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우리들만의매력,모델팸☜ cafe.daum.net/Ueolzzang7 음식(비공개) | 회원수 15,507 카페정보가입 0 방문 22 새글 2 카페지기하늘에별따기 개설일2006.02.22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플레이 대기중 -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2) 숨기 노을뱅이♡<나>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01 ~ 07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1447 08.06.26 22:58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57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제 1화. 첫 만남, 그리고 시작. 때는 2008년 2월 초, 하얀 세상이 되어버린 시내 거리를 누비던 날이었다. 프리푸인가 뭔가 하는 조그마한 인형을 기필코 오늘 꼭 사내야겠다며 굳게 다짐하는 혜미 덕에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혜미 손에 이끌려 결국 시내로 나왔다.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구겨 넣듯 넣으며, 옆에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혜미를 향해 ‘네가 오타쿠야? 왜 그런 걸 모으는 거야? 곧 고2나 되는 주제에.’ 라고 궁시렁 거렸다가 결국 옆구리 한대 세게 얻어맞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은 생각도, 움직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 만큼 춥다. 강렬한 추위가 온 몸을 맴돈다. 입가에서는 숨을 내 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새어나온다. “어! 저기다!” ‘한계다.’ 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서른여섯 번쯤 되새기고 있었을 때였다. 혜미가 깡충깡충 뛰면서 저 멀리 위치한 인형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혜미의 손가락을 타고 시선을 옮기자, 그 끝에는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 인형가게가 보였다. 하지만 그 곳에 시선이 머문 시간은 딱 2초 밖에 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인형가게에 시선을 머물다가,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로 시선이 옮겨갔기에. 장미 꽃 한 다발을 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자. 비록 얼굴은 보지 않았지만 슬픔에 잠겨있을 것만 같은 그의 분위기. “너 안 갈 거야?” “…어? 아, 어.” 그 남자에게 시선만 뺏긴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정신까지 뺏겼나보다. 혜미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엉뚱한 대답을 해서 이렇게 한대 세게 맞는 것을 보면. “아!! 왜 때려!” “네가 사준다고 해놓고, 뭐? 안 가? 어? 이제 와서 발뺌이야!?” “…아. 내가 안 간다고 했어?”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온 거야? 집에 두고 왔어? 아니면 오다가 쓰레기통에 버렸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조잘조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김혜미. 진짜 당장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귀마개 하나 사고 싶다. 귀 좀 막게. “시끄럽고, 가서 인형이나 골라. 돈 줄 테니까.” “아, 그래?” 급 미소를 짓는 김혜미. 너 참 약았다. 돈 준다니까 웃냐? 권강재 그 새끼보다 네가 더 약았어. 어쩜 네가 걔보다 한 수 위일지도. 속으로 얌체 같은 김혜미를 씹어대며 지갑에서 이만 오천 원을 꺼내어 김혜미한테 넘겨주었다. 하, 내 피 같은 용돈. 도대체 내가 왜 얘한테 약점까지 잡히게 된 건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김혜미는 돈을 냉큼 받자마자 인형가게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간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형가게 쪽으로 걸음을 슬슬 옮기기 시작했고, 곧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인형가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형가게 앞에 도착하는 그 때까지도 남자는 인형가게 앞에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내 또래쯤으로 보인다. 헌데 왜 옷은 정장차림이람? 어울리지않…게는 아니구나. 어울린다. 믿고 싶지 않지만 훤칠한 얼굴과 검은 정장이 제길스럽게도 너무 매치가 잘 된다. 게다가 빨간 장미라니. 정말 잘 어울린다. 이래서 애들이 이런 남자보고 환장하는 구나. 하지만 딱 그 정도. 아, 잘생겼다. 훤칠하구나. 라는 말만 떠오르는 그 정도. 내겐 그 이하,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서로 아무 말 없이 그는, ‘그’ 대로 서 있고. 나는 ‘나’ 대로 혜미를 기다렸다면 말이다. 그 이하,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때로는 생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니까. “야.” 아, 춥다. 얜 언제 나오는 거야? 인형을 사는 거야, 만드는 거야? “야.” 으, 추워. 춥다고! 아, 젠장. 안되겠어. 집에 돌아갈 때 붕어빵이라도 사서 들어가야지. 몸을 녹일만한 것이 필요해. “야.” 자꾸 누가 야야 거리는 거야? 그리고 왜 상대방은 대답을 안 해? 아 시끄러워. 귓가로 파고는 그 놈의 ‘야, 야’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고서는 발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내 갈색 부츠 앞으로 번쩍이는 검은 색 구두가 보였다. 딱 봐도 남자 구두. 뭐지?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구두의 주인의 얼굴을 눈앞에 보였다. 헉! 아까 그 남자다. “그 귀는 장식인가 보지?” “…뭐, 뭐?” “부르면 쳐다보는 흉내라도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그 야야 소리가 날 부른 거라고? 날? 날 왜? 어째서? “…저, 아세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아, 다시 봐도 잘 생겼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잡힌 것이 여자들한테 인기 꽤나 많을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내 질문에 살짝 고개를 젓는다. 그럼 왜, 모르면서 아는 척이야? 그리고,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왜 말을 안 해? 어? “너 이거 가져.” 발을 동동 굴리며, 남자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기를 어언 20초. 남자는 내게 장미꽃다발을 넘기며, 아니 넘기는 게 아니라 던지며 나보고 가지라고 한다. 내가 이걸 왜 가져? “이걸 내가 왜 가져요?” “가지라면 가져. 왜 그렇게 잔말이 많아?” “나 아세요? 왜 자꾸 반말질이야?” 처음 본 주제에 존어도 아닌 반말을 찍찍하는 녀석이 아니 꼬아서 결국엔 나 또한 반말을 해버리고 만다. 남자는 그런 내가 웃긴 건지 아님, 어이없는 건지 픽- 하고 웃음을 흘리며 날 내려다본다. “너도 했네. 그럼 쌤쌤?” 지랄. 쌤쌤 좋아하네. 반말은 그렇다 치고 나한테 이걸 왜 주는 거야? 나한테 반한거야? “여튼 너 그거 가져.” “나한테 반했어요?” 조심스럽게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꺼내보았다. 그러자, 남자 인상을 찌푸릴 때로 찌푸린다. 반한 게 아닌가? 그럼 뭐야. 사실 상 처음 보는 여자한테 꽃다발을 줄 리가 없잖아! 한 눈에 반해서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이 남자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어보자면. “미쳤냐? 이 추운 날 뒤지게 맞아 볼래?” 남자는 진심인 것 같았다. 주먹을 살며시 감싸 쥐는 것을 보면. “아뇨. 저 그럼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요?” “버릴 때가 없으니까.” “뭐라고요!?” “버릴 때가 없었다고. 다시 말 해줄까?” 아 놔, 남자의 목소리가 정확히 귓가에 탁- 박히는 순간 얌전했던 화 뚜껑이 열려버렸다. 누그러트리고 있던 내 더러운 성질머리가 폭발해버리고 만 것. “장난 쳐?! 내가 쓰레기통이야!? 나한테 버리게!?” “뭐?” “요!” 아, 젠장. 흥분했더니 말투가 병신 같네. “말투 봐라? 생긴 것처럼 말한다, 너?” “내 생긴 게 뭐 어때서!? 이거 네가 버려! 나 네 쓰레기 버리려고 여기 나온 거 아니거든?” “됐어. 남자가 한 번 준거 어떻게 다시 받아? 네가 버리던 말던 알아서 해.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자. 네 말투가 아니꼬워서라도 보고 싶지 않다.” 누가 할 소리!!!!!!!!!!!! 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는데, 다리 긴 것들은 다 재수 없다고 벌써 저 끝까지 휘적휘적 가버렸다. 아, 이게 도대체 뭐야! 괜히 김혜미한테 약점 잡혀서 인형가게 앞까지 끌려와서 쓰레기통 취급이나 받고! 정말 역시 김혜미랑 나오는 날이면 안 좋은 일들이 꼭 하나씩 터져. 저건 내게 불행을 불러오는 근원 인게 분명해. “헤헤.” 헤헤? 근데 지금 이 해맑은 웃음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거지? “예쁘지? 귀엽지?” 아, 내 옆에서 인형을 들고 쫑알쫑알 웃고 있는 김혜미 입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구나. 빌어먹게도, 난 기분이 최하인데 넌 최고로 좋은 것 같구나. “좋냐?” “응.” “좋아 죽겠어?” “응.” “그래? 근데 난 열 받아 죽겠다. 너! 개학식 하는 날 까지 나한테 연락하면 죽는다! 그리고 이 봉지 내놔!”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린 뒤, 김혜미가 들고 있던 봉지( 인형가게에서 인형을 넣어준 봉지로 추정됨)를 낚아채고선 그 안에 꽃다발을 구겨 넣듯 집어넣었다. 그리고서는 김혜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시원하게 날려주고서는 집으로 곧장 걸어갔다. 붕어빵이고 뭐고, 기분 잡쳤어. 젠장. 오늘부터 개학날까지 내가 집 밖으로 나가나 봐. 집에서 도를 닦겠어.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 위로 꽃다발을 대충 던져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쿵- 하고 마찰음이 들려왔다. 쿵? 쿵? 꽃다발이 책상하고 부딪혔는데 쿵? “…꽃을 돌로 만들었나.” 꽃다발이 떨어진 책상이, 행여 깨졌을까 하고 확인했다. 다행히도 멀쩡하다. ‘휴’ 하고 짧게 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엄마가 오면 공부하라고 난리칠게 분명해. 아 그건 싫은데. 이 기분 좆같은 날 공부까지 하라고 하면 난 죽어 버릴 테야. 정말. 그래, 차라리 자자. 자는 거야. 라고 생각한지 5분 째. 정말 단순한건지 아니면 실행에 잘 옮기는 건지 나는 두 눈감고 이미 꿈나라로 떠나 있었다. * * * 오랜만에 꿈을 꾸게 됐다. 예쁜 꽃이 피어있는 산 중턱에 앉아 있는 나. 꽃밭에 누워 잠을 청하면 천국에 온 기분이겠지? 하고 꽃밭에 누우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때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야.” 엥. 야? 야아~? “야!” 야아!? 순간 퍼뜩 머릿속을 지나가는 얼굴 하나. 꽃다발을 건네주며 알아서 처리하라던 그 녀석의 얼굴. 설마, 설마. 내 꿈속에까지 네가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야, 이향미!!!!!!” 아니다. 그 목소리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눈을 번뜩 뜨며 내 얼굴 위로 미간을 찌푸리며 날 내려다보고 있는 이향원의 얼굴을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아, 진짜…왜 지랄이야, 씹새야. 잘 자고 있는 사람 깨워서는.” “지랄? 씹새? 너 미쳤냐? 지금 몇 신 줄 알아?” “몇 신데?” “10시.” 10시? 10시? 내가 아까 몇 시에 잠잤지?… 3시쯤 집에 도착했으니까. 헐! 내가 지금 약 7시간을 넘게 잠잤다는 거야!? “좀 깨우지 그랬냐. 아, 얼굴 부었겠다.” “그딴 건 걱정하지 마. 넌 평소에도 부었었으니까 그다지 색다르지 않아.” “시비 걸려고 깨웠니? 도대체 깨운 용건이 뭐야? 그냥 내일까지 처 자게 내버려두지.” “너 저 꽃다발 어디서 났어.” 꽃다발? 이향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아까 내가 가져온 봉지 안에 넣어두었던 꽃다발이 보였다. 아까와 그 꽃다발이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는 봉지 안에 있었다는 것, 지금은 바깥에 있다는 것. “너 저거 꺼냈어?” “그럼 벨소리가 울리는데 안 꺼내?” 벨소리? 꽃다발에서 웬 벨소리? “여튼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불어. 저거 어디서 쌔벼왔어?” “누가 줬거든?” “뭘 보고?” “뭐가 뭘 보고야?” “너의 뭘 보고 누가 꽃다발까지 주는데?” 아, 이 개새끼를 그냥. 내 동생 맞아, 이거? “여튼 그런 게 있어, 인마! 근데 뭔 벨소리야?” “넌 꽃다발만 보이냐? 저 옆에 핸드폰 안 보여?” 핸드폰? 녀석의 말에 다시 한번 책상 위를 쳐다보자,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낯선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슬라이드 핸드폰. 새끈하게 잘 빠진 게 탐이 나기 시작한다. “너 폰 바꿨어?” “지랄.” “엄마 폰 바꿨어?” “돈이 어디 있어서?” “그럼 아빠 꺼?” “넌 자고 일어나니까 사고 회로가 역 회전했냐?” 이게, 디질라고. “그럼 어디서 난 건데!” “꽃다발 안에 들어있었거든! 네가 쳐 자는 동안 저 핸드폰이 무려 10번도 넘게 울렸거든!” “…뭐?” 꽃다발 안에? 그럼 아까 그 쿵- 소리가 저 핸드폰 소리? 근데 저 안에 왜 핸드폰이 들어있어? 저 꽃다발은 분명 아까 그 새끼가…. 젠장, 그 새끼건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목록 버튼을 눌러보았다. 부재중 표시로 뜨는 [건강] 이라는 이름들. 방향키를 움직여 ‘건강’ 이라는 목록에 멈추어 확인버튼을 눌러보니 익숙한 번호가 눈에 띈다. 010-2218-xxxx. “아, 설마‥.” 설마, 설마. 설마….내가 아는 그 건강은 아니겠지? 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방안을 울리는 커다란 벨소리. 액정을 보니 건강이라는 사람이다. 헌데, 아무리 봐도 이 번호는 내가 아는 그 권강재가 맞는 것 같단 말이야? “안 받냐?” 옆에서 띠꺼운 표정을 지은 채 받으라고 강요하는 이향원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누구” 세요…. 라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귓가를 쿡- 하고 찌르는 커. 다. 란 목소리 하나. - 이 도둑년아!!!!!!!!!!!!!!!!!!!!!!!!! 뭐라. 뭐? 도, 뭐? 도둑 년? “누구신데 다짜고짜 도둑년이라고….” -그 폰 주인이거든!!!!!!!!? “…누구신데요.” -그 폰 주인이라고!!!! 너 누군데 남의 폰 훔치고 지랄이냐? “저 훔친 적 없거든요?”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서 욕 짓거리야? 근데 이 목소리 왠지 낯이 익다. 이 싸가지 없는 말투하며, 설마. “…아까 그 꽃다발?” - 꽃다발? 너 지금 나랑 장난까? “아까 인형가게 앞에 그 꽃다발 던져주던 씹새?” - 뭐? 씹새? 시팔 너 누구야? 디질래? -- 너 남의 폰 가지고 욕하면 좋냐? 적당히 해라. 알 얼마 안 남았다. - 닥쳐! 야, 너 그 폰이 얼마짜린 줄 알아? 내 애장품 1호거든! 흠집 하나라도 났어 봐. 넌 나랑 마주치는 즉시 세상 다 산줄 알아라! “아까 그 인형가게 앞 씹새 맞네. 야, 네가 줬잖아. 꽃다발.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아, 어이없네, 이거?” 물론- 꽃다발 안에 핸드폰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놈이 먼저 준 것을. 내가 달라고 했나? 쓰레기 처분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다면 녀석의 폰은 이미 쓰레기통으로 골인 되었을 몸.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냐? 생각 할수록 어이가 없네. “이보세요.” - 이보세요든 저보세요든, 내 폰 내놔!! “휴. 말이 안 통하네, 이거.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댁이 들고 있는 그 폰 주인. 권강재라는 사람 아니에요?” - 뭐? 야! 깡! 얘가 너 알아! 얘 진짜 내 스토커인가 봐. 나 지금 소름 돋았어. 보여? 와, 정말 세상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구나. -- 그 쪽에서 날 안다고? - 엉! 시팔 진짜 야! 너 내 스토커 맞지? 그래서 내 폰 훔친 거지? 어? 나랑 그렇게 엮이고 싶었어? 응? ‥도대체 내가 뭐라고 말해야 이 사람이 내 말을 잘 알아먹을 수 있을까. 시팔. 여튼 지금 이 폰이 권강재 폰이란 건 맞다는 거잖아? 그래, 그 자식이 저 씹새랑 어떻게 아는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새끼랑 통화를 해야지 오해가 풀릴 듯싶구나. “폰 주인 바꿔.” - 뭐? “폰 주인 바꾸라고 씹새야.” 나도 화났다 이거야. 뭐? 스토커? 도둑년? 별의 별 사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이 자식한테 이런 소리를 들어야 되는 거야? - 폰 주인 바꿨습니다. “이 개자식아!!!” 결국 참다 참다, 권강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 이향미? “그래, 씹새야. 다행히도 내 목소리는 기억하는 구나? 어? 옆에 그 새끼 네 친구지!” - 네가 차연우 스토커였어? 너 차인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남자냐? 그 것도‥. “뭐래! 닥쳐, 새끼야! 너 어디야!” - 울집. “뭔집?” - 우.리.집 울집이 뭐야, 울집이. 여튼간 지금 그럼 바로 옆집에 있으면서 전화로 씨부렁거렸다 이거지? 차연우인가 뭔가 하는 너 죽었어. “‥닥치고 그 새끼 기다리라고 해. 디졌어.” - 헐? “헐은 무슨 헐! 꼼짝 말고 기다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넌 그 날로 민국이 새끼 꼴 날 줄 알아!” (참고로 민국은, 며칠 전에 자신의 아버지 손에 의하여 반삭한 권강재의 친구이다.) 냅다 핸드폰 안쪽을 향해 소리 질러버린 뒤, 씩씩거리며 외투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물론, 핸드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는 이향원을 향해 ‘뭘 꼬라 봐?’ 라고 툭- 쏘아준 뒤, 현관문을 나서려 하는데, 이향원이 나를 향해 툭, 내 뱉은 말. “꼬락서니 봐라.” “뭐? 내 꼬락서니가 뭐 어때서?” “넌 개념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뭐래는 거야! 나 지금 바쁘거든? 이따가 와서 보자, 넌.” “이향미, 병신아! 지금 이 시각에 강재형네 친구가 와 있다는 건, 그 형의 다른 친구들도 있다는 거 아니냐고!”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라는 눈초리로 이향원을 바라보자, 이향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자다 일어난 게 딱 티나.” “그게 뭐.” “너 여자 맞냐?” 그럼 남자겠어?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준 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팔뚝 지를 문지르며, 재빠르게 권강재네 집으로 건너가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세요?’ 하고 여자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지금 이 시각에 권강재가 여자를 부를 리는 없고. 아마도 권강희 인 듯 했다. “강희야, 나 향미언니!” “‥어? 아, 언니 이 시간에는 웬일이세요?” 문을 열며 놀란 표정을 짓는 강희는 어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 권강재한테 볼일이 있어서.” “오빠 2층에 있는데. 근데 언니‥. 지금 그렇게 위로 올라가려고요?” “응? 응. 올라가면 안 돼?” “오빠 친구들 많이 와 있는데.” “아, 별로 상관없어. 어차피 다 아는 애들일 텐데.” “어휴, 내가 언니 때문에 못 살아. 이리 와요, 어서!” 강희는 못 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고 가더니 자신의 서랍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고데기를 꺼내더니 코드를 꼽는다. “‥그건 어디다가 쓰려구?” “어디다가 쓰긴 요. 언니 머리하려고 하는 거죠. 이게 뭐예요. 자다 일어났죠, 언니!” “‥아, 응. 근데, 나 정말 괜찮거든?” “내가 안 괜찮아요!” 라고 냅다 버럭 소리 지르는 강희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단지 핑계라는 것을. 평소에 미용에 관심이 많은 강희는 , 내가 자신의 집에 놀러올 때면, 그 날 배운 무언가(?)를 내게 실습하곤 했다. 예를 들어, 화장이라던가, 머리모양을 말이다. 아마도 오늘도 어디에서 고데기로 예쁘게 머리하는 법을 배워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머리를 가지고 예쁘게 단장시키는 강희의 손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되니, 강희야. 언니가 조금 급한데.” “거의 다 돼가요, 언니.” 강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머리를 계속해서 만지작, 만지작거렸다. 아, 근데 전에부터 걸렸던 게 있었는데 말이지. “넌, 나랑 안 시간이 얼만데 아직까지 존댓말이야? 말 좀 놔라. 내가 다 불편해, 인마.” “에이, 그래도 언닌데 어떻게 그래요.” 그래, 언닌데 어떻게 그래요. 그게 정상이지? 근데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이 살고 있는 망할 이향원은 어떻게 그러지? 네 오빠인 권강재한테 넉살좋게 ‘형~, 형~’ 거리질 않나, 심지어는 지 친누나인 나한테는 ‘야! 야! 이향미!’ 라며 반말까지 한다? 난 참 권강재가 부러워. 너 같은 동생을 둬서 말이야. 돌아오는 내 생일날 그 녀석에게 ‘내 동생이랑, 네 동생이랑 바꾸자.’ 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란다. “다 됐다. 여기다가 이, 니트 모자만 씌우면. 와, 언니 정말 잘 어울려요! ” “‥어?” 강희의 말에 앞에 놓인 거울을 빤히 쳐다보니, 이거 웬걸?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던 내 모습과는 천지 차이. 역시 미용 쪽에 소질이 있는 아이라니까. “예쁘다, 진짜. 사진이라도 찍어둘까요?!” “‥그건, 좀 사양하고 싶다. 여튼, 너무 고마워. 나 그럼 2층에 올라가볼게.” “네네!” 강희가 싱긋 웃으며 만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지간히도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는 듯 하다. 하긴, 오늘 이 머리는 정말 예쁘다. 나까지도 만족할 정도니. 그나저나, 이런 머리는 어디 나갈 때나 해주지. 권강재 친구들 보는데 뭐 좋으라고 이렇게 해준 건지. 그저 못 마땅할 뿐이다. “얼씨구.” 2층으로 올라가 권강재 방 앞에 다가서니,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온다. 아주머니 없다고 막나가는 구나? 눈을 부릅뜨고, 조금 열려 있는 문을 발로 퍽- 차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잘 하는 짓이다, 너희들?” “뭐냐, 이향미?” “‥아, 분위기 깨게.” “오, 우리의 홍일점 왔구나!” 띠꺼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톡 쏘아주자, 몇 몇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지으며 궁시렁 거리기 일쑤였고, 몇몇은 잘 왔다는 듯 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 익숙한 얼굴들. 차연우로 추정되는 녀석의 얼굴 따위는 없었다. “권강재는?” “옆방에서 연우랑 컴퓨터 하는 것 같던데? 아, 됐고 와서 한 잔 받아!” “됐거든? 술은 네 입에나 퍼부어, 새끼야.” “술 마시러 온 거 아니냐?” “미친? 난 아빠한테 죽기 싫거든? 권강재처럼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지 않아서 말이야. 너나 처먹어.” 자신의 옆에 와서 술 한 잔 받으라는 녀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준 뒤, 옆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방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흥분한 듯 소리를 지르는 권강재와,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내, 방 앞에 다가서니 화면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가관이 아니다, 정말. “너희들 지금 야동 보니?” 헤드 셋을 끼고 있는 차연우라는 아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여전히 화면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내 목소리를 들은 권강재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너, 미쳤냐!?”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컴퓨터 모니터 앞에 다가서며 혀를 끌끌 찼다. 설마 했는데, 정말 야동이라니. 이 것들, 정말 제대로 된 녀석들 맞아? 아래층에는 다 큰 지 여동생도 있는데 말이지. 타락의 끝을 보여주는구나, 권강재. “야, 야 나가! 너 여자가!!” “어쭈? 여자가 뭐? 난 이런 거 모르는 줄 알아? 근데 너희들 진짜 할 짓 없다. 이런 거나 보고.” “나가라니까, 이향미!” 권강재와 실랑이를 버리고 있는 중에도, 차연우는 여전히 화면에 시선고정. 아마도 지 친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구나-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진짜, 그 친구에 그 친구다. “권강재.” “아, 나가라고 진짜!” “저 새끼가 그 씹새지?” “나가서 말‥, 뭐?” “아까 그 전화 받은 씹새! 나 도둑년 취급한 그 씹새!” 그제야 내가 왜 이 곳에 왔는지 이해가 된다는 듯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권강재. 나는 씨익- 하고 웃어 보이며 차연우의 뒤로 다가섰다. 권강재는 ‘얘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고, 차연우가 끼고 있는 헤드 셋을 조용히 빼며, 녀석의 어깨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서는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내며, “어머, 이런 취미가 있으셨네요, 차연우군?. 정말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네요? 그죠?” 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녀석의 귓가에 바람을 후- 하고 불어주는 센스까지 발휘해주었다. 제 2화. 두 번째 만남. “ 뭐하는 짓이‥ 헐!! 너 누구‥, 어, 아까 그 인형가게!” 아직까지 사태파악 되지 않고 있던 차연우는, 여전히 권강재의 장난일거라 생각한 건지, 귀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헌데, 뒤 돌아보니 권강재가 아닌 내가 서 있었으니 얼마나 놀랬을까. “안녕? 우리 안면 있지?” 그런 녀석을 향해 상큼하게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뭐야, 너?” 헌데, 녀석. 인상을 찡그리며 띠꺼운 표정을 짓는다. 그 것도 아~주 띠꺼운 표정을 말이다. 마치 자기 엉덩이를 쓰다듬는 60대 할머니를 바라보는 눈길이랄까 나. “네가 달라며?” “뭘?” 뭘? 지금 ‘뭘’이라고 했어?! 내가 이 시각에 열 받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 그래봤자 옆집이지만 ) 하는 수 없이 내 주머니에 고이 모셔 온 녀석의 핸드폰 꺼내어, 핸드폰 고리를 두 손가락을 집어 들어 흔들어보였다. 그 순간 눈빛이 달라지는 차연우. 60대 할머니를 바라보듯 쳐다보던 녀석의 눈길이, ‘내 밥!’ 하고 달려 들 것 만 같은 강아지의 번쩍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고 비유할 수 있었다. “씨발, 너야?” 근데 지금 이 녀석이 내게 지껄인 말은 뭐지? 고마워, 감사해, 넌 내 은인이야. 라고 지껄여도 모자랄 판국에. 뭐? 뭔 발? 너야?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 “나 눈 높거든?” 생뚱맞게 왜 눈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난 가슴도 큰 여자가 좋거든?” 그니까 씨발, 왜 가슴이야기가 나오는 거냐고! “키 작은 여자애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거든?” 디질라고, 지는 얼마나 크다‥, 크다‥ 젠장 크구나. “뭐? 허, 야, 야. 너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나도 너 그다지 맘에 들지 않거든? 그리고, 권강재! 넌 왜 웃는데!?” 차연우라는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녀석이 오해한 점을 상기 시켜주려고 하는데,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권강재 자식. 내 가슴 슬쩍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큭, 크큭.” “너 자꾸 웃을래?!!! 왜 내 가슴은 쳐다보는 건데, 씹새야!!! 죽인다!?” “아, 하하하하하하하. 크큭, 아 하하하하.” 도대체 그 웃음의 뜻이 뭔데! 나 안 작거든! 이래 뵈도 오늘은 뽕 있는 속옷입고 온 거라고! 젠장. 게다가 권강재가 웃음을 터트리자 곧, 차연우도 녀석을 따라 숨죽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확 폰 던지기 전에 둘 다 안 멈춰!?” 하지만 내 협박 아닌, 협박에 권강재는 제쳐 두고 차연우, 얼굴 싹- 굳히고서는 손바닥 내민다. 정말 아끼는 가 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애장품1호라고 했나. “내 놔.” “사과부터 해.” “무슨 사과? 먹는 사과? 사과 흉내 내라고?” 이런 저질개그. “이대로 1층으로 하강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지?” 방을 나와 계단 쪽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뻗으며 협박하자, 차연우는 다시 얼굴을 굳히며 ‘지송.’ 이라며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넨다. “너의 애장품1호, 오늘로써 이 세상에서 빛을 못 보게 될줄 알아.” “아씨, 사과하기 전에 내가 왜 너한테 사과 따위를 해야 하는 지 설명이나 들어보자?” 라고 연이어 녀석이 내게 말하였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해주려 했지만. 그 많은 걸 언제 다 설명하랴. 금세 귀차니즘 재발됐다. “그러니까 네가 아까 인형가게 앞에서 날 쓰레기 취급 한거랑 그리고 아까 전화통화로‥, 아 됐어. 너 그냥 가져. 언제 그걸 다 말해? 귀찮게. 이거 너 가지고 두 번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나타나면 그 때는 뒤통수를 휘갈겨 줄 테니까!” “뭐!?” “받아, 이 변태 새끼야.” “어? 어, 어?!” 핸드폰을 던지자 당황하며 엉거주춤 핸드폰을 받아드는 녀석의 폼이 좀 웃겼지만 , 꾹 웃음을 참은 채 멋지게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데 2층 난간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권강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어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서는 신경질 적으로 녀석의 불음에 대답하였다. “이향미!” “왜!” “말 못한 게 있었는데.” “뭐!” 녀석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난 꼭 저런 얼굴 보면 한대 때려주고 싶더라. 하지만 녀석과 나의 거리가 꽤 되는 지라 때리는 건 무리일거라 생각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주려 하는데, 녀석의 닫힌 입이 열렸다. “오늘 좀 예쁘다? 좀 여자 같은데?” ‥하. 실소가 절로 나오는 녀석의 발언에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고서는 녀석의 말을 되 받아쳐주었다. “새끼야, 이제 알았냐? 그리고 나 원래 여자였어. ” 라고 말이다. 그러니 녀석들 ( 문 틈사이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권강재의 친구들을 포함하여 ), ‘으어어어억-!’ 하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내며 아주 기절하려고 든다. 내 말에 동감해서 그런 건지, 혹은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차연우의 똥 씹은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 쪽이 좀 더 맞는 듯 하다. 흥. 그래도 어디 나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는 안 듣거든? 물론 집에서는 듣는다. 이향원, 씹새한테. “잘가라.” 하지만, 역시나 소꿉친구는 다르다고-! 미소를 지어보이며 인사를 건네는 권강재. 정말 녀석 밖에 없다. 녀석을 향해 살짝 웃어보이고서는 현관문을 나서려 하는데 저 멀리서 강희가 달려온다. 손을 뻗으면서 말이다. “언니이-!!!!!!!” 날 붙잡는 강희의 애절한 목소리에 현관문을 나서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강희를 바라보았고, 강희는 숨을 헉헉대며 내 어깨를 붙잡는다. 저기서 뛰어온 거 가지고 헉헉대기는, 역시 넌 생긴 모습만큼이나 운동 부족이야. 연약한 기집애가 운동도 안하니 저기서 여기까지 뛰는데 헉헉거리지. “제, 제‥.” “제?” “‥모자 주시고 가야죠. 헉, 헉‥.” ‥아, 예. “언니, 그럼 나중에 또 뵈요.” 모자를 건네받은 강희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왠지 모르지만 난 권강희가 무섭다, 그 것도 아주 미치도록. 이 아이에게서는 알 수 없는 포스가 흐른 다랄까. 여튼 뭐, 그냥 그렇다고. 권강재 집을 나와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할 때,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 진동음이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을 보니 문자가 와 있다. 그것도 권강재 번호로 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폴더를 열어 문자함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한 순간. 현관문 옆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말 그대로,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예쁘다고 하니까 좋아하기는. - 권깡 ] * * * 열두 달 중 2월이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말 눈 깜짝할 세 2월이 지나가고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의 아침이 밝아왔다. 집에서 좀 노닥이다가, 공부 좀 하다가, 김혜미 좀 갈구다가, 티비 좀 보다가, 잠 좀 잔 게 전부 인 것 같은데. 벌써 3월이라니, 벌써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수업을 받아야 한다니. 내 황금 같은 방학이 벌써 끝나버렸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초등학생 때로. 하루 종일 놀아도 구박 받지 않던 그 때로. 벌써 2학년이라니 정말 너무 하잖아. 17년 인생이 이렇게 눈 깜박할 세에 지나가 버릴 수가. 눈앞이 깜깜하다. 하지만 더욱 더 눈앞이 깜깜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뭐냐고? 1학년 때와는 달리 순탄하게 보내길 바랐던 내 2학년 생활이 말이야. “어째서!” 왜! “너랑!” 내가 , “같은 반이냐고, 차연우-!!!” 그랬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내가, 언제나 조용하길 바라는 내 인생이 2학년 새 학기 첫 시작부터 아주 꼬일 때로 꼬여버렸다. 2학년 5반에 배정 받은 나는 새 학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다짐하면서 얼굴에 경련이 금방이라도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은 미소를 방긋 지어보이며 교실 문을 열었다. 헌데, 어째서 교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삭제하고 싶은 녀석의 얼굴이냐고. 도대체 어때서! “나도 불쾌해.” “난 너보다 딱 30배 더 불쾌해. 내 앞에 나타나지 말랬잖아!” “꼬우면 반 배정 해준 선생들을 원망해. 내가 이렇게 배정해달라고 했어? 왜 나한테 와서 아침부터 신경질이야!? 졸려 죽겠으니까 좀 꺼져!” 아 나…, 그렇지. 네 녀석 잘못이 아니지. 잘못이 있다면 너와 나를 같은 반으로 배정해 준 선생님의 잘 못이잖아? 하지만 어쩜 배정해줘도 이렇게 배정해주냐고. 차라리 김혜미랑 같은 반 할래. 아, 아니 권강재랑 할게. 차라리 그게 낫겠어! 아침에 보니까 김혜미랑 권강재랑 같은 반으로 들어가던데. 바꾸자고 그럴까? 안되나? 안되겠지? 아 , 정말 제길스럽다. “자자, 다들 조용하고 앉아!”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때 마침 2학년 5반에 배정받으신 담인 선생님께서 반으로 들어오셨다. 이미 책상 위로 엎드린 차연우 앞에서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서 있는 난,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시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선생님은 칠판 위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시고서는 아이들을 향해 짧은 인사를 건네셨다. “반갑다. 이번에 너희들과 함께 1년을 보내게 될 김한석 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체육을 맡고 있으니, 체육시간에 자주 보게 될 거다. 참고로 난 지각하는 건 용서 못한다. 지각하는 즉시, 그 날 수업은 물 건너갔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겠지?” 잔뜩- 겁이란 겁은 심어 줘놓고서는 마지막에 ‘알겠지?’ 하고 배시시 웃는 건 또 뭐람. 정말 이 학교에 정상적인 선생님은 하나도 없다. 대표적으로‥, 아‥. 말하고 싶지 않아, 젠장. 기분 상했다, 제길. 새 학기부터 그 자식을 떠올리다니. “자, 그럼 예비 반장을 뽑아볼까. 음, 그래. 이 향미?” 아, 구려구려. 개구려. 고구려도 아닌 개구려. 정말. “이 향미?” 휴. 오늘은 학교 끝나고 김혜미랑 오락실에 들려서 오락이라도 한판 해야‥, 아!! 턱을 괸 채, 창 밖을 바라보며 궁시렁 거리고 있는데, 머리를 강하게 내려치는 둔탁한 손 하나. 손을 타고 시선을 옮기니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차연우가 있었으니. “너 나 때렸냐? 어? 지금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작고 , 작은 머리를 때린 거 맞아?” “너 부르잖아, 멍청아.” “뭐?” 눈썹을 꿈틀거리며 ‘ 뭐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손가락으로 칠판 앞을 가리킨다. 그제야 나는 시선을 칠판 앞으로 옮겼고,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벌써 다섯 번째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 “대답이 참 느리구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선생님의 표정에 멋쩍게 웃어 보이며 대답하자, 선생님은 날 부른 용건을 말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그 용건이라는 게 참‥, 정말 구미 안 당기는‥. “꼭 제가 해야 해요?” “해본 사람이 해야 더 낫다고, 작년에 1학년7반 반장이었다고 여기 나와 있네.”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작년에 반장 해봤었다고, 또 시키는 건 억지 아닌가요?” “아, 그래? 그럼 여기 반장하고 싶은 사람?” 어깨를 으쓱이며,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 즉 하고 싶은 생각 없다는 것. 진짜, 이게 뭐냐고! 싫어, 싫다고! 반장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 알면서 나 시키는 거 아냐? 나 첫인상이 안 좋았나? 나한테 감정 있는 건가? 아, 싫다고! “아무도 없네. 그럼 선생님이 널 추천했으니, 자연적으로 네가 임시 반장을 맡도록. 어차피 다음주에 반장선거 하니까 그 때까지만 수고 해주면 돼.” 라며 빙긋 웃어 보이는 선생님의 얼굴을 정말, 진심으로 한대만 때려주고 싶다. 아니면 볼이라도 잡아 당겨 봐도 괜찮은데. 하아. 제 경험상 거의 100발 100중 임시 반장했던 아이가, 대부분 반장이 된다고요. 그걸 알고도 그런 말씀 하시는 거냐고요. “자, 그럼 반장 건은 해결 됐고. 아참참, 여기 동아리 안 든 사람?” 선생님의 질문에 반장 건 때문에 모든 걸 다 포기했다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채 손을 들은 나. 헌데…, 왜 나 밖에 없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아도 손을 든 사람은 나 밖에 없다. 헐랭, 우리 반 뭐야. 다 든 거야, 동아리?! 라고 생각하며, 잠자고 있는 차연우의 팔뚝지를 쿡쿡 찌르며 녀석을 깨웠다. “아, 또 뭔데?” “너 동아리 들었어?” “귀찮게 그걸 왜 들어?” 라며 또 다시 엎어지는 차연우. 너 진짜 잠 많구나. 김혜미 못지않게 잠이 많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나는 선생님을 부르며, 옆에 차연우도 동아리를 들지 않았다고 대신 전하였다. 원래 그런 과잉친절을 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나 혼자 안 들었다고 손을 드니 괜스레 쪽팔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에 2학년에 올라오신 영어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 선생님께서 부서 하나를 만드셨다. 부서 소개란을 보면, 스터디 그룹, English 클래스, 등등 써 있는 것을 보면 학업에 관한 부서 인 것 같은데. 들 생각 있어? 없으면 다른 반 넘겨주고.” 스터디 그룹? 영어?…, 최근에 다니던 학원을 끊고, 마침 학원 아니면 과외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스터디 그룹이라. 왠지 나와 맞는 부서 같다. 학교 끝나고 방과 후, 공부도 할 수 있고. “선생님, 저 할게요.” 손을 번쩍 들며 그 부서에 들어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원래 동아리하면 질색하던 나였다. 방과 후면 즉시 집 혹은 학원으로 가 수업을 받거나 공부를 하던 나이기 때문에 동아리는 내게 불필요했다. 하지만 뭐, 공부에 관련된 동아리라면 상관없겠지. 하고 생각 한 순간 옆에 엎어져 있는 차연우의 모습이 보인다. 권강재의 친구라면 너도 공부를 그다지 잘하진 않겠지? 지금 하는 꼬락서니를 봐서는 더더욱 성적이 좋아 뵈이질 않는다. 권강재는 그럭저럭 중상위권을 유지한다 쳐도, 적어도 넌 하위권에서 맴돌 것 같다는 느낌이란 말이야? … 딱 걸렸어. “선생님! 차연우도 들어간 데요!” 보통, 이런 아이들이 공부하면 질색하고, 성적하면 헉 하곤 하지. 뭐, 너도 마찬가지겠지? 잘도 날 도둑년이라고 욕보였겠다. 말도 안 되는 스토커라고 계속 지랄했겠다. 어디 너도 한번 잘 해봐라. 성적 올라 봐. 다 내 덕분인 줄 알아라. 이 변태 자식아! 라는 심산으로 차연우의 손을 억지로 들며 선생님을 향해 외치자, 선생님께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시고서는 내 이름과 차연우의 이름을 종이에 적으셨다. “소수의 인원만 모집한다고 한다. 너희 두 명이 신청한다고 해도 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 점심시간에 게시판에 명단 자 붙여주신다고 하니까 알아서 확인하도록.” “네~.” 게시판을 보며 절규할 차연우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솔직히 이 정도는 약과다. 도둑년에, 스토커로 몰아간 녀석인데. 뭐 그리고 명단 자에 안 올라갈지도 모르잖아? 아, 근데 나는 정말 올라가야 하는 대. 정말 나랑 딱 어울리는 동아리인대. 휴. … 라고 생각한 지 3시간도 미처 지나지 않았다. 3시간이 지난 후, 게시판 앞에서 절규하고 있는 사람이 차연우가 아닌 나 일거라고는, 그 단시간 동안 내게 커다란 심리적 변화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동아리에 들게 된 것을 미치도록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3시간 동안의 각 과목 담당 선생님의 지겨운 소개와, 앞으로의 진도에 관한 설명이 끝났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밥을 먹으려 잠에서 깬 차연우를 억지로 이끌고 복도 중앙에 위치한 게시판으로 향했다. 분명 그 곳에는 차연우의 이름이 붙어있겠지? 우리 학교의 전통상 1학년 때, 동아리를 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2,3학년들 중 동아리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기에 붙을 확률이 크다. ( 물론 이 사실은 수학 시간에 주어진 자습시간에 사귄 친구가 말해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연우 자식의 절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녀석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것. “아, 진짜 왜 끌고 오는데? 배고파 죽겠는대.” “내가 너와 친해지자는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선물? 네 표정을 봐서는 영~ 받고 싶지 않다?” 눈치하나는 빠른 새끼. “아냐, 너도 나에게 감사할거야. 물론 지금 당장 감사하는 게 아니라 중간고사가 끝날 때 쯤 감사하겠지만.” “중간고사? 무슨 소리야? 나 공부채질 아니어서 어차피 다 찍고 자거든? 헛소리 하려거든, 날, 반으로 곱게 옮겨다 놓고 가.” 역시. 넌 공부와는 담을 쌓는 아이였어.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군. “널 위해, 내가 네가 자는 사이 같이 동아리를 하나 들었어.” “동아리?” “응. 동아리. 이번에 새로 생긴 동아리라는데, 너 동아리 안 들었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너 진짜 내 스토커야?” … 얜 자다가 한 말들은 다 기억 못하는 구나. 그렇구나. 제기랄. 권강재 이 미친 자식. 친구를 이 따위로 사귀다니. 제발 정상적인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애 좀 사귀라고! “…네가 아까 자다가 말해줬거든? 여튼 동아리 합격 명단 자를 게시판에 실어준다고 했으니까. 바 봐.” “무슨 동아린데. 병신 같은 동아리면 여기서 넌 세상 다 산 줄 알아라.” 이상하게도 그 동아리의 정체를 말하면 나 여기서 오늘 집으로 못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스터디 그룹.” “…뭐?” “영어 공부하는 동아리.” “…다시 한번. 뭐?” “성적 올리는 동아리.” 라고 말 한 순간 차연우의 두 주먹이 꽉 쥐어지며 미간이 팍 찌푸려진다. 그리고서는 … 이따구로 지껄인다. “죽을래, 디질래, 쳐 맞을래. 특별히 여자니까 고르게 해준다.” “…헐.” “3초 동안 시간 준다. 삼…, 이…,” 지금 나보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라는 거야? 그럼 당연히…. “특별히 여자니까 가만히 두는 건 어때?” “내가 골라줄까? 그러길 바래?” 제길스럽네, 정말. “자, 잠깐만. 아, 주먹 좀 내려!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야! 명단 자 붙인다고 했다고! 안 붙었을 수도 있잖아! 그냥 장난 좀 친 건대, 왜 그렇게 살벌하게 구는 건데?” “난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공부고, 제일 꼴도 보기 싫은 것도 공부고, 나와 제일 안 친한 것도 공부고, 세상에서 한 가지를 없앨 수만 있다면 공부를 선택 할 거야. …너 담을 쌓은 게 아니라 성을 쌓았구나. “어찌됐건!! 네가 안 될 수도 있다니까, 그건 게시판부터 보고 말을 하자. 어? 그래도 안 늦거든?” “내 이름 석자가 저기에 박혀 있는 그 순간 넌 각오해야 될 거다.” 협박어린 녀석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서는 게시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헌데, 나보다 먼저 게시판에 쓰인 명단 자를 본 건지, 두 주먹을 다시 꽉 쥔다. 제기랄 넌 뽑혔나 보구나. 난 인제 죽었다. 라고 생각하며 게시판에 쓰인 명단 자를 본 순간 온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거짓말.” “너도 안 믿기지? 권강재, 김혜미, 이향미, 차연우. 추가로 1학년 모집? 너 나랑 장난 치냐?” “…밑에 이름 좀 읽어줄래?” “뭔 이름? 말 돌리지 말고 어떻게 책임질 건지 한 번 한 줄로 읊어봐라. 엉?” “담당선생님 이름 읽어보라고, 이 씹새야!!.” 젠장, 거짓말이지? 이거 거짓말 맞지? 내가 잘 못 보고 있는 거 맞지?! “담당 선생님, 신 재원. 이상 있는 분은 교무실로 신 재원 선생님을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아, 젠장, 난 이상이 있다고!” “하, 젠장.” “그치? 정말 젠장 맞지?” 왜, 하필 당신이야. 왜 하필 신재원 당신이냐고!! 03 “…이건, 반칙이야!” 무조건 교무실로 뛰어갔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뒤에서 꽥꽥 오리마냥 소리치는 차연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냥 말이다. 교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앞에 서 있던 1학년 담당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신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셨다. 어쩜 저렇게 동그랗게 떠도 눈이 저 정도 밖에 떠지질 않는 걸까? 아,참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1학년 담당 선생님께 신재원 선생님께서 어디 가셨는지 묻자, 선생님께서는 교무실 한 쪽에 위치한 복사기 쪽을 가리켰다.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는 한 달 만에 보는 그 남자가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두 주먹을 꽉 쥔 채, 성큼성큼 신재원, 그 사람을 향해서 걸어갔다. 딱 삼십 걸음을 걷자, 그 사람 앞에 멈출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뒤 늦게 날 발견하더니 환하게 웃는다. 속 타는 내 심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랜만이네, 향미?” 그래, 저 말투.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저 말투. 언제나 학생 대하듯, 어린아이 대하듯 말하는 저 말투! “어떻게 된 거예요.” “응? 뭐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빙긋, 빙긋 웃는 저 남자, 저 사람! 내 심정은 알고 저렇게 웃는 걸까? 약속했으면서, 내 마음을 거절한 그 순간 나와 약속했으면서. 다시는 엮이지 않도록 주의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면서, 어째서 날 뽑은 거지? “알면서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끄럽다, 향미야.” …하아. 왜 항상 당신은 그렇게 웃는 거야? 그렇게 웃으면 내가 당신 말을 들어줄 것 같아서? 그 때 처럼 포기하고 뒤 돌아설 것 같아서? 그래서 항상 내 앞에서, 아니 그렇게 자신이 불리할 때 웃는 거야? “ 시끄럽거든, 빨리 설명해주시고 보내세요. 도대체 왜 날 뽑으신 거예요? 그렇게 약속하셨으면서, 왜 절 뽑으신 거냐고요!” “시끄럽다. 너무 시끄럽다, 향미야. 우리 나가서 얘기할까?” “뭐라고요? 아, 아 밀지 마요! 밀지 말라고요! 여기서 말해도 난 상관없다니…, 밀지 말라고요!” 싱글벙글 웃으며 내 등을 밀며 교무실 밖으로 날 이끄는 저 사람. 이렇게 내가 소리칠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인 걸 알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신재원, …선생님. 난 그런 당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언제나 어른인 것냥, 날 이해해주는 척, 감싸주는 척 하는 거 정말 싫었어. 차라리 내가 당신을 곤란하게 할 때면 소리를 쳐, 제발! 화를 내! 인간 대 인간으로써 대하는 것처럼! 제발…, 날 학생 대하듯 하지 말란 말이야. 교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복도 끝, 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날 바라보며 왜 찾아왔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나 소리치려 하는데. 그 . 순. 간 갑자기 저 복도 끝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남학생 한명. 이 우렁찬 목소리하며, 간간히 들려오는 욕설하며. 눈 감아도 알겠다. 차연우. “이 결정 반대요!!!!!!!!!!!!!!” 이 결혼 반대요-! 도 아니고, 이 결정 반대요? 어디 본 건 있어가지고 폼 잡기는. 너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애가 그런 소리, 그런 말투 하면 상당히 코믹프로그램 못지않게 웃기다 는 거. 넌 알고 있니? 아마 모르겠지? 모르니까 저러는 거겠지.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정말. “…하, 하아. 미치겠네. 아, 숨차. 선생님!!! 이건 안돼요!” “응? 뭘?” 또, 웃으면서 말한다. 아, 이제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제 인생 공부를 한 적이라고는 초등학교 시절, 그 것도 덧셈까지 밖에 안 배운 몸이 구요. 영어라고는 에프 유 씨 케이, 와이 오 유. 딸랑 이거 밖에 모르는 애에요. 물론 하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긴 하지만요.” 에프 유 씨 케이 와이 오 유…. 뻐큐…?. 미친 놈. “응. 그래서?” “전 스터디 그룹인가 몬가 하는 그 공부하는 동아리에 들어도 어차피 공부 같은 건 하지도 않고요. 할 생각도 없어요.” “응?” “그러니까 여기요.” 차연우는 주머니에서 뭔가 꼼지락, 꼼지락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선생님을 향해 내민다. 글씨가 개발 새발인 것을 보니, 아마도 금방, 막 써가지고 온 모양인 듯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앞에 큼지막하게 써 있는 글씨.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지? “이게 뭐야?” 역시나 싱글벙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차연우를 향해서 묻는 선생님. 그러자 차연우는 당당하게 지입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 또박 , 종이에 적혀 있는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사직서인데요.” …퇴부서겠지, 미친 놈. 영어뿐 만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모국어도 못하는 구만, 이거. 심각해, 정말 심각해. “싫어. 안 받을래.” 그럴 줄 알았다.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단호히 거부하는 선생님. 뭐,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항상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 반복 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래, 사실은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하셨냐고 소리를 치고 난리를 쳐도 바뀌는 없다는 거. 그거 어쩌면 알면서도 난…, 난… 이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왜요!” “사유가 적절하지 않으니까. 우리 동아리는 스터디 그룹 따위가 아니니까. 그 것보다 더 근사한 동아리거든!” 그래서… 어? 뭐? 잠만, 뭐? 잠시만, 뭐라고?! “그럼요? 어떤 일을 하는 근사한 동아리인데요?” “학교를 위해 봉사하는 부서야.” 두 주먹 불끈 쥐며 당당히 말하는 저 모습. 뭐? 학교를 위해 봉사? 설마…, 당신 또. 교생 때처럼…. “또 잡일 맡으셨어요!?” 봉사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내가 소리치며 묻자, 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이는 저 남자. 아악-!!!!!!!! 미쳤어!! 미쳤다고! 저 사람은 뇌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해! 교생 때도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 교생 생활을 보내고, 1학년 때도 제일 어린 선생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잡일을 다 맡아서 하더니, 이번에는 잡일을 하는 부서를 만들어!? 미친 거 아니야!? 게다가 그 부서에 날, 날?! 지금 날 작년 1년 가지고도 모자라서…, 앞으로 남은 2년도 같이 잡일을 시키겠다는 거야?! “일이 없을 때는 놀아도 되고, 자도 돼. 축제 때는 할 일 없으니까 푹 쉬어도 되고, 밤 샐 일 없고. 좋지, 연우야?” 싫다고 해, 싫다고 해. 제발 싫다고 해줘, 차연우. 하지만, 녀석은 분명 나와 전생에 왠수를 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 적으로 좋아하진 않을 테니까! “네. 좋아요. 제가 원하던 부서였어요. 사랑해요, 쌤.” 하고 안기는 꼴 하며…. 넌 천성적으로 내 왠수인게 분명해. 왠수 덩어리. 아주 커다랗고,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왠수 덩어리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즉. 내 꾀에, 내가 당한 거 맞지? 차연우 골탕 먹이려다가 오히려 내가 골탕 먹은 것 맞지? 하아. 미치겠다. “…잠깐만!” 지금, 저 신재원, 저 남자… 그러니까 저 선생님이 동아리 담당인 것이 문제가 아니다. 고1때부터 좋은 대학교를 가서 호위호강하며 살기위해 죽도록 공부해온 나이다. 시험기간에 돌입하면, 티비? 아예 전기선을 빼서 땅속에 묻어버린다. 컴퓨터? 모니터를 이향원 학교 사물함에 넣고 문 잠가버리고 시험 끝난 다음 가져오기를 반복한다. 그런 나에게 동아리…, 그 것도 학교 잡일이나 담당하는 동아리 따위를 들라고 하는 거야? 공부 동아리가 아니고, 잡일 동아리를?! 장난쳐, 지금?! “나 안 들어갈래요. 나 안 들어가요! 절대 안 들어간다고요!” “왜?” 왜? 지금 왜라고 하셨어요? 지금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내게 '왜' 라고 물으셨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난, 향미가 내 일 도와주는 게 편하고 좋은데.” …내가 싫다구요. 내가! “향미가 좋아하는 볶음밥도 해줄 수 있는데.” 파프리카 50% 이상 함유된 볶음밥 따위!!! “…싫어?” … 젠장. 그래, 2년 전 부터 당신은 그랬어. 그 때부터 내가 싫다고 말할 때면 항상 그렇게 웃으면서 날 흔들어 놓았어. 밥알갱이는 보이지도 않고, 오색찬란한 파프리카만 숭숭 썰어 볶아놓은 볶음밥을 내밀며 먹어보라고 할 때도, 그 웃음 때문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싹싹 긁어 먹었던 나였어. 시험 하루 전날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밤새 남아 프린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 웃으면서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당신의 그 웃음 때문에 나는 집으로 옮기려던 발걸음을 되돌려 당신과 밤새 그 프린트를 정리했어…. 이번에도 그 웃음 때문에…, 그 웃음 때문에…, 난. “…알았어요.” 또 허락해버리고 말아. 그리고 분명 이 사실을 알게 된 권강재는 내게 고래, 고래 잔소리를 퍼부을 것이고, 난… 귀찮다며 외면하겠지.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날 학생으로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난 또 이 날의 선택을 후회하겠지.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 이제는 당연하게 되어버린… 그와 나의 관계.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들. 언제쯤이면 그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 * * 그렇게 하여, 모든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동아리 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부디, 부실만이라도 좋은 곳이길 바라며 한참을 걷는데, 저 멀리서 발을 복도 벽에 지탱한 채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밀고 있는 김혜미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아, 왠지 다가가기 싫어진다. 저 곳을 지나가고 싶지 않아. 다른 길은 없나? “…향미야아아-!!!!!!!!!!” 제길. 결국 걸렸구나. 저 멀리서 김혜미의 목소리가 복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린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 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김혜미의 앞으로 다가서자, 어이없는 녀석의 모습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너, 뭐하냐?” “문이 안 열려! 문이 열리지 않아!” …미친 여자라고는 차마 친구라서 말해줄 수가 없겠구나. 나 참, 그 문이 네 눈에는 옆으로 미는 미닫이문으로 보이니? 도대체가 말이야. 밀고 당기는 문을!!… 벽에 발을 지탱한 채 손으로 잡아당기면 문이 열리냐!!! 그러다가 벽이 부서지겠다!! 벽이! “비켜, 멍청아.” 김혜미가 내 말에 살짝 비켜나가자, 나는 후우-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문고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서는 순식간에 찰칵-하고 문을 열고서는 재빠르게 발로 뻥- 하고 문을 걷어차 주었다. 쾅-!!!!!!!!!!!!!. 그 여파로, 부실 안 쪽 벽과 크게 마찰하는 문. 옆에서 김혜미는 뻘쭘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친다. “넌, 진짜 바보야. 내 주변에서 너만큼 바보는 없을 거야.” 혀를 끌끌 차주며 부실 안으로 발을 들어서려 하는데, 이번에는 누군가의 손이 내 뒷덜미를 덥석 잡는다. 아, 씨발. 부실 한번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따기냐? 또 뭐야!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데. 젠장…. 권강재, 금세 달려왔구나. “네가 여길 왜 들어가?” 아, 시작됐어. 또 잔소리가 시작된 거야. 나는 또 고개를 푹 숙인 채 녀석의 말을 경청해야겠지. 우리 엄마도 쟤보다는 잔소리 많이 안 할 거다. 아, 제기랄. “야, 김혜미 너 잠깐만 사라져 봐.” “어?” 이를 꽉-물고서는 김혜미에게 잠시 저리 가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서는 계단 쪽으로 모습을 감춘다. 김혜미가 사라지자, 나는 '뭐, 어쩌라고?' 라는 듯한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내가 기가 막혀 뒷골이 당기는 지, 뒷목을 잡으며 숨을 내쉰다. “그렇게 차이고도 정신 못 차리냐, 이향미?” “뭐라고?” “너, 여자가 자존심도 없냐?” “없다면?” “차이고, 또 차이고. 네가 공이냐?” 정곡 찌르지 말란 말이야.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차이고, 또 차이고 가 뭐냐…. 누가 보면 맨날 차이는 인생인 줄 알겠다. 정말 내가 공인 줄 알겠다, 인마. “좀…, 나 좀 내버려두면 안 돼? 왜 네가 간섭하는 건데?”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 한다. 내가 왜 권강재한테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하는 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네가 뭐라고. “처음에는 나도 몰랐거든? 그 사람이 여기 담당인거 모르고 지원했어. 너도 알 것 아냐. 그 사람, 절대 자기가 한 선택 바꾸는 일 없다는 거. 그래서 2년이 넘도록 뒤는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거. 어차피 내가 이 부서 안 들어간다고 생난리를 폈다고 해도, 서류는 이미 교장인가 , 교감인가 하는 사람들한테 올라갔을 것이고, 결정을 반복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근데, 내가 뭣 하러 힘을 빼? 그냥 하면 되는데?” “그 것 때문에 너 여기 있겠다는 거 아니잖아. 내 말이 틀리냐?” “그러니까, 네가 뭔 참견이냐고!! 그렇게 참견해달라고, 위로 좀 해달라고 광고를 했을 때는 너. 네 친구들이랑 술퍼 마시면서 싸돌아다녔어. 알아? 근데 이제는 관심 좀 꺼달라니까 왜 지랄이냐고!” “왜 지랄이냐고? 왜 이러냐고, 지금?” 그래. 네가 왜 과민반응을 하며, 왜 나에게 화를 내고, 왜 내가 너의 잔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하는 지 조리 있게 한 번 설명해 봐. 눈을 치켜뜨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정말로 화가 난 건지, 크게 숨을 들어 내쉬더니 날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화를 냈다. “네가 지금까지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소개시켜줬던 내 친구들은 네 장난감이냐?!!! 열명도 넘는 그 새끼들은 어쩌라고!” “내가 찼어? 걔들이 찼지. 피해자는 나거덩?” 한 때, 내 첫 사랑 아닌, 첫 사랑을 잊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어 녀석에게 수도 없이 부탁했었다. 남자 좀 소개시켜 달라고. 남자라면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던 내가 녀석에게 그러한 부탁을 했었다. 녀석은 알겠다며 지 주변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기 시작했고, 나는 거의 한달에 두세 번 꼴로 소개를 받았다. 물론 소개를 받으면 그 날, 그 즉시 사귀게 되었고, 사귀게 된 날로부터 열흘도 되지 않아서 헤어지기 일 수 였다. 내가 깼냐고? 절대 아니다. 아까 권강재가 한 말 못 들었는가? 차이고, 또 차이냐고. “너랑 사귈 때 진심이었던 내 친구들 많다, 이향미?” “아, 그러셔? 근데 나는 그걸 못 느꼈는데. 그리고 그 쪽이 진심이든, 말든 헤어지자고 한 건 그 쪽이라니까? 너 왜 자꾸 날 나쁜 년으로 만들어?” “네가 헤어지자고 말하라고 협박했잖아!” …아, 젠장. 시키건, 말건. 한건 그 쪽이고, 당한 건 나잖아! “솔직히 그 협박에 넘어간 그 것들이 병신이지, 내가 나쁜 년이고, 못된 년이야?” “…주전자 높이 치켜들고 던질 기세로 협박하는데, 그럼 안하냐?” …히밤. “휴,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다시 예전사이로 돌아가서 술 마시고 떠들고 노는 걔네들한테 가서 다시 사귀자. 이래? 이럴까? 아니면, 미안합니다. 하고 무릎 꿇고 올까? 그리고 그 다음 날 쌩까? 그걸 네가 바라고 나한테 말하는 거면, 그렇게 할게. 까짓것 그거 하나 못하겠어?” “야, 이향미.” “그만하자. 너도 자꾸 그 사람일로 나한테 소리치고 그러는 거 지긋, 지긋하지 않아? 나도 지긋, 지긋 해. 그냥… 잊어지기 전까지만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네가 사고를 작작 쳤어야지.” …이 새끼를 그냥. 자꾸 내 성질을 조금씩 긁어내려고 하고 있네, 이게? “너, 어렸을 때부터 나 알고 자랐잖아. 나 어떤 애인지 알잖아. 나, 남자라고는 아웃오브관심이었던 사람이야. 근데, 처음이야. 처음이었어. 그래서… 잊기엔 너무 힘들어. 시간이 많이 필요해. 근데, 시간 가지고는 안돼. 할 건 다 해봐야 하잖아.” “그래서, 들어가겠다고?” “어. 옆에 있으면 언젠가 잊혀지겠지. 내 스스로가 인정할 날이 오겠지. 학생, 선생님. 그 이상으로는 발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근데, 지금은 그걸 못 인정하겠어. 머리는 인정하겠다는데, 이 몸이 말을 안 듣네. 이제 됐지? 그만 들어가자.” 권강재의 어깨를 달래듯 두어 번 툭툭 쳐준 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부실 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내 시선이 책상 위에 닿은 순간 똥 씹은 뭐 마냥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서는 바닥에 가방을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씨발, 이 머저리 같은 선생!!!!!!!!!!!!!!!!” 저 책상위에 쌓인 수많은 프린트들은 도대체 뭐냐고!!!!!!!!!!!!!!! 결국, 나는 이 머저리같은 동아리에 든지 하루도 안되서 미치도록 후회를 하고야 말았다. 아주 미.치.도.록. * * * 정확히 3시간 후, 산더미 같이 쌓여 있던 종이들이 내 눈에서 모두 사라진 그 순간. 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껴안고 귀가 할 수 있었다. 이 놈의 선생 같지도 않은 선생은 '잘 부탁해.' 라고 싱글벙글 웃으며 한 마디 남겨둔 채 어디로 사라진 건지, 프린트 정리를 끝낼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김혜미부터 시작해서… 배가 아프다며 사라지고, 권강재는 기분이 조…, 조,좇 같다며 가버리고. 게다가 남은 것, 사람도 아닌 것이라고는! 차연우 딸랑 하나. 그런데, 그 녀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퍼 자고 있더라. 그래서 어쨌냐고? 프린트가 다 사라질 때까지도 퍼 자고 있기에 걍 버려두고 왔다. 헌데, 나 혼자 그 많은 프린트를 정리하기는 역시나 무리였던 것인지 온 몸이 쑤신다. 오죽하면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문 열 힘도 없을까. “문 열어…, 이향원.” 힘없으니까, 제발 소리치게 만들지 말고 제발 문 열어…. 쾅…. 쾅….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으니까, 문을 두드리는 속도 또한 매우 느리다. “…문…, 좀 제발 열어-, 이향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제야 우당탕탕- 하는 알 수 없는 소음이, 집 안에서 들려오더니. 잠시 후, 철컥, 척. 철컥. 하고 빠르게 문이 열린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밖으로 딸려 나오는 이향원. 근데… 너. “…우리 집이 언제 찜질 방이 됐냐.” 왜…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니? 네 얼굴에서 줄줄 흐르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액체는… 꿀이 맞니?…. 04 설마, 너 그 꿀로…. “너 팩 했어!?” “그건 좀 있다가 묻지? 추워 뒈질 것 같거든? 안 들어오냐?” 아, 예…. 좀 더 시간을 끌며, 녀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녀석,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더 있고 싶었지만 그건 누나로써의 도리가 아닌 것 같기에 냉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내 몸 상태도 꼴이 아니니 말이다. “일찍 좀 쳐 다녀. 가시나가 어딜 그렇게 나대고 다니냐?” “조용히 해라? 너, 먹는 거 가지고 얼굴에 쳐 발랐다고 엄마한테 이른다.” “해. 그 딴 협박 따위 내가 먹힐 줄 아냐? 넌, 여자가 꾸밀 줄을 모르냐? 요즘은 여자고, 남자고 다 피부 관리가 필요한 거 몰라?” “이게 또 지랄하네.” “이햐, 피부 봐라. 썩었네?” …저 씹새를 그냥-!!!!! 가방을 높이 치켜들어 던질 자세를 취하자, 녀석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바로 휙- 돌아 화장실로 달려간다. 수건을 움켜쥐고 뛰는 폼이 말이 아니다. 저걸 사내새끼라고. “…아, 피곤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책상위에 대충 던져 놓고 바로 침대위로 엎어졌다. 일어설 힘도 없다. 배고픈데 부엌까지 걸어갈 힘도 없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도대체… 이렇게 귀찮은 일은 왜 맡아가지고. 바보 같은 사람. 2년 전인가, 그 때도 이렇게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을 때 선생님이 먹으라고 볶음밥 해줬었는데…. ‘이게 뭐예요?’ ‘신재원표 볶음밥. 휴게실에 재료가 이거 밖에 없었어. 그래도 맛있을 거야.’ 히죽, 히죽 웃으면서 밥그릇을 내게 내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볶음밥…진짜…. “맛없었는데.” 그런 볶음밥은 세상에서 처음 봤다. 밥알이 보이지 않았다.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을 가진 잘게 썰린 파프리카만 보일 뿐. 어디에도 흰색 밥 알갱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는 모습에… 그만 눈이 멀어 한 입, 그리고 한 입 먹다보니 어느 덧 그릇은 비워져 있었지. 그리고 난 그 날 밤새 토악질을 했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 제길. “권강재 많이 화났으려나?” 문뜩 아까 불같이 화를 내던 권강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자식 삐지면 오래가는데. 아, 또 내가 문자 한통 해줘야 풀리겠지? 아까 내가 말이 좀 심하긴 했어. 교복 주머니에 꼼지락, 꼼지락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빠르게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모티콘을 넣어주는 마지막 센스를 날리며 문자 전송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 ㄴ] “니은? 니은?!” 문자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고, 신호음이 두어 번 가더니 녀석의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딱딱한 것을 보니, 아직 화가 누그러들지 않은 것 같다. 꽤나 오래가겠군. “아직도 화났어?” [-어.] …니은, 그거… 노, 그러니까 no를 뜻하는 거 아니었니? 제길. 어떻게 물어보자마자 바로 ‘어.’라고 대답할 수가 있냐. 물어보는 사람 무안하게. 괜히 미안해지게…. “어떻게 하면 화 풀 건데?” [-필요 없어.] 얼…, 짜식 세게 나오네? “빨랑빨랑 말해라? 나 뒤끝 있는 사람 진짜 싫어하는 거 알지. 오늘 안에 풀자. 우리사이에 삐지고 그러는 거 웃기잖아.” [-부탁하는 거 다 들어줄 거냐?] “응. 지금 가능한 거라면.” [-그럼…, 아, 씨발 건드리지 마! 아프다고 새끼들아!!! 알았다고! 그렇게 할 테니까 꺼져! ] 엥? 건드리지 마? 아프다고 새끼들아?…, 설마, 너희 오늘도…. [-치킨 두 마리 사가지고 우리 집으로 건너 와. 빨리 와라.] 미처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뚝- 하고 끊긴 전화. 그제야 나는 상황파악이 됐고, 저 자식이 나에게 뭘 부탁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치킨 두 마리. 요즘 물가가 비싸서 한 마리에 만원도 넘게 하는 그 치킨. 그 치킨을 지금 나보고, 이 시각에 두 마리씩이나 사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건너오라는 권강재. 게다가, 전화기 안 쪽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혼자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 아니, 누군가가 아닌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 사갈 수도 없고…, 피곤해 죽겠는데. 아, 짜증나!”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책상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비상금이 들어있는 지갑을 꺼내었다. 용돈을 받아봤자 쓸 때라고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스트레스를 풀어보고자 친구들과 함께 가던 술집이 고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쌓아두고 있던 비상금은 많았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치킨 사주려고 모아두었던 돈은 아니란 말이다! “때려 줄 수도 없고, 진짜.” 이를 악 문 채 집을 나와, 집 근처에 위치한 치킨 집으로 향했다. 맛은 엄청 맛있다! 정도는 아니고, 그냥 먹을 만 하네, 정도이다. 그런데 왜 그 곳으로 가냐고? 가까워서?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아줌마! 한 마리 사면, 한 마리 더 주시는 거 맞죠? 저거 진짜죠?” “향미는 매일 올 때마다 묻더라. 네가 여기서 사간 적이 한두 번이니? 뭘, 올 때 마다 물어~.” 인자 하신 아주머니. 매번 이 곳에 방문할 때마다 묻는 나의 질문에 항상 친절하게 대답해주신다. 내가 이 집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한 마리를 사면 한 마리를 더 주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하시기 때문.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자, 서비스로 콜라도 두병 넣어줬으니까 자주 와야 돼? 알았지?” “그럼요! 제가 치킨 먹을 때마다 이 집 오는 거 아시면서~! 아주머니 감사해요! 나중에 또 올게요!” 서비스가 두둑하다. 훗, 정말 이런 집 없을 거다. 치킨 값을 계산한 후, 허겁지겁 권강재네 집으로 달려갔다. 녀석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고르게 내 쉬며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강희의 모습이 보인다. 강희는 이층에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며 올라가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그런 강희를 향해 살짝 웃어준 뒤, 2층으로 빠르게 올라가 권강재의 방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나 닫혀있는 문. 녀석과, 녀석의 패거리들이 항상 권강재의 집에 올 때면 권강재의 방문은 항상 닫혀있다. 왜 그러냐고 권강재에게 전에 한번 물어봤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 ‘동생을 위한 배려.’ 씨도 안 먹히는 변명이다. 걍 방해 받고 싶지 않다고 그러지 그래? 라고 말했다가 머리만 한 대 쥐어 박혔다, 제길. “후.” 짧게 숨을 내 쉰뒤, 녀석의 방 문고리를 돌린 후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나… 아니, 내게 시선이 꽂혀 있던 시간은 정확히 2초. 그 뒤로는 바로 내 손에 들려진 치킨으로 죄다 꽂혀있었다. 망할 것들. “오오오오오-!!! 드디어 왔구나!!!” 그 중에 덩치 큰 녀석이 내게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순간 나는 몸을 움찔 했고, 이내 치킨이 들어있는 봉지를 넘겨주며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한 녀석에게 물었다. “권강재는?” “화장실 갔을 걸?” “그래? 개새끼. 진짜, 소심한 건 알아줘야 돼. 내가 그 녀석 삐질 때마다 돈을 얼마나 쓰는 줄 알아!? 전에는-!!!” “전에는 뭐.” 지난 번 녀석이 단단히 삐졌을 때의 일을 하소연 하려 하는데, 권강재로 추정되는 굵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딱 적당한 톤을 가진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바로 뒤의 위에 쯤…? “…언제 왔니?” “방금.” “손은 닦고 왔겠지?” “아.” … 그 반응은 뭔데. 왜 갑자기 방을 나가는데? 이 더러운 새끼! “야, 야! 나한테는 먹어보라고 말도 안하냐!? 내가 사왔그든!” “넌 살 빼야지. 여자가 이 밤에 야식을 하는 건 위험한 행위다, 이향미.” 개새끼들. 의리도 없는 것들! ‘으이그!’ 하고 한 녀석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며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침대 위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저 뒤태. 눈에 익다. 저 머리 털. 아~주 낯이 익다. …설마. “저거 차연우 아니지?” 설마 하고, 치킨 다리를 입에 물고 허겁지겁 뜯어먹고 있는 한 녀석에게 묻자, 녀석은 먹는 데 왜 건들이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아, 진짜. 차연우 맞어! 씨발, 야! 그거 내가 찜 해둔 거라고, 돼지 새끼야!” 내가 말 시키는 바람에 고기를 다른 녀석에게 빼앗긴 듯, 입에 한 가득 고기를 넣은 채 소리를 지른다. 덕분에, 앞에 앉아있던 한 녀석의 얼굴에 고기 조각들이 덕지, 덕지 달라붙는다. 불쌍한 녀석…. 아, 근데 지금 쟤가 뭐랬지? 차연우가 맞다고?! 차연우가 맞아?! 허, 언제 왔데? 그리고, 아까 그렇게 쳐 자드니만 또 자냐! 넌 24시간 중 몇 시간동안 눈 뜨고 있니? 밤새 야동을 보니 눈이 피로해 죽겠든? 아주…, 잘도 쳐 잔다. 쳐자.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잠만 쳐 자는 녀석의 앞에 다가서고서는, 차연우의 탱실, 탱실한 엉덩이를 세게, 아주 세~게 손으로 ‘찰싹’ 하고 한대 쳐주었다. 방을 울리는 ‘찰싹’소리가 얼마나 감질 나는 지, 한 번 더 때려주고 싶다. 내 손이 맵긴, 매운 건지 잠자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아픔에 벌떡 일어난 차연우는 몸을 틀어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날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게 꿈인지, 아니면 실상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뭐야, 씨발.” 뭔 발? 넌 툭하면 나한테 발발 거리냐? 이 발발아! “잘 쳐잔다?” “…이향미?” 아직 잠이 덜 깬 듯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눈을 껌벅인다. “그래. 학교에서도 아주 잘~ 쳐자드만, 여기서도 아주 잘~쳐잔다? 누구는 쌔빠지게 일만 하다 왔는데.” “…아.” 이제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이다. “너, 그렇게 살 지마라.” 그래, 너 그렇게 살지… 뭐? 잠만, 그 대사는 내가 너에게 쳐야 할 대사그든?! 어째서 네가 나한테 그 대사를 치는 거지!? “뭐어?” “어떻게 지 혼자 쏙 갈 수가 있냐? 그 것도 날 버리고? 아무리 우리가 좀 안 좋은 만남으로 만나게 됐다지만, 나 눈 떴을 때 아무도 없다는 거 안 순간. 배신감 죽여줬다.” …아, 그러세요. 그럼 난 어땠을까요. 지 혼자서 퍼질러 자고, 난 죽어라 일하고. 난 얼마만큼 배신감이 들었을까요. … 딱 너보다 100배 더 들었어, 새끼야. “난 널 죽여주고 싶었다, 씹새야!” “어쭈, 큰 소리?” “‘어쭈’ 좋아하네, ‘어쭈’ 좋아해!” “엉. 나 ‘어쭈’라는 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 난, 얘랑 이야기 할 때마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아. 항상 뭔가 엇나가…. “어찌됐건, 넌 나한테 딱 20대만 맞아라. 그럼 내가 곱게 용서해줄게. 응? 나, 그 많은 프린트 혼자 정리하느라 손이 다 텄거든? 빨게 진 거 보여?” “글쎄다.” 귀를 후비적, 후비적거리며 외면하는 녀석의 꼴을 보아하자니, 20대로 만족 못할 것 같다. 곱하기 이십만 하자. “…아, 맞다. 야, 나 너한테 부탁할 거 있었다.” 부탁? 갑자기 침대 위에 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녀석이 무릎을 꿇으며 날 직시한다. “뭔 부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친구 소개시켜주라.” …엥? 친구? “친구 누구?” 무슨 소리냐는 듯이 녀석을 바라보자, 치킨을 다 먹고 배가 빵빵하게 불어 오른 한 녀석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걔, 있잖아. 너랑 맨날 같이 다니는 기집애.” “같이 다니는 기집애?” “아, 그 쪼그만한게 머리는 동글동글해가지고.” 쪼그만한게? 동글동글? 뭐야, 공이야? 탱탱볼? “아, 걔!!! 인형이면 환장하는 그 기집애!!” 아. “김햄?” “이름이… 김햄이냐? 햄? 헴도 아니고 햄? 시발…, 이름 안 따지는데…안 따지는데…, 김햄….” ‘김햄’이라는 이름에 충격을 받은 건지, 지 혼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 중얼 거리는 차연우. 아마도 김혜미의 별명을 김혜미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하여간 정말 못 말리는 바보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봐라. 김햄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리가 있냐! 아마, 김혜미보고 김햄으로 계명하라고 말하면 날 죽이려 들 걸? “근데 걔를 왜 소개 시켜달라고?” “몰랐냐? 쟤 너만큼 만만치 않은 그거잖아.” 그거? 그게 뭔데?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의 배를 매만지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자, 답답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한다. “여자 밝히는 거.” 히발. “너 죽을래?” 방금 그건 차연우. 그리고 이건. “네가 배가 부르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이건 나. 이 미친놈이 뭐래는 거야! 여자 밝히는 거? 그럼 난 남자 밝히는 거라는 거냐!? 와, 진짜. “아, 때리지 마! 솔직히 강재 놈 주변 사람 중에 너랑 안 사겨본 애 없을 정도잖아!” 내가 때리려는 줄 안 건지,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는 녀석.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 의도로 사귀고 헤어진 게 아닌데. “됐어. 기분 잡쳤어. 너희들끼리 쳐 먹다가 가. 권강재, 나간다.” 의자에서 일어나 낮게 욕을 읊조리며 권강재 놈의 방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나쁘다. 상당히 나쁘다. 그들과 사귈 때는 나 또한 진심으로 대했고, 결국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헤어졌다. 절대 가지고 논 건 아니었다. 권강재, 그가 내 오래된 친구이다. 그만큼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소중한 친구의 친구를 내가 재미삼아 남자를 밝힌다는 이유만으로 사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쁜 년은 정말 아닌데…. 가끔 욕설을 퍼 붓기도 하고, 폭행을 가하기도 하지만, 그저 그건 우정사이에서 오가는 장난일 뿐. 그 것 외에는 정말 나쁜 짓 한 적은 없는데. 그런 식으로 녀석들의 친구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는 것을 들을 때면 항상 기분이 저조하다. 게다가 오늘은 더더욱. 오랜만에 그를 만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재수 없게도 차연우와 계속해서 엮이게 되서 그런 것일까? 정말 새 학기 시작 날부터…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불안한 새 학기 첫 출발. 앞으로 얼마나 더 날 괴롭히고 자극하는 덫들이 있을지는 예감하지 못한 채, 그저 당장 눈앞에 찾아온 덫들에 눈이 멀어 그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것이 덫에 걸리게 된 첫 실수이자,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인생을 벗어나게 해준 첫 단추였다. 04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상당히 무겁다. 정확히 말하면 팔 자체를 움직이지 못할 것 같다. 돌덩어리를 매고 가는 기분이다. 갑작스럽게 팔을 많이 움직이다 보니, 근육이 경직되었나 보다. 이게 다 잡일이란 잡일은 다 맡아서 하는 그 남자 때문이다. 아니, 자신이 할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맡아오는 거야!? “…좋은 아침.” 겨우, 겨우 학교에 도착한 나는 작년에 같은 반 이었던 몇몇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지듯 책상위로 엎드려 뻗어버린 나는 고등학교를 들어간 이래로, 처음으로 1교시가 끝날 때 까지 꿈속을 헤매었다. 1교시가 끝나고, 누군가가 내 등을 찰싹 하고 내려친다. 따끔한 아픔에 벌떡 일어나니, 입을 삐죽, 빼죽 내밀고 있는 김혜미의 얼굴이 보인다. “죽을래? 엉?” “매점가자.” “넌, 너희 반에 친구 없니?” “아니. 근데 너랑 가고 싶어.” 내게는 너무나 피곤한 존재. 그 이름도 유명하디 유명한, 김햄. “알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김햄이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슥 잡더니 냄새를 킁킁 맡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김햄을 밀치며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자, 김혜미 당당하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에게서 건강한 향기가 느껴져.” 넌…아침부터 왜 그렇게도 날 피곤하게 만드니. 전생에 내가 너에게 죄진 것이 있니, 혹시? “뭔 개소리야, 이 거지같은 게.” “한약냄새가 풍겨 와. 너, 한약을 머리에 처발랐니?” 김햄… 넌 역시 내 인생의 최고의 덫이야, 최고의 걸림돌! 잊고 싶은 기억을 방금, 네가 다시 되살려주는 구나. 학교로 떠나기 한 시간 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엉기적, 엉기적 잠이 덜 깬 모습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내 눈에 띄는 샴푸 하나. 딱 봐도 ‘저 샴푸는 과일향이 풍기는 샴푸일거야.’ 라고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샴푸. 어젯밤 엄마가 친구네 집에서 박스 한 통을 가져온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그 박스 속에 있었던 샴푸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득템이다.” ‘나도 이제는 향기가 나는 여자가 될 수 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샴푸를 쭉- 쭉 짜서 머리에 바른 뒤 감기 시작하는 데, 나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난 이향원이 그 샴푸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내가 아닌, 바깥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게 아닌가. “우리 쓰던 샴푸 어디다가 버렸어!!!!!!!!!!! 한약이 들어간 샴푸를 누구보고 감으라고 가져다 둔건데!!!” …그랬다. 머리에 좋으라고 넣은 건지, 그 샴푸 안에는 한약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 어쩐지 색깔이 딱 한약색이더라. 갈색도 아니고, 똥색도 아닌 한약의 특유의 색. 제기랄, 향기 나는 여자 되려다가 건강한 여자 되게 생겼다. 머리를 다 감고, 내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결심을 했다. ‘절대, 난 엘라XX 샴푸 이외에는 쓰지 않겠노라.’ 라고. 헌데, 까맣게도 잊고 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김햄, 너는…. 나의 원수, 나의 웬수, 나의… 걸림돌. “가까이 오지 마. 냄새 옮아!” 냄새도 옮냐!? 엉?! 진짜,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군데! 왜 이제 와서 피하는 건데! 미간이 저절로 좁혀진다. 매점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어느새 다시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은 김혜미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입을 삐죽빼죽 내밀며 몸을 베베 꼰다. “뭔데? 배고프다며?” “삐졌어? 응? 야, 그거 가지고 삐지냐!” “엉. 난 쪼잔 해서 그거 가지고 삐져. 됐지? 너 가.” 김혜미의 손을 뿌리치며 교실 문을 열려 하는데, 미처 내가 먼저 열기 전에 교실 문이 열리면서 김혜미 다음으로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도 막, 자다 일어난 건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김혜미를 발견한 건지 ‘번뜩’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를 슬그머니 짓는다. 한 마디로 재.수.없.다. “네가…그… 이향미 친구…김햄?” …풉. “어?” 김혜미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진다. 참고로 김혜미는 자신을 ‘김햄’이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물론 나는 알면서도 그렇게 부른다. 열 받으라고. “난 차연우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국어책 읽니? 저 딱딱한 말투하며, 뻔한 대사들 하며. 저절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저 녀석, 김혜미의 굳은 얼굴이 보이질 않는가 보다. 진정 널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김혜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니? 너, 거기서 김햄- 이라고 한 마디만 더하면 분명 한대 얻어맞는다. 장담한다. 부디, 김햄과 잘 지내고 싶다면 거기서 멈추는 게…, “김햄, 우리 많은 대화…악-!!!!” …윽, 아프겠다. 김혜미도 대단하지, 처음 보는 아이 볼을 저렇게 사정없이 꼬집어 버리다니. 내가 저거 한 번 당해 봐서 아는데…. 정말 아프다. 한 번 꼬집혔다가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뻔했다. “거지같은 게. 너 뭐야? 나랑 갈등 한 번 빚어볼래?” …이봐, 그 ‘거지같은 게’는 내 말투 같은데? 왜 네가 쓰는 거지? “뭐? 야, 이향미. 얘, 왜 이래?!” “네가 열 받게 생겼나 보지. 잘 지내기는 좀 틀린 것 같다?” 영문을 모르는 차연우는, 새 빨개진 자신의 볼을 비비면서 물었지만, 순순히 알려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김혜미 교복에 박힌 명찰정도는 벌써 봤을 것이다. 설마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만약 정말 모르고 계속해서 ‘김햄,김햄’하고 부르는 것이라면, 저 녀석은 정말 학습능력이 제로라는 것이다. “너, 나 열 받게 했으니까 이거 내가 먹는다. 불만 없지? 불만 있으면 나중에 나와 쓰레기통 앞에서 면담을 가져보자.” 김혜미가 상당히 열 받은 건지, 차연우 손에 들려있던 초콜릿을 낚아채고서는 자신의 반으로 향한다. 차연우는 그런 김혜미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들어가자? 수업시작 할 때 됐거든?” “쟤 뭐냐?” “글쎄. 쟤를 만난 지 5년이 지났지만, 나도 쟤 정체를 모르겠다.” “여자는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뭐, 저리 드세냐. 아 깬다, 깨.” 김혜미의 폭력에,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인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고, 성큼 성큼 녀석의 자리로 다가가서 조그마한 녀석의 뒷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아!” “‘아’? 너 지금 ‘아’라고 했어? 넌 지금 네가 왜 나한테 맞는지 모르겠지?” “그럼 갑자기 와서 때리는데, 너라면 알겠냐?”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녀석의 행동에, 그나마 억누르고 있던 성격. 스템 팍 돌았다. “성격 제대로 썩었다, 너.” “뭐?” “여자는 다 네 장난감으로 보이니? 쟤 내 5년 지기 친구야. 겉으로 만 보면 투탁, 투탁 거리고 웬수지간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친구라고. 넌 그런 친구 앞에서 고분고분한 맛? 드세?” “아, 진짜. 야, 너 눈에 뵈는 게 없냐?” 내 말들이 상당히 불쾌했던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날 내리깔아보며 어깨를 툭, 툭 밀친다. “넌 내가 여자니까 그리도 만만해? 진짜 불쾌하다. 너 같은 녀석이랑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게, 정말로 불쾌해.” “뭐라고?” “민철이 새끼가 어제 그랬잖아, 너랑 나랑 동급 취급했잖아. 그게 불쾌하다고. 권강재 친구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나랑 마음이 맞고,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넌 안 되겠다. 넌… 진짜 재수 없다. 이 시간 이후부터, 나한테 말 걸지 마.” “뭐? 야, 야!” 그 뒤로 계속해서 녀석이 말을 걸어왔지만, 단 한번도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기분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다. 아, 곧 그 날이 다가오는 건가? 한 달도 안됐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게시판을 본 그 순간부터.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본 그 순…. “자, 자. 다들 수업준비하자.” 당신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볼펜 뚜껑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선생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문이 열리면서 ‘신재원’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다음 시간이 영어인 것을 깜박했다. 1학년 때는, 영어시간이라고 하면 항상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자리를 바꿔 앉았었는데. 그 때에 비하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걸까? “교과서는 다들 가져왔지? 어제 대충 수업 진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오늘은 본문부터 나가볼까?” 주변에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저렇게 떠들면 잘 들을 수가 없는데. 지금 밖에 들을 수 없는 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데. 마음 같아서는 한대씩 줘 패 주고 싶지만, 더 이상은 예전 같은 마음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나 자신에게 변화를 주기 위하여 꾹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때, 내 책상위로 날아오는 쪽지 한 장. 뭐지? 하고 쪽지를 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쪽지를 편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그 쪽지는 내 손에 의하여 사정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구겨진 종이는 정확히 차연우의 볼 위로 강타했다. [ 내 뒤통수 멍들었다. 책임져라.] 책임? 지랄하고 자빠졌다. 멍들어도 싸다, 새끼야! 콧방귀를 ‘흥’하고 뀌며, 칠판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날아오는 쪽지들 통에, 제대로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에서 쪽지를 전달하고 있는 아이에게 이제 전해주지 말라는 말을 당부하고서는 다시 시선을 칠판으로 옮겼다. 헌데, 이번에는 치마 속에 넣어두었던 핸드폰 진동음이 울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주머니에서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폴더를 열어 재꼈다. …그런데. “…저 씹새를 그냥.” [ 무시하냐? 엉? 무시 해 봐라? ] [ 죽는다. 이 거지같은 게 자꾸 문자 보낼래!?] [ 그러게 누가 무시하래? ]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 것을 울 엄마가 본다면 나에게 이렇게 한마디를 쏘아 붙일 것이 분명하다. ‘돈지랄을 해라.’ 라고 말이다. 헌데, 내 손 아래로 고정되어있던 핸드폰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핸드폰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라보자,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제기랄, 좇됐다. “나가.” 웃는다. 하지만 웃는 게 아니다. 난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안다. 우유부단한 성격, 하지만 단 한 순간만큼은 다르다. 우유부단하고 헤픈 선생님의 성격이 냉철하고 단호한 성격으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은 바로, “나가, 이향미.” 수업시간에 딴 짓할 때. “선생님 화나려고 한다, 이향미. 당장 나가.” “…” 그의 수업이 있는 시간, 딱 그 때만 그의 성격은 바뀐다. 바로, 이렇게 냉정하게. “안 나가? 오늘 말고, 내일도 안 들어올래? 아니, 평생 내 수업 듣지 않을 거면 계속 있어.”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될 줄 아니까, 참고 또 참았던 건데. 밤을 샜어도,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는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졸음을 참았던 나다. 어느 누가 장난을 걸어와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 나다. 그런데 제길스럽게도 그걸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저 망할 차연우 때문에. 다음 수업은 꼭 들어야 하기 때문에, 교실을 나가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옆에 앉아있던 차연우가 벌떡 일어난다. 선생님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으로 차연우를 바라보았다. “저랑 같이 한 거니까, 저도 나가죠. 나가자, 이향미.” “…뭐? 아, …야!” 갑작스럽게 내 손목을 부여잡으며 바깥으로 이끌고 나가버리는 차연우 덕에,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녀석의 손에 의하여 교실 바깥으로 나와 버린 나다. 녀석 덕분에 지금쯤 선생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너 죽을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에 데려왔더니. 고작 하는 말이 ‘죽을래’?” 울 것 같은 표정이라니…. 내가 그 선생님 앞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단 말을 하는 거야, 차연우? 너 지금…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는 거 맞지? 04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상당히 무겁다. 정확히 말하면 팔 자체를 움직이지 못할 것 같다. 돌덩어리를 매고 가는 기분이다. 갑작스럽게 팔을 많이 움직이다 보니, 근육이 경직되었나 보다. 이게 다 잡일이란 잡일은 다 맡아서 하는 그 남자 때문이다. 아니, 자신이 할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맡아오는 거야!? “…좋은 아침.” 겨우, 겨우 학교에 도착한 나는 작년에 같은 반 이었던 몇몇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지듯 책상위로 엎드려 뻗어버린 나는 고등학교를 들어간 이래로, 처음으로 1교시가 끝날 때 까지 꿈속을 헤매었다. 1교시가 끝나고, 누군가가 내 등을 찰싹 하고 내려친다. 따끔한 아픔에 벌떡 일어나니, 입을 삐죽, 빼죽 내밀고 있는 김혜미의 얼굴이 보인다. “죽을래? 엉?” “매점가자.” “넌, 너희 반에 친구 없니?” “아니. 근데 너랑 가고 싶어.” 내게는 너무나 피곤한 존재. 그 이름도 유명하디 유명한, 김햄. “알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김햄이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슥 잡더니 냄새를 킁킁 맡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김햄을 밀치며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자, 김혜미 당당하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에게서 건강한 향기가 느껴져.” 넌…아침부터 왜 그렇게도 날 피곤하게 만드니. 전생에 내가 너에게 죄진 것이 있니, 혹시? “뭔 개소리야, 이 거지같은 게.” “한약냄새가 풍겨 와. 너, 한약을 머리에 처발랐니?” 김햄… 넌 역시 내 인생의 최고의 덫이야, 최고의 걸림돌! 잊고 싶은 기억을 방금, 네가 다시 되살려주는 구나. 학교로 떠나기 한 시간 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엉기적, 엉기적 잠이 덜 깬 모습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내 눈에 띄는 샴푸 하나. 딱 봐도 ‘저 샴푸는 과일향이 풍기는 샴푸일거야.’ 라고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샴푸. 어젯밤 엄마가 친구네 집에서 박스 한 통을 가져온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그 박스 속에 있었던 샴푸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득템이다.” ‘나도 이제는 향기가 나는 여자가 될 수 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샴푸를 쭉- 쭉 짜서 머리에 바른 뒤 감기 시작하는 데, 나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난 이향원이 그 샴푸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내가 아닌, 바깥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게 아닌가. “우리 쓰던 샴푸 어디다가 버렸어!!!!!!!!!!! 한약이 들어간 샴푸를 누구보고 감으라고 가져다 둔건데!!!” …그랬다. 머리에 좋으라고 넣은 건지, 그 샴푸 안에는 한약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 어쩐지 색깔이 딱 한약색이더라. 갈색도 아니고, 똥색도 아닌 한약의 특유의 색. 제기랄, 향기 나는 여자 되려다가 건강한 여자 되게 생겼다. 머리를 다 감고, 내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결심을 했다. ‘절대, 난 엘라XX 샴푸 이외에는 쓰지 않겠노라.’ 라고. 헌데, 까맣게도 잊고 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김햄, 너는…. 나의 원수, 나의 웬수, 나의… 걸림돌. “가까이 오지 마. 냄새 옮아!” 냄새도 옮냐!? 엉?! 진짜,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군데! 왜 이제 와서 피하는 건데! 미간이 저절로 좁혀진다. 매점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어느새 다시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은 김혜미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입을 삐죽빼죽 내밀며 몸을 베베 꼰다. “뭔데? 배고프다며?” “삐졌어? 응? 야, 그거 가지고 삐지냐!” “엉. 난 쪼잔 해서 그거 가지고 삐져. 됐지? 너 가.” 김혜미의 손을 뿌리치며 교실 문을 열려 하는데, 미처 내가 먼저 열기 전에 교실 문이 열리면서 김혜미 다음으로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도 막, 자다 일어난 건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김혜미를 발견한 건지 ‘번뜩’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를 슬그머니 짓는다. 한 마디로 재.수.없.다. “네가…그… 이향미 친구…김햄?” …풉. “어?” 김혜미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진다. 참고로 김혜미는 자신을 ‘김햄’이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물론 나는 알면서도 그렇게 부른다. 열 받으라고. “난 차연우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국어책 읽니? 저 딱딱한 말투하며, 뻔한 대사들 하며. 저절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저 녀석, 김혜미의 굳은 얼굴이 보이질 않는가 보다. 진정 널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김혜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니? 너, 거기서 김햄- 이라고 한 마디만 더하면 분명 한대 얻어맞는다. 장담한다. 부디, 김햄과 잘 지내고 싶다면 거기서 멈추는 게…, “김햄, 우리 많은 대화…악-!!!!” …윽, 아프겠다. 김혜미도 대단하지, 처음 보는 아이 볼을 저렇게 사정없이 꼬집어 버리다니. 내가 저거 한 번 당해 봐서 아는데…. 정말 아프다. 한 번 꼬집혔다가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뻔했다. “거지같은 게. 너 뭐야? 나랑 갈등 한 번 빚어볼래?” …이봐, 그 ‘거지같은 게’는 내 말투 같은데? 왜 네가 쓰는 거지? “뭐? 야, 이향미. 얘, 왜 이래?!” “네가 열 받게 생겼나 보지. 잘 지내기는 좀 틀린 것 같다?” 영문을 모르는 차연우는, 새 빨개진 자신의 볼을 비비면서 물었지만, 순순히 알려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김혜미 교복에 박힌 명찰정도는 벌써 봤을 것이다. 설마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만약 정말 모르고 계속해서 ‘김햄,김햄’하고 부르는 것이라면, 저 녀석은 정말 학습능력이 제로라는 것이다. “너, 나 열 받게 했으니까 이거 내가 먹는다. 불만 없지? 불만 있으면 나중에 나와 쓰레기통 앞에서 면담을 가져보자.” 김혜미가 상당히 열 받은 건지, 차연우 손에 들려있던 초콜릿을 낚아채고서는 자신의 반으로 향한다. 차연우는 그런 김혜미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들어가자? 수업시작 할 때 됐거든?” “쟤 뭐냐?” “글쎄. 쟤를 만난 지 5년이 지났지만, 나도 쟤 정체를 모르겠다.” “여자는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뭐, 저리 드세냐. 아 깬다, 깨.” 김혜미의 폭력에,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인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고, 성큼 성큼 녀석의 자리로 다가가서 조그마한 녀석의 뒷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아!” “‘아’? 너 지금 ‘아’라고 했어? 넌 지금 네가 왜 나한테 맞는지 모르겠지?” “그럼 갑자기 와서 때리는데, 너라면 알겠냐?”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녀석의 행동에, 그나마 억누르고 있던 성격. 스템 팍 돌았다. “성격 제대로 썩었다, 너.” “뭐?” “여자는 다 네 장난감으로 보이니? 쟤 내 5년 지기 친구야. 겉으로 만 보면 투탁, 투탁 거리고 웬수지간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친구라고. 넌 그런 친구 앞에서 고분고분한 맛? 드세?” “아, 진짜. 야, 너 눈에 뵈는 게 없냐?” 내 말들이 상당히 불쾌했던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날 내리깔아보며 어깨를 툭, 툭 밀친다. “넌 내가 여자니까 그리도 만만해? 진짜 불쾌하다. 너 같은 녀석이랑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게, 정말로 불쾌해.” “뭐라고?” “민철이 새끼가 어제 그랬잖아, 너랑 나랑 동급 취급했잖아. 그게 불쾌하다고. 권강재 친구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나랑 마음이 맞고,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넌 안 되겠다. 넌… 진짜 재수 없다. 이 시간 이후부터, 나한테 말 걸지 마.” “뭐? 야, 야!” 그 뒤로 계속해서 녀석이 말을 걸어왔지만, 단 한번도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기분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다. 아, 곧 그 날이 다가오는 건가? 한 달도 안됐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게시판을 본 그 순간부터.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본 그 순…. “자, 자. 다들 수업준비하자.” 당신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볼펜 뚜껑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선생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문이 열리면서 ‘신재원’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다음 시간이 영어인 것을 깜박했다. 1학년 때는, 영어시간이라고 하면 항상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자리를 바꿔 앉았었는데. 그 때에 비하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걸까? “교과서는 다들 가져왔지? 어제 대충 수업 진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오늘은 본문부터 나가볼까?” 주변에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저렇게 떠들면 잘 들을 수가 없는데. 지금 밖에 들을 수 없는 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데. 마음 같아서는 한대씩 줘 패 주고 싶지만, 더 이상은 예전 같은 마음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나 자신에게 변화를 주기 위하여 꾹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때, 내 책상위로 날아오는 쪽지 한 장. 뭐지? 하고 쪽지를 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쪽지를 편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그 쪽지는 내 손에 의하여 사정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구겨진 종이는 정확히 차연우의 볼 위로 강타했다. [ 내 뒤통수 멍들었다. 책임져라.] 책임? 지랄하고 자빠졌다. 멍들어도 싸다, 새끼야! 콧방귀를 ‘흥’하고 뀌며, 칠판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날아오는 쪽지들 통에, 제대로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에서 쪽지를 전달하고 있는 아이에게 이제 전해주지 말라는 말을 당부하고서는 다시 시선을 칠판으로 옮겼다. 헌데, 이번에는 치마 속에 넣어두었던 핸드폰 진동음이 울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주머니에서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폴더를 열어 재꼈다. …그런데. “…저 씹새를 그냥.” [ 무시하냐? 엉? 무시 해 봐라? ] [ 죽는다. 이 거지같은 게 자꾸 문자 보낼래!?] [ 그러게 누가 무시하래? ]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 것을 울 엄마가 본다면 나에게 이렇게 한마디를 쏘아 붙일 것이 분명하다. ‘돈지랄을 해라.’ 라고 말이다. 헌데, 내 손 아래로 고정되어있던 핸드폰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핸드폰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라보자,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제기랄, 좇됐다. “나가.” 웃는다. 하지만 웃는 게 아니다. 난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안다. 우유부단한 성격, 하지만 단 한 순간만큼은 다르다. 우유부단하고 헤픈 선생님의 성격이 냉철하고 단호한 성격으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은 바로, “나가, 이향미.” 수업시간에 딴 짓할 때. “선생님 화나려고 한다, 이향미. 당장 나가.” “…” 그의 수업이 있는 시간, 딱 그 때만 그의 성격은 바뀐다. 바로, 이렇게 냉정하게. “안 나가? 오늘 말고, 내일도 안 들어올래? 아니, 평생 내 수업 듣지 않을 거면 계속 있어.”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될 줄 아니까, 참고 또 참았던 건데. 밤을 샜어도,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는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졸음을 참았던 나다. 어느 누가 장난을 걸어와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 나다. 그런데 제길스럽게도 그걸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저 망할 차연우 때문에. 다음 수업은 꼭 들어야 하기 때문에, 교실을 나가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옆에 앉아있던 차연우가 벌떡 일어난다. 선생님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으로 차연우를 바라보았다. “저랑 같이 한 거니까, 저도 나가죠. 나가자, 이향미.” “…뭐? 아, …야!” 갑작스럽게 내 손목을 부여잡으며 바깥으로 이끌고 나가버리는 차연우 덕에,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녀석의 손에 의하여 교실 바깥으로 나와 버린 나다. 녀석 덕분에 지금쯤 선생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너 죽을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에 데려왔더니. 고작 하는 말이 ‘죽을래’?” 울 것 같은 표정이라니…. 내가 그 선생님 앞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단 말을 하는 거야, 차연우? 너 지금…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는 거 맞지? 제 5화. 뫼비우스의 띠의 틈.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차연우는, 손을 뻗어 내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깜짝 놀란 나는, 녀석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굳게 닫혀있던 녀석의 입술에서 물 흐르듯 새어나오는 한 마디에 위로 향하던 손을 아래로 다시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으면 피가 나냐.” 피가…난다고? “괜히 더 미안해지게. 권강재한테 자주 들어서 알아. 너 공부 엄청 좋아하는 거.” …미안하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영어를 좋아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영어를 가르치는 그를 좋아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 선생님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게 해줘?”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여전히 내 입술에 머물러 있는 녀석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과분한 친절은 사양이야.” “과분한 친절? 어째서? 여자들은 친절하고,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나?” “대체로는 그렇지.” 하지만…, 그 과분한 친절과, 다정함, 그리고 그 눈웃음에 속으면 너무 힘들어져. 상대방은 그러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데, 나만 그 친절함과 다정함에 속아버려. 그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나는 그 사람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다 줘버려서 되돌릴 수가 없어져. “흐음. 너한테는 안 통한다. 이건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차연우의 모습에, 나 또한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어깨 넘어 창문 바깥을 가리켰다. “창문? 창문, 뭐.” “까자.” “땡땡이?” 되 물어오는 차연우의 말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차연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목을 잡고 교실 안에서 수업을 한창 하시고 계시는 선생님 몰래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중학교 1,2학년 시절 밥 먹듯이 치던 땡땡이였는데. 중학교 3학년 그를 만나고 난 뒤로 달라졌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변해갔다. 하지만 지금은 부질없는 짓, 그저 내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뿐이다.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집.” …뭐라? 차연우,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너희 집?! 땡땡이치자니까, 왜 너희 집을 가는 건데? 너희 집에서 뭘 하려고? 이게 미쳤나! “야! 너희 집을 왜 가는데!” “가서 우리가 할 일이 있어.” “할 일? 그게 뭔데?” “은밀하고, 아름다운 거.”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할 리 없다. 아까 뒤통수 휘갈긴 게 잘 못됐나?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이런, 저런 생각에 한창 빠져있는 동안, 차연우와 나의 발걸음은 더욱 더 빨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에 잠겨있느라 차연우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간 탓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국, 10분도 되지 않아서 차연우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순간까지도 도착한지 모르고 있던 나는, 집 안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형-.” 형? 혀엉? ‘형’이라고 누군가를 향해 부르는 차연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자, 자다 깬 머리를 하고서는 눈을 비비고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차연우가 그를 향해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차연우의 친형인 듯 했다. “걘 누구냐? 설마, 내가 있는 집 안에서 그 짓하려고 하는 거면 꺼져.” “뭐라는 거야? 형, 나도 상대는 봐가면서 해. 알잖아.” 이 거지 같은 게, 알긴 뭘 알아! 물, 물론!!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기분 나쁘잖아! 그렇게 정색하고 거부하는 거보면! “그럼 뭐냐? 왜 왔냐?” “은밀하게 할 게 있어서. 여튼, 형은 방에 들어가 있어.” “지랄한다, 또. 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니냐?” “아, 형. 알면서 뭘 물어.” 자신의 형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하고 치며 자신의 방 안으로 날 이끌고 들어가 버리는 차연우.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손에 따라서 이끌려갈 뿐이었다. “긴장 풀어, 야! 야! 긴장 풀라고!” “…어, 어?” “너 어떻게 해 볼 생각, 요만큼도 없그든? 그러니까 긴장푸시라고요.” “그럼 나 여기 왜 데려왔는데?” 내 물음에, 녀석은 서랍에서 무언가를 뒤적, 뒤적이더니 내게 내밀며 부탁어조로 말하였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녀석의 손으로 향하였고, 시선이 닿은 곳에는 편지봉투 하나가 있었다. “편지?” “해석 좀 해주라.”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날 올려다보며 부탁한다. 편지봉투를 건네받은 나는,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지 안에 내용이 한국어가 아닌 영어인 것을 보니, 외국에서 온 편지 인 듯 했다. 