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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Prologue (2) 린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낡은 지팡이. 의아함을 느끼면서 지팡이에 해석의 눈을 향한다. 외관상 특이한점이라고는 발견하기 어려운 단순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 그저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에 박혀있는 큼직한 보석만이 이 지팡이가 그저 낡아서 버리게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끝. “아...” 그 말을 취소한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지팡이의 맨 밑을 강하게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발견. 덕분에 상자에서 꺼내고자 해도 그 뜻은 달성할 수가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쇠사슬의 끝에는「절대 봉인」이라고 친절하게 써있는 종이쪽지가 하나. 이 상자에 들어있던 지팡이라는 물체에 관해서는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 물론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내손으로 산산히 부순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그 발칙한 지팡이. 그것과 이것이 연관은 없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래도 같은 곳에서 나온 알 수 없는 봉인된 지팡이다. 목뒤를 엄습하는 불안함을 억지로 잠재우며 얼굴에 손을 대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 린의 자문을 구한다. “저기.. 린? 이거 혹시...” “하아.. 대사부의 장난감이야. 어릴 적 처음 발견했을 때는 그 최악의 지팡이와 함께 있었는데, 그 위험성 때문에 대사부가 직접 봉인을 해둔 거라고 들었어.”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면 재깍재깍 버려버리거나 파기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애매한 봉인은 언제 풀어질지도 모르고 사람에게 쉽게 발견될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나 어정쩡하다. 그것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미리 처분해두지 않은 결과 주위에 피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세한 설명을 계속 요구하는게 당연. “그래서?” “그 최악의 지팡이「매지컬 루비」의 프로토 타입. 개량되기 전의 것이라 한번 사용하면 대상자에게 효과가 영속되는데다가 그 목적을 사용자가 세팅할 수 없는 강한 에고를 지니고 있어서 테스트로 사용했던 제자 세명이...” 잠깐의 머뭇거림. 잠시 뒤 각오를 굳혔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한명은 머리가 사람 두 배만큼 커졌고, 한명은 날개가 생겼고, 마지막 한 사람은... 돼지로 변했다고 들었어. 참고로 날개가 생긴 사람은 우리 선조의 바로 위 선배.” 질렸다. 괜히 젤렛치의 제자가 되면 대부분 병신이나 폐인이 된다는 것이 이해가가는 훌륭한 예시가 아닌가. 그런 온갖 시련과 고난을 돌파해서 지금의 토오사카 가문이 있는거라고 생각을 하니 새삼 린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봉인되어 있다니 다행이네. 지난번과 같은 일은 사양할래.” “현명한 선택. 그건 그대로 상자에 집어넣고 구석에 치워버려. 상자 자체에 연결된 봉인이라 버릴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 상자 자체가 일종의 봉인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섣불리 열어버린 것이 문제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불행한 지팡이는 서둘러 손에서 내려놓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하니 어서.. “아.....” “에밀리아?” 시험삼아 오른손의 모든 손가락을 펴본다. 가위바위보의 보와 같이 활짝 펼쳐진 작은 손바닥은 그 어떤것도 쥐고 있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런 불가능한 손에 마치 거머리와 같이 달라붙어있는 지팡이의 모습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한 걸까. - 휙휙~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떨어뜨려 보려 하기도 하고 왼손으로 잡아당겨도 보지만 요지부동. 질렸다 이거. “에밀리아.. 설마 그거?!” “하..하하 뉴턴이 보면 까무러치겠는데. 안 떨어져 이거..” 멋지게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나와 한 몸인양 떨어질 생각을 않는 나무 지팡이. 이거 이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보다 이런 식의 패턴 뒤에는 항상 이어지는 상황이 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Ich befreie eine versiegelung. Anfang] - 봉인 해제, 기동 아니나 다를까 삽시간의 방안 온도를 10도는 낮출 것 같은 낮은 중저음이 울린다. 그 출처는 보나마나 내 손의 지팡이. 내 행운 랭크는 B였을 텐데 어째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일까. “이거 봉인된 거 아니었어?” 친절하게 봉인해 두었다라고 안심하고는 뒤통수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내 이러한 의문에 해명해주는 것은 린이 아닌 지팡이 자체. [마이스터의 의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제 봉인 해제 조건은 두가지. 첫째는 봉인구 Pandora의 내부 탑재 물건의 총 무게가 100kg이하일 경우. 둘째는 봉인 감시봉 매지컬 루비의 부재. 이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 봉인이 해제됩니다. 해제 이후 첫 번째 저를 손에 넣은 분을 마이스터로 인식합니다.] 터무니없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고 있는 지팡이. 그 최악의 지팡이가 이 녀석의 감시역할이었다는 말은 이번 일을 초래하게 된 것이 결국 내 탓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운이 없는 사람은 뭘 해도 안 된다고 하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다는 옛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하아.. 그래서? 너는 뭔데?” [제게는 명칭이 없습니다. 편하신대로 부르시면 됩니다만 굳이 정하라고 하신다면 'Variante(변형)'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제게 부여된 능력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라고 사고합니다.] 조옮김(Variante)?.. 아니, 젤렛치의 작품이니만큼 독일어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기에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직접 물어보는 것이 확실하다. “네 능력은?” [제게 부여된 능력은 단 한가지. 사용자의 최대 약점을 자동 분석하고 평행선상의 모든 대상자를 검색하여 덧씌움으로써 약점을 보완합니다.] 결국 2법의 응용. 역시나 매지컬 루비의 프로토타입 다운 효과다. 그나마 약점이 될만한 점을 보완한다는 점에서는 효용성이 높다고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런 것에 국한되는 것이라면 봉인될 까닭이 없는데다 테스트로 사용해본 사람들이 그런 참담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순히 녀석이 말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Analysieren] - 분석 실시 상념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주제에 멋대로 나를 분석하기 시작하는 지팡이에 경악. 이대로는 좋지 못하다고 이성과 감각과 본능이 전력으로 경고하기 시작한다. 레드얼럿, 레드얼럿. “뭐하는 거야!! 중지! 정지!” [마이스터의 요청은 기각합니다. 자신의 약점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가정하에 객관적 기준을 바탕으로 분석. 해당사항 분석 완료.] 지팡이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맹렬히 휘두르며 거부의 의사를 표명하지만 믿을 수 없는 실력행사로 나온다. “린 이건 에고가 강하네 마네 하는 수준이 아니잖아!” “개량된 게 매지컬 루비라고 말했잖아. 개량되서 그 정도인데 프로토타입인 그 녀석은 어떨 거라고 생각해? 난 몰라. 애시당초 봉인을 푼 건 에밀리아니까. 명복은 빌어줄게. 흑흑,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어 에밀리아 흑.” “배신자!!” 나의 절규를 매몰차게 무시하며 갑자기 어디에서 난건지 알 수 없는 손수건으로 거짓눈물 따위를 닦으며 우는 시늉을 하는 린에게 고함을 빽 질러준다. [보완 가능 대상 검색 실시. 평행세계를 병렬적으로 동시 검색합니다. 시스템의 사양에 따라 1분내지 10분의 검색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런 내 사정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할일을 처리하고 있는 자칭 조옮김. 아니 그보다 내 약점이 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들은 것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거야? [검색 완료. 다운로드 실시. 마스터에 해당 능력을 덧씌웁니다.] “전력으로 거절하겠어! 애시당초 뭘 보완하는건지도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거야?! 내몸에 멋대로 관여하지 말란 말이야!!!!” [마이스터의 동의는 필요치 않습니다. 약점의 보완은 마스터로 하여금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므로 완벽을 두려워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강제로 행할 수 있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습니다.] 하는 말끝마다 얄미움이 가득 차서 폭주, 넘쳐흐른다. 도대체가 외부에서 입력은 불가능하게 만든 일방통행적인 마녀의 지팡이 같으니라고. 이런 내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팡이에서, 그리고 내 몸에서 방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온다. 아아, 끝이야. 이제 돌이킬 수 없어. ---------------------------------- 빛이 사라지는데 까지는 대략 1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죽음이 다가오면 지금까지 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안녕 짧은 행복의 순간들아. 린, 함께가주지 못해서 미안, 세이버 앞으로 밥은 사쿠라가 잘 챙겨줄거야, 후지누나 어서 어른이 되라고, 에미야 정의의 아군을 향해 정진해서 언젠가 꿈을 이루길 바래, [마이스터의 최대 약점인 색기 부족을 보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잔여 마력 고갈.] 사쿠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 에? 지금 뭐라고?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다. 주위에 변화한 모습 없음. 린이 눈을 강타한 빛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린채 허둥지둥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 딱히 달라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묘한 위화감이 존재. 주위에 변한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던것과 다른 모습이다. 있을 수 없는 모순 된 시각. “시야가.. 높아졌어?” [10초안에 기동이 정지됩니다. 10. 9. 8. 7.]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렇게 당황하여 주위를 살피는 동안에도 녀석이 세고 있는 숫자는 초단위로 줄어들고 만약 이대로 정지하게 된다면 상황설명이나 무언가 바뀐 것이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 잠깐!!! 어떻게 멈춰봐!!!” [6. 5. 4. 3. Unmoglich] - 불가능 “그러지말고 좀!!!” [2. 1. Anhalten.] - 정지합니다 내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몹쓸 지팡이. 어떻게 마력을 충전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 빠직! 지팡이 윗부분에 박혀있던 보석이 나를 비웃는 듯한 소리와 함께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미 지팡이는 기능을 정지했고 그쪽에 매달려 있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기에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뒤로 집어던진다. 아까까지 찰싹 붙어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나 쉽게 떨어져 날아가는 지팡이. “아아~ 웬일이야. 에밀리아 무사해?” “일단 무사한 것 같기는 한데.. 린 눈을 뜰 수 있겠어?” “아직 눈이 잘 안 떠지기는 하지만... 으으.. 어떻게든.. 에?!”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린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간다. 거울을 보는 게 두려워 지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만점짜리 표정. -------------------------------------- - 다시 공항 - “덕분에 이런 모습이 되었다랄까?” 지금 내 모습은 130정도에 이리야와 완전히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의 모습이 아니라 여전히 작은 키이기는 하지만 세이버와 비슷한 155정도로 신장이 커지고 앳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라도 대충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쉽게 말하자면 이리야가 15~16살 정도로 성장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모습을 하고 있다. 결국 자기 멋대로 내 약점이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 단정 짓고는 평행세계에 있을 수 있는 ‘성장한 나’를 덧씌웠다는 것.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닌 덕분에 어제 저녁에 몸을 씻을 때는 오래간만에 과다출혈로 쓰러져버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들을 벌리고 있다. “역시, 이상해?” “아.. 아니 그럴리가!! 작을 때의 에밀리아도 귀여웠지만 지금 모습도 그 뭐냐...” “에미야의 감상을 물어본 게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있어.” “네...” 지금 듣고 싶은 것은 에미야를 제외한 세이버와 이리야, 그리고 사쿠라의 생각이다. 에미야한테 어떻게 보이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가는 꽤나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 “아, 시로의 말이 맞습니다. 에밀리아.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워요.” “그래요. 전에는 너무 귀여운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우응.. 살짝 샘날 정도네요. 그 정도로 아름다워서..” 아름답다는 말에 기뻐해야하는 걸까 슬퍼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별로 모두에게 있어서 내 변한 모습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에 있어서는 기뻐해도 될 듯 하다. 하긴, 이렇게 모습이 변했다 해도 이중에 가장 어린 모습인 것은 변하지... 아 잊고있었다. “난 불만이야!” 아까부터 뾰루퉁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리야가 불만을 터뜨린다. 그리고 눈에 맺히는 커다란 눈물방울. “훌쩍.. 언니가 되서 에밀리아보다 작다니. 언니 실격이야~ 으아앙~” “어..언니...” 이리야를 달래는 것은 다행히도 비행기 이륙시간이 되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Fate / Stay Illumination Prologue (3) “덕분에 여권 위조를 한번 더해야 해서 비용이 두 배로 들었다니까. 정말이지..” “돈에 관해서는 린에게 핀잔을 듣고 싶지 않은데. 게다가 언니가 준 돈이 아직 충분하잖아? 린이 아닌 내가 관리하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어.” “윽, 그건 그렇지만.” 이리야가 따라가는 조건으로 제공한 100만유로. 엔화로 전환하면 1억 5천만엔. 사실상 다 쓰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큰 거금이기에 여권 위조에 들어간 10만엔 정도의 금액가지고 생색낸다는 것이 우습다. 게다가 자신이 일주일 사이에 보여준 낭비벽이란 것이 얼마나 흉폭한 마수인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 가관. “도대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가 궁금할 정도의 무계획 무절제 무차별의 낭비3박자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하아.” “어디까지나 다 필요에 의해서 산거지 낭비가 아니야!” “당장 필요해? 지금 당장 그 보석들을 쓸 필요가 있었어?” 3일 전 짐을 정리하다 이리야가 준 돈 가방의 무게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느끼고 열어본 감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 사실 처음에는 이리야가 100만 유로라고 하고서는 좀 적게 준 게 아닌 가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00만유로가 순식간에 63만 유로 정도로 감소했다. 엔화로 치면 5550만엔. 하루치로 계산하면 하루에 약 800만엔이라는 거금을 지출한 셈이 된다. 그 내역이 또한 가관. 린을 추궁하여 구매내역서를 압수, 확인한 결과 구매한 것은 보석.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진주의 5대귀석은 물론 토파즈, 스피넬, 자수정, 지르콘, 알렉산드라이트, 아쿠아마린, 아메지스트등의 다양한 보석까지. 보석에 지출한 돈만 5000만엔. 린이 마술사, 그것도 보석을 주로 사용하는 젤렛치의 계보를 잇는 마술사가 아니었다면 터무니없는 보석 수집을 뭐라고 비난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불가능. 게다가 지난 성배전쟁을 치르면서 소모한 보석이 너무나 많다고 변명하는데 뭐라고 화낼 수도 없고. 덕분에 남아있는 모든 돈은 내가 압수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거리다. “그건 아니지만....그래도!” “이의는 기각.” “자자,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았잖아? 에밀리아도 토오사카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 윽..” 섣부르게 린을 두둔하려 하는 에미야에게 살기를 담아 노려봐준다. 녀석은 사람이 물러도 너무 무르다. 어느날 내가 에미야가에 들어가서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 패가망신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며 웃어넘길 멍청한 호인. 앞으로 사쿠라가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어쨌든 앞으로 모든 돈의 사용은 나를 통해서 할 것. 그렇게 약속했지 린?” “그렇지만.... 하아..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써버렸다 해도 아직 많은데,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출국할 수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그 용량 제한이 없는 상자는 어떻게 통과할 수 있어??” “에헴, 그건 걱정하지마 오빠. 나는 이래뵈도 아인츠베른의 후계자. 개인 비행기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다가 불필요한 검사도 받지 않는 것 정도는 여유야 아하하~” 물론 그것도 오늘이 오기전에 꽤나 고민을 했지만 예상보다 쉽게 해결된 문제. 역시 유서 깊은 가문 아인츠베른. 거짓된 이름으로 아인츠베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나와 달리 이리야는 정당한 가문의 사람이다. 후유키시 교외의 성도 소유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개인비행기 정도야 당연한 것. 때문에 세관에서 걸릴 만한 위험한 물건들은 모두 이리야를 통해서 보내기로 사전에 계획했던 바다. 물론 그렇다면 린과 나도 함께 타고 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지만, ‘에밀리아만이라면 좋아. 하지만 린은 싫어. 응? 왜냐고? 우응.. 에밀리아를 빼앗아 갔으니까 이 정도의 심술은 당연한거야.’ 라며 상큼하게 거절. 함께 가는 것에 대해서 린이 허락함과 동시에 고자세로 나가는 이리야의 모습의 이리야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마에 핏대를 세우는 린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던 공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 몇 년간 저 두 사람의 사이에 있게 되는 거구나. 다행히 린과 나는 마술협회 소속의 기숙사에서, 이리야는 런던에 있는 아인츠베른의 별장에서 지내기로 한 만큼 조금은 여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결국 린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입장인지라 나 또한 린과 함께 여객기를 통해 런던으로 가기로 결정. 그 일들에 대해서 생각을 접고 마중 나와 있는 사람들 중 세이버에게 말을 걸어본다. 처음에 세이버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였지만 오랜 고민 끝에 돌아온 것은 정중한 거절. 때문에 지금 이렇게 이쪽이 아닌 저쪽. 마중 나온 사람들 틈에 서있다. “세이버도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지금의 영국, 아니 브리튼의 변한 모습을 보고 싶을 줄 알았는데.”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에밀리아. 사실 그 말대로 가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만... 고향의 변해버린 모습을 바로 마주할 만한 각오가 아직 저에게는 없어요.” 이것이 세이버가 영국행을 거절한 이유.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찾아갈 고향의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너무도 달라진 상태라면 그 상실감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일 테니. 게다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브리튼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 그 무도한 색슨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 스스로를 제어할 자신도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가게 되면 그 수도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저도 수양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시로, 집으로 돌아가거든 상대를 부탁드립니다.” “하.. 하하... 적당히 부탁할게.” 아더왕은 지금의 잉글랜드가 아닌 오히려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지방의 켈트족이다. 그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이 브리튼을 침공하는 앵글로 색슨에 대항하여 거둔 것임을 생각하면 자신의 고향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숙적.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사쿠라, 알트리아. 앞으로 내가 없는 동안 후유키시의 관리를 부탁할게.” “맡겨주세요 언니. 언니가 없다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잘 할테니까요. 돌아오실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 “흐응~ 여전히 시건방진 여동생님이시라니까.” “어머? 이정도로 언니를 위해 노력하는 착한 여동생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나요?” “잠깐만 둘 다 좀 진정하고...” “시로는 가만히 있어!” “선배는 가만히 있어요!” 또 시작이다. 사쿠라가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에미야와 행복한 생활을 시작하면서 억눌려있던 희노애락의 감정이 이상한방향으로 폭주한 것인지 이후 얼굴을 맞댈 때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두 자매간의 신경전. 덕분에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나와 알트리아는 때로는 말리기도,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며 기진맥진. 이제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은 한동안 없을 테니까 그 점은 이번 런던행의 크나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저기, 알트리아?” “네 에밀리아.” 두 사람의 신경전 속에 아둥바둥 난처해하는 에미야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알트리아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의견을 전한다. 말하기 전부터 내가 할 말이 무엇인지를 짐작한 듯 초연한 태도의 알트리아의 모습. “나는 말이야. 지금 이렇게 저 둘이 떨어지는 것이 이곳의 평화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특히, 린의 성격은 주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사쿠라마저 저런 성격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요. 역시 자매인가 봅니다.” 슬슬 말리지 않으면 목소리가 커져서 주위의 이목을 받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 어떻게든 끼어들어 보려고 앞으로 나서는 찰나 [오늘도 저희 도쿄공항을 방문해주신 승객여러분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런던행 JAL703기 탑승을 시작합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3번 게이트로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런던행 JA...] 공항에 울리는 안내방송이 적절한 타이밍으로 신경전을 멈춰준다. 덕분에 말리는 말이 아닌 자연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말을 한다. “슬슬 가볼 시간이야 린.” “응. 여기까지 배웅 나와줘서 고마워, 시로, 알트리아. 그리고..” “후훗, 언니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어디에 있든 언니는 제 자랑스러운 언니니까요.” “.....” 방금 전까지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사쿠라에게 어색한 안부인사를 하려는 찰나 아까까지의 짓궂은 모습이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이 환한 미소로 전송하는 사쿠라의 태도에 말문이 막히는 린. 하지만 그 당황한 모습도 잠시뿐, 곧 너무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사쿠라에게 지어주며 화답한다. “응. 사쿠라도 건강해. 너 역시 내 자랑스러운 동생이야.” “에밀리아. 언니를 잘 부탁드려요.” “응, 마스터의 명인데 충실히 따라야지. 믿고 맡겨줘. 린의 폭주는 내가 막아낼 테니까.” “너어...” 뒤에서 목을 잡고 흔드는 린의 분노는 어깨너머로 가볍게 넘기고 나역시 이제 떠나는 사람인 입장에서 서번트와 서번트의 관계인 만큼 알트리아에게 이곳에 남을 두 사람의 안부를 부탁한다. 린 조금 살살 흔들어주면 좋겠는데. “아..알트으으으 리아아아~ 두우우울~으으을~ 자아알~ 부우우우~ 타아악~ 해애애애애~” “풉.. 아, 미안합니다. 걱정마세요. 이 두 사람이라면 설령 제가 없더라도 잘 해나갈 테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제게 브리튼을 방문할 각오가 생기거든 그때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 아니 이리야까지 세 사람 모두 잘 지내고 연락 자주 할게.” “네에에에~ 여어어언~ 라아악~~ 으으~ 그만좀 흔들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에미야에게 핀잔을 주려는 나의 시도는 아까부터 목을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는 린의 손을 뿌리치느라 무위로 돌아간다. 뭐, 이제 와서 계속하기도 우스우니 그냥 넘어가주는 것도 괜찮을 테고, 이정도로 작별을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는 나와 린. “언니는?” “나는 에밀리아가 가는 것을 보고나서 출발해도 늦지 않으니까~ 이쪽은 더 빨리 이륙할 수 있어~” 역시, 있는 사람일수록 돈을 더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세상은 유리하게 돌아간다. ------------------------------------- 린이 아무리 낭비를 했다해도 아직 충분히 풍족한 여유가 있는 만큼 굳이 불편한 이코노미 석이 아닌 비즈니스 석을 구매하여 런던 히트로 공항행 여객기에 탑승한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여객기인 만큼-살아 생전 여객기를 타본 적이 없는데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 소환된 적도 없으니까-기대 반 두려움 반. 옆자리에 앉은 린은 벌써부터 눈에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한숨 자려는 모습이지만 나로서는 잠들기는커녕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이륙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도착하거든 나는 우선 예약한 기숙사 수속 및 입학 수속을 처리하러 갈테니까 에밀리아는 이리야스필에게 맡겨둔 짐을 찾고서 기숙사로 와줘.” “에.. 그러니까 언니가 도착하는 곳은 별장에서 가까운 루튼 공항이라고 했으니까. 잠깐, 그럴 거라면 차라리 나는 저쪽으로 가는 게 좋지 않았어?” 어차피 짐을 찾아서 가야하는 것이었다면 이리야와 함께 가는 편이 경제적이고 편리하다. 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굳이 나를 이쪽으로 끌고 왔다는 것은 “흥, 에밀리아는 내 소유니까. 이리야스필에게 넘길 수는 없어.” “우아...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어..”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나는 두 배로 피곤할 운명이라는걸까. “먼저 잘게, 런던까지는 꽤나 긴 여행이 될테니까. 에밀리아도 적당히 보고 자는 게 좋을 거야. 비행기 여행이라는 거, 생각보다 지루한 거니까.” “그런 건 타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소리야. 나는 그저 비행기에 탄 것 만으로도 기대되는데 말이지.” “훗, 얼마나 그 기대가 오래갈지는 안 봐도 뻔하지만, 마음대로 해봐.” [안녕하십니까. 런던 히트로 공항으로 직항하는 JAL703기의 기장 가토 히토시입니다. 본 여객기는 XX시 정각 도쿄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린이 모포까지 덮으며 완전히 잠을 청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기내 안내방송이 곧 이륙을 알려온다. 이제 이륙하면 일본을 떠나 런던으로 향한다. 몇 년간 돌아올 수 없는 긴 여행이 되는 그 첫걸음인 만큼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창밖으로 보이는 마지막 일본의 모습을 가급적 오래도록 눈에 담기 위해 응시.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 즐거운 나날만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참고로, 런던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 Prologue End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166 | 추천 5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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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I help you, ma'am?" "에..??“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과 같은 감각. 그저 간단한 질문을 하면 될 터였다. ‘루튼 공항으로 가는 코치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정도의 정말 간단한 질문. 그래서 평범하게 다가가 평범하게 말을 물어보려 했지만 안내원의 유창한 영어에 당황한다. 아니, 이곳은 영국이니 영어가 유창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니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Ma'am?" "에.. 그러니까... S..sorry." 이 상태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사고도 불가능하기에 서둘러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회피수단을 사용해 자리를 벗어난다. 등 뒤에서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고려대상에서 제외.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다. “하으.. 이래서야 린에게 할 말이 없잖아..” 가장 중요한 일에서 실수를 한다. 이것은 분명 토오사카 가문의 특징일 터였다. 나는 토오사카 가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저지른, 아니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에는 변함없음. “영국에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어를 익혀두지 않았다니....으으..” 그래, 이곳은 일본이 아닌 영국이다. 내가 배운 영어라고는 살아생전 학교에서 배운 게 고작. 그저 입시만을 위해 준비했던 그런 문법이나 책에 있는 영어로는 간단한 회화조차 불가능에 가깝다. 린의 경우 영어뿐만이 아니라 독일어도 가능한 우등생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좌절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이 시간에도 린은 유유히 시계탑을 향해 이동하고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 이대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면 늦어서 당하게 될 그 모진 시간을 감당해낼 자신은 없다.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키며 기억 속에 있는 문법과 단어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문장을 짜 맞춘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회화가 되지 않는다 해도 질문정도는 만들 수 있을 만큼 배우기는 했으니까. "그러니까 길을 묻는 건.. 에 Can..I 아니지 아니지, How can I... go to the 였던가 go 였던가.. 에..또.. Luton airport.. 아,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할 수 있잖아 나~!“ 간신히 문장을 짜 맞추는데 성공. 그 문장이 맞는지 틀린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의 의도만 전달하면 끝이다.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아까의 공항안내원에게 가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하여 입에 익힌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 에밀리아. "How can I go to the Luton airport?" “Oh, Luton airport? You can get on the coach. If you want..........." “w...wait.." 꼴사납게 중간에 다시 도망. 커다란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 조차 재차 대화를 시작하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는 점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무리 내가 질문을 어떻게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공항 한켠에 서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전력을 다해 사고한다.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 버스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그렇다고 전력을 다해서 뛰어가기에는 이곳 런던의 인구가 너무나 걸림돌이 되고 사람의 눈을 피해서 달려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어둠이 깔리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데다 밤이라고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은 하기 어렵다. 게다가, 루튼 공항의 정확한 위치마저 알 수 없기에 언제 도착할지는 미지수. 어떻게든 정류장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불가. 공항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다가 어떤 버스를 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조차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린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 경우는 어떤 구박을 받을지 모르기에 최후의 보루로 남기기로 했다. “으으.. 바보 에밀리아. 바보 아쳐...”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고민을 거듭했지만 어떤 방법을 강구해도 난관을 타개할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남은 것은 린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게 고작. 자신의 한심함에 서있을 기력마저 사라지고 사람의 눈길을 피해 공항 구석에 쭈그리고 앉는다. 무릎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청승맞게 앉아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싶지만 도저히 일어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깊은 좌절감. 그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나 자신에 대한 비난과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운 신에게 비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된다. 누가 좀 도와줘. “Excuse me? Can I help you?" 간절한 바램이 통한 걸까 아니면 내 모습이 그렇게 불쌍해 보였던 걸까. 지나가던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다. 차분하고 의지가 될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굉장히 기초적인 수준의 영어이기에 무슨 의도로, 무슨 뜻으로 말을 건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표현할 자신도, 실력도 없기에 대답은 불가능하다. 그저 친절을 발휘해준 착한 사람의 얼굴이나 확인하자는 심정으로 무릎사이에서 고개를 꺼내어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본다. “아...” 순간 숨이 막힌다. 눈앞에 서있는 남자의 외모가 잘생겼다거나-애시당초 남자의 외모가 잘생겼네 마네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아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그런 이유에서 막히는 것이 아닌 왼쪽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에 당황한다. 최소한 아시아인, 운이 좋다면 한국인이나 중국인, 그리고 신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일본인일 가능성이 있는 친절한 인상의 동양인 청년. 제발, 눈앞에 서있는 사람 좋게 생긴 저 남자가 일본인이거나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용기를 내어 짧은 영어실력으로 물어본다. “아.. 그.... Are..are you Japan?" 당황한 나머지 간단한 영어조차 실수한다. 그 상황에 Japan이라니. 바보 에밀리아! 내 이상한 질문을 들은 그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 하더니 이내 표정을 다잡고 다시 친절한 어조로 대답한다. “Japan? hm.. Yes, I'm Japanese." 신은 존재했다. 내 바램을 들어준 것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도를 들어준 신께 감사를. 물론, 누군지 모르기에 신도가 될 수는 없겠지만. @@@@@@@@@@@@@@@@@@@@@ 이번화 공의 경계측 등장인물 해설 고쿠토 미키야 : 공의경계 소설의 남자주인공. [한없이 평범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라는 기원을 가지고 있는 남자. 여자주인공인 시키의 표현에 의하자면 현대사회에 고지식하게 학생이라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녀석이자 어딘가 프랑스 시인같은 이름의 인간. 부드럽고 상냥한 성격이지만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공의경계에서는 인형술사 아오자키 토우코의 사무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히 이것저것을 돕는중. 찾는자로서의 재능이 있어서 탐정일을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토우코로부터 자주 받는다. 월희의 토노시키 외형의 원형.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할렘이니 그런 욕은 안먹는다. 가장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토노 시키의 외모에 에미야 시로의 성격 정도? 공의 경계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시라즈미 리오에 의해 왼쪽눈의 시력을 잃었다. 왼쪽눈을 덮을 수 있을정도로 길게 기른 머리는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 본 작품에서 등장한 첫번째 공의 경계측 인물이며 어째서 런던에 와있는지는 차차 밝혀질 예정. 일단 어디 사라지지 않는 친절함을 발휘하여 주인공 에밀리아를 핀치에서 구해주기 위해 등장했다. 현재 설정상 나이는 23세 @@@@@@@@@@@@@@@@@@@@@ - 고쿠토 미키야 - 영국에 온지 한달이 넘었지만 이곳 런던의 날씨는 여전히 적응하기가 어렵다. 맑은 날을 보기가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3월 말인 지금 이렇게 기세 좋은 눈발이라는 건 역시나 영국, 그것도 런던이라는 것일까. 더욱이 지금은 토우코씨의 부탁으로 바로 일본에서 돌아온 길이기 때문에 그 차이는 크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토우코씨 여전했지..” ‘고쿠토! 지금 당장 그리로, 아니 아니다. 이리로 좀 와줘야겠다. 당장이다.’ 그런 너무나 갑작스러운 호출로 그 먼 거리를 날아갔더니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안경을 벗은 토우코씨의 난처해하는 표정. 사실, 차갑고 논리적인 상태의 토우코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도 꽤나 신선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헛수고 했군 고쿠토. 그게.. 미안하다’ 그 뒤에 안경을 쓰고서 부드럽고 상냥한 인격으로 체인지 하신 후 생각지 못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이미 해결했다거나, 이렇게 찾아오게 해서 미안하다거나, 저녁식사 라든지 이것저것을 배려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왕복 여비만 받아 당일 비행기를 통해 런던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뭐니뭐니해도 시키와 아자카 둘만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난거다. 내가 없는 사이에 큰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지만, 그 둘 사이에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건 사치스러운 생각이겠지. 내가 시키와 완전히 연인으로 사귀게 된 이후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튀는 불꽃은 중간에 있는 나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아자카는 기숙사에 살기에 매일 마찰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출발할 때와 거의 변화한 게 없는 히드로 공항의 터미널 로비를 빠져나와 소복히 쌓여가는 눈을 맞으며 걷노라니 한쪽 구석에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은색? 아니 굳이 따지자면 실버블론드에 가까운가?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마치 지금 이렇게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이미지의 소녀가 보이는 공항관계자와 한적한 구석자리를 왔다갔다하며 무언가 불안한듯한 움직임. 마치 그 모습이... 아 이제는 자리에 양 무릎을 맞잡은 채 주저앉는다. 그 모습이 마치 길 잃은 강아지 같기도 하고, 예전 후지노를 다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에 나도 모르게 그 소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간다 해서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눈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가녀린 소녀. 그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있으면 아무리 이곳이 공공기관이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항이라도 위험할 텐데 말이지. “Excuse me, Can I help you?" 목소리에 반응하듯 서서히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마치 인형같은 외모의 소녀는 내 모습에서 무언가 크게 놀란 표정을 하고 당황. 왼쪽 눈의 상처는 머리로 잘 가려두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이상한 걸까? 저런 아름다운 소녀에게 이런 반응을 보게 된다면 꽤나 쇼크다. 하지만 주저하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니 외모에 당황한 것은 아닌가. “아.. 그... Are.. are you Japan?" Japan? 아, 일본인을 잘못 말한 걸까? 나를 올려다보며 어설픈 영어로 물어오는 소녀의 모습은 손을 내밀어 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애처로워 보여서 도와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Japan? hm.. Yes, I'm Japanese" - 에밀리아 - 세계의 인구는 60억. 그중 일본의 인구는 1억 5천만 가량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대다수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기에 해외에 나가있는 일본인의 수는 극히 미약. 어찌 보면 58.5억 중 0.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의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극소한 확률을 뚫고 이곳 런던에서 일본인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천운. 그렇지만 방심은 이르다.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교포라면 일본어를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저기 그럼 일본어로.. 대화하실 수 있..나요?” 내 질문에 상대방은 잠깐 의아하다는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바로 일본어를 통해 대답해준다. 이건 교포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일본인. “물론이지. 그런데 특이하네.. 어딜봐도 일본인으로 보이지 않는데 영어가 서툰거니?” “아하.하하.. 네, 사실 일본어 외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부끄럽지만. 이라는 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키자. “사실 실례가 된다는걸 알면서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뭔가 도움이 필요하니?” “읏.. 그러셨나요. 부끄럽네요. 사실 루튼 공항까지 가야해서요. 그곳에 공항 코치를 이용하면 된다고 하던데, 어디로 가면 탈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갈 수가 없어요.” “루튼? 으음, 나도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방법은 모르는데.” “그런가요...” 급격히 실망. 하긴, 이정도로 완벽한 일본인이라면 여행객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곳 런던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런던 교외에 있는 루튼 공항까지 가는 길을 숙지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너무 큰 욕심이었겠지. 친절히 도와주려고 한 사람 앞에서 할 예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처지는 어깨는 어찌 막을 방도가 없다. “그래도 코치를 타는 곳이나 통역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 걱정을 한번에 날려줄 정도로 멋진 미소로 웃어 보이는 청년. 신체는 여성이라도 정신은 남자인 내가 봐도 매력적인 미소에 멍하니 서있기를 수초. 저건 인간으로서 너무 반칙적인 거 아닌가? “정말인가요!?!” “영국 일주라던가 그런 건 못해주겠지만 루튼까지라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하니까. 다만, 모르는 사람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저기 그.. 괜찮겠니?”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에미야 시로이기 이전 그저 시로였던 시절부터의 18번. 그렇지만 그 결과 손해 본 기억은 없고 오히려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는 데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과 동일 할 터. 고민할 까닭이 없다. 게다가 최근에 가끔씩 잊고 있지만 이래뵈도 서번트다. 설령 유괴범일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겠지.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한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요.” “하하, 믿어줘서 고마운걸. 일단 코치 타는 곳은 이쪽이야.” “고마워요!!” 앞장서서 코치 타는 곳으로 안내하는 남자의 모습을 뒤쳐지지 않게 따라가기 시작.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을 되새기며 역시 옛 선조들의 말중 틀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 문득, 앞서가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안했네. 난 고쿠토 미키야, 아, 서양식으로 하자면 미키야 고쿠토라고 해야겠구나.” “네? 아 저.. 그러니까 저는 에밀리아.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이라고 해요.” “응? 독일인이니? 게다가 폰이라고 한다면 꽤나 역사 있는 집안의..” 말하고 나서 실수를 깨닫는다. 이곳은 후유키시도, 성배전쟁의 시기도 아닌 평범한 현대의 런던이다. 폰이라는 성이 들어가는 집안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유서 깊은 집안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고, 그런 집안의 사람이 마치 일본인처럼 일본어밖에 하지 못한다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 “그...그냥 에밀리아면 되요 에밀리아면. 성은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부디.” “그럼 나도 미키야로 좋아. 동생이 이쪽으로 유학을 와서 한달쯤 전부터 함께 런던에 와있어” 서둘러 얼버무리다보니 엉겁결에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뭐, 상관없나. 지금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때도 아니니까. “아, 사실 저도 아는 사람이 이곳에 유학을 와서 함께 온 거에요.” “그래? 우연이네. 동지구나 우린. 하하” --------------------------------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루튼으로 향한다. “미키야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응? 올해로 23세. 아직은 젊은 편이려나? 에밀리아는? 아차, 숙녀에게 나이질문은 실례겠지.” “아뇨, 별로 실례랄 것까지는 없지만.. 16살이요.” ------------------------------- “헤에.. 그럼 런던에서 찻집을 하고 계신건가요?” “으음.. 찻집이라고 하기에는 묘하지만 주로 커피와 일본차를 메뉴로 하고 있어. 하지만 영국인들은 일본차보단 역시 홍차를 선호하기 때문에 홍차도 판매하고 있어. 문제는 손님들의 취향에 맞추는게 어렵더라고...” “후훗, 언젠가 꼭 찾아가볼게요.” “언제든지 환영할 테니 꼭 찾아오렴. 일본차에 있어서는 자신 있으니까. 물론 내가 타는 건 아니지만 하하..” “그럼 미키야씨는?” “내 전공은 커피. 전에 일하던 곳에서 소장님이 꽤나 커피를 즐겨서 자주 끓이다보니 어느샌가 특기중 하나가 돼있더라고.” ------------------------------- “지금 찾아가고 있는 루튼공항에는 무슨 일이 있니?” “아, 언니에게 맡겨둔 짐을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언니는 그쪽에..” - 끼익 이국땅에서 일본인을 만나서 그런지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고 그렇게 대화에 빠져 있다보니 한 시간가량의 시간은 훌쩍 지나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까 히드로 공항이 런던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도시의 모습이었다면 루튼의 모습은 런던 근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골의 모습. 물론 일본의 농촌 수준은 아니지만 꽤나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고 상대적으로 적은 건물들에 한적함을 느끼게 된다. “도착했나? 자 내리자.” “아, 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겨우 도착한 루튼 공항. 이제 이리야를 만나서 짐과 돈을 찾고 린을 찾아가기만 하면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제 린과 대책을 마련하고 영어를 익히는 것만 하면. “그런데 언니분은 어디서 만나기로 했니? 내가 만나 뵙고 인사를 드려도 괜찮으려나?” “아 언니는... 아..” “응?” 깜빡 잊고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은 15~16세 정도의 모습이고 이리야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내가 이리야에게 언니라고 하는 모습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미키야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자폭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챈 것이 어리석은 것일지 그나마 다행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명확하다. “저기, 미키야씨. 언니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시면... 정말 죄송해요.” “그래? 그런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공항 안의 커피숍에 들어가 있을테니까 용무가 끝나면 찾아오렴.” 이 사람.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아쉬운쪽은 나, 도움을 바란쪽도 나, 별다른 댓가도 준비하지 못한것도 나. 그럼에도 화 한번 내지 않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게 어디사는 누구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 녀석처럼 한심해 보이는 것이 아닌 어딘가 믿음직스러운 느낌이다. “그럼, 서둘러 다녀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하렴.” 그렇게 미키야씨를 뒤로하고 이리야와 미리 정해두었던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간다. 약속했던 곳은 공항 한구석에 자리한 개인 비행기 격납장으로 공항 대합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물론 처음에 가는 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어느 정도 헤메기도 했지만 미리 지도도 보고 온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 “에밀리아~” 두 팔을 벌리고 종종걸음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이리야. 이리야를 다시 만나는 게 이렇게 반갑고 다행스러울지는 최소한 린과 헤어지기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눈물나게 고맙다 런던. 가므로일(epilier) 덧글 3개 | 조회수 36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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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만!!!” 바로 앞까지 왔음에도 전혀 속도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몸을 날려 오는 이리야. 그렇다고 그런 그녀를 피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없으니-그 경우 뒷감당은 할 자신이 없다.- 그대로 이리야의 몸을 받친 채로 시야가 반전한다. - 콰당~! “아아아....” “에헤헤.. 에밀리아를 잡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별이 보였다. 아니 정말로 보였는데 순간적인 머리에의 타격으로 인해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를 만치 강렬한 충격. 그 고통을 간신히 이겨내고 눈을 뜨자 이리야의 천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보다 환하게 웃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그 모습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의 값어치 있는 모습이었다. “이리야..” “우읏.. 언니야 언니! 버릇없이 언니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여동생에게는...!!” 고사리처럼 가느다라면서도 백옥처럼 하얀 이리야의 두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온다. 이리야의 몸에 깔려있는 상태로서는 어떠한 반응도, 저항도 할 수 없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결국 그녀의 손에 잡히고, - 쭈우욱~ “하우?” “볼 잡아당기기 형벌이야~!” 사람의 볼이라는 것이 이렇게 늘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처음 경험하는 순간. 이 순간 내 표정을 보고 있는 것이 이리야 단 한사람이라는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만약 린이 보고 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반응이 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다고 이리야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물론 에미야에게 보였다면 증거인멸을... “어이(언니), 이아애, 오, 아어(미안해, 좀 놔줘)” “아하하하, 에밀리아 너무 재밌어~ 에잇 에잇!” 내 부탁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볼을 쥐고 잡아당기는 이리야.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화낼 수도 없고, 어떻게 떨쳐낼 수도 없어서 그저 볼을 잡힌 채로 그녀의 선처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으... 아여어(살려줘)...” “흥~이다~ 아하하하~” 틀렸어. 이렇게 된 이리야는 경험상 이대로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질릴 때까지 그저 내버려두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다. 허나 방도가 없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내 형편.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래서는 미키야씨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 것이고 그것은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그보다 큰 무례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아가씨.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러고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 런던에 계신 아인츠베른의 어르신분들을 기다리시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 부디 갈 채비를 해주셔야 합니다.”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이리야의 너머에서 친숙하면서도 무뚝뚝하고, 그속에 이리야를 위하는 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자명. 바로 이리야의 두 메이드중 생활지도 담당 메이드 세라. 덕분에 내 볼을 잡아당기고 있던 이리야의 손이 떨어져나가고 그 손은 그대로 세라의 볼을 향해 쇄도한다. “우우... 세라 방해꾼!! 아! 내가 에밀리아하고만 노니까 심심한거야? 그럼 이번에는 세라한테 에잇~!”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뻗어나간 그녀의 손은 살짝 몸을 뺀 세라의 행동으로 인해 그저 허공을 휘젓는데 그치고 만다. 재차 시도 역시 실패. “죄송합니다만 놀아드릴 여유는 없을뿐더러 아직 아가씨의 신장으로는 잡는다 하셔도 그리 재미있지 않으실거라고 생각됩니다.” “우으으.. 흥, 재미없어. 세라는 심술쟁이~!!” “하아, 도와줘서 고마워 세라.” 언제나 엄격하고 확실하게 이리야를 보조해주는 감정표현 서툰 메이드씨가 이렇게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오래간만이다. 딱히 내 정체에 대해서는 이리야가 이야기 해주지 않은 듯 처음에는 아인츠베른이라는 이름을 쓰는 나에게 의아함을 느껴했지만 일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에게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는지 가끔씩 이리야를 만나러 성에 가거나 함께 있을 때면 포근한 미소를 보여줄 정도로 잘 대해주곤 했다. 지금도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준 것이라고 짐작. “딱히 에밀리아 아가씨를 도와드리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재미있... 흠흠.. 실례했습니다. 리제릿트. 에밀리아 아가씨께 찾으시는 물건을 드리세요.” “응. 에미, 여기 있어.” 이리야의 또 다른 메이드 리제릿트. 언제나 무표정이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표정 속에 어설프지만 풍부한 감정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 전투 담당 겸 호위병. 이리야와 함께 있다보니 나도 리즈라고 부르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리즈도 나를 에밀리아가 아닌 ‘에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묘하게 친근한 어감이기도 하고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어느 날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대답이 또 가관이었다. ‘에밀리아는 너무 길어. 그래서 에미. 싫어?’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어오는데 거절할 수 있을 턱이 있나. 결국 그날 이후로 리즈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에미로 고정되었다. 아차, 잠깐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샜나. “아, 고마워 리즈. 어디 어디..” 리즈가 건내 준 것은 용량무한의 보석상자와 남은 유로화가 들어있는 서류가방. 혼자 들고 가기에는 약간 부피가 있기는 하지만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의 양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티끌만한 부피다. 게다가 무게가 좀 있다 해도 이 몸은 서번트. 한손에 들 수 있기만 하다면 무게정도는 전혀 문제되지 않으니까. “열어보지 않아?” “하..하하.. 열어보기가 두려워서 말이야. 그냥 돌아가서 정리할 때나 열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거 별로 좋은 기억도 없고..” 이 상자와 얽혀서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지. 사실 이렇게 성장한 모습이 된 것에는 그다지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내 신체에 무단으로 간섭당한 것이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인데다 속옷을 입는 것이나 목욕 같은 것을 할 때 당황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망할 최악의 지팡이에 농락당했을 때와 비견할 수 있는 아픈 기억이라 할 수 있을지도.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즈는 “에미는 지금 모습도 좋아. 그러니까 그 상자 싫어하지 마. 이리야랑 구분도 되서 리즈는 좋아.” 라는 말을 태연하게 던진다. 그 의도에는 전혀 악의가 없고 거짓도 없는 진실 된 것이기에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웃어줄 수밖에 없다. 그보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 것 같은데. 이리야도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듯하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찾아올 것은 뻔한 일이니까. “뭐.. 리즈가 좋다면 상관은 없지만.. 아, 나 이만 가볼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응? 린?” “아니 린은 아니고,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도움을 준 친절한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찾아왔을 거야.” 부끄럽게도 영어를 못하는 내 잘못 덕택이지만이라고 끝을 얼버무린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서로 헤어져서 이쪽에서 살 집을 정리한 후 다시 만나면 좋았을 것이지만 묘하게 자신이 언니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이리야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세라에게서 떨어져 당당히 가슴을 펴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선언하듯 입을 연다. “흐흥~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내 동생을 도와줬다면 언니된 도리로써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자, 에밀리아 나를 그 사람에게로 안내해줘.” “에? 자.. 잠깐.. 언니 그것만은 참아줘.” 잠깐 그건 곤란하다. 애시당초 일부러 미키야씨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지 않고 기다리게 했는데 거꾸로 이리야가 찾아간다? 곤란하고말고. 하지만 이리야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당했던 자세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울먹이기 시작한다. “왜에? 우으.. 내가 언니라는 게 부끄러운거지? 그런거지? 우으..” “에에??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아아.. 울지마 언니..” 어째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까.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눈물을 흘리려 하는 이리야를 필사적으로 달래면서 나의 모습과 이리야의 모습에서 오는 문제를 열심히 설명했다. 한참을 설명한 끝에 그 뜻이 결국 이리야에게 닿았는지 울음을 멈추고 다시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오는 이리야를 보며 가슴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만약 겉으로 한숨을 내쉰다면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오리라는 것 정도는 안 봐도 뻔하지. “이해했지? 이리야는 내 자랑스러운 언니니까. 결코 부끄럽다거나 그렇지 않아.” “응! 우웅.. 그렇지만 에밀리아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에게는 인사를 해야 하는건데... 아!”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기를 수초. 마치 기막힌 묘책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이리야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다. “세라~!” “네 아가씨.” “세라가 내 대리인으로 가서 그 친절한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와 보답을 해주고 오도록 해.” “지금 말인가요?” “응, 지금. 준비는 리즈와 함께 하고 있을테니까 걱정하지말고~” 어떻게든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다는 이리야의 생각은 결국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에 이르렀고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명분과 변명거리가 없다. 부디 세라가 거절해주기를 바랬지만 바로 이어진 승낙에 그 작은 희망도 꺾이고 만다. “알겠습니다. 명하신대로. 에밀리아 아가씨 앞장서 주시겠습니까?” “하아.. 알았어. 그럼 언니, 이만 가볼게. 다음에 봐.” “응~ 내가 찾아갈 거야~ 그럼 조심해서 가~~” 가녀린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휙휙 휘젓는 이리야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저 모습을 지켜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감회에 젖는 것도 잠시. 올 때와는 달리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장소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한-세라와 리즈는 언제나 메이드복을 입고있다-사람과 함께 오던 길을 거슬러 공항 안에 있는 커피숍을 향한다. “현대인들은 역시 불쾌하군요. 사람을 저리 뚫어져라 바라보다니. 예의라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나봅니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그야말로 홍수. 덕분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어들고 싶은 내 기분과는 달리 그 시선들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아니 사실 그건, 세라가..” “뭔가요 에밀리아 아가씨. 이 제가 잘못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유서 깊고 명망 높은 아인츠베른의 이리야스필 아가씨를 모시는 이 제가?” ‘현대에 그런 시대착오적인 메이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문제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다시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나까지 세라에게 눈초리를 받을 지도 모르는 일. 나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가끔 볼 수 있었던 에미야를 대할 때의 세라를 기억하면 그녀에게 미움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었기에 최대한 기분을 거스를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아니야 그럴리가.. 아하하...” “그럴테지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 거라 믿었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는 그 품위 없는 토오사카 당주님이나 철없는 에미야님과는 달리, 명문 아인츠베른을 잇고 계시니까요.” 우와, 엄청난 소리를. 이 자리에 린이 없다는 사실에 정말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고 싶은 기분이다. 만약 린이 있었다면 결코 말싸움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 물론, 린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 “에밀리아 양. 여기...아?!?!?” 주위의 시선을 어찌어찌 못 본채 하면서 간신히 미키야씨가 기다리고 있는 커피숍에 도착한다. 일단 가게에 내가 먼저 들어섰기에 나를 알아본 미키야씨가 자리에서 손을 들어 나를 부르려 했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세라의 모습에 순간 멈칫 하고 만다. 이거, 잘못한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미안한 느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앚는다. “하..하하... 오래기다리셨나요. 미키야씨?” “아니 그리 오래기다린건 아니지만.. 그 뒤에 계신 분은?” 나의 약간 뒤쪽에서 부동자세로 꼿꼿이 서있는 세라의 모습은 안 봐도 뻔하다.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는 세라.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에밀리아 아가씨의 언니되시는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세라라고 합니다.” 미안 미키야씨. 나는 최선을 다했어. ===================================== 세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내 뒤에서 나와 한걸음 미키야씨를 향해 다가선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에서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엄청난 박력을 느끼게 하고 이것이 과연 감사인사를 하러 온 것인지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나중에 혹시라도 이유를 묻는 다면 ‘명예로운 아인츠베른의 메이드로서 상대에게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께서도 스스로의 위치를 생각하고 좀더 당당해 지셔야 합니다. 아시겠나요.’ 같은 훈계가 돌아올게 뻔하겠지.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아니 얌전히 세라가 하는 행동을 지켜본다. “공항에서부터 이곳까지 저희 에밀리아 아가씨를 도와주셨다고요. 그 일을 전해 들으신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은인께 감사의 인사와 그 보답을 해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니, 감사를 받을 것 까지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키야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다. 나를 도와준 것도 딱히 어떤 보답을 바란 것도 뒤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도 아닌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행위. 확신은 못하지만 이래뵈도 영령인 만큼 사람 보는 눈은 충분히 있다고 자부하니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의 뜻을 표하는 세라의 말에 곤혹스러워 하는 것을 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하지만 세라는 딱 겉모습에서 느껴지듯 직업정신이 철두철미한 메이드. 그것도 이리야의 시녀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시녀장이다. 미키야씨의 사양이 마치 들리지 않았다는 듯이 무시하고 자기 할말을 계속 이어나가는 세라[무적의 시녀]. “아가씨께서는 스스로가 직접 감사를 드리고 싶어 하셨습니다만 사정상 그것이 여의치 않기에 이렇게 시녀인 제가 대신 감사를 전하고자 하니 부디 이해해주시길.” 그 말과 함께 어디서 꺼낸 건지, 그보다 언제 챙겨온 건지 알 수 없는 검고 작은 상자를 손에 든다. 크기는 대충 가로세로 10cm정도의 정방형에 고급스러운 형태.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일지 보지는 못했지만 내용물은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도 감사인사로는 차고 넘칠 만큼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일 것은 분명. 일반인이라면 그 선물에 감격하거나 기뻐하겠지만 내가 판단한 미키야씨라면 그런 반응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건..?” “1캐럿짜리 캐쉬미르 사파이어. 시가 5만 달러 상당의 보석입니다.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성의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가 5만달러. 상식을 초월한 부자라는 건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어 주시는 구나. 이건 미키야씨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다. 물론 린이라면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주머니에 넣었겠지만 그저 길안내를 한 대가가 그 정도라는 건 누가 뭐래도 수상하잖아? 그런 내 생각을 가볍게 무시해주듯 다시 어딘가에서 아까와 비슷하지만 색이 다른 작은 상자를 꺼내어 건내는 세라. 어딘가에 요술주머니라도 있는가 싶은 마술사의 마술쇼를 보는 느낌이지만 잠깐 그건 또 뭐야. “이것은 10캐럿 짜리 루비입니다. 에밀리아 아가씨는 이리야스필 아가씨에게 뿐만이 아니라 저희들에 있어서도 소중한 분. 따라서 저를 비롯한 메이드들의 감사 표시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잠깐만요.” 미키야씨는 황급히 손을 내저어 추가로 건내려 하는 상자를 물리친다. 그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세라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유지, 아니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태도로 미키야씨에게 말을 잇는다. 아니 이건 몰아붙인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지도. “무슨 말씀을 하실지 잘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아가씨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성의로는 모자라는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상황. 주소를 알려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사례를....”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이건 받을 수가 없습니다.” 호오...? 라고 말하듯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세라. “.....어째서인가요?” “저는 이런 사례를 바라고 그녀를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물건을 받게 된다면 그 뜻은 변질되어 버리고 말겠죠. 게다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상자와 세라의 손에 들려있는 갈색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숨과 함께 난처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미키야씨. “만약 받게 된다 치더라도 이건 사례치고는 너무 큽니다.” ----------------------------- - 빵빵~! 어느덧 루튼에서 런던 시내로 향하는 코치가 런던에 들어섰는지 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주위에는 아까까지의 자연 대신 인공물과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다. 당연히 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이제 런던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상황. “웃.. 죄송해요 미키야씨. 괜히 저 때문에..” “응? 아니. 괜찮아. 하하.. 그보다 굉장한 사람이었지. 레이디 에밀리아께서는 역시 엄청난 집안의 사람이구나.. 랄까.” “하아.. 레이디라니.. 놀리지 말아주세요.” 옆자리에는 공항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미키야씨가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은채로 앉아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곤란하다는 웃음을 띠면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브로치를 흔들어 보이는 게 뭐라고 해줘야 할지 난감하게 만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리야와 세라를 막지 못한 내 책임이니, 아니 잠깐, 어째서 내가 미안한 생각을 하는 걸까. 저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들이 표한 감사의 물건. 당당하게 나가자 당당하게. 참고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브로치는 어떻게 해도 선물을 받지 않으려 하는 미키야씨를 위해 즉석에서 마련해준 세라의 대체 선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저 역시 저희 아가씨의 명을 받고 온 몸 이대로 물러난다면 아가씨의 체면을 지켜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 이걸 받으시지요.’ ‘이건..?’ ‘별 것 아닌 물건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돌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고쿠토님은 물질적인 것은 대부분 거절할 것이라 사료되기 때문에 조만간 있을 별장에서의 파티에 참석하실 수 있는 약식 초대장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독단적 재량의 의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아가씨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생각되니 드리는 것입니다.’ 파티라.. 그런 걸 계획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마술을 익히기 위해서 온 린과 달리 이리야는 순전히 놀러 따라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이상할 것은 없지. 혹시나 나도 참석해야 하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잠자코 있었지만 도대체 언제일까.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저히 이것까지는 거절하지 못한 미키야씨가 브로치를 받고 나서야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가는 길도 도와주신다고요. 그 친절함에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나 혹시라도 흑심을 품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에밀리아 아가씨는 고귀한 아인츠베른의 일원이자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단 하나뿐인 여동생. 만약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살아있는 것이 저주스러울 만큼...’ ‘세라~!!!’ ‘아.. 실례했습니다. 지금의 무례는 잊어주시길. 그럼 곧 사람을 시켜 정식 초대장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키야 고쿠토님. 저희 에밀리아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떠나기 전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나 내가 미키야씨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미키야씨는 런던의 어디에 계시는 건가요?” “나? 한웨이(Hanway st.)거리. 찻집과 집은 같이 있고. 대영박물관 근처에 있는 곳이야.” “에... 에에!!?” 통칭 시계탑이라고 하면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에 있는 big-ben을 상상하기 쉽지만 실제로 마술협회의 총 본산인 시계탑은 대영박물관을 필두로 주변 대학과 여러 장소에 분산되어 있는 형태이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이자 시계탑의 기능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바로 대영박물관. 다시 말하자면 지금 내가 가는 곳이며 앞으로도 생활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곳의 근처에 미키야씨는 살고 있다고 한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을까. 이 정도까지 오면 운명적인 만남... - 휙휙 나도 모르게 큰일 날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요새 아무리 린에게 여자로써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강요당하고 교육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남성에게 그런 생각을 찰나라도 품다니. 위험하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그리고 그 부끄럽기 그지없는 상상을 떨쳐내려 노력한다. 정신 차리자 에밀리아. “에밀리아?” “아하하..하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어디 아픈 거 아니니?”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요새 마른웃음을 짓는 횟수가 좀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네. 아니 잠깐 미키야씨? 그렇게 걱정어린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면 위험하다고요. - 끼익 이후 미키야씨가 애인, 그리고 여동생과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이나 두 사람이 마주치기만 하면 다툰다는 이야기 등등 서로 함께 이곳에 와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코치는 목적지인 대영박물관 근처에 도착했다. 덧붙이자면 린에 대한 험담은 거의 하지 않았다. 거.의. 지만.. “자, 나는 이쪽으로 가면 되는데, 괜찮겠니? 뭣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 있어.” 예의 그 사람 좋은 기운을 마구 발산하며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미키야씨지만 지금부터 향할 곳은 일반인에게는 철저하게 감춰진 비의(秘意)인 마술의 공간.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마술의 단속이 엄격한 곳이자, 집중되어있는 곳인 마술협회의 본산이다. 물론 여기까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미키야씨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에요. 여기까지만도 충분하니까. 오늘 정말로 감사했어요. 덕분에 헤메지 않고 찾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아 그렇지..” 겉옷의 주머니와 지갑 등을 뒤져서 무언가를 찾는 미키야씨.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종이다. “이거, 내 명함이지만 찻집의 주소도 적혀있고 연락처도 있으니까. 언젠가 꼭 한번 들러주렴. 그, 파티..에 관한 것도 좀 묻고 싶은 게 많기도 하니까 꼭.” “네, 꼭 찾아가도록 할게요.” 미키야씨가 말하지 않았어도 오히려 내 쪽에서 요청했어야 할 일을 먼저 제안해주다니 남에대한 배려도 이정도면 할말이 없을 정도다. 명함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안 주머니에 넣어 두자. “그럼 나머지 길도 조심해서 잘 찾아가렴. 먼저 실례.” “미키야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렇게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자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의 등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 목적지를 향해, 대영박물관을 향해 나도 걸음을 옮긴다. 내린 정류장에서 대영박물관까지는 기껏 3분 남짓한 거리. 그 거리를 태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걸어간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후유키시에 있었을 때에 비해서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인데, 후유키시에서는 이런 식으로 걷는 다는 것은 무리다. 일본에서 외국인, 그것도 은발의 외국인 여성이 걷는다면 절반은 호기심으로 절반은 외국인 공포증으로 의도하지 않은 시선과 격리가 주어지니까. 물론 이곳에서도 은발이라는 것은 흔한 것은 아닌지 간혹 힐끗 힐끗 바라 보는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하는 기색은 없기에 훨씬 마음이 편하다. 3분쯤 걷자 대영박물관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기둥들이 박물관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 모습에 살짝 위축. 문득 그리스라고 하니까 라이더가 저 기둥들 사이에 서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지금은 없는 그녀. 그녀는 이번 성배전쟁에서 내가 구해내지 못한 유일한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약간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린을 만나기로 한 곳이 박물관 정면의 가장 왼쪽 기둥이었으니까...” 언제까지고 우울한 기분으로 있을 수는 없지. 박물관의 앞에 넓게 펼쳐진 정원을 가로질러 가장 왼쪽의 기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걷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는 사람을 발견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가운데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피력하며 한눈에 띄는 강렬한 붉은 색과 흑색의 대비. 이런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전 세계에서 오직 그녀뿐이겠지. 그것은 단순히 외모나 의상 같은 것에 의한 것이 아닌 토오사카 린이라는 인간의 존재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이쪽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시계를 보니 다행히도 약속시간 보다 오히려 빠른 시간이다. 미키야씨 덕택에 헤메지 않고 바로 올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잠깐, 약속 시간보다 빠르다? 약속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린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 내가 다녀온 길도 꽤나 걸리는 길이기는 했지만 린이 처리해야 할일은 입학 수속 및 기숙사 수속. 그것이 이렇게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런 불안함을 억지로 감추고 계속 린을 향해 나아간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린도 나를 발견한 듯 표정이 밝아지지만 그건 한순간. 내가 제대로 도착했다는 안도감 같은 분위기였지만 바로 불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변모한다. 아아, 저 강렬한 존재감은 기분이 나쁘다는 아우라(aura)의 표현이었구나. 이거 이거, 도대체 누가 저 아가씨의 심기를 건드려 놓은 걸까. “린, 기다렸어?” “늦어!!!!!!” 어라? 나? 시간은 아직 약속시간보다 30분 이르다. 런던에 온 직후 시계도 맞추었기 때문에 시차에 의한 실수도 아님. 그렇다면 그녀는 약속시간보다 얼마나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일까. 아직 런던에서의 트러블은 끝나지 않았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루 3개 제한이란 슬픈일이군요 ㅠㅠ 가므로일(epilier) 덧글 3개 | 조회수 33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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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났는데 알 수 있을리가..." "믿을 수 없어요.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를 모르는 마술사가 있을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요."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 아, 기억났다. 핀란드 마술의 명가 에델펠트 가문. 그 가문의 현 당주가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일본에 있었다 해도 들려왔으니까. 게다가 에델펠트 가문이라면 3차 성배전쟁에 참여했던 외부의 마술사로 인연이 없다고도 못하겠고. 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네가 누군지 어떻게 알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예의바른 토오사카의 당주. 시치미를 땐 채 상대를 높여주는 것 정도는 너무나 손쉽다. “미스 에델펠트.. 그 이름은 내가있던 일본에서도 많이 들었어.” “일본? 일본인인가요?” “쿼터지만.” 묘하게도 표정이 살짝 구겨지는 에델펠트. 일본에 무슨 안 좋은 감정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의 표출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인정할만한 사람이다. 나와는 관계없는 단순히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라면 금방 갈무리할 수 있겠지. 거봐, 바로 표정을 풀고 아까의 태도로 돌아가잖아. “뭐, 좋겠죠. 출신지역과 재능은 관계가 없는 거니까요. 이것도 운명이라는 걸까요. 그럼 저만 소개한 것도 우스우니까 당신에 대해 알려주겠어요? 미스..” “토오사카. 린 토오사카야.” “토..오사카...?!?!” 뭐.. 뭐야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 내 이름이 그렇게 놀랄만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이건.. 놀라는 것을 넘어 노려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기가 뜨겁게 이글거리고 분노와 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접수원의 목소리가 접수처에 퍼진다. “레이디 에델펠트. 죄송합니다만 요구하신 최상층 플로어 전체는 사용하실 수 없을 듯 합니다.” 나에게서 눈빛을 뿌리던 것을 잠시 거두고 이번에는 그 노려봄의 대상을 접수원에게로 향하는 그녀. “어째서지요? 이미 일주일 전부터 모두 사용하겠다고 예약을 해두었을 텐데요.” 최상층 전부? 방 하나나 두개도 아니라 플로어 전부?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부자들의 금전감각이란 이 어찌도 터무니없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 하잖아. “예.. 그랬습니다만 그 사이에 갑작스럽게 기숙사의 이용을 신청한 신입생분이 계셔서요. 다른 곳은 모두 차서 남은 곳은 최상층 플로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느 누가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사용하기로 한 곳에 흙발을 내딛으려 한 것이죠?” “바로 옆에 계신 분입니다. 린 토오사카. 토오사카 가문의 정식 후계자로 시계탑에 초청입학 하신분이기 때문에 시계탑으로서는 방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접수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갈색의 눈동자가 아까의 두 배는 되는 살기와 분노를 지닌 채 나에게로 쏘아진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눈빛에 눌리고만 있을 수 없지. 나라고 노려보지 못할쏘냐. “당신이었군요. 비겁하기 이루 말할 곳이 없는 토오사카의 계집.” 뭐..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는 거야? 그보다 초면에 저런 폭언을 난사 당하고도 참을 만큼 나는 호인이 아니다. 내게 이런 모욕을 주고 가볍게 넘어갈 거라 생각지는 않는 게 좋을걸. 에델펠트의 마녀. ------------------------------------- 서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황급히 달려온 관계자들에 의해서 떼어놓아졌을 때 주위는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서로의 옷도 상할대로 상한 상태. 결정적으로 접수대는 흔적도 남지 않고 가루로 변해있었다. 덕분에 처음 싸움을 걸어온 에델펠트 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기숙사에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 아니, 앞으로 기숙사 출입을 금지 당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려나. ------------------------------------- - 현재 - “바보.”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내 심정은 저 단어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큿.... 날 바보취급 했겠다? 어디까지나 이건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거라고. 나는 걸어온 승부는....” “걸어온 승부는 환영하고, 승부를 했다면 상대가 절대로 재기하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라고 말하려는 거지? 린이나 그 에델펠트양이나 똑같이 바보. 도대체 어느 세상의 사람들이야. 기숙사 방을 가지고 결투에, 주변을 초토화시킨단 말이야? 덕분에 기숙사에서 산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잖아.” “묘하게 강하게 나오네.. 에밀리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우위를 점해보겠어. 라는 말은 얌전히 속으로 삼키고 어디까지나 옛 마스터에게 충실한 서번트로인 것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이며 시치미를 땐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것. “그럴리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 이대로 길거리에 나앉을 수는 없잖아. 차라리 언니의 별장에서..” 이리야의 별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유키시에 있던 성을 생각하면 두 사람정도 들어가 산다고 해서 전혀 그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클 것이라고는 예상이 가능하다. 방세도 굳이 낼 필요도 없고,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이상적인 장소. 다만, 협회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이 유일한 약점이지만 그것도 확실한 교통수단이 있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을 터. “아, 그거 기각.” 그러나 내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어디서 꺼낸건지 알 수 없지만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마치 교수와도 같은 자세로 손가락을 세운채로 왜 이리야의 별장에서 지낼 수 없는지를 설명하기 시작. “이 이상 이리야스필에게 신세(빚)을 질 수는 없어. 상대는 다름 아닌 이리야스필. 이 이상 그 애에게 손을 벌린다면 너를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뭔가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닐 텐데라고 생각. 마술사의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살기만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를 하는 공방도 필요하고, 각종 마술적인 생산시설도 놓는 것이 부지기수. 게다가 이상한 약품과 화학물등 일반인이 본다면 당장에라도 경찰에 신고할게 분명한 물건들로 가득차있으니 일반 숙소는 결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야? 린이니까 생각해둔 바는 있겠지?” “마술협회에서 경영하는 맨션을 빌릴 거야. 기숙사보다 집세도 비싸고, 거리도 좀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는 더 고급스럽기도 하고..” “....집세가 얼마인데?” 마술협회에서 경영한다는 것만으로도 앞에서 생각했던 문제점은 모조리 해결. 이제 문제될 것은 다른 곳도 아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런던의 집세다. 상상이상의 액수가 불려진다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두 손에 힘을 쥐고 린의 말을 기다린다. “2700유로...” “40만엔정도인가.. 생각보다 싸네....” 물론 일본과 비교해서 일반적인 집세보다는 비싼 게 사실이지만 마술협회에서 운영하는 맨션이라면 기본적으로 공방을 구비한 방 3개 이상의 고급 맨션일터. 그 정도의 고급맨션이 일본에서는 60만엔 이상 간다는 걸 감안하면 그리 비싼 편은 아니다. 다만, 비슷한 규모의 기숙사에 들어갔을 경우 반값이하로 줄어들 수 있는 액수가 그렇게 변했다는 게 문제. 뭐, 그것도 이리야가 준 돈을 생각하면 부담하지 못할 액수는 아니니까 그럭저럭 괜찮으려나. “그렇지? 에밀리아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 “그렇지만 기숙사에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건 인정하지?” “그건.. 우으.. 인정해. 하지만 그런 수모를 당하고 넘어갈 바에는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게 나아.” 라며 확고한 신념을 내세우는 린. 아니 그러니까, 좀 평화로운 방법으로 수모를 갚았다면 오죽 좋아. “자아, 그렇게 결정 났으면 어서 그 맨션이 있다는 곳으로 가자. 이것저것 상담할 것도 있고, 배도 고프기도 하고.” “상담? 그게... 왜.. 왜 그래 에밀리아?!” 린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뒤로 돌아가서 어깨를 잡고 앞으로 민다. 부끄러운 주제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은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 “런던에서의 첫 번째 밤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 챙~ 이미 해는 서쪽으로 떨어졌음에도 하늘에는 달이 보이지 않는 그믐의 밤. 이곳 런던에서의 처음 맞이하는 밤은 앞으로 살아가게 될 맨션의 테라스에서 맞이한다. 기념할만한 밤이니 고급스러운 와인이 서로의 잔에 가득. 덧붙여서 함께 늘어놓은 케이크는 아직 주방이나 식재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의 가게에서 사온 것이라는 점이 약간은 불만이려나. “달콤하네~” “그러네~”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 온갖 트러블과 새로운 만남, 그리고 오랜 이동. 런던에서의 첫날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긴박함과 바쁨, 그리고 사건으로 가득 찬 하루였기 때문일까. 린도 나도 묘하게 늘어져서 자신의 잔에 담긴 와인을 홀짝거린다. 고급스러운 와인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역시 술 특유의 쓴맛이 거의 없고 그야말로 달콤함만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린이 한 모금 더 머금는 모습에 나 또한 마시려 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척’하고 가리키는 터에 마시려던 시도는 포기. “왜...왜?” “날더러 바보라고 했지만 뭐야. 에밀리아야 말로 구제할 길 없는 바보였잖아.” 간신히 맨션을 구해서 짐을 정리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당장 나에게 닥쳐있는 문제를 설명하자 그때부터 린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진정시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렇다고 린에게도 별다른 방도가 없기에 앞으로 영어를 익힐 때까지는 외출이 부자연스러울 것은 각오해야한다. 그 점에 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음이라. 그녀의 말에 반박해줄 방도가 없기에 그저 화풀이하듯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에 포크를 찍어 입으로 옮긴다. “미안하게 됐네요. 바보라서. 음음.. 아 이 케이크 맛있네..” “그래? 대충 사온거긴 한데. 아, 정말. 어쨌든 에밀리아가 영어를 익힐 때까지는 도움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건가. 이거 쓸모없는 서번트네..” “제대로 말하자면 내 마스터는 사쿠라인데? 남의 서번트를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으면서 불만 같은 건 기...” 기각이라고 말하려하는 시도는 바로 이어지는 린의 목소리에 그대로 삼킬 수밖에 없다. “흐응~ 사쿠라에게 말해버려도 괜찮으려나~ 시로에게 말해버려도 괜찮으려나~ 응? 에밀리아. 기.. 뭐라고 말하려고?” “기... 기.. 큭.. 기쁘게 받아들여드리지요. 마스터.” “어머나~ 기뻐라~” 역시나 붉은 악마. 남의 약점을 쥐고 뒤흔드는데 소질이 있다. 다행히도 저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즐기는 것일 뿐, 일년이 지나는 동안 그 비밀은 철저히 지켜주었기 때문에 내 부끄러운 과거를 사쿠라나 에미야, 후지누나 등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와인을 입에 머금던 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오늘 낮에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도 그 고쿠토씨던가? 그 사람을 만난 건 어떻게 보면 엄청난 행운이라고 봐야하려나. 그 사람 이 근처에서 산다고 했지?” “응, 어디더라.. 아 명함 명함. 어디보자. 카페 Mnemosyne. 이거 어떻게 읽는 거야?” “므네모쉬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억의 여신의 이름이야.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꽤 괜찮은걸?” 므네모쉬네인가.. 아마도 이름을 지은 것은 미키야씨 본인이 아닐까 싶다. 미키야씨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어딘가 시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다 전체적인 이미지가 시인이라고 해도 무리 없을 분위기였으니까. “한웨이(Hanway) 거리에서 카페를 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찾아가기는 쉬울 것 같아.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일은 더 심각했겠지? 세라가 나중에 파티에 초대하기는 했지만 경황이 없어서 정작 나는 감사표시를 못했으니까 언젠가 한번 찾아가볼 생각이야.”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불행은 더욱 가중되고 대폭발하여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렀을 것이 분명. 시계탑으로 향한 린은 에델펠트양과 충돌한 상태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는 오지 않고, 이리야도 나를 기다리다가 찾아왔을지도 모르고, 결국 공항에서 미아로 발견된 나를 쥐고 흔들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거. “나도 함께 갈까?” “린이 왜? 갑자기 그러니까 무서워.” “뭐야 그 태도는. 나는 이래 뵈도 이곳 런던에서 에밀리아의 보호자나 다름없으니까. 찾아가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 그런 말을 하며 테이블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테라스 난간으로 걸어가는 린. 이곳의 높이는 8층.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라도 런던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높이기는 하다. 난간에 서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모두 응시하던 린의 기색이 한순간 흠칫 하고 놀라는 가 싶더니 뒤를 돌아 나에게 손짓한다. “에밀리아, 에밀리아.” “왜? 뭔가 보여?” 그런 그녀의 부름에 나또한 잔을 든 채로 난간으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넓고 멀리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낮에도 파악했을 터. 굳이 더 보라고 권유할만한 것이 있을까. “어때?” “......” 말문이 막힌다. 태양은 지고 달은 뜨지 않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 밑으로 펼쳐지는 빛의 향연.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네. 봐 에밀리아. 런던이 이 안에 있어.” 눈앞에 들어올려진 그녀의 잔속에는 런던의 불빛이 가득 담겨 찰랑이고 있다. 그것은 나의 잔 속에도 마찬가지. “어때, 다시 한번?” “아.. 응. 건배!” “응! 건배~” 이 순간 우리는 런던을 마시고 있다. 그렇게 맛본 런던의 맛은, 정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맛이었다. ----------------------------------- “시로~” “날 본명으로 부르는걸 보니까 많이 취했나보네. 부축해줄게 들어가서...” 테이블에 엎드려서 잔을 위태롭게 만지작거리고 있는 붉은 여우. 그녀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둘이 와인 한 병을 비웠을 뿐인데 이 정도다. 그 모습이 참 어이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있어서 그래도 나의 존재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이득 본 기분.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 이 서늘한 런던의 밤바람을 맞고 있게 할 수는 없기에 린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일으켜 세우려 한다. “시로~” “리.. 린!??!” 팔을 어깨에 두르는 것 까지는 문제없이 진행. 하지만 그 직후 린의 나머지 팔이 내 목을 휘감고 나에게 매달려 온다.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이었다면 어린아이의 목에 매달려있는 모습일 것이므로 이상한 구도일 터였지만 지금의 나는 린에 비교하면 작은 편이라도 이렇게 앉아있는 린이 매달려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신장을 지니고 있어서 누군가 본다면 묘하게 그림이 되는.. 이상한 상상과 함께 얼굴이 화악 하고 붉어지고 취기가 단번에 날아간다. 아니,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취해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보다 지금은 린이 문제다. 목에 매달린 채로 나를 끌어당기는 그녀를 밀쳐내지도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혀 린의 정신을 깨우는 시도를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린? 정신 차려! 지금... 히이익!!” “에헤헤~ 시로 따뜻하네~” 한층 강하게 옭아매는 린의 팔. 이거 어딘가 위험해. 굉장히 위험하다고. 덧붙여서 린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그녀의 숨결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된다. 최대한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거리를 벌리려고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고 이대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저.. 저기.. 린? 잠꼬대는 침대에서 하는 게..” “후에... 에밀리아? 아니, 시로..? 어느 쪽이야~? 아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아니 굉장히 상관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시각각 린의 얼굴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고 더불어 그녀의 붉은 입술도 내게로 다가온다. 이대로는 그녀의 첫 키스(아마도)뿐만이 아니라 나의 첫 키스도 위험한 상황(랜서와의 것은 노카운트다.) 더 이상 거리를 벌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대로라면 서로에게 좋지 못한 결과에 도달하고 만다. 큭, 이제는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 “리.. 린!! 제발 부탁이니까 정신좀!!” “..........” 서로의 입술이 마주치기 직전 다가오던 린의 입술이 멈추고 그대로 고개가 숙여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찰나. 고개가 숙여지는 만큼 린의 이마가 잠깐의 여유도 없이 내 입술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 이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쿠르르릉 창 밖에서부터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든다. 그런 평화로운 아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계적인 울림에 감긴 눈이 살짝 떠지는 것을 신호로 잠이 삽시간에 날아간다. “아아 머리야....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에..?? 에에에!?!?” 린도 마찬가지로 요란스러운 소음에 잠을 깬 듯 인상을 가득 찌푸리면서 불만을 토로. 술 때문인지 소음 때문인지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제대로 정신이 든 상태로 깨어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옆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야할까. 원래대로라면 서로 다른 방에서 잠을 청했겠지만 어젯밤의 소동 탓에, 거기에 결코 손을 놓지 않으려 하는 린의 악력에 패배하고 지금의 나는 여성이다라는 주문을 한참동안 걸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으니까 섣부른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건 무리일 듯싶다. “어...어어어.. 어째서 가.. 같은 침대에 있는 거야?!?” “어째서고 뭐고, 린이 손을 놔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봐.” 증거로 린이 여전히 쥐고 있는 손을 들어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그 모습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당황하면서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린의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푸훗....아하하” 웃음을 흘리고 만다. 인간의 모든 재액의 근원은 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던가. 잠자코 있었다면 어디까지나 린의 잘못인데다 당황까지 하고 있는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의 웃음이 촉매제가 되어 단숨에 순한 양과 같은 상태에서 붉은 악마로 랭크업한 그녀의 분노가 폭풍처럼 몰아닥친다. “읏.. 비웃었겠다?!?!!” 처음에는 베개가 날아드는가 싶더니 이어서 알람을 맞춰둔 시계가 울리자 시계가 날아오고 추가로 간드까지 쏘아지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랄까 보냐! 어디까지나 나는 피해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으... 그걸 다 피해?!?!”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부서질만한 물건은 손으로 받아내며 태연한 모습으로 침대 옆에 서있는 나의 모습에 기가 찬다는 듯 어디 더 집어던질 것이 없나 찾아보는 린이지만. 린, 이미 네 주변에는 던질게 없어. “이익..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던질 것이 보이지 않자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에 손을 댄다. 하지만 그걸 던졌다가는... “린 잠깐 이불은 안!!! 아흑!!” 대단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불에 마력을 넣어 강화한 건지 빳빳하게 펼쳐진 모습 그대로 날아드는 이불을 피하기에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너무 많았고 그대로 복부에 직격당하면서 고꾸라지고 만다. 사실 그 고통은 별거 아니지만 린의 방금 공격으로 인해 시선 둘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 사실. “꺄아악!! 내.. 내가 어째서 속옷차림인 거야!!! 가릴 거 가릴 거!!! 에.. 에밀리아 눈 치워 어서!” “우.. 사실 린은 맨날 내가 여자라고 강요했으면서, 목욕탕에도 같이 끌고 들어가려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여자 사이에 뭐...” “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어서!!!” 내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고 그랬잖아. 하아.. - 쿠르르릉.. 겨우 아침의 소동이 가라앉고 서로가 어색하게 바라보며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지만 그 중간 중간에도 기계가 굴러가는 듯한 소음이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덕분에 눈앞의 린은 폭발 직전. “으... 도대체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큰 소리를 내고 있는 거야.” “대충 소리를 들어보니 누군가 추가로 이사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지금 시간은 아침 6시. 이런 아침부터 이사 온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폭거라고도 생각되지만 뭐, 사람들마다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참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린은 그렇게 생각지 않나보지만. “이런 아침부터 잠을 깨운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 알아보고 오겠어.” “하아.. 같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불도저처럼 문을 열고 10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의 하강버튼을 누른다. 우리 방은 8층. 이 건물은 10층건물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 오랜 기다림은 불필요하고 잠깐의 시간 뒤에 ‘딩동’ 하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스르륵 하고 열린다. 10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는 이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게 또 잘 말린 황금빛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쉽게 보기 힘든 푸른색의 멋진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미인. “!!!!!!!!!!!!!!!”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보이고 있는 나와 달리 옆에 서있는 린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당황. 그제야 우리를 발견했는지 푸른 드레스의 미인 또한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변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은채 입을 연다. 「어머, 미스 토오사카가 아니신가요.」 린과 알고 있는 사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순간. 「네...네네네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상한 질문이로군요. 앞으로 저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답니다. 겨우 한.곳.을 빌린 당신과는 달리 이 건물 최상층 두층의 전체를 샀지요. 이 소리는 맨션을 개조하는 소리랍니다.」 그녀의 말 자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두사람의 대치에서 삽시간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 아, 저 금발에 푸른 드레스의 여성이 바로 린(붉은 악마)의 숙적(금색의 마왕)인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로구나. 라는 것이. - London trouble End ================================================ <<내용 참고>> 루비아가 토오사카에 치를 떠는 것은 3차 성배전쟁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3차 전쟁에서 에델펠트는 일본에 나타난다는 성배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참전했지만 자매(에델펠트는 대대로 자매가 당주가 됩니다. 다만 지금은 루비아 혼자인 듯.) 사이의 불화로 인해 여동생은 사망, 언니는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하게 되고 그때 토오사카에게 당한 것이 뼈에 사무치게 남아 공포+증오가 섞인 복잡한 원한을 지니고 있는 상태입니다. <<런던의 집세에 관하여>> 세계에서 가장 집세가 비싼 곳은 홍콩이고 서울은 5위더군요. 방 3개짜리 고급 맨션의 집세가 홍콩이 800만원 정도, 서울은 대략 650만원 정도, 도쿄가 700만원, 런던은 500만원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마술협회에서 경영한다는 것에서 약간 깎아서 400만원정도로 합의. 참고로 월세입니다; <<루비아와 린의 충돌>> 할로우 아타락시아의 “런던에서” 에피소드를 차용했습니다. 내용의 흐름은 거의 그대로 따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다만 서술이나 대사 등은 표현을 달리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원작에서는 여름에 찾아가서 내년에 묵을 기숙사를 알아보는 것이지만 이건 바로 찾아간 상황이고, 원작에서는 린이 젤렛치옹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토오사카의 후계자로 초청입학이라는 설정입니다.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51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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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어디어디... 아 지갑!” 이 모습도 여섯 번째 보는 아침 풍경. 딱히 휴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시계탑은 수강하고 싶은 수업을 듣는 것도 자유, 시계탑에 나오는 것도 자유, 나오지 않는 것도 자유, 연구도 자유. 웬만한 것은 모두 학생의 자율성에 맡기고 있다. 때문에 일요일인 어제도 린은 시계탑으로 향했고 오늘로 6일 연속 출석 중. 평소에 준비도 철저하고, 수업수준 이상을 습득하고 있는 린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나갈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수업이라는 목표에 국한될 때의 이야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각오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지는 린의 모습은 그녀의 최근 일상이 그저 마술연구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이야말로 금삐까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오겠어. 각오하라지!” 아니,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린이 평범한 범재들과 차원이 다른 천재적 마술의 재능을 지닌 마술사라면 오늘도 시계탑에 출석할 또 다른 천재. 바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맨션의 최상층(원래는 두층이었지만 하나로 통합했으니까.)에 살고 있으면서 그 전문은 린과 겹치는 광석 마술에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격돌할 때는 검은 마탄이 난무했다고 하니 특기로 간드까지 소유하고 있는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 물론 북유럽이 간드의 원조이기는 하지만 이쯤 되면 린의 판박이다. 물론 린에게는 없는 거만함과 귀족적인 소양까지 갖추고 있다지만 그런 것쯤은 순전히 인간과 인간, 마술사와 마술사로 경쟁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고려대상에 들어가지 않으니 거의 동격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자자, 진정하고. 제발 부탁이니까 오늘은 순전히 연.구.만 하고 돌아와 줘 린. 강의실은 죄가 없잖아?” 런던에 오고 3일째 되던 날 아침에 우편함에 들어있는 편지를 보고는 경악해서 까무러칠 뻔했던 것을 기억하면.. 평소 같으면 린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 읽어달라고 했겠지만 그곳에 써있는 2500￡라는 숫자와 글자의 조합에 사전을 옆에 펴고 해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은 강의실 파손 수리비 청구서. 에델펠트양과 공동 책임이기 때문에 반반 부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리고 당장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예산에 비교한다면 전혀 부담되지 않는 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 녀석이 항상 어디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악취미적인 모노클을 꺼내 쓰고는 손가락으로 슥~하고 밀어 올리면서 ‘어머, 미스 토오사카. 그게 다인가요? 역시 일본인은 안되는군요.’ 라고 말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두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채로 ‘뿌뿌’ 라고 불퉁거리는 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그녀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에미야 시로가 기본인 나라해도 그런 말까지 들은 이상 가만히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조금 조심해서 피해를 최소화 해주기를 바랄 뿐. 게다가 이런 린에게 강하게 나가서 안돼! 라고 말한다면 지금 저렇게 에델펠트양을 향해서 쏘아지는 채찍은 그 타겟을 나로 잡고 덤벼들 것이기에 현명한 서번트인 나로서는 그저 주의를 당부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하아.. 알았어. 에밀리아가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게 노력할게. 이거면 됐지?” 이래서 린은 사람이 너무 좋은거다. 그 결의가 지켜질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기에 않는다고는 하지 않지만 그녀가 노력한다는 말은 최대한 지키려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이상 어떤 당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해줄 말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그녀를 배웅하는 것. - 딩동~ “응!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오늘은 일찍 돌아오..지 못하겠네. 「또 이시간인가요. 미스 에델펠트?」” 스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맞추어 며칠째 보는 건지 한숨부터 나올 광경이 다시 펼쳐진다. 「또.. 인가요. 당신 질리지도 않는군요. 미스 토오사카. 언제까지고 이런 유쾌하지 못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건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저야말로 그 쪽에게 묻고 싶군요. 미스 에델펠트. 마치 노리기라도 한 듯이 제가 나가는 시간대에 정확히 맞춰 나오는 건지 말이지요.」 “흥!” “흥!” 서로 영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배워온 게 없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노려본다는 사실만 봐도 좋은 말이 오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파악이 가능.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얼굴은 웃고 있지만 불꽃이 튀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묘하게 파장이 맞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 첫날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것은 그렇다 치자. 그날을 시작으로 서로 일분 일초도 틀리지 않게 첫날 출발했던 시간과 동일하게 나아간다. 그것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린에게 어째서 마주치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면서 왜 그 시간대를 고집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시간을 바꾸면 도망치는 것 같잖아. 