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혈존 탄생(1)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을 꾸는 와중에도 이것이 꿈이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매일 같이 똑같은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의 꿈은 어제보다 더욱 생생했다. 꿈에서 나는 한명의 붉은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붉은 살기 찬 눈빛에 붉은 용포를 입고 왼손에는 붉은 검을 들고 오른 손에는 붉은 불길이 이글 거리는 광채를 담고 있었다. 내 정면에는 세 명의 노인이 나를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의 늙은 중과 한명의 늙은 도사 마지막으로 한명의 장포를 입은 노인이 었다. 그들이나 나나 모두 땀에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나 나는 지친 가운데도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머리에서 허연 김이 피어 올리며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들의 양 손에서는 아지랑이와 같은 무형의 기운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 손에 들린 검과 붉은 광채 또한 이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천무삼성. 천무삼성. 백도의 최고봉이라고 하더니 정말 별 것 아니로구나." 내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천무삼성? 그것이 무엇일까? 붉은 수염의 노인이 꿈속의 나라는 것은 알겠지만 천무삼성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 마도 나를 포위하고 있는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까?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천무삼성이라는 사람들의 내력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 다. 아마도 꿈이 더욱 생생해진 만큼 꿈속의 나의 기억을 더듬게 된 모양 이다. 천무삼성. 성승 도선 장왕이라고 불리는 자들. 혜경성승. 현무도선. 무적장왕. 모두 일백년 전에 활동하던 백도의 최고 배 분의 노기인 들이다. 혜경대사는 소림사 역사상 달마대사 이후 처음으로 세수역근심경을 완전히 통달했다는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지는 성승이었다. 소림칠십이종의 절기의 모태가 되는 세수심공은 백도십대극품절예의 일위로 꼽히는 것. 모든 사공 마공과 극성이 되는 불가 내공이다. 하지만 나의 혈영마공에는 어림도 없 지. 현무도선은 현 무당장문의 사조가 되는 인물이다. 한 자루의 검으로 백리 밖의 마왕의 목을 주머니에 든 물건처럼 딸 수가 있다는 살아있는 검선이 다. 그의 태극혜검은 악마나 마신조차 벨 수 있다고 알려진 백도 최고의 검공이다. 그가 익혔다는 태극일원공 역시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였다. 무적장왕 모용도기는 천하제일가의 태상가주이다. 고금 칠대장공의 수좌로 알려진 건곤무적장을 완벽히 터득하여 한번 장을 뻗으면 백여 장을 초토화 시킨다는 인물이다. 건곤무적장을 포함한 건곤무적류의 절기 역시 백도십 대극품절예의 하나였다. 이들 셋은 이미 백여 년 전에 천하제일을 다투던 인물이고 백도천하를 이 룩한 최강의 인물로 백도사상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최강자들이었다. 달마조사나 장삼붕 진인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알려진 인물들. 하지만 그 런 그들 셋을 감당하는 나 혈존이야말로 고금제일인이 아니겠는가? "혈존. 큰 소리 치지 마라. 이미 네 내공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알고 있다. 최후를 앞두고 허세를 부리지 마라." 나를 포위하고 있던 노인 가운데 장포를 입고 있는 속인차림의 위맹한 노 인이 고함을 질렀다. 무적장왕 모용도기의 목소리였다. 혈존? 꿈속의 나를 가리키는 말일까? 그렇다. 기억이 났다. 나는 바로 혈 천마궁의 궁주이며 고금제일마인 혈존이다. 여태 몰랐던 나의 내력이 숨쉬 듯 자연스럽게 꿈속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만큼 꿈 속에 몰입되고 있는 것일까? 꿈속에서 내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 내 입에서 다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구파일방의 장문인의 목숨 값으로 절반의 내공이면 손해 본 장 사는 아니지. 그리고 남은 내공으로도 너희 셋쯤은 충분히 처 죽일 수 있 다." 내 말에 내 주위의 세 노인이 모두 안색이 어두워 졌다. 그리고 보면 이들 셋 이외에 내가 있는 주위로 백여 명의 시체들이 늘어져 있다. 오늘의 꿈 은 천무삼성부터 시작하고 있으나 나는 과거의 꿈으로부터 천무삼성과 결 투를 벌이기 이전의 일을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비롯한 백 도의 정예들이 천무삼성과의 약속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내 앞을 가로막았 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하나 고금제일마인 나의 내공을 소진시켜 천무삼 성에게 승률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은 모두 내가 쳐 죽인 구파일방의 인물들임을 알고 있다. 허나 천무삼성의 내력과 같이 그 들의 내력조차 완전히 머릿속에 되살아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꿈속의 나는 강하고 잔인했다. 내게 죽은 저들은 소림사 무당파 등 소위 천년이상을 이어왔다는 백도의 거대문파, 무림에서 말하는 무림의 기둥 구 파 일방의 장문인들이다. 또한 그들과 같이 죽은 자들은 구파일방의 장로 들. 하나같이 각문파의 장문인들과 배분이 같거나 높은 자들이다. 이들 중에는 소림 십팔나한진을 펼쳐 나를 상대하고자 했던 소림 전대 장 로로 구성되었던 십팔나한도 있었고 오행검진을 펼치던 무당파의 장로들도 있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같이 그들 장로들 모두 나의 손에 죽 임을 당했다. 이날 내가 죽인 사람은 일류고수를 넘어서 절정고수라고 불 리는 자들만 해도 천명이 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어서 나도 상처를 입었다. 그로 인해 내가 얻은 상처는 세 번의 칼질과 두 번의 주먹 그리고 일곱 번의 발 길질 이었다. 하지만 나의 혈영마기는 그런 모든 상처에서 나를 완벽히 보호해 주었다. 상처를 입어도 즉시 아물고 심장을 잃거나 머리만 잘리지 않는다면 불사의 몸을 만들어 주는 것이 혈영마기였다. 다만 소실된 내공이 미처 회복되기 전에 천무삼성이 백도 구대문파와 개방의 장로급 이상의 고수들 뒤를 쫓아 온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구파일방은 정예의 칠할 이상이 죽었다. 이로서 백도는 더 이상 내 혈천마궁을 상대할 여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천무삼성도 백도도 나와 정당한 대결을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백도의 정예들이 천무삼성과의 결투약속시간 이 전에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천무삼성의 승률을 높이기 위해 나를 지치 게 하기 위해서이다. 죽음으로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고 할 수 있 다. 청무삼성은 그들의 죽음으로 분노하여 그들 본신의 능력이상의 힘을 이끌 어 내었고 나는 내공을 반 이상 소진하여 간신히 대등한 싸움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백 년 전 최강의 존재인 천무삼성으로서도 정면대결로 나 를 이길 가능성이 희박할 정도로 나는 강했다. 싸움이 길어지자 교활한 천 무삼성은 내가 전투 후 많은 내공이 소실되어 내 내공의 취약함을 눈치 채 었다. 천무삼성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택하여 내가 초식대결로 승부하지 못하게 내상을 회복할 틈도 없이 내공대결로 결투를 유도해 버렸다. "네놈이……. 네놈이 그들을 모욕할 수는 없다. 무림의 장래를 위해 숭고 한 희생을 한 그들을." 다시금 장포노인이 입을 열었다. 하도 꿈속에서 여러 번 들은 말이라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가 친숙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분명 어제까지의 꿈속에서 도 나는 그가 천무삼성의 일인인 것은 알지만 꿈속에서 그의 이름을 알 수 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안다. "으하하하. 숭고한 희생? 무더기로 달려들어 진법으로 겹겹이 둘러쌌던 놈 들이 숭고한 희생?" 나는 연신 그들을 비웃었다. 천무삼성을 분노하게 하여 그들의 심기를 격 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실 천무삼성의 개개인의 내공은 나와 비견될 만한 것이다. 그런 그들이 힘을 합해 내공을 겨루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버금가 는 일이다. 하지만 내 비전절기는 사대마도절예와 삼대사도지학의 장점만을 다서 내가 창안한 무공이다. 능히 세배의 힘을 감당해 낸다. 혈영마기의 외부로 드러 난 힘만이 내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이 혈영마기와 대등한 청영마기가 또 하나 있어 내 몸속의 단전을 돌아다니고 있다. 즉 빙산의 수면위에 떠오른 부분보다 그 밑에 가라앉아 있는 부분이 거대 하듯이 나의 성명절기로 이름난 혈영마기도 내 능력의 일부분이며 실제로 나에게는 드러난 부분보다 감추어 있는 부분이 더 많다. 항시 자신과 동등 한 청영마기와 겨루고 있는 혈영마기가 외부의 어떤 충격을 받으면 대치하 던 청영마기가 혈영마기를 도와 겉으로 드러난 혈영마기의 힘의 세배이상 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지금 나와 천무삼성은 서로 내공을 겨루고 있다. 결과는 내가 형편없이 불 리하다. 금방이라도 셋의 내공이 나의 몸을 가루로 분쇄할 듯 압박을 가하 고 있고 나는 피를 토하고 죽을 것처럼 몸이 흔들리고 있다. 적의 내공을 접하면 그 사악한 독기로 상대의 내력을 제압하는 절정의 마공 혈영마공의 기운도 셋의 순수 백도신공에는 별로 맥을 못 추고 있다. 바로 백도 십대극품절예의 수좌에 해당하는 셋을 바로 천무삼성이 익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불리한 가운데 기세등등했고 천무삼성은 우세한 가 운데 얼굴이 침중해 있었다. 나는 내 근본 마공을 굳건히 믿고 있기에 여 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고 저들은 나의 이유모를 자신감에 불안해 있는 것 이다. 내 스스로 이름 붙인 쌍영마공. 바로 내가 창안한 혈영마공과 청영마공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최후로 완성할 절대 마공의 밑거름이 되는 마공 이다. 두 마기는 한 뿌리이면서도 상호 극성이고 서로 배척하면서도 보완 을 한다. 이 둘이 합일하는 날, 나는 살아있는 신선이 되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될 것이다. 현재는 아직 두 마공을 합일하지 못했기에 그중의 한 마공만이 내 몸을 지 배하고 있다. 혈영마공이 우세하기에 외부로 발출하는 근본 힘이 되어 있 고 청영마공이 내 몸속에 숨어 때를 기다린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 근본마 공은 하나가 아닌 바로 이 두 마공을 합쳐 이루는 것이다. 나의 내공이 반 이상 소멸되고 또한 천무삼성에게 눌리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혈영마기에 관한 일일 뿐이다. 구파일방의 수뇌 급 백여 명을 쳐죽이 고도 몸의 원정을 최상으로 보호하고 그 후에도 내상을 입은 몸으로 백도 최고봉이라는 천무삼성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틸 수 있을 만큼 혈영마기 와 혈영마공은 최강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반쪽에 불과하다. 천무삼성에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혈영마기가 스러지기 시작하면 여태 까지 혈영마기에 억눌러져 있던 청영마기가 혈영마기와 위치를 바꿔 수면 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나는 결투이전의 완전한 혈영마공을 지녔던 최상의 상태의 신체와 비견되는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고금 최강이며 나의 최고 무공으로 알려져 있는 혈영마기에 뒤질 것이 하 나도 없는 청영마기. 과연 처음 드러나는 생생한 청영마공이 시전 되어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저 천무삼성이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네놈들 천무삼성이 내 손에 죽고 나면 백도는 깡그리 내손에 청소 될 것이다. 떼거리로 몰려온 놈들. 너희 백도 놈 들이 다 그렇지. 이제 너 희들을 쳐죽이고 백도를 쓸어버리겠다." 혈영마기의 기운이 현저히 약해졌다. 저들 셋도 그것을 느끼고 더욱더 내 공의 힘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과연 불도속 삼가의 백도 최고봉의 무 공은 명불허전이다. 천무삼성은 왜 내가 힘이 다해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토록 큰 소리를 치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꿈틀거리며 내부에서 더욱더 기세를 강화시켜가는 청영마공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쌍영마공은 서로 극성이면서도 서로를 보조해주는 힘. 청영마기는 외부의 위험에 대항하여 평소 자신을 배척하는 혈영마기를 도와 천무삼성의 내력 에 대항하는 혈영마공에 힘을 보조해 주고 있다. 하지만 청영마기는 이미 내부를 완벽히 보호한 상태에서 외부로 튀어나가기 위해 혈영마기가 스러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혈영마공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면 양마공은 서로 그 위치를 바 꿀 것이다. 그리고 내 마공의 재미있는 점은 약세였던 한쪽마공이 자연스 럽게 교체될 때 표층으로 튀어나온 마공은 내부에 있었을 때보다 그 위력 이 반 배 가량 증진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간 나의 독문마공이 혈 영마공에서 청영마공으로 바뀔 것이니 혈존이 아닌 청존으로 바뀌어 불리 게 될지 모르겠다. 아 때쯤이면 꿈에서 항상 나오는 작자가 있는데? "사부님." 역시 나왔다. 내 뒤쪽에 나왔기에 항상 내 꿈에 등장하는 인물인데도 나는 이 남자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그저 꿈속의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 뿐. 다른 모든 사람들의 내력이 환하게 머리에 떠오르기에 오늘은 알까 했는데 역시 이작자의 얼굴과 기억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냉전하게 꿈속의 나를 연극 감상하듯 객관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꿈속의 나와 완벽한 감정 동조의 상태까진 가지 못한 것 같았다. "왔느냐? 놈들은 어찌 되었느냐?" "이미 산 밑에 대기하고 있던 구파일방의 떨거지와 오대세가의 잔존 세력 들. 그리고 천무삼패의 남은 자들은 대부분 저승에 가 있습니다. 셋째와 일곱째가 잔존세력을 청소하고 있을 겁니다." "으하하하. 역시. 이제야 혈천마궁이 영원히 이 천하를 손에 넣는 구나." 내가 흥분에 몸을 떨며 광소를 터트렸다. 천무삼성과 나의 결투가 향후 수 백 년간 강호의 향방을 좌우하는 대 분수령이 된다면 이런 중대한 일을 놓 고 밑에서 하수들이라고 그저 놀고만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 로 이곳 태산주위에 백도의 떨거지들이 세 살배기 아이의 손까지 동원하여 모여들었다. 무덤을 파는 짓이다. 나의 아홉 제자는 하나하나가 천무삼성과 거의 대등 한 강자이다. 그들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서열을 정한 천하 구대 마공을 익혔다. 사대마도절예와 삼대사도지예 그리고 나의 쌍영마공이 바 로 천하 구대마공이다. 게다가 마도 사도와 흑도의 수만 마두가 내 휘하에 몰려있다. 내가 혈천마궁을 건립하며 강호를 몰아쳤을 때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놈은 모두 쳐죽여 버렸고 반항하는 놈은 그 심장을 꺼내 즐겁게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따라서 백도 이외의 놈들 중에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놈은 없다. 끝까지 꿈틀대는 백도의 떨거지를 제외하면 천하가 내 발밑에 굴복해 있는 상태였다. 그들 모두를 동원했다. 나에게도 최후의 싸움이니까. 오늘 이후에는 천하 의 무엇도 나에게 거역할 놈은 없을 것이다. 황제도 나를 거슬리지 못한 다. 나는 강호천자가 되어 천하를 지배할 것이고 내 쌍영마공이 합일되어 아수라독존마공이 완성되는 날 불사신이 되어 신이 될 것이다. 이곳 태산 에서 나에게 거역하던 모든 백도 놈들의 시체가 산을 쌓고 피가 강이 되어 흘러갈 것이다. 천무삼성은 나와의 내공대결에서 약간 우세하다고 해서, 그리고 그중에서 도 저 장포노인 무적장왕은 가장 내공이 강해서 그나마 내공대결에 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해도 겉으로 보기에 내공대결에서 형편없이 밀리는 내가 이렇듯 광소하고 떠드는 것을 무림인 들이 보면 당장 미쳤다고 할지도 모 른다. 하지만 실은 빨리 혈영마공의 힘을 더욱 소진시켜 청영마공을 이끌 어 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순간이라면 내 의지로 혈영과 청영을 교대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래서는 마공의 증진을 이루지 못한다. 내 의지가 아닌 청영과 혈영 스스로 가 자연스럽게 마기의 힘을 한번 교대할 때마다 마공은 한층 강해진다. 백 도 놈들의 힘으로 청영마공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일부러 놓칠 필요는 없지. "이 비겁한 백도 놈들. 무림의 최강이며 백도의 최고 노선배라는 것들이 사부님을 합공하다니. 내가." "첫째. 나서지 마라. 이놈들은 내 힘으로……." 나는 혈영마기가 사라지고 청영마기가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느끼며 첫 째를 만류했다. 첫째 제자라는 이놈은 항상 뒤에서 나타났기에 얼굴도 이 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놈에 대한 총애가 극진하여 쌍영마공 중에서 혈영마기를 이놈에게 전수한 것만은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놈의 혈영 마공의 수준은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이다. 물론 혈영마공만으로는 불완전 한 마공일 뿐이다. 쌍영마공의 반쪽인 마공은 쌍영마공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놈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혈영마기의 힘이 약해진 탓도 있으나 자연스럽게 교대된 청영마기의 힘은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마공이었다. 한층 높아진 청영마공의 힘은 내가 다루던 혈영마공보다 오히려 한배 반 정도 강해질 정도? 첫째를 만류하며 나는 온 몸에 넘치는 마공의 힘을 느끼고 희열에 들떴다. 확실히 천여 명에 이르는 산모의 배를 가르고 태아의 영기를 흡수하여 이 룩한 청영마공의 힘은 쓸만했다. 내 몸으로 밀려오던 삼성의 내공을 일순 간에 저지하며 오히려 놈들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무삼성도 갑작 스런 변화를 알았는지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2 혈존 탄생(2) "으하하하…….하…….하…….크 아아아악." 나는 청영마공의 넘쳐 오른 힘에 희열의 광소를 내지르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가슴속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물론 꿈속이라 모든 상황 을 객관적으로 보는 나는 진짜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꿈속의 노 인인 나는 진짜 아픈 모양이다. 저 강한 성격으로 보아 웬만해서는 비명을 지를 성격이 아닌데. 지금 등 뒤로부터 하나의 손이 뚫고 나와 내 가슴 쪽으로 나와 있었다. 내 가슴을 뚫고 나온 손에는 하나의 심장이 펄떡이며 쥐어져 있었다. 내 심 장. 방금 전만 해도 내 몸에 피를 돌리고 있던 내 심장이 피를 내뿜으며 타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잔인한 광경이지만 하도 꿈속에서 봐와서 이 제는 별 무감동이다. 하기야 어릴 때부터 매일같이 꾸어왔던 꿈이다. 어릴 때는 그저 깨어나자마자 꿈을 잊어버렸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 꿈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꿈속에서도 나와 꿈속의 나를 의식하며 생 각을 하며 감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동시에 나를 압박하던 세 가닥 삼성의 진기가 내 내부를 휩쓸며 밀고 들어왔다. 이미 나에게는 그것을 저 지할 힘이 없었고 내 내부는 발기발기 찢어져 버린다. 내장이 가루가 되어 타버렸다면 죽어야 마땅하거늘 아직도 나는 살아있다. "네놈. 네놈이…….?" 푸아아악. 말도 끝마치지 못하고 내 입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온다. 붉은 수염 에 붉은 피가 묻는다. 그리고 아직도 뒤에서 나를 공격한 나의 첫째 제자 라는 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며 나를 비웃는다. "후후. 사부. 불괴지신에 금강지신인 마신지경의 몸이라고 해도 쌍영마공 이 교대하는 순간만은 사부의 몸이 한순간 약해지는 것. 게다가 같은 계열 의 혈영마공에는 위험에 처하면 저절로 일어나는 호신강기조차 무반응이지 않소? 원망하려면 한순간 방심한 사부 자신을 원망하시오."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내 등 뒤에서 팔이 쑥하니 뽑혀져 나왔다. 여전히 내 심장을 쥔 체로. 그러나 나는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놈의 득의한 얼굴을 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천무삼성 이라는 세 노인이 손을 거두고 물러나며 내 뒤를 향해 포권을 했다. 완전 히 나를 죽은 취급이다. 스님 노인이 입을 연다. "아미타불. 백시주. 성공하셨구려. 참으로 천하의 구세주이시오. 한순간 혈 존에게서 감당 못할 마기를 느끼고 절망적인 생각을 품었었소." "내가 한 일은 백도를 위해 한 일이 아니오. 우리 아홉 제자도 혈존 사부 아래 살아남기 위해 한 일이오." 이놈들이 이제 보니 서로 짜고? 그리고 보면 저놈의 성이 백가인가? 꿈속 의 내 성도 백가였는데? 그리고 아홉 제자가 살아남기 위해? 설마 아홉이 몽땅 배반한 것인가? 가만있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놈들이 백도와 짜고 나를 배신한 것인가? "사형. 성공했군요." 다시 두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 앞을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천무삼성. 그리고 뒤를 지키고 있는 백가라는 첫째 제자놈. 그런데 다시 두 명이 나의 뒤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심장이 뽑혀져 나가고 산산 이 마공이 흩어져 죽어가는 노인네를 아직도 모두 두려워하며 경계를 늦추 지 않는다. 나는 둘이 나타나자마자 꿈속의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정체 를 알았다. 이것도 어제까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심장이 뽑히고도 죽지 않다니. 정말 인간이 아니로군. 마귀 같은 사부. 이 제는 제발 죽어라." 한없이 나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들리는 이 목소 리의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악을 쓰고 있다. 더없이 아름답고 목소리도 고귀한 나의 여섯째 제자. 제자이면서도 내 침상시중을 드는 계집. 그 미모만 보고 내가 제자로 삼은 계집이다. 바로 내 즐거움을 위해 미인들을 모아놓은 요지마전의 전주인 계집. 제자 이면서 미모가 아름다워 나의 스물 세 명의 첩 중에 하나가 된 여자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계집. 내가 천하 구대 마공의 하나 외에도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허용하고 여자로서 쓸만한 수법 인 일곱 가지 채양보음의 마공을 전수해 주었거늘 나를 배반해? "보이는 여자면 여승이건 유부녀건 제자건 무조건 겁간하는 악마. 이제 죽 으란 말이야." 여섯째의 악에 바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나를 공격하려는 듯. 그리고 그녀를 막는 아홉째 제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저. 진정하시오. 어차피 사부는 이제 살지 못하오. 하지만 사부가 얼마 나 기괴한 인물인지는 잘 알거요. 그에게 요사한 술법과 사공이 얼마나 많 소? 섣불리 그를 자극하여 수작부릴 기회를 주지 말고 이대로 포위하여 만 반의 대비를 하면서 그가 서서히 죽도록 합시다." 사람의 심장을 뽑아놓고 서서히 죽도록 하자는 말이 나오냐? 이놈들아? 아무리 내가 사람 심장을 씹어 먹기를 즐겨했어도 네놈들이 그 따위 것을 따라 배워? 오늘따라 꿈속의 노인과 나의 감정 이입이 잘되는데? "크으으윽. 막내야. 내가 너를 사랑했거늘 어찌 네놈이 첫째와 백도 놈과 짜고 사부를 시해한단 말이냐?" 지금 말한 놈은 철갑마전의 전주이며 아홉째 제자인 놈이다. 항상 무식하 고 패도적인 놈이었는데 이렇듯 냉정하다니, 역시 내 가르침대로 평소의 능력을 감춘 것 같았다. 분하지만 막내 놈의 말이 맞다. 심장이 뽑혔어도 살아날 길은 많다. 하지만 일단 이놈들 포위망에서 도망가야 한다. 그러자 면 바보 같고 정이 많은 막내 놈이라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닥치시오. 무공을 가르쳤다고 어찌 모두 스승이고 제자란 말이오? 제자 를 길러 그 육체를 뜯어먹는 자도 사부란 말이오? 당신이 제자라는 미명아 래 기른 우리는 가축이고 먹이이며 당신은 포식자이오. 자신이 부족한 마 기를 보충하기 위해 마공을 창안하여 제자에게 가르치고, 제자가 어느 정 도 경지에 이르면 제자의 심장을 빼어먹어 자신의 마공을 증진시키는 자가 무슨 사부의 자격이 있소? 인간의, 내가 그냥 죽을 수는 있어도 자식 같은 제자의 심장을 즐겨먹는 식인 사부의 한끼 식사가 되어 죽기는 싫소." 아홉째의 말에 천무삼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놀란 표정을 짓 냐? 네 놈들 백도도 격체전력인지 뭔지 죽을 때가 다된 선배가 자질이 있 는 사문의 후배 놈에게 내공을 넘겨주잖아. 늙은이를 위해 어린 놈이 효도 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어린놈에게 늙은이가 희생되어야 맞는 거냐? 그래. 제자놈들의 심장을 내 마공증진을 위해 빼어먹었다. 사람을 죽일 때 죽일 놈의 내공을 심장에 모아놓고 그것을 빼내어 먹으면 순식간에 그놈이 이룩한 마공 성취는 내 일부가 된다. 결국 그 마공도 내가 전수한, 내 일 부가 되기 위해 전수한 미끼에 불과하다. 제자놈을 처벌할 때 심장에 내공이 모이도록 만들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우 니 고문효과도 있고 심장을 먹으면 잔인한 광경으로 부하들을 위협하여 공 포에 의한 충성을 얻어내는 효과도 있다. 게다가 게다가 내 마공도 증진되 니 일석 삼조가 아니냐? 이놈들아. 아무리 꿈속의 내가 그렇게 변명을 한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보는 내가 다 욕이 나올 지경이다. 어떻게 사람 심장을, 그것도 자신이 키운 제자의 심 장을 먹을 수가? 꿈속의 나는 정말 어지간히 악랄한 존재였나 보다. "오십 년간 당신이 들였던 제자의 수가 일백. 그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겨 우 우리 아홉이요. 아흔 한명이 백도나 적의 손이 아니라 사부인 당신의 손에 죽을까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소. 당신은 마공을 완성시키는 재료로 만들기 위해 제자에게 생트집을 잡아 죄인으로 만들고 제자들은 온갖 처벌 을 받아 고통 속에서 산채로 당신에게 심장이 뽑혀 죽었소. 우리도 마도인 이기 전에 살고자 하는 인간이란 말이오. 우리는 키워져 먹히기 위해 살아 가는 가축이 아니오." 놈의 치 떨리는 듯한 음성에는 나를 향한 짙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틀렸 다. 놈이 나에 대한 공포는 거의 광적이다. 나에게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놈이 나를 살려줄 리는 없겠지? 평소 인형처럼 내 말에 절대 복종하던 아 홉째 놈이 저렇듯 철저히 나를 향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숨겨왔었다니. 너도 보통 놈은 아니었구나. "여섯째야. 나는 너를 아꼈거늘…….어찌 사부를……." "닥치고 제발 죽어. 이 괴물 놈. 네놈 제자의 부인인 나를 강제로 겁간한 놈이 사부라고? 항의하는 그이를 죽이고 살아남은 나와 내 가족, 그이의 일가족을 지옥 같은 밀실에 가둔 후 광혼분을 풀어 미치게 만들어 서로를 죽이고 서로 시체를 뜯어먹게 하는 광경을 구경거리로 즐긴 놈이....... 내 가 충격에 미쳐버리자 네 놈은 나를 산속에 버려 짐승의 밥이 되게 했지. 하지만 반 미쳐서 돌아다니자 나를 거둬주고 위로하여 내 마음을 잡아준 것이 바로 자비암의 사부님이었다." 쯧쯧. 여섯째야. 말하지 않아도 네 과거야 훤하게 알고 있거늘 그렇게 네 과거를 일일이 늘어놓을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 저 고루한 천무삼성이 충 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보지 않느냐? "하지만 네 놈은 나의 사문 자비암의 자매들까지……. 내가 겨우 안정을 찾아 세속을 잊기 위해 출가하자 네놈은 나를 되살린 사문인 자비암을 피 로 물들이고 모든 사매와 사숙들을 겁간했다. 짐승 같은 자. 지금도 마궁 의 마졸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있을 자비암의 자매들의 안전이 아니었다면 네놈의 발을 핥으며 애교를 떨었을까? 나를 아꼈다고? 나에게 다른 남자의 정혈을 강제로 채양보음하게 하여 그 내력을 다시 채음보양으로 꿀 빨아먹 듯 채집하기 위해 나를 첩으로 네놈이 사부라고? 오직 오늘만을 기다리며 치욕을 삼켰다." 나 참. 내게 당한 여자가 수천이 넘거늘. 유독 저 계집만 저렇게 치를 떤 담? 역시 계집은 한번 즐기고 죽여야 되는 것을. 쩝. 예쁘기에 내 노리개 들이 모인 놀이터를 책임지게 하고 마공을 전수했거늘. 역시 채음보양으로 마공을 뽑아먹는 것보다는 심장을 씹어 한꺼번에 처리했어야 할 것을. "첫째야. 내가 죽으면 네가 모든 것을 이어받을 것이거늘. 나를 직접 해하 다니. 보아하니 다 쓰러져 가던 백도와 손을 잡은 것도. 봉문한 구파일방 의 잔존하던 모든 고수들을 긁어모아 나에게 보내고 천무삼성을 이용한 것 도 네 짓이로구나. 너만은 진정 나의 후계자로 생각했거늘 어찌 나를 배신 한단 말이냐? 이미 늙어 다 죽어가는 사부의 최후를 그냥 기다리지 못했단 말이냐?" 첫째가 냉소했다. 다른 자는 모두 꿈에서 얼굴을 봤는데 끝까지 이놈만은 얼굴을 알 수가 없다. 내 기억이 이놈을 거부하는 듯 했다. "다 늙어 가시다뇨? 우리 아홉의 완성된 마공을 흡수하면 사부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완성하지는 것이 아닙니까? 제자가 죽는 것도 곤란하지만 설사 죽지 않더라도 사부가 영원히 살아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면 살 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는군. 첫째 놈. 진짜 무서운 놈이다. 확실히 나는 제 자놈들의 심장을 씹으며 그 마공을 흡수해 왔다. 그 덕에 내 심장에도 내 마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저놈이 내 심장을 쥐고 그대로 있는 것은 내 심장을 먹고 내 무공을 흡수하겠다는 뜻. 제 이의 혈존이 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어리석은 제자놈들도, 멍청 이 백도의 천무삼성도 첫째의 뜻은 짐작도 못하고 있을 걸? 놈의 심장을 제일 먼저 먹어 치웠어야 했는데. 친아들이라고 머뭇거렸던 것이 역시 잘 못한 일이었다. 에엑? 친아들? 정말 몰랐다. 이건 어제까지의 꿈속에서는 안 나왔던 사실 인데? 여태까지의 꿈에서 느끼지 못하던 꿈속의 나의 속마음까지 읽어버린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늘 꿈속에서 궁금했던 첫째가 바로 꿈속의 나의 아들? 그런데 어째서 얼굴을 알 수가 없는 거지? 그렇군. 속으로 아 무렇지도 않다고 중얼거리고는 있지만 역시 친아들에게 당한 일이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와 기억이 거부하는 것이로군. "고금제일마. 마공의 끝이며 시조라는 혈존을 앞에 두고 어찌 말이 많은 가? 죽일 수 있을 때 확실히 손을 써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천무삼성중의 성미 급한 장포차림의 속인 무적장왕이 나섰다. 내 과거를 듣고 잠시라도 내가 살아있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기는 자 비암은 백도의 중요 성지로 무적장왕과도 인연이 있었지. 하기야 자비암의 여승 중에는 미인이 많았어. 하지만 천무삼성들아. 나를 이해해다오. 내가 사람의 심장을 뽑아 먹거나 태아를 채집하여 마공을 증진하고 시체의 진액 을 흡수하거나 채음보양으로 마공을 늘리지 않았다면, 순수한 수련만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어찌 무림 역사상 최강의 존재인 고금제일마로 불릴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심장이 뽑히고 내부가 삼성에 의해 파멸한 나를 아직도 두려워하는 듯 했다. 하기야 나에 관한 소문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나 마신의 것에 가 까우니까. 그의 거대한 손이 나를 향해 쭉 뻗었다. 곧 강력한 장력이 나를 향해 몰아쳐 왔다. 놈이 아무렇게나 처낸 장력이지만 나는 이에 대항할 힘 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이 빠져 저절로 죽 기를 바랐던 첫째 놈의 속도 모르고 장왕이 내 뜻을 이루어 줬으니까. "안돼." 첫째의 다급한 외침이 나왔다. 설마 저놈이 내가 죽는 게 안타까워서 저러 는 것은 아닐 테고. 내 속셈을 알았나? 역시 내 아들답군. 하지만 이미 늦 었다. 그 순간 내 몸은 뜨거운 장력에 한순간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내 영혼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뭐…….뭐야? 사부의 몸에서 빠져나간 저 붉은빛은?" 아홉째의 경악에 찬 음성을 뒤로 하고 내 영혼은 열심히 도망쳤다. 빨리 찾아야 한다. 내가 차지할 몸을. "혈…….혈마전혼대법? 설마 그 저주받을 사공을? 오래전에 의문의 멸문을 당하여 실전된 배교의 술법인데?" "바로 사부가 배교를 멸문시킨 장본인이오. 그리고 마지막 배교의 교주이 기도 했소. 어서 추격해야 하오." 지금 혈마전혼대법을 말한 작자. 천무삼성 중에서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늙은 도사 현무로군. 저 노도인이 혈마전혼대법을 알아 볼 줄이야. 역시 도사가 아는 것이 많단 말이야. 원래 사술대법은 도가와 극성이면서도 통 하거든. 내가 굳이 사공과 사술을 사용하지 않고 마공으로 놈들을 상대한 것도 사술로는 현무 같은 도사들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 배교를 버 리고 마교를 찾아 내 마공의 근본을 삼았던 것도 사술로는 인간을 지배하 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고. 혈마전혼대법. 제자 아홉만 마저 희생시켜 쌍영마공을 주축으로 완성시키려고 한 아수라 독존마공이 만들어져 영원불멸지체를 이루게 되었다면 영원히 사용되지 않 았을 사술대법. 타인의 신체에서 영혼을 강제로 추출하고 남의 몸을 뺏어 사용하는 가장 사악하고 저주받은 사술대법. 나도 책으로만 익히고 설마 내가 시전하리라 고는 상상도 안 했던 사공이다. 이것 보다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완성에 더 욱 신경을 썼었으니까. 그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혈마전혼대법이 시행되고 12시진 이내에 영혼 이 들어갈 육체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대법은 실패하고 내 영혼은 그대로 소멸한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육체가 있지. 부드득. 백도의 천무삼성. 그리고 나를 배반한 제자놈들. 내가 되살아나기 만 해봐라. 모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찢어 죽여 버리고 말겠다. 등록자 : 김하준(khj1234) 조회수 : 2555 등록일 : 2002-02-19 08:43:04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10599 bytes 3 혈존 탄생(3) 이십년 전 태산에는 일단의 비극이 있었다. 흑도 백도를 가리지 않고 일단 의 무림인들이 태산에 집결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치기라도 했 는지 일제히 동원되어 태산 근처의 부근 백여리 이내의 네 살 밑의 아이들 을 모조리 죽였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관련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어린아이들을 죽여 야 했는지. 갑자기 흑도 백도가 왜 서로 협력을 하여 이런 천인공노할 일 을 벌였는지. 이 때문에 무림과 관에서는 한 때 극도로 험악한 관계까지 간적이 있었다. 무림인 치고 이 일에 연관되지 않은 문파가 없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사실 단 한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지 금 나는 알았다. 이십년간 거의 만여 명에 이른 생명을 빼앗아간 고금제 일마 혈존 때문에....... 내가 혈마전혼대법으로 달아난 후의 기억은 오늘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꿈속의 나와의 동화가 심화되며 여태까지 알지 못하던 기억이 꿈속에서 펼 쳐지는 것이다. 꿈속의 나, 이제는 사람도 아니고 영혼이니 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한시 빨리 태산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현무 말코가 있는 이상 내 영혼이 그에게 걸리면 새 육체를 얻지도 못하고 소멸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혈마전혼대법이 남의 영혼을 몰아내고 육체를 차지하는 대법이긴 해도 이 렇게 갑작스럽게 펼칠수 있는 대법은 아니었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마 친 후 펼쳐야 하는 술법이었다. 본시 육체란 영혼을 담는 그릇. 만약 잘못 해서 부실한 그릇을 차지하기라도 하면 애써 대법을 펼치고도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삼류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대법을 알고 있는 자 는 사도종사들 중에서도 지존의 자리에 오른 자들. 이 대법을 시전하면서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할 리가 없다. 이 대법이 시전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재질이 최상인 인재. 구해놓은 온갖 약물로 그 육체를 개발하여 영혼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담아놓도 록 만들어 놓는 준비가 필요하다. 완벽한 대법을 위해서는 보조할 열명 이 상의 사술 대가도 있어야 한다. 만약 잘못되었을 때 그를 바로잡아야 하는 배교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사전에 각종 사이한 대법으로 그 제물 의 영혼을 미리 제압하여 빼놓음으로서 육체를 빈 그릇으로 만들어 대법으 로 이전되는 영혼이 쉽게 그 육체에 고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했다. 그 런 모든 안전장치가 된 상황에서 펼쳐야 하는 것이 혈마전혼대법이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제물은 미리 준비되어 있지.' 결코 사용되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나는 만일을 대비하여 하나의 제물을 준비해 왔다. 무로서 최상이라는 천무성체의 몸을 가진 아기를 이십년 전 에 준비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혼을 몰아내어 단순히 살아있는 시체에 불 과한 제물은 온갖 영약과 대법으로 키워져 왔다. 만일을 위해 준비해 온 제물. 나는 이것을 천마강시를 완성시키기 위한 재료라고 수하들에게 말하여 왔 다. 실제 미래에 아수라독존마공이 완성되었다면 나는 그 제물로 꿈의 강 시라는 천마강시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육체를 찾아야 한 다. 다행히 이번 천무삼성과의 대결 전에 만일을 대비하여 태산으로 그 제 물을 운반하도록 명령을 내린바가 있었다. 혈마전혼대법이 완성되기 위한 제물은 나와 가까운 곳에 있다. '빌어먹을' 나는 망설여야 했다. 저 계곡을 들어가면 제물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곳은 이미 수많은 마인들로 하여금 포위되어 있다. 나는 저 계곡을 수비하 라는 명령을 내린 바가 없다. 내가 신임하는 십이 혈영으로 하여금 제물을 지키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십이 혈영은 온데간데없고 마궁에서도 사도에 정통한 혈사전 출신의 작자들만이 모여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내 마음을 알아챈 첫째에 의해 이곳이 장악되고 경계의 명령이 내려진 것 이다. 이들이 첫째의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내 수중의 권력이 이미 첫째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면 아홉 제자 모두가 나를 반 역하고 있다든가. 아마 둘 다가 맞을 것이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나 호령한다면 그들을 다시 손아귀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만 현 재는 능력이 없는 단지 혼령일 뿐이다. '내가 만일 강제로 저기를 뚫는다면?' 혼령이라고 해도 사술대법에 영혼이 보호되고 있어 붉은빛으로 사람들의 이목에 노출되어 있는 영혼이다. 그런 상태에서 과거의 부하들을 뚫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저들 중에는 나만큼은 아니어도 사술대법의 대 가들이 엄청나게 포진되어 있다. 그들은 첫째의 명으로 필사적으로 나를 막을 것이다. 내가 살아난다면 첫째를 따르는 그들의 최후는 지옥보다 비 참할 것이기에. 그래도 강행한다면 뚫고 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물리적 힘은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배교의 사술을 발휘할 능력은 된 다. 하지만.... '하지만 뚫고 들어간다면 현무말코가 도착하기 전에 육체와 동화를 끝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첫째가 이미 내 속셈을 알아채고 천마강시의 재료로 알려 진 제물이 있는 곳의 수비를 강화시켰다면 천무삼성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대법이 완성되기 전에 현무가 도착한다면 혼령상태의 나는 끝장이다. 나는 결정을 하고 제물을 포기한 체 그 자리에서 영혼을 돌려 계곡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내 영혼만의 힘으로 타인의 영혼을 몰아내고 육체를 차지하여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술 대법의 도움 없이 타인의 영혼을 몰아낸다는 것은 본신의 능력과 상관없는 정신력 의 싸움이다. 하물며 자신의 육체에 머물러 있는 주인영혼은 그 육체 안에 서는 더없이 강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완벽히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다. 하물며 그렇게 육 체에 결합되어 있는 영혼에 정신력이 어느 정도 강하기까지 하다면 그 성 인의 영혼을 육체에서 몰아낸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혈마전혼대법이 이토로 어려운 사 전준비가 필요한 불가능의 사술로 분류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능성은 아직 영혼의 고착이 미약한 어린아이들. 정신력이 약한 네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일단 육체라는 그릇의 질을 따지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다. 이대로라면 얼마못가 내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나는 태산의 입구 어귀에 있던 마을을 기억하고 그쪽으로 영혼을 돌 렸다. 최대한 붉은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놈들에게 들키지 않기 를 빌며. 빌어먹게도 백도 놈과 내 수하였던 놈들이 완벽히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해 졌다. 태산 자체가 무림인들로 꽉 차있었다. 제자놈들이 죽였다는 백도의 떨거지들이 모두 살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라면 서로 못 잡아먹어 난 리인 놈들이 서로를 용납하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놈들은 무조건 붉은빛 을 찾아 다녔다. 마인 중에서 붉은 기가 도는 마공을 쓰는 자가 있다면 변 명할 시간도 없이 비명 속에 분시가 되었다. 백도의 무공이라도 붉은빛을 띠는 기색만 보이면 변명도 하기 전에 합공을 받아 죽어야만 했다. 오히려 백도 놈보다 마도의 놈들이 더 눈에 불을 켜고 내 영혼을 찾아 다녔다. 그 만큼 내가 살아난 후의 후환이 두렵다는 거겠지. 뿌드득. 살아난다면 내가 만든 혈존마궁부터 모조리 피로 씻어 버릴 테다. 아아, 첫째 놈의 심기가 무섭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쓸데없는 일에 결백 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백도 놈마저 첫째에게 동조하다니. 첫째 놈을 너무 총애한 것 같다. 내 생각을 이토록 완벽하게 읽고 있다니. 놈에게 혈마전 혼대법을 알려주었던 일이 새삼 후회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그 대법 을 잘 아는 현무라고 해도 그 말코의 대갈통에서 이런 잔인한 생각이 나올 리가 없다. 지금 숲에서 내가 본 인간의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마인과 백도 놈이 어 울려 마을을 뒤지며 네 살 근처로 보이는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었다. 죽일 놈들.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냐? 순진한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천벌이 두렵지 않은가? 하나라도 남 겨놔야 내가 살아날 것이 아니냐? 두 눈이 뒤집혀 마을 안으로 날아갔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이런 조무래 기들에게는 아무리 영혼이라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백 도 놈들 중에 도사가 외우는 주문은 내 영혼을 자극하여 정신을 번쩍 차리 게 만들었다.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조무래기에게 당할 수도 있다. 게다 가 소란이 일었으니 현무말코가 올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천하의 아무것 도 두렵지 않았지만 혼령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현무가 제일 두려웠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네 살미만의 아이 하나라도 발견만 한다면..... 아무리 내 영혼을 담을 그릇이 형편없어도 좋다. 가졌던 모든 능력은 모두 잃어버려도 된다. 내 영혼의 기억과 쌍영마공의 미약한 마기만 놓치지 않 으면 된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처음부터 놈들을 상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차 근차근 일반 백성들을 죽여 그 시체로 내 마공을 늘려갈 수가 있다. 놈들 의 무공으로 보아 가장 나이 많은 천무삼성도 앞으로 오십년 이상은 장수 하겠지. 그 안에 다시 천명 태아를 구해 그 시기로 청영마공을 쌓고 오천 명 순음지체 처녀의 선혈을 구해 혈영마공을 완성할 것이다. 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내가 다시 지금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만 있다 면 십년 내에 혈존마궁 같은 세력을 두세 개 세울 수 있다. 그렇다.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 살아날 수만 있으면 된다. 오십년 정도만 노력하면 다 시 능력을 되찾을 수가 있다. 배반자 제자놈들의 능력으로 보아 그때까지 는 충분히 살아있을 터. 복수를 할 시간은 된다. 그것은 정녕 행운이었다. 태산어귀의 관도를 급하게 달려가는 마차. 그리 고 마차 안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신음. 마차는 관의 것인지 관부의 깃발이 꼽혀 있었다. 또한 어린아이도 없다. 미미한 호흡소리로 보아 마차 안에는 젊은 여자 한명과 노파한명만이 타고 있는 듯 했다. 무림인들도 여자들만 타고 있는 관의 마차를 검색하지는 않았다. 바쁜 와중에 마차에 숨어들어 잠시 놈들의 눈을 속여 태산을 벗어나려고 했던 내 영혼은 그야말로 흥분 에 영체를 부르르 떨었다. '봉황지체' 마차 안에는 이십여 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인이 길게 누워 신음을 내지르 고 있었다. 고통이 심한 듯 거의 정신을 잃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살아있 을 때 보았다면 당장 환장했을 만큼 미인이었다. 여기서 나는 내 꿈속의 나를 향해 욕을 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 대해 음심을 품는다는 것이 지 금 현실의 나로서는 상상도 안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의 혼절 직전의 상태였고 몸도 약해져 있었다. 그런 여인을 노파 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추궁과혈로 주무르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여인 의 미모보다는 신체 때문이었다. 청무성체에 비견된다는 여자로서는 최상의 신체. 그것이 봉황지체이다. 이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여인은 천하제일 미인이 되며 동시에 약간만 노력해 도 여자로서 최강의 무공을 지니게 된다. 여자인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내 가 꿈에도 그리는 최상의 신체였다. 남자 여자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나 는 그만 두 눈이 다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이 신체의 여아라면 내 능력의 반 이상을 부활하자마자 발휘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배반자들을 처벌 할 수가 있다. 여자로서의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 지 않겠는가? 더욱 좋은 것은 여아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신음을 지르며 아랫배를 부 여잡고 있고 거의 혼절 직전에 가있다는 것이다. 그 옆에서 한명의 노파가 여아를 간호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프고 정신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영혼이 불안하다는 뜻. 저렇게 약해져 있는 상태라면 육체와 영혼의 결합 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제정신이 아닌 영혼을 몰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비록 네 살 미만의 어린아이의 영혼을 몰아내는 것보다 쉽지는 않겠지만 멀쩡히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영혼을 몰아내는 것보다는 저렇듯 다 죽어가는 신체를 차지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눈에 보기 에도 현재의 여자의 영혼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약해져 있었다. 머뭇거 리다간 여자가 죽을 지도 몰랐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살아날 기회를 다시 잡을지 몰랐다. 나는 즉시 마음을 정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스 며들었다. 4 혈존탄생(4) 내가 육체와의 결합을 시도한 이래 처음 느낀 것은 극도의 고통이었다. 원 래 남의 육체와 결합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너무 심했다. 맞지 않는 틀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느낌. 마치 인간이 아닌 고양이 같 은 짐승이나 물고기, 식물의 몸에 강제로 결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할 일은 육체를 강점하고 있을 원래의 영혼을 찾아 내 쫒 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애를 쓸 일도 없었다. 이미 영혼은 죽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크게 놀랐다. 여자의 몸도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죽은 몸을 차지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나도 같이 소멸인데. 하지만 다행히 육체는 극도로 쇠약해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었다. 아마 영 혼이 죽었어도 그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육체까지 죽지는 않은 모양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약한 육체였다. 봉황지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허약한 육체였다. 참나. 아무리 그래 도 지금 나의 몸인데 꿈속의 내가 이런 평가를 내리다니. 나는 즉시 내 영혼을 보호라고 있던 쌍영마기를 풀어 내 몸을 안정화 시키 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이미 육체와 결합되기 시작하고 있기에 더 이상 쌍영마기로 영혼을 보호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죽음 직전의 육체 는 구원을 얻었고 내 육체는 되살아났다. 동시에 나도 되살아났다. 혈마전혼대법이 성공했다면 나는 즉시 육체에 대한 통제를 장악하고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둠 속에 있었다. 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뜰 수가 없다기보다는 두 눈이 아직 생겨나지도 않 았다. 왜 이런 일이 있는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아직 생각할 정도의 뇌도 완벽히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 다. 미약하게나마 육체와 결합한 쌍영마기를 운공할 몸의 내부의 내장이나 혈 관도 완성되지 않았다. 손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 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웅크리고 따뜻한 액체 속에 잠겨 어둠 속에 안온한 느낌이 드는 심장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머리를 움직여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려고 노력 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이미 죽은 것일까? 하지만 이 힘찬 심장소리는 무엇이지? 하지만 곧 나는 이 심장소리가 내 심장소리가 아니 라 내 주변에서 들리는 심장소리임을 알았다. 미약한 내 육체의 심장소리 는 너무나 작았다.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나는 여인의 몸에 깃들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인의 뱃속에 있는 유산되기 직전의 태아의 몸에 깃들어 태아의 몸을 안정시켜 버렸던 것이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혈마전혼대법이 인간이 아닌 식물이나 짐승 에게 영혼을 전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그릇이 인간의 영 혼에 맞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 그릇이나 영혼을 담을 수 있다면 최강 강시나 사법으로 완성된 야수마인의 최강의 몸에 영혼을 담을 것이다. 태아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가 깃들은 육체는 겨우 생성된 지 가 삼십일도 안 된 육체였다. 무엇하나 제대로 인간의 형상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뇌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머리로 생각을 할 것 이고 내부의 장기가 형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공으로 이루어진 기공을 보존할 것인가? 두 눈이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로 앞을 볼 것이며 손발이 없는데 무엇으로 움직일 것인가? 태아의 육체는 실로 식물이나 다 른 짐승 못지않게 혈마전혼대법에 맞지 않은 육체인 것이다. 따뜻한 어둠이 내 몸을 감쌌다. 더 이상 나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덜 여문 내 머리로 이성을 유지한 다는 것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억을 보존한 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의지만으로 더 이상 내 영혼의 고유성 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덜 여문 육 체가 갖는 본능만이 남아 이 따뜻한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말리라. 그리 되면 내 영혼과 자아를 잊어버리게 되고 말리라. 그것만은 있어서는 안 되 는 일이었다. 내겐 많은 사술과 기이한 술법이 많이 있다. 내 영혼을 보호하던 쌍영마공 은 내 몸에 자리 잡지 못하고 그 흔적만을 남긴 체 사라졌지만 다행히 내 몸을 품은 모체의 몸에 한 가닥 진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직까지는 모체 와 태아는 하나라도 할 수 있는 몸이었다. 나는 혈마전혼대법이 완료되는 12시진의 시간 직전에, 내 최후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모체의 진기를 끌 어들여 한 가지 대법시술에 성공했다. 내 기억과 감정을 봉인하는 대법. 내가 태어나고 내 두뇌가 여물어 기억을 간직할 만한 신체로 성장했을 때 기억봉인을 푸는 술법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제야 그 모든 기억이 내 꿈속 에서 펼쳐진 것이다. 나 혈존은 원래 배교의 사십이 대 교주였다. 나이 열 살에 배교에 입문하 여 열심히 절학을 익혀나갔다. 하지만 전대 교주는 나의 심성이 교활하고 잔학하다고 하여 최고의 사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부의 딸 을 유혹하여 배교의 교주만이 익힐 수가 있는 사술대법을 훔쳐내었고 끝내 사부를 쳐죽이고 나이 이십오 세에 강제로 배교의 교주로 취임할 수가 있 었다. 내가 교주만이 익히는 술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 부와 같이 죽은 사부의 딸은 내 아내이며 첫사랑이었다. 배교는 삼대사도지학에 해당하는 무공을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술법으로만 따지자면 혈사문, 천뇌교, 음산곡 등의 사문의 삼대 종주보다도 더욱 막강 했다. 혈사문이 무공과 결합한 사공에 정통했다면 천뇌교는 음산한 독계와 음모, 그리고 음유한 성질의 사공과 죽음에 관계된 괴물제조의 비법으로 유명했고 음산곡은 여인들이 만든 문파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모든 사공이 집대성한 것으로 유명했다. 배교는 무공과 관계없이 술법과 도구를 이용한 사술 대법에 능통했다. 나는 처와 사부를 죽인 후 나이 삼십에 나를 반대 하는 사형제는 물론 사숙과 사백들마저 모조리 죽여 버리고 배교의 모든 술법에 통달했다. 나는 배교 역대교주 중에서 가장 강한 술법자의 하나였 다. 당시 무림은 마도와 백도로 나뉘어 크게 싸우고 있었다. 마도는 천년마교 가 주축이 되어 마도맹을 결성했고 백도는 무림맹을 결성하여 그에 맞서고 있었다. 천년마교는 백도에 대항하기 위해 마도 사도의 모든 인물들을 끌 어 모으고 있었다. 당연히 배교의 교주인 나에게도 마교에 초대하는 서신 이 날아왔다. 강호제패를 위해 일단 마도부터 장악해야겠다고 자신 있게 나서서 처음으 로 무림출도에 맞부딪친 인물이 바로 마교의 교주 천마였다. 사술 기학이 마공보다 못지않다는 내 신념과 달리 나는 단숨에 천마에게 제압당하고 말 았다. 본신의 무공이 없는 사공으로서는 정면대결에 천마의 마공에 상대가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움 없이 그 자리에서 천마에게 매달려 나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했다. 배교를 통째로 마교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그리고 마도와 사도 의 종주로써 마도맹의 맹주를 놓고 경쟁하는 혈사문의 사공을 대적하기 위 해 나의 술법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나는 천마의 제자가 될 수가 있었다. 즉시 나는 배교를 잠적시켜 의문스럽게 멸문한 것으로 꾸몄다. 그리고 내 모든 심복을 마교에 데리고 왔다. 나는 천마에게 무공을 배우며 이십 년간 마교의 장무고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직 마공의 연구에만 매달렸다. 내 나이 오십이 되었을 때 나는 마교의 수석장로가 되어 있었고 나 자신은 강호 천지에 팔대천마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마교의 교주. 사대마도절예의 수석인 천마지존공의 천마. 모든 사도의 종주인 혈사문의 문주. 삼대사도지예의 수석인 천사음유공의 만사지존. 세치 혀로 천하를 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천뇌교의 주인이며 삼대사도지예 중의 하나인 천뇌만상공의 주인 천유. 천년마교와 동맹을 맺었던 철마방의 주인이며 사대마도절예의 하나인 철괴 마공의 주인 철갑지존. 검으로 최강이라는 사대마도절예 천지마검류의 주인인 천지마검. 여인천하를 이루겠다며 채양보음의 사공을 집대성한 삼대사도지예 음산곡 환희염정술의 주인인 요지마녀. 음양이기의 무공을 아무 탈없이 최초로 이룩한 마도사대절예 음양벽력공의 주인 벽력마존. 천마의 제자이며 마교의 수석장로. 마교의 마공을 모아 그가 창안한 구음 마공의 주인 혈마. 하나같이 천하를 좁다고 무적을 외치는 인물들이 바로 팔대천마였다. 고금 을 뒤져봐도 이런 개세의 마두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적은 없었고 사대마도 절예와 삼대사도절예가 한꺼번에 나타난 적도 없었다. 이들 칠대절정지예 중에 하나만 나타나도 천하를 노린다는 최강의 마학이다. 백도십대극품절 예의 주인이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을 막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오십 년 간 백도십대극품절예의 주인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들 팔대천마의 가세로 마도맹은 급격히 위세를 떨쳐 무림맹을 압도해 나가고 있었다. 이 대로라면 천마의 천년마교에 의해 강호가 일통되는 것도 헛소리가 아니었 다. 나는 혈마라는 이름으로 유명했지만 천마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마교의 모든 마공서적을 연구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천하무적은커녕 같은 문파에 몸담은 천마조차 이길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의 마공을 배워서는 결코 천마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음마공으로는 천마지존 수를 이길 수가 없다. 영원히 남의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 성미에 맞 지 않았다. 나는 비밀리에 천유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몄다. 당시 변방에는 포달랍궁 과 소뢰음사, 홍황쌍교등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유혹 하여 중원을 침범하도록 했다. 이십년간 마도와 백도가 싸워온 중원은 이 들 변방에게 먹음직스러운 탐욕의 대상이었다.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천마로서는 변방의 침입에 노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는 백도를 공격하던 것을 중지하고 마도맹의 고수들을 모아 변방의 침 입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었다. 아무리 변방의 고수들이 전성기의 힘을 구사한다고 해도 칠대절정지예의 주인과 나 혈마가 있는 마도맹을 이길 수 는 없었다. 변방세력이 패퇴하고 마도맹이 승리를 이끌었을 때 천마가 이끄는 세력은 마도의 알토란같은 천 명의 고수가 다였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팔대천마 가 모두 있었다. 그리고 결전을 벌였던 낙마곡에 내가 묻어놓은 만근의 화 약이 일제히 터져버렸다. 혈마를 비롯한 팔대천마는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었다. 팔대천마와 마도맹의 중요고수들을 일은 마도는 백도에 의해 패퇴했다. 백도는 마도맹 과 변황세력이 양패동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하는 다시 평화를 찾았고 백도천하가 되었다. 하지만 음모를 꾸몄던 장본인인 내가 죽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십년간 비밀리에 낙마곡을 파헤쳐 시체를 건져내었다. 내 목적은 죽 은 다른 칠대천마의 품속에 들어있을 마공사공의 비급이었다. 꺼내진 많은 시체 속에서 무수히 많은 마공비급을 발굴되었다. 대부분의 비급은 회손 되었지만 사대마도절예와 삼대사도지예의 마학 만은 무사했다. 칠대절예가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 후 이십년 간 세력을 꾸며 혈천마궁을 세웠 다. 수많은 마도고수들을 부하로 끌어들이고 비밀을 지켜왔다. 무수히 많 은 제자들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암암리에 삼대사도지예와 사대마도절예를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 나이 팔십. 정식으로 혈천마궁을 강호에 출도시켰다. 무수히 많은 마도 고수들이 내 부하가 되었고 그동안 양성한 제자들도 꽤 쓸만한 마공을 익 히고 있었다. 칠대절예를 합해 만든 쌍영마공, 내 마공의 근본이 되는 쌍 영마공이 완성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 별호는 혈존이 되었 다. 그리고 천하를 차지하려는 내 야망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금방이라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천하는 쉽 게 정복되지 않았다. 왜 천마가 이십 년이나 끌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 았다. 백도의 저력은 쉽게 얕볼 수가 없는 것이었고 내 부족함을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백도십대극품절예도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도 또한 근본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혈천마궁을 전통이라는 것을 내세워 복종 하지 않았다. 팔대천마를 잃었던 마도사도의 문파들도 흑도의 칠대절예를 이을 후예를 중심으로 각 문파의 살아남은 장로들을 내세워 나에게 반항했 다. 혈천마궁이 무림에 자리를 잡고 이름을 떨치기는 했으나 강호통일이 요원 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다시 한번 혈천마궁에 틀어박혀 폐관수련을 했 다. 쌍영마공을 진보시켜 모든 마학의 완성이라 할 수가 있는 아수라독존 마공의 구결이 구체화 된 것이 이때였다. 천하 최강의 마학이면서도 그 수 련방법이 최악으로 잔악한 아수라독존마공이 생겨난 것은 모두 순순히 나 에게 정복되지 않은 흑도와 백도의 탓이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히면 나 는 마신이 될 수가 있었다. 그 때에는 천하를 정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 원히 불사신이 되어 신으로 군림할 수가 있었다. 나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사악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 태아의 시기를 모아 청영마공을 보완한 것도, 순음지체의 처녀들을 모아 혈영마공을 보완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제자들에게 칠대절예를 비롯한 백대마공을 전수했고 그 마공이 어느 정도 성숙하면 심장을 빼어 먹음으로 서 아수라독존마공을 착실히 진보시키는 짓도 거침이 없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은 팔대천마의 여덟 가지 마공과 내가 마교와 배교에서 얻 은 온갖 마공과 사술 등 갖가지 괴공을 모두 모아 마침내 하나의 마공으로 합일시켜 완성한 지상 최강의 마공이었다. 하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은 익히 기가 불가능한 무공이었다. 이론상 홀로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히려면 무려 오백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다만 아수라독존마공의 구결에는 스스로 연마하여 터득하지 않아도 그 마 공을 이루는 부분의 성질만 비슷하다면 타인의 기를 사술대법으로 흡수하 여 공을 이룰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다행히 나의 쌍영마공은 역시 팔대 천마의 마공을 합하여 다시 음양이기로 나누어 만든 마공이기에 아수라독 존마공의 근본이 될 수가 있었다. 이 두 마공을 합치고 다른 부분을 이루 는 마공을 타인에게서 흡수할 수가 있다면 편법이라 할지라도 짧은 시간 안에 아수라독존마공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다. 쌍영마공을 포함하여 아수라독존마공에 흡수되기 위한 백가지 마공이 창안 되었다. 이미 완성된 아수라독존마공을 세부 마공으로 조각조각 분류하는 것이니 백가지 마공을 창안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 다. 쌍영마공을 제외한 구십팔종의 마학 중에는 칠대절예마저 포함되어 있 었다. 나는 백대마공을 모조리 그동안 기른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이십년의 세월이 흘러 내 나이 백 살이 다 되어 갔다. 아수라독존마공은 거의 완성 직전에 이르렀다. 쌍영마공은 최상의 상태였고 제자들이 완성한 마공을 흡수함으로서 내 마공은 급진적으로 발전되어갔다. 제자들을 희생 시키는 것은 물론 임산부와 처녀들을 모조리 잡아 와 내 마공의 진전을 위 한 희생으로 삼았다. 당연히 채음보양의 수법도 서슴치 않았다. 그런 잔학 한 일을 벌이는 사이에 제자는 단 아홉 명만이 남았고 그 잔악한 행위로 인해 이십년 만에 나는 고금제일마라는 이름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남은 아 홉을 희생시켜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하기 전에 나는 현재 나의 무공을 시 험해 보기 위해 다시 한번 무림에 나서기로 했다. 내가 무적이라고 자신하게 된 후 혈천마궁은 나의 재출도와 함께 거칠 것 이 없었다. 천마를 잃고 세력이 주춤한 마교를 단숨에 강제로 복종시켰고 혈사문마저 정복하여 혈천마궁을 마도 제일의 종주로 만들었다. 독문을 복 종시키고 흑도와 녹림을 하인으로 두었다. 피가 흐르고 시체가 쌓였다. 세 상은 이제 혈존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백도는 나에게 반항하기 보다는 두려 워 피하게 되었다. 나는 백 살에 다시 무림에 나서서 일년 만에 그토록 나를 인정하지 않던 마도와 사도를 정복했고 녹림 등 흑도를 장악하여 흑도 대종사, 마도 대종 사, 사도 대종사, 독문 대종사 등으로 불렸다. 나에게 거역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않았다. 재 출도 몇 년 만에 수 만의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천하가 나를 두려워했다. 이제는 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악독한 의미의 고금제일마 가 아니라 역사상 가장 강한 자라는 의미의 고금제일마로 불렸다. 재 출도 삼 년 만에 백도라는 것들을 모조리 봉문 시켰다.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시체가 산이 되어 쌓였다. 제법 한다는 몇몇 강대한 백도문파를 무 너트리자 알아서 잘도 봉문을 하고 있다. 이들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 들. 귀찮아서 백도를 죽이지 않았다. 귀찮아서. 이로서 귀찮아 내버려 둔 몇 명 백도 떨거지를 제외한 중원이 완벽히 나에게 정복되었다. 내 발길은 변방으로 향했고 다시 이년이 안 되어 세외와 천축까지 정복했 다. 나를 거역하는 자는 있을 수가 없다. 이때까지도 쌍영마공 중에 혈영 마공만 사용하여 이룩한 쾌거였다. 이제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하여 영원히 신으로 군림하며 천하를 지배하 는 일만이 남았다. 청영과 혈영을 비롯, 칠대절예의 마공을 전수한 아홉 제자만을 남겨두었다. 그들마저 흡수한다면 내 아수라독존마공은 완성되리 라. 내 나이 백열 살. 소위 천무삼성이라는 것들의 결투장을 받았다. 죽어가는 백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더니 감히 대항할 생각을 하다니. 단지 귀찮아서 살려둔 백도가 감해 대적해 올 줄은 몰랐다. 백도 는 뿌리가 튼튼해서 남겨둔다면 두고두고 후환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흑도의 칠대절예를 흡수하여 쌍영마공과 아수라독존마공을 만든 것처 럼 혹시라도 백도에 그런 천재가 있어 백도십대극품절예를 합해 나에 대항 할 존재를 만들면 곤란했다. 천무삼성을 처 죽인 후 백도를 멸절시키기로 결심했다. 제자와 부하들이 배반했다. 백도 놈들과 합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이 된 것이다. 지금 나를 지키기 위해 봉인 사술대법을 펼친다. 이것 으로 내가 다시 기억을 되찾고 나를 찾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리라. 마지막 기억을 끝내고 나는 꿈을 마치었다. 이제야 내가 누구이고 내가 꾸 었던 꿈이 무슨 일이었는지 확실히 분간되었다. 나는 바로 혈존 그 자체였 던 것이다. 그리고 봉인이 풀려 기억이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네게 모든 지식을 넘겨 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태아의 본능에 영혼을 맡겨 버린 체 정신을 잃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곤란하네. 남을 해치는 혈존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은데 확실하게 기 억나 버렸다. 별 불만도 없이 부모님 밑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잘 실감도 나지 않는 혈존이라니 너무하잖아." 5 혈존 탄생(5) 나는 서로 대장군부의 둘째 공자이다. 나의 가문은 창국 공신의 가문이며 외할아버지인 서문대장군은 세외의 전 투에서 선황을 따라 혁혁한 공을 세워 현재 군부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장군의 지위에 있다. 그분에게 선황은 친히 서로대장군부라는 현판을 내 리셨다고 한다. 어머니 서문 혜는 할아버지의 무남독녀로 아름답고 현숙하여 북경에서 유 명한 재원이었다. 과거 명문대가의 수많은 공자들이 그분을 사모하여 많은 연서와 청혼을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활달한 어머니는 남에게 선택당하 지 않고 스스로 강호에 나가 자신의 신랑감을 골라왔다. 어머니가 직접 선 택한 남자는 강호에 떠도는 이름 없는 무인이었다. 강호인 출신인 아버지는 미처 무림에 이름을 떨치기도 전에 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할아버지의 허락아래 서로 대장군부의 데릴사위로 들어 오게 되었다. 아버님의 이름은 서문 구랑. 원래는 백 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셨는 데 데릴사위로 들어오며 성을 서문으로 바꿨다. 이품의 관직을 받은 장군 이며 서로 대장군부의 후손으로 변방의 방위를 맡고 있다. 장군부에 자랐 던 활달한 성품의 어머니 서문 혜는 그저 남편을 기다리는 평범한 처자들 과 달리 북경과 아버님이 있는 변방을 오가며 신혼을 즐겼다. 형 서문 일 충은 결혼 후 신혼 때의 결실이라고 하지만 나 백 이충은 어머니가 변방에 찾아갔을 때 군막에서 생겨난 씨앗이다. 어머니의 무리한 여행은 한 때 내가 유산될 위험까지 몰고 간 적이 있었 다. 그것을 막은 것은 바로 나 자신 백 이충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몸에 들어왔던 혈존 백 가량의 영혼이다. 나 자신은 서로 대장군부의 둘째 공자 인 백이충이면서 혈존 백가량이었다. 물론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꿈을 통해 최근의 일이다. 대 여섯 살 때부터 꿈을 꾸기는 했지만 확실히 모든 일을 알게 되고 자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십 살인 지금이니까. 아버지 서문 구랑은 물론이요 어머니와 형의 성까지 서문인데도 서로 대장 군부의 둘째 공자인 나만 유독 백가 성을 가진 이유는 아버지가 데릴사위 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백가 성을 버리고 서문가문을 이었다. 대신 아버 지는 둘째 아들인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백씨 성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가 종가집도 아닌 이상 내가 곡 백씨 성을 이어야 될 의무도 없었지 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는 백씨 성을 이었다. 하기는 성만 백씨였지, 아버지의 백씨 가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란 곳도 생활도 가족도 모두 서로 대장군부에 근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백 씨란 성에 대해 별로 구애된 적은 없다. 지금 나는 과시를 준비하며 관음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북경에서 가까운 숲에 있는 절이다. 너무나 조용해서 공부하기에는 알맞은 분위기였다. 어 릴 때부터 무가의 자식답지 않게 무공의 자질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은 적 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내 몸은 허약했다. 그래서 무공은 아예 포기하 고 과거나 볼 생각으로 학문에 열중해 있었다. 집에서도 장군가에 학자 하 나 나와도 괜찮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확실히 쌍영마공이니, 아수라독존마공이니 하는 온갖 마공이 머릿속에 기 억나기는 해. 혈존의 기억이 나면서 모조리 기억이 되살아나기는 했다고. 하지만 몸이 이래서야." 나는 내가 기억하는 무공초식을 기억 나는대로 펼쳐보았다. 초식이라기 보 다는 춤을 추는 것처럼 영 엉망인 동작이었다. 내공이 문제가 아니라 허약 하고 굳어진 몸이 초식의 동작을 따라주지를 않는 것이다. 내 몸의 여기저 기를 만져보았다. "확실히 무공에 적합한 근골은 아니야. 어릴 때부터 무공에 자질이 없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어왔지만 지금 보니 정말 한심하군. 어머니 배에 있을 때 유산될 뻔 했던 휴의증인가? 이래서야 지금부터 무공을 익힌다고 해도 제 대로 익힐 수나 있을까?" 나는 약간 한숨을 쉬었다. 저 관음사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두 노인 네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편법이 있기는 하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사람을 죽이는 것은커 녕 닭 모가지 하나 비틀라고 해도 끔찍한 판에 태아의 시체를 녹여 흡수하 고... 처녀의 피를 빠는 짓은 절대 죽어도 못해. 가장 빠른 길은 엄두도 못 내겠네. 으이구 소름이 끼치네." 나는 관음사의 내 방밖으로 나왔다. 봉인되었던 기억이 갑자기 돌아온 것 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기억만 돌아왔지, 감정까 지 동화된 것은 아니다. 먼 전생의 일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혈 존의 일이 남의 일처럼만 여겨졌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으니 누가 외부에 서 내 기억을 자극했는지도 짐작이 되었다. 관음사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어떤 수신호를 보내자 아니 나 다를까 두명의 노인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주군이시여. 드디어 각성하셨군요." "기다렸습니다." 감격에 차 말하는 두명의 노인. 백발에 쭈글쭈글한 피부는 그 나이를 짐작 도 못하게 하는 인물들. 바로 혈존의 시동들이었으며 벌써 일백 삼십 세 가까이 되는 노물들 이었다. "배교쌍노. 나를 찾아낸 것도. 내 주위에 머물며 혈마전혼대법을 자극하여 백이충에게 각성을 촉구하도록 배교 사령대법을 펼친 것은 너희들이었겠 지?"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알려주신 대로 혈마전혼대법이 시행된 분을 추적하 였고 주군께서 저희를 부르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주군께서 각성하지지 않아 명하신 대로 사령대법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내게 어떤 조짐이 없다면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 도 너희들이었겠지?" 순간 배교쌍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극도의 공포. 태어나서 이성 을 갖은 후부터 혈존에 대한 복종에 길들어져 온 배교쌍노이기에 주인의 노여움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공포에 질린 것이다. "저...저희는 주군의 명에 따라...." "혈마전혼대법이 실패하면 그 후환을 처리하시라는 주군의 명에 따라..." 그들의 급급한 변명에 나는 약간 동정심이 생겨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기 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면 오늘이 제삿날이 될 뻔 했다. 능력은 없지만 그 래도 혈존일 때의 행세를 하며 큰소리 한번 쳐보았다. 괜히 얕잡아 보이다 가 대법이 실패했다고 죽이려고 들면 큰일이다. "이십년 사이에 간이 몹시 커졌군. 감히 변명을 하다니." 배교쌍노는 급히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전전긍긍했다. 만일 남이 보았다면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남모르 게 웃음이 나왔다. 배교쌍노가 어떤 존재인가? 환마와 사마. 혈존과 더불어 혈천마궁을 이끌던 정체가 불분명한 수뇌라고 불렸던 두 명. 대외적으로 혈존의 사제라고 불려졌으나 사실은 혈존의 분신역할을 했 던 두 명의 거마가 아니었던가? 가히 팔대천마시절부터 혈존을 도와 그의 모든 것을 처리하던 그림자속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이십 년 전 혈 존이 사라지기까지 이름을 떨쳤던 쌍마였다. 일존 쌍마 삼성은 혈천마궁이 무림을 지배하던 당시에 유명했던 이름이었고 그들 중에 쌍마와 삼성은 바 로 배교쌍노와 청무삼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혈존이었던 내 인생도 가련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가쁘게 살아왔을까? 천하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아래 모든 것을 희생한 사 람이 혈존이었다. 정말 천하를 정복하고 영원히 살게 되면 행복할 수가 있 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혈존의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났지만 결코 그가 될 마음은 없다. 지금 기억해 보면 모든 것이 허무하기 이를 데가 없 다. 첫사랑을 죽이고 배교를 얻었을 때의 혈존이 행복했었던가? 모두들 두 려워하는 남들의 시선이 진짜 마음이 든 적이 있었던가? 자식에게 죽었을 때의 혈존은 아무렇지도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혈존도 한번 내딛은 길을 돌이킬 수가 없어서 계속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가? 이십 년을 평범하게 살아왔다. 아버지 어머니 의 사랑을 받아왔고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았다. 뚜렷한 성취나 능력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백이충을 인정해주는 가족이 있었다. 여태까지 인생에서 별 불만이 있었던가? 행복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생 각해보면 자신은 별 욕심도 없고 크게 출세하고 싶은 기분도 없었다. 권력 욕과 정복욕의 화신으로 천하를 정복했던 혈존의 환생치고는 참으로 많이 도 바뀌었다. 아니면 본심은 그런 것들이 허무함을 알고 별로 내키지 않았 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에게 혈존의 삶을 부정한다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쌍노는 당장이라도 대법이 실패했다며 나를 죽이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쌍노는 혈존에게는 누구보다 충실한 노복이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는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결국 이들 앞에 서는 싫으나 좋으나 혈존으로 행세해야 했다. 쌍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두 노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한 숨부 터 나왔다. 확실히 책을 읽은 것처럼 기억만 되살아난 혈존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 앞에서 굳이 부정할 생각도 없다. 마음은 바뀌었지 만 혈존이 내 일부인 것은 사실이니까. 혈존 때처럼 잔인한 수법으로 무공을 되찾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쌍노 가 있는데 아무런 힘도 없이 굴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쌍노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환마는 조심스럽게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하나의 옥함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곳에는 혈존이 만일을 위해 쌍노에게 준비하라고 명령했던 것. 내가 혈 존이었을 때 심혈을 기울여 만든 혈환이 옥함 속에 있었다. 혈환은 혈마전혼대법을 보충하는 마환. 혈마전혼대법으로 백이충의 몸에 남아있던 쌍영마공의 흔적을 복구시켜 왕성하게 만드는 마공단환이다. 쌍 영마공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몰라도 그 흔적이라도 남아있다면 당장 몇 달 내에 그 성취를 다시 삼성가량 회복하게 만드는 가공할 단약이었다. 그야 내가 혈존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지금 내 몸의 재 질로 보아서는 쌍영마공의 기초나 마련해주면 다행이겠다 싶다. 쌍영마공 을 보충해주는 재료로 만든 것이니 그 단약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설 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 지금 타인을 희생시킬 마음도 없 지만 이왕 만든 것을 이용하지 않을 나도 아니었다. "혈존으로 명령하겠다. 내가 백이충으로 행세할 때에 너희들이 내 앞에 나 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의 신분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내가 무림에 모습 을 드러낼 때에는 백이충이 아닌 백가량의 이름으로 다시 혈존으로 부활하 는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너희는 그저 따르기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복수를 하던, 혈천마궁을 다시 만들던, 아니면 원한을 잊고 나 자신 을 위해 평범히 숨어 살아가든 너희는 오직 나만을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배교 쌍노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로서는 그저 혈존이 다시 돌아왔 다는 것만으로 감격할 따름이었다. 그들을 보자 내 머릿속에 다시 엉뚱한 것들이 떠올랐다. 한번 쏟아진 기억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머릿속이 좀 복 잡하기는 했다. "내가 명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혈무영과 은표전장은 오직 주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가량은 쓴 웃음을 지었다. 혈존이 자신이기는 했지만 정말 음흉한 자였 다. 천하를 장악했던 지존의 신분이었는데도 만일을 대비하여 아무도 모르 게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다. 사실은 정말 그것을 직접 사용하 게 될 줄은 혈존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혈마전혼대법과 그 대법에 사용할 제물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짜 혈마전혼대법을 사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쌍노에게 혈환을 만들라고 지시는 했지만 그것도 혈마전혼대법이나 제물처 럼 만일을 대비하는 그의 치밀한 성격이 준비한 것뿐. 실제로 이렇듯 이걸 먹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혈무영, 은표전장 역시 만일을 위해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조용히 숨어 지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혈무영은 마도의 천 명의 인재를 따로 비밀리에 수련하게 만든 조직으로 백대마공을 속성으로 익히게 만든 조직이다. 옛날 백명의 제자에게 백대마공을 전수했던 것과 비슷했다. 틀린 것은 이들이 익힌 백대마공은 속성이 가능한 대신 위력이 본래의 마공에 비해 약하다는 것 뿐이었다. 혈무영 중에는 그의 아홉 제자가 익혔던 정통 구대마공, 즉 본래의 칠대절 예와 쌍영마공은 아니지만 간략하게 그 특성만을 뽑아 그가 만든 약식 구 대마공을 익히게 한 혈무영의 아홉 대장도 있다. 이들은 쌍영마공을 익힌 자나 쌍노가 가지고 있는 혈존의 영패에만 복종한다. 암암리에 자신의 비 밀세력으로 제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듯 초라한 신세로 그 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예 자신이 몰락할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 으면서도 그의 치밀한 성격 때문에 쌍노로 하여금 준비하게 한 세력인 것 이다. 또한 모든 세력은 자금이 근본이 되는 것. 혈존은 아무도 모르게 마궁이 장악했던 세 개의 금광을 빼돌려 쌍노에게 맡긴 적이 있다. 그로인해 돈으 로 따지자면 천하 세손가락 안에 드는 은표전장을 쌍노로 하여금 만들게 한 것이 바로 이십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과거 혈천마궁의 십분지 일에 해당하는 세력과 천하 십대 부호의 하나로 들어갈 정도의 재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혈존 백가량 의 성품이 얼마나 치밀하며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일이었다. "아홉 아이들은 어찌하고 있느냐?" "그 배신자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주군의 영혼을 놓친 두려움에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혈천마궁의 반도들은 하나같이 그들에게 달라붙어 잠적했습니다. 주군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어야 모습을 드러낼 것 같습니 다. 혈천마궁의 궁도들 중에서 저희를 따르는 노충신들은 백여 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내 아홉 제자들. 생각하면 그들은 혈존을 배신할 만 했다. 아니, 배신이라 고 할 것도 없었다. 살기위한 선택을 한 것이므로. 그들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심 따위는 없다. 당연히 천무삼성에 대한 감정도 없다. 꿈속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정도로 무슨 감정이 들겠는가? 다만 내 마공이 고스란히 담긴 심장을 가져간 첫째. 아직도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내 아들 녀석만이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백이충으로 살게 될 것이다. 허나 혈존으로 나서야 할 때 나 는 백가량이 되어 수시로 나올 것이고 너희들의 주인으로서 너희를 이끌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 주위에서 나를 따르되 내가 백가량으로서 너희를 부 르기 전에는 절대 나서지 말라. 내가 명을 내리고 직접 지시하기 전에는 절대 백이충의 생활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과거준비는 그만 둬야겠다. 그렇다고 부모 님을 실망시킬 수도 없으니 다가오는 과시에 응모하여 대충 써놓고 천하나 돌아다녀야겠다. 이제 와서 조정에 나서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은 싹 사라 져 버렸다. 그렇다고 혈존일 때의 능력을 되찾을 길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런 방법을 써서까지 혈존이 되고 싶지도 않다. 사실은 혈존의 이름조차 버리고 백이충으로 다시 평범하게 살고 싶다. 혈존의 원한에 찬 복수심이 니, 제자들을 향한 배신감이니 하는 것은 실감이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쌍노에게 혈존이 되겠다고 승낙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 다. 굳이 혈존을 배신한 제자들이나 백도에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은 없지 만, 무림이 어떻게 되든 백이충이기를 원하는 내가 상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내가 펼쳐놓은 것은 거두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혈존은 치밀한 성격답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이 사라졌을 경우 천하를 혼란으로 몰고 갈 안배를 천하의 여러 곳에 만들어 놓았다. 혈존이 죽게 되면 그 안배 자체가 천하에 대한 복수가 될 것이고 살아난다면 자신이 천하를 장악할 훌륭한 준비가 될 것을 생각해서였다. 이제 와서 그것들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냥 놔두면 천하의 백성들이 그 안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리라. 그것이 무림 에 관련된 일뿐이라면 모른 체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무공을 모르는 일반 양민에게까지 재앙이 될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냥 내버려둔다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천지가 뒤집히고 황 조가 바뀔만한 일도 있었다. 천하가 혼란되면 변방의 오랑캐들이 소란을 피울 것이고 그렇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곤란해지리라. 굳이 천하백성 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해서도 혈존이 펼쳐놓은 안 배는 내가 거두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혈존이 되겠다고 마음먹어 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몸이 이래서야....... 끙. 천하의 무학 일대종사 혈존이 무공둔치 백 이량이 되다니. 나에 대해 불만은 없지만 이 신체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 군. 당분간 무공은 포기하고 배교의 술법을 되찾는 데에 전념해 볼까?" 혈천마궁이 이십여년전 사라진 이후 천하 무림은 천무삼성의 공동제자라는 무성 종리연에 의해 백도맹이 세워져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기는 나 이가 이백 세가 다되어 가는 천무삼성이 직접 무림사에 관여하기에는 나이 가 말을 듣지 않으리라. 이십 년 전에 수많은 거마거효를 거느리고 있던 마도사도의 연합체인 혈천마궁이 봄눈 녹듯 사라졌기에 자연히 마도와 사 도는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고 백도맹의 이십여년간의 노력에 의해 천 하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무성 종리연. 그는 이십년 전 갑자기 나타나 천무 삼성을 대신하여 백도를 통합하고 그 강력한 지도력과 신에 달한 무공을 선보여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인물. 그리고 그가 있는한 천하는 영원한 평화를 구가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실재로 이십 년간 무림은 아무 탈도 없이 조용했다. 그 리고 지금 무림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이상한 일이 청해성에서 일어나 고 있었다. 보름 전부터 청해성 오형산에 때 아닌 괴사가 벌어졌다. 그 일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청해성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그 일로 입방정을 떨어대었다. 오형산 주위 삼백여리가 짙은 안개로 뒤덮힌 것이다. 단순히 안개만이 낀 것이 아니었다. 오형산에 안개가 뒤덮힌 이후로 그곳 에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형산에서 화전을 일구던 마을도, 사냥꾼도 약초꾼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나 무 림인들 조차도 호수에 돌을 던진 듯 아무 소식도 없이 잔잔하레 다시는 돌 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산. 오형산은 졸지에 불회산이라는 이름 으로 불리워졌다. 백도맹의 사대 검무단의 하나인 백호단주 마진걸은 숨이 턱에 차서 헉헉대 며 달리고 있었다. 이미 백호단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그와 그의 부하들 십여 명에 불과했다. "우우우우" 등뒤에서 소름끼치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형산에 들어올 때 경계 밖의 청명한 하늘과 달리 단 한 발자국만 산 어귀에 들어와도 앞뒤를 분간 할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처음 오형산으로 출발할 때만해 도 누군가 음모를 꾸며 어줍지 않은 진법으로 눈속임을 했다고 마진걸이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안개는 눈속임이 아니라 실재로 존재하고 있었 다. 처음부터 삼백여리에 달하는 지형 전체를 사람이 진법으로 안개를 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온 사방이 짙은 안개로 자욱하여 과 연 이곳이 오형산인지도 의아할 정도였다. "크아아악" 다시 뒤에서 또 한번의 처참한 비명이 울렸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백호 단의 부하 중에서 하나가 당한 모양이다. 마진걸은 힐긋 뒤를 돌아보다가 온 몸에 소름이 끼쳐 공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은빛의 털을 가지고 어깨높이까지가 무려 이 장에 이르는 거대한 늑대가 백호단원 한명의 몸을 물고 으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과연 저것이 늑대라고나 할 수가 있을 것인가? 화살도 검도 도도 통 하지 않는 두터운 가죽을 가진 괴물. 일 갑자의 내공으로 후려친 검에 머 리를 얻어맞고도 가렵다는 표정을 짓는 괴물. 한입에 사람을 삼켜버리고 장난치듯 휘두른 발톱에 바위와 나무가 박살나는 괴력을 가진 괴물. 무엇보다 늑대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저 늑대의 머리가 두개라 는 사실이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무려 오장은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괴물 은 빠르기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번개같은 속도를 가지고 있었 다. 단지 머리모습이 흡사하다하여 늑대라고 할 수가 있을까? 저 괴물의 발톱에 스친 상처가 가슴 깊숙이 새겨져 다시금 통증이 밀려오 는 것을 느끼며 마진걸은 애써 머리를 굴려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안을 생 각했다. 혼자서 백호단 전체를 괴멸시켜버린 괴물 늑대가 지금은 이십 마 리나 쫓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자부심이 높던 마진걸이라도 지금만은 도주 외의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힘을 내라. 조금만 더 가면 거목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숲 속에서 높이가 높은 나무위에 올라가면...." 이미 공포에 넋이 나가 무작정 달리는 부하들을 향해 격려의 필사적인 외 침을 지르던 마진걸은 자신도 모르게 절망의 탄식을 내뱉었다. 안개에 가 로막혀 자세한 모습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숲의 거목을 쓰러트리며 희긋 하고도 거대한 모습의 괴물체가 숲 앞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 다. 언제 앞을 질러갔을까? 뒤를 쫓아오는 늑대괴물로 생각하고 절망의 탄 식을 내뱉던 마진걸과 그 뒤를 쫓아오던 세 명의 백호단원이 헛바람을 들 이켰다. 그것은 늑대괴물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욱 끔찍한 것들이었다. 오형산의 뱀이 이토록 많았을까? 아마도 천하에 있는 천하에 있는 모든 산 의 뱀들을 모으면 이정도 숫자가 될지도 몰랐다. 수만 마리인지 수십만 마 리인지 분간도 못할 엄청난 수의 가지각색의 뱀들이 지면을 가득 메우며 숲의 거목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독사, 거망, 은사, 금사 등등 갖가지 뱀의 전시장 같은 수많은 뱀 사이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역시 은빛 색을 가진 거대한 거망의 모습이었다. 머 리 하나가 무려 성인크기의 사람만한 괴물. 뱀인지 용인지 구분이 안 될 거망들은 한입에 인간들을 삼키려는 듯 흉악한 눈빛을 발하여 마진걸 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괴이한 것은 이 거망의 머리 이마 부분에 마치 사람인 듯한 형상이 혹처럼 솟아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 손바닥만한 크기의 형태는 뚜렷한 사람형 를 가지고 뱀의 일부인 듯 이마에 팔 다리가 결합되어 사이한 눈으로 아래 를 굽어보고 있었다. "크아아악" "살려줘." 수십 마리의 은빛 거망의 모습에 질려 멈칫거리던 백호단은 뒤에서 덥쳐 온 거대 괴수의 습격을 받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 자루 검 을 들고 강호를 좁다하며 종횡하던 호쾌한 무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겁에 질려 어쩔줄 모르는 작은 동물의 모습이 있을 뿐 이었다. 마진걸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부하 세 사람 모두 거대 늑 대괴물의 입에 물려 허공으로 들어올려진 상태였다. 수십 마리의 거망은 백호단 무사의 비명을 들었느지 수만, 수십만의 뱀들 을 이끌고 먹이를 거대 은랑에게 빼앗길세라 급속도로 속도를 높여 달려오 고 있었다. "나무위로, 나무위로 올라가야 산다." 뒤의 끔찍한 광경과 물어뜯기는 부하들의 비명에 정신을 번쩍 차린 마진걸 은 급히 숲으로 달려갔다. 획하니 앞쪽으로 다가오는 거망의 머리가 마진 걸의 모습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가 있었다. 짙은 안개 덕에 거망도 미처 마진걸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무위 에 달라붙은 마진걸은 급하게 나무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살 아남은 사람은 그 혼자밖에 없었다. 숲의 어귀에는 거망과 거대은랑이 서 로 인간을 뜯어먹기 위해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쿵, 쿵! 마진걸을 지나친 거망들은 은색의 거대괴물에게 달려들었지만 마진걸과 스 쳐지나갔던 거망은 그의 종족을 눈치채고 뒤를 쫓아왔다. 달려들던 기세로 마진걸을 바로 한입에 삼키지 못한 것이 분한 듯 거망은 거목에 몸을 쿵쿵 부딪치기 시작했다. 오형산은 갑자기 모두 거인의 세계로 변한 것일까? 다 행히 마진걸이 올라간 나무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거망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기에 어른 열명정도가 손을 잡아야 감쌀 수 있는 거목이 거망의 부딪침에 쿵쿵 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울림에 마진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흔들리는 몸을 부여잡 고 더욱 높이 올라가며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고정시켰다. 아무리 그래도 백도맹에서 촉망받던 몸.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서도 마진걸은 급히 자신의 검인 청상검에 남아있던 온 내력을 불어넣었 다. 사문의 보물인 청상검은 거대은랑의 두터운 가죽을 뚫지 못하고 오히 려 이미 반 조각이 된지 오래였다. 허나 마진걸의 발악적인 두터운 진기가 들어가자 반 토막의 청상검은 곧 푸른 검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차앗!" 거망이 거목을 휘어 감고 부러트릴 듯 노여오자 밑을 향해 마진걸은 온 힘 을 다해 검을 내던져 버렸다. 비록 그가 전문적으로 비검을 수련하지 않았 지만 청상검은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은색거망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거망은 잠시 머리를 돌려 청상검을 피했고 청상검은 마진걸의 바람을 저버 리지 않고 날아가는 사이에 미묘하게 각도를 변화시켜 정확히 거사의 머리 바로 밑인 목 쪽을 향해 방향을 꺽었다. 챙! 마진걸이 작은 보복에 대한 희망으로 희열에 들떠 바라보고 있을 때 청상 검은 맥없이 거망의 목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쇠를 자르는 청상검에 본원진기마저 포함된 일 갑자의 내공을 모조리 쏟아부었는데도 거망에게 별 타격을 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절망에 빠져있던 마진걸은 황망히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죽어서는 안돼. 짐승의 먹이가 되려고 여태 무예를 딱은 것이 아 니다.) 마진걸은 마지막 힘을 다해 건너편의 거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무가 거 대해진 만큼 주위의 나무들도 모조리 거대화 되어 있었다. 우거진 나무의 위는 서로 가지가 붙어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전력을 청상검에 쏟아부 었던 이후인지라 이미 그의 몸에 남아있는 진기는 한줌도 안 될 듯한 미약 한 것이었다. 그나마 있는 것을 억지로 끌어올려 균형을 잡으며 나무와 나 무사이로 곡예 하듯 가지를 밟기 시작했다. 밑으로 떨어진다면 그의 부하 와 마찬가지로 그도 거대은랑이나 거대은사의 먹이가 될것이 틀림없었다. "커억." 마진걸은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걸려 몸이 고정 된 것이다. 마진걸은 그제서야 보이지 않은 투명하면서 끈적거리는 굵은 밧줄 같은 것이 허공에 걸려있음을 알았다. 그의 몸은 그 끈적이는 동아줄 같은 것에 얽매여 붙들리고 만 것이다. "이...이건." 마진걸은 자신의 몸을 얽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안색이 하얗게 탈색하고 말았다. 허공에서 걸어오듯 내려오는 것은 크기가 삼 장여에 달하는 거대 한 은색 거미였던 것이다. 그의 몸을 죄어오고 있는 것은 동아줄 굵기의 거미줄이었던 것이다. "여...여기는 오형산이 아니라 지옥이야." 마진걸은 절망에 빠져 혼절하며 중얼거렸다. 머리통이 사람 몸통만한 은색 거미의 입이 벌어졌을 때 마진걸은 정신을 잃는 와중에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마치 처음 말을 배운 인간아 이가 소리 지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지주낭랑. 대왕께서 술을 담글 재료가 부족하다고 인간을 구해오래요. 잡 아먹으면 안돼요." "사형. 왜 오형산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백도의 후기지수 중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진걸이 오형산 어귀에서 뜻밖의 방문자를 만났던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마치 누가 금을 그은 듯이 뚜렷하게 경계를 지으며 웅크리고 있는 오형산의 안개에 넋이 빠져있 을 때였다. 감히 그의 앞에서 깊숙한 상념을 방해하며 이렇게 음성을 앙칼 지게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무당파 대장로의 손녀인 금혜연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천무삼성의 덕으로 현재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을 꼽으라면 그 중의 하나 로 무당파의 이름이 늘 나왔다. 현무도선은 살아있는 신선으로 세간에 회 자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당 장문인의 대사형이기도 한 무당파의 현재 대 장로는 바로 현무도선에게서 사문이 이어지는 직계 사손이었다. 그러니 무 당파에서 대장로의 이름은 장문인에 비견될 만큼 높았다. 무당파를 사문으로 가진 마진걸은 어려서 그 특출난 재능으로 인하여 직접 사조 뻘인 대장로에게 무예를 사사받았고 그분을 자주 찾아오는 어린 소녀 를 친동생처럼 여겨왔었다. 대장로도 쩔쩔매는 말괄량이 금혜연은 마진걸 을 하인부리 듯이 성질을 부려대고는 했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마진 걸은 금혜연의 속칭 밥이었던 것이다. "혜연아. 이분은?" 금혜연도 무림명문인 금가장의 일원. 금가장이 백도맹의 중요기둥의 하나 인 것을 감안하면 금가장의 장중보옥인 금혜연에게 맹의 일을 말해도 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나 그렇다고 금혜연이 대동하고 있는 낯선 청 년의 앞에서 까지 비밀을 누설할 까닭이 없다. "이분은 백가가예요. 제 약혼자인...." "소생. 백이충이라고 합니다. 마대협에 대한 이야기는 소매에게 많이 들었 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서생께서 바로 대장군부의...." 금혜연의 앞에 있던 청년서생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자 마진걸도 반색을 하며 답례를 하였다. 그도 금혜연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 었다. 무당파의 대장로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아쉽게도 둘 다 도 문에 적을 두지 못하고 속가제자로서 무당과의 인연을 이었다. 마진걸에게 사숙뻘되는 두 명의 속가제자중 한사람은 백씨 성을 가지고 있 었는데 그 재능과 무공이 출중하여 장차 무당파를 빛낼 인재로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숙은 대 장군부의 사위로 들어가며 무림 에서 이름을 날리지도 못한 체 무림과의 연을 끊었다고 무당파의 모든 어 른들이 몹시 아쉬워 하셨다. 허나 나라를 위해 군부에 투신하는 것도 사문 을 빛내는 일이라고 모두 그를 축하해 주었다. 무당파의 속가제자 중에서 백사숙과 동문수학을 한 다른 한사람이 바로 금 혜연의 아버지가 되는 금가장주였다. 대장로가 출가하기 전에 둔 아들이기 도 한 금가장주는 그 인연으로 무당파의 후광을 등에 입고 속가 중에서 가 장 큰 세력을 이루기도 했다. 금가장주, 금사숙은 죽마고우이며 자신의 사 제인 백 사숙과 몹시 친하여 장차 서로의 자식을 맺어주자고 태중약혼까지 약속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이일은 한때 떠들썩하여 무당 속가 제자들 사이의 미담으로 널리 퍼졌었다. 금혜연이 금가장의 여식이니 눈앞의 서생 은 대장군부의 백사숙의 자제일 것이 분명했다. 활발하면서 아름다운 금혜연은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이다. 또한 그녀 의 뒤에 있는 금가장과 무당파라는 배경은 감히 다른 사람이 무시하지 못 할 만큼 막강하기도 했다. 그녀가 태중 약혼했다는 사실은 무림에 널리 퍼 져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모하여 따라다니는 젊은 청년들이 수 도 없이 많다는 것이 그녀의 미모를 증명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무림칠미 의 하나로 옥수비연이 꼽혔겠는가? 그에 비해 백사숙의 아들이며 대장군부의 자제일 것이 분명한 남자는 금혜 연에 비해 영 부실해 보였다. 비록 허우대는 멀쩡해 보였지만 영 허약해 보이는 체구에다 글공부를 어찌나 했는지 창백한 안색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허약한 글벌레로 보였지, 당당한 대장군부의 후예로는 보 이지 않았다. (장군부에 글을 읽는 백면서생이 하나 있다더니.) "사형. 이제 우리 백가가의 신분도 알았으니 어서 오형산에 들어가도록 허 락해줘요. 백도맹이 오형산을 산것도 아닌데 산도적처럼 길을 막고 행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다니. 이게 무슨 행패예요?" "너는 소문도 듣지 못했느냐? 저렇게 안개가 정상이 아닌 상태로 눈앞에 깔려있는데도 이상하지도 않느냐? 그나저나 오형산은 왜 넘으려 하는 거 냐?" "백가가가 이번 과거에 장원을 못하고 탐화에 머물렀대요. 성상께서 충신 가문의 자제가 한림학사에 봉하겠다고 친히 축하주까지 내려주셨어요. 모 두들 축하하는 데도 백가가는 장원으로 조정에 출사하겠다고 이번에 모든 관직과 조정의 등극 출사를 거절하며 고집을 부린대요." "허어? 그래?" 마진걸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백이충이라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과거는 매년 보는 시험이 아니고 전국의 유생들이 모두 몰려오는 자리이다. 그곳 에서 장원이나 탐화는커녕 급제만 해도 앞으로의 권력을 향한 출세 길이 보당 되는 것이다. 비록 장원은 아니더라도 어차피 일등이나 이등이나 그 게 그거 아닌가? 장원과 탐화의 결정은 실력보다는 오히려 운에 결정된다 고도 할 수 있는 미미한 차이. 그렇다는 것은 눈앞의 허약한 서생이 전 국 의 유생들 중에서 손꼽을 만한 실력을 가진 학자란 소리이다. 비록 관과 무림은 엄연히 생활하는 세계가 틀렸지만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면 마진걸이 충분히 존중할 만한 인물이란 소리이다. 대장군부 의 권세라면 과거를 통하지 않아도 그 자제는 능히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처지일 것이다. 당당히 과거를 보아 조정에 출사하겠다는 의기만으로도 존 중할 만한데 탐화를 했다고 장원을 할 때까지 조정 출사를 거부했다면 사 나이로서 그 호기를 높이 사 줄만했다. 마진걸은 눈앞의 서생을 은근히 무 시하던 마음이 싹 가시며 은근히 호감이 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성상께서 친히 내리신 관직을 거부하다니 그런 똥고집이 어디 있어요? 다 행히 성상께서 일 년의 말미를 주셨어요. 서문숙부께서 저를 불러 백가가 를 설득하라고 하셨어요. 백가가가 천하를 주유하며 산세를 둘러보고 싶다 고 해서 내가 보호자겸 같이 동행하는 처지예요." (사형. 빨리 오형산을 넘어야 한단 말이예요. 산 너머에 제갈숙부와 만나기 로 했다고요.) 몰래 들려오는 금혜연의 전음을 듣는 순간 마진걸은 금혜연의 속셈을 알아 챘다. 제갈숙부란 무림세가인 제갈세가의 가주를 일컫는 말이 분명했다. 제갈가주는 대장군부의 백사숙과 금가장주 금사숙과 친구사이였다. 그는 무림인이면서 동시에 유림의 거물이기도 했다. 그라면 유림의 선배로서 백 이충에게 충고를 해 줄 수도 있고 마음을 돌리게 만들수도 있을지 모른다. 제갈가주라는 신분이 한가하게 누가 만나자고 시간을 낼만큼 만만한 자리 가 아니고 보면 이번에 금혜연이 제갈가주를 만날 약속을 만들기 위해 얼 마나 애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혹시 백이충 이 화가 나지 않는지 얼른 눈치를 보는 금혜연이었다. (녀석. 벌써 어른이라 이건가?) "그렇다면 며칠 기다리려무나. 사실 본 백호단은 오형산 어귀에서 요즘 일 어나는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온 것이란다." "실종사건이요?" 눈빛을 반짝이는 금혜연을 보고 마진걸은 아차 싶었다. 사건이라면 무조건 뛰어들고 싶어하는 금혜연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이곳 근처에서 보름 가까이 머무르며 천천히 유람삼아 왔 지만 실종사건 같은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처음 사건이 일어난 것이 보름 전이다. 오형산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면 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깔린 안개인 줄 알았지만 안개는 걷힐 줄을 몰랐다. 그리고 안개를 무릅쓰고 오형산에 들어간 근처 마을 사람들 의 실종부터 사건이 시작되었지. 하지만 그 실종이 맹수에 의한 짓인 줄 알고 각 마을에서 산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출입을 자제했기에 몇몇 사냥꾼 을 제외하고 큰 희생이 없어 소문이 많이 나지는 않았다." "사냥꾼의 실종이요? 그런데 사형이 나서요?" "그게.... 이번에 변황동맹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서장에 임무차 갔다가 돌 아오는 형산파의 사람들을 접견하고 백도맹으로 인도하기로 한 임무를 이 사형이 맡았지 않느냐? 그런데 형산파에서는 소식이 없고...... 그 소식을 알아보니 오형산을 넘어 지름길에 들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이후 소식이 없구나. 수색을 위해 산으로 들여보낸 백도맹의 무인들도 모 두 실종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백호단을 이끌고 직 접 달려온 것이다." "무인의 실종이요?" 금혜연의 반짝이는 눈빛에 마진걸은 그녀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일침 을 놓았다. "엉뚱한 생각을 하지마라. 자파의 소식을 듣고 올라간 형산일검 노선배마 저 소식이 끊겼다. 또한 오형산에는 제법 세력이 큰 자미관이라는 문파도 있는데 그들도 소식이 끊겼다. 아마 자미관에도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네가 상관할 만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백공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느 냐?" "하지만....." 금혜연이 백이충을 보자 백이충이 웃으며 마진걸의 말을 거들었다. "소매. 그렇게 하자. 마대협도 그렇게 말하시니 마대협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오형산을 넘어가자구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하니 나도 오형산에 오르기가 겁이 난다." "치잇. 하는 수 없죠." "혜연아. 이번에 백호단의 전력이면 형산파에서 무슨 일이 있든 해결하기 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많은 시일은 걸리지 않을 테니 며칠 기다리 든가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렇게 마진걸은 사매를 남겨놓고 형산에 오른 것이 오전의 일이었다. 7 칠괴 혼합(2) 마진걸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밧 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미혼약에 취한 듯 정 신이 혼몽스럽다고 할까? 하여간 마치 꿈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에 억 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죽지 않았던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누군가가 주위에 있다는 말. 마진걸은 소리를 쳐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정신은 점차 맑아지는 가운데 반대로 몸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몸 과 정신이 따로 노는 듯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맥이 풀렸다. 심한 가위에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고함칠 여력도 입을 열 힘도 없었다. 그나마 눈이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열려있어 희미하게 시야를 확 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아니?) 마진걸의 몸은 미동조차 안했지만 그의 마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그는 어떤 허름한 목조건물안에 있는 상태였다. 목조건물에는 술청인 듯 주향이 진동했다. 그리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드러난 목조 건물 안의 모습 은 사오십 개 정도 될 듯한 많은 술독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마진걸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은 그 술독의 모습이었다. 커다란 항아리에는 술이 가득 담겨져 있는 듯 출렁거리는 듯 했다. 어느 항아리는 너무 많은 술을 부어댔는지 아직도 항아리에서 술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술독의 위로는 지금 한명씩 사람의 머리가 그 위로 솟아올 라 있는 것이 아닌가? (저분은 형산파의 조대협, 이대협이 아닌가? 그리고 형산파의 장로이신...) 그리고 보니 진한 주향은 바로 그의 곁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마진걸은 그 제서야 자신 또한 커다란 술독 안에 들어가 온몸이 잠겨 있으며 간신히 머 리만 내어 놓은 형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주위의 술독 모두에 사 람들이 담겨져 있었다. 몇 명은 마진걸도 아는 형산파의 인물, 이번에 변 황에 다녀오기로 했던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실종된 사람들이거나 자미관의 사람들 일 것이다. (이봐요. 누구 말할 수 있는 사람 없습니까?) 말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애타게 마음속으로만 사람들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술독 위에 나온 머리들은 모두 산발에 창백한 얼굴, 얼마나 술독에 잠겨있었는지 주독과 술기운에 피부가 흐믈흐물, 얼굴은 부 풀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두 눈은 모두 뜨고 있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 는지, 잃고 있는지 흐리멍텅 죽은 생선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 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진걸은 마음속으로나마 소 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보면 온몸에 대한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를 않았다. 몸의 통제를 빼앗긴 만큼 몸에 대한 감각마저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럼 내가 깨어나기 전에 들었던 소리 는 누구의 것이지?) 마진걸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목조건물의 밖에서 시끌버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확하게 분간하기는 힘들지만 틀림없는 사람의 소리였다. 마진걸은 희망을 품은체 전 신경을 문 쪽으로 향했다. 애써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에 신경을 집중시켜 무엇이든 보려고 애를 썼다. 삐꺽거리며 문이 열리고 희미한 달빛이 문밖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작고 조그마한 몸체가 구르듯 들어왔다. (어린애?) 처음 마진걸은 그것이 어린애인줄 알았다. 작은 키에 조그만 몸집이 영락 없이 7,8세정도 된 소동의 몸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달빛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마진걸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시퍼런 안색, 얼굴 여기저기에 난 수북한 털,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흉 측한 털복숭이, 검을 무색하게 할 만큼 날카로와 보이는 긴 손톱, 번쩍이 는 송곳니. 그리고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팔. 무엇보다 이마 정 중앙 에 달려있는 한 개의 뿔. (원숭이 요괴..... 세상에 요괴라니.) 틀림없는 요괴였다. 푸르고 뻘건 두 마리의 요괴가 히히덕거리며 술청에 들어온 것이다. 생김새는 영락없이 원숭이였고 하는 행동도 방정맞은 것이 원숭이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손톱과 이마에 난 뿔. 그리고 몸에 걸치고 있는 옷들을 봐서는 그냥 원숭이가 아니고 오래묵어 요괴가 된 원숭이임이 분명했다. 푸른 원숭이 요괴는 아직도 입을 우물거리며 한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 데 마진걸이 자세히 보니 그건 사람의 다리였다. 뻘건 놈은 이빨로 무언가 를 갉아먹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사람의 허연 두개골이었다. "끼..끼..끼. 너희 대왕은 너무해. 그렇게 먹어대다간 우리가 먹을 것은 하 나도 남지 않겠다." "네놈 입에 든 건 뭐냐? 빨리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가 대왕님들의 먹 이가 되고 만다." 두 놈의 뒤로도 줄줄이 요괴들이 들어왔다. 뒤의 요괴들은 원숭이 요괴가 아니었다. 덩치가 일장은 될듯한 커다란 몸집에 갑주를 입고 뒤뚱거리며 들어오는 머리에 십여 개의 뿔이 달린 요괴. 두개의 늑대 머리를 한 흰둥 이 요괴. 십여 개의 눈을 가지고 입으로부터 흰 줄을 늘어트리며 질겅질겅 씹고있는 대머리 요괴 등. 마진걸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각종 요괴들이었 다. 놈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신체 일부나 해골 뼈다귀 같은 것을 게걸스럽게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각자 사람이 든 한독의 술을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가 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쩐지 술독 속에 들어간 사람들의 운명을 알 것 같 아서 마진걸은 진저리 쳤다. 그제야 마진걸은 들어온 달빛 사이로 술청의 바닥에 수북이 쌓인 것이 사람의 뼈인 것을 알아보았다. "조심하란 말이야. 이 술은 우리 원 대왕님의 명령으로 수십 년 넘게 담아 온 것이야. 네놈들이 탐낼 만한 것이 아니야. 깨지면 대왕님이 네놈들의 뇌수를 대신 마시려고 들 거다." 원숭이 요괴의 외침을 들으며 마음조차 하얗게 질려가는 공포 속에서 마진 걸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이건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현실에 요괴 같은 것이 존재할 리가 없어. 틀림없이 깨어나면 잊어버릴 지독한 악몽일거야.) 하지만 마진걸의 애타게 부르짖는 희망과 달리 이것이 악몽보다 더한 지독 한 현실임을 마진걸은 알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여기는..... 지옥이다.)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마진걸이 알 수 있는 것은 수시로 작은 요괴와 큰 요괴가 자신이 있는 건물에 들어와 사람들이 들어있는 술독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 그리고 요괴들이 들어올 때는 항상 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밝 은 빛이 아닌 은은한 달빛이라는 것 등이다. 마진걸의 앞 쪽에 있는 술독 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간혹 원숭이 요괴들이 새로운 술독을 가지고 들어 오기도 했는데 다른 요괴들이 어디선가 데려온 사람들을 그 술독에 담가두 는 것을 마진걸은 지켜 볼 수가 있었다. 술청에서 나가는 술독은 많았지만 마진걸의 뒤로 새로 들어오는 술독은 적 었다. 며칠 사이에 사람이 들어있는 항아리가 거의 사라지고 술청은 거의 비어 남은 것은 마진걸을 비롯해서 십여 명에 불과했다. 감각이 없어 알 수는 없었으나 이미 자신의 몸도 오랫동안 술독에 있으며 흐믈흐믈 쭈글쭈 글해져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런. 여기서 보게 되다니. 안녕하시오?" 문득 그의 귀로 들어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마진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뻔했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곁에는 한 사람이 다가 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절대 요괴가 아닌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것 도 마진걸이 익히 알고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정말 말도 안듣는 사매를 두셨소. 마대협의 신신당부를 잊고 사형이 실종 되었다고 날뛰더니 그 말괄량이가 몰래 사라졌다오. 오형산으로 스며들은 것 같은데....... 이것 참. 정말 골치 아프군. 마대협도 그 말괄량이가 어렸 을 때 고생 깨나 했겠소." 그의 앞에서 중얼거리는 남자는 그의 사매인 금혜연의 약혼자인 백이충이 라는 서생이었다. 이 서생은 술청안의 기괴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오히려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바가지로 마진걸의 옆에 있는 술독에서 사람의 머리를 밀고 그 안에서 술을 퍼다가 목을 추기고 있 었다. "카아. 좋다. 역시 술은 후아주가 최고지. 이런. 말을 하려고 애를 쓸 필요 는 없소. 요괴의 독에 몸이 마비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뻔히 아니 까. 그래도 마대협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니 속으로 생각하셔도 되오. 하하. 그나저나 우리 말괄량이를 혹시 본 적이 있소?" (사매도 이 지옥에 들어왔단 말이오?) "그렇소. 모르오? 나 참.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그녀를 잃 어버렸다고 하면 당장 호통을 치시며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실 텐데. 도대 체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 백가량이 약혼자를 잃어버렸다면 어디 가서 창 피해서 말도 못하지." (백가량? 당신은 백이충이 아니오?) "나는 지금 백가량이라고 하오. 백이충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곳에서는 백 이충이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 같소. 뭐 굳이 내가 누구인지는 마대협이 생각할 필요는 없소. 모두들 내 이름은 잊어버렸으니까 혹여 살아남아도 남에게 물을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마진걸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틀림없는 백이충이었다. 하 지만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을 했다. 설마 쌍둥이란 말인가? (도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요? 그리고 백가량 대협은 이 지옥에 어떻게 들어오신 거요? 우리를 구하시려 오신 거요?) "지옥이라. 뭐 어떻게 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 하지만 마대협에게 설명할 시간은 없소. 그 말괄량이를 구하려고 뛰어다니기도 바쁘거든. 그 리고 대협과 이친구들을 구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백가량은 씨익하고 웃음을 지었다. "너무 나를 원망 마시오. 내가 부적 몇 개를 말괄량이에게 붙여 두었지만 그걸로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게 아니라서 시간이 없다오. 그래서 다 른 사람에게 신경 쓸 여유도, 그리고 또 필요도 못 느낀다오. 마대협 일행 과 내가 친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다 는 주의라서." 그는 여유 있게 마진걸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래도 마대협이라면 혹시 그 말괄량이의 행방을 알까하고 찾아왔는데. 쩝. 하는 수 없지. 자. 그만 작별하겠소." (기다리시오. 기다려. 제발 좀 이 몸 좀 구해 주시오. 제발 이 한 목숨 구 해 주시오. 그럼 결초보은 하리라.) 돌아서려는 백가량을 향해 마진걸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이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음속의 생각만으로 그렇게 부르짖은 것이다. 백가량의 몸 이 멈칫했다. "이것 참. 그 말괄량이의 사형이니. 그녀가 나를 나중에 원망한다면 감당 못하지. 정말 살고 싶으시오?" (살고 싶소. 살고 싶소.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소.) "하지만 내가 친분도 없는 마대협 때문에 손해를 볼 수는 없고. 그럼 마대 협의 영혼을 혹시 나에게 팔 생각은 있소?" (영혼을? 영혼을 어떻게 판단 말이오?) "영혼을 어떻게 사는가는 내 소관이고 마대협은 거래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만 결정하시오. 영혼을 팔고 살고 싶소?" (팔겠소. 영혼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나 살 수만 있 다면 무엇이든지 팔아버리겠소.) "좋소. 계약은 성립되었소." 백가량은 술독에서 축 늘어진 마진걸의 몸을 한손으로 들어 반쯤 꺼내들었 다. 그 순간 자신이 구해지는 줄 알고 마진걸은 기쁨에 가득 찼다. 하지만 곧 마진걸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공포의 체험을 해야 했다. 백가량은 품속 에서 여러장의 부적을 꺼냈다. 백가량의 손이 마진걸의 가슴을 더듬더니 심장이 있는 부근에 부적을 붙였다. 그리고 부적을 통해 그대로 마진걸의 여린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피부를 가르거나 살을 찢는 것도 아니었다. 백가량은 마치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마진걸의 몸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몸이 멀쩡한 상태에 서 자신의 내부장기를 더듬는 타인의 손을 생각해 보라. 고통의 감각을 잊 어버린 마진걸도 자신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백가량의 손에 만져지는 것을 소름끼치는 감각과 함께 공포를 맛보았다. 백가량의 손이 마진걸의 가슴에 있는 부적을 통해 나왔다. 물에서 손을 뽑 아낸 듯 마진걸의 가슴과 배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백 가량의 손에는 심장으로 추정되는 어떤 것이 들려있었다. 본능적으로 마진 걸은 그것이 자신의 심장임을 알았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요사스러워 현 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심장을 뽑아들고 요사스럽게 웃는 백가량의 몸에서 음산하고도 사악한 마 기와 요기가 폭출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공포가 일었지만 동시 에 그 기운은 황홀하기도 했다. 넋이라도 빼앗을 듯 황홀한 기운은 마진걸 의 영혼을 하얗게 탈색해 버렸다. 마진걸의 몸이 마진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르르 떨렸다. 거의 반 시체나 다름없는 몸도 심장이 뽑혀져 나간 반응을 하는 모양이었다. 백가량은 히 죽 웃으며 한 손으로 뽑아든 마진걸의 심장에 정성껏 손톱으로 그림을 그 리기 시작했다. 붉은 심장에 검은 글씨로 무엇인가가 그려졌다. 그림이 완 성되자 백가량은 붉은 심장을 다시 그의 가슴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런. 너무 그렇게 질린 얼굴로 보지 마시오. 내가 시간이 없다고 말했지 않소? 당신의 귀여운 사매를 구하려면 당신을 돌볼 시간이 없거든. 그래서 당신의 심장에 나를 나타내는 표시를 해서 반 쯤 죽어버린 당신 몸에 생명 을 연장시킨 거요. 저 밖의 놈들도 당신 가슴에서 내 흔적을 발견하면 잡 아먹지는 못할 거요." 하지만 마진걸은 그의 말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영혼은 공 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마진걸의 정신상태가 어떻든 백 가량은 가슴에서 부적을 떼어내어 손으로 비벼대었다. 부적이 불이 붙어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 악마.) "쿡.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라오. 자. 내가 돌아올 때까 지 기다리시오. 아, 정말 바쁘군. 배교에서 꺼낸 요요경을 숨긴 곳이 분명 이 근처일 텐데 너무 오래되어 찾을 수가 없으니. 게다가 시간을 내서 그 귀여운 말괄량이도 찾아야 하고. 그녀가 무사해야 될 텐데." 백가량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마진걸은 여전히 술통 속에 들어있었 다. 고개를 숙일 수가 없으니 자신의 가슴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심장을 쥐고 하얗게 웃던 백가량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순간 발작적으로 마진걸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 그래그래. 오형산이 지옥으로 변하고 도검이 안 통하는 거대 괴 물이 출현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요귀가 나타났는데 심장을 뽑는 악마가 나 타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으하하하.) 얼마쯤 넋이 나가있었을까? 삐꺽거리는 소음과 함께 다시 문이 열리고 크 고 작은 원숭이 요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작은 원숭이 요괴들은 들어오 자마자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앗. 끼끼. 이게 뭐야? 달콤한 피 냄새야." "뭐야? 혹시 누가 몰래 들어와 인간을 훔쳐 먹은 것 아냐? 누구야?" "미친 소리. 이것들은 신선한 인간을 좋아하는 대왕님들이 특별히 아껴먹 으려고 저장해 둔거란 말이야. 누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다고 대왕님들의 식사에 손을 대겠어?" "하지만 그럼 이 피 냄새는 뭐야? 썩거나 굳은 피 냄새가 아니라 방금 전 까지 살아있던 신선한 피 냄새잖아. 아이쿠. 어떤 바보 때문에 우리들 모 두 잡혀먹게 생겼다." "그러지 말고 조사해봐. 그리고 너는 항아리 개수를 세어봐라." 빨갛고 파란 작은 원숭이요괴들이 바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백가량이 들 고 있던 심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흘러내린 피가 뿌려졌던 곳을 중심으로 코를 킁킁 거렸으나 재가 된 부적의 탓인지 확실하게 구분을 하지는 못했 다. 그리고 늑대머리를 가진 요괴가 항아리들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둘.... 열. 뭐야? 술항아리 숫자는 다 맞는데?" 늑대머리의 말에 모든 요괴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이 피 냄새 말이야." "젠장. 알게 뭐야. 누가 음식보고 침 흘리면서 자기 팔이라도 뜯어먹었나 보지. 그보다 빨리 술과 음식이나 들고 가자고. 늦었다간 또 우리 중에 몇 이 대왕님의 짜증에 찢겨 죽을지 모른다." "가자. 가. 빨리 가야 대왕님이 먹다 남긴 껍데기 인간 조각이라도 먹게 될지 몰라. 이제 뼈다귀나 빠는 건 질색이야." 요괴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남은 십여 개의 술독을 들고나갔다. 물론 그 속 에는 마진걸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로인해 처음으로 마진걸은 술청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8 칠괴 혼합(3) 오형산은 청해성에 있는 작은 산이다. 오형산에는 옛날부터 요괴와 관련된 전설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설은 천년묵은 구미호가 나타나 사람의 간을 빼먹었다던가 원숭이 괴물이 나타나 아이를 납치했다던가 하는 것들 이었다. 꼭 전설이 아니더라도 심심치 않게 사람이 실종되어 주변 마을사 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곳이 오형산이었다. 이백 년 전에 모산파 출신의 한 노도인이 이 오형산에 도착하여 경악을 한 바가 있었다. "산세가 험준하고 음지가 많아 해의 기운이 미치지를 않는다. 음기가 강하 고 양기가 적으니 요기가 하늘을 찌르는 구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노도인 자미도인은 그 말과 함께 오형산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지옥에서 새어나오는 독기가 이승의 오형산에 피어오르는 것을 세 곳 발견했다고 한 다. 자미도인은 그 세 곳의 틈 위에 양기가 가득한 거대한 바위를 묻어 그 틈을 가로막았다. 자미도인은 그 후에도 오형산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지 옥과 이승 사이에 벌어진 균열을 관리했는데 그의 사후에 자미도인의 제자 들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그 바위를 주춧돌로 삼아 자미관이라는 도관을 짓고 자미관 주위에 음기를 누르고 양기를 돋우는 여러 가지 법보를 설치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이 산에 요괴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도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며 전설은 전설로서 묻혀지고 자미관은 무림 의 한 문파로 자리잡아 비록 무림의 대파로서 성세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당당히 청해성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무림문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 다. 자미관은 현재 거의 폐허가 되어있었다. 오래된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졌 으며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허름한 건물들도 바람에 허물어질 듯 흔들거렸 다. 자미관의 안뜰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에는 지금 수많은 존재로 북적거 렸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형형색색의 피부를 가진 요괴들. 크고 작은 요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고기인지, 혹은 무슨 뼈인지도 모를 음식 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괴물들의 잔치는 무슨 소설에 나오는 서유기의 한 장면 같았다. 바글대는 요괴들의 숫자는 가히 천이 넘을 듯싶었다. 요괴들이 모여있는 곳 정 중앙에는 거대한 탁자가 놓여있고 지금 그 탁자 에는 가득히 열 개의 술 단지가 놓여져 있었다. 왁자지걸 떠드는 요괴들의 정 중앙에는 화려한 차림을 한 일곱 명의 사람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다른 모든 요괴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것으로 보아 요괴들 중에 서도 우두머리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는 광경이었다. 탁자의 좌측으로 네 명의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사람이기 보다는 괴물이라 고 할만한 요괴들이었다. 바로 왼쪽 첫 번 째에 앉은 도복을 입은 요괴는 우두마왕. 인간의 머리를 하고 있지만 어딘지 소를 닮은 기색이 있고 머리에 커다란 두개의 뿔을 달 고 있었다. 남해에서 신선 보리선인을 태우고 다니다가 도망쳐 온 물소의 정이 변한 요괴였다. 그 옆에는 작은 몸집에 화려한 황금색 옷을 해 입은 노인이 한명 앉아있었 는데 그 얼굴모습이 영락없는 원숭이였다. 이 원숭이 요괴가 바로 원대왕 으로 요요태후의 생신에 그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일백 항아리의 인두주를 만들어 바친 요괴였다. 다시 원대왕의 옆에에는 호랑이 머리에 역시 갑옷을 입은 요괴가 있었는데 황호대왕으로 천 년 묵은 호랑이가 둔갑한 모습이었다. 오형산에서 만 년 묵은 하수오를 먹고 요기를 깨우쳤으나 도를 수련하기 보다는 탐욕에 더욱 관심이 많은 요괴로서 도력이 굉장하여 오형산의 산신도 어찌하지 못할 만 큼 광폭한 요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개의 늑대머리에 유생의 차림을 하고 있는 요괴는 청 랑왕으로 지옥에서 도망쳐와 오형산의 요괴들과 마음이 맞아 의형제를 맺 은 괴물이었다. 이번에 오형산 요괴들의 수괴인 요요태후의 생신을 맞이하 여 축하하러 오형산에 들린 상태였다. 탁자의 오른 쪽에도 세 명의 요괴가 있었다. 첫 번 째는 은사여왕으로 아름다운 처녀의 얼굴과 몸에 하체가 거대한 뱀 인 요괴였다. 온 산에 그득한 뱀이 모두 그녀의 부하였고 이마에 인간의 형태를 띤 정을 지니고 있는 은빛 거망들이 모두 그녀의 자식이었다. 그 옆에 있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이었는데 기이하게 그녀의 등 뒤에 거대한 날개가 달려있었다. 요괴라기 보다는 성스러운 천녀와 같 은 모습이었는데 눈매가 날카롭고 사나워 결코 신성한 선녀는 아니라는 것 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비천낭자란 이름을 가진 이천 년 묵은 암컷의 독수리가 변한 요괴로서 도를 닦다가 요요태후의 유혹에 넘어가 요괴의 길 을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장을 간편하게 차려입고 손에 검을 든 역시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의 허리춤에는 은빛 밧줄이 매달려 있었는데 묘하게도 여인과 어울려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주낭랑이라는 거미요괴 로 바로 마진걸을 붙잡아 온 요괴였다. 그들은 사람이 담긴 술항아리에서 인두주를 먹으며 놀고 있었다. 놀랍게도 탁자에 얹힌 항아리에 사람의 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머리만 달랑 남아있었다. 원대왕이 돌아다니며 술항아리를 한번씩 건드리자 인간의 뼈 와 살이 술 속에 녹아 스며들었고 단지 술위에 떠있던 머리만이 무사하여 술위에 둥둥 떠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두주는 원대왕이 바친 후아주에 인 간의 뼈와 살을 녹인 것으로서 오형산의 수괴 요요태후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다. "요요태후께서 납십니다." 갑자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떠들썩한 연회석이 일제히 조용 해졌고 오만방자하게 앉아있던 일곱 요괴들이 일제히 긴장한 낯으로 일어 섰다. 자미관의 안쪽에서 한명의 아름답고 요사스러운 여인이 여러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인격인 중앙의 사람은 서시나 달 기가 부끄러워 할 정도로 요염하고 아름답게 생긴 한명의 중년여인이었는 데 괴이하게도 머리위에 황제나 쓸만한 커다란 황금 관을 쓰고 가슴에는 작은 붉은 거울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나 입는 화려한 궁 장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렸는데 나이는 있었지만 그 표정은 도도하고 오 만하기 이를 데가 없어 마치 황후라도 되는 듯한 행세였다. 그녀가 바로 오형산의 괴사의 주역인 요요태후였다. 지금 그녀의 뒤로 시 녀들이 두 명의 노인을 포박하여 묶고 끌고왔는 데 그들의 모습이 처참한 것이 모진 고문을 받은 듯 싶었다. 갑자기 요요태후가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솟아 올라 하늘을 갈랐고 그 빛에 안개가 걷히며 잠시나마 모든 요괴들의 눈에 밤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요태후는 하늘 위에 둥그런 만월이 완전히 뜬 것을 확인하고는 여러 요 괴와 요괴대왕들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미천한 소녀를 위해 여러 형제자매들이 친히 왕림해 주시니 요요 낭랑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곱 대왕과 천이 넘는 요괴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소리를 질렀다. "요요태후의 생신을 경하드리옵니다. 불노장생하시고 영원토록 그 미모와 권세를 잃지 마소서." 특히나 일곱 대왕은 요요태후에게 극도의 공경을 보여 탁자에 머리를 부딪 혀 쿵쿵대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 "오늘은 뜻이 깊은 날입니다. 내 생일인 동시에 일곱 분과 제가 결의를 맺 는 날입니다. 오늘을 위해 보름동안 준비했습니다. 자미와 오형을 보름 전 에 사로잡은 것도 오늘 이 둘의 목을 쳐서 그동안 우리가 핍박받은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요요태후는 자신의 뒤에 묶인 두명의 노인을 가리켰다. 하나는 오형산인이 라는 이름을 가진 오형산의 산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미관을 세운 자미도 인의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도인이었다. 득도 후 신선이 되었다고 소문났던 자미도인이 사실은 반선이 되어 오형산 주위를 떠돌고 있었던 것 이었다. 보름 전에 산신인 오형산인을 방문하러 온 자미도인이 요요태후의 수작에 말려들어 둘이 같이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다. 반선인 자미도인과 산신인 오형산인을 사로잡을 정도로 요요태후의 요력은 강하였다. 뭇 요괴 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후 오형산은 요요태후의 권역으로 바뀌었고 그녀의 요기로 인하여 온 산이 요기가 섞인 안개가 깔리며 사람들을 환상과 두려움에 젖게 만들어 온갖 요괴에게 홀리게 되었다. 오형산 근처에 있던 모든 요괴들이 달려와 요요태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그녀의 세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자미관의 멸망과 형산파 사람들의 행방불명, 사람들의 실종에는 그런 비사 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어찌 추악한 두 노물의 피로 연회를 더럽히 겠습니까? 그들의 목을 치는 것은 마지막 행사로 남겨놓고 저희의 선물부 터 받으십시오." 일곱 요괴가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품에서 보석들을 꺼내었다. 요요태후는 여자요괴인지라 보석을 좋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대왕만은 어떤 보석도 바치지 않았다. 하지만 늙은 원숭이 요괴의 얼굴에는 누구보다 뿌듯한 기 쁨이 넘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몇 백년간 모아온 후아주를 인두주로 바꿔 모두 요요태후의 생일날을 기해 바쳤던 것이다. "여러 형제자매의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특히나 원대왕의 일백 항아리의 인두주는 정말 잊지 못할 선물이었어요." 화려한 옷을 입은 늙은 원숭이 요괴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 한 몸 이미 요요태후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한지 오래입니다. 충성을 맹 세한 몸이 어찌 몇 동이의 술을 아끼겠습니까?" "말씀만 들어도 고마워요.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내 요력이 완성됩니다. 그 때에는 태상노군이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요. 오형산을 기점으로 천 하에 요력이 가득차고 인간은 모든 괴들과 본후의 발 밑에 엎드리게 될 것 입니다." "요요태후께서는 영원히 권세와 흥복이 가득하실 것입니다." 모든 요괴들이 일제히 앞을 다투어 요요태후에게 아첨을 하자 그녀의 얼굴 에 득의의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크게 흥이 솟아 앞에 놓인 항아리를 번 쩍 들어 통째로 술독을 입에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목 젖이 꿈틀거렸고 마침내 그녀가 쾅하고 빈 독을 내려놓았다. 술독은 깨끗 하게 비어있었고 그녀는 술독에 있던 인간의 머리마저 씹어먹는지 입을 오 물거리는 데 그 입가에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 건배합시다. 즐겁게 먹고 놀며 즐기기를 바래요." 요요태후의 명이 떨어지자 일제히 환호하며 요괴들도 술을 퍼마시기 시작 했다. 그 때 요괴들의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이게 뭐야?" "인간 하나가 녹지 않았다." "뼈와 살이 녹는 인두주 속에서 아직도 숨을 쉬며 살아있다." 하나의 항아리를 둘러싸고 요괴들이 소란을 떨자 원숭이 노괴 원대왕의 모 습이 번쩍였다. 그 순간 술독이 산산이 부서지며 벌써 제자리에 돌아온 원 숭이 노괴의 앞에 한명의 인간이 내동댕이쳐졌다. 원대왕은 믿지 못하겠다 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부르짖었다. "사실이군. 내 오독지에 맞고도 술에 녹아내리지 않다니." 원대왕의 앞에 널부러져 있는 인간은 마진걸이었다. 그는 두눈을 뜨고 주 변에 늘어선 요괴들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눈꺼풀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 다. 은사여왕이 마진걸을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저자. 저 인간의 가슴을 봐요. 북두성군의 빛이 떠오르고 있어요. 저자는 신장 북두성군의 가호를 받는 인간임이 틀림없어요." 은사여왕의 말에 일곱 요괴가 일제히 신음을 터트렸다. 인간의 눈에 보이 지 않지만 그들의 눈에는 지금 마진걸의 가슴에서 뿜어나오는 칠색의 영롱 한 빛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청랑왕이 불안하다는 듯이 주위를 바라보다가 무엇이 두려운지 소리를 낮 춰 작게 말을 했다. "북두성군이 그의 가호를 받은 인간을 잡아 왔다는 것을 알면 우리 모두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원대왕은 어찌 이런 실수를 하셨소?" "나는 여러 대왕이 잡아 온 인간들을 후아주에 담가 논 것뿐인데 어찌 이 인간이 북두성군의 가호를 받는지 알 수가 있었겠소? 오히려 여러 대왕이 무분별하게 인간을 사냥하여 그분의 노여움을 샀으니 여러분의 탓이 크오. " 모두들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자 요요태후가 얼굴 빛을 바꾸며 크게 성을 내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오? 나와 함께 천하를 요괴의 세상으로 만들자며 결의하자고 굳게 결심했는데 겨우 신장한명을 두려워하시는 것이 오? 태상노군도 두렵지 않은 내가 신계의 장수인 북두성군을 두려워할 것 같소? 어찌 나를 곁에 두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입에 담을 수가 있단 말이 오?" "하지만 북두성군은 천계 삼십육천강의 첫 번째 가는 별이며 가장 강한 장 수입니다. 요요태후께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다고 해도 그와 시비를 벌여 좋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들 나를 무시하는군. 여러분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내가 여러분 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내가 북두성군보다 약하다고 보시는 것이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서로가 맹세의 결의를 맺자고 한 일 은 없는 것으로 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집시다." "태후께서는 노기를 거두십시오. 설마 저희가 태후의 권세와 능력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저희는 북두성군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희는 태후를 믿습니 다." "노기를 거두십시오. 태후께서 무적임을 믿습니다." 다른 요괴들이 일제히 요요태후에게 절을 하자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 만 족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일곱의 요괴대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되었소. 오늘은 우리들이 결의를 맺는 경사스런 날이오. 그런데 그것을 축하할 것이 없어 아쉬웠는데 마침 좋은 것이 들어 왔구료. 우리는 이 인간을 나눠먹음으로서 서로의 믿음을 증명합시다." 요요태후가 말을 하자 일곱 요괴는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들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요요태후의 얼굴에 다시 사나운 빛이 떠오르자 원대왕이 먼저 나서서 마진걸의 오른팔을 잡았다. "태후께 충성을 맹세하는 좋은 날입니다. 이 한 팔을 맛있게 먹음으로서 우리의 결의를 자축하겠습니다." 원대왕이 힘을 주자 마진걸의 오른팔이 통째로 뜯어져 나오며 선혈이 뿜어 져 나왔다. 그리고 원대왕은 피비를 맞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그 팔을 입 으로 가져가 우적우적 씹어대기 시작했다. "나 청랑왕은 왼 발을 먹음으로서 오늘의 기쁜날을 기억하겠습니다." 두개의 늑대머리를 가진 청랑왕 역시 마진걸의 한쪽 다리를 잘라내어 먹음 으로서 요요태후를 기쁘게 했다. "황호대왕이....." "우두마왕이...." 황호대왕고 우두마왕이 각기 오늘의 결의를 기념하는 축하의 말을 하며 남 은 팔과 다리를 뜯어먹자 요요태후의 눈길은 여자요괴들 쪽으로 갔다. 여 자요괴들은 그 눈빛에 질려 일제히 마진걸에 달려갔으나 남은 것이라고는 몸통과 머리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베어 먹는다면 요요태후에게 남 겨지는 것이 없으리라. 또한 인간의 몸통을 가르고 내장을 먹자니 북두성 군의 징표가 새겨진 부분이라 꺼림직했다. "지주낭랑은 북두성군의 가호를 받는 인간의 왼쪽 눈을 기쁘게 먹음으로서 오늘의 즐거움을 기리겠습니다." "비천낭자는 오른쪽 눈을 먹겠습니다." "저 은사여왕은 인간의 혀를 먹겠습니다." 원대왕을 비롯하여 일곱의 요괴가 마진걸에게 달라붙은 것은 순식간의 일 이었다. 마진걸의 사지가 뜯겨져 나가고 두눈과 혀가 뽑혀져나갔다. 마진 걸은 끔찍한 고통에 혼백이 흩어지고 영과 육신이 분리되는 지경까지 이르 렀다. 이미 인간이라고도 할 수가 없는 잔해에 요요태후가 낭랑한 교소를 터트리며 다가왔다. "모두들 제 뜻을 따라주니 기쁘기 이를데가 없군요." 요요태후가 손을 뻗으니 피투성이로 변한 마진걸의 머리와 사지가 뽑혀지 가간 몸뚱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여러 형제자매들의 진심을 알게 되니 기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제가 인간의 뇌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저를 위해 머리를 남겨두셨군 요. 하지만 저는 북두성군의 징표가 있는 이 인간의 심장을 먹음으로서 북 두성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며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었음 을 기념하겠습니다." 요요태후이 손이 마진걸의 가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낭랑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목소리가 요요태후의 손을 막았다. "이 악랄한 요괴야. 사형의 몸에서 그 요사한 손을 떼지 못해?"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풍이 요요태후의 몸을 습격했다. 요요태후는 놀라 지 않고 소매를 휘둘러 자신을 공격한 검풍을 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요괴들 또한 얼굴 가득 깜짝 놀 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역시 텅 빈 허공에서 다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오늘 더러운 요괴들을 모조리 죽여 천하의 해악을 없애겠다." 곧이어 또다시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요요태후는 냉소하며 손을 휘둘렀다. 곧 그녀의 손에 무엇인가가 부딪쳐 창 하는 소리가 났는데 갑자 기 허공에서 검이 나타나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요요태후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허공에서 움켜쥐었다. "요 가소로운 것. 은둔법의 부적을 써서 내 눈을 속일 수가 있을 것 같으 냐?" 요요태후가 날카롭게 부르짖자 맹렬한 바람이 일며 허공에서 종이조각이 찢겨져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요요태후의 손에 잡힌 체 바둥거렸다. 놀랍게도 요요태후의 손에 목이 잡혀 새파랗게 질려있는 소녀는 바로 실종되었던 금혜연이었다. 9장 칠괴 혼합(4) 금혜연은 며칠씩이나 사형이 돌아오지 않자 그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하였 다. 도무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약혼자인 백 이충을 버려두고 오형산에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백면서생인 그를 보호하 지 않고 혼자 내버려둔다는 것이 꺼림직 했지만 잠시 오형산에 올라 사형 의 행적만 조사하고 금방 내려올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사형이 있는 오형 산에서 어떤 위험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형산에 들어선 이후 금혜연은 생각 외로 안개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 다. 겉으로 보아서는 오형산에 들어가면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녀 주위에만 안개가 옅어지는 것인지 전혀 시야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사형을 찾아다녔지만 사형의 종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사형에게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자미관이라는 문파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오형산에 돌아다니던 그녀는 수상한 기척만 나타나면 일단 몸을 숨겼다. 그녀가 본 것은 수많은 짐승 떼였다. 어떤 때는 백여 마리가 넘는 늑대들 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십여 마리의 호랑이가 돌아다 니기도 했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심심치 않게 그녀 쪽을 향해 짐 승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숨기면 코를 킁킁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냄새를 맡고는 돌아가는 것이었다. 많은 맹수들의 출현에 금혜연은 오형산에 일어난 사냥꾼들의 실종이 모두 이 맹수들의 짓이라고 혼자 섣불 리 단정지었다. 워낙 맹수들이 많았으므로 금혜연은 짐승들과 충돌하지 않고 피하려고 마 음먹었다. 아무리 무당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자기에게 수백마리의 늑대 떼에 포위당해서 살아날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금혜연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런데 오형산을 올라가며 갈수록 많은 괴수와 맹수들이 자주 출현하 고 숫자도 많아졌다. 어떤 때는 미처 맹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바람에 바로 눈앞에서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짐승들은 그런 금혜연을 마치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는 했다. 처음에는 놀라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자 점차 금 혜연도 짐승 무리들에 대한 두려운 생각을 지워버리게 되었다. 인간보다 몇십 배나 예리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는 늑대들이 바로 그들 곁의 바위 뒤 에 숨은 금혜연을 발견하지 못했다든가, 간혹 그녀가 알아차리는 것이 늦 어 호랑이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어도 그들이 알아채지 못한 것도 금혜연은 이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어리석은 짐승들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산 정상에 올라갈수록 놀라운 일이 많아졌다. 우선 짐승들의 숫자 가 많아졌고 다음은 평소에 이름도 듣기 힘든 괴상하고 흉측한 괴수들이 많이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황소크기의 호랑이라든가 머리가 둘 달린 뱀, 크기가 일장이나 되는 괴조, 서너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등이 그것이었 다.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은 그런 괴수 형상의 호랑이와 늑대, 혹은 뱀과 원숭이 무리들이 한 데 어울려 돌아다닌 다는 것이었다. 짐승들이 무엇인 가에 조정을 받지 않고 있다면 서로 종이 다른 야생의 무리들이 같이 있을 리가 만무였다. 금혜연은 이들 괴수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어딘가에 숨어있 으며 그 존재야 말로 오형산 괴사의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금혜연이 조금 헤메기는 했으나 결국 자미관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자 그곳 에는 엄청난 숫자의 짐승들이 바글바글 거리고 있었다. 원숭이, 뱀, 늑대, 토끼, 여우, 독수리, 곰, 소 등 산에 있는 짐승들은 모두 모여 있는 것 같 았다. 금혜연은 자미관의 중심에 이 짐승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 각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행히 어리석은 짐승들은 바로 곁을 지나가 는 데도 금혜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별로 무서울 것도 없는 괴수들이라고 금혜은 판단을 내렸다. 괴수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는지 자미관은 거의 폐허가 되어있었고 사람들 의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미관이 연무장으로 썼던 것처럼 여겨지는 광장에서 드디어 금혜연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넓은 광장에는 무려 천여 마리나 되는 온갖 괴수가 늘어져 있었고 그 중아 에는 궁중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 고 여인의 좌우로 물소, 원숭이, 호랑이, 늑대와 커다란 은빛 뱀, 더욱 큰 거미, 한 마리의 독수리가 탁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웃기는 것은 여인의 좌우에 앉은 짐승들이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혜연은 허물어진 담장 뒤로 몸을 숨기고 여인을 살펴보았다. 여인과 일곱 마리의 짐승은 여러 항아리를 끼고 앉아 항아리안의 것을 마시고 있었는데 독한 주향으로 보아 술이 틀림없었다. 탁자에 놓인 십여 동의 항아리외에 많은 항아리가 천 마리의 짐승들 사이 에 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여인에 맹수들을 조종하기 위해 무엇인가 사악한 술법을 쓰는 것 같았다. 여인의 뒤에는 오래 된 것 같은 나무의 뿌리 같은 것 하나와 어떤 도인을 그린 초상화 하나가 널부러져 있었는데 서너 마리의 여우들이 그 초상화와 나무뿌리를 물고 있었다. 갑자기 짐승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가 싶더니 탁자에 앉아있던 원숭 이 한 마리가 번개같이 오고가며 항아리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탁자위로 내동댕이쳤다. 눈에 힘을 주고 항아리에서 나온 것을 살펴보던 금혜연은 경악했다. 그것은 무엇이 아니라 인간, 그것도 그녀가 그토록이나 찾던 바 로 사형 마진걸이었다. 금혜연이 놀라고 당황하는 가운데 여인이 뭐라고 소리쳤고 갑자기 일곱 마 리의 괴수가 사형을 덮쳐갔다. 금혜연이 어떻게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사형 의 팔다리가 맹수들의 입에 찢겨져 나가고 두눈과 입이 피투성이가 되었 다. 그리고 여인이 사형의 앞에 나서 그를 번쩍 들었다. 모골이 송연한 가 운데 금혜연은 저 여인이 사람을 잡아먹는 구미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 다. "이 악랄한 요괴야. 사형의 몸에서 그 요사한 손을 떼지 못해?" 금혜연은 더 이상 생각을 진행하기 전에 몸부터 먼저 움직였다. 재빨리 검 을 뽑아들고 할아버지에게 배운 태청검법을 시전했다. 요괴 따위 설마 무 당파의 검법을 막아낼 수가 있겠느냐는 심정이었다. 여인의 소매가 그녀의 검을 막아왔지만 그녀의 안력이 형편없어 미처 금혜연의 신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엉뚱한 데로 휘둘려졌다. 금혜연은 더욱 자신이 생겨 힘껏 진기를 돋우어 소매를 찢으려했다. 하지만 금혜연의 검은 여인의 소 매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내가 오늘 더러운 요괴들을 모조리 죽여 천하의 해악을 없애겠다." 금혜연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다시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소리를 들은 후 비로소 금혜연이 있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본 여인의 입가 에 비웃음이 서렸다. 금혜연이 달라들었으나 여인이 손을 뻗자마자 한줄기 흡입력이 몰아치며 그녀의 몸이 여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요 가소로운 것. 은둔법의 부적을 써서 내 눈을 속일 수가 있을 것 같으 냐?" 여인의 손아귀에 목이 잡히자 금혜연은 천지가 노랗게 보였다. 하지만 아 직까지 기가 죽지 않아 여인을 노려보았다. 여인이 금혜연을 잡은 체 날카 롭게 부르짖자 맹렬한 바람이 일며 갑자기 그녀의 품에서 종이조각이 튀어 나오더니 허공으로 찢겨져 날아올랐다. 그녀의 백씨 성을 가진 연인이 정 표라며 그녀를 향한 정을 그리는 시를 써서 준 종이였다. 순간 천지의 광 경이 변했다. 탁자앞에 앉아있던 일곱 마리의 괴수들은 사람으로 변했고 천지가 안개로 뒤덮혔다. 그리고 수많은 짐승들도 인간처럼 두발로 땅을 짚고 서있는 것처럼 보이며 인간의 말을 지껄이는 것이 금혜연의 귀로 들 어왔다. "이것 뜻밖이로군. 인간이 여기까지 숨어들어 오다니. 우리의 이목을 숨길 정도로 도력이 높단 말인가?" 원대왕이 놀라 부르짖자 요요태후가 섬찟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하찮은 인간이예요. 요것이 감히 연회를 방해하다니." 요요태후는 금혜연을 보며 섬뜩하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짓고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새빨간 혀가 입가를 돌며 군침을 흘리는 것이 맛좋 은 음식을 눈앞에 둔 미식가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약간의 도력을 얻어 부적술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리고 연한 살코기를 가진 맛있게 생긴 인간이로구나. 마침 오늘 결의를 위한 축하를 위한 의식을 네가 방해했으니 대신 너는 특별히 생으로 먹어주마." 금혜연은 요요태후의 말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요요태후에게 먹 히기 전에 지금 숨이 막혀 질식사할 참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요요태후의 손에 겹쳐 어떻게든 목을 쥔 손을 풀려고 했지만 손은 마치 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멈추시오. 요요태후님께서는 잠시만 손을 멈추십시오. 그 인간은 제 것입 니다. 죽이지 마십시오." 갑자기 일진 광풍이 일며 바람이 요요태후의 소매를 흔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요력을 느끼고 요요태후가 행동을 멈추고 얼굴을 들어보니 안개가 걷 히며 서쪽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구름위에서 세명의 남자가 뛰어내렸다.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요괴의 기운 이 서려있었다. 앞에는 서생들이 입는 유생차림의 젊은 남자였고 뒤에는 금빛 갑옷을 입은 장수였는데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금혜연은 정신이 아물아물거리는 가운데도 그 남자를 보고 속으로 외쳤다. (바보.) 요괴들의 연회장에 뛰어든 남자는 백이충, 아니 백가량이었다. 서생차림을 한 그 모습 그대로 연회장에 나타난 백가량은 몹시 긴장했는지 숨을 헐떡 거렸다. 금혜연이 의아한 것은 요괴들이 모인 곳에 인간이 뛰어들었는데도 수많은 요괴들 중에 아무도 백가량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의 말을 경 청하며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혜연을 보았을 때와 같은 적의나 살 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누구요? 그리고 이 인간이 그대의 것이라니?" 요요태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 역시 놀랐는데 그녀의 요기로 오형산을 뒤덮은 안개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가르고 유생차림의 요괴가 나 타났기 때문이었다. "저는 서천노선이 보낸 제자입니다. 이렇듯 명망높으신 태후를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늘 노선께서 태후의 이름을 말씀하시며 한번 만나 뵙고 싶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제가 데리고 온 아이입니다." "그대가 서천노선의 제자라고?" 요요태후를 비롯한 요괴들이 요괴라고 믿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요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이유는 그의 몸에 모든 요괴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요력이 서려있기 때문이었다. 범상치 않은 요기가 춤 을 추듯 줄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요태후는 서천노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요괴들이 술렁거렸다. 의아하게 생각하자 옆에 있던 지주낭랑이 다가와 그 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서천노선은 천축으로 향하는 다지산에 있는 요선의 이름으로 백여 년이나 나타나지 않아 다른 요괴들 사이에 천계의 요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던 큰 요괴입니다" 과연 지주낭랑의 말대로 서천노선은 보통 요선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자라 는 요괴의 요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아 서천노선이라는 요선 역시 요요태후 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지는 요괴가 아님이 분명했다. 서천노선 의 제자라는 청년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멀리 서쪽까지 알려졌다 는 것이 요요태후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 들었다. "서천노선의 명을 받들어 중원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중입니다. 그 여자인 간 아이는 노선께서 사는 근처마을에서 제물로 바친 아이인데 노선이 시녀 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어하자 노선께서 내리신 것으로 이 번에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지라 제 눈을 속이고 도망갔다가 오형산에 스며든지라 그 뒤를 쫓아왔는데 벌써 말썽을 일으켰 군요. 여러분들이 인육으로 자축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노선의 체면을 보아 한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소?" 요요태후는 떫은 감을 씹은 듯한 얼굴을 했다. 서천노선이라는 이름이 부 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천지를 얕잡아보고 오만방자한 요요태후는 자신 의 생일에 처음보는 요괴에게 약세를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서천노선에게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으나 이 인간은 연회를 방해하고 네게 무례를 끼친 인간이오. 용서할 생각도 없소. 적어도 한 팔은 내게 대 접해야 마음이 풀어질 것이요." 요요태후가 강경하게 나가자 백가량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인간하나를 해쳐서 요요태후께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저도 인간하나 때 문에 태후님께 실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노선께서 내려주신 인간이니 함부로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마침 태후 의 생신이고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인연인 듯 싶습니다. 생신선물로 법보 하나를 드릴테니 그것으로 그 인간의 무례를 봐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서천노선의 제자가 준다는 법보라면 보통물건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요요 태후는 잠시 탐심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체면도 차리면서 법보도 얻고 서 천노선과 반목도 하지않을 좋은 기회였다. "그 법보라는 것이 무엇이오?" "서천에서 도를 얻은 불문노니의 사리로 만든 작은 구슬들을 이은 법보로 자연주라는 것입니다. 바람과 화염의 요괴를 잡아가둔 것인데 이것의 주인 은 바람과 불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주는 요기를 배척하지 않고 보완하며 불문이나 도가, 혹은 다른 부문의 법보의 능력을 높이는 힘이 있 습니다. 태후의 품안에 있는 거울 역시 보통 법보가 아닌 듯 한데 이것으 로 목걸이의 줄을 대신하면 그 위력이 몇 배는 뛰어나게 변할 것입니다." 요요태후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녀는 곧 금혜연을 백가량에게 던져주었다. "호호. 그렇게 성의를 표시한다면 나도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손님에게 버릇없이 군 것 같아 마음이 편치가 않군요." 백가량의 품안에 안긴 금혜연은 콜록이며 몸을 일으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가량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그대로 잠 이 들고 말았다. "요 말괄량이야. 말썽을 피우지 말고 좀 자고 있으렴." 백가량이 자상한 말투로 그녀를 쓰다듬고는 금혜연을 뒤의 금빛 갑옷의 장 수에게 맡기었다. 그리고 공손하게 두손으로 염주알을 들고 요요태후에게 다가왔다. "삼가 서천노선의 제자가 요요태후에게 자연주를 바칩니다." 자연주라는 작은 구슬을 꿴 법보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려있음을 본 요 요태후의 얼굴에 흥분의 빛이 가득했다. 자연주를 받아들자 과연 온 몸에 청량감이 가득차고 힘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흥분한 기색으로 한 손에 자 연주를 받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 목에 두른 목걸이를 풀어내렸다. 둘을 비 교하여 잘 어울리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천선도래. 여의조화. 묶어라." 백가량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자연주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 길이가 쭈욱 늘어났다. 그리고 긴 밧줄처럼 요요태후의 온몸을 칭칭 감 아대는 것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요요태후는 깜짝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물러나 주술을 외우려고 온 몸의 요 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자연주는 벌써 요요태후의 뒤를 쫓아가 상체를 감 으며 묶고 있는 중이었다. 요요태후는 자연주의 포박을 피하면서도 벌써 상체에 기어올라있는 포승을 힘을 주어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과 얽힌 자연주가 억합하 는 힘이 방해되어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백가량이 어느 사이에 다가와 요요태후의 목걸이를 재빨리 움켜쥐었다. "네가 감히!" 요요태후가 살기등등하게 외쳤으나 이미 그녀의 목걸이는 백가량의 손아귀 에 들어왔다. 하지만 요요태후의 눈빛이 변하면서 갑자기 백가량의 손아귀 에 있는 목걸이에 달려있는 작은 거울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백가량의 손이 화염에 뒤덮여 불타기 시작했다. 요요경은 마치 홀로 살아있는 듯이 발악하며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 했다. 돌이나 쇠도 녹여버릴 듯한 엄청난 열기였다. 백가량은 손이 타버리 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제멋대로 움직이며 백가량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는 요요경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네가 음기가 충만하게 된 후 인성을 얻어 요괴로 둔갑 하였구나. 칠십 년 만이라고 이제 주인도 못 알아본단 말이냐?" 백가량이 일갈하자 요요경과 요요태후가 일제히 멈칫 거렸다. 요요태후의 두 눈은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질린 얼굴로 백가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가량은 자신의 왼손 검지를 물어 뜯은 후 피를 요요경 에 떨구기 시작했다. 요요태후의 모습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백가량의 손아귀에 들린 요요경 도 심한 진동을 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요요경을 손바닥에 놓고 두손을 겹 쳐 포갠 후 힘을 주었다. 백가량의 손아귀가 파랗게 물들어가는 가 싶더니 갑자기 요요태후의 모습이 꺼지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네 본체가 내게 제압되었으니 이제 헛된 생각은 말고 얌전히 굴어 라. 까불면 다시는 빛을 볼 수가 없도록 영원히 암흑 동굴 안에 처박아 두 겠다." 백가량은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겹친 손바닥을 펼쳤다.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며 붉게 물들었던 요요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모습을 되찾고 있었고 요요경에 매달려 있던 목걸이의 줄은 열기에 한줌 재로 변해 날아 가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요태후의 모습이 사라지 고 갑자기 오형산 전체에 깔린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은. 일곱 요 괴와 천여 마리의 요괴들이 분노해 발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살기 에 찬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백가량을 덮치려는 듯 요괴들의 몸이 들썩거렸 다. 백가량은 귀찮다는 듯이 요괴들을 흘겨보고는 자신이 대동하고 온 두 명의 금빛 갑옷의 장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천신강림. 북두성군. 무곡성군." 어둠에 묻혀있던 두 장수의 얼굴이 안개가 걷혀 환히 드러난 달빛에 모습 을 나타내었다. 오색의 신성한 기운이 두 장수의 몸을 감쌌다. 일곱의 요 괴대왕이 혼비백산하여 부르짖었다. "맙소사. 천강삼십육장의 두 천장이다." 두 신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미관 전체가 오색의 신성한 기운에 감싸였 다. 오색의 기운에 닿은 요괴들은 모두 호흡을 멈추고 죽을 상을 지으며 뒹굴었다. 요력이 약한 요괴들은 둔갑을 해제당해 본신의 짐승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감을 느끼자 천 마리의 요괴들이 일제히 자미관의 밖으로 도 망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일곱의 요괴대왕 또한 다르지 않아 다급한 나 머지 스스로 둔갑마저 풀어버리고 본 모습으로 모든 힘을 다리에 쏟아 달 아나려고 하였다. 그 황망한 모습은 마치 뱀을 본 개구리 들이 살기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북두성군과 무곡성군은 다른 요괴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기세를 잃 고 공포에 질린 일곱 요괴대왕을 향해 덥쳐갔다. 순식간에 두 신장의 창에 얻어맞고 일곱 요괴들이 나동그라졌다. 백가량이 다시 자연주를 던지자 자 연주는 십장 길이로 늘어나 어기적거리는 일곱 요괴를 향해 혼자 스스로 다가가더니 단숨에 묶어버렸다. 썰물 빠져나가듯 그 많던 요괴들이 빠져나가고 장내에는 묶인 일곱 요괴대 왕과 백가량, 그리고 두명의 신장이 남아있었다. 안개가 걷힌 오형산과 자 미관은 훤한 달빛에 물들었으나 아직도 요사스러운 기운이 허공에 감돌고 있었다. 백가량은 두 신장에게 명령은 내렸다. "강신법을 풀어버리고 유부에서 마기가 흘러나오는 요기혈공이 있는 곳의 술법을 풀어버리도록. 배교의 술법이니 내가 알려준 대로 하면 쌍노는 쉽 게 풀 수가 있을 거야." 두 신장의 몸에서 다시 오색의 빛이 감돌았다. 두사람의 몸이 부르르 떨리 는가 싶더니 그곳에는 금빛 갑옷을 입은 두 신장대신 두 명의 노인만이 남 아있었다. 신의 힘을 몸에 강림시키는 강신술로 천계의 신장의 힘과 형상 을 불러 몸에 씌었던 술법을 풀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바로 환마와 사마. 배교쌍노였다. 환마가 조심스럽게 백가량에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유부의 균열로 마기가 새어 나오는 요기혈공을 닫는 것은 주 군께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까? 요요경은 유부의 새오나오는 마기를 요 기로 변하여 다스릴 수가 있고 또한 요요경은 요마로 환신하여 그 힘을 이 용하여 뭇 요괴를 다스렸습니다. 요요경도 회수하셨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뭇 요괴들을 다스린다면 주군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향후 수 만 혹은 수 십만의 요괴들을 부하로 거느리신다면...." 하지만 백갸량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애초에 천계의 두 신장과 계약을 맺은 것도 요기혈공을 닫기 위해 도움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쌍노는 설마 내가 요괴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저희가 어찌? 주군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쌍노가 곧 모습을 감추자 백가량은 자연주에 묶인 일곱 요괴들을 바라보았 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일곱 요괴는 본신인 짐승의 모습으로 두려운 눈빛 을 하고 백가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드리지요. 여러분이 먹어치운 인간에게 북두성군의 징표를 찍은 사람 이요. 흐흐. 이놈들아. 내가 보호하려고 애써 북두성군의 징표까지 새겨놓 은 인간을 먹어치웠으니 어떻게 보상하려느냐? 설마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 겠지?" 미소짓는 백가량의 얼굴은 요요태후 이상으로 무서운 것 같았다. 10 칠괴 혼합(5) 배교 삼십이 대 교주는 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형아 에 남이 보기에 혐오스러운 얼굴을 하고 태어났다. 그는 오형산 주위에 있 는 산간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온갖 구박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첫사랑의 여인으로부터 배반을 당해 대대로 집안에 내려오던 재산을 탕진 하고 쫓겨나듯 고향마을에서 떠난 불우한 사람이었다. 허나 그의 자질은 생김새와 달리 범상치 않았는지 배교에 투신한후 그 성 취가 남달라 배교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술법자가 되었다. 특히 그 가 잘 부리는 술법은 유부의 마졸들을 불러내거나 음기가 뒤덮힌 원귀를 불러내는 것으로 그 분야에서는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릴만 했다. 이백오십 년 전, 배교 삼십이 대 교주는 죽기 직전 자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오형산에 돌아와 최악의 술법을 펼쳤다. 유부의 기운을 이승으로 끌어오는 주술을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펼쳤던 것이다. 유부의 마기가 이 승으로 올라오면 죽은자의 기운인 음의 기운이 마기와 요기로 변하여 오형 산에 흩어지게 된다. 그 기운을 들여마신 짐승들은 사악한 요귀로 변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다. 오형산에 갖가지 요괴들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배교 삼십이 대 교 주의 생명과 맞바꾼 저주와 함께. 하지만 아무리 주술의 위력이 강하다고 해도 인간이 펼친 술법은 한계가 있었다. 유부에서 새어나오는 기운은 아주 미약한 것이고 오형산을 밖을 벗어나는 데로 그대로 흩어지는 작은 양이었다. 그 기운으로 요괴로 둔갑 한 짐승들도 몇 몇에 불과했다. 천지간에는 자연의 복원력이라는 것이 있 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면 바로잡기 마련이다. 배교의 저주도 백년을 넘 지 못하고 대지가 유부의 균혈로 일어난 구멍을 메우며 사라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백년 전에 모산파 출신의 자미도인이 오형산에 들렸다. 그는 한눈에 오 형산의 이상을 알아보고 산을 샅샅히 뒤진 결과 유부와 이어진 세곳의 구 멍을 발견했다. 자미도인은 이 세 곳의 요기혈공을 양기가 가득 찬 바위로 메꾸고 이승과 유부의 틈을 메꾸었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 위에 바위를 주춧돌로 삼아 자미관을 세웠다. 벌어진 상처를 억지로 막으면 억압된 상처는 더욱 커지고 입구가 있어 새 어나오는 것은 확실한데 출구가 막히면 압력은 거세지기 마련이다. 자연과 대지의 복원력이 아닌 도가의 술법으로 강제로 막힌 요기는 세월이 흐를 수로 많아졌다. 조금씩 유부에서 세어나와 오형산 전체에 흩어져야 할 기 운이 무려 이백 년이나 모아졌고 그 양은 오형산을 수십 번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요기가 많아지고 거세어질 수록 유부의 균혈은 막아지기는커 녕 압력으로 더욱 벌어졌고 유부에서 세어나오는 양이 더욱 많아졌다. 자미도인도 등선될 시기에야 겨우 이를 알고 스스로 자신의 힘의 일부를 자미관의 초상화에 남겨 분신으로 하여금 간혹 반선이 되어 나와 오형산인 을 도와 유부의 마기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했다. "내가 칠십년 전에 오형산에 올랐던 것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혈존은 배교의 보물인 요요경을 가지고 있었다. 요요경은 만들어 진지가 얼마나 오래전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는 배교의 보물이었다. 천년 묵은 구 미호의 뼈로 만들어진 거울이라고도 하고 혹은 달기가 애용하던 거울이라 는 소리도 있다. 만약 달기가 천하를 어지럽히기 위해 구미호가 변신한 것 이라면 이 두 가지 말이 다 맞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대대로 배교 안에서 만 내려온 요요경은 많은 비밀이 있었다. 요요경의 한 가지 효능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이성의 마음을 쉽게 사로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요경을 가진 이성의 유혹은 아무리 도가 깊 고 심지가 깊은 사람일지라도 거부하기가 힘이 들었다. 또한 요요경을 여 자가 가지고 있으면 평생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가 있으며 병이 없고 한평 생 건강하며 쉽게 늙지 않는다. 여자에게는 최고의 보물이라고 할 수가 있 었다. 대신 요요경의 역대 주인은 일부종사하지 못하고 뭇 남자의 탐욕의 대상이 되어 최후에는 반드시 비참한 결말을 맺었다. 순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 또한 요요경의 저주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배교의 창고에 들 어온 요요경은 몇 백년간 빛을 보지 못하다가 혈존 백가량의 눈에 발견되 었다. 혈존은 요요경에 실로 재미있는 효능을 발견하였다. 요요경은 사기나 마 기, 혹은 요기를 다스릴 수가 있고 또한 그 기운을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는 보물임을 안 것이다. 단순히 여인의 보물인 요요경을 왜 배교에서 차 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요요경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술법이 몇배나 강한 위력으로 증폭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술법보다 무공에 정신이 팔린 혈존에게 요요경은 곁에 두어야 할 보물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그 때에는 아직 완벽하게 천하를 도모할 자신이 없었을 때였지. 그래서 요요경을 이용하여 오형산 주위에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킬 생각이었다. 기 록에 의하면 미미한 요기이지만 그것이 요요경을 통하면 유부의 기운이 증 폭되어 도가의 이목을 집중시키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미관의 주춧돌에 바늘만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요요경을 묻어놓았지." 하지만 혈존의 예상과 달리 의외로 칠십년 간 아무일도 없었다. 바늘만한 구멍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기운은 출구를 발견하지 못해 이백년이나 쌓여왔던 엄청난 양의 요기로서 배교의 기록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요요경을 통해 증폭되면 오형산은 요괴들이 엄청난 마물이 되어 폭 주해야 했고 혈존의 예상 이상으로 천하가 혼란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칠 십 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요요경이 그 기운을 증폭시켜 오형산에 뿌 리기는커녕 칠십년 내내 그 요기를 오히려 자신의 몸에 흡수시켰기 때문이 었다. "설마 요요경 스스로가 요마가 될 줄은 나도 오형산에 들어오기 전에 생각 도 못했던 일이었어." 그렇다. 이백 칠십년간 쌓인 유부의 요기를 홀로 듬뿍 빨아들인 요요경은 스스로 지성을 갖고 요마가 되었으니 그것이 요요태후였다. 요요태후가 요 괴로서 태어난 날 자미관은 그녀가 시녀로 불러들인 몇 마리의 여우들의 힘에 멸망당했다. 요요경이 요후태후이고 요후태후가 이백 칠십년 분의 요 기를 마구 증폭시켰기에 지미관의 도인들이 감당 못할만큼 여우가 엄청난 요괴가 되었던 것이다. 오형산을 물들인 요기에 놀라 뛰어든 오형산인과 자미도인의 분신 또한 요 요태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백년 전 이후 유부의 요기가 새어나오는 것이 중단되고 힘이 약해져 지하로 스며들었던 온갖 요괴들이 화들짝 놀랐 다. 갑자기 오형산 전체에 겪어본적이 없는 강력한 요기가 감싸며 그들의 몸에 엄청안 요력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오형산의 요괴들이 일제히 요력을 발휘하며 요요태후를 찾아와 스스로 머리를 숙인 것은 본능적으로 요요태 후가 그들의 힘의 근본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요요경을 회수하기는 했는데 말이야, 너희들!!!" 나지막하게 과거의 일을 줄줄히 늘어놓던 백가량이 갑자기 일곱 요괴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곱 요괴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거리며 두려워했다. 보기 에는 어린 인간이 범상치 않은 요력을 잔뜩 풍기며 요요태후마저 제압하고 스스로의 입으로 칠십 년 전에 요요경을 묻어 요요태후를 탄생시킨 장본인 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일곱 요괴의 눈에 백가량은 대마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 몸이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증표까지 남긴 인간을 죽여버 렸으니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미 요괴들은 자연주의 포박에서 풀려난 상태였다. 하지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백가량의 앞에서 감히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 들의 이마에는 저마다 하나씩의 부적이 붙어 있었다. 요괴들이 일제히 덜 덜 떠는 가운데 요괴들을 대표하여 늙은 원숭이가 뾰족한 음성으로 말했 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북두성군의 가호를 받아 아직 저 인간의 숨은 끊 어지지 않았,,...." "안 죽었으면 뭘 해? 두눈도 없고 혀도 없고 팔다리가 없이 어찌 살아가란 말이냐? 이건 죽은 것보다 못하잖아. 그래놓고 뻔뻔하게 나보고 살려달란 말이 나오냐?" 커다란 흰색 독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비천낭자가 감히 대왕님께 아뢰옵니다. 제가 저 인간을 먹은 것은 오직 눈알하나였습니다. 제 눈을 대신 바쳐 그 인간에게 줄 테니 제발 살려주시 기 바랍니다. 제 눈은 창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이라 능히 백리 밖 의 사물도 볼 수가 있습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가진 처녀로 변하더니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아 마진걸의 눈에다 대고 문질렀다. 신기하게도 마진걸의 오른 쪽 눈은 멀쩡해 졌다. 순식간에 마진걸은 장님에서 애꾸눈으로 변했다. 은색 거미또한 인간의 음성으로 말했다. "지주낭랑이 대왕님께 아룁니다. 저도 눈 하나를 바쳐 저 인간을 회복시키 겠습니다. 제 눈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볼 수가 있고 사방 앞뒤와 좌우 위 아래를 동시에 볼 수가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지주낭랑 역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자신의 눈을 뽑아 마진걸의 왼쪽 눈 이 있던 자리에 대고 비볐다. 마진걸의 두 눈이 갑자기 멀쩡해 졌다. 원숭이가 역시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먹은 오른팔 대신 제 오른 팔을 내어 놓겠습니다. 그의 오른 팔에 붙여 두겠습니다. 제 손은 온갖 정교한 일을 할 수가 있고 번개보다 빠른 움직임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창칼 같은 날카로운 금속무기와 마주쳐 도 상하지 않으니 그에게 득이 될 것입니다." 물소도 입을 연다. "저도 왼팔을 내어 놓겠습니다. 제 왼팔은 힘이 쎄서 능히 만근의 바위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들어 올릴 수 있는 완력이 있습니다. 또한 강철 을 부수고 바위를 가루로 내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두 요괴가 저마다 자신의 팔을 잘라 마진걸의 상체에 붙이자 얼른 은빛 뱀 도 질세라 나서서 입을 연다. "저는 제 혀를 내어 놓겠습니다. 자고로 뱀의 혀만큼 교활하고 말 잘하는 혀는 없다고 합니다. 제 혀는 온갖 독을 구별해 낼 수 있고 그 독을 뿜어 댈 수가 있습니다." 은빛 뱀은 입에서 혀 조각을 퇴하고 뱉었다.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의 혀 중에서 한쪽 갈래의 혀 조각이 잘라져 나왔다. 은사여왕은 자신의 혀조 각을 들고 마진걸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놀랍게도 마진걸의 혀가 다시 생 겨났다. 곧이어 호랑이와 늑대도 각기 자신의 한쪽 다리를 내어 놓겠다며 살려달라 고 백가량에게 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진걸의 몸은 멀쩡한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나를 속이고 도망갈 생각이냐? 이미 이 인간은 혼이 흩어지고 백만 이 남아 육체를 식지않게 붙들어두고 있을 뿐이다. 혼이 없는 인간이 인간 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일곱 요괴가 머리를 조아리며 백가량에게 사정을 했다. "대왕께서는 무엇을 바라십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어떠한 명이라도 듣겠습 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너희들을 살려 둘 수는 없다." 갑자기 백가량이 요괴들을 향해 부적을 향해 입으로 물을 뿌렸다. 요괴들 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으나 감히 반항하거나 도망치지 못했다. 요 괴들의 머리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오르며 동시에 요괴들의 몸이 털썩 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백가량이 요괴들에게서 뿜어져나온 검은 연 기 같은 것을 손으로 가르키며 주문을 외우자 즉시 그 연기 같은 것은 마 진걸의 몸으로 슬며시 스며들었다. "너희들에게 인간의 생인 백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의 몸에 얌전히 들어가 없는 혼을 대신하여 그의 몸이 살아있는 동안 그의 백에 서 려있는 기억에 의거하여 그의 몸을 움직이도록 하라. 그 동안 너희들의 몸 은 내가 맡아 두겠다. 만일 그 인간의 몸에서 도망치거나 내 말을 듣지 않 을 때에는 너희들의 몸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도록 몽뚱아리를 망쳐 놓겠다." 백가량이 마진걸의 이마에 손을 얹어놓고 주문을 외우자 일곱 요괴 즉 칠 괴의 영혼이 혼합되어 그의 몸에 고정되었다. 백가량은 잠시 주문을 멈추 고는 마진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계약한 것은 당신을 살려주는 대신 그 영혼을 내가 갖는 것이었소. 이제 당신의 육체는 완전히 살아났고 대신 내 것인 영혼은 어디론가 흩어 져 날아가 버렸소. 비록 혼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것이 당신의 것이 아닌 내 소유인 것이니 당신은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 대신 당신의 살 아난 몸을 움직일 새로운 영혼을 하나도 아니고 일곱이나 넣어주었으니 이 는 계약에 비해 내 인심이 너무 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소." "이 요괴들. 백가가를 해치기만 해봐라." 금혜연이 버럭 소리치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표 정을 지으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오형산 어귀의 아 랫마을에 있는 객잔으로 그녀와 백이충이 함께 머물렀던 곳이었다. 즉 그 녀가 도망치기 직전까지 그녀가 쓰던 그녀의 방이었다. "어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요괴들은?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백가가는?" 그녀가 침상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릴 때 문이 기척도 없이 벌컥 열렸다. "혜연아. 이제 일어났느냐?" "아앗. 사형. 살아 있었어요?" 갑작스런 비명 같은 뾰족한 외침에 마진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약간 심하구나." "하지만....사형은 죽었잖아요. 그것도 처참하게..." "요 말괄량이 녀석. 설마 사형을 죽이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는걸. 도대체 내가 너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은 사람 취급을 하는 거냐?" "하지만, 하지만 분명 요괴들한테 팔다리가 뜯겨서 죽었는데." "이녀석아. 무슨 꿈을 꾼 거냐? 대명천지에 요괴는 무슨 요괴가 있다고 잠 꼬대를 주절대는 거냐?" "꿈? 꿈이었나? 하지만 분명 사형은 처참하게 죽었는데 멀쩡하게 살아있으 니..... 그래. 백가가! 백가가는 어디 있어요? 백가가도 요괴 있는 곳에 나 타나서 나를 구해줬었다고요." 금혜연의 오두방정에 여태 문 뒤에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백이충이 마지못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백이충이 나타나자마자 금혜연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백이충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소매. 나는 여기 있소. 사형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오." "백가가.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나를 구하러 자미관에 왔었죠?" "무슨 말이오. 정말 마대협의 말처럼 잠이 덜 깬 것이오? 나는 그대가 어 제 갑자기 나가버린 후에 밤새도록 소매를 기다렸소. 한 밤중에 마대협이 그대를 안고 오지 않았다면 걱정으로 십년을 늙어버렸을 것이오." "엑? 그럼 내가 꿈을 꾼 게 맞는 건가? 그런데 내가 나갔었다고요? 그럼 어디서부터 꿈이지?" 금혜연이 혼란스러워하자 마진걸이 껄걸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산에서 내려오는 데 나무 아래서 자고 있더구나. 큰 일이 일어난 줄 알 고 살펴보았더니 약간의 독이 있어 정신을 잃게 만드는 독과를 함부로 따 먹고 정신을 잃었더구나.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하여 사문의 자소환을 먹여 잔독을 해독시켰다. 데리고 오는 길에 그대로 쿨쿨, 코까지 골아대고. 아무리 무예를 익혔다고 해도 다 큰 처녀가 산속에서 함 부로 행동을 하다니. 무슨 짓이냐?" "에이. 뭐야? 그럼 산속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든 거로구나. 몽땅 꿈이었구 나. 괜히 걱정했네. 꿈이라지만 마음 졸인 것을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다." "뭐야? 이 녀석. 사형은 지금 너를 꾸짖는 중이야. 반성 안 해?" "헤헤. 그보다 사형. 오형산의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마진걸이 침중하게 표정을 굳혔다. "자미관은 폐허가 되었고 형산파의 사람들은 실종이 되었다. 안개는 아무 래도 자연적인 현상 같다. 사형도 오형산을 조사하는 가운데 일단의 무리 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무공은 별 것이 아니었지만 맹수들을 조련하여 공 격시키는 바람에 백호단의 부하가 전멸했다. 하지만 적도 큰 피해를 입고 도망쳤는데 끝내 놓치고 말았다." "엣? 그럼 맹수들을 본 것은 꿈이 아니네. 그들의 정체가 뭔지 몰라요?" "무림에서 그렇게 맹수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이십 년 전에 사라진 혈천마궁의 잔당 백수존자라는 마두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가 나타 나 뭔가 꾸미다가 사라진 모양이다. 백도맹에도 이미 전서구를 보내 내역 을 알렸다." "백수존자요? 백수존자라면 짐승들을 인간보다 더 아끼면서 사람을 짐승먹 이로 준다는 흉악한 마두잖아요? 그가 나타났단 말이예요?" "아무래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자미관의 폐허에도 곳곳에 짐승 의 발자국이 가득 차있는 것을 보면.... 이번 오형산의 괴사는 아무래도 그 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 백수존자는 여덟째의 수족이었지. 여덟째야. 미안하구나. 하지만 아무래 도 백도맹과 너희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켜야 내가 활동하기에 편할 것이 아니냐? 안 그래도 갑자기 사라진 너희들 아홉에 대해 백도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백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너희들을 끄 집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이제 백도는 물론이고 너희들 간에도 서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괜히 내가 활동하는 중에 내 종적이 우연이라도 혹시 밝혀져서 나를 없애려고 마음을 먹게 하기보다는, 서로 간에 분쟁을 일으켜 신경전을 벌이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는 게 나에게 좋아. 그리고....." 백이충은 자신의 방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금혜연을 남겨놓고 마진걸과 백 이충은 각기 자신의 방안에 돌아온 이후였다. "백도맹에 대해서는 마진걸을 심어놓았으니 이제 모든 백도의 일이 내 손 바닥 안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이십 년 이내에 맹주도 바라볼 수가 있는 거물로 성장하겠지. 칠괴혼합의 영혼을 가진 나의 수족이여. 후 후." "백가가. 무엇을 그리 중얼거려요?" "우와아앗!" 갑자기 들려온 금혜연의 목소리에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던 백이충이 화들 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뭐야. 백가가는? 이 예쁜 혜연이가 요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비명을 지 르게." "뭐, 뭐야? 소매. 언제 들어왔어. 말도 없이 남자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 떻게 해?" "어때요? 서로 부부가 될 건데. 어마. 뭐를 떨어트렸네. 이게 뭐예요?" 금혜연이 주워들은 것은 요요경이었다. 아마도 백이충이 놀랄 때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백이충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나왔다. "어마. 이쁜 거울이네. 이거 내가 가져도 되죠?" "소, 소매. 그건 선물로 줄만한 것이...." "이제 내 것이예요. 백가가. 고마워요." 금혜연은 요요경을 대뜸 자신의 가슴에 집어넣고 가슴을 쭉 내밀었다. 어 쩔 줄을 모르는 백이충을 보며 좋아 죽겠다는 듯이 쪽 소리나게 백이충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부리나케 방에서 달아났다. "소-매. 안-됀-단-말-이-야-아-아!" 11 만보장 살인사건(1) 청해에서 오형산을 넘으면 진령산맥을 타고 내려와 섬서성의 남부에 있는 종남산으로 이른다. 종남산에는 그 유명한 구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있 거니와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종남산 근처에 있는 만보장이었다. 만보장은 천하 십대부호의 한사람인 금산 황보돈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황 보돈은 황보세가의 방계혈족이다. 일찌감치 무가에서 독립하여 상계에 뛰 어들었고 자수성가하여 섬서성 제일의 부호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부호는 구두쇠에 남에게 인정이 없어 욕을 얻어먹기 쉬운데 황보돈은 다른 부호와 달리 인정과 지비심이 많아 매년 많은 재물을 풀어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도왔기에 활보살로 섬서성에 그 명성이 자자했다. 황보돈은 그 자신의 출신이 무림세가인 황보세가의 방계로서 무공의 고수 였다. 비록 그 자신은 무림에 직접 나서본 적이 없지만 그 친구들의 입으 로 전해지는 말로는 그가 황보세가 본가의 고수들에 비해 그 실력이 낮지 않다고 했다. 그는 유난히 협객들을 대접하기 좋아하며 사귀기를 즐겨하여 무림의 친구가 많기로 유명했다. 언제든 무림의 인사가 만보장을 들리면 후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만보장 자체의 세력 외에도 여타 세력에 속하지 않고 독보의 길을 걷는 유명한 무림고수가 항상 오십여명 이상 식 객으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황보돈은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더욱 만보장의 이름이 종남파를 무색하도록 빛나게 만든 것 은 황보돈이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 덕이었다. 황보돈의 둘째 아들인 황보 무악은 백도맹 사대검단 중에서 청룡단의 단주일 뿐만 아니라 무성 종리연 의 넷째 제자이기도 했다. 그것 만으로도 만보장이라는 가문이상의 명성이 거늘 그는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칠룡칠미의 하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거 곤란하군." 종남산 깊은 산속에 있는 어느 모옥 안에서 투덜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드는지 연신 투덜거리는 남자는 바로 대장군부의 이공자인 백이충이었다. "과거의 기억만을 더듬어 찾아왔거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이곳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마화타야. 마화타야. 너는 어 디있느냐?" 처음부터 백이충의 목적은 종남산이었다. 종남산은 과거 마도제일의 의원 인 마화타가 은거한 곳이었다. 과거 혈존 백무량은 아수라독존마공을 만들 기 위한 실험을 하다가 세 번 주화입마에 걸릴 뻔 한 적이 있었다. 그 위 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뛰어난 쌍영마공의 성취와 혈천마 궁의 의전 전주인 마화타의 의술 덕이었다. 마화타는 마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난 자였다. 자신의 의술을 연구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체실험도 서슴치 않았다. 그 런 그의 잔악함은 혈존과 잘 맞아 떨어져 일찌감치 혈천마궁에 투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혈천마궁의 시절이 마화타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혈천마궁 에 투신한 이래 마화타는 인명을 가리지 않고 마음껏 실험하고 남에게 쫓 길 위험도 없었다. 그의 손에 의술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죽은 사람이 수 천명을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의 생사를 자신의 손위에 올려놓고 즐기 던 마화타가 자신의 생명 역시 혈존의 손끝아래 달려있으며 그것이 결코 즐겁지 않은 일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화타는 혈천마궁의 권력층 고위급 인사이면서도 동시에 혈존의 잔악함에 두려움을 품고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처지였다. 어제까지 귀여워 하며 총애하던 수하를 오늘 면상이 기분나빠 보인다고 찢어죽이는 상전을 모시고 있다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것이었다. 혈천마궁의 이인자라는 부궁주의 평균 재임기간이 한달이 채 넘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자리 에서 잘린 부궁주는 당연히 목도 같이 잘렸다. 혈천마궁에서 지위가 높아 진다는 것은 혈존과 마주칠 기회가 많아진다는 소리였고 동시에 목숨줄이 짧아진다는 소리와도 동일했다. 세 번째의 주화입마를 극복했을 때 혈존은 몹시도 기분이 좋았다. 아수라 독존마공이 완성될 실날 같은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마화타에게 소원을 물어 들어주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화타의 소원은 뜻밖에도 혈천마궁을 벗어나 은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혈존은 내뱉은 말이 있어 그를 보내주었으나 언제라도 그를 부를 수 있도 록 그의 위치를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의 의술에 미련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화타는 그런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지금 그의 거처에서 감쪽같 이 사라졌던 것이다. "일단 혈존이 되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 무공은 갖춰야 함이 당연지사. 허나 혈환 조차 소용이 없으니...." 만년삼왕보다 열배는 효과가 좋은 혈환도 그의 근골을 바꿔놓지 못했다. 혈존의 명을 받들어 쌍노가 심산유곡의 찾아다니며 발견한 수많은 약초가 함유된 혈환이었다. 거기에 보태서 쌍노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며 태아와 처녀의 피를 흡수시켜 간신히 만들어 놓은 것이 혈환이었다. 그 혈 환도 백이충의 몸에 쌍영마공이 기어다닐 수 있는 기초혈맥만을 간신히 뚫 어놓았을 뿐이었다. 오직 혈존만이 알고있는 쌍영마공의 구결만 있으면 단숨에 쌍영마공 삼성 의 성취를 얻을 수 있는 혈환을 복용한 지금 백이충의 성취는 삼성은커녕 고작 일푼도 못되는 것이었다. "내 영혼(혈존 백가량)이 내 몸(백이충)에 스며들며 살아나기는 했으나 원 래대로라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어머니 배속에서 유산되었어야 할 처지. 무 리하게 몸을 안정시키고 억지로 살아나 태어나느라 전신의 근골과 혈도가 뒤틀려 있으니 무공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당연지사. 대장군부의 자식인 내가 문의 길을 걷겠다고 했는데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혼쾌히 허락하심 은 이를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태어났을 때에 전신 혈도가 개통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자라면서 공기를 호흡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탁한 기운이 쌓이고 쌓여 중요 혈도가 조금씩 굳어가기 마련이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익힌 다는 것은 그런 혈도의 불순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진기가 오고가는 통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이충은 태어날 때부터 전신 혈맥이 막혀있고 근골이 뒤틀려 있었 다. 혈도와 혈맥이 막힌 사람이 어찌 여태까지 살아날 수 있느냐하면 쌍영 마공이 태아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필요한 최소한의 대혈만을 뚫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공이라는 것이 어찌 중요대혈만 막혀있지 않다고 수 련 가능한 것이겠는가? 현재의 백이충은 늙어 죽을 때까지 가늘게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나 대신 무공을 익히거나 힘을 쓰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혈 환이 중요 대혈 외에 겨우 기초혈도까지 뚫어놓기는 했으나 무공을 익히기 위한 세맥까지 뚫는다는 것은 정말 멀고도 먼 길이었다. 배교의 술법이 무 공과 관련이 전혀 없이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마화타만큼 인체에 대해 의술에 깊은 경지에 도 달한 자는 없다. 내 주화입마를 치료하던 의술이 필요하다. 배교의 법술은 거의 다 되찾았다고 하지만 무공이 없으면 무공을 아는 도가의 사람이나 천무삼성 같은 실력자를 만났을 때에 곤란하다. 마화타만이 의술로서 내 몸을 건강한 일반인처럼 만들 수가 있다. 하지만 그를 찾을 수가 없으니... " 방안은 백이충이 마구 뒤진 듯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마화타는 이곳 에 은거하면서 무슨 실험을 했느지 온통 이상한 혈액과 인체도를 모아놓았 었는데 그런 것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의학서적이었는데 드문 드문 마화타의 필적이 담긴 연구일지도 있었다. 연구일지를 대충 흝어보던 백이충은 발치에 떨어진 인체도를 주워들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마화타란 녀석. 의술은 뛰어나지만 겁쟁이로 알로 있었는데 이 런 묘한 연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거야 내가 그의 의술을 이용했던 것이 아니라 마화타가 혈존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꼴이 아닌가?" 백이충은 의술이라고는 몰랐으나 인체도를 보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 었다. 아수라독존마공. 백가지 마공원류로 나뉘어 그 성질이 비슷한 것은 무엇이든 흡수하는 천하 최악의 마공. 인체도에 그려진 여러 성질은 아수 라독존마공과 전혀 틀리면서도 어딘가 그 맥을 같이 했다. 아수라독존마공 의 존재를 알 리가 없는 마화타도 혈존을 치료하고 진찰하면서 마공의 그 효능에 대한 일을 눈치챘는지도 몰랐다. 마화타의 연구일지를 보면 남의 무공을 흡수하는 어떤 것을 연구했음이 분 명했다. 아수라독존마공이 남의 마공을 흡수하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것도 무림에 널리 알려진 사공이학처럼 단순히 남의 진기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아수라독존마공처럼 남이 애써 수련한 모든 무공을 통째로 훔치는 연구같 았다. "내 주화입마를 치료하면서 혈존일 때의 몸과 내공진기 흐름을 연구해서 무엇인가 연구했던 것이 틀림없는데... 수많은 재료와 후원이 필요한 연구 이고 보면 세력도 없이 홀로 있는 마화타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기는 불가 능한 일이고, 역시 아홉 중의 하나와 손을 잡은 것일까?"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방안으로 두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혈존 백가량 의 수족과도 같은 쌍노였다. 여태까지 모옥을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 지고 다닌 쌍노였다. "주군.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마화타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흔적 으로 보아 이미 몇 년전에 이곳을 떠난 것 같습니다." "바닥에 뿌려진 혈혼으로 보아 마화타에게 뜻밖의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합 니다. 모옥의 시설과 의술서적 대부분을 그대로 놓고 황급히 몸만을 피했 음이 흔적에 나타나 있습니다." 백이충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쌍노에게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 어봤자 얻을 것이 없음을 안 것이다. "쌍노는 다시 한번 종남산을 수색해 보고 은표전장을 시켜 마화타의 행적 이나 혹은 그에 관련된 것 같은 사실이 있으면 알리도록. 나는 내려가 봐 야겠다." 쌍노가 사라지자 백이충은 자신의 손에 들린 인체도를 들고 보다가 자신의 품에 넣고 모옥에서 빠져나왔다. 종남산을 거의 다 내려오자 백이충은 미 련이 남는 듯 산어귀를 돌아보다가 다시 산 아래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 다. "쌍노가 뒤지고 있으니 그의 종적이라도 발견한다면 알려오겠지. 소매가 만보장에 들린다고 해서 그 틈에 빠져나왔는데 너무 늦었구나. 화를 내기 전에 어서 돌아가 봐야겠다." 만보장에는 경사가 있다고 했다. 만보장주의 첫째 아들이 혼인을 한다는 것이다. 만보장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무림인들과 이름있는 대협들 이 만보장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사실 금산 황보돈은 반은 무림인이 지만 반은 상인이기에 비록 만보장의 자식이 혼인하는 경사라고 해도 이렇 듯 거물들이 대거 만보장으로 몰려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았 다. 하지만 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 유명한 청룡일검 황보무악이 만보 장에 돌아온다면 사정이 틀렸다. 백도맹 청룡단주인것만으로 무림인의 부 러움을 살 텐데 백도 후기지수의 제일이라는 무림칠룡의 한사람, 거기에 현 백도맹주 무성 종리연의 넷째 제자까지 겸했다면 모든 무림인들이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미래 무림을 이끌어나갈 확실한 예비 거물이다. 많은 무 림인들이 황보돈과의 친분을 빙자하여 그와 안면이라도 익히기 위해 만보 장에 몰려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금혜연은 자신이 찾는 제갈가주가 만보장에 들렀을 가능성이 많다며 잠시 만보장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녀가 같이 가지고 떼를 썼지만 금가장주를 따라 몇 번 만보장에 들렀던 금혜연이라면 몰라도 관부, 그것도 대장군부 의 후예가 만나본 적도 없고 인연도 없는 상인을 찾아가는 것도 이상해서 정중하게 금혜연에게 만보장의 출입을 거절했다. 사실은 종남산을 직접 눈 으로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분해. 분해! 너무 분해, 정말 분해. 이가 갈릴 정도로 분하다구." 객점에 들어와서 금혜연의 방문 앞에 섰던 백이충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에 깜짝 놀랐다. 금혜연의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 같아 살며시 귀를 귀울여 보니 안에서 씨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혜연이 어느 사이 에 자기 방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기척을 내려던 백이충은 바드득 이가는 소리까지 들리자 방안의 공기가 심 상치 않다 싶었다. 혹시라도 자기가 몰래 종남산으로 빠져나간 것 때문에 저리도 골이 났나 싶어 백이충은 살며시 소리 안나게 문을 열고 방안을 훔 쳐보았다. 방안에서는 금혜연이 침대에서 금침과 배개를 손에 들고 입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입에 이불 헝겊이 물렸는데도 그것이 갈가리 찢어지며 이가는 소 리가 들렸으니 가히 공포의 이빨이라고 할만했다. 손톱도 날카롭게 세워 목침을 마구 쥐어뜯고 있었다. "뭐야? 내 앞에서 아부나 하고 잘 보이려고 꼬리나 치던 것들이. 감히 나 를 무시해? 우아악. 너무 분해." 금혜연은 알아들을 수 없는 분통을 터트리며 목침을 집어 던졌다. 가만히 보니 방안이 온통 난장판인 것이 물건 한두 개를 집어던진 게 아닌 것 같 았다. 꽃병이 깨어져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저-. 소매." 백이충이 쭈볏 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가 장군부를 떠나 올 때 금혜연에게 무슨 일(남녀가 같이 동행하니 부모가 걱정할 일은 뻔했 다.)이 있으면 반 죽음이라고 백이충에게 신신 당부를 한 여인이었다. 게다 가 약혼자라는 명분도 있고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백이충이 비록 혈존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몸도 정신도 젊은 청년이 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금혜연에게 정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백가가?" "소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진정하고.... 내가 늦게 들어와서 화났어?" "우아아앙. 백가가. 나는 너무 분해요. 그것들이....훌쩍." 금혜연은 다짜고짜 백이충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백이충의 가슴을 흠뻑 적시며 훌쩍이는 금혜연에 대해 백이충은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 알 수가 없어 식은 땀만 흘리고 있었다. 훌쩍이던 금혜연이 어느정도 진정되는 것 같자 그녀를 안고 등뒤를 도닥여 주던 백이충이 부드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그것들은 누구고?" "훌쩍. 그것들은 백리혜 일당이예요." "백리혜? 그 여자는 누구지?" "내 천적이예요. 예쁘지도 않고 잘나지도 못한 게 자기 가문의 배경만 믿 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역시 겉멋만 잔뜩 든 다른 계집애들을 추종자라고 몰고다니며 건방떨기에 바쁜 계집애예요. 백리세가의 딸이라고 자기가 가주라도 되는 줄 아나?" 12 만보장 살인사건(2) 천하에는 무를 가문의 업으로 삼고 사는 가문이 많다. 하다못해 백이충의 가문인 대장군부도 무가이다. 그리고 강호에서도 가문의 절기가 하나의 정 립된 무예로서 알려진 무가를 무림세가라고 한다. 금가장이나 만보장도 무 림세가라고 할 수가 있으며 독과 암기로 유명한 사천당가도 역시 무림세가 의 좋은 표본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허나 유구한 전통과 함께 구대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세력과 무공을 가지고 백도의 기둥임을 자처할 수 있는 무림세가는 다섯에 불과했다. 이를 오대 세가라고 하거니와 이십년전 고금제일마를 제거하는 데에 힘을 보탠이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명성은 가히 고금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성세를 이 루고 있었다. 오대세가라 함은 천하제일가이며 연나라 왕족의 정통후계이면서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인 건곤무적류와 건곤무적장을 소유한 모용세가. 열 여덟 종류의 박심정대한 무예를 소유하고 있는 백리세가. 강호 십대검객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며 현무도선의 뒤를 이어 천하제이검 으로 추앙받고 있는 남궁비가 가주로 있는 남궁세가. 강맹한 오호단문도법으로 유명한 하북팽가. 강력한 적수인 사천당문이나 진주언가 등을 제치고 무성 종리연의 배경아 래 오대세가의 한자리에 급작스럽게 부상한 종리세가 등이 있었다. 이들 오대세가는 본가의 세력과 무공 외에도 수많은 방계혈족 및 제자들로 인하여 그 세력이 구대문파에 못지 않았다. 더욱이 대부분 본산에 틀어박 혀 세속일에 신경쓰지 않으며 속가제자들의 양성으로 천하에 간접적인 영 향을 끼치는 구대문파에 비해 직접 천하에 몸을 부딪혀 세력을 넓혀가고 상권을 장악하는 오대세가는 오히려 무림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줄 수가 있었다. 백리세가의 가주는 이녀일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열 살박이 철부지라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녀 다지부용 백리설은 무림칠미의 한사 람으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무성 종리연의 수제 자이며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인 무적소야 모용풍의 약혼자로도 유명했다. 무림칠미는 모두 백도의 거대세력의 후손들인지라 서로 친했고 따라서 금 혜연도 백리설과는 친했다. 그녀를 따라 백리세가에 몇 번 놀러간 적이 있 을 정도였다. 하지만 금혜연이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백리세가의 둘째딸 백리혜였다. 철없는 하룻강아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고 백리혜가 그 꼴이었다. 가문의 위세와 언니와 형부될 사람의 명성에 힘 입어 그녀는 무서운 것도 없고 버릇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두가 귀여워 하고 떠받들다보니 자신 가문보다 못한 출신의 사람이라면 무조건 깔보고 들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 백리혜에게 무당파의 배경을 업고 언니와 함께 무림칠미의 하나이면 서도 자신을 경멸하듯 보는 금혜연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여태 자신이 인 정하고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언니 한사람 뿐이었는데 나이도 비슷한 것 이 백리혜보다 명성도 놉고 사사건건 자신을 가르치려하니 두눈에 독기가 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우르렁거리는 천적 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배경이나 미모, 무공 무 엇으로도 백리혜는 금혜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글세, 그것이 이번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만보장에 놀러왔지 뭐예 요? 제갈숙부를 만나고오는 길에 반갑기에 인사나 했는데..." "그런데 왜? 무당파를 봐서라도 그녀가 소매를 모욕할 수는 없을 텐데." "고것은 지금 황부무악을 꼬시려고 온 거예요. 그 주제에 백가가를 모욕하 더라고요." "엥? 그건 무슨 소리야?" 백이충은 왜 불똥이 자신한테 튀나 싶어 금혜연에게 물었다. 금혜연이 털 어놓은 속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만보장에 들려 제갈숙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던 금혜연은 제갈숙부 에게 백이충을 만나보겠다는 확답을 들은 후에 들뜬 기분으로 젊은 사람들 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과연 자신이 반가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갈세가의 딸이며 자신과 친한 제갈청미, 화산파의 여제자인 화문향등, 여러 명의 여협객을 꿈꾸는 젊은 소녀들이었다. 백도맹이 결성된 이래 구 파의 제자들은 친 사형제처럼 친분을 도모했으므로 여제자들도 서로간에 언니동생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게다가 금혜연은 그런 무리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격의 인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참에 서로 반가워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며 수다를 떨고 있 을 때 금혜연이 듣기에 참으로 재수없는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왔 다. "오호호호. 무림에서도 그 이름도 유명한 옥수비연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 지 행차하셨나 그래?" 금혜연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평생 만나기 싫은 여자한명이 수십 명의 여자와 남자에 둘러싸여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금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혜와 그 떨거지들, 오대세가의 방계나 그 세력에 속한 무림문파의 여 식들이었다. 또한 그에 섞인 남자들은 보나마나 백리혜의 추종자들임이 분 명했다. "호호. 금혜연. 여기서 무슨 일이지? 만보장과 금가장은 서로 왕래도 없을 텐데 네가 왜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냐? 요즘 잘나지도 않은 여자아이 하나 가 제 주제는 모르면서 사문의 배경만 믿고 여기저기 낄데 안낄데 가리지 않고 참견한다는 데 이름이 옥수비연이라던가?" "어? 네 이야기를 하면서 왜 내 별호를 갖다 부치니?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 온 거냐? 백리세가도 만보장과 왕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잖아." 파지직. 두사람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호호호. 나야 우리 황보대가를 만나러 왔지. 너는 무림의 장래 대협객이 되실 청룡일검 황보대가와 무림의 꽃인 내가 원앙 같다는 소문도 듣지 못 한 모양이지? 설마 너도 황보대가에게 꼬리를 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 은 아니겠지? " (저 것이?) 불끈. 주먹을 쥐고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려졌던 금혜연이 곧 표정을 바꿔 방실방실 웃으며 백리혜를 쳐다본다. "어머나. 남들이 듣고 오해하면 어쩌려고? 이몸은 약혼자가 있어서 말이 야. 나는 지금 내 약혼자인 백가가와 달콤한 사랑의 여행을 하고 있단 말 씀이야. 어디서 들려오는 소문처럼 싫다는 남자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천박한 여자 같지는 않거든." "크으윽." 백리혜가 청룡일검 황보무악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소문은 어제 오늘의 일 이 아니다. 황보무악도 백리혜의 배경을 생각해 그녀를 피하고 있지는 않 지만 그렇다고 둘이 연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없었다. 두사람이 쳐다보는 얼굴 사이에 번개가 치고 벽력이 울렸다. 제갈청미와 화문향등 구파의 여제자들이 사사삭 하고 뒤로 피해 백리혜의 시선에서 도 망간다. 반대로 백리혜의 떨거지도 얼굴이 창백해지며 일제히 고개를 푹 숙인다. 백리혜가 뭐씹은 얼굴을 하더니 살기찬 시선과 요사스런 웃음을 보내온다. "맞다. 맞아. 너는 약혼자가 있었지. 듣자하니 대장군부의 아들이라며?" "그래. 아주 멋진 분이시지." 금혜연은 백이충이 화제로 오르자 금방 경계심을 풀고 방실거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빈틈을 백리혜가 놓칠 리가 없었다. "대장군부 출신이라면 네 약혼자는 무공도 고강하겠네? 어머, 좋겠다. 한 번 소개 좀 해주지 그러니. 우리 황보대가 만큼 뛰어난 고수인지 나도 보 고 싶구나." "으으윽." (저 계집이 백가가가 백면서생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소문으로 듣고....) "우리 백가가는 무예를 익히지 않았어. 하지만 학문이..." "어머머. 무슨 소리야? 무림의 여자들인 우리가 볼게 뭐니? 협의심과 늠름 한 기상, 그리고 고강한 무공아니니? 설마 떠도는 헛소문처럼 닭잡을 힘도 없는 백면서생은 아니겠지?" "뭐야? 무공이 전부는 아니라고. 우리 백가가는 이번 과거에 탐화로 급제 했을 정도로 학문이 깊단 말이야." "학문이라고? 세상에 학문이 깊은 사람이 한 둘이야? 우리 무림인이 관리 의 직위 따위 무시하는 것은 상식아니니? 그리고 과거에 급제했다고? 그럼 관직을 받았겠구나. 그래, 어떤 높으신 분이니?" "그게.... 아직까지는 관직을 거절하고 계시지만." "저런. 그럼 아직 관직도 얻지 못한 햇병아리 서생이잖아. 그래서야 천하 에 널리 고리타분한 유생과 다를바가 어디있니? 천하의 옥수비연과는 짝이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니?" 순식간에 금혜연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더 얕잡아 보이기 싫어하는 계집이 자신이 사랑하는 백가가를 무시하니 어찌 참을 수가 있을까? 마침 제갈청미가 금혜연을 거들었다. "혜매. 말이 너무 심하다. 사람이란 단순한 비교가지고 그 가치를 논할 수 가 있는게 아니야." 제갈청미의 말에 도도한 시선으로 코웃음을 친 백리혜가 다시 금혜연에게 공격을 가했다. "어머. 제갈언니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 약혼자는 다른 장점이라도 있나 보구나. 혹시 얼굴이라도 잘생겼니?" "백가가는 누구나 호감이 갈만한 얼굴이야." "어쩜. 그렇구나. 이봐요. 혁소협. 이제 혁소협의 외호에서 옥면이라는 별 호는 금혜연의 약혼자에게 넘겨주셔야 겠네요. 천하의 미남이 출현했으니 까 말이예요. 호호호." 백리혜가 지적한 남자는 백리혜를 따라다니는 젊은 무림인의 하나로 얼굴 이 깍아놓은 조각상처럼 잘 생겼다고 하여 옥면일협이라 불리우는 혁우비 였다. 그는 금혜연의 시선과 백리혜의 시선을 동시에 느끼고는 망설이다가 황급히 백리혜에게 아부했다. "백리소저. 황보대협에 비하면 나는 감히 미남이라고 자처할 수가 없소. 하지만 그 외의 남자에게 저는 양보할 수가 없소이다. 금소저의 약혼자를 볼 수 있다면 누가 진정한 미남인지 승부를 가려 보겠소." "남자가 기생오래비처럼 잘생겨서 뭐해?" 금혜연이 분한 심성을 이기지 못하고 빽하고 소리쳤다. 금혜연이 봤을 때 에도 혁우비의 말은 빈말이라도 백이충이 더 잘생겼다고 우길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금혜연은 말싸움에서 패색이 완연했고 그럴 수록 백리혜는 득의와 승리의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호호호. 젊은 처녀가 그럼 남자에게 바라는 것이 뭐니? 무공도 형편없고 잘생기지도 않았으면 무엇으로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지? 설마 그럴 듯 하게 읊는 문장 몇구절에 천하의 옥수비연이 넘어간 건 아니겠지? 듣자 하니 대장군부의 후계자가 아니라 그 성도 잇지 못한다고 하니 앞으로 권 세를 누릴 수도 없을 것이고. 오라. 혹시 대장군부의 재산이 많아 앞으로 한평생 너를 호강시킬 재물이라도 있는거니?" 백리혜의 말에 그녀의 추종자 중의 하나인 연수유가 얼른 나섰다. "제 가문이 상가의 가문이라 알지만 대장군부에 재력이 있다는 소리는 듣 지 못했습니다." 연수유는 호북성의 부호의 아들로 만보장 황보돈의 장남인 황보문악과 친 구였다. 이번에 친구의 혼사를 축하하러 왔다가 백리혜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속물들. 얼굴이나 재물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거냐?" "어마. 금혜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네말을 들어보면 네 약혼자는 재산도 지위도 없고 무예도 별 볼일 없고 잘생기지도 않았다는 말이 되는구나. 제갈언니의 말처럼 남자가 그런 것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네 약혼자가 천하에 자자한 협명을 떨친 것도 아니고 어떤 성취를 이뤄 그 이름을 떨친 인물도 아니지 않니? 물론 네가 느끼기에 너의 백가가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겠지만." "우리 백가가는 너희들이 무시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어머. 누가 무시했다고 하니? 하지만 우리 황보대가는 멋지고 훌륭한 사 람인데다 협명도 천하에 자자하고 그 성취를 이뤄 백도맹에서 청룡단주가 되기까지 했단다. 무공도 고강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만보장의 아들이니 당 연히 재산도 많지. 어머, 몰랐는데 말하고 보니 네 백가가와 너무나 비견 되지 않니?" "백리혜. 이 구미호 같은 것이." 그날 백리혜에게 달려들려는 금혜연을 제갈청미와 화문향이 필사적으로 뜯 어말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남의 집에 와서 다 큰 처녀들이 싸웠다고 하면 그 부끄러운 소문이 어디까지 돌지 상상도 가지 못했다. 게다가 백리혜는 완전히 기세가 등등해서 겨우 진정한 금혜연의 앞에서 말끝마다 '너의 백 가가는'하면서 금혜연의 약을 올렸던 것이다. "뭐야? 그럼 소매는 내가 창피한 거야?" 백이충의 짜증이 역력한 말에 금혜연은 금새 얼굴을 도리도리했다. "아니예요. 백가가는 백가가인걸요. 황보무악을 한 수레 그냥 준다고 해도 싫어요. 나는 백가가만 있으면 되요." 눈물이 글썽거리며 변명하는 금혜연을 향해 백이충이 불쾌하게 물었다. "하지만 백리혜라는 여자의 말에 화를 낸 것은 속으로 나를 창피하게 여겼 기 때문 아냐?" 필사적으로 백이충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금혜연은 눈물이 글썽어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루룩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니예요. 아니야. 나는 백가가가 그 계집애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 뿐이예요. 나는 조금도 백가가를 창피해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금혜연의 눈물을 보자 불쾌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며 금혜연이 애처롭게 보 이기 시작했다. 백이충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금혜연의 눈물을 딱았 다. "소매. 제갈청미라는 소저도 말했잖아. 사람은 그렇게 단순비교로 가치를 정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야. 소매의 마음에 내가 있다면 다른 사람의 말 정도는 무시하면 돼잖아. 왜 혼자 속이 상해서 울고 있는거야? 그냥 흘려 버리라고." "하지만, 하지만....." "왜? 흘려버릴 수가 없어?" "나. 그 계집애에게 넘어가서... 내일 백가가를 만보장에 데려가기로 했단 말이예요. 우와아앙. 용서해 줘요." 금혜연은 다시 백이충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백리혜의 꼬임에 넘어가서 백이충을 만보장에 데려간다면 그녀일당이 백이충에게 얼 마나 창피를 줄지 뻔히 알면서도 그걸 승낙한 자신이 미웠던 것이다. 백이충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금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이제 그만 좀 울어. 네가 울면 나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야." "하지만. 훌쩍. 아니예요. 됐어요. 만보장에 가실 필요는 없어요. 내일 내가 창피를 당하더라도 그녀 앞에서 백가가와 함께 오지 못했다고 약속을 취소 할 께요. 모두 제탓이니까." "정말이지. 너에게는 내가 사정없이 휘둘리는 구나." 백이충은 그녀를 안아 가볍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내일 나와 같이 만보장에 가자. 그래서 소매를 창피주었던 그 일당의 코 를 납작하게 해주자꾸나. 내 여자가 남에게 얕잡아 보이는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리고 이건 나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13 만보장 살인사건(3) 만보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문 앞에서 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만보장에 돌아오겠다고 소식을 알린 사람은 바로 청룡일검 황보무악. 아들 을 마중나오는 사람들 치고는 너무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나온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도대체 경사의 주역이 황보돈의 큰아들 황보만금인지 형의 결 혼을 축하하기 위해 돌아온 황보무악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단 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금산 황보돈은 아버지이니 그렇다고 쳐 도, 개방의 장로 악취결개, 청성파의 장로 창천일학, 제갈세가의 가주 만묘 귀산, 황보가의 장로 황보도일, 현황방의 수석당주 경천일권 등의 엄청난 신분의 무림거두를 비롯하여 십여 개 방파의 수뇌급이 모여있었으니 이런 환영은 왠만한 일방지주보다 더한 대접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아, 오는군." 황보돈의 나직한 탄성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네 명의 사람이 말을 타고 이야기를 하며 오다가 만보장에 몰린 인파를 보고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다가왔다. 하나같이 늠름하고 잘생긴 장부이며 협객의 기상을 풀풀 날리는 청년들이었다. "아버님.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여러 선배님. 후배 황보무악이 강호의 대선 배들에게 인사드립니다." 황보무악은 황보돈의 앞에서 말에 뛰어내리자 마자 큰 절을 올렸다. 황보 돈이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반가히 맞이하며 부축해 일으키자 그는 일일이 황보돈의 옆에 있는 무림선배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보무악과 같이 있던 세 사람은 천천히 말에서 내린 후 황보무악이 자신들을 소개할 때까지 기 다렸다. "무악아. 같이 오신 분들은?" 그들의 기상이 범상치 않았다. 황보돈이 보기에 세사람은 무림칠룡의 한사 람인 자신의 아들에 비해 전혀 그 기상이 뒤지지 않았다. 황보돈이 물을 때 옆에 있던 악취결개가 대소를 터트렸다. "이것참. 평소에는 한명도 만나기 힘든 무림칠룡의 네사람을 여기서 한꺼 번에 만나다니. 오늘 만보장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이 노개를 크게 부러워하겠구먼." 악취결개의 말에 모두들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무림칠룡이라 함은 당금 무림에서 배경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일파지주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니 고 있는 거물들이었다. 무림칠미처럼 그 미모만 가지고 딴 명성이 아니라 서 칠미의 신분이 들쑥날쑥한데 비해 칠룡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의 핵이라 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만보장이 비록 작은 문파는 아니었다하더라 도 이들 칠룡이 넷이나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현 백도맹의 맹주 무성 종리연은 범같은 네 명의 제자를 두었으니 이들 넷 이 모두 무림칠룡의 자리에 올랐다. 수제자는 오대세가의 제일세력인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이며 무림출도이후 단 한번도 패해 본적이 없다는 무적소야 모용풍. 둘째 제자는 오대세가 중의 하나인 남궁세가의 셋째 아들이며 벌써부터 부 친의 성취를 넘봐 장래의 천하제일검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창궁일준 남궁 홍일. 셋째 제자는 무성 종리연의 조카이며 젊은 종리세가의 가주인 진천신룡 종 리비. 무성 종리연이라는 거물을 배출한 가문이라고 하지만 짧은 시간안에 종리세가를 무림 오대세가의 하나로 올린 수완있는 거물. 넷째 제자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로 만보장의 둘째 아들이며 청룡단의 단주인 청룡일검 황보무달이었다. 또한 이들 넷 이외에도 구파일방에서도 무림칠룡의 셋을 배출했는데 소림 이대제자이며 소림장문의 제자인 백미불 무아. 무당파의 제자이며 백호단을 맡고있는 백호검 마진걸. 곤륜파의 젊은 사자인 곤륜사자 도기훈이었다. 황보무악이 소개하자 그와 동행하고 있던 세명이 즉시 황보돈에게 인사를 드렸다. "후배 남궁홍일이 사제를 따라 숙부님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후배 종리비가 사제를 따라 숙부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곤륜파의 도기훈이라고 합니다." 세사람은 오만하게 오직 황보돈에게 인사를 드렸을 뿐 나머지 사람들에게 는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오만하다고 탓할 수가 없었다. 황보돈 역시 황보무악의 부친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들 셋의 인사를 먼저 받을만한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천신룡은 욱일승천으로 세력을 넓혀가며 힘으로 오대세가의 한자리를 차 지한 종리세가의 젊은 가주였다. 결코 그의 신분은 구대문파의 장문인에 못지 않았다. 무림에서의 위치를 본다면 오히려 황보돈이 먼저 인사를 해 야될 처지였다. 결코 남에게 숙이고 들어갈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궁일준 역시 남궁세가의 아들로 스스로 검에 미친 젊은 무인들만을 모아 천검회라는 소규모 단체를 따로 만들만한 야심가였다. 그의 희망이 언젠가 본가인 남궁가를 능가하는 규모의 방파로 천검회를 키우겠다는 것이었으니 일파의 장로격인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일만한 사람이 아니다. 곤륜사자 도기훈은 구대문파의 하나이면서도 모든 것이 신비에 가린 곤륜 파에서 내놓은 보물. 젊은 나이에 현 곤륜파의 사숙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천무삼성과 배분이 같은 곤륜일성의 제자였으므로 당금 무림에 서 무성 종리연과 배분이 같은 신분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오히려 다른 나이많은 노인들이 그를 선배로 받들어 모셔야 할 판인 것이다. "이거 이렇듯 무림의 앞날을 이끌어나갈 사람들을 보니 눈이 다 부시는 구 려." 제갈가주의 가주인 만묘귀산 제갈도용의 인사를 필두로 분분히 인사가 오 고갔다. 거대세력을 배후에 두고있는 무림칠룡인 만큼 젊다고는 하지만 이 들 무림의 노선배들도 장래의 무림의 기둥이 될 이들과 친분을 쌓아두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황보돈의 안내로 만보장 안에 들어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멈칫했다. 만보장 의 후원에서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 피리소리는 사람을 홀리듯 구구절절하여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홀린 듯 피리소리를 듣고있던 황보무악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황보돈에게 물었다. "본장에는 이런 솜씨를 지닌 악사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 피리를 연주하 시는 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황보돈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글세. 저쪽은 이번에 손님으로 오신 분들중에 젊은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 는 후원쪽이로구나. 백리소저가 있는 쪽인데?" "백리혜? 그녀가 왔단 말입니까?" 황보무악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백리혜의 애정공세 가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어 은근히 그녀를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데 설마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을 줄이야. 하지만 뒤이은 황보돈의 말에 무 림칠룡의 네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번뜩였다. "그래. 백리소저 외에도 제갈가주의 따님인 제갈소저와 금가장의 금소저, 화산파의 화소저들도 모여 있단다." "금소저가 왔단 말입니까?" 곤륜사자 도기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무림에 나선이래 구파일방의 제자 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도기훈은 몇 번 금혜연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마진걸 에게 금혜연의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으나 한번 품기 시작 한 그녀에 대한 호감은 사라질 줄 몰랐던 것이다. "숙부님. 금소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다만. 후원으로 안내해 주실수 있습니까?" "지금 모두를 환영하는 연회가 준비되어 있네. 어차피 그들도 참석할 자리 이니 우리가 도착한 이후에 그 자리로 그들을 부르면.." 황보돈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흐려버렸다. 도기훈이 당장이라도 후원으 로 달려갈 듯이 몸을 날릴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궁홍일과 종리비도 호기심에 찬 눈빛을 보였고 황보무악 역시 부친의 앞이라 내색은 못했지만 금혜연을 만나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림칠미는 무림칠룡과 더불어 무림에서 가장 명성이 뛰어난 이름이었다. 하지만 무림을 넘나들며 무공과 협명으로 지위와 명성을 쌓은 무림칠룡과 달리 무림칠미는 미모로서 알려진 명성일 뿐이었다. 그 미모라는 것도 주 변의 인물들에 의해 알려진 것이라 무림칠미는 이름만 요란했을 뿐, 그녀 들의 얼굴을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 몸가짐이 어찌나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지 그들의 신분과 거처를 안다고 해서 누가 한 번 보려고 마음 먹는다고 해도 현실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미모 때문에 봉변을 당할 것이 염려되어서 인지 무림칠미는 무림에 한 번 나타날 때에도 꼭 사문이나 가문의 보호자나 어른들의 보호아래 다녔고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나마 무림에서 다른 인물들이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 백리설과 금혜연이었다. 백리설은 자신의 약혼자인 모용풍과 같이 백도맹에서 자주 어울리느라 얼 굴이 알려졌고 금혜연은 자신의 사형인 마진걸을 졸졸 쫓아다니며 괴롭히 느라 그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 이들 넷은 무림칠룡이라 불리면서도 다른 무림칠미를 거의 본 적이 없었 다. 다만 종리연의 제자들은 대사형의 약혼자 백리설을 보았을 뿐이다. 하 지만 모용풍의 약혼자인 백리설을 보며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했을망정 감히 모용풍의 앞에서 딴 마음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무림칠미 의 하나인 금혜연이 여기에 있고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 도기훈이 저렇듯 흥분하니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도용은 이들 젊은이들이 나이많은 노인과 어울리는 것보다 젊은 미인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냥 젊은이 라면 버릇없다고 꾸짖기라도 하겠지만 이들은 그럴 신분이 아니었다. 게다 가 후원에는 자신의 딸도 있으니 잘만하면 무림의 최고 신랑감을 사위로 맞는 꿈도 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황보장주. 그렇다면 가는 길에 후원에 먼저 들러 다른 젊은이들도 함께 데리고 연회장으로 갑시다." 연회장에서 기다리는 다른 만보장의 식솔이나 무림인들, 특히 황보돈의 큰 아들인 황보만금을 생각한다면 안될 말이었지만 장내에 모인 모든 노인들 은 오늘 만보장을 찾은 젊은이들의 신분에 짖눌려 아무도 제갈도용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이충은 피리를 입에서 떼어내었다. 모두들 넋을 잃고 환상에 빠져 있었 다. 백이충을 깍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던 백리혜와 그녀를 따르는 젊은 남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백리혜의 추종자인 여자들도 이제는 꿈속의 왕자님 을 보듯 백이충을 쳐다 보았다. 백이충은 암암리에 미소를 띠었다. (역시 음마의 실혼조화곡은 쓸만하군.) 음마는 마교의 교주 천마가 무림을 지배할 때 그의 동료로서 변황세력과 맞선 천명의 마도 고수중의 한사람으로 혈존의 음모아래 만근화약의 희생 양이 되었던 일대 마두. 음마는 휘파람 소리에 내공을 불어넣어 부근 일리 이내의 모든 사람들의 생사를 조종했다는 음공의 대가였다. 혈존이 천명의 마왕들의 무덤을 뒤져 칠대절예와 함께 그의 비급 실혼조화곡의 악보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내공과 함께 시전한다면 능히 절정고수도 혼백을 잃게 만들 수 있는 가공 할 음공이었으나 내공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백이충으로서는 악기를 빌려 서야 간신히, 그것도 남의 귀를 즐겁게 하는 수준밖에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백이충이 자신만만하게 실혼조화곡을 피리로 연주할 수가 있었던 것은 과 거 팔, 구십 년 전에 음마가 활동할 당시에 이 음공을 들었던 자는 거의 죽었기에 지금에 와서 이 음악의 정체를 알만한 사람은 전혀 없다고 자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적인 음공의 위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력이 미약한 젊은 처녀들이나 청년들의 마음을 휘어잡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자신했기 때문이다. 짝.짝.,짝. 이제야 정신을 차린 금혜연을 필두로 여러 낭자들의 손에서 엄청난 박수소 리가 터져나왔다. 아직도 여러 젊은 처녀들의 눈빛은 꿈을 꾸듯 몽롱해 있 었다. 한마디로 피리소리에 방심이 흔들린 것이었다. 금혜연은 어떠냐는 듯이 자랑스럽게 백이충의 옆에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흥. 과연 유약한 서생답게 음악하나는 쓸만하군." 그러나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는 법. 역시 피리소리에 넋을 잃었던 백리혜 가 금혜연의 열화 같은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찬물을 끼얹는 듯한 소 리를 내뱉었다. "글귀나 음악 따위가 무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담? 까마귀 울음소리가 아 름답다고 봉황이 되는 것은 아니지. 역시 남자라면 협의심으로 천하에 이 름을 날려야...." 미처 백리혜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이게 누구야. 백서생이 아닌가?" 한달음에 달려와 백이충의 손을 덥썩 잡는 것은 바로 악취결개였다. 갑자 기 피어나는 좋지 못한 냄새에 일제히 모든 아리따운 낭자들과 청년협객이 코를 쥐고 인상을 썼다. 허나 악취결개와 같이 오는 어른들을 보고 일제히 모을 일으켜 인사하기 바빴다. "우문노인이구려. 여기는 왠 일이오? 잔칫집에 동냥질 하러 온 거요?" "하하. 당연하지. 잔칫집에 거지가 안도면 누가 오겠나?" 악취결개는 백이충과 함게 계속 크게 웃다가 황보장주를 비롯한 사람들이 오자 그를 소개했다.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이번 황하범람 때문에 본방의 방도들이 두 배로 늘어날 처지에 있었는데 황금 십만냥을 풀어 이재민들을 구함으로서 본방의 세력을 크게 줄이는 공헌을 한 서생 한명이 있었다고." "허억. 그럼 저사람이...." "만가생불?" 황보돈을 비롯한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올해 일어난 황하의 범람에 생겨 난 이재민들을 위해 거금 황금 십만 냥을 아낌없이 풀었다는 사람이 있다 는 말은 들었다. 본인이 정체를 밝히기를 거부하여 그에 대하여 알려진 사 항은 전혀 없었다. 다만 개방을 통해 그 돈이 공평하게 이재민에게 나누어 졌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 만가생불이라는 별호가 생기며 그 이름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솔직히 황보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상가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그는 황금 십만냥이 얼마나 거금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섬서성에서 몇 손가 락에 꼽히는 그로서도 황금 십만 냥이라면 만보장의 흥망이 왔다갔다하는 거금이었다. 그런데 저 서생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그 막대한 돈을 아낌없 이 내놓을 수가 있는 재력을 가졌단 말인가? "그...그럴 리가? 이충. 그게 사실이냐?" 제갈도용이 믿을 수가 없다는 투로 백이충에게 물었다. 백이충은 쓴 웃음 을 지으며 제갈도용에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숙부님. 우문노인이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응? 제갈가주. 자네. 나도 모르는 백서생의 정체를 아는가?" 악취결개가 오히려 의문스럽다는 듯이 묻자 제갈도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제 친우의 자식입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무당파 출신 으로 나라를 위해 군문에 뛰어든.... 저아이는 대장군부의 둘째 아들인 백 이충입니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도용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이충에게 쏠렸다. 대장군부의 후예. 무림인이 보기에 그것은 별 것이 없는 내력이었 지만 그 말이 뜻하는 것은 바로 무림칠미의 하나인 금혜연의 약혼자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두사람. 상가에 잔뼈가 굵어 대장군부의 재력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있던 황보돈과 금혜연의 약혼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충격을 먹은 곤륜 사자 도기훈의 얼굴에 가장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그럴 리가? 불가능한 일이오. 대장군부에 그런 엄청난 재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적도 없소." "나도 그것이 의문이요. 저 아이는 분명 내가 아는 그 아이이지만 저 아이 에게 황금 십만냥이라는 돈이 있을 리가 없는데...." 제갈도용과 황보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악취 결개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사람이 되었다 싶었더니 대장군부의 자제였구만. 두 사람. 백서생 에게 황금 십만 냥이 생긴 사연은 내가 아니 놀랄 것도 없네." "우문노인. 그것은 말하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소?" "하하.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말하면 어떻느냐? 모두들 내 재미있는 이야 기좀 들어 보시오. 백서생은 천하칠미의 한사람이며 모란루의 주인인 모란 서시를 두고 흑방의 방주와 내기를 해서 황금 십만냥을 번 것이라오." 순간 백이충은 살기찬 금혜연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다가 몰래 힘 껏 꼬집는 금혜연의 손톱공세에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14 만보장 살인사건(4) 모란루는 기루이다. 하지만 단순한 기루가 아닌 것이 당금 무림에서 모란 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다. 모란루는 오백년 전의 한천신녀가 만 든 곳으로 오갈 곳 없는 여인들이 뭉쳐 만든 기루였던 것이다. 한천신녀는 당시 여인으로서 무림 최고수의 하나로 꼽혔던 위대한 여협객 인 동시에 불우한 여자라고 할 수가 있었다. 생애에서 일곱 번이나 남자에 게 배반을 당해 남자들을 원망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한천신녀는 그러나 결코 남자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란루를 만들어 남자들 에게 배신당하거나 불우한 환경의 여인을 모아서 남자들에게 여자가 선택 당하지 않고 여자들이 직접 자신이 남자를 선택할 수 있는 모란루를 만들 었던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기루를 꼽으라면 모란루를 들 수가 있다. 천하에서 가장 미인이 많은 기루를 꼽으라고 해도 모란루를 들 수가 있다. 천하의 정보가 가장 많이 흘러드는 곳도 모란루이고 황실을 비롯하여 무림 과 유림등, 거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도 모란루라고 할 수가 있었다. 황실보다 화려하고 품격이 있으며 천하제일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과 가장 향기로운 술이 있는 곳. 그리고 눈이 뒤집힐 만한 미인들이 모여있는 곳이 또한 모란루였다. 천하의 미인은 모조리 모여있다는 곳. 모란루의 여인은 자신을 가꾸기에 소홀히 하지 않아 기본만 있으면 모두 천하의 절세미녀로 가꿀수 있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란루의 기녀들은 기예만 팔 뿐, 결코 몸을 팔지 않았 다. 모란루의 기녀들이 치마끈을 푸는 경우는 진정으로 자신이 마음을 주 었던 상대이거나 혹은 후처라도 남자에게 일생을 의탁하는 경우에 한해서 였다. 이것은 모란루를 만든 일대 여협 한천신녀가 내린 유시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였다. 천하에 갈 곳이 없는 여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모란루였고 동시에 여인들이 자립할 수 있게 모든 힘을 다해 도와주는 것도 모란루였 다. 모란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기예를 파는 것도 자신들이 인정할 만한 사내 앞에서만 하는 행동이었다. 당금 무림의 거대 세력중 삼할 이상이 모란루 출신의 여인을 작은 부인으 로 두고 있었다. 관부의 관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망있고 충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많은 대신이 모란루의 여인을 아내나 혹은 첩으로 맞이하였 다. 모란루의 기녀들은 강제로 몸을 팔지 않는대신 한번 마음에 든 남자에 게는 적극적으로 스스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다. 모란루 출신의 여인을 첩으로 둔다는 것은 스스로 남자로서 인정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 었기에 모란루의 여인이 접근하는 것을 마다할 사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모란루의 루주 모란서시는 무림칠미의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남칠성 북육성 중의 일개 성을 주무를 수 있는 거물이어야만 그녀의 시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무림칠미의 한사 람인 그녀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았지만 실제로 그녀를 만나본 사람이 손꼽을 정도였던 것은 그런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본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그녀의 미모는 결코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가 없는 극상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흑방은 무림 흑도의 제일 세력이었다. 혈천마궁이 사라지고 흑도의 세력이 미미해진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잔존세력을 통일한 것이 바로 흑방이었다. 잔존세력이라고는 하지만 천하의 흑도를 통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이었다. 무림이 백도천하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흑방의 세력이 누구에게 무시당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무성 종리연과 대등할 수는 없다고 해도 구대문파의 장문인과는 동격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흑방주의 위치였다. 그런 만큼 그도 자신의 명성에 힘입어 모란서시를 만날 영광을 가질 수가 있었다. 흑방의 방주는 한 눈에 모란서시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목 숨이라도 바친다며 흑방주의 본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매파를 보냈을 정도 였다. 평생 여자보기를 돌보듯 해왔던 흑방 방주로서는 뜻밖의 행동이 아 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란서시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세력을 두려 워하여 흑방의 방주에게 시집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 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흑방의 방주가 너무 욕심을 냈지. 비록 무공 때문에 사십대로 보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칠십이 넘은 노인이 아닌가?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처자에 게 반해서 온갖 추태를 부리는 꼴이란... 쯧쯧." 악취결개가 이야기 하다말고 혀를 찰 때였다. "으아아악." 백이충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독사눈을 하고 백이충 을 노려보며 집게손을 하고 있던 금혜연은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어머. 저 계속 이야기 하세요. 백가가가 그때 볼일이 있다고 나갔던 것이 그 여시를 만나러 갔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상해서....호호.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데 호호는 무슨? 젠장. 정말 사납구나. 모란루 가 은표전장의 수중에 떨어지고 모란서시가 혈무영의 한사람인 것을 소매 에게 밝힐 수도 없으니.... 앞으로 오해를 어떻게 푼다?) 흑방의 방주 흑수마존은 모란서시를 사모했지만 힘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도 없고 방법도 없었다. 모란루 출신의 여인들이 천하에 흩어져 안방 마님 혹은 작은 마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모란루를 힘으로 억누른 다 는 것은 천하를 상대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흑수지존은 열심히 모 란서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 환심을 사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흑수마존은 두 눈이 뒤집힐 만한 일을 겪었다. 자신이 선물을 바리 바리 싸들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모란서시가 중요한 인물을 모신다며 자신 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만난이후 흑수마존은 모란서시 에게 접근하는 자는 흑방의 공적이 된다는 공표까지 했거늘 누가 그를 무 시한단 말인가?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제로 모란루에 침입한 흑수마 존의 앞에 있는 것은 모란서시와 그녀가 시중드는 술을 마시며 쉬고있는 백이충이었다. "말도 안돼. 모란서시가 저 서생을 접대하고 있었다고요?" 백리혜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보잘것 없는 서생을 천하의 모란루의 루주가 직접 접대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흑방의 방주를 무시하면 서 까지. 백리혜가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악취결개는 코웃음을 쳤다. "왜 말이 안돼? 모란서시가 눈이 제대로 달려있어 백서생의 인품을 알아 본거지. 술이나 마실까 해서 모란루를 찾았던 백서생을 한눈에 알아보고 모란서시가 직접 청했다는군. 사실 공짜로 황금 십만냥이 생겼다고 해서 그걸 아깝지 않게 모조리 황하 이재민을 위해 기부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 쉬운 일이냐?"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는 흑수마존의 앞에서도 백서생은 조금도 동요하 지 않았다. 무림에서 악명이 자자한 흑수마존의 앞에서도 오히려 그를 진 정시키고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흑수마존은 당장 모란서시의 앞에서 꺼지라고 백이충을 협박했다. 백이충은 자신은 모란서시에 뜻이 없다면서 모란서시에게 흑수마존에 대한 그녀의 심정을 물었다. 백이충이 본 흑수마존은 중년의 잘생긴 남자로서 호탕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를 뿌리고 있는 흑수마존과 백이 충의 앞에서 모란서시는 당당하게 자신은 백이충의 것이니 백이충의 뜻대 로 따를 것이라고 맞섰다. "그거 우문노선배가 직접 본 일입니까?" 황보무악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기야 무림 칠미의 하나이 며 당당한 모란루의 주인이 백면서생에게 첫눈에 반해 몸과 마음을 맡기겠 다는 뜻의 말을 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야. 하지만 흑수마존이 제 입으로 한 말이니 믿을 수가 있지." 모란서시의 말을 들은 흑수마존의 표정은 정말 과관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러자 그 앞에서 백이충은 흑수마존과 모란서시가 과연 인연이 있는지 증 명하자면서 내기를 요청했다. 그것이 모란서시와 황금 십만 냥을 건 내기 였다. "모란서시를 걸었다고요? 어찌 남자로서 자신을 따르는 연약한 여자를 내 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모란서시가 직접 좋다고 했으니 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악취결개의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인들의 시선이 백이충에게 쏟 아졌다. 백이충은 아직도 옆구리를 문지르다가 금혜연의 주먹을 한방 더 엊어맞고 하는 수 없이 입을 떼어야 했다. 물론 금혜연의 비위를 맞추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나는 소매가 있으니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소. 나에게는 소매만이 있다 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소. 게다가 흑수마존이라는 남자는 내가 보 기에 괜찮은 남자 같았소. 나중에야 그가 노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직접 볼 당시에는 그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 소. 그래서 그녀와 그의 연분을 하늘에게 확인해 본거요." "백가가." 금혜연은 감격해서 백이충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순간적으로 곤륜사자 도기훈의 눈빛이 번쩍였다. 금혜연은 백이충의 품안에 얼굴을 비비면서도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모란서시는 안돼요. 알았죠?" 백이충과 모란서시 그리고 흑수마존은 서로에게 서로를 걸고 내기를 했다. 만일 흑수지존이 이긴다면 모란서시는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흑수마 존에게 시집가기로. 그리고 백이충이 이긴다면 흑수마존은 모든 것을 포기 하고 황금 십만냥을 내놓기로. 황금 십만냥은 흑수마존이 직접 제안한 것 이었다. 모란서시의 값어치는 그 이상 나간다면서, 만약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 더 있었다면 더 걸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신 백이충이 이 긴다면 모란서시는 백이충에게 자신과의 인연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어찌보면 세사람 모두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건 셈이었다. 내기의 대상은 그날 관부의 정문 앞을 자나는 사람의 숫자가 몇이냐 였다. 즉 그날 지난 사람 수가 홀수면 흑수마존이 내기에서 승리. 짝수면 백이충 이 승리였다. 그리고 그날의 내기는 백이충이 승리했다. 흑수마존은 남자 답게 깨끗하게 승복했다. 절망하면서도 황금 십만냥을 내어놓고 다시는 모 란서시에게 다가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늘의 뜻이었지. 그리고 보면 흑방의 방주도 제법 사나이 답단 말이야. 흑수마존의 초빙아래 나와 몇 사람이 내기의 공증인이 되었어. 캬. 정말 모란서시가 아름답기는 아름답더군. 늙은 내가 다 청춘이 되돌아 온 것같 은 기분이 들었으니." (쳇. 그날 배교의 사술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딱 알맞은 수만 지나가도록 손을 써놨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백이충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표전장에서 겨우 모란루를 손에 넣고 혈무영을 파견하여 완전히 장악한 것이 얼마 전이거늘. 흑방의 방주가 혈무영 대장에게 접근하는 바람에 큰 일 날 뻔했지. 언제까지 접근하는 흑수마존을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스스로 일방의 지존이 된 인물. 그의 예리한 이목에 언제 혈천마궁의 흔적이 들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혈무영의 힘 을 드러내어 제거하자니 아직 우리의 힘을 드러낼 처지가 아니고, 숨길 수 있는 적당한 힘으로 막을 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흑수마존을 떨구기 위해 모란서시가 나에게 반한 것처럼 한바탕 연극을 한 것인데 저 노인네가 다 떠들어 버리다니.) "미인과 재물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 그런데 백서생은 황금 십만냥을 개방에 맡기며 황하의 이재민을 위해 써달라고 혼쾌히 내놓았다 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지." (쳇. 흑방의 전표가 은표전장에 유통되었다가 꼬리가 잡힐 것 같아서 개방 에 맡긴 것이거늘. 내가 사용했다가 천하에 내 존재가 드러날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한 것이고. 황하의 수재민이 어떤 놈들인지 내가 알지도 못하 는데 뭐가 예뻐서 내가 돈을 내놓겠는가?) "게다가 천하칠미의 한사람인 모란서시를 과감히 뿌리치고 도망오지 않았 나? 쯧, 그건 약간 사내답지 못한 일이야. 모란서시는 자네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걸었거늘. 소문에 모란서시가 상심해서 모란루에 모습을 드 러내지도 않는다고 하더군." 악취결개의 말이 끝났을 때에 모두의 시선이 백이충에게 쏠렸다. 늙고 젊 고에 상관없이 그들의 시선에 맻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감탄과 존경의 빛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지금 백이충에게 달려드는 인물. "백가가. 그럼 모란서시는 어떻게 되었어요? 설마 나 몰래 만나고 있는 것 은 아니죠?" "응? 무슨 소리? 그날로 도망쳐 나와서 소매와 함께 오형산 쪽으로 떠났잖 아. 그 때 이후 내가 소매 몰래 누구와 만나는 것 본 적이 있어? 그녀도 내가 눈앞에 안보이면 포기하겠지. 나는 죽으나 사나 소매밖에 없어." 창궁일준 남궁홍일의 입에서 감탄의 탄성이 나왔다. "과연 남자요. 나라면 결코 모란서시의 정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오. 과 연 옥수비연 금낭자의 약혼자라고 할 만하오. 소제는 백형과 친구가 되고 싶소이다." 그의 말을 인정하는 듯이 거의 모든 젊은 남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 실 옥수비연을 약혼자로 두고 있다지만 모란서시는 천하칠미의 한사람이었 다. 게다가 모란루의 배경이란 것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이 충은 약혼자 금혜연을 위해 모란서시와 모란루란 배경을 초개같이 버린 것 이다. 게다가 황금 십만냥도 아낌없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쏟아부었다니 남자들이 존경할 만한 사람인 것이다. 물론 겉보기가 그렇다는 것이지만. "소제 종리비 역시 백형과 친구가 되고 싶소." "하하. 좋은 날에 이 황보무악 또한 빠질 수가 없지요." 무림칠룡의 세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백이충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 이 자리에서 백이충을 비웃을 수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백리혜와 그녀를 따 르는 젊은 무리들도 백이충을 인정해야만 했다. 백리혜는 또한번 자신이 금혜연에게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금혜연의 옆에 있는 남 자는 단순한 백면서생에 불과한 남자가 아니었다. 무림칠룡이 스스로 낮춰 먼저 친구가 되기를 청하는 백이충에 대해 부러워하는 사람만이 그곳에 있 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화목하게 되는 가운데 황보돈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그렇게 늙고 젊은 무림의 협객들은 만보장의 연회장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현황방의 수석당주 경천일권 강극은 만보장의 어둠 속을 가르며 몸을 움직 였다. 그의 두 눈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놈. 틀림없는 그놈이다. 내 의제를 죽인 놈은." 경천일권 강극에게는 자신의 친아우처럼 여기는 의제가 한 명 있었다. 현 황방주의 제자인 번뇌권 마진찬이 그의 의제였다. 둘 다 성격이 비슷하고 권을 주로 쓰는 만큼 서로 마음도 잘 맞았다. 실제로 마진찬의 독문무예인 번뇌권은 강극이 전수한 경천권을 참조하여 만든 권법이었다. "그 몸에 난 흔적. 틀림없어. 백리세가의 십팔 절정기예의 하나인 그것이 야." 한 달 전 그의 의제인 마진찬이 죽었다. 강맹한 검기에 난자되어. 그것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법의 흔적이었다. 그 때문에 현황방은 발칵 되집혀졌 고 강극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현황방은 참고 인내를 하며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려고 노력해야 했 다. 왜냐하면 마진찬의 시체에 남겨진 검법의 흔적이 백리세가의 무예중의 하나인 칠채환검에 당한 수법이였기 때문이다. 백리세가는 쉽게 상대할 수다 없는 세력이었다. 현황방이 백리세가를 두려 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 백리세가였 다. 더욱 아쉬운 것은 칠채환검은 절정의 검수들만이 사용할 수가 있는 검 법이라는 것이었다. 백리세가의 검수들 중에서도 칠채환검을 시전할 만한 절정의 고수는 서너 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서너 명 중에서 단 한명도 마진찬이 죽은 그날, 그 근처 지역에서 얼쩡거린 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체에 타 문파의 검법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불가 능한 일도 아니어서 현황방은 백리세가에 책임을 묻는 일을 좀 자제하기로 했다. 좀더 정확한 증거를 찾아 범인을 잡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뿌득. 하지만 나는 알지. 그놈. 그놈은 알려진 것과 달리 절정의 고수였 다. 며칠전 백리혜를 몰라보고 수작을 걸던 건달들을 향해 놈이 시전한 것 은 틀림없는 칠채환검의 수법이었다." 젊고 잘생기기만 했을 뿐 무예는 낮다고 알려졌던 백리세가의 제자. 그놈 은 칠채환검을 시전할 만한 고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의제 마진찬이 죽었 을 때 놈은 분명 백리혜와 함께 그 근처에 있었다. 강극은 조심스럽게 그자와 만나기로 한 곳에 이르렀다. 아까 낮에 들렀던 후원의 정자였다. 과연 그곳에 그자로 보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혁우비. 과연 나왔구나." 강극이 성큼 혁우비의 앞으로 다가서며 노한 어조로 말했다. 혁우비는 지 은 죄가 있어서인지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해라. 네가 정녕 의제를 죽였느냐?" 강극의 고함에도 혁우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극은 그가 침묵으로 결 백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화가 났다. "부정할 생각이냐? 하지만 네놈은 칠채환검을 시전했고 의제가 죽었을 때 도 그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도..." 버럭 소리를 지르던 강극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옥면일협 혁우비가 스르르 몸을 기울이더니 그대로 푹 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혁우비. 무슨 수작을....헉." 강극은 그제서야 혁우비의 안색이 창백하고 싸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 게 다가선 강극은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더욱 놀 라운 것은 그의 가슴에 자신의 독문 권법인 경천권의 주먹 자욱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주....죽었다." 창궁일준 남궁홍일은 혁우비의 시체를 검사했다. 그가 죽은 혁우비의 몸을 만져보고 알아낸 것은 두가지. 하나는 시체의 경직상태로 보아 그들이 현 장에 도착하기 전에 한식경도 안되는 시간에 죽었다는 것. 두 번째는 시체 의 몸에 찍힌 장인은 명백한 경천권의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경천권은 강극의 독문무예로 이에 격중한 사람은 가슴에 붉은 주먹의 흔적 이 남는다. 게다가 중앙이 시꺼멓게 썩어들어가서 경천권의 흔적은 누구라 도 알아볼 수가 있다.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혁우비가 죽었다는 것은 살인자가 시체의 흔 적을 조작하거나 도망칠 시간이 없었다는 것. 살인자는 만보장 안에 있음 이 틀림없다. 게다가 이 흔적을 보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강 선배가 범인 임이 틀림없다." 남궁홍일이 중얼거릴 때 정자안으로 황보무악이 들어왔다. "사제. 경천일권은 어떻게 하였느냐?" "일단 방안에 가둬놨습니다. 제갈선배께서 같이 계시며 감시한다고 했으니 도망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인도 도망갈 뜻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했습 니다. 강대협의 성격으로 보아 거짓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 그게 문제야." "예? 뭔가 이상한 것이 있습니까?" 황보무악이 의아하게 묻자 남궁홍일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선배의 성격으로 보아 자신의 일은 책임지는 성격이야. 그런데 이렇게 나 분명한 일을 어째서 부인하고 있는 것일까?" "하기는 강대협은 아직도 자신이 혁소협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 니다. 백리세가와 현황방이 문제가 될까봐 범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 니까?" 무림 세력중에서 구대문파 오대세가와 버금갈만한 세력중에 이방이 있다. 이방은 흑방과 현황방을 일컫는다. 당금의 흑도지존을 자부하는 흑방과 정 사중간의 현황방은 그 세력이 결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에 못지않았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면 백리세가와 현황방은 서로간의 체면 때문이라도 전 쟁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혁소협이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대협의 비밀제자였다고?" "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랬던 모양입니다. 백리대협은 은근히 백리혜 소저와 혁소협히 맺어지기를 바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백리소저가 무림 에 나간다고 했을 때 그녀의 보호를 명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백리소저는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했답니다." "명예보다 사랑이라. 그래서 무림에 나선 이래 혁소협이 그녀 주위를 맴돌 며 별로 무예를 드러내지 않았군. 나도 그가 그냥 백리세가 방계의 제자로 만 생각해 왔네. 사랑하는 딸의 사위로 생각할 정도였던 제자라면 백리대 협의 애정이 몹시 크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백리세가와 현황방의 충돌을 우려해서 강대협이 범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이상해." 남궁홍일은 고개를 저었다. "강선배의 말에 의하면 그분의 의제 마진찬은 혁소협이 죽인 것이 돼. 그 렇다면 강선배는 복수를 할 목적으로 혁소협을 불러냈다는 말이 되지. 처 음부터 죽일 예정이었다면 현황방과 백리세가의 충돌도 각오했을 거야. 게 다가 죽일 예정을 하고 왔는데 이제와서 부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강선배 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복수였고 떳떳한 일인데 말이야." "하지만 혁우비가 번뇌권을 죽였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백리소저의 말에 의하면 번뇌권이 죽었을 때도 혁우비는 그녀의 곁에서 떠난 적이 없 다고 했습니다만." "백리세가와 현황방의 일일세. 어차피 백도맹에서 개입할 수밖에 없어. 자 네도 청룡단주이니 알거 아닌가? 만일 백도맹의 중재를 거절하면 두문파의 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지. 그건 두문파도 원하는 바가 아닐 거야. 오늘 날 까지 두 문파는 서로 사이가 좋았어. 결국 백도맹에서 조사할 때 현황 방도 마진찬의 시체를 증거로 내놔야 할 거야. 어차피 드러날 사실을 거짓 말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마진찬의 시체에 남겨졌다는 칠채환검의 흔적이 조작된 것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야 조작할 시간도 없이 우리가 도착했기에 확실한 증거가 남았습니다만." "과연 백리세가의 절학이라는 칠채환검의 흔적을 조작하기가 그리도 쉬울 까? 현황방의 이목을 속일 수가 있을까? 그래도 뭔가 이상해. 종리사제는 어디 있나?" "백리소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갔는데요." 종리세가의 젊은 가주인 종리비는 과연 백리혜와 같이 있었다. 아직도 두 눈이 빨갛게 되어 훌쩍이는 백리혜의 옆에는 제갈청미, 화문향, 금혜연등 세 소저가 있었다. 평소에는 싸가지가 없어 한대 때려주고 싶은 백리혜였 지만 친한 사람이 죽어 충격에 빠져있는 백리혜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 어 위로하고 있는 금혜연이었다. "백리세가에서 칠채환검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모두 몇 명 입니까?" "훌쩍. 저도 잘 몰라요. 나는 그냥 딸일 뿐이니까 아버지도 세가의 일은 잘 알려주지 않아요." "하지만 백리소저가 아는 한도에서 말해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칠채환검은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혁장로님만이 익히신 것 으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와 언니는 그냥 구결만 알고 흉내를 내는 정도지 만 혁장로님은 칠채환검을 독문검법으로 삼으실 정도였죠." "혁장로? 혁소협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혁소협의 할아버지예요. 칠채환검도 아버지가 아니라 혁장로님에게 전수 받았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것은 옥뢰수라는 강기 수법이라고...." "그렇다면 혁장로라는 분은 지금 백리세가에 계십니까?" "아니요. 혁장로님은 돌아가셨어요. 일년 전에. 모르세요?" "아, 그럼 일년 전에 의문의 살인을 당하신 환검무영 혁노선배가...." "예. 그분이 혁장로님이세요." 순간 종리비의 머릿속으로 재빨리 환검무영의 살인사건에 대한 기억이 스 쳐지나갔다. 그때의 사건도 백도맹에서 조사를 했기에 백도맹 비각의 각주 인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혁노선배는 친구분이신 마노선배의 사인을 조사하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까?" 종리비는 이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원인이 과거까지 흘러 들어 가는 것이었다. 단순히 마진찬과 혁우비의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 전 에 현황방과 백리세가의 장로들의 살인사건부터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처 음부터 강직한 성품의 경천일권 강극이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것부터 이 상하다고 생각한 종리비였다. "이년 전에 현황방의 장로인 구지홍살 마노선배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습 니다. 그때 그분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종남산 근처였습니다." "구지홍살 마대협이라면 이번에 죽었다는 현황방주의 제자인 마진찬의 할 아버지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끝내 그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었죠. 현황방과 백도맹도 조사 를 포기했을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마대협의 친한 친구 두 분은 절대 그 사건을 포기하시지 않았죠." "두 분 중의 하나가 환검무영 혁노선배?"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년 전에 혁노선배도 의문의 살해를 당하셨습니다." 종리비의 말에 남궁홍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 일은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있네. 그분의 몸에 난 상처는 바로 구지홍살 노선배의 독문무예 인 홍살장에 의한 것이었네. 하지만 홍살장은 마노선배가 죽으면서 영원히 실종되었지. 그분이 창안한 것이고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으셨으니까. 그 래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는 구지홍살의 손자인 번뇌권 마진찬이 죽었습니다. 혁소협 의 칠채환검에 의해서." "그리고 혁소협은 강선배의 경천권에 죽었다?" 남궁홍일은 어이없다는 듯이 종리비를 바라보았다. "이건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뜻하는 것은 뻔하네. 마노 선배가 죽은후 홍살장이 든 무공비급을 마진찬이 얻었다? 일단 홍살장의 무공을 누군가가 얻었다면 그 손자인 마진찬이 가장 유력하지. 그리고 무 슨 이유에서인지 마진찬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구지홍살을 죽인 것이 환검 무영 노선배로 믿은거지. 그래서 홍살장으로 혁노선배를 죽이고. 혁소협은 그것을 알고 칠채환검으로 마진찬을 죽이고. 다시 마진찬의 의형인 강선배 는 경천권으로 혁소협을 죽이고. 돌아가며 피의 복수극이 펼쳐졌다 이건 데." 종리비도 의혹의 빛이 띠었다. "현재 정황증거로는 그렇습니다. 게다가 저희 백도맹에서 조사했던 것이니 그 증거의 확실함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결국 복수극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이래서야 현황방과 백리세가의 전 쟁은 피할 수가 없어." "달리 생각할 바도 없군요. 워낙 증거가 뚜렷하니.... 하지만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황보무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하군요. 마치 이것은 사건이 거꾸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가장 나 중에 죽은 혁우비는 경천권에 죽었죠? 하지만 경천권은 번뇌권과 흔적이 같다고 들었습니다. 즉 혁우비는 그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마진찬의 번뇌권 에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하지만 마진찬은 혁우비에게 살해 당했네." "예. 그런데요. 마진찬이 죽은 칠채환검은 혁우비보다는 환검무영 노선배 의 성명절기 아닙니까? 즉 마진찬도 그가 죽였다고 생각되는 환검무영 노 선배에게 죽은 것 같은 흔적이...." 황보무악의 말에 남궁홍일과 종리비가 흠짓 놀랐다. "마지막으로 환검무영 노선배가 죽은 것이 홍살장의 흔적이었지요? 그건 마진찬이 환검무영 노선배가 구지홍살 노선배를 죽였다고 생각하여 손을 쓴거라고 말했지만..... 환검무영이 전에 죽은 구지홍살의 홍살장에 죽은 것 으로 생각하면 완벽하게 거꾸로 맞아 떨어지는 데요." "죽은 시체가 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를 했다?" 종리비가 중얼거리자 황보무악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 보다는 누군가 죽은 사람의 무공을 사용하여 새로운 사람을 죽 였다는 가설은 어떨까요?" "그게 가능한가?" "글쎄요? 저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추리만 해 본 것 뿐인데." 남궁홍일이 종리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제. 구지홍살 마노선배의 사인은 왜 미궁으로 빠져들었지?" "그것은 구지홍살 마노선배가 이년 전 죽었을 때 그분의 몸에 난 상처가 천면옥마의 비뢰검의 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뢰검의 주인인 천 면옥마는 마노선배가 죽기 삼개월 전에 죽었죠." "막내의 예상대로라면 누군가 천면옥마를 죽이고 그 비뢰검을 써서 마노선 배를 죽였다는 말이군. 누가 천면옥마를 죽였는지 알고있나?" "마노선배의 두 분 친우 중의 한분이신 악취결개 우문 노선배가 취옥권으 로 죽인 것이란 기록을 읽은 기억이...."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군. 종리사제. 즉시 악취결개 우문 노선배의 행방을 알아보게. 그리고 혁우비의 무공은 어떤 것이 있지? 칠채 환검 외에?" "옥뢰수라는 것을 익혔다고....." "만약 누군가 현황방과 백리세가와의 싸움을 원한다면, 이번에는 강선배를 노리고 있겠군. 옥뢰수를 이용해서."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종리비는 악취결개에게, 남궁홍일과 황보무악은 경천일권이 있는 곳을 향해 가기로 결정했다. 금혜연의 이야기를 들은 백이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거야. 모두 거꾸로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이해를 못하겠네. 설명좀 해보세요." "누군가 남의 무공을 훔칠 수 있는 극악한 마공을 발견한 거지. 그리고 처 음 희생자는 바로 악취결개 우문노인이었고." "그럼 그자가 우문노선배의 무공을 훔쳤다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뻔하지. 우문노인의 무공으로 천면옥마를 죽인거지. 그리고 그 변장술을 습득하고 악취결개 우문노인으로 행세한 거야." "그럼 우문 노선배의 친우인 구지홍살 노선배는 왜 죽였죠?" "친구라고 하니까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거겠지. 아마 우문노인으로 변 장했던 자가 종남산 근처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이 근처에 중요한 것이 있 었는지도 모르지. 그걸 구지홍살이라는 사람이 발견한 것이고. 그래서 천 면옥마의 무공으로 구지홍살을 죽인거야." "그것을 환검마영 혁노선배가 조사를 하면서 그를 의심했군요." "친구니까 구지홍살이 발견했다면 환검마영도 발견하지 목하리라는 법도 없지. 아마 범인은 생각 끝에 두 세력을 충돌시켜 자신에 대한 의심을 피 하기 위해 홍살장을 써서 환검무영이라는 혁노인을 죽였을 거야." "그랬군요. 하지만 왜 번뇌권 마진찬을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뻔하잖아. 현황방도 백리세가도 장로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품고 조사를 계속하고 있었을 테니까. 구지홍살이 홍살장을 후손에게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 백리세가가 현황방을 의심하지 않으니 애초의 의도가 벗어난 거야. 이래서야 두 세력이 충돌을 일으켜 자신은 안전하게 몸을 빼 겠다는 애초의 계획이 무산되는 거지. 그래서 홍살장의 전인이 있다면 가 장 유력한 인물인 마진찬을 칠채환검으로 죽인거지." "그리고 혁소협은 마진찬의 번뇌권으로 죽인 거구요. 역시 두 세력간의 싸 움을 벌이게 하기 위해서 였겠군요." "우문노인, 아니지. 우문노인으로 변장했던 범인이 예상치 못했던 것은 이 곳에 제법 똑똑한 친구가 세 명이 몰려 있었다는 거지. 그 바람에 그가 경 천일권을 죽이려고 했을 때 행적을 들켰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옥뢰수를 사용해서 그들의 가설을 오히려 증명한 것이지. 덕분에 그놈의 행적이 오 히려 낱낱이 밝혀진 것이고." 금혜연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만보장을 벗어나 객점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우문노선배의 방에서 그분의 인피면구가 발견되었데요. 오래전에 만든 물 건으로 천면옥마의 수법이었데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하지만 범인은 강선배를 죽이고 도망을 쳤어요. 그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도 말이예요. 이제 그의 정체를 모르니 어떻게 잡지요?" "너무 쉬워. 범인은 자신이 죽인 인물들의 무공 외에는 전혀 못할 걸? 여 태 죽은 희생자들의 무공을 쓰는 자를 추적하면 쉽게 잡을 수가 있을 거 야. 하여간 끔찍한 일이었어." "그래요. 백리혜가 안됐어요. 아직까지 울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 혁우비를 좋아했었나 봐요." 금혜연이 돌아가자 백이충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는 그의 앞 으로 쌍노가 꽁꽁 묶인 한명의 사람을 잡고 있었다. (마화타가 연구했던 것은 무공을 훔치는 것이지, 변장술 같은 수법을 훔치 는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믿어야 얼굴을 모르는 범인을 쉽 게 잡을 수가 없지.) 그는 자신의 발앞에 있는 사람을 툭툭치며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깨웠다. "자. 이제 마화타가 어디있는지 말해 보실까? 우문노인?" 쌍노가 잡고 있는자는 얼마전에 얼굴가죽이 강제로 벗겨진 악취나는 한명 의 노인이었다. 제 목 [연재]혈존무적16-죽음을 부르는음식(1) 16 죽음을 부르는 음식(1) 현재 무림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백도맹. 그리고 백도맹의 중심처 태상전. 천무삼성은 오래전에 백도맹을 떠나 은거에 들어갔다고 알려졌으나 천무삼 성은 여전히 백도맹의 최고 수뇌이며 최고의결기관의 권력자였다. 그들이 비운 거처 태상전은 그들이 없다고 해도 백도의 중지였다. 오십여 명의 백도의 장로급 고수들이 항상 태상전의 주위에서 태상전을 지키고 있 었다. 비록 주인없이 비어있다고 해도 백도맹주나 그의 허락을 받지 않는 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천무삼성은 사실 그동안 모처에서 백도의 부흥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아왔 었다. 그것은 백도의 최고비밀이며 동시에 천하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다. 천무삼성이 백도를 위해 기울인 노력.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현 무림의 맹주인 무성 종리연 그였다. 무성 종리연은 몸가짐을 바로하고 조심스럽게 태상전에 도착했다. 이미 태 상전에는 연락을 한 뒤였으니 어르신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천무삼성이 백도맹에 들리지 않는다고는 하나 모처의 일을 종리연에게 알리기 위해 한 명씩 그곳을 나서 가끔 얼굴을 비출 때는 있었고 한달 전에 천무삼성의 하 나인 무적장왕 모용도기가 태상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도는 혈존의 제자와 손을 잡기로 한 것이었다." 방문 앞에서 기척을 내려던 종리연은 멈칫했다. 모용도기가 한참 열이 올 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수제자인 모용풍이 증조부의 부름을 받고 그의 잔심부름을 하기 위해 태상전에 머물 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도 증손주 모용풍과 증손주며느리가 될 백리 설을 불러놓고 한참 옛날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모용도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 증손주를 데려다 놓고 과거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종리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용도기가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일도 아닌데 스승의 즐거움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도 착했다는 소식을 알리려는 호위무사에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가 암울한 시기였지. 혈존이란 정말 무서운 자였다. 천하를 손에 넣 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마도무림과 함께 망했던 변황마저 손을 써서 굴복 시켰던 자였으니까. 