이게… 은밀하고, 아름다운 거니? …표현 한 번 죽인다. 어떻게 하면 표현을 그…, 아, 맞다. 너 우리나라의 모국어 실력도 그리 만만치 않게 좋지 않았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종이에다가 써주면 돼? 해석해서?” “엉. 나, 한숨 자고 있을 테니까 다 하면 깨워라.” 거지 같은 게.…나도 여잔데, 그렇게 대 놓고 자면 기분 조금 나쁘그든? 이미 눈을 감아버린 녀석의 머리에 주먹을 한대 쥐어 박아줄까- 하다가, ‘에라이’ 하고 때려치우며 의자에 앉아, 앞에 놓여진 A4용지에 편지의 내용을 해석하여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학원에서 항상 해오던 것이었고, 평소에 외국에 사는 친척이 편지를 보내올 때면 쉽게 해석해오던 나이기에. 근데, 이 편지… 누가 보낸 걸까? 내용 한 번 웃기다. “오빠. 저는 잘 때도 오빠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밥을 먹을 때도 오빠의 얼굴이 아른거려요. 오빠를 너무나도…, 얘 뭐야? 연애편지야? 이걸 쟨, 나보고 해석하라고 한 거고? 웃기네, 아주 그냥. 도대체 나보고 이 편지를 해석하라고 한 저의가 뭐야? 염장 지르는 거야?” 결국 말도 안 되는 연애편지를 해석하다가 실증이 나버린 나는, 완전 엉터리로 해석을 하여 A4용지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난 차연우는 이 편지를 보자마자 사정없이 구겨버리고서는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짧은 시간동안 차연우의 내면을 간파한 바로는 그럴 것이 분명하다. ‘오빠, 저는 오늘 오빠보다 훨씬 멋있고, 잘생긴 남자를 봤어요. 이제는 오빠를 잊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어쩜 그리도 멋있던지, 오빠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저에게 잘 대해주며…’ 아, 평소에 로맨스 소설이라도 조금 읽어 둘 걸. 이거 너무 뻔한 레퍼토리 아닌가. 아, 뭐 어때. 차연우만 열 받으면 되지. “…으윽, 겨우 다 했다.” 기지개를 쭉 펴자, 뚜두둑- 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온 몸이 뻐근하더니, 이제야 조금 풀린 듯 하다. 해석한 종이를 곱게 접어 책상 한 편에 놓아두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잘도 자고 있는 차연우를 깨우려고 하는데, 그의 옆에 바로 놓여져 있는 핸드폰이 ‘지잉-지잉-’하고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두 번으로 멈추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전화가 온 듯 했다. 하지만 차연우는 전혀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차연우씨 폰입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은 가족뿐이겠지, 하며 액정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는데. 그 것이 실수였다. [- 이향미?] 제길, 권강재! “…죄송하지만, 전 이향미가….” [- 너희 둘 같이 있는 거 알아. 어디야?] “정말, 전 이향미가….” [-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은 그 목소리가, 네 목소리가 아니라고만 해 봐라.] 역시, 너도 내겐 그리 좋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권강재. “…왜, 차연우 자거든? 조금 있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갈 거니까 끊어.” [-자? 너희…설마.] “뭘 상상하는건데? ‘설마’ 라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행여 오해하려거든 꿈 깨라.” [-너, 그 자식한테 개기셨다면서요.] “뭐?”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개겨? 누가? 내가? “어디서 또 헛소리 듣고 그러는 건데? 그런 적 없어.” [-너랑 차연우랑 같이 뛰쳐나갔다던데? 사랑의 도피라나 뭐래나.] “비꼬지 마, 권강재. 그럴 리 없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헛소문일 뿐이야.” 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온 건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로 달달 볶기 시작하는 권강재. 이런 그의 면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면 중 하나이다. “끊어. 짜증나지려고 해.” [-야! 야, 이향미!…이향….] 더 이상 권강재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바로 차연우의 배 위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차연우는 ‘헉-!’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를 움켜잡았다. “점심시간이야. 안 가?” “벌써? 걍 여기서 밥 먹고 가지?” “너 혼자 쳐드세요. 저는 학교 밥이 더 맛있네요. 그리고 다시는 저 따위 편지 해석 부탁하지 마. 알았어?” ‘콱-!’ 하고 때리는 척 주먹을 움켜쥐며 치켜들었다. 그러자 차연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녀석의 방을 빠져나와 현관문 앞으로 가 신발을 대충 신고서는 녀석의 집에서 나왔다. 행여나 녀석이 따라와 해코지라도 할까, 학교를 향해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가 두려웠다. 벌을 서고 있어야 할 내가 없어진 자리를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그가. 학교로 곧장 돌아온 내가, 먼저 향한 곳은 교실도 아닌 바로 교무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급식실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꾸만 입에 고이는 침을 ‘꿀꺽’삼키며, 그에게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의미는 단 하나였다. 사죄의 의미. “죄송합니다.” 그의 앞에 다가서자마자 맨 처음 꺼낸 말은 ‘죄송하다’라는 말이었다. 그를 안지도, 해로 따지면 어언 3년째다.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그에게 죄송하다는 용서의 말을 한 적은 지금까지 딱 두 번이었다. 첫 번째, 그에게 용서를 구했을 땐 그는 나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두 번째, 오늘 그는…. “선생님?” 내 손에 아까 빼앗긴 핸드폰을 꼭 쥐어주고서는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무슨 의미일까. ‘괜찮다.’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실망했다.’라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는 내게 말을 걸고 싶지 않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 폴더를 제쳤다. 그 때 ‘지잉-’하고 진동이 울리더니 배경 하단에 [새 문자메시지 1통] 라는 문구가 떴다. 엄지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확인버튼을 눌렀고, 새 문자메시지의 내용이 액정을 가득 메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흰 배경이 가득 메웠고, 상단에는 검은색 굴림 체로 딱 한 줄이 적혀져 있었다. ‘아까는 미안..’ 수신자번호를 보지 않아도 누군가가 보낸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시선은, 방금 전 그가 나간 문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선생님에게 영원히 제자로 남길 바란다면… 친절을 베풀지 마세요. 저에게 다정함을 보여주지 마세요. 안 그럼 평생 당신을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느 새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아닌 씁쓸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 * *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날 반겨야 했던 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계시는 우리 엄마와, 거실에서 내 머리띠로 앞머리를 뒤로 민 채 티비를 보고 있어야 할 이향원이것만. 도대체 이 흰색물체는 뭐냐고요. “강아지?” 미간을 찌푸리며, 막 자신의 방에서 나오고 있는 이향원을 뒷덜미를 붙잡았다. “아, 뭔데!” “나야말로 이게 뭔데?” “뭐가 또!” “저거 뭐냐고!” 그제야 이향원은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흰색 말티즈로 추정되는 강아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서는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지껄인다. “강아지.” …이걸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강아지 인 것을 모르고 묻는 거냐고! 도대체 저… 토끼같이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강아지는 어디서 난거냐고요. “샀어?” “돈이 어디 있어서?” “그럼. 얻어왔어?” “우리 주변에 강아지 키우는 사람 봤냐?” “어디서 났는데, 그럼?” 빨랑빨랑 대답 해주길 바라는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이향원이 자신의 몸을 낮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주웠어.” …미…친놈. “제 정신이야? 강아지를 왜 주워와!?” “아, 그게 말이야! 들어 봐? 내가 학교 끝나고 집엘 오고 있는데 말이야. 요 앞에, 슈퍼 알지? 그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흰색 동글동글한 게 막 날 따라 오는 거야. 내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막 달렸는데, 그 흰 것도 막 달려오데? 그래서 내가 갑자기 딱- 멈췄거든? 근데 그 흰 것도 딱- 멈추데? 귀엽잖아. 얘가 나만 보면 요 흰색 꼬리를 살랑, 살랑 막 흔드는데. 토끼 같은 눈 하며, 흰색 털하며…. 귀엽잖아.” …네 눈에는. 네 눈에는!!! 저게 너한테만 꼬리 살랑, 살랑 흔드는 것으로 보이니!!! 나한테도 살랑~ 살랑 흔들고 있고, 우리 엄마한테도 지금 살랑~살랑 흔들고 있잖아! 그리고, 주워오려면 좀 개 같은 걸로 주워오던가! 저게 개야! 토끼야! 아니면 저게…뭐야? 왜, 저 빨간 건조대를 보고 왕왕 짖는 건데? 그 것도 이리저리 왔다갔다, 뛰는 것도 아니고 폴짝폴짝 점프를 하면서 왕왕 짖는 건데? 저게 강아지냐고! “동물병원 갖다 줘라?” “왜! 엄마가 허락했다! 건들지 마, 내꺼야.” 아, 그러세요…. 너 다 가지세요. 근데, 엄마가 허락했다고? 웬일로? “엄마, 저 강아지 왜 허락했어?” 강아지를 꼭 껴안고 있는 이향원을 뒤로 한 채, 부엌으로 들어가 저 강아지를 도대체 왜 허락을 했냐고 엄마를 향해 묻자, 엄마는 허리춤에 손을 딱 얹으며 말씀하셨다. “생일선물.” “어? 생일선물?” “쟤, 내일 모레 생일이잖아. 지입으로 생일 선물로 컴퓨터 사주기로 했던 거 안 사줘도 되니까, 강아지 키우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럼 허락 안하리?” 보통 저 크기의 강아지는 대략 40만원에서 50만원정도 하지. 그리고 이향원이 사달라고 했던 컴퓨터는 대략 200만원 정도 되고.…결국 돈 때문이구나. “잠깐! 그 컴퓨터 나도 같이 쓰기로 했던 거 아냐!” “그럼 그 컴퓨터는 네 생일 날 사던가.” 아…, 제기랄 내 생일 오려면 두 달도 넘게 남았는데! 저 새끼를 그냥-!!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 한쪽에 내려놓고서는 이향원에게 다가가 따지기 시작했다. “왜 네 맘대로 컴퓨터를 포기하는데? 같이 쓰기로 합의했던 거잖아!” “알게 뭐야. 야, 얘 귀엽지 않냐? 응?” “퍽이나 귀엽다? 내 눈에는 지금, 얜 내 컴퓨터의 꿈을 저 멀리 던져버린 놈으로 밖엔 안 보이거든?” “이름도 지었어. 얼마나 귀여운데.” 이향원이 저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본다. 여자친구 앞에서 웃는 것은 많이 봤지만, 집에서는 매일 성질만 냈던 녀석이었는데. 그렇게도 좋나? 하긴,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녀석이긴 했지. 그렇지만…, 저건 정말 강아지가 아닌데…. 귀를 쫑긋 세우는 게 완전 토끼인데, 저거…. 그 때 마침, 이향원이 켜 놓은 티비 안에서 ‘띵동-’하고 드라마속 주인공이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강아지가 쪼르르르 티비 앞으로 달려가더니 미친듯이 왕왕- 하고 짖기 시작했다. “얘 좀 봐. 짖는 것도 짱 귀엽게 짖어. 왕왕이래, 왕왕.” 퍽이나 귀엽다. 동물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키우는 건 싫어하는 나이다. 뭐, 하루이틀 키운다면야 상관없겠지만 한달이고, 두달이고 키우게 되면은 집안에서는 똥냄새가 진동할 것이며, 여기저기 오줌 말라버린 자국들이 선할것이다. 그 것만은 싫다. “약속해, 그럼.” “뭘?” 여전히 강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향원에게 약속을 권했다. “오줌도 네가 닦고, 똥도 네가 치우고, 밥도 네가 먹이고. 예방접종도 네가 시키고, 옷이며 강아지 밥이며 다 네 돈으로 직접 사.” “그까짓거.” 너, 방금 그 까짓거랬어. 한 달 후에 보자. 그 때가서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준다 만다하는 소리하면 죽여버리겠어. “약속했다?” “어. 야, 얘 봐. 눈이 너보다 더 커!” 저 거지 같은게. “강아지 이름은 뭔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강아지의 이름을 묻자, 이향원이 씩- 하고 미소를 지으며 딱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는 그 두 글자를 듣는 순간 그나마 짓고 있던 미소를 싹 거두고서는 이향원의 뒷머리를…, 아주 세게 강타했다. 아주 세! 게! “똥키.” ‘퍽-!!’ 도대체 넌 누굴 닮아서 작명센스가 그 따위냐!? 제 6화 일직선의 틀어짐.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처하지 못한 이향원은,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워낙에 눈이 큰 녀석이기에 노려보면 조금 겁이 나긴 하지만 말이다. 녀석은 내게 맞은 게 분한 지 ‘씩, 씩’ 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통키로 하던가. 똥이 뭐냐, 똥이! 똥개로 하지 그랬냐?” “그래서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거야. 그런 센스도 모르냐?” …얼어 죽을 센스. 요즘 고등학교 1학년들 센스가 그러니? 와, 센스 겁나 죽었네? 김혜미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진짜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고 말하고 다니면 실컷 두드려 패주고 싶을 정도로 저 녀석은 작명센스 제로다. “됐어! 이 강아지 데리고 꺼져. 나 공부할거니까 방해하지 말고.” “방해한다고 네가 안할 기집애냐?” “요새 너, 너무 기어오른다?” “뭐! 뭐! 또 때리려고? 때려 봐! 엄마한테 다 말한다!” 아이쿠, 무서워라. 예예, 말하세요. 사내새끼가 툭하면 엄마한테 일러바치는 거 안 쪽팔리나 몰라. 나라면 그냥 조용히 방으로 들어갈 텐데. 내 뒤통수대고 바락, 바락 말대꾸하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책가방을 챙겨들고 방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방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밖에서 조잘대는 이향원의 목소리가 간혹 들리긴 했지만, 곧 엄마의 고함에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책가방을 대충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의자에 앉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로지 일직선이던 내 생활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로 향한다. 그리고 야간자율학습 시작 직전에 학교에서 귀가한 뒤 독서실로 향했다. 그 곳에서 새벽 2시경까지 그 날 배운 수업 모두를 복습하고서는 집으로 귀가한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학교로 향한다. 이 것이 내 생활방침이었고, (물론 매일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학기 초와 시험기간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일직선이던 일상이었다. 그런데 요 이틀간 동아리라는 곳에 들어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학교를 위한 봉사 따위를 했다. 학교 수업도 빠져보았고, 떠들어보기도 했다. 일직선이던 내 일상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작은 쇼 타임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왜 일까. 그냥 그러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 만 같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특별한 일들이 이제는 내게도 찾아 올 것만 같은 기분. “한 번쯤 겪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 * * 그로부터 3일 후, 며칠 전 만해도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던 내 일상이, 이상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되 돌아와 있었다. 최근 3일간, 1학년 때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냈다. 어디서나 사고를 치던 김혜미도 최근 3일간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권강재 역시, 자신의 새 반에 적응하느라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건 차연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같은 반 남학생들과 함께 다니기 일쑤였고, 내게는 말조차 잘 걸지 않았다. 걸어도 내 쪽에서 먼저 무시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런 시련이 다가온 것은. 아니, 이건 시련이 아니라 막노동이다. 막노동. “장난 좀 그만치세요. 네?” “장난치는 거 아닌 걸? 오늘은 우리 다섯 명이서 이 곳을 아주 깨끗이 치우는 거야. 알았지?”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것이 사실이고, 거짓이 아님을 그가 증명해주었다. 김혜미 또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 동아리에 든 그 순간부터 포기했다는 듯이. “연우야, 거기 앉아있으면 어떡해. 청소해야 되잖아.” 선생님께서 미소를 머금고, 바닥 한 쪽에 앉아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연우를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차연우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걸 우리 다섯 명이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웃는다. 또 웃으면서 말한다, 저 사람. 거부 할 수 없는 미소로 저렇게 말하면 제아무리 차연우라도 저렇게 낮게 욕설을 읊조리며 일어날 수밖에 없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그래. 강재야.” “이 걸 우리가 왜 해야 하는 건데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 지, 나는 그 것이 궁금하다. “우린 봉사동아리잖아.” 그런 변명 따위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요! 어? 권강재! 넌 왜 수긍 하는 건데! 나는 그저 선생님들이 하다 못한 프린트 정리라던가, 아니면 그 밖의 조그마한 일들을 도맡아서 하는 부서인 줄 알았다고! 이런…, 이런 일까지 하는 건 줄은 몰랐다고…. “아, 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응?” 제발 웃으면서 대답하지 말아요, 제발! 그리고! “왜, 우리가 강당 청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요! 청소부 아주머니, 아니면 강당 담당반이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정확히 8교시가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선생님은 우리들을 동아리부서로 집합시켰다. ‘또 시답지도 않은 프린트 정리이겠구나. 라는 생각에 손을 풀고 있는데, 이게 웬일. 왜 우리의 손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쥐어주시는 건지. 나는 그 때까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당을 대청소를 하게 될 줄은 말이다. 하지만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향한 곳이 바로, 이 강당이었으니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청소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재미있다고요? 아, 예, 예. 당연히 재미있으시겠죠. 무슨 일을 다 맡아오건 해줄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해줄 아이가 있으니까.” “이향미. 너, 왜 그래!” “김혜미, 넌 빠져있어 봐. 선생님, 저도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선생님, 지난번에 프린트 받아와놓고, 다 저희, 아니 제가 혼자 다하고 갔어요. 아세요? 이번에도 그러시려고요? 저희한테 맡겨놓고 또 나가시려고요?” “…그 때는.” “그 때든, 저 때든! 진짜…, 하려거든 선생님 혼자 하세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용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우리에게 시키는 그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게 시키는 그런 기분. 이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사실 하루고, 이틀이고 어떻게든 우기고 저항하면 이 동아리에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곳에 남은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만해.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내가 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내 팽개치고, 강당을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권강재의 손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이럴 때만 잽싼 녀석 같으니라고. “선생님, 잠시만 나가주시겠어요? 여기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지만.” “이향미 말대로 언제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신 적 있으세요? 괜찮으니까 나가도 되요.” 권강재의 단호한 말에, 선생님은 잠시 머뭇머뭇 거리시는 것 같더니 역시나, 오늘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당연한 건데, 왜 이렇게 씁쓸한 건지. 사실 날 붙잡아줬으면 하는 사람도 권강재가 아닌 신재원, 당신이었는데. “뭘 실망해? 네가 아는 사람이 저런 사람 맞잖아.” “어. 아는데, 아주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실망하게 돼. 매번 원망하게 돼…. 저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듯이, 내가 매번 아픈 것도 이제는 당연하게 되어버렸어. “분위기 왜 이러냐? 나 적응 안 된다. 안 그래, 김햄?” 차연우. 저건…,아무리 생각해도 매를 버는 거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들어. 봐봐, 또 저렇게 한 대 맞지. “아-!!” 윽, 아프겠다. 웬만하면 김혜미 명찰 좀 보지. 언제까지고 김햄이라고 부르려고…. “마대걸레 대신 널 바닥에 밀어줄까?!” “…아니, 그건 사양하겠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젓는 차연우의 행동을 시작으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혜미의 목소리가 강당을 쩌렁쩌렁 울리며 분위기는 다시 원점으로. “어찌됐건, 여기는 치워야 집에 갈 수 있다는 거잖아.” “응.” 그러면… 최대한 빨리, 깨끗하게 치우면 되는 거네. 그치? “김혜미랑 차연우는 빗자루. 나랑 권강재는 마대걸레로 바닥을 닦을게.” “오케이.” “원하신다면.” 차연우는 김혜미와 함께 짝이 된 것이 마음에 든 건지, 예상외로 큰 저항 없이 빗자루를 잡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나는 권강재와 함께 마대걸레를 빨아오기 위해 수돗가로 향했다. “차연우 어때?” 수돗가에 마대걸레를 올려놓은 뒤, 수돗물을 틀어놓고선 봄바람을 만끽하고 있는데, 봄바람과 함께 권강재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권강재의 목소리 하나만큼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뜻밖의 물음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조차 망각한 채 권강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물어봐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넌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언제나’와 같은 말.” 그게 뭔데…. “정식으로 소개시켜줄까. 라는 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어느새 잔뜩 굳은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그거야 난 모르지.” 왜 빈정거리는 거야? 왜 비꼬는 거야? 언제나 그랬어, 넌. 소개시켜주겠다던 사람은 너였는데, 항상 네 반응은 그래. 난 그런 네 모습도 싫어. “차연우가 소중한 친구인 건,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소중한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건 나도 알거든?”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지금은 나 역시 ‘언제나’처럼 행동하게 될 거야. 네 소개 이번에는 받아들일 생각 없어.” “그래? 생각보다 거리낌 없이 지내기에 난 관심 있는 줄 알았지. ‘여느 때’처럼.”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지금 녀석은 내게 솔직하지 못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애초부터 넌, 내게 네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기 싫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속 시원하게 말해! 내가 언제 너보고 애원을 했니? 마음에도 없는 말 내 뱉을 거면, 티를 내지마. 아니면 속 시원하게 말하던가.” “속 시원하게 말…, 됐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나.’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 답답해.” 수도꼭지를 잠근 후, 마대걸레를 들고 빠르게 강당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권강재를 뒤로 한 채. 강당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바닥이 깨끗하게 쓸려있는 후였다. 그 정도로, 권강재와 나는 밖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눴음을 알 수 있었다. 헌데, 다 치웠으면 곱게 앉아서 기다릴 것이지. 왜, 또 싸우고 있는 건데? “향미야아-!!”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울먹이는 김혜미를 보자마자 내 시선은 차연우에게로 빠르게 옮겨갔다. 녀석은 여유롭게 휘파람을 부르고 있었다. “야, 차연우. 너 또 뭔 짓했어? 덮쳤어?” “아냐!!!!” “걸레를 물에 적셔 오랬더니, 네 뇌를 물에 적셔가지고 왔냐?” 김혜미는 완강히 아니라고 소리쳤고, 차연우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내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차라리 소리칠 것이지. 뭐? 뇌를 어찌구 저째? “됐고, 얘나 떼어내 봐. 나 청소해야 돼.” “권강재는 어디다가 버리고 왔냐?”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어쩔래!” “얼씨구.” 얼씨구, 좋아하네. 권강재를 보고 마음이 답답해져온다면, 널 보면 항상 내 기분이 나빠져. 김혜미로는 모자란 건지, 이제는 내게까지 시비란 시비는 다 걸어오는 차연우를 최대한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걸레로 바닥을 빡빡- 문지르면서. 하지만, 계속되는 녀석의 공격에 결국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걸레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걸레는 정확히 “…헐.” 녀석의 얼굴에 닿아있었다, 제길스럽게도. “…안…치우냐.” 으르렁거리는 차연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잠시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던 정신을 되 찾고, 허겁지겁 걸레를 바닥으로 내려두었다. “내 얼굴이 바닥이냐?” “…아니.” “그럼 내 얼굴이 창문이냐?” “아니….” “근데 왜 사람얼굴에 걸레를 문지르는데!!!” 주먹을 치켜드는 차연우의 행동에 깜짝 놀란 나는 걸레를 내팽개치고 36계 줄행랑을 냅다 쳤다. 녀석은 사과를 해도 모자랄망정 도망을 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너, 오늘 딱 걸렸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죽어라 나를 뒤 쫒아오기 시작했다. 강당은 넓었다. 바닥은 미끄러웠으며, 차연우의 달리기 실력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뛰어났다. “미안하다고!! 미안해!” “얼굴보고 사과해야지, 냅다 도망치면서 사과 하냐?! 어?!” “미안하다고, 이 새끼야!!” “이 새끼? 너 오늘 나한테 죽어 봐라, 어디.” 김혜미는 강당 정 중앙에 앉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와 차연우를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고, 차연우는 냅다 도망치고 있는 나를 계속해서 뒤 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겁을 주려 뒤쫓아 오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하나 잡지 못하는 그런 자존심 때문에 날 뒤쫓아 오는 것 같았다. 어찌됐건 이러나, 저러나 난 잡히면 죽는다는 거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신은 내 편에 서주셨나 보다. 점점 숨이 차올라 스피드가 떨어지고 있는 나를 잡으려는 순간, 바닥이 미끄러워 ‘끼이이익-’ ( 녀석은 건방지게도 실내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하고 자빠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물론, 그건 김혜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하하. 아나, 미치겠다. 하하, 하하하.” “끅, 웃음이 안 멈춰져. 어떡해. 끅, 풉.” 웃음소리가 강당 안을 점점 크게 울릴수록, 반대로 녀석의 미간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염장을 질러라, 아주.” 이제는 차연우도 포기한 건지, ‘에라이, 모르겠다.’라며 뒤로 홀라당 누워버린다. 그리고 나 역시, 너무 뛰어다녀서 인지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오늘 같은 날은 마셔줘야 하는 건데.” 이마에 손을 얹으며 힘이 드는 듯, 한숨을 내뱉듯이 던지는 차연우의 말. 그리고 이어서 김혜미가 그 말을 받아친다. “향미야, 오늘 네 동생 생일 아니야?” 갑자기 이향원 생일이 왜 나오는 거지? 하고 생각한지 3초가 지나가는 그 때, 김혜미의 입에서는 나와서는 안 될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오늘 네 동생 생일파티, 우리도 가자! 가면 공짜로 먹을 수 있을 거 아냐!” 차연우의 눈이 번뜩이고,(‘공짜 술’이라는 말에 번뜩임이 분명하다.) 김혜미의 눈은 초롱초롱해진다. 때 마침, 강당 안으로 들어오던 권강재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 ‘좋네.’라며 긍정의 표시를 하고야 만다. 이래서 난… 이 것들이 싫다. 내게 있어서 덫 같은 존재들인 저 셋이. * * * “마셔라~마셔! 마셔라~마셔!” 끅, 끄윽. 우웩. 갖은 효과음을 총 동원해도 이 느낌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망할 놈들, 예끼 놈들 같으니라고! 이향원 친구들하고 술을 마실 때면, 항상 이 이상한 게임을 한다고! 난 항상 걸리고! 그래서 원치 않았는데…. “뜸들이지 말고, 마셔. 노래 끝날 때까지 안 마시면 두 번째 벌주 간다.” 윽,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하는 수 없이 두 눈 꼭 감은 채 온갖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맥주에 섞어 놓은 잔을 꿀꺽, 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알 수 없는 알맹이들. 금방이라도 도로 올라올 것만 같았지만 참아야했다. 무조건 참아야만 했다. 안 그럼 2차 벌주를 마셔야 하기에. 그 것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다. “오오오~! 형 멋져요!” 히발, 방금 누가 나보고 ‘형’이라고 했어!! 잡히기만 해봐. ‘형’이라는 소리에 욱- 하고 마시던 걸 뱉을 뻔 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입 속으로 탈탈 털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는 안주를 미친 듯이 입 속으로 넣기 시작했다. 권강재가 미친 듯이 웃는다. 녀석 알면서 동의한 것이다. 이 곳에 오면 내가 벌주를 미친 듯이 마실 거라는 것을 알고. 좀생이 같은 새끼. 분명, 내게 복수를 하기 위해 동의 한 것이 분명해. “자, 다시 게임 시작합시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자기소개 하기.” 게임 명. 일명 ‘말’게임. 테이블을 기준으로 빙 둘러 앉아 1번부터 번호를 매긴다. 그리고 자신의 번호를 기억하고 받아치는 게임이다. 우선 1번 말부터 시작하여 자기소개를 먼저 한다. “1번 말.” “2번 말.” . . . “10번 말.” 소개가 끝났으면, 벌주를 마신 사람을 시작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이 전판에서 내가 벌주를 마셨으므로, 게임은 내가 시작한다. 내 말은 7번 말이다. (참고로 김혜미와 차연우는 쉬고 싶다며 게임에 참가하지 않고, 맥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7번에 5번.” “5번에 3번.” “3번에 10번.” 7번(나)이 5번 말을 부르면, 5번 말은 리듬에 맞춰 빠르게 다른 말의 번호를 불러야 한다. 여기서 리듬을 놓쳐, 한 박자 늦게 말하거나 말 번호를 부르지 못하면 걸리는 것이다. 의외로 쉬운 게임이다. 하지만 항상 내가 걸리는 이유는…. “10번에 7번.” “7번에 1번.” “1번에 7번.” “7번에 10번.” “10번에 7번.” … 이것들이 미친 듯이 나만 공격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주도자는 이향원이다. 저래놓고, 집에 가서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면 나에게 이렇게 쏘아 붙이곤 했다. ‘술 좀 작작 쳐 마시지.’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변기통을 부여잡으며, ‘이, 이 거지같은 우욱-!!’ 하고 욕설을 내 뱉으려 해도 멈추지 못하는 토악질에 한참을 변기통과 면담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 “치, 칠 번에…,아, 제기랄.” 아무래도 나는 오랜만에 또 다시 변기통과 안면 까고 면담을 또 해야할 듯 하다. 결국, 미친 듯이 날 겨냥하고 공격하는 1번 말(이향원)과 10번 말(권강재) 때문에 두 번째 벌주도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새우깡을 시작으로, 맥주, 오징어, 마요네즈, 알 수 없는 검은 색 알갱이, 그 밖의 등등을 하나, 하나 섞기 시작하는 이향원의 모습.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이향원. 오늘 너, 꼭 한번 보낸다.’ 제 7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시점. 이번에도 역시나 내 앞에는 알 수 없는 색깔을 띠고 있는 액체가 놓여져 있었고, 어쩔 수없이 나는 그 액체가 담긴 잔을 향해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이 게임의 벌칙이었으니까. 게임에 진, 나는 그 것을 마셔야만 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다만, 보기 만해도 넘어올 것 같은 누런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죽일 듯이 이향원을 노려보았다. 두고 보라는 식으로. “역시 누님이랑 해야 게임이 재미난다니까?” “윽.… 아부 떨지 마, 씹새야.”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방금 전 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 이물질들을 모두 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이 망할 게임부터 바꿔버리자고. “후, 게임 그만하자? 나만 걸리니까 재미없잖아.” “왜, 재미만 있는데?” 노골적으로 날 노리고 시행한 넌 재미있었겠지요, 이향원씨. 조용히 닥치라는 뜻으로 녀석을 살짝 노려봐준 뒤,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우선, 이향원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게임으로는 안 된다. 1:1 게임이라면 모를까. 분명히 권강재와 또 합동하여 날 공격할 것이 분명하니까, 제길스럽게도. “진실게임. 어때?” “에이~, 누님. 요즘 그런 거 잘 안 해~.” “그냥 진실게임이 아니지. 맥주병을 돌려서, 맥주병이 가리킨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기존 룰이라면, 이번에는 반대로 그 사람이 질문하는 거야. 오케이? 대신 질문이 식상하면 마시는 거지. 그 판가름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고.” “오호, 만약에 지목한 사람이 대답을 못 하면 그 사람이 마시는 거고?” “대답을 하게 될 경우에는 질문을 한 사람이 마시는 거고.” 내가 제안한 룰에 이향원을 제외 한(권강재는 관심 없는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든 이가 찬성하였고, 결국 내 뜻대로 게임은 시행되었다. 맥주병은 마지막 벌칙자인 내가 돌리게 되었다. 속으로 ‘제발 내가 걸려라, 내가 걸려라.’ 라고 수십 번, 수백 번을 외치고, 또 외치며 맥주병을 돌렸다. 맥주병은 바람개비가 돌아가 듯 빠르게 돌아가더니, 점점 속력이 낮춰지며 제길스럽게도 내 앞이 아닌, 차연우의 앞에 멈추어 섰다. “얼라? 형 앞에 섰네. 형 참여 할 거예요?” “뭐, 아까 그것보단 재미있어 보이네. 질문만 하면 된다고 그랬지?” “질문 만 하시면 되요! 대신 파격적인 질문이 아니거나, 식상한 질문이면 형이 벌주 마셔야 해요.” “그까짓 거.” 말투 봐라. 어디 한번 지목 해봐라, 라는 식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녀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내 표정은 일그러졌고, 반대로 녀석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 지 씩- 하고 웃어 보인다. 아, 불길하다. 저, 재수 없는 미소 좀 보아라. 굳게 닫혀있던 녀석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녀석은 정확히 한 단어를 내 뱉었다. 간결하고 굵은. “첫 남자.” 첫…남자? “에이, 형! 너무 식상하잖아요!” “맞아, 그게 뭐예요. 좀 더 강한 거!” “조막만한 것들아, 너희들이 그래서 어리다는 거야. 네 또래 애들한테 물어보는 거면 식상하겠지만, 쟨 다르잖아.” 그건 무슨 의미인데…, 차연우. “첫 남자에 대한 사연 짧게 읊어보시지? 꽤나 궁금하거든. 네 성격 받아준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관심 없단 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권강재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지고, 김혜미 또한 흥미로운지 내게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첫 남자라. 순간 내 머릿속을 가득 매우는 이름은 단 하나. ‘신재원.’ 하지만 첫 남자는 아니다. 첫 남자라는 뜻은 곧 사귄 사람을 뜻할 것이며,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서 사귄 교제를 말하는 걸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나의 일방적인 통행이었으니까. 하여간, 저거는 기분을 낙하산 태우는데 뭐 있다니까. 오랜 침묵이 흐르고,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없다.’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이 믿겨지지 않는 건지 1학년 놈들은 야유를 보내고, 차연우는 슬그머니 내게 벌주를 내민다. 이 거지 같은 게. 벌주를 내미는 녀석의 손목을 잡으며 해명을 하려 할 때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권강재가 입을 열었다. 그 것도. “사실이야.” 나를 감싸는. “그럴 걸.” 연이어 이향원 역시 나를 대변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고, 꼴좋다. 저 벌주의 주인은 너인 듯싶다, 이 꼬꼬마야.” 김혜미의 통쾌한 한마디에 차연우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옆에 앉아있던 권강재는 팔짱을 끼며 ‘쯧.’하고 혀를 찬다. “…빌어먹을.” 이향원 보내려다가 차연우만 골로 가게 생겼구나. 벌주를 입에 가져다대는 차연우의 얼굴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뚜렷했던 눈매가 점점 일그러지면서 미간이 좁혀진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오고, 작게 열린 입술 사이로 ‘벌주’의 내용물이 하수구에 흘러 들어가 듯, 들어가 버린다. 저 맛을, 저 느낌을 아는 나로서는 통쾌한 느낌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맛을 알기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저 맛을. “…우윽.” 하지만 몇 번 마셔보아라. 그 맛 또한 익숙해진다. 차연우가 남은 벌주를 ‘꿀꺽, 꿀꺽’ 입 안으로 털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디 가?’라고 권강재가 그에게 묻자, 그는 ‘집.’이라는 간단한 한마디를 내 뱉은 뒤 외투를 집어 들며 자리를 뜨려했다. “야! 같이 가!” “누님, 강재형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에이, 누님 가면 재미없는데!” 물론, 이 곳에 올 때는 녀석과 집으로 가려 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여기서 한 잔이라도 더 마셨다가는 지금까지 내 몸속으로 들어간 이물질들을 모두 다 뱉어내버릴 것 만 같았다. 그랬다가는 이향원의 생일파티는 무참히 끝날 것이 뻔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도 나는 슬슬 사라줘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저기 뻔뻔하게 앉아서 안주를 계속해서 입으로 쑤셔 넣고 있는 김혜미와 반대로 술잔을 놓지 않는 권강재 또한 말이다. 하지만 녀석들. 일어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나라도 먼저 가는 수밖에. “가려면 빨리 나와.” “알았다고! 먼저 나가있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연우는 문을 ‘쾅!’하고 닫으며 룸 밖으로 나갔고, 나는 이향원을 향해서 ‘생일 축하한다, 짜샤! 이거 받아라!’ 하고 조그만 소정의 선물을 녀석에게 던진 뒤 허겁지겁 방 밖으로 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자,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와 온 몸을 순환하기 시작한다. 저 앞, 긴 다리로 휘적휘적 밖으로 나서고 있는 차연우의 뒷모습이 보인다. 뒤태 한번 잘 빠졌다. 하지만 녀석의 뒷모습 감상도 잠시. 금방 사라질세라, 녀석을 뒤 쫓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차연우, 이 새끼. 내게 인사 한마디도 없이 자신의 집 방향 쪽으로 몸을 트는 것이 아닌가! “야!”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 위험하다면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각이었다. 그런데 남자라는 새끼가 여자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지도 않고, 그 것도 인사 한마디도 없이 가버리려 하다니. 매너가 없는 건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없는 건지. “왜?”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매가 날카롭다. 벌주로 인하여 속이 매우 안 좋아 보이는 듯 했다.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이래 뵈도 나 여자야.” 왜 내 가슴을 쳐다보는 건데…. “자정 12시를 가리키는 이 시각, 넌 여자를 혼자 보낼 수 있어?” 제발. “응.” 라고 대답하지는 말아달라고 바라고 있었것만. 어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하니. “나 여자야.” “근데.” “여자라고. 여자야. 나 여자야.” “그래서 뭐. 아, 얼굴 들이밀지 마! 가뜩이나 속 매스꺼워!” 이 거지같은 게, 또! “데려다 줘.” “나, 지금 당장이라도 변기통에 얼굴박고 다 뱉어버리고 싶은 심정이거든?” “나 여자야. 데려다 줘.” 싫다는 아이를 보내지 않고 이렇게 우기는 이유는 뭐, 그리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이 밤중에 20분이나 되는 거리를 혼자서 집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서늘하게 부는 차가운 바람과 하나 되어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 줘.” “야.” 나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바람에 묻혀 작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게 입을 닫고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녀석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낮게 욕을 읊조렸다. 물론 발걸음은 우리 집이 위치한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안 춥냐?” 손을 비비며 ‘호오.’하고 부는 차연우의 모습이 마냥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추워. 빌어먹을 날씨가 원망스러울 만큼.” “필이 팍팍 느껴지는 구나, 네 말투에서부터.” “말시키지 마. 입안에 바람 들어가.” “그럼 왜 데려다 달래?” 그야, 혼자가기 싫으니까 데려다 달라고 하지. 권강재가 따라 나오기만 했더라도 너 같은 녀석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얼굴 좀 구기지 말아줄래? “진짜 꼴에 여자라고…. 야, 입어.” 헌데, 예상 밖의 일이 이루어졌다. 얇게 입고 나온 탓 일까, 집으로 향하는 내내 입술이 덜덜 떨려왔고, 어깨 또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자신의 눈에 안쓰럽게 비추었던 것일까? 녀석이 입고 있던 파카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준다. 꼴에 남자라고. “야, 됐어. 너 입어.” “줄 생각 없으면서 나 생각하는 척 말하지 마라.” 눈치 하나는 빨라요. “뭐, 줬으니까 잘 입긴 할게.” “말이나 못하면 한 대 때려주기라도 하지.”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정말 추웠는데. 역시 남자와 함께 다녀야 해. 녀석들도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이러한 배려를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향미.” 파카를 여미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너도 인간이긴 하지. 남자라고 여자랑 다를 게 뭐 있겠냐. 추워죽겠지? 휴, 나도 정말 차연우 말대로 꼴에 여자라고 녀석이 걱정되기는 한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런지. “껴, 새끼야. 남자새끼가 덜덜 떨기는.” 내가 끼고 있던 장갑을 녀석의 손에 쥐어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녀석은 장갑을 엉겁결에 받아들더니,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첫 남자, 정말 없냐?” 헌데, 이어진 녀석의 말은 정말 뜻밖의 질문이었다. “네가 한 그 질문.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서 사귄 사이를 물었던 거 아냐? 그거라면 없어.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던가, 아니면 그 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적 밖에는 없으니까.” “꽤나 당당하네.” 자랑하듯이 말하는 나를 탐탁치 않아하는 눈길로 힐끗 쳐다보는 차연우. “그럼 반대로 물어보자.” 진실게임 끝난 지가 언젠데, 왜 계속 묻는 거야? 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녀석이 준 파카 때문일까?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이 물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제일 싫어했던 사람은 누구냐?” 싫어했던 사람? “그럼 넌. 넌 뭔데?” 대답하기 전 녀석의 대답을 먼저 듣고 싶었다. 세상 살기 편해 보이는 녀석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버리는 사람.” 버리는 사람? 무엇을 버리는 사람? “난 버리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 아주 끔찍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입가에 걸려져 있는 미소가 씁쓸하게만 보였다면 내 눈이 잘못 된 것일까? “이제 네가 대답해봐. 넌 뭔데?” …나?…. “싫어했던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이야.”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야.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난 싫어하고, 원망하고 그럴 테니까. “선생님. 빌어먹을 선생이라는 직업.”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해. 선생님이란 직업 하나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을 수 있으며, 선생님이란 직업 하나만으로 아이의 마음을 무시 할 수 있다. 선생님이란 직업 하나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막을 수 있으며, 선생님이란 직업으로 변명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 남자를 여전히 좋아한다. 여전히. “어? 다 왔다.” 때 마침, 눈앞에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고픈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장갑은 학교에서 주고, 파카 받아.” 차연우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내미는 자신의 파카를 받았다. 그런 녀석을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넨 뒤, 집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작지도 크지도 않은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린다. “주변을 잘 돌아 봐라. 어쩌면 네 주변을 항상 맴도는 그 녀석은 널 가장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남겨둔 채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차연우. 나는 한참이나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향미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난 뒤 집으로 향하는 길. 그녀가 준 장갑덕분일까, 날씨가 마냥 춥지는 않다. 하지만 얼굴에 부딪히는 찬 바람은 견디기 힘들만큼 추웠다. 그 때, 바람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연우는 들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틀자, 그 곳에는 한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러 명의 남학생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만 있었다면,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은 작았고, 가냘팠다. 하지만 점점 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귓가로 파고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성다웠기에 곧 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발걸음을 되돌리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연우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야, 이 새끼 꼭 생긴 게 여자 같은데 여자 아니야?” “확인해 볼까? 큭큭.” “아가야, 이리 와 봐. 형들 품에 앵겨 봐. 어서, 쭈쭈.” 몸집이 작고 가냘파 보이던 남학생. 반대로 우람한 몸집에 건장한 남학생들. 게다가 녀석들의 질은 ‘하’중에서도 ‘최하’인 듯 했다.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말이다. 게다가 ‘남자’라는 단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연우였기에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치고 갈 수 없었다. “야, 너희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는 어두운 골목길 통로 앞으로 다가섰다. 우람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남학생들은 연우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이건 또 뭐야?’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쭈? 뭐야? 갓 입학한 새끼들 아냐, 이거?” “이 비리비리한 것은 또 뭐야?” ‘비리비리’한 이라는 말에 순간 연우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비리비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영정고등학교.” 그들이 입고 있는 ( 연우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조그마한 남학생을 포함해서 ) 교복은 연우가 다니고 있는 영정고등학교의 교복이었으며, 명찰 색을 보아하니 올 초 3월에 입학한 갓 고등학생이 된 1학년들이었다. 그러니, 연우가 열 받을 수밖에. “이번 신입생 왜 이래? 선배 보기를 개 같이 하냐?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패러디냐, 엉?” 연우의 말에, 그를 노려보고 있던 남학생들이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된 건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허둥지둥 도망가 버린다.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리자,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조그마한 남자아이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넌 뭐냐?” “한효빈.” 누가 이름을 물어봤나….이름은 또 왜 저리 여자 같아? 무표정을 일관하며 대답하는 남자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 것도 아니면 남자아이의 손에 들린 건빵이 눈에 거슬린 건지 연우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삐딱하게 내려다 봤다. “할 말 없냐?” 꼭 ‘고맙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는 것이 예의 아니 인가. 예의라면 눈곱만치도 모르는 연우였지만, 그 역시도 이러한 상황에 자신이 놓여있다면 한마디쯤은 했을 것이다.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게 입을 닫고 있을 뿐. “뭘 바라겠냐. 가라.” 연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아이의 옆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아이가 연우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서는 방금 전, 우람한 남학생들이 사라진 골목길 안으로 자신 또한 모습을 감추었다. 연우는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자신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연우는 이내 콧웃음을 쳤다. 연우의 손바닥에는…. “이거 웃기는 새끼네?” 건빵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댓글 1개 이 글을...(0) ⓧ14월이 조회수 2에 보는 짜릿함 >_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08 ~ 14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528 08.06.26 22:59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58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제 8화 Real Start. 새로운 일주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조금은 늦게 오길 바랐던 그 아침이 너무나도 빠르게 다가와 창문 틈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끄럽게 시작되었다. 교복이 어디 있냐며 오리마냥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이향원과, 그런 아들을 향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더 이상은 이 광경과 마주하고 싶지 않기에 대충 가방을 매고 먼저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을 해서도 쏟아지는 잠은 여전했다. 오늘 수업을 무사히 듣기 위해서는 자습시간에 잠시 눈이라도 붙여야 할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짬조차 주려하지 않는 이 망할 학교. 이 학교를 떠나는 날, 학교 건물 중앙에 밀가루와 계란을 섞어 날려 주리라- 맹세를 하며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동아리 부서 실이었다.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 부서 실 안에는 나를 포함해서 정확히 3명이 가운데 책상을 중심으로 소파에 빙 둘러 앉아있었다. 나머지 2명을 짧게 소개하자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빼죽 내밀고 있는 김혜미와, 소파에 누워 단잠을 청하고 있는 권강재였다. 아무래도 부원을 다 부른 듯싶었지만, 차연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여자의 직감으로 녀석은 분명 늦잠을 잔 것이 분명하다. “아, 진짜! 인형 가지고 좀 그만 투덕거려! 정신 사나워!” 가뜩이나 아침 일찍부터 부실로 불러 불만 가득 했던 나의 신경을 건드는 김혜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꿈지럭거리는 김혜미의 모습. 하지만 신경질을 부리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김혜미는 굴하지 않고 인형의 머리를 곱게 빗고 있었다. “도대체 아침부터 왜 부르는 거야? 하여간 이 놈의 부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다리를 꼬며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5분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여차하면 자습시간이 모두 다 끝날 듯 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오늘 수업시간에 쏟아져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을 자게 될 것이고, 수업은 듣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선생님. 이쯤 되면 교실로 돌아가도 되겠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그 때, 문이 열리면서 기다리던 그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곧, 그 시선은 선생님의 뒤편에 서 있는 조그마한 남자아이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우리학교의 남자교복을 입고 있는, 그 것도 1학년 명찰을 달고 있는 아이에게로 말이다. “많이 기다렸지? 어? 연우는 아직 안 온 거야?”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서는 차연우의 행방을 물어오는 선생님의 행동이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요.” 그 때, 소파에 누워 자고 있던 권강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덜 깬 얼굴을 하고서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서는 선생님을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정확히 말하면 차연우에게서 온 문자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나 지금 일어났다? 15분전에 온 문자네?” 15분전? 그럼 지금쯤 한창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겠군. 하긴 공부랑은 담도 아닌 성을 쌓고 지내는 너인데, 그까짓 학교 너에게 뭐가 대수겠니. 그저 우리가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야지. “그 뒤에 꼬꼬마는 누구예요?” 이야기 주제가 ‘차연우’에게로 쏠려 있을 때 쯤, 김혜미가 선생님의 뒤에 숨어 있는 의문의 아이에게로 주제를 돌렸다. “아, 맞다. 새로운 부원이야. 선생님이 섭외해왔어! 자, 효빈아. 인사해야지?” 효빈? 여자 이름 아냐, 저거?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학한 1학년 2반에 재학 중인 한효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 녀석… 골 때린다. 선생님이 앞으로 그 아이를 내세우자, 효빈이라는 아이는 정확히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며, 그 것도 국어적인 말투로 딱딱하게 인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얼굴을 붉히며 소심하게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던 내 생각과는 달리, 녀석은… 걸어 다니는 로봇같이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여자지?” “남자입니다.” “구라 까면 이 언니가 화성으로 보내버린다, 꼬꼬마야?”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인지, 김혜미 역시 효빈이란 아이를 여자로 생각하나보다. 헌데, 저…녀석. 아무래도 김혜미의 천적이 아닐 듯싶다. “그거 명예훼손죄입니다. 그건 아십니까?” “…뭐? 명 뭐?”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 대한민국의 법도 모르십니까?” 이번 일학년… 왜 이러냐? “혜미야! 인형 내려!” 딱딱한 말투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 김혜미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언젠가 내게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감정을 들어내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인간적이고 매력 있지 않냐고 말이다. 즉, 그 반대인 사람은 김혜미의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효빈이라는 아이는 충분히 김혜미의 눈에 거슬릴 만큼 감정을 들어내지 않는 듯 했다. 마치…. “효빈이가 선도부원이 꿈이라서 이러는 거야!” 그래, 우리학교 3학년 선도부 부장과 성격이 판박…엥? 꿈? 할 꿈이 없어서 선도부 부원이 꿈이냐! “여자 같아서, 여자라고 한 게 뭐 어때서!” “원한다면 때려도 좋습니다. 벌점 6점에 부모님 소환을 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하고 손에 쥐고 있던 건빵봉지에 손을 넣어 건빵을 입안에 하나 쏙 넣는다. 오도독- 오도독 건빵 먹는 소리가 부실 안을 가득 울린다. “큭. 김혜미 고생 좀 하겠다?”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인형을 치켜들 정도로 화가 난 김혜미는 부모님 소환이라는 말 하나에 꼬리를 내려버린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권강재는 작게 웃음을 토해내었다. “이름이 한효빈이라고? 예쁘장하게 생긴 게 동급생들한테 좀 시달리게 생겼네.” “건빵 많이 줍니다.” …푸…푸흑. 큭. 푸, 푸하하하-! “하하. 아나, 미치겠다. 너 왜 이렇게 웃기니? 아나…큭큭. 아, 미쳐. 진지한 얼굴로 건빵 많이 줍니다가 뭐야. 큭큭.” 의외로 녀석은 …웃음을 꽤나 많이 선사해주는 녀석이었다. 무표정 따위를 짓는 주제에 말하는 건 왜 저리 엉뚱한 거지? “자, 1학년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칫.” 나는 한효빈이라는 녀석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건 권강재도 마찬가지 인 듯했다.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는 유일하게 김혜미 혼자인 듯 했다. 물론, 차연우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헌데, 잠시나마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있던 나의 기분을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효빈이가 내게 건네준 건빵하나를 그만 부숴버리고 말았다. “오늘 점심시간부터 설문조사를 하러 다녀야 해.” “그 것도 학교를 위한 봉사인가요?” “음, 이건 신문부에서 부탁한 거야!” …제발요. 제발-!! 일거리를 만들지 마세요! 그리고!! “신문 부를 돕는 일이 학교를 위한 봉사예요? 아나, 왜 매일 말도 안 되는 일을 가지고 오는 거냐고요!” “잘 부탁해, 그럼! 선생님은 수업 준비하러 갈게!” 도피하지마세요-!! 아악-!!!!! 문을 열고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리는 선생님. 그 때, 복도 밖에서 밝은 선생님의 목소리와 낯익은 녀석의 목소리가 부실 안까지 들려왔다. “연우, 늦었네~. 새로운 부원 왔으니까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알았지? 선생님은 수업하러 가볼게!” 덜렁거리고, 맨날 웃기만 하고, 할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도대체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선생님이 된 건지 2년 전부터 항상 의문이었다. 저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피할 거면 왜 맡으신 건지. “여.” 차연우는 부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짧게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곧, 땅에 떨어진 건빵부스러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한효빈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차연우. 그러더니 갑자기 그 아이를 향해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다. “너 그 때, 그 건빵!!!” 라고 소리치며 말이다. 그런데, 그 건빵이라니? 차연우가 얠 알고 있었나? “네가 새로 온 부원이야? 그리고, 그 놈의 건빵은 학교에도 가지고 오냐?” 차연우의 시선이 효빈의 손에 들린 건빵봉지에게로 꽂히자, 효빈은 곧 봉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건빵 몇 개를 꺼내더니. “더” 더? “드실래요?” “너나 쳐드세요. 야, 권강재! 너 내 문자 왜 씹냐? 씹어 드시니까 아주 맛나더냐? 엉?” “그다지. 별로.” …김혜미보다 더 4차원적인 아이는 네가 처음인 것 같아. 효빈아. 우리 가깝게 지내지 말자. 김혜미만으로도 충분해. 너까지 내게 덫이 되려 하지 마렴. 차연우는 효빈이 내민 호의를 거절하고는 곧 권강재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곧, 권강재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그 때, 효빈이 건빵봉지를 내밀며 말한다. “드세요.” …뭐냐. “아니, 난….” “전 많으니까 사양 말고 드세요.” …그런 게 아니라. 나름 선배라고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것 같지만, 사양하고 싶었다. 단 것은 좋아라 하지만, 건빵 같은 과자를 선호하지 않는 나이기에. 게다가 너무 졸려 입맛도 없었다. “난 단 걸 좋아해서….” 그래서 대충 변명을 둘러대며 호의를 거절하려 했으나, 녀석. 의외로…강적이다. “까다로우시네요.” “…뭐?”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자, 드세요.” …내게 별 사탕을 내민다. 아니, 내 말은 별… 하아. 이번에도 거절하면 아예 봉지째 줄 것 같아서 거절 할 순 없었다. 게다가 별 사탕도 되게 아깝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나도 줘.” 그 때, 옆에 앉아있던 김혜미가 손을 내밀며 자신도 달라 말한다. 헌데, 이 녀석. 사람 가리나 보다. 아니면 김혜미만 유독 싫다거나…. “싫습니다.” “나도 줘!” “없습니다.” “봉지 안에 있잖아! 나도 줘!” 김혜미가 봉지를 가리키며 말하자, 효빈이 봉지 안에 남아있는 건빵을 모조리 꺼내더니 입안으로 몽땅 다 넣어버린다. 마치 그 모습이 입안에 해바라기 씨를 가득 넣고 다니는 햄스터같이 보였다. 저 아이. 참 귀엽다. 1학년의 풋풋함이 느껴진 다랄까. 물론… 저 무표정은 어떻게 해주고 싶을 만큼 풋풋함이 느껴지지 않지만. “야!” “이엔 업움니다.”(이젠 없습니다.) 이런 걸 바로 골 때린다고 하는 거라지? 김혜미는 분통터져 죽으려고 한다. 때릴 수는 없고 아주 미치려고 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적수를 만난 듯 하다. 효빈은 여전히 입 안에 들어있는 건빵을 오물오물거리고 있었다. 권강재와 차연우는 지난 밤 늦게 컴퓨터로 했던 게임 이야기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용어를 섞어가며 한창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1년전 내 모습, 내 주변과는 판연히 다르게 시끄럽고 즐거웠다. 2학년을 시작하는 두 번째 월요일 아침은 시끄러웠으나 즐거웠다.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런 생활이 훗날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덫이 되었는지, 그 반대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드는 덫이 되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즐거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웃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 * * 아침에 먹은 별 사탕이 모두 다 소화되고 배꼽시계가 울리는 시간이 다가왔다. 평소 때라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급식실로 뛰어가야 정상이거늘, 어째서 오늘은 이러한 일 까지 도맡아서 해야 하는 건지 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 속에는 온통 불만이 가득했고, 입술은 튀어나올 때로 튀어나왔다. “7반 반장 어디 있어?” “급식실 갔을 걸?” 아, 젠장할. 왜 하필 급식시간에 이런 걸 시켜가지고는. “반장 녀석 오면 이 것 좀 전해주고, 오늘 안으로 신문부에 제출 좀 해달라고 전해줘.” “이게 뭔데?” 이게 뭐냐고? 넌 눈이 없니, 손이 없니. 안 보이면 손으로 종이를 들어다가 네 눈앞에 가져다 되고, 안 보이면 네 두 눈으로 그 글자들을 읽으면 되잖아! “수학여행설문조사.” 하지만 나는 친절한 아이니까. 그래, 나는 참 친절하고 예의바른 아이니까 내게 물어보는 아이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신문부에서 하는 설문조사? 근데 왜 이걸 네가 해? 너 신문부 아니잖아.” 그래, 네가 생각해도 그러한 의문이 들지? 나도 그래. 왜 내가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지 나도 이해가 안가. 난 …그래, 그 망할 봉사 아닌 봉사를 하는 동아리에 들었긴 했는데, 학교를 위한 봉사를 하는 동아리지, 부서를 위한 봉사 동아리가 아닌데 왜 내가 그걸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 아닌데, 시켜서 하고 있는 중이다. 어찌됐건 꼭 가져다 내라고 해. 안 내면 내일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고 꼭 전해.” 7반의 반장 녀석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 중 하나이다. 밝고 쾌활한 녀석이라 친하게 지냈긴 하지만, 녀석의 단점은 게으름이었다. 이렇게 으름장을 놓지 않는다면 분명 오늘은커녕 내일도 가져다 놓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 그 때, 저 멀리서 빈손으로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인다. 어째서 내 손에는 이렇게 한 가득 종이가 안겨져 있는데, 너는 빈 손인거지? 어째서? 설마 벌써 다했다고는 말 하지 않겠지? 1학년 총 담당을 하고 있는 네가-!! ( 1학년은 수련회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너 뭐야! 왜 빈손이야!?” “다 했으니까.” 정말? 정말로 다했다고? 그 많은 걸? 무려 9반이나 되는 그걸 네가 벌써 다했다고!? 6반 담당한 나도 아직 3반 밖에 못했는데 네가 벌써 다했다고?! 네가 무슨 엑스피드야?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할 수가 있어? 믿을 수가 없다. “속으로 씨부렁거리지 말고, 입으로 말해” 간파 당했군. 벌써 다할 정도면 내 것도 금방 할 수 있겠다.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겠지? 하고 녀석에게 도와 달라 부탁하려 하는데. “참고로 도와 줄 생각은 없다.” 미리 선수 쳐 버리는 권강재였다. 나는 그래서 네가 재수가 없다. “한 반만.” “나한테 부탁할 시간에 한 반을 하고 말지.”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천하에 몹쓸놈-! “차연우한테 부탁하던가. 그 녀석도 아까 보니까 다 끝낸 거 같은데.” 내가 느린 건가…. 하고 생각을 하려 해도, 저 멀리서 나보다 더 많은 양의 설문지를 들고 오고 있는 김혜미의 모습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꺼져-! 제발 꺼지라고, 응?” “정말입니까? 정말 꺼져도 됩니까?” “어! 정말이니까 좀 가-!” “그럼 그 건 혼자 다 하십시오.” “뭐? 어? 야!! 아냐, 사라지지마-!!” …저렇게 말다툼만 하고 돌아다녔다면 당연히 늦어지겠지? 그럼 저 녀석들이 빠른 게 아니라 내가 느린 거였군. 후으, 후으. 이걸 다 언제하지? “걍 내놔.” “어?” 권강재는 내 손에 들린 설문지(2반 분량)를 낚아채가더니 아무 말 없이 8반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덕분에 내 손에는 1반 분량의 설문지만이 남겨져 있었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혔고, 나머지 한개 분량의 설문지를 10반 반장에게 넘겨줌으로써 내 할당량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목에 힘주며 고개를 틀자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우드득, 우드득.’하고 들려왔다. “오늘도 집에 가면 바로 뻗겠구나.” 가벼운 몸이 된 기쁨에, 텅 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매점으로 향하던 중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그 곳으로 옮겼지만, 곧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틀 수 밖에 없었다. 왜냐고? “귀엽지 않냐? 귀엽지 않아?” “이름이 똥키라고? 똘키도 아니고, 동키도 아니고 똘츄도 아니고 똥키라고?” 무진장 쪽팔렸으니까. “그래, 이 시밤바야. 불만 있냐?” “어이, 똥키. 왈왈 짖어봐. 왈왈.” ‘왕왕-!!’ 이향원 저 망할 놈이 미쳤는지 똥키인가 뭔가 하는 그 개새끼를 학교에 기어코 데려온 것이다. 아침에 엄마가 똥키를 발로 찼다고 뭐라 뭐라 소리 지르며 데려가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이향원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설마 데려올 줄이야. “야 이 개새끼….” “너 개새끼라고 부르면 뒤진다고 했냐, 안했냐!?” “개님아. 내가 왈왈 짖으랬지, 언제 왕왕 짖으랬나요?” 왈왈이나, 왕왕이나…. 이향원 친구가 정상이길 바란 내가 못된 년이고, 병신이지. 강아지 앉혀놓고 하는 짓이 너무나도 꼴불견일뿐더러, 비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놈들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는 똥키가 너무나도 불쌍해서라도 구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갈 때까지 학생부에 맡겨 놓던가 해야겠다. “개새끼 데리고 뭐하는 짓이야?” “걍 지나가라? 그리고 개새끼라고 부르지 말라고! 얘 이름은 똥키야, 똥키!” 똥키나 개새끼나, 개새끼나 똥키나. “하긴, 얘는 개라고 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해.” “너 지금 우리 똥키를 모욕한거냐?” …제발 학교에서 만이라도 누나라고 불러주겠니? 누가 보면 나 1학년인 줄 알거든…. “야, 이향원….” “일어나 똥키-!! 일어나서 저 기집애 물어! 너의 야생본능을 발산해!!!” …오, 하나님. 정녕 이 놈이 내 동생 맞습니까? 어쩜 저와는 이리도 다릅니까?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 진짜. 더 웃긴 건 똥키까지 이향원을 무시하는 건지 바닥에 엎드려서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그저, “왕왕-!! 왕왕!!” 하고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짖을 뿐. 넌 네 주인하고 닮지 않아서 참 귀엽구나. 앞으로 말만 잘 들으면 내 애견으로 받아줄 생각은 있단다. 헌데 네 주인은 너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나 보구나. 얼굴이 빨게 지면서 너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고 있구나. “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 이… 배신자!!” 하고 달려가는 걸… 달려? 달려가? 이 강아지는 어쩌고? 왜 너 혼자가?! “야! 야 이향원!!!! 이 강아지는!!!” “난 오늘 똥키에게 이별을 고했어! 이제 네가 알아서 책임져!!” …제발 지랄 쌈 싸먹지 말고 돌아오지 않을래? 응? 제발 좀…. 네가 그렇게 사라지면 뒤치다꺼리는 또 내가 해야 한다는 거잖아!! 하고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쳐보았지만 ( 차마 입 밖으로 말하기에는 이 강아지에게 시선 집중된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녀석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강아지를 껴안고 학생부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학생부 선생님은 내 품에 안겨있는 강아지를 보더니 눈이 댕그래지셔서는 내게 달려오셨다. 아무래도 강아지를 매우 좋아하시는 듯 했다. 정말 다행히도.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학교가 끝날 때까지만 맡아 달라 부탁을 하였고,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심으로써 학교 수업을 끝 맞출 때까지 편안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 * * 집으로 향하는 길, 똥키를 껴안고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도 똥키는 이향원을 닮지 않아 매우 얌전히 품에 안겨있었다. 오늘따라 집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길게만 느껴지는 걸까. 하고 창문 밖을 잠시 내다보다가 이내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치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며 ‘누구에게 보낼까.’하고 고민을 하다 이내 갑자기 떠오른 4명의 아이들. 김혜미, 권강재, 차연우 그리고…건빵소년 한효빈. 어째서 이 4명이 떠오른 건지는 내게 묻지 말라. 그냥 아무이유 없이 걍 떠올랐을 뿐. “음, 뭐라고 보내지?” 문자 내용을 뭐로 보내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순간 옆에 앉아있는 중학생 두 명이 눈에 띄었다. 평범한 차림새가 아닌 유난히 튀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두 남녀. 여자아이는 폭탄 맞은 듯한 풍성한 머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반면에 남자아이는 머리는 차분하되 이목구비가 매우 날카로웠다. 말 그대로 껌 좀 씹고 다니는 중학생들 같았다. 하지만 곧 나는 다시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겼고 이내 이 아이들이 답장을 할 수 밖에 없을만한 내용의 문자를 보내었다. [- ←>ㅇ<→ 메롱 약 오르지 까꿍 ↖>ㅇ<↗ ] 며칠 전에 중학교 동창에게서 온 문자를 그대로 보내었다. 내게 이 문자가 왔을 때 당시, 나는 이 아이가 미쳤나 싶어서 전화까지 걸었던 적이 있다. 평소에 이모티콘은커녕 한줄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는 아이였기에 ‘머리에 총 맞았나.’ 할 정도로 의아했기에. 막상 전화해보니 아이들이 자신의 문자를 다 씹기에 답장이 올 수밖에 없을 만한 문자로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먹히긴 먹히나 보다. [- 싸우자 이거냐.] 첫 번째로 도착한 차연우의 문자. 그리고 답장도 하기 전에 연이어 도착하는 권강재의 문자. [- ㅇㅇ] …차연우의 문자를 그대로 전달로 보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구나, 네가. 역시나 또 답장을 하기도 전에 도착하는 문자 한통. 김혜미의 문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좀 길다. 그런데…. [- 헐. 아. 어. 그렇군. 근데 나 요즘 뇌세포가 전학 가는 게 느껴짐. 너도??] 난 널 머나먼 곳으로 전학 시켜 보내고 싶은 기분이 느껴진다. 어째 문자 3통이 다 답장할 만한 가치를 못 느끼게 하냐. 라고 생각하며 핸드폰 폴더를 닫으려는 순간 마지막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효빈이의 문자였다. 두근두근 기대를 하며 확인 버튼을 눌렀지만… 곧 나는 핸드폰을 아예 꺼버리고 말았다. [- 네. 많이 약 오릅니다. 저도 까꿍입니다.] 열 번을 생각해봐도, 백번을 생각해봐도, 천 번을 생각해봐도 이 녀석들과는 문자할 가치가 없다. 제 9화 조금씩 가까워지는 첫 번째 덫.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내게 걸려온 전화 한통. 다름이 아닌 차연우의 전화였다. 이 웬수가 또 뭐 때문에 전화를 걸었나 싶은 마음에 전화를 받자 쌩End 맞은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 빨리 들어가라고? 야, 걱정하지 마. 일찍 들어간다니까? 그래, 인마! 너나 일찍 자.] “…뭐냐, 너?” [ - 나 보고 싶다고? 엉? 아, 그럼 너 오달호의 맛난 삼겹살 집 알지? 그래 거기로 나와. 예쁘게 입고 와. 알았지?] “…미쳤니? 돌았니? 어디서 머리 맞았어?” [ - 그래, 나도 사랑한다.] 이 미친놈이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한 마디 쏘아 붙여주려 하는데 ‘쪽-.’하고 뽀뽀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끊겨버리는 차연우의 전화. 나는 어이가 없어 녀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고, 녀석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 - 아, 씨발. 중학교 때 친구들이 지들 여친 하나씩 끼고 있다고, 앞에서 자랑질 하고 지랄이잖아, 자랑 질을! 그래서 내가 나도 여친 있으니까 안 부럽다고 했더니 부르라잖아. 근데 마땅히 생각나는 기집애는 없고, 요즘 만나는 기집애도 없고 해서 너한테 전화 한거다. 그러니까 오달호 거기 앞으로 지금 나와라.] 그러니까 그건 네 사정이구요. 내가 왜…. “내가 왜 나가야….” [ - 네가 과학 약하다고 했었나? 우리 형 이과 졸업생이거든? 게다가 지금은 잘나가는 명문대학교에서 장학생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고 말이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고든 우리 형을 소개 시켜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물론 공짜로.] …미친놈, 그깟 여친 대행에 네 형을 팔아먹니? 그리고 말이야. 가장 중요한 건 네 말을 못 믿겠다는 거지. “뭘 믿고 내가? 네 형이 명문대 장학생? 장난해? 이 거지같은 게 어디서 구라 질이야?” [ - 썅, 구라 아니거든? 왜 못 믿는데?!] 너라면 믿겠니? 믿겠냐고! 동생은 반에서 꼴찌도 간신히 면하는 앤데. 공부하고는 성을 쌓아두고 사는 녀석인데, 그런 동생의 형이 잘나가는 명문대학교 장학생? 웃기지도 않는 소리. “다른 애나 알아 봐.” [ - 내가 구라 까는 거면… 옥상위에서 발가벗고 스트립쇼 한다.] “그러니까 뭘 믿고!” [ - 지금 내가 하는 말들 다 녹음하면 되잖아!!! 아, 진짜 의심 한 번 드럽게 많이 해요.] 미안하다, 드럽게 많이 해서. 근데 그만큼 네가 신용도가 낮다는 뜻인 걸 알아주길 바래. “한 40분쯤 걸릴 거야. 기다리고 있어.” [ - 구라 아니고 온 진심을 다해서 땡큐다. 언넝 와라.] 정말로 내게 감사한 건지 전화를 끊어서도 문자로 고맙다는 문자를 날린 차연우. 걍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 없다고 하면 될 것을. 이 사람 저 사람 다 피곤하게 만드니, 정말. 어찌됐건 가겠다고는 말했으니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 할 텐데. 예쁘게 하고 오라고 했나? 뭘 입지? 녀석 친구들 여자친구한테 꿀리지 않을 정도로만 해서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음…. 그래, 작년 크리스마스에 입고 한 번도 입지 않은 그 옷을 입는 거야. 좀 춥겠지만.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옷은 바로…. “남자랑 사고 치러 나가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이향원?” “갑자기 웬 미니스커트? 네 튼실한 다리 자랑하러 나가?” 디질라고. 여튼 내가 선택한 옷은 바로 미니스커트였다. 즐겨 입는 옷이 아니어서 장롱 한 쪽에 처박아둔 옷이었는데 이럴 때 입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것도 차연우 녀석의 여자친구 대행을 나가게 될 때 말이다. 나는 가볍게 이향원의 말을 무시하고서는 신발장에서 통부츠를 꺼내어 신고서는 약간 웨이브 진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집을 나섰다. “젠장 춥다고-!!!”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아 두껍게 껴입고 나가도 추웠을 날씨에 미니스커트까지 입고 나갔으니 덜덜 떨지 않을 리가 있나. 오달호인가 뭔가 하는 그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아랫입술이 계속해서 떨려왔고, 곧 눈앞에 오달호의 맛난 삼겹살 집이라는 간판이 보이자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고깃집 안으로 냉큼 달려 들어갔다. “차연우!” 고깃집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 차연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차연우는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몸을 틀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내게 손을 들었다가 이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위 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너….” 내 옷차림에 상당히 놀란 건지 말을 끝맺지 못하는 차연우를 뒤로한 채 그의 친구들을 향해서 인사를 짧게 건네었다. “아…안녕?” 인사가 왜 이렇게 어색하기 그지없냐. “어, 아…안녕. 난 차연우 녀석 중학교 동창 김안호야. 차연우 녀석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숨겨두고 있었다니.” 예쁘다는 말에 살짝 볼이 살짝 붉어졌지만, 곧 내 옆구리를 찌르며 ‘빈말인거 알지?’ 라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차연우의 모습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 “난 박해진. 연우랑 같은 학교?” “…아, 응.” “그나저나 이제 다 온 건가? 아, 맞다. 권강재 이 새끼는 왜 안 온데? 아무리 같은 중학교는 아니었다지만 불렀으면 좀 빨리 오지.” “아까 보니까 이 근처라고 문자 왔더라. 곧 도착하겠지.” …권강재? 권강재라고? ‘권강재’라는 말에 나는 차연우를 화장실 앞으로 이끌고 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째서 이 곳에 권강재가 오는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말이다. “중학교 때 이렇게 넷이 친했던 사이야. 그리고 너… 옷이 왜 그렇게 짧냐?” “예쁘게 하고 오라며!” “눈을 버리는 행위다, 그건.” 이향원이나… 차연우나. “그럼 권강재 앞에서도 너랑 사귀는 척 해야 된다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지 않아?” 못 할 것도 없지가 아니라 못한다고, 못해! 미쳤나 봐! “난 못해! 걔 앞에서까지 나 거짓말 못한다고!” “왜 못하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인 사이다, 권강재와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도 친구사이를 유지하고 계시는 권강재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이란 말이다. 즉, 18년이란 세월을 함께 같이 자라온 권강재와 나다. 가족 같으면서도 가족이 아닌 사이. 그 만큼 나는 그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녀석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권강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또한 내게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는, 갈아 치우는 남자들과의 만남이란 말이다! 즉, 차연우와 사귄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권강재는 또 내가 신재원, 그 사람 때문에 차연우를 만나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하고, 만약에 뒤 늦게 거짓말이 들통 난다 하더라도 내게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 녀석은 어떤 상황이건 거짓말 자체를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더불어 나는 권강재와 말다툼을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 조그마한 말다툼을 하더라도 화해하기 전까지는 상당히 찜찜한 기분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싫어했다.) “몰라, 그냥 싫어! 싫다고! 나 그냥 갈래.”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녀석의 손을 뿌리치며 지나치려 하는데, 낮게 깔린 진지한 차연우의 목소리가 내 신경을 자극한다. “권강재가 신경 쓰여?” 권강재가? 당연히 신경 쓰이지! “친구와 친구사이가 아닌, 남자와 여자 사이로써 신경이 쓰여?” …뭐? “그럴 리가 없잖아! 걔랑 나는 친구일 뿐이라고!” “참 넓은 시야를 가졌군.” …공부도 못하는 게 어려운 말을 지껄이고 있어, 이 거지같은 게. “게임 하나를 제안할게, 그럼.” ‘생뚱맞게 웬 게임?’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차연우는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서는 나머지 한 손으로 뒷 머리카락을 만지며 게임이란 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여자가 몹시 필요하거든?” “그런데?” “요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 옆구리가 아주 뻥 뚫리다 못해 시베리아를 완주한 것같이 시리거든. 그리고 마침 내 눈앞에는 성별만 여자인 애가 있어.” 그 성별만 여자인 애가 나는 아닐 거라 믿고 싶다. “김햄 통해서 내가 몇 가지, 들은 것이 있거든. 네가 좋아했던 첫 사랑에 대한.” “뭐…?” “그 남자 잊으려고 권강재한테 부탁하면서까지 발악하고 있다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갑자기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상하게 남의 입에서 나와 신재원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항상 기분이 나빠진다. 김혜미도, 권강재도 예외 없이. “난 한시라도 여자를 옆에서 떼어놓으면 안 되는 버릇이 있어. 그 이유는 너랑 비슷하거든? 이래 뵈도 나도 순정파라서. 첫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고. 그래. 첫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거든.” 도대체 저 아이가 왜 내게 저러한 말을 하고 있는 지, 나는 그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게임을 말하는 지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목적은 같아. 지난 과거를 잊는 것. 대신 목적은 다르지. 난 여자, 넌 네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좁은 시야.” “허, 그러니까 네 주변에는 여자가 없는데, 지금 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자 같지도 않은 날…, 그래 나 뭐? 여자인 날 어쩌려고?” “공부도 잘한다는 애가 말의 요점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네 설명이 요점만 쏙쏙- 파악하는 내 공부습관도 소용없게 만들 정도로 꼬이고, 또 꼬여놨다고 말해주고 싶구나, 차연우. 그래, 어디 요점파악도 못하고 있는 내게 설명해 봐, 그 요점을 잘 들어 줄 테니까. “그래서 요점이 뭔데?” “사귀자고.” “뭐?” “사귀자고, 이향미.” 내 귀가 잘 못 된 거지? “아~ 그래, 내가 귀지 판지 좀 됐다, 됐어. 다시 한번 차근차근하게 말해 봐. 뭐?” “사귀자고.” “헐! 너 미쳤니!?????? 혹시 술 마셨어? 취한거야??” “술은 입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거든, 오토바이 끌고 와서?” 아니, 취한 게 분명해. 넌 고기에 취한 걸 거야. 아니면 밥? 아니면… 아, 말도 안돼. 취한 게 아니면 미친 게 분명해. 그것도 아니면… 여자에 미쳤거나, 그래 여자에 미친 거야! 그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해! “참고로 말하지만 나 너한테 이성으로써의 감정 못 느낀다.” “피차일반이야.” 피차일반이면 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건데! “아, 몰라. 걍 사겨! 복잡하게 왜 생각하려고 들어?” “이걸 생각 없이 정하려는 네가 더 이상해! 내가 아무리 지금까지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못 느끼는 녀석들과 사겨왔다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거든? 그리고 난 좁은 시야 따위 필요 없어! 그냥 네가 여자가 없으니까 사겨달라고 부탁하는 거라고 말을 해, 차라리!” “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에 너 때문에 끙끙거리는 녀석 때문이라도 그 시야를 가지게 해줘야겠다.” 어려운 말 하지 말라고 이 멍충아!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과민반응 하지 마. 나도 너랑 진짜 이성으로써 사귈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그냥 단순히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냐?” “내가 그 게임을 왜 해야 되는데?” “언제까지고 그 선생님한테 매달리고 있을 건데?” …김혜미, 참 자세히도 말해줬구나. 너 두고 보자. “그건 내 사정 아니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같은 처지로써 말이야. 그거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든 거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자.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쪽이 이기는 거. 대신 헤어지자고 말할 때는 우리가 처음에 말했던 목적을 이루어야지만 할 수 있는 걸로. 어때?”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긴 있다. 언제까지고 그 사람에게 매달릴 순 없으니까. 이대로라면 나 졸업하기 전까지 잊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상당히 거치적거리는 게 하나 있거든? “네 말들. 꼴에 멋있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나한테는 지금 친구들 앞에서 날 여자친구라고 꼭 소개시켜야 되니까 긴말하지 말고 사겨달라는 말로 밖에는 안 들린다?” “이래서 똑똑한 것들은.” 하고 혀를 끌끌 차는 건 뭔데? 정말 그렇다는 거야? 하,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1%라도 생각했던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됐어. 오늘만 하는 척 해주면 되는 거지? 권강재한테는 뭐라고 한다냐…, 하아.” 짧게 한숨을 내 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 내 어깨를 붙잡는 차연우의 손. 그리고서는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진지한 분위기로 전환시켜버린다. “진지하게 생각해.” 그 말에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날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차연우. 막무가내도 저런 막무가내가 없다. 흐트러진 옷차림새를 단정히 하고선 자리로 돌아오자, 김안호라고 하던 아이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어이없는 발언을 한다. “둘이 화장실에서 밀회라도 한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어.” 차연우 저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 되는 소리로 바꾸어 버린다. 저게 정말 미쳤나!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 몰래 차연우를 쳐다봄과 동시에 허공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차연우는 그런 날 향해 딱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에게 날리는 남주인공들의 미소처럼 반할만한 미소를 날린다. 하지만 그 미소가 내게 먹힐 리는 없다. 가식임을 알기에. “야, 차연우. 너 너무 티내는 거 아니냐?” “꼬우면 니들도 여친 부르던가.” 얼씨구, 되갚아 주는 거냐? 아까 네 앞에서 여친 자랑했다고? 하여간 유치한 새끼라니까. 계속해서 내 자랑 아닌 자랑 ( 자랑이긴 했으나 진심이 담긴 자랑이 아니었기에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을 하며 지 친구들이랑 이야기 하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어 익은 고기 한 접을 입에 넣고서는 오물오물 씹고 있는데, 그 때 내 앞에 앉아있던 박해진이라는 아이가 손을 높이 치켜들며 내 뒤쪽을 향해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권강재!!!” 라는 이름을 외치며. 젠장, 녀석 오기 전에 갔어야 했는데. 차라리 그게 나았는데!!!! “늦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 “차연우 새끼 여자친구이시란다. 엄청난 미인이신 거 있지?” “오호.” 하, 장담하는데 권강재 내 얼굴 확인하고서는 박해진인가 뭔가 하는 저놈의 뒤통수를 세게 갈길게 분명해. 퍽-! 그래, 저렇게 말이… 에? “죽을래? 누가 미인이야? 그리고 차연우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왜 이향미가 여기 있어?” “듣고서 확인 차 물어 보는 거냐? 여친 이라니까 새끼야.” “야, 너 잠깐 나와 봐. 그리고 이향미 이거 덮고 있어. 멀리서 보면 안에 다보여.” 권강재가 내게 건넨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재킷이었고,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멍하니 있다 이내 그 말이 무슨 말을 뜻하는지 깨닫고서는 급하게 무릎을 덮었다. 그 사이 차연우와 권강재는 잠시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강재 놈은 어떻게 아는 사이?” 그 틈을 타 앞에 앉아있던 멸치같이 생긴 김안호라는 녀석이 내게 권강재와 나의 사이를 물어왔다. “소꿉친구. 아니 웬수? 음. 여튼 그냥 좀 오랫동안 아는 사이.” “…아. 그…, 헐! 소꿉친구?” “응? 아, 어.” “야, 야, 박해진! 걔, 걔. 권강재 지….” 권강재 지? 지 뭐? 전에도 차연우가 나 보자마자 지 뭐시기라고 말한 것 같은데 왜…그 뒷 말을 안 가르쳐 주냐고요! “어, 니들 이야기 다 끝냈냐?” “엉. 야, 이향미. 너 권강재랑 일찍 집으로 들어가 봐야 된다는데?” 이건 또 뭔 생뚱맞은 소리요. “가자.” “어딜? 집? 집엔 왜? 엄마가 불러?” “어. 아주머니가 부르신다. 가자.” 아니, 지 친구 만나러 온 애가 갑자기 날 끌고 왜 집으로 가려고 해? 뭔가 이상해. 뭔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차연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녀석 내 시선을 피하고 애꿎은 고기만 꾹꾹 누르고 있을 뿐. 하는 수 없이 나는 권강재의 손에 이끌려 고깃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기도 몇 점 못 먹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자꾸 걸리는 건 고깃집을 나오기 전에 차연우가 내게 당부했던 말. ‘모든 건 한방이다.’ 라는 그 말.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 차연우랑 사귀기로 했다면서.”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권강재의 한마디에 싹 잊어버리고, 놀란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차연우가 그렇게 말해?” “어. 그래서 기회는 지금뿐이라는데.” 무슨 기회? 오늘따라 왜 쌍으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지랄이야!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이향미. 내가 지금까지 네가 사귄 남자애들 만날 때 간섭했던 적 있었냐?” ‘없었지.’하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로서 처음으로 사귀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 너 들어 줄 거야?” “…어? 뭐?” “차연우랑 사귀지 말라고 하면 안 사귈 수 있냐고 묻는 거다.” …내가 그 자식과 사귀는 것을 떠나서 말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부탁을 하는데?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그런 권리는 없는 거 알지?” 내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권강재. 하지만 이내 내 앞을 턱- 하니 가로 막더니 다시 한번 내게 진지하게 물어온다. “그럼 말이야.” “빨랑 말해. 나 추워 죽겠어!” “…남자로서.” 평소에 무슨 말이든 딱 잘라 말하던 권강재가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저리도 어물쩡거리는지. “…부탁하는 거라면?” “남자로서 부탁하는 거라면? 아, 그러니까 말이야. 남자든 친구든 네가 무슨 권리로 막는 거냐고. 너 여태껏 소개 시켜달라고 하면 소개시켜주고 그랬잖아. 차연우는 더 특별한 친구라서 그래? 또 내가 금방 차버릴까 봐?” 내 물음에 권강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젓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야, 나 춥다니까? 계속 가만히 서 있을 거야?” 그 순간 권강재의 두 주먹이 꽉 쥐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까 내가 돌려준 재킷을 다시 내 어깨에 걸어주고서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오던 길로 다시 되 돌아갔다. 오늘따라 차연우도 그렇고 권강재도 그렇고 둘 다 폼을 잡는 건지, 아니면 폼 잡는 척을 하는 건지. 그 때문일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하여간 사람 머리 아프게 하는데 는 둘 다 뭔가 있다니까. “차연우…랑 사귄다고?” 물론 첫 인상은 좋았지만 만남은 좋지 않았다. 뭔가 씁쓸해보이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이 떠오른다. 게다가 아까 직접 내게 말했던 첫 여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날 차연우가 그 곳에 서 있었던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왜 차연우와 사귄다는 게 나쁘게 받아지지 않는 걸까. 분명 녀석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말이다. “좁은 시야, 그건 또 뭔지.” 주변을 둘러보라고 했던 녀석의 말. 아, 진짜. 머리 나쁜 것들이 수수께끼 같은 건 잘 푸나? 왜 나는 못 풀겠지? 도대체가 오늘 녀석이 내게 했던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론 권강재의 말들도! “알아먹게 얘기를 해야 이해를 하고 고민을 하고 결정을 할 것 아냐!! 이 쌍놈들아!” 하여간 이것도 저것도 다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들. 고민도 쉽게 못하게 만드는 녀석들. 후, 이럴 땐 단순히 생각하는 게 좋다. 단순히. 그리고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해결 해 나가는 게 좋다. 우선 지금 고민은…. “그래, 차연우와의 관계.” …젠장 첫 고민부터가 만만치 않잖아!!! 결국 나는 그 날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 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피곤함에 침대위로 뻗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고민하지 않아도 늦지 않아 해결 될 수 있었다. 제 10 화 고민. 그리고 결정.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흐르고… 어느 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새 훌쩍 지나가버렸다. 지난 일주일동안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는 눈곱은커녕 먼지만큼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가버리다니. 정말 이건 시간낭비다, 시간낭비. 게다가 어째서 오늘이…. “16번 162cm, 56kg.” …체력검사 날이냐고요. “다음, 17번.” 오, 쒯. 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던 내 차례가 왔구나. 어차피 피해갈 수는 없는 운명. 딱 20초만 숨을 쉬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그래, 나는 우주를 뛰어다니고 있는 무중력상태야. 가볍게…, 가볍게, 한발, 한발. “17번 165cm, 5…1kg?”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이구나. 작년보다 찌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내 신경을 방금 거슬리게 한 것이 있는데. 선생님? 오와 일 사이에 그 공백은 무엇인가요? 왜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건데요! “체력검사 때문에 살 뺐니?”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쓸 때 없는 일에 힘 빼지 않는다구요! 물론 오늘 아침은 먹지 않고 왔지만. “아뇨.” “그래? 생각보다 적게 나가네?” “몇 키로 같아 보이는데요?” “음.” 도대체 몇 킬로로 보이기에 저렇게 놀라운 표정을 짓고 계신지 궁금하다. 다음 차례 아이가 체중계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선생님의 입에서 시냇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몸무게. 과히 충격적이다. “한…오십오 킬로그램 정도?” 그래도 어디 가서 말랐다, 먹어라 소리 듣는데, 오십오라니! 오십오라니! 하, 오늘부터 다이어트 돌입이다. 망할 몸무게만 적게 나가면 뭐해? 보이는 게 다른데! 연신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40번까지 체중계를 다 재기만을 기다렸다. 곧 반 아이들의 몸무게와 키를 재는 것을 다 끝내자 아이들은 반장인 날 주축으로 한 줄로 서서 다음 곳으로 천천히 이동해 나갔다. “제길.” 아침부터 배가 슬슬 아파오던 게 끝내 화장실로 달려가 결국 지각까지 하고 말았던 것부터가 오늘 일진이 좋지 않았음을 알리는 징조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왜 어째서 선생님이 여기 계시는 건데요?!” “응? 여기로 배정해주시던데. 자, 남학생들은 이 쪽으로 서고, 여학생들은 저쪽으로 한 줄로 서.” 왜, 왜! 하필이면 가슴 재는 곳에 선생님이 계시는 거냐고요, 왜! 그리고! 이 망할 놈의 학교는 남학생이랑 가슴을 왜 같이 재는 건데?! 이건 엄연한 성추행이라고, 성추행! 그 때, 줄자를 들고 오신 한 여선생님께서 날 향해 손을 까딱이신다. 마치 이리로 다가오라는 듯. “반장부터 잴까?” …어째서요? 왜 여기는 반장부터 재는 건가요? 설마 먼저 재고 아이들의 가슴둘레 받아 적으라고 저 먼저 재라는 건 아니시죠? 제발요, 아니라고 해줘요. 그냥 순서대로 하게 해줘요. 선 생님. 게다가 선생님의 우렁차진 않지만 그래도 작지는 않은 그 목소리에 차연우의 눈길이 이 쪽으로 쏠렸단 말이에요. 그 것도 제 가슴을 슬쩍 보더니 ‘픽’ 하고 비웃었다고요! ‘픽’ 하고! “…네.” 하지만 난 학생이고 선생님은 날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시다. 거역할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 앞에 남학생이 볼 수 없는 천 안 쪽으로 들어가 손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렸다. 선생님은 줄자를 내 등 뒤에 가져다 대고서는 앞으로 당겨 센티를 재시기 시작했다. “…칠십…” 칠십 제발 칠십 오 보다는 높은 숫자! 제발! 제발! 오보다는 높은 숫자 나와라, 제발! “구. 음, 보기보다 크네? 향미 받아 적고 여자 1번부터 들어오라고 해라.” 아나, 칠십구가 보기보다 크다구요? 도대체 이 사람들 오늘 죄다 왜 이래? 저 쪽에서는 보기보다 덜 나간다고 하질 않나, 가슴은 보기보다 크다고? 도대체 얼마나 작아 보이기에 보기보다 크다고 하시는 건데요! 진짜. 제대로 빈정 상했다. 천 밖으로 나온 나는 내 가슴둘레 길이를 적고서는, 천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차연우가 슬쩍 내 옆으로 숨죽여 다가오더니 내 손 위에 들려있는 종이를 쭉 훑더니, 이내 내 이름 옆에 쓰인 숫자를 보고서는 ‘풉’ 하고 웃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는다. “…야.” “큭.” …저, 저… 저 거지 같은 게!!!!!!! 지금 뭐 보고 웃은 거야!? 네가 79의 의미를 아니!? 아냐고!? 아, 맞다. 너 야동 좋아라 하는 새끼였지. 내가 그걸 깜박했구나. 그래도 말이야! 어쩜 대 놓고 웃냐? 웃어!? “…큭.” 이번에는 내 몸을 훑더니 웃겨 미치겠다는 듯 입을 막고 있던 두 손이 눈으로 향한다.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웃는다. “너 죽을래?!” “하하, 아 미치겠다. 하하하.” “근육도 없는 게! 너야말로 기준 미달 아니야!?” “무슨 소리.” ‘근육이 없다.’라는 말에 얼굴을 굳히며 벌떡 일어나는 차연우는 ‘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듯한 눈으로 날 훑어 내린다. 나는 검지로 녀석의 가슴을 쿡쿡 찔러 보았다. “야!” “가만히 있어 봐! 이거 근육 맞아? 살, 아냐? 살?” 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된 내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로지 이게 근육인지 살인지 확인하는 것에만 염연할 뿐. 하지만 차연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생겼다. 웃음기 가득했던 녀석은 얼굴은 어느 덧 새빨간 사과가 되어버렸다. 이 녀석도 부끄럼을 타긴 타나보다. 지도 꼴에 남자라고. “그만 만져, 이 변녀야!” “뭐? 변녀? 야, 그럼 넌 성추행으로 경찰서 가야 돼!” “지랄, 꼴에 그것도 가슴이라고.” 너, 일주일 전에 나에게 사귀자고 했던 녀석 맞니? 역시 그 때는 네 친구들 앞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내게 권했던 게 맞지?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그렇지? 제길, 진지하게 고민한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댐질래?” “여자가 말투가 왜 그러냐~. 그러니까 어느 여자도 마다하지 않는 내가….” “차연우, 향미랑 투닥거리지 말고 와서 가슴재자.” 허리춤에 한 손을 올리며, 반대쪽 손으로 검지를 까닥까닥 저으며 말하고 있는 차연우의 말을 자르는 신재원 선생님. 그리고서는 나를 향해서 살짝 윙크를 치신다. 아무래도 여기서 차연우가 한마디만 더 했다면 내가 열 받아서 차연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나 보다. 선생님이 내게 윙크를 치는 모습을 보자, 내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차연우도 보고 있었나보다. 갑자기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선생님을 향해서 쏘아붙인다. “지금 작업해요?” “…응?” “왜 남의 작업 상대한테 윙크해요?” 헐. 남의 작업상대?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그 작업상대라는 거니? “아, 연우가 향미 좋아해?” 선생님은 십자가 모양으로 손을 벌린 차연우의 등 뒤로 줄자를 가져다 대며 넌지시 물었다. 차연우는 잠시 머뭇머뭇 거리더니, ‘아이썅.’ 하고 낮게 욕을 읊조리더니 기대조차 하지 않는 대답을 하고야 만다. “네. 좋아해요.” “차연우!” …오늘 너, 나 가지가지 웃기게 만든다. 네가 날 좋아해? 네가? 차연우 네가? 역시나 연기일 뿐이겠지. 네 친구 앞에서 했던 것처럼. “39번 92. 오, 연우 근육 있네? 향미 근육 많은 남자 좋아하는데. 연우랑 잘 어울리겠다.” 아…. 잠시나마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바닥을 친다. 저 사람 앞에서 나의 주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똑같은 반응, 똑같은 말뿐이니까. 웃으면서 잘 어울린다는 말 뿐이었으니까. 한 번이라도 내가 그에게 원했던 반응을 볼 수 없었으니까. ‘질투’ 라는 사소한 감정을 바랐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항상 원망했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구나. 이번에도 당신은 웃는 구나. 여전히 당신은 변함이 없구나. 1년이 지났건, 2년이 지났건 당신은 그 자리 그대로 선생님이라는 위치에 서 있구나. 나는 또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가능성이 없음을. “향미도 연우 좋아하니?” 빙긋빙긋 웃으며 내게 물어 오시는 선생님의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저런 질문을 한 것은. 단 한번도 내가 남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러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똑같은 대답. ‘아, 그렇구나. 잘 어울리겠다!’ 라는 똑같은 패턴의 대답. 하지만 그 것도 잠시. 차연우의 시선 또한 내게로 향해 있었다. 더불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막, 가슴둘레를 재기 위하여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권강재네 반이 보였다. 젠장 맞게도 권강재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김혜미도 같이 들어온다. 아, 맞다. 저것들 같은 반이었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사실대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내게 저런 질문을 한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도 변화가 찾아온 거라고 믿고 싶다. 그래, 그러고 싶기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서 원했던 ‘질투’라는 감정을 보고 싶기에 해서는 안 될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네. 좋아해요. 저 차연우 좋아해요.” 라고 말이다. 가뜩이나 큰 차연우의 두 눈이 더 커진다. 권강재의 표정이 굳어진다. 김혜미의 입에서 말도 안 된다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담긴 ‘헐’ 이라는 말이 교실을 울린다.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힌다. 선생님의 알 수 없는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지막으로 내 입에서 차연우를 좋아한다는 말이 흘러 나간 지 정확히 10초 후, 아이들의 환호성이 교실을 가득 메운다. “네 대답, 내 제안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차연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나는 보는 이의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오늘부로 1일이다. 아싸~, 나도 오늘부로 솔로 탈출이다 인마들아!” 차연우는 자신의 친구들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자랑하듯 큰 목소리로 말한다. 이로써 어이없게 첫 번째 고민이 해결되어버리고 만다. 좋게 해결된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은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은 시간이 흘러야 알 듯 하다. 하지만 첫 번째 고민이 해결됨과 동시에 또 다른 고민이 생겨버리고 만다. 쾅-!!!!!! “…쟨 왜 저래?” 갑자기 교실을 박차고 나가버린 권강재. 아이들은 또 한번 놀란 눈으로 이미 닫혀버린 교실 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권강재?” 너 또 왜 그래? 왜 항상 내가 사귄다고 할 때면 화를 내고 사라져? 그저 내가 또 네 소중한 친구인 차연우를 가지고 놀까봐. 또 금방 헤어지고 말까 봐서 인거지? 항상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소개 시켜주겠다 먼저 권유해놓고, 결국 사귀게 되었다. 통보를 하게 될 때면 권강재의 장난기 가득했던 눈은 어느 새 차게 식어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하지만 내 옆에 서 있는 차연우에 의하여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들이대지 말아줄래?” 내 앞에 얼굴을 들이 밀고 있는 이 녀석 때문에 난, 10분 째 구겨진 표정을 피지 못하고 있다. 아니, 필 수가 없다. “아, 비키라니까!!!” “어떻게 이렇게 들이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길 수가 있는 거지?” 그치? 나도 그게 참 놀랍거든. 그러니까 우리 어제 했던 말 취소하자. 응? 제발!!! “진짜.” 진짜 뭐? 또 무슨 말로 열 받게 하려고? “여자로 안 보인다.” “나도 너 진짜로 남자로 안 보여! 그러니까 제발 좀 꺼져 줘! 부탁이다!” 차연우의 가슴팍을 밀치며 겨우 녀석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의아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이해가 안 된다는 건지. 그 것도 10분 째! “나 인기 많은데.” 네, 인기 많으세요? 좋겠어요.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구요. 제발 제 손 좀 봐주세요. 네? “나 네 가슴에 손 올려 봐도 되냐?” …이 미친 새끼가 뭐래? “댐지고 싶구나, 네가?” “그 댐지고 싶다는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냐? 항상 디질래를 추구하던 네가?” 썅, 지나가던 초등학교 6학년 꼬맹이한테 배웠다. 어쩔래? “여튼 오늘 여기서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변태 같은 말 지껄이지 마. 지껄이는 순간 네 아가리 나가는 줄 알아.” “도저히 겉만 봐서는 모르겠단 말이지. 너 지금 심장이 뛰고 있냐?” “그럼 심장이 뛰고 있지 멈춰 있겠어!? 너 자꾸 아까부터 헛소리하려거든 내 집에서 나가!” 그랬다, 우리도 이런 저런 사정이라도 바깥에서는 연인이라고 불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 데이트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갈 때도 없고 해서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물론 옆에 앉혀놓고 영어숙제를 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녀석 갑자기 내 얼굴을 향해서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더니 자꾸 아까부터 헛소리 질이다. “아니, 병신아. 막 빠르게 뛰고 있냐고.” “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어. 너 때문에 열 뻗쳐서 내 심장도 흥분했거든? 그러니까 얼굴 좀 비켜줄래?” “이상해, 아주 이상해.” 난 네가 이상해! 네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해! 제발 사라져! 제발!!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던 샤프심이 내 분노에 ‘툭’하고 부러졌을 때, 책상 한 편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향해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아들었다. 전화를 받아들기 전 슬쩍 액정을 보았는데, 액정 가운데에는 당당히 ‘김햄’이라고 떠 있었다. [ - 야!!!!!!!!!!!!!!!!!!!!] “왜.” [ - 수영장.] …아, 이 미친 엑스 같은 엑스를 어쩌면 좋지? 죽여야 하나? 어떡하면 잘 죽였다고 소문을 낼 수 있을까? “너도 차연우랑 같이 내손에 댐져 볼래?” [ - 아, 장난이었어. 야, 너 돈 안 필요해? ] 돈은 넘쳐난다. 용돈을 받아도 쓸 때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컴퓨터 타자기처럼 나온 전자사전이 날 유혹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사전을 사기에는 용돈이 턱 없이 부족하기는 하다. “왜? 