기분 나쁘면 그쪽이 바꾸라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에델펠트양 쪽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있었을 거라 예상한다. 그 증거로 항상 그녀를 로비까지 모시고 가는 시녀가 나를 바라보며 애매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나도 똑같이 눈길에 ‘당신도 참 큰일이군요’라는 뜻을 담아 바라봐준다. 이 순간 동병상련의 동지가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자자, 아래층에서 사람들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어서 가봐 린.” “....알았어. 그럼 이따 봐. 영어공부 열심히 하고!” 예예, 걱정도 팔자십니다. 그녀가 하는 내 걱정보다 내가 하는 린의 걱정이 훨씬 태산같다는 사실을 린을 알려나 모르려나. ----------------------------------------- - 엘리베이터 안 - 「.....함께 있는 그 아가씨는 누구인가요. 미스 토오사카?」 「.....궁금하면 맞춰보시지요. 미스 에델펠트?」 “흥!” “흥!” ----------------------------------------- 이렇게 반복되는 폭풍 같은 아침이 지나가고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먼저 하는 것은 아침식사의 뒤처리와 집안의 청소. 린의 공방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산만한데다 규칙 없이 늘어놓아있는 것 같아보여도 린이 나름대로 자신의 룰에 맞추어 펼쳐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지만 다른 곳은 그녀의 영토(어수선 제국)가 넓어지기 전에 사수해야만 한다. 그렇게 대대적인 방어전이 끝나면 다음일은 어제 하루 동안 모아둔 빨래의 처리. 남자들의 옷이라면 그냥 대충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 끝일 테지만 어쩌다보니 이곳에 있는 옷들은 모두 여성복 뿐. 세제도 조심조심, 건조도 조심조심. 세탁이 진행되는 동안 가벼운 티타임을 갖으면서 내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인 영어를 학습한다. 아무리 입시 위주의 죽은 영어만을 교육받았다고 해도 배운 것이 어디 남아프리카의 원주민 언어도 아니고 그 근본은 영어가 틀림없다. 게다가 서번트는 잊는다는 게 없기 때문에 과거에 배웠던 것이 그래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생각보다 학습의 성과는 빠르게 나타나는 중. 이대로 기본기를 확실히 다지고 직접 부딪히다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언어의 장벽은 더 이상 나의 방해물이 되지 않을 듯 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세탁이 끝나 세탁물을 잘 널어 말리고 나면 점심시간.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는 일들을 종합해보면 영락없는 사용인이다. 그것도 이런 모습이고 하니 맞는 옷만 입혀놓는 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메이드. 전부터 의심스러웠는데 린은 아무래도 전속 사용인으로 나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닐까. 설마,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강하게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은근히 서번트 정체성에 위기감을 느낀다. 아무리 린이라도 그렇게 까지는 아니지... 역시 장담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사람이라면 응당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서번트인 나로서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기에 보통은 거른다. 식사는 분명 괜찮지만 나에게 있어 식사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에는 식사하는 것에 의지가 없는 것이 사실. 다만 오늘은 특별한 계획이 있기에 어제 저녁에 장봐온 재료들로 요리를 시작한다. - 탁탁탁탁! 치이익~! 칼과 도마가 마주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후라이팬에서는 귀를 즐겁게 하는 기름소리가 가볍게 울린다. 그런 일련의 행동을 통해서 단순한 재료에 불과했던 것들이 만들고 있는 내가 말하기 뭐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일식으로 변모한다. 최소 10가지 이상의 요리를 만들어 모양새에도 신경을 써서 정성스레 찬합에 담고 에미야가 비전의 엽차도 보온병에 담아서 준비. 그동안 무엇을 준비해가면 가장 괜찮을까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은 역시 나의 특기 중 18번이라 할 수 있는 요리. 아마도 상대방도 런던에 와서 장소가 장소니만큼 제대로 된 일식을 맛보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되기에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후훗, 됐어~ 완벽하네.” 그렇게 일련의 가사노동과 준비가 끝나자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 준비를 시작한다. 은빛의 긴 머리카락을 잘 말아서 챙이 넓은 모자로 가리고 붉은 눈동자는 미리 준비해둔 선글라스로 감춘다. 옷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게 적당한 원피스. 좋아 준비는 완벽하다. 오늘의 계획은 다름 아닌 미키야씨에게 감사인사를 하러 찾아가보는 것. 그동안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 의도를 실행할 수 있게 된 까닭은, 다름 아닌 이리야 때문이다. 낮이 되어 린이 시계탑으로 떠날 때면 마치 노린 듯이 등장하는 이리야를 상대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지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오늘부터 며칠간 독일에 다녀올 일이 있다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리야를 어제 보냈기 때문에 안심하고 집을 비울 수 있기에 망정이지 이대로라면 언제 찾아가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었던 상황. 린은 함께 찾아가보자고 했지만 린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내가 미리가서 언질을 넣어주는 쪽이 미키야씨 입장에서도 편할 게 분명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맨션의 로비로 나서자 눈앞에 펼쳐지는 이국의 정취. 어디를 둘러봐도 일본어는커녕 한자 하나 써있는 곳이 없고 전부 영어뿐. 걸어 다니는 사람도 모두 하얀 피부에 밝은 색의 머리를 한 외국인들뿐이다. 그리고 나의 영어실력이 아무리 생각보다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일주일가지고는 효용성이 있을 리가 만무. 이대로는 일주일 전의 재탕에 불과하고 나는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한 채 길을 잃게 되는 것이 뻔한 수순이겠지만. “후후후.. 오늘의 나는 다르다는 말씀.” 왼손에는 나침반을, 오른손에는 런던의 지도를 출력한 프린트물을 들고 있는 나에게 길이란 더 이상 두려운 미로가 아니다. 오늘의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은 이국의 길에 휘둘리는 나약한 어린양이 아닌 그것을 정복하는 정복자의 모습이다. 아.. 조금 흥분해버렸는지도. 나침반과 지도를 손에든 채로 기뻐하는 나의 모습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신기하게 보였는지 아니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겨졌는지 시선이 집중된다.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쓰고 있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선글라스는 제대로 눈을 가리도록 확실히 걸치는 일뿐. 아무리 일본에 있을 때에 비해서 내 외모에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은발에 적안이다. 알비노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알비노의 그것과는 다른 붉은 눈이되 혈액이 비쳐 보이는 그런 붉은 빛이 아니라 따뜻한 색의 눈빛은 이곳에서도 신기한 것인지 린과 함께 몇 번 저녁 식재료를 사러 나갔다가 주위의 시선에 숨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오늘은 이렇게 완전 무장을 하고 나온 것. 혹시나 선글라스와 모자가 이목을 끌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기는 했지만 현대는 철저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 나의 행동에 잠깐 시선을 주목했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갈 길들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곧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만한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실패할 리가 없다. 애시 당초 겨우 2km가 될까 말까 하는 거리를 이렇게 두려워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닐까. 그럼 카페 므네모쉬네를 향해서 출발!?!? 하지만 출발하려는 직전 묘한 위화감과 함께 발을 옮기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뭔가 허전하다. 길을 찾기 위한 도구는 이미 파악했듯 양 손에 들려있고 옷은 평범한 것으로 골라 입었으며 모자와 선글라스는 확실히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혹시 모를 금전이 필요한 사태를 대비한 지갑도 있고.. 물론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무엇이 허전한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차, 선물 두고 왔네.” 묘하게 출발부터 꼬여버렸다. 이걸 액땜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불길한 징조로 보아야 할지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그저 린의 병이 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린을 옆에서 지켜주며 그런 실수를 막아줘야 할 입장에 있는 내가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주객전도. 최근 들어 이런 실수가 잦아지고 있는데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젠가 크게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불안하다. 물론 린에게지만. ----------------------------- 다시 집에 들어가서 선물을 들고 나오는 길에 로비에 걸려있는 대형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아직 내 자신의 모습이라 실감는데 조금 어려움을 느끼는 아가씨의 모습. 언제까지 적응하지 못할 수는 없으니 자주 거울을 확인하며 자신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는 한다. 어쨌든 거울을 통해 다시 한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점검. 응, 완벽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테지. ===================================== 협회의 맨션이 있는 곳은 구 regent square. 이곳에서 한웨이거리까지는 대략 2km가 조금 못되는 거리다. 인간이 평균적으로 걷는 속도는 시간당 4km. 따라서 헤메지만 않고 제대로 걸어간다면 겨우 30분이면 도착할 거리이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길을 찾아간다. 나침반이 있어 방위를 확인할 수 있고 지도가 있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린이 아니니까. 물론, 휴대용 GPS같은 것을 구매해도 괜찮았겠지만 겨우 이정도의 길을 찾는데는 오래된 방법만으로도 충분하기에 불필요한 낭비는 삼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고려대상에서 제외.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거지만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 지리를 익히기에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에 직접 걷는 쪽을 선택한다. 사실, 아직은 버스를 타는 것이 두렵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맨션과 목적지까지의 동선 사이에는 린이 매일 나가는 시계탑의 본산인 대영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기에 그곳까지 가는 길을 확실히 알아두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공원이나 대영박물관의 커다란 자태 같은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천천히 한 시간쯤을 걸어가자 어느덧 목표로 했던 한웨이거리에 도착한다. 이곳 어딘가에 미키야씨가 운영한다고 한 찻집이 있을 텐데.. “아! 발견~” 찻집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리 구석의 상대적으로 큰 건물 사이에 움푹 들어가듯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찻집.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야외 테라스까지 준비되어 있고, 서양식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의 정취가 묻어있으면서 동양식이라고 하기에는 건물의 형태가 서양적인 건물이다. 그리고 지붕 바로 아래 간판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Tea house. Mnemosyne’ 라는 찻집의 이름이 유려하게 새겨져있어 이곳이 목적지임을 알려준다. 묘하게 사람이 없다 해서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니(소환 1주년 기념으로 린이 선물해준 물건) 아직 3시. 과연, 티타임 전이라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손님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고 들어가서 미키야씨를 찾는 일만 남은 상황. 다만, “들어가서 미키야씨가 없으면 어쩌지..” 이곳에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미키야씨 밖에 없다. 섣부르게 가게 안에 들어갔다가 미키야씨를 제외한 다른 점원이 영어로 물어본다면 대답하고 찾아온 목적을 설명하고,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를 향해 수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 때문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가게 바깥의 테라스를 서성인다. 노골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이상했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창 안쪽을 살펴보는 내 모습을 누가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지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 - 료우기 시키 - 런던에 온지도 벌써 한달. 도대체 내가 왜 아자카를 따라서 이곳에 와야 했던 걸까. 물론, 미키야를 따라온 거지 아자카를 따라온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 녀석 지난번에 미키야가 일본에 갔다 오는 사이에 정말 기특한 일을 해줬지. 간만에 아자카 답지 않게 편지를 보내왔기에 무심결에 열어봤다가 치솟아 오르는 불길에 깜짝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물론 진짜 불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이가 갈리고 당장에라도 녀석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최근 들어 미키야도 이곳에서 자리 잡느라 그런 건지 묘하게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지만 어째서 이 내가 이런 심부름 따위를 해야 하는 거지.” 내가 평소에 기모노만 입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분명 그걸 알고서 나에게 다른 옷을 입혀보겠다고 미키야는 나름 머리를 쓴 것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흥, 그런 얕은 꾀에 넘어갈까보냐. 그런 식으로 술수를 부리려고 하면 오히려 입어주고 싶어도 거절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걸까. 그렇게 보란 듯 평소처럼 기모노에 블루종을 걸치고 찻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곳은 이국. 일본에서도 이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주목 받던 모습이기에 어느 정도 시선이 주어질 것은 예상했지만 이건 그 예상을 뛰어 넘었다. 이곳에 온 뒤 단골처럼 애용하는 찻잎 판매점에 가는 내내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 웃는 사람,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람 등, 기분 나쁜 시선이 총 망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의 연속. 그렇게 왕복해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시간동안 나의 스트레스는 급격히 쌓여가고 이 화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고민하며 겨우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미키야한테는 화를 내봐야 녀석은 그저 웃으면서 다 받아줄 테고, 나도 그 웃는 얼굴을 보면 언제 화냈냐는 듯 풀어질게 분명하고. 왠지 억울하다. “응?” 찻집 앞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이질적인 변화가 야외 테라스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그 변화는 하얀 원피스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찻집 안을 기웃거리는 녀석의 존재. 키는 좀 작은 편에 속하고 얼굴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리기는 했지만 꽤나 귀엽게 생긴 윤곽선을 지니고 있어서 남자들에게 인기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여자애.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잘됐네.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수상한 녀석이라면 분풀이 상대가 좀 되어 줘야겠다. 아아, 이건 다 네가 운이 없던 것일 뿐이야. 하필이면 왜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뭐냐 넌.」 ------------------------------- - 에밀리아 - 「뭐냐 넌.」 아무리 영어가 되지 않아도 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뒤를 돌아보자 순간 이곳이 런던이 아니라 교토의 어느 무가 저택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피력하며 주변의 사물을 자신에게 맞출 정도의 인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있다.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만 짧았다면 아름다운 청년으로 착각할 만큼 중성적인 미모이지만, 어깨 밑까지 내려가게 기른 머리카락은 그가 아니라 그녀라고 주장하며 이게 또 미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가장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입고 있는 남청색의 기모노와 그 위에 걸친 갈색 가죽제 블루종. “에? 에에?? 이.. 일본인?” “응? 뭐야,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거냐.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지. 어이, 뭐하는 녀석이냐?” 장소와 의상의 부조화는 시작점이었다고 말하는 듯 다시 강렬한 충격을 날려주는 언사다. 저런 모습에 저런 어투. 부조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체현해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눈앞의 여성에게서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네?? 에..또 그러니까. 저는.. 아니아니 그러니까 여기가 저기..” “수상하네.. 응? 어이.. 너, 사람이 맞냐?” “네?” 수상한 겁니까? 확실히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것은 뭔가 감추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겠지만 그렇다고 수상하다 단정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 그보다, 확신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눈치 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기운이 너무 강해.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오호라 그래, 적이로군. 하하, 요새 맥 빠지는 일상이 계속되어서 따분해 하던 찰나였는데. 잘됐어. 정말 잘됐어.” 거기까지 말하고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정체불명의 여성. 그 동작은 마치 가부키에서 부채라도 꺼내드는 동작처럼 유려하고 우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고, - 스릉 덕분에 그 손끝을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이 날카로운 흉기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라기 보다 위험하잖아 그거! “저기..? 그건 칼..이죠?” “?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이게 칼이 아니면 뭐로 보이는데?” “아뇨, 칼로 보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런 위험한 걸 꺼내시는 이유가 뭘까 해서...” 내 말에 이상한 점이 있던 걸까.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의 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행동도 잠시 뿐이고 곧 나긋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상쾌한 목소리로 “뻔하잖아? 죽이는 거지.” 사형 선고를 내린다. 런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비현실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상쾌한 목소리 속에 깃든 갈무리된 살기를 잠자고 있던 전투감각이 감지하고 경종을 울린다. 이건 단순한 장난이나 위협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상대의 신체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온다. “읏!” 뒤로 크게 뛰어서 회피. 갑작스러운 공격과 살의, 그리고 칼끝의 날카로움에 위기감을 느끼고 물러나기는 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 내에 있다.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를 지니고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 해도 영령인 내게는 너무나도 느린 공격. 다만 양손에 짐(지도와 찬합)이 있는 상태에서는 반격은 무리기 때문에 그저 재차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멀찌감치 물러선다. “너, 빠르구나.”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가다듬는 상대. 움직임은 평범한 인간을 웃도는 수준이지만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 칼에 대한 해석을 해보지만 단지 날이 잘 서있는 평범한 나이프. 어디까지나 인간의 레벨에서 위협을 느낄만한 수준의 공격일 테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 그 두 눈에 비추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오한과 더불어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알아채는 것은 상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절대적인 수단이 있다라는 사실. 또한 눈앞의 아름다운 사신은 내 생각이 어쨌든 재차 공격을 하기위해 자세를 낮추고 있다는 사실. “또 간다.” 이 적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성배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술사들 간의 사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마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저 무술을 익혔다고 생각될 만큼 몸놀림이 좋은 일반인에 불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맞상대를 해야 하나, 적이라 인식하고 제압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물러나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그녀는 다시 몸을 튕기듯 쏘아내다가 “시키!!”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 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만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찻집의 입구 쪽. 아까까지 닫혀있던 문은 활짝 열려있고 그 손잡이에 손을 쥔 채로 근심 가득한 표정의 남성이 서 있다. 그 사람은 나도 익히 알고 있고 이곳에 오게 된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고쿠토 미키야씨. 역시 이 사람은 미키야씨의 지인이었던 걸까. 잠깐 한숨을 내쉬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우리 둘을 향해 다가온다. “윽.. 미키야.” “하아.. 런던에서 만큼은 참아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가씨, 죄송합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모습.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자신의 현재 옷차림을 생각하고는 이해한다. 처음부터 내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차려입은 거였으니까. “아.. 아뇨..” “미키야! 저녀석은 적...읍” 뭐라고 외치려하다가 미키야씨의 손가락에 의해 저지당하는 여성. 아까 그의 말을 되새겨 보자면 그녀의 이름은 시키려나. “시키..” “왜...왜?” “저 사람 손에 들려있는 게 뭐로 보여?” 아까부터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나의 길잡이와 내가 운반(?)해야 할 물건. “뭐긴 뭐야.. 지도 하고.. 찬합?” “찬합을 들고 쳐들어오는 적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생각해?” “윽..뭐야, 장담할 수는 없지. 나라면 찬합으로도!” 두 사람이 아옹다옹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분쟁의 씨앗이 된 입장에서 언제까지 저대로 두기 뭐하기 때문에 찬합과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다.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살짝 놀라는 미키야씨의 모습에 묘한 즐거움을 느끼고 제대로 인사를 한다. “일주일만인가요? 그때는 신세를 졌네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미키야씨.” @@@@@@@@@@@@@@@@@@@@@@@@ 공경측 인물 소개 료우기 시키 : 한자는 兩儀 式. 이름 그대로 하나의 인간에게 두가지의 소프트웨어를 담기 위해 노력해온 료우기가의 결정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돈에서 태극으로 태극에서 양의로 양의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팔괘로 나아가면서 무한히 쪼개지는 복합개별인격체를 만들려고 했던것 같지만 미키야에 의해 한쪽이 파손되면서 하나의 인격만이 남은 상태. 원래는 여성으로서의 인격인 시키(式)와 남성으로서의 인격 시키(識)가 혼재해 있었지만 고쿠토 미키야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살인을 추구하는 시키(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미키야를 제거하려 하지만 결국 그를 없애는 것 보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스스로를 죽인다.(원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키지만 미키야와의 교제를 통해 정상인 사람과 자신의 괴리를 느끼게되어 미키야를 없애야만 자신이 정상으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되었던 것.) 그때의 충격으로 2년간 가사상태에 빠지는 시키. 공의 경계 소설은 시키가 2년간의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직 후부터를 다루고 있다. 시키의 능력은 시키(識)가 죽으면서 동시에 자신도 죽음을 접했고 그에 따라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데서 출발한 직사의 마안.(물론, 그 능력은 조금 복잡합니다. 원래부터가 시키(識) 쪽에서는 외부를 보지 않고 심부만을 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하죠-마안을 억제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한 자기 제어법인듯.) 만물의 이음새와 죽음 그 자체가 아무런 부하없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애용하는 칼로 그 죽음을 찔러서 개념도, 힘도, 마술도, 생물도, 무생물도 그 존재 자체를 붕괴시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 직사의 마안과 별도로 시키의 신체는 근원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출발한 장소와 연결되어 있는데(앞에서 말했듯 혼돈-태극-양의(료우기) 이렇게 나아가기 때문이죠.) 이러한 시키의 몸을 손에 넣어 근원에 접하고자 하는 마술사 아라야에 의해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발생하는게 공의경계 줄거리입니다. 말투가 남성스러운 것은 소설 원작대로 설명하자면 죽어버린 시키(識)를 미키야가 기억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고쿠토 미키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35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비디오반영은 추후 제공됩니다.) * 글보내기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카페에 담기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해당 파일(or 링크)에 대한 저작권 위반 신고가 접수되어 이용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담기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공지/대문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목록 Fate/Stay Illumination - Garam in London 下 | [ 타입문 팬픽 ] 4 / 2008.11.09 02:07 가므로일(epilier) 5급마술사 http://cafe.naver.com/uunmask33/325723 Fate / Stay Illumination Garam in London (下) “에밀리아?!?” “뭐야 미키야, 저 녀석 알아?” 어느 샌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갈무리하여 소매 속으로 숨겼는지 맨손이 된 습격자가 미키야씨에게 나에 대해서 묻는다. 그 동작마저도 쭈욱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동작. 그는 저 여성이 이렇게 나이프를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응? 아아,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공항에서 만났던 아이. 여기는 어쩐 일이니?” “별일은 아닌데, 그날 도와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왔어요. 선물도 이렇게.” 왼손에 들고 있던 찬합을 보란 듯 들어 보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천진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사람 좋게 말을 시작하는 미키야씨의 태도에 특별한 금전적인 선물이 아닌 음식을 만들어 온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새삼 뿌듯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런 선물을 준비해왔다면 분명 미키야씨는 이렇게 웃음과 함께 반겨주기보다는 어색한 웃음과 더불어 곤란해 했을 테니까. “하하, 별로 수고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가게 밖에서 서서 이야기 하는 것도 그러니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요.” - 짤랑~! 현관문의 움직임과 함께 맑고 경쾌한 방울소리가 방문객의 존재를 알려준다. 가게 안은 건물의 크기가 크기다 보니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엔틱 가구가 장식되어 있다. 테이블은 고작 다섯 개. 하지만 작은 공간이 영세함을 느끼게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아늑하고 옛날 동화 속에 나오는 숲 속의 비밀 찻집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아까 살펴본 대로 손님이 없다는 점은 약간 의외. 아무리 티타임 이전이라고 해도 이런 찻집이라면 매일같이 찾아올 단골이 있을 법 한데 말이다. 혹시 차가 맛이 없는 걸까. “자, 사양하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 커피? 아니면 차?” “아.. 아뇨. 일하시는데 방해가 될 수는...” 양손을 황급히 내밀어 정중히(?) 사양을 표하지만 의외로 미키야씨는 완고했다. 천천히 내 뒤로 다가와서는 나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테이블로 인도. 의자를 직접 빼주고는 그 자리에 앉히는 서비스까지 확실하다. 이 사람 여성을 대하는 솜씨가 너무나 능숙한 게 미키야씨의 인물됨을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면 타고난 바람둥이가 아닐까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지. 모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오신 날이니까.” “어쩔 수 없네요.. 그렇다면 차로 부탁드릴게요.” “그래?” 나의 대답에 고개를 들어, 가게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아니 들어오기 전부터 나를 경계하듯 현관문 근처에 멀찌감치 서서 주시하고 있던 예의 그 여성을 바라본다. 아까의 마치 살인귀와도 같이 보이던 위험성은 지금은 많이 사라져 보통의 여성으로 보이는 기모노의 여인. “뭐..뭐야. 그렇게 바라봐도.” “시키. 부탁할게.” “쳇, 미키야, 언젠가 이 빚 받아낼 거야.” 그렇게 투덜대며 카운터안으로 사라진다. 분명 미키야씨는 커피담당이고, 차를 끓이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 사람이 저 사람. 확실히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품격과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기모노, 주의 깊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일본 전통의 체술이라도 배운 건지 유려한 걸음걸이까지. 전문적으로 다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했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단순한 업무적인 관계가 아니며 나아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우, 아니 연인이라고 생각될 것 같은 모습이다. “연인... 분이신가요?” “음.. 나는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뭐, 아마도 맞을 거라고 생각해. 기대하렴, 시키가 끓여주는 차는 확실히 맛이 일품이니까.” 시키씨 인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날렵한 몸놀림과 잘 갈무리된 살기. 그리고 나이프가 지나가는 궤적 등 일반 범인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과 연인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 눈앞에 앉아있는 성실해 보이고 친절한 청년, 고쿠토 미키야씨에게도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키야씨의 생김새를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마치 먹물을 풀어낸 것 같이 평생 염색은 해본 적이 없는 듯한 새까만 단발머리가 왼쪽 눈을 완전히 덮은 채 입가 언저리까지 길어 있고, 장식이나 꾸밈 따위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검은 반무테 안경. 반무테 안경이 보통 날카로운 인상을 부여하는 것을 생각할 때 미키야씨에게 전혀 그런 인상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은 이 청년이 얼마나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지이.. “....저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네? 아! 아아아!! 죄.. 죄송해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얼굴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것 같다. “다시 한번 아까 시키가 한 일에 대해서 사과할게. 나쁜 뜻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도지만 하하. 분명 뭔가 착각 같은 거였겠지만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하하..하.. 그러게요. 어쨌든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어디까지나 그녀가 나를 덮친 것은 나의 수상한 행동과 그녀의 예리한 감 때문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나에게 책임이 있다. 하다못해 건물 안을 살펴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까지는 안됐을지도 모르는데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 시키씨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게 만들었을 테니까. 물론, 따분하던 찰나에 잘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지만 뭐, 상관없나. “어이, 거기 좀 떨어져 앉아줬으면 하는데.” 미키야씨와의 대화는 카운터 쪽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끊긴다. 그쪽을 돌아보자 들어갈 때와 같은 모습에 주전자와 찻잔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있는 시키씨가 예의 그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채로 서있다. “아, 시키 빨리 왔네.” “흥, 저 계집애랑 미키야를 단둘이 둘 수야 없지.” 어? 하고 생각할 만큼 뭔가 의미가 담긴 듯한 말이지만 그 말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녀가 가지고 온 차에 호기심이 생긴다. 아직 따라낸 것도 아니고 단지 주전자에 담겨있을 뿐인데도 향긋한 차향이 테이블 주변 공기에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홍차의 향이 아닌 고소하면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의 향기를 내뿜는 차라면 아마도 저 주전자에 담겨있는 것은 일본차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향기는.. 홍차가 아니군요? 일본차.. 그것도..” “교쿠로(玉露)다.” “!!”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풍스런 도자기로 된 주전자를 기울여 세 개의 찻잔에 모두 차를 따라 놓는 시키씨. 교쿠로라고 한다면 그냥 쉽게 구할 수 있는 센차나 반차에 비해서 훨씬 고급스러운 차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별로 반가운 손님이 아닐게 분명함에도 이런 고급차를 내놓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 하 “신경 쓰지마. 네가 마음에 들어서 내놓은 게 아니야. 미키야의 손님은 내 손님이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지.” “자자, 시키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걸 거야. 식기 전에 들으렴.” “아, 네. 홀짝.. 아.. 맛있다..” “그렇지?” 차라는 것은 기본 적으로 물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다 보니 물의 상태와 맛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찻잎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물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와 얼마나 우려내는 가에서 결정되는 끓여내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맛이 천양지차.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이 차는 떫은맛도 느껴지지 않고 깊고 부드러운 맛이 가득 찬 아주 훌륭한 차. 차에는 끓여내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시키씨에 대한 인식의 이미지가 변하는 순간이다. 이런 다도 솜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은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너무 분위기가 딱딱해서 우선 차라도 한잔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이제 어느 정도 긴장도 풀린 것 같으니까 서로 소개해 볼까? 이 아이는 에밀리아 폰.... 뭐였더라?” “아인츠베른이에요.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아아, 그랬지.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말했다시피 한 일주일쯤 전에 히드로 공항에서 곤란해 하던걸 도와준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사이야.” “그 이야기는 벌써 들었어. 흥, 서양인인 주제에 영어도 못해서 헤메고 있었다지?”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물론 내 잘못으로 인한, 내 실수로 인한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것을 이렇게 오늘 처음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매도당하고 있자니 아까의 칼부림까지 더해져서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다. 맛있는 차를 대접받으면서 상승했던 인식은 다시 급격한 하락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도 초단위로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시키!” “윽.. 아.. 알았다고.” “미안, 에밀리아. 계속 소개할게. 이쪽은 료우기 시키. 나와 함께 일본에서 왔고 그.. 내쪽에서 멋대로 좋아하고 있는 중이야.” 우와.. 저런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것도 대단한 재능일지도.. 어쨌든 예상대로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가 맞은 듯하다. 아까 미키야씨는 단지 자기쪽에서 멋대로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료우기씨(성을 알게 된 이상 이름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를 소개할 때 그의 표정은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애인, 혹은 자기 부인을 소개할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뭐, 남의 연애사에 신경쓸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최소한 한마디 정도는 해주지 않고서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에 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듯 차갑게 한마디를 쏘아준다. “어딘지 모르게 맹수 같은 사람이로군요.” “맘대로 생각해라 꼬마.” “그래? 다들 시키를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이상하네. 나는 굳이 비유하자면 토끼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미키야씨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봐 주자. 토끼라고? 어디에 살고 있는 토끼가 상대의 목을 베어낼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목을 물어뜯을 송곳니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찾아내라고 한다면 게임 같은 곳에 나오는 몬스터 토끼쯤은 되어야 비유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이 이상 료우기씨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나도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니까.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듯이 평소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없지만 여동생이 한명 있어. 에밀리아랑 비슷한 나이이니까 언젠가 소개시켜주고 싶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하, 이거 너무 앞서간 걸까?” “후훗, 아니에요. 미키야씨의 동생이라면 분명 멋진 사람일거라고 생각하니까 저도 기대되네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오늘 찾아온 두 번째 목적을 전달한다. 감사 인사도 감사 인사지만 이대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이쪽에서 억지로 떠맡긴 파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 이리야의 말에 따르자면 앞으로 2주 뒤의 주말. 이리야의 별장에서 열릴 계획이라고 하니 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기도 하니까. “오늘 찾아온 이유는 감사인사를 하는 것도 있지만, 지난번에 이야기된 그.. 파티에 관한 것도 전해드리려고 온 것이기도 해요. 저기.. 괜찮으세요? 저희 언니 때문에 억지로 오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것에 관해서는 괜찮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런 파티에 가볼 수 있겠니. 다만, 나 혼자 가기는 그렇고.. 여기 있는 시키나 내 여동생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 “윽.. 미키야!” 료우기씨는 그의 말에 뭔가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려는 듯 정색한 표정으로 노려보지만 그는 예의 그 웃는 얼굴을 통해 진정시키고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물론, 나 역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대답을 하는 것이 당연. “물론이죠. 언니도 환영할 걸요. 다만 료우기씨는 파티에 가시기를 꺼려하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안 그래도 제가 탐탁치 못하신 것 같고..” “시키, 좋은 아이야. 오늘따라 이상하네? 에밀리아가 싫어?” 나와 미키야씨의 눈이 동시에 료우기씨를 주목. 당연히 톡 쏘아주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하기 시작한다. “벼.. 별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그...?” 지금까지의 태도를 종합해볼 때 어디를 봐서 내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까. 칼부림부터 시작해서, 대화를 나누는 순간순간 서로를 향해 독설을 몇 번씩 주고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의외의 반응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우리 둘의 시선에서 안절부절하다가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채 “몰라! 결국 미키야가 나쁜 것뿐이잖아. 이런 둔탱이 같으니라고!” 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카운터 안으로 사라지는 료우기씨. 그 행동과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던 것은 내가 료우기씨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딱히 내가 싫은 것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눈앞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료우기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여심이라는 것에 대한 눈치가 에미야 수준으로 없기 때문이라는 것. 어쩌면 나는 료우기씨에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걸. “에밀리아, 내가 뭘 잘못 한걸까?” “아마도요. 미키야씨가 나쁜 것 같네요. 후훗, 저도 료우기씨에 대해서 다시 봐야겠어요. 정말 미키야씨 말대로 토끼 같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 - 뎅~ 뎅~ 뎅~ 뎅~ 한쪽 벽에 서있는 고풍스런 괘종시계가 마침 4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네 번 울려준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영국에서 4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상식중의 상식. 세계적으로 유명한 티타임이 바로 그것이다. 대다수의 영국인이 그때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홍차와 함께 오후의 한때를 보내는 영국의 독특한 풍습. “벌써 네시. 이제 곧 손님들이 오실 테니까 그만 가볼게요.” 당연히 찻집(Tea house)인 이곳에도 곧 손님들로 북적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언제까지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미키야씨와 료우기씨를 불편하게 만들 수 도 없는 일. 찾아온 이유였던 찬합도 건냈고, 파티에 관한 이야기도 전달했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해야겠지. 작별의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맞은편에 앉아있는 미키야씨의 제지로 다시 앉고 만다. “그럴 필요는 없어... 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가게는 약간 특수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미키야씨의 표정은 웃는 얼굴에 한숨이 섞여있는 의아한 모습.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으니까 난처하다는 듯이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 가게에는 오히려 티타임에 손님이 없어. 우리 홍차는 뭐랄까... 별로 맛이 없어서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커피나, 일본차를 찾다보니 오히려 홍차만을 마시는 티타임에는 한산해.” 분명 영국에서도 커피나 홍차가 아닌 다른 차를 즐기는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이곳은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걸 테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은 영국. 그것도 영국의 중심지 런던이다. 홍차의 나라 영국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홍차를 제대로 판매하지 못한다면 손님은 자연스레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물론, 여러 방면으로 배워보기도 하고 연구해보기도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 그 많은 종류의 홍차에 끓이는 방법도 제각각.” 미키야씨의 고민이 이해가 된다. 지금은 홍차를 내는 것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지만 처음 린의 권유로 익히기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면 홍차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지. 순간 머릿속에 맛있는 차를 대접받은 답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다. “그래도 찻잎은 준비되어 있는 거죠?” “응? 일단 주문이 올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두고 있기는 한데.” 그렇다면 어떻게든 된다. 홍차를 끓이는 것과 녹차를 끓이는 것은 각각 맛을 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국에서는 보통 밀크티를 찾는 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본은 동일한 것. 찻잎의 맛을 가장 부드럽게 우려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대접 받은 맛있는 차에 대한 보답으로 기본적인 홍차의 노하우를 알려 주는 것이 제일일 듯. “미키야씨, 잠깐 주방을 빌려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찻잎은 어디에 있나요?” “찻잎은 주방의 왼쪽 찬장에 있고 주방을 사용하는 것 정도야.. 설마 홍차를 끓여줄 생각이니?” “후훗, 기대하세요.” 미키야씨를 뒤로 하고 카운터 안쪽에 자리한 주방으로 들어간다. 위에서부터 내려져있는 발을 걷고 안에 들어서자 “어딜 들어와. 나가.”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도망쳤던 료우기씨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시선만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가볍게 흘려 넘기고 미키야씨에게 전해들은 대로 홍차 잎을 찾는다. “있다~ 흐음.. 찻잎은 블랜드..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인가. 밀크티는 무리겠네. 하긴, 이 시간대에는 주로 사용하는 것이니까 상관없나.” “.....제멋대로인 녀석..”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신다. 물론 노려보고 있는 눈초리는 여전하지만. 어쨌든 다른 홍차도 있지 않을까 해서 좀더 찾아보지만 준비해둔 홍차는 이것 한 종류뿐인 듯 하다. 티타임에 사용하기에는 무난한 종류이지만 용도가 너무 한정적이다. 이것 외에 아삼정도는 구비해 두어야 밀크티도 제공할 수 있을 텐데. “료우기씨.” “왜불러.”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그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이곳에서 쫓아낸다거나 자신이 주방을 나가버리면 될 텐데 뚱한 표정이기는 해도 한쪽 구석에 기대고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버너에 주전자 물을 올려두고 다기를 꺼내며 어깨 너머로 묻는다. “미키야씨... 많이 좋아하죠?” “푸웁..... 콜록.. 콜록.. 무.. 무슨 소리야!” 내 말에 깜짝 놀랐는지 마시고 있던 물이 역류한 듯 격하게 기침을 하는 료우기씨.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한다면 당장 분노한 그녀에게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에 웃음을 참은 채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한다. 요컨대 그거다. 료우기씨가 나에 대해서 퉁명스럽고 경계를 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것은 미키야씨가 에미야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 좋고 둔감한 청년이기 때문. “아닌가요? 흐응.. 미키야씨는 료우기씨를 많이 좋아하고 있던데. 료우기씨가 아니라고 한다면 제가...” “,,.나를 도발하는 거냐?” - 스릉 청각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조용한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도발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도발이 맞지만. 이것으로 확실해 졌다. 료우기씨는 겉으로는 심드렁해 보이고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이고 오히려 쉽게 흥분하고 쉽게 화를 내는 격정적인 사람. 이 정도의 기본적인 도발에 일일이 나이프를 꺼내다가는 앞으로 힘들어질 텐데. 물론 미키야씨가. “아하하, 안심하세요. 미키야씨는 당신 외에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줄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건 저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잖아요? 게다가 사실 저는 남성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료우기씨도 저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아, 끓기 시작했나.” “...........” 내 말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다. 오직 알 수 있는 것은 꺼내질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와 함께 나이프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사실 뿐. 그래도 내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을 거라 생각하고 차를 끓이는 일에 다시 주목한다. 다음 작업은 버너의 불을 끄고 차 주전자(티포트)에 물을 부어 따뜻하게 데우는 것. 티포트가 데워지는 동안 찻잎을 필요한 만큼 덜어놓는다거나 필요한 준비물을 갖춰 놓는다거나 한다. “에또.. 찻잎 거르는 망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저것 준비가 착착 갖추어 졌지만 의외의 문제가 발생. 차를 우려낸 후 남은 잎을 걸러낼 수 있는 망이 보이지 않는다. 찬장의 곳곳을 뒤져보지만 생각보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큰일이네, 이러면 물을 다시 끓여야 할텐데.. 하아, 미리 준비해 두고 물을 끓일걸 그랬나.” 곤란하다. 이대로라면 확실히 다시 끓여야 할 상황. 그때 등 뒤에서 기모노에 감싸인 하얀 팔이 내 앞으로 내밀어지며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넘겨준다. 넘겨주는 것은 내가 찾던 거름망이고 내밀어진 팔은 료우기씨의 것. “자.” “아, 고마워요.” “그런 걸로 고마워하냐. 시시한 녀석.” 그 말을 남기고 나에게서 등을 돌려 홀로 돌아가는 료우기씨. 내게 보이는 건 오직 그녀의 뒷모습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료우기씨의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어쨌든 그녀와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진 느낌.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다는 건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주방에 들어온 것은 홍차를 타기 위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그녀의 불안감을 없애주려 한 것도 사실. 그리고 그 의도는 멋지게 성공한 것 같기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자아, 그럼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적당히 데워진 티포트에 미리 부어진 물을 따라내고 찻잎을 넣은 후 서서히 끓인 물을 집어넣는다. 물이 들어가 티포트를 가득 채우자 마치 춤을 추듯 오르락 내리락 하는 찻잎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뚜껑을 덮고 겉을 천으로 감싼다. 점핑도 확실히 되는 것을 보니 이번 홍차는 자신작이라고 해도 될 수준으로 만들어질 것 같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기대하세요.” 아까의 것과는 다른 세트로 다기를 테이블에 착착 올려둔다. 마지막으로 티포트까지 세팅끝. 조심해서 티포트를 들어 두 사람 앞에 놓여져 있는 찻잔을 부드럽게 채운다. 서서히 빈 공간을 채워가는 붉은 흐름.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요리, 그리고 차를 끓이는 것에 관해서는 꽤나 정진을 많이 했다고 자부하는 나이기에 두 사람 앞에 내어 놓은 홍차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든다. 더욱이 홍차의 나라 영국에서 홍차를 팔지 못하는 찻집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과 같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어디어디..” “흥..” 미키야씨와 료우기씨 모두 자신의 잔에 따라진 홍차에 입을 가져다 댄다. 두 사람 모두 차를 마시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잡혀있는지 아까 료우기씨가 끓여준 차를 마실 때도 그렇고 지금도 꽤나 보기 좋은 광경을 연출한다. 특히 료우기씨의 경우는 옷 입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일본의 명가출신이라고 확신하게 만들만큼 완벽한 자세로 차를 마신다. 저 모습만 본다면 야마토 나데시코가 따로 없을 정도로 단아한 모습이지만 그녀의 흉폭한 내면을 알고 있는 만큼 그 괴리감이 꽤나 재미있다. “오.. 대단하잖아. 이곳에 온 이후로 홍차를 자주 마셔봤지만 이정도의 맛을 느껴본 건 처음인데? 어때 시키?” “흠흠.. 뭐, 그럭저럭 마셔 줄 수 있겠네.. 어이, 너 뭘 웃고 있냐.” 아, 내가 웃고 있던 걸까. 확실히 지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녀의 말을 되새겨 보자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퉁명스런 말과 다르게 료우기씨의 입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눈썹도 웃고 있으니까. “아뇨. 료우기씨는 그럭저럭이라고 하셨지만 표정이 행복해 보이시니까요. 그렇게 맛있었나요? 에헤.. 차를 내온 사람 입장에서는 기쁘네요.” “거.. 거짓말.” “아, 정말이네? 시키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오래간만인걸.” “가끔씩 찾아와서 홍차 끓이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사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기는 하지만.. 우리 때문에 괜한 수고를 하게 할 수는 없..” “사양하지 마세요. 제가 돕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라고 사양의 표현을 하는 미키야씨. 역시나 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오히려 료우기씨와는 꽤나 어울리는 연인 사이가 아니려나. 단편적인 사람에 대한 판단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감정적이고 공격적인 료우기씨를 부드럽게 받아줄 수 있는 미키야씨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미키야씨가 제게 영어를 가르쳐 주는 거에요. 저는 그 보답으로 홍차를 끓이는 법을 가르쳐드리거나 가끔씩은 일을 도와드리거나.” “응? 그걸로 괜찮겠어?” “에에, 거절하기 없기에요. 사실 두 분 모두 마음에 들어버렸거든요. 꼭 돕고 싶으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진짜 이유는 이거다. 다른 나라. 이국땅에서 만난 같은(저들이 볼때는 아니겠지만) 일본인인데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러저러한 도움도 받고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키야씨 뿐만이 아니라 료우기씨도 꽤나 마음에 들기 떄문. 어딘지 모르게 성격나쁜 린을 보는 것 같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확실히... “하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거절할 수가 없겠는걸. 시키는 어때?” “저 녀석이 오든지 말든지 내가 알바 아냐.”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에 담긴 홍차를 거칠지만 우아하게, 빠르지만 품위 있게 라는 결코 겹칠 수 없는 두 요소의 공존을 가능케 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다. 그리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보는 료우기씨.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던진다. “오면 차 정도는.. 대접해주지. 그리고,” 잠깐의 침묵. “시키라고 불러."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붉게 물들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역시나 감정표현은 서툴지만 미키야씨와 어울릴만한 좋은 사람이다. “후훗, 알았어요. 시키씨.” “흥.” 앞으로 이곳, 므네모쉬네에 자주 찾아오게 될 것 같다는 즐거운 예감이 든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아, 조심해서 돌아가고 마음내킬때면 언제든지 찾아와. 시키는 인사 안해?” “별로...”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그곳을 떠나 린과 내가 머물고 있는 맨션으로 향한다. 미키야씨의 찻집에서 예정보다 오랜 시간을 머물다 보니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시간은 벌써 6시. 생각보다 오래 걸린 외출이었지만 새로운 만남과 앞으로 계속될 인연에 약간은 뿌듯한 기분. 그 두 사람 모두 린에게, 그리고 이리야에게 소개시켜줄 일이 기대된다. 그런 기대와 함께 맨션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을 때, “늦어!!” 붉은 악마가 강림해 계셨다. =================================== “윽.. 린.” “어딜 그렇게 다녀오신걸까 우리 에밀리아양은?” 메모를 남긴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가. 물론 처음부터 린에게는 비밀로 하고 다녀온다고 생각한 것이었기도 하고 단지 전해주기로 했던 물건이나 이야기 등을 전하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메모를 남길 생각을 못했다는 게 더 맞는 이야기. 자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엎질어진 물이다. 지금 필요한 사고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에 관한 것.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어떻게든 둘러대는게 좋을까. “속일 생각은 추호도 말아. 네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도는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으니까.” 선수를 당했다. 하긴,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가면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수상한 차림새다. 갈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한 두세 곳이 전부이기 때문에 쉽게 들통 날 것은 당연한 이야기. 지금은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쪽이 상책일 듯 싶다. “저기.. 그 미키야씨에게 잠깐..” -------------------------- - 토오사카 린 - 시계탑에서의 연구 및 수업은 기본적으로 대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나뉘어있는 학부로 원소, 연금, 은비, 전이의 네 개가 있으며 그 네 개의 대분류 속에 다양한 특수 계통으로 세분화 되어있는 소분류가 있다. 나 토오사카 린이 소속되어 있는 곳은 마력의 전이를 기본으로 하는 전이학부의 광석학과. 교수, 혹은 강사진은 시계탑에 소속되어있는 협회의 마술사로 그 수준은 나쁘지는 않지만 딱히 좋다고도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오늘도 그저 그런 강사의 주도하에 기초적인 마술의 실험. 사실 마술사로서 후학을 양성한다는 것은 시간의 낭비에 가깝고 때문에 제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술사도 그리 많지 않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마술을 갈고닦아 근원으로의 길을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모자란 것이 인생인데 타인을 가르칠 시간이 어디 있을까. 때문에 이렇게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근원으로의 길을 포기하고 그저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존경할 만한 실력을 지닌 자는 드물다.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미스 토오사카.」 함께 광석학 강의를 수강했고 오늘은 같이 시주(始呪)팀으로서 실험을 진행했던 제이미 J 펠리스 부팀장이 다가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낸다. 마술사답지 않게, 그리고 그의 이름(Felis)과 달리 서글서글한 성격이 마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서 자주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누군가와는 달리 이 사람은 확실한 한 사람 몫의 마술사. 마술적인 면과 연관 될 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마술사의 모습을 보이는 믿을 만한 팀원이다. 「천만에요. 미스터 펠리스. 오늘 있었던 술식의 실험. 당신의 능숙한 조율이 아니었다면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겠죠.」 오늘의 실험에서는 내가 보석의 세공과 술식의 설계를 맡은 팀장의 역할을. 그가 라인 밖으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는 흐름을 차단하고 술식 전체를 안정화 시키는 프로텍트를 거는 부팀장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직접적인 라인의 연결과 실행을 맡았다. 때문에 그에 대한 나의 말은 전혀 과한 것이 아닌 그가 행한 일에 대한 당연한 칭찬. 「하하, 겸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시계탑에 온지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천재 마술사. 그런 당신이기에 그런 섬세한 마력의 이동과 고착, 그리고 현상으로의 전환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미스 토오사카. 제가 한 것은 그저 외부로 세어나가는 틈을 막아내는 그야말로 잡일 수준에 불과한겁니다.」 뭐, 미스터 펠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다가 오늘의 실험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말대로 겨우 일주일째인 사람이 주도한 실험이라고 하기에 이례적인 완성도. 그러나 강의가 완전히 종료된 지금 나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나저나 해주팀이 보여준 우리 쪽 술식의 역행. 이야, 그것도 꽤나 대단했죠. 사실 당신과 술식을 완성시키면서 생각했던 것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복잡다난한 안배를 두는가 했지만 역시 미스 토오사카. 상대방의 실력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거였다고 생각하니 한층 안목이 넓어진 느낌입니다.」 「그.. 그러셨나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은 이것 때문. 오늘 강의의 주제는 보석의 의미를 바탕으로 마력을 가공하여 일련의 마술현상을 발현시키는 것과 그것의 해주를 동시에 행하는 것. 떄문에 나를 비롯한 시주(始呪) 팀과 그것을 원래의 보석상태로 회귀시키는 해주(解呪) 팀으로 나뉘어 실험을 진행했다. 평범한 실험이라면 그저 간단한 수순을 밟아 보석에 깃든 의미를 해방하는 수준에서 멈췄겠지만 이 실험은 나에게 그리 평범한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심혈을 기울여 술식을 비틀어 보았던 것. 하지만 그런 노력도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어찌 기분이 괜찮을 수 있을까. 「훗, 미스 토오사카 당신의 실력 충분히 견식 할 수 있었답니다. 루비가 지닌 힘과 열, 그리고 화의 속성을 중심으로 사용하여」 마침 저쪽에서 자신들의 팀과 이야기를 나누던 나로 하여금 이런 수업에 진땀을 빼게 만든 상대가 다가오며 거만한 말투로 오늘 있었던 실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부드러운 금발을 찰랑이고 푸른 드레스로 몸을 감싼 기품 있는 여성 마술사. 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온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오늘 있었던 해주팀의 메인이 됐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뛰어난 자이기도 하다. 「진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파이어를 역세공(의미를 반전시키는 주각을 새기는 일)하여 루비로 교묘히 숨긴 위치에 배치해서 거짓된 환상의 불꽃을 현실에 맺게 만드실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귀찮고 복잡한 작업을 해주신 덕분에 해주팀에서는 꽤나 고생하고 말았답니다. 물론 제 손에 걸리면 문제없는 일이었지만요.」 「훗, 미스 에델펠트.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의 뛰어난 능력에 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답니다. 덕분에 다음번 실험에서는 당신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섬세한 술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볼까요. 다음번에는 그 정도 땀방울로는 모자랄 정도로 말이죠.」 서로가 입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칭찬일색이었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칭찬으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한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 증거로 나와 그 녀석 모두 전력을 다했다는 증거로 얼굴 곳곳에 땀이 맺혀있으니까. 「이야, 역시 두 분은 참 사이가 좋군요. 뛰어난 두 사람이 서로를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제이미 J 펠리스. 여러분과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순간입니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두 분 모두.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기운이 빠질 정도로 멍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지. 덕분에 한순간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 거리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그럼 저는 이만. 당신과 다시 로비에서 마주치는 일은 사양하고 싶으니까요. 당신이라면 제 뜻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미스 토오사카」 「물론이죠. 미스 에델펠트.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모처럼 당신과 뜻이 맞아서 다행이군요.」 흥이다. 그렇게 루비아젤릿타가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러한 흐름에 예외가 아니기에 물건들을 정리하며 돌아갈 준비를 서두른다. 걱정할만한 것은 아닌 줄 알지만 맨션에 혼자 두고 나온 에밀리아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으니까. 그 녀석 영령인 주제에, 행동이 너무 위태위태해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긴, 그 애는 원래 시로였으니까 당연한 걸지도. 물론 최근 들어 시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내가 그렇게 만든 것은 사실) 이제는 완전한 여자애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할 때 다시 미스터 펠리스가 자신의 짐을 들고는 다가왔다. 「그런데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미스 토오사카」 「무슨 소문 말씀이시죠?」 마술사란 대단히 폐쇄적인 집단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이곳 시계탑에서 소문이 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최근 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그녀에 관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확실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섣불리 짐작하는 것은 과실로의 지름길이기에 「당신과 미스 에델펠트는 우리 전이학부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두 꽃인 것처럼 원소학부가 자랑하는 폭염의 마녀에 관한 소문 말입니다.」 「아아, 그녀에 관한 소문이라면 물론이지요. 지금 이 시계탑에서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연구자들 밖에는 없을 테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4개 원소와 에테르로 구성되어있는 5대 원소. 그것 중 특정 혹은 복수의 원소를 다루어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원소학부. 최근 그곳에 다시 나기 어려운 천재가 한명 입학했다 해서 소문이 자자하다. 입학한지 겨우 한달이 되었을 뿐인데 화속성. 즉 불을 다루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적성능력을 지녔기에 붙여진 별명이 폭염의 마녀. 왜인지는 모르지만 화속성 중에서도 특히 폭발계통의 친화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그래서 들려오는 소문 중 하나가 ‘폭염의 마녀와 얽히지 마라’ 였던가.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극도의 한계까지 압축된 주술 영창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힘이 떨어지지 않는 괴물. 보통의 마술사가 5~6문장에 걸쳐 외워야 할 영창을 거의 한 단어까지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마술사라면 영창의 압축 정도는 기본 소양이고 따라서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최소 3단어-속성,위력,효과-는 영창 해야 마술적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기에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은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런 엄청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면에 관한 마술은 완전히 제로에 가깝다던가. 어찌보면 세상은 불공평한 것만큼 공평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에 관한 소문이 더 있는 건가요?」 「모르셨습니까? 하긴, 마술사들의 집단인 이곳 시계탑인 만큼 서로에 대한 정보는 대단히 적은 편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더욱이 학부간의 교류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할지도... 아, 새로운 소문이란 그겁니다. 그녀 역시 미스 토오사카. 당신처럼 일본인이라는 것 같더군요.」 아, 솔직히 약간은 놀랐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찾아온 마술사. 게다가 그 능력은 언어라는 하나의 측면에 걸친 천부적 재능으로 마스터 클래스에 올라섰다던 고도워드 ? 메이데이와 같은 성취를 거둘지 모른다고 기대를 받는다고 이미 시계탑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는 사람이 나와 거의 동시대에 일본에 있었다는 사실에. 하지만 어디까지나 놀라움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가요. 그것은 흥미롭지만 관심은 없어요. 그녀는 그녀, 나는 나. 그것이 마술사의 자세이니까.」 「하하, 역시 미스 토오사카 다운 대답이로군요. 그럼 미스, 평안한 저녁 되시길.」 「미스터 펠리스께서도 평안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눌 때쯤은 시계는 이미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시계탑에서 있을 오늘 하루의 모든 일과가 끝. 쓸데없이 루비아젤릿타와 대결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쉴 수 있는 맨션으로 돌아갈까. 분명 돌아가거든 에밀리아가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다. 오늘은 무슨 음식일까? 요리라면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그녀의 솜씨를 감안하면 우월을 가리기 힘든 것이 사실. 오히려 내가 자신하는 중화요리를 제외한 일식과 양식의 측면에서는 나를 웃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식사가 기대된다. 하긴, 그녀는 시로니까. --------------------------------- - 에밀리아 - “그래서 오자마자 널 찾았는데 맨션은 휑하지, 메모는 없지, 아직 휴대폰도 사지 않아서 연락도 못하지. 얼마나 걱정한줄 알아?” 걱정해줬다는 것은 고맙지만 결국 뭐야. 돌아왔더니 내가 없어서 저녁을 아직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라고 이해해도 괜찮은 걸까. 다시 말해 배가 고프다는 거라면.. “저기.. 미안.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시끄러, 내가 먹을 거로 회유될 알트리아 인줄 알아?” 바로 혼났다. 분명 알트리아라면 아무리 화가 나있어도 솜씨를 좀 발휘해서 식사를 제공해주면 바로 기분이 급상승 했을 테지만 이번 교섭대상은 붉은 악마 토오사카 린이다. 내가 이렇게 사과해야할만한 일인 걸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린에게 이길 수는 없겠지. “하아..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줄게.” “글쎄.. 뭐든지라고 한다면 생각 좀 해볼까. 우선 배가 고프니까 일단 저녁이나 만들어줘.” 겨우 대화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서 린을 흡족하게 만들어줘야 그녀의 요구가 덜 치명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메뉴는 무엇으로 정할까. - Garam in London End ----------------------------------------------- 린의 요구는 메이드복을 입고 일주일간 생활하기였다.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45 | 추천 4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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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림은... 미스 토오사카의 메이드셨나요. 미스 토오사카의 취향은 특이하시군요.」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것은 내가 메이드 차림이 되기 전에는 매일 같이 아침마다 마주쳤던 에델펠트 씨의 메이드. 가사활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영어 회화 학습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인지 간단한 대화 정도는 가능하게 되어서(인간이던 시절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으니까)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메이드복은 정숙하고 품위가 있는 영국적인 메이드복인데 비하여 내가 입고 있는 것은.. 관두자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니까. 「에.. 그러니까. 제가. 메이드. 아니라. 이건. 잘못된.」 물론 뜻을 전달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한참동안 짧은 영어를 200% 활용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그녀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역시 당신도 고생이군요. 알겠습니다. 부탁하실 게 있다면 제게 부탁하세요.」 그렇게 든든한 아군을 얻고 견뎌내기를 4일. 그리고 찾아온 오늘이 바로 딱 일주일째다. 오늘 하루만 넘기게 된다면 이 가슴 아픈 과거는 진정으로 과거라는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다행히 린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계탑으로의 전의를 불태우며 집을 나섰기 때문에 얌전히 집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면 문제없음. 분명 그러해야 했을 터였다. - 딩동 이곳에 온지 벌써 2주. 린을 제외하고는 방문하는 사람은 오직 이리야밖에 없었는데다 그 이리야는 일주일도 전에 독일에 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귀국했다면 도착하자마자 연락이 왔을 테니까 분명 린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2시. 평소보다 귀가가 빠른 것 같기는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것. 뭐, 갑작스레 두고 온 물건이라도 생각난 걸지도 모른다. - 딩동 처음 벨소리에 반응하여 문을 향해 다가가는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벨을 다시 누르는 것이 린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도 사람. 분명 어지간히 급한 일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현관으로 향한다. “지금 나가~ 웬일이야? 오늘은 좀 이르네?” - 철컥 잠금장치를 풀고 일주일 한정 주인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린이 아니었다. 아니 린은커녕, “짜잔~” “....어?” 하얀색에 가까운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장난기 가득 찬 붉은 눈이 웃음을 짓고 있는 내가 있었다. 뭘까. 뭐지 이건.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긴,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나의 정신이 닳아 끊어질 정도의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래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고 저렇게 문밖에서 들어온 내가 곧 나를 깨울게 분명하다. 이럴때 볼을 꼬집으면 분명 아프지 않을 거고.. “오래간만이야 에밀리아~ 나 알아보겠.. 어라?” 문밖의 나는. 아니 나로 보이는 누군가는 마치 정말로 오래간만에 본다는 듯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다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깜짝 놀란다. 아아, 그 심정 이해하고말고. 만약 내가 이런 모습의 자신을 본다면 그것은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울 테니까. 그나저나 이 꿈은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 “헤에.. 에밀리아의 메이드 차림~ 가지고 가고 싶다~ 어때 에밀리아? 이참에 이 언니를 따라가는 건?” “언니 제발 그건 참아.... 줘?” 너무나 익숙한 어투에 나도 모르게 이리야를 상대할 때와 같은 반응이 나왔다. 잠깐, 이리야? 다시 한번 문밖에 서있는 사람을 자세히 바라본다. 그러자 거울로 보는 자신의 모습과 눈앞에 서있는 사람의 차이점을 몇 곳 발견 할 수 있다. 우선 나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좀더 눈꼬리가 날카로우면서 장난기 가득한 눈망울. 입고 있는 옷은 이리야가 보통 입고 있는 보랏빛 블라우스와 하얀 치마의 치수를 크게 만든 듯한 디자인. 결정적으로 나에게 말하는 너무나도 천진하고 아이다운 말투. 이 모든 것이 조합되어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언...니?” “뿌뿌~ 뭐야 실망이네. 못 알아 봤다는거야?” 이 정도까지 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있는 나로 착각할 모습의 사람은 분명 나의 언니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이 맞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분명 아인츠베른이 만들어낸 호문클루스. 10세 정도의 모습이 성장의 한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겨우 일주일 전만해도 어린 모습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변해서 돌아온 걸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자.. 잠깐만.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이상한 지팡이? 아니아니.. 그건 쓰지도 못하고 통제가 안 될 텐데?!? 그럼 어떻게??!” “후후후.. 이거? 사실 이곳에 오면서부터 준비했던 거~ 우으.. 언니이면서 여동생보다 작은 건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에헴, 연줄을 총 동원해서 최고의 인형사에게 만들어달라고 한 가짜 몸. 다시 말해서 인형이야.” 나도 부족한 능력이지만 일단은 마술사다.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고 이리야가 말하고 있는 인형이라는 것이 마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알 고 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가 인형이라고 주장하는 몸은 아무리 보아도 인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인형은 인형으로 기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공적인 장치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것이 그녀의 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일반적인 마술사라면 이리야의 말에 반신반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터지만, “정말로 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에헤.. 에밀리아도 알고 있다시피 무리잖아 그건? 그래서 일시적으로 내 몸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인형을 주문했거든. 원리는 원시 마술과 비슷해. 라인을 연결해서 마치 내 몸인 것처럼 보고, 느끼고, 움직이는. 물론 음식도 먹을 수 있어. 꽤나 비싼거라고 이거~” 유감스럽게도 나는 저런 수준의 인형을 만들 수 있는 마술사를 알고 있다. 결국 실패하기는 했지만 생전에 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수소문해서 구했던 인형. 그것은 정말이지 인간의 모습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여 사람과 차이 없이 움직일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 사람이라면 저런 수준의 인형을 만들 수 있을 터. 제작자는 분명 봉인지정으로 잠적한 마술사라고 했었던가. “아오자키.. 토우코?” “헤에~ 알고 있나보네? 응, 최고의 인형사라고 한다면 명성이 자자한 그녀 외에는 없었거든~ 찾아내기 힘들었다니까. 그래서 주문하고 나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인형사. 보낼 곳을 착각했는지 독일에 있는 본가로 보내버려서, 이걸 찾으러 독일까지 다녀온 거였어~” 물론 의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힘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있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훔치는 모습까지도 이리야의 몸짓 그 자체였기에 믿기 힘든 일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이리야가 원하는 성장한 모습을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계속 저 인형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 “그럼 계속 그 몸으로 있게 되는거야?” 성장한 이리야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거나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 나도 기쁘기는 하지만 이 모습은 진짜 이리야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외모가 변했다 해서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이리야는 품안에 쏙 들어오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이런이런,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이게 모두 린이 이상한 요구를 해서 정신 상태가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내 말을 들은 이리야는 턱에 손을 대고는 고민하는 모습을 취하는가 싶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아, 그건 무리. 내 몸에는 서번트 두 명분의 마력이 깃들어 있으니까. 의식이 몸에 남아있는 동안은 그것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이렇게 의식을 전이 시킨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폭주 하고 말거니까. 아마도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하루려나? 다시 생각해보지만 아쉽네~” “그렇구나..” 거기까지 말하고는 자신의 일에 대한 관심을 끊듯이 그리고 나에게로 주의를 돌리듯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는 몸을 바짝 붙여온다. 덕분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자세. “그런데 그 옷은 뭐야? 새로운 놀이?” “하.. 하하.. 이건 말이지..” 다시 설명할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아파온다. 어떻게 설명해야 최대한 오해 없이 지금 이 상황을 이리야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서 이리야에게 설명하는 데는 정말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리야는 린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고 내가 스스로 이런 옷을 입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변명이라 해야 할지 해명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리야의 반응은 걱정도, 분노도 아닌 순전한 재미뿐. “그래서 그런 모습이라는 거네? 헤에~ 린도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걸?” “하..하.. 재미있는 생각이야? 하아...” 문제는 이렇게 얼굴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띤 채로 린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 하긴, 이리야가 나를 옹호해 줄 거라는 기대 같은 것은 이미 예전에 버린 지 오래이기에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것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려나. “응!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끌어안고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 “그것만은 참아줘..” 만약 이대로 이리야에게 납치되어버리게 된다면 단숨에 폭발해서 노도와 같이 달려올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만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살짝 오한이 돈다. 실제로 보지 않아도 그녀의 행동쯤은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에헤~ 그럼 나 혼자 보기는 아까우니까. 리즈! 세라!” “네, 아가씨.” “응, 이리야”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이리야의 부름이 있자마자 문을 통해 익숙한 두 사람이 들어온다. 많이 익숙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짜잔~ 에밀리아 인 메이드~! 어때?” “잘 어울려 리아. 어울려서 예뻐.” 거기다 이런 식으로 마치 나를 구경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리면 더욱 숨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닐까. 그리고 분명 긍정적이고, 오히려 이리야보다 좋은 반응을 보여주 리즈는 둘째 치더라도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항상 기품이 있으셔야 할 아가씨께 메이드복을.. 그것도 그렇게 천박한 옷을 입히는 토오사카의 당주님이나 그에 따르시는 에밀리아 아가씨나. 반성하세요! 조금이나마 언니이신 이리야스필 아가씨를 본받아 보시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이 얼마나 기품이 넘치는 자세와 옷차림이십니까.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반이라도 따라가 주신다면 이 세라는 정말이지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혼나고 말았다. 마치 이 무슨 고약한 장난이란 말입니까. 라고 말하듯 아름다운 얼굴에 경악과 어이없음이 가득 차서 훈계하는 세라는 무섭다. 과연 이리야의 예절 담당은 가차가 없었다. 하지만 세라, 이건 내 뜻이 아니라고. “세라 말은 신경 쓰지 마, 리아. 귀여워. 좋아.” “리제릿트!” “세라는 고집쟁이. 여길 봐.” “에? 자.. 잠깐 리즈!!?” 갑자기 리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는가 싶더니 잔상마저 남기는 번개 같은 속도로 내 뒤로 돌아온다. 그 속도는 가히 서번트에 필적할 것이기에 부끄러워 잔뜩 움츠리고 있는 내 어깨를 잡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리즈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한 채 세라 앞에 내밀어진다. 덕분에 머리끝부터 손끝까지 새빨갛게 변해버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저기 리즈, 너무 몸을 젖히지 마~!” 어딘가가 강조 되서 부끄러움은 더욱 증폭되고 있으니까. 그런 내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무언가를 자랑하듯 세라에게 보여주며 감상을 묻는 리즈에 화를 내는 것도 몸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 어쩔 수 없이 체념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어때?” “무엇을 말인가요. 어울리는가 하고 묻는 말이라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지마세요. 두 분 아가씨는 당신과 나의 자랑. 어떤 옷이든 확실히 잘 어울리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옷 역시.... 읏! 위험했습니다. 당신에게 말려들 뻔했네요. 리제릿트 언제부터 이런 심리전을 걸 수 있게 된 거죠.” “별로 없어. 그저 사실을 말할 뿐. 세라도 인정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 하자면 세라가 인정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 모습, 의외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호평인지 나를 가지고 재미있어하는 것뿐인지 알 수 없지만) 정말이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절대로 아닌 것. 차라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준다면 한결 마음이 편할 테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 인정해요.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리제릿트. 당신은 왜 항상 그런 모양인가요. 아무리 본가에는 알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에밀리아 아가씨에게는 영광스러운 아인츠베른의 피가 흐르는 분이고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유일한 혈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분께 그런...! 그런...! 그.... 입에도 담기 어려운 천한 것들이나 입을 만한 옷이라니!!!” 세라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까까지의 몇 배는 되는 강렬한 눈빛으로 리즈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본다. 세라, 정말이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벗으세요. 벗으시고 다시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품격 있는 옷으로 바꿔 입으시는 겁니다. 잘 됐군요. 그동안도 일반인이나 입고 다니는 그런 저급한 차림이시기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리제릿트, 이번에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인형에 맞게 구입한 옷들이 있지요. 가지고 오세요.” “응. 이미 가지고 있어.” 어디서 난건지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한손에 들어 보이는 리즈. 그녀의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사이즈를 한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려나. 저래 보여도 리즈는 아인츠베른이 만들어낸 유사 서번트이니까. 그보다 메이드라면 물건을 어디선가 꺼내는 건 기본 소양인 걸까. “자 그럼 벗으세요.” “에? 지금 뭐라고..” “벗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아까 언니에게 설명했지만 이 옷은 벗게 되면 린에게 신호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마음은 세라보다 내가 훨씬 강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부끄러운 의상 따위는 단숨에 벗어버리고 평범한 옷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굴뚝같지만 이들 앞에서 갈아입는 다는 것은 훨씬 부끄러울뿐더러 만약 벗게 될 손 치더라도 기간이 지나가기 전에 약속을 깬 것을 린이 알게 될 테니 그 후환이 훨씬 두렵다. “벗으세요. 아가씨께는 이런 옷 따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소용 없습니다. 리제릿트 아가씨를 그대로 붙잡고 있으세요!” “응.” “나.. 나라고 이걸 입고 싶어서 입고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무턱대고 벗으라니! 아앗, 리즈 잡지 마!!” 나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노출이 심한 의복이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끌어내려진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린에게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 그걸 볼 때 나는 생각보다 의외로 침착한 게 아닐까 싶기에 스스로에게 감탄한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대로는 이리야를 비롯해서 두 메이드 앞에서 속옷차림이 되어버린다! “언니?!? 구경만 하지 말고 세라를 좀 말려봐!! 리즈! 이것 좀 놔줘!~!!” “아하하~ 내가 왜~ 나는 지금도 재미있는 걸~” “미안 리아. 지금 옷도 예쁘지만 다른 옷은 더 예쁠 거야. 그러니까 놔줄 수 없어.” 매몰찬 두 사람의 거절 아닌 거절. 이대로 나는 수치스러운 모습이 되고 마는 걸까. 이제 위험한 선을 넘어서는 것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모든게 틀렸어. 그리고 린, 이건 절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는 걸 부디 알아주길 바래. 「놀랐습니다. 굉장히 소란스럽군요. 에밀리아양 있나요? 문이 열려있기에 실례하겠습니다.」 귀에 익은 낯익은 영어가 아직도 열려있는 현관문 쪽으로부터 들려온다. 이 목소리는 에델펠트양의 메이드이자 이번 소동이 있는 동안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클레어씨. 덕분에 벗겨지려던 옷은 잠깐의 유예시간을 갖고 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 그렇게 문 안으로 들어온 클레어씨는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소동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황에 대한 의문을 표한다. 하긴, 당장 이리야와 내 모습만 보아도 궁금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 「에밀리아양이.. 둘? 아니, 저쪽에 메이드 옷을 입고 있는 게 제가 알고 있는 에밀리아양이겠죠. 그 쪽의 두 사람은 에밀리아양에게 무슨 짓인가요. 당장 그녀를 놓아주세요! 그리고 그녀와 똑같게 생긴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 으응~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은 무례한 자한테 알려주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네. 세라, 내가 누군지 저 무례한 자에게 설명해주도록 해.」 「네 아가씨. 거기 당신. 어서 예를 갖추세요. 여기계신 이분은 유서 깊은 독일의 명가 아인츠베른의 직계이신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입니다.」 이게 전화위복이라는 걸까. 그때까지 나에게서 메이드복을 벗겨 내기위해 안간힘을 쓰던 세라는 이리야의 부름을 받고 떨어져 나갔다. 아직 리즈가 움직임의 자유를 구속하고는 있지만 단지 어깨에 팔을 집어넣어 도망만 치지 못하게 하는 수준이기에 자유로운 팔로 흘러내린 옷을 다시 걸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사실 아무리 서번트에 육박하는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는 리즈라도 어디까지나 육박은 육박일 뿐. 제대로 된 서번트인 나의 힘이라면 떨쳐내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좀 거친 수단을 쓸 수밖에 없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리즈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아.. 죽는 줄 알았어.” “에밀리아 아가씨. 안심하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나면 계속 하도록 할 테니까.” 목소리가 들렸는지 어깨너머로 눈을 번뜩이며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세라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단어. ‘귀신’ 역시 이리야가 어린시절부터 돌보아오면서 품행과 예절을 전담해서 가르쳐온 일종의 가정교사. 용서와 자비란 없는 것인가. 그런 나의 심정은 어쨌건 세라와 클레어씨의 상황은 계속 진행 중이다. 물론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이 가능. 「실례했습니다. 아인츠베른의 아가씨. 저는 에델펠트 가문의 당주이신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 아가씨를 모시는 시녀장 클레어 입니다. 저희가 모시는 아가씨의 토지는 북유럽의 핀란드.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고명한 아인츠베른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아무쪼록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가씨.」 전혀 가능하지 않잖아! 내가 배워오고 기억해둔 단어나 어법으로는 저런 식의 격식을 차린 말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앞으로도 영어와의 전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걸까. 어쨌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클레어씨가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 하긴, 이리야는 이래 뵈도 명가의 아가씨니까. 「뭐, 좋아. 이곳은 동생이 머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오늘은 에밀리아의 메이드 차림도 봐서 기분이 좋으니까 넘어가주도록 할게.」 「관용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외람되오나 한 가지 여쭈어도 괜찮으신지요.」 「세라가 답할 수 있는 수준에서 답해줘. 시녀에 대한 대응은 시녀가 하는 게 올바른 법도.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않아? 에델펠트의 메이드.」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럼 그쪽의 메이드 분께. 아인츠베른의 아가씨와,」 클레어씨의 시선이 이리야를 거쳐 나에게 주어진다. 게르만.. 아니 노르만인가 어쨌든 북유럽 사람 특유의 푸른 눈은 나의 정체에 대해서 묻는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지긋이 바라본다. 그 시선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은 아까부터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세라. 「역시, 에밀리아 아가씨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렇기에 이리야스필 아가씨께도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거로군요. 그렇다면 이 기회에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저분은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단 하나뿐인 여동생이신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이십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분께도 무례한 행동은 용서치 않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에밀리아 아가씨께서는 어째서..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궁금해 할 일이 아니로군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인츠베른의 사정. 에델펠트에서 관심을 갖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처음 클레어씨의 질문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역시나 세라의 대답은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태도가 상당히 고압적이고 강하게 말하는 게 별로 좋은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위기로 알 수 있다. 클레어씨에게는 여러모로 도움도 받았고 별로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세라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리야에게 물어본다. “저기 언니? 세라가 뭐라고 하는거야?” “응? 뭐야 에밀리아 아직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거야? 우웅.. 그건 좀 심했다~” 영어를 못한다고 이리야에게 까지 구박(?)받을 줄은 몰랐는걸. “므으..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일본어 외에는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걸. 나한테 있어서는 영어건 독일어건 라틴어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니나 린이 더 신기해. 그보다 내가 물어본 거 대답해줘.” “하지만 에밀리아의 몸은 내 몸일 텐데?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세라가 한말은 말이야~ 에밀리아는 내 동생이니까 함부로 대하면 혼날 줄 알아! 랄까? 응! 그런 뜻이야.” 분위기에서 읽어낸 대로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일까. 이리야와 세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뭐니뭐니해도 클레어씨는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기에 이런 식으로 박대하는 것은 너무나 죄송스럽다. “하아.. 그건 곤란해 언니. 저 사람은 내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걸.” 가므로일(epilier) 덧글 3개 | 조회수 48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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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습니까? 그럼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자.. 잠깐 세라??!? 「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실례했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클레어씨?!?”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진행되는 두사람의 대화. 만약 이대로 클레어씨를 돌아가게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야말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도움은 도움대로 다 받아 놓고서는 나몰라라하는 상황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다. 어떻게든 그녀가 돌아가지 못하게 막고 세라를 납득 시켜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신체적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클레어씨가 돌아간다고 말한 직후 그녀에게 관심을 거둔 세라가 다시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띤 채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 “자, 방해꾼은 사라졌습니다. 아가씨, 아까 하던 교육을 계속 하도록 하지요. 리제릿트 꼭 붙들고 있으세요.” “교.. 교육인거야?!” “네, 교육입니다. 아가씨의 예의범절과 품격을 바로잡기 위한 교육. 그럼 그 천박한 옷을 어서 벗어버리세요!” “싫어~!!!!” 겨우 다시 걸친 복장에 위기가 닥치는 것은 순식간. 잠시 동안의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어느새 세라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공포스러운 하얀 두 손을 나에게로 뻗치기 시작한다. 이리야가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고 리즈는 이미 세라에게 동조해 있는 상태. 차라리 이 상황에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나를 이런 몰골로 만든 린 외에는 아무도 없으려나.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그렇지만 있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세라의 너머로 현관근처에 서있는 것은 아까의 축객령으로 인하여 이곳을 떠난 것으로 여겨졌던 클레어씨.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서있는 그녀의 모습은 저것이야 말로 메이드의 자세로구나 싶을 정도로 귀감이 될 모습이었지만 어딘가가 이상한 느낌. 마치 그녀가 존재하는 공간만 따로 떼어서 관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이질감이 느껴지는 게 묘하다. 물론 클레어씨의 등장으로 바로 앞에 있는 세라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태. 등도 돌리지 않고 어깨너머로 말을 하는 세라의 이마에 혈관이 살짝 불거져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볼 때 그녀 또한 상당히 화가 난 상태인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그때까지 현관문 언저리에서 서 있던 클레어씨는 너무나 유려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집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그렇게도 자연스러운 걸음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무게감은 그야말로 천근. 세라는 아직도 뒤를 돌아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 역시 범상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클레어씨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쯤은 알아차리고 있을게 분명하다. 「당신, 아직도 있었나요. 돌아가겠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네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에밀리아 아가씨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이죠. 곤란에 빠진 그녀를 내버려 두고 가는 건 힘들겠네요. 어서 그녀를 풀어주도록 하세요. 스스로가 아인츠베른의 메이드라고 말을 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 주인 된 사람에게 그리도 불손한 행동인가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시종일관 공손하게 대했던 아까와는 달리 웃는 얼굴 그대로 세라에게 지지 않고 맞상대를 하는 모습에서 뭔가 폭풍이 불어 닥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저 나의 기우였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 그렇지만 이런 예감은 하나같이 적중하고 내 기대는 가볍게 그 폭풍에 날려져 버릴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면 나는 생각보다 운이 없으니까. 「어이가 없군요. 당신은 주인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요?」 「당신의 말뜻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메이드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종. 주인 되시는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메이드의 기본자세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죠. 에밀리아 아가씨의 뜻은 절대적인 거부로 보입니다만 제가 잘못 본건가요? 아뇨, 그럴 리가 없겠죠. 그렇다면 당신은 기본자세조차 되어있지 않은 분. 헌데, 아인츠베른의 아가씨께서 그런 사람을 거느리고 있다니 이 무슨 안타까운 일입니까.」 싸악. 만약 공기가 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런 소리가 들렸을 거라는 착각. 아까부터 심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던 클레어씨가 뭐라고 말을 한 직후 분명 공기가 싸늘하게 냉각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워 나간다. 물론 그 근원은 내 눈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묵묵히 서있는 세라. 구해주러 온 건지 저승사자로 온 건지 알 수 없는 클레어씨.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한건가요.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시 말해보실 수 있나요?」 「알고 보니 귀도 잘 안 들리시는 분이셨군요. 몇 번이고 다시 말해드릴 수 있답니다. 당신은 메이드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회화. 단번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 여성들 사이의 다툼이라는 것은 린과 사쿠라, 린과 이리야, 린과 후지누나, 린과 에델펠트양..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지켜봐온 여성들의 싸움은 항상 린과 관계되어 일어난 것들 뿐 이구나. 어쨌든 그건 그리 새삼스러울 것이 아니고 그러한 다툼 중 어떤 것도 지금의 분위기에 비교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 일. 그만큼 홀가분한 기분으로 맞이했던 네 마지막 약속의 날은 예상외의 방문자들에 의해서 폭풍우 속의 조각배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욕도 이만한 모욕이 없군요. 부디 제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모욕으로 받아 들이셨다면 잘못 알아들으신 게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욕할 생각이 아니라 당신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지금의 발언으로 차갑게 냉각되어 가던 공기는 급반전하여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터지기 직전의 중성자탄 같은 이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이리야는 나를 구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한 듯 한쪽 편에 서서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 그 입술의 모양은 [세.라. 이.겨.라] 포기했다. 아니 절망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안전은 더 이상 확보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아니 확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고 지나간다. 조각배는 더 이상 풍랑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집채만한 파도를 뒤집어쓰고 침몰하기 직전.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메이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모욕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요. 그런 대담한 발언을 할 정도라면 분명 타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물론이지요. 적어도 당신같이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분께는 무엇으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답니다.」 - 빠직 무언가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하고 있는 망상속의 조각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함장의 침몰 선언과 함께 망망대해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세라의, 그리고 클레어씨의 상대방을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지는 상대에 대한 적의 뿐. 「오만방자도 그만하면 재능이겠군요. 미스 클레어.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신의 한계를 똑똑히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물론 당신이 패한다면 제게 준 모욕. 그 몇 배의 수모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그것도 당신의 주인 앞에서 말이죠. 그보다 저는 아직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상대의 이름도 모른 채 승부에 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실례했군요. 제 이름은 세라. 이리야스필 아가씨를 모시는 메이드입니다.」 그렇게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인 사투가... ------------------------------ - 30분 후 - 벌어지지 않았다. “언니?” “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신속하고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고 싶다. 어째서 내가 저 둘의 싸움에 휘말려서 함께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아니 그보다 지금 작금의 이 대결 구도는 도대체.. “부디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줘.” “우웅~ 뭘 말이야?” 아까까지의 적의가 넘치고 당장이라도 불꽃이, 칼이 난무할 것 같던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두 사람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주방도구와 음식 재료, 다기 세트 등 그야말로 평화로운 물건들뿐이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도대체 이것들을 어디에서 가져온 걸까. “이해할 수 없군요. 에밀리아 아가씨. 메이드들의 명예를 건 승부입니다. 그렇다면 메이드로서의 능력을 겨루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니겠나요. 그리고 우습게 보셨다가는 큰일 납니다.” 의문의 일부는 세라가 대답해 줬지만 그런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무엇으로 승부를 보려는 건지도 어떻게 하려는 건지도 잘 알고 있고. 하지만 내가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앞에도 그와 완전히 같은 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이유다. “세라.. 그게 아니라 어째서 내 앞에도 같은 게 놓여있냐는 거야.” “그.. 그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말을 얼버무리는 세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런 차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강제로 갈아입히려 했던 것이 그녀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지금 세라의 태도는 정말이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나의 앞에도 클레어씨나 세라의 앞에 있는 것과 동일한 세트가 자신들을 사용해주기를 강렬히 요구하며 늘어서있기에 마치 나 역시도 그녀들과 함께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쯤은 어떤 둔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왜 나 또한 저들의 다툼에 끼어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 “아! 그건 내가 시켰어~ 에밀리아 모처럼 메이드 차림인 걸~ 에헤~ 메이드인 에밀리아의 시중을 한번 받아보고 싶었거든! 린만 에밀리아의 시중을 받아 본다는 건 너무 치사해~!” “언니 진심이야? ....미안. 멍청한 질문이었어. 당연히 진심이겠지. 하아...”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번 승부의 심판 자격으로 어디에선가 가져온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을 구비하고 리즈의 시중을 들으며 앉아있는 이리야. 역시나 그녀에게 있어 나는 이런 역할인 것인가. 게다가 이리야에 대한 시중 아닌 시중이라면 그동안 충분히 많이 해주지 않았던가 싶은 기분이다. 요리도, 차도 대접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어쨌건 나의 참가는 이리야 뿐만이 아니라 세라에게도, 클레어씨에게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 「에밀리아 아가씨도 함께 하는 건가요. 미스 세라?」 「....제 뜻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되겠군요. 하지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래요. 미스 클레어. 에밀리아 아가씨는 어디까지나 이리야스필 아가씨를 위해 참가하는 것 뿐. 당신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저니까.」 「물론이에요.」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에 대한 전의로 가득 차서 활활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 그야말로 칼 대신 오븐을, 창 대신 티포트를 사용해서 상대를 누르는(말살하는)것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진행은 나. 두 사람 모두 동의했어.” 설상가상으로 이 이해할 수 없는 승부의 진행자는 리즈로 결정 난 듯 하다. 게다가, 단순히 여기에 있는 멤버들로만 구성된 승부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듯 하지만 「클레어씨 힘내요~!!」「에델펠트가의 메이드의 실력을 보여주세요!」「상대의 콧대를 꺾어버리세요!!」「에밀리아씨 예쁘다...」 준비된 도구들은 모두 에델펠트양의 메이드들이 준비한 것인지 원래라면 위층에 상주하고 있어야 할 다수의 메이드들이 갤러리로서 참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한층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외침은 클레어씨를 응원하는 거지만 마지막의 말은 뭐지 도대체. 덕분에 최소한의 사람에게 들키고 넘어가고자 했던 이 행복할 기다림의 순간이었을 하루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하루로 변모하고 있었다. --------------------------------------------- 등장인물 소개 클레어 : 루비아의 시녀장. 나이 27세. 출신지는 영국의 버밍엄이다. 원래부터 루비아의 전속 시녀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영국유학을 위해 가장 영국에 연고가 있는 그녀가 시녀장으로 선발된 것. 루비아에게 의미 있는 사람은 집사인 슈프란씨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최근 클레어의 메이드로서 능력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듯. 가족으로는 부모와 결혼하여 런던에 살고 있는 언니가 한 사람 있다. 마술가계의 시녀답게 마술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충분히 있는듯 하지만 마술사로서의 능력은 삼류. 특기는 영국 사람답게 홍차와 관련된 모든 분야. 지금 당장 글 속에 드러난 참여인원만 해도 에밀리아, 이리야, 세라, 리즈, 클레어, 메이드 4명. 