솔직히 우리 백도의 힘이나 우리 천무삼성으로는 혈존 이나 혈천마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백도의 거대세력이 일찌감치 그의 힘을 알아채고 봉문하여 힘을 기르는데 주력한 덕에 조용히 있었기에 그는 단지 귀찮아서 백도를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그때 혈존의 아홉제자들이 우리와 손을 잡고 혈존을 제거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 계획을 보면 혈존 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백도가 나서서 혈존을 상대해야 했기 때 문에 흑도의 세력은 거의 피해가 없는 대신 백도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지. 정말로 혈존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해도 흑도는 고스란히 세력을 보존 하는 대신 백도는 존재하는 절정고수의 반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제의를 승낙하셨군요." "당시는 혈존이 아니더라도 백도는 어차피 흑도의 세력에 상대가 되지 않 았다. 절정고수나 일류고수는 물론이고 일반고수의 비율을 봐도 오대일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백도는 열세였지. 즉 혈존이 없다고 해도 흑도천하를 피 할 수는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백도는 꺼져가는 마지막 정영을 투입하 여 백도멸절이 될지도 모르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혈존을 제거 하기 위해 혈천마궁의 반도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의 계획을 무조건 적으 로 찬성한 것이지. 너는 그 이유를 아느냐?" "혈존을 제거하지 않으면 영원히 백도의 미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까?" "하하. 그렇다. 잘 아는구나. 확실히 혈존은 고금제일마라는 명성에 어울리 는 절대강자였다. 단지 무공만이 강했다면 백도는 잠적하여 후세에 그를 능가할 준비와 힘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혈존은 마공 못지않게 기기묘 묘한 악계과 귀책을 꾸며내는 머리와 어떤 경우에도 만일을 대비하는 치밀 한 준비성까지 갖췄다. 그것은 그의 마공이나 그의 마공보다 더욱 무서운 사술대법보다 백도에게는 두려운 일이었지. 백도는 혈천마궁 전 세력보다 혈존 한사람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흑도도 마찬가지였지. 혈천마궁의 전 세력이 혈존에 반역할 뜻을 품고 나서도 감히 자신들이 그 의 앞에 직접 나설 용기가 없어서 쓰러져가는 백도에게 손을 빌려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지." 모용도기의 음성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는한 백도의 부흥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지. 게다가 그는 영생을 꿈꾸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불가능 할 것 같으냐? 우리라면 그렇겠 지. 하지만 그는 혈존이다. 그의 가공할 사술대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 나 그가 영생을 꿈꾸는 것이 허황된 꿈이라고 감히 부정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백도는 혈존을 제거한다고 백도천하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을 알면서도 손을 쓸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백도천하가 아닙니까?" "그래. 우리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혈존이 제거되면 그의 제자들이 천하 를 차지하고 권력투쟁을 벌일 줄 알았다. 백도는 정말 흑도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흑도가 천하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 하다고 생각했지. 그 사이 백도는 숨어 지내며 장차 흑도를 몰아낼 힘을 비축할 생각이었다. 그때 이미 승룡곡에서 미래를 위해 백도 후예를 양성 하고 있었지. 하지만 혈존이 제거되자 흑도는 봄눈 녹듯 스르르 자신의 세 력을 감추었다. 그래서 백도는 예상치도 못한 광명을 맺게 된 거지." "어째서 그들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을까요? 백도의 힘이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음을 잘 알았을 텐데요. 손에 들어온 천하를 내놓고 스스로 종적을 감추다니. 흑도의 마두들이 개과천선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풍아. 네가 한번 맞춰 보거라. 나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단다. 네 생각은 어떠냐?" "소손의 생각은 혈존의 생사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본 맹이 올해 이십사 세가 되는 모든 청년 무림인을 감시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겠습 니까?" "맞다. 혈존은 죽었지만 그는 최후에 가공할 사술대법을 펼쳤다. 본맹도 그렇고 흑도의 혈천마궁, 아니 혈존이 죽은 후 그의 아홉제자가 그 뒤를 이어받았으니 혈천마련이라고 불러야겠지. 하여간 본맹과 혈천마련은 그가 부활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모용도기는 한 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특히나 혈존의 제자들이 혈존에 품은 감정은 두려움이나 공포같은 단순한 말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다. 천하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가 혈존이 부활했을 경우 날벼락을 맞을까봐 두려워 천하를 포기하면서까지 모습을 꽁꽁 감춘 것이다. 우습지 않느냐? 천하를 다섯 번은 차지할 만한 거대세 력이 단 한사람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낸다는 것이? 그들은 혈존이 죽었다 는 확신이 든 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혈존이 무섭다는 뜻이군요." "두번째 이유는 그들의 내부 균열에 있다고 생각한다. 혈천마궁의 세력이 혈존 일인에 의한 절대독재의 세력이었던 만큼 후계자는 있을 수가 없었 다. 즉 혈존이 제거된 이후 그 권력은 어느 한사람에게 집중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세력은 그의 아홉제자에 의해 아홉으로 갈라졌다. 서로가 서 로를 적으로 보는 만큼 오히려 그들 아홉과 백도 중에서 오히려 백도의 세 력이 가장 커진 셈이 되었다. 그들의 하나의 세력으로는 뭉쳐진 백도를 감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홉은 홀로 천하를 상대할 만큼 세력이 커질 때까지 모습을 감춘 것이다." "결국 현재의 천하가 평화스러운 것은 오직 폭풍전야의 정적일 뿐이군요." "하지만 백도로서도 절호의 기회였다. 흑도와 마도가 사라진 이후 백도는 천하를 차지했고 그 당시 살아남았던 백도의 사람들은 흑도가 얼마나 강한 지 잘 알고있는 사람들뿐이었지. 이십년 간 백도는 그 세력을 기르고 무공 을 연마하고 후예들을 기울이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지금 백도의 세 력은 이십년 전에 비해 다섯배 이상 성장했다. 흑도가 숨어 힘을 기르는 동안 백도도 놀지만은 않고 그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지. 이제는 누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십년 전처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혈천마련은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까?" "혈존이 죽은지 이십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가 부활했다면 어떤 징조라도 있어야 하거늘 혈존이 부활했다는 증표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혈존이 부활했다면 올해 이십사세의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맹의 조사에 의하면 천하에 있는 이십사세의 젊은이들 중에 혈존 으로 의심할 만한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즉 혈존이 완벽하게 죽었다는 확 신이 서서히 들 때이지. 백도는 물론이고 흑도도 안심할 만한 시간이 지났 다는 것은 혈천마련이 슬슬 모습을 드러낼 시기도 되었다는 뜻이다." "증조부님과 천무삼성께서 혈존을 상대하기 전에 승룡곡을 마련하셨던 것 은 흑도천하가 된 이후에도 백도가 숨어 지내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지 요? 백도십대극품절예 중에서 남아있는 오대절학과 백도의 최강무예들을 모아 오래전부터 승룡곡에서 매 십년마다 직접 일천기재들을 가르치며 훈 련을 시키신 것은 결국 흑도, 아니 혈천마련을 대비하기 위해서였군요. 저 희 사숙뻘 되시는 일기의 선배 분들이 수십 년 동안이나 청춘을 소비하시 며 천하에 단절되어 무공을 익히셨으니 그분들이 출도하시면 혈천마련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하. 그들 일천 명 중에서 가장 성취가 뛰어난 것이 네 사부였다. 그는 오 년 만에 백도십대극품절예 중의 세 가지를 완벽히 터득하고 그곳을 나 섰다. 일기의 승룡곡 출신 중에서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고 네 사부와 함께 무림에 나선 자는 다섯 명이 안 되지. 흑도가 갑자기 사라진 후의 혼란한 천하를 정비하며 우리를 도운 것은 네 사부를 포함한 그들이다. 우리는 그 들 다섯 명에게 천하를 맡겼지. 하지만 더욱 뛰어난 것은 너다. 너는 십대 절예의 다섯가지 모두를...." 모용도기의 말이 백도맹 최고의 비사에까지 이르자 종리연은 헛기침을 하 여 기척을 드러내었다. 이곳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위무장들도 있 는 것이다. 자신의 기척을 모르실 무적장왕이 아니었지만 이야기에 열중하 느라 밖에 종리연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잠시 잊으신 듯 했다. 과연 모용도기는 말을 중단하고 그를 불렀다. "이런. 늙으면 주책이 많아진다더니. 맹주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에 열중 했구나.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거라. 맹주와 만나야겠구나." 모용풍과 백리설이 종리연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서자 종리연은 모용도기 에게 큰 절을 올렸다. "제자. 모용풍이 사부님을 뵈옵니다." "그래. 맹주께서 이 늙은이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무엇입니까?"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용도기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예상은 했으면서도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던 현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세력을 드러냈단 말이오?" 은근히 떨리는 모용도기의 말에 종리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혈천마련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혈천마 련 소속이었던 마두들의 흔적이 몇 군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행동을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맹주의 판단이라면 맞겠지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소?" "청해 오형산에서 백수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백수존자는 이십년 전에 혈천마련과 함께 모습을 감춘 마두입니다.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들이 행동을 개시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흐음.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종남산 근처의 만보장이라는 곳에서 백리세가와 흑방을 이간시키려던 시 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범인은 사람을 죽이고 피살자의 무공을 흡수하여 흉내낼 수가 있다는 마공을 익혔다고 합니다." 순간 모용도기의 말소리가 떨려나왔다. "흠. 천하에 남의 무공을 흡수할 수 있는 마공은 오직 혈존밖에 익히지 않 았거늘. 그렇다면 혈존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하시오? 혈존 출현의 징조란 말이오?" 혈존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끔찍한지 모용도기는 안색을 어둡게 하면 종리 연에게 물었다. "종남산을 뒤진 결과 마화타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던 연구는 아무래도 남의 마공을 흡수하는 어떤 신체의 기능을 연구한 듯 합니다. 게다가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도 혈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손에 패퇴하여 도망을 갔으니까요. 혈존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혈천마련에서 혈존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연 구를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범인은 마화타와 관련된 자일 것임 이 분명합니다." "혈존이 살아났다는 소식보다는 천만다행이구려. 과연 그동안 잠잠하던 천 하에 두 번이나 혈천마련에 소속되어 있던 마두들의 행적이 발견되었다면 그들 흑도가 이제는 가만히 숨어지내지는 않겠다는 뜻이겠군." 모용연이 조심스럽게 자신이 모용도기를 찾아온 뜻을 밝혔다. 백도에 숨어 있는 최후의 힘. 그것을 끄집어 내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흑도의 꼬 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에서 천무삼성이 이를 승낙할 까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저는 백도맹의 맹주로서 승룡곡의 일기와 이기의 일천 천무호정단 의 출두를 사부님에게 요청드립니다." "흠. 그들이 나타났다면 천무호정단도 모습을 드러내야겠지. 그러면 그들 이 숨어있는 곳에 대한 어떤 조사가 있으시오?" 의외로 별 의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용도기를 보며 종리연은 힘을 얻어 자신이 알아낸 바를 밝혔다. "아직 그들의 행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군데 의심스러운 곳이 있습니다. 신녀교라는 사교집단인데 불과 일 년만에 감숙성 일대의 수십만의 일반 백성을 교도로 만든 집단입니다." "신녀교라고? 들은 적이 없는데?" "무림방파가 아니라 일반인들을 교도로 끌어들이고 있어 사부님께서는 모 르고 계실수도 있습니다. 듣기에 기적을 일으키는 신녀를 따르면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며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세를 넓히고 있다고 합니다." "한데 그들이 혈천마련과 관련이 있단 어떤 증거라도 발견했단 말이오?" "지금 천하가 난세도 아니고 어지럽지도 않으며 민심도 안정되어 있습니 다. 그런데도 일년 사이에 수십만의 교도를 확보했다는 것은.... 저는 과거 사도무림의 종주의 하나였던 천뇌교에 그런 능력이 있다는 기록을 읽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험. 천뇌교는 칠십년 전에 천년마교가 변황과 양패구상하면서 사라졌소. 그 때 마도와 사도의 수많은 거파들이 쓰러지거나 힘을 잃었소. 그리고 대 신 나타난 것이 혈천마궁이었지. 하지만 혈천마련에 마도 사도의 칠대절예 가 모두 있음을 혈존이 증명하였으니 과연 천뇌만상공을 전수받은 혈존의 제자라면 가능할지도...." "하오시면 천무호정단의 출도를 허가하시는...." "맹주는 일단 그 신녀교를 조사해 보고 결과를 알려주시오." 모용도기는 자신의 친우인 혜경성승과 현무도선을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일기의 제자들은 무공을 완성하는 대로 승룡곡에서 내보내고 있소. 그대 를 비롯한 상위서열 오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백도를 위해 무림에 활동하 고 있고. 맹주의 동기들 중에서 상위 오백명 정도는 승룡곡에서 이미 자신 의 무공을 완성하여 어느 정도 벽에 부딪쳐 있는 상태요. 맹주께서도 아시 겠지만 그 상태에서는 비급을 들여다보며 홀로 무공을 닦는다고 해서 조예 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지. 어쩌면 맹주처럼 무림활동중에 벽을 깰 계기를 쉽게 만날 수도 있을 거요. 아직 무공을 완성하지 못한 이기나 삼기의 제 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일기의 천무호정단은 어차피 무림출도를 시키려고 했었소. 우선 무공을 완성한 선발의 오백명은 그대를 돕도록 하고 후발의 남은 오백명은 신녀교의 결과를 보고나서 맹주에게 맡길지 아닐지를 결정 합시다." 17 죽음을 부르는 음식(2) 이십년 전에 감숙성 회회현에 사는 약초꾼 맹삼은 산에서 기이한 약초를 발견하였다. 야생파같은 것인데 그 색깔이 이상하게 붉었다. 마치 누가 재 배라도 한 듯 십여평의 밭에 야생파가 열을 맞춰 재배되어 있었다. 심어져 있는 상태가 너무나 양호하여 처음에는 누군가 일부러 재배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주위에 인가도 없는데 누가 일부러 산속에 파를 심을 리 없다고 생각하여 자연스레 산에서 난 것으로 맹상은 판단을 내렸다. 맹삼은 붉은 야생파를 약간 캐내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약초꾼의 지식으 로는 특별한 약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음식에 넣을 채소로 삼기 위해서였 다. 맹삼은 뛰어난 요리사는 아니었지만 홀아비 생활을 오래한 만큼 자신 이 먹을 음식을 요리할 실력은 있었다. 그날 그는 두부요리를 해서 먹었 다. 붉은 파 같이 생긴 채소를 곁들여서. 그리고 그날 맹삼은 이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천상의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별로 풍족한 살림도 아닌지라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던 신세였던 맹삼은 그날 자신이 먹을 한달 분 식량을 모조리 먹어치우고야 말았다. 점점 배가 불러오고 무리한 음식의 침입으로 위장이 탈이 날 정도로 음식을 입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배가 터질정도로 고통이 올 때까지도, 결국 먹다가 다시 토해낼 지경에 이를 때까지도 맹삼은 식탐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제정신이 든 맹삼은 다른 음식을 먹으려고 했지만 어제까지도 감지 덕지 하며 먹던 음식을 그대로 입에서 뱉고 말았다. 그 자신이 특별히 음 식을 가리지 않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먹을 수가 없었다. 마치 모래나 흙을 씹은 것 같아서 도저히 목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아침에 먹은 음식에는 어제 먹었던 붉은 파의 야채가 곁들여지지 않았다. 맹삼은 갑자기 바뀐 자 신의 입맛과 도저히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이 모든 것이 그 붉은 파 때문인 것을 알았다. 단 한번 우연히 붉은 파가 피어있는 곳을 들렀던 것이기에 그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삼일 동안 맹삼은 반쪽이 될 정도로 여위며 정신없이 산속을 뒤졌다. 배고픔에 억지로 다른 음식을 위 속에 넣기는 했으나 도저히 입안 이 껄그러워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맹삼은 모든 생업을 팽개치 고 산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산속을 찾아간 맹삼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며칠 전에 자신이 캐어갔기에 심어져 있던 장소의 반 이상이 황토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발견한 장소에는 여전 히 붉은 파가 십여 평 주위에 가득 심어져 있었다. 그가 캐간 흔적은 보이 지도 않았다. 맹삼은 정신없이 붉은 파를 자신의 약초바구니에 담기 시작 했다. 회회현에 약초꾼 맹삼이 연 작은 음식점이 생겼다. 초라하고 지저분했지만 음식맛은 일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요리는 그저 그렇고 그런 두부죽과 만두가 전부였다. 그나마 속에는 몇 개의 붉은 파가 조금 들어있는 것이 양념의 전부였다. 겉보기에는 전혀 맛있게 보이지 않는 이 음식은 한번 먹 어본 사람들을 반드시 다시 찾게 만드는 황홀경에 빠트렸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음식점에 들린 사람들도 맹삼의 음식을 한 번 맛보고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음식을 탐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맛있다'라는 생각과 '더 먹고싶다'라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그들이 시킨 음식은 바닥이 났고 손님들은 계속 두부 죽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결국 맹삼의 음식점에 들린 사람들은 가졌던 모든 돈을 털어 토해낼 때까지 음식을 구겨 넣었다. 돈이 남아있는 사람은 토해내면서도 연신 음식을 다시 입에 넣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황급히 달려가서 있는돈 없는 돈 모두 털어 맹 삼의 음식점으로 다시 달려갔다. 한번 맹삼의 음식점에 들른 사람들은 가 진 돈이 모두 떨어지고 집에서 가져올 돈도 없어 맹삼에게 쫓겨나기 직전 까지 맹삼의 음식점에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맹삼의 음식점은 날로 번 창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사먹을 정도로 음식이 맛있다는 것 이 회회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넋이 잃을 정도로 맛있었으며 머리털 나 고 처음 먹어보는 황홀한 맛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음식맛에 불과했다. 그 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맹삼의 음식에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특별 한 것이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부족했다. 먹고 돌아서면 다시 그 맛이 생 각났다. 결국 회회현의 사람들은 고이 모아두었던 돈을 들고 세끼를 꼬박 맹삼의 음식점에 들렀고, 농사를 지을 곡식 씨앗까지 팔아가며 맹삼의 음식점에 들렀다. 돈이 떨어지자 있던 땅을 팔아 음식점을 찾았고 재산이 떨어지자 집을 팔아 음식점을 찾았다. 그들 자신이 가진 돈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맹삼의 음식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회회현 사 람들은 얼마안가 가졌던 모든 돈과 재산이 떨어지자 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처음 며칠간은 참을 만 했다. 비록 다른 음식이 돌을 씹고 모래를 넘기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삼시 세끼를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며 점차 머릿속 에는 맹삼의 음식만이 아른거렸다. 오일이 가자 머릿속에 든 음식생각 때 문에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먹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회회현 사람들은 가족을 팔고 딸과 아들을 팔아 맹 삼의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맹삼의 작은 음식점이 커지고 큰 음식점이 주루가 되었다. 이제 맹삼은 회 회현의 제일의 부호가 되었다. 회회현의 땅은 모두 맹삼의 것이었고 회회 현의 사람들은 모두 맹삼의 소작인이 되었다. 그의 큰 주루에는 더 이상 가난한 회회현의 사람이 올 수가 없게 되었다. 회회현 부근의 대부호나 현 령등, 높으신 관리만이 맹삼의 주루에 올 수가 있었다. 맹삼의 욕심이 있다면 그 신비한 보물인 붉은 파가 좀더 많이 자랐으면 하 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싹싹 긁어도 다음날이면 멀쩡하게 다시 그 자 리에 고스란히 원 상태로 자라는 붉은 파는 그 산 그 장소가 아니면 자라 나지 않았다. 아무리 다른 곳에 심고 재배를 해 봐도 붉은 파는 생겨나지 않았다. 결국 붉은 파가 자라는 장소는 맹삼의 가장 소중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붉은 파의 한계가 있으니 아무리 양을 아끼고 음식에 붉은 파를 적게 넣는 다고 해도 파는 음식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붉은 파를 넣지 않는 음식 과 붉은 파를 넣는 음식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어쩌는 수가 없었다. 매일 맹삼의 주루에서 파는 음식은 이백 그릇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덕 에 음식값이 아무리 높아도 감히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인근의 부호와 높으신 관리들만이 오는데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찾는 사람은 많고 파는 음식은 적으니 모두들 맹삼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음식값이 문제가 아니었다. 맹삼은 떵떵거리 며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자에게만 음식을 주었다. 이제는 돈을 주고 음식 을 사는 단계가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맹삼이 싫으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맹삼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여념이 없었 다. 높으신 부호와 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 견딜만 할 때는 맹삼 의 건방진 태도에 호통을 치다가도 음식점을 찾아가지 않은지 오일이 못 되어 맹삼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사정을 하는 관리가 한 둘이 아니었다. 맹삼은 회회현 부근의 제일의 부호가 되었다. 이제는 회회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모두에서 맹삼의 주루에서 음식을 맛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맹삼의 주루음식의 값이 워낙 비쌌기에 부근 마을의 일 반 평민들은 감히 주루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직 부근 십여개 마 을의 지주와 부호와 관리들만이 맹삼의 주루를 찾아 줄을 서고 있을 뿐이 었다. 맹삼의 음식맛을 이미 맛본 적이 있던 회회촌의 사람들, 이제는 맹삼의 소 작인이 된 자들은 가망 없는 희망아래 혹시라도 쓰레기 더미 속에서나마 음식 찌꺼기가 있을까하고 맹삼의 주루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맹삼의 음식은 그릇이 반짝일 정도로 늘 깨끗하게 비워지고 있었기에 음식 찌거기 같은 것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빛이 갈수록 공허해 졌다. 회회현의 현령도 다른 높으신 관리들도 맹삼의 앞에서는 굽신 거렸다. 부 근 지주와 부호들도 맹삼에게 아부의 말을 하기에 바빴다. 맹삼의 한마디 는 현령의 말보다 높았다. 그의 주루의 손님들은 고객이 아니라 그의 종들 이었다. 그가 내놓는 음식 한 그릇을 위해 살인을 불사할 만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았다. 맹삼은 회회현에서는 왕과 같았다. 그는 자기 나이의 반 도 안되는 현령의 딸과 결혼했고 딸까지 낳았다. 정녕 붉은 파는 맹삼의 보물이었다. 맹삼의 젊은 부인은 지금의 생활이 악몽과도 같았다. 회회현의 사람들은 모두 미친 것 같았고 그녀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시집왔을 때 그나마 처 음에는 괜찮았다. 회회현 사람들은 맹삼의 부인이라며 굽실거렸고 다른 사 람들도 그때는 사람같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사람들은 변해버 렸다. 회회현의 사람들은 모두 온종일 마치 넋이라도 나간 듯한 맹한 눈빛으로 시체처럼 거리를 나다녔다. 그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짓지도, 일을 하지도 않았다. 남들을 보고 인사를 하지도 않았으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미 그들의 눈빛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들이 맴도는 곳은 항상 맹삼의 주루근처였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기라도 하듯 맹삼의 주루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살인과 약탈, 강도도 서슴치 않았다. 맹삼의 주 루를 찾는 부호들이 습격 받은 적이 벌써 여러 번 되었다. 누군가 돈이 있 는 부호가 온다는 소문만 돌면 회회현에 들어오는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다. 그리고 맹삼에게 돈 을 바치고 허겁지겁 음식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것을 막을 회회현의 현령인 그녀의 아버지도 제 정신이 아닌 것은 마찬 가지였다.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변한 회회현 사람들도 무서웠지만 맹삼의 주루에 들러 음식을 사먹는 관리와 부호들도 문제였다. 그들은 마치 홀린 것처럼 맹삼의 주루에 들렸고 맹삼에 아부를 떠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양 열성적이었다. 아직은 사람의 형색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사리를 판단하는 이성적인 빛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마차를 대 시시켜 맹삼의 주루를 찾았다. 습격이 빈번히 일어나는, 치안이 극히 흉흉 한 회회현을 목숨을 걸고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루에 도착하여 자신의 재물을 바치며 마치 길들인 강아지처럼 맹 삼의 주위만 맴돌았다. 하루 이백 그릇의 음식은 아침 점심 저녁에 한 때 당 칠십그릇 이상은 팔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몰려들어 주 루에서 나갈 생각도 않은체 돈을 내밀고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은 이백 명 이 넘었다. 경쟁은 치열했고 돈이 있어도 음식을 못먹는 지주나 관리도 있 었다. 평소에 오만하던 그들은 맹삼이 음식 한그릇만 해주면 국물까지 싹 싹 혀로 핥아먹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부친도 주위 근방에 미모와 재지로 소문난 그녀를 강제로 떠맡기듯 맹삼에게 시집보냈겠는가? 황후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거라던 부친의 자랑인 그녀와 교환한 대가로 그녀의 부친이 얻은 것은 매일 같이 확실하게 먹을 수 있는 맹삼의 음식 한 그릇이었다. 모두들 미쳤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맹삼의 음식을 국물이라도 입에 대지 못한 체 한달 이상 지난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의 눈빛을 지니지 못 햇다. 그 맹한 죽은 눈빛에 사람의 색이 돌아오려면 누군가를 습격하여 돈 을 가지고 주루에 와 어떻게 해서든 맹삼의 음식을 입에 대어야 했다. 맹삼 주위의 사람들, 그나마 맹삼의 음식을 항상 먹을 수 있는 지주와 관 리들도 사람의 행색을 가졌으나 이상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맹삼에게 개 처럼 꼬리를 흔들었고 그날 그날의 재수에 따라 맹삼의 음식을 먹지 못한 부호는 맹삼의 발이라도 핥듯한 시늉을 했다. 하지만 맹삼의 눈밖에 벗어 나 한달 이상 맹삼의 음식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회회현 사람들과 같은 미친 야수의 눈빛으로 맹삼의 주루를 배회할 뿐이었다. 맹삼의 젊은 부인은 너무나 무서워 맹삼의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처 음에는 부친과 남편이 원망스러워서, 나중에는 회회현사람들의 광증이 무 서워서였다. 마치 회회현 전체가 맹삼을 신으로 받드는 듯 했다. 아니, 맹 삼의 음식에 맹종하는 듯 했다. 맹삼의 음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맹삼 을 더욱 받들었고 얻지 못한 사람들의 눈빛이 갈수록 흉포해졌다. 이미 일 년 이상 주루 근처를 맴도는 회회현의 사람들은 사람이라고 불릴 수가 없 게 되었다. 흉포한 사람들의 입가에 군침이 돌며 그나마 주루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 적부터였을까? 그 눈빛은 이제 돈을 빼앗기 위한 약탈자로서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닌 먹음직스런 고기를 눈 앞 에 둔 맹수의 빛이었다. 회회현에서 주루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일대 부호로 소문난 맹삼 일가가 갑 자기 들이닥친 마적떼들에게 몰살당한 것으로 관부의 서류에 기록된 것은 십년 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사실은 워낙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기에 부근 현령이 사건을 빨리 처리 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그날의 일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부근 일대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 시체와 피로 피비린내와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다. 회회현의 현령마저 죽었기에 요청을 받은 부근 현령이 급히 달려왔다가 그 많은 시체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체를 묻는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워낙 시체가 많았기에 부근 마을 에서 사람들을 징발하여 시체를 묻는 데에도 하루가 걸렸다. 그 후 회회현 에 돌림병이 돌아 그나마 살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은 한달이 지난 후였다. "호호호호." 피눈물을 뿌리며 교소를 터트리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죽었다고 소문난 맹삼의 아내였다. 완전 미쳐버렸는지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 져 있었다. "잘죽었다. 잘 죽었어. 더러운 것들. 사람도 아닌 것들. 미친 것들." 웃으며 울고, 울며 웃는 전형적인 미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맹삼 의 아내 주위에는 온통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욱한 붉은 안개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미친 여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공포스러울 것이 었다. 아니, 그것은 붉은 안개가 아니었다. 회회현 사람들이 묻힌 묘지. 그 묘지 위에 맹삼이 음식재료로 썼던 붉은 파가 그득 솟아나와 있었다. 맹삼이 그 토록이나 재배하려고 했고, 재배하는 데에 실패했던 붉은 파가 그것을 먹 고 죽었던 사람들의 무덤위에 온통 솟아나와 있었다. "미쳤어. 모두 미쳤어. 붉은 파를 먹다가 먹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모두 미쳐 버렸어.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과 딸을 뜯어먹었어. 맛있는 음식이라 도 된 듯 뜯어먹었어. 평소 남편의 음식을 먹고 지낸 모든 사람들을 뜯어 먹었어. 호호호." 미친 여인의 광소. 그것은 달빛이 비치는 모든 세상을 소름끼치게 했다. "내 몸에서는 그 저주받을 붉은 파의 냄새가, 자신들을 유혹하는 맛의 향 기가 안 난다며 미친놈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사람을 먹지못해 환 장한 듯 남편과 딸과 아버지를, 그나마 남편의 음식을 먹고 지냈던 모든 사람을 맛있게 뜯어먹으면서도 그놈들은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리고 남편이 죽고 붉은파가 있는 곳이 영원히 비밀로 사라지며 놈들도 모조리 죽어버렸어. 호호호. 이 저주받은 붉은 파가 여기 있구나." 미친 여인은 무덤가에 가득 핀 붉은파를 쥐어 뜯어 품속에 집어 넣으며 어 디론가 비틀비틀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종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회 회현의 무덤가에는 온통 붉은 파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보름 후 무덤가 에 가득했던 붉은 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혈향초는 여전하군." 백이충은 사방에 널려져있는 붉은 파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 나가는 곳은 마치 서리를 맞은 꽃처럼 붉은 파들이 시들어갔다. 그가 얼마 있지도 않은 시간에 십여평 안의 모든 붉은 파가 삽시간에 스러지고 말았 다. "혈근이 없지 않은가?" 백이충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십여평 안의 모든 붉은 파가 죽어갔는데도 그의 얼굴은 결코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낭패한 빛이 역력했다. "벌써 피의 맛을 보고 장소를 옮긴 것인가? 하기야 이십 년이면 시간도 많 이 흘렀지.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젠장. 잘못하면 요요경을 묻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일이 벌어질 텐데?" 그가 중얼거릴 때 그의 뒤에 서있던 쌍노중의 한 사람인 환마가 물었다. "주군. 이것은 주군의 식사 때에 즐겨 드시던 야채 아닙니까? 혈향초라고. 주군께서 특별히 파종하신 것으로 오직 혈천마궁 안에서만 자라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여기에....?" "내가 심어 놓았었지. 특별한 주술을 걸어서. 하지만 내가 궁주로 있을 때 는 혈천마궁의 분타에 그 관리를 부탁해 놓았었는데. 혈천마궁의 세력이 모습을 감추며 이곳도 버려지고 누군가 타인의 손이 닿았던 것 같군." "특별한 주술이시라면....?" 하지만 백이충은 아무 말없이 허공을 노려볼 뿐이었다. 일년전 감숙성에 한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처음 나타난 곳은 역병 이 돌고있는 감숙성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녀는 한달간 그 마을에 머물 렀고 역병을 깨끗하게 몰아내었다. 그때만 해도 관리들이나 무림인들이 그 녀를 보는 시각은 의술이 뛰어난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는 정도였다. 한달 후 여인은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 때 마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여인의 추종자가 되어 그녀를 따라 과감히 마을을 버리고 그녀를 쫓아갔다. 그것이 신녀교의 시초였다. 일년간 여인은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소문에 의하면 장님에 그녀의 손길 이 닿자 눈을 떴다고도 하고 앉은뱅이를 그녀가 쳐다보자 걸을 수 있게 되 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후광이 비춘다는 소문도 있고 백호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보호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당장 죽어도 시원치 않은 병자가 그녀가 내리는 성수를 마시면 반드시 일 어난다는 소문도 있고 일년간 먹고 마시지 않아도 신녀의 그림자만 보면 배가 부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처음에는 혹세무민의 사교가 일어났다고 하여 관리들이 조사를 하기도 했 다. 하지만 신녀교는 세력을 일으켜 다른 마을을 습격하는 도적질을 하지 도 않았고 병사들을 기르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약자를 보호 하고 병자를 치료하는 것 뿐이었다. 아무리 탐욕에 물든 탐관오리도 신녀 를 만나고 그녀의 모습을 접하게 되면 개과천선하여 신녀교에 투신한다는 말도 있었다. 감숙성의 전 관리들이 크고낮은 신분에 관계없이 신녀교에 정성을 쏟았다. 심지어 경성에 신녀교의 선행을 알리는 공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겹치게 되자 감숙성에서는 황제나 경성의 고관들도 신녀 교의 교도이며 황제가 감숙성의 관리에게 지시를 내려 신녀교의 배후를 돌 봐준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일년이 지난 지금 신녀교의 교도수는 무려 삼십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 다. 감숙성에 있는 옛 회회현에 자리를 잡은 신녀교는 이제 신녀를 중심으 로 감숙성을 또다른 하나의 왕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감숙성 회회현에는 하나의 성이 있다. 작은 마을이었던 회회현에 신녀가 머물기 시작하면서 신녀를 따르는 교도들이 건물을 증축하고 외곽에 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일하다 보니 거대한 윤 곽을 가진 건물이 순식간에 들어섰고 그것은 하나의 성의 형태를 띠게 되 었다. 신녀가 머무르는 이곳을 감숙성 사람들은 신녀성지라고 불렀다. 이 제 신녀성지는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신녀를 직접 받드는 수만 명이 사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변해 버렸다. 휘이익! 어둠을 틈타 이십명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신녀성지의 담을 넘었다. 가벼운 몸놀림과 한번 도약할 때마다 일 이장씩 날아가는 빠르기를 볼때 무림인, 그것도 고수임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신녀교도가 일반인이라 무림 에서는 신녀교를 무림세력으로 보고있지 않았다. 일반인이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는 단순한 도시나 마을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은 검은 옷의 사람들은 경계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새 이십명의 검은 옷의 무인들은 수많은 집들과 건물을 지나쳐 신녀성 지의 중심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순찰을 도는 경비하나 보 지 못한 흑의인들은 처음과 달리 경계심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 이 보기에 이곳은 일반 마을이나 성과 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고 또한 그들의 은잠술은 훌륭한 것이라 설사 무림인이라도 그들의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하하하. 신녀교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들어올 수가 있는 곳이오. 어이하여 그리도 조심스럽게 오시는 것이오?" 흑의인들이 어둠에 감싸인 신녀성지의 중앙부 거대한 건물의 담을 넘었을 때였다. 갑자기 흑의인들의 귀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흠짓 하자 그들 주위를 시작으로 갑자기 주변 담장에 환한 횃불의 빛이 드러나 며 흑의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의인의 앞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당신은.... 호면염라 자대협?" "하하하. 그렇소. 그리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군. 맹의 최고 정예라는 흑영 당의 형제들이 아닌가?" 흑영당의 형제라는 흑의인들은 몹시 놀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한 달 전만해도 호면염라는 자신들과 같은 소속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자대협께서는 실종된 것이 아니었소?" "실종이라니. 나는 이렇게 잘 있네." "자대협. 어찌된 일입니까? 무사히 계시다면 어째서 맹에 연락을 끊으신 겁니까? 그리고 자대협과 같이 신녀교에 침투했던 맹의 형제들은?" "염려말게. 그들은 나와 함께 잘 있네." 백도맹 감숙지단 소속 흑연당의 당주 일수쾌검 이진악은 의심스런 눈으로 호면염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신녀교를 사이한 집단으로 의심하고 있었 고 그 때문에 혹시라도 호면염라가 어떤 사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눈치챈 호면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하지 말게. 이곳에서 자네들을 해칠 사람은 없네. 맹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악하거나 이상한 곳이 아니네. 내가 맹과 연락을 끊은 것 은 달리 이유가 있어서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나는 신녀를 뵙고 직접 그 성력을 느꼈네. 그리고 내 인생을 돌이켜 보았 지. 그동안 무공이라는 것을 써서 협을 행한다고 돌아다녔지만 얼마나 백 성들을 위해 도움이 되었는지도. 백성들이 원하고 따르는 분, 그런 선행을 베푸는 것은 무림인이 아니라 신녀님 같은 분이라는 것도. 그래서 신녀교 에 투신했다네." "자대협! 제정신 입니까?" "나와 함께 왔던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야. 검을 버리면 백정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무림과의 연을 끊고 신녀교도로서 살아 가고자 맹과의 연락도 스스로 끊은 것일세. 다른 형제들도 나와 같은 마음 이었네." 이진악은 도저히 못믿겠다는 얼굴빛으로 호면염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면염라를 의심하는 듯 했다. "자대협. 많이 변하셨군요. 혹시 어떤 금제에 당하신 것입니까? 우리를 어 찌하려는 생각입니까?" "못믿겠다는 표정이군. 하긴 나도 처음에는 그랬었지.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신녀교는 결코 맹이 의심하는 것처럼 사교 집단이 아니야. 백성들 을 돕기위해 하늘의 계시를 받은 신녀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일 뿐이야. 맹에 돌아가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우리 잘못이지만 결코 신녀교 에서 우리를 억제한 것은 아니네. 사이한 술법이나 금제 같은 것은 없어." "자대협께서 그렇다면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맹에 지시를 받고 다시 돌 아오겠습니다." 그때였다. 신녀성지쪽에서 한명의 인영이 나타나 호면염라의 옆에 나타났 다. 그리고 이진악은 그를 보고 크게 놀랐다. "동형? 무사하셨소?" "자네. 이진악이 아닌가? 자네인 것 같아서 급히 달려왔네. 이거 정말 반 갑구나." 나타난 자는 감숙성에서 십년 전부터 명성을 떨친 운무팔협의 막내 동운영 이었다. 그리고 동운영은 이진악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협명이 자자한 호면염라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만 이진악은 동운영은 잘 알았다. 그의 사람 됨됨이로 보아 결코 강제로 억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반갑네. 안그래도 언젠가 맹에 보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 일피일 미뤘는데. 자네가 여기에 오다니. 대신 우리의 일을 자네가 돌아가 서 보고하면 되겠구나." "동형. 자대협께서 신녀교에 투신하셨다는데 동형도 설마...." "하하. 들어가세.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설마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이야 하 겠는가? 여기에는 우리 형제와 그동안 맹에서 보냈던 사람들이 다 있네. 다만 백성과 생활하는 신녀교의 실상을 알고 그들과 합류했을 뿐. 들어가 서 만나보게. 자네가 보면 반가워할 사람도 여럿 있네." 이진악은 허락을 하려다가 호면염라를 보고 멈칫했다. "여러분의 말이 사실이라해도 동형과 자대협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동안 맹에서 얼마나 여러분을 걱정했는지 모릅니까? 신녀교에 투신하고 싶었다면 맹에 보고를 한 이후에 했었어야 합니다." 호면염라가 쓴 웃움을 지었다. "경계심이 강한 친구로군. 결정하게. 돌아가든 나를 따라 맹의 지시대로 신녀교를 조사하든 마음대로 하게. 무기를 들고 나를 경계해도 좋네. 결국 은 진실을 알게 될테니까. 내가 안내하지. 신녀교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알 고 싶은 것을 조사해도 좋네. 우리는 자네들을 방해할 생각도 없고 싸울 생각이 없으니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면 백성들을 사랑하는 신녀교의 진실 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네. 맹으로 돌아가서 자네들이 본 것을 보고해도 좋고 이곳에 남아도 좋아."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에게 직접 신녀를 만나도록 해 주실 수 있습 니까?" "신녀님은 원하는 모든 사람을 만나보신다네. 하기는 아무리 내가 설명하 고 자네가 눈으로 확인해도 신녀님을 직접 만나보는 것 이상 본교를 설명 할 수가 없겠지. 나도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그분을 뵌다면 자네들도 바로 알수 있을 것이네. 그분이야 말로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하늘이 내려 주신 분이라는 것을." 호면염라는 그라는 것을 의심할 정도로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적의가 없 다는 표시로 두손을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맹으로 돌아오든 따라오든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돌아갈 사람은 우리소 식을 대신 좀 전해주게나. 그리고 신녀님과의 만남도 주선해 주지." 흑영당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진악은 곧 결심한 듯이 자심 염라의 뒤를 따랐다. 동운영도 옆에서 따뜻이 그를 맞이하였기에 약간의 안심을 한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신녀교를 알기위해서는 신녀교에 들어가 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영당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 다. 백도맹은 오단 삼십육지부로 나뉜다. 하남에 백도맹의 총단이 있고 남칠성 을 다스리는 두개의 남부본단과 북육성을 다스히는 두개의 북부본단이 있 다. 이들 네 개의 본단의 책임자는 천무삼성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나도 는 대협들로 무성 종리연의 친우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백도맹의 세력은 이들 다섯에 집결되어 있는데 총단의 힘이 가장 막강하나 다른 네 개의 본단역시 총단에 별로 뒤지지 않는 힘과 세력을 거느리고 있 다. 백년 내에 천년마교와 혈천마궁이라는 흑도의 거대연합과 전쟁을 벌여 왔던 백도이니 만큼 흑도의 기습에 총단이 무너지는 참상을 겪은 적도 여 러 번이다. 그 때문에 백도는 그 힘을 한곳에 집결시키지 않고 천하 다섯 곳에 분산시켰다. 다섯 개의 총단 및 본단 밑에 삼십육개의 지부가 존재하거니와 이들 지부 는 지단이라고도 불리운다. 감숙성에는 감숙지단이 있고 감숙지단주는 혈 천마궁의 결전에서도 살아남았던 유명한 백도명숙으로 무당파 출신의 속가 제자 협옹 장악이다. 장악은 무당파의 장문인에게 사제뻘되는 배분을 가지 고 있다. "흑영당도 소식이 없다고?" "예. 신녀교에 들은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협옹 장악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신 산서생 도익균이었다. 그는 협옹이 신임하는 협사로 벌써 십년 넘게 협옹 과 함께 감숙성에서 일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신녀교에 괴물이라도 있다는 건가?" "신녀교가 아무리 철옹성이라고 해도 본맹의 정예가 이렇게 강물에 빠져든 조약돌처럼 사라진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흑영대의 실력으로 보아 설사 혈천마궁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한 두명은 빠져 나올 수가 있을 실력인데." 협옹이 탄식을 했다. "신녀교는 일년전 생겨날 때부터 감시하기는 했지만 결코 무림인으로 보이 는 사람은 없었네. 단순히 일반 백성들이 심취하는 종교였지. 그들은 단지 많은 숫자가 모여살고 내부 안에서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뭉쳐 살아갔을 뿐 이야." "그렇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뭉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관부에서 그들의 편의를 봐주는 것만이 이상할 뿐, 무림으로서는 주의를 할 만한 세력이 아 니었지요." "하지만 일년 안에 감숙성 제일의 종교세력으로 변해 버렸지. 수많은 사람 들이 계속 신녀교로 몰려 들었으니까. 그래서 총단에 보고를 올렸고 총단 에서는 신녀교가 무림세력에 연관이 되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네." 도악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구류방에 의뢰를 했었지?" "관부와 친밀한 신녀교를 본맹이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구류방에 신녀교의 조사를 의뢰했었지요. 구류방은 정보통인 만큼 사람 수도 많고 정보망도 뛰어나니까요. 게다가 용병 낭인들을 고용하는 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류방은 장로와 함께 일류고수급 이백명의 용병을 고용하여 신녀교에 뛰 어들었습니다. 일반 종교세력인 신녀교의 조사를 구류방에서 실패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죠." "두번 째는 감숙성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협객 운무팔협에게 부탁했었지." "운무팔협은 하나같이 절정고수입니다. 감숙성에서 그들보다 뛰어난 고수 를 찾기는 힘이 듭니다. 구대문파의 장로급 배분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판단력과 배분에 걸맞는 경험 을 가지신 분들이라 어떤 험난한 일도 헤쳐나오셨습니다. 그들이라면 신녀 교의 허실을 가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소식이 없 었습니다." 장악은 탄식을 내뱉었다. 총단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도 그는 신녀교가 자신의 골치를 썩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닭이 많으면 그 중에는 학도 한 마리가 끼어 있는 법. 수십만의 교도들이 모여있는 신녀교를 너무 얕봤지. 그 엄청난 교도들 속에 무림인들도 끼어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하지만 설마 운무팔협마저 아무 소 식도 없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세번 째에 멀리 호북에 있는 자객전에 부 탁했었지?" "자객전은 중원의 무공 뿐만 아니라 동영에서도 인자술을 전수받았다고 했 습니다. 당금 무림에서 살수로서의 실력뿐만 아니라 은신과 침투에서도 독 보적인 경지를 자랑하는 단체입니다. 무공실력은 운무팔협보다 못하지만 은잠과 잠입에 대해서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급살수를 삼십 명이나 투입시켰었습니다." "네번째는 본맹에 가입한 것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맹에 협조하 는 호면염라 자형제에게 부탁했네. 그는 자신의 친구 열 두명과 함께 신녀 교에 들어갔지. 하나 같이 절정고수들이었네." 협옹은 신산서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삼일 전에는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관부와의 충돌까지 각오하면서 본 지단에서 가장 뛰어난 흑영단의 사람들을 보냈네. 그런데도 단 한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흑영당주 이진악에게는 일단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무조건 신녀교에서 철수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습니다. 그의 심기로 보아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은 여태까지의 사태 중에서 가장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구류방이나 자객전, 운무팔협, 호면염라와 흑영당등 하나같이 놀라운 이름 들이었다. 그들이라면 백도맹의 총단에 침입한다고 해도 한 두명은 살아돌 아올 만한 실력과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다. 감숙성의 한낱 사교에 실종될 만한 인물들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도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왔다. "더이상 신녀교는 삼급 경계대상이 아닐세. 특급으로 올릴만한 세력이야. 자네는 이제 어떤 복안이 있나?" "더이상 외부에서의 침투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내부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첩자로 활용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신녀교에 의혹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신분을 위장하여 신녀교도로 들어갔지만 진심 으로 신녀교에 귀의하겠다며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저희가 침투시켰던 순찰요원이나 타 세력에서 침투시켰던 밀정들이 신녀교도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여러 번 목격되었습니다. 또한 신녀교도들 의 신앙이 어찌나 투철한지 결코 신녀교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신녀교의 요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몇몇 납치하여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어떨까?" "소용없을 것입니다. 여태 신녀교도들의 행동을 보면 모두 신녀교에 대한 찬양일색이며 충성심이 강하고 또한 신녀성지 중심의 일은 전혀 알지도 못 합니다. 결국 모든 신녀교의 비밀은 중지의 몇 사람만이 알고 있을 터인데 그들에 대한 정보는 신녀교주인 신녀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나마 신녀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도 그녀의 용모와 여태까지의 기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어떤 계획이 있겠지?" "본맹의 세력을 전면으로 내세워 신녀교를 압박하는 방안이 있습니다. 본 맹의 사람들이 실종된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가능은 합니다만 관부와 의 마찰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감숙성의 관리는 안찰사마저 신 녀교도라는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그것은 맹에서 원하는 바는 아니네. 현재 우리의 의심과는 달리 신녀교는 백성들과 관 양쪽에서 폭팔적인 인기를 얻고있네. 잘못하면 천하인에게 본 맹에 대한 원망만이 생길 뿐이네." "그렇다면 가능성은 적지만 첩자를 투입시키는 일을 다시 한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번처럼 외부의 침입이 아닌, 신녀교도로 위장하여 내 부에서 활동할 정도로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절대 신 녀교에 세뇌되지 않으면서도 빠른 시간내에 그들의 중지에 올라갈 정도로 명망있고 확실한 신분의 인물로.... 다행히 이번에 신녀제전을 연다고 하니 까 기회는 있습니다." "알았네. 맹의 총단에서 신녀교의 일로 사람을 보낸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계획을 세워보게." 강호에 삼대 사종이 있었으니 바로 혈사문, 천뇌교, 음산곡이었다. 천뇌교 의 절예를 완성했던 종주가 팔십년 전 천년마교의 난에서 활약하다가 결국 변황동맹과 함께 동사한 팔대천마의 한사람 천유였다. 천유를 비롯한 팔대천마가 사라진 이후 다시 강호는 백도천하가 되었다. 천뇌교는 백도천하를 뒤엎고 다시 천뇌교의 이름을 천하에 뒤덮기 위한 강 대한 세력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았다. 천뇌교의 주력은 천유의 아홉제자였다. 천뇌교의 절학이 너무나 방대하고 오묘하여 천유의 무학을 아홉이 나누어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천뇌교의 노력을 하늘은 돌보지 않 았던 것일까? 오십년 전에 흑도에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금제일마라고 불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혈천마궁과 혈존이었다. 필사적으로 사도의 종주의 이름을 걸고 천뇌교의 마지막 교주 천뇌광풍은 그의 여덟 사제와 함께 혈천마궁에 이십년을 대항하였다. 하지만 사술과 무공, 그 어떤 것도 천뇌교는 혈천마궁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삼십 년 전, 천뇌광풍의 막내사제 천지마군 막이동에 의한 배반에 의하여 천뇌 광풍은 혈존에게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천뇌교의 세력은 혈천마궁에 흡수 당한다. 당시는 천뇌교 뿐만 아니라 천하 전체가 혈천마궁에 유린되던 시 기였다. 천년 역사를 지녔던 천뇌교는 그 유래도 분명치 않은 혈천마궁의 속하 천 뇌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편입 되었고 막이동의 아들 만상여의 막청운은 천 뇌전의 전주로서 혈존의 여덟 번째 제자가 되었다. 끝까지 혈천마궁에 굴 복하지 않던 천뇌광풍과 그를 따르던 그의 사제들은 모두 혈존에 잡혀 목 숨을 잃었다. 하지만 단 두사람만은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가 바로 귀영 신군과 적안미부였다. 귀영신군과 적안미부는 서로 남매사이였고 적안미부는 천지마군이 사모하 는 여인이었다. 혈존은 자신에 굴복한 천지마군 막이동과 여덟째 제자 만 상여의 막청운의 청에 의하여 귀영신군과 적안미부를 혈천마궁의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복종하기를 기다린다. 귀영신군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협 에 적안미부는 끝내 혈천마궁에 굴복하고 천지마군의 청을 받아들여 부부 가 되었지만 귀영신군은 굴복하지 않았다. 천뇌전의 전주 막청운은 자신의 부친과 적안미부의 사이를 고려하여 귀영신군을 대우했기에 귀영신군이 혈 천마궁의 감옥에서 겪었던 일은 그리 고생스럽지 않았다. 이십년 전, 혈존이 죽고 혈천마궁의 세력이 종적을 감출 때 혈천마궁은 혼 란의 도가니였다. 혈존의 아홉제자들은 그들에 굴복하지 않고 아직도 혈존 을 기다리는 혈천마궁의 궁도들을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그 혼란기를 틈타 적안미부는 귀영신군을 구해 혈천마궁에서 탈출하였다. 천뇌전의 추격을 뿌리치는 와중에 귀영신군과 적안미부가 서로 헤어지게 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귀영신군은 스스로 천뇌교의 마지막 정당한 후예로 자처하고 있었다. 천지 마군이나 혈존의 여덟째 제자였던 만상여의는 천뇌교의 반도에 불과하다. 비록 만상여의가 삼대 사도지예의 하나인 천뇌만상공을 익혔다고 해도 그 것은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반도인 천지마군과 만상여의를 죽이고 천뇌교 를 재정비하는 것이 귀영신군의 꿈이었다. "들어오너라." 귀영신군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밖에 대기하고 있는 두명의 시녀를 바 라보았다. 신녀교의 외전 전주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인지 제법 신경 을 써서 미색이 고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귀영신군은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면 외전전주를 칭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혈천마궁, 아니 혈존이 죽고나서 아홉제자가 각기 세력을 나누어 가진 혈 천마련의 이목을 피해 은거하기를 벌써 이십 년. 갑작스레 동생 적안미부 의 연락을 받았던 것이 몇 달 전이었다. 어떻게 그의 소식을 알았는지 적 안미부는 자신이 제자와 함께 신녀교라는 세력을 일으켰으니 도와달라는 소식을 보냈다. 적안미부의 소식이 반갑기는 하지만 혈천마련을 두려워하 여 몸을 꽁꽁 숨기고 있던 귀영신군의 담이 갑자기 커져 동생의 청을 받아 들인 것은 아니다. 기꺼이 자신이 살던 거처를 버리고 신녀교를 찾아왔던 이유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다른 곡절이 있었다. "호오? 이것봐라?" 귀영신군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의 두 눈은 마치 창날처럼 장여화의 몸을 샅샅히 흝고 있었다. (얼굴은 좀 안 받쳐주지만..... 세상에 이런 몸매를 가진 여인이 있다니. 몸 자체의 곡선이 가히 예술이다. 최고의 옥질이며 가히 천상의 우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구나. 신녀교에 이런 보물이 있다니.) 귀영신군은 입안에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고 장여화를 쳐다보았다. 하룻밤의 노리개를 기대했는데 이건 상상밖의 보물이다. 절로 마른침이 넘 어가는 것을 느끼며 귀영신군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두 시녀가 불안한 듯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자 귀영신군은 장여화가 아닌 다른 시녀에게 물러 가라는 손짓했다. "너는 들어가거라. 오늘 시중은 이 아이로도 충분하다." 귀영신군의 말이 끝나자 시녀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 으며 동시에 장여화는 불안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엉거주춤 서있는 장여화 에게 귀영신군은 부드럽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너라." 귀영신군의 부름에 장여화는 속으로 '참으로 일이 엉망이 되었다' 라고 불 평하며 그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소녀 장여화라고 합니다. 대인께서 시키실 일이 있으신지요?" "여화라. 이름도 곱구나. 좀 더 가까이 오지 않겠느냐?" 귀영신군의 부드러운 말에도 장여화는 경계심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결 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귀영신군에 게는 귀엽게 보였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분부하십시오. 명이 없으면 돌아가겠습니다." "하하. 네가 아무래도 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들은 모양이로구나. 너무 겁먹을 것 없다. 단지 네가 귀여워서 말이나 나누고자 하는 거란다." 귀영신군은 장여화가 방문 앞에서 얼쩡 거리자 그가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장여화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 있지도 못할 처지라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귀영신군의 손이 번쩍였다. "앗!" 장여화는 갑자기 천지가 빙그르 돌더니 그녀의 몸이 허공에 떠올라 방안에 있는 침대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급한 나머지 즉 시 몸을 일으켜 손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어라? 무당의 태극장의 자세가 아니냐? 그리고 보니 몸을 일으킨 자세도 범상치 않고. 너는 일반 시녀가 아니로구나." 귀영신군의 말에야 장여화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그녀의 표정이 영 어색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표정만 어색하게 변할 뿐 얼굴빛은 달라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귀 영신군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흐흐. 그리고 보니 그 얼굴이 진짜가 아니로군. 둔한 표정과 움찔거리는 몸이 나타내는 기색이 어울리지가 않는구나. 어쩐지 몸매와 얼굴이 너무 차이가 있다고 했다. 너는 변장을 하고 신녀교에 침투하러 온 간세로구나. 내가 너를 잡아야겠다." 장여화는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즉시 창밖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귀영 신군을 향해 싸울정도로 그녀는 무모하지 않았다. 무당산에서 익힌 그녀의 경공 무예는 훌륭했다. 다만 그 정도의 무예가 귀영신군의 앞에서는 재롱 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미처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온 몸이 따끔거리며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어느새 귀영신군이 지풍을 날 린 것이다. 그녀의 몸이 침대위에 풀썩 쓰러지며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흐흐. 몸도 풀고 재미도 보면서 첩자도 바치면 그럭저럭 동생에게 면목은 서겠구나. 듣자하니 동생도 그녀의 제자인 신녀교주를 무시하지 못한다던 데 처음부터 공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녀교주가 어떤 인물이든 교주 의 사백인 이 귀영신군이 온 이상 신녀교의 세력은 내 손에 좌우되리라." 귀영신군은 침상위에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한번 만졌다. 즉시 엷은 면구 가 벗겨졌다. "쯧쯧. 엉성한 변장술이로다. 무림인이 별로 없는 신녀교이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 있다면 당장 알아차릴 정도로 어색한 면구 술이구나." 말을 중얼거리던 귀영신군은 갑자기 헛 숨을 내쉬었다. 면구아래 드러난 여인의 얼굴. 그것은 귀영신군이 가히 처음보는 경국지색의 미모였다. 귀 영신군은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 미모에 홀려버리고 말았다. "대...대단하군. 짐작은 했지만 이정도의 미모라니. 청초함과 요염함이 절묘 하게 조화를 이루며 남자의 혼을 빼놓는구나.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전설의 양귀비나 서시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가히 천하제일미라는 이름은 이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여인은 바로 금혜연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무림칠미의 한 사람이니 귀영신군이 놀랄만 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넋놓고 있던 표정을 추스르며 귀영신군은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의 옆에 앉았다. "이 정도 미모라면 보통 인물은 아니겠군. 무당파의 제자이니 후에 알아보 면 신분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현재 내가 은거한지 오래되어 무림에 있는 인물에 대한 것을 알 수가 없으니 당장은 정체를 알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이 여인의 신분이 어떻게 되든 당장 내게 일어난 불을 끄는 것이 먼저로 다." 귀영신군의 손이 그녀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옷을 벗기기 위해 옷자락을 풀어헤치려 하던 귀영신군의 몸이 마치 튕겨져 나가듯 뒤로 일장이나 물러 섰다. "세상에. 저것이 왜 저기에?" 귀영신군의 눈은 마치 튀어나올 듯이 붉어져 있었다. 공포와 경악이 어우 러져 바라보고 있는 것은 금혜연의 가슴쪽이었다. 약간이나마 풀어진 옷자 락 사이로 목에 걸린 목걸이가 보였는데 그것은 작은 거울이었다. 하지만 귀영신군은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작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놀 랍게도 천하의 귀영신군이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트...틀림없다. 배교의 보물. 요요경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이?" 귀영신군의 머리에 한명의 악마가 떠올랐다.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나 잔인 하고 악랄하며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악마. 이 세상 누구보다도 무시무시 하며 신선도 부처도 그 앞에서는 꼬리를 말 정도로 막강한 악마. 지옥의 염라대왕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마왕이 그 악마였다. 귀영신군이 이 세 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자가 바로 그 악마였다. 혈천마련을 피해 은거한체 잘 살고있던 귀영신군을 갑자기 찾아온 악마가 그를 찾아온 것은 바로 동생의 소식을 가져온 자가 다녀간지 얼마 되지 않 아서 였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쳐지는 악마는 그의 두 시종인 노귀를 시켜 귀영신군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 귀영신군은 두 노귀에 의해 만신창이 될 정도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영 약이 있다고 한들 일년 이내에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부숴져 완전 히 엉망진창의 몸상태를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악마는 그의 이마에 간단 한 십자표시를 함으로써 귀영신군을 벌떡 일어나게 했다. 악마는 귀영신군 을 절하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감숙성 난주 근처의 회회현이라는 곳에 신녀교가 있다. 듣자하니 일 년만 에 벌써 수십만의 교도를 확보했다고 한다. 또한 알려지지 않게 비밀리에 여러 가지 일에 손을 쓴 모양이다. 옥문관을 지키는 변방수비대를 실질적 으로 다스리는 중급 무장들과 감숙 일대의 안찰사와 대부분의 현령등의 관 리들까지 세뇌하였고 그로인해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군사력과 관의 힘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감숙성을 지배한다고 한다. 또한 사막을 통해 움직이 는 서역상인의 교역로와 돈황의 돈줄을 움켜쥐어 그 재력이 엄청나다고 들 었다. 신녀교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감숙을 완 전히 움켜쥐어 가히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꼬리를 감추고는 있으나 천하를 향한 또 다른 야심을 위해 그 막대한 재력 과 세력으로 요즘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악마는 징그럽게 씨익 웃었다. 악마가 웃을 때마다 귀영신군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쿵쿵 떨렸다. "그 신녀교가 바로 네 동생과 신녀라는 계집이 만든 것이지. 무림인을 끌 어들이는 것은 아마도 천뇌교를 부활시키려는 네 동생의 생각인 것 같은 데. 네가 거기로 가서 본좌 대신 수고좀 해줘야겠구나." "말씀만 하십시오." 귀영신군은 자신의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왜냐하면 악마 가 그의 이마에 피로서 그린 십자의 표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다. 사종의 후예인 귀영신군이 악마가 자신의 이마에 그은 혈선의 십자표 시, 배교 최악의 술법 형벌혈십자흔을 모를리 없으니 감히 악마에게 거역 할 수가 있을리 없었다. 이제 악마의 호주머니에 든 작은 인형, 귀영신군과 똑같이 이마에 혈십자 가 그려진 인형에 가해지는 모든 압력이 귀영신군의 몸에 직접적인 고통으 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귀영신군의 몸을 움직이는 통제도 언제든지 인형 을 통해 악마가 귀영신군으로부터 빼앗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귀영신군은 악마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형벌혈십자흔에 당하면 스스로 자살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으며 시술자가 풀어주거나 죽기 전까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 원히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영신군의 생각에 악마 는 영원히 살것같은 괴물이었고 동시에 그를 어떤 이유에서건 저주에서 풀 어줄 자비심같은 것은 눈꼽만큼도 없는 존재였다. 이제 귀영신군은 지옥보 다 더한 나락에 이미 떨어진 신세였다. 어차피 벗어날 수가 없는 술법에 당한 것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반항을 하여 악마를 화나게 해서 고통을 당하느니 자청해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나았다. "아무래도 네 동생은 천뇌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변황세력을 자극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옥문관이 있는 감숙성을 택해 신녀교를 세워 그곳의 모든 것 을 장악한 것 같아. 하기야 변방수비대를 손에 넣었다면 변황세력에 압력 을 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 무림이 혼란해지면 천뇌교를 부활시키는 것 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변방수비대가 멋대로 움직이고 군대가 혼란에 빠지 면 내가 좀 곤란한 일이 있다. 네가 가서 본좌 대신 신녀교의 세력을 빼앗 아 감숙성을 진정시켜야겠다." 귀영신군도 천뇌교의 제자이다. 천뇌교의 부활만큼 가슴이 뛰는 일이 어디 에 있을까? 천뇌교를 부활시키고 천뇌교의 배반자인 천지마군이나 만상여 의를 처단하는 것은 그가 꿈에도 그리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악마가 살아 있는한 천뇌교의 부활은 불가능한 일이다. 악마가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나는 일인 것이다. 악마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것을 알 것이다. 귀영신군은 사문인 천뇌교를 생각하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런 악마를 태어나게 한 하늘을 저주하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공손 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악마는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 혹시 그곳에서 요요경을 가진 소녀를 만날지도 몰라. 내가 굉장히 소 중하게 여기는 소저이니 혹시라도 만난다면 철저하게 보호하기 바란다. 만 약 그녀의 손톱하나라도 상한다면 그때 너를 비롯해서 신녀교는 물론, 감 숙성 전체가 하나의 무덤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귀영신군은 처음 보았다. 악마가 미소를 짓는 것을. 잔인하고 죽음 을 보며 웃음짓는 끔찍한 미소가 아니라 순수하게 남을 생각하며 절로 나 오는 미소를. 저 악마에게 저런 순수한 미소를 짓게 할 사람이 천하에 존 재하고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한 귀영신군이었다. 그리고 귀영신군 은 악마에게 저런 미소를 짓게하는 여인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악마가 무 슨 짓을 할지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귀영신군은 요요경이라는 이름을 죽을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네 몸에 가한 금제는 잘 알 것이다. 네 귀와 눈으로 들은 모든 것이 나중 에 내 머리로 직접 전해지니 따로 내게 연락할 필요는 없다. 네게 지시할 것이 있으면 밤에 네 꿈을 통해 지시하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의를 할 것이 있다." 악마는 귀영신군의 눈을 바라보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신녀교에 들어가면 절대 신녀교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 말아라. 물한모금, 음식 한점 입에 대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신녀교의 근본 힘이며 동시에 죽 음을 부르는 음식인 것이다." 21 신녀제전(1) 둥둥둥! 신녀제전을 알리는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수만명의 환호에 찬 함성이 장내를 울려 퍼졌다. 엄청난 함성이 땅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현재 신녀성지의 거대한 광장에 모인 인원수는 오만이 넘을 듯 보였다. 평 소 회회현에 머무는 신녀교도 일만외에 신녀제전을 위해 한달에 한번 감숙 성 각지에서 한인과 위구르인등 신녀교 지부의 책임자가 지부의 주요 신녀 교인과 새로 신녀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찾아왔던 것이다. 오만이 넘는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지르는 광경은 과히 장관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귀영신군은 처음부터 그 숫자에 압도되고 말았다. "감숙성의 대부분 관리들이 신녀교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귀영신군은 나직히 감탄을 터트렸다. 이토록 많은 수의 군중이 한곳에 몰 려 집회를 여는 것을 백성을 다스리는 관이 용납할 리가 없었다. 자칫 잘 못하면 백성들이 폭도로 변하거나 반역의 무리로 변할 수도 있었고 설혹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런 대규모 집회는 관에서 공을 세울수 있 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의 무리를 반역자로 몰아 제거했 을 때 당사자는 중앙으로 진출을 할 수 있는 큰 공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집 회라면 관리들이 트집을 잡아서라도 군사를 동원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한달에 한번씩 있는 신녀교 대규모의 군중 집회를 성서성의 관리들 은 묵인했다. 묵인뿐만 아니라 신녀교도 사이의 상석에 심심치 않게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직접 앉아 있으니 이는 신녀교와 관이 보통 관계가 아님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허어! 신녀교는 무림의 세력이 아니라고 하더니?" 귀영신군은 신녀교의 사람들 속에서 몇몇 눈에 익은 무림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운무팔협, 호면염라, 섬서일객등 그가 무림에 활동할 시에도 볼 수가 있었던 백도의 명숙은 물론이고 웅산이괴, 빙백일살, 일점혈등의 흑도 거마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빙백일살의 경우 자신 귀영신군이 나 적안미부도 쉽게 볼수 없는 거마였다. 하지만 이런 거마들이 신녀교의 요인석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새로 입교하는 자들 중에서 귀빈들을 모아 놓은 곳에 앉아 모두 경건한 자세를 하고 '신녀만세'의 구호를 부르고 있 었다. 결국 실제로 신녀교에는 이러한 거물들이 얼마나 몰려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무림이나 일반백성의 구분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신녀교에 귀의했다는 증 거입니다." "그런가? 무림세력의 섬서분타들이 그것을 용납했단 말인가?" 신녀교에 들어오면서부터 그의 옆에서 아부를 떨던 신녀교 외전전주가 말 을 걸어오자 귀영신군은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마도 외전전주가 자신 의 말을 듣고 그에게 설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백도맹의 섬서지단을 제외했을 뿐입니다. 섬서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크 고 작은 삼십 육개의 무림방파뿐만 아니라 흑방, 현천방의 분타, 구류방의 섬서분타, 자객전의 분타등과 그곳에 파견되었던 장로등, 무림의 열 두개 거대세력의 섬서 분타의 주인도 신녀교도로서 신녀제전에 있습니다. 겉으 로는 변화가 없지만 사실상 신녀교는 섬서의 세력을 일통한 지가 오래입니 다." 외전 전주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귀영신군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섬뜩했다. 이정도라면 무림세력만 따져도 이미 그 옛날 천 뇌교의 세력을 능가하는 거대한 힘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니, 흡수한 무 림세력을 제외하고도 수십만의 열광적인 백성의 힘까지 감안한다면 그 힘 은 무림이 아니라 천하를 향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였다. "저들은....?" 귀영신군은 또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곳에 머무르기에 도저히 어울 리지 않는 두 무리가 신녀제전에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마치 개와 고양 이같은 관계. 백성을 지키는 관군의 무장과 도적들의 무리가 그것이었다. 섬서에는 물자와 돈이 흥청거리는 돈황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서역과 통하는 비단길이라는 무역로 역시 이곳을 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섬서 에 있는 돈황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로 통하는 길목으로 수많은 상인이 일 확천금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고 사막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시장과 그로 인 한 많은 유흥가와 객잔들이 들어섰다. 천하의 돈이 모두 이곳으로 몰린다 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변방을 지키는 가욕관과 옥문 관 양관이 섬서에 있고 관문을 지키는 수십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이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 역시 흥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많고 돈이 몰려드는 길이 생겨나면 당연히 그것을 노리는 도적도 생겨난다. 장강에 삼십육채가 있고 녹림에는 칠십이채가 있듯이. 이들 도 적의 숫자는 변화가 있었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아마도 천 하 만민이 평안한 세상이 오기 전에는, 그리고 재물, 장사, 그리고 상인이 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돈황을 너머 신강으로 통하는 거대한 사막에도 이러한 존재가 있다. 서역 과의 무역을 원하는 상인들을 터는 도적들로 현재는 그 무리가 칠십 이개 나 있어 황사칠십이풍이라고 했다. 이들의 역사는 장강심십이채나 녹림칠 십이채에 못지 않았다. 이들 역시 그 도적무리의 숫자가 칠십이에서 오십, 혹은 삼십으로 변화된 적은 있었지만 그 역사가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었 다.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에게 이들은 경외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황사칠십이풍은 도적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유목민족이며 부족이기도 했다. 이들은 오아시스를 근거로 세워진 마을들의 같은 민족 사람이며 평소에는 평범한 마을 단위의 주민으로 살아가며 외부의 도적을 막기위해 자경단을 꾸미기도 한다. 한데 이들 자경단은 마을부족을 지키는 외에 항상 부족한 마을의 물자를 채우고 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를 약탈하는 마적 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즉 평소의 생업과 필요시마다 하는 도적질이 마을의 두 축이 되는 것이다. 사막의 대상이나 비단길이라는 무역로는 그 들을 먹여 살리는 훌륭한 돈줄이었다. 이들 중에서 한때 세력이 강성하던 부족은 나라를 세우기도 했으니 중원에 전설로 내려오는 향지국이라던가 보화국의 이름은 모두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삼백 년 전에는 혈광풍이라는 황사 칠십이풍의 하나가 사 막의 도적들의 세력을 한데 모아 강대한 힘으로 변황세력의 종주로 떠올랐 다가 전 변황세력을 이끌고 중원의 무림을 쳐들어와 중원과 변황이 십년 변황대전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족은 기름진 중 원을 독차지하고 있는 욕심 많은 하나의 민족에 불과했다. 갑옷을 입은 한인무장들. 이들은 필시 변방을 지키며 외적을 막는 양관의 수비대의 장수들임이 분명하리라. 또한 그들 옆에 있는 황사칠십이풍의 풍 주들. 이들이야 말로 이들이 막아야 할 이민족의 실세인 도적들인 것이다. 물과 불처럼, 혹은 개와 고양이처럼 섞일 수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녀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황사칠십이풍이 신녀교에 복종했다고?" 황사칠십이풍의 풍주라면 귀영신군도 거북한 상대이다. 특히나 칠십이풍의 총풍주라면, 만약 전 부족을 제압할 총풍주가 진짜 있다면 중원 백도맹의 맹주와 버금가는 신분이다. 그런데 황사칠십이풍의 풍주들이 모두 모여 신 녀교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대막일도. 철혈마조, 야수마랑, 과거 혈존이 변황을 정벌할 때 활동하다가 꼬리를 감추었던 대막의 거마들이 아닌가? 황사칠십이풍의 풍주였던 저들 마저 신녀교에 회유되었단 말인가?" 귀영신군은 뜻밖으로 신녀교의 세력이 엄청나다고 느꼈다. 오늘 신녀제전 에 참석하기 전만해도 귀영신군 자신정도 되는 거물이 오면 신녀교의 세력 을 좌지우지 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보니 그와 어깨 를 겨루는 수많은 거마효웅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이정도면 지금 만세를 부르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 양민을 제외한다고 해도 과거 천뇌교의 전성기 를 훨씬 능가하는 세력이었다. "어....어떻게 천하의 이목을 속이고 소문도 없이 이런 거대한 세력을 구축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진짜 내 여동생과 그녀의 제자가 이룩한 세력 이 맞는가?" 귀영신군은 자기도 모르게 등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신 녀제전의 상석에 앉아있던 귀영신군의 심정이 어떻든간에 신녀제전은 착실 히 진행되었다. 먼저 신녀교의 호법사자라는 삼십명 정도의 중년여인이 입을 모아 목청을 돋구어 신녀교의 교리를 설파하며 신녀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녀들이 주 재하는 제사는 거의 반시진을 차지하였다. 귀영신군도 무림에서의 신분이 낮지 않았으나 이렇게 수만명이 일제히 제사에 참석하여 한사람의 손짓에 따라 환호와 움직임을 조정당하는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인지라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었다. 호법사자들에 의한 신녀교 교리의 설파가 끝나자 성지 총전주라는 인물이 나와 이번에 새로이 성지의 중추로 영입되는 신녀교의 요인이 될 인물들을 신녀교도에게 소개하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여 실제로 신녀 중지 중앙에 앉아있는 신녀교의 중심인물들에게만 새로운 요인들이 될 인 물을 소개하는 형식이 되고 있었다. 사실 새로운 요인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아 이들의 신분이 일반교도에게 까지 알려져서 천하에 세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천하가 뒤집힐 것이었다. 귀영신군은 그 속에서 거상은 물론이고 품계가 높은 명관이나 무장도 많이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놀랐다. 한달에 한번이라는, 그리 적지 않게 열리지 않는 신녀제전에도 불구하고 관과 상계, 무림과 유림에 걸쳐 다방면의 많은 거물들이 속속 그 정체를 드러내며 소개되었다. 귀영 신군 역시 자신의 차례가 오자 수만 군웅을 향해 간단히 자신의 소개를 하 였다. 처음 자신의 위명으로 선기를 잡으려던 의도와 달리 수많은 거효들 로 인해 그는 약간 주죽이 든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잡생각과 달리 무림에 관련된 모든 인물이 경악한 시선으로 귀영신군을 바라보았으니 귀영신군이라는 이름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둥둥둥! 다시한번 장내를 울리는 큰 북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수만 군중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음성이 터졌다. "신녀께서 나오십니다. 모든 교도들은 영접할 차비를 차리시오." 그 음성에 범상치 않은 내공이 서려있어 귀영신군은 이를 말한 자가 음공 의 고수임을 짐작했다. 신녀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장내의 오만군 중이 일제히 일어서서 큰 소리로 합창하기 시작했다. "신녀출현. 천하태평." "신녀귀의, 만민평안." "만세. 만세. 신녀만만세." 만세라는 칭호는 만년을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황궁의 황제에게 밖에 쓰지 못하는 칭송이었다. 군왕들도 기껏 천세라는 칭송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만세라는 칭송을 쓴다면 곧 바로 반역을 뜻을 품은 것으로 보기 때문 이다. 하지만 수많은 관리와 무장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히 신녀만세라는 칭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설마 신녀교는 천뇌교의 부활뿐만 아니라 반역의 뜻까지 품고있단 말인 가?) 귀영신군이 다시금 불길한 망상에 몸을 떨 때 갑자기 환하게 어둠이 물러 가며 하나의 여인이 허공에 몸을 띠우고 나타났다. 그것은 묘한 광경이었다. 신녀의 주위에는 횃불도 빛을 밝힐 어떤 도구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녀 주위에만 묘한 광채가 서려 그녀의 모습 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무림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허공을 평지처럼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결코 허공답보같은 절정 의 경공공부를 사용하여 행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후...후광이다." 새로 교에 가입하는 인물들 속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감동 의 물결은 곧 수만의 군중속으로 번져나갔다. 부처님이나 성인의 등뒤에 솟아올랐다는 광채가 그들이 신으로 믿는 신녀의 몸에서 솟아올랐으니 그 럴만도 했다. (천뇌교 비전의 술법. 음부귀영술과 휘광창생술. 음부의 귀신의 힘을 빌려 몸을 허공에서 부축받고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는 술법. 이제보니 신녀의 기적의 정체는 본교의 사술이었군.) 귀영신군은 신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생각보다 특별하지가 않다. 과연 본교의 술법을 통해 짧은 시간에 이런 거대한 세를 이룰 수가 있을까? 우매한 군중을 속이는 것은 본교의 사술로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사술로 속일 수 없는 무림인이나 불가 혹은 도가의 고인들은 어떻게 끌어들인 것일까?) 귀영신군이 본 신녀의 모습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이목 을 속일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으나 그가 보기에 신녀 는 그저 절정에 갓 들어선 고수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남에게 신비하게 보이는 천뇌교의 술법도 귀영신군에게는 장난으로 보였다. 그러하기에 현 재 이루어 논 신녀교의 세력이 더욱 의문스러웠다. 신녀가 땅에 내려서자 어느새 수십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를 에워싸고 호위를 했다. 신녀교의 교도들을 직접 접하고 신녀를 대신하여 이적을 행 하는 성녀들이었다. 신녀교도들이 성녀를 보는 두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 득했다. 성녀들의 앞에 서서 그녀들을 지휘하며 신녀를 안내하는 아름다운 중년의 미부를 보며 귀영신군은 미소를 지었다. 두눈에 홍채가 은은히 서 리는 중년미부는 바로 귀영신군의 동생 적안미부였다. "신녀께서 신의 뜻을 받들어 직접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시겠다고 합니다." 아까 수만 군중들에게 신녀의 출현을 알렸던 음공의 고수가 다시 한번 커 다란 목소리로 수만군중에게 신녀의 이적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역시. 신음문의 반도로 죽었다고 알려졌던 귀음일살이였구나.) 귀영신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신녀앞에 수많은 병자들 이 나서서 신녀의 기적의 손길을 기다렸다.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었으며 다 죽어가던 노인이 춤을 추는 기적이 사람들의 두눈 앞에서 일 어났다. 모두들 신녀의 기적에 놀라워하며 신녀를 찬양했지만 귀영신군은 이미 기적의 정체가 생력촉발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뇌교의 비전술법의 하나인 생력촉발술은 생명체의 남은 생명을 바꾸어 일시에 몸의 활력을 불어넣는 술법이다. 또한 이 술법을 통해 활력이 넘치 면 오감이 극도로 발달되어 두 눈이 없는 자도 눈이 있는 것처럼 사물을 분간하게 되고 귀가 없는 자도 피부를 통해 소리의 기척을 느끼며 혀가 마 비된 자도 복근의 힘을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다리병신이 일어나고 병자가 완쾌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술법을 통해 환희 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불과 열두시진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사람의 이목을 모으고 홀리는 데에는 뛰어나기는 하군.) 오만 군중이 모인 수만평의 광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행진은 두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그 동안 오만인파는 홀린 듯이 넋을 잃고 신녀를 바라보고 있 을 뿐이었다. 마치 마술과 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도저히 완치 될 수 없었을 것 같던 이백명의 환자가 신녀의 손이 스치자 순식간에 완쾌되 었다. 신녀교도들은 일제히 머리를 땅에 맞대고 신녀를 찬양하였다. "새로운 신녀교도들은 앞으로 나서라." 다시신녀제전의 차례를 알리는 귀음일살의 음성이 울리자 신녀교의 각 지 부에서 모여든 새로운 교도들이 이백 명씩 단위를 이루어 신녀의 앞에 섰 다. 신녀는 그들을 축복하고 새로운 신녀교도가 되었음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새로운 신녀교도들을 위한 성수를 접대하여 그들과 함께 마심으로 서 그들을 인도할 것을 다짐했다. 놀랍게도 한달 사이에 새로이 모인 신녀 교도는 그 숫자가 오천 명이 넘었다. 그들의 구성은 한족과 위구르인이 반 반씩 섞여 있었다. (신녀교의 힘은 그들이 내준 음식과 물에 있다고 혈존이 말했는데,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괜찮을까?) 귀영신군은 불안한 눈빛으로 교도들 속에서 장여화로 위장하고 있는 금혜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교도의 입교식은 막바지에 이르러 어느새 신녀성지를 찾아왔던 교도을 향한 예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귀 영신군은 금혜연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정신을 차린 금혜연에게 귀영신군은 자신이 옛날 무당파에 은혜를 입어 무 당문인을 해칠 수가 없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여 그녀를 설득하였 다. 금혜연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면 서까지 고이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특별히 천면변화술이라는 변신법까지 전수하여 그녀의 위장된 신분이 들통나지 않도록 했다. 그후 이일간 귀영신군의 시녀로 있었던 금혜연이었지만 실제로는 귀영신군 이 마치 그녀의 종처럼 굴었다. 그의 지극정성이 얼마나 컸는지 경계하던 금혜연의 마음이 솜사탕처럼 완전히 녹아 풀어질 정도였다. 신녀교의 새로운 교도의 입교식이 끝나자 곧 귀음일살은 다음 순서로 신녀 교의 성녀로 들어갈 여인들의 이름을 호명하였다. 별 관심없이 듣던 귀음 신군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왜냐하면 귀음일살이 불렀던 이름 중에는 놀랍게도 장여화라는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일개 교도인 그녀가 왜? 안돼. 안돼지. 지금 섣불리 행동하면 큰일난다.) 귀영신군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만일 저 여인의 손톱하나로 상한다면 그때에 혈존에게 자신이 받을 처벌을 생각 하면 앞일이 노래질 정도였던 것이다. 아마 자신 하나로 끝나지는 않을 것 이다. 어쩌면 섬서 전체가, 혹은 천하가 완저히 지옥으로 변할지도.... (진정하자. 성녀로 뽑힌다는 것은 오히려 신녀교의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 이 아닌가? 나중에 그녀를 만나고 보호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는 것을 뜻 한다. 설마 지금 그녀가 신녀중지로 들어가 금방이라도 해를 입는 것은 아 니지 않는가? 성녀로 뽑은 여인을 해칠리는 없을 거야.) 귀영신군은 새로이 성녀후보로 뽑힌 여인들이 기존 성녀의 한사람에게 인 도되어 신녀중지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그리고 신녀제전이 빨리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22 신녀제전(2) 금혜연은 자신을 인도하는 성녀들을 따라 신녀교의 중심인 신녀중지로 들 어갔다. 많은 건물을 넘어서 그녀들이 중앙의 건물을 통해 따라간 곳은 뜻 밖에도 건물 바닥에 뚫어져 있는 지하통로였다. 동굴로 이어지는 지하통로 속으로 끝없이 들어감에 따라 계속 길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아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지하 수십장의 밑에 있는 시설 임이 틀림없었다. 그 와중에 금혜연은 장보옥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녀의 뒤로 갔다. 장보옥은 누군가 자신의 등을 살짝 두드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모르는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의 입이 살풋 벌어지며 그녀의 귀로 전음이 흘러 나왔다. "호호. 언니. 나 혜연이야." 장보옥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금혜연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곳까지 따라 들어왔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금혜연은 어느새 그녀 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면서 겉으로는 모르는 척 전음을 주 고받았다. "혜연아. 이 일은 장난이 아니야. 어쩌자고." "이미 왔는데 어떻게 해. 그러지 말고 서로 힘을 합쳐 잘 해나가자고." 금혜연의 헤헤거리는 낙관적 음성과 달리 장보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혜연이 있던 일반교도들의 자리와 달리 새롭게 영입되는 요인들의 상석 에 앉아있던 장보옥은 어느 정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신분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실로 신녀교는 백도맹의 생각 이상으로 용담호혈이었던 것이 다. 내려가는 동굴의 통로를 통과하자 평평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왔다. 하나 하나 갈래길을 거쳐 통로를 지나쳐 오는 가운데 금혜연과 장보옥은 지하에 수천평의 공간에 수많은 석실들이 들어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사 용하는 듯한 여러 개의 거대한 석실이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인도된 한 석실에는 음식과 술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들 환영합니다. 새로 성녀가 되실 분은 내일부터 고된 교육을 받으실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신녀교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 지고 신녀교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 오늘은 여러분을 접대하는 연회자리입 니다. 이곳에서 음식을 먹고 쉬십시오. 피곤하신 분은 옆방에 여러분들이 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음 일정은 내일 아침 알려드리겠습니다." 새로 성녀의 후보로 뽑힌 이십 명의 여인들은 모두 긴장과 함께 기쁨에 설 레이고 있었다. 그녀들을 인도한 성녀가 살풋 미소지으며 친절하게 말하며 자리를 권하자 새로이 성녀후보에 든 여인들은 일제히 긴장이 풀어져 모두 들 연회석에 앉았다. "음식을 먹지 마시오. 미혼약이 들어 있소." 장보옥의 귀에 익숙한 전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잠시 뜻밖의 음성에 움찔 했던 장보옥은 금혜연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금혜연이 먼저 장보 옥에게 전음으로 말을 건네왔다. "언니. 음식을 먹지 마. 신녀교의 물과 음식에는 사람을 홀리는 어떤 이상 한 것이 들어있대." 그녀들은 인도한 성녀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권하며 친히 그들에게 앞으로 의 일을 말했다. 성녀가 얼마나 영광된 자리인지, 앞으로의 인생이 얼마나 희망찬 일인지 설명했다. 그리고 한명한명 일일이 술을 권하며 오늘만은 즐겁게 먹고 마시자고 그들을 부축였다.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 과연 여인들이 하나하나 쓰러지기 시작했다. 처 음에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던 것으로 보였으니 그 숫자가 늘어나며 일 각이 흐르기 전에 모두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금혜연과 장보옥 역시 정 신을 잃은 체 눈을 감고 음식이 놓였던 탁자위에 상체를 눕혔다. 그들이 완전히 쓰러지자 석실의 방문이 열리며 역시 성녀로 보이는 이십명 의 여인들이 들어왔다. "모두 정신을 잃었군. 마지막으로 너희들을 위해 교에서 베푼 호의였으니 잘 즐겼기를 바란다. 앞으로 대외적 활동을 위한 홍보용의 성녀들만을 따 로 골라 그녀들이 거처할 감호실로 옮겨놓고 나머지는 성화의 제물로 사용 할 터이니 성지의 감옥으로 옮겨라." 성녀중에서 제법 나이든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십명의 성녀들이 성녀후보들을 하나하나 가뿐히 집어들고 석실 밖을 나섰다. 장보옥은 자신 과 금혜연이 갈라져 각기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의 귀로 다시 익숙한 전음성이 들리는 것이었다. "낭자. 움직이지 마시오. 곧 구해주겠소. 그때까지는 다른 여인들처럼 정신 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시오." 장보옥은 결국 조급함을 참으며 계속 정신을 잃은 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보옥과 다른 세명의 여인이 옮겨진 곳은 제법 화려한 누각의 방안이었 다. 방안의 침실에 장보옥을 옮긴 여인들이 사라지자 장보옥은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대협. 그곳에 계신가요?" 장보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는 한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귀영신군의 옆에서 아부를 떨던 외전 전주가 바로 그 남자였다. "섬서지단의 장보옥이 천무호정단의 영주를 뵈옵니다." "인사를 거두시오." 외전전주는 마주 포권을 하며 그녀를 일어서게 했다. 일어서던 장보옥은 외전 전주의 얼굴이 바뀐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 얼굴은 그녀 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마대협? 당신이 어떻게?" 지금 그녀에게 백도맹 총단에서 왔다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녀와 접촉 했던 남자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바로 섬서지단 흑영당의 대원이었다. 외전전주인지 흑영당의 대원인지 아리송한 남자는 그녀에게 익숙한 영패 하나를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장낭자. 속여서 미안하오. 섬서지단에도 신녀교의 첩자가 있다는 첩보가 있었기에 장단주님에게만 진실을 밝히고 지단의 사람 모두를 속였소. 이번 에 신녀교에 침투하였던 흑영당에는 세 명의 천무호정단의 단원이 신분을 위장한 체 섞여 있었소." "아, 그랬군요. 소녀가 대협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지금은 그냥 흑영당에 소속되었던 신분인 마영호의 이름, 그것을 그대로 부르시오." "마대협. 대협께서 무사하시다면 어찌하여 그동안 맹에 연락을 하시지 않 았습니까? 그 덕에 아버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천무호정단의 영주 마영호는 나직히 한숨을 쉬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였 다. "신녀교는 사람을 미혹시키는 가공할 사술을 사용하고 있소. 그동안 신녀 교에 침투했던 각 파의 첩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했던 것도 그 사술 덕이었소. 우리는 그 사술의 원인을 밝히려고 외부와 연락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사술이라니요? 어떤 사술이 사람의 심지를 그토록 쉽게 제압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모두들 이성이 멀쩡하던 것 같던데요?" "자세한 것은 모르오. 우리가 침투하였을 때 호면염라가 우리를 가로막았 소. 그리고 우리에게 신녀교의 정당성을 밝히며 의심나는 모든 것을 백도 맹에 떳떳히 밝히겠다고 했소. 당주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들을 따라가 면서도 철저히 경계를 하였는데도 결국은 당하고 말았소." "예?" "우리는 독을 경계하여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소. 혹시라도 함정에 빠질까 봐 경계를 게을리 하지도 않았고 남의 암산을 허용하지 않토록 충분히 주 의를 기울였소. 헌데 신녀중지에 들어선 이후 갑자기 모두들 정신이 흐려 지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소. 그리고 신녀교의 신녀가 직접 우리를 만났을 때 우리 모두 신녀를 향해 절하며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소. 신녀 교가 어떤 수법이나 독도 우리에게 펼칠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요. 오직 우리 세 명의 천무호정단원만 제외하고 모두 걸려들고 말았 소." "그렇다면 마대협과 천무호정단원들은 어찌하여 무사하신 겁니까?" "아마도 신녀교에 들어온 사람들을 홀리는 사술은 냄새와도 관계가 있는 듯 하오." "냄새요?" "맹에서는 신녀교와 혈천마련의 천뇌전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있소. 천뇌전 은 과거 사술의 종주였으므로 우리 세 명의 천무호정단원은 만일을 대비하 여 도가의 호심단을 입에 물고 들어옴으로서 그들의 사술을 방어할 수가 있었소. 헌데 우리와 같이 들어왔던 흑영당의 대원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 작했을 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수상했던 것은 은은한 꽃향기 밖에 없었소." "호심단이요? 신녀교에 잠입하기 전에 아버님이 주신.... 그리고 사술의 원 인이 꽃향기라고요?" "그렇소. 그 생각을 더욱 확실히 증명하는 것은 저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 을 성화라고 부르며 비밀에 부치고 있다는 것이오. 그 성화의 비밀을 찾아 내기 위해, 그리고 혈천마련과의 관련여부를 찾기위해 우리는 신녀교의 중 간급 간부를 죽이고 그들로 위장해 왔소. 허나 지금의 신분으로는 외부와 연락할 수가 없기에 낭자를 기다려 왔던 것도 사실이오. 오직 신녀교의 성 녀만이 외부로 나갈수 있기에 장단주와 미리 상의한 대로 성녀가 될 신분 의 여인이 신녀교에 잠입하는 것을 기다려 왔소. 천무호정단원 한명이 빠 지면서까지 본맹에서 얻어온 호심단 네 알 중에서 한 알을 남겨둔 것은 낭 자가 사술에 걸리지 않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였소." 신녀교의 중지 깊숙한 지하시설의 한 곳.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곳을 태연히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신녀 교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로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경비들은 이 남자가 태연이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성화? 사술? 웃기고 있군." 백이충은 기척을 감출 생각도 없이 신녀교의 지하통로를 지나가며 소리내 어 신녀교를 비웃었다. "혈향초는 그래봤자 일종의 마약에 불과하다. 너무나도 중독성이 강한 최 고의 마약이지. 그 휴의증이 너무 커서 내가 혈천마궁의 교도들에게 먹이 는 것을 포기할 정도의...." 혈향초. 그것은 양귀비의 변종으로 혈존 백가량이 주술을 걸어 만든 최고 의 마약. 어떤 잡초나 꽃에도 접종하여 변종을 일으키는 신기한 마약이다. 혈향초는 처음 혈존이 이를 만들 때부터 마약의 중독성을 이용하여 충성심 을 뽑아내는 효과를 기대하고 만든 것이다. 혈향초의 향기를 맡든, 혹은 섭취하든 일단 중독되면 그 효과는 무서울 정 도로 강력하다. 향기에 중독된 자는 그 향기를 미칠 듯이 그리워하게 되며 물에 포함된 혈향초를 섭취하여 중독된 자는 미칠듯한 갈증에 애타게 되며 음식에 넣은 것을 먹게 되면 미칠듯한 배고픔에 시달려 버리는 것이다. 혈향초의 중독 초기증상은 모든 마약이 그렇듯이 광적으로 혈향초 성분을 그리워하게 되며 점차 이성이 마비되면서 이를 섭취하기위해 물불을 가리 지 않는 데에 있다. 재산을 팔고, 가족을 팔고, 자신을 팔아서라도 금단현 상을 해갈시키고 싶어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양심과 이성을 벗어버리고 짐승의 길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혈향초가 무서운 것은 한번이라도 이에 중독되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중독 에서 벗어나거나 금단현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데에 있다. 한번 혈향초 에 중독되었던 자가 그 공급을 끊었을 때 시일이 지날수록 치료되기는커녕 반대의 금단현상은 놀랄 정도로 그 피해가 커져가기만 한다. 중독자에게 혈향초의 공급이 갑자기 끊어진다면 그로부터 일년간은 몽롱한 상태로 지내게 되며 그나마 사람을 알아보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이성이 상실되며 성질이 사나와지게 되고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흉포해진다. 그리고 미친 듯이 혈향초를 찾게 되며 혈향초를 공급할 수 있 는 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일년 이상 혈향초를 끊게 되면 공격성의 감정이 폭팔하여 살기와 파괴의 화신이 된다. 이성도 감정도 없이 오직 끓어오르는 살육의 욕망에 사로잡 혀버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나운 짐승이 된다. 상처를 입어도 아픈 줄 모르며 죽을 때까지 남을 죽이려는 공격본능만 남은 야수가 된다. 이때 중독자는 유일하게 오직 혈향초의 공급자만을 본능적으로 분간할 수가 있 는데 그에게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도 있는, 말 그대로의 충견이 된다. 오년 이상 중독자가 혈향초를 공급받지 못하면 그때야 말로 야수에서 미친 광견으로 변한다. 이때에는 완전히 이성이 사라져 더 이상의 혈향초 공급 자도 알아보지 못하며 광적으로 혈향초를 탐하게 되어 주위에 이가 없을 시에는 혈향초 중독자의 냄새를 맡아 그 살을 씹고 피를 빨아 그 속에 함 유된 혈향초의 잔재를 흡입하여 갈증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 시기마저 지나 주위에 피를 빨고 살을 씹을 혈향초의 중독자마저 없고 보면 혈향초를 구할 방법이 없다. 오년에서 십년사이에 스스로의 살이 썩 어들어가며 결국 온몸이 화농과 고름으로 뒤덮혀 썩어 죽을 때까지 살아있 으며 고통을 겪어야 한다. 물론 계속적으로 혈향초를 공급받는다면 이런 금단현상과는 관계가 없다. 혈향초를 계속 공급받는한 이성이 상실될 위험도 없고 다른 마약처럼 몸이 약해지거나 생명이 위험해 지지도 않는다. 다만 혈향초의 공급자를 부모보 다 더 공경하고 황제앞보다 더 공손하게 변하며 신보다 더 복종하게 된다 는 점만이 틀리다. 다만 혈향초의 중독자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은 혈향초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중독이 깊을수록 그가 이성을 유지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 해서는 초보자의 몇 배에 해당하는 혈향초의 양이 필요하다. 일년 정도 계 속 혈향초를 섭취해온 자는 초보 중독자의 세 배정도. 십년정도 중독자는 금단현상을 견디기 위해 초보 중독자의 삼십배 이상의 혈향초의 양이 필요 하다. 즉 혈향초를 이용한 부하들의 지배를 위해서는 갈수록 혈향초를 만 들어내는 양을 늘려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혈향초의 양의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그 서 식지가 까다롭고 자라나는 환경도 극히 열악하다. 어떻게 혈향초의 재배에 성공한다고 해도 보름을 넘지 못하고 혈향초는 시들어 버린다. 혈존이 주술을 걸어 한정된 공간에서 혈향초를 채취해도 다음날에는 다시 자라도록 하는 재배에 성공한 적이 있기는 하다. 혈근이라는 혈향초의 거 대한 뿌리를 만들어 그의 주술공간에서 살아가도록 하며 혈근이 씨앗을 뿌 려 하루만에 성장한 혈향초를 주술공간에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양은 하루에 아무리 많아봤자 십년 중독자가 홀로 복용할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초보중독자는 천여 명을 만족시킬 수 있을 지 몰라도 십년이 지난 한명의 중독자를 충족시킬 만한 양도 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중독자를 미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혈향초의 효력의 한계 였다. "후후. 그 신녀라는 여인이 혈근을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비밀을 알았다니 제법이기는 하군." 한 가지 혈향초의 재배를 무한정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로 혈근이 피를 먹고 사는 것이 혈향초의 비밀. 이성과 접하지 않은 이 십 세 이전의 순결한 처녀가 혈향초에 중독되어 초기 중독자가 되었을 때, 그 처녀중독자를 살해하여 땅에 묻으면 혈근은 패냄새를 따라 여인의 피와 살을 양분으로 삼아 시체위에 씨앗을 뿌린다. 보름간 그 시체위에는 수많 은 혈향초가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즉 죽일 사람을 얼마든지 구할 수만 있으면 혈향초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순결한 여인의 피 속에 혈향초의 냄새를 맡고 씨앗을 뿌리는 혈향초의 왕이며 근본인 뿌리 혈근을 가진 자는 모든 중독자들을 지배한다. 지금 혈근은 아마 신녀의 손에 있을 것이었다. "뭐, 그래봤자 신녀교처럼 혈향초를 남발하며 그 위력에 의지한다면, 십년 쯤 후에는 섬서성의 신녀교도를 위해 전 중원의 모든 처녀의 씨가 말라야 겨우 금단현상을 벗어날 정도의 혈향초 수량을 구할 수가 있을 걸?" 백이충은 신녀교의 지하 건물 중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앞에 도착했다. 건 물의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신녀교에서 중요한 건물인 듯 했다. 마침 그 건물 앞에서 어떤 노인이 거만을 떨며 나오고 있었다. "이봐. 너. 나 좀 따라와라." 백이충이 그 노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고루흑살은 갑자기 자신에게 누 군가 소리치자 혼란스러웠다. 신녀교 성화전 태상호법이라는 높은 신분상 신녀교에서 이처럼 자신에게 호통을 칠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저처럼 젊은 사람이라면 그의 윗사람일 리가 절대 없었다. "감히, 지금 노부를.....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루흑살의 얼굴에 노기 띤 표정이 변화하더니 결국 혼란스런 표정이 가득 했다. 처음 보는 청년인줄 알았는데 한번 청년의 얼굴을 보자 익숙해 보이 고 두 번 보자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보였으며 세 번 보자 평소 자신이 받들던 상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백이충은 노한 표정을 지으며 고루흑살의 앞으로 다가가 대뜸 따귀를 갈겨 버렸다. 평소 오만무도한 고루흑살의 성품을 아는 신녀교의 주위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얻어맞는 고루흑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오라면 오라는 거지. 왜 잔말이 많아." 백이충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하의 흉악한 마왕 고루흑살은 얼굴 에 식은 땀을 흘리며 즉시 허리를 숙여 굽실거리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요근래 속하의 기억력이 나빠져서.... 저 성함이 어떻 게 되시는지..." "이 바보 늙다리 녀석. 매일보는 상전의 이름도 몰라? 죽여버리기 전에 더 이상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따라와라." "예? 하지만 신녀께서 교의 간부들과 신녀제전에 참여하셨기에 성화전을 절대 비우지 말라고....." "죽을래? 그래서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한마디만 더하면 당장 머리 통을 잘라 버리겠다." 백이충은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는 듯이 홱하고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 고 루흑살은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즉시 백이충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 다.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기가 죽어 따르는 고루흑살은 자신이 따라가는 익숙한 상전의 정체를 가물거리는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기 위해 연신 고개 를 갸웃거려야 했다. (쳇. 혈향초의 노예라면 혈근을 창조한 주술의 시전자인 나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마도 신녀교의 모든 교도는 내 얼굴을 대하는 순 간 이성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나와 신녀교의 신녀가 동일시되어 혼란을 느끼게 될 걸?) 23 신녀제전(3) 신녀 중지의 거대한 지하시설과 통하는 지하석로의 한 곳. 백이충은 한번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잠시 눈빛을 번쩍였다. 백이충은 손짓으로 고루흑 살을 불러 자신의 앞에 서게 했다. 그 때까지도 고루흑살은 백이충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자신의 머리만을 탓하고 있었다. 이성으로 돌아보건대 분명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의 감정은 눈앞의 청년이 자주 접하던 상관이며 그의 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젠장. 분명히 자주 접하던 낯익은 인물임은 분명한데. 그것도 틀림없이 나 보다 지위가 높은 교의 최고 수뇌의 한 사람. 요즘 건망증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중요인사를 잊어먹다니. 하기야 요 근래 워낙 많은 사람들이 교에 들어왔으니 일일이 기억할 수가 있어야지.) "고루흑살. 성화는 철저한 보호가 이루어지고 있겠지?" 갑작스럽게 백이충이 신녀교 최대의 비밀을 떠들어대자 고루흑살은 흠짓 놀랐다. 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고 또한 백이충이 신녀교 최고의 요인이 라고 믿고있는 고루흑살은 곧 대답을 했다. "물론입니다. 누구도 성화 곁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안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안은 금할 수가 없네. 오 늘과 내일이 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야. 오늘만 지나면 본교의 염원인 천 뇌교의 부활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일국을 성립하는 것도 가능해. 이 때에 성화에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으면 본교는 그 뿌리가 흔들리는 셈이야. 자 네도 성화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겠지?" 신녀교의 최대 중지인 성화전의 이인자인 고루흑살에게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관(?)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루흑살은 고개를 끄덕이 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백이충은 마치 남이 들으라는 듯이 신녀교 최대의 비밀인 성화에 대해 시시콜콜 고루흑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루흑살 또한 알고있는 일이나 감히 백이충의 말을 중단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화야 말로 신녀교의 근본이며 최대의 힘이지. 본 신녀교의 교도들이 신 녀님에게 절대 충성하는 근본이 성화가 아닌가? 꽃향기이든 꽃가루이든 한 번 성화를 접한 인간은 절대 그 마성에 헤어날 수가 없다. 중독될수록 그 마성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는 가공할 힘이다. 본교가 수십만의 신도를 모은 것도, 관리와 변방 양관의 무장들을 회유한 것도, 또한 본교에 침투 한 간세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그들이 본교의 음식이나 물에 탄 성화가루를 복용한 이후 철저히 본교에 충성하게 된 것도 모두 성화의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겠지?" 백이충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의 주위에 있던 바위하나에서 미미한 기 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루흑살은 갑작스레 신녀교의 비밀을 대놓고 떠드 는 백이충의 말에 혼란을 느낀 나머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신녀교 서열 이십위 안에 드는 고루흑살이라도 이렇듯 공공연하게 비밀을 입밖으로 내 었다가는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상전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 는지가 궁금했다. "속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편하겠군. 성화의 수급관계는 어떠한가?" 그제서야 상관의 뜻을 알았다고 착각한 고루흑살이 급히 자신이 알고있는 바를 보고했다. "그 문제라면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이번 신녀제전에 뜻밖의 거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수급에 차질이 생겼지만, 다행히 신녀님께서 성화를 위한 제물로 이십명을 충원시켜 주셨습니다. 그녀들의 살과 피를 이용한다면 내 일 쯤 능히 그들을 모두 본교의 노예로 만들만한 성화를 공급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백이충은 힐긋 바위를 한번 쳐다본 이후 다시 말을 이었다.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네. 일반 신도야 성화 한송이를 물에 타 백명에 나 눠먹여도 상관이 없네. 이성을 잃을 정도의 광란의 상태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면 충분히 신녀교에 향하는 맹목적인 신앙심을 유도할 정도로 중독시 킬 수가 있으니까. 허나 저항력이 강한 무림인의 경우에는 다르지. 특히나 오늘 모인 거물들 같은 경우 한 사람에게 서너 송이의 성화를 복용시켜야 단번에 성화의 마력에 중독되게 만들어 철저한 본교의 충복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네." "걱정 마십시오. 돌아가는 대로 오늘 성녀로 선택된 제물을 사용하여 성화 의 양을 늘리겠습니다." "자네의 말을 못믿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사안이 중요해서 말이야. 이 번 신녀제전에 본교의 미래가 달려있네.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만들수가 없 을 거야. 알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백이충은 미소를 짓다가 다시 설명조로 들어섰다. "대막에 있는 황사칠십이풍과의 접촉은 오랫동안 신녀교의 숙원이었네. 그 들은 본교와의 합작을 원하는 듯 하지만. 흥? 성화에 중독되면 누구보다 신녀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네. 그들뿐만이 아니야. 이번에 본교에서 포섭 한 양관문의 무장들이 대거 동료를 끌고왔네. 여태까지의 본교의 외부선행 을 이용하여 신녀제전을 최대의 축제로 소문낸 것이 이제야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네. 그들은 단순히 신녀제전을 구경하러 온 것이겠지만 역시 신 녀제전이 끝나면 본교의 노예가 될 것이네. 그리고 천뇌교의 부활을 위해 끌어 모은 귀영신군을 비롯하여 이번에 대거 몰려온 거마들 또한 그 예외 가 될 수가 없는 노릇이고. 예상보다 성화의 양이 곱절이 필요하게 되었으 니 신녀님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갑작스런 거물들의 영입으로 당황했지만 신 녀교에서 성녀수업을 받던 이백여명의 처녀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하였고 다 시 그 부족한 이십 명을 이번 제전에서 뽑아왔으니 계획에 차질은 없을 것 입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네 또한 부귀영화가 멀지 않을 것이네. 신녀교의 삼 십만 신도가 일제히 일어서고, 또 양관의 이십만 병사들이 중간급 무장에 의한 봉기로 본교에 귀속된 이후, 다시 양관 밖의 황사칠십이풍이 주도하 여 이민족들이 본교에 협조한다면...... 성서성과 청해성의 관리들이 이미 본교에 굴복한 이상 두성에 걸쳐 신녀국을 세우려는 꿈도 현실로 다가올 것이네. 그때는 황도에서도 본 국을 어쩌지 못할 것이네." 백이충의 말이 끝나자 고루흑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터져나 온 말이 그를 혼란시켰다. 신녀국이라거나 섬서에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고루흑살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 신녀교는 천뇌교의 부활을 최우선 목표였다. 그 때문에 백성 들의 신망을 얻기위해 선행을 가장했고 관의 충돌을 자제하기 위해 그들 고위관리를 포섭하였다. 양관의 무장들을 포섭한 것은 황사칠십이풍에 압 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황사칠십이풍을 포섭한다면 백도맹도 두려워할 필 요가 없이 천뇌교의 이름을 떳떳이 내걸 수 있기에, 이번에 그들이 신녀제 전에 참석하도록 군사들을 통해 온갖 수단을 쓴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이충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럴 듯 싶었다. 확실히 황사칠십이풍 은 마적떼로서는 무림의 세력이었지만 부족으로서는 관과 대립하는 이민족 이었다. 백이충의 말대로 양관의 군사들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일국의 성 립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이충의 말에는 기이한 힘이 서 려있어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고루흑살에게 느껴졌다. (그렇군. 윗전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장래 내 영화 는 단지 일개 무림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로구나. 신녀국의 왕후장상이 되 는 것도 꿈이 아니다.) "신녀님의 뜻을 하늘이 도와 이룰 것입니다. 신녀만세. 신녀만세." "알았으면 자네는 이만 돌아가서 성화의 공급에 만반을 기하게." (이정도 말했으면 알아서 하겠지?) 백이충은 옆에 있는 바위이ㅔ 신경쓰면서 고루흑살을 돌려보내려고 하였 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를 불러세웠다. "그럼 자네는 돌아가서 자네의 일을 하게. 아, 한가지 잊었군. 본교의 이번 거사가 모두 적힌 연판장과 함께 중요서류가 보관되어 있는 기밀각이 어디 있었지? 내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 "성화전의 동쪽에 있지 않습니까?" "아아, 맞아. 그랬지. 동쪽에 있는 붉은 기와의 건물이 기밀각이었지. 그리 고 이번에 희생될 제물들은 성화전 옆의 누각에 모아두었을 테고. 이제 돌 아가 보게." 백이충과 고루흑살이 돌아가자 평범한 암석처럼 보이던 바위가 부르르 떨 렸다. 그리고 바위가 비스듬이 기울더니 그 밑에서 한 명의 젊고 잘생긴 청년이 나타났다.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이며 백도맹주인 무성 종리연의 첫 번째 제자인 무적소야 모용풍이었다. 이번 신녀교의 일을 위해 무성 종리연이 보낸 천무호정단을 따라나선 모용 풍이었다. 이번에 특별히 종리연에게 부탁을 하여 천무호정단의 일원으로 모용풍이 따라 나왔던 것이었다. 섬서지단의 흑영당이 침투할 때 같이 섞 여 신녀교로 들어왔던 세명의 천무호정단원 중의 한명이 바로 모용풍이었 다. "맙소사. 반역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청해에 나라를 세우려고 했었단 말인 가? 그래서 일번 백성과 관리와 무장까지 끌어들인 것인가? 또한 그 배후 는 혈천마련이 아니고 천뇌교였단 말인가?" 너무나 뜻밖의 정보를 얻은 모용풍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 지만 지금은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큰일이다. 일단 천무호정단원을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상의한 끝에 결정 할 일이다. 자칫하면 무림과 관이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어 지고 만다." 모용풍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곳은 지하건물 속이 아니라 외부 로 나가는 통로욨다. 그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자리에 백이충 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불만으로 퉁퉁 부어있었다. "저....저. 죽일 놈 봤나? 그렇게 정보를 알려주었으면 우선적으로 성녀라는 이름으로 희생자가 될 혈향초의 제물들을 구해 나가야 할 것이 아냐? 불쌍 하게 희생될 여인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협의심도 없나? 정말 요새 백도라 는 것들은 하나도 쓸모가 없다니까." 백이충은 잠시 한 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정말 백도에서 쓸만한 물건을 하나 만들어 내었군. 어린 나이에 저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백도에서 백도십대극품절예를 모아 후예들을 기른다고 하더니.... 저정도면 천무삼성의 늙은이들에 비해 뒤지지 않겠어. 몇 년만 지나 경험을 쌓는다면 과거의 나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야. 도대 체 백도십대극품절예의 몇가지를 익혔는지 궁금하군. 그나저나...." 백이충의 안색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이거 계획을 완전 수정해야겠군. 우선 신녀교의 기밀각에 내가 가져다 놓 은 서류는 저 녀석이 가져가겠지. 쯧쯧. 쌍노를 따르는 몇몇 쓰레기를 투 입하여 신녀교를 해산하고 그 세력을 혈무영의 하부세력으로 고스란히 흡 수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말괄량이가 이곳에 호기심을 가지고 침투하 다니. 이렇게 되면 내가 표면에 나설 수가 없게 되어 버렸는걸." 백이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렇다고 신경 쓰이는 고것을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신녀교의 세 력을 해산시키는 원래의 계획을 밀고 가면서 신녀교의 세력은 포기해야 되 겠다. 저놈이 설마 성화전에서 그녀를 구하기는 하겠지?" "그것이 정말이요?" 화산파 출신의 매화검객 이정풍은 놀란 소리를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호에 매화검객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문에서 무공을 익히다가 강 호 출도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제와 함께 승룡곡으로 떠났기 때문이 다. 그것이 벌써 사십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비밀리에 화산의 장로직을 맡고 있으며 천무호정단의 단원이기도 했다. 창창한 젊음을 증명하던 검은 머리는 벌써 백발이 된지 오래이다. 그가 강 호에서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은 흑도 때문이었다. 과거 천년마교 시절부터 흑도에 밀리기 시작하던 백도는 그들이 변황세력과 동패하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허나 미처 백도를 추스르기도 전에 흑도에서는 또 하나의 거 대세력이 출현하였다. 혈천마궁이라는 갑작스런 마세의 출현으로 백도는 다시 움추려 들었다. 굴 복은 하지 않았어도 백도가 흑도를 이길 가능성은 요원했다. 당시의 무림 맹주이던 소림장문인의 제안으로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승룡곡으로 몰 려들었다. 미래를 위한 보험인 셈이다. 백년전의 기인인 천무삼성이 백도의 위기를 보다 못해 무림에 다시 나타났 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마세를 꺽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가능성은 거의 없 을 듯 싶었다. 천무삼성은 그를 알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백도의 극품절 예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승룡곡의 일천명의 백도기재들은 백도광명을 위 해 이를 악물고 무공을 익혀나갔다. 승룡곡에는 백도십대극품절예의 다섯 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하나라도 터득한 사람은 전무했다. 이십년 전 혈존의 사후 갑작스레 흑도세력이 종적을 감추었다. 백도는 다 시 빛을 되찾았고 천하는 화평했다. 하지만 이정풍을 비롯한 천무호정단은 다시 천하로 나가지 않았다. 천무삼성 및 백도수뇌의 판단으로는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한 정적인 것이 확실하기에 그들은 여전히 승룡곡 에서 나오지 못했다. 다만 백도의 초천재 기재인 훗날의 무성 종리연을 비 롯하여 소수의 기재들만이 무예를 완성하여 승룡곡을 나가 백도맹에 헌신 했다. 무성 종리연은 그 속에 속해 있었다. 이정풍이 알기에 천무호정단 일기 천명의 고수 중에서 백도 십대극품절예 를 완성하고 강호에 나선 자는 열명에 불과했다. 천무삼성의 공동제자 무 성 종리연이 그중 셋을 연성했으며 네명이 두가지 절학을, 다섯명이 각자 극품절예중의 하나씩을 완성했다. 이정풍은 백도 십대극품절예의 하나를 익히지는 못했다. 하지는 그는 화산 의 비전절기인 독고구검을 완성했다. 검으로 따지자면 천하에서 다섯손가 락 안에 든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천무삼성의 명을 받들어, 대규모로서는 처음으로 승룡곡에서 나선 오백명의 일기 천무호정단원 중에 서 자신은 오십위 안에 드는 상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정풍의 눈앞에 있는 청년은 품속에서 신녀교의 서류를 꺼냈다. 이정풍은 그것이 방금 청년이 말한 증거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정풍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혈천마련이 아니라 천녀교란 말인가? 그리고 반역이란 말인가?" 경악하는 와중에서도 이정풍은 눈앞의 청년 모용풍에 대해 뿌듯한 감을 느 낄 수가 있었다. 모용풍은 종리연의 제자이며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였다. 동시에 무성 종리연을 능가하는 천재였다. 천무호정단 삼기로 승룡곡에 들 어왔으면서도 불과 오년도 못되어 다섯가지 극품절예를 터득해내고는 선배 들을 제치고 무림에 다시 나선 초천재였다. 이번에 천무호정단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모용풍을 이번 흑영당에 끼어 신녀교에 침투하는 조의 일원으로 뽑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이정풍 은 생각했다. 자신은 신녀교의 외전전주로 화신하여 겨우 지하본부에 대한 비밀을 알아냈을 때 모용풍은 신녀교의 지하 중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신녀교의 최대 비밀을 알아내 온 것이다. "사실이었군. 큰일이다." 이정풍은 모용풍이 가져온 증거서류를 보면서 일이 커졌음을 느꼈다. 무림 에서는 명백히 흑도와 백도를 구분하지만 관에서 보기에는 무림인이란 모 두 거기에서 거기였다. 따라서 무림과 관이 충돌을 일으킬 만한 일을 삼가 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이었다. 만약 무림세력인 천뇌교를 주축으로 하여 섬서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후일 관에서 무림 전체를 그냥 둘 리가 없었 다. "이것은 중대하면서도 시급한 사안이 되어버렸네. 관에서 눈치채거나 신녀 교에서 사람들을 모아 반역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하네. 이 소 식을 급히 섬서지단에 보내 백도맹에 알려야하네. 천무호정단 전체를 불러 와 신녀교를 제압해야 하네. 더 이상 신녀교의 눈치를 볼 처지가 아니네." "하오면 선배께서는?" "신녀제전을 핑계로 신녀교의 경계가 심상치 않네. 게다가 이번에 모인 흑 도의 고수들도 적지 않고. 우리가 침투시켰던 자객전의 고수들도 신녀교의 주구가 되어 외곽을 감시하고 있네. 자네가 나보다 더한 고수이기는 하지 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을 장담할 수가 없네. 하지만 다행히 장소 저가 이 증거들을 가지고 빠져나갈 수는 있지." 이정풍은 방안에 있던 또 한명의 여인 장보옥을 향해 말했다. "그들이 성화라는 마약을 재배하기 위해 성녀들을 제물로 희생시키면서도 장소저를 따로 빼돌린 것은 현재 장소저가 위장한 안찰사의 따님이라는 위 치가 그들에게도 중요하다는 소리요. 내일 아침이 되면 안찰사인 아버님을 만나겠다는 핑계를 대시오. 일단 신녀중지의 외곽으로 의심받지 않고 나갈 수만 있다면 무림인이 아닌 것으로 되어있는 소저에 대한 경계는 약할 터 이니 일반교도에 섞여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오." 이정풍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장보옥이 다급하게 말했다. "말씀드릴일이 있어요. 혜연이.... 금동생이 성녀로 저와 함께 이곳 지하로 들어왔어요. 그녀를 구해야 해요." "금혜연이라고?" 이정풍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자 모용풍이 오히려 놀라 장보옥에게 되물 었다. "금소저라고요? 설마 무당파 대장로 광천도장님의 손녀이며 금가장주의 따 님인 금혜연소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녀가 말도 없이 몰래 이곳에 들어왔어요. 아까 저에게 전음으로 정 체를 밝혔었는데 호정단 영주님의 명 때문에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어요. 설마 그녀에게 바로 위기가 닥쳐올 줄은...." 이정풍도 그제서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당파의 대장로 광천도장 이라면 무림에서는 오랫동안 무당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무성 종리 연과 함께 승룡곡에서 처음으로 출도한 인물들 중의 하나이며 천무삼성중 의 현무도선의 뒤를 이어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인 태극일원공을 완벽 하게 익힌 인물이다. 백도에서 그의 위치는 종리연에 비해 그리 낮다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낭자는 떠나야 하오. 일단 남아있는 우리 셋이 뭉쳐 그녀를 구하 는 방법을 강구하겠소. 어차피 그 성화라는 마약을 없애야 한다면 성화전 에 들어가야 하니까. 대신 낭자는 천무호정단이 신녀교의 제전이 끝나기 전에 이곳을 제압해야 된다는 소식을 반드시 전해야 하오." 서문일충은 서로군부에 속해있는 편장군의 직위에 있었다. 직위는 낮았지 만 그는 옥문관 책임자인 거기장군의 참모관의 역할을 했기에 직책의 높낮 음을 떠나 모두들 그를 존중해 주었다. 옥문관에 속해있던 그는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앞두고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그의 친동생으로부터의 편지였다. "이충이 녀석. 부모님이 걱정하시는데 집에는 돌아가지 않고 웬 편지람." 서문일충이 받은 편지에는 오랜만에 형제끼리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다는 편지였다. 벌써 삼년동안 변방에 나가있던 서문일충으로서는 반갑기도 하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었지. 이 녀석.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거절했다던가? 문관이 되고자 했던 것은 이충의 오랜 꿈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 거절한 것일까?" 서문일충은 자신의 동생이 천하를 유람하겠다는 핑계로 집을 나선 것을 알 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보모님의 걱정이 많은 것도. 그는 한번 동생을 만나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뺄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군문을 이탈할 수도 없고. 녀석. 오는 김에 이곳까지 오던가 하지. 난주 근처에서 만나자고 달랑 편 지한장만 보내오다니." 고심하던 서문일충은 결심을 했다. 그의 앞에 있던 탁자에는 이번 정기훈 련을 앞두고 작전지로 삼으려고 했던 장소의 군지도가 놓여져 있었다. "하는수 없지. 이번 훈련은 목격지를 변경한다. 난주근처로 이동해서 지친 군사들에게도 번화한 도시 구경이나 시켜주는 셈 치지. 그 틈에 동생도 한 번 만나보고." 서문일충으로서는 그의 결심이 섬서에 있는 무림세력에게 신녀교를 향한 황군의 개입으로 비춰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지하석실. 수천평은 될 듯한 거대한 지하광장에는 수많은 붉은 물 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붉은 물결은 모두 붉은 식물들들의 현란한 광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닥에는 만 정도에 가까운 수많은 인골들이 파랗게 빛을 발하며 뒹굴고 있었고 드믄드믄 썩어가는 인육과 그나마 아직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 는 시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위로 수많은 가시들에 뒤덮힌 나무 넝쿨 같 은 것이 뱀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넝쿨 위로는 수많은 울긋불긋한 풀들 이 잡초처럼 난잡하게 자라있었다. 지하석실의 천장에는 입구인 듯한 자그마한 문이 달려 있었는데 바로 그 밑에 거의 삼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시체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다른 시 체들과 달리 그 모습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체인 것 같았다. 뱀처럼 흐느적 거리던 붉은 넝쿨 한줄기가 여인의 시체 하나를 감았다. 식 물의 촉수에 감긴 시체는 예리한 검에 두동강 나듯 허리가 잘라지며 폭포 같은 선혈이 쏟아져나왔다. 허나 그 선혈은 미처 바닥에 고이기도 전에 바 닥을 뒤덮고 있는 붉은 식물들에게 빨려가고 있었다. "괴물. 식인초....." 두려움에 가득한 나직한 음성이 어두운 석실 한구석에서 흘러나왔다. 고집 하나로 자기 마음대로 신녀교에 들어온 금혜연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석실 의 구석에서 붉은 식물들이 미치지 않은 한쪽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으며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석실의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선행으로 소문이 자자한 신녀교의 지하 석실에 식인초가 자라고 있고 신녀교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식인초에 바 치고 있었다니."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나무라고 할수 있을까? 마치 온갖 식물덩쿨이 뭉쳐져 서로 의지하여 허공을 향해 꼿 꼿이 일어서있는 붉은 넝쿨의 모습을? 마치 수만마리의 뱀들이 뒤엉켜 있 는 듯한 징그러운 모습을? 높이는 오장여.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하고 하고 있는 식인초의 몸체로는 촉수같은 수많은 가시달린 넝쿨들이 사방으로 뻗어가 석실의 바닥을 뒤덮 고 있었다. 저 괴이한 식인초는 생물의 체온이나 기척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뻗어나와 사람의 피와 고기를 섭취했다. 금혜연은 감히 제대로 숨도 내쉬지 못하고 귀식대법을 펼쳐 자신의 온도를 떨어트린 후 움직임을 자제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오 일째. 음식과 물을 섭취하 지 못한 금혜연은 자꾸만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일전, 신녀교에서 성화라고 불리는 식인초의 제물이 되기위해 금혜연은 다른 삼백명의 여인들과 함께 이 석실로 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혜 연은 앞날에 이런 공포가 숨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혼약에서 깨어나 공포와 두려움속에 비명을 지르며 흐느끼는 여인들을 향해 수천줄기의 넝쿨이 그녀들 주위를 감쌌다. 식인초는 포식자처럼 한꺼 번에 여인들을 덮치지 않았다. 위협하는 뱀처럼 여인들을 한곳에 모아 수 많은 식인넝쿨로 포위한 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미식가처럼 한명씩 한명씩 넝쿨은 여인들을 골라내어 낚아챘다. 공포 와 경악에 지친 여인의 몸이 칼보다 예리한 수많은 가시에 낭자되며 피투 성이가 된 체로 뒤덮힐 때 조금씩 조금씩 식인초는 여인의 몸을 음미했다. 피와 살덩이, 뼈조차 한조각 남기지 않고 샅샅히 분해하며 그 골육을 흡수 하며 넝쿨은 환희에 떨 듯 진동했다. 그 소리가 마치 금혜연에게는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로잡힌 여인은 마지막 심장이 분해되고 뇌수 가 흡수될때까지 살아있으며 그 고통과 공포를 식인초의 입맛에 제공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간 백여명의 여인이 뼈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분해되 어야 했다. 공포와 경악속에 지친 여인들은 삼일도 가지 않아 탈진하여 하나하나 그들 이 떨고있던 무리속에서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 식인초는 죽은 여인의 시 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있고 피가 뜨거운 살아있는 여인들을 골라내어 그 식욕을 충당했다. 식인초가 여인들의 시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지금도 식인초의 넝쿨이 여인들의 시체를 동강내며 이미 싸늘히 식은 굳어 가는 죽은피를 흡수했다. 그리고 그 살점을 뜯어 분해했다. 하지만 시체는 식인초의 비료는 될 지언정 입맛을 돋우는 음식은 아닌지 살아있던 사람처 럼 산산히 분해하여 흡수하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만 명은 넘을 것 같은 수많은 인골과 썩어가는 사람의 살점이 바닥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금혜연이라고 반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여인을 구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방 석실의 벽과 바닥은 두께가 얼마나 될지 알수도 없을 만큼 두꺼웠고 괴이한 식물의 넝쿨은 칼로도 잘라지지 않을만 큼 단단했다. 게다가 넝쿨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났고 이동 속도는 새가 무색할 정도로 재빨랐다. 금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체온을 떨어트리고 죽은체 구석에 몸을 피하는 정도였다. 파파팍! 넝쿨이 터지며 가루가 허공에 날린다. 사람의 살과 피를 흡수한 이후 환희 에 떨 듯 몸을 진동시키던 넝쿨 한가닥은 반드시 저렇게 갑자기 폭팔하듯 터져나갔다. 그리고 예리한 가시와 칼도 통하지 않은 질긴 껍질 속에 고운 포자가 터져나간다. 포자는 시체들의 더미에 내려앉아 불과 하루만에 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지금 넝쿨과 저 거대한 식인초의 본체에 가득 뒤덮 혀 있는 괴이한 붉은 잡초와 비슷한 꽃을. 쨍강! 금혜연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무리한 귀식대법의 운용이 내공과 체력을 바닥나게 하여 그녀의 정신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더... 더 이상 버틸수가 없어. 이제 끝장이야. 백가가. 먼저 죽어서 미안." 금혜연은 마지막으로 백이충을 부른후 천천히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탈진 과 공포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대로 한시진이 지나기 전에 그녀의 숨이 멎고 싸늘한 시체로 변하리라. 하지만 한시진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식 인초, 즉 혈향초의 넝쿨이 금혜연의 기척을 알아채고 그녀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젠장. 다른 여자처럼 혼절하거나 여자답게 빨리 기절이나 할 것이지. 죽 을 지경까지 이르도록 버티기는." 나직히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석실에 한명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났다. 마 치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온듯한 형태였다. 놀랍게도 뱀을 만난 개구 리처럼 금혜연을 향해 다가오던 수천줄기의 식인넝쿨이 화다닥 물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에 피어있던 수많은 붉은 잡초들, 혈향초의 변종 들이 서리맞은 풀처럼 시들어갔다. "정말 내가 참지 못하고 나설 뻔했군. 여자 한명이 이토록 내 마음을 흔들 어 놓다니. 이거야 부모님보다 이 말괄량이를 신경쓰는 시간이 더 많아지 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금혜연을 살피다가 그녀의 입에 물을 흘려주고는 백이충은 그녀를 안아올 렸다. 그는 석실의 중앙, 혈향초들의 왕인 혈근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나직히 감탄이 표정이 서렸다. "대단하군. 배교의 사술이 만들어낸 혈향초에 훌륭하게 천뇌교의 사술을 접목시켰어. 이런 기물이 만들어지다니. 하기야 천뇌교의 술법을 가미하지 않았다면 혈근을 조종할 수가 없었겠지. 나도 천뇌교의 사술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나도 못해낸 혈향초의 대량 재배를 성공하다니 뜻밖의 일이야." 배교의 술법과 가장 흡사한 것이 천뇌교의 사술이었다. 혈사문의 사공은 무공과 결합되어 사공을 익힌 인간의 육신을 물이나 기체로 흩날리게 하는 기법이 주종을 이루었고 음산곡의 사술이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술법과 방중술에 그 기본을 두었다면 천뇌교의 사술은 강시대법이나 귀신을 다루 는 술법등, 그 기본이 배교와 흡사하였다. 천뇌만상공을 익힌 뒤 은근히 천뇌교의 술법을 무시한 혈존이었지만 지금 천뇌교의 술법에 놀라움을 금 치 못하고 있었다. 백이충이 다가갈때마다 바닥을 뒤엎었던 넝쿨들이 스르르 움츠러들어 자취 를 감추었다. 중앙의 거대한 혈근이 마치 두려움에 떨 듯 웅웅 소리를 내 며 진동을 시작했다. 마치 늑대를 만난 토끼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 듯 혈근은 백이충을 향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창조하고서 내손으로 너를 멸종시켜야겠다. 쯧. 원래대로 라면 너를 보존하여 신녀교를 흡수하려 했다만. 네가 소매의 눈에 띠인 이 상 혹여라도 너와 내가 관계되었다는 증거를 세상에 남겨놓을 수는 없지. 너는 신녀교 그 자체라고 할 수가 없으니 너를 없앤다는 것은 신녀교를 포 기하는 것과 같다." 백이충의 손이 불타올랐다. 그것은 무공에 의한 화염장이 아니었다. 혈향 초와 극성인 주술에 의해 그의 손이 붉게 물든은 것이다. 그의 손에는 금 혜연의 품속에서 찾은 요요경이 들려있었다. "요요경은 만사를 제압한다." 순간 붉은 빛이 번뜩이며 요요경의 거울에서 광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거대한 혈근의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혈근이 그 거체를 진동시켜 마치 비 명을 지르듯 웅웅소리를 내었다. 수천줄기의 넝쿨이 뒤엉킨 듯한 거대한 혈근의 한가운데에 휭하니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순간 혈근에서 수만명이 터트리는 비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 왔다. 동시에 수많은 원령이 비명을 지르며 한순간 모습을 드러냈다가 뒹 구는 모습이 백이충의 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거의 대부분은 그 자리 에서 소멸했지만 일부는 아직도 남아 원독에 찬 눈초리로 백이충을 노려보 고 있었다. 순간 백이충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혈근의 중심이.....? 없어? 저 것이 본체가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저건 뭐 야? 고통을 느끼는 듯한 비명? 아무리 요물에 가까운 것이 된 혈향초라고 해도 식물이 고통을 느껴? 또한 혈향초에 매여있던 영혼이 유부로 사라지 기는커녕 아직도 세상에 매여 있어?" 순간 백이충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헛. 그렇구나. 그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런 거였군. 천뇌교의 사술이 무 림삼대사종의 하나인 것이 헛소문이 아니었군. 가히 배교의 것에 뒤진 것 이 아니었어." 백이충은 점차 누렇게 말라가는 혈근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혈근의 핵이 인간으로 들어갔군. 인초합일을 이루었나? 천뇌교의 누가 있 어 그러한 것을 생각해 내었을까? 하기야 그러하니 마음대로 혈근을 지배 하고 혈향초를 재배했겠지. 대단하군. 이미 혈근은 사람과 하나가 되었고 저것은 껍데기였구나." 백이충은 말라가는 혈근을 뒤져 그 근처에서 마치 사람의 내장인 듯한 것 을 뿌리에서 찾아내었다. 고구마처럼 혈근의 뿌리에 주렁주렁 달린 것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백이충이 세어보니 모두 백 개가 넘었다. 이것은 혈근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와 살과 피를 완전히 흡수하여 백명을 채울 때마다 하나씩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백개가 넘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체 끝까지 생으로 분해되어 혈근에 희생된 여인의 숫자가 만이 넘는다는 것을 뜻했다. 그 전에 죽어 혈근의 비료가 된 숫자까지 치면 희생자의 수는 아마 상상을 불허할 것이었다. 백이충은 그 중에서 가장 큰 것 하나를 뽑아 금혜연에게 먹이며 동시에 나 머지를 짓이겨 선혈처럼 뿜어져 나오는 혈근의 즙을 금혜연의 몸에 골고루 발랐다. "이거야 미치겠군. 요요경의 저주야 내가 해소시켰다고 하지만 그래도 요 요경의 힘 때문에 이성을 끄는 힘이 갈수록 강해질 텐데. 여기에 만명의 인간생혈을 흡수한 혈근의 정혈을 복용하고 온 몸에 발랐으니. 후-. 이미 소멸한 영혼을 제외하더라도 능히 몇 천의 처녀귀가 그녀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예로 복종하며 그녀를 보호하리라. 그녀가 알든 모르든. 하지만 이대로 두면 원귀들이 신녀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보호할테니 차라리 소매 에게 붙들어 매는 것이 낫겠지." 금혜연은 너무 오래 혈근과 함께 있었다. 비록 그녀가 숨을 죽이고 귀식대 법을 행하였다고 해도 그녀의 코와 입을 통해 혈근의 가루가 들어갔다. 또 한 그녀의 피부를 통해 전신모공으로 혈근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애초부터 주술로 몸을 보호하거나 도가의 법보로 사기를 근절시키지 않는 이상 혈향초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금혜연은 미처 백이충이 알 기도 전에 신녀교에 뛰어들어 그가 손을 쓸 틈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녀 는 혈향초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혈근을 제거한다면 그녀역시 금 단현상에 의해 이성을 잃고 악마가 되어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리라. 그를 막기위해서는 혈근의 그동안 축적해 놓은 혈근의 정혈로 그녀 자신이 혈향 초를 지배하는 몸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백도 놈들. 맘에 안 드는군. 기어이 나타나지 않았어. 소매가 혈 근을 본지 못한 상태에서 구함을 받았다면 혈향초를 이용하여 신녀교를 흡 수한다는 원래계획을 수정할 필요도 없었건만." 바닥에 금혜연을 내려놓고 다시 모습을 감추는 백이충이었다. 신녀는 자신의 현실이 꿈만 같았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떠받들 때와는 그 격이 틀렸다. 이제 관과 무림을 두려워하여 눈치를 보던 신녀교는 없 다. 이제는 천하가 자신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보라. 자신의 아래에 부 복하고 있는 자들을. 황사칠십이풍. 대막의 최강자들이며 약탈자인 동시에 각 부족의 실질적인 수뇌인 거물들. 처음에 거만한 표정으로 신녀교에 들어오고 경계의 눈빛으 로 신녀교 요인들을 바라보던 칠십이명의 풍주들이 복종과 굴종의 눈빛으 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또한 귀영신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거두효웅들이 그녀의 밑에 있었다. 뜻밖 에 많은 마두들이 그녀의 밑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거마들이 몰려든 것 이 귀영신군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군웅들의 경배를 받는 기분이 어찌 허름하고 굶주린 거지떼같은 백성들이 절하는 것과 같으랴. 이제는 사부인 적안미부가 두려워하던 혈천마련도 겁나지 않았다. 백도맹 의 눈치를 보느라 관을 끌어들이면서까지 백성들을 선동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제 막대한 세력이 생겼다. 천뇌교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자 신은 그 교주에 취임할 것이다. 신녀는 자신이 마치 제왕이 된 듯한 기분 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회회현에서 부친의 강압아래 무식한 주루 주인에 게 팔려가듯 시집온 철부지 새댁도 아니었고 혈향초의 저주아래 가족을 모 두 잃고 실성하여 떠돌아다니던 미친년도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 오백명의 성녀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들이야 말로 천 뇌교의 진실한 후예이며 힘이었다. 그들은 천뇌교의 정통 사공과 사술을 익히고 있었다. 성녀의 우두머리는 바로 그녀의 사부인 적안미부였다. 원래 신녀는 적안미부가 키우던 오백명의 천사녀 중의 한명이었다. 하지만 혈향초를 적안미부가 알아보며 상황은 바뀌었다. 이미 혈향초와 인초합일 을 이룬 신녀였다. 그녀가 비록 적안비부의 제자이기는 했으나 적안미부조 차 그녀에게 복종해야 하는 처지였다. 남들과 달리 천뇌교의 비전사술에 의해 적안미부와 오백 성녀들은 혈향초의 마력에 지배당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오늘은 신녀교의 신녀제전이 끝나는 날이다. 동시에 신녀교를 하부세력으 로 삼는 천뇌교가 본격적으로 그 이름을 세상에 내세우는 날이 될 것이다. 신녀는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그들 모두에게 신녀교의 개파를 알리려고 했 다. 그 순간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가슴에 느꼈다. "크으윽"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신녀는 하 마터면 옥좌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으나 간신히 신영을 바로잡아 추태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신녀님." 적안미부와 성녀들이 놀라 일제히 그녀곁으로 왔다. 좌중에 모인 거마들과 황사칠십이풍의 풍주들도 신녀를 찬양하다 말고 일제히 놀란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녀는 그들을 신경쓸 틈이 없었다. "성화가.... 성화에 무슨 일이 생겼다. 성화전에 사람을 보내." 신녀가 쥐어짜듯 고통어린 음성으로 적안미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안미 부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성화는 신녀교의 근본 힘이다. 사실상 힘으로 따지자면 신녀교는 아직 황사칠십이풍이나 이번에 입교한 수많은 거마들을 거느릴 능력이 없었다. 오직 성화를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속에서 충성을 얻어낸 것이다. "귀영신군께서는 급히 장로들을 데리고 즉시 성화전으로 가 주십시오. 원 로들은 즉시 주위에 경계령을 내리고 주위를 수색토록 하시오." 적안미부는 그녀의 오빠이자 이번에 신녀교의 부교주로 취임한 귀영신군에 게 명을 내린후 황급히 신녀를 부축하여 연회장을 벗어났다. 더 이상 신녀 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런 소동으로 인해 신 녀와 주요인물들은 주인공이 빠진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추며 부산스런 움 직임을 보여야 했다. 잠시후 제정신을 차린 신녀의 앞에 적안미부가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대령 했다. 힘겹게 눈을 뜬 신녀는 자신의 고통이 한결 줄어들었음을 느꼈으나 동시에 중요한 것을 잃은 듯 가슴이 허해짐도 느낄수 있었다. "성화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성화전에 있던 모든 성화와 성목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성목은 성화에 희생된 만명의 원혼이 성목을 굳건히 지키고 있을텐데? 무엇이 성목을 해할수 있단 말인가요?" "그것이..... 아무래도 또 한명의 인초합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말도 안돼. 성목의 핵은 내 몸안에 있어요. 그런데 다른 핵이 남아있었다고?" 신녀는 현실을 부정하는 투로 말을 맺었지만 그녀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결 여되어 있었다. 애초에 혈향초를 만든 것이 천뇌교가 아닌만큼 아직도 혈 향초는 풀리지 않은 비밀이 많았다. 그것을 그나마 양파 껍질 벗기듯 풀어 나가 천뇌교의 비전사술로 조종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 지 않았다. 신녀교가 일년전에야 세상에 드러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화전에서 아직 살아있는 한명의 여아를 발견했습니다. 이번에 범상치 않은 요력이 몸에 있기에 특별히 성녀로 뽑은 아이입니다. 부교주가 돌보 고 있는데 아무래도..... 부교주의 말에 의하면 성목의 기운이 그녀에게 머 무러 있다 합니다. 성화의 기운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은 인초합일을 이룬 사람외에 없지 않습니까?" 귀영신군의 말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천년마교시절 팔마의 한 사람이던 천유의 제자중에서 천뇌교의 사술에 가장 정통한 것이 적안미부 였고 사공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것이 귀영신군이었으니. (그리고보니 성목의 뜻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목이 세상에 나가 기를 원했을 때 남편의 몸에 씨앗을 퍼트렸고 회회현이 죽음의 마을이 되 었을 때에는 내 몸에 핵을 심어 한정된 장소에서 벗어났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성목도 세상에 퍼져 천하곳곳에 씨앗을 퍼트리는 것을 원한다. 내가 천뇌교의 사술을 터득하여 내 몸을 성목의 제물이 아닌 성목과 일체 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다. 허나 내가 성목을 지배하게 된 것은 오히 려 성목이 씨앗을 세상에 퍼트리는 것을 억누르는 셈이 된다. 그래서 성목 이 또하나의 핵을 만들어 내어 그 계집의 몸에 심은 것일까?)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일단 태상께서는 본교가 흔들리지 않게 단속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여인은 태상께서 직접 부교주와 함께 돌보십시오. 성화와 성목이 사라졌다 는 것은 애석하지만 내가 있고 제물이 될 신녀교의 교도들이 있는 이상 성 화를 다시 만들어 내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알았습니다." 장악은 신산서생 도익균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못 할 상황이 온 것이다. "변방 수비군이 움직였다고?" "예. 황사칠십이풍의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혹은 신녀교의 일을 눈치챈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녀교 쪽을 향해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들 어왔습니다." "또한 신녀교에서는 본격적으로 천뇌교의 간판을 걸 셈이라고?" "모용공자가 보내신 소식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장악은 침중하게 안색을 굳혔다. 지금 장악은 백도맹의 총단에 소식을 알 리고 속속들이 모여드는 천무호정단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용풍의 정 보에 의하면 신녀교의 세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설사 섬서에 모인 천무호정단 전체와 섬서지단의 모든 세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이길수 있다 고 완벽한 자신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관의 비호를 받고 있다 는 것이 섬서지단의 출동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군. 혹여라도 군대가 신녀교의 반역을 눈채채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리고 신녀교가 천뇌교의 간판을 건다면 무림과 관은 전면적인 충돌이 예상되네. 그 전에 우리 무림세력 안에서 해결하여 무림의 다툼으로 종결지어야 하네." "하지만 아직 신녀교의 가면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백성 들을 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녀교를 공격한다면 백도맹은 그 명예에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신녀교가 반역을 꿈꾸고 있다지만 혈 천마련이 아닌이상 무림에 크게 위협되는 상황도 아닌지라 순수하게 본 맹 의 입장으로 본다면 손해만 있을뿐 이득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지.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어도 신녀교에 침투한 세명의 정보 를 더 모아 판단을 내렸을 것이네. 천뇌교가 혈천마련의 세력이 아닌이상 그 혼자서는 무림의 큰 위협이 되지도 않네. 천뇌교를 무림의 한 세력으로 섬서지역을 인정할 테니 반역의 뜻을 바꾸고 무림세력으로서 백도맹과 협 조관계를 맺자고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테지. 허나 신녀교는 현재 반역의 뜻 을 품고 있고 불행히도 그것을 알아챘을 수도 있는 군대가 움직이고 있네. 이제는 변황수비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무림 내부의 다툼으로 일을 축소시 켜야 하네. 싫어도 신녀교를 칠 수밖에 없어." "그러시다면..... 섬서 주위의 다른 세력은 모두 협조를 거절했습니다. 선행 으로 이름난 신녀교를 공격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받거나 신녀교와 친한 관 에 미움을 받기를 꺼려하는 듯 싶습니다. 다행히 오백명의 호정단원 분들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시고 모두 집결하셨습니다." "좋아. 천뇌교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호정단원들은 모두 각파 의 장로급 신분이네. 그 무예는 각파의 장문인보다 오히려 뛰어나지. 그들 이 나선이상 천뇌교와 신녀교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승산은 우리에 게 있을 것이네. 상황이 긴급하니 오늘 밤 야음을 틈타 신녀교 공략에 나 서겠네." "아앙. 언니. 제발 좀 바꿔 줘." "혜연아. 글쎄. 안된다는데." "정말 이럴 거야? 우리 할아버지한테 나 구박했다고 다 이른다." 장보옥은 금혜연의 생떼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보옥은 협옹 장악 의 손녀였다. 결코 장악을 배신하지 않을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이며 외부 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장악의 무공을 무공을 어릴때부터 수련해온 여인 이었다. 그녀는 얼마후 할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모종의 임무에 침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아끼는 금혜연의 막무가내인 고집이 그녀 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얼마전 무림칠미의 하나인 옥수비연이 백도맹 감숙지단으로 찾아왔다. 지 단주인 장악은 무당파의 장문인과 같은 배분이므로 금혜연의 할아버지인 대장로와도 나이차이는 있지만 같은 배분이었다. 감숙성에 들린 금혜연이 당연히 무당파 속가의 협옹을 찾아 인사를 하고 신세를 진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녀인 장보옥의 거처에 금혜연을 같이 있게 했다. "너무해. 그냥 구경 좀 시켜달라는데 왜 안된다는 거야?" 금혜연은 장보옥을 만난이후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완전히 언니동생 하 는 사이가 되었다. 자매가 없는 장보옥도 금혜연을 친 동생처럼 여겼다. 장보옥과 금혜연은 마음도 맞았고 나이도 비슷했으며 특히나 무림칠미의 한사람답지 않게 순수하게 구는 금혜연이 마음에 들어 장만옥은 진심으로 금혜연을 아꼈다. 그때문인지 금혜연은 장보옥이 들어줄 수 없는 떼를 쓰 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아. 네가 내 시녀 금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랑 같 이 가면 오히려 내가 네 시녀로 보일 걸? 그러니 포기하는 것이 나아." "히잉. 면사로 얼굴을 가리면 되잖아. 나 꼭 신녀제전이라는 것을 보고 싶 단 말이야." 신녀제전. 신녀가 감숙성에 나타나 신녀교를 세운지 일년. 수십만의 교도가 몰려들었 다. 그리고 회회현에 신녀성지가 세워지고 몇 만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신녀교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신녀성지를 찾 아왔다. 병들은 환자들은 신녀를 만나면 어떤 병이든 고칠 수가 있다고 했다. 가난 한 자들이 신녀성지에 들면 굶주리지 않을 수가 있다고 했다. 신녀교도가 되면 관리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했다. 병신도 신녀를 만나면 정 상인이 될 수가 있다고 했다. 소문은 끝없이 확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신 녀성지를 찾았다가 꿈을 안고 신녀교도가 되어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가 다 시 소문을 퍼트리고는 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녀를 찾아오자 신녀도 더 이상 회회현을 벗어나 감숙성을 돌아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 이다. 언제부터인가 신녀는 신녀성지에서만 자신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접견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수백명, 수천명이 찾는 사람들과 환자들을 일일이 신녀가 직접 만나 그 하소연을 들어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녀를 찾는 사람들의 숫 자가 증가하면서 신녀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제한되었다. 신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여러명의 여인에게 신력을 전수하여 제자로 삼 았고 성녀라고 불리는 여신선들이 신녀를 대신하여 시녀교를 찾는 사람들 을 만나고 그들의 병을 고치며 한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신녀가 모습을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성녀들을 모 아 의술과 성력, 신녀교의 교리를 가르치는데 시간을 보내지만 교도들을 위해 신녀는 한달에 단 한번 신녀교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 내며 직접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신녀제전이라고 했다. 신녀제전에서 신녀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이적을 모든 교도들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날 새로 신녀교도가 된 모든 사람들은 처음으로 직접 신녀 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모여든 모든 사람들 중에서 운이 좋은 일부사람들은 신녀가 직접 그들을 접하고 소원을 들어준다. 마지막으로 신녀교의 중대한 행사가 있다. 감숙성 각지의 신녀교도 중에서 뽑힌 자질이 있는 여인들이 신녀제전에 모여 신녀를 만나게 되고 그들 중 에서 뛰어난 자들을 신녀는 제자로 삼아 신녀성지로 들어간다. 신녀성지에 들어간 여인들은 나중에 성녀로서 나타나게 된다. 본인이 성녀가 되거나 자신의 가족들 중에서 딸이나 조카가 성녀가 나타난다는 것은 모든 신녀교 도들의 꿈이었다. "응? 응? 언니. 제발." 원망하려면 입이 싼 금아를 원망해야 했다. 감숙성에 들어온 이래 귀가 멍 멍해 질 정도로 신녀의 소문을 들었던 금혜연이 금아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 장보옥이 신녀제전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들은 금혜연은 시녀인 금아를 대신하여 자신이 장보옥과 같이 가겠다고 난리였 다. "혜연아. 내말 좀 들어봐라." "응? 말해. 언니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대신 내 부탁도 들어줘." "혜연아. 신녀교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집단이 아니야. 어쩌면 아 주 위험한 곳인지도 몰라." 장보옥의 말에 금혜연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또야?' 하는 표정을 지 었다. 무당파 대장로의 손녀라는 신분때문인지 금혜연은 어디서든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어디에서도 은근히 배척을 받았다. 호기심많은 금혜연이 끼어들려고 기웃거리기만 하면 누구나 다 '이 일은 위험한 일이니 금소저 가 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위험이라는 것이 이제는 금혜연에게 신물이 날 정도였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면 철부지의 투정으 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위험한 곳이라면 더욱 언니 혼자 보낼 수는 없어. 금아보다 내가 무공도 더 낫잖아. 나 시녀랑 바꿔 언니를 따라가세 해주라. 응?" "네가 여기온 목적이 절경이나 명소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니? 너 도 내 걱정이나 신녀제전을 구경하려는 생각보다는 너의 백가가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니니?" "참. 그 인간 소식 아직 없어? 틀림없이 감숙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바로 뒤따라 왔는데." "글세. 할아버지가 알아보기는 하지만 아직 별 소식은 없는 모양이야. 하 지만 네말대로 감숙에 들어왔다면 얼마못가 발견할 수가 있을 거야." "정말. 무공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천하 무서운줄 모르고 돌아다니다니. 내 보호가 없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걱정이야. 그런데도 나를 떨구고 홀로 천하를 유람해 보겠다고 도망쳤으니..... 잡히기만 하면 그냥." 금혜연은 이를 악물고 손톱을 갈았다. 백이충을 잡기라도 하면 당장 살점 을 꼬집어 도려낼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방글방글 웃으며 말을 원래의 주제로 돌렸다. "하지만 언니. 백가가를 곧 찾을 수가 있다면 신녀제전을 언니와 함께 구 경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만보옥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그냥 설득해서는 금혜연이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말썽이라도 부려 맹의 큰 일을 망쳐버리면 곤란했다. 만보옥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명한 비밀 의 일부를 털어놓기로 했다. "내 말 장난으로 듣지 말아. 신녀교는 구경이나 할만한 곳이 아니야. 진짜 위험한 곳이야. 맹에서는 오래전부터 신녀교를 주시해 왔어. 그리고 신녀 교에 첩자를 투입시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했지. 하지만 첩자들은 모두 신녀교에 귀의하고 맹을 배반했지. 진짜 신녀교도가 된거야. 맹에서 는 그들이 세뇌당한 것으로 보고 있어." "첩자? 하지만 신녀교는 무림세력도 아니고 선행이 자자한 것으로...." "겉보기에는 그렇지. 하지만 신녀교는 화약고나 다름없어. 일년 만에 수십 만의 교도를 거느린 거대집단이야. 본맹의 첩자가 소식이 없다는 것은 신 녀교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야. 배후에 어떤 거대한 세력이 있는지 짐작 도 할 수가 없지. 만약 이대로 십년이 지나면 천하 전체에 신녀교도의 세 력이 뿌리를 내릴지도 몰라. 그때 신녀교도가 사악한 집단이라면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니? 그전에 신녀교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보 고 만일 사악한 집단이라면 맹에서 처단해야 하는 거야." "그것과 신녀제전과 무슨 관계가 있어?" "신녀제전은 신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회야. 그리고 신녀교 듸 중심에 들어갈 수 있는 성녀를 뽑는 제전이기도 하지. 나는 거기에 뽑 혀 신녀교의 비밀을 알아내는 첩자로 들어가는 거야. 놀러 신녀제전에 들 어가는 것이 아니란다." "하지만 신녀교도가 아닌 언니가 무슨 수로 성녀가 된다는 거야?" "백도맹 감숙지단주의 손녀로서는 안되겠지. 하지만 관내 서부 안찰사 장 대인은 신녀교도야. 그리고 그의 딸을 이번 제전에 성녀로 뽑히도록 하기 위해 데리고 가고 있어. 나는 그녀로 위장하여 들어가려는 거야. 내가 맹 을 배신할 리도 없고 장대인의 딸이라면 신녀교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첩자로서 적격이지." "하지만 어떻게 장대인의 딸로 위장한다는 거야?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할아버지가 손을 써놨어. 맹의 안배는 완벽해. 절대 들통 날 리가 없지. 자, 이제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포기해." 금혜연은 단호한 장만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보옥의 말을 들은 금혜연의 눈빛이 더욱 반짝이는 것을 그녀는 눈치 채 지 못했다. 자고로 모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금혜연이라는 것을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장보옥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신녀교는 가난하고 병든 일반 백성들이 신녀교도에 귀의하는 것을 막지 않 는다. 병자로서, 혹은 신녀의 기적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소 문을 듣고 신녀교도가 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신녀성지의 입구 에 세워져있는 접수원이라는 건물은 그런 신녀교도들을 만나고 초보 신녀 교도에게 교리와 일을 가르치는 곳이다. 신녀제전 이틀전. 수많은 사람들의 사이에 끼어 한명의 초라한 차림새의 여인이 신녀성지를 찾아왔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농가의 아낙이나 입는 잔뜩 기운 무명베 옷.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인이나 단 한가지 다른 여인과 다른 것 은 그녀의 몸매가 허름한 옷으로도 가릴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요염 한 것이었다. "낭자께서는 어인일로 여기를 오셨소." 신녀교의 입교를 담당하는 염소수염의 남자가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물었 다. 몸매만 보아서는 사람을 홀릴듯한 폭팔적인 염기를 뿜어내고 있는데 그 얼굴은 주근깨가 어려있는 평범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접수대의 노인은 교에 들어오려는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마음 이 끌리는 처녀는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나이 십 칠팔세가량 되어 보이 는 여인은 슬픈 듯이 말했다. "소녀는 장안태생으로 장씨성을 가진 농부의 딸 여화라고 합니다. 신녀교 의 소문을 듣고 입교하러 왔습니다." "입교하러온 여인이구만. 누구의 소개를 받고 왔나?" "소녀는 이번 황하침수로 얼마되지 않은 농토를 모두 잃어 늙은 아비와 함 께 둘이 호구지책이나 할까하고 감숙성에 있는 숙부를 찾아왔습니다. 하지 만 오랜 노독에 아비는 돌아가시고 숙부는 찾을 길이 없는데 소문에 신녀 교에 입교하셨다는 말도 있어서.... 감숙성에 들어온 뒤에 신녀교의 소문을 누누이 들어 혹시라도 숙부를 찾을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이 한 몸을 신녀교에 의탁할까하여 왔습니다." "알았소. 낭자같은 여인이 하루에 수십 명도 더 찾아온다오. 이름은 장 여 화. 나이와 고향을 적으시오. 그리고 가족관계도 적으시오. 숙부의 출신지 와 이름도 적으시오. 나중에 확인해서 그대의 숙부가 본 교도가 확실하다 면 곧 만날 수가 있을 것이오." 염소수염의 노인은 장부에 여인에 대한 인적사항을 적고는 곧 사람을 불러 여화라는 여인을 신녀성지 안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 대기하고 있는데도 한동안 그는 여화가 사라진 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화를 안내한 시녀차림의 여인은 말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 바람에 여화 는 신녀교의 일반적인 일들을 그녀의 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허름한 건물에 그녀를 안내하면서 시녀는 그녀가 행해야할 몸가짐을 알려주었다. "여화라고 했지? 잘 왔어. 이제는 배를 곯는 일은 없을 거야." "언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같은 곳에 있는 동안이라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하지만 나에게 부탁한 다고 말해도 나랑 같은 곳에 배속될지는 몰라. 그리고 여기도 놀고 먹는 데는 아니야. 아침 해뜰 데부터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해야 해. 농촌 출신이면 그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너는 저녁에 신녀교도가 되기위한 교 육도 받아야 해." "오늘부터 교육을 받나요? 교육은 어떻게 받는 거죠?" "신녀교에 들어오면 성녀님들 중의 한분에 배속되면서 새로운 소속과 이름 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입교절차와 신녀교의 교리에 대한 교육 을 한달간 받아야 해. 하지만 이일 후에 신녀제전이 있어서 모든 입교절차 와 교육은 뒤로 밀렸어." 시녀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가 살 곳이야. 그러니 빨리 적응하도록 해라. 여기는 입교희망 자 들중에서 여인들이 머무는 거처야. 너와 같이 머물 여인이 이십 명이니 까 서로 잘 지내도록 해. 이곳 관리하시는 염파파는 자애로운 분이니까 걱 정하지 않아도 돼. 잘 가르쳐 주실거야. " 시녀는 여화를 목조건물안의 한 방에 안내했다. 그 곳에는 보기에도 나이 를 짐작할 수가 없을 정도의 노파가 있다가 시녀와 여화를 쳐다보았다. "매아냐? 너를 따라온 아이는 신입 교도 희망자인가? 그럼 이것으로 내가 맡은 곳은 이십명이 다 채워졌군." "염파파. 이 소녀는 장여화라고 해요. 염파파가 교육을 맡게 될 거예요. 저 는 돌아가겠어요. 여화야. 이따가 찾아갈 테니 그때 보자." 시녀가 돌아가자 염파파는 여화를 쳐다보더니 그녀에 관해 이것 저것을 물 었다. 여화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신상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신녀제전이 있은 후에는 한달간 내게 교육을 받게 될거다. 이틀 동안은 쉬도록 해라. 네 얼굴과 몸이 그런대로 볼만하니 아무래도 신녀교 외전소 속으로 잡일을 하기 보다는 성녀님들의 시녀로 들어갈 가능성이 많구나. 하지만 그러려면 더욱 열심히 교육을 받아야한다. 이틀 동안은 아직 교도 가 아니니 쉬어도 좋다. 네가 있을 곳을 안내해 줄테니 나를 따라 오너라. 너와 같이 있을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고." "알았습니다." 염파파는 여화를 데려가면서 그들이 있는 건물의 옆을 가르키며 주의를 주 었다. "저곳에는 접근하지 말아라. 본교의 중요손님을 접대하는 누각이다. 지금 두분이 머물고 계시는데 그중 한 분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림인이라는구 나. 아직은 본교의 입교절차를 받지 않아 외전 소속인 이곳에 머무르고 계 시지만 입교절차를 밟고 신녀님을 접견한 다음에는 본교의 중심지에 머물 며 높은 신분에 들어갈 분이야. 행여나 실수를 하지 말거라." "신녀교에 처음 입교하는 사람들 중에도 신분의 차별이 있나요?" 염파파는 피식 웃었다. "그야 신녀님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지상천국의 건설을 꿈꾸시지 만 사람 사는 곳에 신분의 구별이 없을 수야 있겠느냐? 입교하기 위해 귀 빈루에 머무시는 손님들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냐 하면 안찰사의 따님도 있 단다. 외부에서라면 우리 천민들은 쳐다도 보기 힘든 분이 아니냐? 안찰사 님은 본교에서도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 입교시키기 위 해 데려오신 따님은 성녀님의 후보이기도 하지. 아무리 우리 신녀교가 입 교자의 평등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런 분과 너를 같이 생각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귀영신군이라는 분도 있는데 네가 무림인이 아니라서 모를 것이지 만 신녀님이 직접 마중나와 접대하시지 못한 것을 투덜거릴 만큼 높으신 분도 있단다." 여화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귀영신군이라면 이십년 전에 행방을 감추었던 흑도의 거물이 아닌가? 아 마 할아버지보다 배분이 높을 걸? 당시 천하를 오시하던 인물인데 신녀교 와 연관이 있다니. 역시 언니 말처럼 신녀교는 보통 종교집단이 아니구나.) 여화는 바로 변장한 금혜연이었다. 이 말괄량이 아가씨는 기어이 장보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도맹 지단을 빠져나와 변장하고 신녀교에 잠입하고 만 것이었다. 여화는 염파파에 의해 어떤 큰 방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여화를 비롯하여 이십여명에 해당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아마도 나이나 신분으로 분류하여 사람을 모아놓은 듯 방안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차림새가 누추하고 나이가 열 다섯에서 이십 오세 사이정도의 젊은 여인들이었다. 모든 여인들이 여 화를 데리고 오는 염파파를 주시하자 염파파가 손뼉을 치며 그들의 주의를 돌리고 말을 했다. "모두 주목해라. 한달간 너희들과 같이 교육받고 생활할 마지막 동료가 왔 다. 서로 잘 지내도록 해라. 그리고 오늘 의녀님들이 와서 너희들의 심성 과 지혜, 그리고 체질을 조사할 것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소속될 것을 정 하기 위한 절차이니 오늘 밤은 모두 모여 있도록 해라." "정말 골치 아프군." 신녀교 외전 소속 입교담당 책임자 이노인은 한 때 무림에서 쟁자수를 하 며 굴러먹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림의 일을 여러 가지 주워들은 적이 많았다. 따라서 방금 전에 외전 전주에게 받은 명이 얼마나 골치아픈 일인지 잘 알 수가 있었다. "감히 신녀교에 와서 그런 행패를 부리다니. 하지만 아직 신녀교님의 존체 를 뵙지 못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시녀를 교체해 달라니." 외전 전주가 이노인에게 명한 것은 귀빈각에 있는 귀영신군의 시녀를 교체 해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라는 말이었다. 말은 시녀가 마음에 안들어 싹싹 한 아이들로 교대해 달라는 말이었지만 목적은 뻔했다. 색을 유난히 탐한다는 소문이 있는 귀영신군이고 보면 얼굴이 반반한 아이 로 시중들 처녀를 구해달라는 말이다. 문제는 귀영신군이 보통 거물이 아 니라는 데에 있다. 그는 무림의 초절정 고수이다. 당금 무림의 흑도를 일 통한 흑방이나 정사중간의 현황방, 이 쟁쟁한 무림의 두 방의 방주라도 먼 저 고개를 숙여햐 하는 전설적 노마이다. 한때 표국의 쟁자수로 돌아다녔 고 제법 나이가 많은 이노인은 귀영신군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다. "외전 전주도 그렇지. 만약 신녀교도를 귀영신군의 색욕을 위해 제공했다 는 것이 신녀님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아무리 귀영신군의 접대를 위해서 한 일이라지만 자신이 신녀님에게 큰 벌을 받을 텐데. 그렇다고 외전 전주 가 감히 귀영신군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신녀님이나 교 도들을 맡고 있는 성녀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아직 소속이 없는 입교하 지 않은 여자들을 시녀로 보낼 속셈을 가진 거지. 이번 입교자 중에서 귀 영신군의 시녀가 될만한 여인을 나보고 추천하라니. 나중에 이일이 발각나 면 나 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겠구나." 이노인은 정말 골치가 아팠다. 이노인이 알기에 신녀교는 무림과 별 상관 이 없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귀영신군이라면 소림 방장이라도 직접 뛰어나 와 접대를 해야할 거물이 아닌가? 그것을 알기에 신녀님도 외전 전주에게 그를 특별히 잘 대접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만민 평 등을 주장하는 신녀교의 교리를 무시하고 사람을 접대용 시녀로 쓴다는 것 은 나중에 그 책임자가 신녀님에게 큰 벌을 받을 만한 일인 것이다. 그래 서 외전 전주는 그 책임을 이노인에게 떠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신녀님은 신녀교의 모든 사람들을 평등히 대우하라고 가르쳤다. 교리에 따 르자면 귀영신군이나 입교희망자나 현재의 신분은 같았다. 만민을 평등하 게 대하겠다는 그런 교리를 알기에 귀영신군과 같은 거물도 다른사람과 같 이 신녀제전에서 신녀님을 만나보겠다며 순순히 만남을 미루고 있지 않은 가? 귀영신군도 평소 행동으로 보아 신녀님의 대응에도 아무 불평도 없이 외전의 귀빈루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그가 신녀교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젠장. 이리되면 차라리 신녀제전이 원망스럽군. 귀영신군 정도의 거물이 면..... 신녀제전이 코앞에 다가오지 않았다면 신녀님이 직접 귀영신군을 만 났을 테고, 그렇다면 아무리 귀영신군이라도 신녀님에게 감복하여 개과천 선하여 신녀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랐을 텐데. 하지만 지금에야 신녀님 두 려운 줄을 모르고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외전 전주를 협박하고 있으니.... 불쌍한 여인 두명이 큰 희생을 치루겠구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이노인은 현재 입교희망자들이 있는 거처에서 의녀 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흝어보았다. 그리고 내키지는 않지만 두명의 여인을 뽑아 귀영신군의 시녀로 외전전주에게 보냈다. 두명의 여인은 보고서에 성 녀의 자질이 있는 특급의 여인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두명의 여인 중의 한명의 이름은 바로 장여화였다. 25 신녀제전(5) "신녀중지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적안미부는 자신의 애제자인 초홍에게 보고를 받고 침상위에서 벌떡 일어 났다. "무슨 소리냐? 침입자라니? 누가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백도맹인 것 같습니다. 적은 천명 정도의 고수인데 이미 신녀중지를 침범 하여 지하본부로 통하는 통로까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적안미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외부에는 오만 명에 가까운 신녀교도가 신녀제전 때문에 모여있었다. 비록 그들이 무공을 모르는 일반백성이라지만 신녀교에 광적인 신도였다. 외부의 침입이라면 아무리 천명의 고수라지만 그들이 통과시킬리 없었다. 하다못해 호미와 곡 괭이라도 들고 대항할 정도의 세뇌는 이미 되어있었다. "무슨 말이냐? 아무리 고수라지만 천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외부의 교도들 이 물러났단 말이냐?" "그들은 나서지 못한다." 갑자기 적안미부가 있던 방문이 열리며 한명의 남자가 성큼 들어섰다. 신 녀교의 이인자인 적안미부는 놀란 눈을 떴지만 곧 그가 자신의 친오라비인 귀영신군임을 알고 치켜뜬 눈썹을 내렸다. "신녀교도들이 그들을 막지 못한다니요?" "한시진 전에 근처 오화산에 커다란 산불이 났다. 내가 명을 내려 모든 외 부의 일반 신녀교도들에게 산불이 근처 마을까지 번지기 전에 그곳의 불을 끄라고 이동시켰다. 지금 외부는 텅 비어있는 상태이다." 귀영신군은 신녀교의 부교주로 취임한 상태이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면 신 녀교도는 명을 받들었을 것이다. 적안미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오라버니가 왜? 천뇌교의 부활을 나처럼 갈망하는 줄 알았는데." "갈망한다. 그래서 그런 명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을 봐라." 귀영신군은 적안미부에게 하나의 서찰을 주었다. 신녀교에 참석한 무장들 에게 전해져 내려온 서찰은 이곳으로 군대의 이동이 있으니 모든 무장들은 즉시 군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서였다. "병방수비군이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목표는 이곳일 것이다." "변방수비군이 왜? 본교는 그들과 마찰할 아무런 짓도 안했거늘." "아마도 본교를 반역의 무리로 오해하는 듯하다." 적안미부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오해를 풀기위해 관과 양관문의 무장들을 포섭하 였거늘. 황도에 뇌물로 바친 제물이 얼마나 되는데...." "무장들을 포섭했던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게다가 황 군의 입장에서 보면 황사칠십이풍은 이민족의 군대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들이 이곳에 모여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반역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 는 아니다." 적안미부는 비틀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너무 뜻밖의 소식에 어 지러움증을 느꼈던 것이다. "네가 성화를 이용하여 교세를 일으켰던 뜻은 안다. 모두 천뇌교의 부활을 위해 한 일이지. 황사칠십이풍을 끌어들인 것도 천뇌교의 부활을 위해서이 지. 허나 이제 선택할 때가 왔다." 귀영신군은 꿈에서 혈존에게 지시받은 대로 적안미부에게 말했다. "황군과의 마찰을 피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신녀교를 해산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백도맹이 이곳으로 쳐들어 온 것은 아마도 성화에 의한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음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염원인 천뇌교의 부활은 물건너 간 셈이다. 황군과의 오해를 막기위해서는 신녀교를 해산해야 하고, 지금의 세력이라도 보존하여 천뇌교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백도맹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화의 일로 인한 참극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신녀님을 희생물로 세울 것인가요?" "그렇다. 어차피 네 제자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리고 이들은 나와 뜻을 같 이 했다." 귀영신군의 뒤로 몇 명의 모습이 나타났다. 호면염라, 빙백일살, 대막일도 등의 거마였다. "태상께서 동의한다면 백도와의 타협은 내가 나서서 설득할 것이오. 우리 는 천뇌교에 입교하지는 않겠지만 백도가 천뇌교를 인정하도록 도와주겠 소." 호면염라가 말하자 마도의 전설로 알려진 거마 빙백일살이 거들었다. "신녀교 장로원과 원로원에 이번에 든 사람들 중의 칠할이 부교주의 제안 에 찬성했소. 신녀를 배제하고 천뇌교에 입교할 것이오. 태상께서 부교주 를 따른다면 나머지도 복종할 것이오." 대막일도 역시 귀영신군에 동조했다. "황사칠십이풍은 귀영신군의 천뇌교와 동맹을 맺기로 했소." 적안미부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귀영신군을 향해 슬픈 미 소를 지었다. "오라버니가 배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백도맹이 처들어 온 것도 오라버니의 작품인가요? 저들이 감히 신녀님에게 반항할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성화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해 천뇌교 비전의 호심비결을 알려준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다. 처음부터 배반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남보다 빨리 변방 수비군과 백도맹의 정보를 입수했을 뿐이다. 황군과 맞서 싸울 수는 없지 않느냐? 게다가 지금 공격한 백도맹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해도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지금 천하는 백도맹의 세상이다. 백도맹과 전면으로 맞서고도 천뇌교의 이름을 계속 내걸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제 천뇌교의 부활을 위 해서는 신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움직였을 뿐이다." 적안미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모르세요. 신녀님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이제 모두 끝장이예요. 신녀교도 천뇌교의 부활도 끝장이란 말이예요." "내가 무엇을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신녀교는 네가 이룩한 세력이 아니 냐? 그것을 나와 손잡고 다시 되찾자는 말이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네 제 자와의 의리에 연연하겠다는 소리냐?" "성화가 장난인줄 알아요? 내가 괜히 제자였던 신녀의 밑으로 들어온 줄 알아요? 저들이 호심비결을 익혔다고 해서 성화의 마력에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호호. 오라버니는 잘못 아신 거예요. 일시적으로 제 정신을 차릴 수는 있어도 누구도 성화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나 는 물론이고 신녀교에 몸담았던 누구도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한달 이 못가 모두들 금단현상에 의해 미쳐버리고 말거예요." 적안미부는 오히려 귀영신군을 설득하려고 했다. "저 역시 그 금제를 벗어나려고 수도 없이 노력해 봤어요. 하지만 천뇌교 의 어떤 대법으로도 불가능하다고요. 그리고 성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 람은 신녀님뿐이예요. 이대로라면 중독이 깊은 우리는 한달이 못가 인간을 포기하고 미친 짐승이 되야 해요. 그 뿐인가요? 일년안에 섬서에 퍼져있는 수십만의 교도들이 일년 안에 모두 살육에 미친 광귀가 되어 천하를 휩쓸 거라고요. 섬서 전체가 지옥이 될 거예요." 적안미부는 귀영신군의 손을 잡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신녀님을 배신하는 일은 말도 안돼요. 지금은 침입해온 백도맹의 사람들을 쫓아내야 해요. 군대는.... 그래요. 일단 피했 다가 다시 황도의 고위관리에게 뇌물을 보내 오해를 풀어요. 그때까지 숨 어있다가 다시 나타나면 되요. 반역의 오해만 풀린다면 수십만의 신도를 거느린 천뇌교를 누가 건드릴 수 있겠어요? 백도맹도 그것은 불가능 해요. 아직 신녀님이 이 일을 모르실 때 마음을 돌리세요." 귀영신군이 나직히 한숨을 쉬고 적안미부에게 말했다. "그일이라면 걱정마라. 저번에 성화전에서 살아나온 여인을 기억하겠지?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녀역시 성화의 동화된 상태이다. 다른 것은 인 초합일을 이룬 신녀가 성화를 만들어내고 성화에 중독된 사람을 복종시키 는 힘이 있다면 그 여인은 성화의 마력을 해독하고 금단현상을 해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일년에 한번 그녀주위에 있는 것 만으로 성화의 금제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사실이다. 너는 내가 호심비결을 이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 다만. 네말대로 호심비결로 성화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여전히 신 녀에게 반역할 꿈도 꿀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단지 그녀를 만나본 것 만 으로 모든 금제와 금단현상에서 자유롭게 되어 이성을 되찾고 신녀에게서 벗어날 마음을 가진 것이다. 일년에 한번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우리들은 성화를 복용한 것과 같이 금단현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귀영신군은 적안미부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무당파의 여제자로더구나. 금혜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백도맹과 굳이 화해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오라버니는 우리 천뇌교를 백도의 개로 만들 생각이신가요?" "그렇지 않아요." 방안으로 다시 한명의 여인이 불어났다. 눈을 반짝이고 있는 금혜연이었 다. 그녀는 나름대로 혈존의 사주를 받은 귀영신군에게서 일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당신들이 신녀교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끼친 해악을 생각하면 돕고 싶지 는 않아요. 하지만 성화에 중독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의 참사 를 막기위해 귀영신군의 뜻에 따르기로 했어요. 당신들은 백도의 말에 복 종할 필요는 없어요. 다시는 이번처럼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일을 하지 않 는다면 천뇌교가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예요. 일년에 한 번 섬서에 들릴 것을 약속하겠어요. 그때 성화에 중독되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 모인다면 금단현상을 막을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금혜연을 보는 순간 이미 적안미부는 더 이상 반항할 수가 없었다. 왜 그 토록 쉽게 귀영신군이 신녀교의 세력을 장악했는지 알수 있었다. 놀랍게도 금혜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적안미부는 성화의 금단현상이 해소됨을 느낄수 가 있었다. 또한 신녀를 볼때마다 느꼈던 본능적인 복종심이 금혜연을 볼 때도 솟구쳤다. 적안미부는 도저히 금혜연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금혜연이 있는 이상 신녀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적안미부는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거역하고 싶어도 성화에 중독된 자들은 신녀와 금혜연, 성화와 동화된 이 두 명을 거역할 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들 을 복종시키려는 신녀보다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금혜연을 자의로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반역이라는 엄청난 위협과 코앞에 닥 친 백도맹의 침공 앞에서 신녀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귀영신군의 말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알았습니다. 그것이 천뇌교를 다시 세울수 있는 길이라면 오라버니의 말 에 따르겠어요." 지하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신녀중지에 난입하여 몰려든 백도 맹의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일제히 물러나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 다. 그들의 앞에는 가공할 회색빛 기류를 뿜는 빛에 쌓인 물체가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믿을 수가 없군. 진짜 음부귀명공이란 말인가?" 장악은 침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회색빛의 물체는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 오는 가공할 기류에 닿는 것은 예리한 칼로 난자당한 듯 무엇이든 산산이 찢겨졌다. 검으로도, 도로도, 강기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음부귀명공은 사도무학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공이다. 또한 천 뇌교의 사공중에서 천뇌만상공의 뒤를 이어 서열 이위의 절대사공이었다. 하지만 천뇌만상공과 음부귀명공 간에는 명백한 위력의 차이가 있는 것으 로 장악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뇌만상공의 위력은 백도 십대극품절학중 의 하나와 비슷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여인이 뿜어대 는 음부귀명공의 위력은 백도 극품절예의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다시금 회색기류가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천무호정단의 절대고수들이 분분 히 물러서고 있었다. 이미 저 기류에 밀려 희생당한 고수가 수십이 넘었고 부상당한 자는 백이 넘었다. 백도의 중추인 장로급의 천무호정단 오백과 섬서지단의 최고수 오백이 단 일인에 막혀 있는 것이었다. 실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안에서 왜 지원이 나오지 않는 것이지?) 그때 신녀역시 초조함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삼백의 성녀와 함께 급하게 소란이 이는 곳으로 달려오다가 백도와 마주친 것이 벌써 반시진이 넘었 다. 삼백의 성녀는 이미 모조리 백도고수들의 손에 불귀의 객이 된 상태였 다. 인초합일을 이루어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녀였지만 오백의 천 무호정단 전체를 상대로 홀로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지금 그녀 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열 두명의 천무호정단 영주급은 그녀의 음부귀명공 을 억지로나마 힘을 합하여 대항하고 있었다. 신녀도 그들의 포위를 풀지 못해 몸을 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너무 무리한게 진기를 뽑아 쓴 탓인지 내력이 바닥나려고 하고 있었다. (태상과 부교주, 본교의 고수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 다시 신녀는 신경질 적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열두명의 천무호정단 영 주를 향해 음부귀명공을 내뿜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로 그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이에 대항했다. 다시한번 거대한 굉음이 터지면 그들이 물러섰 다. 하지만 신녀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고 억지로 몸을 추슬러야 했다. "천하의 마녀. 죽어라." 갑자기 그녀의 뒤쪽에서 강렬한 강풍이 일며 장력이 날아왔다. 그 기세에 깜짝 놀란 신녀는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장력이 날아온 속도가 너무 빨랐 다. 그녀는 온 몸이 터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등뒤에 느끼며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오행 일섬." 다시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그녀에게 타격을 입힌 장력과 약간의 차이를 두고 그녀를 덮쳐온 검기였다. 미처 신녀가 막을 사이도 없이 피보라가 일 며 그녀의 왼팔이 분단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오. 과연 모용소협." 천무호정단의 영주들이 일제히 환호를 질렀다. 천명의 고수들의 앞을 단신 으로 막은 신녀를 일장과 일검으로 단숨에 부상시킨 모용풍에 대한 찬사였 다. 모용풍은 노한 눈빛으로 신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쓰러진 신녀가 입가 에 피를 흘리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솔직히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 고 그의 전력을 다한 장력이었는데도 그를 맞고 일어선다는 것이 모용풍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곧 노여움이 그를 덮쳤다. "이 마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다니." 모용풍은 오늘 백도맹의 침공고 맞춰 성화전에 침투했다. 금혜연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누렇게 말라죽은 괴이한 식물과 중 간에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넝쿨. 그리고 거대한 지하석실에 널려있는 엄청 난 인골들이었다. 인간이 벌였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참상에 모용풍 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신녀교의 교주를 찾아 전력을 다해 공 격했던 것이다. 더욱이 장보옥이 신신 당부했던 금혜연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모용풍의 분노는 누구도 말릴수 없을 정도로 컸다. "어째서 네놈이 지하통로에서 나오는 거지? 이미 신녀본부도 네놈들에게 장악당한 것인가?" 신녀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모용풍이 지지 않고 말했다. "네 악행에 대해 하늘을 대신하여 벌할 것이다. 신녀교는 끝이다. 마녀." 모용풍의 말을 신녀는 백도맹이 이미 신녀교를 완전 제압했다는 말로 들었 다. 그 순간 신녀의 두눈에서 절망의 빛이 번뜩였다. 자신의 목표를 마악 이룩하려다가 허물어진 공허감의 눈빛. 그녀는 허공을 향해 광소를 내뱉었 다. "오호호호. 인간이기를 원했던 나를 기어이 미치게 만드는 구나. 왜 하늘 은 이토록 나를 불행하도록 하는거지? 정 그렇다면 인간의 길을 포기하고 성목이 되어 네놈들 모두를 내 동반자로 삼아 버리겠다." 갑자기 신녀의 두 눈알이 퍼벅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 눈이 있던 자리 에서 꾸물꾸물 촉수같은 것이 기어나왔다. 말로 할수 없을 정도의 징그러 운 형상이었다. 피에 젖은 촉수가 눈에서부터 기어나모며 그녀의 입에서 부터도 뱀같이 길다란 것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것이 뭐냐? 요괴인가?" 온통 가시가 돋아있고 피에 젖은 촉수같은 것이 기어나오는 것은 신녀의 두눈과 입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칠공에서 동시에 촉수가 기어나왔다. 중인들이 경악할 때 신녀의 온몸에 균열이 가듯 그믈같은 금이 피부에 그 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피부가 터져나가며 기다란 뱀 같기도 하 고 나무줄기 같기도 한 수십의 촉수가 몸을 뚫고 터져나왔다. 그녀의 형상 은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수백의 뱀이 한데 엉켜있는 듯한 괴이 한 모습을 드러냈다. 슈슈슉! 갑자기 괴물의 몸에서 가시와 피에 젖은 촉수 수십개가 사방으로 쭈욱 뻗 어나갔다. 이미 괴물이 된 신녀를 포위하고 있던 백도맹의 고수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놀랍게도 촉수의 끝에서는 신녀가 뿜어대었던 것과 같은 음부 귀명공의 기류가 흘러나왔다. "크아아악." 거의 순식간에 이십여명의 천무호정단원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몇 몇 은 죽기도 하고 몇몇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경상자 조차도 팔 다리가 잘리는 참극을 맞아야 했다. 단 한순간이었다. 호흡한번 할 시간에 구대문 파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절정고수 이십여명이 죽거나 회복불능의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장내에 싸늘한 경악의 침묵이 흘렀다. 아까 홀로 천 명의 고수를 상대할 때도 놀랐지만 이것은 아예 차원이 틀린 엄청난 광경 이었다. "천뇌교에 저런 괴이한 사술이 있다니." 장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무당파의 칠성검법을 펼쳤다. 그의 손에 든 검에서 한자에 가까운 검기가 쭈욱 뻗어 촉수같은 괴이한 줄기를 공격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냉정을 되찾은 백여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괴물을 향 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검기와 검강, 그리고 백도의 절기가 수없이 괴물을 향해 몰아쳐갔다. 그 위력은 산을 허물고 바다를 가를 듯 햇다. 카카캉. 괴물은 수십의 촉수를 휘둘러 음부귀명공으로 그 공격을 막아갔다. 뿌연 기류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음부귀명공과 백여명의 고수의 공격이 맞부닥치며 거대한 굉음을 일으켰다. 지하동굴이 무너질 듯이 흔들거렸다. 대부분의 고수들의 공격은 음부귀명공에 가로막혔다. 무쇠라도 단절시킬만 한 위력을 가진 검기들이 괴이한 촉수들에 의해 막혔다. 수백의 뻗어져 나 온 촉수들이 무공을 익힌 손처럼 하나하나가 음부귀명공을 구사하며 그들 의 공격을 정확히 막아냈다. 하지만 또한 많은 강기와 검강과 검기가 음부 귀명공을 뚫고 괴물의 촉수에 적중했다. 장악 역시 자신의 공격이 음부귀명공을 뚫고 촉수에 적중하자 그것이 단숨 에 잘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직접적으로 촉수를 가 격했는데도 마치 철벽을 친 듯 오히려 손이 저리는 고통을 맞보아야 했다. 놀랍게도 그의 검기는 촉수에 흔적조차 남길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음부귀명공을 뚫고 촉수에 적중시켰던 모든 고수들의 공격이 너무나 허무 하게 사라졌다. 그 엄청난 단단함에 천무호정단의 영주들을 포함한 모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때 다시 괴물의 몸이 회색빛으로 뒤덮히며 그 빛속에서 음부귀 명공의 귀기서린 기류와 수백의 촉수같은 것이 꿈틀이며 사방으로 뻗어나 갔다. 그것들이 향한 것은 바로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 주춤거리며 놀라고 있던 천무호정단의 고수들이었다. "정신들 차려라. 적은 천뇌교의 마녀이다. 괴이한 사공을 익혔을 뿐 인간 이다. 겁먹지 마라." 도가에 뿌리를 든 장악이 그나마 일찍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 히 모두들 천하를 주름잡을 만한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호 통을 치며 촉수가 내뿜는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다시 두명의 고수가 촉수에 휘감겨 산산히 몸이 찢어지는 비극을 맞으며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것은 초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검기나 검강등 강기도 통하지 않 는 괴물을 어찌 상대해야 된단 말인가? 게다가 닿는 무엇이라도 발기발기 찢어버리는 음부귀명공을 줄줄히 내뿜는 괴물을. "마녀. 죽어라." 허공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사방으로 뻗었던 촉 수들이, 강기에도 끄덕하지 않던 촉수들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 다. 허공에서는 모용풍이 눈부신 빛에 둘러쌓인체 떠있었다. "영웅의 탄생이로군." 장악은 감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백도 극품절예의 다섯을 익혔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모용풍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성스러울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모용풍과 괴물의 결투가 시작되었 다. 그것을 보며 장악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가히 천무삼성 노선배들보다 뒤지지 않은 실력이로다." 그들의 결투는 마치 신과 악마의 결투같았다. 장악이나 다른 천무호정단이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그 결투를 지켜보던 장악은 신녀교의 지 하통로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앞에 앞장서 있는 사람은 천무호정단의 영주인 매화검객 이정풍과 호면염라 자염이었 다. 신녀제전이 화려하게 막을 내린 마지막날. 신녀는 신녀교도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모든 신녀교도들은 마음속 에 우러나는 신앙심으로 그녀가 신녀가 그들을 위해 한번 더 모습을 드러 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신녀는 신녀제전에 모인 모든 신녀교도들 앞에서 어젯밤 산불을 끄기위해 수고했던 교도들의 노력을 치하하며 동시에 신녀교의 해산을 발표했다. 하 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교화하다가 이제 하늘의 부름을 받아 다시 천 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신녀의 말에 모든 신녀교도들이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감히 신녀의 말에 거역하고 그녀를 잡고자하는 신녀교도는 없었다. 신녀가 모습을 감추자 신 녀교의 부교주로 취임했던 성자가 영원히 신녀를 기리기 위해 회회현에 신 녀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녀교도였던 자는 매년 중추절 전후로 보름동안 반드시 신녀의 동 상에 들러 그녀를 기리라는 명령을 했다. 그 이후 섬서의 회회현에는 매년 수십만의 인파가 몰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섬서에는 누군가의 우려처럼 광인이 출몰하지도 않았고 이 기현상도 축제 의 하나로 변하다가 백년이 지나기 전에 섬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 에 일반백성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흑도의 뿌리깊은 명문중의 하나이 던 천뇌교가 백도맹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섬서에 자리를 잡 은 것도 바로 신녀교가 해산한 해의 일이었다. 26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1) 거대한 대리석의 대전이었다. 사방은 고급 순백의 대리석과 야명주들로 번 쩍이고 있었다. 기둥마다 용과 봉화의 무늬로 음각되어 있었고 하늘거리는 비단천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전은 한 번에 천명이 동시에 넉넉히 누 워도 될 만큼 넓었으며 중앙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융단의 좌우로는 백여 개의 용좌가 늘어서 있었는데 금박을 익힌 듯 번적 거렸으며 각종 보석을 박아 넣어 화려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용좌에는 저 마다 용이 새겨진 황금빛 용포를 입은 일백 명의 복면인이 앉아있었는데 하나같이 강렬한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의 기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개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의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용포 의 복면인들의 좌우에는 두 명씩의 시비가 용좌 좌우로 늘어서 있었는데 하나 같이 그 얼굴이 만 명에 하나 가려뽑은 절색의 미인이었다. 대전의 전면에는 하나의 취옥색 옥좌가 마련되어 있었고 지금 그 옥좌에는 한명의 청년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열명의 진홍 색 경장을 입은 복면인이 있었다. 마치 청년을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진홍 색 복면인 열 명에게서는 절대자들에게나 느낄 수 있는 가공할 기세가 폭 사되어 대전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간혹 무심한 청년의 눈빛이 대전의 황금빛 용포의 복면인들을 쳐다볼 때에 는 침묵으로 뒤덮인 대전 전체가 긴장으로 뒤덮였다. 용포의 복면인들의 공통된 눈빛에는 공포. 그것도 거역하기 힘든 짙은 본능의 공포가 서려있 었다. 개구리가 뱀을 보듯, 쥐가 고양이를 보듯, 곤충이 조류를 두려워하고 도둑이 포두를 두려워하듯 복면인들의 눈빛에는 천적을 보는 듯한 극심한 공포가 서려있었다. "사지를 짓이겨라." 아주 조용한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일백 명의 용포 복면인 들 중의 몇몇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 고 말았다. 대전의 중앙은 지금 완전히 피바다였다. 대리석과 융단에 얼마 나 피를 많이 쏟았는지 피가 굳은 건더기가 온통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 리고 지금 중앙에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피하지방 얇은 껍질이 통째로 벗겨져 붉은 속 근육이 그대로 드러 나 있는 괴인 하나가 지금 끓는 기름에 살아있는 체로 튀겨지고 있었다. 아직도 파닥거리는 인간의 검붉은 근육에는 굵은 소금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가기 전에 소금밭에 얼마나 버무려졌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기름은 고깃덩어리가 된 사람의 몸 을 튀기느라고 뜨거운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그 고 깃덩어리 인간은 그 고통에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철사가 기름 속에 들어간 인간의 머리와 사지와 몸 등, 서른 네곳의 혈도를 관통하여 꿰뚫고 있었다. 저 서른 네곳을 관통한 철사가 본래 한 가닥의 긴 철사였던 것을 감안하면 인간에게 가장 예민한 고통을 주는 세른 네곳을 철사 하나로 절묘하게 바느질하여 천정에 매달아 놨음을 알 수있을 것이다. 아마도 고깃덩어리 인간은 기름에 생으로 튀겨 지며 뼈가 드러나는 고통과 그 와중에도 살아 꿈틀거릴 때마다 내부의 장 기와 골수와 뼈에 비벼지는 예리한 철사의 애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지옥 일지 판단하지 못하리라. (트...틀림없는 그 악마다. 그 악마만이 이런 고문을 할 수가 있다.) 짙은 공포와 같은 상념이 일백 명의 머리 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람을 요리하는 닭처럼 아무렇지 않게 생으로 껍질을 벗기로 뼈를 바르는 짓은 오직 그만이 할 수가 있었다. 다른 자라면 그 잔인함을 흉내 낼 수는 있을 지언정 진정으로 저렇듯 즐겁고 무심한 눈빛을 하지 못하리라. 다른 자라 면 저렇듯 만신창이가 되어 백골이 드러나고 심장이 터지고 뇌수가 녹아내 릴 때까지 고문받는 자를 살려둘 능력을 가지지 못하리라. 두 명의 태상에게서 연락을 받을 때만 해도 백팔 마제는 반신반의하고 있 었다. 이십 년만에 그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믿기 싫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이십년 사이에 마 제의 칭호를 얻은 인물은 그 악마의 두려움을 잘 인식히자 못했다. 그러기 에 나름대로 강호에 쌓은 업적과 자신의 능력을 믿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 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백팔 마제는 전혀 모습과 기도가 틀린 그를 보는 순간 그가 진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에게서 얻은 능력이기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 다. 이십년간 잊고 있었던 공포를 다시 일깨우기라도 하는 듯 불과 일주야 만에 여덟 명의 마제들이 희생되었다. 그것도 눈빛이 건방지다는 둥, 그를 바라보는 태도가 틀려먹었다는 둥, 아주 사소한 이유로 여덟 명이 끌려나 왔다. 악마의 호위라는 열 명의 영주에게 개 끌려 나오듯 나온 여덟명의 마제는 그 엄정난 이름과 명예에도 상관없이 개잡는 광경을 보여주듯 내장 과 뼈가 피부밖으로 튕겨져 나올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산 체로 껍질이 벗 겨졌으며 소금밭에 굴려졌고, 유리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둔하고 굵은 철사 에 바느질 당한체 천장에 매달렸으며 지금 끓는 기름에 튀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와중에도 끝까지 목숨이 붙어있는 마지막 한 명의 마제가 기름 솥에 나와 만근이 넘는 철근 기둥으로 조금씩 사지의 끝에서 부터 손가락 마디 하나정도 분량만큼 차근차근 짓이겨지고 있었다. (그...그래도 암흑마찰의 주지인데.... 단지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침넘키는 소리를 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고문을.) 사지를 와들와들 떠는 백팔마제의 마지막 서열의 용포 복면인은 바로 귀영 신군이었다. 악마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두명의 태상에게 포섭된 악마의 부하들 중에서 오직 한 맥을 잇는 종주 신분으로 만 명 이상의 부하와 백 명 이상의 절정고수를 부리는 일대종사의 신분이 되어야만 용포를 입고 마 제라는 호칭을 받을 수가 있다. 천뇌교를 일으켜 무림의 일대 폭풍을 일으 킬 거대세력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귀영신군도 이제야 겨우 마제로 올라 서 그 마지막 서열로 합류할 수가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혼백이 달아난 육신으 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고깃덩어리도 귀영신군보다 절대 못하지 않은 신 분이었다. 그는 천축에서 대뢰음사, 소뢰음사에 이어 삼대 세력의 하나로 꼽히는 암흑마찰의 주지의 신분으로 일대 종사신분이었다. 두 명의 태상에 게도 고개를 뻣뻣이 세우는 그로서는 이십 년간 달라진 자신의 신분과 능 력을 믿고 평소에도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악마를 본 순간 꽁지를 내린 호랑이 앞의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였고 긴장을 이기지 못해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단지 마른침을 삼켰다는 이유로 저런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악마의 등뒤에 있는 열명의 혈무영주라는 자도 대단했다. 귀영신군이 느끼 기에 저 열명의 혈무영주는 과거 악마의 제자였던 혈천마궁의 아홉전주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즉 백팔마제, 지금은 백마제가 된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귀영신군이 태상에게 듣기로 저런 자들이 일천명이나 악마를 보좌하고 있다고 했다. 절로 등꼴이 오싹 해지는 귀영신군이었다. 이것이 지금 수백명이 모인 대전이 침묵으로 뒤덮힌 이유였다. 감히 반항 할 생각도 못하고 미동조차 못하는 백마제의 전 신경은 지금 옥좌에 앉아 있는 악마, 혈존 백가량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인간의 눈빛을 하고 있던 백가량이 고문을 명하는 과정에 서 점차 두 눈에 혈기를 띠어가며 진짜 악마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의 눈빛에 백마제는커녕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명의 태상마저 몸을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크크. 겨우 백 명밖에 되지 않는가? 겨우 삼분의 일만을 건졌는가? 감히 간이 부어 나를 배신하고 쌍노를 따르지 않은 자가 이리도 많은가?" 혈존의 입에서 불쾌하다는 음성이 나오자 모두들 큰 죄를 지은 양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사실 그들이야 말로 혈존의 죽음이 소문난 이후에도 그 두 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태상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충신이었다. 혈천마 궁 시절 그들 외의 모든 마왕 마제들이 아홉제자를 따라 배반을 한 것이 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배반을 한 죄인처럼 감히 혈존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혈천마련이 정식으로 발족할 것 같다고?" 혈존 백가량의 입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쌍노는 오싹오싹한 공포 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이 대전에 들어올 때만해도 혈존은 백가량이 아 닌 백이충이었다. 과거보다 너무나 유약해진 그를 보며 태상은 백마제를 압도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쌍노와 미리 상의한 끝에 혈존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나갈 작정이던 백 이충은 어느 순간에 완전히 과거의 백가량의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 죽음 보다 더한 공포를 풀풀 날리며 쌍노를 감정없이 바라보는 혈존의 모습은 진심으로 타인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던 과거 혈존 백가량의 기도와 성질 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은 혈존에게 백이충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쌍노는 그 모습에 기쁨과 희열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다시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포가 스며나옴에 따라 자신도 모 르게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예. 십만대산에서 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혈천마련을 발 족시켜 무림에 나설 뜻을 결의했습니다. 그들은 지존이 완전히 죽은 것으 로 확신한 듯 합니다."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아홉이 모두 모였나?" "음양쌍악의 보고에 의하면 혈영마전과 청영마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혈천마련의 련주로는 셋째 배반자이던 천마전주 천마 황이 선출된 모양입니다." "첫째와 둘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삼대사도지예와 사대마도절예의 위력은 동등하다. 쉽게 셋째가 혈천마련의 수뇌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을 텐데?" "듣기에 혈사전의 전주인 혈사황이 그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아시다 시피 두 전주는 쌍둥이 형제라 혈천마련의 권력을 서로 양분...." "헛소리. 셋째와 넷째는 둘 다 야심이 커서 힘을 합할 인물들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라." "음양쌍악의 보고로는 둘이 한사람처럼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치 마음은 하나이고 몸이 둘로 분리된 것처럼. 그래서 둘이 한 몸으로 일심혼원공이 라는 마학을 익혀 둘의 사고가 동일하다고 합니다. 둘이 연합하여 펼치는 천마지존공과 천사음유공의 합공에 다른 전주들은 대항 할 수가 없다고 전 해졌습니다." 순간 혈존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일심혼원공이라고....? 내가 전수한 바가 없는 무공인데. 쌍둥이가 한 사람 처럼 마음이 합했다? 그렇군. 셋째와 넷째가 혈마전혼대법으로 부활시킨 그 늙은이들을 가둬놓은 곳을 발견했던 모양이군. 흐흐. 어쩐지 옛 혈사교 의 지하뇌옥에 가둬놓았던 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했더니..." 혈마전혼대법. 그것은 혈존이 펼쳤던 배교의 최악의 술법이 아닌가? 그를 부활시켰던 대법. 영혼을 뽑아내어 다른 사람의 육체를 통해 부활하는 가 장 강력한 사술. 그것을 다른 사람이 펼쳤단 말인가? 누구보다 그 일을 가장 잘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혈존 백가량이었다. 그것 역시 그가 천하에 뿌려놓은 씨앗의 하나였으니까. 혈마전혼대법이 배교에 내려오는 비법이라 할지라도 확증이 안된 비법을 혈존이 펼쳤을 리가 없 다. 그는 과거 혈마전혼대법을 일곱 번 시험해 보았고 그로인해 불완전하 게나마 일곱 명을 부활시킨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일곱 명을 부활시킴으 로서 혈존은 혈마전혼대법을 완성함과 동시에 그들 덕으로 짧은 시간 안에 모든 마공과 사공을 합일하여 고금사상 유래없는 대마공 아수라독존마공을 창안해 낼 수가 있었다. (그 노물들이 셋째와 넷째의 손에 떨어졌다면.... 흐흐. 아마도 셋째와 넷째 는 노물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으리라. 이거 쉽게 봐서는 안 되겠군. 혈천마 련을 접수하는 것은 당분간 보류해야 겠다. 놈들을 백도와 충돌시켜 노물 들을 표면에 드러나도록 해야....) "혈천마련에서 본좌를 다시 따르겠다고 맹세한 놈들은 몇 명이나 되느냐?" "혈영마전과 청영마전은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고..... 지금 일곱 마전이 합한 혈천마련에는 그 수뇌급이 오십 명 가량 되옵니다. 하지만 전주의 곁 에서 혈천마련의 중요 비밀을 빼낼 수 있는 정도의 충복은 벽력마전의 음 양쌍악을 비롯하여 채 다섯이 되지 않습니다." "놈들이 다시 강호에 나온다면 백도맹의 주력이 있는 강북을 피하여 자리 를 잡겠지. 아마도 청해, 감숙, 섬서, 사천, 운남, 귀주 등을 먼저 장악하고 광동과 광서에 손을 뻗겠지. 놈들의 중추에 잠입할 수 있는 세력을 심어놔 야겠다. 천뇌교는 여덟째 만상여의 놈과의 관계가 불편하니.... 그렇군. 현 황방을 일단 장악해야겠다. 아마도 혈천마련이 세력을 드러내기 전에 흑방 과 현황방을 먼저 삼켜 그들을 통해 백도맹을 건드리려 할 것이다. 현황방 을 통해 그 배반자들을 조종하는 것도 괜찮겠지." 혈존 백가량이 좀더 생각을 굴릴 때였다. 아무도 그의 사색을 방해하려 하 지 않았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보다 머리가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고 그의 심기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섣불리 그에게 의견을 내놓다가 개만도 못한 죽임을 당하느니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낳았다. 사 실 이런 일인독재의 체제가 혈존의 사후 이십년 전 몇 배의 세력을 가지고 도 마도 사도의 흑도가 백도에 천하를 내준 체 모습을 감춘 이유이기도 햇 다. 대전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적을 유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대전의 입구에서 허겁지겁 한 명의 복면인이 들어왔다. 너 무나 고요했던 대전인지라 문이 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 의 다급해 보이는 기색에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한꺼번에 쏠렸다. 왠 미 친 자가 감히 혈존이 있는 곳에 소란을 떠는가 하는 시선이었다. 특히나 복면인을 목격한 귀영신군의 복면 속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 다. 지금 대전에 들어온 자는 이번에 그가 수하로 데리고 온 빙백일살이었 다. 빙백일살은 이제 나이 백살이 넘어 마도의 전설이 될 정도로 오래된 거마였지만 지금 대전에 있는 일백마제에 비하면 한참 격이 떨어졌다. 그 가 감히 들어와서는 안 될 대전에 들어온 것이다. 귀영신군의 등골이 식은 땀으로 서늘해졌다. "감히...." 백가량이 입을 열기도 전에 쌍노 중의 환마가 노한 소리를 질렀고 백가량 의 등뒤에 있던 혈무십영주 중의 한사람이 번개처럼 빙백일살을 덮쳐갔다. 그래도 백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빙백일살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여 혈 무영주의 발밑에 엎어졌다. 혈무영주의 싸늘한 살기에 찬 눈빛이 그를 바 라보다가 힐끔 환마를 바라보았다. 환마가 고개를 끄덕여 빙백일살의 머리 를 밟아 터트리라는 허락을 하려고 할 때 빙백일살이 처절하게 외쳤다. "서...성녀께서 지존을 찾겠다고 지금 이곳으로...커억." 성녀가 누구를 말하는 지는 장내에서 몇몇을 제외하고 아무도 몰랐다. 하 지만 그 말을 듣고 사태가 급변했다. 먼저 환마가 다급하게 혈무영주를 만 류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은은히 혈기를 눈빛에 두고 있던 백가량에게서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혈존은 이 미 백가량이 아닌 백이충의 모습이었다. 백이충은 다급하게 쌍노와 혈무영 주들에게 지시했다. "쌍노는 현천방을 접수할 계책을 백마제와 상의하도록 하고 혈천마련의 일 을 상세하게 백마제에게 알리도록 하라. 상의가 끝나는 대로 나를 찾도록. 그리고 혈영칠팔구십 네 영주만 회합에서 빠진다. 즉시 나와 대동하여 그 녀를 맞이하러 간다." 그 순간 네 영주가 백이충의 앞뒤로 두 명씩 섰고 번쩍 옥좌를 들었다. 이 제보니 옥좌는 밑에 두개의 긴 기둥이 뻗어있어 가마의 역할도 할 수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네 영주는 혈존이 탄 가마를 들고 순식간에 대전에서 빠 져나와 모습을 감추었다. 옥향은 모란루의 일급기녀였다. 그녀는 모란루가 좋았고 자신이 운이 좋았 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그녀를 팔았을 때 그녀를 사간 것이 모란루였기 때 문이다. 그녀가 모란루에 팔렸기에 그녀의 부모와 동생들은 가난을 벗어날 후한 돈을 받을 수가 있었다. 모란루에 팔렸기에 그녀는 기녀가 되었지만 또한 모란루에 팔렸기에 몸을 팔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 덕에 모란루의 일급기녀가 될 수가 있었다. 모란루의 일급기녀는 학문과 기예, 거기에 일류고수 이상의 무공 마저 지니고 있기에 강호에서 거대 방파의 제자보다 더한 대접을 받는다. 모란루의 지시를 받아야 하기에 자유는 없지만 일개 기녀라고 남들에게 무 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한 부러움을 받는 처지였다. 후일 그녀가 마 음에 드는 사내가 있고 그가 모란루에 필요로하는 거물이기만 하다면 그녀 의 뜻대로 그와 결혼할 수도 있다. 모란루에 팔려오지 않았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높은 신분의 남자와 말이다. 옥향은 모란루의 일급기녀이기에 모란루의 무서움 또한 잘 알았다. 남들은 모란루가 여기저기 섥힌 연줄과 모란루 출신의 안주인들의 배경으로 인해 인정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이었다. 만약 모란루에 실력이 없었 다면 욕심만 가득찬 흉폭한 사내놈들에게 정복당해도 오래전에 정복당했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흑도를 일통했다고 일컬어지는 흑방의 흑수마존도 한 번 된통 당한이후에 감히 모란루주를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작은 권세나 무공을 가지고 모란루에 와서 소동을 부리는 자도 있었다. 하 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모란루에서 돌려보냈어도 그 후 그들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 옥향은 잘 알았다. 하나같이 그들은 얼마 못가 실종되었다. 구대 문파의 장문인과도 어깨를 겨룬다는 거대문파의 문주도 소리 소문 없이 모 란루주의 손속에 의해 증발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던 옥향이었다. 그녀 가 느끼기에 모란루는 세력은 흑방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것도 옥향은 모르는 비밀세력을 제쳐놓고 옥향이 알고 있는 드러난 세력만 보아도 그렇 다. 모란루는 진정 복마전보다 무서운 곳이었다. "호호호. 그래서 말이에요. 언니." 옥향은 눈앞에서 자신에게 수다를 떠는 여인을 보며 마음속에 안타까운 심 정이 그득했다. 모란루도 기루이기에 여자들이 찾아올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런데 눈앞의 여인은 모란루를 찿아왔다. 그것도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 다. 자신의 정랑을 내놓으라며, 서방을 숨겨놓은 모란서시는 당장 나오라 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행패를 부리며 나타났다. 만약 그녀를 보호하는 자가 초절정고수인 빙백일살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급하게 빙백일살이 자신 역시 모란루와 한편이라는 증거를 들이대지 않았 다면, 그녀는 한때 모란루를 무시하다가 조용하게 연못 속에 가라앉아 있 는 무례한 들처럼 그녀역시 그곳에 소리 소문없이 수장되었을 것이다. 빙백일살은 자신의 주인에게 그녀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모란루 의 지하 비밀장소로 떠났다. 모란루주를 모시고 오겠다는 모란루 총관의 설득에 그녀도 이제는 진정하고 얌전히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 녀의 감시자겸 접대용으로 온 옥향을 향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어대고 있 으니 얌전은 아닌가? 옥향은 마구 수다를 떨며 금방 자신을 향해 친숙하게 언니라고 부르고 간 간히 하늘같은 루주를 향해 서방을 훔쳐간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그녀가 좋 았다. 그녀는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을 연상시킬 정도로 귀여웠으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옥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만큼 성격도 좋았고 무엇 보다 루주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옥향은 그녀의 미 래를 예견할 수가 있었다. 루주 모란서시는 결코 자신을 모독한 여인을 용 서할 정도로 너그러운 성격이 아닌 것이다. 빙백일살의 동행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 눈앞에서 까르르 웃고 있는 여인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 미모나 기품을 봐도 아마 무림 대 파의 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일 것이다. 하지만 모란서시를 찾아갔다는 빙 백일살도 모란서시의 상대는 아니었다. 옥향이 생각하기에 천하무림의 최 강자라는 천무삼성 중의 하나가 왔다고 해도 자신을 모욕했다면 모란서시 는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할 능력을 가진 여인인 것이다. 그녀의 무공 실 력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녀의 잔인하고 깔끔한 성격과 치밀한 머리였 다. 더욱이 모란루의 루주로서 기녀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자신을 모독한 여인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설사 당금 황제의 공주일지라도 모란서시의 비위를 거스리고 살아날 수가 없다 는 것을 옥향은 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녀가 안타까웠다. 콰다당. 방문이 무너지듯 험하게 열리며 황급히 한 명의 남자가 굴러들어 오듯 들 어왔다. 번듯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와 반가움의 빛 이 가득했다. 그의 뒤로 네 명의 미녀가 시립하고 있었다. 옥향은 그녀들 중의 한명이 자신이 하늘같이 여기는 모란루주 모란서시임을 알고 놀랐다. "소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가 지금에야.....끄으윽." 젊은 남자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옥향의 앞에서 수다를 떨던 금혜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남자의 옆구리를 향해 초필살 구단 꼬집기 신공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뭐예요? 백가가. 나 몰래 도망쳐 나오기나 하고. 저 년들은 누구예욧? 그 새 또 꼬셨어요? 왜 하나가 아니고 넷이나 되요?" 신녀교에서 갑자기 사라진 그녀 덕분에 십여 일을 걱정으로 날밤 새웠던 백이충은 미처 변명도 늘어놓지 못하고 옆구리를 파고든 체 놔주지 않는 그녀의 손톱 덕에 계속 비명을 질러야 했다. 27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2) 십만대산. 십만 개의 봉우리가 모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괴하 고 절묘한 봉우리가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 괴한 것이 절암봉이었다. 절암봉은 검이 마치 거꾸로 세워져 있는 듯한 거대한 봉우리였는데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기이한 형상의 봉우리였다. 높이는 무려 백팔십여 장. 구름을 뚫고 그 끝을 보이지 않는 절암봉의 정상에 무엇이 있을 지는 상상 도 할 수가 없었다. 절암봉의 암벽 자체가 쇠만큼이나 단단하다는 흑철암 으로 이루어져있어 왠만한 철기도구로는 흠집도 낼 수가 없었고 봉우리 전 체가 매끄러운 기름을 발라놓은 듯 반듯했을 뿐더러 거울을 보듯 면 자체 가 평평하기 이를 데가 없어 어디 한곳 사람이 힘을 주고 버틸 흠집이 없 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절암봉이라는 곳은 거의 올라가기가 불가능한 곳인데 인 간은커녕 나는 새도 올라가다 지쳐 떨어질 만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깊은 십만대산의 정상 절암봉의 밑에는 지금 일곱 무리의 사람들이 제 각기 진을 치고 모여있었다. 각기 옷차림이나 병기, 모여있는 형상을 보아 도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들 일곱 무리는 한 무리가 백여명 정도 모두 칠백여 명이었다. 분명한 것은 여기 있는 칠백 명의 무리가 하 나같이 두 눈에 신광을 발하고 몸에서 타인을 억누르는 무형의 기세가 뭉 클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세는 오랫동안 타 인위에 군림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던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도였다. 또한 이들은 제각기 다른 색을 지닌 깃발을 자신들의 무리의 한 가운데에 세워두고 있었는데 깃발 가운데에는 '련'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고 자 세히 보면 그 밑에 작은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작은 글씨들은 각기 천마, 혈사, 검마, 요지, 벽력, 천뇌, 철갑이라고 쓰여 져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 무리가 속한 단체를 상징하는 단어같았다. 지금 이들 칠백 명의 고수들은 무려 칠주야를 절암봉 밑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가면처럼 굳어져 있었고 간간히 절암봉 위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설마 절암봉 위에 누군가가 올라가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 절암봉의 밑에 있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암봉 위에 올라 간 그들의 지존이었다. 혈천마련 소속의 일곱 소속의 지존들이 혈천마련의 련주 지위를 놓고 절암봉에 올라간지 벌써 칠주야가 흐른 것이었다. "으하하하. 혈천마련의 련주는 이제 나 천마황이다." 혈존의 셋째 제자였으며 혈천마련 소속 천마전의 전주였던 천마황이 광소 를 터트렸다. 그는 중년의 잘생긴 남자였으며 그 얼굴에는 패기와 강함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으면서도 온 몸에서 사기가 넘실거리는 또다른 중년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아직은 아니오. 대사형과 이사형이 오지 않았소." 쓴 웃음을 지으며 철갑마전의 전주이자 이들 중에서 막내였던 철마황이 중 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이미 체념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몹 시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에 늘어져 있는 다른 네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여기에는 혈존이 죽었다고 알려진 후 모습을 감추었던 그의 아홉제자 중에서 일곱이 모여 있었다. 혈존의 셋째 제자이며 천마전의 전주 천마황. 그는 혈존이 전주한 천마지존공을 익혔다. 그것은 무림 유사이래 계속 마 도의 종주자리를 지켜왔던 천년마교의 최고무학이며 마도 서열 제 일위의 지존마공이었다. 혈존의 넷째 제자이며 혈사전의 전주 혈사황. 그는 혈존이 전수한 천사음유공을 익혔고 천사음유공은 천년 사도의 종주 로 군림했던 혈사곡의 최후의 절학이었다. 혈존의 다섯째 제자이자 검마전의 전주 마검황. 그는 일인 전승이면서도 마도의 거대 주류를 형성했던 마검문의 최후절학 천지마검류를 혈존에게 전수받았다. 혈존의 여섯째 제자이자 첩의 역할을 했던 요지마전의 전주 요지마후. 혈사교와 사도종주를 다투었던 음산곡의 환희염정술을 극대로 익힌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몸짓에 굴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 다는 극성의 환희염정술은 사도의 삼대 절기에 들어가는 것. 혈존의 일곱째 제자이자 벽력마전의 전주 음양마황. 서로 침범할 수 없다는 빙기와 화기를 합일시킨다는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 어 내어 마도의 패주로 군림했던 음양궁의 음양벽력공을 익힌 인물이다. 그의 쌍장에서 뻗어나오는 장력은 화기에 못지않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금강불괴의 몸으로도 대항하기가 무리라는 절정마학. 혈존의 여덟째 제자이자 천뇌마전의 전주 만상여의. 천뇌마전은 대대로 혈천마궁시절부터 이인자이자 군사의 역할을 하던 집 단. 사도의 커다란 산맥을 이루는 천뇌교의 천뇌만상공은 배교의 술법에도 버금간다는 사도지학. 오직 만상여의에게만 전수된 사공이었다. 혈존의 아홉째 제자이자 철갑마전의 전주인 철마황. 검과 도가 불침하고 천장아래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용암에 떨어져도 죽 지않는다는 불사의 마공 철괴마공을 익힌 철마방의 후예. "대사형과 이사형? 흥. 이십 년간 매년 있었던 혈천지회에 두 사람은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 년전에 약속했던 오늘, 혈천마련의 련주를 뽑기로 한 날에도 둘은 불참했다. 이미 그들은 자격을 잃었다." "허나.... 우리는 셋째 사형이 대사형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소." "흥. 막내. 너와 여섯째가 대사형과 친했음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둘이 약 속을 지키지 않은 이상 그들은 이미 혈천마련의 련주가 될 자격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과의 승부에서 이겼다. 무엇이 더 필요하나?" 천마황의 말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십년전 혈천마련을 약속한 혈 존의 아홉제자는 혈천마궁의 세력을 나누어 가지며 서로 약속을 했다. 일 년마다 십만대산에서 모임을 가져 연락을 하며 각기 세력을 키우는 동시에 사부 혈존의 동태를 살피기로. 또한 이십년이 지나도록 혈존의 소식이 없 으면 정당한 비무를 거쳐 새로운 혈천마련의 련주를 뽑기로 했다. 하지만 혈영마전과 청영마전은 이십년간 혈천지회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 둘이 불참한 가운데 천마황과 혈사황의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혈천마련의 련주를 뽑는 비무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여의만상은 혈천마련의 군사를 고수하며 련주의 경선에서 사퇴하였고 여섯이 겨루었다. 천마황은 음양마황을 이겼고 혈사황은 철마황을 이겼다. 마검황은 요지마 후를 이겼다. 오일 밤낮을 겨루어 드러난 결과였다. 다시 이어지는 대결에 서는 혈사황이 부전승으로 올라갔고 이틀 밤낮을 겨룬 끝에 천마황이 마검 황을 이겼다. 그리고 혈사황이 자신의 쌍둥이 형인 천마황에게 양보함으로 서 혈천마련의 련주자리는 천마황이 차지했던 것이다. "흥. 혈천마궁 시절부터 마련의 련주는 가장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 불문율이오. 셋째 사형은 우리보다 반수가량 강하지만 대사형이나 둘째 사형은 우리를 오백초 이내에 제압할 수 있었소. 만약 대사형이나 이사형 이 돌아온다고 해도 셋째 사형이 그들을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소?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하는 한 천마전을 우리의 대표로 인정하지 못하오?" 철마황의 반항에 천마황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너희들을 생각해서 손에 사정을 보아주었더니 그렇게나 약하게 느껴졌던가? 그렇다면 본좌와 혈사황이 대사형 못지않게 강하다는 것을 증 명하마." 갑자기 천마황이 가부좌한 자세로 공중에 떠올랐다. 동시에 혈사황 또한 묘한 미소를 짓더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체 같 은 자세로 허공에 앉아 다른 다섯 전주들을 향해 마치 한사람처럼 입을 맞 춰 소리쳤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일심혼원공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겠다. 다섯이 함께 힘을 합쳐 덤벼보아라. 백초 이내에 너희들의 합공을 패배시키지 못 한다면 혈천마련의 련주 지위를 던져버리겠다." 일인이 두사람의 몸을 가진 것처럼 같은 표정 같은 얼굴로 소리치는 천마 황과 혈사황. 이 두사람의 몸에서는 가공할 천마지존공의 마기와 천사음유 공의 사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쳐갔다. 두 이질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기운은 서로의 허점을 보완하며 사방으로 그 기세를 퍼트려갔다. "그 말을 잊지 마시오." 천마황과 혈사황의 광오한 외침에 철마황이 제일먼저 눈빛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묵빛의 절대마공 철괴마공이 넘실거렸다. 요지마후 또한 몸을 일으켰고 검마황과 음양마황도 눈빛을 빛냈다. (혈천마련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련주의 극강함을 증명하는 일은 필요 한 일이다.) 만상여의 역시 머리를 굴리며 그들에게 합세했다. 이들 다섯에게서 가공할 기세가 뻗어나가며 천마황과 혈사황을 향해 포위해 들어갔다. 다시한번 절 암봉의 봉우리 위에서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공할 대결이 펼쳐지기 시작 햇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실상 천마전과 혈사전은 하나로 합해져 있었다. 다만 다른 다섯새의 마전에 눈치채지 않기 위해서 둘로 나눠진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다. 휘장이 처진 화려한 방안. 휘장 안에는 누가 있는지 휘장 때문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에 두명의 인물이 들어왔다. 천마황과 혈사황이었다. "일곱 태상에게 천마황 인사드립니다." "일곱 태상에게 혈사황 인사드립니다." 목소리만 다를뿐 소리의 높낮이도 어조도 똑같은 음성. 휘장속에서 듣기 거북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이한 것은 그 음성이 하나 가 아니라 일곱갈래가 합해진 음성이라는 것이었다. "크흐흐. 어찌 되었느냐? 혈천마련의 련주가 되었느냐?" "태상의 염려로 별 무리없이 마련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혈영과 청 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크흐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두 여우 놈이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지. 하지만 상관없다. 너희가 내 말만 들으면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식 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허나 그들은 우리들을 인정하기는 했어도 아직도 마음속에는 반심을 가지 고 있는 듯 합니다." "크흐흐. 그 교활한 혈마조차 배반한 반골들이니 애초부터 남에게 숙인다 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 허나 상관없다. 받아라." 혈마. 그것은 혈존이 팔대천마의 하나로 있을 때에 불리던 이름이 아니던 가? 오직 혈존과 쌍노만이 알고있는 혈존의 비밀을 이들 태상은 어찌 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비밀을 천마황과 혈사황도 알고있는지 전혀 괴인의 음 성에 의문점을 표시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다만 휘장 너머에서 날아오는 다섯권의 책자를 받아들었을 뿐이다. "이것은.....?" "크흐흐. 너희가 우리에게 받았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삼대사도지예와 사 도마도절예의 무공을 완벽히 보완한 완전무결한 절학. 본래 위력을 반배가 량 증가시킨 것이지. 네 놈에게 그것을 받으면 네 사제라는 것들은 눈이 뒤집혀 그것을 익히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급에도 일심혼원공이....." "크흐흐. 그렇다. 내공구경에 자연스럽게 녹아져 들어가 있다. 너희가 완벽 한 천마지존공과 천사음유공을 익힘으로서 우리의 정신과 하나로 녹아들고 지배를 받으며 너희 둘의 마음과 영혼이 동조하는 것처럼 다른 다섯도 미 공과 사공의 화후가 깊어질수록 너희의 마음에 동조될 것이다. 그리고 일 심혼원공의 화후가 깊은 너희들에게 복종하겠지." 경악스런 말이었다. 그렇다면 휘장 속의 인물들의 일곱갈래로 갈라진 음성 의 정체는 이들의 영혼이 일심혼원공으로 하나로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니 겠는가? 또한 천마황과 혈사황 또한 일심혼원공을 익히면서 그들과 영혼이 동조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분명했다. "완벽한 칠대절학도 무섭지만.... 크흐흐. 일심혼원공의 위력은 더욱 무섭 다. 마음이 합일된 두사람이 칠대절학을 펼친다면 개인이 낼 수 있는 위력 의 다섯배. 세사람이 일심혼원공으로 칠대 절학을 펼친다면 개인의 위력의 열배. 네사람이면 열 다섯배. 일곱이 모여 칠대절학을 모두 펼친다면 서른 다섯명이 펼치는 칠대절학의 합공과 동일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휘장 뒤에서 광소가 펼쳐졌다.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는 듯. 장차 천하가 그들의 발 밑에 굴복할 것처럼. 괴이한 목소리는 다시 천마황과 혈사황에 게 질문을 던졌다. "천마강시의 제련은 어찌되었느냐?" 천마강시. 그것은 혈존이 혈마전혼대법을 펼칠 시에 자신의 몸으로 삼기 위해 마련했던 제물에서 언급되었던 이름이 아닌가? 사실상 마도와 사도를 통털어 최강의 마물로 손꼽히며 천년전에 단 두구만이 만들어졌다는 천년 마교 사상 전설의 최강 강시. 한구의 천마강시가 능히 한시대의 천하제일 인과 일대일로 겨룰 수 있다는 막강한 살인병기였다. "천마강시의 몸이 될 재료는 준비되었으나 완성할 준비가 부족합니다. 혈 천마련의 결속이 완료되는 대로 그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크흐흐. 혈마가 천하를 거의 장악했을 때에도 단 하나의 천마강시만을 제 련할 수 있었지. 허나 명심해라. 우리 일곱이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 몸이 될 제물이 필요하다. 이 너덜너덜한 몸으로는 남들 앞에 나설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될 제물은 오직 천마강시밖에 없다." "천하를 제압하면 일곱구의 천마강시를 제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흐흐. 천하를 제패할 목적이 우리의 몸이 될 일곱구의 천마강시를 제련 하기 위함을 절대 명심하라." 다시금 괴이한 소성이 휘장뒤를 메아리 쳤다. 곧이어 갈라진 목소리 중에 서 뾰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혈마의 소식과 천하를 정복하기 위한 계획은 마련되었느냐?" 순간 천마황과 혈사황의 얼굴에 미미한 분노와 저주, 그리고 공포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일곱 노물에게 영혼이 동조된 천마황과 혈사황에게 그런 빛 이 스쳐지나간다는 것은 일곱 노물이 혈마, 즉 혈존에게 저주와 분노를 퍼 부으면서도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과 동일했다. "혈마는.... 소식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크흐흐. 죽었다고 해도 방심하면 안된다. 아무리 확신한다 해도, 네 앞에 서 그 놈의 영혼이 소멸하는 광경이 벌어진다고 해도 최후의 최후까지 그 놈이 건재하다는 전제아래 모든 일을 대비해야 한다. 그만큼 혈마는 무서 운 놈이다." "......." "천하정복대계는?" "현재 혈천마련의 힘이라면 가볍게 백도를 누를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 다. 다만 방해물이라면 두 사람을 경계해야 하고 한 사람을 죽여야 합니 다." "경계할 것은 혈영과 청영이겠지. 혈마를 빼어닮은 놈 하나와 변황에서 온 놈 하나. 하지만 죽여야 할 것이 하나라는 것은 의외로군. 천무삼성이 가 장 먼저 죽여야 할 것들 아니었나?" "천무삼성은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무 적소야 모용풍이라는 자입니다. 그는 백도십대극품절예의 다섯가지를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무예의 천재로 불리는 자. 혈마만큼 무서운 자입니다. 이대로 시일이 지나면 삼년 이내에 저와 혈사황의 합공을 홀로 감당해 낼수 있을지도..." "크흐흐. 백도에 그런 놈이 있다니. 네 사제들이 모두 일심혼원공을 익히 면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싹을 잘라내는 것도 좋겠지. 놈을 처단할 계획은 잡혀 있느냐?" "놈은 백도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백도는 자신들을 지켜줄 가장 튼튼 한 방패 하나를 스스로 망가트릴 것입니다." "크흐흐. 기대하겠다." 28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3) 혈존 백가량이 천하를 지배할 무렵 그에게 복종하는 세력을 관리하는 방법 은 그 세력의 수뇌들의 후예를 자신의 친위대나 제자로 들이는 방법이었 다. 혈연과 사문을 불문하고 오직 혈존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세력, 혈존의 명만 있으면 부모나 전에 섬기던 사부라도 망설임 없이 죽이는 세력. 그 친위대이자 제자들이 혈존의 힘을 바쳐주는 최강의 세력인 동시에 짧은 세 월동안 중원과 변방을 거쳐 흡수한 수천 문파의 세력들을 꼼짝 못하게 하 는 인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십년 전, 그의 친위세력 중에거 가장 핵심적인 혈존의 아홉제자 가 배반하는 바람에 오히려 혈천마궁 전체가 그를 배신하게 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혈무영 일천인을 육성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이 러한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혈무영 일천인은 마도 거파의 후예들이다. 비록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 만, 또한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혈존에게 이번에 복종하게 된 일백마제의 아들이며 손자, 혹은 일백마제에 기이지는 못했어도 혈존에 복종된 세력의 수뇌들의 후예였다. 심지어 쌍노의 혈손마저 혈무영에게 포함되어 있었다. 혈존을 완전히 배신한 혈천마련의 세력에도 그 후예가 혈무영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혈존에 대한 공포도 있겠지만 혈무영의 인질로서의 가치가 쌍노가 그토록 쉽게 일백마제와 많은 세력을 복속시키게 된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도 인간이고 감정이 있는이상 자신의 유일한 혈손의 생사를 쥐고있는 혈존에 게 쉽게 거역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따로 손을 써서 혈손을 구하기에 는 혈무영의 세뇌가 너무 깊었고 혈존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대했다. 혈존 백가량은 또한 지독한 색마이기도 했다. 그가 천하를 지배할 시에 그 가 노리개로 삼았던 여인들의 숫자는 삼천이 넘었다. 그것도 혈존에게 한 번 거쳐 가 싫증을 느끼게 되어 버려지거나 혈존에게 죽임을 당한 여인들 을 빼고 혈존의 마음에 들어 요지마전에 처박아 두고 항상 자신의 수청을 들게했던 전문적인 혈존의 여인들로 유지되었던 숫자만이 그러했다. 그 당시 혈존의 눈에 든 여인은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십 몇세의 어린 여아도 있었고 오십이 다되어 가는 여인도 있었으며 주안술을 익혀 백세가 넘어도 젊어보이는 여마도 있었다. 처녀도 있었고 약혼자가 있는 여인도 있었으며 남의 첩이든 유부녀이든 가리지 않았다. 요는 혈존을 잠 시 매혹하게 할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혈존의 마수가 뻗었 다. 산골에 처박혀 있던 처녀도 있었고 공주나 군주같은 고귀한 신분의 여 인마저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혈존에게 그 같은 것은 어 떠한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쌍노는 그러한 혈존 백가량의 색욕을 잘 알고 있었다. 모란루를 접수한 것 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모란루 자체가 막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또 한 배경과 연줄로서 막강한 힘을 갖추고 있으며 정보에서 최고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쌍노가 모란루를 접수한 원인의 주요인은 바로 혈존 백가량의 노리개로서 모란루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혈무영의 십영주 또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혈무영에서 가장 강하고 뛰어난 인재를 뽑아 십영주라는 혈무영의 수뇌로 삼기는 했다. 하 지만 그 중에서 다섯이 여인인 것은 그녀들로 하여금 혈존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곳에 없는 한명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영주는 여인으로서 최고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소위 무슨 혈맥, 무슨 지체라는 특이한 신체의 여인들이었다. 또한 그녀들은 철저한 방중술을 무공과 동시 에 익혀야만 했고 혈존이 그들의 주인임과 동시에 자신이 혈존의 노리개라 는 점을 철저히 머릿속에 각인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는 했지만 별로 싫지는 않았지. 나도 남자이니까 말이야. 하지 만 설마 이렇게 되리라고는....) 백이충은 등에 식은 땀을 흘리며 쩔쩔매고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도끼 눈을 뜬 금혜연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칫 말한마디 잘못하면 당장 손톱을 세워 달려들 기세였다. 백이충은 진실로 무서웠다. 그저 상대가 귀엽다든 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담아주겠다든가, 소중한 사람이기에 난처하게 만들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딴 말하면 당장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금혜 연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오고 주눅이 들었으며 머릿속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무서웠다. 백가량으로 있으면서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식마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로 인정을 하지 않던 혈존이었다. 하지만 백이충으로 혈 존임을 자각하면서 그에게는 부모를 인정하고 형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겨 났다. 아니,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백이충으로 자라는 사이 생겨난 인격과 마음을 혈존의 기억이 감히 침범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백이충에게 부모 와 가족의 개념은 혈존으로 있었을 때의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금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역시 부모가 정해놓은 약혼자라는 개념으로 그에게 자리잡았고 그의 마음속에 하나의 존재로 자리잡았다. 자신이 존재 로서 인정하는 인물.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가치로 비교할 수가 없이 그냥 자신과 대등한 입장의 존재였다. 백이충이 인정하지 않는 혈존의 수하들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금혜연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뒤를 따라다녀 일에 사사건건 방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모든 계획보다 훨씬 더한 가치를 가진 존재였 다. 그녀가 화를 내자 백이충은 혈존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공포심을 가졌 다. 자신과 대등한 위치이면서 소중한 존재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백이충이 뭐라고 변명하지도 못하고 등에 식은땀을 흘릴 때 모란서시를 비 롯한 그의 등뒤에 서있던 네명의 미녀가 금혜연 앞에 무릅을 끓었다. "천첩. 모란서시 백소련이 주인마님을 뵈옵니다." "천첩. 북해빙화 북궁소림이 주인마님을 배알합니다." "천첩. 천강옥녀 천소화가 주인마님께 인사드립니다." "천첨. 칠채옥봉 화소예가 주인마님께 절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 없는 천뢰검후 흑소옥을 포함하여 이른마 혈무오미라 불리우는 여인들. 그들 중에 넷이 미처 백이충이 뭐라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사뿐히 금혜연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주...주인마님? 천첩? 백가가. 정말이었어요?" 찢어지는 듯한 금혜연의 고음이 비명처럼 터져나왔다. 마님이라는 소리에 백이충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립된 것 같아 은근히 기쁨도 느꼈으나 설마 하고 은근히 떠봤던 여인들과의 관계가 진실인 것처럼 보여지자 그녀의 마 음은 배신감으로 가득찼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름다운 여인들. 모란서시야 그녀와 같은 칠미의 하나라 고 하니 그렇다고 하지만 다른 세 여인들도 하나같이 금혜연에 못지않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금혜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소매. 오해를 말아라. 저들은 단지 시비에 불과한...." "백가가. 그따위 변명을. 저렇게 기품있고 고귀해 보이는 여인들이 단지 백가가의 시비라고요? 정말 용서 못해요." 금혜연이 화를 내며 백이충을 향해 손을 후려쳤다. 백이충은 아무런 방비 도 하지 못했고 사술로서 몸을 돌보지 않은이상 무예로 단련된 그녀의 손 을 피할 능력이 없었다. "아얏." 순간적으로 백이충의 뺨에 혈흔이 새겨졌다. 금혜연의 날카로운 손톰이 백 이충의 뺨을 할퀴고 다섯개의 긴 손톱자욱을 남긴 것이다. 백이충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뺨을 대며 금혜연의 기세에 눌려 두어걸음 물러섰고 금혜연도 자신의 손톱에 백이충이 상처를 입자 놀라 그만 주춤거 렸다. "마님. 아무리 마님이라도 주인님의 옥체에 상처를 내시면 안됩니다." 갑자기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모란서시를 비롯한 네명의 여인이 백이충과 금혜연의 사이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충동적인 감정으로 일어난 손톱의 만 행을 보고 후회하는 감정이 생겨 백이충에게 사과하려던 금혜연의 감정이 다시 폭풍이 일 듯 어지러워졌다. "이....이....." 금혜연은 그대로 자신의 품에서 하나의 거울을 꺼내 바닥으로 팽겨쳤다. 자신 딴에는 백이충의 선물이라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요요경이었다. 순간 바닥에 세차게 부딪친 요요경은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구석 한조각의 장식이 떨어져 나갔다. 금혜연은 요요경을 던진후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다. 그녀를 보고 네명의 여인도 어쩔줄을 몰라했고 특히나 백이충은 뺨을 감싼 체 금혜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모두들 심각한 분위기라 아무도 요요경 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옥향이 어쩔줄을 몰라하다가 급히 요요경과 떨어 져나간 조각을 집어들고 한쪽으로 피했을 뿐이었다. "너희들은 모두 나가있어라. 소매에게 내가 말하겠다." 백이충이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금혜연의 앞에서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네 여인을 치워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그 의 심정으로는 금혜연이 울음을 끄칠수만 있다면 당장 네 여인을 죽여도 하나도 아쉬울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단지 그냥 백이충으로 아는 금혜연의 앞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생각일 뿐이었다. 모란서시가 머뭇거리며 백이충의 눈치를 보다가 그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조용히 허리를 굽혀 방안에서 물러났다. 그녀로서는 방금전 자신이 봤던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절대의 존재였던 혈존이 용안 에 상처를 입고도 오히려 쩔쩔매는 광경이라니. 방안에서 물러난 모란서시 백소련은 옥향을 돌려보낸후 다른 세 여인들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직 혈존의 노리개로 세뇌되어 자란 그녀 들로서는 금혜연의 질투어린 행동과 백이충의 쩔쩔매는 광경을 보고 또한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비교하면서 뭔가 방책을 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옥향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면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 속 볼을 꼬집어 보았다. 그 고고하고 도도하며 능력이 하늘을 찌르는 모란 루의 하늘, 모란서시가 스스로 첩을 자청하다니. 게다가 옥향과 즐겁게 떠 들고 놀던 마음씨 착하던 아가씨 금혜연에게 자청해서 절을 하며 몸을 굽 히다니. 또한 루주와 같이 있던 세 여인들도 몹시 고귀해 보였다. 마치 인 간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옥향이 보기에 아름답지만 어쩐지 친숙하게 굴고 귀여운 금혜연은 자신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지만 고귀하고 싸늘하며 도도한 표정을 가진 루주를 비롯한 네 여인은 아 무리 봐도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특이한 미모를 지녔 다. 그림이나 조각한 것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개성 과 미모라고 할까? 세속의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을 것 같 은 여신같은 여인들. 그런데 그녀들이 먼저 금혜연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그런데 이 거울은 어떻게 하지?" 옥향은 문득 자신이 가지고 온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세게 내동댕이 쳤는데도 거울은 깨지지 않았다. 다만 손톱만한 구석의 조각 하나만 떨어 졌을 뿐이다. 금혜연이 소중히 정표로서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니 만큼 나 중에 그녀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옥향은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에 빠녀있을 때에 갑자기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백이 충이 들어왔다. 옥향이 금혜연과 루주를 생각하느라 미처 신경쓰지 못했지 만 이 남자야말로 방금전 옥향이 목격한 소동의 주범이었다. 그리고 모란 루의 일개제자인 옥향에게 하늘같은 루주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밝 힌 남자였다. 그의 진실된 신분을 모르지만 감히 그녀가 홀대한 상대가 아 니었다. 옥향은 깜짝 놀라 그대로 허리를 숙여 백이충을 맞이하였다. "소녀. 옥향이 대인을 뵈옵니다." 백이충은 옥향의 인사쯤은 안중에도 없는지 바로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네가 소매와 친하다는 옥향이냐?" "옛?" "내가 오기 전에 소매의 마음에 들어 친하게 되었다는 모란루의 옥향이 맞 느냔 말이다." "소녀. 금....그 분과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잠시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 입니다." "되었다. 잠시라도 친분을 쌓은 친구를 무시할 소매는 아니지. 네가 즉시 소매에게 가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데리고 오너라." "예?" 옥향은 다시한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금혜연과 같이 있던 백이충이 갑 자기 옥향보고 그녀를 데리고 오라니? 게다가 남의 애정에 관계된 일을 삼 자에 불과한 옥향이 어찌 금혜연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단 말인가? "소매가 화를 내고 무작정 뛰쳐나갔다. 빙백일살의 말로는 동행 한명이 현 래객잔에 머물러있다 하니 그곳에 갔을 것이다. 내가 가봤자 화만 낼 것이 뻔하니 네가 그녀를 설득해서 내게 데리고 오란 말이다." 옥향은 쩔쩔 매었다. 세상에 이런 맹목적인 명령은 처음이다. 대충 짐작이 야 하지만 자신이 뭘 안다고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설득하겠는가? "하지만 그분에게 소녀가 뭐라 말해야 할지..." "대충 그녀의 눈치를 보고 뭐든지 그녀가 바라는 대로 말해서 마음을 풀어 주어라. 그녀가 네 명의 계집을 보고 계속 투정을 하면 그녀들과 나는 아 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네가 말해주어라. 아니, 앞으로 다시는 그녀들과 내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라. 하여간 그녀의 마음을 풀 이야기는 어떤 것을 해도 좋다. 네 말을 그대로 실행할 능력이 내게는 있으니까. 하 여간 내가 변명할 수 있게 나를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풀어주기만 해도 된다." "예? 예." 급하게 허리를 숙이던 옥향은 믄득 그녀가 가져온 거울이 생각나 백이충에 게 공손히 바쳤다. "대인. 이것은 아까 그분이 내던졌던 정표인데...." 한조각이 떨어져 흠집이 난 요요경을 바치며 옥향은 불안해했다. 자신은 나무 잘못도 없지만 혹여라도 그가 요요경이 깨진 화풀이를 자신에게 한다 면? 하지만 백이충은 요요경에 별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냥 받아 품에 갈 무리했다. 그러다가 손톱만큼 조각난 한 부분을 보다가 옥향에게 손을 뻗 었다. 옥향은 백이충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자 깜짝 놀랐다. 하지 만 루주도 설설 기는 사람에게 그녀가 어떠한 반항을 하겠는가? 그녀는 희 롱당할 것을 각오하고 이를 악물었다. 루주를 비롯하여 네명의 고귀한 미 인들을 손에 넣어 애인인 금혜연과 다툰 바람둥이가 그녀 같은 여인 하나 쯤 희롱하지 못하겠는가? "네게 과분할 것 같다만 이것을 주지. 이게 소매를 데려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옥향의 예상과 달리 백이충은 그녀의 가슴에 달린 패물 하나를 집어 들었 을 뿐이다. 그는 패옥의 중심에 요요경에서 떨어져나온 조각 하나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조각과 패옥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되니 조각은 마치 기이한 여인모습의 무늬가 되어 원래부터 패옥과 하나였던 듯 모습이 바뀌 었다. 백이충은 모습이 변한 노리개를 옥향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시킨 일을 잘 이행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 이 일에 대해서는 백소련 에게 미리 말해두마.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이행하도록 해라. 가능하면 내 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녀만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걱정했다는 말을 꼭 집어넣어라. 절대 다른 여자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그래. 그 네 계집은 아무 남자나 보고 주인이라고 부르는 미친년이라고 그래라. 그렇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옥향은 백이충의 말을 들으며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섬기 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루주와 다른 여인들을 미친년으로 말하라니. 게다가 그것을 실행하겠다니. 고작 한 여인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 다 른 네 여인의 인생을 쓰레기로 만들겠다니. 옥향은 급히 허리를 숙이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백이충이 말하기는 했으 나 일단 모란루의 총관에 가서 허락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백이충에 게서 받은 노리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29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4) 모란서시 백소련의 진정한 신분은 황제의 조카딸이라 할수 있는 군주였다. 비록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백소련의 어머니 백여옥은 한림원주의 딸이라는 원로대신 가문의 고매한 신분의 규중처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황실의 황족들과 친분을 많이 나누 었기에 백여옥은 부친의 곁에서 여러 황자와 안면을 익힐 수가 있었다. 한 때 황태자의 청혼을 받기도 했던 그녀는 부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자신의 호기를 자랑하며 집을 방문하던 삼황자 주원호에게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 았던 것이다. 주원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지만 백여옥의 주원호에 대한 사랑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주원호 또한 백여옥을 마음에 들어했기에 여러 난관 을 거치고 자신의 둘째 부인으로 삼아 북경으로 데리고 갔다. 만약 아무일 도 없었다면 백여옥은 지금 옥룡왕부의 둘째 안주인으로 아무 탈도 없는 삶을 살았을 테고 백소련은 군주의 신분으로 두려울 것 없는 철부지로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백여옥을 증오하던 옥룡왕부의 첫째왕비 왕비 모향혜의 질투가 어느 시점을 기해 결국 터져나왔다. 모향혜는 구문제독의 누이동생이었고 옥룡왕과의 사이에서 오직 딸 하나 밖에 없었다. 백소련까지는 참았다. 그 런데 백여옥이 백소련의 뒤를 이어 옥룡왕부의 후계자인 아들을 생산하자 눈이 돌아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옥룡왕의 친우이자 시위대장이었던 옥협 초수유와 함께 백여옥은 도망간 것으로 되어있었다. 초수유가 백여옥이 처녀시절부터 그녀를 연모 하여 주위를 맴돌던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범한 옥룡왕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기꺼이 그를 시위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모향혜가 위조된 증거를 들이대어 결국 그들의 실종은 옥협과 백여옥 명예 를 더럽히고 그 이름을 더러운 누명으로 얼룩지게 하는 증명으로 남았다. 사실 백여옥 일행은 은퇴한 부친의 집에 들리던 길에 구문제독의 사주를 받은 무사들에게 쫓겼던 것이다. 옥협은 목숨을 잃었고 백여옥의 갓난아이도 살아남지 못했다. 옥협의 필사 적인 저항으로 백여옥만이 당시 다섯 살이던 백소련을 껴안고 절벽 밑에서 떨어졌다. 그들을 구한 것이 전대의 모란루주였다. 백여옥은 살기 힘든 상 처를 입었고 백소련은 자신들을 버린 것이 부친이라 생각하며 원망을 되씹 을 뿐이었다. 모란루주는 상처입은 백여옥을 모란루에거 거두어주며 대신 그들의 시체를 대신할 증거를 절벽 밑에 남기어 구문제독의 추격에서 그녀 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 백소련을 모란루주는 자신의 제자로 삼고 모든 모란루의 정화가 담긴 비급과 함께 그녀를 쌍노에게 넘겼다. 이미 모란루 에 쌍노는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모란루주는 그들의 마수를 피할 길이 없 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혈존의 이름을 들이대는 대야 어찌 반항하겠는가? 다만 모란루를 넘기는 조건으로 미래에 백소련이 무공을 터득하고 나왔을 때에 그녀를 루주로 내세우라는 작은 소망을 내걸었을 뿐이다. 백소련이 혈무영의 령주가 되어 모란루에 나왔을 때 모란루는 두개의 세력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루주를 위시하여 쌍노에게 굽히고 들어 가 모란루를 보존하자는 세력. 나머지는 호법들을 위시하여 모란루는 다른 세력에 굽힐 수 없으며 혈존의 실존도 믿을 수가 없다는 세력이었다. 백소 련이 모란루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반대파의 세력을 피로 숙청하고 모 란루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부친의 일도, 모친의 일도, 자 신을 구해주었던 스승 모란루주의 일도, 원한과 은혜도 머릿속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혈무영으로서 교육받았던 세뇌사상. 위대한 혈존을 위한 충성과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뿐이었 다. 그런 백소련에게 일대 위기가 닥쳐왔다. 오직 혈존만을 생각하며 충성하고 주인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삶과 존재의 의의로 알고 있게된 백 소련이 주인에게 버려질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예리한 여인의 직감이 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의 삶과 존재가치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는 만큼 그에게 버려진다면 그녀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그녀가 다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주인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일개 여제자에게 부탁을 해야했다. "고개를 들어라." 백소련의 말에 옥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본 적은 있어도 이렇듯 가까이서 루주를 대면하고 직접 말을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녀를 직접 지목하여 명을 내리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은. 총관을 만나러 왔다가 루주에게 불려간 옥향은 조심 또 몸좀심을 했다. 아직까지 그녀에 게는 백이충이나 다른 사람보다 모란루주가 하늘같은 존재였다. 모란서시의 옆에는 옥향이 아까전에 보았던 세명의 절세미인도 같이 있었 다. 그들의 안색 또한 눈에 뜨이게 초조해 하고 있었다. "네가 주인님에게 직접 명을 받은 것을 알고 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 다. 아마도 금혜연이라는 아가씨를 찾아가라는 말이겠지. 주인님과 했던 말을 모두 내게 털어놓을 수가 있느냐?"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수 있겠는가? 옥향은 백이충과의 일을 하나도 빠 짐없이 그대로 고해바쳤다. 심지어 금혜연이 원한다면 그녀들을 다시는 백 이충의 앞에 서게하지 않겠다는 말과 그녀들을 미친년으로 만들겠다는 소 리마저도. 백소련과 세명의 미녀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네가 금예연 소저를 설득할 정도의 친분은 진짜 있느냐? 그녀와는 어느 정도 친한 사이냐? 네 판단대로 숨기지 말고 말해 보거라." "제 생각에는 금.... 그분은 무척 착하신 분 같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분 공자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설득하면.... 진심으로 그분 공자님과 결별할 생각이 아니기에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금소저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으냐? 우리와 주인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일까?" 옥향은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모든 결과는 오직 금혜연이라는 그 귀여운 소녀에게 달려있는 것 같았다. "저희 모란루의 방침으로는 남자가 확실하면 배우자 관계를 고려치 않으 나.... 일반 처녀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사랑에 빠진 소녀는 질 투가 강하고 독점욕이 강한 법입니다. 아무리 그녀가 착하다고 해도 사랑 을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옥향은 결국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 시에 네 여인의 안색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옥향아. 혹시 그분 소저를 주인님에게 모셔오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모셔 올 수 있느냐? 그리고 금소저를 설득할 때 우리에 대해 잘 좀 말해줄 수 있느냐?" "소녀는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그분에게 내 진심을 밝히기 위해 선물을 하고 싶구 나. 전해 줄수 있겠느냐?" 백소련은 그녀에게 자신의 옆에 있던 쟁반하나를 내밀었다. 쟁반위에는 옥 으로 된 깜찍한 거북이 모양의 작은 조각하나가 있었다. 두눈은 비취로 만 들어져 있었고 거북의 등은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옥 향이 놀란 것은 거북 모형 옆에 놓여져 있는 작은 영패 하나였다. "그 조각안에는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향이 액체로 들어있다. 조금씩 찍어 바르면 몸에서 꽃보다 더 좋은 향기가 풍긴다. 금소저에게 더할 나위가 없 이 잘 어울릴 것이다. 그 향을 담은 거북모양의 용기 또한 천금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황실에 상납되는 것을 내가 마음에 들어 거금을 들여 빼내온 것이다." 모란서시 백소련은 잠시 한숨을 쉰 후에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옆의 영패는 내 심부름에 대한 대가이다. 모란루 총순찰의 영 패이다. 그것이 어떠한 지위인지는 잘 알겠지? 만약 네가 힘을 써서 일이 잘 된다면 네게 더한 상도 내리겠다." 북해빙화 북궁소림은 약간 다급함을 느꼈다. 백소련이 선물을 보내 자신만 금혜연의 환심을 사려는 것 같았다. 천강옥녀라든가 천뢰검후는 백소련과 친한 사이다. 혈존께서 백소련을 곁에 둔다면 자연히 나머지 둘도 그녀의 청에 의하여 곁에 둘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백소련과는 그리 친한 사이라 고 볼 수가 없다. 혈존과 금혜연의 관계를 아까 있었던 상황으로 유치해 볼 때 자신들의 위치는 오직 금혜연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금혜연과 백소련이 친해지고 백소련이 먼저 혈존의 환심을 산다면 백소련 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자신과 또한 친자매처럼 지내는 칠채옥봉에게는 하 나도 좋은 일이 없을 것이 뻔한 일이다. 더욱이 자신과 칠채옥봉은 혈무영의 영주이기는 하나 혈무영의 교육을 받 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혈존에게 매달려야 하는 사정은 백소련이나 혈무 영 출신인 그녀들보다 훨씬 절박했다. 북해빙화 북궁소림은 북해빙궁의 소궁주이다. 또한 칠채옥봉은 바다를 지 배하고 있는 절대자로 알려져있는 남해 해왕군도의 소도주이다. 북해 빙궁 이든 해왕군도이든 절대 가볍지 않은 이름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 두세력 의 주인은 현재 중원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무성 종리연과 동급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 때 혈존은 중원천하를 정복한 이후 변황으로 발걸음을 돌린 적이 있었 다. 그때 그는 이년 만에 변황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당연히 혈존의 발걸 음은 북해빙궁과 해왕군도를 거쳐갔다. 신비세력으로 천년이 넘게 중원무 림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던 두 세력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날벼락이었다. 해왕군도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북해빙궁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혈존과 그의 밑에 있는 수많은 거마효웅들 앞에서 북해빙궁은 너무나 무력 했다. 북해빙궁의 일만 제자 중에서 오천이 원한을 품고 죽어갔다. 하지만 끝내 멸망을 택할지언정 북해빙궁은 굴복을 택하지 않았다. 혈천마궁의 피 해도 커졌다. 뜻밖의 큰 피해에 혈존의 분노가 폭발했다. 북해빙궁을 괘씸히 여긴 혈존은 빙궁을 가공할 사술로 감쌌다. 천지에 널 린 오천의 북해빙궁의 제자들의 시체를 축으로 삼아 빙궁 일백 리를 감싸 는 거대한 일곱 개의 진법을 펼쳐내었다. 그리고 북해빙궁의 제자와 혈천 마궁의 궁도들의 영혼을 매개로 거대한 사술을 펼쳐내었다.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고 한기가 북해빙궁을 뒤덮었다. 놀랍게도 북해빙궁은 얼음벽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탈출한 것은 북해 빙궁주와 갓난아기였던 북 궁소림 둘밖에 없었다. 자연의 힘을 무시한 그 가공할 천지개벽의 결계를 풀 수 있는 존재는 천하에 오직 하나 혈존밖에 없었다. 현재 그녀의 부친인 북해빙궁주는 혈존 수하 일백마제의 하나로 충성을 바 치고 있다. 모든 것은 북해빙궁을 회복하고 얼음벽에 갇힌 오천의 북해빙 궁도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고향이, 형제 가족이, 한 부족이, 그 근본뿌리가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혈존이 죽었다고 알려졌 어도 변함없이 쌍노를 따랐던 것이다. 오직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혈존뿐이기에. 하지만 혈존은 빙궁을 풀어줄 생각이 아직도 없는 모양이 다. 북궁소림은 북해빙궁의 음공을 완벽히 익힌 상태였다. 그녀는 자진하여 혈 무영에 지원했다. 입단이 늦어 이미 혈무영의 출도가 가까울 시기에 합류 했지만 그녀는 실력으로 혈무영의 영주 하나를 패배시켜 그 자리를 빼앗았 다. 오직 혈존에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혈존의 여인이 되어 그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 그것이 얼음벽에 있는 북해빙궁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칫하면 혈존의 곁에 다가서기도 전에 내침을 당할 수 도 있었다. "옥향언니라고 했죠? 내 선물도 금소저에게 전해주시겠어요?" 북궁소림이 갑자기 백소련의 말을 끊고 나서자 옥향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소련은 약간 불편한 얼굴을 했지만 북궁소림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필사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금소저에게 드릴 제 작은 성의는 빙령입니다. 하지만 심부름의 대가로 언 니에게도 작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만년한옥의 구슬입니다." "예엣? 이...이런 귀한 물건을...." 옥향은 빙령이라는 말에 놀랐고 만년한옥이라는 말에 또한번 놀랐다. 가볍 게 선물이라고 칭할 수가 없는 무가지보가 바로 이 두개의 물건이었기 때 문이다.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란루의 일급제자인 옥향이 두 개의 물 건의 내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흥. 북궁소림. 빙궁의 무상지보를 내어놓다니. 다급하긴 다급했군.) 백소련도 약간 놀란 빛으로 두개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빙령이란 태초부터 음한 기운이 뭉쳐 형태를 갖춘 후 만년간 단 한번도 햇볕과 양기를 접하지 않은, 뭉쳐진 음기의 결정체를 말한다. 음한기공을 익힌 여인이 빙령을 가지고 있으면 능히 일년의 수련으로 십년 의 성과를 얻을 수가 있다. 빙공계열의 고수에게는 생명보다 중한 무가지 보인 셈이다. 또한 무슨 신체니 하는 절맥의 신체적 결함으로 태어난 불치 환자도 그 절맥이 음한 기운으로 인한 것일 때, 예를 들어 칠음절맥이니, 오음절맥이니, 빙령은 그것들을 완벽하게 뿌리부터 치료할 유일한 보물이 었다. 만년한옥 또한 한기를 띤 옥이 만년동안 음기를 삼킨 보물이다. 빙령보다 못하지만 이 역시 보물중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수명을 늘려주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오랫동안 미모를 간직할 수가 있다. 또한 빙령보다는 못하지만 음한기공의 고수에게는 빠른 속도로 내공을 증 진시켜줄 효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설사 음한기공의 고수가 아니고 일반 무림인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더라도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운기행공이 없 어도 저절로 내공을 불려준다. "금소저는 무당파 제자라고 들었어요. 백도 십대절학에 속하는 태극일원공 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무당파의 내공심법은 대부분 현유한 절학으로 유 로 강을 제압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들었어요. 