로또라도 당첨되었니?” [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끊어.” 하고, 폴더를 닫으려는 순간 전화기 안 쪽에서 애절하게 외치는 김햄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린다. [ - 끊지 마, 향순아!!!!!!!!!!!!!! 알바자리 생겼다고오!!!!!!!!!!!!!!!!!!!!!!!] 이 거지 같은 게. 뒤에 알바라는 단어만 아니었다면 진작 끊어버렸어, 너! 또 향순이라고 했겠다. 씹어 먹어도 모자를 아이 같으니라고. “무슨 알바?” [ - 시내에 제일 큰 페스트 푸드점 있잖아! 거기 두개, 자리 두개 비었거든! ] 행여 내가 전화를 끊을까, 가뜩이나 우렁찬 목소리를 더 우렁차게 말하는 김혜미. 핸드폰을 살짝 띄어놓은 채 전화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너랑 나랑 같이 하자고? 나 미리 말하겠는데, 너랑 같이하라고 하는 거면 1억을 주는 알바자리라도 안 해.” [ - 나 못하는데.] 어차피 김혜미랑 같이 하는 거겠지, 하고 입맛만 다시며 거절하려 했었지만 김혜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즉, 얘는 정말 순수하게 내게 알바자리를 소개 시켜주기 위해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게 웬 떡이야! “정말이지? 너 그 말이 사실이 아닐 경우 네 방에 한가득 있는 인형을 몽땅 다 태워버린다.” [ - 어. 태워. 나 거짓말 안쳐. 근데 나 두명 데려가야 하는데.] “나머지 한명은 알바 지원하는 애들이 하겠지.” [ - 어…, 그게. 나 꼭 2명 추천해야하는데?] 꼭 2명을 추천해야 한다? 꼭? 뭔가 이상하다. 그래, 사실 얘가 나한테 순수하게 알바자리 소개시켜주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것도 같이하는 것이 아닌 나 혼자 말이다. 뭔가가 있다. 내게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 “숨기는 거 말해. 다 들켰으니까.” [ - 헐.]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당장 말해, 안 말해?” “야, 이향미.” “아, 넌 또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 꺼져!!” 한창 김혜미와 ‘알바’라는 것에 대해 깊이 토론 아닌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내 침대 위에 조용히 앉아서 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차연우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더니. “야! 안 내놔?!” 내 핸드폰을 낚아채간다. 그리고서는 나를 향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 안쪽을 향해서 대답한다. “그 나머지 자리 하나, 내가 할 테니까 끊어.” [ - 어, 이 불길한 목소리는. 넌 설마, 믿고 싶진 않지만 차연우? ] “어. 그러니까 끊어줄래, 김햄?” [ - 학교에서 보자. ‘김햄’이라고 부른 대가는 톡톡히 치러 주겠다.] 무슨 만담을 저리 즐겁게 잘 나누는 건지. 솔직히 차연우는 나보다는 김혜미와 좀 더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그리고 김혜미도 여자잖아? 여자가 필요했다면 김혜미한테 작업 걸어도 됐을 것을. 물론 가지고 놀다가 차기 위해 김혜미를 택했다면 내가 가만두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둘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가 싶더니, 차연우가 다시 한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개구진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입이 쩍 벌어질만한 대답을 혜미를 향해서 하고야 만다. 은밀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을. “그래, 그러니까 우리의 찐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줬음 좋겠는데?” [ - 아, 맞다. 니들 사귀지. 그래, 내가 방해를 한 거구나. 그래. 참고로 이향미는 리드하는 쪽이 아닌 리드 당하는 쪽이 어울린다. 덮쳐라. 그럼 걘 네 여자가 된다. 그럼 끊자. 아, 너 알바는 꼭 해야 된다!! 그리고 이향미한테! 절대로 페스트푸드점 사장님이 우리 이모라고 말해서는 안돼! 이모가 알바 구해오면 인형을 사주기로 했다고 말해서도 안돼! 알았지? 너만 믿는다. 그럼.] 이 거지같은 게. 김혜미, 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바깥까지 다 들린다고! 뭐? 덮쳐? 아니, 그건 둘 째 치고. 역시 네 목적은 언제나 인형이구나. 하긴, 너는 로또 당첨이 되면 그 돈을 모두 다 인형에 쏟아 부어도 남을 아이지. 그래, 내가 아는 넌 그런 아이였지. 친구까지 팔아 넘기냐! 그 것도 알바자리에! 분명 그 이모라는 분께서는 네게 알바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을 테지. 그 조건으로 인형을 걸었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귀찮은걸 너무너무 싫어하는 너는 당연히 싫다고 했겠지. 그리고 너희 이모께서는 그럼 네 친구들 중에 알바 할 아이가 없니? 좀 알아봐 줄래? 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고, 너는 그 조건으로 인형을 하나 사달라고 했겠지. 맞지?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너 무슨 생각으로 걔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찐한 시간? 장난 해?” “뭐,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그래도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하면서 내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이유는 뭔데? 너 분명히 나한테 말했었다.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네 입으로 직접 내게 말했었다. 다가오지 마 새끼야! “저리 안 꺼져!? 비켜라!?” “내가 듣기로는 스킨십에 능숙하다고 들었는데, 그 것도 아닌가 보다?” 미친 어떤 새끼가 그런 말을 지껄이디?! 준식이 녀석이 그러디?! 아니면 태준이 녀석? 그 것도 아니면 철호 녀석? 아니면 권…강재가 그래? “표정 굳히기는. 너한테 손댈 마음 아직 눈곱만큼도 없어. 발정 난 놈도 아니고 말이야. 나 꽤 괜찮은 남자다?” 글쎄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 영 괜찮은 남자는 아닌데 말이다. “어, 이거 네 앨범이냐?” “이 거지같은 게, 또! 내꺼 만지지 말라니까!” 책장위에 꽂혀 있는 앨범을 향해 손을 뻗는 차연우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역시 저 녀석도 남자였다. 날렵했고, 그리고 손의 길이도 나보다 훨씬 길었다. 녀석은 가볍게 내 손을 막으며 앨범을 사수한다. 그리고서는 빠르게 내 침대 위로 개구리마냥 ‘폴짝’ 뛰어 안착한다. “차연우!!” 제 11화. 첫 번째 발 돋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녀석은 이미 앨범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서는 고개를 푹 숙이며 웃음을 참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앨범을 넘기는. “웃기면 보지 마!” “꽤 귀엽게 생겼다, 너? 이 사진 되게 웃기다. 자장면을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옷에까지 다 범벅 해놓고 먹냐.” “보지 마! 너 보라고 찍어둔 사진 아니야!” “하하, 하하하하. 아나, 미치겠다. 너 진짜 골 때린다. 이 요술봉은 뭐냐? 지금이랑 매치가 안 돼. 이게 말로만 듣던 세일러문 요술 봉이냐?” 녀석은 사진 속, 요술 봉을 듣고 해 맑게 웃고 있는 내 사진을 가리키며 웃음을 토해냈다. 아마도 지금의 내 모습과는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 사진 속의 나는 한 없이 귀여운 꼬마아이지만 지금은 ‘만화’와는 너무나 동 떨어진, ‘공부’와 한 없이 가까운 학생이니까. “큭. 야, 이리 올라 와봐.” “내가 왜? 네 옆에 앉으니 바닥에 앉아있는 게 나아.” “아, 잠깐만 올라와 보라니까?” “어? 야! 어어! 왜 잡아당겨!” 끝까지 바닥에 앉아 버팅기고 있는 내 손목을 낚아챈 차연우는 자신의 옆으로 잡아당겨 기어코 자신의 옆에 앉히고야 만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나를 자신의 옆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듯 카메라 렌즈 부분을 올려다본다. “…지금 뭐하는 거니?” “아, 이 여자가 센스 없게. 자, 자세 취해봐.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내가 아무리 여자랑 많이 사귀었다지만 스티커 사진 찍는 취미는 없거든? 그러니까 핸드폰으로라도 찍어야지. 자, 가까이 좀 와 봐!” 하며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액정을 보라는 듯이 턱 끝으로 액정을 가리킨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액정을 바라보았다. 액정에는 ‘無’ 표정을 일관하는 내 표정이 보였고, 그 옆에는 장난기 가득한 차연우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뚱한 표정을 짓는 차연우는 ‘확인’ 버튼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울리는 핸드폰 기계음. ‘3’ 초가 남았음을 알리고, 곧 ‘2’초가 남았음을 알리고 마지막으로 ‘1’초가 남았음을 알릴 때, 내 어깨를 감싸고 있단 차연우의 손이 내 머리로 올라가 자신 쪽으로 좀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너무 붉지도, 그렇다고 너무 옅지도 않는 색을 띄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내 볼 위로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찰칵’ 하고 사진이 찍히는 핸드폰 기계음이 방 안을 울린다. 녀석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내 목소리와 함께. “차연우-!!!!” 찍힌 사진을 저장하는 녀석의 입가에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자리 잡는다. 반대로 난 볼에 경련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씰룩씰룩’ 거리며 녀석을 어이없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 방금.” “잘 찍혔네. 너도 보내줄까?” “차연우!” “아아, 주먹 내려놔라. 네 손 매운 건 잘 알고 있거든? 나 이제 네 남자친구라니까? 남자친구를 개같이 패면 안 되잖아?” 알면 개 같이 패지 않게 행동을 취해주면 안되는 거니!? 응?! 안 돼?! 녀석을 향해 내 베게를 치켜들자, 녀석은 벽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녀석은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나는 ‘또 뭐!’ 라고 소리치며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게 아니다. 저 흰 물체는. 저 동글동글한 흰 솜털 같은 것은. “이향원!!!!!! 개새끼 데리고 안 나가!?????” 똥키였다. 엄마가 차연우와 같이 먹으라고 잘라다 준 사과를 탐이라도 내는 듯 ‘킁킁, 킁킁’ 하고 코를 움찔, 움찔거리며 조용조용 다가오고 있는 건. “야, 걔보고 나가라고 해!” 물론 나 또한 똥키가 내 방 안을 들락날락거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차연우는 왜? 왜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똥키를 가리키는 건데? 혹시… 너. “개 무서워하냐?” “당장 치우라니까!?” “야, 이 쪼그만 게 널 물겠냐? 얜 널 더 무서워 해!” “치워! 치우라고!” 벽에 딱 달라붙은 채로 어서 데리고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는 똥키를 번쩍 들어 방을 나가는 척을 하니 차연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똥키를 안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덕분에 녀석은 침대에 눕다 시피 했고, 나는 녀석의 다리 위로 올라가 강아지를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녀석은 ‘악!!!!!!’ 하고 소리도 못 지른 채 자신의 눈앞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똥키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여운 구석이 다 있다, 차연우?” “아씨. 치워!” 장난은 이쯤으로 해야겠다 싶어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와 동시에 내 허리를 감싸는 다른 이의 손이 느껴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을 타고 시선을 옮겨 차연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옅게 붉어져 있었다. “네가 지금 어디 위에 올라와 있는지 볼래?” “뭐? 내가 어디를….” 하고 내 밑을 내려다보자, 그제야 차연우가 왜 약간은 상기되어있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널 여자로 보지는 않는다지만 성불구자는 아니거든. 남자의 몸에 잘 안다면 좀 내려가 주지?” 녀석의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나는 후다닥 바닥으로 내려와 후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주시길 바란다, 여자친구님아. 그나저나 벌써 밖이 깜깜하냐? ” “그, 그러게?” “나 너무 늦었으니 이만 가야겠다.” “…어? 아, 어. 그래.” 집 앞까지 배웅이라도 나가야겠다 싶어 현관문 앞까지 녀석을 배웅하고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자, 녀석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살짝 윙크를 치더니 문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다른 관계를 통해서 사귀게 되서 그런 것일까? 혹은 녀석이 남자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티격태격 거리며 만나는 관계라서 그런 것일까. 여느 때처럼 지루할 줄 알았다. 재미가 없을 줄 알았다. 지금까지의 권강재 친구와 만날 때면 항상 시간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가지 않았다. 하지만 차연우와는 달랐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 장난 좀 치다가 (비록 원하지 않는 장난이었지만) 보니 벌써 10시라는 시각이 다 되어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녀석의 말대로. 생각보다 더…. “빨리 잊을지도 모르겠네.” 차연우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짓는 미소가 과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를 떨쳐 보내는데 에 대한 아쉬움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안도감일까. * * * 향미의 집을 나온 연우의 시선이 머문 곳은 집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재였다. 연우는 그가 반가웠던 건지 그에게 달려가 그를 불렀다. “오, 너도 배웅 나왔냐?” 강재는 아무대답 없이 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깜깜한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연우는 그런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주머니에서 자신 또한 담배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고서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 그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바닥에 담배를 떨어트려 발로 비벼 끄는 강재였다. “놀자 이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강재의 질문에 연우는 ‘큭.’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음을 토해내더니, 이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 다 아닌데~?” “그럼. 알면서도 건드는 이유는 뭔데?” 반대로 강재는 연우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연우는 ‘후우-’ 하고 담배연기를 뱉으며 담벼락에 등을 기대었다. “꼴 보기 싫었어. 미적지근한 네 태도.” “그거 하나 때문에?” “어. 그거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라도 나서면 네가 좀 달라질 것 아냐? 너 알지? 나 이러다가 진심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 그 여자한테도 그랬었잖아. 장난삼아 다가가다가 아직도 못 헤어 나오고 있잖냐. 나 이번에도 그리 진지하진 않거든?” “진심이 되기 전에 나보고 나서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야?” 연우는 강재의 말에 담배를 다시 입술에 물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재는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향미가 기억력이 안 좋다는 걸 넌 모르겠지?” “아, 그 기집애 기억력 안 좋냐?” “공부에 관한 건 몰라도 ‘기억’에 관한 건 정말 꽝이거든, 그 기집애? 그래서 걘 아직도 지 첫 사랑이 그 선생인 줄 알거다.” “오호. 그 선생이 아니야?” 연우는 강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 또한 바닥에 주저앉아 강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부탁을 했었는데, 그 기집애는 분명 잊어먹었을 건데, 그런데도 난 그걸 어길 수가 없어.” “왜? 잊어먹었을 것 같다며? 뭔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답지 않게 끙끙대는 거 난, 보기 싫다.” “상처나 주지 마, 새끼야.” “줄지 안 줄지는 나도 모르겠고. 어차피 서로 진심도 아니니까 말이다. 너도 그건 알고 있지? 서로 진심으로 사귀는 건 아니라는 거.”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강재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한 없이 작아 보인다. 그의 듬직한 어깨가 오늘만큼은 여려 보인다. “힘내라, 짜샤. 이 형이 도와준다니까? 넌 그냥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다.” “아직은 이성이 감성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서 그건 불가능 할 듯한데?” “그럼 그 본능적 감성을 내가 깨워주지. 기대해도 좋아.” 차연우는 강재에게 힘내라는 말과 함께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서는 강재에게서 멀어져갔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강재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쯤 향미의 방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 또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엉킨 실을 풀기 위해서는 가위 혹은 손이 필요하다. 가위로 실을 자를 경우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끝나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실이 시작된다. 허나 손으로 그 실을 풀 경우에는 달라진다. 오래된 실을 시작으로 다시 새로운 실이 시작된다. 차연우 ‘그’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연결이 되는 존재일까, 혹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지게 하는 존재일까. 그들의 엉킨 인연을 풀어 ‘인연’을 지속되게 해줄 것인가, 혹은 그녀에게서 ‘그’라는 존재를 잘라내고 자신과의 인연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운명은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인연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연우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자리 잡아 있었다. * * * 며칠 후, 시내 앞에 위치한 페스트 푸드점에서 미간을 좁힌 채 바닥을 닦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훨씬 뒤 쪽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주문을 받는 내내 열심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청소라는 것을 해내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을 보아하자니 이리 통쾌할 수가 없다. “어떻게 쟤가 청소하게 된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는 무조건 주문 받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애를 말이야.” “그냥 뭐. 자기가 하겠다고 하던데요, 언니?” 내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차연우를 가리키는 나보다 한살 많은 진아언니는 아무래도 아까 영업시작 전 일을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그나저나 네 남자친구 잘 생겼다? 그거 알아? 저 뒤에 언니들 네 남자친구 연락처 따려고 노리고 있는 거.” “아, 그래요? 쟤가 어디가 멋있다고…. 겉멋만 들어서는.” “이야, 얘 봐라? 요즘 웬만해서는 어디 가서 저런 페이스 못 구한다?” 그런가? 하지만 쟤 실체를 아는 나로서는 저 녀석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여자들은 죄다 이해가 안 간다. 공부도 못하지. 그렇다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지. 게다가 변태 끼도 있지. 뭐, 최근 들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원체 여자들한테 매너는 좋은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 녀석과의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다. 날 쓰레기통 취급하던 녀석의 행동을! 아무래도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녀석에게 단 1%도 남자로 못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 때, ‘딸랑’ 하고 종이 울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두 손님이 보인다.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어서오세요.’라고 인사하는 진아언니와는 달리 내 표정을 구겨질 때로 구겨져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 이유는 바로. “옷차림이 잘 어울리시네요.” “그거 칭찬이니?” “네. 당연하죠. 아, 김혜미선배, 햄버거 사주시기로 한 거 꼭 약속 지키세요.” “알았다니까? 너 그거 나한테 몇 번이나 확인하는 건지 알아?! 약속 지키려고 온 거 아냐!” “선배를 믿을 수 없으니까 그렇죠.” “야, 한효빈!” 그 두 손님이 바로 날 이 알바생으로 팔아넘긴 ‘김혜미’와 내가 입은 유니폼이 참 잘 어울린다고 박수까지 쳐가며 칭찬하는 ‘한효빈’ 이기 때문에. 오늘은 토요일. 그것도 노는 토요일이라 불리는 ‘놀토’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둘이 같이 들어온 거지? 그 것도 이 곳에! 수상하다. 김혜미라면 분명 학교에서도 한효빈을 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그를 싫어했는데 놀토날 함께 라니. 함께 라니?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내기해서 선배가 져서 온 거니까요.” “아, 그래? 그래, 뭐로 시킬래? 이왕 사먹으러 온 거 비싼 거 시켜 먹지?” “닥쳐. 나 돈 없어.” ‘돈’에 민감한 김혜미는 얼굴을 굳히며 제일 싼 데리버거 2개와 콜라 2개를 시킨다. “쪼잔 합니다, 선배.” “뭐가? 난 원래 버거만 사준다고 했지, 콜라는 안 사준다고 했었다? 근데 사줬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뭘 더 바래? 설마 감자튀김도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 믿고 난 주문한 거 나올 때까지 의자에 가 있을게.” 어이? 데리버거는 시키는 분들이 많아서 바로 나오거든요? 굳이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거든요? 나는 자리로 가려는 김혜미의 뒷덜미를 잡으며 진아언니가 준비해준 주문한 것을 쟁반위에 두고선 그들에게 내밀며 어서 가져가서 빨리 먹고 꺼지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김혜미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음식을 들고 자리로 갔다. 그런데 말이다. 왜 너 까지 가는 거니, 차연우? “야! 차연우!” 조금만 쉬고 하겠다는 듯 한효빈의 옆에 턱 하니 앉아 콜라를 홀짝 마시는 녀석의 모습이 가관이 아니다. 못 말리는 녀석의 행동을 보아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좀 막무가내구나, 쟤?” “좀이 아니라 많이요. 아주 많이요.” 녀석을 째려보다 ‘많이’를 강조하며 언니에게 말하자, 저 쪽에 앉아있던 차연우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하트 표시를 하며 날린다. 언니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워보였는지 옆에서 연신 꺅꺅거리며 내게 부럽다는 의사 표현을 하지만, 반대로 내 눈에는 마냥 가식으로 보여 오히려 꼴불견일 뿐이었다. 하지만 뭐… 조금 귀엽긴 하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약속되었던 5시간동안의 알바 시간이 끝나고 페스트 푸드점을 무거운 어깨로 나오는 나. 차연우의 어깨는 마냥 가벼워 보인다. 하긴, 5시간 중 2시간 넘게는 농땡이를 피웠으니. 그래도 꼴에 일은 했다고 기지개 피는 것 봐라. “아, 배고프다.” “배고프긴! 아까 한효빈 옆에서 네 감자튀김 먹고 싶다고 김혜미 꼬셔 가지고 결국 그거 사서 네가 반 이상을 다 먹었잖아!” “야, 나는 힘을 많이 소모하는 일을 담당했잖아.” 힘을 많이 소모하는 일을 담당했지만, 2시간이란 시간동안 농땡이 피웠잖아! 피웠잖아, 이 자식아! 하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그럴 힘조차 없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시간도 남겠다. 영화라도 보고 갈래?” “저거 보고 나오면 오늘 알바 한 돈의 반 이상은 쓰는 거 알지? 됐다, 난.” “야, 내가 낸다, 내. 내가 여자한테 돈 내라고 할 것 같냐?” 어, 충분히. 그런데 차연우 이 녀석. 이상하게 내게 하는 대우가 달라졌다. 여자친구가 아니었을 때와는 딴판이게 말이다. 만약에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친구로서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갔다면 분명 오히려 내게 다 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자친구라는 이유 아래에서 자신이 남자임을 각인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행세하는 녀석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어? 야, 잠깐만 나 전화 왔다.” 영화관 앞에 도착한 우리는 예매를 하기 위해 영화를 고르고 있는데 치마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어 폴더를 재치고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 어디야? ] “권강재? 네가 이 시간에는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 - 어디냐니까.] “나 시내지. 영화 보려고 영화관 왔어. 왜?” [ - 놀아 줄 사람도 없고, 심심해서. 너 혼자 보는 거면 나 거기…] 권강재의 말이 미처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서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차연우가 핸드폰을 낚아채가더니 자신의 귓가로 가져다 대며 낮게 속삭이듯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랑 데이트 중이다. 방해는 금물이다, 권강재.”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나저나 권강재 이리로 오겠다고 하려던 것 같은데. “첫 번째 도발.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한데, 권강재? 끊는다.” 첫 번째 도발? 무슨 도발? 아, 남자들은 원래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미치도록 단순한 건가? 차연우는 자신의 할 말만 하고서는 전화를 끊고서 배터리를 분리시켜버린다. 그리고서는 내 손에 꼭 쥐어주며 자신이 고른 영화 포스터를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은 포스터를 바라보다 이내 차연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포스터로 시선을 옮겼다. 절로 미간이 좁혀진다. 이 망할 놈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죽을래, 차연우?!” 그가 고른 영화는 빨간색 딱지가 붙은 영화였다. * * * 결국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멜로도 아니고, 19금 빨간색 딱지가 붙은 영화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액션물도 아니었다. 여름도 아닌데 영화관 안에 크게 붙어 있는 공포물이었던 것이다. 19금은 말도 안 된다고 포스터를 내 던지듯 하는 내게 두 번째로 내민 포스터가 공포물 포스터였다. 공포물을 즐겨보지 않는 나이기에 이것 또한 맘에 들지 않아 다른 영화를 고르려 하는데, 자신이 돈을 내지 않냐 며 이걸로 하자는 협박에 못 이겨 결국 공포물 티켓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공포물 싫은데. 진짜로 보기 싫은데. “두근두근 거리지 않냐?” “얼씨구.” 자기가 더 떨리는 지 내 쪽으로 자신의 몸을 바싹 가져다대는 차연우. “행여 무서우면 이 오빠 품에 앵겨도 된다.” “그럴 일이 있을랑가 모르겠다?” “어허. 나는 그걸 기대하고 왔것만.” 아, 그러세요?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저는 말이지요. 곧 영화가 시작되고, 한창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스크린에서는 ‘꺄르르르’ 하고 웃는 아이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여자의 모습이 떴다. 아이는 점점 관객석 쪽으로 걸어왔고, 관객석에 앉아있는 여자들은 서로 꺅꺅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지만 나는 달랐다. “…하아암.” “허.” 하품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졸렸다. 지루했다. 그래서 공포물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원체 귀신이란 것을 믿지도 않는 나이기에 게다가 평소에 잔인한 액션물을 보는 나이기에 이런 것쯤은 껌이었다. 오히려 지루하게만 느껴질 뿐. 하지만 내게 다른 반응을 원했던 차연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싫다고 했잖아.” “여자 맞냐?” “어, 안타깝게도 여자가 맞다.” “…진짜 무드 없다, 너.” 얼씨구. ‘꺅!’하고 네, 품에 안기는 게 무드 있는 거니? 참 이상한 거 보고 무드라고 한다, 너?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표를 끊던 차연우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는 차연우 몰래 숨죽여 ‘큭’하고 짧게 웃음을 토해내고서는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 정확히 3초 뒤, 귀신이 스크린에 튀어나옴과 동시에. “꺄악-! 어떡해!” 하고 소리를 질러주는 척 하며 녀석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웃음을 토해냈고, 나 역시 녀석의 품안에서 아주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웃고 있었다. 어쩌면 정식 데이트로서는 첫 데이트. 여느 때의 다른 남자들 보다는 훨씬 더 즐거운, 재미있는 작은 추억을 만들었다. 차연우와 함께. 이상하게 이 녀석과 함께 있을 때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다. 차연우에게만 신경을 써야 하고, 녀석에게만 반응을 하게 된다. 화를 내건 웃건 오로지 녀석에게만. 이런 단계가 어쩌면 ‘그’를 잊게 하는 첫 번째 발 돋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 12화 잊혀진 약속을 위하여. 일주일 아니, 학교를 나가는 월, 화, 수, 목, 금, 토 중 가장 사랑스러운 날을 뽑으라면 당연히 뽑을 ‘토요일’.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랑스러운 날 우리는 또 이 곳에 와야만 하는 건지. 굳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는 내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희들도 이건 아니라고 보지 않아? 다른 동아리 애들 이야기 들어봤어? 걔네는 한달에 한 번 모일까 말까 한데. 아니! 축제 준비 때문에 2학기 때나 모이지 1학기 때는 모이지도 않는다고 했어. 1학년 때 동아리에서 부른 적이 딱 5번 밖에 없다는 애들도 있어.” “그런데.” “‘그런데’ 라고 했어, 권강재? 야! 우리가 동아리에 들고 나서 벌써 3주라는 시간이 지났어. 그 동안 우리가 몇 번이나 모였는지 알아!? 첫째 주에 3번! 둘째 주에 3번! 이번 주도 오늘까지 3번! 우리가 무슨 밴드부야? 뭐 이리 시도 때도 없이 모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친구들 말로는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져서 돈을 걷거나, 혹은 그 동아리부에 맞는 할 일을 하거나 그런다는데, 우리는 쓸 때 없는 일로 쓸 때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쓸 때 없이 모인다. 예비 고3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따지려거든 그 잘난 선생한테 따져.” 후, 그래. 너희들도 죄는 없겠지. 그래, 그건 아는데 왜 다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왜 나만 화가 나있는 거야? 김혜미랑 차연우는 워낙에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라고 하고 그렇다 쳐. 그런데 권강재 너는 왜? 너는 왜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는 건데!? 주체할 수 없는 화에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간신히 자제시킬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열리기를 바라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여느 때 처렁 빙긋 빙긋 미소를 띠고 있는 선생님께서 동아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효빈이는 조금 늦게 온다고 했고, 다들 온 거지, 그럼?” 신재원, 그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차연우, 권강재, 그리고 김혜미까지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는 제멋대로인 애들뿐이었으니까. 당신 말을 들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말 그대로 착각에 빠져있던 것이다. “아, 다들 화가 난 거야? 모임가지자고 해서?” 눈치 채셨으면 빨리 보내주시지. 토요일까지 이러는 건 정말 싫다구요. “음. 오늘은 좀 늦게 보내 줄 것 같은데?”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좀 늦게’ 라는 그 단어에 저절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시선 또한 선생님에게로 빠르게 옮겨졌다. 고운 시선이 아닌, 불만 가득한 시선이. “자, 이것 봐.” 하지만 곧 우리를 향해서 흔드는 여러 장의 퍼런 종이를 본 순간 불만 가득했던 시선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건 내 짐작이 맞는다면! “동아리 지원비. 라기보다는 봉사 열심히 했다고 주는 수고비정도? 다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갈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문 바깥을 가리키는 선생님의 행동에 김혜미는 언제 딴 짓 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 벌써 문을 나서는 중이었고, 권강재 역시 가방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아, 근데 이대로 일어나기에는 뭔가 부족해. 뭔가 자존심이 상해. 우리가 학교에서 알바 뛰는 학생도 아니고. 돈 받아가면서 봉사를 해야 해? 차라리 알바생을 구하지 그래? 기분이 팍 상한다. 고개를 살짝 수그린 채 ‘일어날까, 말까’ 하고 갈팡질팡 하는 내 손을 덥석 잡는 손 하나. 고개를 드니 ‘일어나지 않고 뭐해?’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차연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한 번쯤은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 게다가 지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까부터 배꼽시계가 울리려고 하는 이 놈의 허기진 배 때문. 나 역시 가방을 챙겨들고 차연우의 손을 꼭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연우는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 손이 매우 거슬리기는 했지만, 뭐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에 녀석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동아리 부서 실을 나와 선생님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 효빈이, 와 있었구나? 자, 어서 타자. 음, 앞에는 누가 탈래?” 선생님께서 차 앞문을 열며 누가 탈 것인지를 물으며 우리를 쳐다보았고, 머뭇머뭇 거리던 나는 옆에 서 있는 아이들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내 밀었다. 그리고서는 자연스럽게 앞좌석을 타려 하는데 갑자기 내 몸이 뒤로 빠져버리더니 익숙한 대갈통 하나가 앞좌석을 차지하고야 만다. “야, 권강재!” “넌 차연우랑 같이 타.” … 저 새끼를 그냥. 난 앞에 타는 게 더 좋단 말이야! 창문도 끝까지 다 내려가고, 또 편하고. 어찌됐건!! 그럼 두 번째 좌석에 타야 하나, 아니면 맨 뒷좌석에 타야 하나. 보통 승용차가 아니라 9인승 승용차라 꽤나 많은 인원이 차에 탈 수 있었다. 내가 어디를 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효빈과 김혜미가 벌써 두 번째 좌석을 꿰차고 앉았다. 하는 수 없이 나랑 차연우는 맨 뒷좌석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좁은 통로를 끙끙대며 들어가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건 차연우도 마찬가지 인 듯 했다. “선생님 어디로 가요~? 아웃 백? VIPS? 그 것도 아니면 음.” “어디로 갔으면 좋겠는데?” “아웃 백!!!!!!!!!” 아웃 백 한번 가보는 것이 평생소원인 김혜미는 당연히 아웃백이라고 크게 소리쳤다. 내 옆에 앉아있던 차연우도 김혜미를 거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을 하시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나와 권강재에게 물어 보신다. “아무데나 가요. 배고파 죽겠는데 따질게 어디 있어요?” “전 상관없어요.” 창 밖으로 시선을 두며 아무 곳이나 가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권강재의 대답과 배고파 죽겠으니 아무데라도 가달라는 내 대답을 듣고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선생님이 이번에는 한효빈을 향해서 물어 보셨다. “효빈이는 어디 가고 싶어? 효빈이도 아웃 백?” “얜 걍 건빵 가게 앞에서 내려 줘 버려요. 오천 원 한 장 쥐어주고. 그러면 아주 좋아서 날 뛸 걸요?” “혜미선배는 문방구 앞에 내려주면 좋겠네요. 천 원짜리 한 장 쥐어주고서 말이에요. 백 원짜리로 바꾸셔서 뽑기 하시면 딱 어울리시겠어요.” 효빈이의 반박에 김혜미의 눈은 막 타오르는 장작불 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둘은 역시나 천적이다. 같이 두면 안 된다. 같이 두었다가는 6.25 전쟁 때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 정말. 불물 안 가리는 김혜미와, 은근히 반항기가 다분한 한효빈.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럼 우리 고기 뷔페나 갈까? 요 근처에 새로 생겼던데. 거기로 가자.” “…선생님 아웃-!!!!!!!!!” ‘백!’하고 소리치려 하는 김혜미의 입을 뒤에서 두 손으로 막아버리는 나. 시끄럽다. 그냥 아무데나 가서 먹으면 되는 것을. “네, 고기뷔페 가요!! 어서 가요!!” 분명 김혜미라면 내 손을 물어뜯고서라도 아웃 백을 외칠 녀석이다. 그래서 녀석이 내 손을 물어뜯기 전에 선생님을 향해 우리가 갈 곳을 외치듯 말하였고, 선생님을 알겠다며 고기뷔페와 아웃 백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길 중에서 고기 뷔페로 향하는 길 쪽으로 핸들을 돌리셨다. 그렇게 우리는 우역곡절 끝에 고기 뷔페에서 동아리 첫 단합까진 아니고, 여튼 단합과 비스무리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 * * “너, 지금 몇 접시 째인 줄 알아? 그만 먹어!” “자그마치 1인당 9900원이야. 9900원어치는 먹고 가야 될 것 아냐!” 김혜미, 내 생각에는 네 뱃속으로 9900원이 아니라 거기에 3배를 곱해도 될 만큼의 양을 먹은 것 같거든요? 배가 아주 빵빵하다고요! 너의 줄인 마이 단추가 뜯겨져 나갈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 내 눈에는 아주 잘 들어오는데. 다들 너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거니? 한효빈의 눈이 며칠 굶은 거지가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니? “먹어.” 그 때, 내 접시 위로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덜어주는 권강재. 녀석이 내게 덜어준 음식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샐러드였다. 눈앞에 놓인 치킨샐러드에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나는 김혜미처럼 많이 먹지 말자는 생각을 이미 우주 멀리 던져버리고 포크로 치킨을 ‘콕’하고 찔러 입속으로 넣었다. 아. 살살 녹는다, 고기가. 마요네즈와 소스와 어우러진 치킨의 맛이란. “야, 이것도 먹어라.” 이 때, 권강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내게 덜어주는 차연우. 그런데…. “너 죽을래?! 다 먹고 남은 걸 왜 날 주는 건데!? 이거 지금 가져온 거 아니잖아!” “아, 들켰냐? 남기기 좀 아까워서.” 그래, 넌 첫 만남 때도 날 쓰레기 통 취급했었지. 이번에는 날 음식물 쓰레기 통 취급을 하는 구나. 등급이 업그레이드가 된 거니 아니면 다운 된 거니? 녀석을 쏘아주며, 내 접시에 덜어준 음식을 옆으로 덜어놓고 권강재가 준 음식을 입속으로 쏙, 쏙 넣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내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미신다. 그 접시위에 담긴 음식을 확인한 순간 치킨 한 조각에 행복해 하던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이 음식도 있더라고. 선생님이 해줬던 것 보단 맛있을 것 같아서.” “…이 음식은 도대체.” “이거 혹시 …파프리카 볶음밥이냐?” 그랬다. 차연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접시이자, 선생님이 내게 내민 접시 위에 담겨진 음식은 바로 어디 가서도 보기 힘든 이름하랴 ‘파프리카 볶음밥’. 도대체 이런 음식을 하는 음식점이 도대체 어디에 있던가! 선생님께서 해주셨을 때는 ‘이 사람이 내게 잡탕을 해서 줬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 있는 음식이었다니! 이런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있구나. 이런 음식을 하는 음식점이 정말 있구나. “…전, 살아오면서 먹어야 할 파프리카의 양을 2년 전에 다 먹은 것 같아서 괜찮은데….” “파프리카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 이건 먹어도, 먹어도 몸에 나쁘지 않는 거야!” 하고 내게 권하는 선생님. 또 웃으신다. 거부할 수 없도록 또 날 보며 웃으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접시를 향해서 숟가락을 내민…. “제가 먹을게요.” …권강재? “야! 너 그거 못 먹잖아!” “죽기라도 하겠냐.” 너…피망종류 못 먹잖아. 먹으면 밤새 구역질하고 난리 나잖아. 그냥 내가 안 먹는다고 하면 되는데. 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이미 녀석은 한 수저를 떠서 자신의 입속으로 넣어버린다. 미련한 자식. 도대체 왜 저러는 거래? “아, 강재가 그 음식을 좋아했나보구나.” 전혀요, 선생님. 쟤는 파프리카의 파, 피망의 피만 꺼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놈이에요. 절대라고요, 절대. 그런데 저는 그런 녀석이 왜 파프리카를 자진해서 먹는지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르겠어요. “형. 얼굴이 사과 같아요.” 그 때, 음료수가 담긴 컵에 빨대를 꼽고 ‘쪼르륵’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한효빈이 컵을 내려놓으며 권강재를 향해 말하였다. 그 순간 권강재는 ‘쿨럭-!’ 하고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방금 전 보다 더 얼굴이 뻘게지기 시작했다. 정말 새빨간 사과 같다. “자, 물.” 권강재는 차연우가 내미는 물 컵을 건네받고 입 안으로 털어 놓듯 물을 마셨다. 그 옆에서 빈 접시를 보고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혜미가 권강재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미련한 놈.” 이라고 핀잔주는 게 아닌가.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먹지도 못하는 파프리카를 꾸역꾸역 먹는 놈이나, 9900원 맞춘다고 억지로 음식을 몸 안으로 쏟아부어대는 애나. 똑같은 ‘미련한’ 사람 아닌가? “…어? 잠깐,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그 때 차연우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 왔고, 차연우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하였다. 선생님은 옆에 놓인 휴지로 입가를 닦으시는 가 싶더니 다들 먹을 만치 먹은 것 같다며 이만 계산하고 가자고 말하셨다. 나와 효빈이는 동의한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얼굴이 새 빨간 권강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주먹을 움켜쥐며. 김혜미는 여전히 아직 부족하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자신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듯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전화를 받으러 갔던 차연우가 돌아왔다. “저 먼저 가 봐도 되죠?” “무슨 일 있어?” 다급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에 나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녀석은 미간을 좁히며 욕설을 내 뱉으며 짜증난다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아, 씨발. 형이라는 새끼가 화장실에서 큰 거를 다 눴는데 집에 휴지가 없데. 휴지 사가지고 당장 오래.” 아…네. 어서 가세요. 우리 모두다 어서 빨리 가보라고 차연우의 등을 떠밀었고, 차연우는 나를 힐끔 보고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짧은 인사와 함께 음식점을 먼저 나섰다. 그리고 녀석이 음식점을 나선 순간 내 핸드폰에는 녀석의 문자 한통이 도착해있었다. [ 오늘만 권강재랑 집에 가라.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집에 모셔다 줄 테니까.] 문자를 확인하고 있는 내 입가에는 선생님의 미소를 볼 때마다 지어지던 미소가 나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 * * “네 볼일 보러 가도 된다니까? 너, 항상 이 시간에 그 똘마니들이랑 매일 농구하러 갔었잖아.” “그까짓 거 하루 빠진다고 죽이겠냐.” 너에게 언제부터 농구가 그 까짓 거가 됐어?? 언제부터?? 어렸을 적부터 농구만 죽어라 하던 너잖아. 항상 연습도 빼먹지 않고 갔잖아. 근데 오늘은 왜? 왜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건데? 너도 집에 갈 겸 데려다 주는 거라는 변명은 내게 먹히지 않는 다는 건 알고 있겠지? 집에 들른다 한들 바로 연습장으로 갈 거면서. “그리고 너 말이야. 아까부터 나한테 뭐 불만가지고 있냐? 왜 얼굴에 심통이 가득한건데?”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길 뭐가 아니야? 솔직히 말해. 뭐가 불만이야? 사실대로 말해라? 너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난 너랑 내 사이가 찝찝해지는 거 정말 싫다.” 18년이란 시간동안 권강재와 친구라는 사이에 있으면서 항상 권강재에게 해왔던 말이다. 다투거나, 서로에게 화가 났을 때, 항상 권강재에게 말해왔다. ‘난 너랑 내 사이가 어색해지는 거 싫어.’ 라던가 ‘너랑 싸우면 내 기분이 항상 찝찝해져. 우리 화해하자.’ 라던가 말이다. 사실이다. 가족과 다름없는 녀석과 싸우고 나면은 항상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그건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내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 상당히 기분이 저조해진다. 이유라도 알고 미움 받으면 모를까. “어차피 말해봤자 이번에는 네가 해결 못해.” “나한테 불만 있는 건데 왜 내가 해결 못해? 말해보라니까?” “진짜로 사실대로 말해 봐?” “그래, 말을 해. 말을! 답답하게 숨기고 있지 말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녀석의 앞을 가로 막고서는 권강재와 시선을 마주했다. 권강재는 흔들림 없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쉰다. “난….” 그래, 난 뭐. 계속 말해. 끊지 말고 계속 말하라니까? 어이! 고개 숙이지 말고 말하라고! “…네가 내 친구들과 사귀는 거 싫다.” …역시. 그거였나? “왜? 왜 나랑 차연우랑 사귀는 게 싫은 건데?” 권강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새 재촉이 되어버릴 만큼 계속해서 물어보았지만, 권강재는 꿀 먹은 벙어리인 듯냥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내게 말해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내가 말해볼까?” 뻔하다. 권강재가 자신의 친구들과 사귀는 걸 원하지 않는 이유는. 눈에 선하다. “이번에도 가지고 놀까 봐. 또 버릴까 봐. 또 차버릴까 봐. 그래서 널 곤란하게 할까 봐. 맞지?” “이향미.” 내 이름을 부르는 권강재 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내심 부정해주길 바랬던 건, 정말 내 바람뿐인 것 같다. ‘울컥’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녀석에 대한 실망일까? 그 게 아니면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 녀석에 대한 씁쓸함일까. “너, 날 정말 모른다. 18년 동안 함께 있었으면서 넌 정말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권강재. 우리 친구 맞아?” “야.” 내가 화가 난 만큼 권강재도 화가나 보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 설 생각은 없었다. 이 참에 확실히 하자. 그래,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녀석과 사이가 틀어지고 말 것이다. 녀석과 나 때문이 아니라 녀석의 ‘친구’라는 존재들로 인하여. “내가 정말 네 친구들 가지고 놀고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만약에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나 정말 실망할 것 같다. 나 비록 네 친구들과 교재를 긴 시간동안 하지 않았지만, 매 시간마다 네 친구들한테 충실히 했거든? 물론 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하지만 충실히 해서 되는 건 다 아니잖아. 마음이 없으면 왜 사겨? 그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 아니야? 그래서 헤어진 거야. 가지고 논 게 아니라고!” “그럼. 차연우는?” “차연우 뭐?” “차연우랑 너 진짜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거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럼 곧 헤어지겠다, 또?” 비아냥거리는 녀석의 말투가 내 신경을 거슬린다. 어쩌면 권강재가 지금 이리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이유가 ‘차연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뭘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네가, 내게 화를 내는 이유가 단지 네 친구들 때문이 아니라 ‘차연우’ 때문이라는 게. 내가 네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을 땐 넌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안심을 하게 될까. “아니, 걔는 달라.” 라는 대답에, 너는 네 친구를 단지 호기심으로 사귀는 게 아니라는 대답에 너는 안심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지? 그렇지 권강재? 그런데 어째서 넌. “왜… 더 화가 난 거야? 다르다고 했잖아.” “다르면 뭔데? 걔는 뭔데?” “네 말대로 아직 걔를 이성으로써 좋아하지는 않아. 그런데 나 재미있고, 즐겁다? 그 새끼랑 말하는 거 하나하나가 참 즐거워. 그래서 쓸 때 없는 생각을 안 하게 돼. 방심한 사이에 장난을 치고, 딴 생각을 잠시라도 할 때면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행동을 해.” 권강재의 시선이 묘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지?” 녀석의 기분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그저 나는…지금의 내 기분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다르네. 처음이네. 그 사람 이후로는 처음이네, 그치? 아무도 하지 못했던 걸, 차연우는 해냈네.” “…야.” “내가 지켜봐주길 바라는 거지, 넌. 지금까지처럼 너는 내가 네가 하는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봐주고 응원해주길 바라는 거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권강재가 고개를 숙이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들어줘야지. 네 말대로 친구니까. 그래, 친구니까.” “정말?” “대신 조금만 투정부리게 해주라, 나도. 조금만 더 투정부려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래도 네가 그 자리 그대로라면 네 말대로 들어줄게. 네 말 다 들어줄게.” 투정? 지금까지처럼 내게 잔소리해왔던 것처럼? 그런 걸 말하는 거야? “좋아. 부려. 실컷 부려라. 그래서 네 속이 풀린다면 그 까짓 거 못 들어주겠냐? 역시 난 너 밖에 없다니까?” “먼저 집으로 가라. 집 앞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럴 줄 알았다. 연습시간 늦었지? 알았다, 짜식. 있다가 밤에 게임이나 한 판 하자! 나 먼저 들어갈게! 그리고 고마워!!” 그저 고마운 마음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왜 내 기분만 생각했을까, 왜 그때는 손을 흔드는 내내 꽉 쥐어진 녀석의 주먹이 왜 보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던, 진심으로 보이던 녀석의 미소가 이제야 억지로 웃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왜…, 난 녀석의 ‘투정’이 그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게 해왔던 행동이라는 것으로만 생각했을까. 왜…, 왜… 난. * * * “하드, 하드, 하드, 하드!” 소파 위에 앉아서 연신 ‘하드’를 외치고 있는 녀석은 다름 아닌 나의 영원한 웬수 바가지 이향원. 이제 막 3월이 다 지나가는 무렵이다. 그런데 뭐, 벌써부터 덥다고 하드를 외쳐대는 것인가! 그래, 외쳐 되는 것 까지는 좋아. 뭐라고 하지 않겠어. 근데 먹고 싶으면 지가 사오면 될 것을. 왜 나보고 사오라는 듯이 자꾸 날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외치는 건데?! “안 닥쳐!?” “씨발 하드!!!!!” “그놈의 하드, 하드, 하드!! 사다 처먹으라고! 처먹어！ 안 말린다고! 왜, 하드 값이라도 주길 바라냐!? 3월 달 용돈 다 써서 지금 내 앞에서 지랄하는 거니? 어!?” “그 까짓 오백 원 없어서 내가 이러는 것 같아? 어?” “어.” 팔짱일 끼며 비아냥거리며 대답하자, 녀석은 입을 꾹 다물더니 곧 지 옆에 앉혀 놓았던 똥키를 번쩍 들고서는 말도 안 되는 세뇌를 시키기 시작했다. 일종의 나에 대한 분풀이였다, 그건. “우리 집에 식충이 하나가 있는데 말이다.” 그 식충이가 누군데, 병신아. “누굴 닮았는지 존나 짜리몽땅하고,” 내가 키가 아주 작은 편은 아니거든. “존나 슴가 작고.” 존나 까지는 아니거든?! “존나 짠 순이고, 존나 지도 꼴에 여자라고 연애는 하는데 애교 하나 부릴 줄 모르고, 존나 맨날 김햄인가 몬가 하는 기집애 인형이나 사주고, 그 돈으로 동생 하드 하나 사주면 어디가 덧나? 존나 동생위할 줄 모르고 말이야. 아주 조온나!!” 존나 내가 언제 짠순이었고, 존나 내가 언제 여자라고 애교를…, 아. 그래 이건 인정. 그리고 내가 김혜미 인형을 사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지금까지 딱 2번 밖에 안 사줬거든!!! 그리고 너는 지금 하드 값 달라는 게 아니잖아! “네가 돈만 달라고 했어? 씨발 돈만 달라고 했냐고! 네가 무슨 시위대도 아니고 말이야. 사내새끼가 걸어 다니는 걸 귀찮아해서 어디다 써 먹냐? 어!? 돈 줄 테니까 나가서 처 사먹어!” “그래, 존나 치사하다. 존나 치사해. 그래 누가 우리 엄마 딸 아니랄까봐, 아주 존나 더럽게 치사하다. 사다주면 어디가 덧나냐? 더위에 시달리는 동생을 위해서 하드 하나 사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어?” 어, 내 황금 같은 주말을 왜 너에게 써야하는 지 모르겠그든. 내가 왜 네 하드바를 하나 사주는데 왕복 15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지 모르겠그든. 그러니까 네가 사먹으세요. “오백 원이면 되냐?” 매 달 남은 용돈을 저축해 놓았던 것을 넣어둔 지갑을 꺼내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며 묻자, 녀석은 쪼르륵 내 옆에 달려오더니 오천 원짜리 지폐를 가리킨다. 오천 원을 가리키는 녀석의 손가락과 녀석의 뻔뻔한 면상을 번갈아보며 쏘아보았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지금 21세기 아니었냐? 21세기 하드 바가 오천 원씩이나 했어?” 아무 말도 없는 이향원. 하지만 내게 녀석을 쳐다보며 방심하고 있는 사이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쏙 빼내어가 지 주머니에 넣더니 재 빨리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 버린다. 그리고서는 삼선슬리퍼를 대충 신고서는 소리치며 현관문을 나가버린다. “요즘에 잘나가는 하드 바는 뭐!????? 베스킨라벤스~ 유후!” 마지막으로 혀를 날름 내밀어주는 센스까지 발휘해주는 녀석. 어쩜 내 동생인데도 쟤는…. “저렇게 재수가 없냐.” 불과 한 달 전, 녀석에게 고백한답시고 초콜릿을 가져다 바친 여학생들이 매우 불쌍해지려고 한다, 정말. 저런 녀석이 어디가 좋은 걸까? 차라리 그 초콜릿 나나 주지. 녀석에게 초콜릿 받친 여자애들 중에 우리 학교 1학년으로 들어온 애들 꽤 있던 것 같은데. 나한테 주면 후배 대접 제대로 해줄 텐데. 저건 뭐…. “개나, 인간이나. 인간이나, 개나.” 병신 같은 건 똑같다니까. “안 그러냐, 똥키? 네 주인하고 너는 어쩜 그리도 닮았냐?” 소파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똥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며 말하자, 이 것도 내게 반항을 하는 것인지 짧은 손으로 내 손을 걷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손이 너무 짧아서 내 손가락이 아닌 지 머리를 부비, 부비 거리고 만다. “진짜, 네 주인이나 너나 하는 짓 참 바보 같다.” 멍청한 주인의 멍청한 강아지가 하는 짓을 잠시 감상하다가, 곧 그것도 재미가 없어진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잠시 공상에 잠기었다. 아, 주말인데 이게 뭐야. 날씨도 좋은데 이게 뭐야? 할 짓은 없고. 재미는 없고. 아, 진짜 평범하다. 아니 평범한 애들의 일상도 이리 지루하진 않을 거야. 뭐 재미있는 프로라도 하나. 하고 리모콘으로 TV전원을 키려고 하는 때, 츄리링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 할 사람이라고는 차연우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연우?!”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액정을 확인하지 않고 냉큼 전화를 받은 게 실수였을까. 그리 반가운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 13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자의 미소. “왜 전화하셨어요, 선생님?” 반년 만인 것 같다. 주말에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사적인 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 - 주말 잘 보내고 있나 해서.] “그런 일로 전화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설마 주말에 이상한 봉사일 맡았다고 절 부르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그런 거라면 저는 이만 끊으렵니다.”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미리 선수를 쳐버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하하’하고 소심하게 웃으시는 가 싶으시더니, 이내 절대 그런 건 아니라며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잡일에 관한 일이라면 절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로 잡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이리 안심이 될 줄은 몰랐다. ( 그 만큼 지금까지 당해온 적이 너무 많았다.) “그럼 왜 전화하셨는데요?” [ - 선생님 지금 어디에 있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선생님이 서 계시는 곳에 계시겠지. 지금 이런 장난치려고 전화하신건가. 이럴수록 나는 더 미련만 가지고 당신이 원하는 제자와 선생님 사이가 될 수 없을 텐데. “심심해서 전화하신 거면 그만 끊어요. 이러는 거 정말 싫으니까. 선생님 원하는 대로 선생님과 제자사이가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제가 눈물겹지도 않으세요?” [ - 응.] …지금 뭐라 대답하셨어요? 응?? 지금 응이라고 대답하셨어요?! 응이라고?!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에요!? “지금 장난쳐요!?” [ - 애초부터 노력 따위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노력하는 제가’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잖아. 그러니까 눈물겹지 않아. 언제나 즐기고 있는 거면서.] “…저기요, 선생님. 저 지금 화가 나려고 하고 있거든요?” [ - 선생님 지금 문화중학교 운동장에 있어. 향미집이랑 가깝지? 나오지 않을래? 선생님 심심하다. 주말에 놀아줄 사람이 없네.] “제가 나갈 것 같아요? 안 나가요!” 절대 나갈 일 없다는 감정을 한가득 담아 나가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핸드폰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선생님의 대답이 아닌, 언제나 내게 들려주는, 아니 나 뿐만이 아니라 어느 학생에게나 들려주시는 해맑은 웃음소리였다. 이 웃음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알고 있다. 이 다음에는 당연히 그 말이 나오겠지. 내가 그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말을. [ - 선생님 기다리고 있을게, 향미야.] 선생님이 내게 해왔던 말들 중 가장 좋아하는 ‘기다리고 있을게.’라는 말을. 항상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말을. 이래서 한 발짝 그에게서 멀어져도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도망가려고 해도, 숨기려고 해도 다시 제자리로 오는 이유는 다 ‘기다릴게’라는 말과 그의 미소 때문이다. “젠장.” 전화가 끊기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서는 옷장을 열어 입고 나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엇을 입어야할까, 어떤 옷을 입어야 어색하지 않을까. 치마를 입으면 눈에 띄겠지, 그럼 바지를 입어야 하나. 청바지를 입고 갈까? 그냥 긴 청치마를 입고 나갈까. 불과 반년 전까지 그의 전화를 받고 나갈 때면 고민하던 것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고민이 생기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망설임 없이 청바지로 손을 뻗었고, 상의는 타이트한 긴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길게 웨이브 진 머리를 빗으로 살짝 빗어 내리고, 그 위에 캡 모자를 쓴다. 간편한 차람. 반년 전과는 참 많이 다른 대조적인 모습. 나… 조금쯤은 변했을까? 내 몸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향해 조심스레 묻는다. 그리고 심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채, 아니 듣고 싶지 않기에 선생님이 서 계실 그 곳으로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때문에 뛰고 있는 심장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뛰고 또 뛰었다. * * * 잠시 후. 학교 앞에 도착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무 빠르게 뛰어온 탓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호흡이 거칠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운동장 한바퀴를 눈대짐으로 둘러보았다. 스탠드 쪽에 다리를 꼰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내가 이렇게 달려올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빨리 왔네? 왜 그렇게 뛰어왔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자, 이거 마시면서 숨 좀 돌려.” 선생님이 내 눈앞으로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이온음료였다. 음료수가 매우 차가운 것을 보아하니 내가 이 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근처 슈퍼에서 사 오신 듯 했다. 나는 선생님의 성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캔을 따서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가운 이온음료가 목을 적신다. 찝찝했던 기분과 열이 사그라지는 기분. “주말에 데이트 약속 없었나 봐, 집에 있었던 것을 보면.” “집에 있건, 없건 오라고 하실 거였잖아요.” 다 안다는 듯이 말하면 또 미소를 지어보이시겠지. 지금처럼 말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너무 편안한 미소이다. 그냥 바라보는 사람조차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뭐, 그러니까 내가 2년 째 매달리고 있는 거겠지. 저 미소 하나 보려고 이렇게 발악하는 거겠지. “2학년들 다음 주 수요일 날 수학여행 가는 거 알지?” “네. 알아요. 일본으로 간다면서요.” “응. 목요일 날 생일이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생신이신데, 그게 뭐요. 거기 가서 선물이라도 하나 사드리길 바라는 거예요? 라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선생님은 배시시 웃으시며. “다코야끼면 되는데. 선생님 그거 정말 좋아해! 향미가 파프리카 좋아하는 것처럼.” 저기요, 저는 파프리카 무진장 싫어해요. 제발 알아주세요. 제발!! 억지로 먹는 제 모습이 항상 눈에 보이시지 않는 가 봐요? 안경을 생신선물로 드릴까요…? “그나저나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향미야. 그렇지? 매일 선생님 일 도와주고 항상 늦게 같이 집에 가곤했었는데.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죠. 안 날 리가 없잖아요. “향미는 선생님한테 애 제자나 마찬가지야.” 그런 거 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되고 싶었던 자리는 ‘제자’라는 자리가 아닌 ‘여자’ 라는 자리였으니까. “나는 이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말 그대로 초짜 선생님이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에이. 그래도 조금은 변했잖아, 나도.” 바닥에 손을 짚으시고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시는 선생님. 막 오후 1시가 지나가는 시각.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도 솔솔 불어온다. 선생님의 옅은 갈색결의 머리카락이 하늘, 하늘 휘날린다. “네가 너무 좋았어. 나를 잘 따라주는 네가. 참 귀여웠어.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너에게 해준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너에게 독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어.” “독이 아니라, 선생님은 제게 덫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아직도 못 헤어 나오고 있잖아요. 단단히 걸려서. 너무 깊게 걸려서. “그래. 그런데 그거 알아, 향미야? 덫은 말이지. 덫을 놓은 사람만이 그 덫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너를 ‘학생’이상으로는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향미야.” “그게 …왜요? 그게 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인건데요? 받아주시면 됐었잖아요. 저도 10대고, 여자에요. 하루에도 수천가지, 수만 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마음도 변할 줄 아는 아이에요. 변할 수 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속해서 거부만 하시고, 그러면서도 기대감만 주시니까…!!” 그러니까 못 헤어 나온 거라고요. 다 선생님 잘 못이라고요. 다…. “선생님이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으면서 지내니까 이 정도 인거지, 아니면 밑도 끝도 없었을 거야. 선생님은 향미가 성공했으면 좋겠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서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향미는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향미의 가능성을 낮추는 사람 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향미보다 고작 6년 더 살았지만. 그래도 겪고, 살아온 시간이 다르잖아. 크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향미 옆에는 선생님보다 더 멋진 남자아이들이 많잖아. 특히, 대표적으로.” 무릎 한 가운데에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의 손을 꼭 감싸는 선생님의 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선생님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강재가 있잖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더 멋진 남자아이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권강재는 ‘남자’가 아니라 ‘친구’이다. 2년 동안이나 나를 가르치시고,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지금 권강재를 ‘친구’가 아닌 ‘남자’로 분류시켰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걔는 친구일 뿐이라고요. 아시잖아요.” “음. 그래? 내가 잘 못 봤나. 뭐. 그럼 연우도 있고. 어찌됐건 많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맨 처음 선생님을 봤을 때처럼 진심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그 때 수줍게 웃으며 소시지 하나를 내밀….” “그 얘기 꺼내지 마세요!! 아, 쪽팔려!” 정확히 2년 전. 이 학교…, 그리고 이 곳에서 소시지를 맛있게 먹고 있던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선생님의 눈길에 주머니에서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소시지를 하나 꺼내어 선생님께 내밀었던 기억. 그 기억은 어느 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선생님’과 ‘제자’로서의 추억. 다시 그런 추억을 만들 수 있을…. “아!!” 빈 캔을 만지작거리며 추억에 잠겨있던 내 머리통 위로 딱딱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아주 빠르게. “향미야!” “괜찮아요. 아, 더럽게 아프네.” ‘무언가’가 무엇인지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선생님과 내 뒤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떡해. 어쩜 좋아. 어떡하지, 저기 괜찮아요?” 나와 선생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이내 내 앞으로 튕겨져 나간 테니스 공으로 추측되는 형광노란색의 공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여자가 테니스를 치다가 받아 친 공이 잘 못 날아 온 듯했다. “으. 어떡해. 많이 아파요? 병원 갈까요?” 어느 새 내 앞으로 다가와 공이 부딪힌 머리부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자. 그런데 이 여자…, 예쁘게 생겼다. 게다가 학생 같으면서도 학생 같지 않은 외모이다.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여자의 눈망울은 매우 동글동글했고, 그 만큼 작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가냘픈 이미지를 띄고 있었다. 나랑 비교하면 나는 너무나도 건강해보였다…. 이런 젠장. “괜찮아요. 그렇게 아프지도 않는데요, 뭐.” “표정은 아프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참고 있는 사람 건들고 싶어요, 선생님? 이럴 땐 꼭 내가 아파하는 걸 즐기시는 분 같다. “학교 열려 있는데, 양호실가서 밴드라도….” 지금 혹 났다고 제 머리에다가 밴드라도 붙여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혹 났는데 밴드를? …찜질하는 게 아니라 데일밴드를?! “…아, 아뇨. 괜찮아요. 사양할게요. 그리고 아무리 문이 열려있다지만 양호선생님도 안계신데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이 학교 선생님이라서 그건 상관없어요. 많이 아프세요?” 이 학교 선생님? 문화중학교 선생님? 이… 사람이? “와, 선생님이세요? 저는 영정고등학교에서 영어 가르치고 있는데.” ‘선생님’이라는 말에 반가우셨던 건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계셨던 선생님이 은근슬쩍 여선생님께 말을 거신다. 하긴, 선생님도 남자니까…. 나도 이 여자만큼 예뻤다면…. “무슨 과목 가르치세요?” “저는 체육 가르치고 있어요. 다음주에 테니스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줘야 하는데, 제가 테니스를 잘 못 쳐서….” “제가 도와드릴까요? 테니스는 같이 게임하면서 배워가는 게 더 빨리 배워진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이보세요? 저기요? 여보세요? 선생님? 저기요?… 저 아프거든요. 그리고 심심하시다고 저 부르신 거잖아요…. 그 선생님을 따라가시면 어쩌자는 건데요!! 저기요!!! 선생님을 잡으려 손을 뻗으려 할 땐 이미 선생님은 자신의 미소보다 훨씬 더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자선생님과 함께 테니스를 치고 계셨다. “나도 웃는 거나 연습해볼까.” 저 여자선생님처럼 예쁘게 웃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얼굴에 경련 잃어나려고 한다. 볼이 씰룩, 씰룩 움찔거린다. 망할, 이건 연습해서 다 되는 건 아니구나. 아주 타고 나야 되는 거구만? “차연우도 예쁘게 웃는 여자들을 좋아하려나?” 선생님도 테니스를 치고 계시겠다. 나는 할 일도 없겠다, 싶어 핸드폰을 꺼내어 빠르게 차연우의 번호를 찍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 너도 예쁘게 웃는 여자가 좋아? ] 라고 보내자, 정확히 1분 후, ‘지잉’ 하고 진동이 울리면서 아주 짧은 답 문자가 왔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농담 반, 장난 반으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왜…. [ 아니, 제일 싫어.] 넌 진지하게 대답하는 거야? 왜 내가 물어보면 안 될 것을 물어본 사람처럼 미안하게 만드냐. 답장을 할까, 하다가 폴더를 접고 이내 테니스를 치고 계시는 선생님들께로 시선을 옮겼다. 서로 테니스공을 치면서 웃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너무 잘 어울리신다. 학생과 학생이 아닌, 어른과 어른이란 관계 때문에? 그래서 제 3자가 바라보는 눈에도 어색하지 않는 걸까. 그럼 저 여자선생님의 눈에 아까 전, 나와 선생님의 모습은 어색하게만 보였을까. 이런 주말에 학생과 선생님의 본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 하에서 만나는 모습이. “…모르겠다, 정말.” 푸르고 맑은 하늘처럼 내 마음도, 내 머릿속도 맑아지고 깨끗해지면 좋으련만. 언제쯤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살면서 고민하나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있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고민해봤자.” 머릿속만 더 복잡해 질 테니까, 고민만 더 늘 테니까. 그냥 편하게 살면 되는 거지 뭐.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고, 지금 감정에 솔직하고. 그게 내 인생이니까. 내가 가지고 사는 가치관이니까. * * * “너무 편하게 살았나 봐. 어떻게 그 걸 잊어먹을 수 있는 거지?!”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고, 지금 감정에 솔직하게 사는 게 아무리 편해도 때로는 이 생활방식이 사람 목을 조일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엄마, 여권!! 여권 안 가져왔다고, 나!!’ [ - 잘됐네. 가지 말고 환불하고 집에 와서 공부해!] ‘장난쳐?!’ [ - 장난치는 거 아니라니까? 누가 두고 가래?] ‘아이씨! 20분 뒤에 출발한다고! 엄마!!!!!!!!’ [ - 올 때 엄마 선물 사와, 그럼.] ‘돈 없어!’ [ - 그럼 버스 출발하거든 집으로 돌아와서 공부하시던지.] 진짜 우리 엄마 맞냐고! 어떻게 딸 수학여행 간다는데, 이럴 수가 있냐고! ‘지금 엄마도 못 가본 해외 내가 먼저 가본다고 짜증내는 거야?!’ [ - 그렇게 들렸니? 어머. 그럼 그렇게 해석하렴. 엄마는 이만 바빠서 전화 끊을….] ‘알았어! 알았다고! 어제 엄마가 보여준 그 유카타 사오면 되는 거지? 진짜, 도대체 할머니도 안 그러시고, 할아버지도 안 그러시는데 엄마는 누굴 닮은 거야!? 돈을 많이 준 것도 아니고. 알았으니까 빨리 가지고 와!! 알았지!? 꼭!!!’ 불과 10분 전.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내가 깜박 잊어먹고 여권을 집에 두고 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순 없고 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서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그것 참 잘 됐다며 아예 집으로 오라는 게 아닌가. 엄마도 못해본 해외여행, 어떻게 딸이 먼저 가냐면서 말이다. 그냥 속 시원하게, 어제 밤에 사오라고 했던 유카타 안 사올 거라고 소리친 내가 못 마땅했다고 말을 하지. 어떻게 딸에게 협박을. 결국 나는 그 협박에 못 이겨 꼭 사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서는 10분 째, 교문 앞에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수학여행 간다고 잔뜩 들떠있는 내가 가장 중요한 여권을 잊고 있었다니. 정말 한심하다. 진짜 내가 얼마나 평소에 생각 없이 살았으면 여권을 잊어먹냐, 여권을. 점점 시간은 지체되어가고, 출발시각은 다 되어가고.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 시계로 시간을 확인 하려 할 때, 교문 안으로 낯익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엄마는 여유롭게 여권을 흔드시며 걸어오고 계셨고, 나는 옆에서 나를 째려보고 계시는 선생님의 눈초리를 못 이겨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그 눈초리가 마치 ‘어서 받아가지고 버스 안타?!’ 하는 듯 했기에. “또 느긋하게 걸어왔지!” “알면서 뭘 묻니. 자, 여기. 일본까지 가서 망신시키는 짓 하고 오지 말고.” “내가 엄마만 하겠어?” “그래, 유카타 꼭 사오고. 사진 좀 많이 찍어 와.” “알았어. 내가 거기 도착하면 전화 할게.” “얘는. 국제전화가 돈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요즘에는 그렇게 안 비싸거든요. 엄마가 내미는 여권을 받아들고 짧게 인사를 하고서는 짐을 들고 버스 위로 올라탔다. 창문 밖으로 날 보며 잘 갔다 오라는 듯 손을 흔들고 계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자, 나 역시 손을 흔들었다. 그 때, 내 옆에 앉아있던 차연우가 갑자기 창문을 벌컥 열더니. “잘 다녀올게요, 장모님~~!!!!!!” 하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녀석의 뒤통수를 세차게 내리치고 말았다. 녀석은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지며 날 노려보았고, 밖에서 우릴 지켜보고 계시던 엄마는 그저 크게 웃고 계실 뿐이었다. 쪽팔려, 진짜…. “너 쪽팔리게 왜 그래?!” “뭐가? 인사 하는 게 나빠? 나쁘냐고! 아, 내 뇌세포 다 죽었다. 대갈빡에 혹 난거 같아.” “어차피 머릿속에 들은 것도 없으면서.” “왜 들은 게 없어?” 정색하는 차연우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럼 그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고 말이다. “네가 들었지~~.” …죽일까. 응? 죽여 버릴까. 얘, 요즘 오바 왜 이렇게 떠니. “애들 앞이라고 그렇게 신경 써서 말할 필요 없거든? 제발 자제해주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솔직히 그런 말 참기에는…. 그렇잖아?” “솔직히 나도 말하고 조금 후회했다. 여기 닭살 돋은 거 보이냐?” 아주 잘 보인다. 잘 보인다, 못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자제하자, 좀. 그리고 너 왜 내 옆에 앉는데? 내 짝 어디다가 치웠어! 다 남남, 아니면 여여 짝인데 왜 너랑 나만 남여 짝인 건데?” “아~ 애들이 나보고 네 옆에 앉으라고 밀어붙이는데 어쩌라는 건데~~.”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개 구진 표정을 지어보이는 차연우. 그런 녀석을 힐끗 쳐다보다가, 녀석과 평소에 같이 어울려 다니는 놈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들 내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한 놈은 휘파람을 불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겨버렸고, 또 다른 두 놈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척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이야기하는 척 바빴다. 누가 차연우 친구 아니랄까봐. “어, 옆반 애들 버스다.”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는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타야 하는 상황이라 아침7시까지 학교로 모인 아이들. 덕분에 잠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쏟아지는 잠에 잠시 눈이라도 붙여볼까 하는데, 차연우가 창문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몇 반이냐, 저거.” “어, 저 머리 짧고 재수 없는 대갈통은 김햄 같은데.” 김혜미? 어디 보자…. 음. 확실히 저 익숙한 뒤통수는 김혜미가 맞는대. 그럼, 저 차안에는 7반 아이들이 타고 있을 거고, 즉 권강재도 타고 있겠군. “저 차 하극상을 벌이고 있다. 우리 차를 추월했다.” “뭐래….” “우리 반은 5반이고, 쟤네 반은 7반이잖냐. 그런데 저 차가 방금 5반인 우리 차를 추월했어. 그러니까 하극상.” …진짜 이향원만큼 매를 부르는 새끼는 네가 처음이야. 정말로. “닥쳐. 졸려 죽겠는데. 공항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럼 공항 도착하면 나 좀 깨워줘. 나 진짜 졸리다. 다크서클 보이지?” “그래, 넌 좀 자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네 얼굴자체가 피곤해 보인다.” 그래, 내가 잠 좀 깨면 그 때 죽여줄게. 그러니까 굳이 지금 죽으려고 발악하지 않아도 돼. ‘공항에서 보자’ 라는 뜻이 담긴 시선으로 녀석을 잠시 쏘아 봐주다가, 이내 창문 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이 감기가 무섭게 잠이 쏟아져 왔지만, 그래도 곧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깊은 잠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렇기에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는 녀석의 손길도, 담요로 추정되는 것을 내 위로 덮어주는 손길도 모두 다 느낄 수 있었다. 제 14화 너를 잃어가는 여행. 버스가 도착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고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총 2학년의 학생수는 약 380명. 하지만 그 중에서 집안사정상 못 가는 아이들과, 개인 사정 등으로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약 340명에 다다라는 아이들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한 비행기에 340명이라는 아이들이 모두 다 탈 수는 없기에, 먼저 도착한 1반부터 4반 아이들이 이미 세 시간 전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남은 5반부터 나머지 반 아이들은 지금 이 시각 비행기에 탑승하여 드디어 ‘일본’이라는 곳으로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지. 왜 또…. “네가 내 옆자리인 건대.” “내가 아냐니까? 네 옆에 앉으라고 표를 지들이 알아서 바꿔주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아, 그러셨어요. 네, 참 그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씀 좀 전해주라. 아주 감사해 미치겠다고.” “전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전해주지 뭐.” 또 다시 개구지게 웃으며 받아치는 차연우. 정말 말이나 못하면. 저 놈의 주둥아리를 콱 묶어서 하루 동안 말 좀 못하게 만들어버리고 싶다. “어, 저거 권강재 아냐?” 잠은 안 오고, 할 일이 없어서 앞에 놓인 책자를 뒤적이고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차연우가 반대쪽을 가리키며 내게 물어온다. 나는 ‘권강재’라는 말에 시선을 옮겼고, 그 곳에는 정말로 권강재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못 보던 여자애다.” 차연우의 말 대로 못 보던 여자아이였다. 권강재의 옆에 앉아있는 아이는. 워낙에 다른 반 아이들에게 관심도 없고, 다른 반에 친구도 그리 많지 않는 나였기에 더더욱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권강재의 옆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오가고 있는 여자아이는 정말 처음 보는 여자아이였다. 권강재 처음 보는 여자애랑 이야기 할 만큼 여자 안 밝히는데…. 여자애들이랑 말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야.” “…어? 어?” “왜 넋을 놓고 있어? 질투나? 질투는 나한테만 해야 하는 거 알지, 너.” “질투는 무슨! 뭐라는 거야? 아니, 그냥 뭐. 너도 알다시피 쟤는 너랑 달라서 여자애들이랑 이야기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놀지도 않는데. 그냥 나 말고 다른 여자애들이랑 이야기 하고 있는 거 보니까 좀… 기분이 오묘해서 그래.” 정말 단지 그 뿐이었는데, 녀석이 나 이외의 다른 여학생과 이야기 하는 모습이 정말 색달라 보인 게 다였는데. 이어서 반박해오는 차연우의 말 때문에 그게 다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누가 그래?”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그만둬도 될 만한 것을. “권강재가 여자애들이랑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누가 그래?” “뭐? 그야… 지금까지 옆에서 봤을 때, 여자애들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보지 못했고….” 그러고 보니… 그냥 다 내 추측일 뿐이잖아? 순간적으로 깨달아버린 새로운 사실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싫어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다 너 같은 애라고 생각하지 마. 권강재는 달라.” “아니, 다르지 않아.” 기분이 상한다. 생각보다 많이 상해버린다. 내 말이 맞는데. 권강재는 정말 여자라는 존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차연우의 말에 밑도 끝도 없이 기분이 급 저하가 되어 버린다. “야, 차연우. 쟨 나랑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겨버리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어째서? 오히려 더 숨기는 게 없는 거 아니야? 너 생각 이상하게 한다?” “똑똑한 네가 가끔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다고? 내가 뭘 모르는데? “네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뭐라고 했더라.” 선생님이라고 했었어. “그래, 선생님이라고 했었지? 그럼 권강재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뭔지 너는 알아?” “…그건.” …모르겠다. 권강재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나…. 권강재에 대해서 아는 게 얼마 없는 것 같다. 녀석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참 많은 것 같은데. “친구야, 친구. 쟤는 친구라는 존재를 증오하다시피 해.” “친구라니? 친구를 왜?” “친구를 가장 싫어하고, 여자도 싫어하지 않아. 단지 가까이 하지 않는 것 일뿐. 뭐, 또 모르지. 앞으로는 가까이 할지. 그리고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의외로 술도 좋아한다. 대체적으로 엔조이를 즐기는 녀석이야.” 지금 네가 설명하는 사람, 그거 마치 너 같은 거 알아?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엔조이를 즐기는 사람은. “그건 딱 넌데, 차연우?” “그래. 쟨 나랑 아주 비슷해.” “웃기지 마. 권강재가 노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아. 누가 노는 걸 싫어하겠어, 솔직히? 하지만 할 땐 하고, 놀 땐 논다고.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적어도 18년 동안 지켜봐온 나로서는….” 하고 말을 계속 이어나가려 하는데, ‘쫑알쫑알’거리는 내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일까. 미간을 좁히며 내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는 녀석. “아직은 아닌가 보다. 아, 실수다. 실수.” “이어안아??” ( 이거 안 놔?) “시끄럽다고. 엄연히 이 곳은 공공장소. 우리 이제 조용히 닥치고 자자. 아까 네 머리 받쳐주느라 어깨 빠질 뻔했다.” 치, 누가 해주래?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 사람 지가 받쳐 준거면서. 하지만 나도 더 이상 차연우와 말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창문에 기대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볼까 싶어서 눈을 감으려 하는데, 내 머리 뒤로 손이 하나 ‘쑥’ 들어오더니 창가 쪽으로 향하던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으로 기대게 하는 차연우. “어깨 아프다면서?” “아파도 여자친구를 차가운 유리에 기대고 자게 하겠냐?” “얼씨구, 여자친구 대접해줘서 황송합니다.” “암, 황송해야지. 너 일본 가서 내 어깨나 주물러라.” 연신 어깨가 아프다면서 어깨를 주물러 줘라, 마사지해라, 등등 온갖 불평불만을 다 털어놓는 차연우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어깨에서 내 머리를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기대기 편하게 어깨를 살짝 낮추어주기까지 한다. 공부도 못한다. 성격도 좋지 못하다. 말투는 매우 거칠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친구한테 만큼은 책임감이 강한 녀석인 것 같다. 배려도 좋고…. 의외로… 괜찮은 녀석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한번 녀석의 어깨에 기대어 비록 짧지만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 * 도쿄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려 일본의 땅에 한 발짝, 한 발짝 내 딛는 느낌이 한국의 땅을 밟는 느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하고 와서 그런가? 그냥 땅은 땅일 뿐이었다. 다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한국이 아닌 일본인들이 더 많고, 간판들도 한국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일본어로 가득하다는 것 밖에는. “자, 5반부터 줄서. 앞 반은 벌써 숙소 가서 쉬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어서 가서 쉬어야지!” 각 반의 담임들이 반 순서대로 줄을 세우며, 숙소로 이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처음에 우왕좌왕하는가 싶더니, 이내 숙소로 간다는 말에 점점 ‘줄’이라는 형태로 서기 시작했다. 곧 먼저 줄을 선 5반(우리 반)이 먼저 숙소로 향하는 버스 위로 올라탔고, 연이어서 다음 반, 그 다음 반 버스를 타고 뒤 쫒아 오기 시작했다. 숙소로 이동하는 내내 버스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데, ‘일본’이 신기하다기보다는 ‘일본어’로 쓰여 진 간판들이 매우 색달라보였다. 둘째 날에는 자유시간을 준다고 하셨는데, 주위를 좀 돌아다니면서 구경 좀 해봐야겠다. 다코야끼인가, 한국에서도 파는 걸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일본의 음식이니 일본에서 한 번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우동도 맛있다는데, 라면도 한국 라면하고 좀 다르다고 하고…. 아,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일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일인데,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 숙소에 도착했다. 각자 방 배정 받은 데로 들어가서 짐 푸르고, 지금 시간이 12시 좀 안 됐으니까 한시까지 쉬다가 집합해서 밥 먹고 이동하자.” “네~!” “자, 그럼 각자 방 배정 받은 곳으로 이동!” 선생님이 이제 각자 방으로 가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누구하나랄 것 없이 모두 다 일어서서 자신이 배정 받은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들 들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일본까지 왔는데 설마 학교가 말 그대로 ‘개구린’ 숙소로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학교 꽤나 양심 있는 학교 인가 보다. “오~! 멋진데?” “그러게? 야, 여기라면 한 달도 지낼 수 있다, 난.” “그건 오버고. 전망 봐라. 최고다.” 옆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아이들의 말처럼 정말 전망하나는 끝내주는 방에 배정받았다. 6명씩 여자들은 방 3개. 남자들 역시 7명씩 방 3개를 배정 받았는데, 옆 방아이들이 뛰어 들어오면서 연신 ‘부럽다’라는 말을 내 뱉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 방이 가장 좋은 방인 듯싶다. “여기는 술 안파나?” “뭔 술?”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술’이라는 것에 대해 묻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 물어보았고, 친구는 다 알면서 뭘 묻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술잔치를 벌이겠다고?” “당연하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생각은 아니었지, 이향미? 네가 아무리 반장이라고 해도 난 널 알아. 1학년 때 네가 수련회에서 선도주자로 해서 애들 술 먹인 것도 아니까 내뺄 생각하지 마.” 기가 막히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 술잔치를? 그 것도 첫 날? “오늘 하려는 거 아니지?” “당연 첫 날 한판 뜨고, 마지막 날 한판 떠야지. 선생님들도 첫 날은 밖에 나가셔서 시내 한 바퀴 돌고 오신다고, 우리는 그 걸 빌미로 애들 모여서 잔치 벌이는 거지.” 미쳤다. 옆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안주는 뭘 살 것이며, 뭘 준비할 것이며 이야기를 오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남자애들도 와?” “엉. 아까 차연우한테 못 들었어? 남자애들은 옆 반 애들도 같이 올걸?” 그 새끼…. 내가 잔소리 할 거 눈치 채고 말 안한 것이 분명해…. 이 거지같은 게. 짐을 내려놓고 차연우네 방으로 가서 한 소리 해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생물체 하나가 내 목을 아주 세게 감싼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공격받은 나는 휘청, 휘청거리며 겨우겨우 중심을 잡았다. “향미야-!!!!!!!!!!!” “억-!” 제, 젠장. 다리를 삐끗한 것 같다. 물론 작은 통증이라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사그라질 것 같지만. “죽을래, 김혜미? 너희 방으로 안 돌아가?” “야아, 여기가 더 좋단 말이야. 나 오늘 여기서 재워줘. 우리 방 존나 좁아. 개미똥구멍 만해.” “개미 똥구멍만 한 방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거든요. 지랄하지 말고 돌아가. 우리도 좀 쉬자. 애들 지친 기색이 네 눈에는 안 보이니?” 하고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아이들은 김혜미가 이 곳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젠장, 그래 어디에도 내 편은 없지. 세상은 혼자 살아남는 거지, 그래. “다른 방도 가보자.” “다 똑같이 생긴 방인데 뭘 구경 가.” “남자아이들 방 말이야! 걔네 위층이라는데. 어? 엉?” 아예 내 멱살까지 잡으면서 ‘안 올라간다고 말하면 죽여 버리겠어.’ 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김혜미의 핍박에 못 이겨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서는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김혜미의 손에 이끌려 숙소 한 바퀴를 모두 다 돌고나니 어느 덧 집합시간이 다 되었고,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바로 숙소 앞 집합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합장소로 향하는 내내 김혜미를 향한 내 질타는 멈출 줄 몰랐다. “자, 자. 다들 모였나? 각 반의 반장 인원수 맞춰보고, 다 모인 반부터 자유시간을 줄 테니까 다 모인 반, 반장은 선생님한테 오도록.” 아이들 앞에서 각 반의 반장들이 인원수 체크를 하기만을 기다리는 선생님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자유시간을 얻어 쉬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일제히 앉혀 놓고 인원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삼십 구, 사십, 사십 일. 오케이.” 41명, 전원 모두 집합했다. 모두 제 시간에 나와 준 반 아이들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선생님께 달려가 모든 아이들이 집합했다 말을 전하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모두 집합한 우리 반 앞에 다가서시더니 가뜩이나 우렁찬 목소리를 더 크게 내지르시며 주의사항을 말해주셨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낯선 땅, 일본이다.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면 한 마디로 미아가 되어버리는 거야. 찾을 수도 없어. 전화? 연락을 닿을 방법이 없다. 자유시간은 총 4시간. 오후 5시까지다. 늦어도 5시 20분까지는 숙소 앞에 집합해야 한다. 그래야 밥 먹고 휴식시간을 좀 가지다가 레크레이션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너희들에게 자유시간을 주어지는 대신에 이 근처를 벗어나면 안 된다. 시내 밖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다. 버스타고 숙소 오면서 본 사람도 있겠지만 숙소를 중심으로 시내가 둘러싸여져 있다. 그러니까 그 시내 안에서만 놀고, 먹을거리도 좀 사먹고, 기념품도 사는 거다. 오늘 아니면 너희들 가기 전날 자유시간 2시간 정도 주어졌을 때 밖에 시간이 없어. 다들 알아들었지?!”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아이들도 ‘네-!!!!!!!!!!!’하고 우렁차게 대답을 하였고, 선생님은 우리의 목소리에 만족하신 듯 어서 시내로 가버리라는 과격한 제스처를 취하신다. 우리는 누구하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숙소에서 챙겨 나온 지갑을 들고 아이들과 함께 시내로 향하려 했다. 헌데. “넌 우리랑 못 놀겠다, 향미야.” “뭐? 어째서? 너희 나 왕따시키냐?!” “뭐래는 거야. 우리가 미쳤다고 반의 권력자님을 왕따를 시킬까. 저기 차연우가 너한테 오라고 손짓하는데? 일본에 와서 너와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즐기고 싶으신가본데, 가라. 우리 그렇게 눈치 없는 년들 아니니까.” ‘뭐라고?’하고 반박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나를 내버려둔 채 시내입구로 발걸음을 옮겨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나는 몸을 돌려 뒤편에 서 있던 차연우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 뭔데!” “뭐긴. 같이 다니자는 거지.” “같이 다니긴 개뿔! 여기까지 와서 너랑 같이 다녀야겠냐? 친구들이랑 추억도 만들 겸, 친해질 겸 같이 다니려고 했더니만.” 애꿎은 땅을 발로 차며 투덜거리자, 차연우는 개구진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 어깨에 손을 두르더니 자신의 친구들이 서 있는 곳으로 날 데리고 간다. 내 어깨에 두른 녀석의 손을 뿌리치려 해도 녀석이 손에 힘을 주고 있는 덕에 뿌리칠 수도 없었다. “대놓고 여자친구에요, 라고 자랑을 하지 그러냐?” “그냥 부럽다고 말을 해라, 광우야. 아니다, 진짜 그래버릴까?” “미친놈. 그나저나 권강재는 같이 못 놀겠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차연우가 광우 녀석을 쳐다보자 광우는 자신의 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저 기집애랑 선약 있다는데? 쟤도 데이트 잡힌 것 같더라. 그래서 네가 이향미랑 같이 걸어올 때 속으로 존나 욕했잖아. 이 것도 데이트 때문에 빠지나 하고 말이다.” 나 혼자라도 빼주면 안되겠니. 난 내 친구들과 놀고 싶거든. 그나저나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권강재가 여자랑 단 둘이 놀러 다닌다고? 권강재가? 내가 아는 권강재가?! “지네 반 애들하고 놀러 다니는 거 아니야? 설마 쟤가 단 둘이 여자랑…. 에이, 말도 안돼.” “내가 말했지? 쟤도 여자 밝힌다니까. 네가 몰랐던 것뿐이지. 어찌됐건 강재 녀석 빠지면 우리끼리라도 놀러 다녀야 하나? 어디부터 갈까.” 차연우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바로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왜 나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내가 단순히 몰랐었기 때문에? 아니면… 여자와 단 둘이 웃고 떠들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야! 야, 이향미! 너 어디가!” “기다려 봐!” 왜? 어째서? 우리랑 함께 놀러가지 않는 건데? 어째서? 단지 ‘어째서’라는 의문 때문에 한창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권강재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왜 같이 안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물어 본 것이었는데. 정말 ‘어째서’라는 의문에 답이 나오지 않아서 그 당사자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왜 너는 기분나빠하는 거야? 그냥 물어보는 것 뿐인데? 왜. “누구 데이트에 꼽사리로 끼고 싶지 않아서.” 비꼬는 거야? “권강재.” “차연우 기다리고 있네. 어서 가. 나도 같이 다닐 애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런 게 아니라.” 미처 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권강재는 날 향해 ‘데이트 잘해라’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서는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서는 유유히 시내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거 봐. 쟤도 데이트 즐기러 가는 거라니까.” 눈치코치 없는 차연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두른다. 이 손을 쳐 내야 하는데, 지금은 이 손보다 저 앞에 여자아이 어깨에 손을 두른 권강재의 손을 쳐내고 싶다. 어째서? 다시 한 번 ‘어째서’라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디에서도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내 자신에게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건가.” 일본에 와서 한국에 있을 때처럼 권강재와 함께 길을 누비면서 이 것 저것 사면서, 강재네 아주머니와 우리 엄마가 꼭 사오라고 하던 유카타를 고를 상상을 아주 잠깐이나마 했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런 곳에 놀러오면 함께 선물도 고르고 놀고먹고 그랬었으니까. 내가 남자친구가 생겨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권강재는 내게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하다…. “뭐해? 안가고.” “어? 아, 어. 알았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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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ights reserved.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우리들만의매력,모델팸☜ cafe.daum.net/Ueolzzang7 음식(비공개) | 회원수 15,507 카페정보가입 0 방문 22 새글 2 카페지기하늘에별따기 개설일2006.02.22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플레이 대기중 -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2) 숨기 노을뱅이♡<나>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15 ~ 外 1-3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389 08.06.26 22:59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59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 제 15화. 너를 잃어가는 여행2 도쿄의 거리는, 아니 도쿄의 거리라고 말할 정도로 지금 내가 거닐고 있는 시내는 그리 크고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일본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시내는 일본인들로 북적거렸고, 한국과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쁜 옷들과, 김혜미가 눈에 불을 키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피규어까지. “저, 저것 좀 봐!!! 헐, 2000엔? 이런 십숏키 같은 놈들. 나같이 빈곤한 시민들은 어찌 살라고.” 빈곤하면 사지 마세요, 그냥. “오, 다코야끼다! 음, 어.…뭐라고 말해야 되냐?” 피규어를 파는 가게를 입맛만 다시며 지나치던 김햄은, 옆에서 다코야끼를 팔고 있는 가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본까지 왔으니, 일본의 유명하지만 흔한, 흔하지만 유명한 음식인 다코야끼를 먹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아냐?” “일본어 할 줄 아는 애 없어?!” 의사소통이 되질 않으니. 뭐, 얼마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몇 개 더 얹혀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아주 죽을 맛이다. 김혜미는 일본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냐면서 남자아이들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김혜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 때 차연우가 한 발짝 발을 내딛더니, 옆에 종이에 쓰여 있는 가격대로 돈을 지불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포장된 다코야끼를 차연우에게 내민다. “오.” 모두 다 그 모습을 보며 다코야끼를 먹고 싶어 했던 아이들도 하나 둘,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고, 결국 10분이 지난 후에는 모두 손에 다코야끼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만 빼고. “넌 왜 안 먹냐?” “돈 아까워서. 어차피 입속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먹는데 돈을 쓰고 싶진 않아.” 천천히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내 앞으로 다코야끼 하나를 내미는 차연우. 내 앞에 내민 다코야끼를 잠시 쳐다보다가, 차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약 올리는 거야?” “하나 먹으라고. 도대체가 애가 왜 그렇게 다 부정적이냐?” “네가 하나 먹으라고 곱게 줄 애가 아니니까 그렇지. 근데 진짜 먹어도 돼?” “내가 여자친구한테 이런 거 하나 주는 것도 아까워 할 녀석으로 보여?” 라고 묻는 녀석의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그러한 내 모습에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조금 더 가까이 내게 다코야끼가 꽂혀있는 꼬치를 내민다. “평소에 날 어떤 놈으로 봤으면 그러냐. 어찌됐건 먹어. 팔 떨어진다, 나.” “어? 아, 어.” 꼬치를 받아들고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운 다코야끼의 맛은 상상이상이었다. 한국에서 먹어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맛. 역시 원조는 다르구나. “어이, 너희들. 우리 지금 단체 생활 중이다. 연애행각 피우려거든 따로 나가서 피워! 아니면 숙소로 돌아가서 지랄하던가.” “안하면 되잖아, 새끼야. 그런데 애들 다 어디 갔냐?” “느그들 연애할 동안 오락실 들어간 지 오래다, 인마.” 표정에 ‘정말 짜증난다.’라는 감정을 가득 담고서 말하는 한 녀석의 말에 차연우의 시선이 바로 앞에 위치한 오락실 안으로 향한다. 그리고서는 녀석 또한 오락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넌 안 들어가냐?” “너희들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이 근처 좀 둘러 보…. “권강재?” 오락실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가게 앞에 서 있는 녀석은 분명 권강재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을 향해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남겨두고서는 권강재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분명 그 처음 보는 기집애랑 같이 있어야 할 녀석이 혼자 서 있었다. 혹시 그 기집애한테 바람이라도 맞은 건가? 하는 생각에 좀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북적거려 발을 내 딛는 게 매우 힘들었지만 권강재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밀치고, 또 밀치며 가게 앞에 도착했는데. “…아.” 그는 권강재가 아니었다. “미치겠다.” 그저 권강재와 뒷모습이 매우 유사한 일본인일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권강재보다 훨씬 키도 작고, 머리색도 더 옅은데. 왜 착각한건지. 닮은 사람도 아닌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을 착각한 내가 한심스럽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연우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탓에 그들이 있는 ‘오락실’을 찾기 어려웠다. 분명히 왔던 길을 되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어? 설마.” 나 길을 잃어버린 건가!? 보이질 않는다. 차연우도, 김혜미도. 그렇다고 우리 반 아이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반 아이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아까 아이들의 유혹에 못 이겨 숙소 주변이 아닌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온 것이 화근이었다. 낯선 이국에 땅에 여행을 온 아이들인지라 평소에 노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들도 숙소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결국… 난. “큰일 났다.” 내 일행을 찾지 않는 이상 숙소로 가지 못한다? 그 게 아니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일본인에게라도. 그런데 말이지. 어째서!!! “Excurse me. umm….” “…쏘, 쏘리!” …왜 피해? 왜? 왜, 내가 ‘실례합니다.’라고 말을 걸 때마다 슬금슬금 피하는 거야?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까 당연히 영어로 물어봐야 한다. 한국어는 더더욱 안 된다. 그나마 자신 있는 영어로 물어봤는데, 그 것도 아주 기본적인 말로 물어보았는데, 저 어색한 ‘쏘, 쏘리!’는 뭐고, 왜 날 괴물 보듯 하면서 도망치는 건데? 하나같이 다! “진짜 이게 뭐야!” 잠시만….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자신의 나라 모국어를 제일 우선시 하는 나라. 우리나라와는 달리 영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라. 오죽하면 잘 나가는 큰 영어 학원이 대폭 망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는가, 수강생이 없어서. 그래서 길거리에서 영어로 말을 걸면 영어를 할 줄 모르기에 슬슬 피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걸 경험하고 있다. 젠장맞게도. “빌어먹을 이다, 진짜 빌어먹을 이야. 왜 하필이면!!” 한국도 아니고, 이국땅에 와서 길을 잃어버리는 거냐고! 내가 미아도 아니고! 아, 차연우 제발 부탁이야. 찾아줘. 날 좀 찾아라. 응? 내가 없어졌다는 걸 제발 눈치 채줘. 나 일본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는 더더욱 안 먹혀. 우리나라 말은 당연한거고. 나 일본에서 미아 되고 싶지 않아…. 돈도 없고.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아…. “네가 정말 내 남자친구면 지금쯤 눈치 까고 날 찾아야 될 것 아냐!!!!!! 어떻게 주위를 눈 씻고 둘러봐도 네가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건데!”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황당스럽고, 또 당황스러웠지만 어느 새 두려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사는 나이지만, 전생에 토끼전에 나오는 토끼라도 된 듯냥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고 다니던 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길을 잃은 미아일 뿐이었다. “핸드폰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의사소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간 거야? 아니, 나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왜 오락실의 ‘오’짜도 보이지 않는 건대…. 사람이 없으면 좀 찾아야 될 것 아냐! 소리도 좀 지르면서!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잖아…. 사람이름을 부르면서 막 뛰어다니고. 그 정도도 바라지 않을게. 그냥 눈앞에만 나타나줘. 응? 차연우…. 무서워 죽겠다고, 정말. “무서워 죽겠단 말이야, 나쁜 놈아!!” 아무리 한국말로 떠들고, 소리쳐봤자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뿐 도와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으로 수학여행 온 이향미. 어이없게 미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 * * 한편, 오락실에서 한창 게임을 하고 있던 향미 일행은 오락 삼매경에 빠져있느라 향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우 역시 눈치 채지 못하고, 한국에는 없는 색다른 오락게임에 눈이 멀어 열을 내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오락실에 들어 온 또 다른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옆에는 화장을 떡칠한 채 최대한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게 눈에 다 보일정도로 애교, 아니 아양을 떨고 있는 여자아이도 서 있었다. 남자는 오락실 한 바퀴를 둘러보더니, 이내 연우에게 시선을 머물렀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그는 연우의 주변을 둘러보더니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다가섰다. “이향미는 어디 있어.” 한창 게임에 물이 오른 연우는 누군가 자신의 게임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미간을 좁히며 재빠르게 시선을 위로 올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연우는 게임이 죽든지 말든지 오락을 뒤로 한 채 자리에 일어서서 그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다. “데이트 중이냐, 권강재?” “이향미 어디 있냐고.” “이향미? 근처에서 오락하고 있을…. 어라? 얘, 어디 갔냐?” 권강재는 자신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있는 여자의 손을 푸르며 다시 한 번 오락실을 둘러보았다. 연우 역시 마찬가지로 오락실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향미로 추정되는 아이는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갔나? 야, 이향미 어디 있냐?” “이향미? 아까 나보고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했었는데. 안 들어왔어? 곧 따라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게 언제쯤인데.” “우리가 여기에 한 30분전쯤 들어왔으니까, 당연히 30분전쯤이겠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친구의 말에 연우는 미간을 좁히며 그제야 향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강재 역시 향미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서는 연우를 노려보며 말한다. “너, 애를 챙기는 거야, 마는 거야?” “네가 지금 그런 말 할 처지가 되냐? 옆에는 뭐… 기집애 같지도 않은 거 하나 끼고 있는 녀석이.” “내가 걔 남자친구야? 네가 잘 챙겨야 될 것 아냐!” “걔가 애냐? 이 근처에서 시내 구경하고 있겠지.” “얘, 길 감각이 없어서 한 번 잃으면 찾아오지 못한다고!” 강재의 충격적인 발언에 연우는 미간을 좁히며 낮게 욕을 읊조리더니 곧 오락실을 뛰쳐나갔다. 