이정도의 인원에 그 많은 장비. 절대로 집안에서 처리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맨션의 옥상에 무대를 설치해둔 상태입니다. =========================================================== 「그럼 규칙. 네 개를 겨뤄. 많이 이기면 승리.」 「네 진행은 맡기도록 하지요. 리제릿트」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 리제릿트」 “하아..” 이제는 포기했어. ★ 제 1라운드 [요리] : 클레어의 시점 ★ 시작부터 요리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조리는 전속 요리사가 맡아서 처리하고 있지만 분명 요리사가 없을 때는 그 일은 우리 메이드들의 몫일 테죠. 루비아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된 이래로, 아니 정식으로 에델펠트가의 메이드가 된 이래로 과자류나 쿠키류를 제외한 요리는 해보지 않았지만 이래뵈도 부모님으로부터 언니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몸. 게다가 고향인 버밍엄의 레이디우드 지역 요리경연대회에서도 수상한 적이 있었으니 이 승부는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딱 봐도 손재주 없어 보이는 미스 세라나, 귀하게 자랐을 게 뻔한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요리라는 것을 해봤을 리가 만무하니까 두 사람에게는 미안해도 선취점은 제가 올려볼까요. 그래요. 오늘 승부의 요리는 역시 가장 자신 있는 치킨 캐스롤로 정했습니다. - 30분 후 - 「네, 아주 잘 만들어졌군요. 그럼 두 분은 과연 얼마나 했을까요.」 직접 다가가서 바라보는 것은 실례이기도 하니 멀찌감치 서서 바라봅니다. 그런데... 「아직.. 인가요?」 너무 늦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처럼 만든 요리가 식어버리면 맛이 없지 않나요. 두 사람 모두 아직 요리에 열중해서 제가 이미 완성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니 이대로 제출해 버려도 괜찮을까요. 「미스 리제릿트. 이대로 심사를 요청 드리겠어요.」 「응. 먼저 하는 건 괜찮아. 이리야에게 가져갈게.」 진행을 맡고 있는 미스 리제릿트는 미스 세라와 달리 순수한 면이 많은 분. 마치 아이와도 같은 어투와 꾸밈없는 동작은 그 하나하나가 그녀를 돋보이게 만듭니다. 물론 주인이 되는 이리야스필 아가씨께 하는 언사는 메이드로서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어디까지나 허락했기에 가능한 거겠죠. 어떻게 저런 사람과 미스 세라같은 사람이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의아하지만 뭐, 그 일이야 말로 아인츠베른의 문제. 제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죠. 지금은 오직 승부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헤에.. 벌써? 어디어디~ 응? 뭐야 이건..? 닭죽?」 「치킨 캐스롤. 영국의 전통요리야. 맛있어」 미스 리제릿트는 요리에도 조예가 있는 가 봅니다. 흔히들 영국음식은 맛이 없다라거나 성의가 없다라거나 정크푸드라거나 하는 말들이 있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하죠. 물론 전속 요리사가 만드는 다른 나라의 음식들을 먹어보면 맛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로의 음식이기 때문일 겁니다. 심판으로 계신 이리야스필 아가씨가 요리를 시식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조용히 지켜보고 그녀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 남아있는 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리야스필 아가씨와 저쪽에서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 에밀리아 아가씨는 너무 닮았네요. 백은을 녹여서 만든것 같이 윤기 있는 머리카락부터 루비를 그대로 세공한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까지. 에밀리아 아가씨는 모르셨겠지만 그 아름다운 용모는 이미 우리 메이드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랍니다. 당신의 메이드 복장을 메이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줬을 때의 그 폭발적인 반응들이란.. 상상도 못하실 걸요. 하긴,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 원래대로라면 참견하지 말아야 할 일에 양팔을 걷어붙이고 참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에밀리아 아가씨는 이곳에 토오사카의 당주님과 함께 생활하고 계신 걸까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입니다. 「우웅..」 이런,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시식을 마치셨나보네요. 반응이 별로 좋지 못하실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이니까 괜찮아요. 귀족 분들의 입맛이 까다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럼 이제 남은 두분의 요리가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죠. - 다시 30분 후 - 「리제릿트. 저도 다 됐습니다. 미스 클레어, 빨리 만든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이제야 다 된 건가요. 여러 요리를 내는 코스도 아닌데 단지 하나를 만드는 것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닌가 싶네요. 에밀리아 아가씨는 서투르기에 그럴거라 생각해도 미스 세라. 당신은 역시 멀었습니다. 「세라는 로스트비프(Rinderbraten Bristol). 세라, 이거 너무 지겨워.」 「응, 세라는 이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무.. 무슨 소리신가요. 물론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승부. 그러니까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랍니다. 자, 어서 아가씨께 가져다 드리세요.」 밑천이 드러나셨네요. 결국 이 승부 제가 가져갈 수밖에 없을 듯하네요. 그리고 당신이 만든 요리 따위.. 어.. 어라? 맛있어 보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것은 실수 중의 실수인 것을 알고 있지만 확실히.. 단순한 로스트비프가 아닌 위에 얹혀있는 소스가 먹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상대의 실력을 너무 우습게 봤던 걸까요. 이 클레어 일생일대의 실수일 듯 합니다만 제 요리도 뒤지지 않아요. 승부는 아직 모르는 겁니다. “리즈, 나도 다됐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때마침 에밀리아 아가씨도 요리가 끝나셨나보군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가씨의 음식은 기대가 됩니다. 맛이 없더라도, 모양이 나지 않더라도 괜찮답니다. 아마 저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우리 메이드들 중에는 그녀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맛을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을 테니까. “리아 음식은.. 모르겠어. 일본음식?” “도미머리 조림이야. 도미와 그 알, 그리고 우엉을 함께 소스를 통해 조렸으니까 맛은 보장할 수 있으려나?” “와아~ 일주일만에 먹어보는 에밀리아의 요리다~” 뭐라고 말하는 걸까요. 영어와 핀란드어 그리고 독일어까지는 익히고 있습니다만 일본어는 무리입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무언가의 조림인 듯하지만.. 그보다 충격입니다. 뭔가요. 저 요리는. 이리야스필 아가씨도 엄청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뭐랄까 먹어보지 않아도 저런 요리가 나와 버리면 제 요리는, 그리고 미스 세라의 요리는 너무나 격이 낮아 보이지 않나요. 물론 요리의 종류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단순히 음식의 맛에만 치중한 것이 아닌 이것저것 야채와 나뭇잎 같은 것으로 청초한 장식까지 되어있습니다. 요리에서 광채가 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건가 보네요. 오늘 새로운 세상을 접한 느낌입니다. 「읏.. 예상은 했습니다만 역시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자리의 배치로 따지면 가운데에는 미스 세라가. 그녀의 왼쪽엔 제가, 오른쪽에는 에밀리아 아가씨. 때문에 저보다 가까이서 에밀리아 아가씨의 음식을 본 미스 세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분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언가 에밀리아 아가씨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에밀리아 아가씨.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요. 「요리 승부. 리아 승.」 미스 리제릿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에밀리아 아가씨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이거, 방심할 수 없겠는걸요. - 제 2라운드 [홍차] : 세라의 시점 - 네네, 이미 예상했습니다. 첫 번째 승부가 요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버리고 시작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도대체가 뭔가요 저 실력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우면서 그 내부에는 기품과 연륜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맛. 단순히 저 요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아온 에밀리아 아가씨의 요리에는 모두 적용되는 그런 찬사. 하긴, 괜찮습니다. 이미 지나간 승부는 잊도록 하지요. 이번 승부는 홍차. 에밀리아 아가씨의 홍차 맛이 좋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지만 아직 저를 따라오려면 멀었.. 아니 사실은 바로 턱밑까지 쫓아왔지만 그래도 아직은 제가 앞섭니다. 그렇다면 이번 승부는 그야말로 미스 클레어와 저의 승부. 맛좋은 차가 무엇인지 제대로 견식 할 수 있게 도와드리지요. 「누가 먼저? 같이하지는 못해. 차가 맛없어 져.」 「제가 먼저 합니다 리제릿트. 그래도 괜찮겠지요. 에밀리아 아가씨, 미스 클레어.」 과연 리제릿트. 이래저래 저를 고생시키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리야스필 아가씨를 모실만한 메이드로 손색이 없습니다. 제각각 완성시키는 시간이 다르더라도 만들어지자마자 시식할 수 있는 요리와 달리 다도란 그 격식과 차를 내는 시간, 그리고 만드는 시간까지 섬세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기술. “나야 뭐.. 하아..” 「물론이랍니다. 미스 세라.」 에밀리아 아가씨의 반응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모처럼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기뻐하시고 계시는데 즐겁게 참여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저런 옷차림을 하고 계신 것을 보니 마치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같은 옷차림을 하고 계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기 어렵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눈앞의 저 콧대 높은 건방진 여자를 눌러줘야만 하니 참을 수밖에요. 이번 승부로 낼 것은 바로 로열 밀크티. 물론 영국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모처럼 준비된 재료에 향이 좋은 아삼티가 있으니 가장 좋은 선택이 되겠죠. 홍차를 끓여내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우유와 홍차의 미묘한 조합, 그리고 끓이는 온도까지 보통의 로열 밀크티와 저의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거죠. 당신과 저의 격차 현격히 느껴보도록 하세요. 미스 클레어. - 10분 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가씨. 세라 특제의 로열 밀크티 입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세라가 끓여주는 홍차는 오래간 만이네?」 「그렇죠. 최근은 항상 에밀리아 아가씨가 끓여주시는 차를 드시니까요. 하지만 저 세라. 아직은 에밀리아 아가씨께 지지 않습니다.」 아가씨의 머리색처럼 백은으로 빛나는 찻잔을 부드러운 붉은 빛이 서서히 채워갑니다.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홍차의 맛을 알게 되신지 어느덧 10여년. 그 기간동안 항상 아가씨의 차 시중을 들어온 저입니다. 맛의 취향과 원하시는 종류의 잎. 좋아하시는 온도. 그 모든 것을 이미 완전히 마스터 하고 있는 저에게 아가씨가 만족하실 차를 끓이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죠. 두 눈을 감으신 채 홍차의 맛을 음미하시는 아가씨의 모습은 너무나 기품이 넘치시기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정지한 느낌을 받습니다.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만 같은 그 순간은 아가씨의 눈이 살며시 뜨이고 입을 여시면서 다시 흘러갑니다. 「언제나와 같이 세라다운 맛. 이 이상의 말이 필요 없겠지?」 「물론이랍니다. 아가씨.」 그 이상의 찬사는 저에게 없으니까요. 자, 그럼 남은 두 분의 실력을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감상해 보도록 할까요. - 다시 10분 뒤 - “내 차례네. 뭐, 세라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모처럼 만나는 언니니까 실력 좀 발휘 해 봤어. 게다가 나는 승부 같은 건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천천히 마셔줘.” 이번에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차를 내어 가시네요. 확실히 처음 만나 뵈었을 때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실력이 많이 나아지셨죠. 물론 그때도 일반 수준으로 치자면 훌륭하셨지만 언제나 이리야스필 아가씨께 차를 끓여드리던 제 실력에는 많이 못 미치셨던 것이 사실. 그러셨던 것이 이제는 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이 발전 하셨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를 위해? 헤헤.. 기뻐~ 에밀리아~~ 우웅~ 이리와 언니가 안아줄게~” “자.. 잠깐만 언니?!!? 차!! 차 쏟는다니까!!” 두 분의 자매애란 어찌 이리도 아름다운 것인지. 최근 일년여만큼 아가씨께서 저리 기뻐하셨던 시간이 있었는가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물론 두 분 아가씨의 예절 교육과 품행 담당인 저로서 그 기쁨을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요. 「다음은 제 차례로군요.」 「그래요. 미스 클레어. 최선을 다해보시길 기대해 드리죠. 물론 저를 넘으실 수는 없겠지만.」 「기대해 주신다니 감사할 뿐이랍니다. 미스 세라. 부디 놀라서 쓰러지지 마시길 바란답니다.」 아까까지의 풍요로운 제 감정은 저기 있는 적수의 밉살스런 독설에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래요. 기대해드리고 말고요. - 또 다시 10분 후 - 「제 홍차 역시 로열 밀크티입니다. 이리야스필 아가씨.」 같은 홍차로 승부했단 말인가요. 물론 그곳에 있는 찻잎 중에서 가장 쓸만한 것은 아삼티 밖에 없었으니 밀크티를 선택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지만 저의 차를 보고 나서 만든 겁니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선택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자신 있나보네? 방금 전 세라의 밀크티. 물론 봤겠지?」 「물론입니다. 아가씨.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홍차였지만 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과한 자심감이라고 뭐라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지만 저의 차는 지금껏 상대할만한 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요. 그렇군요. 단순한 허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자신이 승부에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부리는 오기에 불과할 겁니다. 그게 분명할 터입니다. 그런데.. 이 불안한 기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흐음~ 자신하는 만큼 기대해 보겠어.」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하얀 찻잔에 미스 클레어의 로열 밀크티를 담아 그 아름답고 작은 입술에 머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아까부터 느껴지는 불길함, 그리고 불안함이 더욱 가중됩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표정에 떠오르는 놀라움에 그때까지 억지로 억누르고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암울한 감정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과시하네요. 저 홍차를, 로열 밀크티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껴오던 불안한 감정은 결국 패배감. 그런 기분이었던 가요. 그렇게 패배감이라는 감정에 빠져있는 시간이 정말 천천히 흘러가고 이윽고 아가씨의 입에서 찻잔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 앵두 같은 입술에서 나올 판정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는 수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군요. 「놀랐어. 역시 영국인. 홍차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는 거네. 물론 차를 끓이는 솜씨 자체는 세라와 비슷했지만... 있지? 넣은 게.」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역시 아인츠베른의 아가씨. 차를 보실 줄 아시네요. 제 차 역시 미스 세라가 끓인 것과 마찬가지로 로열 밀크티이고 그녀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차에는 그녀의 차에 들어가지 않은 게 있지요. 바로 이것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미스 클레어가 들어 보이는 것은 탁자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화려한 금장 마크가 정면에 커다랗게 장식되어 있는 청흑색의 유리병.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그 병은.. 아.. 위스키인 겁니까. 「이건 로얄 살루트 38년산. 최고급 위스키랍니다. 이것을 적당히 로열 밀크티에 혼합하여 끓여내게 되면 훨씬 깊은 맛의 홍차를 만들어 낼 수 있기에 가끔 저희 아가씨께 내가는 홍차에 사용하고는 하죠. 물론 미스 세라의 테이블에도 같은 것이 놓여있답니다.」 분하지만 사실입니다. 홍차에 술을 넣는다는 것. 네, 분명 어딘가에 서는 위스키를 넣는 다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나이로만 따지자면 성인이시지만 아직 아가씨는 술을 드시기에는 어리시단 말입니다. 「흐응~ 그럼 결정 났네. 불만은 없겠지 세라?」 「...네. 변명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승부에서 결착을 짓도록 해드리지요.」 아직 승부는 끝난 게 아닙니다. 다음에서 그 얼굴에 거만한 미소대신 경악이라는 단어를 새겨드리도록 할 테니 각오토록 하세요. 미스 클레어.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19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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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에 나는 그녀들을 직접 대면한 적도 전무하다 시피하고 그녀들이 나를 볼 기회도 거의 없었을 텐데 어째서 저런 반응들인지는 이해 불가능. 나중에 이 소동이 끝나고 나면 클레어씨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 할 듯 하다. 「이제 리아 1승. 클레어 1승. 세라 꼴찌.」 「큭. 알고 있어요. 리제릿트. 자! 어서 다음 과제를 내주세요. 저 거만한 여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부질없는 저항은 사람을 추하게 만든답니다. 미스 세라. 미스 리제릿트의 말을 못 들으셨나요? 당신이 꼴.찌.랍니다.」 「네, 잘~ 알고 있답니다. 미스 클레어. 부디 모든 승부가 끝난 뒤에 그 펑퍼짐한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울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보기 추.하니까.」 「다음은 청소.」 요리, 홍차에 이어 청소까지 등장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이야기. 원래부터 살풍경했던 건물의 옥상인데다가 이곳은 이번 승부를 위해 이미 깨끗하게 청소를 마친 뒤이기 때문에 별다른 청소할 만한 것이 없다. 「청소.. 물론 메이드의 소양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치울 만한 것들이 있던가요? 미스 리제릿트.」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네요. 리제릿트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세요.」 「응. 기다려.」 그녀들의 말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즈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던 시간은 정말로 한순간. 리즈의 모습은 대답과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옥상의 난간 너머로 사라진다. 잠깐만 여기는 옥상이라고!?! “리즈!!!” 「미스 리제릿트!!?!」 「「「「꺄아악!!!」」」」 세라와 이리야를 제외한 옥상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리즈가 뛰어내린 난간으로 달려간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기우. 지상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어디론가 뛰어 사라지는 리즈의 모습이 보인다. 하긴, 리즈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다면 깜짝 놀랄 까닭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랐다는 사실이 어리석었다. 리즈가 누구던가. 아무리 근력의 랭크가 낮은 나라고해도 일단은 서번트. 그런 나를 힘으로 어느 정도 구속할 수 있는 아인츠베른이 탄생시킨 유사 서번트. 「미스 리제릿트는 대체...」 「뭘 그렇게들 놀라십니까. 리제릿트는 아인츠베른의 메이드. 저 정도는 보통으로 할 수 있어야 아가씨를 모시는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응! 응~!」 「...솔직히 말해서 놀랐습니다. 미스 세라. 그럼 미스 세라께서도 가능하시다는 말인가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세라에게 묻는 클레어씨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순수하게 전투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리즈에 비해서 세라는 마술적인 능력과 실제 메이드로서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전투적인 신체 능력은 리즈와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어떻게 보면 약체. 「꼬.. 꼭 필요한건 아닙니다. 제게는 그녀 같은 신체능력은 없지만 대신 리제릿트가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마술이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마술승부까지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정~말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마술은 메이드의 능력이 아니지 않은가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승부를 끼워 넣으시려 하다니 미스 세라는 의외로 소심한 분이었군요. 미스 리제릿트가 내주는 과제만으로는 불안하신가 보네요.」 「무.. 무슨 소리.....」 아 세라 얼굴이 빨개졌어.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네 패배라고. 빨개진 얼굴로 흥분하여 부정하려 하는 세라의 목소리는 뒤이어 어디선가, 아니 건물 아래에서부터 들려오는 새된 소리에 묻히고 만다. - 휘유웅~~~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 소리. 무언가가 날아오는 듯한 소리에 과거 이 시간대에 소환되어 처음 리즈와 세라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고개를 들고 비로소 이 소리의 정체를 눈치 챈다. 그래, 리즈의 핼버드가 날아올 때와 같은 높은 파공음. - 쿠웅!! 「「「「꺄악!!」」」」 내 예상을 그대로 꿰뚫는 모습으로 아래에서 솟구친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옥상에 커다란 충격음과 진동을 선물하며 도착한다. 덧붙여 메이드들의 비명소리까지도 보너스로 말이지. 자욱한 먼지를 흩뿌리고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듯 우뚝 솟아있는 바위는 직경이 거의 2미터는 될 정도의 큰 바위. 「이.. 이건.. 설마 미스..」 - 쿠웅!! 클레어씨의 놀란 목소리 역시 앞서 리즈의 목소리가 묻혔듯이 두 번째 바위가 날아와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잇지 못한다. 앞서와 비슷한 규모의 굉음과 진동이 옥상을 엄습하고 그와 비슷한 타이밍으로 솟구치는 하얀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과 같은 너무나도 깔끔하고 완벽한 회전을 보여주며 새로이 옥상 위에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는 두 바위 사이에 내려선다. 무언가 해냈다는 듯 자신만만한 그 자세에 옥상에 있던 일동은 전원 할말을 잃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그저 멍하니 리즈를 바라보고 서있는다. 가장먼저 패닉상태에서 빠져나온 것은 역시나 리즈의 파트너인 세라. 「리제릿트... 당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정리할게 필요했어. 그래서 가져왔어.」 그제서야 리즈의 손에 들려있는 흉악한 병기에 시선이 닿는다. 리즈가 애용하는 무기 핼버드. 총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서구의 모든 병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무기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둘째 치고 리즈의 손에 들린 이상 저 핼버드는 그야말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폭탄이 된다. 「기다려. 금방 어지럽혀 줄게.」 마치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핼버드는 마치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부드럽게 이동하여 빛과 같은 참격을 연속해서 바위를 향해 쏟아낸다. 일격, 이격, 삼격...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시력을 강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잔상을 느낄 정도의 스피드로 바위를 난자하는 횟수가 증가한다. 게다가 분명 핼버드가 지나쳐 갔음에도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바위에서 그 참격이 지니는 예리함 또한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끝.」 그 선언과 함께 리즈의 핼버드가 멈췄다고 느낀 순간 그녀 옆에 있는 두 바위는 한순간의 삐걱임을 보인 직후 그 자리에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어떤 돌가루도 파편도 튀지 않는 처음부터 작은 돌과 돌가루의 무더기였던 것처럼. 그런 화려한 신기(神技)를 보여준 리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핼버드의 옆면으로 돌의 무더기를 쳐서 세 방향으로 나눈다. 덕분에 먼지하나 없게 깨끗해 보였던 옥상은 삽시간에 돌과 돌가루로 어수선, 그리고 지저분의 극치에 다다른다. 과연... 이만하면 치울게 생기긴 했네. 「도구는 오직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것만을 사용해.」 어디..? 주위를 살피자 도구들의 구석에 놓여져 있는 나무 빗자루와 플라스틱제의 쓰레받기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청소를 위한 기초적인 도구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무와 플라스틱. 저 바위의 잔해를 향해서 몇 번만 휘둘러도 금세 제 기능을 잃어버릴 것 같은 너무나도 평범한 물건이다. 이걸로 이 돌들을 치우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지만 리즈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다. 「이걸로 말인가요? 그건..」 리즈가 돌을 가져오는 것부터 부수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내내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던 클레어씨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불가능한 요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려 하지만 그때까지 담담히 바라보고 있던 세라에 의해 제지당한다. 「시작 전부터 약한 모습인가요? 이 어찌 나약한 모습이란 말입니까.」 묘하게 강하게 나온다. 도구는 나와 클레어씨와 세라가 모두 동일한 평범한 청소용구임에도 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의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미스 세라. 그 말, 마치 당신은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당연한 말을 하시는군요. 미스 클레어. 이 정도를 가지고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그 야만스러운 거인(버서커)이 한 번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부서지던 후유키시 교외의 성을 도대체 누가 치웠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전투(청소)에서 승리를 거둔 제게 걸린다면 이 정도의 돌가루와 잔해는 그야말로 아이들 장난이지요. 그곳에 서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세요. 당신과 나의 차이를!」 자부심 넘치는 것인지 한을 토해내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외침과 동시에 세라의 신형이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돌의 말로(지저분의 공간)를 향해서 쏘아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들려있는 빗자루가 춤을 추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 빗자루가 한번 휘둘러지면 그 영역은 그야말로 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검은 도화지에 하얀 물감을 칠한 것을 연상시킨다. 저것이 나무 빗자루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닳아 문드러질 것을 예상할 수 있겠지만 세라의 빗자루 질은 그런 평범한 것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빗자루의 털 부분으로는 가루를 보듬어 안 듯 부드럽게 쓸어내고 있고 조금 크다 싶은 돌들은 빗자루의 자루 부분으로 튕겨내듯 영역의 가운데로 쳐서 날리는데 그게 또 정확하다. 자신에게 할당되어있는 지역의 외곽을 따라 쓸고 모으고 보내는 것이 마치 물이 흐르듯, 그리고 빠르게, 게다가 돌가루 하나조차 놓치지 않을 정확성까지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모든 오탁과 더러움, 그리고 티끌을 그 중심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를 연상시키는 세라의 모습에 나도, 그리고 클레어씨도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건 그야말로 청소의 신이나 보여줄 수 있는 경외스러운 모습. “세라... 힘들었나보네..” “응. 버서커 매일 부쉈어. 그리고 세라는 치웠어.” 멍하니 서서 세라가 보여주는 신기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느껴지는 것은 오직 하나. ‘세라가 많이 힘들었구나’ 라는 생각이다. 그런 내 감상에 대해서 리즈가 대답.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다. 세라와 리즈는 단 둘이서 이리야를 보필하며 일본에 왔는데 어째서 버서커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세라만 고생을 했을까. “리즈는?” “도와주려고 했어. 그런데 리즈가 치우면 잔해가 늘어서 세라한테 혼났어.” 역시나. 리즈는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 전쟁터와 같은 아인츠베른 성을 상상하니 쉽게 이해가 된다. 확실히 리즈는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걸지도. 「하아아아!!!!」 세라. 그만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무도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 「세라 승.」 「용캐도 한번은 승리를 거두셨네요. 부질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말씀드릴 말을 미리 해주시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미스 클레어. 그 착각하고 계신 표정을 금방이라도 울상으로 바꿔드릴 테니까 기대하세요.」 이로서 참가한 세 사람의 스코어는 1:1:1. 마지막 하나의 과제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건 승패는 가려지는 상황이 도래한다. 덕분에 마지막 승부를 향해 전의를 다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약 내가 이겨버리게 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마지막 과제에 관한 리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지막 과제는. 호위야.」 「잠깐만요 리제릿트. 제정신인가요?!!?!」 동시에 세라의 경악성. 윽.. 이건. 부리나케 세라를 바라본다. 그녀 또한 한 순간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 잠시 동안 바라본 세라의 표정은 역시나 세라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절망이 드리진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세라, 그렇게 까지 이 승부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세라가 저렇게 무엇인가 집중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안타깝다. 리즈 이건 좀 너무 심했어. 「마지막은 예상했던 승부로군요. 메이드에게 있어 주인 되시는 분의 안위를 지키는 것은 가장 막중한 임무중 하나. 오세요. 미스 세라. 저희 루비아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시녀장으로서 SAS훈련 캠프에서 사격 격투술 과정을 수료한 제 실력을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그에 비해 클레어씨는 묘하게 자신만만한 모습. 하긴 SAS라면 영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특수부대였지 아마. 그런 곳에서 사격술과 격투술을 교육 받았다면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대처도 가능하겠고 호위도 문제없겠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쁘다. 클레어씨가 받은 교육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부터의 위협에 관한 대처이지 나처럼 규격 외의, 인간 외적인 존재에 대한 상대는 절대로 단언컨대 무리다. 「.....미스 클레어.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기권하겠어요.」 「그렇게 나오실... 네? 지금 뭐라고 하신건가요?」 「기권하겠다고 말씀드렸답니다. 제게는 승산이 없으니까요.」 「하.. 하지만 당신은 저에 대해 아는 게 없으실 텐데요? 저 또한 당신에 대해 아는바가 없습니다. 이 승부 누가 이길지는 예상할 수 없지 않나요?」 하..하하.. 클레어씨. 그건 틀린 말. 세라가 이길 수 없다고 한건 클레어씨가 아니라 바로 나. 분명 이리야는 기권을 용납하지 않을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져주자니 내 힘을 알고 있는 세라기 때문에 오히려 씁쓸한 기분만을 남길 터.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있답니다. 미스 클레어. 특히 지금 같은 경우에는 말이죠.」 「??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저와 에밀리아 아가씨의 승부가 됩니다만? 아가씨를 싸우시게 내버려 두어도 된다는 뜻인가요.」 「직접 겨루어 보시면 알거랍니다. 미스 클레어.」 꼭 그렇게 까지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1:1:1인 상황으로 마치면 안되는 걸까. -------------------------- 그동안 사용했던 모든 도구들이 치워져서 생긴 넓은 공터에 세라가 빠지고 나와 클레어씨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다. 둘의 간격은 대충 5미터 남짓. 이 정도 거리라면 내게는 한걸음도 되지 않는다. 「괜찮으신가요. 에밀리아 아가씨.」 「괜찮아요. 클레어씨.」 아직도 걱정되는지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클레어씨가 고맙기는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기우. 이제부터 있을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몇 번은 사죄해야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아가씨라는 호칭. 세라에게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고 거북하니까 좀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다만 아직은 그런 뜻을 표현할 만한 어휘력은 안 되니까 나중에 전하도록 하자. “에밀리아 아가씨.” “세라?” 승부를 앞두고 나를 부르는 세라의 목소리. 세라는 이미 승부를 포기한 채 이리야의 곁에 단정히 서있다. 이리야의 양 옆에 리즈와 세라가 함께 서있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져서 저 곳이야 말로 두 사람의 베스트 포지션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이리야가 없는 두 사람도, 두 사람이 없는 이리야도 상상하기 힘든 그런 사이. “봐주시면 뒷일이 후회스러우실 겁니다.” “.............” 그 한마디에 만약 봐줬다가 발생할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선적으로 분명 아인츠베른의 별장에 납치되고(린의 반대는 금전으로 무마하고) 매일 아침부터 새벽까지 세라의 감독하에 예절이다, 품격이다 해서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정도로 잔소리를 듣고 이리야는 옆에서 그 모습을 즐기는 그런 상상. 순식간에 온몸에 오한이 달린다. 저런 소리를 들은 이상 절대로 대충하거나 봐준다는 마음은 나의 마음속에서 지운다. 그런데 나에게 거부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시작」 리즈의 시작신호와 동시에 클레어씨의 몸이 움직인다. 아직 나에게 공격한다는 것이 불편한 듯 일단 거리를 두고 상황을 살피려 하는 모습이지만 이쪽에서는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한 처지가 아니니까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아무도 다치지 않게 끝내기 위해 단번에 신체능력을 끌어 올려 몸을 움직인다. 왼쪽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여 클레어씨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그대로 앞으로 뛰어 사각으로 들어간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0.5초가 못되고 채 1초가 지나가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뒤를 점한 상태. 갑작스럽게 내 모습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이는 클레어씨를 바라보며 이게 사투라면 검을 날렸겠지만 어디까지나 장난 비슷한 거니까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듯한 모습을 해서 그녀의 등에 가져다 댄다. 「에?!?! 이.. 이건..」 「에.. 그러니까 체크에요. 클레어씨.」 조금은 허무하기도 하겠지만 이게 최선이다. 어차피 소용없는 저항일 것을 모르는 채 최선을 다할 클레어씨를 생각하면 괜히 미안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녀가 실력을 발휘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고 끝을 내는 게 내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좋은 선택. 애시당초 이건 승부라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니까 리즈. 「리아 승.」 리즈의 목소리를 통해 그렇게 부끄럽고도 피곤하고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미소가 지어질 만한 그런 우스운 대결은 끝이 난다. 그런데 이거 왜 시작했던 거더라? 분명 내가 입고 있는 이 메이드옷을 벗기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최종 승리자는 나이니 어떻게 되는 걸까. =============================================== 「졌어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뛰어나신 분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네요.」 「아가씨의 실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완패로군요.」 모든 승부가 끝났을 때 누가 봐도 뛰어난 메이드인 두 사람은 너무나도 큰 상심에 빠져 좌절하고 있다. 아니 그렇지만 나는 어찌 보면 반칙 같은 존재고 두 사람이 그렇게 실망할 만 한건 아니지 않을까. 게다가 이번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던 건 두 사람 모두 훌륭한 메이드로 이리야와 에델펠트양을 보필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 그것으로 자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저기.. 제가 이겼을 때. 어차피 없으니까. 걸린 것도. 두 사람 모두. 상심 마세요.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승부였으니까요. 두 사람의.」 그래. 두 사람의 승부였던 데다 둘 만의 스코어로 치자면 1:1 무승부인 셈이니 서로 그렇게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만약 저런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내가 불편해서 못살 것이 더 걱정이고. 「하.. 하긴 아가씨의 말씀이 옳군요. 미스 클레어. 오늘의 승부 기억해 두겠어요. 특히 당신의 그 홍차를 뛰어넘을 실력을 키운 후 다시 승부하도록 하지요.」 「그.. 그래요 미스 세라. 다음번에는 어떤 것이라도. 특히 청소라거나 하는 부분에서도 승리를 넘볼 수 없게 해드리도록 하지요.」 그렇게 마무리를 짓는 두 사람을 보자니 어딘가 사이좋은 친구사이 혹은 선의의 라이벌과 같은 모습이 연상되기에 묘하게 흐뭇한 기분.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둘을 바라보다 문득 클레어씨에게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런데 클레어씨. 오늘 무슨 일. 찾아오셨던 건가요?」 「에밀리아 아가씨 말씀을 낮추세요. 저는 그저 메이드에 불과하답니다.」 「아.. 아뇨. 그러시면 불편해요. 너무. 그냥 지금까지. 에밀리아양으로 충분해요. 그렇게 부탁드려요. 그보다 아까 제 질문..」 세라와 클레어씨 사이에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없는 다툼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클레어씨가 찾아온다는 일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이 처음. 「후훗,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불러드릴까요. 그리고 찾아온 일을 물으신다면... 사실 별 일은 아니랍니다. 그저 이번 주 들어서 벌써 두 번째 청구서가 도착했기에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클레어씨지만 그 발언 중간에 섞여있는 한 단어가 귀를 자극한다. 분명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청구서라는 불길한 단어가 들어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까. 에델펠트양이 단순히 혼자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제로에 한없이 수렴할 테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청구서가 날아왔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최근 일주일간 전혀 없었는데? 「자.. 잠깐만요. 클레어씨. 처..청구서?!」 「네, 청구서입니다만? 강의실 파손 및 기자재 소비. 그리고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까지. 이 주 들어서 어디.. 각각 5천 파운드, 그리고 3천 파운드로군요.」 확실히 청구서가 맞다. 그것도 도합 8천 파운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청구서를 본 적이 없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차림이라 나가지 못하는 틈을 타서 린이 숨겼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난번 오자마자 있었던 것까지 포함하면 1만 5백 파운드. 경비와 생활비를 제외한 단순 불필요한 낭비로서 새어 나간 게 벌써 1만 5백 파운드?! 비교하기 쉽게 엔화로 바꾸자면 300만 엔. 액수에서 한번, 그리고 그걸 숨겼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지금 린이 억지로 입힌 이 메이드 복장 때문에 발생한 오늘 하루 동안의 피곤했던 일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 「에.. 에밀리아양?!?」 “에밀리아?” “에밀리아 아가씨?” “리아?” 클레어씨를 비롯하여 이리야, 세라, 린에 이르기까지 왜 그렇게 이상하다는 태도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린 덕분에 지금 내 머릿속은 너무나도 명쾌하고 확실한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언니.” “왜...왜?” 우선 모처럼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찾아와준 고마운 이리야를 돌려보내도록 하자. 이리야가 세라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리즈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난리를 피울 이유 자체가 없고 오늘 하루는 내 소망대로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으니 순수하게 밝은 미소를 지어서 전송할까. “독일에서 오자마자 들러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이제 피곤하지 않아? 여행의 피로도 있고.. 그 몸에 관한 것도 있고..” “응? 아니 아직은 괜차...” “응?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돌아가 주지 않으면 곤란하기에 성심성의껏 마음을 가득 담아 이리야를 바라본다. 그래서는 곤란해 이리야. “아니아니아니아니 피곤해! 엄~청 피곤해! 얼마나 피곤하냐면 바람같이 별장으로 돌아가야 할 만큼 피곤해!! 그렇지. 세라?” “무.. 물론입니다. 이리야스필 아가씨. 그러고보니 별장 관리 상태도 궁금하네요. 어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죠. 리제릿트?” “리아 화났어...” 이리야 일행이 짐을 챙기는 것부터 모습을 감추고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0초. 하긴, 처음부터 가져온 짐의 대부분은 여전히 차에 실어둔 채였고 이곳에 널려있는 온갖 도구들은 모두 에델펠트가의 메이드 분들이 가져온 것이니까. 신속하게 떠나는 이리야 일행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 이제는 옆자리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는 클레어씨에게 관심을 돌린다. 「클레어씨..」 「네...네!!」 「오늘 정말로 감사했어요. 노력해주신 거. 저를 위해」 「별로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었답니다. 에밀리아 아가.. 아니 에밀리아 양을 위해서 라면 별일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알려주셔서. 제가 모르던. 그 일. 감사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메이드 분들도.」 이번 소동을 준비하느라 고생하신 메이드 여러분께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 고려할 때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아있을 뿐. 이곳에 남아 불똥을 뒤집어쓰는 건 자유지만 기왕이면 클레어씨와 함께 돌아가 주는 쪽이 나에게도, 그녀들에게도 좋은 선택일게 분명하다. 「도..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자자 여러분, 이제 모두 돌아가서 루비아 아가씨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죠.」 「네..넵! 저는 사실 밀린 세탁이!」「아가씨의 고양이에 밥을 줄때가!!」「아앗, 치사해 그건 내 핑계인데!!」「에밀리아님 무서워..」 그 직후 클레어씨의 일사분란한 지휘 하에 옥상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도구들이 삽시간에 정리되고 모두다 계단을 통해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맨션의 9층, 그리고 10층으로 도망치듯 사라진다. 이거.. 딱히 겁주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왜들 이러는지 모르게겠네. 그들이 사라짐을 끝으로 맨션의 옥상에는 아까까지의 소란스러움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고 그렇게 잠시 동안 혼자 존재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를 몇 분. 나 또한 아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계단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 이틀 연속으로 강의실과 수업에 피해를 끼쳐서 인지 루비아녀석도 자중하고 있는 듯 오늘은 그래도 문제없이 지나갔다. 물론 사소한 다툼과 실력 겨루기는 여전했지만 파손이나 부상자가 없었으니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려나. 하긴 미스터 펠리스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만큼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으니 별로 자중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오케이니까 좋게, 좋게 생각하도록 하자. 그보다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에밀리아 몰래 숨겨둔 지난 한 주간의 청구서. 사실 수업도중에 발생한 수업 과정상의 트러블에 의한 피해는 학원 측에서 부담해야 하는 게 당연한일 아닐까. 어째서 활발한 수업 활동을 장려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수리비며 보상비를 학생에게 청구하다니 본말 전도도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에밀리아.. 이걸 보면 경악하겠지.. 아니 엄청나게 화낼지도 몰라.” 지난 일주일간 그 애를 메이드처럼 입혀두고 곁에 두는 건 정말 즐거웠지만 에밀리아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워 하는 게 역력하게 보였으니까 별일 아닌 일을 가지고 그런 벌칙을 시켰으니 만약 나의 이런 실수를 들키게 되면 그 역풍은 보통의 것이 아니리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려나. 그렇기에 숨기는 거다. 어떻게든 내가 받고 있는 연구비나 이것저것 마술 도구를 팔아서 마련하거나 요청을 받아 조금씩 벌어서 메우거나 하다못해 나중에 에밀리아의 기분이 괜찮아졌을 때 들켜야만 마스터(사실은 사쿠라가 마스터지만 그래도..)의 체면이 살 수 있다. 서번트에게 혼나는 마스터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게 다 에밀리아 때문이야. 이리야스필에게 받은 돈이면 쉽게 지불하고 끝날 건데 말이지.” 사실 내가 그리 돈에 대한 씀씀이가 그리 매끄럽다거나 잘 사용한다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런던에 온지 일주일 만에 모든 돈의 사용을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면 못하게 막아둔 건 너무한 처사 아니야? 물론 그 애는 본질이 시로니까 꼼꼼하고 나보다는 훨씬 계획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뭐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 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으니 더 이상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없도록 노력하는 수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응, 그렇게 잘 해나갈 수 있어 토오사카 린. “그런데 루비아 녀석이 시비를 걸지 않아야 말이지.. 하아.” 나라고 강의실을 부수고 싶어서 부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마술의 여파에 휘말려서 다치는 걸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지출은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라는 저주스러운 이름을 가진 여자 금삐까가 거만하게 승부를 걸어오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고말고. 도전을 받은 이상 그 도전으로부터 회피한다는 건 토오사카 가문의 사전에는 없기에 전력을 다해 상대해주는 것뿐이다. 오늘도 이번에 옥션에 출품된 4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사가지고는 ‘어머 미스 토오사카. 유서 깊은 마술사 가계라면 이정도 다이아몬드에 그렇게 넋을 빼앗기시면 안 된답니다.’라고 말하는 그 얼굴에 간드를 처박아 주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찔렀으니까.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부러운 건 부러운 거야. 물론 이 토오사카 린은 그 부러운 감정이 지나쳐 상대의 것을 탐내거나 나는 안 된다고 좌절하거나 그런 감정을 지닐 만큼 한심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런 다이아몬드라거나 커다란 사파이어라거나.. 보석마술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눈부신 소재들뿐이니... 그래도 괜찮다. 내게는 그 녀석에게 없는 그런 돌멩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존재가 있으니까. 에밀리아가 한사코 밖에는 나가지 않으려 하는 탓에 루비아 앞에 데려다가 자랑하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원래 소중한 것이라면 정말로 숨겨두고 남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 그 모습뿐 만이 아니라 가사 완벽에 영령급 페밀리어이니 만약 그 여자 금삐까 녀석이 알게 되면 얼마나 부러운 표정을 지을지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벌써 도착했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왔기 때문일까. 벌써 맨션의 로비에 도착했다. 오늘은 에밀리아가 메이드 차림으로 있는 마지막 날. 마지막인 만큼 저녁시간 내내 홍차 시중부터 시작해서 마음껏 즐겨야지. 그야말로 시계탑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녹여주는 천사 같은 모습이니까. - 딩동~ 8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여느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닫혀있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대고 열면 메이드 차림의 에밀리아가.. - 오싹 손잡이에 손이 닿는 순간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손가락에서부터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부터 팔로, 그리고 팔에서부터 온몸으로 싸늘한 오한이 달린다. 적인가! 성배전쟁을 통해 웬만한 위험에 대해서는 몸이 먼저 반응할 만큼 감각이 좋아졌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나를 전율시킨다.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여는 순간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너는 파멸하고 만다. 그렇지만 이곳은 나의 터전이자 공방. 그 주인으로서 어떠한 위험이 있다 해도 물러서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항상 소지하고 있는 보석을 오른손에 쥐고 숨을 죽인 채, 기척을 죽인 채 왼손으로 서서히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 끼이...이이..이.. 문소리가 이렇게 끔찍했었나? 숨을 죽이고 있었기에 작은 소리조차도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울리고 내가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을 집안에 있다고 예상되는 적에게 고스란히 알리고 만다. 그래 이렇게 조심스럽게 겁먹은 듯 움직이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이미 들킨 이상 강행 돌파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왼손에 힘을 넣어 단번에 문을 열어젖히고 집 안으로 뛰어 든다. - 쾅! 타탁! 몸을 날려 들어선 집안에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아까까지 감지하고 있던 오한 역시 안정된다. 이래서야 만전의 준비를 하고 난입하듯 뛰어 들어온 것이 너무나도 우습게 되어 버렸다. 너무 예민했던 걸까. “뭐야.. 단순한 착각? 하아.. 피곤하기는 한...” - 끼이~이이~이~익 내 목소리를 집어 삼키듯 집안 전체에 울려 퍼지는 귀곡성. 아니 단순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겠지만 내게는 지금까지 들어온 그 어떤 소리보다도 소름이 끼친다. 그 순간 작은 문틈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공포의 기운은 삽시간에 방에서부터 집안으로, 그리고 집안으로부터 현관으로 퍼져나가며 온몸을 속박한다. 손가락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마치 맹수 앞에 놓여있는 고양이가 된 듯한 무력함이 나를 구속한다. “돌아왔네~ 린?” “에.. 에밀리아??!” 방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전히 귀여운 메이드 차림을 한 에밀리아. 빙긋이 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이상하게 나긋나긋한 목소리까지 모습 자체는 어제나, 오늘 아침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지만 본능이 매섭게 경종을 울려댄다. 모든 공포의 근원은 다름 아닌 저곳에 서있는 미소녀 메이드라고. 그리고 이 집안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도망칠 구멍 따위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희망을 잃어버린 다면 나의 이름이 울 것이기에 전력을 다해 그 기운에 저항한다. 나는 바로 토오사카 린이니까. “으..응. 돌아왔어. 오늘 별일 없... 히이익!!” 틀렸다. 나를 보고 아까보다 미소의 강도가 3.5배쯤 증가하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일말의 희망마저도 빼앗겨 버린다. 몰랐는데 에밀리아 너, 화난 상태에서 미소 짓는 타입이었어? 미인의 미소는 박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지만 이건 박력의 수준을 넘어 섰잖아! “나말이야. 린에게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우리 집 우편함에 있어야 할 게 없어졌지? 아마 두개..정도?” 아버지. 이 불효막심한 딸은 곧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될 것 같아요. ------------------------------------ 폭풍과도 같던 하루가 지나가고 평온한 밤이 도래했다. 모처럼 맛있는 중화요리를 바탕으로 지금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이브닝티를 마시고 있는 중. 세탁도, 청소도, 설거지도 오늘 밤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이게 바로 극락이라는 걸까?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손에 들린 찻잔에 입을 대보니 그새 식어있다. 한.. 1도정도? “흐응~ 홍차가 식었어.” “...........” 정말로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거만하게, 그리고 최대한 우아한 동작으로 옆을 향해 잔을 내민다. 그 잔을 받는 것은 아까 내가 입고 있던 의상과 완전히 동일한 의상을 입고 있는 검은 트윈테일 머리의 미녀. 오늘 하루 종일 몇몇의 메이드를 바라봤지만 모두 서양인이었던 데 비해서 처음 보는 동양인의 메이드 차림이지만 이 모습은 이대로 꽤나 어울린다. 다만 가슴부분이 약간 헐렁해 보이는 건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 입에 담지는 않는 게 좋겠지. 나 치고는 시킨 일이나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지만 이왕 즐기는 거 철저하게 즐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뭐랄까 린의 메이드 차림이라는 거. 앞으로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울 게 분명하니까. “............” “대답은?” “......... 다시 내오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벌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뭐, 자존심 높은 린이 저만큼 굽혀준 거다. 이 이상 그녀의 자존심을 건든다면 자신의 잘못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채로 폭주하고 말테니 자극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그래도 고맙게 여겨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린과 달라서 낮에까지 그 옷을 입고 지내라고 말하지는 않아. 그리고 일주일이나 긴 시간 동안 요구하지도 않고. 린은 마술 수업으로 항상 바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여기 있습니다.” “하루 종일 소란스러웠더니 피곤하네~ 어깨 좀 주물러주겠어~?” “..........큭... 네.”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 뒤로 돌아가 어깨를 안마하기 시작하는 린의 모습을 보며 살짝 안쓰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 그렇지만 이번엔 분명 린이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일 이리야에게 연락해서 놀러오라고 하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주라고. - Maid war End =============================================================== 연재를 한다기에는 상당히 부끄러울 정도로 예전에 연재한 분량이군요. 지금 최신화는 오늘까지 잠수중.. 아마 내일부터 다시 일일연재를 시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조아라에 한편 분량으로 올렸던 것들을 두개 합쳐서 올리는 중입니다. 뭔가 타입문 카페에서도 제대로 활동해 볼까 하거든요. 그래서 소설가게시판을 신청해 보기 위해 기준 편수인 40편을 올리는 수단으로 예전 화들부터 올리고 있는 불량인이지만 너그러이 용서를.. 가므로일(epilier) 덧글 3개 | 조회수 23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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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고 있는 것도 별반 차이가 없는 건데? 그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된 걸까?” 확실히 린이 입고 있는 붉은색의 드레스 또한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디자인은 확연히 다르지만 내 드레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 화려한 디자인의 옷. 강렬한 붉은 색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놀라울 정도로 어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린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길 것 같은 모습이다. 때문에 린이라면 저런 옷을 오히려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 반면 최근 아무리 남자다운 옷은 거의 없고 여성복이 내 옷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런 여성복을 입는 것이 이제는 남성복을 입는 것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워 졌다고는 해도 이런 매니악한 드레스 차림을 하는 것은 여전히 저항감이 크게 작용한다. 뭐랄까, 코스프레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이건. “그야!! 린은.. 여자인데다 예쁘고.. 잘 어울리니까.” “.....에밀리아 소환된 때부터 불만이었는데 슬슬 자신의 미모에 대해서 자각할 때도 되지 않았어? 게다가 딱히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게 더 패배감이 느껴지니까.” “에? 으..으응..” 린의 말은 벌써 몇 번이나 들어온 이야기. 그녀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분명 내 모습이 이리야가 성장한 상태라고는 해도 이리야의 외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기조차 부끄럽지만 아름다워졌으면 아름다워졌지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뭐랄까, 아무리 그래도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다거나 생각하는 건 여전히 부끄럽다. “그리고 과거가 어쨌건 에밀리아도 분명한 여자인걸. 만약 그런 모습을 가지고 어디 가서 ‘나는 남자다’라고 말해봐. 당장에라도 정신병원으로 직행이야. 모처럼 파티에 어울리게 이리야스필이 보내온 옷이니까 기분 좋게 입어.” “하아... 물론 이미 입어버린 데다가 이렇게 가고 있는 와중이니 더 이상 투정부릴 생각 없어.” 그러고보면 모든 일의 발단은 어제 날짜로 맨션에 배달된 택배였다. 그 안에는 너무나 이리야다운 동글동글한 문체로 써있는 파티 초대장과 함께.. 고딕 스타일이라고 하던가? 그런 류의 드레스를 통칭하는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지만 검은색을 베이스로 해서 흰색 천이 곳곳에 자리하고 검은 리본 같은 것으로 장식된 것 일색인 드레스가 한 벌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분명 내가 영령이 되기 이전 잠깐의 쇼크로 기억을 잃었던 하루 동안 린과 사쿠라에 의해 억지로 입혀졌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 그 드레스를 보는 순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린에 의해 모든 탈출 수단을 박탈당하고 만약 참가하지 않는다면 돌아올 이리야의 서운함과 화를 감당해낼 방도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만 것. 덕분에 이렇게 옆에 앉은 린이 얼굴에 가득 장난기 있는 웃음을 띠고 나를 놀리듯 가지고 놀고 있다. 어쩐지 가라앉으려 했던 화가 다시 나는 기분인걸. “그래그래, 잘 어울리는걸. 여자인 내가 부러울 정도로 너무 잘 어울리니까. 그런 불평불만은 여러 사람을 모독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호호호.” “웃음소리 최악..” “호호호, 나는 마녀인걸.” 그게 진실이라는 게 더 무서운 거야 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 잇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보내온 이리야스필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저는 제 서번트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답니다. 미스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는 린의 모습이지만 숙이고 있는 고개 밑에 자리하고 있을 장난 가득한 표정과 웃음을 참기위해 노력하는 입술은 너무나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솔직히 뻔뻔함도 저런 뻔뻔함이 있을까. 때문에 나도 과장된 연극조의 표현을 써가며 퉁명스럽게 맞대응한다. “미스 토오사카께서 제게 이걸 입힌 건 어디까지나 미스 토오사카 개인의 만족을 위한 거 아니었나요? 언제부터 미스 토오사카께서 제 언니이신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과 그렇게 생각이 맞았다고 그러는 건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어머 몰랐어? 이번 드레스는 나와 이리야스필이 같이 고른 거라고?” “!!!” 당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지난번에 메이드차림의 린을 이리야에게 보여주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꽤나 미묘하게 어긋났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던 듯싶다. 오히려 의기투합하여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린의 말을 듣고 이제야 눈치 챈 거지만 최근 린의 귀가가 묘하게 늦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겠지.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 드레스는 두벌이 한 세트. 나머지 한쪽은 이리야스필이 오늘 입고 올 거야. 그 애에게는 빚지는 건 싫지만 나도 여자다보니 두 사람이 예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사실이니까.” 확실히 서비스해주는 셈 쳐. 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는 린에게는 이제 신경을 끄도록 하자. 더 이상 신경을 쓰는 건 오히려 내 정신 건강상 좋지 못 할게 분명하기에 다른 화제, 다른 주제로 생각의 방향을 돌린다.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른 것은 오늘의 파티에 초대된 또 다른 손님의 일. 런던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그때부터 종종 찾아가게 된 찻집의 주인인 사람 좋은 청년. 메이드 옷과 관련된 소동 탓에 일주일간 찾아가 보지 못하다 겨우 찾아가 봤을 때 너무 연락이 없고 찾아오지도 않아서 걱정했다던가.. 아직은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님에도 그런 걱정이라니. 사람 좋은 것도 그만하면 오히려 내 쪽에서 걱정이 된다. 과연 그와 그 친구들은 문제없이 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장의 고민. “그보다 미키야씨는 오늘 잘 찾아오려나 모르겠네..” “아, 그 호인? 아마도 초대한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초대하고 나서 신경 쓰지 않는 건 명예에 큰 흠이니까. 아마도...”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앞좌석 칸막이의 작은 문이 열리고 오귀스트씨의 목소리가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고쿠토 미키야님과 료우기 시키님은 제 동생이 맞이하러 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 오귀스트씨 일본어를 하실 수 있군요!?” “물론이지요. 아인츠베른은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치러지는 성배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가문. 모든 가문의 구성원들-설령 말단 청소부일지라도-은 기본적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있답니다.” 과연 시작의 가문중 하나인 아인츠베른이라고 해야 하나. 대단하구나. 그보다 직접 맞이하러 갔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 - 끼익.. 다시한번 자신이 고급차임을 주장하는 듯 브레이크 소리마저도 낮고 조용하게 들리고 차는 곧 멈춰 선다. 그 말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뜻. 아주 잠깐의 시간 뒤에 앞좌석에서 내린 오귀스트씨가 문을 열어준다. “자, 도착했습니다. 런던의 아인츠베른 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토오사카님.” ================================================== 리무진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생각되는 커다란 게이트를 지나칠 때부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후유키시에 있던 고성이 숲을 정원 삼아 고독하게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면 이곳의 별장은 널따란 부지에 제대로 된 정원과 연못 등 고급스러운 저택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그러고 보면.. 런던에 온지 꽤 됐지만 이곳에 온건 처음이네.” 리무진에서 내려 바라본 별장의 위용은 아인츠베른 성을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아인츠베른 성이 웅장하고 거대함을 전해주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이곳의 별장은 선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고 곳곳에 화려한 장식과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어 무척이나 고급스럽다. “잊고 있었지만 이리야스필도 엄청난 부자였지. 딱히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이 적다거나 그런 생각을 갖은 적은 없는데 요새 주변에 차원이 다른 부자들이 많이 보이네. 칫, 왠지 모르게 열받아.” “린.. 자, 힘을 내. 돈 같은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아?” “그게 나를 금치산자 취급하고 있는 네가 할 말이야?” 양손을 허리에 댄 채 입술을 삐쭉 내밀며 나를 노려보는 린의 모습이 어딘지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린. 그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 때문에 당분간은 지금처럼 금전관리는 내가 하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 돈을 그저 쥐고 있는 것은 너무 비생산적이라 건설적인 투자펀드를 통해서 이곳저곳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해두자. 만약 큰 이득을 보게 되었을 경우 그 사실을 린이 알게 된다면 그건그녀의 낭비벽을 부추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을 테니까. “자 두분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가자 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섬세한 세공이 곁든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선다. 저택의 규모에 어울리게 커다란 현관문은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안쪽에서부터 열린다. “““““어서오십시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리아 어서와.” “리즈!” 오귀스트씨의 인도를 받아 거대한 저택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홀의 화려함이나 여러 메이드들이 공손하게 인사하는 장관이 아니라 반갑게 맞이해주는 리즈의 모습. 응? 리즈와 메이드들의 인사에서 어딘지 빠진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확실히 뭔가가 빠진 인사... 아, 린! “흥, 에밀리아만 보이고 나는 보이지도 않나보네. 좋겠구나? 에밀리아?” “응, 리즈에게는 리아만 보여. 린은 어디 있어?” “리즈?! 린이라면 여기에..” “어디? 없어. 안보여.”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정말로 리즈답지 않은 모습으로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내 옆에 서있는 린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딴청을 피우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리즈가 맞을까?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붉게 물들어 있는 린이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큭.. 제법 장난이 늘었잖아. 리제릿트.” “이리야가 가르쳐줬어. 린이 오면 그렇게 맞이해 주라고.” “그.. 꼬맹이가...으으...” 아까까지만 해도 린과 이리야.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는 나를 함정(?)에 몰아넣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생각보다 서로 사이가 좋아진 것일까 하고 느꼈던 것은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던 듯 하다. 하긴, 하루아침에 친밀해질 사이였다면 이미 후유키시에서 있었던 일년간 충분히 친밀해지고도 남았어야한다. 그래도 성배전쟁 당시하고 비교하자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괜찮은 관계가 되었으니 이만하면 사이가 좋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문득 이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평소 같으면 이리야가 세라의 저지를 뚫고 몸을 날려 올 게 분명했지만 이곳에 있는 건 오직 리즈 한사람 뿐. “언니와 세라는?” “이리야는 꾸미고 세라는 도와. 금방 올 거야.” 하긴, 초대한 당사자로서 준비할게 이것저것 많을 것이라고 예상. 게다가 오늘은 미키야씨 일행들도 올 테니 아마도 그때 장만한 인형의 신체를 사용하겠지. 그보다 아직 그들은 도착하지 않았는지 이곳 홀에는 방문자의 흔적이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나봐?” “응, 리아가 제일 먼저. 곧 온다고 연락왔어.” 그 때 문가에서 바깥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한 메이드가 리즈에게로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무언가를 전달한다. 리즈 일본에 있을 때는 단지 리즈와 세라 두 사람밖에는 이리야를 모시는 메이드가 없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꽤나 메이드 중에 꽤나 높은 사람이었던 듯싶다. 하긴, 가장 측근이고 믿을 수 있기에 성배전쟁을 치르는 일본까지 따라온 거겠지만. “리제릿트님. 미키야 고쿠토님 일행을 모시러 갔던 차량이 돌아왔습니다.” “응. 수고해. 리아, 사람들 왔어.” 리즈의 말에 잠시 열려있는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 내가 타고 온 것과 거의 동일한 리무진이 와서 멈춰서고 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이 두 사람, 그리고 낯선 사람이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내려서 입구 쪽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익숙한 두 사람은 미키야씨와 시키씨. 미키야씨의 경우는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검은색 일색의 단정한 연미복 차림. 최소한 안쪽의 조끼나 셔츠는 하얀색으로 된 것을 입고 오는 게 어떨까 싶지만 이렇게 검은 색인 쪽이 미키야씨 다운 모습. 반면 시키씨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모노 차림. 다만 평소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아무런 무늬가 없는 푸른색의 유카타가 아니라 이번에는 속에 불그스름한 옷도 함께 덧대 입고 있는 하얀색의 기모노다. 단순히 하얀색인 것이 아니라 하얀 물감에 약간의 연지를 풀어낸 것처럼 살짝 분홍색의 느낌이 감도는 하얀색의 옷에 수수하지만 섬세한 꽃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기에 시키씨 나름대로 예를 차려왔다고 생각해도 될 법한 옷차림.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린에게 지지 않을 만큼 윤기 나는 검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에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어서 이쪽에 전해져오는 분위기 또한 굉장히 다부진 박력이 느껴지는 미인. 굉장히 간소하고 마치 수녀복을 연상시킬 것처럼 장식도 최소한으로 들어간 옷차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담백한 미모와 조화되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미키야씨와 나눈 대화에 관한 기억에 따르면 아마도 저 사람이 미키야씨의 여동생. “어서오세요. 미키야씨 시키씨.” “아, 먼저 와있었구나. 야아.. 이런 곳에서 만나니까 색다른 느낌이네. 꽤나 긴장 되는걸. 만약에 에밀리아가 없었다면 꽤나 주눅 들었을 거야. 하하.”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대며 ‘하하하’하고 웃는 미키야씨는 여전히 쾌활한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어딘가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그의 옆구리에 경쾌한 일격을 날리는 것은 시키씨. “윽! 시..시키?!” “미키야. 입이 너무 벌어졌다. 체통을 차리는게 어때. 그나저나 오래간 만이다 에밀리아. 거의 5일만인가?” “헤.. 두 분은 여전하네요. 으음.. 그렇네요. 이틀 전에 갔을 때는 시키씨가 없었으니까요. 감기는 다 나으셨나보네요. 다행이다.” 오래간만이라고 할 것도 없이 딱히 이곳 런던에서 할 일이라고는 린의 뒷바라지 정도밖에 없다보니 시간이 날 때면 므네모쉬네에 찾아가는 일이 잦아진 게 최근이지만 얼마 전에 갔을 때 시키씨는 감기였던지 찻집에 없었다. 문병을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미키야씨가 ‘목숨이 아깝다면 그만두는 게 좋아’라고 하는 터에 가지 못한 게 약간 마음에 걸렸는데 건강해 보이는 것을 보니 걱정은 기우였던 듯. 물론 찻집에 있는 재료를 바탕으로 가벼운 죽을 끓여서 전해주기는 했다. “딱히 심각한 감기는 아니야. 그저 이 녀석이 난리 피운 것 뿐. 찻집에서 만들어 줬다는 죽은.. 뭐, 잘 먹었다.” “윽, 시키? 그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게 누구였다고 생각해?” “흥, 감기정도는 죽이면 끝나. 호들갑떨지 마라 미키야.” 변함없이 아옹다옹 하는 커플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린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두 사람에게 말을 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린과 이 두 사람이 만난 건 오늘이 초면이구나. “처음 뵙겠어요. 미스터 고쿠토. 그리고 미스 료우기. 저는 토오사카 린이라고 합니다. 에밀리아의 보호자 겸 친구죠.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에밀리아가 신세를 끼치고 있네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하는 린이지만 으.. 그건 너무 가식적인 미소가 아닐까. 여성이란 누구나 이런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료우기씨도.. 컷이다. 컷. 료우기씨가 가식적으로라도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대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건 이미 공포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아하, 처음 뵙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토오사카...？ 설마 그.. 붉은 악마?!” 미키야씨의 말을 끊듯 내뱉어진 놀란 목소리는 그때까지 잠자코 한 발짝 물러선 곳에 서있던 그의 여동생으로 추측되는 인물에게서 나온 것. 중요한건 그녀가 놀라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의 내용이다. 붉은 악마. 물론 불려지는 당사자는 싫어하고 있지만 그래도 시계탑의 사람들이 린의 뛰어난 마술 실력을 높이 사서 부르는 별칭 아닌 별칭이다.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평범한(?)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미키야씨와 료우기씨의 지인이 마술과, 그것도 시계탑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동의. 때문에 린도 당황하며 그녀를 경계한다. “으으!! 나를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마세...!!?!?! 아니. 잠깐만요. 당신 누구죠? 어떻게 그 별명을 알고 있는 건가요?!” 아차..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놀란 것이 더 컸던 듯. 얼마나 당황했는지 평소의 린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연속적인 질문의 홍수가 쏟아진다. “역시 그랬군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의도하지 않은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 토오사카. 저는 여기 있는 고쿠토 미키야의 여동생인 고쿠토 아자카. 당신과 같은 시계탑의 학생이랍니다.” 역시나 시계탑의 학생이었구나. 그런데 아자카? 확실히 기억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원소학부에 소속되어 있지요. 아인츠베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오빠가 또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시계탑에서 이름 높은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 못했네요.” “고쿠토.. 아자카.. 아자카.. 에에에?!?! 자 잠깐만요. 그.. 폭염의 마녀!?” “당신이 별명으로 불리기 싫듯 저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네 아마 그건 저를 지칭하는 게 맞을 겁니다.” 언젠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돌아온 린이 자신과 같은 신입생이고 일본인인데 벌써부터 최고위급 마술사가 될 자질을 갖추었다고 높게 평가받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그때까지 성은 몰랐지만 확실히 이름은 아자카라고 들었다. 그리고 별명은 그녀가 지닌 마술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 폭염의 마녀라고 했던가. 그런 그녀가 바로 미키야씨의 여동생? “잠깐만 아자카?! 그런 여기 토오사카 양도 저기 그.. 마술사라는 거니?” 잠깐 이상하다. 여동생의 말에 너무 크게 놀라고 있는 미키야씨. 말하는 어투나 내용,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지켜봐온 내 감각에 비추어 볼 때 미키야씨는 확실히 마술사가 아니다. 그건 시키씨도 마찬가지. 하지만 마술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 여동생이 마술사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듯. 이건 마술의 기본인 은폐에 완전히 반(反)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요 오빠.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전이학부에 있다는 천재 마술사.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꼭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게 여기 계신 미스 토오사카 인거죠.” “기다리세요. 고쿠토 아자카. 미스터 고쿠토는 제가 볼 때 확실히 마술사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태연하게 답하는 아자카씨지만 린은 삽시간에 평정을 잃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확실히 방금의 이야기는 농담치고는 강도가 너무 높다고 생각될 정도. 게다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 이상 당황스러운 게 없다. “당신 제정신인가요? 마술의 기본중의 기본은 바로 그 존재의 은폐에 있다는 것을 당신도 마술사라면 알고 있을 텐데요. 그걸 일반인에게 들켜서 어쩌겠다는 것인 가요!?” “아, 그거라면 문제없답니다. 오빠가 마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오빠가 알고 있다 해서 문제될 일은 단언컨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요?!!!” 서로 맞물리지 않는 언사의 높아짐.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자카씨는 너무나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고 린만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기가 찬 듯 흥분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바로 그때 좌중의 분위기를 차갑게 가라앉게 만드는 목소리가 던져진다. “이래서 마술사란 귀찮아. 손님에 대한 예의가 없잖아. 어이, 초대해 놓고 그렇게 언쟁할거면 돌아간다. 쳇.” “시.. 시키씨..” “시키..” “흥, 시키 당신이 돌아가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아. 마음대로 해 버려.” “호오.. 말했겠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있어주고 싶어지지. 아.자.카.” 이제는 린과 아자카씨에 이어 아자카씨와 시키씨까지 불이 붙어버렸다. 아아, 도저히 이런 분위기는 적응이 안 된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이 얽힐 대로 얽혀버린 분위기를 풀어줄 사람이 필요. 그래 저렇게 입구 쪽에서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기운을 풍기며 새롭게 걸어 들어오는 등장인물이 필요한 순간이다. 어? 저.. 정말? 지금 언짢은 표정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걸음걸이마저 너무나 우아하게 보이는 금발의 아가씨는.. 「어떻게 된 건가요? 도대체가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친히 찾아와 주셨는데 아무도 관심을.. 어머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가요.」 에델펠트 양이 어떻게 여기에?! 아니 그녀의 등장 덕분에 뜨겁게 열기가 오르고 있던 홀의 기온이 조금은 낮아졌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왠지 모르게 앞으로 닥쳐올 폭풍에 한숨을 내쉬어야 할까.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32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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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온 거죠?」 에델펠트양의 등장에 가장 눈에 띠는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시계탑 내부에서 공인된 라이벌이라 불리는 린. 그때까지 아자카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린이 목소리 가득 기분 나쁘다는 기운을 실어 날카롭게 묻는다. 린, 모처럼 화기애애한 자리가 돼야 하는데 조금 릴렉스, 릴렉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사이는 공인 라이벌. 라이벌이라는 건 어느 한쪽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바로 이어질 에델펠트양의 말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우문이시군요. 미스 토오사카. 어째서냐고 묻는 다면 대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답니다. 당연히 초대를 받았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랍니다. 그 정도의 기초적인 통찰력조차 없다니.. 같은 마술사로서 보기에 안쓰럽군요.」 「어머, 그럴리가요. 당신이라면 제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셨을 텐데도 찾아오셨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어본 거랍니다. 질문의 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시다니.. 마술사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상당히 걱정되네요.」 그렇게 에델펠트양의 등장과 동시에 홀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와 분명히 달라진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린과 아자카씨 사이의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린 것이 사실. 다만, 그 하나의 불화가 사라지는 대가로 생겨난 것이 두 배의 폭풍이라면 어디까지나 나아진 것이 전혀 없다. 서로 날카롭게 노려보고 독설을 퍼부어주는 것이 린과 에델펠트양의 폭풍이라면 언제 칼이 휘둘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살의가 흘러넘치고 있는 폭풍은 바로 아자카씨와 시키씨. “참을성도 없고 인내심도 없고 배려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은 당신 따위 오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라지시는 게 어떤가요. 시.키?” “흥, 성장이라곤 없고 그 브라콘은 사라지지도 않지. 못 먹을 것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더 이상 네 재롱에 어울려주는 것도 귀찮다." 뭔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한 남자의 동생과 그 애인의 사이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둘의 신경은 점점 날카롭게 갈아지고 서로를 향해 겨누어 진다. “미키야씨. 저 두 분.. 사이가 나쁘신 건가요?” “응? 부끄럽지만 이상하게도 말이야. 하하..하.. 하아... 예전에는 일방적으로 아자카가 시키를 미워하는 편이었고 오히려 시키는 아자카에게 적의는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시키마저 같이 싸우기 시작.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와 버린 거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고생이시네요.” 나의 짤막한 소감에 ‘그러게’라며 쓴웃음을 짓는 미키야씨지만 그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는 없어보인다. 높아져가는 언쟁 속에 펼쳐지고 있는 아자카씨의 시니컬한 도발과 시키씨의 심드렁한 맞받아침으로 단순히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대화는 뒤이어 귀에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와 처음으로 느낀 시키씨의 불쾌감이 상황의 급변을 예고한다. - 스르릉 “아아, 확실히 녀석에게 기대는 건 분명 네가 먼저였지. 하지만 이제와서 빼앗길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네가 사라져라.”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 거네. 시키. 좋아. 내 마술은 오늘을 위해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시키? 아자카? 자.. 잠깐만!?” 「Idrogeno!」 린에게 들은 설명에 의하면 통칭 폭염의 마녀라고 불리는 아자카씨는 극단적으로 압축된 주문 영창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건 어찌 보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는 것. 마술이란 것은 영창이란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허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영창을 줄일 수만 있다면, 그것도 위력을 감소시키지 않고 가능하다면 그 효용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지금 아자카씨가 외친 것 또한 같은 맥락의 영창일 터 - 화르륵!!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영창이지만 그 효과는 순식간에 발생. 아자카씨의 손가락 끝에서 살짝 작은 빛이 났다고 생각한 순간 시키씨의 주변 공기가 말 그대로 불탔다. 아니, 불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얌전한 표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순식간에 터져버리는 공기. 미키야씨도 나도, 순식간에 이루어진 그 공격에 경악하며 시키씨의 안전을 걱정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우에 불과하고 그녀는 이미 터져버린 공간으로부터 대략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킥.. 저질렀구나 아자카. 좋아, 오라고 네 마술의 흐름 따위 잘 볼 수 있었으니까. 그까짓 잔재주.. 죽여주도록 하지.” 「Idrogeno!」 대화조차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재차 외쳐지는 영창. 여전히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걸로 두 번째 보는 마술. 어떤 원리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손끝에서의 빛을 촉매로 해서 목표 주변의 무언가를 불태우는 것. 그게 아자카씨의 마술이다. 그녀의 손끝이 빛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키씨의 모습은 잔상을 남길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나이프를 허공에 대고 휘두른다. 너무나도 깔끔한 움직임이지만 그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시키씨의 주변은 폭발적으로 연소해 버리.. 는 것이 아니다?! “웃!!! 역시 괴물이네 당신..” “네 마술 같은 건 벌써 예전부터 보아왔다. 게다가 붉게 빛나는 흐름이 손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건 첫 번째 공격에서 파악했으니 그걸 베어서 죽여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지금 시키씨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술의 흐름, 마력의 이동을 눈으로 보고 그 흐름을 끊어버렸다고 이해하는 내 생각이 제대로 된 걸까. 그녀는 대체.. 하지만 그쪽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을 여유 따위는 내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번에 터져 나온 문제는 다른 한쪽의 폭풍. 「좋아요. 이대로 당신과 쓸모없는 언쟁을 계속 할 생각은 없답니다. 미스 토오사카」 「그거 참 우연이네요 미스 에델펠트. 저 또한 같은 생각이니까. 말이란 참 무력한 것이니까요. 당신과 저 사이에서 그런 무력한 건 이미 오래전에 필요 없어졌죠.」 「네, 그렇고말고요. 뭐니뭐니해도 첫 만남부터 필요 없었죠.」 광기는 전염되고 폭력은 확산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노골적인 적대적 기운은 삽시간에 다른 쪽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단순히 말싸움에 그치고 있던 린과 에델펠트양의 싸움 또한 서서히 그 수준이 높아져만 가고 서로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 에델펠트양의 마술각인 또한 팔에 있었구나.. 라는 건 어디까지나 중요한 게 아니니 패스한다. 중요한 것은 린의 왼팔에 있는 마술각인도 에델펠트양의 오른팔에 있는 마술각인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녹색과 푸른색의 빛을 흩뿌리며 마력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너무나 황홀한 모습인 동시에 등줄기가 오싹해질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 「후훗, 선공은 양보하겠어요. 미스 토오사카.」 「어머? 그런 핸디캡, 필요 없답니다. 미스 에델펠트.」 - 투타타타타타탕!! - 펑! 펑! 펑! 린의 손끝에서 검은색의 마탄(간드)이 쏘아지고 뒤질세라 에델펠트양의 손끝에서도 그와 유사하지만 더 파괴적인 기운을 지닌 포탄(간드)이 쏘아진다. 린의 간드가 저주의 농도를 짙게 하여 압축, 높은 강도를 지녀 마치 총알처럼 쏘아지는 기관포라면 에델펠트양의 그것은 한발 한발에 강한 파괴력을 지닌 것이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포탄과 같다. 잠깐만 거기 두 사람 방금 전까지 선공이 어쩌고 말하고 있었지 않나요? 내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외치는 것은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두 사람의 서로를 배제하기 위한 행동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시작된다. 문제는 기관총을 쏘듯 난사하고 있는 린의 조준 정밀도와 세밀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린의 회피 덕인지 아니면 에델펠트양 또한 정밀도가 만만치 않게 떨어지는지기 때문인지 어쨌든 두 사람의 간드는 서로 표적으로 삼은 상대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 쿠콰콰콰콰쾅!! 쾅!!! 드드드드드!! 쿠쾅! 죄 없는 홀 안의 벽과 기둥과 장식과 유리창에 아무런 저항 없이 날아든다. 이제와 다시 떠올리기도 뭐하지만 서로의 간드에는 그야말로 총탄과 화포에 비견될만한 위력이 내재되어 있고 마력덩어리에 닿는 매 순간마다 별장은 원래의 모습을 급속도로 잃어간다. “꺄아악!!” “어서 세라님께 연락을!! 꺄악!!” “비상사태!! 메이데이!!” “ 전 이제 틀렸어요..”“포기하지말아요 리사! 안전지대가 바로 저기에!! 꺄아악!!!” 덧붙여 아인츠베른의 메이드들 역시 패닉 상태. 이 상태로는 최소 파티의 무산이고 최대 별장의 붕괴가 예상된다. 어떻게든 양쪽의 사태를 진정시켜 보기위해 최대한 머리를 써보지만 물리적인 제압을 제외하고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디까지나 검을 투영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격리시키는 것 뿐. 때문에 내가 나서는 순간 별장의 파괴된 정도는 순식간에 증가할 수밖에 없다. 뭐라고 표현해도 결국은 대검을 여기저기 꽂아버리는 행위이니까. 「Anfang!! Das Dracheschuppe.....」 「En Garand!! Coup droite.....」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더 이상 간드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건지 린과 에델펠트양은 서로 자신의 소매에서 빛나는 보석을 꺼내들고 시동어를 외치기 시작. 어떤 마술을 사용할건지는 모르지만 결코 지금까지의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파장이 올 것은 자명하고, 「Azolto!!」 “흥! 린쪽의 싸움은 아직 시동어가 외쳐지는 중이지만 이쪽은 다르다. 여전히 단 한단어로 마술을 발하는 아자카씨고 다만 이번 마술은 시키씨가 살짝 피했기 때문에 그녀의 주먹은 허공을 가르면서 불길이 치솟는다. 그야말로 이쪽 또한 일촉즉발.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자. 어쩔 수 없는 위기상황인거다 에밀리아! 「trace...」 그러나 내 주문은 완성되지 못한다. 그건 모든 소음을 잠재울 만큼 크고 강하게 울려 퍼지는 하나의 외침 때문. “그만하지 못하겠습니까!!!!!!!!!!!!!!!!!” 홀 안 가득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그 수많은 폭음과 굉음을 단숨에 지워버리고 모든 움직임을 그 자리에 멎게 만들만큼의 박력이 있다. 일본어임에도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에델펠트양까지도 멈춰서는 언어를 뛰어넘은 의사의 전달. “도대체가 지금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분들이 맞는 겁니까? 물론 토오사카 당주님 같은 경우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핀란드 최고의 마술가계인 에델펠트의 당주님까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 아니 목소리의 주인은 2층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내려오며 홀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쏘아봐준다. 린 그렇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건 좋지 않다고 봐. 아무래도 세라에게 너는 이미 많이 찍혀있으니까. 게다가, 사실이잖아? “그뿐만이 아닙니다. 충분히 그 올바르신 성품을 이해할 수 있기에 이런 격식 높은 파티에까지 초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고쿠토 미키야님을 비롯하여 그 친우여러분 까지도 이 무슨 만행이란 말입니까. - 척 이윽고 홀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은 그녀는 이곳 아인츠베른의 모든 살림을 관장하고 있는 세라. 그 모습은 가히 네 사람의 다툼(?)을 압도하는 기운을 뿜어내는 이 별장의 지배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이 도대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아인츠베른의 런던 별장입니다. 이번 파티를 여시고 여러분을 초대하신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체면을 생각하셨다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세라 화났다.” “리제릿트! 당신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당신을 믿고 손님분들을 맞이하라고 맡겼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소란을 그냥 내버려뒀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저 소란 속에서 리즈는 뭘 하고 있던 걸까. 세라의 노려봄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리즈지만 전혀 주눅 드는 것도 없이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한다. “할 수 없어. 리즈가 움직이면 손님이 다쳐.” ......인정. 아무래도 리즈니까. 세라 역시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삭이는 모습이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꽤나 인내심을 요구하는 듯. 그렇게 부들부들 떨던 세라는 소동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피신해있던 메이드 일동을 바라보고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내린다. “으으.. 확실히 그 말은 맞지만... 1조, 2조!” ““네, 세라님”“ “당장 모든 손님 분들을 독방으로 연행하세요! 모두 아시겠습니까! 홀의 정리가 끝날 때까지 독방에서 반성하고 기다리세요!” 여.. 연행이야? =============================================== 에델펠트양이 등장한 후 고작 5분이 지났을까 말까하는 찰나의 시간동안,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사투가 아닌 레벨의 다툼(?)만으로 별장의 홀이 얼추 절반가량 파손된 한순간의 소동. 그 결과 전원 세라의 명령에 따른 메이드 제군에 의해 별장 안쪽에 마련된 손님용 객실에 따로따로 격리 수용되는 처지가 되었지만 별다른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소동에 말려든 미키야씨는 불만이 있을 법도 했지만(나의 경우는 꽤나 익숙해졌으니까.) “이거 참 난처하네.. 하하” 라고 웃으며 메이드에 이끌려 얌전히 따라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고쿠토 미키야라는 사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랄까.. 자신을 데리고 가는 메이드에게 ‘이거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고 미소를 지어준 탓에 메이드가 얼굴을 붉히고 시키씨가 다시금 나이프를 꺼내들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그렇게 객실에 감금 아닌 감금된 지 대충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 똑똑 “열려있어요.”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스르륵 열린 문 밖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리즈의 모습이 있다. 문득 떠오른 의문이 하나. 그녀와 알고 지낸지 벌써 1년하고도 반이 지나가는 시점이지만 리즈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날은 오기나 할까 하는 것. 평소에는 이리야나 세라에 의해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이 다반사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던 모자를 쓰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꽤나 아름다웠기에 그런 리즈가 미소를 띤 모습 또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지 않다. 분명.. “리아 이상한 얼굴.” “에? 저..정말?” “응, 눈이 웃고 있어.”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풀어졌던 건지 리즈가 의아하다는 태도로 물어온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그.. 그렇게 이상해?” “웃는 것도 같고 꿈꾸는 것도 같아. 그래도 리아는 어울리니까 괜찮아” 다시 말하자면 바보 같은 얼굴이었다는 말을 리즈식으로 표현한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튼 지금은 내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어째서 리즈가 찾아왔는가를 생각해야할 때다. 이렇게 그녀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파티준비가 끝이 나서 사람들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라고 예상한다. “파티가 준비 됐어. 가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뭔가 대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나만 받고 있는 걸까? 그렇게 리즈의 인도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별장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아까까지 네 사람의 소용돌이로 인해 상처 입은 홀에게 애도의 감정을 표하며 그 짧은 시간 안에 최소한 잔해는 모두 치워놓은 세라를 위시한 메이드 일동에게도 경의를 바친다. 그렇게 정문을 나서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도 꽤나 지난 후라 날은 이미 어둑어둑 해져 낮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별장의 정원. 그 정원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분수대 옆에는 은은한 조명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청결한 천으로 덮여진 테이블이 길게 늘어놓아져 있고 메이드들이나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나르는 중이다. “야외.. 파티였어?” “그렇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결코 의도된 바는 아니지만요.” 질문에 대답하는 건 한쪽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며 파티준비에 열중이었던 세라.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나에게 다가오며 의문을 풀어준다. “원래는 별장 안의 홀과 연결되어 있는 만찬회장에서 열 예정이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는 하얀 미간을 찌푸린 채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에 손을 대고 입가를 씰룩거리는 세라의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간다. 게다가 방금 전에 홀의 내부를 지나오면서 피해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온 터라 그녀의 고충도 십분 이해. 내가 일으킨 소란도, 사실상 소동에 관여하지도 않았지만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라에게 미안해진다. “아까의 소란으로 도저히 그곳에서 열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세라 미안..” “아니요. 아가씨께서 죄송해 하실 일이 아니랍니다. 모든 일의 주범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죠. 으으..” 이제는 이를 ‘으득’하고 깨무는 세라. 역시나 꽤 고생이었던 게 맞는 듯싶다. 문득 주위의 준비상태를 보고 내가 도와줄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웬만한 일이라면 자신이 있고 특히나 힘쓰는 일은 이런 몸이다 보니 거뜬하다. “내가 뭔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식기를 나른다거나 요리를 나르는 일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평소라면 꽤나 감사한 말씀이시지만 그 마음만으로 감사하답니다. 지금 아가씨께서는 파티에 참가하신 손님으로 오신 몸. 모든 준비는 저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몫이니까 아가씨께서는 그저 즐기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럼 저는 계속 준비를 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리제릿트 당신도 따라오세요. 당신의 그 쓸데없이 세기만 한 힘이 필요한 곳이 있으니까요.” 예상은 했지만 완곡한 거절. “응. 그럼 리아 놀고 있어.” “으..응 수고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그렇게 세라와 리즈는 계속된 파티의 준비를 위해 최전선으로 사라진다. 엉겁결에 혼자가 되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곧바로 누군가가 내 옆자리를 채운다. 다른 메이드에 의해 인도되어 이곳 정원의 파티장으로 나온 것은 그 치열한 소동 속에서도 어디 한곳도 때가 묻지 않은 붉은 색의 드레스가 여전히 잘 어울리는 나의 동거인이자 자칭 마스터. 강제 연행된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있을 줄 알았지만 지금 보이는 얼굴표정을 볼 때 그런 기분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잘 인지하고 있기에 린 나름대로는 얌전하게 하려 노력하는 듯. 그렇게 스스로의 잘못은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 그녀의 훌륭한 장점 중 하나이다. “헤에.. 야외 파티? 뭐야, 꽤나 본격적이네?” 그게 누구누구들 때문에 갑자기 바뀐 거란 사실을 알면 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능청을 떨고 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는 없다. “린, 괜찮아?” “응?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만.. 저기 오는 누군가만 아니면 더 좋을 것 같아.” 어깨너머로 눈짓하며 가리키는 곳에는 린의 숙적이자 라이벌, 그리고 홀 파괴의 양대 주범이라 할 수 있는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양이 린과 마찬가지로 메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별장의 현관에서는 미키야씨와 시키씨, 그리고 아자카씨.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곳에 시선을 전혀 두지 않고 이쪽으로 일직선으로 걸어온 에델펠트양이 처음 던진 말은 역시나 가시가 돋은 분쟁의 씨앗. 「남의 험담을 하실 거라면 최소한 영어라도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미스 토오사카.」 「험담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머, 무슨 말이든 자신에 대한 험담으로 여겨지실 정도라니 꽤나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나 보군요. 미스 에델펠트.」 「알아듣지 못해도 당신의 의도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답니다. 너무 감정이 쉽게 드러나시는 것 아닌가요?」 「흥!」「흥!」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린도, 에델펠트양도 아까까지의 자신들이 저지른 폭거를 인지하고 있는지 자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대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고개를 휙 하고 돌리는 두 사람은 정말이지 모두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저만큼 잘 맞는 사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에델펠트양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얼마 없지만 약간 접해본 바에 의하면 그야말로 린의 서양인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아 보이니까. 어쨌건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옆에서 벗어나 언제나의 아침처럼 서로 공감을 느끼는 눈빛을 교환하는 나와 클레어씨. 「고생이시네요. 클레어씨.」 「후훗, 에밀리아양이 겪는 고초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저희 아가씨께서도 토오사카 아가씨와의 싸움을 즐기는..」 「클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지 않으면 당장 돌려보내도록 하겠어요.」 「죄..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럼 에밀리아양 이따 봐요.」 그렇게 에델펠트양과 클레어씨가 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고 이번에는 시간차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다음차례로 미키야씨 일행 세 사람이 다가온다. 앞에서부터 미키야씨, 시키씨 그리고 아자카씨. 아까는 갑자기 린과 신경전이 시작되어서 경황이 없었지만 미키야씨의 동생이 그 촉망받는 우수한 마술사일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이 다시 아까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는 것. “...........” “...........” 역시나 서로를 바라보고는 침묵. “아하하..하.. 미키야씨 오늘 연미복 멋지네요.” “그..그래? 하하.. 시키가 검은색만 입는 건 음침하다고 비난했는데 괜찮아 보인다니 다행이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윽.. 그럴줄은 몰랐는걸.” 이 불편한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기 위해 미키야씨와 내가 분발해 보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사이는 냉기가 감돈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기를 수초. “.............아까는 제가 실례를 한 것 같네요.” “아뇨. 저도 오빠에 관한 일이라 조금 날카로웠어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린도 아자카씨도 언제까지 이런 불편한 공기 속에 있는 것은 내키지 않았는지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서로 사과하며 분위기를 풀어 본다. 그래그래 평화롭다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어떻게든 풀어지는 두 사람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기에 사람들로부터 한걸음 물러선 곳에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서있는 시키씨에게 말을 걸어본다. “시키씨 그렇게 뚱한 표정은 안 어울린다고요? 모처럼의 기모노 차림이 대단히 아름다우신데 그렇게 표정이 굳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후우. 알았다. 노력은 해보지.”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표정을 풀어보려 노력하는 시키씨의 모습이 언젠가 미키야씨가 말했던 토끼를 상상하게 만들기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는 것은 시키씨에게 비밀이다. 만약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정말 일격에 내 목숨을 취해가 버릴 것 같은 토끼니까. 바로 그때 아까 모든 소란을 잠재웠던 세라의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시킨다. “모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모든 손님 여러분을 초대하신 천년의 명가 아인츠베른의 영애이신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께서 나오십니다.” 세라의 목소리에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 시선을 향한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얀 눈으로 만든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너무나 눈부시게 새하얀 이리야. 조명을 받아 밤의 어둠을 물리치는 듯 반짝이는 백은의 머릿결은 어깨에 흘러넘치고 머리색과 맞춘 듯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는 디자인만 내가 입은 것과 같을 뿐이고 마치 다른 옷이라 해도 믿을 만큼 조화롭다. 그야말로 밤의 어둠 속에 떠오른 한줄기 빛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겨울의 소녀. 그렇게 사뿐사뿐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너무나 가벼운 걸음걸이로 모두가 모여 있는 곳까지 걸어온 이리야는 언젠가 보았던 기억 속에 있는 그런 우아한 몸놀림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기품 있게 인사한다. 다만 다른 점은 그때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 다시 말해 인형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다. 이리야가 인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린을 제외한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는 이리야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만약 이리야의 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제 초대에 이렇게 모여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어요. 아인츠베른의 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게다가 그 모습에 어울리게 어린아이 같은 말투가 아니라 에델펠트양의 그것과 같이 예를 갖춘 표현을 사용하는 이리야이지만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저런 화법 또한 이리야에게 자연스럽게 배어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왠지 모르게 오늘의 파티를 위해서 저 인형을 산 게 아닌가 싶은 의심까지 드는걸. 아니 의심의 수준을 넘어서 확신할 수 있다. 이리야는 그런 아이니까. 어쨌든 이리야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내 어깨를 잡는 두 손이 느껴진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곳에 있는 것은 너무나 환하게, 그러면서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린.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이리야스필. 그때 이야기했던 대로 준비해왔는데 어떤가요?” “완벽해요. 수고 많으셨답니다. 린.” ‘나이스’ 이런 표정을 지으며 서로 한쪽 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거 다 보인다. 너희 둘, 사이가 좋으려면 좋고 나쁘려면 나쁘라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편이 대응하기 쉬우니까.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12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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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라~ 그럼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이건 미키야씨 일행과 이리야의 인사. 그런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준비하고 있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처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아인츠베른 별장에서의 야외파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 테이블 위에 가득 펼쳐져 있는 산해진미와 밤의 짙은 어둠이 내려선 정원을 부드럽게 감싸듯 옅게 깔리는 음악. 그런 아름다운 공간에 이곳 이국의 수도에서 만나고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과 아득히 먼 기억 속에서부터 함께 해온 사람들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기분에 감싸여 최대한 파티를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즐거웠던 것이 사실이고 가급적 이런 분위기를 오래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아, 지쳤어~” 정말 지쳤다. 이리야의 예의바르고 우아한 모습은 그야말로 첫 등장 때를 제외하면 아까의 모습이 마치 환상이라도 되는 양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내 한쪽 팔을 자신의 팔에 낀 채로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린 또한 합세하여 반대쪽 팔을 붙잡으니 이것이야말로 고문 아닌 고문.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건 기본이고 나를 사이에 둔 채 서로 노려보기까지 하니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너희들 사이가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달라니까. 혹시나 나를 도와줄만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미키야씨는 시키씨와 아자카씨. 두 사람 사이에서 나 못지않은 핀치에 처해 있었기에 그럴 여유는 없어보였다. 그렇게 린과 이리야. 어느 쪽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고 끌려 다닌 지 한 시간 남짓. 한 순간 이리야와 린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틈을 노려 간신히 몸을 빼 파티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분수 근처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사라졌다는 걸 금방 눈치 채겠지만 그래도 이런 곳까지 찾아오지는 않겠지? 물론 언제까지 빠져나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으니까 이리야도 린도 이해해 주겠지. 「어머, 당신은..」 그런 마음을 품기가 무섭게 누군가에게 발각되고 만다. 이런, 다른 방문자가 있었던 건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부족하지 않은 린의 숙적이자 라이벌인 에델펠트양이다. 항상 함께 있던 클레어씨는 어디에 두고 온 건지 혼자인 모습. 그녀는 나를 향해 눈빛을 피하는 일 없이 똑바로 다가와 눈앞에 선다. 하지만 무슨 말을 건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를 수 초간. 어디선가 불어온 시원한 봄바람이 나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고 덕분에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며 먼저 말을 꺼낸 건 에델펠트양. 「여러번 만났지만 제대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로군요.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에요.」 「아.. 네. 저는 에밀리아.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는 아니겠죠. 미스 에델펠트.」 미스 에델펠트라. 사실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여러 면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일본식으로 끝에 경어를 붙여서 에델펠트양이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의 것이기는 하지만 영어의 표현상 우선 상대를 무조건적인 타인으로 인지한다는 느낌이 드는데다가 은근히 닭살이 돋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고 싶은 표현. 하지만 린도 에델펠트양도 서로를 미스 토오사카, 미스 에델펠트. 이렇게 부르고 있으니 나도 따라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미스 에델펠트라고 하는 건 당신과 함께인 미스 토오사카 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저 루비아라고 불러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런데 의외로 에델펠트양은 그런 걸 원하지는 않는지 묘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요구한다. 나야 그쪽이 편하고 친근하기에 좋아하지만, 어째서?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저도 당신을 에밀리아라고 이름으로 부르고 싶군요. 