유한 내공심법이라면 빙령은 반드시 그 가치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금소저에게 꼭 전해 주세 요." "알았습니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과분한 선물을 한아름 안고 옥향이 방밖으로 나갔을 때 갑자기 북궁소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만년한옥을 내어 놓은 거지? 하찮은 모란루의 제 자에게 존칭을 하기도 하고.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호감 을 느끼며 뭔가 귀한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북궁소림의 말을 들으며 총관을 부르려던 백소련도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보니 내가 왜 옥향에게 총순찰의 영패를 내어 준거지? 그녀는 모란 루의 제자이니 내 명령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이일이 중대 하다고 해도 그렇게 과분한 상을 내릴 필가 있었을까?) 백소련도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는 금원보 두 덩어리를 상으로 내어줄 생 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옥향을 본 순간 갑자기 그녀에 대한 호감이 치밀어 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보옥귀갑과 함께 총순찰의 영패를 쟁반위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일순간 그렇게 해야 겠다는 충동이 일었었다. 어떤 일이든 계획하에 움직이는 그녀로서는 충동 적인 행동을 한 것이 처음있는 일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본루의 제자라면 능력없는 지위란 오히려 독과 같은 것이 니까. 호감을 일으키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할 수있지. 그리고 나처럼 금혜연도 옥향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녀가 금혜연에게 우리에 대해 설득하는 일이 좀더 쉬워지겠지.) 30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5) 금혜연은 장보옥의 품에서 훌적거리고 있었다. 금혜연이 무작정 백이충을 찾겠다며 나선이래 어쩌는 수없이 그녀와 동행하게 된 장보옥이 그녀의 등 을 토닥거렸다. "혜연아. 이제 그만 울렴." "훌쩍. 어쩜 백가가가 그럴 수가 있죠? 나를 두고 바람을 피다니." "혜연아. 오해하지 말고 내말좀 들어 보겠니?" 장보옥이 조심스럽게 금혜연의 눈물을 딱아주며 말을 이었다. 금혜연이 물 기가 어린 눈으로 장보옥을 바라보자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직 백공자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 여전히 그 를 좋아하고 있지?" "치잇. 그런 바람둥이 따위. 그사이에 넷이나 다른 여자를..." "하지만 말을 들어보면 그는 너를 조강지처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구나. 네가 말한 네명의 여인이 네게 먼저 인사를 하고 아랫사람으로 자처했다고 하지 않느냐?" "저...전 다른 여자의 상전이 될 생각은 없어요. 백가가와 둘이 살고 싶어 요. 다른 여자들과 그를 나눌 생각이 없어요." "그래. 하지만 그 역시 네게 오직 너만이 있다고 말했다지 않니? 그건 그 녀들에게 큰 모욕이야. 즉 그의 마음에 너만이 있다고 그녀들 앞에서 직접 말했는데도 네가 그를 할키고 모욕준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들이 그를 주인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그녀 들을 인정했기 때문에..." "혜연아. 나는 네가 좀더 마음을 넓게 가졌으면 하는구나." "언니." 금혜연은 장보옥이 그런 말을 할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거라. 백공자가 무공에 자질이 없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야. 무장으로서도, 무림인으로서 성공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문관으로 출세하면 되잖아요. 이미 성상께서 한림학사로..." "너는 조정의 권력다툼이 어떤 것인지 진정 모른다는 말이냐? 현재 조정은 세 개의 큰 세력으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하고 있단다. 그 사이에 군부세력 은 서문 대원수를 중점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금혜연이 장보옥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초야에 은거하지 않는한 그가 성공할 길은 문으로서 관리의 길을 가는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백공자가 왜 자신이 유일하게 나갈수 있는 길을 거절했을까? 왜 한림학사같은 유망한 관직을 거절했을 까? 너는 백공자의 마음을 생각해 본적이 있니? 제갈가주를 만났다면 너도 백공자의 사정은 알 텐데?" 금혜연은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제갈도용에게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재 황제를 가장 가까이 모시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학림파. 한림원주를 비롯해 한림원은 동창제독을 수뇌로 한 학림파의 손에 있다. 아무리 과거에 급제한 명문거족의 후예라고 해도 일시에 한림학사로 임명 될 수 있겠니? 그것은 학림파에서 군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백이 충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도용은 백이충이 관직을 거절한 것도 자신으로 인해 서로대장군부가 권력다툼에 말려드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게 그녀들과 무슨 상관이 있죠?" "백공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들을 만났는지는 모르지. 혹은 우연인지도 모르고 그녀들이 맹목적으로 백공자를 따르겠다고 하는지도 모르지. 적어 도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녀들 앞에서 너와 그녀들에 대한 행동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보면 절대로 너를 잊어버리고 그녀들에게 정을 준 것은 아니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좀더 마음을 넓게 가지렴. 지금으로서 백공자가 관직에 오르더라도 이리 저리 이용만 당할 뿐이지. 하지만 그녀들 중에 모란서시가 있다며? 모란루 는 무림계, 상계뿐만 아니라 관계, 황실에도 그 인맥이 넓게 퍼져있단다. 어쩌면 모란후의 인맥을 이용하여 황실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입지를 펴 나갈 수도 있단다. 하지만 무림인인 너로서는 관직에 등용할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지. 이대로라면 백공자는 가문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앞 날을 닫아 놓을 거야." "언니 말은 백가가가 그녀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들을 만났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백공자가 벼슬을 얻으면 그가 서문 대장군부의 이공자인 이상 조정의 권세를 지고 있는 세력이 여기저기서 그를 이용하려 고 하겠지. 그렇다면 모란루가 어느정도 그의 방패막이 될 수가 있다는 소 리야. 더욱이 그녀들은 너에게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지 않니? 네가 진정 백공자를 사랑한다면 좀더 마음이 넓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백 공자가 너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야." "......." "자, 이제 옥향소저를 만나보렴. 그리고 그녀를 따라 백공자를 만나거라. 일단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백공자를 영영 만나지 않을 것은 아니지 않 니? 네가 답답한 마음이 있다면 직접 백공자에게 만나 확실히 하렴. 그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 지금처럼 도망다니지 말고." 장보옥은 금혜연을 다독거렸다. 금혜연이 어느정도 수그러진 기색이 보이 자 그녀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에서는 옥향이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장아가씨. 금소저는?" "걱정말아요. 제가 잘 말해 놨으니. 애가 순진해서 거의 넘어간 상태예요. 들어가서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뭐라고 장아가씨에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천만에요. 오히려 옥향소저께서 주신 과분한 선물에 좀 더 힘을 보태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예요. 들어가세요." 장보옥은 한시빨리 자신의 방안에 들어가서 옥향이 건네준 선물을 보고싶 었다. 은자 백량이 넘는다는 야명주 열알이 들어있는 상자 한갑. 금과 보 석으로 장식된 비녀와 목걸이, 반지등 세트를 이루는 보석 장신구들. 금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최고급 품의 일곱 벌의 궁장. 당대의 귀한 도자 기들과 고서들. 평소 장보옥이 꿈에도 보지못한 귀한 물건들이었다. 물론 이 일이 백이충을 위해서나 금혜연을 위해서도 좋은일이라는 것을 옥향에 게 설득당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해도 이렇듯 열성적 으로 금혜연을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혜연을 설득시켜 모란루로 다시 들여보내후 옥향은 완전히 진이 빠져 축 늘어졌다. 너무 피곤했다. 옥향은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금혜연을 감 동시켰던 것이다. 옥향의 말에 따르면 백이충은 천하에 둘도 없는 열부였다. 금혜연에 대한 사랑은 천하에서 둘도 없는 다정한 것이었고 모란루에 있는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매일같이 시를 쓰고 연가를 쓰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불쌍한 정인이었다. 금혜연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쯤은 초개처럼 버릴수 있는 열렬한 사랑의 포로였다. 진실이야 어떻게 되 었든 여인이 감동할 수 있는 지극의 사랑을 모두 갖춘 남자였다. 그냥 옥 향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또한 네 명의 소저들은 그런 백이충의 사랑에 감동하여 스스로 백이충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갸륵한 소저들이었다. 백이충을 흠모하고 금혜연과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신도 그에 동참하고자 하는 여인들이었다. 옥향은 네 명의 여인들이 얼마나 금혜연을 존경하고 존중하는지, 그래서 백이충과 금 혜연을 같이 모시며 그 마음 한조각이라도 얻고 싶어하는지 사력을 다해 설득하였다. 만약 금혜연이 그녀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백이충은 오직 금 혜연만을 사랑할 것이며 그것은 네 여인들을 비극에 몰아넣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옥향은 말했다. 그나마 마음이 착한 금혜연에게 그녀 때문에 네 여인이 처절한 자결을 하게 만들거라는 은근한 옥향의 말은 협박과 다름없 었다. "후-. 그래도 이해를 못하겠구나. 어째서 금혜연같은 미인이나 루주같으신 분이 그런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에게도 그런 남자가 생길까?" 옥향은 금혜연이 다시 백이충을 만나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믿어 의 심치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설득을 한 이후에 금혜연의 마음은 완전히 풀 어져 백이충과 네 명의 여인을 어느정도 용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생각하면서 옥향은 자신의 이상향을 생각하였다. "그래. 그분이라면...." 문득 옥향은 자신이 꿈에도 그리는 잘생긴 남자 한명을 연상했다. 이름도 내력도 모르는 남자. 단지 모란루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남자였다. 단지 모 란루주도 그를 공대하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아주 높은 청년임을 짐작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잘 생기고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마치 신선처 럼 고고한 귀품이 서려있는 남자. 옥향이 한 눈에 반했을 정도로. "하지만 단 한번 멀리서 보았을 뿐인걸.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옥향은 자신도 루주처럼 권세있고 높은 신분의 여인이 되어 그 남자를 다 시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녀는 피로에 젖어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꿈속은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은은한 은빛을 함유한 은빛 안개는 너 무나 아름다워 오히려 현실성이 없었다. 그 속에 옥향은 어리둥정한 표정 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은은한 안개와 성광. 그것만으로도 옥향은 자신이 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로 확실한 꿈속이었다. 옥향의 앞에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미소 를 띠며 앉아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금혜연이나 모란서시에 비길 정도 였다. 하지만 요요하고 사이로운 아름다움은 그녀를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 신비로운 요사스러움에 옥향은 흠뻑 빠져들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아가씨." "당신은 누구죠? 인간인가요? 혹시 선녀가 아닌가요?" "선녀는 아니지만 인간도 아니랍니다. 그저 아가씨의 소원에 반응하여 아 가씨의 꿈속에 나타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그럼 여기가 진짜 내 꿈속이란 말인가요?" 눈망울을 깜빡거리는 옥향. 그녀는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오형산에 나타 났던 요요태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신기하다는 눈빛 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 소원에 반응하여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제가 어떤 소 원을 빌었다는 거죠?" "아가씨의 소원. 고귀하고 권세있는 신분을 손에 넣는 것. 그리고 연모하 는 정랑과의 인연. 이 두 가지를 소원하신 것 아닌가요?" 마음속에 품고있던 소원을 들키자 옥향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 었다. 단돈 몇푼에 몸이 팔려 그나마 모란루에서 일급기녀로 있는 그녀가 감히 분수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을 들킨 부끄러움이리라. "어...어떻게 아셨죠?" "저는 아가씨의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럼 아가씨의 소원으 그 두 가지뿐인가요? 그렇다면 쉽게 들어줄 수 있겠군요." "정말 가능한가요? 저도 루주님처럼 귀한 신분이 될 수 있나요? 그리고 그 분을 만날 수가 있나요?" "가능하죠. 다만 저도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떤 부탁이죠?" 요요태후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옥향에게 말했다. "제 원신은 아주 무서운 분에게 제압당해 있답니다. 감히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분. 그래서 저는 지옥이 그리울 정도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분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그분이 고통의 굴레를 제게 주셨어요. 그 고통은 부모가 죽는 광경을 본 자식의 고통, 자식이 죽 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고통, 사랑하는 연인을 잃는 고통,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괴로움보다 몇 갑절 큰 마음의 고문이지요. 저는 정말 두렵답니 다. 이제는 매일같이 소멸을 바랄 정도이지요." "아! 그런줄 몰랐어요." "다행히 제 금제의 한 자그마한 부분을 아가씨가 가지고 있군요. 그 금제 만 풀린다고 해도 저는 많이 편안해 질수 있을 것 같아요. 비록 저는 아가 씨의 소원을 어떤 조건도 없이 들어줄 의무가 있지만 부탁드리겠어요. 제 금제의 작은 부분을 풀어주실 수 있겠어요?" "제가 어떡하면 선녀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가 있죠?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평범한 여자에 불과해요." "간단해요. 아가씨 가슴에 달려있는 패물. 그 노리개를 인근의 덕망있는 불사에 가져가 공양하세요. 부처님의 불상앞에 노리개를 바치고 진심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세요. 그럼 제 금제의 일부분이 풀립니다." "그럼 되나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실행하 겠어요." 요요태후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눈빛을 담아 옥향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의 친절에 감사해요. 제 원신이 비록 자유스럽게 풀리지는 못하겠 지만 그 고통은 훨씬 줄어들을 것이예요. 그리고 아가씨의 소원은 이루어 질 거예요." 요요태후는 미소를 띠고 옥향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아가씨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세 가지 충고를 하겠어요. 가까운 길을 멀 리하고 먼 길을 택하세요. 값진 것보다 흔한 것을 택하세요. 얼굴을 보지 말고 발밑을 보세요. 이 세가지를 명심하세요." "옛? 그게 무슨 소리예요? 쉽게 말씀좀 해 주세요." "가까운 시일내에 이 세가지 선택을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제말을 다 시한번 상기하고 명심하세요. 그럼 아가씨의 두가지 소원이 이루어 질 거 예요. 그리고 제 부탁 꼭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선녀님." 옥향은 애타게 요요태후를 불렀지만 그녀의 모습이 안개속으로 녹아들 듯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옥향은 놀라면서도 그녀가 남긴 이상한 말의 뜻을 알기 위해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했다. 다급히 그녀를 부르는 가운데 그녀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주위는 어두운 자신의 방안이었고 그녀는 침 상위에 누워 있었다. "꿈이었나?" 한동안 멍하니 있던 옥향은 자기도 모르게 꿈속에 요요태후가 들려주었던 세가지 말을 되뇌이었다. "가까운 길을 멀리하고 먼 길을 택하라고? 값진 것보다 흔한 것을 택하라 고? 얼굴을 보지말고 발밑을 보라고? 어떤 비유일까? 인생의 지침으로 삼 으라는 마음가짐을 알리는 말인가? 정말 알수가 없네." 옥향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달린 패물을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행운을 부르는 노리개인거니?" 31 현황방을 삼키다(1) 현황방은 이십년 전에 태어난 방파이다. 정사의 중간 방파이며 그 세력은 구대문파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따지자면 그 근본은 무림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가 없다. 대륙전장연합, 남해해상무역회, 남북표국의결체, 중소상인연합 등등. 거대 상권의 주인들이 연합하여 그들의 재산을 보호라기 위한 호위무사 격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현황방이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상인이라는 것들, 특히나 돈이 많다고 소문난 거상만큼 불쌍 한 것이 없다. 썩을 관리처럼 권세를 통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부를 이룬 것도 아니고, 강도처럼 남의 것을 강탈하여 거부행세를 하는 것도 아 니다. 명문거족처럼 물려받은 땅으로 소작농을 닥달하는 대지주도 아니다. 땀과 노력, 약간의 비리와 운이 겹쳐 이루어낸 부를 보며 흐뭇해 하는 것 이 상인들이다. 그런데 약간이라도 돈이 많다고 소문이 나면 날파리처럼 여기저기서 돈을 뜯으려고 몰려드는 것이 또한 거상들의 신세이다. 비록 약간의 절세를 위해 머리를 굴리기는 하지만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데 도 온갖 명목으로 수탈하려는 관리들에게 뇌물로 상납금을 바쳐야 하는 것 은 물론 친척이다, 무슨 종교단체다, 어디 후원금을 내놔라, 불쌍한 백성들 을 위해 기부해라, 온갖 수단과 명목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으려는 작자들 이 귀찮게 한다. 열심히 일한 댓가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 일반 백성들에게 손라각질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온갖 명목에서 하나라도 소홀히하면 그대로 수전노로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또한 상인이다. 그 뿐이랴? 관에서 뜯어가고 세상의 이목을 위해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위 해 뜯긴 이후에도 돈이 나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 물품을 사고파는 상인에 게 있어서 그들의 부를 노리는 도적이 지천으로 깔린 것이 지금의 세상. 육로로 가면 산적이 노리고 수로로 가면 수적이 노린다. 이제는 녹림채니 수로채니 하면서 아예 정기적으로 뜯어가는 게 관례로 굳어져 있을 정도이 다. 무역으로 넘어가면 사막에는 마적이 있고 해상에는 해적이 있다. 참으 로 힘든 세상이다. 지역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으면 또 그 부근의 관리 외에도 암흑속의 상전, 토착세력의 건달에게 돈을 뜯겨야 한다. 또 강도가 심심치 않게 집안으로 들어와 돈을 강탈하려 한다. 돈을 모았다가 목숨마저 위험하게 된 상황이 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도 경호무사라고 거상들은 열심히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 한다. 무사들을 모으고, 상품들은 표국에 맡기고, 도적들에게는 통행세를 바친다. 돈이 조금 나가더라도 몽땅 털려 알거지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이것도 무림세력이 등장하면 말짱 황이다. 사도나 마도, 흔히 흑도라고 불리우는 거파가 사업체 근방에 있으면 수익 의 반이상 뜯기는 것은 여반장이다. 반항했다가는 통째로 사업이 망하고 목이 달아나고 재산은 모조리 강탈당해 흑도세력에 압류당한다. 관도 두려 워하지 않는 날강도이다. 모집한 경호무사로는 대항할 엄두도 못낸다. 그 저 많은 뇌물을 바치고 봐달라고 할 수밖에. 정도도 마찬가지이다. 흑도에 비해 좀더 명분을 찾을 뿐이다. 사업체 근방 에 정도의 문파가 있으면 기부금조로 자진해서 헌납해야 한다. 도가나 불 가의 문파가 있으면 시주나 헌금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수많은 그 들 문파의 속가제자들의 눈초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나마 그렇게 헌금으 로 돈을 뜯어가는 문파는 그나마 낫다. 세가라 불리우는 정도의 무림세력 은 아예 대놓고 상권에 뛰어들어 칼과 주판을 양손에 들고 위협한다. 망하지 않으려면 그들 세력에 고개를 숙이고 억울하더라도 상전으로 받들 어야 한다. 그들 세가의 권역안에서 상권의 독립을 꽤했다가는 그대로 적 으로 간주되어 온갖 위협속에 생존을 보호받을 수가 없다. 이토록 억울한 것이 상인들, 거상들의 삶이었다. 이런 삶이 수천년이 지났 어도 변한 것은 없다. 그런대로 그들 보호 속에 번영을 이루기도 했고 때 로는 타협을 하기도 했고 이용하기도 했으며, 어떤때는 오히려 금력을 통 해 무림세력을 위협하기도 하며 상인들은 그렇게 존속해왔다. 상인들의 장 기는 바로 거래와 흥정이고, 그 방면에서는 무림세력보다 한단계 위의 실 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방적인 먹이사슬에서 그나마 오히려 그들을 이용 하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상인들의 관념과 관례가 완전히 박살났던 것이 혈천마궁의 지배시 절이었다. 다른 마도세력이 천하를 주름잡거나 과거 천년마교가 천하를 지 배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혈천마궁의 상인에 대한 지배방침은 단 하 나였다. 몰수와 압수. 반항자는 사형. 그 짧지 않는 시간동안 거부들은 모조리 그 재산들을 압수당하고 가산을 바쳐야 했다. 이유도 명분도 필요 없었다.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모든 재산을 바친 후에 얼머전까지 자신들의 업체였던 곳에서 그들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기계가 되어야 했다. 거부하면 모조리 죽어야 했다. 황실도 무림 의 정도문파도 대항하지 못했던 혈천마궁에 상계가 대항할리 없었다. 혈천 마궁시절 상계의 칠할 정도가 고사했으니 그 피해가 얼마나 막심했는지 알 수 있다. 혈천마궁이 사라진후 살아남은 상계의 인사들이 모조리 모였다. 더 이상 무림세력에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고 쓸모없는지 절실하게 느낀 이후였다. 그후 그들은 모든 재력을 하나로 모아 현황방을 만들었다. 그것이 현황방의 시초였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흑도의 고수가 대거 현 황방으로 몰려들었다. 돈을 좋아하는 흑도의 거두들, 재물이 쌓이고 쌓이 는 현황방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흑도의 거마들도 몰려들었다. 하지만 돈으로 움직이는 흑도의 인물들만 몰려든 것이 아니었다. 거상들은 표국을 그들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다. 표국에는 명문거파의 속가 제자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고 그들중에서도 많은 수가 현황방에 가입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연줄을 통해 수많은 정대문파의 제자들이 현황방에 소속되었다. 거상들의 자제들도 명문대파에 제자로 들어가며 동시에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면 자동적으로 현황방에 가입하였다. 그렇게 현황방은 흑 도와 백도의 고수들이 자연적으로 하나가 된 기묘한 단체였다. 처음에 현황방은 단지 상계의 원로들이 상계를 지키기 위해 만들은 단체에 불과했다. 하나 이십년이 지나며 현황방은 백도맹도 무시할 수 없는 거파 로 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분명 상계의 하부세력이면서도 동시에 상계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세력이 되었다. 무림의 세력이 아니면서도 무 림의 어느 거파보다 세력이 강하고 상계의 하부세력이면서도 천하십대거상 의 한자리에 현황방주가 끼일수 있게 된 엄청난 세력. 그것이 현황방이었 다. “현황방을 장악해라.” 그 명령을 듣고 현황방의 세력권으로 접어든 자는 만승패검 오형록이라는 혈무영 십대영주의 한사람이었다. 철저하게 혈존에 대한 충성으로 세뇌된 오형록에게서 그 가능성같은 것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주어진 명령 은 어떠한 불가능도 실현시킨다는 불굴의 의지가 그의 마음속에 주어져 있 었다. 오형록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마도의 최고 절예중의 하나가 마검문의 천지마검류. 혈무영에서 짧은 시간내에 그 성취를 이루도록 천지마검류를 변형시킨 혈검류의 검법을 완벽하게 익힌 자가 바로 오형록이었다. 또한 그는 쌍노중에 사마의 사대 혈손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배교의 기이한 사공도 어느정도 익히고 있었다. 그는 현천방의 총단이 있는 광동성에 이르기 전에 그 초입에 있는 보살암 라는 암자로 향하고 있었다. 비구니들이 모인 보살암은 광동성에서 제법 유명한 절로써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이 있 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모란루의 총순찰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야밤 삼경에 그의 신형이 보살암의 암자에 스며들었다. 입구까지는 들어갈 수 있으나 본당은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보살암. 그곳에 불상을 앞에 놓고 절을 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 모습은 경건하기 이를데 없어 일견 성스럽기 까지 했다. (저 여인이 모란루의 총순찰?) 오형록은 여인의 뒷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말을 붙이지 못 하고 그녀의 자태를 감상했다. 그가 보아온 미인들보다는 못하지만 어딘가 묘한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모란루의 지배계급을 보면 루주 모란서시를 제외하고 그 수뇌급은 대부분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 비록 모란루의 내공 심법의 특성상 젊게 보이지만. 하지만 오형록은 모란후의 총순찰이 실제로 어린 소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수 있었다. “으흠. 모란루에서 오셨소?” 약속장소와 시간, 불상에 절하는 만나기로 한 행동, 게다가 신분을 확실히 하기위해 모란루 특유의 향을 몸에 뿌린 여인은 분명한 모란루의 총순찰이 다. 그의 기척에 그제서야 모란루의 총순찰은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형록을 보며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이 기척없이 다가왔기에 놀랐다고 생각한 오형록은 그녀를 향해 사과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내가 총순찰과 만나기로 한 만승패검이오. 만나게 되어 반갑소.” “아, 죄송합니다. 아시는 분을 만나 놀랐기에...” “아는....? 제가 소저를 전에 만난 적이 있었소?” “아닙니다. 루주와 함께 계시는 것을 멀리서 한번 뵌적이 있습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구려. 모란루에 잠시 머물렀으니 그럴수도 있었겠군.” “장소를 옮기시도록 하지요. 제가 영주께 보고드릴것이 있습니다.” “알았소.” 오형록을 뒤로 하고 몸을 돌리는 소녀의 두 눈에는 희열의 빛이 가득했다. (그.... 그분이야. 꿈에서 뵙던 그분. 진정 노리개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가 봐. 내가 노리개를 받고 모란루의 총순찰에 갑자기 임명되지 않았다면 이 분을 다시 만나지도 못했겠지?) 오형록은 모란루가 조사한 내용을 읽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황방의 세대교체가 있다고?” “예. 그래서 이번에 영주께서 현황방 사방주의 추천으로 대방주 선출의 경 합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현황방을 접수하는 대신 조용히 접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군. 하지만 외인인 내가 현황방 대방주의 선출에 끼이는 것이 그리 용이하겠소?” “현황방 사방주의 부인은 저희 모란루 출신입니다. 부인이 죽은 후 현황방 사방주는 그녀를 첩에서 부인으로 승격시켰고 그 애정이 대단합니다. 그는 야망이 없어 대방주의 경합에 나갈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 고 있습니다. 영주께서는 그녀의 조카자격으로 사방주의 후예로 나가실 것 입니다. 이미 완벽한 신분위장은 되어 있습니다.” 현황방의 세대교체는 백리세가와의 분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화타의 일 로부터 현황방과 백리세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겪어왔다. 비록 백도맹이 그 진상을 알아낸 이후 두 세력간의 오해는 풀렸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 렇지 않은 것. 서로 적대하던 세력간에 빠르게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황방의 총단이 광동에 있지만 그들이 보호하는 상인들은 대륙 전체에 퍼 져있다. 한지방의 패주인 백리세가와 언제까지나 관계가 악화되어서는 상 인들로서도 좋을 일이 없었다. 서로에게 진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 해로 밝혀진 이상 불편한 관계는 빨리 해소하는 것이 좋았다. 백리세가가 천하를 주름잡는 오대세가의 하나이며 그 가주를 바꿀수 없는 이상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먼저 허리를 굽힐 수 있는 것은 당연 한 일이다. 그래서 상계의 거상들이 의논하여 결정된 일이 여태까지 백리 세가를 적대하던 현황방의 대방주 현황군자를 비롯한 세력을 퇴진시키고 새로 현황방의 대방주를 선출하여 백리세가에 화해의 손을 내민다는 것이 었다. 실로 상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무림세력 현황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현황방은 십대방주에 의해 움직인다. 십대방주는 모두 무림 거상들을 배후 에 두고 있다. 하지만 방의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대방주이다. 대방주의 힘은 현황방을 좌지우지하며 동시에 천하 십대거상의 한자리를 자동적으로 차지하게 되는 중요한 자리이다. 퇴진하는 대방주 현황군자도 별 불만이 없었다. 그는 무림 십대거상중의 하나인 금황벌의 주인이기도 했기에 퇴진을 한다고 해도 배후에서 현황방 의 막후실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다음대의 현황방 대방주의 후보는 그의 아들인 현황제갈이다. 오히려 상계를 생각하여 대방 주의 세대교체를 제안한 자가 바로 현황군자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현황방 대방주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현황방 십대방주이거나 그들 의 추천을 받은 자로서 신분이 보장된 자들이다. 현재는 세명이 후보로 올 라있다. 현황제갈. 황금수, 사해태자. 현황제갈은 대방주 현황군자의 아들이다. 또한 현황방의 배후세력인 금황 벌의 소주인이기도 하다. 그는 화산파 제자로 무림칠룡에 못지않은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나 있고 금황벌의 지지를 뒤에 업은 가장 강력한 대방 주의 후계자이다. 황금수는 현황방의 이방주였다. 현황군자와 쌍두마차를 이루며 현황방을 이끄는 자이기도 했다. 천하의 지하상계를 대표하는 흑림의 림주의 아우이 기도 한 그는 현황방에서 이룬 막강한 세력을 배경으로 대방주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해태자는 현황방 칠방주의 제자이다. 그는 칠방주, 팔방주, 구방주, 십방 주등 네 명의 방주의 추천을 등에 업고 있다. 그의 출신은 천하십대거상이 자 해상무역을 주류로 하는 해상벌의 소벌주이며 해남검파의 제자이기도 하다. 해왕군도의 멸망이후 무림과 상계라는 양 측면에서 해남검파와 해상 벌은 남해를 지배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나머지 네명의 방주는 중립이다. 그들은 야심이 없어 대방주의 경합을 포 기한지 오래이다. 하지만 사방주의 부인으로 들어간 모란루의 개입으로 만 승패검을 이 경합에 끼어들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현황방의 인사권은 묘하다. 즉 현황방의 방주들 이하의 신분의 인사권은 오직 그 윗 신분. 그리고 현황방 안에서 이루어진다. 현황방 장로나 원로 들도 마찬가지이다. 상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현황방에 투신하는 자들도 상계의 배경이 없다고 해도 현황방을 움직이는 중추로 올라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실지로 현황방을 움직이는 열명 방주의 신분이상이면 차원이 틀리 다. 현황방 내에서 올라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반드시 현황방의 배후인 거 상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천하십대거상의 배후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 이 현황방주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현황방에서도 열명 방주자리가 비 워지면 그 후임으로 현황방 수뇌중에서도 상계의 후예중에 거상을 배경으 로 둔 거물을 방주자리에 추천한다. 상계의 십대거상 중에서는 현황방주에 자신들의 후예를 앉히려고 암암리에 치열한 경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애초에 현황방 안에서 거론될 수조차 없는 자리가 현황방주 자리이다. 특히나 현황방 대방주의 자리는 더욱 그렇다. 현황방 대방주의 자리는 추 천이 아니라 십대방주나 그들의 추천을 받은 자의 경합으로 이루어진다. 현황방주들이 대부분 천하십대거상들과 관련이 있는 만큼 그것은 거상들의 힘겨루기와 같다. 그리고 모든 시험끝에 십대거상을 포함한 일백의 상계원 로들의 인정을 가장 많이 받은 자가 다음대의 현황방 대방주가 되는 것이 다. “나는 신비에 쌓인 은표전장의 장주자격으로 그 신분을 확정받아 현황방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은표전장이 그 정체를 감추느라고 대륙전장연합의 십위권에도 들어가지 못하지만 엄연히 연합의 일원입니다. 현황방의 대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격과 무위를 시험하기 위해 현황오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대륙전장연합 을 배후에 두고있는 현황방 오방주는 자신의 능력을 알기에 경합을 포기했 을 뿐, 상계에서는 막강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락되어 있는 현황방 내의 대륙전장연합의 위치에 울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주께서 사방주의 추천 을 받아 현황오관을 통과하신다면 오방주 또한 영주를 지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가는 점이 있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어차피 대방주의 선출은 천하십대거상들이 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면 현황방 방주들의 지지를 얻는 것보다는 거상들을 포섭해야 하는 것이 아니 오?” “현재 상계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천하제일거부이며 천하십대거상의 수좌 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도기연입니다. 상계 일백원로의 반 이상이 그의 마 음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여태까지 스스로 현황방의 방주를 추천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현황방을 잘 이끌어 나갈수 있는 자라고 생각 되면 현황방의 추천을 모두 인정합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다른 십대거상의 경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대거상 중에서 네 명의 지지를 받는 사해태자가 가장 유력한 것이 아니오?” “그렇지도 않습니다. 십대거상으로 따지자면 네 명의 지지를 사해태자가 받고 있지만 현황제갈의 배후인 금황벌이나 황금수의 흑림이 장악하고 있 는 상계의 세력은 그들 네 명과 맞먹습니다. 즉 백명의 상계원로들의 장악 력은 상황이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가정할 때 비슷한 편입니다. 따라 서 승부는 현황방에 대한 기여도로 결정날 것입니다. 현황군자는 자신이 대방주로 있는 동안의 기여도를 믿고 자신의 아들을 내세운 것이고 황금수 는 지난 이십년간 이룬 현황방의 자신의 세력을, 사해태자는 사해방주들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형록은 잠시 자신의 머리에서 상계와 현황방의 세력분포도를 그리며 모 란루의 총순찰에게 물었다. 현재 천하십대거상은 상황의 세력이 지고무상 의 위치에 있고 흑림주와 황금벌주가 그 다음의 위치를, 대륙전장연합주와 남북표국의결체주가 중간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남해해상무역회주, 지방중 소상인연합회주, 국외무역상단주, 지방호족거부단합회주가 넷이 합쳐 흑림 주나 황금벌주와 비슷한 상계의 위치를 그리고 현황방주가 마지막 십대거 상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영주께서는 사방주와 오방주의 지지를 얻은면 남은 삼방주와 육방주를 포 섭하십시오. 남북표국의결체주와 대륙전장연합의 지지를 받으면 상계에서 의 영향력은 다른 셋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삼방주와 육방주 는 상황만을 받들면서도 천하 십대거상에 모두 호감을 받을 만큼 현황방을 위해 일한 충신입니다. 그들을 끌어들이신다면 현황방에서의 세력확보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머지는 영주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알았소. 그럼 현황방의 총단이 있는 곳으로 출발합시다.” 32 현황방을 삼키다(2) 관동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를 꼽으라면 영웅루를 들수 있다. 영웅루는 사 람들이 투숙할수 있는 객점과 음식점, 주루와 도박장 그리고 기녀들이 있 는 기루를 한꺼번에 갖춘 곳이었다. 영웅루에서 일하는 사람들만도 그 숫 자가 삼백여 명에 이르고 미색을 갖춘 기녀만도 오십명이 넘는 광동 제일 의 기루가 바로 영웅루였다. 영웅루는 모란루의 분타였다. 이렇듯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란루는 천하 각지에 비밀스런 분타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 현황방 사방주인 칠절신필의 부인은 비밀스럽게 옥향과 만승패검과의 만남을 가졌다. 모란루 출신의 부인 이름은 서화련. 칠절신필과의 나이차이는 무려 사십여 세나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가 모란루에 들렸을 때 서로가 마음에 들어 첩의 신분을 마다하지 않고 그에게 시집간 것이 십삼년 전의 일이다. 칠절 신필의 본부인이 살아있을 때에는 온갖 구박을 받아 지성으로 남편과 본부 인, 그리고 본부인의 딸들을 부모나 주인처럼 섬겼다. 그것이 더욱 칠절신 필의 사랑을 받아 본부인이 병환으로 죽자 바로 곁으로 불러들여 정부인으 로 삼았고 칠절신필의 두 딸도 그녀를 친모친처럼 섬겼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현황방의 사방주의 부인신분이지만 서부인의 신분은 모란루에서 옥향의 아래였다. 당연히 옥향이 받드는 만승패검 오형록은 서 부인의 상전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위해 오형록은 서부인의 조카가 되 어야 했다. 그녀 역시 옥향처럼 어릴 때 팔려와 모란루에서 교육받으며 자라났고 칠절 신필을 만난지라 모란루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찼다. 서부인은 모란 루를 고향처럼 혹은 친정처럼 여겼기에 기꺼이 모란루의 명을 받들었다. 모란루 출신의 여인들의 모두 그렇게 모란루에 고마워하고 있었고 그 은혜 를 잊지 않고 있었기에 서로간의 단합이나 모란루에 대한 충성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단단했다. 하물며 오형록이 그녀의 조카를 위장하여 현황방 의 대방주가 되기라도 한다면 그 영향이 남편에게 끼칠 것이므로 그녀와 그녀 남편인 칠절신필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있었지, 나쁘게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만승패검을 현황방의 대방주로 추천하느냐, 아니 냐는 오직 남편에게 달린 일이었다. 서부인은 들뜬 안색으로 자신의 남편에게 자신의 조카가 사업상 광동성에 들렸다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칠절신필은 처음 듣는 부 인의 가족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아내가 모란루 출신인줄 은 알았지만 가족관계는 전혀 없는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서부인은 감히 어릴 때 헤어진 오빠에 관한 이야기로 감히 남편의 근심을 더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고 칠절신필은 부인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깊히 반성 했다. 영웅루에서 만난 만승패검 오형록과 칠절신필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칠절신필은 처음만난 처조카가 썩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처조카를 자신 이 거둬 그동안 무관심했던 부인의 마음을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이미 처조 카가 일가를 이뤄 은표전장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칠절신필은 남북표국의결체주인 복성표국의 국주 은하성검의 의동생이며 그 자신도 한때 칠성표국이라는 사업체를 경영한 경험이 있었다. 의형의 명을 받들어 현황방에 투신했지만 현황방이 상계와 깊은 관계가 있는 만큼 그도 은표전장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조카가 더욱 마 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그를 초대했으며 광동성에 머무는 동안 현황방에 머물 것을 요청했다. 이제 칠절신필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황방에 들어가 대방주의 선출에 추천을 받는 것은 모두 오형록이 하기 나름이었 다. “하. 제발 그분이 하시는 일이 모두 잘되기를.” 옥향은 영웅루에서 오형록을 위해 달님을 향해 기도했다. 그녀는 오형록과 의 연락을 맡기위해 임시로 영웅루의 루주로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직 접적인 영웅루의 경영보다는 오형록과 모란루의 연결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것도 그녀가 모란루의 총순찰이라는 지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주님. 서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웅루의 뒤뜰에서 기도하던 옥향을 찾아 그녀의 시비가 입을 열었다. “또 오셨는가? 그분의 소식을 가지고 오신 것일까? 알았다. 항상 찾으시는 그곳으로 모시고 곧 간다고 알려라.” 서부인은 모란루에 대한 향수가 그득했다. 그녀는 모란루 출신인 옥향과 친해졌으며 요즘 모란루의 소식에 대해 궁금해했다. 모란루 출신인 옥향이 마음에 든 것은 물론이다. 서로간의 신분관계를 떠나 그녀는 옥향을 찾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남편이 오형록과 현황방에서 시간을 보내 는 사이에 영웅루를 찾아 옥향을 만나기를 즐겨했다. “그런데 그분 혼자가 아닙니다. 서부인의 두 따님이 같이 오셨습니다.” 서부인의 두딸은 칠절신필의 전부인의 딸들이다. 아직까지 서부인에게는 칠절신필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어릴때부터 두 딸을 친딸처럼 여기며 보살폈기에 두딸의 서부인에 대한 태도는 생모와 다름없는 친밀한 관계였다. 서부인이 요즘 부쩍 영웅루를 찾으며 옥향을 만나 즐거워하기에 두딸도 호기심이 생겨 그녀를 따라왔던 것이다. “서부인. 오셨습니까?” “어서오세요. 루주. 오늘은 두 딸과 같이 왔답니다.” 옥향이 들어오자 서부인은 크게 반색했다. 서부인이 인사를 하자 두 딸도 일어나 옥향에게 인사를 했다. 서로를 만나는 순간 양측은 서로에게 감탄 했다. 칠절신필의 두 딸은 현황방의 재녀라고 불릴만치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여인들이었다. 현재 대방주의 선출에 중립을 지키고 있는 칠절신필 의 첫째 딸 옥정은 현황제갈과 약혼한 상태이며 그 아름다움과 총명이 대 단했다. 둘째딸 옥연은 병약하여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나 창백한 얼굴이 가련한 느낌이 들어 절로 보호본능을 느끼게 하는 미인이었다. 옥향 또한 원래 모란루의 일급기녀로 있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 고 있었고 요요경의 조각이 박힌 노리개를 지녔던 이후로 그 미모는 더욱 활짝 피었다. 요즘은 만년한옥의 도움과 사랑에 빠진 여인 특유의 사랑스 러움이 더해지고 신분상승으로 인한 자신감까지 어울려 어느 여협보다 당 당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뿜어대고 있었다. 서부인의 두 딸은 옥향을 본 순간 그대로 의기투합했다. 옥향에게는 성이 없지만 두 처녀의 중간이름에도 옥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옥정과 옥연 은 옥향과 의자매를 맺고 싶어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네 여인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열중했고 주흥에 빠져들었다. 서부인은 노래 를 불렀고 첫째 딸 옥정은 시를 읊었다. 옥향은 서부인의 노래에 맞춰 춤 을 추었으며 둘째딸 옥연은 흠모의 눈빛으로 옥향을 바라보았다. “아앗.”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런 신음을 발하며 음식상에 쓰러진 것은 옥 연이었다. 그녀가 쓰러지자 당황한 것은 옥향이었다. 하지만 서부인과 옥 정은 놀란 얼굴을 했을 뿐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동생의 지병이 발작한 것입니다.” 옥정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 든 병에서 단환을 꺼내 옥연에게 먹 였다. 옥정은 잠시 힘든 숨소리를 내다가 곧 잠이 들어 조용해 졌다. 옥정 과 서부인은 옥향을 안심시키고 옥정을 눕혔다. “너무 무리했던 모양이군요. 즐거운 나머지 옥연이 쉬어야 할 시간을 잊은 저희의 잘못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옥연아가씨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여쭤봐도...?” “세상에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오음절맥이라는 것이지요. 치료할 길이 없 는. 이제는 일년도 안 남았어요. 옥정이 살아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옥정이 담담하게 말했고 서부인은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으며 울었다. “오음절맥은 고칠 수가 없는 병인가요?” “현황방과 상계의 연줄을 생각하면 천하의 모든 의원을 동원할 수가 있어 요. 하지만 천하 어디에도 그녀를 완치시킬 의원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어 요. 전설의 빙정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빙정? 아! 그 하얗고 싸늘한...” 옥향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빙정을 떠올렸다. 북해빙화 북궁소림 의 부탁에 따라 금혜연에게 가져다주었지 않는가? “혹시 빙정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나요?” 옥향이 아는체 하자 옥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여태까지 의원을 통해 빙정 을 알게된후 천하를 뒤졌지만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드믈었던 것이다. 하 지만 옥향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금혜연과 백이충에 관한 일은 철저한 비 밀이었다. 현황방의 일보다 더욱 중대한 비밀이었다. 빙정에 관한 것도 금 혜연이 관련되어 있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아니예요. 단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서.” “그렇군요. 하기는 책속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봤다는 사람은 하나 도 없으니 실지로 있는지조차 의심스런 물건이죠.” 옥정의 얼굴에 실망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하기야 전설의 빙정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겠는가? 그녀는 옥향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시비 들을 시켜 돌아갈 차비를 차리려고 했다. 그때 옥향은 빙정과 함께 북궁소 림에게서 받은 만년한옥이 생각났다. “혹시 만년한옥은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빙정만큼 효력은 없지만 치료에 꼭 필요하지요. 빙정이 있으면 완치될수 있지만 만년한옥이 있으면 완치할 수는 없기에 평생 병약한 몸을 지니고 있다해도 장수를 누릴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빙정만큼이나 만년한옥 또 한 전설속의 물건이니 그 행방을 누가 알겠어요?” “제게 있어요.” 옥향은 기쁜 듯이 말했고 옥정과 서부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동 안 빙정과 만년한옥을 찾아 얼마나 수소문했던가? 이제는 거의 포기단계에 있는데 갑작스럽게 만년한옥이 나타나다니. 어리벙벙한 두 모녀에게 미소 를 지으며 옥향은 품속에서 만년한옥을 꺼냈다. “이...이것은 진짜 만년한옥.” “저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예요. 보잘 것 없는 저를 친자매처럼 여겨주신 두 분에게나 딸처럼 여겨주신 서부인에 대한 선물이예요. 받으세요.” “이런 귀한 것을....” “사양하지 마세요.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되는 것이 옳아요. 저를 남처럼 여기시지 않는다면 받으세요.” 서부인과 옥정은 눈물이 주루륵 흘러나왔다. 옥정은 떨리는 손으로 옥향에 게 만년한옥을 받았다. “옥향언니. 염치없지만 감히 받겠어요. 앞으로 소녀는 언니를 친언니처럼 여기고 반드시 보답을...흑흑.” 옥정은 감정이 격해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서부인도 옥정과 옥 연을 안고 함께 울었다. 옥향은 미소를 띠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부인과 두 자매가 돌아간뒤 사흘이 지났다. 칠절신필이 직접 그녀를 찾 아와 허리를 굽히며 은혜에 감사했다. 옥연의 병이 눈에 뜨이게 나아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극구 사양하는 데도 불구하고 칠절신필은 그녀에 게 선물을 내밀었다. “만년한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물건이오. 만년한옥처럼 전설상의 물건 도 아니고 돈만 있으면 흔히 구할수 있는 천년영지입니다. 하지만 여인이 이를 복용하면 미모가 아름다워지고 젊음을 간직할 수 있다고 하니 만년한 옥의 기능 중에서 작은 것이나마 보충할 수 있다오.” 칠절신필의 말처럼 작은 성의가 아니었다. 물론 만년한옥에 비할 수는 없 지만 천년영지 또한 그 가치가 만금을 상회하는 물건으로 몇 십년에 한번 발견될까 말까하는 귀한 영약이므로 인연이 닿지 않으면 구할래야 구할 수 가 없는 물건이었다. 딸의 수명을 영약으로 연명하기 위해 의형에게 부탁 하여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딸의 병이 차도가 있으니 대신하여 옥향에게 선물한 것이다. 옥향은 극구 사양했으나 칠절신필은 억지로 떠맡기듯 천년 영지를 남기고 돌아갔다. 천년영지의 사용용도에 대해 모란루로 소식을 넣어 물어봤다. 허나 모란루 주는 천년영지는 옥향의 개인 소지품인 만년한옥과 바꾼 것이니 스스로의 뜻대로 처리하라는 연락만이 왔을 뿐이다. 그후 서부인과 두 딸만이 아니 라 칠절신필 또한 영웅루에 자주들러 옥향을 만나러 오게 되었으니 양측의 관계는 가족과 다름없이 변했다. 그 와중에 칠절신필과 서부인은 만승패검 에 대한 옥향의 작은 연정을 눈치채고 말았다. 은근히 그를 둘째 딸의 사 위감으로 생각하던 칠절신필은 입맛이 썻으나 깨끗하게 단념하고 두 남녀 의 인연을 이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상계를 지배하는 상황에게는 칠십평생을 같이한 부인이 있었다. 오대독자 에다가 후손이 없는 상황에게는 그의 부인이 유일한 벗이요, 인생의 동반 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조카들을 친 자식처럼 여기고 돌봐주고 있었다. 요선 동부용은 상황의 처조카였다. 한때 그 미모로 수많은 청혼자를 데리 고 다니며 엄청난 무공으로 강호를 휩쓸었던 그녀가 현황방에 투신하여 있 었다. 그녀는 천년마교 팔대호법 출신의 유명한 여마 소수마녀의 제자가 되는 기연을 얻어 고강한 무공을 얻게 되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상황 의 연줄로 인하여 현황방에 몸을 담았다. 그녀의 독날한 성품과 무공은 그 어떤 자도 감히 얕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무림에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방내에서도 지위가 승승 장구하여 그녀를 현황방의 삼방주로 만들었다. 허나 여자인 그녀는 현황방 에 대한 권력의 욕심보다는 무공과 미모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지대할 뿐이 었다. “옥정아. 옥연의 몸이 나았다며?” 동부용이 친분도 없는 옥정을 찾아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겉 으로는 축하한다는 표정을 가득짓고 옥정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옥정은 자신의 연인인 현황제갈과 함께있는 상태였다. “예. 삼방주님.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동생의 몸이 많이 나았습 니다. 이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애는. 언니라고 불러. 우리 사이에 무슨 방주야?” 겉보기에 얼굴만 따지자면 언니동생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동부용 의 얼굴은 겨우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실제 나이는 오 십에 가까웠다. 나이가 삼십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다 언제부터 친해졌다 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는지 몰라도 은근슬쩍 아부를 하는 동부용의 표정 에 옥정은 동부용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그게 말이야.....” 동부용은 현황제갈을 보며 말을 꺼렸다. 하지만 상황을 배후에 두고있는데 다 배분도 높은 동부용에 대해 현황제갈도 꺼리는 눈치인지 곧 옥정에게 눈짓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마음속에 있던 말을 동부용은 바로 털 어놓았다. “그거 있잖아. 옥연이 복용시키기로 했던 천년영지. 그거 혹시 옥연에게 벌써 먹였니?” “아, 백부님이 보내주신 것이 도착하기 전에 만년한옥을 얻어 복용시키지 않았습니다.” 순간 요선 동부용의 눈빛이 별빛처럼 초롱초롱 해졌다. “그거 말이야. 만년한옥이 있으니 더 이상 옥연에게는 필요가 없겠지? 혹 시 나에게 줄 수 없을까?” “옥연에게 필요없기는 하지만....”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니야. 내 무공비급이든 뭐든 달라는 대로 다 줄게. 고모부에게 말해서 네 연인을 현황방주로 만들어 줄까? 뭐든지 말만 해.” 요선 동부용의 얼굴에는 갈망의 빛이 가득했다. 아무리 주안술이 뛰어나다 해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녀의 얼굴에 잔주름이 자꾸 발견되는 시기였 다. 천년영지는 꿀과 함께 갈아서 피부로 흡수시킨다면 젊음을 되찾는데 최고의 효능을 자랑하는 만큼 동부용에게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근 백년 이내에 나타난 천년영지는 칠절신필의 손에 들어간 것이 유일했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동부용은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게 없습니다.” “뭐? 옥연에게 먹이지 않았다며?” “만년한옥을 준 영웅루주에게 감사의 보답으로 선물로 주었어요.” “영웅루주라고? 알았어. 천년영지가 없어지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 겠군, 옥정아.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보자.” 옥정은 옥향에게 동부용에 관한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 다가 그녀가 옥향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곧 잊어버리고 말 았다. 영웅루는 다복합 사업체인만큼 남자들만이 찾는 곳은 아니다. 여인들끼리 방을 빌려 연회를 가지는 일도 심심치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그 주 손님은 남자들이다. 특히나 루주의 신분을 가진 옥향이 직접 접대해야 할 사람은 남자중에서도 극히 드물며 게다가 여자 중에서는 더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현황방의 삼방주라면 영웅루에서도 보기드믄 귀한 손님이다. 현황 방이 아니더라도 요선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청한다면 영웅루주 가 직접 나가 접대해야 했다. “저를 청하셨습니까?” 옥향은 현황방의 삼방주이자 천하에 이름높은 요선 동부용을 만났다. 겉보 기에는 아름답고 현숙해 보이는 젊은 처녀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풍겨나는 위엄. 싸늘한 인상. 이름에 걸맞게 요요하면서도 온몸에 남을 찍어누르는듯한 기세. 남에게 호령하고 살아온 인생과 경륜이 담겨있 는 눈빛. 과연 현황방의 삼방주다웠다. 살펴보듯 옥향을 쳐다보던 동부용 은 대뜸 물었다. “네가 천년영지를 가지고 있다는 여아가 맞나?” 대뜸 반말을 하는 동부용이었지만 남을 깔보는 듯한 그자세가 그녀에게는 더욱 잘 어울렸다. 오만하고 남을 깔아내리는 태도. 자신의 능력에 완전한 자신이 있기에 남을 무시할 수 있는 자신감. 보기만해도 차원이 다른 인물 이라고 남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당당함. 그녀는 천하의 요선 동부용이었 다. 누구도 천하의 현황방 삼방주 요선 동부용의 앞에서 함부로 굴 수는 없다. 옥향은 오히려 싸늘한 그녀의 시선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옥향은 애써 가 슴을 펴고 어깨를 당당히 하며 동부용의 시선을 응시했다. 옥향은 당당하 면서 비굴하지 않게 동부용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소녀 옥향이 천년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옥향은 동부용이 만약 천년영지에 대한 욕심을 읽고 그녀가 강탈하려 한다 면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과 그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모 란루주라면 모르지만 감히 옥향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녀가 천 년영지를 욕심낸다면 막을 자신도 없고 또한 섣불리 그녀와 반목하여 세인 의 이목을 영웅루에 몰리도록 주의를 끄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동부용은 갑자기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마치 얼음 이 녹아 해동하는 것과도 같고 위엄넘치는 황후에서 개구쟁이 소녀같은 천 진한 태도로 변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옥향을 와락 껴안았다. 완전히 얼음 빙상에서 꼬리치는 강아지로의 완벽한 변신이라고 할까? “으와앗. 예쁜 동생. 그거 나 좀 나눠주면 안 될까?” “예엣?” “동생도 알거야. 여자에게 미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영웅루에 있으니 더욱 잘알겠지? 내 심정을 이해할거야. 그러니 내게 천년영지가 너무너무 필요 해. 응. 응?” “.......” 어울리지 않게 마구 애교를 부리며 동부용은 옥향에게 친밀하게 굴었다. 옥향은 동부용의 태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당황해야 했다. “꼭 준다고 말해줘. 주는 거지? 준는 거야? 줄 거야? 준다고?” “삼방주님. 갑자기 이 무슨 행동이신지....” “삼방주라고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봐. 어때? 천년영지만 준다면 내 가 무엇이든 해주지. 네가 원하는 소원은 어떤 것이든 내 능력안에서 한가 지 들어줄게. 그러니 좀 주라. 응?” “삼방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안들어 줄수가 없지요. 대가는 필요없습니다. 오늘 강호의 명망높은 삼방주님을 뵌 인연으로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야? 공짜로 준다는 말이지? 그말.” “제 성의입니다. 곧 가져오겠습니다.” “오호호호. 정말 마음에 드는데 그래? 너무 사양하면 안 좋겠지? 동생이 이리도 가져가라고 사정하니 성의를 봐서 그냥 가져갈게.” 옥향이 순순히 내어 놓을뿐만 아니라 대가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하자 당장 말이 달라져 마치 옥향이 억지로 떠맡기는 것처럼 태도를 바꾸는 요선 동 부용이었다. 하지만 옥향은 왠지 그녀가 귀여웠다. 더 이상 처음 그녀에게 느꼈던 위압감은 옥향의 마음에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요선 동부용은 자신의 소원이던 천년영지를 아무런 대가없이 가지 고 갈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옥향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되었 다. 33 현황방을 삼키다(3) 칠절신필은 자신의 처조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학식과 인품, 견문이 칠 절신필이 달던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였다. 칠절신필은 단지 딸 둘만을 두 고 있던 차라 아들에 대해 깊이 아쉬워하던 차였다. 그런데 처조카 오형록 은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아들상이었다. 둘째딸과 연결시켜 사위로 삼고자 하던 생각은 포기한 이후 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기르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은표전장이라면 이름난 전장이다. 비록 전장쪽에 관련되어 있는 일은 잘 알지 못했으나 얼핏 그와 친한 오방주에게 듣기로 현재 드러난 재력만으로 도 능히 대륙의 십대전장에 끼일 수 있는 뻗어가는 신규전장이라고 알고 있었다. 은표전장이 대륙전장연합에 가입되어 있는 만큼 오형록은 엄연한 상계의 인물. 언제라도 현황방에 가입할 자격은 충분하였다. 게다가 은표 전장이라면 상계에서 그 가능성으로 인정받고 있는 커다란 사업체인 만큼 현황방에서의 입지도 클 수가 있고 오형록의 인품이 출중한 만큼 칠절신필 이 돌봐주기만 한다면 현황방에서 큰 거물이 될 수 있었다. “록아. 혹시 무공을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이미 숙부와 조카의 사이로 두사람은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칠절신필 이 내심을 밝히기 위해 은근히 띠운 운에 오형록은 칠절신필이 예상하지 못했던 답을 내놓았다. “이모부님. 저는 이미 무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허? 그래? 나는 미처 그것을 느끼지 못했구나. 그래. 사문이 어디냐?” 그가 이미 사문이 있어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지 못하게 됨을 아타깝게 여 기면서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칠절신필이 물었다. “일맥단전이라 혹시 이모부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의 성함은 단향검군이라 하십니다. 홀로 익힌 무공인지라 아직 얼마만한 성취를 이루 었는지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칠절신필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단향검군이라면 그 정체가 신비한 인물 로 천무삼성과도 비교되는 전대의 검수였다. 비록 무림에 활동했던 시기가 삼년도 안된 짧은 시기인지라 그 정체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삼 년이 바로 천년마교의 발호시절에 마교와 싸우는 기간이었고 그가 활약하 며 천년마교의 대마두들을 제압하며 내보였던 무공은 결코 천무삼성에 비 해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강호의 소문으로는 당향검군은 천년마교 시절 팔대천마의 수좌였던 천마에게 패해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말이냐? 그분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단 말이냐?” “십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찍이 천년마교의 발호시절 천마와의 결투에 서 크게 부상을 입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은거하셨는데 제가 다섯 살 되 던 해에 고아로 떠돌아다니던 저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흐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커다란 기연을 만난 셈이다. 당금 강호에 서 단형검군 노선배의 진전을 이은 너를 무시할 존재가 얼마나 되겠느냐? 그럼 내 앞에서 한번 무공을 시전해볼 수 있겠느냐?” “소질. 부족한 솜씨나마 선보일 테니 이모부께서 살펴보시고 가르침을 내 려 주십시오.” 오형록은 칠절신필의 앞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윽한 단향이 허공에 퍼지기 시작했다. 검을 펼치면 단향이 퍼지는 것은 단향검군의 단향검법의 특징이었다. 칠절신필은 오형록이 펼친 검법이 단향검법임을 확신했다. 오형록의 검이 수십개 수백개로 늘어나며 아름다운 환상을 연출하기 시작 했다. 변과 쾌의 극을 이룬 검의 경지였다. 그 실과 허를 칠절신필은 구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검무의 아름다움에 칠절신필은 아득히 정신을 잃 고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미 사람과 검이 녹아들고 유형과 무형이 하나 의 아름다움을 연출하여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 검무였다. 오형록이 검을 거두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칠절신필은 자신도 모르게 박 수를 쳤다. 정말 상상외의 경지였다. 단지 상계의 기린아로 알고있던 처조 카의 무공이 이리도 고강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자신 이 후계자로 내세울 수 있는 경지가 이니었다. 칠절신필 그가 경지를 예측 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히 높은 경지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어. 지혜와 학식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스스로 은표전장이라는 일가를 이룬 능력. 게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까지. 형록이 자네는 정말 보기 드믄 잠룡이로구만.” “과찬의 말씀입니다.” 칠절신필은 오형록이 자신이 거둘 인재가 아님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커도 너무 컸다. 이미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존재인 것이 다. 하지만 오형록의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욕심이 생겼다. 단순한 친척 이 상의 존재로 그를 붙잡아 놓고 싶었다. (만일 그를 현황방의 대방주로 추천한다면?) 여태까지는 중립을 고수하던 칠절신필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대방주 그 릇이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 대방주 의 후보로 가장 유력한 현황제갈을 사위로 삼아 권력의 끈을 연결하는 데 에 자족하던 칠절신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욕심이 생겼다. (형록의 능력이라면 능히 다른 세 후보를 능가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현 황방을 이끈다면 현황방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또한 그를 지지한 의형의 복성표국과 남북표국의결체의 위상도 커질 것이다. 그가 나선다면 대륙전 장연합도 그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형록과 나는 친척관계이니.... 나는 혹시 커다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닐까?) 칠절신필은 마음속으로 격동을 누르며 애써 냉정을 찾아 계산하면서 오형 록을 향해 훈훈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자네 혹시 현황오관이라는 것을 아나?” “옛? 그게 무엇인지요?” “그건 현황방의 대방주가 되기위한 후보들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으로...” 상황 조풍은 상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혈천마궁이 휩쓸 고 지나가 초토화 된 상계에서 살아남았던 몇 안되는 원로였다.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청년시절 전 재산을 태조 주원장에게 투자하 여 황실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상인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연왕에게 투자하였고 그것이 또한번의 성공을 가져왔다. 그후 영락제의 북벌원정시 모든 무기와 군수품을 독점함으로서 그는 남들 이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재산과 상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상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재산 이 많다던가 상권을 가장 많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성 공할 수 있었던 투자에 대한 개념을 전 상계에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상황은 자신의 재산으로 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자들, 상재가 뛰 어난 자들, 그러나 재산과 능력이 부족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투자를 아끼 지 않았다. 단지 사람만을 보고 수만금을 내 주었으며 한번 믿은 사람은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해도 성공할 때까지 계속 뒤를 봐주었다. 그가 사람이 보는 안목은 너무나도 정확하였기에 그가 믿은 인물은 거의가 예외없이 거 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현재 상계의 거상들 중에서 칠할 이상이 상황의 신세를 진 인물이었다. 또 한 아직도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자들 중에서 자본이 없는 자들이 가장 먼 저 떠올리는 인물이 상황이었다. 현재 상계를 이끄는 일백원로 중에서 반 이상이 자신의 상권의 지분의 삼분의 일을 투자의 대가로 상황에게 바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영향력을 벗어난 십대거상들도 대부분 상황의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 배경이 상황을 상계의 절대적인 지존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무림에 천무삼성이 있고 황실에 황제가 있으면 상계에는 상황이 있다.- 상인들은 이러한 말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녀석아. 아직도 멀었느냐?” “그렇게 부르시지 말라니까요?” 동부용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겉으로 보기에 는 딱 어울릴 것 같은 관계의 말투였다. 잘 보면 이십대 초반으로도 보일 수 있는 미녀, 그리고 딸을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건네며 그녀와 같 이 다니는 중년 부인. 하지만 그 훈계를 받는 장본인이 바로 광동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절대고수이자 현황방의 삼방주인 혈선 동부용이 라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이모에게 식사 한끼 대접하는 게 싫으냐?” “누가 싫다고 합니까? 왜 이모부부는 현황방에 머무르시지 않는 거예요?” “거기가면 인사치례하러 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싫다. 너도 만나기 싫 어할 정도이니 네 이모부가 얼마나 사람을 귀찮아 하는지 잘 알지 않느냐? ” 혈선 동부용이 이미 나이가 오십이 넘었다고 해도 자기를 길러주다시피 한 이모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도 어린아이 취급하는 이모의 말투가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나참. 상계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작자들은 어중이떠중이 다 현황방에 몰려들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현황방의 배 후라고 할 수 있는 이모부는 정체를 숨기려 하다니. 아무리 부창부수라지 만 이모도 이모부에게 불평 좀 하시지.” 동부용이 툴툴거리면서도 꼼짝 못하는 상대. 그녀가 이모라고 부르는 상재 는 바로 상황 조풍의 부인 조부인이었다. 상계 일백 원로가 현황방의 대방 주 선출을 위하여 모여 귀빈으로 대접받고 있는 가운데 오직 상황만이 현 황방에 머무르지 않고 따로 머물고 있는데 조부인이 혼자 그녀의 조카인 혈선 동부용을 만나기 위해 따로 연락을 했던 것이다. 하기야 상계의 대부 격인 상황부부가 현황방에 들린다면 현황방의 십대방주는 물론이고 그곳에 몰려있는 일백원로가 모두 모여 그를 접대한다고 난리를 치리라. “그런데 네가 자랑하는 곳이 여기냐?” “그래요. 여기 음식 솜씨가 꽤 근사하다고요.” 평생 무공과 미모에만 달라붙어 노력을 기울여온 동부용에게 광동의 명소 유람과 진미를 맛보여달라고 부탁했으니 동부용이 아는 것이 있을 턱이 없 었다. 평소 현황방에서 일류 요리사가 주는 음식 맛과 싸구려 소면의 맛을 구별 못하고 풍류라고는 절경과 논밭의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그녀로 서야. 그냥 현황방에 머물러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은 남지만 강요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이모부 부부가 어떤 사람인데 자신이 정한 바를 남의 말에 의해 변경하겠는가? 명소야 당장 아는바 없다지만 광동진미를 맛보여 달라는 이모의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기도 뭣한 상황. 거기서 동부용에게 떠오르는 음식점은 얼마전에 만난 마음씨 좋은 영웅루의 주인밖에 없었다. “짜짱. 영웅루라고 하면 광동성 제일의 숙수가 요리장으로 있는 곳으로..” 실제적으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미각에서는 꽤 까다롭다고 소문난 사방주와 그의 가족이 즐겨 들리는 곳이니 광동요리의 특성은 나타낼만 할 것이다. 게다가 동부용의 기억에 의하면 이곳 요리는 꽤 맛있던 것으로 기억되었 다. 필요이상 현황방과의 접촉은 금물이었지만 다시찾은 혈선을 옥향이 푸대접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관에게 연락받자 부랴부랴 인사를 하러 달려 왔다. 옥향은 기별을 넣은 후에 조심스럽게 주인으로서 인사를 드리기 위 해 방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그녀는 방안에 있는 젊어 보이는 중년노부인 (?)의 정체를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옥향동생. 왔어? 오늘 내가 귀빈을 모시고 왔지. 현황방의 중요하신 분이야.” “영웅루의 주인 옥향이라고 합니다. 귀빈을 뵈옵니다.” “헤헤. 이모.... 아니, 대부인. 이 소저가 커다란 영웅루를 경영하는 젊은 주인이예요. 제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인물중의 하나이죠.” 평소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짜기로 소문난 동부용이 칭찬하는 인물에 대해 조부인은 호기심이 일었다. 설마 자신이 큰 신세를 졌기에 과장된 친분을 자랑하는 줄도 모르고 상황은 옥향을 살펴보았다. (영웅루라면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광동성의 제법 큰 업체인데 이런 어 린아이가 주인이라니. 장사수단이 보통 뛰어난 여인이 아니겠구나. 평소 자신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고 그 정체가 확실치 않으면 접근하 지 않는 야무진 부용이 소개한 것을 보면 정체도 확실한 아이일 테고.) 순간 옥향을 바라본 조부인은 깜짝 놀라 헉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평소 상 황 보다 더욱 현명하고 냉정하다는 조부인의 얼굴에서 이미 그 이성적인 평정은 산산이 깨어져 있었다. “그...그것이 현몽이었던가?” 조부인은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입밖에 내고 말았다. 조부인이 상황 조풍과 함께 현황방의 대사에 참석하기 위해 광동성으로 오 기 얼마전에 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구천현녀처럼 귀품있고 신비스러 운 여인이 조부인에게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상의 선녀로서 이름은 요요라고 합니다. 평소 조부인의 선덕을 기 려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왔습니다.” 요요라고 밝힌 선녀의 모습이 범상치 않아 조부인은 황급히 예를 갖추며 꿈속에서 물었다. “천한 하계의 인간이 선녀에게 아룁니다. 제 소원이라니요?” “평소 부인의 소원은 후손을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선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넋이 나갔던 조부인은 선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겉으로는 젊게 보였지만 그것은 동부용처럼 그녀의 친정에서 내려오는 주 안술의 덕분일 뿐, 그녀의 몸은 이미 칠십 노구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후 손이라니? “설마 자식을 이제와서 이 늙은 몸에게 점지해 주신단 말입니까?” “부인에게는 하늘이 내려주신 인연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에 부인의 몸에 서 난 자식이 하나 있었던 것이 기억나십니까?” “평생 한이 맺혔던 일인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조부인이라고 해서 평생 자식을 낳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고생하던 시절 딸아이 하나를 낳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혈천마궁에 거역 하던 상황에 대한 추적은 집요했고 그 시절 상황부부의 고난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쫓기기에 바빠 그들의 유일한 혈육이던 딸아이 하나가 병으로 죽어갈 때에도 흔적을 남길 수가 없어 의원하나 부르지 못 하고 죽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했었겠는가? 상황부부의 가슴속에 맺 혀 있는 가장 큰 한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인의 따님이 이 세계에 다시 환생하셨습니다. 나이는 이미 이십세가 넘 었고 근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부인의 선덕을 기리기 위해 부인의 가슴에 한이 되셨던 따님을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입 니다.” “옥아가 환생했다고요?” 조부인의 음성은 떨려나왔다. 생각만 해도 찢어지는 듯 가슴이 아픈 그녀 인생 최대의 절망. 생각만 해도 죄스러움에 고개들기도 힘든 딸아이가 다 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 부인의 따님이 환생한 초상화가 있습니다. 잘 간직하고 보관하십시 오. 부디 부인께서 이 세상에 머무르시는 동안 복록이 영원하시기를 빌겠 습니다.” 선녀는 한폭의 그림을 조부인에게 내밀고 고개를 숙였다. 다급한 마음에 조부인이 그림을 펼쳐들자 거기에는 한명의 현숙해 보이는 젊은 처녀의 모 습이 그려져 있었다. 요요라는 선녀의 말이 가슴에 닿았기 때문인지, 혹은 조부인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려서 죽었던 조부인의 딸이 자라 성장했으면 이렇게 자랐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 다. 그림속의 여인의 모습은 그대로 조부인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조부인이 그림속 딸의 성장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몹시 놀란 그녀는 남편을 깨워 꿈 이야기를 했지만 남편은 되지도 않은 헛 된 꿈이라며 무시했다. 워낙 남편의 말이 강경했기에 그녀 또한 딸을 그리 워하는 마음에서 생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주위의 처자들을 눈여겨 보 고는 했다. 혹시라도 환생한 딸이 선녀의 말처럼 눈에 띄이지 않을 까하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그림속에 있던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조부인은 이제 남편의 말처럼 거의 포기해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와서 딸의 환생과 꼭 같은 모습의 여인을 보게 될 줄이야. 34 현황방을 삼키다(4) 상황은 할말을 잃었다. 평소의 상냥하고 남편의 말에 복종하던 부인이 아 니었다. 얼굴까지 붉히며 대드는 조부인의 앞에서 상황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인. 부인도 아시지 않소? 안 그래도 주위에서 후계자를 지정하라고 성 화를 부리는 판에 부인마저..” “그래서 못들어 주시겠다는 겁니까?” 냉정하게 말을 자르는 일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조풍은 눈앞의 여인이 자 신이 평생을 같이해온 부인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어느덧 상황도 나이가 칠십 중반을 넘어갔다. 그의 막강한 상계의 지위를 탐낸 그의 수하들과 휘하상인들이 후계자를 정하라고 상황을 몰아붙이는 바람에 안그래도 골치가 아픈 판이었다. 상황이 지정한 정식후계자에게 상 황의 모든 것을 물려주어야 후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상황휘하 상권도 안정된다는 뜻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흑림이나 황금벌, 해상벌과 금표전장, 그리고 복성표국에서도 난리인데 부인까지 이러실 필요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노야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제게 효도할 자식이지, 노야의 후계자가 아닙 니다.” “하지만 나의 양자라는 위치가 어찌 우리만의 자식이 되겠소?” 상황이 설득하듯 조부인에게 말했지만 조부인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상황의 상계에서의 적수라고 할 수 있는 금황벌과 흑림은 물론이요, 대륙전장연합의 우두머리로 있는 금표전장, 남북표국의결체의 맹주 격으로 있는 복성표국, 남해해상무역회를 비롯한 사대거상을 대표하고 있는 해상 벌과 현황방마저 상황이 양자를 들이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상계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은거할 기미를 보이자 후계 를 정하지 않고 물러선다면 다른 모든 상계의 혼란이 예상되고 있기에 그 들이 인정할 후계자를 정하라는 상계 전체의 의지였다. “욕심많은 금황벌이나 흑림 따위 알게 뭡니까? 노야의 상권을 맡길 후계 따위 이미 제자들에게 모두 넘기지 않았습니까? 상계 따위 알 것 없습니 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정을 주고 안아줄 딸자식입니다.” “허, 참.” 실지로 상황에게는 자신의 상권을 대부분 맡기고 있는 세명의 제자가 있었 다. 그들은 상황을 도와 상황이 상계를 장악하도록 평생을 쏟아부었고 지 금은 상황을 대신하여 대부분의 상권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었다. 상황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지금 있는 그대로 세 제자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즉 세 제자가 모두 그의 후계자였던 셈이었다. 상황이 굳이 한명의 정식후계자를 지정하거나 한명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실어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려받은 자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특히 나 상계의 거친 경쟁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지금은 자신이 상계의 절 대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의 지위를 물려받을 자는 자신의 힘으 로 그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세 제자의 하나이거나 혹은 십대거상중의 누가 될지는 상관없었다. 혼자의 힘으로 올라선 자만이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상황도 인간인 만큼 욕심이 있었다. 이왕이면 자신의 영향권 아래있 는 자가 다음대의 상계의 절대자로 등극했으면 그만큼 좋은 일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누군가 이어받는 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려받은 자가 그 지위를 얼마나 이어가겠는가? 다음 대면 몰라도 삼대 사대로 내려갈 수록 편안하게 모든 것을 물려받은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황은 자신의 후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상계를 장악해 주는 전통 을 세우기를 바랬고 그래서 어느 일인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실어주는 것 을 거부했다. “정말 어느 아이가 그렇듯이 당신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소. 당신의 마 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당신의 뜻대로 그냥 양녀를 들이는 것. 나도 찬 성하고 싶소. 하지만 내 양녀가 되면 우리 뜻과 달리 다른 모든 이들이 그 녀를 우리의 후계자로 여기게 될 것이오.” 조부인의 안색이 더욱 화가 나서 붉어졌다. 평소 조풍보다 더욱 냉정하고 현명하게 남편을 보좌하며 따르던 조부인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의 수하들이나 제자들만 중요한가요? 금황벌이니, 흑림따위만 중요한가요? 저는 열여섯에 다신에게 시집와서 평생을 당신 뜻만 따랐습니 다. 이번만은 양보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상황이기에 양녀조차 우리 부부 뜻대로 들일 수 없다면 저는 당신과 헤어지겠습니다.” “허어? 부인 무슨 말을.....?” 상황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싸늘한 조부인의 눈빛이 진심임을 말하 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상황 조풍은 줄을 나이가 다되어 등을 긁어줄 아 내와 헤어지는 것은 절대 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머릿속을 뒤져 해결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양녀를 들여 부인과 금황벌등의 요구를 무마시킨 후에 내 후 계자로서의 일과 관련시키지 못할 곳에 인연을 맺게 해 버린다면?) 상황도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그녀의 뜻대로 양녀를 들이고 싶었다. 사랑 하는 아내가 그토록이나 원하다면 양녀를 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자신 도 노후가 부인과 단 둘이 남아있는 것이 쓸쓸하기도 한 판에 왜 반대를 하겠는가? 다만 그가 염려하는 것은 상계와 상관없이 단순히 양녀를 들이 더라도 상계에서는 그 뜻을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의 영향에 있는 모든 상권을 그의 세 제자에게 맡겨놓은 만큼 적당 한 유산만을 그의 양녀에게 넘겨줄 뿐이라고 해도, 그의 세 제자부터 신경 을 쓰기 시작할 것이며 상계 전체에서도 그녀를 후계자로 오인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자칫 잘못하면 상계의 혼란을 가져오는 소용돌이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부 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현황방은 상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금황벌이나 흑림, 해상벌의 후손중에서 대방주가 나오겠지. 양녀를 그와 연결시켜 준다면?) 현황방은 상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만큼 적어도 상계의 세력은 아니었 다. 즉 현황방이 어느 하나의 세력에 독점되는 것을 상계 전체가 반대하는 것이었다. 현황방의 대방주가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현황방 십대방주가 십대거상의 영향권에 있는 자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일단 현황방에 들어간 자는 대신 상계전 체의 균형을 위해 상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만약 양녀를 들인다고 해도 그녀를 현황방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양녀를 상황의 공식적 후계자로 보지는 못하리라. 현황방이 상계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금기라는 불문율이 있기에. 또한 상계에서도 그의 양녀를 상황과 연 결시켜 이용하지 못하리라. 상계의 균형을 위해 현황방의 인물을 상계 내 부의 일로 간섭하는 것 또한 금기이니까. “좋소. 부인의 말은 알아듣겠소.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있소?” “예? 제 양녀를 들인다는 데에 무슨 조건이 있단 말입니까?” “이해해 주시오. 내가 상황이라고 불리는 만큼 내 양녀는 상황의 양녀가 되는 것이오. 당장 내 휘하의 상인들이 무조건 인정할 것 같소? 우리의 양 녀가 우리 사후에 무시받는 것을 원하오? 현황방의 대방주가 될 자가 현황 오관을 거쳐 자격을 인정받는 것처럼 나는 내 양녀가 될 자격을 시험하여 모든 이에게 인정받도록 하겠소.” “그....그런.” “더이상은 양보 못하오. 대신 당신의 뜻대로 그 아이도 후보로 넣겠소. 또 한 양자가 아닌 양녀를 들이는 것으로 하겠소. 내 양녀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시험해 보겠소. 진정 부인의 마음에 든 그 아이가 우리 와 인연이 있다면 다른 아이들을 누르고 시험에 통과할 것이오. 그리되면 주위와 상계의 상인들도 아무말 못할 것이오. 하지만 인연이 없다면 부인 도 그 아이를 포기하시기 바라오.” (상공. 정녕 그아이가 노야와 저의 딸의 환생임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조부인은 원망스럽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신이나 꿈을 믿지 않는 남편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아예 사랑스런 그아 이를 만나지도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기에 조부인을 입밖까지 나왔던 말 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아이가 뽑히지 않는다면 저는 상공을 다시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아이와 따로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되살아온 제 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 굳게 결심하는 조부인이었다. 옥향은 요즘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동부용과 같이 있던 중년부인은 하염없 이 눈물을 흘리며 옥향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대뜸 그녀를 자신의 딸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하였다. 동부용조차 놀라 중년부인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볼 정도였다. 옥향은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중년부인을 만나자 알 수 없는 따 듯한 정이 생솟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친딸을 바라보는 듯한 그 녀의 눈빛에서 잊었던 모친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 다. 옥향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조부인의 청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 때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조부인의 가슴속에 파묻혀 있 었다. 오직 한줄기 기쁨의 눈물과 모녀의 정만이 옥향의 가슴속에 흘러넘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로 의모로 섬기기로 한 조부인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의부가 될 분에게 허락을 맡겠다고, 그리고 바로 연락하겠다고 의모는 말했다. 의부와 의모 의 신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옥향은 다만 다시 가족의 정을 되찾을 수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동부용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으나 조부인과 옥향에게 축하의 말을 했 다. 그리고 오늘 동부용은 옥향의 의부를 만나야 한다며 아침부터 옥향을 찾아와 어디론가 데려갔다. “삼방주님. 여기는....?” 옥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옥향과 동부용이 간 정자에는 그녀를 딸로 삼겠다고 한 의모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었 다. 옥향과 동부용을 제외하고도 세 명의 여인이 있었고 여인의 일행들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옥향동생. 언니라고 불러. 어차피 진짜 사촌간이 될지도 모르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옥향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동부용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모.... 너를 딸로 맞이하겠다는 분이 내 이모야. 하여간 이모 는 이모부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한 모양이야. 전부터 이모부의 양녀를 추 천한 사람이 꽤 되거든. 그래서 그들을 무턱대고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해. 이모부께서 모두를 직접 만나고 양녀를 정하시겠다는군. 너는 이모의 추천 을 받아 자격을 얻었고 내가 후원자 자격으로 온 거야.” 옥향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동부용의 말뜻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혈선 동부용에게 이모부란 상황을 뜻하는 것이며 옥향이 어머니의 정을 느꼈던 중년부인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말이었 기에. 그녀는 상상도 못할 자리에 온 것이다. 상황의 양녀라는 자리는 현 황방의 대방주 자리보다 몇 배나 중요한 자리였다. “그럼. 저분들은?” “이모부가 양녀로 삼으려고 했던 여자들이지.” 옥향의 눈빛이 여인들 중의 하나에게 다가가는 순간 놀란 눈빛을 지었다. “너도 아나보지? 하기는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니까. 무림칠미의 하 나인 부귀옥녀 연가희야. 이모부의 제일 제자이며 이모부 때문에 십대거부 의 이름을 얻지 못한 상왕의 하나뿐인 누이지.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것은 그 유명한 청성이자들이고.” 상왕이라면 상황이 가진 상권의 반을 관리하는 자. 그 상재가 상황이상으 로 뛰어나다고 알려진 자로서 오죽하면 그의 별호가 상황의 바로 밑인 상 왕이겠는가? 하지만 그는 사부인 상황에게 절대의 충성을 바치는 자이기에 후계자라기보다는 상황의 충복으로 여겨지는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영향력은 금황벌이나 흑림, 해상벌이나 금표전장에 못지않았다. 그리 고 상황의 전 휘하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상황의 후계자로 밀고있는 자이기 도 했다. 부귀옥녀 연가희는 상왕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으로 무림 전체에 그 미명을 떨치고 있는 무림칠미의 한사람. 미모뿐만 아니라 그 지혜도 뛰어나다고 알려진 절세의 재화였다. 상황이 갑자기 양녀를 들이겠다고 하여 공표하자 상황의 휘하세력이 부랴부랴 상왕대신 내세운 재녀였다. “그리고 저 여인은 흑림주의 딸인 흑의선녀야. 우리방파 이방주인 황금수 의 친척이지만 오히려 그의 상전이라 할 수 있지. 흑방과 흑림이 계약을 맺고 있기에 흑방의 호법들이 그녀를 호위하고 있지. 마지막 아이는 금표 전장의 천금이라던가? 미모는 무림칠미에 끼이지 못하지만 지혜만은 뛰어 나. 실재로 금표전장이 대륙전장연합의 수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저 애의 지혜 때문이라고 소문난 아이지. 듣자하니 그녀의 호위는 모두 사천 당가 의 암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하더군.” 동부용과 옥향을 비롯하여 네파로 갈라진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 다. 하기야 경쟁관계이니 서로 떠들고 친한 척하는 것도 어색할 것이었다. 옥향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 안절부절하지 못했 다. 설마 모란루의 일개기녀이던 그녀가 이런 자리에 서서 상황의 양녀자 리를 놓고 겨루게 될 것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모도 재능도 지혜 도, 그리고 배경마저 상대가 안되는 경쟁자들이었다. 옥향은 얼마전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요요태후라는 선녀가 나타나 그녀를 모란루주 못지않게 귀한 신분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꿈이었다. 그녀를 사랑 하는 사람과 인연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꿈이었다. 그리고 꿈대로 노리개를 암자의 관음보살에게 바쳤을 때 그분 오형록을 만나지 않았던가? 옥향이 뜻밖의 일로 거의 넋이 나가있을 때 정자로 한 명의 중후해 보이는 중년인이 들어왔다. 상황가의 일총관, 어디를 가든 한 문파의 장문인보다 더한 대우를 받는 상황가의 제일총관 옥선생 이무인이었다. 그 신분에 걸 맞게 모두들 그에게 먼저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상황께서 여러분들을 만나러 오시기로 했지만 급한 일로 황록사라는 절로 떠나셨습니다. 상황께서는 여러 소저들이 직접 황록사로 찾아오시기를 바 라십니다.” 옥선생은 섭선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공손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조와 달리 약간 오만한 빛을 띠고 있었다.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 다. 옥선생이라면 그런 자격이 있으니까. “다만 다른 일행의 동행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소저분들. 단독으 로 가셔서 상황을 만나셔야 됩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황록사에 머무르신 다고 하셨으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세 여인이 떠나도록 정자에서 머뭇거리는 옥향을 동부용이 서두르라고 재 촉했다. 그러자 옥향은 대뜸 황록사의 위치를 묻는 것이었다. “몰랐어? 여기서 동쪽 오십리 쯤 어딘가에 있다는 것 외에 지리는 나도 잘 모르는데.” “후. 저는 솔직히 그곳에 가야 되는지 망설이고 있어요. 자격도 없는데.” 옥향이 자신 없는 소리를 하자 동부용이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이모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이모부는 몰라도 이모 는 너를 딸로 삼고자 하는 것이 진심이야. 너도 이모를 어머니로 삼겠다고 어제 말했잖아. 너를 기다리고 있을 이모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지.” “맞아요. 그분을 위해서도. 고마워요. 언니.” 옥향이 조부인을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을 때 옥선생이 말을 건네왔다. “옥소저. 혹시 황록사의 지리를 모르십니까?” “예. 혹시 총관님께서는 아십니까?” 조부인 때문에 옥향에게 호감을 느낀 것인지 옥선생은 자상스럽게 길을 가 르쳐 주었다. “동쪽으로 일다경 쯤 달리시면 두 갈래 길이 나올 것입니다. 왼쪽 길은 길 도 잘 닦여져 있고 사람들도 자주 다니는 공도입니다. 그쪽으로 계속 가시 면 황록사에 도착하지만 백여리를 돌아 가는 길입니다. 쉬지 않고 부지런 히 서둘러야 간신히 오늘 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른 쪽 길은요?” “오른 쪽 길은 황록사에 바로 갈 수 있는 직진 길입니다만 산속을 통과해 야 하는 험한 길입니다. 산적이나 맹수가 자주 나타나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하지만 반나절만에 도차할 수가 있지요. 아마도 세분 소저 는 이 길을 통해서 황록사로 갔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추천하는 다른 길 이 하나 더 있지요.” 옥선생은 선심쓰듯 옥향에게 말했다. “소저에게만 특별히 알려 드리죠. 사실은 길이 없는 양갈래의 길 가운데에 새로 길이 났습니다. 길이 없지만 나무와 숲을 헤치고 한시진만 동쪽으로 곧장 전진하면 황록사 스님들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길이 나타날 겁니다. 위험도 없고 맹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옥소저께 서 늦게 출발하셨다고 해도 다른 세분이 모르는 그 길을 통해 가신다면 가 장 먼저 상황을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옥향은 동부용과 옥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경공을 발휘하여 길을 떠났다. 마침내 갈림길 앞에 선 옥향은 망설이다가 가운데도 아니고 오른쪽 길도 아닌 왼쪽 길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가까운 길을 멀리하고 먼길을 택하라.” 상황은 황록사에 있지 않았다. 그는 대로변에 위치한 주막의 천막아래서 나무의자에 앉은채 탁주한동아리를 가져다 놓고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총관으로 하여금 제각기 혼자에게만 전해주는 것처럼 비밀 길을 알려주라 고 했지.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면서도 남들에게 정당치 못한 길. 이 길 을 택한 여아가 있을까?” 가장 빠르고 가정 안전한 길. 그러나 경쟁자가 모르고 경쟁을 통하지 않고 오직 홀로 알게 된 길. 상도로 따지자면 편법이고 일시적인 길. 그러나 부 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다. 편법을 동원하고 남을 속여 이익을 얻는 상술은 일시적으로 부를 쉽게 얻 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편법은 결국에 가서는 남의 원망을 사며 상인의 신용을 잃게 되고 성공을 얻을 수가 없다. 사람이 살며 편법을 택하지 않 을 수가 없을 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정당한 길을 옆에 놔두고도 편법 을 택하는 사람은 상인으로서 결국 성공하기 힘이 든다는 것이 상황의 생 각이었다. “결국 대부분 오른쪽 길로 가겠지.” 오른쪽 길로 가는 자는 그나마 났다. 빠르고 목적지에 정확히 갈 수 있는 길. 그러나 맹수와 산적이 있는 길이다. 상도로 따지자면 정당하게 자신이 아는 바에서 가장 빠르게 부를 이루는 방법을 택하는 길과 같다. 그러나 그 길은 위험한 길이다. 상인으로 크기위해서는 모험을 택해서라도 좀더 지름길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상황의 관점은 달랐다. 큰 상인은 모험을 피해야 한다. 상황정도는 아니더라도 일성을 움직이는 대상인이라면 수익이 적더라도 안전하고 든든 한 길을 택해 자신의 상권을 오래유지하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휘하상인들 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늦을지도 모르지만 정당하고 안전하게 정석대로 가는 길이 곧 상도의 정석이었다. 위태로운 모험을 계속하여 자신과 부하 들을 위험속에 빠트리는 상인은 대상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상황 의 생각이었다. “사실은 내 고집뿐일지도. 돌아서 가는 길이 정답이 아닐지도. 아무도 이 길을 택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편법을 동원하는 것.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여 모험을 통해 큰 부를 손에 쥐는 것. 사실은 이런 일을 잘하는 자야말로 상재에 뛰어난 자인지도 몰랐 다. 상술에 재능을 드러내는 자는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실 재로 상황도 몇 번씩이나 이런 수를 통해 망하기도 하고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정도를 지키는 것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기에는 알맞을지 몰 라도 쌓고 공을 이루려는 자에게는 맞지 않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상도의 길은 인간들에게 있다.” 억지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단지 길을 선택 하는 것으로 상황이 생각하는 상도를 비교하는 것은. 하지만 인간들이 많 이 다니는 대로.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길. 인간과 부딪치는 길에 상도의 왕도가 있다. 인간과 부딪치며 나아가는 길을 택하면 늦더라도 언젠가 반 드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것이 상황이 인정하는 상인의 상이었다. “응?” 상황의 눈이 번쩍였다. 관도의 저쪽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 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바람처럼 달려가는 이십대 여인의 모습이 상황의 시력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옥향을 보며 상황은 중얼거렸다. “저 아이는 내자가 양녀로 들이겠다던 옥향이라는 아이 같은데. 이길을 통 해 오는 아이가 있었다니.” 고개를 내젓는 상황의 귀로 한줄기 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상황께 아룁니다. 부귀옥녀 연가희 아가씨만이 오른쪽길로 가셨고 다른 두아가씨는 가운데로 옥선생이 알려준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대부인께 서 택하신 옥향아가씨만이 보시는대로 대로를 택하셨습니다.” “그런가?” “그리고 보고할 일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음산귀수를 이 근처에서 봤다는 사람이....” 상황은 전음으로 들려오는 심복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음산귀수라면 적어도 백 오십 살이 훨씬 넘은 인물. 즉 전전대의 거마이다. 현재까지 살 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될 정도의 거마로 천년마교의 란이 있었을 때 천마를 보좌하던 십대호법에 있던 거마. 당금 무림에서 배분으 로나 그 무공으로나 비교할 자는 백도의 천무삼성 정도밖에 없을 거마중의 거마였다. “어째서 그가....? 혈천마궁 시절이후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마인 데?” “아무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상황께서 있는 이곳에 그 노마가 모 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흠. 황록사 주변을 철저히 보호하게.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나도 곧 황록사로 가겠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록사에 도착한 옥향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있다는 상황의 모습은 눈에 뜨이지 않고 먼저 온 세 명만이 있을 뿐이었 다. 부귀옥녀를 비롯한 세 여인은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쪽에 시립하 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앞에는 상황대신 열명의 노인이 있었다. 비단장포에 패물을 잔뜩 걸친 열명의 노인. 하지만 이들 열명의 노인이야 말로 상황 휘하 대상인을 대표하는 열명의 장로였다. 상계 일백 원로들 중 에 들어가는 대상들. 상황의 이름과 나란히 할 수없다는 이유만으로 십대 거부에 이름을 같이 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으되 그 잠재력은 황금벌주나 흑림주조차 무시못하는 거물들. 상황의 상권을 맡고있는 상왕 등의 세 제 자들을 코흘리개로 여기며 상황과 같이 오늘의 상계를 이끈 인물들이었다. 급하게 오느라고 소진한 진기를 미처 보충하지 못해 지친 표정이 역력한 옥향에게 열명의 노인중에 배가 제일 나온 노인이 말을 걸었다. 옥향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광동성 제일거부라는 호경대인.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유 학자의 길을 걷어치우고 상계로 뛰어들어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며 지금은 아들 다섯 중의 둘을 조정의 상서 자리에 올려놓고 상황과 자식들 의 연줄로 관과 황실에 관련된 사업을 금황벌과 경쟁하다가 광동성으로 물 러나 앉은 대상인이었다. “소저도 이것들 중에 하나를 골라보게.” “옛?” 노인은 옥향앞에 비단천을 풀어놓았다. 화려한 광채가 빛났다. 각종 화려 하고 빛나는 보석이 비단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께서 여러소저들을 마나는 기념으로 한가지 선물을 주시기로 했네. 그래서 우리 늙은이들이 성의껏 상황을 대신하여 소저들을 위해 아끼는 것 들을 내 놓았네. 하나같이 보물들이니 소저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보 게.” 옥향은 어리둥절하며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호경대인은 옥향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계속 권했다. “이미 다른 소녀들도 자신의 선물을 골랐네. 그러니 소저도 사양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 보면 세 여인도 한가지씩의 보물을 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부귀옥 녀는 한쌍의 짝을 이루는 구술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옥향은 몰랐지만 이 구술이야말로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내렸다는 원앙쌍보주라는 것으로 이를 얻는다면 한평생 부귀와 권세를 얻는다는 전설이 있는 보물이 었다. 흑의선녀가 살피고 있는 것은 한자루 검은 단검으로 춘추시대에 만들어졌 다는 흑요신검으로 삼백년전 지하상계를 다스리던 황포염상의 신물과도 같 았던 물건이다. 지하경제의 맹주로 자처하는 흑림으로서는 다시없는 보물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금표전장의 여식이라는 여인은 제법 평범해 보이는 족자 하나를 들고 있었 는데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삼백년 전 화성이라고까지 불리운 당선의 그 림으로 만든 액자였다. 당선의 그림은 몹시도 귀한 것이기에 보물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다른 두 여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화성 당선이야말로 전설로 떠도는 대도 일각도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 속에서 그녀는 그의 유물이 남 겨진 단서의 흔적을 발견했었고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거의 금표전장의 손 에 있었다. 이번에 손에 들어온 그의 마지막 작품인 이 족자야말로 그의 모든 보물이 묻혀있다는 장보도임이 틀림없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옥향이 비단천을 보니 갖가지 보석과 목걸이등의 보석류 장신구와 도자기 오 찻잔, 그리고 서책과 그림이나 글씨가 있는 족자등이 바단천 안에 있었 다. 아무리 평범해 보여도 어떤 것이든 하나같이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것은 상황께서 양녀로 들일 여아들의 물건을 보는 안목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생각해 놓으신 것이다. 현재는 금표전장의 아이가 가장 뛰어난 선 택을 했다. 비단천에서 가장 귀중한 세가지 보물을 이미 앞선 세 아이가 선택했으니 이 옥향이라는 아이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은 무엇입니까?” 비단천 안에서 가장 허름한 한권의 책을 가리키며 옥향이 물었다. 다른 보 물들과 달리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기에 이미 다른 세 여인이 똑 같이 질문했던 사항이었다. “아, 그건 값진 것이 아니네. 상황의 휘하상인들이라면 누구나 한권씩 가 지고 있는 흔한 인명부이네. 상황휘하의 상인들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사실 인명부가 없어도 상인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는 이름들이지. 누가 눈치도 없이 보물들 사이에 끼어 놓았는지 참.” 옥향이 살펴보니 과연 흔한 백지를 역어 만든 조잡한 책자였다. 안쪽에 각 기 다른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상황을 받든다고 잘 알려져 있는 대 상인들의 이름이 있었다. “비싼 것을 피하고 흔한 것을 택하라. 저는 이것을 고르겠습니다.” 호경대인이 옥향을 바라보며 혀를 차면서 충고했다. “소저. 정말인가? 상황께서 선물로 주는 보물을 하나 택할 유일한 기회이 네. 그런데 그런 쓸모없는 흔한 것을? 보물들 사이에 있다고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해이네. 상황의 영향아래 있는 상인이라면 누 구나 갖고 있는 이 흔한 인명부로 선물을 대신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옥향은 여전히 인명부를 골랐고 호경대인은 한숨을 내쉬며 인명부 를 옥향에게 내주고는 보물과 비단천을 갈무리했다. (상왕의 누이나 금표전장의 아이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내용을 확인해 보고는 곧 손을 떼었는데. 설마 이것을 고르는 아이가 있을 줄이야.) 인명부는 보물도 아니고 가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상황 휘하의 상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계의 족보 같은 인명부인 것도 사실이었 다. 하지만 실재로 이 인명부에는 막대한 무형적 가치가 있었다. 사실 이 인명부야 말로 상황이 가지고 있는 원본 인명부였으며 상황 휘하 의 대상인들이 처음 상황의 세력에 몸을 맡길 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백지위에 이름을 적어 넣었던 인명부였다. 비록 안의 이름이 적힌 내용과 동일한 인명부는 수없이 많아 각 상인들에게 있지만 최초의 인명부는 오직 이 상황이 가지고 있는 이것 하나였다. 즉 실제적으로 그런 명분이 없지만 대상인들이 상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름을 적었던 책. 충성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책자였다. 즉 상황 과 같이 했던 모든 상인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는 귀중한 보물과도 같 은 책자였던 셈이었다. 호경대인이 돌아가자 모두들 눈빛을 빛내며 옥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고 호경대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로를 택했던 것도 옥소저라고 들었다. 상황의 후계자는 결정된 셈이로 군.) 35 현황방을 삼키다(5) 황록사가 있는 천마산 초입에 짙은 안개가 퍼져있었다. 자연적인 안개가 아닌 짙은 혈무. 시체에서 뿜어나오는 자욱한 피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혈 무였다. 그리고 공포와 비명이 혈무속에 끊이지 않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마지막 한사람까지 물러서면 안된다.” 거의 악을 쓰는 사내. 하지만 그의 신영이 공포로 떨리고 있는 것만은 막 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불과 한 시진만에 백명의 일류고수를 난도질하고 남은 오십여명의 고수를 향해 학살을 시도하는 살인귀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을 인간이 있을까? “귀찮은 것들.” 음산귀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강기다발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갔다. 한번 손을 휘두를 때마다 십여명의 고수가 팔다리가 날아 갔다. 이건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백오십명의 고수가 음산귀 수를 막아섰으나 그의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저긴가?” 음산귀수의 귀가 꿈틀거렸다. 지금 그는 눈앞의 파리떼같은 인간들은 안중 에도 없었다. 그의 귀는 천리시청술을 시전하고 있었고 천마산 삼십리 부 근의 소리를 샅샅이 귀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의 귀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마산에서 이런 대규모의 이동을 할 사람들이 라면 음산귀수가 노리는 상황일행일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여태까지 지루하게 날파리들을 상대했던 것은 그들이 필사적으로 음산귀수 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도 아니고 음산귀수가 심심했기 때문도 아니다. 상 황이 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는 얻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기에 그 들의 움직임을 알기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이제 그럴듯한 기 척이 귀에 들어왔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내공이 충만한 광소 소리가 무사들의 청각을 자극했다. 갑자기 일어난 귀 의 고통에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귀를 감싸고 신음을 질렀다. 전문적으 로 음공을 수련하여 상대를 해할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삼갑자의 공력 이 만든 광소소리는 오십명의 무사들에게 틈을 만들기 충분했다. “떨거지들. 살려주마.” 음산귀수의 신영이 삽시간에 무사들의 머리위를 뛰어넘었다. 가히 새처럼 날아간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급히 정신을 차린 무사들이 보았을 때 음산 귀수는 이미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쫓아라. 쫓아서 막아. 시체가 되어서도 막아라.” 상황의 호위무장이 지른 소리에 그들이 음산귀수가 사라진 곳으로 우르르 경공을 발휘하여 사라져갔다. 남은 것은 거의 백명이 훨씬 넘는 시체들의 잔해로 얼룩진 붉은 산의 대지였다. 급하게 이동하고 있는 옥향일행은 벌써 지쳐가고 있었다. 옥향을 비롯한 다른 여인들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계 원로들이 데리고 온 이십 명 정도의 호위 안에서 헉헉대고 있는 상계의 원 로 열명은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평범한 노인들이 쉬지도 못하고 산자락 을 달려 내려가고 있으니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헛 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급히 천마산에서 내려와 현황방으로 가라.” 상황의 전령이 남긴 한마디면 족했다. 그 원인과 이유를 알 필요가 없이 일행들은 상황의 명에 따라 부지런히 산을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다. “크아아악.” 갑자기 앞장서서 가던 두명의 호위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보이지 않는 칼 이 그들의 목을 잘라버린 듯 아무 징조도 없이 허공으로 그들의 목이 날아 가고 몸체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한 두어걸음 더 나간뒤 땅으로 털썩 쓰러졌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일행들 모두가 걸 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후후. 여기까지 왔나?” 어느새 그들의 앞에 붉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쭈글쭈글 한 외모에 흉악한 얼굴. 살기가 번뜩이는 두 눈. 한마디로 마주치기 싫은 사나운 악당 늙은이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노인에 대해 놀랐지만 그가 단 혼자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누가 상황이냐?” 붉은 장포의 노인, 음산귀수가 나름대로 위엄을 갖추고 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나운 승냥이가 부르짖는 듯한 거북한 목소리였을 뿐이다. 동료 를 일은 원로들의 호위 한명이 분기탱천하여 부르짖었다. “늙은이. 갑자기 나타나 노야를 함부로....” 그는 말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 분수같은 피가 쏟아지더니 역 시 마친가지로 목이 땅으로 떨어졌고 곧이어 몸체도 쓰러졌기 때문이다. 음산귀수의 앞에 있는 일행 중에는 고수라고 자처할 만한 자도 많았으나 누구도 음산귀수가 어떤 수법을 써서 호위를 죽이는 지 몰랐다. “무형음기.” 원로들 중에 호경대인이 나직한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나 나이가 많은 탓에 이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그 수법을 썼던 노인의 얼굴도 호경대인의 기 억속에 있는 노인과 똑같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떻게 손을 썻는지 구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상대 를 해치는 가공할 수법. 아직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공격을 할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혹자는 그가 이미 무형검기나 무형검강을 발출할 줄아는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경지에 이른 자라면 천년마교 시절의 팔대천마의 한자리에 끼어들 수 있지, 결코 그 밑에 있지 않을 거 라는 이론에 밀려 설득력을 잃었다. 다만 무형검기와 비슷하다하여 무림에 서는 음산귀수의 수법을 무형음기라고 불렀다. “흐흐. 내 수법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줄이야. 네가 상황이냐?” 음산귀수가 호경대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도 호경대인의 등 뒤에 한 아름 식은 땀이 흘러나왔다. “당신이....당신이 정말로 음산귀수요?” 호경대인의 한마디가 좌중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젊은 여자들은 음산귀수 의 이름을 몰랐지만 이십여명의 호위와 늙은 원로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백 짓장처럼 변해버렸다. “흐흐. 과연 상황이로다. 이제 우리 이야기나 좀 해볼까?” 음산귀수가 더욱 더 몸에 살기를 증폭시키며 좌중을 압도해 나갔다. 하지 만 그와중에 잠시 숨을 돌린 호경대인은 침착을 찾고 음산귀수를 상대해 나갔다. 그가 아는 음산귀수라면 대뜸 살수부터 사용했을 성격인데 대화로 나가는 것을 보면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 그렇다면 저 피에 물든 마왕으 로부터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소생은 상황 노야가 아니오. 선배께서는 무슨 일로 상황을...” “뭐야? 빌어먹을. 헛짚었잖아.” 호경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산귀수가 신경질 적으로 말을 끊으며 손 을 쫘악 뻗었다. 무형음기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욱하게 퍼져나가며 호 경대인과 그의 옆에 있는 열명의 상계 원로들을 향해 나아갔다. 퍼퍼펑! 순간적으로 호위들 이십명이 원로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무형검기와 비슷한 종류였다면 호위들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검기는 목표를 확실하게 척살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유자재로 방향을 트는 것이 무형검 기의 무서운 점이니까. 하지만 호위 중의 열명이 가슴이 난자당하여 비명 을 지르며 쓰러졌다. 갑자기 피세례를 받은 열명의 원로가 기겁을 하며 뒤 로 물러서거나 주저앉았다. 그들의 호위는 상황가의 정예. 무림맹의 일대제자. 즉 명문대파의 일대제 자에 비해 뒤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음산귀수의 수법을 알아보지 도 못하고 대항한번 하지 못한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피하십시오.” 남아있던 열명의 호위가 목숨을 버려갈 각오를 하며 음산귀수를 덮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비록 단 일수의 상대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상전 이 도망갈 시간을 벌려는 갸륵한 충정이었다. “이것들이.” 음산귀수가 귀찮다는 듯이 다시 손을 쓸려는 찰나였다. 그의 등 뒤로 두줄 기 검기가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음산귀수는 일단 몸을 피했다. 그에게 위 협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시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던 것이다. “노마. 이런 무자비한 살상을 벌이다니.” 하늘 위에서 두명의 인영이 각기 가공할 검세를 뿌리며 음산귀수를 덮쳐갔 다. 단순한 검기가 아니라 고도로 숙련된 수십가닥의 검기가 변화를 이루 는 심상치않은 공격이었다. “청성이자.” 부귀옥녀의 입에서 환호의 못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의 호위를 위해 상왕 이 거금을 들여 청성파에 기부함으로서 초청한 두명의 절정기인. 청성파에 몇 남지않은 장로가 다급한 나머지 창피를 무릅쓰고 합공을 한 것이다. 음 산귀수라면 그들의 까마득한 선배이니 오늘의 소문이 퍼져나간다고 해도 별로 수치가 되지는 않으리라. “흥.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 음산귀수가 다시한번 손을 휘둘렀다. 마치 더위를 쫓는 미풍의 손바람을 일으키려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청성이자는 자신들의 검세가 보이 지 않는 무엇인가에 가닥가닥 끊기는 것을 느꼈다. 청성이자가 심상치 않 음을 느끼고 몸을 돌려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음산귀수는 자신을 공격한 두사람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명문거파의 장로인만큼 제법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음산귀수에게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감당치 못 할 거대한 압력에 청성이자의 안색이 노래지며 그들은 사력을 다해 검을 떨쳐나갔다. “만천화우.” “흑천멸세.” 음산귀수는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무형음기가 청성이자의 공 격을 무력화 시키며 덮치기 전에 외부의 방해가 또한번 나타났던 것이다. 가느다란 쇠털같은 무수한 침이 하늘을 까마득히 덮으며 음산귀수를 덮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다시 그의 뒤로 다섯줄기 장력이 날아왔다. 제각기의 위력은 앞에서 오는 청성이자의 두 줄기 검기에 못미칠 것이었지만 다섯 장력이 합한 위력은 결코 청성이자에 뒤지지 않았다. 즉 아무리 음산귀수 라고 해도 무방비로 맞이할 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음산귀수의 몸이 청성이자를 덮치다 말고 중간에 멈춰졌다. 동시에 그의 손이 원을 그리며 손그림자가 그의 온 몸을 덮었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은 완벽하게 손그림자에 가려졌다. 그 위로 쏟아지던 암기와 검기, 장력들도 폭음과 함께 음산귀수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크윽. 이럴 수가.” “기습을 가했는 데도.” 신음을 지르며 연신 물러서고 있는 것은 흑방의 호법들이었다. 흑의선녀를 호위하고 있던 다섯명의 마두들로 그들의 합공이라면 무성 종리연이라도 당해낼 수 있다고 장담하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없이 피를 토 하며 물러서고 있었다. 금표전장의 천금을 호위하던 당가의 정예도 어이없는 표정을 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당가의 이공자 독기린 당구악은 한눈에 그녀에게 반한 상태였 다. 그래서 남의 입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의 보표를 자처했던 것이 다. 비록 일개 보표라고 하지만 사천 당가의 이공자이며 그의 수하는 당가 의 최정예였다. 그런 그들이 일제히 공격한 당가의 비전이 일인에게 쏟아 졌는데도 상처하나 입히지 못한 것이다. 청성이자 또한 안색이 창백해져 음산귀수의 앞에 내려섰는데 비록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많이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세상에 그들의 합공에도 불구 하고 완벽하게 공세를 막아낼 고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이것들이 정말.” 한편 음산귀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었다. 아무리 기습이라고 하지만 두 번이나 살수를 펼쳐내지 못했다. 여태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는 마음내키는 대로 살수를 펼쳤고 일단 손을 썻으면 상대는 반드시 죽었다. 그런데 이번에 두 번이나 상대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외부의 방해로 성공하 지 못한 것이다. “모두 죽여주마.” 음산귀수가 다시금 손을 펼쳐들었다. 수천개의 손그림자가 허공을 수놓았 다. 그뿐이었다. 어떠한 기세도 공격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음산귀수가 심심해서 한바탕 춤을 춘 것 같았다. 하지만 청성이자와 흑방 오호법은 긴 장한 표정이 역력한 상태로 필사의 사력을 다해 몸을 방어했다. “여기도 있어요.” 하얀 손이 어른 거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수. 백색의 빛나는 여인의 손이 음산귀수의 앞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음산귀수의 눈에 놀란 표정이 나타났다. 그리고 피시식 모닥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깨 음산귀수의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혈선 동부용이었다. 동부용의 안색은 극도로 창백했는데 그녀의 앞에는 연거푸 물러난 듯 일곱 개의 발자욱이 찍혀져 있었다. 하지만 음산귀수는 멀쩡했다. 하지만 그녀 는 최초로 홀로 음산귀수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과연 당금 천하에 절정 고수로 이름을 날릴만한 몇안되는 고수의 하나였다. “소수? 네가 혈선이라는 애송이 계집이냐?” 음산귀수는 공격을 멈추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동부용은 피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꿀꺽 삼키고 공손히 포권을 했 다. “후배 동부용이 음산귀수 노선배를 뵈옵니다.” 음산귀수는 천년마교 시절 열명의 호법중의 하나였다. 천년마교는 대대로 팔대호법을 두었는데 천마시절에는 지위를 무시할 만큼 고강한 고수가 넘 쳐날 정도로 마교의 전성기였다. 역대 마도를 통합하여 마교 교주와 대등 한 팔대천마가 그랬고 음산귀수 천지마인등이 그러했다. 원래 그 시절 음산귀수나 천지마인은 호법의 경지를 넘어 장로의 지위를 벗어나는 배분이었다. 나이로나 무공으로나 교주조차 제어하는 원로원에 단 둘이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천마를 제외한 나머지 팔대천마가 천마와 동등한 공봉의 신분으로 원로와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팔대천 마는 두 마왕을 자신과 같은 지위에 올리는 것을 싫어했다. 따라서 천마는 두 마왕에게 양대 태상호법이라는 마교의 실세 호법들을 다스리는 특별한 지위를 주어 마교 장로들의 위와 봉공 바로 밑의 지위에 두었고 기존의 팔 대호법에 두명의 태상호법이 더해져 열명의 호법을 거느리게 된 것이었다. “내 수법을 막은 것을 보아 네가 소수마녀의 직전을 이룬 것은 잘 알겠다. 네 사부는 잘 있느냐?” 음산귀수는 과거 천년마교 팔대호법의 하나인 소수마녀를 사랑했다. 하지 만 둘의 나이가 오십세 이상 차이가 났기에 음산귀수는 그 사랑을 단지 마 음속에만 두었다. 천하를 살명으로 떨어울린 음산귀수가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존재가 바로 소수마녀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음산귀수는 소수마녀 에게 자신의 수법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음산귀수의 무형음기의 정체는 대기를 얼린 음기의 결정체 파편이었다. 이 공기를 얼린 빙편은 날카롭기가 보검에 못지않아 검기와 비슷한 무시무시 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 성분이 공기와 같기 때문에 빛의 굴절도가 대기 와 똑같았다. 즉 사람의 시선으로는 절대 볼 수가 없었다. 또한 음산귀수 가 진기로서 이 보이지 않는 빙편을 조정하면 속도가 음속을 초과하기에 소리로서도 이 빙편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형음기의 정체였다. 동부용은 그 정체를 알아냈기에 음산귀수의 바로 앞에 나타나서 그가 쏟아 낼 모든 빙편의 방향을 향해 소수를 펼쳐 방어를 해 나간 것이다. 검강조 차 맨손으로 상대해 나간다는 소수의 무공이 아니라면, 그리고 음산귀수가 소수의 정체를 알아내고 공격의 태반을 거두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 었다. 무형음기는 그 위력은 무형검강에 못지 않으면서도 내력 소모는 거의 없는 편리한 무공이었다. 단순히 진기를 쏟아부어 절정의 경지인 무형검기나 무 형검강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대기의 결정체를 암기삼아 진기로 조정해 서 날리는 것이기에 진기의 소모는 극히 적었다. 깨달음의 경지라면 무형 검강을 날리는 자보다야 못하겠지만 그 하수들에게는 당하는 위력은 거의 차이가 없는 편이었다. 무헝검강은 심검의 초기단계로 팔대천마나 도달해 있던 경지였다. 물론 세월이 흐른만큼 음산귀수 또한 그 경지에 이르렀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부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벌써 십 오년전의 일입니다.” “그래. 그랬군.” 소수마녀도 죽었을 당시 나이가 백살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죽었다고 해 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다.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음산귀 수가 다시 동부용을 향해 말했다. “네가 그녀의 진전을 얻었다면 너도 마교의 일맥일진대 어이하여 나를 방 해하느냐?” “마교는 지금 존재하지 않고 후배는 현황방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선배께 서 공격하시는 분이 바로 현황방의 귀빈이십니다. 어찌하여 그들을 공격하 십니까?” “노부는 상황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 하지만 저들은 내게 헛걸음을 치게 했다. 그래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노부가 죽이고자 했던 자는 반드시 죽 어야 하는 것이 내 불문율이다.” 음산귀수가 다시 살기를 내뿜었다. 동부용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방금 일장을 나눠본 것만으로 동부용은 음산귀수의 실력을 알았다. 음산귀 수가 어디까지 실력을 발휘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있는 고수들이 합 공해도 음산귀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름높은 강호의 노선배께서 하찮은 상인을 어인일로 찾으십니까?” 숲을 헤치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음산귀수는 미리 예측하고 있었으므 로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방금전은 약간 흥분하여 주위의 동정을 살피는 것 을 잊었지만 혈선을 앞에 두면서 침착을 되찾아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의 기척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부용은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우려와 안도의 표정을 동시에 나타냈다. 나타난 사람은 상황 조풍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같이 나타난 사람들. 바로 현황방의 십대 방주중 상위서열 네명이었다. 혈선 동부용까지 치면 다섯명이다. 다섯은 모두 동부용과 비슷한 실력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합공이라면 다섯이 합쳐도 음산귀수를 상대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일종의 합격진을 연마하고 있었으므로 동부용은 약간의 자신이 생기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상황이냐?” 음산귀수의 반말에 현황방 방주들이 발끈 했지만 상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방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음산귀수였다. 지금쯤 현황방에 서는 정예들이 모두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한 손으로 두주먹을 당해낼 수 없다고 했으니 숫자라도 많으면 음산귀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러자면 시간을 끌어야 했다. “노필부가 상황이라는 허명을 얻고 있소이다.” “노부는 혈천마련의 사자격으로 왔다. 현황방과 상계는 마련에 복속하라.” 음산귀수가 툭 던진 말에 상황을 비롯한 상계 원로들의 안색이 다시 하얗 게 질렸다.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혈천마련이라니. 게다가 그 전신인 혈천마궁에 얼마나 상계가 피해를 입었던가? 무엇보다 음산귀수 같은 거마 가 혈천마련에 가입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설마.... 음산귀수같은 고인께서 혈천마련에 가입하셨단 말이오? 마궁시절 에도 거부하셨던 분이?” “현재의 마련의 대련주는 천년마교의 정통을 얻은 분이다. 그러니 노부가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낯부끄럽게 너무 노부의 얼굴에 금칠하지 마라. 마련에 노부같은 인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그럴 리가? 그럼 선배께서는 마련의 어떠한 신분이시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돈놀이나 하는 필부들과 호위 따위가 모인 현 황방에 마련의 중요인물이 올 이유가 없지 않나? 마련은 중심세력인 팔대 내전과 하부세력인 팔대외전이 있는데 노부는 천마외전 소속 팔대호법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 위치는 내전의 당주보다 아래이지.” 음산귀수의 말에 모두들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무림 내에서 현황방의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정사 중간이라는 미묘한 위치와 상계 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천하를 쥐고있는 무림맹에서도 섣불리 건들지 못하는 거대한 세력이 현황방이었다. 하지만 현황방에서는 결코 음산귀수 와 상대할 만한 절정고수가 없었다. 그런데 음산귀수가 혈천마련의 핵심인 내팔전도 아니고 외팔전, 그 중의 하나인 천마외전의 팔대호법의 하나라 니. 그렇다면 마련에는 얼마나 무수히 많은 고수가 있단 말인가? (팔대내전? 혈천마궁시절 열개의 전이 밑에 있었거늘 어이하여 팔대전이란 말인가?) 약간의 의혹을 느끼면서 상황은 음산귀수에게 말을 건넸다. “노선배는 상계의 마궁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은 줄 알면서도 그것이 가 능하리라 생각하시오?” “혈천마궁과 혈천마련은 틀리다. 그 악마보다 더한 혈존이 없다는 것만으 로 전혀 성질이 틀리지. 마련이 원하는 것은 마궁시절처럼 상계를 완전히 뿌리뽑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천년마교시절처럼 일종의 복종서약과 일정 량의 상납이다. 거절하면 그 결과는 너희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고.” “아직 후배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하겠소이다.” “상관없다. 몇 달간 답변할 여유를 줄 것이다. 노부의 책임은 네게 통보하 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답변을 얻으러 올 때는 노부처럼 홀로 오지는 않 을 것이다. 그리고....” 음산귀수의 두눈에 다시 살기가 돌았다. “하던 것은 마저 해야겠지. 노부의 손속을 방해하고도 살아남은 자를 두고 볼만큼 자비롭지 못한 성품이니까. 동부용. 너는 물러서라.” “노선배. 제 사부의 낯을 봐서라도 오늘은 이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동부용이 급하게 말렸다. 그녀를 보자 과거의 소수마녀가 생각나 음산귀수 의 마음은 약해졌다. 하지만 오히려 살기를 풍기는 현황방 고수의 얼굴을 보자 심사가 뒤틀렸다. “좋아. 네 얼굴을 봐서 한가지 제안을 하지. 내가 오장을 공격하겠다. 몇이 덤벼도 좋아. 다섯 번 공격하는 가운데 저 열명의 돈놀이꾼과 노부를 공 격했던 떨거지를 죽이지 못하면 그냥 물러서지.” 음산귀수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말하자 현황방의 오대방주가 일제히 혈선 의 옆에 나란히 섰다. “저희들이 선배의 공격을 받아보겠습니다.” 당가의 후예와 청성이자들이 합세하려 했으나 상황이 그들을 말렸다. 현황 방 상위 오대방주의 합격진은 다른 이들이 끼어들면 오히려 그 위력이 약 해지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혈선의 모습을 본 음산귀수의 눈이 다시 찌푸 려졌지만 곧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미 소수마녀가 죽은 이상 그 의 성미를 말릴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제자에게도 그만큼 했으면 할 도리 는 다한 것이다. 현황방 오방주가 펼친 합격진은 유기일혼진이라는 것이었다. 몇백 년전 금 나라 땅에 살던 희대의 천재 방숭이 창안한 진법이었다. 방숭은 천문지리 와 병법을 꽤 뚫고 각종의 병진에도 뛰어난 자였으나 너무 뛰어나 시기를 받아 제대로 그 재능을 발휘해 보지 못한 자였다. 천재로 소문났으면서도 오랑캐의 조정이 들어서자 조정에서 여러 번의 초빙했는데도 불구하고 출 사를 거부했다. 그의 재능을 두려워한 금나라 재상은 방숭을 없애기 위해 조정의 명으로 전진교 소속 일곱 도사를 시켜 그의 장원을 습격한 적이 있 었다. 이로인해 방숭은 가족과 일가식솔을 모두 잃고 간신히 두 아들만을 살린 체 그 역시 한 팔을 잃은 체 비밀통로로 도망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방숭은 무공만은 삼류도 되지 모르는 자였는데 그 후 석 달간 천하의 병진 을 참고하여 고심하여 하나의 진법을 만들어 당시의 거대문파 전진교에 쳐 들어갔다. 놀랍게도 내가무공도 모르던 방숭과 두아들이 무딘 칼을 들고 이 진법을 사용하여 전진교의 일대제자 일곱을 차례로 처죽인 적이 있었 다. 이때 분노한 전진교 도사들의 공격에 이들 세부자는 결국 목숨을 잃고 이때 이 진법의 내력도 같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황방에서 어떻게 입수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법이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여 방어하는 진법이었다. 신기한 것은 진의 골수가 진을 이루는 사람의 합심 과 지리, 방위 등의 기문둔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술과 비슷한 하나의 심결에 있다는 것이었다. 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진을 움직이는 것이 아 니라 한번 방위를 정하고 유기일혼을 펼치면 진이 사람을 이루는 특이한 합격진이었다. 이는 진을 이루는 사람들을 마치 하나의 유기물처럼 이어져 그 내공과 감 각을 공유하게 하는 기묘한 진이었다. 다섯이 진을 이루면 다섯의 힘과 내 공 감각과 생각이 다섯에게 공통적으로 공유되었다. 만약 한사람이 공격받 으면 그 사람에게 진 자체가 절로 다섯의 힘과 내공과 감각을 집중시켜 반 격시켜 버리는 최강의 합격진인 것이다. 음산귀수가 다섯에 포위된 이후 양측은 서로를 살피며 몸을 움직이지 않았 다. 서로 숨막이는 대치가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될 무렵 자신을 포위한 진 형에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하지 못한 음산귀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즉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음기가 손살같이 대방주 현황군자에게 몰려갔다. 그 기척을 느끼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현황군자의 몸에 즉시 기이한 힘이 몰려갔다. 현황군자는 자신의 능력이 몇배나 증폭되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시야가 넓어지고 청각능력이 증폭되었다. 오감이 몇 배나 예민해지고 내공이 평소의 다섯배 이상이나 증가한 듯한 기분. 현황 군자는 몸안에서 폭발하는 힘을 내뿜어 음산귀수의 공격에 대비했다. 파파파파팡. 마치 연달아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났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 는 음산귀수의 무형음기의 공격을 연달아 현황군자가 막아내며 내가진기와 무형음기가 격돌하는 소리였다. 현황군자의 몸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놀랍게도 발전한 감각이 소리와 형태를 숨겨버리는 무형음기의 기척을 잡 아낸 것이다. 게다가 음산귀수의 공격을 무리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고무줄의 한쪽을 잡아당기면 다른 한쪽이 딸려온다. 음산귀수의 공격이 현 황군자에게 집중되며 비중이 그쪽으로 쏠리자 딸려오듯 현황방 다른 네명 의 방주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져 와 음산귀수의 뒤쪽을 덥쳐갔다. 네명의 의지가 아니라 공격받고 있는 현황군자를 보호하기 위해 진이 스르르 움직 이고 있는 것이다. 유기일혼진이 공유하고 있는 힘의 전이는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 다. 거리를 격하고 다섯이 공유하는 의지를 먹는 순간 힘의 전이가 이어졌 다. 따라서 거의 시간차이가 없이 음산귀수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현황 군자에게서 전혀 무리없이 다른 네명의 방주 또한 가공할 공격을 음산귀수 에게 뿜어댈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스믈다섯 명의 현황방주가 일제히 음산 귀수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형세였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계속되는 음산귀수의 공세인 일초의 공격은 현황군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달아 폭음을 일으키며 덥쳐들었던 음산귀수의 무형음기의 공격은 와선형을 이루며 현황 군자에게서 주위로 퍼져 돌풍처럼 그의 주위를 돌며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와 함깨 그의 몸을 덮쳐갔던 네명의 방주의 공격과 음산귀수의 무형음기 의 공격이 동시에 맞부닥쳤다. 현황군자에게서 시작된 폭음이 순식간에 셋, 넷, 다섯의 중복된 폭음으로 바뀌었다. 파파파파파파! 퍼퍼퍼퍼퍼퍼퍼퍼! 콰콰콰콰콰콰콰! 쾅쾅쾅쾅쾅쾅! 설명은 길었지만 오대방주와 음산귀수의 격돌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것 이 단 한번의 부딪침이었다. 갑작스런 폭발음에 중인들이 깜짝 놀랄 때 소 음같이 시끄럽던 수십개의 중복 폭발음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 에는 여전히 서있는 음산귀수와 그를 포위하고 있는 오대방주의 모습이 비 쳤다. 마치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의 그 자세였다. 하지만 여 유만만하던 음산귀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었고 반면 심각했던 현황방 오대방주의 얼굴에는 희열과 자신의 빛이 충만했다. “제법이구나. 강호의 무공이 이정도로 발전했었나?” 음산귀수는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오대방주를 보며 몸을 슬쩍 흔들었다. 그 순간 음산귀수의 신영이 흐릿해지더니 다섯 개로 분신했다. 사술대법이 아니라 가공할 속도로 인한 분신이었다. 그렇게 변한 다섯의 음산귀수는 거의 동시에 현황방 오대방주를 각기 덮쳐갔다. 콰콰콰콰! 공기를 파열시키는 괴음이 울려 퍼졌다. 다섯으로 분신한 것 같지만 사실 시간차이를 두고 음산귀수는 각기 칠십이번의 손그림자를 다섯 번 반복하 여 펼쳐낸 것이었다. 일초오식이라고 할까? 모두 삼백육십번의 손그림자를 다른방향으로 펼쳐내었지만 빠른 속도 때문에 현황방 오대방주에게 각기 칠십이개의 손그림자가 뒤덮는 것 같았다. 음산귀수의 공격도 동시였지만 속력의 차이인 만큼 시각적 착각을 줄망정 약간의 시간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유기일혼진은 거의 동시라 할만큼 힘의 전이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진법. 중간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음산귀 수의 공격에 마쳐 마치 퍼져나가는 물방울처럼 다섯이 뒤로 물러나며 강대 하게 증폭된 힘으로 각각의 절기를 펼쳐나갔다. 콰콰쾅! 거대한 폭음이 일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안개처럼 흩날리는 흙 먼지가 사람들의 시선을 일시 방해했다. 두눈을 부릅뜨고 본 광경은 안색 이 하얗게 질린 음산귀수와 각기 서너걸음씩 물러난 현황방 오대방주의 모 습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음산귀수가 좀더 손해를 본 것 같았다. (단순한 다섯의 능력의 합이 아니다. 그냥은 안 되겠군. 현황방 따위를 상 대로 최후 절학을 펼쳐야 하는가?) 음산귀수는 자신이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 손해를 보았다는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단지 두 번 겨루어 봤을 뿐이지만 어찌 자 신이 밀린다는 생각이라도 했었겠는가? 그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십이성의 내공을 끌어올린체 자신의 최고절기인 음산삼귀수륜 첫 번째 절학을 펼쳐 내었다. 다시 한번 음산귀수의 몸 주위로 대기가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의 몸에 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어리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또한 다섯방주를 향해 무시무시한 압력이 피어올랐다. 자신에 찬 표정을 짓던 현황방의 다 섯방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드들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거대한 압력에 대항했다. “바퀴가 대지를 구르니 대지가 피에 젖는다. 가라. 혈륜회전!” 음산귀수의 몸주위로 소용돌이치던 가공할 기세의 회전하는 바람에 고오오 하는 귀곡성을 토했다. 음산귀수의 음산한 외침과 함께 회전하던 대기의 바람이 언뜻 형체를 갖추며 굳어졌다. 무형음기와 같이 회전하는 대기를 통째로 얼려 지름이 무려 삼장이 넘는 거대한 무형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 방을 그대로 할퀴어갔다. “크어어억.” 음산귀수의 강력한 일초가 동시에 현황방 다섯방주를 덥쳐갔다. 거대한 하 나의 무형륜이 동시에 다섯방주를 압박해 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강기 이상의 엄청난 위력과 파괴력을 가진 힘이었다. 현황군자의 가슴이 갈가리 찢겨지며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황금수는 자랑하던 자신의 무기 산반이 그대로 부숴지며 그의 오른쪽 어깨 가 통째로 뜯겨지며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혈선은 어떤 강기무공도 막는 다는 소수를 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양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없이 물러섰다. 사방주 칠절신필은 독문병기인 커다란 붓이 산산히 흩어지는 가운데 뇌려 타곤의 수법으로 땅에 뒹굴어 무형강륜을 피했고 그나마 음산귀수와 가까 이 있던 오방주는 방어할 사이도 없이 무형강륜이 생성되던 범위안에 있었 던 탓으로 비명과 함께 허리부근에서 두토막이 되어 숲 쪽으로 상체 몸이 떨어져나갔다. 순식간에 다섯을 전투불능으로 만든 거대한 무형강륜이 다 섯 방주의 피에 젖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음산귀수의 눈짓에 따라 회전을 멈추며 허공에서 스러졌다. 전세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엄청난 광경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피에 젖은 바퀴가 구루니 천하가 떤다. 혈륜천하.” 그 자리에서 음산귀수가 다시 손을 쭈욱 뻗었다. 다시 고오오 하며 보이지 않는 대기의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그나마 무사한 황금수와 혈선 그리고 칠절신필이 흠짓할 때. “으아아악.” 요란한 비명이 사천당가의 정예가 있던 곳에서 일었다. 그들이 모여 있던 곳에 자욱한 피보라가 일었다. 그들이 있던 곳의 당가의 젊은 고수들의 몸 이 사방으로 찢겨져 날아오르며 팔다리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 비명속에 는 당구악도 있었다. 한쪽 팔과 그의 목이 몸과 분리되며 피분수를 뿜어대 었다. 그들이 비명과 함께 뿜어대는 피에 물들어 허공에서 맴도는 어떤 것 의 형체가 드러났다. 무형강륜. 아까 음산귀수가 현황방 오대방주를 상대로 몸주위에 회전시켰 던 무형강륜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크기가 작아 지름이 한자 정도 될 듯 싶었다. 또 다른 것은 사방으로 뿜어지는 피를 머금어 붉어진 무형강륜이 맹렬한 회전과 함께 허공을 날고 있다는 것이다. “크으으윽.” 당구악을 포함한 당가의 정예를 덮쳤던 무형강륜은 아직도 회전하며 날아 가고 있었다. 날아가는 방향에는 흑방의 다섯호법이 있었다. 하지만 순식 간에 피어오른 피보라에 시야가 차단되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도 못 한 상태에서 무형강륜은 다섯 호법을 지나쳤다. 무형강륜이 지나가던 방향 에 있던 두호법의 머리통이 호박 터지듯 그대로 깨어져나갔다. 그리고 마 지막으로 청성이자를 목표로 삼아 무형강륜은 날아갔다. 청성이자는 고수였다. 하지만 무형강륜의 말도 안되는 위력에 충분히 질린 상태였다. 그 사이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검세로는 무형 강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다행히 피에 흠뻑 젖은 무형강륜의 모습은 뚜렷하게 그들의 눈에 드러났다. 그래서 청성이자는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 는 무형강륜을 피하기 위해 양쪽으로 흩어졌다. 콰콰쾅! 청성이자가 양쪽으로 날아오르고 처음 두 사람이 있던 곳까지 이르렀던 무 형강륜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무형강륜은 음산귀수가 회전하는 대기를 음 기로 얼려 자신의 진기로 조정한 것. 그것이 터져나가자 무형음기의 파편 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하늘을 뒤덮었다. 하나하나의 파편에 막강한 진기 가 실린 공격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마치 인세의 지옥이 펼쳐진 듯 무형 강륜이 폭발한 주변 십여장 이내가 비명으로 뒤범벅되며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당가의 정예가 싸그리 몰살당했고 살아남았던 세 명의 흑방 호법도 온몸이 벌집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땅위로 뉘였다. 청성이자 또한 예외는 없어 그 모든 파편을 막아내지 못하여 몇 개를 가슴과 머리에 가격당하여 결국 생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마지막이다. 대신 노부 최강의 수법을 선보이지. 혈륜강림.” 음산귀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노린 곳은 이 끔찍한 광경에 벌 벌 떨며 주저앉아있는 열명의 노인이었다. 처음 그가 죽이려고 했던 상계 열명의 원로. 단지 그가 짜증으로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상황 을 만난이후에도 죽이겠다는 목표가 된 무공도 모르는 노인들. 음산귀수가 허공에서 만들어 낸 것은 거대한 그림자였다. 처음 무형강륜을 선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몸에 어리던 검은 그림자. 그것이 둥그렇게 퍼져 원의 형태를 만들며 열명의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마도 음산귀수 의 무공 중에 가장 무서운 무공일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음산귀수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누가 이 공격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뜻대로는 안될 것이오.” 상황과 현황 오방주와 함께 나타났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달려나와 열명 의 노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젊고 잘생긴 청년. 그는 한자루의 검을 뽑 아들고 나와 음산귀수의 거대한 원반그림자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순간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그윽한 단향이 허공에 퍼져나갔다. “오상공.” 옥향이 그를 알아보고 애타게 부를 뿐이었다. 오형록은 음산귀수의 무공을 보며 피가 끓어올랐다. 그가 태어나서 본 무 공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승부욕이 불타올랐는지 도 모른다. 오형록은 이십년 내내 갇혀 무공만을 익혔다. 살아생전 내내 세뇌를 받아 왔기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 자질을 인정받아 혈무영 십대영주의 하 나로 꼽혔고 혈검류도 익혔다. 혈검류는 천지마검류의 아류로 본래의 무학 에는 약간 손색이 있지만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대신 속성이 가능했다. 혈검류를 익힌 이후에 강호에 그의 상대가 될 고수가 그리 많지 는 않을 것이라고 오형록은 생각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음산귀수의 무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뛰어 나간 것이다. 그의 무공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그보다는 약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오형록은 단향검군의 무공 중에 최강의 절초를 펼쳐내었다. 혈검류를 제외 하고 그가 아는 검공 중에 최강의 무공이었다. “크흐흐. 이 검의 향기. 단향노귀의 제자이냐?” 음산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무공은 옆에서 볼때보다 겪을 때가 더 욱 무서웠다. 백만근의 압력이 사방으로 그를 압박해 나갔다. 연약한 두부 를 으깨는 쇠방망이처럼 묵중하게 오형록을 사방에서 조여갔다. 본격적인 혈륜강림의 절초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가빠왔다. “네 사부가 온다면 모를까? 너로는 안된다.” 온몸의 피가 증발되는 것 같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다. 확실히 오형록은 음산귀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은 무리인 것이다. 단향검초는 반도 펼쳐지지 못한체 위압에 눌려 정지되었다. 그의 입가에서 도 눈가에서도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라도 혈검류를 시전한다면?) 정체를 감추기 위해 단향검류를 시전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오형록은 고 개를 저었다. 그의 혈검류가 음산귀수의 무공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 는다. 오히려 같은 경지라면 혈검류는 기수식만으로도 음산귀수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형록의 혈검류의 숙력도와 음산귀수 의 자신의 무공의 숙련도는 경지가 틀렸다. 게다가 둘의 내공도 너무 차이 가 났다. 지금 오형록의 내공과 실력으로 혈검류를 펼쳤다면 목숨만은 건 질지언정 패배는 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기지도 못할 거라면 정체를 드러낼 필요도 없지.) 내장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핏줄이 근육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압력 으로 칠공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형록의 한쪽 무릅이 굽혀졌다. 음 산귀수는 괴소를 터트리며 더욱 압력을 가했다. 그 때 갑자기 오형록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산귀수의 혈륜 강림 때문에 충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에 암흑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여겨지더니 그의 정신이 어둠에 삼켜지 는 것처럼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영혼과 정신이 어둠에 갇힌체 육체 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갔다. 갑자기 꺼져가던 오형록의 두 눈에서 혈광이 일었다. 오형록의 눈빛이 아 닌듯한 완전히 바뀌어버린 눈빛. 약간의 희열이 담긴 눈빛. 그 눈빛은 재 빨리 자신의 주위를 파악했고 금방이라도 개미 눌러 죽이듯 오형록을 압력 으로 눌러 죽이려는 음산귀수를 향했다. “뭐야? 천마에 빌붙어있던 멍청이 아냐?” 음산귀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저 위급한 상황에서 겁모르던 애송이 하나가 피식 비웃음을 날리는 것을 봤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애송이의 검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단아한 향냄새가 천지간에 자욱하게 퍼졌다. 음산귀수는 자신의 시야에 온통 거대 한 검이 꽈악 차있다고 느꼈다. “제 조카는 현황오관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 황방 사방주의 신분으로 제 조카를 대방주에 추천합니다.” 칠절신필의 음성이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만승패검이 자 격이 있는 것은 충분할 정도로 장내에 인식되고 있었다. 현황방 다섯방주 의 합격을 단 세수만에 박살내 버린 음산귀수를 홀로 막아내었으니까. 물론 그는 겸손하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했고 그가 간신히 막아내자 음 산귀수가 약속대로 떠난 것이라고 했지만 그날의 흉험했던 일을 아는 사람 이면 누구도 오형록이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음 산귀수가 사라지자 마자 쓰러진 그는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을 정도로 다쳤던 상태였는데도 그때 그는 끝까지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 현황방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이미 모든 조사를 통해 내력이 확인된 이 후였다. 신분은 확실한데다 대륙전장연합의 일원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쪽 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현황방 오방주를 잃어 전장쪽의 현황방 대표를 잃었으니 그를 전장쪽의 대표로 삼으려는 것이다. 게다가 사방주의 추천을 받아 표국쪽의 표도 모으고 있으니 자격은 넘치고도 남았다. 상황은 칠절신필의 말에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장내를 둘러 보 았다. 현황군자는 무공이 전폐되어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다. 그의 은퇴는 이제 단순히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닌 현황방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방주 황금수는 오른쪽 어깨부터 절단되어 대방주의 경선을 포 기했다. 그리고 오방주는 목숨을 잃었다. 지금 장내에 있는 것은 남아있는 현황방의 방주들이었다. 또한 대방주 경선에 나선 세사람이 있다. 이번에 상계의 원로들을 구해 전 폭적인 지지를 얻고있는 만승패검. 그리고 현황제갈과 사해태자. 괴이하게 도 세사람은 하얀 복면을 쓰고 똑같은 하얀 백의를 입어 누가 누군지 분간 할 수가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 셋중에서 대방주를 선출할 자격이 있는 상계의 일백원로. “노부가 한마디 하겠소.” 상황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나서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상황 에게 모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은 역시 상황이었다. “여태까지는 우리들이 현황방 대방주를 표결로 뽑았소. 노부는 별로 이일 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바꿨으면 하오.” 아무도 상황의 말을 가로막지 않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근래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들 알고있을 것이오. 혈천마련이 모습을 드러 냈고 우리에게 복속을 권했소. 이건 현황방의 일대 위기요. 현황방뿐만 아 니라 상계 또한 최대의 위기요. 이런 비상시기에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현황방과 상계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오.” “......” “마련에게 숙이고자 하는 생각은 없소. 하지만 이대로는 현황방과 상계의 결합이 너무 단순하오. 여태까지는 상관없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소. 그래서 노부가 대방주 선출에 대해 한가지 제안을 할까하오.” “상황께서 저희를 인도하십시오. 저희들은 따르겠습니다.” 호경대인이 격동에 차 일어서서 상황에게 말했다. “아니오. 무공을 모르는 노부가 여러분을 인도할 수는 없지. 상계의 일이 아니라 무림의 일이니까. 그래서 말하건대 노부에게는 이제 양녀로 삼으려 는 아이가 있소. 이 아이는 노부의 양녀라는 이유만으로 상계를 대표할만 하다 싶소. 노부는 그 아이와 새로운 현황방주를 결합시켜 상계와 현황방 이 일체화되는 상징적 의지를 표하고자 하오.” 상황의 갑작스런 말에 세명의 현황방 대방주 후보는 움찔 몸을 떨었고 원 로들과 현황방 방주들도 웅성거렸다. 뜻밖의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 실히 효과는 있었다. 여태 현황방의 위에 있던 상계였다. 하지만 앞으로 마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현황방의 새로운 대방주를 중점으로 현황방과 상계가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밑의 호위로 인식하던 현황방의 지시에 상계가 잘 따를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상계의 제황격인 상황의 딸을 아내로 둔 현황방 대방주라면 상계도 명분상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 을 것이다. 그것은 현황방 대방주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다. “노부는 세명의 방주후보가 어느 누구하나 뒤지지 않는 인재들이라 생각하 오. 누가 방주가 되어도 능력을 발휘할 분이오. 하지만 지금은 내분이 있 어서는 안 될 시기. 누가 미는 사람이 떨어지고 누가 미는 사람이 대방주 가 된다면 그 불만이 여태처럼 상계내부에서 대립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 오. 그래서 노부는 세 분이 분간할 수없게 똑같은 차림을 하도록 했소. 이 제 노부의 양녀가 세분 중에서 한명을 택할 것이오. 그녀도 누구를 고를지 모르니 선택되는 분은 하늘의 택함을 받은 것이오. 그러니 떨어진 두 분은 하늘의 뜻으로 알고 아무 불만을 가지지 말고 새로운 대방주를 받들어 우 리 모두의 위기를 구해주기 바라오.” 상황의 말에 세명의 후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에는 정인을 가진 사 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방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고로 영웅은 많 은 여자를 거느리는 법이니까. “들어와라.” 상황의 말에 장내로 옥향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불안으로 가득찼다. 상황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은 들어 알겠지? 양녀로 맞이하겠다고 하고는 네게 못할 짓만 하는구 나. 하지만 부모로서 딸의 배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한다. 하물며 비상시기이니.... 너는 노부의 뜻을 따르겠느냐?” 상황은 눈을 감았다. (이것은 최후의 시험이다. 이 아이가 자기 일신보다 상계와 현황방을 더 위할줄 아는 아이라면 허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부도 이 아이를 진정한 딸로 여기고 위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생이 걸린 문제이다. 그녀가 자 기 자신을 위해 결혼을 망설인다면 그녀는 한 정 많은 노인의 양녀는 될 수 있지만 상계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상황의 딸이 될 인연은 없다.) 옥향은 몹시 망설였다. 저 세사람 중에 그녀가 원하는 님이 있다. 하지만 저들 중에 어떻게 분간을 한단 말인가? 만약 다른 사람을 고르기라도 한다 면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상황의 양녀든 뭐든 되고 싶 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오형록과 맺어질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만약 오늘을 놓치고 다시 모란루로 돌아가게 된다면 현황방에 머물 오형록과 맺어질 수가 있을까? (얼굴을 보지말고 발밑을 보라.) 문득 그녀는 세 번째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똑같은 복면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세 명 남자의 발밑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똑 같은 모습의 신발. 하지만 오형록은 남들보다 훨씬 발이 컸다. 그녀는 큰 소리로 상황에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부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주군. 어찌 되었습니까?” 쌍노의 염려어린 시선에 죽은 듯 누워있다가 대법을 거둔 백이충은 피식 웃었다. “아. 염려마. 이혼통제대법은 성공이야. 십여일 동안 시도해 봤지만 완벽 해. 시험도 적절한 때에 했군.” 백이충의 말에 쌍노의 안색이 격동으로 떨렸다. 혈마전혼대법과 같이 배교 의 사술중에서 가장 성공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것이 이혼통제대법이었다. 배교 역사상에도 그 술법을 성공했던 술사가 세손가락을 넘기지 못했던 그 것이 성공한 것이다. “완벽히 성공했어.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시야. 육체의 귀로 생생 히 들려오는 소리들. 육체의 충족감과 일체감. 온 몸에 느껴지는 피부의 촉각들. 충실한 오감과 여러 감각들. 대법만 시행하면 오형록이 보고 듣 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게 전송되어 똑같이 느껴져. 지금 현황방의 대방주 로 선출된 것을 오형록의 눈을 통해 똑똑히 보고 대법을 그만 뒀어.” “록아의 몸의 통제는 어떻습니까?” “저번에 음산의 멍청이를 상대할 때 시험해 봤잖아. 몸을 통제까지 할 때 는 완전히 내 영혼이 강림한 상태야. 감각은 물론이고 껍데기의 몸에 쌓여 있던 내공까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어. 여기에서 영혼을 통해 강림하 여 몸을 조종했지만 그때는 내가 완전히 만승패검이 되어 그곳에 있던 느 낌이었어.” “록아의 영혼이 거부하지는 않았습니까?” “너희들이 혈무영들에게 대법을 잘 시행했더군. 내가 놈의 눈과 귀와 감각 을 통해 모든 것을 직접 격은 것처럼 경험할 때도 생생했었지만 몸을 조종 하기 전까지는 뭔가 부족했어. 그런데 음산의 멍청이가 왔을 때 몸의 통제 를 시험해 보니 완벽했어. 껍데기 몸이 위험에 빠진 것 같아 여기서 놈의 몸을 내 영혼에 동조시켜 통제하기 시작하자 껍데기의 영혼은 즉시 의식을 잃고 한구석으로 숨어들던걸. 그리고 내가 완전히 그가 되었지. 뭐, 어차피 과거의 내가 그렇게 지시해서 만든 장난감 껍데기 제물들 이니까.” 이혼통제대법. 그것은 대법을 펼친 제물에 영혼을 빙의하는 대법. 남의 육 체를 제멋대로 빌려 쓰는 사악한 대법. 제물은 평소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름없이 자신의 뜻대로 생활하고 움직이며 판단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 구에겐가 조종당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상태. 하지만 안다고 해도 기꺼이 자신의 몸을 도구로 제공할 정도로 제물은 조종자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다. 조종자는 천리 밖에서도 제물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같이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으며 또한 그 몸을 조정할 수도 있다. 단지 조정하는 것이 아 니다. 영혼과 결합된 본체는 안전한 곳에 두고 수천 리 밖의 제물의 몸에 대신 영혼을 빙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으로 대법을 거두기 전 까지는 제물 그 자체의 육체와 동화되어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마음대로 움 직이다가 대법을 거두면 제물의 몸에서 영혼이 물러나는 것이다. 즉 영혼 이 실질적인 자아라면 본체는 자아와 결합된 일체화의 몸, 제물은 마음대 로 빌려 쓰는 여분의 몸이라고 할까? 이혼통제대법을 펼칠 수 있는 자라면, 결국 제물만 충분히 있다면 자신은 안전한 곳에서 머물러 있어도 분신의 제물을 통해 무수한 많은 각기 다른 신분과 모습으로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물의 몸으로 움직일 때는 어떠한 상처도 영혼에 충격이나 해를 끼치지 못한다. “혈무영 일천 전부에게 이혼통제대법을 펼쳐놨나?” “예. 하지만 명하신대로 여자 아이들에게는 대법을 풀어놨기에 남자 아이 들만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법을 통해 그들 혈무영의 몸에 강림하 실 수 있는 분은 배교의 술법을 완벽히 익히신 주군뿐입니다.” “음. 여자의 몸을 사용한다는 것은 좀 꺼림직 해.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본 체가 너무 약해서 술법만을 펼칠 수 있었는데 오형록의 몸을 사용했 때 처 음으로 튼튼한 몸과 내공을 이용해서 조금이나마 무공을 펼쳤어. 하하 그 때 겁많던 그 음산의 멍청이 녀석이 정신없이 도망가던걸?”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혈무영 남자대원들을 천하에 풀어 놓을까요?” “어차피 제자놈들이 마련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어. 나도 본격적으로 나서려면 무공 없이는 안돼. 그러니 이 몸을 어떻게 하기 전까지는 대법을 사용해서 남의 몸을 빌리도록 하지. 그리고 어차피 소매의 등쌀 때문에 당 분간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된 상태이니까.” 백이충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런데 옥향이라는 계집. 모란루에 있었을 때와는 엄청나게 이뻐져서 달 라졌던 걸? 요요태후의 영향일까? 오형록이 옥향과 결혼해서 밤을 보낼 때 는 내가 대신할까? 으-음. 내가 왜 이러지? 점점 옛날 성격이 자꾸 되살아 나면 안 되는데.” 37 이혼통제대법-모용풍(1) 혈존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혈천마궁이 갑자기 종적을 감춘지 이십년이 지 났다. 그동안 천하는 백도의 세상이었다. 중원을 완벽히 장악한 백도맹은 사라진 마도의 흔적을 찾기위해 이십년간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허 나 그들의 종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가있었던 것일 까? 흔히 중원에서 변방이라고 말하는 곳이 있다. 나라안의 땅을 경계로 안팍 에 이민족들이 많이 사는 곳. 중화인이 영향력을 미치되 아직 지배하지 못 하는 곳. 저 멀리 중원의 서쪽에 색목인과 라마들이 사는 서장지역이 그렇 고 대리국과 그 밑에 남만족과 묘족이 사는 중원 남쪽의 운남이 그렇다. 서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바로 중원의 한부분으로 인식되는 감숙만 해도 옥 문관과 가욕관 안쪽에 위그르족 자치구가 설립되어 있으며 중원의 남쪽 한 자락을 잡고있는 광서성에도 장족 등의 종족들이 살고 있다.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 북쪽에도 대원제국의 후예라는 몽고인들의 존재가 있으며 구대문파의 하나인 곤륜파가 있는 청해도 중원이라고 칭하기는 어 려운 곳이다. 아미 청성 점창파등의 삼대문파와 대대로 쟁쟁한 당문이 있 는 사천 역시 삼국시대 유비가 촉을 근거지로 삼지 않았다면 중화의 문명 을 받아들이지 못해 변방으로 치부될 지역이었다. 몽고 동쪽으로 흑룡강, 길림 요동 또한 지리적으로 수도인 북경의 북쪽에 있는 곳인데도 변방으로 치부되어 있다. 변방의 공통점은 중화인과 다른 이민족들이 살고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변방이라고 칭해지는 중원의 끝 서남부 지역들, 즉 청해성, 감숙성, 섬서, 사천, 운남, 귀주, 광동, 광서.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문파에 대하여 이른바 혈첩이라는 것이 전해졌다. 사라졌던 혈천마궁의 일곱마전이 뭉쳐 혈천마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이름을 알리고 복속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로서 혈천마궁의 잔당이었던 마도들이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그리고 어 째서 백도맹이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분명해졌다. 혈존의 사망을 믿지 못했던 그들은 저 멀리 국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국경 변방지역에 이민족 들 속에 숨어들어 이십년간 숨을 죽이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들 지역이 백도맹의 이목이 닿지 않는 변방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대 문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청해성에는 구대문파의 하나인 곤륜파가 도가 의 성지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고 감숙성에는 얼마전 개파한 천뇌교가 자리 를 잡고 있었다. 귀주에는 혈천마궁이 사라진 이후에 흑도를 통일했던 흑 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운남에는 백도맹과 더불어 혈천마궁에 대항했던 천 무삼패의 하나인 만독궁이 자리잡고 있다. 광동지역에는 현황방이, 광서지역에는 광서의 패자라고 일컬어지는 칠륜교 가 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혈첩이 뿌려진 곳 중에서 무림의 변방이라 고 할 수 없는 곳이 두군데 있다. 아미, 청성, 점창등의 대문파가 몰려있는 사천과 종남, 화산등의 대문파가 있는 섬서지역이 그렇다. 혈첩은 복종과 항쟁을 결정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한달 반의 시간이 그 것이었다. 혈첩을 받은 대문파들이 백도맹에 급박한 서신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남에 있는 백도맹에서 그런 모든 지역을 지 원해 줄 수 있는 작전을 짜내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섬서 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할까? 그로인해 천하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다. 백도맹이 있는 하남성의 남부에는 복우산이 있다. 이 복우산에 백도맹의 마지막 저력인 승룡곡이 있다는 사실은 백도맹에서도 알고있는 사람이 스 믈을 넘지 못할 정도의 비밀이었다. 그런 중지가 있는 이곳 복우산의 정상 을 야밤에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멈추세요.” 마침 먹구름에 가린 달이 빛을 발하여 천지가 제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게 되었을 때에 야밤의 산책자도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때맞춰 산책자를 멈추는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을 드러낸 달밤의 야행인은 허공에서 멈을 멈추고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했다. “소협이 향하는 곳은 저희가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곳은 사내들의 발길이 허용되지 않는 곳입니다. 용건이 없으시면 이대로 물러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청년을 멈춰세운 사람들은 두명의 여인이었다. 곱게 나이를 먹은 중년부인 들로 그 미색이 퇴색하지 않았다. 청년은 두 여인에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자비암의 선배들이시군요. 후배는 천하제일가의 모용풍이라고 합니다. 자 비성모의 부름을 받고 왔으니 통지해 주십시오.” 달빛에 천하제일남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얼굴을 드러낸 청년은 무적소 야 모용풍이었다. 차기 무림맹주에 제일 가까운 인물. 무성 종리연의 대제 자이며 천하제일가의 소가주라는 신분에 있고 천무삼성의 하나인 무적장왕 의 사대손이며 무림칠룡의 수좌로 있는 인물. 무릇 여인들이 꿈꾸는 가장 완벽한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가 그였다. “이제보니 모용소협이군요. 사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하. 과분한 예는 후배가 받들기 힘이 듭니다. 자비암과 천하제일가는 남이라고 할 수 없으니 말을 낮춰 주십시오.” 자비암은 절강성에 속해있는 해외 보타산의 보타암이 중원에 두고있는 지 파이다. 그 시조는 자비성모이다. 그리고 모용풍이 자비암을 남이라고 칭 하지 않은 것은 자비성모가 바로 천하제일가 모용세가 출신이었기 때문이 다. 바로 무적장왕 모용도기보다 삼십 세나 어린 누이동생이 세운 문파인 것이다. 자비성모는 어릴 때 무당파의 한 젊은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속가제자 는 결국 사문을 더 중시하여 출가하여 도인이 되었으니 곧 그가 천무삼성 의 하나인 현무도선이었다. 사랑에 실패한 자비성모는 상심하여 그녀 역시 자신의 사문이며 또한 불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남해 보타암에 출가하 였다. 한 때 그녀는 출가하기 전에 보타암의 속가 여제자들을 이끄는 검후 의 후보에 이를 정도로 무예가 높고 방명을 날리기도 했으나 세속에 뜻을 잃은 후에는 명성도 무예도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자비성모는 출가후 보타산에서 나와 천하를 돌며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유 랑하였는데 천하제일가의 재력을 후원으로 삼고 가진바 의술로 병자들을 구제하며 검후 후보였던 무공으로 악인들을 교화하여 중년의 나이에 자비 성모라는 이름을 얻었다. 천무삼성이 은거한 이후 천년마교의 난이 닥치자 그녀 역시 은거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보타암을 지어 말년을 보냈다. 그녀 의 이름을 존경하여 팔대천마의 수좌인 천마조차 보타암을 건드리지 않았 다. 그런 보타암이 멸망했던 것은 혈천마궁의 난이 있었던 때였다. 자비성모가 백도무림의 청을 받아들여 백도명숙과 함께 천무삼성을 설득하 러 갔을 때 일어났던 자비암의 혈겁은 천무삼성을 다시 무림에 끌어들이는 한 계기가 되었다. 혈존이 죽고난 이후 자비성모는 살아남은 몇몇 제자들 로 하여금 자비암의 복구를 명령하고 승룡곡에 들어가 이십년간 백도의 제 자들을 키우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모용풍 역시 승룡곡에서 얼마간 지 낸바가 있었고 자비성모가 그의 고조모 뻘이 되므로 많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그녀는 세속의 혈연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성모께서는 어이하여 승룡곡을 벗어나셨습니까?” “천하가 어지러운데 그분이라고 안빈낙도를 계속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마도 곧 승룡곡의 전원이 강호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낭보가? 만약 승룡곡의 기인들과 천무호정단 칠기의 전 인원이 강호 에 나서면 지금의 무림을 어지럽히려던 기류정도는 단숨에 가라앉을 것입 니다. 그런데 저를 부른 신 것은 어인 일인지 혹시 짐작가시는 일이라도?” “사조께서 무림에 나서시기 전에 모용소협을 불러들여 지금의 무림상황을 알아보시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승룡곡 안은 아무리 저라도 까다로운 절차와 허락없이는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니까 외부로 저를 부르신....” “다 왔습니다.” 모용풍이 자비성모와 만나기로 한 곳은 복우산 정상에 있는 쌍불봉이었다. 하지만 두명의 중년 여성이 안내한 곳은 쌍불봉에 미치지 못하는 그곳 근 처의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모옥이었다. 아마도 사냥꾼이 임시로 쓰는 듯 한 거처인 듯. 자비성모가 머물기에는 초라한 곳이지만 이십년간 승룡곡 안에서 지냈던 자비성모가 따로 외부에 거처를 마련해 둘리는 없었다. 하 지만 모용풍은 모옥 주위에 수십명의 고수들이 은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자비성모를 호위하기위해 나온 자비암의 제자들일 것이다. 오두막 안에서는 한명의 굉장한 미인이 나와 그들을 맞이하였다. “소매가 사저들을 뵈옵니다.” “매사매. 이분이 사조께서 칭하신 모용소협이다. 사조에게 기별을 넣어 주 겠느냐?” 달빛아래 드러난 청초한 얼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한눈에 사내를 매혹시킬 정도의 몸매. 태끌만한 세속의 더러움도 묻지 않고 개끗함 그 자 체로 존재하는 듯한 성스러운 여인. 모용풍은 자신의 약혼녀인 백리설을 제외하고 이런 미인은 처음 보았다.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게 되자 자연적 으로 그의 머릿속에 한 명의 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검후 매옥선? 여중 제일인이라고 불리는 보타암 제일의 여검수이자 무림 칠미의 수좌인 검후가 바로 이 소저이겠구나.) 중원 밖에 신비스런 네 문파가 있으니 이들이 바로 신비사세라. 북으로는 북해빙궁이 있고 남으로는 해왕군도가 있으며 동으로는 장백신선문이, 서 쪽으로는 청룡사가 있다. 이들은 무림 역사에 분명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신비한 문파였다. 다만 알려진 것으로는 그 하나의 세력이 구파일반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들 신비사세는 단지 위협적인 세 력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 혈천마궁과 혈존에 의해 멸문당한 것으로 알려 져있다. 수백 년 전에 무림을 재패하겠다고 남해의 해왕군도가 수백척의 대규모 선 단에 가득 무인들을 싣고 넘어온 적이 있었다. 해남검파가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대륙 남부에 혈풍이 불었다. 당시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던 무림맹주 역시 해남검파와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연일 회의를 거듭했다. 그 때 해왕군도의 총도주를 조용히 찾아가 세시진에 걸친 담론과 단 한번 의 비무로 그들을 물러가게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해 보타암의 출신 으로 세인들은 해왕군도주를 설득한 지혜와 그를 물러나게 한 검을 존경하 여 그 이후부터 그녀를 검후라고 불렀다. 그 이후 남해 보타암에서 검후가 출현하면 중원의 검호들은 아무도 검을 자랑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중원을 진동했다. 그후 세 번 정도 보타암에서 검후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를 배출했는데 그 때마다 검후는 여중제일인으로서, 그리고 검도의 제일인으로 중원의 검문 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검후의 이름을 달고서 비무에서 승리를 이끌지 못하고 무승부를 기록했던 것은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인 무당파의 태극 혜검과 사대마도절예의 하나인 마검문의 천지마검류밖에 없었다. 보타암의 검후가 펼치는 보리무극검 역시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였다. 매옥선은 그런 검후의 이름을 이은 여인이었다. “사숙조께서는 잠시 달빛을 감상하시겠다며 외출하셨습니다. 모용소협이 오면 죄송스럽지만 곧 돌아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모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기다려야죠.” 검후는 현 보타암주의 제자. 그리고 자비성모는 보타암 출신. 그렇다면 자 비성모를 호위하고 있는 고수들은 검후의 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자비암 출신뿐만 아니라 보타암 출신도 많이 있을지 모른다. 보타암은 소림사 못 지않은 불문의 명망과 검후라는 걸출한 무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곳. 모 용풍은 잠시 매옥선을 응시했다. 그 미모때문이 아니라 검후라는 이름이 갖는 매력에 위해 무를 겨루어보고 싶은 맹렬한 경쟁심이 생겨났기 때문이 다. 보타암에서 백도를 위해 보리무극검을 가르치는 여제자들을 일컬어 따로 검각이라 일컫으며 백도의 기둥이라 일컫는 것이 조금의 과장도 아님을 모 용풍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그녀들의 무예가 허명이었다면 일 정한 자격을 얻은 검각의 수뇌가 검후라는 이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예로 지금 그의 몸을 공격하고 있는 수줄기의 검기의 경지는 전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슈우욱. 모용풍은 그들을 해칠수 없기에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상대를 해치 지 않고 빠져나가려면 상대보다 열배는 강해야 했다. 하지만 검각의 고수 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 음적. 검후님을 겁탈하려던 놈. 네가 그래도 천하제일가의 후손인가?” “젠장. 오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소?” 모용풍은 진정 미칠 것 같았다. 또다시 검각의 여검수들에게 포위당한 것 이다. 중하게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포위망을 뚫기위해 검각의 고수들을 벌써 몇 명이나 부상시켰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검각의 여고수들은 미친 듯이 모용풍을 끈질기게 추격하고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미치고 싶은 것은 모용풍이었다. 모용풍으로서는 한시진 사이에 일어났던 방금전 의 일이 꿈만 같았다. 허름한 모옥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용풍의 귀로 한줄기 전음이 흘러들어온 것은 그가 모옥에 들어간지 겨우 일각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풍아. 할말이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풍화봉으로 오너라.” 그 목소리는 모용풍도 잘 알고있는 목소리였다. 바로 천무삼성의 하나인 현무도선의 목소리였다. 그에게 수업을 받은바 있는 모용풍이 못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다만 어째서 현무도선이 당당히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이 곳에서 모용풍에게 은밀한 전음을 날리는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천무삼 성과 자비성모는 깊은 교분이 있으니 성모를 따라 현무도선이 승룡곡을 빠 져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의심을 잠재웠다. 모옥 주위는 보타암의 제자들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모옥을 벗어났다. 모 용풍의 실력이 뛰어난 것인지, 혹은 보타암의 제자들이 모용풍에 대한 경 계보다는 외부의 침입에 더 신경을 쓰고있었기 때문인지 안에서 빠져나오 는 모용풍의 신영을 모옥의 누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모용풍은 모옥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풍화봉으로 방향을 잡을 때였다. 그의 앞에 한명의 도인이 급히 나타났다. “광혜도장님이 아니십니까?” “무량수불. 허허. 모용시주. 미안하네. 어이하여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자는 바로 무당파의 장로 광혜도장이었 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급하게 달려온 듯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모 용풍을 보고있었다. “승룡곡에서 그분을 급하게 찾으셨네. 그래서 소시주를 풍화봉에서 기다리 지 못하고 곡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셨기에 노도를 불러 모용시주에게 말 을 전하라고 했네.” “어인 전언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모뿐만 아니라 도선까지 저를 찿으시 니 어찌된 연유입니까?” “그것은....” 모용풍의 곁에 가까이 온 광혜도장이 소리를 낮추며 비밀이야기를 하려는 듯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네놈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아앙.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광혜도장이 지척에서 모용풍에게 일장을 날린 것이 다. 하지만 물러선 것은 모용풍이 아니라 오히려 광혜도장이었다. 광혜도 장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나타났다. “너는 광혜도장이 아니로구나.” “크윽. 지독하구나. 일갑자 공력의 흑살장을 튕겨내다니 네놈. 어린나이에 곤건무적강기를 십성 이상 터득했구나.” “흑살장이라고? 네놈. 천면음마이냐?” “흐흐.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나는 그분의 일개 수하일 뿐이 니.” 천면음마는 육십년 전 천하를 울리던 음탕한 마왕의 하나였다. 동시에 그 당시에 가장 뛰어나다는 역용술을 지닌 자였다. 눈에 든 미인의 친인으로 변해 여인을 범하고 다녔는데 그중에는 대문파의 여식이나 부인들도 수두 룩했다. 워낙 변신술이 뛰어나고 무공이 강하였기에 천하의 눈을 속이고 잘도 음행을 일삼다가 마교의 여고수를 범하는 바람에 천년마교의 추적을 받아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색마들의 우상격인 인물이었다. 모용풍이 두손을 들었다. 시퍼런 수강이 그의 손을 퍼렇게 물들였다. 암습 에 실패한 가짜 광혜도장은 모용풍의 건곤무적장의 기수식을 보고 안색이 변해 급히 달아났다. 무방비 상태의 암습을 막아낸 모용풍이라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모용풍은 그가 사라지자 태연했던 얼굴이 새하 얗게 변하며 탈썩 주저앉았다. “크윽. 천운이다. 하고많은 사혈 중에 건곤무적강기가 저절로 발동되어 혈 도가 사라진 곳을 향해 암습하다니.” 과연 그때는 그것이 천운인지 알았다. 모용풍은 승룡곡에서 배운 절진을 주위에 펼쳐놓고 내상을 조절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내 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잠시 내식을 조절한 모용풍은 망설였다. 천면음마의 후예가 승룡곡 주위를 서성이고 있는 것을 승룡곡에 알려야 할지 아니면 모옥으로 돌아가 자비성 모를 먼저 만나야 할지 주저했다. 현무도선의 전음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미치지 않고야 마두들이 승룡곡 주위를 어떻게 멀쩡히 돌아다닌단 말인 가? 필시 음모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적들은 승룡곡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곧 모옥으로 돌아가 성모에게 이번 암습에 대해 말을 할 작정이었다. 역시 비밀스럽게 모옥으로 돌아가려던 모용풍은 모옥에서 그리 멀리 떨어 지지 않은 장소에서 어떤 기척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모옥 주위를 둘러싼 자비암의 고수중의 하나인줄 알았다. 하지만 다급한 기척은 모용풍에게 의 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자신을 암습했던 가짜를 조심하며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지도 모를 정도의 작은 기척이었다. 혹시라도 풍화 봉의 일과 연관된 그 가짜일 수도 있다. 기척을 조심스럽게 추적하던 모용풍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뻔했다. 숲 속에 있는 거목의 수많은 가지들이 얽혀있는 곳에 나뭇잎으로 위장하고 은 신하기 좋은 거처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소리가 들린 곳은 그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위에서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명의 늙은 노 도사가 젊은 처녀를 벗겨놓고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 다. 모용풍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제압당해 정신을 잃고 발가벗고 있는 여인은 바로 무림칠미의 수좌라는 검후 매옥선이었다. 그녀의 고강한 무공 으로 볼 때 어찌 그토록 쉽게 제압당했단 말인가? 그리고 매옥선을 벗겨놓 고 음탕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몸을 주무르고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모용 풍은 자신의 눈을 또한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늙은 도인은 바 로 천무삼성의 일인인 현무도선이었다. (그렇군. 저자도 가짜이다. 전음을 날렸던 자도 바로 도선을 위장한 저자일 것이다. 도선으로 위장하였기에 검후가 방심했다가 제압당한 것이다. 저자 야 말로 천면음마와 관계된 자이거나 바로 본인일 것이다.) 모용풍은 상대가 더 나쁜일을 저지르기전에 급히 나타나 상대를 향해 공격 을 했다. 매옥선에게 정신이 팔렸던 상대로서는 기겁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범상치 않은 고수였던 듯 매옥선을 방패로 몸을 돌렸기에 모용풍은 공격을 급히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웬 놈이냐?” “감히 도선의 얼굴을 사칭하다니. 네놈이야 말로 누구냐?” 가짜 현무도선은 흠칫 놀랐다. 자신의 일을 방해한 자가 바로 모용풍이었 기 때문이다. “흥. 그녀석이 실패했구나. 좋아. 계집은 네게 양보하지.” “어디를 도망가려는 거냐?” “네가 무서워서 이러는 줄 아냐? 근처에 검각의 계집들만 없었으면 내일을 방해한 네놈을 없애고 계속 재미를 보려고 했을 거다.” 입으로 잘만 나불거리면서도 가짜 현무도선은 모용풍이 저지할 틈도 없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경공술이 워낙 빨라 모용풍조차 놀랄 정도였다. “순순히 놓칠줄 알고. 서라.” 모용풍이 소리를 질렀다. 모옥과 가까우니 검각의 고수들을 불러모으기 위 해서였다. 그리고 상대를 놓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흐흐. 바보녀석. 나를 따라와도 되느냐? 내가 먹인 음약덕에 검후라는 계 집이 곧 죽을 텐데?” 좀처럼 모용풍을 떨쳐내지 못하자 괴인이 모용풍에게 소리쳤다. 그말에 모 용풍도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았다. 천면음마의 음약은 지독 하여 제때에 해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던 것이 다. “악적. 어서 해약을 내놓아라.” “여기있다. 이놈아. 먹고 내 뒤를 따라오지나 마라.” 괴인은 품에서 어떤 약병을 꺼내 자신이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모용풍은 황급히 그것을 따라갔고 그 사이에 번개같은 경공술 로 가짜 현무도선은 사라지고 말았다. 모용풍은 더 이상 그를 뒤쫓을 수가 없었다. 해약을 가지고 매옥선이 있는 곳에 돌아갔을 때에는 자신을 마중나왔던 두 중년여인이 매옥선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용풍을 보자마자 매섭게 노려보며 노기를 띠었다. “모용풍. 당신이 사매에게 감히 이럴수가.” “오해요. 저는 음적을 뒤따라 갔던 것 뿐입니다.” 그녀들의 시선에 모용풍은 자신이 오해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기야 알몸으로 몸을 비트는 매옥선이 있고 근처에 남자라고는 없으며 그곳에 나 타난 모용풍이 있으니 그럴 오해를 살만도 했다. “거짓말. 당신과 같이 있던 사매가 이런 꼴이 되었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그곳에 다른 사람이 침범했을 리가 없어.” “사매가 당신을 찾겠다고 나섰다가 이런 꼴을 당했는데 다른 악적이 있었 다고?” “매낭자가 정신을 차리면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우선 그녀에게 해약을 주 어서 해독시키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모용풍이 매옥선에게 가까이 가려하자 두여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직 그녀들의 시선에 오해가 풀리지 않았음을 느끼고 모용풍은 품에서 해약 을 꺼내 그녀들에게 던져주었다. 매옥선이 깨어난다면 자신의 말은 증명될 것이다. “우선 그것으로 매냥자를 해독시키십시오.” 아직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 두 중년여인은 약병을 살펴보더니 뚜껑을 열었다. 모용풍의 이름이 일단 그를 믿는 쪽으로 몰고갔고 그의 말대로 매 옥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펑하고 매쾌한 연기가 병에 서 뿜어져 나오며 두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음락환혼산. 모용풍 네놈이....” “아뿔사. 그 음적놈이 속였구나.” 모용풍이 대경하여 그녀들을 부축하러 다가서자 아직 정신을 잃지않은 그 녀들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급히 모용풍이 물러서며 변명을 하려고 했 을 때 그녀들은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근처에 있는 검각의 고수들에 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안되겠다. 이러다간 정말 음적의 누명을 뒤집어 쓰겠구나. 일단 몸을 피하 자. 음약에 중독된 세 여인은 검각의 사람들이 도착하면 어떻게 수를 쓸 것이고 매옥선이 정신을 차리면 내 누명을 벗을 것이다.) 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모용풍은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난 순간부터 검 각 고수들의 끈질긴 추적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라도 성모를 만난다 면 자신의 일을 고해 누명을 벗어날 마음을 품고있던 모용풍으로서는 모옥 주위를 멀리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검각의 고수 들과 충돌을 일으켰는지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중한 수법을 써서 얼마나 부상을 입혔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성모가 빨리 도착하기를 빌 뿐이었 다. 그녀라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음적의 오해를 풀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모용풍으로서는 음적의 누명은 그의 앞에 파여진 함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흐흐. 바보 같은 녀석. 착실하게 빠져드는 군.” “호호. 우리 요지마전의 자매들 중에는 과거 자비암에 있던 제자들이 꽤 있어요. 그들이 직접 나서 위장을 했으니 모용풍이 속는 것은 무리도 아 니죠. 게다가 그는 피하기에 급급하여 정신이 없으니.” “설마 그가 만났던 우리 모두가 가짜라는 것은 몰랐겠지?” “그보다 슬슬 제자들을 철수시켜야 겠네요. 이정도 소란을 부렸으니 승룡 곡에서 눈치를 챘을 수도 있어요. 자비성모도 모용풍이 나타나지 않아 쌍 불봉에서 내려올 수도 있어요.” 놀랍게도 멀리서 여고수들에게 쩔쩔매고있는 모용풍을 보며 조소를 날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검후 매옥선과 가짜 현무도인이었다. 매옥선이 미소를 흘리며 가짜 현무도선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현무도선과 자비성모에게 손을 쓸 시기가 되었어요. 그들이 나 타날 때가 되었으니 말이예요. 천면호법.” “준비는 충분히 되었소. 소전주.” 놀랍게도 검후 매옥선의 얼굴모습이 바뀌었다. 아주 자상스런 표정을 지니 고 있는 노파의 모습으로. 그리고 천면호법이라고 불리운 자도 그 모습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의 모습은 바로 모용풍의 얼굴이었다. 38 이혼통제대법-모용풍(2) 쌍불봉에서는 마치 신선과 관음이 내려온 듯한 두 사람이 있었다. 흰머리 를 길렀으되 승복을 입고 있는 곱게 늙은 자비로운 노파 한명과 단상에 올 라가기만 하면 그대로 신선의 목상으로 오인받을 것 같은 노도인이 그들이 었다. “무량수불. 모용 소시주가 늦는구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것입니다. 풍아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노도 역시 모용시주를 믿소이다.” 쌍불봉에 있는 두 노인은 바로 자비성모와 현무도선이었다. 그들은 불과 며칠새에 부쩍 피곤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얼마전 승룡곡에서는 백도맹에 서 보내온 두가지 중요한 사항이 적힌 서신을 받은 바가 있다. 그 하나는 드디어 무림에 혈천마련이 등장하여 혈첩이라는 것을 중원 서남부에 뿌리 고 다닌다는 것이다. 오랜기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대비하 기 위해 승룡곡에 백도의 고수들을 모아놓고 수련을 시켰었지만 역시 마련 의 출현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두 번째 소식은 요근래 마련의 일로 백도맹의 초청을 받아 오던 무림명숙 들의 피살사건들이었다. 혈천마련의 일로 백도맹에서는 단정 짓고 있었는 데 삼일 전에 혈천마련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백도맹에 오던 소림사의 장 로 네명과 이대제자급 사대나한마저 피살당한 일이 생겨났다. 네명의 장로 중에는 소림 장경각주 선학대사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대제자라지만 소림사 의 주력이라는 십팔나한 중의 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경악스러운 일은 이들의 시체에 모두 동일한 상흔이 나있으며 그 흔적은 마도의 마공 이 아닌 바로 건곤무적장의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무림에서 건곤무적장을 익힌 자는 다섯명을 넘지 못한다. 무성 종리연과 무적장왕은 백도맹에 머물러 있었고 천하제이가의 가주와 이가주는 모용세 가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건곤무적장을 익힌체 백도맹의 명을 받들어 강 호를 떠돌고 있는 자는 오직 무적소야 모용풍 그 하나였다. 그 일로 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결론은 결코 모용풍이 그럴 리 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련의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가 들에 의해 백도맹의 주도권을 빼앗긴 구파일방에서는 납득하면서도 모용풍 을 복귀시켜 그를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팽배했다. 종리연의 서찰은 모 용풍이 승룡곡으로 떠났으니 그가 도착하는 즉시 맹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곡 내에서도 살인사건이 일어나다니.” “무량수불. 그것이 건곤무적장에 의한 살인사건이니 더욱 불가사의한 일입 니다. 그것은 흉내낼 수 없는 절기이거늘.” “틀림없이 누군가 풍아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승룡곡에 도착할 시기에 곡내의 고수를 해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 놓고 건곤무적장의 흔적을 남기며 살인을 할 리가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모용소시주는 자신의 행방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아 직 이일을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아침 승룡곡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곡 주위를 순찰하는 천무호정 단의 일기제자들 중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모두 구파일방의 장로급 존재 였고 또한 그들의 사인은 건곤무적장의 흔적이었다. 천무삼성 중의 현무도 선과 혜경성승이 직접 확인한 바이니 틀림없었다. 하지만 현재 무적장왕이 없는 승룡곡 내에서는 건곤무적장을 익힌 자가 없다. 단지 오늘 승룡곡에 도착하기로 되어있는 모용풍이 가장 혐의가 짙었다. “아아. 곡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 아이의 말을 먼저 듣기위해 쌍불 봉으로 오라고 아침에 바로 소식을 보냈거늘. 이 아이가 어이하여 이리도 늦는지....” 쌍불봉과 승룡곡과는 같은 복우산 안에 있지만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 다. 현재 쌍룡곡 주위에는 천무호정단의 제자들이 비상경계에 들어가 잠복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용풍의 무죄를 믿고 있지만 또한 몇몇 피살 자와 관련된 자들로 성미 급한 사람들은 모용풍을 의심하고 있었다. 승룡 곡 주위에서는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기에 자비성모는 모용풍을 쌍불봉 으로 따로 부른 것이다. “누군가 오고 있군요. 하지만 모용 소시주는 아닌 것 같은데?” 현무도선이 쌍불봉의 밑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저 밑에서 하나의 인영이 매끄러운 제비처럼 날렵하게 산봉우리를 올라오고 있었다. 자비성모의 눈 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사조. 큰일났습니다.” “혜연. 무슨 일이냐? 이곳에는 오지 말라고 했거늘.” “자비암의 사저들이 죽음을 당하고 검후 매사매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뭐? 무슨 말이냐? 아이들은 승룡곡의 천무호정단과 같이 있을 텐데 어이 하여 옥선 그아이가 부상을 입었단 말이냐?” “모용풍. 그 인면수심의 악적이 행한 일입니다.” 혜연이라고 불린 여승이 눈물을 흘리며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자비성모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재촉하자 그녀가 사정을 설명했다. “본암의 제자들은 승룡곡의 다른 분들과 함께 서쪽 숲의 경계를 하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세 시진 전쯤에 모용풍 그자가 찾아왔습니다.” “풍아를 쌍불봉으로 불렀거늘 승룡곡으로 직접 찾아왔단 말이냐? 게다가 세시진 전이라면 약속시간보다 두시진이나 이르거늘.” “예. 매사매도 사조께서 그 악적을 다른 분들 모르게 부르신 것을 알기에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그 악적은 자신이 깜박 잊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네가 그리도 화를 내느냐?” “매사매는 그 악적을 쌍불봉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비암의 제자들과 함께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여 그를 안내했습니다. 혹여 승룡곡의 다른 이들의 눈 에 띠면 사조를 만나 뵙지도 못하고 그가 곡 안으로 압송될 것 같아서, 그 들을 따돌려 가며...” “말해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승룡곡 근역을 벗어나자마자 그자는 사매를 뒤에서 제압했습니다. 제자들 이 놀라 그를 보자 벽력탄을 제자들에게 던져....흑흑.” 자비성모가 비틀거렸다. 그녀가 누구보다 아끼는 혈연이었다. 불문에 투신 했다고는 하지만 그 아이만은 혈연의 끈을 끊지 못하고 사랑해왔다. 친손 주보다 더 귀여워했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보타암에서 승룡곡으로 수업차 보낸 검후를 암습했단 말인가? “무량수불. 성모께서는 진정하시오. 오히려 진상이 밝혀질 것 같소.” “예? 하지만 풍아가...” “모용 소시주의 성품으로 보아 결코 벽력탄같은 화기를 사용할 리가 없소. 아마도 가짜임이 분명하오.” 현무도선의 말에 자비성모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천하제일가의 소가주가 뭐가 아쉬워서 백도의 맹우를 살해하고 검후를 납치하겠는가? “하여간 모용 소시주로 가장한 가짜가 저 밑에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소. 그를 잡으면 모든 진상이 밝혀질 것이오. 다행히 승룡곡에 대기하고 있는 백도의 고수들이 많으니 그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검후를 납치한 자는 어디로 도망갔느냐?” 성모의 말에 혜연이 급히 대답했다. “지금 검각의 고수들이 그 뒤를 쫓고 있습니다. 승룡곡에도 알렸기에 모두 그 악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악적은 승룡곡에서 쌍불봉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도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사조께 소식을 알리기 위 해 올라온 것입니다.” “알았다. 나도 같이 추적에 참가하겠다.” “무량수불. 노도역시 같이 가겠소.” 무림에 수많은 자객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으로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들은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독으로 폭약으로 혹은 암계로 사람을 죽인다. 어떤 수단을 쓰던 청부된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는 그 대가 를 받는 것이다. (무적소야가 청부한 자라니. 도대체 누구일까?) 무림에서 가장 커다란 암살단체는 자객전이다. 이들은 떳떳이 이름을 팔지 는 못한다. 그러나 백도가 무림을 주도할 때도, 흑도가 무림을 주도할 때 도 그들은 필요성에 의해 무림에 존재해 왔다. 자객이야말로 인간의 역사 와 함께하는 가장 오래된 직업인지도 모른다. 별호도 없다. 이름도 없다. 단지 자객전에서는 그를 가리켜 삼호라고 부를 뿐이다. 삼호는 여태 일백 서른 두 번의 청부를 받아 단 세 번만을 실패한 특급살수이다. 그 세 번마저 의뢰인이 속이거나 정보부족으로 그의 능력밖 의 일이었다. 지금 그는 땅에 은신해 있었다. 자객은 모든 정보를 사전에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삼호는 지금 아무것도 모 르고 있었다. 그가 받은 의뢰는 간단했다. 지정된 장소에 은신할 것. 그리 고 은신한 땅위에 서있는 상대를 향해 지정된 시각에 검을 날릴 것. 그 일 검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성공하면 의뢰주와 함께 달아나면 된다. 자객전의 규칙대로라면 이런 의뢰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하지만 의뢰주 는 바로 천하제일가의 소가주 무적소야였다. 자객전으로서는 감히 그 의뢰 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수밖에. 다행히 무적소 야는 삼호가 내지른 일검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청부성공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하기에 찜찜한 의뢰일지라도 무적소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달라붙더니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썰물 밀려나듯 종적을 감췄 으니 어떻게 된 걸까?” 은신해 있던 삼호가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한줄기 음성이 들렸다. (고수다. 그런데 이 음성는?) 삼호는 그 음성을 알아들었다. 바로 그에게 청부한 무적소야의 목소리니 까. 헌데 그는 자신이 있는 것을 모르는 척 혼자말을 하고 있었다. (청부대상이 올 테니 기다리라는 소리인가?) “하기야 사라졌으면 좋지. 워낙 험하게 달라붙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부상 도 많이 입혔으니까. 나중에 사죄를 하는 수밖에. 승룡곡에 연락하러 간 것일까? 그렇다면 큰일인데. 가짜를 잡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삼호는 자신의 근처에서 모용풍의 기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미리 어떤 기척도 연락도 하지 말라는 말 을 듣지 않았으면 의뢰주인 그가 왜 삼호를 모르는 척 그장소를 지나치려 고 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갑자기 모용풍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 기 직전 모용풍은 몹시 놀랐는지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낸 것을 삼호는 들 었다. 다른 두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연에 동화된 듯한 기운. 누구보다 주변 의 기운을 민감하게 느끼는 자객으로서도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정도 로 자연스런 기운이었다. 어디론가 급하게 서두르는 기척이 아니었다면 삼 호역시 그 기척이 인간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가지 못한다. 악적.” 모용풍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변 공기가 떨리며 우는 소리. 한번 내뻗으면 반드시 상대는 피를 흘린다는 정파 무공중의 가장 악독한 건곤무적장이 펼쳐질 때 공기를 울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마디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건곤무적장? 진짜 건곤무적장인가?” “풍아. 네가 진짜.....” 펑펑! 격하게 내력과 내력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삼호는 온 몸에 소 름이 끼치는 것이 느껴졌다. 대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살수로서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감히 그와 비교도 될 수없는 절대고수들의 소리였다. 삼 호는 오금이 저렸다. 이건 할 수가 없는 청부였다. 무적소야와 맞먹는 두 명의 고수를 상대하라니. 삼호는 젖먹는 힘까지 기울여 자신의 심장박동소 리 마저 죽여 쥐 죽은 듯 있으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그는 청부에 대해 까 맣게 잊고 들키지 않기만을 바랬다. “풍아. 정말 너란 말이냐? 네놈이 진짜 모용풍이란 말이냐?” “성모님? 정말 성모님이십니까?” 세찬 검풍이 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 감각만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삼호 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주위의 상황이 느껴졌다. 모용풍이 노한 목소 리를 외치며 습격을 하였고 두명의 절대고수가 손쉽게 그를 방어했다. 건 곤무적장을 받아치는 고수라니. 그리고 공격받은 고수의 옆에 있던 여인고 수가 검을 휘두르며 격동된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정녕 네놈이었단 말이냐? 이분을 공격 한 게 정녕 너 모용풍이란 말이냐?” “성모님. 그러시면 이분이 진짜....” “네놈의 눈은 장식으로 달았느냐? 네놈을 가르친 분을 몰라보게?” “무량수불. 두 분 다 진정하시오. 역시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 같소이다.” (성모? 설마 이십년 전에 종적을 감췄던 자비성모?)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다. 무적소야는 끈질기게 다른 한 고수를 향해 공격 했고 자비성모로 보이는 여인이 노해 모용풍을 나무라며 사정없이 공격했 다. 그리고 모용풍에게 공격받던 고수는 모용풍의 공격을 피하며 오히려 자비성모를 말리는 말을 했다. 몇마디 말이 나눠진 뒤 갑자기 모용풍의 공격이 멈췄다. 한동안 머뭇거리 는 것이 모용풍이 그 고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털썩 엎드려 죄를 비는 소리가 났다. “후배가 감히 죄를 청합니다. 그만 어른을 알아뵙지 못하고 오해를 하는 바람에...” “이놈. 무슨 짓이냐? 네놈이 정년 그놈이냐? 옥선을 암습하고 검각의 아이 들을 죽인 놈이 진정 네놈이 맞느냐?” “성...성모님. 그건 그사이에 오해가....” “무량수불. 자비성모. 진정하시오. 모용소시주가 뭔가 사정을 말하려는 듯 하오. 일단 들어나 봅시다.” 삼호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명의 고수가 차분히 말하며 모용풍을 일으켜 세웠다.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고수인 듯 그는 털썩 그의 앞에 앉았 다. 바로 삼호가 은신해 있는 곳의 바로 위였다. “모용시주. 오늘 노도는 많은 말을 들었소이다. 일단 모용 소시주의 말도 들어보고 나서 판단을 하겠소.” “사실은....” (지금이다. 쳐라.) 모용풍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삼호의 귀로 동시에 다른 내용의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화술로 말하지 않는한 어찌 같은 입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전음을 날리는가? 하지만 모용풍의 목소리를 들은 삼호는 거의 본 능적으로 자객의 일생의 전힘을 끌어올려 생애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무형 무음의 일검을 위로 내질렀다. 너무 큰 무례를 저질렀다. 현무도선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가짜라고 생각 되어 공격을 한 것이 실수였다. 그래도 현무도선의 옆에 있는 자비성모를 보고 혹시라는 생각에 중간에 힘을 뺀 것이 다행이었다. 현무도선을 공격한 것에 대노했는지 자비성모가 그를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는 이제야 오해를 풀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자비성모는 검각의 일과 검후의 일을 추궁했다. 모용풍은 천면음마에 관한 말을 하려고 했다. “사실은....” 푸슈우우욱! “으으윽.” 현무도선의 아랫배에 검이 튀어나온 것과 땅속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튀어 난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너무 뜻밖의 일에 자비성모와 모용풍 둘다 입을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모용풍. 청부는 완료했소.” 땅속에 튀어나왔던 사람은 한마디 외친 뒤에 뒤도 안보고 산 밑으로 도망 쳐 내려갔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와 아는 것처럼 말을 하다니. 모용 풍이 놀라 그의 뒤를 쫓으려고 했을 때 “네놈이 이토록이나 악독할 줄이야...” 자비성모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검을 들어 모용풍을 휩쓸어갔다. 갑작스런 현무도선의 습격에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검세는 몹시 흐트러져 있어 모 용풍이 피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성모님. 제 말을....” “닥쳐라. 네놈을 죽이고 사정을 알아보겠다.” 성모의 검은 더욱 더 살벌해졌다. 모용풍은 등뒤에 식은 땀을 흘리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현무도선의 상세를 곁눈질로 보며 다급하기 이 를데가 없었다. 입으로 죽은 피를 주르를 흘려내리는 현무도선의 상세는 누가보아도 중상이었다. “성모님. 도선의 상세를 먼저 살피시는 것이...” “닥쳐. 듣지 않겠다. 듣지 않겠어. 이제 네놈이 하는 말은 뭐든지 듣지 않 겠어.” 자비성모가 제 마음을 잡았는지 급격하게 검세가 변화했다. 모용풍도 깜짝 놀랄만한 검세였다. 무엇보다 검에 퍼런 강기가 맺혀 있었다. “제발 멈추세요. 풍아의 말 좀 들어보시고...” 피해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모용풍은 오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성모의 검을 막아갔다. 건곤무적장. 겉보기에는 무 시무시한 청광을 발휘하는 무적의 장법이었다. “으윽. 모용시주. 진정 악독하구려. 설마 성모에게까지 살수를 펼치려 하다 니.” 그의 장 앞으로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모용풍은 깜짝 놀랐다. 그와 자비성 모의 앞으로 뛰어든 것은 다 죽어 가던 현무도선이었다. 모용풍은 황급히 장력을 회수했으나 모두 거두어들이지는 못했다. 그의 장력이 현무도선의 등뒤를 가격했다. 콰쾅! “현무도선님.” “현무!” 두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등뒤에 모용풍의 장력을 맞은 현무 도선이 자비성모의 앞으로 쓰러졌다. 자비성모는 황급히 현무도선을 안고 원한이 맺힌 눈으로 모용풍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오늘의 일은 천하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모님. 할머니. 오해입니다. 제발 소손의 말을...” 모용풍이 소리쳤으나 자비성모는 그를 노려보고는 현무도선을 안고 모용풍 을 피해 달아났다. 모용풍을 제압하는 것보다 현무도선의 상세를 먼저 살 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용풍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자 비성모와 현무도선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어이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하는 수없다. 이제는 승룡곡에 직접 찾 아가 죄를 청하는 수밖에. 본의는 아니지만 도선을 상하게 한 죄는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승룡곡 주위에 마두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알려야 한다. ” 모용풍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대체가 오늘의 일은 꿈만 같았다. 검후의 암습. 현무도선으로 분신한 천면음마. 그리고 진짜 현무도선을 공격한 일.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나온 암습자. 그리고 자신의 장에 적중한 현무도선. 자기를 노린 함정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무도선을 상하게 한 일은 분명 했다. 점점 수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무량수불. 시주들은 어인일로 찾아오셨는지.” 한편 혜연을 동반한 자비성모와 현무도선은 쌍불봉에서 내려오자마자 일곱 명의 흉한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현무도선은 짐작한 것 같았지만 자비성모 는 전혀 그들이 나타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아직까지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노마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흐흐흐. 선재불래라. 백년동안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예를 놓차지 않은 현 무도선을 과연 무슨 뜻으로 찾아왔을 것 같소?” “무량수불. 일곱도우께서 옛빛을 갚으시려는 겁니까?” 현무도선과 자비성모의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마도 사대종주의 하나였던 마검문 출신의 칠기검마들이었다. 무려 백년 전의 절대고수인 것이다. 마 검문의 문주의 시동이었던 자들로 천하의 마검류를 집대성한 마검문주가 이들에게 검학을 전수하여 호위로 삼고 다녔던 검도고수들이었다. 문주가 죽고 팔대천마의 하나였던 천지마검이 마검문주의 지위를 이은 후 그의 사 숙을 자처하는 자들이다. 친형제인 이들은 천지마검의 사부였던 마검문주가 죽은 후 검으로 천하를 종횡하며 무적을 자처했었고 특히나 그들의 연합검진은 소림 십팔나한진과 도 겨룰수 있다고 소문나 있었다. 백명이든 천명이든 아무리 많은 수의 상 대를 적으로 두어도 그들의 연합검진은 불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백년전 그들은 차례로 현무도선에게 패해 검을 꺽은 경험이 있었다. “설마 현무말코. 거절은 안하겠지?” 칠기검마들이 검진을 이루며 현무도선에게 흉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 의 자세는 일종의 검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일대일의 대결이 아닌 것이 다. 옆에 있던 자비성모가 그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대의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합공을 하려고 하다니. 백도에 사람이 없는 줄 아오?” “후후. 우리는 주제를 잘 알지. 백년전에도 당하지 못했는데 이제와서 기 력이 다한 우리가 천하를 지배하는 백도의 막후지배자라는 천무삼성의 일 인인 현무말코를 어찌 당할 수 있을까?” “무량수불. 그대들은 시기를 잘못 잡았습니다. 옛빛을 갚는다고 하시면 나 중에 오시지요. 우리는 사정이 있어 당신들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 들은 근처에 백도의 고수들이 모여 부주히 움직이는 것을 못보셨습니까?” 칠기검마가 일제히 흉소를 내질렀다. “흐흐. 알지. 너희들 백도 조무래기들이 모여 승룡곡이라는 곳을 만든 일 을. 너희들의 일이란 바로 모용풍 그 꼬마에 관한 일인가?” “설마 당신들....” 자비성모가 안색이 변해 소리치자 칠기검마의 막내 변환검마가 자신의 옆 구리에 끼고 있던 사람을 내동댕이쳤다. 땅바닥에 뒹구는 자는 바로 모용 풍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당신들 이제보니 바로 마련의....” “검마전 칠대외호법이 바로 우리의 신분이지.” 그말 한마디로 현무도선과 자비성모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여태까지의 일 은 짐작대로 모두 마련의 짓이라는 것을. 모용풍은 그들에게 이미 잡혔다 는 것을. 모용풍은 단지 누명을 쓴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대들의 신분으로 마련의 개가 된 것이.” “흐흐. 문답무용. 벗어날 생각은 마라. 너희를 잡을 자신은 없다. 하지만 우리를 물리치지 않고 도망간다면 모용꼬마는 내일의 해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칠기검마들의 일곱 신형이 일제히 현무도선과 자비성모를 향해 덮쳐갔다. 그리고 현무도선에게서 거대한 검광이 폭팔하듯 일었다. 39 이혼통제대법-모용풍(3) “허? 이십년간 놀고 있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칠기검마가 일검으로?” 백가량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미 현무도선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 혈존이 가장 꺼려하던 인물 현무도선. 그는 인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 던 것이다. “하여간 이나이에 제자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다니. 그렇게 마무리를 철 저히 하라고 가르쳤는데도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지도 않고 손을 써? 이것들을 그냥!” “혈존 백시주이시오?” “어라? 현무말코. 본좌를 알아보는 거냐? 이모습인데도?” “무량수불.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노도가 백시주를 몰라본다면 백시주는 오늘 빈도를 천무삼성 중에서 가장 먼저 찾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건 그래. 현무도선. 당신이 장삼풍으로부터 이어진 무당의 검맥과 그 이전부터 무당에 내려온 선맥을 동시에 있지 않았다면 본좌도 당신을 그토 록 꺼려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지금의 당신은 내가 두려워하던 도가의 선술을 부릴 수가 없을 걸?” 현무도선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여덟구의 시체가 허리가 두동강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여덟구? 바로 칠기검마의 일곱 노 마왕과 모용풍의 얼굴을 가지고 있던 자의 시체였다. 현무도선이 칠기검마 를 일검에 벤 순간 가짜 모용풍이 방심하고 있던 현무도선의 배후를 습격 했다. 현무도선은 암습을 당해 등이 난자된 순간 최후의 힘을 짜내 가짜 모용풍의 몸을 두동강냈다. 하지만 그순간 또 한줄기의 전혀 예상치 못한 암습이 있었다. 혈존의 암습은 현무도선의 생기를 끊어놨다. “오늘 이 모든 일이 빈도를 노린 백시주의 작품이었소?” “천만에. 이건 모두 그 빌어먹을 제자놈들이 꾸민 짓이지. 본좌는 지켜보 다가 허술한 뒷처리에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 것 뿐이야.” “허허. 백시주께서 노도보다 제자들을 좀더 원망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과 다시 손을 잡다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구려.” 백가량과 현무도선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처럼 거리낌없이 대 화를 주고받았다. 현무도선은 이미 자신이 살아날 수없다는 것을 알고 속 세의 미련을 모두 마음속에 버린 이후였고 백가량은 나름대로 가장 마음속 에 적수로 여기던 현무도선에 대해 존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 다만 본좌도 탐내는 녀석이 있어서 제자 녀석들의 일에 그 들 모르게 조금 끼어들었을 뿐이야. 모용풍이라는 녀석 말이야.” “모용 소시주를?” “마련의 아이들은 오래된 생강이 맵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야. 당신들 천무 삼성을 노물로 여기고 모용풍이라는 어린아이를 더욱 신경쓰는 모양이더 군. 이 모든 음모는 모용풍을 상대로 꾸며진 일이야. 하기는 나도 탐을 낼 정도의 육체니까 말이야.” 현무도선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되는 소리요. 백시주는 죽어가는 노도의 궁금중을 풀어주지 않겠 소? 아무리 노도가 죽고 백도의 고수가 다수 살상되었다고 해도 이정도의 일로 모용 소시주가 의심받을 정도로 백도는 허술하지도 인재가 없지도 않 소.”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본인이 인정을 한다면 어쩔까?” “무슨.....?” “죽어가는 예우로 제자녀섯들의 음모를 말해주지. 그러니까 진짜 모용풍과 가짜 백도맹의 고수가 있는 거지. 그리고 현무도선 당신을 비롯한 진짜 백 도맹 고수와 가짜 모용풍이 있는 것이고. 이 두패가 서로 충돌을 일으켰단 말이거든.” “서...설마 모든 게 가짜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맞아. 진짜 모용풍은 피하려고 했지만 가짜 백도맹의 승룡곡 고수가 악착 같이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충돌이 일어났지. 그리고 승룡곡의 진짜 백도고수들은 방심한 가운데 가짜 모용풍의 암습을 받았고. 이 두 가 지 일은 내용상으로 보면 전혀 상방된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겉모습만으로 는 비슷하지. 아마도 모용풍이 백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진실을 밝히는 순간 결국 자신이 짓지 않은 모든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될 거야.” 현무도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모용풍이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그 일개 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용풍은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이다. 마련이 노리는 것은 백도의 분열이었다. 그리고 모용풍에게 백도가 진짜 단죄를 하게 된 다면 백도는 두 쪽 날 가능성이 컸다. “모용 소시주는 천하제일가의 소가주이요. 또한 종리연의 제자로 백도맹의 중추요. 그리 쉽게 사안이 처리될 리 없소. 종리연은 함부로 모용 소시주 의 죄를 묻기보다는 반드시 치밀한 조사를 통해 진상을 알아낼 것이오.” 백가량이 현무도선을 비웃었다. “일반 백도의 장로급들이 대거 죽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천하제일가가 모 용풍을 감싸고 돌테고 무적장왕이 그를 변호한다면 백도의 누가 그 죄를 묻겠나? 실제 죄를 지어도 무죄가 될 판이니 짓지도 않은 죄라면 반드시 진상이 밝혀질 테지. 하지만 천무삼성의 현무도선이 죽었다면 어떻게 될 까?” “........” “아마도 구파일방의 아이들이 제일먼저 분노해서 날뛸걸세. 현무도선의 죽 음이라면 그들 눈에 천하제일가도 들어오지 않을 걸? 하물며 모용풍이 직 접 죄를 시인한 사안인바에야. 그나마 시간이 좀더 있었다면 모르지. 천하 제일가의 낯을 봐서 백도맹주의 권한으로 종리연이라는 당신들 제자가 그 들을 설득하여 시간을 가지고 조사할지도.” “종리연이라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오.” “천만에. 시간이 없어. 마련의 아이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당장 백도와 한판 붙자고 날뛰는 판이야. 당장이라도 백도의 힘을 하나로 끌어모아 마 도와 대립해야할 판에 백도맹주가 맹의 세력이 구파일방과 세가들로 두쪽 나서 반목하는 것을 두고 볼까? 백도맹주나 천하제일가나 양쪽다 생각이 있다면 일단 모용풍을 단죄하여 결속을 다진 이후에 마도를 상대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둘 거야. 사소대취라고 할까? 너희들 백도가 늘 말하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지.” “천만에. 그것이야말로 미봉책. 마도의 뜻대로 백도의 품안에 반목의 불씨 를 남겨두는 것과 다름없소. 종리연이라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진실을 밝히는 데에 먼저 주력하여 반목의 씨앗을 없앤후에 마도와 상대하 려 할 것이오.” 백가량이 쿡쿡 웃었다. “그거야 모르지. 제자아이들은 백도에서 모용풍을 치죄하여 갈등의 불씨가 심어지리라 확신하는 모양이지만 당신말대로 될지도. 하지만 결국은 제자 이이들의 뜻대로 될거야. 본좌가 모용풍에 접근하여 모든 사실을 알려 줄 거란 말이야. 지켜본 모용풍의 성품이라면 자신이 무죄라고 확신해도 자결 해서 일단 백도의 결속을 다지려 할거야. 백도의 대의를 위해 자신 한몸 희생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있는 녀석이니까.” “백시주는 어이하여 그토록 모용 소시주를 죽이려 하시오? 백시주에게 모 용 소시주 정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텐데?” “말했잖아. 탐나는 육체라고.” 현무도선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모용 소시주가 자결하고 나면 그 시체를 이용하여 혈마전혼대법으로 그 몸에 빙의할 생각이오?” “큭큭. 비슷하게 맞췄어. 예전의 본좌라면 그랬겠지. 그녀석의 육체는 꽤 훌륭한 그릇이니까. 하지만 별 쓸데없는 현생의 기억이 전생보다 소중해 지는 바람에 지금은 본좌가 가진 육체를 버리기가 꺼려진단 말이야. 그래 도 혈마전혼대법과 비슷하게 그 육체를 사용할 수는 있지. 어때? 도가의 선맥을 이은 현무 당신이라면 짐작할 수 있지 않아?” “저...저주받을 이혼통제대법을 완성했단 말이오? 그것을 모용 소시주의 몸 에 대법을 펼칠 생각이시오?” “역시 현무도선이군. 맞아. 영혼과 강하게 연결된 본체는 언제든 영혼이 돌아올 수있도록 안전한 곳에 두고 영혼만 제물의 몸에 빙의하여 잠시 제 육체처럼 사용하는 이혼통제대법. 전설상으로만 떠도는 그 사술을 내가 완 성시켰고 얼마전 실험도 성공했지.” 백가량은 신이 나서 떠들어대었다. “생각해 봐. 죽었다고 알려진 모용풍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는 거야. 그리 고 마련에 연신 패배하며 기울어가는 백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거지. 그 에게 죄를 지은 구파일방이나 그를 지지하던 세가세력은 완벽히 그의 통제 에 들어가는 거지. 그러기 위해 마련과의 싸움에서 천무삼성과 현재의 백 도맹주 무성은 죽어야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 모용풍이 사실은 육체만 있는 꼭두가시이고 본좌의 영혼이 빙의되어 움직이는 허수아비란 말이야. 설혹 발각나서 죽는다고 해도 본좌와는 하등 상관없는 남의 육체가 죽는 것이니 나로서는 안전을 보증한 재미있는 한판의 유희에 뛰어드는 꼴이지. ” 너무나 끔찍한 계획이었다. 차기의 백도맹주를 허수아비로. 그것도 단지 배후에서 조정하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진짜 모용풍에 다른 영혼이 빙의 되 어 백도를 조정하는 허수아비로 삼으려 하다니. 게다가 혈마전혼대법과 달 리 이혼통제대법은 대법의 대상이 단수일 필요가 없다. 그 제물이 많으면 영혼은 본체에 기본을 두고 언제든지 제물의 육체에 옮겨가며 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혈존은 자신의 현재 진짜 정체는 철저히 감춘체 전 무림 의 주요세력에 자신이면서 동시에 허수아비인 여러 존재를 박아둘 수 있다 는 말이다. 이는 수십명의 혈존이 무림에서 활약한다는 것과 같으니 얼마 나 끔찍한 일인가? “백시주의 뜻대로 될 것 같소? 자비성모가....” 자비성모는 현무도선이 칠기검마와 부딪칠 때 모습을 감췄다. 현무도선은 칠기검마의 출현에 그녀가 승룡곡에 사실을 밝히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렇 다. 그녀가 무사히 승룡곡에 도착만 한다면 모든 진실은 밝혀 질 것이다. “현무. 당신 정말 바보로군. 설마 자비성모가 살아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그녀를?” “본좌는 후환을 끊는 데에 철저한 사람이야. 제자녀석들에게는 조금 물렀 기에 배반을 당했지만. 자비성모 정도는 옛날 자비암을 멸망시켰을 때에 이미 명줄을 끊어놨었다고.” 현무도선은 연속적인 뜻밖의 사실에 거의 넋을 잃었다. 그렇다면 승룡곡에 서 이십년간 같이 지냈던 자비성모는 누구란 말인가? 쌍불봉에서 모용풍을 걱정하던 자비성모는? 과거 혈천마궁 시절 백도무림을 위해 천무삼성을 찾 아왔던 자비성모도 가짜였단 말인가? “그녀는 귀염둥이. 여섯째 여제자 요지마후야. 당신도 알잖아. 그녀가 한때 자비암의 제자였다는 것을. 그녀가 자비성모로 변장해 당신들 곁에 있었던 거라고. 그러니 오늘의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럼.... 승룡곡에서 있었던 모든 살인 사건이...” “처음부터 승룡곡의 일은 여섯째에 의해 마련에 파악되고 있었어. 그녀니 까 승룡곡 안에서 남모르게 살인사건을 만들 수있었던 거지. 무적장왕의 누이니까 건곤무적장의 흔적쯤 남기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말도 안되. 자비성모는 결코 건곤무적장을 익히지 못했다. 천하제일가는 여식에게 가문의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단 말이오.” “맞아. 그래서 단지 비슷한 흔적만을 남겼지. 타인이라면 모르지만 천무삼 성이 직접 본다면 의심을 해볼 수도 있을 정도로. 하지만 본좌가 직접 그 흔적을 완벽하게 수정했으니 이제는 무적장왕이라도 건곤무적장임을 부인 할 수가 없을 거야. 아마도 그녀가 나중에 당신의 몸에도 그 흔적을 남겨 놓을 테고.” “혈존. 당신이 이일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모든 일을 알고 있소?” “처음에는 그저 승룡곡안에서 누군가가 살인을 하고 건곤무적장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야. 하지만 승룡곡에 자비성모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그녀가 가짜라는 것과 누가 음모를 꾸미는지 바로 알 수 있었지. 현무. 당신이 죽인 저 가짜 모용풍은 혈천마궁 시절 요지마전에 속해있던 천면음마로 여섯째의 충복이야. 그렇다면 자비성모는 여섯째 귀염둥이 일 수밖에 없지.” “맙소사. 혈존. 당신이 어떻게 승룡곡에 그리 자유자재로 출입을....” “이 육체 덕분이지. 생각 안나? 얼마전 승룡곡의 마지막 기수로 수업을 받 으러 온 백도맹의 후기지수이자 당금 무림에서 무림칠룡이니 어쩌니 하며 떠들썩한 이 육체의 정체가?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사문의 까마득한 사 손이니 관심을 가지고 듣기는 했을 텐데.” 현무도선은 마지막 말을 더 이상 듣기 힘들었는지 온통 분노의 표정을 지 으며 태극혜검을 전개했다. 여태까지 말을 길게 끌은 것도 오직 마지막 기 력을 모아 이 일검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가짜 모용풍에게 당한 기습은 그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혈존의 기이한 장력에 당한 이후 한줄기 요기가 그의 내부를 돌아다니며 내장을 끊어내고 있었기 에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현무도선은 자신이 육체를 탈각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대로 혈존을 하계에 내버려두고 가기에는 천하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리하여 현무도선은 등선할 원영, 한평생 선도를 쌓아 이룩한 영기를 진기로 바꿔 신선의 꿈을 포기하며 태극혜검을 펼칠 힘을 마련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혈존을 해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생애에서 가장 완벽하고 완성된 태극 혜검을 펼쳐내었다. 무림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며 인선의 경지에 이르렀던 현무도선의 검은 그대로 백가량의 심장을 꿰뚫었다. 혈존치고는 너무나 어 이없는 최후였다. “크어억.” 하지만 비명을 지른 것은 현무도선이었다. 놀랍게도 심장을 꿰뚫린 상태에 서 백라량이 웃은 것이다. 혈존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드러나며 마치 뱀의 혀처럼 붉은 혀가 날름거렸고 심장을 파괴당했는데도 그의 두 눈이 기괴하게 번쩍였다. 마치 독수리의 눈이나 칙칙한 거미의 눈처럼. 그리고 기괴하게 팔이 흔들리며 현무도선의 팔을 붙잡았고 두 다리는 제멋대로 현 무도선의 하체를 가격했다. 거의 박살나다시피한 현무도선. 사지가 뜯겨져 나가고 온몸이 짖뭉게진체 현무도선이 최후를 맞췄다. 그리고 그토록 잘도 나불대던 백가량 또한 심 장이 뚫린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후. 현무도선과 가짜 모용풍. 그리고 칠기검마와 백가 량이 쓰러진 곳에 다시 한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 사라졌던 자비성모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자는 얼마전 승룡곡에 들어왔던 백호검 마진걸이라는 자인데 어이하여 현무도선을 공격하고 죽였을까? 현무도선의 짓인지 갑자기 소리가 차단되 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수가 없으니.” 자비성모는 완전히 심장이 파헤쳐진 마진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선을 현무도선에게 돌렸다. “호호호. 현무도선이 뜻밖에 이자에게 죽을 줄이야. 칠기검마를 상대로 이 길줄은 예상했지만 적어도 중상은 입으리라 생각했는데. 현무도선이 이토 록이나 강했다니. 과거 팔대천마라는 자들의 전설 이상이 아닌가? 설마 아 무 부상도 없이 칠기검마를 죽이고 그 후에 천면음마의 암습에 적중하고 난 이후에야 상처를 입을 줄이야.” 자비성모는 곧 교소를 터트리며 엉망진창이 된 현무도선의 시체를 엎어놓 고 등을 향해 조심스럽게 십여개의 지풍을 남겼다. 조각하듯 섬세하게 시 체에 남는 지풍의 흔적은 상처를 깍아 내어 어떤 모양을 만들었다. 그녀의 최후의 계책은 천면음마에게 암습당한 현무도선에게 내상을 치료하 라고 권한 이후에 암습할 작정이었다. 그를 걱정하며 호법을 서준다고 접 근했다가 현무도선이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료할 때 다시 한번 암습할 작 정이었는데. 백호검의 등장으로 수고를 덜었던 것이다. “이미 그가 죽은 이상 현무와 마지막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중요 한 것이 아니지. 호호. 이정도면 누가 보아도 건곤무적장의 흔적이라 여기 리라.” 자비성모, 아니 자비성모로 위장한 요지마후는 다시 교소를 터트리며 품안 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들었다. 시체를 녹여버리는 화골산이었다. 그녀는 꼼꼼히 마진걸과 칠기검마의 시체에 화골산을 뿌렸다. 그들의 살이 녹고 곧 뼈마저 부식되어 스러지자 요지마후는 땅위에 남아있던 옷과 검들을 수 거했다. 현무도선의 시체 주위에는 이제 다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후후. 검후로 변장한 그 아이는 자신의 일을 잘 수행했겠지? 승룡곡에 모 인 보타암 검각의 제자들로 위장한 내 제자들이 모용풍을 그곳으로 몰아갔 을 테니. 나로 가장하여 모용풍의 앞을 지정된 장소에서 막은 뒤에.... 모용 풍의 얼굴로 의뢰했던 암살자가 은신한 곳 위에 천면음마의 제자를 세워 암습을 받게 했고. 또 천면음마의 제자는 일부러 모용풍의 장력을 등뒤로 유도했을 테니. 모용풍은 자신이 현무도선에게 건곤무적장을 펼쳤다고 진 술하리라. 내가 승룡곡에 돌아가 모용풍의 죄를 그럴듯하게 꾸며대어 노발 대발한다면 모용풍은 끝장이지. 설마 자비성모가 죄도 없이 혈손을 문책하 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 요지마후가 사라진 직후 누런 황토 흙에서 묘한 요기가 흘러 나왔다. 그 요기는 허공에 일곱가지의 형상을 갖추었는데 각기 뱀, 늑대, 곰, 원숭이 등의 일곱 동물의 모습이었다. 꿈틀대던 요기는 하나로 뭉쳐들어갔고 점차 진흙이 뭉쳐지듯 인간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불과 일각이 안되어 대지를 딛고 있는 인간은 방금전 현무도선에게 심장이 꿰뚫려 죽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라는 것. “큭큭. 여전히 엉성한 건곤무적장의 흔적이로군. 하기야 현무와 혜경이 승 룡곡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시체를 조사하고 건곤무적장을 인정했으니 자신있게 조작한 일이겠지만. 내가 또 한번 손을 써야 겠군.” 백가량. 아니 마진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곱 요괴가 몸을 움직이는 육 체에 이혼통제대법이라는 사술을 통해 영혼이 빙의되어 움직이는 백가량이 광소를 터트렸다. “두고봐라. 본체에서는 무공을 발휘할 수 없지만. 후후. 모용풍의 몸을 손 에 넣어 이혼통제대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쌍영마공이 그녀 석의 몸에 다시 빛을 발휘하게 될 테니까. 그나저나 이제 이 몸은 모용풍 이 다시 백도에 등장할 때 그를 구하기 위해 사라졌던 것으로 꾸며야겠군. ” 마진걸의 몸이 사라졌다. 혈천마련이 모용풍을 향해 꾸민 함정은 그 끝을 향해 질주해가고 있지만 혈존이 모용풍을 향해 시작하려는 음모는 아직 시 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40 이혼통제대법-모용풍(4) 콰르릉! 하늘도 슬퍼하는 듯이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뇌성벽력 이 가끔 작열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밖에서 들어오는 비바 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몸을 떠는 사람이 있었다. “풍아. 네가.... 네가 이리도 가다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바람에 실내에 서있던 남자의 의복과 방안을 흠뻑 적 셨다. 방안은 맹주전이라는 건물의 내실이었고 바닥에 흐트러져 떨어져 있 던 보고서는 흠뻑 젖어있었다. -승룡곡과 하남성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적소야 모용풍의 짓으로 결론 났 습니다. 시체에 뚜렷한 건곤무적장의 흔적이 남아있고 무적소야가 그 근처 에 있었던 것으로....- -검후가 무적소야 모용풍을 직접 지목하며 증언했습니다. 그녀를 암습하여 제압하고 겁탈하려고 했던 자는 무적소야이며 승룡곡 추적대의 숨가쁜 추 적이 아니었다면 검후는 겁탈 당했을 것으로.....- -검후를 추종하는 승룡곡 젊은 기수의 고수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 은 무적소야를 잡아 죄를 주지 않는다면 백도맹에서 탈퇴하겠다며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추적당하는 가운데 무적소야는 승룡곡의 인원을 칠십 이명이나 부상시키 고 열 일곱명을 죽였습니다. 모두 무적소야를 설득하려다가 방심하는 사이 에 당한 일으로 이로인해 승룡곡은 무적소야에 대한 분노가....- -피해자의 대부분은 구대문파, 특히 무당과 화산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두 문파의 장로들은 검후와 젊은 고수측들의 증언에도 아직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문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파일방의 승룡곡 고수들이 친형제처럼 지내던 세가출신의 고수들을 일부러 피하는 심상치않은 분위기 가 형성된.....- -현무도선이 피살되었습니다. 흔적은 역시 건곤무적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자비성모의 증언입니다. 그토록이나 무적소야를 아끼던 그녀는 무척 이나 분노하여 무적소야가 현무도선을 동료와 함께 피살했다는 확정적인 증언을....- -승룡곡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혜경성승도 더 이상 승룡곡 안을 진정시키 지 못할 정도입니다. 특히나 무당파의 분노는 대단하여 당장 구파일방을 규합하여 천하제일가로 처들어 갈듯한...- -모용풍이 승룡곡안으로 제발로 들어갔습니다. 여태까지의 행동으로는 이 해할수 없게 순순히 사로잡혔고 젊은 고수들의 경멸과 구파일방 고수들의 분노서린 시선아래 형당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혜경성승은 특별히 모용풍의 관리를 평소 그를 아끼던 자비성모에게 맡기는 것으로 혹시라도 있을 불상 사를 미연에 방지....- -자비성모의 주관으로 열린 심문에서 모용풍은 뜻밖에도 모든 것을 자백 했습니다. 검후의 납치, 승룡곡 소수들과의 충돌 및 살해, 현무도선의 피살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로인해 모용풍의 음모론을 주장하던 세가측의 인물들은 극도의 경악을....- -모용풍의 주장가운데 기이한 일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사건은 비슷한데 승룡곡안에 일어났던 일과 달리 모든 것이 모용풍에게 이롭도록 내용을 변 질하여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승룡곡 안에서는 모용풍이 추잡한 변명을 하고 있다하지만 승룡곡 안에 제 발로 기어 들어와서 스스로 현무도선을 공격하였다는 말까지 순순히 인정했던 모용풍이, 어째서 누구도 믿지 않을 주장을 제기하는지...- -모용풍의 증언가운데 사소한 것은 무시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무당 과 화산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모용풍의 증언을 인정 하고 다시 조사한다는 것은 여태 사건에 연루되었던 승룡곡 가람을 무시하 는 처사라며. 승룡곡 전원이 모용풍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여 말도 안되는 누명을 담합하여 그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면 모용풍의 증언과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런 결정을 내린 근거입니다. 모용풍은 죄를 순순히 인정한 것으로 고문은 피했지만 극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 되며....- -맹주의 급박한 전갈과 혜경성승의 만류로 일단 모용풍의 처단은 맹주가 직접 지시할 때까지 미루도록 되어있습니다. 또한 승룡곡에서 백도맹으로 곧 압송될 것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구파일방에서는 모용풍의 압송 책임 을 스스로 맡을 정도로 세가측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가측도 차츰 노 골적으로 구파일방을 비난하며 모용풍의 안전을 확보하려하고 있습니다. 구파일방은 세가측에서 모용풍의 죄를 감면하려고 할 경우 백도맹의 장로 전의 힘을 총 동원하여 처단을 주장할 것으로- 많은 내용을 가진 보고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지만 어떤 것도 맹주전에 있는 무성 종리연의 마음을 이토록 헝클어트린 것은 없었다. 지금 비바람 을 마주보고 울분을 삭힐 정도의 내용인 보고서는 마악 맹주전에 도착하여 지금 그의 손에 구겨져 손바닥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도맹으로 오는 도중에 모용풍은 스스로 자결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번 에는 세가측에서 구파일방측에게 대단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으며.... 중 략.... 혜경성승께서 직접 달려와 살펴보았지만 스스로 심맥을 끊어 돌이키 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으로...... - 무성 종리연이 암흑같은 먹구름 속의 밤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모두 혈천마련의 짓이다. 그들이 풍아를 제거하여 마도를 위협할 거목의 싹을 짖밟아 버리고 백도맹을 이간질 시키려 한 것이다. 참으로 분 하고 원통한 노릇이다. 게다가 사부께서는 그 시체를 천하제일가로 수습하 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모용풍이 죽자 무림 세가측에서 노발대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 제일가 모용세가와 가장 방대한 세력을 가진 백리세가는 오대세가를 이끄 는 입장이었으며 하나는 모용풍의 가문이었고 하나는 모용풍의 처가가 될 가문이었다. 대장간의 용광로에 달금질 당한 쇠처럼 달아올랐던 구파일방 의 분노는 갑작스런 모용풍의 죽음에 갑자기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구파일방과 세가측으로 나뉘어져 반목할 것 같던 폭풍의 중심 은 모용풍의 죽음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여전히 갈등의 불씨의 잔재 는 남아있었다. 세가측은 은근히 그들의 감독아래 있던 모용풍이 죽은 일 로 구파일방을 책망했고 구파일방은 나름대로 모용풍이 죄값을 다 갚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반발했다. 그러한 갈등마저 완전히 잠재운 것이 천하제일 가의 태상가주 무적장왕 모용도기였다. 모용도기는 진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오직 백도의 단 결을 위해 구파일방에게 못난 후인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모용풍의 죄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처벌로 죽은 시체나마 모용세가와 모용 풍과의 연을 끊었다. 모용풍의 시체는 모용도기의 명에 의하여 백도맹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야산에 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무적장왕은 부디 죄 인 모용풍의 일로 같은 백도의 형제끼리 서로 반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백도를 구원했던 천무삼성이었다. 백도의 막후 지배자인 천무삼성이었다. 그리고 백도 최고의 배분을 지닌 천무삼성이었다. 그런 천무삼성의 일인인 무적장왕이 처절한 심정으로 죽은 고손자의 시체를 백도를 위해 내치는 것 을 본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구파일방 측이 먼저 사죄 를 하고 손을 내밀었고 세가측이 그 손을 맞잡았다. 혈천마련이라는 강적 을 앞두고 백도는 집안싸움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맹세한다. 결코 혈천마련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본좌가 왜 무성이 라고 불리우는지, 왜 백도의 책임자로 있는지 절실히 알려줄 것이다. 그리 고 풍아의 죽음과 관련된 자는 반드시 모조리 밝혀내어 처참한 죽음을 내 려줄 것이다.” 이름모를 야산의 어떤 초라한 무덤. 억수같은 비는 그곳에도 내리고 있었 다. 그리고 그 무덤앞에서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천하가 그 미모를 인정하여 무림칠미의 하나로 인정했으며 백리세가가 그 재능을 인정하여 백도맹에 내어주었다. 얼굴은 부용꽃 같이 아름답고 그 재지는 하늘을 이치를 모두 헤아릴 정도로 지혜로운 여인. 무림은 그녀에 게 다지부용이라는 별호를 주었다. “흑흑흑. 상공. 웃으며 떠나셨던 것이 얼마전인데 이렇게 땅속에 누워 계 시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다지부용 백리설. 백리세가의 천금으로 그 무공은 무림칠룡과 맞먹고 그 지혜는 제갈가의 가주 만묘귀산 제갈도용과 겨룰수 있다는 여인.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그녀역시 모용풍과 같이 승룡곡에서 수련한 바가 있다. 천 무삼성의 인정을 받을 만한 무공을 쌓거나 십대극품절예의 한가지 이상을 터득하지 않으면 출곡시키지 않는 승룡곡에서 나왔다는 자체가 그녀의 무 공이 이미 범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리설의 눈빛이 원한에 불타올 랐다. 그 불꽃은 폭우속에서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용서못한다. 가가를 죽인 자들은 용서를 못해. 그 뼈를 부수고 살을 찢으 며 피를 마시겠다. 혈천마련은 물론 마도의 어린아이하나 남겨놓지 않겠 다. 그 뿌리를 잘라버리지 않으면 모용가가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해.” 백리설이 고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이의 죽음에 연관된 백도도 용서할 수 없다. 마도와 손을 잡은 자들은 물론 비록 마도의 음모에 빠져 이용당했을 뿐인 자라도. 구파일방. 검후. 가가의 죽음에 연관된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 미친 것처럼 중얼거리는 여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세명의 청년이 있었다. 무적소야의 세 사제였던 인물. 모용풍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랐 던 세사람이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눈 역시 원한에 활활 불타고 있었다. “크윽. 어리석은 무당파와 화산파. 삼척동자도 이것이 마도의 음모라는 것 을 짐작할 수 있거늘. 영웅을 몰라보고 내치는, 진정 그런 자들을 백도의 동료라고 내가 생각했던가?” 창궁일준 남궁홍일. 오대세가 중에서 남궁세가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혔 지만 다른 사문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지만 그가 거느린 후 기지수들의 모임 이름이 천검회인 것을 짐작하여 백도의 누군가는 그의 사 문이 천무삼패의 하나인 천검문이 아닌가 짐작한다. 만약 그렇다면 남궁홍 일은 무당파에 못지않은 두개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는 셈이 된다. 천무 삼패의 하나인 천검문은 마도의 마검문 보타암의 검각과 함께 역사적 최고 의 무림 삼대검문으로 알려졌던 검도의 명문. 또한 남궁홍일 역시 검으로 는 무적소야 모용풍에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미래의 천하제일검으로 인정받는 인물. 그런 남궁홍일도 슬픔에 이를 악물고 있다. 진천신룡 종리비. 무성종리연의 출현으로 오대세가에 끼어든 종리세가의 젊은 가주. 지금은 가장 발전하는 젊은 세가를 이끌고 있다. 현재의 세력으로 보면 오대세가 의 마지막이지만 그 잠재력으로 보면 오대세가의 으뜸이라고 할 수있다. 특히나 백도맹주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잇점은 백도천하에서 엄청난 권력이 었다. 현재 종리세가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고수들은 천을 일컬으며 이 미 그 중의 반이상을 종리세가는 가신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같이 무 림에 커다란 명성을 떨쳤던 일류고수들. 종리세가에서 끌어들였던 그 모든 고수를 푼다면 천하가 움찔하리라. 그역시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 이고 있었다. 청룡일검 황보무악. 천하상계의 거대한 흐름중의 한 맥을 차지하고있는 중소상인연합. 그 연합 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천하십대거부의 하나인 만보장의 황보돈이었다. 황 보무악의 힘은 단지 백도맹의 맹주의 제자이며 청룡단을 이끌고 있다는 데 에 끝치지 않는다. 그의 배후에는 만보장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본다면 천 하상계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현황방과도 끈이 닿아있다 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황보무악은 사형제 중에서 가장 많이 모용풍을 따 랐기에 그 흐느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이들 무성 종리연의 세 사제이며 무림칠룡의 세사람. 이들 개개인의 가공 할 무위도 그렇지만 그들의 배후세력도 만만치 않다. 그들의 배후세력 끼 리만 뭉쳐도 백도 전력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거대 세력이다. 그런 그들 이 복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덤 주위에는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그들 셋을 중심으로 무 덤 주위에 무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격하게 어깨로 흐느기고 있는 젊은 무림인들. 백도맹 중에서 평소 모용풍을 흠모하고 있 던 젊은 백도의 무림인들이었다. 모용풍은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젊 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도맹 대부분의 고수들에게 우상처럼 여겨지고 있 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오대세가 뿐만 아니라 군소문파의 모든 젊은 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마련의 예상은 정확했다. 마련이 모용풍을 그대로 놔두 었다면 향후 이 젊은 고수들이 백도의 수뇌가 된 이후 무림사상 유래 없는 일인 절대권력의 백도천하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묘용풍을 얼마나 마음속 으로 따랐었는지 그들은 상중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머리에 모두 흰 두건을 동여매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뜻을 모으겠습니다. 그 뜻은 복수입니다. 억울한 그분의 마 지막 한올의 원한마저 갚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 다. 지하에서 그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새 흐느낌을 멈춘 백리설이 무림삼룡과 다른 젊은 백도고수들에게 말 했다. 모용풍의 약혼자라는 입장으로 그녀는 암중에 이 백도고수들의 지도 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실 여기있는 젊은 고수들은 극히 소수일 뿐. 모 용풍을 추종하는 젊은 고수들은 오대세가와 군소문파, 그리고 평소 산문에 틀어박혀 세속에 나오지 않는 구파일방의 진전제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속가제자들이 모용풍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도의 젊은이들의 칠할 이상이 모용풍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우리의 뜻을 기르기 위해 우리가 모인 모임의 이름을 지을까 합니다. 모 용풍 가가를 기린다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연풍회. 우리 연풍회는 가가의 죽음에 관련된 마도와 백도의 어리석은 자들의 척살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것입니다.” 폭우속에 사랑을 잃은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무덤을 찾아온 자들의 횟수는 모두 이십 칠번. 천하제일가를 비롯한 백도 쪽에서 열 두 번. 마도 쪽에서 열 다섯 번을 찾아왔습니다.” “미친 것들. 많이도 찾아 왔군.” “마도 쪽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모용풍의 시체를 직접 확인 한 일도 세 번이나 됩니다. 아무래도 천면음마의 예도 있고하니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 일 듯 싶습니다.” 백가량이 껄걸 웃었다. “들었나? 마화타? 시체를 확인한다는 군.” “누가 와도 노부가 손본 시체를 진짜와 구별하지는 못합니다.” 백가량의 앞에는 허리가 굽은 노인 한명이 있었다. 노인은 지금 말끔하게 씻긴 모용풍의 몸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용풍의 주위에는 환마와 사 마. 쌍노가 연신 주술을 외우고 있었다. 마화타. 혈천마궁의 의전 소속의 마도의원. 마도사상 가장 뛰어났던 자로 죽은 자를 살리고 뼈에 살을 붙이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자. 혈천마궁에 서 혈존의 주치의 노릇을 하다가 은거하여 혈존의 능력연구에 힘을 쏟았던 노인. 한때 악취결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고 그로인해 백이충의 이목에 잡혀 다시 그의 충복 노릇을 하게된 자였다. 백이충은 그를 잡아 다시 쌍영마공을 비롯한 아수라독존마공을 수련할 수 있는 신체로 자신의 몸을 개조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명을 걸고 위협해 봐도 결론은 불가능했다. 가능 불가능의 문재가 아니라 그릇의 재 질 문제였다. 아무래도 쇠그릇과 유리그릇은 그 재질에 차이가 있는 것이 다. 쇳덩어리를 담으려면 유리그릇은 아무리 수선을 하고 조심스럽게 관리 한다고 해도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태아의 상태에서 유산되기 직전에 쌍영마공으로 겨우 그릇을 수선하여 태어난 백이충의 몸은 도저히 수선할 만한 재질이 안되었다. 마화타는 그릇을 교체할 것을 건의했다. 몸을 바꾸는 것은 마화타의 의술 의 능력이나 혈존의 사술의 힘으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혈마전혼 대법 같은 고도의 위험을 내포한 시술이 아니더라도 마화타가 새로 연구한 의술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이충으로서는 자신의 태어나면 서부터 가족에게 사랑받아온 백이충이라는 자아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 었다. “모용풍의 몸은 어떤가?” “정말 굉장합니다. 주군의 몸 외에 이런한 신체가 또 있다는 것은 감히 상 상도 못했습니다. 도저히 손을 댈 곳이 없는 완벽한 신체입니다. 어떠한 개조를 통해도 이토록 완벽한 몸을 만들지는 못할 겁니다.” 마화타는 흥분에 가득찬 어조로 모용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게다가 어릴때부터 무예로 단련된 육체. 세수역근심경의 내공으로 내장을 단련했고 건곤무적기로 신체를 단련했습니다. 양손의 흔적을 보아 미미하 게나마 각기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인 무당의 태극혜검과 팽가의 혼돈패 왕도를 익힌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의 몸에 있는 반탄강기의 흔적 역시 십대절예의 하나인 아미의 생사탄강을 사성가량 익힌 모습이 보이고. 백도 십대극품절예의 다섯을 익혔다고 주군에게 들었지만 사실이었군요.” 백이충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니지않나? 쌍영마공을 익힐만한 체질이 되는가를 묻 는 거다.” “가능합니다. 주군의 쌍영마공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존에 수련한 내 공을 잠력으로 바꾸고 이 커다란 그릇을 텅빈 공동으로 만든다면.... 어떠 한 마공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야 만족한 백이충은 쌍노를 바라보았다. 쌍노는 백이충의 명령에 이해 모용풍의 영혼에 손을 대는 시술을 하고있는 상태. 모용풍의 기억을 손봐 현무도선이 죽기 전에 백도를 위해 그가 죽은척 가장하도록 손을 쓴 것으 로 조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백이충과 그의 수하들이 그를 돌보는 모 든 행위가 현무도선이 그를 위해 마련한 안배로 믿도록 하고 있다. “쌍노. 어떻게 되었나?” “거의 다되어 갑니다. 모용풍의 마음에 선악의 개념을 뜯어고치고 있습니 다. 이제 본능적으로 그는 주군의 뜻에 따라 선악의 개념을 판단할 것이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들을 그의 편으로 믿을 것입니다. 보모보다 오히려 주군 이나 우리들을 더욱 마음속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좋군. 어떠한 충성의 맹세보다 마음속으로 진정 따르는 것이 믿을 수 있 지. 이혼통제대법의 시술은?” “보름 정도면 완성될 것입니다. 모용풍이 깨어나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과거와 다름없는 모용풍으로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 실은 모두 주군이 정해 놓은신 바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언제든 주군 이 원하실 때면 이혼통제대법으로 그의 육체에 강제로 빙의하실 수 있습니 다. 주군께서 모용풍을 쓰고서 다시 본체로 돌아오신다고 할지라도 모용풍 은 주군으로서 있었던 때의 기억을 희미하게 기억할 것이며 주군의 일은 전혀 모르는체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음의 개조와 이혼통제대법 둘다 중요한 일이다. 모용풍은 본좌가 가장 자주 애용하는 도구가 될 것이니. 그의 몸이 쌍영마공을 거부해서도 안되 며 쌍영마공을 수련하기위한 절차에 꺼림직한 마음을 가져서도 안된다.” 쌍영마공의 수련은 극악하다. 혈영마공은 순음지기를 지닌 처녀의 피를 통 해 이룩되는 것이고 청영마공은 팔개월된 산모의 배를 가르고 아직 살아있 는 태아의 몸을 이용하여 이룩하는 마공이다. 지금 모용풍의 마음을 개조 하지 않으면 아무리 무의식속에 숨어 그를 조정한다고 하더라도 모용풍의 성격삼 쉽게 쌍영마공을 수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모용풍의 육체를 이용해야만이 비로서 제자놈들에게 나타날 수가 있다. 그 전에는 놈들을 이기기가 힘이 들지. 제길. 혈영동만 털리지 않았 으면..... 아마도 첫째놈의 짓이겠지만.” 혈영동. 그것만 생각하면 백이충은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은표전장이나 혈무영, 혈환처럼 혈존이 만일을 대비하여 만들어 논 동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무공을 모두 잃어버렸을 경우 새로이 짧은 시간안에 쌍영마공을 이 룩하도록 모든 것이 준비된 동굴이었다. 혈영동에는 순음지기를 가진 처녀의 순혈 일천 항아리가 얼음으로 냉동되 어 보존되어 있었으며 태아를 썩힌 시기 일백궤짝이 역시 얼음으로 냉동되 어 있다. 동부에 있는 일천 항아리의 피와 일백궤작의 시기는 혈영마공과 청영마공의 습득을 위해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쌍영마 공에 있어서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최고의 영약인 셈이다. 백이충이 혈영동을 찾았을 때는 그 입구가 파괴되어 있었다. 일천항아리는 모두 파괴되었으되 그 안에 있던 순혈은 모두 말라붙어 있었다. 누가 사용 했다는 소리였다. 또한 일백궤짝에 있던 시기역시 완전히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혈영동부에 와서 이 두가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혈영동의 동부입구를 막고있는 수십가지의 절진과 기관들. 그것은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혈존도 들어가지 못하는 엄중한 함정들이었다. 그것을 파해 하고 쌍영마공의 완성을 위한 재료가 혈영동에 있다는 것을 눈치챌 만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혈영마공 뿐만 아니라 청영마공도 같이 수 련을 하여 쌍영마공을 완성시키려는 자도. 바로 혈존 백가량의 모든 내공 이 담긴 심장을 먹어치운 자. 그의 전생이 남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실수였어. 혈영동에 천마강시까지 놔두는 것은 아닌데.” 그의 심장을 먹고 혈영동의 재료를 사용하여 쌍영마공을 이룩했다면 첫째 제자 그녀석의 성취는 결코 과거 혈존의 아래가 아닐 것이다. 하물며 그가 혈무영과 달리 이미 완성된 천마강시 백구를 혈영동에 가져다 놓은 것을 가져갔다면? “천마강시 열구만 있어도 내가 지금 거느린 일천의 혈무영의 전 세력과 맞 먹는다. 삼십구만 넘어도 일백마제 모두와 비견할 수가 있거늘. 제기랄.” 혈존. 그는 전설의 벽을 깨는 자였다. 그는 진정 고금제일마였고 전설로 전해졌던 모든 경지를 이룩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을 달성했다. 무공으로서 는 마도와 사도의 칠대절학을 통달하여 아수라독존마공이라는 미증유의 마 공을 만들어 내었고 사술로는 혈마전혼대법이라거나 이혼통제대법 같은 신 기원의 기술을 개발해 내었다. 또한 강시라면..... 혈천마궁 시절 그가 혈마 전혼대법을 위해 천마강시 한구를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이 미 일백구의 천마강시를 비밀리에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것이 혈천마궁의 모든 수하들이 배반해도 두렵지 않은 이유였다. “끄응. 일백구의 천마강시가 첫째의 손에 넘어갔다면 정말 걱정만 해서 될 일은 아니야. 어쩌면 놈에게 본좌가 또다시 당할지도.... 끄응. 혈마전혼대 법을 위해 마련했던 천마강시 한구는 셋째 혈천마련의 손에 들어갔다지? 그 일곱노물이 있다면 그것을 연구하여 그놈들이 새로 몸에 들어갈 다른 천마강시 일곱구를 만드는 것도 시간 문제고. 하여간 갈수록 일이 커지는 군.” 문제는 첫째의 쌍영마공의 완성과 일백구의 천마강시만이 아니었다. 셋째 가 다른 제자들을 모아 이룩한 혈천마련. 그 배후에는 일곱 노물이 있다. 과거 그가 혈마시절 같이 팔대천마라고 불리운 노물들이. 혈존은 혈마전혼 대법의 완성을 위해 그들 일곱을 실험작으로 삼았다. 그들의 영혼을 불러 낸다면 마도 사도의 칠대절예를 완성할 완벽한 조언자를 얻는 셈이니 더할 나위없는 실험작이다. 그리하여 혈마전혼대법은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하였 으니 영혼의 빙의는 성공했으되 육체와의 결합이 극히 불완전했던 것이다. 그로인해 혈존은 혈마전혼대법에 가장 알맞은 육체가 마로 천마강시와 같 은 대법으로 제련된 육체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의 백이충이 혈존으로 완벽하게 부활하지 못한 것도 천마강시의 육체를 사용하지 못한 부작용인 지도 모른다. 부실한 그 육체의 탓도 마찬가지. 혈천마련의 배후에는 칠대천마가 있다. 그건 백이충의 확신이었다. 놈들이 어떻게 그가 가둔 곳에서 기어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셋째와 넷째 천마황과 혈사황이 새로운 마공으로 마음을 합쳤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확신했다. 그러한 마공을 만들어 낼 자는 혈존 그와 칠대천마밖에 없기에. 그리고 칠 대천마가 자유를 되찾았다면 반드시 천마강시를 연구하여 완벽한 몸을 손 에 넣어 부활하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첫째 놈 못지 않게 위험한 놈이 둘째 놈.” 청영마공을 익힌 둘째 제자. 그 속을 알수 없는 놈.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에 받아들였고 청영마공도 전수하며 부려먹었지만 내력부터 시작하여 무엇 하나 밝히지 않은 놈. 하나 희미하게나마 알고있는 놈의 내력은 둘째의 내 력이 중원인이 아니라는 것. “중원에 백도 십대극품절예와 마도 사도의 칠대절학이 있다면 변황에도 그 에 못지않은 전설의 무학이 있다. 본좌가 변황 정벌시 그 모든 기학들을 수거하여 한 곳에 봉인해 두었지만.... 둘째가 노린 것은 아마도 그 봉인된 변황무고였을 것이다. 그곳 역시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으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도대체 전생에 혈존이었던 자신은 무 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여기저기에 화약고를 마련하여 설치해 놓았는지. 몇가지는 수거하고 몇가지는 파괴했지만 아직도 한없이 남아있다. 그 모든 것을 거두기에는 시간이 한없이 모자른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두가지를 털려 버렸다. 그리고 그 도둑은 첫째와 둘째이리라. 그렇다면 둘을 상대하 기위해 더 이상 술법만을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수라독존마공. 적 어도 쌍영마공을 되찾는 것은 필요하다. 그 둘과 칠대천마를 상대하려면. 일백마제로서는 턱도 없다. 그래서 백도의 세력을 손에 넣기위해 모용풍을 점찍은 것이다. “이제 희망은 너다. 모용풍. 쌍영마공을 발휘하기 위한 본좌의 도구여.” 백이충이 모용풍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열망으로 일렁거렸다. 41 이혼통제대법-무법자(1) 혈천마련이 기지개를 펴고 드디어 중원의 남부에 혈첩이라는 것을 뿌리기 시작하자 혈첩을 받은 각 문파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도에 속한 문파는 부지런히 백도맹에 연락을 넣어 도움을 청하기에 바빴고 중소문파 는 거대문파에 의지하기 바빴다. 사천에는 아미와 청성, 점창등의 문파와 당가등의 세가가 연합하여 힘을 비축하였고 화산 역시 점창파와 연합하여 백도맹의 지원을 기다리는 한편 자신들의 방어태세를 완비했다. 백도는 그나마 백도맹의 지원이라도 바라는 처지였지만 정사중간의 문파나 흑도문파는 그럴수도 없었다. 항복이냐 투항이냐가 절실한 문제였다. 광동 의 현황방은 결사항전의 태세를 선언했고 귀주의 흑방은 중소 흑도문파의 소집령을 내리는 가운데 만독궁이나 칠륜교와 연합하기에 바빴다. 그나마 힘이 약한 중소문파들은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아무래도 혈천마련 역시 한번 휘저어야겠어. 이대로는 백도와 힘의 균형 이 안맞아. 그나마 일곱노물이 나온다면 형세는 더욱 절망적이야. 마도의 힘을 갈라 균형을 맞춰야 겠어.” 백이충이 그렇게 생각하고 머리를 굴릴 때 쌍노가 황급히 그를 찾았다. “주군 큰일났습니다. 백치마인이 탈출했습니다.” “뭐야? 어떻게?” “마화타가 시술하는 도중에 그를 부상시키고 탈출했다고 합니다.” 백치마인이란 혈존 백가량이 천하에 남긴 또 하나의 흔적으로 백이충이 간 신히 회수한 작품중의 하나였다. 본래 마화타는 혈천마궁에 들은후에 혈존 의 명을 받들어 하나의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무공이나 내공심법의 도움 없이 순수한 근력과 완력을 통한 외공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화타는 한계까지 이르는 육체의 단련 외에 두가지 측면에서 그 연구를 진행했다. 생명력을 소모시키는 원기나 육체에 잠들어 있는 잠력을 모조리 근육의 힘으로 끌어내는 것. 그리고 이성적인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육체가 가진 최대한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야수의 본능에 대한 연구였다. 첫 번째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잠력이나 원기를 최대한 이용하여 자연 스럽게 근육의 힘으로 바꾸어 이끌어내는 연구는 마화타가 미리 연구했던 부분이라 쉽게 성공했다. 두 번째 이성적인 부분이 많은 인간에게 어떻게 본능적인 힘에 의존하는 야수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분야는 결국 짐승의 뇌를 인간에 합성시킴으로서 그 가공할 힘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의술 로 따지자면 가히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연구는 큰 난관에 부딪쳤으니 그 육체가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힘과 야수의 본능과 인간의 지성사이의 갈등에 어느 순간 몸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 한 성공을 이루었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마화타는 의술을 통해 인간의 잠력이나 생명력까지 파괴적인 힘으로 바꾸 는 연구를 했고 동시에 약이라는 것을 통해 잠력을 증대시키는 방안을 연 구했다. 영약을 통해 내공을 배양하는 것처럼 약으로 근력을 근육이 가진 한계이상의 힘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혈존은 갓 태어난 아기하나를 잡아 쓸데없이 고민하는 이성적 뇌세포 부분 을 모조리 제거하고 고통의 감각을 줄이는 사술을 베푼 적이 있다. 인간이 되 이성적인 부분이 제거되고 본능적인 부분만을 다루는 뇌만 남는다면 야 수의 뇌를 합성하여도 그 부작용이 적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 의 본능과 야수의 흉폭성만이 결합된 아기에게 마화타로 하여금 십여종의 영약을 투입해 그 모든 약력을 근력과 완력으로 바꾸도록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다섯 살이 안되어 어른 두세람의 힘을 갖는 백치마인을 만들 수가 있었다. 혈존은 자신이 죽기전에 천마강시를 혈무동에 남겨놓은 것처럼 마화타가 만든 백명의 백치마인을 한 곳에 가둬났는데 얼마 전 그가 찾았을 때에는 단 한구의 백치마인만이 살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죽은 이후였다. 그 한 구마저 폐기처분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결국 연구는 실패작이었던 셈 이다. 마화타는 아직 살아남은 그 백치마인을 연구해보겠다고 백이충과 다시 합 류한후 청을 한 바가 있다. 백이충은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을뿐더러 백치 마인이 살아남을 수 있게끔 그 실험을 돕도록 혈무영의 십대영주의 한사람 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백치마인은 움직일 힘도 없이 사망 직전의 괴물이었는데 어이하여 마화타를 부상입혔단 말인가?” “마화타가 기존에 주군의 능력을 흉내내어 타인의 무공을 흡수하는 연구를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백이충이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런적이 있었다. 과거 혈존은 타인의 심장을 빼먹음으로서 남이 애써 수련한 무공을 손쉽게 얻은 적이 있었는데 마화타 는 이를 연구하여 남을 살해하여 그 무공지식과 능력을 빼앗는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악취결개를 통해 어느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그랬지. 그것과 연관이 있나?” “마화타가 그 연구를 백치마인에게 시험해 본 모양입니다. 무공뿐만 아니 라 타인의 지식까지 흡수할 수 있도록. 그것이 성공한다면 짐승과 다름없 는 백치마인이 다른 인간의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마화타 의 말로는 백치마인이 십대영주의 하나인 곤무악을 죽이고 그의 힘과 기억 과 무공을 흡수하여 힘을 얻은후 마화타를 부상입히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곧 추격대를...” 백이충이 쌍노를 가로막았다. “가만. 인간의 형상만을 가졌을 뿐 야수와 다름없는 백치마인이 곤무악의 모든 능력을 빼앗아 달아났다?” “예. 하지만 마화타는 단지 그 일부만을 얻었을 거라고...” “곤무악은 어떤 무공을 익힌 자인가?” “철마방의 철괴마공을 흉내낸 철갑마공을 익히도록 한 자입니다.” “이혼통제대법도 베풀었겠지?” “옛? 하지만 설마 백치마인이 이혼통제대법마저 흡수했을 지는....” “상관없다. 추적대는 필요없다. 그 백치마인을 데려올 때에 어느정도 통제 가 가능하도록 제령대법을 펼친바가 있으니까. 멀리서도 놈의 행동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는 있다. 하지만 흥미가 있군. 그녀석의 몸에도 이혼통제 대법이 가능한지....” 귀주에서 제일 큰 도시 귀양. 도시가 큰 만큼 번화한 곳이고 사람도 많이 몰려있다. 또한 흑방이 자리잡고 있는 도시인 만큼 흑도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사람이 많이 몰려든 다는 것은 귀양을 오고가는 사람도 많다는 뜻 이다. 그리고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그 런 행인들의 도움을 얻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길을 가는 통행료를 얻 어내고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산적이라고 부른다. 귀양으로 통하는 작은 산에 청림채라는 산적소굴이 있다. 이름도 잘 알려 지지 않은 산적들이다. 흑도를 통일했다는 흑방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 을 만큼 무림의 사정에 어두운 변변치 못한 조직이다. 남자 장정 이십명이 군영에서 도망쳐 칼 몇 개 가지고 모여 살아가는 자들인데 무공하나 제대 로 익힌적이 없어 완력으로 해결하려는 삼류이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가 보이면 얼씬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상인들도 사람만 많으면 나설 엄두를 못낸다. 그저 양민들로 보이는 자들이 두셋 정도 오고 다닐 때 밥벌이를 할 뿐이다. 지금도 영업을 하기위해 숲에 매복하고 있는 산적 둘이 있었다. 하루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지만 만만한 사람들을 찾지못한 산적은 연신 하 품을 하고 있었다. “들었어? 산에 식인 호랑이가 나타났대.” “그래? 내가 듣기에는 무슨 늑대떼라고 하던데?” “늑대는 무슨. 산에사는 사냥꾼 호노인 일가와 약초꾼 이노인이 당했다던 데. 그들이 죽은 근처에는 늑대무리들이 살만한 곳이 없어.” “무슨 소리야? 오히려 이근처에 호랑이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 틀림없는 늑대무리라고. 어디 먼곳에서 넘어온 늑대무리가 틀림없어.” “늑대인지 호랑이인지 하여간 큰일이야. 짐승들이란 왠만하면 사람을 공격 하지 않는 법인데 잡아먹다니. 팔 다리가 뜯겨나가고 배가죽이 찢겨졌다 며?” “촌락 사람들은 식인귀니 귀신이니 어쩌고 하지만 맹수에게 당한 것이 틀 림없지. 세상에 귀신이 어디있어?” 그들이 따분함을 참지 못하고 담소를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명의 사람 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그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참으로 직업에 충실치 못한 산적들이었다. 나타난 자는 누더기인지 옷인지 구별못한 시커먼 것을 몸에 걸치고 있었는 데 머리는 온통 산발하여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체격은 엄청 커서 능히 팔척은 될 듯 싶었고 덩치도 우람했다. 거지보다 더욱 추례하게 보이는 남 자는 비틀거리며 길을 가는 와중에도 연신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하지...마..... 내...머리속에서...나가.....내...머리...속에서... 중얼거리지...마.....귀주로....가라고....자꾸....반복...해서...말하지...마.“ 추례한 사내의 눈빛은 몹시 혼탁하여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헝 클어진 머릿결 속에서 언뜻 드러난 입가에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어 광증 을 심히 의심케하는 남자였다. 남자의 중얼거림은 몹시 불분명해서 마치 막 말을 배운 어린아기같은 발음이었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머리..속에서...나가....들어오지...마....시키는...대로...할테니까... 제발....중얼거리지....마....귀주로 가라...귀주로 가라....자꾸 말하지...마“ 비틀거리던 사내는 자신의 앞에 무언가 다른 것이 가로막았다는 것을 알았 다. 사내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고 곧 칼을 든 흉악한 인상의 사내 둘 이 그를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야? 이거. 거지잖아. 이거 털어먹을 거나 있는 거야?” “오늘 정말 장사 안되네. 이거 눈빛을 보니 미친 놈 아냐?” 일단 혼자서 어슬렁 거리는 꼴을 보고 앞을 가로막기는 했는데 직접 나서 고 보니 영 아니었다. 이건 돈이 되기는커녕 제정신을 가졌는지도 의심스 러운 놈이 아닌가? 그때 사내의 눈에서 흉악한 살기가 퍼져나왔다. “배...고..프..다....먹을 거다....싱싱한...고기....” “뭐...뭐야? 이 미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 사내의 몸이 횡하니 산적들을 덮쳐왔다. 빠른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칼을 들고 위협하면 알아서 졸으려니 생각했던 산적들에게는 뜻밖의 몸놀 림이었다. “야. 조심해. 미친놈한테 물리면 약도 없....” “이거..어떡해..이놈이 내 팔을 잡고...으아아악.” 허둥지둥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미친 사내는 털복숭이 산적의 팔을 덥썩 잡았다. 놀란 털복숭이 산적이 사내를 떨쳐버리려는 순간 사내의 입이 벌 어지며 덥썩 산적의 팔목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산적의 팔뚝이 통째로 사 내의 이빨에 뜯겨져 나갔다. “으아악. 내 팔. 내 팔. 크아아악.” 털복숭이 산적은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 그대로 땅에 마구 뒹굴 었다. 끔직한 광경이었다. 미친 사내는 게걸스럽게 사내의 팔을 잡고 뜯어 먹고 있었고 동료였던 조금 마른 산적이 그 광경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이....미친....” “크아악. 살려줘. 으으윽.” 땅에 마구 뒹구는 털복숭이가 동료 마른 산적의 발을 부여잡고 계속 비명 을 질렀다.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마른 사내가 미친사내에게 노성을 질 렀다. “이놈.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사람을 뜯어먹어?” 마른 산적의 군용도가 미친사내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공포와 분노가 가득한 심정에 있는 힘껏 내두른 칼질이었다. 사내는 남자의 팔뚝을 물고 우물거리며 입가에 피를 묻히느라 정신이 없어 칼질을 상관하지도 않았다. 쾅! 미친 사내의 머리를 박살날 것으로 예상했던 마른 산적의 칼이 지르르 울 렸다. 이건 마치 바위를 칼로 후려친 것 같았다. 손목이 저려 마른 사내는 하마터면 칼을 놓칠뻔 했다. 사내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놈. 이놈.” 마른 사내의 칼이 다시 번뜩였다. 그 엉성한 칼질이 미친 사내의 몸에 계 속 적중되었다. 미친 사내는 마른 산적의 칼은 신경도 안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칼에 적중한 사내의 몸에서는 베어지는 스산한 소리대신에 텅텅 하는 둔탁한 소리만이 울렸다. 마치 철벽을 칼로 후려치는 것처럼. “괴..괴물....그리고보니 저 누더기는 검은 색이 아니라 죽은 피가 말라 변 색된 색깔....” 갑자기 미친 듯한 공포가 마른 사내의 머릿속을 휘어잡았다. 팔뚝을 씹어 삼킨 미친사내의 흉폭한 눈초리가 아직도 뒹굴고 있는 털복숭이 사내와 마 른 사내에게 향했다. “배...고...파....잡아...먹는다...” 마른 사내의 발길질이 바닥에 뒹구는 털복숭이 산적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퍽! 털복숭이의 머리가 수박 으깨지듯 으깨졌다. 입맛을 다시며 털복숭이를 바 라보던 미친사내의 시선이 마른 사내쪽으로 향했다. 마른 사내는 오금이 저리며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도 미칠 것같 은 공포가 밀려왔다. 아랫도리가 뜨듯하면서도 축축한 것이 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죽어도 잡아먹혀 주고싶지는 않았다. 미친 사내의 발걸음이 마른 사내를 향해 다가왔다. 그래도 산적질 하며 사 람도 죽여봤고 시체도 꽤 봐온 터라 담력이 있다고 자부했던 마른사내였지 만 미친 사내의 느린 발걸음에도 오금이 저려 도망을 갈수가 없었다. 사내 는 흉폭한 늑대요 자신은 곧 잡아먹힐 온순한 토끼처럼 느껴졌다. “아이구. 어르신. 제발 살려주십시오. 집에는 팔십 노모와 처자식이....” 더 이상 미친 사내의 눈빛을 마주보지 못한 마른 사내가 칼을 떨어트리며 머리를 처박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미친 사내는 팔을 뻗어 마른 사내의 목을 향해 접근시켰다. (내가 미쳤지. 미친 놈을 향해 노모 핑계가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배고프다...너...잡아..먹어야...굶주림...면한다.” “대협. 어르신. 대왕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배부를 때가 지 진수성찬을 바쳐올리겠습니다.” 마른 사내가 두손을 싹싹 빌며 사정을 했다. 미친 사내의 팔이 멈칫했다. “나...대협....어르신....대왕님...아니다....내..머리속에...곤무악이라는...이름 이...있다....” “예. 곤무악 대협. 살려만 주십시오. 그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보은 하겠습니다.” “정말...배..부를..때까지...먹을...것을...줄...래?” (살 수있다.) 산적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물론이고 말굽쇼.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죠. 산채로 가 시기만 하면 제가 당장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어려운...말....모른다....먹을...거...줘.” 마른 사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칼도 통하 지 않는 괴물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머리통은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 칼이나 망치로 후려쳐도 쉽게 깨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해골이었다. 그런 데 저 미친놈은 단지 발로 밟아 사람의 머리통을 으깼다. 마른 사내는 처참하게 죽은 털복숭이 동료의 시체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악독한 심정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랐다. 저 미친녀석을 죽이지 않고 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미친 놈의 괴력을 당해낼 길이 없다. 미치면 힘이 장사가 된다더니. “물론입죠. 어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가는 마른 산적은 사내를 산채로 안내하기로 했다. 그 곳에는 스므명이 넘는 동료가 있다. 그들과 힘을 합하면 미친놈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굽신거리며 산적은 미친사내를 안내했다. 미친 사내의 엉거주춤 느린 행동을 볼 때 산적이 도망갔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의 시체를 보고 동료애가 생겨났는지 마른 산적은 미 친 사내를 산채로 안내했다. 저멀리 몇채의 목옥이 보이자 사내는 그쪽을 향해 뛰어가며 소리쳤다. “장팔이 당했다. 미친 놈에게 당했어. 어서 모두 나와 복수를 해줘.” 미친 사내는 여전히 멍하고 혼탁한 눈으로 목옥에서 뛰쳐나오는 산적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청림채는 생겨난지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목옥마다 끙끙거리는 사내들로 득실거렸다. 이십명이 한꺼번에 덤볐지만 미친놈을 당해내지 못 한 것이다. 이건 힘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주먹을 막는 답시고 막아도 팔다리가 부러졌으며 빗맞은 발길질에도 갈비뼈가 왕창왕창 나갔다. 우박처럼 미친 사내의 몸에 칼질을 해대었으나 칼날만 상하고 산 적들의 팔만 저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이십명의 산적들이 모조리 팔다리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며 뒹굴었다. 미친 사내가 다시 흉악한 눈빛을 빛내며 산채 두목의 거대한 덩치를 들어 올려 다리짝을 닭다리 찢어내듯 뜯어내어 입으로 가져갈 때 마른 사내는 부엌으로 뛰어들어 산채 두목이 먹던 되지고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아귀가 따로 없었다. 그날부터 미친 사내는 걸신들린 듯이 처먹기 시작했 다. 산채의 모든 식량이 거덜나도 산적들이 배를 곯아도 감히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눈치보였다가 다시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날뛰기라도 하 면? 그야말로 청림채 산적들은 지옥에 포로로 잡힌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팔다리가 부러진 부상을 당한 몸으로 어디를 도망간단 말인가? 마침내 산채의 식량이 바닥났을 때 산적들은 공포로 몸을 떨어야 했다. 이 대로 저 미친놈의 식량이 될 것인가? 마른 사내가 다리병신이 된 산채두목 을 대신하여 꼴에 부두목이라고 미친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대협. 드릴 말씀이....” “나...대협...아니다...곤..무악...이다....” “예. 곤무악대협. 그게 산채의 식량이 다떨어져서...” “먹을...것? 다...떨어졌다? 이제...없어?” 마른사내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마치 미친사내의 말이 이제는 네놈들 을 잡아먹을 차례냐 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이쿠. 곤대협. 제발 좀 사정을 봐주십시오. 저희 산채가 워낙 가난해서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곤대협 덕분에 며칠 일을 나가지 못해서 수 입이 없는 관계로.” “일? 수입? 그래....기억난다.....일해야....먹을...것...생긴다.” “예. 그렇죠. 그런데 저희가 여태 일을 못해서.... 정말 곤대협에게 대접할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요.” 미친 사내. 