강재역시 가지고 있던 옷가지를 여자에게 던져놓고서는 연우를 뒤 따라 향미를 찾으러 나갔다. 향미가 없어진지 30분 째. 한국이 아닌 일본이란 나라에 와 있는 상황이라 그리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라, 제발.” 이런 곳에 와서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사람이나, 그 사람을 찾고 있는 사람이나 서로 이동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서로 만나기가 더 힘들다. 그렇기에 둘 중 한사람이라도 그 자리에 있는 편이 더욱 찾기 쉽다. 30분이 지난 시각까지 오락실로 향미가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이 향미를 찾기 전까지 제발 멀리 가지 않고 근처에 있길 바랄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이향미-!!!!!!!!!!!!! 이향미-!!!!!!!!!1” 오락실 근처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향미로 추정되는 아이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즉, 이 근처에는 없다는 것.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길, 이 근처에도 없어!”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뭘 하든 하지. 미치겠네.” “선생님들한테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우선 우리가 좀 더 찾아보고.” 강재는 연우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서는 빠르게 다음 골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숙소로 향하는 지도가 있기에 걱정이 없지만, 향미는 지도조차 없는 상황이기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찾아야만 했다. “맞다. 너 아까 그 기집애는 뭐냐?” “누구.” “아까 네 옆에 붙어서 헬렐레 팔렐레 웃던 기집애.” “몰라. 그냥 노는 애.” 권강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대충 대답을 하며 근처 벤치에 앉았다. “이향미가 계속 신경 쓰던데.” “그 기집애가 왜.” “글쎄, 왜 일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찾기나 하자.” 쉴 틈도 없이 다시 향미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 연우와 강재는 시내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향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들어서자,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가야하지?” 연우와 강재는 어느 쪽 길로 택해야 하는지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왼쪽.” 동시에 연우는 오른쪽, 강재는 왼쪽. 서로 나뉘어져서 찾으면 괜찮겠지만, 이 곳은 일본이다. 한국이 아니었다.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다. 한 곳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해는 떨어져가고 있었고, 양쪽 다 가볼 상황이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가자.” “왼쪽이야.” “무슨 근거로?” “이향미는….” 강재는 왼쪽 길로 발 한발자국을 내밀며 말하였다. “반항적인 끼가 다분한 녀석이라서 절대로 곧은길로 가지 않거든. 항상 왼쪽, 오른쪽 선택하라고 하면 왼쪽을 선택하는 녀석이니까.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와.” 강재가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왼쪽 길로 들어서자, 연우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뒤 따라갔다. 그렇게 한 참을 왼쪽 길 깊숙이 걸어갔을까. 그 때, 그들이 있는 곳 보다 조금 더 들어간 곳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중간 중간 욕설이 들려오는데, 그 욕설은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였고 또한 낯익은 목소리였다. 연우와 강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 * * 30분이 흘러도, 한 시간이 흘러도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락실을 찾아서 계속 걷고, 또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우리 학교 애들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 건지. 신의 농간인가. 슬픈 영화를 보건, 드라마를 보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런 낯선 땅에서 길을 잃었는데 돈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나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 할 시간에 일본어 공부도 조금 해 두는 건데 말이다. “나쁜 새끼들!!!!!!!!!!!!” 이게 다 권강재 때문이야.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더니 기어코 녀석 때문에 길을 잃고 만다. 진짜 숙소에 돌아가기만 하면 녀석을 사정없이 때려줄 것이다. 평상시처럼 행동만 했어도 내가 그 곳에서 그 남자를 권강재로 착각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으, 으 흑. 으….” 눈물이 난다. 흘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게다가 너무 걸어 들어온 건지 이제는 일본인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으엉엉엉. 이 나, 나쁜…으, 엄마아… 엉엉, 으엉엉.”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1년 전에 국어선생님한테 한번 제대로 개겼다가 얻어터진 적 이후로는 소리 내어 운적은 없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소리 내어 울어본다. 그 것도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으, 진짜 이대로 집에 못 돌아가면 어쩌지? 살다 살다 이향미가 겁에 질려 울기까지 해보고. 진짜….” 나 집에 돌아가면 이향원도 잘 보살펴주고, 똥키도 안 때리고 맨날 맛있는 거 사주고. 또 엄마 유카타도 존나 고급스러운 걸로 사주고, 김혜미 괴롭히지도 않고, 선생님 미워하지도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회봉사도 열심히 다니고 그럴게요…. 그러니까 내가 길을 찾는 것도 좋고, 아니면 누군가가 날 찾아와도 좋으니까 제발…. “나 좀 돌아가게 해주세요, 진짜….” 그렇게 한참을 울었을까, 아직도 눈물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이 자리에 머무를 수가 없으니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데 내 앞으로 한 개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눈이 팅팅 부은 상황이라 감은건지, 뜬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눈으로 게슴츠레 위를 쳐다보자마자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차연우-!!!” 차연우였다. 녀석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몸이 땀범벅인 것을 보아하니 녀석도 나를 어지간히 찾아다녔나 보다. 평소라면 더럽다며 저리 떨어지라고 소리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되지 못했다. 정말로 한국이 아닌 땅에서 미아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마 오늘 하루 종일 울어도 모자를 판이다. 그 만큼 너무 무서웠다. “…으, 으엉.엉엉어,엉…. 나쁜 자식아, 네가 어떻게 엉엉. 여자친구가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마음 같아서는 왜 이제 왔냐고 욕 한 다발을 퍼 부어주면서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으니까. 진짜 눈앞이 캄캄했는데,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차연우의 얼굴이 보였을 땐. “미안. 미안하니까 뚝 그쳐. 내가 진짜 미안하다.” “엉엉, 으어, 엉엉엉. 엉엉 진짜 무서웠다고, 진짜, 흑, 흐으엉엉.” 진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도 흐트러졌었지만 나한테 만큼은 누구보다도 멋져보였고, 고마웠다. 그렇게 한 번 터진 울음은 다시 멈추기가 힘들었고, 나는 차연우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보지 못했다. 차연우의 뒤에서 그보다 더 땀에 절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권강재를. 차연우보다 더욱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권강재의 눈을. 차연우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나를 지켜보다 곧 우리에게서 뒤 돌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권강재의 모습을. 나는 또 다시 한 번 보지 못했다. 그 아이의 진심을. 제 16화. 과거 현재 미래. 차연우와 도움으로 숙소로 가까스로 도착한 나는 방 한쪽에 위치한 침대 위로 바로 쓰러져버리듯 누워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차연우는 그런 내 상태를 아는 것인지 선생님께 상황을 대충 말씀드리더니, 곧 선생님께서 내 방으로 찾아와 저녁시간 그리고 레크레이션 시간은 쉬고 싶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푹 쉬라는 말씀을 건네주셨다. 이래서 여자애들이 남자친구라는 존재한테 환장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내 단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략 오후 11시가 넘어가는 시각. 이미 취침시각이 지난 시각. ‘우르르’하고 여러 명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안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자, 환한 불빛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 몇 개와, 지나가다 스치듯 본 얼굴들 몇 개가 방 가운데서 술판을 버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술잔치를 벌일 거라고 말한 친구의 말이 왜 지금 생각난 건지. 이미 잠은 깼고, 다시 자기도 글렀고 배도 고프기도 하고 술판에 끼려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다가서는데, “일어났어?” 한 친구가 날 발견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서는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는 차연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권강재가 손목을 잡으며 말한다. “자.” 라고 말이다. 아니 지금 내가 몇 시간을 잔 줄 알아? 근데 또 자라고? 진짜. “됐어. 많이 잤어.” “그래도 자.” “잤다니까? 나 배고프다고!” “그럼 죽 해줄 테니까 죽 먹어. 야, 아까 밥 조금 남았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권강재. 으, 내가 무슨 감기에 걸렸니? 아니면 몸살이라도 났니? 그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뿐, 몸이 조금 피곤할 뿐이라고! 근데 웬 죽?! “야! 됐어! 나 그냥 안주 먹으면 돼! 너 해도 안 먹을 거니까 알아서 해!” 어차피 괜찮다고 빡빡 우겨도 만들 놈인 걸 알기에, 만들어도 안 먹을 거라 으름장을 놓으니, 녀석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크레이션 재미있었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앞에 앉은 한 녀석에게 묻자, 녀석은 흥분을 하며 오늘 열린 레크레이션에 대해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놓기 시작했다. 레크레이션의 주인공은 당연지사 이 곳에 태연히 앉아서 술만 죽어라 마시고 있는, “장난 아니었다니까, 차연우 저 자식? 완전 무대위에 올라가서 여자애들이랑-!!” 오호라, 여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이라는 말에 녀석을 째려보자,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며 이번에는 안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입속에 쏙 넣어버린다. “끝내줬어, 아주. 여자애들 흥분해서 같이 춤추는데, 녀석 덕에 우리 반이 이겼잖냐.” “그래서 얻은 게 뭔데?” “집에 돌아가는 날 까지 밥 첫 번째로 먹는 것.” …별 이상한거에 목숨 걸었다, 참. 앞에 술과 안주를 중심으로 둘러싼 아이들만 해도 약 열명정도. 우리 반 5명. 권강재네반 3명, 그 외는 다른 반 정도? 워낙에 평소에 안면 트고 지내던 아이들이라 어색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한명이 무척이나 내 눈에 거슬리는데 말이지. “강재야아, 나 속이 안 좋아아.” “그럼 들어가서 먼저 쉬어.” “…데려다 주라아. 응?” 저 기집애. 아까부터 권강재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아양이란 아양은 다 떨고 있는 저 기집애. 아까부터 눈꼴 시려워 죽겠다, 아주. “저기 그 목소리 좀 어떻게 해 주면 안 될까?” 라고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뭐?” “네 목소리에 속이 안 좋아지려고 하거든? 보아하니 술도 안취한 것 같고.” “…뭐? 너 말 다해…잠시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대.” “보긴 어디서 봐. 데려다 줄 테니까 일어서, 유재인.” 행여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나와 유재인이라는 아이의 사이를 가로 막는 권강재. 그 때 유재인이라는 아이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났다! 권강재 쟤-!!!! 네 지갑-!!!…!!.” 무언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하려 했던 재인은 그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을 덮은 권강재의 입술로 인하여. “오올-!!! 권강재 샘나게 뭐하는 짓이냐~! 솔로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구나!” “연애질은 밖에 나가서 하라니까~.” “쟤들 사귀고 있었어?” “그런 거 같은데?” 무언가 말하려 하는 재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리는 권강재. 재인은 처음에는 당황하는 가 싶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술 더 떠 권강재의 목에 손을 두르며 더 깊숙이 권강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아주 지랄들을 해라, 지랄들을. “이향미 어디가?” 어디 가냐고? 저것들 꼴 보기 싫어서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러 간다. 어쩔래.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되는대로 핑계거리를 대었다. “바람 쐬러.” “야, 몸도 안 좋은 애가 무슨 바람이야? 또 길 잃어버리려고?” “애 취급하지 마. 똑같은 실수 또 할 정도로 바보 아니니까. 맥주 캔 하나 들고 간다.” 위에 걸칠 가디건 하나와 맥주 캔 하나를 들고 방을 나왔다. 바람 쐬러 간다고 나오긴 했다만 막상 갈 곳은 없었다.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녀석들 말대로 또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정말 말 그대로 바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숙소 앞이나 가야겠네.” 하는 수 없이 지금 이 시각에 그나마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이자 가장 이 곳과 가까운 곳 숙소 앞 벤치를 선택했다. 숙소를 나오자 벤치 하나가 보였다. 나는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서는 맥주 캔을 따며 벤치에 앉았다. 캔을 입가로 가져다 대고서는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였다.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이 켜지더니 우리학교 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저 아이도 바람을 쐬려나보다 하고 시선을 거두고서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아이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역시나 한쪽 손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맥주 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우리 학교 학생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청승맞게 여기서 뭐하는 짓?” “꺼져, 새끼야.” “어허, 남자친구한테 꺼져가 뭐냐? 꺼져가. 넌 남자들한테 사랑 받고 싶거든 그 말버릇부터 고쳐야 돼. 여자가 여자다운 맛이 없어.” 그랬다. 방을 벅차고 나온 내가 걱정이 됐는지 내 뒤를 뒤따라 나온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차연우였던 것이다. “애들이랑 술이나 마시지 왜 나왔어? 그냥 혼자 바람이나 쐴 겸 나왔더니.” “거짓말 좀 작작해라.” “내가 뭘?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내 입으로 말해줘? 정말로?” 그래, 어디 한번 네 입으로 말해봐라- 라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한숨은 길게 내쉬더니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깜짝 놀라 녀석에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했지만, 내 어깨를 꽉 쥐고 있는 녀석의 손에는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아주 세게 힘을 주고 있었다.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럼 해답이 다 나온다.” “뭔 개소리야?” “그런 게 있다, 인마.” “지랄하지 말고, 이 손이나 풀어. 그리고 들어가.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야, 어떻게 이 늦은 밤에 여자친구만 홀랑 두고 들어가냐? 나. 이래 뵈도 매너 남으로 소문난 놈이야.” 아, 그러세요? 매너 남으로 소문난 놈이 처음 본 사람을 쓰레기통 취급하고, 도둑년 취급을 하셨나? 전혀 신뢰성 없는 말들이다. “그 놈의 여자친구, 여자친구. 네가 언제 여자친구 대접 제대로 해준 적은 있니? 그만 좀 가져다 붙여.” “내가 못해준 건 뭐냐?” “그래,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집에도 데려다주고. 근데 그건 형식적인 거잖아.” “그럼. 거기서 뭐가 더 필요한건데?” 거기서 뭐가 더 필요하냐고? “이왕 사귀는 거, 서로에 대해서 알건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네가 나 여자취급해주는 것 말고는 우리 사이 거의 달라진 거 없거든? 난 아직도 너랑 내가 왜 사겨야 하는지 모르겠어. 달라진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럼 내가 너에 대해서 물어보면 넌 다 대답해줄 거냐?” “상황 봐서. 대답해줄 만 한 건 뭐.” 팔짱을 끼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녀석은 내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고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서는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권강재랑 어렸을 적부터 친구냐?” “어. 태어날 때부터 친구. 부모님끼리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셨으니까.” “지금까지 사귄 남자는 몇 명 정도?” 물어보는 거 봐라. 질문 한 번 뭐 같다. “열명정도? 최근 2년 동안 갈아 치운 놈들이 많아서.” “그럼…” “빨리 빨리 말해, 나 답답한 거 싫어해.” “그 선생 말이다.” 아, 왜 안나오나 했다. “그 선생이랑은 학교에서 만난 거냐?” “그럼 직업이 선생인데 학교에서 만나지 어디서 만나?” “고등학교 들어와서 만난 거냐?” “아니, 중학생 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다가?” …아예, 육하원칙으로 말하라고 하지 그러세요. “그 선생님이랑 나랑 있었던 과거가 궁금하다고 말을 하지 그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듯이 하지 말고.” “피하는 것 같아서.” “뭐?” “네가 그 선생이야기 꺼낼 때 마다 피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살짝 흔들고서는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텁텁했던 목을 적시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지난날을 회상하기 딱 좋은 기분이었다. “말해줄까?” 그래서였을까. 충동적인 발언을 하게 된 것은. “뭘 말해줘?” “네가 듣고 싶어하는 첫 사랑이야기.” 내 마음을 완벽하게 거부당한 그 날 이후로는 절대 꺼내지 않았던 추억들을, 기억들을 녀석에게 꺼내놓게 된 것은. “괜찮겠어?” “그 까짓 거 뭐 말한다고 달라지겠어? 이미 과건데.” 옛날이야기 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들려주면 나야 감사하지.” 권강재에게도 꺼내기 꺼려했던 그 날의 일들을 차연우에게 꺼내놓게 된 것은. “그 선생님을 만났던 건….”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권강재보다 차연우를 의지하게 되고, 권강재보다 차연우를 더 찾게 되고, 잊어버렸던 감정을 다시 찾게 된 것은 다 오늘 때문이라 나는 알지 못했다. 오늘로 인하여 멀지 않은 훗날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논하게 될 줄은. 그 날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여름마냥 유난히도 더운 날이었다. 그 날, 나는 오랜만에 인생에 몇 번이고 찾아오는 덫에 걸리게 되었다. 헤어 나오기 힘든 지독한 덫에. 제 1-1회 外 첫 사랑이야기. “제발!” “청소하고 와.” “선생님!” “잔말 말고, 어서.” 흑. 정말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그래, 내가 조금 너무하기는 했어. 3학년이 되고나서 밥 먹듯이 지각은 했어! 그런데! 내가 학교를 빠진 것도 아니고, 무단 조퇴한 것도 아니고, 무단결석한 것도 아니고 무단 외출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저, 아침에 너무 너무 졸려서 떠지지 않는 눈을 위해서 조금 더 감고 있었던 죄 밖에는 없는데, 그 것 가지고 뭘 청소해? 어디? 응? 3,4,5층 복도를 모두 다 청소하고 가라고? 지금 그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고!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보심이 어떠신….” “1,2층도 추가 해줄까?” “할게요. 해야죠. 어서 하고 집에 가야죠.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졸지에 1.2층 복도까지 대걸레로 빡빡 문지를 뻔 했던 난, 궁시렁 거리던 입을 굳게 다물고서는 화장실로 가서 대걸레 3개를 깨끗하게 빨아 놓았다. 여기서 문제. 왜 3개를 빨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3개가 아니라 한 5개는 필요하겠다, 5개는. 아, 젠장.” 한 개가지고는 부족하니까. 3.4.5층 복도 만해도 그 넓이가 얼만데, 한개 가지고 가능하겠는가? 제대로 안했다가는 정말 1.2층 복도까지 모두 다 하게 생겼으니, 차라리 한 번에 할 때 잘하자 하는 생각이다. “이걸 언제 하냐고.” 안되겠다, 5층부터 해서 3층으로 내려오자. 마무리 다하고 3층 화장실에 걸레를 가져다 놓고, 교실로 가서 가방을 들고 3층 교무실에 들려서 확인검사를 맡은 뒤, 집으로 가면 되는 거야. “한 시간이면 다 하겠지?” 하는 생각에 5층서부터 대걸레 하나를 쥐고 빡빡 문지르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포즈로 대걸레 윗부분을 붙잡고 ‘하나, 둘, 셋’ 하는 구호와 함께 힘차게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그렇게 한 열 대번을 왔다, 갔다 하니 어느 새 5층 청소 끝. 하지만, 그 열 대번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벌써 20분이라는 시각이 지나버렸다는 거. 또한 빨아놓은 3개의 걸레 중 이미 2개는 초토화가 되어버렸다는 것. “역시 5개는 필요했었어.” 초토화 되어버린 걸레를 5층 화장실에서 대충 빨아 걸어놓고서는 다른 새 걸레를 빨아 들고 4층으로 내려갔다. 근데, 4층 복도를 한번 훑어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욕설들. “…이 씨발 것들을 그냥-!!!!!!!!” 1층, 교감실과 교장실 그 밖의 다른 사무용 실들이 있는 곳. 2층, 신입생들의 반이 있는 곳. 3층, 교무실과 3학년들의 반이 있는 곳. 그리고 4층, 망할 똘마니 2학년들의 반이 있는 곳. 5층은 특별활동부실들이 있는 곳. 그런데 지금 내가 있는 4층의 복도는 아주 쓰레기 천지다. 쓰레기 천지. 원래 자기네 반들이 복도 청소는 기본으로 하고 가는 거 아냐? 근데 어쩜 이리도 쓰레기가 많아? 청소를 한 거야, 만 거야? “한 놈만 걸려봐라. 복도에 쓰레기 버리는 놈, 한 놈만 걸려봐. 가만두지 않겠어.” 이를 악 물고서는 화장실에 있는 비상용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와서 미친 듯이 보이는 쓰레기를 모두 다 쓸어 담기 시작했다. 워낙에 넓고 긴 복도라서 쓸어 담는 데만 한 20분 걸린 것 같다. 어쩜 쓰레기가 그리도 난무하던지. 모두 다 쓸고 복도를 바라보니 뿌듯하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닦아야 하니 괴롭다. 정말로 괴롭다. “…내가, 내일부터 지각하나 봐라. 지각을 하나 봐!” 절대 지각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아까 빨아온 대걸레를 들고 아까전과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복도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반짝, 반짝 하게 말이다. 이래봤자 내일 되면 또 미친 듯이 쓰레기를 처 버릴 테지? 걸리기만 해봐. 내가 닦은 이 복도에 쓰레기 하나라도 버려봐. 가만두지 않겠어.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빨리 끝났다. 젠장.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가?! 아, 짜증나!” 나머지 걸레를 들고 마지막 3층으로 내려왔다. 4층과는 달리 너무나도 깨끗한 복도. 하지만 닦긴 닦아야겠지. 하는 생각에 끝에서부터 천천히 걸레로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하는데, 어두운 복도 끝에 남자휴게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가볼까, 말까 하는 갈등 속에서 5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난 끝내…, “…그래. 살짝 들여다보고만 오는 거야. 그냥…, 뭐. 궁금하잖아?” 하고 조심스레 휴게실로 다가섰다. 빼꼼 열려 있는 문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헐.” 저게 다 뭐야?…에이, 설마 아니겠지? 헐. 설마. 내 눈을 의심하면서 조금 더 가까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할 때였다. 나도 모르게 내가 들고 있던 대 걸레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그 순간 휴게실 탁자에 앉아서 일을 보고 계셨던 한 남자선생님이 문 쪽에 서 있던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누구?” 선생님은 반쯤 닫혀있던 문을 여시며 나를 향해 물으셨다. 나는 재 빨리 떨어트린 대걸레를 잡고서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음…3학년? 여기서 뭐해? 집에 안가고?” 처음 보는 얼굴. 이제 햇수로는 3년 째 이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이런 얼굴을 가진 선생님은 본 적이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교생 선생님이 몇 분 오셨다고 들었는데. 교생인가? 근데… 교생이 남아서 저렇게 산더미 같은 프린트를 정리해? “보시다시피 청소 중 이었어요.” “청소? 아, 너 김한옥 선생님네 반이구나! 그 지각생!” 교생은 날 누군지 알고 있는 듯 손바닥을 치며 아는 척을 해 왔지만, 나는 그런 교생의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난 내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 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이니까. “…선생님은 이번에 새로 오신 교생선생님이신가 봐요?” “응! 나도 보다시피 일하는 중이야. 녹차라도 한잔 줄까? 마침 조금 쉬려고 하던 참인데.” 지금 저 산더미 같이 쌓인 프린트를 두고 잠시 쉬려고 했다고요? 내 생각에는 저건 쉬지 않고 해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양의 프린트인데요. 뭐, 내가 알바 아니지. 녹차까지 주신다고 하니,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네. 녹차주세요. 저 녹차 좋아해요.” 하고 휴게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어떻게 서든 난 그 곳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됐다. 절대로 말이다. 휴게실 근처에도 가서도 안됐고, 지각을 해서도 안됐었다. “자, 마셔.”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자 보통 원룸처럼 생긴 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스렌지에 물을 얹어 놓으시고서는 내가 앉아있는 탁자 건너편에 앉으시는 선생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이목구비도 뚜렷하시고 키도 크시고. 인기 많으실 것 같다, 이 선생님. “있죠.” “응!” “교생이시라면서요.” “응!” “근데 왜 이런 잡일해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교생을 향하여 묻자, 교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방글방글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시던데?” 하라고 주신다고 그걸 다 받아오시면 어쩌자는 건지. 이거 보니까 한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게 아니라, 여러 선생님의 부탁을 받으신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이건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양이 되지 못한다. 집에 가서까지 해야 하실 듯 하다, 이 교생.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요? 설마 내일까지는 아니시죠?” “응? 내일까지 맞는데. 어! 물 끓는다! 잠시만.” 가스렌지를 끄고, 밸브를 잠그고서는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는 교생선생님. 그리고 그 안에 녹차 티백 하나를 넣으시고서는 내게 다가와 그 컵을 건네주신다. 나는 그 컵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짧게 인사를 건네고서는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봄이지만 저녁이 되면 될 수록 추워지는 날씨에 몸이 으슬거리던 참이었는데, 녹차를 마시니 그 추위가 싹 가시는 듯 했다. “근데요, 이거 내일까지 하셔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응.” 아, 제발 그렇게 웃지 마세요. 너무 싱글벙글 웃으시니까, 보는 제가 다 부담스럽다고요. “언제 다 하시게요? 이 많은 걸?” “음. 오늘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보 같은 소리. 이걸 보고도 오늘 안에 끝낼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게다가 지금은 나랑 노닥거리고 계시기까지 한데? 꿈도 야무지셔라. “도와드리고는 싶은데, 제가 지금 청소 끝내고 김한옥선생님께 검사를 맡고 가야해서 그럴 수는 없겠네요. 수고 많으시네요.” “어? 김한옥 선생님 아까 잠시 어디 가신다고 가셨는데.” “오늘 선생님 늦게까지 계신다고 하셨는데요?” “응, 그래서 잠시 어디 나갔다 오신다고 하셨어! 지금 안 계시는데?”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건 좋은데, 마치 지금 하시는 말씀이 꼭 도와달라는 것 같잖아요. 저는 지금 몹시 피곤하다고요. 지금 이 프린트를 다 정리할 만큼 체력이 남아돌지 않아요, 전! “…설마 도와달라고 하시는 건 아니시…죠?” “도와주면 안돼? 내가 녹차까지 줬잖아.” “선생님이 주신다고 하셨지, 제가 달라고는 한 건 아니잖아요.” “와. 너 되게 당돌하다? 너, 문제 많이 치고 다니지?” 전…혀는 아니고, 아주 조금, 정말 조금 친다고요! 입술을 삐죽 빼죽 내밀며 몸을 틀어 나와 시선을 마주하려는 교생선생님의 눈을 피했다. 뭐, 일종의 나 삐졌다. 라고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걸 저 교생선생님이 알아챌 수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말이다.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될까? 그럼 내가 김한옥 선생님한테 잘 말씀드릴게.” “…정말요?” “응! 조금만, 아주 조금만.”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모으며 ‘조금만’이라고 절실하게 부탁하시는 교생선생님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그런 내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뭐…, 웃는 모습은 마음에 드네. 맹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거 도 맡아서 하지 마세요. 선생님만 고생할 뿐이니까.” “응? 왜?” 어이구, 지금 왜 라고 하셨어요? 당연히 이런 걸 도맡아서 하시면 지금처럼 집에 가시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하실 거라고요. 교생 실습 한 달 동안 고생만 하시다 가고 싶으신가봐. “힘 많이 드는 거 좋아하세요?” “…음. 아니?” “그럼 고생하시는 거 좋아하세요?” “그 것도 아닌데….” “그럼 맡아서 하시지 마시라고요. 이렇게 다 하시지도 못할 거면 왜 하세요? 오히려 그게 더 무책임하다는 걸 아셨음 해요.” 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서는 내 앞에 한 없이 쌓아져 있는 프린트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정성 드려서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학생들의 손에 들어가면 버려지거나, 찢겨지거나 폐휴지가 되어버리니까. 그저 그냥 알림 종이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형식적인 알림 글들. “…와, 너 되게 빨리한다?” 제가 빨리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무리하게 정성 드려서 열심히 하시던 겁니다. 내 옆에 선생님이 앞 서 정리해둔 프린트 물들을 보니 그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정말 정성 드려서 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너무 정리가 잘 되어있는 프린트 물들. 하지만 이렇게 해봤자 자기 손해라는 건 아마, 이 교생선생님은 모르는 듯 했다. “이름이 향미야?” “네?” 하라는 프린트 정리는 하시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던 교생선생님은 내 명찰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 이름을 확인 차 물으셨다. “이름 예쁘다. 내 이름은 신재원이야. 신 재 원.” 안 물어봤는데요. 라고 말하면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겠지? “…선생님 이름도 뭐, 나쁘지는 않네요. 그런데 몇 반에 배정받으셨어요?” “응?” “몇 반에 교생으로 배정 받으셨냐고요.” “나? 나 4반!” 얼라, 4반? 4반은 영어선생님네 반 인걸로 아는데? 그럼 이 선생님도 영어를 전공하신 건가? 영어, 그리 호감과목은 아닌데 말이지. “영어선생님이세요?” “응! 와 너 똑똑하다. 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 아는구나?” “뭐, 똑똑하다는 소리 좀 들어요.” “그래? 그럼 선생님이 영어단어 물어볼 테니까 한 번 대답해볼래?” 네? 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벌써 내게 영어 단어 하나를 툭 던져 놓으신 선생님. “supplement.” 수…, 수 뭐? 수펄먼트? 뭔 먼트? 제 16-02화. 과거 현재 미래. 부끄럽기도 하고,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첫사랑 이야기.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차연우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나랑 비슷하네.” 동정. 그 비슷한. “비슷하다니?” “그런 게 있다.” “뭐야?! 난 말해줬잖아! 왜 넌 말 안하는데? 너도 그 선생이랑 똑같은 과야? 남의 이야기 다 듣고 자기 이야기는 말 안하는.” “뭐? 아, 미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몰고 가지 마.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그래, 나중에라도 말해줄 날이 온다면 그 까짓 거 기다려보지 뭐. 선생님은 나중에라도 말해주시지 않았으니까. 너는 다르겠지.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겠지. “많이 힘들었겠다, 너.” “내가 힘들었던 것처럼 들렸어?” “어. 그냥 이야기 할 때 표정이나 말투나 목소리 톤이나. 아직은 과거로 칠 만큼 마음이 없어진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바람둥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여자에 관해서 빠삭해서 그런가. 어쩜 저리도 잘 아는지. 공부는 지나칠 정도로 못하는 녀석이. “너 그거 알아?” “뭘 알아. 본론 빼놓고 ‘그거 알아?’ 라고 물으면. 내가 아냐?” “너 그 선생님이랑 비슷한 점 있다는 거.” 개 구진 표정을 짓고 있었던 녀석은 표가 날 정도로 기분 나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뭐가 닮았는데!?’하고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여자한테 함부로 안대하는 거 말이야.” “야, 그건 남자의 기본 매너 중에 매너….” “그게 여자한테는 어떤 식으로 작용되는 지도 모르면서 베푸는 매너 따위 여자 쪽에선 하나도 반갑지 않아.” “어떻게 작용하는데?” 라는 녀석의 질문에 ‘어?’하고 되묻자, 녀석은 내 어깨에 걸쳐두었던 손을 거두고서는 내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물었다. “내 매너가 너한테는 어떻게 작용했는데.” 어떻게 작용했냐고?… 궁금해? “궁금해?” “어. 아주 많이.” 진심 궁금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차연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녀석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나 너 좋아해도 돼?” “…어?” “나 너 좋아해도 되냐고, 차연우. 나 너 좋아하고 싶어.” 내 물음에 녀석은 당황한 듯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모습에 ‘큭.’하고 살짝 웃음을 토해내며 얼른 뒤에 말을 덧 붙였다. “라는 생각이 들 게 할 정도?” “어?” “널 좋아하고 싶어질 것 같다고. 아니, ‘날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달라는 말씀이야.” 웃으며 장난으로 넘어가라는 듯이 말했지만 굳어진 녀석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곧, 난 더 이상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숙소로 들어가자고 말하려고 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분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어서 있는 내 손목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긴 것은, 그리고 내 볼에 녀석이 입맞춤 한 것은. “…너, 지금….” 당황한 나는 녀석의 입술이 스쳐지나간 볼을 매만지며 차연우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어느 새 개 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여기까지야.” “뭐가?” “내 대답.” 그러니까 무슨 대답? 내가 언제 너한테 대답해달라고 했어? 갑자기 이게 무슨…. 지금도 충분히 황당하고, 당황했지만 이어서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 말들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말한 말들이 장난이 아니고 진심이거든 내가 우정을 저버릴 수 있도록 유혹해 봐.” 제 17화 또 다른 뫼비우스의 띠. ‘네가 말한 말들이 다 진심이거든 내가 우정을 저버릴 수 있도록 유혹해 봐.’ 아직도 생생이 기억나는 엊그제 밤의 녀석의 말. 내가 한 말들이 진심이었듯이 녀석의 말도 진심이었을까? 진짜 나보고 유혹해보라고 하는 건가? 자신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선생님에게 느끼는 감정도 전과 같은 감정은 아니다. 그 감정이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기분. 하지만 완전하게 옮겨진 것은 아니다. 즉, 내가 끊을 수 있으면 끊을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둘 것인가. “…뭔 놈의 고민이 이렇게 복잡한 거야, 난.” 수학여행까지 와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나도 참 한심하고 불쌍하다. “어, 향미야. 어디 가? 곧 레크레이션 했던 장소로 내려가야 하는데.” “잠깐 매점 갔다 올게. 갑자기 탄산이 먹고 싶네.” “그래? 냉장고에 맥주 조금 남은 거 있는데. 선생님 오시기 전에 마실래?” 방 대표한테 술 먹여서 밤새 기합 받을 일 있니, 사양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갑을 들고 방을 나와 매점으로 향했다. 비록 일본이지만 그래도 입맛에 맞는 음식들은 꽤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라면이랄까 나? 한국라면과는 다른 라면. 워낙에 매운 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일본 라면은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아, 갑자기 라면 생각하니까 辛라면이 그리워진다. 내일 집에 돌아가면 라면이나 끓여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매점에 도착한 나는 ‘콜라’와 ‘사이다’ 가운데서 갈등을 하고 있는데, 내 눈이 잘 못되지 않았다면 매점 앞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일본’라면이 아닌 그토록 지금 내가 먹고 싶어 하는 한국의 ‘辛’라면, 그 것도 컵라면을 먹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헐.” 나는 재 빨리 사이다를 들어 계산을 하고서는 테이블로 향했다. 녀석은 내가 온지도 모르고 열심히 라면을 먹고 있었다. “…네 뱃속에는 그지새끼가 들었니.” “어, 언제 왔냐?”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나를 올려다보는 차연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녀석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아예 매점을 통째로 사지 그래?” “왜 또 시빈데?” “시비가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거야. 너 아까 밖에 나갔을 때, 라면 사먹지 않았어?” 우리나라라면 말고, 일본 라면 말이다. 엄청 큰 그릇에 담긴. 그 것도 모자라 몇 젓가락 먹다 남긴 내 라면까지 다 먹었다지? “그리고 30분 전에 식당가서 밥도 한 두 그릇 먹지 않았어?” 반찬이면, 반찬. 밥이면 밥. 아주 한 가득 담아온 것도 모자라 그 것을 한 번 더 받아온 차연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근데, 뭐.” “안 배불러?” “남자는 원래 체력 소모가 많이 된다고.” 지랄 마. 그럼 권강재는 사내새끼도 아니야? 물론 나보다는 많이 먹지만, 너처럼 그렇게 먹지는 않는다고. 오늘 녀석이 저녁에 먹은 양만해도 아마 내가 한 끼 먹는 양으로 따지면 2일 치는 될 것이다. 대단한 녀석. “그리고 내일 집에 가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라면을 먹는 이유는 뭐야?”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안 먹으면 아깝잖냐.” “집에 가서 먹으면 되지.” 집은 폼으로 있어? “한국에서 먹는 거랑, 일본에서 먹는 거랑 같냐?” 다를 건 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말고 방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한다. 그냥 라면 뺏길까봐 무섭다고 말하지 그래? 남자가 쪼잔하게. “아, 김치만 있었어도.” 하긴 라면은 역시 김치랑 같이 먹어야 제 맛이지. 그런데 차연우 그거 알아? “어쩌냐. 라면 거의 다 먹었네? 그러고 보니 아까 매점 한 쪽에 김치 팔던데.” 하고 혀를 날름 내밀고서는 냉큼 방으로 올라왔다. 아마 차연우는 지금쯤 매점 한쪽에서 팔고 있는 김치를 열심히 노려보고 있겠지. 그런데 정말 비상식적으로 많이 먹던데. 괜찮을라나 모르겠네. 하긴 사내새끼가 뭐 잘못 되겠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나는 소화제라도 들고 갔어야 했다. 그 때 그렇게 행동했었더라면 아마 이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뭐? 차연우가 체했다고?” “어. 어찌나 많이 처먹던지. 그래서 오늘 마지막 댄스파티에 참가 못 하겠다던데? 네 파트너 못 해줄 것 같다고 전해 달랬어.” 한참 반항기 시절인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한창 놀 시절인 고등학교 2학년. 그래서 마지막 날 밤. 선생님들께서 특별히 즐기라고 열어주시는 댄스파티였는데, 파트너도 꼭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파트너인 녀석이 아프다고 빠지게 되면 나는…? “미친. 걔 어디 있어? 방에 있어?” “어. 침대 위에서 끙끙대고 있다.” “그렇게 처먹을 때부터 알아봤어. 개 새끼.” 연신 입 밖으로 험한 욕설로 녀석을 씹어대며 차연우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도착했을 때는 노크는커녕 초인종도 누르지 않은 채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한 손에는 집에서 들고 온 비상용 소화제를 들고서는. “가관도 아니다. 아주.” 녀석이 누워있다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정말로 녀석은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워있었다. 나 아파요- 하고 광고하듯이. “안 일어나, 차연우?!” 녀석이 꼭 쥐고 있던 이불을 빼앗으며 소리치자, 녀석은 정말 아프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쳐다보았다. “…뭔데.” 뭔데? 지금 뭔데 라고 했어? 누구 때문에 파트너 없이 파티 참가하게 생겼는데?! “내가 작작 좀 처먹으라고 했지! 미련하게 다 처먹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배가 고팠는데 어쩌라고.” “배가 ‘고팠는데 어쩌라고.’ 배가 ‘고팠는데 어쩌라고?!’ 이렇게 먹고도 배가 고팠어? 어? 장하다. 아주 장해.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참 장하다.” “시비 걸려고 온 거면 가. 나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넌 네 여자 친구를 뭐로 보는 거야? 단순히 시비 걸려고 온 거로 보여? 아무리 내가 아직은 널 좋아하지 않고, 너도 날 좋아하지 않지만. 나 아픈 사람한테 시비 거는 사람은 아니거든? “…이거나 먹어, 바보야!” “이게 뭔데?” 이불 위로 던진 건 다름 아닌 ‘가스명수’. 엄마가 비상용으로 챙겨주신 거였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내가 아닌 내 남자친구에게 줄줄은. “소화제야. 먹으면 좀 나아질 거야.” “이향미.” “내일 비행기 탈 때까지 안 나으면 어떡해. 먹고 푹 자기나 해.” 차연우는 내가 던져준 소화제를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미안. 같이 참가 못해서.” “됐어. 권강재나 아니면 다른 놈들이랑 파트너 하면 되지. 뭐 그까짓 거 대수라고. 약이나 먹고 자! 알겠어? 화끈하게 유혹해주려고 했더니 타이밍도 죽인다, 너.” 입술을 삐죽빼죽 내밀며 말하자, 녀석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어 보인다. “어. 빨리 나으려고 해볼게. 고맙다.” “알면 어서 먹고 자던 가. 나 늦어서 먼저 나가볼게. 다 끝나고 다시 올 테니까 그 때까지 약 먹고 자고 있어.” 차연우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녀석의 방을 나와 레크레이션이 열렸던 장소로 향했다. 나는 몰랐다. 녀석이 해보라던 ‘유혹’이 단순히 여자로 보이도록 유혹해보라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마음을 움직여 보라는 뜻이었다는 걸. 그리고 나는 이미 녀석을 유혹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소화제…. 이거 은근히 감동이네. 기습 제대로 치네, 이향미.” 내가 건넨 소화제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차연우. 그에겐 화려한 몸짓 혹은 가식된 행동과 표정이 아닌 진심어린 걱정이 더 큰 유혹이란 것을. “제대로 유혹 당했다, 나.” 그 때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레크레이션 장소에 도착한 나는 빠르게 권강재부터 찾기 시작했다. 벌써 파티가 시작되어 다들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어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에 권강재를 찾기 시작하는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권강재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다가갈 수는 없었다. “…뭐야.” 권강재의 옆에는 이미 다른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권강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과 추고 있는 여자아이의 표정은 보였다. 웃고 있었다. 아주 밝게. 차마 훼방을 놓으러 갈 수 없었다. 아니, 녀석도 그 여자아이의 표정처럼 즐거운 듯, 밝게 웃고 있을까봐. 그래서 나와 파트너를 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할까봐,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끝내 파티에 참가하지 못한 채 그들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와 추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왜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 것도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는 나는 모른다. 이로써 나는 또 다른 고민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그렇게 만들러 갔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나는 추억보다는 고민들을 더 많이 만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훗날 ‘수학여행하면 뭐가 떠올라?’라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덫’이 떠오른다고 대답했다. 내게 수많은 고민들을 안겨준 덫들이. * * * 짧으면 짧다고 말할 수 있고, 길면 길다고 말할 수 있었던 수학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중간고사’였다. 중간고사를 걱정해야 할 만큼 벌써 시간이 흘렀는가 하는 고민도 할 틈 없이 나는 만사를 다 팽개치고 학교가 끝난 뒤 독서실로 직행했다. 이미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몸에 길들어진 일이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데이트 좀 하자고!” “그럼 독서실로 따라오던가.” “아, 진짜. 공부 좀 그만하라고! 어떻게 학교에서도 공부, 쉬는 시간에도 공부, 점심시간에도 공부, 안하던 야자까지 남아서 공부. 야자 끝나면 좀 쉬겠지 했는데 또 독서실이나 가고 말이야. 남자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냐?” 전혀ㅡ. “이참에 너도 공부 좀 하지 그래? 앞날이 두렵지는 않더냐?” “전혀ㅡ.” 아. 그러세요. 난 네 앞날이 두려운데. 그렇게 놀고 대학은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찌됐건 공부방해할 생각이거든 애초부터 따라오지 마. 나 오늘도 12시 넘어서 들어 갈 거야.” 라는 내 말에 차연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진다. 하지만 저렇게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려도 내가 녀석을 미워할 수 없는 건. “데리러 갈 테니까 나오기 20분전에 문자해.” 라는 녀석의 말 때문이다. 진짜 매너가 좋은 건지, 아니면 여자를 꼬시는 수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건지, 벌써 독서실을 다닌 지 일주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집에 갈 시간에 독서실 앞으로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녀석이 나를 데리러 온 첫 날. 나는 차연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하품을 하면서 왜 데리러 오는 건데?’ 하고 말이다. 녀석이 항상 나를 데리러 오는 건 맞지만, 올 때마다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대답을 할 때도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위험하잖아.’ 라고 말이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감동이었는지. 자신의 피곤함까지 뒤로 한 채 밤늦게 다니는 여자 친구가 위험하다고 독서실 앞까지 데리러 나오는 남자 친구. 뭐, 사귈 만하다. 그래서 오늘도 집에 갈 걱정은 하지 않은 채 주구장창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교복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한 번 울리다가 멈춘 것을 보니, 전화가 아닌 문자가 온 모양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문자를 확인했다. 처음에 액정에 ‘차연우’라고 이름이 떠 있기에, 얘가 또 공부 방해하려나보다 하고 폴더를 제쳤는데, 그게 아니었다. [ 나 오늘 못 갈 것 같다. 오늘 일찍 집에 가.] “…아.” 지금 나 아쉬워하는 거 맞지? 지금 ‘이 문자’에 섭섭해 하고 있는 거 맞지? “애초부터 데리러 온다고 하질 말던가.” 기분 잡쳤다. 오늘도 집에 갈 때는 차연우와 함께 집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걱정 없이 공부하고 있던 나인데, 순식간에 기분이 급 다운됐다. 그렇다고 평소보다 일찍 들어갈 내가 아니었다. 어차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독서실에서 밤늦게 나와 혼자서 집에 가던 나였으니까 걱정은 없다. 약간 불안한 감이 있다면, 최근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성추행범과, 납치범들. 뭐, 주택가에는 잘 출몰하지 않으니까 안심해도 되겠지ㅡ. 하는 생각에 어김없이 12시가 넘은 시각에 유유히 독서실을 빠져나온 나는 평소보다 조금은 느린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원래 독서실에서 집으로 가려면 항상 시내 거리를 지나쳐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집에 들어가도 몇 시간 자지 못하는데 괜히 돌아갔다가는 잠 잘 시간만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에 시내로 들어서는데, 마짐 편 도로에 익숙한 얼굴하나가 보였다. “…저 사람은.” 마짐 편 도로와 내가 서 있는 도로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기에 얼굴정도는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즉, 내 시력이 요 며칠 세 급격히 저하가 된 것이 아니라면 저 여자는 분명 수학여행 가기 전 주, 주말에 선생님과 함께 갔던 중학교에서 만난 그 여선생이다. 체육선생이라던. 물론 저 여선생만 서 있었더라면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할 텐데.’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겠지만, 여선생의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에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연우?” 왜 네가 거기 서 있는 건데? 왜 그 여자선생님 옆에서 여느 때처럼 개 구진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건데? 아는 사이였어? “개새끼. 무슨 일 있나 했더니, 다른 여자한테 작업이나 걸고 있었던 거야?” 하는 괘씸한 생각에 나는 주머니에서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녀석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반대쪽 도로에서 차연우가 전화를 받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 어, 왜. 어? 왜? “집이야?” - 어? 음. 뭐, 잠깐 나왔어. 너 집 아니지, 옆에 차 지나가는 소리 들린다. 난 네 얼굴이 보인다, 새끼야. “지금 집에 가려고 시내 쪽으로 들어왔어.” - 그래? 그래? 그래가 끝이야?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가 아니고 그래? 너 죽었어. “밤늦게 딴 여자 만나니까 좋아?” - 뭐? “예쁘게 웃는 사람, 제일 싫다더니. 너도 역시 사내새끼였어.” - 뭐라는 거야. 너 어디야? 어디냐고? 어딘지 궁금해, 새끼야? 진짜. “네 앞이다, 어쩔래.” - …뭐!? 정말 깜짝 놀란 듯 내가 있는 곳 까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소리 지르듯 말하는 녀석. 나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녀석이 서 있는 도로가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건너편 봐봐.” - …헐. 이, 이향미. “너 때문에 기분 잡쳤어, 새끼야. 나 오늘밤에 잠 못 자면 다 네 책임인 줄 알아. 그리고 너야 말로 일찍 집에나 쳐들어가. 남보고 일찍 들어가라 마라 하지 말고.” 하고 전화를 끊으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가던 길을 걸었다. 차연우는 당황하며 건너편에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 듯 했지만 나는 녀석의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하고서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오긴 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그만큼 기분이 나빴다. 여자 친구라며.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건 당연한 거라며. 기본 매너라며. 근데 여자 친구가 밤늦게 12시 넘어서 집에 가는데 팽개치고 다른 여자 데려다주고 있어? 참나, 그래 너도 똑같은 놈이지. 예쁘게 눈웃음치는 그 여선생한테 너도 홀라당 반한 거야? 선생님처럼? 남자들은 다 그래? “…씨.” 너무 분하고 화가나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냈냐고? 바로 지금쯤 컴퓨터 게임을 한창 하고 있을 권강재에게 보냈다. 물론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녀석이라면 문자 답장이 아마 조금, 많이 늦겠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나 보다. [ 너도 예쁘게 웃는 여자가 좋아?! ] 라는 내 문자에 1분도 체 되지 않아 온 답장. [ 몰라. 왜 너 처 웃고 다니게?] 내가 그 여자처럼 실실 쪼게고 다니라고? [ 미쳤어? 그냥…, 내가 아는 남자들은 다 웃고 다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고 답장을 하자, 또 1분도 체 되지 않아 온 답장. [ 차연우 새끼가 처 웃는 기집애들이 좋다냐? ] 응. 선생님도 그 여자가 눈웃음 살살치니까 사족을 못 쓰데? 그냥 너도 그런가 하고. 너까지 그러면 진짜 모든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거 아니야. 뭐라 답장을 보낼까 잠시 고민하고 있던 틈을 타서 도착한 문자 한통. 나는 문자함에 들어가 새 문자를 확인했고, 문자를 확인한 순간 웃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 난 이놈 저놈보고 다 실실 쪼게고 다니는 기집애보단 네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서 집에 들어가 기집애야. 집 밖에서 청승맞게 뭐하는 짓이냐.] 마지막 ‘집 밖에서 청승맞게 뭐하는 짓이냐.’라는 녀석의 문자를 보자마자 현관문을 열려던 손을 멈칫하고 녀석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자, 베란다에 나와 손을 흔들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였다. “…미친놈.” 집 앞인 건 어떻게 알고. “너 나 들어가서 처 자, 새끼야!” “어. 나 그럼 들어간다. 잘 자라, 이향미.” 녀석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고서는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녀석이 방 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새끼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차연우 때문에 밤새 못 이룰 것만 같았던 잠은 권강재로 인하여 푹 잘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사랑보단 우정이 낫고, 남자보단 친구가 낫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역시 친구가 최고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안고 학교로 향하는데, 김혜미에게서 문자 한통이 왔다. [ 나, 나 티비 출연했어!!!! ] 하고 말이다. 이건 또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ㅡ. 하고 무시하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0교시 수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면 당연지사 차연우가 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 줄 알았것만, 녀석은 1교시가 끝날 때까지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2교시 끝마치기 10분 전 녀석은 아주 당당하게 등교를 했다. 녀석은 3교시 시작 전 쉬는 시간에 내게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듯 했지만 담임의 콜로 내게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한 채 짜증을 부리며 교무실로 불려가 점심시간에서야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야, 이향미.” “응. 왜.” “사람이 부르면 좀 쳐다봐라, 어?” “보시다시피 프린트 정리중이라서.” “화났냐? 어? 화났어?” 화났으면 어쩔 건데. 풀어주기라도 할 거야? “됐어. 너도 네 사정이 있었겠지. 나한테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보고하길 바라고 있잖아, 너.” “안 해도 된다고. 누가 하래? 그나저나 김혜미 어디 있는지 알아? 하루 종일 얼굴 한번 안 비추고 어딜 간 거야? 티비 출연 어쩌구 저쩌구하는 문자 씹어서 그런가.” “아까 동아리 실에서 한효빈하고 티격태격하고 있는 거 봤는데. 야, 그리고 어제 그건.” “됐어, 별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나 잠깐 동아리 실 갔다 올게.” 그나저나 김혜미는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금세 티격태격 이야. 동아리 실에 가까워지자, 바깥까지 들려오는 한효빈과 김혜미의 티격태격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도 좀 본받아보세요.” “내가 뭐, 뭘? 저게 그렇게 대단해?!” “충분히요. 저는 예쁘게 치장하고 그런 여자보다 저렇게 정의감 넘치는 여자가 더 좋아요. 그래서 결정했어요. 저 사람에게 고백하기로.” “…미, 미쳤니? 미쳤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고백이야!” 이건 또 뭔 소리래? 하고 동아리 실로 들어가자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흥분하고 있는 김혜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서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을 일관하며 김혜미를 자극하고 있는 한효빈의 모습이 그 다음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자세히 다가가보니 오늘 아침에 방영된 뉴스 같았다. “또 무슨 난리야? 왜 싸우는 건데, 또?” “누나.” 누나, 그래. 나, 누나 맞지. 그 호칭으로 불린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효빈아. 네 그 표정으로 누나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 꼭 억지로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한효빈이 동아리에 들어오고 나서 변화된 점이 있다면 조금은 사람처럼 군다는 것. 딱딱하게 ‘선배님’이라는 말을 추구하던 녀석이 이제는 ‘누나’라고 부른다는 것. 뭐 어찌됐건 이건 지금 중요하지 않으니까 패스. “그래. 왜 또 싸우는 건데?” “선배가” 맞다, 빼먹을 뻔했다. 그 ‘누나’라는 것은 나한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김혜미는 당연지사 제외였다. “그래, 김혜미가 뭐.” “정의감이 넘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제가 말을 드렸더니, 흥분해서 절 때리고 있었어요.” 아, 그랬군요. 또 김혜미가 애꿎은 한효빈을 패고 있었던 거군. 근데 왜? 왜 때리고 있었는데? 라는 표정으로 김혜미를 쳐다보자, 김혜미는 내 시선을 피한다. 뭐지? “아침 뉴스 보셨어요? 우리 학교 학생이 아침에 아동 성폭행 범을 잡았데요.” 뉴스? 아동 성폭행 범? 아, 그 아침에 등교하던 초등학생을 납치하려고 하던 성폭행 범을 멋지게 잡아낸 고등학생? 수업시간에 들어온 선생님들이 짧게 해주셔서 대충 들었다지만, 그게 우리학교 학생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그게 네들 싸우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마침 우리학교 학생이기도 하고, 딱 제 이상형이라서 고백하려고요.” 고백?…, 얼굴도 모르는데? “그게 김혜미 너랑 무슨 상관인데, 왜 애를 패는데?” “몰라! 모른다고!” 왜 짜증이야? “선배도 보실래요? 얼마나 정의감이 넘치는지. 꼭 21세기의 후레쉬맨 같은 여자예요.” 너도 남자긴 남자구나…, 후레쉬맨을 아는 것을 보면. “그 동영상이 이거야? 나도 좀 보자.” 아침 일찍 등교하느냐고 당연히 뉴스를 보지 못한 나는 동영상을 보기 위해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효빈이는 동영상 재생버튼을 눌렀고, 나는 동영상에 집중했다. 그런데…. “한효빈. 그러니까… 이… 여학생한테 반했다고?” “네.” …확실히 우리학교 교복이 맞고, 정의감이 넘치기는 한데 말이야. “…이거.” “멋지지 않습니까? 반했습니다, 정말.” 이 여학생 말이야…. 짧게 자른 머리 하며,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저 옆구리를 찌르는 실력은…, 아무리 봐도. “…저기 말이야.” “네?” 무표정을 일관한 채 나를 쳐다보는 한효빈을 향해, 그리고 내 시선을 피하는 김혜미를 향해 동영상의 여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김혜미 아니야?” 댓글 0개 이 글을...(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덫》 18 ~ 242008.06.26 아랫글 : 《덫》 08 ~ 142008.06.26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우리들만의매력,모델팸☜ cafe.daum.net/Ueolzzang7 음식(비공개) | 회원수 15,507 카페정보가입 0 방문 22 새글 2 카페지기하늘에별따기 개설일2006.02.22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플레이 대기중 -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2) 숨기 노을뱅이♡<나>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18 ~ 24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521 08.06.26 23:00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60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제 18화 첫사랑과 짝사랑. 그리고 관심 “아냐!! 나 아니라고!” 아니긴, 딱 김햄인데? 봐봐, 저 손동작! 저건 평소에 나를 구타하던 녀석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잖아. 그나저나 자긴 아니라고 잡아떼는 김혜미는 둘째 치고, 한효빈은 어쩔꼬. 아주 돌 마냥 딱딱하게 굳어 버렸구만. 하긴 고백까지 하겠다고 하던 녀석인데…. 상대가 그토록 자기가 싫어하던 김혜미라니. “잘한다, 잘해. 아침부터 TV에 나왔다고 자랑 질 하던 녀석이나, 누군지도 모르고 고백하겠다고 설치는 녀석이나.” “…진짜 선배예요?” “아니라니까? 나 아냐!” 하는 말과 동시에 김혜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혜미는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지만, 오히려 전화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 김혜미씨 폰 맞습니까? XX신문사 김XX기자입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요. …핸드폰 볼륨은 왜 그렇게 크게 해놨데? 밖에 다 들리게 말이야. 나도 모르게 전화기 밖으로 새어나오는 기자의 목소리에 픽- 하고 바람이 새는 듯 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토해냈다. 반면에 한효빈은 아까보다 더 굳어진 얼굴로 김혜미를 쳐다보았다. 김혜미는 ‘망했다ㅡ.’라는 표정을 지으며 재 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태권도를 못해도 사람은 구할 수 있구나. 김혜미, 장하다. 장해.” 난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있는 동영상을 바라보며 김혜미에게 말했고, 김혜미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효빈아, 이래도 너 고백할거야?” 역시 대답 못하는…. “생각 좀 해보고요.” 얼랄라? “왜? 같은 학교에다가, 딱 네 이상형인데?” “저 눈 높습니다. 제 이상형은 현모양처입니다, 누나.” 눈이 높다기보다는 취향이 독특한 거라고 생각할게. 세상에 어떤 현모양처가 성추행 범을 때려잡겠니. 안 그래? 그런 사람도 없을 거야. 더불어 김혜미는 현모양처는커녕 음식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요. 뭐, 그러니까 지금 네가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잘 해봐. 나 먼저 간다. 뭔 TV에 출연했나 싶어 왔더니. 아, 그리고 김혜미 웬만해서는 고백 받아줘라. 백번, 천 번을 봐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아까운 듯싶다.” “이향미!!!!” “그리고 나 오늘도 독서실가니까 먼저 가고.” “야-!!!!” 메에~ 하고 혀를 날름 내밀고서는 재빠르게 동아리 부실을 나왔다. 김혜미 역시 뒤 따라 나오려 하는 듯 했지만 한효빈에 의해서 다시 부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은근히 잘 어울린다니까? 뭐, 효빈이가 조금 더 아깝긴 하지만. “아, 차연우는 어쩐다.” 이대로 계속 삐진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 여자…랑 무슨 사이인지 궁금한데. 차연우한테 물어봐도 대답은 안 해줄 것 같고. “…어떻게 고민이 줄기는커녕 계속 늘기만 하냐.” 아, 이건 고민이 아니라 궁금증인가? 여튼간. 죄다 차연우, 아니면 권강재 때문이라니. “에라이, 공부나 하자.” 괜히 고민만 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지고 공부는 집중도 안 될게 분명하니까. 오늘은 영어를 마스터 하는 거다. * * * 학교가 끝나고 독서실로 향했다. 계속해서 차연우와 그 여자의 관계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구장창 차연우와 그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 끙끙 대며 생각해봤자 얻어지는 건 하나도 없음을 알기에 최대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역시 몸 따로 머리 따로 라고. 의자에 앉아 교과서를 편지 한 시간도 체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커피나 먹으면서 바람이나 쐬자. 하는 생각으로 독서실 바로 바깥에 위치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잠시 한눈 판 사이 누군가와 어깨를 붙이치고 말았다. “…아, 뜨거!” 게다가 손에는 커피까지 들고 있었으니. 반동으로 인해 커피는 내 손목을 적셨고, 손목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나는 손을 털며 아픔을 호소했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손목을 교복치마에 비비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와 부딪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어라? “어! 연우 여자친구…!” “…박해진?” 이라고 했던…. “와. 기억해주는 구나! 독서실 온 거야?” “아, 응. 뭐. 그 쪽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뭐, 그렇지. 의외지?” “공부와는 영 거리가 먼 애들인 줄 알았는데. 차연우만 그런가보구나?” “걔가 머리가 좋은데 안 해서 그래.”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머리가 좋아? 그건 영 아닌 듯싶다. 믿어주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손목 괜찮아? 데인 건 아니지?” “괜찮아. 화장실가서 찬물에 살짝 헹구기만 하면 되겠지. 지금 들어가는 길?” “아니, 나도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 너도?” 박해진의 물음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나갈래? 혼자 바람 쐬기 심심했거든.” “뭐, 사양하진 않을게. 커피 한잔만 사준다면.” “아, 나 때문에 커피 엎었지. 그래, 뭐. 밀크?” “블랙만 아니면 돼.” “밀크로 뽑을게, 그럼.” 박해진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밀크커피 두 잔을 뽑아, 한 잔을 내게 건네주며 바깥으로 나가자고 권유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상쾌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도 뜻밖이다.” “뭐가 뜻밖이야?” “차연우가 지금까지 사귄 여자 친구 중에 공부하는 애는 없었거든.” …저 말은 칭찬이겠지? “연상, 연하 따지지 않고 위 아래로 닥치고 다 사귀는데, 이상하게 공부 잘하는 애는 없더라? 나이트클럽에서 만났거나, 아님 술집에서 만났거나. 알바 하다가 만났거나. 헌팅 당했거나. 아니면 같은 반 여학생이랑 사귀거나.” “차연우랑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나봐? 연애했던 여자 친구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을 보면.” “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권강재랑도 초등학교 때 만난거야?” “권강재는 중학교 때 학원에서 만났지. 나랑 그때 그 녀석 기억하지? 김안호라고. 걔랑 나랑 차연우랑 권강재. 이렇게 다 같이 같은 학원 다녔어. 물론 권강재를 제외하고는 다 같은 학교이기도 했지만 말이야.” 학원? 권강재가 중학교 때 공부학원 말고도 무슨 학원을 다녔더라. 아, 맞다. 드럼…. 드럼 배우고 싶다고 한 한 달을 아줌마 아저씨 앞에서 지랄 발광을 하더니 결국 학원을 보내주셨었지. “드럼 학원 말하는 거지?” “어. 권강재가 말해줬어?” “아니. 그냥 때려 맞춘 거야. 그나저나 그렇게 오래전부터 차연우랑 친구였으면, 차연우 주변에 있는 여자는 거의 다 알겠네?” 라는 내 질문에, 박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녀석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나 하나만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어? 뭐, 뭘?” 노골적으로 다가서는 내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식은땀을 흘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박해진. 하지만 나는 질세라 다시 한 발자국 녀석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자. 내가 원래 과거의 여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 여자는 너무 신경 쓰여서 공부가 안 되고 있어. 너도 공부를 하는 애니까 알 것 아냐. 나 이러다가는 시험도 망칠지 몰라.” “…그, 그래도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 게….” “그 새끼한테 물어봐도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으니까 너한테 묻는 거잖아. 말해 줄 거지? 너도 네 친구가 여자 친구랑 옛 여자 때문에 대판 싸우는 건, 원하지 않을 것 아냐. 나 보기보다 한 성깔하거든?” 손에 쥐고 있던 다 마신 빈 종이컵을 꽉 움켜쥐며 싱글벙글 웃어보이자, 박해진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에게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녀석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여자가 신경 쓰이는 건데? 내가 감이 좋기는 하지만, 녀석의 여자만큼은 모르겠더라. 워낙 많이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놈이라.” “학생은 아니야.” “학생 아니었던 사람도 많았는데.” 이런 미친. 도대체 얼마나 많이 사귄 거야? “차연우랑 알고 지낼 때부터 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그 여자의 직업은 선생님이야. 그 것도 체육선생님.” “…선생님? 아, 설마. 이은새 선생님 말하는 건가?” 이은새 선생님? 이름이 이은새였나. “그 여자 이름이 이은새인지 온새인지는 모르겠고. 되게 예쁘게 생겼어. 웃는 건 아주 환상이더만.” “맞네. 인상 찌푸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던 그 선생님. 근데, 그 선생님을 네가 어떻게 알아? 연우 녀석, 설마 최근에 그 선생님 만나고 있는 거야?”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은 입을 쩍 하고 벌리며 경악을 했다. “미친 새끼!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만난단 말이야?” “당해? 뭘 당해?” “그 웃는 모습에 넘어가면 안 돼!” 웃는 모습에 넘어가면 안 돼? 아,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가는 말이다. “왜? 다 가식이야, 설마? 막 성격이 개 같은 거야, 혹시?” “가식이면 괜찮게?” “그러면?” “그 선생님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 눈에는 분명 웃으면서 애교를 살살 치시며 말하는 게 딱 차연우한테 마음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그게 아닌 거야.” 아. 진심 공감된다. “자기 딴에는 자기 학생이라고 잘 대해주는 건데, 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학생으로서 대하지 않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거로군?” “어! 그렇지! 근데 너 그걸 어떻게 아냐?” 경험담이니까 알지. “어찌됐건, 차연우가 그 여선생한테 고백했어? 그리고 차인 거야?” “고백하려고 했었지.” 했었지? 그럼 안 했다는 거네, 그 여자선생은 아직 차연우의 마음을 모르는 거고? “그 새끼도 병신이라니까. 차연우가 은새쌤을 처음 봤을 때가 우리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야, 아마.” 어라? 나랑 똑같잖아? 나도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아, 갑자기 차연우한테 잘 대해줘야 갰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이것 참. “선생님이 연우새끼네 반 교생으로 오셨었는데, 연우가 공부를 오죽 못했어야지.” 도대체 그 새끼는 언제부터 공부와 담…아니, 성을 쌓고 지낸 거야? “나머지 공부 하냐고 매일 학교에 남아서 억지로 공부를 하는데, 때 마침 연우에게 나머지 공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은새쌤이었어.” “잠깐. 그 선생님 담당 체육이라며?” “어. 근데 학생 때 공부를 되게 잘하셨나 봐. 그 때 당시 다니고 계시던 학교도 명문대학교 중 하나였고, 장학생까지 도 맡아 하실 정도였으니까.” “…아하. 거기다가 차연우는 공부를 잘 하는 애도 아니고, 못 하는 애였으니. 가르치는데 별 문제는 없었겠군.” “그런 거지. 쌤은 연우 공부 가르치겠다고 이 것 저것 준비 해 오셔서 가르치시고, 차연우는 쌤 웃는 모습에 아주 홀딱 반해서 공부는 뒷전이고. 그걸 쌤이 눈치 채셨으면 또 몰라. 그저 자기가 잘 가르치는 줄 알고 얼씨구나 좋다ㅡ. 하시며 계속 연우한테 눈웃음치니, 차연우 그 새끼 환장 안하고 가만히 있겠냐고.” 그 놈의 웃음이 아주 여럿 사람 죽이는 구나. “거기까지면 좋게? 차연우, 이 꼴통이 말이야. 쌤도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거라면서 얼마나 설쳐대는지. 아주 환상에 젖어있었다니까?” 핸드폰 찾아준 사람한테 스토커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 새끼 은근히 자뻑 기질이 상당하단 말이야? “녀석이 한껏 멋 부리고 쌤한테 고백하려고, 쌤 학교에 찾아갔는데 이게 웬걸. 쌤이 남자친구가 있었던 거야. 연우 녀석한테 기대 잔뜩 심어주고서는 뒤통수치신 셈이지. 뭐 차연우가 자기 좋아한다고, 지 혼자 착각해서 받은 상처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긴. 그냥 돌아왔지. 그 뒤로 연우 녀석. 쌤에 대한 반항이라고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고, 체육시간에도 막 사고치고. 그래서 징계도 엄청 받아댔지.” “그렇게 쭉 지속 되 온 거야, 그 관계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연우 녀석, 올 초에도 선생님한테 고백하려고 찾아갔었어.” …올 초? “올 초 언제?” “2월이었을 걸? 그 새끼, 그 때 진짜 멋있게 빼 입고 갔었는데. 정장차림에 빨간 장미 한 다발 들고.” 정장차림에 빨간 장미 한 다발? 설마-. 그 때 나랑 인형가게 앞에서 마주쳤을 때? “그 새끼가 장난기 많고, 사고뭉치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 쌤한테는 진심이었거든. 쌤 이야기 할 때마다 애새끼가 쳐 웃고. 아주 푹 빠졌었는데, 그 때도 역시나 고백하기도 전에 쌤한테 뒤통수 맞았지.” “이번에는 왜?” “그 날이 발렌타인데이였잖아.” 아, 그 날이 발렌타인데이였나. 어쩐지. 김혜미랑 인형 사러 나갈 때, 이향원 지갑에서 버스카드 쌔비려고 이향원 방에 갔더니 초콜릿이 아주 그냥, 산더미더라. 웬 초콜릿인가 했지. “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이야기 전해들은 지 꽤 됐었거든, 그 때. 그래서 연우 녀석이 이번에는 정말 쌤이 자기한테 고백하려고 부른 거라면서 들떠서 쫙 빼입고 나간 거였는데, 쌤이 아주 연우 녀석 죽이려고 작정을 하신 건지, 남자친구랑 싸웠다며 속상하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상담하려고 부른 거더라고.” “그걸 왜 차연우한테 상담해?” “선생님이 내성적이라서 친구가 다 여자들인가 봐. 그래서 남자의 심정을 잘 모르겠다고, 그나마 제일 가까운 사람 중에 남자인 연우를 부른 거지. 한술 더 떠서 쌤 남자친구 초콜릿까지 골라주고 왔단다. 미친놈이지.” 우리 선생님보다 잔인한 사람이 있었구나. 와, 나라면 절대 못해. 안 해. 미쳤냐면서 뛰쳐나오고 말지. 선생님 얼굴 안 보는 한이 있더라도, 선생님 여자 친구 선물을 골라주니, 차라리 다 엎어버리고 말지. “그러니까, 즉. 네 말은. 차연우는 그 선생을 좋아했었고, 그 선생은 그런 차연우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이거지? 근데, 왜 아직까지도 만나?!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설마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거겠지? 설마, 그 여선생 잊자고 계속 여자애들하고 사귀어 왔던 거야? 한 시라도 여자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가 고작 그 거야? 그 여자에 내가 포함되는 거고? 하 참.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네? “너무 신경 쓰지 마. 연우 녀석, 그래도 지금까지 사귄 여자애들하고 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그 때. 권강재랑 먼저 집에 가고 나서, 녀석이 네 얘기 많이 했거든. 근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 웃으면서 말하더라고. 너랑 있었던 일들 말하면서 말이야.” “그게 뭐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는 거야?” “넌 차연우가 정말로 여자를 좋아해서 사귀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 선생 잊으려고 사귀는 거 아니야? 그리고, 좋으니까 사귀었던 거겠지. “그 새끼, 여자 안 밝혀. 밝히는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무관심한 녀석이, 차연우야. 지금까지 사귄 여자애들 중에서 우리 앞에서 지 스스로 지 여자친구, 혹은 지가 좋아하는 여자애 이야기 꺼낸 건 은새쌤이랑, 너 밖에 없다는 말씀이야.” …밝히는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무관심한 녀석이…차연우라고? “거짓말.” 구라 까고 앉아있네. 오히려 무관심한 녀석이. “무관심한 녀석이 친구네 집에 가서 야동이나 쳐 보고 있냐? 언제부터 야동에 여자가 안 나왔어? 아, 몰랐네?” “그건….” “그건 뭐?” “여자애들이 잘생긴 놈 보면 지도 모르게 눈 돌아가듯, 우리도 그런 거야.” …그게 그거랑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여튼 그 여자가 차연우가 짝사랑하던 여자라 이거지?” “정확히 말하면 짝사랑이자, 첫사랑.” 얼씨구, 첫사랑까지? 완전 나랑 판박이잖아, 이 자식. 너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떻게 그 선생님 만난다고 나를 제쳐둘 수가 있지? 물론 나도 선생님한테 이도저도 아닌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 말할 처지는 안 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차연우냐, 선생님이냐 한다면 망설임 없이 녀석을 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차연우는…. “연우 녀석한테는 비밀이야, 내가 이런 말한 거.” “알았어. 너도 이만 들어가서 공부해. 나도 공부해야겠다. 바람 쐰다고 나왔다가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그래. 그리고 신경 쓰지 마, 그 선생님. 어차피 연우한테는 관심도 없는 분이니까.” 그렇겠지.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똑같으니까. 학생은 학생. 그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이유는 간단하겠지.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발령난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과 이런저런 사이라고 소문이라도 낫다가는 학교에서 잘리게 될 테니까. 알면 좀 조심히 행동하지. 어떻게 여자건 남자건 모두 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그 행동이 작용할지 모르고 행동 하냐고. 불쌍한 차연우. 불쌍한 이향미. 완전 불쌍한 커플이구나, 우린. “…공부? 젠장, 공부하려고 물어봤다가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됐잖아.”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괜히 물어봤다. 결국 나는 이 날 차연우와 그 여자 선생님의 다정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목표치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한 채 독서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헌데 오늘따라 너무 어두컴컴한 날씨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겠다 싶어서 지갑을 꺼내들면서 독서실을 나오는데, 익숙한 이가 독서실 앞에 턱하니 서 있었다. 그 익숙한 이는 당연히 차연우였고, 녀석은 한 손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대쪽 손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도 그 여자나 데려다 주고 오지, 왜 왔데?” “그만 좀 해라. 안 지겹냐? 벌써 10번째다.” “10번째는 무슨. 웃기지마.” “미안하다니까? 화 좀 풀어라. 그래서 오늘 데리러 왔잖아, 인마.”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입술을 삐죽빼죽 내미는 차연우의 모습이 왜 그렇게 귀엽게만 보이는지. 절로 좁혀지던 미간이 나도 모르게 점점 풀어지고 있었다. “미안하면, 저기. 저기 들어가서 밥 좀 사주지?” 그냥 풀기에는 너무 많이 기분이 상해있는 상태였기에 눈에 띄는 분식점 하나를 골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밥? 너 저녁 먹고 밥을 또 먹냐?” 저녁 안 먹었그든, 왜 돼지 보듯 날 쳐다보는 건데? “저녁 안 먹었어!” “그럼 밥도 안 먹고 독서실 간 거냐? 가뜩이나 빈약한 가시나가 밥도 안 처먹고 독서실가냐?” “내 어디가 빈약한데? 한 끼 정도는 안 먹어도 돼!” “빈약하잖아!” “그러니까 어디…, 너 죽을래?” 녀석을 올려다보며 도대체 어디가 빈약하냐고 물으려 하는데, 녀석의 시선의 끝이 내 가슴께로 닿는 것을 보고서는 그제야 녀석이 어느 부분을 말하는 지 눈치 챘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빈약하다니까~.” “네가 매를 벌어라, 매를 벌어!” “아-!! 왜 때리는데?!” 넌 더 맞아야 돼! 공부에 쩔어 지친 여자 친구를 그렇게 놀려 먹고 싶냐고! “됐어. 나 혼자 집에 갈 거야. 넌 그 여자나 데려다 주러 가!” 하고, 기분이 상한 티를 팍팍- 내며 녀석보다 좀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녀석은 사태 파악이 된 건지, 내 옆으로 뛰어와 내 손목을 잡는다. “장난이었어, 장난.” “그 여자한테 가서나 그런 장난치세요. 저는 그런 장난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너 안 그러게 생겨서 은근히 소심하다? 밥 사 줄 테니까 가자.” 하고 막무가내로 분식집으로 나를 이끌고 가는 차연우는 분식집으로 들어가 억지로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닥치는 대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김밥부터 시작해서 돈가스, 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떡볶이를 라스트로 주문을 마쳤다. “뭘 그리 많이 시켜?” 하고 묻자, 녀석은 개 구진 얼굴로. “무럭무럭 커야지.”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 정말 스팀이 제대로 받는다. 아주 팍팍-. “안 먹어. 너나 쳐 먹어.” “장난이다, 장난. 진짜 소심하네, 이거?” “닥쳐라?” “입도 험하고.” “맞고 싶은 거지? 그래서 지금 이러는 거지, 너?” “와, 폭력까지. 누가 데리고 살지 너도 앞날이 걱정이다.”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이런 걸 흔히들 보통 사돈남말 한다ㅡ. 라고 하지? 폭력적이고 입도 험하고 그래도 대학 잘 가면 잘 살고 먹고 그러그든요? “됐고, 어제 정말 그 여자 데려다 주려고 나한테 안 온 거야?” “그런 거 아냐. 급하게 만날 일이 있었어.” 오호라, 그 여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이었다 이거지? 아, 이거 은근히 열 받네. 나 이러다가 진짜 얘 좋아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딴 여자랑 같이 있으면 열 받고 그러는 게. 뭔가 심상치 않아. “야.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엉, 뭐.” 물은 마시며 대답하는 차연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내가 진짜로 너 좋아하게 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풉.” 내 질문이 꽤나 당황스러웠는지, 물을 마시다 사례까지 걸린 차연우. “켁. 아나, 뭐?” “좋아하게 되면 어쩔 거냐고.” “흠. 글쎄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나를 좋아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냐? 막 보면 두근두근 거려?” 방금 전 당황했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개 구진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차연우의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얼굴을 들이미는 녀석의 이마를 검지로 살짝 밀며 말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세요.” “오호? 그 정도는 아니면? 막 얼굴이 빨개지냐? 몸이 후끈후끈?” “공공장소에서 제대로 맞아볼래?” “아, 진짜. 장난이라고! 아까부터 왜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장난이 도가 지나쳐서 그런 거다, 새끼야. “여튼간.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그냥. 궁금하잖아. 내가 너 좋아하게 됐는데, 네가 바로 헤어지자고 그러면 어떡해. 난 또 지금이랑 같은 꼴 나는 거잖아. 그러니까 미리 물어보는 거야.” “미리 물어보면 뭐가 달라지냐?” 달라지지. 당연히. “만약에 헤어질 거라고 그러면, 여기서 딱 잘라야지. 잘라지지 않는다면 꾹꾹 숨겨야지. 헤어지지 않도록.” 농담 반, 진지 반 섞은 내 대답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지, ‘끙-’하고 고민을 하던 차연우는 내게 검지로 살짝 삿대질을 하며 말한다. “행여나 진짜 좋아지거든 사실대로 말해라. 난 오는 여자 안 막는다.” 어련하시려고. “됐다, 이 사람아. 음식 나왔다. 밥이나 먹자.” “아, 그리고 너 시간 좀 내라. 어? 남자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아? 데이트 좀 하자고! 우리 사귀고 나서 제대로 된 데이트 몇 번 한 적도 없거든?” 음.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시험이 코 앞 인걸. “뭐, 생각해보고. 와, 이 돈가스 맛있네. 너도 먹어봐.”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 한 대답을 했긴 했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언제 쯤 시간을 낼까, 하고 계산에 들어가 있었다. 아마 나도 은근히 녀석과의 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뭘 봐?” 젓가락을 입에 물고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살짝 미간을 좁히는 차연우. 저런 녀석한테 도둑년 소리도 듣고, 스토커란 오해도 받고. 별의 별 욕도 다 처먹었는데. 왜 이제는 녀석의 험한 입조차도 밉지가 않은 건지. 미운 정이 든 걸까, 아니면 녀석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뭐?” “아냐, 먹어.” 그 언젠가가 멀지 않은 미래이길 바란다.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깨닫게 된다면, 그 지체된 시간만큼 분명 잃은 것도 많을 테니까. 제 19화 내가 좋아해야 하는 남자와 나를 좋아하는 남자. 주말 아침.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오늘 만큼은 공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집을 나와 향한 곳은 빵가게였다. 여러 가지 빵을 골라 담아 계산을 하고나서 향한 곳은 딱 한번 가보았던 차연우의 집이었다. 며칠 전 분식집에서 시간을 내라고 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학교에서 계속 데이트를 하자며 조르던 차연우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기도 했기에. 또 최근에 박해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전보다 차연우가 신경 쓰였다. 왠지 내가 공부하고 있을 시간, 차연우는 그 여자선생님과 함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기분이 나빠지고. 그래서 황금 같은 주말 아침. 녀석의 집 앞으로 향했다. 차연우의 집이 가까워질 무렵 미리 전화라도 할까 싶어, 차연우의 집이 눈에 들어올 때쯤 핸드폰을 꺼내어 녀석에게 문자를 보내고, 차연우의 집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한 가녀린 여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저 여자와 내가 인연인 걸까. 도대체 왜, 하필! 오늘 당신도 이곳에 있는 건데? 첫 인상이 길게 남는다고. 내 자신이 문화중학교 앞에서 그녀와 마주쳤었던 그 때의 기억부터가 그녀를 좋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확 돌아가 버릴까?” 하고 뒤 돌아서려고 하는데, 마침 차연우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 데이트? 히밤, 나 밖인데. 집 앞이랬지? 당장 달려 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음, 밖이라고? [ 집 까지 오는데 몇 분 걸리는데?] [ 한 30-40분?] 미친 새끼. 이게 댐질라고. 지금 나보고 30-40분을 집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봄이라지만 덥다고!! [ 빛의 속도로 달려와. 넌 오면 댐졌어.] 하고 문자를 보낸 뒤,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데,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 이 시간에 단어 하나를 외우겠다.” 아까워라, 아까워. 단어집이라도 가져올걸. 하고 뭐 시간 때울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여전히 차연우의 집 앞에서 맴돌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 설마 차연우가 집 밖에 있는 거 모르고 저러고 있는 건가? 알려줘야겠지? 하고 여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하고 부르자, 여자가 뒤 돌았다. 나를 발견한 여자는 꽤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기억나죠? 두 번 본 것 같은데. 나만 두 번 본 걸지도 모르지만.” “아.…연우 여자 친구?” 오호? 여자 친구인 걸 알아? 그럼, 차연우한테 여자 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찾아왔단 말이지? 그 것도 주. 말. 에? 이 여자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그 때 문화 중학교에서도 봤잖아요. 저 기억 안나요? 나 그 쪽이 친 테니스공에 맞았었는데.” “아, 그 학생! 머리는 괜찮니…?” 맞은 지가 언젠데, 안 괜찮을 리가 있어요? 당연히 괜찮지. “네, 뭐. 괜찮아요. 그나저나 여기서 차연우 기다리시는 거예요?” “어? 아, 응…. 초인종 눌러도 안 나오네.” 안 나오면 차연우한테 연락을 하시면 되지, 미련하게 기다리시는 건 뭐람. “차연우 집에 없어요. 도착하려면 30분 넘게 걸린대요.” “…아, 그래? 그렇구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 “그럼 기다려야겠다.” …뭐? 기다려? 누굴? 차연우를? 아나, 이 여자가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내가 여기에 왜 있겠냐고! 차연우가 밖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겠냐고! 밖에 있던 차연우가 갑자기 여길 왜 오겠냐고! 나랑 만나려고 오는 거지 않겠냐고! 그런데 기다리겠다고? 기다려?! 이 여자 안 되겠네? “저기요.” “응?” “차연우 오려면 좀 오래 걸리거든요? 한 30-40분 걸린다고 했어요.” “…아.” “저도 어차피 그 녀석 기다려야 하고. 잠깐 저기 가서 이야기 하실 수 있으세요?” “…나랑?”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묻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꼭 말해주고 싶었던 것도 있고요.” “…아, 응. 알았어.” 나는 날씨도 꽤 후덥지근하고 하니 빠르게 카페로 가기를 발걸음을 재촉했고,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오렌지 주스 한잔씩을 주문하고서는 서로를 마주봤다. “오늘 연우 왜 찾아오셨어요?” “응?” “이런 거 말해서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저 그 쪽이 차연우랑 같이 있는 거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 “오늘도 남자친구 때문에 찾아오신 거예요? 상담하시려고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여자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한 표정을 말이다. “어?…그걸 네가 어떻게.” 진짜 못됐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상담하는 게 제일 나쁘고 잔인한 짓인데. “남자가 차연우 밖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항상 차연우한테만 상담하세요? 자꾸 웃으시면서 차연우 옆에서 그러고 계시면 제 기분은 어떻겠어요?” “…그게 아니라, 저기.” “그거 모르죠.” “으응?” “차연우가 그 쪽 좋아하는 거 모르고 계시죠?” “…어…어!?” 정말 몰랐나 보네,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면. 차연우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두 눈 뜨고 볼 수만은 없다. 나 같은 피해자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마요.” “…으응?” “차연우한테 다정하게 대하지 말라고요. 그렇게 웃지도 마시고요. 그게 차연우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그 쪽은 모르잖아요.” “…저기, 그러니까 나는 그저….” “그 쪽은 자기 제자니까 그러는 지 몰라도, 상대방은 아주 죽을 맛이거든요. 잊을 만하면 와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흔들어 놓고, 마음표현하려고 하면 여전히 나는 제자고.” 여자는 막 나온 오렌지 주스에 꽂아져 있던 빨대를 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차연우 여자 친구라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참견 많은 여자가 아니니까. “경험자로서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그게 잘못된 행동인지 모르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제자라고 생각하시면 제자답게 대하세요.” “미안, 미안해…. 얘, 그런데 있지….” “나한테 사과하지 마요. 저한테 왜 미안해요. 차연우한테 미안한 거지. 저는 그저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 그리고 당신하고 차연우 사이의 이야기는 차연우한테 들은 거 아니니까 연우한테 뭐라고는 하지 마세요.” 여자는 무언가 내게 말하려는 듯 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연우를 많이 좋아하나 봐.” 내가? 내가 차연우를? “그쪽 눈엔 그렇게 보여요?” “응. 상처 받지 않길 바라고 있잖아.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자기도 그 마음 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좋아하는 걸까? 하는 고민. 그리고 나는 곧 선생님을 향해 대답했다. “틀렸어요.” “어?” 잘 못 보셨다고요. 좋아하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앞으로 좋아해야 하고, 나를 앞으로 좋아해야 할 녀석이라서 그런 거예요.” “…아.” “장애물이 잔뜩 널린 연애는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요. 난 굴곡이 많은 연애가 아닌 평행선을 유지하는 연애를 추구하는 여자라 서요.” 하는 말을 끝으로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하고 숙이며, “저 이만 가볼게요. 원래 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긴 했지만. 나중엔 이런 사이로 뵙지 않았으면 하네요.” 하고 인사를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마침 차연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디야? “너희 집 근처 카페. 이리로 올래? 너 아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데.” - 내가 아는 사람? 아는 사람 누구?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 - 뭐? “나 지금 홀릭에 있거든? 10분 내로 달려와. 안 그럼 주스 네가 다 계산해야 돼.” 라는 말을 끝으로, 녀석이 뭐라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 앞에 앉아있던 선생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가보려고 했는데, 마침 차연우가 이쪽으로 온 다네요.” “…아. 그래?” “마음 같아서는 오늘까지 그 쪽 상담 들어주라고 하고 싶은데요. 그게 상담하는 쪽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받는 쪽은 상당히 상처받거든요. 그래서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아냐, 괜찮아. 이해해.” “그리고 남자는 말이에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뭐, 내가 그 쪽보다 산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연애는 그 쪽보다 많이 해봤을 거예요. 아마도. 그러니까 적당히 밀고 당겨요. 그 쪽은 딱 봐도 남자한테 잡혀 살 것 같으니까.” 내 말에 자기도 동의하는 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선생님. 근데 그 조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어찌나도 충격적인지. “어떻게 알았니…? 정말 걱정이야. 연우랑은 다르게 왜 그리 무뚝뚝하고 그런지. 매일 화만내구.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주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연우랑 다르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르고 있었니? 그 것까지 듣진 못했나 보네.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은 연우네 형이야.” …헐. 헐? 헐?! “네?!” 누구? 지금 누구라고…? “그래서 연우한테 상담한 건데…, 연우가 날 좋아하고 있는지는 몰랐어. 정말 몰랐어…. 그냥 나는 잘 대해 주는 게…, 연우가 자기 형 여자 친구라서 잘 대해주는 줄 알구…. 앞으로 조심할게. 연우네 형이니까, 연우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었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연우는 그저 내게 귀여운 제자이자, 귀여운 동생일 뿐인걸.” 박해진, 이 새끼 뭐하는 새끼야? 그런 말 없었잖아! 차연우네 형하고 사귄다고? 그래서 차연우한테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그러고 보니 차연우네 형이 차연우랑 나이차가 조금 있어 보이긴 했지만… “난 정말 연우를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이고 자시고. 미쳤어. 미쳤어, 차연우! 네가 미친 거야. 차연우, 너는 형 여자 친구를 좋아했던 거야? 네 선생님이자 형의 여자 친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의 형 여자 친구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있던 거야? 네 형이 이 선생님을 찰 때까지? 독하다. 징하다. 넌 나보다 더해, 차연우. 이건 아니야. 나도 내 자신이 한심하고, 이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는데, 넌 더 아닌 것 같아. 넌 정말 끊어야 돼. 하루 빨리 네 마음을 끊어야 돼, 차연우. 전혀 가망성이 없는 라인이잖아. 형의 여자 친구이자 선생님이라니.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할 상황이 아니잖아? “저기요.” “…어?” “지금 차연우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 제가 말씀드렸죠.” “아, 응.” “차연우가 여기에 도착하면 제가 그 쪽한테 있는 마음, 여기서 확실히 정리하라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차연우가 마음 확실히 끊을 수 있도록,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해요.” 당신이 정말 차연우를 귀여운 동생이자 제자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래야만 해요. 헛된 기대를 품지 못하게. 선생님은 당연히 그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후, 차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카페 안에 도착했다. 녀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와 선생님의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에 날 발견할 때는 그저, 뭐냐ㅡ. 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곧 내 옆에 서 있는 선생님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왜 네가 누나하고 같이 있어?” 누나? 누우나?! 지금 너 누나라고 했어? 허. “네 집 앞에서, 너 안에 없는지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시고 계시기에 카페로 모셔왔다. 모셔온 김에 얘기도 좀 하고. 왜, 꼽아?” “무슨 얘기? 어디서 만났다고? 처음만난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데?” “네가 모르는 데서 만났던 적이 있었으니까 원래부터 알던 사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이야.” 내가 이 선생님을 처음 본건, 정확히 그 때 문화중학교 안에서였으니까. “연우야….” “오늘도 상담하려고 온 거예요, 누나?” “…어? 아, 응.” “그럼 가요. 집에 먼저 가있어요. 얘, 데려다 주고 갈 테니까.” 얘, 데려다 주고 갈 테니까? 너 지금 그게 여자 친구 앞에서 할 말이야? 나 너 보러 온 거야. 그런데 날 데려다 주고 저 선생님 상담을 들어주겠다고? 여자 친구가 먼저여야 하는 거 아냐? 네가 말했잖아. 그게 남자의 매너 중 가장 기본 매너라고. 자기 여자 친구를 챙기는 것이! “차연우. 나 너 보러 온 거야.” “내일 학교에서 봐.” “야, 차연우.” “가자. 데려다 줄게.” “가긴 어딜 가! 싫어, 안 가!” “나 지금 기분 나빠지려고 한다, 이향미. 그러니까 웬만해서는 건들지 말고 그냥 가자.” “싫다고! 오늘은 나랑 보내. 너랑 데이트 하려고 독서실 안 가고 온 거야, 나.” “그럼 가서 공부해. 데이트 안 해도 되니까.” 데이트 안 해도 된다고? 데이트 하자고 일주일 내내 졸랐던 사람이 누군데! 데이트하자고 놀러 왔다고, 너희 집 앞이라고 하니까 바로 달려오겠다던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뭐? “저 여자가 네 여자 친구야? 내가 네 여자 친구야, 차연우.” “겉으로만 이잖아, 어차피.” …겉으로만? 겉으로만 이라고?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었어? 수학여행 때 너 좋아하고 싶다고, 네가 나 좋아해줬음 좋겠다는 말, 뭐로 들은 거야? “어차피 오늘도 내가 데이트 하자고 닦달 볶아서 억지로 온 거 아니냐고.” 지금 말 다했어? 억지로? 하, 평소에는 정말 내 남자친구 인 것처럼, 우리가 좋아서 사귀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항상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행동했잖아. 우리는 겉으로만 사귀는 거라고. 근데 아니었구나. 내가 아니라 사실은 너였구나. 우리가 겉으로만 사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닌 너였어, 차연우. “겉으로만 아니야.” “겉으로만이 아니면 뭔데?” “수학여행 때 내가 말했잖아. 네가 나 좋아해줬음 좋겠다고, 그리고 내가 너 좋아하고 싶다고.” “그래서 뭐. 네가 지금 나 좋아하고 있다는 거야, 뭐야?” “말 하는 거 봐. 진짜 싸가지 제대로다.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해? 그리고 내가 경험자로서 충고하는데 말이야. 지금 네 행동, 결국 너만 상처받고 끝나. 내가 해봐서 안다고! 들었잖아! 저번에 내가 해줬던 이야기들 다 들었잖아! 그런데도 넌 뭐 느끼는 거 없어?” “분위기 파악하면서 대답해라. 나 열 받으면 남, 여 구분 못한다.” 그 말…, 지금 나 때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왜, 때리시려고?” “이향미.” “내가 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하는 말들 다 짜증나지? 그런데 난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내가 겪어봤으니까!” 차연우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래야지만 끝을 볼 수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나는 선생님이었지만, 너는 선생님에다가 형의 여자 친구야. 아예 가망성이 없잖아.”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데? 대충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가지고 이러는 거면 닥쳐. 나 진짜로 열 받으려고 한다, 이향미.” “대충 주워들은 거 아니야. 네가 내게 좁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고 했지? 나는 네 끈질긴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제발 참견하지 말고 그냥 가라, 이향미.” “먼저 참견하기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러니까 나도 참견할 자격 있는 거 아니야?” 들고 있던 손가방을 의자위로 던지며 녀석을 올려다보며 쏘아붙였다. “네가 그랬지. 여자가 필요하다고. 여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그 이유가 이 선생님 때문인 건 알겠어. 그럼 여자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를 없애자. 가망성 없는 길은 하루빨리 자르는 게 좋아.” “이향미, 너 진짜.” “선택해. 나랑 이 선생님, 둘 중 한명만.” 라는 내 말에 살짝 놀란 얼굴을 하는 차연우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보는 선생님. “뭐?” “네 손으로 끊어. 가망성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나보다. 그러니까 선택해. 나인지, 선생님인지.” “이게 갑자기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나를 선택하게 되면, 선생님을 향한 마음을 모두 다 접고, 선생님을 선택하게 될 경우, 너는 이 가망 없는 길을 계속 가고 싶은 거라 생각하고 친절하게 헤어져 줄게. 그리고 이참에 나랑은 아예 쌩을 까자.” 자신만만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차연우가 무조건 나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나와 인연을 끊는 것을 택하느니, 선생님을 향한 마음을 접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 것은 내 자만과 오산이었나 보다. 왜 나는 몰랐을까. 나와 차연우가 만난 그 기간보다, 선생님과 차연우가 함께했던 기간이 더 길었다는 것을. 왜 망각하고 있었을까. 자신만만하게 짓고 있던 내 표정은 어느새 일그러져 있었다. 선생님의 손을 잡은 차연우의 손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게 네 선택이야?” “그게 아니라. 나 지금 기분이 상당히 얼떨떨한데, 이건 아니라고 본다. 내가 누나를 택했지만 그건….” “됐어. 실망이다, 차연우. 나도 한심한 년이지만, 넌 나보다 더 한심한 놈이야.” 선생님을 선택할 줄 몰랐어. 내가 너와 만난 시간이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나는 네가 나를 선택할 줄 알았어. 내가 너에게 이유 모르게 이끌리듯이, 그래서 손을 놓을 수 없듯이 너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것 역시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나 봐. “이향미. 그게 아니라.” 화를 낼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을 지어? “넌 계속 미련하게 살아. 괜한 참견이었지. 미련한 놈인 걸 까맣게 모르고 말이야.” 내 자만과 오산으로 내 자신에게 상처를 하나 더 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정말 바보 같다, 이향미. “나 먼저 갈 테니까 너는 그 선생 상담이나 실컷 들어줘.”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계산서를 차연우의 뒤쪽으로 던졌다. “이향미!” 뒤 돌아서서 카페를 빠져나가려는 나를 차연우가 계속해서 불렀지만, 나는 녀석의 불음을 무시하고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짜증나, 짜증나 차연우.” 진짜 그럴 줄 몰랐어. 개새끼, 나쁜 새끼. 가짜라도 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거기서 그 여자를 선택 하냐고! 내가 뭐가 되는데? 진짜…, 그 여자 앞에서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말했는데. 나는 고작 남자 마음도 못 잡는 그런 여자로 생각할 거 아니야! “완전 미워. 개새끼. 한 대 패줘도 시원찮을 놈!” 왜 눈물이 핑 도는 걸까. “짜증나게 왜 눈물까지 나냐고!” 눈물이 나긴 하지만 이건 상처받아서가 아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녀석을 좋아해서, 선생님에게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껴서. 그래서 내가 상처받아서 우는 것이 아니다. 녀석에게서는 아직 그러한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어도. 그러니까 좋아해서 상처받은 것은 아니다. 그냥 충격이었다. 억울했다.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나와 같은 꼴이 나지 않았음 하는 바램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차연우에게는 괜한 참견이었을 뿐이다. 차연우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왜 충격적인거지.” 마음이 아픈 건 아니다. 쓰라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일 당장 학교에서 차연우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은 없다. 녀석과 마주하면 화가 나서 홧김에 녀석의 뺨을 때릴 것만 같아서. “억울해, 억울하다고!!” 녀석은 나의 이야기를 다 알고, 내게 참견이란 참견은 다했었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왜 녀석은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던 거지? 왜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남에게서 들은 거지? 왜 내 도움이 녀석에게는 참견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거지?! “…화가 나, 화가 난다고!” 눈물이 멈춤과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화에, 바로 눈앞에 굴러다니는 깡통 캔을 뻥 차며 화풀이를 대신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탄산이 필요해. 탄산, 탄산!” …김혜미를 불러? 아니야, 아니야. 대낮부터 김혜미랑 탄산 마셨다가는 둘 다 사고 쳐서 내일 곱게 학교에 가지 못할지도 몰라. 효빈이는 어리고. 다른 애들은 지금 쯤 다 독서실에 있을 거고. …그 녀석 밖에는 없나? “소꿉친구. 진짜 이럴 때 너 밖에 찾을 사람이 없다, 권강재.”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서 권강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마침 차연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지만 받을 생각은 없었다. 받아봤자 욕 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에 과감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차연우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오기 전에 권강재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자,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권강재의 목소리가 핸드폰 안쪽에서 들려왔다. - 독서실에 짱 박혀 있어야 할애가 갑자기 웬 전화냐. 평소 권강재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가 왜 평소보다 다정하게 들렸는지. 듬직하게 들렸는지.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고였다. “…권강재.” - 뭐야, 너 울어? 눈치 하나는 빠른 놈. 쪽팔리게. - 이향미? 이향미?? 너 울어? 너 어디야! 네 앞에서는 죽어도 눈물 보이는 거 싫었는데, 평생 안 보고 살 녀석도 아니니까 쪽팔려서 네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만큼은 안 보이려고 했는데 오늘은 너 밖에 없다. 너 밖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 무슨 일이냐니까! 아무런 대답도 없이 훌쩍이기만 하는 내가 답답했던 것인지, 아니면 걱정이 되는 건지 화를 내듯 내게 묻는 권강재의 목소리에 나는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나 차였어…. 술 좀 사주라. 술 좀 사줘, 권강재….” 제 20화 우정과 사랑, 5:5 관계. 아, 자존심 상해. 천하의 이향미가 차이다니…. 