괜찮을까요?」 잠시 동안이지만 지금껏 당당함을 유지해온 에델펠트양의 눈빛에 살짝 흔들림이 보인다. 혹시나 거절당하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그런 눈빛을 받은 상태에서 거절의 의미를 표현할 만큼의 냉정함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냉정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걸까? 세계의 부름에 따라 어떠한 도덕적인 판단도 지니지 못한 채 단순한 살육만을 반복해온 내가? 「미스 아인츠베른?」 나를 부르는 에델펠트양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과거가 어떻다는 건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게 아니라 지금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 따위는 없다. 「그런 일. 거절할 까닭. 없죠. 물론이에요. 잘 부탁해요. 루비아」 「고맙군요. 그럼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한답니다. 에밀리아.」 자신을 편하게 불러달라는 가벼운 말까지도 허리에 손을 대고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하는 루비아씨, 아니 루비아의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자세라는 건 단지 나만의 착각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뭐랄까. 린, 루비아 너희는 정말이지 완전히 판박이구나. 「아, 혹시나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는 건 아니랍니다.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클레어나 우리 메이드들로부터 많이 들은데다가.. 그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죠. 사실.. 오늘 이 파티에 초대를 거절하지 않은 건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루비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정리하는 모습이고 곧 의지를 굳혔는지 눈에 힘이 깃든다. 마치 나의 심부를 꿰뚫어보는 듯 곧고 강한 의지의 눈빛.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에밀리아. 당신.. 정체가 뭔가요.」 「에?」 아차,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의 정체라니. 그런 나의 반응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로 말을 계속 이어가는 루비아. 「처음 몇 번 마주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만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농밀한 마력은 마술사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렇지만 궁금한 건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법. 때문에 언젠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기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 「헌데, 지난주에 클레어가 와서 전해주더군요. 당신의 성이 아인츠베른이라는 걸. 게다가 있을 수 없는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녀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한순간 시야에서 벗어나 클레어의 뒤에 서있었다고 하죠. 저는 이래봬도 클레어를 꽤나 신임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녀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클레어씨 신임 받고 있었구나. 하긴 클레어씨는 훌륭한 메이드이니까. 지난번의 그 우스꽝스러운 대결이 아니더라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볼 때 메이드들에 대한 통솔력 및 루비아를 보좌하는 것도 수준급. 거기에 차분하고 어른스럽기까지 하니 루비아를 곁에서 모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아니 그보다, 클레어씨 그런 이야기까지 전해준 건가요? 「성배전쟁.」 「!!!」 루비아의 한마디에 모든 다른 생각이 날아간다. 어떻게 그녀가 성배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녀가 성배전쟁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더해지게 되면 이미 그녀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느슨했던 기분이 단숨에 경직되며 경계의 필요성을 느낀다. 루비아가 어떤 목적으로 정체를 궁금해 하고 나에게 접근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금은 절대 방심할 수 없다. 「어떻게 알고 있죠? 그걸.」 「역시나 놀라는군요. 어떻게 성배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요? 그건 당연합니다. 60년 전에 있었던 제 3차 성배전쟁이라 이름 붙여진 그 의식에 에델펠트도 참여했으니까요. 의외로군요. 모르셨나요?」 놀라움을 억누르고 억지로 담담한 목소리를 연기하여 반문하지만 역시나 놀람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나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에델펠트가 성배전쟁에 참여했었다는 이야기. 물론 지금까지 치러진 성배전쟁은 총 5회. 그중 내가 모르는 마술사가 있을 것은 당연하지만 이런 런던에서 그 당사자의 가문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쨌거나 성배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최소한 서번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몰랐어요.」 「하긴, 우리의 입장에서 그건 그리 유쾌한 기억이 아니에요. 덕분에 천칭의 에델펠트라는 이름이 부끄럽게도 제 대에 이르러서는 당주가 한 사람으로 줄어들었으니까. 더러운 술책에 휘말렸다고는 하나 패배는 패배.」 - 뿌득. 「으으..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실력으로 진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루비아는 눈을 감고는 그 일이 가문에 대단한 치욕인 듯,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다. 지금까지는 꽤나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루비아가 저런 모습을 할 정도이니 그녀가 말하는 더러운 술책이 무엇이었는지 괜히 궁금해지지만 만약 묻는다면 지금 쥐고 있는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에 차마 물어보지는 못한다.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상태로 조금 시간이 흐르자 여유를 취했는지 다시 평정을 찾고 원래대로의 루비아로 돌아오고 다시 불편한 시선이 주어진다. 화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나한테는 어느 쪽이든 괴롭다는 사실이 처량하다. 「인간을 웃도는 마력, 그리고 신체능력. 거기에 성배전쟁의 참가자인 아인츠베른과 토오사카의 관계자. 이쯤 되면 제가 당신을 무엇이라 짐작하고 이는지 아시겠지요. 에밀리아.」 그녀의 말대로 이쯤되면 알아듣지 못하는 쪽이 바보다. 하지만 있을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을 손에 쥐고 평정을 가장한 채 루비아를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일. 내가 서번트라는 사실을 밝혀서 좋을 게 없으니까. 반쪽짜리였지만 나도 마술사였다. 말이 좋아서 영령이고 서번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종의 패밀리어. 그것도 단순한 패밀리어와 달리 인간을 초월한 힘과 의지를 지니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말 그대로 최고위의 신비(Supreme Phantasm)와 다를 바가 없는 서번트는 마술사들에게 있어 최고의 연구소재. 그런 서번트에 대해 지금껏 마술협회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성배전쟁이라 불리는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존재할 뿐인 허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지만 만약 성배전쟁이 끝난 지 일년이 넘는 지금까지 실체를 유지하고 현계하고 있는 서번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문제는 그 파장이 나를 뛰어넘어 알트리아와 사쿠라에게까지 미칠 것은 자명한 것이니까. 그런 내 고민은 상관없는지 단숨에 핵심을 꿰뚫고 들어오는 루비아. 「당신은 서번트, 아니 영령이라 불리는 존재가 아닌가요.」 ━━━━━━━━━━━━ 한순간의 침묵. 사고가 깨끗하게 지워지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한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에 대한 확인에 불과한 발언이었지만 그걸 어디까지나 예상하고 있던 것과 직접 들은 것에서 오는 충격은 확연히 다른 법. 겨우 사고를 되찾아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최선을 다해본다. 「네? 에에에!?! 제..제가요? 설마요~ 아하..하하하 이런 어설픈 영령. 어디에 있을까요.」 말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이렇게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반응이 아닌가. 게다가 스스로를 어설프다고 변명하다니! 한심해! 에밀리아. 그런 내 마음과는 별도로 나의 반응을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던 루비아는.. 「푸훗... 아 미안해요. 비웃는 건 아니었답니다. 과연.. 그렇게 나오시는 거군요. 좋아요. 그리 쉽게 인정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입장에서도 별로 밝혀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뒷짐을 쥐고는 나에게 등을 돌린다. 그 상태로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나에게서 멀어지듯 발을 움직이고, 세 걸음쯤 걸어가서는 ‘척’하고 멈춰 선다. 「게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에밀리아.」 그 말과 함께 빙글 하고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너무나 환하고 밝은 웃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아까까지의 경계심과 걱정은 눈이 녹듯 사라져버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는 토오사카 린이라는 존재를 제 적수. 혹은.. 그래요. 라이벌이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전력으로 쓰러뜨리려고 해도 그걸 받아낼 수 있었던. 그런 상대는 제 생애에 단 한사람도 없었으니까.」 ‘으으..오히려 역습까지 노리는 괘씸한 상대지만요’ 라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루비아. 「그런 그녀의 주변인을 약점으로 쥔다거나 연구대상으로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요. 게다가.. 짧은 만남, 짧은 대화였지만 이해할 수 없게도 에밀리아. 당신에게 호의가 있는걸요. 아마 주위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덕분에 저도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영령이면서도 영령답지 않은 그런 모습 때문일까요? 오늘일은 어디까지나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뿐이에요. 괜히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렇다고 저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죠?」 불안한 듯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까 자신을 루비아라고 불러 달라 말했던 그때의 표정을 하고 있다. 린도 그렇고 루비아도 그렇고 이런 표정 이런 말, 그리고 이런 모습은 솔직히 반칙이다. 어떤 나쁜 말을 들어도, 어떤 불편한 일이 있어도 이런 모습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잖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불안을 해결해주기 위해 미소를 지어주며 내 뜻을 전한다. 「물론이에요. 우리는 이미. 서로 부르기로. 이름을. 사이잖아요?」 「...........」 내가 뭘 잘못 말한걸까? 갑자기 커진 눈동자로 이상한 걸 봤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루비아. 물론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고 곧 평정심을 되찾는다. 「무.. 물론이죠. 자 그럼 언제까지 파티에서 나와 있을 수도 없으니 돌아가죠. 에밀리아.」 분수대 앞에서의 대화는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래도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라는 여성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기에 가치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파티장으로 돌아가는 길.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아까부터 같이 걸어가고 있는 루비아뿐이다. “이상하네..” 「왜 그러나요. 에밀리아?」 「불렀어요? 저?」 「아니요. 전혀..」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내 귀에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분명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뒤통수가 가려운 것이 어딘지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무언가 잊고 있는 느낌. 그런 기분은 분수대로부터 파티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되고 도착하고 나서야 정체 모를 예감의 실체를 알아차린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우우!! 이 언니를 두고 사라질 줄은 정말 몰랐어!!” 이쪽에 마치 간드라도 쏴댈 것 같은 기세로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척! 하고 가리키고 있는 붉은 악마와 양 팔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고는 연신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불어넣고 계신 하얀 악마께서 내 목에 들이댈 송곳니를 갈고 계셨다. ============================================ “저기 잠깐 밤바람을 쐬러..” “기각. 변명으로써 일말의 가치도 없어.” 하지만 사실이라고 린? 분명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 앞에서 ‘둘 다 너무 나를 귀찮게 해서 도망쳤다’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분명 지금의 몇 배는 되게 화를 낼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피곤해서 잠시 쉬러 다녀온 건 사실이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 “에.밀.리.아?!” “윽.. 정말인데?” 이만저만 벼르고 있던 게 아닌 양 쉽게 수긍하고 넘어가주지를 않는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이 두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내 어깨를 짚듯이 뒤로 당기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다. 바로 분수대부터 이곳까지 함께 걸어온 루비아. 잠깐만요. 루비아 지금 앞으로 나서는 건... 「시끄럽군요. 미스 토오사카. 체통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가지고 계셨으면 하네요.」 그렇게 린에게 핀잔을 주지만 그런 것쯤은 린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게 분명하다.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루비아의 존재에 대해 더 상황이 악화되지 않으면 다행이고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분란이 생기지 않으면 금상첨화. 「시끄러워요! 미스 에델펠....트? 뭐..뭐야. 왜 당신이 에밀리아와 함께 돌아오고 있는 거죠?」 「제 사정입니다만? 뭔가요. 제가 에밀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미스 토오사카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에...에밀리아?!? 어..언제부터 알았다고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거죠?!!」 「당연히 본인의 허락을 받았으니까 부르는 거지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다니 당신, 과연 제가 알고 있는 미스 토오사카가 맞는지 의심스럽네요.」 역시나 줄기차기 다시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린은 그렇다 쳐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정할 만한 상대이고 라이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던 루비아조차 이렇게 다투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사이좋은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리고 루비아. 가만히 놔둬도 시끄러워질 일에 그렇게 불에 기름을 붓는 행위를 해버리면 가운데 있는 내 입장이 난처해진다고요. 벌써부터 이쪽을 노려보며 마치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나중에 천천히 들어주도록 하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린의 눈빛이 안보이나요? - 쭉쭉 적과 청. 흑과 금의 두 사람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그리고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뭔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감촉을 받는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가고 그 정체를 발견. “뭐야~ 어딘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했더니! 겨우 돌아와서는 린밖에 안 보이는 거지! 이 언니 화났어!” 잠깐 잊고 있었다. 이곳에는 붉은 악마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정말 화났으니까 책임지라는 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하얀 악마께서도 강림해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에밀리아. 지금 이 상황을 최대한 무사히, 그리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자. 현 상황에서 최고의 위협요소는 눈앞에 있는 이리야. 잠재적 위협요소는 린과 루비아의 싸움. 그렇다면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은 이리야를 달래는 일이다. 아.. 이건 당연한 거네. “아니야 언니. 설마 내가 언니를 잊었으려고.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데.” “우으.. 거짓말.”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얼굴을 내 바로 앞으로 들이밀고 하늘 높이 들고 있던 두 팔을 이제는 아래로 쭉 뻗은 채 여전히 볼의 바람을 빼려하지 않는 이리야지만 그녀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기에 사실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대하면 언제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이리야니까. “언제나 진심이야. - ♩♪♩♩~ “정말?” “응, 정말.” “우웅... 그럼 에헤~ 증거를 보여줘~” “즈..증거?” 그 때까지 파티 장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그치고 새로운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라고 할 수 있을 타이밍으로 이리야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정원에 넓게 펼쳐진 테이블으로 둘러싸인 중앙의 빈 공간. 이곳으로 이끈 이유는 도대체.. 어째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문득 내 손을 잡고 있는 이리야와 시선이 교차한다. 그 시선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약간의 장난기. - ♬♪~ ♬~ ♩♪♪~ 음악이 멈춰있던 시간은 정말 잠깐에 불과했고 다시 파티장에는 발랄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건 왈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반대쪽 손에도 이리야의 손이 와서는 나의 팔을 끌어 당겨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댄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지만 딱히 그녀를 떼어낼 생각은 할 수 없다. “어... 어어어언니?!!? 무.. 무슨 짓이야!?!” “무슨 짓? 왈츠야~ 에헤~, 에밀리아와 춤출 거야~” 그런 짓을 했다가는 기껏 기분이 풀려가는 이리야를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마치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장소에 주위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이리야는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부끄럽다고. 게다가 이제껏 춤이라고는 배운 적도, 춰본 적도 없으니까 제대로 춤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춤 같은 거는 전혀 할 줄 모르고.. 자.. 잠깐만~!.” “괜찮아~ 춤 출줄 몰라도. 그냥 이렇게~” 내 비명소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춤으로 계속 끌고 나가는 이리야. 그저 나와 손을 맞잡고 몸을 가까이 한 채로 리듬에 맞추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움직임을 이끄는 이리야이기에 춤에 관해서는 무지한 나라도 간단히 따라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나, 줄곧 기대해 왔는걸~ 에밀리아는 린과 함께 살고 있지만~ 이런 기회까지 린에게 빼앗길 수 없어.” ‘린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걸~’ 이라며 귀엽게 혀를 쏙 하고 내미는 이리야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자 역시나 그녀의 드레스만큼이나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린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게 보인다. 이거, 이렇게 이리야를 달래는 건 어떻게든 되겠지만 끝나고 나면 다가올 더 큰 재앙이 생생하게 느껴지는걸. 그렇게 어설프게 이리야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다 문득 내가 추고 있는 포지션이 남자 쪽의 위치라는 것을 깨닫고 이리야에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건 이렇게 소환되고 나서 그녀를 언니라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느껴왔던 의문점. “언니, 혹시 내가 아니라 에미야인 쪽이 좋았을까? 그리고, 내가 에미야였기 때문에..” 거기까지 말을 했지만 ‘이렇게 나를 아껴주는 거야?’ 라고 뒤이어 말하지는 못한다. 그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 이리야의 눈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의미를 이해해 버렸으니까. “쉿, 으응~으응~ 에밀리아는 시로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밀리아는 에밀리아. 시로는 시로. 분명 처음에는 에밀리아가 시로이기 때문에 갖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달라.” 리듬은 그대로지만 음악의 분위기가 살짝 변하면서 그에 맞추어 움직임이 좀 더 빠르게, 그리고 경쾌하게 변화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이리야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살짝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마치 옛날이야기라도 해주는 듯한 그런 어조로 차분히, 그리고 부드럽게 나를 보듬어 준다. “시로는 내 동생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만이 알고 있는 반쪽짜리 남매. 하지만 에밀리아는 나를 언니로 받아준 데다~ 내 자신이나 다름없는걸. 일단은 내 몸이잖아? 그러니까, 넌 내 가장 소중한 존재야.” “언니..” 나도 모르게 감격한 걸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물결치고.. 아니 아마도 그건 알 수 없는 게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런 감정은 분명 감동이라고 불리는 것. “그래서 나는 에밀리아가 좋은 거야~ 에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는 이리야. 그 눈에 대해 나 또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어설픈 왈츠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 - 료우기 시키 - - ♬♪~ ♬~ ♩♪♪~ 새롭게 시작하는 음악. 파티가 무르익어 가면서 이곳저곳에는 새로운 음식이 도착하고 밤이 깊어지면서 정원의 야경은 점점 아름다워 지지만 그 누구도 다른 곳에 시선을 둘 만큼 어리석지 않다.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무대 아닌 무대. 그 위에 올라서서 음악에 맞추어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은 너무나 닮은 모습을 지닌 흑과 백의 하모니를 이곳 정원에 수놓는다. “뭐야, 꽤나 어울리잖아?” “그렇지? 저 두 아이.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자매라는 게 너무나 와 닿는다니까.” 내 평가에 호응해주는 건 아까부터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시인 같은 이름의 남자.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가끔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잊어주자.) 내 옆을 지켜주는 언제까지고 옛 모습을 간직할 연인.... 내가 무슨 생각을. 장난 아니게 부끄럽잖아.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는 미키야는 미소로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어때 시키. 나와 한곡 추지 않을래?” “뭐.. 뭣!?” 이 녀석. 이런 분위기에 그런 요청을 할 만큼 주위를 살필 줄 모르는 녀석인 줄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이래뵈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꽤나 까다로운 기준을 지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저 둘의 모습은 이곳과 저곳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나뉘어 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곳에 끼어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내.. 내가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시키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까. 틀려?” 쳇, 변함없이 태평한 녀석. 최소한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을 텐데. 기모노차림으로 왈츠라니. 게다가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으면 듣고 있는 쪽이 훨씬 부끄러워진다. 도무지 미키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미키야에게서 시선을 떼려 했을 뿐 별다른 의도는 없었지만 어느 순간 미키야의 너머에서 무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자카를 발견한다. 지금 그 애가 이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아, 그런가. 미키야가 내게 춤을 신청했기 때문이군. 좋아, 그런 표정을 지어준다면 오히려 나는 미키야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라고 아자카. “벼..별로 원하지 않아. 그저 네가 멋대로 원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쳇.” “응, 사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한 거야. 잊었어, 시키? 나는 너를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내 멋대로 바라보고, 내 멋대로 말을 걸고, 내 멋대로 좋아하고 있다니까.” 똑바로 나를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 언제까지고 그 눈동자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아아 나도 모르겠다. - 스윽 “응?” 그렇게 까지 말했으면 바로 알아차려라 이 바보. 춤을 신청한 주제에 여자가 손을 내미는 행동의 이유를 몰라? 언제까지 이 손을 부끄럽게 만들 작정인건지. “빨리 안 잡아주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부드럽게 내 오른손을 감싸오는 타인의 손을 느낀다. 생각보다 크고 두툼하고 딱딱한 남자의 손. 그렇지만 너무나 따스해서 내 마음 속 빈 공간까지도 채워줄 그런 마음의 손. 이 녀석 손이 이렇게도 포근했던가. “알아 모시지요. 공주님.” “쳇...” 끝까지 부끄러운 표현 일색이라니. 조금쯤은 성장이라는 걸 배워라 미키야. 그리고 그 표정은 도대체 뭐야.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이래서야 항상 곁에서 보고 있는 내가 안심할 수가 없잖아. 물론.. 다른 방향으로는 안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런 미키야로 좋겠지. ========================================== - 토오사카 린 - 이리야와 에밀리아에 이어 고쿠토씨와 료우기씨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앞의 두 사람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면 뒤의 두 사람은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듯 하면서도 너무나 어울리는 그런 모순된 사랑의 느낌을 느끼게 해준다. 덕분에 나 뿐만이 아니라 미스 에델펠트도, 파티를 보조하고 있는 메이드들도, 그녀들을 관리하는 세라나 리즈도, 그리고.. 「하아.. 완패네요.」 료우기씨와 고쿠토씨의 춤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우리와 함께 멍하니 그들의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는 고쿠토양까지. 어딘지 모르게 후련한 표정으로 와서는 한숨과 함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잔에 담긴 와인을 쭈욱 들이킨다. 지금의 내 손에 들려있는 것도 그와 같은 와인이지만 나의 주량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술을 마시는건 자폭과도 같은 행위이기에 차마 마시지는 못하고 있다. 「미스 토오사카.」 「왜 그러시나요 미스 에델펠트?」 굳이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티격태격 하고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나와 그녀의 관계지만 저래뵈도 내가 쉽게 이기지 못하리라고 인정하는 상대. 그런 그녀이기에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동일할 테니까. 때문에 그녀의 표정쯤은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분명.. 「어딘지 우리.. 소외된 것 같지 않나요?」 「하아..」 지금의 내 표정과 완전히 같을 거라고. 아아!!! 모르겠어. 그냥 마시자. 일단 마시고 생각하는거야. ============================================ 별장을 향해 갈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런 편안한 운전솜씨를 만끽하며 맨션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낮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새근...새근...” 바로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는 린의 존재다. 이리야와의 왈츠가 끝난 직후 린의 분노를 어떻게든 감당할 작정으로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목격한 아자카씨의 “와인을 연거푸 두 잔인가? 마시더니 저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라는 증언을 따라 정원의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린을 발견한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참 자신이 술을 잘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어찌도 이리 무방비한 모습이람. 정원사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잘 손질된 꽃으로 둘러싸여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마냥 두 손을 맞잡고 누워있는 린의 모습은 차마 깨울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기에 수분동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었기에 억지로 그녀를 일으켜 세워 업은 채로 파티장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돌아온 파티장에는 이미 시간이 늦어 파티를 정리하고 손님들을 객실로 안내하는 메이드로 가득 차 있었기고 메이드를 통해 린을 객실로 보내려 했던 내 시도는 바로 이어진 린의 투정아닌 투정 때문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싫어... 돌아가...” 잠결인지 아니면 깨어있는 상태였는지 알 수 없어도 내 목을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는 린 때문에 서운해 하는 이리야를 어떻게 어떻게 설득해서 맨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웅..” 살짝 몸을 뒤척이는 린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의 앞에서나 당차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린이지만 내 앞에서는 이런 약하고 귀여운 아가씨의 모습을 보여주는 린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살짝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다. 정말이지 내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의 절반정도만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어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우우.. 간지러... 어라..?” 이런, 내 손 때문에 깨어난 걸까. 살짝 미안한 기분도 들지만 뭐, 언제까지 자고 있게 놔둘 수도 없는 일이니 이걸로 됐다. 아직 눈을 반쯤 뜬 채로 주위 상황을 파악하려는 린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자. “일어났어 린? 지금 맨션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아.. 그래.. 아~ 편하네.. 걱정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야.” 그렇게 대답하고 정말로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금 눈을 감는 린. 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그녀의 눈이 뭔가에 놀란 듯 크게 떠지기에 깜짝 놀라고 만다. 뭔가 못볼 것을 본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벌린 채로 연신, “왜....왜왜왜왜왜왜!!!” “왜?” ‘왜’라는 경악성은 쏟아내는 붉은 드레스의 아가씨. 뭔가 놀랄만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거라면 심각한데. “내가 네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거야!!” 하지만 생각보다 그녀가 놀라고 있는 이유는 단순 했다. 요점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누워있게 되었냐는 거지. 하긴 이건 일종의(사실 일종의가 아니기는 하지만.) 무릎베개이니까. 물론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대답할 것은 간단하다. “왜냐고 물어도, 술 마시고 취해 쓰러진 건 린이라고? 거기에 내 뒤에 매달려서는 놓지도 않고..” “그그그그그그 그만!! - 콩 - 아흑!” 자신이 취해서 한 행동들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는지 머리에 손을 짚고는 미간을 찌푸리던 린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다 차의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다시 뒤로 넘어간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습고 한편으로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고 덕분에 린의 행동은 더욱 커진다. “풋.. 푸훗...” “우.. 웃지마!! 이.. 일어날거야.” 부끄러움에 빨개진 얼굴을 한 채 두 팔을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린이지만 아까 그녀의 모습으로 볼 때 아직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게 분명하기에 억지로 그녀의 몸을 다시 눕힌다. 그렇게 내 힘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원래대로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 린. 옳지 착하네. “지금은 이렇게 쉬어. 피곤하잖아?” “우으.. 에밀리아 많이 건방져 졌잖아.” 건방져 졌다니 그런 실례의 말씀을. 어디까지나 취한 린의 고집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좋게 평가해주면 안될까? “그래? 별로 변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몰라! 계.. 계속 잘 테니까 도착하거든 깨워. 흥!” 더 이상 저항하는 건 포기하고 내 변명 같은 건 듣는 둥 마는 둥 그대로 눈을 감고 토라져 버리지만 그래도 내게 자기 자신을 맡겨주는 린. 이따금 미간이 찌푸려 진채로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아까와 같은 훈훈한 기분이 든다. 가급적 이 기분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겠지. 우리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길이니까. 그래 돌아가는 거야 린.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 Waltzen End - Interlude Zero -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라는 건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무언가 꾸미는 사람들에게는 심적 안정을 제공하는 건지 지금 이곳 또한 그저 어떠한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의 공간이다.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외부와의 연결점이라고는 구석의 작은 환기구뿐인 작은 방이기에 공기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고 이런 곳이라면 시간도 그 흐름을 멈추고 말 것만 같은 끝없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 끼이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라 여겨졌던 적막과 침묵은 방안 어딘가에 나있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통해 깨어지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좁은 공간에 인기척이라는 새로운 기운이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열려진 문틈에서 조차 빛은 새어 들어오지 않기에 여전히 어둠은 그 자신의 위치를 비켜줄 생각이 없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방문자를 조소한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렇지만 모든 것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어둠은 태내에 자신을 좀먹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다. 그건 이 공간의 주인이자 이곳에 어둠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도록 안배한 자. 「Kenaz」 - 화륵! [키에엑!!!] 북구의 머나먼 과거부터 존재해온 힘을 가진 단어. 그 중 횃불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광명을 뜻하는 단어가 발해지고 그와 동시에 방안에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미리 준비되어 있던 여러 개의 촛대에 순식간에 불이 생겨나 어둠이 자리하고 있던 그 공간을 부드러운 빛으로 채운다. 물론 그 정도의 불빛으로는 이 공간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윤곽을 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 방안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그리고 그들의 모습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왔나.” “어둠의 정령입니까. 여전히 악취미시군요.” 한사람은 지금 막 방안으로 들어온 사내. 키는 180정도일까.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인기척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간의 주인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구라 할 수 있는 책상에 턱을 괸 체 앉아 정면의 사내를 주시하는 회백색 머리카락의 중년인.. 아니 노년일지도 모른다. 금빛으로 빛나는 모노클(외알안경)너머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이미 닳고 닳아 모든 상념이 사라졌지만 앞을 직시하는 힘만은 여전히 그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과시하고 있다. “어둠으로 나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내 마력은 공고해진다는 사실. 모르지 않을 텐데. 루키우스.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 따위를 하러 내 명상을 방해하려 왔다면...”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턱을 괴고 있는 손가락 끝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보석이 잠깐 빛이 남과 동시에 촛불의 불빛에 쫓겨나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암흑이 금방이라도 루키우스라 불린 남자를 집어삼킬 기세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이런 실례.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아키멘드라이트. 농담이 지나쳤습니다.” “.....말하라.”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된 모습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허리를 숙이며 능청스럽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금발의 남자는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늙고 한번 은퇴를 고려했던 과거의 잔재라 해도 지금도 여전히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는 그의 살기를 직접 받아낸 후다. 어찌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일에 관련된 제법 상세한 정보를 잡았습니다. 시계탑의 노친네들이 제법 노력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완전이란 단어는 무의미하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는 상대하지만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아직 자기처럼 기반도 갖추지 못하고 믿을 건 자신의 실력밖에 없는 마술사는 그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 쳇 노친네, 분위기라는걸 전혀 모르고 있군.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작고 검은 물체를 책상위에 내려놓는 사내. 그건 굉장히 낡고 이곳저곳이 녹아있기는 하지만 분명 수첩이다. 사내는 이걸 구하기 위해 그 먼 극동의 나라까지 다녀왔던 것. 모든 일이 끝난 뒤의 뒤처리는 협회의 마술사가 처리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에 연루되었던 지금은 실종된 마술사. 즉, 자신의 형이 했던 일이다. 최소한의 기록은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아 이렇게 실마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남은 일은 이걸 바탕으로 눈앞의 노인에게서 지원을 이끌어 내는 것. “그 잔해더미에서 찾아냈습니다. 이년 전 극동의 섬나라에서 있었던 그 의식에 관해 대략적인 내용과 방해자의 존재까지. 이곳저곳이 용해되어 완전한 해독까지는 앞으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요. 하하”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시 방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할 말을 모두 마친 사내와 들을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인. 노인이 쓰고 있는 모노클 너머의 갈색 눈동자가 사내를 꿰뚫어보듯 주시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노인이었다. “큭.. 네놈의 웃음은 네 형놈을 쏙 빼다 박았구나. 루키우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요.” 형을 쏙 빼다 박았다라. 사내는 노인에게 들키지 않게 속으로 실소를 삼킨다. 그의 형은 자신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앞서있기에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고, 항상 동정을 받고 모멸을 받은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런 그가 형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건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형이 살아있을 때는 전혀 비교되지 못하다 형이 죽은 지금에 와서는 자신에게서 형의 모습을 보는 어리석은 인간. “좋다. 이번 일에 관해 조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허나 모든 정보는 이 내게 가장먼저 보고 되어야 할 것이야. 만약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를 능멸한 죄로 게헤나를 체험시켜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키멘드라이트.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가 바라는 권한을 주며 일을 맡겼다. 지금 말한 것 외에도 몇 가지 조건이 더 붙겠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건 모두 충족되어 있으니까. 때문에 일초라도 이곳에 머물러 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곳은 노인의 공간이고 노인의 몸 안이나 다름없는 곳이기에 숨쉬는 것마저도 힘드니까. 그렇게 책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하는 사내의 등 뒤로 깜빡 잊었다는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 방해자란 누구였는지 알고 있나.” 아아, 그녀 말이로군. 잠깐 동안 그 정보를 전해줄까 말까 고민했지만 사내는 이윽고 말해주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고 노인에게는 어찌 보면 꽤나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봉인지정의 마술사이자 아틀라스의 괴물을 제외하고는 최연소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오렌지색의 마술사. “큭큭.. 그야 물론이지요. 바로 최고의 인형사. 아오자키 토우코.”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이름이 방안에 울려퍼진다. - Interlude Zero Out - ================================================================== 루비아가 에델펠트의 당주인지 아니면 차기에 불과한지.. 글을 썼을 당시에는 당주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업로드 하는동안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차기당주로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조아라에서도 약간 지적당했던 건데 에밀리아가 서번트라는 것을 루비아가 알아차리는 게 약간 억지스러운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이미 돌이킬수 없는 과거... 이걸로 예전에 썼던것 포함 24편째.. 16개만 더 업로드하면.. 쿠쿠쿠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25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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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Tea time Part.1 (上) - 달그락 달그락 이곳 런던에 온지도 벌써 5개월째에 접어들고 그 기간동안 평온하다면 평온한 나날이 계솓 되어왔다. 뭐, 가끔씩 루비아와 린이 사투를 벌였다거나 4월 달에 있었던 파티 이후로 묘하게 인연이 닿기 시작한 아자카씨가 시계탑에서 린과 루비아와 의외로 친근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내 자신의 영어회화가 완벽에 가까워졌다는 것 정도. 정말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라는 필수 불가결한 이유에 의한 영어공부였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일찍 적응하려 했던 나의 노력은 그야말로 무의미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6월의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습격해온 이리야가 ‘결국 에밀리아의 신체라는 건 내 신체이기도 했던 거잖아? 결국 인격을 형성하는 건 혼일지라도 기억을 저장하는 곳은 뇌. 에밀리아의 뇌는 나와 같으니까 그곳에는 언어정보 또한 동일하게 저장되어 있다는 거야. 물론 뇌를 함부로 건든다는 건 위험한 것이라도 의식과 별로 관계없는 부분에 한하면. 우웅.. 다시 말하자면 언어중추를 자극해서 활성화 시켜주면 언어정도는 한번에 해결~ 간단하지?’ 그런 식의 말을 한 직후 정말이지 단 한번의 마술사용(정신 동조)을 통해서 단번에 내 육체(정확히 말하자면 이리야의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 언어능력을 일깨워서 해결해 버렸다. 솔직히 허탈해도 이만저만 허탈한 게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행위 하나로 영어, 독어, 일본어, 라틴어, 희랍어에 이르는 5개 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마술사나 다름없게 변해버렸으니까. 우으.. 돌려줘 내 시간을. 내 고통을. 뭐 중요한건 그런 게 아니고 요컨대 내 생활을 방해하던 족쇄나 다름없던 언어문제는 정말 상큼하게 해결되었다는 사실. 덕분에 나의 활동범위, 혹은 생활범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급속도로 넓어지고 린이 시계탑에 나가있는 동안 외출을 하는 것이 자유로워졌으니 기뻐할 일이다. 물론 그렇게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된 이후에도 가장 빈번하게 왕복한 곳은 미키야씨의 찻집인 므네모쉬네. “저기저기, 이봐 시간 좀 내주지 않겠어? 내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하나 알고 있는데.” “............” 애당초 영어를 배우겠다는 건 일종의 구실에 불과했고 시키씨와 미키야씨에게 홍차 타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회화능력이 향상된 이후에도 여전히 드나듦은 잦았다. 그렇지 대충 이틀에 한번정도는 꼭 찾아갔다랄까? 그렇게 찾아가서 홍차부터 시작하여 홍차와 어울리는 다과(시키씨는 일식 다과는 잘 만들었지만 양식쪽은 아무래도 익숙치 않은 듯 했다.)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준 것. 생각보다 시키씨의 요리 혹은 차를 끓이는 센스는 상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서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기쁨이 컸다. - 뽀드득 뽀드득 “그래서 말이지, 내가 이래뵈도 돈이 좀 있으니까.” “..........” 그 덕분일까? 가끔씩 일본차만 찾아오던 색다른 취향을 지닌 손님뿐이던 찻집에 평범하게 홍차를 즐기러 오는 손님도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요즘은 단골손님도 있다는 것 같으니 정말 보람차지 않은가. 다만, 아무래도 시키씨의 타인에 대해 날카로운 인상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해서 여전히 갈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중후한 중년의 신사나 여성 손님들은 꽤나 늘어났다. 찻집의 손님층 치고는 지나치게 한쪽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젊은 남성층이 거의 전무에 가깝다. 물론 이런 이상한 현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키씨는 미인인데다 이곳에서 볼 때 신비한 느낌을 준다는 동양인이기에 흑심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어이! 튕기는 것도 적당히 해야 봐줄 수 있는.. - 스릉~ - 히이익!!” “꺼져.” “미.. 미쳤어!! 사람 살려!!” 저렇게 칼부터 꺼내고 보니 젊은 남자 손님들이 늘어나래야 늘어날 수가 없지. 물론 저런 실없는 남자들은 한 트럭씩 가져다준다고 해도 필요가 없지만. 일단 가져다 쓸 곳도 없고 분리수거도 안 되는 걸. 뭐, 어쨌든 저런 시키씨의 특성상 근처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흉악한 소문이 돌고 있는 듯 하다. 어디선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시키씨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의 목이 찻집 안쪽 깊숙한 곳에 장식되어 있다거나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게 분명 살해당했다거나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는 터에 한번은 지역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었지. 물론 오해는 풀렸고 그 경찰은 맛좋은 차와 음식을 대접받고는 돌아갔지만 그래도 소문이란 잘 사라지지 않으니까. 때문에 지금도 플로어에 있는 손님들은 거의 다 아가씨거나 아주머니거나 아저씨다. 뭐, 시키씨의 늠름한 모습은 역으로 젊은 여성층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으니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이려나. “시키씨, 말로 거절하면 될 것을 칼까지 꺼내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흥, 근성도 없는 녀석 따위 귀찮기만 할 뿐이다. 너도 조심해라 에밀리아. 당장에라도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모자라도 벗어봐. 아까 그 녀석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추근댔을 게 분명하니까.” “아하하.. 그러려나요.” 멋쩍게 웃어보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씁쓸하다. 지금 나는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찻집 안임에도 불구하고 챙 넓은 모자로 은발을 감추고 선글라스로 두 눈을 가린 상태. 이곳의 차맛이 좋아지기 전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비 없이 드나들 수 있었지만 점점 손님이 늘어나고 젊은 남자들도 찾아오기 시작했을 무렵(처음부터 젊은 남자 손님이 없던 건 아니다.)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을 조용히 손봐준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시키씨에게 뭐라고 할 입장은 안 되려나. 하지만 그 녀석 제비 같아서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고요.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 모습을 가리고 있는 상황. - 짤랑~ “시키 다녀왔.. 아, 와있었구나 에밀리아.” 누군가 들어옴을 알려주는 문의 종이 울림과 동시에 이 찻집의 마스터이자 시키씨의 연인인 남성이 들어오며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오른쪽 어깨 위에 들려 있는 짐은 밀가루일까? 상당히 부피가 있는 것이 조금 무거워 보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는 게 그가 겉보기와 다르게 튼튼하다는 것을 여실 없이 보여준다. 뭐, 그에 대한 시각적 감상을 이야기 하자면 우선 왼쪽 눈을 완전히 감출 정도로 한쪽만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검다. 8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건지 위에 걸치고 있는 검은 목티도 검다. 패션이라는 건 평생 담을 쌓고 살았는지 어떤 무늬도 들어가 있지 않은 면바지와 캐쥬얼 구두 또한 검은색 일색. 그야말로 피부를 제외하고는 전신이 검은색인 남자. 바로 고쿠토 미키야씨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언제나 하는 핀잔을 주는 것이 마치 이곳에 올 때마다 하는 행사인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미키야씨..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그 패션.. 보는 사람이 더워요.” “그래? 음.. 그렇지만 밝은 옷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고 게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목티의 한쪽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미키야씨. “이런 옷인 게 훨씬 차분해지거든.” “네~네.” 사실 이렇게 항상 핀잔을 주면 조금이라도 바뀌는 기색이 있어야 할 텐데 미키야씨도 시키씨 못지않은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여전히 패션에는 변화가 없다. 하긴, 시키씨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내가 비난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게다가.. “지이이~” “뭐야 그 시선은..” 미키야씨의 상대인 시키씨의 패션 감각이라는 것도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 유카타 차림이 그녀에게 대단히 잘 어울린 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이곳은 집도, 심지어 일본도 아닌 영국의 수도 런던이다. 그것도 서양식 찻집의 안임에도 불구하고 파란색 일색의 유카타라니.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커플이 아닐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칫, 실없는 녀석.” 듣자하니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학교건 집이건 사시사철 유카타 차림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겨울에는 어떻게 했냐고 물어본 내 질문에 미키야씨는 곤란한 듯 한쪽 턱을 긁으며 적갈색의 블루종을 유카타위에 걸쳤다고 대답해 줬다. 유카타 위에 가죽 자켓이라니!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니까. “영차~ 그보다 시키 아키다카씨한테 연락은 했어?” “...........” 아키다카씨라면 일본에 있을 때 시키씨를 돌봐주던 고용인이자 집사 같은 존재라고 예전에 일본에 있을 때의 두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 언급된 기억이 있다. 이번에 두 사람이 런던에 올 때에도 함께 따라오려는 걸 억지로 떼어놓고 왔다고. 그런 아키다카씨의 이야기가 언급되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일본 쪽에 관련된 이야기. 어쨌거나 질문을 받은 시키씨가 묘하게 미키야씨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자 미키야씨는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가며 재차 묻는다. “시~키?” “아.. 안했어. 굳이 가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그러면 안 되는걸 알고 있잖아? 일년에 두 번 오쇼가츠(일본의 설)와 오본(일본의 추석) 때는 꼭 돌아가서 가문 행사에 참여하기로 한 게 런던에 오는 조건이었으니까.” 분명 시키씨의 집안은 일본에서도 꽤나 영향력 있는 오랜 전통의 가문이라고 들었다. 료우기가라고 하면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권력도 재력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항상 남자다운 말투와 태도로 인해 있고 있었지만 눈앞에 새침하게 토라져 있는 유카타 차림의 여성은 유서깊은 가문의 아가씨였던 것이다. 어째 내 주변에는 대단한 집안의 여성이 많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집안의 아가씨가 연인이라고는 해도 남자를 따라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거다.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게 일년에 두 번 본가에 돌아오는 수준이라면 생각보다는 파격적인 조건. 그렇지만 시키씨는 그것마저도 탐탁지 않은 듯 연신 툴툴거리며 어떻게든 가지 않을 방법을 궁리하는 듯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몸이 아파.” “방금 전까지 멀쩡했잖아?” “갑자기 아파졌으니까..” “시키.. 병은 스스로 죽일 수 있다고 말한 건 시키 아니었어?” 가끔씩 두 사람의 대화에 등장하는 무언가를 죽인다는 내용은 여전히 이해 불가능. 어쨌건 제 3자인 내가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꾀병이다. 그런 걸로 미키야씨를 설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 찻잔에 금이 갔어. 이건 불길하니까..” “다 봤어. 방금 스스로 깼지?” “쳇, 예리하네.” 미안하지만 시키씨. 저도 봤어요. 그 뒤로도 갑자기 생리주기니 하는 낯부끄러운 핑계까지 대 보지만 역시나 연인 사이. 그녀의 주기정도는 쉽게 간파하고 있는지 모든 핑계를 패퇴시켜 버린다. 저기 두 사람 모두 내가 있다는 사실은 벌써 잊어버린 게 아닌가요? “마지막 이유야. 그럼 가게는 어쩌고. 매일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데 문을 닫을 생각은 전혀 없어.” 모든 무기가 꺾여버리고 마지막 비장의 한 수를 던지는 시키씨의 표정이 긴장으로 가득 차고 미키야씨의 대응을 숨죽이듯 기다린다. 그렇지만 역시나 미키야씨는 그녀보다 한 수 위에서 생각하고 있었는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그동안 가게는 아자카가 봐주기로 했으니까 괜찮을거야. 시키 말대로 모처럼 단골손님도 생겼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문을 닫아둘 수도 없으니까.” 확실히 시계탑은 다음주부터 하계휴가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던가. 과연 이미 시키씨의 변명정도는 모조리 간파하고 있었던 미키야씨. 어찌 보면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하긴 그 정도는 돼야 시키씨를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다만, 아자카 혼자서 하기에는 일손이 부족할 테니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고용해야 할 테지만.” 분명 아무리 규모가 아담한 므네모쉬네라도 한 사람이 찻집을 운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계산부터 서빙, 조리와 정리까지 다해야 하니까. 카운터와 서빙을 겸한다고 해도 조리와 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한사람은 더 있어야 할 터. 미키야씨의 고민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문득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므네모쉬네의 홍차 맛은 전적으로 이 에밀리아표 홍차니까 굳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것보다 이 기회에 내가 직접 차를 끓이거나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말을 꺼내는 건 쉬웠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는 두 사람을 위해(비록 한 사람은 내키지 않아 하지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으니까. “저기, 그럼 제가 아자카씨를 도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 돌이켜 생각할 때 지금의 이 한마디가 두고두고 후회될 줄 누가 알았을까. ================================================== 맨션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린에게 앞으로 일주일정도 미키야씨의 찻집 일을 거들겠다고 전했다. 이래 보여도 린과 같이 지낸 시간이 꽤나 길었으니까. 이런 일은 숨겨봐야 숨겼을 때의 얻을 수 있는 메리트에 비해 들켰을 때의 리스크의 크기가 크다. 숨겼을 때 얻을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린이 찾아오지 않는 것뿐이지만 들켰을 때는 최근에는 뜸해도 오래간만에 붉은 악마로서의 린을 마주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헤에.. 일주일이나?” 그렇게 반문하는 린의 모습은 뭐랄까.. 센터시험(일본의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그것과 흡사하다. 어째서인지 학구적인 주제가 될 때면 어김없이 쓰고 있던 검은 뿔테안경을 비롯 이마에는 하얀 띠를 두르고 두꺼운 참고서적을 잔뜩 든 채 공방으로 이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벌써 3일째. 듣기로는 하계 휴가기간 동안 교수들에게 제출해야할 레포트가 있다고 했던 가. 원래라면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었을 과제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루비아와 경쟁이 붙어서 한치의 여유도 없다고 한다. 내용상 우월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거기다 최대한 빨리 상대보다 먼저 제출해야만 루비아의 콧대를 완전히 눌러줄 수 있다고 선언하고는 식사 때를 제외하곤 공방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한 린이다. “응, 아무래도 오본일로 일본에 가는 거라 왕복 이틀을 제외하고도 5일은 있을 거래.” “뭐, 좋아. 어차피 나도 하계 휴가동안 제출해야 될 논문이 있어서 여전히 바쁠 테니까 괜찮아.” 그래서인지 내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에 의외로 선선히 허락해준다. 모르긴 몰라도 바로 위층에서도 루비아가 비슷한 모양새로(외적인 면은 다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분위기다) 머리를 싸매고 고생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이쯤 되면 선의의 경쟁이라고 봐도 될까 싶지만..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건 아니겠지. 어쨌든 허락은 허락이다. ----------------------- 그 이야기가 있은 지 다시 3일. “우응~~ 좋은 날씨네.” 미키야씨와 시키씨가 일본으로 떠나는 건 오늘 저녁이기에 그전에 아자카씨와 만나 일주일간 어떻게 찻집을 운영할 건가를 이야기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러 가기로 약속한 상황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을 맡는다는 건 민폐나 다름없기 때문에 신중히, 그리고 확실한 준비를 위해서 이런 의견 조율은 꼭 필요하다. 이곳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의 주목은 부담스럽기 때문에 최소한 은발의 머리카락이라도 감추고자 요새 애용하는 하얀색의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맨션을 나온다. 눈은.. 뭐, 상관없지 않을까? 사람 눈을 그렇게 지긋이 바라볼 사람도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외출해서 한동안 걸어가자 시계탑이자 영국 제일의 박물관인 대영박물관 앞으로 가자 저 멀리 여름의 더운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 아자카씨가 보인다. 내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란 하나같이 어딘가의 미인 선발대회라도 나갔다가는 상을 휩쓸 것 같은 미모의 소유자들이라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더라도 아자카씨 역시 그녀들에 비해 전혀 떨어질 것이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덕분에 그녀의 근처를 지나치는 남자들의 시선이 주목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 저런 시선들을 뚫고 아자카씨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게 꺼림직 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고 멀뚱히 서있을 수도 없는 거니까 한쪽 손을 들어 흔들며 아자카씨를 불러본다. “아자카씨~”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이쪽으로 바라보는 아자카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봐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쳐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여성. 성격 또한 그런 외모와 다를 것 없이 시원시원하고 가끔은 남자 같기도 하며 어떨 때는 신사 같기도 하기에 아자카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은 호감을 지닐게 분명하다. 뭐, 나 또한 그런 그녀의 성격 덕분에 이렇게 친밀해 질 수 있었던 거니까. 만약 시계탑이 일반적인 학원이었다면 분명 학원의 아이돌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추켜세워졌을 게 분명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린과 루비아도 마찬가지겠지만. “아, 에밀리아. 오래간만이네.” “그러게요. 가끔씩은 찻집에 들르는 게 좋지 않아요? 최근 오지 않은지 꽤 됐으니까” “뭐.. 오빠와 만나는 건 바깥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시키와 마주쳐서 좋을 게 없잖아?” 아자카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은 듯 갸름한 자신의 턱 언저리를 긁는다. 그녀의 유일한 단점(?)혹은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시키씨와 관련된 일. 이상하게도 아자카씨는 시키씨를 싫어한다. 그것도 단순히 얽히는 일 조차 별로 내켜하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건 시키씨의 외모라거나 능력은 뛰어나다고 인정은 하고 있다는 사실. 단지 사람 자체가 그녀와 맞지 않는 것인지 의식적으로 피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계탑을 찾아가지 않는 내가 아자카씨를 만날 기회는 오직 찻집에서 밖에는 없다는 걸 생각하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한다. “그럼 어디 근처의 카페라도 가서 이야기 하자. 여기서 이렇게 서 있는 건.. 으음, 아무리 나라도 불편하니까.” 그녀를 따라 나 또한 주위를 살펴보지만 역시나, 아까보다 사람이 훨씬 늘어나 보이는 게 나만의 착각이 아닌 듯싶다. 하긴, 아자카씨 정도 되는 사람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건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이곳은 그녀가 항상 생활하는 시계탑의 앞이니까. 저들 중 태반은 마술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어쩌면 시계탑도 일반 학원과 다를 바 없이 미모로 추앙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동감이에요. 아자카씨는 어디서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있잖아. 에밀리아.” “네?” “....하아. 아니 됐어. 에밀리아의 성격상 악의가 있었을리 없었겠지만, 분명 너.. 여자의 적이야.” ?????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 그렇게 들어간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스타덕스. 지극히 미국적인 세계 체인점에 획일화된 맛이지만 그 맛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오늘의 나와 아자카씨처럼 간단히 대화를 나눌 장소가 필요한 사람들이 자주 찾기도 하는 곳이다. “?? 주문 안 받으시나요?” 우리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되는 웨이터에게 주문을 했을 뿐인데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왜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있는 거지? 번거롭게 사람을 불러 확인까지 해야 하잖아. 나의 독촉에 잠시 몸을 떠났던 정신이 황급히 돌아온 듯 눈을 깜빡이고는 손에 든 주문표에 체크하는 웨이터. “아, 죄송합니다. 카페라떼, 카페모카. 주문 맞으십니까.” “네” “네..넵 잠시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이며 허둥지둥 사라지자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자신의 손가방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는 아자카씨. “일단 이게 하루치 매출 전표. 오빠 말에 따르면 여기서 그렇게 큰 차이는 없데. 이걸 기준으로 잡으면 되겠지.” “흐응.. 생각보다 얼마 되지는 않네요?” 전표에 적혀있는 판매량은 어찌 보면 의외랄 것도 없이 딱 작은 규모의 찻집에 어울리는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건물임대료나 인건비는 없는 거니까 재료비를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흑자 규모랄까. 하지만 시키씨의 일본차 맛은 뛰어난데다 최근 내가 전수해준 홍차의 맛도 상당할 텐데 어째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잊고 있는 거 아니야? 거기 카운터에 있는 게 누군지 생각해봐.” “아..” 어리석구나 에밀리아. 바로 어제도 보고 오지 않았던가. 특정 연령층에 편중되어 있는 손님들, 그리고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도 날카로운 살기를 표출하는 주인이 있는 곳에서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자 하는 사람은 어지간히 특이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니까. 그나마 차 맛이 좋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 수준의 손님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뭐, 덕분에 생각보다 어려울 건 없을 것 같다는 점이 좋기는 하네. 그럼 다음은 사용할 다과인데 차와 함께 주문 받을 다과는.. 보통 주문해서 사용했었다고 하고. 여기 연락처.” “하긴, 시키씨의 양과자 솜씨는 그저 그랬으니까요. 미키야씨는 말할 것도 없고.” 시키씨는 일본의 전통 가문 아가씨답게 일본식 다과나 음식에는 대단한 솜씨를 보여줬지만 양과자나 양식 쪽에는 평범한 수준이다. 어디의 요리나 기본은 같기에 일본 요리를 만들 때의 손재주나 감각을 통해 어느 정도는 달성하지만 맛있다라는 수준에는 못 미치는 것. 그렇기에 주문 제품을 사용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미키야씨는.. 하하. 그냥 스파게티 같은 건 만들 줄 아는 것 같지만 그 외의 요리에는 재능이 없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주문한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든 점원이 다가와 테이블에 조각 케익과 커피를 내려놓는다. 조각케익은 주문한 기억이 없는데. “주주주주...주..주문하신 카페라떼,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저 그런데 이건?” “네..넵. 그..그그그 그건 서비스입니다!” 서비스인건 좋지만.. 그걸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쳐버리면 다른 손님들이 듣고 불만을 표시하지 않을까. 뭐,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고맙게 받아들이자. “헤에.. 고마워요.” 감사인사를 하자 다시 그 자리에 굳어버린 웨이터. 설마 하고 생각하지만 설마 이건.. “저기요?” “핫! 조..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황급히 떠나가는 점원을 보면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모자 속에 머리카락도 숨겼고.. 챙 때문에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런 의아함을 띤 표정으로 아자카씨를 바라보자. “풉.. 몰랐어? 에밀리아는 역시나 감이 둔한건지, 태평한 건지~ 아까 시계탑 앞에서도 시선들은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모이던 거야. 겨우 그런 모자 하나로 감춰진다고 생각했어?” 만연에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신랄한 확인사살을 해주신다. 역시나.. “우으..”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손으로 머리의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 쓰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럼, 다시 찻집 이야기로 넘어갈까?” 그런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아자카씨가 화제를 돌려주는 게 그나마 고맙다랄까.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자카씨가 아니라 린이었다면 방금 전 주제를 가지고 계속 놀려댔을 테지만 역시나 아자카씨.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다과 이야기였죠? 으음... 그럼 모처럼 이니까 실력발휘를 해볼까요?” “응?” “주문한 케이크나 샌드위치를 사용하지 않고 제가 만드는 거예요. 이정도의 판매량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할 듯 하니까요.” 다시한번 전표를 보지만 하루 동안 판매된 양 치고는 확실히 적다. 케익 종류는 미리미리 만들어두고 주문이 있을 때마다 기타 식사류를 준비한다면 다양한 메뉴를 준비하는 건 힘들겠지만 샌드위치 한두 종류와 쿠키 등 몇 종류라면 주방에 설치되어있는 오븐 두개로 충분하니까. 이참에 확실히 서비스한다면 앞으로 손님이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좀 과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시중에 판매되는 것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우월하다고 자신하니까. “확실히.. 네 요리는 마성이 있어서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게 있지만.. 괜찮겠어? 난 요리에는 별로 재능이 없어서 도와주기 힘들 텐데.” “이 정도라면 가능해요. 그렇게 많은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 네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거겠지. 응, 그렇게 하자.” 그 뒤로 판매할 차의 종류나 디저트류를 적당히 의논해서 결정했다. 그렇게 대충의 의견 조율이 끝날 때쯤 커피도, 조각케익도 다 없어졌고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기에 서로 다 마신 커피 잔을 둔 채로 자리를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 “그럼, 앞으로 일주일 잘 부탁한다. 아자카, 에밀리아.” “가게일은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오빠.” 므네모쉬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문 앞에 closed를 걸고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미키야씨와 시키씨의 모습이 있다. 공항까지 배웅하겠다고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를 했지만 ‘찻집 일까지 맡겼는데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어’라며 거절을 하는 미키야씨의 고집이 의외로 완강해서 포기하고 이렇게 찻집 문 앞에서 배웅을 하기로 한 것. “잘 할 수 있을 리가. 덜렁이 두 사람이 하는 건데.” “흥, 시키 당신보다는 몇 배는 나을 텐데? 부디 부탁이니까 일본에 가서 오빠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 “호오.. 해보자는거냐?” “바라던 바야.” “저기 두 사람 다 지금 어디인지 관심 좀 가져주세요..”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이지 어떻게 루비아와 린의 관계만큼이나 정해진 수순대로 나아가는 건지... 다행히도 시키씨와 아자카씨 모두 주변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일을 벌일 만큼 상식이 부재하지는 않은 듯 미키야씨와 내 만류대로 어떻게든 그냥 넘어간다. 물론 그 이후 단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일본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공항을 향해 출발하고 남은 건 이 찻집 므네모쉬네를 일주일간 담당하게 될 나와 아자카씨 두 사람. 좋아, 그럼 앞으로 일주일. 힘내볼까.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8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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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이거 한번 입어보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며 아자카씨가 양손에 펼쳐 보인 옷은 전형적인 카페나 찻집의 종업원 차림.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조끼, 아래쪽의 폭이 좁은 미디스커트로 이루어져 있다. 뭐, 일반적인 웨이트리스 차림이라면 차라리 지금 입고 있는 사복을 입고 일하는 걸 선택하겠지만 이런 옷이라면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무엇보다 아래가 스커트로 되어 있다고는 해도 오래간만에 입어볼 남성복과 유사한 스타일이니 기분도 설레고. 그런데 이곳의 주인은 미키야씨와 시키씨고 그 두 사람이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은 없으니 저 옷은 찻집의 소유가 아닐 거라 생각하기에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아자카씨에게 물어본다. “이건?” “응? 아니 뭐.. 사실 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저기..그..” 생각 외로 그녀답지 않은 묘하게 우물쭈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아자카씨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봐 주자 한층 당황하더니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고 안절부절 하기를 수 초간.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듯 맞잡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나도 모르게 인터넷으로 주문...” “하아?” 나도 모르게 실없는 소리가 새어나간다. 그녀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옮겨온 복장을 살펴보지만 이거.. 단지 일주일치 일을 위해서 구매하기에는 상당히 비싸 보인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천도 고급스러운 소재인데다가 옷 끝의 마무리도 꼼꼼하게 되어있다. 거기에 상하의에 조끼까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아자카씨라면 이런 옷까지 준비한 상태에서 구두를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결론은 일종의 충동구매란 이야기. 당황해 하는 내 반응에 아자카씨는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며 “역시 갑작스러웠을까... 싫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아..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잠깐 들어가서 입어보고 나올게요. 에또 탈의실.. 탈의실..” 아자카씨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나 있을까. 그렇게 애처롭게 올려다보면 어떤 사람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신히 탈의실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와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본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한 아자카씨 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뭐, 이미 사온 걸 뭐라고 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잠자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도록 하자. 옷은 생각보다 입기 수월한 형태로 되어 있어 금방 갈아입고 나올 수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보니 걸음을 걸을 때 자연스럽게 보폭이 작아질 수밖에 없지만 그럭저럭 불편하지는 않다. “어.. 어때요?” 갈아입은 아자카씨 앞에서 보여주는 게 상당히 부끄러운 순간이지만(어떤 옷일지라도 남에게 감상 받는다는 건 부끄러우니까) 그래도 환하게 기뻐해주는 그녀에게 그런 내색 따위 할 수없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네. 굉장히 어울려 에밀리아. 사실 메이드옷 비슷하게 팔랑거리는 것으로 사볼까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옷은 싫어할 것 같았으니까. 좋아 그럼 나도 갈아입고 올게. 마무리 청소 부탁할게.” 윽. 메이드옷. 아자카씨 제대로 알고 있다. 그런 옷이었다면 그녀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더라도 내가 입을 리가 없고, 그녀의 충동구매는 말 그대로 무의미해졌을 게 분명. 그딴 부끄러운 옷 따위 런던에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그 소동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입고 싶지 않다. 물론 이 옷도 입기는 입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시키에 비교한다면 분하게도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신하니까 일본차와 일본다과는 내가 준비할게. 에밀리아는 홍차와 간단한 식사, 그리고 케이크를 부탁해.” ----------------------------- * 8월 12일 : 첫날 11시가 되어 찻집의 문을 열었지만 첫 손님이 오시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인기있는 찻집이라면 오픈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 므네모쉬네는 그 정도까진 아닌 듯. 문을 열고나서 30분쯤 지나자 찾아온 첫 손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차림의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 딸랑~ 자주 찾아오는 단골 중 한분인지 들어오자마자 프런트 쪽을 보고 미소를 지으려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자신이 들어온 곳이 항상 오던 그 찻집이 맞는 건지 확인하는 듯한 시선으로 실내를 죽 둘러보지만 다른 곳 일리는 없다.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 쪽의 테이블에 가서 앉아보지만 여전히 그녀 머리위에 맴돌고 있을 의문 부호는 사라 질줄 모르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첫 손님. 그녀의 고민을 알아차린 아자카씨가 서둘러 테이블로 나아가 밝은 미소와 함께 주문을 요청한다. 중년 여성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자카씨의 모습에 한순간 당황한 듯 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어서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저기.. 실례지만 이곳의 주인이 바뀐 건가요?” “아니랍니다. 주인께서 며칠 일이 있으셔서 잠시 가게를 봐드리는 것뿐이에요.” “예에..그렇군요. 음.. 그럼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이랑 다즐링을 부탁드려 볼까요.” 다즐링인가. 당장에라도 주방에 돌아가 차를 끓여서 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작할 때가 아니다. 손님의 주문을 주문서에 받아 적고 다시 한번 주문내역을 확인하는 아자카씨의 모습을 끈기있게 기다리자. 혹시라도 손님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거니까.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에 다즐링 주문받았습니다. 맞으신가요?” “네, 부탁드려요 호호..” “에밀리아,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과 다즐링.” “네~” 드디어 시작이다. 미리 차를 끓이기 위한 도구는 모두 준비해뒀고 따뜻한 물로 다기의 예열까지 마쳐둔 상태.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인 만큼 차를 끓이는 동작 하나하나, 물의 온도 일도마다, 물의 양 한방울까지도 심혈을 기울여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다즐링을 끓인다. 마지막 한 방울인 골든 드롭까지도 찻잔에 담아내고 어제저녁시간을 이용해 미리 구워놓아 저온보관 해둔 초코시폰케이크의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플로어로 가져가 아자카씨에게 전해드린다. 원래라면 주방에서 나와 있으면 안 되지만 어차피 손님도 한 분 뿐이니까 첫 손님이 차를 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나 역시 플로어에 나와서 멀리서나마 바라본다. “주문하신 차와 케이크 나왔습니다. 그럼 천천히 즐겨주세요.” “고마워요 호호호. 젊은 아가씨가 친절도 하지.” 그렇게 말하고 접시와 잔을 들어 두 눈을 감은 채 향을 음미하는 손님. “음~ 향이 아주 그만인걸요. 어디 맛은.. 어머, 놀라워요. 이렇게 깊은 맛이면서도 전혀 떫은맛이 없네요. 정말 저기 서있는 아가씨가 직접 끓인 건가요?” 주방 문 앞에 서있는 나에게 시선을 보낸 채로 묻는 그녀에게 아자카씨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긍정의 말을 전한다. “물론이랍니다. 케이크는 어떠신가요? 케이크 또한 직접 만든 것이에요.” “어머나, 케이크까지? 어디어디.. 시폰케이크의 폭신한 감촉과 부드럽게 퍼지는 초콜릿의 달콤함..” 손님의 예찬은 그 뒤로도 꽤나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그 예찬 속에서도 한 모금씩 마시는 홍차와 조금씩 줄어드는 케이크는 그녀가 이곳에 있을 시간을 시시각각 줄여줬고 결국 마지막 한조각의 케이크까지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아쉽다는 표정으로 시계와 빈 접시를 한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성은 나에게로 다가와 두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짓는다. “정말 훌륭한 맛이었어요. 원래 주인 분들의 맛도 일품이었지만 아가씨의 맛은... 미안해요. 달리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잠시 동안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건가요?” 물음에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을 해본 결과 아마도 미키야씨와 시키씨는 오본이 끝난 직후 돌아오지는 않을 테니 오늘까지 포함한다면 일주일은 걸리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일까요? 아마 그 정도” “어머, 아쉬워라.. 그럼 그때까지라도 매일 찾아와야겠네요. 호호. 그럼 내일 또 봐요. 아가씨~” “아가씨라뇨..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짤랑~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으며 돌아가신 첫 손님을 시작으로 “이런 늙은이가 주책스럽게도 정신을 잃고 바라봤구먼. 허허 실례했네. 아가씨. 어디 그럼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걸 맛보도록 해볼까. 모처럼 이른 시간에 찾아왔으니 실론티와 그리 달지 않은 크림치즈케이크로. 얘야 너는 뭘로 하겠니.” “나는 우웅.. 초코치즈케이크!!” 손자를 데리고 나온 노년의 신사 분과, “아, 차 맛이 어째 조금은 떫어진 느낌이 들지만.. 어쩔 수 없죠. 주인분이 안계시니. 그래도 충분히 맛있으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주세요. 게다가 히가시..라고 하던가요? 함께 나온 다과 맛도 좋았어요.” 시키씨의 일본차 맛을 보기 위해 자주 찾아오는 단골로 보이는 젊은 여성(그녀의 평가에 아자카씨의 표정은 뒤에서 볼 때 보이지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미소와 씁쓸함이 혼재된 미묘한 표정이었을 거라고 예상한다), “여기 찻집, 우물우물.. 맞죠? .....네 맞겠죠.. 분명 저도 냠.. 확인하고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우물.. 슈룩.. 어떻게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제가 자주 가는 쩝쩝... 스파게티 전문점보다도 맛있는거죠? 찻집의 가면을 쓴 우물우물.. 스파게티 음식점 아닌가요? 네 제가 묻고도 어리석다고 냠냠.. 생각하고는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말하는 후아.. 냠.. 와중에도 손이 멈추지 않는 다는 것도 대단히 우물우물.. 실례라고 켁.. 물! 물!! 꿀꺽꿀꺽.. 휴우..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 아아, 지금 대단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죠?” 지나가다 허기가 져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학생까지. 참고로 이 남자 학생이 다른 손님이 주문하신 케이크와 홍차를 들고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두 손을 잡고는 ‘결혼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외쳤다는 건 가슴속 깊이 묻어두도록 하자. 만약 아자카씨가 억지로 떼어내 끌고나가지 않았다면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쟁반이 아니라 간장과 막야였을지도 모르니까. 이 외에도 여러 손님이 다녀가기는 했지만 예상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거나 예상보다 적게 온다거나 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일일 손님의 수와 비슷한 사람이 므네모쉬네를 방문했다. 게다가 그럭저럭 손님들은 대부분 만족한 듯 돌아가셨기에 찻집 대리일은 첫 출발이 좋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대로만 무난하게 시간이 흐른다면 일주일 정도는 금방이고, 지금까지의 손님들 반응으로 볼 때 앞으로의 평가도 괜찮을 것은 분명. 덕분에 손님이 다 드시고 난 빈 접시를 설거지하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진다. 대성공의 예감이랄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손님을 마지막으로 파스타가 다 떨어졌는데 어쩌나. 어디.. 플로어를 바라보자 손님은 한 사람도 없는 게 간만에 찾아온 정적과 여유가 감돌고 있다. 지금이라면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운다 해도 문제될게 없겠지. “아자카씨 파스타가 떨어졌어요. 이 앞쪽 마트에 좀 다녀올게요.” “이제 3시.. 슬슬 티타임 직전이라 손님이 뜸할 때네. 요리하고 차 끓이느라 수고했으니까 에밀리아는 쉬고 있어. 내가 가서 사오도록 할게. 가게 부탁해~” “에.. 네 잘 다녀오세요~” ---------------------------------------- - Interlude - 찻집 므네모쉬네는 이 근처에 한해서 상당히 유명한 찻집이다. 물론 흔히 맛보기 어려운 일본차의 맛이나 다과의 맛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주인인 젊은 일본여성의 소문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곳. 이국적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외모에, 이국의 전통 복장을 항상 하고 있는 여성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칼(비유가 아니라)을 지니고 있어서 그야말로 장미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입고 있는 푸른색의 옷에 빗대어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이 블루 로즈. 한때는 그녀의 소문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최근에는 그런 목적에서의 발길은 끊긴지 오래다. “호오.. 이곳인가. 소문난 블루 로즈의 찻집이.” 모처럼 그 소문에 이끌린 한 남성이 찻집을 향해 접근한다. 이상하다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라면 지금까지 소문에 이끌린 남자는 대부분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었던데 비해 이 남성은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새하얀 백발과 그와 잘 어울리는 잘 다듬어진 입가의 긴 수염. 그리고 커다란 안경이 어딘가의 교수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준엄한 인상의 노신사다. 그 누가 알리. 이 노신사야말로 영국 유명 신문 가디언의 요리 평론가인 찰스 로빈슨이라는 사실을. ===================================== 아자카씨가 재료를 사러 나간 후 찻집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여러 손님들로 북적이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플로어에 혼자 쓸쓸하게 놓여져 있는 것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기에 홍차라도 마시고 정리도 할 겸해서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의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사용한 재료의 잔해나 홍차의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들. 상당히 어지럽다면 어지러운 광경이지만 여러 손님들이 다녀가고 여러 요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잔뜩 선물 받은 후의 충만감은 이런 기분에 요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고 새삼 확인시켜준다. 특히나 오전에 다녀간 할아버지를 따라왔던 아이가 케이크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은 아이들이 어째서 천사라고 표현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해맑고 아름다웠다. 물론, 떠나려 하지 않고 내 허리에 매달려서 칭얼거릴 때는 조금.. - 짤랑~ 아차,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닌가. 현관에 달려있는 작은 방울이 이곳에 누군가가 찾아오셨음을 알려준다. 아자카씨가 나간 지 이제 겨우 몇 분 지나지 않았으니까 손님일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주방을 정리하던 손을 놓고 서둘러 플로어로 돌아가려 할 때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아무도 없는겐가? 누구 없소?” “자.. 잠시만요~!!” 플로어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건 현관 근처에 서 있는 흰 수염과 흰 머리가 중후하게 어울리는 초로의 노신사. “!!!!!” 내 등장에 반쯤 감겨있다고 생각되는 푸른색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놀라움을 표시한다. 이런 반응은 이미 충분히 적응해서 놀라울 것도 없지만 저런 노신사마저 그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약간은 씁쓸하려나. 물론 여자에게 있어 외모가 아름답다는 건 여러모로 유리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 남자들에게 받는 시선은 별로 유쾌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지금은 손님을 맞이하는 점원의 입장이다. 그런 감정은 속으로 숨긴 채 평정을 가장하고 손님의 달아난 정신을 불러준다. “손님?” “아.. 흠흠.. 미안하네. 이상하구먼, 이곳은 분명 동양의 여성이 하는 찻집이라고 들었는데..” 내게 주어지던 부담스러운 시선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입구 근처에 서서 이상하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는 노인. 아마도 시키씨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인 듯하기에 시키씨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키씨는 잠시 일본을 다녀오시게 되어서요. 잠시 동안 가게를 돌보는 것뿐이랍니다.” “그런가.. 이거 아쉽구먼.”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돌아오실 텐데 다시 찾아오시는 건 어떠세요?” “흐음.. 아니 괜찮네, 일본차를 마셔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평소처럼 홍차나 즐기고 가볼까. 허허” 노신사는 할아버지 특유의 잔잔하고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지금의 플로어에는 나와 그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자리에건 앉을 수 있기에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충실한 점원으로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 준비된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손님의 의사를 묻자. “주문은 뭘로 하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어디, 브라우니와.. 스트로베리 타르트.. 생각보다 메뉴가 적구먼.” 지금 사용하고 있는 메뉴판은 원래의 것과는 다른 일주일 한정의 단순화된 메뉴를 담고 있다.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이 일주일간에는 직접 만드는 메뉴만을 담고 있기에 너무 많은 종류를 다룰 수는 없으니까. “죄송해요.. 직접 만들다보니 많은 메뉴를 준비할 수 없었답니다.” “호오.. 그런가. 그럼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홍차는 음.. 적당히 아가씨가 추천하는 걸로 부탁하네..”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즐겨 드시는 차가 있으시다면..” “허허, 그걸로 충분하다네. 모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단 둘이 찻집에 있으니 아가씨의 추천을 받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하..하하.. 농담도 참.. 브라우니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그리고 제가 추천하는 홍차 맞으시죠?” 노신사가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 발길을 주방으로 향한다. 미키야씨와 시키씨가 일본으로 떠나고 그 대리를 맡은 아자카씨도 자리에 없는 지금. 이곳 찻집 므네모쉬네를 지키고 있는 건 오직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한층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한 손님의 만족이 좌우되는 거니까 그럴 수밖에. 여기서 잘해보인다면 새로운 단골손님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니 시계바늘은 오후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주문한 메뉴와 시간으로 보건데 조금은 이른 티타임을 갖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라고 예상. 그렇다면 홍차의 종류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영국의 자랑이라 불리는 아마드의 애프터눈 티. 사실 F&M의 제품을 사두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가격도 비싸고 그것으로는 하루치 판매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브랜드다. 그래도 그 품질은 나쁘지 않아서 잘만 끓인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이랄까. 주전자의 물이 끓는 동안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의 준비를 동시에 진행한다. 타르트의 파이부분은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살짝 오븐에서 데우고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어 4등분. 위에 보기 좋게 얹는다.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야 필요한 재료는 미리 구비되어있고 베이컨과 닭고기를 적당한 온도에 비전의 소스를 사용해서 살짝 익혀주면 끝이니 별다른 수고도 필요 없고. 그렇게 요리와 홍차가 준비되고 쟁반에 받쳐 플로어로 들고간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그리고 홍차입니다.” “오, 벌써 나왔나. 어디.. 아가씨가 추천하는 홍차의 맛을 즐겨보도록 할까.” 찻잔을 들어 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로 가져가는 노신사의 모습에서 세월의 향기와 기품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찻잔을 손에 드는 모습, 입가로 가져가는 움직임, 홍차를 마실 때 찻잔을 기울이는 정도, 입안으로 차를 흘려넣고 그 맛을 음미하듯 그리고 그 향을 음미하듯 눈을 지긋하게 감은 모습까지. 어지간히 몸에 배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자연스러운 기품이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호오.. 이건 부드러우면서도 가벼운 이 맛은 아마드의 애프터눈 티가 분명할 텐데..”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노신사. 덕분에 정신이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오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만약 방금의 그 말이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너무나 어울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치 채지는 않았겠지? 한쪽눈을 살그머니 노신사쪽으로 향해서 기색을 살펴보지만 딱히 내 행동에 이상한점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같은 브랜드를 사용했음에도 이런 맛이 나올 수도 있구먼. 허허, 오늘 이 늙은이가 새로 견문을 넓힌 느낌이야. 이거 아가씨가 직접 끓인겐가?” 세월이 쌓여있는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물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탐구하는, 그리고 꿰뚫어보는 느낌을 받는 시선이지만 악의 같은 것은 없는 순전히 차맛에 대한 궁금증을 피력하는 느낌이기에 밝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돌려준다. “물론이에요. 입맛에 맞으시나요?” “후후, 물론일세. 그럼 이정도의 홍차를 대접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함께 나온 음식들은 어떨까.” 물론, 홍차보다 요리 쪽을 자신한답니다. ------------------------------- - 달그락 한참을 각종 찬사와 더불어 요리에 푹 빠져 있던 노신사는 마지막 타르트를 입으로 옮기고는 연신 아쉽다는 듯 비어버린 접시와 자신의 배를 바라본다. 마치 더 맛보고 싶지만 배가 불러서 더 이상은 무리라는 무언의 표현 같이. 그렇게 한동안을 고민하다가 결국 더 이상 맛보는 건 포기했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후우.. 대단한 솜씨로구먼. 이 내가 이렇게까지 요리에 푹 빠져버린 건 정말 오래간만.. 아니 처음이 아닐까 싶네.” “과찬이세요.” “아니아니, 과찬이 아니야.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고 싶어지는구먼. 그렇지, 일주일 뒤면 원래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가씨는 그럼 어떻게 되는겐가?” “잠깐 도와드리는 것뿐이니까요. 시키씨가 돌아오시면 평소대로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린을 도우며, 이리야에게 휘둘리며, 루비아에게 당황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겠지. 아..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별로 평범하지는 않구나. “그런가. 아쉽구먼.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아가씨가 앞으로 이곳에 없을 예정이라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을 못하니 사진이라도 좀 찍을 수 있겠나?” “사.. 사진요?” “그렇네 사진.” 사진.. 다시 한번 노신사를 차분히 관찰한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제로. 마술적인 흔적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반인이다. 뭐, 딱히 문제될 건 없으려나. “저 같은 걸 찍으셔도.. 그걸로 괜찮으시다면 좋아요.” “오~ 고맙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나.” 가방을 뒤져서 꺼낸 것은 역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디지털 카메라다. “어디어디.. 자 찍겠네. 하나. 둘..” - 짤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도 노신사도 고개가 입구 쪽으로 향하기에 사진찍는 건 잠시 멈춰진다. 입구를 통해 들어온 건 양손에 재료가 든 비닐을 들고 서있는 아자카씨. “다녀왔어. 생각보다 마트에 사람이 많아.. 자..잠깐만요.” 아자카씨는 나와 노신사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본 즉시 당황하며 황급히 달려와 카메라 렌즈를 막아선다. 별다른 의도는 없이 그저 사진을 찍을 뿐인 행동인데 왜 저렇게 당혹스러워 하는 걸까. 손님과 나의 사이에 서서 렌즈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선까지도 차단한 채 사진촬영 금지를 선언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저희 가게에서는 점원에 대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으니까요.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어.. 그리 하다면 어쩔 수 없네만.. 정말 안 되겠는가.” “대단히 죄송합니다. 손님.”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노신사에게 당당하게 서서 거부의 의사를 표하는 그녀. 아자카씨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건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에요. 그 뒤로 하다 못해 내 이름을 묻고자 하는 노신사의 요청도 단호히 기각한 채 거의 쫓아내다시피 그 손님을 현관 밖으로 내보낸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몸을 돌려 이쪽으로 척척 하고 걸어오는 그녀의 기세에 나도 모르게 한발씩 뒤로 물러서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아자카씨에게 붙잡히고 만다. 무.. 무서워. “에.밀.리.아. 지금 정신이 있어?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이상 사진을 찍힌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알 텐데.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쩌려고 했어.” 사진은 예부터 혼을 찍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사체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마구중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때문에 각종 마술 행위에 매개체로 사용되곤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게 사진을 통한 저주. 때문에 아자카씨가 하는 말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본적인 자세다. “그..그게..” “게다가 너 같은 경우는 사진이라도 찍혔다가 무슨 파장을 불러올지 모른단 말이야. 앞으로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후회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노려보는 아자카씨의 위세는 정말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역시 아자카씨는 어딘지 모르게 늠름한 면이 있다랄까. 그런데 무슨 파장을 말하는 걸까? ----------------------------------------- - 8월 13일자 가디언지 푸드 칼럼. 『은빛 빙상에 흐르는 붉은 루비의 선율. 런던의 중심부 한웨이에 가면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찻집이 하나 있다. 전형적인 서구식 찻집의 외형 안에 들어가면 이국적인 모습의 가시달린 푸른 장미가 있다는 소문의 장소. 찻집 므네모쉬네는 그런 인식을 지니고 찾아가 본 곳이다. 결론부터 내자면 그 유명하다는 블루로즈와 그녀가 끓여낸다는 일본식 차의 맛을 느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허나 그런 것 따위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런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한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부드러운 맛을 느끼고 올 수 있었던 나는 이 나이에도 행운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순백의 순결한 은빛이 눈앞을 가리고 그 사이에 강렬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곧은 붉은빛이 어우러져 한 여성의 모습을 내 눈에 그려낸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 말까한 아직은 소녀티를 벗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0평생 살아오며 본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여성. 나는 요리 평론가지 사람에 대해 감상을 읊는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수백이 넘는 평론 중 그러했던 적도 없다. 허나 이번에는 그리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강렬한 빛과도 같이 다가왔으니까. 주문했던 음식은 고작해야 홍차와 스트로베리 타르트, 그리고 평범한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에 불과했지만 그 음식들에 과연 기존의 이름을 붙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외형만 그 요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한 차원 높은.. 그래 언젠가 왕립음악 홀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었을 때 가슴 속에 넘쳐흐르던 환희와 눈물. 요리를 한입, 그리고 또 한입 집어넣을 때마다 머릿속에는 불빛이 번쩍이고 가슴에는 전율과 행복이 충만해진다. - 중략 - 온갖 찬사와 박수를 거듭해도 모자랄 그런 요리와 차를 입에 대면서도 그 찬사의 절반, 아니 10분의 1도 해내지 못할 정도로 음식에 심취해 있었다. 앞에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의 모습은 가히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아름다움을.. 아니 아름다움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그녀의 미를 깎아내리는 거라고 생각될 정도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요리와 홍차에 정신이 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나의 감상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본다. 아쉽게도 그녀의 이름과 사진은 뒤이어 들어온 동양의 미녀에 의해 알아내지도, 찍어오지도 못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서둘러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미식가와 독자들이여. 그녀가 그곳에 존재하는 시간은 앞으로 6일이다. 아니 이 글이 인쇄되어 읽어지고 있을 때를 생각한다면 고작해야 5일뿐. 그 후에는 그곳에서 만날 수 없다고 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찰스 로빈슨』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3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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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이거 한번 입어보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며 아자카씨가 양손에 펼쳐 보인 옷은 전형적인 카페나 찻집의 종업원 차림.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조끼, 아래쪽의 폭이 좁은 미디스커트로 이루어져 있다. 뭐, 일반적인 웨이트리스 차림이라면 차라리 지금 입고 있는 사복을 입고 일하는 걸 선택하겠지만 이런 옷이라면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무엇보다 아래가 스커트로 되어 있다고는 해도 오래간만에 입어볼 남성복과 유사한 스타일이니 기분도 설레고. 그런데 이곳의 주인은 미키야씨와 시키씨고 그 두 사람이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은 없으니 저 옷은 찻집의 소유가 아닐 거라 생각하기에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아자카씨에게 물어본다. “이건?” “응? 아니 뭐.. 사실 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저기..그..” 생각 외로 그녀답지 않은 묘하게 우물쭈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아자카씨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봐 주자 한층 당황하더니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고 안절부절 하기를 수 초간.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듯 맞잡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나도 모르게 인터넷으로 주문...” “하아?” 나도 모르게 실없는 소리가 새어나간다. 그녀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옮겨온 복장을 살펴보지만 이거.. 단지 일주일치 일을 위해서 구매하기에는 상당히 비싸 보인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천도 고급스러운 소재인데다가 옷 끝의 마무리도 꼼꼼하게 되어있다. 거기에 상하의에 조끼까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아자카씨라면 이런 옷까지 준비한 상태에서 구두를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결론은 일종의 충동구매란 이야기. 당황해 하는 내 반응에 아자카씨는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며 “역시 갑작스러웠을까... 싫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아..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잠깐 들어가서 입어보고 나올게요. 에또 탈의실.. 탈의실..” 아자카씨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나 있을까. 그렇게 애처롭게 올려다보면 어떤 사람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신히 탈의실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와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본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한 아자카씨 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뭐, 이미 사온 걸 뭐라고 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잠자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도록 하자. 옷은 생각보다 입기 수월한 형태로 되어 있어 금방 갈아입고 나올 수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다 보니 걸음을 걸을 때 자연스럽게 보폭이 작아질 수밖에 없지만 그럭저럭 불편하지는 않다. “어.. 어때요?” 갈아입은 아자카씨 앞에서 보여주는 게 상당히 부끄러운 순간이지만(어떤 옷일지라도 남에게 감상 받는다는 건 부끄러우니까) 그래도 환하게 기뻐해주는 그녀에게 그런 내색 따위 할 수없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네. 굉장히 어울려 에밀리아. 사실 메이드옷 비슷하게 팔랑거리는 것으로 사볼까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옷은 싫어할 것 같았으니까. 좋아 그럼 나도 갈아입고 올게. 마무리 청소 부탁할게.” 윽. 메이드옷. 아자카씨 제대로 알고 있다. 그런 옷이었다면 그녀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더라도 내가 입을 리가 없고, 그녀의 충동구매는 말 그대로 무의미해졌을 게 분명. 그딴 부끄러운 옷 따위 런던에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그 소동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입고 싶지 않다. 물론 이 옷도 입기는 입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시키에 비교한다면 분하게도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신하니까 일본차와 일본다과는 내가 준비할게. 에밀리아는 홍차와 간단한 식사, 그리고 케이크를 부탁해.” ----------------------------- * 8월 12일 : 첫날 11시가 되어 찻집의 문을 열었지만 첫 손님이 오시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인기있는 찻집이라면 오픈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 므네모쉬네는 그 정도까진 아닌 듯. 문을 열고나서 30분쯤 지나자 찾아온 첫 손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차림의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 딸랑~ 자주 찾아오는 단골 중 한분인지 들어오자마자 프런트 쪽을 보고 미소를 지으려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자신이 들어온 곳이 항상 오던 그 찻집이 맞는 건지 확인하는 듯한 시선으로 실내를 죽 둘러보지만 다른 곳 일리는 없다.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 쪽의 테이블에 가서 앉아보지만 여전히 그녀 머리위에 맴돌고 있을 의문 부호는 사라 질줄 모르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첫 손님. 그녀의 고민을 알아차린 아자카씨가 서둘러 테이블로 나아가 밝은 미소와 함께 주문을 요청한다. 중년 여성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자카씨의 모습에 한순간 당황한 듯 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어서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저기.. 실례지만 이곳의 주인이 바뀐 건가요?” “아니랍니다. 주인께서 며칠 일이 있으셔서 잠시 가게를 봐드리는 것뿐이에요.” “예에..그렇군요. 음.. 그럼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이랑 다즐링을 부탁드려 볼까요.” 다즐링인가. 당장에라도 주방에 돌아가 차를 끓여서 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작할 때가 아니다. 손님의 주문을 주문서에 받아 적고 다시 한번 주문내역을 확인하는 아자카씨의 모습을 끈기있게 기다리자. 혹시라도 손님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거니까.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에 다즐링 주문받았습니다. 맞으신가요?” “네, 부탁드려요 호호..” “에밀리아, 초코시폰케이크 한 조각과 다즐링.” “네~” 드디어 시작이다. 미리 차를 끓이기 위한 도구는 모두 준비해뒀고 따뜻한 물로 다기의 예열까지 마쳐둔 상태.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인 만큼 차를 끓이는 동작 하나하나, 물의 온도 일도마다, 물의 양 한방울까지도 심혈을 기울여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다즐링을 끓인다. 마지막 한 방울인 골든 드롭까지도 찻잔에 담아내고 어제저녁시간을 이용해 미리 구워놓아 저온보관 해둔 초코시폰케이크의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플로어로 가져가 아자카씨에게 전해드린다. 원래라면 주방에서 나와 있으면 안 되지만 어차피 손님도 한 분 뿐이니까 첫 손님이 차를 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나 역시 플로어에 나와서 멀리서나마 바라본다. “주문하신 차와 케이크 나왔습니다. 그럼 천천히 즐겨주세요.” “고마워요 호호호. 젊은 아가씨가 친절도 하지.” 그렇게 말하고 접시와 잔을 들어 두 눈을 감은 채 향을 음미하는 손님. “음~ 향이 아주 그만인걸요. 어디 맛은.. 어머, 놀라워요. 이렇게 깊은 맛이면서도 전혀 떫은맛이 없네요. 정말 저기 서있는 아가씨가 직접 끓인 건가요?” 주방 문 앞에 서있는 나에게 시선을 보낸 채로 묻는 그녀에게 아자카씨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긍정의 말을 전한다. “물론이랍니다. 케이크는 어떠신가요? 케이크 또한 직접 만든 것이에요.” “어머나, 케이크까지? 어디어디.. 시폰케이크의 폭신한 감촉과 부드럽게 퍼지는 초콜릿의 달콤함..” 손님의 예찬은 그 뒤로도 꽤나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그 예찬 속에서도 한 모금씩 마시는 홍차와 조금씩 줄어드는 케이크는 그녀가 이곳에 있을 시간을 시시각각 줄여줬고 결국 마지막 한조각의 케이크까지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아쉽다는 표정으로 시계와 빈 접시를 한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성은 나에게로 다가와 두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짓는다. “정말 훌륭한 맛이었어요. 원래 주인 분들의 맛도 일품이었지만 아가씨의 맛은... 미안해요. 달리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잠시 동안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건가요?” 물음에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을 해본 결과 아마도 미키야씨와 시키씨는 오본이 끝난 직후 돌아오지는 않을 테니 오늘까지 포함한다면 일주일은 걸리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일까요? 아마 그 정도” “어머, 아쉬워라.. 그럼 그때까지라도 매일 찾아와야겠네요. 호호. 그럼 내일 또 봐요. 아가씨~” “아가씨라뇨..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짤랑~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으며 돌아가신 첫 손님을 시작으로 “이런 늙은이가 주책스럽게도 정신을 잃고 바라봤구먼. 허허 실례했네. 아가씨. 어디 그럼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걸 맛보도록 해볼까. 모처럼 이른 시간에 찾아왔으니 실론티와 그리 달지 않은 크림치즈케이크로. 얘야 너는 뭘로 하겠니.” “나는 우웅.. 초코치즈케이크!!” 손자를 데리고 나온 노년의 신사 분과, “아, 차 맛이 어째 조금은 떫어진 느낌이 들지만.. 어쩔 수 없죠. 주인분이 안계시니. 그래도 충분히 맛있으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주세요. 게다가 히가시..라고 하던가요? 함께 나온 다과 맛도 좋았어요.” 시키씨의 일본차 맛을 보기 위해 자주 찾아오는 단골로 보이는 젊은 여성(그녀의 평가에 아자카씨의 표정은 뒤에서 볼 때 보이지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미소와 씁쓸함이 혼재된 미묘한 표정이었을 거라고 예상한다), “여기 찻집, 우물우물.. 맞죠? .....네 맞겠죠.. 분명 저도 냠.. 확인하고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우물.. 