곤무악이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마른 산적은 그만 놀라 털 썩 주저앉고 말았다. 또 하체가 뜨뜻하게 젖어왔다. “곤무악 대협. 왜?” “일.....하러...가자....나도...일한다....” 42 이혼통제대법-무법자(2) 지금 귀양성으로 가는 산길에는 한참 직업전수에 따른 교육이 벌어지고 있 었다. 산적의 영업행위를 가르치는 자는 청림채의 마른 산적인 부두목 마 칠이었고 교육을 받는자는 곤무악을 자신의 이름으로 여기는 미친사내였 다. “그러니까 길가는 행인이 오면 무조건 막아서는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흉 악한 표정을 지으며 칼로 위협하는 겁니다. 잔뜩 겁을 먹게 해야 합니다.” “뭐라고....위협하나?” “우리는 위대한 청림채의 대왕님이다. 순순히 가진걸 다 내놓으면 목숨만 은 살려주겠다. 반항하면 모가지를 몸뚱아리와 이별시켜 주겠다. 뭐 대충 이렇게 위협하면 됩니다.” “청림채.....대왕이다.....가진거....다.....내놔......그러면..... 되나?” “.....휴. 예. 됐습니다. 얼마나 겁을 주냐에 따라 가진 걸 다 내놓게 되지 요. 그리되면 우리는 하루 벌어들인 소득을 가지고 산채로 돌아가면 됩니 다.” “일한다....먹을것....생긴다.” 곤무악의 말을 들은 마칠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이 미친놈은 무조건 산적 질만 하면 돈이 잔뜩 생길 것으로 기대하는 듯 하다. 그러다가 수입이 없 을 때 미쳐 날뛰면 곤란하다. 산적질도 제가 잘해야 돈이 떨어지는 것이 다. 마칠은 약간 변명을 미리 해놓기로 했다. “그게.... 위협이 통하지 않아 반항을 할 때도 있습니다. 돈이 없는 놈이 걸 릴 때도 있고. 그런 놈들에게 통행료를 받지 못하는 건 운이 나쁘거나 그 건 직업전선에 뛰어든 산적본인들의 잘못으로...” “반항..... 때려준다. 먹을 것....내놓을 때까지” 마칠의 변명은 끝을 맺지 못했다. 마칠은 미친놈의 한마디에 방향을 선회 하여 삼류 산적질의 정수를 전수하기로 했다. “예. 물론 때려주셔야죠. 하지만 돈도 없이 길을 지나가는 놈들이 나쁜 놈 입니다. 반항하는 놈은 죽도록 패서 옷까지 싸그리 벗겨 챙겨야 합니다. 그래도 교육이 덜되 반항하는 놈들이 있읍죠. 그럴때는 아예 인질을 잡아 다가 돈을 가져오라고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약속을 안지키고 인질을 돈 과 교환하러 오지 않으면 쓱싹 해야죠. 뭐, 여자라도 있다면 모조리 잡아 놔야겠지만.” “때린다.....벗긴다.....인질 잡는다....여자.....잡는다.” “예.예. 이제 훌륭한 산적의 길을 걸으실 수 있습니다. 곤대협.” 마칠이 손을 비비며 곤무악에게 아부를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미친놈의 마 수걸이가 나타났다. 마칠은 오랜만의 손님인가 싶어 눈을 번뜩였다가 질겁 하는 눈으로 바뀌었다.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째 요새는 무림인만 나타난다니까.) 마칠은 한숨을 쉬고 이번 손님은 그냥 보내기로 했다. 산적질을 하기는커 녕 숲속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들키면 오히려 이쪽에서 머리가 날라갈 형 편이다. 머리를 처박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마칠의 머리에 번뜩 미친놈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차. 아무리 무림인들이라도 미친놈에게 상식이 통할 리가....) 과연 마칠의 예상은 들어맞아 그새 곤무악이 튀어나와 칼을 휘두르며 어눌 한 어조로 호통을 치고 있었다. 마칠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청림채...대왕이다....가진거...다...내려놓고...꺼져.” 산길에 나타난 것은 흑방과의 연합을 위해 귀주로 진입한 만독궁의 사절 일행이었다. 비록 흑방과의 교섭을 위해 나서느라고 정예들을 거느리지 않 고 왔다지만 그래도 만독궁은 혈천마궁 시절에도 끝까지 혈존과 싸워 살아 남았던 천무삼패의 일인이었다. 만독궁의 사두마차에 단 깃발과 마차를 호 위하고 있는 오십명의 만독궁도가 찬 예리한 병장기만 봐도 일반 산적들은 꼬리를 물고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꾀죄죄하고 초라한 모 습의 산적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시했다. 선두에 섰던 만독흑와대는 일제히 뒤를 돌아보며 대주에게 시선을 집중시 켰다. 이 세상모르는 산적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묻는 것이다. 만독궁 서 열 십 칠위에 있는 흑와대의 대주 독연천각은 신경쓰기도 귀찮다는 듯이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말발굽으로 깔고 지나가라.” 선두의 기마무사 둘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 백색에 점이 있는 두 마리 말은 거침없이 무모한 산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금방이라도 말발굽으로 산적을 짖밟을 태세였다. 두 마리의 명마가 산적의 앞에 다달은 순간. 덥석! 덮수룩한 머리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체구의 산적의 손이 앞으로 뻗었다. 키가 큰 만큼 손을 머리위로 뻗은 것 만으로 산적은 두 마리 명마의 말을 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달려오던 기세의 말이 산적의 손에 제지당하여 그 자리에서 멈춘 것이다. 부드득! 돌진하다가 철벽에 부딪쳐 갑자기 멈춘 꼴이라고 할까? 말위에 타고있던 두명의 기수는 갑작스럽게 세워진 말의 정지에 앞으로 체중이 쏠리며 흔들 리는 몸을 고정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달려오던 기세로 목을 부여잡혀 강제로 세워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말의 목을 향해 산적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 다. “우와앗.” 그대로 허물어지는 두 마리의 말. 그리고 쓰러지는 말등을 박차고 두명의 무사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한 산적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달리던 두 마리의 말을 단지 양 팔의 힘만으로 세우고 손아귀힘으로 말의 목뼈를 부 러트린 괴인도 그의 머리와 목을 향해 휘둘러지는 두개의 검을 막지 못했 다. 텅! 텅! “반항했다.....때려준다.” 검으로 강철벽을 향해 휘둘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산적의 어눌한 목소리 가 뒤따라 들렸다. 하지만 어눌한 목소리와 달리 이 추괴한 산적의 두눈에 서 발하는 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검이 산적의 목과 머리통을 향해 정확 히 내리쳤는데도 손만 저린 경험에 경악했던 흑와대의 두 고수는 산적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엄청난 살기에 온몸이 저려오며 사지가 덜덜 떨렸다. 그리고 곤무악의 두 주먹이 만독궁의 두무사의 가슴을 느리게 후려쳤다. 콰앙. 쇠가죽으로 만든 북이 강한 압력에 터지는 소리와 흡사한 음향이 울리며 두무사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놀란 흑와대의 다른 고수들이 그들의 몸 을 받다가 몇이 낙마할 정도로 굉장한 기세로 내동댕이 쳐진 것이다. 그나 마 몇의 손을 거쳐 그들의 몸이 허공에 비행하는 것이 저지되었을 때 그들 의 몸은 더 이상 살아있는 몸이 아니었다. 마치 쇠기둥으로 후려친 것처럼 두 무사의 가슴이 함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감히. 만독궁의 무사를.” 흑와대의 대주 독연천각이 대노했다. 독연천각은 만독궁에서 대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 무림에 제일 많이 알려진 고수였다. 그는 독을 잘 쓰는 만큼 경공술이 뛰어나고 또한 각법이 출중했다. 한번은 만독궁이 묘강의 부족과 싸울 때 그가 단 한번도 땅에 내려서지 않고 적들의 머리를 밟으며 허공에서 서른 네 번의 발길질을 통해 서른 네명의 묘인을 발로 쳐죽였다 고 해서 소문이 날 정도의 각법 고수였다. 그는 곤무악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말등을 박차고 단숨에 그를 향 해 허공을 날아 덥쳐갔다. 단 한번의 도약에 오장의 거리를 격하고 날랐으 니 과연 독연천각의 경공조예가 헛소문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독연천각은 곤무악이 만독궁의 두무사를 가볍게 날려보내 즉사시킨 것으로 보아 제법 고수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실력을 실험해 볼 작정으로 가볍 게 발길질을 시전했는데 곤무악은 전혀 방비없이 머리로 그의 발길질을 맞 이하여 나갔다. (철두공 같은 특이한 외공을 수련한 자인가? 그렇다면 너는 실수한 것이 다.) 독연천각은 그대로 다리에 내공을 집중시키며 힘을 실어 세 번의 발길질을 했다. 그대로 저 건방진 산적의 머리통을 터트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텅!텅!텅! 세 번 독연천각의 다리와 곤무악의 머리가 맞부딪쳤고 그때마다 곤무악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앞으로 되돌아오며 세걸음 물러섰다. 허공에 발 디 딜 힘의 발판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세 번의 발길질을 한 독연천각의 무예 는 훌륭했다. (텅텅텅?) 독연천각은 마치 벽을 향해 발길질을 한 것처럼 다리가 저려왔다. 그의 발 길질은 강철을 부어만든 쇠몽둥이를 휘어버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게다 가 내력을 잔뜩 주입한 발길질이었다. 그런데도 벽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나며 곤무악의 머리는 멀쩡했고 오리혀 독연천각의 발끝만 저려왔다. (철두공의 화후가 보통은 아니란 말이지.) 세 번의 발길질을 끝낸 독연천각의 신영이 땅에 내려서기는커녕 그대로 허 공에서 한바퀴 뒤로 일회전 돌았다. 그리고 회전하는 힘을 가해 온몸의 내 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려 곤무악의 가슴을 향해 발을 내뻗었다. 다리는 일 직선으로 뻗었고 온몸의 탄력을 충분히 받은 셈이다. 독연천각의 몸이 하 나의 도구로서 지랫대역할을 하며 회전하는 힘을 더해 내공까지 실어 곤무 악의 가슴을 후려친 셈이다. (하지만 내 다리도 보통은 아니지. 쇠를 우그러트리고 칼과 도에 맞설 수 있는 네 머리처럼 내다리 역시 마찬가지거든. 게다가 다른 부위라면?) 콰앙! 곤무악이 만독궁의 무사를 날려보냈을 때와 비슷한 폭음이 울렸다. 머리가 쇠처럼 단단한 놈이라면 머리를 공격할 필요는 없다. 과연 독연천각의 예 상이 들어맞았는지 곤무악은 만독궁의 죽은 두 무사처럼 허공을 향해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독연천각은 그의 가슴을 후려찬 반동을 이용하여 멋지게 뒤로 날아 자신의 애마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쿠웅. 털썩. 무려 삼사장이나 날아간 곤무악의 신영이 먼지와 함께 나뒹굴었다. 독연천 각은 곤무악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주위를 향해 명을 내뱉었다. “가자.” 독와대의 고수들은 과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멈추었던 행진을 계속했 다. 땅에 나뒹군 곤무악이 살아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 지만 선두의 기마대가 곤무악의 시체를 짖밟으며 그 등뒤를 밟고 올라섰을 때 곤무악의 손이 말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반항했다.....때려준다.” “히히히힝.” 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곤무악이 움켜쥔 것만으로 말의 발목이 그대로 부러진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태에 말위에 탔던 기마무사가 굴러 떨어지고 곤무악이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의 어깨위에 말이 통 째로 올려진체 앞발이 곤무악의 손에 잡혀 있었다. 곤무악의 손이 큰 원을 그렸다. 동시에 그가 잡고 있던 말이 통째로 휘둘 러지며 주위에 있던 서너마리의 말의 몸을 그대로 강타했다. 말들의 처절 한 비명과 우수수 낙마하는 무사들의 다급한 비명이 울렸다. 곤무악은 그 대로 말을 만독궁의 기마무사들을 향해 던져버렸다. 콰아아앙! 곤무악이 던진 말은 이십여마리에 달하는 말을 쓰러트리고 땅에 충돌했다. 여기저기 쓰러진 이십마리의 말은 이미 말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있었다. 참으로 엄청난 광경이며 보기드믄 괴력이었다. 한 마리의 말을 통째로 들 어 무려 이십여장이나 날려 보내다니. 그것도 스무마리의 말들에 부딪치는 충격을 받으면서. “감히.” 독연천각이 다시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그의 손에 독문병기인 독철퇴가 들 려있었다. 곤무악이 특이한 외공을 익혀 그의 각법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곤무악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독철퇴를 바라 보며 흉흉한 살기를 두눈에 발하며 주먹을 뻗었다. 일체의 수비를 포기한 동귀어진 식의 공격이었다. 독연천각은 냉소했다. 동귀어진도 어느정도 수준이 맞아야 상대방이 공격 을 거두는 것이다. 독철퇴는 길고 곤무악의 손은 짧았다. 독철퇴는 빠르고 곤무악의 주먹은 느렸다. 곤무악은 일체의 수비를 포기하고 공격했지만 그 의 공격이 독연천각에 다가서기도 전에 독철퇴는 수십번이나 곤무악을 강 타할 수 있을 것이다. 수준차이가 확연한 공격차이로 뻔히 상대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헛손질이 될게 분명한 상대의 공격 때문에 이쪽의 살수 를 거두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콰콰쾅! 독철퇴가 곤무악의 머리와 양쪽 어깨 그리고 심장 부근의 가슴을 후려쳤 다. 혹시나 그의 특이한 철두공 덕분에 단 한번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까 봐 연환되어 이어진 네 번의 공격이었다. 강철도 박살내는 독철퇴였다. 게 다가 만독궁 특유의 지독한 독이 발라져 있고 바늘같은 침이 수없이 튀어 나온 철퇴였다. 그러나 머리를 후려친 부위도 양 어깨와 심장을 갈겨버린 부위도 독철퇴는 맥없이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곤무악의 주먹이 독연천각의 몸에 가까이 다가왔다. (제법. 절정에 다른 외공을 익힌 자이다.) 독연천각이 보기에 곤무악의 주먹은 한없이 느렸다. 아무리 몸이 단단하다 고 하더라도 이 느린 주먹동작은 무예를 익힌 자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그 의 몸이 빙그르 돌아가며 여유있게 한뼘 차이로 그의 주먹을 겨드랑이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의 무릎이 곤무악의 명치끝을 향해 올라갔다. 대등한 상대와 싸울때에 근접 박투는 결코 독연천각이 선호하는 전투방식 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가 약자라고 생각할 때에 독연천각은 자신의 화 려한 경공과 각법을 이용하여 수하들에게 눈요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곤무 악의 외공이 제법 예상외로 뛰어났지만 독연천각이 보기에 그의 둔한 몸놀 림은 그의 근접박투의 화려한 개인기를 수하들에게 보일 좋은 대상에 불과 했다. 쿠쿠쿵! 아무리 외공으로 단련되도 쉽게 단련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조 문이라고 하거니와 반드시 사혈중의 한 곳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설사 조 문이 아니더라도, 특히나 외공으로 아무리 단련되어 있다고 해도 명치끝은 충격을 받으면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급소였다. 독 연천각의 무릎은 정확히 곤무악의 명치에 박혀들어갔다. 그것도 세번을 거 의 동시에 연달아 가격했다. 그것으로 곤무악을 어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주춤거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반동으로 거리를 벌여 다시 독철퇴의 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곤무악은 명치의 충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며 덥썩 독연천각의 오른 발을 껴안았다. 한쪽 발이 잡히자 독연천각은 오히려 그 발을 디딤삼 아 그의 인중을 향해 왼발을 내뻗었다. 그의 왼발이 마치 비수가 된 듯 세 찬 바람이 일었다. “크으윽.” 독연천각의 잡힌 발에서 부지직 뼈가 절단나는 소리가 났다. 단지 뼈가 부 러지는 것만으로 독연천각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인내심이 약하지 않다. 곤무악은 꽈악 잡힌 발을 움켜쥐는 것만으로 발목의 뼈와 근육을 마른걸래 쥐어짜듯 으스러트렸다. 뼈와 근육이 만근 철퇴로 양쪽에서 후려친 것처럼 박살났다. 쇠기둥과 부딪치면 오히려 쇠기둥을 으스러트리는 강철보다 단 단한 독연천각의 발목이 손아귀 힘으로 으스런 진 것이다. 그 고통이 독연 천각의 왼발의 공격마저 흐트러버렸다. “반항했다......때려준다.” 다시 지루한 곤무악의 중얼거림이 반복되며 곤무악은 검을 앞뒤로 휘두르 듯 독연천각의 한쪽 발을 붙잡고 앞뒤로 땅바닥에 연달아 후려쳤다. 쾅!쾅! 쾅! 마치 못을 박듯 독연천각의 몸을 망치삼아 땅에 서너번 내리치자 사방 으로 살점이 달아나고 독연천각의 몸이 박살나 분해되어 파편이 분분히 날 아갔다. 더 이상 시체라고 할 수도 없을 처참한 혈육 조각덩어리만이 남았 다.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만독궁 독와대의 무사들이 분노하여 곤무악을 향해 짓쳐들었다. 만독궁이라면 독문. 폼으로 검을 지 니고 있기는 했지만 독문치고 검술에 능한 제자는 발견하기 힘든 법이다. 만독궁의 정예는 일제히 지니고 있는 독암기를 꺼내 곤무악을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쐐애액. 폭우처럼 독암기의 비가 곤무악을 향해 날아갔다. 만독문의 독암기는 사천 당문의 암기 못지않게 악독했다. 하지만 바위를 향해 고무공을 더져봤자 고무공이 바위에 틀어박힐까? 수많은 독암기는 고무공처럼 우수수 곤무악 의 몸에서 튕겨져 땅에 떨어졌다. “또...반항했다....더...세게...때려준다......교육...시킨다.” 독암기마저 소용없자 만독궁의 무사들도 눈에 띠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곤무악이 씩씩 거리며 흉악한 살기를 날리며 만독궁의 흑와대 고수 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달음박질은 느리기 그지없어 분분히 만 독궁의 고수들이 피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곤무악을 피하며 연신 독암기 를 날렸다. 제대로 주먹을 날리기는커녕 접근도 하기 힘들자 곤무악의 입에서 더운 김 이 솟아 올랐다. 그는 땅위에 널부러진 말의 시체를 붙잡고 만독궁의 무사 를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말의 거구가 가벼운 조약돌처럼 무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경공을 익혔다고 해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연달아 날아오는 말의 시체더미를 모조리 사이사이 교묘하게 피할 정도로 경공이 뛰아난 것 은 아니다. 곧 처참한 만독궁의 무사들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고인은 손을 멈추십시오.” 한줄기 낭랑한 목소리가 난잡한 산속의 소동을 뚫고 울려퍼졌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에 말의 다리를 양 손에 쥐고 마구 휘두르 던 곤무악의 신형이 머칫 멈췄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화려한 당예가 문밖에 드러나며 땅을 밟는다. 마차에 서 내린 여인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곤무악을 향 해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이제 고인께서는 연극을 그만하시지요. 정체를 밝히시고 찾아오신 용건을 말씀하신다면 만독궁의 사갈옥녀. 섭섭지 않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사갈옥녀 민주란. 그녀는 만독궁주의 부인이며 동시에 만독궁의 삼궁주이 기도 하다. 그녀의 미모는 운남을 떨어울리고 그녀의 지략은 만독궁 제일 이다. 혈천마궁과의 전쟁시 만독궁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 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만독궁의 전력의 반에 해당하는 여인. 그러 하기에 흑방과의 연계에 만독궁은 사갈옥녀를 파견한 것이다. 그만큼 흑방 과의 연계에 대한 만독궁의 관심은 컸다. “청림채....대왕.....가진...것...다....내놔라....” 곤무악의 입에서 다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체를 숨긴 고인이라고 생각했는데....진짜 외공만을 익힌 고수란 말인 가? 전혀 내가고수다운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그런데도 독연천각이 패해 시체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단 말인가?) 사갈옥녀는 열심히 눈앞의 괴인에 대한 정체를 알기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차안에서도 내내 생각했지만 도저히 곤무악의 정체를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직접 나섰는데도 괴인은 목적을 밝히지 않을 모양이었다. “고인께서 목적을 밝히지 않으시는 군요. 정히 원하시는 것이 재물이라면 충분히 사례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저희들을 통과시켜 줄수 있는지요?” 눈앞의 괴인이 진짜 만독궁을 상대하려는 것인지, 혹은 단순히 건드려 보 는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갈옥녀는 괴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통행료를 내는 것만으로 만독궁을 통과시켜야 한 다. 딴 뜻이 있다면 그제서야 밝힐 것이다. 만약 통과시켜 준다면 통과시 켜주는 대로 좋다. 오늘의 모욕은 언제라도 갚아줄수가 있다. “너희...반항했다....교육...시킨다....마차...여자....남아라....인질이다.....남 자.....다 남겨두고....옷벗고.....알몸으로...떠나라.....돈...더가져와서.... 여자...찾아가라.“ 사갈옥녀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만독궁의 삼궁주로서 이런 모욕은 처음 이었다. 흑방의 방주라고 해도 그녀를 대우해야 했다. 그런데 한낮 외공 고수가 그녀를 모욕하다니. “이런.... 기어이 본녀를 분노하게 하는 구나.” 사갈옥녀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녀는 분노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미소 를 지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 그녀는 곤무악을 조소했다. “바보같은 자. 외공이 강하다고 해서 독을 경계치 않다니. 우리가 만독궁 임을 잊었단 말이냐? 네놈은 이미 본녀가 사용한 단혼절백산에 당했다.” “반항하면....여자...너도....때려준다....모두....남기고....남자.... 옷벗고...떠나라.” “이익. 네놈. 단혼절백산의 향기를 들이마셨다는 말을 못들었느냐? 네놈은 열을 세기도 전에 쓰러질 신세라는 것을 모르느냐?” “나...열...못....센다.....여자...욕하면....잡아먹는다.” 사갈옥녀의 안색이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토록 그녀를 분노시킨 자는 곤무악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 기다렸 지만 열은커녕 백을 셀만한 시간이 지나도 곤무악은 멀뚱하니 서서 사갈옥 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열....길다.....지루하다....못...기다리겠다.....어서....남자들...떠나라....반 항하 면...때려준다.” “네놈..... 설마 만독불침이 되기라도? 그럴 리는 없지. 피독의 보물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이익. 네놈을 찢어죽이기 위해 그것이라도 사용하 겠다.” 그녀가 손을 떨치자 한줄기 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이 간 곳은 곤무악이 아니라 마차였다. 마차의 문쪽 벽면이 박살나며 그 내부의 모습 이 드러났다. 화려한 귀부인이 탑승한 안락한 마차라고 생각했던 내부는 놀랍게도 열구의 관이 들어가 있었다. “흑방과의 연계를 위해 선물로 독혈강시 열구를 가져왔거늘. 마련보다 먼 저 네놈을 상대로 독혈강시의 위력을 시험해 봐야 겠구나.” 사갈옥녀의 뼈시린 교소에 만독궁도들은 죽은 사람보듯 곤무악을 바라보았 다. 하기는 상대가 독혈강시라면 당연한 일이다. 독혈강시를 아는 사람이 라면 독혈강시 열구를 혼자서 상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테니까. 사도대법의 총화로 가장 막강한 강시제조 대법이 천마강시라면, 강시로서 의 견고성이나 위력은 약해도 그 떨어진 면을 독으로 보충하여 천마강시와 비견될만한 독문의 최강 자랑거리가 독성강시였다. 하지만 천마강시나 독 성강시는 무림에 전설로 내려올 뿐 실제로 무림의 역사에 나타난 적은 겨 우 단 한번에 불과하다. 이제는 실재로 그 존재가 있는지도 불투명한 것이 바로 천마강시와 독성강시. 그러니 그 위력은 가히 절대고수와 맞먹을 정 도로 무적이라 할 수가 있다. 독혈강시는 독성강시를 제외한 독문 최고의 작품이다. 듣기에 독혈강시 다 섯수면 독성강시 한구를 감당해 낼수 있다고 한다. 독혈강시 한구는 그 아 래급인 만독강시 열구를 감당하고 만독강시 한구는 일파의 장문인을 감당 할 수 있다고 하니 독혈강시의 위력이 어떠한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런 독혈강시 열구를 사갈옥녀는 흑방에 가져온 것이었다. “독문의 종이여. 저자를 죽여라.” 사갈옥녀의 교성이 쏟아지고 동시에 마차안에 들어있던 열구의 관이 박살 나며 흐릿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곤무악을 향해 덤벼들었다. 43 이혼통제대법-무법자(3) 관에서 튀어나온 것은 검은 연기에 뒤덮힌 열구의 사람모양의 그림자였다. 온 몸에서 넘실거리는 묵연에 스치는 것은 대지건 바위건 초목이건 그대로 시커멓게 변색되어 죽어갔다. 그런 독혈강시 열구가 그대로 곤무악을 덮쳐 갔다. 콰쾅! 선두에 선 최초의 독혈 강시의 일장에 곤무악의 신형이 맥없이 뒤로 튕겨 져 날아갔다. 무려 십여장이나 날아간 곤무악이 땅바닥에 파묻히듯 거칠게 바닥에 처박혔다. 그것을 보는 사갈옥녀의 눈빛에 ‘그럼 그렇지’하는 눈빛 이 흘렀다. “호호호. 단숨에 한줌 독수로 흘러내리리라.” 교소를 터트리던 사갈옥녀의 눈빛이 부릎 떠졌다. 곤무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독혈강시의 독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멀쩡하다니. 게다가 독을 제외하더라도 강철도 박살낼 만큼의 위력있는 일 장이었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다니. “설마 만독불침?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 저런 무공도 모르는 어설픈 동작으로는 그럴 리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외공을 익힌 정도인데....” 콰콰콰쾅! 그 사이에 열구의 독혈강시들이 연달아 독장을 후려쳤다. 그리고 여기저기 로 튕겨지는 고무공처럼 엄청난 폭음과 함께 곤무악의 몸이 여기저기로 튕 겨져 날아갔다. 느릿한 곤무악의 동작으로는 도저히 독혈강시의 장력을 피 해낼 수가 없었고 그들이 뻗는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던 것이다. 실 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수십장을 연달아 얻어맞고 그 충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곤무악이 계속 일어나는 모습은 실로 불가사의 했다. 도대체 누가 사람이고 누가 강시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콰아앙! 곤무악의 몸이 최초로 뒤로 튕겨져 날아가지 않고 일곱 걸음의 뒷걸음질을 치는데 성공했다. 그의 발자욱이 찍힌 땅바닥은 마치 구덩이를 파놓은 듯 하자나 되는 깊은 발자욱의 모습이 드러났다. 곤무악은 더 이상 이리저리 튕겨져 나가는 것이 싫었는지 한쪽 발을 힘을 주어 바닥에 쾅 박았다. 그 의 오른쪽 발이 땅바닥에 무릎까지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다 시 한구의 독혈강시가 독장을 뻗어왔다. 콰콰쾅. 거의 뒤로 눕혀지듯 곤무악의 신형이 젖혀졌지만 튕겨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초로 그는 느릿한 주먹을 뻗어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독혈강시의 머리를 후려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곤무악이 한명 의 독혈강시에게 최초로 공격을 성공시킨 순간 다른 아홉의 독장이 일제히 곤무악의 머리위로 떨어진 것이다. 콰콰콰쾅! 하는 폭음과 함께 곤무악의 신형이 지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 다. 가공할 독혈강시의 장력에 온 몸이 분시되어 조각조차 안남은 것일까? 그리고 독혈강시 한구가 가슴이 뚜렷한 주먹자욱과 함께 함몰되며 뒤로 튕 겨져 나갔다. 뒤로 일이장 굴러간 독혈강시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났다. 후드드득. 땅속에서 자갈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곤무악이 땅을 헤치고 기 어 올라왔다. 독혈강시들의 장력이 하늘위에서 쏟아오자 못을 땅바닥에 박 은 것처럼 그만 머리까지 땅바닥 속으로 파묻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기어나오는 곤무악을 열구의 독혈강시들이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실로 일세에 보기힘든 무식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일체의 방어를 포기하 고 서로 공격만 해대는 무식한 공격이었다. 가까이 접근만 해도 숨이 끊어 지고 피부가 녹아버리는 가공할 독연을 발산하는 독혈강시와 아무렇지도 않게 뒹구는 곤무악도 놀라웠지만 누구의 몸이 단단한가 비교실험하는 것 같은 무식한 타격대결도 놀라운 일이었다. 숫자가 십대일인데다가 곤무악의 동작이 그리 빠른 것이 아니었기에 앞뒤 옆으로 수십장을 얻어맞으며 비틀거릴 때 마다 겨우 한방씩 곤무악은 성공 시키고는 했다. 워낙 독혈강시들이 그를 중심에 두고 원으로 포위하여 앞 뒤로 좌우로 수십장씩 독장공격을 해오는 지라 오히려 곤은 전처럼 튕겨져 날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어쩌다가 한번 성공하는 곤의 공격에 얻 어맞은 독혈강시는 갈수록 거세게 멀리까지 바닥으로 튕겨져 뒹굴다가 벌 떡 일어나 다시 곤을 향해 달려들고는 했다. “지독한 놈이군. 금강불괴라도 저정도 계속 격타당한다면 걸레 찢어지듯 몸이 갈가리 찢어졌어야 할 놈이....” 사갈옥녀가 어이없다는 듯 곤무악을 바라보다 생각을 굴렸다. (독혈강시의 독에 끄덕하지도 않다니. 저놈의 무공이 그리도 고강하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에 끄덕하지 않는 어떤 영약을 먹었음이 분명한 데.... 분명한 것은 독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독혈강시들 공격으로는 저놈의 외공을 허물지 못한다는 것.) 사갈옥녀가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독혈강시들의 공격이 바뀌 었다. 여태가지 격타를 주로 공격수단으로 삼던 독혈강시들이 곤무악에게 달라붙었다. 급작스럽게 팔 다리가 독혈강시들에게 붙잡힌 곤무악의 신형 이 허공에 붕 떠졌다. 동시에 팔다리와 곤무악의 머리를 부여잡은 독혈강 시들이 밖으로 곤무악의 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때려서 죽이지 못하자 찢어죽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사갈옥녀의 실수였다. 기기기기. 독혈강시들이 뭉실거리는 묵연을 뒤집어 쓴체 둘이서 곤무악의 사지 하나 씩 놓칠세라 부여잡고 사력을 향해 곤무악을 찢어발기려했다. 그의 몸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위기의 순간 큼 곤무악도 온몸을 비틀며 발악했다. 다만 허공에 뜬 체라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힘 을 실을 수가 없는 만큼 쉽게 독혈강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 다. 그렇지만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의 팔다리를 계속 놓치지 않고 부 여잡는 것 또한 독혈강시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오른팔이 독혈강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마구 휘두르는 곤 무악의 손아귀에 독혈강시의 머리통이 잡혔다. 그리고 독혈강시의 머리통 에 곤무악이 힘을 가했고 처음으로 독혈강시의 입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손아귀의 힘만으로 사과를 우그러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두개 골은 그 강도가 엄청 단단하다. 게다가 독혈강시의 두개골은 강철보다 단 단했다. 그런데 곤무악의 손가락이 그대로 독혈강시의 두개골을 파고들어 갔고 머리가 으스러지며 독혈강시의 뇌수가 곤무악의 손아귀에 흘러나왔 다. 독혈강시는 뇌수마저 검은 색이었으며 공기에 닿자마자 뿌연 검은 안 기로 변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키에에엑!” 코가 있음직한 부분의 윕부분이 완전 박살난 독혈강시가 지르는 처절한 비 명이었다. 그 비명에 다른 아홉구의 독혈강시마저 움찔하며 동요했다. 아 무리 이성이 없고 본능뿐인 독혈강시라도 자신과 동류가 내지르는 죽음의 비명마저 무시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 잠깐 뿐인 틈을 타서 곤무악은 팔다리를 바둥거려 놈들의 손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아직도 경 악으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갈옥녀가 제대로 명령을 내리지 못한 틈 을 타서 다른 한구의 독혈강시를 손아귀에 붙잡았다. 부지지직! “엄청...질기다.....그래도...나를... 찢으려... 했으니... 나도....찢는다.” 강시의 몸이, 그것도 독문에서 거의 최강의 것으로 꼽히는 독혈강시가 곤 무악의 손에 잡혀 팔 다리가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수수깡 인형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독혈강시의 몸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독문의 강시가 독에 의한 공격 의존도가 워낙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민 첩성이나 몸체의 강도가 사문의 강시에 비해 아무리 약하다고 할지라도 사 람이 힘으로 사지를 뜯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독혈강시가 아닌 가? 검강을 쏟아부어도 해하기 힘든 독혈강시의 몸을 그대로 손으로 뜯어 버릴 정도면 그 힘과 완력이 어떠해야 한단 말인가? 한구의 강시가 그대로 발기발기 찢겨지자 이를 지켜보던 만독궁 모든 사람 들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동시에 다른 여덟구의 강시들조차 두려 움에 질렸는지 몸을 주춤 물러서는 것이었다. 눈에서 흉악한 살기를 줄기 줄기 내뿜으며 곤무악이 다시 독혈강시를 붙잡으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아 무리 사도대법으로 만든 강시들보다 민첩성이 떨어지는 독문의 강시라고 해도 그 움직임은 고수들을 상대로 예상하여 만든 것인만큼 곤무악의 흐느 적 거리는 동작에 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장력을 날려라. 패고 도 패면 끝장날 때가 있겠지.” 졸지에 두구의 강시를 잃어버린 사갈옥녀의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독혈강시는 더 이상 곤무악에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독장 을 날릴뿐이었다. 곤무악이 어떻게든 공격하거나 잡으려고 접근하는 속도 이상으로 독혈강시들의 속도가 빨랐기에 곤무악은 좀처럼 독혈강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독혈강시들의 구타가 이어졌다. 독혈강시들이 독장을 뻗어 계속 곤무악을 후려패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들의 장력은 아까처럼 곤무악을 나뒹굴게하는 힘이 없었다. 일방적인 공 격에도 불구하고 독혈강시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는지 공격보다 곤 무악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 했고 곤무악은 일방적으로 격타당하면서도 점차 몸만 흔들거릴 뿐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기세만 으로는 독혈강시들을 앞도하며 한발 한발 전진했다. 콰아앙! 기어이 다리부근을 얻어맞고 곤무악이 다시한번 땅에 뒹굴었다. 이미 독장 의 장력에 맞아 그의 몸에 걸친 누더기는 완전히 찢어지고 벗겨진지 오래 였다. 흉악한 눈빛으로 일어나던 곤무악은 믄득 자신의 주위에 뒹구는 시 체 중의 하나옆에 저들이 들고 설치던 금속조각이 나뒹굴고 있음을 발견했 다. 바로 일반 청강검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검을 집어- “크으윽....머리속에서...말하지...” “명을 들어라. 검을 집어라.- 곤무악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속삭이는 명령을 따라 땅에 뒹구는 검을 잡았다. -발에 힘을 주고 뛰어올라- 곤무악의 신형이 독혈강시들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나갔다. 경공이 아니 라 단지 두발의 힘만으로 펄쩍 뛴 것이 그 놀라운 다리근육의 힘으로 몸을 튕겨 올린 것이다. 사갈옥녀의 눈이 휘둥그레 지는 가운데 몸을 피하지 못 한 독혈강시들과 곤무악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검을 수평으로 그어. 하늘과 일직선이 된 듯한 기분으로 강시의 허리부근 을 향해- 까까까까깡! 쇠가 긁히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한구의 독혈강시의 몸이 무식한 곤무악 의 검에 걸렸다. 곤무악의 검은 독혈강시의 몸을 자르는 대신 쇠를 긁는 듯한 소리를 냈고 도저히 굽어질수 없는 각도로 독혈강시의 몸이 옆구리를 중심으로 구부러졌다. 접쇠가 접히듯 우두득 소리와 함께 옆으로 머리와 다리가 맞닿도록 접혀진 것이다. 콰콰쾅. 날가가는 독혈강시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곤무악의 검이 다시한번 다른 독 혈강시의 머리를 후려쳤다. 우두득 소리와 함께 독혈강시의 머리가 가슴속 으로 함몰되었다. 목과 머리가 완전히 납작 눌린 양은그릇 꼴이 되어 곤무 악의 검에 눌려 가슴속으로 찌그러진 것이다. “저....저...저....저.....” 사갈옥녀가 미처 말을 못하고 더듬거릴 때 옆에 있던 만독궁 수하 하나가 대신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횡소천군. 일도양단. 누구나 아는 무식한 초식에 검을 몽둥이 휘두르듯 하면서 순식간에 독혈강시 두구를.....” 곤무악이 휘두른 검은 말 그대로 횡으로 종으로 검을 그은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검날의 잇점은 전혀 무시한체 쇠몽둥이 휘두르듯. 그런데 두구의 독혈강시가 싸구려 인형처럼 우구러져서 망가져버린 것이다. “잡지않고.....뜯지않고.....패도....죽일수...있다....도구...잡으면....된다.... ” 더듬거리는 곤무악의 음성이 사갈옥녀에게는 그렇게 소름이 끼칠 수가 없 었다. “후퇴한다.” 사갈옥녀의 명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제일먼저 줄행랑쳤다. 곤무악의 동작 이 느리니 경공을 써서 이 괴물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동시에 살아남 은 여섯구의 독혈강시가 사갈옥녀를 따라갔고 만독궁의 하급무사들이 일제 히 사갈옥녀의 뒤를 따라 출행랑쳤다. 느릿한 곤무악의 발걸음질로는 도망 가는 만독궁의 최하위 무사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이놈들....인질...남겨놓고....가라....돈...가져와라.....옷...벗고...가라...” “사갈옥녀가 도움을 청해왔다.” “들었습니다. 본방 주위에 그런 괴인이 있다니 재미있군요.” 흑방의 방주 흑수마존은 자신의 아들인 흑수기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흑수기린은 흑방의 소방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흑수마존이 혈천마련 과 대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아들 흑수기린을 믿고 한 일이었다. 과거 천하를 지배하고 변황마저 쑥밭으로 만든 혈천마련과 싸운 백도는 천 무삼패라는 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이들 천무삼패의 이름은 만독궁, 천검문, 봉황곡이었다. 만독궁은 운남의 패주로서 그 독이 지독하여 사천 당가에서도 상대할 수가 없었기에 모두들 두려워했다. 그토록 엄청났던 만 독궁의 위명은 당시 만독궁주였던 고금제일독인으로 소문난 독성의 위명에 태반을 의지하여 이룩된 것으로 오직 그의 명성하나로 신비문파 천무삼패 의 하나로 들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혈존마저 그의 독공을 두려워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지만 결국 독성이 혈존의 암계에 죽고 나서 만독궁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천검문은 천하에 널려진 검도 고수들을 총망라한 집단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집단이었다. 소문으로는 여태까지 천하제일 검으로 알려져있는 천무삼성의 하나 현무도선도 천검문의 장로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이 말은 공식적으로 무당파에 의해 부인된 사실 이다. 그러나 진실이 어떠하건 그런 말이 나돌 정도로 천검문의 이름이 크 게 나돈 것이 사실로서 천검문의 시조는 마도의 제일 검문이라는 마검문의 천지마검류에 대적할 만한 검도를 창안하기 위해 정파의 누군가 검에 미친 자들을 모아 검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집단으로 만든 것이라고 알려져 있 다. 천검문에는 일백 천검문인이 있고 그들 하나하나는 천하제일마검학인 천지마검류를 꺽기위해 은둔하고 있다고 한다. 쉽게 나서지는 않으나 한번 나서면 무림의 형세를 바꿀 저력이 있는 은둔문파인 것이다. 봉황곡은 이보다 더욱 신비한 문파로서 불사를 추구하는 인물들의 모임이 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재로 그 정체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세력과 근거지가 확실치 않기에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문파라는 말도 있으나 혈천 마궁을 철저히 괴롭혔던 봉황곡의 인물이 실재로 이십년 전에 출몰하여 봉 황곡이 근거하고 있다는 증명을 했다. 당시 봉황문의 이름을 걸고 나선 인 물들은 하나같이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장사를 망라한 전대 고인들이 었다. 혈천마궁이 천하를 지배하던 당시에는 봉황곡이 전면으로 나서야만 혈천마궁을 저지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만큼 봉황곡은 천 무삼패의 으뜸이었다. 흑수기린은 봉황곡 팔대장로의 공동제자이며 미래의 봉황곡 총호법으로 내 정되어 있는 자였다. 사실 봉황곡은 이십년 전에 혈존에 의해 거의 멸문되 다 시피 했다. 이때 혈천마궁 역시 엄청난 피해를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 데 봉황곡의 혈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는 곡주와 팔대장로 팔대호법등 십 칠인이 전부였다. 이들은 봉황곡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천하로 흩어졌 는데 그중에서 팔대장로는 흑방을 봉황곡의 하부세력으로 삼기위해 흑수기 린을 제자로 삼은 상태였다. 흑방의 방주 흑수마존은 봉황곡과 하나의 약조를 맺었는데 흑수기린에게 팔대장로가 모든 것을 넘겨줄 것, 그리고 흑수기린이 준비된 성취를 모두 갖추었을 때 봉황곡의 후계자와 비무를 할 것등이었다. 여기서 흑수기린이 이긴다면 그로 하여금 흑방이 봉황곡을 삼켜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하도록 했고 흑수기린이 패한다면 약속대로 흑방을 봉황곡의 하부세력으로 만들고 그가 봉황곡 총호법으로 취임하기로 했다. 즉 이래저래 흑방은 봉황곡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다. 천무삼패의 그러하기에 운남 만독궁과 광서 칠륜 교가 흑방을 중심으로 혈천마련에 대항하고자하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쩔 생각이냐?” “만독궁을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사갈옥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겠 지요.” “허나 만독궁의 사절이라고는 하지만 정예들을 홀로 일패도지시킨 자이다. ” “자세한 사항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독을 두려워 하지 않는자라고 하더군 요.” “독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면 설사 천무삼성이라고 해도 만독궁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독궁이 낭패를 당했다면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어떤 방안이 있는 자이겠지.” “만독궁이 무서운 것은 오직 해약이 없는 독을 방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 다. 원거리에서 화살이라도 날리지 않는한 무림인이라면 주먹이든 검이든 맞대어야 상대를 할 수 있는 법인데 만독궁의 독은 병기를 타고 흘러들어 오니까요. 하지만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만독궁의 무공은 삼류에 불과 합니다.” “너는 그를 얕보고 있구나.” “듣자하니 그자는 금강불괴에 가까울 정도의 외공과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별다른 무예를 선보인 적은 없다고 합니다.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 러울 정도로. 사실 독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본방의 호법들도 혼자서 만 독궁의 사절들을 몰살시킬 수 있지요.” “단순히 만독궁의 제자들이라면 그렇겠지만. 그자는 독혈강시 열구를 패배 시키고 네구를 폐기한 자이다.” “독혈강시도 독이 지독하기에 다른 강시들보다 이름이 높은 것 뿐입니다.” “독이 아니더라도 독혈강시의 강인함과 튼튼함은 여타 사도대법의 강시에 뒤지지 않는다.” “독혈강시는 독이 있기에 절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독문의 무기로 이름 높 은 것입니다. 그자가 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독혈강시도 사문의 일급강 시에 불과했겠지요. 소위 절정고수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검강을 뿌릴 수준만 된다면 사도의 일급강시를 파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자는 검강을 시전하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힘으로 상대했다지요. 외공의 힘이 강시를 파괴할 정도라니 상상도 안가지만..... 결국 외공의 힘이란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가 중수법을 상대로는 고양이 앞의 쥐에 불과할 뿐이지요.” “아비는 그자를 흑방에 끌어들이고 싶구나. 혈천마련을 상대로 고수하나라 도 아쉬운 판이다. 하물며 갑자기 나타난 그런 고수라면.....” 흑수기린이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일단 제가 한번 시험해 보죠. 그가 가치가 있다면 데려오겠습 니다. 하지만 들은 것처럼 외공의 힘에 의존하는 자라면 삼류보다 못한 쓸 모없는 자입니다. 삼류 경공만 익혀도 그 괴인은 상대를 해칠수 없을테니 그런 자를 무엇에 쓴단 말입니까? 피부가 질긴들 피해다니며 두들기면 동 네북에 볼과하지요. 사갈옥녀도 겁을 먹지 않고 피해다니며 계속 공격했다 면 그자를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금강불괴? 외공으로는 그런 경지에 이를수가 없습니다. 패고 또 패고 찌르고 또 찌르면 언젠가 금강석이라도 파괴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늘. 그 기괴한 외공과 힘에 겁먹고 만독궁의 위명을 먹칠하다니. 역시 아무리 암여우라고 불려도 여자는 할 수가 없는 법이지요.” “.......” 사갈옥녀가 낭패한 모습으로 흑방에 도착한 삼일후 흑방의 소방주 흑수기 린은 자신을 따르는 세명의 고수와 함께 청림채를 향해 출발했다. 44 이혼통제대법-무법자(4) 청림채는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만독궁이 남기고 간 마차에서 네 상자의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만독궁이 흑방에 예물로 바치기 위해 가져 왔던 네상자의 보석과 살아남았던 마필들, 시체에서 꺼낸 적지않은 재물이 청림채의 수중에 든 것이다. 하지만 곤무악을 보석보다 더한 보물로 여기 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산채의 부두령 마칠이었다. 그는 숨어 자신의 두눈 으로 엄청난 곤무악의 무위를 확인했다. 산적들이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 하는 무림인들을 쫓아버린 것하며 검과 도가 들어가지 않는 강인한 육체. 전설로만 들었던 강시를 찢어죽이는 무식한 힘. 마칠은 꿈을 꾸었다. 이자를 이용하면 청림채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녹림칠 십이채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서우면서도 어리숙한 곤무 악을 두령으로 앉히고 자신이 부두령이 되어 떵떵거리는 꿈을 꾸었다. 그 때부터 곤무악을 무서워하며 어떻게든 쫓아내려는 다른 산적들과 달리 마 칠은 곤무악에게 아부를 떨며 찰싹 달라붙어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부하는....죽지않을만큼....때려야...한다?” “예. 공포심이야말로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힘이지요.” 곤무악을 산채의 두령으로 만들려면 일단 청림채에 남아있는 산적들의 복 종을 얻어내야 했다. 엄청난 재물을 청림채에 가지고 온 곤무악이지만 아 직 산적들은 곤무악을 무서워할뿐 우연히 산채에 들린 그를 두령으로 삼을 마음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마 칠은 폭력으로 그들을 강제로 곤무악의 부하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가...왜...두령이...되야하지? 부하를...거느리면....뭐가...좋지?” “헤헤. 부하가 많으면 좋은 것이 천지지요.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부하들 에게 명령만 내리면 대령합니다. 게다가 부하들이 많아져서 세력이 커지면 온갖 부귀영화와 미녀들, 진수성찬의 매일매일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곤무악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청림채 두령이 병 신이 된 이후 마칠이 실질적인 청림채의 수령이었다. 마칠은 이번에 생긴 재화로 마을에서 온갖 것들을 들여와 곤무악의 비위를 맞추었다. 먹을 것 을 밝히는 곤무악을 위해 아랫마을의 이름난 요리사도 잡아왔고 소와 닭 등, 온갖 고기종류와 쌀과 채소등 요리재료도 풍족히 실어왔다. 술도 수십 단지를 들여왔고 곤무악이 자던 방안도 비단금침에 가구 등 화려하게 꾸며 졌다. 막대한 돈을 들여 인근 기루에서 유명한 홍루의 기녀도 몇몇 사들여 곤무 악의 시중을 들게 했다. 여색이 주는 즐거움은 먹을 것의 즐거움을 능가했 다. 곤무악에게 먹는다는 것은 살기위한 본능이었지만 여자는 푹 빠질 수 있는 쾌락이었다. 곤무악은 처음으로 사람이 느끼는 쾌락이라는 것을 배우 는 중이었다. 마칠이 곤무악의 주위를 맴돈지 며칠이 되지 않아 곤무악은 사람같은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온통 살기찬 야수에 무식한 괴물같은 모습이었던 곤무악이 깨끗하게 씻고 좋은 장포로 갈아입자 의외로 호걸 같 은 호감가는 인상을 주는 건장한 장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며칠간 곤무악이 한 것이라고는 마칠을 제외한 산적들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매타작의 폭력으로 완벽히 굴복시킨 것과 술과 음식의 폭음폭식, 그 리고 부드러운 금침 속에서 기녀들과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모든 것은 곤무악이 강탈해온 보석에서 나왔으나 실질적으로 그에게 이런 환락을 제 공한 자는 마칠이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령이란.....좋은.....거군.” “물론입죠. 게다가 곤두령님은 다름아닌 청림채의 우두머리. 청림채의 우 두머리는 아주 아주 높은 자리입니다. 황제님을 제외하고 제일 높은 자리 이죠.” 마칠이 진지하게 설명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 주 익숙한 산채 산적의 목소리였으므로 곤무악은 마칠과 함께 황급히 밖으 로 나와야 했다. 흑수기린은 볼수록 어이가 없었다. 청림채라는 이름을 찾아 발견하고 오기 는 했지만 이건 산채라고도 할 수가 없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몇채의 오두 막뿐이었다. 오히려 화전민이나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릴 정 도였다. 이런 곳에 있는 자들 속에 있는 자가 고수라고는 도저히 믿기가 힘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자들에게 당한 만독궁에 대한 경멸만이 싹틀 뿐 이었다. “흥. 독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 그래서 독이 통하지 않으면 한 없이 무능하기 이를데가 없는 것이 만독궁이라는 곳이지.” 흑수기린이 자신의 발밑에 너부러져 시체가 되어있는 산적을 밟으며 중얼 거릴 때 제법 그럴듯하게 생긴 두명의 장한이 그들 일행 앞으로 달려나왔 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한 고수의 기도도 보이지 않아 흑수기린은 또 한 번 실망했다. 흑수기린 일행의 기세를 보고 벌써부터 벌벌 떠는 마른 사내 와 어울리지 않게 비단옷으로 칭칭감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들에게 무인의 기도를 느낄 수 없었다. “아직도 그 괴인이라는 자가 나서지 않다니. 그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죽 여라.” 흑수기린이 경멸에 찬 눈길로 두 산적을 보며 명을 내리자 그를 따랐던 세 명의 고수중의 하나가 몸을 날려 둘을 덮쳐갔다. 방금전도 산채 주위에 경 계를 한답시고 어슬렁거리던 세 명의 산적을 단숨에 고혼으로 만들어 버린 고수였다. 마른 산적이 기겁하여 재빨리 덩치 큰 자의 뒤로 숨었다. 하지 만 덩치큰 산적은 흉흉한 눈빛은 빛내며 마주 대항해왔다. 흑수기린을 따른 세 명의 고수는 그의 최측근인 경호시위였다. 왕씨 삼형 제라는 자들인데 흑수기린의 유모의 아들들이었다. 어릴 때 흑수기린이 봉 황곡에 무공을 익히러 방을 떠나자 그의 수발을 들기위해 흑수마존이 경호 시위라는 이름을 붙여 딸려 보낸 자들이었다. 직급은 흑방의 일개 시위지 만 흑수기린의 옆에서 그를 따라 봉황곡 장로들의 절기 몇을 얻었으므로 그 무공은 흑방의 장로급에도 뒤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곤무악을 덥쳐간 시위는 삼호시위였다. 곤무악은 삼호시위가 눈깜빡할 사이에 닥쳐 와 검을 휘두르자 자신도 마주 검을 찔렀다. 마치 몽둥이를 어술푸게 휘두 르는 것 같은 허술한 검놀림이었다. (단숨에 검을 쳐내고 몸을 두조각으로....) 삼호시위는 곤무악을 얕보았다. 그가 만독궁을 혼비백산시킨 괴인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듣던 바와 지금 곤무악의 차림은 완전히 틀렸던 것 이다. 삼호시위는 손에 내력을 돋구어 상대의 검을 튕겨내려고 했다. 하지 만 효과적으로 상대의 검을 튕겨내기 위해 빠르게 부딪친 삼호시위의 검은 철벽에 막히듯 오히려 그의 검이 튕겨졌다. 예상치 못한 강맹한 힘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검은 삼호의 검을 무시하고 계속 덥쳐왔다. 깜짝 놀란 삼호 시위는 몸을 뒤로 돌려 피했으나 상대의 발길질이 연이어 뻗어나왔다. (굉장한 힘. 머리를 쓴 발길질. 제법 싸움을 아는 자다. 허나 무예로 불리 기에는 부족한....) 삼호시위가 냉소를 터트리며 무릎으로 상대의 발길질을 막고 다시 검을 날 리려고 마음먹었다. 그의 다리 또한 권각으로 단련되어 나무를 부러트릴 정도로 단단했다. 그러나 우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무릎이 으깨지는 소 리가 들렸다. “크윽.”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정도 부상은 무림인의 정신을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안 되었다. 그러나 하체가 자유롭지 못하면 동작의 이동에 상당한 지장이 따 른다. 삼호시위와 곤무악의 몸은 박투가 어울리는 근접거리에 있었고 한쪽 다리가 박살난 삼호의 몸은 곤무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얕보았던 곤무악 의 검이 그대로 한쪽 다리의 부상으로 비틀거리는 삼호시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삼호시위가 검을 들어 막았으나 이번에도 내려치는 곤무악의 검 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검마저 힘에 밀리며 머리위로 함께 떨어졌 다. “막내.” 삼호시위의 위기를 본 왕씨 형제들이 크게 놀라 곤무악을 덮쳐갔다. 새파 란 검기가 곤무악의 몸을 뒤덮었다. 쾌속한 살수였지만 검의 목적은 살상 용이라기보다 곤무악을 위협하여 그를 물러서게 함으로서 삼호의 위기를 구하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곤무악은 자신을 덮쳐오는 검을 무시하고 힘 으로 삼호의 머리를 부셔버리려 했다. 삼호시위는 그 와중에 냉정을 유지하며 머리를 억지로 움직여 곤무악의 검 에 머리통이 부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간신히 피했어 도 그의 왼쪽 어깨가 박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접전을 시작하자마 자 한쪽 다리의 무릎과 한쪽 어깨가 순식간에 박살났으니 삼호시위도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삼호의 비명을 들은 왕씨 형제 일호와 이호시위의 검이 곤무악의 전신을 베어갔다. 그들의 검이 변화되어 곤무악의 사혈을 향해 떨어졌다. 카카카캉! 거의 순식간에 곤무악의 전신에 있는 일곱 군데의 요혈이 두 시위의 검에 의해 베어졌다. 하지만 검에서 나는 소리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분명 사람일진데 검으로 바위를 후려치거나 쇠끼리 서로 부딪친 듯 곤무악의 몸 과 검이 부딪치는 곳에서 불통이 튀겼다. “사람도 아니군. 혹시 진짜 강시.....” 일호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삼호의 한쪽 팔을 잡고 훌쩍 물러났다. 이호는 보법을 밟아가며 정면대결을 피하고 계속 곤무악의 뒤를 돌며 검을 후려쳤 다. 이제야 적이 그 괴인인 것을 안 것이다. 그리고 힘과 단단한 몸을 제 외하면 상대의 무예가 별 것 아님도 들었음을 상기했다. 과연 곤무악은 이 호의 신형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곤무악의 등에서도 여전히 쇠를 부 딪치는 소리만이 날 뿐이었다. 곤무악이 뒤를 돌면 이호는 더 빨리 이동하 여 곤무악의 배후를 점령했다. 곤무악과 이호의 신형이 팽이처럼 돌 때 일 호는 삼호를 구출하여 흑수기린의 옆으로 물러났다. “정말이군. 강시보다 단단한 몸이라니....., 도대체 어떤 외공이기에....” 흑수기린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말로는 들었지만 직접보니 상상 이상이었 다. 검기가 통하지 않는 몸이라니. 만독궁의 말을 듣고 설마했는데 진짜 저 괴인에게는 검의 날카로움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삼호의 검에서 새파 란 검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 다. 검이 사람의 몸을 공격하는 것인지, 사람의 몸뚱아리가 검을 공격하는 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부딪친 사람 몸은 멀쩡한데 검기를 내뿜는 검 에 날이 빠지기 시작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설 정도는 아니다. 저런 시정잡배 같은 굼뜬 동작으로는 방심을 하지 않는한 절정고수는 고사하고 일류고수조차....” 흑수기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곤무악이 발에 힘을 주며 뒤로 훌쩍 뛰 어 올랐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뒤를 향해 개구리처럼 펄쩍 뛴 곤무악의 몸은 그 강력한 다리의 힘으로 엄청나게 빠르게 뒤로 날아갔다. 그 속도는 왠만한 경신법보다 빨라 이호의 몸이 비켜날 시간이 없었다. 이호는 당황 했지만 무방비로 자신의 눈앞으로 가가오는 널찍한 곤무악의 등판과 뒤통 수를 향해 배운바 있는 흑룡검법을 모두 발휘해 휘둘러대었다. 카카카캉! 칠팔번의 검음이 곤무악의 등에 울리는 동시에 이호위사는 곤무악의 뒤통 수와 충돌하여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호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커다란 충 격을 받았다. 무슨 바위와 충돌한 것처럼 곤무악의 몸이 묵중한 위력을 가 지고 사정없이 그의 몸에 부딪쳤던 것이다. 둘이 한덩어리가 되어 땅에 뒹 굴다가 누워있는 몸의 밑에 깔린 이호를 느낀 곤무악의 팔꿈치가 사정없이 뒤로 휘돌아갔다. 곤무악의 등밑에 깔린 이호로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우지직. 순식간에 이호시위의 머리가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콰콰콰쾅 하는 소리가 곤무악의 몸에서 들렸다. 이호시위의 위기를 본 흑수기린이 재빨리 덮쳐와 삼장을 내려갈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출수는 한발 늦었다. 이호는 이미 죽었고 곤무악의 몸을 후려갈긴 흑수기린의 장력은 그 보복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흑수기린은 자신의 손바닥이 얼얼한 것을 느끼고 다시 한번 놀랐다. 옆에 서 보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또 틀렸다. 내력도 무공초식도 선보이지 못한 저 괴인의 단단함은 실로 전설상의 금강불괴보다 더한 것 같았다. 하 지만 흑수기린은 흑수마존의 독문절기인 흑수를 전개하여 다시 곤무악을 후려쳐갔다. 외공을 자랑하는 자에게 천적이 되는 것이 바로 흑수의 절기 였다. 그의 손이 검게 물들어갔다. 곤무악이 땅에 뒹굴다가 일어나 흑수기린을 향해 자기도 주먹을 휘둘렀다. 이미 검은 최초의 흑수기린의 공격에 땅바닥에 뒹굴다 놓친지 오래였다. 흑수기린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염없이 느린 주먹이었지만 흑수기린은 피하 지 않고 정면으로 자신의 흑수를 뻗었다. 말로만 듣던 곤무악의 주먹의 힘 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쾅! 폭음이 울리며 흑수기린은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놀란 눈으 로 곤무악을 쳐다보았다. 단순한 외공의 주먹으로 흑수를 막아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곤무악도 뒤로 세걸음 물러나며 흑수기린을 노려보았 다. 하지만 어떤 부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에 서린 살기가 워낙 강력하여 흑수기린마저 놀랄 정도였다. “세...세상에. 흑수를 감당해?” 흑수기린은 자부심이 대단한 고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상대는 무림칠룡중의 하나인 무적소야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후기지수들 중에 그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자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림을 주도해나가는 무성 종리연이나 천무삼성, 혈천마련 의 마련주들을 이긴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도 그리 밀리지는 않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무공 중에서 가장 놀라운 무공의 하나가 바로 흑수였다. 혈천마궁이 사라진후 흑수마존을 흑도의 지존으로 만들었던 흑수는 지도한 위력을 가진 장력이었다. 바위를 후려치면 바위가 박살나고 쇠를 후려치면 쇠가 부러졌다. 검과 도를 손으로 주물러도 아무렇지 않고 쇠구슬을 손바 닥으로 으깰 수 있는 것이 흑수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흑수의 진정한 위력 은 단순한 손의 파괴력이 아니었다. 흑수의 진짜 무서운 점은 상대를 내부 로부터 파괴시키는 것에 있었다. 흑수에는 기이한 내기가 서려있어 격중된 상대의 몸에 그 기운이 파고들어 안에서부터 파괴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그런 흑수와 정면으로 맞대결하고도 곤무악이 밀리지 않은 것이다. “이익. 흑수를 받아라.” 자존심이 상한 흑수기린은 그 자리에 선체 연달아 장력을 내뿜었다. 곤무 악의 모습을 보아서는 초식이나 신법을 사용하면 쉽게 상대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흑수기린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보잘 것 없어보이 는 무명의 남자의 약점을 공략하기가 싫었다. 곤무악이 자랑하는 힘을 자 신의 흑수로 이겨내고 싶었다. 그는 곤무악이 내뻗는 주먹에 맞춰 순수한 흑수의 힘을 이용하여 손바닥을 계속 내뻗었다. 콰쾅! 곤무악의 주먹과 흑수기린의 손바닥이 계속 맞부딪쳤다. 어느 한쪽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서로가 서로를 향해 순수하게 힘으로 대결을 지속해 나갔 다. 곤무악의 주먹에 바위를 으깨는 힘이 있다면 흑수기린의 흑수에는 쇠 를 부러트리는 위력이 있었다. 흑수기린의 전 내력을 동원한 흑수와 곤무 악의 근력에서 파생되는 주먹의 대결이었다. 손바닥과 주먹이 부딪칠 때마 다 연달아 폭음이 이어졌다. 흑수기린의 안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밀리는 듯했던 곤무 악의 주먹의 위력이 갈수록 강맹해 졌다. 아무리 봐도 내력이 실려 있지 않는 주먹이었다. 이갑자의 내공이 담긴 흑수를 감당해 낼 리가 없었다. 흑수의 내기가 스며든 곤무악의 주먹이 터져나갔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곤 무악의 힘이 갈수록 강해졌고 마침내 흑수기린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한 것 이다. “제길. 이런 괴물이.” 마침내 곤무악의 몸이 굳건히 버틴 상태에서 흑수기린이 한 발자국 밀려났 을 때 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쳐들었다. 더 이상 정면대결로 흑수의 힘 을 이용하여 그를 압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 싶었다. 그렇다고 병기를 꺼 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봐서 알 듯 곤무악의 몸에는 병기가 소용 없다. 강기를 두른 병기라면 모르지만. 하지만 흑수는 그 이상의 위력이 있다. 기세에 밀린 즉시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순간 적으로 흑수기린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곤무악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방 에서 흑수기린의 모습이 분열되는 듯 수십개의 모습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그 모든 움직임의 모습에서 각기의 흑수가 뻗어나왔다. 정면대결을 고집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흑수기린의 모습에 내뻗은 주먹 의 힘을 거두지 못하고 곤무악은 휘청 균형을 잃었다. 무방비 상채의 곤무 악의 심장위로 열 네 번의 흑수가 가격해 왔다. 카카카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곤무악의 얼굴이 창백히지며 신형이 비틀, 다리가 풀렸다. “가슴이....저릿저릿.....아프다.” 곤무악이 신음을 내지르자 흑수기린이 냉소를 지었다. 어떠한 무림인도 흑 수를 삼장이상 맞고 버틸 수가 없다. 팔에 맞으면 팔의 혈관과 근육이 내 부에서 터져나가고 다리에 맞으면 다리가 터져나가는 것이 흑수의 위력이 다. 닿는 부위에 흑수의 기운을 스며들게 하여 내부에서 폭발시키는 것이 다. 그런데 곤무악은 그것을 주먹으로 견뎌내었다. 그래서 흑수기린은 흑 수로 곤무악의 심장부위에 직접 충격을 가하여 기운을 흘린 것이다. 철갑으로 가슴을 두르고 있어도 갑옷을 찢고 심장을 파고드는 것이 흑수의 위력이다. 가장 튼튼하고 강인한 호신구로 가슴을 보호하여 견딘다고 하더 라도 흑수로 심장부근 위를 직격당하면 버텨낼 사람이 없다. 설사 금강불 괴라도 정확히만 가격하면 단단한 껍질을 격하고 심장을 내부에서 으깨버 리는 것이 당연한 흑수의 위력이라고 흑수기린은 자부했다. 그런데 곤무악 은 연달아 십사장이나 심장부위 바로 위의 가슴을 얻어맞고도 주절대는 것 이다. (반탄력이 없다. 역시 내공이 없는 자이다. 그런데도 견뎌? 정말 가공할 외 공이군. 이런 외공이라면 내가심법에 못지않은 절학이라 할 수 있다. 하 지만 외공은 한계가 있는 법. 훅수의 기운을 조금씩 흘려 넣으면 언제까지 버틸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외공의 단단함에는 필시 조문이 있을 것이다.) 곤무악의 몸에 스며든 흑수의 기운이 심장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 의 내력이 곤무악의 몸에 스며든 것을 확실하게 느낀 흑수기린이었다. 그 런데도 곤무악은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는 가슴을 아픈 듯 쓰다듬고는 흉 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흑수기린을 향해 다시 주먹을 내뻗었다. 흑수의 기 운을 몸을 떤 것만으로 털어낸 듯. 콰콰쾅! 흑수기린의 흑수가 다시 곤무악의 몸을 수십 차례 강타했다. 곤무악의 둔 한 몸놀림으로는 도저히 흑수기린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시험을 하듯 곤무악의 주위를 맴돌며 강력한 장력이 요혈을 골고루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곤무악은 다른 때와 달리 고통스런 표정으로 몸을 흠칫 흠칫 떨 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구타가 벌어졌다. 흑수기린의 흑수와 곤무악의 몸 이 서로의 단단함을 시험하는 대결이었다. 그리고 곤무악의 몸이 나뒹굴었 다. “단단한 것만이 아니다.” 흑수기린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 곤무악의 몸을 두들기 기 시작할 때는 철벽을 후려치듯 손에 느낀 감각은 단단함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신 흑수의 힘은 착실히 곤무악의 내부로 스며들었고 그때마다 곤 무악의 표정이 고통으로 잠시 일그러졌다. 그런데 때리면 때릴수록 곤무악 의 몸에서 탄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쇠를 직접 두들기던 느낌에서 질긴 가죽을 입힌 쇠를 두둘기는 느낌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하지만 탄력이 늘 어나며 동시에 흑수의 내력도 점차 곤무악의 몸에 스며들지 못하고 피부 표면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 곤무악의 표정에서도 점차 고통의 빛이 없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조문이 어디냐?” 태양혈부터 백회혈, 단전까지 골고루 두들긴 흑수기린이었다. 하지만 어떤 곳을 공격해도 곤무악의 몸에 타격을 입힌 표시가 나지 않았다. 두들기고 또 두들기면 언젠가는 나가떨어지겠거니 생각했던 흑수기린의 얼굴에도 초 조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상대의 외공을 파괴하고자 흑수를 사용하여 내 력을 뿜어대기 시작한 것이 두시진 째. 슬슬 내력이 딸리고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는 흑수기린이었다. 반면 그토록 얻어맞은 곤무악은 멀쩡하니 일 어나 다시 흑수기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싸움을 하는 기 분이었다. 설마 초절정 고수의 경지에 다달은 자신이 내력이 바닥날 정도 로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그것을 모조리 몸으로 감당하는 괴물이 있을 줄이 야. 흑수기린은 이제 흑수를 내뻗길 포기하고 공격방법을 달리했다. 타격대신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공격법이었다. 다행히 힘으로 주먹을 휘드르고 발을 날리는 공격 외에 곤무악의 공격에 별다른 사항이 없기에 내공을 아끼며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곤무악을 나뒹굴게 했다. 내공을 아끼고 몸끼리 부 딪쳐 대결하는 근접박투이기는 하되 일방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패는 전법 에서 곤무악의 힘을 이용하여 그의 균형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땅에 꽃아 박아 나뒹굴게 하는 전법이었다. 흑수기린이 내력을 아끼기 시작한 이후 곤무악의 공격권 안에 흑수기린의 몸이 있었지만 흑수기린에 공격을 성공 시킬 수는 없었다. 흑수기린은 산 보하듯 유유자적 곤무악의 주먹을 피했고 대신 곤무악의 몸이 자기 힘을 버티지 못하고 수없이 나뒹굴었다. 왕씨 형제들은 흑수기린의 선전에 미소 를 지었지만 갈수록 흑수기린은 속으로 질려버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흑 수기린이 그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곤무악은 아직도 팔팔했고 자신의 힘을 아끼고 삼푼의 힘만을 써서 곤무악을 휘두르는 흑수기린의 몸 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흑수기린의 신형이 살짝 움직이며 발을 걸 듯 곤무악의 하체를 봉쇄하자 다시 곤무악이 나뒹굴었다. 또 한번 나뒹군 곤무악의 몸이 땅에서 검 하나 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몽둥이 휘두르듯 일직선으로 흑수기린을 향해 덥쳐 왔다. 그가 개구리 뛰듯 웅크리더니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쏜살같이 흑 수기린을 덮쳐왔다. 그 하체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뛴 것이 아니라 날아오 른 것 같았다. “이형환위보다 더하군.” 단순한 몸놀림이고 방어에 허점이 많은 뛰어오름이었다. 하지만 그 무수히 많은 허점도 곤무악의 단단한 신체를 감안한다면 어느 것 하나 약점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단순한 만큼 빨랐다. 다리의 힘만을 이용한 것이 아 니고 온 몸의 힘을 탄력으로 바꿔 뛰어 오른 것이니 빠름은 당연했다. 게 다가 그 곤무악의 힘이라는 것이 절정고수의 내력보다 더 강한 힘이었으니 흑수기린조차 당황하여 피하지 못할 만큼 곤무악의 덮침은 빨랐다. 휘이익. 횡의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곤무악의 검이 휘둘러졌다. 단순한 검 의 휘두름. 어떠한 변화도 없고 어떠한 내력도 없다. 몽둥이 휘두르듯 단 하나의 횡의 움직임. 그러나 그것은 흑수기린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놀 랍게도 곤무악의 뛰어오름을 보법으로 피하지 못한 것처럼 일직선의 단순 한 곤무악의 검의 움직임도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피할수 없다면 막아 야 했다. 콰쾅. 흑수기린의 손과 곤무악의 검이 맞부딪쳤다. 동시에 곤무악의 검이 산산조 각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흑수에 충분한 내력을 모으지 못했고 그래서 흑수기린은 내장이 울컥하는 충격과 함께 뒤 로 물러서다가 자신에게 뻗어오는 검의 파편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얼굴로 검의 파편을 튕겨낸 곤무악의 몸이 흑수기린의 몸에 접근했다. 흑 수기린이 검의 파편을 피해내기위해 호신강기를 끌어낸 사이에 곤무악은 그를 품안에 가둘 정도의 근접거리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곤무악이 박살난 검 대신 또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도 흑수기린은 그 주먹을 피해내었다. 피해냈을 뿐더러 흑수기린의 몸이 꿈틀거리며 미꾸 라지 움직이듯 곤무악의 앞에서 다시 벗어나려고 했다. 그 토록 가까운 근 접거리에서 단 한방의 주먹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곤무악과 흑수기린의 수 준 차가 컸다. 하지만 검편을 튕겨내기 위해 흑수기린이 무의식중에 호신 강기를 발휘한 것이 문제였다. 그의 몸에 호신강기가 발휘한 만큼 흑수기 린이 차지하는 공간의 영향권이 커졌다. 껴안 듯 팔을 벌린 곤무악의 새끼 손가락에 흑수기린의 강기 끝자락이 접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덜컥. 흑수기린의 몸이 곤무악의 옆으로 빠져나다가 충격을 받은 듯 강제 로 멈춰졌다. 곤무악의 손가락이 호신강기를 저지하여 흑수기린의 몸을 멈 춰 세워버린 것이다. 강철도 두부처럼 으스러트리는 강기를 맨손으로 잡아 저지하다니 믿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곤 무악의 주먹이 날았다. 흑수기린은 도저히 그 주먹을 피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접근해 있었다. 흑수기린은 흑수를 사용하여 두 손으로 곤무악의 주먹을 받아내었다. 여태까지는 내력을 아끼느나고 어떻게든 피해왔다. 피할 수 없다면 막아내는 수밖에. 막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번에 는 흑수에 내력을 불어넣을 시간도 충분했고 근접전이라도 흑수라면 쉽게 밀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 다. 흑수기린이 흑수를 뻗어 곤무악의 주먹을 향해 맞부딪치러 오자 곤무악이 살기찬 눈으로 씨익 웃었다. 내지르던 주먹이 펴지며 곤무악의 손이 흑수 기린의 흑수를 잡아채는 형태로 바뀌었다. 흑수와 격돌하는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흑수를 잡아채는 것이었다. 퍼억. 흑수와 곤무악의 오른 쪽 손 바닥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곤무악은 아무런 표정 없이 흑수기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흑수기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흑수기린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흑수기린은 강호에서도 악명높은 지독한 공력인 흑수로 수천번이나 곤무악을 후려쳤지만 곤무악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일격에 흑수기린은 배를 움켜쥐고 정신을 놓아야 했 다. 창검도 물리치는 흑수기린의 호신강기는 단 일수에 파괴되었다. 그나 마 호신강기가 그의 배에서 내장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아주었다. 겉보기에 는 아직 몸이 멀쩡하지만 한번만 더 충격을 받는다면 몸이 으스러질 것이 뻔했다. 살기 띤 곤무악의 몸이 천천히 기절한 흑수기린에게 다가왔다. “잠...잠깐만.” 그의 앞을 일호시위가 황급히 물러섰다. 그의 안색은 다급한 기색이 역력 했다. “대...대협. 잠시만 기다리시오. 우리는 나쁜 뜻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 라...” “비켜..... 반항하면.....때린다.....인질......죽이지는...않는다....교육...시킨 다.” “저분은 흑방의 소방주이시오. 설마 흑방과 적대하시겠다는 뜻은 아니시겠 지요?” “나는...흑방....상관하지...” “잠깐. 곤두령님. 저분의 말을 들어 봅시다.” 곤무악이 나뒹굴 때 저 멀리 피해있던 마칠은 흑수기린이 나뒹굴자 슬금슬 금 다가왔다. 그러다 일호시위의 말 중에서 흑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안색 이 변해 얼른 끼어들었다. 곤무악은 마칠이 말하자 그를 한번 보고는 일호 시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말해라.” “방주께서는 대협을 귀빈으로 초청하시겠다고 했소. 소방주는 다만 대협의 무위를 시험하고자 했던 것 뿐. 결코 나쁜 뜻은 없었소. 제발 결례를 용서 해 주시오.” “흑방주께서 초청하신다고요?” 마칠의 음성에 놀란 음색이 역력했다. 곤무악이 제법 세다고는 생각했지만 흑방의 초청을 받을 정도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처들어온 저 젊은 청년이 흑방의 소방주였던 것도 마칠에게는 놀라운 일이 었다. “흑방주께서는 높은 대우로 대협을 맞이하시겠다고 했소. 대협이 승낙만 하시면 대협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으시다고 했습 니다.” 마칠과 일호위사의 대화에 곤무악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마칠에게 물었 다. “저자....인질...아니냐?” “곤두령님. 세상에. 흑방의 소방주님에게 인질이라니요? 이건 기횝니다. 흑 방에 의탁하시면 앞으로 출세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나....청림채....두령인데?....아주...높은데?” “물론 곤두령님은 높지요. 하지만 흑방에서도 높은 지위를 준다고 하지 않 습니까? 여기 계시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부귀영화를 누리실 것 입니다.” 부귀영화라는 말이 곤무악의 마음에 들었다. 며칠간의 생활이 곤무악에게 단지 먹고 자는 것 외에 인간에게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 다. 그런데 여기보다 더한 즐거움이라니. 마음이 움직였다. “나....높아?” “물론입니다. 방주께서는 곤대협이 승낙하시기만 하면 본방에서 최고의 대 우를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실 것입니다.” 곤무악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최고라면....흑방....간다....하지만....교육...시킨다.....왜냐하면.... 나는...높은 두령이고....너희는...낮은...부하이다....부하는....때려야...한다.“ “대협.” 일호시위의 다급한 말이 뒤따랐지만 곤무악의 몸이 더 빨랐다. 그리고 미 처 마칠이 말리기도 전에 왕씨 삼형제와 흑수기린의 비명이 울려퍼지기 시 작했다. 흑수기린이 깨어난 것은 흑방으로 돌아온지 오일 후였다. 그는 깨어나서 자신의 옆에 있는 아버지 흑수마존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의원의 말로는 내외상을 깔끔히 처리하였기에 삼사일 휴식만 취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만.”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제가 혼절하기전에 들은대로 본방의 인물로 초빙하셨군요.” “너를 이길 정도라면 충분히 포섭할 만하다. 너를 상하게 한 것을 고려하 면 죽여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만. 지금은 혈천마련의 혈첩을 받아 단 한명의 고수라도 손을 더 빌려야 하는 심정이야. 이때에 그런 고수를 내버려 둘수는 없지 않느냐?” “단순하고 무식한 자입니다. 아버님 말씀처럼 쓸만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 ” “하지만 만독궁을 도주하게 했고 너를 이겼지. 네 말처럼 쓸모없는 자라면 다음에 겨루었을 때 그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흑수기린은 생각했다. 그자의 가공할 외공. 창검이 안 들어가는 피부는 물 론이고 내가진력으로 내부를 격상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설상의 금강 불괴가 재현한 듯한 단단함이었다. 게다가 그자는 수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지치지도 않았고 힘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흑수기린의 내력이 모조리 소진 되어 중수를 쓰지 못할 정도로 그가 얻어맞았는데도, 오히려 흑수기린이 진저리 쳐질 정도로 지쳐갈 때까지 타격을 가했는데도 오히려 그는 다치 거나 지친 기색하나 없었다. 절대불가침의 강시나 죽지 않는 불사신을 상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엄청난 힘. 그 엄청난 몸에 지치지 않는 체력에 더불어 호신강기를 깨 부수는 힘이라니. 결국 내공도 수련을 통해 힘을 이끌어 내는 것. 그정도 의 가공할 외공과 힘이라면 절정의 내가기학보다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또다시 그자와 겨룬다고 해도 상대하지 않고 벗 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그자를 이기거나 다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죽이기는커녕 다치게 하거나 지치게 하는 것도 불가능 한 자를 어떻게 이 기겠는가? “그자는....어떤 직위를 내리셨습니까?” “수석호법의 지위를 내렸다. 너를 이겨낼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 지위도 낮 은 거지.” 흑수기린은 그자에 대한 흑수마존의 기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 이 뭐라고 말한들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흑방의 수석 호법이라는 지위가 그렇다. 흑방 서열 오위의 지위는 아무리 무공이 강하 더라도 결코 방금 입방한 자가 차지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더욱이 흑방의 소방주를 부상시킨 자가 그런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흑방주의 기 대가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까? 무공이 강할지는 몰라도 방에 득이 되는 자 는 아닙니다. 게다가 소자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불명예가 될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아비가 너를 욕보이고 만독궁을 모욕한 그자를 영입한 것은 마련과의 대 결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마련과의 싸움에 소모될 자에 불과하다. 네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흑방은 인재라면 흑방의 소방주와 싸운자 일지라도 높은 지위로 영입한다는 소문이 돌겠지.” “그자는 마련에게 쉽게 죽을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련과의 싸움에서 더욱 큰 이용을 할 수 있겠지. 어차피 본방 의 수중에 든 자이다. 죽이고자 한다면 어떠한 방법을 간구해서라도 못 죽 이겠느냐? 이용가치가 떨어질 때에 그자는 네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흑수기린은 그를 생각하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호신강기가 깨어지고 난 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혼절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온몸을 두드리는 폭력 에 깨어나 수없이 기절과 깨어남을 반복해야 했다. 죽을 정도의 폭력은 아 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내력이 고갈되고 호신강기가 깨 어지며 가벼운 내상까지 입었던 흑수기린으로서는 반복되는 끝없는 구타가 몸서리 쳐질 정도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자가 흑방에 가입했다면 소방주로서 그의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처음 흑방에 왔을 때 너는 몹시 위급한 상황처럼 보였다. 그에게 다 급하게 영패하나를 던져주고 네 상처를 치료하느라 이후 그를 보지 못했 다. 그나마 그자가 흑방의 초대로 왔다며 정신없는 나에게 달라붙어 끈질 기게 높은 지위를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수석호법에 임명했을 뿐 제대로 방의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대로 그를 신 경쓰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청기당주가 우는 표정을 하며 나를 찾아왔더구 나.” “청기당주가요?” “아비가 떠나고 총당주가 그를 장로전으로 인사시키러 안내하는 도중 그자 가 청기당의 건물을 보았다고 한다. 청기당은 본방의 주력인 만큼 가장 커 다란 건물이지. 그자는 수석호법의 영패를 들고 청기당주의 거처에 막무가 내로 들이닥쳤다고 한다. 영패를 들고 말하며 청기당의 건물을 자신의 숙 소로 사용하겠다고 했다더구나. 총당주가 아무리 상급 직위라도 함부로 고 위직의 숙소를 빼앗는 모욕을 줄수 없다고 말하고 또 청기당주도 심하게 반발했지만 부하가 말을 안 듣는다며 청기당주를 반죽음을 만들어 놓았다 는구나. 청기당주는 영패를 보고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고, 거처를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다.” “청기당주는 본방의 모든 전투에 선봉으로 나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분이지만 무공은 장중한 권법에 능한 사람입니다. 정면대결에 익숙하신 그 런 형식의 무인은 그자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영패가 아니더라도 청기 당주는 그를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자는 지금 청기당의 건 물에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청기당 소속의 시녀 다섯명을 끌고 침실로 들어선 이후 먹고 자고 싸는 것을 모두 침실 안에서 해결하고 있다는 구나. 시녀들이 다 죽 어가는 얼굴로 이틀만에 도망쳐 나오자 눈에 띠는 대로 부수고 소동을 부 리는 바람에 총당주가 다른 시비들을 보내줬더니 데리고 다시 방안으로 들 어갔단다. 아비야 정신이 없어 그를 신경쓰지 못했다지만 총당주가 그를 방내의 사람에게 소개시키려고 몇 번씩 찾아가도 밖에서 기별해도 침실에 서 꿈적도 안 한다는 거야.” “그런..... 방내에 그보다 서열이 높으신 분도 있는데. 그런 자를 그대로 놔 두실 겁니까?” “그렇게 여색을 밝히는 자라면 더욱 이용하기 쉽지. 어차피 한때의 이용물 이 아니냐? 당분간은 그가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두는 것도 좋겠지.” 곤무악은 점차 인간다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아라는 것이 불분명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과 살기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생명 체로서의 자각뿐이었다. 단지 벌레처럼 생존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형상을 가진 자가 곤무악이었다. 그는 맹수였고 짐승이었으며 먹고 자는 것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에 불과했다. 곤무악에게 최초의 변화가 생긴 것은 사람을 잡아먹고 나서였다. 사람을 잡아먹고 나면, 그것도 뇌수를 들이키고 나면 그 자의 마지막 기억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사람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자극했고 그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희미한 기억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고 지시를 내려왔다. 그 것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했고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곤무악에게 커다한 저 항감과 함께 고통을 가져왔다. 하지만 끊임없이 속삭이는 머릿속의 울림이 곤무악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만들었다. 영문모를 속삼임의 뜻을 각인 시키면서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했고 그 목소리는 최초로 몸에 받아들인 어떤 기억을 상기시키도록 만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처음의 기억은 곤 무악이라는 이름이었다. 곤무악이 자신을 곤무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 자각을 했다. 동시에 자신과 동류의 존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 고 머릿속의 속삭임과 대항하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맹수의 본능과 생존의지가 몸을 지배했지만 인간을 자각한 순간부터 또 생각을 하 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류인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산적 과의 만남이 그가 자신의 의지로서 나눈 최초의 인간과의 대화였다. 마칠이 여자를 데려왔을 때 곤무악은 처음으로 쾌락을 느꼈다. 그것은 살 기위해 움직이는 본능위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만을 간신히 느끼고 있 는 곤무악에게 쾌락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 전까지 그에게는 인간 이라는 자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에 사는 누군가에 대한 저항 감 외에는 생존 본능, 그리고 단편적인 곤무악의 기억이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쾌락이라는 하나의 감정이 생겨났다. 하나의 감각과 감정이 깨어나 는 순간 곤무악은 훨씬 인간다워졌다. 그리고 그 환희를 느끼기 위해 마칠 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했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자는 할 수 없는 의견을 나눈 것이다. 타인과 의견을 교환함으로서 그는 진정으로 인간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머릿속의 누군가를 인정하게 되었다. 흑방에 들어온 이후 곤무악은 미친 듯이 여자를 탐했다. 그것이 그가 아는 감정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여자와 정사를 나누며 몇마디 안되는 말이나마 나누게도 되었다. 밤낮으로 같이 있으니 여자들의 감정과 지식을 빨리 배 울 수가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있을수록 인간으로서 필요한 기억과 지식과 감정이 곤무악의 기억 속에 깨어났다. 산적소굴의 음식과는 비교도 안되는 고급요리를 맛보게 되었고 여자들의 말을 통해 사치라는 감정도 배웠다. 그리고 점차 여러 가지 감정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고 말도 분명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많은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 울림의 도움을 받아 곤무악의 기억중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여러 기억을 뇌리에 되살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곤무악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곤무악의 기억 을 생각해 낼수록 곤무악은 진짜 곤무악에 가까워졌고 동시에 머릿속에 울 리는 음성에 저항감을 잃어갔다. 그가 자신을 곤무악이라고 믿을수록 그리 고 머릿속의 누군가에 복종하면서 곤무악은 가끔 머릿속의 누군가가 자신 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고 있다고 느꼈다. 가끔가다가는 원인모를 두려 움이 일 정도로 머릿속의 누군가와 곤무악의 마음이 동조되기도 했다. 흑 방에서의 며칠간은 이렇게 곤무악이 인간으로서 진화하고 머릿속의 속삭임 의 인도를 따라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지식과 감정은 아주 단편적인 초보의 것이었다. 밖에서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곤무악은 짜증이 일었다. 며칠 전부 터 계속 찾아와 방밖에서 찾는 자였다. 품안에 있던 여자들 중의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총당주님이 부르시는데 안나가보셔도 되나요?” “왜 내가 나가 봐야 돼?” “그래도 총당주님은 아주 높으신 분인데 그분을 이토록 박대하시는 것은... ” 여자의 말중에 곤무악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 아주 높다는 말. “나도 청림채 두령이다. 아주 높아. 그런데 총당주가 더 높아?” 곤무악의 얼굴에 살기가 떠오르자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자가 보이는 듯한 시퍼런 눈빛. 여자는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며 입을 열었다. “물론....수석호법님이 총당주님보다 높습니다.” 그녀는 총당주가 흑방의 실질적인 전력인 오개당을 지배하는 자라는 것도, 그리고 장로들도 그를 어려워하며 동급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곤무악이 그녀를 찢어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서열에서 총당주는 장로와 호법의 밑이었다. 수 석호법의 직함을 달고있는 곤무악에게도 아래서열이었다. “그럼 내 부하군. 그럼 교육을 시켜야 좋은 상관이지.” 곤무악은 마칠의 말을 상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봉황곡 팔대장로의 막내인 흑영신마는 흑수마존의 사숙이 되는 자였다. 육 십년 전에 사문과 인연을 끊고 봉황곡으로 들어갔다. 봉황곡이 혈존에 의 해 거의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자 봉황곡의 팔대장로와 팔대호법은 각기 봉황곡을 복구하기위한 하위세력을 만들기 위해 천하로 흩어졌다. 흑영신 마는 자신의 사질 흑수마존이 흑방을 만든 것을 알고 흑방으로 들어왔다. 팔대장로는 각기 제자를 두었으며 이는 흑영신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자와 함께 흑수마존을 도와 흑방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의 눈에 흑수 기린의 천품의 자질이 들어왔다. 흑영신마는 팔대장로를 소집하여 흑수기린을 공동제자로 거둘 것을 제안했 고 흑수기린의 자질은 그들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이끌어 내었다. 그 후 봉 황곡 팔대장로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흑방은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오늘날 흑방의 태상장로 흑영신마의 위치는 소방주의 공동사부의 하나라는 것과 방주의 사숙이라는 지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흑수마존에 뒤지지 않는 것 이었다. 흑방이 혈천마궁의 실종이후 흑도를 통일할 때까지의 발전의 반은 흑영신마가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흑영신마는 곤무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독궁의 일이 있을 때만해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흑수기린이 떡이 되어 엎혀 들어 왔다는데 곤무악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나마 마련과의 일전을 앞두 고 고수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흑수마존의 심정을 알고있기에 묵인했을 뿐 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날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리라 벼 르고 있었다. 헌데 이 작자는 흑방에 온지 오일이나 되었는데도 상위서열 의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오기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중대한 일이나 있으면 모르지만 알아보니 시비들과 뒹구느라 방안에 처박혀 있다 고 한다. 흑영신마의 마음속에 곤무악에 대한 미운 감정이 더욱 커가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자신의 제자인 총당주 흑장무영을 그 에게 보냈다. “이...이게 어찌된 일이냐?” 흑영신마는 기절할 듯 놀랐다. 자신의 제자인 흑장무영이 온몸이 퍼럴 정 도로 멍이 들어 수하들에게 엎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흑영신마는 자신도 모르게 총당 소속의 무사의 멱살을 쥐어틀고 영문을 물었다. “수석호법께서.... 교육을 시키신다며 다짜고짜 총당주님을 패기 시작해 서....” “뭐야? 그것이 미쳤나? 감히 엊그제 입방한 주제에 방내의 원로를 공격했 단 말이냐?” 흑영신마는 노기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실질적인 관계로 본다면 총당주 흑장무영은 방주 흑수마존의 사제뻘이 된다. 그리고 방 내에서도 실질적인 전력을 이끌고 있다. 서열상은 이십위 권에 들지만 실제적으로 그의 위치 는 다섯 손가락 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로들조차 흑영신마와 흑수마존의 얼굴을 보아 그를 동등하게 대우해 주고 있는 인물이다. 호법들은 그를 상 전보듯 했다. 그를 곤무악에게 보낸 것은 은근히 흑영신마가 흑장무영을 통해 그를 압박하고자 한 것인데 설마 자신의 제자가 이토록 떡이 되어 돌 아올 줄이야. “이 바보같은 놈. 수석호법이라고 당하고만 왔단 말이냐? 네 성질은 다 어 디다 두고? 그 명목뿐인 지위인 수석호법의 서열을 존중해주느라고 얻어맞 기만 했단 말이냐?” 흑영신마는 제자가 방내의 서열에 밀려 얻어맞은 줄만 알았다. 제자의 실 력을 잘 아는 그로서는 설마 실력으로 이토록 얻어맞았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물론 흑수기린의 일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둘 다 같은 흑 방의 동료가 아닌가? 같은 흑방의 동료가 본신의 실력을 다 끌어 내어 생 사결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게다가 척보니 내상도 없고 심 한 외상도 없다. 그런데도 제자의 온몸에 퍼러죽죽 멍이 들어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는 양자의 동의아래 반항없이 마구잡이로 얻어맞지 않는한 결과가 이렇게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막무가내 서열을 앞세운 놈의 폭력에 제자가 저항을 못했다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곧 흑장무영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사...사부님.” “그래. 당장 노부가 가서 그 애송이 녀석을...” “사부님. 급합니다. 빨리 호법원으로 가셔서 사태를 막아야 잘못하면 호법 님들이 위험...” 흑장무영의 말에 흑영신마의 얼굴이 어리둥절해 졌다. 갑자기 호법원이 왜 나오는가? 그때 그를 업고 왔던 총당 소석 무사가 흑장무영의 말을 보충해 줬다. “총당주님을 패시고 난 이후 수석호법께서 호법원으로 가셨습니다.” “수석호법이 호법원에 가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게 뭐가 위험하단 말이 냐?” “수석호법을 따라온 마칠이라는 자의 말에 의하면..... 수석호법님은 부하들 을 두둘겨 패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알고 계시다고..... 수석호법께서 자신은 수석호법이니 호법은 모두 자신의 부하이고 또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그곳 으로...”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부하들을 아무 이유 없이 패는 것이! 게다가 수석호법이라지만 호법과는 서열상 그리 차이도 없거 늘.” “하지만 실제로 수석호법님은 청기당 소속 일급무사 이백여명에게 오늘 아 침부터 아무 이유없이 폭력을 휘두르셨습니다. 그것도 총당주님 바로 앞에 서. 지금 방내의 의원으로는 부상자를 다 치료할 수가 없어 귀양성의 모든 의원을 불러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시던 총당주님도 사정이 너무 흉악하게 돌아가 어이가 없어 말리시는 가운데 갑자기 수석호 법님이 주먹질을 시작해서.... 총당주님은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당하 셨습니다. 총당주님도 패는 그 성격으로 보아 호법원이라고 무사하시지 는...” 흑영신마의 모습이 그 순간 꺼지듯이 장로전에서 사라졌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죽기 직전에 내지르는 듯한 비명. 창피함도 가리지 않고 오직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충실한 비명. 고통을 표현하 는 생생한 비명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비명을 들었다면 설마 흑방의 호 법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흑방하면 흑도의 독종 이 떠오르고 흑방의 호법이야말로 대마두들 중의 대마두들로 독종들의 정 상이 아니겠는가? 흑방에 서른명이 넘는 호법이 있고 이들이 구파의 장로 급은 못 되도 그에 비해 그리 손색이 없은 마두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었다. 혈천마궁이 사리진 이후 흑도의 남아있던 마두들이 모조리 흑방 에 투신했기 때문이다. 호법전 한쪽에서는 마칠이 벌벌 떨고 있었다. 산골에서 삼류산적이나 해먹 던 자였다. 그런데 운좋게 곤무악과 연관되어 흑방에 따라왔다. 흑방의 하 급무사도 되지 못할 실력에 수석호법의 측근이라하여 상급무사의 직위까지 얻었고 수석호법의 시중을 명받았다. 곤무악과 달리 그간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돌아다닌 끝에 흑방의 일을 어느 정도 알게된 마칠이었다. 왠일 인지 갑자기 거처에서 나온 곤무악이 하늘같은 총당주 흑장무영을 패기 시 작할 때부터 마칠은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고수나 하수나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똑같았다. 마칠로서는 흑장무 영이 전투시에 내장이 배 밖으로 나오는 상처를 입고도 자신의 손으로 배 를 꼬매고 다시 전투네 나선 경력이 있을 정도로 인내가 깊은 독종임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본 것은 곤무악의 주먹에 얻어맞을 때마다 떠나갈 듯 비명을 지르는 흑장무영의 모습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곤무악의 주먹은 그 런 흑장무영에게조차 사정없이 비명을 지르게 했다. 흑장무영이 실려가고 갑자기 호법원으로 안내하라고 했을 때도 마칠은 설 마했다. 총당주야 명색이 당주라는 직위라지만 그래도 같은 호법들 서열인 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묻는 질문에 부하들 교육시키러 간다는 말이 나왔 을 때 마칠은 곤무악에게 강조했던 자신의 산적교육을 저주하고 싶었다. 그래도 흑도를 통일했다는 흑방의 정예마두들이 모조리 모인 호법원이다. 설마하는 마지막 희망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곤무악이 호법원에 들어 오자마자 호법들을 집합하라고 고함을 질렀고 당연히 원내에 있던 호법들 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부터 곤무악의 눈에 띠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원 내에 비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 미친 놈. 주먹과 발이 엄청 빨라졌다.) 마칠이 경악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흑수기린과 대적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곤무악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빨라진 것이다. 호법원의 호법들 이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일간 계집과 있으면서 곤무악은 많이 인간에 가까워졌고 인간의 감정과 지식을 배우면 서 동시에 곤무악의 기억을 수없이 단편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그 전까 지 곤무악이 싸워온 방식은 오직 본능에 이끌려 움직인 것이었다. 그런데 곤무악의 단편적인 기억 속에 싸우는 방식도 떠올리게 되었다. 무예의 권 장구결이나 내공심법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기억이 이끄는 대로 강 약의 동작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곤무악이 펼치는 주먹과 발길질은 놀랄 만한 속도를 자랑했다. 윙 윙 우는 주먹의 속도가 일으키는 바람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었다. 빗 맞아도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질 힘이었다. 그런데 곤무악은 몇 번의 구 타경험을 통해 어떻게 패야 뼈가 부러지지 않고 내장이 터지지 않는지, 그 리고 죽지 않을 정도로 패는지를 알게 되었다. 차라리 근육이 파열하고 내 장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이 낫다. 고통이 극한을 넘으면 오히려 고통 이 사라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곤무악의 주먹은 매번 뼈가 부러지고 근육 이 파열되는 한계치 바로 밑의 고통을 줄 정도만을 선사했다. 게다가 온 몸을 아작아작 죽지 않을 정도로 패고 또 패고 있으니 고통에 정신을 잃을 수도 없다. 그것이 흑도의 대마두라고 불리는 호법들이 사정없이 비명을 지르는 이유였다. 내장이 피박살 나는 것과 거의 버금가는 고통을 수백번 이나 얻어맞으면서 느끼는 데 그것이 언제 끝날지 예상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호법원 내에는 벌써 십여명이 넘는 마두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호법원에서 성질깨나 부린다는 마두들이었다. 눈에 보이면 사정없이 두들기고 한참 패 는 가운데 다른 호법이 보이면 패던 작자를 내팽겨지고 곤무악은 새로운 장난감에 달려 들었다. 한참 얻어맞은 호법들은 널부러진 가운데 감히 일 어설 생각도 못했고 나타난 호법은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흑방의 같은 호법이라고 생각하며 비명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나타났 던 호법들은 미처 대적하지 못하고 무방비로 얻어맞았다. 한번 곤무악의 주먹을 맞으면 그 때부터 감히 반항을 할 여력이 없이 비명만을 질러야 했 던 것이다. 지금 호법원에 남아있던 호법들은 모조리 갑자기 날벼락을 맞 은 것이다. “멈춰라.” 호법원 내에 호통이 메아리쳤다. 태상장로 흑영신마가 나타나며 소리를 친 것이다. 그는 장내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호법원에서 이름을 날리 는 열 두세명의 호법들이 완전 걸레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 도 해도 이건 너무했다. 평생을 강호를 누비며 악명이나마 명성을 날리던 흑방의 호법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이토록 걸레가 다 될 정도로 두들겨 패 다니. 아무리 지위가 높고 무공이 강해도 나이도 어리고 갓 입방한 신참자 가 할만한 행동이 도저히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행동을. (단단한 외공과 힘뿐이라고 들었거늘. 호법들 중에는 신법을 장기로 삼는 자들도 많은데 어이하여 모조리 당했단 말인가?) “영감 뭐야? 너도 교육 좀 받을래?” 곤무악이 내뱉는 소리가 더 가관이었다. 그 소리에 흑영신마의 얼굴이 노 랗게 변했다. 마칠의 얼굴도 노랗게 변했다. 며칠 흑방을 싸돌아 다닌 탓 에 흑영신마가 누군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마칠이 뭐라고 곤무악에게 말을 하기도 전에 흑영신마의 몸이 먼저 곤무악에게 덤벼들었다. “교육? 이놈. 내가 먼제 네 버릇을 고쳐주겠다.” 흑영신마의 신형이 번쩍 곤무악을 덮쳐갔다. 그리고 마칠은 눈을 질끈 감 고 호법원에서 달아났다. 그가 흑방에 와서 듣기로 흑영신마의 무공은 오 히려 흑수마존보다 한수 위라고 했다. 현재 흑방 내의 최고수. 마칠이 생 각하기에는 결코 곤무악이 감당할 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콰콰쾅! “감히 반항하는 거냐?” “영감이야 말로 반항하냐? 더 아프게 패준다.” 마칠의 예상과는 달리 둘의 신형은 누가 밀리지도 않은체 붙었다 떨어졌다 를 반복했다. 흑영신마는 흑수마존의 성명정기인 사문의 흑수를 완벽히 터 득한 자였다. 흑수가 완성에 달하면 손만은 금강불괴에 가까울뿐더러 천하 의 신병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완벽한 흉기가 된다. 게다가 흑수마력이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내부로 파고들어 안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흑수에 가격당하여 견딜 수가 있는 것이 없다. 사대 마도절예의 뒤를 이을 정도로 강력한 마공이면서도 마도에서조차 금기시 된 십대금지마공중의 하나인 것 이다. 흑수를 십이성 완성하면 불사지체가 된다. 심장이 끊어지고 목이 끊어지지 않는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을 파내는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 몸이 되는 것이다. 또한 흑수를 완성한 자는 온 몸이 양손만큼은 아니더라도 일 반 장검으로는 손상할 수 없을만큼 단단해지기 때문에 심장이나 목을 끊어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불사를 목적으로 하는 봉황곡에 흑영신마는 흑수의 절기를 가지고 장로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자인 것이다. (이 괴물 녀석. 듣던 것과 틀리다.) 겉으로 보기에 막상막하의 대결인 것 같지만 흑영신마는 은은히 질려가고 있었다. 듣기에 저 녀석은 몸이 느리고 동작도 마구잡이라고 했다. 그 엄 청난 힘과 단단한 몸이 전부라고 했다. 하지만 직접 격고보니 그말과는 전 혀 틀렸다. 확실히 손발의 움직임이 무예의 이치를 따르지는 않고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흉험했다. 게다가 몸의 놀림이 흑영신마가 눈으로 따라가기가 힘들정도로 빨랐다. (이녀석. 진짜 내공이 없는 것이 맞아?) 흑영신마는 등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흑수기린의 흑수가 소용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의 절기가 미완성이기 때문인줄 알았다. 천하에 사대마도절 예의 하나인 철괴마공을 제외하고 흑수를 버텨낼 무공이 있다고는 꿈도 꾸 지 않았다. 그런데 곤무악은 태연하게 흑영신마의 흑수를 받아내는 것이었 다. 게다가 곤무악이 제대로 전력을 쏟아내지 않고 있다는 것도 흑영신마 는 알수 있었다. 한편 곤무악은 신이 났다. 단지 기억나는대로 싸우는 법을 행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몸이 빨라질 줄은 몰랐다. 무작정 온 몸에 힘을 잔뜩 주어 주먹 하나하나에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게 더 동작이 둔하고 균형도 잃기 쉬웠다. 가볍게 몸안에 중심을 두고 손발로 툭툭 치는 것만으로 충분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대신 손발이 빨라졌다. 게다가 그 톡톡 손을 던 지는 것만으로도 호법이고 당주고 하는 것들이 나가 떨어졌다. 오히려 조 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면 내장이 터지고 몸이 뭉그러져 죽어 나갈테니 부하 교육차원에서 곤란했다. 눈앞의 영감도 마찬가지였다. 전의 흑수기린의 손바닥보다 훨씬 저릿저릿 하기는 했다. 하지만 온몸에 흑수기린의 저릿저릿한 그 손바닥을 얻어맞고 도 견딘 곤무악이었다. 몸에 가격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볍게 주먹으로 감당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에는 때려도 때려도 상대를 맞출 수가 없어 어떻게든 한방을 맞추려고 방어를 포기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상대의 동작에도 허둥지둥 힘을 다 실은 주먹으로 상대를 공격하느라고 오 히려 상대의 공격만 몸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그런데 그냥 놀이처럼 저 손 바닥과 마주친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내미니 막는데 하등 어려울 것이 없었 다. 그리고 힘이 안 들어간 주먹으로도 저릿한 손바닥을 견뎌내는 것은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으윽.” 흑영신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왜 독종이라고 소문난 흑방의 호법들이 호법원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렸는지 알수 있었다. 얼핏 빗나가게 한방 옆구리에 스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철퇴로 후려쳐도 까닥하지 않을 자신의 몸이 고통으로 부르르 떨렸다. 뼈속까지 저며드는 듯한 고통에 흑 영신마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주춤 물러서는 가운데 곤무악이 빠르게 덮쳐왔다. 신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으므로 설마 신법도 모른다고 알려진 곤무악이 쫓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개구리 뜀 흉내로 곤무악은 흑영신마보다 더욱 빠르게 그를 덮쳐온 것이다. “수석호법. 멈추시오. 감히 무슨 짓이오?” 곤무악의 주먹이 턱까지 오는 것을 보고 질끈 눈을 감은 흑영신마였다. 그 때 다시 한줄기 호통이 일었다. 그리고 곤무악의 주먹이 바로 멈췄다. 그 냥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털어내듯 뻗은 주먹이라 회수도 쉬웠던 것이다. 곤무악은 후다닥 달아나는 영감에게 신경을 끄고 호통친 자를 바라보았다. 곤무악도 그자는 알았다. 바로 흑방의 방주 흑수마존이었다. 마칠이 말하 기를 저자는 흑방에서 최고로 높은자이니 존중(?)해줘야 한다고 했다. 자 신도 높은자이지만 저자도 높은 자이다. 높은자끼리는 서로 잘 대해줘야 한다. 곤무악은 그렇게 이해했다. 게다가 여자와 음식과 옷을 모두 저자가 주는 것이다. “방주? 왜 교육하는데 방해하냐?” 대놓고 하는 반말에 흑수마존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숨을 고르고 진정하 려던 흑영신마의 입도 쩌억 벌어졌다. 흑수마존의 뒤에 있던 자들의 얼굴 이 벌개지며 무기를 뽑으려고 했다. 그때 마칠이 흑수마존의 등뒤에서 나 타나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흑영신마가 나타나 곤무악을 공격하자 방주의 거처로 달려가 흑수마존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오히려 흑영신마를 구했던 것이다. “곤 수석호법님. 방주님에게는 존대를 하셔야 합니다.” 곤무악의 고개가 갸웃했다. “왜? 방주도 높고 나도 높은데.” “높은 분이니까 서로 존대하셔야지요.” 먹을 것 주고 여자를 주니까 잘 대해 줘야 한다. 그래서 곤무악은 마칠을 잘 대해 주었다. 흑수마존은 더 좋은 것을 주었다. 그러니 더 잘 대해 주 어야 한다. 하지만 마칠에게는 마구 말한다. 곤무악은 높고 마칠은 졸개니 까. 흑수마존은 높은 분이다. 그러니 높은분끼리는 존대를 해야 한다. 곤무 악은 이해가 갔다. 기억에 의해 존대가 뭐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가? 방주. 미안해요.”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하는 사과에 흑수마존의 얼굴이 펴질리 만 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얼마 전 임명한 수석호법을 문책할 수도 없다. 게다가 흑영신마를 쩔쩔 매게한 무위를 보고는 더욱더 그를 이용할 욕심이 났다. “수석호법. 호법전의 상견례치고는 너무 요란법석 하군요. 게다가 태상장 로는 수석호법의 위사람인데 어찌 무례를 저지르신 거요?” 곤무악이 고개를 절래절래 젔더니 흑영신마에게 말했다. “영감도 높은 사람이었어? 진작 말하지. 부하인줄 알고 교육시킬려고 했잖 아. 또 미안해.” “수석호법. 무슨 사과가 그렇소? 태상장로님은 배분으로나 나이로나 그대 보다 훨씬 윗분이시니 정식으로....” “아! 방주. 마침 잘 만났어요. 영감애기는 그만 하고. 그보다 그 여자들 질 렸어. 다른 여자 안고 싶어. 예쁜 다른 여자들 줘요. 안고 자게.” “.......” “왜 말을 안해? 여자 줘요. 여자. 한 대여섯명 씩 며칠마다 갈아줘요.” “크아아악.” 흑수마존이 다시 입을 쩌억 벌리는 순간 흑영신마가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곤무악을 덮쳐가려고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버릇 없는 놈을 찢어발기리라. 그런 흑영신마를 기겁을 해서 붙잡고 말리는 것이 흑수마존 이었다. 인내는 쓰고 과실은 달다. 오늘 곤무악의 진짜 실력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더욱더 마련의 결전까지는 잡아놓아야 했다. “태상장로님. 그냥 물러서시지요. 그리고 수석호법. 돌아가시오. 계집은 거 처로 보내겠소.” 결국 흑영신마의 발광에 흑수마존은 제대로 곤무악에게 말도 못하고 그를 잡고 태상장로전으로 향해야 했다. 그에게 곤무악의 이용가치를 설명하고 마련을 물리친 뒤에 이용가치가 다한다면 그때 제거할 속 뜻을 밝히기 위 해. 한 밤중에 곤무악이 두 눈을 떴다. 보통의 멍하거나 살기찬 눈이 아니었 다. 붉은 광망을 발하는 두 눈. 그러나 그 눈에는 지혜와 교활함이 엿보였 다. 곤무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에는 다섯명의 여인이 수혈이 집힌체 잠들어 있었다. 무예의 무자도 모르는 곤무악이 혈도를 집을줄 알 리가 없다. 곤무악의 몸을 차지한 혈존 백가량의 영혼이 그녀들의 수혈을 집은 것이다. “이놈의 머리 속에 꾸준히 이혼통제대법을 수련하도록 지시했더니 이제야 성공인가? 놈이 이제야 본좌에게 완전히 복종한 것인가?” 혈마전혼대법과 이혼통제대법은 배교의 양대 궁극 사술. 영혼을 타인의 몸 에 이전하는 것은 같으나 주체가 틀리다. 혈마전혼대법은 영혼이 주이고 육체가 종이다. 따라서 옮겨진 원래의 육체는 버려지는 것이고 주가 되는 영혼이 옮겨진 육체가 새로운 영혼의 그릇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혼통제 대법은 육체가 주이고 영혼이 종이다. 안전한 곳에 있는 원래의 육체가 본 체가 되는 것이기에 영혼은 자신의 주이자 본체인 원래의 육체로 돌아와야 한다. 따라서 이혼통제대법으로 영혼이 이동하여 담는 상대의 다른 육체야 말로 도구인 그릇에 불과하다. 이 두가지 차이점을 제외하고 타인의 육체 를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의 몸처럼 움직이는 것은 동일했다. 다른 차이점 을 더 든다면 이혼통제대법은 영혼을 담는 그릇인 도구를 수없이 많이 만 들 수 있다는 것 정도? 또한 영혼을 옮기지 않아도 도구가 듣고 보며 느끼 는 모든 것을 멀리서 본체가 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 정도이리라. “정말 대단하다. 이 육체 하나만으로도 사대 마도절예를 완성한 자와 버금 가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과연 백치마인은 천마강시에 버금가는 군.” 곤무악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단지 애석한 것은 몸에 들어오는 모든 힘이 근력과 완력으로 전환되기에 내공을 연마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초식 외에 내가수법 같은 무예를 발 휘하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철괴마공의 아류인 철갑마공은 외공과 흡사한 면이 있으니 내공없이 흉내만 낸다고 할지라도 이몸으로는 쌍영마공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혼통제대법에 성공한 혈존 백가량은 다시 자신의 본체에 돌아가기 위해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이로서 쓸만한 이혼통제대법의 도구가 열 구가 완성되었나? 백호검 마진 걸, 무적소야 모용풍, 그리고 혈무영 중에서 이혼통제대법으로 내가 직접 이용할 만한 자들은 만승패검 오형록과........등등, 그리고 열번째 철마 곤 무악까지. 후후 하지만 아직 멀었다. 마련의 일곱제자 놈들과 백도 그리고 천하의 기존세력이 대립하고 첫째와 둘째까지 뛰어들게 하며 그 와중에 일 곱 늙은이까지 한꺼번에 제압하려면 최소한 쌍영마공과 비슷한 위력을 발 휘할 육체적 능력을 지닌 도구가 스믈 네구 이상 필요하다.” 그 말을 끝으로 곤무악의 신형이 다시 침대위로 쓰러졌다. 46. 악도(1) 혈존이 그의 아홉제자를 모아놓고 이르기를 “본좌가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으나 오직 하나의 사람만을 두려워한 다. 전일비.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찾아 죽여야 한다.” 첫째 제자가 물었다. “사부는 고금제일인이라 불리십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지혜로우 며 가장 뛰어나십니다. 전일비는 일개 사기꾼에 불과한데 어이하여 그를 직접 지목하여 혈천마궁 척살 제일 순위에 두셨습니까?” 혈존이 다시 말하기를 “본좌가 바다라면 그는 하나의 모래알이다. 본좌가 하늘이라면 그자는 먼 지에 불과하다. 본좌가 천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전일비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허나 본좌가 만약 상처를 입고 위기에 빠졌을 때 본좌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전일비이다. 그러하기에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 “그의 어떤 점이 감히 사부님을 위협할 수 있습니까?” “본좌가 스스로 몸을 감추고자 하면 누가 본좌를 찾아낼까? 본좌가 심중을 감추고자하면 누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본좌가 죽이고자 마음먹는다 면 누가 살아날까? 하지만 본좌를 찾아내고 마음을 알아내고 살아날 수 있 는 유일한 자가 바로 전일비이다. 그는 모산파의 유일한 직통을 이은 자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하지만 천하를 지배하는 혈천마궁도 악도 전일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산동성 제남 우령현. 현령은 안절부절한 눈빛으로 자신 앞의 사내를 쳐다 보았다. 수도 북경에서 내려왔다며 금의위의 영패를 보여준 자. 한번 금위 의의 눈에 벗어나면 성을 다스리는 성주나 제후도 목이 달아나는 세상이 다. 현령은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건 기록은 이것이 전부입니까?” “미...미안하네. 워낙 미궁에 빠진 사건이라. 하지만 다시 재조사에 들어가 겠네.” 사건 기록을 요구했던 금의위 위사의 눈이 멎은 서류는 붉은 줄이 쳐져있 는 종이였다. 그것은 미궁에 빠져 사건을 종결했다는 표시였다. 현령은 그 사건이 얼마전 현이 떠들썩하게 일어났던 일이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곡가장 일가족 살인사건. 우령현에 십년전에 이주해와 장원을 짓고 살고있는 인근의 대부호 곡대인 의 장원이 피바다가 된 사건이었다. 곡대인과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장원 의 하인들마저 모조리 죽어버린 장원에서는 범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 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곡가장의 모든 재산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현령은 누군가 곡대인의 재산을 탐내 흉악한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범인은커녕 용의자 한명 찾아낼 수가 없었다. “곡대인의 시체는 심히 훼손되었다?” “그렇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지. 하지만 곡대인의 옷과 평소 보여주던 손가락의 붉은 사마귀로 그의 시체를 확인할 수가 있었네. 그런 데 곡대인의 피살사건이 혹시 윗전과 연관된 어떤 큰일에 연루된 것인가?” 현령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금의위는 현령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깊 은 생각에 잠겨들었고 한참후 혼자말로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지독한 악종이군. 부인과 아이마저 죽이다니.” “그렇네. 아무리 흉악하다고해도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이다니 범인 은 살인마임에 분명하네.” 금의위 위사는 고개를 젓더니 현령에게 말했다. “이일은 수도의 높으신 분과 연관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찾아온 일은 비 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곡가장 피살사건은 이것으로 종결해 주십시 오.” “알았네. 그런데 금의위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알아도 되겠는 가?” 현령은 자신의 우매한 질문에 쏘아보는 금의위 위사의 날카로운 눈빛에 말 을 삼키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의위 위사는 현령의 앞에서 사라졌다. 매 한마리가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매의 다리에는 작은 전통이 달려 있었고 그 남자는 전통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다. - 전일비 추적 실패. 열 다섯 번째의 신분을 버리고 스스로 꼬리를 끊고 종적을 감췄음- “허. 천리추종이 이십년동안 열 다섯 번이나 놓쳤단 말인가?” 관옥같이 생긴 미청년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온 몸에서 범 상치 않은 기세를 발하는 자. 한때 혈천마궁에서 혈지존이라고 불렸던 자. 그리고 오직 혈존 백가량과 그만이 아는 비밀로 백가량의 유일한 아들이었 던 자. 그리고 혈존을 모해하는 모든 음모를 꾸몄던 자였다. 또한 혈존의 심장을 먹고 혈영동부를 열었으며 천마강시들을 훔쳐간 자였다. “혈존 사후 천하가 혈존의 흔적을 찾는 동안 본좌는 오직 전일비를 쫓았 다. 그런데도 이토록이나 그를 잡기 힘들다니. 하기야 흔적을 감추려고 십 년간 살을 비비고 살아온 부인과 아이들마저 단호하게 죽여버리고 꼬리를 끊는 독종을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 혈마전혼대법으로 혈존이 사라진 이후 혈지존은 그를 찾는 일을 깨끗이 포 기했다. 천하 전체가 혈존을 수색한다고 해도 성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혈존이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자 한다면 누가 찾아낼 수가 있 단 말인가? 하지만 있었다. 혈마전혼대법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자. 유일하게 혈존의 종적을 모조리 찾아낼 수 있는자. 모산파의 모든 진전을 머릿속에 두고 있 는 자. 그러나 혈존을 두려워하여 평생을 암흑속에 숨어 지낸자. 전일비가 바로 그였다. 혈존을 찾는대신 혈지존은 이십년간 오직 전일비를 쫓았다. “혈존을 찾기위해서는 전일비 그자가 필요하다.” 혈존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가장 많이 알고있는 자가 바로 그의 아들 혈지 존이었다. 천하를 뒤엎을 힘이 있어도 혈존의 사망을 확인하지 않는한 그 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의 시체를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를 찾아 죽이기 라도 해야했다. 그가 어디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천하에 모습을 드러낸다 는 것은 그의 사냥감이 된다는 것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혈지 존은 머리털 하나 보일세라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대신 혈존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자. 전일비를 찾기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무림 제일의 추적자 천리추종을 포섭하는 데 십만냥의 돈이 들었다. 천리 추종이야 말로 찾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찾아낸다는 수색에 관해 타의 추 종을 불허하는 자. 하지만 그자라도 혈존을 찾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전 일비를 찾아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혈존은 육체를 소멸시켜 종적을 감 춘 자이고 전일비는 흔적을 지우고 종적을 감춘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주축으로 전일비를 찾기위해 이십년간 소모한 돈은 이백만냥이 넘었 다. 천리추종은 자신에게 의뢰한 자가 혈지존인지 모른다. 다만 충분한 돈을 받고 일에 착수했을 뿐이다. 전일비의 이름이 무명인 탓도 있다. 하지만 이십년이 넘는 숨바꼭질은 이제 천리추종의 자존심과 명예를 건 한판 승부 가 되어 그는 모든 것을 걸고 그를 쫓고 있다. 이십년간 전일비의 그림자인 위장신분 열다섯 개를 발견했다. 하기야 천하 를 지배하던 혈존의 이목을 피해 살아남았던 전일비였다. 혈천마궁의 수색 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수십개의 위장신분마저 부족했을지 모른다. 하나 하나의 신분이 지워질 때마다 전일비는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천리추종조차 모르는 혈지존의 신분을 전일비가 알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한번 혈존이 노렸던 대상인 전일비인 만큼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천리추종은 마침내 그가 십년이나 살아왔던 거처를 발견했다. 그가 열다섯 번째의 신분으로 살아왔던 장소는 우령현의 곡가장이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전일비는 또한번 꼬리를 끊고 잠적한 것이다. 자신을 알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은 것으로 위장해서. 심지어 아내와 혈육마저 죽이고 모든 흔적을 지웠다.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어리석은 사제들은 사부가 죽었다고 여기고 혈 천마련을 세워 천하를 지배하려 하지만. 본좌는 느낄수 있다. 사부는 천하 에 거미줄을 펴고 천하가 공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천하를 사냥할 준비 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부가 의도한 대로 천하는 숨가쁘게 달리고 있을 것이다.” 혈지존은 조급함을 느꼈다. 천하를 지배할수 있을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숨어 살아야 하는 인내를 발휘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본좌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다시 사부가 천하를 지배할 지도 모른다. 옛 힘보다 더한 공포를 가지고 군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본좌는 영 원히 공포에 떨며 숨어 지내야 하리라. 그 전에 사부를 발견해야 한다. 그 래서 천하에 그의 종적을 노출시켜 그를 소멸시켜야 한다. 천하를 도모하 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사부가 손을 쓰기전에 그를 찾아야 한다. 더 이 상 기다릴 수 없다.” 혈지존은 더 이상 미룰수 없다고 여기고 커다란 결심을 했다. 스스로의 정 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나서기로. 그리하여 전일비를 찾아내기 로. 모든일의 시작점은 반드시 혈존의 사망점 이후부터 시작되어야 하므 로. 전일비는 평생을 삼류 무인으로 산 자였다. 절학이라 할 무예 몇을 알고 있으나 체질이 따라주지 못해 절정의 무공을 익히지 못했고 배교와 모산의 술법을 머릿속에 외우고 있으되 이해하지를 못해 썩히고 있는 자였다. 그 는 백가량의 죽마고우였다. 태어날 때부터 옆집에 살며 함께 자라고 놀았 다. 그는 기어다닐 때부터 백가량과 함께 자랐고 그와 함께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백가량과 함께 배교에 입문했다. 전일비는 늘 백가량과 함께했고 그의 마음을 미리 알아서 수족노릇을 했다. 백가량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자질도 출중했으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쟁취하는 성격마저 지니고 있었다. 반면 전일비는 성격이 독했으나 다른 모든 점에서 백가량을 따를 수가 없었다. 머리도 둔했고 술법에도 자질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공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한계를 알고 백가량의 수하를 자 처하여 백가량이 지시하기에 앞서 모든 일을 손수 수족처럼 처리했다. 백 가량의 밑에서 출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전일비는 눈치가 빨랐다. 백가량의 환심을 사기위해 온종일 백가량의 눈치 만 살폈고 마침내는 백가량이 말하기도 전에 그의 뜻을 알아차려 먼저 행 하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부하노릇 을 자처하는 사이에 전일비는 자신보다 백가량의 마음을 먼저 알 정도가 되었다. 백가량이 배교의 교주자리를 차지할 때도 누구보다 앞서 그를 도 운 것이 전일비였다. 배교를 장악하고나서 백가량이 전일비를 향해 자신의 신체에 달린 수족보다 그가 더 낫다고 칭찬한 것도 그 이유였다. 백가량의 가슴이 서늘해진 것은 갑자기 전일비가 배교에서 도망쳤기 때문 이다. 백가량의 총애를 받던 전일비가 갑자기 모산비전의 비급 한권을 달 랑 들고 도망친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백가량마저 그가 도망 친 이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을 정도였다. 전일비가 미리미리 알아서 자신 의 마음을 헤아려 행하는 일을 백가량은 흡족해 하면서도 한 편으로 속에 서 살기를 품어갔다. 백가량은 스스로 천하를 속이더라도 천하가 그의 속 을 헤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전일비를 자신도 모르게 거북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전일비가 도망가고 나서야 백가량은 자신이 전일비에 대해 죽일 마음을 가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전일비가 워낙 자신의 손발노릇을 잘 해 주었기에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데 늦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전일비는 백가량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속마음을 먼저 눈치채고 모산비전 한권만을 달랑 들고 배교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백가량은 그때 자신보다 자신의 속마음을 더 잘아는 전일비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 다. 백가량이 배교의 비전을 천마에게 바치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했을 때 전일비는 이미 마교에 가입하여 있었다. 천년마교가 혈사문과 겨루고 있을 때 혈사문의 사술을 대비하기 위해 끌어모은 술법자의 한 사람으로 천년마 교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질이 미약하여 모산비전을 모조리 머리 속에 넣고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다. 그래서 천년마 교 내에서도 출세하지 못하고 일개 제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백가 량은 승승장구하여 혈마란 별호를 얻고 천년마교가 천하를 지배할 힘을 얻 었을 때 팔대천마의 한자리를 얻을 정도로 득세했다. 지독한 악바리 성품으로 인해 악도란 별호를 얻은 전일비는 천마에게 몇 번씩이나 백가량을 경계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언젠가 혈마가 반 드시 팔대천마의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독존천하의 야심을 가지리라고 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개 마교의 제자인 악도 전일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 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백가량 자신조차 팔대천마의 막내에 불과 한 자신이 다른 일곱을 제거하고 천하를 손에 쥘 것이라는 전일비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다만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전일비를 죽여 괜히 천 마의 의심을 살까봐 손을 쓰지 못했을 뿐이다. 혈마는 변황과 천년마교의 충돌을 이용하여 다른 칠대천마를 땅에 묻었다. 결국 백가량은 전일비의 예언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전일비는 백가량도 알 지 못했던 그의 미래의 행동을 미리 예측했던 것이다. 백가량보다 더욱 백 가량을 잘 알고있는 전일비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천하가 팔대천마가 모 두 변황과 동귀어진하여 죽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전일비만은 백가량이 살 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교를 탈출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부 터 전일비는 백가량이 천하를 쥘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백가량이 야심을 드러냈을 때, 혈천마궁을 조직했을 때, 마침내 혈존이라 는 이름으로 천하를 손에 쥐었을 때에도 백가량은 전일비를 찾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전일비는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천하 전체를 알고 속이고 주무르는 백가량도 전일비의 마음만은 알지 못했다. 반면 천하의 수많은 고인에 비하면 삼류에 불과하고 술법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전 일비는 천하에서 오직 한명 백가량의 마음이나 생각만은 백가량 자신보다 더 잘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늘 백가량보다 한발 앞서 모습을 감 출수 있었던 것이다. “혈존이 아니었군.” 혈지존이 중얼거릴 때 그가 있는 곳의 백리 밖에서 그를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전일비였다. 놀랍게도 그의 모습은 금의위로 가장했던 천리추종이 만났던 현령의 모습이었다. 전일비의 열 여 섯 번째 위장신분이야말로 그가 살던 곡가장이 있는 우령현의 현령이었던 것이다. 전일비는 천리추종이 금의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추 적하고 있는 자라는 것도. 그런데도 그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를 이길 자신도 없었거니와 그의 배후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을 찾 는 이가 혈존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전일비는 평생을 백가량을 피해 숨어 다녔다. 그가 혈존을 피해 숨어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 만 그러기 위해서는 혈존의 주변 상황을 잘 알아야 했다. 그래서 전일비는 혈존의 정보를 어느것 하나 빼놓지 않고 수집했다. 누구나 얻어들울수 있 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전일비는 백가량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때 백가 량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전일비는 백가량의 마음을 분석하여 자 신이 도망갈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였다. 전일비는 뛰어난 자가 아니었 기에 백가량이 자신을 잡기위해 생각하는 바를 알아맞히는 것만으로도 힘 이 들었다. 그런데 이십년전 혈존이 죽었다고 알려진후 전일비는 백가량의 정보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 그 후부터 전일비의 공포가 시작되었다. 전일비는 백가량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림의 최고급 인물 극소수만이 백가량이 혈마 전혼대법을 통해 도망갔다는 것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백가량의 정보가 사라지면서 전일비도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 게 되었다. 그때부터 몇배나 자시의 행적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모 습을 감추는데 더 신경을 썼다. 위장 신분도 수십개를 만든 것도 그 때문 이었다. 천리추종이 사라진후 전일비는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가 소식을 전하 는 매를 날려 보냈을 때 모산의 술법을 사용하여 매의 눈을 정보창구로 이 용했다. 그리고 백리밖에서 매의 눈을 통해 혈지존을 보고 그가 혈존이 아 님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로구나. 혈지존.” 천하 누구도 모르는 혈지존의 정체. 하지만 백가량의 주변을 속속들이 파 악하고 있는 전일비는 혈지존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하에서 혈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나라면 혈존을 죽 일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혈지존이다. 그리고 혈존을 세상에 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그와 나는 쌍벽을 이룰 것이다. 또한 혈존이 죽기를 가장 원하는 사람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그와 나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혈존 백가량에 대한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평생을 쫓겨 다녔 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혈지존을 본 순간 전일비는 온몸이 흥분으로 젖 어왔다. 어쩌면 자신이 혈존을 쫓을 수도 있다는 희망. 사냥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할 수도 있다는 희망. 그리고 혈존이 죽는다면 영원히 자신은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었다. “혈지존의 보호아래라면 나는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혈존보다 더 교활하 고 악독한 마음을 가진 자이니까. 그리고 그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백가량 그 망할 놈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일비는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47. 악도(2) 깊은 산속에 한명의 노인이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별 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하나하나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한숨을 쉬었다. "마성은 여전히 빛을 발하니 마음 편하게 살 날은 아직도 멀었구나." 마치 신선처럼 긴 수염과 백발을 가진 노인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공존할 수 없는 자의 운명을 발하는 별이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은 죽을 때까지 마음 편하게 두다리 쭉펴고 살 팔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마성의 빛을 그대의 힘으로 사라지게 만들 생각은 없소?" 백발노인의 뒤에서 언젠 나타났는지 하나의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하지만 백발노 인은 전혀 놀라지 않은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자가 오늘 나타날 줄 미리 짐작하 고 있었던 것이다. 나타난 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지저분한 차림의 노도인이 었다. "악도인가? 오늘 찾아올 줄은 알았네." "세상에 천기노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오래 전에 하늘 위 에서 내 별을 가려내어 혈존에게 일일히 내 위치를 알려주던 분이시니." "과거의 일을 꺼내 무엇하겠나? 이제는 같은 신세이니 것을. 자네도 알고있지 않 나? 노부가 늙은 목숨이 꺼지는 것이 두려워 숨어 지내는 불쌍한 노인에 불과하다 는 것을." 천기노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악도에게 다가왔다. 혈존의 별을 볼 때 항상 같이 관찰하게 되는 것이 악도의 별이었다. 그리고 천기노인은 그가 왜 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서 기다리기는 했으나 따르지는 않겠 네. 그냥 돌아가 주게." "천기노인. 정녕 이대로 산속에서 늙어 죽을 생각이오?" "자네는 정말 신기하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네가 그자의 무서움을 잘 알지 않나? 자네의 별이 흉성을 띠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것을 아네. 하지만 그자를 그자 자신보다 잘 아는 자네가 감히 그자를 향해 대항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신기하네." "흥. 혈존. 그자도 인간에 불과하오. 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위 축되어 스스로 두려워 했소. 게다가 지금 천하의 정세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지금 상태에서도 혈존이 정면으로 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소. 우리가 두려움에 떨지않고 오히려 그자를 죽일 기회란 말 이오." "크후후. 그자의 별의 빛이 바뀐 것을 보니 확실히 제 능력을 되찾지 못한 것은 사 실이네. 하지만 병든 호랑이가 더 무서운 법이야. 그자의 처지가 어떤 것이든 그자 의 지혜와 신기묘산만으로도 천하가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나?" "이제는 달라졌소. 우리가 힘을 합하면 그자를 죽일 수가 있소. 그자가 천하를 지 배하는 대신 이제는 천하가 그를 노리고 있소. 그자의 행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그를 제거할 수가 있소. 물론 그를 꼼짝없이 잡아두 어야 하겠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혈존이라면 꿈에서도 두려움에 떠는 자네를 무엇이 그렇게 바꾸었나? 누가 자네의 배후에 있나? 말해보게." "천기를 보아도 그것마저 알아보지는 못하는 모양이지요? 나는 혈지존과 손을 잡 았소." 천기노인의 얼굴에서 비로서 흥미가 일었다. "혈지존이? 흠. 맞부딪치면 혈존에게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역시 천하 를 차지할 말한 혈성. 그자가 자네의 뒤를 대준다고?" "그는 혈존보다 더 악날하고 강한 자요. 그러나 우리만큼 혈존을 두려워하는 자요. 우리들이 힘을 합하면 혈존을 처지할 수가 있소." "자네가 노부를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포기하게. 혈지존이 자네와 노부와 함을 합친 다고 하더라도 혈존 그자를 당해낼 수는 없어. 그자의 기계묘산과 술법은 이미 인 간의 경지가 아니네. 무엇보다 운명이 말하고 있네. 천하에서 혈존을 없앨 운명을 지닌 별은 아직 존재하지 않네." "후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요? 나는 악도요. 혈존이 그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안다고 했던 악도요. 오직 살아날 방법만 생각하고 그자를 죽일 방법만 연구했 던 나요.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소? 내게 대책이 없었다면 혈지존이 아니라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다고 해도 혈존에 대항하 기 위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거요." "계책이 있단 말인가? 세상에 혈존을 죽일 계책이 있단 말인가? 과거 천무삼성과 혈존의 아홉제자가 힘을 합하고 완벽한 음모에 빠트리고 백도와 마도 천하 전체가 포위하고도 결국 그자의 육신밖에 죽이지 못했네. 지금은 더욱 몸을 사리고 있을텐 데 그자를 죽일 계책이 있단 말인가?" "계책 따위 혈존을 상대로 아무 소용이 없소. 하지만 혈존의 움직임은 내가 세상에 나온 이상 내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그렇다면 혈존을 꼼짝 못하게 할 사람들만 있으면 되오." 천기노인이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천기를 살 펴 세상만사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혈존의 눈밖에 난 이래 심산유곡 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천기노인에게 혈존을 꼼짝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담조차 되지 못했다. "웃지 마시오. 과거와는 틀리오. 혈존은 지금 천하를 지배하고 있지도 못하고 천하 를 노리는 대세력도 그가 모습만 드러내면 일체의 항쟁을 그만두고 즉시 그부터 죽이려고 할 것이오. 그는 숨어있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 당신은 그자를 없앨 운명 을 지닌 별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다섯 사람을 알고있소." "다섯 사람? 혈존이 자네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섯 사람이나 두려워 한다고? 설마 그것이 자네와 혈지존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그자를 피해 도망다니며 그의 행동을 살펴왔었소. 그는 분명 다 섯 사람을 두려워했소. 한사람 한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지만. 그 다섯 사람이 모이는 것은 극도로 꺼려했소. 물론 나도 그렇고 당신 천기노인도 그 다섯 사람의 하나요. 우리들이 모이면 그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 리를 죽이려고 했소. 나는 그가 두려워 했다는 것을 자신할 수 있소. 혼자라면 그 자를 이길 운명을 지닌 자가 없겠지만 다섯이 모이면 그자의 운명을 바꿀 존재들 이 있소." "그런 자가 다섯이나 있다고? 도대체 누구지? 어째서 내가 몰랐지?" 악도의 말에는 자신이 흘러 넘쳤고 그말에 천기노인은 점차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혈조 그보다 더욱 혈존에 대해 잘 아는 자이니까. 그리고 천기노인 역시 혈존을 두려워하는 만큼 죽이고 싶어 하니까. 천기를 보기에 자신의 운명을 포기했다. 천기를 보기에 끈질긴 목숨이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죽 음도 두렵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밤 하늘에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떠있소. 천기노인이라 한들 어찌 그 들 모두의 운명을 읽을 수 있겠소? 게다가 그들 하나하나는 결코 천하를 움직일 만한 큰 인물이 안 되는 작은 그릇의 사람들이요. 그러나 그 다섯이 모이면 천하를 홀로 파멸시킬 수 있는 혈존을 죽일 비수가 되오." "..." "천하에서 그를 가장 잘아는 나 악도가 그 첫번째이고 별을 헤아려 별의 운명을 가진 사람의 미래를 짐작하는 당신 천기노인이 두번째이며 그 세번 째 사람은 바 로..." 개봉의 빈민가. 음습한 냄새와 온갖 불결한 토사물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곳. 그리고 엉기설기 움막보다 못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 이곳에 세 사람이 움직이 고 있었다. 백박의 신선 같은 노인네와 지저분한 옷을 차려입은 늙은 도인 하나. 그리고 깨끗한 장삼을 입은 중년 무인 하나였다. 그들은 천기노인과 악도. 그리고 혈지존과의 계약에 따라 이들을 돕기위해 따라나선 천리추종이었다. 껄렁한 건달들이 빈민가에 나타난 이 침입자들을 향해 다가왔지만 천리추종의 날 카로운 눈초리에 모두들 꼬리를 감추었다. 대충 보아도 무예로 단련된 몸과 장검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무림인이었다. 빈민가의 건달들이 건드릴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 그자가 숨어있단 말이지? 천하의 혈존이 두려워 하는 자가?" 천기노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주변의 음습하고 낡은 거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주는 이 거리가 싫었다. 그 말에 천리추종이 냉소했다. "나는 추적에 실패하지 않소. 악도가 말한 삼십년 전의 사람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 한다면 바로 이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소. 그자 적암이라는 자가 아직 살아있다 면." "자. 그만들 하시오. 그자가 적암이 맞다면 내가 알아볼 수가 있소. 적암 역시 혈 존을 피해 숨어살고 있었으니 이런데에 살 수도 있는 일이오. 만나면 알게 될 것이 오." 천리추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그들은 어느 다 쓰러져가는 집앞에 도착했다. 돼지 우리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러운 집이었다. 천리추종이 성큼 문을 발로 차고 방안으 로 들어갔다. "누...누구?" 어두운 방에서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에 의하 여 희미하게 방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먼지가 가득 쌓이고 오물이 뒤범벅이 된 방 에서 거적더미를 둘러쓴 지저분한 여인이 두려움에 찬 얼굴을 드러냈다. 나이는 중 년 정도. 젊었을 때는 꽤 미인이었을 것 같은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엇지만 얼마나 굶고 고생을 했는지 마치 해골처럼 말라있었고 온 얼굴과 피부에 버짐이 퍼져 있 었다. 천리추종은 한눈에도 그녀가 몸을 팔아 살아가던 유녀출신임을 알았다. 나이를 먹 어 더 이상 일할 수도 없고 병마저 들게 되자 집안에서 죽을 때만을 기다리는 것 이다. 빈민가에는 그런 여자들이 많았다. 저 버짐도 화류병에 의한 것인지도 몰랐 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평생동안 행운이라고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듯한 불행 에 찌든 표정이 남아 있었다. "뭐야? 적암은 어디있는 거야?" 천리추종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온 악도가 휘휘 살펴보더니 실망에 찬 목소리로 말 했다. 천리추종이 서슴없이 여인의 목을 움켜 쥐었다. 힘없이 여인의 몸이 주르르 천리추종의 손길에 따라 허공으로 올라갔다. "적암은 어디있지?" "무... 무슨 소리예요? 적암이 누구예요? 여기는 제 집이에요. 저는 아무 잘못도 없 어요." "삼십 년 전에 이곳 개봉 빈민가로 흘러 들어온 대장장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자 와 친분이 있던 모든 자를 조사했지만 그자는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 집은 그 자의 집이다." "아... 아버님을 찾아 온건가요? 아버님은 벌써 이십 년전에 죽었어요." 여인의 떨리는 말에 천리추종의 시선이 악도에게 돌아갔다. 여인의 말이 진실임을 알아낸 것이다. 공포로 가랑이를 노란 물로 축축하게 한 여인이 무슨 거짓말을 하 겠는가? 천리추종은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는 시선을 악도에게 보 냈다. "다섯의 하나라는 그자가 죽었단 말인가? 혈존의 약점을 움켜쥐고 있는 천하의 유 일한 인물이라는 적암이. 허허. 이를 어쩌는가?" 천기노인이 탄식을 했지만 악도는 오히려 기쁜 미소를 짓고 여인에게 다가섰다. 그 가 손톱을 세워 여인의 목을 살짝 찔렀다. 여인의 목에서 주르르 피가 흘러 나왔다. "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뭐든지 할께요. 말 잘들을께요.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가만 있어라. 네말이 사실이라면. 네가 적암의 딸이라면 죽이지는 않는다." 악도는 여인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 조심스럽게 품안에서 꺼내든 투명한 옥병 에 담았다. 옥병에는 이미 들어있는 선혈이 있었고 그것은 새롭게 들어간 여인의 피와 엉켜 풀어지지 않았다. 여인은 피를 보고는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맞군. 너는 틀림없는 적암의 딸이구나." "흥. 이미 혈존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그자가 죽었거늘 그 딸로서 무엇을 한단 말 인가? 적암이 저 여인에게 혈존의 약점을 알려주기라도 했을 것 같은가?" 천기노인의 질문에 악도가 껄걸 웃었다. "적암은 혈존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혈존의 약점을 쥐고 있는 자였었지. 그리고 이제는 이 여인이 혈존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다섯의 하나이 다." "그녀가 약점을 쥐고있는 자이며 혈존을 죽일 수 있는 다섯의 하나라고?" 악도가 득의의 빛을 띠고 천기노인에게 설명했다. "혈존이 지닌 가장 큰 힘의 하나가 바로 배교의 사술. 아마도 지금은 그것이 혈존 의 가장 큰 힘이겠지만. 그리고 배교의 사술에서 혈존 못지않게 뛰어난 자들이 있 다." "삼대 사문을 말하는 건가? 그자들은 혈존을 당해내지 못할 텐데?" "아니. 바로 배교쌍노를 말하는 것이요. 혈존이 누구보다 믿는 인물. 그리고 혈존 의 명이 떨어지면 스스로의 목숨이라도 일말의 주저 없이 끊을 수 있는 배교의 충 성스런 가신. 환마와 사마는 혈존의 양팔인 동시에 혈존의 사술을 모두 알고 있는 자들이지." "자네가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을 모두 발휘할 수가 있었으면 자네 역시 혈존과 사술을 겨룰 수 있었겠지. 그런데 그 배교쌍노가 어쨋단 말인가? 그자들은 혈존의 심복들이 아닌가?" "그들이 바로 혈존의 약점이기도 하오." "배교쌍노가? 아무리 그들이 사술의 대가라고 해도 혈존을 당해낼 수는 없을 텐 데? 그리고 그자들은 자네의 말대로 혈존의 명이 떨어지면 스스로 목숨이라도 버 릴 정도의 충신들이 아닌가?" 악도가 공포로 정신을 잃은 여인을 가리켰다. "배교쌍노가 혈존의 약점이라는 것은 바로 그 충성심 때문. 그 충성심 때문에 혈존 이 그들을 가장 믿고 있고 또한 방심하는 유일한 존재들. 혈존이 자신의 등뒤를 내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배교쌍노. 그러기에 그들은 혈존의 약점이 될 수 있소. 그리고 배교쌍노로 하여금 혈존을 배신하게 할 유일한 인물이 바로 저 여 인." "그녀가? 어째서? 적암이 배교쌍노 중의 하나의 자식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니오. 배교쌍노의 혈존에 대한 충성심은 자식이라도 서슴없이 희생시킬 정도로 강한 것이오. 문제는 그 충성심의 이유가 바로 혈존이 배교의 마지막 교주라는 데 에 있소. 그리고 적암은 배교의 마지막 정통 교주, 즉 혈존에게 죽임을 당한 혈존 의 첫번째 사부의 혈손이었소. 이제는 저 여인이 배교의 마지막 정통 혈통을 지닌 여인이지. 따라서 그녀가 유일하게 혈존의 약점인 배교쌍노를 움켜쥘 수 있는 여인이오." "그런가? 과연 그녀가 배교쌍노를 움질일 수 있다면 혈존이 두려워 할만한 대상이 될 수 있기는 하겠군. 혈존도 자신의 양팔을 잘라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은 이 여자를 의원에 데라고 가야겠소. 후후. 배교의 후손이 이런 지경까지 몰락하다니. 적당히 재물로 달래주면 우리 뜻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을 것 같소." "그렇군. 그럼 다음번 네번째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건가?" 그날 개봉부의 빈민가에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퇴물 싸구려 윤락녀 하나가 사라 졌다. 누군가가 개봉부 제일의 의원 집에 그녀가 한달간 치료받고 있는 것을 보았 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개봉부에서 사라졌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그동안 못올려서 죄송합니다. 월드컵을 보면서 거의 글을 못 썼습니다. 머리속에서 한국 축구경기만 맴돌아서 말이죠. 이제 월드컵도 끝났으니 다시 글을 올려야지요. 적어도 일주일에 삼회 이상은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그럼. 콰콰쾅! 암도에 매쾌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리고 검은 연기와 함께 폐허가 된통로 가 드러났다. 통로의 일부가 완전히 파괴되어 천정과 암벽이 무너져 버렸다. 엄청 난 폭약이 폭발한 모습이었다. "쿨럭. 쿨럭. 살아있나?" "살아있소. 모두 무사하오?" "나도 살아있소. 천마강시는?" 연기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악도와 천기노인 그리고 천리추종이었다. 개 봉부 빈민가의 여인 적일화는 혈지존에게 보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녀는이들 의 행동에 방해만 되었기 때문이다. 세사람 모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안색이 초 최해 있고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었다. 세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연기를 장력으로 날려버리자 무너져 버린 폐허 한쪽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사람 키가 넘는 듯한 석 암 바위가 우수수 밀려나가며 그 안에서 한명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온 몸이 너덜 너덜 해진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었다. "과연 천마강시로군. 오십여 장 방원을 폐허로 만든 벽력탄의 폭발에도 살아있다 니." "하지만 좀 쉬어야 할 것 같소. 이대로 계속 진행한다면 천마강시도 더 이상 견디 지 못할 것이오." 악도의 말에 천기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일을 남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네. 천마강시 한구면 천하제일인도 죽일 수 있다고 하는데 일개 기관하나를 반도 뚫기 전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지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혈존이 직접 설치한 기관이요. 당연한 것이오. 천마강시를앞세 우지 않고 우리끼리 왔다면 18관문의 반이 아니라 첫번째 관문에서 우리 모두 비 명횡사 했을 것이오." 천기노인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마강시를 보고 불안한듯 악도에게 물었다. "천마강시는 절대의 마물인데. 저것을 저토록 망가트렸으니 혈지존이 화를 내지않 을까?" "천만에. 혈존을 죽일 인물의 하나를 찾는데 천마강시 하나면 오히려 큰 득을 보는 셈이지. 혈존이 살아있는한 혈지존은 아무것도 못할 사람이요."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기야 천마강시는 원래 혈존이 만든 것을 혈지존이 가로챈 것이기도 하니까. 만약 혈존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마강시를 모두 빼앗길 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혈존을 죽이기 위해서는 한구가 아니라 지니고 있는천마강 시를 모두 투입해도 아깝지 않을 지도...그런데 말이야." "말해 보시오." "도대체 지금 구하려는 사람 대두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가 네번 째 인물이라는 것은 들었네만 왜 그가 혈존이 두려워 할만한 사람인가? 왜 이렇듯 엄중한 기관장 치로 막아 놓았지?" "그가 두려워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렇듯 엄중한 기관장치로 침입자를 막지 도 않았을 거요." "그것도 이해가 안가네. 기관을 보면 마치 팔대천마의 능력을 가진자들이침입이라 도 할까봐 막을 작정으로 설치한 것 같은데. 그렇게 자신에게 해가 가는 사람이라 면 왜 진작 죽이지 않고 가둬 놓은 건가?"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거요. 아직 이용가치가 끝나지 않았기에." "무슨 소리인가? 잠시 휴식도 취할 겸 말이나 해보게. 그는 어떠한 인물인가?" 악도는 천마강시를 힐긋 보았다. 놀랍게도 내장이 드러나고 뼈와 근육이 함께부숴 져 엉키고 가루가 된 상처들이 저절로 아물고 있었다. 폭약의 한가운데서도살아나 왔다는 것도 굉장한데 저정도의 재생력이라니. 가히 천마강시가 모든 사공술법의 최고로 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몇번 씩 보아도 놀랄만한광경이었 다. 하지만 연거푸 짧은 시간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덕인지 완전히 상처를 회복 하기는 힘들었다. 하기는 불길을 뚫고 독지를 건너고 한자 두께의 강철이 양쪽에서 백만근의 압력으로 짖누루는 것을 헤쳐 나왔으며 이제는 천근의 화약이 폭발하는 한가운데에서 걸어나왔으니 짧은 시간에 정상으로 돌아올 리는 없는 노릇이다. 악 도는 주변 바위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기노인은 혈존의 무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시오?" "글쎄? 아는 것이라고는 천하 모든 마공을 두루 섭렵하고 또 그 마공 사공의 절정 이라는 삼대사공이니 사대마공이니 하는 것을 모조리 익힌후 다시 그것을 근본으 로 새로운 마공을 창안했다고 들었네만. 낙마곡을 발굴하여 천하의 마공비급을 모 두 얻었다던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한사람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오?" "하지만 혈존은 그것을 해냈지 않나?" "흥. 아무리 천재라도 절정 마예 하나만을 익혀도 평생을 다해도 완전히 익히지못 하는 것이 무공이요. 혈존의 예를 따서 몇가지 절예를 동시에 익히는 자가 백도나 마도에서도 다시 나타나는 모양이지만. 내 장담하겠소. 어설푸게 여러가지를 익힌 자보다 한가지 절정무예를 완전히 터득한 자가 열배는 더 강하다는 것을. 아무리 비급이 있다고 해도 모든 종류의 마공과 사공을 완벽하게 익힌다는 것은 천재가 아니라 그 할아비라도 불가능하오." "아네. 하지만 혈존에게는 가공할 배교의 술법이 있지 않나? 나도 천기를 보아 아 네. 혈존 자신을 제외하고 팔대천마로 불렸던 다른 칠인들. 죽은 그들을 나타내는 빛이 다시 하늘에 떠올랐다는 것을. 아마도 혈존이 그들의 영혼을 불러모아 무공의 전수를 강요했겠지. 스스로 비급을 해석하는 것과 완전히 터득한 자에게서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전수받는 것은 틀리니까. 게다가 무공 수위가 비슷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 심득을 얻는 것은 더욱 쉬었겠지." 악도가 피식 웃었다. "과연 천기노인이구려. 나도 혈존이 익힌 마공을 보고 그런 짓을 했으리라 짐작을 했지만 천기노인이 확인시켜 주는 구려. 그러면 다시 묻겠소. 칠대 절학을 그들을 강요해서 쉽게 풀이하여 얻었다고 칩시다. 그럼 그것 모두를 통합하여 새로운무공 으로 만든 다는 것이 쉬운 일이오?" "그건? 그럼 혈존에게 뭔가 비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두자라는 인물이 그것 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과거 천명에 해당하는 천재가 사라졌소. 모든 것은 내 추측이오만 혈존이 했으리 라고 내가 짐작하는 것은 반드시 그자가 그리 했으니 이번도 틀리지 않을 것이오. 이 기관과 내가 혈지존에게 얻은 정보가 그 뒷바침을 하오." 과거 천명의 천재가 사라졌다. 세살때 사서오경을 외우던 자들. 남보다 두세배 머 리가 뛰어나고 이해력이 높은 자들. 커서 나라의 동량이 되리라고 촉망받던 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천재들의 실종의 배후에는 혈존이 있었다. 납치된 천재들은 사지가 잘리고 근맥이 폐쇠되고 두 눈을 상실했다. 그들의 주변 모든 환경이 차단되었다. 그들은 외부의 어떤 자극도 감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그 들은 먹고 마시며 생존하는 것도 벽곡단으로 생활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듣고 말하고 생각하며 이해할 줄 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혈존은 천명의 천재들에게 한가지씩 마공의 구결을 알려 주었다. 한가지 마공을열 가지로 찢어 각 구결 하나를 한명의 천재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였다. 먹고 자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밖에 없는 천재들은 생각하는 기계가 되 었다. 무공을 해석하는 기계. 그들은 자신이 얻어들은 구결을 외우고 해석을 하고 주석을 달아 말하는 것이 살아가는 증거였다. 그렇게 혈존은 모든 마공의 완벽한 해석 구결을 손에 넣었다. "어린 아이들도 쉽게 익힐 정도로 완전한 해석. 단어 하나에도 수십가지의 주석이 달려있는 구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예를 들어 만든 글귀. 그렇게 하나 하나의 불가해 마공이 손쉽게 풀이된 반자 두께의 비급으로 변했소.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은 자가 바로 혈존이오. 생각하는 천재두뇌들을 기계로 만들어 혈존을 대신하여 모든 구결을 풀어나갔소. 혈존은 어떤 사부로 부터도 받지 못할 자상한 해석을 바 탕으로 쉽게 그 구결을 손에 넣었지." "그... 그럼 그 천재들이 여기에 갇혀 있단 말인가?" "훗. 사람의 심력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오. 혈존은 하나의 마공이 완성되면 그 마 공들을 합하여 새로운 마공으로 만드는 작업을 그들에게 맡겼소. 그렇게 하나하나 새로운 마공이 완성되었지. 마공이 완성되고 더 이상 천재들의 두뇌가 새로운구결 을 만들지 못할 때 혈존은 그들을 하나씩 죽였소." "그럼 대두자는 그들 중의 하나?" "유일하게 살아있는 자요. 동시에 혈존의 최후의 마공. 그 이름은 모르지만 마도 사도의 칠대 절예와 모든 마공의 장점을 하나로 모은 최후의 무공을 해석하고 있 는 자이오." 천기노인이 흥분한 듯 악도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자야 말로 보물이 아닌가? 혈존의 최후 마공을 아는 자. 그자를 찾아내면 혈존의 최후 마공의 구결을 알게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악도가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그렇게 허술하면 혈존이겠소? 내가 혈존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오. 아마도 최후 의 마공을 창안하려고 자신이 구성한 기본 구결을 생각해내고 열명 정도의 최고의 천재들에게 구결을 나누어 맡겼겠지. 그리고 하나의 구결이 완성될 때마다 그자를 죽였을 것이오. 다른 모든 자들이 죽었다는 것은 그 구결이 완성되었다는 것.대두 자가 살아있다는 것은 최후마공의 마지막 한 구결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오.듣 기에 혈존은 두가지 새로운 마공을 익히고 있다고 하오. 대두자의 최후 구결이 완 성되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완성된 구결만으로 대신 만든 것이겠지. 그렇지 않 다면 혈존이 그자를 살려 둘리가 없지." "호오." "혈지존에게 이곳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이곳에 한명이 갇혀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혈존이라면 이렇게 했으리라고 추측했소. 대두자라는 이름은 내가 붙인 이름이오. 하지만 아마 절대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오." "참 이상하군. 자신의 일이라면 둔재보다 못해 버벅 거리는 자네가 혈존에 관한일 이라면 제갈공명이 되니 말이야. 차라리 자네가 혈존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처 리해 보는 게 어떤가? 그럼 혈존만큼 자네도 성공하지 않겠나?" "풋. 혈존의 행동이나 흔적을 보면 이렇게 했으리라는 것이 저절로 떠오르오.아마 도 혈존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겠지. 하지만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 오. 혈존의 흔적을 보고 이랬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혈존이 이렇게 하리라 는 계획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소." "허허. 하기야 그러니까 자네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지 않은 거겠지. 그런데그자 가 혈존의 최후 무공도 아니고 그 구결의 한부분. 그것도 완성되지도 않은 한부분 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자가 필요한 건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쓸모가 있는 것이오. 그것이 혈존을 죽일 유일한 급소가 될것 이오. 천기노인이 혈존의 위치를 파악하고 내가 그자의 대응을 대비하고 배교의혈 손이 배교쌍노로 하여금 그자를 완전한 함정에 빠트린다고 해도 그자를 제압하지 못하면 말짱 헛거요. 혈존이 그 최후의 마공을 전개하면 천하에 그자를 잡아 놓을 것이 없소. 오직 최후의 구결로 그자의 허술한 부분을 미리 알고 대응하는 수밖 에." "혈존의 무공은 완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자네의 추측아닌가? 천기도 그렇게 나 와있고."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 혈존을 상대하려면 만의 하나라도 빠트릴 수가 없소.그 리고 혈존이 대두자가 이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는 것도 사실이고. 혈존의 마음에 불안이라는 감정을 심어주기만 해도 대두자의 역할은 성공이오." 혈존이 설치한 최후의 기관은 무서웠다. 대두자가 매달린 쇠사슬이 산의 용맥과이 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푸는 순간 용맥을 막은 만근 한옥이 벽력탄에 폭발되 었고 용암이 분출되었다. 놀랍게도 혈존은 활동하고 있는 화산을 눌러 그 위에 대 두자를 감금하고 기관을 설치했던 것이다. 천마강시가 녹아내렸고 천리추종이죽었 다. 천기노인은 신선 같은 풍모를 잃고 온 몸에 흉측한 화상을 입었다. 그 와중에 악도가 배교의 술법을 써서 천기노인과 대두자를 데리고 빠져 나온 일은 거의 기 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천기노인은 침대에 누워있고 악도가 그의 앞에 서있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찾을 여인은 바로 이 여인이오." 악도가 품에서 하나의 족자를 꺼내 놓았다. 족자에는 한 폭의 선녀도가 그려져 있 었는데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여인은 누군가?" 천기노인이 온몸을 붕대로 감은 체 물었다. "이름은 악산산. 생김새는 보는 것과 같고 혈존 백가량의 첫사랑의 여인이오." 순간 천기노인은 두 눈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너무나 엉뚱한 말이었던 것이다. "무... 무슨 소리인가? 혈존의 첫사랑. 그 나이대의 여자라면 호호백발 노파가되었 을 텐데 이 그림으로 찾자고? 아니 살아있을 지도 알 수가 없군." "물론 죽었소. 호호백발 노파가 되어 늙어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그림처럼 젊은 나이에 죽었소. 그것고 혈존의 손에 죽었지. 한 백년쯤 전의 일이오." "자네 누구를 놀리는 건가? 영혼을 부리는 회혼술이라도 하잔 말인가? 백년 전 죽 은 여인을 찾자고?" "악산산을 찾자는 게 아니오. 다만 이 여인과 모습이 같은 여인을 찾으면 되오.모 습만 같으면 분위기는 내가 교육시킬 수가 있소." "세상에 용모가 완벽히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차라리 비슷한 인물을 찾아 수 술을 통해 모습을 뜯어 고치는 것이 쉽지." "절대 안되는 말이오. 혈존이라면 단번에 하늘에서 내려준 용모인지 누가 만들어낸 인공의 용모인지 알 수가 있소. 꼭 이 여인과 같은 용모를 가진 여인이어야하오." 천기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알고서 사람을 찾는 것과는 달랐다. 그야말로 천 하를 뒤져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기를 본다고 해서 용모가 별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들이 할 수가 없는 일이군. 천하를 뒤져야 하는데 그런 여자가 있을지도모르 고. 일단 혈지존의 힘을 빌릴 수밖에. 그럼 한가지만 말해주게. 본인도 아니고 단지 용모만 같은 여자. 그것도 기껏 혈존의 첫사랑이 어째서 혈존에게 두려운 사람이 되는가?" 악도는 족자의 여인을 보다가 한 숨을 쉬었다. "천기노인은 마누라에게 무릅을 끓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런 말도 안되는... 천하 남자의 대표적 망신이네. 사내라고도 할 수 없지." "그럼 자신의 여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내를 등에 태우고 말 흉내를 내고 여자 가 시킨다고 개짖는 소리를 내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그런 남자 망신을 다 시키는 공처가가 있단 말인가?" "여자의 장난 때문에 광대짓을 하고. 온갖 망신을 당하고. 그래도 허허 웃으며 여 자가 손짓하면 단번에 달려가 온갖 애교를 떠는 남편은?" "설마?" "악산산은 천진하지만 장난이 심한 여자였소. 특히 남편을 골탕먹이고 웃기를좋아 했지. 혈존은 그런 장난을 하는 악산산을 좋아했소. 그때는 그냥 백가량이라는 남 자였지. 아내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고 기꺼이 아내의 짖굳은 장난에도 팔불출처 럼 허허 웃기만 하는 애처가. 공처가 보다 훨씬 심한..." "설마 혈존이? 여자를 정액받이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혈존이? 말도 안돼. 자네 농 담이 너무 심하군. 자신이 아닌 사람들은 가축으로 보는 혈존이 그런 시절이 있었 단 말인가? 자신의 혈손이라도 비위가 거슬리면 서슴없이 죽여버리는 혈존이?" "사실이오. 유일하게 혈존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여자였소. 혈존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오. 악산산이라는 여인은." "그런 여자를 어떻게 혈존이 자신의 손으로 죽였나?" "쿠후후. 그녀는 무공을 모르는 여자였소. 무공을 익힐 필요도 못느낀 여자였소. 그리고 동네 불량배에게 겁간당했소. 미쳐버린 그녀를 죽일 때 자신의 손으로 죽일 때 혈존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소. 그때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죽어버렸지. 그녀 를 죽였다는 불량배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만으로 혈존에게 인간은 더 이상 존중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소. 그것이 자신의 자식일 지라도. 생각할 수가 있소? 천하의 악마를 동네 불량배가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을." 천기노인은 한동안 아무말도 못했다. 천하의 악마 혈존과 혈존을 종 부리듯이 했던 여자?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결국 혈존도 인간은 인간이었단 말인가? 한 여인의 죽 음으로 악마가 되었을 정도로 마음이 약한 남자였단 말인가? 천기노인은 옛날에 죽었을 그 불량배들을 찢어죽이고 싶었다. 물론 그들의 최후야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혈존이 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 마을 전체가 씨몰살을 당했을 지도. "하지만 악산산은 죽었지 않나? 그저 그녀와 닮았다고 해서 혈존의 마음을 흔들 수가 있을까?" "있소. 자신할 수가 있소. 아직도 혈존은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으므로. 그것이혈 존의 유일한 인간의 감정이므로. 그녀와 닮은 여자가 있다면 반드시 흔들릴 것이오. 물론 뱃속에서부터 이 용모를 타고난 여자여야 하겠지만." 악도가 내어놓은 그림 속의 여자. 놀랍게도 그 여인의 얼굴은 바로 무림칠미의 하 나인 금혜연의 얼굴이었다. 바로 백이충의 약혼녀인 금혜연. 49. 악도(4) 오형산. 폐허가 된 자미관에 한 명의 지저분한 노도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산전 체를 흝어 보듯 움직이던 노도인은 자미관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백도맹의감찰기 관 수찰단의 영주라는 노도인. 갑자기 오형산 괴사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백도맹 무사들을 이끌고 온 늙은 도인이었다. "흐흐. 이것이 백수존자의 흔적이라고? 헛소리." 노도인은 바로 악도였다. 그는 땅의 흔적을 살펴보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요력이 산 전체를 휘감았다가 사라진 흔적이 있다. 이것은 한 때 요계와 통하는 통로가 이 산에 있었다는 이야기. 오형산 괴사는 요괴의 짓이야." 악도는 자미관 폐허에 새겨진 흔적 하나 하나를 검토하며 확신에 찬 어조를 내뱉 었다. "정말 대단하군. 적어도 천년의 요력을 가진 요괴가 최소한 다섯에서 열 정도사이 의 엄청난 괴물들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것들. 이들이 날뛰었다면 나라가 흔들리고 국조가 망했을 수도 있었던 일. 그리고 그것들의 요력에 힘입어 요괴화 되었던 것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고." 악도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무엇이 요계를 열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뿐이지. 이 흔적들 중에는 배교의 요요경의 흔 적이 남아있는 것이 그 증거다. 요요경의 주인은 바로 혈존이지." 악도가 중얼 거릴 때 자미관의 뒤쪽에서 한명의 노인이 나왔다. 바로천기노인이었 다. "무엇을 발견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겠소.천하 를 뒤집을 정도의 요력이 일어났다가 한 순간에 소멸 되었소. 혈존의 마음을 모르 겠군." "허. 자네가 혈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다고?" "확실히 혈존의 흔적이 보이기는 하는데. 혈존이 이곳에 나타났다면 천지간에가득 찬 요력과 요기들을 거두어 저장하고 수많은 요괴들을 사로잡아 수하로 이용해야 했소. 하늘도 땅도 자신의 밑이라고 생각하는 혈존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당연 한 일이거늘. 헌데 대부분의 요력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듯 하니 이는 혈존의평 소 행사와는 너무도 다르오." "그럼 혈존의 흔적이 아니란 말인가?" "그건 아니오. 틀림없는 혈존이 이곳에 나타났소. 오형산 괴사의 배후에는 혈존이 관련된 것이 틀림없소. 허나 이곳에서 그가 노렸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산전 체를 뒤덮을 정도의 요력을 모은 것이 혈존일 텐데 그것을 무상으로 자연으로 돌 려 보내다니... 아무리 요력이 큰들 그것을 제압하지 못할 혈존도 아닐텐데 이것을 이용하지 않다니." "흠. 이십 년이 지났으니 뭔가 음흉한 속이 더 깊어졌나 보지. 이 단서로는알지못 하는 다른 음모가 있을 거네. 그럼 더 알아낸 것은 없나?" "오형산 괴사에 대해서는 백도맹에서 조사했다하니 그 서류를 뒤져 봅시다." 청해성 백도맹 지부. 그곳에 감찰나온 순찰 영주 한명이 들이닥쳤다. 순찰영주는 백도맹 지부장이라는 지책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감찰이라는 임무 탓으로 늘 책임 자에게는 영 껄끄러운 인물들이다. 무공과 공적 외에도 사소한 비리 하나가 승급과 승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청해성 지부장은 영 뒤가 깨끗하지 못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 외에도 곤륜파 제자라는 배경으로 청해 지부장에 오른 자였다. 그동안은 중앙에 뇌물을 바침으로서 승진을 기대함은 물론 감찰도형 식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예고도 없이 순찰영주가 들이닥친 것이다. 지부장은 그를 귀빈으로 대접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번 순찰 영주는 다만 과거의 오형산 괴사에 대한 보고서류만을 요구했기에 지부장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 쉴수가 있었다. "혈지존의 힘이 백도 까지 뻗어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청해 지부장이 물러나자 천기노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악도에게 말했다. 백도맹 무 사들과 동행하여 오형산을 올랐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실제 백도맹의 중지라 할 수 있는 청해 지부에 들어가 당당히 위세를 부리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백도맹과 혈지존은 서로 타협할 수가 없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러자 악도가 고개를 내저 었다. "백도맹 뿐이겠소? 그는 황실에도 손을 뻗고 있소. 문제는..." 악도의 얼굴에 두려움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단순히 진짜 영패를 사용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각 조직에 뿌리깊 게 수하들을 뿌려 놓은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오. 그동안 우리가가 는 곳마다 그 지역의 세력이 우리를 접대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조사를 도와주었 소.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그들 각 조직의 상부에서 나온 사람들로 알았 소. 무서운 것은 그것이 위장이었다면 지금쯤 어느 한곳에 무슨 말썽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임시로 사용한 신분이 진짜라는것이 오. 만약 그가 천하의 세력 전체에 수하들을 잠입시켜 놓고 그 세력의 일각을조종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그는 혈존 못지않게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이증명 되는 셈이오." 천기노인도 혈지존을 떠올리고는 두려운 감정을 가졌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네. 혈존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 같은 자에게 신경이나 쓰겠나? 혈지존이무 서운 자일수록 우리가 그힘을 빌려 혈존을 없앨 가능성이 더 커지니 기쁜 일이지. 혈지존이야 사냥이 끝난다고 한들 잡아봤자 아무 쓸모도 없는 사냥개만 남는데 무 엇이 아쉬워서 우리 따위에게 신경을 쓰겠나?" 악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존을 없애기 위해 모인 다섯은 모두 혈존 그에게만 위 협이 되는 자였다. 혈지존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 천기노인이 혈지존의 위치를 알아낸다고 해도 그는 천하의 공적이 아니니 천하가 합세하여 죽이려고 하 지도 않을 것이고 악도는 혈지존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배교의 마지막 혈손 은 혈지존에게 아무런 약점도 되지 않으며 대두자는 혈지존의 무공과 아무 상관도 없다. 또한 혈지존의 첫사랑이 누군지 그 누가 알겠는가? 따라서 혈지존에게 그들 다섯은 혈존을 해칠 수 있는 그의 유용한 비수가 될 뿐 그 자신을 해할 수 있는 도구는 되지 못했다. 위협이 되지도 않고 해친다고 해서 득이 되지도 않는자 를굳 이 해칠 필요는 없으리라. "그보다 서류는 어떤가?" "마무리 보고를 올린 자는 바로 백호검이라는 자. 백도맹에 꽤 힘을 쓰던 무당파 출신 제자요. 하지만 그는 무적소야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죽은 자로 되어 있소. 흥. 말도 안되는 소리지. 오형산 괴사를 처리했다 함은 반드시 그자가 혈존의마수 에 접촉했다는 증거. 혈존이 그를 살려주었다 함은 그를 도구로서 이용하고자계획 을 짰던 것이니. 혈존의 도구로 선택된 그런 자가 벌써 죽었을 리가 없소." "흠. 하지만 그자가 죽지 않았다고 해도 죽음을 위장했다면 찾기가 힘들지 않겠나? 다른 것은 없나?" "백호검의 사매가 한명 같이 살아 돌아왔구려. 옥수비연이라던가?" "무림 칠미의 한사람이지? 그 여인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그 여자부터 조사를 하면 되겠군." 악도가 고개를 저었다. "혈존은 계집을 욕정의 배출구로만 여기는 자요. 결코 자신의 쓸만한 도구로 생각 하지 않소. 아마도 백호검을 백도맹에게 위심받지 않도록 살려둔 거겠지. 계집이 천하를 뒤흔들 대 세력의 지존이라는 신분이면 몰라도 무당파의 속가제자 금가장 의 딸이라는 신분으로는 이용가치가 없소. 아마도 관계없을 것이오." "허. 그렇다면 다음은 어디가서 혈존의 소식을 알아봐야 하는가?" "이곳의 요기를 이용하여 그자의 행적을 알아볼 수는 없소?" 천기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되네. 그자는 혈마전혼대법으로 몸과 운명을 바꾼 자야. 그자가 현재 지닌 몸의 기운을 읽지 못하면 천기로도 그자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하네. 이곳의 요기는 너무 지독하고 요괴들의 것과 뒤섞여 있어 혈존의 기운을 분간해 낼 수가 없네." 악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백호검이 죽었다는 곳에 가서 사술의 흔적을 살펴보고 그의 무덤을 한번 더 조사해 보고 천뇌교가 발생했다는 감숙성에 한번 가봅시다. 천뇌교가 한때 이름을 빌렸다가 소멸시켰다는 신녀교란 곳도 혈존의 냄새가 나오." "천뇌교를 직접 조사해보잔 말인가? 우리 둘이서?" "천뇌교를 조사해 볼수는 없어도 신녀교는 조사해 볼 수 있소. 듣자하니 감숙일대 에서는 신녀교의 제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거의 없다고 들었소. 천뇌교는 신녀교를 해산하고 그들 중에 무인들만을 모아 만든 무림의 집단이지만 해산된 신녀교는 일 반 백성의 광신도들의 집단이었소. 감숙을 뒤져 수소문하다보면 쓸만한 것을 건질 지도 모르오." 악도와 천기노인은 사천을 통해 섬서 성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하남으로 건너왔다. 그동안 혈존의 흔적을 샅샅히 조사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들이 돌아다닌 천하의 정 세는 살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겁을 먹고 집밖을 나서지 않았고 관도를 지나가는 것은 모두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 뿐이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고 비장하여 감히 관군도 무림인들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햇다. 누구나앞으 로 커다란 무림의 전쟁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천 지방은 당가를 비롯한 무림 명문과 아미 청성 점창등이 뭉쳐 칼을 갈고있었 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림인과 일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검문을 했다. 하나같이 혈천마궁에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백도맹에서 섬서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사천은 그들 자신이 혈천마궁을 막아야 했다. 물론 백도맹이 그런결 정을 내린 것은 구파 일방 중에 무려 3개 방파와 당문을 비롯한 거대 무림 명문이 사천에 많이 몰려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섬서에는 화산 종남등의 무림인이 모두 화산에 집결했다. 그리고 백도의 천무호정 단이라는 정예들이 대거 파견나와 있었다. 사천의 위기감과 다르게 섬서는 어느정 도 여유가 있었는데 천무호정단이라는 백도맹의 세력이 구파일방의 장로급 인사들 로 구성된 최강의 세력이라는 이유와 함께 백도맹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천과 섬서를 지나쳤을 때도 사전에 그들의 행방이 백도맹에 연락되어 순찰령주의 신분으로 거의 아무런 검색없이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이다. 하남은 백도맹의 총단이 있는 주요 거점이다. 하남에서 백도맹 총단으로 향하는수 많은 무인들이 길을 오고가고 있음을 악도와 천기노인은 볼 수가 있었다.혈천마련 이 선포한 날자가 다가옴에 따라 백도맹에서 초 긴장상태에 있는 것이었다. 일단 백도의 저력을 분산시킬 수가 없어 섬서에 집중시키기는 했지만 중소문파의 구원 요청과 청원이 빗발치듯 백도맹 총단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백도맹 의 사기는 충만된 듯 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백도맹에는 내분의 어 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적소야 모용풍이 천무삼성의 일인 현무도선을 죽인 혐의로 잡혀오다가 자결했다 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실이야 말로 백도맹의 노강호들과 젊 은 고수들을 분열시키는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었다. 백도의 젊은 고수들에게무적 소야는 천무삼성 못지않은 우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무적장왕이 노력한 탓에 오대 세가와 구파일방의 사이는 그리 벌어지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오대세가의 젊은 고 수들이 무적소야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몰아붙인 무당파를 비롯한 구파일방에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악도는 하남성에서 복우산에 이르렀다. 이곳이 천하의 큰 별인 천무삼성의 하나가 스러진 곳이다. 혈지존은 복우산을 너무 헤집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왔다. 복우산에 백도맹의 중요 비밀 하나가 있으니 빨리 조사를 마치고 철수하라는 것이었다.악도 는 무적소야 모용풍이 현무도선을 죽였다는 장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악도는 혈존 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그는 익숙한 어떤 흔적을 대신 발견했다. 혈존의 것은 아니나 혈존과 관계가 깊은 기운으로 바로 얼마전 그들이 발견한 것 이었다. "혈존이 직접 오지는 않았군." "뭔가 발견했나?" "오형산에서 봤던 요기가 나타났던 흔적이 땅에 남았소. 도가의 선문출신이라도이 런 것은 모르지. 전진이나 배교가 아니면 요기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니까. 이건 아무래도 오형산의 요기가 백호검이라는 자와 연관된 것 같소. 모용소야와현 무도선의 일에는 혈존이 백호검만을 투입하여 개입을 한 것같소. 오형산의 일은아 마도 현무도선을 노리고 혈존이 그 수단을 삼기 위해 백호검에 손에 넣기 위해 벌 인 일인 모양이오." "그렇다면 혈존이 개입했다는 말인데 혈존의 흔적이 없는 것인가?" "전혀 없소. 놀라운 일이오. 혈존이 어떤 수를 썻는지 몰라도 백호검이 요기를 발 출하여 현무도선을 해할 정도의 어떤 힘을 발휘하였소. 백호검이 천무삼성 못지않 은 강자가 되었다는 소리요. 하지만 단순히 그를 이용했는지 이곳에서는 오형산의 요력 이외에는 오형산에 있던 혈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소." "검후를 겁탈하려 하고 현무도선을 죽였다는 무적소야의 일은 누명을 쓴 것이겠군. 어떤가? 이 정보는 백도맹에게 크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혈지존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나?" "우리의 일은 혈존을 추적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 을 테니 아마도 누군가 우리 뒤를 따르고 있을 것이오. 우리가 알아낸 사실은저절 로 혈지존의 귀에 들어갈 것이오." "그 백호검이라는 자도 죽었다던데?" "쳇. 이 요기를 가지고 천기를 살펴 보구려. 과연 그자가 죽었는지. 수많은 요기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자의 기운은 읽을 수 있지않소? 아마도 혈존이 그 자를 어딘가에 또 사용하기 위해 감춰두고 있을 것이오." "그럼 그자의 요기를 분석하여 천기를 살펴보고 그의 종적을 먼저 찾아낸 후 그를 통해 혈존을 탐색하는 것이 어떨까? 그자를 감시하면 자연히 혈존의 행방도 알아 지지 않겠나?" 악도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극명한 공포가스쳐지나 갔다. "미쳤소? 우리는 절대 혈존의 근처에도 가면 안되오. 괜히 그의 주변 흔적을 알아 내고 얼쩡거리다가 발각이라도 난다면 어쩌려고? 혈지존도 우리를 구해 줄 수가 없소. 그리고 십중 팔구 발각이 날 것이오. 그것은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 놓읍시다. 혈존이 최후를 마쳤다고 확인하기 까지는 절대 우리는 그가 우리를 알아챌 영역에 발을 들여 놔서는 안되오. 일단 감숙성에 갑시다. 운좋으면 혈존의 흔저을 발견하 고 그 기운을 가려낼 수 있을지 모르오. 그 때는 우리는 안전한 장소에서 당신이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가 있소." 감숙에서는 천뇌교의 이목을 피해야 했다. 천뇌교는 혈존의 수하라고 혈지존에게 의심받고 있는 방파였다. 고지식한 백도맹에서는 과거 사도의 정통을 이어받은 귀 영신군이 새로 개파했다고 믿고 있지만 혈지존이나 악도의 생각은 달랐다. 첫째로 귀영신군은 혈천마련의 비위를 거스릴 만한 인물이 안되었다. 또한 명분은 있는지 몰라도 천뇌교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사공은 혈천마련에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천뇌교는 전혀 혈천마련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두가지 가능성이겠지. 혈존이 남긴 어떤 것을 얻어 힘을 얻었거나 혹은 혈존에귀 속되었거나." 아무리 악도라고 해도 이 두가지가 모두 맞는다는 것은 몰랐다. 실재로 신녀교는 혈존이 남긴 혈향초를 얻어 세력을 얻은 광신교이고 천뇌교는 귀영신군이 혈존에 투항함으로서 신녀교에서 무림 세력만을 뽑아 새로 재건한 교단이었다. 귀영신군은 사문의 사공은 물론 혈존으로부터 배교의 술법마저 얻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혈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 천뇌교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악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혈존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천뇌교를 엄중 감시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세력처럼 수하들을 뿌려놓지 않았다. 하기는 진짜 혈존 이 연관되어 있다면 천뇌교에 수하를 뿌려 놓는 것은 자신의 종적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악도는 감숙을 돌아다니며 천뇌교를 피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 리고 그는 뜻밖의 사실 하나를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신녀교의 최고 수뇌가 천뇌교와 상관없는 신녀였다고? 그리고 신녀가 스스로 신 녀교를 해체했다고? 이건 또 혈존이 무슨 수작을 부리느 것일까? 가만 두었다면 감숙 일대 전체를 무림과 백성, 관리마저 수중에 넣을 수가 있었을 텐데? 혹여 외 부의 진압으로 그렇게 발전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천하는 어지러워 졌을 테고 그 렇다면 혈존이 활동하기가 더욱 편해졌을 텐데. 천뇌교만 손에 넣는 것은 최소한의 이득만 취한 꼴이 아닌가?" "그렇다면 혈존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혹여 그냥 혈존이 남긴 무엇 하나를 얻어 귀영신군이 천뇌교를 연 것이 아닐까?" "글쎄. 확신은 못하겠군." 악도는 고심에 빠졌다. 이십년 만에 혈존의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은 번번히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정확히는 그의 예상에서 조금씩 빗겨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악도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심지어 천뇌교와 혈존의 관계마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보다 신녀교의 신녀라는 존재. 그 초상화를 만들었는데 말일세." "아. 되었소?"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바로 자네가 만들었던 족자의 그림의 얼굴과 같아. 마치같 은 사람처럼 말일세." "그게 정말이오?" 악도의 얼굴에 커다란 놀람이 생겨났다. 다섯번 째 혈존을 공격할 여인의 얼굴은 그로서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신 녀교를 해산하고 사라진 신녀의 얼굴이 혈존의 첫사랑을 닮았다니. "놀라운 것은 그녀의 신분이네. 그녀는 오형산 괴사에서 살아남았던 바로 옥수비연 금혜연이야. 오형산에서 그녀가 살아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네. 혈존은그 녀 근처에 있을 거야." <혈천마련 출도> 혈천마련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신강에 있었다. 신강은 과거 천년 마교가 있던 터이기도 했다. 중원에 있던 혈천마궁을 배반하고 혈천마 궁의 흔적을 감춘후 천하 각지로 흩어졌던 혈천마련. 그 대련주가 천 년마교의 후신인 천마전의 천마황이 되었기에 그들이 신강에 모인 것 이다. 그들은 혈천마련의 압도적인 힘과 위엄을 천하에 보여주려고 했 다. 그래서 당당히 혈첩을 보내 천하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그들 이 기다리던 때가 되었다. "하하하. 우리 혈천마련이 단숨에 천하의 반을 정복할 힘이 있음을 증 명하리라." 혈천마련의 련주가 된 천마황이 괴소를 터트렸다. 그는 천하가 증명한 최강의 흑도 무공, 사대 마공과 삼대 사공의 위력을 이삼 성 정도 높 힌 구결을 자신의 사제들에게 전수하여 완벽하게 그들을 장악하였다. 물론 그들의 수련이 짧아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기도 한 혈사황처럼 마 음이 동화되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혈천마련의 이전주 혈사전의 혈사황은 사천을 장악하라." 천마황의 명에 그의 쌍둥이 동생이며 사도 최강이라는 천사음유공을 익힌 혈사황이 즉시 무릅을 끓고 복명했다. 사천에는 사천 당문을 포 함하여 아미, 점창, 청성등이 몰려있는 와호잠룡의 지역이었다. 백도맹 과의 거리가 있어 비록 백도맹이 지원을 하지는 않았지만 각 파에 해 당하는 장로와 제자들이 모두 사천으로 돌아간 이후였다. 그리고 사천 귀주 감숙등의 백도 문파들이 모두 사천에 모여 혈천마련에 대항하기 위해 뭉친다는 소리도 있었다.만만치 않은 세력일 것이 틀림없다. 그 러나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과거 혈사곡이 천하를 도모할 때도 이 들 몇몇 방파 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하물며 이십 년이나 숨어 힘을 기른 혈사전의 세력은 혈사곡 시절의 두배에 달했다. "삼전주 검마전의 마검황은 청해를 장악하라. " "사전주 요지마전의 요지마후는 때가 아니니 백도의 동정을 좀더 살 피며 때를 기다려라." "오전주 벽력마전의 음양마황은 섬서를 장악하라. 백도맹이 지원한다 고 하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된다." "육전주 만상여의는 본련의 군사이니 이곳에 남아 대계를 지휘하라." "칠전주 철갑마전의 철마황은 운남과 귀주를 장악하라." 천마황의 명이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 천뇌마전의 군사 만상여의가 고 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제가 듣자하니 감숙에 귀영신군이 천뇌교의 이름 감히 도용하여 개 파를 했다고 하더이다. 그자를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귀영신군 따위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감히 마도 사도를 통합한 혈천마련이 발족하는 데 감히 천뇌교의 이름을 쓰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네가 직접 나서지는 말더라도 수하들을 풀어 천뇌교를 접 수토록 해라. 듣자하니 세외의 도적들. 황사칠십이풍이 가세했다 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존명." 천마황은 그들을 바라보며 계속 명을 내렸다. "광동과 광서는 본련의 정예인 혈천수호대를 보내 쓸어 버리겠다. 장 로원주 마승상은 명을 이행하라. 이로서 천하는 본 혈천마련의 무서움 을 알게 될 것이다." 요지마후가 못마땅 한듯 미간을 찌푸렸다. "본 련의 세력이라면 백도맹이 있는 하남과 중원 본토를 단숨에 공략 해도 모자람이 없을 텐데 어이하여 변방을 먼저 공략하시려 합니까? 왜 전력을 기울여 백도맹의 근거지를 처부수고 단숨에 천하를 장악하 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전주의 말도 일리는 있다. 허나 우리는 이십년의 세월을 숨어 살며 정예를 양성하였다. 허나 절정고수는 많되 일급무사와 하급무사의 수 가 부족하다. 저들 백도는 이십 년간 절정고수의 양성과 함께 하부층 을 두텁게 만들었다. 본련의 하급무사의 수는 백도맹에 비해 절대적으 로 부족하다. 자칫 잘못하면 두주먹이 네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 가 온다." 천마황은 위엄있게 요지마후를 내려다 보았다. "정복은 적을 처부수고 땅을 차지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고 저항을 잠재울 힘이 있어야 한다. 백도맹의 저력을 그리 만 만하게 볼 것도 아니지만 백도맹의 세력의 근거지가 되는 중원의 주요 거점을 우리가 일시간에 장악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다스릴 인원이 부족할 것이다. 그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여기저기에 지 부를 설치해야 하는데 천하에 본련의 세력을 흩어놓는다면 모자란 하 부무사들은 그곳의 오합지졸을 모집할 수밖에 없다. 그 때 백도맹의 두터운 일급 무사들이 숨어 대항한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우리 혈천마련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중원의 외곽 지역을 먼저 도 모하여 각 성에 할거하는 방파들을 굴복시켜 그들을 하부세력으로 만 들어야 한다. 하급무사들을 확보하여 위 아래를 모두 투텁게 만든다음 백도맹의 본거지 한성 한성을 차근 차근 정복한다면 중원 무림을 더욱 수월하게 무림을 정복하리라." 요지마후는 불만인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는 못 했다. 천마황이 개조한 환희염정술의 구결을 넘겨 받은 후 무공은 크 게 증진했지만 갈수록 천마황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다. 마음 깁숙한 곳에서부터 천마황에 대한 복종심이 크게 자라나는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천하는 혈천마련의 공포를 알고 스스로 복종하게 되 리라." "혈천마련이 혈첩을 내려 예고한 시간이 다되어 갑니다." "그래. 모든 것이 시작되겠지." "신강에서 놈들의 세력이 천하 각지로 파견되고 있습니다. 각 방파와 백도맹도 이제는 그들의 행적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놈들의 저력은 모르겠지. 절정고수의 수를 봤을 때 혈천 마련 놈들은 백도맹의 다섯 배가 넘는다. 천무삼성도 둘 밖에 남지 않 았으니 백도맹으로서는 역부족 일거다." "그 배신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환마의 말에 혈존 백가량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백가량의 마음을 거부하던 백이충이었지만 그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인 이후 갈수록 그의 마음은 백이충의 본래 마음보다는 혈존 백가량의 마음으 로 변질되어가는 백이충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첫째와 둘째도 싸움판에 끌어들여야 해. 그전에 는 등장 할 수가 없다." "하오나 그리되면 혈천마련이 천하를 장악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아. 이번 싸움에서는 백도와 혈천마련 둘다 지는 전쟁이 될 것이다." "예?" "현재 혈첩이 예고한 지역 중에서 백도는 두군데에 힘을 집중시켜 혈 천마련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다. 사천과 섬서지역이지. 이 두군데에서 백도는 혈천마련에 크게 패할 것이다. 백도가 주춤거리게 되겠지." 백가량은 지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는 천하의 지도가 놓 여져 있었다. 지금은 전 지역이 백도맹을 상징하는 백기가 꼽혀 있었 다. 중간 중간에 백도맹의 백기와 각 지역의 패주를 상징하는 색의 깃 발이 동시에 꼽혀 있기도 했다. 백가량은 지도를 보다가 그것을 걷어 올렸다. 지도의 밑에는 또다른 지도가 있었다. 그곳에는 하남 하북, 호 북, 호남, 안휘, 강서 절강, 강소, 산동등의 중원 노른 자위에만 백기가 꽃혀 있었고 서쪽과 남쪽은 혈천마견의 붉은 기가 꽃혀 있었다. 다만 감숙, 귀주, 광동등은 백기가 사라지고 혈천마련을 상징하는 붉은 기 도 없으며 대신 독자적인 세력을 상징하는 흑기, 녹기, 황기등이 꽃혀 있었다. "허나 백도가 밀리면 혈천마련의 기세가 올라간다. 단숨에 중원 본토 로 밀고 들어올 테지. 기고만장하게 내버려 둘수는 없다. 일단 혈천마 련의 기세도 꺽을 필요가 있다. 천하는 백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줘야지. 백도와 싸우는 곳이 아닌 감숙, 귀주, 광동에서 혈천마련은 철저하게 패할 것이다." "지존의 그림자들이 있는 곳 아닙니까? 혈천마련이 그들의 존재를 모 르는 이상 반드시 혈천마련은 반드시 패퇴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귀주 의 천뇌교에 있는 귀영신군은 아직 그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따로 생각한 바가 있느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백 마제의 몇몇을 천뇌교에 투입할 것이다." 백가량은 흥이 난 듯 지도를 짚었다. "첫째 놈이 어디로 숨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허나 둘째까지 뛰어들게 되면 더 이상 그도 기다릴 수가 없다. 놈도 천하가 어지러워 지면 더 이상 참지 못할 것이다. 둘째에 대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사마가 대답했다. "예측하신대로 천축에 법왕이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배신자들 중의 둘째가 분명합니다. 사실 중원이 천축을 세외라 하여 평가절하해서 그 렇지, 천축의 기인들의 힘은 중원에 못지 않습니다. 법왕은 대뢰음사 와 소뢰음사등을 모조리 장악했습니다. 백마제 중의 하나인 암흑마찰 주는 법왕 휘하의 십대 천살의 한명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흠. 천축을 모조리 장악했다는 말이지. 사실 과거 내가 천축을 밟아 줄 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녀석이 중원을 도모할 야심 은 가지고 있느냐?" "천축의 세가 강해졌을 때 중원을 침공한 일은 있지만 중원의 세력이 천축을 침공하여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주군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 은 그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며 복수에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이미 서장 의 포달랍궁이 그들에게 복종당했고 운남 대리도 그들과 손을 잡은 것 으로 보입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면 그들은 반드시 일어나 혈천마련 의 배후를 칠 것입니다." 천축은 달마가 중원으로 건너와 소림사에 들어 무파로 거듭난 이후 불 학과 중원 무학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다. 동시에 어느정도 한족이 중화사상에 젖어 천축을 무시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천축 불문을 대표하는 대뢰음사나 소뢰음사도 천축에 수없이 널려있는 종교 유파의 하나에 불과했다. 심지어 불문의 종교마저 천축에서는 여러 종 교 갈래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각 유파에 해당하는 기이한 유가술 과 무공이 수없이 늘어서 있는 것이 천축이었다. 천축의 무공을 따지 자면 결코 중원의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대뢰음사 소뢰음사가 중원에 알려진 것도 불문에 속하는 그들이 불문 이 융성한 중원을 동경하여 찾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수많 은 고승등이 천축과 중원을 오가며 불학을 교류했다. 따라서 중원이 알고 있는 천축 무림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런데 지금 법왕이라는 자가 천축 무림세력 전체를 통일했다. 그의 위 세는 천축에서 한 나라의 왕에 부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자야 말 로 사실은 혈존이 천축을 짓밟으며 천축의 무학서를 약탈할 때 그것을 되찾으로 중원까지 건너왔던 혈존의 둘째 제자이자 청영마공의 주인이 었다. 지금 그가 중원과의 사이에 있는 변황지역에 손을 뻗고 중원무림을 호 시탐탐 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오직 혈존과 그의 첫째 제자 혈지존을 제외하고는. 현재 천하를 쟁패하는 두 세력은 혈천마련과 백도맹이었지만 혈지존, 법왕이라 별 호를 개명한 청영마존, 그리고 혈존은 그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서로 간에 다른 자의 정체를 알기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지금으로서는 혈천마련이 백도맹의 세력을 압도한다. 하지만 둘째가 세외 세력을 이끌고 나타나면 혈천마련도 세외세력과 백도맹을 앞뒤로 두고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 첫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삼자 정립의 세르 유지하도록 만든다." 혈존은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된다는 듯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흑방, 현황방, 천뇌교를 주축으로 내 지배를 받는 세력이 조 금씩 중소문파들을 삼킨다. 놈들은 그들을 신경쓰면서도 백도맹과 세 외세력 때문에 신경을 못쓸 것이다. 큰 것들을 꺼꾸러 트리면 그 정도 쯤이야 단숨에 삼킬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정 체를 드러내면 안된다. 백마제가 그들을 암중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세 세력 중에 약자를 보조하며 각 세력의 균형을 맞춰준다. 중간에서 계 속 분란을 일으키고 싸움을 부추기며 약한 놈들은 슬쩍 도와 무림 전 쟁의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유도 한다. 혼란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 고 무림은 그 정예를 모조리 소진하고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첫째 녀 석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린다. 모두가 힘이 빠졌을 때 우리가 나 서 힘 잃은 맹수들을 한꺼번에 사냥을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혈천마련 출도 2> 사천 지방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 나는 것이 바로 사천 당가이다. 하지만 사천 지방에는 구대문파에 속하는 청성파, 아미파, 점창파 등 의 쟁쟁한 문파가 있다. 아마도 사천 당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들 이 산에서 숨어 수도하는 문파이고 사천 당가는 세속에서 세인들과 직 접 부닥치며 명성을 떨치는 무림 세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천은 요리의 명소로서도 유명하며 한 나라의 혼란기 유비가 촉을 근 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침으로서 비로서 중화인의 관심을 받았다. 이제 는 나라에서 사천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림이나 관에서 중 요한 지방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위치상 대륙의 구석에 고립된 지역 이고 변방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나름대로 자립하고 있었다. 사천 당가가 사천 지방의 호족으로 마치 왕처럼 권 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천 지방의 독특한 문화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기도 하다. 무림의 역사를 보면 나름대로 사연이 많았었던 지역이 또한 사천 지방 이다. 백도와 가장 많은 충돌을 일으켰던 천년마교가 바로 사천과 가 까운 신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의 혈겁의 역사를 살펴볼 때 백도맹과 마도의 전쟁은 그 삼분의 일이 바로 천년 마교에 의해 저 질러 진 일이며 그때마다 가장 앞서 천년마교와 싸웠던 것이 사천 당 가였다. 또한 운남의 묘족이나 독을 사용하는 독문의 침입을 중화인의 입장에서 저지했던 것도 사천 당가였다. 그것이 독과 암기라는 중화인 이 사도로 생각하는 음독한 수단을 절기로 내세우면서도 사천 당가가 명문으로 이름을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당금의 무림을 볼 때 사천 당가는 그 힘이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에 미치지 못했다. 혈천마궁 시절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 한 구파일방을 부흥시킨 혜경성승이나 현무도선, 오대세가를 부흥시킨 천하제일가의 무적장왕 모용도기가 사천당가의 암기를 경멸했기에 그 들이 주도하는 백도에서 사천당가는 움추러 들 수밖에 없었다. 혈천마련이 혈첩을 천하에 뿌렸다. 그리고 혈천마련이 자리를 잡은 곳 은 바로 옛날 천년마교가 자리잡고 있던 신강지역이었다. 그에 따라 백도에서는 그들과 맞서 싸울 곳으로 사천 지방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도맹은 혈천마련의 혈첩이 뿌려진 여덟개 지역 중에서 두 군데에서 혈천마련과 맞서 그 기세를 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번 째는 바로 신강에서 가까운 사천 지방. 혈난이 있을 때마다 맞서 싸웠던 사천 당가를 중심으로 아미, 청성, 점창의 무인들이 대거 당가 로 몰려왔다. 심지어 백도맹의 총단에 있던 이들 문파의 원로와 장로 들도 속속들이 자파로 복귀했다. 혈천마궁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은 거기인들이 대거 몰려들자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두번 째는 바로 섬서. 화산과 종남이 있는 이 지역은 바로 백도맹 총 단이 있는 하남과 지척지간이다. 마약 이 지역을 혈천마련에 빼앗긴다 면 백도맹으로서는 바로 목 밑에 날이 선 비수를 내버려 두는 것과 같 은 꼴이 된다. 따라서 백도맹으로서는 아무래도 사천보다 섬서에 그 신경을 더욱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천무호정단이 사천이 아닌 섬서 에 집중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백도맹은 하남에 총단을 두고 있고 북경 수도가 있는 하북에 북부 본 단을, 군산이 있는 호남에 남부 본단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중 요지역에 한 개 혹은 두세 개의 지부 및 지단을 두고 있다. 즉 하북, 산동, 강소, 하남, 호북, 호남, 강서, 절강, 섬서등 중원의 중심지가 백 도맹의 주 세력이 포진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혈천마련이 백도를 위협 하는 의미로 섬서에 혈첩을 보낸 이외에 기타 중원의 변방 지역을 먼 저 장악하려고 한 것은 본격적으로 백도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자신들 의 하부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그것을 알기에 백도맹에서도 기타 지역은 신경쓰지 않고 사천과 섬서에 전력을 집중 시킨 것이었다. "아미, 점창, 청성은 본산의 문을 걸어 잠그고 무공을 모르는 제자들 을 모두 근처 동굴이나 비밀 은신처에 피난시켰습니다. 그리고 무공을 할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사천 당가에 몰려 들어 전투를 대비하고 있습 니다." 사천의 동정을 살피러 파견 보냈던 혈천마련의 첩자가 음양마황에게 보고했다. 혈천마련의 오전주 음양마황은 자신의 휘하 세력을 이끌고 곤륜산을 넘어 사천에 들어왔다. 아마도 곤륜산은 마검황의 검마전을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음양마황 옆에는 그를 보좌하는 오대 벽력호법이 서 있었다. 음양마황 이 직접 거둬 무공을 가르친 자들로 오행의 기운을 따라 오행신마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절정고수였다. 그들의 오행마공을 겸비한 합공은 음양마황이 둘이 있어도 견디기 힘든 막강한 위력이 있었다. 또한 벽 력마전은 내전과 외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전은 음양마황이 혈천마 궁 시절의 고수들과 자신이 양성한 고수들을 이끌고 만든 벽력마전의 본세력이고 외전은 옛날 음양궁의 궁주의 독문절기인 음양벽력공의 정 통성을 내세워 봉문해 있던 음양궁을 흡수한 이후 그들을 내세워 만든 세력이었다. 천하를 주름잡던 혈천마궁의 숱한 거마들이 모여있는 내전의 세력이 외전의 세력을 압도했지만 외전 또한 옛날 정사 중간의 명문인 음양궁 의 변신이었기에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외전 팔대호법만 해도 음 양궁의 팔대호법으로 있던 자들로 나이가 백살이 넘어가는 마두가 수 두룩 했다. 음양마황은 자신을 호위하는 인물로 오행신마를 곁에 두고 내전 일백 의 고수와 외전 삼백의 고수를 동원했다. 그들 사백은 최하가 구파 일 방의 장로급이나 장문인 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벽력마전 의 주전세력인 벽력기마대 일천을 앞세웠다. 총 일천 사백을 넘어가는 대 세력이었다. "사천을 접수하는 쉬운 길은 먼저 비어있는 아미 점창 청성등의 빈 집을 점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 주변을 살펴 각파의 문인들을 인질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당가에 모여있는 각 세력이 본산으로 떠날 것이고 저희는 그들을 각개 격파하면 됩니다." "갈! 대 벽력마전이 무슨 얄팍한 수작인가? 모여있다면 더욱 좋다. 단 번에 힘으로 박살내 준다. 한번의 전투로 사천을 접수할 수 있다면 잡 다한 일로 머리를 썩힐 필요도 없다. 당가에 모인 고수들의 수는 어떻 게 되나?" 음양마황의 호통에 그 수하는 찔끔하여 즉시 대답했다 "사천 당가의 제자는 오천에 달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가에 모여 싸움 을 대비하고 있는 자는 당가 직계의 고수 오백입니다. 당가의 가주를 비롯 일대의 형제들이 여덟명. 절정고수의 반열에 이른 이대 제자들이 스믈 두명.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일곱 명입니다. 본 전에 위협이 될 만한 자는 이들 서른 일곱 명이며 그 밖 에 남아있는 자들은 당가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당가의 무적혈우단 의 제자 오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가의 방계 직속 제자들로 일 류고수도 애를 먹는 암기의 대가들입니다. 하지만 진짜 위협이 되는 것은 당가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독과 기관의 함정들입니다." "그리고 당가에 모인 다른 자들은?" "아미파의 장문인 자인 사태를 비롯해 장로급이 스믈 일곱명. 그리고 은거해 있던 아미의 원로들 다섯명이 나섰습니다. 아미파는 저희 혈천 마련과의 대결에 하급 제자들은 희생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무림에 명 성을 날린 일급 고수들로 삼백 명을 이끌고 왔습니다. 특히 주의 해야 할 자는 원로들 중에 자인 사태의 사조 뻘이 되는 불인성니가 있다는 겁니다." "흠. 과거 천무삼성에 패한 바 있던 불인노니가? 그녀는 곤륜일성, 자 비성모 등과 더불어 천무삼성과 동배분의 늙은이가 아닌가? 사부가 천 하를 정복할 때는 쥐죽은 듯 나서지 않아 모두들 이미 죽었으리라 생 각했는데 아직 죽지 않았던가?" "예. 아미파에 묻혀 있다가 이번에 나섰다고 합니다." "점창과 청성은?" "두 파를 합하면 일급 고수가 천여 명에 달합니다. 장문인이나 장로급 고수가 칠십여 명. 원로급 이십여 명이 그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싸그리 쓸어 버린다. 오늘로서 아미, 청성, 점창의 이름이 무림에서 지워지리라. 먼저 대항하겠다고 뭉친 놈들을 힘으로 제압하여 본 마련 의 무서움을 알리고 천천히 사천지방을 접수해 나간다." 사천 당가. 일개 혈족이 뭉친 세가치고는 사천 지방에서 제왕처럼 지 내는 가문이다. 숱한 위기를 넘기며 때로는 지방 호족으로서 오랑캐 민족이 나라를 차지했을 때 대항하기도 했고 마교와 싸우기도 했다. 그런 숱한 전투의 역사 속에서 사천 당가의 본거지는 한 가족이 사는 저택이라기 보다는 전투를 위한 성처럼 발전해 나갔다. 숱한 기관진식 의 매복들이 사천 당가의 외곽과 내원에 깔려있어 그 진도를 알지못하 고 안내를 받아 나가지 않는한은 죽음만이 남는 것이 바로 사천당가였 다. 콰콰쾅! 때아닌 폭발음이 사천 당가의 외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음은 당가의 내청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을 일제히 창백하게 만들었다. "폭발음? 설마 마련의 주구들이 강호 도의를 무시하고 군문의 폭약을 사용한단 말인가?" "아미타불. 아니오. 저것음 음양궁의 벽력장의 소리요. 그들의 장력은 폭약과 비슷한 폭음을 낸다고 하더이다." 아미파의 자인사태가 고개를 저었다. 이십 년전 그녀가 아미파의 제자 로서 혈천마궁과 싸울 때 음양궁의 궁도와 겨룬 적이 있었다. 그들의 벽력장은 악몽 그 자체였다. 왜 음양궁의 음양벽력공이 사대 마도절예 의 하나로 꼽히는지 똑똑히 알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장력은 맞서 부 딪치는 순간 폭발하여 상대를 해하게 하는 무서운 위력이 있었다. "아미타불. 오늘 마련에서 온 자들은 아마도 음양궁의 세력인 듯 하오. 혈천마련이 마도와 사도의 절학을 집대성 하였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오늘 흉은 많고 길은 적을 듯 하오." "하하. 어찌 그리 힘빠진 소리를 하시오. 오늘 백도의 정예들이 모였 으니 마도의 졸개 따위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오." 점창 장문인 도룡검객이 큰소리를 내었다. 점창파는 혈천마궁 시절 본 산이 무너진 원한이 있어 혈천마련에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있었다. 속 가제자이면서 점창의 무공을 수습한 도룡검객에 의해 점창이 재건되고 오늘날 그 성세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빛났지만 혈천마련에 대한 원 한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럴 것이오. 오늘 삼파와 당가의 원로들이 모두 나섰소. 또한 만반 의 준비를 마쳤으니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무량수불." 청성파의 장문인 창해도장도 도호를 외웠다. 그들의 눈은 맹렬한 투지 로 불타고 있었다. 당가의 정문 쪽. 벽력마전의 제자들이 일제히 정문을 부수고 우르르 몰려 들었다. 하나같이 철갑을 두른 말을 타고 창을 쥔 기마무사들이 었는데 그들은 각기 홍의 갑옷과 청의 갑옷을 입었다. 이들이야 말로 벽력마전이 자랑하는 벽력기마대였다. 홍의를 입은 벽력열화군이 마상 에서 일제히 장력을 뿜어내었다. 장풍이 이는 것으로 보아 절대 이들 이 손발과 칼의 휘두름에 의존하는 보통 고수가 아님을 알 수가 있었 다. 그들이 내뿜는 장력에는 용암처럼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 다. "음양 합벽" 홍의를 입은 벽력열화군이 뜨거운 장력을 내 쏟자 벽력기마대 중에서 청의를 입은 벽력빙마군들이 역시 마상에서 일제히 차가운 기운의 장 력을 쏟아내었다. 동시에 두 기마대의 입에서 합창의 소리가 나왔고 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한 지점에서 맞부닺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 켰다. 콰르릉! 당가의 내원에 있는 가산이 무너지고 흙벽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리고 그 기관 속에 숨어져 있던 당가 정예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흩어져 나왔다. 폭발로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서 분분히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 며 벽력기마대를 향해 공격해 왔다. 그들은 분노의 눈빛을 띠며 하늘 을 까맣게 덮는 암기를 쏟아내었다. "마련의 주구들. 오늘 살아돌아가지 못하리라." "벽력탄을 사용하는 강호의 도의도 모른 것들. 당가의 힘을 보여주 마." "너희들이 온 것은 죽음을 향해 뛰어든 불나방 같은 짓일 뿐이다." 순식간에 이 삼백이 되는 당가의 인물이 나서 폭우 같은 암기를 뿜어 대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런 폭발에 의한 낭패와 자신들의 실력 에 대한 자부심이 뚜렷히 들어나 있었다. 암기들이 하늘을 뒤엎으며 벽력기마대를 향해 쏟아지고 벽력기마대가 아무런 대응을 못하자 암기 를 뿌린 당가의 고수들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당가 의 정예들 뒤로 점창파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늘 여기 온 자들은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이십 년전 혈천 마궁에 진 빛을 갚으리라." 당가의 무사들을 호위하며 점창파 무사들을 지휘하는 앞에는 열 명의 노인이 있었다. 점창 십검객이라 불리는 이들은 과거 혈천마궁과의 전 쟁에서도 살아남은 노련할 대로 노련한 점창의 원로 고수들이었다. 그 들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으하하하. 당가와 구파의 쓰레기들." 하늘을 찌르는 광소가 벽력기마대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 괴이한 음성에는 기이한 힘이 들어 있어 당가의 고수들과 점창파의 고수들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동시에 철갑을 두른 말 위에 있던 벽력기마대의 고수들이 일제히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호 에 이름난 당가의 수많은 암기가 고무공 튕기듯 벽력기마대의 몸에서 튕겨져 나갔던 것이다. 날카로운 침모야의 암기도, 혈리표도, 모래 모 양의 독분도 모두 튕겨져 나갔다. 점창 십검객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부릅 떠졌다. "벽력반탄기. 음양궁의 수뇌부들이나 익히는 비전 절기를 일반 무사가 익혔단 말인가?" "흐흐. 벽력마전을 과거의 음양궁으로 생각하면 안되지." 벽력 기마대를 뚫고 검고 하얀 두 명의 노인이 흉소를 터트리며 모습 을 드러내었다. "벽력 쌍마." 점창 십검객의 안색이 쌔까맣게 죽어갔다. 벽력쌍마는 오래 전에 죽었 다고 소문난 괴물들. 바로 천년 마교시절 팔대천마의 하나였던 음양궁 의 벽력마존의 사제들이었다. 벽력마존은 음양이기를 한몸에 익힌 괴 인으로 그의 음양벽력공에 의한 벽력장은 고금 제일장으로 이름이 높 았다. 당시 천하의 주인이자 팔대천마의 수괴이던 천마조차 장력으로 는 정면으로 벽력마존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벽력쌍마는 각기 순수한 음벽력공과 양벽력공을 나눠 익혀 둘이 한몸같이 다니던 노괴물이었다. 이 둘의 합공은 벽력마존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다. "당신들은 오래 전에 은거했다고 하거늘. 어이하여 마련의 개가 되었 는가?" "흐흐. 우리는 벽력마전의 음양마황의 사숙 자격으로 초빙되었다." " 벽력마전의 봉공이 우리들 신분이다. 개라니? 말이 지나치군." 불인노니가 소리치자 벽력쌍마가 냉소를 터트렸다. 그들을 보는 불인 노니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혈존이 음양궁을 봉문시킬 때도 나 서지 않던 전대의 노괴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벽 력기마대가 그들의 뒤로 점차 당가와 점창의 고수들을 향해 다가갔다. 점창 십검객의 얼굴이 까맣게 죽어갔다. 당가의 서쪽 담장을 통째로 무너트리며 돌진하는 기마대가 있었다. 역 시 홍의와 청의를 나눠입은 벽력마전의 벽력기마대였다. 건물들 사이 를 넘나드는 철마들은 마치 황야를 누비는 듯 거칠 것 없이 달려들었 다. 가로막는 건물과 벽이 있으면 거침없이 벽력기마대의 음양 벽력마 공이 서로 부딪쳐 폭발을 만들어 내었다. "아미타불. 멈추시오." 그들의 앞을 막어서는 자들은 일단의 여승들과 노승들이었다. 바로 아 미파의 고수들이었다. "어이하여 이런 혈겁을 저지르는가? 노니가 살계를 열겠도다." 아미파의 고수들 앞에서 살기를 피어내는 여승은 바로 불인노니였다. 천무삼성과 같은 배분의 백도 명숙. 얼마 남지 않은 최고 배분의 고수 들 중의 하나로 이미 반 보살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살아있는 보 살이었다. "큭큭. 불인. 그 허풍은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았구나." 하지만 벽력기마대의 선두에 선 몇 명이 비웃음을 흘렸다. 불인노니가 사나운 눈길을 그들에게 던지자 벽력기마대를 이끄는 선두의 몇 명이 복면을 잡아 뜯어 그 진면목을 드러내었다. 순간 불인노니의 눈길이 격하게 흔들렸다. "음양 칠마존. 당신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었소?" "흐흐. 늙은 여승이 죽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죽어야할 이유라도 있 나?" 괴소를 터트리는 자들은 과거 음양궁의 장로들이었던 음양 칠마존이었 다. 음양궁이 혈천마궁에 의해 봉문될 때 죽었다고 소문났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거 불인 노니는 이들 중의 둘의 합공에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이끌고 온 고수들 중에 자신을 제외한 가장 강한 아미파의 고수들도 음양 칠마존의 한명의 상 대가 되지 못했다. "뜻밖이군. 과거 혈존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던 당신들이 혈천마련에 고 개를 숙였다니." "어찌 벽력마전이 혈천마궁과 같겠는가? 혈천마궁은 혈존 개인의 집 단이었으되 혈천마련의 벽력마전은 음양궁의 변신이거늘. 우리는 벽력 마전 외전의 칠대호법에 불과하다." 음양 칠마존이 철마를 재촉하여 전진하자 불인노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인노니를 비롯한 아미파의 고수들이 일제히 내공을 끌어올려 장삼을 부풀게 만들었다. (벽력마전의 세력이... 혈천마련의 세력은 본파가 생각한 것보다 십 배 는 더 강하다.) 당가의 동쪽 담장을 부수고 들어오는 세력이 또 있었다. 그들 역시 복 면을 한 벽력기마대 였으며 그들을 막아선 자들은 바로 청성파의 고수 들이었다. 청성파의 장문인 창해동장의 사제격인 창천일학, 현황방에 파견나갔었던 청성이자, 본산에 틀어박혀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던 창미, 창우, 창두 등의 창자급 장로급 고수들. 그리고 그들보다 한 배분이 높은 원로격의 무자 배분. 무현, 무소, 무정 등의 청성삼선 등의 십여 명의 고수들이었다. "무량수불. 시주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오." 무현도장이 도호를 외우며 그들앞을 막아섰다. 청성삼선의 몸에서 일 제히 푸른 강기가 벽처럼 퍼져나가 그들의 전진을 막아갔다. "창룡일기공. 청성은 잊혀진 절학을 되찾았는가?" 벽력기마대의 앞에서 누군가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음성 뒤에 계속 이어진 목소리가 처음의 음성을 덮어 버렸다. "크크크. 청성삼선이라니. 이거 옛빛을 청산하게 되었군 그래." "이거 옛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출두하자 마자 네놈들을 만나다 니." 청성삼선의 절대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가운듯 환호를 터트리 는 인물들. 일개 벽력기마대의 대원으로 알고있던 그들이 일제히 흉소 를 터트리자 청성삼선의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복면을 벗고 드러나는 마련 인물의 모습을 보고 청성 삼선의 얼굴이 서서히 질려가기 시작했 다. "천잔 외수. 천잔방의 살마들." "사천 칠살! 천하를 시산 혈해로 몰고갔던 독각대도들이..." "혈해마가의 악마들." 하나같이 천하에 악명을 터트리던 절대 흉마들. 사람을 죽인 횟수가 한명 한명 천을 가뿐히 넘어가는 악마들. 백도에 짖눌려 사라져야 했 던 절세 거마들. 과거 혈존에 의해 사로잡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거마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죽지 않았나? 혈천마궁이 멸망할 때 내분으로 마궁의 마두들이 반 이상 죽었다고 하더니 모두 사아남았구나. 너희들이 모두 몰려 오 다니. 혈천마련이 주력을 사천에 모두 투입했던가?" "크하하하. 혈천마련의 주력? 네놈들 미쳤구나. 우리는 혈천마련 산하 벽력마전휘하의 일개 무사에 불과하거늘. 게다가 우리들이 죽었다고? 하기야 죽은 것과 다름없지. 마전의 일개 무사들로 지위가 격하되었느 니. 하지만 너희 놈들을 죽여 공을 세워 지위를 좀 올려야 겠다." 살기를 무럭무럭 퍼트리며 다가서는 자들. 벽력마전의 내전 무사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으되 청성파의 원로고수들의 안색을 무겁게 만드는 흉신악살 같은 마두들이 살기를 띠우며 청성파의 고수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련의 전주들이 일제히 마도와 사도의 칠대 마공사공을 주 축으로 하여 내전의 고수들을 양성하자 과거의 일대마두들이 마련의 내전에서는 일개 무사들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불만을 터트리지 못하는 처지가 그들이었다. 그러데 그들 앞에 옛 원한이 있는 청성삼선이 나타나자 일제히 그동안 쌓아놓았던 울분 을 한꺼번에 터트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혈천마련 출도 3> "정문에서 점창파의 고수들이 원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동쪽에서 청성파의 고수들이 밀리고 있습니다. 빨리 지원군을 보내셔 야..." "서쪽에서 아미파의 고수들이 전멸했습니다. 불인노니께서 마두들에게 생포를 당하시고..." 당가의 본청에 앉아있던 당가주 천수마군의 안색이 급변했다. 적들이 침입하고 그들과 전투를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구원군을 요 청하는 전령들이 이렇듯 한꺼번에 들이닥친단 말인가? 그것도 어느 한 곳이 뚫린 것이 아니라 세곳이 모두 한꺼번에 위기를 요청하고 있으니. 천수마군과 청성파의 창해도장, 점창의 도룡검객과 아미의 자인사태가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본 청에는 마련의 마두들에게 뚫 릴 경우 지원할 고수들이 머물고 있었다. 당가의 원로 고수들. 그리고 청성, 아미, 점창에서 승룡곡에 갔다가 무학을 완성하고 이번에 자파 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복귀한 장로급 천무호정단원들이 그들이었다. "아미타불. 이미 서쪽이 뚫린 듯 하니 서쪽을 지원해야..." "무슨 소리요? 정문 쪽에 전력을 집중시켜 적의 주력을 괴멸시켜야 하오." "무량수불. 서쪽이 뚫렸으니 동쪽마저 뚫리면 전세를 돌이키기 어렵소. 동쪽을 지원해야 하오." 세파의 장문인들이 일제히 자파의 세력이 있는 곳에 지원군을 보내자 고 말을 꺼냈다. 동시에 말하던 그들은 곧 서로의 얼굴을 보고 어색하 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있는 사천당가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수마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하하. 너희들은 굳이 지원군을 보내러 갈 필요가 없다." 그들이 망설일 때 갑자기 호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당가의 본청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인물이 있었다. "버...벌써 뚫렸던가?" "그럼 본파의 고수들은?" 세 파의 장문인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당가의 본청에 모습을 드 러낸 사람은 중후한 모습의 중년인 한명과 그의 시동인 듯한 다섯명의 어린 소년이었다. 중년인은 오만한 눈빛으로 좌중을 쏘아보고는 냉소 를 터트렸다. "흥. 과거 이십 년전에도 백도에는 쓰레기 밖에 없더니 오늘날에도 마 찬가지로군. 진정 천하 백도에 인재라고는 천무삼성 밖에 없는가?" 그의 오만한 말에 당가의 원로 고수들 중의 하나인 폭우필살 당조인 노인이 노호를 터트렸다. "네놈은 누구인데 이렇게 오만하게 구느냐?" 순간 음양마황의 뒤에 있던 소년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변했 다. 그들이야 말로 바로 음양마황을 호위하는 절정고수 오행신마였다. 오행신마 중의 벽력금마가 호통을 지르며 당조인 노인을 향해 덥쳐 들 어갔다. "무례하다. 감히 마황님에게 버릇없이 굴다니." "어린 놈이 감히!" 당조인은 어린 소년이 덥쳐오자 어이없다는 빛을 띠었다. 하지만 적의 수괴로 보이는 자를 따라온 소년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손에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벽력금마의 신법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에 당조 인은 그를 얕봤다. 암기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그는 지체없이 자신의 성명절기인 혈리표를 날렸다. 저 오만한 소년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리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애액"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자는 벽력금마가 아니 라 바로 당조인이었다. 순식간에 금색의 빛이 어른거리더니 당조인이 쓰러지자 모두 안색이 변했다. 점창과 청성의 몇몇 장로급 고수가 급 히 손을 써 벽력금마를 공격했다. 벽력금마는 오만한 웃음을 내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다시 금색의 기가 쏟아져 나왔다. "으아악." "크윽." 순식간에 강호에 이름을 떨친 세명의 고수가 쓰러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당가에 모였던 백도의 수뇌가 멍하니 넋을 잃을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벽력금마는 오만하게 좌중을 둘러보고는 음양마황 에게로 돌아갔다. 당가의 가주 천수마군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고수다. 우리들 중의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는...) 그라도 당조인을 포함한 네명의 이름난 절정고수를 한꺼번에 쓰러트릴 수가 없다. 적의 수괴로 보이는 자도 아니고 그를 호위하는 어린 시동 조차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것을 알자 천수마군 을 비롯한 백도의 장문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미타불. 어린 시주가 너무 악독하군. 함부로 살수를 쓰다니." 자인사태가 불호를 외우자 음양마황이 그들을 비웃었다.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도 있던가? 그런 너희들은 어이하여 마도의 고수들에게 사정을 보지 않는가?" 음양마황의 눈에서 줄기줄기 광망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 기는 위압감이 삼 파의 장문인과 가주들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천수 마군이 나섰다. "나는 당가의 가주 천수마군이요. 그대가 마도의 이름없는 자가 아니 라면 먼저 그대의 신분부터 밝히는 것이 어떻소? 그대는 누구요?" "흥. 본좌는 바로 마련의 음양마전의 전주 음양마황이다." 그가 이름을 밝히자 천수마군의 몸이 비틀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그 이름이 갖는 무게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과거 혈존이 천하를 지배했 을 때 그의 아홉제자들은 나누어 천하를 관리했다. 음양마황은 그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 이름이 갖는 무게는 결코 천무삼성에 비해 손 색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 이름과 나란히 어깨를 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자는 백도에서 천무삼성과 무성 종리연만이 자격이 있을 것이었다. "마도의 수괴를 향해 강호의 도의를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탓 하지 않을 것이오." 도룡검객이 먼저 소리쳤다. 적이 여섯 몀만이 당가의 중지 깊숙히 들 어왔으니 합공을 해서 죽이자는 소리였다. 소수를 다수가 공격하는 것 은 백도가 가장 꺼리는 일이었지만 백도가 위기에 몰렸을 때는 천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서서히 당가의 본 청에 모여있던 고수들이 음양마황과 오행신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비열한 백도의 개들답게 그렇게 진작 행동했어야지. 오늘 내가 다섯 호법만을 데리고 온 것은 시시한 싸움에 실망하기 보다는 숫자로나마 만족하기 위해서였다." 음양마황이 손마디를 우드득 꺽었다.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음양마황 을 보며 천수마군의 가슴이 무겁게 내리앉았다. 마도의 정예를 맞이하 기 위해 모여있던 수백의 고수들이 음양마황을 비롯한 다섯을 포위하 면서도 결코 성공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당가의 외곽을 막고 있던 고수들이 계획대로 연극을 하며 쓰러진 것 이 아니라 진짜 쓰러진 것인지 모른다. 적이 저렇게 강하다면! 하지만 신호탄을 터트리기만 하면...) 천수마군은 그나마 한가닥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신호탄을 터트리 는 즉시 당가 곳곳에 매설되었던 독약의 연기가 터져나올 것이었다. 그것은 당가의 해약이 아니면 견딜수 없는 당가 비전의 극독이었다. 그리고 일부러 약세를 보이며 마도의 고수들을 독연이 미치는 범위로 끌어들였던 고수들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가짜 천무호정단이 아니라 당가의 밖에 흙더미에 숨어 매복하고 있던 진짜 천무호정단이 마도고수들의 배후를 덥칠 것이었다. (마련의 놈들이 아무리 강해도 천무호정단의 고수라면...) 백도의 고수들 중에 최강자들은 삼개 파의 장로나 원로 급 고수들이 아니었다. 미래를 위해 승룡곡에서 땀을 흘리던 천무호정단의 고수들 이었다. 백도의 원로 고수들은 이름만 높았을 뿐 개정대법을 통해 내 공의 삼할 이상을 자파의 천무호정단 후배들에게 물려준 이후였다. 하 지만 그만큼 천무호정단 고수들의 사기과 무공은 높았다. 천수마군의 손에서 한 개의 동그런 구슬 같은 것이 쏘아졌다. 음양마 황은 경멸의 미소를 지을 뿐 그것을 본척만척 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서 쏟아져 나온 구슬이 허공을 향해 날아가 오색 연기를 날리며 터지 자 당가의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본청역시 검은 연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음양마황은 어리둥절한 가 운데 오만하게 내뱉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지만 오늘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백도의 졸개는 극히 적으리라." 당가에서 신호탄이 터지고 당가 여기저기의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터 져나오자 당가 주변의 언덕에 땅을 파고 매복하고 있던 천무호정단의 고수들이 일제히 뛰쳐 나왔다. 그들의 숫자는 무려 삼백 명이 넘었다. "갑시다. 가서 앞뒤로 협공하여 마도의 고수들을 무찌릅시다." 천무호정단의 수뇌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당가를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동안 딱은 수련의 결과를 확인 할 시간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고 마공의 극성이 었다. 천무삼성이 그들을 마도를 향한 칼날으로서 키운 것이다. 하지 만 그들의 몸이 어느 순간에 멈칫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몸이 갑자기 어느 지역에서 튕겨져 나왔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앞으로 갈 수가 없다니?" "설마... 진법인가? 마도의 누군가가 우리의 매복을 눈치채고 미리 우 리 주위에 진법을 깔아 놓았단 말인가? 그럼 우리의 계획도 눈치챘단 말인가?" 천무호정단이 당황하는 순간 영주 한명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갑 자기 일어난 괴이한 일이 진법에 의한 일이라고 단정지었다. 진법에 관한 학문을 연구한 그였기에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풀어낼 자신이 있 었다. 결코 당황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주위를 살펴보며 진법의 흔적 을 찾고 있는 그 순간 허공에서 괴이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는 안되지. 다른 지역은 모르지만 백도는 마련에 패배당해야 돼. 그래야 계산이 맞는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천무호정단이 어리둥절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신선처럼 허공에 둥둥 떠있는 남자 하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몸에 오색휘광을 휘드르고 요 사스럽게 웃으며 떠있는 남자. 사람이 어떻게 허공에 떠있을 수가 있 단 말인가? 저 자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사람의 경지를 넘 은 무학의 도를 터득한 인물이란 말인가? 천무호정단의 영주는 저자가 주변에 진을 깔아놓은 자라고 생각했다. "누구냐? 너 역시 마도의 인물인가?" 괴인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천무호정단에게 답했다. "나는 혈존의 화신의 한사람. 몸은 혈무영에 속해 있지만 지금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혈존의 영혼. 이제 너희들은 내 정체를 알았으니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혈존이라고?" 괴인의 답에 삼백의 천무호정단의 안색이 일제히 하얗게 탈백되었다. 그만큼 혈존의 이름은 무서운 것이었다. 한순간에 천무호정단의 단원 들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자 영주가 소리를 질러 그들을 진정시켰다. "모두 조용히 해라. 혈존이 살아 있을리가 없지 않나? 저자는 혈존을 사칭했을 뿐이다." 영주의 말에 천무호정단이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혈존을 칭한 괴인 은 허공에 떠서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천무호정단을 바라보았다. "자기 이름도 나타내지 못하는 자. 진법이나 사악한 술법에 의존하지 말고 내려와라. 정식으로 겨루어 보자. 우리를 이런 진법에 언제까지 가둬둘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하하. 이미 너희들이 내 손바닥 위에 있는데 내가 너희를 상대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그리고 위대한 술법을 진법으로 착각하다니. 백도의 바보들. 네놈들이 경멸하는 사술의 위력을 보여주마." 괴인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의 모습도 갑자기 사라 졌다. 마치 그들이 연극 무대에 있다가 갑자기 불빛이 사라져 어둠속 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무호정단은 그들이 당가의 근처에 있던 언덕이 아니라 암흑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의 빛이 사라지고 암흑의 공간에 그들은 떨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주위에 으슬으슬한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천무호정단의 고수들이 소름이 돋 기시작한 자신들의 팔뚝을 문질렀다. "이게 뭐야? 우리들이 어디에 있는 거냐? 왜 이렇게 추운 거야?" "혈존. 지옥에서 혈존이 나타났다. 그가 우리를 지옥에 끌고 온 것이 다. 여기는 지옥이야." "정신차려라. 혈존이 살아있을 리가 있느냐? 승룡곡의 수련이 장난이 었느냐? 침착을 되찾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가 있다. 저건 마도에서 우 리를 속이려는 수작이다. 우리는 지금 마도의 진법에 갇혀 있는 것이 다. 세상에 갑자기 환경이 변하는 사술이 있을 수가 있겠는지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영주가 소리쳤지만 천무호정단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만큼 어 둠은 괴이한 요기를 품고 사람들의 감정을 불편하게 자극했다. 게다가 주변의 온도가 너무나 싸늘했다. 중구난방으로 천무호정단의 고수들이 소리치며 몸을 떨었다. 훈련된 백도의 정예 천무호정단을 한순간 오합 지졸로 만드는 거이 바로 혈존의 이름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 혈존 백가량. 혈무영의 영주 하나의 몸을 빌려 나타난 혈존의 화신. 그는 지금 언덕 너머에서 혼란에 빠진 천무호정단원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가둔 것은 진법이 맞았다. 하지만 그냥 진법이 아니었다. 혈존 이 펼친 진법이었다. 바로 지척에 당가에서 마도와 백도의 혈전이 있 었건만 그들 중의 누구도 언덕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재로 직접 본다고 해도 그들은 무의식중에 그들을 인 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리라. "술법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지." 혈존의 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종이 인형들이 있 었다. 종이 인형의 주위로는 천무호정단이 있는 언덕과 비슷한 모양으 로 꾸며진 가짜 언덕이 탁자위에 있었다. 그리고 보면 탁자위의 종이 인형들이 가짜 언덕에 있는 장소와 혈존이 보고 있는 언덕에서 천무호 정단이 헤메고 있는 장소의 위치가 비슷했다. 천무호정단이 갇힌 진법 의 안은 혈존의 술법으로 탁자의 가짜 언덕의 영향의 지배아래 있었다. 혈존이 품에서 한웅큼의 부적을 꺼냈다. 부적에는 온갖 요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혈존은 웃으며 부적에 불을 붙였다. 한 순간에 타오른 부적의 재를 혈존은 탁자위의 작은 언덕과 종이 인형 위로 뿌려대었다. 그 순간 혈존이 보고 있는 저 멀리 언덕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실 재 천무호정단이 있는 언덕, 어둠 속의 하늘에서 수를 헤아릴 수가 없 는 요괴 귀신들이 나타났다. 아귀, 아수라. 지귀. 온 몸에 피칠을 하고 손톱을 내세운 괴물들이 어둠 속의 허공에서 떨어져 천무호정단을 덮 쳐갔다. "으아악. 괴물이다." "진정해라. 진법에 의한 환상이다. 속지마라." "아니야. 이들은....으아악." 누군가 환상이라고 소리쳤지만 괴물들이 휘두른 칼날 같은 손톱에 천 무호정단의 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괴물과 요괴의 수는 수천 수만이 넘었다. 그들은 땅 속에서 솟아나와 천무호정단의 다리를 잡아끌기도 하고 허공에서 날아 목을 긋기도 했다. 요괴들을 향해 천무호정단은 그동안 수련한 무공을 발휘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얼마전 오형산에서 백도의 미래였던 백호검 마진걸이 요괴들 을 향해 느꼈던 무력감이 지금 이들 천무호정단에게서도 발휘되는 것 이었다. 그리고 피의 혈겁이 시작되었다. 백도의 정예 천무호정단이 백도의 계획대로 당가를 돕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천과 섬서에서 백도는 패해야 한다. 마련과 백도는 둘다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번 혈겁의 승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영웅들의 것이 될 테지." 혈존이 탁자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언덕위에서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언덕위의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혈존조차도. 사천에서 일어났던 마련과 백도의 싸움은 처절한 백도의 패배로 끝이 났다. 마지막 당가가 본거지를 파괴하고 독연을 풀어 백도의 마지막 고수들의 탈출에 일조를 하지 않았다면 사천의 백도의 전통은 끝이 났 을 것이다. 그날 사천 당가에서 살아 도망간 백도의 고수는 그 수가 백 명이 넘지 못했고 그들은 피 눈물을 흘리며 백도 총단으로 달려가 야 했다. 그로서 더 이상 사천에는 마련에 대항하는 세력이 존재할 수 가 없었다. <화산 대회전> 실수를 했군요. 혈천마련의 회의에 사천을 혈사황이, 섬서를 음양마황 이 장악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음양마황이 사천을 장악했습니다. 전의 회의에서 사천을 음양마황이, 섬서를 혈사황이 장악하도록 천마황이 명을 내리는 것으로 바꿔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천과 달리 섬서에서는 혈천마련을 상대로한 대비에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사천과 달리 섬서는 백도맹의 총단이 있는 하남과 지 척지간이었다. 따라서 섬서를 빼앗긴다면 백도맹으로서는 턱 밑에 비 수를 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백 도맹에서는 대거 천무호정단을 파견했다. 그 힘은 섬서에 본거지를 두 고있는 화산과 종남의 몇 배에 해당하는 막강한 세력이었다. "감숙에 있는 공동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혈사황이라는 혈천마련의 이인자가 마군을 이끌고 감숙을 넘어 섬서에 진입했다는 정보입니다." "공동파는 어이했다든가?" "공동파는 청해 곤륜과 달리 그 힘이 구파 일방 중에서 가장 약합니 다. 종남의 장문인인 종가도인께서는 감숙을 천뇌교에 맡기고 이미 하 남 무림맹으로 제자들이 이끌고 도착했다고 합니다." 천무호정단의 책임을 맡고 있는 화산파의 장노 매화검객 이정풍이 백 도무사의 보고를 듣고 탄식을 했다. "아마도 사천의 아미, 청성, 점창은 그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제 종남이 그 근거지를 비우고 곤륜 또한 홀로 마세를 감당하기 어려 우니 구파 일방 중의 다섯 개 대파가 그 피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 소. 도고일척이면 마고일장이라더니. 통재로다." "그래도 다행히 오대세가의 근거지가 되는 곳은 마련의 혈첩이 당도 하지 않은 곳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종남파의 종가도인이 매화검객을 위로했다. 지금 이들의 자리에는 화 산 장문 주미도인. 종남파의 종가도인. 그리고 천무호정단을 이끌고 있는 매화검객이 같이 있었다. 또한 천무호정단의 군사 자격으로 제갈 가의 가주 제갈도용이 와 있었다. 주미도인, 종가도인, 그리고 제갈도 용은 모두 한파의 주인 신분이었다. 반면 매화검객은 단지 주미도인의 화산파 속가 사제뻘 되는 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천무호정단 에는 주미도인이나 종가도인의 사숙뻘 되는 높은 배분의 고수들도 수 두룩했다. 천무호정단의 직급은 결코 배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지휘를 맡고 있는 매화검객에게 주미도인이나 종가도인도 무례하게 굴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관계야 어떻게 되었든 현재 매화검객의 신분은 백도맹의 맹주를 대신한 대표격이었기 때문이 다. 종가도인이 자신만만하게 매화검객에게 제안했다. "이미 섬서 전역에 구파의 속가제자들이 깔려 혈사황의 행적을 감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그들을 무찌를 곳으로 마봉곡이 어떻습니까?" "그들이 그곳으로 온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마봉곡을 지나칠지는 좀더 두고봐야 겠지요." "그들도 나름대로 정보력이 있다면 화산에 우리의 주력이 몰려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감숙에서 화산으로 향하려면 필시 마봉곡을 지나쳐 야 할 것. 그곳에서 일격을 가하고 도망치는 마두들을 화산에서 무찌 른다면 적은 필패할 것입니다." 제갈도용이 승리를 자신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 혈천마궁 시절부터 혈사황은 오만무도한 자였습니다. 혈천마궁 의 아홉제자가 모두 그러했지요. 그들은 쉽게 승리할 계책을 알아도 정면대결을 고집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이 계획을 꾸민 것은 혈존을 제 거할 때가 유일했지요. 그만큼 혈존의 첫째 제자만이 무서운 자입니다. 다른 자들은 모두 쉬운 길을 알아도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자들입니다. 어리석지만 그만큼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자들이지요. 이번에도 어 떤 매복이 있을 것을 짐작한다 할지라도 혈사황은 반드시 마봉곡을 고 집할 것입니다." 그 말을 주미도인이 받았다. "이미 양 파의 제자들 외에도 천무호정단이 가세한 것만으로도 우리 의 승리는 예정된 것입니다. 게다가 듣자하니 오대세가의 제자들이 백 리설 낭자를 필두로 남궁홍일 소협이 이끄는 천검회와 더불어 우리를 지원하러 온다고 합니다." "허어. 이토록 젊은 아이들의 협기가 충천하니 백도의 복이요. 앞에서 천무삼성께서 이끄시고 무성 종리연 대협이 그 허리를 바쳐주고 젊은 아이들이 뒤를 민다면 백도의 앞날은 영원토록 밝을 것이오." 당금 구파일방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이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이었다. 곤륜과 개방이 그 뒤를 잇는다고 하나 둘이 힘을 합해야 이들 삼파의 하나를 감당할 수 있고 다른 다섯 개파의 세 력은 셋이 합쳐야 간신히 곤륜이나 개방에 맞먹을 수 있다. 따라서 사 천의 아미, 청성, 점창이라고 해도 화산파 하나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 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천의 일은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 신 섬서지역은 승리를 자신하는 이유도 화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화산 을 종남이 보좌하고 다시 천무호정단이 가세한 세력은 사천의 백도 세 력의 세배를 능가했다. 따라서 이들은 혈천마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자신했다. 하물며 비록 후기지수라고 해도 백도 오대세가의 지원이 뒤 를 잇는다고 하면? "정말 괜찮을까?"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오. 혈존의 행방을 밝혀낼 길은 이길 밖 에 없소." "하지만 자칫하면 무당에게 우리의 일이 들통날 수가 있네." "하는 수 없는 일이오." 악도는 천기노인과 함께 섬서에 있었다. 그는 모종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번에야 말로 혈존은 그 모습 을 천하에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혈존을 알고있는 악도는 그렇게 자신했다. "하지만 백도맹의 명령을 위장하여 옥수비연 금혜연을 섬서의 전투에 참여하도록 한 일은 들킬 가능성이 많네. 만의 하나 우리가 꾸민 명령 서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걱정마시오. 무당파의 이름으로 꾸민 명령서는 진짜이니까. 혈지존이 자신있게 말했고 내가 살펴보았으되 그 헛점을 밝히지 못했소. 아마도 무당에 잠입해있는 혈지존의 수하가 손을 쓴 것일거요. 즉 명령서는 우리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진짜라는 말이오." "하지만 금혜연을 전투에 투입한다고 해서 혈존이 모습을 드러낼까?" 거듭되는 천기노인의 질문에 악도는 짜증을 내었다. "몇번씩 말해야 알겠소? 오형산의 괴사. 감숙 신녀교의 신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오? 오형산의 괴사때만 해도 나는 그녀를 살려둔 것은 백호검을 손에 쥐기 위해 혈존이 그녀를 내버려 둔 것으로 알았 소. 하지만 감숙 신녀교의 일까지 감안하면 그것이 아니오. 이미 혈존 이 그녀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오. 이미 혈존이 그녀를 중요하 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오." "하지만 그녀가 이번 전투에 참가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위험에 빠 지지 않으면 결코 혈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걸세. 내가 이번에 듣 기에 백도맹의 준비가 철저하다고." "나도 이번에 누가 이길 것인지는 판단할 수가 없소. 이것은 혈존에 관한 사항이 아니고 혈천마련이나 백도맹에 대한 정보가 내게는 부족 하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소. 혈지존은 두 세력 에 대해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장담하기를 이번 전투에서 백도는 철저하게 패하리라는 것이오. 즉 금혜연은 전투에 참 가한 이상 반드시 위험에 빠질 것이고 그녀가 악산산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있는 이상 혈존은 절대 그녀를 내버려 두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오대세가의 정예들 또한 백도맹을 돕기위해 나선다고 하지 않는가?" "천기노인은 바보요?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잊었소? 오대세가의 젊 은 것들은 모용풍을 우상시하고 있었소. 그리고 그 지도자는 모용풍의 약혼자인 백리설이오. 천검회를 이끄는 것도 오대세가에 속한 남궁홍 일이오. 그녀와 그가 오대세가의 우상인 모용풍을 죽인 것과 같은 일 을 한 구파일방을 도울 것 같소? 흥. 백도의 늙은 것은 젊은 것들의 협심을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여인의 마음에 한이 생기면 한여름 에도 서리가 생긴다는 독심을 믿소." "그렇다면 자네는 오대세가의 젊은 고수들과 천검회가 백도를 배신한 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들이 커다란 타격을 받을 때까지는 나서지 않을 것이오. 이 미 오대세가의 중추들과 달리 젊은이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분리 하여 구분하고 있으니 말이오. 또한 지금 혈천마련에 잠식되고 있는 지역에는 구파일방의 세력 절반이 있소. 이번에 섬서마저 당한다면 소 림과 무당, 개방을 제외한 구파일방 대부분이 당한다는 소리요. 반대 로 오대세가는 아직 여유가 있소. 백도맹의 세력을 일거에 거뭐질 기 회를 그들이 놓치지는 않을 것이오." "자네말대로라면 그냥 놔둬도 될 것을 왜 오대세가에서는 젊은 고수 들을 파견한단 말인가?"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오? 오대세가에서 아직 힘을 쥐고 있는 가주들 은 구파일방과 한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서기 전에 젊은 것들이 먼저 나서 오대세가에서 구파일방을 돕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오. 백도에서는 섬서에서의 일전에 승리를 자신하고 있기에 오대 세가의 젊은이들에게 경험을 쌓기위해 보냈겠지만. 두고보시오. 화산 과 종남이 멸문하더라도 그들이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까. 기껏 나중 에 결단이 난 이후에 생색을 낼 정도로나 나설까?" "그가 화를 낼까?" 화산파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화문향과 더불어 담소를 나누던 금혜 연은 소로록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파의 객청에는 지금 금혜연과 화산 파의 여제자인 화문향 그리고 제갈가의 딸인 제갈청미와 금혜연과 동 행한 장보옥이 있었다. 모두 금혜연과 친한 친구사이였다. 지금 장보 옥과 금혜연은 화산파에서도 귀빈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무당 파의 제자라서가 아니었다. 매화검객은 감숙 천뇌교의 일 때 장보옥과 금혜연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천뇌교와 무림맹은 동맹을 맺었다. 매화검객이 알고있는 천뇌교는 혈 천마련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가 없는 원수이고 그런만큼 지금의 상 황에서는 백도맹의 든든한 아군이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신녀교에 서 일어난 천뇌교에서 금혜연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지금도 천뇌 교에서는 금혜연의 보호에 사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매화검객은 금 혜연의 주위를 보호하는 일단의 신비 고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 고 그들이 신녀교가 변신한 천뇌교의 후신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향 후 혈향초의 중독이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금혜연은 그녀의 의사와 상 관없이 천뇌교의 최고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매화검객은 금혜 연의 주위를 맴도는 천뇌교의 고수들(?)이 이번 전투에 큰 전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금혜연은 귀빈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왜그래? 무슨 걱정이 있어?" "응? 이번에 그이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이곳으로 왔거든. 워낙 사문의 명령이 시일을 재촉하는 일이라. 반드시 어제까지 편지를 가지고 화산 에 도착하라고 하기에 급박한 일인줄 알았어. 천검회와 오대세가의 후 기지수들이 지원할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가 서찰에 적혀있을 줄은 몰랐지." "그이? 그때 만보장에서 본 대장군부의 공자말하는 거야?" "그래. 우리 백가가. 휴. 나를 두고 또 바람피면 어쩌지?" 잔뜩 걱정스런 금혜연의 얼굴을 보고 제갈청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교소를 터트렸다. "미쳤어? 세상에 무림칠미의 하나인 너를 두고 바람필 바보가 어디있 다고 그래? 그때 보니 네가 아깝더구만. 너만한 미인을 또 어디서 보 겠어?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는 남자라면 네가 차버려." "네가 몰라서 그래. 모란서시만 해도..." 금혜연이 모란서시의 이야기를 하자 화문향과 제갈청미의 귀가 바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들은 흥미를 느끼고 즉시 금혜연 곁으로 붙어버렸 다. "그말 진짜야? 모란서시가 백공자의 첩을 자청했다는 말. 설마 무림칠 미의 하나인 그녀가 그럴리가 있겠어? 헛소문이지? 개방의 그 늙은 장 로가 노망들어 헛소리를 한거지?" 금혜연이 한숨을 또 내쉬었다. "누가 그래? 거짓말이라고.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모란서시가 직접 내 앞에 무릅을 끓고 제발 그이 곁에 시녀 신분으로라도 있게해 달라고 사정사성하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뿐인줄 알 아? 그녀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더기로 그이 곁에 있지 못해 안달이더라니까. 하기야 우리 그이가 워낙 잘났어야 말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심을 하겠어?" 제갈청미와 화문향의 눈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동그랗게 치켜 떠졌다. "너. 그말 농담이지? 설마 진심이야? 무공도 모르는 겨우 백면서생의 장군부 공자 따위가. 모란서시의 지위가 어떤 것인데 정실도 첩도 아 니고 시녀로라도 받아달라고 했다고? 게다가 네 앞에 무릎을 끓어?" "따위라니. 우리 백가가가 얼마나 잘났는데. 그리고 내말은 진짜라니 까." "하지만... 하지만 모란루는 무림 일파로 인정받는 큰 조직이야. 무력을 제처놓고라도 그 연줄과 배경은 엄청나. 우리 화산파의 속가제자들 중 에도 모란루 출신의 부인을 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줄 알아? 화산파 의 사람들 중에 모란루의 사람들을 무시할 사람은 전무라고 할 정도로 없어. 우리 종미 장문인님도 모란루의 루주라면 한발 양보하셔야 할 거야. 그런데 그 주인인 모란서시가 무당파의 일개 제자인 네 앞에 무 릎을 끓었다고?" "그래." 금혜연은 또한번 한숨을 호로록 내쉬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 금 혜연에게서 장보옥에게로 넘어가자 금혜연의 곁에서 그녀들과 같이 있 었던 장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분 명 사실은 사실이었다. 장보옥도 금혜연을 따라 모란루에 있을 때 황 궁의 공주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던게 사실이었다. 또한 장보옥이 금혜 연과 친한 사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란서시를 비롯한 미녀들이 그녀에 게 선물공세를 하며 접근했던 것이다. 화문향과 제갈청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든 말든 금혜연은 걱정이 태 산같았다. 그 구미호 같은 것들 틈에 백이충을 내버려두고 떠나온 것 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금혜연은 일단 모란서시를 비롯한 북 해빙화 천강옥녀 칠채옥봉 천회검후를 받아들였다. 정식으로 백이충의 첩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백이충의 약혼 자 입장으로 허락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단한 신분의 그녀들이 자신을 상전 받들 듯 하는 것 에 우월감을 느껴 그만 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란서시만 해도 자신과 같은 무림칠미의 한사람. 게다가 무림의 일파 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배경만을 따지자면 상계 관계 무림계의 거파들 과 거미줄 같은 연줄을 가지고 있는 모란루의 주인이다. 황제가 청해 도 마음에 안들면 동석을 거부한다는 것이 모란루주의 지위이다. 모란 루가 망하면 천하의 각계에 있는 세력가 반 이상이 마누라의 안달에 들고 일어날 것이다. 같은 무림칠미의 한사람이지만 무당파의 제자이 며 금가장의 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금혜연과는 비교도 안된다. 그런 모란서시가 그녀 앞에만 서면 설설 기었다. 어디 그녀뿐랴? 북해빙화 천강옥녀 칠채옥봉 천회검후는 모두 모란서 시 못지않은 미모를 가지고 있다. 그녀들이 무림에 정식으로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나섰다면 무림 칠미가 무림 십일미가 되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또 그녀들의 신분은 어떻든가? 무림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않을 뿐이다. 북해빙녀는 모란서시에게 언뜻 듣기로 북해빙궁의 후계 자이고 칠채옥봉은 남해 해왕군도의 후계자라고 했다. 다른 두 사람도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점을 비교해봐도 금혜연이 뛰어나 다고 할 만한 점을 확연하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금혜 연이 백이충의 약혼녀이며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한가지 만으로도 그녀 앞에서 복종했었다. 뛰어난 여인들을 자신의 밑에 둔다 는 것은 엄청 기분좋은 일인 것이다. 그것이 금혜연으로 하여금 그들 이 백이충의 마음을 빼앗을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녀들을 백이충 옆에 있도록 허락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을 본의 아니게 떠나고 보니 마음이 불안하기 이를데가 없는 것이다. "모란루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아직도 모란루에서 신선놀음을 할 때가 좋았던 것 같았다. 그날 처음 으로 백이충과 금혜연은 합방을 했다. 주위의 연적들이 많아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금혜연이 강수를 둔 것이다. 어차피 마음을 주었고 그의 부인이 될 위치이니 후회는 없다. 백이충도 자신이 처음 이라고 하늘을 상대로 맹세했고 앞으로 금혜연의 허락없이는 절대 다 른 여인을 넘보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금혜연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는 자신이 손해보면서 한 불쌍한 인생 구해준다는 식이었다. 백이충이 자신에게 쩔쩔 매는 것이 당연하 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도 그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누가 보아도 객 관적으로 자신이 아까운 것이다. 따라서 이만큼 잘난 미인을 부인으로 삼게 되었으니 잘 받들어 모셔라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 그녀의 마음 이었다. 그만큼 마음대로 백이충을 휘두르고자 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백이충은 그녀를 보면 쩔쩔맨다. 그녀의 일이라면 쌍수를 들고 나선다. 그녀의 눈치 하나하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한다. 자신이 사 랑하는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과거처럼 자신이 없다. 아무래도 금혜연이 그에 게 넘어간 것만큼 백이충에게는 그녀가 모르는 어떤 매력이 있는 모양 이다. 그러니 그런 미녀들이 줄줄히 백이충의 곁에 있으려고 하는 것 이 아니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더욱 불안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다른 여자들이 또 유혹을 하면? 그녀보다 훨씬 뛰어난 미인들이 백이 충을 유혹해서 넘어가면? 금혜연은 점차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백이충 곁을 떠나온 것을 후회했다. 엄중한 명령만 아니었 다면 그에게 말하고 같이 가자고 했을 것을. 하지만 그 시각 백이충이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뭐야? 그녀가 화산에 갔어?" 백이충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점차 이상할 정도로 혈 존 백가량으로서 변신해가는 백이충. 백이충때의 마음보다 백가량의 마음으로 있을 때가 점차 자연스러워지는 백이충이었다. 사술을 자꾸 사용하고 천하에 욕심이 생길때마다 마음속에 마가 커지고 혈존으로서 의흉악한 야심이 본성에 속하는 부분을 점차 크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 이었다. 애초에 무림의 일에 상관하고 백가량의 뒷일을 처리하면서 백 이충으로서의 순수한 마음을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백이충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백이충으로 자라오면서 느꼈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약혼녀 금혜연에 대한 마음때 문이었다. 특히나 금혜연에 대해 생각할 때는 백이충으로서의 마음 뿐 만 아니라 백가량으로서의 마음일 때도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할 때 가 많았다. "예. 하지만 빙백일살을 비롯하여 호위들이 그분을 따라간 것으로." 환마가 머리 뒤에 식은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백이충의 분위기가 심 상치 않은 것이다. "어째서 내게 보고하지 않았지? 그녀에 대한 일이라면 사소한 것 하 나 놓치지 않고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나? 환노. 죽고 싶은 건가?" "아...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주군." 환마가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었다. 죄의 유무를 떠나 혈존 이 죽이고자 한다면 아무리 환마나 사마 배교 쌍노라고 해도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마가 백이충의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제발 용서를. 성녀께서 화산에 가실 때는 마침 주군께서 이혼통제대 법으로 혈무영주 환영마신의 몸에 들어가 있을 때라 보고드릴 수가 없 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신분으로는 성녀님의 앞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 리고 나설 수가 없기에." "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녀의 일은 내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느냐?" 백이충이 드믈게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모든 일에 냉정한 그가 금혜 연의 일에 연관되어서는 이성을 잃고 허둥지둥 대는 것이다. 그것은 악도의 예상과 한치의 틀림도 없는 것이었다. "백소련. 북궁소림등. 그 계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소매 를 모시라고 그들을 붙여 두었던 것이 아니냔 말이다." 백이충이 노발대발하자 배교쌍노가 엎드려 허둥지둥했다. 그의 분노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환노의 더듬거리는 변명이 이어졌다. "주군. 진정을 하십시오. 빙백일살을 비롯한 호위들이 그분을 보호하 고 있으니 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백이충은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 저었다. "이번 일은 백도의 패배로 결정지어졌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 소 매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는 일이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거 지? 무당에 엄중한 감시를 하지 않았나? 소매가 화산에 갈 일은 전혀 없었을 텐데? 어째서 무당에서 그녀에게 임무를 맡긴거지?" "혹시 주군과 성녀님의 관계를 누군가 눈치채고?" "그럴리는 없다. 천하에 나와 그녀의 관계를 알 사람은 없어. 내 정체 를 모르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내 정체를 아는 이가 너희 둘 외에 누가 있단 말이냐?" 백이충은 고개를 내젖고 배교쌍노에게 명을 내렸다. "하는 수 없지. 좀 이르기는 하지만 모용풍을 내세우겠다. 오대세가의 젊은 놈들을 이용하면 소매를 위험에서 사전에 차단시킬 수도 있겠 지." "하오나 주군. 그리되면 섬서를 혈천마련이 장악하는 일에 차질을 빛 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소매의 안전이 중요하다. 소매나 내 가족이 희생되어서는 내가 무림에 나선 의의가 없음이야. 혈천마련이 백도의 기세를 완전히 꺽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변경한다. 섬서에서 혈천마련과 백도맹은 서 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모용풍 정도의 비밀병기라면 그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연재] 혈존무적 54-화산대회전(2) <화산 대회전 2> 아아! 이름 이름 이름. 왠 구파일방은 그렇게 많고 소속 고수들은 왜 그리 많은지. 자꾸 이름들이 햇갈리고 있습니다. 실수가 있더라도 봐 주십시오. 나중에 리메이크해서 전체의 오류를 한꺼번에 몽땅 바로잡 겠습니다. 그리고 휴가 다녀오자 마자 갑자기 집에 인터넷이 끊어졌습니다. 고치는데 열흘이 걸리는 군요. 연재가 늦어 죄송합 니다. 핑계김에 그냥 쉬었더니... 감숙에서 섬서로 들어오게 되면 화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마봉곡이라는 곳이 있다. 과거 송나라 당시에 섬서의 이름없는 계곡에 봉황이 출현 한 적이 있다. 성스로운 징조라며 황제가 만조백관들을 불러모으고 큰 잔치를 열었으나 그 해에 금나라가 처들어 옴으로 해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고 후일 점술가들은 봉황이 아닌 마봉의 출현이라 하여 나 라의 흉란을 나타낸 하늘의 예고라고 입을 모았다. 마봉곡은 송나라 관군에 의해 흉조의 상징이라 하여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고 그곳으로 통하는 관도가 끊겨버렸다. 마봉곡은 화산 근처에 있었기에 그쪽의 도 로가 막힌 일은 화산에 사는 도인들을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중 에 명나라에 들어오면서 화산에서 다시 길을 뚫고 마봉곡을 통하여 화 산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마봉곡은 화산을 공격하기 위해 필히 거쳐야하는 관문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혈천마련의 마두들이 접근합니다." 천무호정단의 고수 하나가 즉시 보고를 올렸다. 이번 화산에 파견된 천무호정단의 책임자인 이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환자는 승룡곡에 수련을 갔었던 종남파의 고수로 장로격 신분이었다. 그의 무공은 검강 을 발하는 단계에 들어가 이미 검의 형식을 잊고 자신만의 검술을 이 루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천무호정단 전체 내에서도 백위 이내의 고 수였다. 당금 백도에서 천무삼성과 까마득한 몇몇 원로들을 제외하고 무성 종리연을 비롯한 대부분의 백도 각파의 최고 고수들이 승룡곡 출 신이므로 천무호정단 백위 이내의 고수란 소리는 이환자가 백도내의 무공순위 백위 이내란 말과 거의 흡사했다. "혈사전의 주력인가?" "그들 이외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화산을 치려는 고 수들이 분명합니다." "수는 얼마나 되는가?" "대략 천 명정도 됩니다." 이환자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천 명정도로 섬서를 장악하려 한단 말인가? 섬서에 있는 중소문파의 개수만 해도 수백은 될터인데. 아니면 후속 부대가 온다는 것일까? 그 렇지 않으면 화산과 종남만 쫓아내면 다른 중소문파는 흡수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까? 후속부대가 온다면 얼마나 올까? 안온다면 섬서의 중소문파를 어떤 방법으로 흡수하려는 걸까?" 이환자의 나쁜 버릇은 중대한 일을 두고 간혹 생각이 다른 길로 빠지 는 것이었다. 그가 홀로 고민에 들어가자 천무호정단의 고수 하나가 혀를 차며 그를 툭툭 쳤다. 같은 종남파 출신의 늙은 도사 관로자였다. 사실 그는 종남파의 원로고수 격으로 이환자보다 배분이 높아 개인적 으로는 사숙에 해당되었지만 천무호정단에서의 지위는 이환자보다 낮 은 자였다. 청무삼성을 비롯한 백도 전체가 내어놓은 상승무학을 승룡 곡에 내놓았고 원로고수와 장년배 고수들, 그리고 젊은 청년고수까지 승룡곡에 무예를 배우려고 몰려들었지만 아무래도 무학을 배우고자 하 는 열의는 나이가 젊을수록 컸다. 그래서 무학 발전의 속도는 나이가 젊을수록 높았고 실력이 신분을 뛰어넘는 기현상이 천무호정단에는 비 일비재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혈천마련 또한 마찬가지였다. 혈천마궁 시절의 주축 이던 거마효웅들은 모두 외전 소속으로 밀려났고 내전은 칠마황이 직 접 삼대사학 사대마학을 주축으로 가르쳐 양성한 젊은 고수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즉 혈천마련 또한 무공과 지위는 내전의 젊은 고수들이 높고 경험과 경륜은 외전의 늙은 고수들이 높은 현상이었다. 혈천마궁 이라는 무림에 닥쳤던 거대한 시련이 마도와 백도 전체를 배분과 고루 한 전통에서 실력 우선주위로 탈피해버린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백도 에서는 배분과 사문의 관계를 생각하여 조직에서서의 그 지위를 명예 직으로 존중하되 실질적인 일을 처리할 중요 책임자만 실력자로 구분 해 놓은데 비해 혈천마련에서는 지위와 신분 모두가 실력자 위주로 바 뀌었다는 점이다. "대주. 어찌하실 생각이오?" "그러니까 저들이 섬서를 장악하려면 은자가... 헛!" "대주. 또 나쁜 버릇이 도졌구려. 지금은 눈앞의 일만을 생각하셔야 할 때요." "그... 그렇군요." "혈사전에서 처들어온 세력이 의외로 작소. 정면승부로도 승산이 있다 고 생각하는데 대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정면승부를 하려 했다면 그동안 피를 흘린 동도에게 면목이 없습니 다. 백도의 속가제자들이 그동안 희생된 숫자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르 고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천이 넘어갈 테고 그것을 은자로 환산하면 ..." 감숙에서 혈사전의 무리가 들어온 이후 백도의 제자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그들의 진전을 가로 막았다. 암습을 하기도 하고 가벼운 독을 뿌 려놓기도 했으며 그들이 지나쳐 온 곳의 객점과 음식점을 강제로 철수 시키기도 했고 애꿎은 길을 거목과 바위로 막아놓기도 했다. 혈사전의 고수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보다는 모두 그들의 행군을 지연시키기 위 해서였다. 덕분에 광포한 혈사전의 고수들에게 발각당해 희생당한 백 도제자의 수도 많았지만 상당한 시일을 벌 수가 있었다. 혈첩이 예고 한 날자는 이제 불과 며칠 남지 않았고 혈사전이 혈첩이 예고한 날자 이내에 화산에 모인 백도고수들을 처부수려면 반드시 마봉곡을 거쳐야 했다. 화산으로 마봉곡을 거치지 않고 돌아가려면 능히 보름 이상의 시간이 더 걸린다. 즉 저들은 마봉곡에 매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예를 지키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고 실리를 통해 돌아가려 한다면 혈첩에 적힌 날자에 맞추지 못해 명예를 저버려야 했다. 제갈 도용은 오만한 혈사황이라면 설사 매복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명예 를 지키기 위해 마봉곡을 통과하리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아군이 불리한 상황이 아닌데도 매복을 사용한다면 백도의 자긍심과 정당함이..." 백도의 명분을 뒤집는 듯한 작전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관로자는 미련 이 남아 중얼거렸지만 이환자가 단호히 그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자긍심으로 아군의 피를 흘릴수는 없지요. 나중에 욕을 먹 더라도 매복함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저들이 아직도 백도가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는줄 알고 암습이 없다고 방심한다면 더 쉽게 이길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의 대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구습을 모두 버리지 못한 원 로고수들은 아직도 백도의 명예나 명분에 연연하고 있는 반면 중장년 에 승룡곡에 들어와 이십년의 세월을 보낸 백도 장로급 천무호정단 주 축 고수들은 명예보다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마봉곡은 과거 계곡이 있던 곳이라 아직도 지명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 고 있지만 화산에서 길을 개축한 이래로 앞뒤의 관도를 개통하여 지금 그이름은 마봉곡을 관통하는 하나의 긴 관도의 지명을 뜻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름에서 볼수 있듯 과거 계곡이었던 흔적이 남아 관도의 양 옆에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관도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마봉곡입니다. 필시 백도의 무리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알고있소. 매복을 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일이지. 하지만 모처럼 우 리를 위해 준비한 것을 알면서도 그냥 피해간다면 저들의 성의를 무시 하는 꼴이겠지.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서는 마봉곡을 지나치지 않을 수 도 없는 상황이오." 혈사전의 부전주인 혈악대제가 혈사오걸의 수좌인 일효의 말에 대답했 다. 혈사전의 부전주인 혈악대제는 과거 혈사문의 문주였다가 혈사황 의 부름에 응답하여 이인자의 자리를 지킨 효웅이다. 또한 그의 곁에 있는 혈사오걸은 혈사황의 주위를 지키는 오대호법으로 혈사황이 친히 키운 자였다. 다른 혈천마련의 세력이 전주가 키운 세력과 외부에서 영입한 세력을 철저히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하였다면 혈사전은 유일하 게 양 세력이 균형있게 조화된 세력이었다. "혈사대를 먼저 마봉곡에 통과하게 하시오." 혈악대제의 명이 떨어지자 일천명의 혈사전 고수들 중에서 혈포를 입 고 복면을 한 무사들 이백 명 정도가 앞으로 나서 먼저 마봉곡으로 들 어갔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애가 탄 것은 이환자였다. "눈치챘나?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에 매복이 있다는 것을 눈 치채지 못할 리가 없겠지?" "대주. 어떻게 하겠소? 마두들은 수를 나눠 조금씩 계곡을 통과시키려 는 모양이오. 매복이 있어도 계곡에 들어간 소수만을 희생기키고 모습 이 드러난 우리와 정면전을 나누려는 모양이오." "마봉곡을 꼭 지나쳐야 한다면 그게 가장 희생없이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겠죠. 하는 수 없이 저들 이백만이라도 처리해야 겠군요. 저들 을 처리하며 마봉곡이 막힌다면 그것을 치우느라 또 시간이 흘러갈 테 고 그리되면 화산에 도착할 때까지 저들은 여유를 얻지 못합니다. 지 친 적을 상대로 화산에서 아군이 편안하게 맞이하여 싸울수 있을 겁니 다." "허허. 대주는 꼭 우리가 질 것처럼 말씀하시는 구려. 내 생각에 저들 은 화산을 구경하기는커녕 이곳을 벗어나지도 못할 것 같소이다만." 그들이 말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이백 명의 혈포무사가 마봉곡의 협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백도맹이 있는 마봉곡 중간 쯤에 왔을 때 이 환자는 즉시 명을 내렸다. 협곡 절벽위에 있던 천무호정단이 절벽위에 나두었던 바위들을 굴리고 암기와 궁술에 능한 궁수대 무사들이 몸을 드러내어 화살비를 퍼부우려 할 때였다. "그렇게는 안된다." 갑자기 천무호정단의 궁수대 사이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붉은 안개가 거침없이 백도의 무사들 사이에 퍼져나가며 곳곳에서 비 명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 뭐냐?" "크카카카. 눈에 뻔히 보이는 매복도 함정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어느새 붉은 안개가 흐릿하게 모여 사람의 형상을 이루며 거침없이 천 무호정단의 무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궁수대는 접근전에 불리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고 뜻밖의 기습이었기에 침착을 되찾을 사이 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궁수대 쪽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크윽. 혈사운무술. 비겁한 사술을..." "크카카카. 본 혈사전은 혈사문의 후신. 혈사문은 사도의 종주이거늘 사술을 사용했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비겁하단 말이냐?" 혈사운무술은 자신의 몸을 붉은 안개로 가려 타인의 이목을 완벽하게 가리고 잠입하는 사술이다. 백도의 고수들이 마봉곡에 접근한 혈사전 의 고수들을 주목하고 있는 사이에 몇몇이 혈사운무술로 몸을 가리고 매복하고 있는 백도의 고수들 중에 궁수대 쪽으로 접근하여 오히려 기 습했던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적은 몇 안된다. 궁수대는 즉시 뒤로 빠지고 검수대 가 그들을 구원하라." 궁수대가 이환자의 명에 의해 절벽가에서 후퇴하기 시작했고 검을 빼 든 검도고수들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붉은 안개로 몸을 가리고 있는 혈사전의 고수는 바위가 있는 쪽에서 몸을 벗어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마봉곡에 이백명의 혈사전 고수들이 있는 이상 바위들이 있는 위치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마봉곡 절벽위에서 소란이 일자 도로를 따라 조용히 행군했던 이백의 혈포고수들이 즉시 절벽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봉곡 밖에 있던 혈사전의 본대도 즉시 마봉곡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이환자가 초조하게 소리쳤다. "즉시 절벽위의 사술을 파괴하고 저들부터 해치워라. 이미 매복은 소 용없게 되었지만 바위를 떨어트려 마봉곡의 도로를 봉쇄해야 한다. 그 이후에 저들과 정면승부를 버린다." 이환자의 명령에 검도 고수들이 일제히 붉은 안개를 향해 장력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가 그들의 몸을 가려주어 마치 몸이 안 개로 변화한듯 했지만 분명 적은 안개속에 숨어있었다. 검도고수들은 청각을 의지하여 붉은 안개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혈사전에서 도 괜히 이들을 올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방어에 충실한 그들은 모두 혈사운무술에 달통한 사도고수들이었고 혈사전의 고수들이 절벽위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은 충분히 방어할 자 신이 있었다. 정면대결로는 수십 명도 안되는 그들 숫자로 수많은 백 도고수들을 상대로 버틴다는 것이 무리였지만 그들 모두는 백도의 고 수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사술의 대가였고 혈사운무술로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백도고수는 눈을 가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꼴이었기에 방어에 치중한다면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고 자신했 다. 창칼이 부딪치고 장력으로 붉은 운무를 날려버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 운데 처음 마봉곡에 들어왔던 이백명의 혈포무사들이 절벽의 삼분의 이쯤 기어올랐다. 경공의 고수라면 두어번의 발디딜 곳을 찾는다면 즉 시 올라올수 있는 거리였다. 또한 마봉곡 밖에서 돌진하고 있던 혈사 전의 고수들도 삼분의 이쯤이 마봉곡 안으로 돌격해 들어오고 있는 상 황이었다. 하지만 절벽위에서 백도의 고수들은 협소한 장소라 수의 이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아직도 혈사전의 마두들을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환자는 초조하게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혈포무사들이 거의 절벽위로 접근하고 있고 이미 많은 수의 혈사전 본대 고수들이 마봉곡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는 갑자기 소리쳤다. "지금이다." 이환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붉은 운무로 감싼 혈사전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바위덩어리 땅 밑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땅을 파고 바위 밑에 교묘하게 은신하고 있던 백도 고수들이 일제히 떨쳐나온 것 이다. 그들은 즉시 혈사전 고수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한편 바위들을 밀어 절벽밑으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혈사전 고수들을 상대하던 백도 고수들도 그들이 지키고 있지 않은 절벽가로 달려가 일 제히 암기를 떨쳐내었다. 붉은 운무의 사도고수들이 미처 경악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르르릉! "크아아악" 마봉곡 안이 삽시간에 비명과 거대한 굉음 속에 묻혀 버렸다. 수십 개 가 되는 바위들이 마봉곡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봉곡 절벽에 어떤 장치를 했는지 굴러떨어진 바위들에 부딪쳐 절벽중간의 암석도 떨어져 나가며 바위사태가 마봉곡 안에 있는 고수들을 덮쳐내려갔다. 이백명 의 혈포 고수들이 떨어지는 바위들 틈에 견디지 못하고 같이 떨어져 내렸으며 마봉곡안으로 돌진했던 오백 명 정도의 고수들도 비명을 지 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였다. 마봉곡에 매복이 있는 것은 백도도 알고 혈사전도 알고있는 일이었다. 백도에서 그들의 행군을 전진하여 반드시 마봉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으니 그것을 짐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바보였다. 천무호정단의 화산 파견대의 군사역할을 맡았던 제갈도용은 혈사전이 반드시 매복을 공격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오만무도한 혈사황이라고 해도 매복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리라 생 각한 것이다. 처음 혈사전은 무리를 나눠 소규모로 마봉곡을 통과하여 소수의 희생으로 마봉곡을 통과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 만 제갈도용의 예측대로 과연 혈사전은 절벽위의 매복에 고수들을 파 견하여 돌바위 함정을 장악하고 그 틈을 타서 본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마봉곡을 돌파하고 이백의 혈사전 정예가 절벽 위의 혈무고수들을 구 원하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기좋게 함정에 빠져 돌무더기 아래 가라앉은 것이었다. "이...이게?" 혈암대제는 망연한 얼굴로 할말을 잊었다. 삽시간에 천명의 고수들 중 에서 칠백에 해당하는 고수들이 돌무더기아래 깔려버린 것이다. 돌덩 이를 피해 여기저기 몸을 날리던 고수들도 절벽위에서 우박처럼 쏟아 지는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쓰러지다 역시 돌더미에 깔려 버렸다. 바 위와 암기라는 이중의 함정폭우에 칠백의 고수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부전주." 비통한 목소리로 절벽 위에서 혈무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백도의 정 예들을 막아내던 혈무고수는 혈사전 오대호법인 혈사오걸 중의 네명과 그들이 이끄는 혈사은무대의 고수였다. 하지만 등 뒤에서 습격을 받아 살아 절벽 위에서 내려오는 자는 혈사오걸의 네명과 한두명의 혈사은 무대 대원이었다. 절벽위의 혈사은무대 이십명이 순식간에 죽어나간 것이다. "하하하. 백도무림을 얕본 결과가 이것이다." 백도의 천무호정단 고수들이 호탕한 대소를 터트리며 분분히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매복한 천무호정단의 고수들의 수는 천 삼백명 정도 되었으며 혈사전의 남은 고수는 삼백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만만한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환자가 승리의 미소르 띠우며 혈암대제에게 물었다. "그대가 이번에 혈천마련의 마두들을 이끌고 온 수뇌인 모양이구려. 본도는 이환자라고 하오." "크크. 혈암대제라 한다. 기특한 음모를 다 꾸몄군. 생각하지 못했다. 백도도 많이 발전했군." 혈암대제란 말에 이환자가 흠짓했다. 그가 장년시절 승룡곡에 들어가 기 전에 혈암대제는 한지방의 패주로 천하무림을 떨어울리던 거물로 혈사문의 문주였던 자였다. 그 이름에 이환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혈암대제 선배였구려. 보시는 바와 같이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같소.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소?" "돌아가? 네놈들의 목을 따기 전에는 돌아가지 못한다." "뻔한 결과를 보려고 하시오? 이미 혈천마련에는 승리할 기회가 없소. 게다가 어떻게 승리한다고 해도 이미 마봉곡의 통로는 완전히 막혔소. 혈첩에 응시한 날까지 화산에 도착할 수 없소. 즉 이미 혈천마련의 명 예는 땅에 떨어진 것이오. 그런데도 뻔한 승부를 고집하려 하시오?" "뻔한 승부? 크카카카. 네놈이야 말로 우리가 사도의 종주 혈사문의 후신인 혈사전이라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닌가?" 혈암대제의 광소가 터지고 갑자기 백도의 무리들 속에서 놀람의 음성 이 터졌다. 그들 뒤로 바위 무더기가 자욱히 깔린 곳에서 거대한 암석 더미가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암석더미 밑에서 무엇인가 벗어나려 고 하는 것처럼 바위들이 무너지고 비위틈에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 러내기 시작했다. "그럴리가? 천근 바위의 돌벼락에서 살아남는 인간이 있을리가?" "크크크. 네놈들의 함정은 훌륭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의 종조임을 잊은 것이 실수이다. 본 전의 주력인 혈사대는 모두 혈사강시로 이루 어졌다. 정식 이름은 혈사강시대. 십만근의 압력에도 버티도록 만든 본 전의 강시가 그ㄳ 돌벼락 따위에 하나라도 상했을 것 같으냐? 크카 카카." 혈암대제의 광소가 다시 들리고 바위 틈에서 진짜로 하나하나 혈포를 입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옷이 찢어지고 온몸이 흙더미에 깔렸다가 벗어나 지저분했지만 혈암대제의 말대로 누구하나 크게 다친 모습없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신형을 드러냈다. 