물론 지금까지 권강재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많이 차이기도 했지만, 그건 지난 번 권강재가 언급했듯이 나의 반 협박적인 의견을 수렴해 상대방이 찬 거지, 남자가 원해서 나를 찬적은 없었다. - 뭐라고? 차여? 차연우한테? “…응. 술 좀 사줘. 응?” - 대낮에 청승맞게 술주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됐어! 안 사줄 거면 말아! 나 혼자 마시면 되니까! 끊어-!”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전화기 안쪽에서 아직 끊지 말라며 소리치는 권강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줄 거지?” - 집으로 와. “너희 집? 아저씨랑 아줌마는 어쩌고!” - 지금 나 밖에 없어. 권강희랑 같이 꽃구경 나가셨어. “알았어. 나 곧 도착하니까…, 탄산 준비해둬. 탄산.” - 어, 끊어. 그렇게 권강재와 전화를 끝마치고 바로 배터리를 분리시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차연우에게서 전화가 올 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권강재랑 단 둘이 술 마시는 것도. 맨날 그 새끼 친구들이랑 껴서 다 같이 먹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둘이 얘기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다. 수학여행 이후로 이상하게 녀석이 나를 피하는 듯 한 기미가 보여서 나 또한 녀석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었으니까. “…벌써 다 왔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거닐다 보니 어느 새 권강재네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까 분명 집 안에 혼자 있다고 했지? 그럼 초인종 안 누르고 들어가도 되겠지?’하고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권강재가 있을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권강재-.” 하고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데, 2층에서 들려야 할 대답이 이상하게도 내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아, 깜짝이야!” “빨리 왔네. 준비하고 있었는대.” “아, 응. 가까운 곳에 있었어. 어…, 뭐야. 이건 탄산이 아니잖아!” 권강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탄산이 아니었다. 분명 탄산을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왜 탄산이 아닌 알코올을 준비한 건데?! 왜 맥주가 아니라 소주를 준비한 거냐고! 내가 소주에 얼마나 약한데! “이거 밖에 없더라고.” “아씨, 그럼 사오지!” “대낮에, 그 것도 이런 차림으로 나가서 맥주 달라고 하면 줄 것 같냐?” 하고 권강재가 쏘아붙이자 나는 녀석의 차림새를 쭉 훑어보았다. 분명 외모는 반듯한데, 옷차림은 영…. 추리닝 바지 걷어 올린 거 하며, 위에는 아직 여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반팔티를 입은 녀석. 게다가 반팔 티 가운데에는 노란 병아리가…. “…이해해 줄게.” “올라가기나 해. 손 아파.” “아, 으응.” 어서 올라가라는 녀석의 재촉에, 녀석의 방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항상 녀석의 방에 들어올 때면 박하향이 코끝을 찌른다. 게다가 깨끗한 방안이라니. 여자인 내 방보다 깨끗하다. 이향원 방은 드럽기만 하던대. “멀뚱히 서서 뭐해? 내 방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두리번거려?” “어, 그냥. 오늘 따라 새롭게 보이네?” “미친. 앉기나 해.” 녀석을 마주보며 앉은 나는, 녀석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우선 입가심으로 한잔 마셔라.” 하고 쪼르르- 알코올을 따라주는데, 걱정부터 앞선다.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게 소주인데. 맥주는 어느 정도 먹어도 취하지 않지만, 소주는 다르지 않는가. 엄마한테 걸리면 나 완전 댐지는대…. “오징어도 하나 물고.” “별걸 다 준비했다, 너. 그 짧은 시간에.” “준비할 건 준비해야지. 자, 이제 말해봐.” “뭘?” 오징어를 우물거리며 묻자, 녀석은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온 목적을 잊은 거냐? 금세? 아까 그 말 무슨 말이냐고. 차였다니?” …윽.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나 차여서 술 마시러 여기 온 거였지…. “그게 말이야. 음…말 그대로 차였어.” “차연우가 헤어지재?” …그건 아니었는데, 나를 선택 안하면 헤어지자고 한 게 나긴 하지만 그래도 선택한 건 차연우니까…. 그게 날 찬 게 아니고 뭐야? 안 그래? “직접적으로 한 건 아니고….” “그러면?” “내가 오늘 차연우랑 데이트 하려고, 그 녀석 집엘 찾아갔는데, 어떤 여자가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여자가 차연우한테는 무진장 소중한 존재인가 봐. 여자로서.” “어, 그런데.” “근데 그 여자한테 있어서 차연우는 그냥 귀여운 동생쯤인가 봐. 그저 귀여운 동생인데도 불구하고, 막 차연우한테 기대를 심어주는 게 마치 선생님이 나한테 하는 행동들 같아서 울컥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 어이가 없데? 근데 마침 차연우가 나랑 그 여자가 있던 카페로 왔단 말이야. 내가 그 녀석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선택하라고 했다? 나랑 그 여자랑? 게다가 지금 차연우의 여자 친구는 나잖아. 안 그래? 아, 갑자기 또 화나려고 하네. 야, 한 잔 더 따라봐.” 녀석이 내 빈 잔을 채워주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알코올을 입 속으로 부우며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근데 나를 선택 안했다고! 내가 나를 선택 안하면 헤어지는 거라고도 했는데도!! 끝까지 그 여자를 선택 하는 거야!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네가 지금 화가 나는 이유가 뭔데? 너 차연우 좋아해?” “…엉?” “차연우 좋아하냐고. 그래서 지금 질투 나서 그러는 거냐고.” 야,…너까지 왜 그래. 아까 그 여자도 그랬는데…. “…아냐.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럼 왜 그러는데?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잖아. 그저 자존심이 상했을 뿐인 거야? 항상 네가 찼는데, 이번에는 네가 차여서?” …아냐, 그런 것도 아닌데…. 자존심이 상해서 지금 이러는 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앞에 놓인 땅콩을 하나 입 안으로 넣어,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었다. “그럼 차연우는 너에게 있어서 무슨 존잰데?” …무슨 존재? “우정이야?” “…음. 그건 아닌 거 같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며. 그런 뭔데?” “…좋아지려고 하는 단계쯤?” 그냥 차연우랑 있으면 편하고…, 막 즐겁고 그래. 선생님도 생각 안 나고…. 가끔 두근거리기도 해. 그런데 선생님이랑 있었을 때만큼은 아니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냥…차연우가 스킨십을 해 올 때 정도만 두근거리는 정도? “그럼 월요일 날 학교에서 어떻게 할 건데?” 그게 나도 걱정이야…. “모르겠어.” “대충 들어보니까 아직 완전하게 헤어진 거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만약 차연우가 헤어지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헤어지기 싫다고 하면?… 받아들여야지! 하면 자존심 상하고, 솔직히 헤어지기는 싫어. 그래서 충격 받은 거란 말이야.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선택해서. “…모르겠어.” 아무 것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게 뭐냐, 도대체.” “모르겠으니까 널 찾아온 거지! 안주만 먹지 말고 얘기 좀 해봐!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잔이나 비워, 멍청아.” 아. 잔. 그래, 비워야지. “그래, 마시고 잊자. 잊는 게 좋겠다. 그지?” “너 겨우 넉 잔째다. 근데 벌써부터 혀가 꼬이려고 하면 어쩌냐. 나 소주 3병이나 사왔는데. 이 많은 걸 나 혼자 다 마시라고?” 자신의 옆에 놓인 소주병들을 가리키며 말하는 권강재는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소주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 마시면 될 거 아냐! 줘 봐, 한 병.” “잔도 안 비운애가 병을 왜 달래.” “달라면 주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하고, 녀석이 들고 있는 소주병을 낚아채서 병따개로 병을 따기가 무섭게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이향미!” 소주병을 낚아채가기 위해서 손을 뻗은 권강재보다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녀석의 손이 닿기 직전에 몸을 틀어 계속해서 소주를 속으로 들이 부었다. 하지만 곧 권강재의 손에 의하여 소주병은 내 손에서 멀어져만 갔다. “너 미쳤어? 3분의 2가 없어졌잖아!” “…너 혼자 다 마시기엔 많다며.” “병신아!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마시면 어쩌냐고! 이게 맥주인 줄 알아? 가뜩이나 알코올에 약한 애가!” 으음, 음. 아, 막 웃음이 나오려고 해. 왜 이러지? 기분이 막 좋아지네. 아까는 기분이 정말 구렸는데. “…히이. 뭐 어때에.” “얼씨구?” “…나 한잔만 더 줘.” “너 많이 마셨어. 취했다고요, 이향미.” 라고 녀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하자,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속상하냐?” “…응? 뭐가?” “너 취할 만큼 마시는 거 죽어도 싫어하잖아. 그래서 항상 맥주만 마셨었잖아.” 음, 이게 속상한 건가? 잘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술 마시는 거, 디게 오랜만인 거 알아??” “지난주에도 마셨잖아.” “에이! 그 때는 네 똘마니들이랑 같이 마신 거잖아! 우리 둘이 마신 건 오랜만이란 말이다, 이 자식아.” “그런가.” 그래. 오랜만이야. 우리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 주고받은 지 오랜만이라고. “그거 알아?” “몰라.” …냉정하게 굴기는. “나 솔직히 너한테 섭섭했다?” 남아있던 알코올을 입 속으로 부으며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나 피하는 것 같아서 섭섭했어. 얘기도 잘 안하려고 하고. 근데 나 내색은 안했다? 왜인 줄 알아?” 권강재의 옆으로 다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며 말하는 내가 우스운지 실소를 흘리는 권강재. “왜? 왜 내색 안했는데?” 왜냐면…. “…또 싸울까봐. 그래서 너마저 나랑 강우재 사이처럼 될까 봐….” “…” 나랑 강우재 사이처럼 될까봐…. 그럴까봐 그랬어.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었어…. 난 항상 그런 짓 밖에 할 줄 모르니까…. 내 말에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비울 뿐. “아, 갑자기 그 녀석이 보고 싶네. 왜 이러지?” “넌 술에 취하기만 하면 꼭 그 자식 얘기하고, 그 자식 찾더라.” 그랬나? 술에 취할 때마다 내가 강우재를 찾았었나?…못 느꼈었는데. “…아, 선생님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번에는 그 선생이냐.” “음. 강우재 얼굴도 보이네?” 하고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녀석은 그런 내 말이 기분이 나빴던 것인지 미간을 좁혔다. “그 새끼랑 나랑 하나도 비슷하게 안 생겼어.” “응응. 알아. 와, 차연우도 보여!” “취했다, 너.” “으응. 안 취했어, 병신아. 아, 이러고 있으니까 그 때 생각난다.” “그 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권강재가 되묻자,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지난 번 일을 권강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에 차연우가 우리 집까지 따라와서 하는 수없이 내 방에 들여보냈었는데, 그 때, 울 집 에 서식하고 있는 개새끼가 내 방으로 슬금슬금 들어 온 거야.” “그 새끼 강아지 무서워하는데.” “응!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좀 놀려주려고 막 그 개새끼를 들이 밀었어! 그러니까 얘가 막 무서워서 뒤로 물러서는 거야! 근데 내가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막 녀석한테 달려들었는데, 모르고 내가 차연우 위에 올라타 버린 거야.” “뭐?” 와, 놀란 것 봐. 그게 그렇게 놀란 일인가? 으음. “그 때도 이렇게 차연우랑 마주보고 있었는데, 되게 가까웠다? 막 입술이 닿을 랑 말랑. 요렇게.” 한 손에 오징어를 들고 권강재의 무릎 위에 반대 손으로 지탱한 채, 녀석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권깡.” “…어, 어? 야, 좀 떨어져 봐!” “나…목말라, 권깡.” “무, 물 줄 테니까 좀 떨어져 보라고!” “네 입술 되게 촉촉하게 생겼다…. 맛있겠다.” 녀석은 당황한 듯 나를 밀치려고 했지만, 나는 녀석이 나를 밀치기도 전에 녀석의 목에 손을 두른 채로 내 입술을 녀석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알코올에 적셔진 녀석의 입술을 머금으면 갈증이 덜 할 것 같았기에 충동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으음.” “음, 으으, 이향…으음. 읍…음.” 굳게 닫힌 녀석의 입술을 집요하게 핥고 빨았다. 녀석의 입술의 물기란 물기는 다 흡수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다른 뜻은 없었다. 심한 갈증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물을 마시고 싶었다. 마침 눈앞에 촉촉하게 적셔진 녀석의 입술이 눈에 띄었을 뿐. 물론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행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집요하게 녀석의 입술을 핥고 빨자, 녀석은 몸에 힘이 풀린 건지,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서는 뒤로 완전히 누워버리고 말았다. “…멈, 멈…음.” “으음. 음.” 권강재는 나를 밀치려고 했지만,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나를 밀칠 순 없었나 보다. 녀석은 두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는 듯 우물쭈물 거렸지만, 입술은 여전히 나의 입술과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곧 나를 밀쳐내려 했던 권강재의 손은 허공이 아닌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덮치고 있는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었다. “…으으…음.” 어느 덧 권강재와 나의 위치는 반대가 되어 있었고, 나는 멈추지 않고 녀석의 입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점점 더 진해져만 가고 있었고, 정신은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아, 촉촉하고 부드러워. 말캉말캉하고, 젤리 같아. 입 속 안에 돌아다니는 게 꼭 달콤한 젤리 같아…. 더……먹고 싶어, 맛있어. 더…더. … …더? 젤리? 응?…뭘?…,……헉! 벌떡ㅡ. “헉-!” 지끈해져오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일으키며 눈을 뜨자 눈앞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방 안. “여기가 어디…어라? 내 방?” 내 방이라고? 잠깐만. “나 차연우 만나러 나가지 않았었나?” …아, 기억이 안 나네. 분명 차연우를 만나러 나가서… 그래, 그 여자랑 이야기를 하고, 차연우한테 차여서… 권강재네 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다가…, 녀석 위로 올라가서…입, 입…!!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이향미!!!!!!!! “뭐야?!!?!?”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괴성을 지르자, 밖에서 얼쩡거리던 이향원이 놀라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으, 으, 으아-!!!!!!!! 어떡해!!!” “뭘? 뭐가? 왜 그러는데? 귀신 봤냐?!” “나,…나, 어떻게 된 거야? 나 분명 권강재랑….” “…아, 뭐야.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네. 병신이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지를 만하니까 질렀지, 개새끼야! 어떡해. 나 여기 어떻게 온 거지? 내가 권강재 위로 올라타서 덮친 것 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어, 으으-!! “강재 형이 너 업고 들어왔잖아!” “…권강재가?” 표정을 굳히며 진짜냐고 묻자, 녀석은 ‘그럼 가짜냐!?’하고 소리치며 한 번 더 내 머리에 각인을 시켜줬다. 권강재와의 일을.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형 등에 업혀왔잖아, 등신아. 대 낮부터 술을 쳐 마시고 싶냐? 싶어?” “권강재가 데려다 줬다고…? 그니까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이지?” “뭔 꿈? 너 또 사고 쳤냐?” 시발, 쳤다. 아주 단단히 쳤다! “아, 그리고 너 웬만하면 살 좀 빼라.” “왜 갑자기 살 얘기가 나오는데!” “네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너 업고 들어오는 형 얼굴이 새빨개져있냐?” …제기랄. “권강재가 아무 말도 안 해? 뭐 전해주라는 말 없었어?” “어, 아무 말도 안 하던데? …너 사고 쳤지? 맞지? 너, 술 취하도록 마셔도 다음 날 기억 다 나잖아.” …빌어먹을. 그래, 기억 다 난다! 아주 생생하게 난다! 처음에는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가면 갈수록 생생해져서 미치겠다! 입술에 남아있는 감촉 때문에 더 미치겠다구! “…나 밖에 나갔다 올게.” “미친, 나가긴 어딜 나가? 엄마가 방 안에 짱 박혀 있으랬거든?” 엄마? 엄마가? “뭐!? 엄마, 나 술 마시고 온 거 알아?!” “그럼 모르냐? 문 열어 준 사람이 엄만데? 넌 이제 뒤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나가.” “뭐래?” “나가라고 새끼야!” 하고 베개를 던지자, 녀석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방에서 나갔다. “…엄마는 둘째 치고, 월요일 날 어떡하지?” 차연우 얼굴을 그렇다 치고, 권강재 얼굴은 어떻게 보냐고! 녀석도 내가 취해서 저지른 짓을 다음 날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뭐, 어떻게 해야 돼? 미안해, 내 실수였어. 라고 말을 해? 아니면… 잊어줘. 라고 말을 해야 하나? 어쩜 좋아. 차연우가 문제가 아니야! 그 새끼는 아예 무시하면 되지만, 권강재는 어쩌냐고! “미쳤어, 이향미. 미쳤어! 차라리 애를 패지! 하필이면…,” 키스를 할게 뭐냐고! 죽도록 팼다면 차라리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만, 이건…사과해서 될 게 아니잖아. 게다가…. “…으, 왜 자꾸 기억이 나냐고.” 왜 자꾸 그 때의 느낌이 생생해지는 거냐고. 말캉말캉하고…부드러운. “아아악-!!!!!!!!!!!” “시끄러워, 기집애야!!!!!!!!!! 여기 네 혼자 사냐!????” 계속해서 괴성을 지르는 내 목소리가 시끄러웠던 이향원은, 방문을 뻥뻥 차며 닥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쿠션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질러도, 질러도 걱정이 사라지질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다. “…나 이제 어떡해?” * * * 월요일 아침. 드디어 대망의 날이 다가왔다. 그 날 밤 새벽, 모임에 나가셨던 엄마가 집에 들어오셔서 바로 내 방으로 찾아와 외출 금지령을 내려 놓으셨다. 외출금지령에 감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덕분에 나는 일요일 날 하루 웬 종일 집안에만 처 박혀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일요일은 넘겼지만, 문제는 오늘. 월요일이라는 거다. 가방을 챙겨들고 나서는 나는, 제발 권강재와 마주치지만 말아라ㅡ. 하고 속으로 바라고, 또 바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권강재네 집 쪽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제길.”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딱 마주 치냐고! 그 많고 많은 시간 중에 왜 하필 지금 학교를 가냐고! 권강재와 눈이 마주친 나는, 눈웃음을 살짝 치고서는 반 쯤 열린 현관문을 닫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냐, 안 나가냐?” 입에 빵을 물고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던 이향원이, 띠꺼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마이를 안 가지고 왔지 뭐야.” 하고 대충 변명을 둘러대고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데, 이향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입고 있는 건 치마냐?” “…아, 맞다. 마이가 아니고 실내화 주머니!” “너 학교에 두고 다니잖아.”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되겠니? “…이향원, 너 용돈 부족하지. 이 누나가 용돈 줄까?” 하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돈을 꺼내려고 하자, 녀석은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치며 말했다. “너 갑자기 왜 그러냐? 무섭게?” “용돈 줄 테니까,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 부탁?” 하며 내가 내민 퍼런색 종이 3장을 받으며 묻는 이향원의 물음에 “오늘만 나 좀, 네 오토바이 태워주라.” 라고 말하자, 녀석은 퍼런색 종이를 다시 내게 내밀며, “미쳤냐?” 라고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하는 게 아닌가. “아, 제발! 오늘만! 용돈 더 줄까? 응?” “내가 미쳤다고 오토바이 타고 등교를 하냐? 압수당하면 네가 책임 질 거야?” “몰래 숨겨 두면 되잖아!” “야, 선생님은 둘째 치고, 중딩들은 어쩌라고? 그 새끼들이 요즘 오토바이를 얼마나 잘 쌔비는 줄 알아? 닥치고 택시타고 가, 가려면.” 개새끼. 넌 동생도 아니야! “됐어, 새끼야! 너 앞으로 내방 와서 컴퓨터 하면 뒤질 줄 알아!” 하고 소리쳐준 뒤, 다시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어 배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도 권강재는 이미 학교로 향한 듯싶었다. “…아슬아슬했다.” 권강재가 이미 학교로 향했다는 것에 안심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는 나또한 천천히 학교로 향했다. 오늘 하루 권강재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제 21화 틀어지기 시작하는 사이. 학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내가 향한 곳은 동아리부실이었다. 지금 교실로 돌아가면 0교시 자습시간이라 아이들이 한창 떠들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수업이라도 하게 된 다면 차연우와 얼굴을 마주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문제는 자습이라는 것이다. 분명 차연우는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여기가 가장 편한 곳이 될 줄이야.” 막상 학교에 오고 나니 갈 곳은 없었다. 교실로 갈 수가 없으니, 남은 곳은 동아리 부실 뿐. 그렇게도 들기 싫어했던 부였는데, 지금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이 이 곳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쉬는 시간마다 밖에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밖에 돌아다니다가 권강재라도 만나면 그건 한 마디로 새 되는 거다. 차라리 교실에서 차연우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훨씬 낫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권강재>차연우’라는 것이다. “10분 뒤에는 교실로 가야 되네.” 벌써 9시 정각이 되기 10분 전. 9시 정각에는 조례가 있기 때문에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 아, 차라리 아프다고 꾀나 부릴 걸.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내일도 동아리 부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점심시간에도 그렇고. 석식시간에도 그렇고. 젠장스럽다. “이만 올라가야겠다.” 하고 동아리 부실을 나와 교실로 향하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 하는 원망스러움을 가슴에 안고 급하게 몸을 틀어 다시 동아리 부실로 향하려고 하는데, 이미 그 아이는 내 뒤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이향미.” 왜 너야. 왜! 차라리 차연우라고 데려와! 왜 하필이면, “아침에도 그렇고, 너 왜 그래?” …권강재 너냐고. 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몸을 틀어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내 표정을 본 순간 급속도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나는 몸을 틈과 동시에 쾌재를 불렀다. 왜냐고? “향순이, 오랜만?” “개민철,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래, 우리 2학년 대표 모범적인 머리를 소유하고 있는 개민철이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향미. 난 안 보여?” …안 보이고 싶어…, 내 앞에 있는 게, 네가 아니길 바라. 어떡하지? 말 한마디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몰랐네. 아, 그래.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자! “나,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가봐야겠다. 나중에 보자!” 하는 구식 중에서도 아주 개 구식인 변명을 둘러대고 빨리 교실로 향했다. ( 다행히도 교실이 교무실과 같은 방향 쪽에 있었다.) “이거 마주칠 때마다 이럴 수도 없고!” 제길, 어떡하냐고…. “후,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뭐, 권강재가 호랑이라는 건 아니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 뒤 교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교실 문 앞에 방금 전 권강재와 함께 서 있던 개민철이 서 있었다. 분명 권강재랑 같이 있었는데, 쟤가 언제 왔데? “뭐야? 너 아까 권강재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하고 묻자, 녀석은 팔짱을 끼며 날 내려다보았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이다. “…뭐, 뭔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권강재랑 싸웠냐?” …에? “아니. 안 싸웠는데?” “그럼 또 그 새끼 게임기 망가트리고 숨겨놨냐?” …저 새끼가. “그 것도 아니거든! 그리고 그 땐 망가트린 게 아니라 고치고 갖다 주려고 했던 거였어!” “뭐야, 그럼? 설마 또 권강재 문제집 싹 다 버렸어? 아님 태웠냐?” “너도 확 댐져볼래? 여기서 한 판 떠볼까? 엉? 시비 걸려고 왔어?” “그럼 뭔데? 너는 왜 권강재를 피하고, 권강재는 왜 너를 죽일 듯이 째려본 건데.” 뭐? 권강재가 나를 뭐? 죽일 듯이 째려 봐? “…에이, 걔가 날 왜 죽일 듯이 째려 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오죽하면 내가 가던 길을 되 돌아왔겠냐.” …왜? 네가 왜 날 죽일 듯이 째려 봐? 혹시 엊그제 그 일로 기분 나빴던 건가…? 설마 처, 처…, 첫 키스는 아니겠지?!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너 뭐 사고 친 거 있지?” …어떡해…, 사과를 해야 하나? 근데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겠는 걸…. 18년 동안 친구로서 지내왔던 놈이랑 그런 사고를 쳤는데, 어떻게 뻔뻔하게 얼굴을 마주하겠냐고…. 으, 못해! 못한다고! “…없어, 그딴 거.” “앞에 그 3초간의 공백은 뭔데? 수상하다, 이향미.” “없다고 새끼야! 너희 반에 가! 수업 시작하잖아!” “괜히 찔리니까 소리치는 것 봐라.” “아, 그럼 하루 종일 여기에 서 있던가! 나 들어갈 거야.” 하고 교실 문을 닫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또 하필이면 들어가자마자 차연우와 눈이 마주칠 게 뭐람? 저건 아침마다 쳐 자더니, 오늘은 왜 안자고 일어나 있데? “하여간 되는 일이 없어.”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워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아 1교시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책상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추어 나와 책상을 그림자 속에 가뒀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는데…, 호기심 어린 내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지고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얘기 좀 하자, 이향미.” “할 얘기 없는데? 좀 가지? 나 너랑 달라서 수업 준비해야 하거든.” “그럼 있다가 점심시간에라도 하던가.” “그 때도 시간이 안 되는데, 어쩌나. 내가 주말에 공부를 하지 못해서, 학교에서 틈틈이 해야 하거든. 그만 좀 돌아가 주지?” 책상 서랍 안에서 1교시에 들은 국어책을 꺼내놓으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 순간 차연우는 보란 듯이 내 눈 앞에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짧지 않은 녀석의 손톱이 금방이라도 녀석의 살갗을 뚫고 들어갈 것 같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초가 지나고, 20초가 지나고…, 그렇게 1분이 지나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만큼 차연우는 더욱 더 세게, 꽉 주먹을 쥐었다. 어느 새 녀석의 손톱이 닿은 살갗부분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후.” 참 더러운 수법 쓴다. 내가 알았다고 대답해줄 때까지, 이 자식 손을 풀지 않을 생각 인 거다. 손톱이 살갗 안으로 파고들든 말든, 내 대답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만 손 풀어!” 하고 그새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웃어 보이며 손을 풀었다. 녀석의 손바닥은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살이 파여 금방이라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에 동아리부실에서 얘기해. 여기는 보는 눈도 많고, 곧 수업시작이니까.” “밥 먹고 동아리부실 안에서 기다린다, 나.” 내게서 대답을 받아낸 차연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으, 1분을 참지 못하고 대답해버리다니. 나도 참 못났다, 못났어. 이향미 왜 그렇게 사니. “아아악-!!!”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머리에 못 이겨 크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수업시작한지 5분이란 시간이 지났는지 자각하지 못한 내가 말이다. 그렇게 돼서 결국, “이향미 나가있어ㅡ!” 하고 선생님의 다그침에 교과서를 들고 1교시부터 뒤에 나가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권강재, 차연우.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들이다. 진짜 덫 중에서도 이런 덫도 없을 거다. 어떻게 사사건건 이 녀석들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고,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고, 벌까지 받냐고! 누가 나 좀 살려줬으면 좋겠다, 제발. * * * 점심시간. 빈약한 반찬들 때문에 10분도 체 되지 않아서 급식을 마친 난 남은 음식을 버리고, 차연우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을 동아리 부실로 향했다. 동아리 부실이 점점 가까워질 때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금방이라도 다시 교실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을 다시 잡고 동아리 부실로 들어서는데…. 왜 차연우는 없고…. “사귀어요, 선배.” “내가 너랑 왜 사겨야 하는데? 싫어!” “인형도 사다드렸지 않습니까. 제 선물은 날로 잡수시는 겁니까?” “네가 그냥 준 거잖아! 치사하게 그런 걸로 약점을 잡다니!” 곰돌이 인형을 꼭 껴안은 채 효빈을 향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있는 김혜미의 모습이 보이고, 연이어 그 옆에 앉아 무표정을 일관한 채 연신 ‘사귀어요, 선배.’를 반복하고 있는 한효빈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하고 있는, 지금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였다. 차연우, 개새끼.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더니, 이제는 약속도 늦냐? 설마 동아리부실에서 보자고 했던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지가 얘기하자고 했던 건데…. “향미야!!!” 속으로 차연우를 열심히 씹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등 뒤로 숨는 김혜미. “나 덥다. 떨어져라, 김혜미.” “으으, 나 좀 살려달라고! 저 꼬꼬마가 나보고 자꾸 사귀자고 하잖아!” 꼬꼬마? 한효빈을 말하는 거냐, 그거? “인형 사드리면 소원 들어주신다고 하신 건 선배였습니다.” “이런 소원 말고! 뭐…, 청소대신이라거나. 아니면…, 어째든 이런 건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곰돌이를 더욱 세게 껴안는 김혜미. 한효빈은 그런 김혜미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숙인다. “뭐야, 효빈이가 너한테 고백했어?” “으. 다짜고짜 사귀자고 하잖아!” “효빈아, 어쩌자고 이런 애한테 고백을 했냐. 설마 김혜미가 접때 말했던 후레쉬맨인가 뭔가 닮아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맞는데요.” 아, …예. 죄송합니다. 몰라봤습니다. “설마해서 말하는 건데, 김혜미는 후레쉬맨처럼 변신 못한다.” “저 초등학생 아닙니다.” …키가 꼬꼬마 같기에, 생각하는 것도 그런 줄 알았지, 난. “그나저나 차연우 여기 안 왔어?” 하고 김혜미와 한효빈의 일을 뒤로 한 채 녀석들에게 물었는데. “안 왔어.” 하고 권강재가 대신 대답을 한다. “…아, 그, 그래?” “어. 그리고 이향미…너….” “나, 나 이, 이만 가본다! 차연우 찾아야 돼서! 나중에 보자!” 하고 권강재가 입을 열기 전에 동아리 부실을 뛰쳐나왔는데, 바로 앞에서 차연우와 마주쳤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차연우의 손을 잡고 최대한 동아리부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녀석을 이끌었다. 그리고 끝내 도착한 곳은 옥상 위였다. “미쳤냐? 걸리면 우리 징계야.” “됐어, 금방 얘기하고 갈 텐데. 뭘 걱정해?” 난 지금 권강재가 이곳을 찾아오면 어쩌나 싶어서 장난이 아니라고. 너 보다는 권강재가 더 걱정이라 이 말이다! “후, 어째든 빨리 할 말만 말해. 나 교실로 가봐야 하니까.”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연우와 두 눈을 마주했다. 당당하게, 꿀리는 거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보통 이런 눈으로 쳐다보면, 상대방은 미안하단 듯이 눈길을 피해야 하는데 차연우는 오히려 나보다 더 당당하게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술 더 떠 어이없는 말까지. “우리 헤어질 수 없다는 거 알지?” “…뭐어?” “못 헤어진다고, 이향미.” 이게 지금 미쳤나? 분명 그 여자 선택하면, 헤어지고 쌩깐다고 말 했거든. 난? “지랄하지 마. 그 말 하려던 거였음, 나 내려간다.” 하고 뒤 돌아서서 옥상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차연우가 재빠르게 달려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처음 사귀기 전에 했던 말들 기억 안나?” ‘사귀기 전에 했던 말들? 무슨 말들?’하는 전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는 차연우. “헤어지자고 할 때는 각자가 얻어야 하는 것을 얻었을 때만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뭐? “지금 장난해?” “이게 장난같이 들리냐, 넌?” “어, 충분히. 내가 알기론, 넌 충분히 여자를 얻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헤어지자고는 하지 않았어.” …하, 진짜 골 때린다. “그럼 헤어지자고 해. 헤어져 줄 테니까.” “싫은데?” 이게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건가? “헤어지고 싶으면, 내가 처음에 말했던 그 것을 얻어. 그럼 네 말대로 헤어져 줄게.” “거짓으로 얻었다고 한다면?” “아니, 그 건 절대 거짓으로 말할 수 없는 거다.” 어째서? 하고 묻자, 녀석은 팔짱을 끼며 받아쳤다. “어째서? 하고 묻고 있잖아. 그게 증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넌.” 그러니까 뭐가? 하고 다시 묻자, 이번에는 녀석이 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헉- 할 세도 없이 그대로 껴안아버렸다. 허리에 손을 자연스럽게 두르며 말이다. “뭐, 뭐하는 짓이야!” “토요일 날은 미안했다. 누나한테 들었어.” “이 거 안 놔?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가 되니, 넌? “데이트 하자.” “시끄럽고, 이 손 안 놔? 안 풀러?” “주말에 데이트 하는 거다. 일요일 날 너희 집 앞에 찾아 갈 테니까 대기 타고 있어.” “공부 할 거야, 새끼야!” 녀석의 품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악을 하며 소리치자, 녀석은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을 푸르며, 그 손으로 내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날 유혹해봐. 열심히 유혹 당해줄게.” 라는 말을 남긴 채 ‘나 먼저 교실로 돌아가 있는다.’ 하며 옥상을 내려가는 차연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나는, 차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개자식, 누가 유혹해주기나 한데?” 웃기는 자식이야.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만 하면 다야? 내가 그 날 얼마나!! …얼마나…, 얼마…. 히발, 또 떠올랐어! 그래, 이 모든 게 차연우 너 때문이야!! 네가 그 때 나만 선택했어도 그런 사고는 안 쳤잖아, 개새끼야! “하.” 암담한 현실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온다. * * * 그로부터 4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짧지만 긴 4일이란 시간동안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슨 일들이 있었냐고? 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고 해야 되나? 술래는 권강재, 나는 술래한테 잡히지 않기 위해 열심히 숨어 다니는, 그런 거? 물론 차연우 역시, 무시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워낙에 능글 맞는 녀석이라 냉정하게 굴 때마다 장난 걸고, 무시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차연우라서 그런지 점점 화가 누그러지고 있었다. 반대로 권강재와의 사이는 더더욱 급속도로 어색해져만 갔다. 권강재는 내게 자꾸만 말을 걸려고 하는 듯 했지만, 내가 피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그 일이 있은 뒤 일주일이란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그 반대로 더더욱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부끄럽다고 해야 되나, 창피하다고 해야 되나? 18년 동안 친구로만 지내왔던 녀석을 자신이 덮쳤다고 생각을 해봐라. 그 것도 엄청 진하게. 도저히 얼굴 볼 낯짝이 없다. 하여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게 4일이란 시간을 숨어 다녔다. 녀석이 반으로 찾아오면 아픈 척 엎드려 있거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미친 듯이 교실로 뛰어갔고, 어쩌다가 우리 집에 들를 때면, 샤워하는 척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녀석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점점 지칠 무렵 내게 발신자제한표시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나는 또 어떤 씹새가 장난전화를 거나 싶어서 받았는데, 그 것이 화근이었다. - 끊기만 해봐. 지금 바로 쳐들어간다, 교실로. “…궈, 궈…권강재?” - 학교 끝나고 기다려. 히발라마. “으응?” - 기다려라. 이제 한계에 다다랐으니까. 꼭 기다려. 이따 보자.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권강재. 나는 멍한 눈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소리를 치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어떡해! 어떡해! 내가 기다리지 않고 있으면 분명 집까지 찾아올 녀석이야. 게다가 오늘만큼은 곱게 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던 그 목소리. 아, 안 된다. 싫어! 그렇다고 녀석을 기다리는 건 더더욱 싫다. 마주하기 싫다. 어쩌지? 아직은 아니란 말이야! “…그래! 조퇴를 하는 거다.” 내가 아파서 조퇴하겠다는데, 지가 뭐 어쩌겠어? 마침 그 날이기도 하고, 평소에 행실이 바…, 바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쌓아온 이미지가 있으니 쉽게 조퇴시켜주실 거고. 하고- 생각을 마친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안 돼.” “선생님, 저 진짜 아파요….” “복통이라며? 안 돼.” 히발, 남자 선생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생리통이라고 당당히 말했을 텐데, 우리 담임이 체육이란 걸 잠시 망각해버렸다. 하는 수 없지. “…그, 그럼 사실대로 말하면 조퇴 시켜 주실 거예요?” 때 마침 교무실로 오기 전 이마에 묻혔던 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케이. 리얼하다, 이향미! “들어보고 판단하자.”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나는 배를 힘껏 움켜잡고 ‘끙-’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선생님 책상위에 팬을 하나 주워들어 바닥에 떨어진 이면지를 주워들어 힘겨운 척 한 글자, 한 글자 쓰기 시작했다. “…생” 그래, 생-. “…리통?………….” 그 정적은 뭐예요? 해주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저는 1분 1초가 급하다고요! “조퇴서 끊어줄 테니까 가방 들고 내려와.” 오예-! “…네.” 끝까지 아픈 척, 힘겨운 척 하며 교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힘차게 교실로 달려가 애들에게 조퇴 한다는 말을 남겨놓고, 가방을 들고 교무실로 다시 내려가 조퇴 증을 가지고 당당하게 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미안, 미안해. 권강재. 으, 도저히 네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특히 1:1 이야기라면 더더욱. 차라리 개민철이를 끌고 왔다면 조금은 들 그랬겠지만…. 자꾸 네 얼굴 볼 때마다 그 곳에 시선이 간단 말이다…. 그, 그…이, 이 입…수, 수…히발. “에라이, 알게 뭐야. 오늘은 집에 가서 빡세게 공부나 하자. 아, 근데 이거 꼭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기세인데. 비 오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하고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에게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가 문제집을 펴고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중간에 권강재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오기도 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배터리를 분리하고서는 다시 팬을 잡았다. 다음 주면 벌써 시험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퇴한 내가 미친년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니까 대신 집에서 그 만큼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5교시에 조퇴를 했고, 오늘 야자 빼면 적어도 집에서 3시간은 죽치고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한다. 마치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무려 3시간 아니, 4시간이라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문제집을 풀어나갔다. 창문 밖에는 내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뭐 저리 비가 많이 내리는 지. 이향원, 오늘 비에 쩔어 들어오겠군. “시발, 권강희!!!!!!!!!!!” 응? 뭔 발? 뭐? 뭔 강희? 문 밖에서 이향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제 왔나 싶어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비에 흠뻑 젖어 핸드폰을 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이향원의 모습이 보였다. “너 뒤질라고. 지금 누구 우산을 쌔벼 간 거냐? 어? 죽을래?! 다 젖었잖아!” 아하, 강희가 이향원 우산을 쌔볐구나. 으응. 흠. “안 닥쳐? 너 내가 지금 교복 너희 집 가지고 갈 테니까, 네가 다 빨아. 알았어? 싫다고? 싫어? 진짜 뒤져볼래, 권강희? 아쭈? 까분다, 너? 세제 값이 아까웠음 우산을 쌔벼가지 말았어야죠. 아, 몰라! 지금 가져갈 테니까 닥치고 빨아. 끊어!” 하고 핸드폰을 소파에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와이셔츠와 교복바지를 벗어버리는 이향원.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려 자신의 방에 들어가려는 듯 몸을 튼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뭐냐?’라고 물어보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너 집에 있었냐?” “보시다 시피.” “독서실은?” “조퇴했는데, 오늘?” 하고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받아쳤는데, 어째서 녀석은 나를 향해. “미친년!” 하고 소리를 치는 건데? 당당하게 조퇴 받고 온 나에게, 뭐? 미친…뭐? “너 밖에-! 아, 아니다. 우선 이 옷 좀 가져다주고 말하자. 넌 이제 뒤졌다.” “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내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서는 교복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야?” 하고 한 1-2분간을 닫혀버린 현관문을 쳐다보던 나는, 곧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샤프를 들고 다시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내 방문이 열렸고, 어이없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향원이 들어왔다. “나가, 나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너 미쳤냐?” “뭘?” “밖에 누구 있는 줄 알아?” 누구? 밖에? “누구 있는데?” “너 오늘 강재 형이 기다리라고 했다며.” …그래, 그래서 내가 이렇게 조퇴하고 왔지 않겠냐. “아, 근데 조퇴하고 와서….” “아까부터 형 밖에 서 있거든? 그건 아냐?” “…뭐!?!” 권강재가 밖에 서 있어?! 밖에 비 엄청 내리고 있는데?! “그럼 들어가라고 했어야지, 네가!” “야, 이 기집애야, 네 나올 때 까지 기다리겠다잖아! 비에 홀딱 맞고 서 계신다. 내가 우산을 가져다주는데도 불구하고 안 쓰고 기다리겠다잖아. 그러니까 너 좀 빨리 내보내라고!” …그 새끼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우산도 없이 서 있다고?! “…언제부터 서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아냐? 지금 막 왔는데? 하여튼 나가 봐! 너, 알지? 형, 이번 주 주말에 중요한 농구 시합 있는 거.” …아, 그게 이번 주였어? 진짜, 나 미친 거 아니야? 권강재가 나가는 시합은 매번 꼬박꼬박 챙겼는데, 까먹을 정도로 내가 신경을 안 쓰고 있던 건가? 아니면 그 일에 너무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건가? “안 나가?” “어?” “안 나가냐고. 형 밖에 서 있다니까? 감기라도 걸리면 끝장인 거 알지?” …맞다, 시합. 감기 걸리면 시합 제대로 못 뛸 텐데. “아, 짜증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을 두 개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내가 써야 할 우산 한 개를 펴 쓰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정말 이향원 말대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왜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어색함도 잠시 잊은 채 녀석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너 미쳤어?! 왜 여기서 이러고 서 있어!!!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나왔냐?” 나왔냐? 고작 하는 말이 그거야? 차라리 욕을 해! “무모하게 여기 왜 서 있어?! 왜!” “문자했잖아. 기다리겠다고, 여기서.” “핸드폰 꺼놨단 말이야! 도대체 몇 시간을 여기 서 있던 거야? 학교 끝나자 마자 서 있었던 거야!?” “아니, 6교시 끝나고 조퇴했다, 나도.” 6교시 끝나고 조퇴? 지금이 6시니까…, 3시간 가까이 여기에 서 있었다고? “…네가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내가 안 나오면 들어갔어야지!” “피하잖아, 네가. 자꾸만 피하잖아.” …권강재. “왜 피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나도. 내가 너한테 무슨 실수라도 했냐?” “…너 때문이 아니야.” 절로 숙여지는 고개. 떨리는 목소리로 속 안에 감춰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쪽팔려서 그랬다고,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소꿉친구한테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게 너무 쪽팔리고 그래서 그랬다고, 멍청아! “쪽팔려서 그랬어. 그 때, 내가 너무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서. 네 잘 못 아냐. 그러니까 이 우산 쓰고 어서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좀 씻어. 감기 들면 시합 못 나가잖아.” 하고 말하며 새 우산을 펴 녀석에게 씌워주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 우산을 받지 않았다. “그럼 네가 쪽팔려지지 않을 때 까지 피할 거야?” 라는 녀석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피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무진장 부끄러우니까 말이다. “들어 가 봐.” “이향미.” “우선 들어가. 감기 들려.” “나 쳐다 봐봐.” 내 어깨에 비에 젖은 손을 올려두며 말하는 권강재.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끝가지 들지 않으려 했다. 헌데, “얼굴 좀 보자고.” 라는 말이 왜 그리 간절하게 들렸던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은 내가 ‘앗.’ 할 틈도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 위로 포개었다. “…!” 권강재의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느껴진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대로 몸을 굳혀버렸고, 입 속으로 파고드는 녀석의 혀에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나도 모르게 놓쳐버렸다. 뿌리 칠 수가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거부 할 수 없었다. 달콤한 녀석의 입술을. 잠시 후, 내 입술에서 권강재의 입술이 떨어졌다. 차갑지만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술. 다시 한 번, 그 때의 일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 때와 똑같았던, 하지만 조금은 다른…느낌. “…자, 이제 똑같지? 이젠 피하지 마라.”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쓱 매만지며 웃는 녀석의 모습을 본 순간, 왜 미친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을까. 방금 전 그 감촉이, 느낌이 왜 자꾸만 잊혀 지지 않고 생생해지는 걸까. 어째서…? 제 22화. 연인보다는 친구. 권강재는 내 옆을 슥- 지나쳐 내가 떨어트렸던 우산을 들어, 내 손에 쥐어주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감기 걸리겠다, 어서 들어가.” 그리고서는 자기는 여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니까 며칠 전 술에 취해 녀석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고, 나는 그 실수로 권강재를 피해 다녔어. 그런 내 행동에 화난 녀석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내 입술에 입맞춤을 했으니 이제는 둘 다 실수했으니까…피하지 마라. 이 말을 하고 들어간 것이 맞나? “…아, 어떡해.” 시간이 지나도 방금 전 기억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생생해지고, 입술은 점점 뜨거워져갔다. 나는 그가 집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생소한 느낌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다음날 아침. 퀭해진 얼굴로 학교에 도착한 나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책상에 엎어져 잠을 청했다. 시험공부를 하라 주어진 자습시간이었지만, 시험공부고 뭐고 무조건 잠을 청해야만 했다. 밤 새 권강재와 입을 맞추었던 일이 생생히 기억이 나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자습을 하라 주어진 3시간 중, 3분의 2는 잠을 청했다. 그렇게 2시간을 허무하게 허비하고 일어난 나는 띵한 머리를 안고 첫 날 시험인 영어 교과서를 펴고 지문을 읽기 시작했고, 한 시간마저 그렇게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종례 시작 전, 화장실을 갔다 교실로 향하던 중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 개민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참고로 말하지만 개민철의 성은 절대 개가 아니다.) “개민철이!” 하고 민철을 향해 소리치자, 녀석은 미간을 좁히며 내가 서 있는 곳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나를 발견하고서는 발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계속 개민철, 개민철 거려라? 이향순이라고 부른다, 진짜.” “아, 사내새끼가 야박하게. 근데 …권강재는 어째 안 보인다?” 같은 반이라 항상 같이 다니던 권강재와 개민철. 헌데, 오늘은 권강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홀로 다니고 있는 민철의 모습이 보이는 건지. “어, 너 몰랐냐?” 응? 뭘 몰라. “권강재 오늘 학교 안 왔잖아.” “뭐!?” 권강재가 학교를 안 와? 나를 닮지 않아 수업은 꼬박꼬박 듣던 그 새끼가 학교를 빠져?! “땡땡이 쳤어, 그 새끼!?” “미친, 너는 십년이 넘도록 같이 자랐으면서 그 새끼를 그렇게 모르냐? 걔가 수업듣기 싫다고 빠질 녀석이야?” 아니지. 그런 녀석이 아니지. 그럼 왜…? “그러면 왜 …안 왔는데?” “감기랜다.” …뭐? …감기? “어제 우산도 없는 새끼가 갑자기 조퇴 맡고 집에 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 새끼가 단단히 미쳤어. 내일이 시합인데, 감기에 걸리면 어쩌자는 건지.” “지금 시합이 문제야? 친구라는 새끼가, 학교에 못 올만큼 심하다는 건 캐치 못해?!” “왜 화를 내고 그러냐? 그리고 너 나를 뭐로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일 있을 ‘시합’에만 연연하는 개민철에 모습에 괜스레 화가 난 내가 소리치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개민철이 오히려 나를 향해 소리쳤다. “권강재, 그 새끼가 몇 달동안 내일 있을 시합 기다렸던 거 너도 알잖아! 내일 그 시합에 누가 오는 지도 알고! 근데 자기 몸 하나 관리 못하고 누워있는 그 새끼가 불쌍해서 그런다! 내가 지금 그 까짓 시합 때문에 그러는 거 같냐?!” …그래, 그러고 보니 권강재 그 녀석. 몇 달 전부터 내일 있을 시합을 기다렸는데. 밤새 혼자 연습하기도 하고, 몇 달 동안 다른 애들이랑 호흡도 맞추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감기…, 나 때문에 걸린 거겠지? 하,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개새끼, 그러게 비 오는데 왜 안 들어가고…. “…하루 만에 감기는 안 낫겠지?” “몸 관리만 잘 하면 괜찮아지기는 하겠지, 완벽하게 낫지는 않아도.” “히발, 약 한 박스는 사가지고 가야겠구나.” “뭐?” “이 근처에 죽파는 데 있나? 아, 돈 안가지고 왔는데. 야, 나 돈 좀 꿔줘!” “뭐라고? 돈?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사내새끼가 돈도 안 가지고 다니는 게 말이 돼? 여자인 나도 가지고 다니는데? 하는 수 없네, 차연우한테라도 빌려야지. 하고 머릿속에서 판단이 서기가 무섭게 개민철을 지나쳐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차연우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다짜고짜 말했다. “돈 좀 빌려줘.” 라고 말이다. 차연우는 갑작스러운 내 출현은 둘째 치고, 손을 내밀며 돈을 꿔달라는 내 말에 당황한 듯 ‘뭐, 뭐?’하고 말을 더듬었다. 녀석의 옆에 서 있는 다른 놈들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만원만 빌려줘. 월요일 날 줄게.” “만원? 뭐, 어렵지는 않는데…. 갑자기 왜?” “죽 사야 돼.” “죽? 웬 죽?” 그냥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줄 것이지,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짜증나게. “누구 좀 먹여야 해서. 하여간 좀 빌려줘.”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 돈을 빌려 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언 놈 한명이 마치 시비를 걸 듯 내게 툭 하고 한 마디 던졌다. “그 ‘누구’를 먹이기 전에, 남친부터 좀 먹이시죠.” “이 새끼는 내가 챙기지 않아도 하루에 다섯 끼는 거뜬히 알아서 챙겨 먹으니까 걱정 없어. 챙겨먹이려면 소화제나 챙겨먹여야지. 안 그래, 차연우?” 지 친구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차연우를 향해 수학여행 때를 상기시켜주며 말하자, 녀석은 얼굴을 굳히며 재빠르게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서 내 손 위에 올려놨다. “월요일 날 갚을게!” 만원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넨 뒤 자리를 돌아가려고 하는데, 차연우의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할 말 있어?” “내일 데이트하자.” “내일? 뭐, 그러던지. 아, 선생님 왔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종례를 하기 위해 들어오신 선생님으로 인해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종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 죽 집으로 가서 평소에 권강재가 좋아하는 죽인 참치 죽을 사들고, 남은 돈으로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들고 우리 집이 아닌 권강재의 집으로 향했다. “멍청한 새끼, 한심한 놈!” 권강재를 향해 비난하는 듯 한 말이긴 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핸드폰만 꺼놓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권강재를 피하지만 않았어도 권강재가 감기에 걸릴 일은 없었을 텐데. 얼마나 심하면 학교에 나오지도 못하는 거지? 아파도 웬만해서는 참고 학교에 나오는 권강재인데, 심하더라도 학교에 나와서 조퇴하고 가는 녀석인데. 어느 정도이기에 학교도 못 나오는 거야, 도대체! 권강재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드는 걱정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곧 권강재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데, 때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강희와 마주쳤다. “어, 언니!” “강희야.” “그건 뭐예요? 죽?” 강희는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새겨진 죽 집의 이름을 보고서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죽’이라는 것을 가볍게 알아맞히고선 웬 죽이냐는 듯이 물었다. “아프다며, 권강재.” “아…, 어떻게 아셨어요? 언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학교에서 들었어. 많이 아파?” “아, 뭐 조금. 밤새 끙끙 앓았나 봐요. 아침에 보니까 온 몸이 땀에 쩔어서는. 휴, 미련하게 왜 참았던 건지. 밤에 약이라도 먹고 잤으면 더 심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럴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요. 엄마도 나가셔서 집에 오빠 혼자 있을 거예요.” 강희는 가방에서 집 열쇠를 꺼내더니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려 문을 열었다. “아, 맞다! 감기약 사와야 하는데!” “내가 사왔어. 2층에 있지? 물 좀 가져다줄래? 나 먼저 올라가 있을게.” “네. 오빠 방에서 자고 있을 거예요.” 강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층으로 올라가 권강재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권강재는 방문을 등지고 돌아 누워있었다. “…나가, 권강희.” 나를 강희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한 권강재.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딱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은 아파보였다. 얼마나 아프면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도 아프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수 있는 걸까. 나는 녀석이 들을 수 있을 법한 톤으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권강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챈 건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녀석. 이내 나를 발견하고서는 조금은 놀란 듯 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개자식아!” 하룻밤 사이에 헬쭉해진 녀석의 모습을 보자 울컥한 나는 단 걸음에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어떻게 알았어?” “민철이 새끼가 알려주더라! 너 내일 시합인데 이게 뭐야!” “…됐어, 별로 안 아파.” 별로 안 아파? 안 아프다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차라리 네가 여자라고 해!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게 더 쉽겠어! 땀나는 것 좀 봐. 아직도 아픈 거야? 약 안 먹었지? 약 먹…, 아니다. 속 비었을 테니까 죽부터 먹자.” “…큭.” 큭? 지금 이 녀석 웃은 거 맞지? “…하하, 하하. 미치겠다, 이향미. 하하.” “왜 웃어!” “나, 너 그렇게 허둥지둥 대는 거 처음 봤어.” 허둥지둥 댔다고? 내가? “내가 언제 허둥지둥 댔는데!” “지금. …그렇게 걱정됐냐?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 보면 피하던 녀석이.” “…내,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리고 누가 걱정했데? 나, 나는 그냥!”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왜 또 어제일이 기억이 난 건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이 마냥 웃긴 건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 녀석. 나는 순간 녀석이 환자인 것을 망각한 채 녀석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나 환자다, 이향미.” “환자면 환자답게 행동해, 새끼야! 말이 많아, 진짜. 먹어, 어서.” 봉지에서 사온 죽을 꺼내어 수저와 함께 녀석의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녀석은 받아들지 않고 멀뚱멀뚱 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안 먹어?” 하고 녀석에게 묻자 녀석, 이번에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 시작한다. “뭐, 뭔데! 왜 그렇게 쳐다 봐?”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괜스레 소리치며 물었다. 아직은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때마다 자꾸 어제일이 떠올랐으니까. “힘이 없다, 나.” “…그, 근데!” “좀 먹여주라.” …뭐라? “뭐? 뭘 먹여? 누굴? 널? 내가?!” “여기에 너 말고 또 있어?” “가, 강희 있잖아!” “싫어, 걘.” “왜, 왜 싫은데?!” 아씨. 가뜩이나 단 둘이 있는 거부터가 신경 쓰이는데, 나보고 뭘 하라고? 먹여주라고? “그냥 싫어. 안 먹여 줄 거야? 나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아, 아씨…. 젠장. 누가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면…!!! “…알았다고!!” …개새끼. 내 약점을 간파했어.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잖아. “입 벌려, 멍청아!” 수저로 죽을 한 숟갈 떠서 녀석의 입술 앞으로 가져다 대자, 녀석은 입을 살짝 벌리며 죽을 삼켰다. “…참치네.” 녀석은 죽을 오물오물 거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숟갈을 떠서 녀석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참치 죽이라서 그런지 기름이 번지르르 한 녀석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딜 쳐다 봐?” “…어…어?!” “뭘 그렇게 놀래?” 아, 미치겠다. 자꾸 신경 쓰여. 어쩌면 좋지? “먹기나 해, 어서!” “괜히 화나내고. 너 오늘 이상하다?” “너야말로 아픈 애 맞아? 왜 이렇게 쌩쌩해! 아픈 거 뻥 아냐?” “너는 지금 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그러니까 어서 먹어. 약 먹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권강재.” 녀석이 내가 내민 죽을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 시합 나갈 거야?” 조심스레 물어본 말. 지금 권강재의 상태로 봐서는 절대로 나가지 못할 시합. 나가봤자 결과는 뻔 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어. 당연한 거 아냐?” 라고 자신에 찬 대답을 한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괜찮아. 내일이면 지금보단 나을 거야.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돼.” “…괜히 나 때문에…. 미안.” 나만 아니었어도 말짱한 몸으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나갔을 시합이, 나 하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숙여지는 고개.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 듯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날 타박했다. “고개는 왜 숙여? 내가 언제 너 때문이라고 했어? 고개 들어. 너 때문 아냐. 나 때문이야. 내 의지로 거기 서 있었다고.” “…권강재.” “나 때문이니까 신경 쓰지 마. 우산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 나올까도 했었어. 그런데 나중에 네가 나왔을 때 조금 골탕 먹이려고 그랬던 거야. 네가 자꾸 나 피하는 게 화가 나서 조금 골탕 먹이려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어째 됐건 나 때문이잖아. 내가 피하지만 않았어도 넌 그러지 않았을 거 아냐. “…미안해. 그 때 널 찾아가서 술 마시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 그 날 때문이야. 그 날 너를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왜?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 날 다른 새끼한테 술 사달라고 해서 입술 부비 했어 봐.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그거 무슨 뜻이야?” 네가 당하는 게 낫다…니? “입 안에서 술 냄새가 쩔게 나는데, 다른 녀석이 당했어 봐. 가만히 안 있었을 걸? 나니까…, 아! 왜 때리는데?!” 개새끼, 나쁜 새끼! 내가 그 날일로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뭐? 냄새가 쩔어? 가만히 안 있어?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네가 먹어! 아주 팔팔하네, 팔팔해!” “하하, 화났냐?” “안났그든? 쳐 먹기나 하지?” “먹여줘야 먹지~.” 먹여줘야 먹어? 웃기시네. “네 상태 보면 당장이라도 시합에 쳐 나갈 만큼 팔팔해 보이거든? 네가 먹어, 새끼야!” 잔뜩 골이 난 나와는 달리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권강재. “…재수 없어, 권강재.” “내일 시합 올 거야?” “몰라!” “알지? 나 징크스 있는 거.” “…무슨 징크…! 아,… 그거.” “꼭 와라.” 중학교 때부터 녀석이 농구시합에 나갈 때면 항상 응원을 가던 나. 하지만 어느 날 녀석의 농구 시합 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응원을 가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녀석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었다. ‘나 졌다.’ 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으니 한 번쯤은 질 때도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이나 녀석의 시합에 가지 못했고, 매번 녀석은 그 시합을 지고 돌아왔다. 네 번째로 시합에 지고 돌아온 권강재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시합에 응원 나오지 않은 이후로 계속 졌어. 다음 시합에는 꼭 나와.’ 하고 말이다.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하는 녀석의 말에 다음시합에는 녀석을 응원하러 시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날, 녀석의 팀은 대 승을 이루었다. 그날 밤, 녀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징크스 같다. 네가 시합장에 나오지 않았을 땐 맨날 지더니, 나오니까 이기는 거 봐. 너 앞으로 맨날 내 시합장에 와라.’ 믿고 싶지 않은 징크스였지만, 그 후로 매번 녀석의 시합장을 찾았고 녀석의 팀은 그 후로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알았어, 간다고 가. 몇 시랬지?” “두시 반.” 두시 반이라. 뭐, 가능하겠네. “알겠어. 그나저나 너 진짜 나갈 수 있겠어? 네 상태를 보면 시합 도중에 쓰러질 것 같은….” “나 약골 아냐, 인마.” 누가 약골 이랬나? 그만큼 아파 보인다 이거지. “하여간 약이나 먹고 푹 쉬어. 그래야 내일 시합에 나가지. 나 이만 집에 가볼게. 학교 끝나자마자 너희 집으로 달려와서 가방도 못 두고 왔어.” “그래. 가봐.” “약 꼭 먹어! 저녁에도 먹고 아침에도 먹고! 확인 문자한다, 내가!” “알았다, 알았어.” 못 말리겠다는 듯 녀석은 작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까보다는 나아보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안심하며 강희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권강재와 전처럼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에 아까 전, 차연우와의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헉-!”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중간고사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린 나는, 오랜만에 늦잠이라는 것을 자고야 말았다. “…헐, 1시? 나 미쳤나 봐.” 무려 10시간이나 자다니. 엊그제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한 몫 단단히 했나 보다. 적어도 2시까지는 녀석의 시합장으로 가야 하는데,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려나? 끊임없이 드는 녀석을 향한 걱정.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어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10여분을 화장실에서 보낸 나는 머리를 말리며 방으로 들어와 입을 옷을 꺼내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 나 지금 너희 집으로 가고 있다. - 차연우 - 2008.4.27. 01:15pm] 차연우가 왜 우리 집에 오는…, 아 맞다! 데이트!! 헐, 까먹었다! “아, 안 되는데? 나 지금 권강재한테 가야하는데….”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내려놓고 옷을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그리고선 화장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로 대충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시간도 없는데 꾸밀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대충 캡 모자를 쓰고 갈 생각에 머리를 말리고서는 모자를 들고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딩동-, 딩동-. “…누구지?” 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고, 나는 인터폰을 확인했다. “헐, 너….” - 문 열어. “…자, 잠깐만!” 허겁지겁 모자를 눌러 쓰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대문을 열어주자, 빨간색 장미꽃 한 송이가 내 시야를 가렸다. “선물.” 하고 개구지게 웃는 차연우 또한 이어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아 고마워.” 아, 안 되는데. 벌써 30분 지났는데. 택시타고 가도 2시에 도착할까 말까 하는데…. “데이트 어디로 갈까?” 곤란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녀석은 벌써부터 어디로 갈지 장소를 정하고 있었다. “…저기, 차연우. 그러니까.” “뭐 가고 싶은데 생각이라도 했어?” “…아니, 저 그러니까.…나 데이트 못할 거 같은데.” “뭐?” 개구지게 웃던 녀석은 내 말에 얼굴을 굳혔다. 딱 봐도 기분이 상한 듯 한 모습이 역력하다. “…나 지금 권강재 시합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어제 데이트 하자고 했잖아, 내가.” “미안해, 진짜. 나중에 하자 어?” “꼭 네가 거기에 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차연우. “가야돼, 진짜로 나 가야되거든? 오늘 진짜 중요한 시합이야.” “시합을 네가 나가는 게 아니잖아, 권강재가 나가는 거지.” “그래도 가야 돼. 나중에 하자. 시험 끝나고 하자.” 발을 동동 굴리며 어서 가야한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러기 싫다는 의사를 표했다. “싫어. 난 지금 하고 싶어.” “왜 그러는데, 진짜!” “데이트 하자고.” “나 슬슬 짜증나려고 해, 차연우. 비켜! 나 늦었다고!” “늦었음 안 가면 되겠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차연우!” “네 남자친구는 나지, 권강재가 아니야.” “누가 뭐래? 그래 내 남자친구는 너야! 근데 뭐!” “그럼 내가 먼저야 하는 거 아니냐?” 화가 났다. 오늘은 정말 권강재에게 중요한 시합인데, 시합에 지각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 때문에 심한 감기에 앓아누웠던 녀석의 모습만 생각하면 친구가 먼저건 남자친구가 먼저건 따질 시간이 없었다. 무조건 권강재였다. 무조건.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난 시합장 가야 돼!” “선택해.” …뭐? “나랑 권강재. 둘 중 한명 선택해.” “하, 얘가 사람 미치게 만드네. 너 왜 그래, 진짜!” “권강재야, 나야?”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선택을 하라니.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건가. 지금 당장 어느 곳으로 갈지에 대한 기준?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 “나 화나려고 해, 차연우.” “선택해. 나야, 권강재야?” “뭘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 건데? 너 자꾸 유치하게 굴 거야?!” “네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 …시발. 그거야 당연히. “그리고 네가 지금 옆에 있고 싶은 사람.” … “같이 있고 싶은 사람.” … “네가 필요한 사람, 네가 있어야 할 자리. 잘 생각해서 선택해.”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 내가 지금 옆에 있고 싶은 사람, 같이 있고 싶은 사람,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그걸 나보고 선택하라고?…생각할 것도 없어. 당연히, ………………… …………… “권강재야.” 제 23화 깨져버린 징크스. 대답이 끝난 후 굳게 닫혀버린 내 입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차연우는 곧 실성을 하기라도 한 듯 큰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한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그러다 곧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한 방 먹었네.” 라고 말이다. 헌데, 이어서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가관이 아니다. “그 말은 곧, 권강재를 좋아한다는 뜻이네?” 저 녀석 단단히 오해한 듯싶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으로 녀석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내 속을 꽤 뚫지 못한 채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내 입으로 녀석이 하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는 수밖에는. “네가 말한 조건 중에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조건이 있었나?” 분명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은. 헌데 왜 저런 오해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아니라는 거야?” “당연히! 하지만 지금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권강재가 맞아.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옆에 있고 싶은 사람도 권강재가 맞아. 당장이라도 시합장에 가야 하니까.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역시, 권강재고 말이야. 지금 권강재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나거든. 즉,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권강재 옆이란 거고, 필요한… 뭐 이건 권강재가 날 필요로 하는 거니까 애매하긴 하다.” “…너, 지금 나랑 장난 치냐? 누가 그런 걸 묻는…!” “네가 궁금한 게 이성으로써 좀 더 관심 있는 것을 묻는 거라면 두말할 것 없이 너야.” 권강재한테 내가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니까 나, 가 봐도 돼?” 곧 있으면 시합이 시작된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정말 늦게 된다. “네 말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왜 권강재한테 가겠다는 건데?” “사정이 있다고, 새끼야! 아씨, 그렇게 데이트 하고 싶으면 너도 같이 가던가!” “…뭐?” “권강재 시합장에 같이 가자고! 너도 응원 겸 같이 가면 될 거 아냐. 시합 끝나면 그 때 데이트 하면 되고. 어째든 갈 거야, 말 거야!?” 앞으로 10분 남았다, 시합이 시작하기 전 까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초조한 표정으로 차연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차연우는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시간 얼마 안 남았다, 어서 가자.”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급했던 나는 차연우의 손을 잡고 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거장까지 걸어가는데 5분, 이미 재 시간에 시합장에 도착하기는 글러 먹었다. “…아, 어떡해. 문자라도 넣어야겠다. 꽃도 못 사겠네.” “시합에 웬 꽃?” “오늘 중요한 시합 있다니까, 권강재? 넌 친구라는 녀석이 그런 것도 몰라?” 관심이 없는 건지, 못돼 먹은 건지. 그나저나 꽃 사갈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시합도 늦은 판에 꽃을 살 여유는 없다. 하지만 항상 시합이 있을 때마다 꽃은 사가지고 갔는데, 잘 하라는 뜻으로. “…어?”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내 눈에 띈 색색별 진달래 꽃. 그리고 번뜩 스쳐지나가는 아이디어. “차연우!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주라!” “사진? 뭔 사진?” “핸드폰 줄 테니까 사진 좀 찍어줘!” 하고 녀석에게 내 핸드폰을 넘기며 진달래 꽃 앞에 가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연우,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원맨쇼 하냐?”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죽인다, 너!” “네가 무슨 연예인이야? 브이자도 아니고, 꽃한테 뽀뽀를 하긴 왜해?” “닥치고 찍어, 새끼야!” “눈이 썩어 들어갈 것만 같다. 정화할 만한 것이 필요해.” 오버하는 거 봐라. 그 정도로 못 봐줄만하지는 않거든? 어디 가서 ‘꽃’ 같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어도, 예쁘다는 소리는 들어봤다고. “어서 찍어! 나도 쪽팔려, 인마!” 다시 한 번 꽃에 입맞춤을 하는 포즈를 취했고, 녀석은 순식간에 사진을 찍더니 못 볼 것을 봤다는 시선으로 내게 핸드폰을 재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런데, 그 사진은 뭐하려고?” “꽃 대신 보낼 사진.” 꽃을 살 시간은 없고, 그렇다고 안 주기에는 항상 주던 것이라 걸리고. 그래서 길거리에 있는 꽃을 찍어 보내려는 것이었다. 딸랑 꽃만 찍어 보내기에는 미안하니, 덤으로 나까지. 저장한 사진을 첨부하고서는 권강재의 번호를 찍고,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집에서 너무 늦게 출발해서 시합장에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아. 이기라고 주던 꽃다발 대신 주는 사진이니까 보고 나 갈 때까지 버텨라. 지고 있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문자 작성을 마치고 전송버튼을 누른 뒤 폴더를 닫았다. “권강재한테 보내는 거? 꽃 대신?” “응. 어, 택시 왔다! 타자!” 때 마침 택시가 도착하자, 택시를 잡아 몸을 실었다. 차연우 또한 연이어 몸을 실었다. 그렇게 시합장으로 가는 길. 차연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뭘?” “사진. 마치 남자친구한테 보내는 것 같잖아, 그거.” 그러니까, 지금 질투하는 거지? “응, 그렇게 까지 해야 돼. 시합장에 제 시간에 가지 못했으니 그렇게라도 해야지. 지면 내 탓이란 말이야.” “그게 어째서 네 탓인데?” “징크스 있어, 그 새끼. 이상하게 내가 응원하러 가지 않은 시합은 항상 지고 돌아왔거든.” ‘농구선수’가 꿈인 권강재이니 만큼, 매 시합 하나하나가 중요한 권강재. 그런 녀석의 꿈이 실현되게 도와주기는 못할망정 망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귀찮기는 해도 매 시합마다 응원을 가는 것이었다. “개 같은 징크스네.” “질투 나도 참아, 새끼야.” “누가 질투래? 누가 질투랬어? 엉?!” “또 쇼하고 앉아있다.” ‘질투’라는 단어에 발끈한 차연우는 연신 오버를 떨며 아니라고 손치레를 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그냥 수긍하면 될 것이지. 뭐 저리 유난을 떠는 건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 유난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차연우의 말에. “그나저나 너는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뭐? 뭐어?!” “아까 그랬잖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고.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순식간에 전세역전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했나?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그랬어? 이성으로써 좀 더 관심 있는 사람이 너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어떻게 그게 그거가 되는 건데? 좋아하는 것과 좀 더 이성으로써 관심이 있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라고! “달라!” “그럼 좀 더 관심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데?” 음, 굳이 뜻을 물어본다면…. “친구는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뭐냐고.” “굳이 세세하게 따지자면…좋아지고 있는 중이랄까?”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다, 녀석에게. 친구로써의 감정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감정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선택했었을 때,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자존심이 상했을 뿐. 배신감이 들었을 뿐. 여자가 밉다거나 싫다는 그런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언제쯤 좋아질 것 같은데?” “글쎄다. 이왕이면 이 감정이 그냥 사그라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 “어째서?”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지. “넌 바람둥이니까.” “뭐냐, 그게?” “바람둥이에, 변태에. 뭐 미래가 뻔히 보이잖아? 널 좋아하게 되면 내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잖아.” “내가 왜 변태인데?!” 어머, 이 새끼 금세 까먹었나 보다. “너 기억 안나? 네 폰 돌려주려고 갔을 때, 너… 야동보고 있었다.” 지난 기억을 되새겨주자, 녀석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갔다. 아무래도 잊고 있었나 보다. 하긴 머리가 워낙에 나쁜 녀석이니 기억할 리가 만무하다. “갑자기 기억났는데, 너 그 때 왜 내폰 훔쳤냐?” …히발. 내가 야동 봤던 거 기억하냐고 그랬지, 언제 폰 훔쳤던 거 기억하라고 했냐고! 그리고! 내가 언제 폰을 훔쳤어!!! 지가 나한테 준 거였으면서! “훔친 적 없어! 네가 분명 그 날 인형가게 앞에서 나한테 꽃다발하고 같이 줬잖아, 네 폰!” “인형 가…게? 아! 그 후줄근한 여자애! 그게 너였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후, 후, …후줄근한 여자애!? “너 죽을래?! 후, 후줄근하다고? 그 때는 방학이었어, 새끼야!” “방학이어도 그렇지 말이야. 기집애가…, 그 때부터 여자로 보이지 않았어.” …개새끼. 추리닝이 뭐가 후줄근하다고! 그리고 그 때부터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건…. “그럼 지금도 여자로 안 보인다는 거네?” 약간은 실망한 기색으로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어차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을 하는 차연우의 모습에 나는 놀란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나도 과정을 밟아가는 중이다.” “…뭐?” “너랑 비슷하다고. 아직 좋아하는 건 아냐. 하지만 좀 더 유혹해보면 넘어갈지도.” “내가 언제 유혹을 했었던가….” “충분히. 지금도 유혹하고 있잖아, 옷차림으로.” 옷차림? 하고, 녀석의 개구진 시선을 따라 내 시선 또한 내 옷차림에 두었다. 낮은 슬리퍼식의 구두에, 짧은 청치마. 그리고 흰색 반팔 티와 조끼. 마지막으로 캡 모자. …도대체 어디…아, 청치마. 히발라미. 개새끼. “내 주먹이 날아가기 전에 눈 저리 안 치워!?”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전에도 밤에 짧은 치마 입고 왔었잖아. 보기보다 다리에 자신이 많나봐?” “어, 많다. 그래서 꼽아?” “아니 뭐, 도대체 무슨 깡으로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나 해서.” …그 말은, 지금 내 다리 굵다고 돌려서 말하는 거지? “너 내려.” “뭐?” “걸어서 와. 아니다, 아예 오지 마. 오늘 데이트 취소다, 개새끼야!” “미친, 거의 다 왔는데 뭔 개소리야?” “안 해! 안한다고! 나쁜 새끼! 그래, 내 다리 굵다!” 하고 녀석의 팔뚝을 꼬집어주고서는 시선을 창문 바깥으로 돌려버렸다. 녀석은 잠시 자신의 팔뚝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호소하다가 이내 내가 토라진 것을 알고 내 허리를 툭툭 건들며 화났냐고 묻는다. “됐어.” “야, 장난이었어. 그걸 진담으로 받아 들이냐? 어?” “남자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 은근히 상처 받는다고.” “그래, 미안해. 미안하니까 화 풀어라. 어?” 최대한 귀엽게 아양을 떨며 내가 화를 풀라고 말하는 차연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얄밉게 보였을까. 나는 몸을 틀어 녀석의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나 좋아지고 있다는 말 뻥이지.” “진짜야.” “좋아지고 있는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어? 좋아지고 있다고 해도, 분명 내가 너한테 더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는 이상은 이런 취급을 할 수가 없어.” “그럼야 나야 좋지.” 뭐라? 그럼 나야 좋지?!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나보다 더,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안 그래?” 하고 웃어 보이는 차연우. 정말 얄밉기 그지없다. 정말 택시 안이 아니라면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다 왔습니다. 5800원 나왔네요.” 그냥 확 한 대 쥐어박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침 시합장 앞에 도착했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곧, 차연우의 손에 의해 제지당했고, 차연우가 나를 대신해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꼭 이런대서만 남자인 척. “내가 내도되는데.” 하고 말하면. “이런 건 남자가 내는 거야.” 하고 대답하겠지, 역시나. “아, 역시 시합 시작했네. 으으, 어서 들어가자. 조금이라도 더 봐야 돼.” 하고 차연우를 뒤로 한 채 먼저 시합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관중석에서 사람이 제일 없고, 시합장이 훤히 보이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 권강재를 찾기 시작했다. 한 10여초 권강재의 모습을 찾았을까, 곧이어 눈에 권강재로 추정되는 놈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의 모습을 발견함과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권강재 파이팅!! 누님이 응원하고 있을게!!!!!” 권강재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관중석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언제나 관중석에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웃음으로 대답해주던 권강재가 이번만큼은 나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뒤쪽을 바라 보…, 내 뒤 쪽? 하고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 곳에는 팔짱을 낀 채 권강재를 내려다보는 차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차연우를 보고 표정을 굳히는 권강재라…, 둘이 싸웠나? 차연우도 권강재가 시합이 있는 걸 몰랐던 것을 보면…. 나는 차연우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녀석에게 물었다. “혹시…권강재랑 싸웠어?” 하고 말이다. 그러자 차연우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역시나 내 착각일 뿐이었나 보다. 그럼 권강재는 왜 그런 표정으로 차연우를 봤던 것일까. 마치 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뭐, 내 착각일 뿐이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착각일 거라고. 하지만 그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 뼈저리게 알 게 되었다. “차연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또.” 이상하다, 평소의 권강재가 아니다. 10년이 다 되가 도록 그의 농구솜씨를 지켜봐왔던 나이다. 헌데 저렇게 맥락 없이 당한 적은 처음이다. 몇 번의 저항 없이 바로 먹혀버리는 골. 설마 아직 감기기운이 남아있는 건가? 아직도 몸이 아픈 건가? “…땀 흘리는 것 좀 봐….”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내 입을 가리고 만다. 이제 후반전 시작이다. 그런데 온 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땀. 누가 봐도 그가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합 말려야 돼.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게 분명해!” “나 둬.” “차연우!” “알면서도 나간거야. 지 몸이 저렇게 될 줄 알면서도 나간 거라고. 그 만한 각오를 하고 나간 거야. 넌 그 것도 몰라?” “네가 보기에도 이건 아니잖아. 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잖아! 쟤 어제까지만 해도…, 어제까지만 해도 엄청 아픈 애였단 말이야. 아직 안 나은 게 분명하단 말이야!” 녀석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하듯 말하자, 녀석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합 말리면, 시합이 끝난 후 너는 저 녀석한테 엄청난 원망을 사게 될 거야. 그리고 후회도 엄청나겠지. 사람이 언제나 컨디션이 좋길 바랄 수는 없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어야지 발전하지. 녀석도 이 번 시합이 끝나면 얻는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걍 둬.” …무식하지만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 역시 그냥 둬야 하는 걸까? 권강재가 포기하고 나올 때까지? 아니면 시합이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는 걸까? 분명 이기고 있었다. 권강재의 팀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왜 어째서 내가 이 시합장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권강재의 페이스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을까. 단순한 내 착각일까? “…다시 미안해지잖아.” “뭐?” 중얼거리다 시피 한 혼잣말을 차연우가 듣고서는 되묻는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오로지 권강재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분명 아직 감기기운이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감기는 나 때문에 걸린 것이고…, 만약 이 시합에서 지게 된 다면 그 이유는 나 일 것이다. 꽤 많은 유명인사가 훗날 나라를 이끌 인재를 눈 여겨 보기 위해 관람을 참여했다. 그들의 눈에 띄어야 자신들의 ‘꿈’에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기회를 노리고 있던 권강재는 나로 인하여 그 기회가 사라져버린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기회는 내가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안해, 미안. 권강재 미안해.” 분명 아까 권강재의 표정이 굳어진 뒤로, 이상하리만큼 권강재의 몸동작이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몸동작도 둔해지기 시작했고, 땀도 전보다 배로 흘리기 시작했다. 얻었던 점수를 조금씩 잃기 시작했고, 어렵사리 찾아온 슛 기회마저 어이없게 날려버리고 만 권강재. 불안했다. 분명 내가 항상 응원을 왔던 시합은 멋지게 이겨냈던 권강재인데. 역전할 것이라 믿었다. 분명 끝에는 멋지게 이겨낼 것이라고. 하지만 그 것 역시 내 착각이었다. 스코어 31:63. 2배 이상이나 나는 점수 차로 권강재의 팀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어떡해.” 다시 한 번 두 손이 입을 가렸다. 시합이 끝나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권강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분명 울음을 참고 있을 것이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졌네, 결국.” “…어. 결국 졌어. 이길 줄 알았는데.” 내가 언제나 너를 응원하러 올 때면 멋지게 이겨보이던 너. 멋지게 슛을 넣고, 언제나 승리의 주역이 되었는데…, 오늘의 넌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겠지? 친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너의 꿈을 무너트려버렸어. 다른 사람도 아닌 얼마나 열심히 이 시합을 위해 네가 연습을 해왔던 것을 아는 내가. 그래서 더 원망스러워. 10년이 다 되 가도록 유지 되었던 징크스. 내 나이 18살, 권강재의 나이 18살. 깨져버렸다. 시합이 끝난 지 5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권강재를 향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권강재의 팀이 짐과 동시에 권강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징크스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주 깨끗하게. 녀석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내려 보고 있던 나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은 덜 미안할 수 있도록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 나를 반겨주기를. 나의 못된 이기심. 언젠가 한 번 너에게 부렸던 나의 이기심을,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부려볼게.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 * * 권강재의 시합이 있는 후, 빠르게 다가온 중간고사. 평소에 열심히 준비해두었던 탓에 무리 없이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차연우는 매 시험시간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져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번호로 찍었거나, 이 번호 저 번호 아무거나 찍었음이 분명하다. 이 번 시험이 끝난 후, 아무래도 특별 교육이 필요할 듯싶다. 도대체 대학교는 갈 생각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김혜미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날 시험이 끝나자 팔랑 팔랑 시험지 한 장을 들고 내게 오더니 내게 자랑스럽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설마… 네가 100점을?’하는 생각에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시험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첫째 날 시험은 화학이었다. 참고로 화학은 내가 무진장 취약한 과목이었다.) 하지만 곧, 동글동글하게 뜨고 있던 내 눈은 점점 가늘게 변했고 이내 김혜미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 “포켓몬스터!” …김혜미는 시험시간, 풀라는 문제는 풀지 않고 열심히 포켓몬스터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효빈. 효빈이는 내가 걱정할 것 없이 역시나 우수한 성적으로 하루, 하루 시험을 치고 있었다. 첫 날 그의 성적을 보고서는 ‘아, 김혜미는 거뜬히 먹여 살리겠군.’하고 말했다가 김혜미한테 열라 얻어터지고 말았다. 그 만큼 효빈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한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과목 모두가 100점이라니. 아마 이 대로 쭉 가다보면 전교 순위권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권강재. 역시나 걱정할게 못 된다. 그 역시 나처럼 평소에 공부를 해두는 스타일이기에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성적은 내가 더 좋다. 하지만…. “화학 70,2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점수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개새끼. 90점 넘었다고 째는 거냐!?” 화학은 녀석이 조금 더 뛰어나다는 점. 첫 날, 간신히 70점을 넘긴 나를 연신 놀리던 권강재는 셋째 날. 영어 시험 결과가 나온 뒤로 그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하하 하하, 58.2점? 어떻게 하면 그런 점수가 나올 수 있는 거니? 으응? 응? 어떻게 60 점도 안 나올 수 있는 거지?” “좋냐?” “어, 좋다!” “영어 빠순이.” …히발라미. 괜히 점수 안 나와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것 봐. 어째든 그래도 이 번 시험 영어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 0.1점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100점.’ 역시나 노력한 대가는 후하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렇게 좋은 컨디션으로 넷째 날 시험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시험 날은 수리와 윤리. 역시나 중요한 과목이다. 하지만 수리 공부를 하느라 윤리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나는 그날 밤, 평소보다 더 늦게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3시간 반밖에 잠을 자지 못한 나는, 다음 날 아침 그만 평소보다 집에서 더 늦게 학교로 출발 할 수밖에 없었다. “아, 히발!! 그냥 일찍 잘 걸!!” 시험기간이라 선도부 부원들은 서 있지 않지만, 대신 선도부 선생님들이 교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렇기에 시험기간에도 학교에 지각을 하면 안됐다. “이향미 스톱.” 학교 앞에 도착한 나는 조심스레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역시나 교문 앞에 서 있는 선생님께 떡하니 걸려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저 선생이라니. 유일하게 나와 안면이 있는…. “지금이 몇 시지?”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힐끔 학교 건물에 달려있는 시계를 쳐다보고서는 대답했다. “…8시 5분이네요.” “몇 시까지 등교지?” “여덟시요.” “즉 너는 시험기간에 무려 5분이란 시간을 지각한 것이 맞지?” …예예. 소녀를 죽여 주십…, 잠만. 5분? 5분이라고 했나, 지금? “잠시 만요! 선생님 지금 8시인데요?” “뭐?” “저희 학교 시계 5분 빠르잖아요! 앗싸! 저 지각 아니죠!?” 이번에도 벌점을 받게 된다면 이번 주 토요일 남아 봉사를 해야 됐었는데, 다행히도 5분 빠른 학교 시계 덕분에 간신히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인정하기 싫은 듯 끝까지 트집을 잡으시려고 했지만 더 이상 교칙에 어긋나지 않은 나를 걸고 넘어가실 수는 없었다. “수고하세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그대로 교실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생님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니 교과서가 절로 머릿속에 꼭꼭 박혀버린다. 왠지 시험 점수가 아주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역시나 시험 결과는 내 예상처럼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곧 생일이 다가오는 지금, 성적표가 나옴과 동시에 엄마에게 성적표를 내밀며 새 컴퓨터를 요구해야겠다. 이향원의 생일 날, 어처구니없게 개새끼 한 마리 때문에 날아가 버린 내 컴퓨터. 이제 곧 내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야, 이향미. 끝나고 동아리 부실로 모이란다.” “누가?” “누구긴 누구야, 그 얼빵한 선생이지.” 종례가 끝나자마자 집에 갈 준비를 하는 내게 동아리 부실로 오라고 전하는 차연우.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햇것만, 또 이렇게 초를 치는 구나. 한창 잠잠하다 했더니, 역시 조용하게 넘어갈리 없는 선생이지. 그 선생은. “알았어.” 하고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서는 가방을 챙겨들고 동아리 부실로 향했다. 동아리 부실에 도착하니 이미 종례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김혜미와 효빈의 모습이 보였다. “시험 잘 봤어?” 인사차원으로 그들에게 묻자, 김혜미는 표정을 굳혔고, 효빈은 무표정을 일관하며 ‘그럭저럭요.’라고 대답을 했다. “나 죽었다. 오늘 밤 내 인형이 모두 폐기처분이 될지도 몰라.” “왜?” “평균 50점을 넘지 못했거든.” …아, 예. 폐기처분을 당하실 만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효빈이 너는? 평균 얼마정도 돼?” “채점을 정확히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95점은 넘을걸요.” …아, 그래? 그게 그럭저럭 이야? 나와 싸우자는 건가? 간단간당하게 90점을 넘긴 나에게, 그 점수도 너무 내게 과분해서 쾌제를 지르고 싶은 나에게, 너에겐 95점이 그럭저럭 이구나. “어, 권깡. 시험 잘 봤어?” 때 마침 부실 안으로 들어오는 권강재는 한 손에 시험지를 들고 있었다. 녀석에게 시험 잘 봤냐고 물음과 동시에 내 시선은 시험지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곧 녀석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시험지 중앙에 ‘65’라고 쓰인 점수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차연우는?” “저기 들어오네. 선생님은 언제 오셔? 나, 빨리 가 봐야 하는데.” “어디 가냐?” “시험 끝났잖아. 반애들이 놀러가자고 해서.” “부럽다…, 시험 잘 본 누구는 놀 생각하고, 시험 못 본 누구는 목숨이 위태로운 인형걱정에 집에 가기도 두려운데….” 권강재와 내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김혜미가 빈정대는 말투로 툴툴 거린다. 그렇게 부러우면 공부를 좀 하시던가요. 이게 다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란다. “아,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시간이 흘러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자 선생님한테 전화를 걸어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는데, 때마침 동아리 부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 역시나 방글방글 웃고 계신다. 왠지 오랜만에 보는 듯 한 선생님의 미소. 언제나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던 그 미소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덤덤할 뿐이다. 역시나 내가 변했나 보다. 그렇게 변하고 싶어도 변해지지 않더니. “왜 부르셨어요?” 선생님도 오셨겠다, 어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에 다짜고짜 본론부터 물었다. 선생님은 소파에 앉으시며 우리에게 프린트 한 장씩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축…제 계획안?” “응! 3주 후에 우리 학교에서 가정의 달을 기념으로 축제를 열게 되었어!” “…그런데요?” …뭔가 불안하다. 불안해. 왠지 선생님의 말을 끝까지 듣게 되면 좋았던 기분이 급 하락을 칠 것만 같아…. “이걸 왜 저희들한테 주시는 건데요? 이 중요한 계획안을?” “응! 그게 왜 줬냐면!” 제발, 제발. 선생님 불안해하는 저희들의 눈을 바라봐 주세요! 저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선생님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잖아요! 제발 제가 생각하는 그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제발! “도와달래!” …히발. “무대 꾸미는 것을 도와달래!” …역시나 선생님의 입은 핵폭탄과도 맞먹을 정도다. 5월도 조용히 보내기는 글러먹었다. 제 24회 새로운 임무(?) “나, 안 해.” 제일 먼저 자신의 의사표현을 한 차연우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고, 연이어 권강재 또한 이번만큼은 정말 탐탁지 않은 듯 차연우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효빈은 동아리에 들어오고 나서 첫 봉사활동이라서 무표정을 일관하고 있는 듯 하지만 조금은 들 뜬 듯 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혜미는 집에서 가지고 온 인형의 목을 조심스레 조이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아 참참, 물론 나는 반대다. 이번만큼은 나도 전혀 할 생각 없다. “보니까 효빈이만 할 생각이 있는 듯 한데, 효빈이 데려가서 시켜요. 우리는 할 생각 없어요.” 하고 내가 말하자, 김혜미를 포함하여 차연우와 권강재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 선생님을 울상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숙이신다. 이젠 안 통한다, 안 통해. 예전의 이향미라면 무조건 오케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선생님한테서 마음이 떠난 지 오래인 내가 이런 봉사활동 따위를 할 리가 없다. 헌데…. “…향미야.” …저 처량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건 뭐냐고…. 마치 저 모습은 우리 집에 있는 그 똥킨가 뭔가 하는 똥개가 내 앞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쳐다보는 눈과 매우 유사하잖아! 먹을 것을 주면 금세 돌변하는 태도도 잊으면 안 된다. 즉, 지금 내가 넘어가면 선생님의 태도 역시 금세 돌변할 것이다. 넘어가면 안 돼, 넘어가면 안 된다. 향미야 , 안 돼. 참아. 참아야지? 참아야 해. 참아야 하는데…. “…향미야.” …진짜 짜증나. “알았다고요! 하면 될 거 아냐!” 결국 또 다시 넘어가버리는 나이다. 아직은 선생님의 표정 하나, 하나에 약한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래도 언젠가는 흔들리지 않는 날이 오겠지. “너희들도 해라? 나랑 한효빈 둘이서는 무리인거 알지?” 하고 김혜미를 포함해 사내 녀석 둘에게 협박 식으로 말했지만 녀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오호라,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권강재, 네 시험점수 아줌마한테 지금 문자로 날려버린다.” “야!” “차연우, 너 알바시간에 농땡이 친 거 동영상으로 찍어놓은 거 알지? 나 그거 아저씨한테 보여드려서 월급에서 깎이게 만들어 버린다.” “이향미, 너!” “김혜미,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까먹고 두고 간 인형만 해도 한 박스 넘는 거 알지? 그 중에 네가 제일 아끼는 인형도 하나 있는 거 알지? 나 그거 오늘 우리 집에 서식하고 있는 개새끼한테 장난감으로 줘버린다.” 하고 마지막 협박을 끝내자 김혜미는 얼굴을 굳히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한다. “…비겁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욕 하지 마.” “뭐?” 지금 뭐라는 거야, 얘? “걸어온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나, 노래 부른 거다? 절대 반박한 게 아니야.” …분명 ‘비겁하다.’라고 말할 때는 음이 없었어. 김혜미 은근슬쩍 넘어가주는 센스가 아주 죽이는 구나? “어찌됐건 모두 다 참여한다고 하네요. 그럼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뭘 해야 되는지.” “응! 그러니까!…어? 이상하다….” 무언가 설명을 하려는 듯 축제 계획안 프린트를 넘기시는데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선생님. 그러더니 이내 머리를 긁적이시며. “…잘 못 복사해 왔다.” 하고 말하시는 게 아닌가. 정말… 선생질하신지 (교생시절을 포함하여) 해로 3년이 다 되가는데 도대체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니. “선생님 책상에 프린트 있는데, 그거 향미가 가져다주면 안 될까?” …또 나야? “저 혼자 갔다 오라고요?” “음, 그럼 효빈이랑 같이 갔다 오면 되겠다. 효빈아 향미 따라가서 프린트 같이 가져와~!” 당신이 직접 갔다 오라고요! “네.” 하지만 이미 효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을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효빈과 함께 동아리부실을 빠져나와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까지 그리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 어색하기에 은근슬쩍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았다. “효빈아, 혹시….” “네.” …물어봐도 때리지는 않겠지? “혜미랑 사귀니?” …지난 번 이후로 김혜미와 한효빈 사이의 일은 들은 게 없어 둘의 사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나였다. 게다가 나 또한 일이 많아서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말이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고백은 해봤어요.” “해봤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당연히 거절당했습니다.”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효빈. 고백하는 효빈의 모습과 고백을 거절하는 김혜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효빈이 저러한 표정을 짓는지도 이해가 갈 것만 같다. “설마 맞았어?” “네.” “인형으로?” “잘 아시네요.” …나, 너무 똑똑한 것 같아. 아, 자랑스러…울 때가 아니지. 역시나 김혜미 거절했구나. 하긴 연애에는 미숙한 아이니까. “네가 이해해. 걔가 연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애라서….” “건빵 한 박스.” “어?” “사다주면 생각해보겠대요.” 건빵…한 박스를 사다주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고? 김혜미가 건빵을 좋아했었나. “그래서 사다 줄 거야?” 하고 효빈을 향해 묻자,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한다. “사다 줄 거였음 지금쯤 사귀고 있었겠죠.” 그 말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거구나. “왜? 좋아하면 그냥 한 박스 사다주고 사귀면 되잖아.” “아직은 건빵 한 박스가 더 소중하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내가 프린트 가지고 나올게. 기다리고 있어.” 하고 교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 프린트를 가지고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가지고 나온 프린트를 반반 나눠 나란히 동아리 부실로 향하는데, 동아리 부실에 가까워졌을 때쯤 김혜미의 커다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 순간 효빈과 나는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 조금 전보다 빠르게 동아리부실로 향했다. 그런데…. “뭔데…, 이건?” 어째서 소파에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모자랄 판에, 남에게 심부름을 시켜놓고 지금 단체로 뭐하는 짓인데? “효빈아 네 눈에는 저 사람들이 뭐하는 거로 보이냐.” “게임인 것 같은데요. 제품명은 닌텐도 디 에스. 핑크색.” …그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고. “멍청아!! 거기서 피카츄를 내보내면 어떡해! 너 오랜만에 나와 갈등한 번 빚어볼래, 차연우? 뇌세포가 하나씩 가출하는 느낌을 느끼게 해줄까?!” 그랬다, 효빈과 내가 프린트를 가지러 간 사이. 선생님은 어디로 가신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으셨고, 녀석들은 김혜미와 차연우. 그리고 권강재 이렇게 2:1로 편먹고 게임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녀석들은 대전을 하고 있는 듯했다. 권강재가 여유롭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권강재가 이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나봐, 이 꼬꼬마야!” 계속해서 지고 있는 차연우가 답답했는지, 김혜미는 차연우의 게임기를 빼앗아 들고서는 크게 외치며 무한 클릭을 하기 시작했다. “질 수 없다, 리자모옹!!!” …오타쿠 같은 새끼. 맨날 컴퓨터만 키면 포켓몬스터만 하더니, 아주 날 잡았구나. “효빈아, 저래도 김혜미와 사귀고 싶어?” “저는 디지몬 어드벤처를 더 사랑해요.” …가지 가지하네, 진짜. “혜미선배도 디지몬을 사랑할까요?” 글쎄다. 근데 디지몬이나 포켓몬이나 다를 게 뭐야? “디지몬이랑 포켓몬이나 그게 그거지. 도대체 차이점이 뭐야? 둘 다 괴물 같은 게 기어 나와서 쌈질하는 거 아냐?” “다릅니다.” 그러니까 뭐가 다르냐고. “뭐가 다른데? 내가 보기엔 똑같기만 하고만.” “디지몬은….” 디지몬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이는 한효빈. 괜스레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헌데 곧 효빈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나는 괜히 들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디지몬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차이점이야? “대단한 걸. 아주 놀라운 사실이야.” “어찌됐건 지금은 저 세 사람을 말리고 선생님을 찾아 모셔 오는 게 급선무 인 것 같은데요.” “그래, 아무래도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이 막 드는 참이야. 네가 선생님을 모셔올래? 내가 쟤들을 말릴게.” “누나 혼자로는 벅찰 듯싶은데요. 저는 혜미선배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그거야 네가 김혜미를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것이고. 나라면 이야기가 틀려지지. 쟤를 안지 벌써 5년짼데, 저거 하나 통제 못 할까봐? “닥치고 어서 선생님이나 모셔와. 그리고 내 생각에 저 닌텐도 중 하나는 선생님 것이라고 추정된다. 안 오시려고 하거든 저 것 같다가 협박하면 오실 거야. 자 어서 가!” 