슈룩.. 어떻게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제가 자주 가는 쩝쩝... 스파게티 전문점보다도 맛있는거죠? 찻집의 가면을 쓴 우물우물.. 스파게티 음식점 아닌가요? 네 제가 묻고도 어리석다고 냠냠.. 생각하고는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말하는 후아.. 냠.. 와중에도 손이 멈추지 않는 다는 것도 대단히 우물우물.. 실례라고 켁.. 물! 물!! 꿀꺽꿀꺽.. 휴우..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 아아, 지금 대단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죠?” 지나가다 허기가 져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학생까지. 참고로 이 남자 학생이 다른 손님이 주문하신 케이크와 홍차를 들고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두 손을 잡고는 ‘결혼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외쳤다는 건 가슴속 깊이 묻어두도록 하자. 만약 아자카씨가 억지로 떼어내 끌고나가지 않았다면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쟁반이 아니라 간장과 막야였을지도 모르니까. 이 외에도 여러 손님이 다녀가기는 했지만 예상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거나 예상보다 적게 온다거나 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일일 손님의 수와 비슷한 사람이 므네모쉬네를 방문했다. 게다가 그럭저럭 손님들은 대부분 만족한 듯 돌아가셨기에 찻집 대리일은 첫 출발이 좋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대로만 무난하게 시간이 흐른다면 일주일 정도는 금방이고, 지금까지의 손님들 반응으로 볼 때 앞으로의 평가도 괜찮을 것은 분명. 덕분에 손님이 다 드시고 난 빈 접시를 설거지하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진다. 대성공의 예감이랄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손님을 마지막으로 파스타가 다 떨어졌는데 어쩌나. 어디.. 플로어를 바라보자 손님은 한 사람도 없는 게 간만에 찾아온 정적과 여유가 감돌고 있다. 지금이라면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운다 해도 문제될게 없겠지. “아자카씨 파스타가 떨어졌어요. 이 앞쪽 마트에 좀 다녀올게요.” “이제 3시.. 슬슬 티타임 직전이라 손님이 뜸할 때네. 요리하고 차 끓이느라 수고했으니까 에밀리아는 쉬고 있어. 내가 가서 사오도록 할게. 가게 부탁해~” “에.. 네 잘 다녀오세요~” ---------------------------------------- - Interlude - 찻집 므네모쉬네는 이 근처에 한해서 상당히 유명한 찻집이다. 물론 흔히 맛보기 어려운 일본차의 맛이나 다과의 맛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주인인 젊은 일본여성의 소문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곳. 이국적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외모에, 이국의 전통 복장을 항상 하고 있는 여성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칼(비유가 아니라)을 지니고 있어서 그야말로 장미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입고 있는 푸른색의 옷에 빗대어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이 블루 로즈. 한때는 그녀의 소문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최근에는 그런 목적에서의 발길은 끊긴지 오래다. “호오.. 이곳인가. 소문난 블루 로즈의 찻집이.” 모처럼 그 소문에 이끌린 한 남성이 찻집을 향해 접근한다. 이상하다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라면 지금까지 소문에 이끌린 남자는 대부분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었던데 비해 이 남성은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새하얀 백발과 그와 잘 어울리는 잘 다듬어진 입가의 긴 수염. 그리고 커다란 안경이 어딘가의 교수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준엄한 인상의 노신사다. 그 누가 알리. 이 노신사야말로 영국 유명 신문 가디언의 요리 평론가인 찰스 로빈슨이라는 사실을. ===================================== 아자카씨가 재료를 사러 나간 후 찻집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여러 손님들로 북적이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플로어에 혼자 쓸쓸하게 놓여져 있는 것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기에 홍차라도 마시고 정리도 할 겸해서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의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사용한 재료의 잔해나 홍차의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들. 상당히 어지럽다면 어지러운 광경이지만 여러 손님들이 다녀가고 여러 요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잔뜩 선물 받은 후의 충만감은 이런 기분에 요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고 새삼 확인시켜준다. 특히나 오전에 다녀간 할아버지를 따라왔던 아이가 케이크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은 아이들이 어째서 천사라고 표현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해맑고 아름다웠다. 물론, 떠나려 하지 않고 내 허리에 매달려서 칭얼거릴 때는 조금.. - 짤랑~ 아차,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닌가. 현관에 달려있는 작은 방울이 이곳에 누군가가 찾아오셨음을 알려준다. 아자카씨가 나간 지 이제 겨우 몇 분 지나지 않았으니까 손님일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주방을 정리하던 손을 놓고 서둘러 플로어로 돌아가려 할 때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아무도 없는겐가? 누구 없소?” “자.. 잠시만요~!!” 플로어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건 현관 근처에 서 있는 흰 수염과 흰 머리가 중후하게 어울리는 초로의 노신사. “!!!!!” 내 등장에 반쯤 감겨있다고 생각되는 푸른색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놀라움을 표시한다. 이런 반응은 이미 충분히 적응해서 놀라울 것도 없지만 저런 노신사마저 그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약간은 씁쓸하려나. 물론 여자에게 있어 외모가 아름답다는 건 여러모로 유리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 남자들에게 받는 시선은 별로 유쾌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지금은 손님을 맞이하는 점원의 입장이다. 그런 감정은 속으로 숨긴 채 평정을 가장하고 손님의 달아난 정신을 불러준다. “손님?” “아.. 흠흠.. 미안하네. 이상하구먼, 이곳은 분명 동양의 여성이 하는 찻집이라고 들었는데..” 내게 주어지던 부담스러운 시선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입구 근처에 서서 이상하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는 노인. 아마도 시키씨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인 듯하기에 시키씨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키씨는 잠시 일본을 다녀오시게 되어서요. 잠시 동안 가게를 돌보는 것뿐이랍니다.” “그런가.. 이거 아쉽구먼.”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돌아오실 텐데 다시 찾아오시는 건 어떠세요?” “흐음.. 아니 괜찮네, 일본차를 마셔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평소처럼 홍차나 즐기고 가볼까. 허허” 노신사는 할아버지 특유의 잔잔하고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지금의 플로어에는 나와 그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자리에건 앉을 수 있기에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충실한 점원으로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 준비된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손님의 의사를 묻자. “주문은 뭘로 하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어디, 브라우니와.. 스트로베리 타르트.. 생각보다 메뉴가 적구먼.” 지금 사용하고 있는 메뉴판은 원래의 것과는 다른 일주일 한정의 단순화된 메뉴를 담고 있다.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이 일주일간에는 직접 만드는 메뉴만을 담고 있기에 너무 많은 종류를 다룰 수는 없으니까. “죄송해요.. 직접 만들다보니 많은 메뉴를 준비할 수 없었답니다.” “호오.. 그런가. 그럼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홍차는 음.. 적당히 아가씨가 추천하는 걸로 부탁하네..”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즐겨 드시는 차가 있으시다면..” “허허, 그걸로 충분하다네. 모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단 둘이 찻집에 있으니 아가씨의 추천을 받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하..하하.. 농담도 참.. 브라우니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그리고 제가 추천하는 홍차 맞으시죠?” 노신사가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 발길을 주방으로 향한다. 미키야씨와 시키씨가 일본으로 떠나고 그 대리를 맡은 아자카씨도 자리에 없는 지금. 이곳 찻집 므네모쉬네를 지키고 있는 건 오직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한층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한 손님의 만족이 좌우되는 거니까 그럴 수밖에. 여기서 잘해보인다면 새로운 단골손님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니 시계바늘은 오후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주문한 메뉴와 시간으로 보건데 조금은 이른 티타임을 갖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라고 예상. 그렇다면 홍차의 종류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영국의 자랑이라 불리는 아마드의 애프터눈 티. 사실 F&M의 제품을 사두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가격도 비싸고 그것으로는 하루치 판매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브랜드다. 그래도 그 품질은 나쁘지 않아서 잘만 끓인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이랄까. 주전자의 물이 끓는 동안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의 준비를 동시에 진행한다. 타르트의 파이부분은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살짝 오븐에서 데우고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어 4등분. 위에 보기 좋게 얹는다.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야 필요한 재료는 미리 구비되어있고 베이컨과 닭고기를 적당한 온도에 비전의 소스를 사용해서 살짝 익혀주면 끝이니 별다른 수고도 필요 없고. 그렇게 요리와 홍차가 준비되고 쟁반에 받쳐 플로어로 들고간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스트로베리 타르트와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그리고 홍차입니다.” “오, 벌써 나왔나. 어디.. 아가씨가 추천하는 홍차의 맛을 즐겨보도록 할까.” 찻잔을 들어 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로 가져가는 노신사의 모습에서 세월의 향기와 기품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찻잔을 손에 드는 모습, 입가로 가져가는 움직임, 홍차를 마실 때 찻잔을 기울이는 정도, 입안으로 차를 흘려넣고 그 맛을 음미하듯 그리고 그 향을 음미하듯 눈을 지긋하게 감은 모습까지. 어지간히 몸에 배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자연스러운 기품이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호오.. 이건 부드러우면서도 가벼운 이 맛은 아마드의 애프터눈 티가 분명할 텐데..”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노신사. 덕분에 정신이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오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만약 방금의 그 말이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너무나 어울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치 채지는 않았겠지? 한쪽눈을 살그머니 노신사쪽으로 향해서 기색을 살펴보지만 딱히 내 행동에 이상한점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같은 브랜드를 사용했음에도 이런 맛이 나올 수도 있구먼. 허허, 오늘 이 늙은이가 새로 견문을 넓힌 느낌이야. 이거 아가씨가 직접 끓인겐가?” 세월이 쌓여있는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물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탐구하는, 그리고 꿰뚫어보는 느낌을 받는 시선이지만 악의 같은 것은 없는 순전히 차맛에 대한 궁금증을 피력하는 느낌이기에 밝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돌려준다. “물론이에요. 입맛에 맞으시나요?” “후후, 물론일세. 그럼 이정도의 홍차를 대접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함께 나온 음식들은 어떨까.” 물론, 홍차보다 요리 쪽을 자신한답니다. ------------------------------- - 달그락 한참을 각종 찬사와 더불어 요리에 푹 빠져 있던 노신사는 마지막 타르트를 입으로 옮기고는 연신 아쉽다는 듯 비어버린 접시와 자신의 배를 바라본다. 마치 더 맛보고 싶지만 배가 불러서 더 이상은 무리라는 무언의 표현 같이. 그렇게 한동안을 고민하다가 결국 더 이상 맛보는 건 포기했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후우.. 대단한 솜씨로구먼. 이 내가 이렇게까지 요리에 푹 빠져버린 건 정말 오래간만.. 아니 처음이 아닐까 싶네.” “과찬이세요.” “아니아니, 과찬이 아니야.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고 싶어지는구먼. 그렇지, 일주일 뒤면 원래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가씨는 그럼 어떻게 되는겐가?” “잠깐 도와드리는 것뿐이니까요. 시키씨가 돌아오시면 평소대로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린을 도우며, 이리야에게 휘둘리며, 루비아에게 당황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겠지. 아..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별로 평범하지는 않구나. “그런가. 아쉽구먼. 부탁이 하나 있는데 아가씨가 앞으로 이곳에 없을 예정이라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을 못하니 사진이라도 좀 찍을 수 있겠나?” “사.. 사진요?” “그렇네 사진.” 사진.. 다시 한번 노신사를 차분히 관찰한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제로. 마술적인 흔적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반인이다. 뭐, 딱히 문제될 건 없으려나. “저 같은 걸 찍으셔도.. 그걸로 괜찮으시다면 좋아요.” “오~ 고맙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나.” 가방을 뒤져서 꺼낸 것은 역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디지털 카메라다. “어디어디.. 자 찍겠네. 하나. 둘..” - 짤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도 노신사도 고개가 입구 쪽으로 향하기에 사진찍는 건 잠시 멈춰진다. 입구를 통해 들어온 건 양손에 재료가 든 비닐을 들고 서있는 아자카씨. “다녀왔어. 생각보다 마트에 사람이 많아.. 자..잠깐만요.” 아자카씨는 나와 노신사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본 즉시 당황하며 황급히 달려와 카메라 렌즈를 막아선다. 별다른 의도는 없이 그저 사진을 찍을 뿐인 행동인데 왜 저렇게 당혹스러워 하는 걸까. 손님과 나의 사이에 서서 렌즈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선까지도 차단한 채 사진촬영 금지를 선언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저희 가게에서는 점원에 대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으니까요.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어.. 그리 하다면 어쩔 수 없네만.. 정말 안 되겠는가.” “대단히 죄송합니다. 손님.”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노신사에게 당당하게 서서 거부의 의사를 표하는 그녀. 아자카씨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건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에요. 그 뒤로 하다 못해 내 이름을 묻고자 하는 노신사의 요청도 단호히 기각한 채 거의 쫓아내다시피 그 손님을 현관 밖으로 내보낸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몸을 돌려 이쪽으로 척척 하고 걸어오는 그녀의 기세에 나도 모르게 한발씩 뒤로 물러서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아자카씨에게 붙잡히고 만다. 무.. 무서워. “에.밀.리.아. 지금 정신이 있어?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이상 사진을 찍힌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알 텐데.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쩌려고 했어.” 사진은 예부터 혼을 찍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사체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마구중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때문에 각종 마술 행위에 매개체로 사용되곤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게 사진을 통한 저주. 때문에 아자카씨가 하는 말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본적인 자세다. “그..그게..” “게다가 너 같은 경우는 사진이라도 찍혔다가 무슨 파장을 불러올지 모른단 말이야. 앞으로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후회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노려보는 아자카씨의 위세는 정말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역시 아자카씨는 어딘지 모르게 늠름한 면이 있다랄까. 그런데 무슨 파장을 말하는 걸까? ----------------------------------------- - 8월 13일자 가디언지 푸드 칼럼. 『은빛 빙상에 흐르는 붉은 루비의 선율. 런던의 중심부 한웨이에 가면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찻집이 하나 있다. 전형적인 서구식 찻집의 외형 안에 들어가면 이국적인 모습의 가시달린 푸른 장미가 있다는 소문의 장소. 찻집 므네모쉬네는 그런 인식을 지니고 찾아가 본 곳이다. 결론부터 내자면 그 유명하다는 블루로즈와 그녀가 끓여낸다는 일본식 차의 맛을 느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허나 그런 것 따위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런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한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부드러운 맛을 느끼고 올 수 있었던 나는 이 나이에도 행운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순백의 순결한 은빛이 눈앞을 가리고 그 사이에 강렬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곧은 붉은빛이 어우러져 한 여성의 모습을 내 눈에 그려낸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까 말까한 아직은 소녀티를 벗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0평생 살아오며 본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여성. 나는 요리 평론가지 사람에 대해 감상을 읊는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수백이 넘는 평론 중 그러했던 적도 없다. 허나 이번에는 그리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강렬한 빛과도 같이 다가왔으니까. 주문했던 음식은 고작해야 홍차와 스트로베리 타르트, 그리고 평범한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에 불과했지만 그 음식들에 과연 기존의 이름을 붙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외형만 그 요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한 차원 높은.. 그래 언젠가 왕립음악 홀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었을 때 가슴 속에 넘쳐흐르던 환희와 눈물. 요리를 한입, 그리고 또 한입 집어넣을 때마다 머릿속에는 불빛이 번쩍이고 가슴에는 전율과 행복이 충만해진다. - 중략 - 온갖 찬사와 박수를 거듭해도 모자랄 그런 요리와 차를 입에 대면서도 그 찬사의 절반, 아니 10분의 1도 해내지 못할 정도로 음식에 심취해 있었다. 앞에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의 모습은 가히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아름다움을.. 아니 아름다움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그녀의 미를 깎아내리는 거라고 생각될 정도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요리와 홍차에 정신이 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나의 감상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본다. 아쉽게도 그녀의 이름과 사진은 뒤이어 들어온 동양의 미녀에 의해 알아내지도, 찍어오지도 못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서둘러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미식가와 독자들이여. 그녀가 그곳에 존재하는 시간은 앞으로 6일이다. 아니 이 글이 인쇄되어 읽어지고 있을 때를 생각한다면 고작해야 5일뿐. 그 후에는 그곳에서 만날 수 없다고 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찰스 로빈슨』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3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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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제 손님이 그렇게 늘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기에 상당히 케이크나 타르트류가 부족했다. 전날의 매출에 근거해서 만들어 놓았던 양으로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그 배가 넘게 준비를 해 두었으니 준비상황으로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어찌 찻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 수 있으랴. ------------------------------------------- “겍..”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찻집의 앞. 순간 내가 다른 곳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절대 잘못 찾아올 수 없는 위치에 잘못 알아볼 수 없는 아담한 므네모쉬네의 전경은 그 가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제정신으로 돌려놓는다. - 웅성웅성 못되도 50명은 되어 보이는 손님의 행렬.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자 이제 겨우 9시다. 찻집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 상황. 물론 찻집의 입구에 세워놓은 영업시간 표지판에도 명확히 AM 11:00 ~ PM 9:00 라고 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의 줄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주장하듯 연신 움직이며 더구나.. 늘어나고 있다!?!? 모자의 챙을 양 손으로 잡아당겨 옆모습까지 가리고 나서야 인파를 헤치고 문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중간 중간 뒤에서 ‘오오 저 아가씨가!!’ ‘그녀인가!!’ 라던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건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자. 환청이 들리다니 몸이 많이 피곤한 거겠지... - 짤랑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심각한 표정의 아자카씨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테이블에 앉아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간단한 인사를 한 것이 전부이고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어딘가 안좋아 보이기도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까. “아자카씨?” “하아... 에밀리아, 이것 좀 읽어볼래?” “네?” 아자카씨가 건내는 건 신문의 한 면. 신문의 이름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영국의 대중적인 신문 가디언지다. 오늘 무슨 기사라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신문에 실린 기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 모르기는 몰라도 신문의 한 부분을 바라보는 내 두 눈은 그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뜨여진 채로 신문 가까이 노려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기사의 제목부터 끝까지 읽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 “아...아아아아..아자카씨!! 이.. 이건?!” “이해했지? 이틀 전에 찾아왔던 그 노인.... 잘도 해줬겠다..” 아, 그 노신사분. 확실히 사진을 찍고 이름을 물어보다 아자카씨에게 제지당해서 돌아갔던 사람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아니 분명 칼럼의 대부분은 칭찬과 찬사 일색일 뿐 악담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지만 그래도 작금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으니... 아아아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중요한건 결국 하나의 사실이다. 창을 통해 바라본 바깥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 “아자카씨, 이거.. 가디언지죠? 이름이 비슷한 가디온지라거나 하는건 아니죠? “그래, 가디언지지.. 기대해도 좋아. 저건 시작에 불과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다시 한번 칼럼으로 눈을 돌려 마지막에 써있는 칼럼가의 이름을 살기를 담아 노려봐 준다. 찰스 로빈슨이라고 했겠다.. 잊지 못할 선물을 기대하세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제 저녁에 구워둔 케이크와 타르트.. 각각 몇인분이었지?” “기껏해야.. 각각 100인분.. 이었을거에요.” “개점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 지금 이렇게 멍하니 서있을 여유 따위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아자카씨가 다음에 할 말 정도는 당연하게 이해한다. 나도 완전히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없겠지” “없겠죠.” ------------------------------------------------ “어이 새치기 하지마라!” “누가 할 소리를!!” 이곳 므네모쉬네에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은 고작해야 일곱 테이블. 한 테이블에 네 사람씩 앉는다고 해도 한번에 소화해낼 수 있는 손님의 수는 28명에 불과하다. 내가 왔을 때 줄을 섰던 사람들의 수가 50명 남짓 하는 수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여전히 줄을 서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허용가능 범위다. 찻집에 나온 9시부터 지금 이렇게 문을 연 11시까지. 두시간 동안은 마치 내가 케이크 구워내는 기계가 된 느낌으로 오븐의 문을 열고, 생크림으로 장식을 하고, 과일을 자르고, 또 그걸 다시 반복했다. 그 결과 스스로도 놀랄 만큼 준비를 해낼 수 있었고 이렇게 전쟁을 앞두고 만전의 준비를 마친 보급 사령관과 같은 자세로 적(손님)을 맞이할 태세를 갖춘다. - 웅성웅성 플로어의 일곱 테이블은 삽시간에 주인이 생겨버리고 플로어의 치프. 야전 사령관인 아자카씨는 테이블 하나를 돌 때마다 적은 명령서(주문표)를 잠시의 지체도 없이 주방으로 전달한다. “브라우니가 셋, 스트로베리 타르트가 둘, 로스트비프 샌드위치가 하나 - 중략 - 얼그레이 셋!” “네!” 주문을 받은 즉시 보관한 냉장고 담긴 재료와 미리 구워둔 빵을 바탕으로 모든 주문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주문이 벽을 넘고 방어선을 돌파하여 이 몸에 다다른다 하여도 몸은 검으로 되어있기에 다소의 고난이라 할 수 있는 이 정도의 난관은 막아낼 수 있다. 오른손은 과일을 자르고, 왼손은 물을 끓인다. 다 자른 과일은 한쪽에 놓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만전의 상태를 기한 채로 오른손으로 샌드위치에 필요한 빵을 넓게 펼쳐 놓는다. 물이 끓는 것을 확인하는 사이 비어있는 왼손은 생크림을 들어 타르트위를 장식하고... “아자카씨!!” “응!!”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케이크류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이상 시간을 소요하는 건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은 샌드위치와 동시에 여럿을 준비할 수 있는 홍차류 뿐.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조금은 남았기에 손님들이 스파게티류를 주문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 가닥의 위안이 된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주방에서 내어진 요리와 홍차를 모조리 내어갈 테이블에 맞게 각각의 쟁반에 담아지고 한치의 오차도, 단 하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주문한 사람들에게로 전달된다. 단 한번 주문을 받았을 뿐인데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처리하는 아자카씨 역시 대단한 사람. 중간중간, “그 은발의 아가씨는 어디 있는 겁니까?” “주방에 있는 아가씨 얼굴 좀 보여줘요~!” 라는 외침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날카로운 미소와 함께 상대를 압박하는 아자카씨 덕분에 그러한 외침들은 이내 사그라지고 플로어에서는 찻집의 본래 목적인 차와 다과를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좋아 이렇게만 처리한다면 손님들도 자신들의 시간이 있을게 분명하고 언제까지고 줄을 서 있을 리가.. 있다?!!? 아니, 또 늘었어? 처음에는 50명 남짓이었던 줄이 분명 절반 가까이 플로어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창문을 통해 세어도 70명을 헤아린다. 아니 이보세요들. 여러분 출근 안 해요? 학생들로 보이는 너희들 학교는? 생전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도 무패, 불패의 성녀(?)로 이름을 날렸던 나지만 이정도의 위기를 경험해본 기억은 그야말로 손꼽을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뺨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고 온몸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탈바꿈 한다. 잊어서는 안돼. 여기는 전장이다. 꼭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것은 그저 찰나. 첫 번째 손님의 집단이 서서히 줄어드는가 싶더니 약간의 여유도 없이 빈자리는 바로 채워진다. 당연히 아자카씨는 착실히 주문을 받아 적고 “초코 치즈 케이크 둘!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하나! 크림스파게티 둘! 다즐링 셋! 얼그레이 하나!!” 이제는 스파게티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나의 전장(주방)으로 재 진입하자. “네!” ------------------------------------------------- * 8월 14일 오후 2시 “아자카씨. 더는 무리에요.” “큭.. 어떻게든 안 될까?” 손님과의 치열한 사투가 계속된 지 벌써 세 시간. 그동안은 탄약과 보급이 충분했기에 그럭저럭 전선유지(줄의 길이)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그래, 지난 밤에 준비해둔 케이크류 100개와 타르트류 100개. 거기에 오늘 오전에 추가로 준비한 각각 100개씩 해서 총 400개의 물량은 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동이나 버렸다. 이제부터는 샌드위치와 케이크, 타르트를 동시에 만들어야하는 극한의 상황이 도래하고 만 것. 그나마 식사때가 지나서 스파게티의 주문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만 케이크가 떨어진 것과 스파게티를 주문받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스파게티를 선택하겠다. 그만큼 물량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윽.. 억지로라도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질의 저하는 피할 수 없어요.” 상태가 나쁜 요리를 사람들에게 내놓는다니. 차라리 요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만큼 자존심에 큰 상처이지만 불가피하게도 지금은 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찻집 므네모쉬네의 이름을 걸고 움직이고 있는 상황. 만약 내 개인적 만족에 일하는 걸 그만둔다면 어떻게 미키야씨와 시키씨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때문에 질을 낮춰서라도 손님의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논의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에밀리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봐 어떻게든 주문을 케이크가 아닌 샌드위치나 스파게티류로 권유해볼 테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그녀의 전장(플로어)을 향해 나아가는 아자카씨. 잊어서는 안 되는 게 나만 곤란한 것이 아니다. 플로어에서 직접 손님을 대하고 있는 아자카씨를 생각해서라도 약한 소리는 금물. 그래, 질이 낮아지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그 폭을 좁히면 된다. 정확한 기계와 같은 움직임으로 한 치의 낭비도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래 이 정도에 부러질 검이 아니다. 파이팅 에.. “홍차 쉬폰 하나! 블루베리 타르트 하나! 클럽하우스 샌드위치 둘!! 애프터눈 티로 셋!!!” “전의를 다질 시간도 없는거에요~!?! 게다가 므... 스파게티는 하나도 없잖아요!!” 불만을 토로할 상대는 이미 손님의 호출로 플로어로 돌아가 버렸기에 내 절규는 허공에 메아리치고 만다. ------------------------------------------ * 8월 14일 오후 5시 “케이크를 안고 익사했어요..” “무슨 소리야.. 그보다 슬슬.. 왔지 그게?” “역시 아자카씨.. 정확하시네요.” 생각하고 싶지 않던 치명적인 타격. 재료가 이제 거의 바닥이다. 그것도 어느 한 종류에 한정된 것이아니라 케이크, 타르트, 스파게티, 샌드위치, 심지어 홍차에 이르기까지 전 종류에 걸쳐서 재료가 바닥을 보인다. 전화로 주문을 넣었지만 주문한 재료가 도착할 때까지는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린다. 문제는 지금 당장 필요한 재료도 이제 거의 없다는 것. 상황 상 20분이면 완전히 동이 나고 만다. 창밖에는 분명 오전에 비하면 상당히 줄어있는 손님의 행렬이 보이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대략 20명 정도? 물론 플로어는 여전히 가득 찬 상태. “10분.. 10분만 버틸 수 있겠어?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다녀올 테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아자카씨의 표정은 비장한 각오로 굳어있다. 그녀가 하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플로어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 오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자카씨는 최선을 다해 내가 노출되는 것을 막아왔지만 이제는 버텨낼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혼자서 저만한 수의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절대로 무리일거야.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전 아자카씨를 믿어요.”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잘도 여기까지 버텨왔으니까. 여기서 무너지기에는 너무나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 짤랑~ 아자카씨가 바람과 같이 문밖으로 쏘아져 나간 직후 새로 들어온 손님을 향해 모든 힘든 기색을 감춘 채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내가 나타나자 갑작스레 플로어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는 착각, 아니 현실인가? 분명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정말 짧은 시간동안의 사라짐. 그 직후, “““““오오오!!!!!!!!!!!!”“”“” “아아 행복해!!” “죽어도 여한이 없어!!” 플로어가 터져나갈 기세로 함성이 내질러진다. 각오했던, 아니 그 이상의 폭풍같은 반응이다.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뛰어들어 숨어버리고 싶은 시선과 함성의 집중. 아니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겁니까? 평소에 내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이정도 반응은 아니었잖아요? 게다가, 영국신사라는건 어디다 팔아버린 걸까. 그래도 나는 지금 이곳의 점원이다. 주문을 받아야... 억지로 평정을 가장한 채 목적한 손님에게 주문을 요청한다. “손님, 주문하시겠나요?” “.............” 젊은 남자 손님.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손님?” “당신을 주문하겠습니다!!” 하아?!? ======================================================== [Closed] 저녁 9시가 되기 무섭게 입구에 걸려있는 팻말을 Open에서 Closed로 돌려놓고 나서야 우리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손님의 물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습격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으로 보였기에 아직도 외부에 많은 사람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몰차다면 매몰차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끄... 끝났..다?” “네.. 끝났네요...” 덕분에 나와 아자카씨는 오늘 오전 11시 이후로 처음 맞이하는 정적과 고요, 그리고 편안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었고 플로어의 테이블 하나에 앉아 그대로 엎드려 있다. 그 상태에서 고개만을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린 채 시작하는 하루의 정리. 저녁때쯤 아자카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찰나 손님들 사이에서 한 손님에 대한 집단 린치가 있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성공적인 하루라 할 수 있지만 그런 성과를 거두어낸 나와 아자카씨는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고개조차 끄덕일 기력이 없고 그저 엎드린 채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으니까. 얼마나 그렇게 엎드려있었을까. 정적을 깨고 먼저 이성을 찾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역시 똑 부러지는 아자카씨. “오늘 얼마나 팔았지..” “에.. 잠시만요.. 케이크가 400여개.. 타르트가 300여개... 스파게티 50여개.. 샌드위치 300여개... 홍차류 900여잔... 일본차 종류와 그쪽 다과는 전무해요..” 처음 준비했던 게 케이크 100개에 타르트 100개였던 걸 생각하면 몇 배로 늘어난 건지.. 그야말로 정신없이 케이크를 굽고 스파게티를 삶고 타르트를 굽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홍차를 끓이는, 그런 하루. 손님은 홍차를 마시지 않은 손님도 있었으니까 아마도 홍차의 수를 조금 넘는 1000명에 육박하리라 본다. 단 둘이 천명에 달하는 손님을 상대했으니 우아.. 지칠 만도 하다. 문제가 있다면, “내일도 계속 되는 거겠죠..” “그렇겠네...” 오늘로 끝이 아니라는 것. 단 하루만 이렇게 되었던 거라면 그래도 버틸 여지가 있는 거지만 문제는 아직도 미키야씨 일행이 돌아오려면 4일이나 남았다는 사실과 그 4일 사이에 손님이 줄어들 가능성은.. 없겠지. ------------------------------------------ 맨션까지 비척비척 겨우 돌아와 문을 열자, 요 며칠사이 본적이 없는 밝고 기운찬 린이 나를 반겨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로 과제가 마무리 된다고 했던가. “늦었네, 에밀리..아?” “에에... 린 돌아와 있네에~” 서번트는 피로라는 걸 지니지 않는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피로뿐이고 정신적인 면은 서번트가 조금 더 강인하고 버틸 수 있을 뿐 인간과 큰 차이는 없다. 때문에 그런 린에게 나 또한 밝게 대해주고 싶지만 하루 내내 받아온 정신적 피로감에 적당히 대답하고는 그대로 욕실로 향한다. 지금 당장 따뜻한 물에 들어가고 싶어.. “미안 나~ 목욕 먼저 할 게에~” “에밀리아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하다. 뭐니뭐니해도 진실대로 말하면 분명 바보라거나 머저리라거나 말미잘에 해삼 등 온갖 매도의 말이 날아들 테니까. 우으.. 생각만해도 골치가 아프다. 지금은 그저 어서 욕조로 들어가는 것만을 우선시 하도록 하자. 욕실 문을 열고 불을 켜면 부드러운 빛이 가득한.... 어라? 욕실이 언제부터 창고로 변했기에 커다란 상자들만 가득한 걸까. “후에~?” “거기는 창고야..” 뒤를 보지 않아도 린이 머리에 손을 짚고 있을 것이라는 일쯤은 예상할 수 있다. - 참방~ 따뜻한 물을 가득채운 욕조에 몸을 뉘어 놓고 나서야 그제야 하루 종일 쌓여있는 피로가 풀려가는 느낌과 함께 기분 좋은 온기가 피부를 통해 몸 안 곳곳으로 스며들어온다. 천국이 따로 없네..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만큼................................................................................... ......................................................................................아차.. 잠깐 정말로 잠들어 버렸나. 몸을 담그고 있던 물이 다 식어서 미지근해진 걸로 볼 때 꽤나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듯 싶다. 일단 여전히 감겨있는 두 눈을 뜨니, “이 바보 에밀리아!! 욕조에서 잠들면 어떻게 해!! 웃.. 물이 다 식었잖아!!” 린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 * 8월 15일 - 린 -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를 준비한 뒤 찻집을 향해 나가려하는 에밀리아의 뒷모습이 어딘가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그럼 다녀올게.” “괜찮겠어? 어제 밤을 보면 걱정인데.” 자정이 다 되어 비척거리며 돌아온 에밀리아. 찻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영령을 지치게 만들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저 아이는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로부터 도망치는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직하게 정면 승부만을 고집할게 분명하다. “아하하.. 괜찮아. 앞으로 4일정도면 끝나는 걸. 그럼 다녀올게~” “아..응. 한번 찾아가 볼게.” 그렇게 말했을 때 에밀리아의 반응은 어딘지 모르게 당황스러워 하는 느낌이었지만 내가 그 점에 대하여 물어보려 하자 건성건성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간다. 뭐야 저 녀석.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아니라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뻔하지 뭐, 그 성격이 어디 가지 않는 만큼 또 어떤 트러블에 말려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이따 꼭 찾아가 봐야겠는 걸. - 딩동~ 응?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에밀리아라면 굳이 벨을 누르지 않고도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 애 일리는 없다. “누구세요” “어서 빨리 이 문을 여세요. 미스 토오사카.” “풉..!!!” 루.. 루비아!!?! 아침부터 무슨 열불나는 소리를 내려고 찾아오는 거지?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쳐들어온 적을 피하는 것은 토오사카의 당주에게 있을 수 없는 불명예. 각오를 굳히고 힘주어 손잡이를 비튼다. - 철컥 아아 제길, 녀석은 이런 아침인데도 완벽하다. 섬세한 공을 들여 빗질하고 다듬은 금발의 머리카락, 녀석의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인 푸른색 드레스도 완벽. 오른손의 신문도.. 응? 신문?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이신가요. 미스 에델펠트?” “에밀리아는 있나요. 설마 벌써 나간 건 아니겠지요.” “안타깝게도 방금 전에 나갔답니다. 에밀리아에게 무슨 용무라...” 에밀리아가 나갔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루비아의 태도가 갑자기 격해지며 지금까지의 그녀라면 하지 않을 모습으로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오며 내 양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한다. 이...이이 무슨 짓이야!! “나갔다고요?!?! 왜 막지 않았나요. 미스 토오사카! 당신은 신문도 안보는 건가요!?!” “무.. 물론 봐요!! 다만 최근에 바빠서... 아니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게다가 녀석이 보라고 나에게 들이대는 신문은 가디언지. 나는 가디언지를 보지 않는데 말이지 왠지 억울하다. 루비아가 가리키는 부분은 평범한 푸드 칼럼에 불과한 곳. “평범한 푸드 칼럼이네요. 평론가는 찰스 로빈슨... 은빛 빙상에 흐르는 붉은 루비의 흐름..” 살짝 닭살이 돋는 표현인데. 은색과 붉은 색인가~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가 생각나는 이미지. 그렇게 가벼운 생각으로 읽던 칼럼은 가운데 들어있는 므네모쉬네라는 단어부터 몰입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의 소감은 ‘바보 에밀리아. 또 저질렀구나..’ “........미스 에델펠트?!!?” “이제 이해했나요. 미스 토오사카?” 이해하고 말 것도 없다. 단지 읽기만 해도 지금 에밀리아가 가있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 있을 지는 불보 듯 뻔한 이야기. 거기에 이 신문은 어제의 신문이다. 이미 일은 어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고 지난밤 녹초가 되어 돌아온 에밀리아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예감은 확신으로 변한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거실에 비치된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려댄다. 여느 때와 같은 소리의 전화벨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급박하게 경종을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전화기를 향해 다가가는 와중에도 벨소리는 멈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울려댄다. ----------------------------------------- - 에밀리아 - 혹시나 하는 심정은 역시 나로 바뀌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스스로의 선택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미 므네모쉬네의 앞에는 기나긴 줄이 늘어서 있다. 아니, 오히려 어제의 그것보다 더 긴 줄. 그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전장(찻집)으로 한걸음, 한걸음 전진한다. 줄을 지나쳐 가며 느끼는 감상은 많다는 감정 하나뿐이다. 아직 오픈하기 두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늘어서 있는 줄은 앞으로 얼마나 길어질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준비는 어제보다 확실하다. 어제는 어떠한 대비도 없이 밀려드는 손님의 군세를 막아내느라 탈진상태에 이르렀던 거지만 오늘은 다르다. 문을 닫고 나서 만들어둔 케이크와 타르트의 양만해도 제각각 300개. 오븐이 터져버릴 것처럼 굽고굽고 또 구웠기에 분명 부족할 거라 예상은 하지만 분명 만전을 기하고 있다. 덕분에 - 짤랑~ 문이 열릴 때 항상 들려오는 작은 방울의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Welcome to hell'이라는 소리로 들려온 건 분명 나의 착각이다. 어디까지나 방울소리에 불과할 뿐인걸. 그보다 그렇게 들어선 홀에는 아자카씨가 어제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은 채 마치 적진을 노려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어서와. 에밀리아.” “네, 오늘도 힘내요 아자카씨.” 서로를 바라보며 힘없는 미소를 교환. “그나저나.. 네가 볼 때는 어때? 늘었지?” “네에.. 늘었네요..” 역시나 줄은 다시금 시시각각 늘어나고 벌써 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줄이 길어진 이유는 자명. 어제는 남성이 대부분이었다면 오늘은 중간 중간 여성손님이 눈에 띈다. 게다가 신문기사가 나간 지 오늘로 이틀째라는 것을 생각하면 첫날은 미처 시간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오늘은 다를 터. 게다가 앞으로 4일 동안 장담하지만 절대로 줄어들 리가 없다. 그야말로 물밀 듯 밀려든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손님의 홍수를 나와 아자카씨는 감당해 내야 하는 것. 그런데 저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서 들어와야 할 정도로 이곳에 꼭 오고 싶은 걸까? ----------------------------------------- * 8월 15일 오전 10:58분 “아자카씨” “에밀리아” 11시가 되기 2분전. 이제 2분 뒤면 문 밖에 서있는 저 많은 사람들을 다시 상대하기 시작해야 한다. 서로 마주 본 채 눈빛을 교환하고 이제부터 재개될 전투를 대비하여 전의를 다진다. 믿을 건 오직 서로의 옆에 있는 동료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모두가 적(손님)이다. 비축된 무기(음식)를 십분 활용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적(손님)의 공격(주문)을 철저히, 그리고 완벽하게 방어해 주는 것. 그것이 오늘 이곳 므네모쉬네 전투에 임하는 나와 아자카씨의 자세. [Open] 자 문이 열린다. ================================================== 조아라에서도 연재 재개 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단 이곳은 현재 연재분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네요 ㄷㄷ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35 | 추천 3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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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여기 주문~!!] 네~ 잠시 만요~! 거기 무리해서 들어오려고 하지 마세요!! 새치기는 안돼요! [주문 멀었어요!?!?] 네네 곧나갑니다~~“ 바야흐로 아자카씨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입구를 통해 강제 진입을 기도하는 손님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 당연히 그녀는 사람들의 진입을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이미 플로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일 또한 한쪽에 내팽겨 칠 수 없기에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을 반복한다. 설상가상으로 입구의 바깥에서는 거친 목소리와 손님들끼리 다투는 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보자면 “어디서 새치기를 하는 거야 이 사람이!!” “거 쩨쩨하게 굴고 있네. 여기 들어가는데 목숨이라도 걸었수?” “나는 벌써 세 시간째라고요!!” “그러는 나는 어떻고! 어제 찾아왔다가 결국 그냥 돌아간 사람이야!” “아 그래서 어쩌라는 거에요! 새치기한 게 잘했다는 건가요!!” 이대로는 장사고 뭐고 손님들 사이의 충돌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어떻게든 아자카씨가 바깥에 나가서 상황을 진정시켜 보려고 하지만 플로어 내부에서도 바깥의 소란에 짜증내는 목소리가 높아져가기 때문에 어느 쪽도 확실히 처리하는 건 불가능. 여기까지인가. 이래서야 큰소리치고 미키야씨와 시키씨에게 찻집을 맡겠다고 했던 체면이 서지 않지만 물리적으로 무리다. 이미 상황은 통제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으니까. “힘들어 보이네?” “응,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상황이야. 하아..” 하다못해 최소한 두 사람은 더 필요하다. 정리에 필요한 한 사람과 플로어를 담당해줄 사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아자카씨가 플로어에서 서빙과 카운터에서의 계산을 맡고, 내가 주방에서 요리와 정리를 맡아서 처리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나는 괜찮다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인 아자카씨는 오래지 않아 기력이 쇄하고 말 터. “그러게 일을 스스로 만드는 네 성격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바보.” “윽... 그렇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에?” 그제야 눈치를 챈다. 도대체 나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아자카씨는 여전히 플로어에서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손님들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텐데. 게다가 이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와 편안한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한 사람밖에는 없다. 갑작스러운 린의 출현에 한창 케이크 위에 얹고 있던 생크림이 엇나가며 반대쪽 손을 하얗게 칠한다. “린?!?” “하이~ 이제야 알아차렸어?” 주방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서있는 건 언제나 윤기 있는 검은 흑발을 양 갈래로 묶고 붉은 옷을 좋아하지만 어쩐 일로 오늘은 푸른색 계통의 가벼운 투피스를 입고 온 평생의 친우이자 실질적인 마스터. 이곳에 린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어주기는 하지만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섣부른 방심은 금물이다. 그녀에게 아무런 대비 없이 상대했다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정말 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여긴 어쩐 일이야?” “나뿐이 아니야. 슬슬 눈치 채주지 않겠어? 저쪽 상당히 조용해졌지?”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란스런 손님들 간의 다툼과 그걸 말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아자카시의 목소리, 거기에 새로 주문을 요청하는 손님의 외침이 뒤섞여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플로어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이쯤 되면 최대한 주방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던 처음 계획에 어긋나는 한이 있어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생크림이 묻은 손을 씻을 여유도 없이 주방 입구 근처에서 생글거리고 있는 린을 지나쳐 플로어의 상황을 바라보자 있을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분명 가득 찼었을 테이블 중 한 곳을 당당히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뿐임에도 찻집 내부의 공기가 확 달라지는 기운을 흘리고 있는 오늘따라 붉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기품 있는 아가씨와 “야호~~” 내가 주방에서 나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옆에 숨어 있다가 확 하고 튀어나오는 은발의 꼬마 아가씨. 두 사람의 옆에는 그녀들을 보좌하는 유능한 메이드들 또한 자리하고 있다. 덧붙여서 지금 문밖에 살짝 보이는 옷차림은 이곳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메이드. 전투 담당 리즈가 분명. 갑자기 소란이 사라진 배경에는 이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감고도 알아차릴 수 있다. “냠~” “!!!!!!?!?!” 갑작스런 작금의 사태에 대해 사고에 혼란이 발생하고 멍하니 서있던 나에게 이리야의 예상치 못한 기습. 아직 생크림이 묻어있는 손가락을 그대로 입에 물고 빨아먹는 이리야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매몰차게 손을 잡아 빼지 못한다. 아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가 버렸다고 해야 하려나.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 이리야가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방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되새기고는 귀 끝까지 빨개진다. “어... 언니!?!” “에헤헤~ 에밀리아의 맛이다~” 도대체 무.. 무슨 짓이야. 게다가 이리야를 말렸어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는 세라는 방금 전의 만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떨어져 나온 이리야의 입가를 닦아주는 충직함을 보여주고 있다. 평소 같으면 경악하며 아가씨의 예의니 뭐니 하면서 한소리 할 법도 싶은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잔소리가 없다. “흠흠.. 여전히 대담하네. 이리야스필.” “에헴~ 부러운가봐 리~인~?” 더불어 거기까지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세라가 닦아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쳇, 노리고 있었는데..’라는 말 따위를 중얼거리는 건 어디 사는 토오사카 린일까. 물론 이리야의 대답에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이 오래간만에 다시 불붙고 두 사람에게서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준 덕분에 제대로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 아까부터 손님이 추가로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문밖에서 리즈가 막아서고 있기 때문일 거고 플로어 안이 묘하게 조용한건 루비아와 이리야 때문일 터. 어떻게 모두가 이곳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지... 아, 그 신문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동시에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어떻게 여기에? - 딱콩! - 아얏..” “그걸 몰라서 물어? 에밀리아가 바보라서 인거야. 흥,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까지 귀찮은 일을 만들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니까.” 질문과 동시에 일말의 봐줌도 없는 강렬한 꿀밤에 이은 린의 신랄한 비난. 린, 그런 식으로 자꾸 머리를 때리면 뇌세포가 죽어버린다고. 그것도 꽤나 아팠다. 맞은 부분을 감싸며 살짝 치켜뜬 눈으로 억울하다는 듯 노려봐 주지만 린은 그런 눈빛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흘리고 입을 연다. “도와줄게.” “우으.. 그렇게 비난하지 않아도.. 에? 린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린의 입에서 나온 거라 예상하기 어려운 단어가 포함되어 있던 것 같은데. “도.와.준.다.고. 어차피 그만둘 생각도 없잖아?” “저와 미스 클레어도 함께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리제릿트에게는 외부의 경비를 맡겨두었으니 아까와 같은 난동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린뿐만이 아니라 세라도 앞으로 나오며 조력의 의사를 밝힌다. 거기에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클레어씨와 리즈까지.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든든한 우군의 등장에 방금 전까지 핀치에 빠져있던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위기 뒤의 기회. “지금부터는 제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마음 같아서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일 하시는걸 당장에라도 그만두시도록 하고 싶습니다만 말린다고 들으실 분이 아니지요. 우선 리제릿트는 지금 자리 그대로 경비를, 고쿠토님은 카운터를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이 자리에서 가장 압도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서 일사 분란한 조율을 하는 건 아인츠베른의 메이드장인 세라다. 세라의 지시에 따라 린은 플로어를, 클레어씨는 홍차를, 나는 요리만을 전념. 거기에 세라 자신은 정리를 솔선해서 맡겠다고 자처했다. 자, 반격 개시다! ---------------------------------- - 린 - 뭐, 찻집에서 일한다는 건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고 내 장기라면 장기라 할 수 있는 사근사근한 태도를 바탕으로 플로어 일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이 일은 어디까지나 에밀리아로 인해 일어난 거니까.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그 애에게 청구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걸려버리니 굳이 억지로 미소를 지을 필요도 없다. 덧붙여 에밀리아의 웨이트리스 차림은 메이드 차림이 아니라는 게 안타까웠지만 이건 이대로 만족스러우니까 불만은커녕 행운이라고까지 느낀다. 다만 플로어를 돌다 시선이 한곳을 지나칠 때면 미간이 찌푸려지고 미소 지은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기를 담아 노려봐주지만 저 능구렁이 같은 두 여자는 내 살기정도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여유 만만의 태도를 보여주기에 속에서 커져가는 불만은 도저히 주체가 불가능할 정도. 이래서 금삐까들이란(한명은 백금인 것 같다) 정말이지.. 아, 지금 눈이 마주쳤을 때는 오히려 이쪽을 보고 웃는다? 으으.. 더 이상은 못 참아. 한마디 해주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기에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걸어간다. “미스 토오사카? 아직 추가 주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큭.. 이렇게 내가 핏대를 세우고 다가왔는데도 여전한 태도를 유지하는 얄미운 녀석. 허나 저렇게 평정을 지키고 있는 루비아를 상대로 화를 내게 되면 오히려 나의 패배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최대한 미소 지은 얼굴로 의도한 말을 전달한다. “미스 에델펠트, 이리야스필? 두 사람은 어째서 그리 편안한 자세로 차를 즐기고 계신 걸까?” 그렇다. 일의 시작인 에밀리아와 아자카씨를 비롯해서 세라나 리즈, 클레어씨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이 두 여자는 여유 작작 차를 마시며 가끔씩 이 ‘나’를 불러다가 주문 따위를 해대고 있다. “우문이로 군요 미스 토오사카. 찻집에 와서 차를 즐기는 건 당연한 행동 아니겠나요. 게다가 돈도 확실히 계산할 생각이랍니다.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어째서 모두가 일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쉬고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만 언어능력이 떨어지시나 보군요.” 사람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단어를 거론하면서 핀잔을 주는데도 여전히 두 녀석의 태도는 변할 줄 모르고 오히려 우아하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참자.. 참는 거야. 저건 도발일 뿐 아무것도 아니니까 넘어가면 안돼. 토오사카 린. 아아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바라보고 이기를 수 초간 그제야 얄미운 루비아의 입에서 찻잔이 떨어지고 “설마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에게 일을 시키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미 클레어를 보내준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나도나도~ 이리야는 세라와 리즈를 보내줬어~ 린은 메이드가 없으니까 스스로 해야지?” 같은 얄미운 소리를 계속 해주신다. 큭.. 그렇게 나올 줄이야. 하지만 어떻게 반박할 수가 없다. 클레어씨와 세라, 리즈만해도 저들은 충분히 성의를 보인거나 다름없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먼저 도와주겠다는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이 토오사카 린이다.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 말 따위 할 수 있을까. “큭....” “이해하셨나 보군요. 미스 토오사카. 그럼 가서 일을 계속 보도록 하세요. 당신이 멈춰 있으니까 주문을 받지 못하지 않습니까? 보세요. 벌서 저쪽에 손을 들고 있군요.” 어떤 눈치 없는 녀석이 폭발 일보직전인 이 상황에서 주문을 하겠다고 손을 든단 말이야! 분노를 담아 뒤를 돌아보자 정말 눈치 없게 생긴 희멀건한 사내가 내 기세에 눌린 듯 어깨를 움츠린 채 앉아있다. 으으..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히고는 주문을 받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다. 또 무슨 볼일이 남았길래! “참, 잠깐만 기다리시겠나요 미스 토오사카?” “무슨 일인가요 미스 에델펠트?” “스트로베리 타르트 좀 가져오세요. 신문에서 극찬한 메뉴이니 꼭 먹어보고 싶군요.” 뚝. 하고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린과 여러 지인들이 도와주기 시작한 이래로 찻집은 점차 평정을 되찾고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람손이 넉넉해지자 야외 테라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손님 수용 역시 충분. 모처럼 나서서 일을 맡았다가 절망에 빠지기 직전에 한 가닥 구원의 끈을 잡은 느낌이 이런 걸지도. “린, 여기 주문한... 어라.” 주문서에 적힌 음식과 클레어씨가 만들어준 홍차를 쟁반에 담아 플로어로 내놓다가 뭔가 공기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자, “지금 저와 해보시겠다는 건가요. 미스 에델펠트.” “어머나, 저는 어디까지나 손님으로서 점원 분께 주.문.을 하고 있는 거랍니다. 어딘가 문제라도 있나요. 점원 아가씨?” “큭.. 이..이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기상황이 플로어에 닥치고 있다. 그것도 특대 급의 위기상황. 현재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얼굴 가득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린을 바라보고 있는 루비아도 루비아지만 그런 도발에 넘어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린 또한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덕분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머릿속에는 마치 이곳이 적색 등이 붉게 점멸하며 경고음을 심하게 울리고 있는 침몰직전의 잠수함, 혹은 전 재산을 건 체스 시합에서 외통수에 걸린 체크메이트 상황 수준의 경보가 내려진다. 어떻게든 루비아를 조용히 시키고 린을 떼어 놓아야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에 서둘러 주방에서 나서려 하지만 이미 타이밍은 늦어 사건은 발생하고 만다. “아~네, 저는 점원이었고. 미스 에델펠트는 손님이셨죠. 그러면 저도 점원으로서의 일에 열중해야겠네요.” “이제야 이해를 하셨... 꺄악!! 뭐.. 뭐하는 건가요!!” 성큼 성큼 가게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돌아온 린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청소용 대걸레가 들려있었고 대걸레를 그대로 루비아의 머리를 향해서 휘둘렀다.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간신히 대걸레를 머리위로 스쳐 보낸 루비아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 그런 위압적인 모습을 목전에 두고도 린의 태도는 너무나 태연하기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누가 잘못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어머나~ 죄송해라. 손님. 점원으로서 청소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미처 보지를 못했네요. 이거 정말 죄송하네요.”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이.. 이봐요!!” 항의중인 루비아의 말을 막듯 이번에는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의 아래. 정확히 말하자면 루비아의 다리를 향해 대걸레는 질주하고 황급히 두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서 회피하는 루비아. 아아.. 이건 말려야해 더 이상 계속되다가 위험한 선을 넘어버리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하고 만다. “저는 점원으로서 할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거기 불필요하게 커다란 가슴 좀 치워주시겠나요? 도저히 이대로는 청소가 어렵네요. 뭐, 스스로 치우기 싫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해보자는 거군요. 미스 토오.. 잠깐 말을 할 때는 좀 멈추세요! 그 지저분한 물건으로 어딜 향하는 건가요!!” 린, 그거 어디까지나 명백한 사심이 들어가 있어. 어쨌든 제발 멈추기를 바라는 내 마음속 바램과는 전혀 반대로 대걸레는 착실하게 루비아의 어딘가를 향해서 질주한다. 그런 대걸레의 쇄도를 의자 위에서 공중제비를 넘듯 뒤로 피하는 루비아의 동작에는 10점 만점에 10점을 줘도 모자라지 않을 현란한 움직임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루비아 마저 완전히 자세를 잡고 제대로 한판 붙어볼 태세. 말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어쨌건 지금이 유일한 찬스다. 서둘러 주방을 벗어나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자. “루비아도, 린도 주위를 좀 살펴줘.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어쩌려고 그래.” 겨우 시작하기 전에 끼어들어 어떻게든 상황에 대한 자각을 통해 말려보려 시도해보지만 “걱정마! 이런 금삐까쯤은 맨 주먹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이런 빈약한 여성쯤은 맨손으로도 가뿐하니까요!” 오늘따라 묘하게도 서로 색이 뒤바뀐 청과 흑의 아가씨들에게 가볍게 기각 당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는 두 사람.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으로 동시에 말하는 모습은 정말 사이가 나쁜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완벽한 호흡. 아아, 이제는 틀렸다. 두 사람 다 불이 붙어서 이대로 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는 말리기는커녕 본전도 찾지 못할게 틀림없기에 최대한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더 이상 둘 사이에 관여하는 걸 포기하고 한발 물러서 사태를 관망하던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본다. “아자카씨, 세라, 클레어씨.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서로가 아무 말이 없지만 눈빛으로 역할을 지정하고 알아서들 움직이기 시작. 모두 저들을 말리는 건 이미 포기했다는 반증이려나. 세라는 일단 저들 사이에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박수치며 좋아하고 있는 이리야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나와 아자카씨는 플로어 내부에 있는 손님들을 외부로 내보낸다. 클레어씨는 차양막을 전면의 유리창에 펼쳐 외부의 시선을 차단. 마지막으로 모두가 합심하여 플로어 내부의 테이블을 이쪽저쪽으로 치우자 훌륭한 특설 링이 설치된다. 여기까지 일을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분 남짓. 억지로 쫓겨난 손님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상사태에 대한 인식은 충분한지 저항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준다. “지난번에 그렇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도 여전히 기가 살아있다니 대단한 기억력이로군요. 미스 토오사카.” “상대방의 기술에 대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거둔 비열한 승리를 가지고 여전히 떠들다니 대단한 프라이드로군요. 미스 에델펠트.” 이로서 아무런 방해도 존재하지 않는 즉석 무대에서 마술을 사용하지 않는 마술사들 간에 벌어지는 사투의 막이 열린다. 린은 소매의 단추를 풀러 팔을 걷어붙이는 것으로, 루비아는... 저거 부직포 같은 것으로 연결된 거였구나. 어쨌든 탈착식 소매를 떼어내는 것으로 상황 준비는 종료. 이제 서로를 노리는 맹수와 같은 시선으로 틈을 찾기 위해 준비 자세를 취한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마치 체술의 달인과도 같은 빈틈없는 대치 상황. “하앗!!!” 기합성과 함께 선수를 친 건 린이다. 린은 예전부터 중국의 권각술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격투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한순간 바람처럼 튀어 나가며 루비아의 명치부근을 향해 강한 일섬을 꽂아 넣는다. 허나 루비아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무릅니다!!” 일갈과 함께 린의 정권을 횡이동으로 피하며 순식간에 린의 뒤를 점하려 하는 루비아. 그 움직임은 너무나 빠르고 자연스러웠기에 마치 처음부터 린의 뒤에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 이대로 뒤를 내준 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는 순간이다!?!? “흥!” 뒤에서 린을 잡으려 한 루비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린의 발차기. 마치 루비아가 뒤를 점할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정권을 지른 직후 타이밍을 봐서 내질러진 차기를 루비아는 간신히 피하지만 완벽하지는 않고 왼쪽 볼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아직 린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고 내질러진 새하얀 가느다란 다리는 그대로 왼다리를 축으로 돌려차기로 변해 루비아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가격한다. 그런 공격을 루비아는 아슬아슬하게 오른팔을 들어 막아내지만 위력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하고 한쪽으로 밀려나며 쓰러져 버린다. 그나저나 서로 얼굴을 공격하는 건 자제해줬으면 하는데.. 여성의 얼굴에 난 상처는 보기 안쓰럽다고. “읏.. 제.. 제법이군요.” “똑같은 기술에 당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 미스 에델펠트. 당신이 제 공격을 피해 뒤로 돌아들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한 바였답니다.” 한쪽으로 밀려났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방어는 성공했고 단번에 카운트를 빼앗지는 못했기에 바로 재정비 후 격돌에 들어가는 두 여성 마술사(격투가). 린이 속도와 강력한 한방의 타격기를 사용하여 루비아를 노린다면 루비아는 한순간 틈이 보였을 때 린의 팔이나 다리 등을 낚아채서 그대로 던져버리는 훌륭한 카운터 어택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 탁! 팍! 휘익! 퍼억! 우당탕! 처음에는 우리가 마련한 플로어의 공간에서만 벌어지던 격전의 전장은 갈수록 넓어져 이제는 플로어뿐만이 아니라 찻집안의 다른 공간에까지 이르는 전범위적인 공방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아..?!” “기회다!” 효과적인 공격의 연속으로 밀어붙이다 루비아가 등 뒤의 카운터에 막혀 회피 공간이 없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의자를 발판으로 뛰어올라 루비아를 향해 내려찍는 발차기를 날려주는 린과 그 공격을 피해 카운터를 뛰어 넘는 루비아. 그녀 자신은 겨우 회피에 성공을 했지만.. “아..” - 콰직! 콰직! 무심코 내뱉어지는 내 입에서의 한탄. 방금 전의 사건 덕분에 카운터에 놓여있던 이번 일주일 한정의 특제 메뉴판이 바닥을 나뒹굴고 거기다 두 사람의 현란한 풋워크에 무차별로 짓밟힌다. 며칠 전에 저걸 만들면서 어떤 메뉴를 넣고 어떤 메뉴를 뺄까라며 고민했던 일이나 그냥 만들면 너무 밋밋하니까 장식해둔 리본을 만들며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겼다거나.. 완성된 메뉴판을 보고는 괜히 혼자 기뻐하며 계속 바라본 일이라거나.. 하는 그런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에이잇! 촐랑촐랑 피해 다니지 마세요!” “우문이군요! 그럼 맞으란 말인가요!? 당신이야말로 순순히 붙잡히는 게 신상에 좋을 거랍니다!” 내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다툼을 계속하는 린과 루비아는 카운터에서의 만행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 플로어로 내려서 쉴 틈 없는 공방전을 계속한다. 비어버린 카운터 옆으로 다가가 짓밟히고 부서져버린 메뉴판의 처참한 말로를 손으로 주워 모으는 동안 왠지 모르게 속에서부터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참아낼 수 있다. 이 정도는 상관없으니까. 메뉴판이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고. “이런!” “하앗!!” 그런 내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공격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공방은 내지른 주먹을 회수하지 못하고 루비아에게 붙잡혀 린이 날려지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그래도 린의 체술은 여전히 뛰어나기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달려드는 루비아를 피해 유일한 회피로인 주방을 향해 몸을 날린다.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린을 쫓아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은 몸놀림으로 잠깐 몸을 구부리더니 용수철처럼 튕겨져 쏘아지는 루비아의 공격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 할 수 있는 드롭킥! 린이 루비아를 피해 들어온 곳은 횡적으로 피할 공간이 전혀 없는 주방이기에 그저 막아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체중을 무기 삼아 상대가 가드하더라도 그 여파를 완전히 죽여 버리지 못할 그런 드롭킥을 맞은 린은 겨우 막아냈지만 예상한 것처럼 그대로 날려져 버린다. 그 끝에는.. 자.. 잠깐! “아.. 안돼!!!!!!!!” - 우당탕탕탕!! 지난밤과 오늘 아침을 꼬박 투자해서 겨우 준비해 놓은 케이크. 원래는 냉장 보관 해두는 것이지만 너무나 빠른 손님의 회전 속도에 도저히 맞출 수도 없고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기에 아침에 만든 절반정도는 꺼내 놓은 상태였던 케이크. 하필이면 린이 쓰러진 곳에는 나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케이크들의 임시 진열대가 있었다. “큭, 드롭킥이라니 제.. 제법이군요. 하앗!!” “말을 거는 척하면서 기습이라니 비겁하네요. 미스 토오사카!!” 다시금 주방을 벗어나 플로어 쪽으로 가버린 두 사람은 이제 안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비척이는 걸음걸이로 케이크들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걸 굽는데 필요했던 노력과 다 굽는데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그 모든 기억이 아까 메뉴판 때와 마찬가지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에밀리아.. 괜찮니?” 아자카씨의 걱정스러운 위로에도 도저히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제는 틀렸어. 이제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해도 오늘을 무사히 넘기는 건 불가능. 삼일간 잘 버텨왔던 것이 이렇게 한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 사람이 여전히 다툼을 벌이고 있는 플로어를 향해 걸어가며 나도 모르게 무한의 검제 주문 영창 중 한 부분을 반복해서 읊는다. 피는 철.. 마음은... 유리.... [Steel is my body, and fire is my blood] 응, 내 마음은 유리로 되어있는 걸. 그러니까 유리를 깨버린 상대에게 이정도의 화풀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아무리 분노에 몸을 맡겼다 해도 최소한의 이성의 끈은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날이 있는 검은 단 하나도 투영하지 않았고, 선택한 무장의 종류는 오직 단 하나. “아.. 일났네..” “큰일.. 났군요.” 린과 루비아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두 사람을 포위하듯 허공에 띄워놓은 호랑이 스트랩이 붙은 죽도들에게 단 하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 뿐. “메뉴판이랑.. 케이크.. 돌려주지 않을래?” - 두두두두두두두!!! 물론, 그런다고 죽도를 거두지는 않겠지만. ================================================== [며칠이 지난 후] - 탁 언제부턴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처럼 항상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하얀 챙의 모자를 쓴 채 내가 내 주는 엽차를 마시는 은발의 녀석. 첫 만남 때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고 숨기고 있는 강한 힘은 겉으로 느껴지는 것 이상일게 분명한데도 “후아아~”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김새는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자면 지켜보고 있는 나마저도 기운이 빠져나간다. 세상에 이렇게 태평하고 멍한 녀석은 미키야 외에 없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건만 이 녀석 또한 만만찮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곤란하다. 곤란하고말고. 이렇게 미키야와 에밀리아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는 나까지도 긴장감이 사라질 것 같으니까. “역시 시키씨의 차는 최고네요..” “흥, 별거 아니야. 오히려 차라면 네 것이 더 맛있으니까. 그 증거로 봐라.” 손을 내밀어 플로어 내부를 가리킨다. 폭주할 것처럼 밀려들던 손님들의 홍수는 지난 삼일 동안 그야말로 거품이 빠져나가듯 삽시간에 줄어들고 평소와 같은 수준의 단골손님들만 플로어에 군데군데 앉아있다. 일본에서 돌아온 첫 날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다른 장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연히 다른 광경. “하아.. 결국 원상태네요.” -------------------- * 8월 16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래간만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영국. “며칠 더 있다 오는 쪽이 낫지 않았어?” “너도 참 끈질기다.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났잖아?” “그렇지만..” 여전히 뭐가 그리 아쉬운 건지, 오본이라 하면 8월 15일 당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미키야와 아키다카가 하도 성화를 해서 준비 기간부터 본가에 돌아가 있던 거지만 실질적인 행사가 끝이 난 뒤까지 남아있어 줄 의리도 생각도 없다. 게다가 몇 대만에 나타난 정통 료우기 가문 계승자의 능력이 사라진 것에 대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친척들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한동안 느끼지 못하던 살인 충동마저 느낀다.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반겨주는 건 시키(職)가 사라진 것을 통해서 후계자로 선택받은 오라버니뿐이라는 사실도 불쾌하다. 사실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도 미련도 없지만 또 다른 나의 반신이 사라진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거기까지만 해라. 미키야. 게다가 더 이상 이야기하기에는 이미 늦었잖아.” 정말이지 일본을 떠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곳까지 와서 계속 언급하는 건 무슨 심리인건지. 이제와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것 정도는 미키야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하는 건지. 게다가.. - 저벅 저벅 자박 자박 이렇게 모처럼 단 둘이 여유롭게 걷고 있는데 손 한번 잡아줄 생각을 않는 걸까. 무.. 물론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 눈치라고는 정말 찾아보려 해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 둔감한 사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나. 이런 답답하고 고지식하고 둔감한 녀석이라도 좋아하게 되어 버렸는걸. 내가 져주는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 척 “시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버린 나의 태도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다가오는 미키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안구에 담고 한쪽 손을 잡기 좋게 앞으로 내민 채 두 눈을 감아 버린다. “눈이 아파서 감고 가야겠다.” “응? 눈을 감는다면 어떻게 갈 생각이야?” “몰라 미키야가 알아서 하겠지.” 그냥 손을 잡아서 이끌어주면 그만일 걸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반응이 늦다. 물론 닫힌 시야 저편에서 곤란해 하는 미키야의 중얼거림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손 하나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곤혹스러워 해서는 너무 남자로서 의지가 안 된다.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눈을 뜰까 생각할 때... 미키야는 어처구니없는 실력행사를 보여온다. “읏차~” “!!!!!!!!! 내.. 내려줘!!” 제..제제제제 제정신인가 이 녀석! 여기는 런던의 시가지 한복판이라고!? 아무리 목적지가 가까워 졌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많은 곳에서 업으면 어쩌자는 거야!? “응? 시키 눈이 아파서 걸어갈 수 없다면서? 그럼 내가 옮겨주는 수밖에 없지. 자자, 얌전히 제게 맡기시지요.” 여전히 마이페이스인 녀석. 단지 손만 잡아주길 원했을 따름인데 이런 전개는 예상조차 못했다. 그렇지만 왜일까. 그저 미키야의 등을 밀쳐내고 녀석의 등에서 뛰어내리면 그만일 터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키야의 넓은 등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등에 기대고 살짝 어깨를 잡아 버린다. “하하, 떨어지지 않게 꽉 잡으시지요. 공주님.” 쳇, 부끄럽군. ----------------------------- “얼마나 남았어?” 미키야의 등에 업혀서 이동한지 꽤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어 나라고 생각되지 않을 그런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평소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겠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나도 약간은 들뜬 기분이 되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하자.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힘든 기색이 없는 미키야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자 거의 다 왔답니다. 공주님” “그 공주님 소리 좀 집어치워. 다 왔다면 이제는 내려줘.” 여기까지 이렇게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만약 이 모습을 아자카가 보기라도 한다면 또 시끄럽게 떠들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미키야의 걸음이 멈춘다. 게다가 녀석의 등에 기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웅성거림과 더불어 인기척이 수없이 느껴진다. 아마도 미키야가 멈춰 선건 그런 무언가를 마주쳤기 때문일 거라 짐작하고 고개를 들어 앞을 살피자. - 웅성 웅성 솔직히 당황했다. 이곳이 나와 미키야가 살고 있던 그 찻집이 맞는 걸까 의심스러운 상황. 눈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인파는 평소라면 전혀 사용하지 않을 야외 테라스의 테이블까지도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히 차있는 만원 상태. 길게 늘어서 있는 손님의 줄을 통제하고 있는 건 지난번 별장에 초대되었을 때 만났던 그곳의 메이드고 “미스 에델펠트. 4번 테이블에서 주문한 메뉴 가져가시지요?” “당신에게 손이라는 것이 달렸다면 스스로 하는 게 어떨까요. 미스 토오사카. 그런 일까지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테이블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웨이트리스 차림의 여자는 분명 초대받아 왔던 손님중 하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상당히 오만하고 귀한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도도한 여자였을 텐데 그런 그녀가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건 어째서지? 게다가 지금 찻집 안에서 나온 사람은 에밀리아와 함께 살고 있던 붉은 이미지의 여자 마술사가 틀림없다. 특히 저 둘이 서로를 노려보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만 봐도 타인이 아닌 그들 본인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 해보자는 거군요.” “제가 할 말을 그대로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어이어이, 잠깐. 너희들이 서 있는 곳은 나와 미키야의 터전이라고? 그런 곳에서 싸움 같은걸 하면 내가 가만 놔둘까 보냐. 거기까지 생각하고 소매 안에 감춰둔 나이프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미키야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던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타난다.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의 소녀. 아름답다는 것 정도는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숨김없이 외모를 드러낸 모습은 지난번 파티 이후로 처음인 만큼 여전히 시선을 빼앗는 녀석. 그런데 구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밀리아에게서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다. 온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마치 맹수 앞에 서있는 느낌. “루비아? 린? 뭐하고 있는 걸까?”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비단 나뿐 만이 아닌지 방금 전까지도 서로 으르렁대며 이빨을 곤두세우고 있던 두 고양이가 갑자기 친한 척 당황하며 순식간에 자신들이 원래 하고 있던 일로 돌아간다. “아.. 알았어요. 자자 일하죠 미스 토오사카.” “무.. 물론이죠. 열심히 해요. 미스 에델펠트” 호오.. 강한 맹수일수록 발톱을 숨기는 법인가. 단숨에 단지 위압감을 내뿜은 것만으로도 상황을 종료시켜버리는 에밀리아에게 묘한 호승심을 느낀다. 저 애라면 내 살인기호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게 분명.............. 여전히 쓸데없는 망상이 남아 있는 건가. 이미 나는 이상(異常)을 벗어나 미키야와 함께 정상(正常)의 길을 걷기로 하지 않았던가. “시..키? 다.. 당신 어째서 오..오빠의 등에 업혀있는 거야!?!?” 사고의 불순물을 깨끗이 털어내느라 주위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동안 근처까지 다가온 아자카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덕분에 미키야에게 업혀있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게 되었고 예상대로 나에게 손가락을 들이대며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아자카. 그런데 묘하게도 은근히 그 모습이 재미있다. 후훗, 마음껏 질투해라 아자카. 그렇지만 이 등은 내거야. ----------------------------------- 그렇게 아자카와 에밀리아에게 맡겼던 5일간이 지나고 나와 미키야가 다시 돌아온 뒤에도 며칠간은 엄청난 손님이 몰려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에밀리아가 없다는 사실에 낙담하며 돌아가고 아주 가끔 나에게 귀찮게 들러붙는 녀석들이 있어서 살짝(?) 손을 봐서 돌려보냈더니 이러게 삼 일만에 원래대로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서 한다기 보다는 미키야와의 평온한 일상을 만들기 위한 장소로서 선택한 것인 만큼 손님의 숫자는 내게 있어 별로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우으.. 모처럼 힘을 내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원래대로 돌아갈 줄은 몰랐어요.” 다만 에밀리아는 그게 아쉬운 모양. 그녀가 내민 지난 5일간의 장부를 살펴보고 나와 미키야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재료비를 제하고 순 매출액으로만 거의 7000파운드 가까이 벌었을 정도니.. 아무리 돈에 관해서 개념이 희박한 나라도 에밀리아와 아자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뭐, 이번만큼은 아자카도 칭찬해주지. “낙담할 필요 없다. 사람이 많이 오고 말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오히려 사람이 적으면 귀찮지 않아서 좋고.” “그래도..” 그런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손님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자책하는 이 귀여운 바보를 위해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 “됐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차나 한잔 더 마셔라. 이번에 일본에 가서 구해온 최고급 엽차니까. 자주 마시기는 어려울 테니.” “헤에.. 어쩐지 평소보다 향이 더 향긋하더라니. 감사히 마실 게요~ 후~후~” 뜨거운 차를 하얀 두 손으로 감싼 채 호호 불며 너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더불어서 함께 내놓은 화과자(일본의 전통과자)를 베어 무는 그 모습은 이 나마저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멋진 광경이기에 “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실수. “응? 아.. 아니. 신경 쓰지 마라. 그나저나 그 단걸 잘도 먹네.” “으음... 묘하게 단 게 입맛에 잘 맞아서요.” ‘이상하죠?’ 라며 다시 차와 다과로 주의를 돌리는 에밀리아. 여전히 태평한 녀석이라니까. 그래도, 이런 녀석이기 때문에 싫지 않은 건 사실이다. 어딘지 모르게 미키야를 생각나게 하는 너무나 무해하고 착해빠진.. 그래서 나 같이 주변에 상처만을 남기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없는 바보니까. - Tea time End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24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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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나 토오사카 린은 마술사다. 가문의 역사는 다른 마도의 명가들에 비교하자면 그리 긴 편이 아니지만 현존하는 4인의 마법사중 일인이며 사도의 위치까지 차지하고 그 고명한 흡혈귀의 진조와도 연관이 있다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사도이되 사도가 아닌 마도원수 젤렛치의 사사를 받은 선조의 피를 잇고 있는 토오사카의 마술사. 특기는 가전의 마술대로 보석마술과 간드. 물론 하나의 재능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이 토오사카 린은 오대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보인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다. 게다가 조금 이상한 형태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성배전쟁의 최종 승리자이기도 하다(공동이기는 하지만) 게다가 스스로의 본성을 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기에 호무하바라 학원에서부터 지금 이곳 시계탑에 이르기까지 현명하고 조신한 학생으로 통하며 만족할만한 생활을 만끽해 왔다. 그런 내가 마술의 본산인 이곳 런던의 시계탑에서 만난 유쾌하지 못한 한 여자 마술사. 1000년에 달하는 북유럽의 명가이며 ‘천칭’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마술사 가계의 현 당주이자 나와 같은 보석마술과 간드, 게다가 오대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까지 상대가 얼마나 유능한 마술사인지 알 수 있다. 덕분에 같은 도시에, 같은 기관에, 같은 학부에, 같은 학과에 소속되어 의도하지 않게 경쟁하게 되는 숙명에 처해있다. 게다가 서로의 가면마저 단숨에 벗겨져 본성을 드러내며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게 현실. “저기.. 미스 토오사카?” ---- 상념은 거기에서 끝. 다시 현실로 돌아와 눈앞에 있는 교수의 비서를 바라본다. 최대한 자제를 하자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탁자를 짚고 있는 몸은 점점 앞으로 기울고 모르긴 몰라도 상대를 잡아먹을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왜냐면.. 나와 별반 나이 차가 나지 않을 안경 쓴 여성의 눈이 두려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점점 움츠러들고 있으니까. 이상한 점이라면 과제에 대한 평가는 타인에게 맡길 경우 부정의 의혹을 피해갈 수 없기에 교수가 직접 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서가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 부정에 대한 의혹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내 상대는 그 고상한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 그녀가 그런 치사한 수법을 사용한다는 건 차라리 에밀리아가 자발적으로 수영복을 입고 나를 이끈 채 바다로 달려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할 확률보다 낮다고 자신한다. 물론 그건 그거 나름대로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러니까 이번... 과제에 대한 교수님의 평가는...” 그 인정할 만한 상대는 정확히 탁자를 이분하는 반대편에서 나와 완전히 똑같은 자세로 교수의 비서를 노려보고 있는 상황이기에 비서의 위축은 급속히 심해진다. “저.. 저기 그만 다가와 주시면.. 안될까요..” 아차, 실수. 서둘러 발표되기를 바라는 심정과 루비아에게 질 수 없다는 결사적인 태도가 너무 지나쳐 비서를 향해 너무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루비아가 저렇게 비서를 압박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경쟁심에서 출발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뭐, 일단은 발표가 우선이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기에 마음을 추스르며 탁자에서 떨어져 한 걸음 먼 곳에서 얌전히 결과의 발표를 기다리자. 나와 루비아가 그렇게 멀어져 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서는 잠시 안경을 고쳐 쓰고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옮겨 그 위에 적힌 검은 글자를 읽어 내려간다. 자 심판의 순간이다. “과제의 정교함과 세밀함, 그리고 요구하는 필요조건을 두 분 모두 최대치로 충족시켜 주셨으며... 따라서 과제 제출 시기로 상하를 구분 지으려 했지만..” 결국 과제 제출에 대해서는 호각이었던 건가. 칫.. 게다가 그 뒤는 듣지 않아도 훤하다. 상대방을 인정할 줄 아는 자세는 상대를 꺾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소양. 상대방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를 넘기 위해서 필요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 옆에 서있는 저 파란색 금삐까는 인정하기는 정말 싫지만 이기려면 꽤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상대. 때문에 하계휴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기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해 철야까지 해가며 완성한 과제를 제출하러 교수 연구실을 향했을 때 바로 문 앞에서 똑같이 방대한 분량의 프린트 물을 든 채로 나와 똑같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녀석을 마주쳤던 것. 다시 말해 아직 발표하지 않은 과제 제출 시기에 관한 점수 또한 정확히 동일할 게 분명하다. 저쪽의 루비아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테지. “과제 제출 역시 두 분 모두 동시에 제출해 주셨기 때문에.. 공동 만점입니다.” “도망쳤네..” “도망쳤군요..” 동시에 나오는 나와 루비아의 동일한 감상. 어째서 결과를 통지해 주기로 한 날짜에 교수가 아니라 그의 비서가 대신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단번에 풀려준다. 시계탑 내에서 나와 루비아의 경쟁의식이라는 건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지 가급적이면 교수들이 동일 과제를 내주지 않는 게 보통이었지만 이번 과제의 경우는 필수 과제였기 때문에 교수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대신 발표는 비서에게 맞기고 자신은 도망쳤다는 것. 뭐, 그건 둘째 치고 결과가 발표 된 이상 루비아와의 신경전으로 넘어갈 차례다. “제법이군요. 미스 토오사카.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와 동일한 점수를 거두실 줄은 예상치 못했네요.” “어머나, 미스 에델펠트. 벌써 머리가 녹이 슬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신가 보죠? 우리 두 사람의 지금까지 전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 빠득 둘다 만점이라는 사실에 그녀도 조금은 평정을 잃었는지 루비아 답지 않은 그런 수준 낮은 도발이다. 나와 그녀 사이에서는 그저 상대에게 공격당할 빌미만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잊었나보지? 덕분에 녀석의 그림 같은 얼굴 한쪽이 살짝 일그러지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건 너무나 행복한 상황이지만. “잊을 리가 있나요. 3승 3패 12무... 였지요.” 이래서 루비아는 무섭다. 평범한 자존심으로 뭉친 덜떨어진 재수 없는 녀석이라면 여기서 어떻게든 자신의 실책을 만회해 보고자 거짓을 꾸며내다 자멸로 떨어지는 게 정해진 수순일 텐데 사실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추가 공격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게다가 인정하는 사실 조차 루비아에게 그리 큰 타격은 주지 못하니까. 녀석의 말대로 지금까지 우리의 전적은 3승 3패 12무.. 정확히 5할이다. 그것도 어느 쪽이 연승이나 연패를 한 것도 아니라 한쪽이 승리하면 다음 대결은 무조건 반대쪽이 승리한.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시소타기. “이번 것으로 3승 3패 13무가 되었지요.” “이 기회에 13무보다는 4승을 추가하고 싶네요.” 그렇게 말하며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나에게 들이대는 루비아. 좋아 그런 도전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는 게 이 토오사카 린이라고. 오는 감정이라면 호의건 적의건 가리지 않고 상대해 주는 것이 바로 토오사카의 마술사. “히.. 히이익!! 교수님~ 돌아와줘요~” 문제는 눈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불쌍한 비서 아가씨. 이런이런.. 너무 불태웠나. --------------------------------- “그럼 더 이상 전달 사항은 없는 거지요.” 겨우 적당히 무승부로 타협을 보고나서 앞으로 하계휴가에 대한 교수의 전달사항이 없는가 하여 비서에게 묻는다. 무승부라는 게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찻집에서의 사건도 있고 하니 가급적이면 참고 넘어가야 신상에 좋다는 것쯤은 나뿐만이 아니라 루비아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테지. 내 질문을 받은 비서는 이것저것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찾아내고는 우리에게 전달한다. “아..아뇨. 한 가지 더 남아있답니다. 이번 하계휴가가 끝나면서부터 여러분의 후견인으로 시계탑의 강사 중 한분이 여러분을 맡게 되시는데 시계탑에서는 이번에 장래가 촉망받는 두 분의 후견인으로 로드 엘멜로이 2세께서 내정해둔 상태랍니다. 그래서 으음.. 아 여기 있네요. 내일 오후 3시에 로드의 연구실로 찾아가 보셔야 할 것 같네요.” 뭐? 루비아와 내 후견인이 동일인? “네에?!?!” “네에?!?!?” --------------------------------- - 다음날 - 그래서 서있는 곳이 바로 이곳. 시계탑에서 교수 집무실이 집중되어 있는 서쪽 중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집무실. 로드 엘멜로이 2세. 마도명문 아치볼트가의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엘멜로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본명은 웨이버 벨벳. 원래는 아치볼트가의 사사를 받는 견습 마술사였지만 후유키에서 10년전에 있었던 4차 성배전쟁에 참가한 당주. 케이네스 엘멜로이 아치볼트가 사망함으로 인해 가문이 몰락하는 상황에 처한 것을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흥 시켜놓았기에 그렇게 불린다고 들었다. 그저 타인들이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라면 무시해도 좋을 것이지만 아치볼트의 정식 후계자가 그를 로드 엘멜로이 2세로 공식 인정함에 따라 그 이름이 확고부동한 지위를 받은 이상한 관계. 마술사로서의 능력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시계탑의 강사와 같은 수준이지만 지도 대상의 숨어있는 잠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주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 그에게 사사 받은 제자 중 그랜드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다시 말해, 일본식으로 치자면 명문대 합격을 보장하는 최고의 학원 강사. 타인의 도움을 받아 위로 올라가는 건 별로 내키지 않지만 꼭 선택해야 하는 후견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나 토오사카 린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불만은 없다. 그럼 약속시간도 다 되었으니 노크를 해볼까. - 똑똑 반응이 없다. - 똑똑 재차 문을 노크해보고 혹시나 약속 잡은 날짜가 잘못된 건 아닌지 손을 꼽아가며 생각해 봤지만 분명 오늘이 확실하다. 시간은 손목시계로 확인이 가능. 날짜도 시간도 예정된 시간에 찾아온 상황인데.. 문패에 Lord El-melloi II라고 휘황찬란한 문구로 써있는 것으로 보아 잘못 찾아온 것 역시 아니다. 의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옆에 서있는 푸른 드레스의 금발을 휘날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루비아다. “이상하군요.” 원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을 따로 따로 만나보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둘을 동시에 호출한 로드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문 앞에 서있는 루비아가 의아함을 나타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술사란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없는 인종. 자신이 정한 약속의 시간에는 분명 약속을 지켜야만 시간에 낭비를 보지 않는다. 로드의 칭호를 받은 자라면 그 정도는 기본일 텐데.. 만약 마술사가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거나 혹은, “혹시 무슨 트러블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 미스 에델펠트.”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탁월하다. 전자의 경우는 사실상 있기 어려운 만큼 트러블의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결론. 때문에 루비아도 나의 의견에 모처럼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트러블이라면... 어머? 열려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잡이를 돌려봤던 걸까. 루비아에게서 보기 드물게 놀란 표정과 함께 살짝 열리는 문.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들어가 보고 싶지만 상대는 시계탑에 이름 높은 최고의 강사. 듣기로는 큰 키와 카리스마 넘치는 행동, 터프하게 생긴 외모까지 여자 마술사들 사이에서 안기고 싶은 대상으로 1위라고 할 정도의 유명인이다. 함부로 과격한 행동을 하는 건, 피하고 싶기에 잠시 주저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니 들어가 보지 않을 수는 없겠지. “들어가 볼 수밖에 없겠네.” “들어가 볼 수밖에 없겠죠.” 서로 처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의견이 맞아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다. - 끼이익 “실례합니다” “실례하겠어요” 교수 집무실의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정리 정돈도 깔끔하게 되어있다. - 두둥~ 두둥~ 두두둥~♩♪♬ - 그렇지만 집무실 구석구석 어디를 둘러보아도 로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깔끔하기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무기질 적인 공간. 그야말로 오직 사무를 처리할 때만 사용한다는 기색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집무실과 연결되어 있는 문은 3개. 다른 교수의 집무실과 구조상 큰 차이가 없으니 하나는 아마도 화장실로 연결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다른 한 곳은 교수들이 쉬는 휴게실로 연결 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 두두두둥~ 둥둥~ 따단~♩♪♬ 문제는 휴게실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이 커다란 음악소리.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넘어서 연구실까지 울리고 있는 음악소리에 아마도 우리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으로 예상한다. 실례인걸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약속시간을 맞춰서 왔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건 로드이니 이렇게 문을 연다 해서 큰 잘못을 없을 터. 속으로 마른 침을 넘기며 용기를 내어 휴게실로의 손잡이를 돌려서 살며시 연다. 있었다. 연구실과는 달리 전혀 정돈되지 않은 침대 시트위에는 먹다 남은 과자 봉지와 다 마신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 캔이 굴러다니고 침대의 아래쪽에는 대형 TV가 연신 시끄러운 효과음과 음악을 울려대고 있다. 그 TV에 연결된 것은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마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게임기와 흡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아니 누가 봐도 게임기다. 문제는 “뭐냐? 너희들은.”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화면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열심히 손에 들고 있는 조작기를 눌러대는 러닝셔츠에 트렁크 차림인 건장한 남자. 너무나 태연한 자세라 보고 있는 나와 루비아가 얼굴이 빨개지는 데는 약 3초 정도의 시간이, 그리고, “꺄아악!!!!!!!” “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가는 데는 5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 황급히 휴게실의 문을 닫고 연구실을 지나 복도까지 나오고 나서야 우리 둘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술사로서의 나라고는 해도 거의 반나체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는 건장한 남성을 여과 없이 바라본 것이다. 냉정을 유지하고 현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기에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서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 한 게 아니다. 그런 심리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지 루비아 또한 “뭐.. 뭐뭐뭐뭐뭐 뭔가요!! 저 사람은!!” 창백했다 붉어졌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변화하는 얼굴색과 당황한 듯 이리저리 휘저어지는 양 팔. 평소라면 볼 수 없는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며 말까지 더듬고 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본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지우죠. 지우는 겁니다. 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아까의 그 남자는 아마도 이 방의 주인인 로드 엘멜로이 2세. 아니 분명 틀림없이 본인일 것이다. 마술사의 집무실이라는 곳은 타인이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저런 사람이 로드라 불리우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미스터 카리스마. 로드 엘멜로이 2세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어쨌건 별로 루비아의 말에 따르는게 아니라 그저 내 스스로의 의지로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에 그다지 부인할 필요도 없이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다듬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불결한 영상을 잊어버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틀렸어. 위치가 위치인 만큼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문 두개의 건너편에서 있었던 일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문에 적혀있는 문패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 “미스 에델펠트, 일단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네요. 여기 있다가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루비아 또한 내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우리 둘은 이곳 런던에서 처음으로 뜻이 맞은 기념할 만한 날답게 동시에 문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한걸음씩 멀어져 간다. 허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첫 걸음이 한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하면서도 날이 서있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만다. “어이, 남의 허락 없이 집무실에 들어왔다가 마음대로 사라지는 건 어느 세상의 법도인지 설명해 주겠나.” 정말 돌아보기 싫지만 부름이 있은 이상 그냥 있을 수도 없는 일. 돌아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돌려 뒤를 보자 그곳에는 아까까지 반 나체상태로 침대위에 폐인처럼 있던 사람이 아닌 어느 틈엔가 군청색의 정장에 굵직한 시가를 입에 문 위압감이 넘치는 사내가 서있다. 키는 180이 넘을 정도의 건장한 체격. 어느 틈에 저렇게 채비를 갖추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건한 기세와 풍채는 그야말로 로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존재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자가 바로 우리의 후견인이 될 로드 엘멜로이 2세. 상대가 이렇게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나타난 이상 아무리 첫 인상이 최악에 가까웠다고는 해도 앞으로 우리의 후견인이 될 마술사.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실례했습니다.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응답이 없으셨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무단으로 들어오게 된 점 사과를. 저는 이번에 로드께서 호출하셨기에 찾아오게 된, 광석학과에 재학 중인 토오사카 린 입니다.” “실례하겠어요. 저는..” “아아, 기억났다. 흐음.. 그게 오늘이었나. 뭐, 시간 같은 사소한 일은 넘어가도록 하지. 토오사카 린이라... 분명 그 이름.. 너는 아마 일본인이었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일본이 싫다. 일본인도 싫어하지. 다만 그래.. 네가 일본인이라면 어떤 장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모르겠군. 우에노라던가 아사쿠사라던가 그 근처 가까운 장소에 대한 건데 말이다.” 루비아의 인사를 중간에서 끊어버렸다는 점은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지만 일본과 일본인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마이너스. 물론 이자가 지난번의 성배전쟁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기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일로 일본을 싫어한다는 건 얼마나 좁은 속을 가지고 있는지 능히 짐작케 하니까. 게다가 우에노? 아사쿠사?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지명이지만 어째서 그런 지명이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건지 이해는 불가능이기에 추가 감점이 있다. 뭐, 굳이 생각해보자면 우에노는 잘 모르겠지만 아사쿠사라면 분명 도쿄에 있는 유명 신사의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우에노와 아사쿠사를 의도한 게 아니라 그 근처의 장소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노라니, “흠..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였는가. 아키하바라라고 하는 곳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아키하바라?? 저기..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직접적으로 지명을 언급하는 로드. 허나 아무리 지명을 직접 언급했다 해도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다. 아키하바라? 그렇게 반문한 내 질문은 제대로 된 대답으로 돌아오지 않고 깜짝 놀랄만큼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상대방으로 돌아온다. “Fuck! 네년은 최악의 일본인이다!!!! “꺅!! 뭐.. 뭔가요?! 갑자기 소리는 왜.. 게다가 지금 뭐라고 하신거죠!?!?” 이해불능의 연속이다. 게다가 어찌 그런 천박한 욕설을 할 수 있는 건지. 아까까지 매겨주던 차트에 단숨에 마이너스 체크를 5개쯤 추가해 주자. 그래도 상대는 시계탑의 유명인이자 존경받는 교수인 로드 엘멜로이 2세. 아직은 참아낼 수 있다. “몇 번이라도 말해주고 싶지만 참도록 하지. 도대체 일본인에게 단 하나있는 좋게 봐줄 수 있는 점에 대해 무지한자는 그야말로 약간의 장점도 없는 쓰레기다. 단언해주지 너는 일본인의 자격이 없다.” - 빠득.. 말.. 했겠다. 무언가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나와 로드의 대화를 옆에서 부들부들 떨며 지켜보고 있던 루비아에 의해 저지당한다. 그러고 보면 루비아도 그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는 않았을 게 분명. “......로드, 저를 무시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자네도 있었나. 분명히.. 그렇군. 에델펠트였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루비아를 바라보는 눈은 나를 바라볼 때와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무기물을 바라보는 듯한 심드렁한 표정이다. 사실 일본인을 싫어한다고 했기에 나를 바라보는 눈이 그렇게도 무관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이자는 단지 모든 타인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걸지도 모른다. 루비아도 그 눈에 살짝 불쾌감을 느끼는지 눈가를 찌푸리기는 했지만 녀석도 가면을 쓰는 데는 나와 견줄 수 있을 만큼의 달인.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한다. 칫, 저런 우아함은 솔직히 루비아의 뛰어난 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입니다. 저에 대해서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알고 있다. 천칭의 에델펠트. 쌍둥이의 에델펠트. 핀란드의 유서 깊은 오래된 마술가계인 그 에델펠트 말이로군. 헌데 말이야. 어째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문을 그리 들먹이는 거지.” “네?” 이 사람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는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덕분에 듣고 싶지 않은 고함과 욕설을 피하기 위해 나의 귀를 막는 것은 그리 늦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 “Fuck!! 난 명가 출신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인간이 제일 싫다!!” 귀를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들려오는 고함소리. 뭐야 이 터무니없는 폭언을 남발하는 사내는. 도대체가 말끝마다 F.. 차마 머릿속으로 생각하기조차 천박한 단어를 남발하며 나와 루비아에게 비난을 퍼붓는 상대가 정말 그 유명한 로드 엘멜로이 2세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다시금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는다. 이 모습이 어딜 봐서 학원 내 여마술사들 사이에서 안기고 싶은 남자 1위에 선정될 모습이란 말이야. 이런 녀석보다는 시로 쪽이 백배는.. 우와아.. 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나른하고 시니컬한 태도에서 힘이 넘치고 자신감 넘치는 것으로 급변한다.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잡듯이 움켜쥐는 로드 엘멜로이 2세. “명가가 무엇이고 가문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가슴은 장식이냐! 그 속에 품고 있는 원대한 꿈과 나아갈 대망만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 몸뚱이 하나의 나를 펴고서, 하늘과 땅을 마주본다. 그것이 정복이라고 하는 “행위”의 전부……그렇게 개시하고, 밀고 나아가고,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자의 패도인 것이다!” 앞으로 내민 으스러지도록 꽉 쥔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열변을 토하는 로드 엘멜로이 2세. 무기력함과 강인함. 거침과 섬세함. 오만과 자신감. 그러한 것이 어우러져 이 인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라고 말했던 왕이 있었지. 뭐, 그 왕은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길은 내가 이어받고 있다. 부끄럽게도 아직은 격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지탱해 내고자 내게는 과분한 로드의 칭호를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눈빛은 마치 젊은 청년의 그것처럼. 꿈과 희망으로 불타오르는 정열과 뜨거운 혼이 이글거리는 듯 강한 빛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저 너머에 있는 단 하나의 소망을 그대로 직시하기에 주변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그런 눈. 