복면이 찢어지고 드러 난 얼굴은 창백하고 푸른 얼굴로 이미 죽은 강시의 얼굴 그대로였다. 칠백 명의 혈사강시들이 암석들을 해치고 일어서자 졸지에 절벽에서 내려온 백도고수들은 앞뒤로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혈사강시라고? 그런 저주스런 마물을?" 이환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거 혈사문은 자신들 문파 최강의 강시 를 가리켜 혈사강시라고 했고 전설의 천마강시를 제외하고 최강의 강 시라고 자부했다. 혈사문은 사술을 가미한 사공을 주축으로 무림의 한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기에 혈사강시를 많이 제조 하거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분란이 있을 때마다 혈사문의 사 공 고수들이 직접 나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과거 마 교의 난때 혈사문이 혈사강시를 한번 등장시킨 적이 있었는데 단 하루 만에 당시 백도 최강문파이던 천룡문을 멸문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천룡문은 소림도 한발 양보하는 세력으로 절정고수들이 가득했던 백도 의 패자였는데 겨우 삼십 구의 혈사강시에 하루밤만에 몰살당했던 것 이다. 그 이후 혈사문이 따로 혈사강시를 동원한 적은 없었지만 혈사 강시라는 이름은 무림의 공포로 떠올랐었다. 그런데 지금 무려 칠백이 넘는 혈사강시가 등장한 것이다. "저주스런 마물이라고? 흥. 네놈들이 행군을 저지시키는 추잡스런 일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혈사강시들은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면 대결이라면 본 전의 진짜 고수들로 충분하니까. 하지만 너희들의 목적 이 본 전의 발목을 잡아 명예를 더럽히게 하려는 것이었던 만큼 우리 도 마물 혈사강시를 동원하여 너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뭐가 저주스럽고 뭐가 비겁한 일이냐?" 이환자의 경악에 상관없이 혈암대제가 손짓을 하자 그의 뒤에 있던 삼 백 고수들도 즉시 복면을 벗었다. 그들 역시 모두 혈사강시였다. 혈암 대제가 이끌고 온 고수들은 그와 혈사오걸 그리고 이십 명 정도의 혈 사운무대 대원을 제외하고 모두 혈사강시로 이루어진 무리였던 것이다. 혈암대제가 이환자를 비웃었다. "그리고 마봉곡을 봉쇄하여 화산을 공격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크크 크. 이미 본문의 고수들은 모두 사술로 몸을 감추고 일찌감치 너희들 의 이목을 피해 마봉곡을 통과하여 화산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 우리 는 단지 너희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본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 미끼였단 말이지. 위대한 혈사황과 내전 외전의 진짜 고수 천 사백 명 이 이미 화산 근처에 도착하고 있단 말이다. ㄳㄳ. 너희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그놈들은 아마 뒤통수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거야. 크 카카카." 혈암대제가 혈사강시의 무리 뒤쪽으로 훌쩍 신영을 날렸다. 혈사오걸 이 혈암대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혈암대제의 명령이 혈사강시 무리 에게 떨어졌다. "쳐라. 모두 없애라." 혈사전의 혈사강시는 혈사문 시절의 혈사강시와는 좀 틀렸다. 과거의 혈사강시가 절정고수와도 충분히 대적할 만큼 속도와 반응 단단함 모 든 면에서 무적의 강시였다면 지금의 혈사강시는 조문이 있는 불완전 한 혈사강시였다. 하지만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조문을 모르 는 한 과거의 혈사강시보다 속도와 반응은 떨어질지 몰라도 단단함은 더했다. 적어도 천무삼성과 같은 수준 즉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드는 초절정 고수가 아닌 절정고수 수준이라면 조문을 모르는 이상 상대하는 데 있어 혈사문 시절의 혈사강시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었다.창칼이 통하지 않는 강철 같은 몸을 가지고 반응 속도 도 일류 고수 못지않은 혈사강시와 천무호정단의 대결이 마봉곡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혈존무적2.txt 제 목:[연재] 혈존무적-옥룡왕의 정체 관련자료:없음 [1953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17 20:42 조회:1288 <옥룡왕의 정체> 악도와 천기노인은 도망치듯 화산에서 벗어났다. 혈존의 흔적을 모용충 의 몸에서 발견한 두사람의 온 몸에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평소에 스스 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혈존에 대한 두사람의 공포는 컸다. 실재로 혈 존의 흔적을 발견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멈추지를 않는 것이 다. 혈존이 이혼통제대법이라는 전설상의 사술을 익혔다는 심증을 굳힌 그들의 마음은 공포로 가득했다. 혈존이 스스로 나서지 않고도 분신을 통 해 천하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도의 기둥이라는 모용충이 혈존의 분신으로 농락당할 정도라면 마련이나 기타 전대기인 들중에도 혈 존의 숨은 분신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마련과 백도맹의 싸움도 혈 존의 각본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두사람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혈존이 지켜보기라도 하는양 부랴부랴 화산을 벗어났다. 공포로 인 한 전율은 섬서를 벗어날 때까지 끄치지 않았다. 하남 백도맹의 총단 근 처에 와서야 겨우 떨림이 멎었고 하북에 들어서서야 마음을 진정하고 냉 정하게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악도와 천기노인은 자신의 뒤를 쫓는 또다른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평소 냉철한 이 성을 갖고 있었다면 절대 범하지 않을 실수였다. 악도와 천기노인은 북경에 들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경은 하 북에 있는 백도 북부 두 개 총단 중의 하나가 있는 곳이다. 하남에 못지 않은 백도의 본거지이기에 절대 혈존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안심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설마 북경이야말로 혈존의 환생인 백이충의 본가 가 있는 곳이라고 둘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요리점이라는 용화루에 두사람이 들어섰 다. 안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떠들썩하고 있었다. 모두 사천과 화 산의 백도패배 소식과 사대 대첩에 관한 소문이었다. 솔직히 섬서에서 백 도는 패하지 않았다. 패하여 물러난 것은 마련 측이고 혈사황이었다. 백 도는 섬서의 관문을 굳건히 지킨 것이다. 허나 워낙 백도의 피해가 큰 탓 에 섬서조차 마련에 패한 것처럼 사람들은 떠들었고 대신 천하를 지배하 던 백도를 연전연패시키는 가공할 마련조차 물리친 새로운 영웅들을 환호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척 떠들어 대었다. "마련의 세력이 그토록 강하단 말인가?"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백도는 사천에서도 패했고 섬서에서도 패한 것 과 마찬가지이지. 게다가 섬서의 화산파는 소림 무당과 더불어 구대문파 세 개 기둥중의 하나라고 자부하던 대문파가 아닌가? 이번 마련의 발호 에 구대문파 중에 무사한 문파가 몇 개나 되는가? 공동파는 아예 짐을 싸 들고 백도맹 총단으로 피신을 왔다고 하더군." "아이쿠. 그럼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거야? 마련의 힘이 백도를 앞도한다 면? 앞으로 과거 혈존 시절처럼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건가? 혈천마 련이라는 것이 과거 혈천마궁의 후신이라며?" 대충 떠도는 소리는 사천과 섬서의 백도 패배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 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래를 비관하는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네. 백도에는 그래도 무적장왕과 혜경 성승 두 성인이 있지 않은가? 아직 마련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닐세. 그 리고 마련에 칠마황이 있다면 이번에 새로이 나타난 마련의 천적 일황 삼 존도 있지 않나? 백도와 마도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일황 삼존이 백도를 도울테니 마련은 결코 천하를 차지할 수 없을 걸세." "백도의 일황 삼존이라니? 그건 뭔가? 천무삼성은 들어봤어도..." "천무삼성은 이제 흘러간 이름, 과거 혈존 쌍마 천무삼성 시절의 이름이 지. 지금은 일황 삼존과 마련 칠마황의 시대라네." 요즘들어 부쩍 소문이 돌고있는 일황은 누구인가? 천무삼성을 대신하여 천하를 구원할 존재로 백도의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르는 인물. 바로 무적 소야 모용풍을 말함이다. 무적소야 모용풍은 섬서에서 혈사황을 물리치 며 무적일황이라는 새로운 별호를 얻으며 천무삼성에 버금가는 이름을 손 에 넣었다. "아, 무적소야 모용풍 말인가? 그런데 그는 현무도선을 죽인 백도의 반역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백도의 구세주인 일황이라니? 어떻게 된건가?" "무적소야란 말은 과거의 명호일세. 이제는 일황 무적일황 모용풍일세. 반역자라는 말도 실상은 천무삼성 중의 현무도선께서 마련의 함정에 빠졌 을 때 본신 내력을 그에게 전수하고 마도에 일격을 먹이기 위해 숨겨왔기 에 퍼진 헛소문일세. 그야말로 무적일황은 백도의 구세주일세. 마련의 이 인자인 혈사황을 그가 물리치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마도 의 칠마황을 감당할 정도의 일황 즉 무적일황 모용풍이라고 부른다네." "알았네. 그럼 삼존은 이번에 마련을 패퇴시킨 사대 대첩의 주인공을 말 하는 것이겠군." 삼존 흑철존 곤무악은 철마황을 물리쳐 그 이름을 귀주와 운남에 떨쳤고 귀영신군은 천뇌교를 물리침으로서 천뇌교의 정통을 인정받아 천뇌존이라 는 이름을 얻었으며 현황방의 방주 만승패검은 상계를 발아래 두고 단향검군의 후예임이 알려 지며 황금존이라는 이름으로 단번에 그 이름이 천하의 구성으로 떠올랐 다. 이제 백도맹 천하는 물러갔다고 용화루의 사람들은 공공연히 떠들고 있었 다. 천무삼성과 무성 종리연의 시대는 가고 일황 모용풍과 삼존이 주관하 는 백도시대가 왔다고. 이제는 백도맹과 마련의 싸움이 아니라 마련 칠마 황과 삼존이 돕는 백도 일황과의 싸움이며 그 승자가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떠드는 것이다. "흥.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입을 지껄이는 군." 악도는 용화루의 주객들이 떠드는 소문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악도의 말 을 듣고 천기노인은 이해가 안간다드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왜?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지 않는가? 섬서를 지켰다 하되 화산과 종남 은 거의 멸문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니... 구대 문파 중의 무려 일곱이 마련에 의해 패망했으니 백도맹은 종이호랑이로 인식되어도 할말이 없지 않는가?" "천기노인까지 왜 그러시오? 화산의 피해가 뜻밖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른 문파는 백도맹에서 버리는 패였소. 중원 외곽지역에 있는 그들 문 파 모두를 구원할 수 없기에 백도맹은 그들에게 백도맹 총단으로 피할 것 을 권유했소. 문파를 부흥시킬 어린 제자들과 알짜배기 장로들은 처음부 터 아예 백도에서 뒤로 빼돌린 상태였었소. 이번 전투에서 쓰러진 문파들 은 백도맹에서 마련의 힘을 알아볼 가늠자로 사용하기 위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남겨둔 세력이었소. 문파의 전통과 이름을 위해 각파의 장문인 들이 고집하여 일대 제자들과 함께 남아 목숨을 걸었던 거요. 두고 보시 오. 다시 백도천하가 된다면 십 년이내에, 지금 패망했다는 칠대문파가 몇 배나 되는 세력을 가지고 다시 무림에 화려하게 등장할 테니."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백도의 기둥 일곱이 쓰러졌으니 백도맹의 타 격이 큰 것이 아닌가?" "백도맹의 타격이 클 것도 없소. 얼굴로 따지자면 백도의 얼굴은 구대문 파이겠지만 실력으로 따지자면 백도의 힘은 오대세가요. 그리고 화산의 피해가 아무리 커도 화산 동혈에 은거하던 도인들이 나서면 금방 세력을 회복할 것이니 잠재력으로 따지자면 화산의 피해는 소털 중의 하나가 손 상된 정도요. 또한 소림 무당 화산 셋이 건재하면 패망한 다른 문파의 전 력의 서너 배이니 구대문파로 전체로 따져도 피해는 미미하오. 진짜로 타 격을 입은 것은 힘이나 실력이 아니라 명분과 체면이었소. 하지만 백도맹 은 그것을 기꺼이 감수했으니 과거의 고리타분한 백도맹이 아니오. 그리 고 오대세가는 하나하나가 소림이나 무당에 못지않소." 악도의 설명에야 천기노인은 겨우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들이 앉은 좌석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요." 악도와 천기노인이 뒤를 돌아보니 관복을 입은 위사차림의 남자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들 뒷 좌석에 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포권을 하며 악도에게 말을 걸었다. "소생은 삼왕부의 시위 왕정이라 하오이다. 본의아니게 뒤에서 논의하시 는 말을 엿듣게 되었소. 청컨대 소생들과 합석하여 해박한 고견을 들려주 심이 어떠하시오?" 삼왕부라면 황제의 두 번째 아우인 옥룡왕부를 말하는 것이다. 당금 천하 의 최고 권력자로 황제도 두려워한다는 옥룡왕 주원호가 있는 곳이다. 삼 황자시절의 주원호는 일개 풍류공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옥룡 왕은 진면목을 드러내어 천하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지금 개인적으로 수천의 사병을 거느리고 동창을 수족으로 부린다고 한 다. 옥룡왕부의 군사들이 황도를 제멋대로 활보하고 있어도 이를 논의하 는 신하가 없을 정도이다. 재력으로는 금황벌을 사주하여 상계 쪽에도 막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권세 쪽으로는 조정 삼대 파벌 중에 가장 세력이 큰 학림파의 배후를 자처하고 있다. 천하는 언젠가 옥룡왕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로 옥룡왕 주원호는 황제의 위엄과 권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게다가 인물이 준수하 고 성품이 호탕하며 마음이 너그러워 백성들의 인심을 얻고있는 자이기 도 했다. 옥룡왕부의 시위라면 호위무사를 뜻하는데 원래 재상 집의 똥개가 없는 집의 사람보다 신분이 높다는 말도 있는 판이다. 옥룡왕의 권세 덕에 일 개 왕부의 호위무사의 자리는 금의위나 동창도 한발 양보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가 불렀으니 악도로서는 꺼림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장소 가 황도인 북경이고 상대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의 옥룡왕부 무 사이니 악도도 공손히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강호에서 굴러먹은 하찮은 늙은이에 불과하오다. 감히 높으신 나 으리에게 실례를 범할까 두렵소. 강물은 우물물을 침범하지 않는 법이니 나리께선 이 늙은이의 사정을 봐주셨으면 하오." 강호의 인사는 관부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니 좋게 말할 때 상관하지 말라 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하지만 범같은 인상의 호위무사는 직접적으로 말 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자인 모양이었다. "하하. 실례라니. 그런 걱정 마시오. 왕야께서 강호의 인사들을 좋아하시 고 대접하시니 우리 아랫사람들도 강호의 인사들을 좋게 보고 있소. 그래 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친분을 맺을 기회를 노린다오. 이제보니 노인장들의 식견이 보통이 아니니 나의 견문을 넓혀주시기 바라오." 악도와 천기노인이 보아하니 왕정이라는 자가 두사람에게 나쁜 마음을 먹 고 있는 바도 아닌 것 같고 호의를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혈존을 탐색하며 자신의 종적을 감추고 있는 자인데 남의 이목을 끌 어 좋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둘이 주저하자 왕정이 아예 일행을 이끌고 자신들이 앉아있던 탁자를 움직여 두 노인의 자리와 붙여버리는 것이었 다. 그 바람에 용화루의 좌석배치가 이상하게 헝클어졌지만 왕부의 무사 가 하는 일에 용화루의 점원이 감히 불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어영부 영하는 사이에 악도와 천기노인은 왕정의 일행과 합석하게 되었다. "본인은 아까 말했듯이 삼왕부의 삼급시위 왕정이라 하고 이쪽은 구문제 독부의 포교들이오." "노부들은 이름없는 필부들이니 밝힐 이름도 없소이다." 퉁명스런 악도의 말에 왕정의 눈치를 보고있던 포교들이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왕정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가만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큰 소리만 쳐왔던 포교들의 입장에서 늙은이 둘의 뻣뻣함은 아무래도 마음 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헛. 아무래도 노인장들은 이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려. 그런 데 방금 전에 백도의 세력이 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련을 능가한다는 말 씀을 하신 것 같은데." "백도가 마련을 능가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소. 단지 백도의 힘이 마련 에 의해 꺽이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오." 악도의 냉냉한 말에 왕정도 점차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마 음을 먹고 있다고 해도 상대의 푸대접이 너무 심한 것이다. "백도의 힘이 꺽이지 않았다는 말은 곧 마련을 능가한다는 말이 아니오?"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오? 이 늙은이의 소견으로 백도가 천하 대국을 주 지하는 위치를 차지했을망정 실제적 힘은 마련이 백도맹을 훨씬 능가한 다고 보오." 왕정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아하니 왕정은 백도맹의 열렬한 추종 자인 것 같았다. 중인들이 모두 백도맹을 깍아내리는 와중에 악도가 백도 맹이 건재하다는 의견을 내었기에 동지를 만난 듯 합석했거늘 점차 악도 의 말이 왕정의 뜻과는 달리 가는 것이 아닌가? "백도는 운이 좋았소. 과거 마련 칠마황의 능력으로 보건대 섬서에서 패 했다면 백도맹은 마련에 완전히 패망당했을 거요. 그 정도로 마도와 백도 는 전력 차이가 있소. 하지만 사대 대첩이 발생했으니 마련이 새로운 강 자들을 견제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백도맹은 삼존과 연합하여 겨우 백중세 를 유지할 수 있었을 거요. 그런데 섬서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바람 에 일황의 가세로 백도는 기세가 오르게 되었소. 아마 수많은 무인들이 백도맹에 합류하고 더 이상 마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 덕에 간 신히 백도맹은 천하의 대국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소..." "너무 백도를 얕보는 것이 아니오? 아까 노인장들끼리 말하던 것과는 틀 리지 않소?" "백도가 패망할 정도로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 뿐이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소. 백도의 힘이 딸리지 않았다면 굳이 섬서에 전력을 집중시키 지 않고 바로 신강으로 쳐들어갔을 거요. 그러고도 백도맹은 섬서에서 패 할뻔 했소. 모용풍의 출현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소." "무적일황 모용풍도 백도맹 소속이오. 그렇다면 그의 출현도 결국 백도 의 힘이 아니오?" "정말 그럴까? 노부는 모르겠소. 언제는 천하의 반도라 욕하더니 오늘은 백도의 구세주라... 하하하. 정말 조석지간으로 변하는 것이 백도의 마음 이라." "뭐라? 노인장들이라 참으려 했더니 천하의 협사들을 모욕하다니. 어이하 여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오?" "그러길래 애초에 실례를 범할 것 같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소? 귀먹어리 였단 말이오?" "으으... 노인장들은 지금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거요?" "저자는... 으으. 그자다. 바로..." 용화루의 백장 밖, 어느 저택의 지붕에서 용화루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앉아있는 자의 입이 절로 열렸다. 그는 술 항아리 하나를 옆에 끼고 있었 는데 술 항아리 안에는 놀랍게도 용화루의 정경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 다. 술 항아리로 악도를 엿보고 있는 자, 몸은 되살아난 천마지존 혁련광 이되 정신은 강림한 백이충의 것인 분신이었다. "번뇌천이 알려준 자의 얼굴이다. 둘 다 마찬가지이다. 저 둘 중 하나는 잘 알고있는 자이다. 저자를 죽이고 싶다. 으으... 그런데 저 자가 누구 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마지존은 악도와 천기노인을 섬서부터 미행해 왔다. 당장 이 둘을 처죽 이지 않은 것은 천마지존의 정신감응을 받은 백이충이 말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의 정체와 배후를 알고자 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천마지존의 몸에 영혼을 강림시켜 직접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자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필시 보통 악연이 아니다. 게 다가 이 증오감... 도대체 누구인가?" 백이충이 천마지존의 몸으로 머리를 감쌌다. 깨어질 것 같은 영혼의 기 억 속에 얼핏 한마디가 정신을 울린다. - 그 여자를 그처럼 얻고 싶다면 강제로 취하면 되잖아. - 두근! 마화타에 의해 강화된 천마지존의 심장이 울린다. 악도의 모습을 비추던 술항아리가 백이충의 분신의 손에서 깨어져 버린다. 술이 지붕위에 쏟아 졌다. 자욱한 술향기가 퍼진다. "강제로 취하라고? 산산을 힘으로 얻으라고...?" - 나는 영원한 너의 편. 너의 수족이 될 것을 맹세하겠어. - "그래. 그리고보니 너는 어릴 때부터 나의 곁에 있던 자였어." -여자는 어차피 여자. 배교의 교주가 될 네가 천한 계집 때문에 고민하 면 안돼.- 두근 두근! "천하다고? 산산이 천하다고? 누구냐? 누가 감히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녀의 방에 음락분을 뿌려놨어. 너는 들어가서 열매 만 따 먹으면...- "감히. 산산에게 음약을 뿌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커억. 용서... 용서해줘. 나를 벌할 때가 아니야. 빨리 그 여자에게 가 야... 부디 내 충정을 믿어줘. 그건 네가 원하는 것이었어. 단지 네가 원 하는 그녀를 취하도록 도왔을... - "언제나 그랬어. 심지어 네 놈은 내가 가장 순수하게 대해야할 소중한 존 재에게 숨겨두었던 가장 추악한 본심마저 눈치채고 더러운 욕망을 충족하 게 만들었어. 이놈. 전. 일. 비!" 백이충의 입에서 갈라져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악산 산에 대한 기억이 터져나오며 백가량이라는 인격의 특성이 강하게 표출되 는 듯. 눈에서는 혈광이 번뜩이고 무시무시한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왔 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붕위 백가량의 종적이 발견되었다. 조용히 지붕 위에 있던 그가 난리를 떠는 모습에 그가 올라가있는 지붕의 주인, 정대 인의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정대인의 하인들이 대낮의 대담한 도둑이 라 욕하며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 네가 그렇게 말했다. 백년도 넘는 세월을 가진 나의 친구 여. 내 욕망과 야망을 양분삼아 내 추악한 부분을 자극시킨 친우여. 나 를 가장 잘 알고있는 죽마고우여. 그래. 그때 네 충고는 언제나처럼 매 우 유용했고 나를 만족시켰다. 내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사랑을 나 는 스스로 욕망이란 이름앞에 더럽힐 정도로... 전.일.비." 천마지존의 몸에 백이충이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렸다. 얼마전 악몽을 꾸 고난 직후처럼 악산산에 대한 강한 기억의 자극에 지금 천마지존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은 온통 백가량의 인격에 의해 물들어 버렸다. 전일비. 어떻게 그 이름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 혈존의 욕망과 살욕을 자극하는 존재. 가장 어둡고 추악 한 부분을 스스로 혈존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던 존재. 너무나도 자연스럽 게 백가량의 머리에서 전일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힘으로 반항하는 산산의 몸을 차지했지. 추악한 욕망을 만족 시켰어. 괴로워하는 그녀를 억지로 겁탈했고 그녀가 아직도 처녀임을 감 격해 했지." 악산산과의 추억이 다시 떠오른다. 몸을 빼앗기고 거의 넋이 나가있던 악 산산. 그녀의 모습에 얼마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던가? 하지만 백가량 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몸만으로는 악산 산에 대한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녀의 앞에서 개 흉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산산이 백가량 에게 마음을 열고 환한 미소를 지을줄 알게 되었는데... "커-어-억." 백가량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질렀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오기 시 작했다. 어떤 것을 기억해내는 것을 영혼이 거부했다. 스스로 그 이후의 기억을 상기해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너무나 심했다. 두려웠다. 싫었 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전일비. 너는 죽어야 한다." 그의 두 눈에서 자욱한 살기가 퍼져나갔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정대인 저택의 호위무사들이 지붕위에 나타났다. 자신만만하게 저택의 호 위무사들이 소리쳤다. "대담한 도적 같으니.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모르지만 순순히 포박을 받 아..." 콰콰쾅. 백가량은 정대인 저택의 소동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단 지 용화루를 향해 몸을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 라진 직후 어리둥절하던 호위무사들이 모습이 먼지처럼 스러지기 시작했 다. 마술처럼 사람의 모습이 피먼지로 화해 허물어지자 그를 지켜보던 저택 밑의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에 저택의 지붕이 백가 량이 있던 지점을 중심으로 쩌억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무너져 내렸다. 건물이 가루로 화해 허물어지며 그 밑에 있던 하인들과 건물 속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콰르릉.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대낮 멀쩡한 하늘에 벼 락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천벌을 받은 자임이 틀림없다. 정산적인 자가 대낮 해가 멀쩡하니 떠있는 상황에 서 벼락을 맞거나 볼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으므로.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 치는듯한 소리가 퍼져나가자 북경시내를 오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북경에서도 유명한 주루인 용화루가 무너 지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듯 상층부터 시커멓게 그슬려 부숴지고 허물어 지고 있었다. "크크크. 그 사이에 도망가다니. 역시 악도 답구나." 헐렁한 장포를 가진 괴인이 반쯤 허물어진 용화루 허공위에 붕붕 떠 있었 다. 천마지존공. 너무나 놀라운 힘이었다. 백가량의 단 일격에 수 백평 규모의 거대한 건물 용화루가 허물어진 것이다. 설사 진짜 벼락이라한들 어찌 이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겠는가? 그러나 용화루를 허물어트린 백가량 의 기분은 별로 좋지 못했다. 악도를 놓친 것이다. 사람들이 용화루 주위에 몰려들었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거대한 건물이 폭삭 가라앉으며 무너졌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용화루의 괴변이 바로 이 괴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 람의 힘으로 누가 용화루같은 거대한 건물을 단숨에 반파시킬수 있다고 믿겠는가? 단지 사람들은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에 놀라워할 뿐이었 다. (안그래도 죽여야 할 놈이었다. 하물며 감히 나를 노리다니. 반드시 오 늘 죽여버리겠다.) 백가량의 몸에서 살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백가량에 물든 현재의 백 이충이 가끔 쌍노앞에서 드러내던 살기였다. 하지만 천마지존의 몸을 차 지한 백가량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그러한 살기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 런 살기가 갑작스런 용화루의 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몸에 소름을 돋게 만 들었다. "앗. 저기봐라. 허물어진 용화루의 위에 사람이 떠 있다." 누군가 백가량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백가량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그들의 눈을 완전히 무시했다. 혈 존시절 비위가 거슬린다고 해서 황궁까지 처들어갔던 백가량이었다. 남들 의 눈 따위 꺼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물며 백이충의 허약한 몸이 아니 라 천마지존의 강대한 몸을 지니고 있음에야. 포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무인들의 움직임도 간혹 보 였다. 북경은 황도인 동시에 백도맹의 북부 2단이 존재하는 곳이다. 절정 고수들이 없을 리가 없다. 갑자기 황도 한가운데에서 유명한 용황루가 이 유없이 쓰러진데다 수상한 자가 떠있으니 포교와 고수들이 몰려드는 것이 다. 백가량은 주변에 몰려드는 고수들의 기척을 느끼며 슬며시 몸을 감추 려 했다. (크크크. 감히 본좌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피의 축제를 열고 싶지만 악 도 전일비 그놈을 오늘 반드시 죽여야 한다. 시끄럽게 굴다가 본좌의 정 체가 드러나면 악도 그놈이 아예 꽁꽁 숨어버릴 염려가 있어.) 백가량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닌지 두 눈을 의심할 따름이었다. "옥룡왕부라니. 전일비가 왕부에 들어갔단 말인가?" 북경의 서쪽에 황궁에는 못미치나 거의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저택이 있 었다. 당금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느 옥룡왕부였다. 술법으로 찾은 악도의 기척은 옥룡왕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왕부의 호위무사를 만났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나? 악도가 배후와 만 나기위한 접선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전일비의 배후가 옥룡왕이고?" 백가량의 어조에 뜻밖이라는 투는 있었지만 놀람이나 꺼리는 기색은 없었 다. 배후가 옥룡왕이라면 옥룡왕을 처치할 기세였다. 황제도 비위에 거슬 리면 죽이려 한 자가 혈존 백가량이니 옥룡왕인들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그동안 너무 유약했어. 분신의 몸을 이용하여 모조리 쓸어버리면 될 것 을." 백가량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백이충은 백가량의 기억을 가지 고 점차 그에 동화되었으되 기본적으로 백이충의 사고를 근본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군부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금혜연을 위해 혈존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 무림에 뛰어들었다. 되살아난 백가량의 인격과 동화 되면서 야망이 생긴 이후에도 백이충은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약점과 자 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일단 머리와 계략으로 모든 일을 이끌 어나가려 했다. 지금의 백가량은 백이충의 인격이 전혀 없는 순수한 혈존 백가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이충의 기억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백가량이든 백이 충이든 어차피 다른 인격과 기억을 가진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도 백이충의 계획과 기억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가량은 자신 의 능력에 대해 철저히 확신하는 자였다. 또한 지금만은 장군부나 금혜 연 따위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돌아가는대로 계획을 변경하겠다. 모용풍의 몸을 이용해서 남은 천무이 성의 두 놈을 처죽이고 백도를 장악하는 거다. 또한 혁우비의 몸을 이용 하여 천년마교와 혈사문을 장악, 배반한 일곱 놈과 일곱 노물을 처죽인 다. 다른 분신을 이용하여 백도 마도를 제외한 세력을 규합하고 첫째와 둘째를 찾아 죽여버리면 천하에 본좌를 거역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흐 흐. 혈천마궁을 다시 부활시키리라." 훌쩍 백가량의 몸이 옥룡왕부의 담을 넘어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 수한 화살이 백가량의 몸으로 쏟아졌다. "뭐야? 왕부의 경계가 철저한 건가? 아니면 기다린 건가?" 백가량이 호신강기를 두르니 화살이 몸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우수수 떨 어졌다. 천마지존의 단전에는 수많은 마교 대종사들의 내공이 합쳐져 있 었다. 적어도 내공이 마르거나 부족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 궁왕이 쏜다 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혈존이었다. 백가량이 눈을 들어 보니 거대한 왕부 담장너머 후원이 하필이면 무사들 이 수련하는 연무대였다. 수많은 호원 무사들이 몰려 서로 검을 겨루며 수련하고 있었다. 그 수가 수백은 되어 보였다. 또한 한 쪽에는 궁술 수 련장인 듯 과녁이 있고 오십 명 정도의 궁수들이 궁술을 수련하고 있었는 데 백가량이 넘어온 곳이 바로 궁술 수련장의 과녁이 있는 바로 뒷 담이 었다. 갑자기 연무장의 궁술 과녁 뒤로 침입자가 불쑥 나타나자 과녁을 겨냥하 던 궁수들이 제일먼저 놀랐다. 곧 궁술대장은 그가 침입자임을 알고 궁수 들에게 과녁의 변경을 알렸다. 그 바람에 백가량은 담을 넘자마자 수많 은 화살세례를 받은 것이다. 장대비 같은 화살비 속에 백가량은 태연하고 그 주위로 우수수 화살이 쏟 아지자 궁수들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가려 뽑은 명사 수들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눈알도 맞추는 궁수들인데 그런 화살을 무 용지물로 만드는 백가량의 신위에 놀란 것이다. 궁수들이 웅성대자 백가 량의 출현은 즉시 연무하는 호위무사들에게도 알려졌다. "흐흐.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잘됬군. 옥룡왕을 제물 로 본좌 혈존의 건재를 세상에 드러내리라." 백이충과 쌍노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백가량은 서슴없이 하며 옥 룡왕부로 걸어들어갔다. 일부러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으나 이왕 들 킨 것 혈존 체면에 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산책 을 하는 듯 여유로웠다. "쳐라. 왕부의 침입자다." "강호의 무뢰한이다. 하나이니 사로잡아라. 그 배후를 캐내야 한다." "어리석은 자. 왕부가 용담호혈인줄 모르고 잠입하다니." 그의 태평한 모습에 호원무사들이 분노하여 백가량에게 덤벼들었다. 그 들 역시 이십년 넘게 옥룡왕이 기른 정예무사였다. 수백명 전부가 일류 의 경지를 훌쩍 넘어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실로 십년만의 침입자로다. 환영의 의미로 일격에 제압하리라." 호원무사의 장을 맡은 중년인 하나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칠 팔장을 훌쩍 넘어 덮쳐왔다. 금의위 출신의 절정고수로 황궁에서 임무를 맡아 강호를 떠돌 때도 적수를 만나지 못해 은근히 무림인을 무시하던 자였다. 금의 위 천호까지 지위가 올라갔던 자로서 오만하되 그 능력만은 인정받을만 하여 옥룡왕부에 들어가 오백의 호원무사들의 대장이 된 자였다. "날파리 같은 것." 백가량이 냉소하며 가볍게 장을 날렸다. 천마지존공 최후의 초식. 천마현 세. 과거 팔대천마의 수좌인 천마조차 필살의 절초로 아껴두던 비장의 절 학이다. 그만큼 위력이 크고 내공소모가 심하다. 하지만 무한한 내공을 가진 천마지존의 육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강시보다 더욱 단단한 괴물. 역대 마교 대종사들의 육체의 짜깁기에 부활의 술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괴물이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한계도 이 괴물같은 육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천마현세같은 절기를 삼류 절기처럼 가볍게 사용하는 것이다. 콰콰콰쾅! 일장에 삼층 높이의 건물을 반파하는 위력의 장력이다. 군문의 대포도 이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리 없다. 당연히 인간의 육신이 견딜수 있을 리가 없다. "크아악." 앞장섰던 호원대장 중년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 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흔들리고 크기가 방원 십오장에 깊이가 일장 이나 되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그 범위안에 있던 이십여명의 인간 의 육체가 허무하게 고기 덩어리로 바뀌었고 주위에 있던 사십여명이 팔 다리에 충격을 입고 중상을 당했으며 백여 명이 기파의 충돌에 내상을 입 고 쓰러졌다. "괴물이다." "세상에 저런 장력이! 만근 화약보다 더하다." "과거 마도 제일의 장력을 자랑하는 벽력지존도 저정도는 아니었을 텐 데." 호원무사들이 일제히 두려움에 떨며 물러섰다. 일장에 삼분의 일에 해당 하는 사상자가 생겨났으니 그럴만 하다. 평소에 왕부의 권세를 믿고 안하 무인을 떨던 호원무사들이었으나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의 무인을 보고 질 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가량이 성큼 다가서자 일제히 호원무사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얼굴을 붉혔다. 왕부를 호위하는 무사 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적에게 물러섰으니 이는 치욕적인 일이라 아 니 할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백가량은 너무나 두려운 상대였다. 만일 그의 정체가 혈존이라는 것까지 알려졌다면 일제히 뒤도 안보고 달아났 을 것이다. "천마지존공. 귀하는 누구이기에?" 후원 뒤의 정자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가량이 오만한 눈 빛으로 둘러보다가 미약한 파장을 눈빛에 드러냈다. 뜻밖에 정자에서 나 타난 백의 중년인은 그도 잘 아는 자였다. (절정마유가 아닌가? 팔대천마의 하나인 천유와도 비견되는 삼십 년 전 천하 삼대 두뇌의 하나. 천년마교의 초청은 물론 나의 초청도 거부한 자 이다. 괘씸해서 죽이려 했지만 교묘하게도 행방을 감추었지. 저런 자가 왜 여기에?) 무시할 만한 자는 아니었지만 혈존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 되는 자는 아니 었다. 오만한 백가량의 걸음걸이에 은근히 절정마유의 안색이 붉어졌다. "소생은 절정마유라는 사람으로 왕부의 삼총관을 맡고있소. 감히 왕부를 침입한 귀하는 누구요? 마련의 인물이오?" "흥. 너는 나에게 질문할 자격이 없다." 백가량이 절정마유의 체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옥룡 왕부의 저력에 약간 놀랐다. 절정마유가 왕부의 귀빈도 아니고 겨우 삼총 관에 불과하다니. 도대체 옥룡왕부에 얼마나 많은 기인이사가 몰려있단 말인가? 물론 백가량은 자신의 발을 저지할 만한 자가 왕부 안에 있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귀하는 너무 오만하군. 설사 천마황이라도 옥룡왕부에 마음대도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늘." 오만한 백가량의 어투에 얼굴 가득 노기를 띤 절정마유가 손을 들었다. 즉시 후원 쪽으로 금의 무사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백가량이 한눈에 보기 에도 보통 자들이 아니었다. "왕부에는 삼천 무사가 있소. 무사에는 다섯 등급이 있는 데 가장 등급 이 낮은 계급이 방금 귀하가 물리친 백의 무사이오. 금의 무사는 세 번 째 중간 단계의 무사들이니 어디 귀하의 실력을 확인해 보리라." 절정마유가 지휘하자 일정한 진세를 이루며 금의 무사 삼백 육십명이 백 가량에게 다가섰다. "한마디 하자면 본인을 비롯한 왕부의 몇몇이 천하 고금의 으뜸이라는 백 도 흑도의 절기를 상대할 절진을 만들었다는 것이오. 이들은 전문적으로 천마지존공을 상대하기 위한 천마포박진을 익힌 자들이오. 상대하기 쉽 지 않을 것이오." "헛소리." 진법으로 천마지존공을 상대한다? 백가량은 믿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한 계에 이르는 최상승무학이 사대마도절예이다. 천마지존공은 그 중에서도 최강의 마공이다. 진법의 으뜸이라는 소림사 백팔나한진 조차도 천마지존 공으로 열합 이내에 깨부술 자신이 있는 백가량이었다. 그런데 왕부의 무 사들이 엉성하게 짠 병진이 천마지존공을 막는다고? "천마현세." 대뜸 백가량이 천마지존공을 날렸다. 뭉클한 암흑의 마기가 구름처럼 금 의 무사들에게 날아가자 절정마유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천마지존공의 최종 절기를 저토록 가볍게." 절정마유가 즉시 손에 든 섭선을 마구 흔들었다. 그것이 진법을 지휘하 는 지시라도 되는 듯 삼백 육십명의 금의 무사들이 삼조로 나뉘어 각기 앞에선 자의 등에 손을 뻗고 격체전력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맨 앞에 선 삼인이 뭉클거리며 덮쳐오는 암흑마기에 삼면으로 손을 뻗었다. 콰콰콰쾅. 다시금 지진이 일어난 듯한 굉음이 울리고 백가량이 서너걸음 물러섰다. 부활의 술로 시체가 움직이는 몸이라 생혈이 없어 그렇지, 하마터면 내상 을 입고 피를 토할뻔 했다. 반면 삼백 육십명의 금의 무사들은 일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백가량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겨우 삼백 육십명으로 천마지존공을 막았어?" 삼백 육십이라는 숫자가 겨우라는 단어와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러나 홀로 천명이고 만명이고 대적하여 죽이고 패배시킨 경험이 있는 혈 존이다. 변황을 돌 때는 홀로 변황 일천문파의 지존들을 사흘 낮밤에 걸 쳐 주살한 적도 있다. 그들 하나하나의 무공은 중원 구대문파의 장문인 에 못지 않았다. 지금 천마지존의 몸으로 발휘하는 천마지존공은 혈존 시절의 쌍영마공의 위력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천마현세라 면 삼백 육십덩이의 핏덩이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삼백 육십명에 달 하는 일개 호원무사들은 단지 한걸음 물러섰을 뿐이다. 절정마유가 다시 부채를 흔들자 금의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일정한 진형 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 고도의 진법에 맞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 는 모습. 하지만 백가량은 대경실색하여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세수역근신공. 세수역근신공의 무리인가? 방금 전 달마삼검을 진법으로 표현하여 공격하고 있는 것인가?" 천무삽성이 합공을 한다해도 지금 삼백 육십명의 금의무사들이 펼치는 진 법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수십의 혜경성승이 있어 저마 다 달마삼검을 펼치고 있으며 백가량은 그 속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모습 이었다. 백가량의 놀란 외침에 그제야 절정마유가 미소를 지었다. "천마지존공을 제압하기 위한 진법을 구성하는 이론을 마공의 극성인 세 수역근신공에서 많이 빌려왔을 뿐, 천마포박진이 세수역근신공과 동일한 것은 아니오. 오히려 천마지존공을 제압하는 데에 있어서는 훨씬 효과적 이오. 팔대천마의 수뇌 천마일지라도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이오." (옥룡왕부. 단순한 일개 왕부가 아니다.) 백가량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그의 생각처럼 옥룡왕부는 범상한 곳 이 아님이 당연했다. 소림사의 진산지보인 세수역근신경의 무리를 이토 록 간단히 도용할 수 있는 곳이 범상한 곳일 리가 없었다. 절정무학은 권 세가 있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천하 절정무학을 상대할 진법을 왕부에서 연구했다고 했다. 천마지 존공의 극성에 해당하는 천마포박진만이 있을리 만무였다. 어쩌면 사대마 도절예와 삼대사도지학을 상대할 진법이 모두 구비되어 있는지도 모른 다. 어쩌면... 백도 십대극품절학마저 상대할 진법조차 있을지도... (이러한 능력을 지닌 자는 천하에 얼마 없다. 옥룡왕 주원호? 주씨 황실 의 멍청이들 중에 그런 기재가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본좌의 약점을 너 무나 잘 알고있는 악도까지 포섭했다면... 그정도로 본좌를 파악하고 있 는 자라면... 단 하나밖에 없지. 옥룡왕은 가짜다. 그자의 정체는 바 로...) "그러나 천마포박진의 불행은 처음만난 상대인 본좌가 천마가 아니라는 것이지." 백가량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퍼졌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4권 출간할 때 미처 연재 못했던 뒷부분 약간 이야기. 혈천마련의 대침략이 시작되고 사천에서 혈천마련은 대승을 거둔다. 섬서에서 화산 또한 혈사황에 의해 위기에 빠지는데 악도의 함정 으로 금혜연이 화산파를 도우러 오고... 그로인해 백이충은 모용풍을 파견하여 혈사황을 물리친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악도는 모용풍의 모습에서 전설적인 이혼통제대법의 수법을 상기해내고 경악하여 물러서는데... 그뒤를 혈존의 명을 받은 천마지존(이혼통제대법 분신의 하나로 역대 마교대종사의 시신중 하나를 천마강시화하여 만든 자.)이 뒤를 쫓는다. 그리고 사대대첩이라 하여 귀주, 감숙, 광서, 광동에서 혈천마련은 사천이나 섬서와 달리 대패하고... 제 목:[연재] 혈존무적-천마지존공의 패비 관련자료:없음 [19554]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19 16:59 조회:1266 ㅁㅁ 천마지존공의 패배 천마지존은 살아있는 몸이 아니다. 마화타가 되살려낸 몸에 부활의 술로 천마지존의 영혼을 불러낸 작품일 뿐이다. 즉 반은 강시오, 반은 되살아 난 괴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화타의 말처럼 마지막 공정이 가해지 지 않은 미완성의 몸체이다. 현재 천마지존의 겉모습은 완성되지 않아 몹시 흉측한 모습이다. 마치 엉 성한 바느질로 살조각들을 붙여놓은 듯한 모습. 걸레를 이어만든 듯 짜깁 기한 한 몸통의 추악한 모습은 헐렁한 장포로로 감추고 있었고 얼굴에도 평범한 남자의 인피면구를 하나 덮어 버렸다. 하지만 추악한 모습은 나중 에 마화타의 간단한 수술로 해결될 사소한 문제이다. 마화타가 가장 염려했던 것, 즉 최후의 공정이 남아있지 않아 부활의 술 로 불러낸 영체와 몸의 결합이 극히 불안할 것이라는 걱정도 단지 기우 에 불과했다. 부활의 술로 인해 불러낸 혁견광의 영혼은 이미 죽었던 육 체와의 결합에 아무런 거부도 하지 않았다. 마화타가 마지막 손질을 가 한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현재 천마지존의 상태는 부활의 술로 영혼과 몸 체가 찰싹 달라붙었다고 할 수 있다. 혁련광의 영혼은 술법의 금제로 백가량에 충성을 맹세했고 몸체는 영혼 의 전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이혼통제대법에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 미 천마지존의 술법 공정이 구할이상 끝난 상태이기에 부활의 술도 이혼 통제대법도 성공한 것이다. 미완성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를 제쳐놓고 속 알맹이 즉 천마 지존의 생전 능력은 그대로 복구되어 있었다. 천마강시의 튼튼함에 생존 해 있던 시절 천마지존 천마지존공의 화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몸에 마화타의 수술과 배교쌍노의 술법, 그리고 역대마종사의 단 전의 통합은 천마지존의 몸에 무한한 내공을 심어주었다. 이 몸에서 발휘 하는 마공은 백가량이 지금 가지고 있는 열 개의 분신 중에서도 최강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내공으로 발휘하는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마 저 천마포박진에 통하지 않았다. "아수라천마!" 백가량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새로운 이름이 쏟아져 나왔지만 백가량의 몸에서 퍼져나오는 검은 마기는 천마현세를 발휘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 것도 그럴 것이 아수라천마는 천마현세의 변형인 탓이다. 콰르릉! 다시금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백가량은 미소를 지 었다. 분명 그의 천마지존공을 억누르던 천마포박진의 제마(制魔)의 힘 을 아수라천마가 뚫어버렸음을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절대구식의 하나로서 손색없는 위력이었다. "크아아악." 최초로 옥룡왕부 금의 무사들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제마의 힘을 눌 러버린 것이다. 천마지존공의 최후 절기 천마현세는 버텼을지 몰라도 아 수라독존마공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를 천마지 존공으로 펼친 것만은 천마포박진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을 위해 혈존이 천하 마도의 모든 초식들을 모아놓았으니 이를 일컬어 절대구식이라 했고 이는 아수라독존마공을 터득하거나 쌍영 마공이 극성으로 성취되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다. 허나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 초식만은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의 변형이었기에 지금 천마지 존의 몸으로도 펼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반부 칠식과 후반부 이식으로 되어있는 절대의 무공. 이를 혈존은 절대 구식이라 불렀다. 아수라천마(阿修羅天魔) 아수라천사(阿修羅天邪) 아수라천지(阿修羅天地) 아수라환희(阿修羅歡喜) 아수라벽력(阿修羅霹靂) 아수라만상(阿修羅萬象) 아수라철갑(阿修羅鐵甲) 혈존은 아수라독존마공에 어울리는 절초를 얻기위해 사대마도절예 상의 마공들의 최후 구명초식과 삼대사도지학 사공의 최후 비전초식을 모아놓 았다. 흑도의 칠대 무공의 최후 절기인 일곱 개의 초식. 단 하나만 나타 나도 천하를 뒤흔든다는 흑도 최강 무공의 최후초식이니 그 위력을 말하 는 것은 입만 아프리라. 원래 최강의 절기라는 것은 마공이나 신공으로 대변되는 내공의 운용법 과 초식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초식은 내공을 밖으로 표출하는 수단이고 내공은 초식을 발휘하게 만드는 기본 동력이다. 이 둘중 어느 하나가 없 으면 아무리 절세의 무공도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다. 흑도최강의 절세마공(絶世魔功)의 비전(秘傳) 초식이라도 근본이 되는 마 공의 운기 방법을 빼놓고 모아놓은 초식은 기껏해야 건강체조나 춤에 불 과하다. 어차피 초식이라 함은 운용되는 내공과 운기로 끌어올린 힘을 최 고의 위력으로 표출하는데 사용되는 것. 호흡과 운기가 틀린 다른 내공으 로 운용하는 초식은 초식 자체의 무학이치가 아무리 오묘할지라도 몸에 맞지 않는 옷, 하찮은 걸레에 불과한 것이다. 절세나 절정, 초극의 위력 은커녕 운이 좋아야 일류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미완성이라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어떤 것인가? 바로 흑도 칠대무 학을 포함하여 천하 모든 마공을 포함한 마공중의 마공이 아닌가? 아수 라독존마공은 능히 흑도칠대무학의 최후초식을 비전 내공없이 전개할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독문 내공으로 초식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한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오히려 일곱 개의 초식이 아수라독존마공에 영향을 받 아 자연스럽게 변형되었으니...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의 무학이치에 따라 개조시킨 일곱 개의 초식이 바 로 절대구식 중의 전반부 칠식이었다. 아수라천마는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가 아수라독존마공의 영향을 받아 그 운기법에 맞게 변형된 것. 강의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이 바다에 나가 면 파도를 일으키듯 아수라천마는 같은 근본에서 만들어진 초식이되 천마 현세보다는 훨씬 고차원의 무학이었다. 또한 그 근본이 천마지존공이기 에 절대구식 중에 천마지존공으로 펼칠수 있는 유일한 초식이었다. 아수라파천황(阿修羅破天荒) 아수라멸천황(阿修羅滅天荒) 절대구식의 후반부 이식. 이것은 혈존이 혈뇌동, 즉 천명의 천재의 비극 을 만들어낸 곳을 통해 얻은 두가지 초식이다. 이는 오직 아수라독존마공 만으로 발휘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떤 마공이나 신공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초식이다. 따라서 혈존조차 그 위력을 짐작도 할수 없는 절대의 초 식. 아수라가 하늘을 깨트린다는 아수라파천황! 아수라가 하늘을 멸한다는 아수라멸천황! 이 두가지 초식이 천하에 나타나는 날 천하는 공포에 질식하리라. 아수라천마가 효과를 보이지 득의의 미소르 지었던 백가량은 뒤에서 맹렬 히 다가오는 암경의 힘에 깜짝 놀랐다. 천마지존의 몸에 담긴 천마지존공 의 힘에 극성이 되는 제마의 힘이 손 쓸 틈도 없이 그의 등을 후려쳤다. 버티려고 했지만 백가량은 끝내 몸을 바닥에 몇 번 굴리고 말았다. 그의 몸이 천마강시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으로 그는 끝 장났을 것이다. 방금 맞은 일격에는 현무도선과 혜경성승이 합격한 정도 의 막대한 성력(聖力)이 포함되어 있었다. "크으윽. 제법인 걸." "크으으윽." 백가량이 제빨리 일어나 중얼거렸다. 천마지존의 몸은 현재 상태로만 따 지자면 모용풍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아무리 진법을 응용한 다수라고 하 지만 당금 강호에 그런 천마지존의 몸을 운용하는 백가량을 땅에 뒹굴게 만드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삼개진으로 나뉘어져 백가량의 배후를 공격했던 자들도 신음을 지 르며 질겁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백가량의 몸을 뒹굴게 할정도로 위력적 인 위력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장력이 백가량의 등과 접촉한 사이에 맹 렬한 기세로 그들 전체의 진기가 백가량에게 빨려들었던 것이다. 진 자체에 포함된 제마의 능력 덕으로 기겁을 하며 간신히 백가량의 흡입 력을 뿌리쳤지만 만약 그들이 형성한 진법이 천마지존공의 상극이 되는 능력이 없었다면 세 번째 진에 포함되어 있던 자들 모두는 그대로 해골 이 될 때까지 진기를 빨렸을 것이다. "크윽. 백이십 명씩 삼열이었군. 본좌의 공격에 당한 것은 일진이고 배후 를 공격한 것은 삼진이로군. 단 하나가 아닌 세 개의 진이 뱀처럼 움직이 는 것이었군." 백가량은 잠시 방심한 것을 후회하다가 흠짓 놀랐다. 물러났던 일진의 금 의무사들이 경계하듯 그를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가량은 방금 전 자 신의 일격에 천마포박진의 일진 일백 이십 명중 태반이 죽었으리라 생각 했다. 그 정도로 아수라천마를 타고 흘러내린 천마지존공의 마기가 진법 의 제마기운을 사나운 기세로 갈갈히 찢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겨우 세명?" 광폭한 마기가 사람들을 휩쓸었다. 천마지존공의 지독한 위력은 스치는 모든 자를 마기로 새까맣게 태워죽이는 것. 고통과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 천마지존공이 제마의 기운에 눌려있을 때라면 모르지만 그것을 박살 낸 이상 마기에 휩쓸린 백이십 명이 모조리 죽어야 했다. 하지만 이리저 리 흔들거리며 마기에 휩쓸린 자들은 멀쩡히 일어났다. 천마지존공의 악 명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지 못한 자는 겨우 세명이었다. 그나마 진법에 방해되지 않도록 다 른 자들에 의해 즉시 치워졌다. 혈존의 최선을 다한 일격에 겨우 세명밖 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반면 죽지 않은 금의무사들 도 동료들에게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이 충격이었는지 그들의 진법이 미미 하게 어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배후를 감싸던 세 번째 진도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백가량을 공격하지 못 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삼개 진 중에서 일진이 일부러 공격당하는 유인 을 틈타 성공한 일격이 백가량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위기를 겪을뻔 했다는 것이 그들의 사기를 꺽어버린 것이다. "보의(寶衣)인가?" 백가량은 마기에 까맣게 물들어 썩어가는 세명의 시신 상태를 살피다가 그들의 의복만은 멀쩡한 것을 보았다. 천마지존공은 그 위력면에서 대포 와도 맞먹는다는 음양벽력공과 겨룰만하고 잔인하기로는 빗맞아도 반드 시 죽는다는 천사음유공과 흡사했다. 제대로 맞았다면 신체와 의복이 같 이 먼지로 화했어야 한다. 결코 멀쩡히 금의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 힐긋 보니 금의 안쪽에 복잡한 무늬가 쓰여져 있었다. 그제야 백가량은 금의가 단순한 보의가 아니라 술법중에 몸을 보호하는 주문이 담긴 부적 의 역할도 겸한다는 것을 알았다. 금의가 펼치는 보호주문이 천마지존공 의 악독한 마기를 막아내었기에 겨우 세 명만이 죽은 것이다. 금의무사들의 힘이 단순한 진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의에까지 있다 는 것을 알자 백가량의 등골이 더욱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방어복 외에 무기와 다른 것에도 수작을 부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장 무서 운 것은 진법과 보의의 위력이라면 금의무사 자리는 절정고수를 기를 필 요없이 가법게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천마포박진을 보았을 때 옥룡왕이 무서운 자라 생각했지만 이건 그의 생각보다 열배는 더 무서운 자였다. 하지만 싸늘한 백가량의 안색은 더욱 싸늘해졌다. 천마지존공이 백가량의 모든 것이었다면 백가량은 혈존이 아니라 천마지 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혈존은 혈존이다. 설사 몸에 천마지존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천마지존이 아닌 혈존인 것이다. 그리고 혈존이 무 적이었던 것은 단지 무공만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천마지존이 아니라 혈존이라는 것이겠지. 천마지존은 천마 지존공을 발휘하되 사술대법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거든." 일단 천마포박진을 깰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또한 천마지존공으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세명이 죽었다는 것은 마기를 막아주는 부적 자체인 보의가 전적으로 그들의 몸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백 가량의 몸에서 천마지존공의 마기 뿐만 아니라 사기마저 폭발적으로 쏟아 져 나왔다. 혈존이 왜 혈존이겠는가? 마공과 사공의 절정에 술법마저 자유자재로 부 리기에 혈존이 아니었던가? 과거에도 혈존만큼 마공을 성취한 자가 있었 다. 혈존만큼 사공을 성취한 자도 있었다. 혈존만큼 사술대법에 조종(祖 宗)격인 인물도 있었다. 혈존만큼 심계가 깊은 자도 있었고 혈존만큼 잔 인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몸에 갖춘 자는 없었다. 그러 기에 혈존은 무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혈존의 몸이 천마포박진을 형 성하고 있는 자들을 덮쳐갔다. 천마지존공의 마기를 전문적으로 제압하도록 되어있던 진법의 고수들은 천마지존공이 출현했을 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쥔 검 이 뱀으로 변하고 주위가 암흑으로 덮히고 또한 주위 동료가 악귀로 변 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 비춰질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리고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그들의 몸이 펑펑 터져 버리기 시작 했다. 처절한 비명이 옥룡왕부에 메아리쳤다. 옥룡왕부의 비밀 거실에는 세명의 남자가 있었다. 옥룡왕 주원호와 악 도, 그리고 천기노인이었다. 옥룡왕 주원호의 앞에는 여러개의 불빛을 발 하는 구슬이 있었는데 그중 반이 빛을 잃고 있었다. 옥룡왕 자신이라해 도 이렇듯 짧은 시일에 반 이상의 구슬을 꺼트릴 수는 없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옥룡 삼십육관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니." 주원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악도를 향했다.그리고 약 간 비꼬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정말 대단하네. 혈존 사부의 행방을 알아내라고 했더니 아예 직접 유인 해 올줄이야. 어쩐지 본좌를 직접 만나야 한다고 떼를 쓰더니 그게 혈존 을 본좌에게 유인하기 위해서였나?" 혈존 사부? 옥룡왕 주원호는 자신의 입으로 혈존사부라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 옥룡왕 주원호의 정체야말로 바로 혈지존이었다. 이십년 전 풍류 공자였던 옥룡왕 주원호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얼굴을 빌린 야망 가 가짜 주원호가 생겨난 것이었다. 이십년 간 황실에서 힘을 기른 혈지 존의 힘이야말로 혈천마련이나 백도맹의 것에 뒤지지 않는 힘이었다. "그는 혈존 자체가 아니라 이혼통제대법으로 몸을 빌린 분신에 불과하 오. 그러나 분신조차도 노부는 감당할 수가 없소. 그건 천하를 뒤져봐도 마찬가지요. 오직 혈지존, 그대만이 감당할 능력이 있기에 데려온 것이 오." "쿡쿡쿡, 팔대천마가 한꺼번에 덥쳐온다고 해도 막아낼 거라고 기대했던 옥룡 삼십육관을 거침없이 부수는 존재가 단지 분신이라... 과연 그정도 는 되어야 본좌의 사부이겠지. 그나저나 자신이 미끼가 되어 잘도 그가 추적해 오리라는 것을 예측했군. 그래." "모용풍을 보고 혈존은 이혼통제대법으로 분신을 만들어 활동한다는 것 을 알았소. 그렇다면 혈존의 뜻에 의해 틀림없이 다른 분신들 또한 활동 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 중 하나 정도는 노부를 죽이기 위해 찾을 것이라 생각했소. 북경까지 오는 동안 세 번 종적을 희미하게 드러내었으니 혈존 이 노부를 죽이려는 마음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쫓아오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악도는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설마 혈지존, 그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지는 몰랐소. 단지 혈존 의 정체를 알게될 거라는 말 한마디에... 그대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으 니 이제 그대는 아마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 할 것이오. 이제는 그대 를 찾아온 게 후회되오." "흐흐흐. 본좌가 옥룡왕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것 말인가? 상관없네. 분 신을 잡으면 혈존 사부의 위치를 알테고... 그를 제거하기만 하면 비밀 이 밝혀진들 누가 본좌를 감당하겠는가? 당금의 황제는 더 이상 본좌를 누를 힘이 없네." "......" 자신만만한 옥룡왕의 말에도 악도의 안색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옥룡 왕 주원호가 혈지존이라는 비밀은 천하 전체가 소란스러워질 만큼 아주 커다란 비밀이었다. 아직은 혈존의 존재를 밝히는 데 악도의 힘이 필요하 여 다독거리지만 혈존이 제거되면 혈지존은 악도 역시 비밀을 지키기 위 해 제거하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악도의 안색이 펴지지 않을 때 거실로 허겁지겁 절세마유가 들어왔다. 그 의 얼굴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을 본 듯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왕야. 큰일났습니다. 침입자가..." "삼총관. 천천히 말하게. 누가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고 절세마유라 하겠 는가?" 다급히 숨을 몰아쉬는 절세마유를 보고 혈지존이 혀를 끌끌 찼다. 그 모 습은 자상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절세마유가 간신히 진정하고 대답했 다. "침입자가... 침입자가 천마포박진을 파괴했습니다. 천마지존공을 발휘하 는 자에게... 천마포박진의 삼백 육십명의 금의무사가 전멸했습니다." "그런가? 너무 소식이 늦었군. 금의무사 정도야 아까운 것이 없지. 보의 와 보검을 챙기도록 하게." 너무도 담담한 옥룡왕의 말에 절세마유가 혼자 다급해 외쳤다. 그는 오룡 왕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있는 몇안되는 충북으로 그를 주군으로 받들고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자였다. "왕야. 천마지존공을 상대하기 위한 천마포박진이 파괴되었단 말입니다. 이는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준비가... 전부 다시 검토를 해야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알고있네. 하지만 걱정말게. 천마포박진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침입자가 너무 강한 것 뿐이니까. 그는 왕부의 저택에 뛰어들었고 옥룡 삼십육관에 유인되었네. 그리고 벌써 그 반절의 기관을 파괴했다면 그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겠지? 게다가 관문을 파괴하는 그 속도가 갈수록 빨 라지니 내가 어찌 천마포박직이 파괴된 것을 모를 리가 있겠나?" 절세마유의 안색이 또한번 급변했다. 파래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것이다. "옥룡 삼십육관이... 진의 무사들을 학살하고 사라진 것이 불과 얼마되 지 않거늘 그 사이에..." 옥룡삼십육관이란 절세마유조차 존경하는 일총관이 천하의 기관지학의 대 가들을 모아 만든 관문이었다. 옥룡왕부의 외곽에는 내원으로 통하는 스 믈 두 개의 입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옥룡왕 부 내부가 아닌 죽음의 함정 옥룡 삼십육관으로 유인된다. 죽음만이 존재 하는 살벌한 기관이 지천으로 깔린 곳. 결코 인간으로서는 통과하지 못 할 곳인데... "천하에 천마지존공을 구사할 만한 자는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하지. 그 리고 그 중에 천마지존공으로 천마포박진을 파괴할만한 능력을 가진 자 는 단 둘에 불과하지. 세상이 아무리 넓다해도 그 둘 뿐이야. 혈천마련 의 련주 천마황도 불가능하다. 기존의 천마지존공을 한단계 뛰어넘을 능 력이 있는 팔대천마의 수좌인 천마, 그리고 혈존, 이번에 온 자는 혈존 의 영혼을 지닌 자이니 천마포박진의 패배에 결코 실망하지 않아도 된 다." 혈존이라는 말에 절세마유의 얼굴이 또다시 백짓장처럼 변했다. 오늘 칠 면조처럼 많이도 얼굴색이 바뀌는 절세마유였다. "놀랍군. 이곳의 기관은 혈뇌동의 것과 흡사하다." 백가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흡사할 뿐,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백가량의 긴장을 자아내고 있었다. 혈존의 근거가 될 모 든 무학구결을 만들어내었던 혈뇌동, 혈뇌동의 일천명 천재들이 일백의 마공을, 흑도 칠대 절학을 해석해 놓았고 아수라독존마공과 쌍영마공을 만들어 내었다. 사술을 제외한 혈존의 모든 무공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중대한 곳이기에 혈뇌동의 기관은 팔대천마 수준의 고수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 백가량의 몸인 천마지존이 가진 기량은 팔대천마 의 것과 비슷했고 동시에 번번히 덮쳐오는 이곳의 함정은 혈뇌동과 흡사 하면서도 전혀 틀렸다. 다만 위험도만은 혈뇌동의 것에 조금도 못하지 않 았다. "그 녀석... 그녀석이 쌍영마공과 천마강시의 비밀 뿐만 아니라 혈뇌동 의 비밀마저 파악했단 말인가?" 백가량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혈뇌동의 모든 것을 감춰왔음에 도 혈지존, 그 하나의 눈만은 피하지 못했다. 하기는 혈영동 역시 그가 찾지 않았던가? 혈존의 최강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천마강시들이 있던 혈영동. 과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혈지존의 모든 것이 혈존과 흡사함은 어떤 이유일까? 콰르르릉. 백가량의 손에서 검은 빛 마기가 구름처럼 피어나갔다. 그리고 통로가 아 닌 통로의 벽이 허물어졌다. 지하에서 굴을 파는 심정으로 백가량은 함 정 자체를 무시하고 벽과 기관 자체를 무너트리며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초기 함정들에 약간의 고전을 했지만 곧 이 기관의 약점을 알아챌수 있었 다. 너무나 혈뇌동의 기관을 따라했기에 쉽게 알아챌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약점이란 기관이 정하는 함정의 위치 수순대로 들어온 자가 따라갈 필 요가 없다는 것이다. 입구의 위치를 보아 중심부는 서쪽이었다. 기관은 튼튼했지만 기관매복의 장치 모두가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것은 아 니다. 그리고 천마지존공은 기관의 벽을 파괴할 정도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밟고 들어와야 할 수순과 멀정히 존재하는 통로를 무시하고 가로 막는 모든 벽과 장애물을 무조건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들어오는 백가량 에 의해 기관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무작정 파괴하는 것이 아니 라 다시 기관의 모습이 드러나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자신의 위치 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나름대로 방위를 찾으며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백가 량이었다. "흐음. 다행히 혈뇌동의 머리들은 모조리 죽은 이후... 첫째놈이 혈뇌동 을 알아챘다고 해도 건질 것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직 하나 살아있던가? 최고의 천재라 불리면서도 끝내 마지막 구결을 완성하지 못 했던 쓸모없는 그놈. 그 마지막 두뇌자 놈이 혈지존의 수중에 넘어갔겠 군." 수없이 벽을 부수자 기관매복이 끝났는지 천마지존의 앞에 거대한 광장 이 나타났다. 하늘도 빛도 없는 암흑의 광장. 끔직한 기관매복으로 보아 이곳을 알고 있는 자는 한 둘에 불과할 것이다. 광장에는 끔찍한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수백인지 수천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수북히 쌓인 해골들. 그리고 아직도 쇠사슬로 묶여있는 자들이 있었다. 사지가 잘리고 머리와 몸만이 남은 자들, 앞에 책을 놓고 쉴새없이 입을 중얼거리며 미쳐있는 듯한 자들이었다.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충혈되어 있 고 미친 듯이 뭔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 하나같이 머리가 보통 사람들의 두배 정도 컸고 몸통만 남은 몸에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는 자들이었다. "큭큭 두뇌자를 만들었는가? 두뇌잠력촉발대법(頭腦潛力觸發大法)을 얻었 는가? 두뇌의 능력을 강제로 전부 깨워 십년간 초 천재로 만든 이후 심력 을 고갈시켜 죽게 만드는 대법. 흥. 이곳이 혈지존의 두뇌 산실인가? 본 좌의 핏줄답게 혈뇌동의 흉내는 다 냈군." 혈뇌동과 너무도 흡사한 광경에 백가량은 할말을 잃었다. 혈존의 혈천마 궁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옥룡왕부의 힘이라면 기재들 수천명을 비밀리 에 납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평생동안 삼할 도 쓰지 못하는 머리를 십년동안 모조리 쓰게 만드는 악마의 대법, 잠조 차 없이 살아있는 내내 단 한가지만을 연구하게 만드는 두뇌잠력촉발대법 은 어떤 불가능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첫째 녀석. 이십년 간 이런데 숨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군. 설마 혈 뇌동마저 흉내낼 줄이야.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이들을 이용하여 혈지 존이 무엇을 얻었는가 이겠지만." 천마포박진도 아마 이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혈존이 아닌 천마황이었다 면 천마지존공을 제압하는 기운이 서려있는 천마포박진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천마황 정도의 고수를 기껏해야 삼백 육십명의 절정고수로 제압할 수 있 다면? 설사 천마포박진으로 천마황과 동귀어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얼마 나 이득인가? 옥룡왕 수하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몰려 있을지 몰랐지만 옥룡왕부의 저력이라면 그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가진 권세로 얼마든지 많은 절정고수를 끌어들이거나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천마포박진 만이 아니다. 지금 혈존의 눈앞에 있는 해골들로 보아 희생 된 천재들의 숫자는 수천 명. 아마도 백도의 십대극품절예, 흑도의 칠대 절학을 상대할 모든 진법이 이미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간혹 나타난 무학대종사(武學大宗師)가 만들어낸 최고절학 들을 능가하는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천명의 초천재들 이 현 무림의 역사를 모조리 뒤집어 버리는 진법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혈존의 존재 자체가 증명한다. 그의 모든 것 도 이렇듯 초천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혈존은 아수라독존마공을 만들어내었다.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론 상 단 한구절만 완성된다면 고금 무림사의 최강의 마공으로 이름 날 것 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혈지존은 어떨까? 천하 절학들을 제압하는 진법 의 창안으로 초천재들의 용도를 끝냈을까? 단지 기존의 최고 절학을 상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혈지존이 아수라독존마공에 버금가는 또 다른 경 지의 초마공이나 초절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죽어라." 백가량의 손에서 뭉클한 마기가 쏟아져 나오며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 에게 쏟아져 갔다. 이미 저들은 사람이라 할수 없는 자들이었다. 두뇌만 이 촉발되어 주어진 오직 한가지 과제-천재라도 보통은 불가능할 듯한 과 제-만을 풀기위해 자신의 모든 심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생각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죽는 것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물론 백가량이 그들을 위해 그들을 죽이려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이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혈지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들을 없애 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 두뇌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 이 있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백가량의 천마지존공을 막아갔다. 콰쾅! 광장이 흔들거리는 가운데 백가량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 에는 천마지존공이 막히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에 백가량은 정신없이 뒤 로 물러서는 자신의 상태를 정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법에 의하지 않 고도 그를 가로막을 고수가 있다니? 의아해서 보니 단 두 명이 그의 앞을 막았다가 역시 백가량과 같은 거리 정도로 물러났다. 순수한 능력으로 맞대결하여 백가량과 비등한 고수들이 라니, 설마 마련 칠마황 만한 고수가 옥룡왕 휘하에 있단 말인가? "천마강시?" 백가량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보의도 보검도 필요없는 자들. 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자력으로 천마지존공을 감당해 내는 자들. 홀 로 천무삼성이나 팔대천마의 힘을 발휘하는 자들. 그러나 살아있지 않은 괴물들. 바로 백가량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천마강시가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첫째 녀석. 두뇌자들의 보호를 위해 천마강시를 배치해 두었 단 말인가? 가장 막강한 호위를 두었군." 백가량이 둘러보니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여덟구의 천마강시가 그에게 다 가오고 있었다. 천마강시의 출현에는 아무리 백가량이라도 움찔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전설상 무적이라는 천마강시를 만든 자가 바로 백가량 본인이 아니었던가? 결코 전설에 조금의 손색도 없는 존재가 천마강시였 던 것이다. 견고하기는 금강불괴가 무색할 정도로 단단하여 만근 화약에도 상처입히 기가 쉽지 않은 천마강시. 게다가 어떻게 상처를 입여도 순식간에 아무 는 재생력을 가지고 있고 재생하지 못할 정도로 사지와 목이 끊겨도 조각 난 것들이 제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가히 불사신. 빠르기는 번개같고 공격력은 지독하다. 천마강시와 대면하는 자는 그 엄 청난 마기에 처음부터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며 기가 약한 자들은 단순 히 기세에 눌려 죽을 수도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그 움직임 을 따를 수 없이 빠른데다 일격에 바위가 부숴지고 쇠조각이 분쇄되며 땅 이 흔들리고 산이 허물어지는 공격력마저 가지고 있다. 천마강시가 괜히 전설상의 강시이며 최강의 강시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마하타발, 음마바라기니..." 백가량은 나직히 주문을 외웠다. 설마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천마 강시는 천년마교 비전의 수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통제하는 대법 은 천마지존공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전설의 천마강시를 완성시켜 숨 겨놓은 장본인이 바로 백가량 자신이니 과거 천마강시를 조정하기 위해 만든 통제대법의 수법을 펼쳐보기로 한 것이다. 백가량은 천마지존의 몸 으로 있는 지금 천마지존공을 이용하여 강시의 혼에게 복종하라는 명령 을 내렸다. 천마강시의 몸이 잠시 멈칫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두 눈에 흉폭한 광채 를 터트리며 여덟명의 청마강시가 일제히 백가량을 덥쳐오는 것이었다. 백가량의 천마강시 통제대법은 역시나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이다. "천마강시의 통제수법을 역시 그놈이 바꿔 버렸군." 재빨리 몸을 움직여 천마강시의 공격에서 피하며 백가량이 분통을 터트렸 다. 피하는 곳으로 천마강시들의 일격이 떨어질 때마다 펑 펑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구덩이가 파였다. 천마강시의 몸과 흡사한 자신의 몸일지라 도 여덟구의 천마강시의 몰매라면 파괴될 수가 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니 머리 속으로는 누구보다 천마강시의 위력을 잘 알 고 있는 백가량이다. 실재로 몸으로 몇 번 부딪쳐보니 과연 장난이 아니 었다. 스쳐지나가는 강기의 여파만으로도 사지가 삐거덕 거리기 시작하 자 백가량은 천마강시를 상대할 기분이 싹 달아나 버렸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파괴해야 하나?) 백가량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천마지존의 몸이라해도 무공이라면 천마 강시 여덟구는 좀 벅찬 상대였다. 이성이 없는 놈이니 사술대법도 어디까 지 통할지 알수 없다. 여덟구의 천마강시를 홀로 상대한 다는 것은 팔대 천마를 홀로 상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쌍영마공이라도 있으면 삼할 정도 승산을 잡아보겠는데 지금의 몸이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힘은 겨우 천마 지존공이었다. 어쨋거나 천마강시는 혈존이 최고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다. 어 쩌면 천하를 지배하던 시절 그의 제자들보다 천마강시에 더 마음을 기울 였을지 모른다. 혈존이 천하를 장악했을 때 천하의 모든 정혈을 쥐어짜 서 만든 걸작품이 바로 천마강시인 것이다. 천마강시 일천구를 만들기 위해 고금제일마라는 악명을 들어가면서까지 천하를 약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들이니 만큼 통제가 되지 않는다 고 해서 파괴하기는 아까웠다. 다시 손에 넣을 수있다면 천하를 쥘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백가량이 망설이는 만큼 파괴할수 있는 수단이 있기는 하다. 그나마 만일 의 일을 대비하여 천마강시를 제조할 때 오직 그 혼자만이 아는 약점을 하나 만들어 놓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약점을 공략하는 일도 쉬운 일 은 아니었다. (다시 손에 넣는 방법이 없을까? 너무나 아깝구나. 약점으로 오늘 이 여 덟 구를 파괴한다해도 첫째가 본좌의 수법을 눈치챈다면 나중에 남은 천 마강시의 약점을 보완해 놓을 것이 아닌가? 지금은 천마강시의 약점을 드 러낼 때가 아니다.) 백가량은 천마강시를 파괴하는 일을 미뤄두기로 했다. 약점을 공략할지라 도 천마강시가 모두 모여있는 곳에서 한꺼번에 하는 것이 낫다. 일단 그 렇게 결정하자 이곳에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자신만만하게 전일비를 죽 이러왔지만 옥룡왕부에서 뜻밖에 그동안 숨어있던 첫째의 행방을 알아버 린 것이다. 옥룡왕부는 천하의 혈존조차 도망갈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용 담호혈보다 험난한 곳이다. 지금 그를 포위하고있는 여덟구의 천마강시 만 해도 약점을 공격하지 않고는 돌파할 길이 막막했다. "흥. 이대로 간다. 첫째가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전일비를 추적한 보람 은 충분히 있었다." 백가량의 몸에서 나선형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혈존은 아직 혈존이었다. 아수라천마는 같은 초식이라도 만가지 초식처럼 기기묘묘하 게 변화하였다. 여덟구의 천마강시는 이를 피하려 했으나 암흑마기는 기 어이 천마강시의 몸을 쫒아가 부딪쳐 버렸다. 천마강시들은 단지 조금 비틀거렸을 뿐이지만 그 것으로 충분했다. 천마 지존의 몸체 역시 마화타가 천마강시의 이론을 따서 조합한 몸이기 때문 이다. 백가량의 몸이 화살처럼 위로 솟구쳤다. "천하의 혈존이 도망가는가?" 갑자기 백가량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뇌자들 사 이에 전일비가 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보자 백가량은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렸다. "전-일-비. 이놈." 그의 머리에 폭죽터지듯 과거의 기억이 물밀 듯 치밀어 올랐다. -네게 충성을 맹세하겠어.- 악산산과 헤어진 이후에도 백가량은 악산산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숙이고 배교의 이목 몰래 다시 악산산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 었다. 사과하고 그녀와 화해했다. 물론 배교에 몸담고 있음을 악산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 아닌 악산산의 것이었기에 도저히 그녀의 곁 을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일비를 만났다. 모산파를 재건하 기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악산산의 곁에 있던 모산파의 하급제자 전 일비를. 그가 모산파를 떠나며 배신했던 그의 친구를. -네게 충성을 맹세하겠어. 너를 내 주군으로 모시겠어.- 의외로 자신을 배신한 백가량을 전일비는 원망하지 않았다. 관제묘에서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우정을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전일비는 단지 백가 량에게 자신을 거두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백가량은 도통 전일비의 속을 알수 없었다. 그 누구라도 한번 보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는데 이놈만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이용가치가 없는 놈을 거 둘 정도로 아량이 넓은 자가 아니었다. -충성의 대가로 모산비전을 바치겠어.- 악산산의 거처에는 악산산과 전일비를 비롯한 몇 명의 모산파 제자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모산파의 잔존 제자들이 부흥의 희망을 모산비전에 걸고 그것을 찾기위해 천하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산비전이란 과거의 술법제일인 현천진인이 모산파의 술법을 모아 남겨 놓은 술법서였다. 삼장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살아남은 모산파 제자들은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 현천진인의 과거 행정을 더듬었다. 현천진인은 당 나라시절 술법만으로 모산파를 천하제일 문파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며 또 한 모산파에 돌아가지 않고 모산파의 절기를 자신의 은거지에 숨겨둔 괴 인이기도 했다. 모산비전이 있는 현천진인의 은거지를 찾는 단서는 대대 로 모산파의 장문인에게만 알려지다가 모산파가 멸문하면서 사라졌다. 애꿎게도 현천진인의 유적을 찾고 그 속에서 모산파의 온갖 비전을 찾은 것은 모산파의 하급제자 전일비였다. 모산파의 제자가 모자라 하급의 모 든 제자에게도 모든 비밀과 단서를 공개하며 조사의 은거지를 찾게 했는 데 전일비가 그 행운아가 된 것이다. 전일비도 야망이 있는지 자신이 찾 은 바를 모산파의 사람들에게 비밀로 했다. 모산의 비전을 모산파의 잔당 에게 넘겨주지 않고 홀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모산비전을 전일비는 백가량에게 바쳤다. -원하는 것은 없어. 다만 네 옆 자리에 있게 해 줘. - 충정이 가득한 전일비의 말이었다. 그리고 백가량은 그를 받아들였다. 배 교를 장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와중이었다. 단 하나의 손이라도 아쉬운 판에 모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모산비전을 들고 온 전일비는 귀중 한 존재였다. - 모산파의 잔당을 배교에 넘기면 세력을 굳건히 만들 수 있어. - 전일비는 그렇게 말했다. 이미 전일비에게 사문인 모산파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가량은 거부했다. 배교를 차지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간신히 빌다시피 하여 화해한 악산산의 마음 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기회야. 모산파를 희생시켜 배교에서 네 입지를 완전히 굳힐 기 회. 여자는 어차피 여자. 배교의 교주가 될 네가 천한 계집 때문에 고민 하면 안돼.- 전일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전일비는 몰랐으리라. 백가량도 모르게 그말을 듣는 순간 그의 심장 깊숙한 곳에 전일비에 대한 살심의 씨앗이 심어졌음을. 하지만 처음으로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하게 된 백가량이었다. 배교의 교 주 자리도 탐이 났지만 악산산은 그 이상으로 탐났다. 모산파 따위 희생 시키지 않아도 배교를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악산산의 미움을 받느니 차 라리 배교 교주 자리를 포기하리라. 모산파의 부흥따위는 신경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망한 문파가 재건되 어 배교를 상대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기껏해야 망한 모산파의 남은 비술 몇가지와 삼 류도 못되는 기본 무공을 익힌 악산산을 중심으로 모산파의 잔당 몇몇이 남아 어떻게 하나의 문파가 되살아 나겠는가? 그들 최후의 희망인 현천진 인의 모산비전 역시 전일비를 통해 백가량 손에 들어왔으니... -고민할 필요 없어. 그녀의 방에 음락분을 뿌려놨어. 욕망이 일면 꺽어버 려. 네가 어려워해야할 계집은 없어. 너는 들어가서 열매만 따 먹으 면...- 하지만 전일비는 백가량의 허락없이 일을 저질렀다. 악산산은 몇 남지않 은 모산의 제자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그녀를 속이기는 쉬웠다. 백가량 은 놀라고 당황했지만 전일비는 백가량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대 로 실행했다. 충성을 맹세한다고 했어도 아직 그에게는 백가량이 친구라 는 마음이 남아있었는지 모른다. 겁탈당하고 바보처럼 넋을 잃어버린 악산산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증오가 전일비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증오를 감출줄 아 는 마음정도는 백가량에게 있었다. 전일비는 아직 쓸모있는 존재였으니 까. 사실 전일비의 잘못이 아니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에 그녀를 강제 로 차지하겠다는 욕망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전일비는 단지 그것을 실행시켜 주었을 뿐. 그리고 그일... 그 치욕스러운 일. "죽어라." 백가량의 눈에 귀화가 활활 타올랐다. 전일비를 노리느라 다시 덮쳐온 천 마강시들에게 암흑 마기를 뿌려대었다. 천마지존공의 암흑마기가 폭발해 버렸으며 여덟명의 천마강시가 일시에 가랑잎처럼 휘날렸다. 아무리 천하 의 혈존이라도 일거에 천마강시 여덟구를 물리쳤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가 없는 일이었다. "아수라천마!" 검은 마기가 마존의 형상을 띠며 전일비를 덮쳐왔다. 전일비의 안색이 당 연히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가 어찌 백가량의 일초라도 버틸 수가 있을 까? 하물며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가 최종 형태를 띠며 펼쳐졌음에야. "혈존 사부. 당신이 실수했소." 청아한 음성과 함께 거대한 힘이 백가량의 등을 강타했다. 그 순간 백가 량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강력하고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천마 지존공의 진기가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크윽. 네... 네가." 경악하는 백가량. 그의 반신이 거의 부서져 있었다. 천마지존의 몸이야말 로 천마강시의 것과 같은데 단 일격으로 그의 반신을 부숴버리다니. 그 럴 만한 자는 옥룡왕부에 단 한명. "하하하. 누구의 몸을 이용했기에 천마지존공을 그토록 위력적으로 발휘 하는가 했더니 천마지존의 몸체로군. 과연 사부시오." "네놈. 감히 내 앞에서 입을 놀리는 게냐?" 백가량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쓰러졌다. 땅에 번지는 피는 살아있는 생 생한 피가 아니라 굳어있는 죽은 피였다. 하지만 그 죽은 피야말로 천마 지존의 몸을 재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백가량이 땅에 바둥거렸지 만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일장을 얻어맞은 등에서 강력한 기운이 퍼 져 천마지존의 몸에 있는 천마지존공을 파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로 천마강시의 하나가 날아 내려왔다. 혈지존이 천마강시의 하나 로 변장해 숨어있다가 기회를 노린 것이다. 그의 무공으로 암습을 한 것 은 그만큼 혈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혈영마공. 이미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이냐?"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백가량은 원독어린 시선으로 쓰러진체 혈지존을 노려보았다. 그의 몸으로 스며든 혈영마공의 기운이 단단히 천 마지존의 몸에 틀어박혀 천마지존공을 억누르고 있었다. 백가량은 단 한 줌의 진기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자꾸만 몸이 땅으로 쓰러졌다. "오랜만이오. 사부. 어느 사이에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구려." "과거에도 암습이더니 이번에도냐? 본좌가 네놈에게 암습밖에 가르치지 않았더냐?"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한 것 은 사부가 아니었소?" 혈지존은 여유있게 이십년 만에 대하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앞 의 자가 진짜 혈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혈존의 분신이며 잠 시 영혼이 머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다. 이혼통제대법이 사실이라면 당 연한 일이다. 하지만 혈존을 이십년 만에 대하는 혈지존의 마음은 복잡하 기 이를데 없었다. "크흐흐. 본좌를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네 눈앞에 있는 것은 본좌의 터 럭 하나만큼도 못한 일개 분신에 불과한 것. 분신이 파괴된들 나에게는 털끝만큼의 피해도 없다. 하지만 네가 본좌의 앞에 감히 나타나다니. 그 동안 담이 커진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본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 가?" "제자는 사부를 아직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사 부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그릇이라는 것도 알고있소. 사부는 언제든지 본 체로 돌아 갈수 있겠지요. 그것이 이혼통제대법일터이니." "흐흐흐. 전일비가 붙어있더니 대단하구나. 하기야 이혼통제대법을 알아 볼 자는 전일비와 죽은 현무도선, 그리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만사지존 셋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내게 네놈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이 얼마 나 큰 일인지 알겠지? 본좌의 수중에서 네놈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 냐?" "제자는 더 이상 사부를 두려워하지 않소. 알겠소? 사부를 두려워했다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오. 사부는 제자를 해치기 보다는 제자에게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오." "감히." "이미 제자는 쌍영마공을 대성했소. 사부처럼 두뇌잠력촉발대법을 이용하 여 백도와 흑도를 한꺼번에 대응할 방법을 손에 넣었소. 그 일부는 사부 도 경험해 보셨을 거요. 그리고 사부가 만든 천마강시를 손에 넣었소. 천 하를 손에 쥘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났소. 게다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나타 난다고 해도 사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소. 본좌의 쌍영마공과 내공은 이 미 과거 사부의 경지와 똑같으니까." "크크크. 과연 똑같군. 똑같아. 과거의 본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구 나. 쌍영마공도, 혈뇌동을 흉내낸 것도, 천마강시를 얻은 것도 똑같아. 네놈은 아마 배교의 술법도 터득했겠지?" "물론이요." 얼음처럼 냉정한 눈으로 백가량을 내려다보는 혈지존. 그를 보고 혈존은 탄식하더니 말했다. "안아. 꼭 아비와 대적해야 했느냐?" 그 순간 혈지존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진동했다. 동시에 그의 안 색이 칠면조처럼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색으로 급변했다. 얼음장 같던 혈지 존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다. 격동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안아. 아비는 너를 사랑했다. 가만 있었어도 네게 모든 것을 물려 줄...." "닥쳐. 이제와서 무슨 아버지라 자청하는 거야? 그토록 원할 때는 외면하 더니... 단지 따듯한 말한마디 손길 한번 바랄 때는 무시하더니... 당신 이 내게 아버지라고 할 자격이 있어?" 혈지존이 단단히 감쌌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었다. 지금 백가량이 건 드린 부분이야말로 가장 민감한 혈지존의 역린이었던 것이다. 혈지존이 격동된 기색을 드러내자 전일비마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혈지존 백나 안은 참지 못하고 백가량을 향해 퍼붇기 위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때 였다. 백가량이 벌떡 일어난 것은. "크하하하. 그래서 네놈은 아직 어리다는 거다. 첫째." 백가량의 몸에서 붉은 광채가 뻗어나갔다. 그것은 혈영마공. 그것도 극성 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너무나 기습적인 일격이었으므로 혈지존 백 나안도 피하지 못했다. 백가량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알아두어라. 너를 죽이는 이몸은 천마지존의 몸이다. 이 몸에 혈영마공 을 집어넣지 않았다면 분신 중의 최강이라 자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 성되지 않아 몸에 그득한 천마지존공을 썼지만 불완전체라 해도 단 한번 만은 혈영마공을 전개할 수 있다." 백가량의 자신의 일격에 혈지존이 피를 뿌리고 당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 다. 그러기위해 옥룡왕부에 들어 천마지존공만이 전부인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지존의 얼굴을 본 백가량의 마음이 섬뜩해졌다. 혈지존 이 피식 웃은 것이다. 혈지존의 쌍장에서 각기 다른 빛이 터져 나왔다. 왼손에는 붉은 마기, 혈 영마공의 기운이 솟아나왔다. 오른 손에는 푸른 마기, 청영마공의 기운 이 솟아나왔다. 혈지존의 얼굴이 붉고 푸르게 변한 가운데 양손에서 두줄 기 마공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악. 네놈. 쌍영마공을 합일..." "하하하. 사부. 마지막으로 알아두시오. 이곳에서 만든 최고의 성과는 바 로 쌍영마공의 합일 구결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로 인해 완성되었음을. 그 위력을 보여 주겠소." 콰르르릉.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끝으로 백가량의 영혼은 천마지존의 몸에 서 강제로 떠나버렸다. 그가 최후로 본 것은 합일된 쌍영마공의 넘치는 힘이 백가량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지하광장에 가득 퍼져버 렸다는 것이다. 지하 광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가량의 몸이 피먼지처럼 스러지기 시 작했고 핏빛과 청빛이 쌍룡처럼 서로 엮어가며 휘몰아치자 모든 것을 무 너트리기 시작했다. 광장의 지하천정도, 석벽도, 쇠사슬에 묶인 두뇌자들 도 핏덩이로 화하기 시작했다. 지하석부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 치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우우우우." 혈지존은 창룡음을 발하며 지상위로 솟구쳤다. 붉고 푸른 강기에 쌓인 혈 지존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이 허물어졌고 혈지존은 마치 허공을 날아가듯 지하를 뚫고 지상위로 올라갔다. 쌍영마공이 합일된 위력은 혈지존의 예 상을 수십배 초월했다. 처음 펼친 무공이었건만 이토록 대단할줄 몰랐 다. 설마 단 한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펼친 마공이 혈존 백가량을 피모래 로 만들고 지하석부를 무너트릴 줄이야. 지하석부는 옥룡왕부의 밑에 있었다. 그리고 지하석부가 무너지며 거대 한 옥룡왕부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 재난이었다. 지상에 있던 왕 부의 시위와 하인들이 갑작스런 재난에 허둥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너지는 옥룡왕부에서 사람들이 솟구쳐 올랐다. 여덟의 천마강시, 그리 고 악도를 채어 솟구친 혈지존이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성립되는 반혈존연합 관련자료:없음 [19564]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1 01:29 조회:1067 <성립되는 반 혈존연합 > 저멀리 중원의 서쪽에는 서장이라는 지역이 있다. 중국은 서장을 중원의 한 지방으로 치지만 사실은 한 나라로 해석해도 부족하지 않는 곳이다. 중원으로 들어오는 청해 운남등과 접해있는 지역이고 황교의 총본산 포달 랍궁(包達拉宮)이 있는 지역이다. 포달랍궁은 단순한 서장의 사찰이 아니다.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는 서장 티벳지역의 황제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활불이다. 고원에 사는 모든 민족이 포달랍궁의 승려를 숭배하고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 를 향해 절한다. 완벽한 제정일치가 되어 있는 곳이 바로 서장의 포달랍 궁이었다. 포달랍궁에 지금 수많은 라마승 제자들이 몰려있었다. 그 수는 적게 잡아 도 오천은 될 것 같은 엄청난 수였다. 게다가 하나같이 안광이 번쩍이는 것으로 보아 일류고수를 뛰어넘는 수준임이 분명했다. 서장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포달랍궁이기에 이정도 숫자의 고수들을 규합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원이라면 일개문파로서는 도저히 동원할 수 없는 숫자였다. 하기야 머리수로만 채운다면 포달랍궁은 수만이라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 7세께서 납시오." 포달랍궁의 누군가 소리치자 오천의 라마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그 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활불이 나타난 것이다 곧 포달랍궁의 거대한 문 이 열리고 수십명의 라마승이 맨 거대한 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 로 서장의 지배자인 칠십대의 늙은 승려가 교자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나 타났다. 모두의 경배를 받으며 달라이 라마는 힐긋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 가 서쪽으로 많이 져있는 상태였다. 그의 얼굴이 약간 초조해질 때였다. "제자, 포챤이 대라마의 명을 이행하고 도착했습니다." 하늘에서 훌훌 떨어지는 라마 하나가 있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날 렵한 경공으로 보아 보통 인물이 아닌 듯 했다. 실재로 그는 대라마의 사 랑하는 스믈 두명 제자의 하나였다. 포챤은 오랜 시간을 뛰어다녔는지 온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자, 아진챤이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제자, 타라마가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제자, 탑타니가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뒤를 이어 다시 하늘을 나는 야조처럼 세명의 거대한 체구의 라마들이 나 타났다. 그들은 포챤의 옆에 내려서 일제히 달라이 대라마를 향해 절을 했다. 대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기다리자 차츰 차츰 다른 라마들 이 몇 더 나타나 그들의 옆에 엎드렸다. 대충 도착할 라마들은 다 도착했 다고 생각했는지 달라이 대라마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오오. 어찌 되었느냐?" 달라이 대라마는 희망찬 어조로 포챤을 재촉했지만 포챤의 얼굴은 절망 에 물들어 있었다. "대라마. 변황동맹은 와해되었습니다." 비통한 그의 어조에 달라이 대라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냐? 대막과 운남, 동영과 묘강이 모두 옛 맹세를 잊었단 말이 냐?" "대막의 황사칠십이풍은 변황동맹을 탈퇴하고 중원의 천뇌교와 손을 잡았 습니다. 그들은 이미 배신자입니다. 또한 변황동맹의 운남 대표이던 대 리일족은 만독궁에 눌려 힘을 못쓰고 있고 만독궁은 운남에 위치하고 있 지만 그 시조는 중원의 무림인이던 독성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 미 이 둘은 중원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다고 봐야 하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흉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스스로의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둘 정도가 빈다고 해서 어찌 변황동맹이 허물어지겠는가? 섣불리 말하 지 마라."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다른 제자들을 향했다. 그러자 아진챤이 먼저 대 답했다. "변황동맹의 맹주령을 발동했지만... 몽고 철혈마궁은 명을 거부했습니 다. 그들은 천축의 법존을... 새로운 변황동맹의 맹주로 인정했습니다."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좋지않게 변하며 다른 제자들을 보자 그들도 침 중한 어투로 하나 하나씩 대답했다. "묘강 이십사동주는 변황동맹에 등을 돌리고 천축의 법존에 굴복하겠다 는 뜻을 밝혔습니다." "동영 살막은 천축의 법존을 새로운 변황동맹의 맹주로 인정하며 법존의 맹주기가 올라가면 인원을 이끌고 오겠다고..." "신강 유목세력은 신강에서 떠났습니다. 신강에는 혈천마련의 총단이 들 어선 관계로 그들은 이미 천축의 법존의 보호를 요청했다고..." 하나같이 중원에 복속되었다는 소리, 아니면 변황동맹의 맹주인 포달랍궁 을 부정하고 천축의 법존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였다. "감히... 변황동맹의 맹주로서 우리 포달랍궁을 인정하는 존재가 단 하나 도 없단 말이냐?" 달라이 대라마가 노성을 터트렸다. 지금의 사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천축의 대뢰음사, 소뢰음사, 암흑마찰, 청룡사, 서장의 포달랍궁, 그리 고 세력을 잃어가는 홍모교의 삼대세력, 몽고의 철혈마궁, 대막의 황사칠 십이풍, 묘강 이십사 동주, 동영 살막....등등은 모두 과거 동맹을 맺고 중원을 쳐들어갔던 세력들이었다. 오만한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일차 침입은 팔대천마에 의해 철저히 궤멸되었다. 그들은 패배하 여 후퇴했지만 변황동맹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중원의 힘이 약해 지면 다시한번 힘을 모아 오만한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때의 변황동맹 맹주는 서장의 포달랍궁 달라이 대라마 6세였다. 변황동맹이 실재적으로 와해된 것은 혈존의 변황 정벌 때였다. 혈존의 바 람은 무서웠다. 변황의 거대 세력이 모두 찬바람 맞은 풀들처럼 시들어갔 다. 북해빙궁이나 해왕군도 같은 거대세력이 사라져버렸고 포달랍궁도, 청룡사나 대뢰음사도 고개를 숙이고 문파의 명맥만을 살려줄 것을 빌어 야 했다. 대막의 철혈마궁이 벌벌 떨었고 묘강과 대막에서는 피의 폭풍 이 일어 그들의 세력 태반이 사라져 버렸다. 변황은 혈존에 문파의 존속 을 구걸하며 굴복해버린 것이다. 혈존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포달랍궁은 중원을 경계해왔 다. 이미 완전히 무너진 변황동맹의 맹주라는 이유로 언제 중원의 보복 이 있을지 모른다고 경계해왔다. 하지만 백도맹은 변황동맹과의 평화를 원했다. 포달랍궁은 기꺼이 이름만 남은 변황동맹의 맹주자격으로 중원 의 백도맹과 불가침 협상을 맺어왔다. 달라이 대라마 7세는 중원과의 평화를 바랐다. 그러기에 요즘들어 중원 의 혼란기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런데 천축에서 법존이라는 자가 포달랍 궁의 달라이 대라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인즉 변황동맹을 새로 일 으켜 중원을 정벌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변황동맹의 맹주자리를 법존에 게 가져다 바치라는 내용이었다. 달라이 대라마는 처음에는 분기탱천하여 천축의 법존이라는 자를 욕했 다. 하지만 조금 알아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축의 쟁쟁한 문 파들, 번뇌마궁, 암흑마찰, 대뢰음사, 소리음사, 청룡사등 천축의 주요 무림세력을 모조리 굴복시킨 자가 법존이었던 것이다. 포달랍궁의 세력만으로는 도저히 천축을 통일한 법존을 이길수 없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변황동맹, 특히 서장의 세력을 천축 법존의 야심 때문에 희생시킬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천축의 법존에게 중원정벌에 포달랍궁은 빠지겠다는 전갈을 보냈지만 법존은 자신을 따를 것인가, 아 니면 멸문할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위협해 왔다.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달라이 대라마가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과거 변황동맹 맹우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을 파견하여 소식을 듣고보니 이는 아예 몰 랐던 것보다 못한 결과가 아닌가? 과거 변황동맹 세력의 대부분이 이미 천축의 법존에게 굴복당했다면 포달랍궁으로서는 더더욱 천축 세력을 감 당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후우. 이를 어이할 꼬? 천축의 법존이 본궁을 방문하겠다는 날자가 바 로 오늘이건만..."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질 때 포달랍궁의 고위라마가 달려 오며 고개를 숙였다. "달라이 대라마. 홍모교의 사대 라마교의 주지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말에 달라이 대라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포달랍궁을 도와 주러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같은 서장의 식구가 아닌가? 함께 합쳐 외세에 대항해야지. 어서 본 라마의 앞으로 모시거라." 원래 서장 황교와 홍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종교를 구실로 민중에게 일방적으로 군림하던 라마교는 처를 거느리며 약탈과 겁탈을 밥먹듯 하 여 서장의 민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그 결과 포달랍궁을 종주로 하는 황 교의 라마교 세력이 서장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그러나 아직 홍교의 세 력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포달랍궁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바로 홍교의 사대라마교였다. "변황동맹의 다른 자들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이렇듯 서장의 세력들이 라도 모두 뭉쳐 대항한다면 결코 천축에 밀리지 않으리라." 달라이 대라마가 굳은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 었다. 언뜻 보니 네명의 라마가 하나의 가마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처음 에는 홍교 사대 라마교의 한명이 제자들에게 가마를 들려 오는 줄 알았다 가 자세히 보고 대경실색했다. 놀랍게도 가마를 맨 네명의 가마꾼이 바 로 홍교 사대 세력의 수장인 라마들이 아닌가? "당신들이 어떻게?" 달라이 대라마와 포달랍궁의 제자들이 황당해 할 무렵 달라이 대라마 앞 까지 온 홍교 사대 라마는 가마를 조심히 내려 놓았다. 그리고 공손히 고 개를 숙이고는 일제히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달라이 대라마는 천축 법존을 맞이하시오." 달라이 대라마가 크게 놀라 경계하니 과연 가마 속에서 한명의 남자가 있 는 기척이 느껴졌다. 절로 대라마가 제자들에게 홍교 사대라마를 포위하 라 하고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다. "소뢰음사 수라마불이 십이악불을 대동하고 법존을 호위하오." 포달랍궁의 동쪽에서 소뢰음사의 십이악불이 오백의 고수를 이끌고 나타 났다. 그들의 눈빛은 흉흉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뢰음사의 아나타가 법존을 호위하오." "암흑마찰의 마륭이 법존을 호위하오." "흐흐흐. 번뇌마궁의 탁탑 역시 지존이신 법존을 호위하여 왔소이다." "천룡사에서..." 차례로 수백씩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나는 중들. 바로 천축 불가의 종주들 이 각기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그 광경이 순식간에 포달랍궁 을 포위하는 것이고 또한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어느하나 달라이 대라마 못지 않아 포달랍궁을 질리게 만들었다. 오늘 법존이 온다하여 포달랍궁 앞에서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홍교 라마들에게 속아 허무하게 천축의 포위망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런 데 절망적 상황은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묘강에서 왔소이다. 천축의 법존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왔소." "동영 살막에서 천축의 법존에게 절을 하러 왔소." "몽고 철혈마궁이 천축 법존의 지휘를 받으러 왔소." 천축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무사들을 이끌고 과거의 맹우들이 나타났다. 수천씩 부하를 이끌고 온 자들. 하나같이 자신의 지역에서는 달라이 대라 마처럼 패주로 있거나 왕같이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포달랍궁에 나타난 것이다. 천축 법존의 벗이며 동시에 포달랍궁의 적으 로서. 달라이 대라마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포위된 상 태라 천축 세력만으로도 벅차는데 각지에 있는 변황의 모든 세력이 나타 나 천축 법존을 편들고 있음에야... 설마 같은 서장에 있는 홍교의 라마 들까지 천축 법존에 굴복할 줄은 몰랐다. 자존심 하나는 엄청난 자들이었 는데. "달라이 대라마.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것인가?" 갑자기 가마에서 한줄기 호통이 흘러나왔다. 가마에 있다는 법존의 목소 리일 것이다. 달라이 대라마는 화가 나서 그를 꾸짖으려 했다. 그때 가마 속에 있는 이의 눈빛이 주렴을 뚫고 달라이 대라마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으윽. 천왕지안(天王之眼)..." 달라이 대라마는 묵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전신을 옭아매는 막대한 위엄 과 위압감이 가마에서 뻗어나와 달라이 대라마를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대라마는 눈빛이 마주친 순간에 알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 라는 것을. 그의 무공도 대라마보다 몇배 뛰어난 듯 보였지만 무공보다 는 불가의 수장으로서 모든 것이 달라이 대라마를 앞도했다. 눈빛을 봤 을 때 그는 마치 맹수를 본 토끼의 공포를 느꼈다. 달라이 대라마의 머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여기서 그를 거역하면 포달랍 궁은 멸문한다'라는 감이 강하게 와 닿았다. 달라이 대라마는 이런 눈빛 을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중원에서 건너온 혈존의 눈빛이 저러 했다. 저런 눈을 가진 자에게 거역하면 모든 것이 파멸한다. 미래를 위해 숙일 때는 숙여야 한다. '이미 저런 눈을 가진 혈존에게 굴 복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달라이 대라마는 스스 로 교자에서 내려와 가마를 향해 절을 했다. "그대에게 절대자의 위엄이 뻗는다. 다른 변황동맹의 세력도 절대자의 상 을 보고 굴복한 것이겠지. 본 라마 또한 굴복한다. 절대자에게 허리를 굽 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어쩌면 중원을 정복할 지도..." 달라이 대라마가 법존을 향해 절하자 법존도 즉시 가마에서 내려와 반례 로 글의 절을 받아들였다. 달라이 대라마를 천축 법존인 자신과 거의 동 급으로 인정하는 태도였다. 혈존과 같은 눈빛을 가진 자가 달라이 대라마 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자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과연 대라마는 활불이시오. 변황을 위해 이토록 쉽게 본인을 인정해 주 시다니. 본 법존은 대라마의 호의에 무척 감격스럽소." 물론 법존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서장은 중원 정벌의 교두보였다. 법 존이 서장을 무리없이 장악하기 위해서는 달라이 대라마의 도움이 필수였 고 그러기 위해서는 달라이 대라마와 법존 사이에 반목이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진심어린 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천축과 다른 변황의 쟁쟁한 지존들을 놔두고 법존이 일부러 달라이 대라마를 공경하 는 모습을 보이자 달라이 대라마는 감동했다.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전면 항복을 택한 달라이 대라마 덕분에 천축과 서 장은 별 충돌없이 함께하게 되었다. 사실 달라이 대라마가 굴복한 것은 무공보다 한없이 불력을 내뿜는 법존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갑자기 많은 손님이 머물게 되었기에 포달랍궁은 연신 복잡거렸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변황동맹의 간부만이 포달랍궁 귀빈실로 모셔졌다. 각 문파나 세력의 수장이거나 대표만이 안으로 모셔졌다. 이미 포달랍궁 의 주인은 달라이 대라마가 아닌 법존이었다. 그것을 달라이 대라마도 인 정했다. (이제는 중원에 보복하는 일만이 남았다.) 법존이 뿌듯한 마음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누가 감히 변황을 중원보다 못하다고 하는가? 여기 모인 각파 지존들의 면모를 보라. 중원 따위가 상 대나 되는가? 법존의 마음은 터질 듯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모두들 한마 음으로 법존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이제 풍요로운 중원을 정복하러 간다." 법존이 외치자 좌중의 각파 지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새로운 변황 동맹 결성에 대한 함성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변황동맹 맹주에 대한 충성 의 함성이었다. 법존은 과거의 맹주였던 달라이 대라마의 손을 잡고 같 이 좌중의 각파 지존들에게 흔들었다. 법존이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을 깨끗하게 풀어주고 서장과 천축, 그리고 변황세력의 화합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슬며시 법존 근처에 뭔가 를 떨어트리고 간다. 처음 법존은 그가 포달랍궁의 일원이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았다. 그가 떨어트리고 간 것을 보 니 편지였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법존에게' 라는 문구가 있었다. 법존이 의아한 표정으로 달라이 대라마를 보았으나 달라이 대라마 또한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편지를 펴서 읽어보던 법존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천하의 무엇이 법존을 놀라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스러 웠는데 단지 편지 한 장이 법존의 부동심을 깨트린 것이다. "으으... 혈존이 살아있단 말인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법존이 들고 있는 편지. 그것은 바로 혈지존에 의 해 발송된 것이다. 포달랍궁 조차 그의 간세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 다. 법존이 저도 모르게 혈지존의 편지를 와락 부여잡았다. "흐흐. 대사형. 뜻대로 모이겠소.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무엇보 다 먼저 해야할 일이 바로 혈존 사부라는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 는 것이니..." 신강에는 과거 천년마교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혈천마련이 있다. 한바 탕 마련이 천하를 향해 벌였던 전투가 끝나고 마련의 칠마황은 모두 마련 에 돌아왔다. 사천처럼 정복한 지역도 있지만 패배한 지역도 있다. 정복 한 지역을 복속시키느라 바쁜 칠마황이 천마황의 부름아래 모두 모인 것 은 어제였다. 마련 칠마황이 회의청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가라앉 아 있었다. 하기야 그럴 것이 혈첩을 날리고 시작할 때만해도 단숨에 천 하를 장악할 것 같았는데 자신감과 달리 의외로 천하의 저항이 거세 여기 저기서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마련의 군사이자 천뇌마전의 군주인 만상여의 막청운은 특히나 고개를 들 지 못했다. 자신이 우겨 감숙을 공격했거늘 오히려 천지마군 막이동을 비 롯하여 천뇌마전의 정예만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부친의 죽음까지 겹쳐 몹시 기가 죽어 있었다. 천지마군과 천뇌존의 싸움은 천뇌교의 정통을 건 아주 중요한 싸움이었 다. 그건 마련에게도 중요했다. 그동안 혈천마련은 혈천마궁의 후예라기 보다는 혈천마궁조차 합쳐진 마도와 사도의 연합체 종주 세력으로 자부해 왔다. 무림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진리이다. 인정하든 안하든 그동안 아 무도 혈천마련의 주장을 전면에서 반박하지 못했다. 혈천마궁의 후예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또한 과거 혈천마궁에 저항하던 흑도 종주의 대문파들이 마련과는 함께 합병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도 사 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혈천마련은 천년마교와 혈사문 등, 마도와 사도 의 전통있는 종주 문파들의 연합체 권위로 모든 흑도 인물의 복종을 명했 던 것이다. 그런데 천뇌교의 정통을 걸고 싸운 전투에서 천지마군이 천뇌존에 졌다 는 것은 천뇌교의 정통이 혈천마련의 천뇌전이 아닌 천뇌존의 천뇌교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마련이 스스로 주장한 흑도 종주세력의 연합 체라는 권위를 전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혈천마련이 단지 혈천마궁 의 후예로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철갑마전의 전주 철마황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부터 장난처럼 시작했다가 강호에 마련의 철마황이 일패도지한 것처럼 소 문이 났으니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가? 무명이던 애송이 흑철존이란 이름 은 이제 마련 칠마황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는 이름이 되었다. 이 또한 중대한 패배이다. 세력으로서야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손해가 있 을까마는 명예와 사기 측면에서는 마련의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 다. 그동안 마련 칠마황의 지위는 백도 천무삼성과 동격의 존재였다. 이 십년 전 혈천마궁 시절 혈존은 지위상 저 멀리 하늘위의 불타는 태양같 은 존재였고 백도의 전설적 기인 천무삼성은 기껏해야 혈존의 제자들과 그 밑의 구름 정도로 무림의 지위가 비슷했다. 그 인식은 오늘날 백도천 하가 된 이후에도 남아있었다. 그 마련 칠마황의 무림 지위가... 천무삼성이 백도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처럼 혈존이 사라진 흑도에서 최고의 지위로 인식되고 있는 마련 칠마황이... 무림의 신성에 패배당함으로서 그 이름값이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천무삼성은 이제 고고한 전대의 고인으로 물러가고 그들 대신 이제야 나온 백도의 신성으로 일황삼존, 까마득한 후배들과 동격으 로 다루어질 정도로 마련 칠마황의 이름이 떨어졌으니... 천무삼성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하늘 위의 별이나 달같은 존재로 올라갔 다면 마련 칠마황은 구름위의 존재에서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닿 을 수 있는 태산 위의 봉우리 정상정도로 낮아졌다고 할까? 철마황이 무 림의 새로 나온 후배에 달아났다는 소문이 났으니 자신의 무공에 자신있 는 고수들 중에 이제 그 누가 마련 칠마황을 두려워하겠는가? 마승상 또한 고개를 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금존에게 질려 혈천 수호대를 돌린 것은 오히려 과감한 결단이라고 칭찬 받을만한 일이었다. 무림의 싸움은 숫자싸움이 아니었으므로. 현황방이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소수의 정예고수는 숫자싸움에서 후퇴하여 대신 고수들만이 쓸 수 있는 수법을 쓰는 것이 마련 측에서는 현명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혈천수호대 를 광동과 광서로 나눈 것만은 마승상의 엄청난 실수였다. 싸우지 않고 물러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니 누가 승리하고 패배했는지 가리기 힘든 일이다. 절세고수는 압도적으로 많은 마련이니 나중에 현황방의 수 뇌를 흔들어버리면 된다. 그러나 마승상은 혈천수호대를 둘로 나누었고 마승상같이 뛰어난 지휘자가 없는 광서의 혈천수호대는 숫자에 밀려 전투 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광서의 패배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시세를 알고 한발 물러선 광동마 저 광서의 대패 때문에 마련의 패배로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류라 도 힘을 뭉쳐 숫자를 모으면 마련도 두렵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다. 현재는 금력이 가장 강한 현황방이 막대한 금을 사용함으로서 사람 을 모았지만 숫자의 우위가 확인된 이상 혈천마련에 굴복하기 싫은 정사 지간의 중소문파들이 모두 현황방에 몰려드리라. 즉 마련의 일방적인 공 포 지배와 굴복의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뜻했다. 셋의 패배는 충격적이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마련의 전력이 줄어들지 않는한 얼마든지 되갚아 줄수 있는 패배였다. 하지만 이들을 이토록 침중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혈사황의 패배때문이었다. 일황 무적일황 모용풍의 등장. 사실 그가 그 이름그대로 백도의 무적일황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로 혈사황이 모용풍에 졌다고 해도 이토록 절망적이지는 않으리라. 모용풍은 혈사황에게 스스로의 이름을 혈지존이라 밝혔다. 이것이야말로 마련을 먹구름으로 몰아넣는 진정한 정체였다. 혈지존이란 이들 혈천마련 의 모태가 된 사건, 즉 혈존을 향한 배반을 이룬 장본인이고 또한 그들 의 대사형이었다. 청영마공을 익혔던 둘째와 함께 혈천마련의 대련주가 될 자격이 있는 자인 것이다. 혈지존이 모용풍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그는 그동안 모용세가에 숨어 백 도를 거의 쥐었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만상여의 막청운의 생각이었다. 요지마후를 승룡곡에 파견하여 마련이 백도맹을 낱낱이 파악하고 비웃는 입장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 반대인 꼴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경우 혈지존이 천마황에게 마련의 지분이 있는 자로서 대련주의 자리를 걸고 승부를 건다면 천마황은 거절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벌써부터 혈지존의 추종자이던 요지마후와 철마황이 혈지존의 소식을 듣고 들썩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들 마련의 일곱 수뇌 중에 비무를 통해 최후로 남았던 가장 강한 자는 천마황과 혈사황 둘이었다. 그리고 천마황은 혈사황의 양보를 통해 혈천 마련의 대련주가 되었다. 그런데 모용풍은 혈사황을 패배시켰다. 그렇다 면 천마황도 혈지존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혈지존을 머리 속에 넣고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침묵을 견 디지 못하고 천마황이 입을 열려고... 그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터지 는 듯한 웅웅 울리는 소리가 신강 십만대산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리 고 십만대산을 떨어울린 소리는 회의청에 있는 칠마황의 귀에도 들어갔 다. "주군 혈지존의 명을 받들고 혼음흑귀가 사자로 왔소이다. 부디 마련에서 는 사자의 방문을 거절하시지 마시고 주군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이행하 게 해 주시오." 사람의 고막을 상하게 하는 위력적인 힘은 없으나 거의 이십여리 방원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하도록 전달될 만한 거대한 소리였다. 멀리서 수십리 안팍에 소리를 퍼트리는 음공이었다. "신음문의 천리웅음(千里雄音)이 아닌가? 신음문의 절기는 음마가 낙마곡 에 묻음으로서 실전되었고 이제 신음문의 반도 몇 명만이 남아있을 뿐인 데? 혼음흑귀라고? 처음듣는 별호인데... 신음문의 절기가 대사형에게 넘 어갔단 말인가?" "백도를 휘어잡은 자가 무슨 일로 사자를 보냈을까?" "마련마저 욕심내고 있단 말인가?" "백도와 마련, 양손에 떡을 쥐고 욕심을 낼 생각이라면 우리가 용납하지 않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흑도의 천하 지배이지, 대사형의 지배아래 양 쪽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오." 좌중의 의견이 분분할 때 천마황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조용히 하라. 혈천지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일단 그 역시 마련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 또한 적이라해도 사자를 거절하면 마련 의 졸렬함을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천마황의 말에 동의하며 만상여의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사자를 접견합시다. 이십리 밖에서 울려퍼진 소리입니다. 대사형의 전갈 이라면 잘된 일입니다. 모습을 감추었던 그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까요. 마련에 합류할지, 아니면 대항할지 그를 만나보고 결정합시다." "그럼 그자를 마련 안으로 들어오도록 합시다." "아니다. 막내. 대련주 그리고 여러 련주들. 대사형이 무슨 속셈인지 모 르나 현재 마련과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밖 에서 대사형의 사자라는 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련의 일 이 대사형에게 많이 알려져 좋을 것이 없지요." 철마황의 들뜬 말에 만상여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자신이 혈지존의 소식에 너무 기쁜 티를 냈다는 것을 깨달은 철마황이 딴전을 피웠다. 혈 지존을 지지하는 것은 여기에서 요지마후와 철마황 둘밖에 없는 것이다. 천마황이 마승상에게 명령했다. "혈천수호대를 보내 그를 마중나가라. 마련으로 오지말고 절암봉으로 안 내하도록 해라. 마련의 기틀이 태동된 것이니 그곳에서 혈지존의 뜻을 알 아보겠다." 혈지존의 사자라고 왔던 혼음흑귀는 홀로 왔다. 험준한 십만대산의 산령 을 마차를 이끌고 홀로 왔다. 혼음흑귀가 모는 마차는 삼 백의 혈천수호 대의 무사들에게 호위겸 포위되어 절암봉에 도착했다. 혼음흑귀가 묵묵히 기다리는 가운데 마련에서 칠마황이 도착했다. 천마황 이 힐긋 혼음흑귀를 보고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혈지존의 수하 라 어떤 대단한 자인가 했는데 무림에서 모래알처럼 많은 일류 고수나 잘 봐줘야 절정고수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대가 혈지존의 사자를 자처하는 자인가?" "미천한 자가 고귀한 마련의 련주님들을 뵈옵니다." 혼음흑귀는 자신이 혈지존의 수하가 아닌 마련의 수하라도 된 듯 극진한 예로 천마황과 다른 마황들에게 절을 했다. 그는 머리와 사지를 땅에 밀 착하는 극진한 공경함을 보였고 머리를 땅에 박은체 두 손을 들어 밀서 를 들어올리며 무릎 걸음으로 천마황에 다가가려 했다. "저의 주군이신 혈지존께서는 한때 같은 길을 걷던 대련주님과 련주님들 의 영광됨을 축복하며 기쁜 마음으로 저를 통해 소식을 보내셨습니다." "흥. 마련의 행보를 직접 막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인가? 화 산에서의 치욕을 안겼음은 이미 마련과 적대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천마황은 냉냉한 어조로 말했으나 얼굴에는 은근한 기쁨의 빛이 퍼져나왔 다. 혈지존은 사자를 통해 천마황과 다른 련주들을 사제라든가, 별호로 부르지 않고 대련주와 련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자신이 혈천마련 과 단절되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고 동시에 천마황을 혈천마련의 대 련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천마황의 냉냉한 어조에 혼음흑귀는 고개 를 저었다. "오해이십니다. 주군께서 저를 보내심은 마련의 오해를 풀기위함입니다. 주군의 정체와 뜻을 밝히고 오해를 풀고 협조하며 한가지 부탁을 하기 위 해서입니다." "정체와 뜻? 오해? 협조와 부탁? 혈지존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 군. 마련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직접 찾아오지 않는가?" 천마황이 연신 냉소했지만 혼음흑귀를 향한 말은 현격하게 부드러워졌 다. 혈지존이 혈천마련에 뜻이 없다는 것만 분명하면 혈지존이 백도를 손 에 넣어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마련에 대한 권리를 포 기한다면 백도에 혈지존의 정체를 비밀로 할 용의도 충분히 있는 천마황 이었다. 하여간 밀서라는 소리에 천마황은 손을 뻗었다. 즉시 공간을 격 하고 밀서가 혼음흑귀의 손에서 천마황의 손으로 딸려왔다. 허공섭물(虛 空攝物)의 재주였다. 서찰을 읽던 천마황의 안색이 몇 번 변했다. 그는 궁금중에 찬 사제들의 얼굴을 보면서 밀서를 넘겨주고 혼음흑귀에게 물었다. "저 서찰에 적힌 말이 사실인가?" "저는 무엇이 적혀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주군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는 것만은 제 목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저 서찰에는 혈지존, 그가 옥룡왕으로 화신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 은 황실을 노리니 우리에게 천하무림을 차지하라며 서로 협력하여 천하 를 차지한 이후 황실과 무림의 영역을 나누자고 써있다. 서찰에 적힌 것 이 사실인가?" "주군께서 옥룡왕을 가장하고 계시다는 일은 주군의 가장 큰 비밀. 들통 나면 황실에 반역도로 백만대군에 쫓기게 되는 일입니다. 그 자체를 밝히 셨다함은 마련의 련주님들께 진실된 마음을 보이기 위해 그분의 가장 큰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마황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서찰을 읽은 만상여의 가 입을 열었다. "대련주. 옥룡왕이 대사형이 가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뜻이 무림이 아닌 황실에 있다면 일단 그와 손을 잡아도 손해 볼일은 없을 것 입니다. 만약의 경우 대사형은 자신을 공략할 약점을 우리 손에 쥐어준 셈이니. 다만 화산의 일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마황이 고개를 끄덕이고 혼음흑귀에게 물었다. "혈지존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면 그의 충복이 분명할 터. 어이하여 화산 에서 우리와 대적했는지 설명하게. 황실에 마음을 두고있는 자가 어이하 여 백도에 손을 뻗치고 있는가? 혈지존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도 없을 터." "그것이야말로 풀어야할 한가지 오해. 주군께서도 그 일을 지켜보고 계셨 습니다만 모용풍은 결코 주군의 화신이 아니었습니다." 천마황이 코웃음쳤다. 흑을 백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너무도 명백한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혈영마공을 아는 자가 죽은 혈존을 제외하 고 혈지존외에 누가 있다는 건가? "우리를 바보로 아는가? 혈사황이 당한 것은 분명 혈영신공이었네. 설마 사부가 되살아왔다고 혈지존이 말하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 "바로 그 설마입니다. 모용풍은 바로 혈존의 화신에 불과합니다." 순간 마련의 칠마황의 안색이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혈존이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의 머리 속에 잠재해 있었지만 떠올리기 싫은 일이었다. 믿기 힘든 듯, 아니면 믿기 싫다는 듯 천마황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은가? 모용세가에서 혈존 사부가 모용풍 으로 가장하도록 눈치도 못챘다는 소리를 믿으란 소린가? 혈지존도 아닌 사부가 모용풍으로 가장하기 위해 모용세가의 백도 늙은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행동을 했다고 믿으라는 건가?" "한마디 말로서 진실과 거짓을 밝혀내는 일은 힘든 것. 단지 믿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혼음흑귀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혈천마련의 대련주에게 믿음을 주기위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대련주께서 흡족해할만한 선물일 것입니다." 갑작스레 선물 이야기를 꺼내자 천마황이 어리둥절했다. 천마황이 마차 에 고개를 돌렸다. 천마황의 안광이 번쩍이자 마차 안이 투시되었다. 보 이는 것은 관으로 보이는 몇 개의 상자. 천마황이 다시한번 손을 뻗자 마차의 문이 저절로 열리며 여섯 개의 관 이 마차 안에서 날아왔다. 관을 보는 천마황의 표정이 급격하게 차갑게 굳어졌다. "관이라... 혈지존의 선물은 무슨 뜻인가?" 은근히 살기가 어린 말에도 혼음흑귀의 표정은 태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천마황이 무형의 기운을 퍼트려 관 뚜껑을 열었다. 창 백한 표정의 일곱구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마황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천마황의 표정이 제일먼저 변했고 그 다음에 혈사황, 마지막에 만상여의 막청운과 요지마후의 표정이 거의 동 시에 떨리는 표정으로 변했다. 천마황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설마... 설마 천마강시인가? 그것도 여섯 구나?" 천마황은 도저히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마련이 태동된 이래 천마황 은 무림에 직접 나서지 않고 천마강시의 제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도 천마강시의 완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일에 불과한데 이렇게 완 성된 여섯 구의 천마강시가 있다니. "주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련에는 일곱구의 천마강시가 반드시 필요할 것 이라 말했습니다. 과거 한구의 천마강시가 마련에 남아 있으니 여섯 구 정도면 대련주에게 성의를 표하기에 충분하다고 주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 (혈지존이 우리의 뒤에 칠대천마가 있음을 알고있단 말인가?) 천마황은 혈지존이 그의 배후를 알고있다는 사실과 혈지존이 천마강시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두가지 사실에 놀랐다. 혈사황이 떨리는 손길 로 관 속의 천마강시를 살피는 것을 보면서 천마황이 혼음흑귀에게 말했 다. "정체라는 것은 혈지존이 옥룡왕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 뜻이라 함은 반 역을 노리고 있는 것. 오해라 함은 화산에 나타난 모용풍이 자신이 아니 라 혈존사부라고 하는 것이겠지. 협조라 함은 혈지존과 마련이 손을 잡 고 각기 원하는 바를 성취하자는 것. 그럼 한가지 부탁이란 무엇인가?" 혼음흑귀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한마디를 위해 혈지존은 천마황이 어떤 행동을 보이든 들어주라 하지 않았던가? "부탁이란 다시 이십 년전처럼 힘을 합쳐 혈존을 죽이자는 것입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서문대장군부의 위기 관련자료:없음 [19581]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3 08:26 조회:1078 < 서문 대장군부의 위기 > 백도맹에는 두 곳 맹의 중심이 있다. 하나는 백도맹 총단이고 또 하나는 승룡곡이다. 백도맹 총단은 현실적으로 천하를 운용하는 백도맹 무사의 정예가 모여있는 곳이고 승룡곡은 백도에서 수련을 위해 몰려든 자들이 모인 곳이다. 승룡곡의 중처, 현무도선이 죽은 이후 무적장왕 모용도기와 혜경성승만 이 거처하는 삼성각이 있다. 지금 천무이성은 삼성각에서 그들의 다섯 제 자를 만나고 있었다. 무림 맹주 무성 종리연을 비롯하여 북부 2단과 남 부 2단을 책임지는 네명의 제자들. 혜경성승의 사손 뻘인 소림 장경각주 불아대사와 남궁세가의 가주 천하제 이검 남궁비는 북부 2단의 책임자, 죽은 현무도선의 사손인 무당의 대장 로 광천도장과 모용도기의 손자인 모용세가의 가주 장제 모용일현은 남 부 2단의 책임자였다. 소림, 무당, 모용세가, 남궁세가, 종리세가 의 세력이 모인 이들 다섯은 백도맹의 핵심이며 동시에 천무삼성의 후예들이다. 천무삼성을 대신하여 백도맹을 대신 움직이는 실질적인 수뇌들인 것이다. "풍아가 연풍회의 사람들과 함께 오고있답니다. 며칠 내에 도착할 것입니 다." 모용일현의 말에 천무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무성 종리연의 얼 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백도를 위해 억울한 죽 음을 한때 묵인하기는 했지만 모용풍은 엄연히 종리연의 제자요, 모용도 기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허허. 잘된 일이로군. 이제야 본격적으로 혈천마련과 본격적인 대결을 할 수 있겠어." 모용도기는 기쁨의 탄성을 터트렸지만 결코 후손의 생환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단둘이 모였을 때라면 혹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공적으로 백도 최고의 수뇌들이 모인 자리이다. 모용풍의 생환에 대해 모용도기가 기쁨을 표현한 것은 사적으로 후손이 살아 돌와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공적으로 모용풍이 백도맹의 전력에 중대한 힘을 보태줄 수 있기 때문이다. "풍아의 귀환으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와의 오해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대세가의 외면으로 구하지 못한 사천과 다른 지방의 문파들에 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리고..." 맹주 종리연이 잠시 문파의 본거지를 상실한 다른 문파에 대해 생각하며 안타까움에 젖었다. 오대세가 수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젊은 무사들의 분노와 외면으로 그동안 구파와 오대세가 간에는 큰 골이 파여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백도맹이 섬서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 마련의 침입에도 사천 과 청해, 감숙을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 실, 즉 이번에 공격당한 구파일방에 오대세가의 젊은이들 실전(實戰)세력 이 지원을 거부했기에 백도맹이 섬서에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 갈등의 원인이 모용풍이었고 이제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종리연은 제자의 생환에 대한 기쁨보다 백도갈등이 해결되었다는데 더 기뻐할 수밖 에 없었다. 비록 이번에 피해를 입은 문파들 대부분의 장로와 후예들을 승룡곡에 감 춰두었다고 해도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아픈 종리연이었다. "사부님들 말씀대로 마련과의 건곤일척 승부를 겨룰 준비가 되었습니다." 천무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맹의 문제가 사라진이상 이제 본격적 인 대결을 준비해야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혜경성승이 말했 다. "맹주께서는 풍아가 돌아오는대로 그를 무상으로 임명하라. 이번에 그의 위명으로 보아, 또한 맹 내의 지지도로 보아 반발하는 자는 적을 것이 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풍아와 함께 백도맹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우 리는 그 일에 매달리기 위해 폐관에 들어가겠네." 백도맹의 무상. 그 자리는 맹주에 이어 백도맹의 2인자의 자리이다. 천무 호정단의 쟁쟁한 선배들과 장로는 물론 수백문파의 지존들이 모여있는 백 도맹인만큼 무림칠룡을 비롯하여 아직 후기지수에게 수여될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모용풍이 무상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곧 이들 5인과 동등하 며 동시에 맹주와도 권력을 견줄수 있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뜻한다. "하오나 풍아에게 맹주직을..." 모용일현은 아들의 일에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표했다. 천하에 가득퍼진 무적일황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모용일현은 모용풍의 무위를 믿을수 없었 다. 단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우려만은 아니었다. "우리도 안다. 소문을 모두 믿을수 없다는 것을. 단 하나도 제대로 익히 기 힘든 십대절학을 소문대로 다섯가지나 완벽히 익혔다는 것은 쉽게 믿 을 수 없는 일. 게다가 소문대로 풍아가 익힌 다섯가지 절예를 완벽히 익 혔다고 해도..." 혜경성승은 말끝을 흐렸지만 여기모인 다섯 명은 모두 성승의 뒷말을 짐 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백도의 최고신공을 두가지 혹은 세 가지를 익혔기 때문이다. 종리연 같은 경우 천무삼성의 세가지 절학을 완벽히 대성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스스로 천무삼성 중에 어느 한명도 능가하지 못했다고 생각 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 신공을 두가지 혹은 세가지 익혔다고 해서 한 가지 무공을 깊히 익힌 자보다 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손에 익은 무기가 두세 가지가 되는 것 처럼 적을 상대하는 운용의 묘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나 의 무기를 사용하는 자보다는 강해지겠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십팔 반 무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무인이 같은 경지를 이룬 무인으로서 검을 주무기로 하는 자보다 열 여덟배 강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모용풍이 승룡곡에 전해지는 다섯가지 신공을 익혀 소문처럼 모두 대성했 다면 그건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나하나가 백도의 최고 신공들인 만큼 나름대로 여러방면의 최고 무리를 같이 깨달았다는 것은 무학의 경지가 몹시 높다는 증명이 될 수 있다. 무학은 처음 시작하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 록 최고의 무리(武理)로 통하는 길은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이다. 다섯가 지 신공은 각기 다른 방면으로 무학을 추구했지만 마지막 완성의 경지는 비슷했다. 그 상태에서는 여러방면의 길을 걸어봤다는 이유가 한가지 길 만을 통해 그 높이까지 왔다는 이유를 누르고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가 능성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다섯가지 신공의 이론을 제멋대로 주물러 한 차원높은 새로운 신공 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여러 가지를 익혔다는 것이 신공 한가지를 익힌 것보다 강하다는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무성 종리연이나 모용풍이 완성했다는 신공의 경우는 최고의 위력을 완벽 히 발휘할 수 있다는 차원의 완성이지, 천무삼성처럼 그 무공을 새로운 신공으로 발전시킬 정도로 통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너희의 우려는 공감할만 하다. 허나 풍아는 그만한 자격이 있 다. 솔직히 혈사황을 무리쳤다 함은 풍아의 힘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상 으로 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문처럼 신공을 다섯이나 완 성하는 사이에 새로운 경지로 가는 길을 깨달았는지도 모르지." 모용도기가 그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선조로서 그는 모용풍이 혈사황 을 물리쳤다는 데에서 모용풍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었다. 화산에서 혈 사황이 패퇴한 것은 사실인지라 모용도기가 모용풍에 대한 말을 끝내자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팔대천마 시절부터 마공이 신공을 누르기 시작했네. 항상 흑도가 한발 앞서나갔지. 그 때는 흑도의 마공을 완성시킨 자가 백도의 신공을 완성시 킨 자보다 많아 백도는 흑도의 밑으로 눌릴 수밖에 없었네. 그래서 백도 는 와신상담의 신념으로 백도의 신공을 완성시킨 자를 여럿 키워내었네." 모용도기가 쓸쓸히 말했다. 아직도 흑도에 전전긍긍하는 백도의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일까? "하지만 혈존시절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네. 더 이상 백도의 열가 지 신공도,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과 사공도 무적이 아니네. 혈존은 새로 운 무학의 진화를 이루었고 그것은 과거 한 방면에서 조사가 되거나 대종 사가 된 분들의 경지를 능가하는 것이었네. 그리고 그런 발전의 징조는 이제 흑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 과거 혈존의 아홉제자는 흑도의 마공의 완성을 거의 눈앞에 둔 경지였 다. 혹은 완성하고서 비밀로 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명 성이 천무삼성과 어깨를 겨룰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십년간 침 묵을 지켰다. 이십년간 단지 세력만을 키웠을까? 혹은 혈존처럼 그들이 지닌 마공을 능가하는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천무삼성이 이십년 전에 완성한 자신들의 신공을 깊 히 통달하여 한걸음 신공의 무학을 끌어올린 것처럼 마련의 칠마황도 그 랬을 수가 있다. 현무도선의 죽음이 혜경성승과 무적장왕의 그런 불안을 확신처럼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단지 신공의 완성만이 전부인줄 아는 백도의 아이들은 더 이상 마련의 칠마황을 당해낼 수 없다. "이제 우리 둘은 더 이상 무림사에 상관하지 않겠네. 승룡곡에 모인 백 도 절학을 모아 새로운 신공을 만들어 낼 것이네. 영원히 흑도를 누를 무 적의 백도 신공을..." 혜경성승, 그리고 무적장왕은 굳게 결심을 밝혔다. 실재로 이미 있는 백 도신공을 완성하기도 힘든 판에 그 절학들을 모아 새로운 절학으로 진화 시킨다는 것은... 그럴 힘과 경륜을 지닌 자는 백도에서 이미 반선의 경 지에 오른 천무이성밖에 없었다. 과거 혈존이 혈뇌동의 천재를 통해 이룩 한 새로운 무학 경지의 완성을 천무이성이 도전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은 환우오존의 후예를 모으라는 것이네. 환우비령 이야말로 백도 최강의 힘. 천무호정단보다 강한 그들이야말로 백도의 모 자란 힘을 충족시킬 열쇄가 될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풍아의 귀환으로 환우오존의 후예들이 모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환우오존. 과거 팔대천마에 대항하던 백도의 기인들을 말한다. 어찌보면 천무삼성과 동배분이지만 그들이 나서기 이전에 백도를 이끌었다고 할수 있는 인물들. 화산파의 화선(花仙)은 불사건곤심공으로 무장하고 구대문파를 이끌어 마 도의 심장을 박살냈고, 봉황곡의 봉황무후(鳳凰武侯)는 신비삼패를 규합하여 만상건곤심결로 마 도의 손발을 잘라냈으며, 개방의 개성(　聖)은 백도의 눈과 귀가 되는 동시에 금강칠채강으로 백도 를 방어했고, 검각의 검후(劍后)는 백도의 검이 되어 보리무극검법으로 마도를 난도질 했고 하북팽가의 혼돈패도(混沌覇刀)는 백도의 칼이 되어 혼돈패왕도로 마도 를 두조각 내었다. 백도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인물들. 또한 백도십대극품절예를 하나씩 이루 었던 인물들이다. 화선과 개성은 구파일방을 이끌었고 봉황무후와 검후 는 신비삼패나 검각등 백도의 여타 세력을 대표했다. 혼돈패도는 무림세 가들의 지지를 이끌고 마도에 대항했다. 백도무림의 영수라고 할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천외구기와 함께 팔대천마를 맞서 싸웠고 그리고 패배했다. 천외 구기는 전멸을 당하다시피 했고 환우오존도 홀든 죽고 혹은 부상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무림에 활동할 힘이 남지 못했다. 그나마 그 직후 천무삼성 이 나타나 백도를 이끌고 숨어 반전을 위한 백도 최후의 숨을 남겨놓았다 고 할까? 천무삼성이 혈천마궁 시절 미래를 위해 승룡곡에 백도의 정예를 모아놓 고 키웠던 것처럼 환우오존도 당시 백도의 정영을 모아놓고 은밀히 키웠 다. 여러 종파의 세력이 하나로 묶여 전혀 새로운 힘으로 탈바꿈한 이들 비밀 세력을 환우비령(　宇秘嶺)이라하며 그들의 수뇌를 상징하는 징표 를 환우령(　宇玲)이라 했다. 환우오존은 흑도의 칠대절예를 완벽히 누를 힘을 기르지 않고는 당시 백 도 최후의 힘인 환우비령이 절대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환우오존은 한가 지 약속을 했는데 환우오존의 후예들이 동시에 백도십대극품절예를 완성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각기 신공을 완성한 환우오존의 후예들끼리의 비무로 환우령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환우비령은 절대 무림에 나서 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이후 백여년 가까운 세월이 넘치도록 환우비령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 다. 물론 환우오존의 실질적인 후예들은 그동안 게속 무림에 활동했기에 백도는 환우비령이 어디에 존재해 있는지 안다. 하지만 혈천마궁의 어려 운 시절 천무삼성과 구파 장문인들이 직접 부탁했어도, 환우오존의 직접 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방이라든가 검각, 화산파, 봉황곡, 하북팽가 의 주인들이 직접 환우비령에 찾아가 고개를 숙였어도 그들은 무림에 나 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이십년 동안 무림이 평화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개방, 검 각, 화산파, 봉황곡, 하북팽가 등에서 비롯되었지만 백년이 넘게 흐르는 동안 이들은 이미 근본과는 전혀 다른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직 환우령만을 받들었다. 환우령이 있어야 환우비령이 움직일 수 있다는 환 우오존의 당부는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유훈이었기 때문이다. 환우오존의 후예라 할만한 자와 세력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동시에 백도십대극품절예를 완성한 경우는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백도맹 은 환우비령의 힘을 놔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얼마 전 환 우오존의 후예로 자처하는 자가 모두 나타난 것이다. 검각의 검후 매옥선이 보리무극검법을 익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검후라는 이름을 사용했을망정 그녀가 스스로 환우 오존의 하나로 자처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즉 최근에 그녀는 보리무극검 법을 대성했다는 뜻이다. 삼존이라는 흑철존을 탄생시킨 흑방, 그 흑방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며 과거 혈천마궁과의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신비삼패의 수좌 봉황곡. 혈존에게 멸망되다 시피했던 그 봉황곡의 전인 또한 환우오존의 후예를 자처하며 무림에 나왔다. 즉 봉황곡의 만성건곤심결을 완성한 자가 봉황 곡에서 나왔다는 소리이다. 최근에 개방 또한 개방 방주의 숨겨져 있던 사제라는 백결개가 환우오존 의 후예임을 밝혔다. 이로서 환우오존의 후예 셋이 나타난 것이고 환우비 령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화선과 혼돈패도의 후예가 나 타나지 않는다면 환우령주를 뽑는 비무는 있을 수 없고 환우비령도 나타 날 수 없다. 화산파와 하북팽가에서는 불사건곤심공과 혼돈패왕도를 완성한 자가 나오 지 않았다. 환우오존의 후예로 자처할 만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 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 가문과 사문의 최대 절학을 기꺼이 승룡 곡에 넘겼다. 백도무림을 위해 절기를 넘긴 것이다. 팽가와 화산파 이외에 이들 두 가지 무학을 같이 익힌 자가 한명 있었 다. 당대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그는 한가지만 익혀도 끝 을 보기 힘든 두가지 무학을 분명 같이 익혔다. 그는 무학의 천재로 어려 서부터 불린 인물로 욕심이 많아 두가지 절학 이외에 천무삼성의 무공마 저 같이 익혔다. 그가 바로 모용풍이다. 무적일황의 소문에 그는 다섯가지 백도의 신공을 완성했다고 하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환우오존의 화선과 혼돈패도의 후예도 되 는 것이었다. 즉 환우령의 주인을 가리는 비무대회를 열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이래저래 환우비령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혈천마 련과의 승부를 앞두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 질거야. 혈천마련은 단지 난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듣자하니 현황방의 방주가 천외구기의 하나인 단향검군의 후예 라 하더군. 천외구기들 역시 천하를 위해 싸웠던 의인들. 그들의 후예를 규합할수 있다면 이또한 백도의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네." "사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천외구기의 후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다섯 제자가 물러가도록 끝내 천무이성은 한가지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비밀 연락망을 통해 들어왔던 소식 한가지였다. 과거 혈존과의 비무를 약속하고는 완전하게 혈존을 죽이기 위해 백도와 마도간에 만들어졌던 비밀스런 조직. "후. 혈존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던 정보망이 다시 가동되다니. 백시주 로부터 다시 소식이 오다니. 혈존의 위치가 확인되었단 말인가?" 혜경성승의 무거운 음성이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혈존의 생존. 생 각만해도 몸이 떨리는 일이 아닐수 없다. 마련과의 일전을 앞두고 백도맹 을 실제로 움직이는 제자들에게 혈존의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들 이 해결해야 했다. "생각만 해서 무슨 결론이 나겠소? 혈존이 살아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그 가 혈마전혼대법으로 도망간 이래 계쏙 생각해왔던 일이오. 다만 그의 행 방을 우리가 아니라 완전히 종적을 감췄던 혈지존이 먼저 찾아낸 것이 이 상할 뿐이지." 모용도기의 말에 혜경성승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존이 살아있다 면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야했다.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최우선으로 할 일이 바로 혈존의 말살이었다. 천무 이성은 혈지존과 만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천무이성은 천무호정단 중에 서 백도 십대극품절학을 한가지라도 익힌 자는 모조리 데려갈 생각이었 다. 그만큼 백도맹의 전력이 삭감되겠지만 혈존의 척살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천무이성은 살아돌아오지 못할지도... "폐하. 서문대장군을 잡아들이소서." 구중 궁궐의 자금성.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있는 곳이다. 용포를 입은 당 금 천하의 주인인 황제는 어지럽다는 듯이 손을 머리에 대고 고개를 젓 고 있었다. "허어. 서문 대장군은 개국 공신의 후예이오. 어이하여 그를 벌하라고 한 단 말이오?" "폐하. 서문대장군은 역도이옵니다. 천하의 악적 혈존이라는 자와 손을 잡고 반역을 도모하는 자이옵니다. 그자를 잡아 구족을 멸해야 할줄 아옵 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서소." 신하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조력자를 찾는 듯 고개를 둘러보았지만 좌중의 신하는 모두 학림파의 파벌이었다. 다른 파벌의 신하는 어이하여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또한 저들도 분명 황제의 신하가 분명할진대 어이하여 이토록 천자를 핍박한단 말인 가? "뚜렷한 증거도 없지않소. 단지 그대들의 말만 믿고 대신을 잡아들이는 것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말을 끊는 자가 있었다. 가장 예를 중시해야 할 예부 의 중신이었다. "폐하. 이 일은 반역에 관한 일이옵니다. 서둘러야 하실 일이옵니다. 일 단 잡아들이고 시비를 가려도 늦지 않사옵니다." "서문 대장군부가 어떤 곳이오? 선황께서 서문대장군부에는 어떤 잘못이 있던 처벌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곳으로..." "폐하. 다른 일도 아니고 역모이옵니다. 역모에 관한한 예외란 없습니 다." 또다시 황제의 말이 끊겼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역모가 진 짜로 있다면 황제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역도들 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대명 황군의 정신적 지주이며 충신중의 충신임이 서문 대장군임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황제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학림파였다. 벌써 열흘째 다 른 신하들은 보지도 못했다. 자금성을 지키는 친위군이 성을 에워쌓다는 말도 들었다. 황제가 노하자 이들은 반역의 위험이 있어 황제를 보호하 기 위함이라 겉으로 변명을 내세웠다. 하지만... 처음에는 화도 내보고 물러가라 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무엄한 역도들 은 신하라고 자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의 마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주장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둘러싼 시위와 동창의 무 사들에게 신하를 끌어내라 명을 내리기도 했다. 평소 자신의 심복이라 생각했던 동창의 내관과 금의위마저 황제를 무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금 의위과 동창마저 저 역도들의 편에 서서 황제를 핍박하고 있었다. 그제서 야 황제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후우."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저들이 이토록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반의 때가 성숙했음을 말해준다. 더 이상 거리낄 필요없이 반역을 해 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함에도 집요하게 자신에게 서 문 대장군을 벌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뻔했다. 서문 대장군은 동북 여진쪽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북벌군로의 총 책임 자였다. 또한 그의 막역한 친우인 황 대장군은 막북을 책임지고 있는 총 책임자였다. 막북 쪽의 서로군벌은 황 대장군이 부관인 서문 일충에게 거 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고 하니 서문 장군부가 북벌로와 서로벌을 지 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단순히 두 군벌의 지휘자라지만 좀더 따지자면 전체 대명황군의 반이 서 문 대장군의 지휘하에 있다는 소리이다. 만약 그가 마음먹는다면 황제라 도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의 한마디에 대명 50만 대군이 움직 이니 어찌 안그렇겠는가? 역도들에게는 가장 꺼릴만한 존재임이 틀림없 다. 그러기에 역도들은 아직 자신을 대놓고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서문 대장군은 대대로 충신의 집안이었다. 의심많은 선황도 서문 가문만은 믿고 국방의 총수권을 내주었다. 이는 서문가문이 오로지 군문 에만 투신하고 결코 정치적 파벌에 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들 학림파는 그런 서문가문이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반역의 마음이 확실한 만큼 지금처럼 전군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서문가문이 반발한다면 곤란 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장군이라면 황명을 빌미로 파직하고 역도의 허수아비를 장군으로 내 세우면 된다. 허나 서문 대장군만은 그럴 수가 없다. 선황은 역모만 아니 면 서문 대장군을 벌할수 없다는 면책특권을 뜻하는 금빛 현판을 내주었 다. 서문 대장군이 반발하면 황제도 그를 면직시키기가 힘들다. 충신인 그가 황제의 명을 거역할 리는 없을 것이다. 단 황제도 그를 존중 하는 뜻에서 그에게 행해지는 모든 명은 일일이 황제의 옥새를 찍어 황명 을 이행하도록 했다. 옥새의 인이 없는 명이라면 서문 대장군이 대뜸 의 심부터 할 것이다. 그리고 옥새는 오직 황제만이 아는 곳에 있다. 황제는 묵묵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천자를 핍박하는 역 도의 무리를 오마분시 시키고 싶었지만 지금은 힘이 없었다. 황성에 가득 찬 신하와 무사들이 모조리 역도의 편이었다. 황제의 바람은 오직 시간 을 끄는 사이에 다른 두 개 파벌의 신하가 이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을 알 아채고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백허에게 기별을 넣었지만... 그가 서문 대장군과 연락하여 짐을 구해주 기를 바랄 뿐이다.) 백허는 조정의 청류계를 이끌고 있는 이정례 대인의 호였다. 옥룡왕부가 갑작스런 지진으로 허물어진지 하루가 지났다. 다행히 인명피 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귀한 분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사 나 하인들의 목숨이야 피해로 치지도 않으니까. 옥룡왕은 지금 금의위 총영반 허첨의 집에 있었다. 겉으로야 금의위와 동 창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오래전에 이미 금의위는 동창의 세력 에 잡아먹힌 터였다. 옥룡왕의 앞에는 세명의 남자가 고래를 숙이고 옥룡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룡왕부의 대소사를 맡고있는 총관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옥룡왕부의 일총관은 놀랍게도 동창제독이었다. 황실의 비밀 친위기관이 라 할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황제의 손발이 되어야할 동창의 최고수뇌가 오히려 일개 왕의 총관으로 행세하고 있다니... 학림파의 총수라는 동창 제독이 옥룡왕의 수하라면 학림파의 배후가 옥룡왕임이라는 소문은 당연 한 이야기가 될 터였다. "황제가 버티고는 있으나 곧 항복하고 서문대장군을 잡으라는 명을 내리 게 될 겁니다. 그는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으음. 서문대장군부라... 악연이군. 악연이야." 옥룡왕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흘동안 자금성을 그의 부하들이 둘러 싼 이유는 황제를 바꿔친다고 해도 충분한 자신이 있어서였다. 동창과 금의위가 이미 그의 손에 있었다. 조정 최대 파벌인 학림파가 그 의 손에 있었다. 정적인 두 파벌의 신하들은 모두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황성을 수비하는 수비군의 수장 역시 옥룡왕에 충성을 맹 세한지 오래였다. 적어도 자금성 안에서 황제의 힘이 미치는 곳은 없었 다. 북경 내에서도 옥룡왕의 힘은 황제를 능가했다. 문제는 북경 밖이었다. 국경에는 수십만의 대명 황군이 있다. 명분없는 반역은 그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당금의 황제는 제법 백성들 을 생각하는 좋은 황제였다. 황제를 쫓아낸다고 하면 군대가 가만있을 리 가 없다. 그에 대한 준비로 오래전부터 군부에 옥룡왕은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았 다. 하지만 북벌군로와 서벌군로만은 이도 들어가지 않았다. 양 쪽의 군 대는 대명의 군대가 아닌 서문 대장군의 군대 같았다. 서문 대장군이 충신인만큼 황제로서야 믿고 맡기면 되겠지만 옥룡왕의 입 장에서야 껄끄럽기 이를데가 없다. 그래서 황제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전 에 황명을 빌붙어 서문대장군을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하필이면 그 자가 서문 대장군부와 연관이 있다니..." 고민하는 옥룡왕의 표정을 보며 일총관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 었다. "서문 대장군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이미 일공자 가 호황부주로 선출되었습니다. 호황부를 손에 넣은 이상 서문 대장군이 라해도 대세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일공자란 당금 황제의 부마도위인 현안군을 말한다. 현안군은 황제의 다 섯 번째 공주인 명옥공주의 남편으로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지 만 사실은 옥룡왕이 비밀리에 키운 첫째 제자였다. 현안군은 옥룡왕의 지 시대로 아내의 사랑을 이용하여 마침내 호왕부주의 자리를 손에 넣은 것 이다. 호황부는 황실을 수호하는 최후의 비밀세력이었다. 황제를 제외하고 황족 조차 구금 체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최후의 힘인데 그것마저 옥룡왕부 에 넘어간 것이다. 호황부의 인원은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라 아무리 대군 을 거느린 장군이라 해도 암살을 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인데 왜 그의 주 인이 저토록 망설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열흘 전에만 그가 서문 대장군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섣부 른 행동을 자제했을 것을... 하지만 지금 그는 서문 대장군에 대한 공격 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알 것이다." 옥룡왕의 얼굴은 침울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 그에게 육체를 준 아버지이자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부 혈존. 어제 그 분신을 물리쳤다 고 하지만 혈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 면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있는 곳이... 어제의 일로 혈존과 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혈 존의 침입을 옥룡왕은 단지 방어한 것에 불과하다. 또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분신 하나 잃은 정도는 혈존 본인의 입장에서 아무런 타격도 아니 다. 물론 어제 일로 앙심을 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천하 전체가 혈존의 적 이다. 그 중에서 예상했었지만 밝히지 못했던 적 하나의 정체와 거처가 드러났다고 해서 특별히 놀랍거나 경악스런 일은 아니다. 혈지존의 정체 와 거처를 알았다고 해도 그 냉정한 혈존이 기존에 세웠던 모든 계획을 제쳐두고 허둥지둥 옥룡왕부를 먼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 지 그의 계획에 혈지존에 대한 일을 추가시키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혈존과 달리 혈지존은 혈존이 모든 계획의 최우선이 기 때문이다. 혈존이 옥룡왕의 정체가 혈지존임을 안 순간 혈지존도 혈존 의 정체를 알았다. 즉 혈존이 혈지존을 당장 공격할 마음만 먹지 않는다 면 옥룡왕에게는 혈존을 먼저 칠만한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왕부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서문 대장군부에 대한 공격은 다르 다. 분명 모르고 시작한 일이지만 혈존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인하는 경우 혈존의 계획 맨 앞 순위에 옥룡왕부에 대한 반격이 놓여 질 것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의 모든 계획을 허물 어트릴 수가 있다. 혈존을 완벽히 제거할 준비가 끝마치기 전에 그의 계 획 맨 앞줄에 옥룡왕부의 이름이 올라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 같지 않은 자가 식구들에게 정을 가지고 있을 희망은 적지만... 그 래도 대비를 하는 것이 낫겠지. 즉시 동창을 대동하여 서문 대장군부의 식솔들을 연금하라. 허나... 결코 무례하게 굴거나 상처입혀서는 안된 다. 최후의 인질일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벌인 일을 취소할 수는 없다. 이미 혈존은 혈지존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를 진정시킬만한 준비를 해야한다. 가족에 대한 인질이 얼마나 먹혀들지는 자신없지만. (서문 대장군이라면 결코 식솔의 염려 때문에 충정을 저버리지는 않을 텐 데) 동창제독인 일총관은 턱을 갸웃거리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옥룡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의 명은 이행하기만 하면 될뿐 이해할 필요는 없 기 때문이다. 옥룡왕의 시선이 이총관으로 넘어갔다. 마치 탈속한 신선같이 생긴 남 자. 옥룡왕부의 이총관은 바로 천외사세의 하나인 장백신선문의 문주였다. 중 원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네 개의 세력 천외사세. 장백신선문. 북해빙궁. 해왕군도. 천축 청룡사. 어떤 때는 중원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으로, 그리고 어떤 때는 중원의 벗 으로 같은 적을 맞아 싸우며 이들은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도 이들은 중원에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월과 시류만은 천외사 세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북해빙궁과 해왕군도가 혈존에게 멸만하더 니 장백신선문의 문주마저 옥룡왕부의 이총관으로 중원에 굴복해 있을 줄 이야. "변황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옥룡왕의 조용한 물음. 단순히 혈존에 대한 서찰을 천축의 법존에게 제대 로 전했는지 묻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뜻밖에도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가 법존에게 쉽게 굴복했습니다." "흐음. 포달랍궁의 기세가 죽어있다고 하지만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로 있 던 이름 값도 못하고 바로 굴복했단 말인가?" "달라이 대라마도 처음에는 대응하려 했지만 홍교의 사대 라마가 굴복한 모습을 보고는 기가 꺽였습니다. 게다가 천축 법존은 달라이 대라마를 동 맹의 예로 대했고 때를 맞추어 기존 변황동맹의 고수들과 천축의 고수들 이 같이 모여드는 바람에..." "흥. 과연 청영지존, 그녀석 답군. 이렇게 되면 변황의 힘은 완전히 법존 에게 굴복한 것인가? 그럼 매복지계는 어찌 되었는가?" "이공자가 청룡사주로 변하여 왕야의 명을 듣고 제일먼저 법존의 휘하에 투항하였습니다. 청룡사주의 지위는 천축 십대고수의 제 일좌이고 변황 세력에서는 달라이대라마 다음가는 서열 삼위입니다. 법존이 살아있는 부 처로 여겨지는 바람에 이공자께서는 비록 천축의 세력은 포섭하지 못했으 나... " 옥룡왕의 싸늘한 시선에 이총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공자와 일총 관이 황실의 일을 잘 처리한 만큼 자신과 이공자도 맡은 분야인 변황에 서 왕야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이공자는 옥룡왕의 둘째 제자를 뜻한다. 과거 혈존이 수많은 제자를 키우 고 이용했듯 옥룡왕 혈지존도 제자들을 이용하여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 다. 일총관이 일공자의 후견인이듯 이공자는 이총관이 섬기는 자였다. 옥 룡왕의 둘째 공자는 장백 신선문을 가문으로 둔 소문주였기 때문이다. 숱 한 우여곡절 끝에 천외사세의 하나인 청룡사를 장악했을 때만해도 이공자 의 임무인 변황장악의 앞길이 훤히 열리는줄 알았으나 천축에 법존같은 거물이 나타날줄 이공자가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묘강, 동영 살막, 몽고 철혈마궁은 은근히 힘으로 그들을 누룬 법존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합니다. 이공자가 전한 소식으로는 그들을 부추겨 법 존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흥. 그정도 일도 못한다면 청룡사를 그동안 지원했던 보람도 없지. 북해 빙궁과 해왕군도는 어찌 되었는가? 천외사세를 통합하기만 해도 변황동 맹 못지않은 힘일텐데." "소신이 수많은 제자들을 풀었으나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혈존에 의하여 완전히 멸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며..." "무슨 헛소리인가? 이총관. 북해빙궁과 해왕군도가 멸문되었으면 멸문되 었다는 증거를 가져오게. 그 증거를 찾지 못했으면 여전히 그들을 찾아 포섭해오게. 자네의 생각은 조금도 필요없네." "명...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총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총관과 달리 변황을 맡은 자신은 별로 뚜렷한 실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천축에 법존이라는 걸출 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의 주인에게 별 변명이 되지 못했다. 옥룡왕의 시선이 다시 삼총관에게 넘어갔다. 절정마유라고 불리는 인물. 옥룡왕부에 남아 옥룡왕의 곁에 있던 인물이다.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 자 절정마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보검과 보의는?" "명하신대로 진법에 투입할 자들을 위한 보의와 보검이 모두 준비되었습 니다. 만근의 황금이 소모되었고 천하에 이름높은 장인과 술법자들이 모 두 투입되었습니다. 육천개의 보검과 육천개의 보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진법에 투입할 금의무사들의 훈련은 어찌 되었는가?" "열 일곱 개의 진법도 완성되었고 진법을 운용할 사람도 마련되었습니 다. 백도십대극품절학을 익힌 자들을 제압할 열 개 진법, 삼천 육백의 금 의무사가 준비되었고 마찬가지로 흑도의 사대마도절예와 삼대사도지학을 누를 칠개 진 이천이백팔십명의 금의무사들 훈련이 끝났습니다." "괜찮군. 이로서 흑도와 백도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난들 변수를 만들어내 지는 못하리라." 천하에는 많고 많은 무인이 있으며 또한 많고 많은 무학이 있다. 하지만 혈존을 제외하고 당금 무림에서 흑도의 일곱가지 무공과 백도의 열가지 무공을 능가하는 무공을 얻은 자는 없다. 무림의 가장 큰 세력이라는 마 련도, 백도맹도 이들 열 일곱가지 신공 마공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었다. 즉 옥룡왕부는 마련과 백도맹을 완전히 제압할 준비가 끝났다 고 말하는 것이다. "마련은 어떠한가? 옥룡왕부를 위해 일하는 그의 정체가 마련에서 들통나 지는 않겠지?" "혈천마련에는 아직도 왕야를 잊지 못하는 요지마후와 철마황이 있습니 다. 천마황과 혈사황은 왕야와 관련하여 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덕분 에 왕야에 충성을 맹세한 만상여의는 아무 의심없이 마련을 주무르고 있 습니다.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만상여의는 마련의 뒤통수를 칠 것입니 다." "혈천마련에는 일곱 노물이 있다.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연락을 전하라." 옥룡왕은 마련의 뒤에 되살아난 칠대천마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 곱 노물이 뒤에 물러서 있는 이상 마련을 짖밟는다해도 후환은 영원히 남 는다. 그래서 칠대천마가 그토록 원하는 천마강시 여섯을 그들에게 보낸 것이다. "천마강시 덕에 왕야에 대한 의심은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또한 혈존 의 일이 있기에 일단 왕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 듯 합니다." 천마강시 여섯을 주기는 했지만 덕분에 혈존을 상대할 중요한 협조자인 마련의 신임을 얻었다. 덤으로 일곱 노물을 표면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 면 완전한 대성공이다. 아무리 칠대천마가 제 모습을 찾고 무림에 나선다 고 해도 그들의 마공과 사공을 누를 진법이 있는 이상 칠대천마는 더 이 상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일이라면 마련의 어리석은 일곱 사제들이 모두 나서겠지. 운이 좋 으면 그에 대한 원한이 깊은 일곱 노물도 새로 갖춘 몸을 가지고 나설테 고. 백도맹 쪽은 어떠냐?" "백도맹은 천무이성이 나설 모양입니다. 천무이성은 무성 종리연에게 이 야기하지 않고 천무호정단에서 십대 절학을 익힌 자들을 모조리 뽑아 투 입할 듯 합니다." 여기에서 삼총관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불행히도 백도맹 세력의 대부분이 승룡곡 출신이라 백도맹 안에 세력을 깊히 침투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야의 제자이신 삼공자께서 백도맹 에 중용되어 계시니..." 옥룡왕의 셋째 제자인 삼공자는 무림칠룡의 하나인 백미불 무아였다. 겉 으로 드러난 백미불 무아의 신분은 백도맹 서열 4위인 불아대사의 제자이 며 백도맹 감찰기관인 순찰부의 총순찰이기도 했다. 모용풍이 무적소야라는 명호로 무림칠룡의 수좌 자리를 차지할 때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모용풍이 세가의 젊은 무사들이 주축이 된 연풍회의 우상이라면 구대문파의 젊은 고수들이 주축이 된 군 웅회의 회주이기도 했다. 모용풍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는 백도맹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의 수 좌로 떠올랐지만 모용풍이 무적일황으로 명성을 떨치며 생환하자 백도맹 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미불 무아야말 로 옥룡왕의 셋째 제자이며 백도맹에 분단에 자신의 세력을 깔아놓은 자 였다. 삼총관이 물러간 이후 옥룡왕은 조용히 악도의 거처를 찾아갔다. 혈존을 척살하기 전까지 악도는 옥룡왕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였다. "어떤가? 그 분신의 상태는?" "혈존 본인과의 교감이 완전히 끊겨졌소. 적어도 혈존을 처치할 때까지 는 이혼통제대법을 차단시킬수 있을 것 같소." 악도가 지켜보고있는 곳에는 완전히 엉망이 된 넝마가 하나 있었다. 천마 지존의 시체였다. 과연 천마강시를 기본으로 한 덕분인지 그 와중에도 상 처를 스스로 복구하고 있는 것을 옥룡왕과 악도가 발굴해 낸 것이다. "마화타의 솜씨요. 재생력을 극도로 발휘하도록 한 덕분에 시일은 좀 걸 리겠지만 다시 원래의 몸을 회복할 것이오. 허나..." 악도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화타 답지 않은 실수를 했소. 그가 사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까? 영혼과 육체를 동일시 접착해야하는 최후의 공정처리가 허술한 덕분에 이 몸의 원래주인의 영혼이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또한 그 덕에 이혼 통제대법도 강제로 해제되다시피 했소. 뭐, 그덕에 오히려 이 몸에 펼쳐 져 있는 대법을 역으로 추적하여 혈존의 지금 정체를 알기 쉬웠지만." 천마지존의 몸의 상태는 심각했다. 혈존의 영혼이 떠난 것도 무리는 아니 다. 하지만 몸이 살아있는 이상, 그리고 이혼통제대법이 해체된 이상 천 마지존의 영혼이 다시 몸체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영혼과 몸체의 결합 이 불안했던 상태라 백가량의 영혼이 떠나면서 천마지존의 영혼마저 같 이 떠나버린 것이다. 지금 천마지존의 몸은 그저 살아숨쉬되 내용물이 빠 진 텅 빈 껍데기와 같았다. "실행할 예정인가?" "그렇소. 평생 무공에 관한 자질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왔소. 이제 무학 의 대종사였던 신체를 얻었소. 게다가 몸의 주인인 없는 영혼도 없는 상 태. 평생의 숙원을 풀 기회요." "사부의 분신이었던 몸을 차지하면 좀더 많은 정보를 꺼낼수 있으니 본좌 도 나쁜 일은 아니지. 허나 성공할수 있겠나? 혈마전혼대법을?" "크크. 혈존은 너무도 간단히 성공한 대법. 그것도 준비도 없고 제물도 없는 상태에서 바로 성공해버렸소. 허나 노부는 무려 백년 가까이 이 대 법 하나만을 연구해왔소.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던 무학의 자 질을 손에 넣기 위해, 그리고 완벽히 다른 존재로 변해 혈존의 마수를 영 원히 피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숨어 연구했었소." "악도의 안타까운 일생은 알고있네." "백년간의 준비. 마화타의 손길이 간데다 백치도 아니고 아예 영혼자체 가 존재하지 않아 천마강시보다도 훌륭한 제물. 혈지존, 당신의 보조. 이 렇듯 굉장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성공의 확률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 실이 안타깝소. 결국 그것이 혈존과 노부의 차이겠지." "본좌는 사부와 다르오. 결코 본좌를 위해 일한자를 내치지는 않소. 본좌 를 위해 일한다면 그에 대한 대우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악도는 모산파의 술법을 이용하여 천마지존의 두뇌에 새겨져 있는 기억 을 읽었다. 그것은 천마지존과 백가량의 기억이 혼용된 것이었다. 덕분 에 혈존의 정체가 서문 대장군부의 이공자임도 알아내었다. 모산파의 술 법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대를 지진으로 몰고갔던 엄청난 위력하에서도 천마지존의 몸체는 견뎌 내었다. 그것은 천마강시의 견고함과 재생력을 몇배 뛰어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몸에 숨겨져있는 엄청난 천마지존공의 내력. 악도는 한눈에 천 마지존의 육체에 반해버렸고 혈마전혼대법으로 그 몸을 자신의 것으로 삼 겠다고 혈지존에게 요청한 것이다. "혈존을 죽이는 계획은 한달 이내에 실행될 것이니 그때까지 혈마전혼대 법을 완전히 마무리 해야 할 것이오." 제 목:[연재] 혈존무적-귀환 관련자료:없음 [1958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4 21:07 조회:942 < 귀환 >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모용가가. 왜그러세요? 어마? 왜 식은 땀을 이토록.” 백가량의 옆에서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 가량이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일깨우다가 경악했다. 속이 환히 들여다보 이는 얇은 침의만 입은 절세미녀가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헉. 너는 백리설! 네가 왜 여기에... 으으윽. 설매. 내가 왜 이러지?” “왜그러세요? 머리가 아파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백리설은 모용풍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자 안절부절했다. 백리설이 밖에 나가 의원을 청하려는 것을 모용풍이 잡았다. “설매. 아무 것도 아니니 가만 있으시오.” 말과 달리 모용풍의 두 눈은 혼란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모용풍인가?)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 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모용풍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 대법으로 모용풍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은 화산파에서 깨어나 사랑하는 약혼녀 백리 설과 함께 백도맹으로 돌아가고 있던 모용풍이었다. 사랑을 호소하며 다 가오는 그녀를 안아준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자신은 분명 모용풍이다. “으으. 나는... 나는 누구지?” 모용풍은 계속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모용풍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혈존? 백이충? 단 지 꿈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모용풍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서 내 혼과 모용풍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모용풍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백리설은 모용풍의 제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모용풍의 이 마의 땀을 딱아주었다. 모용풍의 발작이 점차 심해지자 불안해진 백리설이 도움을 청할 결심을 굳히고 나가려고 할때 모용풍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우웅. 응? 설매? 왜 안자고 그러고 있소? 무슨 일이 있소?” “가가. 모용가가. 이제 괜찮으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연히 괜찮지. 혹시 무슨 악몽이라도 꾼거요?” “으윽. 가가. 악몽을 꾼 듯 괴로워한 것은 바로 가가였다고요.” “내가? 무슨 그런 소리를? 설매의 기척에 지금 잠에서 깨어난 것 뿐인 데...” “......”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방주. 왜그러세요? 어마? 왜 식은 땀을 이토록.” 백가량의 옆에서 걱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가량이 머 리를 흔들고 정신을 일깨우다가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다. 자신의 곁에 는 상황의 양녀가 된 조옥향과 그녀의 의자매인 옥정과 옥연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세 여인의 속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 닌가? “헉. 그대는 옥향! 네가 왜 여기에... 으으윽. 내가 누구지?” 오형록이 옥향을 남부르듯 하자 옥향의 얼굴에 당장 눈물이 그렁그렁 떠 올랐다. 동시에 옥정과 옥연이 발끈하여 오형록을 노려보았다. “너무 하세요. 혼례를 올린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옥향언니를 남을 대하 듯 하시나요? 방주는 언제 언니를 인정할 건가요? 언니만한 여인이 어디 있다고.” 옥연이 날카롭게 쏘아부치자 옥향이 안절부절했다. 만의 하나라도 오형록 에게 짐이 되고싶지 않은 옥향이었다. 그녀가 옥연을 붙잡았다. “연매. 나는 괜찮아. 방주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마.” 슬픈 듯 울먹거리는 말을 하는 옥향을 보고 오형록의 가슴이 뭉클 뜨거 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느끼고 오형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오형록인가?)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 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오형록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 대법으로 오형록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은 혈무영의 영주로 혈존에 충성을 맹세한 오형록이었다. 자신의 몸을 혈존에게 내어준 것도 스스로의 자의에서였 다. 그런데 어이하여 마음속의 주인인 혈존과 자신을 혼동하는 지경에 이 르렀단 말인가? “으으. 나는... 나는 누구지?” 오형록은 계속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오형록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어이하여 주군인듯 한 착각이 든단 말인가? 내가 미쳤단 말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오형록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서 내 혼과 오형록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오형록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옥향 등은 오형록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녀들을 소홀히 여긴다 고 생각하여 화를 내었는데 오형록이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자 깜짝 놀 랐다. 주화입마라도 든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오형록의 행태가 발작 수준까지 가자 옥향이 울며 오형록을 부축했다. 그 녀의 얼굴은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 범벅이 되었다. 그때 오형록의 얼굴 이 멀쩡한 상태로 들렸다. “응? 향매? 왜 울고 있소? 무슨 일이 있소?” “방주. 지금... 지금 뭐라고 하셨죠? 향매라고... 저를 향매라고 하셨나 요?” “으음. 이제 그대는 나의 내자이니 당연한 소리가 아니오. 그나저나 언 제까지 방주라 부를 것이오? 어서 록랑이라 한번 불러보시오.” 순간 옥향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 광경을 보고 옥정 자매는 쿡쿡 웃 으며 물러섰다. 연인이 단둘이 마음을 털어놓을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것 이다. 이미 방금전 오형록의 행동은 장난으로 치부한 듯 이들의 머리 속 에 까마득히 잊혀졌다.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교주. 무슨 일입니까? 어이하여 부동심이 깨어졌습니까?” 백가량의 옆에서 그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자신을 질책할 수 있단 말인가? 화가 치밀어 노려보니 중년 미부였다. “헉. 너는 적안미부? 으음. 이상하군. 너는... 너는 내 동생인가?” 귀영신군의 이상한 말에 적안미부는 싸늘한 살기를 뿌리며 오빠를 노려보 았다. 천뇌교를 위혀서라 하지만 얼마전 자신의 남편을 척살한 오라버니 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호호호. 이제는 동생인 것도 부정하시려 합니까? 이제는 저도 죽이시 려 합니까?” 적안미부의 행동에 귀영신군은 움찔 했다. 속으로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쳤다. 아마도 핏줄에 의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 웃했다. 혈존인 자신이 적안미부에 미안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잠 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귀영신군이었다. “교주. 정말 왜그러세요? 대법을 실행시키지 않을 겁니까?” 그리고보니 자신은 귀영신군이었다. 혈존에게 복속한 이후 혈향초 혈근에 서 비롯된 혈과로 인초합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혈향초에 대해 누구보다 잘아는 적안미부의 도움을 받아 혈향초의 힘과 형벌십자흔의 마력을 합일 시키려는 시도를 시험해보던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또한 백가량이었다.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 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귀영신 군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대법으로 귀영신군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귀영신군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혈향초와 형법십자흔의 마력으 로 천뇌만상공을 능가하는 사공을 만들려던 생각은 까마득히 사라져갔다. “교주. 진정 이렇게 나를 무시하긴가요?” “으윽. 제발 좀 나를 잠시만 내버려다오. 지금 나는... 으으. 내가 누구 란 말인가?”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귀영신군인가?) “나는 귀영신군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혈존? 백이충? 형벌십자흔의 주술에 이런 힘도 있단 말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귀영신군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 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내 혼과 귀영신군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귀영신군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그 모습이 마치 연극하는 것 같아 적안미부가 참지못하고 화를 내려 고 할때 귀영신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뭐하고 있는건가? 대법의 실패라도 바라는 건가? 왜 제자리에 있지 않 느냐?” “뭐라고요? 교주. 지금 나에게 말하는 겁니까?” “여기 너말고 누가 있느냐? 제발 대법 중에 엉뚱한 짓좀 하지 말아라. 이 대법이 성공하면 천뇌교의 힘이 천하를 뒤덮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 냐?” “대체 이게 무슨 적반하장격인 소리를... 휴우. 관둡시다. 오라버니도 장난칠 줄 아는 사람이었구려.” 머리를 설래설래 젓는 적안미부의 목소리에는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라버니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것이 적안미부의 마음이 풀어졌 다는 것을 안 귀영신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방금 오라버니라 불렀느냐? 이제 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풀 렸느냐?” “교주. 대법이나 실행합시다. 교주 말대로 이제 엉뚱한 장난은 그만두리 로 하고 말입니다.” 이혼통제대법으로 혈존의 분신역할을 하던 자에게 이런 현상은 모조리 일 어났다. 곤무악도 흑방의 회의 중에 한바탕 난리를 쳐 발칵 뒤집어 놨으 며 혈무영 십대영주의 하나이던 유부마영 조인후도 임무도중 발작을 일으 켰다. 백도맹 근처에 잠적해 있던 백호검 마진걸도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모란루의 지하에 있는 혈존의 거처에서도 세명의 인물이 발작을 했다. 아직 혈존이 그 육체를 써보지 못했던 세 명의 분신. 이혼통제대법 만을 베풀어놓고 마화타에게 맡겨놓았던 삼인, 악취결개 우문노인과 십대 영주 중 남자들 두명. 바로 쌍교잠룡 혁우비와 무영독와 구태립이었다. “놀랍구나. 놀라워. 내가 만들었지만 가히 경이적인 흡공능력이 아닌 가?” 마화타는 악취결개 우문노괴의 몸을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악 취결개는 과거 마화타가 혈존의 몸을 연구하여 만들었던 수술비법의 결과 물이었다. 게다가 혈존에 의해 잡혀온 이후 마화타의 평생의 심혈이 모 두 우문노괴의 몸에 베풀어졌다. 처음 잡혀왔을 때 혈존이 죽여도 좋다 고 한 데다 기존에 마화타의 수술로 이미 체질이 길들여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실험물은 없었다. 온갖 인공적 수술의 결과로 한낱 개방의 장로였던 우문노괴가 드디어 십 대영주같은 천고의 기재들과 더불어 혈존에게 분신으로 지적을 당할 정도 로 신체와 몸의 능력이 발전했으니 이를 보는 마화타의 심정이 뿌듯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의 내공을 흡취하는 기술로만 보면 이미 밖에 나가 활동하고 있는 유 부마영 조인후 영주와 비등하구나. 둘다 상대가 십장 내에만 있으면 노려 보기만 해도 적의 진기를 빨아들일수 있으니...” 유부마영 조인후는 남의 진기 뿐만 아니라 정혈까지 빨아먹는다. 선천지 기와 힘의 근원을 모조리 갈취하니 남의 무공을 흡입한다고 해서 부자용 이 있을리 없다. 게다가 음산곡의 사술에다 쌍노의 배교 술법까지 익혀 사이한 대법의 경지가 가히 쌍노와 버금갈 정도이다. 허나 마화타는 자신의 걸작이 조인후에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문 노괴의 흡공능력은 상대의 진기뿐만 아니라 무공까지 빨아들인다. 그동안 의 결점을 완벽히 보완했다. 우문노괴는 어떤 자의 무공도 내공과 더불 어 완벽히 흡수하게 된 것이다. 남의 진기를 빨아들이며 사술대법에 극에 이른 자, 그리고 남의 진기를 빨아들이며 무공까지 빨아들이는 자. 둘 중 어느 하나가 낫다고 장담하 지 못하리라. 하물며 거듭되는 마화타의 시술로 우문노괴의 몸은 천마강 시나 천마지존의 짜깁기한 몸 정도는 못되어도 천마강시랑 비슷하다고 말 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올라가 있었다. “크으으윽.” 갑자기 우문노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마화 타는 깜짝 놀랐다. 완전한 세뇌가 성공하기 전에 우문노괴는 정신을 차리 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마화타의 의술의 예측을 벗 어나지 못하던 우문노괴가 어이하여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가? 천일을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마취분에 중독되어있는 우문노괴가 신음을 내지르자 마화타는 의술상 일어날 수 없는 현상에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 다. 그 순간 우문노괴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으윽. 이 눈빛은?” 마화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이 눈빛의 주인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우문노괴의 몸을 차지하여 이런 눈빛을 발하게 만들 능 력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혈존은 이미 천마지존이라는 분신의 몸으로 여 행을 떠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였 다. “크윽. 마화타. 어찌된 일이냐? 본좌가 왜 네 실험실에 있는 것이냐?” 우문노괴가 나직히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마화타는 털썩 주저앉을뻔 했 다. 확실히 혈존의 음성, 혈존의 눈빛, 혈존의 기세였다. 이혼통제대법 이 무언가 잘못되어 천마지존의 몸대신 우문노괴의 몸으로 영혼이 이전 된 것이 틀림없었다. 마화타는 벌벌 떨며 우문노괴의 몸을 묶은 사슬을 풀어주려 했다. “크으윽. 너는 어떤 놈이냐? 누구이길래 본좌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냐?” 마화타가 방금전 들은 음성과 똑같은 음성이 뒤에서도 들려왔다. 엄청난 살기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문노괴의 두 눈에서도 지 독한 혈광과 살기가 퍼져나갔다. 마치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원수를 만 난 듯 우문노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본좌를 사칭하다니. 찢어죽여 버리겠다.” 마화타가 황급히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뒤에는 마화타를 호위하며 우문노괴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두명의 혈무영 영주가 있었 다. 쌍교잠룡 혁우비와 무영독와 구태립이었다. 둘다 그 재질을 인정받 아 이혼통제대법의 실험자가 되었고 좀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마화타의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 혁우비와 구태립의 모습은 평소 마화타가 알고있는 모습이 아니었 다. 붉은 혈광, 음산한 살기. 그것은 쌍영마공중에 혈영마공에 영혼을 담 구었던 자만이 발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 자는 천하에 단 하나만이 존재할 뿐인데 지금 두명의 영주, 아니 우문노괴까지 셋이서 같은 눈빛 을 발하고 있었다. “천한 가짜 녀석. 감히 본좌 혈존을 흉내내다니. 분신 주제에 본좌의 행 세라도 하고 싶은 거냐?” “누가 할 소리. 가짜. 네놈은 개방의 냄새나는 거지에 불과하다. 감히 본좌를 사칭하다니.” “너희 둘 다 가짜이다. 본좌야 말로 방금 전 첫째의 일격에 잠시 후퇴했 다가 본의아니게 이 몸에 깃들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본좌의 노예인 네 놈들이 나로 가장할 생각이냐?” 혁우비와 구태립 그리고 우문노인은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발했다. 마 화타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누가 진짜 혈존의 영혼인지 알수가 없었다. “으으. 혈존이 장담하던 이혼통제대법이 실패한 것인가? 그 부작용으로 셋다 미쳐버린 것일까?” 마화타가 입에 거품을 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혼절했다. 그리고 서 로를 노려보려던 셋은 동시에 손을 쓰려했다. 우문노괴가 몸에 두른 쇠사 슬을 순식간에 풀어내고 공격을 하려했고 혁우비와 구태립도 각기 손을 쓰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우문노괴의 몸이 갑자기 쓰러졌으며 혁우비와 구태립은 손을 든 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 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멍청히 상대와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쓰러져 기절해 있는 마화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그를 깨웠다. 혈존의 분신으로 내정되었던 자 아홉은 이토록 짧은 사연을 모두 거쳤 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하나 이미 혈지존의 손에 떨어진 천마지존의 몸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짧은 시간의 발작이후 장본 인들이 하나같이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크윽. 첫째 녀석. 설마 쌍영마공을 합일하다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영혼과 몸이 일체가 되어있는 자라면 죽 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가량에게는 단지 영혼이 이동하는 순 간에 불과했고 재미있게 사용하던 놀이기구 하나가 파괴되는 순간일 뿐이 었다. 백가량이 있는 곳은 그의 본신 백이충이 있는 곳. 이혼통제대법으로 혼 이 빠져나가 있을 때는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엄중히 보호되고 있는 석 실이었다. 하기야 지금 백이충의 몸 상태로서는 깨어있다 한들 스스로 자 신을 방어하기 힘들겠지만. 으스스한 눈빛은 완전한 혈존 백가량이었다. 백이충이라 생각하던 그모습 은 사라지고 없었다. 강한 백가량의 자아가 백이충의 인격을 영혼 구석 어리론가 밀어넣어 버린 것이다. 그 모습 어디에도 순진하고 가족을 사랑 하던 백이충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몸. 어째서 이따위 몸에 그토록 집착을 갖고 있었을까? 흐 흐. 천마강시를 하나 만들어 놓고 혈마전혼대법을 사용하여 몸을 옮겨야 겠다.” 인격과 기억이 혈존 백가량으로 각성했으니 백이충의 인격에 대한 미련 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백이충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 그의 가족에 대 한 사랑과 집착도 기억은 하나 동감할 수는 없다. 기억만은 온전하여 과 거를 돌이켜 볼 수 있지만 백이충으로 스스로를 다짐하던 시절 왜 그토 록 어리석게 이런 약해빠진 몸을 고집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가량은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올리고 석실을 나섰다. 그 와 중에도 그의 머리는 천하를 혈세할 계책이 숨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형산의 요기를 다시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요요경을 금혜연 계집 에게 다시 주었던가? 빼앗아내어 오형산에 다시 요기혈공을 뚫으면 가능 하리라. 그리되면 수많은 요괴 귀신들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겠지. 그리 고 혈향초도 다시 재배해야지.” 백가량은 미래를 생각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련과 백도를 양패구상 시키리라. 마련의 뒤에 일곱 노물이 있으며 그 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백도는 결코 마련을 좌시하지 않 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다.” “흑방과 현황방, 천뇌교의 세력을 합치리라. 방해하는 놈은 모조리 죽이 리라. 그 힘과 지금 가진 일백마제의 힘으로 백도와 마도의 충돌이후 살 아남은 잔존자들을 쓸어내면 되리라. 그때는 천하무림은 내손아귀에 있 을 것이다.” “살아남은 백도는 모용풍 분신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세뇌하여 본좌의 꼭 두가시로 만드리라. 마련의 잔존자들도 마찬가지. 천년마교의 정통인 혁 우비를 이용하여 혈천마련의 세력을 삼켜버리리라. 거부하는 자는 다른 분신들을 이용하여 모조리 죽여버리리라.” “천마강시를 다시 대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백치마인도. 혈향초 도 대규모로 재배하고 수십개의 혈근을 천하에 뿌려야 한다. 또한 본좌 의 분신을 수십 수백으로 늘리리라.” “첫째 녀석도 용서할 수가 없다. 천하무림을 접수하고나면 옥룡왕 행세 를 하고있는 놈도 죽여버리겠다. 흐흐. 천하무림 뿐만 아니라 천자가 되 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천마강시가 그 녀석에게 있지만 그 괴물 의 약점을 알고있으니 본좌에게 문제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첫째 가 쌍영마공을 익혔다한들 분신들을 이용하여 차륜전을 벌인다면 감히 이 기지 못하리라.” 백가량이 대소를 터트리며 쌍노를 불렀다. 마음으로 부르는 것만으로 쌍 노는 기척을 알아채고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백가량이 쌍노에게 여 태까지의 계획이 바뀌었다고 알려주려는 순간이었다. “크으윽. 머리가 깨어질 것같다.” 백가량이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이곳은 가장 비밀스런 석실이라 누 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 쌍노조차 혈존의 허락없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 이다. 따라서 백가량이 머리를 붙잡고 뒹군들 누구하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크으윽. 곤무악, 모용풍, 마진걸, 오형록... 놈들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놈들의 인격이 내 머릿속으로 역류한다. 크으윽. 있을 수가 없 는 일.” 백가량의 신음이 자그마하게 흘러나왔다. 백가량의 눈빛은 온통 혼란과 혼동의 격류 속에 빠져 있었다.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나 마 다행인 것은 분신들의 기억은 영혼의 조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지 기억이라는 정도였을까? 백가량, 백이충의 영혼의 정체성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영혼을 오염시키지는 못했다는 소리이다. “크으윽. 나는 누구이지?” 백가량의 눈에서 광인 수준의 눈빛이 터져나왔다. 백가량은 점차 미친 것 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갔다. 자신을 자신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자, 자신 을 나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미칠 수밖에 없다. “영혼이란 무엇이지? 기억과 지식의 집합체인가? 본능의 혼합체? 으으. 나는 나인가?” 그는 백가량인가? 그의 몸은 백이충이다. 혈마전혼대법으로 백가량의 영 혼이 스며들어 태어났고 백이충으로 잠깐 자라났다. 하지만 그 영혼은 백 가량의 것이고 백가량의 기억과 인격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그렇다 면 백가량인가? 백이충은 단지 기억을 잃었을 때의 가장된 인격에 불과한 가? “으으... 백가량 과거의 기억이 백이충의 몸에 스며들었다고 해서 내가 백가량이라고? 그럼 모용풍은? 마진걸은? 오형록은? 놈들의 기억이 역류 되어 지금 내 머릿속에 스며들어왔다. 그럼 나는 모용풍인가? 마진걸인 가? 오형록인가? 그것들은 단지 기억과 지식에 불과하다. 그럼 백가량 또 한 스며든 지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 이 몸이 살아온 백이충이 진짜 나인가?” 그는 백이충인가? 확실히 백이충의 인격과 몸으로 이십년을 살아왔다. 하 지만 이십 년을 능가하는 백년 넘게 쌓아온 백가량의 영혼은? 백가량의 기억은? 백가량으로서 절절히 느껴지는 복수심과 감정은? 악산산에 대한 감정은? 백이충의 몸이 본신이기에 그를 백이충이라 할 수 없다. 그의 영 혼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여러 분신의 몸에 깃들어 움직이지 않는가? 백이충의 몸은 최후로 돌아오는 곳일뿐 따지고 보면 본신이라고 해도 분 신의 몸처럼 영혼이 깃드는 거처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누구인가? 헛깨비인가?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닌가? 존재하기는 하 는 것인가? 존재하지도 않은 허상이 남의 육체에 빌붙어 돌아다니는 것 이 아닐까?" 깊은 혼란. 그것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심마(心魔)이기도 했고 주화입마 로 들어가는 현상이기도 했으며 또한 아수라독존마공의 입문(入門)이기 도 했다. 처음에는 백이충이라는 확실한 자아가 있었다. 백가량의 기억이 깨어났을 때는 전생이나 어릴 적 추억처럼 희미한 기억 이 되살아 난 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마성이 되살아나 백가량의 인격이 표출되었을 때는 그 인격도 백이충 자 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혈존, 혹은 백가량으로 되돌아갈수록 백이충으로 남으려 노력했다. 전혀 다른 두 인격 모두의 통합이 지금의 자신이라 생각했다. 어느 순간에 백가량인지 백이충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악산산과 금혜연 으로부터 시작된 마음의 갈등은 두 인격의 합일이라는 착각을 깨트려버렸 다. 정체성이 사라졌다.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혼란과 혼돈이 깊어졌다.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자각과 혼란과 깨달음은 모두 개인의 인식에게서 비롯되는 것. 우주의 창생도 우주의 멸망도, 자연의 오묘한 이치도, 죽음 으로 향하는 저주도 모두 개인의 사고에서 인식되어야 비로서 그 개인에 게 가치가 부여되는 것. 그 개인의 인식의 혼란은 바로 개인에게 있어 전 우주의 혼란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혼돈은 전 우주의 혼돈이 아니겠는 가? 개인의 인식 자체가 전 우주이니... “크아아악.” 백가량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만약 다른 무도의 길을 걷는 자였다 면 깊은 혼돈과 자아의 상실에 백치와 반신불수, 심지어 영혼의 상실까 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가량이 추구하는 무도의 길은 혼돈의 극치, 아무도 걷지 않 은 길, 아수라독존마공이었다. 그의 혼란은 아수라독존마공의 길을 걷는 것에 불과했다. 하루가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일어났다. 천천히 자신을 점검하듯 생각 하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아직 혼란의 빛이 눈에 머물렀지만 쓰러지기 직 전 광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린 모습이었다. 그것은 백가량의 눈빛이 아니었다. 순수한 백이충의 눈빛도 아니었지만 요 근래 스스로 백이충이라 고집하면서 백가량의 인격을 많이 나타내던 눈빛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인 정하는 눈빛. 모든 것을 깨달은 선각자(先覺者)나 완벽히 미쳐버린 광인 (狂人)과 동일한 눈빛이었다. “흐흐. 모순된 일이 아닌가? 정신이 건강할 때는 몸이 허약하더니 정신 이 미쳐가니 몸이 튼튼해지다니.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또다시 늘어났 지 않은가? 마지막 구결의 해석을 아직 얻지 못했거늘...” ‘그’는 자신을 부정했다. 하지만 또한 자신을 초월했다. 스스로 혼돈이 라고 자신을 자인한 순간 새로운 자신을 되찾았다. 그는 ‘혼돈’이었 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되 스스로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니었으며 그 누고 도 될 수 없는 존재. 또한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므로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존재. 백가량도 백이충도 아닌 ‘그’이기에 마음 속의 갈등을 줄 일 수 있었다. 마음을 결정했다지만 아수라독존마공에서 뜻하는 진정한 ‘혼돈’으로서 의 존재가 그의 몸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백가량과 백이충 의 자각이 왔다갔다하기에 회피라는 개념으로서 만들어내어 택한 ‘혼 돈’이기 때문이다. 백이충으로서도 백가량으로서도 자아성을 찾지 못하 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회피한 혼돈인 것이다. “후후. 새로운 인격의 ‘나’이지만 일단 백이충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 야겠지.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백이충이 되어야 할테니까.” 백이충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혼돈’으로서 백이충을 배우려는 것 이다. 백이충을 배움으로서 지금까지의 백이충을 털어내려는 것이다. 또 한 백가량도 털어내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온전히 하나로서의 ‘혼돈’만 남지않으면 ‘그’의 존재는 단지 다중 인격의 하나가 늘어 난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백이충이 석실을 나서자 쌍노가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이충이 마음 속으로 그를 부른 것이었다. 쌍노는 백이충을 보며 약간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백이충의 무공이 상실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백이충의 몸은 금간 그릇이었으되 그 속에 쌍영마공을 억지로 담아내고 육체의 한계를 넘는 기운을 집어 넣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파괴할 듯 한 사납고 위태로운 기운이 항상 과거의 백이충의 몸에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쌍노가 보기에 백이충의 몸에는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 다. 마치 무림에 처음 나섰던 때의 백이충의 몸처럼. 이 몸 속에, 실재로는 그 영혼 속에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인 혼돈-아수라독존마공-이 담겨져 있었지만 쌍노는 그것을 눈치챌 수 없었 다. “주군. 일은 잘 되셨습니까?” “흥. 본좌를 해치려는 자는 악도였다. 너희들이 말한 것이 맞았다. 하지 만 그자를 해치우려다가 엉뚱하게 첫째의 흔적만을 발견했다.” “옛? 그 배반자 말씀입니까?” “그래. 놀랍게도 우리 가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살고 있었더군. 옥룡왕이 바로 첫째의 변신이더군. 이로서 아홉 녀석이 숨은 곳이 모조 리 들어난 셈이지.” 백이충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조로 쌍노에게 말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쌍영마공의 합일에 성공했었다. 천마지존의 몸으로 비장의 한 수랍시고 혈영마공을 전개해 봤지만 통하지도 않더군.” “그... 그럴 리가? 쌍영마공의 합일이라니. 그건 주군께서도 아직 이룩 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덕분에 큰 낭패를 봤다. 그 위력이란 대단하여 이혼통제 대법을 역류시킬 정도이더군. 역시 본좌를 가장 닮은 녀석은 바로 첫째녀 석인 것 같아.” “......” “너무 그런 표정을 짓지 마라. 녀석도 혈뇌동과 비슷한 일을 했다. 쌍영 마공의 합일구결은 그곳에서 얻은 듯 하더군. 하지만 애초부터 쌍영마공 따위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이룩하기 위한 기초무공. 아수라독존마공을 이 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영마공의 합일이 필요하지만 쌍영마공이 합일 되었다고 해서 아수라독존마공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애초에 혈뇌동을 통 해 이룩하고자 했던 목적이 그놈과 나는 달라.” 백이충은 가볍게 혈지존의 일을 무시했다. 현재 가장 급한 것은 간신히 진정시킨 자신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또한 그 다음은 무림에 뿌 려놓은 씨를 수확하여 거두는 것. 그러니 황실 쪽에 있는 혈지존의 일은 가장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백이충은 관심을 금혜연에게 돌렸다. 스스로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닌 새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금혜연을 생 각하자 다시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백이충으로서의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품고있기 때문이다. “소매는 지금 어디있나?” “모용풍과 더불어 하남 무림맹 총단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백이충은 가만히 기억을 되돌아 보았다. 백이충이 백가량과 혼동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원인이 바로 금혜연과 악산산 때문이었 다. 금혜연이 중요한지 악산산이 중요하지 생각하다가 자신이 백가량인 지 백이충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동일시 했던 서로의 인격을 인 정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이충을 배우기 위해서는 갈등의 시작이 된 금혜연을 알아야 했다. “내 이름으로 소매에게 서찰을 보내라. 하북에 있는 북경 우리 집으로 오라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자고 소식을 보내면 당장 달려오겠지. 오래 전부터 혼인식부터 하자고 졸라왔으니.” 그리고보면 오랜 동안 북경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백이충이 처음 집 을 떠나 무림에 나설 때는 잠깐 여행을 하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벌써 일년이 넘는 세월이 후딱 지나간 것이다. 서문 대장군부는 백이충의 마음 속에서 금혜연과 함께 가장 크게 차지하 는 가족이 있는 곳이다. 백이충은 다시 백이충으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백이충의 꿈인 조용하고 단란한 가족과의 평범한 생활도 좋고 백가량의 야망인 무림제패나 역모도 좋다. 하지만 일단 자신이라는 가치를 먼저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집으로 돌아가 소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 가족과 함께 지낼 것이 고...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겠다. 그래서 백이충으로서의 모든 것 을 되찾았을 때... 진짜 내가 되기 위해 백이충을 버리겠다.” 백이충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 모든 것이 아수라독존 마공의 혼돈구결 속에 포함된 뜻인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란루에 벗어나 백이충은 북경을 향해 올라갔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 난 이후 집으로의 귀환이었다. 악도를 쫓아 북경의 옥룡왕부에 가기는 했 지만 그건 천마지존의 몸으로서 간것이지, 백이충으로서 간 것은 아니었 다. 새로운 백이충은 원래 백이충으로서 가족을 생각했다. 집을 생각하 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든 가족이 그립기 이를 데 없었 다. 북경에 들어서니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중원의 중심인데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마치 한겨울의 중심에 온 듯 거리는 썰 렁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거리를 사람도 군관과 병마들밖에 없었다. 또한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이 철저하기 이를데 없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쌍노를 주변에서 물리쳤던 백이충으로서는 북경의 분 위기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서문 대 장군부로 발길을 옮기려하니 귓가에 쌍노의 전음이 들렸다. “주군. 장군부로 들어가시면 아니됩니다.” “무슨 일인가? 북경의 분위기가 마치 난이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 가?” “옥룡왕이 자금성을 장악했습니다. 북경 전체가 그의 통제하에 있습니 다. 아직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제 황제를 끌어내도 이상하지 않 을 정도입니다.” “그런가? 첫째 녀석. 무림 뿐만 아니라 천자의 자리에도 욕심이 있었던 가? 역시 욕심도 녀석이 백가량을 가장 많이 닮았군.” 혈존. 그이름이 뜻하는 존재는 없다. 지금 백이충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 히 잠들어 있지만 그 존재 백가량은 백이충과 더불어 영원히 나오지 않 을 것이다. 오히려 옥룡왕 혈지존이야말로 과거의 혈존과 똑같은 존재라 고 할수있을 것이다. 그 야망과 욕심, 그리고 잔인함과 지혜까지... “그리고... 서문 대장군부가 폐쇄되었습니다.” 그 말에 당장 백이충의 몸이 뻣뻣한 동상처럼 굳어졌다. 대장군부가 폐쇄 되다니. 선황의 유시덕에 당금 황제도 벌을 내리지 못하는 대장군부를 누 가 폐쇄시켰단 말인가? “옥룡왕부에서 나온 사람이 대장군부의 식솔들을 잡아갔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는 없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 하지만 좋은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쌍노는 백이충의 대장군부에 대한 애정을 잘 알기에 더듬거리며 말했지 만 백이충은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옥룡왕과 대장군부 에 대한 생각이었다. (천마지존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기에 그 몸이 완전히 파괴된 줄 알았 거늘 그것이 아니란 말인가? 혈지존이 천마지존의 몸을 통제할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역추적으로 백이충의 내력을 알아내었단 말인가?) 가족이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생각만큼 충격적이지 않았다. 새로 운 백이충에게는 과거 원래의 백이충으로서의 부분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냉정했던 백이충의 표정도 쌍노의 다음 말에 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성녀 말씀입니다만. 실종되셨습니다.” “뭐라고?” 백이충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직 금혜연에 대한 마음까지 지우는 것은 멀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냉 정을 되찾았다. “성녀께서 모용풍과 헤어진 직후 하북으로 넘어왔습니다만... 도중에 실 종되셨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성녀 스스로 행방을 감추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크윽. 말도 안돼는 소리. 나와의 결혼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다. 도중 에 무슨 일이 있다한들 어이하여 스스로 행방을 감춘단 말이냐?” “......” “그녀가 실종된 장소는 어디냐?” “하남에서 하북으로 들어오는 청마산 근처입니다. 지금 혈무영 전체를 동원하여 성녀의 행방을...” “내가 직접 가겠다. 그녀에 대한 일은 가장 급한 일이니.” “하오면 북경에서 대장군부의 일은 어이하실 일이신지...” “가족의 일보다는 소매의 일이 더 급하다. 이거 어쩐지 여자에 환장해 서 가족을 나몰라라 하는 패륜아 같아졌군. 하지만 소매의 안전을 확보하 지 못하면 영원히 나로서 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위기 관련자료:없음 [1961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8 23:26 조회:92 <위기> 백이충이 처음 자각했을 때의 몸은 무공이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혹은 자 각 후에 조금 쌍영마공의 기틀을 잡을 수 있는 진기가 되살아났어도 허약 한 몸의 상태 덕에 있으나 마나 한 경지였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무림에 나섰을 때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백이충이 허약한 몸을 이끌고 무림에 자 신있게 나섰던 것은 몇가지 믿는 게 있었던 탓이다. 첫째는 바로 백이충이 혈존 백가량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 는 것. 둘째는 쌍노의 힘. 배교쌍노는 혈존의 수족역할을 했던 자로서 술법과 무 공이 모두 최상승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무공 하나만 비교한다면 뒤질 지 몰라도 술법과 무공 두 가지를 합한 최종 능력이라면 설사 천무삼성 을 만난다해도 배교 쌍노는 능히 상대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셋째는 무공은 사용할 수 없지만 대신 기억과 함께 돌아온 혈존의 배교 사술 능력이다. 처음에는 일일이 술법을 펼치기 위해 배교쌍노의 힘을 빌 려야 하는 정도였지만 오형산 요요경의 막대한 요력을 얻은 이후 사술의 능력은 배교쌍노를 바로 뛰어 넘었다. 넷째는 백이충의 몸에 있는 여러 가지 법보의 능력이다. 혈존시절 안배했 던 배교의 보물들, 혹은 천하 각지에서 빼앗은 것들로 쌍노를 통해 다시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 보물들을 모조리 다룰 능력은 오직 천하에 그 하 나였다. 주변 모든 생명체를 잠들게 하는 수면충(睡眠蟲), 몸을 일시 불사로 만들 어주는 불사옥대(不死玉帶),땅을 축지(縮地)시켜주는 천리신보기(千里神 步旗),하늘의 신장을 몸에 내리게 하는 성군강림부(星君降臨符),스스로 영성을 가진 자령검(紫靈劍), 자연주(自然珠)... 등등, 오형산에서 얻은 요요경(妖妖鏡)도 혈존이 평소에 몸에 지니고 있던 이들 법보 중의 하나 에 불과했다. 백이충의 과거가 혈존이라는 사실만 밝혀지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조건 만 가지고도 안전하게 천하를 종횡할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대장군부의 자손에 무림인이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할 테지만 설사 무모한 자가 나 라 군부와의 충돌을 꺼리지않고 백이충을 공격한다해도 그의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극히 적었던 것이다. 백이충은 처음 천하를 어지럽힐 몇가지 혈존의 장난만을 거둬들이면 다 시 장군부로 돌아와 평범히 살려했다. 원한관계를 풀거나 다른 자와 충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안배를 거둬들이면 된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어차피 집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무공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백이충은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무림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혼 에 잠들어있는 혈존의 인격을 너무 무시했다. 설마 혈존의 인격이 되살아 나며 무림에 대한 야욕이 불타오리라고는 백이충도 상상하지 못했다. 백이충은 백이충이고 혈존 백가량은 단지 과거 속의 희미한 기억일 뿐이 라 생각했지만 결국 백이충과 백가량은 같은 영혼이었다. 백가량의 영혼 이 모든 기억을 잃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이 쌓아올린 인격이 백이충이었 다. 유순한 사람에게 사나운 면도 있듯 기본적으로 같은 영혼에서 뻗어 나 각기 다르게 보여지는 두 개의 인격일 뿐이었다. 전혀 다른 환경, 전 혀 다른 풍부한 사랑에 의해 다르게 생성된 과거와 현재의 두 인격이지 만 그 근본적인 토양, 즉 영혼은 같았다. 스스로 백이충으로 확신하고 백가량은 이미 죽어 지식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백이충의 영혼. 하지만 그 영혼은 동시에 백가량의 영혼이기도 했으며 순수하고 행복해하는 백이충의 인격에 눌려 잠자는 백가량의 인격 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혈존의 안배를 하나하나 거둬들일수 록, 즉 요요경의 요기를 얻고 혈향초의 힘을 얻고, 마화타에게서 건강을 위한 수술을 받고, 혈환과 혈무영이 마련한 각종 안배를 얻어 힘을 얻을 수록 영혼의 한단면인 백가량의 성품이 깨어났고 백이충은 거칠어졌다. 백이충이 경험하지 못했던 백가량의 치밀하고 잔인한 성격이 깨어난 것 은 그가 얻은 힘이 대부분 마공과 사공을 자극하기 위한 최고의 질에 해 당하는 안배였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환경과 풍부한 사랑 속에 자라났 던 백이충은 영혼 속에 숨어있던 거친 성품, 혈존 백가량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사납고 잔인한 성품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얻은 힘이 혈존 의 그런 성품에 적합하도록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이충의 순수한 마음에 백가량의 거칠고 잔인한 성품이 섞일수록 혈존 백가량이었을 때의 버릇과 성격과 야망이 자주 드러났다. 또한 백가량의 기억이 더더욱 또렷해졌다. 그러나...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하지만 않았아 도 문제가 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백가량의 기억이 점차 뚜렷해지기는 해도 단지 영혼의 일부분일뿐, 영원히 백이충으로서 살았을 테니까. 백이 충으로 자처하는 동안만은 혈존과 비슷한 야망을 드러낼지라도 과거의 혈 존처럼 나쁜 놈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혈마전혼대법, 이혼통제대법. 이러한 대법은 저주받은 사법임이 분명하 다. 혈존이 펼친 혈마전혼대법은 분명 성공했다. 백가량의 영혼은 아기의 죽 은 영혼대신 완전히 아기의 몸과 접착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실패했다. 모든 기억과 인격을 잃고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바람에 기존에 있 던 백가량의 인격을 지워버릴만한 백이충이라는 인격이 영혼위에 새로 생 겨났다. 백이충은 무림에 나섰고 혈존 백가량의 성격이 뒤섞이면서 무림에 대한 야망과 욕심이 생겨났고 마침내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했고... 원래 백이충 의 몸의 것이 아니던 영혼은 너무도 쉽게 본체를 떠나 분신에게 깃들었 다. 전설상의 이혼통제대법은 혈마전혼대법으로 백이충의 몸에 깃들었던 영혼과 너무도 상성이 잘맞는 대법이었던 것이다. 대신 완전히 고착(固着)되었던 백이충의 몸과 영혼은 그만큼 틈이 벌어지 고 결합력이 약해졌다. 임시로 깃드는 분신의 몸보다야 이십년 넘게 깃 든 몸이 백이충의 영혼에 훨씬 강한 결합력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과 몸 이 떨어지는 시간이 많을수록 백이충의 몸도 영혼의 거리가 멀어짐은 당 연한 일이었다. 백이충이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하면서 간과하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지나 갔던 것은 결국 원래의 영혼 즉 혈존 백가량이나 백이충의 영혼의 진짜 거처 진짜 몸은 백이충의 몸이 아니라 죽어 사라진 혈존의 몸이라는 것이 다. 너무 오랜 세월을 백이충으로 살았기에 백이충도 영혼의 본체를...백 이충의 몸을 본신으로 생각했지만 백이충의 몸은 본체가 아니었다. 영혼 게게는 백이충의 몸조차 분신 중에 가장 오래 깃들었던 몸에 불과한 것이 다. 처음으로 혈지존에게 일격을 먹고 강제로 이혼통제대법이 해제되었을 때 대법은 역류했다. 백이충의 잘못도 있었다. 마화타의 충고를 무시하고 천 마지존의 몸에 최후의 공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쉽게 깨어졌다. 천마지존의 몸이 파괴되는 충격에 백이충의 영혼이 튕겨 나갔고 더불어 자중에 재생된 몸에도 애써 부활의 술로 불러들였던 천마 지존의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혼통제대법에서 분신의 타격은 본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백이충 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준 영혼과 일체였던 진짜 본신이었으면 그렇게 됬 을 것이다. 혈지존 때문에 강제로 대법이 풀어졌어도 영혼은 아무 탈없 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진짜 본신에게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대법 의 역류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불행히도 백이충 자신조차도 백이충의 몸이 본신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했 다. 더욱 불행한 것은 거듭되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 천마지존의 몸에 깃 들어있던 영혼은 자신을 백이충이 아닌 백가량으로서 강하게 자각하고 있 었다. 두 다른 인격의 갈등 속에서 영혼은 백이충의 몸에 있을 때처럼 백 이충을 '나'로서 자각한 것이 아니라 백가량으로 인격을 드러내면서 백이 충을 '별개'의 존재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혼통제대법이 해체되었다. 대법이 강제로 해체되었으니 본신으로 돌아가야했다. 하지만 본신은 어 디 있었을까? 하물며 백이충을 '별개'로 인식한 백가량의 영혼은 본신이 어디라고 했을까? 백이충의 몸이 백가량의 본신으로 백가량의 영혼에게 인식되었을까? 이혼통제대법을 백가량의 영혼이 스스로 거두었다면 역류는 없었을 것이 다. 백가량의 영혼일지라도 백이충의 몸을 본신으로 생각하는 기억은 가 지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대법은 강제로 해체되었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영혼은 본능적으로 본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백가량의 영혼 이 본능적으로 귀소하려던 본체인 백가량의 몸은 존재하지 않았다. 본체 는 이미 이십년 전에 소멸되었다. 영혼이 익숙한 몸을 찾아 갈가리 찢어졌다. 하나의 영혼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수 있을까? 영혼이 물질이 아니고 사념의 집합체라면 가능하기 도 할 것이다. 영혼의 대부분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백이충의 몸으로 돌 아왔지만 조금 씩은 각기 가장 편했던 장소라고 생각했던 몸으로 기어들 어갔다. 그 조각은 너무나 작아 분신에 머물고 있던 진짜 영혼을 쫓아내 지도 못하고 잠시 기억을 뒤섞었으며 역시 아니라고 여기고는 다시 떠나 백이충의 몸으로 향했다. 백가량의 영혼은 백이충의 몸에 돌아왔다. 그리고 밖에 나가려다 수많은 다른 분신의 기억을 가진 영혼의 조각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백이충의 영 혼이었던 시절처럼 갈등했다. 단지 백가량의 기억을 가졌다 해서 자신을 백가량이라 한다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이 몸에 들어온 영혼들은 뭔가? 백이충으로서도 백가량으로서도 자아를 확신하지 못하는 영혼의 이러한 갈등은 묘하게도 혈존의 최후마공인 아수라독존마공과 일치했다. 진리도 없고 거짓도 없고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고 남을 구분하지 못하는 애매하 고 포괄적인 혼돈. 아수라독존마공의 최후구결인 혼돈진결. 그것이 백가 량도 백이충도 아닌 지금 '혼돈'으로서의 백이충이라는 또다른 인격을 만 들어내었다. (소매가 사라졌다면 첫째 혈지존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다.) 백이충은 청마산에 가까이 오자 금혜연의 실종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렇 게 생각했다. 무림칠미의 하나인 데다 금가장의 재력이 만만치 않고 또한 무림인이니 금혜연이 다른 자들의 노림을 받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허나 금혜연 의 무공이라면 일류고수도 감당할만 하고 백이충이 금혜연의 몸에 베풀 어 놓은 수호령이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금혜연의 몸을 빼내게 만들 것 이다. 금혜연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다시 말해 수호령을 제거할 능 력을 지닌 인물이 움직였다는 말,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 금혜연 에게 해를 끼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혈존과의 관계외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이미 서문 대장군부 공격당했다는 것은 혈지존이 백이충 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 금혜연이 백이충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 져있는만큼 혈존이 백이충이라는 사실을 알고 금혜연을 납치할 만한 자 는 천마지존의 몸을 손에 넣은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번뇌천이 알려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악도가 소매에게 접 근하는 것이 아니라 본좌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소매를 납치하여 본좌 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나?) 청마산에서 금혜연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백이충이 금혜연 에 베풀은 여러 가지 사술대법의 냄새, 그중 하나인 수호령의 냄새만으로 도 백이충이 느끼려고만 하면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가자. 아무래도 첫째 놈의 짓이로구나. 흥. 녀석이 본좌를 너무 가볍게 보고있군." 백이충은 단지 뒤에 쌍노만을 대동하고 청마산을 올랐다. 혈무영이나 다 른 분신을 부리지 않은 것은 혈지존이 청마산에 있다면 분신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단 한번이지만 혈영마공을 발휘할수 있었던 천마지존은 분신 중에 최강이었지. 그런 분신을 일격에 허물어트린 첫째 놈이니 다른 분신 을 이용해봤자..." 그렇다해도 자신이 있었다. 일단 백이충은 지금 쓰고있는 몸이 자신의 몸 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놀랍게 건강해 져있었다. 혈존시절의 안배와 마 화타는 이갑자 내공과 팔성 수준의 쌍영마공을 몸에 심어놨지만 백이충 의 몸은 전력을 다해도 채 지닌바 부공의 일성 이상의 힘과 이십년 내공 을 발하지 못한다. 그나마 발휘되는 위력은 백분지 일이며 진기를 발출하 는 즉시 망가질 것이 백이충의 몸이었다. 이제는 바뀌었다. 지금 즉시 혈영마공 팔성을 제위력 모조리 내면서 발휘 할 정도로 몸이 튼튼해졌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십년 넘게 살아온 몸으 로 제대로된 무공하나 발휘하지 못해서 이혼통제대법과 분신마저 생각해 내었던 백이충으로서는 자신의 몸으로 무공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사실이 나무나 기뻤다. 동시에 자신이 지닌 법보와 혈존 시절보다 더욱 증진된 사술의 능력을 무공과 함께 생각하니 혈지존조차도 우습게 보일 지경이었 다. "허. 이건 어서 오라고 아주 본좌를 초대하는 꼴이 아닌가?" 기막히다는 듯 말하는 백이충을 보고 쌍노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보기 에는 아무 것도 없는 숲 그대로였던 것이다. 술법이나 진법으로 가렸다 면 혈무영들을 보냈을 때 놓쳤을 리가 없다. 하기야 쌍노조차 새삼스럽 게 눈을 부릅떴음에도 지금 쉽게 찾지 못하는 것이니 혈무영도 찾지 못하 는 것이 당연하였으리라. 쌍노는 백이충의 말을 듣고 안력을 돋구었고 그 제야 뭔가를 느꼈다. "모산파 비전의 술법. 부시무영술(不視無影術)? 하지만 저 술법은 모산 파가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실전되었을 텐데?" "악도 녀석은 모든 모산비전을 알고있지. 게다가 부시무영술로 가리고 있 는 것은 차시혈존대진(借始血尊大陣). 바로 본좌가 혈지존에게 전수한 진 법이다." "아, 모든 것을 감추어 차단시켜 완벽히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차 시혈존대진입니까?" "그래. 게다가 이 진법에 들어간 사람들은 진법을 시전한 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진법을 시전한 자가 진을 풀어주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면 절 대 진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영혼조차 빠져나가지 못하지. 즉 진을 만 든 자가 살아있어 안에 있는 동안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가두는 진이 지." 백이충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진법을 혈지존이 펼친 이유는 간단 했다. 영혼조차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는 여기에서 반드시 죽는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초대를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 가? 게다가 금혜연은 반드시 저 안에 있을 터였다. "크아아악." 북두성군(北斗星君),무곡성군(武曲星君), 문창성군(文昌星君)은 하늘위 에 떠있는 서른 여섯 개의 별 즉 삼십육천강성(三十六天剛星)의 세 별이 다. 모든 별을 다스리는 북쪽 하늘의 우두머리 별, 무와 문을 번성케 하 는 별. 이들은 또한 하늘을 지키는 천장(天將)이기도 하다. 지금 자색 장삼을 입은 무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곳에는 세명의 천장이 늠름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백이충과 쌍노가 법보를 사용하여 성군강림부를 이용하여 세명의 천장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킨 것 이다. 천장을 강림시킬 때마다 생명이나 업보 등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고 힘을 빌리기는 하지만 그 위력만은 확실하였다.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할 정도 의 힘을 발휘할수 있는 것이다. "비켜라. 인간 따위가 감히 가로막느냐?" 북두성군이 호통을 쳤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커다란 위압감이 그 사이 를 휘감았다. 갑자기 나타나 눈깜짝할 사이에 수십의 동료들을 죽인 세명 의 천장에게 놀라 뒤로 물러선 자의 무사들을 내리누르는 엄청난 기세였 다. 북두성군이 힐긋보니 중앙 장원을 호위하고 있는 자의무사들은 이곳에 있 는 자가 다일 것 같았다. 지금은 기세에 눌려 투지를 잃었지만 옥룡왕부 의 무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음을 그는 잘알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북두성 군은 슬쩍 소매를 휘저었고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살며시 나오 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셋, 둘, 하나!" 북두성군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열을 거꾸로 다 세 자 자의무사들이 일제히 픽픽 쓰러졌다. 수혈을 짚은 것처럼 그들 모두 가 순식간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을 타고 세명의 신장은 담장을 넘 어 훨훨 장원안으로 들어갔다. "소매. 거기 있구나." 북두성군이 소리쳤다. 평범한 장원의 안에는 커다란 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금혜연이 묶여 있었다. 주위에는 일곱명의 무사들이 기둥을 둘러싸고 감시하고 있었다. 한 눈에 기둥에 있는 금혜연이 가짜가 아닌 자신의 연인임을 북두성군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명의 신장이 기둥을 향해 다가서자 일곱의 무사들이 가로막았다. 천장 들의 늠름한 기세에 일곱의 인간들은 몸을 움추렸다. 허나 곧 기합을 내 지르고는 몸을 부풀렸다. 천장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 일곱 명의 무사들 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검은 털이 자라기 시작하며 눈에서 흉광이, 손 에서 길죽한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덩치가 인간의 세 배 정도는 되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되어 천장들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나찰귀 따위가 성군의 수좌를 공격한단 말인가?" 세 성군의 노기를 실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북두성군의 검과 문창무곡의 창이 번뜩였다. 밝은 섬광이 한동안 환하게 터져나오는 순간 하늘에서 후 르륵 피비가 내리더니 일곱의 나찰귀는 수천갈래의 혈육 조각이 되어 사 방으로 분산해 버렸다.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 북두성군이 기둥에 묶인 금혜연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찰나 자욱한 피조각으로 변해 떨어진 나찰귀의 조각들이 땅에 피를 묻혔다. 선혈은 땅속에 스며들지 않고 바닥을 흘러 일종의 기 이한 그림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진형을 표시하는 것임을 알 정도가 되었을 때는 세 성군의 위치가 진형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런. 모산파 비전의 악귀금쇄진(惡鬼禁鎖陣)이다." 북두성군의 놀란 음성 속에서 피로 만들어진 원형의 금진(禁陣)안이 급격 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암흑이 진 안에서 뻗어나왔고 세 성군은 암흑 의 원통에 갇혀버렸다. 동시에 뿌연 영혼의 사슬이 어디에선가 뻗어나와 뱀처럼 꿈틀거리며 신장을 향해 다가왔다. 세 성군이 당황하여 피하려했 지만 어둠의 힘이 성군의 신력을 가로막았다. 눈깜짝 할사이에 세 성군 의 몸이 뿌연 영혼의 사슬에 묶여 버렸다. "내가 파사진결(破邪眞訣)을 외어 악귀의 영혼으로 만든 사슬을 끊어버리 리라." 북두성군이 당황하지않고 소리칠 적에 금혜연이 있는 기둥 뒤에서 한 사 람이 나와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모산비전. 칠성검. 하늘에 있는 별의 힘을 빌어 신도 귀도 끊어버린다."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뜻밖에도 얼마 전까지 백이충의 분신이 던 천마지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문을 외워 살짝 검을 쓰다듬 고 암흑의 감옥에 갇힌 세 성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놀란 세 성군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천마지존의 모습을 한 자는 바로 악도였다. 세 성군이 쓰러지자 계약을 완료한 악귀금쇄진은 힘을 다하고 스러졌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악도가 바라보니 어둠이 밝아오며 목과 분리된 세 개의 몸이 천천히 쓰러지고 있 었다. 한줄기 성스런 광채가 세 개의 몸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구쳤다. 그 힘이 다해 성군의 영이 하늘로 되돌아간 것이다. 광채가 스러지자 나타난 몸 은 뜻밖에도 장원의 밖을 호위하던 자의 무사들의 복장이었다. 세 성군 이 강림하여 금혜연을 구하려던 자는 뜻밖에 백이충이 아닌 자의 무사들 이었던 것이다. "혈존. 나타났으면 모습을 보여라. 설마 다시 태어나 환생한 연인마저 죽 이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악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의 검은 정신을 잃은 금혜연의 바로 목 밑 에 있었다. "빌어먹을 녀석. 본좌랑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리도 못살게 구는 거냐?" 장원의 담장 위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둔법의 부적으로 몸을 감추 고 시체에 천장을 강림시켜 조정하던 백이충과 쌍노의 모습이었다. "흐흐. 원한이라...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살아보겠다고 벌레처럼 네 눈 을 피해 도망다녔던 것도 원한이라면 원한일까?" "쳇. 네 녀석 때문에 산산이 죽었다. 여지껏 살아있는 것도 하늘에 감사 해야 할 판이거늘 감히 엉뚱한 마음을 먹어? 게다가 이제보니 본좌의 분 신 하나를 떡하니 얻어쓰고 있구만." 순간 악도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절대적인 확신에 순간적으로 의 심이 들었다. 저자가 진짜 혈존이라면 저토록 담담하게 악산산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음성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짜 임 을 악도는 눈치챘다. 저 자가 혈존이 아니었단 말인가? 혹은 진짜라도 악 산산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이란 말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악산산을 닮 은 여자 금혜연을 통해 혈존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겠다는 확신이 조금 흔 들렸다. 악도와 백이충의 설전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장원의 곳곳에 몸을 숨 기고 지켜보고 있는 자들. 바로 천하를 움직이는 배후의 그림자들이었 다. 그들이 가장 불안해 하는 자가 바로 혈존이고 그 혈존을 처단하기 위 해 이들은 모였다. 하지만 악도와 노닥거리는 자가 혈존인지 아닌지 판단 하기는 참으로 애매했다. 스스로 혈존을 자처하고 있다고 해도, 혈지존이 그를 혈존이라 지칭했다 해도 그가 확실히 혈존이란 근거는 없었다. 과거처럼 혈존이라고 정해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혈마전혼대법을 사용하 여 누구도 모르는 사람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 자가 혈존이었다. 그가 혈 존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이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사형. 악도와 상대하는 자가 혈존사부가 확실할까요?) (확신할 수 없다. 혈지존의 계략인지도 모르지. 먼저 움직이는 자가 큰 손해를 본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 대련주는 어떠시 오? 그가 혈존 사부같소?) (이 진법은 사부도 우리도 알지 않느냐? 어차피 혈지존이 진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저자는 이곳에서 달아나지 못한다. 그의 정체를 확인할 시간 은 충분히 있으니 천천히 지켜보는 것이 낫다.) 이렇게 속삭이는 자도 있는가하면 (아미타불. 저 자가 혈존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구려. 어떠시오?) (나도 확신을 못하겠소. 혈지존이 혈존의 핑계를 대고 혹여라도 마련과 우리를 충돌시키려는 음모일 수 있으니 절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혈존이라면 반드시 죽여햐 할 것이오.) (그나저나 금 여시주를 구해야 하지 않겠소? 악도가 혈존의 정체를 밝히 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여 방관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몹시 꺼려지는 구려.) 이렇게 전음을 주고받으며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법존. 저 자가 혈수라입니까?) (글세? 사술의 위력으로 보아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군. 쌍노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 설사 배교쌍노라고 해도 혈수라가 살아있다 는 증거는 되지 않으니...) (그럼 지금 우리는 어이해야 합니까?) (일단 기다리자. 혈지존의 함정인지도 모르는 현재 적지인 중원에 들어 온 우리가 먼저 나서 좋은 것 하나 없다. 일단 혈존이라는 증거를 혈지존 이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한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자들이 하나같이 숨어 예리하게 혈존을 자처하는 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느낀 것일까? 백이충이 이죽거렸다. "악도. 왠만하면 나도 본좌도 너와 놀아주고 싶다만... 아무래도 구경거 리가 되고 싶지가 않구나." 백이충이 시선을 장원 밖으로 돌렸다.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태도에 악 도의 냉정한 태도가 금방 무너졌다. "이 여자는 네 약혼녀이다. 그리고 악산산의 환생이라 해도 무방할 듯 같 은 여인이다. 그런데도 무시하겠다는 거냐? 악산산을 잊어버렸다는 거 냐?" 악산산. 악도로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여자였다. 인생을 혈존 백가량에 게 걸었거늘 오직 이 여자 하나 덕에 혈존의 미움을 샀고 마침내 혈존이 악도를 죽일 마음까지 먹게 만들었다. "닥쳐라. 산산의 죽음에 일조한 놈이 말할 자격이 있느냐? 네놈이... 네 놈이 그녀를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모함? 어줍지 않은 변명은 집어치워라. 그녀를 해친 것이 누구냐? 그녀 를 쫓아낸 것이 누구냐?" 전일비에게나 백가량에게나 죽어도 회상하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백 가량에게는 생각만해도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 다행히 지금 백이충의 몸 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인격이기에 그나마 견딜수 있는 괴로운 기 억이 떠올라 버렸다. - 하하. 일비. 일년동안 그녀에게 애교를 떤 덕에 드디어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어. - -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배교 소교주의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좀 더 그곳에 신경을 쓰심이...- - 하하. 일비. 그녀가 드디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 얼마나 기쁜 지 아는가? - - 이대로라면 배교의 후계자 지위를 빼앗깁니다. 좀더 배교의 소공녀에 게 신경을 쓰셔야... - - 하하. 일비. 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네. 우리 아이. 하하. 이거 힘좀 써야 겠어. - - 주군. 배교의 소공녀가 그녀에 대한 눈치를 챈 듯 싶습니다. 그녀를 숨 기는 것이... - - 일비. 언제까지 그럴건가? 권력. 권력. 소공녀. 소공녀. 그까짓게 뭐 야? 내겐 산산만 있으면 돼. - - 주군. 이대로 사시려 하십니까? 그녀 때문에 야망도 미래도 없이 이대 로 꿈을 접으시렵니까? - - 일비. 권력을 잡는 것만이 꿈은 아니야. 이대로 사는 것도 행복일 수 가 있어. - 맹렬히 솟구치는 기억. 한 때 음약으로 미움을 샀던 악산산. 그런 악산산 이 백가량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백가량도 전일비에게 웃어줄 수 있게 되 었다. 그 때의 백가량은비겁한 방법으로라도 오히려 인연을 맺게 해준 것 을 전일비에게 감사하게 생각했고 진정한 친구로 대했다. - 주군. 그녀를 버리십시오. 지금 주군의 야망에 필요한 것은 배교 소공녀의힘입니다.- - 그만. 나도 괴롭다. 산산이 무림을 떠나 단 둘이 은거하자고 조르고 있 는 판에...- - 소공녀께서 그녀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주군께서 그녀와 헤어지지 않으 면 그녀와 주군을 둘다 배교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고... 위험합니다. 그 녀를 버리지 못하면 소공녀에게 변명이라도 해야 합니다. - - ...... - - 주군. - - ......- - 주군. - - ....... - - 주군. 그녀의 집에 능소위가 드나드는 것을 아십니까? - - 뭐라고? 일비. 다시 말해보게. 그녀가 능소위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단 말인가? - - 능소위와 악산산은 약혼관계입니다. 모산파가 파멸한 이후 그들은 만인 의 인정받는 연인으로..- - 아니야. 산산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결코 능소위에게 돌아갈 리 가 없어. 그녀가 어떻게?- - 주군. 그녀가 다시 능소위를 만났습니다. 어제 밤에도 집에서 밤늦게 능소위가 나가는 것을...- - 크으윽. 아직도 능소위를 잊지 못했단 말인가? 다시는 그 녀석을 만나 지 말라고 그녀에게 손까지 대었건만 그래도 그 녀석을 만났단 말인가? - 백가량은 반 미쳐버렸었다. 질투에 미쳐버렸다. 그리고 악산산을 주먹으 로 때리고 또 때리고... 폭행하고 그녀를 욕하고 이별을 선언하고 나가버 렸다. 애타게 그녀가 부르며 쫓아오는 것을 무시했다. "크으으윽. 네 놈이 감히 그 일을 입에 담다니..." 백이충의 두 눈이 시뻘개졌다. 새로운 백이충이라는 인격도 완전히 과거 의 기억에서 탈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같은 영혼인 덕에 백이충의 감 정도 백가량의 감정도 그 일부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백가량 의 괴로운 과거가 드러나자 '혼돈'으로서의 백이충도 괴로워하는 것이다. - 주군. 그녀가 미쳤습니다. - - .... 하, 뭐? 일비. 뭐라는 거냐? 지금 농담하는 거냐? - - 주군을 쫓아 나섰다가... 밤거리를 헤매며 주군을 찾다가 건달들에게 걸려... - - 거... 거짓말. 그래도 모산파을 일으키겠다던 당찬 여자야. 한낱 건달들에게...- -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일년 전부터는 아예 무공을 버려 둔 상태 였었고... 주군. 저는 단지 주군의 야망이 되살아 날 정도로 그녀와 조금 만 거리를 두기를 바랐는데... 설마 그녀가 이토록 비참하게... 될 줄 은...- - 임신? 그녀가 내 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아기라고? 크흐흐. 비참이 라고? 그녀가 어떻게 죽었기에... 크윽. 말하지 마라. 크흐흐. 이 근처 건달 녀석에게 여자가 걸려들었을 때의 일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 으니...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겠다. 크하하하하.- - 주군. - - 크하하하하. 잘된 일이야. 잘된 일. 잘 죽었어. 그깢 계집. 이제야 제 대로 된 야망을 펼칠 수 있겠군. 배교를 향한 대권에 도전해 보자구. 하 하하. 잘된 일이야. 잘된 일. 옛날 애인을 못잊어 만나고 다니는 계집 따 위는... 크하하하. 학학...흑흑. 크흑흑흑. 하하. 흑흑..흐흐. 흑흑흑.- - ...... - 그녀를 폭행하고 윤간한 건달들을 잡아 죽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최후를 선사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알았다. 산산을 죽이라고 사주한 것이 배교의 소공녀 임을. 배교의 교주 를 대대로 지내는 적씨 일족임을. 아이를 잃고 미친 그녀는 내손으로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하. 그랬지. 그 후에 능소위 그놈을 만났지. 천외구기의 하나였던 놈. 당시 나로서는 감당못할 힘을 가졌던 녀석. 그녀석이 말했지. 산산 은 나만을 사랑했다고. 모산파의 부흥조차 포기하고 나를 쫓아 평번하게 살겠다며... 모산파의 부흥을 능소위 그놈과 삼장로에게 부탁하기 위해 그를 만났다고. 그렇게 나를 사랑했던 그녀를 죽게 한 나를 용서할 수 없 다고 그놈이 말했지." "그래. 그렇다. 혈존. 너는 악산산을 죽게한 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나 전일비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네 놈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말일뿐. 결국 네놈은 네놈의 욕망을 위해 움직였고 다만 그 증오를 모조리 나에게 돌려 놓았지. 네 놈 을 위해 내 전인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나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찾지 못했던 남자와 인생 자체가 파멸당한 남자. 둘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 다. 그리고 악도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금혜연의 목 밑을 파고들었다. "네놈. 순순히 내려와라.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여버리겠다. 악 산산의 환생인 듯한 여자. 그러기에 네 약혼녀로 삼은 거겠지? 악산산을 두 번 죽이고 싶지 않으면 말을 들어라." 악도의 행동에 갑자기 백이충은 피식 웃었다. 방금 전의 격렬했던 감정 표현이 마치 연극인 것처럼. "후후. 그러던지. 네 말대로라면 그녀는 단지 산산에 대한 환상. 그 정도 의 가치겠지." "그 정도의 가치라면 어째서 이곳까지 왔지? 그녀가 소중한 존재였기에 온 것이 아니었나?" "첫째녀석의 의도가 궁금해서 왔을 수도 있지. 하여간 이제 돌아가겠다." 담장 위에서 백이충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금혜연을 상관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태도. 주변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혈존이라는 증거를 혈지존은 아직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천하의 지존들 이 모조리 모인 이곳에서 남에게 이득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혈존의 증 거 없이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착각이었나? 악산산. 그녀의 이야기에도 표정이 잠시 변하다 말았다. 마 음의 상처가 치료되었단 말인가? 금혜연도 하등 그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 지 못한단 말인가? 혈존의 마음을 내 자신보다 더 잘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오판한 거란 말인가?) 벌써 담장에서 백이충과 쌍노의 모습이 사라졌다. 천하의 혈존이고 배교 쌍노이다. 천하지존들이 움직이지 않는한 단순한 수하들로만 그들을 막 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혈지존이 나선다면 혈존에게 당해 진법 이 흐트러짐으로서 애써 유인해 놓은 덫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 (모험이다. 그가 그냥 놔둔다면 백도는 철저히 노부를 증오하게 될 것이 다. 혈지존의 일에도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만있지 못한 다면... 그러면 그의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다.) 천하지존들의 시선이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혈지존의 수하 들이 사라진 혈존을 쫓고 있는 기척도. 예상은 완벽히 깨졌다. 악산산과 의 사랑을 아는 악도가 생각하기에 혈존은 절대 금혜연을 놔두고 사라질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존재가 밖으로 탈출하려 함을 말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악도가 입술을 깨물며 검을 금혜연의 목으로 밀어 넣었다. 악도는 믿었 다. 혈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신의 신념을. 담장 너머 사라진 혈 존이 지금 그의 검을 막으리라고. 어떻게 혈존이 막을 줄은 모른다. 그러 나 그는 할 것이다. 그는 악도가 가장 잘 아는 혈존은 금혜연을 절대 버 리지 못하므로. 펑! 악도의 검이 막 금혜연의 목을 파고들려는 순간 악도의 등에 폭음이 일었 다. 천마지존의 몸을 지닌 악도가 땅에 뒹굴었다. 살아있는 자라면 도저 히 살아날 수 없는 강대한 일격. 쓰러진 악도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그 곳에는 목이 잘린체 다시 일어서는 세 남자가 있었다. "돌아와라." 가운데 있는 자의 주문이 끝나자 즉시 땅에 피를 뿌리며 뒹굴던 목 세 개 가 하늘을 날아왔다. 자의를 입어 혈지존의 무사인줄 알았던 목없는 세 시체는 머리를 받아 자신의 목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혈존 과 쌍노였다. "이런 불사옥대의 마디가 세 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군." 백이충이 자색 장포를 벗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 속에 입은 서생차림 의 허리에는 금색 옥대가 매어져 있었는데 옥대의 마디가 몇 개를 남겨놓 고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그나마 앞쪽의 세 개는 방 금전에 끊어진 것 같았다. "불사옥대? 배교에서 실전되었다는 보물을 되찾았나? 그래서 목대신 옥대 의 마디가 끊어진 거로군. 그럼 나와 말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그들 이야말로 너의 사술로 움직이는 꼭두가시였나?" "아. 그래. 하지만 너도 정말 질기군. 주위에 떠도는 기로 보아 꺼려지 는 놈들이 한둘 온 것 같지가 않아. 잠시 내 뜻대로 움직이는 몇 놈을 적 당한 시기에 죽여 모두 속이고 조용히 떠나려 했는데 감히 소매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에..." 백이충이 기둥에 묶여있는 금혜연의 포박을 풀었다. 백이충이 금혜연을 안고 부축할 때 악도가 소리치며 일어났다. "으하하하. 너는 졌다. 혈존." 악도의 광소. 그것은 자신의 예상대로 혈존이 금혜연을 구하러 왔기 때문 이었다. 이번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백이충이 금혜연을 사랑 하느냐, 아니냐였다. 만약 금혜연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충을 혈 존이라고 다른 자들에게 믿게할 증거가 없었다. 혈지존이야 천마지존의 기억을 직접 읽어 믿는다해도 다른 자들이 어찌 그토록 쉽게 믿어주겠는 가? 하지만 혈존이 금혜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면... 푸아아악. 붉은 선혈이 아름답게 뿌려졌다. 너무도 뚜렷한 혈향. 그것은 금혜연의 가슴에서부터 뿜어져나와 백이충의 앞가슴을 흠뻑 적셨다. 금혜연의 심장 이 있는 가슴부위가 갑작스레 터져 나간 것이다. "소... 소매?" "이것이 나의 복수다. 혈존. 하하하. 그녀의 심장에 언제든지 내 명에 반 응하는 심고를 심어놨지. 악산산에 이어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두 번이 나 죽는 것을 본 기분이 어떠냐? " 미친 듯한 악도 전일비의 웃음. 터져버린 금혜연의 심장. "소매?" 소매가 죽었다? 소매는 죽지 않았다? "소매?" 내 가슴이 아프다? 내 가슴이 아프지 않다? "소매?" 이건 너무도 뚜렷한 현실인가? 이건 너무나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소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지 않다? "소매?" 소매가 죽어 슬프다? 하나도 슬프지 않다? 그런데 슬픈게 뭘까?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하늘과 땅이 뒤엎어졌다. 인간으로서 배우고 알 았던 이치가 무너졌다. 일고지낸 상식이 뒤엎어졌다. 혈존 백가량으로서 알고지냈던 모든 것이 거짓이 되었다. 백이충이 살아온 모든 것이 환상 이 되었다. 감정은 돌이 되고 진리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무나 깊은 슬픔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깊은 아픔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깊은 감정은 감정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뒤바 뀌었다. 모든 것이 가치가 없었다. 죽음은 뭐고 삶은 뭣인가? 백이충이 면 어떻고 백가량이면 어떤가? 아니면 혼돈이면 어떤가? 혼돈? 백이충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혼돈. 십팔층 지 옥에서 올라온 어둠보다 더욱 짙은 혼돈의 끝. 어둠이 빛이 되고 빛이 어 둠이 된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된다. 이세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세상도 나도 모 두 헛것이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아수라독존마공(阿修羅獨尊魔功) 최후의 미완성 구결 혼돈진결(混沌眞訣) 그순간 빛이 터져나왔다. 아니 어둠이 터져나왔다. 아니, 빛도 어둠도 아 닌 혼돈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일어선 것은 죽음의 사신, 아수라였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죽음 관련자료:없음 [1961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8 23:35 조회:78 <죽음 > 한줄기 장소가 터져나왔다. 그 장소가 터져나온 곳에 빛도 암흑도 아닌 뿌연 혼돈의 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왔다. 장소는 저 멀리 청마산 구석구석 까지 퍼져 울렸다. "우우우우우우!" 단장의 슬픔이 느껴지는 흐느낌, 쾌락의 정점을 넘어서는 광소, 터져나 올 곳을 못찾아 헤메는 분노의 포효, 생의 환희를 나타내는 흥겨움, 죽음 을 넘어서는 공포, 이루지 못할 것을 바라보는 애닳음. 모든 것을 만족하 고 나오는 트림, 그모든 감정이 장소 소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소리에는 힘이 있다. 정도 마도 아닌 힘.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드는 엄청난 힘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렵고 기쁘고 슬프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힘. 혼돈의 힘. "혈존이다." 혈지존의 초청을 받았던 자들이 일제히 같은 음절을 내뱉었다. 더 이상 의 증거는 필요없었다. 본능이 콕 찝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저 혼돈스 런 울음소리를 내는 자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그리고 바로 고금제일마 혈존이라고. 누가 부정하겠는가? 저 아수라의 소리를 듣고 고 금제일마와 연결시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거늘. "혈존이다." 장소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공포를 느꼈다. 접해보지 않은 미 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끝없는 미로를 걷는 것같은 피곤함, 결코 이길 수 없는 강자를 만났을 때의 좌절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자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자에 대한 약자의 떨림. 장 소 소리를 듣는 자는 모두 그것을 느꼈다. "혈존이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도저히 넘을 수 없 는 최후의 장벽을 만났을 때의 막막함, 인생을 걸고 푼 문제가 마지막에 가서야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무감, 보물의 산을 찾아왔더니 이미 주인이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감. 혈존의 울부짖음 을 듣는 자들은 모두 그런 감정을 맛보았다. "우우우우우." 혼돈 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혼돈의 기류를 뿌리고 있는 자에 게 가장 가까이 있던 자들이 훌훌 날아 그 덩어리를 쫓아갔다. 백도의 고 수들이 살광을 뿌리며 백이충을 향해 날아올랐다. "설마 했더니 혈지존 백시주의 말이 사실이었도다." "천하의 흉적 혈존을 오늘에야 없애 버리겠다." 혜경성승과 천무이성이 백이충을 향해 살광을 뿌리며 나타났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혈천마련보다 백배 더 위험한 것이 바로 혈존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뿌연 기류와 같은 높이의 허공에 위치했다. "아미타불. 오랜만입니다. 백시주." "천하의 악종놈. 기어이 되살아났구나." 천무이성. 혜경성승과 무적장왕의 뒤에 천무호정단의 이십 팔명의 제자들 을 이끌고 혈존의 뒤를 쫓아 하늘로 치솟았다. 뿌연 기류의 백이충을 포 위한 백도의 고수들 중에서 성격이 급한 무적장왕이 먼저 손을 썼다. 백 도 절학중 가장 강맹하다는 천하제일의 장공인 건곤무적장이 푸른 기류 를 동반하고 뿌연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뿌연 덩어리에서 손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희고 고운 손. 미려한 곡선 에 부드러움과 강건함을 동시에 지닌 조각한 듯한 손. 하얗고 고운 소수 (素手)가 건곤무적장을 맞이해 나갔다. 물고기가 급류를 파고들 듯 뿌연 기류속에 나타난 소수는 거침없이 무적장왕의 푸른빛 기류 장강(掌剛)을 꿰뚫었다. 소수가 잠깐 무적건곤장을 뚫고 거짓말처럼 빠르게 움직여 무적장와의 이 마 사이 미간을 짚는 순간 빠직! 둔탁하게 두개골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금강불괴에 이른 무적장왕의 이 마가 함몰되어갔다. 소수의 손가락이 금강석보다 단단한 무적장왕의 미간 을 파고들어갔다. "크아아악." 무적장왕 모용도기의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천무삼성의 일인으로 백도 백년이 넘는 세월을 이끌어왔던 거인 중의 거인. 건곤무적류의 기인 은 반항조차 못하고 이토록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무적장왕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소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침없이 나 아갔다. 얼굴이 헬쓱하게 질려있는 혜경성승을 향해서. 혜경성승은 마치 얼음 속에 있는 물고기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세수 심공의 힘으로 성승은 뿌연 기류속에 숨겨져있는 무색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눈에 시선이 고정된 순간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공포에 질 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공 이전에 천적을 만난 생명체의 당 연한 반응이었으며 그런 성승의 이마를 향해 유혹하듯 소수는 하늘하늘 다가왔다. "악적. 모용 사부를 해치다니." "혈존이라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리라." 혜경성승에게 소수가 다가오기 전에 천무이성을 따라 올라온 스믈 여덟명 의 천무호정단이 일제히 뿌연 기류를 향해 공격했다. 이들 이십 팔인이야 말로 천무삼성이 힘을 모아 승룡곡에서 길렀던 최강의 힘. 백도에서조차 비밀리에 길러진 힘으로 십대극품절학을 최소한 팔성 이상 하나씩 익힌 자들을 모은 세력. 혈존이 살아있을 때를 대비하여 천무삼성이 비밀리에 키운 강자들이었다. 이십 팔개의 강기류가 치솟아 올랐다. 검강, 장강, 수강등의 다양한 강 기. 그것은 하늘을 빈틈없이 메우며 사방에서 뿌연 기류, 혈존을 공격해 왔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무공 을 익힌 자라면 어찌 강기의 다발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싶은 막강한 공격이었다. 콰르르릉. 천둥이 몰아치는 소리가 둘렸다. 수십 발의 우레가 한곳에 떨어지는 듯 한 소리. 나름대로 천하를 주름잡을 만한 이십팔인의 강기가 일인을 향 해 쏟아지면서 나온 소리였다. 거센 폭포줄기가 강에 한꺼번에 떨어지듯 수십 줄기의 강기가 혼탁한 독존강기를 향해 쏟아지며 부딪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백이충의 몸을 감싼 뿌연 독존강기가 회오리쳤다. 콰 르릉. 콰르릉. 끔직한 파열의소리. 하지만 이십팔인의 강기는 회오리치 는 독존강기에 휘말려 사방 팔방으로 뿌리쳐졌다. 튕겨져 나갔다. 하지 만 강기다발이 튕겨져 나갔다고 경악할 시간도 없었다. "피해라." 혜경성승이 악을 쓰는 소리가 천둥 몰아치는 소리에 섞여 간신히 퍼졌 다. 혜경성승의 고함과 더불어, 이십팔인의 강기다발이 튕겨져나가는 동 시에 회오리치는 백이충의 독존강기가 스믈스믈 퍼져나갔다. 그것은 느린 듯 하지만 피할틈 없이 순식간에 백이충을 포위한 백도고수 들을 향해 다가왔다. 마치 피할수 없는 악몽처럼. 그것은 이십 팔개의 기 류. 강기종류 같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십 팔명에 동시에 강기다발을 뿌려댈 수 있을까? 결론은 절대 아니다였다. 혜경성승도 스스로 무의 극을 향해 다가가고 있 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강기는 내공을 소모하는 최상승의 형태. 한번 에 스므개 이상의 손 그림자를 나타내는 장법만 해도 정신을 바닥낼 정도 로 변화의 극을 나타내는 무공이라 칭송되거늘 거기에 더해 한꺼번에 이 십개 이상의 강기를 방출하는 수법이라... 아무리 내공이 깊고 소모된 내공을 금방 보충해주는 심법이 있다해도 한 사람이 한꺼번에 스므발 이상의 강기를 뿌려대는 것은 절대 불가능.... 이라 생각했거늘 백이충은 혜경성승의 상식을 뒤엎었다. "크아아악." 어쨋거나 이들 이십팔인은 천무삼성이 혈존을 상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 배한 인물. 제각기 약속한 진형의 위치에 따라 자리를 바꾸며 침착하게 혈존의 독존강기에 대응했다. 자신의 무학에 자신을 가진 자는 앞줄에 서 서 백이충의 강기에 맞대응하고 신법에 자신있는 자는 허공에서 몇 번 자 세를 바꿔 뒤로 빠지며 앞의 동료에게 내공을 전수해주었다. 천무삼성 삼 인 동시의 합격이라도 막을 적절한 대응이었으나... 커다란 비명이 울렸 다. 뒤로 몸을 빼서 피한 열 네명을 제외하고 백이충을 포위한 앞쪽의 열 네 명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음성. 어둡다고도 밝다고도 할 수 없는 묘한 색깔의 혼탁한 백이충의 강기는 그들의 방어를 거침없이 뚫 고 지나갔다. 아니, 아예 상관조차 안했다고 할까? 스며드는 물을 종이로 막았으나 종이를 적시며 안으로 뚫고 흘러오는 물 처럼 독존강기는 열 네명을 덮쳤다. 뒤로 빠진 열 네명을 향했던 독존강 기 역시 놓친 자들 대신 가까운 곳에 있는 열 네명 쪽으로 방향을 틀었 다. 그리고 부시독(腐屍毒)에 담긴 시체처럼 열 네명의 고수들의 몸이 썩 어들어갔다.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시커멓게 뼈가 부식되며 스러지고... 열 네명의 고수는 살아있다는 증거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의 몸 을 감싸고 녹여내리는 독존강기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과거 독문의 독 성 구양봉의 절대지독도 이처럼 지독하지는 않았다. 백이충에서 발출된 뿌연 강기는 기어이 열 네명의 고수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야 그 형태 가 스러졌다. "이럴 수가!" 혜경성승의 입에서 두려움과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존이 강 한줄을 알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진정 지옥에서 아수라가 뛰쳐나 왔단 말인가? 과거에는 삼인이 합격했지만 이십년간 많은 무학의 진경을 이룬 천무삼성 이었다. 나름대로 그들이 익힌 신공의 벽을 깨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고 생각했다. 죽은 현무도선이 없다고 해도 천무이성이 합공을 하기는커 녕 은근히 혼자서 혈존을 상대할 수 있겠다고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이십팔인의 제자들을 동행했다. 다섯이 힘을 합하면 천 무삼성의 한 명이 나선다고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실력을 가진 제자들 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덤벼들기 무섭게 백도의 정예 반이 나가 떨어 지다니. 단지 호흡한번 내쉴 시간에... 혜경성승과 살아남은 열 네명의 천무호정단 고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두려 움에 질려 허공에서 뒤로 물러서듯 포위망을 후퇴시켰다. 세상에 허공을 자유자재로 노니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들이 대거뭉쳐 두려움에 떨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꿈틀대는 뿌연 기류의 강기가 혜경성승과 천무호정단 단원에게는 아수라 의 얼굴이 미소짓는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뿌연 강기가 순식간에 혜경 성승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공간을 단축시킨 것같은 이동이었다. 성승 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뿌연 강기류는 성승의 바로 코앞에 있 었다. 지금처럼 혜경성승이 자신의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뿌연 강기 가 솟구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데도 속수무책이라니. 하지만 본능적으 로 알았다. 자신의 어떤 무공으로도 저 정체불명의 색깔의 독존강기를 막 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기는 싫었다. 그 는 조용히 뿌연 기류 속의 백이충의 두눈을 바라보며 삶을 정리했다. 그 동안 끝없는 고행의 삶이었다. 이렇게라도 해탈을 하게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아수라를 사바 세계에 남겨놓고 가야하니 세상에 있 는 중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눈 한번 깜짝일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혜경성승에게는 억겁의 세월 같 았다. 다가오던 독존강기의 가는 기류가 성승의 미간 사이에서 멈췄다. 혜경성승은 뿌연 기류속의 무색 눈동자가 잠깐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아수라가 갈등할 이유가 뭣이 있을수 있을까? 흔들리는 무색 눈동자 는 기류 속에서 자신의 가슴 쪽을 잠깐 쳐다보는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 지만 그곳에는 죽은 금혜연이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다시 고함을 지르며 장원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동시에 혜경성 승의 몸이 바람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나뒹굴었다. "혜경성승 사부님." 살아남은 열 네명의 천무호정단 고수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혜경성승마저 죽은 줄 알고 비분에 차서 백이충을 쫓으 려 했다. 그 때 나뒹군 혜경성승의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아미타불. 쫓지마라. 우리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혜경성승이 몸을 일으켰다. 뿌연 기류에 격타당한 것 같았지마 기류는 부 드럽게 그의 몸을 밀었을 뿐이었다. 성승 자신도 살아남은 것이 신기하다 고 생각했다. (혈존... 그의 마음에 자비가 살아있단 말인가? 그토록 그의 품안에 있 는 여시주가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오오. 부처시여.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제거하기 보다는 여시주를 통해 그를 설득했어야 할지도... 우리의 판단 잘못으로 천하가 파멸할지도. 아미타 불) 혜경성승은 조용히 눈을 감고 불호를 외쳤다. 애초에 악도는 혈존의 정체를 증명하기만 모든 것이 끝장일줄 알았다. 혈지존이 천하를 경영하는 우두머리들을 끌어모으면 악도가 혈존의 정체 를 드러낸다. 악도는 악산산을 닮은 금혜연을 이용하면 혈존이 반드시 참 지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명백하게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그때 부터는 가만 둬도 천하의 지배자들이 혈존을 죽이려 혈안이 될 것이 다. 아무리 혈존이라해도 천하의 지배자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야 어찌 살 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악도의 생각이었다. 몸을 피해 도망갈지도 모른다. 혈존이야 특유의 사술이 있으니 몸을 숨기 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혈지존의 차시혈존대진은 그를 청마산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리라. 그렇다면 어디로 숨든 천기노인의 힘으로 그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천기노인은 단지 지배자들에게 도망 다니는 혈존의 위치를 가리쳐주기만 하면 된다. "크아아악." 천기노인은 정확하게 혈존의 위치를 가리켜 주었다. 혈지존의 초청을 받 고 온 자들중에 변황의 지배자들에게. 하지만 결과는 천기노인의 예측과 정 반대였다. 물론 순순히 혈존이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만... 이건 양떼에 뛰어든 한 마리 호랑이의 모습이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공격해라." 천축의 법존이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에서부터 두려움이 섞여 있었 다. 법존은 거의 백여명에 이르는 변황고수들을 이끌고 백이충을 포위했 다. 이정도 전력이라면 스스로 청마산에 모인 전 중원세력과도 한바탕 맞 붙어도 승패를 가리기 힘든 세력이라고 자부할 정도였으니 그 막강함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천축에 혈수라라고 알려진 혈존이라도 이정도 고수 라면 당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리라 생각했는데... 진짜 지옥에서 뛰 쳐나온 피의 아수라였단 말인가? "크으으윽." 소리음사 십이악불이 회색기류에 휘말려 공중에 날려갔다. 권풍 앞을 막 아섰던 촛불처럼 그렇게 그들의 생명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천축 십대고 수의 하나인 수라마불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단지 앞으로 나 아가는 백이충의 회색기류에 휘말린 결과가 그것이었다. "감히." 노호틀 터트리며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가 손을 썼다. 백도의 열가 지 신공이나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 사공에 못지않은 변황 무공을 모조리 통달했다는 천축 법존. 그 무학의 경지가 중원을 넘어섰다고 자신하는 천 축 법존과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였던 달라이 대라마가 동시에 일격을 가 했다. 콰쾅. 공격을 한 것은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였지만 피를 토하고 튕겨져 날 아간 것도 이 두사람이었다. 이미 인간을 초월하여 활불, 혹은 법존이라 불리며 신으로 추앙받고있는 이 두사람이 제대로 된 공격을 받은 것도 아 니고 제힘에 반탄되어 쓰러지다니. "으으. 사람이 아니다. 진정 혈수라인가?" "과거 포달랍궁의 방문했을 때보다 십배 백배나 강해졌다." 비틀거리며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가 중얼거리든 말든 백이충의 혼돈 을 뜻하는 독존강기는 거침이 없었다. 구비치는 물결처럼 거침없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향해 뿌연 기류는 휘감아 앞으로 나아갔고 그 기류가 닿 는 곳에는 예외없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천룡사주를 따라나온 세명의 태상법승이 혈존을 막아섰다. 끓는 용암속 에 들어갔다가도 무사히 나왔다는 이적을 보여준 태상 법승은 독존강기 에 녹아 백골이 되었다. 대뢰음사의 오백 황금나한 중에서 아나타를 따라온 것은 상위 서열 삼십 명. 도검과 악기, 사기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금강지체의 삼십 명의 황금 나한도 독존강기에 맷돌에 갈린 고기덩어리 신세가 되었다. 제자들의 처 참한 죽음을 본 아나타의 눈에서 혈루가 흘러내렸다. 백팔 번뇌마는 뿌연 기류의 진행방향을 가로막은 것을 후퇴하며 뒤로 후 퇴하려 했지만 백이충의 아수라독존강기가 더 빨랐다. 번뇌마는 순식간 에 십팔 번뇌마만이 살아남았다. 머리가 파괴되고 심장이 파열되도 재생 되어 되살아난다는 백팔 번뇌마였지만 독존강기에 죽은 번뇌마들은 살아 날 줄 몰랐다. 대막 철혈마궁의 궁주는 기세등등하게 뛰어들었다가 파랗게 질려 백이충 의 몸 주위를 회오리치는 뿌연 강기류에 다가갈 생각조차 못했다. 두려움. 단숨에 중원을 정복할 줄 알았던 변황고수들의 가슴 속에 다시 금 그런 감정이 스며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과거 변황을 두려움 이란 감정 속에 한번 굴복시켰던 인물이라 그 감정은 더욱 빠르게 되돌아 왔다. 과거 그의 잔인했던 손속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혈존도 인간이다. 설사 마귀라고 해도 그것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불존을 따르는 자들의 사명이 아닌가? 대자비불진(大慈悲佛陣)을 펼쳐 라." 기세가 꺽이지 않은 천축 법존이 소리쳤다. 그의 평생의 숙원이 혈존을 꺽고 중원보다 천축의 무공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데 여기 에서 포기할 리가 없다. 천축 법존의 명령하에 변황고수들이 몰려들었다. 일단 중심에 천축 법존 을 두고 천축 십대고수가 반원형으로 진형을 이루었다. 이는 천지간을 지 배하는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는 뜻이다. 그 상대편에 달라이 대라마를 중심으로 홍교의 사대라마, 동영 살막, 묘 강, 대막등 과거 변황동맹의 주측을 이루는 고수들 열명이 나머지 반원형 의 진형을 이루었다. 악귀를 참하는 불법의 무서움을 뜻한다. 천축과 변황의 수뇌들이 진의 중심을 이루자 각 세력의 원로급 고수들이 진의 외곽을 둘러쌓다. 불법을 지탱하는 호법존자들의 뜻을 나타내는 것 이다. 이렇게 세 개의 도리가 모여 천하의 마를 제압하고 정화하는 대자 비불진이 완성되는 것이다. 혈존이 미쳤다고(지금 완전히 미친 것으로 보이고는 있지만...) 대자비불 진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손을 빨며 기다리고 있겠는가? 천축 법존의 호령 하에 일종의 진법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혼돈의 뿌연 기류는 거침없이 진 형을 이루는 변황고수들을 향해 짖쳐들었다. "크하하하하. 혈마. 잘 만났다. 이 천유의 원한을 어이 풀꼬?" "키흐흐흐. 혈마. 뼈를 가르고 살을 발라주마. 죽은 영혼마저 불러내어 희롱하다니. 네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천지마검이 지옥에서 돌아왔다." "천하의 악종놈.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종말이다. 다시는 환생조차 못하 게 만사지존의 이름으로 영혼마저 소멸시켜 버리겠다." "천년마교의 이름으로 반도 혈마를 처단하겠다." "철갑지존이..." "벽력마존이..." "요지마후의 이름으로..." 소리만으로 지축을 진동시키는 거대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일곱 개 의 호통소리. 그 소리는 가공할 마기가 서려있어 진법을 이루는 변황고수 들의 고막을 진동시켜 비틀거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변황진형을 향 해 덮쳐들면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뿌연 기류의 백이충마 저 막았다. 그 막강한 음공의 힘도 그렇지만 그 안에 든 뜻 또한 가공하지 않는가? 전설 속 팔대천마 중의 칠인의 이름이 방금전에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팔 대천마.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고금제일마 혈존의 이름도 놀라웠지만 팔대천마의 이름또한 그에 못지 않 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팔대천마의 하나하나는 혈존의 이름에 손색이 있 을지 모른다. 허나 팔대천마의 이름을 모두 묶으면 결코 혈존의 이름 무 게보다 가볍지 않다. 팔대천마가 천년마교에 뭉쳐 하나가 되었을 무렵,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었던가? 중원정복? 혈존보다 앞서 천하를 흑도천하로 만들었던 것이 팔 대천마의 천년마교였다. 변황정벌?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던 변황의 세력 이 중원에 처들어 온 것을 가볍게 막아낸 것이 팔대천마였다. 지금처럼 백도의 열가지 신공과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 사공이 마구잡이 로 퍼진 것도 따지고보면 팔대천마 덕이었다. 그동안 불가해의 무공으로 알려졌던 최고의 무공들이 팔대천마가 완성시키는 바람에 그에 대응하느 라 백도 흑도 가리지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바람에 오늘날의 성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팔대천마라고?" "그들이 죽지 않았단 말인가? 오오. 부처시여." "혈마? 혈존이 혈마의 화신이었단 말인가?" "아미타불. 혈존이 겨우 팔대천마의 일인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럼 나머 지 칠인의 출현으로 천하는?" 팔대천마의 등장은 백이충보다 변황지존들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변 황세력 중에도 백살이 넘어가는 고수들이 수두룩 하다. 하지만 이들도 팔 대천마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하다. 팔대천마 중에서 가장 나이많은 벽력마존이나 만사지존은 지금 나이로 이 백살이 넘어가는 존재들이다. 지금 팔대천마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혈 마, 혈존이라 밝혀진 혈마도 백 살을 넘기며 나이를 잊을 정도였다. 무 려 이백년 전부터 백년 전 사이를 풍미한 대 고수들인 것이다. 변황이 역대 최고조의 힘을 이루었을 때 중원에 처들어 왔다가 전멸을 당 한 것이 바로 팔대천마의 시절이었다. 오히려 혈존이 변황을 정벌했을 때 변황동맹의 힘은 중원에 처들어갔던 변황동맹의 힘에 비해 비할수 없 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팔대천마의 출현에 변황고수들의 놀라움 은 컸다. "반도. 죽여주마." 천마라고 자신을 밝힌 자. 그자의 몸에서 묵빛 마기가 발출되었다. 천하 마의 제왕 격인 천마지존공. 천마가 누구인가? 혈존 이전에 천하 마도의 지배자이자 천하의 주인이었다. 혈존의 이름이 나올 때 꼭 그와 비견되 어 나오는 팔대천마의 수좌. 그의 무지막지한 마공이 터져나온 것이다. 회색기류 역시 천마를 향해 예의 그 독존강기를 내뿜었다. 전대의 최강 마공과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자의 최강마공의 격돌. 그리고 뿌옇고 검은 두 기류가 충돌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천마가 비틀거렸다. 회색기류는 약간 주춤했을뿐 뿌연 기류가 흩어질 생각조차 안하는데 묵 빛 마기는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천마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을 뿐 결코 큰 부상을 당한 기색은 없었다. 무적장왕을 일격에 쳐죽이고 혜 경성승을 반항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천축 법존을 단지 반탄력만으로 튕 겨버린 혈존의 독존강기를 정면에서 충돌하여 최초로 막아낸 것이다. "흐흐. 제법 많은 발전을..." 콰콰쾅! 천마가 말을 잇기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뿌연 강기가 천마를 덮쳐왔다. 그것은 파도와 같아 한번 지나도 뒤에 다른 파도가 또있고 그것이 지나 도 또 있는 것과 같았다. 천마는 급하게 묵빛 마기를 뿜어대며 회색기류 를 막아내었다. "저것은 천마지존공이 아니다. 이미 천마지존공을 초월했다." 천축법존은 직접 저 혼돈의 독존강기를 접해보았기 때문에 그 위력을 잘 알았다. 또한 혈존의 제자였던만큼 천마지존공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 가 아는 천마지존공으로서는 도저히 막아낼수 없는 아수라독존강기를 천 마는 잘도 막아냈다. 그것은 이미 천마가 천마지존공을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진경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무적장왕이나 혜경성승이 겨우 신공의 껍질을 벗고 한단계 위의 새로운 세계의 초입에 발길을 들여놓았 다면 천마는 그 경지의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천마의 새로운 마공도 백이충의 혼돈강기에 미치지는 못했다. 