하고 효빈을 동아리 부실 밖으로 떠밀다 시피 내보내고 난 뒤 다시 시선을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세 사람에게로 옮겼다. “그만 좀 하지?” …아무 반응도 없음. “그만 좀 하지?!!?!?” 소리쳐도 아무 반응 없음.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아무리 큰 소리로 소리쳐도 김혜미가 귓구멍을 손으로 후벼 파는 정도? 아주 게임과 동화가 되어 버렸구나. 되어버렸어.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다 죽었어, 하는 심산으로 달려들었는데. 분명 저 게임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자리에 앉히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는데 어째서. “쟤 뭐야?” “걍 버려.” 왜 내가 닌텐도를 들고 앉아서 하고 있는 건데…. “하하…. 이게 은근히 재미있네??” 그랬다. 그렇게 비웃었던 게임이 은근히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게임기를 빼앗으려고 다가갔는데 내 눈에 들어온 화면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어느 새 차연우의 게임기를 빼앗아 권강재와 열심히 한 판 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혜미와 차연우에게 나무란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나 역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권강재에게 소리치고 있었다.…봐달라고. “저거 산지 얼마 안됐는데.” “포기하고 하나 사는 게 더 빠를 걸? 저 손놀림을 봐. 금방이라도 부술 기세야.” 그렇게 김혜미와 차연우의 투덜거림을 배경음악삼아 열심히 게임삼매경에 빠져있는 나, 그리고 역시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권강재. 그 때 누군가가 동아리 부실의 문을 ‘똑똑’하고 노크를 하며 동아리 부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일제히 모두다 고개를 돌리자 1학년 명찰을 달고 있는 한 여학생이 프린트 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내 눈이 정상이라면, 절대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프린트 물 상단에는 ‘2008 축 제 계 획 안’ 이라는 문구가 떡 하니 박혀 있었다. 헌데 어째서 한효빈과 선생님이 들고 왔어야 할 프린트 물이 저 여학생이 들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해 여학생이 알아서 의문점을 해결해주었다. “저 영어선생님이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한효빈은 어쩌고 그걸 네가 가져와? 선생님은 뭐하고 계시는데?” “지금 교무실에서 이야기 하고 계시던데요, 효빈이랑.”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데 그 중요한 걸 다른 사람한테 시킨거냔 말이야.” 또 슬금슬금 내빼셨군.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여학생을 향해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야, 너 왜 그래? 귀여운 후배님이 겁먹으셨잖아.” “여자친구 앞에서 잘 하는 짓이다, 차연우?” “아아, 맞다. 너 질투 심했지. 미안. 내가 잊어먹고 있었다.” “어쨌든. 내 질문에 대답 좀 해봐.” “학부모님들께서 떡을 사가지고 오셨나 봐요. 선생님이랑 나란히 앉아서 드시고 계시던데.” …그러니까 즉, 우리한테 이 말도 안 되는 일 시켜놓고 교무실에서 맛있는 떡을 잡수시고 계신다는 거지, 지금? 한 술 더 떠 한효빈까지 거기에 눌러 앉았다 이거고? “프린트 내려놓고 가. 가져다줘서 고마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학생이 동아리부실을 나가자마자 여학생이 두고 간 프린트 물을 들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담당 신재원 선생님. 장기자랑 홍보, 무대 조명, 무대 뒤 정리 및 소품 정리. 리허설하기 전 무대 디자인 검토. …하고 뒷정리까지? 우릴 청소부 취급하는 거야, 뭐야!?” “그 것보다 선생님 성함 옆에 쓰인 거 보여? 나는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 “선생님 성함 옆에?” 김혜미의 말에 선생님 성함 옆에? 하고 시선을 옮기자 동아리 ‘S’ 라는 문구가 보였다. “이게 뭐야?” “우리 동아리 부서 이름쯤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S’가 무슨 의미냐고.” “신재원 선생님의 신?” 에이 설마. “섹시한 사람들의 모임?” 그건 말이 안 되거든, 차연우. 네 눈에는 김혜미가 섹시해 보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을 녀석을 한 번 째려봐주고서는 다시 프린트 물로 시선을 옮기려고 하는데 굳게 닫혀있던 권강재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흘러 나왔다. “Special.” …특별한?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Special.’ 이라고.” “넌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에 이 부서 들어왔을 때 들었었어.” “특별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거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혜미가 권강재에게 묻자, 권강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일이 가득한 모임.” 특별한 일이 가득한 모임…. “특별한 추억들을 만들 모임.” 특별한 추억들을 만들 모임이라. “지랄. 학교 뒷바라지 하는 게 퍽이나 특별한 일이고 특별한 추억이겠다.” “나 그럼 이만 일어나본다. 약속 있어서.” 권강재가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농구연습이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약속이 있는 걸까. “오늘 우리 엄마가 아줌마랑 저녁 약속 있다고 했는데, 너 안 나와?” “어. 약속 있어.” “저녁인데도? 뭐야, 무슨 약속이기에? 술 약속?” 오랜만에 아줌마, 아저씨와 함께 저녁 먹는 것인데, 권강재가 빠진다고 하니 약간의 섭섭함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매일 학교에서 만나는 사이이지만 말이다. “알 거 없잖아?” “그야…. 근데 너 꽤나 까칠하다? 대답이?” “기분 탓이겠지. 나 먼저 가볼 테니까 알아서들 해라.” “잘 가라.” 아무 이유 없이 까칠하게 굴 녀석이 아닌데, 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녀석은 이미 차연우의 인사를 받으며 동아리 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이만 가자? 어차피 오늘 당장부터 할 일도 아닐 테고.” “그러지 뭐. 김혜미, 너 바로 집으로 갈 거야?” “그 발언은 뭐지, 이향미? 내 성적이 어떤지 알면서 지금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아, 맞다. 시험 개 망했지. 인형들의 몽땅 폐기처분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나. “그래? 오랜만에 너희 집 좀 놀러가려고 했더니.” “우리 집이 놀이터야? 먹을 거 없그든? 그리고 너희 반 애들이랑 술 약속 있다며.” “그거야 밤늦게고.” “저녁에 강재 네랑 너희 네랑 약속 있다며.” “술 약속은 더 밤늦게지, 멍청아. 어째든 못 놀러 가면 됐어. 집에 가서 짜져있던가 해야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차연우와 함께 동아리 부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김혜미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서는 가식이 묻어난 미소로 내게 말한다. “누가 오지 말랬니. 그냥 나는 걱정 되서 한 소리였지. 가자, 우리 집으로. 나도 오랜만에 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한잔 나누고 싶구나.” “솔직하게 말해. 내가 가면 아줌마가 성적 이야기 안 꺼낼 것 같아서 갑자기 돌변한 거잖아, 너.” 내 말이 정곡을 찌른 건지, 김혜미는 말을 더듬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가방을 들고 어서 가자며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차연우의 손이 김혜미의 손에 의해서 떨어져 나가자, 차연우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김혜미를 쳐다보았다. “뭐.” “쟤 내 여자친구거든?” “이향미 내 친구거든?” “내가 먼저 잡았다.” “그래서 모? 너 나랑 우열을 한번 다퉈볼래?!” 나를 가운데 두고 말씨름을 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 하지만 곧 차연우의 멱살을 잡으며 머리를 박을 기세인 김혜미의 모습에, 차연우는 기겁을 하며 김혜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치사해서 나 혼자 간다. 됐냐?!” “어. 잘 가. 영원히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주길 바라.” “너나.” 김혜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사라지는 차연우. 그리고 동아리부실을 뛰쳐나가 복도를 빠져 나가려고 하는 차연우를 향해서 양쪽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소리치는 김혜미. 정말 쪽팔린다. 저런 것도 친구라고. 아직 복도에 1학년들도 많은데 저러고 싶을까. “그만하고 집에 가자, 김혜미.” “월요일 날 죽었어. 넌 저런 게 뭐가 좋다고 사귀어!?” “그러는 넌 한효빈이 어디가 좋은데?” “…시, 시, 시밤!! 내가 언제 좋다고 했냐!? 어? 나 걔 싫거든? 날 건빵 한 박스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고!” 역시 시험 삼아 한효빈에게 말한 것이군. 사귀려면 건빵 한 박스를 받치라던 그 말은. “차라리 인형 한 박스를 사오라고 하지. 그러면 좀 더 가능성이 있었을 것을.” “닥쳐!” “하필이면 건빵을 요구하냐, 넌?” “닥쳐!” “싫어.” “닥쳐!” “자꾸 닥치라고 해봐라?” “닥쳐!” “너희 집 안가.” “닥치고 내 말 들어♬ 나 너보고 닥치라고 한 거 아니다? 난 노래를 불렀을 뿐이야. 봐봐~.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말 달리자~.” “시끄러.” 하여간 둘러대는 건 잘하지. 이번에도 너의 ‘닥쳐’소리에 음이 없었다고. 하고 얘기해봤자 내 입만 아플 테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 다물고 무시하는 게 최선이다. “말 달리자아!! 말 달리자아!” 아, 귀도 막고. * * * 같은 시각, 학교를 빠져나가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인다. “늦었네.”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멈추더니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핸드폰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 나 도착했다, 권강재. “알아. 어디야? 아직도 공항이야?” - 어. 너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미친놈. 안 오면 그냥 좀 가지. 뭣하러 기다리냐.” 강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자리 잡혔다. - 구라야, 새끼야. 내가 미쳤다고 30분 넘게 그 자리에서 널 기다리고 있겠냐. 집에 왔어. 넌 어디야? “가고 있는 중. 막 학교 끝났다.” - 그럼 우리 집으로 와. “텅 빈 집에 가서 뭐하라고?” - 집 정리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어느 덧 강재는 버스 정류장 앞까지 이르렀고, 이내 자신의 앞에 선 버스에 올라타며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나갔다. “4년 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런 부탁을 하고 싶든?” - 4년 만에 만난 친구라도 어제 만난 친구 같으니까 부탁하는 거다, 인마. “새끼, 아부는. 밥은 먹었고?” - 왜, 안 먹었음 올 때 사 오시려고? “너 먹을 것 말고, 나 먹을 것.” - 오냐, 너 먹을 것 많이 사와라. 남은 거 나 좀 얻어먹게. “그래, 많이 사가 마. 예전 살던 집 그대로지?” 창 밖을 응시하던 권강재는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소리에 급정거 버튼을 누르고서는 버스에서 내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전화통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 내일 쯤 오실 거야. 나 먼저 왔다, 너희들 보고 싶어서. …이향미는 잘 지내지? “네 눈으로 직접 봐.” -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언제, 어떻게 만나면 좋을지 고민 좀 하고 있었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할지, 아니면 직접 찾아갈지. “편하실 때로. 나 너희 집 앞이다. 문 열어라.” - 어, 벌써? 기다려! ‘기다려’라는 소리와 함께 남자와의 전화통화는 끝이 났고, 강재는 누군가의 집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찰칵-’하고 문이 열리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강재를 환영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권강재!” 아니, “오랜만이다, 강우재.” 4년 만에 재회하는 그의 친구의 모습이. 댓글 0개 이 글을...(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덫》 25 ~ 312008.06.26 아랫글 : 《덫》 15 ~ 外 1-32008.06.26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우리들만의매력,모델팸☜ cafe.daum.net/Ueolzzang7 음식(비공개) | 회원수 15,507 카페정보가입 0 방문 22 새글 2 카페지기하늘에별따기 개설일2006.02.22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플레이 대기중 -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2) 숨기 노을뱅이♡<나>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25 ~ 31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550 08.06.26 23:00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61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제 25화 another story. 김혜미의 손에 이끌려 거의 반 강재로 도착한 김혜미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서 계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지만, 나보다는 아주머니께서 더욱 당황하신 듯싶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와 나와는 달리 김혜미의 입가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승자의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혜미는 아주머니가 따로 부르실까 두려워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숨 좀 돌리자!” “봤어? 우리 엄마 손에 그 야구 빠따! 내 성적을 직감하시고 대기타고 계셨던 거야. 너 가면 난 죽은 목숨이다. 너 오늘 나 잘 때까지 있어주면 안되겠니? 아니, 오늘 자고 갈래?” “아까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었냐? 저녁에 외식 있고, 더 늦은 저녁에는 반 애들이랑 술 약속 있다니까.” “내가 중요해, 너희 반 애들과의 약속이 중요해!?” “술이 중요해.” 김혜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더니 어디론가 가더니 무언가 잔뜩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인형들.” “…이게?” “어. 끝내주지. 진짜 하나같이 매력덩어리라니까? 딱 보고 반해서 질렀잖아.” “하나같이 매력덩어리라고?” …어딜 봐서? “제일 큰 얘는 매운 고추냉이, 얜 당근, 마지막으로 쟨 무우.” “김혜미.” “응.” 네 눈에는 저 끝에서부터 제일 큰 인형인 그, 뭐냐. 그래 매운 고추냉이하고 당근하고 무놈하고 구분이 가니? “다 똑같이 생겼잖아!! 크기하고 색만 다르잖아!” “뭐가 똑같아? 봐봐, 고추냉이는 조금 더 날렵하게 생겼잖아. 우리 무 봐봐, 걸어 다닐 때 ‘뽁, 뽁, 뽁’하고 소리가 날 것만 같지 않니?” 전혀. 내 눈에는 죄다 인삼뿌리같이 보이거든. “창문열고 밖으로 다 던져버리기 전에 눈앞에서 이 인삼뿌리 같은 것들 좀 치워!” “헐, 야만인!” “닥쳐. 거지같은 게 누구보고 야만인이래?” 김혜미의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꼬며 김혜미의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내 발에서 느껴졌다. 말캉하고 털이 많은…. 털이 많은?! “이거 뭐야!!!!” “어! 우리 토토가 또 탈출을 시도했다!” ‘토토?’하고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그 무언가를 꼭 껴안아버리는 김혜미. 김혜미의 팔 사이로 삐져나온 긴 귀 두 개가 보였다. “…토끼?” “응! 우리 토토야! 최근에 구입했어.” “방에다가 토끼 키워?” “아니, 우리 토토가 비장의 기술인 방충망 뚫기를 사용한 것 같아.” 즉, 베란다에 키우는데 저놈의 토끼새끼가 이빨로 방충망을 뚫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거군. 어쩜 저리도 주인을 닮았을꼬. “암컷?” “노노, 수컷임. 귀엽지? 너희 집에 있는 강아지보다 귀엽지?” “적어도 우리 집 개새끼는 방충망 따위는 뚫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토토가 대단한 거지!” 퍽이나. 그게 대단한 거야? 귀찮고 쓸모없는 거지. “됐고, 나 배고파. 먹을 것 좀 주라.” “집에 가서 먹어.” “정말?” “어.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너 먹을 거는 있겠니?”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좋아, 나 그럼 이만 가볼게. 배가 고파서 말이야. 너는 아주머니와 열심히 면담을 나누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김혜미의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김혜미가 토끼를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내 팔뚝을 잡으며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시 앉히며 말한다. “…없으면 사와야지. 그렇지? 사올게. 너는 여기서 편안히 기다리고 있어.” 하고 토토를 껴안고 밖으로 나가는 김혜미. 하지만 곧 아줌마의 ‘안 치워!?’하는 고함소리에 방에 토토인가 뭔가 하는 토끼새끼를 던져놓고 다시 나가는 김혜미이다. 하여간 여기만 오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먹을 것을 한가득 들고 온 김혜미는 마음껏 먹으라는 듯 내 앞에 먹을거리를 내려놓으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토끼를 안고 내 앞에 앉았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따위 지껄이지 마.” “티 났어?” “어.” 네 눈에 보일 정도로 티 났다면 그건 정말 티가 난 거겠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김혜미한테 물어볼까. “그나저나 너 한효빈한테 고백 받았다며.” “풉!” 여유롭게 주스를 마시고 있던 김혜미는 내 질문에 깜짝 놀란 것인지 주스를 다시 그대로 뱉어버린다. “더럽게.” “누, 누가 그래!” “누구긴 누구야. 당사자한테 들었지.” “한효빈이 그랬다고!? 그 꼬꼬마 새끼가!?” “그래. 근데 넌 왜 거절한 거야?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는 또 뭐고? 건빵 한 박스? 너 건빵 장사라도 하려고 하냐? 평소에 싫어하던 건빵을, 그 것도 한 박스씩이나 요구를 왜 해? 차라리 인형을 사달라고 하지.” “내가 건빵 한 박스만한 가치도 없다는 거잖아. 자존심 상하게.” 김혜미는 입가에 묻은 주스를 휴지로 훔치며 토라진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호, 그러니까 한효빈한테서 가장 소중한건 건빵이고. 그 소중한 것을 한 박스씩이나 요구했을 때 그 때도 자기를 택하면 받으려고 했다. 뭐 이런 뜻이네, 그 말은? “가져왔다면 사귀었겠네?” “그건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결정할 일이고.” “효빈이 귀엽잖아. 애가 풋풋한 게 너랑 달리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어딜 봐도 너보다 뒤처지는 구석이 없는데 그냥 받지 그랬니.” “그 점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이야.” …별게 다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꿈이 선도부가 뭐야? 너 알지? 우리 학교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집단이 선도부인거. 내 인형만 해도 수십 개를 접수해간 집단이라고! 그런 집단에 드는 게 꿈이라니! 최악이야.” “그거야 네가 학교에 인형만 가지고 안 왔어도 안 뺏기잖아.” “그래서 너는 벌써 수십 개의 액세서리를 그 곳에 받쳤니.” “닥쳐. 나중에 다시 돌려주신다고 했었어.” “나도 나중에 다시 돌려주신다고 했었어. 그나저나 너나 이야기 해봐.” 나? 내 이야기? “무슨 얘기? 그리고 왜 말 돌려! 한효빈이야기 하는데, 왜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하재?” “무슨 이야기를 더 해? 이미 게임 종료구만. 그리고 너야말로 권강재랑 어떻게 된 건데?” …헐. 왜 갑자기 권강재 이야기가 나오는데? “뭔 소리래.” “내가 아무리 하는 짓이 병신 같다지만 너도 알다시피 눈치하나는 빠르거든. 더불어 너랑 권강재랑 안지만 해도 3년째야. 그거 하나 모를까봐서? 너희들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눈치 까고 있었다고.” “구라까지 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은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이거든.” “말 돌리지 마!” 말 돌리는 게 아니라 사실인 걸 어쩌라는 건지. 그리고…나도 할 말이 없는 걸. 권강재와, 나 사이는. 물론 그 때 술 마신 날을 시작으로 예전과 같은 사이를 유지 할 순 없었다. 물론 비 오는 날, 권강재가 내게 했던 말 때문에 피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더불어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오버도 떨고 있으니. “너랑 차연우 사이보다 너랑 권강재 사이가 더 수상해 보이는 거 모르지.” “뭐?” “까 봐. 뭐야? 둘이 무슨 썸싱 있었어? 드디어 생긴 거야!?” “뭐가 드디어야! 평생 없을 거야!” “왜? 너 모르지? 차연우보다 권강재가 더 잘 어울리다 는 거.” “그 소리 차연우 앞에서 하면 너는 끽이야, 김햄. 아마 네 입 속에 수십 개의 햄을 처박아 줄 걸? 그리고 왜라니.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뭐?” 맞다. 너는 모르구나…. 4년 전, 권강재와 했던 약속을. 굳이 그 약속을 김혜미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권강재는 친구니까.” “에게. 그게 이유야?” 응. 내겐 가장 중요한 이유야. 친구니까. 친구여야만 하니까. “그리고 권강재나 나나 서로 이성으로썬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들인데 왜 괜히 호들갑이야?” “그거야 네가 잘 못…!” “됐어. 너 거기서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나 그대로 집으로 가 버릴 거야.” “협박은 수준급이지.” “누구 덕에.”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게임하자. 내가 이번에 새로운 게임을 찾았는데 끝내준다.” 금세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알아서 말을 돌려주는 김혜미. ‘역시 단순하다니까.’ 하고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는 다시 ‘차라리 권강재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다.’하고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이건 또 뭐야?” “일본에서 한창 유행인 게임이야.” “네 캐릭터는 쟤야? 저 농부?” “어. 빗자루타고 날아다녀.” 어느 게임에서 농부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녀? “이거 뭐하는 게임인데?” “농사짓는 게임.” …하하. 참 신선하다. 차암 신선해. 이 할 짓 없는 게임을 왜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농사짓고 싶으면 집 앞에 밭을 만들던가. 난 또 한 몇 시간을 이렇게 쓸 때 없는 곳에 소비하게 되겠구나. 게임에 한창 빠져있는 김혜미의 모습을 보며 정말 ‘괜히 왔다.’라는 생각을 수십 번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하루하루가 심심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한심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 * * 3시간 후, 저녁 외식 약속을 위해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김혜미를 뒤로한 채 집으로 냉큼 달려온 나는 오랜만에 하는 외식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 한번 깜박하지 않으며 들어오는 이향원이 보였다. 사내새끼가 숙녀 방문을 벌컥 벌컥 열며 들어오다니, 그래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거지같은 게, 숙녀 방에 들어올 땐!!!” “슴가도 작은 게 어디서 숙녀를 거론해?” …그 한마디를 입 속으로 쏘옥 넣어버리게 만드는 녀석. “닥치고 왜 들어왔어.” “핸드폰 충전기 가지러.” “네 거 어디다 두고?” “학교에 두고 왔다.” 미친, 그걸 왜 학교에 두고 다녀! 나도 충전해야 되는데! “30분만 쓰고 넘겨, 나도 해야 돼.” 대답하기도 귀찮은 건지 손가락으로 ‘ㅇ’ 모양을 만들며 방을 나가려는 이향원. 하지만 곧 무언가 생각났는지 이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맞다. 나, 집에 오다가 강재형 봤다.” “나도 학교에서 봤거든? 그게 그렇게 자랑하고 싶든?” “병신. 말 좀 끝까지 듣고 지껄여. 강재형 누구랑 있었는지 알아?” “누구랑 있었는데? 여자?” “형이 언제 여자랑 단둘이 돌아다니는 거 봤어? 형이 너 같은 줄 아냐?” “이게 곱게 대답만 하면 될 것이지 왜 시비야?!” “됐고. 귀국했더라, 그 형.” “귀국했다니?” “우재형.”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우재형 귀국했나보더라고. 강재형이랑 시내 돌아다니고 있던데.” “강우재…말하는 거 아니지?” “내가 아는 형 중에 ‘우재’라는 이름을 가진 형은 그 형 밖에 없거든.” …하하, 말도 안 돼. 강우재가 귀국했다고? 강우재? “나가.” “이건 알려줘도 지랄이야.” “나가라고!!” “나간다, 나가. 저것도 누나라고. 아이고 내 팔자야.” 방문이 ‘쾅’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닫힘과 동시에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권강재, 이 배신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권강재는 오늘 강우재가 귀국한다는 것을 알고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가버린 것이다.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식을 전해들을 내가 충격을 먹을 것을 알면서도 녀석은 끝까지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은 것이다. “왜.” 왜 돌아온 거지. 아니, 왜 하필이면 지금인거지. 내게 다른 남자가 생겼을 때, 권강재와의 사이가 많이 어색해진 지금. 왜 나타 난 거지, 강우재. “언제나 너는 타이밍을 잘 맞추었지.” 이번에도 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났네. “가만두지 않겠어.” 권강재한테 허튼 소리를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강우재.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강우재’ 잊고 싶었던 아이. 내가 살아온 18년 중 10년을 가까이 함께 했던 아이. 그 10년이란 세월을 잊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던 아이가 다시 나타났다. 이젠 난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요 근래처럼 없던 사람인 것냥 살면 되는 것일까? 멈추었던 심장이 거세게 뛰어댄다. 반가움일까, 원망일까, …다시 찾아온 설레임일까? 기대하고 있던 저녁약속과 친구들과의 약속까지 취소할 만큼 ‘강우재의 귀국’은 내게 큰 타격을 가지고 돌아왔다. * * * “그러니까 학교에서 준 인형 탈 있잖아. 그걸 우리가 쓰고 홍보를 하면!” “닥쳐, 김혜미. 그냥 학교에서 사줄 인형 탈을 나중에 슬쩍 하고 싶다고 말을 해.” “어, 사실 그래. 슬쩍 하고 싶다.” 동아리부실에 둘러 앉아 3주 후에 있을 축제에 대하여 나름 고민 중인 우리들. 하지만 1시간 째 회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권강재 그만 자!” 소리쳐도 꼼짝 않고 자고 있는 권강재하며, “차연우 어깨 빼버리기 전에 얼굴 안 치워?” 내 어깨에 기대어 게임 중인 차연우하며, “오도독-, 오도독.” “효빈아. 그 건빵 좀 어떻게 그만 먹으면 안 되니?” 건빵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한효빈까지. 아, 아니다. “인형 탈 그냥 우리가 가져오면….” 인형 탈에 미련을 못 버린 김혜미도 포함이다. 도대체가 하나같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만 할 뿐이다. 제대로 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니. 정말 이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청소만 맡으시지, 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죄다 맡아 오셔서는. 우리를 이렇게 고생을 시키냔 말이야! “됐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어차피 이번 주까지 하면 되니까.”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나 이만 갈게. 안녕, 오늘 새 인형이 들어오는 날이라서.” “어, 제발 사라져라.” “저도 이만 가볼게요. 과외가 있어서요.” “그래, 다음에 올 때는 건빵은 가져오지 말고.” 들은 척도 않고 김햄 뒤따라가는 거 봐라. 너도 김혜미랑 다를 바 없었어, 한효빈. “권강재, 너도 어디 갈 때 있어? 나랑 같이 가. 나 집에 갈건대.” “약속 있어.” “무슨 약속?” “그런 게 있어. 있다가 내 방으로 건너오기나 해. 줄 거 있어.” “줄 거? 알았어. 한 10시쯤 가면 돼?” “아니, 아홉시쯤? 여튼 나 먼저 간다.” 뒤이어 가방을 들고 동아리부실을 나가버리는 권강재. 이로써 동아리부실에는 내 어깨에 여전히 기대어 게임 중인 차연우와, 나. 단 둘만 남은 셈이다. 웃긴 건, 권강재가 나가자마자 벌떡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보는 차연우의 모습이라는 거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둘만 남았다.” “그런데?” “와, 너 긴장도 안돼? 단 둘만 남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들과 자주 어울려 놀아서 그런지 난 남자와 단 둘만 있다는 거에 긴장하고 가슴 떨리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결국 이번에도 차연우가 바라는 상황은 나오지 않을 듯싶다. 지난 번 영화관처럼 말이다. “전혀.”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말하지만 난 너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다는 것뿐이지.” “그게 그거 아냐!” “그게 그건 아니지.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우리도 그만 나가자.” “데이트 하러?” …아니, 집.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차연우의 모습에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원한다면 데이트하러 가지 뭐.” “어디 갈까? 달나라? 별나라? 응? 어디로 갈까?” “너 여자에 굶주린 애 같아.” “굶주렸어. 지난주에 한 번도 데이트 안했잖아! 매일 나 버리고 가버렸잖아, 이향미.” “그거야 시험기간이라서….” “그런 걸 바로 비겁한 변명이라고 하는 거다.” 시험 점수가 왜 그렇게 나왔냐는 내 질문에 ‘시험지가 날 거부했다.’라고 했던 너의 대답도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 거니? “나가자.” 손을 잡으라는 듯 내게 손을 내미는 차연우. 나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렇게 내게 내밀었던 손 하나가 문뜩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렇게 내밀었었지. 영영 놓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결국에는 놔버렸지, 넌. 나를 버리고, 다른 이를 택했지. 지금 내가 잡은 이 손도 언젠가는 나를 놓게 될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차연우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자신이 먼저 내 손을 잡아버린다. “꼴에 여자라고, 잡아주길 바라다니.” “그런 거 아냐.” “이제 와서 말해봤자 믿지도 않아.” 그래, 이제 와서 말해봤자 믿지 않겠지. 그 때 그렇게 멍하니 강우재의 손을 쳐다봤던 건, 이 손이 나를 놓으면 어쩌지 하는 그런 불안함 때문이었다고. 지금처럼 기다림에 지쳐 내 손을 먼저 잡았던 강우재로 인하여 그 불안함은 더 커져만 갔다는 거. 내가 잡은 게 아니라 그 애가 잡았던 손이기에, 지금 역시 내가 아닌 차연우가 잡은 손이기에 언제고 내가 놓고 싶어도 차연우가 먼저 놓을 수도 있기에 지금 역시 불안함이 밀려오고 있다는 거. 차연우 너 역시 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 그저 핑계일 뿐이라며 또 웃어버리겠지. “진짜 달나라로 갈 거야?” “원한다면.” “정말?” “원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가주지, 까짓 거. 어디가고 싶은데?” “라스베가스.” …얼굴 굳히는 거 봐라. 원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가주겠다며 왜 얼굴을 굳혀? 말만 뭐 있어 보이게 하는 거야? “농담이고, 초등학교 가고 싶어.” “초등학교? 어느 초등학교?” ‘연인’보다는 ‘친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렸던, “내 모교.” 우리들의 추억이 가득했던, “데이트 코스로 처음가보는 곳이긴 하지만, 뭐. 근데 뜬금없이 거긴 왜?” 우리 셋이서 즐거웠던, “그냥, 갑자기 가보고 싶어지네. 갈 수 있지?” 그 시절로 가보고 싶어. 하지만 너는 들어줄 수 없는 곳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그 곳에서 너와의 추억을 쌓고 싶어. 그 기억들을 잊을 수 있도록.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라면 기억조차 할 수 없도록. 그럴 수 있지, 차연우? “네가 원한다면.” 제 26화 4년만의 재회. 지금까지처럼 중간고사가 끝난 주는 여느 때와는 달리 시간이 빠르게만 지나갔다. 더불어 축제준비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시간이 빨리 지나갈 수밖에. “어, 문자왔다!” 동아리부실에 둘러 앉아 아이디어 구상을 하고 있는 나와 김혜미. 그리고 차연우. 물론 차연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소파에 누워 방해되지 않게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뿐. “문자 오니까 그리 좋든?” “백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하는 문자가 내게 왔다고!” “그거야 네가 평소에 문자를 보내지 않으니까 안 오는 거 아냐.” “닥쳐. 돈 아까워.” 문자 쓰는 돈은 아깝고 쓸 때 없는 인형 사는 돈은 안 아깝든? 문자 한통에 고작 얼마나 한다고. 혀를 끌끌 차며 하던 것을 마저 하려 하는데. “디지몬!!!!!!!!!!!!” 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고 외치는 김혜미 덕에 깜짝 놀란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그만 바닥에 몽땅 놓쳐버리고 말았다. 히발라미. 다 정리해 둔건데. “죽인다, 너! 깜짝 놀랐잖아! 문자 보다가 갑자기 생뚱맞게 디지몬은 왜 외쳐!” “문자가 와서.” “문자랑 디지몬이 무슨 상관인데?!” “자, 때가 됐다. 이제 핸드폰을 높이 들고 디지몬을 외쳐주세요. 라고 문자가 와서.” …누가 요즘 그런 장난 문자를 보내. 그 것도 문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쟤한테 저런 문자를 보내서 기껏 정리해둔 거 다 망쳐버리게! “됐고, 권강재 어디 있어? 축제 때 공연할 애들 명단 뽑아서 선생님 드려야 하는데!” “아까 복도에서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 바쁜 와중에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이 개념 밥 말아 먹은 새끼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이 시점에서 권강재가 노닥거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준 차연우의 말에 동아리 부실을 박차고 나가서 권강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오늘 내로 공연할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전달해야 할 사항들과 컨셉 그리고 노래테이프를 받아야하는 상황. 5명밖에 안 되는 부원이서 모두 다 하기란 너무 벅찬 일들인데 그런 상황에서 노닥거리고 있다니! 절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권강재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며 녀석을 찾아다니고 있을 때 익숙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로 파고들었고, 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권강재가 서 있었다. “권강…! …재?” 녀석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려고 할 때였다. 녀석의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아이로 인해 내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입을 굳게 닫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수학여행 때 권강재와 함께 춤추던 여자애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여학생. 즉, 저 여학생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도 모르는 여학생을 향해 소리 내어 웃어 보이는 권강재의 모습이 생소하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기분 나빠.”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줘, 쥐고 있던 종이를 구겨버렸다. 누구는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보도 듣지도 못한 기집애랑 히히 낙락 거리고 있다니. 이 무슨 불공평한 일인가. 나는 두 주먹에 힘을 가득 실은 채 권강재의 앞으로 다가갔다. 권강재는 곧 내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권강재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여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뭐?” “기집애들이랑 히히 낙락 거리니까 좋냐고!” “야, 이향미. 말이 좀 심하다?” “심해? 누구는 할 일이 태산 같아서 쉴 틈도 없는데, 누구는 여자애들이랑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 같으면 화 안나!?” “곧 가려고 했…, 아! 왜 때리는데?!” “시끄러. 이거 네가 해야 할 일이니까 알아서 다 해. 오늘 이거 다할 때까지 집에 가기만 해봐!” 하고 소리치며 녀석을 향해 구겨진 종이를 던지고선 반대로 몸을 돌려 동아리 부실로 향했다. 동아리 부실로 향하는 내내 녀석과 이야기 하고 있던 여학생을 향해 웃고 있던 권강재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누구는…, 누구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는데. 넌 여자랑 놀고 있다 이거지? 그리고 그 표정은 뭐야? 왜 날 보자마자 웃고 있던 표정을 싹 굳히는 건데? 내가 방해하니까 꼴에 기분이 나빴나 보지? …짜증나, 권강재! “왜 혼자 와? 권강재는.” “몰라!” “왜 짜증인데?” “모른다고! 몰라! 너는 가서 할 일이나 해!” 밀려오는 짜증을 나도 모르게 김혜미에게 풀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차연우 너도 가서 애들 노래 테이프나 걷어! 게임 그만하고!” “너 오늘 짜증이 도를 지나친다?” “닥쳐.” “네네, 닥쳐드리고 할 일이나 하겠습니다.” 소파에서 느그적 느그적 일어나 동아리 부실을 나가버리는 차연우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흐트러진 종이들을 다시 줍기 시작했다. “학생부에서 할 일들을 왜 우리가 다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그런지 또 다시 아무 이유 없이 축제준비를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짜증이 났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처음 보는 기집애랑 노닥거리는 권강재도 짜증나고, 괜스레 앞에서 알짱거리는 차연우도 짜증나고. 만사가 짜증났다. “그 날이라서 그런가.” 마침 오늘이 여자의 그 날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신경이 더욱 날카로웠다.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더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얼른 해버리고 집에 가야지 안 되겠다.” 가방에서 엠피쓰리를 꺼내어 귀에 꼽고서는 시험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복통이 점점 심해지는 듯했지만 양호실까지 가서 진통제를 먹고 올 만큼 그리 한가하지 못했다. 차라리 빨리 정리하고 나서 집에 가서 푹 쉬자- 라는 생각으로 아까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손을 놀렸다. “얘들은 잘 하고 있는 건가.” 나가서 맡은 일을 다 하고 오라고 내보내긴 했지만 김혜미나, 차연우나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다. 둘 다 제대로 일한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권강재라도 있으면…, 에이씨. 또 짜증나지려고 하네. “신경 쓰지 말고 내 할일이나 하자. 이향미, 정신 차리자. 정신!” 손뼉으로 뺨을 두어 번 쳐주고서는 다시 손에 쥐고 있는 종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한 두 시간이 지났을까. 벌써 시계바늘이 ‘2’를 가리켰고,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차라리 평일이라면 야자를 째고 동아리부실에 죽치고 앉아서 일을 하면 되지만 토요일은 달랐다. 학교도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차연우한테 그만 오라고 해야겠다.” 핸드폰을 꺼내어 차연우에게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문자를 남긴 뒤 가방을 챙겨들고 동아리부실을 나와 교문 앞으로 향했다. 오늘 따라 날씨가 화창하다. 이런 날씨에 하필이면 그 날이라니. 집에서 죽치고 앉아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다니. 슬픈 현실에 그저 눈물이 날 뿐이다. 교문에 기대어 화창한 날씨를 조금이라도 만끽하자는 심산으로 크게 숨을 들어 마시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쪽으로 가방을 덜렁덜렁 매고 오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늦게 오지. “할 일은 다 했어?” “한 반 정도? 귀찮아 죽겠다.” “반 정도 한 게 어디야. 장하다, 장해. 그만 가자.” “날씨도 좋은데 그냥 집에 가자고?” 오늘도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며 말하는 차연우. 여기서 그냥 집에 가야한다고 말하면 금방이라도 삐질 기세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데이트를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이번 주는 정말 못해.” “시험도 끝났는데 왜? 이유를 말해줘야 납득하지. 오늘 재미있는 영화 개봉해서 같이 보러가려고 했더니만.” “오늘이 그 날이야. 그래서 지금도 배가 무척 아프다고.” “그 날?”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그 날.”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나이다. 전혀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차연우는 그런 내 모습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여자 맞냐?” “가슴 달린 거 보면 여자지, 남자겠어?” “살다 살다 내가 사귄 여자 중에 너 같은 여자애는 처음이야.” “내가 어떤데?” 네가 사귄 여자애들은 어떻고, 나는 어떤 여자인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의 비밀을 내게 말할 때면 꼭 내가 여자가 된 기분이라거나, 혹은 네가 남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게 뭐야. 중성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친구 같은 여자 친구라 이거지.” 욕이야, 칭찬이야? 친구 같다는 건 이성으로 보이지 않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색다르다고 하는 게 맞겠지?” …뭐 신선하다는 거지?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그나저나 배 많이 아프냐? 많이 아프면 약이라도 사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집에 있을 걸. 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배 아프다는 기집애가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아이스크림은 나중에 먹고 집에 가자.” 그래도 먹고 싶은 걸. “가자니까?” 하지만 녀석이 곱게 사가지고 들어가게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녀석을 돌려보낸 후 다시 나와서 사가지고 들어가야 할 듯싶다. “이향미!” 다시 나오기 귀찮은데. 어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으, 고민되네. “…어!?”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응?” “안 갈 거냐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설마 내가 엎고 가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엎어 달라고 하면 엎어줄 거야?” “내가 여자 친구가 요구하는 건 거의 다 들어주는 스타일인데, 그건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하며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차연우의 모습에 살짝 빈정 상한 나는 녀석의 종아리를 한대 걷어차 주고서는 먼저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자신의 종아리를 몇 번 문지르더니 같이 가자며 긴 다리를 뽐내며 내 옆으로 달려와 섰다. “삐졌냐? 엉? 삐졌어?” “안 삐졌거든!” “삐졌구만. 아이스크림 사줄까?” “됐어! 안 먹고 말아!” “장난이었어, 인마. 엎어줄게. 화 풀어.” “됐네. 무거워서 미안하다. 그래도 나 몸무게는 보기보다 덜 나가거든!” 집으로 향하는 내내 화를 풀어주려는 듯,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려가며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그저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간간히 녀석의 말을 되받아쳐주곤 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집 앞에 다다른 나는 오늘 아침 밤늦게 들어올 것이라는 엄마의 말에 챙겨가지고 나왔던 열쇠를 꺼내려고 가방 지퍼를 여는데, “너희 집 앞에 누구 서 있는데?” …어? 엄마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누구지? 하고 시선을 집 앞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고정했다. 그런데. “남잔데? 네 동생 친구냐?” …강우재. 캐주얼한 옷차림에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저 남자아이는 강우재임이 분명했다. 강우재는 ‘권강재’의 집이 아닌 ‘우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즉 권강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우재는 나와 차연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곧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차연우.” “쟤 누구냐니까? 아는 애야?” “밥 먹고 갈래?” “뭐?” “집에 부모님 안 계시거든? 이향원도 조금 늦게 오고. 밥 먹고 갈래?” 이대로 차연우를 보내고 나 혼자 강우재의 옆을 지나칠 자신이 없다. 모르는 사람인 것냥, 오늘 처음 본 사람인 것냥 그렇게 지나칠 자신이 없다. 지금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차연우를 보내고 혼자 남았을 때는 오죽 하겠는가. “나야 뭐,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쟤 아까부터 너 쳐다보는 것 같은데. 정말 모르는 애야?” “응. 몰라. 처음 보는 애야. 그냥 지나가던 애인가 보지. 들어가자. 내가 볶음밥 해줄게. 나 그거 진짜 잘한다? 이향원도 인정한다니까, 내 요리 솜씨는?”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속으로 외치고, 또 외치며 차연우의 손을 꼭 잡으며 현관문에 다다를 때였다. 차연우의 손을 잠시 놓은 후 한 손으로 열쇠를 들어 열쇠구멍에 넣고 문을 열려 하는데, 열쇠를 쥐고 있지 않은 반대 손을 차연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덥썩’하고 잡았다. 순간 나는 ‘설마.’하고 속으로 외치며 내 손목을 잡은 누군가의 손을 타고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리고 아니길 바랐던 누군가의 얼굴이 시선에 사로잡혔다. “누구세요?” 하지만 이제 와서 아는 척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인 것냥 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하지만 강우재는 나를 곱게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사람 잘 못 보신 듯해요.” “이향미.” 그래, 내 이름은 이향미야. 하지만 강우재 네가 기다리던 사람은 내가 아니야. “제 이름이 이향미는 맞는데요, 그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자꾸 이럴 거야? 4년 만에 보는 친구한테?” “저한테는 4년 만에 볼 친구 따위는 없는데요. 그럼. 차연우, 들어가자.” 차연우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이끌려고 할 때였다.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강우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나는 다시 그 자리에서 멈칫하고 설 수밖에 없었다. “제가 기다리는 사람은 그 쪽이 맞는 것 같은데요.” “그 쪽이 나를 왜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4년 동안 그 쪽이 보고 싶었거든요. 이향미 네가 보고 싶었거든요.”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넌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았구나. “누구야?”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차연우가 강우재의 존재가 궁금했던 것인지 내게 강우재의 존재를 물어왔다.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차연우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강우재가 대신 대답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 것도 틀린 대답을 말이다. “이향미 친구 강우재라고 해. 그 쪽은?” “누가 친구야!” 화가 났다. 강우재와의 사이는 친구도 그 무엇도 아닌 사이였다. 그런데 친구라니? 이제 와서 친구라니? 인정할 수 없다. “친구 맞잖아, 우리.” “웃기지 마, 강우재.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겠지. 차연우, 들어가자. 상종하지 마. 내가 들어가서 맛있는 밥 해줄….” “남자친구인가 봐.” … 또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비꼬는 듯 한 강우재의 말투에.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던 녀석이 갑자기 비꼬며 말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녀석의 말을 받아치려고 하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가만히 듣고 있던 차연우가 받아쳤다. “왜 그 쪽이 이향미 옆에 서 있어요? 서 있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건 그 쪽이 상관할 바가 아닌 듯싶은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조금 억울해서 말이죠. 이래서 4년 전에 널 놔준 게 아닌데, 이향미.” 그만해…. 그만해, 제발. “차연우, 들어가자. 응? 들어가자.” “가만히 있어봐! 이 새끼가 뭔데 너랑 나랑 사귀는 거에 대해 관여하는 건데? 나 내 연애사의 남이 관여하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 “그냥 들어가자. 어? 그리고 강우재 너도 오늘은 그만 돌아가.” “싫다면? 말했잖아. 나, 너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근데 내가 왜 가야 돼?” 대책이 서질 않는다. 이대로 강우재와 차연우를 가만히 뒀다가는 강우재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올 것만 같다. 그 말이 나오면 차연우와 나의 관계는 물론이고…, 모든 게 얽힌다. “권강재나 너랑 연락하고 있다는 거 저번 주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권강재한테 내 연락처 물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그 때 말 해. 지금은 돌아가.” “왜 그렇게 날 돌려보내고 싶어 하실까. 내가 싸움 싫어하는 건 너도 알 테고, 그럼 여기서 내가 네 남자친구랑 싸우지 않을 거라는 건 더더욱 잘 알 테고. 그럼 뭘 무서워해서 날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걸까, 이향미?” “강우재!” “아직 모르지? 강재 말이야.” “제발 가. 제발-!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 가라구!”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도 현실적으로 인정할 준비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강우재가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당황한 것이었다. 찾아올 줄 몰랐다. 그래서 권강재와 따로 연락을 하고 있어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강재를 협박하는 한이 있더라도 강우재가 절대 나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이다. 그만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강우재와의 기억들을. 그 날 있었던 강우재의 말들을 절대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는 지금이 좋으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여자친구가….” “강우재?” 차연우가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나를 가로 막으며 강우재와 대화를 시도하려던 때였다.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늦었다, 권강재.” “학교에 남아서 할 일이 있어가지고. 그런데… 여기서 뭐하냐, 너?” “저번 주에 말했었잖아. 이향미 보러 갈 거라고.” 말했어? 날 보러 갈 거라고 권강재한테 말했었어? 그런데 권강재 너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거야? “그거야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지금 이런 상황이 연출 됐냐고 묻고 싶은데? 이향미는 왜 울기 직전이고, 연우 녀석은 왜 널 적대시 하고 있는 건데?” “모르겠다, 나도. 그냥 인사만 하러 왔을 뿐인데, 이향미가 생각보다 내 인사를 심하게 거부하네.” “이향미, 괜찮아?” 차연우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재야, 너 오늘 이만 가봐야할 것 같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오랜만에 만나서 조금 놀려주고픈 생각이 들어서 계속 서 있었던 거야, 겸사겸사 네 얼굴도 볼겸.”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드디어 돌아가려고 하는 건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권강재를 향해 인사를 하는 강우재. 나는 그렇게 녀석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시름 놓았다.’하고 짧게 숨을 내쉬려고 했는데, 그 때 권강재를 지나쳐 가려던 강우재가 몸을 틀어 내 귓가에 나만 들릴 수 있도록 한마디를 남기고서는 그렇게 왔던 길로 녀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녀석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내 귓가에는 듣고 싶지 않았던,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그리웠던 녀석의 향기와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내 첫사랑.’ * * * 강우재가 돌아가고 나서 권강재 역시 그만 들어가라고 내게 인사를 남기고서는 먼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역시 이제 그만 들어가자는 뜻에서 차연우의 손을 잡은 채로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할 테니까 웬만하면 앉아서 쉬고 있지?” “우리 집인데, 왜 네가 음식을 해.” “그렇게 손을 덜덜 떠는 애가 어떻게 음식을 하겠다는 건데? 수전증이야? 술 많이 마실 때부터 알아봤어.” “수전증 아니야!” 진정이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심장도 벌렁벌렁 한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강우재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이향원에게 들었을 때는 한 동안 충격을 받긴 했었지만 다음 날 잊어버릴 만큼 내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 앞에 나타난 강우재를 보고나서 정말 다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궁금한 거 뭐?” 앞치마를 두른 채 야채를 볶고 있는 차연우의 옆에 나란히 서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앞치마를 두른 채 음식을 하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아까 걔. 누구냐?” 하지만 그런 생각도 금세 달아나게 만드는 녀석.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 “그렇게 말하니까 거창해 보인다?” “진짜야. 지우고 싶어.” “왜 지우고 싶은데?”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굳이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이제는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니까. 친구도 될 수 없고 다른 사이도 될 수 없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왜?” “그건 내가 널 완전히 좋아하게 되었을 때 말해줄게. 너도 그 선생님에 대해서 나한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잖아.” “복수냐?”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이제 보니 너 은근히 속 좁다.” 원래 속 좁은 아이였네요. 네가 몰랐을 뿐이지. “야! 다 타잖아! 너 음식 할 줄 아는 거 맞아?” “네가 옆에서 말 시켜서 그래, 인마!” “헐! 야, 내가 말 시켰어?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으, 어떡해. 이거 다 누가 먹을 거야.” “버리면…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음식물 버린 거, 우리 엄마가 알면 나는 그 날로 3일간 저녁이 없을 것이다. 쫄쫄이 굶게 될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후, 하는 수 없지. “오므라이스 할 줄 알아?” “어. 대충?” “이걸로 오므라이스 해줘.” “네가 먹게?” 미쳤어? 이 걸 내가 먹게? “이향원 주게.” 어차피 집에 오면 밥 달라고 소리칠 녀석이다. “못됐다, 너.” “평소에 걔가 나한테 하는 짓이 더 못 되 처먹었어.” 냉장고 안에서 케첩을 꺼내며 궁시렁 거릴 때였다. ‘쾅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연이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향미, 밥 줘!” 역시나 이향원이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밥달라고 하다니. “기다리고 있어. 밥 하고 있는 중이야.” “메뉴는?” “오므라이스. 교복이나 갈아입고 내려와.” “오케이. 알겠음.” 가방을 대충 소파위에 던져놓고 2층으로 올라가는 이향원. 그 때였다. 또 다시 ‘쾅쾅.’하고 ( 좀 전보다는 작은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강희야?” “향원이 오빠 위로 올라갔죠?” “어? 아, 응. 근데 왜?” “어제 오빠한테 핸드폰을 맡겨뒀었는데, 깜박하고 못 돌려받았거든요? 그런데 오빠가 금세 핸드폰 정액제 다 썼어요!!!” …가지가지 한다. “위로 올라가 봐. 옷 갈아입고 있을 걸?” “네!” 하고 힘차게 대답하며 위로 올라가는 강희. 분명 지금쯤 윗도리를 벗고 있을 텐데. 갑자기 방문을 열면…. “아악-!!!!!!!!!!! 이 변녀야!!!!!!!!!” 하고 호들갑을 떨 녀석인데. 뭐, 강희가 그런 거에 연연할 아이는 아니지만. “너희 집은 맨날 이렇게 시끄럽냐?” 계란을 열심히 부치고 있던 차연우가 내게 던지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그래도 오늘은 언제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 내 동생 때문에 아주 잠시나마 강우재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제 27화 숨겨왔던 사실 “씨발 권강희. 용서하지 않겠어. 두고 봐. 똑같이 갚아 줄 거야.” 탄 오므라이스 한 숟갈 떠서 입안에 넣은 채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건지 연신 씩씩대는 이향원. 벌써 10분 째다. “제발 닥치고 먹으면 안 되겠니?” “너라면 닥치게 생겼냐? 닥치게 생겼냐고! 내 가슴을 봤어! 씨발, 내 여자친구도 못 본 내 가슴을….” 왜 네가 여자인 것냥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건데? “지랄깝숑 하지 말고 어서 먹어.” “지랄깝숑? 너 지금 지랄깝숑이라고 그랬냐? 지랄깝숑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내가 의미도 모르고 사용했을까 봐? 요즘 세대에 지랄깝숑도 모르는 애들이 있나. “지랄깝숑이 뭔데?” 모르는 애가 있었다. 이름도 참 자랑스럽다, 차연우. “지랄깝숑이 뭐냐면요.” “지랄하고 깝치고 쇼한다.” 자꾸만 뜸을 드리는 이향원이 답답해 나도 모르게 밥을 먹다가 대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네, 맞아요. 저거예요. 지랄하고 깝치고 쇼한다.” “그거야?” “네.” “틀린 말 아니네. 지랄하고 깝치고 쇼하고 있었잖아, 아까부터.” “…형, 형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사나이잖아요. 그럼 제 편을 들어주셔야죠.” “그런거냐?” “네. 원래 남자들의 우정은 돈독하잖아요, 형.” 남자들의 우정은 돈독하지. 그런데 언제부터 너랑 차연우가 친구가 되었길래 감히 우정을 논하는 거냐. 그리고 남자라고 네 편을 들어줘야 하는 법이 어딨어? 당연히 여자친구 편을 들어줘야지. 안 그래 차연우? 하고 녀석을 쳐다보았는데…, “이향미.” “왜.” “지랄깝숑 하지 마.” 새끼 1분, 아니 30초도 되지 않아 나를 배신하고 말았다. 이향원은 꼴좋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너 그거 아니, 너와 돈독한 우정을 나눈 너의 편이 네가 지금 먹고 있는 탄 볶음밥을 만든 장본인 이라는 걸. 그래, 모르겠지. 모르니까 지금 너는 그 탄 오므라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맛있게 먹고 있는 거겠지. 남자들은 다 이렇게 단순한 걸까. “삐졌어? 왜 그만 먹어?” “다이어트 하는 거예요.” “다이어트?” “네.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밥은 적게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 살은 안 빠지고 슴가만 작아지는 건지. 빼야 할 곳은 오히려 찌고, 쪄야 할 곳이 점점 마르고 있다니까요.” …혜미야.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지려고 해. 아니다, 강희야. 다시 와주면 안 되겠니. 그나마 이향원을 열 받게 만들 수 있는 건 너뿐인 것 같아. …다시 돌아와 줘 . 컴백 홈 플리즈. “형, 문자 온 것 같은데요?” 남은 밥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고 설거지를 하려고 수돗물을 틀려고 할 때였다. 문자를 확인하던 차연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이야?” “형이 방에 갇혔대.” “어?? 방에 갇혀? 설마 도둑이!?! 강도가?!!? 납치범?!?!?” “아니, 우리 집에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있는 방 하나가 있는데 모르고 잠금으로 해놓고 들어갔대.” …어, 그렇구나. 나 갑자기 뻘쭘 해지고 있어. “어서 가서 구출해드려.” “형이라는 새끼가 맨날 사고질 이야.” 너도 2학년이라는 새끼가 학교에서 맨날 사고치고 다니잖아. 그리고 너희 형은 그래도 명문대를 다니셨다며.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갑자기 밥 먹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열이 받은 건지 화가 잔뜩 나 있는 차연우를 더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잘 가.” “아까 그 새끼가 와서 또 깝죽거리면 문자해.” “주말만 되면 문자며, 전화며 단절되는 놈이.” “이번 주에는 살려둘게.” …매주, 앞으로도 살려둬. 제발. “밤에 전화 할게. 어서 가 봐.” “배웅은 필요 없다.” 할 생각도 없었다, 새끼야. “형 잘가요!!!!!!!!” “오냐.” 부엌에서 여전히 밥을 맛있게 먹고 있던 이향원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차연우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고, 문이 닫힌 순간 다시 한 번 이향원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파고들었다. “씨발, 이거 탔잖아!!!!!!!!!!!!!” …그걸 이제야 눈치 챈 내 동생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 * * 주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월요일이 시작될 때 마다, 언제 또 주말이 오나.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토요일 날 그렇게 차연우가 돌아가고 이향원의 갈굼에 몇 분을 소비하다가 방으로 들어가니 잠시 잊고 있던 ‘강우재’가 문뜩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어렸을 적 강우재와 함께했을 적을 떠올려보았다. 권강재와 함께했던 것만큼이나 즐거웠던 시간들.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추억들. 하지만 그 추억들은 4년 전, 녀석의 이별선고에 산산조각 깨부숴지고 말았다. 그냥 헤어지기만 했더라면 친구로서라도 강우재와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라는 관계마저 부순 것은 내가 아닌 ‘강우재’였다. 그래서 잊으려 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그러지 않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몇 년 동안 함께 했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뜩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고, 울적해지고, 그리워졌다. 하지만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리지 못하는 관계라면 차라리 잊는 게 나았다. 그렇게 잊고 지낸지 어언 4년 째, 귀국했다는 소식하나 만으로 흔동시켰던 강우재가 눈앞에 나타나니 어찌 정상적이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었다. 밤늦게 권강재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어느 덧 일요일이 다가왔다. 일요일은 토요일과는 정반대로 별 탈 없이 보내었다. 가끔 이향원이 옆에서 비디오를 빌려달라고 떼를 썼지만 말이다.(지 용돈이 다 떨어졌다고 내게 돈을 요구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자, 종 치기 전까지 교실에서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일요일 늦게까지 TV를 보다 자서 그런지 수업시간 내내 졸음이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누워 자고 싶은 내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선생님은 평상시보다 수업을 일찍 끝내주셨고, 수업이 끝났다는 말과 동시에 나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하지만 수업이 끝났다고 해서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냐??” 그럼 내가 안 자는 걸로 보이니. 제발 날 가만히 나둬, 차연우. “자~냐?” …이 거지같은 게. 지 안 잔다고 남 깨우는 건 무슨 심보야!? “네 남자친구 심심하다.” 네 여자친구 졸리다. 졸려 죽는다. 죽기 직전이다. “꼼짝도 안하는 거 봐. 내가 빅뉴스를 들었는데, 듣고 싶지 않아?” 빅뉴스 따위. 잠이 더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며 무시하려 했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한 사람의 이름 때문에 구부러져있던 허리가 곱게 펴지면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구?” “너희 집 앞에 서 있었던 사내놈 있잖아.” “…걔가 뭘 어쩌고 어째?” “아까 아침에 복도에서 봤어.” “정확해? 강우재가 맞냐고!!” “왜 그렇게 흥분해? 다 쳐다보잖아.” 웃기지 마. 강우재가 뭘 어쩌고 어쨌다고? 우리 학교에 복학을 했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맞장구를 쳐주든 뭘 하든 하지. “웃기지 마. 네가 잘 못 본거야.” “나 양쪽 다 1.5다.” “웃기지 말라니까! 걔가 영정고등학교에 복학을 했다고? 걔 복학하면 1학년이야, 알아? 넌 걔를 모르니까 모르나 본대, 걔가 얼마나 자존심이 센 아이인대, 지들보다 한 살 어린애들하고 공부하려고 들 것 같아?” “그럼 내 눈은 호구라는 거야 뭐야? 내가 잘 못 봤다고?” “그래! 잘 못 본 거야. 말도 안돼. 미쳤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잘 못 봤나?” 내가 강하게 나오자,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왔던 차연우가 점차 자신이 착각한 것 같다는 듯이 말을 했고, 끝내 착각했었나보다- 라고 결론을 지었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강우재’라는 이름이 나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 때 마침 3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점심시간 시작을 알렸다. 결국 착각이라고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이미 상한 기분에 밥맛은 뚝 떨어지고 그저 지금은 편안하게 쉬고 싶었다. “어디가, 밥 안 먹어?” “별로 생각 없어. 동아리부실이나 가서 할 일이나 하고 있을래. …넌 왜 일어서?” “여자친구가 밥 생각 없다고 하니까 남자친구까지 밥 생각이 없어져서요.” 하며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웃어 보이는 차연우.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가서 또 잘 생각이면 그냥 여기서 밥이나 먹어.” “도와주면 되지.”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면서.” “어…, 음. 그건 네가 가르쳐줘야지?” …진짜 몰랐어? 와, 우리가 축제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지가 벌써 2주가 더 접어드는데. 아직도 몰라?! 너 정말 잤니? 1분도 빼먹지 않고 잔거니? 첫 날 설명해주었던 건 어디다가 흘려버리고 온 거니…. “내가 진심으로 걱정 되서 하는 말인데 나는 네 앞날이 걱정 돼.” “무슨 앞 날?” “네 미래!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대학도 못 가면 어떻게 해?!” “아, 뭐야. 벌써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거냐?” …웃기네. 왜 우리의 미래야? 네 미래지. “그 표정은 뭔데? 지금 커서 내가 너 못 먹여 살릴까봐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퍽이나.” “이거 유감인 걸. 나는 프러포즈라도 하는 줄 알았지.” 김칫국부터 마신다, 또.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긴지 어연 몇 분. 어느 새 우리는 동아리 부실 앞까지 도착해 있었고,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염과 동시에 우리를 반기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인해 웃고 있던 나의 표정은 어느 새 굳어져있었다. “2일만인가? 동아리부실…, 꽤 좋네?”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자아이, 한명. 그의 가슴팍에는 ‘강우재’라는 이름 석자가 박혀 있었다. “것 봐. 내가 말했지, 진짜로 봤다고.” 어처구니가 없음에 헛웃음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진짜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는 강우재가 맞았다. 이름만 동명이인이 아닌 내가 아는 강우재가 맞았다. “나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나도 이 동아리에 들까 하고. 이제 나도 이 학교의 학생이잖아? 보시다시피 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내 마음대로지. 그 정도 권리는 나한테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나저나…오늘도 네가 잡고 있는 손은 내가 알고 있는 손이 아니구나.” 강우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시선은 차연우가 꼭 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강우재의 시선에 못 이겨 나는 차연우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고 말았다. “들어보니까…, 강재랑 친구사이라던데.” “그런데?” “친구 걸 빼앗으면 쓰나. 안 그래, 이향미?” “닥쳐, 강우재.” “4년 사이 입이 꽤나 거칠어졌다? 내가 그 때 널 왜 포기했는데?” “닥치라고 했어! 그만해!” “아직 모르고 있지? 내 앞에 서 있는 얘나, 권강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는 강우재. 초조한 나와는 달리 녀석은 나와 비교될 정도로 차분했고, 여유가 있었다. “그 때 네가 그랬지. 난 참 이기적이라고.” “그래. 넌 너 밖에 몰랐어. 지금도 그래. 넌 내 입장은…!” “그건 너잖아.” “…뭐?” “그 때도, 지금도 이기적인 건 너잖아. 나야? 정말 나라고 말 할 수 있어? 물어볼까? 네 옆에 서 계시는 너의 남자 친구 분께? 어느 누가 더 이기적인건지.” …안 된다. 안 돼. 강우재가 그 말을 차연우에게 말하게 된다면…. 그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해. 그 날 그 때 강우재와 나누었던 이야기는 우리들만의 비밀이니까. 말하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말 하지 마, 강우재.” “그래서 네가 이기적이다 는 거야. 알아? 네가 4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는데? 내가 너한테 그 말을 해주면서 다시 한국에 왔을 때를 상상했어.” “말 하지 마! 그만해, 제발 그만해. 부탁이야….” “웃으면서 다시 한국에 왔을 때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이제 친구가 되어 있을 테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할 친구 옆에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권강재가 서 있을 줄 알았어.” …제발 부탁이야. 그만해. 더 이상 잃기 싫단 말이야…. 어느 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차연우는 아리송한 강우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쪽은 이향미가 얼마나 이기적인 애라고 생각해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해? 지금 나랑 사귀고 있고 문제가 없으면 된 거 아닌가?” “문제가 있으니까 말하는 거죠. 권강재랑 네가 친구라는 그 것부터가 문제에요. 안 그래, 이향미? 4년 전에는 몰랐다고 쳐.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내가 다 잘 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말. 하지만 생각과 달리 굳게 닫힌 입술은 미세하게 떨릴 뿐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쪽, 권강재가 이향미 좋아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이미 틀렸다. 다 말할 생각이야.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어. 알고 있는데?” “의외네.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럼 그 것도 알아요?” “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사실을 이향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받아드리는 것.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4년 동안 감추고 있었던 사실이 들키지 않고 싶은 사람 중 한명에게 들키고 말았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뭐?” “쟤 나랑 4년 전에 사귀던 사이인거 알지? 모르나.” 이 자리에 권강재가 없다는 것. 그 것이다. 차연우는 강우재의 결정타에 충격을 먹은 듯 멍하니 강우재가 하는 말만 듣고 서 있을 뿐이었다. “헤어졌어, 권강재 때문에. 내가 권강재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로챈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해, 제발.” “헤어지던 날 알려줬어. 권강재는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향미를 좋아했었다고. 나는 이향미를 중간에 가로챌 생각은 추호도 없었거든. 권강재가 이향미를 좋아하고 있었단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면 이향미를 좋아하던 감정을 숨기고 멈췄을 거야. 그렇게 깊은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그 땐.” “계속 말해.” “…그만해!” “계속… 말해.” 강우재를 제지하려던 내 손을 덥석 잡는 차연우.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차연우의 손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뒤늦게라도 권강재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서 헤어졌어. 이향미도 소중했지만 권강재도 내게는 너무 소중하나 친구였거든. 그래서 이향미에게도 그 사실을 말해준 거고. 그런데… 난 모르고 있었어. 내가 떠난 4년 동안 이향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냥 권강재의 옆에 있었다는 것을.” 아니야,…아니라고. 이유가 있었어. 나는…. “귀국한 날, 권강재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됐어. 4년 동안 이향미는 권강재의 친구들과 교제해왔고, 지금 역시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모르는 사람과 교제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 않겠지. 왜 하필 강재 녀석 친구였어, 이향미?”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네 탓이잖아.” “그게 왜 내 탓인데.” “네가 그렇게 만들어 버렸잖아. 너랑 나도 처음엔 친구였잖아! 지금 권강재와 나처럼 친구였잖아. 날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넌 날 버렸잖아!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뭐가 달라? 도대체 뭐가 다른데?!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렇게 발전했던 우리 사이가 지금은 어떻다고 생각해? 무슨 사이니, 우리. 친구? 연인?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색하고… 거리낌생기고 불편하고 그래. 알아? 그런 사이는 너 하나면 족했어. 소중한 사람을 2명이나 잃고 싶진 않았어!”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났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누구보고 죄를 덮어씌우는 건가. “그래서 약속한 거야, 권강재랑?” 도대체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니. “4년 전에 권강재에게 그래서 약속하자고 한거냐고.” “무슨 약속? 너만은 친구로 남아달라는 그 약속?” “그래.” 4년 전, 강우재에게 이별통보를 받음과 동시에 견딜 수 없어 권강재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막상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강우재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연이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하나였다.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다시 친구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 같아서. 고작 다른 친구가 먼저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 큰 것을 잃은 것 같아서. 그래서 한편으로는 권강재가 너무 미웠다. 내 앞에서 나를 달래고 나를 좋아하는 권강재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그 약속은 원망스러움을 표출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일지도 몰랐다. ‘부탁이 있어.’ ‘말해.’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줘.’ ‘무슨 약속?’ ‘너만은…친구로 남아줘. 너는 영원히 내 친구가 되어줘.’ 알고 있었다. 그 부탁을 했을 때 권강재의 얼굴이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굳어졌다는 것을.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해야만 했다. ‘그럼 강우재처럼 나 잃지 않아도 되잖아. 우리 죽을 때까지 웃으면서 즐거운 추억도 만들 수 있고, 함께 일 수 있잖아. 나 너 안 잃어도 되잖아. 응?’ 내 애절한 부탁에 권강재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범벅이 되어 애절하게 부탁하는 날 뿌리칠 만큼 녀석은 못된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난 그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을 너는 모르잖아! 그 때 내가 느꼈던 내 마음을 너는 알아?” “이해가 안 돼. 헤어져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어, 우린.” “웃기지 마! 친구? 친구라고 했어? 나는 못 해. 넌 내게서 마음을 접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었어. 나는 아직 널 좋아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친구를 해? 스킨십을 하고, 매일같이 좋아한다고 서로에게 속삭였던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떻게 마주해!” 나는 쿨 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를 찬 녀석을 밉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그런 악독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도 좋아하는 남자애와, 농도가 지나친 스킨십까지 했던 아이와 친구가 될 만큼 나는 감정이 없는 여자도 아니었다. 다시 친구가 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이었다, 내겐. “그럼 왜 하필이면 강재 녀석 친구들과 사귄 건데? 알면서도, 너는 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거잖아.” “난 돌아보지 않을 건데….” 내가 돌아봐주길 바라는 녀석이. “…내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권강재가 불쌍했어. 이미 알고 있는데도 난 알아주지 않을 건데, 끝까지 모르는 척 할 건데… 그런데도 날 좋아하는 권강재를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사귀었어. 잊으라고. 눈앞에서 자신의 친구와 사귀는 못된 여자 잊으라고. 나 좀 잊어달라고!” “그 정도로 잊었으면 진작 잊었어.” “그게 무슨…! ……권강재?” 순간 강우재가 내게 한 말로 착각했던 난 강우재를 향해 소리치려고 했지만 그 목소리는 내 앞이 아닌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에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이 서 있었다. “…살면서 지금만큼 배신감 느낀 적은 없었어.” “강재야. 권강재…,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 봐. 저기, 그러니까.” “뭘? 뭘 더 들어.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는데. 차라리 밥 먹으러 갈 걸. 너희 반에 갔더니 동아리 부실 갔다는 애들 말에 혼자 힘들게 축제준비하고 있을 네가 걱정 되서 왔는데…. 괜히 왔다, 정말.” 최악이다. 나 또한 살면서 지금만큼 최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상황도 최악이고, 나도 최악이다. 그리고 강우재가 원망스럽다. 너무나도. 앞으로의 상황을 나는 예측할 수 있기에 녀석이 더욱 원망스럽다. “몰랐어. 정말 난 몰랐어. 내가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해봤어.” “…미안해. 그렇지만 다 이유가 있었어.” “무슨 이유? 잃고 싶지 않았다는 그 이유?” “그래. 난 그 만큼 네가 소중했어.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진 않았어….” “4년 만에 만난 강우재가 네 소식을 전해주자마자 내게 했던 말이 뭔 줄 알아?” ‘여전하구나, 그 이기심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이야, 이향미. 너는 내게…,” 미안해…, 미안해. 강재야. 두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추락한다. “…제일 잔인한 짓을 한 거야.” “미안해, 정말. 정말로 미안해.”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알아버린 지금 권강재도, 강우재도. 심지어는 차연우까지도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지 않는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 나는…, 나는 또 버림받게 되는 걸까. 그저 무서웠던 것뿐인데. 또 잃어버릴까봐.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까봐. 그래서 그랬던 것뿐인데, 그게 이기적이었던 걸 까? “네가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사실을 말했어야 했어.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깊은 감정은 생기지 않았을 거고, 나는 지금 너를 달래줄 수 있었을 거다.” “…권강재.” “그만하자, 이제.”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강우재처럼 나와 너도 친구도 연인도 그 무엇도 아닌 사이가 되자고.”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는데. “나 간다. 그리고 오늘은 못 남을 것 같다. 강우재 있다가 연락해.” “그래.” 그렇게 권강재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알고 있었는데, 권강재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나는 이러한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느껴지는 슬픔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나보다. “…이, 이러려고…. 이러려고 나는… 4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너와 함께 있었던 게 아니야….” 울음을 삼키며 눈물을 흘리며 이미 사라져버린 권강재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그만큼 소중했단 말이야, 권강재!!!!!”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한 나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던 강우재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내 옆을 지나쳐나갔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던 차연우 역시 내 옆을 지나갔다. 동아리 부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순간 결국 혼자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이 듬과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 위에 닿았다. “울어도 돼.” 따스한 목소리가…귓가로 파고들고, “마음껏 울어, 참지 말고.” 나는 아직은 내 옆에 남아있는 그 아이의 품에 안겨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한 가지 깨달았다. 거짓말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고.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나씩 할 때마다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는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게 되는 거라고. 제 28화 방심한 사이 덫에 걸리다. “100% 이해해주지는 못해. 하지만 100% 이해해주는 척은 할 수 있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를 달래는 듯이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차연우….” “그래도 나 아직은 네 남자친구잖아. 원래 남자친구는 아무리 여자친구가 잘못을 했더라도 감싸주는 게 매너거든.” 내 옆을 지나쳐 동아리 부실을 나간 줄로만 알았던 차연우는, 사실 내 옆을 지나쳐 강우재와 권강재가 열고 나가버린 동아리부실의 문을 닫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복도에 돌아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내가 우는 것을 듣지 못하도록, 그렇게 배려해준 것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소파에 나를 앉히며 차연우가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차연우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있었다. “이향미.” “…응.” “내가 100% 이해해주지는 못한다고 했잖아.” “어….” “그래서 나도 의아한 점이 있고, 듣고 싶은 대답이 있거든. 물어봐도 되냐?”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까지 속였어?” 차연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했어도 되지 않았었냐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여 차연우와 권강재 중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차연우였다. 물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가장 들키기 싫었던 사람은 단연코 권강재였다. 하지만 차연우와 사귀고 나서 상황이 바뀌었다. “너와 내가 사귀는 조건, 그 것 때문에.” “조건?” “이젠 너도 알겠지만 4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권강재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래서 쉽게 눈치 챌 수 있었어. 네가 나와 사귐으로써 나를 향한 권강재의 마음을 내가 눈치 챌 수 있도록 하려던 것을 말이야.” “그런데.” “애초부터 우린 양쪽에서 내세운 것을 이루게 되면 헤어지게 되어있었잖아. 근데… 처음부터 이루어진 거였잖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알면 우리가 헤어져야 되는 거였잖아.” “네가 헤어지자고 말할 때까지는 안 헤어져. 알잖아?” “아무리 여자친구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덜 느끼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여자친구를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좋아하고, 또 그 것을 여자친구가 알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신경 쓰지 않을까.” 나는 그 것이 걸렸다. 예전처럼 편안하게 데이트도, 함께 있지도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렇게 보면 강우재의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기적이다 는 말이 말이다. 굳이 하나, 하나 따져보면 모두 내가 다 잃기 싫어서, 나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길 바라서 속인 셈이 되니까. “그리고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 버렸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그래서 권강재를 조금 원망했던 적도 있었어.” “왜?” “네가 나와 사귀는 이유가 권강재 때문인 걸 알아서, 그리고 네가 쉽게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도 권강재 때문이란 걸 알아서. 처음에는 상관없었어. 그 사실을 알아도 나는 선생님을 잊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근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게 되었어.” 계획에도 없었던 고백 아닌 고백. 선생님 이후 처음 남자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듯해도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고, 심장 박동 수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향미.” “그리고 네게 선택권이 있어. 이 자리에서 헤어지자고 한다면 헤어져줄게. 처음부터 내가 잘못한 거니까. 다만 헤어지더라도 완전히 돌아서지는 말아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차연우의 결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미 나는 차연우의 대답을 알고 있다.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단지 혼자 남은 나를 향한 동정이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녀석은. “돌아설 리가 없잖아.” 동정을 택했다, 나를 향한. 하지만 동정이라도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네가 내게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는 헤어질 생각 없어.” “넌 강우재랑은 다르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있나.” 차연우 역시 강우재와 같은 아이일거라 생각했다. 차연우나 강우재나 권강재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우재는 우정을 위해 나를 버렸고, 차연우는 우정을 위해 나와 사귀었다. 그렇기에 강우재가 결국 나를 버렸듯, 차연우 역시 내게서 뒤 돌아설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교실로 향하는 내내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차연우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고 내가 놓아버리기 전까지는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은 이 손. 그런 차연우의 손이 왜 권강재의 손과 순간 겹쳐 보인 걸까. 평생 놓지 않을 것만 같았던 권강재가 결국 내 손을 놓고 말았다. 나의 잔인한 이기심에. “너랑 권강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 녀석이 쉽게 너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아는 권강재는 절대 그런 놈 아니야.” “…정말로 그럴까?” “모르지? 권강재 지갑을 열어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사진이 너 인거.” 지갑에 내 사진이? “처음 그 사진을 봤을 때 누구냐고 물었었어. 근데 권강재가 뭐라고 대답했는줄 알아?” “뭐라고 그랬는데?” “덫. 평생 헤어 나올 수 없는 덫.” 평생 헤어 나올 수 없는 덫…. “그래서 더 소중한 사람.” “나 역시 권강재가 소중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잊으려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만큼 시간이 흘러야 해. 근데 너희는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어.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거야.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말 뿐이야.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은 시간이 흘러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믿을게. 차연우 너를, 아니 너의 말을 믿어볼게. 돌아서지 않겠지? 권강재는 내 손을 완전히 놓지 않은 거겠지? 되돌릴 수 있겠지? “고마워.” 차연우. 나는 나란 존재가 권강재에게 있어서 지독한 덫이었으면 좋겠어. * * * “이향미 오늘 약속 잊지 않았지?!” 종례가 끝나고, 교실 문 밖에서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서는 나를 향해 소리치는 김혜미. 순간 김혜미와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3초간 몸을 멈칫했고, 눈치 빠른 김혜미는 그런 나를 간파했다. “오늘 나랑 인형 사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아, 맞다. 오늘이 그 날이었나.” “와, 매 달 19일은 나와 인형을 사러갔었잖아. 같이 다닌 지가 벌써 일 년이 다되어가는데 그걸 잊어!?” 발을 동동 굴리며 내게 화를 내는 김혜미. 하지만 1년 동안 꾸준히 지켜왔던 약속을 잊어버릴 만큼 오늘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게다가 지금 김혜미의 뒤를 지나쳐가는 권강재와 강우재의 모습을 보아하니 더더욱 내 머릿속은 새하얘져만 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김혜미는 계속해서 쫑알쫑알 거릴 뿐이었다. “저녁 쏴!” “…어?” “뭐야, 너? 오늘 왜 그래? 약속을 잊어먹지 않나, 이제는 내 말까지 씹어?” “미안, 오늘 정말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무슨 일인데? 너 권강재랑 싸웠어, 설마?” “어?” “맞지? 어쩐지. 아까 팬 빌리려고 하는데 풍겨져 나오는 오로라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지. 권강재 역시 나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자식이 매 쉬는 시간마다 권강재 앞을 알짱거리더라? 그래서 내가 시비를 걸려고 했는데 키가 나보다 20cm는 더 커 보이는 거야. 그래서 곱게 앉아있었다.” 강우재가 매 시간마다 권강재를 찾아갔나보구나. 그럴 만도 하지. 강우재 역시 권강재에게까지 알릴 생각은 없었을 텐데 갑작스레 등장한 권강재로 인해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권강재의 오래된 친구야. 행여 시비라도 걸려거든 참아.” “오래된 친구? 권강재한테 제일 오래된 친구는 너잖아. 그럼 너도 걔 알겠네? 걔도 널 알겠고.” 알다마다. 어렸을 적 우리 셋이서 얼마나 친했는데. 옆 동네 아이들이,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우정이 돈독했고, 즐거웠다. “너, 오늘 정말 이상해.” “뭐라고 했어, 지금? 못 들었어.” “안 되겠다. 우리 오랜만에 면담을 좀 가져야 할 듯싶다. 집으로 가자.” 우리 며칠 전에도 너희 집에서 담소를 나누지 않았었니. 또 너희 집을 가야해? 하고 반박하기도 전에 길가에 있는 택시 한 대를 잡아 자신의 집 앞으로 가달라고 하는 김혜미. 돈 아깝게 택시는 왜 탄담. * * * “맛있게 먹으렴.” 김혜미의 방 가운데 앉아 아주머니께서 주신 과일을 입에 넣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맨 처음 김혜미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정말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게 있다면 갈수록 늘어나는 인형들이랄까. “자, 이제 말해 봐.” “뭘?” “혹시 알코올이 필요하다면 내가 몰래 가져올 수도 있어.” “됐거든?”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알코올은 무슨. “그럼 후딱 털어놔봐! 답답해 돌아버리겠네!” 돌아버리진 마. 거기서 더 돌면 나는 널 감당하지 못할 거야. “하나만 약속해, 그럼.” “어. 한다. 무조건 해.” “실망하더라도 너까지 돌아서지는 마.” “어. 나는 도는 거 싫어해. 안돌아.” 진지한 이 시점에서 말장난이라니. 역시 김혜미답다. “그러니까 사실은….” 베어 물었던 사과를 마저 입안에 넣고 포크를 내려놓으며 나는 강우재와 나의 사이, 그리고 권강재와 나, 강우재의 사이. 그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과 4년 전에 강우재가 외국으로 갔을 때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행여 학습력 제로인 김혜미가 이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최대한 어렵지 않게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김혜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굳어져갔다. 이미 예상한 바이기에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김혜미가 나를 향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꽤나 거칠었다. “막장이구나, 이향미.”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잖아.” “…야,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네가 100% 잘 못했어. 이리보고 저리보고 위에서보고 아래서 봐도 권강재는 1%의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김혜미의 말이 옳았다. 권강재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100% 다 잘못한 건 아니었다. “그럼 난? 난 강우재를 좋아했어. 나 역시 피해자야.” “그래, 네 이야기를 다 들어봤을 때 아까 그 꼬꼬마. 아니 꼬꼬마라고 하기엔 키가 존나 크니까 키다리 새끼라고 하자. 그래, 그 키다리 새끼도 잘못이 커. 하지만 너도 잘 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고, 그 잘못이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거야.” 이럴 때 보면 김혜미는 참 예리하다고 생각한다. 평소의 김혜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키다리 새끼의 말 중에 틀린 말 하나 없잖아. 넌 이기적인 게 맞아. 전혀 상관없는 나도 배신감이 들 정도인데, 권강재는 오죽하겠어? 난 너희들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며칠이 지나면 묻혀 지겠지, 이 감정이. 하지만 권강재는 다르지.” “정말 나를 모른 채 할까?” “나라면 전학을 갈지도.” “그건 오버고.” “어, 그래. 좀 오버였던 것 같다. 어찌됐건 넌 무조건 권강재한테 빌어야 돼. 조금이라도 예전처럼 돌아가려면.”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일 아침부터 권강재가 학교에 가는 시간에 맞추어 나와 어떻게든 학교까지 함께 갈 생각이다. 들어주지 않으려 하겠지만 어떻게든 이야기를 듣게 할 것이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하려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상처받기가 겁이 났다. 소중한 사람한테서 상처받을 줄을 알면서도 상처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나만 물어보자.” “어, 물어 봐.” “권강재가 용서를 했어.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용서를 했는데 만약 권강재가 정식으로 너한테 고백을 한다면? 널 계속 좋아한다고 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하면 권강재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해봤어도 모든 걸 알아버린 권강재가 아직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행여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마 받아드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친구이지 않는가. “받을 생각 없어. 친구잖아. 권강재랑 난.” “네 마음에 솔직해져봐.” “뭘 솔직해져? 말 그대로 친구야.” “권강재는 널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아.” “나는 권강재를… 남자로 받아들이지 않아.” “과연 그럴까. 나 눈치 빠른 거 알고 있지.” “네가 아무리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도 이번엔 정말 아니야.” 나에게는 차연우가 있고, 점점 차연우를 완전히 남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내가 권강재를 좋아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그저 너무 친하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같이 지낸 세월이 길었기에 동성친구처럼 거리낌 없이 친해서 오해를 하는 것뿐이다. “거짓말 마. 넌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권강재랑 친구해오면서 단 한 번도 이성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어?” 나는 권강재와 함께 해 온 시간동안 단 한번도… 단 한번도. “왜 대답을 못해?” 한 번.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비오는 날, 권강재가… 내게 입맞춤을 했을 때. “없었어.” 하지만 그 사실을 나는 숨기고 만다. 많은 시간 중에 딱 한 번에 불과했으니까. 어느 여자라도 그 상황이 닥친다면 두근거리고 이성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너는 네 감정에 가장 둔한 것 같아.” “그만해. 정말 없었으니까.” “그러면 이번 주 주말에 있는 시합은 갈 거야?” “무슨 시…, 아. 이번 주에 시합 있었지.” 지난 번 시합에서 참 패를 당한 권강재의 팀은 다시 한 번 열의를 가지자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그 때 그 팀과 시합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 예정일은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가고 싶어. 하지만 가도 될지 모르겠어.” “너도 참 한심해. 왜 숨겨가지고는.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이러지 않았잖아.” “너라면 할 수 있어? 이미 강우재와 사이가 어색해진 상황에서 권강재와의 사이까지 어색해질 수도 있었어. 난 그럼 두 명을 잃는 거잖아!” “겁쟁이.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 “뻔한 상황이었어.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어. 그리고 너야말로 왜 효빈이 마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데?” 내가 갑작스레 ‘효빈’의 이야기를 꺼내자 김혜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갑자기 꼬꼬마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나 역시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위로 봐도 아래로 봐도 효빈이가 100% 아까워. 그러니까 적당히 튕기고 받아.” “…우, 웃기지마! 튕기는 게 아니라 싫은 거야!” “너야말로 웃기지마. 네 진짜 감정을 깨달을 때가 됐어, 너도. 도망치려고 해봤자 해결 되는 건 없어.” “그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야, 이향미. 너야말로 네 감정 좀 깨달아라!” “깨달을 게 어디 있다고 깨달아? 남자친구도 있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야.” 슬슬 집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자리에 일어서며 말하자, 김혜미 역시 뒤따라 일어서며 내 말을 받아쳤다. “이성과 친구. 친구와 이성. 너는 그 위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김혜미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방을 나갔고,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친구’와 ‘이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나는 지금 나와 차연우의 위치, 그리고 권강재와 나의 위치가 맞다고, 옳다고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김혜미가 말하는 ‘친구’와 ‘이성’의 위치라는 게 무엇일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 * * 토요일 아침. 집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벌써 사일 째 권강재는 나를 무시한 채 먼저 학교로 향했다. 첫 날, 권강재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나를 무시하며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 당연히 권강재에게 말을 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둘 째 날. 역시나 권강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뛰기까지 하며 권강재를 뒤쫓아 갔지만 권강재는 정말 나와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택시까지 잡아가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셋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날, 현관문을 열자마자 권강재의 집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권강재가 부른 것인지 강우재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마 내가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침이 아닌가 싶었다. “그만 해. 네가 이래봤자 권강재는 너한테 더욱 정이 떨어질 뿐이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결코 100% 다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직 반성을 다 못했구나, 이향미.” “반성해야 할 사람은 너야, 강우재!” “그런 마음으로 권강재에게 사과해봤자 돌아오는 건 상처뿐일 걸?” 화가 났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강우재인데, 왜 그 벌을 내가 다 받고 있는 것일까. 나 역시 피해자인데, 왜 상처를 준 강우재는 멀쩡히 권강재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걸까. 나는 정말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데. 왜 그럴 수가 없는 걸까. “권강재가 너를 용서할 방법을 알려줄까?” “그게 뭔데?” “Know what you feel.” Know what you feel? “지금 유학파라고 자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네가 영어에 능숙하다는 것쯤은 지난번에 권강재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어. 해석할 수 있잖아. 내 충고를 새겨듣기를 바랄게. 이만 가 봐라. 너 갈 때까지 이 녀석 안 나올 것 같거든.” Know what you feel. 네가 느끼는 바를 알아라. 간단히 말하자면 내 감정을 깨달아라. “도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권강재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도한지 어느 덧 오일 째 되는 날. 다행히도 오늘은 강우재가 그의 집 앞에서 지키고 서 있지 않았다. 잠시 후, 권강재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권강재는 나를 발견하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해, 이제.”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그 때 다했잖아. 이제 모르는 척 하자고.” “왜 내 입장은 생각을 안 해주는 거야?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의 간절한 외침을 향해 돌아오는 것은 권강재의 비웃음이었다. “네 입장? 아니, 그 반대겠지. 네가 내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았던 거겠지.” “너는 왜 한가지 밖에 생각 못 해? 그만큼 내가 너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생각은 못 해?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는 건 왜 생각해주지 않는 건데!?” “반대로, 내가 그런 너의 결정에 상처받을 거라고는 왜 생각하지도 못했던 건데?” …당연히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으니까. 그리고 평생 들키지 않으려고 했었으니까. “넌 네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거야.” “너 역시 너 밖에…!” “나 밖에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4년 전에 너와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어!” “그 건….” “내 감정 밖에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강우재와 네가 헤어졌을 때 너한테 고백했을 거야. 하지만 내 감정보다 상처받았을 네 감정이 더 중요했어. 그래서 무작정 약속했던 거고, 참았던 거고 감정을 숨겨왔었어. 근데 다 알고 그랬다고? 모두 다? 너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어떻게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있냐고!” …생각보다 너는 내게 더 큰 배신감과 실망을 했던 거구나. 내가 네게 큰 상처를 입힌 거구나. “가.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말 그대로 더 이상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내게서 거침없이 뒤 돌아서는 권강재는 지난 4일처럼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사라지려고 했다. 가끔가다 등교를 함께 했었던 권강재는 내 발걸음에 맞추어 걸음을 늦추었었다. 지금의 권강재는 내가 아는 권강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변한 이유는 모두 다 나 때문이겠지. “…잠깐만!” 아직은 이렇게 보내선 안 된다. 그래도 조금은 이렇게 변해버린 우리의 관계를 호전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어, 내게 너무나 소중한 너를. “이번 주에 시합이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거부하지 말아줘. “나, 응원하러 가도 되지? 아니…, 응원하러 가도 돼?” 여느 때처럼 웃어주지는 않더라도 와도 된다고, 응원하러 오라고 까지는 않더라도 매몰차지는 말아줘.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인 나는 초조하게 권강재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권강재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다시는 내 시합에 오지 마.” 눈가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상처 난 가슴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었다. 제 29화 타인이 말하는 이성과 친구의 위치. 축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월, 화, 수, 목, 금, 토 중 유일하게 일찍 하교할 수 있었던 ‘토’요일. 나는 물론이고 동아리 부원과 선생님까지 학교에 남아 축제준비가 한창이었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선생님, 언제부터 우리 부원이 6명이 된 거죠?” “어제부터?” “전 다리가 긴 새끼들을 혐오해요!” “우재가 키가 크긴 크지.” 5명이었던 부원이 어째서 6명으로 늘어났냐는 것.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왜 우리와 함께 있냐는 것. 하필이면 그 부원이 왜 강우재이냐는 것이다. “전 키 크지 않은데 왜 싫어하세요?” “난 꼬꼬마도 싫어해!” “싸우지들 말고. 매점에서 음료수라도 사올 테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 “또 도망가지나 마세요.” 저러다 꼭 딴 곳으로 세지. 속은 게 어디 한 두 번이야? 선생님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시고서는 동아리부실을 나가셨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침묵. 어느 누구하나 그 침묵을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효빈이와 김햄도 입을 굳게 다문 상황. 권강재가 입을 열리는 없고, 차연우 역시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면 또 잠을 자고 있는 듯싶고. 그냥 이 상황을 유지하자니 미치겠고.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깨는 수밖에. “여기 들어온 이유가 뭐야?”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내 질문에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강우재의 손에는 장기자랑 명단이 적힌 프린트가 들려 있었다. “정말 그게 이유야?” “응. 아, 그리고 네가 강재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아서 지키는 차원에서 들어오기도 했어.” “…진짜 할 말 없게 만든다, 너.” “그나저나 몇 시까지 하는 거야, 이거? 끝나고 놀러 갈래, 우리?” “장난해? 누가 누구랑 놀러가?!” “누구긴. 여기 있는 사람 다지. 설마 나랑 단 둘이 가고 싶었던 거야?” 기가차서 말이 안나온다. 나를 제외한 여기 있는 다섯 사람 중 가장 미운사람을 꼽자면 강우재일 것이고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을 꼽아도 강우재일 것이고, 한대 때려주고 싶은 사람을 꼽아도 당연히 강우재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랑 놀러가고 싶어 해? 강우재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다그치려고 할 때 자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차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랄깝숑 하는 애 여기 또 있네.” “…지랄깝숑? 그게 뭐야?” 이향원한테 배운 거 잘 써먹네. “지랄하고 깝치고 쇼한다. 뭐 그런 의미라고 하던데. 지금 딱 네가 그러고 있거든. 얘, 남자친구가 난데 왜 얘가 너랑 놀러가고 싶어 하냐?” “…아. 너희들 아직 안 헤어졌어?” 의외라는 듯한 강우재의 말투에 차연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 역시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난 헤어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향미가 널 좋아하긴 해?” “강우재!” “은근히 정 안주는 애가 이향미거든. 그래서 나도 고백할 때 조금 겁났었는데 말이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이향미가 먼. 저 사귀자고 했었거든?” 분명 내가 먼저 사귀자고는 말했지만 마치 내가 널 좋아해서 먼저 사귀자고 말한 것처럼 말한다, 차연우? 그건 아니잖아. “내가 들은 바로는 마음이 없어도 무작정 고백하고 사귀었던 남자들이 수두룩하다고 들었는데.” 그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리 많지도 않다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는 된다고! “그럼 그 것도 들었겠네? 그런 놈들 다 열흘도 안 되서 헤어졌다는 것 말이야. 우리는 벌써 두 달이 다 되도록 사귀고 있거든?”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강우재가 차연우를 도발하고 있다. 누가 봐도 고의적이라는 것을 느낄 정도로. 화가 난 것이다. 권강재가 아니라 차연우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지난 날 들과 같은 엔조이가 아닌 진심으로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그만들 해. 