정말 잠깐이기는 하지만 그 눈빛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해 버렸다. “모처럼 시계탑의 늙은이들이 협회의 미래를 책임질만한 인재들이라고 추켜세우기에 맡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하나는 아키하바라도 모르는 최저의 일본인에 하나는 가문만 믿고 있을 뿐인 얼간이라. 돌아가라. 나는 너희에게 마술의 지도는 하지 않는다. 뭐, 다른 교수에게로의 추천서라면 써주지.” 그 말과 함께 이제는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모습에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 뚝.. 때문에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로드가 무엇이고 엘멜로이가 무엇인지는 이제 생각할 수 없고 그저 이 나를. 이 토오사카 린을 이렇게 까지 무시한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일생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루비아조차 나에 대해 이렇게 무시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 나를.. 살짝 옆을 바라보자 루비아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있다. 때문에 우리 둘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공적(로드 엘멜로이)을 앞에 두고 원하지 않았지만 공동 전선을 펼친다. “기다리시겠어요. 로드 엘멜로이.” “기다리세요. 로드 엘멜로이.” “뭐냐 더 할말이 남아있나.” 일초도 틀리지 않고 우리 둘의 입이 동시에 자리를 뜨려 하는 로드를 붙잡는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물음을 던진다. 시작은 루비아가. “로드께서는 자신이 없으신가보군요. 이 나를.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를 지도하기에 스스로가 모자람이 있어 허세로 자신의 약함을 가리고 꼬리를 내린 채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나요. 역시 안되겠지요. 로드의 칭호를 지니고 있는 위대한 강사가 겨우 이제 일학년일 뿐인 마술사조차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면 그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테니까요. 네네, 갑자기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요.” “어머나 그건 아니지요. 미스 에델펠트. 듣자하니 로드 엘멜로이 2세께서는 자신을 강사보다는 마술사로 봐주기를 바란다는데 우리를 가르칠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마술사로서 자신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피하시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마술이 아닌 다른 이상한 변명을 가져다 대시면서 우리를 애써 피하시는..” - 콰득 반응이 있다. 등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무언가를 꽉 움켜쥐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니까. 조금만 더 도발을 한다면 넘어올게 분명. “그게 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술사로서 실력이 떨어지기에 우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겟나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계시는군요. 미스 토오사카.” “아, 그게 그 말이었군요?” 내 말이 끝났을 때 휙 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로드의 얼굴은 붉어진 채 마치 스팀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기세로 씩씩댄다. 분명 소문이 와전된 건 아닐 테니 강사로서의 실력은 확실하겠지만 이렇게 도발에 약해서야 만약 우리를 맡게 된다면 속병이 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새삼 생겨난다. 물론 나도 루비아도 그걸 염려해줄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먼저 도발을 걸어온 건 누가 뭐래도 로드니까. “이.. 우매한 계집들이.. 누가 너희를 두려워 한다는 거냐!!!!” “어머 아니셨나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거의 임계점을 돌파할 것 같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드 엘멜로이 2세도 잠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겨우 평정을 되찾은 그는 아까와는 달리 마치 승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승부사와 같은 얼굴로 바뀌어 우리에게 선언하듯 말을 한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너희가 아무리 최악의 인간일지라도 이대로 물러선다면 너희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겠지. 나는 왕의 뜻을 계승하는 자로써 걸어온 도전은 피하지 않는다.” ‘따라와라’ 라고 어깨너머로 말한 후 우리를 집무실로 이끌고 들어가는 들어온 로드 엘멜로이 2세는 우리를 잠시 집무실에서 기다리게 놔둔 채 아까까지 지저분과 퇴폐의 온상으로 보이던 휴게실로 먼저 들어가 정리를 시작,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들어올 것을 재촉한다. 그 끔찍한 몰골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살짝 주저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해갈 수는 없고 루비아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손에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리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간다. 휴게실 안에서 로드 엘멜로이 2세가 우리에게 들이 대는 것은. 어딘지 현란하게 채색된 네모난 박스. 그 표지에는 ‘Admiral 大戰略 2002’라고 써있다. 어라, 한자? “어드미랄 대전략 2002. 아직 영어권에는 발매되지 않은 최신작이지. 참고로 그동안의 숙원이던 온라인 플레이가 가능한 버전이다. 이것으로 2:1. 너희 둘이 나를 꺾는다면 이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이름을 걸고 너희를 내가 거두어 주마.” ??? ========================================================== 페이트 제로를 읽으신 분이라면 친근하게 느끼실 우리의 찌질이 웨이버가 돌아왔습니다. 정말 찌질이 웨이버와 로드의 모습에는 너무 큰괴리가.. 역시 우리 대인배 형님의 공이 크신듯 합니다. 사람 하나 개조 순식간;; 공식 설정상 웨이버가 린의 후견인으로 되어 있기에 등장했습니다. 1부의 카리스마가 길가메쉬와 랜서였다면 2부의 카리스마는 로드 엘멜로이가 맡을 수 있을까요? ㅎ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19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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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1)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날 있던 일을 이야기하는 자리. “흐응..” 굳이 남자가 아니라도 사랑스럽게 바라볼법한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어떤 행동도 어울린다고 해야 하려나. 가늘게 뜬 눈은 질책하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손은 내가 진상한(?) 아니 떠넘긴 쇼핑백을 한심하다는 듯 이리 저리 흔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를 털끝만큼도 떨어뜨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윽고 쇼핑백의 내용물을 부러울 만큼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꺼내어 탁자위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톡톡’ 하고 두드리는 에밀리아. 마치 심문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행동에 나의 기세는 더더욱 움츠러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 지금 나는 절대적인 약자이며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요구조자(要救助者)이니 침묵을 지킨 채 선처만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다. “이걸 가르쳐 달라고?” 지금 내가 사와서 에밀리아의 손에 건내 준 것은 세간에 최고 인기를 구가한다는 게임기. 대략 3만엔 정도를 호가하는 고가품이다. 함께 구매한 소프트는 그 이상한 로드 엘멜로이 2세의 과제로 제시된 어드미랄 대전략 2002라는 게임.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게임은커녕 게임기나 컴퓨터라는 물건 자체도 건드려 본적이 없는 나다. 홧김에 그리고 오기로 승부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 때문에 그나마 우리 집의 기계 관련 담당자이고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에밀리아에게 자신의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최선의 방안이다. 그렇지만 에밀리아의 반응은 영 신통치가 않고 급기야는, “무리. 절대로 무리.” “윽.. 어째서?” 절대 불가 판정을 받고 만다.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있나. 게다가 반문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무리라고 말하는 이유 정도는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니까.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 수 있는데 듣고 싶어?”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에밀리아의 의견을 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일단 나 혼자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돌파구가 보일 리가 만무. 지금은 최대한 에밀리아의 의견에 동조해주며 그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첫째. 린은 기계치중에서도 최고급 기계치니까. 그렇지 서번트의 랭크로 치자면 기계치 랭크가 EX에 달하는 게 분명하잖아? 어디 부정할 수 있으면 부정해 봐.” “큭...” ‘토오사카 린은 기계와 친하지 못하다.’ 정말이지 신랄한 비판이지만 안타깝게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현대가 정보화 사회니,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니 하는 소리는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용법을 익혀보기 위해서 무수히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만지는 기계, 컴퓨터마다 종국에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가는데 이 이상은 도저히 두려워서(기계들 마다 하나같이 비쌌기에 하나를 망가뜨릴 때마다 노려보는 에밀리아의 눈이 두려웠다는 건 절대 아니다.) 손을 놓고 지낸지도 벌써 몇 달. 이제 와서 게임기 따위를 만지작거렸다가는 아마도 같은 말로를 걸을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그런 결과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 태도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에밀리아는 남은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반론은 없는 것 같네.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두 번째 이유. 인터넷을 통해서 이 게임 살짝 조사해 봤는데..”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라니 나름대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걸까. “어드미랄 대전략 2002. 발매 된지 한달도 안 된 최신판이네. 기초적인 조작은 그렇다 쳐도 제대로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방대한 지식과 조작의 난해함이 극악에 달한다고 평가 되어있어. 어떻게든 특훈을 통해 조작을 익힌다 쳐도 그건 기초적인 수준에서 멈춘다는 뜻.” “하.. 하지만 이쪽은 두 명이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든 조작법을 익히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다 해도 일단 수적으로 두 배에 달하는 아군의 전력이다. 게임 방식과 룰의 해석에는 충분히 자신이 있으니까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조작. 조작기의 컨트롤마저도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적에게 공격할 수 있는 방법정도만 익힐 수 있다면 충분히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보지만 에밀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만 있다. “평범한 상대라면 그렇겠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게 린과 루비아가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인데.. 아까의 정보와 마찬가지로 게임제작사 홈페이지에서 찾아낸 사실. 이건 나도 예측하지는 못했어. 린 이것 좀 보겠어?” 빙글 하고 의자를 돌려 앉아 조작하고 있던 컴퓨터의 모니터를 가리키는 에밀리아의 손끝을 따라 바라보자 그곳에 써있는 것은. 조잡한 홈페이지의 디자인 속에 조잡한 글씨로 써있는 무언가의 공고문. [어드미랄 대전략 2001 세계 대회 준우승 : Lord_Elmeloi II] “.......................” “.......................” 솔직히 당황해 버렸다. 뭐야 그 아저씨는! 시계탑의 마술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회에 나가서 준우승이나 해버리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잠깐 고민해봤지만 로드 엘멜로이 2세라는 말도 안 되는 명칭을 자신을 나타내는데 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 외에 있을 리가 없는데다가 준우승 상패와 상금을 수상하는 장면을 찍어둔 사진에서 이렇게도 불만에 가득 찬 채로 뚱해 있는 얼굴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로드가 준우승자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로드 엘멜로이.. 생각보다 치사한 사람이잖아? 자신의 주특기분야인 것을 끌어다가 과제니 뭐니 하고. 아니 애시당초에 마술사라면 마술과 관계되어 있는 과제를 내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이상의 3가지 이유를 넘어서 승리를 거머쥘 자신이 있다면 도와줄 수도 있어. 어떄?” 저렇게 의기양양한 태도로 ‘너는 안돼’ 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에밀리아의 모습이 어쩐지 얄밉다. 물론 나도 마술사다. 마술사란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여 시작부터 결과를 산출해 내는 사고를 하는 인간. 그 극단의 마술사가 바로 아틀라스 사원의 마술사이지만 굳이 아틀라스의 마술사가 아니라도 기본적인 사고의 베이스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라거나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말이 지니는 허구성과 무의미함 정도는 알고 있지만.. “윽..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포기할 수만은 없잖아? 준우승이라는 건 누군가가 그 사람을 이겼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도대체 누가 이긴 거야?” 포기할 수는 없다. 그 정도의 모욕을 받고 나서 쉽사리 물러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최대한 발버둥치고 발버둥쳐서 상대에게 내가 받을 피해정도는 입혀 줘야 성미가 찬다. 게다가, 저 괴물 같은 사람도 지기는 한다는 의미이니 그 가능성은 실낱같지만 없는 것도 아니니까. “흐응.. 분명 여기에 우승자의 이름이... 에?” 모니터를 찾아보던 에밀리아가 상황에 걸맞지 않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화면의 어떤 부분에 시점을 고정시킨 채 굳어버린다.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그럴까 하는 마음에 살짝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곳에는 로드가 준우승한 대회의 우승자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드미랄 대전략 2001 세계 대회 우 승 : King Arthur] ‘킹 아더’라. 하긴, 세상에 아더왕은 전신이자 군신이고 브리튼의 영웅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왕이었으니까 저런 식의 별칭을 사용하는 사람 역시 많을 수밖에 없을거다. 마치 일본인 중에 오다 노부나가라던지 도쿠가와라던지 하는 별칭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저런 별칭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더왕의 정체가 그런 소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지어지는 상황이 예상 된다. “헤에.. 누군지 몰라도 알트리아의 팬인가 보네? 어디어디..” 우승자의 이름 옆에는 우승 당시의 사진이 찍혀있는데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려버릴 만큼 커다란 선글라스가 인상적인 금발의 소년이다. 마치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반짝이는 금모래 빛. 그러고 보니 체격도 닮았구나.. 랄까보냐! “뭐.. 뭐야 이건!?!!?” 기억 속에 있는 알트리아의 모습과 지금 사진 속에 있는 우승자의 모습을 대조하면 할수록 일치 판정만이 지속적으로 내려진다. 150이 약간 넘을 정도로 작은 키에 가녀린 체구.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잘 따서 말아 올린 금빛 머리카락. 그런 조건에 킹 아더라는 별칭까지. 이건 어딜 봐도 알트리아? “하아.. 알트리아도 가끔은 별난 구석이 있으니까.”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이건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나 다름없다. 초보자인 내가 그를 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전해본 과제. 하지만 실제로 그를 꺾은 경험자가 주변인이라는 사실은 어둠 속에 빛을 발견한 것처럼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는 사실이다. “잘됐네. 린. 순전히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이른 것 같아.” 아까부터 포기하라는 말만, 무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던 에밀리아마저도 달라진 상황을 인식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희망을 북돋아 주고 있다. 좋아 돌파구가 보였을 때 단숨에 난관을 돌파하는 것이야 말로 지금 필요한 순간. 더구나 전화기는 바로 옆에 있다.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일본에 전화해볼 테니까.”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번호를 눌러 일본의 에미야가로 전화를 건다. 이곳에 와서 몇 번이나 전화를 걸고 몇 번이나 싸우고 몇 번이나 서로의 안부를 걱정했던 번호이니 틀릴 리는 절대로 없는 너무나 익숙한 번호. -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이상하네.. 안받아.” “침착해 린, 이제 전화 건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게다가 지금 일본은 으음... 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치는 에밀리아이지만 그녀의 행동은 지금 내 눈에 들어와도 들어온 게 아니다. 다시 말해 내 모든 신경은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수화기에 집중되어 다른 외부의 자극은 없는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끈기 있게 상대가 전화에 응답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를 수 십초. -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딸깍. 아,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쿠라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반가운적이 얼마만인지. 그 반가움을 전부 전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여유는 없다. 당장에라도 알트리아에게서 비책을 전수받고 맹훈련에 들어가야 하니까. “왜 이렇게 늦게 받은 거야. 사쿠라, 저기저기 있잖아~” “린..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언니. 시계 좀 확인해주세요. 그럼..] - 딸깍. 뚜~~~~ 뚜~~~~ 뚜~~~~ 끊어버렸다? 시계? 어째서? 무언가 알고 있는 지 안쓰럽게 내 어깨를 두들기는 에밀리아를 바라보자 “지금 일본은 한밤중이야..”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들겨 준다. ============================================== “저기 사쿠라? 알트리아 좀 바꿔주지 않겠어?” “............흥.”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전화를 걸자 이번에는 오래지 않아 전화를 받는다. 문제가 있다면 지난 밤의 전화를 통해 상당히 기분이 상해있는 사쿠라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라도 하면 바로 비아냥을 늘어놓기 때문에 전화를 하는 내내 스스로의 이마를 짚으며 화를 삭여야 했다는 점이지만. 사쿠라.. 오늘의 굴욕은 절대로 잊지 않아줄 테니까. “네, 전화 바꿨습니다.” 그렇게 겨우 알트리아와 통화할 수 있게 된 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굳건한 어조이지만 그 본질인 가느다랗고 듣기 좋은 미성이 전혀 퇴색하지 않는 목소리는 지금 나에게 있어 마치 천상의 목소리와도 같게 들린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한 느낌이 들고 있다는 점이 마치 성배전쟁 당시 세이버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라 왠지 불안하기는 하지만. “아.. 알트리.. 아차 그게 아니지. 우선 잘 지냈어?”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만, 린 덕분에 오늘 하루의 기분은 좋지 않을 듯 하군요.” 웃.. 역시 불안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아까까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노력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젠 조금씩 목소리에 불만이 스며 나오고 있다. 물론 실제로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나, 뭔가 저질러 버린걸까? “에? 나.. 뭔가 했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가요. 아니면 아예 자각이 없는 건가요. 당연히 지난밤에 걸어준 그 한통의 전화 때문이지요. 어떻게 그리도 대단한 타이밍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겁니까. 당신의 그 특징은 이제 단순히 운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습니다. 간단히 말하죠.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만, 물론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쪽이 좋겠죠. 아니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제발 두 사람의 문제는 두 사람이 해결해주시고 전혀 관계없는 제게까지 피해가 미칠 일은 제발 만들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덕분에 제 오늘 아침 식사가 상당히 초라해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니죠. 아니죠. 상당히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식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굽다만 토스트 한조각과 우유를 내 주고는 ‘알트리아. 원망은 저 멀리 런던에 있는 언니에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데... 칫.” 아차, 상당히 좋지 못한 순간에 전화를 걸었던 걸까. 명예로운 기사왕인 저 알트리아가 ‘칫’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지금 저쪽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게다가 그 출발이 내가 시차를 생각 못하고 걸어버린 한통의 전화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지금부터 알트리아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인 내게 치명적. 그런 내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알트리아의 푸념은 수화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달된다. “시로우가 아침을 마련해 줬다면 그래도 제 기분은 나아졌겠지만.. 아니 하다못해 시로우가 남아있기라도 했다면 사쿠라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나빠질 일도 없었을 테니 문제될 일이 없었겠지만 시로우는 아침부터 잇세이에게 호출을 받아 나갔기 때문에 사쿠라 만을 믿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사쿠라가 기분이 나빠진 상태라는 건 어떤 상황을 초래하는지. 오늘 린 덕택에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심정을 어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아.. 아니 충분히 전달되고 있거든..” 알트리아라고 하면 세계에 이름이 드높은 영웅중의 영웅, 브리튼의 왕이자 미래의 왕. 성검 엑스칼리버를 손에 들고 모든 적을 멸하는 무패의 제왕. 그 대단한 알트리아가 이렇게 구구절절이 한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얼마나 상태가 좋지 못한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하긴 그렇겠죠. 스스로가 요리라는 것을 할 수 있는데다 에밀리아라는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옆에 붙어있는 당신은 결코 제 심정을 알 수 없을 겁니다. 마치 적진을 눈앞에 두고 병량고를 습격당했을 때의 최전방 장수의 심정인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자숙하라는 의미에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명예로운 기사들의 왕인 알트리아 팬드래건이니 일방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지는 못하죠. 그러니 부디 먼저 끊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자.. 잠깐만 알트리아. 이쪽은 절박하다고~! 제발~!!” 으으..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상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렸 던 적이 있었던가. 없다. 절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래 없을 정도로 상대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내게 너무나 가혹한거 아닐까. 정말이지 이 모든 게 그 꼴 보기 싫은 마술사 때문이야. 대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에밀리아에게, 알트리아에게 이렇게 사정을 해야 하는 거지. 이번 일만 끝난다면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로드에게 보복해주고 만다. “.........제 조건을 들어준다면 이야기라도 들어보죠.” 못마땅하다는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참고로 조건이라는 게 이곳, 런던에서 만들어지는 특산 과자의 세트라니. 알트리아 이미지가 많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 한참동안 겨우 지금 처해있는 상황과 알트리아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하고 나자 그녀의 목소리에서 기분 나쁨이 사라지고 평상시와 비슷한 어조가 돌아왔다. “흐음..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 로드 엘멜로이 2세가 웨이버 벨벳이었을 줄은 몰랐군요. 후후, 그 오만방자한 정복왕의 마스터였던 키 작은 소년이 그렇게까지 성장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그랬기에 정복왕의 전술을 사용하고 있던 것인가.” 로드 엘멜로이 2세는 4차 성배전쟁에 참가했던 마스터에 라이더로 소환되었던 이스칸달의 마스터라는 사실은 아버지가 남겨주신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작년에 있던 어드미랄 대전략 2001년 세계대회였죠. 저는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변장을 하고 나간 상태였습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웨이버 벨벳은 저를 본적이 있으니 만약 맨얼굴로 마주쳤다면 알아볼 수 있었겠죠. 결승전까지는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만 결승전은 그리 쉽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임이 시작하고 상대의 진형을 보자 기병과 창병, 중무장보병이 혼재되어 있는 부대 구성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고 특히나 기병의 비율이 1/4정도에 좌익에 대부분이 밀집해 있는 형태의 진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요새 현대인에게는 낯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살던 시대에는 전술을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익히게 되어있던 알렉산더 혹은 한니발의 우회 기동 전술.” 알렉산더와 한니발이라면 굳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고금의 명장이다. 알트리아의 말에 따르자면 상대는 그런 자의 전술을 연구하고 사용한다는 것. “문제는 제가 지니고 있던 병력의 구성이었습니다. 저는 명색이 기사왕이고 생전에 사용했던 전술 또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기사에 의존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지닌 병력은 중기병이 전체 병력의 4/5를 차지하는 극단적인 중기병 집중 병력이었고 상식상 상대가 제대로 된 우회 기동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려운 승부가 예상되었죠.” 아무리 그런 쪽과 인연이 없는 나라도 기초적인 상성 정도는 알고 있다. 기병은 보병과 궁병에 강한 대신 창병에게 약하고 창병은 기병에 강한 대신 보병과 궁병에 약하다. 말하자면 가위바위보 싸움과 같은 관계로 서로 물고 물리는 것. 그렇다면 알트리아가 당시 선택한 군대의 병종은 너무나 극단적인 편중을 보이고 있기에 상대가 그 약점을 파고들어 창병을 앞세운 전술을 사용할 시에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선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불리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예상뿐,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결국 알트리아는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결국 이길 방도는 있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알트리아의 설명은 계속 된다. “우회 기동 전술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중앙 본진의 힘입니다. 중앙 본진이 버텨주고 있는 동안 좌익 혹은 우익의 기병대가 상대의 후미로 돌아 포위 섬멸하는 망치와 모루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전술이 완성됩니다. 만약 본진이 버텨주지 못한다면 뒤로 돌아간 기병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각개 격파되고 마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중앙 본진은 공격적인 것보다는 견고한 진형이 우선시 되죠. 정복왕의 팔랑크스는 그런 방어진의 정수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왕입니다. 그것도 기사들의 왕. 잊고 있던 그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가 지닌 좌익의 기병이 저의 후미를 포위하기 전에 전력을 집중하여 적 본진을 꿰뚫는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전술적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지만 불리한 전력을 지니고 있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고 저는 저의 기사들을 믿기에 과감히 전진을 시도 했습니다. 쐐기 대형으로 물밀 듯 적의 심장부를 파고들었고 뚫느냐, 막히느냐의 치열한 돌파전의 끝에 결국은 상대가 우리의 배후를 점하기 전에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제게만 통용되는 전술에 불과합니다. 제 능력은 이런 게임에도 적용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병들의 사기는 돌파를 감행하는 동안도 최고치를 유지했고 시도하는 공격마다 크리티컬 히트가 나와 줘서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그를 이기고자 한다면 저와 같은 방법으로는 무리입니다.” 분명 알트리아의 특징 중에 카리스마와 행운이 높은 랭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게 게임을 대상으로 통용된다는 점은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역시나 영령은 대단하다랄까.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알트리아가 로드를 이기는데 사용했던 방법은 내가 쓰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하지만 이미 상대의 전술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다시 준비를 한다면 다르겠죠. 게다가 아까 린의 설명을 따르자면 린의 군대가 상대방의 두 배라고 했으니 병력의 구성과 수, 그리고 전술. 이 세 가지가 맞물린다면 능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정도의 책략을 낼 수 있겠는데 선택은 린이 하도록 하세요. 1책은....” 좋아, 놓치지 않게 제대로 들어볼까. -------------------------------------- “이상이 2책입니다. 아무래도 2책이 훨씬 간단하겠죠. 연습해 보시고 조작과 타이밍을 읽을 수 있다면 1책을, 만약 무리라면 2책을 선택할 것을 추천합니다.” “고마워 알트리아. 도움이 됐어. 덕분에 희망이 보였으니까.” 사실이다. 알트리아가 로드 엘멜로이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때 사용한 방법은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기에 직접적인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내놓은 두 가지 책략과 로드가 사용하는 공격 방법에 대한 대략적인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상당히 큰 패를 쥐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 무엇보다 상대방의 수를 뻔히 아는 채로 상대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알트리아, 어쩌다가 그런 대회에 나갈 생각을 했던 거야?” “읏..” 전화하는 내내 정말 궁금했던 의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알트리아는 게임이나 그런 쪽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갑작스레 게임대회에 출전하거나 하는 의도는 짐작이 불가능. 내 질문을 받은 알트리아는 한순간 당황하는 소리를 내고는 “..........군사 기밀입니다. 그럼 약속한 영국제 과자 세트를 항공 우편으로 신속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뒤에서 사쿠라가 노려보고 있으므로 전화를 계속하는 건 무리겠네요.” 라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땠어?” “이제 낙승이야.”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밀리아의 모습이 있다. 어제 말로는 ‘무리다’ ‘안돼’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던 그녀이지만 그래도 내심 내 일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내 마음까지도 위안이 된다. 때문에 말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어주며 안심 시킨다. 그렇지만 에밀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으로 가득 찬 채. “하아.. 남은 게 있었잖아. 아직 린이 저 게임기를 조작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아차,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필승의 비책을 전수받고 비책에 대한 이해를 십분 발휘하여 의기가 충천하다 하여도 나의 이 저주받을 기계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한 결국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괘.. 괜찮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래 어떻게든. ------------------------------------------ - 일본 후유키시 에미야 가 - - 딸깍 그때까지 통화하던 수화기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뒤에서 ‘어째서 자신의 언니를 도와준 것이냐’라고 심기 불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여성을 피해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가는 금발 머리의 소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아무도 주위에 없는 곳까지 이르자 한숨과 함께, “후우.. 린 아무리 저라 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기는 합니다. 사쿠라로부터 식비의 압박을 받아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출전했다거나 하는 이유를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후후...” 라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모습이 꽤나 처량하다. =================================================== 음.. 챕터를 기획했던 의도와 설정상 어드미랄 대전략 2002라는 게임을 실제하는 대전략 게임에 기초해서 설명할 수가 없을 듯 합니다. 순수 창작 게임으로 설정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실제의 대전략은 현대전이지만 이 팬픽에서의 어드미날 대전략 2002는 고대 전투로 설정을 바꿉니다. 다시 말해 중무장 보병, 경무장 보병, 경기병, 중기병, 궁수, 투석병, 장창병 등을 바탕으로 전술을 통해 상대를 꺾는 그런 게임으로 설정합니다. 게임 규정은 기본적으로 1인당 100의 인구수를 주고 경무장 보병(궁수, 투석병)은 1, 장창병과 중무장 보병은 2, 경기병은 4, 중기병은 8의 인구수를 소비하도록 합니다. 중기병 = <1.5 경기병>, <10 중무장 보병> <20 경무장 보병>, <2 장창병> 경기병 = <7 중무장 보병>, <14 경무장 보병>, <2 장창병> 중무장 보병 = <3 경무장 보병, 장창병> 경무장 보병 = <장창병>..................... 여기까지 쓰는 도중 지쳤습니다; OTL.. 그냥 대충 두 마디로 설정을 적겠습니다. 중기병은 보병에게 효율이 매우 좋지만 인구수를 많이 먹는데다 창병한테 취약하기에 너무 많이 쓰기 그렇고 모든 병종 중 중무장 보병의 효율이 가장 좋습니다. 다만 배후 공격 등에 모든 병종이 약하다는 식입니다. 알트리아가 게임대회에 참가했던건 2001년. 린과 에밀리아가 아직 후유키시에 있던 기간입니다. 뭐, 별로 중요한건 아니고;; 마지막 사족. 알렉산더의 우회기동전술에 대해서는 짧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대충 끄적인거라 안습할 따름입니다. <참고자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다큐멘터리 알렉산더>. 게다가 어디를 뒤져도 저 전술의 약점이라거나, 파훼법이라거나 써있는게 없더군요; 그래서 책략 1, 2는 거의 제 망상속에서 짜여질 예정이니 군사지식에 해박하신분 계시면 노려보지 말아주세요 OTL... ===================================================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27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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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2) “조..좋은 아침이네요. 미스 토오사카.” “조..좋은 아침이네요. 미스 에델펠트.” 녀석과 한 치도 다름없이 같은 말을 나누는 아침인사. 루비아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나간 일주일간의 악몽 같은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틀렸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 ‘아니야. 그건 후퇴 버튼이라니까!’ ‘하아.. 그건 공격이 아니라 항복.’ ‘린, 솔직히 말해봐 일본어 모르지?’ ‘쓸데없는 노력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어?’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그런 모진 비난의 홍수와 밤낮으로 필사적으로 싸워 겨우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히는데 성공한 것이 이틀 전. 이틀 전의 그 날은 그야말로 토오사카 린의 기계와의 첫 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려나. 에..밀..리..아.. 모처럼의 기회라고 그렇게 나를 무지막지하게 매도해주다니. 이번일이 끝나면 내가 꼭 갚아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그나저나 과거는 과거 이제는 앞으로 남은 결전의 순간에만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자. 겨우 조작법을 익힌 후 남은 이틀간은 루비아와 나의 집을 오가며 진행된 의견의 조율과 호흡을 맞추는 훈련으로 보냈다. 역시나 철야에 가까운 연습 속에서 좌절과 고통을 맞보며 결국 오늘 새벽에 이르러서야 가상의 상대역을 맡아준 에밀리아를 이길 수 있었다. 2:1이라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는 건 정말 치욕스러운 사실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로드 엘멜로이 2세가 들고 나올 전략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을 위안 삼을까. “드디어 오늘이군요. 미스 에델펠트.” “네, 드디어 오늘이에요. 그 오만방자한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날이지요. 오호호호호” 엑.. 정말 오늘만큼은 아군이긴 하지만 코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대며 왕비님같이 ‘오호호호’하고 웃는 루비아의 모습은 정말 최악이다. 평소라면 저런 과장된 행동을 취할 리가 없는 그녀이지만 루비아 역시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다는 반증. 그러나 상태가 저렇다는 것만 뺀다면 며칠째 철야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금발과 하얀 피부는 여전히 빛나고 있기에 살짝 부러운 건 사실. 물론 어디까지나 살짝 부러운 것에 불과하지만. 알트리아가 제시해준 책략에 대한 이해는 이미 전해들은 당일에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방의 중심은 정면에 내세우는 창병과 중무장 보병대. 두가지중 첫 번째 책략은 기동성 좋은 경기병을 다수 확보하여 상대가 배후를 치기 위해 기병을 이동시키는 타이밍을 잘 노려 순식간에 기병과 중앙군의 사이를 파고들어 중앙군을 포위, 섬멸하고 남은 기병대를 각개 격파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마술사. 성배전쟁이라는 사투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마술사란 진리와 근원을 탐구하는 학자에 가깝다. 전투, 전쟁, 전술, 전략 등에는 무지한게 사실이기에 알트리아가 말해준 타이밍이라는 것을 잡는 것은 무리. 몇 번 시도해보기는 했지만 너무 이른 타이밍이라 상대 기병과 창병에 납작하게 눌려버리거나 너무 늦은 타이밍이라 오히려 아군의 중앙이 포위 섬멸당하기 일쑤였다. “마음 같아서는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참아야겠지요?” 내 푸념을 자연스레 이어받아주는 루비아. 최소한 이번 소동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루비아와의 관계가 그래도 개선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로드 엘멜로이 2세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다투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력의 손실을 초래하고 만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 지난 일주일간 믿을 수 없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는 나 토오사카 린과 닮은꼴이니까. ------------------------------------- - 루비아 - 읏.. 서로 약속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동일한 시간이군요. 하긴, 지난 새벽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니 이번만큼은 비난을 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린. “조..좋은 아침이네요. 미스 토오사카.” “조..좋은 아침이네요. 미스 에델펠트.” 한 치도 틀림없는 동일한 인사라니 지난 일주일동안 린과 꽤나 어울리기는 했었나보네요. 정말이지, 린이 그렇게 심각한 기계치인 줄 알았다면 로드의 제안에 대해..... 후우.. 깊이 고민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만 그렇다 해도 피하지는 않았을 테니 알았다 해도 소용 없으려나요. 로드 엘멜로이 2세.. 린을 모독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독하는 이유가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 토오사카의 붉은 악마는 조금은 못되게 굴어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의 유서 깊은 에델펠트를 모욕한 점에 있어서는 약간의 관용도 없어요. 무슨일이 있어도 제 앞에 무릎꿇고 빌도록 만들어 드리지요. “드디어 오늘이군요. 미스 에델펠트.” “네, 드디어 오늘이에요. 그 오만방자한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날이지요. 오호호호호” 아차, 마지막의 웃음은 뭐였나요. 제정신을 차리세요. 루비아젤릿타. 그런 천박한 웃음 따위는 명예로운 에델펠트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니까. 실수인겁니다 어디까지나 실수. 그나저나 눈앞에 서있는 저 아가씨의 모습에는 정말이지.. 기가 차네요. 어딜 봐서 저 모습이 저와 마찬가지로 일주일째 밤에 잠을 못자며 깨어있던 여성의 모습이란 말인가요. 여전히 윤기 넘치는 흑발과 강한 의지의 빛을 지니는 눈동자. 과연 저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인정할 만한 상대로군요. 약간 부럽기도 합니다. 무.. 물론 약간이에요. 아주 약간. “마음 같아서는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참아야겠지요?” 린은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있는 모양이군요. 물론 아쉬워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이니.. 하지만 린,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넘어가고 있기는 합니다만 당신이 기계 종류와 친하지 못한 건 그야말로 저주에 가깝다고 보네요. 마술사로서 어려서부터 자라온 저 또한 그리 능숙하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만 린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어른과 갓난아이의 차이에 가까우니.. 어떻게 만지면 시작하고 하루 만에 조작기-조이패드라고 하던가요-가 스파크와 함께 부서질 수가 있는 겁니까. 그런 상황에서 첫 번째 책략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나마 일주일간의 노력 끝에 두 번째 책략이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게 어디인가요. 책임이 막중합니다. 루비아. 기계치인 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중앙에 두터운 장벽을 쌓고 버텨주는 것 뿐. 나머지는 제가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겠죠. 어디서 얻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로드가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술과 그걸 무너뜨릴 수 있는 전술. 가져온 건 린이지만 그걸 활용하는 건 이 루비아입니다. 상대와 거의 동일한 구성의 병력을 준비하기만 해도 숫자는 기본적으로 두 배. 린이 상대의 두 배에 달하는 중앙군을 바탕으로 전진을 계속 하는 동안 저는 상대의 두 배가 되는 기병대를 이끌고 상대 기병을 끝까지 쫓아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죠. 결국 포위당하지 않는다면 승기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전술에 의한 승리를 노리는 것이 아닌 월등한 숫자로 승리를 거머쥐고자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패배한다면 그 불쾌감의 몇 배가되는 굴욕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참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린, 당신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준비에 매달렸던 거겠지요. 인정하기는 싫지만 린 토오사카는 저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와 닮은꼴이니까요. -------------------------------------------------- - 린 - 왠일로 친절을 발휘한 루비아의 호의에 꽤나 편안하게 이곳 시계탑 서쪽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집무실까지 도착했다. 차를 운전해준 운전사는 하얀 백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중후한 미소를 지어주는 노년의 남성이었는데.. 분명 예전에 소개받은 기억에 의하면 루비아의 집사인 슈프란씨.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루비아와는 달리 곧으면서도 친절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까지는 앞으로 5분정도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상대는 일단 우리보다 마술사로서도, 협회내부에서의 위치로서도 격이 높은 로드의 칭호를 받은 자. 약속시간보다 앞서 도착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겠지. 바로 옆에 서있는 루비아와 눈빛을 한번 주고받은 뒤 각오를 굳히고 집무실의 문을 노크한다. - 똑똑 반응이 없다. - 똑똑 어딘지 모르게 데자뷰가 느껴지는 건 착각에 불과하려나... 그럴 리가 없잖아! 정확히 일주일전 이곳을 찾아왔을 때 역시 약속시간에 맞춰 왔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는 대답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자..... 돌아간다. “설마 오늘도 마찬가지는 아니겠..지?.” “설마요. 그렇게까지 로드도 무책임한 사람은...” 거기까지 말하고 문을 열었을 때 일주일전의 상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재현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 정돈 되어있는 집무실의 풍경과, - 두둥~ 두둥~ 두두둥~♩♪♬ “무책임한 사람이 있었네요.” “질렸어요. 이긴다 해도 이 사람에게는 별로 사사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이렇게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까지. 다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는 이 음악이 무슨 음악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서 오늘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정도이려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난 일주일간 수없이 들어온 그 악몽 같은 음악의 연속을. 물론 음악을 끄려 한다면 끌 수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게임에 적응하기 위해 그대로 둔 채 연습에 몰두했고 덕분에 저 음악의 멜로디라면 연주까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겹게 들었다. 뭐, 그건 둘째 치고, 어쨌든 우리의 적 로드 엘멜로이 2세는 오늘도 어김없이 휴게실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말이겠지?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루비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어쨌건 이대로 멈춰 서있을 수는 없겠지.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인지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는 루비아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휴게실로 들어가는 문의 손잡이를 내가 돌린다. 어떤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 - 따단~ 두둥~~ 두두둥~ ♩♪♬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오던 음악소리는 한층 크게 증폭되어 귀청을 울린다. 도대체 볼륨을 이렇게 높여놓고 게임을 즐기는지 따위는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지만. 휴게실의 내부는 지난번에 왔을 때에 비해서는 훨씬(?) 정상적인 상태다. 흐트러진 침구의 상태는 여전했지만 먹다 남은 과자도, 음료수도, 결정적으로 반나체 상태의 로드 엘멜로이 2세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여전히 정면의 모니터만을 응시하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동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있다. 아니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그것 나름대로 부조화인 게 사실이지만 말이야. “실례하겠습니다. 로드 엘멜로이.” “실례하겠어요.” 내 뒤에 숨어서 힐끔 하고 내부를 바라보고는 안심한 채 앞으로 나서는 루비아와 함께 상대에게 우리의 도착을 알린다. 그야말로 일종의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이므로 당당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그나저나 내 뒤에 순한 양처럼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내부를 살피는 루비아의 모습이라니 오늘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억할만한 날이 될 것 같네. 그렇게 인사를 겸한 선전포고를 마치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지만 딱히 상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모니터를 향해 들어갈 것만 같이 몰두를 하고는, - 따라라단다다~ 게임 종료 음악이 나오자 묘하게 감격한 모습으로 잠시 눈을 감는 등 완전 게임에 심취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그저 질렸다는 표정으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기를 수십 초. 겨우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를 바라보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표정은, ‘뭐야, 너희 있었냐?’ 라는 표정이다. “음, 뭐냐 너희들인가.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왔나.” 진짜로 질렸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 무슨 일을 한 걸까. 상대는 이렇게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로드는 오늘이 예정된 날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뿐이기에 어딘가로 연락을 취해 사람을 불러 우리를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로드의 호출로 불려온 사람은, “이곳 시계탑에 랜을 설치하라는 억지를 부리시는 데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게임시설을 설치해 놓으라니. 물론 시설 설비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건 시계탑에 있는 조직 중 오직 우리 슈트라우스 밖에는 없다 해도 로드께서도 상당히 짓궂으신걸요. 덕분에 다른 교수분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꽤나 고생했답니다. 아 비용걱정은 마세요. 모두 로드께서 지불해 놓으신 상태이니까.” 자신을 빌헬미나 폰 슈트라우스라고 소개한 은발에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 그녀가 안내한 곳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던 동쪽 건물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강의실. 한쪽 벽면에는 대형 스크린이 두개 자리 잡고 있으며 각각의 스크린에는 지겹게 만져본 비디오게임기가 설치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안에 들어있는 소프트 역시 예상하는 그대로일건 분명. ‘자 어떠신가요?’ 라며 자신들이 해놓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포즈로 가슴을 펴는 그녀의 어딘가에 시선이 닿고는 아주 약간의 패배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니 저 체구에 저런 사이즈라니. 어딜 봐도 사쿠라 수준이잖아? 치사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차 지금은 그런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적당히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녀를 내보낸 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게임기를 조작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게임을 실행시킨다. 이미 로드가 개설한 게임이 목록에 올라와 있고, 나와 루비아가 접속함과 동시에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서서히 올라간다. “준비 됐나요. 미스 에델펠트.” “물론이에요.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를 모욕한 대가. 꼭 치르게 해드려야겠죠.” 5. 4. 3. 2. 1. 개전. 스크린을 통해 전장이 열리고 나와 루비아는 그런 전장 한가운데에 던져진다. 전장은 오직 넓은 평야뿐으로 별다른 지형적인 제약은 없이 순전히 병력과 전술을 통한 승부만이 요구되는 장소다. 그런 평야의 저편. 우리의 상대가 되는 로드 엘멜로이 2세의 군대가 넓은 지역을 차지한 채 이쪽의 시야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대의 병력 구성과 그 포진 뿐. “예상대로군요. 미스 토오사카.” 알트리아에게 얻은 정보는 정확했다. 중앙에는 마치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으로 진형을 짠 견고한 창병의 라인과 그 뒤는 중무장 보병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 쪽에서 바라볼 때 좌측. 즉 상대의 우익에 다수 포진하고 있는 기병까지. 전형적인 알렉산더의 우회 기동 전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렇네요. 미스 에델펠트. 똑바로 해주시길 바라겠어요. 당신의 움직임이 우리의 핵심이니까.” 분하게도 나는 이번 결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물론 이런 경우 경중을 따지는건 우습기는 한데다 내가 맡고 있는 중앙군은 상대방 입장에서도, 우리 입장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창과 방패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루비아라는 창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막고 있는 방패의 역할일 뿐. “기우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려드리지요. 그렇게 말하는 미스 토오사카야 말로 혹여나 그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돌파당하거나 한다면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 - 로드 엘멜로이 2세 - “호오..” 솔직히 놀랍군. 상대의 포진은 어딜 보나 내가 취하고 있는 진형과 거의 동일. 오히려 저쪽의 병력이 우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일한 진형과 전술로 맞부딪칠 경우 승패는 쉽게 예측 된다. 토오사카에 에델펠트인가. 마술적 소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출발에서는 합격점을 줄만하군. 어디, 반응을 살펴보도록 할까. “일단 탐색이 좋겠지.”“ 우익의 기병을 평소보다 큰 이동 궤적을 취하게 하여 상대의 뒤로 돌려보내자 상대의 좌측에 포진하고 있던 이쪽의 두 배가량 되는 기병대가 이쪽의 이동경로를 가로막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정면의 중앙군은 이쪽을 압박하면서 서서히 전진. 그야말로 견실하고 자신들의 우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는 부대의 움직임. 혹시나 하는 의심으로 이번에는 기병대를 조금 더 본진으로부터 멀리, 그렇지만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돌려보지만 본진을 향해 방향을 틀 생각은 전혀 없는지 여전히 상대의 기병은 이쪽의 기병만을. 그리고 상대의 중앙군은, 이쪽의 중앙군만을 노리고 진격을 계속한다. “견실하군.” 그야말로 견실한 용병술. 기책도 없고 기교도 없다. 단지 순수한 힘으로 상대를 정면에서 누르기 위한 움직임. 하지만 그렇기에 처음 이쪽이 계획했던 대로 왕의 전술을 따라 기병을 통한 포위 공격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움직인다면 승리는 어렵다. “그러나 너무 견실해. 이쪽이 쉽게 알아차릴 만큼.” 그래, 너무 견실해서 상대방이 움직임을 너무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희들의 약점이다. ------------------------------- - 린 -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10분. 루비아가 이끄는 기병대는 상대방을 추격하고 또 추격하는 그런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듯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없는 전진뿐. 게다가 상대의 중앙군 역시 이쪽의 위력을 알고 있기에 교전을 피하고 지속적인 후퇴만을 계속하는 상황이니 교전다운 교전도 없이 오직 전진만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내게는 벅찬 짐. 전진, 전진, 전진. 말은 쉽지만 이쪽이 움직여 줘야 하는 부대는 상대의 두 배에 달하는 대군. 지금 나의 실력으로는 전 병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으니까. “뭐하는 건가요. 미스 토오사카. 중앙군의 일부가 출발점에 그대로 남아있다고요? 정신 차리고 상대를 향해 진격 시키세요.” 읏.. 살짝 기분이 상했다고 지금. 나보다 약간(약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능숙하다고 해서 기병을 손에 쥔 루비아는 지금 흘깃 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의기양양해 하는 감정이 충분히 느껴질 정도로 마음껏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눈치다. 게다가 이쪽의 움직임까지 신경쓸 여유까지. 하지만, “읏.. 알았네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니 뭐라 반박도 해주지 못한다. 실제로 거의 1/3에 달하는 병력이 후위에 남아 명령만을 기다리며 우왕좌왕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어차피 전방의 움직임은 계속 전진만을 주문해 둔 상태이니 지금은 남아있는 병력에게 명령을.. 아?!?! [Alert!] 우측면에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기병대. 내가 지니고 있는 병력과 비교하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소수의 기병대이지만 오직 정면을 향한 방비만을 하고 오로지 전진만을 계속 하고 있는 창병과 중무장 보병대의 옆을 제대로 기습하는 코스다. 상대의 기병대는 루비아가 상대하고 있었을텐데 어째서 이곳에? “미스 에델펠트!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어째서 기병대가 우측에서 오는거죠!?” “그럴리가요! 저쪽의 기병은 여전히 제가 쫓고.. 아!!?!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있어요?!!!” 물어본 것은 어디까지나 나이지만 루비아의 말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황급히 오른쪽에서 격돌해 오는 기병대를 향해 병사들의 진형을 돌리는 것이 급선무. 연습한 결과 충실히 사실을 재현해 내고 있는 이 시뮬레이션은 측면이나 배후에서 공격을 당할 때 몇 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리가 가더라도 방향을 선회해야.. “큿.. 늦어요!”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뭉쳐있던 만큼 부대의 방향 전환은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고 더구나 느린 나의 손놀림으로는 겨우 극도로 일부에 불과한 부대에게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덕분에 완전히 노출된 측면은 상대 기병에 의해 너무나 손쉽게 유린당하는 상황. 온다!! 기병대는 여전히 정면만을 향하고 있는 나의 중앙군을 아무런 장해도 없이 상대의 말굽에 짓밟기 시작한다. “조금만 버티세요. 미스 토오사카. 이쪽에서 기병을 돌려서!!” 물론 늦었지만 아직까지 이쪽의 병력은 상대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상태. 지금이라도 루비아가 병력을 돌려 공격하고 있는 기병대를 쫓아내 준다면 이쪽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이 게임 세계대회의 준우승자인 로드 엘멜로이 2세. 역시나 그런 대응을 하는 것에 내가 고생하고 있는 것이 우습기라도 하다는 듯 바로 반응이 온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화면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바로 옆에서 절규하듯 내뱉는 루비아의 외침만으로도 상황의 파악은 간단하다. “우읏.. 무리에요. 이쪽이 머리를 돌리기라도 하면 바로 도망을 멈추고 역공을 옵니다! 아직 저는 부대를 나누어 다루는 것은 할 수 없단 말이에요!!” 아무리 나보다는 낫다고 해도 루비아의 실력은 그래봐야 이쪽보다 아주 조금 나은 것에 불과하기에 그녀 또한 유기적인 대응은 불가능할 터. 동시에 두 개 이상의 명령을 내리는 것은 무리라고 이미 연습때부터 파악했다. 따라서 상대 군대의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에는 피해만 입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게 분명. 이렇게 된 이상 자력으로 측면을 공격하는 저 기병대를 격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려나. 어떻게든 느린 속도로라도 하나, 둘 공격 받기 전의 부대들에게 방향 전환을 지시한다. 갑작스러운 측면 공격과 무리한 명령의 하달. 부대를 표시하는 각종 패러미터 중 사기를 나타내는 수치가 상당히 저하되고 명령에 따른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혼란도의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지만 그런 수치 따위 무시다. 지금은 그저 저 기병대를 쫓아내는 것 외에 다른 일 따위 생각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돼.. 됐어요!” 상당수의 병력을 잃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중앙군 오른쪽에 포진한 부대의 방향전환은 성공했고 덕분에 파죽지세로 파고들던 기병대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물러간다. 잘했어 린. 만약 옆에 에밀리아가 있었다면 나의 이런 성과에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Alert!] 이번에는 아까까지 후퇴를 계속하고 있던 상대의 중앙군이 갑자기 일제히 반전하여 나의 중앙군을 향해 진격을 계속한다. 아까까지의 상황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겠지만. 지금 이쪽 중앙군의 우측은 방향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상황. 충돌한다!! - 챙캉! 창! 창창!! 귀에 거슬리는 금속음과 함께 대규모의 군대와 군대가 몸싸움을, 그리고 칼과 창으로 상대를 배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저 게임에 불과할 뿐인, 영상과 인조 사운드에 불과할 뿐인 그 광경에도 상대가 지니고 있는 힘과 전의가 느껴지고 그와 함께 전열이 흐트러진 나의 중앙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간다면 어느 쪽으로도 집중하지 못하고 혼란과 사기 하락으로 상대에게 승기를 내주게 될 것은 불 보듯 환한 일. 어쩔 수 없이 루비아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쳐보지만. “뭐하고 있는 건가요!! 미스 에델펠트! 언제까지 그렇게 작은 적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생각이죠!?!” “아... 알고 있지만!! 이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요!!” “이..이.. 쓸모없는 루비아! 자신 있게 기병을 잡았다면 제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마.. 마마 말했죠! 린!! 지금 이런 상황이라고 막 이름을 부르는 거죠!!” “마찬가지잖아!!” 돌아오는 건 우리끼리의 다툼뿐.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적군은 착실하게 나의 병력을 줄여나가는 중이고.. 이거 틀린 걸까.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7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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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Alert] 만약 경고 메시지로만 화면을 가득 채울 기회가 있다면 이미 내가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은 전부 붉은 색의 경고 메시지로 가득 차있을게 분명하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착실히 전진을 계속 하고 있던 병력은 진형이 완전히 흐트러진 채 정면의 적 중앙군과 다시 돌아온 소수 기병대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이제는 사기마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흩어진 채 통제를 벗어나 도주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아까부터 아무런 손을 대지 않았던 중앙군의 좌측면 부대만 정면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적군에 대해 대등한 싸움을 해주며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 이 경우 다수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는 루비아가 서둘러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전면에 나선 중앙군은 단숨에 궤멸되고 마지막으로 루비아의 기병대 또한 각개 격파를 당하게 될 것은 뻔할 뻔자. “으으!!! 정말 신경을 건드는 움직임이군요. 로드!!!” 그러나 이렇게 옆에서 연신 조이패드를 눌러대며 그녀에게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루비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말다툼만 벌어질 건 당연한 귀결이기에 여의치 못하다. ----------------------- - 로드 엘멜로이 2세 - “끝났군” 역시나 상대는 고작해야 전술이나 전략이라는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애송이 마술사들인가. 그런 것 치고는 처음 준비한 병력의 구성이나 배치, 그리고 이쪽의 움직임에 대해 대응하는 형태는 분명 왕의 그것을 인지하고 나온 모습이었다만.. 유인하면 유인하는대로 끌려다니고, 부대가 나뉘어 지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공격을 받으면 정직하게 반응하니 두 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하는 건 필연이 아닐 수 없겠지. “슬슬 마지막이다. 애송이들.” 처음 출발부터 다수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적 중앙군에는 반수에 가까운 병력이 남아있지만 이대로 적 중앙군의 우측을 괴멸시키고 상대의 전방과 후방, 그리고 우측을 동시 공격하면 섬멸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니. 그렇게 되면 남는 건 여전히 이쪽의 소수 기병대를 4배가 넘는 병력으로 쫓기만 계속하는 어리석은 움직임의 기병대가 전부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 단숨에 유린하는 거다. 나의 군대여, 그리고 "AAAALaLaLaLaLaie!!" 저 드넓은 황야를 정벌하는 왕의 군대여! ---------------------------- - 린 - 갑자기 섬뜩할 정도의 전율이 손에 쥐고 있는 패드를 통해서 몸으로 전달된다. 마치 내가 전장에 서 있고 맹렬히 진군하는 적군을 무방비로 맞이하는 것 만 같은 그런 기분. 그저 게임일 뿐이고 기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이라는 사실은 뇌가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기세는 그야말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말라버리게 만들 정도의 그런 패도의 기세를 담고 있다고. 결국 적에게 베이고, 흩어지고, 도망가던 중앙군의 우측은 단 한명의 병력도 남지 못한 채 전멸한다. 남은 건 정면의 적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좌측뿐. 그 좌측도 이제는 우측을 무너뜨린 적의 중앙군이 측면을 향해, 그리고 소수 기병대가 후방을 향해 포위 공격을 시도하고 있기에 조금만 시간이 흐른다면 삽시간에 전멸하고 만다. “우읏.. 아직 멀었어!!? 루비아!!” “시끄러워요! 당신은 그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 이쪽 일에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아니 그렇게 말해도!!” 그렇게 말해도 이대로라면 무리. 답이 없다. 만약 후퇴하고자 하면 정면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상대 군대에 배후를 그대로 공격받게 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어떤 방법도 선택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태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걸까. 정말이지 지원군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라도 해보겠는데.. 아? 갑자기 생각의 저편에 잊혀져 있던 한 무리의 군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싸우고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는 것은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일을 신경쓸 겨를이 없다. 저 멀리 출발지점으로 시점을 옮겨보자. 역시나 여전히 처음과 동일하게 갖춰진 진형과 기본적인 상태의 사기. 그러면서도 적지 않은 숫자의 부대가 후방에 남아있었다.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모든 부대를 움직이지 못해서 의도치 않게 남겨둘 수밖에 없던 병력. 이거라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 - 루비아 - “우읏.. 아직 멀었어!!? 루비아!!” “시끄러워요! 당신은 그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 이쪽 일에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아니 그렇게 말해도!!” 그렇게 불러대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건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린의 저 입을 다물게 해주기 위해서 기병을 움직이고 싶지만.. 어디 한번 다시 시도를.. 아, 역시나 기수를 돌리자마자 바로 추격에 들어옵니다. 이쪽은 한번 방향을 선회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순식간에 방향 전환 후 후미를 치는 로드의 기병대에 피해를 입고, 반격하기 위해 방향을 다시 돌리려 하면 순식간에 도망치는. 정말이지 속에서 불이 날 것만 같은 그런 얄미운 모습이네요. 하지만, 이대로는 결국 패배가 결정되고 맙니다. 이미 린이 상대하고 있는 쪽에서는 연신 좋지 못한 보고가 계속 날아들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 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그런 모욕을 당하고 설욕하기 위한 승부에서 유리한 조건을 지닌 상태에서도 패배를 한다는 사실과,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 쏟아질 나에 대한 린의 비난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온갖 비난을 가해올 게 뻔하죠. 문제는 지금 어떻게든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딱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네요. 결국은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인 거로군요. 이미 스스로의 능력은 파악하고 있는 상태인 만큼 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추격을, 일부는 린의 원호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나누는 것 만이라면 가능하겠죠. 제가 지니고 있는 기병의 수는 지금 추격하고 있는 병력의 네 배에 달하니까. 일부의 병력을 도마뱀이 꼬리를 끊듯 잘라내서 그 자리에 내버려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 건 제 자존심에 흠집이 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진다는 상황만큼 좋지 못한 건 절대 없으니까. 각오하세요. 로드 엘멜로이 2세. 저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이렇게 우아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준 이상 쉽게 끝낼 생각은 않는 게 좋을거니까요. -------------------------- - 로드 엘멜로이 2세 - 호오.. 예비대가 남아있었던가? 어쩐지 중앙군의 병력이 부족하다 싶었거늘 그런 불필요한 방법을 사용할 줄은 정말 몰랐군. 나누어 봤자 각개 격파 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게 분명한데 말이야. 하긴.. 지금 당장은 허를 찔러 이쪽을 역으로 포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쁜 선택이 아닌가. 적의 선진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중앙군을 후퇴시키면 피해가 크겠지. 그렇다면 어차피 중앙군은 정면에서 오는 공격이라면 어지간히 버틸 수 있으니 중앙군은 이대로 버티고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병력을 일단은 재정비할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저쪽의 기병대는.. 어떻게든 전장으로 돌아올 요량인지 이번에도 고삐를 잡아 채는 모습이지만 무리다. 그걸 가만 놔둘 이 로드 엘멜로이 2세가 아니니까. “의도 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쉽게 끝나는 게 아닌가 싶었거늘, 재밌어졌는가. 후후.. 아니!?!” 상대가 부대를 나눌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방심했던 것인가. 적의 기병대는 지금까지처럼 뒤에서의 습격을 당하자 다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닌 병력의 일부를 제자리에 멈춰 세워버리는 것으로 차단 벽을 만드는 효과를 의도한다. 이대로라면 막고 있는 병력을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머지 기병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너무 우습게 봤나. -------------------------------- - 린 - 적의 소수 기병대와 측면 쪽 중무장 보병은 이쪽의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 아슬아슬한 타이밍까지 시간을 벌다 빠져나갔다. 로드의 병력이 지금까지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건데 포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약간은 아쉬운 게 사실이려나. 그래도 지금은 중앙군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할 만하다. 일단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번 것이니까. 이대로 병력은 잠시 멈추고... “멈추지 말아요. 린!” “에?!?” 내 병력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건지 루비아의 일갈이 날아든다. 어째서? 의문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장의 시야를 넓게 펼치자 눈에 들어오는 건 적 중앙군의 후미를 공격해 들어가는 루비아의 기병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걸까!! “이대로 함께 공격을!!” “아.. 알았어!!” 선두에 서있는 기존의 중앙군은 그대로 적 중앙군과의 힘겨루기를 계속 진행하고 후위에서 따라온 추가 지원군이 속속들이 합류한다. 덕분에 진형이고 전술이고 하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완전히 헝클어진 군대는 오직 하나의 목적-전진-만을 위해 움직이고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원래대로라면 잘 짜여져 있는 대오를 유지한 상대방의 군대에 큰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손실이 더 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루비아의 기병대는 상대가 이쪽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적의 후미를 유린한다. 지금까지 마치 철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대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을 보여 온 적의 중앙군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 간다면 적의 우측 중앙군은 이대로 궤멸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에 불과하고 다시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루비아! 오른쪽!!!” “네!?!!?” 로드 엘멜로이 2세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까 나의 중앙군을 포위 공격하고자 달려들었던 나머지 중앙군과 소수의 기병대가 어느새 진형을 가다듬고 신나게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루비아의 기병대 측면을 노리며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아!!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정면에 집중해!!” “.....믿겠어요. 실망시키지 말아요.” 정말이지 루비아 답지 않은 말이지만 그런 거 신경 쓸 여유 따위가 있을까. 이미 진형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나의 부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응은 빠르다. 그저 전진만을 계속 주문하면 되는 일이니까.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하나. 루비아의 기병대와 적군의 사이에 끼어들어 벽을 쌓는 것뿐. 어떻게든 저 돌진을 막아내어 시간을 벌기만 한다면 그 사이 루비아가 적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무모한 전진을 계속해서 인위적인 벽을 만들어낸다. 격돌. 정말이지 무계획적이고 아무런 대비 없는 끼어듦이었기 때문에 손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막심하다. 이쪽에서는 별다른 피해조차 주지 못하고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상대의 공격에 고스란히 측면을 노출시킨 상태. 하지만 그건 이쪽만의 문제가 아니라 로드 엘멜로이 2세의 군대에도 통용되는 단어다. 나의 군대가 적을 막고 있는 동안 루비아의 기병대는 주어진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여 결국은 나의 중앙군과 마주친다. 즉, 적의 중앙군 병력의 절반가량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말. 물론, 우리의 중앙군 역시 망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 해진 상태이고 게다가 진형도 흐트러져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상대에게 농락당해 온 게 아니라 상대에게도 막심한 피해를 입히면서 병력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치 있다. 게다가, 상대도 그걸 알고 있는지 벽처럼 늘어섰던 병력만을 없앤 후 멀찌감치 부대를 후퇴시켜 전열을 가다듬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병력은 대충 절반가량으로 줄어들어 있다. “미스 토오사카 이번에는 그리 호락호락 하게 당하진 않을 거랍니다.” “물론 그래주셔야죠. 미스 에델펠트.”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겨서일까. 서로의 호칭이나 대화가 평상시로 돌아간다. 하지만 시작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좀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사실 일까. 방금 전의 전과는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고 행운이 따라줬기에 가능했던 일. 서로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를 앞에 두고 새롭게 전의를 다진다. 그럼 격렬한 움직임으로 흐트러진 패드의 선도 정돈하고 자세도 고쳐 앉아볼까. “좋아, 이번에는 각오하는게 좋을거에요. 로드 엘멜로이 2세!” - 띠딕~! [Disconnected 60. 59. 58. 57. 56. 55....] “뭐...뭐뭐뭐뭐 무슨 짓인가요!! 린!!” “아.. 그.. 글쎄..” 나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조금 더 집중해서 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은 것뿐이다. 굳이 하나더 따지자면 패드의 선이 너무 느슨하기에 잡아당겼을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화면에는 연결 종료라는 단어와 함께 카운트가 매겨지고 있는 걸까. [5. 4. 3. 2. 1. You are disconnected. Game over] ================================================= - 치익-- 은색의 몸체에 푸른 사파이어로 섬세한 세공이 되어 있는 라이터에서 붉은 불이 갈색 담배의 끝을 태우고 하얀색 연기로 변하는 그런 짧은 순간.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해도 사투를 벌였던 상대인 로드 엘멜로이 2세이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그의 집무실이다. “후우...” 게임 도중 나의 연결이 종료되고 전장에 남은 것은 오직 루비아의 기병대 뿐. 둘이 힘을 합쳐도 힘겨웠던 상대를 앞에 두고 루비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부질없는 저항 끝에 싸움은 손쉽게 끝나버렸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이어진 승부이고 우연에 의해 허무하게 끝나버린 승부이기에 패배한 쪽도, 그리고.. “이처럼 허무해진 경우는 처음이다. 멍청한 것들.” 승리한 쪽도 씁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채 투덜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게임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이 있던 서쪽 건물에서 우리가 있던 동쪽 건물까지 달려온 로드의 표정은 그야말로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악귀와 같은 표정이 었으니 그의 기분이 어떤 상태일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 원인은 랜선이라고 하는 먼거리를 연결해주는 선이 나의 움직임에 의해 빠져버렸다라는 건 이제와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직 의미 있는 사실은 루비아와 내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사실. 그렇기에 우리 두 사람은 그저 패배자로서 이렇게 로드 엘멜로이 2세의 폭언을 담담히. 그렇지만 좋지 못한 기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입에서 멍청한 것, 어리석은 것, 시시한 것 등등의 각종 폭언을 내뱉던 그는 필터근처까지 담배가 재로 변해 사라지자 책상위의 재떨이에 대충 비벼 끄고는 결심했다는 듯 툭 하고 말을 던진다. “어이, 너희 둘. 계속 했다면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나." "네?" "네?" 의외의 질문. 만약이라는 단어는 우리와 같은 마술사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정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상에 불과한 사실이기에 언제나 확실한 진실만이 사고과정에 있어 인정을 받는 것. "뭐냐, 말도 못알아들을 정도의 천치인가. 그쪽에 있는 최악의 일본인이 디스커넥트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묻는거다." 그걸 누가 못알아 들어서... 하아. 쓸데없는데 신경을 써봐야 소용이 없겠지. 그렇다면 단지 로드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다. 만약.. 정말 만약 그대로 진행이 될 수 있었다면 루비아도, 나도 처음과는 다를게 분명하다. 그래, 분명히. "만약이란 단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로드께서 질문하신대로 만약 계속 되었다면...." "절대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만큼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 루비아도 무의미하게 끌려다닐리도 없고 나도 그렇게 경직된 움직임을 보일리도 없다. 상대가 우리를 기만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이상 더욱 신중하게, 그리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자신은 있지만.. "하지만 이미 끝난일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무의미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루비아의 말대로이다. 우리는 패배했고, 상대는 승리했다. 그런 결과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 진실이고 현실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더욱더 심리적으로 우울해지는건 어쩔 수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폭풍과도 같은 외침이 나와 루비아의 귓전을 울리며 쏟아진다. "Fuck!!!!! 어리석은 놈들. 그게 너희들의 모습이냐!! 자네들은 한번 졌다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어리석은 위인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대단한 실망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인간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읏.." 마치 귀에다 바로 대고 쏟아 붓는 것 같은 큰 목소리에 귀를 막아보지만 그런 임시방편 정도는 로드의 말을 전혀 막아주지 못하고 그의 폭언은 계속 귀를 통해 뇌리에 날아든다. "돌아가라! 너희같이 근성없는 녀석들은 내가 아니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정말 구제불능인 녀석들이니까." 그 말과 함께 우리로부터 등을 돌려 멀어져가는 로드의 뒷 모습은 어딘지모르게.. 무지하게 열받는다. 직접 보지 않아도 루비아의 모습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건 분명. 지금까지는 그래도 상대는 시계탑에서 이름 높은 교수이고 이쪽은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학생일 뿐이기에 최대한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를 높여주려 하였는 데다 만약 불손한 태도를 보였을 경우에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저런 소리까지 들은 이상 잠자코 있는다면 나는 자존심 강한 토오사카 린이라는 존재가 아닐뿐더러 "듣자..듣자..하니까.. 당신 최악이네요. 그렇게까지 말을 들은 이상 물러 설 수 없겠는걸. 그렇지 않아요? 미스 에델펠트?" 그녀는 그 오만한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가 아니겠지. "미스 토오사카의 뜻에 동조하는게 기분 좋지는 않지만 지금만큼은 동감이에요. 재차 승부를 요청하겠어요. 로드 엘멜로이. 당신정도는 가볍게 짓밟아드리도록 하지요." 우리의 말을 들은 로드 엘멜로이 2세는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저 그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다. 이쪽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충분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아아, 저질러 버렸구나. 평안한 시계탑에서의 생활이여 안녕인 걸까. 아무리 흥분해 있다고는 해도 자신이 저지른 일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학생으로부터 이런 모욕을 들은 이상 로드 엘멜로이 2세가 취할 태도는 분명 분노일 테고 거기에 합당한 징계가 뒤따라 올테지만 후회는 없다. 분명 루비아도 나와 마찬가지겠지. 왜냐면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도 닮은 꼴이니까. 이윽고 로드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두 손을 꽉 쥐었지만, 돌아온 것은 의외의 표정과 발언이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을 거라 예상했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처음 보는 것 같은 호탕한 웃음으로 가득 차있는데다 "훗, 하면 되지 않나. 최악의 일본인에 가문만 믿고 있는 얼간이지만 그래도 그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이 로드 엘멜로이 2세가 후견인이 되어줄 만한 자들이지. 아무래도 나정도 되는 교수가 되다보면 아무나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근성을 테스트해봤다. 흠, 이만하면 간신히 턱걸이기는 하지만 합격이라 할 수 있겠군." 그러니까.. 처음 찾아오라고 했을 때부터,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들고 나와 루비아를 열받게 만든 이유가.. 고작 테스트라는 거? 갑작스러운 상황의 반전에 오히려 나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가고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충동이 일어난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후훗.. 들으셨어요? 미스 에델펠트?" "네에, 듣고 말고요. 미스 토오사카." 루비아도 마찬가지. 이제와서 그런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네에 그러셨군요. 어머나 감사해라'라는 생각을 할 줄 안다면 오산이다. 게다가 테스트 받았다는 것이 오히려 기분나쁘니까. 때문에 나도 루비아도 이럴때 만큼은 정말 호흡이 딱 맞는게 어쩌면 괜찮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을거라 생각될 만큼 서로 반대쪽 소매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자세로 마치 거울을 보고 마주 서있는 느낌의 행동을 취한다. "어이, 너희 뭐하는 거냐." 덕분에 우리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로드 엘멜로이 2세는 자신을 향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한걸음씩 뒤로 물러서고 있지만 이미 식어버린 홍차이고, 뺏겨버린 시로다. 요컨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 "뭘하냐고 로드께서 묻고 계시는군요?" "어머, 무슨 우문을 남기시는 걸까요?" 서로가 다시 없을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바라보며 함께 입을 맞추는 행위까지도 완벽. "토오사카 린과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라고 한다면" "루비아젤릿타 에델펠트와 토오사카 린이라고 한다면" 로드 엘멜로이 2세를 향해 나의 왼손과, 루비아의 오른손이 동시에 겨누어지는 타이밍도 완벽. ""당연히 간드죠"" 마지막 외침과 함께 쏟아져 나가는 검은 마탄의 홍수의 공격또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호흡으로 날아간다. - 타타타탕! 펑! 타타타! 펑! 타타!! 두두두두! 펑펑!! 퍼펑!! --------------------------------------------------- 그로부터 일주일. 아무리 마술사로서의 능력은 평범하고 교수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로드 엘멜로이 2세라도 명색이 마술사인 이상 그만한 간드의 난사를 맞이하고서도 꽤나 빨리 회복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하극상의 극치가 일어난 이후 우리와 그의 관계는.. "Fuck!!!!! 이건 속임수다!! 네놈들이 사기를 친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질리가 없다!!!" "어머나, 속임수라고 우기시지만 엄연히 정당한 방법이랍니다. 그렇지 않나요. 미스 토오사카?" "물론이지요, 미스 에델펠트. 아무래도 로드께서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나보네요. 어떻게 이걸 속임수라고 말하실 수 있을까요?" 물론 다시는 게임기 따위를 잡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체스 같은 걸 통해 승부를 계속하고 있는 일단은 스승과 제자라는 틀 속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다.. 랄까. - Tactics? End --------------------------------- - Interlude One - - 일본 - 생각해보자. 어딘가의 번화한 거리에 지어지다 말아서 맨 위층에 흉물스러운 철근이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고 도색도 제대로 완성이 되지 않은 그런 4층짜리 빌딩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바라볼까. 당장에 시공사를 찾아가 거리의 미관을 망치는 저 건물을 철거하라고 주장하거나, 하다못해 완공이라도 하라고 시위할게 분명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건물은 지어지기 시작한 이래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쪽의 방향도 선택하고 있지 않다. 아니, 처음부터 사람들의 항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설마 거리의 명물이라는 이름 하에 사람들이 묵인하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그런 무관심한 건물일 뿐.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이곳에 건물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도심 속의 이계와 같은 공간. - 탕탕탕탕! 그렇지만 오늘은 다르다. 지금까지는 이곳을 사용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곳이지만 오늘은 요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다수의 사람이 뛰어 올라가는 소음이 복도에, 계단에, 심지어 건물 밖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기에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관심의 대상이 아닌지 이런 몇년만에 처음 있는 이상한 일에도 그저 무관심하게 오가고 있을 뿐. “서둘러 올라가라! 인형사는 4층에 있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 사이에 젊은 남자의 외침이 곁들어져 긴박감마저도 연출하고 있는 그런 하루. - 쾅!! 4층. 사무실의 문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거친 소리와 함께 열어젖혀진다. 덕분에 사무실의 주인인 검푸른 머리의 젊은 여성의 모습은 문 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혀를 차고는 이 무례한 방문자들을 향해 기분 나쁘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박대한다. “뭐냐.” “훗, 우문이로군요. 미스 아오자키. 당신이라면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제가 누구인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루키우스인가.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네. 훗, 제 형의 복수를 한답시고 찾아올 위인은 아니라는 것 정도 알고 있다.” “돌아가라 루키우스. 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형에도 못 미치니까. 게다가 나는 네 형이 온다 할지라도 이기지 못할 마술사. 얌전히 돌아가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금까지처럼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꼬마 루시.”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문을 등진 방향으로 돌려놓은 의자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온갖 독설과 모욕을 주는 상대 여성에 대한 분노로 눈이 뒤집혔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일그러진 적이 없던 젊은 마술사의 표정이 삽시간에 마귀의 형상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구겨지며 단걸음에 문에서부터 의자로 다가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만한 독설을 퍼붓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단숨에 자신 쪽으로 돌려 앉힌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난 충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여성의 입은 마치 호두까기 인형처럼 덜그럭거리고 있었으니까. “큭.. 모두 피해라! 함정이다!!” 그렇게 외쳤지만 얼마나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외친 청년 본인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미 마술은 발동되었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니까. 외쳐준 것만으로도 들어온 이들에 대한 최대한의 친절. 오른손으로 주머니의 칼을 꺼내어 즉시 손가락 끝을 베고 그 손으로 허공에 글씨를 적는다. 손끝에서 배어나온 붉은 피는 마력을 띤 채 허공에 고착화 되고 방어의 알기즈와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페후. 두개의 룬이 겹쳐져 비상식의 힘을 현현 시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제 3카테고리에서 무조건 적인 보호를 의미하는 베르카나로 벽을 보강한다. 마지막 글자로부터 손을 떼는 순간 그것은 4층 건물 안을 휘몰아 쳤다. - ㅁㅁㅁㅁ 이세상의 것이 아닌 귀곡성과 같은 소리와 함께 검은 폭풍은 정확히 딱 10초간 4층 사무실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방향으로 휘몰아치고 바로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 폭풍이 지나친 곳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아무런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무기물질 뿐. 아니, 한 사람 남아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그만큼 상황에 대한 위협을 가장 빨리 느꼈고 방어의 마술을 행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루키우스라 불린 젊은 마술사. 하지만, 그와 함께 이곳에 진입했던 슈폰하임의 다른 마술사는 모조리 자신이 입고 있던 옷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니 증발해 버렸다. ------------------------------------ - 같은 시간 일본의 훗카이도 어딘가 - “우아앙~~! 내 모자~아~~ 우앙~!!”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 때문이었을까. 한 10살 남짓한 소녀가 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가 허공에 뜬 채로 날아간다. 기류를 잘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도저히 소녀가 쫓아가기에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특별한 장애물이 없다면 이대로 난간을 넘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 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지만. “읏챠~” 난간을 넘어가기 직전 하얀 손이 뻗어 나와 허공을 달리는 모자를 낚아채는데 성공한다. 모자를 붙잡은건 8월임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긴팔의 와이셔츠와 안경은 여름휴가를 맞아 훗카이도를 찾아온 어딘가의 OL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여성. 하긴, 훗카이도라면 여전히 선선한 날씨를 자랑하기에 여름 휴양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자아, 조심하렴. 바람이 세게 부니까.” “네~! 고마워요 언니~” “너무 서둘러 뛰어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쫓아온 소녀에게 손수 모자를 씌워주는 모습은 깨끗한 미모와 어우러져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아름다움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모자를 받은 소녀의 얼굴이 살짝 홍조를 띤 채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감사인사와 함께 자신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다시 서둘러 돌아간다. 그런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여성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 건 한순간. “음?” 표정에 살짝 불쾌감이 감도는가 싶더니 안경을 벗어 케이스에 집어넣은 그녀에게 아까까지의 여성이 본인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굳어져 버린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낡고 조잡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담배 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기 까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방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의 이름은 아오자키 토우코. 마술사다. - 치익------- “후우.. 멍청한 루키우스. 여전히 제 형의 그림자만 쫓아다니니까 네 녀석은 안 되는 거다. 그나저나, 결국 슈폰하임에서 내 공방까지 찾아오다니.. 결국 그때의 일을 잘도 여기까지 알아낸 건가.” 하얀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입고 있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 삑삑삑... ♩!♩! ♩!♩! ♩!♩! ~ ♪♬!!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히 녀석답다고 생각한다. [......................................] “어이어이, 오래간만에 통화한건데 쌀쌀맞군. 뭐? 귀찮은걸 떠맡았다고? 그걸 나한테 푸념하지 마라. 네 푸념 들어주려고 전화한거 아니니까.” [....................!!!]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큰소리로 외쳤는지 토우코는 수화기 부분에서 귀를 때고 인상을 찌푸린다. “귀청 떨어지니까 좀 닥쳐. 그보다 슈폰하임 좀 알아봐라. 그쪽 일은 알아서 처리해 주기로 했잖아. 이렇게 되면 계약 위반이니까 알아서 하도록. 끊는다.” [....!!!!!]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토우코.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생각에 잠겼는지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는 입에 문 담배로부터 연신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는 것을 반복한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고 눈을 뜬 그녀는 재차 휴대폰의 번호를 눌러 아까와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건다. - 삑삑삑... ♬♪♩♬♪♩♪♪♬♬♩♪♬ 전 직원 녀석의 이번 벨소리는 이건가. 여전히 부드럽고 느긋한 음악을 좋아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노라니 오래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벨소리와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 “오래간만이다. 고쿠토. 건강하냐. 아니 건강하겠지.” - Interlude One End - ========================================================== <인터루드 원>은 지난번에 등장한 <인터루드 제로>로부터 이어지는 겁니다. 아키멘드라이트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바가 토우코의 공방을 찾아내고 봉인지정 대상이기도 하겠다 단숨에 덮쳐서 제압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협회 내부에 끄나풀(?)을 심어둔 토우코는 몸을 뺀 상태였습니다. 끄나풀일지 동업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일단 일본쪽 이야기는 끝나고..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7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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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Escape impossible (上) 오늘도 언제나 같은 사소한 일-이리야가 아침부터 찾아와 저혈압상태로 멍하게 있던 린을 상대로 이런 저런(?) 장난을 쳤던 것이 발단-로 인하여 아침부터 이렇게 집안 곳곳을 누비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두 사람. 그저 얌전히 뛰어다닌다면 내가 한숨을 쉴 필요도 없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가벼운 움직임이 아니라 - 챙그랑!! 아.. 이번에는 찻잔이 깨졌다. 저거 린이 꽤나 아끼던거 아닐까. 린의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나, 아끼던 찻잔이 확실하다. "이익... 깨.. 깼겠다!!!" "흥~~~~~~~~이다!!" 한층 불이 붙은 린은 지금까지의 움직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민첩하게 이리야를 압박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를 수록 이리야는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다. 예전에 내가 린으로부터 도망다녔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추격전은 어디까지나 쫓는 사람이 유리. 서번트인 내가 도망치지 못했을 정도니 이리야는 말할 것도 없다. 역시나 오래지 않아 내방 한쪽 구석에 몰려 더이상 빠져나갈 공간이 없는 이리야. 오늘은 이걸로 소동이 일단락.. “오늘은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에잇!!” - 찌이익~ “아..” “아..” 될리가 없었다. 하아.. 결국 저질러버리고 말았네. 구석에 몰려있던 이리야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던 린의 손에 잡힌 것은 이리야가 급한 대로 막기 위해 들어올린, 그저 불행하게도 근처에 있던 나의 단벌 겨울 옷. 물론 옷을 살 여유가 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아직 겨울이 본격적으로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미리 한 벌 정도만 사두었을 뿐이지만 이유야 어쨌든 단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저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기에 겨울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두었던 건데 조금은 아까우려나. “저기.. 에밀리아?” “좋아~ 그러면 언니가 나설 차례지~ 세라! 리즈!” “네, 아가씨.” “응, 이리야.” 항상 생각하는 것이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세라와 리즈는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 걸까. “해롯에 내가 찾아가니까 준비해놓으라고 연락해. 리즈는 차를 준비시키고”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응.” 해롯.. 해롯.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Harrod를 의미하겠지만 내 기억 속에 그런 단어와 관계되어 있는 장소라고는.. 정확히 부합하는 장소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딱 한군데 있기는 하지만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 아닌데다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 부인하는 게 사실. 그도 그럴 것이 Harrods는.. 런던, 아니 세계 최고의 백화점이니까. 하지만, 다름 아닌 이리야가 벌이고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무른 생각으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위험성이 크다. “언니? 지금 무슨 이야기야?” “응? 해롯 몰라? H.A.R.R.O.D.S 해롯.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최고의 재단사를 불러다가 치수를 재서 에밀리아에게 맞는 최고급 옷을 만들어 주고 싶지만 에밀리아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옷을 사주려면 최소한 거기는 가야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이리야이지만 상식을 초월한 부자들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히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아까 세라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면 평범한 일개 손님으로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 모르긴 몰라도 정문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융숭한 환영과 함께 친절하다 못해 불편하기 그지없을 대우가 기다리고 있을 건 당연하려나. 혹시 모르지, 백화점의 지배인이 직접 나와서 차를 주차해줄지도. 하하, 설마 그럴리가. “에헤~ 그럼 지금 당장 가자~” 그래도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이리야의 천진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이런 모습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약하니까. 이게 동생의 한계? 그 작고 앙증맞은 손이 내 손을 잡고는 현관을 향해 끌고 달려가는 행동에 조금의 저항도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수밖에. “잠깐 기다려 이리야스필. 난 허락한적 없는데?” 아차, 이리야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또 한사람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건 실수다. 모르긴 몰라도 뒤에서 차갑게 빛나는 미소로 나와 이리야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을 린은 너무나 쉽게 연상이 가능. 그러고 보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리야와 린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무마 된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려나. “므으... 역시 보기보다 속이 좁네~ 린은. 언니가 동생 옷 좀 사주겠다는데 그걸 그렇게 심술부리기야?” “누..누가 속이 좁다는 거야!! 나는 다만.. 다만..” “다만?” 생각보다 아까까지의 일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건지 이리야도 린도 방금 전까지 쫓고 쫓기던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다투지 말았으면 오죽 좋아. 내 옷도 찢어질 일이 없었을 테고.. 그보다 린. 거기까지 말해 놓고서는 이제와 우물쭈물 한다는 것도 우스워. 린과 함께 지낸지도 영령이 되기 이전 시기까지 포함하면 벌써 10여년이 넘어간다. 때문에 지금 린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어떤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고 있는지도 손에 잡힐 듯 훤하고 지금의 나는 일단은 린의 사역마나 다름없으니까 도와줄 수밖에 없으려나. “으.. 그러니까..” “그럼 린도 함께 갈까? 어때 언니, 괜찮지?” “우웅... 난 둘이서만 가고 싶었는데.” 자신의 가느다란 턱 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나를 올려다보는 이리야지만 그래도 그녀가 린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살짝 무릎을 굽혀 이리야의 양쪽 볼을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져다 대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한다. “언니 괜.찮.지?” “응!” 역시 이래야 이리야지. 그렇게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 서있던 린에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흐응.., 같이가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보다 언제까지 그런 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을거야 바보 에밀리아. 보고 있는 사람이 부끄러워 질 정도라니.” “에?” 린의 말에 지금 스스로의 모습과, 눈앞에 있는 이리야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겨우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자각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황급히 이리야의 얼굴에서 손을 때고 떨어지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이리야가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떨어지지 못하게 억누른다. 그저 어린 팔로 살짝 감싸는 것에 불과한 언제든 떨쳐낼 수 있는 그런 미약한 붙잡음이지만 그 어떤 강제력보다도 강하게 나를 속박하고 그대로 이리야의 품에 구속되어 버리고 만다. “헤에~ 린은 그럼 가기 싫다는 거네? 잘됐다 에밀리아~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둘이서만 가고 싶은걸~” “가..같이 가기 싫다고 말한 적도 없어!” “린. 솔직하지 못한 것도 병이야..” “거.. 거기 입 다물고 있어!!”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아가씨라니까. 그런데 이리야.. “언니?” “왜 그래 에밀리아?” “이건.. 언제 놓아줄 거야?”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는데.. “우웅.. 아마 평생?” -------------------------------------- “이리야. 차가 준비됐어.” 바깥으로 차를 준비시키러 나갔던 리즈가 돌아와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외출의 준비를 시작한다. 내 단벌 겨울옷은 이미 이리야와 린의 손에 더 이상 옷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변모하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린의 겉옷을 대충 빌려 입는 수밖에 없었지만 “윽.. 답답한걸.” “그런 맹랑한 소리를 내고 있는 건 어디의 얄미운 입일까?” 하지만 답답한 건 사실인 걸.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채비를 마치고 왼손은 이리야에게, 오른 손은 린에게 잡힌 채로 맨션의 입구를 나서자 언젠가 이리야의 별장으로 초대받았을 때 타고 갔던 그 벤츠의 리무진이 자리 잡고, 마찬가지로 오래간만에 만나는 오귀스트씨가 마치 지금이 그때로 돌아간 게 아닌 가 싶을 정도의 똑같은 자세로 허리를 숙여 우리를 맞이한다. 그야말로 사용인으로서 완벽하게 잡힌 자세. “오래간만이네요. 오귀스트씨.” “그런 것 같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종종 별장에 찾아와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허허, 이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아..하하.. 노력할게요.” ------------------------------- 해롯 백화점. 통칭 해롯이라고 표현되는 이곳은 브롬튼 로드에 넓게 퍼져 있는 6층짜리 건물이다. 지금은 낮이라 보지 못하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건물에 둘려진 조명이 켜진 해롯의 야경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한 그런 런던의 명물. 차가 해롯 앞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귀스트씨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풀이 먹은 옷깃을 빳빳하게 세운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어준다. “어서오시지요.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 오래간만에 오셨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응~! 잘지냈어~” 이리야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인 듯 “이런이런, 친구분들이신가요.” “여동생과 짐꾼이야~” 이리야 그런 말을 했다가는.. - 따악!! 아.. 예상했던 바다. ================================================ “우으.. 때렸겠다!!” “흥, 그런 건방진 꼬마는 얼마든지 때려줄 수 있네요. 뭐하면 더 해줄 수도 있어.” 모처럼 내가 피해를 입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소란이 잠재워졌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그야말로 착각중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니, 이 경우는 이리야가 전적으로 분란을 일으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건 다시 출발하려는 분란의 불씨는 이곳에 있는 제 3자. 우리를 맞이한 중년 남성에 의해 다시 가라앉는다. “후후, 친구 분을 그리 놀리시는 건 아닙니다. 이리야스필 아가씨. 그런데..” 이리야와 린에게서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는 남성. 그 눈빛은 무언가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다. 내가 어디 이상한 거라도.. 아! 눈치 챘다. 방금 이리야가 우리를 소개할 때 린을 짐꾼이라고 소개하는 동시에 나는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소개를 했었다. 으으.. 이리야 여기서 나를 여동생이라고 소개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오늘의 이리야는 인형을 사용한 상태가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나와는 적게 잡아도 5살 이상의 차이가 있는 모습이기에, “여동생 분이시라면.. 이리야스필 아가씨와 닮은 이 숙녀 분을 말씀 하시는 건지요?” 이렇게 의아해 하는 반응이 나올 것은 당연한 수순.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수습을 할 방도를 머릿속으로 궁리해 보지만 딱히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병에 걸려서 이렇게 커졌지만 실제로는 어린 나이라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이리야가 성장이 멈추는 병에 걸렸다고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상대에게 제대로 설명이 될 것 같지 않다. 이런 내 고민도 모르고 이리야는 여전히 환한 미소와 함께 중년 남성에게 자랑하듯 나를 소개한다.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응~! 내 동생인 에밀리아야~ 나를 대하는 것처럼 대해줘.”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어라...의외로 쉽게 넘어가네. 오히려 궁금해 하는 것보다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는 게 더욱 의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잠자코 있자. 그보다 아까부터 궁금해 하던 의문점에 대해 이리야에게 물어 볼까.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기에 저렇게 단정하고 중후한 모습을 한 채로 ‘우리’에게 이리도 정중하게 나오는 건가 하는 의문점. 평범한 종업원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품격과 태도, 그리고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연륜에서까지 모든 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까 출발하기 전에 농담 삼아 생각했던 ‘지배인’은 아니겠지만. “언니, 이 사람은?” “응? 여기 지배인.” “지배인!?!?!” “지배인!!??!” 설마 하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런 충격적인 현실에 놀라 반문하고 마는 나와 린. 지배인이라고 한다면 한 점포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일종의 오너의 대리인 같은 일을 맡고 있는 직책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곳 백화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배인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중요한 사실은 어째서 지배인이 이곳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느냐는 것. 그런 의문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그는 지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지금까지의 태도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정중한 자세로 우리에게 인사를 해온다. 인사하는 예절로만 따지자면 오귀스트씨나 지난번에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던 루비아의 집사인 슈프란씨에 전혀 뒤지지 않을 그런 너무나 자연스럽고 멋진 모습. “인사가 늦었습니다. 숙녀 분들. 저는 이곳 해롯 백화점의 지배인 레이놀드 베일. 해롯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네에.. 환대 감사드려요. 저기 그런데.. 어째서 지배인께서 여기까지..?” “모르셨습니까?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아가씨는 이곳 해롯의 주식 중 10%에 달하는 비율을 점유하고 계시는 대주주십니다.” 내 질문에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듯 살짝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라는 소리와 함께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준다. 이리야가 대주주.. 오늘은 이래저래 놀랄 일이 자주 일어나는구나. 