첫 번째 강 기와의 충돌이 있었을 때는 아직 천마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지만 두 번 째 충돌이 있은후에 천마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세 번째 충돌이 있은 후에 는 천마의 입가에 피가 흐르며 얼굴에 식은 땀이 흘러나왔다. 네 번째 충돌때에 백이충의 뿌연 기류는 아무런 흔들림조차 없었지만 천 마의 몸은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묵빛 강기가 거의 소멸되다시피했 다. 만약 네 번째 강기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천마도 버텨내지 못할 것임 이 틀림없었다. "크크크. 여기도 있음을 잊지마라. 혈마." 천지마검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강이 벼락처럼 터져나왔 다. 천지에서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천지마검류. 그것은 거침없이 뿌연 기류를 가르며 쑤셔들어갔다. 최초로 백이충이 몸을 날려 천지마검의 검강을 피했다. 여태 법존과 기 타 여러 초고수들의 공격도 묵묵히 독존강기로 호신하며 막아내던 백이충 이었다. 최초로 독존강기가 막아내지 못하는 검강이 출현한 것이다. 천마 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숨을 고르는 동안 천지마검 은 살기를 뿌리며 다시 검강을 내뿜었다. "천지마검류를 뛰어넘은 새로운 검류를 보여주마. 이것이야말로 신선도 베는 천지멸절검강." 새파랗게 빛나는 검강이 화살이 날아가듯 천지마검의 검에서 쭈욱 뻗어나 와 발사되었다. 푸른 빛의 검강파편. 어떤 것이든 부술수 있는 검강이 천 지마검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을 누가 막을 수.... 막을 수 있다. 혈존이라면. 회색 기류가 뭉쳐 굳어지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사실 여태는 독존강 기라고 하기에 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간혹 뭉쳐 적을 향해 공격 할 때를 빼고는 하늘하늘 뿌연 안개같은 기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뿌연 기류가 뭉쳐 하나의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천지멸절검강을 잘라?" 천지마검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든 박살낸다는 천지멸절검 강이 오히려 뿌연 검강에 부딪쳐 박살난 것이다. 뿌연 혼돈의 검강은 그 에 만족하지 않고 천지마검을 짖쳐들었다. 창백해진 천지마검이 검막을 펼치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지만... "크윽. 빌어먹을." 기어이 검을 든 오른쪽 어깨를 잘려버리고 신음을 지르는 천지마검이었 다. 단 일검에 자신의 어깨를 잘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역력 했다. 하물며 그의 몸이 어떤 몸인가? 천마강시의 완성된 몸체를 자신의 몸으로 삼았거늘 아무리 검강이라도... "하기야 천지멸절검강을 박살내는 검강이라면 아무리 천마강시의 몸이라 해도 무베듯 벨수 있겠지." 천지마검이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오른팔 대신 그의 왼손에 검의 형상 의 검강이 맺혔다. 이미 검없이 검강을 발출하는 것이 천지마검의 지금 경지였다. 천지마검이 오른 손을 잘리고도 여유있게 왼손에 검강을 발출하며 여유 를 부린 것은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이 동시에 백이충을 공격했기 때문이 다. 과연 백이충은 움찔 거리며 주의를 천지마검에서 벽력마존과 철갑지 존에게로 돌렸다. 벽력마존은 음양을 부딪치는 괴공으로 화포나 낼 수 있는 파괴력을 능가 하는 힘을 발출하는 자였다. 또한 철갑지존은 금강보다 더욱 단단하다는 강기로 몸을 두루는 자였다. 이 둘의 파괴적인 힘은 어쩌면 천마를 능가 하는지도 몰랐다. 이 둘이 답답하다는 듯 외치며 합공을 했다. "제길. 언제까지 자존심을 세울 작정이냐? 복수를 포기한 거냐?" 사실 이들은 뜻만으로도 서로의 의사가 통하는 경지였다. 일심혼원공이 깊은 화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에 서로 암 묵적으로 동의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혈존의 경지 는 상상을 불허할 것이니 서로 힘을 합쳐 그를 죽이기로 말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과거 천하를 질타하던 위상이 생각났다. 그들이 누구인가?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팔대천마의 하나 가 아니던가? 그런 자존심이 있기에 그들은 제각기 혈존을 공격했다. 하 나가 위험에 빠질 때 손을 써서 구하기는 했지만 천마가 손을 쓸때는 다 른 자들이 손을 끼고 수수방관했고 천지마검이 손을 쓸때도 다른 자들은 방관만 했다. 천지마검이 단번에 팔이 잘리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철 갑지존과 벽력마존이 동시에 손을 쓰면서 나머지 천마들을 질타한 것이 다. 강으로 따지자면 고금 역사상 손가락 안에 들어갈 음양벽력공과 철괴마 공. 그것은 백도 이십팔명의 함께 만들어낸 강기다발보다 훨씬 더 강력하 고 위력적이었다. 하물며 이들은 수천년 무림사에 항상 무공의 끝자락에 위치했던 흑도 최강 무학의 경지를 초월하여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낸 존 재였다. 무림 역사상 겨우 몇사람의 문파 조사만이 이룩해낸 경지를 이들 팔대천 마가 모두 이뤄낸 것은 아마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을 겪으면서, 그리고 혈존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이룩해낸 경지 일 것이다. 문제는 혈존도 까마득한 옛날 그 경지를 걸었다는 것이다. 콰르르릉. 최초로 뿌연 기류가 흩어졌다. 벽력음양공과 철괴마공의 신기원의 경지 가 힘을 합치자 독존강기의 기류가 걷혀진 것이다. 하지만 막강한 합공. 그것도 천지마검을 공격하다가 뒤로 물러서며 엉겹결에 맞부딪쳐 이루어 낸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뿌연 기류는 잠시 거두어졌다가 다시 깔렸다. 기류가 거두어질 때 나타 난 백이충의 모습은 한 손에 금혜연의 시체를 안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봐서 단 한손으로 철갑지존과 벽력마존의 합공 을 상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백이충은 단지 한 걸음 물러섰을 뿐 이고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은 서너장 뒤로 튕겨져 나갔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분노의 노호성을 터트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자에 대한 분 노였다. 동시에 뿌연 혼돈의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칠대천마가 일제히 긴 장을 하는 순간에 뿌연 혼돈의 기류가 백이충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었 다. 드러난 백이충의 모습은 회색 일색이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모두 회 색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의 모습을 표현하라면 바로 백이충의 모습이 었다. 왼손으로 축 늘어진 금혜연의 시신을 안고 마치 백치처럼 백이충 은 서 있었다. 고함을 지른 백이충의 오른 손이 흔들렸다. 왜 그토록이나 위력적이던 뿌 연 기류막을 일부러 걷어냈을까? 그 의도는 다음에 바로 들어났다. 뿌연 회색빛 수강. 뿌연 독존강기를 걷어들이고 발한 수강은 분명 회색빛 기류 보다 수십배 위력적이었다. "크억." 칠대천마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눈치도 못채고 제대로 동작도 못봤 다. 아는 것이라고는 당장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호색의 손바닥 뿐이었 다. 설마 혈존의 능력이 이토록 대단할 줄이야. 천마, 천지마검, 철갑지존과 벽력마존은 살짝이나마 백이충과 부딪치면 서 혈존의 힘을 비로서 깨달았다. 단지 마음으로 알고있던 것과 실재로 체험하여 깨달은 것과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긴장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틀린 것이다. 넷은 회색 손바닥이 보이자말자 일신에 지닌 젖먹던 힘까 지 끌어들여 대항했다.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반면 만사지존, 요지마후, 천유등은 아직 머리 속으로만 혈존의 위력을 알고있는 상황이었다. 혈마전혼대법의 시험작으로 되살아나 혈존의 관리 아래 착취당하고 고통받은 기억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분노, 한편으로는 팔대천마의 막내이며 가장 형편없었던 혈마라는 기억이 혈존 을 약간이나마 얕보게 만든 것이다. 팔대천마의 모든 것을 빼앗았으니 혈 존이 강하다는 것은 상상했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부딪쳐보지 못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응이 늦었다. "크아아악." 비명이 울렸다. 혈존을 제외하고 무림 역사상 그 누구에게도 윗길을 용납 하지 않는 팔대천마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지 육체 의 죽음이 발하는 비명이 아니었다. 바로 육체와 함께 영혼마저 소멸을 당한 자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천마, 천지마검, 철갑지존, 벽력마존이 일제히 신음을 지르며 비틀거렸 다. 그래도 그들은 괜찮은 것이었다. 커다란 부상없이 다만 힘에 눌려 뒤 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세명의 천마는 사정이 달랐다. 만사 지존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연신 신음을 내질렀다.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그나마 그의 천사음유공이 거의 불사에 해당하 는 사공이기에 생명과 영혼이 소멸당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요지마후와 천유는 달랐다. 천뇌만상공과 환희염정술은 직접적으로 적과 마주대하여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공이었다. 게다가 방심한 상태에서 마음 한구석에 혈존을 얕보는 마음조차 있었으니 제대로된 반응 을 할 리가 없었다. 일격에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팔대천마의 두명이 손 도 제대로 못쓰고 머리에 구멍을 뚫린 것이다. 만약 다른 무공이었다면 잠시의 고통이 있었겠지만 즉시 신체는 재생되 고 생명력도 되돌아왔을 것이다. 생명력과 재생력에 있어서 천마강시보 다 뛰어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혼돈의 힘이 숨어있는 독존강기가 섞 인 수강에 당한 둘은... 그대로 영혼마저 소멸당하고 말았다.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천하를 주름잡던 팔대천마의 두사람의 최후치고 는 너무도 간단하고 허망했다. 낙마곡에 파묻혀 죽은 이래 혈존에 의해 그 영혼이 소환되어 부활의 술과 혈마전혼대법의 시험작으로 반쯤 되살아 나 혈존에 이용당했고 혈존이 죽은 틈을 타서 천마황을 장악하여 완벽히 되살아나려고 노력한 것이 무려 수십년. 천마강시를 얻어 완벽히 되살아 나서 불과 며칠만에 다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영혼조차 소멸당 하고 말았다. 이렇게 죽을 것을 도대체 왜 그렇게 되살아나려 노력했을 까? "일심혼원공, 일심혼원대진을 펼쳐라." 천마의 절규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둘이 죽고나서야 사태를 엄중히 파악한 것이다. 인간의 최후의 경지에 이른 천무삼성. 그 경지를 돌파한 팔대천마. 하지만 그런 팔대천마조차 벌레 때려잡듯 죽여버리는 혈존의 경지는 이미 인간에게 허용되는 한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만사지존이 입술을 깨물고 중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행방위의 한 구석 에 섰다. 아직도 무표정한 회색빛 얼굴로 한손으로 금혜연을 안고 한손으 로 장을 휘두르는 백이충. 그의 주위는 온통 손바닥 형태의 수강이 맴돌 았다. 사상 초유로 나타난 아수라독존마공의 수강. 팔대천마 또한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오행방위에 서서 백이충을 포위 한 팔대천마의 다섯은 일제히 일심혼원공을 펼쳤다. 다섯이 하나되고 하 나가 다섯이 되었다. 천마지존공과 천사음유공이 뒤섞이고 천지마검류와 음양벽력공이 뒤섞였다. 또한 철괴마공이 모든 것을 혼합했다. 뒤섞인 다섯 마공과 사공은 다시 하나가 되어 다섯 인간의 몸에 흘러 들 어갔다. 그 힘은 오행의 방위에 따라 나누어지고 일심혼원공에 의해 하나 로 통합,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며 그 힘을 폭발적으로 키워나갔다. 그리 고 일심혼원공은 하나의 기류를 형성하여 다섯의 몸을 감싸고 가운데가 파여진 동그란 륜(輪)이 되어 백이충의 몸을 조여나갔다. 일찍이 천마황이 십만대산에서 다른 마황들을 물리쳤을 때 천마가 그에 게 일심혼원공에 대해 말하기를 - 두사람이 일심혼원공을 펼치면 진법의 도움 없이도 단순한 합공의 다섯 배의 힘을 발휘한다.- - 세 사람이 일심혼원공을 펼치면 열배, 넷이면 열 다섯배, 다섯이면 스 므배의 힘을 발휘한다. - 즉 지금의 다섯명의 천마가 일심혼원공을 발휘하여 백이충을 공격하는 압 력은 스므명의 천마가 동시에 전력을 다해 백이충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위력이 있었다. 다시 여기에 더해 이들은 가장 단순하고 고전적이며 또 한 가장 효과있는 오행방위의 이치에 따라 진법을 펼쳐 백이충을 포위하 고 일심혼원공으로 공격하는 것은 가히 무림 역사상 나타나 본적이 없는 미증유(未曾有)의 힘이라고 할수 있었다. 팔대천마의 다섯이 펼치는 일심혼원공의 힘이 고금 초유의 막강한 것이라 면 백이충의 아수라독존마공이 발휘하는 힘은 인간사에 나타나서는 안될 금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다섯 천마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백이충은 눈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회색빛 얼굴 그대로 금혜연을 알고 제자리 에서 원을 돌며 조여오는 륜형태의 기류에 다섯방의 수강을 때렸을 뿐이 다. "크으윽. 이럴수가. 일심혼원공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크으윽. 이럴수가. 일심혼원공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시꺼멓고 붉고 하얗고 번쩍이고 금빛인 다섯가지 색깔의 기류속에 거의 동시에 다른 목소리의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여오던 일심혼원공의 오대혼합공력(五大混合功力)이 움찔 타격을 받고 뒤로 물러섰다. 막대한 타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연달아 다섯 번 째의 수강을 받았을 때는 백이 충의 지척까지 조여오던 오대혼합공력이 주변 일장밖까지 후퇴하였으며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 흔들거렸다. "우우. 천마황. 나타나라. 우리를 도와라." 팽팽히 버티는 오대천마. 혼합공력의 기류에 빠져 그들의 모습을 볼 수 는 없지만 극도의 불안이 뒤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설마 그들 다섯이 되 살아나고도 혈존 하나에게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만큼 그들의 마공은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혈존에 게는 통하지 않았다. 백가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난치듯 잠깐 잠깐 수강을 발휘할 뿐이다. 그 때마다 오대혼합공력의 기류가 풍랑을 만난 듯 흔들거렸다. 이제 백이충 을 압박하기는커녕 오대천마가 백이충에게 핍박받는 꼴이었다. 강제로 오 대혼합공력이 깨어진다면 그 타격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었다. 천마의 명령에 변황세력이 만든 대자비불진의 뒤에서 일곱의 인형이 솟아 올랐다. 혈천마련의 칠마황. 혈존의 아홉제자중의 일곱이었다. 이들 또 한 일심혼원공을 익혔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들 칠마황은 일곱 천마와 함께 이곳에 왔다. 하지만 혈존을 증명하는 장소소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혈존에 대 한 공포. 사부에 대한 공포는 그 정도로 이들에게 심한 것이었다. 일곱 천마는 자신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내버려두고 왔다. 팔대천마 의 일곱의 부활을 혈존을 제물삼아 천하에 화려하게 터트리려고 했던 것 이다. 설마 혈존의 힘이 이토록 강대하게 변했을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칠마황 또한 이들 오대혼합공력에 흡수되었다. 일심혼원공을 익힌 자들만 이 발휘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대뜸 열두가지의 기운이 혼합되 었다. 그리고 그 힘은 천마 개인의 힘의 이십 배에서 육십배로 늘어났다. 혼합공력의 강기의 륜은 칠마황의 합류로 더욱 두텁고 위력적으로 변했 다. 장난처럼 툭툭 건드리는 백이충의 수강에 금방이라도 부숴질 듯 했 던 혼합공력의 륜이 다시 두터운 포박이 되어 백이충의 몸을 조여 들려했 다. 백이충이 반항해도 소용없었다. 그정도로 혼합공력의 힘은 강력했다. "제발. 혈존을 처치해야 한다." 외곽에서 천축 법존이 식은 땀을 흘리며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협력하여 백이충을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대자비불진으로 백이충 을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변황 전 고수들이 힘 을 합해 펼친 대자비불진도 지금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힘을 합해 펼치는 합공보다 위력적이지 않았다. 저런 합공을 견뎌내는 혈존이 자유스럽게 풀려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누가 혈존의 그 힘을 감당해내랴? "우우우." 팽팽히 버티던 양측의 압력에서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힘이 조금 더 우세 한 모양이었다. 줄어들지도 늘지도 않았던 륜 형상의 강기가 급격하게 줄 어들며 백이충을 조여왔다. 동시에 무표정의 백이충의 입에서 거친 사자 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강기륜이 백이충의 몸 을 덮쳤다. 질끈. 천축 법존은 절로 눈을 감았다. 산산조각나는 혈존의 몸을 상상하며 거대 한 폭음을 상상했다. 드디어 고금제일마라는 혈존의 최후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혼합공력의 힘은 대단했다. "......"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축 법존이 의아하여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두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거대한 륜의 고리는 사정없이 백 이충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폭발도 폭음도 없었다. 또한 백이충 의 몸을 두동강 내지도 못했다. 륜의 강기는 백이충의 몸에 바짝 붙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법존은 원인은 모르지만 저들이 내공대결로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오대천마와 칠마황에 게 승산이 있었다. 가공할 마공의 위력과 내공의 대결은 전혀 다른 이야 기이니까. 천축 법존의 예측과 달리 백이충과 천마들 측은 내공대결을 하는 것이 아 니었다. 혼합공력이 오히려 백이충의 몸에 흡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 림사에 획기적인 선을 그을 일심혼원공과 그로 인한 혼합공력. 오대천마 와 칠마황의 혼합공력이 사정없이 백이충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당연히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안색이 흡혈귀에 피를 빨린 피해자처럼 안색이 창백 해졌다. 그것을 보고 천축 법왕의 표정이 대변했다.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내공대 결에 밀린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창백한 안색으로 보아 그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으으. 괴물. 내공이 얼마나 되기에 저들 모두를 합한 내공을 능가한단 말인가?" 사실 백이충은 공력이 부족하여 혼합공력의 륜 강기에 조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환희염정공을 능가하는 아수라독존마공의 흡정구결로 오대천마 와 칠마황의 공력을 탈취하기 위해 그들의 강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 채음보양이니 채양보음이니 하는 말이 있을만큼 남의 공력을 훔치 는 수법은 힘든 일. 순순이 자신의 공력을 남에게 전해준다면 모르지만 강제로 남에게서 탈취하는 것은 환희염정술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물며 남의 공력을 탈취하는 데에 최강이라는 환 희염정술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강기에서 공력을 탈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남의 공격이 모조리 자신을 위해 내어놓은 공력이 될테니 무적이 아니겠는가? 거의 말도 안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었다. 혈존이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강기 공력을 빨아들이는 광경을 천축 법존 이 직접 눈으로 보고서 내공대결로 착각한 것은 그만큼 강기에서 공력을 흡수한다는 것이 무학의 상식을 뒤집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그런 일을 수월히 해내는 혈존은 완전히 괴물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저... 저?" 색색의 기류로 뒤덮여 있던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몸에서 기류가 사라져갔 다. 그들을 뒤엎는 기류가 그들이 만들어낸 혼합공력의 륜 강기에 흡수되 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몸을 보호할 공력조차 남김없이 끌어모았다는 것 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맹렬히 번뜩이는 륜의 혼합 강기는 사실 더욱 맹렬한 속도 백이충 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에따라 백이충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흑백의 그림이 현실의 사람처럼 살아나듯 회색 일색의 머리, 피부, 눈동자에 조금씩 미미하게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천축 법존은 모르겠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일성의 성취에서 이성으로 올 라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아수라독존마공이 백이충의 몸을 움직이 는 꼴이지만 이성으로 성취가 올라가면 저절로 이성과 지성이 회복되리 라. "대자비불진의 힘으로 모든 공력을 모아 혈존을 공격하라." 천축 법존의 안색이 공포로 질리며 고함쳤다. 차라리 오대천마와 칠마황 은 상대할만 했다. 각기 떨어트려 놓으면 법존 자신도 오대천마에 못하 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또한 그들의 무학을 깨트리지 못할 산은 아니었 다. 변황의 절학을 꾸준히 익히면 지금은 변황이 약할지라도 언젠가 혈천 마련을 능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저 혈존을 지금 죽이지 못하면... 여기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법존은 왜 혈존의 무서움을 그토록 잘 알 면서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지 후회했다. 변황 대자비불빈에서 거센 무형의 기세가 솟구쳐 혈존을 후려쳤다. 강기 대결도 일종의 내공대결. 내공대결 중에 누군가 공격당하는 것은 양자 모 두를 치명상으로 몰고가는 일. 하지만 지금은 혈존을 공격하는 것만이 중 요할 뿐, 오대천마와 칠마황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혈존이 보여준 가공할 능력을 보건대 지금의 기습이 효과가 있다고 자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이충의 안색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변했다. 오른 손으로 혼합공력을 흡 수하는 중이라 변황의 기습을 방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금혜연을 안 고있는 왼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지금 백치상태에서 움직이는 백이충이 지만 금혜연의 시신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사실만은 자각하고 있었다. 또 한 몸을 빼려한다면 지금 흡수하여 영양이 되고있는 혼합공력이 오히려 강대한 흉기가 되어 백이충의 내부를 휘저으리라. 콰아아앙! 백이충은 등으로 대자비불진의 공력을 받아내었다. 변황 전 세력의 최고 수뇌진의 힘이 하나로 뭉친 힘이었다.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일심혼원공으 로 뽑아낸 기세보다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힘은 아니었다. 태산을 뿌리뽑고 만년한철 일만근을 박살낼 수 있는 힘이었다. 폭음이 일어났 다. 백이충의 척추 뼈와 허리가 천만개로 박살났어야 당연하지만 백이충 은 가볍게 안색이 변했을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대자비불진의 힘마 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법존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비로소 오대천마와 칠마황도 공력을 흡수당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순수히 전해주는 공력도 아니고 남 이 공격수단으로 뽑는 강기를 흡수하다니. 그제야 혈존시절 수많은 제자 들의 공력과 무공을 빨아들였던 그의 행태가 기억에 새롭게 솟아나는 법 존이었다. "괴물. 끝장이다. 설마 우리 모두의 공력을 한 몸에 흡수하지는 못하겠 지." 무저갱에 공력이 빨려들 듯 혈존에게 쭉쭉 공력이 빨려나가는 것을 보며 오히려 천축 법존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가공할 힘을 보여준다고 해 도 혈존의 육신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한계가 있었다. 지금 혈존이 빨아들이고자 하는 공력은 적게 잡아도 수백갑자. 수백 가지 종류 에 위력도 들쑥날쑥 가지각색인 혼잡한 공력. 도저히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법존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백이충의 몸을 움직이 는 것이 아수라독존마공만 아니었다면. 모든 것을 모아 혼돈으로 둘러싸 고 혼돈으로서 뒤덮는 혼돈진결을 운용하는 아수라독존마공만 아니었다 면 백이충의 몸은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풍선처럼 터져버렸을 것이다. 천축법존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대자비불진의 도움 덕 으로 조금 안색이 좋아졌던 혈천마련 쪽도 다시 안색이 창백해졌다. 양측 의 강물같은 공력과 신공 마공이 흘러들어갔는데도 마치 대해에 풀어놓 은 듯 백이충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머리색이 회색에서 검게 물들고 피부가 점차 살색으로 윤기있게 되돌아가고 있었 다. (끝...끝장이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천마와 법존의 안색이 누렇게 변해갈 때 또다시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미타불.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가랴." 혜경성승이 살아남은 열 네명의 제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 자마자 일자로 늘어섰고 각자 앞에 있는 사람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대었 다. 맨 앞에 있던 혜경성승의 손이 백가량의 머리를 눌렀다. "잘 가시오. 혈존." 혜경성승조차 이들의 대결을 내공대결로 착각했다. 무학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삼자의 내공대결이라면 이를 방해놓은 자는 삼자의 모든 공력을 한몸에 받고 파멸한다. 혜경성승과 열 네명의 제자는 물론 마련과 변황세력, 그리고 혈존의 합고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다. 그러나 손을 댐으로서 그들 셋 역시 파멸할 것이다. 혜꼉성승은 스 스로 파멸함으로서 천하를 혼란시키는 이들 셋의 세력을 소멸시켜 천하 를 안정시킬 생각이었다. 결국 백도의 내공마저 사정없이 백이충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혜경성승 이 아차했지만 그 역시 법존처럼 때늦은 후회였다. 대신 뺨이 핼쓱해졌 던 변황과 천마들의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혜경성승이 한 손을 들어줌으 로서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점차 백이충의 눈동자 색이 돌아왔다. 거의 이성이 돌아왔다는 뜻이었 다. 백이충이 이성마저 회복되면 더 이상 천하는 그를 감당해재지 못할 것이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사자후를 터트리며 몸을 떨었다. 동시에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나가떨어졌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이성을 이룰만한 충분한 내공을 쌓았기 에 더 이상 그들의 진기를 흡입할 필요가 없어 떨쳐버린 것이다. 백도 흑 도와 변황의 고수들이 우수수 백이충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칠마황중에 요지마후, 검마황, 음양마황, 만상여의 네명의 숨이 끊어졌 다. 최후의 한줌 진기마저 남김없이 백이충에게 빨려버린 것이다. 천마황 과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만이 간신히 숨이 붙어 할딱거리고 있었다. 일 년 정도 몸을 숨기고 운공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우리라. 오대천마에서도 살아남은 자는 천마와 만사지존 둘뿐이었다. 간신히 되살 아났던 천지마검, 요지마녀, 철갑지존이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의 뒤를 이 어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변황 쪽은 더욱 참담했다. 변황의 세력 오백이 넘게 와서 살아남은 자는 법존과 천룡사주, 달라이대라마 단 셋이었다. 아마도 변황이 그 힘을 회 복하려면 앞으로 백년은 있어야 하리라. 백도 쪽은 가장 늦게 공력을 빨리기 시작했기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 다. 혜경성승과 열 넷의 제자들이 모두 살아났다. 다만 그들 역시 일년 정도는 꼼짝도 하지 못하리라. "우우우우." 살아남은 자들도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소진했 다. 장소성이 끝난 직후 백이충이 손을 쓴다면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 리라. "사부. 기다렸소. 그것이 바로 사부가 우리 제자들 모두의 공력을 빨아 완성시키고자 했던 마공이오? 우리대신 다른 이들의 공력 태반을 빨아들 였으니 아마도 완성되었겠구려." 모든 이들이 나가떨어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혈지존이 나타났다. 그의 주위로 무려 팔십에 달하는 천마강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혈지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백이충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 지만 혈지존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최후의 최후로 염려하던 상황. 하 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상황이 일어났던 것 뿐이니까. 하지 만 최후의 최후도 대비하는 습성상 대비는 끝난 상태였다. - 아수라독존마공이라는 것이오. 우리 대두자들이 최후로 만들어 놓은 구 결은... -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가 말했다. 혈뇌동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부터 쌍 영마공 말고도 뭔가 있다는 정도는 혈지존이 알고 있었다. 제자들을 죽이 고 넙죽넙죽 제자의 무공과 진기를 심장과 함께 씹어 삼킬 때부터 그것 을 통해 무엇인가 이루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던 사부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도 했다. 그것이 어떤 마공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그 이름은 대두자를 통 해 처음 들었다. 팔십 정도의 천마강시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탈진하여 널부러진 천축 법존도 그리고 천마와 혜경성승도 천마강시를 알아보았다. 다른 의미에 서 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태 숨어있는 실력자들을 몰라보고 그들 끼리 천하를 놓고 다툰 격이었다. "세상에 팔십구의 천마강시라니." "혈존조차 천하를 지배하던 시절 단 한구밖에 제조하지 못했다고 하는 전 설상의 천마강시?" 그들이 만약 지금 몰려오는 천마강시가 전부가 아님을 알면 어떤 표정일 까? 황실을 장악하기 위해 십여구 정도의 천마강시가 아직도 혈지존의 수중에 남아 천하에 흩어져 있다면... 그리고 이미 천하 반 이상이 옥룡왕의 이름으로 명령과 동시에 떨 어짐을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법존과 혜경성승, 그리고 천마와 천마황의 얼굴에 실망과 기대의 빛이 동 시에 떠올랐다. 팔십의 천마강시라면 혹여라도 혈존을 이길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혈존의 무위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아무 리 전설상의 천마강시라도 무리가 아닐까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팔십이라면... "혈지존. 첫째 사형은 무서운 자였군. 그가 혈존을 처지한다고 해도 문제 로군. 팔십의 천마강시를 누가 있어 당해낸단 말인가? 변황은 영원히 중 원을 이겨내지 못한단 말인가?" "으음. 혈지존이 우리에게 보낸 천마강시 여섯구가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 가? 마치 과거의 혈마를 찍어낸 듯한 대 효웅이로군. 저자가 살아있는 한 마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법존의 신음과 천마의 탄식이 뒤를 이었고 혜경성승이 불호를 외웠다. "그래도... 아미타불. 혈존 시주보다는 낳을 것이오. 혈존은 이미 인간 이 아닌 악마이니... 그가 천하를 지배했을 때를 생각하면... 누구에겐 가 지배당할 천하라면 차라리 흑도의 천마보다는 혈지존 백시주가 낳을 지도... 아미타불." 혈지존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그들은 그들 최후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혈지존이 애초에 염려한 것은 혈존이 혹시나 대두자가 말했 던 아수라독존마공을 연마했을 경우였다. -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연마했다면 천하에서 그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소.-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혈지존은 홀로라도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쌍영마공을 합일한 만큼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천마강 시 일백구가 손에 있는 이상 누가 그를 당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서문대 장군부의 이공자라는 신분을 파악하고 나서 백이충의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이 조사된 이후였다. 그 조사가 어긋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혈존은 결 코 혈지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부. 당신은 기어이 아수라독존마공이라는 것을 익혔구려. 역 시 내 사부이자 아버지 답소." 백나안의 어머니는 배교의 소공녀였다. 아버지 백가량은 복수를 위해 어 머니를 취했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외가를 파멸시켰다. 심지어 어머니 에게 자신이 있어도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냉혹한 그가 왜 아들인 자신을 살려두었을까? 핏줄 탓? 키워오면서 괴롭 혀 온 것을 보면 결코 핏줄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자신에게 까지 이어가며 괴롭히기 위해서였을까? 지금와서 알 방법은 없 다. 한때 그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발버둥친 적도 있었다. 그를 닮기위해 모 든 노력을 다 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뛰어넘는 것이 혈지존 의 야망이자 숙원이었다. 혈존을 뛰어넘어서야 진정 자신의 길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혈존이 이루었던 길. 무림 천하의 정복. 변황계 정 복. 혈지존은 황실마저 정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능가하는 길이 다. "만일을 대비하여 이들을 불러온 것은 잘한 일이다." 혈지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변황과 흑백도의 지배자들을 불러내어 손해볼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혈지존의 아버지. 만약 그의 무공화후가 낮다면 자신의 손대신 흑백도와 변황의 살수에 죽을 것이다. 만약 아수라독존마공 을 연마했다면...? 그때는 진정 그들이 초대한 역할을 다 해 줄 것이다. -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혔다면 혈존을 제거할 방법은 한가지 뿐이오. 그 의 성취가 일성에서 이성으로 높아질 때, 그때... 성취가 급격히 높아지려면... - 혈지존의 눈빛을 받고 천마강시 외에 두줄기 괴인형이 혈존의 곁으로 다 가갔다. "설사 천마강시라고 해도 사부에게 피해를 입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 나..." 혈지존이 괴이한 목소리를 흘릴 때 백이충을 향해 다가오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장원에서 헤어졌던 쌍노였다. "주군. 위험합니다. 혈지존이 천마강시를 모두 동원했습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천마강시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어서 피하십시오." 쌍노의 출현을 보고 백이충은 경계심을 거두었다. 천하의 혈존이 가장 사 랑하는 자가 금혜연이라면 가장 믿는 자가 바로 쌍노였다.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도 쌍노를 알아보고 경계를 풀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가 쌍노를 믿는지 알수 있었다. 쌍노는 백이충이 아무런 저지도 하지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지 만 그 직후 쌍노의 신형이 번뜩이더니 백이충의 손에서 금혜연을 빼앗아 왔다. 금혜연의 시신이 환마의 품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 순간 백이충의 안색이 급변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주군. 죄송합니다. 적씨 일족 최후의 부탁입니다." "저희를 죽여도 좋습니다. 하지만 주군을 해하는 일이 아니라 겨우 성녀 의 시체를 넘겨주는 것. 이로서 적씨일족은 배교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저 희들의 주군은 오직..." 쌍노가 비참한 어조로 자신들을 변명하며 금혜연의 시신을 안고 도망갈 때 무표정 일색이던 백이충의 눈동자가 확대되며 저절로 탄성을 지르기 위해 입을 별렸다. "안..." "쌍영합일마공." 그 순간 혈지존이 바로 백이충의 앞에 도착했다. 백이충은 혈지존이 바 로 앞에 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쌍노 쪽을 향해 손을 뻗 고 있었다. 그 순간 혈지존의 쌍장에서 혈광과 청광이 터져나왔고 그것 이 하나로 합일되었다. 어찌보면 아수라독존마공의 초입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쌍영마공의 합일. 혈지존의 뇌리에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 아수라독존마공이 발휘되면 그것을 파훼할 방법은 하나뿐이오. 아수라 독존마공이 이성으로 올라갈 때 쌍영마공의 합일된 힘으로 입천정을 뚫어 버리는 것 뿐입니다.- 대두자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최후구결을 완성했다. 그리고 혈존에 전해주 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한 해석구결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이 혈존 이 대두자를 죽이지 않고 또 죽이지 못했던 이유였다. 대두자는 최종 혼돈구결의 해석구결대신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훼방법을 연 구했다. 자신을 가두고 인간 이하로 만든 혈존에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혈지존에게 넘어갔다. 혈지존의 최후의 힘인 쌍영마공의 합일 마공은 가늘은 지풍으로 변화되었 다. 그거은 안돼라고 소리치려는 백이충의 입 속으로 파고 들었고 입천정 을 뚫고 뒤통수를 뚫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혈존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두번째 죽음이었다. -------------------------------------------------- 혈존무적3.txt 제 목:[연재] 혈존무적-옥룡왕의 정체 관련자료:없음 [1953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17 20:42 조회:1288 <옥룡왕의 정체> 악도와 천기노인은 도망치듯 화산에서 벗어났다. 혈존의 흔적을 모용충 의 몸에서 발견한 두사람의 온 몸에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평소에 스스 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혈존에 대한 두사람의 공포는 컸다. 실재로 혈 존의 흔적을 발견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멈추지를 않는 것이 다. 혈존이 이혼통제대법이라는 전설상의 사술을 익혔다는 심증을 굳힌 그들의 마음은 공포로 가득했다. 혈존이 스스로 나서지 않고도 분신을 통 해 천하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도의 기둥이라는 모용충이 혈존의 분신으로 농락당할 정도라면 마련이나 기타 전대기인 들중에도 혈 존의 숨은 분신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마련과 백도맹의 싸움도 혈 존의 각본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두사람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혈존이 지켜보기라도 하는양 부랴부랴 화산을 벗어났다. 공포로 인 한 전율은 섬서를 벗어날 때까지 끄치지 않았다. 하남 백도맹의 총단 근 처에 와서야 겨우 떨림이 멎었고 하북에 들어서서야 마음을 진정하고 냉 정하게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악도와 천기노인은 자신의 뒤를 쫓는 또다른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평소 냉철한 이 성을 갖고 있었다면 절대 범하지 않을 실수였다. 악도와 천기노인은 북경에 들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경은 하 북에 있는 백도 북부 두 개 총단 중의 하나가 있는 곳이다. 하남에 못지 않은 백도의 본거지이기에 절대 혈존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안심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설마 북경이야말로 혈존의 환생인 백이충의 본가 가 있는 곳이라고 둘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요리점이라는 용화루에 두사람이 들어섰 다. 안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떠들썩하고 있었다. 모두 사천과 화 산의 백도패배 소식과 사대 대첩에 관한 소문이었다. 솔직히 섬서에서 백 도는 패하지 않았다. 패하여 물러난 것은 마련 측이고 혈사황이었다. 백 도는 섬서의 관문을 굳건히 지킨 것이다. 허나 워낙 백도의 피해가 큰 탓 에 섬서조차 마련에 패한 것처럼 사람들은 떠들었고 대신 천하를 지배하 던 백도를 연전연패시키는 가공할 마련조차 물리친 새로운 영웅들을 환호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척 떠들어 대었다. "마련의 세력이 그토록 강하단 말인가?"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백도는 사천에서도 패했고 섬서에서도 패한 것 과 마찬가지이지. 게다가 섬서의 화산파는 소림 무당과 더불어 구대문파 세 개 기둥중의 하나라고 자부하던 대문파가 아닌가? 이번 마련의 발호 에 구대문파 중에 무사한 문파가 몇 개나 되는가? 공동파는 아예 짐을 싸 들고 백도맹 총단으로 피신을 왔다고 하더군." "아이쿠. 그럼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거야? 마련의 힘이 백도를 앞도한다 면? 앞으로 과거 혈존 시절처럼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건가? 혈천마 련이라는 것이 과거 혈천마궁의 후신이라며?" 대충 떠도는 소리는 사천과 섬서의 백도 패배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 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래를 비관하는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네. 백도에는 그래도 무적장왕과 혜경 성승 두 성인이 있지 않은가? 아직 마련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닐세. 그 리고 마련에 칠마황이 있다면 이번에 새로이 나타난 마련의 천적 일황 삼 존도 있지 않나? 백도와 마도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일황 삼존이 백도를 도울테니 마련은 결코 천하를 차지할 수 없을 걸세." "백도의 일황 삼존이라니? 그건 뭔가? 천무삼성은 들어봤어도..." "천무삼성은 이제 흘러간 이름, 과거 혈존 쌍마 천무삼성 시절의 이름이 지. 지금은 일황 삼존과 마련 칠마황의 시대라네." 요즘들어 부쩍 소문이 돌고있는 일황은 누구인가? 천무삼성을 대신하여 천하를 구원할 존재로 백도의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르는 인물. 바로 무적 소야 모용풍을 말함이다. 무적소야 모용풍은 섬서에서 혈사황을 물리치 며 무적일황이라는 새로운 별호를 얻으며 천무삼성에 버금가는 이름을 손 에 넣었다. "아, 무적소야 모용풍 말인가? 그런데 그는 현무도선을 죽인 백도의 반역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백도의 구세주인 일황이라니? 어떻게 된건가?" "무적소야란 말은 과거의 명호일세. 이제는 일황 무적일황 모용풍일세. 반역자라는 말도 실상은 천무삼성 중의 현무도선께서 마련의 함정에 빠졌 을 때 본신 내력을 그에게 전수하고 마도에 일격을 먹이기 위해 숨겨왔기 에 퍼진 헛소문일세. 그야말로 무적일황은 백도의 구세주일세. 마련의 이 인자인 혈사황을 그가 물리치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마도 의 칠마황을 감당할 정도의 일황 즉 무적일황 모용풍이라고 부른다네." "알았네. 그럼 삼존은 이번에 마련을 패퇴시킨 사대 대첩의 주인공을 말 하는 것이겠군." 삼존 흑철존 곤무악은 철마황을 물리쳐 그 이름을 귀주와 운남에 떨쳤고 귀영신군은 천뇌교를 물리침으로서 천뇌교의 정통을 인정받아 천뇌존이라 는 이름을 얻었으며 현황방의 방주 만승패검은 상계를 발아래 두고 단향검군의 후예임이 알려 지며 황금존이라는 이름으로 단번에 그 이름이 천하의 구성으로 떠올랐 다. 이제 백도맹 천하는 물러갔다고 용화루의 사람들은 공공연히 떠들고 있었 다. 천무삼성과 무성 종리연의 시대는 가고 일황 모용풍과 삼존이 주관하 는 백도시대가 왔다고. 이제는 백도맹과 마련의 싸움이 아니라 마련 칠마 황과 삼존이 돕는 백도 일황과의 싸움이며 그 승자가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떠드는 것이다. "흥.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입을 지껄이는 군." 악도는 용화루의 주객들이 떠드는 소문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악도의 말 을 듣고 천기노인은 이해가 안간다드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왜?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지 않는가? 섬서를 지켰다 하되 화산과 종남 은 거의 멸문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니... 구대 문파 중의 무려 일곱이 마련에 의해 패망했으니 백도맹은 종이호랑이로 인식되어도 할말이 없지 않는가?" "천기노인까지 왜 그러시오? 화산의 피해가 뜻밖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른 문파는 백도맹에서 버리는 패였소. 중원 외곽지역에 있는 그들 문 파 모두를 구원할 수 없기에 백도맹은 그들에게 백도맹 총단으로 피할 것 을 권유했소. 문파를 부흥시킬 어린 제자들과 알짜배기 장로들은 처음부 터 아예 백도에서 뒤로 빼돌린 상태였었소. 이번 전투에서 쓰러진 문파들 은 백도맹에서 마련의 힘을 알아볼 가늠자로 사용하기 위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남겨둔 세력이었소. 문파의 전통과 이름을 위해 각파의 장문인 들이 고집하여 일대 제자들과 함께 남아 목숨을 걸었던 거요. 두고 보시 오. 다시 백도천하가 된다면 십 년이내에, 지금 패망했다는 칠대문파가 몇 배나 되는 세력을 가지고 다시 무림에 화려하게 등장할 테니."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백도의 기둥 일곱이 쓰러졌으니 백도맹의 타 격이 큰 것이 아닌가?" "백도맹의 타격이 클 것도 없소. 얼굴로 따지자면 백도의 얼굴은 구대문 파이겠지만 실력으로 따지자면 백도의 힘은 오대세가요. 그리고 화산의 피해가 아무리 커도 화산 동혈에 은거하던 도인들이 나서면 금방 세력을 회복할 것이니 잠재력으로 따지자면 화산의 피해는 소털 중의 하나가 손 상된 정도요. 또한 소림 무당 화산 셋이 건재하면 패망한 다른 문파의 전 력의 서너 배이니 구대문파로 전체로 따져도 피해는 미미하오. 진짜로 타 격을 입은 것은 힘이나 실력이 아니라 명분과 체면이었소. 하지만 백도맹 은 그것을 기꺼이 감수했으니 과거의 고리타분한 백도맹이 아니오. 그리 고 오대세가는 하나하나가 소림이나 무당에 못지않소." 악도의 설명에야 천기노인은 겨우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들이 앉은 좌석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요." 악도와 천기노인이 뒤를 돌아보니 관복을 입은 위사차림의 남자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들 뒷 좌석에 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포권을 하며 악도에게 말을 걸었다. "소생은 삼왕부의 시위 왕정이라 하오이다. 본의아니게 뒤에서 논의하시 는 말을 엿듣게 되었소. 청컨대 소생들과 합석하여 해박한 고견을 들려주 심이 어떠하시오?" 삼왕부라면 황제의 두 번째 아우인 옥룡왕부를 말하는 것이다. 당금 천하 의 최고 권력자로 황제도 두려워한다는 옥룡왕 주원호가 있는 곳이다. 삼 황자시절의 주원호는 일개 풍류공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옥룡 왕은 진면목을 드러내어 천하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지금 개인적으로 수천의 사병을 거느리고 동창을 수족으로 부린다고 한 다. 옥룡왕부의 군사들이 황도를 제멋대로 활보하고 있어도 이를 논의하 는 신하가 없을 정도이다. 재력으로는 금황벌을 사주하여 상계 쪽에도 막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권세 쪽으로는 조정 삼대 파벌 중에 가장 세력이 큰 학림파의 배후를 자처하고 있다. 천하는 언젠가 옥룡왕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로 옥룡왕 주원호는 황제의 위엄과 권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게다가 인물이 준수하 고 성품이 호탕하며 마음이 너그러워 백성들의 인심을 얻고있는 자이기 도 했다. 옥룡왕부의 시위라면 호위무사를 뜻하는데 원래 재상 집의 똥개가 없는 집의 사람보다 신분이 높다는 말도 있는 판이다. 옥룡왕의 권세 덕에 일 개 왕부의 호위무사의 자리는 금의위나 동창도 한발 양보하는 자리였다. 그런 자가 불렀으니 악도로서는 꺼림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장소 가 황도인 북경이고 상대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의 옥룡왕부 무 사이니 악도도 공손히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강호에서 굴러먹은 하찮은 늙은이에 불과하오다. 감히 높으신 나 으리에게 실례를 범할까 두렵소. 강물은 우물물을 침범하지 않는 법이니 나리께선 이 늙은이의 사정을 봐주셨으면 하오." 강호의 인사는 관부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니 좋게 말할 때 상관하지 말라 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하지만 범같은 인상의 호위무사는 직접적으로 말 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자인 모양이었다. "하하. 실례라니. 그런 걱정 마시오. 왕야께서 강호의 인사들을 좋아하시 고 대접하시니 우리 아랫사람들도 강호의 인사들을 좋게 보고 있소. 그래 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친분을 맺을 기회를 노린다오. 이제보니 노인장들의 식견이 보통이 아니니 나의 견문을 넓혀주시기 바라오." 악도와 천기노인이 보아하니 왕정이라는 자가 두사람에게 나쁜 마음을 먹 고 있는 바도 아닌 것 같고 호의를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혈존을 탐색하며 자신의 종적을 감추고 있는 자인데 남의 이목을 끌 어 좋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둘이 주저하자 왕정이 아예 일행을 이끌고 자신들이 앉아있던 탁자를 움직여 두 노인의 자리와 붙여버리는 것이었 다. 그 바람에 용화루의 좌석배치가 이상하게 헝클어졌지만 왕부의 무사 가 하는 일에 용화루의 점원이 감히 불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어영부 영하는 사이에 악도와 천기노인은 왕정의 일행과 합석하게 되었다. "본인은 아까 말했듯이 삼왕부의 삼급시위 왕정이라 하고 이쪽은 구문제 독부의 포교들이오." "노부들은 이름없는 필부들이니 밝힐 이름도 없소이다." 퉁명스런 악도의 말에 왕정의 눈치를 보고있던 포교들이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왕정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가만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큰 소리만 쳐왔던 포교들의 입장에서 늙은이 둘의 뻣뻣함은 아무래도 마음 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헛. 아무래도 노인장들은 이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려. 그런 데 방금 전에 백도의 세력이 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련을 능가한다는 말 씀을 하신 것 같은데." "백도가 마련을 능가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소. 단지 백도의 힘이 마련 에 의해 꺽이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오." 악도의 냉냉한 말에 왕정도 점차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마 음을 먹고 있다고 해도 상대의 푸대접이 너무 심한 것이다. "백도의 힘이 꺽이지 않았다는 말은 곧 마련을 능가한다는 말이 아니오?"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오? 이 늙은이의 소견으로 백도가 천하 대국을 주 지하는 위치를 차지했을망정 실제적 힘은 마련이 백도맹을 훨씬 능가한 다고 보오." 왕정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아하니 왕정은 백도맹의 열렬한 추종 자인 것 같았다. 중인들이 모두 백도맹을 깍아내리는 와중에 악도가 백도 맹이 건재하다는 의견을 내었기에 동지를 만난 듯 합석했거늘 점차 악도 의 말이 왕정의 뜻과는 달리 가는 것이 아닌가? "백도는 운이 좋았소. 과거 마련 칠마황의 능력으로 보건대 섬서에서 패 했다면 백도맹은 마련에 완전히 패망당했을 거요. 그 정도로 마도와 백도 는 전력 차이가 있소. 하지만 사대 대첩이 발생했으니 마련이 새로운 강 자들을 견제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백도맹은 삼존과 연합하여 겨우 백중세 를 유지할 수 있었을 거요. 그런데 섬서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바람 에 일황의 가세로 백도는 기세가 오르게 되었소. 아마 수많은 무인들이 백도맹에 합류하고 더 이상 마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 덕에 간 신히 백도맹은 천하의 대국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소..." "너무 백도를 얕보는 것이 아니오? 아까 노인장들끼리 말하던 것과는 틀 리지 않소?" "백도가 패망할 정도로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 뿐이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소. 백도의 힘이 딸리지 않았다면 굳이 섬서에 전력을 집중시키 지 않고 바로 신강으로 쳐들어갔을 거요. 그러고도 백도맹은 섬서에서 패 할뻔 했소. 모용풍의 출현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소." "무적일황 모용풍도 백도맹 소속이오. 그렇다면 그의 출현도 결국 백도 의 힘이 아니오?" "정말 그럴까? 노부는 모르겠소. 언제는 천하의 반도라 욕하더니 오늘은 백도의 구세주라... 하하하. 정말 조석지간으로 변하는 것이 백도의 마음 이라." "뭐라? 노인장들이라 참으려 했더니 천하의 협사들을 모욕하다니. 어이하 여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오?" "그러길래 애초에 실례를 범할 것 같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소? 귀먹어리 였단 말이오?" "으으... 노인장들은 지금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거요?" "저자는... 으으. 그자다. 바로..." 용화루의 백장 밖, 어느 저택의 지붕에서 용화루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앉아있는 자의 입이 절로 열렸다. 그는 술 항아리 하나를 옆에 끼고 있었 는데 술 항아리 안에는 놀랍게도 용화루의 정경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 다. 술 항아리로 악도를 엿보고 있는 자, 몸은 되살아난 천마지존 혁련광 이되 정신은 강림한 백이충의 것인 분신이었다. "번뇌천이 알려준 자의 얼굴이다. 둘 다 마찬가지이다. 저 둘 중 하나는 잘 알고있는 자이다. 저자를 죽이고 싶다. 으으... 그런데 저 자가 누구 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마지존은 악도와 천기노인을 섬서부터 미행해 왔다. 당장 이 둘을 처죽 이지 않은 것은 천마지존의 정신감응을 받은 백이충이 말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의 정체와 배후를 알고자 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천마지존의 몸에 영혼을 강림시켜 직접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자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필시 보통 악연이 아니다. 게 다가 이 증오감... 도대체 누구인가?" 백이충이 천마지존의 몸으로 머리를 감쌌다. 깨어질 것 같은 영혼의 기 억 속에 얼핏 한마디가 정신을 울린다. - 그 여자를 그처럼 얻고 싶다면 강제로 취하면 되잖아. - 두근! 마화타에 의해 강화된 천마지존의 심장이 울린다. 악도의 모습을 비추던 술항아리가 백이충의 분신의 손에서 깨어져 버린다. 술이 지붕위에 쏟아 졌다. 자욱한 술향기가 퍼진다. "강제로 취하라고? 산산을 힘으로 얻으라고...?" - 나는 영원한 너의 편. 너의 수족이 될 것을 맹세하겠어. - "그래. 그리고보니 너는 어릴 때부터 나의 곁에 있던 자였어." -여자는 어차피 여자. 배교의 교주가 될 네가 천한 계집 때문에 고민하 면 안돼.- 두근 두근! "천하다고? 산산이 천하다고? 누구냐? 누가 감히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녀의 방에 음락분을 뿌려놨어. 너는 들어가서 열매 만 따 먹으면...- "감히. 산산에게 음약을 뿌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커억. 용서... 용서해줘. 나를 벌할 때가 아니야. 빨리 그 여자에게 가 야... 부디 내 충정을 믿어줘. 그건 네가 원하는 것이었어. 단지 네가 원 하는 그녀를 취하도록 도왔을... - "언제나 그랬어. 심지어 네 놈은 내가 가장 순수하게 대해야할 소중한 존 재에게 숨겨두었던 가장 추악한 본심마저 눈치채고 더러운 욕망을 충족하 게 만들었어. 이놈. 전. 일. 비!" 백이충의 입에서 갈라져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악산 산에 대한 기억이 터져나오며 백가량이라는 인격의 특성이 강하게 표출되 는 듯. 눈에서는 혈광이 번뜩이고 무시무시한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왔 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붕위 백가량의 종적이 발견되었다. 조용히 지붕 위에 있던 그가 난리를 떠는 모습에 그가 올라가있는 지붕의 주인, 정대 인의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정대인의 하인들이 대낮의 대담한 도둑이 라 욕하며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 네가 그렇게 말했다. 백년도 넘는 세월을 가진 나의 친구 여. 내 욕망과 야망을 양분삼아 내 추악한 부분을 자극시킨 친우여. 나 를 가장 잘 알고있는 죽마고우여. 그래. 그때 네 충고는 언제나처럼 매 우 유용했고 나를 만족시켰다. 내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사랑을 나 는 스스로 욕망이란 이름앞에 더럽힐 정도로... 전.일.비." 천마지존의 몸에 백이충이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렸다. 얼마전 악몽을 꾸 고난 직후처럼 악산산에 대한 강한 기억의 자극에 지금 천마지존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은 온통 백가량의 인격에 의해 물들어 버렸다. 전일비. 어떻게 그 이름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 혈존의 욕망과 살욕을 자극하는 존재. 가장 어둡고 추악 한 부분을 스스로 혈존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던 존재. 너무나도 자연스럽 게 백가량의 머리에서 전일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힘으로 반항하는 산산의 몸을 차지했지. 추악한 욕망을 만족 시켰어. 괴로워하는 그녀를 억지로 겁탈했고 그녀가 아직도 처녀임을 감 격해 했지." 악산산과의 추억이 다시 떠오른다. 몸을 빼앗기고 거의 넋이 나가있던 악 산산. 그녀의 모습에 얼마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던가? 하지만 백가량 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몸만으로는 악산 산에 대한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녀의 앞에서 개 흉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산산이 백가량 에게 마음을 열고 환한 미소를 지을줄 알게 되었는데... "커-어-억." 백가량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질렀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오기 시 작했다. 어떤 것을 기억해내는 것을 영혼이 거부했다. 스스로 그 이후의 기억을 상기해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너무나 심했다. 두려웠다. 싫었 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전일비. 너는 죽어야 한다." 그의 두 눈에서 자욱한 살기가 퍼져나갔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정대인 저택의 호위무사들이 지붕위에 나타났다. 자신만만하게 저택의 호 위무사들이 소리쳤다. "대담한 도적 같으니.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모르지만 순순히 포박을 받 아..." 콰콰쾅. 백가량은 정대인 저택의 소동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단 지 용화루를 향해 몸을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 라진 직후 어리둥절하던 호위무사들이 모습이 먼지처럼 스러지기 시작했 다. 마술처럼 사람의 모습이 피먼지로 화해 허물어지자 그를 지켜보던 저택 밑의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에 저택의 지붕이 백가 량이 있던 지점을 중심으로 쩌억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무너져 내렸다. 건물이 가루로 화해 허물어지며 그 밑에 있던 하인들과 건물 속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콰르릉.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대낮 멀쩡한 하늘에 벼 락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천벌을 받은 자임이 틀림없다. 정산적인 자가 대낮 해가 멀쩡하니 떠있는 상황에 서 벼락을 맞거나 볼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으므로.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 치는듯한 소리가 퍼져나가자 북경시내를 오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북경에서도 유명한 주루인 용화루가 무너 지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듯 상층부터 시커멓게 그슬려 부숴지고 허물어 지고 있었다. "크크크. 그 사이에 도망가다니. 역시 악도 답구나." 헐렁한 장포를 가진 괴인이 반쯤 허물어진 용화루 허공위에 붕붕 떠 있었 다. 천마지존공. 너무나 놀라운 힘이었다. 백가량의 단 일격에 수 백평 규모의 거대한 건물 용화루가 허물어진 것이다. 설사 진짜 벼락이라한들 어찌 이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겠는가? 그러나 용화루를 허물어트린 백가량 의 기분은 별로 좋지 못했다. 악도를 놓친 것이다. 사람들이 용화루 주위에 몰려들었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거대한 건물이 폭삭 가라앉으며 무너졌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용화루의 괴변이 바로 이 괴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 람의 힘으로 누가 용화루같은 거대한 건물을 단숨에 반파시킬수 있다고 믿겠는가? 단지 사람들은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에 놀라워할 뿐이었 다. (안그래도 죽여야 할 놈이었다. 하물며 감히 나를 노리다니. 반드시 오 늘 죽여버리겠다.) 백가량의 몸에서 살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백가량에 물든 현재의 백 이충이 가끔 쌍노앞에서 드러내던 살기였다. 하지만 천마지존의 몸을 차 지한 백가량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그러한 살기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 런 살기가 갑작스런 용화루의 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몸에 소름을 돋게 만 들었다. "앗. 저기봐라. 허물어진 용화루의 위에 사람이 떠 있다." 누군가 백가량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백가량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그들의 눈을 완전히 무시했다. 혈 존시절 비위가 거슬린다고 해서 황궁까지 처들어갔던 백가량이었다. 남들 의 눈 따위 꺼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물며 백이충의 허약한 몸이 아니 라 천마지존의 강대한 몸을 지니고 있음에야. 포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무인들의 움직임도 간혹 보 였다. 북경은 황도인 동시에 백도맹의 북부 2단이 존재하는 곳이다. 절정 고수들이 없을 리가 없다. 갑자기 황도 한가운데에서 유명한 용황루가 이 유없이 쓰러진데다 수상한 자가 떠있으니 포교와 고수들이 몰려드는 것이 다. 백가량은 주변에 몰려드는 고수들의 기척을 느끼며 슬며시 몸을 감추 려 했다. (크크크. 감히 본좌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피의 축제를 열고 싶지만 악 도 전일비 그놈을 오늘 반드시 죽여야 한다. 시끄럽게 굴다가 본좌의 정 체가 드러나면 악도 그놈이 아예 꽁꽁 숨어버릴 염려가 있어.) 백가량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닌지 두 눈을 의심할 따름이었다. "옥룡왕부라니. 전일비가 왕부에 들어갔단 말인가?" 북경의 서쪽에 황궁에는 못미치나 거의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저택이 있 었다. 당금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느 옥룡왕부였다. 술법으로 찾은 악도의 기척은 옥룡왕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왕부의 호위무사를 만났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나? 악도가 배후와 만 나기위한 접선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전일비의 배후가 옥룡왕이고?" 백가량의 어조에 뜻밖이라는 투는 있었지만 놀람이나 꺼리는 기색은 없었 다. 배후가 옥룡왕이라면 옥룡왕을 처치할 기세였다. 황제도 비위에 거슬 리면 죽이려 한 자가 혈존 백가량이니 옥룡왕인들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그동안 너무 유약했어. 분신의 몸을 이용하여 모조리 쓸어버리면 될 것 을." 백가량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백이충은 백가량의 기억을 가지 고 점차 그에 동화되었으되 기본적으로 백이충의 사고를 근본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군부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금혜연을 위해 혈존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 무림에 뛰어들었다. 되살아난 백가량의 인격과 동화 되면서 야망이 생긴 이후에도 백이충은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약점과 자 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일단 머리와 계략으로 모든 일을 이끌 어나가려 했다. 지금의 백가량은 백이충의 인격이 전혀 없는 순수한 혈존 백가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이충의 기억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백가량이든 백이 충이든 어차피 다른 인격과 기억을 가진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도 백이충의 계획과 기억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가량은 자신 의 능력에 대해 철저히 확신하는 자였다. 또한 지금만은 장군부나 금혜 연 따위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돌아가는대로 계획을 변경하겠다. 모용풍의 몸을 이용해서 남은 천무이 성의 두 놈을 처죽이고 백도를 장악하는 거다. 또한 혁우비의 몸을 이용 하여 천년마교와 혈사문을 장악, 배반한 일곱 놈과 일곱 노물을 처죽인 다. 다른 분신을 이용하여 백도 마도를 제외한 세력을 규합하고 첫째와 둘째를 찾아 죽여버리면 천하에 본좌를 거역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흐 흐. 혈천마궁을 다시 부활시키리라." 훌쩍 백가량의 몸이 옥룡왕부의 담을 넘어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 수한 화살이 백가량의 몸으로 쏟아졌다. "뭐야? 왕부의 경계가 철저한 건가? 아니면 기다린 건가?" 백가량이 호신강기를 두르니 화살이 몸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우수수 떨 어졌다. 천마지존의 단전에는 수많은 마교 대종사들의 내공이 합쳐져 있 었다. 적어도 내공이 마르거나 부족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 궁왕이 쏜다 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혈존이었다. 백가량이 눈을 들어 보니 거대한 왕부 담장너머 후원이 하필이면 무사들 이 수련하는 연무대였다. 수많은 호원 무사들이 몰려 서로 검을 겨루며 수련하고 있었다. 그 수가 수백은 되어 보였다. 또한 한 쪽에는 궁술 수 련장인 듯 과녁이 있고 오십 명 정도의 궁수들이 궁술을 수련하고 있었는 데 백가량이 넘어온 곳이 바로 궁술 수련장의 과녁이 있는 바로 뒷 담이 었다. 갑자기 연무장의 궁술 과녁 뒤로 침입자가 불쑥 나타나자 과녁을 겨냥하 던 궁수들이 제일먼저 놀랐다. 곧 궁술대장은 그가 침입자임을 알고 궁수 들에게 과녁의 변경을 알렸다. 그 바람에 백가량은 담을 넘자마자 수많 은 화살세례를 받은 것이다. 장대비 같은 화살비 속에 백가량은 태연하고 그 주위로 우수수 화살이 쏟 아지자 궁수들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가려 뽑은 명사 수들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눈알도 맞추는 궁수들인데 그런 화살을 무 용지물로 만드는 백가량의 신위에 놀란 것이다. 궁수들이 웅성대자 백가 량의 출현은 즉시 연무하는 호위무사들에게도 알려졌다. "흐흐.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잘됬군. 옥룡왕을 제물 로 본좌 혈존의 건재를 세상에 드러내리라." 백이충과 쌍노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백가량은 서슴없이 하며 옥 룡왕부로 걸어들어갔다. 일부러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으나 이왕 들 킨 것 혈존 체면에 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산책 을 하는 듯 여유로웠다. "쳐라. 왕부의 침입자다." "강호의 무뢰한이다. 하나이니 사로잡아라. 그 배후를 캐내야 한다." "어리석은 자. 왕부가 용담호혈인줄 모르고 잠입하다니." 그의 태평한 모습에 호원무사들이 분노하여 백가량에게 덤벼들었다. 그 들 역시 이십년 넘게 옥룡왕이 기른 정예무사였다. 수백명 전부가 일류 의 경지를 훌쩍 넘어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실로 십년만의 침입자로다. 환영의 의미로 일격에 제압하리라." 호원무사의 장을 맡은 중년인 하나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칠 팔장을 훌쩍 넘어 덮쳐왔다. 금의위 출신의 절정고수로 황궁에서 임무를 맡아 강호를 떠돌 때도 적수를 만나지 못해 은근히 무림인을 무시하던 자였다. 금의 위 천호까지 지위가 올라갔던 자로서 오만하되 그 능력만은 인정받을만 하여 옥룡왕부에 들어가 오백의 호원무사들의 대장이 된 자였다. "날파리 같은 것." 백가량이 냉소하며 가볍게 장을 날렸다. 천마지존공 최후의 초식. 천마현 세. 과거 팔대천마의 수좌인 천마조차 필살의 절초로 아껴두던 비장의 절 학이다. 그만큼 위력이 크고 내공소모가 심하다. 하지만 무한한 내공을 가진 천마지존의 육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강시보다 더욱 단단한 괴물. 역대 마교 대종사들의 육체의 짜깁기에 부활의 술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괴물이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한계도 이 괴물같은 육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천마현세같은 절기를 삼류 절기처럼 가볍게 사용하는 것이다. 콰콰콰쾅! 일장에 삼층 높이의 건물을 반파하는 위력의 장력이다. 군문의 대포도 이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리 없다. 당연히 인간의 육신이 견딜수 있을 리가 없다. "크아악." 앞장섰던 호원대장 중년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 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흔들리고 크기가 방원 십오장에 깊이가 일장 이나 되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그 범위안에 있던 이십여명의 인간 의 육체가 허무하게 고기 덩어리로 바뀌었고 주위에 있던 사십여명이 팔 다리에 충격을 입고 중상을 당했으며 백여 명이 기파의 충돌에 내상을 입 고 쓰러졌다. "괴물이다." "세상에 저런 장력이! 만근 화약보다 더하다." "과거 마도 제일의 장력을 자랑하는 벽력지존도 저정도는 아니었을 텐 데." 호원무사들이 일제히 두려움에 떨며 물러섰다. 일장에 삼분의 일에 해당 하는 사상자가 생겨났으니 그럴만 하다. 평소에 왕부의 권세를 믿고 안하 무인을 떨던 호원무사들이었으나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의 무인을 보고 질 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가량이 성큼 다가서자 일제히 호원무사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리고 일제히 얼굴을 붉혔다. 왕부를 호위하는 무사 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적에게 물러섰으니 이는 치욕적인 일이라 아 니 할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백가량은 너무나 두려운 상대였다. 만일 그의 정체가 혈존이라는 것까지 알려졌다면 일제히 뒤도 안보고 달아났 을 것이다. "천마지존공. 귀하는 누구이기에?" 후원 뒤의 정자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가량이 오만한 눈 빛으로 둘러보다가 미약한 파장을 눈빛에 드러냈다. 뜻밖에 정자에서 나 타난 백의 중년인은 그도 잘 아는 자였다. (절정마유가 아닌가? 팔대천마의 하나인 천유와도 비견되는 삼십 년 전 천하 삼대 두뇌의 하나. 천년마교의 초청은 물론 나의 초청도 거부한 자 이다. 괘씸해서 죽이려 했지만 교묘하게도 행방을 감추었지. 저런 자가 왜 여기에?) 무시할 만한 자는 아니었지만 혈존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 되는 자는 아니 었다. 오만한 백가량의 걸음걸이에 은근히 절정마유의 안색이 붉어졌다. "소생은 절정마유라는 사람으로 왕부의 삼총관을 맡고있소. 감히 왕부를 침입한 귀하는 누구요? 마련의 인물이오?" "흥. 너는 나에게 질문할 자격이 없다." 백가량이 절정마유의 체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옥룡 왕부의 저력에 약간 놀랐다. 절정마유가 왕부의 귀빈도 아니고 겨우 삼총 관에 불과하다니. 도대체 옥룡왕부에 얼마나 많은 기인이사가 몰려있단 말인가? 물론 백가량은 자신의 발을 저지할 만한 자가 왕부 안에 있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귀하는 너무 오만하군. 설사 천마황이라도 옥룡왕부에 마음대도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늘." 오만한 백가량의 어투에 얼굴 가득 노기를 띤 절정마유가 손을 들었다. 즉시 후원 쪽으로 금의 무사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백가량이 한눈에 보기 에도 보통 자들이 아니었다. "왕부에는 삼천 무사가 있소. 무사에는 다섯 등급이 있는 데 가장 등급 이 낮은 계급이 방금 귀하가 물리친 백의 무사이오. 금의 무사는 세 번 째 중간 단계의 무사들이니 어디 귀하의 실력을 확인해 보리라." 절정마유가 지휘하자 일정한 진세를 이루며 금의 무사 삼백 육십명이 백 가량에게 다가섰다. "한마디 하자면 본인을 비롯한 왕부의 몇몇이 천하 고금의 으뜸이라는 백 도 흑도의 절기를 상대할 절진을 만들었다는 것이오. 이들은 전문적으로 천마지존공을 상대하기 위한 천마포박진을 익힌 자들이오. 상대하기 쉽 지 않을 것이오." "헛소리." 진법으로 천마지존공을 상대한다? 백가량은 믿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한 계에 이르는 최상승무학이 사대마도절예이다. 천마지존공은 그 중에서도 최강의 마공이다. 진법의 으뜸이라는 소림사 백팔나한진 조차도 천마지존 공으로 열합 이내에 깨부술 자신이 있는 백가량이었다. 그런데 왕부의 무 사들이 엉성하게 짠 병진이 천마지존공을 막는다고? "천마현세." 대뜸 백가량이 천마지존공을 날렸다. 뭉클한 암흑의 마기가 구름처럼 금 의 무사들에게 날아가자 절정마유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천마지존공의 최종 절기를 저토록 가볍게." 절정마유가 즉시 손에 든 섭선을 마구 흔들었다. 그것이 진법을 지휘하 는 지시라도 되는 듯 삼백 육십명의 금의 무사들이 삼조로 나뉘어 각기 앞에선 자의 등에 손을 뻗고 격체전력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맨 앞에 선 삼인이 뭉클거리며 덮쳐오는 암흑마기에 삼면으로 손을 뻗었다. 콰콰콰쾅. 다시금 지진이 일어난 듯한 굉음이 울리고 백가량이 서너걸음 물러섰다. 부활의 술로 시체가 움직이는 몸이라 생혈이 없어 그렇지, 하마터면 내상 을 입고 피를 토할뻔 했다. 반면 삼백 육십명의 금의 무사들은 일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백가량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겨우 삼백 육십명으로 천마지존공을 막았어?" 삼백 육십이라는 숫자가 겨우라는 단어와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러나 홀로 천명이고 만명이고 대적하여 죽이고 패배시킨 경험이 있는 혈 존이다. 변황을 돌 때는 홀로 변황 일천문파의 지존들을 사흘 낮밤에 걸 쳐 주살한 적도 있다. 그들 하나하나의 무공은 중원 구대문파의 장문인 에 못지 않았다. 지금 천마지존의 몸으로 발휘하는 천마지존공은 혈존 시절의 쌍영마공의 위력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천마현세라 면 삼백 육십덩이의 핏덩이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삼백 육십명에 달 하는 일개 호원무사들은 단지 한걸음 물러섰을 뿐이다. 절정마유가 다시 부채를 흔들자 금의무사들이 달려들었다. 일정한 진형 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 고도의 진법에 맞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 는 모습. 하지만 백가량은 대경실색하여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세수역근신공. 세수역근신공의 무리인가? 방금 전 달마삼검을 진법으로 표현하여 공격하고 있는 것인가?" 천무삽성이 합공을 한다해도 지금 삼백 육십명의 금의무사들이 펼치는 진 법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수십의 혜경성승이 있어 저마 다 달마삼검을 펼치고 있으며 백가량은 그 속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모습 이었다. 백가량의 놀란 외침에 그제야 절정마유가 미소를 지었다. "천마지존공을 제압하기 위한 진법을 구성하는 이론을 마공의 극성인 세 수역근신공에서 많이 빌려왔을 뿐, 천마포박진이 세수역근신공과 동일한 것은 아니오. 오히려 천마지존공을 제압하는 데에 있어서는 훨씬 효과적 이오. 팔대천마의 수뇌 천마일지라도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이오." (옥룡왕부. 단순한 일개 왕부가 아니다.) 백가량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그의 생각처럼 옥룡왕부는 범상한 곳 이 아님이 당연했다. 소림사의 진산지보인 세수역근신경의 무리를 이토 록 간단히 도용할 수 있는 곳이 범상한 곳일 리가 없었다. 절정무학은 권 세가 있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천하 절정무학을 상대할 진법을 왕부에서 연구했다고 했다. 천마지 존공의 극성에 해당하는 천마포박진만이 있을리 만무였다. 어쩌면 사대마 도절예와 삼대사도지학을 상대할 진법이 모두 구비되어 있는지도 모른 다. 어쩌면... 백도 십대극품절학마저 상대할 진법조차 있을지도... (이러한 능력을 지닌 자는 천하에 얼마 없다. 옥룡왕 주원호? 주씨 황실 의 멍청이들 중에 그런 기재가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본좌의 약점을 너 무나 잘 알고있는 악도까지 포섭했다면... 그정도로 본좌를 파악하고 있 는 자라면... 단 하나밖에 없지. 옥룡왕은 가짜다. 그자의 정체는 바 로...) "그러나 천마포박진의 불행은 처음만난 상대인 본좌가 천마가 아니라는 것이지." 백가량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퍼졌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4권 출간할 때 미처 연재 못했던 뒷부분 약간 이야기. 혈천마련의 대침략이 시작되고 사천에서 혈천마련은 대승을 거둔다. 섬서에서 화산 또한 혈사황에 의해 위기에 빠지는데 악도의 함정 으로 금혜연이 화산파를 도우러 오고... 그로인해 백이충은 모용풍을 파견하여 혈사황을 물리친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악도는 모용풍의 모습에서 전설적인 이혼통제대법의 수법을 상기해내고 경악하여 물러서는데... 그뒤를 혈존의 명을 받은 천마지존(이혼통제대법 분신의 하나로 역대 마교대종사의 시신중 하나를 천마강시화하여 만든 자.)이 뒤를 쫓는다. 그리고 사대대첩이라 하여 귀주, 감숙, 광서, 광동에서 혈천마련은 사천이나 섬서와 달리 대패하고... 제 목:[연재] 혈존무적-천마지존공의 패비 관련자료:없음 [19554]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19 16:59 조회:1266 ㅁㅁ 천마지존공의 패배 천마지존은 살아있는 몸이 아니다. 마화타가 되살려낸 몸에 부활의 술로 천마지존의 영혼을 불러낸 작품일 뿐이다. 즉 반은 강시오, 반은 되살아 난 괴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화타의 말처럼 마지막 공정이 가해지 지 않은 미완성의 몸체이다. 현재 천마지존의 겉모습은 완성되지 않아 몹시 흉측한 모습이다. 마치 엉 성한 바느질로 살조각들을 붙여놓은 듯한 모습. 걸레를 이어만든 듯 짜깁 기한 한 몸통의 추악한 모습은 헐렁한 장포로로 감추고 있었고 얼굴에도 평범한 남자의 인피면구를 하나 덮어 버렸다. 하지만 추악한 모습은 나중 에 마화타의 간단한 수술로 해결될 사소한 문제이다. 마화타가 가장 염려했던 것, 즉 최후의 공정이 남아있지 않아 부활의 술 로 불러낸 영체와 몸의 결합이 극히 불안할 것이라는 걱정도 단지 기우 에 불과했다. 부활의 술로 인해 불러낸 혁견광의 영혼은 이미 죽었던 육 체와의 결합에 아무런 거부도 하지 않았다. 마화타가 마지막 손질을 가 한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현재 천마지존의 상태는 부활의 술로 영혼과 몸 체가 찰싹 달라붙었다고 할 수 있다. 혁련광의 영혼은 술법의 금제로 백가량에 충성을 맹세했고 몸체는 영혼 의 전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이혼통제대법에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 미 천마지존의 술법 공정이 구할이상 끝난 상태이기에 부활의 술도 이혼 통제대법도 성공한 것이다. 미완성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를 제쳐놓고 속 알맹이 즉 천마 지존의 생전 능력은 그대로 복구되어 있었다. 천마강시의 튼튼함에 생존 해 있던 시절 천마지존 천마지존공의 화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몸에 마화타의 수술과 배교쌍노의 술법, 그리고 역대마종사의 단 전의 통합은 천마지존의 몸에 무한한 내공을 심어주었다. 이 몸에서 발휘 하는 마공은 백가량이 지금 가지고 있는 열 개의 분신 중에서도 최강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내공으로 발휘하는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마 저 천마포박진에 통하지 않았다. "아수라천마!" 백가량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새로운 이름이 쏟아져 나왔지만 백가량의 몸에서 퍼져나오는 검은 마기는 천마현세를 발휘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 것도 그럴 것이 아수라천마는 천마현세의 변형인 탓이다. 콰르릉! 다시금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백가량은 미소를 지 었다. 분명 그의 천마지존공을 억누르던 천마포박진의 제마(制魔)의 힘 을 아수라천마가 뚫어버렸음을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절대구식의 하나로서 손색없는 위력이었다. "크아아악." 최초로 옥룡왕부 금의 무사들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제마의 힘을 눌 러버린 것이다. 천마지존공의 최후 절기 천마현세는 버텼을지 몰라도 아 수라독존마공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를 천마지 존공으로 펼친 것만은 천마포박진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을 위해 혈존이 천하 마도의 모든 초식들을 모아놓았으니 이를 일컬어 절대구식이라 했고 이는 아수라독존마공을 터득하거나 쌍영 마공이 극성으로 성취되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다. 허나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 초식만은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의 변형이었기에 지금 천마지 존의 몸으로도 펼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반부 칠식과 후반부 이식으로 되어있는 절대의 무공. 이를 혈존은 절대 구식이라 불렀다. 아수라천마(阿修羅天魔) 아수라천사(阿修羅天邪) 아수라천지(阿修羅天地) 아수라환희(阿修羅歡喜) 아수라벽력(阿修羅霹靂) 아수라만상(阿修羅萬象) 아수라철갑(阿修羅鐵甲) 혈존은 아수라독존마공에 어울리는 절초를 얻기위해 사대마도절예 상의 마공들의 최후 구명초식과 삼대사도지학 사공의 최후 비전초식을 모아놓 았다. 흑도의 칠대 무공의 최후 절기인 일곱 개의 초식. 단 하나만 나타 나도 천하를 뒤흔든다는 흑도 최강 무공의 최후초식이니 그 위력을 말하 는 것은 입만 아프리라. 원래 최강의 절기라는 것은 마공이나 신공으로 대변되는 내공의 운용법 과 초식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초식은 내공을 밖으로 표출하는 수단이고 내공은 초식을 발휘하게 만드는 기본 동력이다. 이 둘중 어느 하나가 없 으면 아무리 절세의 무공도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다. 흑도최강의 절세마공(絶世魔功)의 비전(秘傳) 초식이라도 근본이 되는 마 공의 운기 방법을 빼놓고 모아놓은 초식은 기껏해야 건강체조나 춤에 불 과하다. 어차피 초식이라 함은 운용되는 내공과 운기로 끌어올린 힘을 최 고의 위력으로 표출하는데 사용되는 것. 호흡과 운기가 틀린 다른 내공으 로 운용하는 초식은 초식 자체의 무학이치가 아무리 오묘할지라도 몸에 맞지 않는 옷, 하찮은 걸레에 불과한 것이다. 절세나 절정, 초극의 위력 은커녕 운이 좋아야 일류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미완성이라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어떤 것인가? 바로 흑도 칠대무 학을 포함하여 천하 모든 마공을 포함한 마공중의 마공이 아닌가? 아수 라독존마공은 능히 흑도칠대무학의 최후초식을 비전 내공없이 전개할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독문 내공으로 초식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한 위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오히려 일곱 개의 초식이 아수라독존마공에 영향을 받 아 자연스럽게 변형되었으니...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의 무학이치에 따라 개조시킨 일곱 개의 초식이 바 로 절대구식 중의 전반부 칠식이었다. 아수라천마는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가 아수라독존마공의 영향을 받아 그 운기법에 맞게 변형된 것. 강의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이 바다에 나가 면 파도를 일으키듯 아수라천마는 같은 근본에서 만들어진 초식이되 천마 현세보다는 훨씬 고차원의 무학이었다. 또한 그 근본이 천마지존공이기 에 절대구식 중에 천마지존공으로 펼칠수 있는 유일한 초식이었다. 아수라파천황(阿修羅破天荒) 아수라멸천황(阿修羅滅天荒) 절대구식의 후반부 이식. 이것은 혈존이 혈뇌동, 즉 천명의 천재의 비극 을 만들어낸 곳을 통해 얻은 두가지 초식이다. 이는 오직 아수라독존마공 만으로 발휘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떤 마공이나 신공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초식이다. 따라서 혈존조차 그 위력을 짐작도 할수 없는 절대의 초 식. 아수라가 하늘을 깨트린다는 아수라파천황! 아수라가 하늘을 멸한다는 아수라멸천황! 이 두가지 초식이 천하에 나타나는 날 천하는 공포에 질식하리라. 아수라천마가 효과를 보이지 득의의 미소르 지었던 백가량은 뒤에서 맹렬 히 다가오는 암경의 힘에 깜짝 놀랐다. 천마지존의 몸에 담긴 천마지존공 의 힘에 극성이 되는 제마의 힘이 손 쓸 틈도 없이 그의 등을 후려쳤다. 버티려고 했지만 백가량은 끝내 몸을 바닥에 몇 번 굴리고 말았다. 그의 몸이 천마강시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으로 그는 끝 장났을 것이다. 방금 맞은 일격에는 현무도선과 혜경성승이 합격한 정도 의 막대한 성력(聖力)이 포함되어 있었다. "크으윽. 제법인 걸." "크으으윽." 백가량이 제빨리 일어나 중얼거렸다. 천마지존의 몸은 현재 상태로만 따 지자면 모용풍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아무리 진법을 응용한 다수라고 하 지만 당금 강호에 그런 천마지존의 몸을 운용하는 백가량을 땅에 뒹굴게 만드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삼개진으로 나뉘어져 백가량의 배후를 공격했던 자들도 신음을 지 르며 질겁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백가량의 몸을 뒹굴게 할정도로 위력적 인 위력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장력이 백가량의 등과 접촉한 사이에 맹 렬한 기세로 그들 전체의 진기가 백가량에게 빨려들었던 것이다. 진 자체에 포함된 제마의 능력 덕으로 기겁을 하며 간신히 백가량의 흡입 력을 뿌리쳤지만 만약 그들이 형성한 진법이 천마지존공의 상극이 되는 능력이 없었다면 세 번째 진에 포함되어 있던 자들 모두는 그대로 해골 이 될 때까지 진기를 빨렸을 것이다. "크윽. 백이십 명씩 삼열이었군. 본좌의 공격에 당한 것은 일진이고 배후 를 공격한 것은 삼진이로군. 단 하나가 아닌 세 개의 진이 뱀처럼 움직이 는 것이었군." 백가량은 잠시 방심한 것을 후회하다가 흠짓 놀랐다. 물러났던 일진의 금 의무사들이 경계하듯 그를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가량은 방금 전 자 신의 일격에 천마포박진의 일진 일백 이십 명중 태반이 죽었으리라 생각 했다. 그 정도로 아수라천마를 타고 흘러내린 천마지존공의 마기가 진법 의 제마기운을 사나운 기세로 갈갈히 찢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겨우 세명?" 광폭한 마기가 사람들을 휩쓸었다. 천마지존공의 지독한 위력은 스치는 모든 자를 마기로 새까맣게 태워죽이는 것. 고통과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 천마지존공이 제마의 기운에 눌려있을 때라면 모르지만 그것을 박살 낸 이상 마기에 휩쓸린 백이십 명이 모조리 죽어야 했다. 하지만 이리저 리 흔들거리며 마기에 휩쓸린 자들은 멀쩡히 일어났다. 천마지존공의 악 명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지 못한 자는 겨우 세명이었다. 그나마 진법에 방해되지 않도록 다 른 자들에 의해 즉시 치워졌다. 혈존의 최선을 다한 일격에 겨우 세명밖 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반면 죽지 않은 금의무사들 도 동료들에게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이 충격이었는지 그들의 진법이 미미 하게 어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배후를 감싸던 세 번째 진도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백가량을 공격하지 못 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삼개 진 중에서 일진이 일부러 공격당하는 유인 을 틈타 성공한 일격이 백가량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위기를 겪을뻔 했다는 것이 그들의 사기를 꺽어버린 것이다. "보의(寶衣)인가?" 백가량은 마기에 까맣게 물들어 썩어가는 세명의 시신 상태를 살피다가 그들의 의복만은 멀쩡한 것을 보았다. 천마지존공은 그 위력면에서 대포 와도 맞먹는다는 음양벽력공과 겨룰만하고 잔인하기로는 빗맞아도 반드 시 죽는다는 천사음유공과 흡사했다. 제대로 맞았다면 신체와 의복이 같 이 먼지로 화했어야 한다. 결코 멀쩡히 금의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 힐긋 보니 금의 안쪽에 복잡한 무늬가 쓰여져 있었다. 그제야 백가량은 금의가 단순한 보의가 아니라 술법중에 몸을 보호하는 주문이 담긴 부적 의 역할도 겸한다는 것을 알았다. 금의가 펼치는 보호주문이 천마지존공 의 악독한 마기를 막아내었기에 겨우 세 명만이 죽은 것이다. 금의무사들의 힘이 단순한 진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의에까지 있다 는 것을 알자 백가량의 등골이 더욱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방어복 외에 무기와 다른 것에도 수작을 부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장 무서 운 것은 진법과 보의의 위력이라면 금의무사 자리는 절정고수를 기를 필 요없이 가법게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천마포박진을 보았을 때 옥룡왕이 무서운 자라 생각했지만 이건 그의 생각보다 열배는 더 무서운 자였다. 하지만 싸늘한 백가량의 안색은 더욱 싸늘해졌다. 천마지존공이 백가량의 모든 것이었다면 백가량은 혈존이 아니라 천마지 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혈존은 혈존이다. 설사 몸에 천마지존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천마지존이 아닌 혈존인 것이다. 그리고 혈존이 무 적이었던 것은 단지 무공만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천마지존이 아니라 혈존이라는 것이겠지. 천마지존은 천마 지존공을 발휘하되 사술대법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거든." 일단 천마포박진을 깰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또한 천마지존공으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세명이 죽었다는 것은 마기를 막아주는 부적 자체인 보의가 전적으로 그들의 몸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백 가량의 몸에서 천마지존공의 마기 뿐만 아니라 사기마저 폭발적으로 쏟아 져 나왔다. 혈존이 왜 혈존이겠는가? 마공과 사공의 절정에 술법마저 자유자재로 부 리기에 혈존이 아니었던가? 과거에도 혈존만큼 마공을 성취한 자가 있었 다. 혈존만큼 사공을 성취한 자도 있었다. 혈존만큼 사술대법에 조종(祖 宗)격인 인물도 있었다. 혈존만큼 심계가 깊은 자도 있었고 혈존만큼 잔 인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몸에 갖춘 자는 없었다. 그러 기에 혈존은 무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혈존의 몸이 천마포박진을 형 성하고 있는 자들을 덮쳐갔다. 천마지존공의 마기를 전문적으로 제압하도록 되어있던 진법의 고수들은 천마지존공이 출현했을 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쥔 검 이 뱀으로 변하고 주위가 암흑으로 덮히고 또한 주위 동료가 악귀로 변 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 비춰질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리고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그들의 몸이 펑펑 터져 버리기 시작 했다. 처절한 비명이 옥룡왕부에 메아리쳤다. 옥룡왕부의 비밀 거실에는 세명의 남자가 있었다. 옥룡왕 주원호와 악 도, 그리고 천기노인이었다. 옥룡왕 주원호의 앞에는 여러개의 불빛을 발 하는 구슬이 있었는데 그중 반이 빛을 잃고 있었다. 옥룡왕 자신이라해 도 이렇듯 짧은 시일에 반 이상의 구슬을 꺼트릴 수는 없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옥룡 삼십육관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니." 주원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악도를 향했다.그리고 약 간 비꼬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정말 대단하네. 혈존 사부의 행방을 알아내라고 했더니 아예 직접 유인 해 올줄이야. 어쩐지 본좌를 직접 만나야 한다고 떼를 쓰더니 그게 혈존 을 본좌에게 유인하기 위해서였나?" 혈존 사부? 옥룡왕 주원호는 자신의 입으로 혈존사부라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 옥룡왕 주원호의 정체야말로 바로 혈지존이었다. 이십년 전 풍류 공자였던 옥룡왕 주원호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얼굴을 빌린 야망 가 가짜 주원호가 생겨난 것이었다. 이십년 간 황실에서 힘을 기른 혈지 존의 힘이야말로 혈천마련이나 백도맹의 것에 뒤지지 않는 힘이었다. "그는 혈존 자체가 아니라 이혼통제대법으로 몸을 빌린 분신에 불과하 오. 그러나 분신조차도 노부는 감당할 수가 없소. 그건 천하를 뒤져봐도 마찬가지요. 오직 혈지존, 그대만이 감당할 능력이 있기에 데려온 것이 오." "쿡쿡쿡, 팔대천마가 한꺼번에 덥쳐온다고 해도 막아낼 거라고 기대했던 옥룡 삼십육관을 거침없이 부수는 존재가 단지 분신이라... 과연 그정도 는 되어야 본좌의 사부이겠지. 그나저나 자신이 미끼가 되어 잘도 그가 추적해 오리라는 것을 예측했군. 그래." "모용풍을 보고 혈존은 이혼통제대법으로 분신을 만들어 활동한다는 것 을 알았소. 그렇다면 혈존의 뜻에 의해 틀림없이 다른 분신들 또한 활동 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 중 하나 정도는 노부를 죽이기 위해 찾을 것이라 생각했소. 북경까지 오는 동안 세 번 종적을 희미하게 드러내었으니 혈존 이 노부를 죽이려는 마음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쫓아오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악도는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설마 혈지존, 그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지는 몰랐소. 단지 혈존 의 정체를 알게될 거라는 말 한마디에... 그대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으 니 이제 그대는 아마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 할 것이오. 이제는 그대 를 찾아온 게 후회되오." "흐흐흐. 본좌가 옥룡왕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것 말인가? 상관없네. 분 신을 잡으면 혈존 사부의 위치를 알테고... 그를 제거하기만 하면 비밀 이 밝혀진들 누가 본좌를 감당하겠는가? 당금의 황제는 더 이상 본좌를 누를 힘이 없네." "......" 자신만만한 옥룡왕의 말에도 악도의 안색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옥룡 왕 주원호가 혈지존이라는 비밀은 천하 전체가 소란스러워질 만큼 아주 커다란 비밀이었다. 아직은 혈존의 존재를 밝히는 데 악도의 힘이 필요하 여 다독거리지만 혈존이 제거되면 혈지존은 악도 역시 비밀을 지키기 위 해 제거하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악도의 안색이 펴지지 않을 때 거실로 허겁지겁 절세마유가 들어왔다. 그 의 얼굴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을 본 듯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왕야. 큰일났습니다. 침입자가..." "삼총관. 천천히 말하게. 누가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고 절세마유라 하겠 는가?" 다급히 숨을 몰아쉬는 절세마유를 보고 혈지존이 혀를 끌끌 찼다. 그 모 습은 자상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절세마유가 간신히 진정하고 대답했 다. "침입자가... 침입자가 천마포박진을 파괴했습니다. 천마지존공을 발휘하 는 자에게... 천마포박진의 삼백 육십명의 금의무사가 전멸했습니다." "그런가? 너무 소식이 늦었군. 금의무사 정도야 아까운 것이 없지. 보의 와 보검을 챙기도록 하게." 너무도 담담한 옥룡왕의 말에 절세마유가 혼자 다급해 외쳤다. 그는 오룡 왕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있는 몇안되는 충북으로 그를 주군으로 받들고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자였다. "왕야. 천마지존공을 상대하기 위한 천마포박진이 파괴되었단 말입니다. 이는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준비가... 전부 다시 검토를 해야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알고있네. 하지만 걱정말게. 천마포박진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침입자가 너무 강한 것 뿐이니까. 그는 왕부의 저택에 뛰어들었고 옥룡 삼십육관에 유인되었네. 그리고 벌써 그 반절의 기관을 파괴했다면 그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겠지? 게다가 관문을 파괴하는 그 속도가 갈수록 빨 라지니 내가 어찌 천마포박직이 파괴된 것을 모를 리가 있겠나?" 절세마유의 안색이 또한번 급변했다. 파래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것이다. "옥룡 삼십육관이... 진의 무사들을 학살하고 사라진 것이 불과 얼마되 지 않거늘 그 사이에..." 옥룡삼십육관이란 절세마유조차 존경하는 일총관이 천하의 기관지학의 대 가들을 모아 만든 관문이었다. 옥룡왕부의 외곽에는 내원으로 통하는 스 믈 두 개의 입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옥룡왕 부 내부가 아닌 죽음의 함정 옥룡 삼십육관으로 유인된다. 죽음만이 존재 하는 살벌한 기관이 지천으로 깔린 곳. 결코 인간으로서는 통과하지 못 할 곳인데... "천하에 천마지존공을 구사할 만한 자는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하지. 그 리고 그 중에 천마지존공으로 천마포박진을 파괴할만한 능력을 가진 자 는 단 둘에 불과하지. 세상이 아무리 넓다해도 그 둘 뿐이야. 혈천마련 의 련주 천마황도 불가능하다. 기존의 천마지존공을 한단계 뛰어넘을 능 력이 있는 팔대천마의 수좌인 천마, 그리고 혈존, 이번에 온 자는 혈존 의 영혼을 지닌 자이니 천마포박진의 패배에 결코 실망하지 않아도 된 다." 혈존이라는 말에 절세마유의 얼굴이 또다시 백짓장처럼 변했다. 오늘 칠 면조처럼 많이도 얼굴색이 바뀌는 절세마유였다. "놀랍군. 이곳의 기관은 혈뇌동의 것과 흡사하다." 백가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흡사할 뿐,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백가량의 긴장을 자아내고 있었다. 혈존의 근거가 될 모 든 무학구결을 만들어내었던 혈뇌동, 혈뇌동의 일천명 천재들이 일백의 마공을, 흑도 칠대 절학을 해석해 놓았고 아수라독존마공과 쌍영마공을 만들어 내었다. 사술을 제외한 혈존의 모든 무공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중대한 곳이기에 혈뇌동의 기관은 팔대천마 수준의 고수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 백가량의 몸인 천마지존이 가진 기량은 팔대천마 의 것과 비슷했고 동시에 번번히 덮쳐오는 이곳의 함정은 혈뇌동과 흡사 하면서도 전혀 틀렸다. 다만 위험도만은 혈뇌동의 것에 조금도 못하지 않 았다. "그 녀석... 그녀석이 쌍영마공과 천마강시의 비밀 뿐만 아니라 혈뇌동 의 비밀마저 파악했단 말인가?" 백가량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혈뇌동의 모든 것을 감춰왔음에 도 혈지존, 그 하나의 눈만은 피하지 못했다. 하기는 혈영동 역시 그가 찾지 않았던가? 혈존의 최강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천마강시들이 있던 혈영동. 과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혈지존의 모든 것이 혈존과 흡사함은 어떤 이유일까? 콰르르릉. 백가량의 손에서 검은 빛 마기가 구름처럼 피어나갔다. 그리고 통로가 아 닌 통로의 벽이 허물어졌다. 지하에서 굴을 파는 심정으로 백가량은 함 정 자체를 무시하고 벽과 기관 자체를 무너트리며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초기 함정들에 약간의 고전을 했지만 곧 이 기관의 약점을 알아챌수 있었 다. 너무나 혈뇌동의 기관을 따라했기에 쉽게 알아챌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약점이란 기관이 정하는 함정의 위치 수순대로 들어온 자가 따라갈 필 요가 없다는 것이다. 입구의 위치를 보아 중심부는 서쪽이었다. 기관은 튼튼했지만 기관매복의 장치 모두가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것은 아 니다. 그리고 천마지존공은 기관의 벽을 파괴할 정도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밟고 들어와야 할 수순과 멀정히 존재하는 통로를 무시하고 가로 막는 모든 벽과 장애물을 무조건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들어오는 백가량 에 의해 기관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무작정 파괴하는 것이 아니 라 다시 기관의 모습이 드러나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자신의 위치 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나름대로 방위를 찾으며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백가 량이었다. "흐음. 다행히 혈뇌동의 머리들은 모조리 죽은 이후... 첫째놈이 혈뇌동 을 알아챘다고 해도 건질 것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직 하나 살아있던가? 최고의 천재라 불리면서도 끝내 마지막 구결을 완성하지 못 했던 쓸모없는 그놈. 그 마지막 두뇌자 놈이 혈지존의 수중에 넘어갔겠 군." 수없이 벽을 부수자 기관매복이 끝났는지 천마지존의 앞에 거대한 광장 이 나타났다. 하늘도 빛도 없는 암흑의 광장. 끔직한 기관매복으로 보아 이곳을 알고 있는 자는 한 둘에 불과할 것이다. 광장에는 끔찍한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수백인지 수천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수북히 쌓인 해골들. 그리고 아직도 쇠사슬로 묶여있는 자들이 있었다. 사지가 잘리고 머리와 몸만이 남은 자들, 앞에 책을 놓고 쉴새없이 입을 중얼거리며 미쳐있는 듯한 자들이었다.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충혈되어 있 고 미친 듯이 뭔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 하나같이 머리가 보통 사람들의 두배 정도 컸고 몸통만 남은 몸에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는 자들이었다. "큭큭 두뇌자를 만들었는가? 두뇌잠력촉발대법(頭腦潛力觸發大法)을 얻었 는가? 두뇌의 능력을 강제로 전부 깨워 십년간 초 천재로 만든 이후 심력 을 고갈시켜 죽게 만드는 대법. 흥. 이곳이 혈지존의 두뇌 산실인가? 본 좌의 핏줄답게 혈뇌동의 흉내는 다 냈군." 혈뇌동과 너무도 흡사한 광경에 백가량은 할말을 잃었다. 혈존의 혈천마 궁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옥룡왕부의 힘이라면 기재들 수천명을 비밀리 에 납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평생동안 삼할 도 쓰지 못하는 머리를 십년동안 모조리 쓰게 만드는 악마의 대법, 잠조 차 없이 살아있는 내내 단 한가지만을 연구하게 만드는 두뇌잠력촉발대법 은 어떤 불가능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첫째 녀석. 이십년 간 이런데 숨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군. 설마 혈 뇌동마저 흉내낼 줄이야.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이들을 이용하여 혈지 존이 무엇을 얻었는가 이겠지만." 천마포박진도 아마 이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혈존이 아닌 천마황이었다 면 천마지존공을 제압하는 기운이 서려있는 천마포박진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천마황 정도의 고수를 기껏해야 삼백 육십명의 절정고수로 제압할 수 있 다면? 설사 천마포박진으로 천마황과 동귀어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얼마 나 이득인가? 옥룡왕 수하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몰려 있을지 몰랐지만 옥룡왕부의 저력이라면 그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가진 권세로 얼마든지 많은 절정고수를 끌어들이거나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천마포박진 만이 아니다. 지금 혈존의 눈앞에 있는 해골들로 보아 희생 된 천재들의 숫자는 수천 명. 아마도 백도의 십대극품절예, 흑도의 칠대 절학을 상대할 모든 진법이 이미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간혹 나타난 무학대종사(武學大宗師)가 만들어낸 최고절학 들을 능가하는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천명의 초천재들 이 현 무림의 역사를 모조리 뒤집어 버리는 진법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혈존의 존재 자체가 증명한다. 그의 모든 것 도 이렇듯 초천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혈존은 아수라독존마공을 만들어내었다.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론 상 단 한구절만 완성된다면 고금 무림사의 최강의 마공으로 이름 날 것 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혈지존은 어떨까? 천하 절학들을 제압하는 진법 의 창안으로 초천재들의 용도를 끝냈을까? 단지 기존의 최고 절학을 상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혈지존이 아수라독존마공에 버금가는 또 다른 경 지의 초마공이나 초절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죽어라." 백가량의 손에서 뭉클한 마기가 쏟아져 나오며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 에게 쏟아져 갔다. 이미 저들은 사람이라 할수 없는 자들이었다. 두뇌만 이 촉발되어 주어진 오직 한가지 과제-천재라도 보통은 불가능할 듯한 과 제-만을 풀기위해 자신의 모든 심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생각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죽는 것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물론 백가량이 그들을 위해 그들을 죽이려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이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혈지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들을 없애 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 두뇌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 이 있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백가량의 천마지존공을 막아갔다. 콰쾅! 광장이 흔들거리는 가운데 백가량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 에는 천마지존공이 막히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에 백가량은 정신없이 뒤 로 물러서는 자신의 상태를 정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법에 의하지 않 고도 그를 가로막을 고수가 있다니? 의아해서 보니 단 두 명이 그의 앞을 막았다가 역시 백가량과 같은 거리 정도로 물러났다. 순수한 능력으로 맞대결하여 백가량과 비등한 고수들이 라니, 설마 마련 칠마황 만한 고수가 옥룡왕 휘하에 있단 말인가? "천마강시?" 백가량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보의도 보검도 필요없는 자들. 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자력으로 천마지존공을 감당해 내는 자들. 홀 로 천무삼성이나 팔대천마의 힘을 발휘하는 자들. 그러나 살아있지 않은 괴물들. 바로 백가량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천마강시가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첫째 녀석. 두뇌자들의 보호를 위해 천마강시를 배치해 두었 단 말인가? 가장 막강한 호위를 두었군." 백가량이 둘러보니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여덟구의 천마강시가 그에게 다 가오고 있었다. 천마강시의 출현에는 아무리 백가량이라도 움찔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전설상 무적이라는 천마강시를 만든 자가 바로 백가량 본인이 아니었던가? 결코 전설에 조금의 손색도 없는 존재가 천마강시였 던 것이다. 견고하기는 금강불괴가 무색할 정도로 단단하여 만근 화약에도 상처입히 기가 쉽지 않은 천마강시. 게다가 어떻게 상처를 입여도 순식간에 아무 는 재생력을 가지고 있고 재생하지 못할 정도로 사지와 목이 끊겨도 조각 난 것들이 제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가히 불사신. 빠르기는 번개같고 공격력은 지독하다. 천마강시와 대면하는 자는 그 엄 청난 마기에 처음부터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며 기가 약한 자들은 단순 히 기세에 눌려 죽을 수도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그 움직임 을 따를 수 없이 빠른데다 일격에 바위가 부숴지고 쇠조각이 분쇄되며 땅 이 흔들리고 산이 허물어지는 공격력마저 가지고 있다. 천마강시가 괜히 전설상의 강시이며 최강의 강시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마하타발, 음마바라기니..." 백가량은 나직히 주문을 외웠다. 설마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천마 강시는 천년마교 비전의 수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통제하는 대법 은 천마지존공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전설의 천마강시를 완성시켜 숨 겨놓은 장본인이 바로 백가량 자신이니 과거 천마강시를 조정하기 위해 만든 통제대법의 수법을 펼쳐보기로 한 것이다. 백가량은 천마지존의 몸 으로 있는 지금 천마지존공을 이용하여 강시의 혼에게 복종하라는 명령 을 내렸다. 천마강시의 몸이 잠시 멈칫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두 눈에 흉폭한 광채 를 터트리며 여덟명의 청마강시가 일제히 백가량을 덥쳐오는 것이었다. 백가량의 천마강시 통제대법은 역시나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이다. "천마강시의 통제수법을 역시 그놈이 바꿔 버렸군." 재빨리 몸을 움직여 천마강시의 공격에서 피하며 백가량이 분통을 터트렸 다. 피하는 곳으로 천마강시들의 일격이 떨어질 때마다 펑 펑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구덩이가 파였다. 천마강시의 몸과 흡사한 자신의 몸일지라 도 여덟구의 천마강시의 몰매라면 파괴될 수가 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니 머리 속으로는 누구보다 천마강시의 위력을 잘 알 고 있는 백가량이다. 실재로 몸으로 몇 번 부딪쳐보니 과연 장난이 아니 었다. 스쳐지나가는 강기의 여파만으로도 사지가 삐거덕 거리기 시작하 자 백가량은 천마강시를 상대할 기분이 싹 달아나 버렸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파괴해야 하나?) 백가량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천마지존의 몸이라해도 무공이라면 천마 강시 여덟구는 좀 벅찬 상대였다. 이성이 없는 놈이니 사술대법도 어디까 지 통할지 알수 없다. 여덟구의 천마강시를 홀로 상대한 다는 것은 팔대 천마를 홀로 상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쌍영마공이라도 있으면 삼할 정도 승산을 잡아보겠는데 지금의 몸이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힘은 겨우 천마 지존공이었다. 어쨋거나 천마강시는 혈존이 최고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다. 어 쩌면 천하를 지배하던 시절 그의 제자들보다 천마강시에 더 마음을 기울 였을지 모른다. 혈존이 천하를 장악했을 때 천하의 모든 정혈을 쥐어짜 서 만든 걸작품이 바로 천마강시인 것이다. 천마강시 일천구를 만들기 위해 고금제일마라는 악명을 들어가면서까지 천하를 약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들이니 만큼 통제가 되지 않는다 고 해서 파괴하기는 아까웠다. 다시 손에 넣을 수있다면 천하를 쥘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백가량이 망설이는 만큼 파괴할수 있는 수단이 있기는 하다. 그나마 만일 의 일을 대비하여 천마강시를 제조할 때 오직 그 혼자만이 아는 약점을 하나 만들어 놓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약점을 공략하는 일도 쉬운 일 은 아니었다. (다시 손에 넣는 방법이 없을까? 너무나 아깝구나. 약점으로 오늘 이 여 덟 구를 파괴한다해도 첫째가 본좌의 수법을 눈치챈다면 나중에 남은 천 마강시의 약점을 보완해 놓을 것이 아닌가? 지금은 천마강시의 약점을 드 러낼 때가 아니다.) 백가량은 천마강시를 파괴하는 일을 미뤄두기로 했다. 약점을 공략할지라 도 천마강시가 모두 모여있는 곳에서 한꺼번에 하는 것이 낫다. 일단 그 렇게 결정하자 이곳에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자신만만하게 전일비를 죽 이러왔지만 옥룡왕부에서 뜻밖에 그동안 숨어있던 첫째의 행방을 알아버 린 것이다. 옥룡왕부는 천하의 혈존조차 도망갈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용 담호혈보다 험난한 곳이다. 지금 그를 포위하고있는 여덟구의 천마강시 만 해도 약점을 공격하지 않고는 돌파할 길이 막막했다. "흥. 이대로 간다. 첫째가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전일비를 추적한 보람 은 충분히 있었다." 백가량의 몸에서 나선형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혈존은 아직 혈존이었다. 아수라천마는 같은 초식이라도 만가지 초식처럼 기기묘묘하 게 변화하였다. 여덟구의 천마강시는 이를 피하려 했으나 암흑마기는 기 어이 천마강시의 몸을 쫒아가 부딪쳐 버렸다. 천마강시들은 단지 조금 비틀거렸을 뿐이지만 그 것으로 충분했다. 천마 지존의 몸체 역시 마화타가 천마강시의 이론을 따서 조합한 몸이기 때문 이다. 백가량의 몸이 화살처럼 위로 솟구쳤다. "천하의 혈존이 도망가는가?" 갑자기 백가량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뇌자들 사 이에 전일비가 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보자 백가량은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렸다. "전-일-비. 이놈." 그의 머리에 폭죽터지듯 과거의 기억이 물밀 듯 치밀어 올랐다. -네게 충성을 맹세하겠어.- 악산산과 헤어진 이후에도 백가량은 악산산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숙이고 배교의 이목 몰래 다시 악산산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 었다. 사과하고 그녀와 화해했다. 물론 배교에 몸담고 있음을 악산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 아닌 악산산의 것이었기에 도저히 그녀의 곁 을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일비를 만났다. 모산파를 재건하 기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악산산의 곁에 있던 모산파의 하급제자 전 일비를. 그가 모산파를 떠나며 배신했던 그의 친구를. -네게 충성을 맹세하겠어. 너를 내 주군으로 모시겠어.- 의외로 자신을 배신한 백가량을 전일비는 원망하지 않았다. 관제묘에서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우정을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전일비는 단지 백가 량에게 자신을 거두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백가량은 도통 전일비의 속을 알수 없었다. 그 누구라도 한번 보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는데 이놈만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백가량은 이용가치가 없는 놈을 거 둘 정도로 아량이 넓은 자가 아니었다. -충성의 대가로 모산비전을 바치겠어.- 악산산의 거처에는 악산산과 전일비를 비롯한 몇 명의 모산파 제자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모산파의 잔존 제자들이 부흥의 희망을 모산비전에 걸고 그것을 찾기위해 천하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산비전이란 과거의 술법제일인 현천진인이 모산파의 술법을 모아 남겨 놓은 술법서였다. 삼장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살아남은 모산파 제자들은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 현천진인의 과거 행정을 더듬었다. 현천진인은 당 나라시절 술법만으로 모산파를 천하제일 문파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며 또 한 모산파에 돌아가지 않고 모산파의 절기를 자신의 은거지에 숨겨둔 괴 인이기도 했다. 모산비전이 있는 현천진인의 은거지를 찾는 단서는 대대 로 모산파의 장문인에게만 알려지다가 모산파가 멸문하면서 사라졌다. 애꿎게도 현천진인의 유적을 찾고 그 속에서 모산파의 온갖 비전을 찾은 것은 모산파의 하급제자 전일비였다. 모산파의 제자가 모자라 하급의 모 든 제자에게도 모든 비밀과 단서를 공개하며 조사의 은거지를 찾게 했는 데 전일비가 그 행운아가 된 것이다. 전일비도 야망이 있는지 자신이 찾 은 바를 모산파의 사람들에게 비밀로 했다. 모산의 비전을 모산파의 잔당 에게 넘겨주지 않고 홀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모산비전을 전일비는 백가량에게 바쳤다. -원하는 것은 없어. 다만 네 옆 자리에 있게 해 줘. - 충정이 가득한 전일비의 말이었다. 그리고 백가량은 그를 받아들였다. 배 교를 장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와중이었다. 단 하나의 손이라도 아쉬운 판에 모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모산비전을 들고 온 전일비는 귀중 한 존재였다. - 모산파의 잔당을 배교에 넘기면 세력을 굳건히 만들 수 있어. - 전일비는 그렇게 말했다. 이미 전일비에게 사문인 모산파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가량은 거부했다. 배교를 차지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간신히 빌다시피 하여 화해한 악산산의 마음 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기회야. 모산파를 희생시켜 배교에서 네 입지를 완전히 굳힐 기 회. 여자는 어차피 여자. 배교의 교주가 될 네가 천한 계집 때문에 고민 하면 안돼.- 전일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전일비는 몰랐으리라. 백가량도 모르게 그말을 듣는 순간 그의 심장 깊숙한 곳에 전일비에 대한 살심의 씨앗이 심어졌음을. 하지만 처음으로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하게 된 백가량이었다. 배교의 교 주 자리도 탐이 났지만 악산산은 그 이상으로 탐났다. 모산파 따위 희생 시키지 않아도 배교를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악산산의 미움을 받느니 차 라리 배교 교주 자리를 포기하리라. 모산파의 부흥따위는 신경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망한 문파가 재건되 어 배교를 상대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기껏해야 망한 모산파의 남은 비술 몇가지와 삼 류도 못되는 기본 무공을 익힌 악산산을 중심으로 모산파의 잔당 몇몇이 남아 어떻게 하나의 문파가 되살아 나겠는가? 그들 최후의 희망인 현천진 인의 모산비전 역시 전일비를 통해 백가량 손에 들어왔으니... -고민할 필요 없어. 그녀의 방에 음락분을 뿌려놨어. 욕망이 일면 꺽어버 려. 네가 어려워해야할 계집은 없어. 너는 들어가서 열매만 따 먹으 면...- 하지만 전일비는 백가량의 허락없이 일을 저질렀다. 악산산은 몇 남지않 은 모산의 제자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그녀를 속이기는 쉬웠다. 백가량 은 놀라고 당황했지만 전일비는 백가량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대 로 실행했다. 충성을 맹세한다고 했어도 아직 그에게는 백가량이 친구라 는 마음이 남아있었는지 모른다. 겁탈당하고 바보처럼 넋을 잃어버린 악산산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증오가 전일비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증오를 감출줄 아 는 마음정도는 백가량에게 있었다. 전일비는 아직 쓸모있는 존재였으니 까. 사실 전일비의 잘못이 아니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에 그녀를 강제 로 차지하겠다는 욕망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전일비는 단지 그것을 실행시켜 주었을 뿐. 그리고 그일... 그 치욕스러운 일. "죽어라." 백가량의 눈에 귀화가 활활 타올랐다. 전일비를 노리느라 다시 덮쳐온 천 마강시들에게 암흑 마기를 뿌려대었다. 천마지존공의 암흑마기가 폭발해 버렸으며 여덟명의 천마강시가 일시에 가랑잎처럼 휘날렸다. 아무리 천하 의 혈존이라도 일거에 천마강시 여덟구를 물리쳤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가 없는 일이었다. "아수라천마!" 검은 마기가 마존의 형상을 띠며 전일비를 덮쳐왔다. 전일비의 안색이 당 연히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가 어찌 백가량의 일초라도 버틸 수가 있을 까? 하물며 절대구식 중의 아수라천마가 최종 형태를 띠며 펼쳐졌음에야. "혈존 사부. 당신이 실수했소." 청아한 음성과 함께 거대한 힘이 백가량의 등을 강타했다. 그 순간 백가 량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강력하고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천마 지존공의 진기가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크윽. 네... 네가." 경악하는 백가량. 그의 반신이 거의 부서져 있었다. 천마지존의 몸이야말 로 천마강시의 것과 같은데 단 일격으로 그의 반신을 부숴버리다니. 그 럴 만한 자는 옥룡왕부에 단 한명. "하하하. 누구의 몸을 이용했기에 천마지존공을 그토록 위력적으로 발휘 하는가 했더니 천마지존의 몸체로군. 과연 사부시오." "네놈. 감히 내 앞에서 입을 놀리는 게냐?" 백가량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쓰러졌다. 땅에 번지는 피는 살아있는 생 생한 피가 아니라 굳어있는 죽은 피였다. 하지만 그 죽은 피야말로 천마 지존의 몸을 재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백가량이 땅에 바둥거렸지 만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일장을 얻어맞은 등에서 강력한 기운이 퍼 져 천마지존의 몸에 있는 천마지존공을 파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로 천마강시의 하나가 날아 내려왔다. 혈지존이 천마강시의 하나 로 변장해 숨어있다가 기회를 노린 것이다. 그의 무공으로 암습을 한 것 은 그만큼 혈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혈영마공. 이미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이냐?"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백가량은 원독어린 시선으로 쓰러진체 혈지존을 노려보았다. 그의 몸으로 스며든 혈영마공의 기운이 단단히 천 마지존의 몸에 틀어박혀 천마지존공을 억누르고 있었다. 백가량은 단 한 줌의 진기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자꾸만 몸이 땅으로 쓰러졌다. "오랜만이오. 사부. 어느 사이에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구려." "과거에도 암습이더니 이번에도냐? 본좌가 네놈에게 암습밖에 가르치지 않았더냐?"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한 것 은 사부가 아니었소?" 혈지존은 여유있게 이십년 만에 대하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앞 의 자가 진짜 혈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혈존의 분신이며 잠 시 영혼이 머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다. 이혼통제대법이 사실이라면 당 연한 일이다. 하지만 혈존을 이십년 만에 대하는 혈지존의 마음은 복잡하 기 이를데 없었다. "크흐흐. 본좌를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네 눈앞에 있는 것은 본좌의 터 럭 하나만큼도 못한 일개 분신에 불과한 것. 분신이 파괴된들 나에게는 털끝만큼의 피해도 없다. 하지만 네가 본좌의 앞에 감히 나타나다니. 그 동안 담이 커진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본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 가?" "제자는 사부를 아직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사 부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그릇이라는 것도 알고있소. 사부는 언제든지 본 체로 돌아 갈수 있겠지요. 그것이 이혼통제대법일터이니." "흐흐흐. 전일비가 붙어있더니 대단하구나. 하기야 이혼통제대법을 알아 볼 자는 전일비와 죽은 현무도선, 그리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만사지존 셋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내게 네놈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이 얼마 나 큰 일인지 알겠지? 본좌의 수중에서 네놈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 냐?" "제자는 더 이상 사부를 두려워하지 않소. 알겠소? 사부를 두려워했다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오. 사부는 제자를 해치기 보다는 제자에게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오." "감히." "이미 제자는 쌍영마공을 대성했소. 사부처럼 두뇌잠력촉발대법을 이용하 여 백도와 흑도를 한꺼번에 대응할 방법을 손에 넣었소. 그 일부는 사부 도 경험해 보셨을 거요. 그리고 사부가 만든 천마강시를 손에 넣었소. 천 하를 손에 쥘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났소. 게다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나타 난다고 해도 사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소. 본좌의 쌍영마공과 내공은 이 미 과거 사부의 경지와 똑같으니까." "크크크. 과연 똑같군. 똑같아. 과거의 본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구 나. 쌍영마공도, 혈뇌동을 흉내낸 것도, 천마강시를 얻은 것도 똑같아. 네놈은 아마 배교의 술법도 터득했겠지?" "물론이요." 얼음처럼 냉정한 눈으로 백가량을 내려다보는 혈지존. 그를 보고 혈존은 탄식하더니 말했다. "안아. 꼭 아비와 대적해야 했느냐?" 그 순간 혈지존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진동했다. 동시에 그의 안 색이 칠면조처럼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색으로 급변했다. 얼음장 같던 혈지 존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다. 격동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안아. 아비는 너를 사랑했다. 가만 있었어도 네게 모든 것을 물려 줄...." "닥쳐. 이제와서 무슨 아버지라 자청하는 거야? 그토록 원할 때는 외면하 더니... 단지 따듯한 말한마디 손길 한번 바랄 때는 무시하더니... 당신 이 내게 아버지라고 할 자격이 있어?" 혈지존이 단단히 감쌌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었다. 지금 백가량이 건 드린 부분이야말로 가장 민감한 혈지존의 역린이었던 것이다. 혈지존이 격동된 기색을 드러내자 전일비마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혈지존 백나 안은 참지 못하고 백가량을 향해 퍼붇기 위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때 였다. 백가량이 벌떡 일어난 것은. "크하하하. 그래서 네놈은 아직 어리다는 거다. 첫째." 백가량의 몸에서 붉은 광채가 뻗어나갔다. 그것은 혈영마공. 그것도 극성 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너무나 기습적인 일격이었으므로 혈지존 백 나안도 피하지 못했다. 백가량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알아두어라. 너를 죽이는 이몸은 천마지존의 몸이다. 이 몸에 혈영마공 을 집어넣지 않았다면 분신 중의 최강이라 자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 성되지 않아 몸에 그득한 천마지존공을 썼지만 불완전체라 해도 단 한번 만은 혈영마공을 전개할 수 있다." 백가량의 자신의 일격에 혈지존이 피를 뿌리고 당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 다. 그러기위해 옥룡왕부에 들어 천마지존공만이 전부인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지존의 얼굴을 본 백가량의 마음이 섬뜩해졌다. 혈지존 이 피식 웃은 것이다. 혈지존의 쌍장에서 각기 다른 빛이 터져 나왔다. 왼손에는 붉은 마기, 혈 영마공의 기운이 솟아나왔다. 오른 손에는 푸른 마기, 청영마공의 기운 이 솟아나왔다. 혈지존의 얼굴이 붉고 푸르게 변한 가운데 양손에서 두줄 기 마공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악. 네놈. 쌍영마공을 합일..." "하하하. 사부. 마지막으로 알아두시오. 이곳에서 만든 최고의 성과는 바 로 쌍영마공의 합일 구결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로 인해 완성되었음을. 그 위력을 보여 주겠소." 콰르르릉.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끝으로 백가량의 영혼은 천마지존의 몸에 서 강제로 떠나버렸다. 그가 최후로 본 것은 합일된 쌍영마공의 넘치는 힘이 백가량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지하광장에 가득 퍼져버 렸다는 것이다. 지하 광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가량의 몸이 피먼지처럼 스러지기 시 작했고 핏빛과 청빛이 쌍룡처럼 서로 엮어가며 휘몰아치자 모든 것을 무 너트리기 시작했다. 광장의 지하천정도, 석벽도, 쇠사슬에 묶인 두뇌자들 도 핏덩이로 화하기 시작했다. 지하석부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 치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우우우우." 혈지존은 창룡음을 발하며 지상위로 솟구쳤다. 붉고 푸른 강기에 쌓인 혈 지존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이 허물어졌고 혈지존은 마치 허공을 날아가듯 지하를 뚫고 지상위로 올라갔다. 쌍영마공이 합일된 위력은 혈지존의 예 상을 수십배 초월했다. 처음 펼친 무공이었건만 이토록 대단할줄 몰랐 다. 설마 단 한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펼친 마공이 혈존 백가량을 피모래 로 만들고 지하석부를 무너트릴 줄이야. 지하석부는 옥룡왕부의 밑에 있었다. 그리고 지하석부가 무너지며 거대 한 옥룡왕부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 재난이었다. 지상에 있던 왕 부의 시위와 하인들이 갑작스런 재난에 허둥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너지는 옥룡왕부에서 사람들이 솟구쳐 올랐다. 여덟의 천마강시, 그리 고 악도를 채어 솟구친 혈지존이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성립되는 반혈존연합 관련자료:없음 [19564]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1 01:29 조회:1067 <성립되는 반 혈존연합 > 저멀리 중원의 서쪽에는 서장이라는 지역이 있다. 중국은 서장을 중원의 한 지방으로 치지만 사실은 한 나라로 해석해도 부족하지 않는 곳이다. 중원으로 들어오는 청해 운남등과 접해있는 지역이고 황교의 총본산 포달 랍궁(包達拉宮)이 있는 지역이다. 포달랍궁은 단순한 서장의 사찰이 아니다.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는 서장 티벳지역의 황제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활불이다. 고원에 사는 모든 민족이 포달랍궁의 승려를 숭배하고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 를 향해 절한다. 완벽한 제정일치가 되어 있는 곳이 바로 서장의 포달랍 궁이었다. 포달랍궁에 지금 수많은 라마승 제자들이 몰려있었다. 그 수는 적게 잡아 도 오천은 될 것 같은 엄청난 수였다. 게다가 하나같이 안광이 번쩍이는 것으로 보아 일류고수를 뛰어넘는 수준임이 분명했다. 서장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포달랍궁이기에 이정도 숫자의 고수들을 규합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원이라면 일개문파로서는 도저히 동원할 수 없는 숫자였다. 하기야 머리수로만 채운다면 포달랍궁은 수만이라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 7세께서 납시오." 포달랍궁의 누군가 소리치자 오천의 라마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그 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활불이 나타난 것이다 곧 포달랍궁의 거대한 문 이 열리고 수십명의 라마승이 맨 거대한 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 로 서장의 지배자인 칠십대의 늙은 승려가 교자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나 타났다. 모두의 경배를 받으며 달라이 라마는 힐긋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 가 서쪽으로 많이 져있는 상태였다. 그의 얼굴이 약간 초조해질 때였다. "제자, 포챤이 대라마의 명을 이행하고 도착했습니다." 하늘에서 훌훌 떨어지는 라마 하나가 있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날 렵한 경공으로 보아 보통 인물이 아닌 듯 했다. 실재로 그는 대라마의 사 랑하는 스믈 두명 제자의 하나였다. 포챤은 오랜 시간을 뛰어다녔는지 온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자, 아진챤이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제자, 타라마가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제자, 탑타니가 대라마의 명을 받들고 도착했습니다." 뒤를 이어 다시 하늘을 나는 야조처럼 세명의 거대한 체구의 라마들이 나 타났다. 그들은 포챤의 옆에 내려서 일제히 달라이 대라마를 향해 절을 했다. 대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기다리자 차츰 차츰 다른 라마들 이 몇 더 나타나 그들의 옆에 엎드렸다. 대충 도착할 라마들은 다 도착했 다고 생각했는지 달라이 대라마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오오. 어찌 되었느냐?" 달라이 대라마는 희망찬 어조로 포챤을 재촉했지만 포챤의 얼굴은 절망 에 물들어 있었다. "대라마. 변황동맹은 와해되었습니다." 비통한 그의 어조에 달라이 대라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냐? 대막과 운남, 동영과 묘강이 모두 옛 맹세를 잊었단 말이 냐?" "대막의 황사칠십이풍은 변황동맹을 탈퇴하고 중원의 천뇌교와 손을 잡았 습니다. 그들은 이미 배신자입니다. 또한 변황동맹의 운남 대표이던 대 리일족은 만독궁에 눌려 힘을 못쓰고 있고 만독궁은 운남에 위치하고 있 지만 그 시조는 중원의 무림인이던 독성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 미 이 둘은 중원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다고 봐야 하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흉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스스로의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둘 정도가 빈다고 해서 어찌 변황동맹이 허물어지겠는가? 섣불리 말하 지 마라."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다른 제자들을 향했다. 그러자 아진챤이 먼저 대 답했다. "변황동맹의 맹주령을 발동했지만... 몽고 철혈마궁은 명을 거부했습니 다. 그들은 천축의 법존을... 새로운 변황동맹의 맹주로 인정했습니다."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좋지않게 변하며 다른 제자들을 보자 그들도 침 중한 어투로 하나 하나씩 대답했다. "묘강 이십사동주는 변황동맹에 등을 돌리고 천축의 법존에 굴복하겠다 는 뜻을 밝혔습니다." "동영 살막은 천축의 법존을 새로운 변황동맹의 맹주로 인정하며 법존의 맹주기가 올라가면 인원을 이끌고 오겠다고..." "신강 유목세력은 신강에서 떠났습니다. 신강에는 혈천마련의 총단이 들 어선 관계로 그들은 이미 천축의 법존의 보호를 요청했다고..." 하나같이 중원에 복속되었다는 소리, 아니면 변황동맹의 맹주인 포달랍궁 을 부정하고 천축의 법존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였다. "감히... 변황동맹의 맹주로서 우리 포달랍궁을 인정하는 존재가 단 하나 도 없단 말이냐?" 달라이 대라마가 노성을 터트렸다. 지금의 사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천축의 대뢰음사, 소뢰음사, 암흑마찰, 청룡사, 서장의 포달랍궁, 그리 고 세력을 잃어가는 홍모교의 삼대세력, 몽고의 철혈마궁, 대막의 황사칠 십이풍, 묘강 이십사 동주, 동영 살막....등등은 모두 과거 동맹을 맺고 중원을 쳐들어갔던 세력들이었다. 오만한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일차 침입은 팔대천마에 의해 철저히 궤멸되었다. 그들은 패배하 여 후퇴했지만 변황동맹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중원의 힘이 약해 지면 다시한번 힘을 모아 오만한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때의 변황동맹 맹주는 서장의 포달랍궁 달라이 대라마 6세였다. 변황동맹이 실재적으로 와해된 것은 혈존의 변황 정벌 때였다. 혈존의 바 람은 무서웠다. 변황의 거대 세력이 모두 찬바람 맞은 풀들처럼 시들어갔 다. 북해빙궁이나 해왕군도 같은 거대세력이 사라져버렸고 포달랍궁도, 청룡사나 대뢰음사도 고개를 숙이고 문파의 명맥만을 살려줄 것을 빌어 야 했다. 대막의 철혈마궁이 벌벌 떨었고 묘강과 대막에서는 피의 폭풍 이 일어 그들의 세력 태반이 사라져 버렸다. 변황은 혈존에 문파의 존속 을 구걸하며 굴복해버린 것이다. 혈존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포달랍궁은 중원을 경계해왔 다. 이미 완전히 무너진 변황동맹의 맹주라는 이유로 언제 중원의 보복 이 있을지 모른다고 경계해왔다. 하지만 백도맹은 변황동맹과의 평화를 원했다. 포달랍궁은 기꺼이 이름만 남은 변황동맹의 맹주자격으로 중원 의 백도맹과 불가침 협상을 맺어왔다. 달라이 대라마 7세는 중원과의 평화를 바랐다. 그러기에 요즘들어 중원 의 혼란기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런데 천축에서 법존이라는 자가 포달랍 궁의 달라이 대라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인즉 변황동맹을 새로 일 으켜 중원을 정벌하자는 내용이었다. 또한 변황동맹의 맹주자리를 법존에 게 가져다 바치라는 내용이었다. 달라이 대라마는 처음에는 분기탱천하여 천축의 법존이라는 자를 욕했 다. 하지만 조금 알아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축의 쟁쟁한 문 파들, 번뇌마궁, 암흑마찰, 대뢰음사, 소리음사, 청룡사등 천축의 주요 무림세력을 모조리 굴복시킨 자가 법존이었던 것이다. 포달랍궁의 세력만으로는 도저히 천축을 통일한 법존을 이길수 없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변황동맹, 특히 서장의 세력을 천축 법존의 야심 때문에 희생시킬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천축의 법존에게 중원정벌에 포달랍궁은 빠지겠다는 전갈을 보냈지만 법존은 자신을 따를 것인가, 아 니면 멸문할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위협해 왔다.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달라이 대라마가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과거 변황동맹 맹우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을 파견하여 소식을 듣고보니 이는 아예 몰 랐던 것보다 못한 결과가 아닌가? 과거 변황동맹 세력의 대부분이 이미 천축의 법존에게 굴복당했다면 포달랍궁으로서는 더더욱 천축 세력을 감 당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후우. 이를 어이할 꼬? 천축의 법존이 본궁을 방문하겠다는 날자가 바 로 오늘이건만..." 달라이 대라마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질 때 포달랍궁의 고위라마가 달려 오며 고개를 숙였다. "달라이 대라마. 홍모교의 사대 라마교의 주지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말에 달라이 대라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포달랍궁을 도와 주러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같은 서장의 식구가 아닌가? 함께 합쳐 외세에 대항해야지. 어서 본 라마의 앞으로 모시거라." 원래 서장 황교와 홍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종교를 구실로 민중에게 일방적으로 군림하던 라마교는 처를 거느리며 약탈과 겁탈을 밥먹듯 하 여 서장의 민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그 결과 포달랍궁을 종주로 하는 황 교의 라마교 세력이 서장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그러나 아직 홍교의 세 력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포달랍궁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바로 홍교의 사대라마교였다. "변황동맹의 다른 자들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이렇듯 서장의 세력들이 라도 모두 뭉쳐 대항한다면 결코 천축에 밀리지 않으리라." 달라이 대라마가 굳은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 었다. 언뜻 보니 네명의 라마가 하나의 가마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처음 에는 홍교 사대 라마교의 한명이 제자들에게 가마를 들려 오는 줄 알았다 가 자세히 보고 대경실색했다. 놀랍게도 가마를 맨 네명의 가마꾼이 바 로 홍교 사대 세력의 수장인 라마들이 아닌가? "당신들이 어떻게?" 달라이 대라마와 포달랍궁의 제자들이 황당해 할 무렵 달라이 대라마 앞 까지 온 홍교 사대 라마는 가마를 조심히 내려 놓았다. 그리고 공손히 고 개를 숙이고는 일제히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달라이 대라마는 천축 법존을 맞이하시오." 달라이 대라마가 크게 놀라 경계하니 과연 가마 속에서 한명의 남자가 있 는 기척이 느껴졌다. 절로 대라마가 제자들에게 홍교 사대라마를 포위하 라 하고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다. "소뢰음사 수라마불이 십이악불을 대동하고 법존을 호위하오." 포달랍궁의 동쪽에서 소뢰음사의 십이악불이 오백의 고수를 이끌고 나타 났다. 그들의 눈빛은 흉흉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뢰음사의 아나타가 법존을 호위하오." "암흑마찰의 마륭이 법존을 호위하오." "흐흐흐. 번뇌마궁의 탁탑 역시 지존이신 법존을 호위하여 왔소이다." "천룡사에서..." 차례로 수백씩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나는 중들. 바로 천축 불가의 종주들 이 각기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그 광경이 순식간에 포달랍궁 을 포위하는 것이고 또한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어느하나 달라이 대라마 못지 않아 포달랍궁을 질리게 만들었다. 오늘 법존이 온다하여 포달랍궁 앞에서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홍교 라마들에게 속아 허무하게 천축의 포위망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런 데 절망적 상황은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묘강에서 왔소이다. 천축의 법존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왔소." "동영 살막에서 천축의 법존에게 절을 하러 왔소." "몽고 철혈마궁이 천축 법존의 지휘를 받으러 왔소." 천축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무사들을 이끌고 과거의 맹우들이 나타났다. 수천씩 부하를 이끌고 온 자들. 하나같이 자신의 지역에서는 달라이 대라 마처럼 패주로 있거나 왕같이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포달랍궁에 나타난 것이다. 천축 법존의 벗이며 동시에 포달랍궁의 적으 로서. 달라이 대라마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포위된 상 태라 천축 세력만으로도 벅차는데 각지에 있는 변황의 모든 세력이 나타 나 천축 법존을 편들고 있음에야... 설마 같은 서장에 있는 홍교의 라마 들까지 천축 법존에 굴복할 줄은 몰랐다. 자존심 하나는 엄청난 자들이었 는데. "달라이 대라마.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것인가?" 갑자기 가마에서 한줄기 호통이 흘러나왔다. 가마에 있다는 법존의 목소 리일 것이다. 달라이 대라마는 화가 나서 그를 꾸짖으려 했다. 그때 가마 속에 있는 이의 눈빛이 주렴을 뚫고 달라이 대라마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으윽. 천왕지안(天王之眼)..." 달라이 대라마는 묵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전신을 옭아매는 막대한 위엄 과 위압감이 가마에서 뻗어나와 달라이 대라마를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대라마는 눈빛이 마주친 순간에 알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 라는 것을. 그의 무공도 대라마보다 몇배 뛰어난 듯 보였지만 무공보다 는 불가의 수장으로서 모든 것이 달라이 대라마를 앞도했다. 눈빛을 봤 을 때 그는 마치 맹수를 본 토끼의 공포를 느꼈다. 달라이 대라마의 머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여기서 그를 거역하면 포달랍 궁은 멸문한다'라는 감이 강하게 와 닿았다. 달라이 대라마는 이런 눈빛 을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중원에서 건너온 혈존의 눈빛이 저러 했다. 저런 눈을 가진 자에게 거역하면 모든 것이 파멸한다. 미래를 위해 숙일 때는 숙여야 한다. '이미 저런 눈을 가진 혈존에게 굴 복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달라이 대라마는 스스 로 교자에서 내려와 가마를 향해 절을 했다. "그대에게 절대자의 위엄이 뻗는다. 다른 변황동맹의 세력도 절대자의 상 을 보고 굴복한 것이겠지. 본 라마 또한 굴복한다. 절대자에게 허리를 굽 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어쩌면 중원을 정복할 지도..." 달라이 대라마가 법존을 향해 절하자 법존도 즉시 가마에서 내려와 반례 로 글의 절을 받아들였다. 달라이 대라마를 천축 법존인 자신과 거의 동 급으로 인정하는 태도였다. 혈존과 같은 눈빛을 가진 자가 달라이 대라마 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자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과연 대라마는 활불이시오. 변황을 위해 이토록 쉽게 본인을 인정해 주 시다니. 본 법존은 대라마의 호의에 무척 감격스럽소." 물론 법존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서장은 중원 정벌의 교두보였다. 법 존이 서장을 무리없이 장악하기 위해서는 달라이 대라마의 도움이 필수였 고 그러기 위해서는 달라이 대라마와 법존 사이에 반목이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진심어린 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천축과 다른 변황의 쟁쟁한 지존들을 놔두고 법존이 일부러 달라이 대라마를 공경하 는 모습을 보이자 달라이 대라마는 감동했다.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전면 항복을 택한 달라이 대라마 덕분에 천축과 서 장은 별 충돌없이 함께하게 되었다. 사실 달라이 대라마가 굴복한 것은 무공보다 한없이 불력을 내뿜는 법존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갑자기 많은 손님이 머물게 되었기에 포달랍궁은 연신 복잡거렸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변황동맹의 간부만이 포달랍궁 귀빈실로 모셔졌다. 각 문파나 세력의 수장이거나 대표만이 안으로 모셔졌다. 이미 포달랍궁 의 주인은 달라이 대라마가 아닌 법존이었다. 그것을 달라이 대라마도 인 정했다. (이제는 중원에 보복하는 일만이 남았다.) 법존이 뿌듯한 마음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누가 감히 변황을 중원보다 못하다고 하는가? 여기 모인 각파 지존들의 면모를 보라. 중원 따위가 상 대나 되는가? 법존의 마음은 터질 듯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모두들 한마 음으로 법존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이제 풍요로운 중원을 정복하러 간다." 법존이 외치자 좌중의 각파 지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새로운 변황 동맹 결성에 대한 함성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변황동맹 맹주에 대한 충성 의 함성이었다. 법존은 과거의 맹주였던 달라이 대라마의 손을 잡고 같 이 좌중의 각파 지존들에게 흔들었다. 법존이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을 깨끗하게 풀어주고 서장과 천축, 그리고 변황세력의 화합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슬며시 법존 근처에 뭔가 를 떨어트리고 간다. 처음 법존은 그가 포달랍궁의 일원이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았다. 그가 떨어트리고 간 것을 보 니 편지였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법존에게' 라는 문구가 있었다. 법존이 의아한 표정으로 달라이 대라마를 보았으나 달라이 대라마 또한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편지를 펴서 읽어보던 법존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천하의 무엇이 법존을 놀라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스러 웠는데 단지 편지 한 장이 법존의 부동심을 깨트린 것이다. "으으... 혈존이 살아있단 말인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법존이 들고 있는 편지. 그것은 바로 혈지존에 의 해 발송된 것이다. 포달랍궁 조차 그의 간세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 다. 법존이 저도 모르게 혈지존의 편지를 와락 부여잡았다. "흐흐. 대사형. 뜻대로 모이겠소.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무엇보 다 먼저 해야할 일이 바로 혈존 사부라는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 는 것이니..." 신강에는 과거 천년마교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혈천마련이 있다. 한바 탕 마련이 천하를 향해 벌였던 전투가 끝나고 마련의 칠마황은 모두 마련 에 돌아왔다. 사천처럼 정복한 지역도 있지만 패배한 지역도 있다. 정복 한 지역을 복속시키느라 바쁜 칠마황이 천마황의 부름아래 모두 모인 것 은 어제였다. 마련 칠마황이 회의청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가라앉 아 있었다. 하기야 그럴 것이 혈첩을 날리고 시작할 때만해도 단숨에 천 하를 장악할 것 같았는데 자신감과 달리 의외로 천하의 저항이 거세 여기 저기서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마련의 군사이자 천뇌마전의 군주인 만상여의 막청운은 특히나 고개를 들 지 못했다. 자신이 우겨 감숙을 공격했거늘 오히려 천지마군 막이동을 비 롯하여 천뇌마전의 정예만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부친의 죽음까지 겹쳐 몹시 기가 죽어 있었다. 천지마군과 천뇌존의 싸움은 천뇌교의 정통을 건 아주 중요한 싸움이었 다. 그건 마련에게도 중요했다. 그동안 혈천마련은 혈천마궁의 후예라기 보다는 혈천마궁조차 합쳐진 마도와 사도의 연합체 종주 세력으로 자부해 왔다. 무림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진리이다. 인정하든 안하든 그동안 아 무도 혈천마련의 주장을 전면에서 반박하지 못했다. 혈천마궁의 후예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또한 과거 혈천마궁에 저항하던 흑도 종주의 대문파들이 마련과는 함께 합병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도 사 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혈천마련은 천년마교와 혈사문 등, 마도와 사도 의 전통있는 종주 문파들의 연합체 권위로 모든 흑도 인물의 복종을 명했 던 것이다. 그런데 천뇌교의 정통을 걸고 싸운 전투에서 천지마군이 천뇌존에 졌다 는 것은 천뇌교의 정통이 혈천마련의 천뇌전이 아닌 천뇌존의 천뇌교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마련이 스스로 주장한 흑도 종주세력의 연합 체라는 권위를 전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혈천마련이 단지 혈천마궁 의 후예로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철갑마전의 전주 철마황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부터 장난처럼 시작했다가 강호에 마련의 철마황이 일패도지한 것처럼 소 문이 났으니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가? 무명이던 애송이 흑철존이란 이름 은 이제 마련 칠마황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는 이름이 되었다. 이 또한 중대한 패배이다. 세력으로서야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손해가 있 을까마는 명예와 사기 측면에서는 마련의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 다. 그동안 마련 칠마황의 지위는 백도 천무삼성과 동격의 존재였다. 이 십년 전 혈천마궁 시절 혈존은 지위상 저 멀리 하늘위의 불타는 태양같 은 존재였고 백도의 전설적 기인 천무삼성은 기껏해야 혈존의 제자들과 그 밑의 구름 정도로 무림의 지위가 비슷했다. 그 인식은 오늘날 백도천 하가 된 이후에도 남아있었다. 그 마련 칠마황의 무림 지위가... 천무삼성이 백도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처럼 혈존이 사라진 흑도에서 최고의 지위로 인식되고 있는 마련 칠마황이... 무림의 신성에 패배당함으로서 그 이름값이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천무삼성은 이제 고고한 전대의 고인으로 물러가고 그들 대신 이제야 나온 백도의 신성으로 일황삼존, 까마득한 후배들과 동격으 로 다루어질 정도로 마련 칠마황의 이름이 떨어졌으니... 천무삼성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하늘 위의 별이나 달같은 존재로 올라갔 다면 마련 칠마황은 구름위의 존재에서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닿 을 수 있는 태산 위의 봉우리 정상정도로 낮아졌다고 할까? 철마황이 무 림의 새로 나온 후배에 달아났다는 소문이 났으니 자신의 무공에 자신있 는 고수들 중에 이제 그 누가 마련 칠마황을 두려워하겠는가? 마승상 또한 고개를 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금존에게 질려 혈천 수호대를 돌린 것은 오히려 과감한 결단이라고 칭찬 받을만한 일이었다. 무림의 싸움은 숫자싸움이 아니었으므로. 현황방이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소수의 정예고수는 숫자싸움에서 후퇴하여 대신 고수들만이 쓸 수 있는 수법을 쓰는 것이 마련 측에서는 현명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혈천수호대 를 광동과 광서로 나눈 것만은 마승상의 엄청난 실수였다. 싸우지 않고 물러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니 누가 승리하고 패배했는지 가리기 힘든 일이다. 절세고수는 압도적으로 많은 마련이니 나중에 현황방의 수 뇌를 흔들어버리면 된다. 그러나 마승상은 혈천수호대를 둘로 나누었고 마승상같이 뛰어난 지휘자가 없는 광서의 혈천수호대는 숫자에 밀려 전투 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광서의 패배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시세를 알고 한발 물러선 광동마 저 광서의 대패 때문에 마련의 패배로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류라 도 힘을 뭉쳐 숫자를 모으면 마련도 두렵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다. 현재는 금력이 가장 강한 현황방이 막대한 금을 사용함으로서 사람 을 모았지만 숫자의 우위가 확인된 이상 혈천마련에 굴복하기 싫은 정사 지간의 중소문파들이 모두 현황방에 몰려드리라. 즉 마련의 일방적인 공 포 지배와 굴복의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뜻했다. 셋의 패배는 충격적이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마련의 전력이 줄어들지 않는한 얼마든지 되갚아 줄수 있는 패배였다. 하지만 이들을 이토록 침중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혈사황의 패배때문이었다. 일황 무적일황 모용풍의 등장. 사실 그가 그 이름그대로 백도의 무적일황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로 혈사황이 모용풍에 졌다고 해도 이토록 절망적이지는 않으리라. 모용풍은 혈사황에게 스스로의 이름을 혈지존이라 밝혔다. 이것이야말로 마련을 먹구름으로 몰아넣는 진정한 정체였다. 혈지존이란 이들 혈천마련 의 모태가 된 사건, 즉 혈존을 향한 배반을 이룬 장본인이고 또한 그들 의 대사형이었다. 청영마공을 익혔던 둘째와 함께 혈천마련의 대련주가 될 자격이 있는 자인 것이다. 혈지존이 모용풍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그는 그동안 모용세가에 숨어 백 도를 거의 쥐었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만상여의 막청운의 생각이었다. 요지마후를 승룡곡에 파견하여 마련이 백도맹을 낱낱이 파악하고 비웃는 입장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 반대인 꼴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경우 혈지존이 천마황에게 마련의 지분이 있는 자로서 대련주의 자리를 걸고 승부를 건다면 천마황은 거절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벌써부터 혈지존의 추종자이던 요지마후와 철마황이 혈지존의 소식을 듣고 들썩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들 마련의 일곱 수뇌 중에 비무를 통해 최후로 남았던 가장 강한 자는 천마황과 혈사황 둘이었다. 그리고 천마황은 혈사황의 양보를 통해 혈천 마련의 대련주가 되었다. 그런데 모용풍은 혈사황을 패배시켰다. 그렇다 면 천마황도 혈지존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혈지존을 머리 속에 넣고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침묵을 견 디지 못하고 천마황이 입을 열려고... 그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터지 는 듯한 웅웅 울리는 소리가 신강 십만대산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리 고 십만대산을 떨어울린 소리는 회의청에 있는 칠마황의 귀에도 들어갔 다. "주군 혈지존의 명을 받들고 혼음흑귀가 사자로 왔소이다. 부디 마련에서 는 사자의 방문을 거절하시지 마시고 주군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이행하 게 해 주시오." 사람의 고막을 상하게 하는 위력적인 힘은 없으나 거의 이십여리 방원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하도록 전달될 만한 거대한 소리였다. 멀리서 수십리 안팍에 소리를 퍼트리는 음공이었다. "신음문의 천리웅음(千里雄音)이 아닌가? 신음문의 절기는 음마가 낙마곡 에 묻음으로서 실전되었고 이제 신음문의 반도 몇 명만이 남아있을 뿐인 데? 혼음흑귀라고? 처음듣는 별호인데... 신음문의 절기가 대사형에게 넘 어갔단 말인가?" "백도를 휘어잡은 자가 무슨 일로 사자를 보냈을까?" "마련마저 욕심내고 있단 말인가?" "백도와 마련, 양손에 떡을 쥐고 욕심을 낼 생각이라면 우리가 용납하지 않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흑도의 천하 지배이지, 대사형의 지배아래 양 쪽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오." 좌중의 의견이 분분할 때 천마황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조용히 하라. 혈천지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일단 그 역시 마련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 또한 적이라해도 사자를 거절하면 마련 의 졸렬함을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천마황의 말에 동의하며 만상여의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사자를 접견합시다. 이십리 밖에서 울려퍼진 소리입니다. 대사형의 전갈 이라면 잘된 일입니다. 모습을 감추었던 그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까요. 마련에 합류할지, 아니면 대항할지 그를 만나보고 결정합시다." "그럼 그자를 마련 안으로 들어오도록 합시다." "아니다. 막내. 대련주 그리고 여러 련주들. 대사형이 무슨 속셈인지 모 르나 현재 마련과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밖 에서 대사형의 사자라는 자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련의 일 이 대사형에게 많이 알려져 좋을 것이 없지요." 철마황의 들뜬 말에 만상여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자신이 혈지존의 소식에 너무 기쁜 티를 냈다는 것을 깨달은 철마황이 딴전을 피웠다. 혈 지존을 지지하는 것은 여기에서 요지마후와 철마황 둘밖에 없는 것이다. 천마황이 마승상에게 명령했다. "혈천수호대를 보내 그를 마중나가라. 마련으로 오지말고 절암봉으로 안 내하도록 해라. 마련의 기틀이 태동된 것이니 그곳에서 혈지존의 뜻을 알 아보겠다." 혈지존의 사자라고 왔던 혼음흑귀는 홀로 왔다. 험준한 십만대산의 산령 을 마차를 이끌고 홀로 왔다. 혼음흑귀가 모는 마차는 삼 백의 혈천수호 대의 무사들에게 호위겸 포위되어 절암봉에 도착했다. 혼음흑귀가 묵묵히 기다리는 가운데 마련에서 칠마황이 도착했다. 천마황 이 힐긋 혼음흑귀를 보고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혈지존의 수하 라 어떤 대단한 자인가 했는데 무림에서 모래알처럼 많은 일류 고수나 잘 봐줘야 절정고수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대가 혈지존의 사자를 자처하는 자인가?" "미천한 자가 고귀한 마련의 련주님들을 뵈옵니다." 혼음흑귀는 자신이 혈지존의 수하가 아닌 마련의 수하라도 된 듯 극진한 예로 천마황과 다른 마황들에게 절을 했다. 그는 머리와 사지를 땅에 밀 착하는 극진한 공경함을 보였고 머리를 땅에 박은체 두 손을 들어 밀서 를 들어올리며 무릎 걸음으로 천마황에 다가가려 했다. "저의 주군이신 혈지존께서는 한때 같은 길을 걷던 대련주님과 련주님들 의 영광됨을 축복하며 기쁜 마음으로 저를 통해 소식을 보내셨습니다." "흥. 마련의 행보를 직접 막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인가? 화 산에서의 치욕을 안겼음은 이미 마련과 적대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천마황은 냉냉한 어조로 말했으나 얼굴에는 은근한 기쁨의 빛이 퍼져나왔 다. 혈지존은 사자를 통해 천마황과 다른 련주들을 사제라든가, 별호로 부르지 않고 대련주와 련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자신이 혈천마련 과 단절되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고 동시에 천마황을 혈천마련의 대 련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천마황의 냉냉한 어조에 혼음흑귀는 고개 를 저었다. "오해이십니다. 주군께서 저를 보내심은 마련의 오해를 풀기위함입니다. 주군의 정체와 뜻을 밝히고 오해를 풀고 협조하며 한가지 부탁을 하기 위 해서입니다." "정체와 뜻? 오해? 협조와 부탁? 혈지존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 군. 마련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직접 찾아오지 않는가?" 천마황이 연신 냉소했지만 혼음흑귀를 향한 말은 현격하게 부드러워졌 다. 혈지존이 혈천마련에 뜻이 없다는 것만 분명하면 혈지존이 백도를 손 에 넣어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마련에 대한 권리를 포 기한다면 백도에 혈지존의 정체를 비밀로 할 용의도 충분히 있는 천마황 이었다. 하여간 밀서라는 소리에 천마황은 손을 뻗었다. 즉시 공간을 격 하고 밀서가 혼음흑귀의 손에서 천마황의 손으로 딸려왔다. 허공섭물(虛 空攝物)의 재주였다. 서찰을 읽던 천마황의 안색이 몇 번 변했다. 그는 궁금중에 찬 사제들의 얼굴을 보면서 밀서를 넘겨주고 혼음흑귀에게 물었다. "저 서찰에 적힌 말이 사실인가?" "저는 무엇이 적혀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주군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는 것만은 제 목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저 서찰에는 혈지존, 그가 옥룡왕으로 화신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 은 황실을 노리니 우리에게 천하무림을 차지하라며 서로 협력하여 천하 를 차지한 이후 황실과 무림의 영역을 나누자고 써있다. 서찰에 적힌 것 이 사실인가?" "주군께서 옥룡왕을 가장하고 계시다는 일은 주군의 가장 큰 비밀. 들통 나면 황실에 반역도로 백만대군에 쫓기게 되는 일입니다. 그 자체를 밝히 셨다함은 마련의 련주님들께 진실된 마음을 보이기 위해 그분의 가장 큰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마황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서찰을 읽은 만상여의 가 입을 열었다. "대련주. 옥룡왕이 대사형이 가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뜻이 무림이 아닌 황실에 있다면 일단 그와 손을 잡아도 손해 볼일은 없을 것 입니다. 만약의 경우 대사형은 자신을 공략할 약점을 우리 손에 쥐어준 셈이니. 다만 화산의 일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마황이 고개를 끄덕이고 혼음흑귀에게 물었다. "혈지존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면 그의 충복이 분명할 터. 어이하여 화산 에서 우리와 대적했는지 설명하게. 황실에 마음을 두고있는 자가 어이하 여 백도에 손을 뻗치고 있는가? 혈지존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도 없을 터." "그것이야말로 풀어야할 한가지 오해. 주군께서도 그 일을 지켜보고 계셨 습니다만 모용풍은 결코 주군의 화신이 아니었습니다." 천마황이 코웃음쳤다. 흑을 백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너무도 명백한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혈영마공을 아는 자가 죽은 혈존을 제외하 고 혈지존외에 누가 있다는 건가? "우리를 바보로 아는가? 혈사황이 당한 것은 분명 혈영신공이었네. 설마 사부가 되살아왔다고 혈지존이 말하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 "바로 그 설마입니다. 모용풍은 바로 혈존의 화신에 불과합니다." 순간 마련의 칠마황의 안색이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혈존이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의 머리 속에 잠재해 있었지만 떠올리기 싫은 일이었다. 믿기 힘든 듯, 아니면 믿기 싫다는 듯 천마황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은가? 모용세가에서 혈존 사부가 모용풍 으로 가장하도록 눈치도 못챘다는 소리를 믿으란 소린가? 혈지존도 아닌 사부가 모용풍으로 가장하기 위해 모용세가의 백도 늙은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행동을 했다고 믿으라는 건가?" "한마디 말로서 진실과 거짓을 밝혀내는 일은 힘든 것. 단지 믿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혼음흑귀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혈천마련의 대련주에게 믿음을 주기위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대련주께서 흡족해할만한 선물일 것입니다." 갑작스레 선물 이야기를 꺼내자 천마황이 어리둥절했다. 천마황이 마차 에 고개를 돌렸다. 천마황의 안광이 번쩍이자 마차 안이 투시되었다. 보 이는 것은 관으로 보이는 몇 개의 상자. 천마황이 다시한번 손을 뻗자 마차의 문이 저절로 열리며 여섯 개의 관 이 마차 안에서 날아왔다. 관을 보는 천마황의 표정이 급격하게 차갑게 굳어졌다. "관이라... 혈지존의 선물은 무슨 뜻인가?" 은근히 살기가 어린 말에도 혼음흑귀의 표정은 태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천마황이 무형의 기운을 퍼트려 관 뚜껑을 열었다. 창 백한 표정의 일곱구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마황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천마황의 표정이 제일먼저 변했고 그 다음에 혈사황, 마지막에 만상여의 막청운과 요지마후의 표정이 거의 동 시에 떨리는 표정으로 변했다. 천마황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설마... 설마 천마강시인가? 그것도 여섯 구나?" 천마황은 도저히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마련이 태동된 이래 천마황 은 무림에 직접 나서지 않고 천마강시의 제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도 천마강시의 완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일에 불과한데 이렇게 완 성된 여섯 구의 천마강시가 있다니. "주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련에는 일곱구의 천마강시가 반드시 필요할 것 이라 말했습니다. 과거 한구의 천마강시가 마련에 남아 있으니 여섯 구 정도면 대련주에게 성의를 표하기에 충분하다고 주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 (혈지존이 우리의 뒤에 칠대천마가 있음을 알고있단 말인가?) 천마황은 혈지존이 그의 배후를 알고있다는 사실과 혈지존이 천마강시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두가지 사실에 놀랐다. 혈사황이 떨리는 손길 로 관 속의 천마강시를 살피는 것을 보면서 천마황이 혼음흑귀에게 말했 다. "정체라는 것은 혈지존이 옥룡왕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 뜻이라 함은 반 역을 노리고 있는 것. 오해라 함은 화산에 나타난 모용풍이 자신이 아니 라 혈존사부라고 하는 것이겠지. 협조라 함은 혈지존과 마련이 손을 잡 고 각기 원하는 바를 성취하자는 것. 그럼 한가지 부탁이란 무엇인가?" 혼음흑귀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한마디를 위해 혈지존은 천마황이 어떤 행동을 보이든 들어주라 하지 않았던가? "부탁이란 다시 이십 년전처럼 힘을 합쳐 혈존을 죽이자는 것입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서문대장군부의 위기 관련자료:없음 [19581]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3 08:26 조회:1078 < 서문 대장군부의 위기 > 백도맹에는 두 곳 맹의 중심이 있다. 하나는 백도맹 총단이고 또 하나는 승룡곡이다. 백도맹 총단은 현실적으로 천하를 운용하는 백도맹 무사의 정예가 모여있는 곳이고 승룡곡은 백도에서 수련을 위해 몰려든 자들이 모인 곳이다. 승룡곡의 중처, 현무도선이 죽은 이후 무적장왕 모용도기와 혜경성승만 이 거처하는 삼성각이 있다. 지금 천무이성은 삼성각에서 그들의 다섯 제 자를 만나고 있었다. 무림 맹주 무성 종리연을 비롯하여 북부 2단과 남 부 2단을 책임지는 네명의 제자들. 혜경성승의 사손 뻘인 소림 장경각주 불아대사와 남궁세가의 가주 천하제 이검 남궁비는 북부 2단의 책임자, 죽은 현무도선의 사손인 무당의 대장 로 광천도장과 모용도기의 손자인 모용세가의 가주 장제 모용일현은 남 부 2단의 책임자였다. 소림, 무당, 모용세가, 남궁세가, 종리세가 의 세력이 모인 이들 다섯은 백도맹의 핵심이며 동시에 천무삼성의 후예들이다. 천무삼성을 대신하여 백도맹을 대신 움직이는 실질적인 수뇌들인 것이다. "풍아가 연풍회의 사람들과 함께 오고있답니다. 며칠 내에 도착할 것입니 다." 모용일현의 말에 천무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무성 종리연의 얼 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백도를 위해 억울한 죽 음을 한때 묵인하기는 했지만 모용풍은 엄연히 종리연의 제자요, 모용도 기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허허. 잘된 일이로군. 이제야 본격적으로 혈천마련과 본격적인 대결을 할 수 있겠어." 모용도기는 기쁨의 탄성을 터트렸지만 결코 후손의 생환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단둘이 모였을 때라면 혹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공적으로 백도 최고의 수뇌들이 모인 자리이다. 모용풍의 생환에 대해 모용도기가 기쁨을 표현한 것은 사적으로 후손이 살아 돌와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공적으로 모용풍이 백도맹의 전력에 중대한 힘을 보태줄 수 있기 때문이다. "풍아의 귀환으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와의 오해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대세가의 외면으로 구하지 못한 사천과 다른 지방의 문파들에 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리고..." 맹주 종리연이 잠시 문파의 본거지를 상실한 다른 문파에 대해 생각하며 안타까움에 젖었다. 오대세가 수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젊은 무사들의 분노와 외면으로 그동안 구파와 오대세가 간에는 큰 골이 파여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백도맹이 섬서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 마련의 침입에도 사천 과 청해, 감숙을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 실, 즉 이번에 공격당한 구파일방에 오대세가의 젊은이들 실전(實戰)세력 이 지원을 거부했기에 백도맹이 섬서에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 갈등의 원인이 모용풍이었고 이제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종리연은 제자의 생환에 대한 기쁨보다 백도갈등이 해결되었다는데 더 기뻐할 수밖 에 없었다. 비록 이번에 피해를 입은 문파들 대부분의 장로와 후예들을 승룡곡에 감 춰두었다고 해도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아픈 종리연이었다. "사부님들 말씀대로 마련과의 건곤일척 승부를 겨룰 준비가 되었습니다." 천무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맹의 문제가 사라진이상 이제 본격적 인 대결을 준비해야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혜경성승이 말했 다. "맹주께서는 풍아가 돌아오는대로 그를 무상으로 임명하라. 이번에 그의 위명으로 보아, 또한 맹 내의 지지도로 보아 반발하는 자는 적을 것이 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풍아와 함께 백도맹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우 리는 그 일에 매달리기 위해 폐관에 들어가겠네." 백도맹의 무상. 그 자리는 맹주에 이어 백도맹의 2인자의 자리이다. 천무 호정단의 쟁쟁한 선배들과 장로는 물론 수백문파의 지존들이 모여있는 백 도맹인만큼 무림칠룡을 비롯하여 아직 후기지수에게 수여될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모용풍이 무상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곧 이들 5인과 동등하 며 동시에 맹주와도 권력을 견줄수 있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뜻한다. "하오나 풍아에게 맹주직을..." 모용일현은 아들의 일에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표했다. 천하에 가득퍼진 무적일황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모용일현은 모용풍의 무위를 믿을수 없었 다. 단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우려만은 아니었다. "우리도 안다. 소문을 모두 믿을수 없다는 것을. 단 하나도 제대로 익히 기 힘든 십대절학을 소문대로 다섯가지나 완벽히 익혔다는 것은 쉽게 믿 을 수 없는 일. 게다가 소문대로 풍아가 익힌 다섯가지 절예를 완벽히 익 혔다고 해도..." 혜경성승은 말끝을 흐렸지만 여기모인 다섯 명은 모두 성승의 뒷말을 짐 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백도의 최고신공을 두가지 혹은 세 가지를 익혔기 때문이다. 종리연 같은 경우 천무삼성의 세가지 절학을 완벽히 대성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스스로 천무삼성 중에 어느 한명도 능가하지 못했다고 생각 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 신공을 두가지 혹은 세가지 익혔다고 해서 한 가지 무공을 깊히 익힌 자보다 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손에 익은 무기가 두세 가지가 되는 것 처럼 적을 상대하는 운용의 묘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나 의 무기를 사용하는 자보다는 강해지겠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십팔 반 무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무인이 같은 경지를 이룬 무인으로서 검을 주무기로 하는 자보다 열 여덟배 강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모용풍이 승룡곡에 전해지는 다섯가지 신공을 익혀 소문처럼 모두 대성했 다면 그건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나하나가 백도의 최고 신공들인 만큼 나름대로 여러방면의 최고 무리를 같이 깨달았다는 것은 무학의 경지가 몹시 높다는 증명이 될 수 있다. 무학은 처음 시작하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 록 최고의 무리(武理)로 통하는 길은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이다. 다섯가 지 신공은 각기 다른 방면으로 무학을 추구했지만 마지막 완성의 경지는 비슷했다. 그 상태에서는 여러방면의 길을 걸어봤다는 이유가 한가지 길 만을 통해 그 높이까지 왔다는 이유를 누르고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가 능성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다섯가지 신공의 이론을 제멋대로 주물러 한 차원높은 새로운 신공 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여러 가지를 익혔다는 것이 신공 한가지를 익힌 것보다 강하다는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무성 종리연이나 모용풍이 완성했다는 신공의 경우는 최고의 위력을 완벽 히 발휘할 수 있다는 차원의 완성이지, 천무삼성처럼 그 무공을 새로운 신공으로 발전시킬 정도로 통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너희의 우려는 공감할만 하다. 허나 풍아는 그만한 자격이 있 다. 솔직히 혈사황을 무리쳤다 함은 풍아의 힘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상 으로 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문처럼 신공을 다섯이나 완 성하는 사이에 새로운 경지로 가는 길을 깨달았는지도 모르지." 모용도기가 그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선조로서 그는 모용풍이 혈사황 을 물리쳤다는 데에서 모용풍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었다. 화산에서 혈 사황이 패퇴한 것은 사실인지라 모용도기가 모용풍에 대한 말을 끝내자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팔대천마 시절부터 마공이 신공을 누르기 시작했네. 항상 흑도가 한발 앞서나갔지. 그 때는 흑도의 마공을 완성시킨 자가 백도의 신공을 완성시 킨 자보다 많아 백도는 흑도의 밑으로 눌릴 수밖에 없었네. 그래서 백도 는 와신상담의 신념으로 백도의 신공을 완성시킨 자를 여럿 키워내었네." 모용도기가 쓸쓸히 말했다. 아직도 흑도에 전전긍긍하는 백도의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일까? "하지만 혈존시절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네. 더 이상 백도의 열가 지 신공도,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과 사공도 무적이 아니네. 혈존은 새로 운 무학의 진화를 이루었고 그것은 과거 한 방면에서 조사가 되거나 대종 사가 된 분들의 경지를 능가하는 것이었네. 그리고 그런 발전의 징조는 이제 흑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 과거 혈존의 아홉제자는 흑도의 마공의 완성을 거의 눈앞에 둔 경지였 다. 혹은 완성하고서 비밀로 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명 성이 천무삼성과 어깨를 겨룰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십년간 침 묵을 지켰다. 이십년간 단지 세력만을 키웠을까? 혹은 혈존처럼 그들이 지닌 마공을 능가하는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천무삼성이 이십년 전에 완성한 자신들의 신공을 깊 히 통달하여 한걸음 신공의 무학을 끌어올린 것처럼 마련의 칠마황도 그 랬을 수가 있다. 현무도선의 죽음이 혜경성승과 무적장왕의 그런 불안을 확신처럼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단지 신공의 완성만이 전부인줄 아는 백도의 아이들은 더 이상 마련의 칠마황을 당해낼 수 없다. "이제 우리 둘은 더 이상 무림사에 상관하지 않겠네. 승룡곡에 모인 백 도 절학을 모아 새로운 신공을 만들어 낼 것이네. 영원히 흑도를 누를 무 적의 백도 신공을..." 혜경성승, 그리고 무적장왕은 굳게 결심을 밝혔다. 실재로 이미 있는 백 도신공을 완성하기도 힘든 판에 그 절학들을 모아 새로운 절학으로 진화 시킨다는 것은... 그럴 힘과 경륜을 지닌 자는 백도에서 이미 반선의 경 지에 오른 천무이성밖에 없었다. 과거 혈존이 혈뇌동의 천재를 통해 이룩 한 새로운 무학 경지의 완성을 천무이성이 도전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은 환우오존의 후예를 모으라는 것이네. 환우비령 이야말로 백도 최강의 힘. 천무호정단보다 강한 그들이야말로 백도의 모 자란 힘을 충족시킬 열쇄가 될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풍아의 귀환으로 환우오존의 후예들이 모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환우오존. 과거 팔대천마에 대항하던 백도의 기인들을 말한다. 어찌보면 천무삼성과 동배분이지만 그들이 나서기 이전에 백도를 이끌었다고 할수 있는 인물들. 화산파의 화선(花仙)은 불사건곤심공으로 무장하고 구대문파를 이끌어 마 도의 심장을 박살냈고, 봉황곡의 봉황무후(鳳凰武侯)는 신비삼패를 규합하여 만상건곤심결로 마 도의 손발을 잘라냈으며, 개방의 개성(　聖)은 백도의 눈과 귀가 되는 동시에 금강칠채강으로 백도 를 방어했고, 검각의 검후(劍后)는 백도의 검이 되어 보리무극검법으로 마도를 난도질 했고 하북팽가의 혼돈패도(混沌覇刀)는 백도의 칼이 되어 혼돈패왕도로 마도 를 두조각 내었다. 백도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인물들. 또한 백도십대극품절예를 하나씩 이루 었던 인물들이다. 화선과 개성은 구파일방을 이끌었고 봉황무후와 검후 는 신비삼패나 검각등 백도의 여타 세력을 대표했다. 혼돈패도는 무림세 가들의 지지를 이끌고 마도에 대항했다. 백도무림의 영수라고 할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천외구기와 함께 팔대천마를 맞서 싸웠고 그리고 패배했다. 천외 구기는 전멸을 당하다시피 했고 환우오존도 홀든 죽고 혹은 부상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무림에 활동할 힘이 남지 못했다. 그나마 그 직후 천무삼성 이 나타나 백도를 이끌고 숨어 반전을 위한 백도 최후의 숨을 남겨놓았다 고 할까? 천무삼성이 혈천마궁 시절 미래를 위해 승룡곡에 백도의 정예를 모아놓 고 키웠던 것처럼 환우오존도 당시 백도의 정영을 모아놓고 은밀히 키웠 다. 여러 종파의 세력이 하나로 묶여 전혀 새로운 힘으로 탈바꿈한 이들 비밀 세력을 환우비령(　宇秘嶺)이라하며 그들의 수뇌를 상징하는 징표 를 환우령(　宇玲)이라 했다. 환우오존은 흑도의 칠대절예를 완벽히 누를 힘을 기르지 않고는 당시 백 도 최후의 힘인 환우비령이 절대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환우오존은 한가 지 약속을 했는데 환우오존의 후예들이 동시에 백도십대극품절예를 완성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각기 신공을 완성한 환우오존의 후예들끼리의 비무로 환우령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환우비령은 절대 무림에 나서 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이후 백여년 가까운 세월이 넘치도록 환우비령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 다. 물론 환우오존의 실질적인 후예들은 그동안 게속 무림에 활동했기에 백도는 환우비령이 어디에 존재해 있는지 안다. 하지만 혈천마궁의 어려 운 시절 천무삼성과 구파 장문인들이 직접 부탁했어도, 환우오존의 직접 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방이라든가 검각, 화산파, 봉황곡, 하북팽가 의 주인들이 직접 환우비령에 찾아가 고개를 숙였어도 그들은 무림에 나 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이십년 동안 무림이 평화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개방, 검 각, 화산파, 봉황곡, 하북팽가 등에서 비롯되었지만 백년이 넘게 흐르는 동안 이들은 이미 근본과는 전혀 다른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직 환우령만을 받들었다. 환우령이 있어야 환우비령이 움직일 수 있다는 환 우오존의 당부는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유훈이었기 때문이다. 환우오존의 후예라 할만한 자와 세력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동시에 백도십대극품절예를 완성한 경우는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백도맹 은 환우비령의 힘을 놔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얼마 전 환 우오존의 후예로 자처하는 자가 모두 나타난 것이다. 검각의 검후 매옥선이 보리무극검법을 익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검후라는 이름을 사용했을망정 그녀가 스스로 환우 오존의 하나로 자처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즉 최근에 그녀는 보리무극검 법을 대성했다는 뜻이다. 삼존이라는 흑철존을 탄생시킨 흑방, 그 흑방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며 과거 혈천마궁과의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신비삼패의 수좌 봉황곡. 혈존에게 멸망되다 시피했던 그 봉황곡의 전인 또한 환우오존의 후예를 자처하며 무림에 나왔다. 즉 봉황곡의 만성건곤심결을 완성한 자가 봉황 곡에서 나왔다는 소리이다. 최근에 개방 또한 개방 방주의 숨겨져 있던 사제라는 백결개가 환우오존 의 후예임을 밝혔다. 이로서 환우오존의 후예 셋이 나타난 것이고 환우비 령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화선과 혼돈패도의 후예가 나 타나지 않는다면 환우령주를 뽑는 비무는 있을 수 없고 환우비령도 나타 날 수 없다. 화산파와 하북팽가에서는 불사건곤심공과 혼돈패왕도를 완성한 자가 나오 지 않았다. 환우오존의 후예로 자처할 만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 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 가문과 사문의 최대 절학을 기꺼이 승룡 곡에 넘겼다. 백도무림을 위해 절기를 넘긴 것이다. 팽가와 화산파 이외에 이들 두 가지 무학을 같이 익힌 자가 한명 있었 다. 당대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그는 한가지만 익혀도 끝 을 보기 힘든 두가지 무학을 분명 같이 익혔다. 그는 무학의 천재로 어려 서부터 불린 인물로 욕심이 많아 두가지 절학 이외에 천무삼성의 무공마 저 같이 익혔다. 그가 바로 모용풍이다. 무적일황의 소문에 그는 다섯가지 백도의 신공을 완성했다고 하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환우오존의 화선과 혼돈패도의 후예도 되 는 것이었다. 즉 환우령의 주인을 가리는 비무대회를 열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이래저래 환우비령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혈천마 련과의 승부를 앞두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 질거야. 혈천마련은 단지 난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듣자하니 현황방의 방주가 천외구기의 하나인 단향검군의 후예 라 하더군. 천외구기들 역시 천하를 위해 싸웠던 의인들. 그들의 후예를 규합할수 있다면 이또한 백도의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네." "사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천외구기의 후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다섯 제자가 물러가도록 끝내 천무이성은 한가지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비밀 연락망을 통해 들어왔던 소식 한가지였다. 과거 혈존과의 비무를 약속하고는 완전하게 혈존을 죽이기 위해 백도와 마도간에 만들어졌던 비밀스런 조직. "후. 혈존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던 정보망이 다시 가동되다니. 백시주 로부터 다시 소식이 오다니. 혈존의 위치가 확인되었단 말인가?" 혜경성승의 무거운 음성이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혈존의 생존. 생 각만해도 몸이 떨리는 일이 아닐수 없다. 마련과의 일전을 앞두고 백도맹 을 실제로 움직이는 제자들에게 혈존의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들 이 해결해야 했다. "생각만 해서 무슨 결론이 나겠소? 혈존이 살아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그 가 혈마전혼대법으로 도망간 이래 계쏙 생각해왔던 일이오. 다만 그의 행 방을 우리가 아니라 완전히 종적을 감췄던 혈지존이 먼저 찾아낸 것이 이 상할 뿐이지." 모용도기의 말에 혜경성승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존이 살아있다 면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야했다.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최우선으로 할 일이 바로 혈존의 말살이었다. 천무 이성은 혈지존과 만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천무이성은 천무호정단 중에 서 백도 십대극품절학을 한가지라도 익힌 자는 모조리 데려갈 생각이었 다. 그만큼 백도맹의 전력이 삭감되겠지만 혈존의 척살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천무이성은 살아돌아오지 못할지도... "폐하. 서문대장군을 잡아들이소서." 구중 궁궐의 자금성.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있는 곳이다. 용포를 입은 당 금 천하의 주인인 황제는 어지럽다는 듯이 손을 머리에 대고 고개를 젓 고 있었다. "허어. 서문 대장군은 개국 공신의 후예이오. 어이하여 그를 벌하라고 한 단 말이오?" "폐하. 서문대장군은 역도이옵니다. 천하의 악적 혈존이라는 자와 손을 잡고 반역을 도모하는 자이옵니다. 그자를 잡아 구족을 멸해야 할줄 아옵 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서소." 신하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조력자를 찾는 듯 고개를 둘러보았지만 좌중의 신하는 모두 학림파의 파벌이었다. 다른 파벌의 신하는 어이하여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또한 저들도 분명 황제의 신하가 분명할진대 어이하여 이토록 천자를 핍박한단 말인 가? "뚜렷한 증거도 없지않소. 단지 그대들의 말만 믿고 대신을 잡아들이는 것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말을 끊는 자가 있었다. 가장 예를 중시해야 할 예부 의 중신이었다. "폐하. 이 일은 반역에 관한 일이옵니다. 서둘러야 하실 일이옵니다. 일 단 잡아들이고 시비를 가려도 늦지 않사옵니다." "서문 대장군부가 어떤 곳이오? 선황께서 서문대장군부에는 어떤 잘못이 있던 처벌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곳으로..." "폐하. 다른 일도 아니고 역모이옵니다. 역모에 관한한 예외란 없습니 다." 또다시 황제의 말이 끊겼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역모가 진 짜로 있다면 황제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역도들 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대명 황군의 정신적 지주이며 충신중의 충신임이 서문 대장군임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황제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학림파였다. 벌써 열흘째 다 른 신하들은 보지도 못했다. 자금성을 지키는 친위군이 성을 에워쌓다는 말도 들었다. 황제가 노하자 이들은 반역의 위험이 있어 황제를 보호하 기 위함이라 겉으로 변명을 내세웠다. 하지만... 처음에는 화도 내보고 물러가라 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무엄한 역도들 은 신하라고 자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의 마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주장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둘러싼 시위와 동창의 무 사들에게 신하를 끌어내라 명을 내리기도 했다. 평소 자신의 심복이라 생각했던 동창의 내관과 금의위마저 황제를 무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금 의위과 동창마저 저 역도들의 편에 서서 황제를 핍박하고 있었다. 그제서 야 황제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후우."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저들이 이토록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반의 때가 성숙했음을 말해준다. 더 이상 거리낄 필요없이 반역을 해 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함에도 집요하게 자신에게 서 문 대장군을 벌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뻔했다. 서문 대장군은 동북 여진쪽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북벌군로의 총 책임 자였다. 또한 그의 막역한 친우인 황 대장군은 막북을 책임지고 있는 총 책임자였다. 막북 쪽의 서로군벌은 황 대장군이 부관인 서문 일충에게 거 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고 하니 서문 장군부가 북벌로와 서로벌을 지 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단순히 두 군벌의 지휘자라지만 좀더 따지자면 전체 대명황군의 반이 서 문 대장군의 지휘하에 있다는 소리이다. 만약 그가 마음먹는다면 황제라 도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의 한마디에 대명 50만 대군이 움직 이니 어찌 안그렇겠는가? 역도들에게는 가장 꺼릴만한 존재임이 틀림없 다. 그러기에 역도들은 아직 자신을 대놓고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서문 대장군은 대대로 충신의 집안이었다. 의심많은 선황도 서문 가문만은 믿고 국방의 총수권을 내주었다. 이는 서문가문이 오로지 군문 에만 투신하고 결코 정치적 파벌에 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들 학림파는 그런 서문가문이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반역의 마음이 확실한 만큼 지금처럼 전군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서문가문이 반발한다면 곤란 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장군이라면 황명을 빌미로 파직하고 역도의 허수아비를 장군으로 내 세우면 된다. 허나 서문 대장군만은 그럴 수가 없다. 선황은 역모만 아니 면 서문 대장군을 벌할수 없다는 면책특권을 뜻하는 금빛 현판을 내주었 다. 서문 대장군이 반발하면 황제도 그를 면직시키기가 힘들다. 충신인 그가 황제의 명을 거역할 리는 없을 것이다. 단 황제도 그를 존중 하는 뜻에서 그에게 행해지는 모든 명은 일일이 황제의 옥새를 찍어 황명 을 이행하도록 했다. 옥새의 인이 없는 명이라면 서문 대장군이 대뜸 의 심부터 할 것이다. 그리고 옥새는 오직 황제만이 아는 곳에 있다. 황제는 묵묵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천자를 핍박하는 역 도의 무리를 오마분시 시키고 싶었지만 지금은 힘이 없었다. 황성에 가득 찬 신하와 무사들이 모조리 역도의 편이었다. 황제의 바람은 오직 시간 을 끄는 사이에 다른 두 개 파벌의 신하가 이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을 알 아채고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백허에게 기별을 넣었지만... 그가 서문 대장군과 연락하여 짐을 구해주 기를 바랄 뿐이다.) 백허는 조정의 청류계를 이끌고 있는 이정례 대인의 호였다. 옥룡왕부가 갑작스런 지진으로 허물어진지 하루가 지났다. 다행히 인명피 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귀한 분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사 나 하인들의 목숨이야 피해로 치지도 않으니까. 옥룡왕은 지금 금의위 총영반 허첨의 집에 있었다. 겉으로야 금의위와 동 창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오래전에 이미 금의위는 동창의 세력 에 잡아먹힌 터였다. 옥룡왕의 앞에는 세명의 남자가 고래를 숙이고 옥룡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룡왕부의 대소사를 맡고있는 총관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옥룡왕부의 일총관은 놀랍게도 동창제독이었다. 황실의 비밀 친위기관이 라 할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황제의 손발이 되어야할 동창의 최고수뇌가 오히려 일개 왕의 총관으로 행세하고 있다니... 학림파의 총수라는 동창 제독이 옥룡왕의 수하라면 학림파의 배후가 옥룡왕임이라는 소문은 당연 한 이야기가 될 터였다. "황제가 버티고는 있으나 곧 항복하고 서문대장군을 잡으라는 명을 내리 게 될 겁니다. 그는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으음. 서문대장군부라... 악연이군. 악연이야." 옥룡왕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흘동안 자금성을 그의 부하들이 둘러 싼 이유는 황제를 바꿔친다고 해도 충분한 자신이 있어서였다. 동창과 금의위가 이미 그의 손에 있었다. 조정 최대 파벌인 학림파가 그 의 손에 있었다. 정적인 두 파벌의 신하들은 모두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황성을 수비하는 수비군의 수장 역시 옥룡왕에 충성을 맹 세한지 오래였다. 적어도 자금성 안에서 황제의 힘이 미치는 곳은 없었 다. 북경 내에서도 옥룡왕의 힘은 황제를 능가했다. 문제는 북경 밖이었다. 국경에는 수십만의 대명 황군이 있다. 명분없는 반역은 그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당금의 황제는 제법 백성들 을 생각하는 좋은 황제였다. 황제를 쫓아낸다고 하면 군대가 가만있을 리 가 없다. 그에 대한 준비로 오래전부터 군부에 옥룡왕은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았 다. 하지만 북벌군로와 서벌군로만은 이도 들어가지 않았다. 양 쪽의 군 대는 대명의 군대가 아닌 서문 대장군의 군대 같았다. 서문 대장군이 충신인만큼 황제로서야 믿고 맡기면 되겠지만 옥룡왕의 입 장에서야 껄끄럽기 이를데가 없다. 그래서 황제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전 에 황명을 빌붙어 서문대장군을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하필이면 그 자가 서문 대장군부와 연관이 있다니..." 고민하는 옥룡왕의 표정을 보며 일총관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 었다. "서문 대장군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이미 일공자 가 호황부주로 선출되었습니다. 호황부를 손에 넣은 이상 서문 대장군이 라해도 대세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일공자란 당금 황제의 부마도위인 현안군을 말한다. 현안군은 황제의 다 섯 번째 공주인 명옥공주의 남편으로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지 만 사실은 옥룡왕이 비밀리에 키운 첫째 제자였다. 현안군은 옥룡왕의 지 시대로 아내의 사랑을 이용하여 마침내 호왕부주의 자리를 손에 넣은 것 이다. 호황부는 황실을 수호하는 최후의 비밀세력이었다. 황제를 제외하고 황족 조차 구금 체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최후의 힘인데 그것마저 옥룡왕부 에 넘어간 것이다. 호황부의 인원은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라 아무리 대군 을 거느린 장군이라 해도 암살을 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인데 왜 그의 주 인이 저토록 망설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열흘 전에만 그가 서문 대장군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섣부 른 행동을 자제했을 것을... 하지만 지금 그는 서문 대장군에 대한 공격 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알 것이다." 옥룡왕의 얼굴은 침울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 그에게 육체를 준 아버지이자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부 혈존. 어제 그 분신을 물리쳤다 고 하지만 혈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 면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있는 곳이... 어제의 일로 혈존과 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혈 존의 침입을 옥룡왕은 단지 방어한 것에 불과하다. 또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분신 하나 잃은 정도는 혈존 본인의 입장에서 아무런 타격도 아니 다. 물론 어제 일로 앙심을 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천하 전체가 혈존의 적 이다. 그 중에서 예상했었지만 밝히지 못했던 적 하나의 정체와 거처가 드러났다고 해서 특별히 놀랍거나 경악스런 일은 아니다. 혈지존의 정체 와 거처를 알았다고 해도 그 냉정한 혈존이 기존에 세웠던 모든 계획을 제쳐두고 허둥지둥 옥룡왕부를 먼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 지 그의 계획에 혈지존에 대한 일을 추가시키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혈존과 달리 혈지존은 혈존이 모든 계획의 최우선이 기 때문이다. 혈존이 옥룡왕의 정체가 혈지존임을 안 순간 혈지존도 혈존 의 정체를 알았다. 즉 혈존이 혈지존을 당장 공격할 마음만 먹지 않는다 면 옥룡왕에게는 혈존을 먼저 칠만한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왕부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서문 대장군부에 대한 공격은 다르 다. 분명 모르고 시작한 일이지만 혈존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인하는 경우 혈존의 계획 맨 앞 순위에 옥룡왕부에 대한 반격이 놓여 질 것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의 모든 계획을 허물 어트릴 수가 있다. 혈존을 완벽히 제거할 준비가 끝마치기 전에 그의 계 획 맨 앞줄에 옥룡왕부의 이름이 올라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 같지 않은 자가 식구들에게 정을 가지고 있을 희망은 적지만... 그 래도 대비를 하는 것이 낫겠지. 즉시 동창을 대동하여 서문 대장군부의 식솔들을 연금하라. 허나... 결코 무례하게 굴거나 상처입혀서는 안된 다. 최후의 인질일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벌인 일을 취소할 수는 없다. 이미 혈존은 혈지존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를 진정시킬만한 준비를 해야한다. 가족에 대한 인질이 얼마나 먹혀들지는 자신없지만. (서문 대장군이라면 결코 식솔의 염려 때문에 충정을 저버리지는 않을 텐 데) 동창제독인 일총관은 턱을 갸웃거리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옥룡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의 명은 이행하기만 하면 될뿐 이해할 필요는 없 기 때문이다. 옥룡왕의 시선이 이총관으로 넘어갔다. 마치 탈속한 신선같이 생긴 남 자. 옥룡왕부의 이총관은 바로 천외사세의 하나인 장백신선문의 문주였다. 중 원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네 개의 세력 천외사세. 장백신선문. 북해빙궁. 해왕군도. 천축 청룡사. 어떤 때는 중원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으로, 그리고 어떤 때는 중원의 벗 으로 같은 적을 맞아 싸우며 이들은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도 이들은 중원에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월과 시류만은 천외사 세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북해빙궁과 해왕군도가 혈존에게 멸만하더 니 장백신선문의 문주마저 옥룡왕부의 이총관으로 중원에 굴복해 있을 줄 이야. "변황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옥룡왕의 조용한 물음. 단순히 혈존에 대한 서찰을 천축의 법존에게 제대 로 전했는지 묻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뜻밖에도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가 법존에게 쉽게 굴복했습니다." "흐음. 포달랍궁의 기세가 죽어있다고 하지만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로 있 던 이름 값도 못하고 바로 굴복했단 말인가?" "달라이 대라마도 처음에는 대응하려 했지만 홍교의 사대 라마가 굴복한 모습을 보고는 기가 꺽였습니다. 게다가 천축 법존은 달라이 대라마를 동 맹의 예로 대했고 때를 맞추어 기존 변황동맹의 고수들과 천축의 고수들 이 같이 모여드는 바람에..." "흥. 과연 청영지존, 그녀석 답군. 이렇게 되면 변황의 힘은 완전히 법존 에게 굴복한 것인가? 그럼 매복지계는 어찌 되었는가?" "이공자가 청룡사주로 변하여 왕야의 명을 듣고 제일먼저 법존의 휘하에 투항하였습니다. 청룡사주의 지위는 천축 십대고수의 제 일좌이고 변황 세력에서는 달라이대라마 다음가는 서열 삼위입니다. 법존이 살아있는 부 처로 여겨지는 바람에 이공자께서는 비록 천축의 세력은 포섭하지 못했으 나... " 옥룡왕의 싸늘한 시선에 이총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공자와 일총 관이 황실의 일을 잘 처리한 만큼 자신과 이공자도 맡은 분야인 변황에 서 왕야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이공자는 옥룡왕의 둘째 제자를 뜻한다. 과거 혈존이 수많은 제자를 키우 고 이용했듯 옥룡왕 혈지존도 제자들을 이용하여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 다. 일총관이 일공자의 후견인이듯 이공자는 이총관이 섬기는 자였다. 옥 룡왕의 둘째 공자는 장백 신선문을 가문으로 둔 소문주였기 때문이다. 숱 한 우여곡절 끝에 천외사세의 하나인 청룡사를 장악했을 때만해도 이공자 의 임무인 변황장악의 앞길이 훤히 열리는줄 알았으나 천축에 법존같은 거물이 나타날줄 이공자가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묘강, 동영 살막, 몽고 철혈마궁은 은근히 힘으로 그들을 누룬 법존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합니다. 이공자가 전한 소식으로는 그들을 부추겨 법 존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흥. 그정도 일도 못한다면 청룡사를 그동안 지원했던 보람도 없지. 북해 빙궁과 해왕군도는 어찌 되었는가? 천외사세를 통합하기만 해도 변황동 맹 못지않은 힘일텐데." "소신이 수많은 제자들을 풀었으나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혈존에 의하여 완전히 멸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며..." "무슨 헛소리인가? 이총관. 북해빙궁과 해왕군도가 멸문되었으면 멸문되 었다는 증거를 가져오게. 그 증거를 찾지 못했으면 여전히 그들을 찾아 포섭해오게. 자네의 생각은 조금도 필요없네." "명...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총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총관과 달리 변황을 맡은 자신은 별로 뚜렷한 실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천축에 법존이라는 걸출 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의 주인에게 별 변명이 되지 못했다. 옥룡왕의 시선이 다시 삼총관에게 넘어갔다. 절정마유라고 불리는 인물. 옥룡왕부에 남아 옥룡왕의 곁에 있던 인물이다.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 자 절정마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보검과 보의는?" "명하신대로 진법에 투입할 자들을 위한 보의와 보검이 모두 준비되었습 니다. 만근의 황금이 소모되었고 천하에 이름높은 장인과 술법자들이 모 두 투입되었습니다. 육천개의 보검과 육천개의 보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진법에 투입할 금의무사들의 훈련은 어찌 되었는가?" "열 일곱 개의 진법도 완성되었고 진법을 운용할 사람도 마련되었습니 다. 백도십대극품절학을 익힌 자들을 제압할 열 개 진법, 삼천 육백의 금 의무사가 준비되었고 마찬가지로 흑도의 사대마도절예와 삼대사도지학을 누를 칠개 진 이천이백팔십명의 금의무사들 훈련이 끝났습니다." "괜찮군. 이로서 흑도와 백도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난들 변수를 만들어내 지는 못하리라." 천하에는 많고 많은 무인이 있으며 또한 많고 많은 무학이 있다. 하지만 혈존을 제외하고 당금 무림에서 흑도의 일곱가지 무공과 백도의 열가지 무공을 능가하는 무공을 얻은 자는 없다. 무림의 가장 큰 세력이라는 마 련도, 백도맹도 이들 열 일곱가지 신공 마공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었다. 즉 옥룡왕부는 마련과 백도맹을 완전히 제압할 준비가 끝났다 고 말하는 것이다. "마련은 어떠한가? 옥룡왕부를 위해 일하는 그의 정체가 마련에서 들통나 지는 않겠지?" "혈천마련에는 아직도 왕야를 잊지 못하는 요지마후와 철마황이 있습니 다. 천마황과 혈사황은 왕야와 관련하여 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덕분 에 왕야에 충성을 맹세한 만상여의는 아무 의심없이 마련을 주무르고 있 습니다.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만상여의는 마련의 뒤통수를 칠 것입니 다." "혈천마련에는 일곱 노물이 있다.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연락을 전하라." 옥룡왕은 마련의 뒤에 되살아난 칠대천마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 곱 노물이 뒤에 물러서 있는 이상 마련을 짖밟는다해도 후환은 영원히 남 는다. 그래서 칠대천마가 그토록 원하는 천마강시 여섯을 그들에게 보낸 것이다. "천마강시 덕에 왕야에 대한 의심은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또한 혈존 의 일이 있기에 일단 왕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 듯 합니다." 천마강시 여섯을 주기는 했지만 덕분에 혈존을 상대할 중요한 협조자인 마련의 신임을 얻었다. 덤으로 일곱 노물을 표면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 면 완전한 대성공이다. 아무리 칠대천마가 제 모습을 찾고 무림에 나선다 고 해도 그들의 마공과 사공을 누를 진법이 있는 이상 칠대천마는 더 이 상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일이라면 마련의 어리석은 일곱 사제들이 모두 나서겠지. 운이 좋 으면 그에 대한 원한이 깊은 일곱 노물도 새로 갖춘 몸을 가지고 나설테 고. 백도맹 쪽은 어떠냐?" "백도맹은 천무이성이 나설 모양입니다. 천무이성은 무성 종리연에게 이 야기하지 않고 천무호정단에서 십대 절학을 익힌 자들을 모조리 뽑아 투 입할 듯 합니다." 여기에서 삼총관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불행히도 백도맹 세력의 대부분이 승룡곡 출신이라 백도맹 안에 세력을 깊히 침투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야의 제자이신 삼공자께서 백도맹 에 중용되어 계시니..." 옥룡왕의 셋째 제자인 삼공자는 무림칠룡의 하나인 백미불 무아였다. 겉 으로 드러난 백미불 무아의 신분은 백도맹 서열 4위인 불아대사의 제자이 며 백도맹 감찰기관인 순찰부의 총순찰이기도 했다. 모용풍이 무적소야라는 명호로 무림칠룡의 수좌 자리를 차지할 때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모용풍이 세가의 젊은 무사들이 주축이 된 연풍회의 우상이라면 구대문파의 젊은 고수들이 주축이 된 군 웅회의 회주이기도 했다. 모용풍이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는 백도맹의 미래를 책임질 후기지수의 수 좌로 떠올랐지만 모용풍이 무적일황으로 명성을 떨치며 생환하자 백도맹 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미불 무아야말 로 옥룡왕의 셋째 제자이며 백도맹에 분단에 자신의 세력을 깔아놓은 자 였다. 삼총관이 물러간 이후 옥룡왕은 조용히 악도의 거처를 찾아갔다. 혈존을 척살하기 전까지 악도는 옥룡왕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였다. "어떤가? 그 분신의 상태는?" "혈존 본인과의 교감이 완전히 끊겨졌소. 적어도 혈존을 처치할 때까지 는 이혼통제대법을 차단시킬수 있을 것 같소." 악도가 지켜보고있는 곳에는 완전히 엉망이 된 넝마가 하나 있었다. 천마 지존의 시체였다. 과연 천마강시를 기본으로 한 덕분인지 그 와중에도 상 처를 스스로 복구하고 있는 것을 옥룡왕과 악도가 발굴해 낸 것이다. "마화타의 솜씨요. 재생력을 극도로 발휘하도록 한 덕분에 시일은 좀 걸 리겠지만 다시 원래의 몸을 회복할 것이오. 허나..." 악도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화타 답지 않은 실수를 했소. 그가 사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까? 영혼과 육체를 동일시 접착해야하는 최후의 공정처리가 허술한 덕분에 이 몸의 원래주인의 영혼이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또한 그 덕에 이혼 통제대법도 강제로 해제되다시피 했소. 뭐, 그덕에 오히려 이 몸에 펼쳐 져 있는 대법을 역으로 추적하여 혈존의 지금 정체를 알기 쉬웠지만." 천마지존의 몸의 상태는 심각했다. 혈존의 영혼이 떠난 것도 무리는 아니 다. 하지만 몸이 살아있는 이상, 그리고 이혼통제대법이 해체된 이상 천 마지존의 영혼이 다시 몸체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영혼과 몸체의 결합 이 불안했던 상태라 백가량의 영혼이 떠나면서 천마지존의 영혼마저 같 이 떠나버린 것이다. 지금 천마지존의 몸은 그저 살아숨쉬되 내용물이 빠 진 텅 빈 껍데기와 같았다. "실행할 예정인가?" "그렇소. 평생 무공에 관한 자질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왔소. 이제 무학 의 대종사였던 신체를 얻었소. 게다가 몸의 주인인 없는 영혼도 없는 상 태. 평생의 숙원을 풀 기회요." "사부의 분신이었던 몸을 차지하면 좀더 많은 정보를 꺼낼수 있으니 본좌 도 나쁜 일은 아니지. 허나 성공할수 있겠나? 혈마전혼대법을?" "크크. 혈존은 너무도 간단히 성공한 대법. 그것도 준비도 없고 제물도 없는 상태에서 바로 성공해버렸소. 허나 노부는 무려 백년 가까이 이 대 법 하나만을 연구해왔소.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던 무학의 자 질을 손에 넣기 위해, 그리고 완벽히 다른 존재로 변해 혈존의 마수를 영 원히 피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숨어 연구했었소." "악도의 안타까운 일생은 알고있네." "백년간의 준비. 마화타의 손길이 간데다 백치도 아니고 아예 영혼자체 가 존재하지 않아 천마강시보다도 훌륭한 제물. 혈지존, 당신의 보조. 이 렇듯 굉장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성공의 확률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 실이 안타깝소. 결국 그것이 혈존과 노부의 차이겠지." "본좌는 사부와 다르오. 결코 본좌를 위해 일한자를 내치지는 않소. 본좌 를 위해 일한다면 그에 대한 대우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악도는 모산파의 술법을 이용하여 천마지존의 두뇌에 새겨져 있는 기억 을 읽었다. 그것은 천마지존과 백가량의 기억이 혼용된 것이었다. 덕분 에 혈존의 정체가 서문 대장군부의 이공자임도 알아내었다. 모산파의 술 법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대를 지진으로 몰고갔던 엄청난 위력하에서도 천마지존의 몸체는 견뎌 내었다. 그것은 천마강시의 견고함과 재생력을 몇배 뛰어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몸에 숨겨져있는 엄청난 천마지존공의 내력. 악도는 한눈에 천 마지존의 육체에 반해버렸고 혈마전혼대법으로 그 몸을 자신의 것으로 삼 겠다고 혈지존에게 요청한 것이다. "혈존을 죽이는 계획은 한달 이내에 실행될 것이니 그때까지 혈마전혼대 법을 완전히 마무리 해야 할 것이오." 제 목:[연재] 혈존무적-귀환 관련자료:없음 [1958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4 21:07 조회:942 < 귀환 >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모용가가. 왜그러세요? 어마? 왜 식은 땀을 이토록.” 백가량의 옆에서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 가량이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일깨우다가 경악했다. 속이 환히 들여다보 이는 얇은 침의만 입은 절세미녀가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헉. 너는 백리설! 네가 왜 여기에... 으으윽. 설매. 내가 왜 이러지?” “왜그러세요? 머리가 아파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백리설은 모용풍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자 안절부절했다. 백리설이 밖에 나가 의원을 청하려는 것을 모용풍이 잡았다. “설매. 아무 것도 아니니 가만 있으시오.” 말과 달리 모용풍의 두 눈은 혼란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모용풍인가?)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 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모용풍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 대법으로 모용풍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은 화산파에서 깨어나 사랑하는 약혼녀 백리 설과 함께 백도맹으로 돌아가고 있던 모용풍이었다. 사랑을 호소하며 다 가오는 그녀를 안아준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자신은 분명 모용풍이다. “으으. 나는... 나는 누구지?” 모용풍은 계속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모용풍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혈존? 백이충? 단 지 꿈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모용풍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서 내 혼과 모용풍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모용풍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백리설은 모용풍의 제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모용풍의 이 마의 땀을 딱아주었다. 모용풍의 발작이 점차 심해지자 불안해진 백리설이 도움을 청할 결심을 굳히고 나가려고 할때 모용풍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우웅. 응? 설매? 왜 안자고 그러고 있소? 무슨 일이 있소?” “가가. 모용가가. 이제 괜찮으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연히 괜찮지. 혹시 무슨 악몽이라도 꾼거요?” “으윽. 가가. 악몽을 꾼 듯 괴로워한 것은 바로 가가였다고요.” “내가? 무슨 그런 소리를? 설매의 기척에 지금 잠에서 깨어난 것 뿐인 데...” “......”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방주. 왜그러세요? 어마? 왜 식은 땀을 이토록.” 백가량의 옆에서 걱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가량이 머 리를 흔들고 정신을 일깨우다가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다. 자신의 곁에 는 상황의 양녀가 된 조옥향과 그녀의 의자매인 옥정과 옥연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세 여인의 속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 닌가? “헉. 그대는 옥향! 네가 왜 여기에... 으으윽. 내가 누구지?” 오형록이 옥향을 남부르듯 하자 옥향의 얼굴에 당장 눈물이 그렁그렁 떠 올랐다. 동시에 옥정과 옥연이 발끈하여 오형록을 노려보았다. “너무 하세요. 혼례를 올린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옥향언니를 남을 대하 듯 하시나요? 방주는 언제 언니를 인정할 건가요? 언니만한 여인이 어디 있다고.” 옥연이 날카롭게 쏘아부치자 옥향이 안절부절했다. 만의 하나라도 오형록 에게 짐이 되고싶지 않은 옥향이었다. 그녀가 옥연을 붙잡았다. “연매. 나는 괜찮아. 방주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마.” 슬픈 듯 울먹거리는 말을 하는 옥향을 보고 오형록의 가슴이 뭉클 뜨거 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느끼고 오형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오형록인가?)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 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오형록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 대법으로 오형록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은 혈무영의 영주로 혈존에 충성을 맹세한 오형록이었다. 자신의 몸을 혈존에게 내어준 것도 스스로의 자의에서였 다. 그런데 어이하여 마음속의 주인인 혈존과 자신을 혼동하는 지경에 이 르렀단 말인가? “으으. 나는... 나는 누구지?” 오형록은 계속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오형록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어이하여 주군인듯 한 착각이 든단 말인가? 내가 미쳤단 말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오형록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서 내 혼과 오형록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오형록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옥향 등은 오형록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녀들을 소홀히 여긴다 고 생각하여 화를 내었는데 오형록이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자 깜짝 놀 랐다. 주화입마라도 든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오형록의 행태가 발작 수준까지 가자 옥향이 울며 오형록을 부축했다. 그 녀의 얼굴은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 범벅이 되었다. 그때 오형록의 얼굴 이 멀쩡한 상태로 들렸다. “응? 향매? 왜 울고 있소? 무슨 일이 있소?” “방주. 지금... 지금 뭐라고 하셨죠? 향매라고... 저를 향매라고 하셨나 요?” “으음. 이제 그대는 나의 내자이니 당연한 소리가 아니오. 그나저나 언 제까지 방주라 부를 것이오? 어서 록랑이라 한번 불러보시오.” 순간 옥향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 광경을 보고 옥정 자매는 쿡쿡 웃 으며 물러섰다. 연인이 단둘이 마음을 털어놓을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것 이다. 이미 방금전 오형록의 행동은 장난으로 치부한 듯 이들의 머리 속 에 까마득히 잊혀졌다.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교주. 무슨 일입니까? 어이하여 부동심이 깨어졌습니까?” 백가량의 옆에서 그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자신을 질책할 수 있단 말인가? 화가 치밀어 노려보니 중년 미부였다. “헉. 너는 적안미부? 으음. 이상하군. 너는... 너는 내 동생인가?” 귀영신군의 이상한 말에 적안미부는 싸늘한 살기를 뿌리며 오빠를 노려보 았다. 천뇌교를 위혀서라 하지만 얼마전 자신의 남편을 척살한 오라버니 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호호호. 이제는 동생인 것도 부정하시려 합니까? 이제는 저도 죽이시 려 합니까?” 적안미부의 행동에 귀영신군은 움찔 했다. 속으로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쳤다. 아마도 핏줄에 의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 웃했다. 혈존인 자신이 적안미부에 미안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잠 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귀영신군이었다. “교주. 정말 왜그러세요? 대법을 실행시키지 않을 겁니까?” 그리고보니 자신은 귀영신군이었다. 혈존에게 복속한 이후 혈향초 혈근에 서 비롯된 혈과로 인초합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혈향초에 대해 누구보다 잘아는 적안미부의 도움을 받아 혈향초의 힘과 형벌십자흔의 마력을 합일 시키려는 시도를 시험해보던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또한 백가량이었다. 방금전 분명 자신은 천마지존의 몸에 들어가 혈지존의 정체를 알았다가 일격을 받고 이혼통제대법이 헤체되었 다. 그렇다면 자신은 백이충 본신으로 돌아가야 하거늘 어이하여 귀영신 군의 몸에 있단 말인가? 분면 이혼통제대법으로 귀영신군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귀영신군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혈향초와 형법십자흔의 마력으 로 천뇌만상공을 능가하는 사공을 만들려던 생각은 까마득히 사라져갔다. “교주. 진정 이렇게 나를 무시하긴가요?” “으윽. 제발 좀 나를 잠시만 내버려다오. 지금 나는... 으으. 내가 누구 란 말인가?” (나는... 나는 누구지? 백가량인가? 백이충인가? 아니면 귀영신군인가?) “나는 귀영신군인가? 그럼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뭐지? 혈존? 백이충? 형벌십자흔의 주술에 이런 힘도 있단 말인가?” “나는 백이충인가? 그럼 지금 내가 귀영신군이라는 자각은 뭐지? 대법 의 실패인가? 부작용인가? 이혼통제대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내 혼과 귀영신군의 혼이 뒤섞인 것인가?” 귀영신군은 커다란 갈등을 겪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연신 신음을 내질렀 다. 그 모습이 마치 연극하는 것 같아 적안미부가 참지못하고 화를 내려 고 할때 귀영신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뭐하고 있는건가? 대법의 실패라도 바라는 건가? 왜 제자리에 있지 않 느냐?” “뭐라고요? 교주. 지금 나에게 말하는 겁니까?” “여기 너말고 누가 있느냐? 제발 대법 중에 엉뚱한 짓좀 하지 말아라. 이 대법이 성공하면 천뇌교의 힘이 천하를 뒤덮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 냐?” “대체 이게 무슨 적반하장격인 소리를... 휴우. 관둡시다. 오라버니도 장난칠 줄 아는 사람이었구려.” 머리를 설래설래 젓는 적안미부의 목소리에는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라버니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것이 적안미부의 마음이 풀어졌 다는 것을 안 귀영신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방금 오라버니라 불렀느냐? 이제 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풀 렸느냐?” “교주. 대법이나 실행합시다. 교주 말대로 이제 엉뚱한 장난은 그만두리 로 하고 말입니다.” 이혼통제대법으로 혈존의 분신역할을 하던 자에게 이런 현상은 모조리 일 어났다. 곤무악도 흑방의 회의 중에 한바탕 난리를 쳐 발칵 뒤집어 놨으 며 혈무영 십대영주의 하나이던 유부마영 조인후도 임무도중 발작을 일으 켰다. 백도맹 근처에 잠적해 있던 백호검 마진걸도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모란루의 지하에 있는 혈존의 거처에서도 세명의 인물이 발작을 했다. 아직 혈존이 그 육체를 써보지 못했던 세 명의 분신. 이혼통제대법 만을 베풀어놓고 마화타에게 맡겨놓았던 삼인, 악취결개 우문노인과 십대 영주 중 남자들 두명. 바로 쌍교잠룡 혁우비와 무영독와 구태립이었다. “놀랍구나. 놀라워. 내가 만들었지만 가히 경이적인 흡공능력이 아닌 가?” 마화타는 악취결개 우문노괴의 몸을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악 취결개는 과거 마화타가 혈존의 몸을 연구하여 만들었던 수술비법의 결과 물이었다. 게다가 혈존에 의해 잡혀온 이후 마화타의 평생의 심혈이 모 두 우문노괴의 몸에 베풀어졌다. 처음 잡혀왔을 때 혈존이 죽여도 좋다 고 한 데다 기존에 마화타의 수술로 이미 체질이 길들여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실험물은 없었다. 온갖 인공적 수술의 결과로 한낱 개방의 장로였던 우문노괴가 드디어 십 대영주같은 천고의 기재들과 더불어 혈존에게 분신으로 지적을 당할 정도 로 신체와 몸의 능력이 발전했으니 이를 보는 마화타의 심정이 뿌듯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의 내공을 흡취하는 기술로만 보면 이미 밖에 나가 활동하고 있는 유 부마영 조인후 영주와 비등하구나. 둘다 상대가 십장 내에만 있으면 노려 보기만 해도 적의 진기를 빨아들일수 있으니...” 유부마영 조인후는 남의 진기 뿐만 아니라 정혈까지 빨아먹는다. 선천지 기와 힘의 근원을 모조리 갈취하니 남의 무공을 흡입한다고 해서 부자용 이 있을리 없다. 게다가 음산곡의 사술에다 쌍노의 배교 술법까지 익혀 사이한 대법의 경지가 가히 쌍노와 버금갈 정도이다. 허나 마화타는 자신의 걸작이 조인후에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문 노괴의 흡공능력은 상대의 진기뿐만 아니라 무공까지 빨아들인다. 그동안 의 결점을 완벽히 보완했다. 우문노괴는 어떤 자의 무공도 내공과 더불 어 완벽히 흡수하게 된 것이다. 남의 진기를 빨아들이며 사술대법에 극에 이른 자, 그리고 남의 진기를 빨아들이며 무공까지 빨아들이는 자. 둘 중 어느 하나가 낫다고 장담하 지 못하리라. 하물며 거듭되는 마화타의 시술로 우문노괴의 몸은 천마강 시나 천마지존의 짜깁기한 몸 정도는 못되어도 천마강시랑 비슷하다고 말 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올라가 있었다. “크으으윽.” 갑자기 우문노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마화 타는 깜짝 놀랐다. 완전한 세뇌가 성공하기 전에 우문노괴는 정신을 차리 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마화타의 의술의 예측을 벗 어나지 못하던 우문노괴가 어이하여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가? 천일을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마취분에 중독되어있는 우문노괴가 신음을 내지르자 마화타는 의술상 일어날 수 없는 현상에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 다. 그 순간 우문노괴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으윽. 이 눈빛은?” 마화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이 눈빛의 주인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우문노괴의 몸을 차지하여 이런 눈빛을 발하게 만들 능 력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혈존은 이미 천마지존이라는 분신의 몸으로 여 행을 떠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였 다. “크윽. 마화타. 어찌된 일이냐? 본좌가 왜 네 실험실에 있는 것이냐?” 우문노괴가 나직히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마화타는 털썩 주저앉을뻔 했 다. 확실히 혈존의 음성, 혈존의 눈빛, 혈존의 기세였다. 이혼통제대법 이 무언가 잘못되어 천마지존의 몸대신 우문노괴의 몸으로 영혼이 이전 된 것이 틀림없었다. 마화타는 벌벌 떨며 우문노괴의 몸을 묶은 사슬을 풀어주려 했다. “크으윽. 너는 어떤 놈이냐? 누구이길래 본좌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냐?” 마화타가 방금전 들은 음성과 똑같은 음성이 뒤에서도 들려왔다. 엄청난 살기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문노괴의 두 눈에서도 지 독한 혈광과 살기가 퍼져나갔다. 마치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원수를 만 난 듯 우문노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본좌를 사칭하다니. 찢어죽여 버리겠다.” 마화타가 황급히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뒤에는 마화타를 호위하며 우문노괴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두명의 혈무영 영주가 있었 다. 쌍교잠룡 혁우비와 무영독와 구태립이었다. 둘다 그 재질을 인정받 아 이혼통제대법의 실험자가 되었고 좀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마화타의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 혁우비와 구태립의 모습은 평소 마화타가 알고있는 모습이 아니었 다. 붉은 혈광, 음산한 살기. 그것은 쌍영마공중에 혈영마공에 영혼을 담 구었던 자만이 발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 자는 천하에 단 하나만이 존재할 뿐인데 지금 두명의 영주, 아니 우문노괴까지 셋이서 같은 눈빛 을 발하고 있었다. “천한 가짜 녀석. 감히 본좌 혈존을 흉내내다니. 분신 주제에 본좌의 행 세라도 하고 싶은 거냐?” “누가 할 소리. 가짜. 네놈은 개방의 냄새나는 거지에 불과하다. 감히 본좌를 사칭하다니.” “너희 둘 다 가짜이다. 본좌야 말로 방금 전 첫째의 일격에 잠시 후퇴했 다가 본의아니게 이 몸에 깃들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본좌의 노예인 네 놈들이 나로 가장할 생각이냐?” 혁우비와 구태립 그리고 우문노인은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발했다. 마 화타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누가 진짜 혈존의 영혼인지 알수가 없었다. “으으. 혈존이 장담하던 이혼통제대법이 실패한 것인가? 그 부작용으로 셋다 미쳐버린 것일까?” 마화타가 입에 거품을 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혼절했다. 그리고 서 로를 노려보려던 셋은 동시에 손을 쓰려했다. 우문노괴가 몸에 두른 쇠사 슬을 순식간에 풀어내고 공격을 하려했고 혁우비와 구태립도 각기 손을 쓰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우문노괴의 몸이 갑자기 쓰러졌으며 혁우비와 구태립은 손을 든 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 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멍청히 상대와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쓰러져 기절해 있는 마화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그를 깨웠다. 혈존의 분신으로 내정되었던 자 아홉은 이토록 짧은 사연을 모두 거쳤 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하나 이미 혈지존의 손에 떨어진 천마지존의 몸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짧은 시간의 발작이후 장본 인들이 하나같이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혈지존 백나안에게 충겨적인 일격을 먹은 후 백가량은 헉 하고 깨어났다. “크윽. 첫째 녀석. 설마 쌍영마공을 합일하다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영혼과 몸이 일체가 되어있는 자라면 죽 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가량에게는 단지 영혼이 이동하는 순 간에 불과했고 재미있게 사용하던 놀이기구 하나가 파괴되는 순간일 뿐이 었다. 백가량이 있는 곳은 그의 본신 백이충이 있는 곳. 이혼통제대법으로 혼 이 빠져나가 있을 때는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엄중히 보호되고 있는 석 실이었다. 하기야 지금 백이충의 몸 상태로서는 깨어있다 한들 스스로 자 신을 방어하기 힘들겠지만. 으스스한 눈빛은 완전한 혈존 백가량이었다. 백이충이라 생각하던 그모습 은 사라지고 없었다. 강한 백가량의 자아가 백이충의 인격을 영혼 구석 어리론가 밀어넣어 버린 것이다. 그 모습 어디에도 순진하고 가족을 사랑 하던 백이충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몸. 어째서 이따위 몸에 그토록 집착을 갖고 있었을까? 흐 흐. 천마강시를 하나 만들어 놓고 혈마전혼대법을 사용하여 몸을 옮겨야 겠다.” 인격과 기억이 혈존 백가량으로 각성했으니 백이충의 인격에 대한 미련 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백이충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 그의 가족에 대 한 사랑과 집착도 기억은 하나 동감할 수는 없다. 기억만은 온전하여 과 거를 돌이켜 볼 수 있지만 백이충으로 스스로를 다짐하던 시절 왜 그토 록 어리석게 이런 약해빠진 몸을 고집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가량은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올리고 석실을 나섰다. 그 와 중에도 그의 머리는 천하를 혈세할 계책이 숨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형산의 요기를 다시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요요경을 금혜연 계집 에게 다시 주었던가? 빼앗아내어 오형산에 다시 요기혈공을 뚫으면 가능 하리라. 그리되면 수많은 요괴 귀신들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겠지. 그리 고 혈향초도 다시 재배해야지.” 백가량은 미래를 생각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련과 백도를 양패구상 시키리라. 마련의 뒤에 일곱 노물이 있으며 그 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백도는 결코 마련을 좌시하지 않 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다.” “흑방과 현황방, 천뇌교의 세력을 합치리라. 방해하는 놈은 모조리 죽이 리라. 그 힘과 지금 가진 일백마제의 힘으로 백도와 마도의 충돌이후 살 아남은 잔존자들을 쓸어내면 되리라. 그때는 천하무림은 내손아귀에 있 을 것이다.” “살아남은 백도는 모용풍 분신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세뇌하여 본좌의 꼭 두가시로 만드리라. 마련의 잔존자들도 마찬가지. 천년마교의 정통인 혁 우비를 이용하여 혈천마련의 세력을 삼켜버리리라. 거부하는 자는 다른 분신들을 이용하여 모조리 죽여버리리라.” “천마강시를 다시 대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백치마인도. 혈향초 도 대규모로 재배하고 수십개의 혈근을 천하에 뿌려야 한다. 또한 본좌 의 분신을 수십 수백으로 늘리리라.” “첫째 녀석도 용서할 수가 없다. 천하무림을 접수하고나면 옥룡왕 행세 를 하고있는 놈도 죽여버리겠다. 흐흐. 천하무림 뿐만 아니라 천자가 되 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천마강시가 그 녀석에게 있지만 그 괴물 의 약점을 알고있으니 본좌에게 문제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첫째 가 쌍영마공을 익혔다한들 분신들을 이용하여 차륜전을 벌인다면 감히 이 기지 못하리라.” 백가량이 대소를 터트리며 쌍노를 불렀다. 마음으로 부르는 것만으로 쌍 노는 기척을 알아채고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백가량이 쌍노에게 여 태까지의 계획이 바뀌었다고 알려주려는 순간이었다. “크으윽. 머리가 깨어질 것같다.” 백가량이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이곳은 가장 비밀스런 석실이라 누 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 쌍노조차 혈존의 허락없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 이다. 따라서 백가량이 머리를 붙잡고 뒹군들 누구하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크으윽. 곤무악, 모용풍, 마진걸, 오형록... 놈들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놈들의 인격이 내 머릿속으로 역류한다. 크으윽. 있을 수가 없 는 일.” 백가량의 신음이 자그마하게 흘러나왔다. 백가량의 눈빛은 온통 혼란과 혼동의 격류 속에 빠져 있었다.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나 마 다행인 것은 분신들의 기억은 영혼의 조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지 기억이라는 정도였을까? 백가량, 백이충의 영혼의 정체성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영혼을 오염시키지는 못했다는 소리이다. “크으윽. 나는 누구이지?” 백가량의 눈에서 광인 수준의 눈빛이 터져나왔다. 백가량은 점차 미친 것 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갔다. 자신을 자신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자, 자신 을 나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미칠 수밖에 없다. “영혼이란 무엇이지? 기억과 지식의 집합체인가? 본능의 혼합체? 으으. 나는 나인가?” 그는 백가량인가? 그의 몸은 백이충이다. 혈마전혼대법으로 백가량의 영 혼이 스며들어 태어났고 백이충으로 잠깐 자라났다. 하지만 그 영혼은 백 가량의 것이고 백가량의 기억과 인격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그렇다 면 백가량인가? 백이충은 단지 기억을 잃었을 때의 가장된 인격에 불과한 가? “으으... 백가량 과거의 기억이 백이충의 몸에 스며들었다고 해서 내가 백가량이라고? 그럼 모용풍은? 마진걸은? 오형록은? 놈들의 기억이 역류 되어 지금 내 머릿속에 스며들어왔다. 그럼 나는 모용풍인가? 마진걸인 가? 오형록인가? 그것들은 단지 기억과 지식에 불과하다. 그럼 백가량 또 한 스며든 지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 이 몸이 살아온 백이충이 진짜 나인가?” 그는 백이충인가? 확실히 백이충의 인격과 몸으로 이십년을 살아왔다. 하 지만 이십 년을 능가하는 백년 넘게 쌓아온 백가량의 영혼은? 백가량의 기억은? 백가량으로서 절절히 느껴지는 복수심과 감정은? 악산산에 대한 감정은? 백이충의 몸이 본신이기에 그를 백이충이라 할 수 없다. 그의 영 혼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여러 분신의 몸에 깃들어 움직이지 않는가? 백이충의 몸은 최후로 돌아오는 곳일뿐 따지고 보면 본신이라고 해도 분 신의 몸처럼 영혼이 깃드는 거처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누구인가? 헛깨비인가?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닌가? 존재하기는 하 는 것인가? 존재하지도 않은 허상이 남의 육체에 빌붙어 돌아다니는 것 이 아닐까?" 깊은 혼란. 그것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심마(心魔)이기도 했고 주화입마 로 들어가는 현상이기도 했으며 또한 아수라독존마공의 입문(入門)이기 도 했다. 처음에는 백이충이라는 확실한 자아가 있었다. 백가량의 기억이 깨어났을 때는 전생이나 어릴 적 추억처럼 희미한 기억 이 되살아 난 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마성이 되살아나 백가량의 인격이 표출되었을 때는 그 인격도 백이충 자 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혈존, 혹은 백가량으로 되돌아갈수록 백이충으로 남으려 노력했다. 전혀 다른 두 인격 모두의 통합이 지금의 자신이라 생각했다. 어느 순간에 백가량인지 백이충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악산산과 금혜연 으로부터 시작된 마음의 갈등은 두 인격의 합일이라는 착각을 깨트려버렸 다. 정체성이 사라졌다.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혼란과 혼돈이 깊어졌다.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자각과 혼란과 깨달음은 모두 개인의 인식에게서 비롯되는 것. 우주의 창생도 우주의 멸망도, 자연의 오묘한 이치도, 죽음 으로 향하는 저주도 모두 개인의 사고에서 인식되어야 비로서 그 개인에 게 가치가 부여되는 것. 그 개인의 인식의 혼란은 바로 개인에게 있어 전 우주의 혼란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혼돈은 전 우주의 혼돈이 아니겠는 가? 개인의 인식 자체가 전 우주이니... “크아아악.” 백가량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만약 다른 무도의 길을 걷는 자였다 면 깊은 혼돈과 자아의 상실에 백치와 반신불수, 심지어 영혼의 상실까 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가량이 추구하는 무도의 길은 혼돈의 극치, 아무도 걷지 않 은 길, 아수라독존마공이었다. 그의 혼란은 아수라독존마공의 길을 걷는 것에 불과했다. 하루가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일어났다. 천천히 자신을 점검하듯 생각 하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아직 혼란의 빛이 눈에 머물렀지만 쓰러지기 직 전 광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린 모습이었다. 그것은 백가량의 눈빛이 아니었다. 순수한 백이충의 눈빛도 아니었지만 요 근래 스스로 백이충이라 고집하면서 백가량의 인격을 많이 나타내던 눈빛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인 정하는 눈빛. 모든 것을 깨달은 선각자(先覺者)나 완벽히 미쳐버린 광인 (狂人)과 동일한 눈빛이었다. “흐흐. 모순된 일이 아닌가? 정신이 건강할 때는 몸이 허약하더니 정신 이 미쳐가니 몸이 튼튼해지다니.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또다시 늘어났 지 않은가? 마지막 구결의 해석을 아직 얻지 못했거늘...” ‘그’는 자신을 부정했다. 하지만 또한 자신을 초월했다. 스스로 혼돈이 라고 자신을 자인한 순간 새로운 자신을 되찾았다. 그는 ‘혼돈’이었 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되 스스로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니었으며 그 누고 도 될 수 없는 존재. 또한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므로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존재. 백가량도 백이충도 아닌 ‘그’이기에 마음 속의 갈등을 줄 일 수 있었다. 마음을 결정했다지만 아수라독존마공에서 뜻하는 진정한 ‘혼돈’으로서 의 존재가 그의 몸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백가량과 백이충 의 자각이 왔다갔다하기에 회피라는 개념으로서 만들어내어 택한 ‘혼 돈’이기 때문이다. 백이충으로서도 백가량으로서도 자아성을 찾지 못하 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회피한 혼돈인 것이다. “후후. 새로운 인격의 ‘나’이지만 일단 백이충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 야겠지.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백이충이 되어야 할테니까.” 백이충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혼돈’으로서 백이충을 배우려는 것 이다. 백이충을 배움으로서 지금까지의 백이충을 털어내려는 것이다. 또 한 백가량도 털어내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온전히 하나로서의 ‘혼돈’만 남지않으면 ‘그’의 존재는 단지 다중 인격의 하나가 늘어 난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백이충이 석실을 나서자 쌍노가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이충이 마음 속으로 그를 부른 것이었다. 쌍노는 백이충을 보며 약간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백이충의 무공이 상실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백이충의 몸은 금간 그릇이었으되 그 속에 쌍영마공을 억지로 담아내고 육체의 한계를 넘는 기운을 집어 넣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파괴할 듯 한 사납고 위태로운 기운이 항상 과거의 백이충의 몸에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쌍노가 보기에 백이충의 몸에는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 다. 마치 무림에 처음 나섰던 때의 백이충의 몸처럼. 이 몸 속에, 실재로는 그 영혼 속에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것인 혼돈-아수라독존마공-이 담겨져 있었지만 쌍노는 그것을 눈치챌 수 없었 다. “주군. 일은 잘 되셨습니까?” “흥. 본좌를 해치려는 자는 악도였다. 너희들이 말한 것이 맞았다. 하지 만 그자를 해치우려다가 엉뚱하게 첫째의 흔적만을 발견했다.” “옛? 그 배반자 말씀입니까?” “그래. 놀랍게도 우리 가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살고 있었더군. 옥룡왕이 바로 첫째의 변신이더군. 이로서 아홉 녀석이 숨은 곳이 모조 리 들어난 셈이지.” 백이충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조로 쌍노에게 말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쌍영마공의 합일에 성공했었다. 천마지존의 몸으로 비장의 한 수랍시고 혈영마공을 전개해 봤지만 통하지도 않더군.” “그... 그럴 리가? 쌍영마공의 합일이라니. 그건 주군께서도 아직 이룩 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덕분에 큰 낭패를 봤다. 그 위력이란 대단하여 이혼통제 대법을 역류시킬 정도이더군. 역시 본좌를 가장 닮은 녀석은 바로 첫째녀 석인 것 같아.” “......” “너무 그런 표정을 짓지 마라. 녀석도 혈뇌동과 비슷한 일을 했다. 쌍영 마공의 합일구결은 그곳에서 얻은 듯 하더군. 하지만 애초부터 쌍영마공 따위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이룩하기 위한 기초무공. 아수라독존마공을 이 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영마공의 합일이 필요하지만 쌍영마공이 합일 되었다고 해서 아수라독존마공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애초에 혈뇌동을 통 해 이룩하고자 했던 목적이 그놈과 나는 달라.” 백이충은 가볍게 혈지존의 일을 무시했다. 현재 가장 급한 것은 간신히 진정시킨 자신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또한 그 다음은 무림에 뿌 려놓은 씨를 수확하여 거두는 것. 그러니 황실 쪽에 있는 혈지존의 일은 가장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백이충은 관심을 금혜연에게 돌렸다. 스스로 백이충도 백가량도 아닌 새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금혜연을 생 각하자 다시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백이충으로서의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품고있기 때문이다. “소매는 지금 어디있나?” “모용풍과 더불어 하남 무림맹 총단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백이충은 가만히 기억을 되돌아 보았다. 백이충이 백가량과 혼동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원인이 바로 금혜연과 악산산 때문이었 다. 금혜연이 중요한지 악산산이 중요하지 생각하다가 자신이 백가량인 지 백이충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동일시 했던 서로의 인격을 인 정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이충을 배우기 위해서는 갈등의 시작이 된 금혜연을 알아야 했다. “내 이름으로 소매에게 서찰을 보내라. 하북에 있는 북경 우리 집으로 오라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자고 소식을 보내면 당장 달려오겠지. 오래 전부터 혼인식부터 하자고 졸라왔으니.” 그리고보면 오랜 동안 북경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백이충이 처음 집 을 떠나 무림에 나설 때는 잠깐 여행을 하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벌써 일년이 넘는 세월이 후딱 지나간 것이다. 서문 대장군부는 백이충의 마음 속에서 금혜연과 함께 가장 크게 차지하 는 가족이 있는 곳이다. 백이충은 다시 백이충으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백이충의 꿈인 조용하고 단란한 가족과의 평범한 생활도 좋고 백가량의 야망인 무림제패나 역모도 좋다. 하지만 일단 자신이라는 가치를 먼저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집으로 돌아가 소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 가족과 함께 지낼 것이 고...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겠다. 그래서 백이충으로서의 모든 것 을 되찾았을 때... 진짜 내가 되기 위해 백이충을 버리겠다.” 백이충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 모든 것이 아수라독존 마공의 혼돈구결 속에 포함된 뜻인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란루에 벗어나 백이충은 북경을 향해 올라갔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 난 이후 집으로의 귀환이었다. 악도를 쫓아 북경의 옥룡왕부에 가기는 했 지만 그건 천마지존의 몸으로서 간것이지, 백이충으로서 간 것은 아니었 다. 새로운 백이충은 원래 백이충으로서 가족을 생각했다. 집을 생각하 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든 가족이 그립기 이를 데 없었 다. 북경에 들어서니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중원의 중심인데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마치 한겨울의 중심에 온 듯 거리는 썰 렁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거리를 사람도 군관과 병마들밖에 없었다. 또한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이 철저하기 이를데 없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쌍노를 주변에서 물리쳤던 백이충으로서는 북경의 분 위기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서문 대 장군부로 발길을 옮기려하니 귓가에 쌍노의 전음이 들렸다. “주군. 장군부로 들어가시면 아니됩니다.” “무슨 일인가? 북경의 분위기가 마치 난이라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 가?” “옥룡왕이 자금성을 장악했습니다. 북경 전체가 그의 통제하에 있습니 다. 아직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제 황제를 끌어내도 이상하지 않 을 정도입니다.” “그런가? 첫째 녀석. 무림 뿐만 아니라 천자의 자리에도 욕심이 있었던 가? 역시 욕심도 녀석이 백가량을 가장 많이 닮았군.” 혈존. 그이름이 뜻하는 존재는 없다. 지금 백이충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 히 잠들어 있지만 그 존재 백가량은 백이충과 더불어 영원히 나오지 않 을 것이다. 오히려 옥룡왕 혈지존이야말로 과거의 혈존과 똑같은 존재라 고 할수있을 것이다. 그 야망과 욕심, 그리고 잔인함과 지혜까지... “그리고... 서문 대장군부가 폐쇄되었습니다.” 그 말에 당장 백이충의 몸이 뻣뻣한 동상처럼 굳어졌다. 대장군부가 폐쇄 되다니. 선황의 유시덕에 당금 황제도 벌을 내리지 못하는 대장군부를 누 가 폐쇄시켰단 말인가? “옥룡왕부에서 나온 사람이 대장군부의 식솔들을 잡아갔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는 없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 하지만 좋은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쌍노는 백이충의 대장군부에 대한 애정을 잘 알기에 더듬거리며 말했지 만 백이충은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옥룡왕과 대장군부 에 대한 생각이었다. (천마지존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기에 그 몸이 완전히 파괴된 줄 알았 거늘 그것이 아니란 말인가? 혈지존이 천마지존의 몸을 통제할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역추적으로 백이충의 내력을 알아내었단 말인가?) 가족이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생각만큼 충격적이지 않았다. 새로 운 백이충에게는 과거 원래의 백이충으로서의 부분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냉정했던 백이충의 표정도 쌍노의 다음 말에 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성녀 말씀입니다만. 실종되셨습니다.” “뭐라고?” 백이충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직 금혜연에 대한 마음까지 지우는 것은 멀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냉 정을 되찾았다. “성녀께서 모용풍과 헤어진 직후 하북으로 넘어왔습니다만... 도중에 실 종되셨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성녀 스스로 행방을 감추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크윽. 말도 안돼는 소리. 나와의 결혼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다. 도중 에 무슨 일이 있다한들 어이하여 스스로 행방을 감춘단 말이냐?” “......” “그녀가 실종된 장소는 어디냐?” “하남에서 하북으로 들어오는 청마산 근처입니다. 지금 혈무영 전체를 동원하여 성녀의 행방을...” “내가 직접 가겠다. 그녀에 대한 일은 가장 급한 일이니.” “하오면 북경에서 대장군부의 일은 어이하실 일이신지...” “가족의 일보다는 소매의 일이 더 급하다. 이거 어쩐지 여자에 환장해 서 가족을 나몰라라 하는 패륜아 같아졌군. 하지만 소매의 안전을 확보하 지 못하면 영원히 나로서 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위기 관련자료:없음 [1961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8 23:26 조회:92 <위기> 백이충이 처음 자각했을 때의 몸은 무공이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혹은 자 각 후에 조금 쌍영마공의 기틀을 잡을 수 있는 진기가 되살아났어도 허약 한 몸의 상태 덕에 있으나 마나 한 경지였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무림에 나섰을 때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백이충이 허약한 몸을 이끌고 무림에 자 신있게 나섰던 것은 몇가지 믿는 게 있었던 탓이다. 첫째는 바로 백이충이 혈존 백가량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 는 것. 둘째는 쌍노의 힘. 배교쌍노는 혈존의 수족역할을 했던 자로서 술법과 무 공이 모두 최상승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무공 하나만 비교한다면 뒤질 지 몰라도 술법과 무공 두 가지를 합한 최종 능력이라면 설사 천무삼성 을 만난다해도 배교 쌍노는 능히 상대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셋째는 무공은 사용할 수 없지만 대신 기억과 함께 돌아온 혈존의 배교 사술 능력이다. 처음에는 일일이 술법을 펼치기 위해 배교쌍노의 힘을 빌 려야 하는 정도였지만 오형산 요요경의 막대한 요력을 얻은 이후 사술의 능력은 배교쌍노를 바로 뛰어 넘었다. 넷째는 백이충의 몸에 있는 여러 가지 법보의 능력이다. 혈존시절 안배했 던 배교의 보물들, 혹은 천하 각지에서 빼앗은 것들로 쌍노를 통해 다시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 보물들을 모조리 다룰 능력은 오직 천하에 그 하 나였다. 주변 모든 생명체를 잠들게 하는 수면충(睡眠蟲), 몸을 일시 불사로 만들 어주는 불사옥대(不死玉帶),땅을 축지(縮地)시켜주는 천리신보기(千里神 步旗),하늘의 신장을 몸에 내리게 하는 성군강림부(星君降臨符),스스로 영성을 가진 자령검(紫靈劍), 자연주(自然珠)... 등등, 오형산에서 얻은 요요경(妖妖鏡)도 혈존이 평소에 몸에 지니고 있던 이들 법보 중의 하나 에 불과했다. 백이충의 과거가 혈존이라는 사실만 밝혀지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조건 만 가지고도 안전하게 천하를 종횡할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대장군부의 자손에 무림인이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할 테지만 설사 무모한 자가 나 라 군부와의 충돌을 꺼리지않고 백이충을 공격한다해도 그의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극히 적었던 것이다. 백이충은 처음 천하를 어지럽힐 몇가지 혈존의 장난만을 거둬들이면 다 시 장군부로 돌아와 평범히 살려했다. 원한관계를 풀거나 다른 자와 충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안배를 거둬들이면 된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어차피 집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무공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백이충은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무림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혼 에 잠들어있는 혈존의 인격을 너무 무시했다. 설마 혈존의 인격이 되살아 나며 무림에 대한 야욕이 불타오리라고는 백이충도 상상하지 못했다. 백이충은 백이충이고 혈존 백가량은 단지 과거 속의 희미한 기억일 뿐이 라 생각했지만 결국 백이충과 백가량은 같은 영혼이었다. 백가량의 영혼 이 모든 기억을 잃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이 쌓아올린 인격이 백이충이었 다. 유순한 사람에게 사나운 면도 있듯 기본적으로 같은 영혼에서 뻗어 나 각기 다르게 보여지는 두 개의 인격일 뿐이었다. 전혀 다른 환경, 전 혀 다른 풍부한 사랑에 의해 다르게 생성된 과거와 현재의 두 인격이지 만 그 근본적인 토양, 즉 영혼은 같았다. 스스로 백이충으로 확신하고 백가량은 이미 죽어 지식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백이충의 영혼. 하지만 그 영혼은 동시에 백가량의 영혼이기도 했으며 순수하고 행복해하는 백이충의 인격에 눌려 잠자는 백가량의 인격 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혈존의 안배를 하나하나 거둬들일수 록, 즉 요요경의 요기를 얻고 혈향초의 힘을 얻고, 마화타에게서 건강을 위한 수술을 받고, 혈환과 혈무영이 마련한 각종 안배를 얻어 힘을 얻을 수록 영혼의 한단면인 백가량의 성품이 깨어났고 백이충은 거칠어졌다. 백이충이 경험하지 못했던 백가량의 치밀하고 잔인한 성격이 깨어난 것 은 그가 얻은 힘이 대부분 마공과 사공을 자극하기 위한 최고의 질에 해 당하는 안배였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환경과 풍부한 사랑 속에 자라났 던 백이충은 영혼 속에 숨어있던 거친 성품, 혈존 백가량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사납고 잔인한 성품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얻은 힘이 혈존 의 그런 성품에 적합하도록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이충의 순수한 마음에 백가량의 거칠고 잔인한 성품이 섞일수록 혈존 백가량이었을 때의 버릇과 성격과 야망이 자주 드러났다. 또한 백가량의 기억이 더더욱 또렷해졌다. 그러나...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하지만 않았아 도 문제가 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백가량의 기억이 점차 뚜렷해지기는 해도 단지 영혼의 일부분일뿐, 영원히 백이충으로서 살았을 테니까. 백이 충으로 자처하는 동안만은 혈존과 비슷한 야망을 드러낼지라도 과거의 혈 존처럼 나쁜 놈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혈마전혼대법, 이혼통제대법. 이러한 대법은 저주받은 사법임이 분명하 다. 혈존이 펼친 혈마전혼대법은 분명 성공했다. 백가량의 영혼은 아기의 죽 은 영혼대신 완전히 아기의 몸과 접착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실패했다. 모든 기억과 인격을 잃고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바람에 기존에 있 던 백가량의 인격을 지워버릴만한 백이충이라는 인격이 영혼위에 새로 생 겨났다. 백이충은 무림에 나섰고 혈존 백가량의 성격이 뒤섞이면서 무림에 대한 야망과 욕심이 생겨났고 마침내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했고... 원래 백이충 의 몸의 것이 아니던 영혼은 너무도 쉽게 본체를 떠나 분신에게 깃들었 다. 전설상의 이혼통제대법은 혈마전혼대법으로 백이충의 몸에 깃들었던 영혼과 너무도 상성이 잘맞는 대법이었던 것이다. 대신 완전히 고착(固着)되었던 백이충의 몸과 영혼은 그만큼 틈이 벌어지 고 결합력이 약해졌다. 임시로 깃드는 분신의 몸보다야 이십년 넘게 깃 든 몸이 백이충의 영혼에 훨씬 강한 결합력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과 몸 이 떨어지는 시간이 많을수록 백이충의 몸도 영혼의 거리가 멀어짐은 당 연한 일이었다. 백이충이 이혼통제대법을 사용하면서 간과하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지나 갔던 것은 결국 원래의 영혼 즉 혈존 백가량이나 백이충의 영혼의 진짜 거처 진짜 몸은 백이충의 몸이 아니라 죽어 사라진 혈존의 몸이라는 것이 다. 너무 오랜 세월을 백이충으로 살았기에 백이충도 영혼의 본체를...백 이충의 몸을 본신으로 생각했지만 백이충의 몸은 본체가 아니었다. 영혼 게게는 백이충의 몸조차 분신 중에 가장 오래 깃들었던 몸에 불과한 것이 다. 처음으로 혈지존에게 일격을 먹고 강제로 이혼통제대법이 해제되었을 때 대법은 역류했다. 백이충의 잘못도 있었다. 마화타의 충고를 무시하고 천 마지존의 몸에 최후의 공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쉽게 깨어졌다. 천마지존의 몸이 파괴되는 충격에 백이충의 영혼이 튕겨 나갔고 더불어 자중에 재생된 몸에도 애써 부활의 술로 불러들였던 천마 지존의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혼통제대법에서 분신의 타격은 본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백이충 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준 영혼과 일체였던 진짜 본신이었으면 그렇게 됬 을 것이다. 혈지존 때문에 강제로 대법이 풀어졌어도 영혼은 아무 탈없 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진짜 본신에게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대법 의 역류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불행히도 백이충 자신조차도 백이충의 몸이 본신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했 다. 더욱 불행한 것은 거듭되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 천마지존의 몸에 깃 들어있던 영혼은 자신을 백이충이 아닌 백가량으로서 강하게 자각하고 있 었다. 두 다른 인격의 갈등 속에서 영혼은 백이충의 몸에 있을 때처럼 백 이충을 '나'로서 자각한 것이 아니라 백가량으로 인격을 드러내면서 백이 충을 '별개'의 존재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혼통제대법이 해체되었다. 대법이 강제로 해체되었으니 본신으로 돌아가야했다. 하지만 본신은 어 디 있었을까? 하물며 백이충을 '별개'로 인식한 백가량의 영혼은 본신이 어디라고 했을까? 백이충의 몸이 백가량의 본신으로 백가량의 영혼에게 인식되었을까? 이혼통제대법을 백가량의 영혼이 스스로 거두었다면 역류는 없었을 것이 다. 백가량의 영혼일지라도 백이충의 몸을 본신으로 생각하는 기억은 가 지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대법은 강제로 해체되었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영혼은 본능적으로 본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백가량의 영혼 이 본능적으로 귀소하려던 본체인 백가량의 몸은 존재하지 않았다. 본체 는 이미 이십년 전에 소멸되었다. 영혼이 익숙한 몸을 찾아 갈가리 찢어졌다. 하나의 영혼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수 있을까? 영혼이 물질이 아니고 사념의 집합체라면 가능하기 도 할 것이다. 영혼의 대부분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백이충의 몸으로 돌 아왔지만 조금 씩은 각기 가장 편했던 장소라고 생각했던 몸으로 기어들 어갔다. 그 조각은 너무나 작아 분신에 머물고 있던 진짜 영혼을 쫓아내 지도 못하고 잠시 기억을 뒤섞었으며 역시 아니라고 여기고는 다시 떠나 백이충의 몸으로 향했다. 백가량의 영혼은 백이충의 몸에 돌아왔다. 그리고 밖에 나가려다 수많은 다른 분신의 기억을 가진 영혼의 조각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백이충의 영 혼이었던 시절처럼 갈등했다. 단지 백가량의 기억을 가졌다 해서 자신을 백가량이라 한다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이 몸에 들어온 영혼들은 뭔가? 백이충으로서도 백가량으로서도 자아를 확신하지 못하는 영혼의 이러한 갈등은 묘하게도 혈존의 최후마공인 아수라독존마공과 일치했다. 진리도 없고 거짓도 없고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고 남을 구분하지 못하는 애매하 고 포괄적인 혼돈. 아수라독존마공의 최후구결인 혼돈진결. 그것이 백가 량도 백이충도 아닌 지금 '혼돈'으로서의 백이충이라는 또다른 인격을 만 들어내었다. (소매가 사라졌다면 첫째 혈지존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다.) 백이충은 청마산에 가까이 오자 금혜연의 실종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렇 게 생각했다. 무림칠미의 하나인 데다 금가장의 재력이 만만치 않고 또한 무림인이니 금혜연이 다른 자들의 노림을 받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허나 금혜연 의 무공이라면 일류고수도 감당할만 하고 백이충이 금혜연의 몸에 베풀 어 놓은 수호령이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금혜연의 몸을 빼내게 만들 것 이다. 금혜연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다시 말해 수호령을 제거할 능 력을 지닌 인물이 움직였다는 말,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 금혜연 에게 해를 끼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혈존과의 관계외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이미 서문 대장군부 공격당했다는 것은 혈지존이 백이충 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 금혜연이 백이충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 져있는만큼 혈존이 백이충이라는 사실을 알고 금혜연을 납치할 만한 자 는 천마지존의 몸을 손에 넣은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번뇌천이 알려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악도가 소매에게 접 근하는 것이 아니라 본좌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소매를 납치하여 본좌 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나?) 청마산에서 금혜연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백이충이 금혜연 에 베풀은 여러 가지 사술대법의 냄새, 그중 하나인 수호령의 냄새만으로 도 백이충이 느끼려고만 하면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가자. 아무래도 첫째 놈의 짓이로구나. 흥. 녀석이 본좌를 너무 가볍게 보고있군." 백이충은 단지 뒤에 쌍노만을 대동하고 청마산을 올랐다. 혈무영이나 다 른 분신을 부리지 않은 것은 혈지존이 청마산에 있다면 분신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단 한번이지만 혈영마공을 발휘할수 있었던 천마지존은 분신 중에 최강이었지. 그런 분신을 일격에 허물어트린 첫째 놈이니 다른 분신 을 이용해봤자..." 그렇다해도 자신이 있었다. 일단 백이충은 지금 쓰고있는 몸이 자신의 몸 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놀랍게 건강해 져있었다. 혈존시절의 안배와 마 화타는 이갑자 내공과 팔성 수준의 쌍영마공을 몸에 심어놨지만 백이충 의 몸은 전력을 다해도 채 지닌바 부공의 일성 이상의 힘과 이십년 내공 을 발하지 못한다. 그나마 발휘되는 위력은 백분지 일이며 진기를 발출하 는 즉시 망가질 것이 백이충의 몸이었다. 이제는 바뀌었다. 지금 즉시 혈영마공 팔성을 제위력 모조리 내면서 발휘 할 정도로 몸이 튼튼해졌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십년 넘게 살아온 몸으 로 제대로된 무공하나 발휘하지 못해서 이혼통제대법과 분신마저 생각해 내었던 백이충으로서는 자신의 몸으로 무공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사실이 나무나 기뻤다. 동시에 자신이 지닌 법보와 혈존 시절보다 더욱 증진된 사술의 능력을 무공과 함께 생각하니 혈지존조차도 우습게 보일 지경이었 다. "허. 이건 어서 오라고 아주 본좌를 초대하는 꼴이 아닌가?" 기막히다는 듯 말하는 백이충을 보고 쌍노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보기 에는 아무 것도 없는 숲 그대로였던 것이다. 술법이나 진법으로 가렸다 면 혈무영들을 보냈을 때 놓쳤을 리가 없다. 하기야 쌍노조차 새삼스럽 게 눈을 부릅떴음에도 지금 쉽게 찾지 못하는 것이니 혈무영도 찾지 못하 는 것이 당연하였으리라. 쌍노는 백이충의 말을 듣고 안력을 돋구었고 그 제야 뭔가를 느꼈다. "모산파 비전의 술법. 부시무영술(不視無影術)? 하지만 저 술법은 모산 파가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실전되었을 텐데?" "악도 녀석은 모든 모산비전을 알고있지. 게다가 부시무영술로 가리고 있 는 것은 차시혈존대진(借始血尊大陣). 바로 본좌가 혈지존에게 전수한 진 법이다." "아, 모든 것을 감추어 차단시켜 완벽히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차 시혈존대진입니까?" "그래. 게다가 이 진법에 들어간 사람들은 진법을 시전한 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진법을 시전한 자가 진을 풀어주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면 절 대 진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영혼조차 빠져나가지 못하지. 즉 진을 만 든 자가 살아있어 안에 있는 동안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가두는 진이 지." 백이충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진법을 혈지존이 펼친 이유는 간단 했다. 영혼조차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는 여기에서 반드시 죽는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초대를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 가? 게다가 금혜연은 반드시 저 안에 있을 터였다. "크아아악." 북두성군(北斗星君),무곡성군(武曲星君), 문창성군(文昌星君)은 하늘위 에 떠있는 서른 여섯 개의 별 즉 삼십육천강성(三十六天剛星)의 세 별이 다. 모든 별을 다스리는 북쪽 하늘의 우두머리 별, 무와 문을 번성케 하 는 별. 이들은 또한 하늘을 지키는 천장(天將)이기도 하다. 지금 자색 장삼을 입은 무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곳에는 세명의 천장이 늠름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백이충과 쌍노가 법보를 사용하여 성군강림부를 이용하여 세명의 천장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킨 것 이다. 천장을 강림시킬 때마다 생명이나 업보 등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고 힘을 빌리기는 하지만 그 위력만은 확실하였다.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할 정도 의 힘을 발휘할수 있는 것이다. "비켜라. 인간 따위가 감히 가로막느냐?" 북두성군이 호통을 쳤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커다란 위압감이 그 사이 를 휘감았다. 갑자기 나타나 눈깜짝할 사이에 수십의 동료들을 죽인 세명 의 천장에게 놀라 뒤로 물러선 자의 무사들을 내리누르는 엄청난 기세였 다. 북두성군이 힐긋보니 중앙 장원을 호위하고 있는 자의무사들은 이곳에 있 는 자가 다일 것 같았다. 지금은 기세에 눌려 투지를 잃었지만 옥룡왕부 의 무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음을 그는 잘알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북두성 군은 슬쩍 소매를 휘저었고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살며시 나오 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셋, 둘, 하나!" 북두성군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열을 거꾸로 다 세 자 자의무사들이 일제히 픽픽 쓰러졌다. 수혈을 짚은 것처럼 그들 모두 가 순식간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을 타고 세명의 신장은 담장을 넘 어 훨훨 장원안으로 들어갔다. "소매. 거기 있구나." 북두성군이 소리쳤다. 평범한 장원의 안에는 커다란 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금혜연이 묶여 있었다. 주위에는 일곱명의 무사들이 기둥을 둘러싸고 감시하고 있었다. 한 눈에 기둥에 있는 금혜연이 가짜가 아닌 자신의 연인임을 북두성군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명의 신장이 기둥을 향해 다가서자 일곱의 무사들이 가로막았다. 천장 들의 늠름한 기세에 일곱의 인간들은 몸을 움추렸다. 허나 곧 기합을 내 지르고는 몸을 부풀렸다. 천장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 일곱 명의 무사들 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검은 털이 자라기 시작하며 눈에서 흉광이, 손 에서 길죽한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덩치가 인간의 세 배 정도는 되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되어 천장들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나찰귀 따위가 성군의 수좌를 공격한단 말인가?" 세 성군의 노기를 실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북두성군의 검과 문창무곡의 창이 번뜩였다. 밝은 섬광이 한동안 환하게 터져나오는 순간 하늘에서 후 르륵 피비가 내리더니 일곱의 나찰귀는 수천갈래의 혈육 조각이 되어 사 방으로 분산해 버렸다.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 북두성군이 기둥에 묶인 금혜연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찰나 자욱한 피조각으로 변해 떨어진 나찰귀의 조각들이 땅에 피를 묻혔다. 선혈은 땅속에 스며들지 않고 바닥을 흘러 일종의 기 이한 그림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진형을 표시하는 것임을 알 정도가 되었을 때는 세 성군의 위치가 진형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런. 모산파 비전의 악귀금쇄진(惡鬼禁鎖陣)이다." 북두성군의 놀란 음성 속에서 피로 만들어진 원형의 금진(禁陣)안이 급격 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암흑이 진 안에서 뻗어나왔고 세 성군은 암흑 의 원통에 갇혀버렸다. 동시에 뿌연 영혼의 사슬이 어디에선가 뻗어나와 뱀처럼 꿈틀거리며 신장을 향해 다가왔다. 세 성군이 당황하여 피하려했 지만 어둠의 힘이 성군의 신력을 가로막았다. 눈깜짝 할사이에 세 성군 의 몸이 뿌연 영혼의 사슬에 묶여 버렸다. "내가 파사진결(破邪眞訣)을 외어 악귀의 영혼으로 만든 사슬을 끊어버리 리라." 북두성군이 당황하지않고 소리칠 적에 금혜연이 있는 기둥 뒤에서 한 사 람이 나와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모산비전. 칠성검. 하늘에 있는 별의 힘을 빌어 신도 귀도 끊어버린다."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뜻밖에도 얼마 전까지 백이충의 분신이 던 천마지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문을 외워 살짝 검을 쓰다듬 고 암흑의 감옥에 갇힌 세 성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놀란 세 성군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천마지존의 모습을 한 자는 바로 악도였다. 세 성군이 쓰러지자 계약을 완료한 악귀금쇄진은 힘을 다하고 스러졌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악도가 바라보니 어둠이 밝아오며 목과 분리된 세 개의 몸이 천천히 쓰러지고 있 었다. 한줄기 성스런 광채가 세 개의 몸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구쳤다. 그 힘이 다해 성군의 영이 하늘로 되돌아간 것이다. 광채가 스러지자 나타난 몸 은 뜻밖에도 장원의 밖을 호위하던 자의 무사들의 복장이었다. 세 성군 이 강림하여 금혜연을 구하려던 자는 뜻밖에 백이충이 아닌 자의 무사들 이었던 것이다. "혈존. 나타났으면 모습을 보여라. 설마 다시 태어나 환생한 연인마저 죽 이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악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의 검은 정신을 잃은 금혜연의 바로 목 밑 에 있었다. "빌어먹을 녀석. 본좌랑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리도 못살게 구는 거냐?" 장원의 담장 위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둔법의 부적으로 몸을 감추 고 시체에 천장을 강림시켜 조정하던 백이충과 쌍노의 모습이었다. "흐흐. 원한이라...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살아보겠다고 벌레처럼 네 눈 을 피해 도망다녔던 것도 원한이라면 원한일까?" "쳇. 네 녀석 때문에 산산이 죽었다. 여지껏 살아있는 것도 하늘에 감사 해야 할 판이거늘 감히 엉뚱한 마음을 먹어? 게다가 이제보니 본좌의 분 신 하나를 떡하니 얻어쓰고 있구만." 순간 악도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절대적인 확신에 순간적으로 의 심이 들었다. 저자가 진짜 혈존이라면 저토록 담담하게 악산산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음성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짜 임 을 악도는 눈치챘다. 저 자가 혈존이 아니었단 말인가? 혹은 진짜라도 악 산산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이란 말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악산산을 닮 은 여자 금혜연을 통해 혈존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겠다는 확신이 조금 흔 들렸다. 악도와 백이충의 설전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장원의 곳곳에 몸을 숨 기고 지켜보고 있는 자들. 바로 천하를 움직이는 배후의 그림자들이었 다. 그들이 가장 불안해 하는 자가 바로 혈존이고 그 혈존을 처단하기 위 해 이들은 모였다. 하지만 악도와 노닥거리는 자가 혈존인지 아닌지 판단 하기는 참으로 애매했다. 스스로 혈존을 자처하고 있다고 해도, 혈지존이 그를 혈존이라 지칭했다 해도 그가 확실히 혈존이란 근거는 없었다. 과거처럼 혈존이라고 정해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혈마전혼대법을 사용하 여 누구도 모르는 사람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 자가 혈존이었다. 그가 혈 존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이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사형. 악도와 상대하는 자가 혈존사부가 확실할까요?) (확신할 수 없다. 혈지존의 계략인지도 모르지. 먼저 움직이는 자가 큰 손해를 본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 대련주는 어떠시 오? 그가 혈존 사부같소?) (이 진법은 사부도 우리도 알지 않느냐? 어차피 혈지존이 진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저자는 이곳에서 달아나지 못한다. 그의 정체를 확인할 시간 은 충분히 있으니 천천히 지켜보는 것이 낫다.) 이렇게 속삭이는 자도 있는가하면 (아미타불. 저 자가 혈존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구려. 어떠시오?) (나도 확신을 못하겠소. 혈지존이 혈존의 핑계를 대고 혹여라도 마련과 우리를 충돌시키려는 음모일 수 있으니 절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혈존이라면 반드시 죽여햐 할 것이오.) (그나저나 금 여시주를 구해야 하지 않겠소? 악도가 혈존의 정체를 밝히 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여 방관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몹시 꺼려지는 구려.) 이렇게 전음을 주고받으며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법존. 저 자가 혈수라입니까?) (글세? 사술의 위력으로 보아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군. 쌍노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 설사 배교쌍노라고 해도 혈수라가 살아있다 는 증거는 되지 않으니...) (그럼 지금 우리는 어이해야 합니까?) (일단 기다리자. 혈지존의 함정인지도 모르는 현재 적지인 중원에 들어 온 우리가 먼저 나서 좋은 것 하나 없다. 일단 혈존이라는 증거를 혈지존 이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한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자들이 하나같이 숨어 예리하게 혈존을 자처하는 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느낀 것일까? 백이충이 이죽거렸다. "악도. 왠만하면 나도 본좌도 너와 놀아주고 싶다만... 아무래도 구경거 리가 되고 싶지가 않구나." 백이충이 시선을 장원 밖으로 돌렸다.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태도에 악 도의 냉정한 태도가 금방 무너졌다. "이 여자는 네 약혼녀이다. 그리고 악산산의 환생이라 해도 무방할 듯 같 은 여인이다. 그런데도 무시하겠다는 거냐? 악산산을 잊어버렸다는 거 냐?" 악산산. 악도로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여자였다. 인생을 혈존 백가량에 게 걸었거늘 오직 이 여자 하나 덕에 혈존의 미움을 샀고 마침내 혈존이 악도를 죽일 마음까지 먹게 만들었다. "닥쳐라. 산산의 죽음에 일조한 놈이 말할 자격이 있느냐? 네놈이... 네 놈이 그녀를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모함? 어줍지 않은 변명은 집어치워라. 그녀를 해친 것이 누구냐? 그녀 를 쫓아낸 것이 누구냐?" 전일비에게나 백가량에게나 죽어도 회상하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백 가량에게는 생각만해도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 다행히 지금 백이충의 몸 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인격이기에 그나마 견딜수 있는 괴로운 기 억이 떠올라 버렸다. - 하하. 일비. 일년동안 그녀에게 애교를 떤 덕에 드디어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어. - -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배교 소교주의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좀 더 그곳에 신경을 쓰심이...- - 하하. 일비. 그녀가 드디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 얼마나 기쁜 지 아는가? - - 이대로라면 배교의 후계자 지위를 빼앗깁니다. 좀더 배교의 소공녀에 게 신경을 쓰셔야... - - 하하. 일비. 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네. 우리 아이. 하하. 이거 힘좀 써야 겠어. - - 주군. 배교의 소공녀가 그녀에 대한 눈치를 챈 듯 싶습니다. 그녀를 숨 기는 것이... - - 일비. 언제까지 그럴건가? 권력. 권력. 소공녀. 소공녀. 그까짓게 뭐 야? 내겐 산산만 있으면 돼. - - 주군. 이대로 사시려 하십니까? 그녀 때문에 야망도 미래도 없이 이대 로 꿈을 접으시렵니까? - - 일비. 권력을 잡는 것만이 꿈은 아니야. 이대로 사는 것도 행복일 수 가 있어. - 맹렬히 솟구치는 기억. 한 때 음약으로 미움을 샀던 악산산. 그런 악산산 이 백가량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백가량도 전일비에게 웃어줄 수 있게 되 었다. 그 때의 백가량은비겁한 방법으로라도 오히려 인연을 맺게 해준 것 을 전일비에게 감사하게 생각했고 진정한 친구로 대했다. - 주군. 그녀를 버리십시오. 지금 주군의 야망에 필요한 것은 배교 소공녀의힘입니다.- - 그만. 나도 괴롭다. 산산이 무림을 떠나 단 둘이 은거하자고 조르고 있 는 판에...- - 소공녀께서 그녀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주군께서 그녀와 헤어지지 않으 면 그녀와 주군을 둘다 배교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고... 위험합니다. 그 녀를 버리지 못하면 소공녀에게 변명이라도 해야 합니다. - - ...... - - 주군. - - ......- - 주군. - - ....... - - 주군. 그녀의 집에 능소위가 드나드는 것을 아십니까? - - 뭐라고? 일비. 다시 말해보게. 그녀가 능소위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단 말인가? - - 능소위와 악산산은 약혼관계입니다. 모산파가 파멸한 이후 그들은 만인 의 인정받는 연인으로..- - 아니야. 산산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결코 능소위에게 돌아갈 리 가 없어. 그녀가 어떻게?- - 주군. 그녀가 다시 능소위를 만났습니다. 어제 밤에도 집에서 밤늦게 능소위가 나가는 것을...- - 크으윽. 아직도 능소위를 잊지 못했단 말인가? 다시는 그 녀석을 만나 지 말라고 그녀에게 손까지 대었건만 그래도 그 녀석을 만났단 말인가? - 백가량은 반 미쳐버렸었다. 질투에 미쳐버렸다. 그리고 악산산을 주먹으 로 때리고 또 때리고... 폭행하고 그녀를 욕하고 이별을 선언하고 나가버 렸다. 애타게 그녀가 부르며 쫓아오는 것을 무시했다. "크으으윽. 네 놈이 감히 그 일을 입에 담다니..." 백이충의 두 눈이 시뻘개졌다. 새로운 백이충이라는 인격도 완전히 과거 의 기억에서 탈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같은 영혼인 덕에 백이충의 감 정도 백가량의 감정도 그 일부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백가량 의 괴로운 과거가 드러나자 '혼돈'으로서의 백이충도 괴로워하는 것이다. - 주군. 그녀가 미쳤습니다. - - .... 하, 뭐? 일비. 뭐라는 거냐? 지금 농담하는 거냐? - - 주군을 쫓아 나섰다가... 밤거리를 헤매며 주군을 찾다가 건달들에게 걸려... - - 거... 거짓말. 그래도 모산파을 일으키겠다던 당찬 여자야. 한낱 건달들에게...- -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일년 전부터는 아예 무공을 버려 둔 상태 였었고... 주군. 저는 단지 주군의 야망이 되살아 날 정도로 그녀와 조금 만 거리를 두기를 바랐는데... 설마 그녀가 이토록 비참하게... 될 줄 은...- - 임신? 그녀가 내 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아기라고? 크흐흐. 비참이 라고? 그녀가 어떻게 죽었기에... 크윽. 말하지 마라. 크흐흐. 이 근처 건달 녀석에게 여자가 걸려들었을 때의 일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 으니...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겠다. 크하하하하.- - 주군. - - 크하하하하. 잘된 일이야. 잘된 일. 잘 죽었어. 그깢 계집. 이제야 제 대로 된 야망을 펼칠 수 있겠군. 배교를 향한 대권에 도전해 보자구. 하 하하. 잘된 일이야. 잘된 일. 옛날 애인을 못잊어 만나고 다니는 계집 따 위는... 크하하하. 학학...흑흑. 크흑흑흑. 하하. 흑흑..흐흐. 흑흑흑.- - ...... - 그녀를 폭행하고 윤간한 건달들을 잡아 죽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최후를 선사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알았다. 산산을 죽이라고 사주한 것이 배교의 소공녀 임을. 배교의 교주 를 대대로 지내는 적씨 일족임을. 아이를 잃고 미친 그녀는 내손으로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하. 그랬지. 그 후에 능소위 그놈을 만났지. 천외구기의 하나였던 놈. 