당사자두고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강우재. 나한테 화가 났으면서 차연우에게 그 화를 푸는 건 무슨 경우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인데? 사과는 했냐?” “…뭐?” “권강재한테 사과는 했냐고. 넌 끝까지 네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그깟 자존심 내세우고 가만히 평소처럼 지내고 있는 거냐고.” “내가 끼어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말이 좀 심하다?” “제 3자는 빠지지?” “내가 볼 땐 너도 제 3자 같은데?” 나와 권강재의 일이 어느 새 차연우와 강우재의 일로 번져 결국엔 가만히 있던 김혜미까지 끼어들게 되어버렸다. 강우재가 김혜미에게 거친 언성이라도 내뱉었을 시에는 한효빈이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강우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권강재 한명만 자기는 이 일에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프린트정리에만 여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내 착각이었나 보다. 김혜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을 때 낮지도 높지도 않은 권강재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시끄러워.” “권강재.” “강우재 너도 그만해. 그리고 슬슬 일어나자. 시합시간 다 됐다.” “벌써 그렇게 됐냐? 네 농구경기 몇 년 만에 보는 거냐.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걸?” …완전히 무시당했다. 시끄럽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은 분명 김혜미와 강우재를 향해 한 말이다. 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합’. 내가 가지 못하는 ‘시합’에 강우재를 데려간다? 강우재에게 나보다 네가 더 소중했듯이 너 역시 나보다는 강우재가 더 소중했어? “맞다, 오늘 네가 나 여.자 소개시켜준다고 했잖아. 그 약속 잊진 않았겠지.” “나 응원하러 오는 건데 왜 네가 관심 있어 하는 건데?” “친구 덕 좀 보자. 나 호주가서 금욕 생활 했어, 인마.” 마치 내가 꼭 듣길 바라는 듯 ‘여자’를 강조하는 강우재. 강우재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기로 한건가?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 ‘여자’가 권강재를 보기 위해 시합에 온다는 말에 순간 화가 났다. 지난 몇 년 동안 권강재의 시합에는 권강재를 응원하기 위해 온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권강재가 오지 못하게 했다. 내게 말했던 적이 있다. 자기는 자신과 상관없는 여자아이가 자신을 응원하러 시합장에 오는 것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다고. 그렇기에 오로지 나 하나만 시합에 응원 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다른 여자아이가 온다? 나는 가지 못하게 하고? “권강재!” 내가 그렇게 잘 못 한거야? 너에게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아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우리가 함께 했던 10년이 넘는 시간을 지울 만큼 넌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어? 그건 아니잖아. 내가 아무리 너에게 큰 상처를 줬다고 해도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큰 상처는 아니잖아! 그 만큼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들이었잖아. “불렀으면 말을 해.” 하지만 그렇게 따질만한 용기는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권강재의 시선이 그만큼 차가웠기에. 질문도 하지 않았고 대답도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아서. “…시합 잘 해.”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잘 할 거니까 신경 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신경 끄라니!” “그럼 내가 어떻게 말해주길 바라는데. 어, 고맙다. 이러고 가? 내가 너를 신경 쓰지 않듯이 너도 나한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괜히 부담스러울 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권강재와 강우재가 부실을 나가는가 싶더니 ‘이만 가볼게요.’하는 권강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가지고 오신 게 맞나 보다. 딴 곳으로 세신 것이 아니라. 잠시 후, 선생님은 음료수를 들고 부실 안으로 들어오셨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와 그 옆에서 나를 달래고 있는 차연우의 모습을 발견한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나를 제외한 김혜미와 한효빈, 그리고 차연우까지 먼저 집으로 가보라는 하셨다. 곧 아이들이 하나 둘 동아리부실을 빠져나가고 선생님은 나를 소파에 앉힌 뒤 내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미셨다. “그만 울고. 강재랑 싸운 거야?”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한테 이야기 해봐. 항상 밝던 향미가 우니까 선생님이 되게 당황스럽다.” “선생님.” “응.” “선생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여자라고 한다면요.” “응.” “그 여자가 선생님을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 여자를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면요.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여자에게 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라고 당당히 말하실 거예요? 아니면 끝까지 숨기실 거예요?”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어찌됐건 나보다 몇 년은 이 세상에 더 산 사람이고 경험도 있을 거란 생각에. 하지만 그 경험이 나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를 좋아하는 제자 한 명이 있었어.” “…네?” “선생님은 그 제자가 너무 소중했어. 내게 첫 제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그 제자가 나를 선생님이 아닌 남자로 보고 있다고 했어. 그런데 나는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지. 무려 2년 동안. 향미는… 그 때 기분이 어땠어?” …원망스러웠고, 가슴이 아팠고. 심지어는 이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몇 달은 선생님을 일부러 모른 척까지 했었다. 그 만큼 선생님이 내 마음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 상처받았었으니까. …권강재도 그런 것일까. “선생님이 가장 향미에게 미안한 게 그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저도요.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권강재 마음을….” “강재가 향미를 좋아한다고 고백 했어?” “…아니요. 그런데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향미야.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에 각오하고 있었어. 향미에게 원망을 살 각오를.” 내가 선생님을 원망할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너의 마음을 모른 척 한 이유는 너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으니까. 소중한 제자를 잃고 싶지 않았어.” 나도 권강재라는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너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기에 그만한 대가는 치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향미가 가끔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감수해야만 했어.” “…제, 제가 언제 그렇게 쳐다봤다고 그러세요!”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말을 이어나가셨다. “향미야. 이런 생각 해봤니? 선생님은 이런 생각을 해봤다. 향미가 나를 정말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내 마음도 내 생각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 그래서 가끔 그런 눈으로 쳐다볼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었어.” “맞아요. 저도 강재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만큼 제가 강재가 소중하다는 건데 왜 그걸 몰라주는 건지.” “그럼 향미는 왜 내 마음과 생각을 존중해주지 않았어?” …그거야 소중하니까, 내가 너무 많이 좋아하니까. 그런 사람이 내게 내 마음을 무시했었으니까. 그 배로 아프고 상처받았었다. “…아.” “이해가? 선생님은 이제 어른이니까 겪지 않아도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만 향미는 겪지 않으면 모르는 아이잖아. 향미야 강재도 네가 너무 소중했었으니까, 너를 너무 좋아했고 믿었으니까 그 만큼 상처를 받은 걸 거야.” “그럼 어떡하죠? 저는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권강재가 저를 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건가요?” “선생님이 향미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어. 그리고 이해를 완전히 했을 때 너를 다시 만났지. 이 동아리에서 말이야.” 그래서 일부러…. “나를 무시하고 피하려던 너에게 선생님이 어떻게 했었지?” “무작정 들이댔죠. 싫었는대.” “하하. 그래, 그게 정답이야. 좋아하니까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는 없는 거거든.” “그럼 오늘 강재 시합에 가도 될까요?” “음. 오늘 하루는 집에서 네 마음을 정리해보는 게 어떨까?” 선생님은 내게 음료수 한 캔을 내밀며 말씀하셨다. “무슨 마음이요?” “선생님은 향미가 많이 소중하지만 지금 향미가 상처받은 만큼 나는 상처받지 않았었거든.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었는데 향미는 생각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결론이 뭔데요?” “향미에게 강재는 친구야, 이성이야?” …며칠 전 김혜미가 내게 했던 말과 유사한 말. 그리고 내가 고민했던 것 ‘이성’과 ‘친구’의 위치.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고민. “…친구요.” 그렇기에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대답. “친구와 이성친구의 차이점을 알아?” “친구에게는 믿음을 얻고 싶어 하지만 이성친구에게는 사랑을 얻고 싶어 하죠.” “그 것 말고도 차이점은 많아. 그 차이점을 모두 알았을 때 강재를 찾아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아.” “제가 평생 못 알아내면요?” “알아낼 것이라고 믿어. 자, 이만 집에 가자! 늦었다. 선생님 뒷바라지 하느라 매일 힘들지.” “알긴 아시네요.” “선생님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그 때는 정말 제자 대 선생님으로써 데이트 하는 거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동아리부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선생님한테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선생님.” “응?” 이미 선생님을 향한 내 이성으로써 감정은 끝이 났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던 말. “저를 단 한번이라도 여자로 생각하신 적 있으세요?” ‘없었어.’라는 말을 들을 각오로 물어보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권강재에게, 단 한번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들었던 것처럼 설마 선생님도 그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었을까.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잠시 시선을 낮게 내리까시며 생각에 잠기신 듯 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듯 했다.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몸을 틀어 동아리부실 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그런데 그 때 선생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고, 내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자리 잡혔다. ‘없었어.’ 예상했던 ‘없었어.’라는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이 며칠 전 혜미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던 나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집으로 귀가하는 길, 내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권강재의 시합장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선생님께서 조금만 생각을 해보고 찾아가라고 했는데 막상 그러려고 하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러다가 정말 다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며칠동안 모르는 사람인듯냥 취급받은 것조차 힘들었는데 앞으로 평생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갑자기 알코올이 당기네.” 권강재의 집에서 마셨을 때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번호 목록을 뒤지며 누구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에 빠졌다. 우선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권강재와 나의 이야기를 모르니까. 그렇다고 김혜미한테 전화했다가는 취하고 난 뒤 뒷수습을 모두 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효빈이는 자연적으로 패스. 그러면 차연우가 남는데, 괜찮겠지? 하고 차연우의 번호를 선택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자연스럽게 통화음이 가고 곧 차연우의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들렸다. “술 사줘.” - 다짜고짜 전화해서 웬 술? 선생님이랑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애인이 술 사달라고 하는데 곱게 사주면 어디가 덧나?” - 꼭 술이어야 하냐? 음료수는 안 돼? “용돈이 떨어졌다고 말을 해.” - 눈치 빠르기는. 어딘데? 내가 그리로 갈게. “됐어. 돈 없다며.” - 비상금은 있다. 네 말대로 애인이 술 사달라고 하는데 곱게 나가서 사드려야지. 안 그래? 하여간 아부는 전교 1등이라니까. “어디로 갈까. 이 시간에 포장마차 하는 곳 있나.” - 교복 입은 애가 포장마차는 무슨. “집에서 갈아입고 오면 되지. 어, 저기 포장마차 한다. 일찍 여네. 여기 시내 입구 앞에 있는 포장마차거든? 나 한 시간 뒤에 여기로 나 올 테니까 너도 시간 맞춰서 와.” - 오냐. 그렇게 차연우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집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최대한 학생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진한 화장이라서 그런지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한다. 누가 보단 수전증이라 오해 할 만큼.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똥키가 엉금엉금 걸어온다. “…여기는 부엌이 아닌데.”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다리를 넣어 문을 밀고 들어오는 강아지. 이럴 때 보면 정말 사람 같다. 그런데 저렇게 들어올 때는 맛있는 냄새가 나거나 혹은… “저 개새끼를 그냥!” 똥, 오줌을 쌀 곳을 찾아다닐 때였다. 그리고 역시나 똥키인가 뭔가 하는 개새끼가 다리를 쫙 벌리더니 똥을 쌀 폼을 취하는 게 아닌가. “이향원, 저 씹새를 그냥. 개새끼 훈련을 시킨 거야 만 거야!?!” 똥내가 풍겨옴과 동시에 방을 나가버리는 개새끼. 그리고 나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을 이향원이 들릴 정도의 목소리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똥 치워, 이향원!!!!!!!!!!!!!!!!!!!!!” 하지만 묵묵부답, 들림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새끼를 그냥 분명 저 강아지새끼를 집에 들여놓았을 때는 지가 오줌 똥 다 치우겠다고 했으면서 어느새 오줌은 내 담당 똥은 네 담당이 되어 버린 거냐고! “으, 똥냄새.” 이대로 똥을 방치해두고 나갈 수는 없었기에 똥을 치우고 나서 핸드백을 들고 방을 나와 이향원에게, “개새끼가 네 팬티물고 간다.” 라는 거짓발언을 해준 뒤 재빠르게 집을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향원의 절규가 집 밖까지 들려왔다. “흥, 쌤통이다.” 아,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빨리 가지 않으면 차연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나자고 해놓고 내가 늦으면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고, 어느 새 아까 전 내가 보았던 포장마차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 약속시간이 되기까지 여유의 시간이 있었고, 나는 상쾌한 저녁바람을 마시며 차연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어?”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 권강재와 강우재.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서 있는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시합이 벌써 끝났나보다. 권강재와 강우재가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그런데 왜 저 여자아이가 둘 사이에 서 있는 거지? “저 자리는 내 자린데….” 4년 전에도 권강재와 강우재의 사이는 내 자리였고, 지금도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만 했다. 아니, 강우재는 둘 째 치고 권강재와 가장 친한 여자아이는 나여야만 했고, 옆자리 역시 내 자리여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처음 보는 기집애가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 “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넋 놓고 가만히 있다가 정말 소중한 걸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다른 아이에게 저 자리를 빼앗기게 되면 나는 어떡해?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 하나 헤아려주지 못하고, 이렇게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너에게 섭섭해 하는 지도 모르고. 그런 녀석이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기는 할까?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면 솔직히 자신의 친구들이랑 사귈 때 내색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있지? 섭섭함이 어느새 여자를 향한 질투로 변해갔고, 이제는 그의 마음마저 의심하게 되어버렸다. 권강재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의심하다니 나 정말 최악이다.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지, 왜 밖에서 기다리냐?” “…어? 언제 왔어?” “방금 왔다.” “딴 생각하느라 못 봤나보다. 들어가자.” 어느 새 내 앞을 지나가고 있던 강우재와 권강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쫙 차려 입고 나온 차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대학생처럼 보이는 모습. 역시 내공이 쌓인 자는 다르다. “아줌마 여기 닭발 한 접시랑 소주 2병 주세요.” “우동도!” “저녁 안 먹고 나왔냐?” “응. 나 쫄쫄 굶었어. 여기서 본전 뽑고 갈 생각이야.” “알코올로 배 채워봤자 속만 버린다.” “누가 알코올로 채운데? 여기 음식 많잖아? 내가 포장마차에서 파는 음식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기를 몇 분,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내가 제일 먼저 향한 음식은 닭발도 아니었고, 우동도 아니었다. “우동국물이라도 마시고 마시지?” “됐어.” 소주였다. 차연우가 잔을 채워주기가 무섭게 그 것을 그대로 들이켰고, 절로 ‘캬.’하고 탄성이 나왔다. 속이 씁쓸해지면서 권강재에게 받았던 상처가 조금은 아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소주를 애용하는 것은 하나였다. 소주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시면 속이 씁쓸해지면서 싸해져온다. 그러면 잠시나마 가슴에서 느껴졌던 통증이라거나 힘들었던 기억을 잊을수 있었다. “벌써 두잔 째다. 나는 한 잔도 못 마셨는데.” “우동 먹어, 우동.” “난 저녁 먹고 나왔어, 인마.” “그래?”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 손은 잔이 아닌 소주 ‘병’으로 향했다. 웬만해서 나발을 불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미친 듯이 마시고 싶어졌다. 아까전만해도 그냥 건전하게 몇 잔만 먹고 가야지 했는데 권강재와 강우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한 층 더 기분이 좋지 않아졌고 우울해지고 가슴이 쓰라렸다. “이향미! 너 미쳤어? 왜 나발을 불어! 잔에 따라 마시면 되지! 미쳤냐? 와, 얘 봐라. 한 병 지가 홀라당 마셔버리네.” “…아깝냐?” “누가 아까워서 이래? 걱정 되서 그러잖아.” “걱정 돼?” 실소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내 소주 주량이 얼마였더라. “우동이라도 먹고 마셔. 진짜 속 버린다, 너.” “괜찮아.” 우동을 내 앞으로 내미는 차연우의 모습을 보자 차연우 때문에 속상해 권강재와 술을 마시던 날이 떠오른다. 술만 먹지 말라며 오징어를 입에 물려주던 권강재. 오늘은 너 때문에 차연우랑 술을 마시게 됐네. 그 때만 해도 너만은 내게서 뒤 돌아서지 않을 것 같았는데. 너 하나만은 끝까지 내 손을 잡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가장 먼저 놔버렸구나. “권강재 때문에 이러는 거야?” “뭐가?” “선생님하고 무슨 일 있었냐?” “아니. 없었는데?” 차연우의 앞으로 빈 잔을 내밀며 대답했다. “야, 벌써 두병 째다. 병이 또 비어가잖아.” “시키면 되지. 아깝냐? 어?” “그런 게 아니잖아.” “내 주량이 얼마 게?” “맥주, 소주 합쳐서?” “아니, 소주만.” 맥주는 그래도 어느 정도 주량이 강한 나이지만 소주는 달랐다. “글쎄. 한 세병?” “아니. 한 병. 의외지.” “한 병?! 야, 너 주량 넘었잖아! 지금 취했냐!?” “취한 건가? 기분이 몽롱하기는 해.” 오늘은 필름이 끊길 만큼 마시고 싶다. 마시고 일어나면 나는 다시 권강재와 함께 학교를 등교하고 웃고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전에 말이야. 네가 나 말고 그 선생님 택했을 때, 그 날 기억나?” “어. 근데 그 이야기는 왜 갑자기 꺼내는데?” 내 입에서 다시 그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온 것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은 건지 차연우의 표정이 한 층 어두워졌다. “그 날 내가 너무 속상해서 권강재한테 술을 사달라고 했었다?” “그 때도 이렇게 꼬장 부렸냐?” “근데 내가 그날 사고를 쳤어.” 나도 모르게 권강재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버렸던 날. 아무 생각 없이 입맞춤한 것이라 어떠한 기분이 들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모르고 권강재한테 키스를 해버린 거야.” “…뭐?” “근데 아무 느낌도 안 났었거든? 사실대로 말하면 그 때 내가 어떤 말을 했었고, 어떠한 행동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때의 기분은 기억이 안나.” “그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어?”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인마.” 반쯤 비어져 있는 잔을 마저 비우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음 날 내가 했던 행동들이 다 기억이 나는데, 부끄러운 거야. 권강재 보기가. 10년 넘게 함께 했던 친구한테 그 것도 내가 먼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랬다?” “그래서.” “그래서 피해 다녔어. 무작정 피해 다니면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무시하고 그랬었는데 권강재는 그런 내 행동이 이해가지 않고 또 화가 났었나 봐.” “나라도 그렇겠다.” “시합 전전 날. 금요일이었나? 그 때 권강재가 남으라고 했는데 내가 무시하고 조퇴하고 집으로 갔었다? 그리고 집에서 시험공부하고 있는데 이향원이 갑자기 들어와서 밖에 권강재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 때 비 엄청 내리지 않았었냐? 너 조퇴한 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나아갔다. “깜짝 놀라서 나갔지. 근데 비를 맞고 권강재가 서 있는 거야. 나는 그 모습에 되게 화가 났다? 일요일 날 시합이 있는 애가 왜 나 때문에 비 맞고 서 있나 싶어서. 그런데 권강재가 그러더라. 내가 자꾸만 피해서 기다렸다고. 자기는 내가 왜 자기를 피하는지 모르겠대.” “둔한건지, 맹한 건지.” “그러니까! 당연히 그 때 일 때문에 그러는 건데 말이야.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그냥 내가 그 때 했던 일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네 얼굴 보기가 그랬다고. 그런데 그 다음에 권강재가 나한테 어떻게 했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때 권강재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던 그 날 그 감촉을. 차가운 입술이 입술에 닿았지만 차갑지 않았다. 점점 닳아 올랐고, 권강재에게 내 심장소리가 들릴 것 같이 크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데. 때렸냐?” “아니, 권강재도 나한테 키스했어.” “…키스?” “응. 그러면서 이제 쌤쌤이니까 피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더라. 그 날 만큼은 권강재가 다르게 보였어. 친구로 보이지 않았어. 내 입술에 키스할 때도 친구로 느껴지지 않았어.” “권강재 좋아해?” “끝까지 들어봐. 그렇게 느낀 건 그 날 하루였어. 그 날 이후로는 그 때의 일이 떠올랐을 때 말고는 단 한번도 남자로 느껴진 적도 없었고, 두근거린 적도 없었어. 그리고 어느 여자라면 그 때 나처럼 그랬을 것 아냐. 나 정말 그 때 말고는 남자로 느낀 적 없거든? 권강재를 너무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근데 이렇게 잃게 될 줄은 몰랐어.” “이향미.”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또렷하게 보였던 차연우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속상해.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이,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는 게 속상하고 그래.” “내가 지금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가 제정신일 때 말해야 할 것 같다.” “힘들어. 권강재와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어. 친구 하나를 잃는다는 게 이렇게 아픈 건지 몰랐어.” 어느 새 나는 차연우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을까 내 귓가에 속삭이는 차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놓았다. ‘헤어질 때가 온 것 같다, 이향미.’ 제 30화 두 남자의 입맞춤의 차이점. 특별함을 원했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내게, 하루 24시간 중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공부에만 허비해야 하는 나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다가오길 바랐다. 허나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잃고, 아파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고, 제 할일을 하지 못하고. 내 꾀에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퍼뜩 안 일어나냐!?!” 으, 졸려 죽겠는데 누가 깨우는 거야? “일어나라고, 이향미!!!!!!!!!!” 이 굵직한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확 엄마 불러 버린다.” 엄마!? ‘엄마’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여졌고, 내 앞에 서 있는 이향원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일어났냐? 그렇게 불러도 일어나지 않더니만 엄마 부른다는 말에 벌떡 일어나는 것 봐라. 후환이 두렵긴 했나보지?” “…나 어떻게 된 거냐?” “기억 안나? 기억 날 거 아냐.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기를 바라는 거냐, 설마?” “진짜 기억이 안 난다고! 나 어떻게 들어왔어? 어제 차연우랑 술 마신 것 까지 밖에 기억 안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향원.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사실이었다. 언제나 술 마신 날 다음 날에는 그 전날의 일이 모두 다 기억났었던 나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필름이 끊겼던 것인지 기억이 당최 나질 않는다. 마지막 내 기억은 소주병을 나발로 불어 눈앞이 흐릿하게 보였을 때다. 그 이후로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기억 안나? 구라 아니고?” “진짜 안 난다고! 내가 언제 이런 걸로 거짓말 하는 것 봤어? 도대체 나 어떻게 들어온 거야?” “연우 형이 모셔다 놓았지. 엄마는 연우 형 앞에서 창피해죽겠다고 네 등짝 후려치고 난리 났고.” 어쩐지 등이 따끔하다 했어. “엄마는?” “다행으로 여겨라. 나갔다.” “이 밤에?!” “…이 밤? 창문 밖을 봐라.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낮? 분명 나는 저녁에 술을 마셨는데 어째서 낮인 건…데? 설마. “…나 하루 꼴딱 이러고 있었어, 설마?” “어. 그 설마가 사실이다.” 히발. 엄마한테 제대로 죽었네. 아, 그런데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지난번에도 술 먹고 사고치는 바람에 단단히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겠지만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니 그저 애가 탈 뿐이다. “사고 친 건 모르겠고, 형이 너 속 차리면 형한테 연락 하라고 전해달라고는 했어.” “…윽, 사고 쳤나 보다.” “내가 대신 연락이라도 해주리? 드디어 술 처먹고 깼다고?” “미쳤어? 나는 아직 속이 풀리지 않았다고!” “딱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물론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하긴 평상시에도 정상적이지는 않았지.” 양 쪽 귀에 피어싱을 몇 개 박고 다니는 너 따위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하면 가만히 거실에 처 박혀 주말을 보낼래.” “내가 요즘 용돈이 떨어져서 말이야.” 지난번에 오토바이 태워줬으면 줬잖아! 그 때는 사양하던 녀석이 이제 와서 용돈을! “…얼마면 돼?” “파란색 다섯 장정도?” 오만 원? 이게 미쳤나. 내 한 달 생활비를 몽땅 바치라는 거냐? “…지갑에서 꺼내가.” 하지만 그깟 오만 원보다 내 안전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기꺼이 오만 원을 이향원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향원은 정말로 약속대로 하루 종일 거실에 처박혀 티비만 주구장창 보았다. 외출하셨던 엄마가 돌아와서 한심하게 티비만 처보고 있는 이향원의 등짝을 후려 쳐주기까지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향원이 맞은 타격의 3배나 되는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한동안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라는 늦어도 10시 안으로는 들어오라는 통금시간이 생겨버렸다. 물론 2주정도가 지나면 없어질 통금시간이지만 말이다. ( 독서실로 인하여 당연지사 없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의미 없이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 거리며 지내고 드디어 월요일이 찾아왔다. 축제는 4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축제보다 더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바로 차연우였다. 물론 지금 권강재와의 문제도 급했지만 차연우에게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했으면 무슨 얼굴로 보지? 하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 권강재에게 사고 쳤을 때는 다른 반이라 원활하게 피할 수 있기라도 했지만 차연우는 다르지 않은가. 같은 반이니 만큼 마주치는 시간도 많고 피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내 편이었다. 권강재 때와는 달리 그 날 이후 차연우와 첫 대면하는 날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그와의 만남을 피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지금부터 피구연습게임을 시작한다. 먼저 짝수팀 공격. 시작-!” 1교시 체육시간. 4일 후 열릴 축제는 오후에 시작한다. 그리고 오전에는 운동회가 있을 예정이다. 예선전 통과 준결승전 통과 끝내 결승전까지 올라간 우리 반은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우리 반은 체육시간, 운동회를 준비할 겸 피구 연습에 한창이었다. 남자아이들 역시 축구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지라 한창 축구 연습에 빠져있었다. 여기서 내가 왜 하늘이 아직 내편이라고 외쳤는가 하면, 내가 속해있는 팀은 홀수 팀. 짝수 팀에는 어마어마한 공격수가 있었다. 그 공격수가 던지는 공에 맞으면 거의 게임 아웃. 하루 종일 양호실에 누워있을 정도의 파워다. 나는 저 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 되는 거다. 하루 종일 양호실에 뻗어서 잠만 주구장창 처자면 되는 거다. 물론 하루 종일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지만 그 단점을 감안할 만큼 나는 차연우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 모르기에 더더욱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향미야, 피해라. 쟤 너 노리고 있나보다. 눈빛이 장난이 아니야.” 옆에 있던 친구가 내 몸을 걱정해주며 자신 또한 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피할 준비 따위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 공격수의 공격을. 나를 향한 공격을 말이다. 아마 짝수 팀에서는 체육에 그나마 소질이 있는, 공격은 잘 하지 못하지만 이리저리 잘 피해 다니는 내가 골치 덩어리였나 보다. 제일먼저 나를 타깃으로 삼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향미. 3초만, 3초만 참는 거야.” 두려움 3초. 그 딱 3초만 참으면 나는 오늘 하루 편안해지는 거다. 아무 무리 없이 하루를 보내는 거다. 참자. 그 까짓 3초. 하루 종일 차연우와 마주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심해, 이향미ㅡ!!” 이미 늦었다. 이미 공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정확히 1초 후 나는 엄청난 힘이 실린 공을 정확히 이마에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공에 맞은 순간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그저 내 앞에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손을 뻗으려고 하는 한 친구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을 뿐. 하지만 보이는 것도 거기까지. 그 이후로는 어두컴컴한 세상이 눈앞을 가로막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술 이외의 것으로 기절, 아니 정신을 잃은 건 아마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 * * “…으음.” 머리가 띵한 게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자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요, 특유의 양호실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나… 기절했던 건가?” 분명 엄청난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지면서 눈앞이 흐릿해지고 나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 이러다가 기억력 제로 되면 어쩌나 싶다. 하루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하루는 공에 맞아 정신을 잃고. 나 병원가지 않아도 되나. 갑자기 내 건강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일어났구나. 몸은 어때?” 그 때였다. 일을 보고 계시던 양호선생님께서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아셨는지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상태를 물으셨다. “…좀 아파요. 머리가 어질 거리고.” “심한 충격을 받아서 그래.” “지금 몇 시에요?” “3시. 5시간이나 이러고 있었어.” 5시간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나도 정말 엄청난 모험을 했구나. “수업은 들을 수 있겠어? 힘들면 담임선생님한테 대신 말해서 조퇴증 끊어줄게.” “…좀 힘들 것 같아요. 아직도 눈이 흐릿하게 보여서.” “병원 가봐야겠다. 선생님이 조퇴증 끊어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려. 그리고 마침 쉬는 시간이니까 친구한테 연락이라도 해서 가방가지고 내려오라고도 좀 하고. 네가 갔다 오기에는 좀 위험해 보인다.” “…네.”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선생님께서 양호실을 나가시자마자 체육복 바지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어 반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친구는 전화를 받고 괜찮냐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는 차연우의 귀에 들어갈 염려가 있었기에 괜찮지 않다며 조퇴를 하려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가방을 좀 들고 내려와 달라는 부탁까지 하였다. 친구는 흔쾌히 알았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후. 오늘은 이렇게 보낸다 치고, 앞으로는 어떡하려나.” 요즘 따라 되는 일이 없다.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인 ‘친구’와 ‘이성 친구’의 차이점도 찾아야 하고, 권강재와 사이도 풀어야하고, 강우재도 거치적거리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차연우까지 피해야하는 상황이라니. 정말 최악이다, 이향미. 너 왜 이렇게 됐냐.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푹 쉬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하루를 보내보는 거야. 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건 시간일지도 몰라. 항상 무엇에 쫓기듯 공부해왔고, 들킬까 조마조마한 생활을 해왔고, 힘든 짝사랑까지 해왔었으니까. 편하게 하루를 보내고, 즐겁게 놀고, 평상시에는 하지 않았던 게임도 해보고, 비디오도 빌려와 영화도 좀 보면서 하루를 지내다 보면 해결방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 * * 다음 날 아침. 차연우와의 만남을 걱정해야 할 내가 다른 이유로 겁을 내며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이향미.” 언제나 완벽을 추구했던 내가 어젯밤 충동적으로 했던 행위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키다니. 하, 왜 하필이면 오늘 선도부 담당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냐고요! “지금이 몇 시냐.” “…음. 제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네 시력은 건강검진 때 양호실 선생님 옆에서 내가 직접 같이 보았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몇 시냐.” 하루쯤 놀아도 되겠지? 하고 정말 실컷 놀아버린 나를 탓할 수도 없으니. 이 상황을 도대체 누구에게 원망하리오. “내 입으로 말해주길 바라는 거냐? 그럼 좋아. 직접 말해주지. 지금은 정확히 작은 바늘이 ‘9’를 큰 바늘이 ‘12’를 가리키고 있구나.” “선생님 정확하지가 않잖아요! 저희 학교 시계는 5분 빠르다니까요!” “시력 멀쩡하네.” 이런 낚였다. “어찌됐건 네가 지금 몇 분을 지각했는지 알아?! 반장이라는 녀석이 말이야!” 그러게요. 반장이라는 녀석이 어쩌다가 새벽 4시가 넘는 시간까지 만화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버렸을까요. 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 밤늦은 시각까지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 잠에 들지 못한 저를 탓해주세요. “선생님이 학기 초에 뭐라고 말했었지?” “지각과 결석은 용서치 않는다고… 지각과 결석을 하는 순간 그 날 수업은 포기하라고….” “잘 아네. 아는 녀석이 한 시간이나 지각을 해!?” “55분이라니까요!” “그거나, 그거나!” 다르죠! 한 시간이면 무단 지각이라고요! “어찌됐건 너는 오늘 학교 내의 봉사를 한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반장이라는 녀석이! 선생님은 단 한번의 실수도 용서치 않는다. 반에 가방 가져다 놓고 다시 교무실로 내려와.” “…네.” 후. 결국 2일 연속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는구나. 아니 세상천지에 지각한번 했다고 교내 봉사를 시키는 담임이 어디 있냔 말이야! 진짜 담임 복도 지지리도 없지. 작년에는 떨거지 일만 주구장창 얻어오는 담임 얻어 늦게까지 돕느라 집에 늦게 갔지, 이번에는 사소한 실수 하나가지고 징계수준의 벌을 내리질 않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결국 반으로 올라가 가방만 자리에 둔 채로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에 들어간 틈을 타 힐끗 차연우의 자리를 쳐다보자 녀석도 밤늦게 잠을 잔건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찌됐건 오늘 하루 차연우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는 하다만 교내 봉사하는 마음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오늘은 선생님들 세미나 때문에 단축수업이라 점심만 먹고 집에 가니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손 걸레로 싹싹 닦고, 1층부터 4층까지 껌도 깨끗이 떼어내고. 마지막으로 1.2층 여자 화장실 청소까지만 하고 마무리 한다.” 내가 청소부 아줌마인 줄 알아!? 저걸 어떻게 다 하냐고! 그 선심 쓰는 듯한 말투는 또 뭐야? 단축수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시켰을 거라는 거야, 뭐야?! “…네에.” 하지만 담임선생님, 그 것도 체육을 담당하는 선생님께 ‘반항’이란 것을 했다가는 하루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곱게 대답을 하고서는 청소도구함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학생 때 많이 해왔던 것이라 그런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어제 맞은 이마에 대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인지 가끔 어질 거릴 뿐. “복도는 대충 어떻게 했다만, 화장실은 어쩌지? 아까 보니까 변기통 막혔던데.” 히발, 담임. 설마 막힌 것을 알고 날 시킨 것은 아니겠지!? 변기통 막힌 것은 대부분 남자선생님이 나서서 뚫어주던데. 그러고 보니 지난 번 뚫어 뻥을 들고 다니시는 담임선생님을 본 것도 같다. “…이런 망할!” 결국 신 선생님과 다를 바 없는 선생이었다, 이 선생도. 지가 변기통 뚫기 싫어서 나 시킨 거잖아, 지금!!! “후.” 복도를 닦고, 1-4층 까지 붙어있는 껌을 다 떼고 나니 벌써 2교시가 끝나고 3교시가 시작되었다. 이제 한 시간 남았다. 그 안에 화장실 청소를 다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으, 다리 저려.” 너무 무리를 했는지 다리가 저려 복도에 주저 앉아버렸다. 이왕 앉은 김에 한 숨 돌리고 다시 하자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게임 한판이라도 하려고 하는데 차연우에게서 문자 한통이 도착해있었다. [ 청소하는 꼬락서니 봐라. 그렇게 대충 대충해서 쓰냐? ] 시간을 보아하니 막 도착한 문자 같다. 헌데 이 녀석이 내가 청소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밖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1층에서 청소하고 있던 나를 차연우가 발견하고 문자를 보낸 듯싶었다. “결국 피하지도 못했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는 듯 문자를 보내는 거야! 하고 문자를 작성해서 전송했다. [ 왜 이래, 땀 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 노닥거리는 거로 밖에는 안 보이는데? ] “이 새끼를 그냥.” [ 너 나 잘해! 선생님한테 농땡이 피우고 있다고 꼬질러 버린다.] [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오호? 계속 개기시겠다?” 넌 딱 죽었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선생님을 향해 소리 지르려고 하는데 다시 한번 ‘지이잉’하고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역시나 차연우에게 온 문자였다. 나는 이미 늦었어, 이 자식아.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자를 확인했는데 문자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 오늘 시간 비워라. 데이트나 하자. 학교도 일찍 끝나는데.] “…돈도 안 가져왔는데.” [ 돈 없어. 패스] [ 오늘은 모두 다 내가 쏜다.] [ 오호? 용돈 날인가 보다, 오늘? 좋아. 알았어. 학교 끝나고 바로?] [ 한 2시쯤 만나자. 그 때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차연우의 문자에 알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접었다. 평범한 데이트 신청인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기분 탓인가? * * * 3교시 끝나는 시각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청소를 끝낸 나는 선생님께 검사를 맡고 점심을 먹지 않고서 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오늘 학교에서 한 일이 도대체 뭔지, 이럴 바에는 그냥 가지 말 걸 왜 갔는지 후회가 되었다. 어찌됐건 집으로 돌아온 나는 2시, 데이트 약속을 위해서 아침에 늦잠을 자 재대로 씻지 못한 몸을 씻고 나와 옷장을 열었다. “날씨도 더운데 치마나 입어야지.” 벌써 여름이 오는 건지 아직 6월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그로 인해 내가 선택한 옷은 짧은 청 미니스커트. 그에 맞추어 상의를 골라 입고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 올렸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상하게 오늘은 예쁘게 입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 좋은 일들을 잊고 즐겁게 놀고 싶어 기분을 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권강재가 신경 쓰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이 많이 흐르기 전에 사이를 되 돌려야겠다는 생각 뿐.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이향원, 디질래?” “그건 사양하겠어.” “개새끼나 치워! 따라 나오려고 하잖아!” “똥키! 가서 물어!” 백년 그렇게 말해 봐라. 쟤가 나를 무나. 오히려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고. 나는 이향원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서는 집을 나와 집 근처에서 택시를 잡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보통 때라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가겠지만, 오늘 따라 날씨가 너무 후덥지근해서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간 온 몸에서 땀 냄새가 진동할 것만 같았으니까. “여기 2900원이요.” 잠시 후, 택시는 약속장소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지갑을 열어 택시비를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연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현재 시각 2시 되기 5분 전, 남자라면 당연히 5분 정도는 미리 나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매너, 매너 하던 녀석이 숙녀를 기다리게 하다니. 기본이 안 되어있다. 이 더운 날씨에 기다리기 까지 해야 하다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나는 차연우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눌러갔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톡’하고 손가락으로 치는 게 아닌가.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접고 고개를 틀어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확히 2시에 도착.” “좀 미리 나와 있으면 안 돼?” “방금 왔으면서 한 시간 미리 온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방금 왔는지 안 왔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몇 십분 전에 왔더라면 적어도 너의 이마에 땀 한 방울 정도는 맺혀있었겠지.” 하여간 예리하다니까. “자, 그럼 네 말대로 데이트 하러 나왔으니까 데이트 코스를 읊어보시지?” “우선 무엇을 좀 사러 갈 거야. 그리고 밥도 좀 먹고, 영화 좀 보다가 마지막으로 공원에 갈 거야.” “뭐야. 평범하잖아.” “뭘 바랐는데? 놀이공원이라도 가길 바랐던 거야?” 이 날씨에 놀이공원을 가느니 차라리 집에 처 박혀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녀석 평상시처럼 행동하네? 나 그날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은 건가? 나 혼자 쇼한 거? “저기, 나 하나만 묻자.” “어, 물어 봐.” “우리 술 마셨던 날. …나 아무런 말실수도 안 했어?” “말실수?” “응. 내가 원래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겨도 다음 날 기억이 다 나거든? 근데 이상하게 그 날은 기억이 안 나. 누가 내 머릿속을 지우개로 싹 지워놓은 것 같은 기분? 조금 더 리얼하게 말하면 하얀색 페인트를 통째로 부운 기분?” “말실수는 안했어.” “말… 실수는? 그럼 뭐, 다른 건 했다는 거야?” 아,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말실수라기 보단 무언가 깨닫게 해줬지.”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불어! 무슨 실수 한 거야, 나?” “오늘 이 데이트가…” “오늘 이 데이트가 뭐.” 후다닥 말하고, 후다닥 끝내기를 바랐던 나와는 달리 유난히도 뜸을 드리는 차연우의 행동에 승질이 난 나는 빽ㅡ 소리를 질렀다. “빨랑빨랑 안 말해?!” “그냥 데이트 끝나면 말해줄게. 지금 얘기하면 분위기 확 깨거든.”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이러기야!?” “자자, 첫 데이트 장소로 출발해볼까.” 이 새끼 말 돌리는 것 봐! 말 돌리기만 하면 될 것이지, 세게 미는 건 뭔데! 안 밀어도 간다고 이 새끼야! “걸어갈 거야? 멀리 가는 거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더워 죽겠다.” “여기서 얼마 안 멀어. 이 골목으로 쭉 가면 나와.” “도대체 뭘 사러 가는데 날 데려가는 거야? 으, 영화관 가고 싶다. 거긴 시원하겠지?”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으니까. 어, 저기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손부채를 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때 차연우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나는 그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너무 멀리 있어 간판은 잘 보이지 않지만 얼핏 봐서는 여성용품 파는 곳 같다. 멀리서 봐도 아기자기해 보이는 가게는 도저히 남자들이 살만한 물건들이 있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악세사리 가게였어.” 내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우리가 향한 가게는 아기자기한 악세사리가 가득 판매되고 있는 가게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악세사리들뿐. 도대체 여길 왜 오자고 한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길 도대체 왜 오자고 한 거야?” “주문해놨던 게 있어서.” “주문? 설마… 나 주려고?” “꿈 깨셔.” 아, 실망스러워. 내심 기대했는데. 너한테 기대란 것을 한 내가 바보지. “며칠 전에 주문했던 물건을 받으러 왔는데요. 차연우라는 이름으로 주문했었는데.” “안 그래도 언제 오시나 했어요. 여기요.” 여자점원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서 차연우의 앞에 꺼내 놓았다. 여자가 꺼내 놓은 것은 너무나도 귀엽고 예쁘게 생긴 꼬마 아이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와ㅡ. 예쁘다. 막 뽀뽀하려고 한다, 얘네 들.” “그렇죠? 이렇게 붙여놓으면 소리도 나요.” 남자 아이 모양의 열쇠고리와 여자 아이 모양의 열쇠고리가 ‘톡’하고 소리를 내며 붙자 귀여운 아이 목소리로 ‘사랑해.’하고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가 귀여워 탄성을 지르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점원이 두 아이모양의 열쇠고리를 떼어내자 ‘기다릴게.’ 하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손으로 만든 작품이라 더 섬세하고 예쁘죠?” “와 수공으로 만든 거예요? 진짜 비싸겠다.” “얼마죠?” “51000원인데, 50000원만 주세요.” 헐, 5만원씩이나 해? 한 달 용돈이나 다름없잖아? 으, 예쁘지만 정말 비싸다. “저걸 어디에다 쓰려고 사는데? 진짜 비싸다.” “다 쓸 때가 있어.” “이거 사러 오자고 한 거야? 나중에 너 혼자 오지, 날 왜 끌고 왔대.” “근처에 왔으니 받아가야지. 여기 오만원이요.” “여기 물건이요. 다음에 또 오세요.” 점원이 내미는 물건을 건네받은 차연우와, 나는 가게를 나와 다시 영화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날씨가 워낙에 더워서 그런 것인지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버거웠다. “땀 흘리는 것 봐라. 그렇게 덥냐?” “더워! 넌 안 더워? 우리 하드 바 하나만 사먹고 가자. 정말 더워!” “누가 사는데?” “당연히 너지! 네가 다 쏜다며? 나 돈 한 푼도 안 들고 왔어.” “진짜 안 들고 오냐!?” “네가 다 산다며!” 너무나도 더웠던 나는 차연우에게 하드 바 하나만 사달라고 요구를 하자 그런 내게 투덜대는가 싶더니 곧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하드 바 2개를 들고 나와 내게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무슨 아이스크림이 700원씩이나 해? 조온나 비싸.” “물가가 올랐잖아. 언젠가는 7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2000원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안 먹어. 차라리 얼음을 먹고 말지.” “오만 원짜리 열쇠고리를 사는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건 다 쓸 때가 있다고. 후, 드디어 도착했네. 들어가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다보니 어느 새 영화관에 도착했고, 우리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 최근에 개봉한 ‘영화’표를 예매한 뒤, 시작 시간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근데 말이야. 네가 웬일로 데이트 비용 전액 부담을 하는 거야?”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매정하다. 여자친구한테 얻어먹고 싶어?” “시간 다 됐다, 들어갑시다.” 말 돌리는 것 봐. 얄미워 죽겠네, 정말. “오늘이 마지막 이랬으니까 이따 식당에서 보자. 뽕을 빼주겠어.” “여자친구 먹여 살리느라 등골 휜 남자친구는 보이지도 않나보지?” “지 것 사다가 휘는 거겠지. 어서 들어가기나 해!” 입구에서 어물쩍 거리는 차연우의 등짝을 후려치며 먼저 입구로 들어갔고, 곧 차연우도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뒤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표에 적혀있는 좌석을 찾아 앉아 곧 시작할 영화를 기다렸고, 영화가 시작하자 나는 살며시 차연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영화에 집중했다. 집에서 쉬었을 때보다 더 확연히 다가오는 편안함.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에 크게 출렁이는 파도가 점점 잠잠해지는 듯 한 기분이다. * * * “그 대사 기억 나? 중간에 그 아줌마 말이야.” “쪼잔한 놈이 쪼잔하게 쪼잔한 말만 하네, 이 쪼잔한 놈아! 이거 말이야?” “어. 아줌마 말 빨이 장난이 아니었어. 쪼! 잔한 놈이 쪼! 잔하게. 아주 그냥. 쪼에 강조를!” “너도 늙어서 그렇게 되고 싶나 봐?” “됐거든. 난 그렇게는 안 살 거거든! 너야말로 이제 너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게 어때? 그렇게 공부 안하다가는 나중에 돈 없어서 여자 못 만나고, 돈 없어서 결혼 못하고 돈 없어서 사고 싶은 거 못 산다?” “난 운이 타고 나서.” 저러다 정말 큰 코 한번 다치죠.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정말 배고파. 점심도 안 먹고 나왔어, 너 때문에.” “학교에서 점심 안 먹었냐?” “응. 집에 빨리 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점심도 안 먹고 왔잖아.” “근처 음식점 괜찮은데 없나.” “나 괜찮은 스파게티점 아는데, 거기 가자. 가격도 싸고 맛도 좋아.” “안내해라, 이향미.” 저 명령하는 듯 한 말투는 뭐야? “네가 쏘는 거니까 아무 말도 안하는 건데, 그 명령하는 듯 한 말투는 뭐야?” “지금 그 ‘아무 말도’ 하고 있네.” “됐다. 그냥 내가 입 다물고 있을게.” 더 이상 말을 이어 나아가다는 저 얄미운 말투에 제풀에 열 받을 것 같아 음식점에 도착하기 전까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음식점에 도착한 우리는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했고, 곧 음식이 나오자 배가 고팠던 나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급하게 음식을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음식을 먹는 내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차연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말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일일이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릇 가득했던 스파게티는 눈 깜짝할 세 깨끗이 비어졌고, 차연우는 그런 내게 ‘네가 먹는 것 보니까 입맛 떨어졌다. 나가자.’하고 말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남겨진 음식을 보며 ‘아깝다…’ 하고 애처롭게 봤지만 남은 음식까지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먼저 음식점에서 나와 차연우를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차연우가 음식점에서 나왔다. “이제 좀 배가 부르냐?” “응. 살 것 같아. 이제 어디가?” “마지막 코스. 한적한 공원.”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잖아. “공원을 가는 이유는? 산책하자고? 나란히 손잡고?”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이 녀석 유난히도 분위기 잡는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구석도 있는 것 같고. 괜스레 이런 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시내를 쭉 타고 올라가니 녀석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한적한 공원이 나왔다. 사람들도 별로 없는 조용한 공원. 도대체 이곳에서 녀석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공기 좋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네. 여기 꽤 오래 살았었는데.” “이향미.” “우리 좀 걸을까?” “할 말 있어.” “걷자.” “이향미.” 차연우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차연우가 짓고 있는 표정을 언젠가 봤던 적이 있었다는 것. 차연우가 짓고 있는 표정은 정확히 4년 전 강우재가 내게 짓고 있었던 표정이라는 것. 그렇기에 나는 직감적으로 차연우가 내게 무슨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데이트라고 단정지어버렸던 내가 미워진다. “네가 내게 그 날 말실수 한 거 없냐고 물었었지.” “얘기 안하면 안 돼? 나 별로 듣고 싶지 않아.” “근데 내가 실수 한 거 없다고 했었잖아. 대신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응. 근데 나 이제 하나도 안 궁금해. 그러니까 말 안 해도…” “오늘 너와 내가 한 데이트가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라는 것을 깨달았어.” 어색하게 웃으며 하고 있는 내 말을 끊으면서까지 내게 전해준 그 깨달음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아니, 난 분명 그 날 해서는 안 될 말을 차연우에게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날,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했던 거야? 무슨 실수를 한 거야, 도대체?” “실수한 거 없어.” “거짓말 마!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할 수는 없잖아. 말 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거야?” 당연하잖아.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넌데 헤어지고 싶을 리가 없잖아!” “정말 날 좋아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 내 진심을 믿지 않는 듯 한 그 말투는 뭐야? “내가 너한테 남자야?” “그럼 네가 여자겠어?”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이성이냐, 친구냐. 그 걸 묻고 있는 거잖아.” “난 친구한테 고백 따위 하지 않아.” 내 대답에 차연우는 아직도 멀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권강재는 남자야, 친구야?” “갑자기 권강재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당연히 친구잖아!” 또 다시 언급되는 ‘권강재’와 나의 사이. 몇 번이나 친구라고 말했음에도 이렇게 묻는 이유는 뭘까. 김혜미에, 선생님에, 차연우까지. 이제 누가 남았지? 왜 자꾸 내게 묻는 거지? 친구와 이성하나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 소리쳤다. “내가 그런 것 하나 구분 못할 거…!” “친구랑 키스까지 해?” “…뭐?” …하지만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돌아오는 차연우의 물음에 나는 또 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권강재와 입맞춤을 나눈 사실을 어떻게 차연우가 알고 있는 거지? “그런 표정으로 볼 것 없어. 네가 직접 말해준 거니까.” “…설마, 그 날.” “그 설마가 아마 맞을 거야.” “그럼 알겠네. 실수였어! 술에 취해서…!” “내가 말한 키스는 그 키스가 아니라 두 번째 키스를 말하는 거야. 네가 권강재한테 한 키스가 아니라, 권강재가 네게 한 키스.” 두 번째 키스? …비오는 날 권강재가 했던 그…. “대부분 실수라도 친구와 키스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진 않지. 두근거림도, 설렘도.” “여자라면 누구나 그 순간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려!” “그래?” “어! 설마 그 것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 나 정말 실망할 것 같아. 내가 고작 그 정도도 구분 못할 여자애로 봤던 거야? 정말 실망….” 이번에도 역시나 차연우에 의해서 도중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차연우가 내 말을 뚝 자르고 자신의 말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차연우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는 점이다. “…….” 잠시 후, 내 입술 위에 머물렀던 차연우의 입술이 떨어졌고,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차연우와의 입맞춤은 이제까지 와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강우재와 사귀었을 때 당시 했던 내 첫 키스 이후 처음으로 내가 좋아한다고 인정한 남자와 하고 있는 입맞춤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기분이 어때? 권강재한테 느꼈던 기분을 나한테도 느끼고 있어? 지금 두근거려?” 왜 강우재와 첫 입맞춤을 했을 때와 기분이 다른 거지. “넌 똑똑하잖아. 공부도 잘하고. 이정도면 이제 깨달을 때도 됐잖아.” 차연우와의 입맞춤은 권강재와의 입맞춤을 했을 때와의 느낌과도 달랐다. 그렇다고 권강재와의 입맞춤과 강우재와의 첫입맞춤의 느낌이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볼게.”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내가 남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묻지 마….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네가 선택해. 어차피 처음부터 네가 선택했어야 했으니까. 앞으로 어떡했으면 좋겠는데?” 권강재와 차연우. “우선…우리 시간을 좀 갖자.” 두 사람과의 입맞춤은 나를 크게 뒤 흔들었다. 제 31화 끊어진 뫼비우스의 띠. 차연우와 그렇게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너무나도 많은 걸 깨달은 듯 한 기분. 어째서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 거야? 내심 평소에 기대했었던 입맞춤인데. 이제까지 사겨왔던 남자아이들과도 몇 번이나 입맞춤을 나누었었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느끼질 못했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두근거림도, 설렘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입을 맞대고 있는 듯 한 기분. 그런데 …차연우가 내게 입을 맞추고 있을 때도 그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강우재와의 입맞춤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설렜었다. 권강재와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부드러웠고,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차연우와의 입맞춤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가만히 서 있는 듯 한 기분. 그냥 서로 입술만 맞대고 있는 듯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권강재가 내게 키스 했을 때는 정말 미친 듯이 두근거렸는데 차연우와 똑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는 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지? 분명히 내 입으로 말했는데, 어느 여자라도 그 순간 누군가에게 입맞춤을 당한다면 두근거릴 거라고, 그런데 왜 나는 두근거리지 않았던 거지? 혼란스러운 머리를 끌어안고 멍하니 걷다보니 어느 새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없어.” “어디 갔는데?” “옆집.” 또 아줌마들과 수다 떠시러 가셨구나싶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이향원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재미있는 채널 없어?” “어.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그 맹구같은 표정은 뭔데?” “맹구? 디질래?” “네 표정 엄청 맹~ 하다고.”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여전히 나는 맹~ 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향원은 그러한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 때 저 멀리 탁자 뒤로 유리 조각처럼 보이는 투명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유리 깨진 거 아냐?!” 하고 깜짝 놀라 소리 지르며 이향원을 쳐다보자, 이향원 내 시선을 피한다. 나는 녀석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가까이 다가가 유리조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았고, 곧 유리조각의 정체는 엄마가 평소에 아끼던 장식구라는 것을 눈치 챘다. 내 시선을 피하는 이향원을 보아하니 필시 네 놈이 깬 것이렸다.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치사하게!” “닥쳐. 어차피 나 아니라고 하면 너밖에 의심 받을 사람이 없잖아?” “우리 똥키도 있잖아!” “걔가 사람이야?!” “뭘 원하는 건데…, 시발.” 딱히 원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엄마한테 혼나기 싫었을 뿐. “이번에 너 축제 나간다며.” “어. 들었냐?” “그 것도 오늘 아침에 신청했다며. 장기자랑.” “원래 스타는 늦게 등장하는 법이거든.” 지랄한다, 또. “취소해.” “…뭐라? 뭐라고??” “취소하라고. 네가 미쳤지? 축제가 이틀 앞인데 신청을 오늘 해?! 너 하나 때문에 장기자랑 일정 다시 짜야 하고 노래 준비에 없던 일이 생겼다고. 이 바쁜 와중에. 그러니까 취소해. 그러면 눈감아 줄게.” “너야말로 미쳤냐!?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일러! 누가 무서울 줄 알고?” 오호라. 그렇게 나오시겠다? 정말로 무섭지 않다 이거지? “알았어. 그대로 말해줄게. 엄마 폰 가져갔지?” 하고 수화기를 들자, 이향원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지면서 녀석의 두 손이 한곳으로 모여졌다. “누님.” 녀석은 내게 빌고 있었다. “취소할 거야?” “그 것만은 제발.” “그럼 며칠 전에 가져간 오만 원 내 놓으시던가.” “연우형한테 연락한다!” “안 그래도 오늘 데이트했다. 전화하려면 전화하던가. 나는 상관없거든.” “제발, 누님. 이 어린 동생을 봐서라도 한 번만.” 적당히 놀려주고 끝내려고 했던 나는 갑자기 녀석에게 원하는 것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이향원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어쩌면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금방 해결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묻는 질문에 몇 가지만 대답해줘.” “얼마든지. 오늘 하루 누님에게 쏟을 자신 있습니다!” “오바는 됐고, 대신 진지하게 대답해줘.” “난 언제나 진지해. 학교에서는 날 진지남이라고 부른다니까?” 진짜 진지하게 대답해줄 생각은 있는 걸까. “너 여자친구랑 사귄 지 얼마나 됐더라.” “한 일년됐지?” 사귄지 1년이 조금 넘었다면 한 번쯤은 여자친구와 키스를 해봤을 거라는 가정 하에 녀석에게 물었다. “네 여자친구 좋아하지?” “당연하거는 묻지 마.” “그럼 키스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변태같이 그런 건 왜 물어? 아, 알았다고! 째려보지 마. 대답하면 되잖아. 음, 그러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 …비행기타는 기분을 말하는 건가. “기분 좋은 건 당연한 거고, 달콤하고 황홀하고. 뭐 그 정도?” 나도 차연우를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거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 건가. “너랑 친한 여자애와 키스를 했다고 생각했을 때 기분이 좋아?” “미쳤냐? 좋아하지도 않은 애랑 키스를 했는데 왜 기분이 좋아?” “그럼 불쾌해?” “친한 여자애라며, 그럼 무진장 친한 친구를 말하는 거 아냐? 불쾌하진 않겠지. 그냥 덤덤했겠지. 실수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가?” “비슷하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이랑 키스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싫어하는 사람이랑 키스하면 기분 나쁘고.” 왜 나는 반대야? 친구랑 키스했을 때는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했을 때는 덤덤했지? “질문 끝?” “아니, 하나만 더.” “물어 봐.” “너…강희를 여자로 본 적 있어?” 내가 권강재를 남자로 봤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나와 권강재만큼 함께 지냈던 이향원과 권강희. 그 둘도 서로에게 여자 혹은 남자로 느껴졌던 적이 있었을까. “우리 누님 돌았구나.” 대답은 NO였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어?” “하나만 더 한다며. 그리고 너 강재형 좋아하냐?” “뭐어!?” “아니면 그런 질문을 왜해? 강재형이 남자로 느껴져?” “그런 게 아니라….” “키스 물어본 것도 강재형 때문이구만? 형이랑 키스했냐?”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왜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물어봤을까. “어쩐지 수상쩍다 했어. 둘이 사귀어? 연우 형이랑 강재형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냐?” “네 마음대로 추측 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지하게 대답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진지하게 대답해줄게. 나랑 권강희가 너랑 강재형이랑 같냐? 나랑 권강희가 아무리 오래 알던 사이라고 해도 너랑 형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권강희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권강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와 권강희는 2살 차이라고. 그 만큼 같이 붙어 다니지 않았다는 거야. 근데 너랑 형은 다르잖아? 나이도 같지, 학교도 같은 학교였지. 집도 옆집이지. 형이 널 끔찍이 아끼지. 남자나 여자로 볼 기회가 많았을지 몰라도 나와 권강희는 다르지.” …단순히 함께 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 만큼 남자, 혹은 여자로 볼 기회가 많았다는 건가? 그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그건. “그랬기 때문에 쉽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 “어?” “오랜 시간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함께 해왔다면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우정인지, 이성을 향한 감정인지 모른다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곁에 있었으니까. 익숙해진 거지.” “그럼 앞으로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럴 땐 주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야. 당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남에게는 쉽게 보이는 법이거든.” 남에게는 쉽게 보인다고? ‘네 마음에 솔직해져봐.’ 김혜미에게도, ‘향미에게 강재는 친구야, 이성이야?’ 선생님에게도, ‘대부분 실수라도 친구와 키스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진 않지. 두근거림도, 설렘도.’ 차연우마저도 이들의 눈에는 내가 권강재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였다는 건가?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마음이 바로 그거라는 말인가? “하지만 소용없잖아. 내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거잖아.” “남의 힘을 빌려 더 빨리 깨달아야지.” “남의 힘을 빌려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럼 몇 가지 질문을 해 줄 테니까 하루 종일 주구장창 생각해보던가.” 몇 가지 질문이라…. 그런 걸로 깨달을 수 있나. “네가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고, 너를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인 것 냥 구는 모습을 떠올려 봐. 언제나 우선시했던 너를 제쳐두고 다른 여자를 우선시 한다고 상상해봐.” “…상상.” “마지막으로 강재형이 네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봐. 너의 기분이 어떤지.” 오랫동안 나를 좋아했던 권강재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네가 아무리 이런 거에 젬병이라고 해도 적어도 네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 친구인지, 이성인지 구분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향원의 마지막 조언이 끝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옆집에 놀러 가셨던 엄마가 돌아오셨다. 하지만 나는 다녀오신 엄마께 인사조차 하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네 누나 언제 왔니?” “한 30분 전 쯤?” “애가 왜 저렇게 맹한 표정을 지어? 무슨 일 있었어?” “제 2의 사춘기가 다가온 거지. 엄마 나 밥 줘. 배고파!” “이 식충아! 아까 먹고 또 먹어!?” …시끄럽다. 시끄러워서 집중할 수가 없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조용히 할 만한 방법은 역시 하나다. “엄마.” “넌 또 뭐.” “이향원이 엄마가 아끼는 장신구 깼어.” “뭐?!!?” “야, 이 배신자야!!!!!!!!!!!!!” 나를 향한 원망어린 이향원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방금 전 이향원이 내게 낸 숙제를 떠올렸다. “권강재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을 때?” 수학여행에 갔을 때 마지막 날 댄스파티에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기분이 이상했었다. 언제나 권강재의 주변에는 남자아이들 밖에 없었고,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 전날 밤 권강재가 그 여자아이에게 입맞춤을 했을 땐 이유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내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권강재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설마 그러한 감정들이 이성에게 드는 감정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를 무시했을 때.” 기분이 나빴고, 서운했고, 권강재가 미웠다. 소중했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인데 그 사실 하나 이해해주지 못하는 권강재가 원망스러웠고, 나를 모르는 사람인것냥 대하는 행동도 싫었다. 예전처럼 웃어주길 바랐고, 다정하게 대해주길 바랐고, 내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한 바람이 이성에게 바라는 바람이었던 건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아이를 우선시할 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함께 했던 권강재가, 나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해주던 권강재가 다른 여자들을 우선시 한다고? “그러고 보니 시합 때.” 항상 나만 데려갔던 시합 때 다른 여자를 데려갔었다. 그 때 든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내가 권강재에게 잘못을 했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권강재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을 해보라고?” 지난 4년간 단 한 번도 그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언제나 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고, 빨리 마음을 변하길 바라면서도 절대 변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권강재가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다? “그건 싫어….”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싫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아이에게 웃어주고, 다정히 대해주고 좋아한다 말해주는 권강재를 상상하니 불쾌하고, 화가 나고…, 화가 나고. …왜? 왜 화가 나는 거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저 친군데. 왜 화가 나는 거야? “하아.” 완전히 정리가 되지가 않는다. 한 가지가 정리되면 다른 한 가지가 걸리고 그 한 지가 해결되면 다른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는다. 나도 내 심정을, 내 마음을,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모르겠다. “난 도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지?” 여전히 권강재가 내 옆에 남아주길 바란다. 헌데 그게 이성으로써 일까, 친구로서 일까. 내게 숙제 한 가지가 생긴 동시에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성이든 친구든 이미 내게 권강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덫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 * * “우리 이사가?” “얘가 또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 짐들은 다 뭔데?” “대청소. 너도 거들어!” “이향원 시켜! 나는 방금까지 학교에서 축제준비 하다가 와서 피곤하다고!” “오늘은 외박합니다.ㅡ 하고 당당하게 쪽지한통 남기고 사라진 녀석을 어디서 찾아?” 그랬다. 축제 하루 전 날. 그래서 더욱이 피곤에 쩔어 있는 나를 반긴 건 어마어마한 짐들이었다. 잠시나마 우리 이사 가는 건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많은 양의 짐들. 내일이 축제 시작이라 오늘은 그만 쉬고 싶은데 엄마는 나를 쉽게 나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셨다. 게다가 이향원까지 장기자랑 준비하느라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니 이 많은 짐을 정리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 게다가 이향원이 내준 숙제, 그리고 차연우의 질문 때문에 머리가 쌔빠지게 복잡한 나에게 대청소라니. 이 밤중에 대청소라니! “그거 네 방에 가져다가 꽂아놔.” “이게 뭔데? 자리 없어. 별 거 아니면 버리자.” “버리긴 왜 버려! 네 앨범이야! 어렸을 때 앨범.” 앨범? 내 어렸을 적? 초등학교 시절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유치원? “이것만 정리하면 돼?” “응. 얼추 다 했으니 나머지는 내일하자.” “알았어. 어서 씻고 엄마도 자. 아빠는 오늘 야근?” “아니. 옆집 양반네랑 근처에서 한 잔하고 있다고 하더라. 너도 어서 올라가서 씻고 자.” “응.” 강재네 아저씨랑 술 한 잔 하시는 구나. 부럽다…. 나는 물 한 잔 나눠먹지도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는데. 갑자기 아빠가 엄청 부러워지네. 나는 앨범이 가득 담긴 박스를 앉고 낑낑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뒤에서 ‘통, 통, 통’ 하고 무언가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뭐지?’하고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고, 나는 고개를 숙여보았다. “…얼씨구?” 고개를 숙여보니 이향원의 애완견, 일명 ‘똥키’가 나를 따라 계단을 총총총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흰색 동그란 물체가 궁둥이를 실룩실룩 거리며 올라온다고 생각해보아라. 강아지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귀엽게 보일 것 이다. “너도 앨범을 보고 싶은 거니? 인심 썼다. 이 언니랑 같이 앨범보자.” 강아지를 앉고 방으로 들어와 한 쪽에 박스를 내려놓고, 박스 안에 있는 앨범 하나를 들어 침대 위에 앉았다. “어디 보자.” 제일 첫 장을 피자 보이는 내 어렸을 적 사진. 벌써 내가 이렇게 큰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진도 있었나. 내 방에 있는 앨범이 다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사진이 많네.” 박스 안에 들어있는 앨범 안에 있는 사진들은 내가 다 처음 보는 사진들이었다. 내 방에 있는 앨범만이 내게 남겨진 사진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 권강재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사진에 나와 나란히 서 있는 권강재와 그 옆에 서 있는 강우재. 우리 엄마와 권강재네 아주머니는 꽤 오래된 친구사이였기에 권강재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해 온 사이였다. 그건 강우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우재는 나와 권강재와는 달리 집 근처에 살지 않고 꽤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기에 나와 권강재만큼 사이가 돈독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중학교를 올라가고 나서부터 권강재보다는 강우재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사귀기까지 한 것.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강우재가 나를 참으로써 다시 권강재와 더 돈독한 사이가 되었었던 기억. “…벌써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니. 5년이나 지났네.” 중학교 입학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이 조금 더 어리게 보일 뿐. 우리 셋 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마음가짐과, 꿈, 그리고 관계랄까. “졸업사진도 있네?” 브이를 한 채 권강재의 옆에서 나란히 찍혀 있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었고, 팔짱을 낀 채로 찍힌 사진도 있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이 사진은 마치 나와 권강재가 사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렇게 다정하게 찍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 때는 몰랐을까. 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권강재를 친구로만 생각했을까. “바보. 얼굴에 다 묻히고.” 고등학교 1학년 권강재의 생일 날, 권강재의 얼굴에 케이크가 잔뜩 묻혀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보였다. 물론 그 옆에는 여전히 내가 서 있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 마다 성장하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보였다. 더불어 내가 아닌 권강재의 모습까지. 즉 어렸을 적부터 내 옆에는 권강재가 있었고, 권강재의 옆에는 내가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이렇게 붙어 다녔으니 허전할 수밖에.” 어렸을 적부터 자석마냥 붙어 다니던 우리가, 지금 이렇게 떨어져 지내고 있으니 허전한 기분이 들지 않을 리가 있을까. 게다가 좋지 않은 이유로 냉전중이니 말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볼 때마다 이 때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똥키야. 너도 내가 권강재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 똥키와 눈을 마주치며 묻자, 녀석 알아듣지 못한 건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권강재를 향한 내 마음. 좋아하고 있다ㅡ.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확실히 친구는 아니다. 만약 정말 권강재가 친구라면 여전히 나를 좋아해주길 바라는 것보다 하루 빨리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길 바라는 게 맞을 것이다. 확실히 4년 전 강우재에게 권강재의 마음을 들었을 때는 권강재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어느 샌가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지금 이러한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무언가 부족해.” 하지만 좋아한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아직 절실하게 와 닿지 못해서 그런가? 그렇지만 이 정도까지 눈치 챌 정도로 나 역시 노력을 많이 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정말 이도저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오늘도 이틀 전, 차연우와 그렇게 헤어진 뒤 학교에 갔을 때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이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도저히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지 축제 준비를 해도 멍하니 앉아 하는 둥 마는 둥 보내기가 대부분이었다. 오죽했으면 김혜미가 내게 그렇게 할 바에는 집에 가라고 소리치겠는가. 권강재에게 말을 걸어보려고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번번이 강우재가 옆에서 방해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못했다. “무엇일까.”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이. 정말 머릿속을 비워버리고 싶다. 댓글 0개 이 글을...(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덫》 32 ~ 完2008.06.26 아랫글 : 《덫》 18 ~ 242008.06.26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All rights reserved. 메일 | 블로그 | 뉴스 | 게임 우리들만의매력,모델팸☜ cafe.daum.net/Ueolzzang7 음식(비공개) | 회원수 15,507 카페정보가입 0 방문 22 새글 2 카페지기하늘에별따기 개설일2006.02.22 프로필 내 정보 노을뱅이♡ 수정 쪽지 0통 메일 12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플레이 대기중 -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채팅하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2) 숨기 노을뱅이♡<나>DEM-01 접속중인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 탈퇴 　　　＜팸원완결＞ Model팸.작가완결소설방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웃음보웃졉] 《덫》 32 ~ 完 글쓴이: 웃음보웃졉 조회수 : 631 08.06.26 23:02 http://cafe.daum.net/Ueolzzang7/7G66/362 ◈ 소설제목 : 덫. ◈ 작가 : 웃음보웃졉 ◈ 이메일 : xxxxxx1991@hanmail.net ◈ 팬카페 : http://cafe.daum.net/KJW1468 ( Every Body Say : 웃음보웃졉 ) ◈ 팸카페 : http://cafe.daum.net/Ueolzzang7 ( 우리들만의 매력, 모델팸☜ ) ◈ 편수 : 총 34편 ◈ 장르 : 로맨스 ◈ 불펌,도용,성형 금지. 제 32화 축제의 시작과 동시의 우리의 마지막. ‘S동아리는 지금 즉시 강당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S동아리는 지금 즉시 강당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지난 보름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축제준비가 끝나고 대망의 축제날이 다가왔다. 열심히 축제준비를 했던 2주에 반면 최근 며칠은 내 사소한 일로 축제준비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해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나의 몫까지 배로 열심히 신경써주었다. 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새로 들어온 부원인 강우재가 내 몫까지 배로 해주었음에 어쩌면 무사히 축제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 점검만이 남았다. 마지막 점검은 점심을 먹고 난 직후인 1시에 하기로 되어있었고, 지금은 체육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곧 우리 반 축구 시합이 있을 예정이라 응원준비가 한창인데 갑자기 왜 부르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강당 앞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강당 앞에 도착하였고,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축제 총 담당 선생님께 물었다. “왜 부르셨어요?” “있다가 2시까지 오라고. 체육대회가 3시에 끝날 예정이니까.” “한 시간 늦추어졌네요?” “응. 다른 부원들은 어디 갔니?” “이제 곧 올 거예요. 저는 이만 가 봐도 되요?” “그래 가봐.” 별일도 아닌 일에 방송까지 하다니. 그냥 전달사항으로 전해주면 될 것이지 날씨도 더워서 움직이기도 싫은데 말이다. 별 일도 아닌 일에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다시 옮겨 우리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스탠드 앞에 도착한 나는 계단 한 쪽에 주저앉아 기지개를 폈다. 어젯밤 너무 늦게 자 피로가 몰려드는 바람에 앉아서 편히 쉬다가 피구 시합 시작할 때쯤 일어나자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로 인해 내 계획은 산산조각 부수어졌다. “향미야! 빨리 와! 시합 시작했어!” “축구가 뭐가 재미있다고…. 쉴래.” “돈이 걸려있는데 재미가 문제냐!? 응원해, 어서!” “몇 반하고 붙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우리 반 맞냐? 7반이잖아!” ‘축구’의 ‘축’자에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상대팀이 ‘7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여졌고, 재빠르게 친구의 옆자리로 달려가 운동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쟤 네 친구 맞지? 네 남자친구랑 친구랑 붙게 생겼네. 와, 잘 뛴다! 달려!!!!!! 달려!!! 꺅!!!” 제발 조용히 응원할 수는 없는 거니? 고막이 나가떨어지겠다. 그나저나 권강재네 반이 결승에 올라올 줄이야. 그 것도 옆에서 연신 떠들어 대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우승후보이기까지 했다. 농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축구도 잘하는 구나. 권강재에 대해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건 단순히 내 착각이었나 보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잘 하고 있는 건가?” 축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봐도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확히 한 가지 알겠는 건 차연우건, 권강재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팀과 팀이 아닌 차연우 대 권강재로. 누군가가 차연우에게 공을 패스하면 공격수인 권강재가 앞으로 튀어나와 차연우의 공을 가로채 달린다. 하지만 그 공은 다시 차연우에게로 빼앗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니 보는 이들도 지쳐갔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오오오! 차연우 옷 벗는다!” 5분간 주어진 작전타임. 땀에 젖은 티를 차연우가 운동장 한복판에서 벗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티의 허리부근을 잡아 한 번에 벗어버리는 차연우. 탄탄한 근육에 여러 여학생들이 ‘꺄!’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나 역시 탄성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 만큼 녀석의 몸은 섹시했다. “…저러니 여자애들이 환장하지.” 잠시 차연우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반대쪽으로 옮겨 권강재에게로 향했다. 권강재는 목이 많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물이 꽤나 시원했는지 녀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자리 잡혀있었다. 오랜만에 보는듯한 미소. 예전에는 뒤만 돌아봐도 볼 수 있는 권강재의 얼굴이었는데 요즘에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다시 시작하나 보다.” “아무나 이겼으면 좋겠네.” “아무나라니! 우리 반이 이겨야지!” 그 놈의 학급비가 뭐라고. 반장인 나보다 더 열정적이다. “…어! 어…!!! 달린다!! 오오!! 차연우!!!!!!!! 달려!!!!!!!! 달려 !!!!!!” (아직은) 여자친구인 나보다 어째 더 흥분한 듯싶다. 옆에 서 있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누가 보면 내 친구가 녀석의 여자친구인 줄 착각할 듯싶다. “골 하나 못 넣고. 결승전 맞아?” “결승이니까 골 넣기 더 어려운거지! 잘 하는 팀들끼리 붙었는데 골이 계속 먹혀봐. 얼마나 허무한지 알아? 월드컵 때 봐. 거의 다 1~2골로 승부가 결정된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이고 우리 학교 남자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들인데 어째서 골 하나 넣지 못하냐는 말이야. 1:1이건, 2:2이건, 3:3이건 골 하나 정도는 넣어야 응원하는 맛이 있을 것 아냐. 1:0으로 지고 있으면 어서 넣으라고 응원을 할 테고, 0:1로 이기고 있으면 봐주지 말고 한 골 더 넣으라고 응원을 할 것 아니냐고. 하지만, “재미없어.” 하고 뒤 돌아섰던 내가 곧 내 친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관심 없던 축구 시합이었다. 아무도 점수를 먹지 않고 있었기에 더더욱 지루한. 헌데 이번에는 정말로 골 찬스가, 그 것도 차연우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텅 빈 상대팀 공간을 치고 들어가는 차연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 하지만 권강재와 차연우 사이의 거리보다, 차연우와 골대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차연우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함께 그대로 공을 향해 세게 발을 찼다. 공은 차연우의 발에 맞아 멀리 날아갔고, “와아-!!!!!!!!!!!!!!!!!!”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키퍼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공의 속도는. “5반 이겨라!! 5반 이겨라!! 한 골 더!! 한 골 더!!” 하지만 한 골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우리 반. 이 기세를 몰아 한 골 더 넣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분. “3분 남았어!! 3분 안에 7반이 골 못 넣으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7반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 충분히 공을 넣을 수 있는 시간. 하지만 반대로 넣기 부족한 시간. “…권강재.” 차연우는 충분히 이 시합에서 커다란 활약을 해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차연우가 아닌 권강재였다. 이러면 안 되지만 바랐다. 그가 멋지게 한 골을 넣어주기를. 농구대에 멋지게 역전 골을 넣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멋진 동점골을 넣어주기를. 하지만 권강재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향미야, 우리가 이겼어!!!!!” 3분후 시합은 끝났다. 7반에게는 ‘3분’이라는 시간이 넣기 부족한 시간이었나 보다. 7반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앉고 스탠드로 돌아왔고, 우리 반 남자아이들은 운동장 정 가운데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진짜 징크스가 깨졌나.” 농구를 비롯하여 언제나 내가 권강재를 응원할 때면 멋지게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권강재가, 내가 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패배하였다. 내가 없어도 멋지게 승리하는 권강재의 모습을 본다면 기쁘겠지만 권강재와 나의 연결고리 하나가 없어진 듯 하여… 기뻐할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흥분된다. 우리 뭐 좀 마시러 가자.” “돈 없어.” “기분이다! 내가 쏜다!” “나는 아이스크림.” “음료수 처먹어!” 사주려면 거하게 쏘지. 쩨쩨하게 음료수가 뭐야? “음료수건 아이스크림이건 나중에 드시지? 곧 우리 피구시합인데 지금 먹으면 시합 때 옆구리 아파서 못 뛰잖아!” 피구 시합 전 시원한 음료수로 목이나 축이려고 했더니만 우리를 가로막는 다른 친구로 인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스탠드에 앉아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 남자아이들의 곁에 둘러싸여 영웅대접을 받고 있던 차연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뭐야?” “오늘 축제 때 마지막 순서에 나간다, 나.” “…뭐!?! 누구 마음대로! 이제와서 나간다고 하면!!” “축제 준비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네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애들한테 이야기 다 하고 준비 끝낸 상태니까.” …언제 다했대. 그 거 하나 눈치 못 챌 정도로 내가 멍하니 있었나. “그런데 그건 왜? 그걸 왜 나한테 가르쳐 주는데? 여자친구라서?” “아니. 오늘 물어볼 거야.” “뭘 물어봐?” “이틀 전에 내가 너한테 묻지 못했던 질문. 오늘은 대답 확실하게 들을 거니까 준비해둬.” …이틀 전 내게 질문하려던 차연우를 막아섰던 나. 그 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때보다는 많은 것을 눈치챘고, 내 감정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그 질문을 받아도 나는 시간을 더 달라고 할 것이다. “…꼭 오늘이어야 해?”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을 것 아냐. 내가 너에게 남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 감정을 네가 어떻게 알고 확정지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때론 남에게는 잘 보이거든. 네가 모르는 너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향원이 내게 했던 말과 똑같다. 즉, 차연우의 눈에도 보인다는 건가? 그럼… 권강재에게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걸까? “하여간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본다.” 하고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다시 제자리로 가려는 차연우.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자마다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차연우!” 차연우는 내 목소리에 몸을 틀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오늘 멋있었다.” “난 언제나 멋있었어, 인마.” 하여간 칭찬 한마디 해주면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하지만 저런 모습이, 저러한 행동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행동해주는 차연우의 모습이. 그래서 그에게 덜 미안한 걸지도 모르겠다. “향미야 피구시합 나가는 사람 대기하래.” “알았어.” 차연우가 돌아가기가 무섭게 피구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난 뒤 시합에 참가한 나는 최대한 공에 맞지 않도록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이제 웬만한 공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난 번 연습게임에서 우리 반 다크호스에게 맞은 공의 위력을 알기에 그 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파워를 지닌 아이가 상대팀에 없다는 것을 안 나는 그들이 던지는 공들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이향미 나이스~!” 상대 팀에서 던진 공을 잡은 나는 받자마자 최대한 파워를 실어 상대팀을 향해 던졌고, 내가 던진 공에 맞은 상대팀 선수는 낮게 욕을 읊조리며 선 밖으로 나갔다. “한 쪽으로 몰리지 마!” 피구를 하면 생기는 습성. 공을 무서워하는 여자아이들이 항상 모서리 쪽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100% 그 곳에 있으면 공에 맞을 확률이 더 커진다. 오히려 반대쪽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공을 맞을 확률이 적어진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볼 수 있다. 가끔 가다가 던지는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다 피할 수 있는 공들이다. “…거 봐라. 내가 모이지 말랬지?” “아 몰라! 너 죽지 말고 나한테 패스나 잘해!” 먼저 아웃된 친구가 나에게 한 마디 쏘아 붙이고서는 선 밖으로 나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우리 팀 7명, 상대팀 5명.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그 때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앞으로 5분 뒤에는 시합이 끝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다 죽었어.” 마침 내 손에 공이 들려져 있었고, 나는 선 밖에 있는 우리 팀에게 공을 패스 했다. 아이들은 기세 좋게 공을 패스 하며 한 명, 한 명 아웃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팀 아이에게 공을 빼앗겼고, 그 아이는 나를 타깃으로 잡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까짓 공.” 별로 무섭진 않았다. 지금까지 던진 아이의 공을 봐서는 쉽게 피할 수 있는 공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권강재와 시선이 마주친 것일까. “아웃!”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었다. 권강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졌고, 나는 파워라고는 전혀 실리지 않은 공에 맞고 허무하게 아웃되었다. “뭐야, 이향미!” “…미안. 나 조금만 쉴게.” “쉬긴 뭘 쉬어! 우리 결승이야! 정신을 어디다가 두고 있는 거야?!” “맞다. 결승이었지.” “얘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맹해? 야, 공 온다! 받아!” “…어? 아, 어.” 같은 팀에게 패스 받은 공을 반대쪽에 서 있는 아이에게 패스하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마 공을 던질 힘이 나지 않았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권강재의 차가운 시선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그에게 얼마나 큰 미움을 받고 있는 지 깨닫게 되었다. “5반 승!” 잠시 후, 시합은 끝났고. 아슬아슬하게 우리 반의 승리로 돌아갔다. 기뻐해야 하는데, 내 친구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기뻐해야 하는데 억지스런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따끔따끔 거린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게 이렇게 아픈 것이었나.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미움 밖에는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시합이 끝난 지 한 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권강재의 차가운 시선만이 가득했다. * * * 아까 전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셨던 선생님이 말씀하신 ‘2시’가 다가왔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이어달리기 경주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뒤로한 채 강당 앞으로 가야만 했다. 혜미네 반에 들려 김햄이랑 같이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김혜미는 권강재와 같은 반이었기에 김혜미네 반으로 향하려고 했던 발걸음을 강당 쪽으로 옮겼다. 강당 앞으로 갔을 때는 벌써 다른 아이들이 도착해있었다. 차연우도 언제 온 것인지 먼저 와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지각, 이향미. 몇 시냐? 2시 5분이다.” “우리 학교 시계는 5분 빠르거든? 2시에 정확히 왔다고.” “자자, 그만 떠들고. 강당에 들어가자. 오디오점검은 강당 안에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방송부가 도와줄 것이고, 너희들은 무대 점검만 하면 돼. 선생님 없이도 할 수 있지?” “무대 점검을 저희들이 다 해요? 신재원 선생님은요?” “신재원 선생님은 운동회 끝나고 정리할 것이 계셔서 아마 오시지 못할 거야. 그리고 조명점검이 위험해서 선생님들이 맡아서 하는 바람에 무대 점검은 너희들이 해야 할 듯싶다. 힘들겠어?” “당연히…!” “아뇨. 괜찮아요. 저희는 점검하러 갈게요.” “차연우!” “건장한 남정네가 3명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왜 효빈이는 빼는데. 효빈이가 째려보잖아, 인마! “믿음직한 걸, 차연우? 좋았어. 총 책임자는 너다. 자, 어서 들어가서 하자. 빨리 해야 쉬고 그러지.” “네~!” 해 맑게 대답하는 김혜미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뒤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멋지게 꾸며져 있는 무대가 보였다. 유치하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무대가. 정말 공연할 맛이 날 것 같다. “선생님은 조명 점검하러 갈 테니까 너희들은 무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각목이라거나, 공구 같은 거 한 쪽으로 옮겨놓고. 빗자루 가져다가 깨끗이 쓸어놓고.” “그 것만 하면 되요?” “무대 뒤에 어질러져 있는 것도 치워놓고. 유리 같은 것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알았지?” “네.” “선생님은 너희들만 믿고 갈게.” 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조명을 점검하시러 무대 뒤쪽으로 가셨다. 뒤따라 강우재가 한 쪽에 놓인 빗자루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고, 김혜미와 효빈이도 무대 위로 올라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차연우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 화장실 좀.”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로써 무대 밑에는 나와 권강재 밖에 남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말도 걸며 장난도 치고 그랬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부터 나와 권강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눈감고 피할 수는 없었다. 차연우의 말대로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보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지나가버리고 말 것이다. “…권강재.” 그래서 용기를 내어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대답대신 나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저, 그러니까….” “뭐.” 아, 대답했다. ‘뭐’라는 무뚝뚝한 한마디인데 왜 이렇게 기쁘지? “…아까 시합.” “할 말 없으면 간다.” “아니! 그러니까 아까 시합 잘 봤다고….” “진 시합을 잘 봐서 뭐해?” …빈정대는 말투로 대답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권강재. 하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이향미가 아니지. 이런 걸로 포기했다면 그렇게나 싫어했던 영어 역시 예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축제 준비가 우선이기에 선생님이 맡기신 일을 먼저 해야만 했다. “누나. 한 쪽 벽으로 각목 좀 모아주세요.” “알았어.” “제가 벽 쪽에 유리 세워두었으니까 조심하세요.” “응.”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긴 각목들을 주워 한쪽에 기대놓았다. 무대를 만들고 남은 각목이라 그런지 날카로운 각목들이 많았다.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다가는 정말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것처럼. “…으, 날카로운 것 좀 봐. 이거로 맞으면 작살이겠다. 잘 못해서 찔리기라도 하면 피부가 찢어지겠는데?” 게다가 양이 꽤 되는지라 혼자 옮길 수가 없어, 차연우가 돌아오면 함께 옮겨달라고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나는 벽 쪽에서 공구를 정리하고 있는 권강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아이들은 반대쪽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기에 지금이 말 걸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축제 끝나고 시간 돼?” “없어. 약속 있어.” 하지만 예전처럼 웃으며 말을 걸어보아도. “어제 아저씨 잘 들어가셨어? 우리 아빠랑 한잔 하셨다고 했는데….” “신경 꺼” 가족 이야기를 꺼내보아도. “음료수 사올까? 힘들….” “시끄러우니까 저리 가서 애들이나 도와. 지금 네 얼굴 보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으니까.” 권강재는 내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정말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건가? “…권…아,”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 용서 받고 싶다하면서 권강재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작정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 권강재를 미워했고, 상처 받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받아줄까? 아직 늦지 않았겠지? 다시 한 번 권강재의 이름을 불렀다. “…권강재!” “그만 하라니….” “미안해.”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귀찮다는 듯이 나를 내치려고 했던 권강재의 행동이 나의 사과의 멈칫했다. 권강재가 반응했다, 나의 사과에. 그 모습에 나는 어쩌면…, 어쩌면. “…미안해. 이제 와서 사과해서 미안해.” “사과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받을 생각 없으니까.” …어쩌면 받아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내 착각이었다. 오히려 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받아 줄 건데? 어떻게 하면!” “할 일이나 해. 지금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는데?” 노닥? 지금 네 눈에는 내가 너에게 하는 이 사과가 노닥거리는 걸로 보이는 거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야. 그런데 노닥이라니? 네가 화난 건 알지만 진심 담아 하는 사과를 그렇게 표현 할 필욘 없잖아!” “그 말은 네가 할 말이 아니지 않아?” “뭐라고?” “내 말 틀려? 넌 내 마음을 뭐로 생각했기에 몇 년간 숨겨왔냐? 단순한 감정으로 생각했냐? 며칠 지나면 사그라지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했냐고! 네가 자초한 거잖아. 너는 네 감정, 네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왜 넌 그러지 않았던 건데? 이기적인 거 아냐?” 권강재가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었다. 강우재도, 혜미도, 효빈이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 앞에서 그 날 이후, 4년 동안 내가 해왔던 행동에 대해서 화를 내었다. 이렇게 싸울 상황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녀석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자극을 했다. “그래, 나 이기적이야. 근데 내 마음도 생각해주면 안 돼?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었는지 한 번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주면 안 돼?” “너야말로 내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기나 했어?” “해봤어! 나도 4년 동안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너도 화가 났겠지 하면서도 내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내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해야만 했었던 이유는!” “더 이상 네가 힘들기 싫어서겠지. 혼자 있기 싫어서겠지.” “…뭐?” “나 때문이 아니고 너 때문이었잖아. 그러한 행동을 취한 이유가 모두 너 때문이었잖아! 마음을 받자니 내게 마음이 없고, 거절하자니 친구를 잃을 것 같고. 무서워서 그랬던 거 아냐? 혼자가 될 까봐?”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그리고 내가 네 사과를 받아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전과 뭐가 달라질까. 전과 다른 거라고는 네가 숨기고 있던 것이 겉으로 들어난 것 밖에 더 돼? 이렇게까지 됐는데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전과 달라진 게 분명 하나 더 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그 감정만큼은 어떻게 숨길 수가 없어. 