게다가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예감이 들 뿐이지만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니고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할 것 같은 느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고 있는 게 불안하다. “레이놀드. 거기는 이미 준비 됐지?” “물론이지요. 이리야스필 아가씨. 안심하시길. 오늘의 방문자는 아가씨 일행 분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마음껏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이쪽으로 저를 따라오시죠.” 베일씨의 안내는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 옆에 장치되어 있는 - 관계자 외 출입 금지 - 라고 써있는 작은 입구로 향한다. 다른 출입구인가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따라 갔지만 들어간 이후 보이는 장치는 지하를 향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분명 입구에서 확인한 매장 안내도에 의하면 숙녀복 판매는 1층에서 하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아래로 내려가는 걸까. “저기.. 베일씨? 숙녀복은 1층에 있는 게 아니었던 가요?” “레이놀드면 된답니다. 아가씨. 이리야스필 아가씨의 여동생 분이시라면 저로서는 그렇게 편하게 불러주시는 편이 영광이지요.” 하..하하..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다보니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그리고 질문에 답해드리자면 숙녀복은 1층 매장에 있는 게 맞습니다만, 지금 가고 있는 곳은 그런 일반인을 위한 매장이 아니지요. 지금 여러분은 저희 해롯의 프리미엄 고객만을 위한 지하의 비밀 매장을 향해가고 계십니다. 그곳과 지상의 물건들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라 할 수 있죠.” 비밀 매장이라.. 아마도 프리미엄 고객이라는 건 이리야겠지?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바에 의하면 해롯 백화점의 물건 자체가 왕실에 공급되는 물건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들은 구입하기엔 부담되는 물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여주려면 어떤 물건일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저기.. 프리미엄 고객이라면?” “그렇군요. 프리미엄 고객이라 한다면 우선, 영국 왕실을 비롯한 각국의 최정상 지도자 및 각국 왕실 분들 정도시군요. 그 외에는 해롯의 주식을 다량 보유하고 계시는 대주주 분들도 계십니다만 그중 앞서 말한 지위에 계신 분들이 태반이기 때문에 굳이 구분을 짓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헤~ 이곳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가보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길 래 바로 주식을 사버렸지~ 물론 일은 세라가 처리했지만.”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더 이상 현실에 질려버린다. 아니 절망했다. 그런 사는 세계가 다른 그런 엄청난 발언을 태연히 하고 있는 레이놀드씨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주식을 그렇게 대량으로 충동 구매해버리는 이리야도 문제다. 도대체가 부자들의 감각이란 이해할 수가 없는데다 그런 곳으로 안내받고 있는 상황이 되니 부담감은 몇 배로 증가하고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게 현실인지 의심스러운 기분이다. 더구나 이 복도의 조명시설부터 모든 장식에 이르기까지 돈이란 돈은 있는 대로 가져다 부은 것 같은 호화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랄까. 이런 고급스러운 건 나 같은 게 함부로 디딜 만한 물건 아니라는 압박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린.” “...응.” 문제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이런 상황에 가장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나와 린 두 사람 뿐이라는 사실. 이리야는 원래부터가 부잣집. 그것도 차원을 달리하는 부잣집의 딸인데다가 이곳의 대주주라 불릴만하고 세라나 리즈는 애시당초부터 아인츠베른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우스운 듯 하다. 그리고 레이놀드씨야 이곳의 지배인이니 자주 들락날락 할 테고.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기에 살그머니 유일한 동지라 할 수 있는 린의 왼손을 붙잡고, “나 어딘지 속이 안 좋아졌어..” “그러게..” 서로 지금의 상황에 대해 한탄한다.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린과의 유대감이 형성된 것 같은 느낌. 더불어 앞쪽에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레이놀드씨와 이리야)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 느낌. 단, 그 벽은 아마도 1광년쯤의 두께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어색한 상황은 복도가 끝나고 아름다운 장식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문에 도착하면서 끝이 난다. 저 안에 펼쳐질 풍경은 도대체 어느 별나라의 풍경일지 최대한 놀라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오른손에 잡고 있는 린의 왼손을 다잡는다. 린 역시 내 손을 잡아오는 건 마찬가지. 자, 이제 문이 열린다. “자, 환영합니다. 여러분. 이곳이 해롯이 자랑하는 플레티넘 플로어입니다.” 문이 열리고 내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을 때 한눈에 들어온 풍경은 긴장했던 바와 달리 평범한 백화점의 내부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평범한 진열장에 평범한 물건들. 지금까지 걸어온 복도의 사치를 생각한다면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는 광경. 복도가 그러했는데 이 내부는 오죽하겠는가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먹은 게 허탈해져 함께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끼고 있던 린에게 안도의 말을 전한다. “린, 그나마 내부는 정상인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 “.............”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묵묵부답. 의아함에 린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의 시선은 바로 앞에 있는 흔하디흔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흔하디흔한 작은 사이즈의 미니 유리잔에 고정된 상태. 저기 어째서? 세공이 조금 섬세하기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찻잔에 불과한 물건인...데? 어라..?!?! 그제서야 린이 정신을 빼앗긴 이유를 알아차리고 다시한번 경악한다. 대충 봤을 때는 그저 유리잔에 불과 한 모습이었지만 제대로 바라보자 그건 그야말로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거.. 다이아몬드를 가공한 물건이잖아. 이래서야 린이 정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야기. 덕분에 나의 시선마저도 찻잔에 고정되어 넋이 나가버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눈치 챘는지 레이놀드씨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아, 그건 20만 파운드밖에 하지 않는 거죠. 뭐, 장점이라고 한다면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유리컵 같은 가치밖에 없습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꽤나 큰 편이었지만 품질 자체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네 그러시군요. 20만파운드라고 한다면 2000만엔에 가까운 거금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계신 분들에게는 20만 파운드 밖에 하지 않는 거로군요. 게다가 잘 보고 있노라니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열대의 프레임은.. 백금이다. 물론 그 내부의 심은 철제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외부에 백금으로 코팅되어 있는 물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조와 재질 파악에 특화되어 있는 내가 말하는 거니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진열장이 백금으로 도금되어 있을 정도면 그곳에 놓여있는 물건들의 가격표는 모르긴 몰라도 0을 세 개니 네 개니 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건 분명하다. 대충 보면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당장 다이아몬드잔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는 도금이 아닌 순수 백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며, 건너편에 있는 체스판 위에 놓여진 체스 말들은 각각.. “린, 저 체스말..” “보고 있어. 읏.. 검은 건 안드라다이트를 직접 세공한거잖아. 게다가 하얀 쪽은 믿을 수 없어 다이아몬드를 이런 곳에 터무니없이 사용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 여기있는 물건들.. 제정신으로 만들 수 있는게 아니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만을 토로하는 다이아몬드에 버금가는 희소성과 광택을 지니고 있다는 안드라다이트 가넷에, 다이아몬드 그 자체다. 보석마술을 전공하는 린의 입장에서는 저건 자원의 낭비이자 터무니없는 사치행위겠지. 역시나 이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어. “일단 오늘은 에밀리아의 겨울옷을 사러왔으니까 어서어서~” “허허, 그렇군요. 그럼 에밀리아 아가씨께 어울리는 옷을 찾으러 가보도록 할까요.” 그저 평범한 일상 용품에서부터 이 정도 핀치에 몰려있는 상태다. 과연 어디까지 놀라게 될지. 이제는 궁금하기까지 하네. ------------------------------- “이건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은 마크 제이콥스가 직접 디자인하고 끝마무리까지 처리한 세계에 단 한 벌뿐인 코트입니다만 어떠신가요.” 처음부터 이렇게 세게 나오는 겁니까!!! ====================================================== 해롯 백화점은 영국왕실에 물건을 납품하기도 하고 홍차브랜드로도 유명한 런던의 명소중 한군데죠. 진열되있는 물건들은 서민은 절대 살 수 없는 최고급품들도 많고요. 실제 소유주는 알 파예드. 그의 아들은 죽은 다이애나 전 황태자비의 애인이었고 같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플래티넘 플로어는 어디까지나 창작입니다. 혹시나 찾아보지 마세요 ^^;;; 가므로일(epilier) 덧글 쓰기 | 조회수 6 | 추천 0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비디오반영은 추후 제공됩니다.) * 글보내기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카페에 담기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해당 파일(or 링크)에 대한 저작권 위반 신고가 접수되어 이용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담기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공지/대문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목록 Fate/Stay Illumination - Escape impossible 中 | [ 타입문 팬픽 ] 2 / 2008.11.15 23:20 가므로일(epilier) 5급마술사 http://cafe.naver.com/uunmask33/326915 Fate / Stay Illumination Escape impossible (中) 이곳 해롯의 플레티넘 플로어에 들어 온지도 벌써 2시간. 레이놀드씨의 말은 전혀 틀림이 없었는지 이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을 제외하고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어때~~” “역시 안목이 높으시군요. 그건 샤넬의 칼 라거펠트의 작품입니다. 하얀색의 밑바탕에 검은색의 꽃잎이 수놓아져 있어 밋밋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조화로운 디자인이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지칠 줄 모르고 마치 자식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새처럼 진열되어 있는 옷이란 옷은 다 꺼내어 나에게 가져다주는 이리야와 그녀의 행동을 말리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부추기고 있는 레이놀드씨. 그리고.. “흐응, 하얀색 바탕에 검은 무늬면 역시나 검은 계통으로 가는 게 좋겠지? 레이놀드씨 데만토이드로 만들어진 브로치나 너무 화려하지 않은 목걸이 종류 있나요?” “물론이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이런 이질적인 공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던 동지에서 지금은 이리야와 파트너를 이루어 장식과 보석류를 전담하고 있는 린까지. 이게 배신이라는 거고, 이게 막다른 골목이구나. 레이놀드씨는 도대체 이 넓은 매장에서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모든 내역을 파악하고 있는지 정말로 잠시 후 양 손에 큼직한 검은 보석이 자리잡고 있는 목걸이를 들고 나타난다. “오래기다리셨습니다. 다행히 원하시는 조건에 맞는 물건이 있었군요. 데만토이드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작은 다이아몬드들의 콘트라스트. 흑백의 대비가 아름다운 목걸이죠. 게다가 섬세한 가공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리 현란한 색상들이 아니기 때문에 차분하기도 합니다.” “자자, 어서 들어가서 입어봐.” 이리야와 레이놀드씨에게서 받아든 코트와 브로치를 억지로 내 품에 떠넘기고는 탈의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강요하는 린의 모습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린의 모습은 평소의 린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들떠있는 상태. 이건 그래.. 마치 나를 가지고 놀고 있을 때의 린과 같은 모습이다. 양손의 짐과 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런 의심, 아니 확신을 추궁하지만, 린의 태도는 그저 유쾌할 뿐이다. “솔직히 말해봐 린.. 재미있어 하고 있지?” “실례의 말을. 내가 너를 두고 재미있어 할 리가 없잖아? 이런 건 어디까지나 즐기고 있는거야.” “무슨 그런 즐거운 말장난을!! 에?? 에에에?!?!” 린에게 발뒤꿈치를 든 상태에서 항의하고 있는 가운데 갑작스레 허리부근에서 나를 밀어내는 힘을 느끼지만 균형 잡기 힘든 자세로 서 있다보니 저항하지 못한 채 그 힘이 원하는 대로 밀려가기 시작한다. 그 힘의 출처는 다름 아닌 이리야. 두 손으로 ‘으쌰으쌰’라며 나를 밀어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볼 때 그저 머리 위만 보이고 있지만 모르긴 몰라도 분명 입가에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할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탈의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자..잠깐만 언니!~?!?” “어서어서~ 에잇~!” 아아, 저항하지 못하고 들어와 버렸다. 벌써 몇 번째 들어오게 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드나든 탈의실은 역시나 플레티넘 플로어. 해롯의 비밀 매장의 탈의실답게 단지 옷을 갈아입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뿐임에도 그 넓이가 열 사람이 뒹굴어도 좋을 정도다. 그런 넓은 공간에 내팽겨쳐진 내 손에 들려있는 건 방금 전에 억지로 떠맡은 한 벌의 겨울용 원피스와 부담스럽게 비싸 보이는 목걸이뿐. “하아... 어쩔 수 없네.”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쌓아둔 한숨을 모은다면 충분히 이 공간을 채우고도 남지 않을까? 왠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오늘 하루가 다 가도록 옷을 입어보다가 끝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역시.. 불길한 예감이라는 녀석은 나를 빗겨나가지 않고 마치 내가 쏘아낸 화살처럼 정중앙을 관통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려가버린 행운 랭크의 효력이 발휘되는 건지. 물론 이렇게 많은 옷을 입어보고, 살 수 있게 된다는 사실 자체는 보통의 여성들에게는 기쁜 일이고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저 불편하고 귀찮은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불행일 뿐이다. “이번엔 이거야!” “오, 골라 보시는 것마다 다시없을 명품들로만 선택하시는 군요. 그건 아르마니가 디자인한 물건입니다. 끊임없이 교차하는 선들이 매력적인 물건이지요. 이것도 한번 권해보시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에밀리아에게 입히기에는 너무 복잡하지 않아? 저애는 심플한 쪽이 어울린다고 보는데.” “우웅..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린 말도 맞는 것 같네.” 아직도 끝나지 않을 옷과 보석의 홍수. 때문에, 벌써 한참 전부터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순간의 타이밍을 잰다. "그래도 한번 입어 보는건 상관없으니까 입어봐~" "하긴, 자자 어서 들어가봐." "하아.. 알았어." "이번에는 순순하네? 잘생각했어. 포기하면 편하다니까." 다행히 린도 이리야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순순히 건내진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들고있던 옷을 구겨지지 않게 잘 펴서 한쪽에 내려 놓고는 굳은 각오를 마친 자세로 허리를 편다. 탈출을 위한 계획을 궁리하기 시작한 것은 탈의실에 10번째 들어왔을 때. 그때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이미 탈의실 내부에 대한 구조의 분석은 끝마친 상태다. 탈의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입구가 없지만 이만큼 넓은 탈의실이다. 아니, 애시당초 탈의실로 만들어진 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정상적인 입구가 아니더라도 어딘가 다른 틈이 있을 건 분명. 분석 결과 문에서 가장 먼 쪽 벽에 작은 통풍구가 하나 있고 그 통풍구는 지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곳에 13번째 들어왔을 때 파악해두었고 이번 14번째 들어설 때가 바로 탈출의 때다. 통풍구를 막고 있는 작은 철제 칸막이를 제거하는 건 손쉬운 일이고 서번트인 나의 능력이라면 저 정도 높이에 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처럼 나를 위해 노력해준 이리야와 린, 그리고 레이놀드씨에게는 미안하지만(사실 나를 위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이상은 버틸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 모두. - 철컹 통풍구로의 입구를 열고 몸을 안으로 집어 넣는다. 자아, 탈출이야. -------------------------------------------- - 료우기 시키 - 일본이든 영국이든. 이곳은 여전히 세상의 한 곳이기 때문에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온다. 7년 전 그날. 어이없을 만큼 무방비하게 나에게 다가왔던 한 학우의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던 한마디. ‘아마도, 하지만 괜찮아. 겉옷을 입을 거니까.’ 나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그때부터 겨울이나 날이 쌀쌀해질 때면 항상 입던 검붉은 가죽 블루종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가죽 점퍼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도 이렇게 다른 무언가를 사러 외출을 했다. 그건 “시키. 이건 어때? 어울릴 것 같은데.” 이렇게 7년전과 마찬가지로 무방비한 모습을 한 채 내게 하늘하늘하고 팔랑팔랑한 푸른색 빛이 감도는 원피스를 보여주는 이 태평한 녀석 때문. “됐다. 미키야. 처음부터 기모노 위에 걸칠 옷을 사러 온 거잖냐. 그렇게 기모노 대신 입을 옷을 들이대봐야 소용없어.” 항상 가죽 점퍼들만 입는 모습이 질렸는지 미키야 답지 않게 강경한 태도로 내 손을 잡아서 끌고 나온 미키야는 모처럼 새로운 옷을 사는 건데 제대로 괜찮은걸 고르자면서 이곳 해롯백화점으로 데려왔다. 나는 동의한적이 없는데 말이지. ‘시키, 네가 기모노를 입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번에야 말로 겉에 입는 것 정도는 여성스러운 걸 사는거야.’ 여성스러운 옷이라. 그런 아름답고 예쁜 옷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아차 그랬었지. 미안미안. 흠.. 그럼..잠깐만 기다려.” “....행복한 녀석.” “응? 뭔가 말했어?” “별로..” 나도 모르게 미키야의 얼굴을 외면하고 만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쪽에는 미키야가 들고왔던 것과 비슷한 원피스를 입은 서양 여성이 지나가고 내 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간다. 부드럽고, 길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화사하게 웃고 있는 새하얀 얼굴까지. 여성스럽다라는 것은 저런 사람을 말하는 걸테지. 반면 나는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여전히 짧은 머리카락에 표정은 무뚝뚝하고. 역시나 여성스럽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미키야는 이런 내가 어째서 좋은 걸까. “머리.. 길러볼까.” 이번에 중얼거린 말은 듣지 못했는지 미키야는 여전히 옷을 고르는데 한창이다. 뭐, 일단은 오늘 이렇게 끌려온 이상 미키야의 고집에 이끌려다녀 볼까. 문제의 이상한 상황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 처음에는 귀에 들렸다. - 덜컹 덜컹 지금 미키야와 내가 서있는 곳은 1층 숙녀복 매장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여성용 자켓 전문 코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때문인 건지, 아니면 동양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치가 구석인데다 우리를 피해서 다른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변에는 아까 지나간 여성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게다가 미키야는 옷을 고르는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을 발견한 것도 나 혼자뿐. 내 바로 앞에 있는 바닥의 타일 밑에서 어딘지 모르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타일 자체가 들썩거린다. 뭐지 이건. “우으.. 힘들었다~” 굉장히 귀에 익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다. 그것도 꽤나 친숙하게 들리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닮았다랄까. 자주 찻집에 찾아와서는 내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몇 안돼는 사람 중 한 사람. 어딘지 모르게 미키야를 생각나게 하는 은발의 귀여운 녀석. - 덜컹~ 탕~ 결국 타일은 완전히 들려서 뒤집어지고 그 안에서는 막 굴에서 나와 주위를 경계하는 흰 토끼 같은 녀석이 빼꼼히 고개를 든다. -------------------- - 에밀리아 3분 전 - 통풍구를 통해서 진입한건 좋았지만 통풍구는 생각보다 너무 좁았다. 게다가 여기저기 먼지까지 잔뜩 쌓여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바깥에 나왔을 때 먼지투성이의 지저분한 모습이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탈의실 구석에 놓여있던 하얀 천을 몸에 두르고 들어갔기 때문에 움직이는 건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마치 애벌레라도 된 기분인걸.” 눈앞은 천으로 막혀서 보이지 않지, 너무 좁아서 팔다리를 써서 움직이는 건 무리지. 결국 꼼지락거리며 몸을 움직여 나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이지만 계속 그 공간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낫기에 전진을 계속한다. 구조를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 통풍구는 1층 매장의 바닥을 지나 건물 외부로 나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외부와 연결된 곳에는 팬이 장착돼있을게 분명하기 때문에 1층 바닥을 통해 탈출하는 게 합리적인 방법. 어느 정도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넓어진 통로로 인해 그래도 앉은 자세로 걸어갈 수 있을 수준까지 바뀌었고 “아, 여긴가?” - 덜컹 덜컹 읏.. 잘 안열린다. 하긴, 아무래도 이곳은 매장의 바닥이니 함부로 들려서는 백화점의 체면이 있지. 그렇다고 힘을 써서 단숨에 밀어 젖히면 주위의 주목을 한눈에 받게 되니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최저한의 힘을 사용해서 살그머니, 그리고 조용하게 여는 게 상책이겠지. 어느 정도 힘을 주자 살짝 들려지는 타일. 그 틈새로 주위를 살펴보지만 운이 좋게도 최소한 세 방향에서 보이는 사람은 없다. 이대로 나간다고 해서 누군가의 주의를 끌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물론, 뒤쪽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75%의 확률로 사람은 없으니 단숨에 빠져나가자. “우으.... 힘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고난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대견하게 생각되는 건 당연. 나중에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 린이나 이리야가 얼마나 날뛸지는 예상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쪽이 모로봐도 이득이다. 최소한 여기는 다시올 일이 없을 테니까. - 덜컹~ 탕~ 타일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약간 컸기는 했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을 정도의 작은 소리. 다시금 이미 확인한 전방과 좌측, 우측을 살핀 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 “에?” 정말 예상치 못한 사람이 그곳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저 멍하니 그녀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어, 이런데서 만날 줄 몰랐다.” 그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어울리는 남성의 어투를 사용하며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낸다. 너무나 잘생긴 아름다움을 소지하고 있는 날이선 칼과 같은 이미지에 숏컷이 어울리는 여성. 찻집 므네모쉬네의 주인인 시키씨다. 어째서 시키씨가 여기에? 그렇게 멍하니 시키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한손을 내게 내밀어 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냐. 얼른 올라오지 않고.” “아.. 네에.” 그리고 나는 친절히 내밀어진 그 손을 잡았다. 시키씨의 손을 잡고 내가 만들어낸 바닥의 구멍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상황이 딱히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여전히 이곳 런던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푸른색 계통의 기모노에 겉에는 검붉은 색의 가죽점퍼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이 해롯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일본이나 그녀의 찻집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어찌됐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 시키씨가 이곳 해롯의 숙녀복 매장에 있느냐 하는 사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어떤 상황 어떤 순간이던지 항상 기모노 혹은 유카타만을 애용하고 이렇게 날이 추울 때면 겉에 대충 자켓을 걸치는 것으로 겨울을 대비하는 게 전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서양식 옷을 파는 곳에 있다는 현재의 상황이 신기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터. 그런데 내 그런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시키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만이라는 듯 말을 던진다. “뭐야, 그 이상하다는 표정은.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게 그렇게 신기하냐?” “네? 아..아뇨. 그저.. 에또..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 생각하던 게 그렇게 들통 났기 때문일까. 우물쭈물하며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억지로 생각해 낸다 해도 시키씨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하고 만다. 그래도 정말 신기한건 신기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걸. “흥, 싱거운 녀석.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네가 바닥에서 솟아 나오는 것보다는 덜 신기할 거다. 게다가..” 거기까지 말하고 내 모습을 지긋이 주시하듯 바라보는 시키씨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그 거추장스러운 먼지투성이가 된 천은 언제까지 감고 있을 생각이냐. 그런 지저분한 물건이 네 취향이라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만. 별로 보기에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아..” 이어지는 말에 알아차린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먼지투성이의 통풍구를 지나가기 위해 사용했던 흰 천을 여전히 몸에 두르고 있는 상태. 시키씨의 지적대로 천을 바라보자 역시나 원래 하얗던 천은 이제 그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먼지로 더럽혀져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거.. 빤다고 깨끗해질지는 장담할 수 없어도 나중에 돌려줄 때는 그래도 최대한 빨아서 돌려줘야겠는 걸. 그런 고민과 함께 몸에 감고 있던 천을 풀어 적당히 정돈하며 아까부터 궁금하던 상황에 대한 질문을 해본다. “그런데 시키씨는 이곳에 무슨 볼일이세요?” “응?”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던 걸까. 시키씨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잠시 퉁명스럽게 이곳을 찾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털어놓는 그녀. “....겉옷을 장만하러 왔다.” 그녀가 말하는 겉옷이란 아마도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점퍼를 이야기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해를 하려해도 약간은 이상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시키씨가 겉에 입는 옷들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이 단순하거나 남성스러운 가죽제 블루종이 대부분이었던데 비해서 지금 우리가 서있는 1층 구석의 매장은 여성스러운 숄이나 귀여운 디자인의 여성용 코트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기에 시키씨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어딘지 어긋나있는 느낌이니까.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단지 그녀 자신만의 의도는 아닐 거라고 예상하는 건 간단하다. 아마 그가 함께 와있는 거겠지. “시키씨 혼자요?” 그 말에 시키씨는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는 기색도 없이 그저 턱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언제나 시키씨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검은색 일색의 단정한 남성이 밝은 색 계통의 여성용 코트를 하나 손에 들고 천천히 그렇지만 똑바른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고쿠토 미키야. 시키씨의 애인.. 이라고 해야 하나? 이윽고 나와 시키씨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미키야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왼쪽 눈을 검은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부드러운 인상에는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는다. “응? 웬일이니 에밀리아.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 “안녕하세요. 미키야씨. 그러게요. 이런 곳에서 만나니까 새삼스럽게 반가워요.” 그도 그럴게 내가 미키야씨나 시키씨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예전에 있었던 아인츠베른의 파티를 제외한다면 거의 10중 8,9는 그들의 찻집에서가 전부였으니까. 이렇게 그곳을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 마주치는 건 어찌 보면 특별한 일인 셈이다. “그보다 어째서 그런 곳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다만. 하긴, 네게 그런 이상한데로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다면 상관은 없지.” “그런 취미 따위는 없어요!” “응? 시키, 무슨 일 있었어? 아.. 에밀리아 이런 곳에 먼지가 묻어있구나. 가만히 있어봐.” - 팡! 팡! “아.. 저기.. 미.. 미키야씨!??!” “잠깐만.. 거의 다 됐다.” 갑자기 허리를 굽혀 내 스커트를 붙잡는 미키야씨. 흰 천으로 몸을 감싸고 왔음에도 역시나 완전하지는 않았는지 입고 있는 스커트의 뒷부분 끝자락에 약간의 먼지가 묻어있는걸 그제야 눈치 챘지만 이미 그가 먼지를 털어주기 시작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미키야씨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가 타고났다고도 할 수 있는 친절함을 발휘하여 털어주고 있는 거지만.. 거기, 털고 있는 위치가 조금.. 게다가 지금 옆에는 아무리 평소에 무뚝뚝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고 질투심도 많은 시키씨가 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고, 살그머니 눈을 돌려 시키씨의 눈치를 살피는 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시키씨의 시선은 나와 미키야씨의 모습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뒤쪽.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올라온 구멍을 향하고 있다. “쥐새끼가 있군.” 일순 시키씨의 눈이 빛났다고 생각한 순간 서번트인 나의 눈으로도 넋을 놓고 있다가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빠르고 정확한 동작을 통해 그녀의 팔이 한쪽 소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고 모습을 드러낸 손에는 시키씨가 애용하는 작은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그 직후 그녀의 팔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져 손에 들린 나이프는 나의 옆을 스쳐 바닥의 어느 곳을 노려 날아든다. - 슈칵 “에?” 한 타이밍 늦게 나이프가 날아간 궤적을 쫓아 내 바로 뒤의 바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시키씨의 말이 맞기는 맞는 거려나. 실제로 쥐가 하나 시키씨의 나이프를 맞고 움직임을 멈춘 상태다. 다만 살아있는 쥐가 아니라 투명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쥐의 모양을 한 무언가라는 점이 특이점이기는 하지만. 게다가 그 쥐의 모습은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사역마와도 닮았다. 그래, 보석을 사용한 마술에 특출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나의 동거인이자 명목상의 마스터의 그것과. “뭐야, 장난감인가?” “에..또.. 들킨 걸까...” 린이 전에 만들어 둔 사역마라는 희망적인 관측은 일단 절대로 무리, 게다가 설령 그 무한한 불가능의 확률을 뚫고 기적적으로 얼마 전에 만들어둔 사역마라 할지라도 그 사역마가 하필이면 이곳에 나타날 가능성은 차라리 린의 낭비벽이 고쳐지고 길을 걷다 수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줍는다거나 린과 루비아의 사이가 좋아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보다 낮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아마도 저 보석쥐는 내가 빠져나온 통풍구를 그대로 지나서 이곳에 도착한 게 분명하고 다시 말해 이미 내가 그곳에서 도망쳐서 이곳까지 와있다는 사실은 린과 이리야에게 들통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귀결이다. ------------------------------------------------- - 린 - “큭! 들켰어! 역시 저 여자..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단순한 나이프를 가지고 내 사역마를 단숨에 제거할 줄은 몰랐네.” 내가 사용하는 사역마는 나의 주특기인 보석마술을 사용한 물건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아무런 마술적 부가효과나 기원이 쌓이지 않은 칼같은 것으로는 흠집을 내면 다행일 정도로 단단한 경도를 자랑하는 것. 그런 나의 사역마를 단칼에, 그것도 그다지 힘들여 던지지 않은 듯한 투척으로 라인이 완전히 끊어져 버릴 정도로 파괴해 버렸다는 사실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역량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 고려할 때 일까보냐? 게다가 미키야씨 어디를 그렇게 털어주는 건가요! 물론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사심 같은 게 1mg라도 포함되었을 리가 없지만... 어쨌건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타겟이 이동하기 전에 어서 빨리 그물을 펼쳐야 하는 법. “이리야스필. 지금 타겟은 1층 숙녀복 매장의 구석 쪽, 겨울용 자켓이 모여 있는 코너에 있어. 다음은 맡길게.” “응! 레이놀드!” “말씀하시지요. 이리야스필 아가씨.” 에밀리아. 그 애 답지 않게 신속한 실행력을 발휘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후.. 그렇게 쉽게 탈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모처럼 즐겁게도 이런 저런 옷을 입혀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게 만든 대가. 충분히 치르게 해줄 테니까. ---------------------------------------- - 에밀리아 - 매장 전체에 울려 퍼진 불길한 소리는 시키씨가 쥐를 잡은 직후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딩동~ 매장내 전 직원들에게 알립니다. 현재 1층의 숙녀복 매장에 있는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15~16세 정도의 소녀를 발견하는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잠깐만요. 부장님. 이걸 그대로 읽으라고요?] 켁.. 이건 무슨 방송일까. 1층은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다. 은발은 나의 머리색, 붉은색은 나의 눈동자 색. 게다가 현재 내 모습은 15~16세 정도로 성장한 이리야의 모습이니까. 다시 말해 저 안내방송이 지칭하는 포획대상은 나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방송을 들은 직후 저쪽에서 이곳 해롯의 직원 복장을 한 사람들 몇몇이 이쪽을 향해서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있으니까. 틀림없는 사실. [네.. 그럼 추신입니다. 도망쳐도 상관없지만 얌전히 돌아오는 쪽이 신상에 이로울걸? 이상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현재 1층의 숙녀복 매장에 있는 은발에...] 린.. 이리야.. 그런 사적인 말까지 방송을 통해 전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게다가 그런식으로 말을 한다고 해도 내가 후환이 두려웠으면 탈출을 감행했을까. 이미 도망친 이상 지금은 돌아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도망 다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린과 이리야가 직접 나를 잡으러 온 게 아니라 흰색 와이셔츠에 녹색 앞치마를 걸친 정말로 평범한 일.반.인 들을 풀어서 나를 잡으려 하고 잇기 때문에 마술과 그 관련된 힘은 사용할 수 없다. 결국 순전히 15~16세 소녀의 힘 정도만을 가지고 지금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사람들은 한두 사람이 아닌데다 다들 건장한 체격을 지닌 남자들이다. 간혹 보이는 여성들도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보다는 힘이 세 보이는 20세 이상의 여성들. 게다가 사방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이건 무슨 소리인 걸까? 에밀리아. 아무래도 방송에서 말하는 건 너 아니니?” “뭐야, 너 쫓기고 있냐?” “으음.. 아마도 그럴 거에요. 아니 그러니까 딱히 나쁜 짓을 한건 아니고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도 포위망은 점차 좁혀져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까지 첫 번째 점원이 도착했다. 이대로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리는 건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할 테고... 어떻게 한다.. 무리해서라도 힘을 사용해서 빠져나가야 하는 걸까. “실례합니다. 아가씨. 지금 방송을 들으셔서 아시겠지... 커헉!” 그렇게 친절하지만 어딘지 석연찮은 표정을 지은 남자 점원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뻗으려 하는 순간 번개처럼 몸을 날리는 푸른 그림자.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을 점원의 복부에 그대로 꽂아 넣고는 다리를 걸고 손바닥으로 턱을 올려쳐서 점원의 몸을 그대로 빙그르 회전 시켜버린다. 그야말로 너무나 손쉽지만 빠르고 강하게 들어간 현란한 체술. “시.. 시키씨?!!” 내 경악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미키야씨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는 시키씨. “미키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 ※ 주의 : 이번 편에 나오는 해롯백화점의 묘사는 순전히 현실에 기반을 둔 상상입니다. 몇몇 요소(투탕카멘의 동상이나 오픈테라스, 옥상에서 옆 건물까지의 거리 등)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저런 구조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점원 한사람이 쓰러졌기 때문일까. 그때까지는 그저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던 점원들은 마치 시키씨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상황에 맞지 않은 우스운 상상이지만 미키야씨는 시키씨를 토끼라고 비유하였으니 저들은 토끼를 잡기위해 달려드는 사냥꾼이 아닐까. 물론 그들이 잡고자 하는 건 나고 그녀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하여튼.. 나라고 이곳의 구조를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시키?” 어쨌든 무턱대고 안내하라고 하는 주문에 미키야씨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태도로 무슨 그런 주문이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시키씨는 여전히 태도를 바꾸지 않고.. 아, 또 다른 사람이 달려든다. “속일 생각하지 마. 미키야. 네가 이렇게 나를 끌고 오는 길에 미리 조사도 안했을 리가 없지. 자, 어서 안내나 해.” 미키야씨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두 번째로 달려든 가여운 희생양을 멀리 날려버리는 시키씨. 아까의 점원이 그저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에 의외로 번거로운(?)절차를 밟아 쓰러뜨렸다면 이번엔 그야말로 달려드는 기세를 십분 활용하여 그저 다리를 걸고 등을 살짝 밀어준 것만으로도 그 점원은 순식간에 천장과 바닥이 뒤바뀌는 감각을 느끼며 한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모처럼 시키에게 다른 옷을 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좋았는데 말이지. 뭐, 일단 정상적인 출구는 아까 방송으로 볼 때 이미 막혔다고 보는 게 좋겠고. 그럼 이쪽이야.” 미키야씨는 그렇게 두 번째 점원이 쓰러진 순간 나의 손을 낚아채서는 방금 전 충돌로 뚫린 포위망의 한쪽 부분을 향해 달려가며 외친다. 기습적으로 달려나가는 미키야씨와 나의 뒤를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바로 따라오는 시키씨. 역시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타입이면서도 서로의 생각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착 맞는 호흡을 보여준다. 그렇게 시작된 급작스러운 우리의 탈주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점원들은 뭐라고 외치며 우리의 뒤를 쫓기 시작. 하지만 이대로라면 결국은 잡혀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곳에 처음 온 사람에 불과하고 저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직장이자 삶의 터전이니 길이나 매장의 배치정도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을게 뻔하니까. 그러나 시키씨로부터 길안내를 부탁받은 미키야씨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쪽!” 속속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점원들에게 따라잡히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급격히 방향을 틀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과 동시에 미처 몸을 멈춰 세우지 못한 추격자들 중 선두에 서있던 사람을 뒤따라오던 시키씨가 팔을 붙잡는가 싶더니 자신을 축으로 상대의 달려가는 관성의 힘을 이용하여 방향을 180도 전환시켜 버렸다. 당연히 달려오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선두의 점원은 뒤에 따라오던 다른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해 버리고, - 콰당탕탕!! 덕분에 충돌지점을 기점으로 마치 연쇄충돌이라도 일어나듯 차례차례 부딪치거나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이로서 한순간 타이밍을 벌었고 바로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로 뛰어 올라간다.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1층을 통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이지만 어째서일까. 미키야씨가 이끄는 대로 향한다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그와 시키씨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우스꽝스럽게 생긴 파라오의 동상을 지나쳐 이번에는 각종 잡화를 판매하고 있는 2층의 매장을 질주한다. “잠깐 여기에 숨자.” 모퉁이를 돌자마자 있는 자그마한 틈새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미키야씨의 끌어당김과 바로 뒤에서 미는 시키씨의 손에 떠밀려 틈새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는 잠깐의 찰나.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외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리고 잠시 후 모두 지나쳐 간다. “자, 목적지는 최상층이니까. 서두르자.” 이미 쫓던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쳐 갔기 때문에 한결 여유 있는 걸음으로 아까 2층으로 올라왔던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려간다. 어느 정도 되찾은 여유. 따라서 어떻게 그가 이렇게 이곳의 구조를 잘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구조 파악과 타이밍을 재는 감까지. “미키야씨 어떻게 이렇게 잘 찾아 가는 건가요?” “별거 아니야. 시키 말대로 찾아오기 전에 매장의 구조도 정도만 숙지했을 뿐이니까. 예를들면 어디에 무슨 물건이 판매되고 있고, 에스컬레이터의 움직이는 방향이나 화재나 지진의 발생시 탈출할 수 있는 루트 등. 간단한 일이니까.” 역시나 시키씨와 어울리고 있는 만큼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리라는 예상은 충분히 하고 있었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이 아닌가. 단지 쇼핑을 위한 사전 조사 수준으로 거기까지 조사해놓고 별거 아니라는 태도도 여러모로 대단하기도 하고. 그렇게 미키야씨의 대단한 능력을 바탕으로 3층까지 올라가는 건 무난했지만 역시나 세상일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훌륭한 체술을 바탕으로 방해꾼을 처리하는 시키씨와 탐정 뺨칠정도로 뛰어난 조사능력을 지닌 미키야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3층에서 4층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과 마주쳐 버렸으니까. “찾았다! 잘도 도망쳤겠다. 에.밀.리.아?” “읏.. 린!?”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올라온 건지 3층 저편에서 붉은색의 오라를 번쩍이며 이쪽을 향해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서서히 접근하고 있는 붉은 악마의 모습이 보인다. 이대로는 위험해. 분명 서서히 걸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목뒤를 엄습하며 이대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감각이 지속적으로 경종을 울린다. “시키씨, 그리고 미키야씨. 우리 에밀리아가 폐.를. 많이 끼쳐드렸네요. 이제 그만 이쪽으로 오지 않겠니 에.밀.리.아?” 절대로 불가다. 지금 가면 지옥이 무엇인지 염라대왕의 목전까지 인사를 드리러 갈 수 있을게 분명.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를 압송해 가려 하는 건 염라대왕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최악의 붉은 악마 모드로 강림하신 토오사카 린이니까. 틀림없이 아까까지 괴로웠던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충격과 공포가 휘몰아치는 기나긴 시간과 장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 “시.. 싫어..” 나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입에서 나오고 만다. 정말이지 가끔씩 생각하는 거지만 이래뵈도 영령이고 서번트이고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린에게 너무 약한 거 아닐까 나? 마치 린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린 앞의 에밀리아처럼... 아 이건 아니고. 어쨌건 거역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 스윽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뒤로 감추듯 린을 향해 나서는 두 사람. 이때까지의 도주를 도와준 시키씨와 미키야씨다. “어이, 이 녀석 싫어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잠시 동안 내가 맡아가지고 있도록 하지. 미키야, 계속 안내해” “그렇게 됐네요. 토오사카 양. 저도 에밀리아가 싫어하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하하” 거기까지 말한 직후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짜여진 각본처럼 동시에 몸을 돌려 양쪽에서 내 팔을 잡아채고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린의 행동력은 나도 인정하고 있는 바. 다른 점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 판단으로 바로 뒤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미키야씨가 있는 우리 쪽이 린에 비해서 유리한 게 사실. 4층까지만 어떻게 올라가면... “윽..” “도망쳐도 소용없어! 에밀리아!” 뒤에서 린의 의기양양한 외침이 들려온다. 그도 그럴 것이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의 끝에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의기양양하게 서있는 하얀 소악마께서 너무나 깔끔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얼굴에 가득 채운 채 우리를 굽어보고 있기 때문. “어서와~ 에밀리아~” 아래는 린이 마수를 뻗치며 서서히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고,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에스컬레이터가 충직하게도 하얀 소악마의 부하라도 되는 양, 우리를 들어다 바치게 놔두는 셈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2면 초가로구나. 짧은 도망의 순간이여 안녕. 지옥같은 시간이여 어서오세요. “꺄아?!?!” 그렇게 좌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귀에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면 화들짝 놀라버리고 마는 게 당연한 일.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귀에 다가온 숨결은 미키야씨의 것이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린다. “..............” “......정말요?” “그것 외엔 방법이 없지. 시키 준비됐지?” “응. 먼저 가라.” 이미 시키씨와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인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미키야씨의 생각이란. “자 타이밍은 한 순간 뿐이야. 하나, 둘.... 셋!” 에스컬레이터 난간 너머에 있는 작은 오픈 테라스를 향해 뛰어 넘는 것. 그의 신호에 맞추어 가장 먼저 내가 뛰어서 넘어간다. 이곳 해롯의 에스컬레이터는 다양한 인테리어로 구성되어 있어서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는 남자, 혹은 여자가 즉석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오픈 테라스가 몇 개씩이나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에스컬레이터에서 오픈 테라스까지의 거리는 기껏해야 1미터 남짓한 거리밖에 안되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뛰어 넘을 수 있다. 그건 미키야씨나 시키씨도 마찬가지이고 나를 따라 두 사람 모두 문제없이 넘어 온다. 덕분에 에스컬레이터의 양쪽에서 의기양양하게 포위망을 좁혀가던 두 사람이 당황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고 그 둘을 뒤로 하고 우리 세 사람은 다시금 도주를 시작한다. “에!!?!?” “자.. 잠깐!!!” 미안, 이리야. 미안, 린. 아직은 잡혀주지 못하겠어. ---------------------------------------- 그렇게 유유히 린과 이리야를 떨쳐버린 후 최상층까지 가는데는 평범한 점원 외에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고 때로는 계단을, 때로는 에스컬레이터를, 그리고 때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린과 이리야를 피해 결국 최상층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미키야씨에 의하면 외부로 나가서 옆 건물로 건너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하니 이제 악몽이여 안녕 일건 확실했다. 물론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린과 이리야의 불평불만을 들어줘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아까처럼 인형놀이의 대상이 된다거나, 도망 도중 붙잡혀서 지옥을 보는 건 사양이다. - 끼이익~ “아...” 그건 정말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해롯의 최상층 플로어에서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 곳 근처는 물건을 판매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저 창고나 이동 통로로 이용되는 게 전부인 것 같았기 때문이고,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게 급선무였던 나를 비롯한 우리 세 사람에게 그런 창고들을 열어볼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미키야씨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 들어갈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차, 실수네. 옆쪽의 문인데 잘못 열었어. 자, 서두르자.” 하지만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우연이란 단지 필연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할 때 탈출구로 사용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미키야씨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길을 잘못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닌 바로 옆의 창고 문을 열었던 것이 어찌보면 내가 이것을 보기 위해 안배되어 있던 필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이리야가 내게 겨울옷을 마련해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니까. ““에밀리아?”“ 옆에서 시키씨와 미키야씨가 이상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러보지만 나의 발걸음은 문을 연 그 순간부터, 아니 이 옷이 눈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 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다. 그 옷의 첫 느낌은.. 눈과 같았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따뜻해 보이는 디자인. 목선에는 하얀색의 털이 자리하고 있으며 모든 색상이 하얀색으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그런 옷. 가운데 라인을 따라 두 줄로 늘어서 있는 검은 단추는 하얀 눈밭위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동물의 발자국 같은 느낌을 주기에 더욱더 설원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왜였을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이 옷 앞에 멈춰 서게 된 걸까. 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단지 그 옷에서 느껴지는 첫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기억 속 저편에 아득하니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그건 내 머릿속의 기억이 아닌.. “어머....님?” 육체의 기억. =================================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25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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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리야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이리야가 키리츠구의 딸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리야가 키리츠구를 닮지 않았으니 분명 어머니를 닮은 거겠지. 어쩌면 너무 닮아서 자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옷걸이에 걸려있는 하얀 코트를 중심으로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고 곧은 은발에 이리야처럼 붉은 눈동자. 어머니이니까 지금의 이리야보다는 더 어른스러운 모습일 테고. 그렇게 구성된 한 여성의 모습이 망막이 아닌 뇌리에 비쳐진다. 내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리야의 어머니 모습은 다름 아닌... 나? 그럴리가. 고개를 흔들어 잘못된 상상일 게 분명한 영상을 지워버린다. 덕분에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듯 붙잡아 두고 있던 기억의 밧줄이 풀리고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다. 더불어 지금 이렇게 멍하니 서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바로 이어진 미키야씨의 한마디로 완벽하게 자각. “이거.. 위험한데. 슬슬 시간이..” “이런, 미키야씨, 시키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어서 가죠.” 이곳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리야에게 물어보면 그만이고 지금은 이곳 해롯 백화점을 빠져나가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창고를 벗어나며 뒤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하얀 코트의 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창고의 문을 닫는다. 자, 이제 탈출은 목전에 있다. ----------------------------------------------- - 린 - “놓쳤다고요?!” 지금 나와 이리야스필, 그리고 레이놀드씨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실패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사람은 거구의 이곳 경비 책임자. 3층에서 4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오픈테라스를 향해 몸을 날린 세 사람은 그 때부터 어찌나 이곳의 지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지 5층에 있는가 하면 갑자기 1층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다 2층에서 엘리베이터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3층의 계단을 통해 4층으로 올라가는 등 정말이지 신출귀몰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쪽을 농락하며 도주행각을 계속 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1층에서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3층에서 5층에서 내린 직후 이제는 완전히 그들의 모습을 놓쳤다는 보고를 전하러 온 것. “곤란하군요. 이만한 인원을 투입했는데도 잡아내지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지배인님.”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는 경비 책임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곰곰이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의하면 섬세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키씨나 이곳에 처음 온 에밀리아가 저들의 도주로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 터. 분명 에밀리아의 경우 건물의 구조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아까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쳤을 때의 모습으로 보아 그녀가 앞장서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정황과 여러 사람들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저들을 이끌고 있는 건 미키야씨. 전에 아자카(지나간 시간동안 비슷한 나이에 일본인이라 서로 말을 놓고 지낸다고 설정하겠습니다.)가 말한 바에 따르면 미키야씨는 무언가를 찾는데 특출 난 재능이 있다고 했던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풀이 빳빳하게 먹어서 날카롭게 날이 선 와이셔츠 깃을 세운 채 우리와 현장을 진두지휘 하고 있던 레이놀드씨가 다가와 말을 건다. 이곳의 지배인이면서 이 무슨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분명 이 사람은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뭐, 그 덕에 여러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나쁠 건 없지만 저 재미있어 하는 얼굴.. 은근히 성격 나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출입구는 봉쇄하고 있는 거겠죠?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려면 출구를 통해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혹시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라도 있지 않나요?” “흐음.. 다른 방향이라고 한다면.. 해롯은 도난 방지를 위해 1층의 출입구를 제외하면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없습니다. 다만..”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레이놀드씨. “하늘로 날아 도망칠 수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옥상은 항상 개방되어 있으니까요.” 하늘이라. 에밀리아는 비행을 할 줄 모른다. 나 같은 마술사라 해도 의식하의 비행은 매개체 없이 시도해도 성공률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하물며 반쪽짜리 마술사로 출발한 그 애가 그런 고등의 마술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은 배재해도 좋겠지. 게다가 혼자의 몸이 아니라 일반인 두 사람까지 낀 채로 날아서 탈출하는 건 무리다. 물론 육체적 능력으로 높이 뛰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옥상에도 사람들이 있으니 함부로 힘을 사용할 수도 없을 터. 보통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면 고작해야.. 잠깐만. “레이놀드씨! 이 건물 옆에는 어떤 건물이 있죠!?” “흐음.. 낮은 건물들 밖에 없습니다만.. 아!!”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깜짝 놀라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마주 친다. “파이프 라인이 있습니다. 그걸 사용한다면 옆의 낮은 건물 지붕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까지 파악하고 있을리가..” “들은바 대로의 미키야씨라면, 그리고 오늘 보여준 모습을 감안할 떄 그건 이미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죠. 경비실에 연락해서 최상층 플로어에서 옥상으로 나가는 길에 설치된 카메라를 주시하라고 전해주...” - 띠리리리 내말을 끊듯 울리는 호출 소리. 지금 레이놀드씨가 지니고 있는 휴대폰은 이곳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직원용 장비로 아까부터 상황 지시용도로 사용하던 물건이다. 그쪽을 통해 연락이 걸려왔다는 말은 지금의 상황과 관계된 무언가라는 말. 그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절도 있는 자세로 안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열고 통화를 시작한다. “실례하겠습니다. 음, 나다. .......................뭐!!? 알았다. 즉시 쫓도록. - 딸깍 - 토오사카님. 예상이 맞으신 듯 합니다. 방금 전 옥상으로 향하는 통로에 있는 마지막 감시카메라에 세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 출발하면 늦는 게 아닐 런지.” 역시나 옥상이네. 당연히 지금 쫓는다면 늦을게 분명하지만 이미 이쪽도 생각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놓쳤을 때부터 준비시켜둔 게 있다. 그건 바로 지금 향하고 있는 해롯의 정문 상공에 떠있는 “이리야스필!” “응! 이쪽이야 린!” - 투투투투투투투투투 만약의 만약 저들이 이곳을 벗어나는데 성공한다면 추격할 용도로 준비해둔 이리야스필의 개인 헬기. 개인 헬기도 가지고 있는 이리야스필이 부럽다거나 하는 기분은 요만큼도.. 요만큼도.. 요만큼...도.. 칫, 사실 좀 부럽긴 하다. 저 플라티나삐까. 착륙시키는 건 무리기에 위에서 내려온 줄사다리에 매달리자 헬기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이 토오사카 린을 여기까지 가지고 놀아줬겠다. 기대하는 것 이상의 대접을 약속해주도록 하겠어. ------------------------------------ - 에밀리아 - “저기다!!” “잡아라!!” “멈춰서!!” 최상층 플로어에서 이쪽을 향하는 통로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다. 이제까지 당한 것에 대한 원한이라도 품고 있는 걸까. 이쪽을 노리고 달려드는 모습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남녀를 가리지 않은 채 그야말로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밀려들고 있지만 아무리 이쪽이 창고에서 시간을 빼앗겼다 해도 우리는 이미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버린 상황. - 쾅! 옥상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문의 잠금장치를 통해 추격의 의지를 뿌리쳐 버린다. 이제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겠지. 문의 너머에서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그건 더 이상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자, 저쪽의 난간 너머에 아래로 연결된 파이프라인이 있으니까. 그쪽을 통해 간다면 무리 없이 옆의 건물로 넘어설 수 있어.” “정말 감사해요. 미키야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소동 속에서도 여전히 상쾌한 미소를 잃지 않은 미키야씨. 그의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되었으니 언젠가 한번 꼭 보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뭐야, 미키야만 보이는 거냐.” “하하.. 설마요.” 그렇게 툴툴거리는 시키씨이지만 여부가 있을 까. 물론 시키씨에게도 감사의 보답을 약속드려야겠지. 그렇게 탈출 성공을 목전에 둔 세 사람은 모처럼 여유를 갖고 미키야씨가 가리킨 난간을 향해 걸어간다. 이제 탈출 까지는 그야말로 한걸음 남겨둔 상태. 이상한 소리는 바로 그때 들려오기 시작했다. -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어디선가 헬기라도 지나가나? 하고 생각할 정도의 맹렬한 로터의 소음. 그리고 그건 절대 착각이 아니고 우리가 향해가던 옥상 난간 너머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위압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하.. 이건 예상 못했는걸. 토오사카양이나 네 언니가 꽤나 벼르고 있었나보구나.” “쳇, 여전히 쓸데없는데 힘을 쏟는 녀석들이군.” “아..하하...하.. 하아.. 그러게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헬기는 우리를 발견했을 게 분명함에도 여전히 고도를 상승시킨다. 그 이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오래지 않아 의문은 해결. 헬기의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는 하얀 줄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붉고 하얀 두 명의 사랑스런(?) 소녀들의 모습이 헬기에 이어 난간위로 올라왔으니까. "“딱!!!!!!!!!!! 걸렸어!!!!!!!!!!!!”" 헬기소음을 뚫고 여기까지 도착할 정도의 고함이란. 정말이지 강렬했다. ================================================= 마치 특수 포획작전을 방불케 하던 해롯에서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생각보다 허무하게,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충격적인 스케일로 마무리 된다. 게다가 마무리까지도 완전 분위기 탄 채로. “저기 린... 이거 어떻게 안 될까?” 은색으로 빛나는 범죄자 구속 장비. 일명 수갑을 찬 양 손목을 위로 흔들어 보이며 자비와 선처를 부탁해보지만 나를 체포하는데 최전방에서 진두지휘한 붉은 수사관께서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가차 없는 태도로 수갑에 연결된 사슬을 잡아당긴다. 아, 지금 그거 팔이 당겨져서 살짝 아프다. “사.. 살살 해!” “시끄러워! 이정도로는 내 분이 풀리지 않으니까.” 윽.. 이건 명백한 분풀이다. 린의 태도가 평소의 기분 나쁠 때에 비해서 한층 더 붉은 악마 모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를 쫓아다니느라 상당히 고생했는지 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한층 개가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 그나저나 린을 이곳까지 동행하도록 이리야에게 부탁한 사람이 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린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붙잡는데 혈안이 되었던 걸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끌려가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린의 표정은 이쪽에서 보이지 않지만 이리야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살짝 비추어진 그녀의 입가가 매력적인 곡선을 띄고 있는 모습을. 이건 화내고 있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다?!? “에헤헤~ 에밀리아~ 재미있었어?” 앞에서 나를 호송하는 호송 책임자가 린이라면 뒤에서 나를 맡고 있는 감시자는 이리야. 아니 내 뒤에 딱 붙어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연신 즐거운지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이리야의 모습을 감시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리야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라면 볼 것도 없이 NO다. 악취미적으로 부티나는 복도에 들어서면서부터 느낀 거지만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통풍구를 통해 도망칠 때나, 미키야씨와 시키씨에 의해 이리저리 도망다닐 때나. “하아..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어.” “우웅.. 나는 재미있었는데~ 그렇지? 레이놀드?” “물론이지요. 이리야스필 아가씨. 그나저나 에밀리아 아가씨. 꽤나 열심히 해주셨습니다만 여기까지가 한계셨군요. 그래도 꽤나 재미있었답니다. 허허. 나이를 먹으면 별일 아닌 일에도 재미를 느끼고는 하지요.” 잊고 있었지만 이 사람도 역시나 보통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옷을 고르다가 도망친 한 여자애를 잡기 위해 보통 이렇게 까지는 않는 거 아닌가. 안내방송으로 백화점 전역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는 등. 우리의 행동루트를 파악하여 린과 이리야에게 전달하는 말하자면 통신장교와 같은 역할까지. 아무리 시키씨와 미키야씨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상대의 지원이 막강했다면 붙잡히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려나. “하하.. 이거 안타깝게 됐구나 에밀리아. 이야,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걸.” “쓸데없는데 감탄이나 할 때냐 미키야.” 참고로 시키씨와 미키야씨는 탈주범에 대한 협력과 수사방해(?)라는 죄목이 있기는 하지만 애시당초에 포획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옆에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며 따라오는 상황. 물론 시키씨는 안쓰러운 표정보다 붙잡혔다는 사실이 더 불쾌한지 연신 투덜대고 있는 표정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래도 린과 이리야가 연행(?)의 대상을 나로 한정시켜서 다행이다. 만약 장난이라도 시키씨나 미키야씨까지 나와 같은 모습으로 수갑을 채운 채 끌고 가려 했다면 분명 시키씨는 옷소매 속에 들어있는 그 나이프를 다시 꺼내어 한바탕 날뛰어 줬겠지. 그나저나 이대로 잡혀서 끌려가게 되는 건 어디이고, 나는 이제 무슨 처분을 받게 되는 걸까. 린에게 물어보지만, 사실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정도는 어렴풋이.. 아니 사실은 상당히 명확하게 짐작하고 있다. 중요한건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인가 하는 것. “린, 이제 나를 어떻게 할거야?” “후후후, 궁금해? 이리야스필 수사관. 상대의 처결에 대해 설명해 주도록.” 역시나 아까하던 것의 재탕일까. “옛서~ 린 수사관! 범인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에 대해 도주죄에 대한 처결로 지금부터 24시간동안의 인형 역할에 처한다!” 절망했다. 자비심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이 세상에 절망했다. 24시간 동안 옷을 갈아입혀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몸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고 차라리 아까 얌전히 있는 게 좋았을 거라고 후회한다. 거기 미키야씨, 시키씨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지 말아요. 특히나 시키씨가 그렇게 바라보니 정말로 세상이 끝나버리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옥상에 있는 최상층 플로어로 돌아가는 입구를 지나쳐 아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가는 도중 눈에 들어온 곳은 아까 미키야씨의 이해할 수 없는 실수로 들어갔던 창고의 문. 저 안에 있던 옷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면 간발의 차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소한 궁금증 하나는 풀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잠깐만, 린. 저기 이왕 이렇게 붙잡힌 거 부탁하나만 들어주겠어?” “흥, 말해봐. 나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린 수사관의 허락에 이리야를 보며 부탁한다. 저곳에 있는 것이 내 예상에 맞는 거라면 이리야가 보았을 때 무언가 반응이 나올 건 분명하니까. “언니, 저기 창고 안에 있는 옷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 “창고? 알았어~ 레이놀드, 저기 들어가 봐도 되는 거지?” “저 창고면 613호 말인가요. 흐음.. 물론입니다. 아마도 그곳에는 판매하기에는 하자가 있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니까요. 평소에는 문을 잠궈 둡니다만 오늘은 마침 새로 상품을 넣어둘 예정으로 열려있습니다.” 레이놀드씨의 허락이 내려지자마자 이리야는 내 허리에서 손을 떼고 종종걸음으로 창고를 향해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 역시나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입으로 손을 가린 채 문가에 그대로 멈춰 선 이리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코트를 바라보며 서있는 이리야의 표정은.. 그리움, 고통, 반가움, 회한, 추억, 아픔.. 뭐라 한마디로 정의 하기 힘든 다양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코트의 앞에 멍하니 서있던 이리야가 현실로 돌아와 우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레이놀드씨를 향해 추궁하듯 말을 꺼낸다. 그 말에 들어있는 내용은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것. “이 옷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에서 기억하는 옷이야. 레이놀드.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어?” 바로 그녀의 어머니와 관계된 옷이다. 그것도 마지막 기억속의 옷. “흐음.. 그렇게 물어보신다고 해도 저희는 이유를 알지 못한답니다. 아가씨. 이 옷은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플레티넘 플로어에 진열되어 있던 물건입니다. 10년쯤 전이었을 겁니다. 재질은 분명 은여우의 모피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코트입니다만 디자이너는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편지와 함께 해롯의 접수창구에 배달되어 왔을 뿐이니까요. [극동의 섬나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만났다. 이 후 그녀를 여러 번 수소문해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기에 기억을 더듬어 이 옷을 만든다. 부디 어울리는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라고 말이지요. 워낙에 디자인도 좋고 소재도 고급이라 3년 전까지 전시해두었습니다. 다만..” “다만?” 지금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허허 웃는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레이놀드씨 답지 않게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주저한다. “이렇게 멋진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보시다시피 너무 하얀색 일색이다보니 이렇게 장식을 해둔 상태에서는 누구나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을 명품이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걸치면 옷에 사람이 묻혀버리고 게다가 입는 사람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에 매년 겨울이면 꺼내 놓고는 했지만 결국 아무도 사가지 않고, 사간다 해도 금방 반품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창고에 집어넣어둔 상태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금 코트를 바라보니 이해가 된다. 새하얀 눈과도 같은 티 없이 깨끗한 하얀색. 이렇게까지 하얀 옷이라면 어떤 사람이 입더라도 가려질 수밖에 없겠지. 저런 옷이 어울릴 정도의 사람이라니 이리야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 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이리야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을 건다. 잠깐 그렇게 당기면 수갑이 걸려서 아프다니까. “저기, 에밀리아. 이거 한번 입어볼래?” “에? 내... 내가?” - 키릭 이리야의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린이 내 두 손을 구속하고 있던 수갑을 풀어주고 덕분에 두 손은 자유를 되찾는다. “저 애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어때? 완전히 풀어주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임시 방면이야 임시! 착각하지 말 것!” 뭐, 린이 이렇게까지 해주는데다 이리야의 부탁을 딱히 거절할 마음도 없었기에 두 손으로 벽에 걸려있는 코트를 집어 들자 부드러운 털의 감촉으로부터 포근한 감촉이 전해진다. 레이놀드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옷은 이리야의 어머니가 입었던 것이 아닌 그저 그 모습을 다시 그려내기 위해 만들어낸 레플리카에 불과. 그렇기 때문인지 소매에 팔을 집어넣고 단추 하나하나를 제대로 끼우는 와중에도 별다른 감상이나 느낌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리야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헤에~” 내가 옷을 입는 동작 하나하나에 잔뜩 흥미를 지니고 그 시선의 끝에 있는 내가 부끄러워 질 만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 단추까지 제대로 끼워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달려들어 양 팔을 벌려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이리야. 아까와는 위치만 반대가 되었을 뿐 똑같은 모습이지만.. 뭐 기뻐하는걸 보니 그런 것쯤은 상관없으려나. “헤헤~ 어머님이 돌아온 것 같아. 에밀리아는.. 어머님을 많이 닮았으니까.” 그야, 이리야의 모습이니까. 그녀의 어머니를 닮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나저나 이리야가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꼭 이 옷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놀드씨. 이 코트.. 살 수 있는건가요?” “흐음.. 그렇군요. 물론 사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차피 팔리지 않는 물건이기는 합니다만 물건 자체의 가격이 상당히 비싼 만큼 웬만한 가격은 아니겠군요. 한두 푼으로 해결될 금액이 아닐 겁니다.” “그런가요..”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리야의 입장에서는 그리 부담이 되지 않을게 분명하기에 문제될 건 없지 않을까?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 나의 귀에 경악스러운 제안을 이야기하는 레이놀드씨. “그렇군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다음 주에 있을 해롯의 세일 이벤트 기간 중 하루 동안 홍보 모델이 되어 주신다면.. 어떻습니까?” 에? 내가 무언가 잘못 들은걸까? “모...델요?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이런 저런 옷을 입고 나서는 그.. 모델?” “네, 그 모델 말이지요. 토오사카님이나 이리야스필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째서 내 일을 결정하는데 린과 이리야의 동의를 구하는 겁니까? 당사자의 의견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고, 그녀들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는 거? 그런 제안을 들은 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턱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지만 저 모습이 연기라는 것 정도는 린과 지내온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알 수 있다. 저 모습은 절대로 교섭을 위한 자세. “흐응.. 글쎄요. 그런다고 제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는 이상..” “의상의 선택 및 악세사리의 선정은 전적으로 토오사카님께 일임하고, 덧붙여서 모델료는 심심치 않게 지불해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껏 사용하세요.” 역시나다. 린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금전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군요. 레이놀드씨. 아니 그보다 지금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고 있는데 나는 절대적으로 싫다고! 린과 이리야. 두 사람 앞에서도 옷을 갈아입고 하는 게 쑥스러운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건 그야말로 치사량에 가까운 제안이다. “저.. 절대 반대! 반대야! 나는 절대 반대라고! 이런 옷 같은 거 필요 없...” “므으.. 에밀리아~ 내가 부탁해도 안돼? 어머님이 다시 돌아온 거 같아서.." “윽..” 강경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내게 아까부터 나를 껴안고 매달려 있는 이리야가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을 들어 빤히 바라본다. 그런 모습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걸어오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어머니라.. 하긴, 그러고 보면 실수가 없었던 미키야씨가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된 것도. 내가 이 옷을 보게 된 일도. 모두 이리야를 위한 안배가 아니었을까. 내 모습이 그렇게도 그녀의 어머니를 닮았고 이 옷이 그 마지막 모습이라면 성배전쟁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나로 인해 아버지마저 잃은 가녀린 소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지금 이 옷을 입어주는 일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이리야의 눈물까지 본 이상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모조리 선택 불가로 변해버린다.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붙잡아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승낙의 말을 건낸다. “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울지 마 언니..” “정말? 야호~!” 마치 노렸다는 듯 바로 밝아지는 목소리와 표정. 방금 전까지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급작스러운 기분의 변화다. 이건 마치... “자.. 잠깐만!! 연기였던 거야!?!” “글쎄에~” 그렇게 말하며 혀끝을 빼꼼 내밀고 마치 춤이라도 추듯 내 앞에서 한바퀴 빙그르 도는 이리야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 “다.. 당했다?!!?!?” =================================================== 고민을 좀 많이 했습니다. 아이리스필이 입던 옷의 복제품(레플리카)으로 설정을 할지, 그 옷과 함께 만들어진 쌍둥이 옷으로 설정할지, 아니면 그 옷 자체로 설정을 할지. 그러다가 복제품이라는 쪽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기는 했습니다만.. 음, 역시 급히 쓴티가 좀 나는군요; =================================================== 슬슬 서늘한 날씨가 끝이 나고 추워지기 시작하는 11월이 되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영국의 날씨는 여전히 추적추적하게 비가 내리고 있어 지금이 겨울인지, 가을인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3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하늘에는 눈이 휘날리고 있었지. 역시나 변덕스러운 날씨다. 뭐, 그렇다 해도 나도, 린도 별다른 일이 없이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휴일의 아침이니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운치 있기도 하니 나쁠 건 없으려나. “하아~ 역시 평화로운 게 제일이네..” 따뜻하고 그윽한 향을 지닌 차가 입으로 들어와 목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주욱 늘어지는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손안에 들린 찻잔 속에 있는 차는 붉은 색을 띈 홍차가 아니라 에메랄드처럼 투명한 녹색의 일본차. 지난주 해롯에 갔을 때 선물이라고 잔뜩 받아온 해롯 브랜드의 홍차가 아닌 모처럼 시키씨를 통해 얻은 일본산 교쿠로를 끓여 창 밖에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것이 바로 풍류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고 이 평화로운 기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면 바랄게 없겠지만.. - 우당탕탕!! 정확히 일주일 쯤 전에 있었던 악몽을 떠올리게 할 만한 소음이 린의 침실 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기에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숙지하고 있다. Fate / Stay Illumination Escape impossible : Revenge - 일주일 전 - 이곳에서 보이지 않지만 눈앞에 펼쳐진 검은 장막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집중되어 있을 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산전수전, 인세의 아수라장을 겪어본 나라 해도 쉬이 평정을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을 할 수 없다. 일단 밖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래, 해롯의 인지도를 생각한다면 이정도의 인파야 당연한 걸테지. 문제가 있다면 “응?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눈앞에서 이렇게 뻔뻔한 웃음을 지은 채 태연히 서있는 중년 남성이다. “레이놀드씨.. 이런 일이라고는 말 안해줬잖아요!” “아~ 그랬습니까? 별로 차이는 없으니 걱정 마시길. 오히려 간단한 일이니까요.” “아~ 그러세요~ 라고 할 줄 알았어요?!?! 린! 뭐라고 말 좀 해봐!” 이리야의 어머니가 입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옷을 받는 조건으로 내가 분명 처음 제의 받은 일은 이번 세일에서 일개 모델의 일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거라면 사실 눈딱감고 처리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 레이놀드씨가 요청하는 건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미안, 입막음 당했거든. 레이놀드씨 능수능란하네..” “칫.. 능수능란 하다기 보다는 돈으로 입막음 당한 게 아니고?” 부정하지 못하는게 확실하다. 얼마나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일이 끝나고 나서 확실히 계산할테니까 각오해 린. 정말이니까. 어쨌건 레이놀드씨가 나에게 맡긴 건 테이프 커팅의 역할. 해롯의 세일 이벤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매년 유명인사를 초청하여 테이프 커팅을 하는 것으로 이벤트가 시작한다. 때문에 그 커팅에 초대받는 유명인사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 그런 주목받는 자리에 어째서 나를 세우겠다고 하는 건지 정말이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때문에 이유를 물어보며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추궁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괜찮습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이번 세일의 테마는 매스커레이드. 아가씨뿐만이 아니라 많은 초대객들도 가면을 쓰고 이벤트에 참석하실 예정이니까요. 누구도 아가씨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랍니다.” 라는 너무나 태연한 대답.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오늘 내게 준비된 의상은 이번 일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그 하얀 코트와 그것에 짝을 맞춘 듯 보이는 하얀색 부츠, 그리고 하얀 털모자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머리색과 피부색을 생각한다면 두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하얀색으로 도배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게다가 가면무도회-매스커레이드-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손에 들려있는 가면까지도 순백에 은색 수가 놓아져 있는 물건. 과연 이런 것 가지고 얼굴이 가려질까 싶을 정도로 작은 가면에 불과하다. 그저 눈 주위와 콧잔등만 살짝 가린 정도랄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마음에 위안이 되니 다행일지도. “이런, 시간입니다. 그럼 에밀리아 아가씨께서는 준비를 끝마쳐주시고 제가 개장 선언을 하면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막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레이놀드씨 덕분에 머릿속으로 고민과 상념을 거듭하며 보내던 유예의 시간도 어느덧 끝이 나고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도망칠 기회도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한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해롯의 겨울 정기 세일 이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해롯의 소유자이신 알 파예드 사장님께서 개장 선언을 하시겠습니다.” - 중략 - “이번 이벤트의 시작은 가면무도회로 시작하겠습니다. 에잇,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눈 딱 감고 나가는 거야. ---------------------------------- 아아,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기억이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도 뜨겁게 쏟아지던 카메라의 플래쉬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집중되던 스포트라이트. 거기에 개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까지. 막을 벗어나 테이프를 커팅하기 까지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표정을 한 채 서있었으며 어떻게 돌아왔는지 조차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 분명한건 그날의 기억은 내생에 최악의 경험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돌고 있으니까. 그날로부터 일주일. 언제든 악마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려주기 위한 심판의 무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악마를 묶을 올가미도, 필요한 족쇄도. 그들을 붙잡기 위한 파수꾼도.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이후 무대 위에는 그곳이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충실히 움직여주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거기 서지 못해!!!!!!!!” “메롱이야~!!” 악마를 포획하기 위한 조건 그 첫 번째는. 바로 두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 시켜 둘이 결속하는 것을 막는 일. “또...또 했겠다. 이리야스필!!!” “베에~~” 역시나 이리야에게 린이 여전히 자고 있다는 사실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도 괜찮다는 뉘앙스를 풍겨 준건 주효했다고 할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린의 침실에 기어들어간 이리야는 아마도 린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친 듯 그녀의 아름다운 흑단의 머리카락이 마치 용틀임이라도 하듯 이중으로 묶인 채 하늘로 솟구쳐 올라있다. 당연히 린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다시금 열린다. 악마를 포획하기 위한 조건 그 두 번째. 둘의 행동이 나의 의도대로 행해지도록 만들기 위해 주변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한다. - 덜컹! “에? 아.. 안 열려?!” “딱 걸렸어! 거기서지 못해!!” 거실에서 평소에는 창고로 쓰는 방의 문을 잠가두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녀들이 거실로 뛰어 들어올 때에 맞추어 은근 슬쩍 일어나 이리야의 도주 경로를 자연스럽게 막는 위치로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 게 두 번째. 그리고 아마도 끝까지 도망칠 거라 예상할 수 있는 공간에 이리야와, 린의 옷을 하나씩 가져다 두는 게 마지막 복선. “후후후.. 더 도망은 못가겠지? 얌전히 죄 값을 치르도록 해!!” “에잇!!” 후우.. 어떻게 저리 한 치도 틀림없는 동작을 보여줄까. 이 정도까지 오면 마치 짜고 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손을 뻗은 린과 그걸 막기 위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잡아서 앞에 펼친 이리야. - 찌이익!!! “에?” “에에?” 옷이라는 건 이렇게도 쉽게 찢어지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른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는 표정은 걱정스러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미안함으로 가면을 쓴 상태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만이야. 겉으로만. “미안 두 사람 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두 사람의 옷을 그런 구석진 곳에 놓아두고 말았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아니, 별로... 에밀리아 탓도 아니라 이건 이리야스필이... 히익!!” 어라? 왜 거기까지만 말하고 기겁을 하며 물러서는 걸까? 나는 그저 의도를 감추고 상냥하게 웃어주었을 뿐인데. 하지만 내 미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본 것일까. 린도, 이리야도 창백해진 표정을 한 채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필사적으로 나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옷이 찢어진 건 내 탓이니까. 꼭. 보.상.을. 해.줘.야.겠.네?” “에밀리아??” “에밀리아??” 하지만 그런 움직임 정도는 이미 예상한 상태. 아까 열리지 않던 문을 기억하겠지 두 사람 모두? - 짝짝! “모두들 나와서 붙잡으세요.” 내 손뼉소리와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호응하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미리 내가 와주기를 부탁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번일로 부탁한 사람은 모두 네 사람이고 그중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둘. 나머지 중 한 사람은 목적지에서 평소라면 찻집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내가 부탁한 옷들을 준비한 채 시퍼런 미소를 짓고 있을 거다. 그녀도 지난번에 붙잡힌 일에 대해서 칼을 갈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녀에 한해서는 진짜로 애용하는 나이프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호호호호, 모처럼 에밀리아가 선의를 베풀겠다는데 그걸 그리 매몰차게 거절하면 안되지요. 미스 토오사카?” “미... 미스 에델펠트!?!?!” “게다가.. 저렇게 무서운 에밀리아를 보는 건 여름의 그날 이후로 처음이기도 하니까요.” 린을 붙잡는 건 언제나와 마찬가지이지만 항상 너무나 푸른색의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명문가의 아가씨. 분명 보통 사람에게 린을 붙잡는 일을 부탁했다면 린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할건 분명하겠지만 루비아라면 다르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주효한 것일까. 평소라면 쉽게 붙잡기 어려웠겠지만 지금 내게서 풍겨 나오는 불길한 기운 때문인지 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붙들린다. “미안하네. 이리야. 이번 에밀리아의 부탁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거든. 용서해 주겠니?” “미..미키야?!!?!” 이리야를 붙잡는 건 어딘지 모르게 에미야와 비슷하기 때문일지 아니면 단순하게 친절하고 상냥하기 때문일지 어쨌건 이리야가 꽤나 잘 따르는 미키야씨다. 평소의 미키야씨라면 난처해 했겠지만 지난주에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다.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이번 계획에 동참해 주었다 랄까. “루비아. 미키야씨. 모든 준비는 확실하겠죠?” “물론이죠. 이미 클레어를 통해 최대한 우스꽝스러운 옷으로 보내 두었답니다. 기대하세요. 에밀리아.” “하하.. 그러니까. 아마 시키가 준비해 두었을거야. 시키도 꽤나 벼르고 있었으니까.” 좋아. 그럼 이걸로 이쪽에서 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에밀리아 이게 무슨 짓이야?!!?” “에밀리아!? 언니 화낼거야!” 후우.. 아직도 쓸데없는 저항이네. 이 두 사람은. “린? 언니? 무슨 일이라니. 나는 그저 보.답.을 하고 싶을 뿐인 걸. 저항하는 건 자유지만.. 후훗, 뒤는 책임질 수 없어.” [trace on] 미소지은 내 얼굴 뒤편으로 떠있을 이것저것 흉악한 물건들은 그저 장식일 뿐이다. 물론 저들이 내 말에 저항하고 반항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만다. 응, 착한 애네. 그들의 그런 모습에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며 아마도 문밖에 서있을 마지막 조력자를 찾는다. 그는 지금부터 목적지까지 이동할 이동수단을 준비하는 한편, 잠재적인 방해자가 될 수 있는 세라를 이곳으로부터 떼어놓는 역할을 맡아준 이리야의 충실한 집사. “오귀스트씨. 차는 준비되었나요?” “물론이랍니다. 에밀리아 아가씨. 이거이거, 이리야스필 아가씨께는 나중에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게다가 세라에게도 혼좀 나겠군요. 허허허. 하지만 두 분 모두 저희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분이시니 에밀리아 아가씨의 부탁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자,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오늘 하루 찻집 므네모쉬네는 인형의 집으로 변모하여 24시간 동안 영업을 하게 되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기대감으로 여성들이 옷 갈아 입히는 걸 좋아하는구나.. 하고. - Escape impossible End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13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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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Driver's high (上) “감사합니다~” - 부우웅~ 버스에서 내려서며 이곳까지 수고해준 운전기사분께 예의상 감사의 인사를 건낸다. 뭐, 그건 둘째 치고, 내가 어째서 이렇게 런던의 교외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으려나. ----------------------------------------- - 3시간 전 - 척 잠시 동안 상황의 판단을 보류한다. 내게 들이밀어진 이 한 장의 종이는 무엇이고, 지금 린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시선을 린이 건내 주는 종이로 옮겨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종이인지 파악한다. 섣부르게 받았다가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그저 린의 손에 들린 상태 그대로 보는 것. 겉보기에는 평범한 광고 전단지이고, 내용은 어디어디.. “흐응.. 취득률 100%,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사람의 합격을 보장합니다. 친절한 지도강사와 함께하는 자격 취득의 길.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로 시작하는 문구다. 무언가 어떤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도와주는 학원에 관련된 광고지 같은데... 물론 그 목적에 대해서는 가장 아래에 써있는 문구와 광고지를 배포한 장소의 이름이 써있는 것을 보고 오래지 않아 파악이 가능하다. “운전,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운전강습학원의 광고지. 별다를 것도 없이 지극히 평범한 운전강습학원의 전단지다. 뭐, 최근 운전 면허정도는 누구나 지니고 있을 만큼 간단한 작업이기도 하니 100%라는 말이 걸리기는 해도 별로 문제될 건 없으려나. 다만 문제가 되는 게 있다면 이걸 어째서 린이 나에게 보여 주냐는 사실이다. “린? 이건 뭐야?” 당연히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이런 종이 쪼가리를 받는다고 해봐야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이게 한계다. 물론, 나도 머리가 있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기에 무슨 의도로 보여 준건지는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짐짓 모르는 척 대꾸하는 건 린을 상대함에 있어서 최소한 자신은 보호할 수 있도록 몸에 익힌 처세술. 이렇게 말을 해둬야 나중에 불리한 조건이 들어올 때 저항이라도 할 수 있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 에밀리아. 보면 몰라? 운전학원 광고지잖아?”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내 말은 왜 이걸 나에게 보여 주냐는 의문.” “응? 그거야 당연하잖아? 영국에 온지도 그럭저럭 1년이 지나가는데 슬슬 우리도 차를 장만해야 하지 않겠어?” 차라.. 린의 생활 범위는 어디까지나 시계탑과 이곳을 오가는 것뿐이고, 나의 활동 범위는 근처 마트와 시키씨들이 있는 므네모쉬네, 그리고 이리야가 있는 별장 정도가 전부다. 뭐, 전부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이고 이리야의 별장은 오귀스트씨가 언제나 데리러 오니 패스, 어쩌다 멀리 갈 일이 있어도 버스나 전철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문제될 것도 없으니 굳이 차가 필요할까 싶지만.. “차라면.. 분명 있으면 편하겠지만..” “그렇지?!?” 린답지 않게 눈을 빛내며 이쪽을 향해 몸을 바짝 붙여오는 린. 저기 조금만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확실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다고 납득은 간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차가 있을 때의 편리함도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으니 괜찮을지도.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고 잠깐 의아해 한다. 차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어디까지나 린이다. 처음 생각한 것도 린. 그렇다면 운전 역시 린이.. “그거라면 린이 따도... 아, 그런가?” “그렇게 너무 쉽게 납득해도 상처받는데..” 린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나 쉽게 납득 된다. 그런 내 반응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지만 그렇다고 특별이 화를 내지는 않는 린. 자신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다른 일도 아닌 린인걸. 게다가 그 어떤 기계장치보다 자동차는 섬세하면서도 과격한 물건이다. 만약 린의 손에 핸들을 쥐어줬다가는 그날로 런던 시내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건 어디까지나 내... 기우라고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프다. 응. 린이니까.. “그래서, 어쩔꺼야?” 차가 있으면 어딘가 갈 때 편하기도 하겠고, 걸어 다니는 것보다 빠르고, 한번에 많은 물건을 사올 수도 있다. 게다가 혹여 라도 런던 외부로 나갈 일이 있을 때 사용하기도 용이하니 하나쯤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게다가 아무리 최근 여자로서의 삶이 익숙해지고 예전의 ‘에미야 시로’로서의 부분이 옅어져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까지 왔다고는 해도 일단 그 본질은 남자였다. 확실히 차라거나 레이싱이라거나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게 사실이니까. 게다가 올해 초에 린의 막무가내 식 낭비로 내가 자금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 그럭저럭 펀드에서 수익도 나고, 절약도 많이 했으니 어느 정도의 사치는 허락될 정도의 여유는 있다. 딱히 집에 있어도 할일은 없으니 시간도 때울 겸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뭐, 괜찮지 않을까? 알았어. 할게.” 그렇게 승낙의 뜻을 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까부터 느껴지는 뒷목이 끈적끈적해지는 감각은 지금 린의 제안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숨겨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고해주고 있다. “그래? 흐흥, 그럼 부탁할게, 이미 등록은 마쳐 뒀으니까.” 라는 등의 말을 태연히 꺼내고 있는 건 어디 사는 누구의 입일까. 도대체 미리 등록해두고 이야기할 거라면 왜 허락을 구한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 지끈지끈 아파오는 감각을 억지로 누르며 살짝 핀잔을 준다. “미리 등록해둔 상태에서 허락을 구하는 건 어딘지 앞뒤가 뒤바뀐 거 같지 않아 린?” 혹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은 했지만 설마 정말로 선행동, 후승낙을 실행해버릴 줄이야. 뭐, 만약 내가 못할 일이라면 뭐라고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상관은 없으려나. 그나저나 등록을 마쳐두었다면 조만간 시작할 텐데 그건 언제인지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차의 운전이라는 걸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만큼 차에 관해서는 무지한 상태.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어느 정도의 지식은 공부해 두는 편이 좋겠지. “언제부터 시작인데?” “응? 오늘.” 살짝 이마 언저리가 당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린은 나에게 오늘 있을 일을 미리 신청해 두고 이야기는 당일에 전해주는 행동을 하고 있는거네. 어찌도 이리 무책임한 언사와 행동이 있을 수 있을까. 이건 한마디 해주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기에 린의 얼굴 앞에 손가락과 함께 얼굴을 가까이 하고 최대한 화났다는 표정을 지어준다. “...........있잖아 린. 난 들은 기억이 없는걸.” “물론이야. 오늘 처음 말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그건?” 하지만 린은 역시나 전혀 반응 없음.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화를 내는 내가 비정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고 있다. 하아..뻔뻔함도 이정도면 병이다. “혹시라도 거절한다면 이미 신청해뒀다고 해서 억지로 밀어 붙일라고 했지.” “역시 그런거냐!!!” 으으.. 참는거다. 참는거야. 너는 참을 수 있어 에밀리아! 린이 이런 행동을 해온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하물며 이런 평상적인 모습에 참지 못해서야 어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간신히 터지려는 걸 억누른 채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내 방으로 향할 때 뒤에서 린의 마지막 쐐기와 같은 목소리가 날아든다. “아, 그리고 에밀리아. 미리 수강료는 납부해뒀으니까 혹시라도 취소 같은 건 없어~” - 철썩! 마지막 한마디에는 더 이상 참아주지 못하고 긴급히 만들어낸 조잡한 쥘부채로 린의 뒷머리를 후려쳐 준다. 아, 후련하다. ------------------------------------- 뭐,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하게 될 일. 얄밉게도 환한 표정으로 전송하는 린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맨션을 나와 이곳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은 여유 있는 시간. 광고지에 그려져 있는 약도에 따르면 학원이 있는 곳은 런던 북부의 돔우드(Domewood) 지역. 그 중에서도 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에.. 약도에 따르면 이 부근인데..” 그나저나.. 여긴 어디? 넓게 펼쳐진 평야와 산. 건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주변은 전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이 과연 런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황량한 벌판뿐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운전연습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는 불가능. 아니 그보다 이런 곳에서 만든 전단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런던의 중심부까지 찾아온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주위를 돌아다니며 약도에 그려져 있는 강습학원의 존재를 찾아보려 노력하다가 이윽고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그건 버스 정류장의 건너편에 있는 밭의 너머에 있었다. “아.. 있다...아? 에에에!?!?!?” [Domewood Driving licence academy] 확실히 잘못 찾아온 게 아니었다. 찾기 어려웠지만 길의 한쪽 구석에 세워져있는 낡은 나무판자 조각에는 분명 내가 찾아가고 있는 돔우드 운전강습학원이라고 써있으니까. 하지만 그 나무판자 주변에는... 폐허 밖에 남아있는 게 없었다. 건물도! 차도! 교관도! 운전연습을 할 수 있는 트랙도! 아무것도 그곳에는 존재하는 게 없었고 오직 황량한 폐허만이 남아있다. - 푸석~ 손에 들어올린 나무판자마저도 얼마나 대충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저 들어올렸다는 그런 작은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낙하한다. 그런거네, 이건.. “린... 바보..” 힘없이 부서진 나무판자를 눈앞에 두고, 조용히 뇌까리는 내 한마디는 들어주는 사람도 없이 허공에 흩날린다. <에밀리아의 운전면허 연습 첫날. 수확 없음.> =================================================== - 다음날 - 지금 시간은 오전 8시 55분. 약속시간까지는 앞으로 5분정도 남았으니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하려나. 평소라면 집에서 집안일을 하거나 클레어씨들과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모처럼 아침부터 거리에 나와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어제의 연장선이다. 바로 운전학원의 강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어제의 사기에 대하여 이미 입금까지 마쳐두었던 린은 길길이 날뛰며 당장에라도 그 사기꾼들을 찾아내려 했을 때 보여준 언동과 행동은... 뭐, 그녀의 명예를 위해 마음속 깊이 가라앉혀두자. 그 분노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침묵을 지킬 용의는 충분하다. 만약 내가 그 일에 대해서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분명 분노의 화살은 그들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올 테지. 역시나 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혹하는 건 그에 합당한 위험이 존재하는 법이라는 것을 배운 게 그나마 교훈이라면 교훈일까. 물론 저렇게 흥분한 린이 그냥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 갈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속인 일당을 찾아내어 온갖 보복을 가할건 분명하다. 사기꾼 일당을 앞에 두고 서슬퍼런 독설과 분노를 표출하는 린은.. 생각하기만 해도 공포 그 자체. 언젠가 분명 잡히고 말 그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 싶기는 하지만 자업자득이다. 무슨 생각으로 붉은 악마의 봉인을 뜯었는지... 어쨌건 첫 출발이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흔들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전면허의 필요성은 분명 있기 때문에 어제 일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제대로 된 학원에 등록했다. BSM이라는 영국 전역에 넓게 펼쳐져 있는 전국적인 유명 학원이 그것. BSM은 그 운영되는 시스템이 일본과는 달라서 정해진 교습장이 없고 어디까지나 운전교습 자격증을 지니고 있는 개인 강사와 수강자를 연결시켜주는 알선소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강사는 BSM으로부터 운전연습용 차량을 대여 받아 교육을 실시하지만 예외적으로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서 운이 좋다면 좋은 차량과 좋은 강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도 있지만 운이 없다면 형편없는 차량과 형편없는 강사를 만날 수도 있는 것. 물론 어느 정도 알선해주는 입장에서 검증을 마친 강사만 보내주기 때문에 최저 한계선은 분명 존재하기는 할 테지만. 그런 관계로 지금 내가 강사를 기다리며 서있는 곳은 언제나 린이 통학하는 곳이자 런던 마술협회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시계탑이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대영 박물관의 앞이다. 보통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자택 앞까지 강사가 찾아오는 게 정석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린이 살고 있는 마술협회 소유의 맨션은 일반인이 접근하지 않도록 암시를 걸어주는 결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런 곳으로 찾아오라고 할 수는 없었고 주변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건물, 혹은 지명이라 할 수 있는 대영 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강사를 기다리기를 수분. 수 없이 많은 차량들이 이곳을 지나치고 이 앞에 정차하곤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은 없었고 대부분이 잠시 멈추거나 대영 박물관을 향하는 사람들, 혹은 다른 만날 약속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오갔던 차량과는 확연히 다른 외양을 지닌 한대의 자동차가 내가 기다리고 있는 이곳 대영 박물관의 정문 버스 정류장을 향해 질주해온다. - 끼이익! 약속시간을 30초가량 넘겼을 무렵 차는 도착. 운전석 쪽 문에 붙어있는 BSM 스티커가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도착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차라는 게 꽤나 낡은 차인 듯 60~70년대에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런 외향을 지닌 물건이다. 잘도 이런 게 굴러다니고 있네.. 디자인은 소형에 좌석은 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운전석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좌석 밖으로 다리를 꺼내고 차에서 내린다. 분명 저 사람이 강사일 테...지? 차에서 내린 사람은 여성이다. 12월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겉에 걸친 외투도 없이 타이트하게 차려입은 정장 차림에 위로 올려 고정시킨 머리카락. 얼굴에는 위아래 폭이 좁으면서 사각형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보여주는 안경까지. 그야말로 전형적인 차가운 인상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로 온 몸을 둘렀지만, ‘헤에.. 좋은 사람일 것 같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터무니없이 귀여운 사람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은 루비아와 비교하자면 확실히 빛이 덜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비아가 규격외의 미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뿐. 저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머릿결이라고 할 수 있고 키는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큰 정도. 게다가 강사 자격증을 지니고 있는 만큼 분명 20대는 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의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기까지. 그런 본바탕에 저런 옷차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어린 소녀가 억지로 어른스러운 모습을 흉내 내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느낌이랄까. 차에서 내려서 무언가를 찾는 듯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그제야 만나기로 했던 이곳 버스정류장 근처를 발견했는지 방향을 이쪽으로 향하고 일직선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습을 볼 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을 신어서 일까. 나를 향해 오는 걸음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위태롭게 보이는데다 언제 넘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뻣뻣하게 걸어올 필요는 없을 텐데. 아! 거기에 발을 딛었다가는! “꺄악!?!!” - 콰당! 아아, 이런.. 어째서 이런 겨울 날씨에, 언제나 청결하게 청소를 거듭하는 이곳 대영박물관의 앞에서, 하필이면 이렇게 위태롭게 걸어오는 사람의 발이 놓이는 장소에 노란색의 어딘지 모르게 유명한 아이템이 놓여 있던 건지는 불명이지만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사람이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어딘가의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완벽한 자세와 타이밍. 뭐..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어서 일으켜 세워 줘야겠지. “아야야...” 넘어질 때 세게 부딪쳤는지 찡그린 얼굴로 주저앉아 자신의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는 강사(추정) 아가씨.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앳되어 보이는 모습이 더욱 부각되고 왠지 친밀해 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력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첫 인상만큼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랄까. “괜찮으세요?” “네? 아.. 네에. 고.. 고마워요. 왜 그런 곳에 바나나가...에?” 내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 자신의 정장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던 그녀는 이윽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그저 멍하니 서 있는다. 그리고는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놀란 시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터에 도와주기 위해 다가갔던 내 얼굴이 붉어지고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만다. “에.. 저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뇨!! 뭐가 묻었다니요! 그런 의도가 아니라... 너무...”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눈치 챘는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 하는 그녀는 마지막 말꼬리를 흐리며 주저했지만 서번트로서의 내 청각은 그런 작게 말하는 것 까지도 들린다. 하아.. ‘귀여워서요..’ 라니. 뭐, 이런 반응 정도는 이제 하도 많이 받아서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으니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 외에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차라리 어서 빨리 대화를 본 궤도로 올려놓도록 하자.