당시 나로서는 감당못할 힘을 가졌던 녀석. 그녀석이 말했지. 산산 은 나만을 사랑했다고. 모산파의 부흥조차 포기하고 나를 쫓아 평번하게 살겠다며... 모산파의 부흥을 능소위 그놈과 삼장로에게 부탁하기 위해 그를 만났다고. 그렇게 나를 사랑했던 그녀를 죽게 한 나를 용서할 수 없 다고 그놈이 말했지." "그래. 그렇다. 혈존. 너는 악산산을 죽게한 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나 전일비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네 놈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말일뿐. 결국 네놈은 네놈의 욕망을 위해 움직였고 다만 그 증오를 모조리 나에게 돌려 놓았지. 네 놈 을 위해 내 전인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나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찾지 못했던 남자와 인생 자체가 파멸당한 남자. 둘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 다. 그리고 악도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금혜연의 목 밑을 파고들었다. "네놈. 순순히 내려와라.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여버리겠다. 악 산산의 환생인 듯한 여자. 그러기에 네 약혼녀로 삼은 거겠지? 악산산을 두 번 죽이고 싶지 않으면 말을 들어라." 악도의 행동에 갑자기 백이충은 피식 웃었다. 방금 전의 격렬했던 감정 표현이 마치 연극인 것처럼. "후후. 그러던지. 네 말대로라면 그녀는 단지 산산에 대한 환상. 그 정도 의 가치겠지." "그 정도의 가치라면 어째서 이곳까지 왔지? 그녀가 소중한 존재였기에 온 것이 아니었나?" "첫째녀석의 의도가 궁금해서 왔을 수도 있지. 하여간 이제 돌아가겠다." 담장 위에서 백이충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금혜연을 상관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태도. 주변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혈존이라는 증거를 혈지존은 아직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천하의 지존들 이 모조리 모인 이곳에서 남에게 이득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혈존의 증 거 없이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착각이었나? 악산산. 그녀의 이야기에도 표정이 잠시 변하다 말았다. 마 음의 상처가 치료되었단 말인가? 금혜연도 하등 그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 지 못한단 말인가? 혈존의 마음을 내 자신보다 더 잘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오판한 거란 말인가?) 벌써 담장에서 백이충과 쌍노의 모습이 사라졌다. 천하의 혈존이고 배교 쌍노이다. 천하지존들이 움직이지 않는한 단순한 수하들로만 그들을 막 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혈지존이 나선다면 혈존에게 당해 진법 이 흐트러짐으로서 애써 유인해 놓은 덫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 (모험이다. 그가 그냥 놔둔다면 백도는 철저히 노부를 증오하게 될 것이 다. 혈지존의 일에도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만있지 못한 다면... 그러면 그의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다.) 천하지존들의 시선이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혈지존의 수하 들이 사라진 혈존을 쫓고 있는 기척도. 예상은 완벽히 깨졌다. 악산산과 의 사랑을 아는 악도가 생각하기에 혈존은 절대 금혜연을 놔두고 사라질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존재가 밖으로 탈출하려 함을 말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악도가 입술을 깨물며 검을 금혜연의 목으로 밀어 넣었다. 악도는 믿었 다. 혈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신의 신념을. 담장 너머 사라진 혈 존이 지금 그의 검을 막으리라고. 어떻게 혈존이 막을 줄은 모른다. 그러 나 그는 할 것이다. 그는 악도가 가장 잘 아는 혈존은 금혜연을 절대 버 리지 못하므로. 펑! 악도의 검이 막 금혜연의 목을 파고들려는 순간 악도의 등에 폭음이 일었 다. 천마지존의 몸을 지닌 악도가 땅에 뒹굴었다. 살아있는 자라면 도저 히 살아날 수 없는 강대한 일격. 쓰러진 악도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그 곳에는 목이 잘린체 다시 일어서는 세 남자가 있었다. "돌아와라." 가운데 있는 자의 주문이 끝나자 즉시 땅에 피를 뿌리며 뒹굴던 목 세 개 가 하늘을 날아왔다. 자의를 입어 혈지존의 무사인줄 알았던 목없는 세 시체는 머리를 받아 자신의 목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혈존 과 쌍노였다. "이런 불사옥대의 마디가 세 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군." 백이충이 자색 장포를 벗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 속에 입은 서생차림 의 허리에는 금색 옥대가 매어져 있었는데 옥대의 마디가 몇 개를 남겨놓 고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그나마 앞쪽의 세 개는 방 금전에 끊어진 것 같았다. "불사옥대? 배교에서 실전되었다는 보물을 되찾았나? 그래서 목대신 옥대 의 마디가 끊어진 거로군. 그럼 나와 말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그들 이야말로 너의 사술로 움직이는 꼭두가시였나?" "아. 그래. 하지만 너도 정말 질기군. 주위에 떠도는 기로 보아 꺼려지 는 놈들이 한둘 온 것 같지가 않아. 잠시 내 뜻대로 움직이는 몇 놈을 적 당한 시기에 죽여 모두 속이고 조용히 떠나려 했는데 감히 소매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에..." 백이충이 기둥에 묶여있는 금혜연의 포박을 풀었다. 백이충이 금혜연을 안고 부축할 때 악도가 소리치며 일어났다. "으하하하. 너는 졌다. 혈존." 악도의 광소. 그것은 자신의 예상대로 혈존이 금혜연을 구하러 왔기 때문 이었다. 이번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백이충이 금혜연을 사랑 하느냐, 아니냐였다. 만약 금혜연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충을 혈 존이라고 다른 자들에게 믿게할 증거가 없었다. 혈지존이야 천마지존의 기억을 직접 읽어 믿는다해도 다른 자들이 어찌 그토록 쉽게 믿어주겠는 가? 하지만 혈존이 금혜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면... 푸아아악. 붉은 선혈이 아름답게 뿌려졌다. 너무도 뚜렷한 혈향. 그것은 금혜연의 가슴에서부터 뿜어져나와 백이충의 앞가슴을 흠뻑 적셨다. 금혜연의 심장 이 있는 가슴부위가 갑작스레 터져 나간 것이다. "소... 소매?" "이것이 나의 복수다. 혈존. 하하하. 그녀의 심장에 언제든지 내 명에 반 응하는 심고를 심어놨지. 악산산에 이어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두 번이 나 죽는 것을 본 기분이 어떠냐? " 미친 듯한 악도 전일비의 웃음. 터져버린 금혜연의 심장. "소매?" 소매가 죽었다? 소매는 죽지 않았다? "소매?" 내 가슴이 아프다? 내 가슴이 아프지 않다? "소매?" 이건 너무도 뚜렷한 현실인가? 이건 너무나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소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지 않다? "소매?" 소매가 죽어 슬프다? 하나도 슬프지 않다? 그런데 슬픈게 뭘까?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하늘과 땅이 뒤엎어졌다. 인간으로서 배우고 알 았던 이치가 무너졌다. 일고지낸 상식이 뒤엎어졌다. 혈존 백가량으로서 알고지냈던 모든 것이 거짓이 되었다. 백이충이 살아온 모든 것이 환상 이 되었다. 감정은 돌이 되고 진리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무나 깊은 슬픔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깊은 아픔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깊은 감정은 감정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뒤바 뀌었다. 모든 것이 가치가 없었다. 죽음은 뭐고 삶은 뭣인가? 백이충이 면 어떻고 백가량이면 어떤가? 아니면 혼돈이면 어떤가? 혼돈? 백이충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혼돈. 십팔층 지 옥에서 올라온 어둠보다 더욱 짙은 혼돈의 끝. 어둠이 빛이 되고 빛이 어 둠이 된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된다. 이세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세상도 나도 모 두 헛것이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아수라독존마공(阿修羅獨尊魔功) 최후의 미완성 구결 혼돈진결(混沌眞訣) 그순간 빛이 터져나왔다. 아니 어둠이 터져나왔다. 아니, 빛도 어둠도 아 닌 혼돈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일어선 것은 죽음의 사신, 아수라였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죽음 관련자료:없음 [1961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1-28 23:35 조회:78 <죽음 > 한줄기 장소가 터져나왔다. 그 장소가 터져나온 곳에 빛도 암흑도 아닌 뿌연 혼돈의 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왔다. 장소는 저 멀리 청마산 구석구석 까지 퍼져 울렸다. "우우우우우우!" 단장의 슬픔이 느껴지는 흐느낌, 쾌락의 정점을 넘어서는 광소, 터져나 올 곳을 못찾아 헤메는 분노의 포효, 생의 환희를 나타내는 흥겨움, 죽음 을 넘어서는 공포, 이루지 못할 것을 바라보는 애닳음. 모든 것을 만족하 고 나오는 트림, 그모든 감정이 장소 소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소리에는 힘이 있다. 정도 마도 아닌 힘.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드는 엄청난 힘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렵고 기쁘고 슬프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힘. 혼돈의 힘. "혈존이다." 혈지존의 초청을 받았던 자들이 일제히 같은 음절을 내뱉었다. 더 이상 의 증거는 필요없었다. 본능이 콕 찝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저 혼돈스 런 울음소리를 내는 자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그리고 바로 고금제일마 혈존이라고. 누가 부정하겠는가? 저 아수라의 소리를 듣고 고 금제일마와 연결시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거늘. "혈존이다." 장소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공포를 느꼈다. 접해보지 않은 미 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끝없는 미로를 걷는 것같은 피곤함, 결코 이길 수 없는 강자를 만났을 때의 좌절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자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자에 대한 약자의 떨림. 장 소 소리를 듣는 자는 모두 그것을 느꼈다. "혈존이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도저히 넘을 수 없 는 최후의 장벽을 만났을 때의 막막함, 인생을 걸고 푼 문제가 마지막에 가서야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무감, 보물의 산을 찾아왔더니 이미 주인이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감. 혈존의 울부짖음 을 듣는 자들은 모두 그런 감정을 맛보았다. "우우우우우." 혼돈 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혼돈의 기류를 뿌리고 있는 자에 게 가장 가까이 있던 자들이 훌훌 날아 그 덩어리를 쫓아갔다. 백도의 고 수들이 살광을 뿌리며 백이충을 향해 날아올랐다. "설마 했더니 혈지존 백시주의 말이 사실이었도다." "천하의 흉적 혈존을 오늘에야 없애 버리겠다." 혜경성승과 천무이성이 백이충을 향해 살광을 뿌리며 나타났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혈천마련보다 백배 더 위험한 것이 바로 혈존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뿌연 기류와 같은 높이의 허공에 위치했다. "아미타불. 오랜만입니다. 백시주." "천하의 악종놈. 기어이 되살아났구나." 천무이성. 혜경성승과 무적장왕의 뒤에 천무호정단의 이십 팔명의 제자들 을 이끌고 혈존의 뒤를 쫓아 하늘로 치솟았다. 뿌연 기류의 백이충을 포 위한 백도의 고수들 중에서 성격이 급한 무적장왕이 먼저 손을 썼다. 백 도 절학중 가장 강맹하다는 천하제일의 장공인 건곤무적장이 푸른 기류 를 동반하고 뿌연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뿌연 덩어리에서 손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희고 고운 손. 미려한 곡선 에 부드러움과 강건함을 동시에 지닌 조각한 듯한 손. 하얗고 고운 소수 (素手)가 건곤무적장을 맞이해 나갔다. 물고기가 급류를 파고들 듯 뿌연 기류속에 나타난 소수는 거침없이 무적장왕의 푸른빛 기류 장강(掌剛)을 꿰뚫었다. 소수가 잠깐 무적건곤장을 뚫고 거짓말처럼 빠르게 움직여 무적장와의 이 마 사이 미간을 짚는 순간 빠직! 둔탁하게 두개골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금강불괴에 이른 무적장왕의 이 마가 함몰되어갔다. 소수의 손가락이 금강석보다 단단한 무적장왕의 미간 을 파고들어갔다. "크아아악." 무적장왕 모용도기의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천무삼성의 일인으로 백도 백년이 넘는 세월을 이끌어왔던 거인 중의 거인. 건곤무적류의 기인 은 반항조차 못하고 이토록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무적장왕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소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침없이 나 아갔다. 얼굴이 헬쓱하게 질려있는 혜경성승을 향해서. 혜경성승은 마치 얼음 속에 있는 물고기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세수 심공의 힘으로 성승은 뿌연 기류속에 숨겨져있는 무색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눈에 시선이 고정된 순간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공포에 질 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공 이전에 천적을 만난 생명체의 당 연한 반응이었으며 그런 성승의 이마를 향해 유혹하듯 소수는 하늘하늘 다가왔다. "악적. 모용 사부를 해치다니." "혈존이라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리라." 혜경성승에게 소수가 다가오기 전에 천무이성을 따라 올라온 스믈 여덟명 의 천무호정단이 일제히 뿌연 기류를 향해 공격했다. 이들 이십 팔인이야 말로 천무삼성이 힘을 모아 승룡곡에서 길렀던 최강의 힘. 백도에서조차 비밀리에 길러진 힘으로 십대극품절학을 최소한 팔성 이상 하나씩 익힌 자들을 모은 세력. 혈존이 살아있을 때를 대비하여 천무삼성이 비밀리에 키운 강자들이었다. 이십 팔개의 강기류가 치솟아 올랐다. 검강, 장강, 수강등의 다양한 강 기. 그것은 하늘을 빈틈없이 메우며 사방에서 뿌연 기류, 혈존을 공격해 왔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무공 을 익힌 자라면 어찌 강기의 다발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싶은 막강한 공격이었다. 콰르르릉. 천둥이 몰아치는 소리가 둘렸다. 수십 발의 우레가 한곳에 떨어지는 듯 한 소리. 나름대로 천하를 주름잡을 만한 이십팔인의 강기가 일인을 향 해 쏟아지면서 나온 소리였다. 거센 폭포줄기가 강에 한꺼번에 떨어지듯 수십 줄기의 강기가 혼탁한 독존강기를 향해 쏟아지며 부딪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백이충의 몸을 감싼 뿌연 독존강기가 회오리쳤다. 콰 르릉. 콰르릉. 끔직한 파열의소리. 하지만 이십팔인의 강기는 회오리치 는 독존강기에 휘말려 사방 팔방으로 뿌리쳐졌다. 튕겨져 나갔다. 하지 만 강기다발이 튕겨져 나갔다고 경악할 시간도 없었다. "피해라." 혜경성승이 악을 쓰는 소리가 천둥 몰아치는 소리에 섞여 간신히 퍼졌 다. 혜경성승의 고함과 더불어, 이십팔인의 강기다발이 튕겨져나가는 동 시에 회오리치는 백이충의 독존강기가 스믈스믈 퍼져나갔다. 그것은 느린 듯 하지만 피할틈 없이 순식간에 백이충을 포위한 백도고수 들을 향해 다가왔다. 마치 피할수 없는 악몽처럼. 그것은 이십 팔개의 기 류. 강기종류 같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십 팔명에 동시에 강기다발을 뿌려댈 수 있을까? 결론은 절대 아니다였다. 혜경성승도 스스로 무의 극을 향해 다가가고 있 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강기는 내공을 소모하는 최상승의 형태. 한번 에 스므개 이상의 손 그림자를 나타내는 장법만 해도 정신을 바닥낼 정도 로 변화의 극을 나타내는 무공이라 칭송되거늘 거기에 더해 한꺼번에 이 십개 이상의 강기를 방출하는 수법이라... 아무리 내공이 깊고 소모된 내공을 금방 보충해주는 심법이 있다해도 한 사람이 한꺼번에 스므발 이상의 강기를 뿌려대는 것은 절대 불가능.... 이라 생각했거늘 백이충은 혜경성승의 상식을 뒤엎었다. "크아아악." 어쨋거나 이들 이십팔인은 천무삼성이 혈존을 상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 배한 인물. 제각기 약속한 진형의 위치에 따라 자리를 바꾸며 침착하게 혈존의 독존강기에 대응했다. 자신의 무학에 자신을 가진 자는 앞줄에 서 서 백이충의 강기에 맞대응하고 신법에 자신있는 자는 허공에서 몇 번 자 세를 바꿔 뒤로 빠지며 앞의 동료에게 내공을 전수해주었다. 천무삼성 삼 인 동시의 합격이라도 막을 적절한 대응이었으나... 커다란 비명이 울렸 다. 뒤로 몸을 빼서 피한 열 네명을 제외하고 백이충을 포위한 앞쪽의 열 네 명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음성. 어둡다고도 밝다고도 할 수 없는 묘한 색깔의 혼탁한 백이충의 강기는 그들의 방어를 거침없이 뚫 고 지나갔다. 아니, 아예 상관조차 안했다고 할까? 스며드는 물을 종이로 막았으나 종이를 적시며 안으로 뚫고 흘러오는 물 처럼 독존강기는 열 네명을 덮쳤다. 뒤로 빠진 열 네명을 향했던 독존강 기 역시 놓친 자들 대신 가까운 곳에 있는 열 네명 쪽으로 방향을 틀었 다. 그리고 부시독(腐屍毒)에 담긴 시체처럼 열 네명의 고수들의 몸이 썩 어들어갔다.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시커멓게 뼈가 부식되며 스러지고... 열 네명의 고수는 살아있다는 증거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의 몸 을 감싸고 녹여내리는 독존강기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과거 독문의 독 성 구양봉의 절대지독도 이처럼 지독하지는 않았다. 백이충에서 발출된 뿌연 강기는 기어이 열 네명의 고수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야 그 형태 가 스러졌다. "이럴 수가!" 혜경성승의 입에서 두려움과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존이 강 한줄을 알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진정 지옥에서 아수라가 뛰쳐나 왔단 말인가? 과거에는 삼인이 합격했지만 이십년간 많은 무학의 진경을 이룬 천무삼성 이었다. 나름대로 그들이 익힌 신공의 벽을 깨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고 생각했다. 죽은 현무도선이 없다고 해도 천무이성이 합공을 하기는커 녕 은근히 혼자서 혈존을 상대할 수 있겠다고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이십팔인의 제자들을 동행했다. 다섯이 힘을 합하면 천 무삼성의 한 명이 나선다고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실력을 가진 제자들 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덤벼들기 무섭게 백도의 정예 반이 나가 떨어 지다니. 단지 호흡한번 내쉴 시간에... 혜경성승과 살아남은 열 네명의 천무호정단 고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두려 움에 질려 허공에서 뒤로 물러서듯 포위망을 후퇴시켰다. 세상에 허공을 자유자재로 노니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들이 대거뭉쳐 두려움에 떨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꿈틀대는 뿌연 기류의 강기가 혜경성승과 천무호정단 단원에게는 아수라 의 얼굴이 미소짓는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뿌연 강기가 순식간에 혜경 성승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공간을 단축시킨 것같은 이동이었다. 성승 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뿌연 강기류는 성승의 바로 코앞에 있 었다. 지금처럼 혜경성승이 자신의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뿌연 강기 가 솟구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데도 속수무책이라니. 하지만 본능적으 로 알았다. 자신의 어떤 무공으로도 저 정체불명의 색깔의 독존강기를 막 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기는 싫었다. 그 는 조용히 뿌연 기류 속의 백이충의 두눈을 바라보며 삶을 정리했다. 그 동안 끝없는 고행의 삶이었다. 이렇게라도 해탈을 하게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아수라를 사바 세계에 남겨놓고 가야하니 세상에 있 는 중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눈 한번 깜짝일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혜경성승에게는 억겁의 세월 같 았다. 다가오던 독존강기의 가는 기류가 성승의 미간 사이에서 멈췄다. 혜경성승은 뿌연 기류속의 무색 눈동자가 잠깐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아수라가 갈등할 이유가 뭣이 있을수 있을까? 흔들리는 무색 눈동자 는 기류 속에서 자신의 가슴 쪽을 잠깐 쳐다보는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 지만 그곳에는 죽은 금혜연이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다시 고함을 지르며 장원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동시에 혜경성 승의 몸이 바람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나뒹굴었다. "혜경성승 사부님." 살아남은 열 네명의 천무호정단 고수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혜경성승마저 죽은 줄 알고 비분에 차서 백이충을 쫓으 려 했다. 그 때 나뒹군 혜경성승의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아미타불. 쫓지마라. 우리 힘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혜경성승이 몸을 일으켰다. 뿌연 기류에 격타당한 것 같았지마 기류는 부 드럽게 그의 몸을 밀었을 뿐이었다. 성승 자신도 살아남은 것이 신기하다 고 생각했다. (혈존... 그의 마음에 자비가 살아있단 말인가? 그토록 그의 품안에 있 는 여시주가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오오. 부처시여.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제거하기 보다는 여시주를 통해 그를 설득했어야 할지도... 우리의 판단 잘못으로 천하가 파멸할지도. 아미타 불) 혜경성승은 조용히 눈을 감고 불호를 외쳤다. 애초에 악도는 혈존의 정체를 증명하기만 모든 것이 끝장일줄 알았다. 혈지존이 천하를 경영하는 우두머리들을 끌어모으면 악도가 혈존의 정체 를 드러낸다. 악도는 악산산을 닮은 금혜연을 이용하면 혈존이 반드시 참 지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명백하게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그때 부터는 가만 둬도 천하의 지배자들이 혈존을 죽이려 혈안이 될 것이 다. 아무리 혈존이라해도 천하의 지배자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야 어찌 살 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악도의 생각이었다. 몸을 피해 도망갈지도 모른다. 혈존이야 특유의 사술이 있으니 몸을 숨기 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혈지존의 차시혈존대진은 그를 청마산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리라. 그렇다면 어디로 숨든 천기노인의 힘으로 그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천기노인은 단지 지배자들에게 도망 다니는 혈존의 위치를 가리쳐주기만 하면 된다. "크아아악." 천기노인은 정확하게 혈존의 위치를 가리켜 주었다. 혈지존의 초청을 받 고 온 자들중에 변황의 지배자들에게. 하지만 결과는 천기노인의 예측과 정 반대였다. 물론 순순히 혈존이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만... 이건 양떼에 뛰어든 한 마리 호랑이의 모습이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공격해라." 천축의 법존이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에서부터 두려움이 섞여 있었 다. 법존은 거의 백여명에 이르는 변황고수들을 이끌고 백이충을 포위했 다. 이정도 전력이라면 스스로 청마산에 모인 전 중원세력과도 한바탕 맞 붙어도 승패를 가리기 힘든 세력이라고 자부할 정도였으니 그 막강함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천축에 혈수라라고 알려진 혈존이라도 이정도 고수 라면 당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리라 생각했는데... 진짜 지옥에서 뛰 쳐나온 피의 아수라였단 말인가? "크으으윽." 소리음사 십이악불이 회색기류에 휘말려 공중에 날려갔다. 권풍 앞을 막 아섰던 촛불처럼 그렇게 그들의 생명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천축 십대고 수의 하나인 수라마불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단지 앞으로 나 아가는 백이충의 회색기류에 휘말린 결과가 그것이었다. "감히." 노호틀 터트리며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가 손을 썼다. 백도의 열가 지 신공이나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 사공에 못지않은 변황 무공을 모조리 통달했다는 천축 법존. 그 무학의 경지가 중원을 넘어섰다고 자신하는 천 축 법존과 과거 변황동맹의 맹주였던 달라이 대라마가 동시에 일격을 가 했다. 콰쾅. 공격을 한 것은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였지만 피를 토하고 튕겨져 날 아간 것도 이 두사람이었다. 이미 인간을 초월하여 활불, 혹은 법존이라 불리며 신으로 추앙받고있는 이 두사람이 제대로 된 공격을 받은 것도 아 니고 제힘에 반탄되어 쓰러지다니. "으으. 사람이 아니다. 진정 혈수라인가?" "과거 포달랍궁의 방문했을 때보다 십배 백배나 강해졌다." 비틀거리며 천축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가 중얼거리든 말든 백이충의 혼돈 을 뜻하는 독존강기는 거침이 없었다. 구비치는 물결처럼 거침없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향해 뿌연 기류는 휘감아 앞으로 나아갔고 그 기류가 닿 는 곳에는 예외없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천룡사주를 따라나온 세명의 태상법승이 혈존을 막아섰다. 끓는 용암속 에 들어갔다가도 무사히 나왔다는 이적을 보여준 태상 법승은 독존강기 에 녹아 백골이 되었다. 대뢰음사의 오백 황금나한 중에서 아나타를 따라온 것은 상위 서열 삼십 명. 도검과 악기, 사기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금강지체의 삼십 명의 황금 나한도 독존강기에 맷돌에 갈린 고기덩어리 신세가 되었다. 제자들의 처 참한 죽음을 본 아나타의 눈에서 혈루가 흘러내렸다. 백팔 번뇌마는 뿌연 기류의 진행방향을 가로막은 것을 후퇴하며 뒤로 후 퇴하려 했지만 백이충의 아수라독존강기가 더 빨랐다. 번뇌마는 순식간 에 십팔 번뇌마만이 살아남았다. 머리가 파괴되고 심장이 파열되도 재생 되어 되살아난다는 백팔 번뇌마였지만 독존강기에 죽은 번뇌마들은 살아 날 줄 몰랐다. 대막 철혈마궁의 궁주는 기세등등하게 뛰어들었다가 파랗게 질려 백이충 의 몸 주위를 회오리치는 뿌연 강기류에 다가갈 생각조차 못했다. 두려움. 단숨에 중원을 정복할 줄 알았던 변황고수들의 가슴 속에 다시 금 그런 감정이 스며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과거 변황을 두려움 이란 감정 속에 한번 굴복시켰던 인물이라 그 감정은 더욱 빠르게 되돌아 왔다. 과거 그의 잔인했던 손속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혈존도 인간이다. 설사 마귀라고 해도 그것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불존을 따르는 자들의 사명이 아닌가? 대자비불진(大慈悲佛陣)을 펼쳐 라." 기세가 꺽이지 않은 천축 법존이 소리쳤다. 그의 평생의 숙원이 혈존을 꺽고 중원보다 천축의 무공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데 여기 에서 포기할 리가 없다. 천축 법존의 명령하에 변황고수들이 몰려들었다. 일단 중심에 천축 법존 을 두고 천축 십대고수가 반원형으로 진형을 이루었다. 이는 천지간을 지 배하는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는 뜻이다. 그 상대편에 달라이 대라마를 중심으로 홍교의 사대라마, 동영 살막, 묘 강, 대막등 과거 변황동맹의 주측을 이루는 고수들 열명이 나머지 반원형 의 진형을 이루었다. 악귀를 참하는 불법의 무서움을 뜻한다. 천축과 변황의 수뇌들이 진의 중심을 이루자 각 세력의 원로급 고수들이 진의 외곽을 둘러쌓다. 불법을 지탱하는 호법존자들의 뜻을 나타내는 것 이다. 이렇게 세 개의 도리가 모여 천하의 마를 제압하고 정화하는 대자 비불진이 완성되는 것이다. 혈존이 미쳤다고(지금 완전히 미친 것으로 보이고는 있지만...) 대자비불 진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손을 빨며 기다리고 있겠는가? 천축 법존의 호령 하에 일종의 진법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혼돈의 뿌연 기류는 거침없이 진 형을 이루는 변황고수들을 향해 짖쳐들었다. "크하하하하. 혈마. 잘 만났다. 이 천유의 원한을 어이 풀꼬?" "키흐흐흐. 혈마. 뼈를 가르고 살을 발라주마. 죽은 영혼마저 불러내어 희롱하다니. 네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천지마검이 지옥에서 돌아왔다." "천하의 악종놈.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종말이다. 다시는 환생조차 못하 게 만사지존의 이름으로 영혼마저 소멸시켜 버리겠다." "천년마교의 이름으로 반도 혈마를 처단하겠다." "철갑지존이..." "벽력마존이..." "요지마후의 이름으로..." 소리만으로 지축을 진동시키는 거대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일곱 개 의 호통소리. 그 소리는 가공할 마기가 서려있어 진법을 이루는 변황고수 들의 고막을 진동시켜 비틀거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변황진형을 향 해 덮쳐들면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뿌연 기류의 백이충마 저 막았다. 그 막강한 음공의 힘도 그렇지만 그 안에 든 뜻 또한 가공하지 않는가? 전설 속 팔대천마 중의 칠인의 이름이 방금전에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팔 대천마.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고금제일마 혈존의 이름도 놀라웠지만 팔대천마의 이름또한 그에 못지 않 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팔대천마의 하나하나는 혈존의 이름에 손색이 있 을지 모른다. 허나 팔대천마의 이름을 모두 묶으면 결코 혈존의 이름 무 게보다 가볍지 않다. 팔대천마가 천년마교에 뭉쳐 하나가 되었을 무렵,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었던가? 중원정복? 혈존보다 앞서 천하를 흑도천하로 만들었던 것이 팔 대천마의 천년마교였다. 변황정벌?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던 변황의 세력 이 중원에 처들어 온 것을 가볍게 막아낸 것이 팔대천마였다. 지금처럼 백도의 열가지 신공과 흑도의 일곱가지 마공 사공이 마구잡이 로 퍼진 것도 따지고보면 팔대천마 덕이었다. 그동안 불가해의 무공으로 알려졌던 최고의 무공들이 팔대천마가 완성시키는 바람에 그에 대응하느 라 백도 흑도 가리지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바람에 오늘날의 성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팔대천마라고?" "그들이 죽지 않았단 말인가? 오오. 부처시여." "혈마? 혈존이 혈마의 화신이었단 말인가?" "아미타불. 혈존이 겨우 팔대천마의 일인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럼 나머 지 칠인의 출현으로 천하는?" 팔대천마의 등장은 백이충보다 변황지존들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변 황세력 중에도 백살이 넘어가는 고수들이 수두룩 하다. 하지만 이들도 팔 대천마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하다. 팔대천마 중에서 가장 나이많은 벽력마존이나 만사지존은 지금 나이로 이 백살이 넘어가는 존재들이다. 지금 팔대천마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혈 마, 혈존이라 밝혀진 혈마도 백 살을 넘기며 나이를 잊을 정도였다. 무 려 이백년 전부터 백년 전 사이를 풍미한 대 고수들인 것이다. 변황이 역대 최고조의 힘을 이루었을 때 중원에 처들어 왔다가 전멸을 당 한 것이 바로 팔대천마의 시절이었다. 오히려 혈존이 변황을 정벌했을 때 변황동맹의 힘은 중원에 처들어갔던 변황동맹의 힘에 비해 비할수 없 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팔대천마의 출현에 변황고수들의 놀라움 은 컸다. "반도. 죽여주마." 천마라고 자신을 밝힌 자. 그자의 몸에서 묵빛 마기가 발출되었다. 천하 마의 제왕 격인 천마지존공. 천마가 누구인가? 혈존 이전에 천하 마도의 지배자이자 천하의 주인이었다. 혈존의 이름이 나올 때 꼭 그와 비견되 어 나오는 팔대천마의 수좌. 그의 무지막지한 마공이 터져나온 것이다. 회색기류 역시 천마를 향해 예의 그 독존강기를 내뿜었다. 전대의 최강 마공과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자의 최강마공의 격돌. 그리고 뿌옇고 검은 두 기류가 충돌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천마가 비틀거렸다. 회색기류는 약간 주춤했을뿐 뿌연 기류가 흩어질 생각조차 안하는데 묵 빛 마기는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천마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을 뿐 결코 큰 부상을 당한 기색은 없었다. 무적장왕을 일격에 쳐죽이고 혜 경성승을 반항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천축 법존을 단지 반탄력만으로 튕 겨버린 혈존의 독존강기를 정면에서 충돌하여 최초로 막아낸 것이다. "흐흐. 제법 많은 발전을..." 콰콰쾅! 천마가 말을 잇기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뿌연 강기가 천마를 덮쳐왔다. 그것은 파도와 같아 한번 지나도 뒤에 다른 파도가 또있고 그것이 지나 도 또 있는 것과 같았다. 천마는 급하게 묵빛 마기를 뿜어대며 회색기류 를 막아내었다. "저것은 천마지존공이 아니다. 이미 천마지존공을 초월했다." 천축법존은 직접 저 혼돈의 독존강기를 접해보았기 때문에 그 위력을 잘 알았다. 또한 혈존의 제자였던만큼 천마지존공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 가 아는 천마지존공으로서는 도저히 막아낼수 없는 아수라독존강기를 천 마는 잘도 막아냈다. 그것은 이미 천마가 천마지존공을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진경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무적장왕이나 혜경성승이 겨우 신공의 껍질을 벗고 한단계 위의 새로운 세계의 초입에 발길을 들여놓았 다면 천마는 그 경지의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천마의 새로운 마공도 백이충의 혼돈강기에 미치지는 못했다. 첫 번째 강 기와의 충돌이 있었을 때는 아직 천마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지만 두 번 째 충돌이 있은후에 천마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세 번째 충돌이 있은 후에 는 천마의 입가에 피가 흐르며 얼굴에 식은 땀이 흘러나왔다. 네 번째 충돌때에 백이충의 뿌연 기류는 아무런 흔들림조차 없었지만 천 마의 몸은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묵빛 강기가 거의 소멸되다시피했 다. 만약 네 번째 강기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천마도 버텨내지 못할 것임 이 틀림없었다. "크크크. 여기도 있음을 잊지마라. 혈마." 천지마검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강이 벼락처럼 터져나왔 다. 천지에서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천지마검류. 그것은 거침없이 뿌연 기류를 가르며 쑤셔들어갔다. 최초로 백이충이 몸을 날려 천지마검의 검강을 피했다. 여태 법존과 기 타 여러 초고수들의 공격도 묵묵히 독존강기로 호신하며 막아내던 백이충 이었다. 최초로 독존강기가 막아내지 못하는 검강이 출현한 것이다. 천마 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숨을 고르는 동안 천지마검 은 살기를 뿌리며 다시 검강을 내뿜었다. "천지마검류를 뛰어넘은 새로운 검류를 보여주마. 이것이야말로 신선도 베는 천지멸절검강." 새파랗게 빛나는 검강이 화살이 날아가듯 천지마검의 검에서 쭈욱 뻗어나 와 발사되었다. 푸른 빛의 검강파편. 어떤 것이든 부술수 있는 검강이 천 지마검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을 누가 막을 수.... 막을 수 있다. 혈존이라면. 회색 기류가 뭉쳐 굳어지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사실 여태는 독존강 기라고 하기에 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간혹 뭉쳐 적을 향해 공격 할 때를 빼고는 하늘하늘 뿌연 안개같은 기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뿌연 기류가 뭉쳐 하나의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천지멸절검강을 잘라?" 천지마검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든 박살낸다는 천지멸절검 강이 오히려 뿌연 검강에 부딪쳐 박살난 것이다. 뿌연 혼돈의 검강은 그 에 만족하지 않고 천지마검을 짖쳐들었다. 창백해진 천지마검이 검막을 펼치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지만... "크윽. 빌어먹을." 기어이 검을 든 오른쪽 어깨를 잘려버리고 신음을 지르는 천지마검이었 다. 단 일검에 자신의 어깨를 잘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역력 했다. 하물며 그의 몸이 어떤 몸인가? 천마강시의 완성된 몸체를 자신의 몸으로 삼았거늘 아무리 검강이라도... "하기야 천지멸절검강을 박살내는 검강이라면 아무리 천마강시의 몸이라 해도 무베듯 벨수 있겠지." 천지마검이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오른팔 대신 그의 왼손에 검의 형상 의 검강이 맺혔다. 이미 검없이 검강을 발출하는 것이 천지마검의 지금 경지였다. 천지마검이 오른 손을 잘리고도 여유있게 왼손에 검강을 발출하며 여유 를 부린 것은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이 동시에 백이충을 공격했기 때문이 다. 과연 백이충은 움찔 거리며 주의를 천지마검에서 벽력마존과 철갑지 존에게로 돌렸다. 벽력마존은 음양을 부딪치는 괴공으로 화포나 낼 수 있는 파괴력을 능가 하는 힘을 발출하는 자였다. 또한 철갑지존은 금강보다 더욱 단단하다는 강기로 몸을 두루는 자였다. 이 둘의 파괴적인 힘은 어쩌면 천마를 능가 하는지도 몰랐다. 이 둘이 답답하다는 듯 외치며 합공을 했다. "제길. 언제까지 자존심을 세울 작정이냐? 복수를 포기한 거냐?" 사실 이들은 뜻만으로도 서로의 의사가 통하는 경지였다. 일심혼원공이 깊은 화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에 서로 암 묵적으로 동의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혈존의 경지 는 상상을 불허할 것이니 서로 힘을 합쳐 그를 죽이기로 말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과거 천하를 질타하던 위상이 생각났다. 그들이 누구인가?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팔대천마의 하나 가 아니던가? 그런 자존심이 있기에 그들은 제각기 혈존을 공격했다. 하 나가 위험에 빠질 때 손을 써서 구하기는 했지만 천마가 손을 쓸때는 다 른 자들이 손을 끼고 수수방관했고 천지마검이 손을 쓸때도 다른 자들은 방관만 했다. 천지마검이 단번에 팔이 잘리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철 갑지존과 벽력마존이 동시에 손을 쓰면서 나머지 천마들을 질타한 것이 다. 강으로 따지자면 고금 역사상 손가락 안에 들어갈 음양벽력공과 철괴마 공. 그것은 백도 이십팔명의 함께 만들어낸 강기다발보다 훨씬 더 강력하 고 위력적이었다. 하물며 이들은 수천년 무림사에 항상 무공의 끝자락에 위치했던 흑도 최강 무학의 경지를 초월하여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낸 존 재였다. 무림 역사상 겨우 몇사람의 문파 조사만이 이룩해낸 경지를 이들 팔대천 마가 모두 이뤄낸 것은 아마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을 겪으면서, 그리고 혈존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이룩해낸 경지 일 것이다. 문제는 혈존도 까마득한 옛날 그 경지를 걸었다는 것이다. 콰르르릉. 최초로 뿌연 기류가 흩어졌다. 벽력음양공과 철괴마공의 신기원의 경지 가 힘을 합치자 독존강기의 기류가 걷혀진 것이다. 하지만 막강한 합공. 그것도 천지마검을 공격하다가 뒤로 물러서며 엉겹결에 맞부딪쳐 이루어 낸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뿌연 기류는 잠시 거두어졌다가 다시 깔렸다. 기류가 거두어질 때 나타 난 백이충의 모습은 한 손에 금혜연의 시체를 안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봐서 단 한손으로 철갑지존과 벽력마존의 합공 을 상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백이충은 단지 한 걸음 물러섰을 뿐 이고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은 서너장 뒤로 튕겨져 나갔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분노의 노호성을 터트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자에 대한 분 노였다. 동시에 뿌연 혼돈의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칠대천마가 일제히 긴 장을 하는 순간에 뿌연 혼돈의 기류가 백이충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었 다. 드러난 백이충의 모습은 회색 일색이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모두 회 색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의 모습을 표현하라면 바로 백이충의 모습이 었다. 왼손으로 축 늘어진 금혜연의 시신을 안고 마치 백치처럼 백이충 은 서 있었다. 고함을 지른 백이충의 오른 손이 흔들렸다. 왜 그토록이나 위력적이던 뿌 연 기류막을 일부러 걷어냈을까? 그 의도는 다음에 바로 들어났다. 뿌연 회색빛 수강. 뿌연 독존강기를 걷어들이고 발한 수강은 분명 회색빛 기류 보다 수십배 위력적이었다. "크억." 칠대천마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눈치도 못채고 제대로 동작도 못봤 다. 아는 것이라고는 당장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호색의 손바닥 뿐이었 다. 설마 혈존의 능력이 이토록 대단할 줄이야. 천마, 천지마검, 철갑지존과 벽력마존은 살짝이나마 백이충과 부딪치면 서 혈존의 힘을 비로서 깨달았다. 단지 마음으로 알고있던 것과 실재로 체험하여 깨달은 것과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긴장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틀린 것이다. 넷은 회색 손바닥이 보이자말자 일신에 지닌 젖먹던 힘까 지 끌어들여 대항했다.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반면 만사지존, 요지마후, 천유등은 아직 머리 속으로만 혈존의 위력을 알고있는 상황이었다. 혈마전혼대법의 시험작으로 되살아나 혈존의 관리 아래 착취당하고 고통받은 기억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분노, 한편으로는 팔대천마의 막내이며 가장 형편없었던 혈마라는 기억이 혈존 을 약간이나마 얕보게 만든 것이다. 팔대천마의 모든 것을 빼앗았으니 혈 존이 강하다는 것은 상상했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부딪쳐보지 못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응이 늦었다. "크아아악." 비명이 울렸다. 혈존을 제외하고 무림 역사상 그 누구에게도 윗길을 용납 하지 않는 팔대천마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지 육체 의 죽음이 발하는 비명이 아니었다. 바로 육체와 함께 영혼마저 소멸을 당한 자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천마, 천지마검, 철갑지존, 벽력마존이 일제히 신음을 지르며 비틀거렸 다. 그래도 그들은 괜찮은 것이었다. 커다란 부상없이 다만 힘에 눌려 뒤 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세명의 천마는 사정이 달랐다. 만사 지존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연신 신음을 내질렀다.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그나마 그의 천사음유공이 거의 불사에 해당하 는 사공이기에 생명과 영혼이 소멸당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요지마후와 천유는 달랐다. 천뇌만상공과 환희염정술은 직접적으로 적과 마주대하여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공이었다. 게다가 방심한 상태에서 마음 한구석에 혈존을 얕보는 마음조차 있었으니 제대로된 반응 을 할 리가 없었다. 일격에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팔대천마의 두명이 손 도 제대로 못쓰고 머리에 구멍을 뚫린 것이다. 만약 다른 무공이었다면 잠시의 고통이 있었겠지만 즉시 신체는 재생되 고 생명력도 되돌아왔을 것이다. 생명력과 재생력에 있어서 천마강시보 다 뛰어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혼돈의 힘이 숨어있는 독존강기가 섞 인 수강에 당한 둘은... 그대로 영혼마저 소멸당하고 말았다.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천하를 주름잡던 팔대천마의 두사람의 최후치고 는 너무도 간단하고 허망했다. 낙마곡에 파묻혀 죽은 이래 혈존에 의해 그 영혼이 소환되어 부활의 술과 혈마전혼대법의 시험작으로 반쯤 되살아 나 혈존에 이용당했고 혈존이 죽은 틈을 타서 천마황을 장악하여 완벽히 되살아나려고 노력한 것이 무려 수십년. 천마강시를 얻어 완벽히 되살아 나서 불과 며칠만에 다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영혼조차 소멸당 하고 말았다. 이렇게 죽을 것을 도대체 왜 그렇게 되살아나려 노력했을 까? "일심혼원공, 일심혼원대진을 펼쳐라." 천마의 절규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둘이 죽고나서야 사태를 엄중히 파악한 것이다. 인간의 최후의 경지에 이른 천무삼성. 그 경지를 돌파한 팔대천마. 하지만 그런 팔대천마조차 벌레 때려잡듯 죽여버리는 혈존의 경지는 이미 인간에게 허용되는 한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만사지존이 입술을 깨물고 중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행방위의 한 구석 에 섰다. 아직도 무표정한 회색빛 얼굴로 한손으로 금혜연을 안고 한손으 로 장을 휘두르는 백이충. 그의 주위는 온통 손바닥 형태의 수강이 맴돌 았다. 사상 초유로 나타난 아수라독존마공의 수강. 팔대천마 또한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오행방위에 서서 백이충을 포위 한 팔대천마의 다섯은 일제히 일심혼원공을 펼쳤다. 다섯이 하나되고 하 나가 다섯이 되었다. 천마지존공과 천사음유공이 뒤섞이고 천지마검류와 음양벽력공이 뒤섞였다. 또한 철괴마공이 모든 것을 혼합했다. 뒤섞인 다섯 마공과 사공은 다시 하나가 되어 다섯 인간의 몸에 흘러 들 어갔다. 그 힘은 오행의 방위에 따라 나누어지고 일심혼원공에 의해 하나 로 통합,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며 그 힘을 폭발적으로 키워나갔다. 그리 고 일심혼원공은 하나의 기류를 형성하여 다섯의 몸을 감싸고 가운데가 파여진 동그란 륜(輪)이 되어 백이충의 몸을 조여나갔다. 일찍이 천마황이 십만대산에서 다른 마황들을 물리쳤을 때 천마가 그에 게 일심혼원공에 대해 말하기를 - 두사람이 일심혼원공을 펼치면 진법의 도움 없이도 단순한 합공의 다섯 배의 힘을 발휘한다.- - 세 사람이 일심혼원공을 펼치면 열배, 넷이면 열 다섯배, 다섯이면 스 므배의 힘을 발휘한다. - 즉 지금의 다섯명의 천마가 일심혼원공을 발휘하여 백이충을 공격하는 압 력은 스므명의 천마가 동시에 전력을 다해 백이충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위력이 있었다. 다시 여기에 더해 이들은 가장 단순하고 고전적이며 또 한 가장 효과있는 오행방위의 이치에 따라 진법을 펼쳐 백이충을 포위하 고 일심혼원공으로 공격하는 것은 가히 무림 역사상 나타나 본적이 없는 미증유(未曾有)의 힘이라고 할수 있었다. 팔대천마의 다섯이 펼치는 일심혼원공의 힘이 고금 초유의 막강한 것이라 면 백이충의 아수라독존마공이 발휘하는 힘은 인간사에 나타나서는 안될 금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다섯 천마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백이충은 눈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회색빛 얼굴 그대로 금혜연을 알고 제자리 에서 원을 돌며 조여오는 륜형태의 기류에 다섯방의 수강을 때렸을 뿐이 다. "크으윽. 이럴수가. 일심혼원공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크으윽. 이럴수가. 일심혼원공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시꺼멓고 붉고 하얗고 번쩍이고 금빛인 다섯가지 색깔의 기류속에 거의 동시에 다른 목소리의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여오던 일심혼원공의 오대혼합공력(五大混合功力)이 움찔 타격을 받고 뒤로 물러섰다. 막대한 타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연달아 다섯 번 째의 수강을 받았을 때는 백이 충의 지척까지 조여오던 오대혼합공력이 주변 일장밖까지 후퇴하였으며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 흔들거렸다. "우우. 천마황. 나타나라. 우리를 도와라." 팽팽히 버티는 오대천마. 혼합공력의 기류에 빠져 그들의 모습을 볼 수 는 없지만 극도의 불안이 뒤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설마 그들 다섯이 되 살아나고도 혈존 하나에게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만큼 그들의 마공은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혈존에 게는 통하지 않았다. 백가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난치듯 잠깐 잠깐 수강을 발휘할 뿐이다. 그 때마다 오대혼합공력의 기류가 풍랑을 만난 듯 흔들거렸다. 이제 백이충 을 압박하기는커녕 오대천마가 백이충에게 핍박받는 꼴이었다. 강제로 오 대혼합공력이 깨어진다면 그 타격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었다. 천마의 명령에 변황세력이 만든 대자비불진의 뒤에서 일곱의 인형이 솟아 올랐다. 혈천마련의 칠마황. 혈존의 아홉제자중의 일곱이었다. 이들 또 한 일심혼원공을 익혔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들 칠마황은 일곱 천마와 함께 이곳에 왔다. 하지만 혈존을 증명하는 장소소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혈존에 대 한 공포. 사부에 대한 공포는 그 정도로 이들에게 심한 것이었다. 일곱 천마는 자신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내버려두고 왔다. 팔대천마 의 일곱의 부활을 혈존을 제물삼아 천하에 화려하게 터트리려고 했던 것 이다. 설마 혈존의 힘이 이토록 강대하게 변했을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칠마황 또한 이들 오대혼합공력에 흡수되었다. 일심혼원공을 익힌 자들만 이 발휘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대뜸 열두가지의 기운이 혼합되 었다. 그리고 그 힘은 천마 개인의 힘의 이십 배에서 육십배로 늘어났다. 혼합공력의 강기의 륜은 칠마황의 합류로 더욱 두텁고 위력적으로 변했 다. 장난처럼 툭툭 건드리는 백이충의 수강에 금방이라도 부숴질 듯 했 던 혼합공력의 륜이 다시 두터운 포박이 되어 백이충의 몸을 조여 들려했 다. 백이충이 반항해도 소용없었다. 그정도로 혼합공력의 힘은 강력했다. "제발. 혈존을 처치해야 한다." 외곽에서 천축 법존이 식은 땀을 흘리며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협력하여 백이충을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대자비불진으로 백이충 을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변황 전 고수들이 힘 을 합해 펼친 대자비불진도 지금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힘을 합해 펼치는 합공보다 위력적이지 않았다. 저런 합공을 견뎌내는 혈존이 자유스럽게 풀려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누가 혈존의 그 힘을 감당해내랴? "우우우." 팽팽히 버티던 양측의 압력에서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힘이 조금 더 우세 한 모양이었다. 줄어들지도 늘지도 않았던 륜 형상의 강기가 급격하게 줄 어들며 백이충을 조여왔다. 동시에 무표정의 백이충의 입에서 거친 사자 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강기륜이 백이충의 몸 을 덮쳤다. 질끈. 천축 법존은 절로 눈을 감았다. 산산조각나는 혈존의 몸을 상상하며 거대 한 폭음을 상상했다. 드디어 고금제일마라는 혈존의 최후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혼합공력의 힘은 대단했다. "......"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축 법존이 의아하여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두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거대한 륜의 고리는 사정없이 백 이충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폭발도 폭음도 없었다. 또한 백이충 의 몸을 두동강 내지도 못했다. 륜의 강기는 백이충의 몸에 바짝 붙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법존은 원인은 모르지만 저들이 내공대결로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오대천마와 칠마황에 게 승산이 있었다. 가공할 마공의 위력과 내공의 대결은 전혀 다른 이야 기이니까. 천축 법존의 예측과 달리 백이충과 천마들 측은 내공대결을 하는 것이 아 니었다. 혼합공력이 오히려 백이충의 몸에 흡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 림사에 획기적인 선을 그을 일심혼원공과 그로 인한 혼합공력. 오대천마 와 칠마황의 혼합공력이 사정없이 백이충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당연히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안색이 흡혈귀에 피를 빨린 피해자처럼 안색이 창백 해졌다. 그것을 보고 천축 법왕의 표정이 대변했다.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내공대 결에 밀린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창백한 안색으로 보아 그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으으. 괴물. 내공이 얼마나 되기에 저들 모두를 합한 내공을 능가한단 말인가?" 사실 백이충은 공력이 부족하여 혼합공력의 륜 강기에 조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환희염정공을 능가하는 아수라독존마공의 흡정구결로 오대천마 와 칠마황의 공력을 탈취하기 위해 그들의 강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 채음보양이니 채양보음이니 하는 말이 있을만큼 남의 공력을 훔치 는 수법은 힘든 일. 순순이 자신의 공력을 남에게 전해준다면 모르지만 강제로 남에게서 탈취하는 것은 환희염정술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물며 남의 공력을 탈취하는 데에 최강이라는 환 희염정술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강기에서 공력을 탈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남의 공격이 모조리 자신을 위해 내어놓은 공력이 될테니 무적이 아니겠는가? 거의 말도 안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었다. 혈존이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강기 공력을 빨아들이는 광경을 천축 법존 이 직접 눈으로 보고서 내공대결로 착각한 것은 그만큼 강기에서 공력을 흡수한다는 것이 무학의 상식을 뒤집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그런 일을 수월히 해내는 혈존은 완전히 괴물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저... 저?" 색색의 기류로 뒤덮여 있던 오대천마와 칠마황의 몸에서 기류가 사라져갔 다. 그들을 뒤엎는 기류가 그들이 만들어낸 혼합공력의 륜 강기에 흡수되 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몸을 보호할 공력조차 남김없이 끌어모았다는 것 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맹렬히 번뜩이는 륜의 혼합 강기는 사실 더욱 맹렬한 속도 백이충 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에따라 백이충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흑백의 그림이 현실의 사람처럼 살아나듯 회색 일색의 머리, 피부, 눈동자에 조금씩 미미하게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천축 법존은 모르겠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일성의 성취에서 이성으로 올 라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아수라독존마공이 백이충의 몸을 움직이 는 꼴이지만 이성으로 성취가 올라가면 저절로 이성과 지성이 회복되리 라. "대자비불진의 힘으로 모든 공력을 모아 혈존을 공격하라." 천축 법존의 안색이 공포로 질리며 고함쳤다. 차라리 오대천마와 칠마황 은 상대할만 했다. 각기 떨어트려 놓으면 법존 자신도 오대천마에 못하 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또한 그들의 무학을 깨트리지 못할 산은 아니었 다. 변황의 절학을 꾸준히 익히면 지금은 변황이 약할지라도 언젠가 혈천 마련을 능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저 혈존을 지금 죽이지 못하면... 여기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법존은 왜 혈존의 무서움을 그토록 잘 알 면서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지 후회했다. 변황 대자비불빈에서 거센 무형의 기세가 솟구쳐 혈존을 후려쳤다. 강기 대결도 일종의 내공대결. 내공대결 중에 누군가 공격당하는 것은 양자 모 두를 치명상으로 몰고가는 일. 하지만 지금은 혈존을 공격하는 것만이 중 요할 뿐, 오대천마와 칠마황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혈존이 보여준 가공할 능력을 보건대 지금의 기습이 효과가 있다고 자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이충의 안색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변했다. 오른 손으로 혼합공력을 흡 수하는 중이라 변황의 기습을 방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금혜연을 안 고있는 왼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지금 백치상태에서 움직이는 백이충이 지만 금혜연의 시신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사실만은 자각하고 있었다. 또 한 몸을 빼려한다면 지금 흡수하여 영양이 되고있는 혼합공력이 오히려 강대한 흉기가 되어 백이충의 내부를 휘저으리라. 콰아아앙! 백이충은 등으로 대자비불진의 공력을 받아내었다. 변황 전 세력의 최고 수뇌진의 힘이 하나로 뭉친 힘이었다.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일심혼원공으 로 뽑아낸 기세보다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힘은 아니었다. 태산을 뿌리뽑고 만년한철 일만근을 박살낼 수 있는 힘이었다. 폭음이 일어났 다. 백이충의 척추 뼈와 허리가 천만개로 박살났어야 당연하지만 백이충 은 가볍게 안색이 변했을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대자비불진의 힘마 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법존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비로소 오대천마와 칠마황도 공력을 흡수당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순수히 전해주는 공력도 아니고 남 이 공격수단으로 뽑는 강기를 흡수하다니. 그제야 혈존시절 수많은 제자 들의 공력과 무공을 빨아들였던 그의 행태가 기억에 새롭게 솟아나는 법 존이었다. "괴물. 끝장이다. 설마 우리 모두의 공력을 한 몸에 흡수하지는 못하겠 지." 무저갱에 공력이 빨려들 듯 혈존에게 쭉쭉 공력이 빨려나가는 것을 보며 오히려 천축 법존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가공할 힘을 보여준다고 해 도 혈존의 육신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한계가 있었다. 지금 혈존이 빨아들이고자 하는 공력은 적게 잡아도 수백갑자. 수백 가지 종류 에 위력도 들쑥날쑥 가지각색인 혼잡한 공력. 도저히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법존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백이충의 몸을 움직이 는 것이 아수라독존마공만 아니었다면. 모든 것을 모아 혼돈으로 둘러싸 고 혼돈으로서 뒤덮는 혼돈진결을 운용하는 아수라독존마공만 아니었다 면 백이충의 몸은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풍선처럼 터져버렸을 것이다. 천축법존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대자비불진의 도움 덕 으로 조금 안색이 좋아졌던 혈천마련 쪽도 다시 안색이 창백해졌다. 양측 의 강물같은 공력과 신공 마공이 흘러들어갔는데도 마치 대해에 풀어놓 은 듯 백이충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머리색이 회색에서 검게 물들고 피부가 점차 살색으로 윤기있게 되돌아가고 있었 다. (끝...끝장이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천마와 법존의 안색이 누렇게 변해갈 때 또다시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미타불.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가랴." 혜경성승이 살아남은 열 네명의 제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 자마자 일자로 늘어섰고 각자 앞에 있는 사람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대었 다. 맨 앞에 있던 혜경성승의 손이 백가량의 머리를 눌렀다. "잘 가시오. 혈존." 혜경성승조차 이들의 대결을 내공대결로 착각했다. 무학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삼자의 내공대결이라면 이를 방해놓은 자는 삼자의 모든 공력을 한몸에 받고 파멸한다. 혜경성승과 열 네명의 제자는 물론 마련과 변황세력, 그리고 혈존의 합고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다. 그러나 손을 댐으로서 그들 셋 역시 파멸할 것이다. 혜꼉성승은 스 스로 파멸함으로서 천하를 혼란시키는 이들 셋의 세력을 소멸시켜 천하 를 안정시킬 생각이었다. 결국 백도의 내공마저 사정없이 백이충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혜경성승 이 아차했지만 그 역시 법존처럼 때늦은 후회였다. 대신 뺨이 핼쓱해졌 던 변황과 천마들의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혜경성승이 한 손을 들어줌으 로서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점차 백이충의 눈동자 색이 돌아왔다. 거의 이성이 돌아왔다는 뜻이었 다. 백이충이 이성마저 회복되면 더 이상 천하는 그를 감당해재지 못할 것이다. "우우우우." 백이충이 사자후를 터트리며 몸을 떨었다. 동시에 오대천마와 칠마황이 나가떨어졌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이성을 이룰만한 충분한 내공을 쌓았기 에 더 이상 그들의 진기를 흡입할 필요가 없어 떨쳐버린 것이다. 백도 흑 도와 변황의 고수들이 우수수 백이충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칠마황중에 요지마후, 검마황, 음양마황, 만상여의 네명의 숨이 끊어졌 다. 최후의 한줌 진기마저 남김없이 백이충에게 빨려버린 것이다. 천마황 과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만이 간신히 숨이 붙어 할딱거리고 있었다. 일 년 정도 몸을 숨기고 운공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우리라. 오대천마에서도 살아남은 자는 천마와 만사지존 둘뿐이었다. 간신히 되살 아났던 천지마검, 요지마녀, 철갑지존이 벽력마존과 철갑지존의 뒤를 이 어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변황 쪽은 더욱 참담했다. 변황의 세력 오백이 넘게 와서 살아남은 자는 법존과 천룡사주, 달라이대라마 단 셋이었다. 아마도 변황이 그 힘을 회 복하려면 앞으로 백년은 있어야 하리라. 백도 쪽은 가장 늦게 공력을 빨리기 시작했기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 다. 혜경성승과 열 넷의 제자들이 모두 살아났다. 다만 그들 역시 일년 정도는 꼼짝도 하지 못하리라. "우우우우." 살아남은 자들도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소진했 다. 장소성이 끝난 직후 백이충이 손을 쓴다면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 리라. "사부. 기다렸소. 그것이 바로 사부가 우리 제자들 모두의 공력을 빨아 완성시키고자 했던 마공이오? 우리대신 다른 이들의 공력 태반을 빨아들 였으니 아마도 완성되었겠구려." 모든 이들이 나가떨어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혈지존이 나타났다. 그의 주위로 무려 팔십에 달하는 천마강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혈지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백이충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 지만 혈지존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최후의 최후로 염려하던 상황. 하 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상황이 일어났던 것 뿐이니까. 하지 만 최후의 최후도 대비하는 습성상 대비는 끝난 상태였다. - 아수라독존마공이라는 것이오. 우리 대두자들이 최후로 만들어 놓은 구 결은... -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가 말했다. 혈뇌동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부터 쌍 영마공 말고도 뭔가 있다는 정도는 혈지존이 알고 있었다. 제자들을 죽이 고 넙죽넙죽 제자의 무공과 진기를 심장과 함께 씹어 삼킬 때부터 그것 을 통해 무엇인가 이루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던 사부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도 했다. 그것이 어떤 마공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그 이름은 대두자를 통 해 처음 들었다. 팔십 정도의 천마강시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탈진하여 널부러진 천축 법존도 그리고 천마와 혜경성승도 천마강시를 알아보았다. 다른 의미에 서 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태 숨어있는 실력자들을 몰라보고 그들 끼리 천하를 놓고 다툰 격이었다. "세상에 팔십구의 천마강시라니." "혈존조차 천하를 지배하던 시절 단 한구밖에 제조하지 못했다고 하는 전 설상의 천마강시?" 그들이 만약 지금 몰려오는 천마강시가 전부가 아님을 알면 어떤 표정일 까? 황실을 장악하기 위해 십여구 정도의 천마강시가 아직도 혈지존의 수중에 남아 천하에 흩어져 있다면... 그리고 이미 천하 반 이상이 옥룡왕의 이름으로 명령과 동시에 떨 어짐을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법존과 혜경성승, 그리고 천마와 천마황의 얼굴에 실망과 기대의 빛이 동 시에 떠올랐다. 팔십의 천마강시라면 혹여라도 혈존을 이길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혈존의 무위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아무 리 전설상의 천마강시라도 무리가 아닐까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팔십이라면... "혈지존. 첫째 사형은 무서운 자였군. 그가 혈존을 처지한다고 해도 문제 로군. 팔십의 천마강시를 누가 있어 당해낸단 말인가? 변황은 영원히 중 원을 이겨내지 못한단 말인가?" "으음. 혈지존이 우리에게 보낸 천마강시 여섯구가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 가? 마치 과거의 혈마를 찍어낸 듯한 대 효웅이로군. 저자가 살아있는 한 마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법존의 신음과 천마의 탄식이 뒤를 이었고 혜경성승이 불호를 외웠다. "그래도... 아미타불. 혈존 시주보다는 낳을 것이오. 혈존은 이미 인간 이 아닌 악마이니... 그가 천하를 지배했을 때를 생각하면... 누구에겐 가 지배당할 천하라면 차라리 흑도의 천마보다는 혈지존 백시주가 낳을 지도... 아미타불." 혈지존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그들은 그들 최후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혈지존이 애초에 염려한 것은 혈존이 혹시나 대두자가 말했 던 아수라독존마공을 연마했을 경우였다. -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연마했다면 천하에서 그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소.- 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혈지존은 홀로라도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쌍영마공을 합일한 만큼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천마강 시 일백구가 손에 있는 이상 누가 그를 당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서문대 장군부의 이공자라는 신분을 파악하고 나서 백이충의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이 조사된 이후였다. 그 조사가 어긋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혈존은 결 코 혈지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부. 당신은 기어이 아수라독존마공이라는 것을 익혔구려. 역 시 내 사부이자 아버지 답소." 백나안의 어머니는 배교의 소공녀였다. 아버지 백가량은 복수를 위해 어 머니를 취했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외가를 파멸시켰다. 심지어 어머니 에게 자신이 있어도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냉혹한 그가 왜 아들인 자신을 살려두었을까? 핏줄 탓? 키워오면서 괴롭 혀 온 것을 보면 결코 핏줄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자신에게 까지 이어가며 괴롭히기 위해서였을까? 지금와서 알 방법은 없 다. 한때 그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발버둥친 적도 있었다. 그를 닮기위해 모 든 노력을 다 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뛰어넘는 것이 혈지존 의 야망이자 숙원이었다. 혈존을 뛰어넘어서야 진정 자신의 길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혈존이 이루었던 길. 무림 천하의 정복. 변황계 정 복. 혈지존은 황실마저 정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능가하는 길이 다. "만일을 대비하여 이들을 불러온 것은 잘한 일이다." 혈지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변황과 흑백도의 지배자들을 불러내어 손해볼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혈지존의 아버지. 만약 그의 무공화후가 낮다면 자신의 손대신 흑백도와 변황의 살수에 죽을 것이다. 만약 아수라독존마공 을 연마했다면...? 그때는 진정 그들이 초대한 역할을 다 해 줄 것이다. -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혔다면 혈존을 제거할 방법은 한가지 뿐이오. 그 의 성취가 일성에서 이성으로 높아질 때, 그때... 성취가 급격히 높아지려면... - 혈지존의 눈빛을 받고 천마강시 외에 두줄기 괴인형이 혈존의 곁으로 다 가갔다. "설사 천마강시라고 해도 사부에게 피해를 입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 나..." 혈지존이 괴이한 목소리를 흘릴 때 백이충을 향해 다가오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장원에서 헤어졌던 쌍노였다. "주군. 위험합니다. 혈지존이 천마강시를 모두 동원했습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천마강시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어서 피하십시오." 쌍노의 출현을 보고 백이충은 경계심을 거두었다. 천하의 혈존이 가장 사 랑하는 자가 금혜연이라면 가장 믿는 자가 바로 쌍노였다.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도 쌍노를 알아보고 경계를 풀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가 쌍노를 믿는지 알수 있었다. 쌍노는 백이충이 아무런 저지도 하지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지 만 그 직후 쌍노의 신형이 번뜩이더니 백이충의 손에서 금혜연을 빼앗아 왔다. 금혜연의 시신이 환마의 품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 순간 백이충의 안색이 급변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주군. 죄송합니다. 적씨 일족 최후의 부탁입니다." "저희를 죽여도 좋습니다. 하지만 주군을 해하는 일이 아니라 겨우 성녀 의 시체를 넘겨주는 것. 이로서 적씨일족은 배교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저 희들의 주군은 오직..." 쌍노가 비참한 어조로 자신들을 변명하며 금혜연의 시신을 안고 도망갈 때 무표정 일색이던 백이충의 눈동자가 확대되며 저절로 탄성을 지르기 위해 입을 별렸다. "안..." "쌍영합일마공." 그 순간 혈지존이 바로 백이충의 앞에 도착했다. 백이충은 혈지존이 바 로 앞에 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쌍노 쪽을 향해 손을 뻗 고 있었다. 그 순간 혈지존의 쌍장에서 혈광과 청광이 터져나왔고 그것 이 하나로 합일되었다. 어찌보면 아수라독존마공의 초입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쌍영마공의 합일. 혈지존의 뇌리에 혈뇌동에서 구한 대두자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 아수라독존마공이 발휘되면 그것을 파훼할 방법은 하나뿐이오. 아수라 독존마공이 이성으로 올라갈 때 쌍영마공의 합일된 힘으로 입천정을 뚫어 버리는 것 뿐입니다.- 대두자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최후구결을 완성했다. 그리고 혈존에 전해주 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한 해석구결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이 혈존 이 대두자를 죽이지 않고 또 죽이지 못했던 이유였다. 대두자는 최종 혼돈구결의 해석구결대신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훼방법을 연 구했다. 자신을 가두고 인간 이하로 만든 혈존에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혈지존에게 넘어갔다. 혈지존의 최후의 힘인 쌍영마공의 합일 마공은 가늘은 지풍으로 변화되었 다. 그거은 안돼라고 소리치려는 백이충의 입 속으로 파고 들었고 입천정 을 뚫고 뒤통수를 뚫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혈존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두번째 죽음이었다. -------------------------------------------------- 혈존무적4.txt 제 목:[연재] 혈존무적 - 부활 관련자료:없음 [19792]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17 11:59 조회:934 6권 시작입니다. 그동안 5권 안지우신 분 있으면 퍼가시는 분들 중에 꼭 지워주십시오. 6권도 이번 주 중에 끝내겠습니다. <부활> 청마산에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전의 살풍이 마치 거짓말인 듯 청 마산의 풍경은 조용하기만 했다. 특히나 밤이라 더욱 추악한 모습을 어둠 이 가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곳에 한 노인과 한 청년이 나타났다. 탈속한 선인인듯한 모습의 인자한 얼굴을 한 노인. 바로 천기노인이었 다. 또한 청년은 그가 숨어살며 길렀고 그의 모든 것을 전수했던 제자였 다. 평생 그를 괴롭혀왔던 혈존이 죽었음에도 천기노인의 안색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사부님. 이곳이 바로 천하를 파괴한 파천성(破天星)의 별자리를 타고 난 혈존이 죽은 장소입니까?” “그렇다. 천하는 모르지만 천하의 대세가 결정된 그런 곳이었지.” 혈존이 죽고 천하지주들의 태반이 이곳 청마산에서 죽었다. 적어도 수천 의 부하나 제자를 거느리고 권력과 무력을 휘두르던 천하지주들 수십이 죽었다. 그런데도 청마산은 깨끗했다.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아예 전투의 흔적조차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제자의 신기한 듯한 음성도 천기노인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얼마전 천하 모든 세력의 수좌들과 옥룡왕 혈지존 이 모여 혈존을 죽였을 때의 광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혈지존의 손가락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는 순간 혈존의 머리 뒤통수 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리며 지풍이 솟아나왔지. 누구도 예상 못한 허무 한 결과였지.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기노인은 제자에게 설명하며 불연 듯 탄식했다. 죽은 혈존을 생각하자 몸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이미 혈존같은 괴물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 육체 라는 것은 단지 영혼이 쓰고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 만약 혈지존이 아 니었다면 우리는 또 한번 혈존을 놓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혈지존 은 쓰러진 혈존의 시체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빈 허공에 손을 뻗었다.” 제자의 궁굼해하는 눈빛을 보며 천기노인은 혈지존의 행동을 설명했다. “우리 같은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도를 걷는 자, 그리 고 혈지존이나 전일비, 그리고 배교쌍노의 눈에는 혈존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도망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혈지존은 혈존의 영혼을 향 해 손을 뻗은 거였지.” “그럼 혈지존에 의해 혈존의 영혼마저 파괴된 것이겠군요.” “그렇다. 악도의 말에 의하면 혈존의 영혼은 열조각이 넘게 산산조각나 서 소멸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혈지존은 주위에 있던 천하지주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의미심상한 미소였다.” 천기노인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소름이 오싹 끼쳤다. 흔히들 죽 을 때 혼백이 흩어진다는 말을 하지만 말그대로 혼백이 흩어지는 광경이 었다. 천기노인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혈지존이 손을 움켜쥐었을 때 영혼이 찢김을 다해 울부짖는듯한 비참한 비명소리가 마음을 찔러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심장에 벌레가 스믈스믈 기어다니는 것 같 은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사부님. 좀 더 이야기 해 주십시오. 들을 때마다 신기해서 죽겠습니 다.” “벌써 몇 번을 들어놓고 또 조르는 것이냐? 하기야 나도 혈지존의 미소 가 생각날 때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처럼 늘 생생하게 그때의 일이 떠오 르기는 하다만.” “혈지존의 미소는 천하가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신감을 표현하는 미소였겠군요.” “그래. 그렇다. 혈존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널부러진 천하지주들 앞에 서 그는 홀로 혈존을 격살했다. 그의 무위를 증명한 것이지. 그때 그가 펼친 무학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학이지만 또한 고금 역사상 존재했 던 그 어느 무학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천기노인은 혈지존을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무공 뿐이 아니다. 당시 그는 천마강시 팔십구를 동원한 상태였다. 반 면 천하지주들은 혈존과의 대결로 태반이 죽고 또한 살아남은 자도 그 힘 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지. 혈지존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들 모두를 죽일 수는 없었어도 반 이상은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혈지존은 혈존 을 죽인후 진이 빠져 널부러져 있는 천하지주 들을 그냥 놓아주었다.” 천기노인의 제자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했다. 아 무도 모르게 천하의 향방이 좌우되는 비밀 이야기를 듣는 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흑도, 백도, 변황의 천하지주들이 모두 굴욕감에 몸을 떨었겠군요.” “천하지주들을 무시하는 듯한 혈지존의 태도에 천하지주들이 모욕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혈지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을 것이 다. 그 증거로 천하지주들 누구하나 내색하지 않고 혈지존에게 몸을 굽히 며 순순히 떠난 것이 그들의 깊은 마음을 알려준다.” 천기노인은 혈지존의 위세에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떠난 자들을 생각했 다. 천기노인은 당시 혈지존이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 다. 천하 모든 세력의 수뇌들을 일거에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였다. 그들은 진이 빠져있고 혈지존에게는 천마강시가 있었다. 하지만 혈 지존은 그들을 놔주었다. (아니, 천마강시로서도 그들이 달아나려고만 한다면 전부 막지 못했을 거 라는 불안이 있었겠지. 하여간 혈지존으로서도 역모를 성공시키기 전까지 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할 필요가 있으니 그들의 안전과 맞바꾼 셈이 되 는 것일까? 하여간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해도 천마와 천마황, 혜경성승, 그리고 천축 법존의 굴욕적인 표정은 잊지못할 것이다.) 천기노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더 이상 과거의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 다. 지금은 하늘이 자신에게 시킨 일을 해야할 때였다. “그때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저기다. 저기를 파 보아라.” 제자에게 한 곳의 봉분을 가리키며 천기노인이 소리쳤다. 떨리고 흥분된 음성이었다. (저곳이었다. 쌍마가 혈지존에게 울부짖으며 혈존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고... 혈지존의 허락아래 혈존의 시체를 묻은 곳이. 그리고 쌍마 는 스스로 자결했지. 주인없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의의도 찾지못하 는 배교의 사술이 걸려있었다고 악도가 말하기는 했지만.) 천기노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이 행하고는 있지만 절대 인정하고 싶 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성으로는 있을 수 없 는 일이지만 평생 천기노인이 배운바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제자가 봉분을 파헤치는 소리를 들으며 천기노인은 제자에게 들으라는 듯 나직히 중얼거렸다. “천기가 맞다면 천하를 구할 구성이 바로 그곳에 있다. 그곳에 묻혀있 는 자는 절대 그럴 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천기가 맞다면 그곳에 있어 야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절대 일어나서도 안되고 밍을 수 도 없는 일이다. 죽은 자가 천하의 구성이라니. 그것도 영혼이 파괴당해 윤회의 율법에서조차 완전 소멸해버린 고금제일마가 천하의 구성이라니. 누구에겐가 털어놓는다면 당장 미친놈으로 취급받을 게 뻔한 일. 본인조 차 스스로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일이다. 허나 그가 평생 배운 바가 이곳에 천하를 구할 구성이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 는 것은 바로 그의 평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바로 혈존이 죽어 시체가 묻힌 곳. 뇌가 파괴당해 육신은 싸늘 하게 변하고 영혼마저 혈지존의 손에 파괴되었거늘, 어이하여 하늘은 이 곳에 천하의 구성이 있다고 알려주는가?” 천기노인은 원망스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젯밤 분명히 보 았다. 천하를 파멸시킬 운명을 지녔다는 파천성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혈 존의 운명이 분명 그것이었거늘, 혈존의 죽음 이후에 사라졌어야 마땅한 파천성은 더욱 찬란한 빛을 뿌려대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지. 혹여 파천성이 혈존이 아니라 혈지존의 것 인데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파천성은 천하를 파멸시킬 운명 을 지닌 자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인데 혈존은 죽었고 그정도의 큰 힘을 가진 자는 이제 혈지존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에.) 천기노인은 봉분의 흙이 파헤쳐지는 소리를 들으며 연신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자신의 배운바대로, 하늘의 별빛이 나타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믿기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파천성은 여전히 혈존의 것이었고 그의 육체와 영혼이 죽은 지금에도 더욱 밝고 크게 광휘를 빛냈으며 게다 가...) 천기노인이 평생 배운바를 부정하는 일이 어제 밤하늘에서 벌어졌다. 그 가 배운 어떤 책에도 적혀있지 않은 전대미문의 괴사가 벌어진 것이다. 밤하늘에 있던 파천성 별이 점차 거대한 광휘를 발하다가 마치 태양처럼 빛을 내어 일순간 천지사방을 대낮처럼 밝혀버렸고 그 직후 산산조각 나 서 열 개 조각으로 나뉘어 갈라지더니 각기 천공에 자리를 잡고 다시 별 빛을 빛내는 것이었다. 물론 천기를 살피는 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가 받은 마음의 충격이 너 무 거대하여 천기간 별빛의 운행을 제멋대로 상상하여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실재로 천기노인과 같이 하늘을 살피던 제자는 하늘에서 아무런 현 상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별이 폭발할 때 태양처럼 빛나던 엄청난 광채 도 별이 폭발하는 광경도 없었다고 했다. 확실히 모든 것이 천기노인 혼자의 착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지 만 눈을 비비고 봐도 천하를 파멸시킨다는 파천성의 빛은 열 개로 갈라 져 있었다. 과정은 몰라도 결과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제자도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으며 천기노인이 본 바를 확인시켜 주었다. 착각이 아니었 다. 사라진 혈존을 뜻하는 파천성의 기운을 전혀 다른 열 개의 빛이 동시 에 발하고 있었다. 천기노인은 자신이 미쳤는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일 이 가능하단 말인가? 혈존을 뜻하던 파천성, 천하를 파멸시킬 파천성의 기운을 엉뚱한 열 개 의 별이 발하여 천기노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하여 천기 노인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별의 모습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아주 작고 미미한 기운을 발하는 하나의 별. 천하를 구원할 별의 기운이었지만 천기 노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분명 혈존의 운명을 나타내는 파천성이었던 것이 어젯밤 파천성의 기운 이 다른 별에 옮겨가는 동시에 천하를 구할 천황성(天皇星)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파괴되어 열갈래로 흩어진 파천성의 자리에 왜 새롭게 천황 성의 빛을 띤 별이 있는가? 혹시 이미 죽어버린 데다 영혼까지 파괴당한 혈존이 천황성? 천기노인은 자신의 두 눈을 파헤쳐 버리고 싶은 것을 간 신히 참았다. “무시할 수도 있었다. 잘못 본 거라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었다. 이미 죽은 혈존이 천황성일 리가 없다고. 천지개벽을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지만 설사 혈존이 살아났다고 해도...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천하의 악당 인 그가 천황성의 기운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노부의 눈앞 에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평생 천기를 살피며 살아온 노부의 인 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래서 왔다. 어이하여 평생 배워온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리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천기노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제자의 목소리 가 들렸다. “사부님. 여기 시체가 하나 있는데요.” 어차피 짐작하고 있었던 소리. 역시 혈존은 시체였다. 역시 그가 본 천기 는 잘못된 것이었다. 씨늘히 식은 시체가 천하의 구성일리는 없지... “또 한구의 시체가 옆에 있는데요.” “뭐?” 천기노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뒤통수에 구멍이 뚫린 것 외에는 멀쩡 하던 혈존의 시신이 두쪽이 났을 리도 없고 왠 또 한구의 시체? 혈존과 함께 묻힌 시신이 있었던가? 천기노인이 제자의 옆에 다가갔다. 파헤쳐진 땅에 두구의 시신이 드러났 다. 천기노인도 익히 알고있는 사람들의 시신이었다. “쌍마? 그들이 자진한 이후에 혈지존이 그들을 혈존과 함께 묻었던 건 가?” 천기노인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자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더 파보아라. 그들 외에 또다른 시신이 있을 것이다.” 천기노인의 말에 툴툴 거리면서 제자는 다시 땅을 팠다. 그리고 얼마뒤 에 다시 사람의 모습이 흙속에 드러났다. 참지 못하고 천기노인도 구덩 이 속으로 들어가 시신을 끌어내었다. “사부님. 이 사람은 살아있는데요.” “으음. 금혜연.” 천기노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악도의 주술에 의해 심장이 터져 죽었던 금혜연. 아마도 혈지존의 허락을 받아 쌍마가 금혜연을 혈존과 같 이 묻었던 모양이었다. 혈존도 혈지존도 금혜연이 죽었다고 판단했다. 천기노인이봐도 지금 금혜연은 죽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자녀석은 그녀 가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짜 살아있는 거냐?” “겉으로 보아 심장이 터져나간 것 같지만 맥을 보니 그런게 아니에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훌륭한 속임수에요. 시체와 거의 흡사한 가사상태 에 빠져 있지만 분명 살아있어요.” 의술에 대해서 천기노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경지에 오른 제자가 그렇다 하니 그럴 것이다. 악도 역시 완전히 잔인한 인물은 아니었던것일까? 악 도의 수작으로 금혜연은 혈존의 눈을 교묘하게 속이게 되었을 뿐 진짜 죽 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천기노인이 봉분을 파헤쳐 그 녀를 꺼내지 않았으면 생매장당해 죽어버렸을 것이다. 여러 잡생각 속에 믄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있어 천기노인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게 되었 다. “으하하하. 역시 그렇군. 하늘이 그럴 리가 없지. 천하의 최강 악질 마 왕을 천하구성으로 지정했을 리가 없지. 천하의 구성은 혈존과 함께 묻혔 던 금혜연이였구나. 그녀가 살아있는 체 여기에 묻혀혔어. 곁에 있기에 혈존의 사라진 별자리에 천황성의 빛이 떠올랐던 거로구나.” 너무 기뻐 천기노인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천기노인의 기쁨에 찬물 을 끼얹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천기노인이 사랑하여 마지않는 그 의 제자였다. “사부님. 별의 기운은 사람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지, 위치를 나타내 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혈존의 곁에 있다고 해서 그녀의 별자리가 천 황성의 자리로 옮겨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이 여자의 바로 곁에 있던 마지막 사람입니다. 젊은 남자네요. 정말 이 자가 혈존이 맞나요?” “혈존이 맞다. 살아있나?” “어디보자. 숨도 쉬지않고 맥도 없습니다. 완전히 심장이 멎었네요. 이 건 틀림없이 죽었습니다.” “역시나... 하기야 살아있다면 그게 말이 안되지. 그럼 천기는 무엇을 말하는 거지?” 천기노인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 다는 안도감. 즉 혈존이 또다시 살아나 천황성을 뜻하는 기운을 받은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자신이 본 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없다는 씁쓸 함.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읽은 천기는 혈존이 천황성의 기운을 띠고 있다는 것. 그런데 혈존은 확실히 죽어있으니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느끼 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함이었다.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문을 알수 없으니 노부 의 평생 공부가 헛되었던 모양이구나. 하늘이 스스로 천기를 거꾸로 흐르 게 할 리가 없는데 평생 배운 바가 그렇다하여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으 니... 그래도 덧없이 사라질 생명 하나를 구했으니 다행이다. 그 소저를 데리고 천황성에 대한 나머지 미련을 버린 체 여기를 떠나자.” “그런데 사부님. 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혈존의 시신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천기노인과 달리 그의 제자는 고금제일마의 시신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말했다. 재주 많고 뛰어난 제자의 말에 천기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그리 이상하냐?” “사부님의 말대로라면 혈존의 뒤통수에 손가락 구멍 다섯 개가 뚫려있어 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처하나 없네요. 그럼 시체가 가짜인가요? 아 니면 죽은 시신도 상처가 자연치료되어 아물수가 있는 건가요?” 천기노인이 크게 놀라 제자가 살피던 혈존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뒤통수에 뚫려있던 구멍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시신은 분 명 혈존의 것이었다. 천기를 읽고 인간의 육신 내부에 있는 운명을 읽는 천기노인의 눈이 시신에 아직 얽혀있는 기운을 읽는 이상 다른 자를 착각 할 리는 없다. “이럴수가? 설마 죽지 않았단 말인가?” “의술적으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맥도 뛰지않고 숨도 끊겼으니까요. 심장도 뛰지않고 체온도 보통 시신의 것처럼 차갑습니다. 그런데 이상하 게 시신의 피부가 깨끗하네요. 자잘한 상처하나 없는 것이 마치 탈태환골 을 격은 직후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제자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천기노인은 물끄러미 제자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대단한 놈이었다. 스승의 피를 이어받은 놈이라 보면 볼수록 자신 의 스승이 생각났다. 천기노인은 일찍이 다섯명의 사형제가 있었는데 각 기 한 방면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천기노인이야 하늘을 살피는 제주밖 에 없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네 형제는 각기 자기 방면에서 대 단한 사람이었다. 사형제 다섯이서 각기 다른 방면으로 뻗어나간 것은 그 들의 스승의 능력이 대단하여 홀로 그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없었기 때 문이다. 다섯이서 그 재주를 나눠가져도 벅찬 사람. 그 뛰어난 존재였던 스승이 바로 천년마교와 싸우다 거의 대부분 죽었다고 알려진 천외구기의 하나 생사활의(生死活醫)였다. 생사활의는 백 수십년 전에 천지마검에 의해 죽 은 사람으로 신에 달한 의술과 침을 사용하는 암기술로 천하에 명성을 떨 쳤던 사람이다. 당시 그의 의술에 대한 명성은 지금의 마화타에 비견될만 했고 그의 암기술은 흑도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술과 암기술 외에도 천기, 바둑, 시와 그림 등 다방면에서 그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 다. 제자 장의비는 생사활의의 마지막 후손이다. 천기노인을 비롯한 다섯의 사형제는 계속 스승의 후손을 보살펴왔다. 스승의 은혜를 갚기위해 생사 활의의 모든 진전을 스승의 후손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뜻에 그들 모두 가 동의했던 것이다. 그동안 그 후손 중에 쓸만한 재능을 가진 자가 나오 지 않아 천기노인을 비롯한 다섯 사형제가 포기하려는 순간 하나의 천재 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지금 천기노인의 앞에 있는 장의비였다. 장의비의 의술은 신의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났으므로 그가 혈존이 죽었 다고 했으면 죽은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사라졌다니 이는 또 무슨 소리 인가? 못 믿겠다는 듯 천기노인이 혈존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흙속에 묻혀있어 싸늘한 시신. 하지만 흙을 털어놓고보니 방금 전까지 땅에 묻혔다고는 전 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 보였다. 금혜연보다 오히려 더욱 깨끗하고 투 명한 피부. 전신에 티끌하나, 잡티 하나, 점 하나 없는 모습. 태어난지 얼마안된 아기의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으니 흉터하나 없는 순백의 모 습이었다. 장의비의 말처럼 껍질을 벗고 탈태환골한 듯한 모습. 그러나 사람이 죽어서 탈태환골한다는 소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천기노인이었 다. “같이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부님이 보신 대로라면 이 시체가 천하 를 구할지도 모르는데.” 천기노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뜻도 이해할 수 없지만 죽 은 혈존의 시신에서 나타난 현상도 신기한 일이었다. 하여간 이대로 천기 를 해석하지도 않은체 그만 둘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이 시체가 뜻 하는 것이 천황성의 기운이 확실한 만큼 더욱. 천기노인은 혈존의 시신 을 사형제들에게로 데려가겠다고 결심했다. 깊은 어둠이었다. 혼돈이었다. 이미 그 영혼이 아수라독존마공에 푹 담겨 져 있었기에 그 영혼도 혼돈 속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그 혼돈도 오래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혼돈에 물든 그 영혼자체가 소멸되고 있었기 때문 이다. 산산히 부서져 소멸되는 영혼. 소멸되어 존재가 지워지면 혼돈조 차 없으리라. 백이충은 울었다. 혼돈속에서 공포와 절망 속에 울었다. 떨면서 슬퍼하 며 외로움에 젖어 울부짖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부러워하며 존재하 는 모든 것들을 질투하며 백이충은 유(有)에서 무(無)로 돌아가려하며 울 었다. 존재의 소멸. 온통 회색빛의 어둠. 싸늘하고 차가운 혼돈의 어둠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시간은 백이충에게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단 일각도, 한 시진도 외로움에 떨고있는 백이충의 영혼에게는 영겁의 세월과 다름없었 다. 회색의 어둠에서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 그리고 뭔가 따듯한 것이 다가왔 다. 혹은 백이충이 떨면서 따듯함을 향해 다가섰다. 그 작은 밝음은 백이 충을 적시고 있는 공포, 혼돈, 소멸, 외로움, 고독, 슬픔의 반대가 되는 개념을 안고 있었다. 그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식이 찾아왔다. 빛이 손을 내밀었다. 백이충이 손을 붙잡았다. “또 다른 나여. 백가량의 잔재여. 나에게로 와라.” “빛이여. 밝음이여. 나를 인도하라.” 백이충은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맹목적으로 빛을 따랐다. 목마른 자가 오 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굶주린 자가 음식냄새에 이끌리는 것처럼, 사랑 에 빠진 자가 연인을 따라가는 것처럼 빛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그 어떤 의혹도 의심도 없었다. 빛을 따라 간 곳은 백이충에게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머 물렀던 곳. 그러나 지금은 그 인연이 끊긴 바로 그의 집이자 육신인 곳이 었다. 하지만 얼마전까지 백이충 자신과 하나였던 그 육체는 이미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백이충과의 모든 연계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 치 주인처럼 그 빛은 백이충을 이끌고 그 육체에 깃들었다. 익숙하고 따듯한 곳을 찾자 백이충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비로서 하 얗고 밝은 빛의 모습을 바라 볼수가 있었다. 그리고 놀랐다. “당신은...” “나는 백이충이다. 또 다른 나이며 백가량의 잔재여.” 백이충의 모습을 한 빛이 말을 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영혼이었고 지금 인도되어 온 백이충과 동질의 냄새를 지니고 있는 영혼이었다. 하지만 빛 에 이끌려온 백이충과는 또 달랐다. 혼돈에 젖어있던 백이충은 죽어있는 영혼이었고 백가량의 잔재였으며 혼돈속에 소멸해가는 존재였다. “누구야? 당신은 누구지? 백이충은 나야. 당신이 아니야.” “나는 너이고 또한 백이충이다. 그러나 동시에 네가 아니다. 너는 백가 량의 잔재이고 나는 백이충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야말로 백이충이야. 백가량은 나의 영혼의 일부이며 과거의 행적일 뿐이야. 너는 내가 아니야. 백이충이 아니야.” 백이충의 모습을 한 빛은 백이충을 가리켰다. “너는 백가량의 영혼이다. 백이충으로서 살아온 백가량의 영혼이다. 분 명 백이충으로서 살아온 것은 너지만 네 본질은 계속 백가량의 영혼이었 다. 너는 또한 백가량의 영혼이 아닌 백가량의 잔재일 뿐이기도 하다. 백 가량의 영혼(靈魂)은 이미 파괴되어 소멸되었고 혼백 중에 흩어진 백(魄) 만이 남아 대기에 떠돌고 있었다. 너는 백가량의 기억을 담고있는 백(魄) 중에서 백이충으로 살아본 부분을 가장 사랑하는 기억의 잔재이다.” 백이충의 모습을 한 빛은 또한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백이충이다. 백이충의 몸에 깃들었던 본래의 영혼이며 소멸되어 사라졌어야 할 영혼이고 또한 네가 육체에 깃듬으로서 한 구석에 계속 너 를 지켜보며 잠들어있던 존재이다. 비록 너는 나를 느끼지 못했지만 나 는 계속 너를 느꼈다. 내 육체를 살려준 네게 감사하고 네게 협조했다. 알게 모르게 너와 나는 동화되었다. 또 다른 나여. 너는 백가량의 잔재이 며 동시에 나와 동화된 일부분이기도 하다. 어릴 때의 추억과 감정, 가족 에 대한 사람은 모두 너에게 반영된 나의 일부분이다.” 백이충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백이충이라고 말한 빛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와 내가 서로 합해야 할 때가 왔구나.” “무슨 소리지? 왜 내가 너와 합해야 하지?” “이 육체가 죽었기 때문이다. 네가 이룩한 아수라독존마공은 생과 사를 뛰어넘은 신마공(神魔功). 이 육체는 죽었음에도 아수라독존마공의 지배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힘을 일으키면 이 육체는 생과 사를 뛰어 넘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육체에 맴돌고 있는 아수라독존마 공을 다스릴 수 있는 너의 영혼은 이미 죽어 흩어지고 있는 상태이고 내 영혼은 육체에 얌전히 깃든 상태라 온전하지만 신마공을 다스릴 힘이 없 다. 그것이 둘이 합일해야 할 이유이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영혼이다. 존재가 다른 두 영혼이 어떻게 합일하 자는 거냐?” “너는 이미 죽었다. 백가량의 영혼이 파괴되고 지금의 너는 그저 백이충 의 기억만을 중요시하는 혼백의 잔재로 간신히 내가 대기에서 끌어 모은 일부분일 뿐이다. 혼백이 흩어질 수 있다면 또한 모일 수도 있는 법. 두 영혼의 합일은 불가능하지만 내 영혼을 백가량의 잔재인 너로 채색하는 것은 가능하리라. 나는 내 영혼을 보존하되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된 주 (主)가 내 영혼을 물들이는 너에게서 비롯되리라.” 백이충의 손과 백이충이라 자처하는 빛의 손이 맞잡았다. 둘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육체와 동일화 해 본적이 없는 영혼과 영혼이 부스러져 흩어진 기억의 잔재 일부분이 합해졌다. 분리된 하나가 서로를 닮아가 새로운 하나로 되었다. “이럴수가?” 육체의 밖에서 백이충의 육체를 지켜보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 경악의 음 성이 터져나왔다. “시신의 온기가 돌아오고 있다. 따듯해져온다.” “불가능한 일. 영혼이 흩어진 육체가 살아난다는 건가? 강시나 괴물로 되살아나는 건가?” “아니다. 숨이 돌아오고 있다. 체온이 돌아오고 있다. 심장이 뛰고 있 다. 사람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정상적인 이간의 밝은 심령의 빛이... 보인다. 영혼이... 영혼이 부활 한 건가?”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 어린 청년 하나와 노인 다섯이 떠드는 소리였다. 그들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있을수 없는 일이 눈앞에 일어나는 데에 경악 하는 목소리였다. “혈존이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부적합한 괴물, 마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영혼이 부스러지고도 영혼을 복구할 정도의 괴물이란 말인가? 고 금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죽은 자가 부활한단 말인가? 그 어떤 사술 대법이나 다른 이의 도움도 없이?” “......”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한다. 이것이 진리이며 상식이었다. 인간이 살아 온 역사에는 그렇게 되어있다. 사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구분이 없 어지면 이 세계는 진작 혼란과 혼돈으로 어지러워졌을 것이다. 황제도 천 민도 죽음앞에서는 평등하다. 하지만 또한 황제도 천민도 죽고 싶지않아 영생을 꿈꾸게 되는 것이 사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염 원이었다. 도인은 신선이 되어 불노불사를 터득하려 한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통 해 해탈을 얻어 윤회를 벗어나려 한다. 그나마 힘이 없는 자들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함으로서 내세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한다. 종교도 수 련도 도덕도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 다.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위한 직접적인 불사를 꿈꾸는 자도 있다. 진시황 이 불노불사를 위한 연단술에 매진한 것, 불노초를 구해오라고 옥동옥녀 를 보낸 것도 그러하다. 심지어 이미 죽은 자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자도 있다. 역사의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수천년 중원의 역사에는 그렇 게 죽음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자가 한둘이 아니다. 물론 죽음을 뒤엎는 것은 하늘의 순리를 거역하는 일. 그 끝은 늘 비참하다. 사법을 통해 영 생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길을 벗어나 귀축(鬼畜)이나 요귀(妖鬼)의 길 을 걷기 쉽상이다. 그런 모든 사술 대법의 정점이 혈마전혼대법이다. 자아의 주를 영혼에 두 고 육체를 단지 그릇으로밖에 보지 않는 대법. 육체가 돌이킬수 없는 죽 음앞에 이르렀을 때 영혼을 빼내어 새 육신에 넣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 고 영생의 길을 걷는다는 이론에서 시작된 사술대법이다. 위험은 적고 효 과는 확실하다. 실제로 이 대법에 성공한 자가 많지는 않지만 수천년 세 월동안 손가락 꼽힐 정도는 있다. 혈존 또한 그러한 자 중의 하나이다. 백이충은 다르다. 혈존은 죽기전 혈마전혼대법을 펼쳐 영혼을 백이충의 육체에 불어넣었다지만 백이충의 몸에 깃들어있는 상황에서는 혈마전혼대 법을 펼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혈존은 말 그대 로 마신에 가까운 자이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술 대법 없이도 스스로 육체를 빠져나가 영혼의 안전을 꾀하려했다. 그 결과가 일 어난 것은 육체를 여러번 벗어난 경험이 있는 혈마전혼대법이나 이혼통제 대법의 효력 덕분인지도 모른다. 영혼이 빠져나와 도망쳤다면 지금의 일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워 낙 혈존이라는 자는 상식이나 순리가지고 판단할 수 없는 자이니까. 하지 만 그 영혼조차 파괴되었다. 열조각이 넘게 산산히 흩어져 영(靈)은 영대 로, 혼(魂)은 혼대로, 백(魄)은 백대로 흩어졌다. 영혼도 죽었고 육체도 죽었다.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확실히 죽었 다. 숨도 끊어지고 심장도 멈추고 피는 굳었으며 체온은 싸늘하게 식어 몸이 뻣뻣히 굳어졌다. 심지어 생각하는 머리의 뇌조차도 다섯 개의 구멍 이 뻥 뚫렸다. 영혼이든 육체든 부활의 이치를 아무리 찾으려해도 그 근 거조차 없는데 지금 백이충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이걸 단순히 기적이나 이적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백이 충의 육체를 지켜보는 남자들의 침묵이 두려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놈이군.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이다.” “지금 저항할 힘이 없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 까? 혈지존의 힘조차 천하는 감당할 힘이 없거늘 다시 혈존마저 부활한다 면 천하가 어찌 감당하리까?”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 다섯 중에 속한 목소리이다. 그때 젊은 남자의 목소리, 장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악도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지만... 영혼이 박살난 것이 사실이라면... 박살난 영혼의 일부가 스며들어 이 육체를 다시 부활시키고 되살아났다 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까? 사부님들.”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겠지. 혈존같은 귀물의 영혼조각이 아니면 어떤 요 귀나 귀신의 힘이 그리 커서 죽은 시신을 생자(生者)로 부활시킬 힘이 있 겠는가?” “천기사부님께서는 혈존의 파천성의 빛이 열 개로 조각나 각기 따로 빛 나고 있다고 하셨죠?”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너 역시 하늘에서 열 개의 파천 성의 빛을 발견하지 않았느냐?” “만약... 만약 이지만 말입니다. 악도의 말처럼 혈존의 영혼이 산산조 각 난 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그것은 진실이겠지만, 그런데도 그 영혼 조각이 소멸되지 않고 다시 육체로 되돌아와 우리 눈앞에서 부활하고 있 는 것이라면...? 그러면 산산조각났던 영혼의 조각들은 모두 이 육체로 다시 되돌아 온 것일까요?” “....!!!” “만약에 산산조각난 혈존의 영혼조각이 모두 되돌아 온 것이 아니라 면... 일부분 만으로도 죽은 본래의 육체를 되살린 것이라면... 남은 조 각도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남은 조각도 완전한 영혼처럼 각기 흩어져 새로운 육체를 찾는다면... 혈마전혼대법처럼 타인의 육체를 차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하늘이 보인 천기는 혹시 그것을 나타내는 것 이 아닐까요? 혈존의 영혼이 열조각으로 나뉘어 혈존의 힘과 영혼을 지 닌 자가 열명으로 늘어난다는...” “...!!!!!!!!!” 싸늘한 침묵이 다시금 주위를 뒤엎었다. 질식할 것같은 무거운 침묵이었 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 나타나는 혈존들 관련자료:없음 [1981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18 17:08 조회:1016 <나타나는 혈존들> 악도 전일비는 혈존 백가량의 죽마고우이다. 그는 평생 백가량을 부러워 했다. 어려서는 백가량을 질투했다. 그러나 질투도 어느정도 서로의 능력을 비 교할 수 있을 때의 일이다. 전일비는 백가량과 자신의 근본적인 능력의 차이를 인식할 정도의 식견은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전일비는 백가량 의 재능에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전일비에게 백가량의 존재는 우상이나 받들어야 할 존재이지, 결코 질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혈존 백가량이 전일비를 내치지만 않았다면 그는 평생을 통해 백가량을 위해 인생을 받쳤을 것이다. 백가량이야말로 전일비가 가장 바라고 본받 고 싶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일비가 혈존 백가량에 대해 자기 자신보 다 더욱 잘 알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보다는 혈존에 대해 연구했던 것도 모두 백가량의 재능과 성격, 야망을 격렬히 사랑했 기 때문이었다. 혈존이 죽었다. 그것도 전일비의 전폭적인 협조와 음모 속에 죽었다. 전 일비는 단지 자신의 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속의 우상인 혈 존을 해치워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신을 자신의 손으로 지 워버린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되고 싶었던 목표와 본받고 닮고 싶었던 표본이 전일비 자신에 의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어째서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냐?” 혈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전일비. 그가 혈존이 빠져나갈 수 없는 함 정을 파놓고도 혈존이 혈지존에 의해 파멸을 맞이하자 부지불식간에 이 런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 혈존의 성격과 행동을 연구한 끝에 혈존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을 마련해 놓고서도전일비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혈존이 절 대 죽을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혈존 백가량은 그의 마음 속 신 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이정도였던가? 이 정도에서 혈지존에게 죽을 정도의 존재에 불과 했던가?” 전일비는 끊임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뜨듯한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 러내렸다. 지금 전일비의 몸은 자신의 원래 몸이 아니다. 혈존의 분신이 었던 천마지존의 몸을 차지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라도 혈존이 한때 소유했던 육체를 전일비는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반응하여 천마지존의 몸이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은 이미 천마지존의 몸과 전일비 의 정신이 완벽히 동화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할 줄 알았다. 옥황상제와 유부대제가 와도 너를 건드리지는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혈지존의 손에 죽는 거 냐? 백가량?” 마음에서 사무치는 전일비의 목소리. 신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 신도의 절 망에 찬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혈지존에 협력했지만 그의 인생 최대의 목적이자 목표였던 혈존이 쓰러지는 모습은 전일비에 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혈존이 죽은 것은 어떻게 보면 전일비의 인생이 허 물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이하여, 어이하여 이정도에 쓰러지는 것이냐? 진정 네가 혈존 백가량 이 맞기는 맞는 것이냐? 이런 정도에 쓰러지는 존재가 이 전일비가 평생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던 혈존 백가량이었단 말이냐? 어이하여 네가 백가량 이란 말이냐?” 누구도 들을 수 없었지만 전일비의 비명과 절규는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 “어이하여 네가 백가량이란 말이냐? 어이하여 네가 혈존이란 말이냐? 백 가량은 무적이어야 하거늘. 백가량은 신이어야 하거늘. 어이하여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백가량이란 말이냐? 아니다. 아니야. 그가 백가량일 리 가 없다.” 전일비는 마치 미친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은 자가 어찌 백가량일 수 있으랴? 하지만... 하지만 그는 진 짜 백가량이다. 어이하여 그가 백가량이란 말이냐? 어이하여 내가 전일비 란 말이냐? 차라리... 차라리 내가 백가량이었다면 그렇듯 허무하게 쓰러 지지 않았을 텐데. 내가 백가량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너희 모두를 비 웃으며 혈존을 거역한 죄에 대해 오만한 태도로 처벌을 내렸을 텐데.” 될 수만 있으면 전일비 자신이 백가량이 되고 싶었다. 그의 과감한 결 단, 잔혹한 심성, 천부적인 무공과 지혜의 재질, 그리고 평생 모든 이의 머리위에 군림만 하고 살아갈 것같은 오만성. 혈존은 타고난 지배자였으 며 포식자이고 강자였다. 전일비가 다시 태어난다면 되고 싶어하는 자였 다. 전일비는 평생 백가량을 흉내내려 했다. 백가량의 생각을 신의 복음처럼 생각해 내려고 했다. 그런 전일비이기에 스스로 백가량이 아닌 전일비로 태어나게 한 신에 대해 평생동안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영원 히 손댈수 없을 것 같던 전일비의 우상 백가량이 쓰러졌다. 그의 신앙 이, 마음속의 신이 쓰러진 것이다. 전일비가 허탈감에 빠져 중얼거릴 때였다.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 누군 가 속삭였다. 그것은 혈존의 속삭임이고 또한 악마의 속삭임이기도 했 다. 그리고 전일비가 평생 바라던 유혹이기도 했다. 거의 반 미친 상태 의 전일비라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대해 의문을 갖지도 못했다. - 혈존이 되고 싶나? 네가 백가량이 되고 싶나? - “누... 누가? 누가 그따위 혈존이 되고 싶다고. 그는 패배자에 불과하 다. 노부의 함정에 빠져 혈지존의 손에 죽은 패배자에 불과한...” - 네가 평생 되고 싶었던 존재. 그 기회가 왔다. 전일비를 저버리고 혈 존 백가량으로 살고 싶은가? - “누가 그따위... 누가 백가량 따위 되고 싶다고... 누가 혈존 따위 되 고 싶다고...” - 원하면 말하라. 원하면 소원하라. 그러면 너는 전일비가 아닌 혈존이 되리라. 간절히 원하라. 간절히 소원하라. - “그따위... 그따위를... 원해. 그래 원한다구. 나는 혈존이 되기를 원 해. 저 나약해 빠져 죽은 백가량대신 내가 혈존이 되었으면 하고 원한다 구. 그것이 내 평생의 소원. 내가 전일비가 아니라 혈존 백가량이었으면 하는 것이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었다구.” 전일비가 아무도 모르게 마음 속에 소리칠 때였다. -크크크.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네 육신에 나와 상성이 맞는 기운이 서 려있구나. 백가량의 잔재인 나를 보존하게 할 익숙한 장소가 네 육체 안 에 있구나. 나는 이미 영혼이 아니지만 네 영혼을 혈존 백가량으로 칠하 리라. 너는 나에 의해 네 영혼이 물들어 다시 새로운 혈존 백가량으로 태 어나리라. 너는 전일비의 영혼인 동시에 나 혈존이로다. - 전일비의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그의 심신이 백치가 되어갔다. 마 음 속에 무언가 촉촉하고 사악한 것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위 에 혼돈의 잔재가 뒤덮었다. 전일비의 몸 속에 미약한 기운이 스며들었음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 다. 그리고 그 작은 혼돈의 기운은 천마지존의 몸에서 전일비의 영혼을 몰아내는 대신에 전일비의 영혼과 합일하여 서로의 공존을 모색했다. 이 리하여 혈존이면서 또한 전일비인 존재가 탄생하였다. “크으윽.” 전일비가 두눈을 떴다. 그 눈에는 회색빛 광망이 폭사되었다. 혼돈의 눈 빛이었다. 전일비의 기억 위에 혈존의 잔인한 상념이 머릿속에 살아났 다. 과거 혈존을 연구하기 위해 알아두었던 그의 과거와 행동들이 전일 비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경험처럼 마음 속에 생생히 스며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스스로가 전일비라고 하지만 가슴 속 정신은 스스로가 혈 존 백가량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전일비가 아니었다. 그렇다 고 백가량도 아니었다. 그는 전일비의 영혼에 혈존의 잔념이 채색된 마 물, 마혈존 전일비였다. “크으윽. 아들이라고 봐줬거늘 감히 본좌를 시해하다니.” 어지러운 눈빛을 다스리며 전일비가 중얼거렸다. 그는 방금 전까지 전일 비였지만 전일비의 과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방금전까지 혈존 을 두려워했지만 이제 혈존의 과거가 바로 그의 기억속의 과거가 되었 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자신은 혈지존의 뒤를 쫓아 청마산을 떠나 고 있는 중이었다. 마혈존의 주위로는 열구의 천마강시가 있었다. 저 앞 에는 그의 과거를 죽인 아들 혈지존이 득의양양하여 앞서가고 있을 것이 다. 당장 손을 쓰고 싶었지만 치미는 살심을 자제했다. 그는 혈존의 능력 을 가진 대신 동시에 전일비의 소심함도 같이 가진 마혈존이었으므로 앞 뒤를 냉정히 계산,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혈지존 백가량의 세력은 아직 엄청났다. 또한 쌍영마공을 합일한 놈의 힘 은 지금 마혈존의 힘으로 직접 부딪쳐 이긴다는 승산을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을 일부 얻었지만 전일비의 영혼에 부딪쳐 온 혈존의 영혼이 아주 작은 잔재에 불과한 만큼 아수라독존마공의 힘도 모래 알만한 아주 작은 것이었다. 쌍노마저 죽었으니 백이충일 때 남겨 둔 일백마제나 혈무영을 다시 장악한다고 자신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 면...? “크흐흐. 좋다. 첫째 녀석. 쌍노를 죽이고 소매를 죽인 값으로 네 녀석 의 세력을 대신 훔쳐주마.” 마혈존 전일비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더 이상 그에게 백이 충의 순진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순순 혈존 백가량의 잔인함과 백가량이고 싶었던 전일비의 영혼이 결합된 결과였다. 중요한 것은 혈존 이었던 백가량의 과거이지, 백가량이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지냈던 백이 충의 과거가 아니었다. 심지어 금혜연과의 일도 첫사랑 악산산의 연장선 에서 중요할 뿐, 백이충과 금혜연의 추억에 대한 감정은 희미한 기억으 로 남아있을 뿐이다. “천마강시를 회수할 절호의 기회이다. 첫째를 죽이고 천마강시들을 회수 하면 이제 천하에서 본좌를 막을 자가 그 누구이겠는가?” 마혈존의 입에서 의미심상한 미소가 떠올려졌다. 혈존이 남겨두었던 세력 보다는 혈지존의 지금 세력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마혈존은 혈존의 일부일 뿐이기에 쌍노가 죽은 지금 혈존이 남겨놓은 세력을 장악 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알고있었다. 혈존의 힘과 기억 을 받은 것이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반면 방심하고 있는 혈지 존의 세력을 훔칠 기회는...? “크크크. 천마강시. 너희들의 창조주가 본좌인만큼 시간만 있다면 네놈 들의 정신을 다시 본좌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 마혈존의 손에서 미약한 지풍이 일어나자 그의 주위를 호위하듯 움직이 는 천마강시들의 몸에 바람이 스며들었다. 혈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된 금 강불괴에 재생력까지 가진 무적의 천마강시이지만 몸에 지닌 수백 개의 혈도중에 일곱 개의 혈도를 찾아 차례대로 누르면 약점이 나타난다. 열 두 시진 이내에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천마강시들은 기능을 멈추게 된다. 그때 천마강시를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오직 혈존의 기억을 가진 자들 뿐이다. “천천히... 천천히... 천마강시들을 모조리 되찾으리라. 그 다음에는 첫 째가 했던 것처럼 놈의 부하들을 세뇌하여 끌어들일 것이고 놈의 세력을 모조리 빼앗는 순간 그 목숨을 이 손으로 직접 끊어주리라. 크흐흐. 첫째 가 황실을 장악하는 데에 정신을 쏟는다면 본좌에게 파고들 충분한 틈이 만들어진다는 소리이리라.” 천하를 파괴할 파천황의 기운. 혈존을 부러워하고 연구하다가 혈존 자체 가 되어버린 마혈존 그의 저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크아아악.” 엄청난 비명이 대청을 울렸다. 그리고 경악에 찬 시선이 쏟아졌다. 지붕 밑의 상황은 온통 피, 피, 피, 선혈로 이룩된 시산혈해의 장이었다. 한 사람의 내장이 후루룩 흘러내리고 살점 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살해된 자가 귀주에서 이름높은 흑수기린과 흑장무영이라는 것을 안다면 지금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반대할 놈 있나? 있으면 죽여준다.” 음산한 살기가 느껴지는 음성에 숨막히는 공포가 물씬 풍겼다. 살육을 저 지른 자가 한 걸음 나서자 수백명이 동시에 움찔 거리며 물러섰다. 이른 바 귀주와 운남의 절대자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모두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두 눈에 혈광을 보이며 두 손을 선혈로 물들인 자는 바로 곤무악이었다. 삼존의 하나로 흑철존이라는 이름을 얻은 곤무악. 지닌 무공은 놀랍지만 단순무식하기 이를데 없다는 그가 어이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가? “반란...? 흑방이 네게 무엇을 잘못했다고 반역을 하는가?” “크흐흐. 흑방은 없다. 방주 흑수마존이 말했다. 여긴 흑련이라는 새로 운 세력이 태어나는 장소라고.” “하지만 흑방의 수석호법이 아닌가? 어이하여 상전인 흑수마존을 해한 단 말인가?” “흑방은 흑수마존 것. 그러나 흑련은 주인 없는 것. 흑방에서 곤무악은 수석호법. 높지만 흑수마존도 주인이라 높다. 마음에 안든다. 흑련은 주 인 없고 높은 자도 없다. 곤무악, 주인 된다. 흑련에서 가장 강한 자가 주인이다. 곤무악, 약한 자들은 흑련의 련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다. 이를 힘으로 증명한다. 곤무악 생각이 틀렸다면 너희들도 힘으로 증 명해라.” 지금 수백명이 모여있는 대전은 과거 흑방이라 불렸고 혈천마련을 물리 친 이후에는 흑련이라고 이름을 바꾼 곳의 중심으로 개파대전을 여는 장 소였다. 혈천마련과 이름을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만독궁과 흑방 이 주축이 되어 심혈을 기울인 것이 오늘 탄생할 예정이었던 흑련이다. 과거 흑방이 단일세력으로 귀주의 제일 세력이었고 만독궁이 운남의 제 일 세력이었다면 흑련은 귀주와 운남의 정사를 가리지 않은 모든 무림세 력이 모여들 연합체였다. 연합체라고 하지만 만독궁과 흑방이 주축이 되 어 귀주와 운남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 영 광스런 자리를 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혈천마련을 물리치고 이름을 높인 흑방은 그런 자격이 있었다. 흑방 곳곳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몰려들어 연회가 개최되었지만 중앙의 대전에 모인 자들은 모두 일문지주(一門之主)뿐이었다. 수백명을 문도로 거느린 자도 있었고 수천명을 부하로 거느린 자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모 두 강호에 이름 석자를 날린 절정고수라는 것, 그래도 숫자가 수백 명이 나 되었다. 하지만 그 수백 명중에 살기를 발휘하는 흑철존 곤무악의 기 에 눌리지 않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 질펀한 피 속에 사지가 조각나서 쓰러져 있는 만독궁주 독마와 흑 방 방주 흑수마존. 한 시진만 해도 둘은 주인공답게 잔뜩 들뜬 기분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좌중의 영웅들을 치하하는 뻔한 소리를 했고 곧 흑련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때만 해도 마시고 떠드는 연회의 축제가 곤무악으로 인한 피의 축제로 바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태가 기괴하게 돌아가게 된 것은 독마 가 관례적인 말을 했을 때 부터였다. “이제 여러동도의 협력으로 귀주와 운남의 무림 세력을 대표하는 흑련 이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흑련을 다스릴 련주로 적합한 분을 추천해 주십 시오.” 독마가 말을 하면 흑방에서 독마를 추천하고 만독궁에서 흑수마존을 추천 하기로 되어있었다. 적어도 귀주와 운남 양 지방에서 이 둘을 능가하는 명망과 이름을 가진 무림 고수는 없으니까. 적당한 연극적인 사양 끝에 흑수마존이 흑련의 련주를, 독마가 부련주의 지위에 앉으면 되었다. 그 때였다. 흑방의 위세를 드높인 흑철존 곤무악이 머리를 부여잡고 미친 듯 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던 것은. 워낙 엉뚱하고 단순하며 사고를 잘치는 곤무악이었기에 뜻밖의 사태에도 누구도 그의 곁으로 다가서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독마와 흑수마존도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광란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바람에 곤 무악은 무련 일각에 해당하는 시간을 마음껏 발악할 수 있었고 일각이 지 나자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미 흑철존이라는 이름은 삼존의 하나로 명성에서 누구의 밑에 있는 이 름이 아니었다. 대청에 모인 수백의 절정고수 중에는 흑철존을 보기위해 모여든 자도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흑철존이 하나의 세력을 맡을 수 없 을 정도로 단순하고 백치같은 자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좌 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지만 누구도 흑련의 련주로 염두에 두지 않은 자 가 바로 흑철존 곤무악이었다. 그런데 그가 중인의 이목을 한몸에 집중시 키는데 성공하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크흐흐. 곤무악 높다. 높고 강한 자가 련주이다. 곤무악, 흑련의 련주 권좌에 도전한다.” 엉뚱한 소리와 함께 흑철존 곤무악이 대청의 앞, 즉 독마와 흑수마존의 앞에 내려섰다. 처음에는 모두들 사태를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흑수마존 과 독마조차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석호법. 취하신 모양이오. 오늘은 이만 참으시고 자리로 돌아가심 이...” 과거 흑방 소속 호법원의 호법 하나가 흑수마존의 눈짓을 받고 곤무악을 끌어내기 위해 나섰다. 백치라고 해도 삼존의 하나이며 그 무력만 따지자 면 흑방 내에서 가장 높은 자이다. 목적은 소동을 진정시켜 곤무악을 내 려보내기 위한 것이라 해도 겉 행동만은 공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곤무악의 손이 흔들리고... 푸아악! 질펀한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 왔다. “크흐흐. 강한 자가 련주다. 곤무악, 련주되려 나섰다. 련주 인정 안하 면 모조리 죽인다. 방해하면 모두 적이다.” 말투는 어눌하지만 그 행동만은 어눌하게 볼 수가 없었다. 손에 피를 뚝 뚝 흘리며 사람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고 히쭉 웃는 자를 어떻게 멍청한 자로 보겠는가? 싸늘한 침묵이 좌중을 휩쓸었다. “수석호법. 이 무슨 짓인가?” 곤무악의 시선에 한기를 느끼면서도 흑수마존이 용기를 내어 나섰다. 흑 수마존이 보는 곤무악은 백치같은 눈을 한 데다 가끔 비범한 면모를 보여 주는 알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지금 흑수마존 앞에 있는 곤무악은 절대 자의 기도를 가진 자였다. “크흐흐. 강하면 련주가 된다. 강하지 못하면 련주가 못된다. 곤무악, 도전한다.” 곤무악이 성큼 걸음을 내딛었고 흑수마존은 그 기세에 압도당했다. 흑방 을 창설한 이래 흑도의 맹주로 자처하며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패배감 이 흑수마존의 몸을 휩쓸었다. 흑수마존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일장을 내 뻗었다. 과연 일방지주이며 동시에 백도천하에 대항하여 꿋꿋하게 흑도 를 지켜온 흑수마존다온 일장이었다. 아무렇게나 가볍게 내뻗은 것 같은 장력에 알 수 없는 힘이 숨어있었다. “크크크. 천하가 방주를 너무 낮게 봤군. 철마황보다 못하지 않은 힘이 다.” 검은 장력 안에 숨어있는 힘을 느끼며 곤무악이 흉소를 터트렸다. 마치 훈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흑수마존이 전력을 다해 일장을 내뿜은 것 을 눈치챈 것이다. 연신 흉소를 터트리며 가만히 흑수마존의 일장을 기다 리고 있었지만 대신 곤무악의 눈에서 쏟아지는 혈광이 더욱 강해졌다. 그 리고 그 혈광을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남자가 있었다. “설마? 저 눈빛은...? 맙소사. 안돼!!!” 흑수마존의 사숙이며 동시에 봉황곡 팔대 장로의 하나였던 흑영신마. 그 는 저 눈빛과 같은 눈빛을 과거에 본 적이 있었다. 혈광이 도는 저 눈빛 은 결코 곤무악의 눈빛이 아니었다. 혈영신공이 운기되었을 때에만 발할 수 있는 광기어린 눈빛. 바로 혈존의 눈빛이었다. 흑영신마는 잊지 못한 다. 봉황곡의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갈 때 그 처참한 비 극위에서 대소를 터트리며 웃고있던 자의 눈빛을. 흑영신마의 몸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아갔다. 장력을 뻗은 것은 흑수마존 이 먼저이건만 곤무악의 지척에 다다른 것은 흑영신마의 몸이 먼저였다. 연회에 모인 무림 고수들이 보기에 흑영신마가 곤무악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린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흑수마존을 보호하기 위한 흑영신마 의 발버둥이었다. “사숙.” 흑수마존은 깜짝 놀라 장력을 거두었다. 이미 내기의 수발이 자유로운 그 가 장력을 거두는 것은 별 무리가 없었다. 그때 흑수마존은 보았다. 곤무 악의 입가에 살짝 그려지는 비웃음을. 그리고 풍선이 터지듯이 터져버리 는 흑영신마의 몸. 흑영신마같은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의 몸이 어째서 그토록 쉽게 터져 나 갔을까 하는 의문같은 것은 없었다. 흑방을 일구며 같이 고생해온 사숙 이 죽는 모습을 본 순간 분노로 흑수마존의 이성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이 다. 그는 끝내 흑영신마가 죽음으로 그를 구해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 고 다시 죽음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흑수마존과 독마가 함께 곤무악을 덮쳐갔다. 좌중 모두는 흑혈존 곤무악 이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의 무공이 높다하더라도 외공과 개세 적인 힘에 관한 소문이 나돌 뿐이었다. 반면 독마와 흑수마존은 이십년 간 이름을 우뚝 세운 당대의 거인이었다. 이 둘이 죽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이미 죽은 흑영신마 밖에 없었으리라. 곤무악은 독마와 흑수마존을 비웃었다. 오히려 아까 몰래 쳐냈던 흑수마 존의 일장이 훨씬 무서웠다. 독밖에 몰라 본신 무공이 형편없는 독마와 분노로 이성을 잃어버린 흑수마존의 공격은 전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오 히려 빈틈 투성이었다. “크아아악.” 흑영신마와 만독궁의 궁주인 독마가 동시에 사람의 형상대신 수천조각으 로 폭발하여 사방으로 고기와 선혈을 쏟아내는 장면은 마치 거짓말이나 속임수 같았다. 곤무악이 손을 썼다기보다는 두 사람의 몸 속에 화약이라 도 숨겨져 있어 그것이 발화되어 폭발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여간 한 지역을 웅패하던 두 사람은 이처럼 시신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크흐흐. 이제 흑련의 련주. 곤무악이다.” 피분수로 화한 두 효웅. 건들거리며 마치 시비거는 듯한 말투를 내뱉는 곤무악과 그 주위에 있던 흑방과 만독궁도들의 분노. 특히나 호법원에서 흑수마존과 처음부터 같이 호흡을 맞추며 흑방을 일으켰던 상위서열의 오 대호법의 분노는 대단했다. “덤벼라. 덤벼. 곤무악은 흑수마존 련주되는 거 반대했다. 그래서 덤볐 다. 죽였다. 곤무악 련주 되는 것, 반대하는 놈. 덤벼라.” 그 다음은 마치 한편의 연극과 같았다. 흑영신마와 독마의 죽음이후 흑방 의 호법원 오대 호법이 덤벼들었다. 만독궁의 호위들도 사갈옥녀의 명령 에 함께 덤벼들었다. 그것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같기도 하고 불꽃 대신 피로 연출하는 폭죽놀이 같기도 했다. 다섯 호법과 이십명의 만독 궁 호위가 죽는 시간은 호흡 세 번 정도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흑수 기린과 흑장무영의 몸을 터트리고는 모두의 공포에 질린 눈빛 속에 곤무 악은 소리쳤다. “또 반대할 놈 있나? 있으면 죽여준다.” 한 명이 수백명을 협박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흑방과 만독궁이 연합하 여 흑련을 만들려던 자리. 그 자리에서 흑방의 방주와 소방주, 태상장로 와 총당주가 목숨을 잃었다. 호법원을 좌지우지하는 다섯명의 상위서열 호법도 목숨을 잃었다. 만독궁 역시 궁주가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만독궁 최고의 무기인 강시 는 곤무악에게 전혀 해를 끼칠수 없다는 사실이 일찍이 증명된 이후였 다. 무엇보다 흑혈존으로 이름났던 곤무악과 다르게 그는 엄청난 위압감 과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백명의 운남과 귀주의 이름난 고수들이 곤무악의 시선에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이미 그들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 을 곤무악에게 빼앗긴 것이다. “우와아. 흑혈존.” “흑혈존. 당신이야말로 진짜 흑련의 련주다.” “흑련만세. 흘련주 흑혈존 만세.” 갑자기 대전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공포에, 기세에 눌려있 던 자들이 숨통이 터진 듯 누군가가 터드린 환호를 따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전염병처럼 흑혈존 곤무악을 환호하는 목소리가 커져나갔 다. 마치 환호를 지르는 것만이 이 질식할 것같은 분위기에서 달아날 수 있는 것처럼. (크크. 마칠녀석. 잘하고 있군. 사람이란 공황상태에 빠지면 무조건 주 변 분위기에 동화하게 되지.) 곤무악은 흑혈존이 백치에 무공만 무식하게 세다는 소문과 달리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장내는 곤무악을 흑련 련주에 추대하는 자리로 바뀌 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해도 단신으로 두 거대방파의 수뇌부 를 쓸어버린 곤무악에게 누가 대항하겠는가? 잔인한 손속으로 인한 공포 는 곤무악에 대한 복종심과 충성심을 일으켜 버렸다. 그때였다. “주인 되는 자를 물다니. 무인 자격이 없는 자가 아닌가?” 한줄기 날카로운 음성이 좌중의 경직을 풀어내었다. 찌르는 듯한 음성에 힘이 실려있어 공포에 질려 곤무악의 이름을 환호하던 장내 고수들을 단 숨에 진정시킨 것이다. 모두들 차가운 냉수를 들이킨 듯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이성을 되찾고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곤무악을 바라보다가 그들의 이성을 깨운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전의 입구로 들어서는 자들은 세 무리의 인물이었다. 그들을 보고 곤무 악의 얼굴도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곤 무악이 두 눈에 발하던 혈광을 거두었다. 더 이상 핏빛을 발하지 않는 곤 무악의 두 눈은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중앙에는 중년부인이 굳어진 얼굴로 왼쪽에 일곱 늙은이를, 오른 쪽에 일 곱 노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중년미부는 잘못한 어린 아이를 나무라는 얼 굴로 곤무악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녀와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같 이 봉황의 그림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전설상의 신비삼패의 수좌, 봉황곡을 상징하는 의복이었다. 입구의 왼쪽에는 온통 만독궁도들이 입는 옷과 흡사한 옷을 입은 쌍둥이 노인이 들어왔다. 온 몸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는 두 노인들의 몸에는 검은 기류가 스믈스믈 피어올랐으며 봉황곡의 사람들은 아예 멀찌감치 두 노인의 주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입구의 오른 쪽에서 들어오는 자는 중년 문사와 열 두명의 중년 검수였 다. 하나같이 예리한 검 자체를 보고있는듯한 느낌. 보는 것만으로도 절 세 검학을 딱은 검수임을 알 수 있는 자들이었다. 중년 문사는 마치 시장 통의 건달을 보는듯한 깔보는 자세로 곤무악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숙조.” 사갈옥녀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만독궁의 삼궁주. 게다가 이미 만독 궁의 궁주가 죽은 이상 만독궁 최고 지위에 올랐다고 할수 있는 그녀가 어린 아이처럼 울며 매달렸다. 그녀는 검은 기류를 흘리고 있는 두 노인 의 앞에 무릎을 끓었다. 두 노인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자였다. 만독궁 전체의 힘을 비교해보아도 도 노인중 단 한명만 나서도 반나절에 전멸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노인 들. 그 공격수단이 무공이 아닌 독이라는 것이 더 무서운 자들. 그러나 사갈옥녀를 손녀처럼 귀여워하는 노인들이기도 했다. 사갈옥녀는 두 노인 이 온 이상 이제 남편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노인의 눈은 사갈옥녀에게 향하기는커녕 곤무악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 랐다. “크흐흐. 독성 구양봉의 두 사제가 아직도 살아있었던가?” 곤무악의 말에 두 노인의 안색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단순무식에 백치라 고 소문을 들어왔던 곤무악이 단숨에 자신들을 알아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너는 누구냐? 소문에 들리는 흑철존과는 너무도 다르구나. 어떻게 노부 들의 정체를 아는 거냐?” 독성 구양봉의 사제라는 말에 대전에 남아있던 운남과 귀주의 고수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만독궁은 독문의 후신이지만 그 위세는 독 문이란 이름을 감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했다. 하지만 독성 구양 봉의 사제라면 바로 독문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노인들이 아닌가? 독문 의 두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곤무악은 시선을 중년문사와 중년미 부에게 돌렸다. “놀랍군. 사라졌다고 알려진 신비삼패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곤무악의 말에 이번에는 중년문사와 중년미부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심지 어 곤무악을 다그치려던 독문의 두 노인도 움찔 거리며 입을 다물고 물러 섰다. 말의 내용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음공 때문이었다. 범상치 않 은 힘이 곤무악의 음성에 실려있어 이들의 가슴을 진탕시킨 것이다. 중년 문사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우리를 아는 것인가? 신비삼패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니?” 오른 쪽의 중년 문사가 다시 소리를 쳤다. 방금 전 날카로운 음성의 주인 은 바로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음성에도 내력이 실려있어 단 번에 곤무악이 내뱉었던 음성의 기세를 거두어 버렸다. 하지만 그 잠깐 의 대화만으로도 이들 신비삼패가 곤무악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미 나타날 때의 기세가 단번에 꺽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곤무악과 중년문사는 암중에 음성에 힘을 실어 서로의 내력을 겨루었지 만 대전 안의 사람들에게는 그 말 속의 내용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독 문만으로도 모자라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신비삼패 모두의 출현이라니. 일찍이 혈천마궁과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겨루었던 신비의 세 집단이 아 니었던가? “크흐흐흐. 곤무악. 이제까지 흑철존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앞으로 철혈 존이라는 이름을 쓸 곤무악이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뭔 지 확인하는 게 아닐텐데? 여기는 흑련이 성립되는 장소이다. 흑련과 관 계없는 자가 나설 곳이 아니다.” 곤무악의 눈에서 다시 회색 광망이 번뜩였다. 그 눈빛을 보고 봉황곡의 중년미부와 중년 문사는 동시에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 은 어쩌면 오늘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이자의 기세가 이렇듯 놀랍다니. 마치 과거 본 곡을 짓밟았던 혈존과 비 슷하지 않은가?) (흑철존은 단순무식하고 그 무공도 외공에 힘만 앞세우는 자라더니 말짱 헛소문이 아닌가? 백치는커녕 대단한 효웅이 아닌가? 이제까지 진면목을 감추다가 오늘 드러낸 거란 말인가?) 중년미부는 당대의 봉황무후로 봉황곡주였다. 그리고 중년문사는 천검문 의 문주 천상검제였다. 흑방은 알다시피 봉황곡이 뒤를 돌봐줘서 세력을 키워온 봉황곡의 하부세력과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봉황무후는 그렇게 생 각했다. 그래서 봉황무후는 흑련의 성립을 기회로 신비삼패를 이끌고 와 정식으로 자신들의 무림에 출현을 천하에 알리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혈천마련을 막는 명분으로 흑련과 합세하여 자연스럽게 신비삼패의 이름 을 다시 천하에 날리러 왔다가 뜻밖에 곤무악이 대혈겁을 벌이는 광경을 보게되었다. 그들의 하부세력이라고 믿었던 흑방과 만독궁의 수뇌진들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자 노발대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통을 치 고 대전안으로 들어왔지만 오히려 곤무악의 눈빛에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 고 말았다. 하지만 신비삼패란 이름이 밝혀졌으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그대는 강호의 이름있는 무인으로 어이하여 하극상을 벌이는가? 그대 는 흑방의 수하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상전을 죽이고 흑련의 개파대전을 피로 물들인 자가 흑련의 련주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나?” 천검문주가 다시 냉정하게 곤무악에게 따졌다. 천상검제와 당대의 봉황무 후는 부부였다. 원래 친했던 신비삼패가 혈천마궁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하면서 한집안처럼 바뀌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둘이 부부가 된 것 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봉황곡의 일이 바로 천검문의 일이었 다. 사실 봉황곡에 살아남은 것이 당대의 봉황무후와 팔대호법, 팔대장로가 전부인 것처럼 천검문의 생존자도 천상검제와 같이 있는 십이검수가 전부 였다. 독문이라고 할수 있는 자는 그들과 같이 있는 두 노인밖에 없으니 그래도 봉황곡과 천검문은 조금 나은 편이라고 할까? 그것이 신비삼패가 하부세력을 늘려 세력을 회복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였다. 과거의 영광을 찾기위해 이들은 어떻게든 흑련을 흡수해야 했다. “크크크. 흑방은 흑도의 맹주를 자처하던 조직. 그리고 흑도는 강자가 바로 지존이 되는 조직이고 그 기반위에 세워지는 것이 바로 흑련. 곤무 악, 가장 강하다는 증거를 보여주자 저들도 그것을 인정했다. 이건 흑련 내부의 일이다. 신비삼패가 나설 일이 아니다.” “흥. 만독궁은 독문의 후예가 세운 문파이고 흑방은 봉황곡의 하부세력 이다. 그러니 남의 일이라 할 수 없다. 흑수마존과 독마를 해친 죄를 묻 겠다.” “크흐흐. 신비삼패도 흑련과 관련있다고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좋다. 내 정의는 여전히 강자존이다. 곤무악을 이겨라. 지면 곤무악 죽이든 살 리든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이기면 너희도 곤무악 밑이다.” (크흐흐. 이게 웬 행운인가? 본좌가 곤무악과 동화하는 바람에 더 이상 혈무영과 백마제를 이용하기가 힘들어져 흑련을 손에 넣으려 했거늘 신비 삼패가 걸려들다니. 피라미를 잡으려고 드리운 낚시에 월척이 걸려든 꼴 이 아닌가?) 스스로 흑혈존이라 자칭한 곤무악의 회색빛 광망이 봉황무후와 천상검제 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어나온 곤무악의 광망한 태도는 더 이상 이들 을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흑련의 련주의 힘을 보여주마. 곤무악, 너희들 모두를 상대하겠다. 한 꺼번에 덤벼라. 곤무악 지면 너희들 부하. 너희가 지면 곤무악이 너희들 상전이다. 덤벼라.” “으으. 오만한 자.” “감히 신비삼패를 어떻게 보고.” “고금제일마라는 혈존이라 할지라도 감히 홀로 신비삼패를 맞서겠다고 나서지 못하거늘...” 천상검제와 봉황무후, 그리고 독문쌍마는 체면때문이라도 더 이상 물러서 지 못하게 되었다. 마약 곤무악의 눈빛이 흑영신마를 죽였을 때처럼 혈광 을 발했다면 이들은 당장 혈존과 곤무악의 관계를 의심했을 것이다. 허 나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를 뜻하는 회색빛 눈빛의 정체는 이들도 알아차 리지 못했다. 단지 알게 모르게 불안이 스믈스믈 기어들어올 뿐이었다. (어쩌면 봉아와 홍일을 환우령으로 보낸 것은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구 나. 잘못하면 신비삼패의 이름에 먹칠을 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봉아와 홍일이 있는 이상 지금의 불안한 예감이 들어맞아 패배한다해도 언젠가 명예를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놓고 곤무악이 도전한 이상 승부에 지면 신비삼패는 흑련의 일부로, 그 의 수하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약속을 어기면 신비삼패의 얼굴을 다시 는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해도 봉황곡과 천검문의 진정한 절학 을 익힌 후손은 따로 있어 약간 안심이 되기는 했다. 천상검제가 말한 봉아는 환우오존의 후예로 자처하며 만상건곤심결을 익 힌 천상검제와 봉황무후의 딸, 무림 칠미의 하나인 봉황공주 남궁봉을 말 한다. 또한 홍일은 천검문을 흉내낸 천검회를 이끄는 장궁일준 남궁홍일 을 말한다. 천상검제야말로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비의 친동생 남궁우였 던 것이다. 얼마전 천무삼성의 이름으로 봉황곡에 서찰이 도착했다. 환우오존의 후예 들이 모두 모여 환우령을 열자는 내용이었다. 신비삼패의 부흥을 노리는 봉황곡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요청이다. 혹시라도 환우오존의 후예 비 무대회에서 우승이라도 한다면 신비삼패보다 몇배나 강할지도 모르는 환 우령이라는 세력을 그대로 거느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봉황무후와 천상검제는 딸을 환우령에 보내며 서찰을 보내 남궁홍일을 청 했다. 남궁홍일은 천상검제 남궁우의 조카이며 동시에 천검문의 비전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 그가 이끄는 천검회는 혈천마궁과의 전쟁에서 멸문한 천검문의 후예들이 모여 만든 집회이다. 백도무림에서 당당히 후 기지수중에 열손가락 안에 드는 남궁홍일이라면 사촌인 남궁봉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아 동행하게 했다. “언제까지 미적거릴 것인가? 입으로만 떠드는 겁쟁이라면 이대로 물러나 라.” 흑혈존 곤무악의 호통에 제일먼저 독문쌍마가 노호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 다. 그들의 몸에서 묵빛 독기가 넘실거렸다. 그것을 보고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봉황무후와 천상검제도 몸을 날렸다. 봉황곡의 무공은 백도십대극품절예의 하나인 만상건곤심결. 그리고 천상검제의 검 법은 천검문 비전의 알려지지 않은 검법이었다. 그러나 흑도의 천지마검 류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법. 바야흐로 흑혈존 곤무악의 포효가 천하를 향태 터트려지려는 순간이었다. 감숙, 천뇌교. 백도맹과 동맹을 맺고 이번에 혈천마련을 막아내어 그 성 세를 드높인 감숙의 무림 문파이다. 교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처럼 종교집 단으로서의 힘은 크지만 무림 세력으로서의 위세는 그리 크지 않다. 감숙 에서는 절대라는 말로 불릴만 하지만 백도맹이나 혈천마련에 비교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교주를 뵈오이다.” 천뇌교의 수많은 교도들이 연신 절을 했다. 그 모습은 상전을 대하는 것 이 아니라 신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해 있었다. 천뇌교 교도들의 심령을 제압하는 것, 그것은 대전의 상 석에 앉은 천뇌교의 교주였다. 존재 자체가 천뇌교 교도들의 복종심을 만 들어내고 있었다. 뇌혈존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껄걸. 감숙은 과거 송대에 서하를 건국했던 장소이다. 일국을 건국해 도 못하지 않은 장소이지. 일백만 신민이 충심으로 본좌를 따르고 있으 니 결코 좁지 않은 장소이다.” 귀혈존이 반역으로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을 하자 그의 뒤에 있는 적안 미부가 싸늘하게 말했다. “교주가 미친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미칠 줄은 몰랐어요. 감숙 의 관문에 서로군벌 수십만의 명군이 있다는 것을 잊었나요? 갑자기 웬 나라타령입니까? 게다가 평생 쌓아온 귀영신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뇌 혈존이라니요? 갑자기 혈존이라는 그 끔찍한 이름을 별호에 집어넣은 이 유가 뭔가요?” 귀혈존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적안미부밖에 없었다. 그녀 는 바로 귀혈존의 누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혈존이 그녀가 무례하게 구는 데도 살려두는 것은 핏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천뇌교의 사술을 이 용하여 혈향초를 재배하는 데 성공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혈향초의 대 량 재배는 혈존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전대 신녀를 죽이고 혈향초를 멸할 때는 언제고 다시 재배하겠다니. 도 대체 무슨 속셈이죠? 그리고 아무리 교주가 인초합일을 이루어 그 힘을 얻었다고 해도 이제 씨 하나 남지않은 혈향초를 다시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죠? 애초에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근본도 알수 없는 그 마초(魔草) 를?” 적안미부가 눈에 쌍심지를 키우며 말하자 뇌혈존이 쿡쿡 웃었다. 그는 손 에 소중이 들고있는 화분을 적안비부에게 건넸다. “그것을 봐라.” “뭐죠? 이 쓸모없는 붉은 잡초는... 설마? 혈향초?” “쿠쿠쿠. 애초에 그것을 만든 것은 일반 풀에 사공과 독을 섞어 만든 것.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마화타와... 쿡쿡. 이제는 본좌 귀 혈존이겠지.” “정말... 정말 이것을 오라버니가 다시 만든 것인가요? 제가 이십년을 들여 연구했어도 재배방법만 알아냇지,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실패한 이 품종을?” “과거의 것과는 다르다. 인초합일을 이룬 자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신 앙심을, 그리고 중독되어 일정시간에 혈향초를 복용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것은 같으나 그 폐해는 극단적으로 줄었다. 복용하는 양도 중독된 상태와 상관없이 일정하며 계속 복용할 수만 있다면 미치지도 않는다. 마 약치고는 최고의 품종이지. 크흐흐.” “하지만 혈향초라고 해도 절대적인 충성심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일반 백성들을 교도로 반역의 뜻을 말하다니. 혹시라도 관에 들어가기 전에 백 도맹의 귀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저들을 봐라. 저들의 몸에 숨은 힘을 봐라. 오늘 본좌가 개발한 새로운 품종의 혈향초를 달여 마신 자들의 힘이다.” 귀혈존은 적안미부에게 주위를 가리켰다. 천뇌교의 대전에 수없이 많은 자가 무릎을 끓고 마치 신을 배알하는 자세로 귀혈존에게 머리를 조아리 고 있다. 오늘 귀혈존을 배알하기 위해 모여든 자들도 무려 수천명이 넘 는 자였다. 하기야 감숙을 석권한 천뇌교의 세력은 수십만 교도를 넘었으 니 수천 쯤 모으는 것이야 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명이 넘 는 자들이 모두 두 눈에 혈광을 발하며 무서운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저들이? 어이하여 저런 눈빛을 발하는 것입니까? 천뇌교에 입교하여 입 문무공을 배운 자들뿐이거늘. 어떻게 저들이 마치 절정고수같은 기세를 내뿜는 것입니까?” 절정고수를 넘어서는 기세를 보이는 자들 수천명은 천뇌교의 최하급 제자 들이었다. 귀혈존이 만든 새로운 품종의 혈향초의 실험 대사이 된 자들 이 바로 대전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절정고수의 기도를 뿜어대고 있었다. 수천이 넘는 절정고수. 이것은 알려진 천뇌교의 절정고수 수와 너무나 차 이가 나는 숫자였다. 천뇌교가 종교로서는 감숙에서 힘이 크다고 하나 무 림세력으로서는 힘이 약해 백도와 연계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무림세력으 로서의 천뇌교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혈천마련을 막아 그 성세를 드높이 기는 했으나 아직 백도맹이나 혈천마련에 가려져 있는 이름이었거늘... “저들은 기껏해야 무공을 익힌지 몇 년 되지 않은 초심자들이다. 이른 바 삼류무사들이지. 그런데 이번에 새로 개발한 혈향초를 먹이니, 보라. 그 힘이 능히 절정고수를 능가하지 않는가?” “혈향초라고요? 이제 그 내막을 짐작하겠군요. 잠재진력(潛在眞力인)을 끌어쓰는 것이군요.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쓰는 것은 생명을 갉아먹는 것 과 같아요. 단 한번 쓰는 절정고수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크흐흐. 감숙의 백만 백성이 모두 본 교의 신도이다. 아직 과거 신녀교 도들은 본 천뇌교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좌가 인초합일을 이루 고 본교에 혈향초가 다시 만들어진 이상 더욱 그렇다. 일회용이라지만 얼 마든지 우리는 절정고수를 양산할 수 있다. 일백만의 절정고수가 한꺼번 에 밀고들어가면 누가 감당하겠는가? 백도맹? 변황무림? 혈천마련? 혈지 존? 크흐흐흐. 옥문관의 수십만 군대라고? 몇만의 교도로 몰살시킬 수가 있다. 결국 중원의 수억 생명이 모두 혈향초의 노예가 될 것이고 본좌 귀 혈존은 신이 되리라.” “......” 가능한 이야기였으므로 적안미부는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가능한 일이 었다.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지만 혈향초를 먹은 자들은 한순간 절정고수 를 능가하는 힘을 낸다면? 백만의 절정고수를 가진 집단을 막아낸다는 것 은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단지 혈향초를 복용함으로서 내공 이라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가 일백년 내공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단 지 천뇌교에서 혈향초를 먹이는 것만으로... “네 일이 중요하다.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는 있어도 재배는 너만이 가능하다. 적안미부. 네 힘으로 천뇌교 천하, 본좌 뇌혈존 천하가 이루어 질 것이다. 네 꿈대로 천뇌교의 세력이 천하를 뒤엎는 것이다.” 뇌혈존의 음성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마치 앞으로 그렇게 이루어 질 것 같은 힘. 예언자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는 것 같은 힘이 목소 리에 숨어있었다. “본좌는 더욱 더 좋은 혈향초의 품종을 개발할 것이다. 단숨에 절정고수 를 만들 수 있는 혈향초. 시체도 되살려 강시로 만드는 혈향초, 영혼을 얽매어 귀령부대로 만들 수 있는 혈향초. 흐흐흐. 천뇌교의 사술과 혈향 초의 힘이 합하면 그 무엇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르게 천하를 향한 독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감숙 천뇌교의 텃 밭에. 바로 귀혈존이라는 독초가 천하를 중독시키려고 뿌리를 내리고 있 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 백이충과 천외구기 관련자료:없음 [1983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19 18:33 조회:881 <백이충과 천외구기> 청마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곡령현이라는 마을이 있다. 북경 근 처의 이마을은 당금 천하에서 제일가는 바둑의 국수 현천선생(玄天先生) 이 살고 있는 곳이다. 유림의 대학자중의 하나인 그의 바둑 기예는 가히 신선이 울고 간다는 지경. 시와 바둑을 사사받기 위해 가끔 황제도 황궁 으로 초대한다는 인물이다. 덕과 학문이 깊어 존경받는 학자의 하나로 관직을 얻지는 않았지만 조정 파벌중 청류계의 인사들과 교분이 깊다. 특히 당금 유학자들 중에 세 손 가락 안에 든다는 거유 이정례 대인의 친형이기도 하다. 곡령현의 현천장 원은 이런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현천장원의 깊숙한 내실. 지금 여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현천선생 을 비롯한 다섯 노인과 한명의 청년. 백이충을 데려온 천기노인 일행이었 다. 노인들은 모두 현천선생과 함께 한 스승 밑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혈 육보다 더 가까운 사형제들이었다. 현천선생은 일찍이 유림에 몸을 담기 전에 무림에 천외구기의 하나 생사 활의의 문하에 몸을 둔 적이 있었는데 생사활의는 다섯 제자를 두니, 첫째가 생사활의의 무공을 이어받았으며 군부에 투신, 평생을 보내 지금 은 서로군벌의 총수 사자장군(獅子將軍)으로 더 잘 알려진 황부인 대장 군. 둘째가 생사활의에게 천기를 보는 법과 잡기를 배운 후에 무림을 떠돌며 하늘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예언하고 다니던 천기노인. 셋째가 천고제일이라 할 수 있는 생사활의의 암기술을 이어받았으며 천하 에는 시와 바둑으로 천하무쌍(天下無雙)이라 알려진 유학자 현천선생. 넷째가 생사활의가 남긴 살수조직, 생사문을 이어받았으며 생사문의 위장 인 북경제일화방(北京第一畵房)의 주인으로 알려져 그림으로 일화에 수천 냥을 뿌린다는 화옹(畵翁) 방이운 다섯째가 생사활의의 친아들로 오직 의술만을 이어받았으며 다섯 사형제 의 공동 제자인 장의비의 친할아버지 말의(末醫)장이거였다. 천기노인이 혈존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이 바로 황 대 장군과 현천선생이었다. 시체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되살아나는 광경도 믿 지 못할 일이었건만 천기노인의 이야기가 풀어지면서 그가 혈존이라는 이 야기가 나오자 기절할 듯한 심정이 되었다. 혈존이야기로 갑박을론을 벌이던 노인들은 천기노인의 이야기가 혈지존 에 이르자 사태가 역모에 이른 것을 알고 혈존의 이야기를 뒤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셋이야 관직과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황대장군은 서 로군벌을 책임지는 대장군이고 현천선생은 청류계의 대학자 이정례의 친 형이다. 혈존의 이야기도 놀랍지만 혈지존이 옥룡왕을 가장하여 반역을 꾸미고 있 다는 말에 황대장군이나 현천선생은 혈존에 대한 관심이 저만치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정례 대인은 옥룡왕의 농간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에 근신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황제폐하의 뜻을 모르겠다며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기 위해 이정례 대인이 현천장원 에 온 것이 며칠 전이었다. 현천선생이 제일먼저 동생을 부른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아니? 이 사람은 서문 장군부의 둘째 공자가 아닙니까? 이 공자가 혈존 이란 말입니까?" 현천선생의 이야기 처음을 듣고 이정례 대인이 침상위의 백이충을 보며 놀라 소리쳤다. 현천선생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백이충이 혈존이라 는 이야기의 서두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백 이충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상의 기대가 대단했던 청년이 아 니었던가? 전에 만나보니 더욱 인물됨이 발라 고개를 절로 끄덕였던 청년 이다. "진정하고 본장군의 둘째아우의 자초지종을 들어보게. 서문 늙은이와는 자네보다 본 장군이 더 인연이 깊지 않은가? 이 아이의 친형이 바로 내 부장(副將)일세. 둘째 아우의 말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면 이 늙은 몸이 먼저 난리를 쳤을 걸세." 황 대장군의 권위는 이정례 대인도 쉽게 거역하기 힘들었다. 부장 서문일 충에게 서로군벌을 맡기고 거의 은퇴하다시피 했다지만 그래도 군부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기둥이었다. 황 대장군의 권유에 따라 이정례 대인이 형의 말을 가만히 듣고보니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점차 이정례 대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반역에 관 한 엄청난 이야기였다. "아니, 그럼 옥룡왕이 혈지존이란 무림인의 변신이었단 말입니까? 사실이 라면 진짜 옥룡왕 전하께서 오래 전에 해를 입으셨다는 말씀. 게다가 혈 지존이라는 자가 황실을 뒤엎을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니요?" 이정례 대인이 흥분하여 난리를 치자 다시 황 대장군이 그를 타일렀다. "진정하게. 지금 흥분으로 일을 처리할 때가 아니네." "그리고보니 한달 전부터 저와 청류계의 관리들이 황명에 의해 자택에 연 금되었습니다. 그것이 황상의 명령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대장군. 당 장 이 역적들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위급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정례는 마음이 타 들어갈 듯 이 다급해졌다. 옥룡왕이 역심을 품고 있다면 그와 연관이 있다고 알려 진 학림파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면 지금 황제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구 원을 바라며 감금당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역모라는 생각이 들자 제일 먼저 이정례의 머리에 떠오르는 해결책은 지 금 침상 위에 누워있는 백이충의 할아버지 서문 대장군이었다. 하지만 지 금 그는 저 멀리 북방을 지키고 있다. 멀리 있는 물이 어찌 가까운 불을 끄랴? 다음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눈앞의 황 대장군이었다. 황 대장 군 역시 서문 대장군 못지않게 군에 대해 영향력이 높지 않은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네. 자네는 지금 자택에 갇혀있었기에 돌아가 는 사정을 모르네. 이미 황성은 사람의 통행이 금지될 정도로 살벌한 분 위기 속에 있네. 황제폐하를 노린 암살자가 들었다는 터무니 없는 명분 을 내세워 황궁을 비롯하여 황성의 모든 통제가 옥룡왕에게 이미 넘어갔 단 말일세. 사람들의 통행과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어 움직이기가 쉽 지 않네." "어이하여? 황성의 군졸과 장군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역적이 활개치도 록 내버려둔단 말입니까? 수많은 신료들이 무엇을 하고 있기에..." "그 신료들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학림파가 아닌가? 또한 황성의 군권은 오래전부터 가짜 옥룡왕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네.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은 황궁을 장악하고 있네. 게다가 사태가 이지경 이 되도록 비밀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어 지금 옥룡왕에 붙은 자들을 제외 하면 북경 근처의 고관들 중에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영 문을 아는 자는 없을 걸세. 일단 겉으로는 역모의 역자도 흘러나오지 않 은 상태니까."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청류계의 사람들을 모으겠습니 다. 황 대장군께서는 지방 군대를 설득해 주십시오. 당장 황성에 쳐들어 가 황상을 구해야 합니다." 이정례의 말에 황 대장군이 혀를 찼다. "명망높은 대학자가 어이하여 이렇듯 가벼이 구는가? 지금 폐하와 만조백 관들의 목숨이 옥룡왕의 손아귀에 있음이야. '설마' 라고 의심하지 말 게. 소문에 서문 대장군부의 식솔까지 옥룡왕의 수하들이 잡아갔다고 하 네. 선황의 유시로 폐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가문에까지 그들은 손을 댄 상태야.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황궁 에 커다란 비극이 일어날 걸세."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중해야 하네. 황제폐하가 옥룡왕의 수중에 있는 이상 대의명분은 저 쪽 마음대로 라고 할 수 있네. 자칫 잘못 군을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이쪽 이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지. 게다가 황제의 명도 없고 역모의 소문도 퍼지지 않았는데 이쪽에서 마음대로 역모를 핑계로 군을 움직이려 든다 면 누가 명에 따르겠는가?" 하나 하나 말을 듣고보니 과연 그러했다. 이정례 대인은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차츰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신이 나갔다가 이제야 냉정을 되찾은 것이다. "황제폐하와 태자, 황자 전하 분들의 안전부터 확보해야겠군요. 군을 움 직이거나 역도들을 성토할 신하들을 모으는 일은 그 다음이어야 하겠군 요." "이제야 이정례 대인답군." "하오나 동창과 금의위가 옥룡왕에 넘어갔다면... 어림친위군 또한 그쪽 수중에 넘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누가 있어 그들을 제치고 황제폐하와 황 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황실 최후의 힘인 호황부가 있지 않은가?" 황 대장군의 말에 이정례는 인상을 찌푸렸다. 호황부는 황실을 지키는 최 후의 힘. 비밀 중의 비밀로 전해지던 것이 현 황제 시절부터 어느 순간 허울뿐인 존재가 되었다. 황실의 종친들과 권세를 지닌 자는 그 존재를 다 아는데 무슨 비밀의 임무를 수행하는 황실 최후의 힘이란 말인가? 호 황부에 뽑힌 무관들이 명문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호황부주로 선 출된 현안군이 옥룡왕의 측근이며 학림파의 중요인물이라는 것은 모든 조 정 신료들이 아는 바였다. "호황부가 허수아비인 것은 황성의 모두가 아는 말 아닙니까?" "호황부가 허수아비? 이 늙은 몸은 그들이 무림의 어떤 강대한 조직이나 고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최강의 힘으로 알고 있네만." "그것도 옛말. 이제는 권력의 길을 가는 자가 출세를 위해 들어서는 곳으 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확실히 뛰어난 자들은 많이 있지만 호황부주인 현안군이 옥룡왕부의 측근이지 않습니까?" "허허. 자네가 아는 호황부와 본 장군이 아는 호황부는 다른 모양이군." "예?" "내가 아는 호황부는 송대시절부터 시작되었네. 역대 한족의 황조에게 충 성했듯 이 나라의 태조에게도 충성을 맹세했지. 하지만 황실의 통제를 받 는 조직은 아니네. 그 옛날 황궁무고에서 비롯된 조직이나 각기 조직원마 다 따로 대를 이어가는 조직. 따로 존재하고 따로 움직이다가 황족과 연 관된 호황부 수장의 호출이 있을 시에만 즉시 모여 황제의 명을 받드는 조직. 황실뿐만 아니라 무림조차 관여하는 강대한 조직이 호황부로 아네 만." "그... 그런. 하지만 호황부가 베가 아는 이외의 엄청난 힘을 숨겨 놓았 다고 해도 방금 말씀하신 수장, 호황부주는 결국 옥룡왕의 측근인 현안군 이 아닙니까? " "내가 알고있기로 호황부주는 오직 황제께서 군림하시는 동안 그분의 소 생 중에서만 선출될 수가 있네. 현재에 내가 알고있는 호황부주는 현안군 이 아닌 명옥공주로 알고있네. 그리고 호황부주는 대를 이어 하나의 이름 을 이어받지. 호황맹호라는..." 이정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름높은 학자이지만 무인과의 교류도 소 홀이 하지 않은 그는 무림의 일도 잘 알고 있었다. 현안군의 부인인 명옥 공주가 실질적인 진짜 호황부주라는 말도 놀랍지만 호황맹호라는 이름은 더욱 놀라웠다. 그 이름은 과거에 천년마교의 팔대천마와 싸웠던 이름이 다. 바로 천외구기의 하나였던 놀라운 이름인 것이다. "황 대장군께서는 어이하여 그토록 호황부에 대해 잘 아십니까?" "호황부는 모두 아홉명으로 구성되어 있지. 그 중에서 생사활의라는 이름 은 불민한 제자들 덕분에 수많은 세월동안 대를 잇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 이름을 찾았네. 자네 친형을 비롯해서 우리 다섯의 제자가 가지게 된 이름이 바로 생사활의이지." 이정례는 그제야 역모를 일으켰던 옥룡왕이 진짜 황실의 왕야가 아닌 혈 지존이라는 무림인임을 상기했다. 자신의 형이 학문 외에 무림의 또다른 사문을 가지고 있는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호황부에 연결되어 있었을 줄이 야. 생사활의라니. 그 이름 역시 천외구기의 하나가 아닌가? 동시에 자신의 형과 의형제를 맺었던 네명의 노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짐 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호황부의 진짜 정체도 알 수 있었다. 무림인이면 서도 그 근본이 황실무고에서 비롯되어 있기에 황실에 충성하는 조직. 바 로 천외구기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호황부임을. "듣기에 삼존의 하나인 현황방주가 천외구기의 후손이라 하던데 그 역시 호황부의 사람입니까?" "아니네. 호황대원은 절기와 함께 이름을 이어받지, 결코 절기만을 이어 받지 않네. 어지러웠던 과거의 무림시절 표향검군의 절기가 현황방에 넘 어간 모양이야.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기연 이겠지. 현황방주와는 상관없이 호황부에는 분명 표향단심공을 익리고 표 향검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따로 존재하네." "하오면 황 대장군께서 역모를 아셨다 함은 명옥공주께서도 벌써 아시고 호황부를 움직이고 계셨겠군요. 아무리 현안군이 옥룡왕부를 받든다고 해 도 명옥공주께서 황제폐하를 해하는 역모를 도울리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네. 말했듯이 천외구기는 따로 대를 이어가며 행동하네. 호 황부주의 요청이 없는 한 황실을 위해 움직일 의무가 없네. 말하자면 호 황부주의 요청이 없는한 호황부 대원이 아닌 무림인 천외구기일 뿐이지." "그렇다면 호황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명옥공주께서 아직 현안군 의 일이나 역모사태를 모르시고 계시는 거군요." "그렇지. 호황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네. 나 역시 호황부와 연관된 이름 이 아니라 황실의 은혜를 입은 대장군으로서 자네에게 이런 내막을 알려 주는 것이네. 하지만 명옥공주께서 사태를 아시면 진짜 호황부가 움직이 겠지. 황성을 탈환하거나 지금의 사태를 뒤집지는 못한다고 해도 폐하와 황족의 안전을 보장할 힘은 생길 것이네." 여기서 황 대장군은 이정례에게 의미심상한 미소를 지었다. "이 늙은 몸이야 평생을 전쟁터에 굴러먹어 군부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 지만... 자네는 정치 실세의 하나였던 청류계의 수장이 아닌가? 황성이 나 황궁에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슬쩍 집어넣을 정도의 인맥은 가지고 있 겠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명옥공주와의 연락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의 안전만 확인되고 황명만 받을 수 있다면 제가 대신들을 설득하고 각 군대에 공문을 돌려 옥룡왕을 토벌할 수 있습니다. 서문 대장군께서 오시 기만 해도 저들 역도를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이정례가 물러간 뒤에 천기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첫째 형님. 처음에 그는 그토록 백이충 공자를 걱정하더니 황실의 문제 를 듣자마자 까마득히 잊어버리는군요. 지금 중요한 것은 황실의 일이 아 니라 백이충 공자의 일이거늘." "사형. 제 동생의 입장에서는 황실의 일이 바로 천하의 일이니 이해해 주 십시오. 열가지 파천성의 기운이 떳다고 하나 우리외에 그 누가 그일을 알겠습니까? 또한 천하를 위태롭게 만들 일 중에서 황실의 일도 그 하나 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천선생의 말에 천기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하면 백이충 공자의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은가? 파천성의 일을 막을 힘은 오직 천황성밖에 없네. 황실의 일, 즉 옥룡왕 혈지존의 일도 나뉘어진 파천성의 기운과 관련이 있다면 막을 힘을 가진 자는 백이충 공자밖에 없네. 일단 천기가 나타내는 바로서는 분명 그렇 네." "하지만 그가 혈존의 영혼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진짜 백이 충 공자가 맞을까요?" 의심스럽다는 현천선생의 말에 다섯째 말의 장의거가 대신 대답했다. 그 는 부친의 재주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고 해서 의원 가운데 가장 부끄 러운 말석에나마 이름을 겨우 올릴 처지라고 자책하여 스스로 별호도 말 의라고 지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재 그의 의술은 마화타에 약간 모자 랄 정도였다. "그것은 확실할 것입니다. 그는 살아났기는 했지만 아직 영혼과 몸이 완 전히 깨어난 것은 아닙니다. 즉 그의 마음과 정신은 심층 깊숙이 잠들어 있다고 봐야죠. 아버님께 배운 정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잠재의식, 꿈속 을 건드려 알아낸 사실이니 그의 말은 진실입니다." "혈존의 영혼이 박살났기에 대신 백이충의 영혼에 잠들어있던 영혼이 되 살아났다. 그가 진짜 막내 사제의 의술에 말려들어 심층의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사실이겠지만..." 현천선생은 지금의 사태가 마음에 한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혈존의 영혼이 어떤 존재입니까? 이미 인간은 추측 불가능한 괴물입니 다. 그대로 육체에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막내를 속이는 것은 쉬울 것입 니다. 저는 산산조각난 혈존의 영혼이 백이충의 육체를 다시 부활시켰다 는 가능성도 불가능하에 가깝다고 보지만 그것만큼이나 마찬가지로 혈마 전혼대법에 때문에 자신의 육체에서 쫓겨났던 영혼이 이십년 뒤에 다시 육체를 되찾았다는 말도 터무니 없게 들립니다." "셋째의 우려는 알겠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는 진실이지. 혈존이 조각 난 영혼의 일부로도 육체를 부활시킨 것이거나 육체가 꿈속에서 말한 것 처럼 혈존의 영혼이 파괴되었기에 잠들어있던 백이충 본래의 영혼이 육체 를 깨운 것이거나." "혈존의 조각난 영혼이 백이충에게 들어가 되살린 것이 아니라면 혈존의 다른 영혼조각들도 다른 인간의 육체에 깃들지 못하겠죠. 둘째 사형이 본 천기, 즉 열 개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운명의 별을 물들인 파천성이 표현하는 천기를 부정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반면 백이충의 육체에 깃 든 본래 영혼이 깨어난 것이 아니라면 천황성이 나타내는 천기를 부정하 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막내가 알아낸 무의식의 발언이 맞을 가능성은 이래저래 반반이라고 봅니다." "절대 백이충 공자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도 꿈속에서 는, 무의식 속에서는 솔직해집니다. 의식적으로 거짓 꾸밀 수 있는 세계 가 아니기 때문이죠. 제 의술을 걸고 말하면 무의식적으로 심층 속의 진 실을 말한 것은 절대 진실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막내. 우리 모두 그러기를 절실히 바라네. 백이충 공자가 혈존의 영혼 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진짜 백이충 공자이기를. 그리고 그 존재가 진짜 천황성이기를. 하지만 혈존이 너무 위험한 만큼 확인하지 않을 수 가 없네. 다행히 오행신인(五行神人)과 옥령선자(玉玲仙子)가 도와준다 고 했으니 영혼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네." 옥령선자, 그리고 오행신인. 둘 역시 천외구기에 들어가는 이름이며 과 거 천마에게 목숨을 잃었던 이름이다. 따라서 천외구기의 후손으로 그 이 름을 이어받은 자들의 이름임을 알수 있다. "곧 백이충 공자는 의식을 찾게 되네. 막내의 의술로 계속 잠 속에 빠트 려 놓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하지만 옥령선자의 옥령선음(玉玲仙音)과 오 행신인의 오행미몽진법(五行迷夢陣法)이라면 그를 환상 속에 빠트릴 수 있을 테지. 우리가 그 영혼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어도 영혼의 선과 악 은 옥령선음과 오행미몽진법으로 알아볼 수가 있네. 혈존의 영혼이라면 극악(極惡)일테고 백이충 공자의 영혼이 맞다면 적어도 중도(中度)의 성 품은 되겠지." "인간의 선악은 모호하여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선과 악에는 각기 주관적 개념과 객관적 개념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허 나 누가 보아도 타당하여 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다섯 있으 니 그 첫 번째는 바로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백이충은 모호한 기분으로 사막을 걷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이고 자신이 왜 사막에서 걷고있는지 의식할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백이충이라 는 자신의 이름하나 밖에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자아에 대한 확 인만으로도 바빴다. 한걸음 한걸음이 자신을 인정하고 기억을 향해 걷는 것이 스스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가다듬는 걸음이었다. 몽롱하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평안했다.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 퍼져 그를 도와주었다. 그 소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곱고 맑으며 활력을 전해주는 방울소리는 사 막 너머에 자신이 가야할 길이 있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통과 해야 한다고 머리 속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이 사막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이 사막이 이어졌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낮에는 지독히 더웠고 밤에는 지독히 추웠다. 땀이 비 오듯 흘렀으며 갈증은 끊임없이 목을 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 는 것은 단 한통의 물뿐이었다. 꾸준하게 그리고 쉬지않고 백이충은 걸었다. 무공이라든가 경공이라든가 하는 것은 머릿속에 없었다. 꿈속을 헤메고 있는 것처럼 그저 가야 하기 에 힘들면서도 사막을 걸었다. 유일하게 그를 이끄는 한줄기 인도자는 머 릿속을 울리는 맑은 방울소리밖에 없었다. 닷 새가 넘어가며 온몸의 진이 다 빠졌을 무렵, 더 이상 땀을 흘리지 않 았다. 물을 마시지 않으니 흘릴 땀도 없는 것이다. 수통안의 물은 단 한 모금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 물은 최후에 기력이 다했을 때 마시기 위 해 백이충이 아껴두었다. 이틀을 참고 드디어 갈증에 못이겨 마지막 한모금의 물을 마셔야할지 아 닐지 갈등할 때였다. 아직도 이 사막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저멀리 사막의 독수리들이 보였다. 혹시 오아시스라도 아닐까 하고 가 본 곳에 있는 것은 죽어있는 낙타 한 마리였다. 오래 전에 죽었는지 살점이 사막 독수리에게 다 파헤쳐져 있었다. 낙타 시체 주위에 혹시 쓸만한 것이 없나 뒤지던 백이충은 낙타의 시체 밑에 깔린 어린 아이 한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막에 구덩이를 파고 아 이를 숨긴뒤에 낙타 시체를 구멍 위에 두었다. 쓸만한 것 하나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막의 도적에게라도 습격당한 듯 했다. 아이는 살아있고 죽기 직전이었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입술이 새까맣 게 타 있었다. 단 한방울의 물이 절실하게 필요한 모습이었다. 백이충은 잠깐 망설였다. 분명 한모금의 물이 필요한 것은 자신보다 죽 기 직전인 이 아이였다. 하지만 약간 버틸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다고는 해도 백이충 역시 갈증의 극에 이를 정도로 심한 상태였고 자신이 이틀이 나 갈증을 참고 남겨둔 물이었다. 무엇보다 이 한모금의 물이 생명수의 역할을 해서 자신을 사막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버티게 할 수도 있고 혹 은 내일 당장 이 어린 아이와 같은 처지로 만들 수도 있었다. 자신이 풍족할 때 남에게 필요한 것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측 은지심보다는 자신의 과시욕을 위해 도와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가 진 단 하나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것일 때 그것 을 자신보다 더욱 절실히 필요하고 자신보다 더욱 약한 자에게 넘기기는 힘들다. 약한자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은 이렇듯 여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백이충은 서슴없이 아이에게 한모금의 물을 주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 의 방울 소리가 아주 맑고 경쾌한 소리로 바뀌었다. 절로 백이충의 몸에 활력이 돌았고 갈증도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그의 마음도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이에게 베풀었다는 자부심에 아주 즐거웠다. 간신히 한 모금의 물로 입술을 축인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아이 는 정신을 차렸고 오아시스가 있는 곳을 백이충에게 알려주었다. 백이충 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를 업고 이틀을 더 걸었으며 오아시스에 도착하 여 아이와 자신을 함께 살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방울소리는 여전히 맑 고 경쾌했으며 그의 마음속의 무엇인가를 바꿔 놓았다. "인간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자비지심(慈悲之心) 때문이다. 이는 약한자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는 또 틀리다.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 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남을 사랑 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첫걸음이다." 오아시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백이충은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사막의 큰 부족의 족장 아들이었다. 도적의 습격을 받아 부족민의 도움으 로 간신히 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아이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지리에 대 해 잘 알고 있었기에 백이충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백이충이 아이를 부족에게 데려다주자 사막의 부족은 그에게 몹시 고마워 했다. 부족장은 백이충에게 세 마리의 낙타와 그 등위에 먹을 것과 돈을 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막을 벗어나는 지도까지 주었다. 백이충에게 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낙타를 데리고 드디어 사막을 빠져나갈 때 쯤이었다. 사막과 초원의 경계 가 되는 곳에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백이충의 머 리 속에서 들리는 경쾌한 방울소리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지난 일년간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은 생기가 없었다. 여 기저기 쓰러져있거나 맥없이 누워있는 사람 천지였다. 백이충이 세 마리 의 낙타를 이끌고 들어오자 적선을 바라고 마을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었다. 이미 측은지심을 느낀 백이충은 아무말 없이 낙타와 식량을 마 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의 굶주림을 면할수 있게 되기를 기원 하면서. 백이충은 족장에게 받은 돈이 남아 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어디 로 가야하는지, 왜 사막을 지나 초원으로 왔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는 끊임없이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고 또한 머릿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를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다보니 목이 말랐다. 여기는 사막이 아니므로 물을 구하기는 쉬웠다. 지나가고 있는 바로 옆집 마당에 마침 우물이 보였으므로 담장 너머로 물 한모금을 얻어 마시려 소리쳤다. 집 안에서 대답이 없었으므로 백이충은 다른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했 다. 집 안에서 들리는 작은 신음소리가 없었으면 그러했을 것이다. 신음 소리에 백이충은 서슴없이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중년 남자였는데 이 집의 주인인 듯 했다. 신음소리를 흘린 것도 쓰러진 중년 남자였다. 백이충이 살펴보니 머리에 열이 높고 야윈 것이 무슨 병을 앓고있는 것 같았다. 남자를 부축 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 두 개 있었는데 한 방에는 중년부인이 침 상위의 두 형제를 바라보는 자세로 상체를 눕히고 있었다. 백이충이 살펴 보니 침상위의 두 소년도, 침상 옆에 앉아있다가 쓰러진 중년부인도 모 두 혼절해 있는 모습이었다. 백이충이 들어오자 기척에 정신을 차렸는지 중년부인은 살짝 눈을 떴는 데 아무런 표정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력이 빠져 움직 일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바닥에 중년 남자를 눕혀놓고 침상위의 두 소년 을 살펴보았다. 뼈와 가죽만 남은 것이 휑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백이충 의 손길이 닿자 살짝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실망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 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이충이 방안을 나서 옆방으로 들어가보니 침상위에 한 노인이 누워있었 다. 역시 기력이 빠져 누워있었는데 집안 식구들 중에 그나마 가장 기운 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백이충을 보고 바로 물었다. "자네는 왜 여기에 왔나?" "소생은 물한모금 마시러 왔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백이충이 보니 집안 식구 일가족이 모두 굶어죽기 일보직전의 상태같았 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백이충은 가뭄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살기 힘들 다는 것은 짐작했다. 그러나 사막이나 산속도 아니고 마을 안에 있는 한 집안의 식구 일가족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인데도 다른 마을 사람들 이 내버려두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우물은 마당에 있으니 마음대로 마시게. 이 집안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 으니 훔쳐갈 것도 없네.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어차피 우리 가족은 모두 죽을테니 마음대로 가져가게." 가져갈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두 방 모두 침상과 죽어가는 가족 외에 그 흔한 가구하나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수 있습니까?" "사연은 무슨 사연? 가뭄에다가 이 늙은이가 병이 들어 이렇게 된 것일 뿐이네." 노인 가족은 일년 전까지는 양 다섯 마리를 기르며 그런대로 먹고사는데 지장없이 지내던 가족이었다. 그런데 일년전부터 지독한 가뭄이 들어 양 을 먹일 풀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내다보니 양을 하나 하나 팔 아 결국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마을 사람이 모두 겪는 어 려운 상황으로 당장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노인이 병이 든 것은 그때였다. 노인의 아들부부는 아주 효자였기 때문 에 노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달 두달이 넘어가자 병을 치료하는데 많은 돈이 들었다. 노인의 약값으로 한 마리 남은 양을 팔았을 뿐더러 약값을 벌기위해 남의 양을 돌봐주거나 하인 일 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만 빛이 쌓여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노인을 병간호하던 며느리가 쓰러졌다. 노인과 같은 병이었다. 전염병이 라는 말이 나돌자 그동안 노인 가족을 도와주던 마을 사람들이 일절 얼씬 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 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노인 뿐만 아니라 아내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두 아이도 집안의 우환과 굶주림 때문에 어 리광을 부릴 틈도 없었다. 부인은 열이 펄펄 끓는데도 집안일을 하겠다 며 무리하게 움직였다. 병마는 마침내 노인의 아들인 중년 남자에게까지 찾아왔다. 그동안 무리 하게 고생한 흔적과 병마가 합쳐져 아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하루하루 벌 어 목에 풀칠하던 집안에 일가족 식구가 다 병에 걸려 쓰러지니 앉아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두 소년을 시켜 집 안에 있던 물건을 하나하나 팔아 연명을 했다. 그나마 집안의 물건이 하 나도 남지않자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두 소년은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전염병이 도는 집 아이라 하여 마을에 서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일자리를 주거나 돈을 주기는커녕 중년부부마 저 병이 나자 빛을 준 마을사람들이 돈을 받을 길이 없다하여 집안을 마 음대로 뒤져 돈이될 만한 모든 물건을 빼앗아갔다. 그 이후 병이 옮을까 봐 얼씬거리지 않았다. 병을 앓고있는 노인과 중년 부부는 온 몸이 무기력하고 열이 높아 가끔 혼절하다가 깨어나는 상황을 반복했다. 병도 낫지않고 밖에 나갈 수가 없 게되자 결국 일가족이 모두 집에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인 의 아들이 병자인 몸으로 밖에 일을 얻으려 나가다가 문밖을 나서지 못하 고 혼절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노인 집안의 딱한 사정을 듣다보니 백이충은 문득 자신에게도 이 노인과 같은 할아버지가 있었음이 생각났다. 노인뿐이 아니었다. 중년부부를 보 니 자신에게 부모가 있음이 생각났고 두 형제를 보니 자신을 아껴주던 형 이 생각났다. 백이충은 마당의 우물에서 물을 퍼서 목을 축이고는 집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목적이 있어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아를 찾는 와중에 머릿속의 방울소리가 자아를 찾으려면 자신의 지시 를 따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자아를 찾 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급한 일은 아니다. 하물며 여기에서 자신의 가 족도 기억나지 않았던가? 여기에 좀 더 머물러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백이충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대장간에서 큰 솥을, 곡물상에서 곡식자루 를 두 포대 샀다. 주점에서 그릇도 좀 샀다. 가뭄으로 돈이 있어도 식량 을 사기 힘든 형편이었지만 마을사람들은 백이충이 낙타와 식량을 나누어 주었던 것을 기억하여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시 그 집으로 돌아 온 백이충은 아무것도 없지만 과거 집의 부엌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죽을 쒔다. 일일이 그 집의 가족들을 하나하나 안아 입에 죽을 숟가락으로 넣어주었 다. 그제야 가족 모두가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노인은 아무말 없이 죽을 받아먹었지만 먹고나서는 눈물을 흘렸다. 한 이틀이 지나자 두 소년이 제일먼저 기력을 되찾고 움직였다. 배를 채 운 두 소년은 백이충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심부름을 하고 재치있게 움직 여 그를 도우려했다. 백이충이나 집안 식구나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 지만 백이충이 집에 있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두 소년과 달리 병이 낫지않은 노인과 중년부부는 쉽게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제일먼저 쓰러진 노인조차 두 달을 누워 있 었다하니 쉽게 낫지 않은 병인 듯 싶었다. 백이충은 가지고 있던 모든 돈 을 탙탈 털어 다시 다섯 마리의 양을 샀다. 백이충이 두 소년의 도움을 받아 직접 양을 길렀다. 양을 기르자 이제 굶어죽을 염려는 없게 되었다. 한달이 흐르자 제일먼저 노인이 병상에서 일어났다. 노인이 양을 키우는 것을 맡자 백이충은 근처 산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다 집안의 사라진 가구 를 하나하나 만들었다. 백이충에게 제법 손재주가 있어 집안에 가구를 들 이는 것 외에 마을에 내다 파니 제법 돈도 되었다. 석달이 되자 양이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큰 경사였다. 백이충은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양뿐만 아니라 소와 염소도 샀다. 돌밭도 조금 샀다. 노인이 가축을 돌보는 동안 돌밭에서 열심히 일하니 제법 밭다워졌다. 노 인의 아들도 그제야 몸을 추스릴 정도가 되었다. 중년남자는 아무말도 하 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백이충을 가족으로 여기는 눈빛이었다. 백이충도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게 되었다. 중년부인마저 병에서 회복되었다. 아무래도 그리 큰 병도 아닌 것이 못 먹고 못 쉬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이충은 가족을 향해 이 제 떠나겠다고 말했다. 노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지긋이 응시했다. 두 소년은 울고불며 백 이충을 향해 떠나지 말라고 떼를 썼다. 중년부인은 그날 있는솜씨 없는 솜씨를 모두 부려 석별의 음식을 마련했으며 중년 남자는 아무말 없이 백 이충을 향해 일곱 번 절을 했다. 중년남자를 일으키며 백이충은 문득 자비지심을 깨달았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이집 가족의 존재는 백이충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았 다. 그러나 자비지심을 베풀었을 때 이집 가족은 백이충에게 하나의 존재 로 다가왔으며 그들에게 베푸는 와중에 백이충은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 다.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은 쉽다. 허나 진정한 자비지심은 물질이 아닌 마음 으로 베푸는 것이며 그것은 상대를 자신에게 의미있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베푸는 진정한 자비지심을 느낄 때는 그 감정이 상대에 대한 자비심, 그리고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백이충의 머릿속에 울리던 밝고 경쾌하던 방울소리가 환하고 즐거운 박자 를 가진 음악소리로 바뀌었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울리는 방울소리는 더 이상 단순한 방울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옥이 울리는 듯한 즉거운 옥음이었다. 백이충은 마음에서 따듯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제는 어디를 가건, 어떤 상황에 빠지든 외롭거나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 에 자비지심이 있는 한은 늘 머릿속의 방울이 즐거운 음악을 연주할 것이 기에. 백이충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그 마을을 떠날 수가 있었다. "인간이 측은지심과 자비지심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착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선과 악을 기준으로 하면 주동적으로 선을 행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뜻을 세워 남을 돕는 마음. 이것이 바로 협의지심 (俠義之心)이다. 협의지심을 가져야 비로소 선하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 다." 오행신인과 옥령선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백이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이 충은 한 침상위에 누워있는데 그 주위로 푸른 깃발 칠십이개와 붉은 깃 발 삼십육개가 꽃혀 있었다. 오행신인의 오행미몽진법이 펼쳐진 것이다. 시전자가 원하는 환상을 줄수 있는 오행미몽진법. 지금 이 진법은 깨어나 지 못하고 있는 백이충의 심층에 환상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오행신인의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이십대 초반인 것 같기도 하고 삼십대의 농염함을 갖고있는 것같기도 한 나이를 알수 없는 여인. 그녀의 손목에는 옥으로된 방울이 달려있어 움직일때마다 아름다 운 방울소리가 났다. 바로 옥령선자였다. "이토록 빨리 측은지심과 자비지심의 관문을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 말 소매는 믿을 수가 없군요." "이미 이 아이는 혈존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혈존이라면 힘으로 진법과 옥령선음을 깨트릴 수 있을지 몰라도 두 관문을 돌파할 수는 없다. 이 아 이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선량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옥령선음과 오행미몽을 거둘수는 없는 노릇 이에요." "물론이지. 어쩌면 사부님이 말씀하신 그 경지를 이룰 인재를 보는 것일 지도... 사문의 숙원이 풀릴지도 모를 일이다." 옥령선자와 오행신인. 천외구기의 두 이름을 잇는 이들이 사실은 하나의 비급으로부터 그 무공의 연원이 시작되어 있음을 누가 알고 있으랴. 구백 년전 득도하여 선인이 되었다는 광한선인(廣寒仙人)이 남긴 광한비급. 상 하권으로 되어있는 광한비급이 황실무고로 흘러들어 호황부에 인연이 닿 았으니... 광한선인이 이룩했다는 경지를 설명한 광한비급의 하권을 익힌 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나마 상권조차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눠 익혀 각기 오행신인 과 옥령선자의 이름을 이어나가게 했다. 오행신인의 절기는 진법이라 하 여 그 이름이 무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옥령선자의 옥령선음 이야말 로 백도십대극품절학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옥령선음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감정을 조정하며 마음을 죽 이고 살릴 수 있는 가공할 음공. 무림사 이래 옥령선음보다 더한 음공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절세의 음공이다. 옥령선음의 절기는 모두 칠십이개의 악보로 되어있고 그 중에서도 최고 로 꼽는 것이 오행신인과 합작으로 시전하는 오행옥령심음(五行玉玲心音) 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시전자의 뜻대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천상의 절 기인데... "광한비급의 하권을 익힐 수 있는 재질을 가진 자는 인간중에 아무도 없 다. 아마도 이미 도를 터득하여 선인지경이 이른 분만이 그 뜻을 알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혹여... 혹여라도 오행옥령심음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 을 통해 스스로 뜻을 터득하는 자라면... 광한비급의 하권의 내용을 알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행옥령심은은 자체로도 최고의 절학이지만 또한 하권 을 터득하기위한 기본을 딱는 수련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행신인과 옥령선자의 조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행옥령심음을 이겨 낸 자만이 광한비급 하권의 주인이 된다고. 그리고 오행옥령심음은 절기 인 동시에 하권을 익힐 기본을 딱게해주는 관문이라고. 오행신인과 옥령선자는 생사활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이충을 시험했다. 그 영혼의 선악을 판별하기 위해서 오행옥령심음보다 더 적당한 것은 없 다. 하지만 그들의 뜻과 달리 백이충은 오행옥령심음에 휘둘려 영혼의 선 악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행옥령심음을 이겨내고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으니... "광한선인의 후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 광한문의 숙원이 풀리 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광한선인의 후인은 나오 지 못할 것이다." 오행옥령심음은 아주 위험한 수법이다. 영혼의 선악을 가려 혈존인지, 아 니면 백이충인지 확인만 하면 도중에 그만두도록 되어있었다. 끝까지 버 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무공이기 때문이다. 백도십대극품절예 인 옥령선음에 그에 못지않은 오행미몽이 섞여있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 만 둘은 여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오행신인과 옥령선자의 눈빛은 오행 옥령심음을 끝까지 강행할 굳은 결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백혈존, 요혈존 관련자료:없음 [19863]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20 21:36 조회:874 <백혈존과 요혈존의 백도 나눠먹기> "도대체 요즘 백도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비가 분통을 터트렸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 면 오대세가는 완전히 백도맹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 심스러울 정도였다. "너무 그러지 말게. 오대세가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구파일 방도 불만이 대단하지만 전에 무상에게 지은 죄가 있어 함부로 말하지 못할 뿐이네." 광천도장이 종리비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도 씁쓸해 하기는 마찬가지였 다. 모용풍이 백도맹에 복귀한지도 한달이 넘었다. 그를 따라 복귀했던 오대 세가의 젊은 고수들 연풍회도 직후 바로 해산되었다. 모용풍이 살아 돌 아온데다 오해가 풀린이상 더 이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갈등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구파일방의 피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백도끼리 분열 을 일으킬 때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오대세가에서 백도맹의 주류를 자처할 줄 알았는데.) 천무삼성이 은거한 이후 백도맹을 실제로 움직이는 최고 수뇌자들은 무 성 종리연과 남북 4단의 단주들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반씩 권 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모용풍이 무상으로 등장하며 오대세가 가 백도맹의 주류가 될 것으로 모두 예상했다. 모용풍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구파쪽도 오대세가 쪽도 아닌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권력과 지위는 사부인 종리연을 능가했다. 모 용풍은 이제 세력을 가리지 않고 백도맹 젊은 무사들의 우상이었다. 백 도맹의 무사들은 혈천마련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힌 수뇌진보다 이 번에 새로 무상으로 등극한 모용풍을 더욱 따르고 존경했다. 형식상으로 는 백도맹의 이인자인 무상의 자리이지만 그 권위와 힘은 모용풍이 종리 연을 능가했다. 종리연과 모용풍은 부러움을 살만큼 사이좋은 사제지간이고 둘다 오대세 가 출신이었기에 모용풍의 권위가 커짐으로서 백오맹 내에 분란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를 하는 자는 없었다. 종리연도 백도맹 내에서 모용풍의 신망을 알기에 전폭적으로 그를 밀어주었다. 심지어는 맹내의 모든 대사 를 모용풍에게 맡기고 모습을 감출 정도로. "뭔가 이상합니다. 사부께서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종리비의 말에 광천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무상이 말하지 않았나? 맹주는 승룡곡으로 떠났다고. 지금 천무삼성 어 르신들의 명령으로 마도에 대항할 마지막 세력을 만들고 있다고." "사형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맹주께서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 이후 사형의 행동은 너무 지나칩니다. 여러 어르신들의 우려와 걱정이 대단합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무상의 패기를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네. 앞으로 마련과의 싸움에서 무상이 주축이 되어야하는 만큼 무상 개인의 세력을 키우는 것은 조직의 유용성을 위한 조치로 봐도 되지 않 겠는가?" 한달동안 백도맹 사대단이 폐쇄되고 하나로 통합되었다. 백도맹 후기지 수들의 모임인 이 세력은 무적일황 모용풍의 친위대로 변해버렸다. 백도 맹의 가장 주목받던 힘이 일개인의 개인친위세력으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사부가 없는 틈을 타서 남북 4단의 단주를 함부로 바꾸다니요." "그 4단의 단주 중에는 무상의 부친도 있네. 결코 그 개인을 위한 일은 아닐 것일세." 모용풍을 두둔하고 있기는 하지만 광천도장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천무삼성은 은거하기 전에 무성과 그들에게 백도맹을 부탁했거늘 모용풍 이 마음대로 사숙뻘인 그들을 자리에서 쫓아낸 것이다. 맹주가 없는 이 상 백도맹의 전권은 무상에게 있는지라 비록 개인적인 신분은 사숙과 부 친이지만 그들은 한마디 불평도 모용풍에게 할 수가 없었다. "허나 많은 백도의 명숙들을 놔두고 많은 험담이 나돌고 있는 자들만을 골라 그 자리에 앉힌 것이 이상합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무상을 믿게. 무적일황을 못믿으면 누구를 믿겠나?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무상을 믿지 않았다면 맹주가 그에게 자리를 맡기고 승 룡곡으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일세." 광천도장도 종리비만큼이나 모용풍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종리비처럼 대놓고 불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안그래도 마련에 비해 약하다고 평 가받는 백도맹인데 수뇌진끼리 분열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록 백도맹의 단주와 분단주 자리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명숙들이 아닌 이름도 없는 자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더라도 분열만은 안되었다. "사형은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새는 백리소저를 제외하고 저희들마저 피하고 있는 실정이니... 백도맹 전체가 명숙들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형을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로 채워지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어이하여 영명하던 사형이 아부꾼들만을 주위에 두시는 지. 크윽." 끝내 분통을 터트리고 종리비가 돌아갔다. 광천도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 다. 백도맹에서 있는 것도 며칠 안남았다. 남부 본단주 자리에서 쫓겨났 으니 이제 무당에서 편히 몸을 쉴 때가 온 듯 싶었다. 광천도장은 자신 을 위로하러 왔던 종리비가 오히려 자신에게 위로받고 떠난 사실이 약 간 씁쓸했다. "둘째 사형이 봉황공주를 호위하여 환우령으로 떠났지? 그리고 대사형 도 환우령을 백도맹에 편입하기 위해 곧 움직일 예정이고." 종리비는 백도맹 자신의 거처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종리비는 종 리세가의 가주이다. 백도맹의 근본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이기에 그의 지위는 백도맹 원로급에 해당한다. 신분으로만 따지자면 그의 사부인 맹 주조차 무시하지 못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달 전의 이야기. 지 금의 백도맹은 철저히 구파와 오대세가를 무시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들일까? 사형은 돌아가신 현무도선께서 비밀리 에 안배하신 세력이라 하지만 그들은 백도 고수라기 보다는 철저히 사 형 개인을 따른 자들이다. 광천도장이나 불학대사도 모르는 자들이 백도 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부는 사형의 저런 행동을 알고 계시 는 것일까?" 무적일황 모용풍은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평소 종리비는 모용풍을 위해 서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종리세 가의 가주임에도 연풍회에 거침없이 가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사형에 대한 믿음이 단 한달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승룡곡의 일도 그렇다. 승룡곡 내부의 일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책임자들에게 모두 공개되도록 되어있거늘. 사부가 승룡곡에 들어갔다 고 사형이 알린 이후 일절 모든 정보가 차단되었다." 아무리봐도 뭔가가 잘못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시일을 두 고 천천히 진행되었다면 종리비의 모용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 으리라. 하지만 불과 한달 사이에 백도맹 조직 전반에 대한 대 수술이 감행되었기에, 백도맹이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이 너무나 뻔히 눈에 보였 기에 종리비조차 모용풍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는 무조건 믿었지만 이번 인사조치 만은 참을 수 없다. 맹주 지위만큼이나 중요한 남북 4단의 책임자 자리 를 무상에 올랐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아치우다니. 이건 월권행위이다. 사형에게 직접 따져야 한다." 끝내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한 종리비는 모용풍을 찾아 직접 따지기로 했다. 종리연이 사라진 지금 백도맹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모용 풍을 향해 따지러갈 마음을 먹게된 것은 그만큼 사형제지간의 정을 믿었 기 때문이다. 종리비는 무상각을 향했다. 무상각은 백도맹의 이인자인 모용풍의 거처 로 오히려 맹주의 거처보다 더 컸다. 종리연이 제자를 위로하는 뜻에서 천무삼성이 백도맹에 머무를 때 기거하는 태상전을 무상각으로 개조했 기 때문이다. 백도맹이 약간 이상하게 변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종리비의 발걸음을 막을 장소는 없었다. 하물며 종리비는 모용풍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기 에 무상각의 무사들도 종리비를 막지 않았다. "사형이 계시지 않는단 말이냐?" 무상각의 무사들에게 모용풍이 자리에 없다는 말을 듣고 종리비는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환우령의 일 때문에 외출을 했다고 한다. 환우령은 가히 승룡곡에 못지않게 백도에 중요한 장소이기에 모용풍이 그리도 신 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잠시 사형의 거처에서 기다리다가 가겠다. 그것마저 막지는 않겠지?" 종리비는 무상각을 지키는 친위대에게 이렇게 말하고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무상각을 지키는 친위 대 분대장은 전에 종리비와 함께 연풍회 에 있던 자였다. 남궁세가의 유망하고 든든한 후기지수였는데 이제는 남 궁세가 가주가 와도 모용풍의 명령이 없으면 따르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 렸다. (오히려 기회이다. 사형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종리비는 언젠가 백리설이 태상전에 비밀통로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천무삼성이 마련한 비밀스런 장소이고 천무삼성이 승룡곡 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는 무적장왕 모용도기가 가끔 모용풍을 물러 무 공을 가르치는 연공관으로 사용했다고 했다. 천무삼성과 맹주만이 알아 야하는 비밀장소인데 자신이 알게되었다고 모용풍이 백리설에게만 살짝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곳이야말로 비밀스러운 곳. 사형의 마음을 짐작할 만한 뭔가가 있다 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태상전을 건립했을 때 사부인 무성 종리연이 직접 천무삼성을 위 해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종리세가의 기관지학이야 천하 다섯 손가 락안에 들 정도가 아닌가? 비밀통로와 연공관이 있다면 사부 종리연이 종리세가의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었을 터, 거처에 어떤 통로가 있을 거 라고 알고있는이상 종리세가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을 종리세가의 가주 가 못찾아낼 리가 없다. 종리비는 느긋한 마음으로 방안을 뒤졌다. 그야 친위대의 허락아닌 허락 을 받고 들어왔지만 모용풍의 허락이 없으면 하인이나 시녀는커녕 무상 각 친위대 무사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금있는 모용풍 의 거처. 방해받을 일이 없으니 느긋하게 방을 뒤져 기관장치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서재의 책장이 드르륵 뒤로 밀리고 그 뒤로 한 사람이 드나들만한 통로 가 나타났다. 모용비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축 양식은 본가의 기술을 따랐으되 누군가가 추가로 매복을 설치했 다. 본가의 것이 아니니 사형이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토록 악독 한 함정을..." 백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이 통로에 가득 극독이 뿌려져 있었다. 아무리 비밀장소라도 백도맹 내의 장소에 독을 사용하다니 너무한 듯 싶 었다. 게다가 함정은 곳곳에 설치된 듯 싶다. "차라리 없으면 모르지만 너무 많은 함정은 오히려 파악하기 쉽다. 적어 도 기관지학에 대해서 사형은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함정을 파악하자 모용비의 호기심이 더욱 치밀어 올랐다. 처음에는 사형 이 왜 저렇게 변했나 혹시 단서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이토록 철저히 비 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니 저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는 듯 싶었 다. 결국 종리비는 통로로 들어갔다. 불과 이십여장의 지하로 들어가는데 종리비는 열 두군데의 기관매복을 멈추어야 했다. 그나마 기본 설계까 종리세가의 것을 따르고 있고 출입 이 자주 있는 곳이라 통과하기 쉬웠다. 그래도 이십장을 내려오는 동안 종리비의 등허리가 축축히 땀으로 젖어버렸다. "도대체 이 아래에 무엇이 있길래?" 드디어 통로가 끝나고 지하 석실의 입구가 드러났다. 과거 모용풍이 연 공관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종리비의 긴장이 마악 풀어지려는 순간 거 센 바람이 종리비를 향해 밀려왔다. "허억." 검은 그림자 다섯이 덮쳐오자 종리비는 깜짝 놀랐다. 그냥 당할 수는 없 어 황급히 대항했지만 사형을 명을 받고 지키는 호위일 것 같아 살수를 쓸 수 없어 약하게 공격했다. 퍼엉. 비밀 거처를 지키는 자들답지 않게 상대의 몸놀림은 둔했다. 절정고수는 커녕 일류고수에 간신히 들을수 있을 정도의 몸놀림이었다. 의아하게 생 각하던 종리비도 자신의 손이 다섯 그림자의 몸에 닿자 깜짝 놀랐다. 비 록 약하게 공격했지만 손에 닿는 촉감이 마치 철벽을 후려친 듯 단단했 기 때문이다. 종리비는 손을 거두고 뒤로 황급히 일장을 물러선 이후 안력을 집중하 여 다섯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몸놀림은 둔하지만 피부가 단단한 것으 로 보아 속도보다는 파괴력을 중점으로 하는 무공을 익힌 듯 했다. 그리 고 종리비의 눈에 드러난 자들은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어라? 연풍회에 소속되어있던 모용세가의 당주들 아니오? 이거 실례했 소." 종리비는 얼굴을 붉히고 자신이 이곳에 무단으로 침입한 사실을 사과했 다. "나는 모요풍 사형의 사제인 종리비요. 일시의 호기심으로 이곳에 들어 온 바이니 사형에게는 직접 해명하리라. 나쁜 뜻은 없었소. 그보다 여러 분들은 연풍회가 해산되면서 사부의 명으로 무공을 연공하기 위해 모두 모처로 옮겼다고 하더니 이곳에서 지냈던 것이오?" 종리비나 남궁홍일등, 당장 중요한 지위에 있어 빠질수 없는 자들을 제 외하고 연풍회에 소속되어 있던 대부분의 자들이 행방을 감추었다. 모용 풍의 명령과 맹주 종리연의 안배로 비밀장소에서 신단을 먹고 무공을 수 련한다고 했다. 백도의 중추로 거듭나기 위해 고련한다고 했다. 그 장소 가 무상각의 지하 석실이었단 말인가? (무공을 수련하러 갔다는 자들의 움직임이 더욱 둔해졌군. 무공이 증진 된 것이 아니라 줄어들었다.) 종리비가 은근히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종리비의 말에도 그들은 부채 살처럼 퍼져 종리비를 포위하고 있었다. 종리비에 대한 적대감을 풀 생 각이 없는 듯 보이는 것이다. 종리비가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다가 손끝 이 마비되는 것을 보고 믄득 손가락을 보았다. "이... 이게? 언제 중독되었지?" 종리비의 손가락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토록 조심했는데 언제 독 을 만졌을까? 믄득 눈앞의 자들의 가슴을 후려쳤던 것이 생각났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모용세가의 당주들이었던 자들은 석상같은 얼굴에 시퍼 런 안색을 하고 있었다. "정도의 고수가 독공을?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오?" 종리비의 호통에도 그들은 눈썹하나 까닥 거리지 않았다. 돌처럼 딱딱 한 얼굴. 시퍼런 안색. 기계적인 몸짓. 손에서 일렁거리는 독기. 그것 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자들 의 움직임이었다. 퍼뜩 그와 비슷한 형상을 한 존재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설마? 설마 독문의 독인이란 말인가? 백치가 되어 오직 명령만을 수행 하며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중독시켜 죽인다는 독인. 사형이 무상각 지하에서 백도무사들을 끌어들여 독인을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종리비가 놀라 소리칠 때 다섯명의 독인이 그를 덥쳐왔다. 종리비는 황 급히 팔뚝의 혈도를 막아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양 손 이 독으로 마비되자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 자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독인의 몸에 닿기만 해도 중독되는 판이라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이런. 겨우 이따위 자들에게..." 모용비의 안색이 꺼멓게 죽어갔다. 생각보다 더욱 독이 지독했다. 무리 하게 몸을 움직이자 독이 막힌 혈도를 뚫고 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 다. 점차 현기증이 나고 몸이 마비되어갔다. 이대로라면 금방 저들 독인 에게 잡히든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사형. 어째서요? 백도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거요? 어째서 독인 을?" 모용비가 비통하게 울부짖을 때 허공에서 손이 불쑥 솟아나왔다. 그 손 은 단숨에 다섯 독인의 머리를 집어버렸고 그 순간 마치 인형처럼 독인 의 동작이 멈추었다. "당신은...?" "참으로 대담하구려. 홀로 백혈존의 중지(重地)에 침입하다니. 내가 아 니었다며 종리 가주는 죽었을 것이오. 백혈존이 이곳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안배한 스믈 두가지의 위험 중에서 독인의 위협은 가장 보잘 것 없 는 것이거늘." 나타난 남자를 보고 모용비는 깜짝 놀랐다. 그와 같은 명성을 누리고 있 지만 세가와 구파라는 명분이 갈려 별로 친하지 않았던 인물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백호검 마진걸이 아니오? 죽지 않았소?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가주도 요즘 무상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이곳에 함부로 들어온 것 아니오? 백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당신 혼자만이 아 니오." 마진걸은 한 숨을 쉬었다. "우리는 모용풍의 비밀을 쫓아 이곳을 조사한지 오래되었소. 우리란 누 구를 말하는 것인지 물었소? 백도 내에서 모용풍의 수상한 흔적을 의심 하여 그를 조사한 자들이 있었소. 그리고 그의 무서운 음모를 알게된 이 후 지금의 백도맹을 진정한 백도로 되돌리려는 자들의 모임이 생겼소. 우리란 회백회(回白會)를 말하는 것이고 내가 바로 회백회의 회주요." "회백회? 백도로 돌아가겠다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사형이 무상 으로 취임한 것이 이제 겨우 한달이거늘 백도가 그토록 썩었단 말이오? 게다가 백도로 돌아가는 회백회? 지금 장난하는 거요? 도대체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도대체 사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그 리고 백혈존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당신이 믿는 모용풍은 이미 모용풍이 아니오. 그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이미 혈존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스스로 백혈존이라 칭하는 미치광이 일 뿐이오. 하지만 그 능력은 너무나 커서 과거의 혈존과 비교할 만하 오. 그는 백도맹에 들어오기 전부터 백도맹을 장악할 준비를 해왔고 무 상의 지위에 오른 이후 거침없이 계획된 수순을 밟고 있소. 우리 회백회 는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너무 늦었소." "말도 안되는 소리. 사형은 현무도선님의 안배로..." "현무도선은 무당파 출신이며 나의 사문의 종사이시오. 현무도선의 안배 아래 키워진 것은 모용풍이 아니라 바로 나 마진걸이었소. 모든 일을 밝 히고 싶지만 지금 모용풍의 위세가 너무 커서 숨어 움직일 뿐이오. 이대 로 백혈존 모용풍의 정체를 폭로한다면 백도는 분열로 공멸될 것이기에 울분을 참고 백도의 속에서 진정한 백도로 작은 힘을 키우는 것이오. 종 리가주. 모용풍의 진짜 정체를 알려거든 나에게로 오시오. 회백회에 가 입한다면 그제야 진짜 백도 고수라 할수 있을 것이오." "회백회라고? 백혈존이라고?" 종리비가 알고있는 마진걸은 무림칠룡의 하나로 무당의 기대주이기는 하 지만 수백을 넘는 절정고수의 하나에 불과했다. 후기지수의 범위를 벗어 나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능력은 결코 종리비가 알고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종리가주는 이제 모습을 감추어야 하오. 종리가주가 무상각에 들어온 이후 그의 비밀 거처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종리가주가 모습을 드러내 면 종리세가가 겁난을 당하게 될거요." 간단히 독인을 처리한 마진걸은 한알의 단약을 종리비에게 주었다. 종리 비의 독이 해독되는 것을 보고 마진걸이 종리비에게 이곳에서 물러날 것 을 권하자 종리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당신의 말을 믿소? 독인을 두눈으로 목격했지만 아직 사형 의 변명을 들어보지 못했소. 백혈존이라고? 당신의 말은 너무 허황되 오. 직접 알아보겠소. 사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어리석은 사람. 이미 혜경성승과 무성 종리연이 모용풍의 손에 당했는 데도 어리석은 말을 할거요?" "뭐라고요? 어찌 그런?" 너무 놀라운 말을 들어 종리비는 제대로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혜 경성승이 누구인가? 백도를 다시 일으킨 천무삼성의 한사람. 그리고 종 리연은 백도맹의 맹주이며 종리비와 모용풍의 사부. 그런데 그들 모두 가 모용풍에 당했다니. 너무 엄청난 말이라 믿어야할지 안믿어야할지 방 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와 종리가주는 서로 깊은 친분이 없었으니 쉽게 믿지 못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요. 그러니 회백회의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소. 그분들이 라면 종리가주도 믿게 될 거요." "내가 믿을만한 다른 사람도 회백회에 가입해 있다는 거요? 그보다는 이 안으로 들어가 사형이 꾸미고 있는 일을 확인하는 것이 더 낫지 않 소?" "백혈존이 꾸미고 있는 것은 대부분 내가 알고있소. 굳이 지금 저 안으 로 들어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는 것이오. 진실을 알고싶다면 잠자 코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귀하의 판단과 결정이 요구되는 것은 그 다음이오." 마진걸의 마음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종리비 는 솔직히 단 한달만에 모용풍이 백도맹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생각 하지 않았지만 회백회의 정체도 궁금한지라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잠깐 손을 빌리겠소." 마진걸이 종리비의 양해를 구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종리비는 마진걸 을 완전히 믿지도 못하는 판에 그에게 손을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 만 눈앞에 바로 마진걸의 모습이 드러나더니 이미 그의 손목이 마진걸 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 방심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도 허무하게 손을 장악당한데 놀라 종리비가 소리칠 때에 갑자기 그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주위의 사물이 흔들리 더니 온 몸이 나른해졌고 깜짝 놀라 정신을 추슬러보니 자신이 있는 곳 은 무상각의 지하 통로가 아니라 낯선 방안이었다. "지.... 지금 도대체 무슨..." "너무 놀라지 마시오. 아시다시피 조사이신 현무도선께서는 무공 이외 에 법술에도 능통하셨소. 현무도선 조사님의 진전을 이어받으며 그 법술 도 몇 개 익혔을 뿐이오. 부적에 의해 정해진 장소로 몸을 이동하는 작 은 잔재주에 불과하오." 종리비의 놀란 시선을 짐작하고 마진걸이 미리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 의 말처럼 몸이 있는 장소를 부적의 힘을 이용하여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술이든 사술이든 엄청난 법력이 있어야 가 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백도맹에서 십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오. 저 방에 종리가주가 믿을 만한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오." "귀하의 말을 들어보니 회백회는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포섭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들리오만." "그렇소. 종리가주 같은 진정한 협객분을 포섭하지 않으면 회백회의 존 재이유가 없을 것이오. 그동안 백혈존의 눈과 귀가 종리가주의 주위를 떠나지 않아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종리가주가 결단을 내려 백혈존의 주 위를 조사할 마음을 먹었기에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오." (아직까지는 이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백호검 마진 걸이면 의리있는 협사로 알려진 것도 사실이지. 일단 회백회를 꾸미고 있다는 다른 자들의 면목을 보고 마진걸의 말이 사실인지 판단을 내려 도 늦지 않으리라.) 종리비는 아무말도 없이 마진걸을 따라 방안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 에 있는 자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궁 사형. 환우령을 열기위한 환우오존의 비무대회 준비를 한다더니 왜 여기에?" 방에서 종리비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 허나 그 면면을 보면 결코 여섯 명이라 얕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검후 매옥선, 남궁홍일 과 봉황공주 남궁봉, 백결개, 매화검객 이정풍, 패왕도 팽무악이었다. 검후 매옥선은 환우오존의 후예의 하나로 보리무극검의 계승자, 또한 보 타암 여검수들의 수뇌이고, 남궁홍일은 종리비의 사형이며 동시에 천검회를 이끈다. 그는 환우오존 의 비무대회를 위해 사촌인 봉황공주 남궁봉을 호위하러 떠났다고 알려 지는데 봉황공주 남궁봉이야말로 봉황곡의 후계자로 만상건곤심결의 계 승자이다. 백결개는 개방의 젊은 장로로 역시 환우오존의 하나인 개성의 후계자로 금강칠채강의 계승자였으며, 매화검객 이정풍은 화산 장문 주미도인의 은거로 환우오존의 화선을 배 출했던 화산파를 대표하는 장로신분이며 패왕도 팽무악은 환우오존의 하 나인 혼돈패도를 배출한 하북팽가의 가주이다. 하나같이 환우오존의 계승자이거나 그에 연관된 세력의 대표자들이니 종 리비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궁홍일은 그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둘째 사형이 아닌가? "종리사제. 어서 오게. 많이 놀랐지?"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소협... 마회주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 입니까?" 종리비의 말투가 마진걸에 대해 회주라는 말로 바뀌었다. 조금씩 마진걸 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남궁홍일이 한숨을 쉬었다. "네 심정을 안다. 너무도 뜻밖이겠지.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럼, 사부님과 혜경성승께서 사형의 손에 해를 입었다는 것도 사실입 니까?" 백결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용풍이 아니네. 모용풍이지만 혈존에게 영혼을 팔아 마인이 된 자라고 할 수 있지. 실재 모용풍은 과거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죽었네. 그것을 되살려 마인의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혈존이지. 혈존이 죽 은 지금 백혈존이 바로 혈존의 망령일세. 하지만 더욱 무서운 망령이 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적장왕과 혜경성승은 혈천마련을 상대하기 위해 은거하신다고 하셨 네. 하지만 어인일인지 얼마전 혜경성승과 맹주가 모용풍의 손에 제압당 한체 승룡곡에 나타났네. 모용풍이 성승과 맹주를 인질로 위협하는 바람 에 승룡곡의 사람들은 모용풍에게 순순히 제압당했고... 승룡곡은 폐쇄 되었네." "그 사실을 어이 아십니까? 승룡곡과의 연락은 끊어졌다고 하거늘." "천무삼성께서 십대절학의 무공을 비밀리에 전수했던 천무호정단원 중 에 사형뻘인 분이 계시네. 그분이 승룡곡에서 탈출하여 모든 것을 알려 주시고 돌아가셨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성독약에 중독되시어 살릴 수 가 없었네. 그리고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개방은 사형의 말이 사실이라 는 것을 알았네." 백결개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어째서 모용풍이 변심했는지 알수 없었네. 그리고 그 비밀은 회 주가 우리와 합류하면서 밝혀졌네. 놀랍게도 돌아가신 현무도선이 안배 했던 사람은 바로 마진걸 회주였네. 현무도선의 안배대로 그분의 죽음 을 사주한 자를 찾기위해 모용풍의 무덤을 끝까지 지키며 나타나지 않았 던 것이지. 그는 모용시주가 죽은 것도, 그리고 그 시체를 누가 몰래 가 져가는 것도 지켜본 사람이지." "그것이 혈존이었단 말입니까?" "그러하네. 그리고 마회주는 혈존 주위를 감시하며 그를 살폈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혈존이 얼마전 죽었다는 것이네. 승룡곡에서 탈출하신 사형도 혈존이 죽었다고 마회주의 말을 확인시켜 주었으니 확실하네. 하 지만 혈존은 죽어서 더욱 무서운 자를 남겨놓았지. 백혈존 모용풍이야말 로 본래의 영혼을 마성에 빼앗긴 혈존의 진실한 후계자이네." "그러면 어이하여 백도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어이하여 사형 이 마음을 마성에 빼앗겨 마도에 든 것을 폭로하지 않았습니까?" "혈존은 오래전부터 백도를 삼키려고 모든 준비를 해왔네. 지금 백도에 는 진실로 믿을만한 사람이 별로 없네. 모두 백혈존에게 포섭되거나 미 리 심어놓았던 첩자들 뿐이네. 실재로 사형이 숨을 거두던 날 개방 총단 이 습격을 받았네. 나만 겨우 살아남았지. 놀라운 것은 습격한 사람이 바로 개방의 장로들이었다는 걸세." "그럴 수가? 그런 소문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미 개방에는 뿌리깊게 백혈존의 세력이 스며들었다고 보면 될것이 네. 다른 문파도 마찬가지이지. 그 이후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여 몇몇 백 도의 원로분들을 소집했지만... 이미 그분들은 백혈존에게 포섭된 상태 라 마회주가 아니었다면 회백회는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와해될 뻔했 네." 백결개의 말을 이어 남궁홍일도 한숨을 쉬었다. "사제도 아마 종리세가의 내부사정을 조사해보면 알 것이네. 나도 마회 주의 말을 듣고 남궁세가를 조사해보다가 경악하고 말았네. 아버님 이... 아버님이 가짜였네. 남궁세가의 반 이상이 다른 이의 명령을 듣 고 있었네. 커다란 충격이었지. 이미 백혈존의 첩자는 오래 전부터 백도 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남궁가주님이 가짜라고요?" "그래.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거야. 게다가 모 용세가와 백리세가는 어떤 이유든 모용풍을 편들 수 밖에 없는 처지. 오 대세가의 젊은 무사 대부분도 모용풍의 추종자로 뒤덮였고 지금 상황에 서는 첩자 때문에 구파도 믿을 수 없으니 백도맹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꼴밖에 되지 못하네.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 드러 내지 못하고 회백회를 조직하여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네. 많은 시간 을 들여 관찰하다가 진실로 믿을만하다고 판단을 내린 이후에야 마회주 가 접근하여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 "진실로 믿을만한 것은 천무삼성께서 키우셨던 승룡곡과 천무호정단이지 만 맹주와 성승께서 백혈존에 제압당하는 바람에 그들도 완전히 제압당 해야 했다고 봐야하네. 실로 백도로서는 암담한 현실이지." "저는... 저는 몰랐습니다. 백도가 이토록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줄 이야." "허나 지금처럼 하나하나 작은 힘을 모으면 다시 백도를 정화할 수 있 을 것이네. 마회주도 있고 회백회의 힘도 조금씩 불어나고 있으니... 언 젠가 다시 백도천하가 될 걸세. 그러기 위해서 마회주는 환우령을 회백 회에 합하려고 하네." "환우령이요? 그건 환우오존의 후예가 그 절학을 대성하고 비무하여 우 승자가 나와야 나타나는 세력 아닙니까? 그러나 혼돈패왕도와 불사건곤 심공을 대성한 자는 대사형... 백혈존 뿐이라고 알았는데 아닙니까?" 패왕도 팽무악이 종리비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환우령은 환우오존의 후예가 모두 무학을 대성하고 나타나야만 출현할 수 있네. 그러나 환우오존이 어떤 분이신데 영원히 환우령을 묻 어버릴지 모를 상황을 만들어놓고 비상시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았겠는 가? 적어도 환우오존 조사들의 후계 다섯문파의 대표자들이 승낙하고 두 명 이상 환우오존의 무학을 대성한 자가 있으면 환우령의 출현을 명할 수 있네." 종리비는 그제야 지금 있는 인원의 뜻을 알수 있었다. 검후와 봉황공 주, 그리고 백결개는 환우오존의 후계자이며 동시에 그들의 절학을 대성 한 자, 그리고 모용풍을 대신하여 매화검객과 패왕도가 화산과 팽가를 대표하여 환우령의 출현을 허락하려는 것임을. "환우령은 결코 승룡곡에 못지 않은 힘. 환우령을 회백회에 끌어들이면 백혈존에 대항할만 하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숨어있어 백혈존이 눈치채 지 못했네. 큰 피해없이 백도를 다시 정상으로 돌릴 방법도 있을 걸세. 적어도 맹주와 성승을 구출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승룡곡의 금제를 풀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백혈존도 버티지 못하고 백도에서 손을 뗄 수밖 에 없을 걸세." 몇몇 조직원을 제외하고 그 모든 회원을 아는 것은 회주밖에 없는 회백 회. 모인 사람들과 종리비가 돌아간 이후 백호검 마진걸은 대소를 터트 렸다. "크흐흐. 모두들 이 요혈존에게 잘도 속고 있구나." 종리비나 남궁홍일등과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요광(妖光)을 마진걸은 눈에서 발했다. "크흐흐. 본좌를 무시하고 감히 혈존을 자처하는 가짜. 백혈존이 백도맹 을 날로 삼키려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얼마전에 자각한 놈이 무슨 세 력이 있다고 백도맹에 세력을 깔아놨겠는가? 지금 들고 일어나면 백혈존 도 본좌도 낭패이지. 흐흐. 각 세력에 깔려있는 첩자는 모두 혈지존이 그동안 백도에 깔아놓은 첩자망,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여 백도를 장악하 는 것이지." 백혈존 모용풍과 요혈존 마진걸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여 백도를 장악 하고 있었다. 모용풍은 무성 종리연을 잡고 승룡곡에 들어온 혜경성승 을 제압하여 승룡곡 전체를 장악했다. 백혈존은 빠르게 백도맹을 장악하 기 위해 폐쇄된 승룡곡의 고수들의 심령을 약물과 사공으로 제압하고 제 압된 자를 백도맹의 요직에 앉히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혈지 존의 첩자들을 발굴하여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백혈존의 무리한 백도장악에 의심을 품는 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을 맡은 것이 요혈존 마진걸이다. 어차피 그도 무당에 뿌리를 둔 백 도출신. 그 세력을 백도에서 솎아내려는 것이다. 서로 미리 상의한 것 도 아닌데 서로 같은 영혼의 잔재를 나눠가졌던 때문인지 두사람은 척 척 손발이 맞고 있었다. 지금 백도가 백혈존 모용풍에 의심을 품고 일어 나면 난리나는 것은 백혈존 뿐만 아니라 요혈존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백도를 완전 장악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백도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 백혈존은 물론 요혈존도 더이상 세력확장이 불가능했다. 요혈존은 백혈존에 의심을 품은 자에게 접근하여 회백회를 조직했다. 백 혈존의 세력을 과장되게 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혈지존의 첩자조 직을 백혈존이 뿌려놓은 것으로 오해하게 하여 회백회에 가입하게 한 다. 회백회의 회원들은 요즘 한참 권력과 신망이 절정에 이르러있는 모 용풍에 대한 두려움과 혈지존의 첩자조직에 대한 놀라움으로 혼란 속에 회백회에 가입하고는 했다. 그들은 가입할 때 철저히 믿을 수 잇는 주 변 인물의 설득으로 가입하고 또한 가입한 이후에는 점조직이므로 요혈 존 마진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 가끔 혈지존의 첩자들을 제거하면 서 그것이 백혈존의 조직을 제거하여 백도를 다시 되살리기 위한 노력으 로 오해하는 것이다. "크흐흐. 혈지존, 그 아들 놈이 모든 법보를 가져가지만 않았으면 이럴 필요도 없다. 요요경만 손에 있었어도 천하에 산재한 수백년, 수천년 먹 은 요물들을 소집하여 요괴로 환원시켜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 다." 요혈존 마진걸은 분하다는 듯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의 주위로 다시 여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방금 전 모용비를 설득시켰던 여섯 명 이다. 물론 회백회에 이들 여섯명이 가입해 있기는 하지만 모용비를 열 심히 설득했던 여섯명은 진짜가 아니다.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 이 모용비 하나의 회백회 가입을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모였을 리가 없 다. 마진걸의 눈빛을 받자 그들의 모습이 바뀌었다. 봉황공주가 흰 독수리 로, 백결개가 늙은 원숭이의 모습으로, 검후가 은색 거미의 모습으로 바 뀌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마진걸을 보다가 그가 눈짓하 자 순식간에 요괴의 모습으로 바꿔 흐릿하게 연기로 바뀌더니 마진걸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으윽. 요력을 봉쇄한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이야. 요요경이 있어야 몸 속에 그윽한 요력을 풀 수가 있다. 몸에 봉인한 요귀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다. 또한 요요경이 있어야 천하의 요물들을 요귀로 둔갑시 켜 수하로 부릴 수 있거늘." 요혈존이 백도를 목표로 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요경을 노리고 혈지존에 접근하던 요혈존은 그의 주위에 또다른 자신의 가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혈존 전일비였다. 그 놈이 정체를 숨기고 혈지존의 곁에 있는 것이었다. 놈도 요혈존도 곁에 있으면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았다. 놈이 있는 이상 요요경을 손에 넣는 것은 힘든 일이었 다. "하는 수 없지. 대신 백도를 갈라 세력을 형성하는 수밖에. 천하를 최후 에 지배하는 것이 바로 진짜 혈존이다. 그자가 바로 진짜 백가량이지. 그때가 되어서야 다른 가짜들은 진짜 혈존은 오직 이 요혈존 뿐임을 알 게 되리라. 크흐흐. 환우령은 든든한 하부세력이 되어 줄 것이다." 요혈존의 음산한 웃음이 백도의 뿌리를 썩게 만들고 있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 광한비급 관련자료:없음 [19937]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26 22:13 조회:270 <광한비급> "측은지심과 자비지심 그리고 협의지심을 지닌 자라면 선과 악 중에서 선 에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셋을 말하기는 쉬워도 진실로 실천하 는 자는 드믈다. 하지만 진정한 선인이라면 세가지 마음을 실천할 자신 의 그릇, 자아를 확고히 해야한다. 자신을 믿고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천하게 여기고) 늘 반성하는 (후회하는) 자는 선한 자로 여겨지 기 쉬울지 모르지만 선한 자가 아니다. 선한 자는 자신에게 당당한 자. 자신을 사랑하여 뒤를 돌아볼 줄 모르는 자이다. 자신지심(自信之心)과 자애지심(自愛之心)을 가진 자들만이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을 게을리 하 지 않고 세 가지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행동으로 늘 옮길 수 있다." 오행옥령심음에서 백이충은 자신지심과 자애지심의 관문마저 통과했다. 오행옥령심음에 휘말리면 누구든 방울 소리의 유도대로 끌려가는 것이 일 반적인 모습이었고 그로인해 옥령선자는 그들의 마음을 조정하거나 영혼 의 선악을 확인, 혹은 조율할 수 있었다. 백이충은 오행옥령심음에 이끌려 가다가 어느 순간에 심음에 동화되었 다. 옥령선자가 옥령을 연주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고 오히려 옥령심음을 변화시켰다. 오행신인과 옥령선자는 그 모습이 조사가 언급했던 오행옥령 심음을 수련으로 삼는 자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사실 옥령선음으로 해칠 마음을 먹지 않는 한 영혼의 선악을 조사하는 정도는 특별히 위험하지도 않으니 관문이랄 것도 없었다. 백이충이 깨어나서 방에 틀어박힌 지도 이틀이 지났다. 처음 깨어났을 때 황 대장군과 오행신인과 몇마디 나눈 이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 다. 황 대장군과 그의 의형제들은 백이충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 에 마음을 닫아걸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백이충이 깨어났을 때 멀쩡히 말하고 움직이자 모두들 의아하게 생 각했다. 천기노인은 혈존 백가량의 영혼이 박살나서 소멸되었다고 말했 다. 또한 오행신인과 옥령선자는 되살아난 육체의 영혼이 선하다고 말했 다. 되살아난 백이충의 육체가 영혼이 없는 빈 몸뚱이가 아니라면 그 육 체에 있을 영혼은 단 하나였다. 바로 백이충의 육체의 원래의 주인. 백이 충 본래의 영혼이 다시 몸을 찾았다는 가정 외에는 되살아난 육신에 깃 든 영혼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혈존이 혈마전혼대법을 펼쳐 달아났던 것이 이십 년 전 이다. 또한 백이충의 나이 이십이니 혈존에게 육체를 제압 당했을 때 원 래 백이충의 영혼은 태어나지도 못한 태아이거나 갓난아이의 것일 수밖 에 없다. 이십 년동안 잠들어있던 영혼이 깨어나자마자 멀쩡히 움직이고 떠들어대자 모두들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는 어디죠? 내가 왜 여기와 있는 거죠?"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겁먹어 말하는 모습은 틀림없이 나약하 고 겁먹은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혹은 글만 공부한 전형적인 서생의 모습 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 약한 모습을 보고 황 장군 일행들은 그나마 마 음 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의심의 잔재마저 던져버렸다. 혈존의 영혼이라 면 절대 이런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일리 없다고 지레짐작을 한 것이다. "너야 말로 어찌된 것이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네가 누군지 아느냐?" "황 할아버지잖아요. 우리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신 황부인 할아버지요. 앗, 이분들은 황 할아버지의 친구분들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 은 서문 장군부의 백이충이라고 합니다." 백이충이 일어서서 일행에게 넙죽 절하자 황 대장군이 김이 빠지는 탄식 을 내뱉었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이야. 네가 기억나는 것을 전부 말해줄 수 있겠느냐?" 백이충은 순진해 보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겁먹은 표정으로 좌 우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는... 황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 몸이 약한 것을. 그래서 부모님 과 우리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글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관음사를 추천 해주신 것이 바로 황 할아버지였잖아요. 그래요. 거기서 과거를 보기 위 해 글 공부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밤에 귀신처럼 생긴 두 노인을 발견했 어요." 갑자기 백이충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야기를 하다말고 무언가를 깨달 은 모습.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경악의 표정이 스쳐지나간 다. "설마... 설마 그동안 꾸었던 꿈이 사실은 아니겠죠? 그 노인들을 본 이 후에 꾼 길고 길었던 꿈이 사실은 아니겠죠?" "꿈이라? 무슨 꿈을 꾸었느냐?" "다른 꿈과 같아요. 꿈속의 저는 제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말하고 생 각하고 움직이거든요. 저는 꿈속에서 제가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 어요. 아시잖아요? 꿈 속의 자기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나 쁜 일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꿈속이라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설마, 설마..." "그 꿈속의 일을 좀 더 자세히 말해 줄수 있겠니?" "으으으... 그럼 그게 사실이었군요. 으윽. 저는 사람도 죽였는데... 내 가 사람도 죽였다니. 어떡해요? 황할아버지? 으흑흑흑." 백이충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더니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 대 장군을 비롯하여 모두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했다. 혈존의 영혼을 몸에 담았던 자가 살인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눈물을 쏟아내다니. 백이충 의 갑작스런 반응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십년 전 혈존의 혈마전혼대법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갑자기 펼쳐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혈존의 영혼이 백공자의 영혼을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백공자의 몸에서 이십년 간 잠들어 있었던 것 같 습니다. 백공자가 쌍마를 만나고 그들이 혈존의 영혼을 깨운 것 같군요. 혈마전혼대법으로 백공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쫓겨갔던 것이 아니 었고 그러하기에 혈존의 영혼이 파괴되자 다시 백공자의 영혼이 육체 안 에서 깨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오행신인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 백이충의 말을 믿자 면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오행신인은 백이충이 깨어나 자신에게 한 말을 믿었다. 사문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인재라고 생각하 니 남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직접 옥령선자와 같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눈앞의 자는 선인(善人)이었다. 물론 선인도 필요에 의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오행신인은 생각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천기노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들 중에 사술이나 도가의 법 술에 정통한 자는 거의 없었다. 사술이나 법술을 아는 자가 있다고 해도 혈존의 사악한 법술에 대한 경지를 이해할 만한 자가 천하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일행 중에 그나마 사술에 대해 가장 이해가 깊은 것은 잡기에 능통하고 악도 전일비와 오래 붙어있었던 천기노인 밖에 없었다. "아마도 신인의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혈존의 영혼은 파괴되었고... 빈 육체 안에서 백공자의 영혼이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행 신인의 말대로 이십년 전 시행되었던 혈마전혼대법에 이상이 있어서 혈존 의 영혼이 일년 전에 깨어날 때까지는 백공자의 영혼이 아무 이상 없이 육체와 동화되어 자라왔다고 밖에 볼 수 없지요." 천기노인이 자신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천기노인의 말을 들은 백이 충은 몹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는 모두들 보는 가운데 꽥하는 비 명 소리를 내었다. "끄이이아왜애액. 혈존? 그럼 내가 혈존이 되었던 꿈이 진짜로 사실이었 군요. 다른 사람들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사람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였던 것도 사실이었군요. 오오. 옥황상제님. 어이하여 제가 이런 죄를... 으으음." 백이충이 신음을 내지르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백이충이 천기노인 등에게 말한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영혼 이 백이충인 것과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은 맞으나 잠들은 기간은 혈존 이 깨어난 이후의 일년간이 아니라 태어나서 계속이었다. 그동안의 백이 충은 백이충이 아니라 백가량이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나서 계속 백이충 으로 있다가 단 일년간 만을 혈존에 의해 영혼이 잠들었다고 모두를 속 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들이 마도를 증오하는 백도 쪽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자랐던 모든 생의 주체가 혈존이고 자신 백이충은 이제야 겨우 깨어났다면 여태까지 살아왔던 백이충의 모든 인생은 혈존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일년 전 까지 혈존의 기억을 각성하지 못하고 백가량이 백이충으 로 평범히 자라왔다고 해도 모두들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 태까지 살아왔던 주체가 백이충 자신이고 단 일년 동안만을 사악한 쌍마 의 술법에 의해 혈존의 영혼 침습을 받아 육체를 지배당했다고 한다면 백 이충은 일방적으로 당한 불쌍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크흐흠. 어차피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니까." 자신이 완전한 백이충의 영혼으로 깨어났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백 이충의 영혼에 상념과 기억은 백가량의 것으로 칠했다지만 그 잔념 역시 백이충의 삶을 가장 중요시하던 백가량의 부분. 지금의 백이충은 혈존의 기억을 조금 가지고 있는 완전한 백이충에 불과했다. 백이충으로서 깨어 났다고 해도 백이충의 영혼으로서 살아온 바가 없으니 그동안의 기억과 생활방식, 습관은 모두 백가량이 백이충으로서 살아왔던 것에 기반을 두 고 있다. 즉 백이충의 영혼과 백이충으로 살아왔던 부분의 백가량의 영혼 잔재와의 결합이 지금의 백이충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기대가 부담스럽다. 그러기에 겁쟁이 서생의 역할을 연 극한 것이지. 이 몸에는 아무런 힘도 없거늘." 백이충의 몸은 허약하기 이를 데가 없어 원래 무공을 발휘할 수 없는 상 태였다. 그나마 마화타의 덕으로 억지로 쌍영마공을 집어넣기는 했다. 무 공보다는 오형산에서 얻은 요력과 혈향초의 혈근에서 얻은 힘으로 사술 과 법술에 더욱 강했다. "하지만 단 한번 엄청난 힘을 얻었다. 백가량이 평생을 염원했던 아수라 독존마공의 맛을 본 것이지." 여러번의 우연과 깨달음을 걸쳐 백이충은 아수라독존마공에 입문할 수 있 었다. 비록 입문단계에서 간신히 이성으로 넘어가려다가 이성 수준 직전 에 혈지존에게 당했지만... 그 때의 힘은 가히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 다. 가히 신선이나 악마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능력. 아수라독존마공 은 인간을 초월한 천하무적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힘도 아련히 사라져갔다. 백가량의 영혼이 부서지면 서..." 천하무적이던 아수라독존마공도 영혼을 보호하며 육체에서 빠져나오려다 가 산산히 부서졌다. 이제는 혼백의 잔재가 품고있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작은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백이충도 그 조각을 품었다. 백이충처럼 백 가량 영혼의 다른 잔재도 역시 다른 영혼과 결합했다면 그 영혼 역시 아 수라독존마공의 조각을 품었을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은 혼돈의 힘. 혈 존의 잔념과 영혼이 결합하여 동화될수록 아수라독존마공도 몸의 무공에 뿌리를 내려 결합할 것이고 점차 상상도 못할 엄청난 힘을 줄 것이다. 하 지만 백이충의 몸에는 뿌리를 내릴 아무런 것도 없었다. 남아있는 무공 도 내력도 없었다. "원래부터 무공을 못하던 몸. 그나마 억지로 집어넣었던 쌍영마공이 깨달 음을 전재로 아수라독존마공으로 화했고... 그것이 산산조각나서 깨어졌 으니 이 육체에 아무런 무공의 내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 한 때 아수라독존마공을 몸에 담았기에 그 흔적으로 몸이 탈태환골 한 것이 유일한 수확이라 할까?" 백이충의 몸은 아수라독존마공을 가득 품었던 덕분에 허약했던 몸이 완전 히 고쳐졌다. 조화와 균형이 완벽한 육체. 사악하고 해로운 기운을 모두 몰아내고 조화로운 것을 몸에 모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강건한 완벽 한 육체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환골탈태로 완벽히 건강하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몸으 로 바꾼 것으로 아수라독존마공은 사라졌다. 허공에 백가량의 영혼의 잔 념을 품고 산산조각 났고 그 하나가 백이충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뿌리 를 내릴 어떤 무공의 토양도 없는 백이충의 현재 몸으로 그 조각은 아무 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흐흐흐. 그래도 결국 아수라독존마공의 가장 큰 파편은 한때나마 그 입 문 마공을 담았던 바로 이 몸 자체라고 해야 할까? 아수라독존마공을 이 루었던 그 깨달음조차 산산조각나서 이제는 그 누구도 아수라독존마공의 구결과 깨달음을 온전히 복구할 수가 없으니..." 아수라독존마공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혈존의 영혼이 박살난 것처럼 아수라독존마공의 구결과 깨달음도 박살났다. 백가량 영혼의 잔재가 품고 있는 구결도 단지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마공 자체도, 그것을 이루는 구결과 깨달음도 산산조각나서 다시는 모일 가능성이 없다. 혈존이 아수 라독존마공을 기록한 적이 아예 없으니 고금제일마공의 복구는 영원히 불 가능했다. 그 구결이 혈지존이나 법존, 혈무영의 영주등에게 전수한 바있 는 쌍영마공의 복구는 가능해도 그것을 합일하여 진화시키는 아수라독존 마공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어차피 백이충으로 살아오면서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행히 몸이 조 화지체로 돌아가며 앞으로 어떤 무공이든 쉽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을 다행 으로 여기는 수밖에. 불행인 것은 사악하고 모든 악한 기운을 아수라독존 마공이 육체밖으로 몰아내면서 사술과 법술을 발휘할 요력과 사력 역시 몰아내었다는 것. 지금의 나는 완벽한 서생 백이충일 수밖에 없으려나?" 능력은 없지만 얽힌 인연은 서생으로서 해결할 수 없으니 그것이 백이충 의 걱정이었다. "백이충으로서 살아가자면... 지금 나를 구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부정 하면 된다. 혈존을 부정하고 백이충으로 살아가면 된다. 청마산에서 소 매 또한 죽지않았다고 하니 복수할 것도 미련이 남은 것도 없다. 어차피 능력도 없으니... 허나 천하에 뿌린 혈존의 분신들은? 혈지존에게 잡혀 간 가족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걱정만 깊어지는 백이충이었다. 교활한 백가량의 성품이 남 아 백이충은 깨어나고서도 깨어나지 못한 척 그동안 주변 상황을 파악했 었다. 그러기에 천기노인등은 백이충이 아무 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돌아 가는 사정을 모두 알고있는 백이충이었다. 특히나 가족이 잡혀간 데에 대 한 괴로움과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괴로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런 고민이 깊어 백이충은 감히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었다. "백서생. 들어가도 되는가?" 오행신인이 백이충에게 내어준 방 밖에서 말 소리를 내었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백이충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오행신인은 그를 믿었다. 오행옥령심음을 뚫고 뭔가를 얻은 사람이 이대로 자책 속에 묻혀 있을 리가 없다. "실례인줄 알면서 들어가겠네." 오행신인이 백이충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어두컴컴해 보였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침울한 분위기가 방을 컴컴하 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기억이 있더라도 그것은 자네가 한 일이 아니야. 자네는 혈존이라는 악마에게 영혼이 빼앗겼을 뿐, 그 몸이 행했던 모든 악행은 자네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네." "......"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는 백이충을 보고 오행신인을 혀를 찼다. 혈존에 게 영혼을 제압당하고 빼앗겼던 일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과거의 일이었 다. 그래도 육체를 차지했던 악귀가 죽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 다. "자네의 일은 불행이지만 그래도 별난 경험을 했다고 자위하게." "......" "내가 알기로 자네의 몸을 혈존이라는 악마가 차지한 이후 별다른 악행 은 없었다고 아네. 오히려 자네의 약혼자인 금소저와 더불어 신녀교의 역 모를 막았고 분신을 통해 화산파를 구했네. 자네가 괴로워할 만한 악행 은 없었어. 오히려 그 기간 동안의 혈존을 보면 오히려 좋은 일만 했다 고 봐도 되지." "하지만 사람을 죽였단 말입니다. 사람을 고문했고... 크흑흑흑." "허어. 자네의 순박한 심정으로는 충격일 수도 있지. 허나 자네도 대장군 부의 후손이 아닌가? 사람 하나 둘 죽는 것에 너무 충격을 받으면 큰 인 물이 될 수가 없네. 또한 자네 식구들 걱정도 해야하지 않나?" "....... 식구라고요?" 무겁게 묻는 백이충의 표정에 오행신인의 가슴이 뜨끔했다. 천기노인은 백이충이 천황성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그의 힘을 빌려야한다고 하지만 다 른 모든 사람들은 백이충의 힘을 빌리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무공도 못하 는 아이의 힘으로 어찌 천하를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이유로 서문 대장군 부의 일을 백이충에게 알리지 않도록 무언 중에 합의된 상태였다. 그들 은 백이충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아니네. 자네가 이렇게 의기소침한 상태로 있으면 자네 가족들도 걱정 을 할 거라는 이야기네. 하여간 나는 자네를 믿네." "......" "움추러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자넨 강한 사람이야. 오행옥령 심음의 화음과 동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지. 자신지심을 지녔 으니 자네의 후회와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을 걸세. 자애지심을 지녔으니 자신을 자책하는 일도 오래가지 못할 걸세. 자네는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 도 물러서지 않고 극복해낼 강한 정신력을 가졌네." "......" "천기노인이 자네를 가리켜 천하를 구할 천황성이라 하더군. 다른 사람들 은 자네가 천황성인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옥령선자와 나는 믿 네. 다른 사람들은 자네가 기억하고 있다는 혈존의 재주에 기대를 가지 는 모양이지만... 자네의 진정한 힘은 그런 사술이나 마공 따위가 아닌 자네의 강한 마음이네. 광한문의 원을 풀어줄 만큼 어려운 오행옥령심음 의 수련을 통과한 자네의 강한 영혼." "......" "아직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군. 나는 자네가 밝은 얼굴 로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겠네. 그리고 여기... 본문. 옥령선자 와 나의 사문인 광한문의 비전 광한비급 하권이네. 남들은 불가능한 무학 을 상상으로 쓴 이야기책이라 비하하지만 우리 광한문은 그 내용이 실현 될 것임을 믿네. 자네와 인연이 있을 것으로 믿어 남겨놓으니 한번 읽어 보게." 백이충이 끝까지 말이 없자 오행신인은 한숨을 내쉬고 탁자에 한권의 책 을 내려놓고 나갔다. 광한문의 비한이 서린 광한비급 하권. 상권과는 전 혀 다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실린 비급이었다. 오행신인이 완전히 주변에서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 백이충은 나직히 한 숨을 내쉬었다. "젠장. 바로 그 기대 때문에 겁쟁이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거늘. 천황성이 라니, 그건 또 뭔 소리인지." 백이충이 머리를 긁적이며 광한비급을 펼쳤다. 광한비급이 자신과 인연 이 있다는 말도 흥미있지만 이제 자신의 몸은 어떤 무공도 익힐 수 있는 최상의 신체였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무공, 특히나 그에게 전혀 새로운 정도의 무공이 마침 필요하던 참이었다. 물론 머리 속에는 혈존의 기억파편에 있는 마공과 사공의 무공구결이 남 아있지만 어쩐지 그것을 익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마공 때문에 단순 히 혈존에게 몸을 빼앗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염려도 있지 만... 그건 혈존의 기억이 머리 속에 남아있다는 것으로 어떻게 둘러댈 수가 있다. 마공이나 사공을 익히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달리 있었다. 이미 그는 마와 사의 길에서 극을 넘어서는 길을 한번 올라가 본적이 있 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수라독존마공의 깨달음은 사라졌지만 백가 량의 파편이 제일 큰 것이 백이충인 것처럼 그때의 여운과 흔적을 제일 많이 알고있는 것도 백이충이었고 몸에 그 성취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있 었다. 그런데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성취에 비해 백이충이 지금 알고있는 여타 마공과 사공은 얼마나 조잡한가? 황궁의 음 식에 길들여진 자가 빈민가의 쓰레기 죽을 보고 식욕부터 달아나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그런 면에서 정도의 무공은 오히려 요리방법이나 재료가 전혀 다른 음식 이니 흥미가 일 것도 같았던 것이다. 백이충은 광한비급이라는 이름을 들 어본 적이 없으므로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책을 펼쳤다. 과연 책은 초반 부터 도가 어쩌니 깨달음이 어쩌니 하는 지루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 다. "어라라? 이건 또 아수라독존마공의 그 구결과 비슷하구만." 광한비급의 책 중간에 백이충에게 익숙한 구결이 적혀 있었다. - 본래 세계는 아무런 법칙도 의미도 없이 생성되었다. 그런데 그것 을 '인식'하면서 의미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 하나의 객체를 별개 로 '인식'하면서 '이름'이 생성되었고 '이름'을 '인식'하면서 '의미'가 부여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라 이름을 지으며 '인식'하고 다른 사 물과 스스로를 구분함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곧 혼 돈된 세계에 법칙이 부여된 것은 사물을 정의하는 '인식'이 생겨나고 나 서부터이다. - 광한비급의 구결은 백이충의 뇌리에 있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 혼돈구 결과 비슷했다. 아수라독존마공은 그 구결에 이르기를 - 본래 우주는 혼돈의 연속에 불과하다. 억겁의 세월 속에 존재하는 혼 돈 속의 일부 일어나는 현상에 사물의 진리를 정의함으로서 그것을 우주 의 질서라고 인식함과 동시에 진리가 확립되었다. --- 중략 --- 우주보다 큰 혼돈의 시작은 또한 내 인식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가? - 둘의 의미가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중간에 이르러 백이충은 호기심을 가지고 광한비급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잃어버린 아수라혼돈마공의 깨달 음을 다시 되찾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결국 사물은 '인식'되고 '정의'되어야 그 본질을 가진다. 인식하고 그 렇게 생각하는 상념이 바로 본질을 만드는 것이다. 신선의 길을 이야기하 기 전에 죽음과 삶을 이야기해보자. 영혼에 관한 것 역시 밝히지 않을 수 가 없다. 인간의 영혼 또한 인식에 의한 상념에 다름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정의해온 깨달음의 상념이 바로 육체가 죽은 이후에도 이 세상 에 남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영혼인 것이다. - "이것도 비슷하군. 아수라독존마공은 우주와 세계의 질서는 자아의 인식 에게서 비롯되므로 그 중심이 자신이라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만물의 정의와 의미가 인식되어 이름지어져 의미를 가지므로 자아 역시 수많은 타인의 인식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군. 시작은 같은데 설명하는 길이 갈 라졌다고 할까?" -불사는 무엇일까? 신선은 무엇일까? 마귀와 귀신, 신과 악마는 무엇일 까? 모든 것은 인식한 자아들의 상념이 만들어낸 것이다. -중략- 그 '인식'을 승화시켜 깨달음을 통해 선한 상념으로 승화한 것이 신선이 다. 악마는 '악'이라 규정한 인식의 상념이 만들어낸 상념이 승화한 것, 귀신은 깨달음없이 저급하게 집착만이 남은 상념, 곧 영혼은 인식함으로 서 자아의 집착이 만들어낸 상념에 불과하다.- "무... 무슨 소리야? 여태 내가 존재해왔던 백가량의 영혼의 과거가 기 껏 상념이라는... 하기는 그렇군. 아수라독존마공 또한 나는 내가 아니 고 너는 네가 아니라는 구결이 있다. 만물을 혼돈으로 보고 자아 자체를 부정하는 것. 이것을 통한다고 봐야 하나?" 광한비급의 내용은 참으로 이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광한선인의 고차원 적 토론으로 가득찼다. 그것은 혼돈을 근본으로 삼는 아수라독존마공과 비슷하나 끝에서 전혀 달랐다. 같은 산에 오르기 위해 같은 산길을 걷고 똑같이 정상을 넘어섰는데 그 자리에서 보니 서로 정반대의 봉우리 위에 올라있는 것과 같았다. 깨달음은 같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만물을 부정하 는 데에서 마공의 길을 걷어 불사와 인간을 초월한 마신의 힘을 얻으려 한다면 광한비급은 만물을 인식함으로서 자연과 우주의 힘을 이용하는 신 선이 되려했다. "끄응. 이게 뭐야? 기대를 가지고 봤건만 내공구결이나 무공초식 따위는 단 한 줄도 없지 않는가?" 끝내 광한비급의 끝까지 읽어본 이후에 백이충은 탄식을 터트렸다. 공감 은 갔지만 깨달음은 없었다. 한번 그 맛을 봤기에 비슷한 맛에 대해 동의 를 해줄 수는 있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그 맛을 재현할 능력이 없 기에 광한비급 상의 맛도 얻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정종무공을 익혀 과거 백가량의 수준에 오른다면 이 구결이 하나 의 상승무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과 같은 성취를 이룰 지도...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 진짜 신선이 될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러 기 전에는 단순한 삼류초식보다 못한 것이 또한 바로 이 구결이다. 게다 가 아무런 기초도 없는 지금의 나에게는, 단지 깨달음의 여운만을 가진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백이충은 탄식을 했다. 좀더 아수라독존마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면, 깨 달음을 반만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파편이 많이 남아있었다면... 그리되 면 아수라독존마공이 아닌 광한선공으로 신선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가 얻은 것은 백이충에 관한 파편이 었으므로. 그리고 원하지도 않았다. 아수라독존마공에 가까이 가는 것은 지금 겨우 얻은 백이충의 영혼을 잃고 다시 백가량으로 돌아가는 길이므 로. "기대를 가지고 읽었거늘 얻은 바가 없구나. 헛수고했구나." 백이충은 손을 휘둘러 촛불을 끄고는 자리에 누웠다. 머리 속에 광한비 급 상의 구결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결에 동감이 간다고 해도 대충 느낌을 아는 것과 깨달음 사이에는 바다 사이의 두 육지만큼이나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백이충은 잘 알고 있었다. "헉." 갑자기 백이충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보니 자신은 침상에 누워 촛불을 껐다. 촛불과 침상의 거리는 이장이 넘었다. 내력하나 없는 그가 이장 거 리에서 손을 휘둘러 촛불을 껐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 자연과 만물의 힘을 자유로이 이용하니 이가 곧 신선이 되기위한 깨달 음을 얻기 최종 직전의 단계인 자연지체의 단계이다. - "설마?" 백이충은 스스로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촛불이 켜질 것이라는 강한 의지의 상념을 가지고. 그러자 대기의 자연 속에 있던 뜨 거운 양의 기운이 백이충의 의지를 따라 흘러나갔고 촛불에 불이 켜졌다. "되... 된다. 육체에서 무한의 힘을 끌어낼 필요없이 주위 자연에서 힘 을 끌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아수라독존마공도 아니고... 광한 비급의 것도 아닌, 광한비급 상에서 설명한 경지에 이르기 위한 최종 마 지막 단계로 잠깐 언급한 경지상의 무공이거늘." 백이충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그 이치를 잘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삼아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의지가 자연 속에서 힘을 끌어내어 촛불을 파괴했다. 초가 터져 나갔다. "으음. 완전하지는 않군. 마치 바둑을 처음 두는 자가 돌을 놓는 것처럼 서툴러. 으음. 혹시?" 백이충은 자신의 신기한 힘에 대해 가설을 내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백이충의 영혼은 아수라독존마공의 깨달음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그의 육체는 그 경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죽음 직후에 영혼조차 없이 스 스로 부활한 것만 보아도 그 육체가 기억하고 있는 아수라독존마공의 힘 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미 백이충의 육체는 조화지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 "하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이 없는 조화지체는 단지 강건한 신체외에는 아무 런 의미가 없는데?" 아수라독존마공은 조화지체에서 무한의 힘을 끌어내어 인간이 낼 수 없 는 마신적 힘을 뿜어내는 마공. 그 마공을 알지 못하는 한 조화지체는 내 력없고 무병장수할 수 있는 좋은 육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같은 경지의 깨달음이라지만 광한비급의 깨달음은? "호풍환우를 자유자재로 하는 신선의 길. 그보다는 못하지만 광한비급이 한단계 아래로 쳐주는 것이 바로 자연의 힘을 내력처럼 이용하는 것. 설 마 깨달음은 얻지 못했지만 광한비급을 보고 공감한 것만으로... 광한비 급 상의 깨달음을 되찾지는 못해도 그 밑의 경지는 운행할 수 있다는 것 일까?" 자연의 힘을 이용한다. 말은 쉽지만 조화지경에 이른 그 경지를 누가 터 득했을까? 쌍영마공을 완벽히 합일하면 아마 그 단계에 이룩할 것같다. 아수라독존마공과 광한비급상의 경지가 비슷하니 광한비급에서 말한 조화 지경은 아수라독존마공의 바로 아랫단계 즉 쌍영마공의 합일된 상태의 경 지일 것이다. "알 수 없군.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이 육체는 광한비급이 말한 경지 와 비슷한 아수라독존마공을 경험하여 조화지체를 이룬 상태. 깨달음을 얻은 영혼이 조각나고 그 이룩한 도(道)도 조각나서 육체가 이룬 경지를 다시 알 길은 없지만, 그 일부의 작은 깨달음만으로... 광한비급의 경지 에 공감했다는 것만으로... 광한비급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 밑 의 경지는 조화지체가 저절로 비슷하게 흉내낸다는 것인가? 어처구니없 군." 엉뚱한 가설이지만 가설이 만에 하나라도 맞다면 지금의 서투른 경지도 이해가 간다. 제대로 밑에서 쌓아 올라간 길이 아니다. 반대쪽 저 멀리 높은 곳에 서서 이쪽 낮은 길을 내려다보다가 마음이 동해 이쪽으로 뛰어 내려 도착한 길이다. 당연히 이쪽 길에 도착은 했을망정 자세한 주변 길 이나 올라온 사정을 모른다. 그 경지에 맞게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 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백이충으로서 있을 수 있는 길은 열어주는군. 이 힘이 있 어 혈존의 잔재들을 모두 치움으로서 백이충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 다. 어쩌면... 천기노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군. 하늘이 나를 시켜 천 리에 어긋난 자들을 청소하라는 것인지도... 하늘의 별 중에서 유일하게 술법으로 그 힘을 빌릴 수 없었던 천황성이 바로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 군." 현천장원의 깊숙한 내실. 그곳에 한 절세의 미녀가 누워 잠들어 있었다. 생매장당했다가 천기노인에게 구출되어 삶을 되찾은 금혜연이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금혜연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눈물자욱으로 얼룩져 있 었다. 검은 그림자가 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섰다. 현천장원에는 적지않은 고수가 있고 오행신인, 옥령선자, 생사활의 등의 절정고수가 있 는데도 이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 는 물끄러미 금혜연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불렀다. "소매. 일어나." 금혜연은 현천장원에서 치료를 받고 일찌감치 깨어났음에도 백이충을 찾 지 않았다. 아마도 적지않게 불안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눈물자욱이그것을 증명했다. 혈지존에게 납치된 이후에 그녀의 약혼자가 혈 존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깨어나서는 백이충이 혈 존에게 영혼만을 빼앗겼던 상태라고 들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생사를 넘 나들면서 그녀의 충격은 컸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임을 감히 찾지 못한 금혜연의 상황이 익히 짐작가는 백이충이었다. "소매. 나다. 너의 백가가야." "으으...음. 백가가?" 백이충의 안스러운 부름에 금혜연의 봉목이 살그머니 떠졌다. 그녀의 눈 가득히 그토록 그리웠던 임의 모습이 보였다. "백가가? 진짜 백가가예요? 흑흑흑." 백이충을 보자 금혜연은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트렸다. 그 울음에는 그동 안 그녀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백이 충인지 혈존인지 혼돈스러웠던 마음. 천하의 대마왕 혈존이 바로 그녀 곁 에 있었다는 충격. 그 모든 것이 울음 속에 녹아 있었다. "그래. 소매. 너의 백가가란다." 백이충이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중한 존재였다. 백이충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서문대장군부의 가족이 아니라 바로 이 품안의 소중한 작은 소녀때문이었다. "소매는... 소매는 너무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백가가가 백가가가 아니라는..." "그런 소리는 귀에 담아둘 필요가 없어. 나는 언제까지고 소매의 백가가 이니까. 설사 내가 죽어 몇 백번 환생한다고 해도 오직 너만의 백가가로 남아있을 거니까." "흑. 백가가. 사랑해요. 사랑해요." 금혜연이 정신없이 백이충의 입술을 찾았다. 백이충도 그녀의 입술을 찾 았다. 단순한 육체적 접촉이 아니었다.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이 고 넘는 경험을 한 백이충에게는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중요했고 금혜연 이기에 입을 맞춘 것에 전율적인 환희를 맞이했다. "소매. 나도 사랑한다." 백이충은 금혜연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이러려고 야밤에 금혜연 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 보다도 더욱 유혹적인 것이 바로 지금의 금혜연이었다. 백이충은 떨리는 손으로 금혜연의 옷을 벗겼고 금혜연은 기대하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 녀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백이충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사랑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소매를 내 곁에서 떼어내지 못할 거야." 백설같이 눈부시게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백이충의 달콤한 속삭 임이 이어졌다. 금혜연은 부끄러운 듯 드러난 알몸을 감추기위해 백이충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황홀하고 뜨거운 숨결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홍빛 감정으로 두 사람이 이 세상의 가장 행복한 기 분을 맛보고 난 이후에 백이충은 가만히 금혜연의 고운 머릿결을 쓰다듬 었다. "소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무엇이든지... 이제 소매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백가가의 옆에 있는 이상은 백가가의 정체가 무엇이든지... 소매는 영원히 백가가의 소매이니 까요." "그래. 나 역시 같은 심정이야. 하지만 소매가 더욱 소중하기에 소매에게 만은 어떤 비밀도 없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예. 가가. 말씀하세요." "아주 긴 설명이 될 거야. 그리고 나와 함께 어디를 가야 해. 그곳에는 내가 책임 질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소매도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죠? 저와 백가가가 함께 가야 하는 곳이요? 혹시 그 아이들이 있는 모란각?" "그래. 그곳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지. 그리고 내 과거의 잔재가 있 는 곳이고." 다정한 연인의 소근거림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계 속되다가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이어지기도 했고 따근한 열정적 정열이 불 어오다가 곧 자제하고 다시 진지한 이야기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밤 새 이야기는 계속 되었고 새벽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방안에 없었 다. 방안에는 황 대장군에게 남기는 한통의 서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잠시 볼일이 있어 둘이 같이 떠나지만 한달 이내에 돌아오겠다는 내용이 적힌 서찰이. 제 목:[연재] 혈존무적- 혈존무적 관련자료:없음 [1993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26 22:26 조회:259 혈존무적 혈존! 혈존! 혈존! 혈존! 천하를 공포로 물들였던 혈존이 드디어 돌아왔다. 이십 년 전 혈마전혼대 법으로 도망친 이후에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며 천하가 두려움에 떨며 기 다렸던 혈존이 드디어 돌아왔다. 그리고 혈존의 모습이 나타났다는 소문 과 동시에 혈존의 최후가 소문났다. 혈존과 더불어 천하지존들의 삼분지 이가 죽었다는 이른바 청마산의 참사가 소문난 것이다. 청마산 참사. 혈존이 단신으로 대 혈겁을 일으켰다는 소문의 이름이다. 과연 고금제일마답게 그는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혼자서 엄청난 참 극을 일으켰다. 변황과 백도, 마도의 고수들을 싸그리 쓸어버린 것이다. 비밀스럽게 중원을 침범하려 했던 변황의 고수들이 대거 죽었다. 각기 일 파의 종사였던 자들. 대뢰음사의 주지도 죽었고 천축의 공포 세력인 암흑 마찰, 번뇌마궁, 소뢰음사의 마불들도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중원을 혈겁 으로 몰고갈 그 많은 변황 지존들이 모두 혈존 일인에 의해 죽었다는 것 이다. 묘강의 고수들도, 동영 살막의 고수들도, 몽고 철혈마궁의 고수들 도... 모든 변황동맹의 고수들이 혈존이 뻗은 죽음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수백의 변황지존이 몰려와서 돌아간 자는 겨우 셋, 신비의 변황동맹 맹주 와 전대의 변황동맹 맹주였던 달라이 대라마, 그리고 천외사세의 하나인 천룡사주 뿐이라고 했다. 그 이후 중원을 정벌하러 왔다는 변황동맹의 소 식이 사라져 그 소문의 진실을 의심하는 자들마저 있었다. 소문 속에 혈존에게 당한 것은 변황동맹의 지존들만이 아니었다. 마도의 고수들도 있었다. 현재 백도를 압도하며 천하를 위협하고 있는 혈천마련 의 세력, 혈존의 제자들이었던 칠마황이 모조리 나서 단 셋만이 살아남았 다고 한다. 오직 천마황과 혈사황 철마황만이 살아 도망갔다는 것이다. 더욱 엄청난 소문은 혈존 이전에 마도의 종주였던 팔대천마들이 청마산 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낙마곡에서 죽었다는 자들이 모두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혈천마련의 배후가 바로 팔대천마라는 것이다. 혈마를 제외한 팔대천마의 칠인이 바로 혈천마련의 배후였다면 여태까지 판단되어온 마련의 세력은 열배이상 축소된 것이다. 팔대천마의 이름이 어떤 것인가? 그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혈존에 버금 가는 거마가 바로 팔대천마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한 둘도 아니고 팔대천 마 중에 일곱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등장 한 팔대천마가 등장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망소식을 함께 퍼트린 것이다. 천마와 만사지존을 제외한 다른 천마들이 씨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바 로 고금제일마 혈존에 의해서. 백도 또한 소문 속에서 낭패를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은 현무도선을 제 외하고 혜경성승과 무적장왕이 비밀리에 키운 천무호정단의 정예를 이끌 고 청마산에 올랐다고 소문났다. 과거 혈존을 죽였다는 천무삼성의 둘이 백도의 정예를 몰고 올라갔지만 무적장왕이 죽고 천무호정단의 반이 몰살 당했다. 혜경성승 역시 한 목숨 건져 간신히 도망갔다는 것이다. 백도조 차 소문을 듣고 경악하고만 엄청난 일이었다. 혈존무적. 과연 이런 말이 절로 터질 만한 엄청난 자였다. 그토록 수많은 천하 각파 의 일파종주(一派宗主)들을 무수히 죽였음에도 혈존은 세력을 거느리지 않고 홀로 나서서 대항했다고 한다. 단 혼자서 수많은 거물 효웅들을 참 살했으니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인간이 아니라 마신이나 마왕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전설 속에 등장 하는 누가 감히 혈존에 비견될 수 있을까? 소림의 달마조사가 그만한 무 위를 갖추었을까? 무당의 장삼풍 진인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을까? 근 천 년이내에 가장 번성했다는 흑백도(黑白道)의 거물들과 변황의 거물들을 단 혼자서 쓸어버린 혈존의 무위를 그 누구가 있어 비교될 수 있단 말인 가? 충격!!! 혈존의 죽음. 앞의 소문을 모조리 뒤엎는 진정한 충격적인 소문이 바로 뒤를 이었다. 바로 그 무적을 자랑하던 혈존이 청마산에서 기어이 죽음다는 것이다. 혈 존은 결국 무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속적인 충격파 소문의 끝은 혈존 의 죽음과 함께 바로 새로운 무적지존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옥룡왕. 당금 황제의 동생인 삼왕야이자 황실의 최고 권력자. 그가 단신으로 혈존 과 상대하여 해치웠다는 것이 이 모든 소문의 끝이었다. 물론 혈존도 혼 자서 수백명의 정사(正邪) 양도의 지존과 변황의 지존을 한꺼번에 해치웠 던 만큼 지치고 다쳤을 테고 옥룡왕이 그 틈을 타서 혈존을 해치웠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가 있든 결국 천하의 모든 무학지존들이 건 드리지 못했던 혈존을 옥룡왕이 해치운 것이다. 결국 옥룡왕은 천하제일의 무신(武神)으로 소문났고 그 누구도 감당 못 할 초인(超人)으로 알려졌다. 황제조차 한발 물러서서 경의를 표해야 할 영웅. 천하의 모든 힘을 다 기울여도 이길 수가 없는 고금제일인으로 옥 룡왕의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며칠이 흘렀다. 사람들은 혈존의 이름을 말하면 서 항상 그 뒤에 옥룡왕의 이름을 말했다. 혈존의 이름은 더 이상 두려움 의 대상이 아니었고 대신 두려움을 지워준 옥룡왕에 대한 칭송이 대화의 주를 이뤘다. 그렇게 혈존의 이름은 역사 너머로 저 멀리 사라지는 듯 했다. 그리고 혈 존의 천하는 재림하지 않고 옥룡왕의 천하가 올 것으로 사람들은 떠들곤 했다. 천하무림이 옥룡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문부터 갖 가지 소문이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소문에는 황제가 황위마저 옥 룡왕에게 양위하려 한다는 것이다. 백도도 흑도도 옥룡왕에게 복종해야 그 존재를 유지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옥룡왕에게는 혈존을 죽인 막강한 무공과 함께 엄청난 수의 천마강시가 있다는 소문도 함께 나돌았다. 천마강시. 그것은 단 한 구가 팔대천마나 천무삼성에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설상의 무적강시. 그것 이 옥룡왕에게는 천마강시가 한두 구도 아니고 백여 구 가까이 있다는 소 문이었다. 솔직히 단 한 구의 천마강시도 무림 역사상 제대로 제조했다는 소문이 나 오지 못한 상황에서 백여 구라는 숫자는 쉽게 믿기 힘든 소문이었다. 그 러나 백도도 흑도도, 그리고 변황도 그 소문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서 천하 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성급한 자들은 이 소문이 도는 시점에 벌써 단정을 지었다. 천하는 옥룡왕 전하의 것이라고. 옥룡왕은 황제가 될 것 이며 억조백성과 천하무림 또한 옥룡왕에게 복종해야 살아남을 것이라 고... 그러나... "그 누가 함부로 혈존의 이름을 입에 담는가? 흑도를 대표하여 그 종주 의 이름을 철혈존이 잇겠노라." 감히 죽은 혈존의 이름을 잇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천하의 공적이자 고금 제일마의 이름을 잇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그는 혈천마련을 막아내어 일 약 삼존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흑철존 곤무악이라는 자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비록 그가 철마황을 물리쳐 그 이름을 단번에 높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팔대천마와 칠마황을 쓸어버린, 변 황과 백도의 종주마저 대부분 쓸어버린 혈존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는 없 다. 