그런데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강우재와 친구로 지낼 수 없었듯이 나도 그럴 수 없다고.” …내가 숨기고 있던 것이 겉으로 들어난 것과 권강재를 향한 내 감정이 우정에서 이성에게 드는 감정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그 감정을 권강재에게 말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권강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내게 등을 보였다. 안 돼, 나와 강우재와의 사이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 “…아냐. 그런 게 아니야.” 잡아야 돼. 잡아야만 해! “권강재!!” 멈 춰, 제발! “달라! 다르다고!” 자꾸만 멀어지는 권강재의 모습에 다급했던 나는 권강재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권강재는 마치 몸에 벌레가 닿은 것처럼 내 손을 뿌리쳤다. “내 말 좀 들어 봐…!” 이대로 권강재를 잡지 못하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다시 한 번 권강재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권강재는 내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변했…! 아….” 헌데 너무 세게 뿌리친 탓일까. 반동으로 인해 중심을 잃은 내 몸은, 내가 세워둔 각목 쪽으로 쓰러졌고, “향미야 위험해!!” 곧 각목이 내 몸 위로 쓰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혜미의 비명소리와 함께 효빈이가 세워둔 유리가 ‘와장창창’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연이어 각목들이 ‘우르르-’하고 쏟아지는 소리와 내 몸에 무언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 벌 받는 건가…. 아까 그 날카롭게 잘려나간 각목들이 내 몸 위로 쏟아지는 거겠지? 많이 아프겠다…. 찔리면 피부가 찢어질 텐데. 나 아픈 거 정말 싫어하는데. 아이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까? 날 냉정하게 내치던 권강재도 다친 내 모습을 보면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봐주겠지? 그렇겠지? …차가운 시선이 아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봐준다면 이까짓 아픔.…하지만 물 밀려오듯 다가오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나보다. 곧 아픔이 느껴지겠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두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이제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겠지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부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들이 부른 이름은, “권강재!!!!” “강재야!!” 바로 권강재였다. 제 32화 축제의 시작과 동시의 우리의 마지막. ‘S동아리는 지금 즉시 강당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S동아리는 지금 즉시 강당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지난 보름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축제준비가 끝나고 대망의 축제날이 다가왔다. 열심히 축제준비를 했던 2주에 반면 최근 며칠은 내 사소한 일로 축제준비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해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나의 몫까지 배로 열심히 신경써주었다. 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새로 들어온 부원인 강우재가 내 몫까지 배로 해주었음에 어쩌면 무사히 축제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 점검만이 남았다. 마지막 점검은 점심을 먹고 난 직후인 1시에 하기로 되어있었고, 지금은 체육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곧 우리 반 축구 시합이 있을 예정이라 응원준비가 한창인데 갑자기 왜 부르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강당 앞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강당 앞에 도착하였고,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축제 총 담당 선생님께 물었다. “왜 부르셨어요?” “있다가 2시까지 오라고. 체육대회가 3시에 끝날 예정이니까.” “한 시간 늦추어졌네요?” “응. 다른 부원들은 어디 갔니?” “이제 곧 올 거예요. 저는 이만 가 봐도 되요?” “그래 가봐.” 별일도 아닌 일에 방송까지 하다니. 그냥 전달사항으로 전해주면 될 것이지 날씨도 더워서 움직이기도 싫은데 말이다. 별 일도 아닌 일에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다시 옮겨 우리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스탠드 앞에 도착한 나는 계단 한 쪽에 주저앉아 기지개를 폈다. 어젯밤 너무 늦게 자 피로가 몰려드는 바람에 앉아서 편히 쉬다가 피구 시합 시작할 때쯤 일어나자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로 인해 내 계획은 산산조각 부수어졌다. “향미야! 빨리 와! 시합 시작했어!” “축구가 뭐가 재미있다고…. 쉴래.” “돈이 걸려있는데 재미가 문제냐!? 응원해, 어서!” “몇 반하고 붙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우리 반 맞냐? 7반이잖아!” ‘축구’의 ‘축’자에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상대팀이 ‘7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여졌고, 재빠르게 친구의 옆자리로 달려가 운동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쟤 네 친구 맞지? 네 남자친구랑 친구랑 붙게 생겼네. 와, 잘 뛴다! 달려!!!!!! 달려!!! 꺅!!!” 제발 조용히 응원할 수는 없는 거니? 고막이 나가떨어지겠다. 그나저나 권강재네 반이 결승에 올라올 줄이야. 그 것도 옆에서 연신 떠들어 대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우승후보이기까지 했다. 농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축구도 잘하는 구나. 권강재에 대해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건 단순히 내 착각이었나 보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잘 하고 있는 건가?” 축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봐도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확히 한 가지 알겠는 건 차연우건, 권강재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팀과 팀이 아닌 차연우 대 권강재로. 누군가가 차연우에게 공을 패스하면 공격수인 권강재가 앞으로 튀어나와 차연우의 공을 가로채 달린다. 하지만 그 공은 다시 차연우에게로 빼앗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니 보는 이들도 지쳐갔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오오오! 차연우 옷 벗는다!” 5분간 주어진 작전타임. 땀에 젖은 티를 차연우가 운동장 한복판에서 벗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티의 허리부근을 잡아 한 번에 벗어버리는 차연우. 탄탄한 근육에 여러 여학생들이 ‘꺄!’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나 역시 탄성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 만큼 녀석의 몸은 섹시했다. “…저러니 여자애들이 환장하지.” 잠시 차연우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반대쪽으로 옮겨 권강재에게로 향했다. 권강재는 목이 많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물이 꽤나 시원했는지 녀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자리 잡혀있었다. 오랜만에 보는듯한 미소. 예전에는 뒤만 돌아봐도 볼 수 있는 권강재의 얼굴이었는데 요즘에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다시 시작하나 보다.” “아무나 이겼으면 좋겠네.” “아무나라니! 우리 반이 이겨야지!” 그 놈의 학급비가 뭐라고. 반장인 나보다 더 열정적이다. “…어! 어…!!! 달린다!! 오오!! 차연우!!!!!!!! 달려!!!!!!!! 달려 !!!!!!” (아직은) 여자친구인 나보다 어째 더 흥분한 듯싶다. 옆에 서 있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누가 보면 내 친구가 녀석의 여자친구인 줄 착각할 듯싶다. “골 하나 못 넣고. 결승전 맞아?” “결승이니까 골 넣기 더 어려운거지! 잘 하는 팀들끼리 붙었는데 골이 계속 먹혀봐. 얼마나 허무한지 알아? 월드컵 때 봐. 거의 다 1~2골로 승부가 결정된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이고 우리 학교 남자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들인데 어째서 골 하나 넣지 못하냐는 말이야. 1:1이건, 2:2이건, 3:3이건 골 하나 정도는 넣어야 응원하는 맛이 있을 것 아냐. 1:0으로 지고 있으면 어서 넣으라고 응원을 할 테고, 0:1로 이기고 있으면 봐주지 말고 한 골 더 넣으라고 응원을 할 것 아니냐고. 하지만, “재미없어.” 하고 뒤 돌아섰던 내가 곧 내 친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관심 없던 축구 시합이었다. 아무도 점수를 먹지 않고 있었기에 더더욱 지루한. 헌데 이번에는 정말로 골 찬스가, 그 것도 차연우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텅 빈 상대팀 공간을 치고 들어가는 차연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 하지만 권강재와 차연우 사이의 거리보다, 차연우와 골대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차연우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함께 그대로 공을 향해 세게 발을 찼다. 공은 차연우의 발에 맞아 멀리 날아갔고, “와아-!!!!!!!!!!!!!!!!!!”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키퍼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공의 속도는. “5반 이겨라!! 5반 이겨라!! 한 골 더!! 한 골 더!!” 하지만 한 골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우리 반. 이 기세를 몰아 한 골 더 넣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분. “3분 남았어!! 3분 안에 7반이 골 못 넣으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7반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 충분히 공을 넣을 수 있는 시간. 하지만 반대로 넣기 부족한 시간. “…권강재.” 차연우는 충분히 이 시합에서 커다란 활약을 해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차연우가 아닌 권강재였다. 이러면 안 되지만 바랐다. 그가 멋지게 한 골을 넣어주기를. 농구대에 멋지게 역전 골을 넣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멋진 동점골을 넣어주기를. 하지만 권강재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향미야, 우리가 이겼어!!!!!” 3분후 시합은 끝났다. 7반에게는 ‘3분’이라는 시간이 넣기 부족한 시간이었나 보다. 7반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앉고 스탠드로 돌아왔고, 우리 반 남자아이들은 운동장 정 가운데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진짜 징크스가 깨졌나.” 농구를 비롯하여 언제나 내가 권강재를 응원할 때면 멋지게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권강재가, 내가 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패배하였다. 내가 없어도 멋지게 승리하는 권강재의 모습을 본다면 기쁘겠지만 권강재와 나의 연결고리 하나가 없어진 듯 하여… 기뻐할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흥분된다. 우리 뭐 좀 마시러 가자.” “돈 없어.” “기분이다! 내가 쏜다!” “나는 아이스크림.” “음료수 처먹어!” 사주려면 거하게 쏘지. 쩨쩨하게 음료수가 뭐야? “음료수건 아이스크림이건 나중에 드시지? 곧 우리 피구시합인데 지금 먹으면 시합 때 옆구리 아파서 못 뛰잖아!” 피구 시합 전 시원한 음료수로 목이나 축이려고 했더니만 우리를 가로막는 다른 친구로 인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스탠드에 앉아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 남자아이들의 곁에 둘러싸여 영웅대접을 받고 있던 차연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뭐야?” “오늘 축제 때 마지막 순서에 나간다, 나.” “…뭐!?! 누구 마음대로! 이제와서 나간다고 하면!!” “축제 준비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네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애들한테 이야기 다 하고 준비 끝낸 상태니까.” …언제 다했대. 그 거 하나 눈치 못 챌 정도로 내가 멍하니 있었나. “그런데 그건 왜? 그걸 왜 나한테 가르쳐 주는데? 여자친구라서?” “아니. 오늘 물어볼 거야.” “뭘 물어봐?” “이틀 전에 내가 너한테 묻지 못했던 질문. 오늘은 대답 확실하게 들을 거니까 준비해둬.” …이틀 전 내게 질문하려던 차연우를 막아섰던 나. 그 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때보다는 많은 것을 눈치챘고, 내 감정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그 질문을 받아도 나는 시간을 더 달라고 할 것이다. “…꼭 오늘이어야 해?”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을 것 아냐. 내가 너에게 남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 감정을 네가 어떻게 알고 확정지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때론 남에게는 잘 보이거든. 네가 모르는 너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향원이 내게 했던 말과 똑같다. 즉, 차연우의 눈에도 보인다는 건가? 그럼… 권강재에게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걸까? “하여간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본다.” 하고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다시 제자리로 가려는 차연우.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자마다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차연우!” 차연우는 내 목소리에 몸을 틀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오늘 멋있었다.” “난 언제나 멋있었어, 인마.” 하여간 칭찬 한마디 해주면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하지만 저런 모습이, 저러한 행동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행동해주는 차연우의 모습이. 그래서 그에게 덜 미안한 걸지도 모르겠다. “향미야 피구시합 나가는 사람 대기하래.” “알았어.” 차연우가 돌아가기가 무섭게 피구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난 뒤 시합에 참가한 나는 최대한 공에 맞지 않도록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이제 웬만한 공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난 번 연습게임에서 우리 반 다크호스에게 맞은 공의 위력을 알기에 그 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파워를 지닌 아이가 상대팀에 없다는 것을 안 나는 그들이 던지는 공들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이향미 나이스~!” 상대 팀에서 던진 공을 잡은 나는 받자마자 최대한 파워를 실어 상대팀을 향해 던졌고, 내가 던진 공에 맞은 상대팀 선수는 낮게 욕을 읊조리며 선 밖으로 나갔다. “한 쪽으로 몰리지 마!” 피구를 하면 생기는 습성. 공을 무서워하는 여자아이들이 항상 모서리 쪽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100% 그 곳에 있으면 공에 맞을 확률이 더 커진다. 오히려 반대쪽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공을 맞을 확률이 적어진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볼 수 있다. 가끔 가다가 던지는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다 피할 수 있는 공들이다. “…거 봐라. 내가 모이지 말랬지?” “아 몰라! 너 죽지 말고 나한테 패스나 잘해!” 먼저 아웃된 친구가 나에게 한 마디 쏘아 붙이고서는 선 밖으로 나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우리 팀 7명, 상대팀 5명.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그 때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앞으로 5분 뒤에는 시합이 끝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다 죽었어.” 마침 내 손에 공이 들려져 있었고, 나는 선 밖에 있는 우리 팀에게 공을 패스 했다. 아이들은 기세 좋게 공을 패스 하며 한 명, 한 명 아웃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팀 아이에게 공을 빼앗겼고, 그 아이는 나를 타깃으로 잡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까짓 공.” 별로 무섭진 않았다. 지금까지 던진 아이의 공을 봐서는 쉽게 피할 수 있는 공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권강재와 시선이 마주친 것일까. “아웃!”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었다. 권강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졌고, 나는 파워라고는 전혀 실리지 않은 공에 맞고 허무하게 아웃되었다. “뭐야, 이향미!” “…미안. 나 조금만 쉴게.” “쉬긴 뭘 쉬어! 우리 결승이야! 정신을 어디다가 두고 있는 거야?!” “맞다. 결승이었지.” “얘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맹해? 야, 공 온다! 받아!” “…어? 아, 어.” 같은 팀에게 패스 받은 공을 반대쪽에 서 있는 아이에게 패스하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마 공을 던질 힘이 나지 않았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권강재의 차가운 시선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그에게 얼마나 큰 미움을 받고 있는 지 깨닫게 되었다. “5반 승!” 잠시 후, 시합은 끝났고. 아슬아슬하게 우리 반의 승리로 돌아갔다. 기뻐해야 하는데, 내 친구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기뻐해야 하는데 억지스런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따끔따끔 거린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게 이렇게 아픈 것이었나.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미움 밖에는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시합이 끝난 지 한 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권강재의 차가운 시선만이 가득했다. * * * 아까 전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셨던 선생님이 말씀하신 ‘2시’가 다가왔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이어달리기 경주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뒤로한 채 강당 앞으로 가야만 했다. 혜미네 반에 들려 김햄이랑 같이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김혜미는 권강재와 같은 반이었기에 김혜미네 반으로 향하려고 했던 발걸음을 강당 쪽으로 옮겼다. 강당 앞으로 갔을 때는 벌써 다른 아이들이 도착해있었다. 차연우도 언제 온 것인지 먼저 와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지각, 이향미. 몇 시냐? 2시 5분이다.” “우리 학교 시계는 5분 빠르거든? 2시에 정확히 왔다고.” “자자, 그만 떠들고. 강당에 들어가자. 오디오점검은 강당 안에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방송부가 도와줄 것이고, 너희들은 무대 점검만 하면 돼. 선생님 없이도 할 수 있지?” “무대 점검을 저희들이 다 해요? 신재원 선생님은요?” “신재원 선생님은 운동회 끝나고 정리할 것이 계셔서 아마 오시지 못할 거야. 그리고 조명점검이 위험해서 선생님들이 맡아서 하는 바람에 무대 점검은 너희들이 해야 할 듯싶다. 힘들겠어?” “당연히…!” “아뇨. 괜찮아요. 저희는 점검하러 갈게요.” “차연우!” “건장한 남정네가 3명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왜 효빈이는 빼는데. 효빈이가 째려보잖아, 인마! “믿음직한 걸, 차연우? 좋았어. 총 책임자는 너다. 자, 어서 들어가서 하자. 빨리 해야 쉬고 그러지.” “네~!” 해 맑게 대답하는 김혜미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뒤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멋지게 꾸며져 있는 무대가 보였다. 유치하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무대가. 정말 공연할 맛이 날 것 같다. “선생님은 조명 점검하러 갈 테니까 너희들은 무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각목이라거나, 공구 같은 거 한 쪽으로 옮겨놓고. 빗자루 가져다가 깨끗이 쓸어놓고.” “그 것만 하면 되요?” “무대 뒤에 어질러져 있는 것도 치워놓고. 유리 같은 것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알았지?” “네.” “선생님은 너희들만 믿고 갈게.” 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조명을 점검하시러 무대 뒤쪽으로 가셨다. 뒤따라 강우재가 한 쪽에 놓인 빗자루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고, 김혜미와 효빈이도 무대 위로 올라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차연우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나 화장실 좀.”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로써 무대 밑에는 나와 권강재 밖에 남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말도 걸며 장난도 치고 그랬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부터 나와 권강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눈감고 피할 수는 없었다. 차연우의 말대로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보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지나가버리고 말 것이다. “…권강재.” 그래서 용기를 내어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대답대신 나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저, 그러니까….” “뭐.” 아, 대답했다. ‘뭐’라는 무뚝뚝한 한마디인데 왜 이렇게 기쁘지? “…아까 시합.” “할 말 없으면 간다.” “아니! 그러니까 아까 시합 잘 봤다고….” “진 시합을 잘 봐서 뭐해?” …빈정대는 말투로 대답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권강재. 하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이향미가 아니지. 이런 걸로 포기했다면 그렇게나 싫어했던 영어 역시 예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축제 준비가 우선이기에 선생님이 맡기신 일을 먼저 해야만 했다. “누나. 한 쪽 벽으로 각목 좀 모아주세요.” “알았어.” “제가 벽 쪽에 유리 세워두었으니까 조심하세요.” “응.”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긴 각목들을 주워 한쪽에 기대놓았다. 무대를 만들고 남은 각목이라 그런지 날카로운 각목들이 많았다.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다가는 정말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것처럼. “…으, 날카로운 것 좀 봐. 이거로 맞으면 작살이겠다. 잘 못해서 찔리기라도 하면 피부가 찢어지겠는데?” 게다가 양이 꽤 되는지라 혼자 옮길 수가 없어, 차연우가 돌아오면 함께 옮겨달라고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나는 벽 쪽에서 공구를 정리하고 있는 권강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아이들은 반대쪽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기에 지금이 말 걸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축제 끝나고 시간 돼?” “없어. 약속 있어.” 하지만 예전처럼 웃으며 말을 걸어보아도. “어제 아저씨 잘 들어가셨어? 우리 아빠랑 한잔 하셨다고 했는데….” “신경 꺼” 가족 이야기를 꺼내보아도. “음료수 사올까? 힘들….” “시끄러우니까 저리 가서 애들이나 도와. 지금 네 얼굴 보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으니까.” 권강재는 내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정말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건가? “…권…아,”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 용서 받고 싶다하면서 권강재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작정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 권강재를 미워했고, 상처 받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받아줄까? 아직 늦지 않았겠지? 다시 한 번 권강재의 이름을 불렀다. “…권강재!” “그만 하라니….” “미안해.”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귀찮다는 듯이 나를 내치려고 했던 권강재의 행동이 나의 사과의 멈칫했다. 권강재가 반응했다, 나의 사과에. 그 모습에 나는 어쩌면…, 어쩌면. “…미안해. 이제 와서 사과해서 미안해.” “사과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받을 생각 없으니까.” …어쩌면 받아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내 착각이었다. 오히려 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받아 줄 건데? 어떻게 하면!” “할 일이나 해. 지금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는데?” 노닥? 지금 네 눈에는 내가 너에게 하는 이 사과가 노닥거리는 걸로 보이는 거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야. 그런데 노닥이라니? 네가 화난 건 알지만 진심 담아 하는 사과를 그렇게 표현 할 필욘 없잖아!” “그 말은 네가 할 말이 아니지 않아?” “뭐라고?” “내 말 틀려? 넌 내 마음을 뭐로 생각했기에 몇 년간 숨겨왔냐? 단순한 감정으로 생각했냐? 며칠 지나면 사그라지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했냐고! 네가 자초한 거잖아. 너는 네 감정, 네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왜 넌 그러지 않았던 건데? 이기적인 거 아냐?” 권강재가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었다. 강우재도, 혜미도, 효빈이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 앞에서 그 날 이후, 4년 동안 내가 해왔던 행동에 대해서 화를 내었다. 이렇게 싸울 상황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녀석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자극을 했다. “그래, 나 이기적이야. 근데 내 마음도 생각해주면 안 돼?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었는지 한 번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주면 안 돼?” “너야말로 내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기나 했어?” “해봤어! 나도 4년 동안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너도 화가 났겠지 하면서도 내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내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해야만 했었던 이유는!” “더 이상 네가 힘들기 싫어서겠지. 혼자 있기 싫어서겠지.” “…뭐?” “나 때문이 아니고 너 때문이었잖아. 그러한 행동을 취한 이유가 모두 너 때문이었잖아! 마음을 받자니 내게 마음이 없고, 거절하자니 친구를 잃을 것 같고. 무서워서 그랬던 거 아냐? 혼자가 될 까봐?”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그리고 내가 네 사과를 받아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전과 뭐가 달라질까. 전과 다른 거라고는 네가 숨기고 있던 것이 겉으로 들어난 것 밖에 더 돼? 이렇게까지 됐는데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전과 달라진 게 분명 하나 더 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그 감정만큼은 어떻게 숨길 수가 없어. 그런데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강우재와 친구로 지낼 수 없었듯이 나도 그럴 수 없다고.” …내가 숨기고 있던 것이 겉으로 들어난 것과 권강재를 향한 내 감정이 우정에서 이성에게 드는 감정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그 감정을 권강재에게 말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권강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내게 등을 보였다. 안 돼, 나와 강우재와의 사이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 “…아냐. 그런 게 아니야.” 잡아야 돼. 잡아야만 해! “권강재!!” 멈 춰, 제발! “달라! 다르다고!” 자꾸만 멀어지는 권강재의 모습에 다급했던 나는 권강재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권강재는 마치 몸에 벌레가 닿은 것처럼 내 손을 뿌리쳤다. “내 말 좀 들어 봐…!” 이대로 권강재를 잡지 못하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다시 한 번 권강재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권강재는 내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변했…! 아….” 헌데 너무 세게 뿌리친 탓일까. 반동으로 인해 중심을 잃은 내 몸은, 내가 세워둔 각목 쪽으로 쓰러졌고, “향미야 위험해!!” 곧 각목이 내 몸 위로 쓰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혜미의 비명소리와 함께 효빈이가 세워둔 유리가 ‘와장창창’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연이어 각목들이 ‘우르르-’하고 쏟아지는 소리와 내 몸에 무언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 벌 받는 건가…. 아까 그 날카롭게 잘려나간 각목들이 내 몸 위로 쏟아지는 거겠지? 많이 아프겠다…. 찔리면 피부가 찢어질 텐데. 나 아픈 거 정말 싫어하는데. 아이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까? 날 냉정하게 내치던 권강재도 다친 내 모습을 보면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봐주겠지? 그렇겠지? …차가운 시선이 아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봐준다면 이까짓 아픔.…하지만 물 밀려오듯 다가오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나보다. 곧 아픔이 느껴지겠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두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이제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겠지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부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들이 부른 이름은, “권강재!!!!” “강재야!!” 바로 권강재였다. 제 33화 안녕, 그리고 기다림. “…아, 아….” 나를 향해 쏟아졌었는데, 분명 각목이 몸에 닿는 감촉을 느꼈는데 어째서…. “권강재!! 권강재!!” 어째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권강재인거지…? 왜 권강재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거야? “서, 선생님 불러! 아니, 119!! 119 불러!!! 어서!” “…강재야.” 강우재가 나를 안고 있는 권강재의 몸을 떼어내서 이리 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권강재의 몸을 살피는 강우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권강재의 몸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깨진 유리조각 파편이 권강재의 팔뚝에 잔인할 만큼 박혀있었고, 더욱 나를 굳게 만든 건 권강재의 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였다…. 날카로운 각목이 권강재의 귀를 친 것 같았다. “이향미 어서 선생님 불러!” “어, 어떡해. 어, 어, 어떡….”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내 앞에 누워있는 사람이 권강재가 아니길 바랐다. 그 때 화장실에서 돌아온 차연우가 급하게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이향미.…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떡해. 어떡해, 연우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향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고 하는데 각목이 쏟아졌어. 근데 권강재가 향미를 감싸 안았어….” “…119는? 선생님은?!” “지금 모시러 갔어. 지금 119에도 연락했고. 양호실 선생님이 오실거야. 유리가 깊게 박힌 것 같아서 빼려고 해도 신경을 잘 못 건드릴까봐 건들지도 못하고 있어.”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119가 늦게 오면 우리가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 것 아냐!!” 차연우는 피를 흘리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자초지종을 전해주고 있는 혜미를 향해 소리쳤다.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보이잖아! 손에 유리가 박힌 거 보이잖아! 잘 못 건드리면 신경을 다친다고!” 선생님을 빨리 모시고 와야 하는데…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나는 조금씩 몸을 낮추어 교복 자락으로 귀에서 흘러내리는 새빨간 피를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으로 닦아 내려갔다. “…어떡해, 어, 어떡해.” 빨리, 빨리 붉게 물드는 피를 닦아야 하는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오고 울음이 세어 나왔다. “선생님!” 그 때 양호실 선생님께서 강당 안으로 들어오셨고, 이어서 막 도착한 119 구조대원들이 들어와 나를 권강재의 곁에서 떼어놓더니 간단하게 응급조취를 취한 뒤 권강재를 들 것에 싣고 강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따라 나가야 하는데, 나도 같이 병원으로 가야하는데. 많이 다쳤는지 봐야하는데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오히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비명소리가 들렸고, 웅성웅성 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나서 말을 할 걸. 급한 마음에 참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이향미, 안 따라 나갈 거야!?” “…혜미야.” “뒤처리는 선생님께서 해주시겠대. 그러니까 병원 가.” “…하지만.” 못 가겠어. 강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나 때문에 다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어서 병원에 가 보라고! 이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 알지? 거기래. 응급실 가면 있을 거야. 어쩌면 바로 수술실에 들어갈지도 모른대. 권강재네 부모님 오시려면 시간 걸리잖아! 그러니까 네가 가서 지키고 있으라고!” 아저씨, 아주머니…. 내가 거기서 지키고 있다가 그 분들을 봐야하는 거야? 볼 낯이 없어. 나 때문인데…. 나 때문에 다쳤는데…! 어떻게 봐. 어떻게…. “일어나, 이향미.” “…강우재.” “나랑 같이 가. 연우가 119 구조대원들이랑 같이 갔어, 선생님이랑. 우리도 가자고.” “…강재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 녀석 그렇게 약한 녀석 아니라는 거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가장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네가 잘 알잖아.” “나도 내가 잘 알거라고 생각했어. 권강재에 대해서 내가 제일 잘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무서워. 나 때문에 다친 권강재가 또 다시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볼까봐.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이제 나를 봐주지도 않으면 어떡해?” 눈물을 흘리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강우재는 그런 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좋아하니까 너를 감싸 안았던 거야. 네가 다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대신 녀석이 다친 거야.” “…차라리 내가 다칠걸. 내가 다쳤다면 권강재가 다칠 일도 없을 텐데….” “그렇게 미안하고 속상하면 권강재한테 그 마음을 직접 말해. 그게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같다.” “…받아줄까?” “받아 줄 거야, 권강재라면. 가자, 병원으로.” 내게 내민 강우재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미리 강우재가 불러놓은 콜택시를 타고 권강재가 실려 간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떨리는 손은, 내 몸은 멈추지 않았다. * * * 강우재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권강재는 수술실에 들어간 상황이었고, 수술실 앞에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안절부절못하시는 아주머니께 가서 괜찮을 거라고 말을 드려야 하는데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권강재가 지금 수술실에 들어간 이유는 나 때문이었으니까. 누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다치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게 심지어 자신의 친구의 딸이라 할지라도. “선생님.” 그 때 강우재가 의자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던 선생님께 다가갔다. “어, 왔구나.” “수술실 들어간 거예요?” “그래. 조금…심각한가보더라.” 심각…해? “의사선생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유리가 너무 깊게 박힌 것 같아. 우선 팔뚝에 박힌 유리조각부터 제거하는 게 급하다고 하시더라고. 그리고… 귀를 좀 많이 다친 것 같아.” “귀를 요?” “그래. 우선 수술이 끝나봐야 알 것 같아. 수술실 들어간 지 한 40분 됐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거야.” 얼마나 심각하기에, 간단한 봉합수술이면 20~30분 만에 끝날 수술이 40분이 넘어서도 끝나지 않은 거지? 선생님의 옆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마음은 더욱 더 초조해져갔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퉁퉁 부어 빨갛게 충혈이 됐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 계시던 아주머니도 어느 새 의자에 앉아계셨고, 긴장이 풀린 강우재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약 2시간 정도가 흐르자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선생님께서 나오셨다. 밝기를 바랐던 의사선생님의 표정은 믿고 싶지 않지만 어두웠다. 아주머니는 의사선생님께서 나오기가 무섭게 선생님을 따라 가셨고, 우리는 강재가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렸다. 곧 다른 의사선생님들과 함께 마취에 취해 눈을 감고 있는 권강재가 나왔고, 권강재는 1인실로 옮겨졌다. “마취가 풀리시면 의식이 돌아올 거예요. 의식이 돌아오면 여기 벨을 눌러주시면 되요.” “아, 그런데 저….” “네, 말씀하세요.” “…환자 상태가.” 아직 권강재의 상태를 모르는 우리를 대표하여 선생님께서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 보시자 간호사 선생님께서 잠시 뜸을 들이시다가 이내 권강재의 상태에 대해서 짧게 대답해주셨다. “저도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귀가….” “…귀가?” “들리지 않으실 확률이 큽니다.” …뭐라고? 간호사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귀가. 귀가 뭐? “잠깐만요! 귀가 들리지 않을 확률이 크다니요? 얼마나 다친 건데요! 피부가 찢어진 것이 아니었어요!?” “저도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네요. 의사선생님께서 아마 환자 보호자 분께 말씀을 드리실 거예요. 그럼 전 이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거길 바랐다. 하지만 강우재와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절대 잘 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출혈이 많았어도 타박상일거라 생각했다. 찢어진 피부를 봉합하고 치료를 받다보면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내 착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선 향미랑 우재는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재는 되도록이면 학교로 돌아가고, 향미는… 충격을 많이 받은 듯 해보이네. 선생님이 있다가 학교 가서 조퇴처리로 해 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 “아직… 깨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쉬어요.” “선생님한테 연락처 하나 남겨놓고 가. 강재 깨면 연락 줄 테니까.” “안 갈래요. 여기 있을래요. 말도 안 돼요. 귀가 안 들릴지도 모른다니요!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고요!” “우선 강재가 깨어나 봐야 아는 거니까. 어서 가 봐.” 계속해서 남겠다는 나를 말리는 선생님은 병원 밖까지 나와 나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었다. 권강재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강우재도, 선생님도 이러다가는 권강재보다 내가 먼저 큰일이 날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멀쩡한데,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권강재인 거야? 차라리 내가 넘어졌더라면. 하는 후회가 끝임 없이 들었다. 뒤 돌아서려 했던 것이라면 끝까지 뒤 돌아서주길 바랐다. 이렇게 다시 돌아봐줄 것이었다면, 그래서 권강재가 다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무시당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엄마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벌써 사고가 난 지 2시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은 진정될 줄 몰랐고, 이불을 꼭 잡은 손도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리면서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긴장이 풀렸는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땐 무사한 권강재의 모습을 보길 바라며. * * * “이향미 일어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몸이 무거워, 두 눈을 감은 눈꺼풀이 무겁게만 느껴져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향미!!” 여자의 목소리. 아침마다 집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는 건 엄마라는 건가? “네가 이렇게 자고 있을 때야!!?” “…엄마?” “병원 가자.” “어?” “강재 입원했다며! 일어나서 병원 가자고.” “나 오늘 갔다 왔는데?” 선생님이 연락을 주시기 전까지 오지 말라고 하셨기에 오늘은 가지 않고, 마침 내일이 놀토라 병원에 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를 깨워서 병원에 가자는 엄마의 말씀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오늘 언제가! 지금 오후 2시야.” “…어?!” “너 어제 방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안 나오고 계속 잤다고. 자, 일어나. 강재 의식 찾았다더라. 문병가야지.” “궈, 권강재 의식 찾았대?!” “그래. 그러니까 어서 나와, 기집애야!” 권강재가 의식을 찾았다는 말에 흥분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병원 갈 채비를 하고서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어제 밤에 간절히 바라던 것이 정말 이루어진 것인가? 엄마의 반응으로 봐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은 거겠지? 정말 그런 거라면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나 때문에 네가 많이 다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내 단순한 착각일 뿐이었다. “…뭐?” 나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선 엄마와 함께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시는 아주머니. 엄마가 내게 지폐 두 장을 주시며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오라고 하셨다.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뜻에 따라 자판기에서 음료수 3개를 뽑아 다시 권강재의 병실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미처 권강재의 병실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우리 엄마의 목소리.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면 좋니, 미향아.” “그러니까 강재의 귀 한 쪽이 들리지 않는다고? 아예?” 아예 들리지…않아? 이게 무슨 말이야? 들리지 않는다니! 그냥 다친 것도 아니고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머지 한 쪽 귀도 달팽이관이 많이 손상 되서 잘 들리지 않을 거래…. 그래도 귀는 치료를 꾸준히 하고, 수술을 받다보면 들릴 거라고 했는데….” “…문제는 강재의 손이구나.” 그랬다. 무사할 거라고 여겼던 강재의 몸 상태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지 못했다. 귀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걱정했었던 권강재의 손조차 온전치 못했던 것이다. “유리 조각이 손을 움직이게 하는 무슨 신경을 건드렸대. 이런 경우도 드물대. 강재는 운이 좋지 못한 케이스라고 하더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할 거래. 그렇지 않으면 한 쪽 손을 보통 사람만큼은 쓰지 못할 거래….” 권강재의 꿈은 농구선수이다…. 그런 그에게 생명 같은 손을 보통 사람만큼도 쓰지 못하게 된다니. 그 건… 권강재에게 죽으라고 하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사이이기에 알고 있었다. 권강재의 인생의 ‘농구’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 게다가 곧 권강재의 인생의 첫 번째 찬스일지도 모르는 시합이 있을 예정이다. 그런 그가 팔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단연코 그 시합에는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재우씨는? 재우씨도 아는 거야?” “…너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해외로 발령 났잖아. 그이도 해외에는 나가고 싶지 않았던 건지 잘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속상했는지 며칠 전에 원석씨랑 한 잔 했나 보더라. 그런데 그런 그이가 먼저… 해외에서 치료받자고 하더라.” “해외에서?!” …해외? 아저씨가 해외에 발령이 나셨다고? 그래서 권강재도 해외…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설마 며칠 전에 아빠가 밤늦게 까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신 이유가…, 아저씨가 해외로 발령이 나서. “응.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해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 받는 게 더 빨리 완치 될 것 같다고 해서. 의사선생님도 그럴 거라고 하셨고…. 그래서 아무래도 가는 날짜가 조금 앞당겨질 것 같아.” “원래는 다음 주랬잖아.” “응. 어쩔 수 없지…. 미리 다 준비해놓았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한 달 후에나 갈 수 있었을 거야. 의사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그나마 빨리 갈 수 있는 것 같아. 후, 하루 빨리 데려가서 치료부터 시켜야지 안 되겠어….” 엄마는 근심 가득한 아주머니께 힘이 되어주고 계셨다. 나도 권강재에게 힘이 돼 주어야 하는데 권강재의 상태를 안 지금 나는 도저히 권강재와 마주할 수 없었다. “엄마.” “사가지고 왔어?” “…응. 나 먼저 가볼게, 엄마.” “강재 안 보고 가?” “…어?” “안 보고 가냐고.” “아니…, 자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니야, 향미야. 강재 지금 방금전만해도 깨어있었는걸? 들어 가 봐.” “…하지만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게.” “괜찮으니까 들어 가 봐. 강재도 널 보고 싶을 거야.”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볼 자신이 없어요. 이제는 날 아예 쳐다 봐주지도 않으면 어떡해요? 하지만 어서 들어가 보라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차마 버팅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문을 열자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권강재는 여전히 창문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길 바랐다. 아주머니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길 바랐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나를 절망케 만들었다. “…강재야.” 대답 없는 권강재. 뒤돌아보는 것조차 하지 않는 권강재. 정말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길 바라며, 그저 내가 너무 싫어서. 이제 진절머리가 나서 무시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다시 한 번 권강재의 이름을 불렀다. “권강재.”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주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한 쪽 귀는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귀조차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한가 보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눈가에 고였고, 나를 향한 원망감과 권강재를 향한 미안함에 나는 문 앞에 서서 권강재에게 다가가질 못했다. 그런데 그 때 거짓말같이 나를 부르는 권강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재야.”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화도 내지 않고,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는 권강재.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천천히 용기를 내어 권강재에게 다가갔다. “…몸…괜찮아?” 대답 없는 권강재. 권강재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 입술에 머물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괜찮아?” “천천히 말해 봐.”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입모양을 보고 알아들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속상할까. 자신의 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괜…찮…아?” “견딜 만 해.” 권강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권강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역시 내가 원망스러운 걸까?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내가 막아선 거니까. 그러니 괜히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 이렇게 찾아올 필요도 없고.” “…정…말 미안해. 미안해, 권강재.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못 알아들을 것을 알면서도 말해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수십 번, 수 천 번. 할 수 있을 만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꾸역꾸역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려 더 이상 권강재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권강재는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 마음 알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네 마음 받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됐어. 너무 미안해서. 나란 아이 왜 이렇게 싫어지니.” 들리지 않겠지. 지금 내가 네 앞에서 하는 말들이 들리지 않겠지? 이대로 네가 해외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면 아마 몇 년간, 아니 어쩌면 네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네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해줄 수 없겠지? 들려주고 싶었는데. 내 입모양이 아닌 내 목소리로 네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울 거면 나가.” “…강재야.” “울고 싶은 사람은 나야. 네가 아니라. 왜 네가 울어?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말라고 했잖아. 울어도 내가 울어. 그러니까 울 거면 나가.” “…미안해.” “평생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치료하고 수술하면 다시 들릴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평생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지 마.” 손은…? 손은 어떡해? “…손….”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하던 권강재가 ‘손’이라는 내 말에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귀는 그렇다 쳐도 아마 다친 손에 대해서는 귀보다 더 속상할 것이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중요한 대회를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권강재도 알고 있을 테니까. 적어도 재활치료를 받으려면 반년에서 1년. 더 걸리면 2년, 3년 정도 걸릴 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권강재에게 다가가 핸드폰에 몇 자 적어 권강재에게 내밀었다. 짧은 말은 입 모양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쳐도 긴 문장은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 해외로 치료받으러 언제 가는 거야? ] 권강재는 핸드폰 액정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이틀 후.” 이틀 후? 이틀 후면 월요일이잖아…. 너무 빠르잖아.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 너도 그 날 가는 거야?] “어.” [ 원래 예정일이 언제였는데?] “다음 주 수요일.” 다음 주 수요일…. 너는 그 사실을 나한테 숨기고 있었구나. 아무리 내가 미웠더라도 알려주지. 그랬다면 나 조금 더 빨리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 노력했을 텐데….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권강재 환자. 검사 받을 시간이에요.” “…검사요?” “네. X-ray 촬영을 해야 해서요.” “오래 걸리나요?” “이것저것 검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릴 듯싶네요. 혹 기다리실 거라면 나중에 오시는 게 좋을 듯해요.” “…네.” 얼마 같이 있지도 못했는데 벌써 가야하는 구나. 나는 다시 핸드폰에 몇 자를 적어 권강재에게 폰을 내밀었다. [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도 돼?] “4시.” “어?” “4시에 와.” 이 상황이 기뻐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왠지 권강재가 나를 용서해준 것 같아서. 내일 다시 와도 되냐는 내 물음에 그렇다고 허락해준 게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봐.” 권강재를 향해 인사를 건네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권강재. 헌데 내가 잘 못 본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권강재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본 것은. 잘 못 본거겠지? 병실 밖으로 나오자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 엄마는 좀 더 있다가 가겠다고 하시기에 먼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 권강재가 가기 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차연우에게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지금 잠깐 만날 수 있냐는 전화 한 통.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지난 번 차연우와 했던 마지막 데이트 코스인 공원으로 향했다. “내일 도시락 싸가야지.” 권강재 병문안을 갈 때 어떤 도시락을 쌀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 새 공원에 도착했고,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차연우를 찾았다. 그리고 곧 커다란 나무 밑 벤치에 앉아있는 차연우의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녀석에게로 향했다. “빨리 왔네.” “갑자기 왜 보재? 할 말이 뭔데?” 빨리 집에 가서 마트 갈 준비를 하고 싶은 급한 마음에 차연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바쁜 일 있냐? 뭘 그렇게 다짜고짜 물어보냐.” “마트에 좀 들려야 해서. 하여간 왜 보자고 했어?” “줄 게 있어서.” 줄 거? 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쳐다보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는 차연우. “뭐야, 이거?” “줄 것.” “…이거 내 것 아니라며.” “네 거 아냐.” “그럼 왜….” “권강재, 가잖아.” 어떻게 알았지? 차연우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한 2주 전부터. 말해주고 싶었는데 권강재가 끝까지 말하지 말라고 해서 못했는데, 이제는 너도 알 테니까.”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예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네가 권강재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그거와 이게 무슨 상관이…? “권강재와 내가 안지도 3년이 다 되가. 그 녀석을 알 때부터 네가 권강재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자기 마음 하나 눈치 채지 못하는 너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권강재가 너무 답답해서 내가 대신 이어주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 조건을 내걸었던 거구나. 권강재의 마음을 내가 눈치 챌 수 있게.” “어. 하지만 네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말이야.” “헛수고였네.” “그래. 그리고 점점 너랑 사귀면서 나도 모르게 빠지게 될 것 같더라고. 진심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너에게.” …그랬지. 선생님을 잊기 위해 난 너에게 진심으로 다가섰었지. “강우재, 그 녀석이 때 마침 잘 나타났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는 너에게 마음을 줘버렸을지도.” “걔가 원래 타이밍을 죽이게 잘 맞춰.” “이거. 너희들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하나는 권강재, 하나는 너. 나눠가지라고 직접 내 돈 투자해서 산거야.” “…아.” “권강재 그 녀석이 이렇게 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올 녀석이란 거 알아. 그 녀석은 토종 한 국인이라 외국생활 못할 거라는 것을 내가 알거든. 영어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외국이야.” 차연우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내 입가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자리 잡혔다. “그러니까 그 녀석 떠나기 전에 나머지 하나 건네 줘.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고마워.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나는 너한테 해준 게 없는데. 왜 난 이렇게 피해만 주는 것 같지?” “이게 또 울려고 하네? 어제도 엄청 울드만.”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나보다. 그만큼 차연우가 내게 준 선물은 감동적이었고, 내게 보여준 차연우의 배려에 고마웠다. 하지만 차연우가 내게 준 감동은 그 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향미.” “…응.” “권강재가 지키지 못한 약속.” 4년 전 권강재와 내가 했던 약속. 평생 지켜주길 바랐던 그 약속을 “네가 권강재에게 부탁했던 약속.” 권강재가 아닌 차연우가, “내가 대신 지켜줄게.” “뭐?” “평생 친구로 남아달라는 약속, 권강재 대신 내가 지키겠다고. 너한테 평생 친구가 되어준다고. 네가 원하는 그 친구, 내가 되어줄게.” 대신 지켜주겠다고 한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그러한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다. 권강재가 아닌 차연우가. 차연우는 그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말하는 걸까? “그러니까 권강재한테가.” “…미안. 미안해. 그리고 정말 고마워.” “울지 말라니까.” 권강재만이 내게 지독한 덫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곳을 떠난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울컥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내게는 또 다른 덫들이 있었음을. 권강재만이 내게 덫이 아니었음을. 다른 친구들도, 김혜미도, 한효빈도, 그리고 차연우도 내게 있어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덫임을. 권강재가 없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해줄 덫들은 많다는 사실을 나는 왜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저 내 곁에 있는 덫들 중 권강재는 그저 특별한 덫인 것을 나는 왜 지금 알았을까. “…고마워. 친구로 남아줘서.” 나의 외로움을 알고, 나의 두려움을 알고 내 곁에 남아준 그들에게 나는 감사하다는 마음을 언제나 표하고 있다. * * * “이향미. 4시 다 되간다.” “그만 먹어, 이향원! 네 것 없단 말이야!” “쩨쩨하게. 그런데 엄마는 어디 갔냐?” “전화해 봐.” “전화기 놓고 갔단 말이야. 아씨, 병원에 먼저 가셨나?” “병원 가보면 알겠지.” “야, 진짜 4시 다 되려고 한다!” 이향원의 말에 ‘뭐?!’하고 시계를 쳐다보자 정말 분침이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간다면 5분 안에 도착하겠지? 하고 빨리 나갈 채비를 챙겨 도시락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 병원에서 만나면 아들이 배고프다고 전해줘라.” 이향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준 뒤, 미리 불러놓은 콜택시를 타고 권강재의 병원으로 향했다. 내 한쪽 손에는 권강재에게 줄 도시락과 어제 차연우가 나눠가지라는 예쁜 열쇠고리가 쥐어져 있었다. “…사랑해, 기다릴게.” 열쇠고리를 붙이고, 떼면 나는 소리. 권강재에 닿길 바라는 내 마음. “도착했습니다.” “여기 2000원이요.” 병원 앞에 도착한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께 택시비를 지불하고서는 빠르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권강재의 병실이 위치한 층을 눌렀다. “…아, 왜 이렇게 안 올라가지?” 천천히 가도 되는데 이상하게 초조해지고 불안한 마음에 오늘따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리게만 느껴졌다. 그 때 ‘딩-.’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권강재의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멀리서 보는 권강재의 병실 앞이 이상할 정도로 휑하다. 이상한 기분에 권강재 병실까지 뛰어갔고, 곧 텅 빈 권강재의 병실을 보자마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거, 검사 하러… 갔나?” 검사 할 게 많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권강재가 4시에 오랬는데…. 이상하다…. “…저, 저기요!” 나는 권강재의 병실에서 나와 회진을 돌고 계시는 의사선생님을 붙잡아 물었다. “여기 환자…, 지금 검사하러 간 건가요?” “권강재 환자 요? 권강재 환자는 오늘 아침에 퇴원하셨는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직 치료가.” “오늘 오후 비행기로 미국으로 가신다고 하셨어요. 보호자 분께서 미국에서 치료받는 것으로 결정하셔서요.” “오늘 오후 비행기요…?… 그렇구나.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몸이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엄마가 집에 없던 이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간다는 것을. 아마 차연우도 권강재가 오늘 간다는 것을 알고 어제 내게 이 열쇠고리를 줬던 것이다…. “…안, 안되는데. 안 되는데….” 왜 속였어? 왜….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왜…. 왜? “아직… 아직 가면 안 돼. 권강재, 아직 가면 안 된단 말이야!” 아직 내 마음을 전해주지 못했단 말이야. 이렇게 가는 게 어디 있어! 4시에 오라며! 4시까지 오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몰래 가는 법이 어디 있냔 말이야! 나쁜 새끼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병원을 나와 앞에 서 있는 택시 한 대를 잡아 인천공항으로 가달라고 말한 뒤 차연우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차연우.…차연우.” [ - 이향미?] “…어,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 - 너 울어? 왜 그래?!] “…궈, 권강재가 없어. 병원에 없어…!” [ - 무슨 소리야. 권강재 5시 비행기로 미국 가잖아. …설마 몰랐던 거야?!] 알고 있었구나. 넌 역시 알고 있었어…. 권강재 이 나쁜 새끼가 나한테만 알려주지 않았던 거였어! 그래서…, 그래서 어제 내가 갈 때 그런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어…. [ - 울지 말고. 지금 인천공항 가는 중이야?] “…으, 흑. 으, 으흑,” [ - 후, 보니까 차 안 인거 같은데. 지금 가도 늦지 않아. 빠르면 30-4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말고!] “어떡해. 어, 어떡해. 아직 말해주지 못했는데…,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못했는데….” [ - 이향미. 잘 들어. 믿어. 권강재를 믿고, 네 마음을 믿어. 재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믿어.] “갔으면 어떡해? 벌써 갔으면….”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차연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 - 어제 잊어먹고 못 물어본 게 있는데, 지금 대답해 줄 수 있어?] “…뭔데….” [ - 이향미.]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인가. 나는 한 손으로 눈가에 눈물을 훔치고 귀를 기울였다. [ - 그 때 못 물어본 거 다시 물어볼게.] 그 때 물어본 것? [ - 내가 너한테 남자야?] “…그럴 리가 없잖아.” [ - 친구지? 그럼 권강재는 너한테 친구야, 남자야?] 당연히 물어볼 필요도 없이. “…남자야.” [ - 그래. 그럼 그 마음만 믿고 있어.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못 믿겠으면 날 믿어. 만날 수 있어.] “믿을게…. 믿어볼게.” 그래. 믿는 거야. 아직 가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얼마 멀지도 않고…. 그래, 제발. 부탁이야, 권강재. 오늘 가도 좋아. 제발 나 한번만 보고 가. 나 딱 한 번만 보고 가. 내 마음만 듣고 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가. 4년 전 너에게 했던 부탁 취소할게. 그러니까…. “…가지 마.”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음은 초조해져가고 시선은 자꾸만 시계로 향했다. 남은 시간 20분. 차는 점점 인천공항에 가까워졌고, 남은 시간 10분. 아슬아슬하게 인천공항 앞에 내릴 수 있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께 돈을 지불하고 전속력을 다해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가 미국행 5시 비행기를 탑승하는 게이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권강재가 통과할 게이트를 향해 뛰어갔다.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뛴 적은 아마 오늘이 처음 일 것이다. 그만큼 간절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물들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제발. 아직, 아직 가지 않았기를.” 그 때였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권강재의 실루엣. 그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죽을힘을 다해 권강재의 이름을 불렀다. “권강재!!!!!!!!!!!!!!” 들리지 않겠지만 들리길 바라며. 내 마음의 소리가 권강재에게 들리길 바라며.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네게 닿길 바라며. 들리지 않겠지? 하지만 들어주면 안 돼? 넌 항상 내 부탁이면 들어줬잖아. 내 목소리면 들어줬잖아. 나면 언제나 돌아봐주었잖아. 오늘도 그래주면 안되겠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오늘하루만큼은 다시 내게 뒤 돌아봐주면 안 될까? 축제 때처럼…. “…부탁이야.” 그리고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그 바람은 거짓말 같이 이루어졌다. “…이향미?” 권강재가 뒤 돌아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나를 발견해주었다. 나는 그가 또 나를 피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두려워 젖 먹던 힘을 짜 권강재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려갔다. “하아. 하.”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날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권강재. 그리고 아주머니와 아저씨. “어떻게 온 거야?” 숨이 차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차연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새끼한테도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울면서 올 줄 알고 일부러 숨겼던 거였는데.” 권강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자리 잡혀 있었다. 권강재 역시 나를 보고 가지 못하고 가는 것이 내심 걸렸었던 듯했다. 그의 미소에 진정되는 마음. “…너 나쁜 새끼야. 너 진짜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욕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겠네.” “웃음이 나오니? 내가 ,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 줄 알아?! …나쁜 새끼야! 왜, 왜 가는데! 왜 말도 안 해주고 가는데!!! 내가, 내, 내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다시 한 번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멈추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권강재의 손이 내 눈가를 쓰윽- 하고 지나쳐간다. “울지 마.” 예전과 같은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손짓. 나는 주머니에 담아두었던 열쇠고리를 꺼내어, 내집 열쇠에 달려있는 열쇠고리를 가져다 대었다. ‘사랑해.’ 그리고 다시 떼어 놓자. ‘기다릴게.’ 하고 앙증맞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강재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이게 뭔데?” 어차피 말로 설명해도 듣지 못할 권강재이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권강재의 손에 열쇠고리 한 쪽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권강재의 입가에는 다시 한 번 옅은 미소가 폈다. “이런 걸로 나 용서 안해.” “뭐?” “나 아직 너 용서 못했다, 이향미.” “…나쁜 새끼. 끝까지 나쁜 새끼. 이런 상황에서도…, 넌.” 이런 상황에서까지 상처를 주는 권강재가 너무 미워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때 내 등 뒤로 권강재의 손길이 느껴졌고, 믿을 수 없는 한 마디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기다려줄래?”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내 귓가에 속삭이는 권강재. “내가 기다린 만큼, 너도 기다려줄래?”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 권강재와 눈을 마주했다. 권강재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느낀 것은 진심이었다. 권강재는 진심을 담아, 내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로서 기다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써 자신을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딱 4년만 기다려줘. 오늘과 같은 날, 같은 시각. 우리가 함께 했던 곳에서 딱 4번만 기다려줘.” 딱 4번만 기다려달라는 권강재. “내년에도, 그 내 후년에도 4번 다 내가 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 만나.” 4번 중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 자신을 포기해달라는 권강재.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약속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권강재. 나를 쳐다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바보 같은 권강재.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했으면서 그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하니. 이 바보야. 내 대답은 뻔 하잖아. 당연히. “약속할게. 기다릴게, 권강재.” 너를 기다릴게. 네가 나를 기다린 만큼, 내가 너를 아프게 한만큼 나도 이곳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을게. “다시 한 번만 말해줘.” “…기. 다. 릴. 게.” 내 입모양을 알아들은 건지 권강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나는 권강재만 듣지 못할 말을 그에게 남겼다. “꼭 돌아와. 다음번에 만났을 때, 네가 날 용서해주면 네가 듣고 싶었던 그 말. 꼭 해줄게. 그러니까 다 나아서 무사히 돌아 와. 손도 다 나아서 멋진 모습으로 돌아와.” 짧은 말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 그가 알아들은 것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권강재.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으로 인해 권강재와 아주머니 아저씨는 게이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18년 동안 단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 권강재와 나. 그렇게 우리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에게서 떠났다.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던 권강재를… 내 곁에서 잠시 떠나보내었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 뿐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쉽게 잊는 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덫이 아니게 될 것이고, 4년이 지났을 때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지독한 덫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4년 후 권강재의 옆에 내가 서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지독한 덫이 되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4년 후의 이야기. 고등학생 시절, 20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내 20대의 모습은 어떨까.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옆에서 웃고 있을까. 누구와 함께이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시절 곰곰이 상상했던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4년 후의 나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여전히 내 곁에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옆엔 권강재가 없었다. “어디 가냐?” “약속 있어. 그런데 너는 제대한 새끼가 하루 종일 집에서 뭐하는 거야?! 학교 안 나가?!” “오늘은 휴강이걸랑요.” 태평한 녀석. 내가 변함없듯이 이향원 역시 변함없었다. “그나저나 그 약속 혹시 미팅이냐? 치마길이 봐라. 팬티 보이겠다?” “오버 하지 마. 무릎 바로 위야. 그리고 미팅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지?” “누가 뭐래? 찔리냐?” 어째 저 개김성은 변함이 없냐. “연우형이 있다가 저녁 먹으로 네 오피스텔에 간다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나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전 해.” “내가 네 시다바리야? 왜 내가 전해!?” “식충이 주제에 말도 많다. 여튼 그렇게 전해.” “대신 올 때 아이스크림이나 사와라.” 마지막, 이향원의 말은 곱게 씹어주고 집을 나와 천천히 길을 걸었다. 이향원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권강재가 미국으로 간지 4년 째 되는 날이자, 나와 권강재의 마지막 약속의 날이었다. “4시 30분. 넉넉하네.” 학교까지 가는데 천천히 걸어가도 15분. 느긋하게 걸어가면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권강재가 그렇게 미국으로 가고 다음 해, 오늘과 같은 날, 5시. 우리의 모교. 영정고등학교에 갔었다. ‘내가 기다린 만큼, 너도 기다려줄래? 딱 4년만 기다려줘. 오늘과 같은 날, 같은 시각. 우리가 함께 했던 곳에서 딱 4번만 기다려줘. 내년에도, 그 내 후년에도 4번 다 내가 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 만나.’ 첫 해, 권강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치료가 빨리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대를 품지 않고 갔었다. 그렇기에 실망도 그만큼 덜했다. 그 다음 해, 역시 권강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 해보다는 기대를 꽤 품고 갔기에 실망이 컸었다. 다음 해에는 오겠지. 오겠지 하고 위안을 삼으며. 하지만 권강재는 3년 째 되는 날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을 거야- 하고 위안을 삼으며 기다렸지만 마지막 해를 남겨두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말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권강재 하나만을 기다리며, 꼭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4년 째 되는 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제발 나오기를.” 학교로 향하는 길, 설레임과 두려움을 안고 나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정확히 일 년 만에 이 길을 다시 거닐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 년 사이에 변한 건물들이 새롭게 와 닿았다. ‘여기는 이렇게 변했네, 저기는 저렇게 변했네.’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반대 쪽 길목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여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권…강희?” 그 여학생은 다름 아닌 강희였다. 올해 고 3이 되는 강희는, 4년 전 강재와 아주머니, 아저씨를 따라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교육과정을 모두 마칠 것이라고 했었다. 아마 지금도 수능 준비를 하러 학원으로 가는 듯 해보였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강희가 반가워 반대쪽 길목으로 건너가 강희를 불렀다. “강희야!”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강희는 움찔 하고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강희는 나를 발견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언니!” “학원가는 길이야?” “네. 언니는요?” “…약속 지키러 가는 길.” “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죠.” “응.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니 이제 여자가 다 됐네. 공부는 잘 되가?” 강희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에 성실했던 강희라 아마 수능도 아무 탈 없이 잘 볼 것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야지. 이향원 봐. 시험은 개떡같이 쳐놓고 와서 전문대 간 거. 너는 절대 그렇게 되지 마라.” “오빠 재수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대하고 와서 공부하기 귀찮은 건지 재수는커녕 학교도 제대로 안 나가고 있어.” “오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여전한가 봐요.” “그렇지 뭐. 아,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았나? 수험생한테 시간은 금인데.” “아니에요! 오랜만에 언니 봐서 반가웠는걸요. 그리고 언니 저 폰 번호 바뀌었어요.” “정말? 나 번호 좀 가르쳐줘.” 나는 강희를 향해 내 핸드폰을 내밀었고, 강희는 자신의 바뀐 핸드폰을 찍어 내게 넘겨주었다. “그럼 공부 열심히 하고.” “네. 나중에 연락할게요.” “응. 잘 가.” 하고 강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데, 뒤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려던 강희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다시 나를 향해 몸을 틀며 내게 말했다. “맞다. 언니, 이거 말 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요.” “어?” “…오빠요.” “응?” “3년 전에 한국 왔어요, 사실.” …뭐? “치료가 잘 돼서 반년 만에 치료 끝내고, 재활치료 받은 다음 돌아왔어요.” “…다 나았어?” “네. 예전처럼 팔도 잘 움직일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오빠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냥 있었는데, 오늘은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럼 돌아왔는데도 지난 2년간 나오지 않았던 거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오빠만이 알겠죠. 그러니까 언니, 만약에 오늘 오빠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요. 오빠는 한국에 있으니까.” “…한국에 있었구나. 한국에 있었어….” 4년 동안 즐거웠던 일들이 있었던 반면에 힘든 일도 있었다. 그 순간마다 권강재가 생각이 났고,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었다. 그 마음 하나로 4년 동안 버텼고,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권강재를 기다렸다. 그런데 권강재가 이미 3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었다니. 나와 같은 땅을 밟고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니. 나에겐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럼 언니 저 정말 가볼게요. 나중에 뵈요!” 이번에야 말로 강희는 내게서 등을 돌렸고, 나 역시 강희에게서 등을 돌리고 천천히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늘은 나왔을 거야, 하는 희망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었지만 강희의 말을 듣고 난 지금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같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건 아직도 날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로 밖에는 해석이 되질 않는다. 그런 권강재가 오늘은 나왔을까? 내 생각은 No였다. 3년 동안 한 번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녀석이 오늘이라고 나왔을까. 오늘도 지난 3년처럼 허탕만 치고 오는 게 아닐까. “…오늘도 없다면 울 것 같아.” 3년 동안 참았던 슬픔과 섭섭함에 오늘은 눈물을 흘릴 것 같다. 눈앞에 학교 건물이 보였다. 건물 중앙에 달린 시계는 정확히 ‘4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각 5분. 항상 기다리던 교문 앞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역시나 없구나.”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직 5분이 남았으니까- 하고 위안을 삼으며 마지막 희망을 안고 교문 앞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3년을 함께했던 학교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다. 이렇게 변한 것이 없는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너는 변한거야? 내 인생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너를 소중히 하고, 너를 원하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나타나지 않는 거야? 보고 싶어, 강재야. 권강재.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면 안 돼?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건강해진 모습 보고 싶어. “1분 남았다.” 학교 건물 중앙에 달린 시계의 분침이 12에 가까워질수록, 움직이는 초침을 바라볼수록 속은 애가 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 역시 오지 않는 건가. “…5.” 남은 시간 5초. 5초 뒤에는 나와 권강재의 약속도 끝이 나는 것이다. “제발 나타나.” 4. “보고 싶어. 권강재. 보고 싶어….” 3. “왜.” 2. “어째서….” 1. “나타나지 않는 거야….” 0…. 정확히 초침과 분침이 12를 가리켰고, 그와 동시에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5시하고 1초,…2초…, 3초.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강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용서하지 못했구나.” 오늘까지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나는 너에게 큰 죄를 저질렀던 거구나. 4년 전에 그렇게 느꼈던 사실을 새삼스레 다시 느껴졌다. 그렇게 몇 분을 멍하니 교문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 계속 이 곳에 있다가는 미련만이 생길 것 같아서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학교에게서 등을 돌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모르겠지만, 아마 오게 된다면 권강재를 떠올려도 가슴 아프지 않을 때 일 것 같다. “힘들겠지만 잊어보는 거야.” 여전히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한 채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새로운 앞날을 향해. 그런데… 그 때였다. “이향미.” …내 어깨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듣고 싶었던 목소리…. 내가 환청을 듣는 건가? 하고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향미!” …환청이 아니다! 이건 환청이 아니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권” 권강재…. ……………… 그가 서 있었다. ……………………… 교문 앞에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권강재의 모습이 보였다. 거짓말처럼 앞을 향해 전진하던 내 발걸음이 권강재를 향해 움직였다. 천천히 거닐던 발걸음은 어느 새 뛰고 있었다. 권강재를 향해. 믿기지 않았다. 불과 1분전만 해도 권강재가…. “오빠 팔 아프다. 어서 안겨.” 권강재는 나를 향해 두 손을 펼치고 있었고, 나는 권강재를 향해 힘차게 뛰어가 녀석의 품에 안기었다. “…으. 으으.” “보고 싶었어.” 나를 꼭 안아주는 권강재의 두 손. 4년 전과는 달리 깁스도, 붕대도 차고 있지 않은 멀쩡한 손에 방금 전보다 나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돌아왔어.” 권강재가 맞았다. 이 품도, 이 목소리도, 이 얼굴도. 모두 권강재가 맞았다. 내가 아는 권강재가 돌아왔다. “…왜, 왜…, 왜 늦은 거야….” “난 정확히 5시에 왔다고.” 웃기지 마. 5분이나 늦었으면서! 하고 녀석에게 소리치려고 했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권강재가 내민 핸드폰 액정에 비친 시계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리 학교의 시계는 5분이 빠르잖아.”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둘러대던 변명 중 하나. 학교시계는 5분이 빠르다는 변명. “네가 제일 잘 둘러대던 변명을 잊어버리면 어떡해?” “잊고 있었어…, 바보같이 잊고 있었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정확히 학교의 시계가 분침이 12시를 가리킨 순간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미련 없이. 나는 권강재가 없다는 사실 하나에, 학교 다닐 적 항상 잊지 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 시계가 5분이 빠르다는 사실을. “하고 싶은 말 없어? 우리 4년 만에 만났는데.” 하고 싶은 말? “3년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며. 왜… 연락 안 한 거야?” “입대했었어.” “…어?” “너랑 다시 만나면 나는 다시 군대에 가야하고, 또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먼저 간 거야, 군대. 몇 달 전에 제대했어. 또 다른 하고 싶은 말은?” “그럼…귀하고 팔 다 나았어?” “그게 할 말이야?” 나에게는 다른 어느 것 보다 가장 중요했다. 모두 완치가 되었는지. 나 때문에 다친 몸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움직일 수 있는지. 하지만 권강재는 내 질문에 많이 실망한 건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빨리 말해 봐. 다 나았어? 괜찮은 거지?” “뭐? 뭐라고?” “…왜 그래?” “갑자기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봐.” “안… 들려? 다 안 나았던 거야?! 정말 안 들려?!” “더 크게 말해 봐. 뭐라고?” 권강재는 내게 귀를 가져다 대었다. 정말로 들리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그 모습에 내 표정은 굳어졌고, 권강재의 귀로 뻗는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직…완치 되지 않았던 거야?”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부들부들 떠는 내 손을 잡으며 말하는 장난스러운 녀석의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면 들릴 것 같은데.” 권강재는 내게 장난 아닌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공항에서 해주지 못했던, 듣지 못했던 말을 듣고 싶어서. 그 말을 가장 먼저 해주지 못한 내게 심술이 난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뭐라고?” “좋아하고 있어….” “더 크게 말해 봐. 잘 안 들려.” 여전히 장난스럽고, 여전히 나를 좋아해주는 나의 하나뿐인 덫이, “좋아해, 권강재.” 권강재를 향한 내 마음을 깨닫고 난 후 처음으로 하는 수줍은 나의 고백에 4년 후 내게로 다시 돌아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도 좋아해, 이향미.” 아주 행복하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제 시작되는, 앞으로 행복할 우리들의 이야기. 하지만 여기까지 들려드립니다. 앞으로 우리들에게 일어날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추억으로 간직할래요. 그냥 한 가지만 알아주시면 되요. 우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서로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덫이라는 사실하나만을. 그 사실 하나만 알아주시면 우리는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영원한 해피엔딩일 것입니다. 특별함을 원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인생을 살기를 바랐고, 그렇기에 특별함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렸던 나는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특별한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나와 함께 해왔던 수많은 덫들 중에 내가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덫, 권강재.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서 평생 헤어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권강재에게 있어서 나 역시 그가 헤어 나오지 못할 지독한 덫이 되기를 바란다. we fell into a trap. 우린 덫에 걸렸다. 아직 남은 덫들의 이야기. After Story - 2012년 11월.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날 중에서도 오늘 만큼 중요한 날은 없을 것이다. 바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 약 12년이란 시간을 마무리하고, 12년이란 시간동안 공부한 자신의 실력을 평가하는 날, 수학능력시험.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런 중요한 날 오토바이를 타고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으니. 한 놈은 차연우요, 한 놈은 이향미였다. 꽤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오토바이는 곧 낯선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섰고, 뒤에 타고 있던 향미는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구겨진 치마를 툭툭 치며 다듬었다. “너 아직도 날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또 아침부터 헛소리한다.” “알지? 나 여자한테는 매너남이어도, 그 외의 사람한테는 전혀 아닌 거.” “알지. 내가 얼마나 당했는데.” “알면서도 날 부른 이유가 뭔데? 여기까지 데려달라고 한 이유가 뭔데?! 피곤하다고!” 아침부터 거리 한 복판에서 소리를 쩌렁쩌렁 질러대는 연우가 창피한 건지 연우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말하는 향미. “아! 왜 때리는데!” “조용히 안 해? 다 쳐다보잖아!” “헬멧 써서 어차피 못 알아 봐.” “누가 너 알아볼까봐 무서워서 이래?! 쪽팔려서 그러지!” “그렇게 쪽팔리면 권강재 부르면 되지, 날 왜 불러! 그것도 아침 7시부터 집에는 왜 오래!?” “권강재, 어제 밤늦게 강우재랑 내 오피스텔에서 술 처먹고 지금 뻗어서 자고 있거든? 그런 애한테 운전시키리?” “어제 새벽까지 스케줄이 빡빡해서 잠도 한 숨 제대로 못 잔 친구 불러서 운전시키고 싶든?” 입을 열려던 향미의 입술이 굳게 닫혀 지는 모습을 보며 연우는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곧 향미의 반격에 이번에는 연우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오후 스케줄만 있을 때 내 오피스텔에 와서 아침밥 얻어먹고 가는 새끼가 그런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옆집인데 좀 챙겨주면 덧나?!” “네가 밥값을 내냐, 반찬값을 내냐? 그렇다고 가스 세를 내, 수도세를 내?!” “그 까짓 거 몇 푼 된다고.” “그 까짓 거 몇 푼? 너 말 다했어?! 빵빵한 직업 있다고 째는 거야, 뭐야? 난 학생이라 아직 돈 벌 처지가 못 된다고! 너랑 다르다고, 달라! 그리고 그 까짓 거 몇 푼이라고 칭하는 새끼가 오토바이가 뭐냐!? 차 한대 뽑으라고! 치마입고 이게 뭐야. 다 구겨지게.” 향미는 구겨진 자신의 치마를 가리키며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 나한테는 안 통해. 권강재한테나 통하지.” “애정이 식었어.” “애정은 무슨. 너한테 애정 따위 처음부터 없었거든요.” “왜 이래? 우리 그래도 한 때 사귀었던 사인데. 너 솔직하게 말해 봐. 나랑 헤어지고 난 뒤 왜 다른 여자들이랑 안 사귄 거야? 사실 나 좋아했던 거지?” “오랜만에 물어보네. 죽을래, 뒤질래, 처 맞을래. 여자니까 특별히 고르게 해준다.” 고등학교 2학년 학기 초, 연우가 향미에게 했던 말. 향미는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며 마찬가지로 똑같은 대답을 했다. “여자니까 특별히 가만히 두는 건 어때?” “내가 고를까?” “아, 진짜! 그럼 왜 안 사귀는 건데? 너 여자 엄청 밝혔었잖아!” “기억 안 나? 나도 너랑 같은 이유로 여자애들이랑 사귀었던 거. 다 잊었다고. 잊었으니까 안 사귀지.” “…아. 잊었어? 대단한데? 장하다, 우리연우!” 의외라는 듯 향미는 연우의 엉덩이를 톡톡 쳐주며 말했고, 연우는 갑작스런 향미의 손길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변태냐!! 어딜 만져! 그리고 어서 들어가서 볼일이나 보고 와! 10분이다. 10분 안에 해결하고 나와!” “어차피 일찍 나와도 오늘 수능 보는 날이라서 도로 막히거든요.” “오토바이는 막힐 일 없거든요.” “사고 나고 한 번 나봐야 혼이 나지, 엉?” “빨리 볼일이나 보고 와!” “…예예.” 연우의 으름장에 향미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답답해 죽겠네.” 오토바이가 멈추어 선지 5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헬멧을 벗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으. 매니저 형 전화다. 여보세요. 어, 형. 어. 아 그게…응. 싫어! 오늘 쉬게 해준다고 했잖아! 됐다고! 안 해! 나도 쉴 거라고! 왜 지금 깨어있냐고? 이향미 이 기집애가 오토바이 태워달라고 해서…! 아 위장하고 나왔어! 헬멧 썼거든! 못 알아 봐! 걱정 붙들어 매라고! …형 이러기야? 자꾸 이래 봐. 나… 연말까지 있는 스케줄 다 펑크내버리고 외국으로 날라버린다! …그치? 형이 잘 못 생각한 것 같지? 알았어. 내일 봐, 형.” 그랬다.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비유하고 싶진 않지만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모델이었다. 어쩌다가 길거리캐스팅이 된 차연우는 작년 겨울 CF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우연인건지 아니면 적성에 맞은 건지 CF가 유행을 타면서 얼굴만 봐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모델이 된 그가 향미는 언제나 불만투성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도 안하고 놀기 바빴던 그의 미래가 걱정스러우면서도 한심하게만 느껴졌던 향미는 그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하고 수없이 말하던 향미는 해로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말을 입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8시도 안 됐는데 사람을 깨워가지고는… 으하아아암. 졸리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 연우가 향미를 기다리는 시간이 심심해 핸드폰을 꺼내어 게임을 하려고 할 때였다. 오토바이에 앉아있던 그의 뒤로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달려와 그의 뒤에 앉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연우는 고개를 돌려 그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헬멧을 쓰고 있는지라 여학생은 그러한 연우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출발 안 해요!?!”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던 연우는 그 여학생을 향해 따져들었다. “난 택시기사가 아니거든요? 왜 남의 오토바이 뒤에 타시는 건데요, 학생.” “아, 진짜. 이 아저씨 안 되겠네?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요? 빨리 출발해요!” “…아, 아저씨!?” “뒤에 말 툭 잘라먹지 말아요!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냐고요!” 오늘이 무슨 날이겠는가. 당연히 고3들의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지. “아는데?” “알면 출발해요. 영정중학교.” “그러니까 거길 왜 내가 데려다 줘야 하는 건데?” “제가 그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러 그 학교에 가야하거든요?! 5분밖에 안 남았다고요! 5분 안에 교문 통과 못하면 나는 1년 기다려야 해요! 아저씨가 책임 질 거예요!?” 여학생의 발언에 연우는 어이가 없었다. 여학생이 늦은 이유가 자기 때문도 아닌데 자신보고 책임질 것이냐며 따지는 모습이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왜 널 데려다 줘야 하냐고, 내가 왜!? 내가 네 오빠야? 네 아빠야??! 왜 내가 데려다 줘!?” “이 아저씨가 기본이 안 되어있네!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에는 경찰 아저씨조차도 늦은 학생들 태워서 그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요! 그게 예의라고요! 학생들 늦을까봐 이 날은 출근 시간도 한 시간 늦추어진다고요! 그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요! 그런데 대한민국의 건전한 아저씨가 지금 이러기에요!? 나 늦었어요! 빨리요!!!! 안 태워다 주실 거면 내리세요! 내가 운전해서라도 가게!!!” 여학생은 연우를 밀 기세로 소리쳤다. 순간 몸을 움찔한 연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미쳤냐? 꼬맹이한테 내 바이크를 맡기게? 꽉 붙들어라. 영정중학교랬지? 전속력으로 데려다 주마. 나는 대. 한. 민. 국의 사나이니까.” “아저씨 최고! 달려!!!!” “아저씨 아니고 오빠야, 이 기집애야!!!” “달려요, 어서!!” 연우는 대한민국의 사나이 자존심으로 곧 건물에서 나와 기다릴 향미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신나게 달렸다. 오토바이라 그런지 자동차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며 겨우겨우 8시가 되기 1분전 영정중학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우의 뒤에 앉았던 여학생은 오타바이에서 내리고서는 연우를 향해 인사를 건네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나 합격하게 되면 아저씨 때문에 저 수능합격 한 거예요! 나중에 길가다가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된다면 제가 한턱 쏠게요!!” 여학생은 연우에게 손을 휙휙 저으며 교문 안으로 사라졌다. “…저거 웃기는 기집애네.” 연우는 당돌한 여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나서부터 그에게 다가오는 여학생들은 모두다 그의 팬들이었다. 오늘처럼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주는 여학생은 드물었기에 연우는 잠시나마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것도 잠깐. 건물 앞에서 기다릴 향미가 떠올랐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다시 향미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오토바이 앞에 떨어진 명찰 하나. 아마 방금 전 그 여학생의 명찰인 듯싶었다. 연우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떨어진 명찰을 주웠고, 입 밖으로 명찰에 새겨진 이름을 중얼거렸다. “…권강희?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했더니 권강재 동생이었던가.” 그의 얼굴에는 어느 샌가 옅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오랜만인데, 꼬맹이?” 차연우, 어린 덫에 걸릴 조짐이 보이다. * * * “차연우 죽었어!” 강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는 바람에 길 한복판에 버려진 향미는 연신 씩씩 거리며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갈 거면 말을 하고 가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앙증맞은 가게 하나가 눈에 보였다. 가게의 간판에는 ‘ Lovely Doll’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향미는 가게를 발견하자마자 조금 전 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 도착한 향미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가게 을 울렸다. “…어서 오…이향미?” “물 줘!” “아침부터 남의 가게에 와서 왜 행패야? 너 줄 물 없다. 나가.” “나 지금 열 잔뜩 받은 상태니까 곱게 물 줘라, 김혜미?!” 그랬다, 향미가 향한 곳은 혜미가 일하고 있는 인형 가게였다. OOOO과에 진학한 혜미는 학교 근처 인형가게에서 알바 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인형을 만들어 파는 가게라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권강재 바람폈냐? 열이 왜 받아?” “권강재가 아니라 차연우가 날 버리고 갔어!” “너 양다리였니? 새로운 정보 감사한다.” “장난 쳐? 그게 아니라! 오늘 잠깐 주문해 놓은 물건이 급하게 필요해서 이 근처에 와야 하는데 집에서 멀고 시간은 없잖아! 그래서 차연우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이 새끼가 데려다 주고 사라졌잖아! 10분 안에 해결하고 나오래서 후딱 나왔는데!” “기다리기 싫었나보지. 그나저나 너 그 인형 안 내려 놔!?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이까짓 인형!” “오랜만에 나와 겨뤄볼래, 이향미?” 무릎 위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은 혜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향미를 위협하자, 향미는 꽉 움켜쥐고 있던 인형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향미는 혜미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작업대 위에 놓인 인형 하나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이번에 새로 만드는 인형.” “누구 닮은 것 같은데?” 향미는 작업대 위에 놓인 인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혜미는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켰다는 얼굴을 하며 향미에게 반박했다. “…누, 누, 누, 누굴 닮았다고 그래!” “소리는 왜 쳐? 그 반응 어째 수상하다? 잠깐만…, 이거 효빈이 아니야!? 완전 효빈이 얼굴인데?” “아니야!” “웃기지 마. 딱 한효빈인데. 너, 설마…. 드디어!” “서, 서, 설마 뭐!” 혜미가 작업대 위에 놓인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소리치자 향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고백 받아주려고 그러는 거지, 너.” “…우, 우, 웃기시네!” “야, 걔가 널 몇 년 쫓아 다녔냐? 나라면 받아주겠다. 그러고 보니, 효빈이도 얼마 전에 제대했잖아. 이향원이랑 같은 날에 제대하지 않았나? 아직 얼굴 한 번 못 봤네.” “다, 다, 닥쳐!” “얘가 오늘 따라 말을 왜 자꾸 더듬어? 아니면 말아.” 향미는 금방 흥미가 떨어진 건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인형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벨소리가 울렸다. “내 전화 아닌데, 김혜미, 네 전화 아니야?” “어, 그런가 보다.” 혜미는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내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 했는데? 됐거든, 이 꼬꼬마야! 너 그 이상한 고백은 자꾸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지라알! ‘내 고백을 받지 않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와 사귀자.’라는 대사 따위! 어디서 베껴온 티가 팍팍 난다고! 웃기지 마.” “내 고백을 받지 않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와 사귀자? 뭐야. 이 촌스러운 대사는.” “생일 뭐! 오늘 네 생일인데 뭐! 없어! 선물 따위 없다고! 뭐? 누구 마음대로 내 가게로 와!” “네 가게가 아니라 네가 알바 하는 가게겠지.” “이향미 안 닥쳐!? 한 효빈!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빡빡이 따위! 오려면 머리 붙이고 와! 돈 없다고? 어쩌라고! 내 알 바 아냐! 끊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통화하던 김혜미는 곧 전화를 끊더니 씩씩 거리며 작업대로가, 마저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뭔데?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얘가 자꾸 제대하고 난 뒤부터 이상한 고백하잖아. 진심도 아닌 주제에.” “뭐라고 고백했기에?”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와 사귀자. 날 사랑하지 않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와 사귀자. 뭐냐고 이 유치한 대사들은! 진심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잖아! 그냥… 그냥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될 거이지.” “…오호. 그렇다면 받아줄 의사가 있다? 하긴 고등학교 때도 건빵에 밀렸다고 그렇게 하소연을 해대더니.” “건빵 소리하지 마.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하고 온 게 아니라 건빵 장사를 했나, 건빵을 몇 박스나 들고 왔어.” “여전하구나. 그나저나 효빈이 지금 온데?” 향미의 물음에 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다 됐다.” “역시 한효빈이 모델이었어.” “…우, 웃기지!” “됐네. 어? 효빈이다.” 자꾸만 우기는 혜미에게 실증이 난 건지 혜미에게서 등을 돌려 유리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 향미. 곧 저 멀리서 모자를 쓰고 오고 있는 효빈이를 발견하더니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흥.” “그거 효빈이 생일 선물이지?” “아니야!” “맞으면서 튕기기는. 이참에 받아줘라. 효빈이가 너 얼마나 기다렸냐. 군대 갔다 와도 장화 거꾸로 안신은 거 봐.” “나랑 사귀고 나서 바람피우면 어떡해?” “얘가 뭘 모르네. 남자는 입대할 때 배웅 나와 준 여자를 평생가도 못 잊는대.” “어째서?” “몰라. 고등학교 때 걔 사회선생 있잖아. 아그리파. 걔가 그랬었어. 막 입대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쳐도 자기 여자친구의 목소리는 다 들린다나? 하여튼 효빈이는 네 목소리를 잊지 못했을 거다. ‘살아 돌아와!!! 건빵아!’ 하고 울먹이던 네 목소리를 어떻게 잊겠냐.” 향미의 말에 자신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 건지 얼굴을 붉히는 혜미.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리고 아그리파가 했다는 말에 신용이 제로로 떨어졌어.” 그 때 ‘딸랑’하고 종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리며 효빈이의 얼굴이 보였다. “효빈이 오랜만.” “어, 누나도 있었네요?” “응. 아, 맞다. 오늘 생일이라며. 생일 축하한다. 이따가 혜미랑 같이 내 오피스텔로 와. 오랜만에 애들이랑 다 같이 한 잔 하자. 또 넌 건전한 남자라며 내 빼지 말고. 네 생일까지 내 빼면 누나 슬프다.” “오늘은 갈게요. 혜미랑 같이요.” “너 언제부터 혜미한테 말 놨냐? 어색해 보인다. 하여튼 김혜미 파이팅!! 나 먼저 가 볼게. 방해꾼은 사라져 줘야지. 행운을 빈다!” “쇼하지 말고 나갈 거면 어서 나가버려!” 혜미가 향미를 향해 어서 나가라고 소리치자 향미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가게 밖으로 나와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부터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는 향미다. “아, 권강재랑 강우재 먹일 해장국할 거 사가야 하는데.” 마트에 들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 향미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진동이 지잉, 지잉 하고 울리자 향미는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 - 이향미. ] “지금 일어났어?” [ - 응. 어디야?] “잠깐 요 앞에 나왔다가 지금 집에 가고 있는 중이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지금 막 일어났구만?” [ - 몰라. 머리 아프다.] “근데 이 번호 우리 집 전화번혼데…, 너 설마. 또 내 침대에 누워있는 거야?!” [ - 어. 껴안고 자고 싶었는데 네가 없어서 깼어. 빨리 와.] 노골적인 강재의 애정표현에 향미의 볼이 옅게 붉어졌다. “마트 들렸다가 갈 거야. 강우재는 깼어?” [ - 잘 걸. 이향미 마트 가지 말고 빨리 와.] “왜 자꾸 빨리 오래!” [ - 보고 싶다고.] “어제도 봤잖아!” [ - 술 취해서 제대로 얼굴 못 봤어. 빨리 와. 보고 싶으니까. ] “…알았어. 하여간 애라니까. 기다리고 있어.” 향미는 전화를 받으며 길가로 가 택시 한 대를 잡으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곧 핸드폰 안쪽에서 들려오는 강재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 - 사랑해. ] 강재의 목소리와 함께 끊긴 전화. 향미는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며 강재에게는 들리지 않을 대답을 하고서는 택시에 올라타 언제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향했다. …………………… …………… ‘나도 사랑해’ 새로운 덫에 걸릴 조짐이 보이는 남자와, 이제 시작하는 귀여운 커플. 그리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행복했고, 행복할 우리의 주인공들은 보시다시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덫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댓글 7개 이 글을...(0) 이 스완 1편부터 풀로 봤습니다+.+ 완전 재밌어요 ㅠㅠㅠㅠ. 나 이제 웃졉님 광팬할래얌.......... 진짜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최고!!!!!!!!!!!!! 08.06.27 23:56 답글 ⓧ안뇽안뇽 언니쫌늦게봐서지금다봐써!!!!헿짱이다완결축하햄!ㅋㅋㅋㅋ 08.06.28 21:21 답글 융힐 ㅠ.ㅠ 이제완결다읽엇섬.....왁!!!!!!!!!!!!!!!!!!!!넘재밋게봣엇졈 08.06.29 15:05 답글 뽕짝어예 악악!!완전감동이어요권강재짱멋있어 08.07.05 20:53 답글 짱예쁜애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ㅁ<책으로 만들어서 갠소하고싶을만큼 08.07.31 20:20 답글 헹헹 재밋서여>.<* 08.08.02 20:46 답글 종이비행기♥ 오늘 하루동안 다 읽었더니 눈이 ㄷㄷ;; 유쾌한 이야기라 그런지 쑥쑥 읽었으나.. 눈이 아파요.ㅠㅠ 앞으로의 열한번째 다이어리 기대하겠어요!♡ 08.10.19 17:55 답글 이전 1 다음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허위사실 유포 등의 내용은 임의 삭제되거나 관련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텍스티콘 사용 0 / 600bytes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윗 글 : 터닝포인트 (Turning Point) 01-102008.07.08 아랫글 : 《덫》 25 ~ 312008.06.26 서비스 약관/정책권리침해신고카페 신고이용약관카페 고객센터검색비공개 요청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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