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셨네요. BSM에서 오신 강사분이시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약속장소인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주위를 둘러봐도 오직 나 혼자.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볼일을 보러 떠났는 데다 방금전에 버스도 지나가서 이곳에는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에게 볼일이 있는 상대가 나 외에는 없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한 말에 놀란 표정과 함께 여전히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확인하듯 물어온다. “네? 그렇다는 말은.. 그러니까... 미스.. 아인츠베른?” “에밀리아에요.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나인 줄 몰랐던 걸까?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자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서고는 자신의 복장과 현재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넘어져서 흐트러진 옷자락을 손으로 고쳐 반듯하게 바로잡고 여전히 먼지가 묻은 상태인 스커트를 마저 턴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는 안경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올리는 제스쳐와 함께 턱을 들고 방금 전까지의 언사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언동으로 나에게 자신의 소개. 그렇지만 그렇게 갑자기 태도가 변한다고 해도.. “오늘부터 당신의 운전면허 취득을 도와주게 된 레이첼 로스입니다. 제 말대로 따라준다면 쉽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을 겁니다.” 레이첼 로스인가. 그녀의 외양과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다. “면허를 딸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길. 저는 BSM의 정규 강사이니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딱히 의심 같은 걸 하는 게 아니지만 아무래도 걱정되는 건 사실이랍니다. 아무래도 바나나 따위를 밟고 넘어지는 아가씨이니.. 그래도 그녀 당사자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편이니 불만은 없다. 오히려 불만? 혹은 궁금한 게 있다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몰고 온 연습용 차량 쪽이겠지. “그런데, 미스 로스? 저 차가 연습용 차인가요? 상당히 낡은 디자인이네요.” 그저 평범한 질문에 불과한 몇 마디였지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동안의 얼굴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그마저도 억지로 짓는 표정 같아 보인다-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차를 변호(?)하는 레이첼씨. “무슨 실례의 말씀을!! 이 차는 1991년 일본의 닛산이라는 유명한 자동차 메이커에서 만든 휘가로라는 차로! 저래보여도 현대적인 내부 부품과 작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차체가 만들어져있는 아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세계적으로 2만대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한정판이....아..” 급히 자신의 입을 스스로의 손으로 막으며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갑작스레 열변을 토하며 자신이 가지고 온 차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레이첼씨는 뭐랄까.. 알기 쉬운 성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결국 자신의 어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차가운 말투와 어른스러운 옷차림만을 고집하지만 그런 발버둥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주고 게다가 차와 연관된 이야기라도 나오게 되면 흥분하고 마는 에.. 그러니까 자동차 매니아? “시..실례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아.. 아니에요. 미스 로스의 본모습을 본 것 같아서 즐거운걸요.” 사실 그녀의 본모습 정도야 처음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 있었던 해프닝-요새 누가 바나나껍질 따위를 밟고 그렇게 황당하게 넘어져 줄 수 있을까. 노리고 해도 힘들듯-덕분에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파악하기는 했지만 더욱더 알기 쉬워졌다라는 게 정답이다. 덧붙여 그런 그녀이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고. “에...? 무..무무무무무..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보다 신청하실 때 17살이라고 하셨는데 맞는가요? 실례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론 아니다. 생전의 나이로 치자면 20세는 훌쩍 넘겼고 수호자로서 살아온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지만.. 일단 이곳 영국에서의 등록된 나이는 17살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사실 억지라고는 생각한다. 어딜 봐도 내 모습은 기껏해야 고등학교 초년생 정도로 15~16세의 소녀로 보이니까. 하지만 이래저래 미성년이라면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서류 위조를 통해 17살로 등록해 두었다. 그나저나 레이첼씨? 당신도 절대 강사로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는 건가요? “맞아요. 어려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믿지는 않지만...”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어디에가면 항상 애들 취급이나 받고.. 저도 당당한 성인이에요. 미스 아인츠베른도 당당한 성인이에요!” 말을 중간에서 끊듯 내 두 손을 모아 잡고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동자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하는 레이첼씨. 뭐랄까... 그녀는 자신이 어려 보인다는 사실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의 손에 붙잡혀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슬슬 자각 시켜줘야 한다. 벌써부터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에..네에.. 그.. 그렇네요. 그런데 미스 로스, 이 손 좀..” “네? 아! 죄..죄죄죄죄 죄송합니다. 흠흠. 그럼 다시 한번 확인하죠.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17세. 강의 대금은 25시간 코스로 587파운드, 이미 납금 된 상태이므로 오늘부터 하루 두 시간씩 저와 함께 연습하시게 됩니다.” 이제와서 다시 그런 태도를 취해봐야 하나도 어른스럽지 않고 오히려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만큼 나도 어리석지는 않다. 왠지.. 앞으로 레이첼씨와 함께 할 25시간이 꽤나 즐거워질 것 같은 기분인 만큼 굳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에밀리아의 운전면허 연습 둘째날. 성과 없음(?)> ====================================================== 옆자리에 앉은 나의 운전연습 강사. 레이첼씨가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이 감도는 목소리로 다시 처음부터 기어의 조작에 관해 강조한다. 그녀에게 배우기 시작한지 오늘로 6일째. 물론 그녀의 걱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아시겠나요? 기어를 움직이실때는..” - 끼긱 “이렇게 말인가요?” “......네...” 다만.. 이렇게 운전석에 앉아서 이렇게 스티어링과 기어 스틱을 양손에 쥐고, 양 발로 여러 페달을 밟고 있노라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고나 할까, 아니면 안중에 없어진다고나 할까. 하아.. 린, 내게 자동차라는 건 마치 네게 있어서의 보석처럼 터무니없는 물건이었어. --------------------------------- 자동차라는 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기계다. 다만 그 구조가 섬세하고 힘의 전달이나 연동, 그리고 원리 등이 복잡한 것일 뿐 분명 기계의 일종. 다시 말해 구조해석 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나라면 기어의 원리나 효과, 엔진의 효율, 힘의 전달 등은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따라서 저렇게 1단 기어를 넣으라고 하는 요구는 무리 없이 실행 가능하다. 물론 2단, 3단으로 옮겨가는 동작이나 회전의 반경, 가속까지의 시간 등등. 자동차의 메카니즘이라면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완벽이라 할 수 있을 정도. 거기에 학과 시험에 대한 대비도 완벽. 린이나 루비아 정도는 아니지만 운전면허의 학과시험 정도라면 가볍게 패스할 정도의 머리는 되기에 별다른 걱정이 없다. 뻔한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어있는 문제들이니까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지도.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 시작해주세요.” “네. 그럼..” 레이첼씨의 어딘지 모르게 두려워하는 듯한 목소리를 신호로 자신감있게 양손을 움직여 조작하기 시작한다.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 차를 정지시킨 상태에서 기어를 1단으로 놓고 서서히 클러치에서 발을 떼며 엑셀레이터를 밟아준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순조로운 출발. 이대로 1단에서 서서히 출발하여 점차점차 속도를 높여가기만 하면 문제될게 없기는 하지만.. - 부아앙!!!!!!!!!!! “또인가요!!!!” 클러치에서 발이 떨어짐과 동시에 앞으로 나가는 차. 어딘지 모르게 레이첼씨의 절규가 들린 것 같지만 지금 이순간 만큼은 관심을 끄고 오직 나의 손끝에, 그리고 발끝에 정신을 집중한다. 이 작고 아담한 차는 지금까지 단순한 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기계였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그 순간부터 차는 나의 발이 되고 엔진은 나의 심장으로 변모한다. 역시나 철과 유리라는 건 나의 에미야 시로로서의 부분과 잘 맞는지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나는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그렇게 1000cc의 76마력 엔진이 열화와 같이 포효하며 자신이 지닌 힘을 속삭이듯 주장하기에 나는 이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고 오른손은 스티어링을, 그리고 왼손은 점차, 점차.. 아니 단숨에 기어를 올려버린다. 1단에서 2단을 거치지 않고 rpm이 높은 상태 그대로 3단으로, 3단에서 4단을 건너뛰고 5단으로 단숨에 올라간다. 엔진을 나타내는 바늘들은 붉은 영역을 떠날 줄 모르고 속도를 나타내는 바늘은 거침없이 임계점을 향해 질주. 계기판에 표시된 최고 속도인 120km/h에 도달하는 건 순식간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아이가 낼 수 있는 속도는 이정도가 아니다. [trace on] 지금까지는 이 아이가 나의 몸으로 변하여 움직여 주었다면 아득한 과거부터 읊어온 나를 변화시키는 주문을 통해 이번에는 내가 차로 변한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광적인 자동차 매니아인 레이첼씨가 꼼꼼하게 정비한 닛산의 휘가로는 내부나 외부, 엔진과 축등 어느 곳을 살펴보더라도 새것처럼 생생하고 지금보다 더 속도를 올린다 해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도 지니고 있기에 엑셀레이터를 밟은 나의 발은 떨어질 줄 모른다. 아니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밟는다는 게 옳은 말.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풍경.풍경. 나무, 건물, 전신주, 사람. 런던의 도심을 질주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호등이란 신호등은 마치 내가 지나갈 걸 알고 있다는 듯 연신 녹색불만을 표시하고 거리에 나와 있는 차들은 나를 태우고 질주하는 이 아이에 비한다면 너무나 얌전하기에 그저 손을 조금씩 움직여 스티어링을 약간만 좌우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추월한다. “.........리아...” 한겨울이기에 창은 닫은 채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봄이 오면 상황은 달라질 거다. 활짝 창문을 열고, 이 차의 특징인 지붕을 열고 밖에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며 길을 달린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의 속삭임과 머리위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햇볕까지. 그저 생각만 해도 상쾌한 기분이 아직 경험해보지도 못한 나에게까지 와 닿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에......리아...” 갑자기 저 멀리에 이상 상황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길을 비켜주는 것처럼 녹색불만을 표시하고 있던 신호등 중 하나가 마치 나를 막아서겠다는 듯 붉은색의 눈망울을 크게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나를 막아서겠다면 나는 그저 이 아이와 함께 너를 넘어서는 것 뿐. 속도계는 이미 120km/h를 넘어섰고 현재의 속도는 측정이 불가능. 헤에.. 이런 나를 네가 막아설 수 있을까? 이대로 신호등이 지키고 있는 그 거리를 돌파하... “에밀리아씨!!!!!!!!!!!” “엣?” 내가 신호등을 돌파하기 전에 바로 옆에서 외쳐진 고함이 나의 귀를 돌파한다. 덕분에 지금까지 차에 홀린 듯 빨려들어가고 있던 정신이 황급히 끌어당겨지고 오른발은 엑셀레이터에서 떼어 브레이크에, 왼발은 클러치를 밟으면서 왼손은 기어를 3단으로 낮춘다. 기어가 낮추어지자 마자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고... - 끼이이익!!!!!!!!!!!!!!!!!!!!!!!!!!!!!!!!!!! 차가내는 귀청을 울리는 비명소리와 타이어가 새겨나간 도로위의 검은 상흔.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겨우 신호등 앞에 정차하는데 성공한다. 여전히 신호등은 붉은 신호를 바꿀 생각을 보이지 않고 겨우 멈춘 차의 앞으로 가로질러 다니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나를 비웃듯 내 앞을 가로막는다. 조금만 더 달렸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충돌은 기본으로 일어났을지도 몰랐던 위험한 상황. 이게 바로 나의 문제. 아무래도 구조의 해석에 특화되어 있는 나의 마술 특성상 기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 또한 높은 수준이기에 생각보다 자동차라는 기계에 몰입되는 정도가 심한지 자신과 차를 동일시하는 사고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차의 작은 몸체는 에밀리아로서의 내 어린 모습, 1000cc 76마력의 4기통 엔진은 나의 심장. 네 개의 검은 타이어는 나의 다리. 때문에 점차 속도를 높여가는 게 아니라 단숨에 가속해버리고 만다. 3단까지 사용했을 때 낼 수 있는 속도는 마력을 통해 강화한 나의 달리기 속도보다 조금 빠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 속력을 내고 마는 걸지도. “하아..하아... 에.. 에밀리아씨.” “에... 또 저질렀네요. 아하하..” “또 저질렀네요. 아하하... 라면 다에요?!!!!! 도대체가 어째서 차에 시동을 걸고 엑셀레이터만 밟으면 사람이 변하는 건가요! 제발 부탁이니 외모처럼 상냥하게 이 아이를 조작해줄 수 없는 거에요!?!?” 그녀에게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지 3일째 되던 날 들은 그녀의 비밀. 선천적으로 어린 모습과 귀여운 외모를 타고난 레이첼씨는 그런 외모 덕분에 주위로부터 실제 나이에 비해 어린 대우를 자주 받았고 이렇게 운전교습 강사일을 시작한 이래로 그녀가 맡은 학생들마다 자신을 업신여기기에 이번에는 어떻게든 쿨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레이첼씨, 침착.. 침착요~ 차가운 모습 또 흐트러졌다고요?” 보다시피 이런 모습이다. 천성이라는 건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서 겨우 며칠동안 연습한 정도로는 그녀가 지닌 어린 모습을 벗어나기는 무리였던 듯. 조금만 흥분하면 본모습이 드러나 버린다. 물론, 억지로 차갑게 대하려고 노력을 해도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은 어른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처럼 보이기에 그건 그거대로 미소를 자아내지만... 뭐, 그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에? 아.. 그..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하죠. 이대로는 시험 통과는커녕 당장에 경찰에게 잡혀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실, 그녀의 말대로 용케도 지금까지 이런 폭주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경찰의 검문이나 추격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게 나답지 않은 행운이겠지만.. 어쩌면 차를 탄다는 행위 자체가 불행일지도? 어떻게든 시험을 보기 전까지 이런 나의 특성을 억누르고 최대한 천천히 달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만.. “그럼 다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녹색 신호가 들어오면 천천히 출발해주도록 하세요.” “하아.. 알았어요.”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해보도록 하자. 녹색 신호가 들어오면 기어 1단을 넣고 저속으로 출발해서 서서히 속도를... - 부아아앙!!!!!! “에밀리아씨~!!!!!!!!!!!!!!!!!!!!!!!!!!!!!!!!!!!” 어디선가 레이첼씨의 절규가 들린 것 같지만. 뭐, 상관없지 않을까?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해. 휘가로~ ----------------------------------- - 토오사카 린 - 나 토오사카 린은 마술사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이미 몸에 체득되어 있는 마술사. 비합리적인 일은 행하지 않는게 당연하고, 어떤 순간에서건 최선의 선택을 취하는.. 하지만 며칠전 거리에서 얻은 한 장의 전단지가 그런 나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내었다랄까? “후훗.. 감히. 이 나에게 사기를 쳤다는 말이네.” - 띠띠띠.. 띠띠.. 띠띠띠띠.. (네.. 전화기 버튼 누르는 소리입니다 OTL..) 덕분에 에밀리아에게도 한소리 들어버리고.. 사실을 전해듣자마자 전단지에 적혀있던 번호로 바로 연락을 취해봤지만 이미 잠적했는지 통화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손해본 금액은 통상적인 운전학원 강습비용의 절반정도에 불과한 정도라 이렇게까지 녀석들을 붙잡기 위해 동분서주 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굴욕을 갚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기에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기필코 붙잡아서 붙잡은 뒤에 받은 굴욕을 몇 배로 갚아주고 잃은 액수의 몇 배로 뜯어내줄 테다. 이 토오사카린을 건드렸다는게 무슨 의미인가를 뼛속 깊이 각인시켜 주도록 할테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귀에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신호는 그들의 명운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보음이다. 그럼 사기꾼 제군들. 도망칠 수 있는 한도까지 도망쳐보도록 하세요. 만약 혹시라도 내게 덜미를 붙잡히기로 한다면, 그날은 살아있다는 게 저주스럽도록 만들어 주겠으니까요. - 뚜루루루~ 딸깍. “네, 고쿠토입니다.” “안녕하세요. 미키야씨. 토오사카인데요.” “아, 토오사카양. 이렇게 전화를 주다니 신기한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 영국의 운전강습학원 시스템은 조금 특이하더군요. 본문에 있는 것처럼 일종의 알선소.. 같은 형태랍니다. 사무실에는 3~5인정도의 사무원만 상주하고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접수를 받아 등록된 강사들을 알선해주는 형태.. 40시간, 30시간, 25시간, 10시간으로 구분되고 교재나 DVD같은걸 수강료에 포함시킨다나요? 시험의 형태는 학과시험-기능시험-주행시험으로 우리나 별 차이 없을것 같고.. 그나저나 닛산의 휘가로는 우리나라에서 이효리가 타고다닌 이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하네요. 1991년에 만들어졌고 마치라는 기종의 한정판 모델로 내부는 마치 외부는 휘가로.. 1000cc짜리에 디자인은 멋지게 생겼더군요 ㅎ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0만원 정도 하는듯 합니다. 2인승~ 아, 오픈카에요. ===================================================== 가므로일(epilier) 덧글 1개 | 조회수 14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비디오반영은 추후 제공됩니다.) * 글보내기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 블로그에 담기 카페에 담기 카페에 담기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전체공지 등록 게시판 공지 등록 대문 등록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해당 파일(or 링크)에 대한 저작권 위반 신고가 접수되어 이용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담기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위반 파일 이용 제한 저작권 위반 음원이 본문 내에 있어 공지/대문 기능을 제한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음원 파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입니다. 네이버는 저작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보호가 요청된 음원 파일에 대해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목록 Fate/Stay Illumination - Driver's high - 中 | [ 타입문 팬픽 ] 2 / 2008.11.16 22:06 가므로일(epilier) 5급마술사 http://cafe.naver.com/uunmask33/327094 Fate / Stay Illumination Driver's High (中) “그럼 다녀올게. 한 이틀정도 걸릴 테니까.” “응, 집은 걱정하지 마. 사실 린이 없으면 더 잘 지킬 수 있는 게.. 아야!” 이번 사기에 관해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요새의 에밀리아는 알게 모르게 얄미운 소리를 하곤 한다. 응당 그런 얄미운 소리에는 철권의 제제가 들어가고는 있지만 왠지 교육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게 사실. 조만간 누가 마스터인지 확실히 ‘교.육’할 필요가 있으려나. 그나저나 이렇게 외출을 준비하는 건 오늘 아침 미키야씨에게 부탁했던 조사 결과가 내 손안에 들어왔기 때문. 얼마 전 해롯에서 볼 수 있었던 미키야씨의 능력에 대한 궁금증은 시계탑에서 만난 아자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이번 일을 부탁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찾아내는 탐색능력 까지. 뭐랄까,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덕분에 지금 내 손에는 미키야씨가 부탁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찾아낸 그들의 소재와 연락처까지 들어와 있다. 놈들이 숨어있는 곳은 이곳 런던에서 서쪽에 있는 브리스톨 시티. 영국 서쪽의 커다란 항구도시인 브리스톨의 어느 낡은 창고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과 밀항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며칠 내에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 도대체가 어떻게 된 사람이람. 찻집주인같은건 관두고 사립탐정이라도 해본다면 탐정 소설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 런던에서 과장되게 말하자면 셜록홈즈에 버금가는 명탐정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일이 주행 시험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돌아왔을 때 합격의 소식이 아니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에밀리아.” “아하하. 그건 글쎄.. 아.. 알았어! 꼭!” 정말이지.. ------------------------------------- - 에밀리아 - - 끼이~익. 해.. 해냈다? 레이첼씨와 함께 운전연습을 시작한지 12일 째 되는 날. 쉽게 말하자면 주행시험을 하루 앞둔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저속 출발과 도로 사정에 맞는 규정 속도를 지켜서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중간에 테스트를 치뤘던 학과 시험에 있어서는 예상했던 대로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역시나 문제가 되는 게 있다면 도로에서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된 버릇. 그래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비해서는 처음부터 폭주를 시작하는 횟수도 현저히 줄었고 점차 운전기술도 능숙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른 것 “에...밀리아씨.” “해...냈어요.” 나 못지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레이첼씨의 떨리는 목소리에 겨우 스티어링에서 손을 떼고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그렇구나. 아슬아슬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성공한거다. 결국 지난 며칠동안의 끝없는 폭주와 레이첼씨의 절규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 그렇게 생각하며 해냈다는 성취감에 빠져있노라니. “꺄악!!!! 거봐요! 하면 되는거에요!”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내 몸을 붙잡고는 앞뒤로 마구 흔들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해내는 레이첼씨가 있다. 아아, 그렇게 흔들면 어지러운데. “에~에~에에에~~ 레에~~이이~ 체엘~~씨이~~ 어~~ 어지~~러워요~오~~” “네? 아!!?!!” 앞뒤 가리지 않고 내 몸을 흔들던 레이첼씨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내 상태를 눈치 채고는 마구 흔들던 손을 뗸다. 우욱.. 아직도 어지럽네. 하지만 겉으로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다. 항상 억지로 차가운 모습을 연기하려 노력했던 레이첼씨가 이렇게까지 기쁜 감정을 드러냈는데 그곳에 찬물을 끼얹는 일 따위 내가 할 수 있을까. 어지러움 정도는 참아내는 거다. 에밀리아. “죄..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너무 흥분해서~!!” “아니에요. 이 정도는 견딜 수 있.. 욱..” 으.. 참아내는 건 무리였던가. 어쨌든 오늘 같은 자세로만 내일 주행 테스트에 임한다면 통과는 분명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게 틀림없다. 나는 아무래도 메카니즘적인 면이나 지식 면에서는 충분하니까. 다만, 항상 그랬듯 스티어링을 잡고 엑셀레이터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부터 치솟는 충동을 억제하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일단 그건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합격을 향한 일직선 도로 뿐이다. “죄송합니다만, 그럼 슬슬 돌아가실까요.” 아.. 그새 태도가 바뀌어 버렸다? -------------------------------- 돌아오는 길도 연습의 일환으로 내가 운전하여 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에밀리아씨에게 맡겼다가는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어디 먼 곳까지 가버릴 것 같으니까 제가 운전하겠습니다.’라고 레이첼씨가 고집하여 자리를 바꾸었지만 모처럼 성공한 날이다. 게다가 시험이 내일인 만큼 조금이라도 이 감각에 익숙해 지는편이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에 여전히 운전석에는 내가 앉아있는 상태. 아까 지나갔던 길을 거꾸로 되밟아 돌아가는 감각은 뭐랄까.. 아, 내가 이런 길을 달렸구나 라거나 길이란 이런 구조로 되어 있구나 하는 도로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마치 직접 내 두 다리로 길을 달려가고 있는 그런 감각. 아무래도 처음 가는 길이라면 오직 운전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건 무리가 있는데다 지금까지 운전할 때 주변의 상황 따위 들어올 여지가 없기도 했으니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으려나. “레이첼씨 거의 다 왔네요.” “..............” 이윽고 언제나 레이첼씨와 만나던 약속장소이자 헤어짐의 장소인 대영 박물관 앞의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길에 이르는 마지막 코너가 보이자 옆자리에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차가운 태도를 고집할 때의 그녀라도 내가 거는 말을 무시하거나 할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다. 그렇게 의아함을 느끼는 동안 차는 코너를 돌고 약간의 전진 후 주차를 하고자 할 때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때의 활기참도 아니고 스스로를 억지로 차가운 인상으로 만들 때의 딱딱함도 아닌 자신감 없고 한없이 약한 여성의 목소리. “있잖아요? 제.. 차가운 태도. 많이 어색하죠?” “네?” 어색하다는 건 그녀의 태도에 관한 걸 테지? 그녀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연습하던 과정에서 들을 수 있었던 사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어떤 사람이건 제가 맡은 사람들은 항상 저를 어리게 보고는 제 말은 듣지 않은 채 감으로만 운전 연습을 했으니까. 운전의 시범을 보여주려 해도 ‘내가 하는 게 더 낫겠다’ 라거나 ‘별거 아니네’ 라거나..” 레이첼씨는 올해로 23살이지만 타고난 동안과 작고 가녀린 몸으로 인해 실제 나이보다 5~6살은 어리게 보여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다. 다시 말해 린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인다랄까? 아, 물론 이런 말을 린 앞에서 한다면 단숨에 입에서 불을 뿜으며 나를 노려볼게 분명하니까 절대 꺼내는 건 금물. “그래서 회사 선배한테 조언을 구했죠. 선배는 제 인상이 너무 어리버리 하니까 좀더 지적이고 차가운 인상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심정으로 안경도 사서 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도 구입하고.. 있잖아요. 이 안경 도수도 없는 거에요.” ‘하아, 너무 바보 같죠?’ 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몸을 숙여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녀의 고민, 고뇌.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영령이 되기 전의 나만 해도 어떤 일이라도 하려 하면 ‘이런 꼬마 여자애가 뭘 할 수 있다고’ 라거나 ‘꼬마 아가씨, 이 아저씨가 도와줄까?“ 라거나.. 이렇게 거슬러 생각해보니까 꽤나 나도 고생이었네. 게다가 이렇게 소환되고 나서도 린에게 여러모로 무시당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모습에 후회한 적이나 불만을 가졌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몸은 이리야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나에게 남겨준 단 하나 남은 증거다.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이라는 소녀가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불합리한 대우를 받거나 주위에서 업신여긴다 해도 한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물론, 함부로 무시하거나 한다면 응당 합당한 보복을 가해준 건 당연하지만. 약간은 다른 케이스지만 레이첼씨의 저런 모습 또한 그녀의 부모님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증거. 이곳에 레이첼 로스라는 사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그녀의 소중한 특징인 만큼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 사실을 깨우쳐 줄 수 있을까. 물론, 답은 간단하다. “별로. 오늘은 이만하죠. 연습을 도와주느라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에밀리아씨?” 이곳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스스로의 정체를 감추고 억지로 린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취했던 내게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언동과 말투. 누군가 억지로 어른스러워 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같다고 말했던 느낌이 있지만 그때는 이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잘못된 생각이기는 했지만. - 타탁, 탕! 갑작스럽게 변한 내 태도 때문인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고 당황한 채 굳어있는 레이첼씨를 뒤로 하고 일부러 큰 소음을 내면서 차에서 내려 문을 세게 닫는다. 아차, 그녀는 꽤나 차를 아끼는데 이렇게 닫았다고 화를 내지는... 다행히도 화를 내지는 않는구나.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건가요. 이걸로 당신의 일은 끝난 건데.” 어쨌건 마토가에서 있었던 그날 밤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린의 조건 때문에 지금과 같은 편안한 태도를 취하면서부터 린과의 거리가, 그리고 사쿠라, 이리야와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나의 그런 차가운 모습이 무의식중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다시 말해 내가 직접 레이첼씨에게 두 모습이 주는 느낌의 차이를 보여준다면 그녀 스스로도 무엇이 제대로 된 건지 알아차릴 수 있을 터. “아....” 이런, 너무 자극이 강했을지도. 조금 전까지는 그저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이대로 조금 더 연기를 했다가는 그녀를 울리고 말 것 같아 딱딱한 분위기를 풀고 빙글 돌며 웃어 보인다.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여성의 눈물에는 약하니까 이대로 연기를 계속 할 수는 없어. “풋.. 어땠어요?” “에...밀리아씨?” 다시금 급변한 내 미소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당황하는 레이첼씨. 여전히 눈가에는 눈물이 비치고 있지만 그 너머에는 방금 전까지 걱정과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대신 안도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미안해요. 장난이 조금 지나쳤으려나~ 어때요. 별로죠?” “네? 뭐.. 뭐가요?” “레이첼씨가 억지로 차가운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거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는 해요.” 이대로는 언제까지고 무시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최소한 맡은 일에 있어서는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라도 차가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라는 그녀의 생각. 물론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레이첼씨. 차갑다는 거.. 굉장히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상대를 무기질 적으로 대하고 더욱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뿐. 지금 레이첼씨가 방금 전의 제게 느꼈던 것 처럼요. 그게 어쩔 수 없는 천성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억지로 그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절반쯤은 진실이고 절반쯤은 본심이 아니다. 내 본심은 그렇게 복잡 다난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감정. “레이첼씨는 평소처럼 밝은 미소가 어울리는 걸요.” “아..” 아무래도 그녀는 가끔씩 보여주었던.. 아니 자주였던가? 어쨌건 그녀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밝고 활기찬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으니까. “그럼 가볼게요~ 내일은 웃으면서 만나요~” “자.. 잠깐만요!! 에밀리아씨!?”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못들은 척 의식적으로 흘려 넘기고 맨션을 향해 달려간다. 이걸로 그녀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겠지. 자, 이제 남은건 주행 시험 뿐이니 내일은 긴장하고 나아가자. ------------------------------------ - 뒤에 남겨진 차 안 - 자신이 가르치던 은발의 아름다운 소녀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그녀는 조용히, 소녀의 말을 되뇌인다. “어울..리는 걸요.” 라고. ====================================================== - 토오사카 린 - [브리스톨 시티의 부두 창고 근처] “네, 그럼 부탁드려요.” “...........” - 딸깍 휴대폰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마치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휴우..” 이미 어느 창고에 그들 일당이 잠복해있는지도 파악이 끝났고 보석으로 만든 사역마를 통해 창고 내부의 상황도 확인한 상태. 아마도 며칠 뒤에 있을 밀항을 대비하며 가급적이면 이 창고를 벗어나지 않는 듯. 다시 말해 미키야씨의 정보대로다. 내부에 있는 사람은 도합 3사람. 리더로 보이는 덩치 한 사람과 그 앞에서 알량 거리는 간사해 보이는 부하. 그리고 아마 리더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까지. 이렇게 세 사람이 나의 지갑을.. 아니 내 금고를.. 아니 아니, 어쨌든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친 것. 무장은 파악되지 않지만 아무래도 간단한 권총정도는 대비하는 게 좋겠지. 물론 저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섣부르게 총을 사용하여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킬 생각은 없을 테니 단기간에 제압한다면 총기에 대한 위협도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 식은 죽 먹기 라는 거네. 어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려다 불빛이 없는 어둠 속이라 확인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화면을 응시한다.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분. 그 시간동안 모든 일을 끝마쳐야만 한다. “4시 32분... 좋아.” 창고 내부에 미리 집어넣어 둔 사역마는 두 마리. 그 중 하나에 라인을 연결하여 창고에 쌓인 짐들 너머에서 의도적인 소음을 발생시켜 주의를 유도하는 게 첫 번째 단계. 작은 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역마로서 큰소리를 내는건 아무래도 어렵지만 이렇게.. 이렇게.. - 부스럭 부스럭 “어이, 칼. 뭔가 소리가 들리지 않냐?” “에이, 두목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최대한 격렬하게 움직여주면 신경쓰일 정도의 소음은 낼 수 있다. 좋아, 조금만 더.. -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야 임마, 분명 들리잖아. 가서 확인해봐라. 쥐새끼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니.” “예예~ 분명 쥐새끼가 맞을 겁니다요.” 으.. 쥐의 시야는 너무 낮아서 다가오는 순간 얼마나 이쪽으로 끌려오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고 굳이 다가오지 않더라도 주의가 창고 입구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그만. 적당히 첫번째 사역마를 짐이 쌓여있는 구석으로 이동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두 번째 사역마에게도 라인을 연결. 창고 문의 자물쇠를 열도록 만든다. - 찰칵 좋아. 여기까지는 간단했고.. 그럼 두번째 플랜으로 넘어갈까. 사역마를 구성하고 있는 보석은 그리 값어치가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석의 한 종류인 비취석. 다시 말해 화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사역마 자체로도 마술의 실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결국 그런거야, 마술이란 가로되 은폐되어야 하는 것이고 일반인에게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거지만 [Das Dracheschuppe] ----- 불에는 용의 비늘 - 화륵!! “으앗!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혀.. 형님?!!” 이렇게 마술로 일어났다는 사실만 감추면 문제없는 거지. 물론 직접 손에 든 상태에서 마술을 발동시킨 것이 아니라 원거리 조작을 통한 발동이고, 사역마로서 활동 시키느라 보석의 개념도 옅어졌기 때문에 위력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불이 난 곳 자체가 탈것이 충분히 많은 창고의 짐 더미 구석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충분 하다. “으앗이 뭐냐. 으앗이! 어서 불을 끄지 못해!? 도대체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냐 네 녀석은. 그래봤자 창고 구석에서 작은 불이 났을 뿐 아니야! 전기 합선이라도 일어났나보지.” “제임~~스~~으~ 언제까지 칼을 돌봐줘야 하는 거야~~앙~” “물론 네 마음에 들 때까지, 마이 달링~ 오, 역시 불빛에 비친 그대의 모습은 정말이지 미의 여신이 강림한 듯 하군. 마이 스위트 허니~ 야! 칼! 야야! 어서 빨리 처리하란 말이다!” 욱.. 두 번째 사역마를 통해 내부의 상황을 살피고 있지만 저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와 그 애인의 행각에 나도 모르게 속이 미식거린다. 제발 부탁이니 느끼한 말좀 그만하고 서로 꽈배기 틀 듯 껴안고 있는 것 좀 자제해줬으면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들어가는 건 아직 준비가 완전하지 않기에 패스. 게다가 저런 얼굴로 미의 여신? 당장에라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나 데리고 온다면 까무러치겠네. 좋아, 저런 속에 좋지 않은 장면을 연출해준 대가는 톡톡히 치르도록 해주겠다 이거야. 한 사람은 비취에 의해 일어난 불을 끄기 위해 떨어져 있고 남은 두 사람은 자신들 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는 상황. 당연히 두 번째 사역마의 접근을 알아차릴 리는 절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아까 것이 저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이번 것은 뇌격의 힘이 깃들어 있는 톨마린. [Heftig Blitz] -- 노도와 같은 번개의 폭풍 - 파치칙!!! 물론 이번 것 역시 비취와 마찬가지로 원격 마술인데다 개념이 옅어졌기 때문에 원래 마술의 효과인 번개의 폭풍이 아닌 그저 가벼운 전기 충격기로 단숨에 쇼크를 준 것 정도의 위력만을 발휘한다. 다만.. “으갸갸갸갸갸갸!!!!!”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정도의 쇼크만으로도 사람을 잠깐 기절시키는 것 정도는 가볍지. 좋아 그럼 지금이야 말로 돌입의 타이밍이다. “혀.. 형님?!?! 형수?!?!” 문 안에서 급작스럽게 기절한 두 사람을 눈치 챈 나머지 부하로 보이는 인물의 경악성이 들리지만 신경쓸 수준은 아니다. 이미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떠한 체술도 익힌 것으로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졸개에 불과하니 총기류도 주지 않았을 건 분명 하니까. - 콰앙!! 이미 자물쇠가 열린 창고의 문을 발로 거세게 차서 당황시키고 그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는 한편으로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좌우로 뛰며 상대가 반응하기 전에 바로 앞까지 접근한다. 살짝 올려다본 얼굴에 있는 감정은 오직 단 하나. 경악이라는 감정 뿐. [진보단양포] - 빠악! 몸을 낮춘 자세 그대로 손바닥을 위로 올려치며 상대의 턱을 강하게 가격한다. 제대로 맞는다면 뇌가 흔들려서 그대로 어지럼증에 최대 기절까지 가능하지만 어설프게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약간 빗맞았는지 여전히 서있다. 그렇다면!!! - 휘익~! 턱을 올려친 팔을 거둠과 동시에 스탭을 밟아 빠르게 상대의 뒤로 돌아 들어간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여전히 선공의 효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정신이 없는 상대의 등!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시전하는 건 아무래도 팔극권의 기술 중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는 대중적인 기술. 철산고. 무방비한 상대의 등에 그대로 회전 속도 그대로를 몸에 실은 위력 그대로 어깨를 사용하여 들이 받는다. - 퍼억! 쿠당탕탕!! “크하아악!!” 직격 당한 상대는 그대로 톨마린의 번개에 의해 기절해 있는 남녀의 위로 튕겨져 날아가고, 그대로 셋이 한덩이가되어 창고 구석에 꼴사납게 굴러 버린다. “낙승이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지만.. 뭐, 보는 사람도 없고 이 정도는 허용범위야 허용범위. 이제 계획의 마지막 단계로 이행하는게 남았다. 서둘러 미리 창고 주변 4방위에 배치해둔 보석으로의 연결에 핵심이 되는 보석을 손에 쥐고 준비해둔 마술을 발동. [Das Isolieren] - 고요한 격리 그건 이 창고를 외부로부터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신간섭형 결계. 아직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지불한건... “하아.. 이게 얼마더라.” 실력이 떨어진다면 부족한 부분은 어떻게든 돈으로 매울 수밖에 없다. 이 결계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보석의 값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지만 어차피 곧 회복할 수 있는 액수이기도 하니 걱정하지 말자. 후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에요. 사기꾼 여러분. ------------------------------------------------ - 15분 뒤 부두가 외부 - 사기꾼 여러분들과의 즐거운 면담이 끝나고-물론 상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상담료 및 상담 비용도 두둑하게 받았으니 이곳 브리스톨까지 찾아올만한 가치는 있었다. 이 사기꾼들은 의외로 여기저기 벌인 일이 많아서 지명수배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밀항을 통해 국외로 도망치려 했던 것. 뭐, 그것까지 신경쓸 상황은 아니고 내게 있어 중요한건 그만큼 많은 일을 벌였고, 그 대가로 많은 금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 도피하려는 사람이 통장에 돈을 넣어둘리 만무하고 어떻게든 현찰, 혹은 보석류로 물질화 시켜놨을 거라 생각했던 게 주효해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현찰과 보석, 그리고 값나가 보이는 시계에 적당히 챙겨가면 오히려 성의를 무시하는 기분이 들어 두 느끼커플의 커플링까지 깔끔하게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불쌍한 부하에게는 인정을 베풀어서 상담료를 받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 □□~□□~ □□~□□~ (차마.. 삐뽀삐뽀는 못쓰겠습니다 OTL..) 쓰러져있는 세 남녀를 뒤로하고 창고의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예상대로 밖에는 돌입하기 이전에 신고해둔 덕분에 경찰들이 부두 전체에 잔뜩. 이정도의 인원이라면 이곳이 발견되는 게 시간문제 혹은 이미 다른 곳은 모두 찾아본 상태이겠지만 아무래도 결계가 펼쳐져 있는 덕에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좋아 그럼 경찰 분들도 공을 세우셔야 할 테니까 슬슬.. [Das Offne] --- 결계 해제 어느 정도 창고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경찰의 주목도 받지 않을 위치에 도착했다고 여겨지기에 어둠에 몸을 숨긴 채로 결계 해제의 시동어를 외워 창고를 둘러치고 있던 결계를 해제 시킨다. 결계의 기점이 된 보석은 내일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그럼 이제 안녕이네요. 사기꾼 여러분. 슬슬 깨어날 시간도 되었을 텐데 일어나고 나서 당황하면 안돼요. -------------------------------- - 브리스톨 중앙 경찰서 마이클 경사 - “이곳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도 놈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헛다리짚은 게 아닐까요. 경위님. 아니면 그 신고가 잘못 되었거나.” 쳇, 그럼 그렇지 그 화려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흔적다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던 놈들이 이렇게 쉽게 발각될 리가 있나. 덕분에 일주일째 끊고 있는 담배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는 기분이다. “치잇..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찾아본다! 지금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았던 놈들에 대한 정보다! 이렇게 잃어버릴 순 없...... 어?” 가만, 저쪽에 있는 창고는.. 앞뒤 것은 모두 수색했는데 분명 수색한 기억이 없다. “어이 리오. 우리가 저쪽 창고는 찾아봤던가? 분명 건너 뛴 거 같은데.” “어라? 그렇군요. 어이 거기 두 명! 저쪽 C동 3번째 창고를 수색한다. 나를 따라와!” “예써” “예써!” 수색 대상을 건너 뛰다니 이런 어이없는 실수가 있나. 뭐,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곧 밝혀질.. 응? - 콰앙!!! 부아아앙!!!! 끼이이익!!!!!!!!!!! 뭐야 저 차는! 큭. 역시 저 안에 잠복하고 있던 건가?! 안 됐구만 운이 좋았다면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뭐냐 이건!!!!!!!!!!!!!!!! 눈떠보니 돈은 다 털렸지! 주변에는 경찰이 쫘악 깔렸지!!!!” “자기야 어떻게 해!!” “알게 뭐냐!! 지금은 도망친다!!!” - 부아아앙!!!!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차 밖까지 들릴 정도로 큰 고함을 지르는 건 분명 놈들의 두목인 제임스 로니가 분명하다. 그럼 나머지 둘은 지명수배중인 그 패거리가 분명하고. 좋아 이번 기회를 놓칠까 보냐! “리오!! 추격한다!!!” “옛써!!!” - □□~□□~ □□~□□~ =============================================== 주의 : 이번 편에 등장하는 런던 면허 시험장은 가상의 장소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런던 면허 시험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18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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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Driver's High (下) “우우... 에밀리아씨..”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어제 내가 한 말이 효과가 있던 걸까. 오늘 아침 나를 태우기 위해 차를 끌고 왔던 레이첼씨의 모습은 확실히 자기감정에 충실해 보였고 나아가 이렇게 면허시험장에 들어가려는 내 두 손을 꼭 쥔 채로 오히려 나보다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부담이라니까요. 게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서있을 수 없으니 이제 그만 놔주는 게 어떨까 싶은 데요 레이첼씨. “그럼 다녀올게요. 기대하고 있어요.” “될 거에요! 에밀리아씨는 꼭 될 거에요!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힘내세요!” “하하, 그렇게 까지 기대하면.. 알았어요. 그럼 잠시 후에 봐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 다행히도 그녀의 눈물의 전송식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레이첼씨를 뒤로 한 채 시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방금 전 상황에서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는 발언을 했다가는 가까스로 진정시킨 레이첼씨가 다시 달려올 것 같았기에 목까지 올라왔던 말을 억지로 되삼키고 도망치듯 시험장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대기석에 앉아있다. 그나저나 그녀에게 억지로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은 했지만 본래의 모습은 뭐랄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감정적인 사람이네. “만약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겠지?”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건가요.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응시생이 맞습니까.” 이런.. 아무리 레이첼씨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만 누군가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니 나도 굉장히 느슨해져있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서있는 건. 이거야말로 인텔리, 혹은 차가운 인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법한 여성. 나이는 대충 40대 초반? 폭이 좁고 날카롭게 각이진 안경과 신경질적으로 생긴 인상, 사람이라도 벨 수 있을 만큼 풀을 먹여서 빳빳하게 서있는 옷깃까지. 레이첼씨가 연기하던 차가운 인상이라는 게 얼마나 어설펐는지를 이렇게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멍하니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비어있는 왼손으로 안경테의 끝자락을 잡아 살짝 고쳐 쓰며 가늘게 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기에 나도 모르게 움찔 하고 만다. 뭐랄까 그런 단순한 동작에도 굉장한 박력이 느껴지니까.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응시생이 맞습니까.” “아.. 네!” “저는 당신의 주행시험을 감독, 평가할 허지스 시험관 입니다. 따라와요.” “네에..” 시험의 내용은 기초적인 문답이 있은 후 시험관을 옆에 태운 채 정해진 코스를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완주하는 것. 시험차량은 연습 자체를 소형차인 휘가로로 치렀기 때문에 일부러 여러 차종 중에 가장 작은 편에 속하는 폭스바겐의 폴로를 선택했다. 최고 120km/h인 휘가로와는 215km/h로 확실히 다르지만.. 뭐 어차피 저속으로만 주행할 예정... 아니 주행해야만 하니 그런 건 별로 상관없겠지. 런던 시내의 평균 주행속도인 60km/h 이하로만 주행하는 거니 최고 속도 따위는.. “그럼 아인츠베른 응시생. 출발해 보시죠.” “아.. 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도 같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노라니 허지스 시험관이 출발을 독촉한다. 익숙한 손동작으로 키를 꽂고 옆으로 돌린다. 벌써 레이첼씨와 몇 번이나 연습했기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조작하는 일은 이제 꽤나 능숙해졌다고 자부. 침착하자 에밀리아. 진정하고 최대한 흥분하지 않도록 1단부터 차근차근 출발하고 연습했던대로만 하면 문제없으니까. 응, 간단한 일이고말고. 그러니까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난 할 수 있어. ------------------------------ - 20 분 후 - - 끼익 시험장으로부터 출발해서 정해진 코스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제 이번 신호등을 무사히 지나쳐서 두 번 정도의 코너만 지나치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면서 받은 감점 요인이라고는 중간에 차선 변경 도중 방향지시등을 너무 빨리 꺼버린 것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다. 이대로만 무사히 가게 된다면 아마도 목적지서 기다리고 있을 레이첼씨가 반갑게 맞이해 주겠지. - 빵빵!! 갑자기 들려오는 뒤차의 경적 소리. 분명 내 앞에 있는 신호등은 붉은색의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어째서 경적 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자 이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검정색 세단이 시야에 잡힌다. 저런 속도로 다가온다면 이미 멈출 생각은 없다고 보는 게 분명하고 이대로 우리가 출발하지 않는다면 충돌할 지도 모른다. 어째서? ------------------------------ - 제임스 로니 일당 - “형님! 아직도 따라 붙는뎁쇼!?!” “큭.. 짭새 놈들 끈질기구만!! 꽉잡아!! 둘다!” - 끼이익!!!! 빌어먹을, 브리스톨로부터 런던까지. 벌써 이게 몇 시간째 주행인지 모르겠구만. 빌어먹을 짭새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래도 조금씩 거리는 벌어지고 있으니까 이대로 계속 달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앞에 신호가 걸렸어요 형님!!” 치잇, 하필이면.. 지금 이렇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신호같은거 신경쓸 겨를이 있을까 보냐!! 싶지만.. 이차선의 좁은 도로에 앞에는 이미 정차하고 있는 차가 있으니 신호를 무시하기도 어렵구만. 피해가려고 해도 마주오는 차가 없는게 아니니... 앞차는 뭐하는데 저렇게 꾸물대는 거야! 어서 비키지 못해!! - 빵빵!!!!!!!!!!! “혀.. 형님!!” “자...자기야!!” 아끼는 차에 흠집이 좀 나겠지만 잡히면 아무것도 안되니 어쩔 수 없나. 옆 차선에서는 마주오는 차가 있고 왼쪽에는 가로등이 서있지만.. 충분히 지나갈만한 공간이 있으니 왼쪽 인도 쪽에 바짝 붙어서 돌파한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짜증나는 짭새들아!! ------------------------------- - 카카카카가카카가카가!! “꺅!” “꺄아아악!!! 뭐.. 뭡니까!!” 짧은 내 비명소리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허지스 시험관의 비명소리.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쳐야 할 이유가 얼마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쪽 차와 옆면이 거의 붙다 시피 해서 지나쳐가는 검은 세단이었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 카가가가가가각!!!! 카가가가가가각!!!! □□~□□~ □□~□□~ 노란 줄무니가 인상적인 영국의 경찰차 두 대가 똑같은 코스로 지나쳐 간다. 역시나 귀청을 울리는 소음을 내면서 말이다. 살짝.. 아니 꽤나 화가 난다. 나는 이렇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게 난폭한 방법으로 지나쳐 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이렇게 린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 노력해준 레이첼씨를 위해서 최대한 얌전하게 운전하려 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이리도 난폭하게 지나쳐 갔다는 사실에. 이런 일들이 그들이 그렇게 지나쳐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을 맴돌고..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고 생각한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꺼지고, 대신 다른 어떤 것이 ‘찰칵’하고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경찰도 있던 것 같은데, 정식으로 소송을 걸... 아인츠베른 응시생?” - 부우우웅!!!! 부웅!!! 클러치에서 발을 때지 않은 채 엑셀레이터를 깊숙이 밟아준다. 옆자리의 허지스 시험관이 이상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러보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미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게 사실. 타이밍은 붉은 신호가 푸른 신호로 바뀔 때다. 예리하게 갈고 닦인 감각으로 판단하건데 다가오는 순간은 앞으로 3초. rpm은 3000을 돌파한다. 2초. rpm은 4000을 돌파하고 오른손을 핸드브레이크에 가져다 댄다. 가장 빠른 출발을 하는 방법은 이미 차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고 있기에 남은 건 그 지식대로 실행하는 것 뿐. 1초. rpm은 5000을 넘어서고 그대로 핸드브레이크를 풀어주며 동시에, 푸른 신호를 눈으로 인식한다. “자.. 잠깐만. 아인츠베른 응시생?! 정신 차리세요!” 허지스 시험관의 절규에 그녀를 살짝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안심시켜준다. 그래,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전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 아주 상쾌하고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허지스 시험관. - 끼기기기기기기기긱!!!!! 부아아앙!!!!!!!!! 신호를 눈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클러치에서 발을 떼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고무타는 냄새가 나지만 그 대가로 폭발적인 추진력을 얻는다. 마치 총알과도 같이 튕겨져 나가는 차체에 몸이 뒤로 밀리는 느낌을 강하게 받지만 이정도 압력쯤은 내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급속히 올라가는 속도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핸드브레이크에서 오른손을 때고 그대로 기어를 2단, 연이어 3단까지 올리고 엑셀레이터를 최대한 깊숙이 밟아준다. 덕분에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답답한 기분이 한번에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나의 몸이, 마음이 족쇄를 끊고 자유를 향한 질주를 시작한다. “자아, 시작이야.” ------------------------------------ - 마이클 경사 - 저런 무지막지한 녀석들이 있나. 이런 좁은 길에서 앞에 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난폭한 방법으로 빠져나가다니. 그렇다고 놓칠 수는 없지! “치잇, 해보겠다 이거냐!!” 핸들을 급격히 꺾어 녀석들이 지나간 루트와 완전히 같은 방법으로 인도에 한쪽 바퀴를 걸친 채 앞차를 지나쳐 간다. 살짝 바라본 차 안에는 잘은 보이지 않지만 여성이 두 사람 타고 있는 듯. 신사의 나라 런던의 경찰관으로서 살짝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지금은 놈들을 잡는 게 급선무다.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숙녀여러분. 그렇게 녀석들을 뒤따르지만 거리는 좁혀질 줄을 모르고 오히려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 브리스톨에서 이곳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다른 경찰들과의 연계를 통해 놓치지 않고 따라왔지만 아무래도 녀석들의 차는 딱봐도 속도가 엄청나 보이는 차다. 무선을 통해 전해들은 차종에 따르면 인피니티 라던가. 칫, 딱봐도 무한 속도다. 이런 경찰차로는 따라잡는 것에 한계가... [치익-- 경사님!! 조심하십쇼!!] 뒤따라오고 있을 리오 녀석으로부터의 무전이다. 조심하긴 뭘 조심하라는 건가. 지금 눈앞을 달려가고 있는 녀석들 외에 신경쓸만한게 있을까. “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치익-- 지금 경사님의 뒤를.. 치익-- 정체.. 치익-- 쫓아---] “어이, 리오!? 어이!!” 치잇, 이럴 때 고장인가. 도대체 뭐가 뒤에.. 아까 차를 추월하면서 왼쪽 사이드미러는 가로등에, 오른쪽 사이드미러는 추월한 자동차에 의해 부서졌기 때문에 유일하게 뒤를 살필 수 있는 수단인 룸미러를 통해 뒤를 살피자. “어이.. 장난이지..?” 마치 빛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기세로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은빛의 섬광이 이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 어제편을 봤더니 사기꾼들에게 너무 인자(?) 자비(?)롭다는 의견이 꽤 있더군요 ^^;; 안되요 안되. 걔네들은 이렇게 도망쳐 줄 의무가 있었던거거든요. 쟤네들이 도망쳐야 에밀리아가 폭주하는 계기가 마련되니까요 ㅋ ================================================== 왕복 2차선에 불과한 좁은 도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신호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상황일 뿐이고 속도를 늦출 생각은 전혀 없다. 오직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도 난폭하게 나를 지나쳐 간 불쾌한 세 차량을 따라잡는 일뿐. 아무래도 세 차중 두 대의 순찰차는 도로의 상황과 다른 차들의 안전등을 생각하고 있는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기에 - 부아아아아!!! 따라잡는 건 너무나 수월하다. 가장 뒤늦게 나를 지나쳐 간 순찰차를 따라잡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고 다음 타겟은 앞서가고 있는 또 다른 순찰차. 첫 번째 순찰차에 비해서 좀더 과감하고 빠른 주행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겨우 100km/h의 속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움직임으로는 내가 앞서 나가는 것을 저지할 수 없고 다른 뒤로 지나쳐가는 모든 사물처럼 한 순간에 뒤쳐져 멀리 떨어져 나간다. 뭐, 처음부터 저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고 이제 남은 한대의 차량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아무리 주변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질주한다고 해도 이쪽의 차량과 상대 차량의 속도차는 명확하다. 나의 시력으로 바라본 차 뒤의 차종 이름이 인피니티라고 써있는 딱 봐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검은색의 세단이니까. 아무래도 폭스바겐의 폴로도 좋은 차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형차량이기 때문에 따라잡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진리다. 게다가, - 끼기기기긱!! 부아앙!! 저쪽 운전자의 운전 실력은 나로서는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 코너를 돌기 시작할 때의 속도도, 코너를 빠져나간 뒤의 가속도. 반면 나의 운전 실력은 이제 막 운전 면허를 따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초보중의 초보인 만큼 그 차이는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상대에게 뒤쳐지지 않고 이렇게 어찌어찌 따라가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을 뛰어넘는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을 지니고 있는 서번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가오는 차,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차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반응하여 스티어를 부드럽게 미끄러뜨려 앞서나가는 것. 덕분에 어찌어찌 뒤쳐지지 않고 겨우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뒤쳐질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게 느껴지니까. 그렇다면, 포기해야하나. 이렇게 상대에게 농락당한채로 패배한 개처럼 물러나야 하는 건가. “아니, 농담이라도 그건 싫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혼잣말. 나는 서번트이자, 반쪽짜리이기는 하지만 마술사니까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은, 에미야 시로는 싸우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 자신이 이길 수 없다면 상상하는 거다. 이길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거다. 운전 도중이기는 하지만 찰나가 영원인 심상 속으로 잠겨 들어갈 여유는 충분하기에 그 황량한 벌판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아..] 찾았다. 그건 역시나 이곳에 꽂혀있었다. 이미지하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검. 알트리아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약속된 승리의 검이지만 아직 나로서는 완벽한 투영은 할 수 없다. 하지만, [trace on] 그 검을 감싸고 있는 청명하고 상쾌한 바람을 검의 언덕에서 끄집어 올리는 건 할 수 있다. 자기 암시의 주문을 통해 엑스칼리버를 두르고 있는 인비지블에어(풍왕결계)만을 현현시켜 질주하는 차의 앞에 펼쳐 보인다. 전면에 전개된 풍왕결계는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바람을 가르며 이 작고 왜소한 나의 충실한 하인이 한줄기 질풍처럼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와 동시에 이 이상 한계가 없을 정도로 깊게 엑셀레이터를 밟아주는 것만으로도 차는 가로막는 것이 없다는 듯 달려 나간다. 계기판의 수치는 이미 한계치인 215km/h를 넘어서 끝에 도달해 있고 엔진의 회전수는 그 포효를 전달하듯 붉은 영역을 격렬하게 오간다. 이걸로 직선 주행에서라면 결코 뒤지지 않을 속도를 손에 넣었다. 실제로 앞을 달려가는 세단의 뒷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이대로 조금만 더 달릴 수 있다면 따라잡는 것은.. 치잇.. 직선 주로가 끝나고 다가온 코너에서 어쩔 수 없이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낮추어 감속하고 만다. 언제까지 이렇게 직선으로만 달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단순히 직선 주행에서의 속도만으로는 상대를 따라잡는 게 어렵다. 코너를 돌자마자 다시 펼쳐진 직선 주로에서 다시 상대를 바짝 추격해 보지만.. 역시나 다시 찾아온 코너에서 차이가 벌어지고 만다. 이곳은 레이스 서킷도, 고속으로 달리는 게 허용된 하이웨이도 아닌 복잡하고 좁은. 그리고 교통이 혼잡한 런던의 도심인 것이다. 분명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자주 코너를 돌고 있는 걸 테지. - 끼이이익!!! 이번에도 코너에서 상대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져 버렸다. 이쪽은 코너시 전복되지 않기 위해서, 속도에 밀려 어딘가에 충돌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속도를 크게 감속시킬 수밖에 없지만 저 검은 세단은 그런 나의 문제를 우습게 비웃기라도 하듯이 거의 속도를 감속하지 않은 채 차체를 미끄러뜨리고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라고 생각된 순간 억누른 기세를 한번에 터뜨리듯 빠르게 코너를 이탈한다. 때문에 직선 주행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쌍방간의 거리는 원상복귀되고 만다. 상대가 코너를 돌지 못하도록 검을 투영해서 길을 막는 것을 검토해 봤지만 기각. 아무리 지금의 내가 평소의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상태라고 하지만 마술을 은폐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이런 대낮에 런던 한복판에서 그런 눈에 보이는 마술을 사용했다가는 나뿐만이 아니라 린에게 까지도 피해를 끼칠 것이 자명하니까. 어디까지나 마술의 사용은 나의 속도에 관해서만,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요는.. 결국 미끄러지지 않고 빠져나가면 되는거네.. 좋아.” 이번에 다가온 코너. 승부다! [trace on] 아무리 속도가 빠르다 하더라도 서번트인 나의 근력이라면 억지로 핸들을 조작하여 방향을 전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때문에 감속해야 하는 이유는 방향 전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환에 따른 문제. 최고 속도에 가깝게 달려간 만큼 급격하게 방향을 선회 했을 때 구동계에 이상이 발생하거나 심할 경우 차체가 망가질 수 있기에 지금까지는 속도를 줄였지만. 핸들을 통해 차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구동계 전체를 [강화]한다. 나의 인간이 낼 수 없는 힘을 견디기 위해, 그리고 MAX215km/h를 넘어서는 속도에서 전해지는 강한 관성의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 끼이익!!! 생각은 적중했고 강한 저항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의 힘은 그 저항을 억누르고 차체의 방향을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여전히 상대의 코너링에 비하자면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로 코너를 돌 수 있었다. 이제 직선에서의 플러스 요소와 코너에서의 마이너스 요소를 더한다면 약간이나마 이쪽이 우세하고, 이대로 간다면 분명 따라잡는데 성공할 수 있어. ---------------------------------- 따라 잡았다. 결국 검은 세단과 나의 폴로는 앞을 나란히 한 채 같은 방향을 향해 질주하는데 성공했고 엎치락뒤치락 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떨쳐내기 위해 앞을 향해 달려 나간다. 직선 주행에서의 속도는 내가 우위, 코너 주행에서는 강화로 어느 정도 따라 잡았다고는 해도 이쪽은 어디까지나 무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짝 뒤쳐진다. 때문에 방금 전처럼 긴 직선주로가 나오지 않는 한 완전한 추월은 무리고 두 차의 팽팽한 승부는 한동안 계속 되어간다. “아..” 막 코너를 돌았을 때 그 광경은 눈에 들어왔다. 앞에 펼쳐진 길은 길게 봐야 150m. 그 너머는 런던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템즈강이 펼쳐진다. 반면에 지금까지처럼 전력으로 주행하고 있는 우리의 속도는 막 코너를 돈 상태라고 해도 100km/h를 가볍게 넘어서있다. 지금 당장 브레이크를 잡아도 늦다!? 상대도 지금의 상황을 눈치 챘는지 뒤늦게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 소리가 귀청을 울리지만 늦었다. 이대로라면 일반 차는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마술을 행사한다. “읏...” [Trace on] 지금까지는 구동계의 강화에 한정시키고 있던 차의 강화를 마력을 돌려 전체 강화로 전환시킨다. 골격계, 구동계, 그리고 유리와 타이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강도를 할 수 있는 한계만큼 강화시키고 - 콰앙!!!! 스티어를 크게 꺾어 그대로 세단의 옆을 들이 받아버린다. 그 여파로 방향이 크게 휘어진 세단은 감속하고 있던 것도 있어서 인지 옆에 있는 건물에 옆을 부딪치고는 어떻게 어떻게 속도를 줄여나간다. 엔진 부분에서 연기도 나고 있고, 차량의 손상이 심해 보이지만 이쪽은 강화로 강도를 높인 상태이기 때문에 여전히 멀쩡. 남은 건.. 내가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 뿐이다. 멈춰서는 건 불가능. 투영한 검이나 양 옆의 건물에 부딪치는 것을 통해 강제적인 감속을 하는 것도 옆에 앉아있는 허지스 시험관을 생각한다면 무리다. 아무리 강화 했다고 해도 충격까지 없애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대로 충돌한다면 그녀에게 위험하기에 사고에서 배제한다. 방향 전환은 무리, 정지도 무리, 날아갈 수도 없고, 강에 빠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응, 강을 건너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네. 결심을 굳히자마자 머릿속에 설계도를 늘어놓는다. 시야에 잡힌 템즈강의 넓이는 대략 200미터 가량. 그렇다면 최대 27개를 준비할 수 있는 나의 마술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양쪽에 하나씩 준비해야 하니 기껏해야 한번에 30미터 정도가 한계. 그렇다면 투영과 파기를 반복하여 모든 회로를 쉬지 않고 돌리는 것만이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Trace on] 투영하는 무기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무장 중 가장 면적이 넓은 버서커의 부검. 폭이 50cm가 넘는 그 검이라면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을 터. 첫 번째 투영을 통해 땅에서 강 위로 나아가고.. [Sword barrel open] 연속적으로 부검을 투영한다. 그렇지만 예상했듯 차가 나갈 수 있는 거리는 기껏해야 30미터에 불과하기에 뒤로 지나친 부분의 부검은 모조리 파기하고 다시 설계도를 차곡차곡, 아니 단 한번의 사고를 통해 장전한다. 그리고 끝에 다다를 때쯤, 마지막 두개의 투영 파기와 재차 소드배럴의 전개를 동시에 실행 [Trace off! Sword barrel open!] 다시금 길을 연다. 그렇게 런던 템즈강에,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다리가 하나, 만들어지고.. - 끼이익!!! 무사히 강 건너편에 도달한다. 차의 속도와 투영 마술의 발동 시간, 그리고 방향등. 한치만 어긋나도 타이어가 터지거나 옆으로 떨어져 물속 구경을 할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곡예였지만 그래도 이정도의 위기조차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찌 영령이라 자부할 수 있을까. 그래 오늘도 이렇게 나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을리가 있을까 보냐! ".... 라는게 아니라. 나..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하아.." 강 건너편에 도착해서 엔진의 시동을 끄고 멈춘 후에야 상황이 파악된다. 일말의 제정신은 있었는지 타인의 눈에 드러날 만한 마술은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막무가내식의 마술을 통한 질주. 거기에 신호, 차선, 규정속도등 모든 것을 위반하고 대낮의 도심에서 추격전을 벌인 상황. 게다가 경찰차까지 추월하는 등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면허도 없고, 운전 면허 시험을 치르기 위해온 응시생에 불과하니 만약 이대로 경찰에게 적발되기라도 한다면(한다면이 아니라 틀림 없이 걸린다. 현대 경찰의 수사망은 그리 허술한게 아니니까. 절대적으로 걸려있을건 분명) 단순히 잘못하고 말고를 떠나 최소한 면허 취득은 불가능이고 심할경우 무면허 난폭 운전으로 구속 될지도 모른 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눈앞을 가린다. 생각하면 할 수록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불명, 오히려 절망스러운 사고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기에 그대로 몸을 앞으로 숙여 핸들을 끌어안듯 머리를 기대며 고뇌. "하으으..." 게다가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차안에 있는 또다른 한 사람이 괴로운 표정으로 기절해 있다. 다름 아닌 처음 이 차에 탈때부터 함께 였던 나의 시험 감독관인 미스 허지스. 물론 지금은 그런 난폭한 주행 때문이었는지 정신을 잃고 있지만 그녀가 깨어날 경우 어떤 반응, 혹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도는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하다. 어쩌지,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도주라도? 어느쪽도 무리다. 나로서는 아무런 죄없는 그녀에게 손을 쓰는 것을 할 수 없고 도주 한다 해도 이미 시험 등록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경찰의 손길을 피해가기 어려우니까. "바보 에밀리아... 멍청이. 말미잘. 해삼.. 우으.. 린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보.." 그렇게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채로 자괴감에 휩싸여 고뇌하고 있노라니 그녀-허지스 시험관-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두통이 있는지 머리에 손을 대고는 신음을 내고 있지만 정신을 차린건 명백한 사실. "으음..." 잠깐만요. 미스 허지스?! 아직 저는 마음의 정리를 하지 않았는데!? 벌써 깨어나면 어떻게 해요!? ========================================== 아아.. 더위 먹었는지 글이 정말 안써지는군요;; 이거.. 한 이틀정도 쉬고 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수습을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가 아프네요.. 경찰도 있는 상태에서의 질주.. 그것도 대낮에.. 목격자는 부지기수고.. 바로 옆자리에 사람도 OTL..뭐, 대충은 잡혀있습니다만;; ========================================== 사쿠라, 알트리아. 그리고.. 내키지는 않지만 에미야까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렇게 먼 런던에서 있으니 새삼스럽게 모두의 생각이 나서 부끄럽네. 사람에게 생명의 위기가 닥치면 지나간 추억들이 새삼스럽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하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해. 런던 도심에서 있었던 그 노도와 같던 폭주가 있은 지 지금으로 정확히 만 하루. 응, 나는 “나참, 어이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렇게 고양이 앞의 쥐가 무슨 심정인지 마음껏 만끽하고 있으니까.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일을 생각한다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는데요. 영국의 심장부인 런던에서 대낮에 벌어진 쫓고 쫓기는 추격전. 그 공포의 순간이 지나간지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그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본 한 목격자의 목격담을 취재해 봤습니다. 데이비스 기자.] [네, 현장의 데이비스입니다.] - 삑 미녀가 웃는 얼굴은 어떠한 표정보다도 박력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현실과 괴리된 미모에서 나오는 이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그것인데 안타깝게도 그 모습이 지금 딱 내가 바라보고 있는 린의 표정이라는 사실에 그 말이 진실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에밀리아? 입이 있다면 변명이라는 걸 해보겠어? 나는 관대하니까.” “우으...” 린이 관대하다니 그건 어느 세상의 거짓말일까. 눈과 입은 저렇게 웃고 있지만 내가 쌓아온 전투에의 감각은 결코 긴장의 끊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저 미소에 헤롱헤롱 넘어가서 섣부르게 대답했다가는 보살의 얼굴은 삽시간에 아수라의 표정으로 변해서 나를 덮쳐올게 분명. 때문에 이렇게 어떻게든 침묵으로 일관하려 하지만.. “에.밀.리.아.? - 빠직 -” “잘못했어요.....” 더 이상의 침묵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만다. 분명 들릴 리가 없는 어딘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렸다고. 이마라던가 혈관이라던가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니까. --------------------------------------- - 만 하루 전 템즈강 강변 - “으음...” 큰일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하면 좋을까. 1번, 가끔씩 충동에 휘말리는 성격이다? 2번, 속도를 내는 게 좋다? 무리다. 후자는 면허취득이 절대 불가능하고 전자는 곧이 곧대로 믿었다가는 정신병원으로 직행. 그렇다면 깨어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이 자리를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을까? 그것도 기각. 이미 면허 시험장에는 나의 본명으로 된 신상정보(위조지만)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에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으음.. 여긴 대체.. 아..?!” 늦어버리고 말았다.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허지스 시험관이 완전히 깨어나 주위릘 둘러본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방도도 없.. “시..실례했습니다. 잠깐 정신을 놓았나 보군요. 거의 다 도착했다고 생각한 게 방금 전 같았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어? “네? 허지스 시험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면허 시험에 관한 이야기지요. 감점요인은 방향 지시등의 사용 미숙이 한차례.. 그것이 전부인 만큼...."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확실히... 이곳은 처음 목적지로 정했던 템즈강 맞은편의 주차장이기는 하지만 그 난폭한 주행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걸까? 마치 지금의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일들에 대해서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는 모습이고 결코 그 모습이 거짓이 아님은 분위기로 알 수 있다. 아무래도 격렬한 주행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 기억을 잃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지도. “...합격입니다. 미스 아인츠베른. 조만간 기입하신 주소로 면허증이 발급될 거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 하하... 이거 운이 좋은 걸까? ------------------------------------ 그런 일이 있은 직후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첼씨와의 감동의 해후.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응시생중 첫 번째 합격자라며 정작 면허를 취득하게 된 나 이상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업 된 기분을 뽐내며 점심식사까지 대접 받았으니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확연. 문제는 그 이후였다. 허지스 시험관의 문제는 행운이 겹쳐서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대낮의 도로를 그렇게 달린 거다. 목격자의 눈이 없을 리가 만무하고 내가 추월한 차 중에는 순찰차도 두 대나 포함되어 있었기에 경찰의 수배를 피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구해준 게 지금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린. 린의 말을 그대로 인용 하자면 ‘저 멀리 브리스톨까지 다녀왔더니 제일 처음 마주한 소문이 그런 터무니없는 일일 줄 누가 알았겠어? 네 일을 무마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아?’ ‘어..어떻게 나인줄.. 알았어?’ ‘...에밀리아. 너는 얼마나 네가 눈에 띄는지 아직도 모르지? 지금 당장에라도 거리에 나가봐. 은빛 폭스바겐 폴로에 깃든 은빛 요정이라나.. 정말이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표현이 난무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갔는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은빛 요정이라니.. 우와아 터무니없이 부끄럽다. 어쨌든 그렇게 내 실수를 생각보다 빠르게 눈치 챌 수 있었던 린이 바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연줄을 통해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여 나를 찾는 경찰의 손길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마지막에 내가 들이 받았던 검은 세단은 경찰에 의해 쫓기고 있던 지명 수배자였기 때문에 경찰 측에서도 도움 받은 셈 치며 묵인해주기로 했다던가. 뭐, 갑작스럽게 끼어든 나 때문에 도주행각에 치명적 타격을 입고 붙잡혀 버린 그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없잖아 있지만 어차피 시작은 그들 때문에 시작했던 것이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붙잡혀야 하는 게 당연하니 상관없으려나. ‘그나마 다행인줄 알아. 무슨 일인지 차의 번호판이 떨어져 있어서 네 차를 본 경찰이 확인을 못했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무마시키려고 했어도 틀림없이 발각되고 말았을 거야.’ 정말이지 허지스 시험관의 일도 그렇고 번호판의 일도 그렇고 나의 C까지 떨어진 행운랭크 답지 않은 운이었다. 분명 번호판이 그대로 붙어있었다면 경찰에서 무마하려고 해도 어떤 경로로든 차의 출처가 판명되는 건 시간문제이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 나에게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을 테니까. 사실 이번일이 일어난 것부터가 운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지만 그래도 이 조그마한 행운에 감사하자. 그리고 지금. “잘못한건 알고 있어?” 이렇게 린의 앞에 죄인 마냥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쩌랴 아까 범인들에게 가졌던 생각은 나에게도 통용되는 것이라 잘못을 저지르고 그 무마를 린이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그녀의 불평불만을 들어줄 책임이 있는 것을. 문제가 있다면 “으응.. 잘못했어.” “반성하고 있어?” “반성하고 있어...” 이렇게 잔뜩 풀이 죽어 그녀의 말을 복창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나에게 린이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 그저 잘못했다는 말과 반성하고 있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눈앞에 있는 린은 절대로 토오사카 린이 아니다. 가짜다. 누군가가 악질적인 장난으로 만들어놓은 인형이거나 더미, 혹은 도플갱어의 의심까지 해봐야 할 것. 누가 뭐래도 린은 ‘붉은 악마’니까. 게다가 이번에 린이 지출한 돈은 모르긴 몰라도 0이 한두 개 붙은 액수의 단위가 아닐게 분명하다. 생각해보자. 린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토오사카 린이 돈을 잃은 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위인일 리가 없지. 이번에 브리스톨에 다녀온 것도 미키야씨의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사기를 친 사기꾼 일당을 붙잡으러 다녀온 것인 만큼 돈이 걸린 일에 있어서만큼 린은 그 느슨하고 주먹구구식 사고에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은 그녀의 성격을 버린 채 철두철미하게 냉철한 마술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최소한 예전에 있었던 메이드 형벌이나, 인형 형벌, 혹은 내가 지금 관리하고 있는 가산의 관리 양도 등 그녀가 요구할 조건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뒷목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심장이 뛴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온다. 직감적으로 이 뒤에 그 이야기가 올 것이라는 것을 느껴지기에 나도 모르게 어꺠를 움츠리고 만다. 그래 받아들이자 어떤 조건이 들이밀어지더라도 이를 꽉 물고 눈을 꼭 감은 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나에게 주어진 선택이 있을까. 만약 저항한다면 그 이상의 형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게 뻔한 것을. “그럼~ 반성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줘.” 응? 지금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린? 지금 뭐라고...” “주의해달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해?” 이상하고말고. 그것도 엄청나게 이상하다. 린이, 저 토오사카 린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나를 용서한다고? 그거야 말로 세상이 새로 개벽하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며 알트리아가 영웅왕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 하지만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말을 내뱉을 배짱은 없다. 만약 말을 꺼낸 다면 지금 저렇게 그녀답지 않게 온화하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이라도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나를 몰아붙일 건 불보 듯 환한 일.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아니!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아. 미안해 린. 앞으로는 잘 할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자. -------------------------------------- - 토오사카 린 - 치잇...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에밀리아에게 시키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나. 내가 경찰 일을 무마하도록 부탁한 인물은 다름 아닌 로드 엘멜로이 2세. 역시나 괴짜 마술사답게 여기저기 발이 넓어서 이곳 런던 경찰의 총 책임자와 아는 사이라던가. 물론 그것은 함께 게임을 즐기는 사이라나 뭐라나. 덕분에 별다른 금전의 손실 없이 무마시키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흐음.. 그렇다면 그 일의 대가로 당사자의 사진 정도를 부탁하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인데 이곳까지 소문이 퍼졌기에 궁금하던 차였으니까. 레이싱 게임은 별로 즐기지 않지만 그 은빛의 요정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여성이라면 호기심이 이는 게 어쩔 수 없군.“ 아껴두었던 소중한 컬렉션중 하나를 건네고 말았으니까. 쳇, 변태 아저씨 같으니라고.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봐 그런 걸 요구한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서 함께할 일이 있더라도 에밀리아는 꼭 숨겨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건넨 사진은 컬렉션 중에서도 중요도가 낮은 물건이었지만.. 일단 에밀리아 몰래 모으고 있던 사진의 존재가 드러나는 거다. 혹시나 그애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다가 내가 건넨 대가가 어떤 건지 알게 되는 날에는 지금 소장하고 있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으니 참는 거다. 그래도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니 만족 할까. 사기꾼 일당에게서 빼앗은 돈도 꽤 되는데다가.. 무심코 손에 들고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시선을 늘어뜨린다. 그곳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은발에 붉은 눈을 지닌 여성이 찍혀있고 그 여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 내 서번트이자 동거인이다. 그애의 운전 연습 강사였던 레이첼씨에게 부탁해서 손에 넣은 추가 컬렉션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니 이번에는 에밀리아에게 빚을 지운 셈 치지 뭐. 게다가 이렇게 내 처분만을 기다리며 눈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밀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도.. 후훗, 꽤나 즐거웠고. - Driver's high End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8 | 추천 2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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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 Stay Illumination King's return (上) - 알트리아 팬드래건 - “우으.. 배가.. 고픕니다.” 일본으로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열두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견딜 수 없는 공복, 아니 따분함으로 지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시로우가 싸주었던 도시락을 미리 먹어버렸던 것이 실책이었던 걸까요. 그 후 기내식이라고 나온 음식들은 과거 왕이던 시절에 먹었던 음식과 비교하자면 뛰어난 음식이었지만 시로우나 사쿠라가 차려주던 식사와 비교한다면 조잡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 정도의 식사를 가지고 남은 시간을 버티라고 하다니.. 훌륭하군요. 잉글랜드. 이 나의, 아더왕의 진군을 미리 알아채고 이쪽의 병참을 끊으면서 최소한의 식량만을 제공하여 목숨만을 연명시키는 뛰어난 심리작전입니다. 덕분에 나의 사기는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정말이지 시로우의 요리는 정말 마성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요리 실력 자체만 놓고 보자면 에밀리아를, 중화요리에 국한 시킨다면 린을, 양식에 국한 시킨다면 사쿠라를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 요리를 입에 대는 순간 세상을 다 갖은 듯한 포만감이란... 시로우의 곁을 떠나있는 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참아낼 수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쪽에는 에밀리아와 린이 있으니까. 그 둘은 사쿠라와는 다릅니다. “네... 사쿠라와는 다를겁니다.” 무심코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몸의 여기저기가 떨리고 있는 것이 지난 일년간의 트라우마가 없잖아 있는 게 분명하군요. 마스터 사쿠라는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과연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이러고 가만히 서있어 봐야 나아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서둘러 마중 나오기로 한 에밀리아와 약속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면허를 취득했다고 했던가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대되기도 하고.. 방향 표지판을 토대로 공항의 입구를 향해 걸어갑니다. 상당히 넓은 부지에 건설되어 있지만 그래도 브리튼의 넓은 평원을 말로 달리던 내게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두 발로 걷고 있다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허용 범위 안입니다. 보세요. 벌써 입구가 보이는군요. “여기가 브리튼.. 론디니움이군요.” 공항의 입구를 벗어나자 후유키시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현대의 거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이런 현대적인 건물이나 복잡한 도시의 구조는 후유키의 신토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이건 그 규모가 다르군요. 살짝이지만 도시의 복잡함과 활기참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로마가 건설한 빛나는 역사의 도시가 지금은 야만족인 앵글로 색슨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듣기로는 우리 켈트의 후손들을 북부와 남서부의 험준한 땅으로 내쫓았다고 하지요. 당장에라도 엑스칼리버를 꺼내어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지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나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과거의 망령이나 다름없는 존재. 현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손에 놓여있는 것이니까요. 만약, 그때 선정의 검(칼리번)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가령 랜슬럿 같은 뛰어난 기사가 뽑았더라면 지금의 이 터전에는 브리튼의 후손들이 나라를 일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의 한편이 아파 옴을 느낍니다. ‘후회하는 순간 내가 해온 모든 일과 목적이 모두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리는걸. 나는 내가 걸어간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기에 후회하지 않아. 지금 세이버는 스스로가 걸어간 길에 대해 후회하고 있어? 그렇다면 세이버의 길 끝에 있는 그 무언가는 잘못된 거야?‘ 언젠가 아쳐.. 에밀리아는 그렇게 말했었죠. 그래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걸어간 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고 스스로의 모든 것을 나라에 바쳤으니 잘못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것을 덮어버린다니! 그런 우행(愚行)은, 나와 함께 시대를 쌓았던 모든 인간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번 전쟁이 아닌 지난 전쟁에서의 라이더.. 이스킨달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보구 왕의 군세(아이오니언 헤타이로이)를 직접 목도한 이상 그의 왕도가 패도의 길이라 하여 비난할 수도 그의 말이 터무니 없는 망상이라고 매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잘못 되지 않았으면서 잘못 되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 끝에 있는 것이 멸망이라면 후회하는 것이 당연 하겠죠.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무언가가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결과를 얻게 된다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 이니까. 때문에 나는 성배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언젠가 성배의 힘으로 나라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 이상으로 바라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현계가 끝나고 다시 영령의 좌로 돌아가게 된다면 후유키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성배를 구하기 위해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겠죠. 물론, 지금은 시로우의, 린의, 사쿠라의, 그리고 에밀리아의 미래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 잠깐 멈추는 거랄까요. “그보다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에밀리아.. - 꼬르륵~ 부끄럽지만.. 배가 고프니까요. ------------------------------------------ - 에밀리아 - - 끼익. 신호등에 붉은 램프가 점등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그시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정차시킨다. 이렇게까지 멀리 차를 몰고 나온 적은 면허를 따고 나서 처음일지도 모르지만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일의 시작은 어제 밤에 일본으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서 출발. ‘묻겠습니다. 거주지에 방은 남아있습니까?“ ‘그럼, 지금 가겠습니다.’ 마치 먼 옛날 그녀를 소환했던 그 멋진 밤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늠름한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을 하는 알토리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는 사실과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났고 그저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무기질적인 신호음만이 - 뚜~ 뚜~ 반복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전화를 통해 들었던 내용을 정리하자면 오늘 낮 2시쯤 도착하는 비행기를 통해 알트리아가 이곳 런던에 도착한다는 것. 갑작스러운 알트리아의 방문에 이렇게 마중을 나가고 있는 중이다. “알트리아도 가끔은 어이없는 행동을 하고는 하니까..” 그래, 어딘가의 게임대회에 출전하지를 않나.. 아, 신호 들어왔다. - 부우웅~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V6엔진이 가벼운 발놀림만으로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차체를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차는 굉장히 클래식한 디자인의 이인승 스포츠카인 메르세데스 벤츠 300SL 쿠페다. 전 세계적으로 1400대밖에는 생산이 되지 않았다고 하던 환상의 명차라던가. 그런 차를 이렇게 몰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이리야 덕(?)이다. 내가 면허를 땄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어디선가 이런 고풍스런 클래식 카를 가지고 와서는 막무가내식으로 열쇠를 떠맡겼으니까. 물론 이런 물건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해봤지만 자신이 어릴 적 아인츠베른 성에서 본 적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져와서는 그저 내가 받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 물론 종종 이리야를 옆에 태우고 근처를 드라이브 하는 정도의 서비스는 해주었지만 차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대가 축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일 뿐이다. 아무리 평범하게 운전을 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알 수 없는 본능.. 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충동 때문에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컨트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뭐, 차차 나아지겠지. 이제 마지막 코너만 돌면 목적지인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런던에 처음 온 곳도 이곳을 통해서이고, 새로운 일상의 시작도 이곳에서 부터이고, 미키야씨를 만나게 된 것도 이곳에서 였으니... “이런이런, 꽤나 감상적이 되겠는걸.” 안 되지 안 되지.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라 알트리아를 찾는 쪽이 급선무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에서 이곳까지의 비행기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알트리아가 그 오랜 시간을 기내식만을 가지고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보석이 떨어진 린이 평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리라 믿는 것과 동등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 분명 지금쯤이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아무래도 알트리아가 그런 사람일 줄 생전에는 짐작도 하지 못했으니. 마지막 코너를 돌아 알트리아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람으로 가득차있는 히드로 공항 앞쪽 도로변 중 오직 한 곳만이 텅 비어서 공간을 낭비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안에 공간을 가득 채울만한 존재감(여러가지 의미에서)을 띄고 있는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억겁이 지난다 하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금발의 소녀가 당당하고 늠름한 자세로 서 있다. 알트리아는 여전하네 랄까. - 끼익 그런 그녀 앞쪽에 최대한 부드럽게 차를 세우고는 문을 열고 내려선다. 아무리 오늘따라 날씨가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2월 초다.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어느 정도 불어오기 때문에 오늘 입고 있는 옷은 해롯에서 얻은(?) 하얀 코트. 물론 털모자도 세트로 있기는 하지만 그건 꽤나 답답하기 때문에 제외한 상태다. “오래간 만이네. 알트리아.” 그렇게 차에서 내려 만면에 반가움을 표시하는 나와 달리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는 알트리아다. 이쪽을 향해 떨리는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으면서-정확히는 자동차 쪽에 가깝지만- 무언가 못볼 것을 본 듯 에메랄드빛의 예쁜 두 눈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크게 뜨여진다. 이거 살짝 가슴 아픈데. 내가 그렇게 이상한 모습인 걸까? 자신의 모습을 발끝부터 점검해보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알트리아의 반응은 여전히 당황 그 자체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 가리키는 손가락을 거두지 않은 채 당황한 반응을 계속 보여주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아이리스필?!?” 어라? ======================================== 후우.. 이번 챕터를 위해 미리 배치한 앞의 두개의 챕터였지만 약간은 허무하군요. 세이버가 런던을 방문했을때 최대한 에밀리아에게서 아이리스필의 모습을 겹치기 위해서 옷도 사고, 차도 사게 만들었지만 정작 그 복선을 사용하는건 기껏해야 다음편이 끝...OTL.. 그건 그렇고 이 팬픽에서의 세이버는 여전히 성배를 구하고 있습니다. FATE루트를 제외하고는 세이버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없죠. 1부에서 에밀리아가 세치혀로 설득해 보려 했습니다만 실패하고.. 뭐, 그녀의 상태는 UBW이후와 흡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의외의 복병 '사쿠라' 뭐, 나름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건 작가 혼자서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PS. 챕터 제목이 너무 식상한데 뭔가 멋진거 없을까요; 편수 삽화로 메르세데스 벤츠 300SL 걸윙(Gullwing) 쿠페가 있습니다. ======================================= Fate / Stay Illumination King's return (2) - 알트리아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긴 여행과 공복에 지쳐서 잠시 정신이 이상해져 환각을 보고 있는 걸까요.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은 결코 이 시간대에 있을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아이리스필 폰 아인츠베른. 키리츠구의 아내이자 이리야스필의 어머니였던 그녀가 생전 일본의 후유키에서 입고 있었던 순백의 코트를 걸치고 후유키의 교외 길을 마음껏 달리며 기뻐하던 것과 같은 은백의 스포츠카를 타고 왔습니다. 물론 나이에 비해 어머니로서 어른스럽고 포용적이던 분위기는 어딘지 발랄하고 생기있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만 잘못 볼 리가 없습니다. “아... 아이리스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경악성을 내보냈지만 이내 생각을 고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아이리스필이 있을 리는 없어요. 지난 성배전쟁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령주에 의한 명령이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마지막은 이 손으로 보내주었기에 살아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녀의 딸인 이리야스필의 성장한 모습이자 나를 마중하러 오기로 되어있던 에밀리아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겁니다. “혹시, 에밀리아 입니까?” “응, 누군가 착각하기라도 한걸까 알트리아?” “아네, 실은 이리야스필의 어머니인 아이리스필과.... 두 사람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살짝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차려입고 있으니 너무 닮았군요. 역시 그녀의 딸이라고 해야 할까요.” “딸이라니. 물론 아버지-키리츠구-의 아내였으니 굳이 따지자면 내게는 양어머니가 되겠지만.. 이왕이면 아들이 되고 싶은 걸.” 아.. 그건 무립니다. 이미 에밀리아는 시로우였던 시절의 행동이나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난처한 기색을 내며 혀를 살짝 내미는 행동 같은 건 결코 시로우라면 할 리가 없어요. 이제는 그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에밀리아는 그걸 자각하고 있지는 못한 듯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시로우가 아니라 이리야스필의 말대로 그녀의 친여동생인 에밀리아 폰 아인츠베른이라는 것을요. “그럼 어서 타, 그렇지 않아도 알트리아가 온다는 소식에 린이 이것저것 준비를 해두고 있으니까. 모처럼 기합이 들어갔다고?”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린의 요리라면 다양한 방면에 높은 수준을 보이지는 않지만 한 분야. 특히 중화요리 분야에 있어서는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기에 매우 기대가 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역시나 지금부터 에밀리아가 운전하는 차에 타야할 일입니다. 제게는 얼마 전의 일이나 다름없습니다만 이 시대의 시간으로 10여년전 있었던 후유키 외곽에서의 주행은 짧은 경험이나마 트라우마로 다가옵니다. 밤중 고갯길에서의 100km/h를 넘기는 속도에 차선 무시, 신호 무시까지. 이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아이리스필이 운전하는 대신 내가 운전하기는 했지만요. 그런 걱정에 에밀리아에게 일말의 희망과 걱정을 담아 부탁을 해봅니다. “저기 에밀리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운전을 할 수 없겠나요.” “응? 실례랄 건 없지만... 그보다 알트리아 면허가 있었어?” 물론 면허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기승 스킬이라면 운전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운전 자체는 상관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내가 운전한다는 일은 무리겠지요. 게다가 에밀리아는 아이리스필과 달리 제대로 운전면허를 취득했으니 안전이라든지 규칙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 지킬 테니 걱정할 일은 전혀 없을 터입니다. “무..물론 없습니다. 실언이었으니 잊어주세요.” “그럼 오늘은 내가 모셔볼게. 아 맞다. 오랜 여행 동안 배고프지? 미리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봤는데 일단 차에 타겠어?”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아이리스필과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지만 같은 모습에, 같은 의상에, 같은 차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 .................................... 핫.. 어..어느새 옆자리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어설픕니다. 알트리아. 그 두려웠던 경험을 되새기자면 어찌 이렇게 쉽사리 옆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에밀리아의 도시락이 있는 상황에서 거절 따위는 할 수가 없고 그녀의 옆자리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겨집니다. 도시락 속에 들어있는 새우튀김을 능숙한 젓가락질로 입으로 옮기자 알맞게 튀겨진 튀김옷 속에 담백하고 적당히 익은 부드러운 새우의 살이 입안을 즐겁게 만듭니다. “하아~” 아아.. 행복합니다. 이제 운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래요. 아이리스필은 요리에 있어서는 재능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지금 운전대를 쥐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에밀리아입니다. 두 번째 새우튀김을 입으로 옮기려던 때에 문득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에밀리아가 있습니다. “맛이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그 표정을 보니 묻지 않아도 될듯하네~” “그... 그렇습니까.” 우으.. 실책입니다. 하지만 에밀리아. 당신의 요리는 정말 그 근간이 시로우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 만큼 마성이 있으니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시선이 부담되는 와중에도 새우튀김을 입으로 옮기는 걸 멈추지 못하잖습니까. 모든 건 에밀리아의 요리에 잘못이 있는 겁니다. “그럼, 모처럼인데 가기 전에 런던을 한번 돌아볼까? 알트리아도 지금의 런던에 대해 궁금할 테니까.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린이 꽤나 기합이 들어가서 지금 돌아가면 방해만 될 거고.” “아, 부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나의 나라 브리튼은 그 중심지가 이곳보다 서쪽에 있는 지금은 웨일즈라 불리는 지역입니다만 물론 이곳 런던도 지배했던 강대국이었기에 이곳도 조국이나 다름이 없는 곳. 때문에 현대의 브리튼의 일부라도 살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요. 이곳을 잔악무도한 앵글로와 색슨이 점거하고 있다고 해도 그 토지는 언제까지나 브리튼의 것이니까. ---------------------------------------- 에밀리아의 운전솜씨는 뛰어나다고도 할 수 없고 오히려 구분을 짓자면 어설픈 솜씨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운행하는 것이 안심이 됩니다. 신호는 철저히 지키고 차가 다가오면 비켜주는 안전운전. 그런 에밀리아가 처음 안내한 곳은 현대의 도시답지 않게 넓게 펼쳐진 초목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여기는 테니스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윔블던. 알트리아의 시대에는 테니스라는게 없었지?” “그건 편견입니다. 에밀리아. 물론 테니스라는건 없었지만 그 기원이 될만한 스포츠는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있었으니까요.” “헤에.. 그런거야?” 특별히 지칭하는 이름은 없었습니다만 종종 기사들과 내기 시합을 하고는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아무도 나를 상대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기에 재미가 없었을 뿐이지요. 뭔가 공을 치기만 하면 다들 받아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몸을 피해서 일부러 져주는 기분이었기에 그리 즐기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왕을 공경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있는 지가 의심 되는 기사들이 어째서 스포츠를 즐길 때면 그리 행동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만. ----------------------------------------- 다음으로 안내 받은 곳은 이렇다할 특징이 없지만 매우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거리입니다. 마치 후유키의 미야마 상점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곳이 노팅힐이라는 곳이야. 엔틱류의 물건이 주 상품이기도 하고, 꽤 한적한 곳이니까 언제 한번 쇼핑을 다니는 것이 어떨까? 예쁜 물건들이 꽤 많거든.” “에밀리아, 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거의 취향이 소녀 같아지고 있는 것 같아 기쁘군요.” “하으으...” 내 말에 그런 식으로 머리를 핸들에 가까이 가져다 대는 모습 또한 부끄럼 많은 소녀의 모습입니다. 에밀리아. 그러고 보니 특이한 조합이군요. 우리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되 남성으로 살아온 나와, 남성으로 태어났으되 여성으로 살아온 에밀리아. 그렇기에 당신에게 더욱 신경이 쓰이는 건지도 모릅니다. ---------------------------------------- “여기는 하이드 파크. 런던 최고의 공원이고 도시락 싸서 피크닉 오기에 괜찮아 보이지? 게다가 이곳에서는 말을 탈 수 있는 곳도 있으니까. 알트리아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 굉장히 넓은 곳입니다. 그보다 에밀리아의 말 중에서 가장 귀를 잡아끄는 건 역시나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나의 기사들과 함께 전장의 바람에 망토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건 그 오랜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니까요. “그럼 슬슬..” - 빵빵!! 음, 이 귀에 거슬리는 큰 소리는.. 아아 뒤의 차에서 내는 소리인가요. 자동차가 내는 무기질적인 소리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그 사용자의 마음이 깃들었기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군요. 마치 거만한 적국의 왕이 회담자리에서 나를 보고 얕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건 에밀리아도 별반 다르지 않게 느끼기 때문인지 사이드 미러를 통해서 뒤를 살펴보는 그녀의 표정은 불편하다는 표정입니다. “뭐,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지? 이제 그만 집으로...” - 빵빵!! “그만 집으로...” - 빠앙!!!!!!!!!!!!!!!!!!! 부아앙!! 에밀리아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게 계속 큰 소리를 반복해서 이쪽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던 뒷 차는 마지막으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 주고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앞질러 나아갑니다. 자동차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 내가 볼 때도 에밀리아의 차에 비하면 부족합니다만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입니다. 그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이제 막 검과 말을 하사받은 초보 기사가 자신을 과시하며 행진하는 그런 감각이랄까요. 결국 젊은 혈기로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입니다. 이미 지나쳐갔으니 넘어갑니다만 다음에는 뭐라고 훈계라도 해주지 않으면.. 그 목소리는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들렸습니다. “후훗.. 좋아.” 뭔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기분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요. 그 매혹적이고 듣기 좋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몸을 전율시키는 목소리. 마치 차안의 기온을 단숨에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미성이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우리를 앞질러가는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밀리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에밀리아?”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네.” 차갑게 미소를 짓는 에밀리아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만 그 미소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눈치 챘을 때 내게 남은 감정은 공포와 절망입니다. 이 느낌을 언젠가 받은 적이 있어요. 다만 그때는 별다른 이유 없이 순전히 즐기는 그런 기분이었다면 지금의 이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둡습니다. 절대로 어둡습니다! ------------------------------------------ “에.. 에밀리아!!!?!? 정면에 벽입니다!!!” “괜찮아 갈 수 있어.” “멈추세요!! 앞에는 이미 신호가!!!!” “괜찮아 곧 들어 올 거야.” “부딪쳐요!! 부딪칩니다!!!!” “♪♬~ ♪♬♬~ ♩♪” ------------------------------------------ 에밀리아가 제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 건 우리를 앞질러간 그 괘씸한(에밀리아의 질주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차를 앞서고는 그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상대로 하여금 주행의 균형을 잃게 하여 가드레일에 들이 받게 만든 후였습니다. 영령으로서, 아더왕으로서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정말로 이 순간만큼은 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에밀리아가 아이리스필과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맞아요. 틀림없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속도의 수준이 두 배 가까이 차이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과격하고 난폭하고 앞뒤 가리지 않으며 주위에서 말하는게 들리지 않는 것은 더욱 질이 나쁩니다. “에밀리아.... 이 말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뭘까?” 에밀리아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자각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는 기미가 얼굴에 가득차 있기는 합니다만 이 말은 꼭 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 한 말입니다만 지금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는 아이리스필의 딸입니다. 그건 제가 보증하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에밀리아. 당신은 분명 아이리스필의 딸입니다. ======================================================= 가므로일(epilier) 덧글 2개 | 조회수 12 | 추천 1 인쇄 | 신고 글쓰기 답글 목록 ▲ top 작성하신 글은 아래의 서비스로 보내신 글입니다. 해당 서비스에서도 삭제 반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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