하물며 그의 무공이 고강한들 일파의 종사도 아니고 흑방의 수하에 불과하지 않는가? "천하는 복종하라. 이제 천하는 이 철혈존이 갖겠다." 모두들 곤무악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생각했다. 하지만 철 혈존으로 자처한 곤무악의 위세는 감히 혈존을 입에 담을 정도로 대단했 다. 천하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철혈존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철혈존은 천 하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 순식간에 귀주와 운남을 장악했다. 흑방과 만독 궁을 포함하여 양대 지역에 속한 모든 무림세력을 손에 넣거나 괴멸시켰 다. 철혈존이 거느린 그 세력의 이름을 흑련이라 하거니와 흑련의 힘은 결코 백도맹이나 혈천마련에 비해 못지 않았다. 신비삼패가 흑련에 굴복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비삼패. 신비 속에 있지만 백도와 손을 잡고 그 위명을 날렸던 전설속의 문파. 혈 천마궁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문파. 신비삼패인 봉황곡, 천검문, 독 문의 이름은 결코 백도맹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흑련의 구성 원 중에 바로 신비삼패가 속해있었다. 신비삼패를 포함하여 운남과 귀주 의 모든 세력을 주축으로 흑련이란 거대세력을 이룩한 철혈존은 거침없 이 천하쟁패를 선언했다. 혈천마련을 몰아내고 사천을 흑련이 손에 넣었을 때 천하는 철혈존의 위 력에 놀랐다. 그리고 사천에 뒤이어 바로 호남성으로 진군했을 때는 경악 했다. 백도맹 남부 2개 본단이 있으며 모용세가, 백리세가, 형산파등이 있는 곳이 바로 호남성이었다. 백도맹의 4개 본단 중에서 2개가 있고 오대세가 중에서 천하제일가 모용 세가와 백리세가 두개의 세가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 그 힘은 백도맹 전력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전력면에서 보면 화산파가 있는 섬서보다 모든 면에서 강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호남이 흑련에 정복되었다. 흑 도의 종주라는 혈천마련이 호남보다 약한 섬서를 치고는 실패했거늘 일 개 지방세력으로 알려진 흑련이 백도의 삼분지 일이라는 호남을 무너트 린 것이다. 사돈을 맺은 모용세가와 백리세가 양가가 피눈물을 흘리며 짐을 싸고 분 노로 이빨을 갈며 백도맹으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흑련의 이름은 백도맹 과 혈천마련과 나란히 하게 되었고 흑혈존이라는 이름은 팔대천마의 천마 나 천무삼성의 혜경성승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갑자기 부상한 철혈존은 항상 혈존무적을 외치고 다녔다. "누가 혈존을 자처하는가? 진정한 혈존은 오직 뇌혈존 뿐이로다." 백도맹과 연맹을 맺었던 귀영신군이 동맹을 파기했다. 백도맹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뇌교의 교주인 귀영신군은 스스로 혈존의 영혼을 물려받았다고 자처했으며 또한 자신이 진짜 혈존이라고 떠들고 다 녔다. 그는 천뇌교만으로 천하제패를 선언했다.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모두들 그가 허풍을 떤다고 말했다. 하지 만 천뇌교는 단 며칠만에 감숙에서 다른 모든 문파를 완전히 몰아내었 다. 그 직후 혈천마련이 장악했던 청해마저 빼앗았다. 놀랍게도 청해 정복에서 뇌혈존이 동원한 절정고수의 수는 무려 오천에 해당한다고 했다. 혈천마련은 청마산의 피해와 사천을 빼앗긴 충격이 컸 는지 바로 청해에서 철수했다. 그 때만해도 천하는 천뇌교의 운이 좋았다 고 생각했다. 천뇌교가 섬서를 침범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섬서는 혈천마련의 혈사황이 공격했다가 패퇴한 곳이다. 그 덕에 무적일 황 모용풍의 이름이 천하에 퍼지기도 했다. 화산의 힘에다가 백도맹이 다 시 대거 몰려와 전력을 보강한 곳이다. 섬서의 주력은 화산파이고 화산파 의 저력은 가히 소림이나 무당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소 문대로 마련과의 전투로 인한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화산파는 쉽게 상처를 복구하고 그 성세를 회복했다. 구파일강 중에 삼강에 든다는 소문 이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산파가 멸문했다. 천년마교도 혈존도 혈천마련도 하지 못한 일을 천뇌 교가 해치워버렸다. 화산에 있는 동혈의 기인들이 전멸했고 화산에서 백 도맹으로 도망간 자들은 이십 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것도 천뇌교의 일차공격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에는 모두들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뇌교에서 무 려 이만의 절정고수를 동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럴 수고 있다고 생 각이 바뀌었다. 청해성에서 천뇌교가 동원한 오천의 절정고수도 놀랍거 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뇌교는 무림 제패를 선언할 정도 로 강했다. 모두들 이만이라는 엄청난 절정고수를 가볍게 동원할 수 있 는 천뇌교를 새로운 눈으로, 두려운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천뇌교에는 수만이 아니라 수백만의 절정고수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중원의 일류고수 들 이상만을 모아도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야 겨우 십만을 채울까 말까일 것이다. 그런데 수백만, 그것도 일류고수가 아닌 절정고수 수백만이라 니. 그것을 다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천뇌교를 향해 우려하는 시선이 많 아진 건 사실이었다. 천뇌교는 누구도 두려워할 만한 힘을 가진 세력으로 거듭났다.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절정고수를 거느린 세력. 천뇌교는 이렇게 소문나기 시작했고 모두들 귀영신군을 뇌혈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혈존의 부활이 바로 뇌혈존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였다. 천뇌교의 힘은 무적이며 그 지존인 자신 뇌혈존도 무적이라고 혈존무적 을 외치고 다니는 뇌혈존이었다. 백도에 은밀한 소문이 떠돌았다. 혈존은 청마산에서 완전히 죽었지만 그 원령이 백도 내에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흑도천하를 이룩했었고 또 평생 소원으로 삼았던 혈존이 원혼이 되어서 백도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흘려듣기에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소문이 었다. 소문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사자 몸 속의 벌레처럼 백도를 속에서부터 파 고 들어가 먹고있는 두 명의 요귀가 있으며 바로 이 두 요귀의 정체가 혈 존의 망령이라고 했다. 요귀에 홀려 백도 스스로가 두 망령에게 굴복하 고 있다고 했다. 소문에 둘은 스스로 백혈존과 요혈존이라 부르는 망령들 이었다.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하는 자들도 있다. 백도 내에 혈존의 잔재가 스며 들 리가 없다고 부정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 백혈존이니 요혈존 이니 하는 망령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백도의 명숙 들이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사건에는 반 드시 백혈존이니 요혈존이니 하는 혈존의 망령과 연관이 지어졌다. 백혈존과 요혈존이 백도를 포섭하고 어둠처럼 번지고 있음이 빈번히 일어 나는 백도의 살인사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이름높 은 구파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이 속절없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의 시 체 위에는 '백도를 배신하고 백혈존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를 처단한 다.'라고 쓰여있는 것도 있고 '요혈존에게 속은 배신자를 처벌한다.'라 고 쓰여진 것도 있었다. 백도의 고수들을 죽인 자는 백혈존과 요혈존이라는 말이 있었다. 처음에 는 혈존을 추종하는 흑도의 고수들이 백도 고수들을 죽이고 다니는 줄 알 았다. 그런데 문제는 흉수가 항상 시체 위에 불명예스러운 말이 담긴 글 귀를 남긴다는 것이다. 흉수는 죽은 백도의 고수들을 혈존에 포섭된 첩자 라고 소문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백도는 극도로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도맹 자체 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백도고수들 도 소문이 무성해지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단결 하나로 따지 자면 마도나 사도 등 흑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일치단결 했던 백도인 데 이제는 그 누구도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맹주 종리연은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새로이 백도의 책임자 이자 영웅이 된 모용풍은 맹주 대리임에도 불구하고 백혈존과 요혈존의 이름이 연관된 살인사건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백도맹은 맹 전체가 백도 고수들의 불신과 의심을 받게 되었다. 명령체계가 흐트러 지고 조직이 마비되었다. 분단과 백도의 명숙들이 수습을 하려고 애써도 그 혼란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그 바람에 백도는 외부에 신경 쓸 틈이 없게 되었다. 호남을 흑련에 빼앗겨 모용세가와 백리세가가 피눈물을 흘리며 본거지를 옮기게 되었어도, 섬서를 천뇌교에 빼앗겨 화산파가 멸문되었어도, 백도 맹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이미 사태를 수습할 힘이 백도맹에게는 없는 듯 싶었다. 무적일황 곤무악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각지에서 백도고수들이 백도맹을 성토하고 혜경성승이나 무성 종리연을 찾는 소리가 높아졌다. 백도 내에 일어나고 있는 신비의 살인사건들, 백 혈존과 요혈존의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백도의 재기는 불가능할 듯 싶었 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백도맹은 이제 종이호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 고 망령이 되어서도 백도를 괴롭히고 있는 혈존의 망령, 백혈존과 요혈존 을 두려워했다. 두 혈존은 백도 안에서 혈존무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었 다. 처음 혈존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만해도 옥룡왕이 천하를 차지하리 라고 예측하는 자가 대다수였다. 그만큼 혈존을 죽인 위업은 대단했다. 그의 힘은 무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황실에게까지 미쳤다. 황성에서 황제가 옥룡왕에게 황위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옥룡왕이 충심에서 그것을 세 번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옥룡왕부의 무사들은 옥룡왕이 황제가 된 듯 행세하며 고관들을 무 서워하지 않았다. 동창이나 금의위 무사들도 옥룡왕부의 무사들에게 굽실 거렸다. 그 위세는 무엇으로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혈존을 죽였 다고 알려진 옥룡왕에게도 혈존의 어두운 그림자의 손이 미쳤다. 그 망령 은 마혈존이라는 그림자였다. "본좌를 죽인 원한을 갚기위해 되살아났다. 본좌 혈존은 마혈존이 되어 옥룡왕을 찢어 죽이리라." 지진이 일어나 얼마 전에 옥룡왕부가 허물어 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많 은 인부를 동원하여 옥룡왕부는 복구되었다. 그런데 새로 복구된 옥룡왕 부에 옥룡왕과 그의 가족이 들기로 한 날, 마혈존이 옥룡왕을 죽인다는 글귀가 벽보가 되어 옥룡왕부의 사방 벽에 도배되었다. 황성이 발칵 뒤집혔다. 옥룡왕부의 무사를 비롯해서 황성의 모든 관군이 동원되어 범인을 잡으려고 난리를 쳤다. 범인은 옥룡왕부를 비웃듯 잡히 지 않았고 벽보가 붙은 지 오일 째 되는 날 새로운 옥룡왕부가 또 한번 폭발했다. 지진처럼 땅이 흔들렸고 옥룡왕부의 호위무사 이천이 갑작스 런 사고를 피하지 못하고 폭사당했다. 누군가 화약을 묻어놓고 폭발시킨 것이다. 다행히 옥룡왕은 무사히 피신했다. 하지만 너무 피해가 컸다. 황성에 대 대적인 사건수사가 벌어졌고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어도 모 두 잡아들여 심문을 했다. 갑자기 나타난 마혈존의 소문 덕에 옥룡왕의 관심이 모조리 그쪽으로 몰리는 바람에 이제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는 일 은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 커다란 소동이 벌어 졌는데 도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황성 북쪽 외곽에 고관들이 자주 머무르는 별장 형식의 저택들이 많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옥룡왕부가 파괴되고 오일도 안되어 성 외곽의 호화로운 장원 한 채에 일이 일어났다. 장원의 담 벽에 저번과 똑 같은 내용의 벽보가 붙은 것이다. 옥룡왕은 그 누구도 모르게 거처를 옮 겼거늘 그가 있는 거처를 마혈존이 귀신같이 알아내고 또다시 불길한 내 용의 벽보를 붙인 것이다. 옥룡왕은 벽보가 나붙자 장원을 샅샅이 수색했다. 혹시 저번처럼 장원 주 변에 화탄이나 화약이 묻혀있는지 조사했고 장원에 황실과 관부의 수많 은 고수들을 풀어놓았다. 저번에는 너무 얕보다가 속절없이 당했지만 이 번에는 만전을 기해 장원 주위에 얼쩡거리는 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 다는 의지였다. 옥룡왕의 새로운 거처에 벽보가 다시 붙은 지 오일 째 되는 날, 장원을 넘는 세 사람의 복면인이 있었다. 그들은 당당히 장원을 침입했고 곧 수 백의 절정고수와 수천의 관군에게 포위되었다. 예상은 세 복면인이 당연 히 사로잡혀야 했지만 드러난 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삼인의 복면인의 힘은 수백의 절정고수와 수천 관군을 거의 몰살시켰다. 옥룡왕이 초빙한 수백의 절정고수 중에는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전대의 거마나 황실에 투신했던 잊혀진 협객이 많이 끼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 니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 사장 충격적인 일은 옥룡 왕의 무사들 중에 소문에만 나돌던 천마강시 다섯 구가 섞여있었고 천마 강시마저 속절없이 당했다는 진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은 일파만장(一派萬 丈)의 파고를 불러일으켰다. 단 한 구로 팔대천마나 천무삼성과 비견할 수 있다는 전설의 천마강시. 그 천마강시가 옥룡왕의 호위 속에 다섯 구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천 마강시를 제외한다해도 무림에 그 이름을 날리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수백의 절정고수가 있었다. 그들조차 제외한다고 해도 사천의 관군이 있 었다. 그런데도 단 셋이서 그들 모두를 거의 몰살시켰던 것이다. 셋 중에서 가운데에 있던 자가 마혈존이었다. 그는 오히려 천마강시를 가 볍게 생포하여 납치해갔고 남은 둘은 장원에 끝까지 남아 도망가는 자들 을 제외하고 대항하는 옥룡왕부 무사들 모두를 죽이고 또 죽였다. 옥룡왕 이 내보냈던 다섯이 천마강시가 아니라 마혈존과 같이 왔던 살인귀 둘이 천마강시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이후 옥룡왕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마 혈존의 이름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옥룡왕은 마혈존을 잡는 자에게 옥룡 왕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약속했다. 소문에 옥룡왕은 마혈존을 두려워하여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다고 했다. "혈존의 지정한 힘은 금력이다. 본좌 금혈존이야말로 진짜 천하를 정복 할 혈존의 환생이다." 천하 상계를 대표했던 현황방. 그 현황방의 방주마저 스스로 혈존을 자처 했다. 마치 혈존을 외치는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천하는 이 제 혈존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들만큼 공포를 느꼈다. 혈존은 죽어서 진짜 공포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금혈존 오형록, 과거의 만승패검은 자신을 따르는 현황방의 십방주를 모 두 죽이고 상황을 비롯한 상계의 원로들을 현황방의 감옥에 잡아 가둠으 로서 영웅에서 일약 마왕으로 변신, 혈존으로 자처할 만한 자격이 있다 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현황방이 혈천마련을 상대하기 위해 황금으로 끌어들였던 용병의 수가 무 려 십만이라고 한다. 그 힘으로 만승패검은 혈존의 위업을 달성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현황방의 거침없는 기세에 광서 칠륜교가 먼저 스스로 금 혈존의 밑으로 굽히고 들어왔다. 복건성에서 백도맹에 고개를 숙이고 있 던 삼합회도 슬그머니 허리를 현황방 쪽으로 향해 숙였다. 그것만으로 단 숨에 금혈존은 중원 삼개성을 집어삼켰다. 혈존, 혈존, 혈존..., 어이하여 갑자기 혈존을 자처하는 자가 이토록 많 이 나타나는지... 앞의 혈존들이 워낙 대단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천하는 이제 금혈 존이라 불리는 자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금 혈존은 현황방 내에 혈겁을 일으킨 것을 제외하고는 큰 전쟁도, 큰 사단 도 일으키지 않았다. 광서 와 복건 또한 스스로 굽혀 들어온 것이기에 현 황방의 힘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기에 천하에는 금혈존과 현황방의 힘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도 많았다. 무림인이 보기에 무력이 아닌 금력은 자신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혈존은 이미 천하를 경악하게 할만한 일을 터트렸으니... 바로 그가 끌어들인 용병 십만의 정 체는... "어서 오시오. 법존." 금혈존이 끌어들인 용병은 바로 변황동맹의 십만 무사였다. 금혈존은 궁 지에 몰린 변황동맹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이었다. 변황 십만 정예를 거느린 법존은 금혈존을 만나기 전까지 상당한 곤란을 만나고 있었다. 기세 당당하게 서장에 변황동맹을 복구하여 집결한 것까 지는 좋았는데... 중원을 정복하러 온 변황 십만 정예무사가 제대로 된 전투한번 경험하지 못하고 수뇌들을 모조리 잃어버렷다. 실재적인 전투전 력은 그대로 있지만 그들을 지휘할 자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모두 청마 산에서 죽은 것이다. 수백에서 수천까지 제자들을 거느리고 통제하며 군 림하던 지휘자가 모두 죽어 나자빠졌으니 당장 변황동맹 지휘체계 자체 가 마비상태에 빠져 버렸다. 혈존에 대한 무서움을 너무 무시했는지 모른다. 설마 단 일인에게 변황동 맹의 문파 지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목숨을 잃을 줄이야. 결국 변황 수 백 개 문파가 법존이 청마산을 다녀온 이후에 수뇌를 바꾸어야 했다. 혼 란이 없을 리가 없다. 그만큼 변황동맹의 타격이 컸다. 하지만 중원에 정 체가 알려진 이상 이제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중원은 얕볼만한 세력이 아니다. 지금 마도와 백도가 싸우고 있기에 변황 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을 뿐이다. 청마산에서 천마와 혜경성승이 모두 법존과 변황의 존재를 알았으니 당장 중원은 변황동맹을 경계하기 시작 할 것이다. 또한 혈지존의 천마강시들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존재들이었 다. 빨리 혼란을 수습하고 조직을 정비하지 못하면 애써 중원정벌을 하러 왔다가 오히려 몰살만 당하고 돌아갈 판이다. "이렇듯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법존은 오형록의 손을 잡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 때의 법존에게 내밀어 진 금혈존의 반가운 제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 결과 이렇게 변황 십만 고수는 중원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중원 에 잠입할 수 있었다. 물론 법존은 금혈존이라 자칭한 오형록이 감히 혈존의 후계로 자처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다만 생각 외로 머리가 잘린 타격이 큰 변황동맹의 세 력을 수습하고 다시 조직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까지 손을 내밀어준 현황 방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변황의 십만 무림인이라면... 적은 세력이 아니었다. 그것도 변황의 정예 로 알려진 무림인이라면. 현재 알려진 중원무림 전체가 분쟁을 멈추고 힘 을 합쳐야 겨우 대항할 만한 숫자이다. 어차피 천축과 변황이라는 곳이 중원 전체보다 적지 않은 거대한 땅인 것이다. 그곳의 정예가 중원정벌이 라는 기치아래 모두 몰려왔으니... 한 두 방파나 한 두 세력으로는 감당 하지 못할 엄청난 세력. 어쩌면 백도와 마도, 그리고 혈지존이 손을 잡 고 대항해야 할지 모르는 거대 세력이다. 십만의 무림인이라는 것은 엄청난 것, 절정고수나 절세고수의 수가 소수 라면 그 차이를 쉽게 메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이다. 그러나 수 뇌가 없는 조직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오합지졸. 지휘자가 없으면 십만 이 관병보다 못한 존재가 결국 무림인이다. 개별적인 전투에만 익숙한 무림인 다수는 오히려 집단전투에 익숙한 일 반 군졸의 군대에게도 당할 수 없다. 집단전투에서는 개인적 힘이 크게 중요하지 않고 집단 전투에는 익숙하지 못한 무림인은 지휘자가 없이는 어떻게 움직일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법존의 십만 변황무림 세력 은 변황동맹의 조직을 재정비하기 전까지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상태였 다. 중원의 눈을 피해 변황동맹을 정비할 시간과 장소가 천축 법존에게 는 필요했고 그것을 벌어 준 것이 바로 바로 금혈존이었다. "서로의 이해가 합치된 결과일 뿐이오." 두 사람이 만났다. 중원을 정벌하러 온 천축법존, 그리고 혈존의 환생이 라 자처하는 현황방의 금혈존. 현황방은 상계를 삼킨 세력이었다. 엄청 난 자금이 무한이 있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서장에서 변황동맹의 고수들 을 은밀히 광동으로 불러들였다. 남해해상무역회의 일천 선단이 동원되 어 그 누구도 모르게 변황의 무사 십만을 현황방에 불러들인 것이다. 현 황방은 현황방대로 변황동맹의 막강한 무력을 이용하려는 생각이겠지만 변황동맹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만 이루면 현황방 쯤 하고 단번 에 집어삼킬 음흉한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원하는 바가 같으니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원하는 바라니? 본 법존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만." 법존이 딴소리를 해대자 금혈존 오형록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마주보 던 법존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미소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 다. 법존은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크흐흐. 법존께서는 본좌가 혈존의 환생임을 믿지 않는 모양이구려." "단향검군의 후계자가 어이하여 혈존을 자처하는지 몰라도 본 법존은 청 마산에서 혈존이 죽고 그 영혼마저 파괴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 람이요. 본존에게 그대가 혈존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자체가 무리요. 엉뚱 한 헛 수작은 그만두고 이제 각자 속에든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어떻소?" 법존이 이죽거렸다. 중원과 한판 대결을 벌이기 위해 당장 금혈존의 도움 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에게 이용당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금혈존 에 대한 평가만 끝나면 집어삼킬지 진정한 동맹을 맺을지 결정할 생각이 었다. 공정한 거래를 하려면 서로 대등한 힘을 가져야 했으며 또한 솔직 하게 원하는 바를 밝혀야 했다. "크흐흐. 광망하구나. 둘째. 네놈의 잣대로 함부로 본좌를 평하지 마라." 오형록의 눈에서 회색빛 살기가 터져 나왔다. 순간 법존의 온 몸에 소름 이 오싹 끼쳐나왔다. 그 눈빛이 너무도 익숙했다. 청마산에서 질리도록 본 눈빛이 아닌가? "너... 너는?" "크흐흐. 언제부터 본좌에게 말을 놓았느냐? 왜 그리 살기를 내뿜느냐? 청마산 때처럼 대자비불진이라도 펼쳐 덤벼들 생각이냐?" 변황문파의 지존들을 제외하고는 중원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는 대자비불 진이라는 말이 금혈존의 입에서 나왔다. 천축법존의 안색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진짜... 진짜 사부의 환생이오? 어떻게? 영혼이 산산조각 났거늘..." "청영지존. 네놈이 본좌의 문하로 들어올 때의 일을 말해야 본좌를 믿겠 느냐? 본좌가 시켰다고는 하지만 어린 놈이 본좌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같은 사문의 천축 승 오십 명의 심장을 산 체로 파헤친..." 법존이 질린 표정을 짓다가 손을 내뻗었다. 빠르고 강한 일장. 법존이 가 장 자신 있어하면서 구명절초로 여기는 대비불마장(大悲佛魔掌이)었다. 가장 빠르게 엄청난 위력을 발할 수 있기에 기습으로 적당한 절학이지만 청마산에서 혈존의 아수라독존마공에 단 일초도 버티지 못한 무공이기도 했다. 콰앙! 금혈존 오형록 또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몸을 움찔 거렸 다. 천축법존은 손이 약간 저리기는 했으나 밀리지 않자 갑자기 용기가 솟아나왔다. (해볼만 하다. 청마산 때와 같은 절대적 위력의 힘이 없다. 이 정도면 이 길 수 있다.) 법존은 의외로 승산이 있자 얼굴에 생기가 돌며 다시 연환(連環)으로 장 법을 바꾸려하자 오형록이 손을 저으며 그를 말렸다. "둘째 그만둬라. 십만의 부하들을 모두 폭사(爆死)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 겟지?" 법존의 몸이 그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금혈존은 법존에게 앉기를 권하 며 부드럽게 말했다. "중원은 변황동맹 입장에서 적지이지. 그동안 계속 긴장해오다 기름진 음 식과 술, 따듯한 잠자리를 보고 모두들 긴장이 풀린 듯 싶구나. 밑에 십 만근의 화약이 묻혀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여기는 현황방의 총단인데 이곳을 터트릴 생각이란 말이오?" "크크. 나만 살아있으면 현황방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황금만 있으면 이 따위 건물이나 무사들, 조직은 한달 이내에 다시 만들 수 있다. 너는 아 직도 본좌를 모른단 말이냐?" "....." 혈존의 잔인함으로 무엇을 못하겠는가? 만약 눈앞의 자가 진짜 혈존의 환 생이라면 법존은 진정 호랑이 입안으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게다가 현 황방의 자금력이라면 십만근의 화약은커녕 백만근의 화약도 구할 수 있으 리라. 그리고 혈존의 말은 항상 위협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 조용하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도대체 어찌된 것이오? 어떻게 살아난 것이오? 보아하니 또 혈마전혼대 법과 같은 사술을 이용하여 다른 육체로 옮긴 것 같은데... 분명 이 두 눈으로 영혼이 조각난 것을 보았거늘." "크크크. 혈존은 불사이며 또한 무적이다. 소멸이란 없다. 어떤 경우도 다시 부활하는 것이 바로 혈존이라는 이름이다. 비록 그때의 상처가 너 무 커서 본좌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너무 많은 가짜가 생겼지만 본좌는 기어이 완전한 부활을 이룩할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 거요? 청마산에서 당신을 공격했던 자들의 복수요? 아니 면 천하의 파멸이요?" 오형록은 회색빛 흉악한 안광을 발하며 법존에게 말했다. "크흐흐. 그 따위는 아니다. 청마산에서의 일로 인하여 오히려 과거의 혈 존이 죽고 본좌 금혈존이 탄생하였으니... 본좌가 원하는 것은 모든 가 짜 혈존을 죽이고 중원 천하를 차지하는 것. 그리고 진정한 혈존으로 거 듭나는 것. 너는 본좌의 약해진 무공을 보고 착각을 하지 말아라." 금혈존의 회색빛 눈빛이 점차 더 강해졌다. "크크. 영혼과 함께 넘어온 그 마공의 잔재는... 이미 뿌리를 내렸다. 본 좌의 무공은 갈수록 강해진다. 물론 가짜들도 마찬가지 상황이겠지만. 크 흐흐. 오년이면 진짜가 가려지리라. 본좌가 살아남는다면 지금의 열 배 이상 무공이 강해진다. 청마산 때보다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시간동 안 너희 변황동맹을 고용하겠다." "당신과 손을 잡은들 우리들에게 좋을 것이 뭐요? 혈존과 협조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자는 들어보지 못했소.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것 이 바로 우리 제자들이오." "둘째. 크흐흐. 네 속셈을 알고 있다. 네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중원정복 이 아니다. 천축과 변황에 네 적수가 될 소지가 있는 자들의 싹을 중원 의 힘을 빌려 없애는 것이 바로 원하는 것. 너와 네 후손이 영세(永世)토 록 변황의 패자로 군림하기를 바라는 것이 네 소원임을 안다." "그... 그런 터무니 없는 모함을. 본좌의 소원은 변황의 수치를 갚고 중 원을 정벌하는..." "솔직해져라. 네 절대권좌의 확립, 거기다가 본좌 때처럼 중원이 강성해 졌을 때의 변황 침입위협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천축과 변황의 힘을 모으고 권위와 권력를 한 손에 쥐기 위해 너는 변황의 염원인 중원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흥, 네 진정한 목적은 본좌가 말한 바와 같다. 본좌는 네가 청마산에서 적당한 성과를 올리자 천축으로 다시 물러설 생각부터 했던 것을 안다." "으음. 혈존이 확실하기는 한 것 같구려.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알아내다니." "네 뜻대로 천축 법존과 그 후손은 향후 오백 년 간 천축과 변황의 패자 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본좌가 진짜임이 인정될 때 중원 또한 본좌의 후예 들이 영원토록 군림할 것이다. 변황과 중원의 패자와 서로 동맹을 맺을 것이며 둘을 위협하는 도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서로 힘을 합해 그들을 누를 것이다. 이것이 본좌의 오백 년 동맹제안이다. 어떠한가? 서로 손 을 잡고 중원과 변황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자는 의견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소? 천하 전체를 차지해도 욕심을 만족하지 못 하는 혈존이? 본 법존이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지금 본좌 금혈존에게 중요한 것은 변황 따위를 정벌하는 일이 아니다. 바로 가짜들을 모두 물리치고 중원을 정복하여 진정한 혈존으로 인정받 는 것. 스스로 자신이 진짜 혈존 임을 확신할 증거를 본좌의 영혼이 필요 로 한다. 그것이 지금의 본좌가 원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그리고 네게 선 택권은 없다. 여기서 수하들과 폭사하던가 본좌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렇게 금혈존은 변황동맹과 손을 잡았다. 규모 면에서는 혈천마련이나 백도맹조차 능가하는 최강의 세력 변황동맹, 그리고 천하의 황금을 손에 꽉 틀어쥐고 있는 금혈존. 들이 힘을 합함은 금력과 폭력이 서로 합쳤음 을 의미했다. 금혈존은 그 힘으로 혈존무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었다. 신강 십만대산에는 그곳이 있다. 모든 마도인들의 성지. 수천 년간 흑도 의 종주로 지내온 곳.이름만 들어도 공포스러운 곳. 천년마교. 당금 무림에서는 혈천마련이라 불리는 곳. 혈사문과 합쳐져 흑도의 모든 세력을 삼키고 천하를 정복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혈첩을 보냈던 마도의 본산이 바로 십만대산에 있다. 한달 전만해도 혈천마련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단숨에 청해, 사천을 삼켰고 섬서에서는 패했지만 화산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갔다. 비 록 일황삼존이라는 신예의 출현으로 네 곳에서 잠시 고배를 마시기는 했 지만 혈천마련이 백도맹과 더불어 천하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양대 축이라 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 었다. 팔대천마가 되살아났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나돌더니 소문이 돌자마자 다 시 천마와 만사지존을 제외한 다른 천마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칠 마황도 삼마황만을 남겨놓고 넷이 죽었다고 한다. 그것이 부활한 혈존에 의한 짓이라 할지라도 천년마교, 혹은 혈천마련의 체면은 엉망으로 구겨 진 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혈존을 최후에 처리한 것도 천마나 만사지 존이 아닌 옥룡왕이었으니... 이래저래 체면이 구겨지고 형편없이 평가절하 된 데다 천하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혈천마련. 그들에게 청마산의 위기를 틈탄 또 한번의 도전이 있었다.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세력을 형 성하여 공격한 것이다. 사천을 빼앗기고 청해를 빼앗겼다. 비록 혈존과의 전투로 입은 상처를 치 료하기 위해 천마와 만사지존이 삼마황을 시켜 모든 마련의 세력을 신강 십만대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망정 천하인의 눈 에 혈천마련이 종이호랑이로 비춰지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이제 천하는 혈천마련을 주목하지 않았다. 백도맹도 주목하지 않았다. 당 금 천하는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과 옥룡왕의 천하였다. 그들이 바로 천 하 관심의 초점이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천하인의 이목에서 빗겨 난 십만대산에서 다시 조용하게 그러나 거대하게 기지개를 펴려는 자가 있었다. "오늘 부로 마련은 그 이름을 천년마교로 되돌린다." 천마의 이름은 과연 거대했다. 십만대산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전혀 움직 이지 않은 것 같은데 구름같이 마도인들이 몰려들었다. 마도의 가장 위대 했던 존재를 꼽으라면 혈존과 천마를 꼽을 수 있고 그중에서 혈존은 증오 의 대상, 천마는 마도인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천하가 모르고 있는 가 운데 천년마교의 세력은 오히려 몇배로 불어나 있었다. 혈천마련의 태상련주로 취임한 천마는 그 얼굴을 드러내고 즉시 조직을 옛날 천년마교의 것으로 되돌리려고 했다. 마승상이고 삼마황이고 천마 의 말에 거역하지 못함은 물론이었다. 게다가 천마와 맞먹을만한 권위와 힘을 지닌 만사지존은 천마와 일심혼원공으로 인해 한마음이었다. "천하에 본교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다. 앞으로 마련의 일곱 개 외전과 내 전의 역할을 천년마교의 외당(外堂)과 내당(內堂)으로 바꾼다. 외당은는 대외적인 전투직급이고 당주는 내당주보다 한단계 직급이 낮다. 외당 총 호법은 마승상이 맡는다. 천년마교로 다시 이름을 바꾼 조직의 교주는 바 로 마교의 정통을 이은 본좌 천마가 앉을 것이고 부교주는 만사지존이 될 것이다." 누가 있어 천마의 말을 거역할 것인가? 철마황이 발끈 했다가 천마황의 제지로 간신히 분을 삼켰다. 대세는 백 몇십 년 만에 되살아난 팔대천마 의 수좌인 천마의 것이지, 살아남은 삼마황의 것이 아니었다. 혈천마련 이 성립되면서 칠마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마도거두들도 지금은 천마에 게 먼저 머리를 숙이는 상황인 것이다. "내당 칠개 당의 당주는 다음과 같다. 천마당의 당주는 음산귀수, 혈사당 의 당주는 혈악대제." 백수마존, 벽력쌍마... 등등 줄줄이 전대의 마왕들의 이름이 천년마교 내 당주의 직위로 불러졌다. 칠마황이 간신히 복종시켜 수하로 삼았던 전대 의 마왕들. 칠마황에게는 거만을 떨기도 했던 마도 원로들이 천마의 앞에 서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들이 명성을 떨쳤을 당시 이미 천마는 천하를 지배하던 자였다. 천마가 호령하는대로 몸을 굽혀 복종의 자세를 취할 뿐이다. "본교의 교주와 부교주, 바로 밑에는 삼대 호법이 있다. 그 지위는 내당 주와 외당 총호법보다 위이다. 삼대호법은 삼마황이 맡는다." 천마황,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복종을 뜻하는 자세이다. 이미 천마황과 혈사황은 천마와 만사지존에게 무공을 일심혼원 공을 배운 몸이라 그들에게 얽매였다고 할 수 있다. 마음 속에 반역의 씨 앗을 품고는 있지만 당장은 천마를 거역할 힘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본교의 소교주로는..." 천마의 말이 여기까지 이를 때 천마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과거의 천년 마교는 사실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천년마교는 바로 혈천마련 의 변신으로 칠마황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장소가 천년마교에 있다 는 이유로 천마는 그의 모든 것을 훔쳐가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그 세력 의 후계자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지명하려 하고 있다. "천마님. 그 분이 도착하셨습니다." 천년마교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원로들의 하나, 천지마인이 허 겁지겁 천마의 앞에 부복했다. 그분. 천지마인과 같은 대마두가 존칭을 하며 흥분할만한 자가 과연 누구일까? 천지마인의 보고에 천마와 그 옆 에 있는 만사지존마저 흥분했다. "그런가? 그 아이가 도착했는가?" "진정 그 아이가 맞는가?" 둘의 얼굴이 흥분과 격동으로 흔들렸다. 세월조차 비켜간 두 마왕의 마음 을 흔들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을 흥분시킨 그분, 혹은 그 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저 멀리서 방문자를 알리는 호명소리가 들렸다. "천년마교와 혈사문의 정통 후계자이신 쌍교잠룡 혁우비님이 도착하셨습 니다." 쌍교잠룡 혁우비. 그는 천마잠룡과 혈사봉황 사이에 태어난 자이다. 바 로 천마와 만사지존의 핏줄이다. 그러기에 거마들의 얼굴에 흥분이 일어 났던 것이다. 천마가 사라진 이후 천년마교를 책임졌던 자가 바로 천마의 아들 천마잠 룡이다. 천마잠룡은 천년마교의 정예가 낙마곡에 묻혀 그 기세가 꺽이자 스스로 세력을 거두고 신강으로 물러나 재기를 노리던 효웅이다. 하지만 당시 마도의 피해는 너무 컸고 팔대천마의 실종으로 흑도는 완전히 분열 되었다. 천년마교를 정비하는 데만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사지존이 사라진 이후 혈사문을 책임졌던 여인이 바로 만사지존의 외동 딸 혈사봉황이다. 그녀 역시 무너진 사문(邪門)을 일으켜야 하는 책임을 짊어졌다. 여인의 몸으로 사도의 종주자리를 굳건히 지켜야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 의무감에 무너지지 않고 혈사문을 끝까지 지킨 여인이 바로 혈 사봉황이다. 이 두 남녀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 서로를 만났고 양대 거대세력의 힘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혼인을 했다. 나이는 많았지만 모두 무공이 높고 주안술이 뛰어나 겉으로는 젊은 청년과 미녀의 모습이었다. 천년마교와 혈사문이 힘을 합하고 동맹을 맺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 당 시 등장하기 시작하여 천하 마도를 손에 쥐려던 혈천마궁 때문이었다. 천년마교와 혈사문은 수십 년 동안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은 혈존에 의해 멸망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천하 마도와 사도가 모두 무너졌다. 그 직 후 백도가 봉문했고 변황도 무릎을 끓었다. 바야흐로 혈존천하의 시대가 도래하던 때였다. 그리고 천마잠룡과 혈사봉황은 혈천마궁의 뇌옥에 갇혔 다. 지금으로부터 삼십년 전쯤이다. 혈사봉황이 백 수십살이 넘는 나이로 아 이를 낳았다. 혈천마궁과 싸울 때는 부부가 너무 바빠 아이를 만들 틈도 없더니 뇌옥 안에 갇혀 한가홉게 되자 아이가 생겼으니 참으로 묘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겨난 아이가 바로 천마잠룡의 아이였고 천년 마교의 정통 후계자인 혈우비의 탄생이었다. 혈천마궁은 마도의 집단이었고 그만큼 천년마교를 존중해 주었다. 천년마 교의 후계자인 천마잠룡과 혈사봉황이 뇌옥에서나마 부부애를 꽃피웠던 것도 마궁의 마도고수들이 그들을 존중하여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뇌옥의 출산은 혈사봉황의 몸에 큰 무리를 낳았고 결국 혈사봉황은 산 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 소식을 듣고 천마잠룡도 시름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둘의 애정은 결코 필요에 의한 수단 때문만은 아 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혈존이 제자들의 반란과 백도와의 합작으로 인해 죽었을 때, 천마황은 뇌 옥에 갇혔던 천년마교와 혈사문의 제자들을 풀어주었다. 마도 고수들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년마교의 인정이 필요했다. 결국 천 마황과 혈사황은 천마지존공과 천사음유공을 내세워 천년마교와 혈사문 의 정통임을 내세웠던 것이다. 당시 천지마인, 음산귀수등은 마도와 사도 의 정통 후계자 혁우비가 탄생한 것은 아나 그의 행방은 몰랐다. 혁우비 가 태어나자마자 배교쌍노에 의해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승 상의 중재로 그들은 천마황과 혈사황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천년 마교의 제자들은 천마황의 밑으로 들어갔다. 팔대천마와 칠마황이 혈지존의 연락을 받고 청마산으로 떠나기 직전, 천 마는 한통의 서찰을 받았다. 스스로 쌍교잠룡 혁우비로 자처하는 자로 뿌 리를 찾아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혁우비는 천마황에게 자신이 천년마교의 정통 후계자이니 과거 천년마교의 제자들을 우대하여 혈천마련에 영입했던 것처럼 혁우비 자신도 후계자에 맞는 대우를 해주 면 혈천마련에 순순히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혁우비는 그동안 자신이 배교쌍노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 그리고 혈무영 이라는 쌍노의 조직에서 영주로 컸다는 것 등, 그가 살아온 인생을 서찰 에서 모두 밝혔다. 그는 얼마 전에야 배교쌍노의 서류 중에서 자신의 신 세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근본인 천년마교에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서찰 에서 밝혔다. 천마와 만사지존은 놀랍고 기뻤지만 당시에는 혈존에 대한 복수심이 훨 씬 더 컸다. 혁우비를 만나는 것보다는 혈지존과 힘을 합해 혈존을 죽이 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혁우비에 대한 접대와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일을 천지마인에게 맡기고 청마산으로 떠났던 것이다. 얼마 전 천지마인이 돌아왔다. 혁우비가 진짜임을 확인한 것이다. 혁가 의 자손은 그 누구와도 다른 신체적인 특징이 있다. 역대 마도종주를 가 장 많이 배출한 집안답게 혈관에 마혈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 른 누구도 위장할 수 없는 피의 혈통, 천지마인은 혁우비의 피가 마혈임 을 확인했다. 그것은 혁우비가 천마와 만사지존의 혈육임을 증명하는 것 이다. "드디어... 드디어." 천마와 만사지존은 동시에 격동에 몸을 떨었다. 천마강시의 몸으로 부활 한 직후에도 혈육에 대한 뜨거운 마음만은 잊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에 서 멀어지자 더욱 혈육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혁우비 의 출현은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힘이 되었다. 혁우비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천년마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수많 은 마웅 들이 도열한 가운데 당당히 혁우비가 걸어들어왔다. 지금의 그 가 천년마교 소교주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 의 과거가 아무리 천한 것이었어도 상관없다. 과거와 지금의 혁우비가 어 떻게 지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미래에 그를 무학종사(武學宗 師)로 만들 능력이 천마와 만사지존에게는 있는 것이다. 혁우비가 어떤 인물이든 그 핏줄 하나의 이유만으로 천마와 만사지존은 그에게 천하 마 도와 사도를 통합한 천년마교를 계승할 능력을 갖추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다. "소손이 두분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혁우비가 감격한 얼굴로 천마와 만사지존을 보고 절을 했다. 만년거목처 럼 든든한 천마와 만사지존의 두 눈에도 뿌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혈 육에 대한 정이 혁우비에 대한 일체의 의심과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이 다. "본교의 소교주는 바로 오늘 도착한 천년마교의 정통 후계자인 쌍교잠룡 혁우비이다." 천마가 소리쳤고 천년마교 출신의 거마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만사지존 또한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바람에 혈사문 출신의 거마들도 따라 혁우비의 이름을 외쳐대었다. 천년마교 내의 가장 강대한 두 세력 이 환호하자 다른 유파의 마도 사도 문파도 혁우비의 이름을 환호했다. 천마황과 혈사황의 얼굴이 찌푸려지든 말든 이미 대세는 천마에게서 혁우 비로 이어지는 추세였다. 바야흐로 흑도를 책임지는 천년마교의 소교주 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크흐흐. 이 순간을 즐겨라. 천마. 만사지존. 혈육 상봉의 기쁨이 네놈들 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겉으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혁우비의 마음 속은 비웃음으로 가득찼 다. 그는 혁우비이되 혁우비라 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혈존과 혁우비 의 영혼이 결합된 자였으며 스스로 패혈존이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혁 우비의 영혼에 혈존의 기억과 집념을 가지고 있는 패혈존이었다. (현재 본좌의 무공으로 한꺼번에 너희 두놈과 세명의 배반자를 처리하는 것은 힘들지. 허나 너희들은 실수했다. 천마와 만사지존. 네놈들이 본좌 가 만든 천마강시를 몸으로 하는 바람에 네놈들의 몸에는 본좌가 만든 약 점이 생겼다.) 뜨겁게 흐르는 혁우비의 눈물 속에는 천년마교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는 잔혹한 회색 빛 안광이 숨어있었다. 청마산에 있었던 자라면 결코 잊지 못한 눈빛이었다. (미친 것들. 마도의 본산(本山)은 천년마교가 아니라 혈천마궁이다. 본좌 가 천년마교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순간 천년마교의 이름은 다시 한번 혈 천마궁으로 바뀌리라. 천마와 만사지존은 혈육이라 방심하다가 몸의 약점 으로 본좌에게 제압당할 것이고... 그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배반자인 제 자들 삼마황을 움직이리라. 크흐흐. 오년 정도면 본좌가 진짜 혈존이 될 것이며... 지금 늘어나고 있는 마공의 증진 속도로 볼 때 그때의 힘은 삼 마황과 두 천마가 합공을 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으리라.) 신강 십만대산, 세간에는 혈천마련으로 이름났고 지금 천년마교로 이름 을 바꾼 곳에서 음습한 뿌리가 내리려하고 있었다. 천년마교의 이름을 혈 천마궁으로 바꾸려는 패혈존이라는 음습한 악마의 꽃의 뿌리가 혈존무적 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 귀혈존의 죽음 관련자료:없음 [19940]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26 23:57 조회:139 귀혈존의 죽음 모란루로 향하는 산길에 두 연인이 다정히 걸어가고 있었다. 백이충과 금 혜연이었다. 백이충은 금혜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금혜연은 그를 이해했다. 둘 사이에는 이미 현세를 뛰어넘는 사랑이 걸쳐져 있었다. 둘 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굳건했다. "혈무영의 아이들은 내가 돌봐줘야 해. 쌍노가 키웠지만 내가 이용한 아 이들이니까. 내가 돌보지 않으면 그들은 천하를 향해 폭주하는 마인이 되 거나 혹은 미쳐버릴 거야." "그보다는 혈무영의 여자영주들이 보고 싶은 것 아니에요?" "소매. 섭섭한 소리좀 하지 마. 내게는 소매밖에 없는 것을 알잖아." 백이충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금혜연이 야속하다는 듯 섭섭하게 말했 고 금혜연은 혀를 내밀면서도 골치가 아팠다. 백이충의 마음은 확고한 듯 했지만 금혜연이 약속한 바가 있는 것이다. (고 계집애들에게 백가가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어떡하지? 백가가의 말을 들어보니 보통 계집들이 아닌데. 남자 영주들이 혈존의 분 신이 되어 사라지고 없으니 남은 일천의 혈무영 들은 고 계집애들의 지휘 를 받을 것이고... 혈무영이라는 것들은 장차 백가가의 큰 힘이 되겠지? 백가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마음이 아프지만... 내가 희생해서 그녀들을 약속한대로 받아들일까?) 금혜연이 갈등을 일으킬 때 백이충이 그녀를 졸랐다. "그보다 무당의 검법을 좀 알려줘. 칠성검법(七星劍法)에서 구궁(九宮)으 로 변화될 때 어떻게 통한다고 했지?" "참. 나보다 더 잘하면서 왜 자꾸 나한테 물어봐요?" 금혜연은 투정을 부리듯 말했지만 백이충에게 무당의 태극권과 칠성검법 을 알려주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둘다 무당의 기초공부인데다 백이 충 역시 무당과 인연이 없지 않으므로 알려준다 한들 아무런 잘못도 없 는 일이다. 백이충이 무당의 기초공부를 수련하는 것은 그가 새로 얻은 자연지기 때문이었다. 처음 백이충은 새로 얻은 힘, 자연에게서 무한의 기를 얻는 능력을 자신 이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가 얻은 경지를 백이충은 자연지경(自然之境)이라 일단 이름 붙였다. 백이충이 자 연지경에 도달한 것은 육체가 얻은 조화지체에 빌붙어 광한비급 상에서 얻은 작은 마음의 동화 덕이었다. 우연이 겹쳐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도 의 바로 밑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차근차근 근본부터 쌓은 것이 아니기에, 구결조차 모르는 체 저절로 얻은 경지이기에 그 힘의 조절이 힘든 것이라 생각했다. 단지 그 힘을 쓰는 방법을 몰라 익숙히 조절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니 백이충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자신이 얻 은 힘은 조화지체라는 육체의 경지와 광한비급에게서 얻은 작은 마음의 만족감이 어울려 생겨난 힘. 광한비급에서 설명하는 득도 밑의 자연지경 은 선을 추구하는 수련으로 도달하는 무공경지, 백이충이 알고있는 무학 의 이치 즉 마공과는 아예 상성이 맞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물론 백이충 정도의 깨달음이라면 형식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어차 피 깨달음에는 마공(魔功)과 선공(仙功)의 구분이 없다. 최강의 마공이 든 하오문의 삼류 초식이든 단순한 손동작, 발동작 형식만을 빌어도 자연 의 기를 발출할 수 있고 그것이 자연지경의 위력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 나 자연의 힘이 일으켜진 이후 결과를 표출하는 형식 자체는 무공의 형식 을 빌린다. 깨달음으로 얻은 힘이니 생성될 때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지 만 형태와 위력으로 구현되는 결과에 있어서는 결국 무학의 이치를 빌리 므로 그 길이 정 반대가 되는 것이다. 선을 추구하는 자연지경의 기운을 깨달음으로 일으켜 마도(魔道)의 무학 이치를 빌어 그 위력의 결과를 얻으려 하니 제대로 조절이 될 리가 없 다. 아무리 무한한 자연의 힘을 본신 내력대신 사용할 수 있는 자연지경 의 경지에 올랐다해도, 결과를 도출하는 무학이론의 방법이 마공구결이라 면... 결국 생성된 힘과 표출되는 결과가 서로 극성이니 결국 말짱 헛된 일이다. 백이충이 아는 모든 무학의 이론과 이치는 그 세계가 마공과 사공의 범주 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도와 사도의 무공 방면에는 고금사에 누구도 올라 가 본 적이 없는 경지를 개척한 대종사(大宗師)이지만 선을 추구하는 쪽 의 선가무공, 아니 마도와 사공이 아닌 쪽의 무학은 아예 불가이건 도가 이건 심지어 일반 하오문의 무공조차 알지도 못하는 초보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백이충이 자연의 기를 마음껏 이용하려면 마공과 상관없는 무 공, 이왕에 상성까지 맞추려면 도가(道家)나 선가(仙家)의 무공을 얻어 야 했다. 그것이 삼류이든 절정이든 상관없다. 단지 그 쪽 길로 향하는 방향만 백이충이 알면 된다. 이미 그 힘을 만들 경지는 충분히 도달해있 기에 그 힘을 사용할 사용방법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금혜연은 요 즘 사부가 되어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하고 태극권과 칠성검법을 백이충에 게 알려주면서 연신 툴툴대는 것이다. 자연지기를 이용하여 태극권과 칠성검법을 펼치니 백이충의 경지가 자연 히 높지 않을 수가 없다. 도가무공이라는 것이 애초에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사람들이 익히는 무공인 것이다. 자연지경의 무공은 도가무공 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무당의 기본 권법과 검법도 백이충 이 펼치면 무당의 최고라는 태극일원공의 무공에 못지 않게 보인다. 금혜 연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백이충으로서는 아직도 도가무학 의 기초이론이 헷갈리니 자꾸만 금혜연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백이충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마도 천하에서 마기나 요기, 마공을 익힌 자들의 기운에 대해 백이충만큼이나 익숙한 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미 그 자신은 마인에서 벗어났지만 그의 영혼 일부가 그런 것들을 지배해 왔던 만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다. 백이충은 자신들의 목적지에서 엄청난 마기를 느꼈다. 마공을 익힌 무림인이 뿜어대는 마기였다. 모란루는 강소성 소주에 있다. 소주는 절강의 항주와 함께 향락의 이대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영웅들이 가장 들리고 싶어하는 모란루가 소주 에 있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태호를 끼고 있는 소주의 절경은 천 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의 하나이니까. 그런데 소주에 들어서기도 전에 백이충은 풍류대신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기를 느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마인들이... 수백? 아니 수준을 따지지 않으면 마도 인이 삼천은 뭉쳐있다." 백이충은 금혜연의 손을 잡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강소성은 백도 맹의 구역이지만 오래 전부터 모란루가 쌍노와 함께 장악하고 있는 지역 이었다. 백이충이 혈존이었을 때 모란루가 마음에 들어 백마제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 절대 수하 마인들을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장소가 바로 모란루가 있는 소주였다. 심지어 혈존의 직속 수하라 할 수 있는 혈무영도 영주를 제외하고는 일 천 혈무영 누구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특별히 백이충이나 배 교쌍노가 허락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마도고수의 숫자가 몇 백을 넘을 수가 없는 곳, 그게 바로 모란루가 있는 소주였다. 그런데 대충 헤아려 도 삼천이 넘는 마도고수가 마기를 숨기지도 않고 소주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소매. 가자." 백이충이 부드럽게 금혜연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꺼지듯이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람보다 빠르게 그들의 모습이 도시 쪽으로 움직인 것 이다. 항주에 도착한 백이충은 약간 놀란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확실히 소 주에는 마도인들이 들끓고 있었다. 혈천마련 소속의 고수가 아닌 백마제 소속의 고수들이었다. 겉으로는 백도맹의 영역에 들어가는 강소성 소주 에 이토록 많은 마도고수가 돌아다니는 데에도 백도맹의 간섭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소매. 저들은 모란루를 중심으로 흩어져있다. 다른 마도인과 상관없이 자기 볼일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란루를 경계로 수상한 자들을 주시 하며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아무래도 백마제의 수하들 같다. 각기 다른 계통 문파의 마도인이지만 북해빙궁과 해왕군도의 고수들도 간 간히 보인다. 아마도 모란루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북해빙궁과 해왕군도요? 천외사세였던 그들이 멸망했던 것이 아니었군 요. 백가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모란루에 는 나만이 아는 비밀 통로가 있으니 쉽게 잠입할 수 있단다." 백이충은 백마제의 수하들로 보이는 자들의 이목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 지 않고 당당히 소주의 한 객잔에 들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허름한 객잔 이었다. 둘은 마도고수 들에게 전혀 경계 받지 않고 객잔에 들어갔다. 금 혜연만 면사로 얼굴을 가리면 백이충은 평범한 얼굴에 무공을 익힌 흔적 도 없기에 주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백마제의 수하 되는 아랫 것들이 백이충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리 없다. "여기는 모란루도 모르고 이곳 객잔의 주인도 몰라. 하지만 객잔 창고의 바닥에 모란루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있어. 쌍노와 나, 통로를 지키는 녀 석들만 아는 곳이지." 슬쩍 주위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백이충과 금혜연은 객잔의 식재료 창 고에 스며들었다. 허리 높이까지 쌓아져있는 쌀자루를 헤치고 보니 과연 바닥에 손잡이가 있었다. 백이충은 금혜연을 이끌고 지하통로로 들어갔 다. 문이 닫히고 저절로 쌀자루들이 날아와 지하통로의 위에 쌓였다. 백 이충이 허공섭물로 쌀지루를 끌어당긴 것이다. (소매를 데리고 온 것이 잘한 일일까?) 백이충은 작은 불안을 느꼈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금혜연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굉장한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통과하 는 지하통로 위쪽에 마기를 뿜어대는 고수들이 많았다. 마기를 많이 뿜어 댄 다는 것은 지독한 마공을 익힌 자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누구냐?" 지하통로 저 쪽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통로는 모란루의 뇌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에는 배교쌍노가 배치한 사람이 지 키도록 되어있었다. 일천 혈무영 중에서 최고의 살수기예(殺手技藝)와 합 격살진(合擊殺陣)을 익힌 혈영칠살이었다. "혈영칠살. 본좌다." 혈영칠살과는 안면이 있었다. 통로에 그들을 배치한 것이 바로 백이충이 다. 때문에 백이충은 자신있게 혈영칠살에게 얼굴을 드러냈지만 그 모습 을 본 혈영칠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지... 지존. 살아계셨습니까?" "물론이다. 누가 본좌가 죽었다고 헛소리라도 지껄였나?" 백이충은 그들이 귀신을 본 듯 놀랄 뿐, 평소처럼 바로 엎드려 절하지 않 자 이상한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혈영칠살이 뒤로 황급히 빠지며 비상호각을 부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절대 반역할 리 가 없는 혈무영의 대원이 그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거역하는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비상호 각은 대적이 침입했을 때를 대비한 비상신호였다. "감히. 본좌에게 반역하는 것이냐?" 백이충이 대노하여 손을 뻗었다. 뻗은 것은 태극권의 형식을 빌은 주먹인 데 보이지 않는 무형권이 펼쳐졌다. 갑자기 허공에서 콰쾅 하는 북치는 소리가 나며 혈영칠살이 일제히 꺼꾸러졌다. 허공을 격하고 무형의 권강 (券剛)이 기세를 타고 혈영칠살을 가격한 것이다. "크으윽." "감히 본좌에게 반항하다니. 네놈들이 미쳤단 말이냐?" 백이충은 혈존이었을 때의 모습을 상기하며 짐짓 노한 듯 소리쳤다. 그 모습이 조금도 두렵지 않아 금혜연은 뒤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지 만 쓰러진 혈영칠살은 마치 지옥의 염라대왕을 본 듯한 두려움에 질린 표 정을 했다. 무형권에 정통으로 가격당했다. 최소한 내장이 상하는 상처이니 오장육부 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고 있을 터인데도 혈영칠살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머리를 땅에 대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는 혈존은 결코 지금 의 그들 행동을 용서해줄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죽자니 그 끔직 한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설사 자결한다해도 영혼을 다시 불러들여 고문 할 수 있는 자가 혈존이었다. "지존. 제발 용서를. 저희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지었나이다." "도대체 본좌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천지가 개벽하지 않 는한 절대 배반할 리가 없는 혈무영인 너희들이 감히 본좌를 거역하는 행 동을 하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소주에 흩어져있는 마 도 고수들은 어찌된 것이냐?" "지존께 아룁니다. 혈무영주인 유부마영 조인후가 감히 반역을 일으켰습 니다." 백이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혈무영은 배교쌍노가 심혈을 기울인 조직. 절대 배반은 있을 수가 없다. 설사 배반하고 싶더라도 그들 몸에 걸린 사 술과 금제가 그러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천하 전체를 믿을 수 없더 라도, 심지어 배교쌍노조차 믿을 수 없더라도 혈무영만은 믿을 수 있다 고 혈존 때의 백이충은 자신했었다. 그런데 반역이라니? "흐흠. 분신이었던 놈의 반역이라. 이혼통제대법. 따지고 보면 그들 분신 이나 이 몸이나 영혼이 한쪽에 밀려나 육체를 제공 당했던 같은 처지. 그 럼 백가량이 파편이 그에게도 들어갔단 말인가?" 백이충은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현천장원에서 깨어 났을 때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했더니... 공존할 수 없는 천적이 마치 천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실재로 백 가량의 영혼이 과거 혈존의 분신들에게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비 로소 든 것이다. 그렇다면 혈존임을 자각하며 자신을 혈존이라 생각하는 혈존의 파편이 곳곳에 생겨난다는... 게다가 백이충에게 생긴 불쾌한 혐 오감으로 보아 본질이 같은 자를 본능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 다. "자세히 말해보라." "한달도 더 된 일입니다. 마화타님의 비밀 연구실이 터졌습니다. 그곳에 서 마화타님이 관리하던 악취결개와 혈무영 영주의 하나인 무형독와 구태 립 영주가 커다란 상처를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 갑자기 도망가 모습을 감 추었습니다." "악취결개와 무형독와가?" "예. 그리고 유부마영 조인후 영주가 그들의 뒤를 추적하며 나타났습니 다. 그의 손이 피범벅인 것으로 보아 도망간 둘은 조인후 영주에게 커다 란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마화타님을 잡고 있었는 데 이미 마화타님은 정신을 잃은 것이 조인후 영주에게 제압 당해 있었습 니다. 그리고 그 후 돌아온 조영주는 감히 혈무영과 일백 마제를 소집하 여 반역을 꾀했습니다." 백이충의 마음에 슬금슬금 불쾌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것은 이성적이거 나 혹은 어떤 이유가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유부마영 조인후의 이야기 를 들을수록 엄청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그림자를 본 기분? 거울 속의 자신이 손을 뻗어 자기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불쾌감이 라고 할까? 혹은 그 존재를 말살시키고 싶은, 본능에서 솟아 나오는 감정 이었다. 왜 이런 감정이 솟아 나오는지 이유를 알고는 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네가 감히 반역이라고 말했는가?" "조영주는... 지존께서 원래의 본체가 상해 버리셨다고 말씀하셨으며 자 신의 몸에 지존의 영혼이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감히 지존을 사칭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귀혈존이라 칭했습니다." "감히. 조인후가 스스로 본좌를 사칭했는데도 일백 마제와 혈무영들이 가 만있었단 말이냐? 그들도 조인후의 반역에 동조를 했단 말이냐?" 백이충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혈영칠살은 즉시 고개를 땅에 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백이충에게 주체못할 노기가 치밀어 오를 때 금혜연이 옆에서 살며시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자 흥분된 마음이 대 뜸 가라앉고 진정되는 것이었다. "다섯 명의 여인, 혈무 오 영주들은 조영주를 받들지 않았습니다. 하지 만 다른 네 영주는 이미 지존의 명을 따라 혈무영을 떠난 직후라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혈무 오령주가 혈무영 들을 지휘하여 조인후 영주를 체 포하려 할 때..." "조인후가 본좌와 쌍노만이 아는 혈무영의 금제를 발동시켰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혈무영 대부분은 조영주가 스스로 귀혈존이라 칭하 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설사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금제에 반항할 길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금제가 발동했는데도 끝까지 조영주에게 굴복하 지 않은 다섯 영주를 어리석다 탓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혈무영의 금제가 발동되었는데도 모란서시 등의 다섯 영주가 반 항을 했단 말이냐?" "예. 저희가 그분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한 점. 참으로 죽어 마땅합니 다. 그러나 조영주의 앞에 섰을 때는 그자가 진짜 지존인 것처럼 여겨져 서... 지존께서는 육체를 바꿔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의심치 못 하고 속았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본능적으로 조영주가 명한 바를 수행하 기 위해..." 쌍노가 베푼 혈무영의 금제가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있는 백이충은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배교의 금제에 거역할 의지를 지닌 인간이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무영의 금제가 발동했는데도 감히 그녀들이 반항할 수가 있다니. 그것 이 가능한 일인가? 쌍노가 자신들이 반항하는 일은 있어도 금제 때문에 혈무영은 반역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자신하던 금제였거늘. 백소련과 북 궁소림 등이 그런 금제의 힘을 순순한 의지만으로 이겨냈단 말인가? 흐 흠... 그런데 조인후가 명령한 거라니 그건 또 무엇이냐?" "조영주가 말하기를 혹시 이곳으로 조영주처럼 스스로 지존을 자처하는 자들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저하지 말고 비상신호를 보 내라 했습니다. 크윽. 지존을 거짓 칭하는 자가 아니라 지존께서 직접 오 셨음에도 본능적으로 조영주의 명을 따랐으니... 제발 깨끗한 죽음을 내 려 주십시오." "금제 때문에 거의 본능적으로 행한 일. 일어서라. 이번은 용서해 주마." "존명." 혈영칠살은 백이충이 너무 쉽게 용서해주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색을 하 며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백이충의 상념은 이미 혈영칠살에게서 떠나 있었다. 백이충은 혈영칠살의 말을 듣고 이번 일이 간단하지 않음을 느꼈 다. 일백 마제와 혈무영이 귀혈존에게 장악 당했다면 이미 모란루는 귀혈 존의 것이 된 것이다. 소주에 가득찬 마도고수들은 조인후의 명으로 일백 마제가 부하들을 소집한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지금에야 깨달았지만 혈존의 파편을 얻은 자가 한 둘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백이충이 혈존시절 만들었던 분신 모두가 각기 혈존의 혼 백 조각과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를 품었을지도... 오히려 그럴 가능성 이 더 많다고 백이충은 생각했다. "그럼 일백 마제 또한 모두 조인후에게 충성을 맹세했느냐?" "일천 혈무영이 모두 조 영주에게 소집되어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 고 일백 마제도 혈무영의 포위아래 결국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다만 북궁 소림 영주와 화소봉 영주의 영향으로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만이 불복 했습니다. 나머지 마제들은 모두 조영주를 귀혈존으로 인정했습니다." "진짜 혈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놈이니 인정안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겠 지. 그런데 밖의 고수들 중에 북해빙궁과 해왕군도의 녀석들로 보이는 자 도 꽤 있던데?" "조영주가 일백 마제에게 당장 부릴 쓸만한 수하들을 소집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제들마다 자신의 정예를 소집했고... 북해빙궁과 해왕군도 의 제자들은 감옥에 갇힌 인질 때문에 명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백이충은 두 눈을 감았다. 혈무영과 일백마제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모 란루로 왔다. 그리고 그들의 힘을 얻을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자신 이 명하면 그들이 순순히 따라올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미 혈존의 망 령은 모란루부터 뒤엎고 있었던 것이다. 귀혈존 또한 혈존의 파편이라는 점에서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 혈무영과 일백 마제에게 자신이 자신있게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 다. 지금 오히려 그들은 귀혈존의 명령하에 자신에게 대항할지 몰랐다. 게다가 자신은 혈존의 인생대신 백이충의 인생을 택했다. 영혼도 삶도 백 이충으로 살려한다. 혈무영을 되찾는 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른 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백이충으로 살더라도 무림 인으로 살려면 귀혈존이란 망령을 제거해야 하고 단지 평범한 보통 백이 충으로 살려면 외면하고 돌아가는 것이 낳았다. 어차피 자신은 평탄한 백 이충의 삶을 택했으니... "백소련과 북궁소림, 천소화와 화소예, 흑소옥은 소매와 의자매를 맺었어 요. 그 아이들을 구해야 해요. 가가. 그들을 구해주실 거죠?" "뭐? 소매. 언제 그녀들과 의자매를 맺었지?" "남자들은 너무 깊은 것을 알면 다쳐요. 하여간 백가가. 그녀들을 구해주 지 않으면... 알죠?" 제법 앙칼지게 눈을 흘기는 금혜연을 보고 백이충은 한숨을 쉬었다. 금혜 연의 마음이 결정되었다면 자신도 그에 따라야 한다. 금혜연의 사소한 부 탁 하나라도 거절하고 싶지 않은 백이충이었으므로. "결국 귀혈존이라는 조인후 놈과 나의 대결이 되겠군. 놈과 마주쳐 먼저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지금 누구를 따르던 혈무영과 일백마제는 문제 가 되지 않는다. 결국 혈존의 금제 때문에 조인후에게도 굴복한 놈들. 조 인후만 사라지면 또다시 나에게 굴복할 테니까. 문제는 어떻게 무사히 조 인후 녀석의 곁으로 침입하여 놈을 처리하는가 인데."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금혜연이 원하는 혈무오미의 구출과 귀혈존의 처리 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깨달았다. 혈무오미를 완전히 구출하기 위해서, 그녀들뿐만 아니라 일천 혈무영과 일백마제, 그리고 마제의 수하들마저 손에 넣고 귀혈존에게서 빼앗기 위해서는 결국 조인후를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귀혈존 조인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옥에 갇혔다는 혈무오 미를 구해 그녀들이 소란을 일으켜 조인후의 주위에서 다른 자들을 떼어 놓아야 했다. "혈영칠살. 일단 혈무영의 다섯 여자영주를 구한다. 바로 감옥이 이 위이 니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그것으로 본좌의 앞길을 막은 너희들 의 죄를 사하겠다." "존명." 본래 혈무영의 본거지는 따로 있었다. 모란루는 혈무영주 중에 모란서시 백소련의 거처일 뿐이다. 하지만 백이충이 무림에 나선 이래 일백 마제 와 혈무영을 모두 이곳에서 만났고 머문 곳도 주로 이곳이었다. 따라서 배교쌍노는 백이충의 행동에 따라 그동안 모은 세력을 모란루에 집중시키 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백 마제가 모이는 집회장소와 혈무영이 존재하는 곳도 모란루 지하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모란루가 혈존의 수하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시설은 바 로 모란루 지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지하에는 뇌옥이 하나 있다. 혈존이 나 배교쌍노의 눈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가두는 뇌옥. 한번 들어가면 살 아 나오지를 못하는 공포의 뇌옥이었다. "어리석은 것. 끝까지 그분을 인정하지 않을 테냐?" 뇌옥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백이충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뇌옥에 갇힌 자들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지존께서는 영혼을 자유로이 옮겨다니시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귀혈존이 야 말로 지존의 영혼이 옮겨와 부활사신 몸.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 리석은 네년이야말로 혈무영의 반역도이다." 어두운 지하뇌옥에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살수로 길러진 자들답 게 혈영칠살은 그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이동하고 있었다. 자연지기 를 느낄 수 있는 백이충은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금혜연 은 그들의 종적을 발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 는 금혜연과 백이충의 눈에 드디어 음성이 들리는 곳의 광경이 보이기 시 작했다. 넓은 광장. 그나마 깨끗한 옷을 입은 다섯 여인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바로 모란서시 백소련, 북해빙화 북궁소림. 천강옥녀 천소화, 칠채옥봉 화소예, 천회검후 흑소옥등의 혈무영 오대영주인 혈무오미였다. 그들의 안색은 마음 고생이 큰 듯 초최했지만 심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은 모습이 었다. "지존께서 너희들의 미모를 아끼지만 않으셨으면 벌써 너희들의 목숨은 없었다. 하지만 지존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렀다. 오늘까지 너희들이 지존 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일부터 너희들과 너희들의 수하들은 모두 백 마 제 어르신의 부하들의 정액받이가 될 것이다." "....이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느냐?"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한 분 뿐이라고 했다. 그분은 결코 조인후가 아니 다." 백소련의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혈무오미를 설득시 키던 남자를 화나게 했다. "어리석은 것. 너희들이 말하는 그분 지존이 바로 지금의 지존이라는 것 을 인정하지 않다니. 그렇게도 비천하게 되고 싶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내일부터 너희들은 지존께서 천하를 정복하는데 사용하실 무사들의 욕정 을 푸는 노리개가 될 것이다." 남자는 일백마제 중의 한사람. 잔설마왕(殘說魔王)이라는 자였다. 세치 혀로 천하를 농락한다고 할만큼 설득력이 대단한 자였는데 기어이 혈무오 미를 회유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세치 혀로 속이는 방법 은 알아도 여인의 분홍빛 사랑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실패였다. "그래도 같은 일백 마제로서 북해빙궁의 궁주와 해왕군도의 도주 체면을 봐서 너희들을 구하려 했거늘. 이제 어쩌는 수가 없다. 네년들은 비참한 최후를 당할 것이다. 그 전에 노부를 모욕한 죄 값부터 치러야 할 것이 다." 잔설마왕이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 께 백소련의 가슴쪽 옷이 길게 찢어졌다. 그 순간 잔설마왕의 두 눈이 순 식간에 붉게 충혈되었다. "크흐흐. 과연 무림칠미의 하나라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노부가 이 나 이 되도록 너 같은 미인은 처음 본다. 네년이 지존에게 계속 거역하기를 속으로 빌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너를 처음 맛보는 영광을 얻었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잔설마왕이 떨리는 손을 뻗어 백소련의 드러난 가슴을 만지려 할 때였다. (죽여라.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다.) 백이충의 전음이 흘러나왔고 혈영칠살이 일제히 뛰어나와 보이지 않는 무 형의 검을 휘둘렀다. 그 하나 하나가 잔설마왕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혈 무영. 그들 중의 일곱의 합격, 그것도 최절정 살수기예를 익힌 혈영칠살 의 합격살진이었다. 잔설마왕은 놀라는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다가 그 자 세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파아악. 피가 터져나오고 백소련의 가슴을 만지려던 그의 손이 미끈하게 잘라져 나갔다. 잔설마왕의 두 눈과 입이 벌어지며 비명이 터져 나오려 할 때 목에서 분수 같은 피가 쏟아지며 머리통이 허공을 날랐다. 어느새 잔설마왕의 사지가 조각나 잘라진 것이다. "소련. 소림. 소화. 소예. 소옥." 잔설마왕이 죽자 혈무오미 모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 었다. 그때 숨어있던 자리에서 금혜연이 뛰쳐나와 그녀들에게 달려갔다. 금혜연을 보는 혈무오미의 표정은 더욱 크게 놀란 모습으로 변했다. "성... 성녀님." "다친 곳은 없어? 고생은 안 했어? 이 언니가 너무 무심했지? 빨리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설마 너희들이 이토록 고생을 하는 줄은 몰랐어." 금혜연이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오랫동안 묶여 있었는지 혈무오미는 모 두 몸을 비틀거렸다. 백소련은 혈영칠살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가슴을 가 렸다. 금혜연의 출현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혈무오미들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백이충이 쓴 웃음을 머금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오셨군요. 살아 계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들의 마음을 가져가시 고 그대로 돌아오시지 않을 분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지존. 천녀들이 지존을 뵈옵니다. 돌아오셨군요. 저희들의 주인님." "아아. 충성이라 생각했거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자를 섬길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의 주인은 오직 한분 뿐이기에. 몸과 마음을 바칠 분 은 오직 주인님밖에 있을 수가 없기에." "지존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 국 조인후 그자는 가짜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합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 하겠습니다. " "아아. 기다렸습니다. 진정 기다렸습니다. 성녀와 함께 돌아오셨군요." 혈무오미가 모두 눈물을 펑펑 터트렸다. 그 눈에는 진실이라는 감정이 섞 여 있었다. 과거였다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이 충은 그녀들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그녀들의 눈물을 직시한다면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진 한 애정을 읽은 백이충은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충정에는 감동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는 술법에 의해 생긴 충성의 감정 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백이충의 말을 금혜연이 가로채며 노려보았다. 마치 여인의 공적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금혜연을 생각하여 여인들을 뿌리치려는 백이충을 오히 려 금혜연이 공격하는 것이다. "백가가. 무슨 말을 그리 하세요? 술법이나 금제라면 벌써 조인후라는 자 에게 소련 등은 넘어갔을 거예요.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를 본능적으로 알아요. 그래서 당신을 기다린 거예요. 그건 절대 진실한 마음이지, 술법에 의한 거짓 따위가 아니라고요. 그런 여인의 마음을 모 욕하다니." "그... 그게. 정말 괜찮겠어? 소매?" "빨리 그녀들을 안아 위로해주지 못해요? 남자로서 여인에게 따듯한 모습 을 보이라구요." 금혜연의 재촉에 백이충은 하는수 없이 혈무오미들을 하나하나 안아주었 다. 그때마다 혈무오미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백이충의 마음에도 흘러들어왔다. 한 순간 그 녀들과 백이충의 마음은 분명 하나로 합일되었다. 그것은 사랑.... 일까? 백이충은 그녀들을 안아줄 때마다 자연지기를 그녀들의 체내에 순환시켜 기운을 차리게 했다. 단순한 조치였지만 그녀들의 피폐한 몸은 즉시 생기 로 가득찼다. "너희들과 같이 갇혔다는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는 어디 있는가?" "저 안에 계십니다." "좋다. 그들은 너희들이 구해라. 나는 이제부터 조인후 그자를 찾겠다. 북해방궁주와 해왕군도주에게 그들의 세력에 걸린 금제를 풀어주겠다고 말해라. 이번 일이 끝나면 직접 내가 북해와 남해로 가서 금제를 풀어주 겠다고." "지존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풀려나면 즉시 수하들을 풀어 모란루의 사방으로 퍼져 최대한 소란을 일 으켜라. 소란이 크면 클수록 좋다. 그 틈을 타서 조인후와 결판을 내겠 다. 그 자를 처리하면 모습을 드러내겠다. 아마도 조인후가 사라지고 내 모습이 나타나면 모두들 승복하고 모두들 다시 복종해 오겠지." 귀혈존 조인후는 혈무영 십대영주 중의 하나였다. 백이충이 혈존일 때 그 분신의 하나로 선택되었고 지금은 스스로 귀혈존이라 자처했고 배교쌍 노와 백이충이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일백 마제와 혈무영을 장악하였다. 그 또한 혈존의 파편이라 할 수 있으니 혈존의 금제에 당해있는 혈무영 과 일백 마제를 장악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크으윽. 불쾌하다. 뭔가? 이 끈끈하고 더러운 혐오감은? 지긋지긋한 불 쾌감은?" 귀혈존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가 귀혈존으 로 자각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때 그는 마화타의 석실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을 가장한 두명의 가짜가 더 있었다. 스스로 광혈존과 독혈 존이라 자처한 가짜 놈들. 마화타의 실험물 주제에 스스로 광혈존이라 광 망을 떨었던 늙은 거지 가짜와 독으로 새까맣게 뒤덮인 주제에 독혈존이 라 우긴 무형독와 가짜였다. 그때 놈들을 볼 때의 불쾌감이 바로 지금 몸 가까이에 느껴지는 불쾌감 과 흡사했다. 그 때는 두 놈이 미처 자각을 끝내지 못한 사이에 마구 선 제공격을 했다. 미처 완전히 끝장을 내지 못하고 도망가게 한 것이 불쾌 할 따름이다. 그리고 보니 밖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마치 전쟁이 터진 것 같은 시끄러움이랄까? "혹시 그놈들 중의 한 놈이 침입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보다 훨씬 혐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답 답한 마음에 귀혈존은 창문을 열었다. 시원스런 바람이라도 맞을까 해서 였다. 하지만 창문이 열리자 떠들썩한 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모란루의 일부로서 불타고 있는 전각이 보였다. "저건 어찌 된 일이냐?" 짜증스런 감정에 와락 소리쳤다. 누각의 창문 밑으로 수많은 자들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곳곳에서 전투가 있는지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있 다. 게다가 화재가 자신이 있는 누각 가까이 번지고 있었다. "십 마제. 어이된 일이냐?" 어이하여 자신이 조용한 사색을 하고 있는 곳, 모란루의 중심 모란각 근 처에 저런 화재가 생긴단 말인가? 화가 날대로 난 귀혈존이 심 마제를 불 렀다. 일백 마제들 중에서 그에게 제일 먼저 충성을 맹세한 자들로 하나 같이 대 효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자들. "부르셨습니까? 지존." 나직히 불렀으나 대답은 그의 주위에서 들린다. 십 마제는 언제 어디서 든 그의 명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것이 귀혈존의 명이었 다. 새로운 귀혈존의 심복 십 마제는 그러한 이유로 모란루에 소동이 일 어났는데도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보고하라."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가 놔옥을 탈주했습니다. 또한 혈무 오령주가 같이 탈출했습니다. 혈무영 일부가 그들에게 합류하였고 북해빙궁의 제자 와 해왕군도의 제자들도 그들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 덕에 제압이 쉽 지 않은데 혼란을 부추기기 위하여 그들이 도망가면서 불을 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감히 그자들이 끝까지 본좌에게 거역한단 말인가? 부드득. 십 마제. 주 위에 포진하고 있는 일백 마제에게 명을 내려라. 한 시진의 여유를 주겠 다. 본좌에게 거역한 놈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사로잡아라. 이 세상에 서 가장 비참한 처벌을 주겠다. 본좌의 위엄을 보여주겠다. 한 시진이 다. 그 시각에서 늦어지면 일각에 한명씩 마제들의 목을 취하겠다." "알았습니다." 귀혈존의 노기가 전해졌음인가? 십 마제가 파랗게 질려 황급히 사라졌 다. 일백 마제의 상위 서열이라 할 수 있는 십 마제는 오히려 혈무영 십 대 영주보다 강한 자들이다. 숨은 세력의 지존들이니 하나 하나가 결코 범상한 위인이 아니다. 그러나 혈존의 금제에 걸려있는 이상 귀혈존에게 는 단순한 하루살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크흐흐. 믿을 수가 없군. 혈비." "존명." "십 마제의 뒤를 따라라. 그러나 나서지는 마라. 그들의 행동을 하나하 나 모두 파악하여 보고하라." "존명." 기척도 움직임도 없이 허공에서 소리만이 생성되었다. 십대 영주의 하나 가 될 뻔했던 혈무영의 살수, 혈비. 그 재능과 능력으로 따지자면 분명 일천 혈무영 전체에서도 일 이위를 다투는 자였다. 그러나 이용가치라는 면에서 배경이 딸려 십대영주에서 탈락되었고 배교쌍노에게 혈존의 칼 로,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암살자로 키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폐관하 여 모시게 된 주인은 혈존이 아니라 귀혈존이었다. 혈존이 배교쌍노를 믿 었듯이 귀혈존은 혈비를 다시없는 심복으로 믿고 있었다. 혈영이 떠난 기척이 느껴졌다. 불쾌한 기분으로 뒤로 돌아서던 귀혈존은 믄득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서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확인하 는 순간 혈존이라 자처하던 귀혈존의 안색이 진짜 귀신처럼 새하얗게 질 려버렸다.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심가 답지않게 귀혈존은 저도 모르게 정신 없이 뒤로 쾅쾅쾅 물러섰다. "너... 너는 누구냐?" 심지어 귀혈존의 음성마저 와들와들 떨렸고 눈앞의 인물을 가리키는 그 의 손가락도 덜덜 떨렸다. 설사 혈지존이나 천마가 앞에 있다고 해도 비 웃을 수 있는 담력을 가진 귀혈존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확신마저 있는 귀혈존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혈존도 지금만 은 떨리는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귀혈존의 뒤에 서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바로 백이충이었다. 그리 고 그 모습을 본 귀혈존은 다시 식은 땀을 흘리며 서너 걸음 물러서다가 벽에 가로막혀 뒷걸음질을 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기 싫고 보기 싫은 것, 두려운 것을 눈앞에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 너일 리가 없다. 너는 죽었어. 본체는 죽었다. 절대 살아있을 리 가 없어." "네가 보는 대로 나는 살아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네가 진짜 혈존일 리가 없다. 네가 진짜 나라 면... 나라면... 그럼 지금 여기 서있는 나는 누구란 말이냐? 네가 죽지 않고 되살아난 것이라면... 여기 혈존이라 스스로 자각한 나는 누구란 말 이냐?" "네가 생각해라. 나는 살아있다. 죽지 않았다. 그럼 너는 누구냐? 너는 그저 내가 만들어낸 분신에 불과한 존재다. 본체가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 한 가짜다. 보잘것 없는 존재란 말이다." 벽을 등지고 귀혈존의 얼굴이 극도의 공포로 부들부들 떨렸다. 자아를 부 정 당하는 공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자신이 가짜라는 느낌.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없다는 느낌. 얼마나 끔찍한 공포인가? 그것은 부모에게 너는 주워온 아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들은 어린 아이의 비참한 느낌. 엄마에게 지긋지긋한 아이라는 말을 들은 아이의 슬픈 느 낌. 원수를 갚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어릴 때 헤어진 부모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미칠 것같은 느낌. 사랑하는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나서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뻔뻔한 말을 내뱉는 것을 들었을 때의 배신같 은 느낌.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과 대면하는 바로 그 공포였다. 바로 자신이 가짜 일 거라는 느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부활한 것이 자신인줄 알았는데 단순히 자 신은 가짜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진짜 자신 은 바로 눈앞에 멀쩡히 서서 가짜인 자신을 혐오의 시선으로 보고있다 는... 그런 모든 진실이 마주 대하기 싫을 정도의 공포로 벌벌 떨고있는 귀혈존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는 가짜가 아니다. 진짜 혈존이다. 진짜 혈존의 영혼과 융합 한 귀혈존이란 말이다." "진짜는 여기있다. 너는 가짜이다." 백이충이 심리적으로 귀혈존을 압박하며 성큼 다가섰고 귀혈존은 발작을 하듯 몸을 떨며 뒤로 물러 서려하다 벽에 막혀 움찔거렸다. 그의 몸은 쉴 새 없이 떨렸고 마침내 발작적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나는... 가짜가 아니다. 다른 것들이 가짜다. 너도 가짜다. 만 약... 만약... 내가 가짜라고 해도 진짜가 될 테다. 오직 본좌야말로 진 짜 혈존이다. 귀혈존이야말로 진짜 혈존이다. 내 앞에 진짜가 있다면 그 진짜를 없애버리고라도 본좌가 진짜 혈존이 되고 말 것이다." 혈존. 그것은 유아독존의 고고한 자. 홀로 천하에 군림하는 자. 자신 이 외의 모든 자를 눈 아래로 내려보는 자. 그러기에 혈존에게는 타협은 없 다. 혈존은 하나이기에. 또 다른 자가 있다면 그것들을 치워버려야 자신 이 군림독존(君臨獨尊)하는 진정한 혈존이 되기에. 그 자신과 비슷한 또 다른 자가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혈존의 잔재를 품은 자들이었다. 귀혈존의 몸이 사르르 사라졌다. 사술에 대해서는 거의 혈존이나 배교쌍 노에 필적하던 유부마영 조인후. 그의 영혼과 혈존의 요력과 사술적 파편 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귀혈존이다. 그의 사술은 과연 과거 혈존 시절의 백이충보다 못하지 않았다. 다만 자연지기를 감지하는 백이충의 감각을 피하지 못했을 뿐이다. 콰르르릉.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굉음이 백이충의 몸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동 시에 백이충의 몸 한치 밖의 허공에서 격렬한 타격음이 연달아 울려퍼졌 다. 자연지기를 이용한 호신강기에 귀혈존의 장력이 연달아 터진 것이 다. 백이충은 충격을 받고 연달아 십여걸음을 물러났다. 자연지기의 힘을 빌려 호신강기를 펼쳤음에도 속에서 울컥 핏물이 솟아나 왔다. 보이지 않는 귀혈존의 장력에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아주 미약하 게나마 스며있어 가공하게도 자연지기의 호신강기를 일부 부수고 스며든 것이다. 백이충은 내상을 입었다. "감히 분신 따위가 본좌를 상처입히다니." 백이충이 귀혈존의 마음을 자극하는 내용의 노한 고함을 지르자 허공 한 구석에 움찔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원래 가공하던 자였다. 사술은 극에 이르고 환락미혼술이라는 남의 내공을 갈취하는 흡성대법(吸成大法) 류 의 사공에 정통하여 그 내공이 얼마인지 측량할 길이 없는 자였다. 그 힘 에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편이 뿌리를 내렸다. 서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자연지경의 경지에 오른 백이충과 비등할 정도 였고 귀혈존이 사술을 부려 모습을 완전히 감춘 지금 오히려 귀혈존이 약 간 더 유리한 상태였다. 그러나 본체라고 생각한, 자신의 진짜라고 생각 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귀혈존에게 있었다. 그의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백이충은 즉시 귀혈존이 있다고 생각하 는 곳을 향해 칠성검법을 펼쳤다. 검은 필요없었다. 그의 마음이 검의 형 상을 이루고 있기에. 콰르르르릉. 콰콰쾅!!! 허공의 공간이 베어졌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이층높이의 거대한 누각이 검기가 휘둘러진 사선방향 반으로 베어져 허물어졌다. 엄청난 결과였다. "우와아앗. 무엇이냐? 누각이 반으로 갈라졌다." "어어? 저기는 지존께서 계시는 곳인데?" 주변에서 소란스런 음성이 들렸지만 백이추의 귀에도, 귀혈존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혈무영과 마제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그 둘만이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다. 백이충은 자신이 벤 곳을 향해 무섭게 노려보았고 그곳에 서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귀혈존의 신음이었다. "가짜는 본좌를 이길 수가 없다." 백이충의 몸에서 줄기줄기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이 없는데 대기가 검 이 되어 허공을 난도질했다. 형상이 없는 검기가 한번 휘둘러져 건물 하 나를 베어버리는 엄청난 위력으로 뿜어져 나갔다. 허나 그 모든 것을 귀 혈존은 정면으로 맞이하였다. "크르르. 본좌야말로 진짜다. 너를 죽여 귀혈존이야말로 진짜 혈존 백가 량 임을 증명하겠다." 칠성검법에 일부 상처를 입은 데다 백이충이 연신 가짜라는 말을 하며 그 의 마음에 타격을 주자 귀혈존이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가 두려움을 덮어버린 것이다. 원래 조인후는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편을 자신이 가진 환락미혼술의 사공 에 결합시켜 가공할 힘으로 변환시켰다. 홀로 광혈존과 독혈존을 상처입 혀 도주시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백이충의 자연 지경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는 힘이었다. 사실 사술로 모습을 감춘 것은 백이충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섞여있 어 도망가고자 하는 심리가 무의식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이 충은 몸에 요력(妖力)과 사기(邪氣)가 사라져 법술을 펼칠수 없게 되었기 에 귀혈존이 계속 사술을 부리면 몹시 불리했다. 그래서 백이충이 그의 마음을 자극하여 모습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 "너의 영혼을 빨아 흡수하겠다. 그리하여 진짜 혈존이 되겠다." 귀혈존의 눈이 뿌연 회색으로 변했다. 그가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 낸 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공포는 사라지고 대 신 살기가 뭉클뭉클 솟아나왔다. 귀혈존의 몸에서 회색빛 기류가 쏟아져 나왔고 곧 백이충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며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크흐흐. 본좌의 특기가 무엇인줄 아는가? 그 누구의 정혈과 생기를 갈취 하는 환락미혼술. 그 때에도 내공으로는 천하에 부러울 자가 없었다. 하 지만 그것이 아수라독존마공의 씨앗이 합쳐져 어떻게 변했는지 아는가? 천지간의 기운 모두를 빨아들이는 천하무적의 대법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 다." 귀혈존이 허공에서 몸을 띠운 체 음산하 어조로 말했다. 그의 웅웅거리 는 말소리는 주변에 퍼졌고 주변에 있던 혈무영과 마제들 모두 경악과 공 포에 질린 시선으로 반으로 잘라진 누각 상공에 떠있는 귀혈존을 바라보 았다. 회색의 회오리가 점차 크게 자라고 있었다. "크윽. 그래. 네놈의 특기가 바로 환락미혼술이었지. 허공을 격하고 마음 먹은 대로 기력을 흡수하는 흡성대법의 최고봉. 어떤 존재의 기운도 빨아 먹는 그 가공할 사공에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편이 뿌리를 내렸구나." 백이충이 다급히 말했다. 귀혈존이나 백이충이나 특기로 삼는 그 뿌리는 바로 아수라독존마공이었다. 그러나 백이충은 광한비급을 읽고 완전히 사 공에서 벗어나 자연지경을 이루었고 귀혈존은 남의 무공과 진기를 갈취하 는 흡성대법(吸成大法)의 최고봉 환락미혼술에 마공의 뿌리를 내려 어떤 존재의 기운도 빨아먹을 수 있는 흡성마경(吸成魔境)에 이르렀다. 마치 귀혈존을 중심으로 진공상태가 된 듯 싶었다. 그곳에 모든 것을 빨 아들이는 회색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누각이 완전히 부서져 내려갔다. 땅이, 바위가, 부서진 잔재가 엄청난 흡입력에 의해 회오리치는 회색빛 귀혈존에게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사람조차도... "으아아악. 살려주십시오. 지존." "으아악. 빨려들어간다." 멋모르고 다가서던 혈무영과 마제들이 회오리의 흡입력에 말려 귀혈존에 게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회오리에 들어가자 마치 맷돌에 갈린 두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피도 뼈조각도 살점도 모조리 귀혈존에게 빨려버린 것이다. 그 엄청난 흡입력에 멋도 모르고 다가서던 자들이 수십 이 희생되었다. 무너진 모란각은 물론이고 모란루 내에 있는 주변 건물마 저 흡입력에 말려 조금씩 부서지면서 귀혈존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도망가라. 지존께서 엄청난 대법을 펼치신다. 가까이 가는 자들은 모조 리 빨려 죽는다. 지존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라."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아마도 십 마제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화로 귀혈존과 백이충에게 다가서던 혈무영들과 마제들이 다투어 물러 섰다. 접근하면 귀혈존의 흡입력에 말려들어 개죽음을 당할 것을 뻔히 아 는데 일부러 다가서는 바보는 없는 것이다. 모든 생명있는 자들이 다투어 물러서고 부서진 건물 잔해와 목재, 바위등 이 마구 흡입력에 휘말려 허공에 날아올라갈 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버 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귀혈존을 노려보고 있는 백이충이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아. 어디 한번 겨뤄보자. 이 가짜 놈. 귀혈존.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 든 자연의 기운을 네가 빨아먹을 수 있는지 보자꾸나." 백이충의 이를 가는 소리가 끝나며 그는 버티고 있던 발의 힘을 풀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굳건히 붙어서 가공할 귀혈존의 흡입력에도 까닥하지 않던 백이충이 스스로 귀혈존의 흡입력에 몸을 맡겼다. 귀혈존 이 백이충의 빈정거림에 혐오감과 분노가 공포를 눌렀듯이 백이충도 혐오 감 때문에 냉정히 대처할 이성을 날려버린 것이다. 귀혈존이 백이충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그 이상으로 백이충 역시 귀혈존에 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저자는 백가량의 잔재이고 자신은 백 이충이라 스스로 위로해봤지만 결국 본질과 영혼의 일부가 동질인 자에 대한 진한 거부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회오리에 휘말려 가던 백이충의 몸이 그 어느 순간 거대한 회색빛 구멍 속으로 빠져버렸고 그 순간 엄청난 힘이 백이충의 내부를 흡입하려 빨아 들였다. 회색 구멍 자체가 바로 귀혈존의 거대한 환락미혼술의 기운인 것 이다. "크으윽." 배고픈 아귀가 고기에 달라붙듯 엄청난 흡입력이 백이충의 정혈을 빨아갔 다. 하지만 귀혈존에게는 불행이고 백이충에게 다행인 것이 바로 백이충 의 몸은 바로 조화지체f는 것이다. 회색 기류에 말려 몸 안의 정혈이 빨 려나가는 즉시 자연의 기운이 그의 몸을 다시 채웠다. 그 순환의 고리는 끝이 없었다. 자연의 기운이 백이충의 몸을 통해 끊임없이 귀혈존을 향하 는 것이다. 결국 귀혈존은 끝없이 자연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된 것이다. "그그그그." 귀혈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의 몸에 그득히 엄청난 힘이 들어 온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의 파편이 뿌리를 내려 변형된 환락미혼술의 흡성대법은 어떤 특이질의 기운도 즉시 소화시켜 귀혈존의 내력 일부로 만드는 가공할 사공이 되었다. 그러나 자연지기는 너무나 순수하여 소화 시킬 필요없이 스스로 귀혈존의 몸에 흡수되었고 마침내 귀혈존이 감당못 할 정도까지 엄청난 기운이 밀려들어왔다. "대단한 놈. 주변 오십리 이내의 지기를 모조리 빨아먹고도 양이 차지 않 는가? 그럼 대기에 포함되어 있는 우주의 기운마저 넘겨주마." 백이충의 이죽거림에 귀혈존은 즉시 환락미혼술을 중지했다. 이 정도까 지 진하고 많은 기운을 빨아들여본 적이 없었다. 가히 수만명에 해당하 는 생명을 한꺼번에 빨아들인 것 같은 진한 포만감이 귀혈존을 지배했 다. 설사 전설 속의 용이라도 이 정도 기운을 빨아들였으면 해골만 남아야 했 다. 하지만 극성까지 찬 기운 때문에 그것을 소화하기 바빠 귀혈존이 환 락미혼술을 중지했을 때, 회색의 회오리가 사라지고 시커멓게 죽은 땅 위 에 무방비상태가 된 귀혈존이 나타났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멀쩡 한 모습의 백이충이었다. 자연지기를 그자신의 몸을 통로로 삼아 귀혈존 에게 보냈으니 백이충 그 자신은 손톱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은 것이다. "귀혈존. 이제 끝장이다. 네놈의 무공과 너에 대해 내가 너무 잘 알고있 는 것이 네놈의 패배 원인이었다. 결국 네놈이 가짜였기에 나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빨아들인 자연지기를 소화하는 날, 천하에 너를 당할 자가 없으니 여기에서 죽어줘야겠다." 백이충이 태극권을 펼쳐 칠권을 내뻗었다. 콰르르릉 벼락치는 소리가 실재로 들렸다. 향후 이십년 동안 땅의 기운을 완전히 죽여야 할 정도로 피해를 입은 자연의 분노였다. 무형의 권풍이 태풍처 럼 휘몰아쳤고 불행히도 너무 뱃속이 가득 차 끅끅 거리는 귀혈존의 둔해 진 몸은 그 권풍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치명적인 사혈 일곱 군데 가 파괴되었다. "크아아악. 크르르. 네놈이... 네놈이...." 살이 터지고 뼈가 갈라지고 피가 분해되었다. 귀혈존의 환락미혼술의 힘 을 파괴하는 일곱군데 사혈이었다. 환락미혼술은 환희염정술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백이충이 그 약점을 모를 리가 없다. 이 세상 그 누구보 다 귀혈존과 그가 가진 무공에 대해 잘 아는 백이충이었다. 정수리와 함 께 사지, 가슴 등 치명적인 사혈을 파괴당한 귀혈존의 몸이 부르르 떨렸 다. 귀혈존은 사술의 경지가 과거의 백이충이 혈존이었을 때의 경지와 비견 할 수 있는 자. 하지만 이렇게 엄한 상처를 입어서는 과거의 혈존처럼 영 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실 혈존 혼백의 파편을 거둔 자 들 중에 육체가 파괴되어도 과거의 혈존처럼 영혼을 이용하여 도망가서 부활을 노릴만한 자가 두명 있었다. 귀혈존 조인후와 요혈존 마진걸이 바로 그 둘이다. 귀혈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 안에 천지간의 기운을 가득 품고도 오히려 그것이 방해되어 죽어가는 억울함 때문이었다. 차마 깨긋이 이 세 상을 단념하여 죽지 못하고 원독에 찬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가는 것이 바로 혈존의 진짜 모 습이었다. 만약 백이충이 혈존이었을 때도 죽음을 마주했다면 저런 모습 을 취했을 것이다. "크르르. 본좌가... 본좌 귀혈존이... 바로 진짜 혈존이거늘..." 끝까지 귀혈존은 혈존이라는 이름에 집착했다. 그러나 결국 진짜 혈존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혈존을 포기한 백이충에게 당하고 말았다. 귀혈존 의 모습이 쿵 하고 쓰러지자 그제야 백이충은 온 몸에 흐르는 식은 땀으 로 옷이 흠뻑 젖은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자연지기를 이용했다해도 백이충 의 현재 몸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중간에 자연지기와 귀혈존 사이의 중 간다리 역할만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육체가 부서져야 마땅했다. 그나 마 조화지체였기에 감당해낸 것이었다. 그래도 충격이 큰 것은 사실이었 다. "크흐흠. 나가야 한다. 혈무영과 일백마제 앞에 나서서 그들을 복종시켜 야 한다." 백이충이 힘겨운 발걸음을 밖으로 옮겼다. 회색의 회오리는 멈춰졌지만 아직 그 누구도 백이충과 귀혈존이 죽은 시체 주위로 다가올 담량이 큰 자가 없었다. 승리를 했으니 백이충이 나서서 이제 혈무영과 마제들을 수 습해야 했다. 저 멀리 아직도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혈무오미 등이 아직도 소란을 피 우는 소리일 것이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힘들지만 지금 나서서 그들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혈무오미와 해왕군도주, 북해빙궁주 등이 위험 할 수가 있다. 혈무오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금혜연이 백이충을 못살게 굴 것이다. 백이충이 귀혈존의 시체 곁을 떠나간 직후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듯한 폐 허. 땅도 바위도 생기를 잃고 시커멓게 죽었던 지역에 검은 그림자가 방 안에 나타났다. 그는 귀혈존이 쓰러진 바로 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크흐흐. 죽었구나. 귀혈존. 건방지게 굴더니..." 귀혈존을 향해 비웃는 자. 그는 얼마전 귀혈존의 호위로 자처하며 대화 를 주고받던 혈비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귀혈존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답지 않게 그의 음성에는 비웃음만이 가득했다. "설마 네놈에게 당해 도망갔던 본좌 광혈존이 네놈 곁에 남아있었을 줄 은 몰랐을 것이다. 네놈이 세상의 기운과 정혈을 빨아먹는다면 본좌는 그 어떤 놈의 기억과 무공이라도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이 있 지. 크흐흐. 그것이 바로 본좌 광혈존의 특기. 혈비를 기억하는 것은 네 놈만이 아니었다. 네놈에게 쫓겨간 즉시 혈비라는 놈을 죽이고 놈의 기억 과 무공을 먹어치우고 네놈 곁에 머문 것이지. 네놈 곁에 머물러 죽일 기 회를 노리고 있었지." 광혈존. 바로 마화타의 연구로 만들어졌던 시험작 악취결개 우문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기억과 무공을 빼앗는 자. 그 무공을 완전 히 흡수하는 자. 그가 바로 혈존의 파편과 결합하여 광혈존으로 거듭난 것이다. "크흐흐. 본좌는 인정한다. 혈존으로 각성한 자들 중에 본좌가 가장 약하 다는 것을. 분하지만 본좌가 진짜 백가량임에도 불구하고 가짜들이 더 강 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본좌는 실망하지 않는다. 바로 본좌가 혈존 이기 때문이다." 광혈존은 두눈을 부릅뜨고 채 감지 못한 귀혈존의 시체 곁으로 갔다. 광 혈존의 시체가 뻗뻗히 굳자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몸이 흡수했던 자 연지기가 풀리는 듯 그의 몸 주위로 서서히 죽었던 땅이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귀혈존이 죽자 대지가 빨렸던 기운을 되찾으려 하 는 것이었다. 광혈존이 황급히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본좌는 너희들 모두를 흡수할 것이다. 본좌를 가장한 가짜놈들 하나하 나 본좌의 먹이가 될 것이다. 네놈들의 본좌의 일부분이 될 운명을 타고 잠시 깨어난 것뿐이다. 본좌에게 모여 다시 완벽한 하나의 혈존이 되는 것이다. 크흐흐." 귀혈존의 시체가 쭈글쭈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급격히 수분이 빨 려 말라 가는 나무처럼. 미이라처럼 뼈와 껍질만 남도록, 나중에는 뼈조 차 없이 인간의 가죽만 남도록 속 안의 것이 모조리 말라갔다. 남의 정혈 과 내공을 빨아들이는 흡성대법으로 무적을 꿈꾸었던 귀혈존이 죽은 이 후 오히려 광혈존에게 모든 것을 빨리는 것이다. 기억과 영혼, 무공 그리 고 내공까지. 동시에 광혈존의 몸에서 좀더 짙은 회색 빛이 색을 더하기 시작했다. "크흐흐. 몸 안에 가득한 엄청난 힘을 모두 빨아먹을 수 없음이 분하군. 하지만 어리석은 귀혈존과 달리 본좌는 몸의 한계에 맞는 만족이라는 것 을 정하고 움직이니까." 광혈존은 가죽만 남은 귀혈존의 시체를 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다가 백 이충이 사라진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한때 본체였던 가짜가 출현하다니. 이거야말로 본좌의 복. 아 마도 가짜 중에서는 본체였던 그놈이 가장 강하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본 좌가 뒤에서 도울 것이니 상관없다. 놈의 뒤를 따르며 하나하나 집어삼키 는 것이다. 가짜들의 영혼과 기억과 무공을 모두 씹어먹어 삼키는 것이 다. 모든 가짜가 본좌에게 모이는 날 진정한 혈존인 '나, 백가량'이 깨어 날 것이고 그때 진정한 혈존무적이 실현되리라." 광혈존의 광소라 터져나오는 곳, 광혈존이 혈존무적을 부르짖었으나 아무 도 듣지 못한 곳이 바로 폐허가 된 모란각이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호황부주가 된 백이충 관련자료:없음 [1995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2-28 13:19 조회:243 호황부주가 된 백이충 "나는 혈존이 아니오." 백이충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그를 향해 절하고 있는 혈무영과 일백 마제가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태호 근처였다. 모란루에서 백이충과 귀혈존이 혈투를 벌이고 또한 혈영오미가 소동을 일 으켰다. 혈무영과 일백 마제가 총 출동된 소란이었고 십여 채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 모란루에서 두 세채의 건물이 한꺼번에 허물어진 큰 소동이 었다. 당연히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고 소주의 이목이 몰리지 않을 수 없 다. 백이충은 일행을 몰고서 조용해 질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를 수습할 노련한 모란루 출신 여인들만을 남겨두고 과거 혈 존 직속의 수하들은 모두 모란루를 떠난 상태였다. "내가 배교쌍노와 함께 마제들과 혈무영을 다스렸던 몸은 맞소. 그러나 그 때는 본인이 아니었소." 백이충은 눈을 감으며 자신에게 복종해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은 지금 혈존에게 굴복해 있는 것이지, 결코 백이충이라는 사람에게 굴복 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인 말씀이신지?" "청마산으로 떠난 직후... 쌍노와 함께 혈존은 죽었소." 일백 마제는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가 완전히 장악한 모양이었다. 하기 야 일백의 마제라고 해도 그 세력과 권위면에서 보면 북해 빙궁주와 해왕 군도주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일백 마제중에 가장 뛰어난 십 마제가 모 두 힘을 합해야 겨우 두명의 비중과 맞먹을 수 있다고 할까? "여기있는 이몸은 혈존이 아닌 백이충입니다. 여러분들과 만났을 때 혈존 의 영혼에 육체를 점령당했고 혈존이 죽은 이후에 겨우 자신의 육체를 찾 고 제 정신을 차린 멍청이에 불과하지요." 백이충의 말에 북해빙궁주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존께서 귀혈존을 죽인 그 무력은 어떻게 설명하오리까? 또 혈존 이 죽었다면 조 영주가 스스로 귀혈존이라 자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게 다가 지존께서는 저희들의 금제를 풀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혈존이 아 니고서야 할 수 없는 약속 아닙니까?" "나는 혈존이 아니니 지존이라 부르지 말고 백공자라 불러주십시오." "알았습니다. 백공자. 저희들의 의문을 풀어주십시오." "혈존의 영혼은 파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제물이 될 육신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제몸이 혈존의 본신으로 있 을 때 분신으로 이용했던 자들의 영혼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경우 스스로 자신을 혈존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백이충은 다행이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저는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그 때 이 육체를 점령했던 영혼의 기 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머리에 조금 남았습니다. 또한 혈존이 이 몸 을 통해 수련한 무공도 조금이나마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확실히 일개 서생인 백이충이 맞지만 그래도 혈존의 것을 조금 기억하고 가지고 있어 그럭저럭 여러분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금제를 풀어줄 정도 는 되는 듯 합니다." 백이충은 다시금 눈을 감고 어려운 말을 꺼냈다. "금제를 푸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 이후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혈존에게 이용당하여 여러분을 그동안 노예처럼 부렸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백이충의 말에 주위에 있던 자들이 웅성거렸다. 주로 일백 마제들의 얼굴 에 혼란이 어렸다. 혈존에게 잡혔을 때 그들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한 평생 혈존에 매여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그래도 살겠다고 비참한 목 숨 아등바등 이어가야 할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유가 주어진다니 혼란을 느낀 것이다. 일백 마제와 달리 일천 혈무영의 얼굴에는 일점의 동요도 없었다. 혈존 의 분신이 되어 사라졌던 다섯 영주말고 남아있는 여자 다섯 영주를 대신 하여 모란서시가 혈무영 대표가 되어 나섰다. "호호. 그럼 저희 일천 혈무영 또한 자유인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소. 혈무영들도 더 이상 혈존의 명을 들을 필요가 없소. 그대들의 인생을 사시오." "그럼 저희들은 저희의 인생을 백공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맡아주십시오." "백영주. 그 무슨 말을... 여러분은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거요. 자유라고."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혈무영으로 자라고 교육받으면 서 오직 한 분을 따르고 명령을 받으라고 주입 받았습니다. 금제 따위는 사실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를 거느리신 분의 명령을 따르 는 것 밖의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백 영주."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저희에게 자유를 주신다 함은 저희의 삶 을 버리시는 겁니다. 이미 평범한 삶을 살 수가 없는 저희들입니다. 저 희 혈무영들. 처음에는 자유를 찾았다고 기뻐할지 몰라도 결국 저희에 게 명령을 내릴 사람을 찾으려 할겁니다. 대부분이 비참하게 세상을 헤메 며 이용당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 "......"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그들의 마수 에 걸려 노예같은 삶을 살 것이 확실합니다. 저희 혈무영들을 버리지 말 아주십시오. 백공자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모란서시 백소련의 말을 이어 일천 혈무영이 모두 무릅을 끓었다. 이미 백이충은 그들을 거느릴 마음이 있었고 이렇게 되도록 백소련과 이야기 를 미리 맞추어 놓았는데도 혈무영이 단 한명도 빠짐없이 진심으로 받아 달라고 간청하자 마음이 벅차 올랐다. "모두들 일어나시오. 이 모자란 몸을 이토록 생각해주다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지존을 뵈옵니다." 백이충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말을 하자 혈무영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절 을 했다. 백이충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서문 장군부에서 태어났으나 백씨 성을 가졌소. 아버지가 서 문 가에 데릴사위로 오면서 둘째 아들인 나로 하여금 그분의 백씨 가문 을 잇게 하기 위해서였소. 이제 나는 백가장을 새로 열 것이며 여러분 혈 무영은 백가장의 첫 식구가 될 것이오. 이제부터 평생 한 식구, 한 형제 로 여기겠소." "장주님의 은혜에 충심으로 보답하겠나이다." 일천 혈무영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진심으로 복종하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모란서시 백소련, 북해빙화 북궁소림, 천강옥녀 천 소화, 칠채옥봉 화소예, 천뢰검후 흑소옥은 백이충의 평생이라는 말에 살 짝 볼을 붉이기도 했다. "하하하. 백공자. 축하하오."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가 백이충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의 음성은 따듯 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한 식구를 대하는 듯한 음성이었 다. 북궁소림은 북해빙궁의 소궁주이고 칠채옥봉은 해왕군도의 소도주이 다. 이 둘의 백이충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잘 알고있는 북해빙궁주와 해 왕군도주는 백이충을 사위로 여기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보다 우리들도 부탁할 것이 있소만." "무슨 말씀이신지..." 혈무영은 모두 젊은 층이라 말을 하오체로 내릴 수 있었지만 일백 마제 는 그렇지 않다. 혈존이었다면 모르지만 지금의 그는 백이충이란 젊은이 에 불과하고 마제들은 젊은 자가 나이 칠십, 늙은 자는 백세가 넘은 자들 도 수두룩하니까. 게다가 나이에 상관없이 각기 한 문파를 잇거나 개파 한 종사의 신분에 있는 자들이었다. 홀로 이름을 떨친 자들과는 차원이 틀렸다. "일백 마제의 반이 넘게 북해빙궁과 해왕군도에 투항해왔소. 북해와 남해 는 넓은 곳이니... 공자가 우리들의 본거지에 있는 금제마저 풀어준다고 하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소. 과거 천외사세로서 떨치던 옛 영광을 되찾 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오. 또한 남은 마제들도 각기 자신들의 세 력을 정리하고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이 모든 것 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 백공자의 덕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백이충이 북해빙궁주에게 허리를 숙였다. 혈무영과 달리 일백 마제를 복 속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혈천마궁이 망했을 때 칠마황에게 복종 하지 않고 몰래 자신들의 세력을 빼돌렸을 만큼 마제들은 하나같이 능구 렁이 마두 들이었다. 적어도 일백 이상의 절정고수를 수하로 부리고 있 는 자들이었다. 운 나쁘게 배교쌍노에게 다시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지역에서 흑방 정도의 세력을 하나씩 거느린 존재가 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음흉한 마왕들이 모든 금제가 풀리고 백이충이 스스로 혈존이 아니라고 부인하 는 데도 그를 도와줄까? 마제들이 백이충이라는 일개인에게 복속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노릇이었다. 백이충도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혈무영도 말했듯이 당금의 무림은 복마전이네. 천하에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이 각처에 출몰하여 움직이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혈무영처럼 우리 들 마제 역시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의 마수에 걸려 본의아니게 악행을 계 속할지 모르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네." "예?" "우리를 혈존의 금제에서 구해준 것도 백공자. 또한 귀혈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도 백공자같 네. 향후 오년을 자네에게 투자하겠네. 오년 동안 백공자의 명을 받드는 것으로 은혜를 갚고 그 이후에 자유로이 떠나겠네. 백가장을 설립하는 데 에도 우리 늙은 이들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받아주겠는가?" "하지만 여러 마제님들의 의향이 어떠신지도 모르고..." 백이충이 북해빙궁주의 제안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리자 해 왕군도주가 여러 마제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우리가 자유를 되찾은 것은 모두 백공자 때문이 아닌가? 오년의 세월이 길다고 하면 길수 있지만 평생을 매여 살 것을 생각했던 것보다는 짧은 시간이다. 본 도주는 북궁궁주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혹시 은혜를 모르고 홀로 떠나겠다는 자가 있는가?" "본 녹마존자는 찬성이오. 은혜를 모르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쌍방마존도 찬성이오. 오년은 짧소. 그리고 그를 돕는 것이 또한 우리 가 생존할 길이오." "본 삼화마제도 찬성이오. 이왕 찾은 자유. 오년 없는 셈 치겠소." 일백 마제의 반이 저마다 떠들벼 찬성했다. 거의 대부분이 북해빙궁과 해 왕군도에 투항하기로 결정한 마제들이었다. 중원은 너무 강자들이 많다. 중원에서 북해빙궁이나 해왕군도라면 모를까, 현재의 마제들 수준으로는 천하에 이름을 당당히 내놓기에 힘겨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중원을 떠나 남해와 북해에 뿌리를 내리려는 자들. 북해빙궁과 해왕군도라는 이 름에 기대에 현재 복마전같은 중원무림의 현실을 떠나려는 마제들이 모 두 찬성을 한 것이다. 분위기라는 것과 기세라는 것이 있다. 일백 마제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가 의견을 낸 데다가 마제들 중의 반이 한꺼번 에 떠들며 찬성을 하니 분위기가 모두 백이충을 돕는 분위기로 급변하였 다. 물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십 마제같은 자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북해빙궁주가 말한 바와 같이 현 무림처럼 어려 운 시기에는 백이충같은 강자에게 잠깐 몸을 피해 폭풍이 지나기를 기다 리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감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정말 감사히 그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 다. 여러분들의 신분에 비하면 미비한 대우이지만 백가장의 장로로 대우 받을 것이며 백가장이 마음에 드시지 않을 때 언제 떠나든 결코 지금의 호의를 잊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백이충이 맹세합니다."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식으로 척척 말을 주고받는 북해빙궁주와 백이충. 북해빙궁주는 딸 북궁소림에게 이제는 됐냐는 식으로 한쪽 눈을 깜박였 다. 백이충이 큰 세력을 이루고 북궁소림이나 화소예가 백이충의 첩이 된 다면, 북해빙궁이나 해왕군도로서도 중원에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이 손 해되지 않는 것이다. 모인 자들의 뜻이 대충 모이자 백이충은 미소를 지었다. 과거 그가 거느 렸던 세력이 다시 고스란이 그의 손아귀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자의 냐 타의냐에 따라 큰 의미가 있었다. 혈존이 아닌 백이충이라는 이름 밑 에서 스스로 충성을 맹세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공자. 아니 장주. 백가장의 터를 어떻게 잡을 생각이시오? 지금처럼 모란루를 중심으로 할 것이오? 그리고 보면 은표전장은 이미 현황방에 넘 어갔으니 자본도 큰 문제겠구려." "일단 제 부모님들부터 구해야 겠습니다. 혈존을 죽인 혈지존이 반역을 꾀하고 있고... 저희 가문이 서문 대장군부인 관계로 모든 식구들이 옥룡 왕 혈지존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백가장을 세우는 일은 그 이후의 일입 니다." "흠. 옥룡왕이 혈지존이라. 그를 상대할 일이 보통은 아닌데 무슨 복안이 라도 있소?" "할아버지의 친구인 황 대장군님이 호황부를 불러 현재의 황제를 보호할 모양입니다. 어차피 옥룡왕 혈지존과의 대립을 피할 길이 없다면 그들 호 황부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군. 그럼 옥료왕과 대립하는 호황부는 어디있소?" "하북 북경근처 현천장원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현천선생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서 옥룡왕을 상대할 모의를 꾸미고 있습니다. 일단 그곳에 가서 황 실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혈무영 일천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란루의 소란 으로 강소성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니 아마도 단번에 백도맹의 이목에 걸릴 것이다. 백이충은 혈무영 일천과 일백 마제를 삼대로 나누어 각기 따로 현천장원으로 집합하라고 일렀다. 삼대 중의 첫 번째 삼백의 인원을 이끌고 백이충은 금혜연과 혈무오미를 데리고 출발했다. 나머지 인원은 북해빙궁주와 해왕군도주가 각기 이끌 고 올 것이다. 오히려 백이충보다 훨씬 노련한 사람들이니 백도맹의 이목 을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라. 산동을 거쳐 하북으로 들어서서 점차 곡령현이 가까워질수록 백이충은 심 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여러번 관군에 의해 길이 통제되는 것을 목격 했는데 아무래도 그 방향이 곡령현 현천장원 쪽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속도를 높여라. 아무래도 현천장원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백이충의 명령에 이해 혈무영 삼백과 삼십 명의 마제, 그리고 혈무오미 가 달리는 속도를 빨리했다. 이들 중에 절정고수가 아닌 자가 없기에 그 들의 속력은 순식간에 말이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라졌다. 그리고 불과 반 나절만에 곡령현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입니다." 마제중 한명의 소리에 백이충은 다급해졌다. 일단 천기노인을 비롯하여 현천장원의 사람들은 배이충과 금혜연을 구해준 은혜가 있고 특히나 황 대장군은 바로 할아버지의 친한 친구이니 그들이 잘못된다면 얼굴을 들 수 없다. 좀 더 속력을 빨리하다보니 앞에 길을 통제하는 관군들이 보였다. 백이충 의 손짓에 의해 관군들을 피해 곡령현을 내려다볼수 있는 언덕 쪽으로 몸 을 날렸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서 아직도 현천장원이 무사함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백이충이었다. 백이충이 보고있는 가운데 곡령현 마을은 관군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 다. 삼천이 넘는 병력이었는데 그 선두에는 갑옷을 입은 장군이 허리를 굽히고 누군가에게 아부를 하고 있었다. 절대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 가 아니라 갑자기 병졸들을 떠맡은 관리가 분명했다. 장수의 옆에는 한명 의 중년 서생이 점잔을 빼며 말위에 앉아 있는데 백이충도 아는 얼굴이었 다. 옥룡왕부의 삼총관이 절정마유였다. 관군은 마을을 포위하고 있지만 직접 쳐들어가거나 공격하지 않고 있었 다. 공격하고 있는 것은 금의무사들이었는데 바로 옥룡왕부의 무사들이었 다. 그 수는 칠백여명. 이들이 진법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정확 히 칠백이십 명일 것이다. 두 개의 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진에는 옥령선자와 오행신인이 포위되어 있었다. 둘다 천외구기 의 이름을 이었으므로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였다. 특히나 옥령선자의 옥 령선음은 천하에도 이름높은 백도십대극품 절학의 하나였다. 음공이라는 것은 집단전에서 더욱 위력을 발하는 무공이었고 그 중에서도 옥령선음 은 고금 최강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법에 갇힌 옥령선자에게서는 작은 방울소리 하나 나 지 않았다. 방울소리가 진법의 어떤 기운에 의해 퍼지지 못하고 갇혀있 는 것이다. 역시 절세마유에 의해 옥령선음을 제압하는 특별한 진법이 진 행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삼백 육십의 금의무사들에게 포위되어있 는 옥령선자와 오행신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제압 당할 듯 위태로웠다. 보의와 신병으로 무장되어 진법으로 핍박하는 금의무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쪽의 진에는 황 대장군과 그 사형제들인 다섯 노인, 그리고 그들 의 제자인 장의비였다. 이들 역시 하나하나 절정고수가 아닌 이가 없는 데 일류고수에 불과한 금의무사들의 포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로잡힐 것 같았다. 마을 쪽에서는 몇 명의 새로운 인물이 초조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아 마도 이정례와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외구기의 이름을 이은 다른 사람 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섣불리 뛰어들어 진법에 갇힌 사람들을 구 할 수가 없었다. 진법을 파괴할 어떤 묘안도 없이 뛰어들어봤자 같이 사 로잡히는 신세가 될 것이 뻔했고 또한 그들은 다른 한 명을 호위해야 했 기 때문이다. 궁장을 입은 삼십대의 아름다운 미부. 바로 옥룡왕의 측근 이며 호황부주라는 현안군의 부인 명옥공주이자 진짜 호황부주 호황맹장 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열흘이 넘도록 잡지 못했던 자들을 단번에..." 관군의 책임자는 연신 절정마유에게 굽실거렸다. 실재로 그들이 명을 받 들고 곡령현을 포위한 것은 오래되었다. 허나 감히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황제의 따님이신 명옥공주가 나타나 칼을 휘두르며 위협을 하 는데 만에 하나 공주에게 가벼운 상처라도 입힌다면 공을 세우고도 목이 붙어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아무 일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사이에 옥룡왕부에서 절정마유 가 찾아왔다. 황제보다도 권력이 더 강하다는 옥룡왕부의 삼총관이다. 장 군은 마치 승상이라도 본 것처럼 굽실거렸다. 그리고 절정마유는 명옥공 주가 있음에도 개의치않고 옥룡왕부의 무사들을 푼 것이다. "흠. 이정례를 잡으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황 대장군까지 잡게 된 것은 잘된 일이다. 허나 명옥공주가 황제를 위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이정례와 접촉한데다 그녀를 돕는 뜻밖의 무리가 추가로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방 심치 않고 진법 훈련차 두 개조 금의무사들을 데리고 온 것이 참으로 다 행인 일이로다. 그렇지 않다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절정마유는 전투를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옥룡왕이 황위를 물려받 으려면 꺼림직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중신(重臣)중에는 이정례가 첫손가 락이요, 무장 중에는 서문 대장군과 황 대장군이 또한 첫 손가락이었다. 비록 북방에 북로군벌을 거느리고 있는 서문 대장군을 당장 압송할 수는 없지만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고 황 대장군과 이정례를 감시하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제 이정례와 황 대장군이 이정례의 형 현천선생의 집에 한군데 모이고 비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계속 모으는 것을 보고 절정마유는 일단 모두를 잡아들이려 했다. 고수들이 있어 그들을 돕는 것은 의외였지만 일거에 이 정례, 황 대장군 두 거물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 었다. 다만 명옥공주가 이정례와 함께 있음은 좀 의외였다. 절정마유가 만족의 미소를 띠고 마을입구에 서있는 명옥공주에게 이만 항 복하라는 권유를 하려고 했다. 응하지 않으면 금의무사들을 시켜 힘으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이미 옥룡왕이라는 배후가 있는 그에게는 황실의 공 주 따위 권위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우우우." 갑자기 마을뒤에 있는 산에서 경쾌한 장호성이 들렸다.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날아가듯 휙휙 거리를 좁 히는 것을 보아 결코 마을의 일반인이 아니었다. 절정마유가 놀란 표정 을 지을 때 삼백의 혈무영이 일시에 금의무사들을 덥쳤다. 삼백육십대 삼백이다. 허나 금의무사는 강호 최강의 무공을 상대할 진법 을 익혔다고 해도 개개인의 수준은 겨우 일류고수였다. 반면 삼백의 혈무 영들은 개개인이 최절정 고수들이었다. 어쩌면 절정을 넘어서는 초고수 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저... 저..." 절정마유의 안색이 확 변했다. 무공이 뒤져도 보의 와 보검으로 무장한 금의무사들이었다. 정체모를 자들의 출현이 뜻밖이나 쉽게 지리라고는 보 지 않았다. 그런데 접하자마자 일시에 금의무사들의 진법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개개인의 무공 차가 워낙 심하다는 뜻이다. "저... 저자들도 진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같이 절정고수들. 세상에 저 런 절정고수들이 어떻게 소문도 없이 나타나서 우리를 방해한단 말인가?" 절정마유가 데리고온 금의무사들은 강호최강자들 전용이다. 본래 무림 최 강자 급이 되면 일반 고수의 숫자로는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 이유 로 종종 무림의 판도와 미래는 최강자 몇 명의 대결로 결판이 나기도 했 다. 하지만 그런 법칙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 금의무사들이 형성한 진이었 다. 팔대천마이건 천무삼성, 환우오존, 천외구기 등 어떤 고수가 와도 일 반 무사로 제압할 수 있는 진인 것이다. 단 하나, 약점은 있다. 금의무사들이 형성한 진법은 다수가 진법을 이루 어 소수의 최강의 무공을 상대하는 것이지, 결코 집단 전투용으로 다수끼 리 맞부딪치는 진법이 아니었다. 절정마유가 현천장원을 감시하는 자들로 부터 보고 받기는 분명 곡령현에 많은 수의 무사들보다 절정고수 몇 명 만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신중을 기하기 위해 두 개진에 해당하는 금 의무사들을 데려온 것이다. 금의무사들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절정고수들을 대거 파견할 세력은 몇 되지 않는다. 하물며 백도맹 북부본단이 있는 하북에서는 백도맹을 제 외하고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도맹의 무적일황과 옥룡왕부는 서로의 일을 잠시 간섭하지 말자는 동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 어디서 저런 자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허수아비처럼 금의무사들을 쓰 러트리는 것을 보아 저들은 옥룡왕부 다섯 등급 중에서 최상위인 옥의무 사들과 맞먹는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진짜 호황부가 따로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저들 이 진짜 호황부의 세력이고 이정례와 황부인이 그들을 부른 것이란 말인 가?" 절정마유는 갑자기 나타난 삼백의 무사가 짧은 시간 안에 금의무사들을 제압하고 다른 한 개의 진법을 덮치는 것을 보고 불길한 심정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다른 하나의 진법 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황대장군과 이정례를 구하러 온 것으로 보아 삼백의 무사는 저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 입장에서는 옥룡 왕부에 속한 자신들이 역적인 셈. 전세가 역전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 이 분명했다. "퇴각해야겠다." 절정마유가 자신을 호위하는 현의무사들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현의무사 는 옥룡왕부 호위무사들 중에 이등급의 고수들로 옥룡왕부의 주요 요인들 의 호위를 담당하는 절정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적어서 절정마 유도 단 오십명만을 데리고 왔다. "크아악." 절정마유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주위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디 선가 나타난 노인들이 절정마유를 목표로 덥쳐든 것이다. 백이충과 함께 달려온 삼십의 마제들이었다. 현의무사들이 아무리 강해도 마제들을 상대 로 할 정도는 아니었다. "막아라. 막아." 절정마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동시에 그와 같이 있던 장수, 관군 을 몰고왔던 장군이 황급히 관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삼천 관병 도 일반 병졸이 그들 사이로 뛰어든 초절정 고수들을 막을 수 없었다. 현 의무사들이 물샐틈 없이 절정마유를 감쌌지만 마제들은 거침없이 절정마 유 근처로 다가왔다. 마제 중의 한명인 청삼혈검이 절정마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의무사 셋을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그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낙마하자 새파 랗게 질린 절정마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청삼혈검이 공을 세우게 됨을 기 꺼워하면 절정마유의 목덜미를 잡으려 할 때였다. 절정마유의 몸이 흐릿 해졌다. 청삼혈검이 깜짝 놀라 눈을 부라리고 보니 절정마유의 모습이 십 여장 밖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가 타고있던 말까지 함께 이동했으니 절 대 절정마유 스스로의 무공으로 몸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이놈이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마침 그 근처에 있던 또 다른 마제 하나가 거치적 거리는 군졸들의 머리 를 밟으며 절정마유를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파랗게 질린 절정마유가 또 다시 자신의 손에 든 깃발을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정마유 의 모습이 또 다시 사라졌다. "이 놈이 요술을 부리는 구나." 청삼혈검이 화가 나서 노성을 지르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번에 절정 마유가 나타난 것은 군졸들의 후미 쪽이었다. 마제들이 덮친 군병의 앞쪽 과 반대되는 쪽이었고 병졸들이 방해되어 일순간 절정마유를 놓친 꼴이 되었다. 절정마유는 마제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자 현의무사와 옥의무사 들을 내버려두고 즉시 말을 몰아 달아나려 했다. (왕야께서 평소 천마강시의 하나를 호위로 두라고 했는데 나 스스로 아 껴 사용하지 않다가 오늘 큰 낭패를 보는구나.) 절정마유가 탄 말은 천리준구였다. 아무리 경공이 능한 자라도 쉽게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절정마유가 이를 갈며 도망가려는 순간 그의 눈앞 에 별이 번쩍이고 머리에 통증이 오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잃어버렸던 법보가 여기 있구나." 희색이 만면하여 절전마유의 손에서 천리신보기를 빼앗아 드는 백이충이 었다. 불사옥대는 청마산에서 수명을 달리하였지만 나머지 법보는 모두 혈지존에게 빼앗겼다. 그중의 하나인 천리신보기를 발견한 것이다. 조화 지체를 이룩하여 오히려 사술, 요법의 사용이 막히게 된 백이충으로서는 뜻밖의 횡재였다. 그 이후 절정마유의 품을 더 뒤져봤지만 더 이상 법보 는 나오지 않았다. "모두 멈춰라. 더 이상 움직이는 놈이 있으면 이놈부터 쳐 없애겠다." 백이충이 절정마유의 멱살을 틀어잡고 번쩍 들어 소리쳤다. 그 큰 목소리 에 모두들 일제히 싸우는 것을 멈추었다. 관군의 수장인 장수가 백이충에 게 호통쳤다. "이놈. 감히 왕부에서 오신 분을 해치다니. 네놈이 구족이 멸하려고 작심 했느냐?" "네놈이야말로 닥쳐라. 저기 계시는 분이 명옥공주이심을 네놈도 알것이 아니냐? 일개 왕부의 총관을 거들어 황실의 공주를 공격했으니 네놈이야 말로 반역을 꾀하려는 것이냐?" 반역이란 말을 듣자 장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천하에 옥룡왕 이 곧 황제가 되리라는 소문이 쫘악 퍼지기는 했지만 일개 천부장인 그 가 반역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오금이 저리는 것이다. "그... 그.... 반역이라니. 소장은 그럴 의도가..." "당장 말에서 내려 공주마마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네놈이 진 실로 구족의 참함을 당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백이충이 연달아 호통치자 더 이상 장수는 말에서 버티지 못하고 허겁지 겁 내려왔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자신이 거느린 병졸은 별로 소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백이충이 역모니 반역이니 운운하자 그대로 항복해 버린 것이다. "그대를 호황부주에 명하겠어요." 명옥공주가 백이충을 보며 머리를 숙였다. 직위를 위임하는 명령이기보 다 부탁을 하는 자세였다. 백이충은 명옥공주의 안스러운 표정을 보았 다. 남편이 역모의 일당으로 아버지인 황제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 여심 과 효심 사이에서 고뇌한 흔적이 역력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마마. 너무 소생에게는 대임이옵나이다. 그리고 호황부주는 현 황제폐하 의 소생 사이에서만 인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주마마가 명하신 다 해도 호황부의 천외구기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관없어요. 호황맹장 스스로가 능력이 부족하여 황실을 안정시키지 못 한다고 인정할 때 단 한번에 한하여 남에게 임무와 직위를 대리시킬 수 있어요. 물론 천외구기의 반 정도가 인정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 위임은 제 대에서 끝나며 호황맹장의 이름 역시 저에 의해 다음대의 황실 공주에 게 넘어갈 것입니다. 이번에 저는 나설 수가 없으니 부디 제 심정을 이해 해 주시고 직위를 위임받아 주십시오." 명옥공주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백이충은 과연 그녀가 단 순히 공주라서 호황부주가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타내지 않을 때는 모르지만 분명 그녀는 여장부였고 절정을 넘어선 초고수였다. 하지 만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남편을 잡아죽이는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인정할지..." 백이충이 천외구기의 다른 이들을 보자 오행신인이 껄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 대장군부의 자식에다 광한선인의 후계인 자네가 아니면 누가 나설 수 있겠나? 게다가 호황부란 말뿐인 조직으로 쓸모 없는 아홉 명만 있을 뿐이네. 오히려 자네의 부하들이 역모를 막는 데에는 더욱 큰 역할을 할 것 같구만. 우리가 자네 앞에서 부탁해야 할 처지이네 그려." 오행신인의 기분은 몹시 고조되어 있었다. 백이충이 광한비급을 보고 갑 자기 무공을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백이충이 갑자기 고수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모두 어리벙벙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지만 오 행신인과 옥령선자는 믿었다. 둘은 광한비급의 하권이 얼마나 뜬구름 식 의 엉뚱한 비급인지, 얼마나 고차원적인 내용의 비급인지 잘 알고 있었 고 그런 괴상한 비급을 백이충에게 준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선가에서 최고로 치는 득도의 경지를 마치 깨달음을 얻기위한 기초공부처 럼 떠들고 있는 것이 광한비급이었다. 게다가 오행옥령심음을 백이충이 통과했으므로 둘은 은근히 조사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 다. 따라서 백이충이 진정으로 광한비급의 뜬구름 같은 내용에서 조금이 나마 뭔가를 터득했다면 지금처럼 갑자기 초고수가 되었다는 정도가 아니 라 신선이 되었다고 말했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을 것이다. 다른 천외구기도 대충 광한비급 상에 얽힌 사연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전설이나 허구인줄 알았는데 백이충이 그 광한비급에서 깨달음을 얻어 하루아침에 엄청난 고수가 되었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하 기야 백도십대극품절학의 옥령선음도 광한비급의 기초수련무공에 불과하 니 하권의 무공이 얼마나 높을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 이 의아한 것은 백이충이 함께 데려온 고수들의 정체였다. "혈존이 제 몸을 점령했을 때 마치 꿈속처럼 모든 행동을 지켜본 기억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저들은 혈존에게 제압 당해 그 의 부하 노릇을 했던 피해자들입니다." 백이충은 마제들과 혈무영에 대해서도 적당히 거짓말을 꾸며 놓았다. 과 거 혈존이 만성독약으로 그들을 제압하여 부하로 부려먹었는데 혈존이 갑 자기 죽음으로서 그 해독약이 있는 곳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는 것, 꿈속의 일을 회상해보던 백이충의 머리에 이들이 당장 모두 죽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내버려두면 자신이 이들을 죽인 것과 다름없는 것 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밤에 금혜연의 도움 을 받아 그들을 찾아갔다고 둘러댄 것이다. 황 대장군과 천기노인등은 백이충이 혈존의 기억을 꿈속처럼 생각하며 괴 로워하던 때를 기억했고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믿어줬다. 일단 백이충 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옥령선자의 옥령선음이 확인한 바를 믿 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이충이 그들에게 해독약을 주는 대신 오년간 자 신을 도와달라는 거래에 성공했다는 말도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삼십명의 마제와 삼백의 혈무영 고수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이었 다. 게다가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 두 배되는 숫자가 더 현천장원으로 올 것이라 했다. 옥룡왕부의 막강한 세력을 감안하면 꼭 필요한 힘이었다. 백이충은 서문 대장군부의 아들이니 충성심을 확신할 수 있는데다가 옥령 선자가 인간 됨의 선함을 보증했고 막강한 세력까지 거느리고 있었으므 로 명옥공주는 서슴없이 호황부주 자리를 백이충에게 위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여기 호황령이 있습니다." 명옥공주가 호황령을 백이충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인해 확실하게 백이충 은 호황부주라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당금 황제를 제외 하고는 벼슬의 직급에 상관없이, 심지어 황실의 종친들도 아무런 사전 허 락없이 처벌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호황부주라는 자리였다. "제가 모잘라 그동안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황 대장군께서 주변 병력을 모아 황성수비대와 싸울 전투력을 확보해 주셨고 서문 대장군에 게 옥룡왕부의 역모사실을 알렸습니다. 부황폐하와 오라버니들의 행방도 알아냈으나 그분들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정례 대인께서 학림 파를 제외한 여러 유파들의 신하들과 연락하시어 역모사실을 퍼트리는 노 력도 하고계십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 황성 내에서 거점과 침입로 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황궁은 커녕 수도내에 들어가기만 해도 옥룡왕 의 이목에 잡힐 것입니다. 그런 난제로 부황폐하를 안전하게 모실 계획 을 마련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걱장하지 마십시오." 백이충이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이 천리신보기는 혈존이 사용하던 법보입니다. 이것이 있는 이상 황궁 에 침입하기란 여반장입니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6권 끝입니다. 며칠 수정들어가고 바로 출판사로 넘길 예정입니다. 3,4일 정도 후에(?) 아마 지우게 될 것 같습니다. -------------------------------------------------- 혈존무적5.txt 제 목:[연재] 혈존무적-황제의 실종 관련자료:없음 [20373]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1 01:48 조회:810 <황제의 실종> 황도 북경을 수호하는 군사의 수는 황경도독(皇京都督)휘하 황도수비군 (皇都守備軍) 십만이다. 현재 황도수비군은 도독(都督) 강소유가 맡아 도시의 방위와 치안을 맡 고있다. 황도수비군은 병부(兵部)의 지배아래 있지만 그 지휘관 강소유 는 이미 그 통제를 벗어나 옥룡왕부에 충성을 맹세한지 오래이다. 황군 (皇軍)중에서 옥룡왕이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군대이지만 황도를 장악하 고 반역을 도모하기에는 이 군대만 있어도 충분했다. 황실어림군(皇室御臨軍), 금의위(錦衣衛), 동창(東廠). 황실과 황궁을 수호한다는 거창한 이름들, 하지만 관리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이들 조직은 요인의 경호 및 정찰, 모략, 모반의 수색을 주 임무로 할 뿐 전투를 치루는 군대가 아니다. 황도수비군이 반역을 했을 경우 그들 과 맞서 황제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황제의 수족노릇을 하 며 황제와 황족을 보호해야할 이들 황제의 수족마저 옥룡왕부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황제를 보필하는 대소신료. 황제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려야 할 중 앙의 대신들이다. 자고로 군사부일체라 하였고 또 천자라 하여 황제를 하늘의 아들과 동일시하여 떠받든 것은 신하들의 지극한 충성을 우려내 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일심으로 황제를 위해야할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옥룡왕에 복종한지 오래였다. 중신(重臣)들의 삼대파벌 중에 최대 거파인 학림파가 옥룡왕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은 이제 비밀도 아닌 형편이다. 청류계(淸流 系)와 서유림(西儒林)의 파벌에 속한 대신들은 황궁에 등청하지 못한지 오래이다. 그들 두 개의 파벌에 가담한 신하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황명 으로 모두 구금되거나 자택연금 상태로 감시를 받고 있다. 현재 황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황도 북경은 지금 일반인의 출입이나 왕래조차 황도수비군에 의해 제한 되어 있다. 열 발자욱마다 검문을 받는 형상이다. 황제가 있는 자금성 은 황실어림군에 의해 열겹 포위되어 있고 북경 안의 관의 녹을 먹은 대 신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금의위의 감시하에 있다. 심지어 옥룡 왕에 충성을 맹세한 학림파의 신하들마저 황궁 안에서는 딴 마음 먹지 못하도록 동창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황제의 친위세력 이어야 할 황도의 모든 것이 옥룡왕에 굴복한 상태라는 것이다. 천하에 흩어져있는 유학자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황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북경을 포함한 하북 지역은 이미 옥룡왕이 황제가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 다. 이런 모반의 움직임에도 군대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오군도독부 (五軍都督府)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미리 옥룡왕이 이들에게 손을 써놨 기 때문이다. 옥룡왕이 지난 이십년 간 쌓은 명성이 높고 그동안 무장 들에 끊임없이 후원을 해왔기에 대명 군부의 상당수는 은근히 옥룡왕이 황제가 되기를 바랄 정도였다. 차마 직접적인 반란에 가담하지는 못해 도 현 사태에서 황궁에서 내려온 황명이 없으면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는 핑계로 중립을 지킬 정도는 되었다. 명의 황군을 황명없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단 한명 있다. 군 부의 총수로 금군대원수(禁軍大元帥)인 서문대장군이다. 그리고 서문대 장군처럼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군도독부에 강력 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또 한사람이 있다. 황 대장군이다. 이 둘은 북방 국경을 지키는 군부의 거대한 세력인 북방군벌(北方軍閥)과 서로군 벌(西路軍閥)의 총수로 황제의 가장 든든한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경을 수비하고 있는 이 두 군대와 두 대장군은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 기 위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서로군벌은 북원(北元)의 잔당을 경 계해야 했고 북방군벌도 동북방의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섣불 리 움직일 수 없었다. 하물며 옥룡왕은 전력을 기울여 두 군벌에 소식 이 전해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자금성. 황제가 거처하는 곳. 그리고 천하를 다스리는 곳이다. 황궁은 철저한 감시하에 있다. 자금성 밖은 황실어림군에, 지금성 모든 출입구에는 금의위들이, 그리고 황제가 거처하는 내궁에는 동창들이 물 샐틈 없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이다. 황궁에 황족을 제외하고도 항시 거주하는 두 부류가 있다. 바로 내관들 과 궁녀들이다. 내관들은 곧 거세한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며 궁녀는 황 후와 비빈을 모시는 궁내의 여인들. 동창에 적을 두고 있는 태감들이 내 관들을 장악하여 황궁 내부에서 황제와 비빈들을 감시하고 있으니 황궁 내부의 아무리 사소한 일도 동창의 이목을 숨길 수 없음이 당연하다. 엄 중한 경계를 뚫고 황궁 내로 침입한다든가 동창의 이목을 숨기고 황제 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소리이다. 불가능을 뚫고 어둠 속에서 비밀리에 움직이는 호황대원들이 있다. 동창 을 향해 조여드는 호황대원들의 손길은 바로 황궁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 었다. 어떻게 호황대원들이 금의위의 그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황궁에 침입했을까? 어떻게 황궁 내부에서 동창의 이목을 뚫고 움직일 수 있을 까? 너무 당연하게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여자들. 태감 들의 수좌로 앉은 동창조차 감시를 하지 않은 여자들. 바로 황궁에 상주 하는 궁녀들이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호황대원이었다. 애초부터 황 궁 내에 생활하는 궁녀들이니 침입이니, 이목을 숨기는 것이니 할 필요 가 없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황궁의 궁녀들 속에 호황부 고수가 섞여 있다는 것 을. 현 황제의 공주들 중에 호황부주가 승계되고 호황령이 건네지듯이 일천 호황령 고수중에 호황맹장에 소속되어 있는 이백의 호황대원은 황 궁 내부에서 궁녀들 사이에 승계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펼 쳐지는 죽음의 손길. "컥."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또 한명의 태감이 목 숨을 잃는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어제까지 같이 생활하던 궁녀가 뒤 에서 비수로 목젖을 가르는 것이다. 방심과 암습은 고수도 하수들에게 죽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단 두 시진만에 황제가 오늘밤 거처 하는 태위전(太衛展) 주위를 감시하던 동창 소속 스물 두명의 고수가 평 소 친하게 지내던 궁녀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대단하군요. 저처럼 깔금한 마무리라니." 천리신보기를 이용하여 황궁 내부로 스며든 백이충이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지시에 의해 황제 근처를 감시하던 동창의 고수들이 치워 지고 있는 것이다. 백이충이 보기에 궁녀들은 내공을 쌓지 않은 몸이었 다. 그러나 수천번 연습해온 양 암습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저것은 그리 대단할 게 못됩니다. 호황문(護皇門)은 평생 저것 하나만 을 연마해온 여인들의 문파이니까요." 명옥공주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가 호황령과 호황부주 자리를 백이충에 게 넘겨주었다고 해도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호황맹장의 역할을, 그리고 황궁 내부에서 호황대원들이 모인 호황문을 이끌었던 여 인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호황령, 호황부는 삼문구기로 이루어져 있다. 황실 내부에서 황제를 보 호하는 호황문(護皇門), 호황부의 역사를 지켜나가는 광한문(廣寒門), 황실 외부 무림의 반역을 감시하는 생사문(生死門)의 삼문과 천외구기 가 그것이다. 호황문은 천외구기의 셋과 이백의 호황문도로 이루어져 있다. 호황문의 임무는 반역의 감시이다. 황족의 반역을 감시하는 일이며 반역이 일어났 을 시 호황맹장이 호황령을 동원할 때 호황문은 최후의 사태를 대비하 여 황제와 황태자를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황족의 핏줄로 대대로 호황령을 이어받아 호황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 은 호황맹장(護皇猛將).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황제의 옥체(玉體)를 대신하여 최후를 맞이할 천면객(千面客), 다음대의 보위를 이어받을 황 태자와 황자의 생명을 책임진 구룡화(九龍花)가 호황문 삼기이다. 호황 맹장은 명옥공주이고 천면객은 놀랍게도 삼십 년 전에 죽었다는 전(前) 동창제독(東廠提督) 사마감이었다. 그리고 구룡화는 황궁 나인들 중에 가장 오래된 태후전(太后展) 수석상궁인 이상궁이었다. 호황문의 호황문도 이백은 황궁의 나인들 속에서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최후의 순간 황제가 고립무원(孤立無援)되었을 때 구룡화의 지휘 아래 황제 및 황족의 생명을 보호하여 탈출시키는 것. 그들은 무공을 익 히지 않는다. 대신 단 한가지 살인기예만을 철저히 연습하고 있다. 단 검, 독, 구중궁궐에 펼쳐진 기관매복, 암습 등 갖가지 살인기예. 평생 사용할지 안 할지 모르는 단 하나의 기술을 연마하여 호황문도로 선택되 는 순간 궁중나인들은 다른 궁녀보다 더욱 많은 돈과 재물을 가족에게 보낼 수 있다. 이제는 평소 생활처럼 익숙해진 호황대원 궁녀들의 살인기예는 상대의 방심 속에서는 거의 무적이라 할 수 있는 것. 방심 속에서 펼쳐지는 암 습은 완벽한 죽음의 사신이 되지만 한번 정체가 알려져 경계 대상이 되 면 내공이 없으므로 다시는 써먹을 수 없는 살인기예들. 그러나 그 누 가 황궁 나인들이 최후에 황제를 보호할 수단임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동창 고수들이 맥없이 당하는 이유였고 바로 황제를 보호하는 호 황문의 저력이었다. 삼문의 하나인 광한문은 호황부의 역사를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옥령선자와 오행신인 둘이 광한문에 해당하며 그들은 호황부 천외구기 의 사문내력과 무공비급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천외구기 자체 가 따로 맥을 이어가며 후예를 구하지만 과거 천외구기가 천마에 패해 대부분 후예도 없이 죽었을 때처럼 그 맥이 갑자기 단절되었을 때에는 광한문에서 새로운 후예를 구해 호황부 삼문의 맥을 잇게 한다. 그것이 호황부가 사라지지 않고 황조가 변해도 면면히 이어지는 이유였다. 생사문은 황궁 이외의 지역, 즉 무림에서 황궁을 위협할 세력이 발생하 는 것을 감시하는 세력이다. 또한 호황부의 실질적인 전투세력이다. 생 사활의, 단향검군, 설산고검, 구류신군 등, 천외구기의 넷과 그 넷에 각 기 이백씩 딸려있는 팔백여 호황대원이 이에 속한다. 하나같이 일당 백 의 고수들. 따지자면 반역을 제압할 호황부의 진짜 세력이 되는 셈이다. "저기에요." 명옥공주가 가르키는 곳을 보며 백이충도 긴장된 안색을 감추지 못했 다. 동창고수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드디어 황제가 있는 침전에 도착 한 것이다. 대부분의 내관들은 호황문 궁녀가 제거했지만 제법 고수들 은 백이충과 명옥공주가 처리했다. 그러는 동안 백이충의 긴장도도 상당 히 높아졌다. 황도와 자금성 주변은 동창, 금의위 등의 철저한 감시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나같이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었다. 아무리 백이 충이라도 그들의 이목을 모두 피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황궁에 침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껏해야 백이충 자신이 명옥공주를 데리고 천리신보기 로 황궁에 비밀리에 침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호황문 이백 궁녀가 없었 다면 큰일날 뻔 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호황부의 호황문도 이백이 최후에 황제의 바로 곁에 있을 줄이야.) 호황문도 이백은 그야말로 최후의 비책. 황제를 빼돌릴 시간은 벌 수 있 지만 그야말로 일순간이다. 무공도 없는 궁녀가 아무리 암습으로 주변 을 정리한다지만 황제 주변 동창 고수들의 이목을 제거, 유지할 수 있 는 시간은 많아봐야 한 시진의 시간 정도일 것이다. 그 이후는 바로 옥 룡왕부에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면 되었다. 황제의 신변을 일시 간만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백이충에 게는 있었다. (황제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의위와 어림친 위군을 돌파한다고 해도 일다경(一茶頃)이내에 옥룡왕부에서 천마강시들 을 파견할 것이다. 그러나 진법으로 황궁 내부에서 황제의 거처를 격리 시킨다면...) 백이충이 제안한 것은 바로 오행신인의 최고절학인 오행미궁대진(五行迷 宮大陣)이었다. 사람과 사물을 적절히 이용한 오행미궁대진은 그 안에 보호되는 지역을 완전히 안개와 운무속에 감춰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사방을 분간 못하게되고 안에 잠복한 자들에 의해 힘없 이 제압당한다. 드넓은 황궁 내부에도 펼칠 수 있는 진법으로 능히 이백의 호황문도로 수천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백이충은 오행미궁대진에 자신의 마도진학(魔道陣學)을 이것저것 뒤섞어 그 누구도 쉽사리 풀 수 없는 변 형된 오행미궁대진을 만들어 내었다. 절대불파의 진법이라고는 말못하겠 지만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변형된 새로운 오행미궁대진은 창안한 백이충 이나 오행진인이라 할지라도 진법도해(陣法圖解)없이 혼자서 풀어내려 고 하면 삼개월 이상은 걸리는 대단히 복잡한 진법이었다. "황제를 보호하는 시간으로는 삼개월이면 충분하다. 할아버지가 홀로 북 방군벌에서 내려온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황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 가 함께 하면 근처의 병권을 장악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그리고 그 시 간 안에 호황부는 옥룡왕부를 파멸시켜면 된다." 삼개월 이내로 옥룡왕부를 파멸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옥룡왕의 승리 가 될 것이다. 삼개월의 시간이라면 설사 황제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아주 긴 시간이다. 옥룡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에 등극할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옥룡왕이 황제로 즉위식을 가지 게 되면 그때부터 불리한 것은 호황부와 지금의 황제측이 될 것이다. 황제의 침전에 조용히 숨어든 백이충은 전각 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열 명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지기가 아니라면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아마도 옥룡왕부의 고수들일 것이다. 그리고 열 명중의 하나는 대단한 고수였다. "저자는 바로 동창제독 염무균이예요. 황실 제일 고수라고 불리는 자입 니다." 명옥공주가 긴장한 목소리를 내었다. 침전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외소한 내관 하나가 황제를 시중들고 있었다. 황제는 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관에게 함부로 내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내관이 바로 옥룡왕의 심복인 동창제독이었다. 백이충이 염무균을 살펴보니 과연 대단한 고수였다. 구파일방의 장문인 을 능가하는 고수. 호황부 천외구기를 능가하는 고수. 그러나 천무삼성 이나 천마들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백년 정도의 과거라면 천하를 오시할 고수가 될 수 있었겠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지금시대에 는 남의 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수준의 고수였다. "누구냐?" 백이충이 기척을 드러내자 대뜸 염무균의 입에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 다. 염무균은 황제를 가까이 모시며 감시를 겸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황 제는 소중한 인질이었다. 어둠에서 백이충이 명옥공주와 함께 모습을 드 러내었다. 명옥공주를 알아보고 황제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백이충이 무릎을 끓고 황 제에게 극진한 예를 올렸다. "신, 서문장군부의 백이충이 황상을 배알합니다." 그제야 황제는 백이충을 알아보았다. 서문장군부의 자제가 과거에 합격 했기에 황제가 친히 접견하고 어사주까지 내렸던 인재였다. 황제가 가 장 믿는 충신이 서문 대원수였기에 그 후손이면서도 다른 성씨를 썼던 백이충에 대한 인상이 각별이 기억에 남았다. "백학사? 그리고 너는 명옥이 아니냐? 기별도 없이 여기에 어떻게?" 황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백이충은 문과에 급제한 학자 일 뿐이고 명옥공주는 연약한 아녀자에 불과하다. 또한 백이충은 충신 서문가의 후손이고 명옥공주는 사랑하는 딸이다. 마지막으로 둘은 전혀 연관이 없다. 그들이 어떻게 함께 있는지는 모르지만 위험한 황궁에 소 중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늙은 내관의 눈치 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안심하십시오. 폐하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백이충이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동창제독은 어리석은 자 가 아니었다. 세겹 네겹으로 엄중히 감시되어 있는 황궁의 경비망을 뚫 고 그들이 황제 앞까지 오도록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다. 그가 황제의 뒤에 서서 황제의 신변을 관리하 에 두며 고개를 끄덕이자 침전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아홉의 그림자가 일제히 백이충과 명옥공주를 향해 덮쳐왔다. 일단 사로잡아보고 사태를 판단할 작정이었다. "어리석은 것들." 열줄기 진기가 백이충의 몸을 휘몰아 감겨왔다. 아주 위험한 장력과 지 력이 온 몸의 위중한 혈도를 노리고 다가오는데도 백이충은 그를 막지 않았다. 모두들 백이충이 생각보다 시시한 놈이라며 단숨에 제압당한다 고 생각했을 때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크아아악." 내관의 복장을 한 아홉이 허공에서 넝마가 되어 피떡이 되어 떨어졌다. 백이충이 몸에 다가온 진력을 자연지기로 열배 증폭하여 되돌려 보낸 것 이다. 황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때 염무균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자... 자연지기. 광한문이 숙원을 풀었단 말이냐?" 동창제독 염무균도 황실에서 무공을 익힌 사람이다. 자연히 호황부의 전 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호황부의 역사를 지킨다는 광한문 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전해지고 있었다. - 언젠가 광한문의 진정한 무공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 자연지기를 터득 한 자는 살아있는 신선이며 광한선인의 후예이다. 그는 천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가 나타나면 천하와 황실은 그의 뜻대로 움직 일 수밖에 없다. - 염무균은 전설같은 그 구절을 믿지 않았지만 눈으로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동창 서열 삼십위 이내에 드는 첩형 아홉이 단순한 반탄강기 만 으로 반항도 못하고 피떡이 되다니. "다가오지 마라. 황제의 목숨을 구하고 싶거든." 염무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황제를 인질로 내세우려 했다. 여태까 지는 겉으로나마 황제에게 공손히 대하며 시중을 들었지만 생사가 달린 지금에서는 앞뒤를 가릴 여력이 없었다. 구하러 온 자가 이토록이나 강 한 자일지는 생각도 못했다. (호황부가 나타났다. 서문장군부가 호황부와 연관되어 있다니. 왕야에 게 연락해야 한다. 옥룡왕부의 힘이라면 자연지기를 터득한 광한문의 전 인이라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네놈. 지금 무엇을 잡고 있는 거냐?" 백이충의 비웃음 가득한 말에 염무균의 두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오직 옥룡왕만 두려워했을 뿐, 자신의 무공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염무균이었지만 불행히도 옥룡왕보다 뛰어날지 모르 는 무공을 백이충은 가지고 있었다. 어느새 황제는 명옥공주의 곁에 있 고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황제의 옷자락대신 그의 오른 팔이 팔목까지 잘 려져 있었다. 언제 잘렸는지 누가 잘랐는지 느낌조차 없었다. "크으윽. 이놈." 염무균이 신음을 지르며 왼손으로 암기를 뿌려대었다. 무림의 금용암기 (禁用暗器)로 알려진 폭우유성침이었다. 용수철 장치에 의해 주변 십장 을 바늘 들어갈 틈조차 없이 빽빽하게 독침이 쏟아지는 가공할 암기였 다. 황제와 명옥공주가 그 범위 안에 있었기에 백이충은 그들을 보호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장창! 염무균이 그 틈을 타서 창밖으로 달아났다. 외부의 도움을 청하 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방안으로 한줄기 어두운 음성이 들렸다. "염무균은 내가 처리하겠소." 그 목소리가 천면객임을 알고 백이충은 추적할 생각을 멈추었다. 따지고 보면 천면객은 전대의 동창제독 사마감이었고 염무균이 동창의 첩형이었 을 때 상관이었던 사람이었다. 염무균의 자질을 알아보고 사마감 자신 의 손으로 일반 내시를 직접 동창에 이끌어 무공을 가리켰을 정도로 출 중한 인재였다. 이제 과거 자신의 부하가 동창을 통솔하며 황제를 배신 한 것을 알았으니 사마감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죄책감에 심사가 편 치 못했을 것이다. 염무균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싶은 심정이 충분히 이해갈만 했다. (염무균의 오른 손이 잘렸으니 충분히 천면객의 힘으로 상대할 만 하 다.) 백이충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 명옥공주는 황제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호황부가 움직이고 황제를 구하려고 한 일, 청류계와 황대장군이 움직인 일. 그리고 호황령을 백이충에게 넘긴 일을 자세하 게 황제에게 전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을 감금하다시피 한 동창의 고수 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백이충과 명옥공주가 구하러 왔으면 황제는 몹시 기뻐해야 하거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의 태도는 침착하기 이를데 없었다. 황제는 명옥공주의 말을 모두 듣고 서두르는 기색없이 백이충 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호황부의 전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백학사가 호황부를 맡을 정도의 인재였단 말인가? 역시 충신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오는군. 서문대장군부의 집에서 자네 같은 인재가 계속 나오다니. 백학사. 아 니, 이제 호황부주라고 칭해야겠군."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이 불민하여 역도들의 음모를 사전에 막 지 못한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짐이 곤란을 당한 것은 근래의 일이고 자네가 호황령을 넘겨받은 것은 엊그제의 일이니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사태가 급박하니 단도직 입적으로 묻겠네. 지금 호황령의 임무를 수행할 힘이 자네에게 있는가?" 옥룡왕과 역도를 물리치고 지금 불안에 빠진 황실을 안정시킬 힘이 있는 지를 묻는 물음이었다. 과연 만인지상의 절대자라 사태 파악이 빠른 것 일까? 질문이 단도직입적이었다. 마침 백이충도 시간이 없었기에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참으로 민망하게도 역도들의 힘이 너무 막강하옵니다. 현재 저희들의 힘이 너무 미진하니... 당분간 때를 기다려 역도들을 물리칠 기회를 기 다려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황제는 얼굴에 잠시 실망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도 옥룡왕의 세력이 강했던가? 전설상의 호황부로도 당장은 그 와 맞설 수 없단 소리로군. 그럼 짐은 황궁을 벗어나 잠시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인가?" 황제의 실망어린 어조에 백이충이 다시 부복한체 머리를 조아렸다. "황궁은 폐하의 처소이옵니다. 누가 감히 폐하를 이곳에서 떠나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저들이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백이충은 오행미궁대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자금성 안의 내궁을 중 심으로 진법을 펼치겠다는 것. 그리하면 적어도 석달은 옥룡왕도 진법 을 파해할 수가 없다는 것. 옥룡왕이 자금성의 진법에 이목을 집중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시간에 외부에서 서문대장군과 황대장군이 힘을 합쳐 충신들과 함께 황도를 되찾겠다는 계략이었다. "하면 황후와 비빈들, 황자들의 안전도 오행미궁대진으로 보호할 수 있 다는 것인가?" "예. 또한 호황문의 고수들이 오행미궁대진 안에서 폐하와 마마들을 보 호할 것입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호황부에서 가장 빠른 시 간 안에 위급한 사태를 해결하도록 전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역시 너희들은 그와 연계되지 않고 따로 일을 만든 것이로구나. 호황부 는 너무 성급했다. 그토록 준비를 해왔던 일에 잠시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 들다니. 그를 기다려야 했거늘..." 황제는 백이충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허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지. 호황부의 전설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짐의 실수이기도 하니... 호황부주의 말대로 일단 그 진법이 라는 것으로 시간을 버는 수밖에. 흐흠. 황자들과 황후를 확실히 보호 할 수만 있다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황제는 탄식을 하더니 오행미궁대진을 황궁 내에 설치하는 것을 허락했 다. 이미 백이충의 지휘아래 호황문의 고수들이 진법을 바쁘게 설치하 고 있었지만 황제의 허락을 받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황제의 기이 한 언동에 의심이 생겨 그를 물으려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백이충이 질 문하기 전에 방 안에 걸려있던 검을 꺼내 들더니 백이충에게 내밀었다. "백부주. 지금은 비상시기이고 이미 그대는 호황령을 가졌으니 반역도 를 향해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호황령에 잠재해 있던 권한, 짐 을 제외한 모든 황족과 관리를 체포 구금하고 생사를 판결할 권한을 주 겠노라. 그리고 이검." 황제를 상징하는 구룡보검을 백이충에게 내밀면서 황제가 말했다. "오늘로서 서문 대장군을 호국대원수(護國大元帥)로 봉하며 그 증표로 이 구룡보검을 서문 장군부에 넘기겠도다. 그대는 즉시 이 구룡보검을 가지고 하남 낙양성주를 찾아가도록. 거기에 호국대원수를 대신하여 역 도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 존재가 있을 터이니... 바로 그대의 부친 서 문장군이다. 서문장군과 호국부주, 이 두사람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겠 도다." 황제의 말에 백이충은 얼굴 색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서문장군부는 옥 룡왕부의 무사들에 의해 모든 가솔이 끌려간 것으로 되어 있거늘... 지 금 황제의 말을 들어보니 뭔가 다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서문장군부의 데릴사위로 성까지 바꾸며 할아버지 곁에 부장(副長)으로 있던 아버지가 낙양성에 있다니? "짐의 뜻이 궁굼한 모양이군. 하기는 이번 일은 호국부를 염두에 두지않 고 진행시켰던 일. 호국부주가 알지 못하는 비밀리의 일이니." "하오면 폐하께서는 달리 역도들을 처리할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 까?" "옥룡왕이 그토록 반역의 뜻을 명백히 하거늘 짐이 짐작도 하지 못할 리 가 있었겠는가? 다만 역도들의 뿌리가 너무 깊고 그 세력이 너무 방대하 여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고름만 만드는 꼴이었기에... 역도들의 정체가 모두 드러나기를 기다려 일망타진하기 위해 참았을 뿐." 황제는 놀라운 말을 태연히 내뱉었다. 그렇다면 조정의 대신이 장악되 고 금의위와 동창에 의해 황궁이 제압되고 어림친위군에 의해 자금성이 감시되고 황도 북경이 옥룡왕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모두 황제가 그렇 게 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란 소리가 아닌가? "금의위와 동창을 내어준 것도 모두 그 때문. 호국대원수와 황대장군 같 은 충신들을 변방으로 몰아낸 것도 그들이 마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그런 것. 지금 호국부주의 부친 서문장군이 호국대원수의 명을 받들어 황실의 충신들을 이끌고 낙양성에서 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네." 황제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역도들의 전모가 드러나도록 좀 더 기다려야 했거늘. 그리고 짐 혼자서라면 몸을 뺄 준비는 모두 되어 있었네. 다만 역도들의 행동 이 너무 빨라 황궁에 있는 비빈들의 안전이 걱정되었는데... 호황부의 행동이 약간 성급하기는 했으나 대신 짐의 비빈과 황자들에 대한 안전 의 보장책을 제시해 주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네. 호황부가 서문장군 과 힘을 합치면 좀 더 빨리 이 추악한 일이 끝나겠지." 황제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명옥공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아바마마. 옥룡왕의 일을 아셨으면서도...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소녀 를 현안군에게 시집보내신 것입니까?" "하하. 네 심려가 컸겠구나. 짐이 알고있기에 부부의 금실이 좋은 것으 로 알고 있는 데도 남편을 배반하고 아비를 위해 호황령을 발동시키다 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현안군은 역도가 아니다." "무슨? 그럼 부마께서 거짓으로 옥룡왕에 충성을 맹세하신 것이란 말입 니까?" "현안군을 가장하려 했던 자는 역도 염무균의 조카로 옥룡왕의 제자가 되는 자이다. 그는 너와 현안군의 혼사가 결정되자 현안군을 죽이고 그 를 가장하려고 했다. 다만 그는 현안군이 백면서생으로 알았을뿐, 서문 장군의 제자로 무당파의 절기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서문장군이 짐의 뜻을 받들어 동창제독 염무균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는 것도 몰랐다." 명옥공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현안군은 염무균의 조카로 가장하여 옥룡왕의 내실을 염탐했다. 원래 옥룡왕의 제자가 현안군을 가장하려 했으니 반대의 일은 쉬운 일이었 다. 하지만 현안군이 알아낸 옥룡왕의 반역도당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방대했다. 이미 조정 중신과 장수들의 반 이상이 포섭되어 어디까지 역 도들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을 정도였지. 그래서 서문대원수가 짐 과 상의하여 이런 계획을 짰던 것이다." "하오면 아바마마가 말씀하셨던 아바마마의 안전을 도모할 길이라는 것 이..." "황궁을 맡고있는 염무극이 철저히 현안군을 믿고 있으니 현안군을 시 켜 서문장군과 연락을 하려 했었지. 그리고 서문장군이 북경으로 진군하 면 현안군이 짐을 호위하여 서문장군과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 나 황궁을 진법으로 보호할 수 있다면 굳이 짐이 황궁을 벗어날 필요는 없겠지." 그날밤 자금성을 뒤엎는 운무가 십리에 걸쳐 퍼져나갔다. 제일먼저 황실 어림군이 그것을 발견하였고 금의위가 부산을 떨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황궁 내부는 그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았 다. 경비를 교대하러 들어간 금의위들의 소식이 끊어졌고, 연락을 내보 내야할 동창의 소식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황실어림군의 군대가 연락이 끊어진 자들의 소식을 알기위해 황 궁 내부로 들어갔으나...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옥룡왕이 황궁의 이변 을 알게 된 것은 황실어림군과 금의위의 인물들이 무려 천 오백에 가깝 게 실종된 이후였다. 쾅! 탁자가 박살났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황궁의 안쪽에 안개가 깔리고 황제가 실종되었다 니?"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황제와 비빈들이 있는 내궁에 안개가 깔 리고... 미궁이 되었습니다. 내관들도 궁녀들도 나오지 않았고, 우리편 동창과 금의위, 관리들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섭했던 태감들도 소식 이 없고 그 안에 있던 대신들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 하고 그 안으로 들어선 황실어림군의 모든 장수와 금의위 영반들이 아무 도 돌아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옥룡왕은 어이가 없었다. 그토록 철저하게 황궁을 감시했거늘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변수가 생길 여지가 남아있었단 말인가? "일총관은 뭐라 하는가? 황제를 철저히 감시하도록 그렇게 일렀거늘 무 슨 일을 이렇게 처리했단 말이냐?" "그것이... 일총관은 자금성의 내궁이 미궁이 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 습니다. 동창제독 역시 미궁 안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 다." "동창제독마저? 그의 무공은 황실에서 거의 당할 자가 없거늘. 이... 무 슨 일이란 말이냐?"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었다. 갈수록 생각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사부는 죽었거늘 마혈존이라는 것이 복수를 한답시고 날뛴다. 게다 가 무적의 천마강시조차 그 신출귀몰한 마혈존이라는 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자만으로도 악몽을 꿀 지경인데 삼총관이 실종되었다. 그리 고 이제다시 일총관의 연락이 끊어지고 소중한 인질인 황제가 사라지다 니. "가보자. 본 왕야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겠다. 멀쩡하던 황궁이 어찌 미 로가 깔린 미궁으로 변한단 말이냐?" 옥룡왕은 그의 제자인 현안군과 함께 자금성으로 향했다. 그를 모시는 현안군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한 것을 그는 결코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진법이?" 혈지존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단번에 황궁의 이변이 진법에 의 한 것임을 알았다. 차라리 술법이나 사술로 인한 것이었다면 능히 파해 할 수 있었으리라. 진법이라도 삼총관이 있었다면 결코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절정마유는 두뇌자들의 머리를 빌어 절정무학을 제압하는 진법을 만들어낼만큼 진법의 대가였다. 그러나 삼총관 절정마유는 이미 소식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절정마유가 실종되던 당시 감시하던 황대장군 과 이정례 대인의 모습도 사라졌었다. "이건... 오행의 원리에 의한 진법이다. 과거 천년마교에 오행진인이 사 용하던 진법. 설마 천외구기가 환생이라도 했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오묘한 진법임을 알고 옥룡왕은 침음을 흘러내렸다. 진법이 라는 것이 무공 못지않게 심오한 것이다. 결코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진법에 정통한 학자라도 있다면 사정이 틀려지리라. 그러나 절정마유라는 진법의 최고 두뇌를 보유하고 있던 옥룡왕은 그 외 에 별다른 진법의 전문가를 수하에 둔 적이 없었다. 절정마유가 사라진 지금은 진법에 관해 취약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과거에 천년마 교가 가장 애를 먹었다고 알려진 오행진인의 진법이라니. "현안군." "예. 왕야." "황궁의 이변은 진법에 의한 형상이다. 천하에 방문을 열어 진법의 전무 가들을 모두 황명으로 끌어들여라. 가장 빠른 시간이내에. 그리고 저 괴 이한 진법을 파해하라. 적어도 일개월 이내에는 진법을 파해해야 한다." "왕야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옥룡왕은 저도 모르게 아랫 입술을 질겅 앂었다. 극도의 초조감이 생겨 났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답답했다. "북경을 제압하고 군부의 인심을 얻었다지만 천하에 명분을 쌓은 것은 아니다. 지방의 군대와 관리들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황제가 직 접 양위를 한다는 명분이 필요하다. 지금은 군부에서 본 왕야에 암묵적 으로 동조하고 있다지만... 우리를 방관하고 있을뿐 거사에 동참한 것 은 아니다. 사태가 변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등을 돌릴 소지가 있다." 옥룡왕이 탄식을 내뱉었다. "시일이 길어진다면, 그리고 군부에서 서문대장군이나 혹은 다른 충신장 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북경의 군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황제를 다시 손에 넣어야 한다. 황제가 북경을 빠져나가거나 시일이 지나도록 그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끝장이다. 결국 황제의 확보가 이번 일의 승 패를 좌우한다." 옥룡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했던 이번 역모에 대 해. (뭔가 황실의 다른 힘이 움직이고 있다. 역시 황실을 너무 얕보았는가? 백번 생각하여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행동했는데도 변수가 이토록 많 다니. 만일의 경우 황실을 포기하고 다시 혈지존으로 무림부터 장악해 야 할지도 모른다.) "천외구기. 천외구기라. 그리고보니 천외구기는 과거 황실에서 파견한 존재라는 소문이 나돈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럴만한 세력이 또 누가 있 을까? 호황부는 현안군이 장악했거늘 어떤 세력이 있어 천외구기 같은 자들을 움직였던 것일까? 그럼 과거 천외구기를 무림에 파견했던 세력 이 이번에 새로운 존재들을 만들어 다시 개입한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옥룡왕이었다. 황제가 만든 가짜 호황부 와 현안군에 속아 진짜 호황부와 호황령의 출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 하지 못하는 옥룡왕이었다. 그러나 옥룡왕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세력 이 아니었다. 무인 몇 명의 정예세력은 옥룡왕부의 무사와 부하들로 충 분히 제압할 수 있다. 옥룡왕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대명의 황군 이 황제를 위해 움직이는 일이었다. "아직은... 아직은 옥룡왕으로서 군부를 움직일 명분이나 지위가 부족하 거늘, 멍청한 황제가 군부의 장군 관직만은 죽어도 본 왕야의 부하들에 게 넘겨주지 않아서... 황도수비군을 장악한 것만도 간신히 이룩했고 군 부의 인심을 얻은 것도 무려 이십년이란 세월과 엄청난 황금을 들여야 했거늘." 옥룡왕의 눈빛이 싸늘한 살기로 바뀌었다. 그는 다시금 황성 내궁의 안 개낀 미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 안될 때에는 황궁 자체를 쑥밭으로 만들겠다. 북경 전체를 불질러 버리게겠다. 황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혼란 에 빠질테고... 그때 무림을 장악한 이후 본좌는 백나안 본인으로 돌아 가 힘으로 다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 버릴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내용을 내뱉는 옥룡왕 혈지존이었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황궁무고의 기연 관련자료:없음 [20374]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1 01:52 조회:736 <황궁무고의 기연> 황제가 백이충에게 명했다. 내궁이 진법으로 감싸인 뒤 과연 옥룡왕부 의 역도들이 내궁을 침범하지 못하자 그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였다. "호국부주 백이충은 짐의 명을 따라 황궁무고에 들라. 그곳에서 열흘동 안 있을 것을 명한다. 대대로 호국부의 모든 무학은 황궁무고에서 나왔 다. 호국령주는 황궁무고의 무학을 익힐 수가 있다. 따라서 그대 역시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단 열흘만이라도 황궁무고에 기거하는 것이 옳다." 백이충의 입장에서는 황궁무고의 무학 따위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이미 자연지경에 이른 백이충으로서는 무공비급 따위는 그에게 별 도움 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지경을 넘어 서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떨어졌으니 황궁무고에 들어서 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모든 무림인들이 단 한번이라도 구경하기를 원하는 황궁무고는 솔직히 백이충으로서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은 장소였 다. "이것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 백이충은 황궁무고에 들어서서 입을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황궁서고 에는 네 개의 책창고가 있다. 서로 붙어있는 네 개의 황궁서고 중에 황 궁 무고에는 거의 만권에 달하는 책이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절 정의 무공비급이었다. 십팔반 군부 무예부터 시작하여 강호에 실전되었 다고 알려졌던 모든 무공비급이 여기에 있었다. "소림사, 무당파의 비급까지... 황궁무고에 장경각보다 더 많은 소림의 무공이 비치되어 있다는 것을 소림사가 알면 장경각주가 눈에 불을 키 고 달려오겠군." 소림사에도 실종되어 사십여종만 남았다는 소림의 칠십이종 절기가 황 궁 무고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불문무예가 서가에 얌전히 책 제목가 지 붙어 모조리 존재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무당파의 비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이하여 세수역근신경이 없는 거지?" 이상했다. 소림의 칠십이종 절기가 모두 있는데 십대절학의 하나인 세수 역근신경 만이 없었다. 아예 수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간단한데 빈 자리에 책 제목이 자리에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까지 세수역근신 경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보면 무당의 모든 비급이 있는데 태극일원공의 비급만이 없다. 이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극혜검의 이치를 담고있는 태극일원공 역시 백도의 십대 절학의 하 나. 무당의 비급이 있는 곳 역시 수많은 책이 빽빽이 꽃여 있었다. 하나 같이 무당의 절정비급들. 단 한권의 자리조차 빈틈이 없이 가득 채워져 있는 무당파 무공비급이 있는 서가에 오직 하나, 태극일원공이라는 제목 이 붙어있는 자리만이 비어있는 것은 우연일까? 믄득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 백도의 절학들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화산 파, 청성파, 아미파, 곤륜파... 놀랍게도 그들 문파의 비전비급이 없는 것이 없었다. 자고로 황궁무고의 절학은 허락받은 자가 안에서 암기를 할 지언정 절대 가져가거나 필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황제와 황 제의 허락을 받은 황족만이 그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각 문파 의 서가에 백도의 십대절학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화산파의 불사건곤 심공도, 개방의 금강칠채강의 비급도 서가의 빈 자리만이 있을뿐 비급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황궁무고에는 놀랍게도 백도의 십대절학 중에 여덟종이나 있었던 흔적 이 있었다. 빈 자리에 책 제목이 확실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없는 두종 은 오히려 황궁무고에서 비롯되었다는 무공, 표향단심공과 옥령선음이었 다. 이 두종의 무학은 아마도 호황부의 광한문이 그 역사를 따로 잇기 위해 황궁무고에서 빼돌렸을 것이다. 황궁무고에 전설적인 절학들 여덟 종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모든 것이 사라져있다니. "역시 옥룡왕 혈지존의 짓이었어. 어떻게 천하의 절학을 제압하는 진법 을 만들어냈는가 했더니..." 과거 혈존은 낙마곡을 파헤쳐 팔대천마의 마공사공과 기타 마두들의 마 도절학을 얻었다면 옥룡왕 혈지존은 여기서 흑백도의 모든 비급을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두뇌자를 이용하여 그 비급으로부터 천하절학을 제압 할 진법을 만들어내고 쌍영마공을 합일하는 마공을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혈존은 두뇌자를 이용하여 모든 흑도마 공을 통합하여 쌍영마공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조차 아수라독문마공을 얻기위한 기초무공이었다. 두뇌자와 낙마곡이 혈존을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혈지존도 모든 백도의 신공을 여기에서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혈 존의 흉내를 내어 두뇌자 역시 만들어 내었다. 그는 천하의 절학들을 일 반 무인으로도 막아낼 진법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최후의 무공은 쌍영마공을 합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마지막일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무공의 끝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까 지는 바로 볼 수가 없는 터일 텐데... "백도의 절학이 그렇다면 흑도의 절학역시..." 백이충은 흑도의 무학을 살펴보기로 했다. 사실 흑도의 무학은 백이충 이 살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혈존의 영혼이 깃들었던 시절은 거의 모 든 흑도절학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있었고 지금도 반 정도는 머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백이충에게 있는 혈존의 파편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지금의 백이충은 혈 존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백이충으로서 혈존 백가량을 흉내내며 지냈던 시절의 기억이 지금의 백이충이 혈존과 연관되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 이었다. 무공을 익힐 수 없었던 그 당시의 백이충은 무공대신 사공과 법술을 주 로 사용했었다. 그것만이 머리에 남았다. 마공은 허약한 몸 때문에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혈존의 영혼이 조각나 사라지면서 많은 무공구결을 같이 잃어버렸다.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분신의 필요에 의해 혈존의 영혼에서 기억해내어 백이충이 분신의 체질과 함께 개선하고자 직접 연구했던 흑도 마공뿐이었다. 혈존 백가량의 영혼에 무수히 존재했던 마공, 그저 자신의 영혼에 남아 있으니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굳이 그 당시 백이충이 머리나 몸으로 익히지 않았던 모든 마공구결은 까맣게 지금의 기억 속에 서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분신으로 영혼이 들어가 사용하고 익혔던 기억 과 무공마저 다른 파편으로 갈라지며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나마 혈존의 영혼이 온전히 깃들었던 백이충 시절, 익히지는 않았어 도 많은 마공구결을 마화타와 함께 검토한 적이 있어 흑도무공이 반이나 마 머리에 남은 것이다. 하지만 혈존의 기억 속에는 전부 존재했을 모 든 흑도 마공구결 중에 반 이상이 백이충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이 환했던 흑도의 칠대절학도 대충 그 원리와 장단점만 기억날뿐 정작 완벽한 구결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그들 모든 마공사공의 원리와 정수가 조금씩 포함된 쌍영마공의 구결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백이충이 머리 속에 남아있던 마도의 절학을 기억하며 확인해보니 황궁 무고의 마도서가에 그 마공들이 모조리 존재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참으 로 대단한 황궁무고였다. 없는 것이 없으니 황실이 얼마나 무림을 경계 했는지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 비급은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쌍영마공을 제외하고는 천마지존공이나 천사음유공 등 마도와 사도의 칠 대절학이 있던 자리가 모두 있었다. 서가에 칠대절학의 제목이 적힌 자 리가 분명히 존재한 것이다. 심지어 백이충이 마교의 혈마시절 창안했 던 구음마공의 비급 자리마저 여기에 있었다. 쌍영마공의 자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옥룡왕이 싹쓸어 갔기에 서가에는 책이 있던 빈자리, 책 제목만 있 는 빈자리가 있을뿐 정작 일곱가지 절예의 비급은 없었다. 다른 모든 비 급은 있는데 그 자리의 책만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최절정 마학중 에 구음마공만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푸웃. 혈지존놈. 혈존이 최초로 만들었던 구음마공을 무시하고 가져가 지 않다니." 이것으로 한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 옥룡왕의 무림에 대한 모든 준비 는 바로 황궁무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옥룡왕이 진짜로 무림 에 나선다면 이미 모든 최절정 무공을 연구하여 제압하는 진법을 가진 옥룡왕에게 무림이 대항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나마 쓸만한 것은 결국 다 가져갔군. 잊어버린 마도의 절학이나 이 제 내게 그래도 많이 소용될 백도의 절학, 그나마 자연지경에 가까운 흑 도의 칠대절학, 백도의 십대절학을 보려 했거늘... 이렇게 되면 아무 소 용이 없지 않은가?" 백이충은 크게 실망했다. 물론 그의 자연지경의 상태로 보아 흑도의 비 급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자연지경의 지금 상태만으 로 백도의 최고절학이라 이름붙은 것들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 었다. 그래도 황궁무고에 가장 최고라고 생각되는 비급들이 사라진 것 을 보니 맥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끄응.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백도의 무공이나 외어볼까? 자연지기를 얻은 이후 이상할 정도로 흑도의 마공이 몸에 맞지 않으니... 백도의 무 공도 외워놓으면 자연지기를 좀 더 익숙하게 다루게 될지 모르지. 일단 심심하지는 않을테니까." 백이충은 자신이 얻은 자연지기가 도가의 광한비급에서 비롯되었기에 도 가의 비급을 읽기 시작했다. 무당, 화산, 공동의 비급. 수련하려는 목적 이 아니었기에 한번 읽는 것으로 만족하였기에 열흘의 시간은 충분한 시 간이었다. "호오. 백도의 무공은 이런 식으로 되어있군. 마도의 무공이 자연의 이 치를 극복(거역?)하면서까지 강함을 추구한다면 백도는 자연에 순응해 서 힘을 얻으려하는 건가?" 백이충은 하나 하나를 읽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세계를 접한 것이다. 무공이라면 마공이나 백도의 도가신공이나 그게 그 거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백도의 신공은 말하자면 자연에 순응하자는 식의 이치를 담은 무공이었 다. 그리고 광한비급의 신선이 되는 내용은 그 자연의 이치마저 초월하 여 자연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경지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것이었다. 자 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연을 초월하여 천지초화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신선의 경지였다. 흑도의 마공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려는 식의 이치를 담은 무공이었 다. 자연의 이치를 비틀면 부조화 속에서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 강한 힘만을 추구하여 속성의 광폭한 힘을 담는 것이 마공이었다. 아수라독존 마공은 그런 마공의 극치에 달한 것으로 아예 스스로가 자연의 중심이 자 생성지이니 자연따위 내마음대로라는 안하무인의 극치인 초마의 경지 를 담는 것이었다. 또한 흑도의 마공이 마공, 사공, 독공, 온갖 기괴한 여러 가지로 나뉘어 져 있다면 백도의 무공 역시 불가, 도가, 유가등 갖가지 종류로 나뉘어 져 있다는 것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도 모른다. 하나의 같은 진리도 불가, 도가, 유가 등은 각기 다르게 설 명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걷고 있는 길이 다른데도 아수라독존마공이나 광한비급 상의 광한신공이나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이다. 둘 다 자연이나 우주의 이치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 위에 자기 자신을 두어 그 기운을 자기 마 음대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미 몸이 그 경지를 경험 한 백이충은 광한비급상에 조그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연스럽게 광한 신공 바로 밑의 자연지기를 얻었던 것이다. 백이충이 광한비급을 모조리 깨달았다면 인선(人仙)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자연의 이치따위는 초월하여 마공이나 신공의 구별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것이고 광한신공으로 아수라독존마공을 펼칠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 경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백이충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터득해 나갔다 면 광한비급을 단 한번 보는 것만으로 광한신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 다. 역시 그 경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이충이 아수라독존마 공의 깨달음을 잃어버렸기에 광한신공의 깨달음도 완벽히 얻을 수가 없 었다. 단지 그 밑의 자연지기만을 얻었기에, 그 자연지기라는 것이 자연의 기 운을 담는 것이기에,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는 마공으로 표현하기에는 모 순되고 백도의 신공으로 표현하기에는 적당하며 조화스러운 것이기에 자 연지경에 다다른 백이충의 무공에 모순이 발생했다. 마공은 많이 알아 도 갈수록 어색하고 백도신공은 아는 것이 적어도 갈수록 익숙해지는 모 순이었다. 무당의 기초무공 몇가지를 익히며 자연지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백이충이지만 백도의 신공비급을 읽으며 얻는 바가 많았다. 마도의 구결 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그가 몸에 품고있는 자연지기와는 몸에 맞는 옷처 럼 완벽하게 들어맞는 구결이었다. 광한선인이 신선이 되었다고 하니 도 가계통인가 싶었지만 자연지기는 불가와 유가의 이론과도 상통하는 것이 었다. 자연지기 자체가 어느 한 계통의 좁은 경지를 뜻하는 상태가 아 닌 것이다. 어느덧 백도신공을 읽으면서 구일이 흘렀다. 백이충 스스로는 몰랐지만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적어도 몸 안에 있는 자연지기를 완벽하게 통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이충 자신이 이미 초식이나 무공의 원리를 초 월한 경지였기에 단지 읽고 잊어버리는 것만으로 새로운 경지에 올랐 다. 몸안의 자연지기가 분출될 가장 적당한 방법을 백도의 신공 중에 골 라내어 스스로 찾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광한선인의 기록인가?" 백도신공의 비급을 읽을만큼 읽었을 때였다. 문득 백이충은 자신이 얻 은 광한비급을 남긴 광한선인에 대해 궁굼해졌다. 광한비급은 호황부에 의해 빈 자리마저 사라졌지만 광한선인은 선인으로 등선했다는 전설이 남은 아주 유명한 선인이었다. 무가의 황궁무고가 아닌 바로 곁의 황궁 서고를 찾아갔다. 도가의 경전들이 있는 비고에서 백이충은 광한선인의 발자취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건 뭐야? 그림인가?" 백이충은 한권의 책을 발견했다. 어떤 이가 광한선인의 발자취를 소상 히 밝힌 책이었다. 그 자신이 광한선인의 자취를 쫓아 일평생을 보냈으 니 자서전이라 할 수도 있는 책이었다. 이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백이충 은 광한선인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광한선인에 대한 전설을 기록한 여러 가지 책자 가운데 가장 자세히 선 인의 자취를 적은 책의 저자는 스스로 광한선인의 손자라고 밝혔다. 백 이충은 책 마지막 장에 한폭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 광한선 인의 손자라고 밝힌 이가 그린 그림인데 책 속에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 은 글이 있었다. - 할아버지는 백세가 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늙기 직전 젊 어진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나는 살아있는 신선이라 고 세상에 알려진 광한선인이 바로 내 할아버지였음을 알았다. 그분은 스스로 등선한다고 하시며 당신의 심득을 내게 일러주셨는데...- "얼레? 어쩐지 신선이 된 양반이 비급을 남겼다고 해서 이상하다 했더 니. 이제보니 광한비급을 기록한 사람은 광한선인 본인이 아니라 바로 광한선인의 손자라는 바로 이사람이었구나." 광한선인의 발자취를 책으로 남긴 사람은 스스로 옥령진인이라 밝힌 도 사였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옥령선음을 최초로 무림에 알려 옥령 선음을 백도십대 절학의 하나로 만든 사람이었다. "엑? 옥령진인이 광한선인의 후손이었어? 한때 천하제일인으로 불렸 던... 그리고 보니 옥령선음으로 무적행세를 했던 사람이잖아?" 옥령진인이 광한비급을 만든 사람이 맞았다. 그가 최후로 광한선인을 만 났을 때 한구절의 알 수 없는 구결을 듣게 되었고 그것을 나름대로 책으 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백이충이 얻었던 광한비급이었다. 그 내용도 책 속에 밝히고 있었다. 백이충은 우연하게도 광한선인의 심득을 광한비 급에 옮겨 적은 옥령진인의 자서전 같은 책을 읽게 된 것이다. - 지금 마지막 남긴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다. 과거 할아버지가 애지중 지하던 그림을 흉내낸 것이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는 자연의 모든 이치 가 담겨 있다며 곁에 두시고 즐거워하던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할 아버지와 함께 사라졌다. 죽기 전 문득 할아버지가 그리워졌다. 기억을 더듬어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그림과 비슷한 것을 하나 그려 다시 남 긴다. - 책의 내용은 광한선인의 일을 다루고 있지만 또한 옥령진인의 자서전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자서전이야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실지로 과 거 호황부는 이 자서전을 통해 광한비급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황궁무고 에서 광한비급을 발견함으로서 호황부의 광한문이 시작된 것이다. "이게 뭐야? 산에 호랑이와 학, 짐승들이 모여 노니는 그림이네?" 자연의 이치가 담겨져 있는 광한선인의 그림을 옥령진인이 따라 그린 그 림이라 했는데 백이충이 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그림에 불과했다. 죽림에 온갖 짐승이 모여들어 같이 놀고있는 모습이었다. 호랑이와 학 이 서로 머리를 부비고 원숭이와 개가 춤추고 있었다. 말이 달리고 소 가 누워있다. 평화스럽지만 단지 그림이었다. 이미 백이충의 경지는 무학대종사(武學大宗師)의 경지를 넘어서 어떤 것 이든 무학의 이치가 담겨져 있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거늘 이 그림은 진짜 단순한 그림에 불과했다. 심상치 않은 열정은 숨어있을지언정 광한 선인이 칭찬했다는 자연이치는 전혀 없었다. 혹시나 어떤 이치가 담겨져 있을까 싶어 눈이 떨어져라 그림을 살펴보 고 또 살펴보았지만 백이충은 아무 것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하기야 광한선인이 남긴 그림도 아니고... 그 손자가 광한선인이 아끼 던 그림의 모습을 기억을 더듬어 다시 그린 것에 불과하니... 진품이라 면 모르지만 모작인 이 그림 안에 광한선인의 깨달음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황당한 일이 될지도." 그림을 연구하다가 어느덧 백이충은 그림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그 리고 꿈을 꾸었다. 꿈 속은 대나무 숲이었다. 대나무가 끝없이 높아 위를 쳐다보면 하늘까 지 찌르고 있었다. 사방이 대나무 숲이라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가 없었 다. 그리고 그안에 온갖 짐승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온갖 자세를 취하며 놀고 있었다. 원앙이 하늘을 날고, 학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원숭이가 술에 취해 울고 웃었다. 호랑이가 잠자고 있었고 말이 달리고 소가 누워있었다. "이건 꿈이다. 그런데 참으로 생생한 꿈이로구나. 이곳의 세계는 익숙하 다. 바로 잠이 들기 전에 본 그림 속의 세계이다." 짐승들의 표정이 마치 산 사람의 표정처럼 생생했다. 묘하게도 짐승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아이가 온갖 짐승 속에 뛰어 놀고 있었다. 짐승들에게 가려져 있 던 소년이었다. 선동(仙童)인 듯 얼굴이 몹시 아름다웠다. "신비하다. 대나무와 짐승이, 선동의 주위 환경 모두가 선동에 휘둘리 고 있다." 백이충은 어떤 감동을 느꼈다. 대나무 숲의 움직임이 선동을 위해 존재 하는 것 같았다. 저마다 온갖 자세로 눕고 달리고 나는 짐승들의 움직임 이 선동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꿈 속의 세계 전체가 선 동과 완벽히 일치되어 있었다. 선동이 숲과 짐승들과 조화된 것이 아니 라 이 꿈속의 세계 자체가 선동에게 조화하고 있었다. 조화되지 않은 유 일한 외부인은 백이충이었다. "어린 아이인데 정말로 아름답다. 감히 저 선동의 곁으로 가고자하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추해 보일 테니까. 나 역시 저 곁으로 갈 엄 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초라한 사람이었다니." 그 아름다움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순수와 조화. 그리고 자연 을 자신의 품에 안는 완벽한 일치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었다. 완벽함 에 대해 느끼는 불완전함의 부끄러움이고 부러움이며 동경이었다. 백이충은 선동의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어느덧 그는 선동의 모습 에 빨려들었다. 선동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제 대나무 숲도 없고 짐승도 없었다. 아니, 있는 데 백이충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다. 아니, 있는데 백이충이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이었다. 백이충 은 전 정신은 선동을 살펴보는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백이충의 귀는 선동의 아름다운 웃움소리만을 들었고 백이충의 눈은 선 동의 얼굴만을 살펴보았다. 백이충의 온 몸은 선동의 움직임에 반응하 고 있었다. 백이충의 온 감각이 온통 선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느덧 백이충은 결가부좌를 틀고앉아 선동의 움직임을 흉내내고 있었 다. 선동이 웃으면 따라 웃고 선동이 울면 따라 울었다. 선동이 팔짝 뛰 면 그의 다리도 움찔거렸고 선동이 짐승들을 쓰다듬으면 그의 손도 쓰다 듬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백이충의 얼굴은 아주 밝아보였다. 그는 비로소 세상사 모르는 나이 이 십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의 마음이 철없이 어려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과 미소 때문이었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순 진한 미소라고 할까? 그의 미소는 선동의 표정을 닮아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그 누구도 들어가 보고 싶어한다는 황궁 무고안, 태 연히 코까지 골며 자는 사내가 있다. 하지만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인생에서 몇 번 겪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얼굴 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꿈에서 그가 가장 원하는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뜻이 숨어있다.) 백이충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깨달음 에 대한 희열의 감정이었다. (선동의 얼굴에 따라 주위의 환경이 변한다. 자연을 조정하는 능력이 선 동의 움직임에 숨어있다. 웃고 울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하나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자연지기를 넘어서는 하나의 선능이다.) 사람에게는 삼단전이 있다. 그것은 내공을 끌어모아 가두는 하단전, 천 지조화를 깨달으며 자연과 일치하는 중단전, 그리고 천지와 교통하는 머 리꼭대기 영규타동의 상단전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상단전과 중단 전을 깨달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중단전은 사람의 세맥 모두가 개통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상단전은 깨달음으로 영혼에 단전을 만드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이나 광한선공은 모두 상단전을 초월하여 자연을 다스리 는 반선(半仙)혹은 마신(魔神)의 경지였다. 흑도 칠대절학이나 백도의 십대절학은 하단전의 완성에 도달하는 최고 의 무공, 중단전 초입에 들어가는 무공이다. 쌍영마공의 합일은 중단전을 완성하여 상단전을 여는 준비를 하는 단계 이고 자연지기 역시 중단전이 포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단계는 광한선공이나 아수라독존마공의 밑이었다. 백이충, 그는 그림을 바라보며 꿈을 꾸다 기연을 만난 것이다. 선동의 움직임은 중단전이 아닌 상단전을 채워 움직이는 세계였다. 꿈속의 세계 일망정 마음대로 주변환경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상단전을 사 용하고 있다는 증걱였다. 선동이 바로 광한선인이었다. 그림 속에 광한선인은 없지만, 옥령진인은 광한선인을 그리워하며 그림 을 그렸다. 그래서 광한선인에 대한 옥령진인의 그리움이 그림 속에 담 겨 있었다. 그 그리움이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선동이 되어 그림을 보 며 잠이 든 백이충의 꿈 속에 나타난 것이다. 어느덧 선동이었던 광한선인은 중년 나이의 선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선동시절처럼 울고 웃고 장난치며 뛰어 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모든 짐승을 복종시키고 다스렸다. 중년 선인의 발치에는 호랑이가 엎드려있 고 그의 머리위에는 학이 뛰어 놀았다. 호랑이의 움직임도, 학의 춤도 모두 무학의 이치를 담고 있었다. 상단전을 여는 단계에서 상단전의 힘을 키워 능숙히 사용하는 단계였 다. 백이충의 몸이 한때 경험했던 세계였다. (그림은 무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광한진 인에 대한 그리움. 그것이 사무쳐 광한선인의 분신이 보이지 않게 그림 속에 스며들었던 것일까? 그 광한선인의 분신이 이 꿈속의 세계를 만든 것일까? 그림 속에 숨어있던 광한진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천 지조화를 이루는 무학이다.) 선동은 중년도사가 되었고 그가 바로 광한선인이다. 광한선인의 모든 움 직임이 바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광한선인 자체가 바로 광한신공이었 다. 백이충은 광한선인을 흉내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연지기를 뛰어넘 는 광한선공의 깨달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광한선인을 따라 움직였다. 어떤 때는 누었고 어떤 때는 엎드렸 다. 어떤 때는 광한선인이 아닌 발치의 호랑이 자세를 흉내내기도 했고 학무를 흉내내어 춤을 추기도 했다. 간혹 물구나무를 섰고 원숭이가 술 에 취한 모습의 흉내를 내어 비틀거리기도 했다. 광한선인 주위의 모든 것이 깨달음이었다. 거기에 하늘이 있었다. 하늘 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광한선인의 작은 손동작 발동작 하나가 하늘의 이치를 뛰어 넘는 현기(玄機)가 담겨있었다. 그것을 무학으로 보면 최고의 신공이고 입으로 말하면 선인이 되는 이치를 설파하는 선법이 되며 자연을 다스리 면 바로 천지조화의 법술이 되었다. 백이충은 저도 모르게 광한선인을 닮아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백이충을 쳐다보지도 않고 짐승들과 유유자적하던 광 한선인이 갑자기 백이충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백이충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중년도사는 사라지고 백발백염의 신선이 그곳에 있었 다. 등선하기 직전의 광한선인이었다. 광한선인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백이충의 몸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천 재개벽 속에 놓여 어쩔줄 몰라하는 한 마리 개미처럼 백이충은 엄청난 위압감에 압도되었다. 광한선인이 백이충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춤을 추 기 시작했다. 스-슥. 휘-익. 백이충의 시선이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할 빠른 속도의 선무(仙舞)였다. 백이충이 그것을 무학으로 보자 춤은 무공이 되었다. 광한선인의 찰나지 간 동작마다 무공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은 백이충이 황궁무고에서 읽 었던 모든 백도의 신공이었다. 광한선인의 손이 일만개로 나눠지곤 했고, 몸뚱이가 수천개로 흩어졌다 가 하나로 모였다. 그의 손에 자연이 창조되고 흩어지며 혼돈으로 되돌 아갔고 다시 이치가 부여되어 질서가 잡혔다.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 다. 광한선인은 백이충이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는 광한비급 하권의 이치를 하나의 춤으로 일관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광한신공은 무공이기도 했고 조화이기도 했으며 법술이기도 했고 선법(仙法)이기도 했다. 다만 백이 충이 무공으로 보자 그에게는 모든 것이 무공으로 다가왔다. 간혹 간직 하고 있던 사술을 생각하면 법술인 것 같기도 했다. 무공으로 보면 내공이며, 신공이고, 신법이며 권법이기도 했도 장법이기 도 했다. 검을 들고 펼치면 검법이 될 수도 있다. 반면 법술로 보면 비 를 내리고 구름을 부르고 사람의 운명을 읽은 깨달음의 법이기도 했다. 백이충은 저도 모르게 광한선인의 움직임을 따라하려 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동작도 따라하지 못했다. 선동일 때나 중년도사일 때와는 완전 히 틀렸다. 손이 얽히고 발이 얽혔다.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지의 깨달음에 머리는 터질 듯 복잡해져 왔다. 그것은 경이(驚異)이고 기적 (奇蹟)이었다. 환희로 물들어있던 백이충의 얼굴이 식은 땀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놀라 운 환희의 세계이지만 아직 백이충이 디딜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였 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세계이기도 했다. 광한선인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검이 되었다. 선검(仙劍). 그것은 분명 선검이었다. 선검이 백이충을 덮쳐왔다. "으아아악." 백이충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온 몸은 식은 땀으로 뒤 덮여있고 마치 백일을 못먹고 중노동(重勞動)한 것처럼 온 몸이 기진했 다. 얼굴과 몸이 축축했고 의복이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백이충은 저도 모르게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들고있던 그림을 바라보았 다. 꿈 속에서는 몇갑자인지 모를 한 세월을 보냈지만 잠이 들었던 것 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다. "글... 글이 숨어있다." 백이충은 그림을 보며 질식할 듯한 긴장을 맛보았다. 거기에는 책은 물 론 펼쳐진 그림마저 백이충의 땀에 젖어 흠뻑 젖어 있었다. 땀에 젖은 종이는 그림이 사라지고 대신 글이 나타나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후인에게 남긴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라면 바로 할아버지의 광한신공을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광한신공의 기 초를 얻었다면 천하기재(天下奇才)이며 금광불괴지신이다. 노부는 옥령 진인이며 평생 할아버지의 심득을 연구하여 말년에 조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정도 광한신공에 대해 알고서야 노부가 기술한 광한비급 상으로는 결코 광한신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수를 만회하고자 이 그림을 하나 더 남겨 광한신공에 입문할 기틀을 남겨 놓 는다.> 글을 남긴 사람은 바로 옥령진인이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놀랍게도 옥령진인은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고 알려진 광한신공을 어느 정도 깨 달았다. 광한선인의 심득을 직접 전해들었던 사람이니 그만큼 유리한 입 장에 있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죽기 직전 할아버지인 광한선인을 그리워하다가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고 할아버지가 아끼던 그림을 모사(模寫)하는 과정에 그 깨달음을 남겼다. <할아버지는 등선한 신선이고 노부는 도사였다. 노부가 알고 배운 것은 모두 신선이 되는 공부와 자연의 이치를 공부한 도가의 비법이었다. 그 래서 할아버지의 심득을 당연하다는 듯이 도가의 이치로 남겼다. 그것 이 광한비급이다. 하지만 광한비급을 그런 방식으로 남긴 것은 노부의 가장 큰 실수였다.> 옥령진인이 알고있는 광한선인은 진정 위대한 사람이고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사람이었다. 광한선인은 옥령진인에게 심득을 읊어주었지만 옥령 진인은 광한비급에 십분지 일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자연의 초월한 심득(心得)을 도가의 공부로만 설명했기 때문이다. 광할한 바다를 건너 는 길을 한척의 나룻배로 어떻게 찾아가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과 같다. 옥령진인은 평생 도가의 공부로 광한신공을 연구하여 겨우 자연지경에 머물렀다. 죽기 직전에 깨달음을 얻고서야 도가의 이치만으로는 광한신 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나마 말년에 얻은 자신 의 작은 깨달음을 그림에 옮겨 후인이 광한선공을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 옥령진인 필생의 소원이 자신이 망친 광한신공의 구결이 제대로 후인에게 전수되는 것이었다. <광한신공의 깨달음은 도가의 공부만을 기초로 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도가의 공부로는 기껏해야 자연지경에 이를 뿐이다. 죽기 전 집착을 버리자 꿈에 할아버지가 나왔다. 할아버지가 꾸짖고 나서야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 옥령진인은 자신의 잘못을 절실히 후회하는 문구를 써 내려갔다. 글귀 로 보아 말이 많은 사람인 듯 했다. <이에 노부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다시 이 그림을 남긴다. 광한비급을 얻 은 후인이 이 그림 역시 얻었을 것이다. 천기가 그러하다. 이미 자연지 경을 이룬 자만이 그림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니 이 글을 보 고 있다면 후인은 어떤 공부의 기초이든 경지에 오른 이후에 광한비급 을 접했을 것이고 그 후에 자연지경에 도달했을 것이다. 자연지경의 상 태에서 이 그림을 보고 노부의 도가 공부 깨달음을 추가로 얻었을 것이 다. 사실 도가뿐만 아니라 불가와 유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포괄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광한선공이었다.> "그렇군. 아수라독존마공도 모든 마공을 통합해서야 그 입문의 경지에 이른다. 하물며 백도신공의 정수라는 광한선공이 오직 도가의 진리 안에 서만 움직인다면 결코 천지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지가 될 수 없 을 것이다." 백이충이 몸에 자연지기를 담고 그림 속에 빠져들고서도 광한선인의 마 지막 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옥령진인은 도 가(道家)라는 수단으로 광한신공을 극에 달하도록 공부했지만 죽기 직전 에야 겨우 자연지경 밖의 광한신공을 엿 볼 수 있었다. 옥령진인이 표현 한 광한선인의 경지는 정작 옥령진인 자체도 엿보기만 했을 뿐 이해하 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것이었다. 백이충이 그림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 은 옥령진인이 깨달았던 그 경지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 노부는 천기를 본다. 광한비급과 이 그림이 모두 한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니 노부의 실수를 보완할 수 있다. 할아버지를 뜻했던 천황 성의 별을 이어받아 태어나는 자가 후인이다. 당연히 할아버지 만한 선 기를 가지고 태어난 자일 것이다. 후인은 불도속에 관한 모든 인연이 남 아있다. 그것을 하나씩 접하면서 노부가 깨닫지 못한 진정한 광한신공 에 접근할 것이다. 천하의 혈난이 다가올 때 광한선공을 익힌 자가 천하 를 구하게 될 것이다.> 글은 계속 되었다. 옥령진인은 한때 백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사람 이며 천하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이상한 것은 후인의 몸에 파천성의 빛이 또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천기를 읽었을 때 천하를 파멸시킬 파천성의 빛이 쇠약해지다가 천하를 구원할 천황성의 갓 태어난 빛을 삼켜 버린다. 오직 파천성 하나의 별만 이 천황성의 기운을 빌려 존재하다가 파천성이 진정한 파멸의 위력을 발 휘할 시기에 별의 빛이 서로 갈라지고 천황성이 파천성에 벗어나 제모습 을 찾는다. 둘은 싸우게 되지만...> 잠깐 자신없는 글귀로 옥령진인은 뒤를 흐렸다. 그 이유는 바로 나왔다. <천기에는 천황성과 파천성이 같은 별로 존재했었기에 그 승부를 나타내 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노부가 생각하기에 천황성이 파천성을 이기게 된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천기에 나타나고 있지만 노부는 일단 나타 난 천기를 믿는다. 노부가 천황성이 이긴다고 한 것은 광한신공이 나타 난다면 파천성이 어떤 것을 나타내든 광한신공으로 천하를 구할 수 있 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아주 길었다. 그리고 그 글의 끝에는 광한신공을 그가 어떻 게 생각하는 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글이 끝날 즈음 작 은 글씨들이 다시 뒤를 잇고 있어 얼핏 맨 뒤를 보니 하나의 구결이 작 은 글씨로 적혀져 있었다. 옥령진인이 나름대로 깨달은 도가의 진전을 통한 광한신공의 구결이었다. 광한비급처럼 뜬구름 잡는 식의 설명이 아 니라 이미 어느 정도 이룩한 자가 도가의 공부로 체계화시킨 광한신공 의 구결이었다. 백이충은 구결을 읽다말고 다시 아까 읽다 중단했던 부 분을 찾아 읽었다.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나 이제 후인은 신선이라 할 수 있는 광한신공의 입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불가와 속가의 구결은 그대가 있는 곳의 남동 쪽에 있다. 하나 충고할 길은 파천성 역시 천황성이 제 빛을 찾아가는 만큼 본 모습을 되찾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어느 쪽의 별이 제모습을 더 빨리 찾는지가 승부의 관건이다. 물론 노부는 천황성이 이길 것을 믿 어 의심치 않는다.> 세 시진후 백이충은 자신의 눈앞에 있던 그림이 수명을 다하고 재가 되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일까? 오랜 세월 버텼던 책자 속의 그림은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옥령진인이 한평생 광한선인 을 그리워한 내용을 담은 책자뿐이었다. 백이충이 멍하니 책을 보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 궁무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어느덧 열흘이 흐른 것이다. "남동쪽이라고? 그곳은 백도의 승룡곡이 있는 쪽이 아닌가?" 백이충은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햇빛을 대문 틈으로 바라보며 저도 모르 게 중얼거렸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 - 진위혈존 관련자료:없음 [20375]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1 01:55 조회:743 <진위 혈존> 옥룡왕 혈지존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마혈존이라는 놈 이 주위에 맴도는 바람에 잠시 황궁을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황궁의 안쪽에 거대한 진법이 설치된 것이다. 그 바람에 황제를 놓친 것은 물론 이고 그 안에 있던 대신과 일총관 동창제독마저 행방이 묘연해졌다. 얼 마전에는 삼총관 절정마유까지 사라졌으므로 혈지존의 머리가 지끈거리 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 안되면 천마강시들을 투입하여 황궁 내부에 설치된 진법을 힘으로 깨트려 버릴까?" 혈지존이 고민을 거듭했지만 천마강시를 함부로 투입할 수가 없었다. 야 금야금 마혈존이라는 놈이 무적의 천마강시를 허수아비처럼 꺼꾸러트리 고 납치해가더니 어느덧 그 수가 이십에 이르렀다. 현재 혈지존이 가지 고 있는 천마강시는 이래저래 천년마교에 넘겨준 것과 파괴된 것을 제외 하면 칠십여구에 불과했다. 물론 그 숫자만으로도 당금 강호의 그 누구 도 감당하기 힘든 최강의 전력이다. "하지만 과거 천외구기 중의 오행진인이 펼친 진법에 천년마교가 당했 던 절정고수의 수는 삼천이 넘었다." 천외구기는 겨우 아홉으로 당시 천하를 제패했던 천년마교와 싸웠던 기 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천년마교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것이 오행 진인의 진법이었다. 천년마교의 전성기 시절에 육성했던 절정고수 삼천 이었다. 천마가 그들을 육성하느라 걸린 시간은 삼십 년이 넘는다. 그 런 그들 모두를 오행진인이 유인책을 써서 진법으로 가둬버렸다. 마교 의 삼천 고수가 겨우 진법 하나를 파괴하고 무너져 버렸다. 천년마교는 당시 절정고수 삼천으로 오행진인 하나의 목숨과 바꿨던 것이다. "단순비교이겠지만 전력으로 따지자면 과거 천년마교 삼천의 전력은 천 마강시 사십여구에 해당한다. 게다가 진법이 과거 그대로이리라는 보증 도 없고... 최악의 경우 수십 구의 천마강시를 잃게된다." 혈지존이 자신하는 옥룡왕부의 최고 전력은 천마강시이다. 옥현금은백 의 다섯 등급의 무사들 중에 최절정고수의 숫자는 옥의 급으로 그 숫자 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수가 적다고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백 도든 흑도든 어떤 최절정 고수도 진법과 무구로 상대할 수 있도록 옥룡 왕부의 고수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무림의 어떠한 세력도 그들 진법 에 맞상대할 수가 없다. 하물며 부족한 최절정고수 대신 천마강시가 있 는한 전 무림과 한꺼번에 전쟁을 벌여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 천마강시의 전력이다. 그런 것을 몇 십구나 잃어버 릴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삼십여구의 천마강시만이 남는다. 그것으로는 지금도 혈지존 주위를 맴돌며 천마강시들을 납치해 가는 마혈존조차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저 골치아픈 진법을 그냥 놔두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북경 근처에서 진법에 조예가 있다는 자들을 강제로 모아왔다. 절정마 유 만큼은 안되지만 그래도 진법을 수십년 동안 연구해왔다는 자들이 수 십이 모였다. 그들은 진법의 반응을 알아보고자 진 안으로 사람을 투입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에 접근한 자들은 예외없이 돌아오지 못 했다. 단 한발자욱만 들어가도 그러하니 모두들 진법 근처에 가까이 가 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쪽의 반응을 모르니 안개에 쌓인 진법의 종류는 더욱 모호하고 알기 힘들었다. 진법 연구가들 모두의 공통된 견해는 하나였다. 황궁 내부에 펼쳐진 거대한 진법을 외부에서만 관찰하여 순수하게 연구하고 해체하려 면 적어도 삼개월에서 육개월은 걸린다는 것. "삼개월? 길면 육개월이 걸린다고? 그때가 되면 황실에 충성한답시고 장 군놈들이 모조리 북경을 향해 달려올 걸?" 군부의 반이상만 장악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군 부의 인심을 얻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도 서문대원수의 영향력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 애써서 오군도독부 안에 인맥을 깔아놨지만 서문 대원수의 한마디면 간단히 허물어질 인맥이었다. 하지만 서문대원수는 충신이었다. 그는 절대 황제의 명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황제를 손아귀에 잡고 있었으면... 강제로라도 황제가 양위한다는 한마 디만 얻었다면 서문대원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거늘." 황제를 위협해서라도 정식으로 황권교체를 했다면 서문대원수도 할 말 이 없었을 것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서문대원수가 반발할 것이다. 황제가 죽었다고 거짓 발표를 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다고 해도 마찬 가지이다. 서문대원수가 이를 믿지않고 군대를 일으켰을 경우 지금 그 가 장악한 병력으로는 대항 할 수가 없다. 황제가 끈질기게 군부의 장군 직을 옥룡왕 휘하의 사람들에게 내놓지 않은 것이 오늘의 궁지를 가져오 게 했다. 이십년의 노력으로도 군부의 힘을 장악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황도 북경의 병력을 손에 쥐었을 뿐이다. "크윽. 황제를 내세워 일년. 단 일년만 권력을 장악하면 천하의 모든 것 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거늘." 그의 계획 속에 황제를 놓친다는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황제를 손아귀 에 쥔 상태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단 일년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면 모든 후환을 제거할 자신이 있었 다. 차례로 조정의 모든 신료들이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바뀌었을 것 이다. 청류계와 서유림의 신하들은 말살되었을 것이다. 속속 군부의 장군들도 자기 세력으로 갈아치웠을 테고 서문대원수도 황 제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영향력을 축소시켜 결국 처치해 버 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일년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앞세우고 조정을 개편 했다면 중원천하의 모두가 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삼개월이면 황제가 서문대원수와 접촉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기에 무리인줄 알면서 서문대원수를 갈아치우려 했다. 그의 대원수 직을 빼앗으려했다. 그러나 황제도 죽어라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옥새가 없는 한 선황제가 내린 금빛현판을 가진 서문장군부의 서문대원 수 지위를 빼앗을 방법이 없었다. "현재 문제는 세 개이군." 혈지존은 자신 앞에 놓인 세 개의 문제를 놓고 머리를 정리했다. 첫째. 마혈존의 문제이다. 이것은 정말 골치아픈 놈이었다. 사부의 후신 이라 하지만 혈지존은 믿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손에 혈존의 영 혼이 확실히 파괴된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에 여기저기에 서 혈존의 후신이라 자처하는 놈들이 마구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영 혈존 과 연관이 없는 놈들은 아닌 모양이다. 정말 죽어도 곱게 죽지 않는 사 부였다. 특히나 천마강시를 덥석덥석 채가는 마혈존 놈을 보면 간장이 새까맣게 타버릴 지경이다. 그런데 놈은 너무나도 훤하게 혈지존의 모 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가짜 혈존들은 겁나지 않았다. 뇌혈존이니 철혈존이니 금혈존이니 하는 놈들은 거처가 있고 세력이 확실했다. 천마강시만 내보내도 쓸어버 릴 수 있었다. 황제가 되면 대명황군을 보내 처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혈존은 근거지가 없는 놈이고 혈지존의 세력을 환히 알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괴롭히는 아주 몹쓸 놈이었다. 둘째. 사라진 황제와 진법 문제였다. 황궁은 내부와 외부를 철저히 차단 시켰다. 자금성을 포위하는데 옥룡왕부의 옥의무사들을 모두 투입했다. 황제는 섣불리 자금성에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진법을 해제 하고 황제를 다시 잡아야 했다. 황제만 손에 넣으면 다른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삼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 번째 문 제에 봉착하게 된다. 문제는 황궁을 진법으로 감싼 배후에 만만치 않은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청류계의 수뇌 이정례 대인도 사라졌고 황대장군의 종적 도 놓쳤다. 그들을 감시하던 삼총관 절정마유도 사라졌다. 그 모든 것 의 배후에 황궁에 진법으로 이변을 일으킨 세력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 다. 적의 정체를 모르니 대적할 방법이 막막하다. 자금성을 포위했다고 해도 적의 힘을 모르니 완벽히 차단했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갑자기 모 든 것이 꼬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최악의 경우 서문대원수가 북경을 공격할 때의 상황이다. 현재로 서문대원수와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있다. 서문대원수도 지금쯤이면 서 문가의 식솔들을 잡아 가둔 것을 알 것이다. 황제라도 있다면 섣불리 움 직이지 못하겠지만 황제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군대를 몰고 처들어 올 것이다. 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차단한다해도 천하의 중심, 황궁 내부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수개월동안 감춘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서문대장군, 금군의 대원수가 처들어 올 경우도 대비해야 한 다. 일단 황제를 대신하여 대소신료들을 장악하여 가짜 황명으로 국정 을 운영할 수 있으니 지금의 권력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군부에 옥새 없이 어디까지 통할지 모르겠지만 황명을 가장하여 군부의 주요 관직을 최대한 옥룡왕 휘하로 갈아치워야 할 것이다. 최후의 경우 서문대원수 와 한판 전쟁을 벌일 정도의 병력은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북경은 포기해야 한다. 아직까지 혈지존에게는 칠 십구의 천마강시와 수만의 옥룡왕부 오등급 무사들이 있다. 마혈존 놈 이 아니라면 일년 이내에 천하무림을 장악할 자신이 있다. 이미 대부분 무림의 최고 수뇌들이 진짜 혈존에게 개박살난 지금 그를 막을 자는 무 림에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이후 천하무림을 통일한 힘으로 다시 황실 을 도모하면 된다. "이십만. 적어도 내게 이십만의 병력만 더 있으면..." 혈지존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꽈악 쥐었다. 북경의 십만이 손에 있다. 그러나 서문대원수가 움직이면 국경을 경비하는 병력을 제외하고도 능 히 오십만의 병력을 움직일 것이다. 서문대원수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 다. 하지만 북경의 성을 방어벽으로 버틴다면 능히 삼십만의 병력만 있 으면 오십만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현실에서 그가 지닌 병력 은 십만이 전부였다. "왕야. 소인 이총관입니다." 이총관은 천외사세의 하나인 장백신선문의 문주이다. 일총관과 삼총관 이 사라지면서 그가 명을 내릴 직속 수하는 그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방해하지 말라 했거늘." "이공자의 서신입니다. 아주 급한 일인 듯 최고 긴급을 요하는 전서구 를 통해 보낸 것입니다." "그 아이가? 들어오게." 혈지존의 둘째 제자는 천축 천룡사주로 변신하여 청영지존을 감시하는 첩자로 들어가 있다. 청영지존은 혈지존만큼 심기가 깊고 무서운 자이기 에 섣불리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그가 긴급연락을 해왔다면 보통 일 이 아닌 것이다. 장백신선문의 문주가 방안으로 들어와 혈지존에게 서찰을 건넸다. 확실 히 초긴급에 최대비밀을 요하는 푸른 띠가 매어져 있는 서찰이었다. 혈 지존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없이 서찰을 꺼내 읽어들였다. 그리고 몇 번 이고 안색이 변했다. "왕야. 무슨 일이신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혈지존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커다란 일은 별로 없다. 아무리 큰 일이라 도 혈지존의 심기가 깊은지라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총관 의 앞에서 안색을 변할 정도라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아 주 큰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자네가 읽어보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수 없다는 아주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서찰을 바라 보던 혈지존이 이총관에게 서찰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찰을 본 이총관 의 안색도 변했다. 분명 천룡사주로 변한 이총관이 보냈어야 할 서찰에 는 다른 사람의 글씨로 써져 있었다. 그것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백나안. 보아라. 평생 처음 아비라고 밝히며 네게 소식을 전하마. 이 아비는 얼마전에 네게 죽은 혈존 백가량이다. 지금은 금혈존이라 불리 고 있다.일단 혈육지정을 생각해서 과거의 원한은 묻지 않겠다. 뿐만 아 니라 너를 위해 지금의 곤란한 문제도 해결해 주겠다. 나는 너와 화해하 고 싶다. 네게 세가지를 제의하겠다. 내 호의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 다.> "왕야. 설마 이 서찰은?" "스스로 사부이자 아버지인 혈존이라 자칭하는 놈이지. 하지만 그 서체 는 진짜이다. 정말 혼동되는군. 글씨로만 본다면 혈존이 다시 살아왔다 고 내가 먼저 믿을 정도이다." 이총관은 다시 서찰에 시선을 두었다. 어째서 금혈존의 서찰이 이공자 를 통해 들어온 것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첫째. 네게 이십만의 병력을 지원해 주겠다. 그것도 보통 일반 병사들 이 아니다. 둘째인 청영지존이 데리고 온 변황고수 십만이다. 무림고수 십만과 일반 병사 십만의 차이는 너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나머지 십만 은 이 아비가 황금으로 고용한 용병 십만이다. 역시 전쟁과 전투로 뼈 가 굵은 자들이다. 강제로 징집되어 움직이는 일반 병사와는 차원이 틀 린 전쟁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이면 현재의 네 어려움은 해소될 것이라 생각된다.> "왕야. 이공자가... 금혈존이라는 자에게 이공자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소리 아닙니까? 게다가 변황의 법존의 이야기가." "금혈존이라는 자. 아주 무서운 자야. 서찰의 내용이 진짜라면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게 변황세력을 통째로 삼켰다는 소리이지. 천하에 혈존 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무서운 자가 있을 줄이야. 둘째라면 결코 쉽게 남 에게 굴복할 자가 아닌데... 설마 금혈존이라는 자가 진짜 사부이기라 도 하단 말인가?" <둘째. 네 주위를 맴돌고 있는 하나의 날파리를 제거해 주겠다. 감히 이 아비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 혈존인 마혈존이다. 놈도 혈존이라 자처 하는 놈인만큼 네게 큰 어려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놈이나 이 아비에게 네가 최강의 전력으로 생각하는 천마강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놈의 정체는 과거 너를 도왔던 전일비라는 놈이 천마지존의 껍데기를 쓰고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너를 너무나 잘 알 고 있어 네가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허락하면 삼일 이내 에 놈의 목을 네게 가져다 주마.> 이총관은 또다시 얼굴색이 변했다. 천마강시가 무용지물이라니. 천마강 시야말로 천하를 휘어잡을 무기로 옥룡왕 혈지존이 가장 믿는 존재가 아 니었던가? 그러나 서찰은 천마강시는 그들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에게 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것이 마혈존에게 는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지는 천마강시들의 처지이다. "진짜건 가짜이건 사부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소리이지. 천 마강시를 만든 것이 바로 사부이니... 설마 사부가 천마강시의 몸에 어 떤 수작을 부려두었을 줄이야... 혈존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모두 그 약 점을 알고있는 것이 분명하다." <셋째. 네게 줄 것은 명분이다. 지금 황제의 실종으로 상당한 곤란에 빠 져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마라. 황금이 거래되고 먹고 마 시며 물건을 사고파는 곳에는 모두 이 아비의 정보처가 있다. 네게 황제 를 잡아다주마. 네가 힘으로 천하를 제압한다고 해도 명분이 없다면 각 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라 것이다. 억지로라도 황제에게 양위를 받는 것 이 천하에 명분을 쌓는 일이다. 황제를 잡아다 네게 주마. 이건 삼개월 이내에 해결될 것이다. 물론 약간 네 도움도 필요하다. 내가 줄 것은 이 세가지이다. 그럴 능력이 있느냐고는 묻지마라. 네가 허락한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마. 그렇다면 이 아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 지 궁굼할 것이다. 이 아비가 진짜라면 공짜로 네게 이런 것들을 해주지 는 않을터이니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이 아비가 네게 원하는 것은 바로 동맹이다. 너 와 나, 그리고 둘째와의 동맹. 동맹의 내용에 대해서는 직접 말하마. 그 러나 결코 네게 불리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두겠다. 그럼 네가 허락하기를 빌며 이만 글을 줄이마. 곧 만나기를 기대하겠다. - 아비 금혈존 백가량이 - > 이총관은 할 말이 없었다. 일단 금혈존이라는 자의 정보가 너무 무서웠 다. 마치 옥룡왕부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혈지존은 천하에 첩보조직을 깔아놓았다. 황궁과 백도, 혈천마련 은 물론이고 변황까지 첩자들을 파견했었다. 그러기에 남들의 소식은 훤 히 알아도 이쪽은 철저히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혈존을 제거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혈지존의 힘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 나 혈존의 죽음이후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일단 마혈존이라는 자가 시 시각각 혈지존을 괴롭히는데 도저히 그의 행방이나 정체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반면 마혈존이라는 자는 혈지존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옥룡왕이 혈존을 제거한 이후 북경을 제압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모 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일총관과 삼총관이 사라져 버렸다. 이정례대인과 황대장군은 행방을 놓쳐버렸고 황궁에는 기이한 진법이 깔 렸다. 적들은 이쪽의 일을 모두 알고 움직이는데 옥룡왕부에서는 무엇하 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여기에 금혈존이라는 자마저 옥 룡왕부의 일을 자기집 안방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과거에는 혈지존이 어둠에 숨어있고 다른 세력이 드러나 있었다. 지금 은 혈지존이 드러나있고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어둠 속에 그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자들이다. "이것으로 몇가지 확실한 것이 있네." "금혈존이라는 자가 변황동맹의 법존과 동맹을 맺었거나 그를 제압했다 는 소리이군요. 또한 그들은 우리와도 동맹을 희망하고 있고." "그 서찰에 적힌 일이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너무 엄청난 일이라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짜 법존 을 제압했다면... 그럴 능력이 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가 동맹의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지만 그 서찰의 내용이 사 실이라면 정말 나에게는 절실한 것들일세. 하지만 여우를 쫓아내려다 호 랑이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닌가 경계심이 먼저 드는군." 그렇다. 서찰의 내용이라면 금혈존은 너무나 위험한 자였다. 적어도 이 십만의 병력을 자기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자였다. 게다가 그 병력이 라는 것이 일반 병사가 아니라 무림 고수들인 이십만의 병력이었다. 또한 중원천하의 부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현황방의 방주였다. 금력 과 무력을 동시에 쥐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처럼 무서운 자가 어디 있을 까? 혈지존이 가장 자신하고 있는 무기 천마강시마저 그는 두렵지 않다 고 했다. 힘과 권력과 병력을 지닌 자가 무위마저 뛰어나며 천마강시까 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혈지존이 충분히 경계해야 할 자였다. 그자가 황제의 지위마저 노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물며 혈존이라 자처한다면 그만큼 욕심도 큰 자일 것이다. 천하를 파멸시켜서라도 자신 의 욕심은 일단 차리고 보는 것이 혈존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그의 조건이 너무 유혹적이군요." "그렇네. 지금 우리는 상당히 곤란한 입장에 빠져있네. 어떻게 된 것이 혈존이 죽은 이후 모든 것이 꼬이고 있네. 죽은 사부가 복수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네. 그런 때에 이런 제안이라면... 위험을 알 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이네." "일단 금혈존을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둘째 공자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 첩보선을 이용하여 먼저 동맹하자고 연락을 보냈을 정도이 면 스스로 왕야에게 먼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일단 그가 호랑이라고 해도 여우가 워낙 귀찮게 구니 불 러들이지 않을 수가 없네. 그리고 호랑이가 만족할 수 있는 먹이를 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산을 뒤져 사냥을 할 수 있을 것이네." 이총관도 혈지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찰은 제안을 정하 는 내용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만나고자 하는 연락은 어떻게 해야 한 단 말인가? 설마 현황방에 직접 사람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그런 표정을 지을 것 없네. 곧 사람을 영접할 준비를 하게. 곧 만나기 를 기대한다고 했으니 바로 왕부를 방문할 걸세." 혈지존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외부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 왕야를 뵙겠다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연락을 했다고 주장 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할까요?" 옥룡왕부의 내실이다. 혈지존이 삼총관들을 불러 이후의 일을 상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 내실에는 옥룡왕부의 세 총관들이 하 나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혈지존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세 사람 의 남자였다. "하하. 인정해도 좋고 인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바로 네 사부인 혈 존 백가량이다. 지금은 금혈존이라 불리지." 과거 만승패검 오형록이라 불렸던 자. 그리고 단향검군의 후계자로 알려 졌던 금혈존이 입을 열었다. 혈지존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모습은 틀렸지만 그 눈빛은 진짜 혈존 백가량의 것이었다. 그는 눈앞의 금혈존 이 진짜 혈존의 화신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금혈존은 검법에 능하다. 단순히 표향단심공을 익힌 정도가 아니다. 그 는 표향단심공에 천지마검류를 접목시켰고 그 위에 아수라독존마공의 일 부 능력을 가미했다. 지금 그는 고금제일 검신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 을 정도이다. "나 역시 혈존 백가량이다. 지금은 독혈존이라 불리운다. 눈앞의 금혈존 과는 일시 손을 잡고 진가(眞假)를 가려내는 것을 미룬 상태이지." 혈지존이 더욱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눈앞의 독혈 존이라는 자였다. 그의 눈빛 역시 혈존 백가량의 눈빛과 똑같았다. 과 거 무형독와 구태립이라 불렸던 자. 혈무영 오대영주의 하나였던 자이 고 귀혈존에게 패해 광혈존과 함께 쫓겨났던 자이다. 그가 놀랍게도 금 혈존과 같이 있었다. 과거 독성 구양봉이 독문의 문주로 있을 때 혈존도 그를 두려워했다. 오 직 그 혼자의 힘으로 신비삼패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이다. 혈존도 직접 적으로 그를 상대하지 못하고 암습과 기습으로 그를 처치했다. 구태립 은 독성 구양봉의 손자이다. 또한 구양봉의 모든 독공을 이어받은 자이 다. 그 독공에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를 가미했다. 그는 숨쉬는 것만으 로 주위 일백장 이내를 중독시킬 수 있는 무서운 자였다. "사형. 오랜만이오. 전에 만났을 때는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 소. 이제 다시 손을 잡게 되었으니 감회가 무량하오." 법존, 변황동맹의 새로운 맹주인 법존도 혈지존에게 인사를 했다. 여러 번 좌절을 겪었지만 그의 기세를 꺽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자 신만만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가장 무서운 자이다. 변황고수 십만이라는 수는 중원 의 고수들을 모두 합한 것과 같을 정도의 숫자이다. 비록 변황의 수뇌들 이 전멸했다고 하지만 절정고수들로 따지자면 천하의 그 어떤 세력보다 튼튼했다. 혈지존이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절정고수들의 숫자가 아닌 가? 법존과 확실히 동맹을 맺을 수만 있다면 혈지존에게 필요한 것이 당 장 해소되는 셈이다. "스스로 혈존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감히 나의 아버지라고 자처하는 금 혈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밝혀주겠나? 과거 내게 죽은 혈존이 가짜라 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혈존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도 아 니고 둘이 될 수 있나?" 혈지존은 평소 가장 의문스러웠던 점을 물었다. 그는 마혈존이 진짜 혈 존의 화신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했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하고보니 눈앞 의 금혈존이라는 자와 독혈존이라는 자가 모두 혈존과 같은 눈빛을 하 고 있었다. 도저히 가짜라고 믿을 수가 없는 눈빛. 그것은 혈지존에게 충격이었다. "흐흐. 첫째. 말투가 불손하군. 혈존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지 금은 참겠다. 아직 나 조차도 스스로 유일한 혈존이라고 장담할 수 없 는 처지이니까. 지금의 나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너도 짐작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과거 나는 이혼통제대법이라는 것을 사용했다. 분신을 사 용하는 대법. 너도 과거 천마지존이라는 분신을 상대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알고있소. 허나 이혼통제대법은 여러 분신을 동시에 움직이는 사술이 아니오. 오직 하나의 분신에 일시 영혼을 불어 잠시 꼭두가시처럼 움직 이는 술법 아니오?" "역시 첫째로구나. 그렇다면 이해가 쉽겠군. 우리는 모두 진짜이면서 가 짜이기도 하다. 서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사이 이기도 하지. 과거 네 게 영혼이 박살나면서 혈존의 영혼은 갈라지고 갈라져 그 일부분이 껍데 기 분신의 몸으로 들어갔다. 혈존의 영혼 일부분을 바탕으로 분신에 남 아있던 영혼이 융합되었고... 그것이 지금 무림에서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의 정체이다. 물론 진짜 혈존은 나 하나이지." "흐흐. 금혈존. 잠시 내가 몸을 의탁했다고는 하나 그 일에 대해 언급하 는 것은 금기일텐데. 모든 다른 가짜들을 물리치고 우리 둘이서 누가 진 짜 혈존인지 진위를 가리기로 한 약속을 잊었는가? 감히 지금 내 앞에 서 스스로 진짜라고 자처하다니." 독혈존이 나직히 으르렁 거렸다. 그로서는 같은 영혼을 가진 금혈존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철전지 원수라도 목적을 위해 참고보는 인내 심이 혈존에게는 있었다. 독혈존은 스스로 혈존의 파편 중에서 가장 약 한 쪽에 속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런 이유로 스스로 금혈존을 찾아 협 상을 한 것이다. "그... 그런 일이. 그렇다면 마혈존 역시 혈존의 분신 중에 하나라는 소 리인가?" "말하지 않았는가? 놈은 천마지존의 몸에 전일비의 영혼이 혈존의 파편 과 융합한 가짜이다. 우리 중에 가장 강한 놈이지." 금혈존이 마혈존을 언급하며 나직히 신음했다. 스스로 금혈존으로 자각 한 이후 다른 혈존의 존재에 대해 모든 정보 수집을 아끼지 않은 것이 바로 금혈존이었다. 그는 모든 혈존들 중에 가장 강한 것이 마혈존이라 판단했다. 혈존의 파편들이지만 분신의 능력에 따라 분명 실력차가 존재 했다. 스스로 마혈존을 제거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을 찾아온 독혈존 과 기꺼이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들 사부의 파편들은 모두 사부의 기억과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소리요?" "흐흐.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 우리의 능력은 청마산에 나타났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과거 너희가 천무삼성과 합작하여 배반했 을 당시의 능력은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 기억으 로 따지자면... 혈존의 기억과 분신으로 있었을 때의 기억이 혼재하고 있다. 무공은 제한되어 있지만 대신 순수해지고 더욱 깊어졌지." 금혈존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애써 독혈존을 외면하려는 기색이 역력했 다. 동맹자이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또 다른 자신을 눈 앞에 ㅜ고 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오. 그날 혼과 백을 모조리 으스러트렸다 고 생각했거늘." "흐흐. 그 이야기를 다시 하니 불쾌하군. 뭐, 진정한 동맹을 맺자면 숨 기는 바가 없어야 하니 진실을 말해 주겠다. 애초에 혈존은 세 개의 인 격을 가지고 있었다. 혈마전혼대법으로 새로운 몸에 깃들어 태어나 생활 했던 백이충으로서의 인격. 순수하게 혈존의 영혼에 깃들었던 인격. 그 리고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히면서 새로이 형성되었던 인격이 그것이다." 혈지존도 청마산에서 혈존의 가공할 능력이 아수라독존마공에서 비롯되 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같은 혈존이 세 개의 인격이 아 니라 백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청마산에서 네게 파괴당한 영혼은 아수라독존마공에서 생성된 인격이 다. 네 뜻대로 영혼의 혼백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혼백에서 혼은 육신 에 깃든 주체인 영(靈)이고 백(魄)은 그를 주관하는 기억이지. 아수라독 존마공이 만들어낸 인격, 즉 새로운 백(魄)이 소멸되는 대신 아수라독존 마공의 힘으로 쪼개진 영 즉 혼을 보호했다. 그 바람에 영혼이 갈라지면 서도 완전히 소멸되지 못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아수라독존마공을 얕보지 마라. 아수라독존마공이 영혼을 보호하며 소 멸되었지만 혈존의 인격이 담긴 백(魄)은 고수란히 남았다. 백은 영이 아니기에 찢어진 영혼의 파편을 쫓아 저마다 각 분신에 깃들어 분신의 영혼과 융합한 것이지. 마지막 백이충의 인격, 세 번째 백은 아마도 죽 은 본체의 시신에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은 것은... 과 거 혈존이 만들었던 분신에 깃든 우리들 혈존의 기억, 즉 백과 일부 혈 존의 영혼의 파편이 만들어낸 새로운 혈존들인 것이다." "......" "네가 알고있는 혈존과 우리는 동일하면서도 같다. 또한 조금은 틀리 다. 혈존이 지녔던 능력과 야망, 성격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중요시하 는 것이 틀리다. 과거의 혈존은 군림천하에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우리 십혈존들에게 가장 시급한 우선적인 목적은 자신 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다른 가짜들을 없애고 홀로 남아 진짜 혈존임 을 증명하여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 혈존이었다 면 절대 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우리가 먼저 네게 동맹을 제의한 이 유이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군. 그대들이 혈존사부이면서 또한 아니라면, 그 리고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소?" "불행히도 열 개의 분신, 십혈존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 바로 광혈존과 나 금혈존, 그리고 독혈존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지. 우리는 혈 존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혈존과는 조금 틀리다. 천하군림의 욕심이 사라 진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짜들을 없애는 것. 그러기 위해 좀 더 승리의 가능성이 많은 것은 둘이 힘을 합쳐 다른 혈존을 상대하는 것 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이다." 그 순간 혈지존은 깨달았다. 이들은 진정한 혈존이라는 것을. 과거 혈존 은 천마에게 패배당한 이후 수치를 무릅쓰고 천마의 제자가 될 것을 간 청했다. 결국 그는 천년마교의 수석장로가 되어 혈마라는 이름을 얻었지 만 끝내는 천마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고 천년마교를 몰락시켰다. 그리 고 혈천마궁을 세운 것이다. 지금의 금혈존과 독혈존도 서로 싫은 것은 인내하고 혈존이라는 존재가 둘만 남을 때까지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에 승부를 겨루기로 하고 서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를 참고 있 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혈존도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스스로 다른 혈존보다 약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우리 둘과 광혈존 뿐 이다. 우리들은 인정할 수 있다. 다른 혈존들은 결코 이런 감정을 참으 면서까지 남과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광혈존이라면... 글쎄, 늙고 음 흉한 거지의 영혼과 융합한 광혈존이라면 아예 자존심을 죽이고 가장 유 리한 위치를 점할 때까지 혈존의 기운마저 숨겨 버릴지 모르지. 우리로 서는 스스로 혈존 백가량이라는 자아를 부정하는 꼴이기에 그렇게까지 자존심을 접지는 못하지만." "그렇다면 나와 동맹을 원하는 목적은 다른 혈존들의 멸절인가?" "그렇다. 그것이 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금혈존이 힐긋 법존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밝힌 바와 같이 너에게 이십만의 병력을 주겠다. 그 대가로 서로 구역 을 나누면 된다. 둘째에게는 변황의 맹주임을 중원 천자로서 인정하라. 그리고 너는 황실을 장악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라. 나 금혈존과 독혈존 은 마지막으로 겨뤄 홀로 남은 진짜 혈존이 된 이후에 중원 무림을 차지 하여 군림하겠다. 서로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의 일은 그때 생각 하도록 하지." "금혈존과 나 독혈존은 또한 마혈존을 죽여주겠다. 가장 강한 자이기에 가장 먼저 죽이고자 우리가 마음먹은 자이다. 그를 죽이는 것은 우리도 원하고 너도 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너에게 원한을 가진 혈존이 많아서 좋을 것은 없다. 우리가 그나마 너를 인정하고 손을 잡겠다고 결 심한 것은 너의 행운이다. 대신 너 역시 다른 혈존을 없애는 데에 협조 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흠. 둘째 청영지존의 목적은 변황의 확실한 패권이었던가? 그것이라면 도와주지. 내가 중원의 천자가 되면 변황 땅과 천축의 법왕으로 둘째를 인정하겠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중원의 적이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둘째도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한 대가가 되겠지?" "사형. 뭐, 그렇게 말해준다면 아쉬운대로 그럭저럭 괜찮군요. 천축에 본좌의 진짜 수하들은 남겨놓고 왔으니 지금 변황의 세력들은 소모시킬 수록 유리하지요. 다른 세력들의 기세가 약해질수록 천축과 변황에서 내 입지가 강해질 터이니." "그렇다면 서로의 입장이 확실하게 도울 수 있는 처지로군. 그렇다면 병 력의 확충은 확실한 것 같고, 마혈존은 두 혈존이 해결해준다고 했으 니... 마지막 황궁의 진법은 어떻게 해결해 줄텐가? 그리고 나는 그대들 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 혈지존의 말에 독혈존이 어깨를 으쓱 거렸다. "지금 황제의 이름을 빌려 천하에 공포하라. 진짜 혈존을 가리는 혈존대 회를 황궁에서 개최하겠다고. 천하에 소문이 퍼지면 혈존이라 자처하는 가짜들은 그 자존심 때문이라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모조리 해치우는 것이지. 아마도 가짜 혈존들이 몰고올 세력 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나같이 천하 위에 군림할 욕심에 가득찬 자들 이니까. 그들을 대회의 이름을 빌어 진법 안으로 밀어 넣으면... 아마 도 서로가 공멸하겠지. 가짜 혈존은 살아남겠지만 그래도 힘이 빠질테 고, 우리 둘의 연합에 너희 둘의 도움이면 충분히 하나하나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혈존대회?" "그렇다. 그것이 네게 바라는 동맹의 목적이다. 천하에 혈존의 존재들 을 불러모을 수 있는 자. 그것은 황제밖에 없고 황제를 대신할 자는 너 밖에 없다. 명분과 장소가 결정되면 그들은 모여들 것이다. 우리와 너 의 동맹이 밝혀지지 않는한 최후로 남는 것은 우리가 될 것이다." "나를 믿는가?" "흐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지.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이용가 치가 있다면 서로 배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혈존을 죽여 야 한다는 최우선 목적이 있고... 너 역시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섣불 리 우리를 배신할 수 없을 터이니. 그 정도 이용가치면 서로의 믿음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혈지존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서로 좋은 동맹관계가 되었으면 좋겠군. 만약 원한다면 내가 황제가 된 이후에 강호무림에 대해서는 혈존의 소유임을 확실히 해주지. 끝까 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동맹관계가 오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 금혈존이 혈지존의 손을 잡았다. 그도 미소를 띠었다. 법존도 손을 잡았 다. 독혈존은 금혈존의 손을 피해 혈지존과 법존의 손을 잡았다. (산적한 문제만 처리되면 너희들도 끝장이다. 혈존의 본신도 해치웠는 데 분신따위야... 결국 너희들은 진짜 혈존은 영원히 될 수 없다. 쌍영 마공의 합일된 힘은 가짜 혈존 정도는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위협적 인 존재에게 강호무림이라는 위험한 힘을 맡긴체 내버려 둘 수야 없지.) (나 금혈존의 힘과 현황방의 금력이면... 혈지존 따위야. 청마산의 일 을 잊을 손가? 최후의 순간에 네 놈의 목을 따겠다. 이 불효자 놈.) (흐흐. 본좌의 만성지독이 이미 모두에게 투입되었음을 아무도 모르리 라. 지금 가장 약한 것은 본좌이지만 최후의 승자는 독혈존이 될 것이 다.) (후후. 이대로 천축으로 물러가려고 했거늘. 생각외로 재미있게 되는 군. 잘만하면 어부지리를 얻어 중원정복이라는 애초의 목적도 달성할 수 가 있겠다. 그뿐이야? 기회만 얻으면 황제의 자리도 이 법존이 차지하리 라.) 그렇게 동상이몽을 가진 네명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제 목:[연재]혈존무적-마혈존의 죽음 관련자료:없음 [2038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2 08:11 조회:675 마혈존이 숨어있는 곳은 어이없는 장소였다. 과거 원래의 옥룡왕부가 있 던 장소. 마혈존이 엄청난 화약으로 폭발을 일으켜 무너트렸던 처음의 왕부 지하였다. 원래 옥룡왕부의 지하에는 옥룡왕이 준비했던 많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 다. 수많은 두뇌자들. 엄청난 지하미로와 기관매복. 천마강시. 그 모든 것이 옥룡왕부의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옥룡왕부는 철저하게 무너져버 렸고 옥룡왕 혈지존은 그 장소를 버렸다. 그런데 마혈존은 멀쩡하니 그 장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어두컴컴한 굴 속.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두 쌍의 신광이 흐르고 있었 다. 가볍게 움직이는 구개의 그림자. 바로 독혈존과 금혈존의 모습이었 다. 절대 마혈존을 남에게 넘길 수 없은 두 혈존이 옥룡왕부의 지하통로 에 들어가기 위해 직접 움직인 것이다. "드디어 벽이다. 역시 지하통로와 기관이 통째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 다. 거대한 지하광장이었던 만큼 건재한 곳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을 마혈존이 천마강시의 힘을 빌어 수리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혈존 이 사용하는 통로의 입구는 모르지만 이 벽 너머가 바로 마혈존이 거처 하는 곳이 맞다." "그런 것 같군. 그런데 벽이 혈지존이 만들었던 기관매복에 의한 철벽 같은데 어떻게 소리없이 뚫지?" 금혈존의 말에 독혈존이 질문했다. 독혈존의 독으로도 엄청난 크기의 철 로된 벽을 녹여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금혈존이 나직히 독혈존을 비웃으며 나섰다. 그리고 금빛이 일어나고 푸 른 불똥이 티었다. 금혈존의 손에서 한자루 검이 흔들리더니 한자 두께 의 철벽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소리도 없이 뚫렸다. "금혈존의 검 앞에는 뚫리지 않는 것이 없지." 금혈존이 오만하게 내뱉고는 그림자가 흐르듯 안으로 날아들었다. 독혈 존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뒤따랐다. 적어도 단 둘 이 남을 때까지는 서로가 협조를 해야하는 사이였다. 통로 안은 바로 과 거 옥룡왕부의 지하미로가 있는 곳이었다. 거미줄 같이 복잡한 통로가 이어졌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혈지존에게 넘겨받았던 지하통로의 지도를 기억하며 부지런히 달렸다. "모습이 조금 바뀌었는데? 혈지존을 섬기던 절정마유가 설치했던 기관에 다가 마혈존이 대두자를 가두었던 장소의 기관매복을 가미했다. 워낙 심 하게 개조하여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가 없구나." 둘이 여기저기 조심스럽게 조사할 때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모두 신속히 행동하라. 너희들이야말로 마혈존님의 충신들이니 앞으로 천하를 장악할 존재들이다. 더욱 열심히 연마해야 한다." "대두자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대역천심마진(大逆天心魔陣)을 익혔느냐? 옥룡왕부의 진법을 파해하기 위해서는 대역천심마진을 능숙하게 시전해야 한다." "저희 배교 전사들은 마혈존님을 위해 촌음도 아끼며 진법에 매진하며 절예를 익혔습니다." 거대한 석굴 안, 수백의 복면인들이 질서 정연하게 무공을 수련하고 있 었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대로 움직였다. 그 것은 일종의 신묘한 진법이었다. "옥룡왕 혈지존에 복수한 다음 천하에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마혈존님과 함께 나타나면 천하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되리라." "천하에 군림하는 것은 오직 마혈존님 뿐이다. 하하하. 가짜 혈존들을 모조리 이 검으로 죽여 버리겠다." 복면인들은 저마다 호기있게 소리치며 검을 수련했다. 그 모습을 숨어 서 지켜본 금혈존과 독혈존은 어이가 없었다. "마혈존이 언제 저런 부하들을 두었지? 납치한 천마강시 이십구가 전부 가 아니었던가?" "글세? 그리고보니 방금 전에 배교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설마 마 혈존이 배교의 잔당을 끌어들여 수하로 삼은 건가?" 둘은 서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호언장담하는 복면인들의 모습이 가소롭게 보인 것이다. 확실히 그들이 수련하는 진법은 대단해 보였지 만 두 혈존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보니 복면인들 앞에서 진법을 가리키는 녀석이 눈에 익는데?" "커다란 머리에 작은 몸통? 그렇군. 과거 우리의 전신인 혈존이 가둬두 었던 두뇌자야. 최후로 남겨놓았던 놈이지. 저놈이 살아남아 마혈존의 밑에서 부하노릇을 할 줄은 몰랐는걸? 그저 무공풀이를 하던 부속같은 녀석이었는데... 저 녀석이라면 짧은 시간에 옥룡왕의 진법을 파훼하는 진법을 창안하는 것도 가능하지." "우습군. 머리만 크고 무공이라고는 하나도 익히지 않은 놈이 무사들을 가리치다니." 금혈존과 독혈존은 그들을 비웃으며 동굴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같아서 는 단숨에 없애버리고 싶지만 마혈존을 발견하기 전까지 괜한 소동을 벌 여서 마혈존을 놓치기는 싫었다. 얼마후 금혈존과 독혈존은 지하광장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장소까지 이동했다. 그르르릉! 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외로 마혈존의 수하가 많은 모양이었다. 복면인들 십여명이 또다시 나타나 크고 작은 톱니바퀴를 거대한 쇠막대리고 돌리며 걷고 있었다. 기관을 조종하는 곳이었다. 그 위쪽 통로로 수많은 작은 석실이 이어져 있었다. 혈존이 가두었던 최후의 대두자. 그는 천재였다. 무공의 천재이며 진법 의 천재이고 기관의 천재였다. 옥룡왕부 지하에 있던 기관은 모두 대두 자가 뜯어고치고 새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옥룡왕이 설명해 주었던 기관과는 많은 면에서 틀렸다. "옥룡왕이 말했던 옥룡삼십육관이 모조리 복구되어 있다. 거기에 더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구나. 벽과 벽, 굴과 굴, 석실과 석실이 모두 기관 에 따라 움직이고 있구나." 금혈존은 감탄했다. 과거 혈존은 대두자들에게 얻은 기관지식으로 대두 자들을 가둔 동굴에 수많은 기관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그 기관은 옥룡 삼십육관과 흡사했다. 하지만 지금의 기관은 그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갑자기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위의 석실에서 뛰어내리며 기관 을 돌리는 복면인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 교대를 하지 않았느냐?" "교주님." 복면인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여인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손을 들고 외쳤다. "배교천세. 교주님 천세. 마혈존 만세." 복면인들의 외침에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그렇게 볼 때마다 예의를 차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배교가 다시 부흥하여 흥분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나도 배교 교주에 오른지 얼마 되 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다. 우리 배교가 다시 나서게 된 것은 모두 마혈 존님의 은혜이니 이를 잊으면 아니된다." "물론입니다. 배교 교주의 적통이 돌아와 우리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 다. 그동안 교주님이 안계셔서 어둠에서 겪은 배교의 수모는..." "교주님과 마혈존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가겠습니 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복면인들의 무리는 배교였다. 바로 혈존이 과거 교주로 있던 배교였다. 혈존이 배교 를 천년마교에 팔아 넘긴후 관심을 끊었다. 배교에서는 오직 쌍노와 정 예 몇 명만을 데려와 부하로 이용했는데 버림을 받았던 자들 중에 아직 도 살아남았던 배교의 후예가 있는 모양이었다. "배교의 적통이라고? 마지막 배교의 교주는 바로 우리였을 텐데? 마혈 존 놈이 혈존을 자처하며 배교 교주자리를 저 여자에게 물려주었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 과거 청마산에서 우리의 전신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라. 쌍노가 일시 우리를 배반했다. 아마도 적씨 성의 마지막 교주 의 후손일 것이다." "그렇군.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마혈존 놈. 어떻게 두뇌자라던가 우리가 몰살시켰던 적씨일족을 보살피는 것일까? 혈존의 뒤를 이었다면 이런 것들은 보이는 대로 모조리 몰살시켰을 텐데?" "우리가 손을 잡은 일, 있을 수 없는 행동을 실행한 것처럼 마혈존 역 시 원래의 혈존과 다른 행동을 조금씩 보이는 거겠지. 아마도 전일비의 영혼의 영향이 마혈존에게 조금 남은 것이 아닐까? 적씨 일족의 후예를 살려두고 배교 교주를 물려준 것이라든가 배교의 교도를 부하로 삼은 것 이라든가." "하여간 쉬운 놈이 하나도 없구만. 부하로 천마강시 몇놈만 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인으로 움직이리라 생각했던 마혈존마저 배교를 끌어들 여 부하로 삼았을 줄이야. 하나같이 착실하게 천하를 독패할 세력을 준 비하고 있어." 금혈존과 독혈존은 그들을 지켜 보았다. 배교 교주라는 여인은 그들과 몇마디 더 나눈 이후 통로를 내달렸다. 금혈존과 독혈존도 모습을 드러 내지 않고 그녀를 미행했다. "이건 상상이상이군. 마혈존이란 놈. 오히려 원래의 혈존에 가장 가까 운 놈 아냐?" "이럴 수가. 옥룡왕이 버리고 간 것을 이용하여 오히려 이런 정도까지 만들어 놓다니. 정말 무서운 놈이네. 제일 먼저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군." 배교 교주라는 여인은 기관으로 이루어진 곳곳을 살피며 배교 교도들을 격려하였다. 그것은 금혈존과 독혈존을 안내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 데 그녀가 가는 곳에 어떤 곳에는 화약 십만근이 산재되어 있고 어떤 곳 에는 천마강시가 아닌 다른 형태의 강시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금혈존 과 독혈존은 식은 땀을 흘렸다. "몇차레, 옥룡왕부를 폭발시켰다더니... 이런 화약을 어디서 이만큼이 나 구한 것일까?" "저거 새로운 천마강시 같은데... 약재가 부족하니 완벽한 것은 아니겠 고. 약식으로 능력이 천마강시 십분지 일 정도되는 가짜 천마강시를 잔 뜩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 이 마혈존 놈. 미친 놈일세. 천마강시 이십 구로 부족하단 말인가?" 마혈존은 단지 옥룡왕 혈지존을 괴롭히는데 시간을 다 쏟은 것이 아니었 다. 그 역시 혈존을 자처하는 자였고 천하를 차지할 욕심을 가진 자였 다. 마혈존은 배교의 후예를 끌어들이고 두뇌자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무 공과 진법을 가리켰다. 한편으로는 화약을 모아들이고 약식으로 천마강 시의 아류를 만들어내었다. 옥룡왕부에서 잡아온 한구의 천마강시를 분 해하여 천마강시 십분지 일의 능력을 가진 약식 천마강시 일백구를 만들 어 내는 것이었다. 배교 교주라는 여인을 따라가던 금혈존과 독혈존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 인이 사라지고 난 이후 한 통로에 세 명의 복면인이 한 곳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힘과 기세가 복면인들의 몸에서 풍기고 있었 다. 복면인의 뒤에는 혈존동(血尊洞)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짜 천마강시이지?" "확실해. 그것도 전신이었던 혈존이 만들어 놓은 약점이 모조리 사라진 진짜배기 천마강시이다." "세 구라. 저 뒤에 바로 마혈존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누가 더 많이 천마강시를 부숴버리는지 내기할까?" "앗. 금혈존. 비겁하군. 그렇게 먼저 몸을 날리다니." 금혈존이 허공을 날았다. 그의 오른 손이 흔들리더니 검이 허공으로 날 아올라 팽이같이 빙글빙글 돌았다. 갑작스런 파공음에 천마강시들이 움찍하며 검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금검 이 한구의 천마강시의 머리를 파괴하고 있었다. "하하. 아무리 천마강시라도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서린 어검절기(御劍 絶技)를 당해내지는 못하지." 츠츠측. 그 사이에 묵빛 연기를 뿜으며 독혈존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본좌가 완전한 혈존이었을 때도 두려워하던 무형지독이다. 설마 천마강 시 주제에 본좌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녹아라." 묵빛 기운이 천마강시의 몸을 휘감았다. 그 이후 강시가 내지르는 끔찍 한 소음과 함께 천마강시의 귀밑에서 검은 물과 함께 연기가 솟아올랐 다. 천마강시의 튼튼한 몸을 어쩌지는 못했지만 속의 뇌수(腦髓)가 녹아 내리며 귀로 흘러내린 것이다. 금혈존과 독혈존의 손속은 지독했다. 천마강시 한구의 힘은 천무삼성이 나 팔대천마의 일인과도 동일하거늘 그들은 너무도 쉽게 처리했다. 마지 막 남은 한구의 천마강시가 반응을 하려할 때 금혈존과 독혈존이 동시 에 손을 썼다. "너는 내 몫이다. 단단하기가 강철보다 더한 천마강시 주제에 어검절기 로 두조각 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내가 먼저다. 놈의 뇌를 먼저 녹여버리겠다." 검기가 번쩍이더니 또다시 세 번째 천마강시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거 의 동시에 천마강시의 귀에서 줄줄 핏물이 흘러내렸던 것도 같은 시간이 었다. 세 구의 천마강시를 처리한 시간은 거의 숨한번 들이킬 시간이었 다. 그만큼 금혈존과 독혈존의 힘은 강력했다. 천마강시를 처리한 금혈존과 독혈존이 즉시 혈존동이라 적힌 곳으로 날 아들어갔다. 둘은 기관이 발동할까봐 걱정한 나머지 허공답보(虛空踏步) 의 신법으로 걸어갔다. 한 십장 쯤 걸어들어갔을까, 갑자기 천둥치는 소 리가 들렸다. "으하하하. 천마강시를 파해하는 자가 누군가 했더니... 본좌의 분신들 이로구나. 너희 둘이 죽으려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금혈존과 독혈존은 바로 옆에 있는 자만큼이나 지독하게 증오스러운 감 정을 일으키는 자가 앞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혈존의 기운을 숨 기지 않으면 이런 거북한 기운을 서로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혈존의 기운을 내뿜는 것이야말로 십혈존들에게는 자아를 증명하는 모습이었 다. "마혈존. 이 가짜 놈. 진짜인 이 금혈존이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나야말로 가짜 놈을 죽여버리겠다. 이 독혈존이야말로 진짜 혈존이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이유없는 분노를 느끼고 마혈존의 음성이 들린 곳으 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살광을 발하며 오십장을 단번에 가로질렀다. 휙. 둘은 순간적으로 문 안을 들어섰다. 문 안에는 무수한 석상이 서 있 었다. "어엇?" 금혈존과 독혈존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몸을 휘청거렸다. 놀랍게도 무 수한 석상의 모습은 과거 이십년 전에 혈염 혈발을 가졌던 진짜 혈존 백 가량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석상이었다. 수백개의 석상. 그것은 아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 살아있고 어느 것이 무생물인 석 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석상들 사이에서 마혈존을 발견 못하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들이 알고있는 마혈존은 천마지존 혁련광의 몸을 가지고 있 는 모습인데 보이는 것은 과거 혈존의 모습을 한 석상 뿐이니... "살기가 없다. 주위에 인간의 기척이 없이. 아예 기가 사라졌다." "혈존의 기운조차 없다. 감추었어. 마혈존 이놈이 재주를 부리네." 금혈존과 독혈존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살기는 물론 생명체로서의 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경지. 현재 금혈존이나 독혈존보 다 훨씬 놀라운 경지의 무공이었다. 혈지존이 쌍영마공을 합일한 상태 의 경지라고나 할까? 더 놀라운 것은 혈존의 자존심조차 팽개치고 혈존 의 기운을 숨겼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랫동안 흘렀다. 그러나 마혈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 기 독혈존이 분통을 터트렸다. "속았어. 놈은 도망친거야. 여기에 마혈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우리 전신(前身)의 석상밖에 없잖아." 그때였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독혈존의 뒤에서 불었다. 독혈존이 깜짝 놀랐지만 이미 늦었다. 콰앙. 북치는 소리와 함께 독혈존의 몸이 튕겨져 천장까지 솟구쳤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독혈존의 입에서 죽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 다. "하하. 방심했는가? 암습을 한 것은 미안하지만 분신 둘이 한꺼번에 온 것은 너희들이니 이정도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혼자 남았으니 정당히 겨뤄보자꾸나." "너너... 진짜 마혈존이냐?" 금혈존이 눈을 부릎뜨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마 혈존은 천마지존 혁련광의 외모가 아니라 혈존 백가량의 외모였다. 즉 지금 늘어서있는 석상의 외모와 똑같았던 것이다. "흐흐흐. 어떠냐? 본좌의 본 모습이. 과거의 모습을 찾기위해 배교 술법 의 도움을 조금 받았다. 하지만 이모습이어야 진짜 혈존 백가량답지. 안 그런가? 가짜 분신." 그 누구보다 혈존 백가량을 부러워하고 그가 되고 싶었던 전일비. 그는 혈존의 영혼의 파편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스스로 완벽하게 혈존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마저 혈존시절 살았던 모습으로 바꾼 상태였 다. 그는 자신을 숭배했다. 심지어 자신의 모습, 혈존 백가량의 석상을 수없이 만들고 쳐다보며 좋아할 정도였다. "이놈. 마혈존. 설마 우리들 앞에서 기척을 숨길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 는 몰랐구나." 마혈존이 씨익 웃었다. 순간, 마혈존의 어깨가 잠시 바람결을 따라 흔들 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신형은 금혈존의 면전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금혈존이 미처 검을 빼어들기도 전이었다. 금혈존이 자게를 꼿꼿이 세운채 두 손으로 크게 연속적인 원호를 그리 자 그의 장심에서 패도적인 회선강기(回旋剛氣)가 발출되면서 금혈존의 전신을 덮쳐갔다. 금혈존은 얼굴 색이 변한체 검을 간신히 빼어들어 자 신을 향해 말려오는 묵빛의 회선강기를 마주쳐갔다. 금혈존의 검에서 하얀색의 검기가 뿜어져나와 묵빛의 회선강기와 막 닿 으려는 순간 금혈존은 기이한 자세로 회선강기를 빠져나오며 그대로 회 선강기를 검으로 내리 끊었다. 파팍! 불꽃이 튀는듯한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금혈존의 검이 뒤로 튕겨 져 나오며 마혈존이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거대한 독수리처럼 허공에 몸을 멈춘체 금혈존을 바라보았다. "크윽. 대단한 반탄력. 천마지존공이 이정도 위력이었던가?" 금혈존의 입에서 탄식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마혈존이 발휘한 것은 분 명 천마지존공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금혈존 스스로 생각하기를 흑도의 칠대절학을 뛰어넘은 경지라 생각했는데 마혈존이 발휘한 순수한 천마지 존공에 잠깐 밀린 것이다. 금혈존은 다시 긴장된 자세로 검을 세우고는 허공에 떠있는 마혈존을 올 려다 보았다. 그는 한가로운 듯 여유있는 자세를 취했는데 조금 전의 격 돌로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불현 듯 마혈존이 그대로 급강하하며 두손을 어지럽게 교차시켜 무수한 장영을 뿌려대었다. 파파파팍. 요란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자 날카로운 파공음을 수반한 수십 줄기의 묵빛 강기가 금혈존의 머 리위로 쏟아져 내렸다.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오묘한 배합과 적 절한 시차를 가지고 묵빛 강기들은 맹렬하게 금혈존의 전신을 덮어씌웠 다. 금혈존은 여전히 신중한 자세로 검을 머리위로 처들어 떠받치는 자세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등을 새우처럼 약간 구부린채 채내에 갈무리했 던 표향단심공의 경력을 폭발적으로 내 쏟으며 천지마검류를 시전했다. 놀랍게도 금혈존은 백도의 신공과 마도의 마공, 이 두가지의 조화를 이 룩한 것이다. 일순 콰콰콰쾅! 청천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거대한 폭음 이 터지며 금혈존이 그대로 뒤쪽으로 튕겨녀 나갔고 반면 마혈존은 꺼꿀 로 솟아오르는 엄청난 반발력에 이장 위로 올라가 버렸다가 힘없이 내려 왔다. 석실 안에 충격으로 부서지고 무너져내린 돌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자욱한 먼지 속에 둘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모습을 드러내었 다. 금혈존은 뒤로 물러난체 여전히 검을 굳건히 잡은 상태이며 마혈존 은 얼굴에 놀란 표정을 가득히 짓고 있었다. "놀랍군. 겨우 천지마검류로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을 받은 천마지존공의 천마현세를 받아내다니." 천마지존공은 마도 제일의 신공. 거기에 마혈존이 얻은 아수라독존마공 의 힘 일부를 쏟아부었다. 이미 천마지존공은 원래의 천마지존공이 아니 었다. 쌍영마공의 합일된 마공에 가까운 천마지존공이었다. 그런 자신 이 없었다면 마혈존이 어찌 혈지존의 주위를 맴돌았겠는가? 게다가 천마현세. 천마지존공의 최후 절초였다. 혹은 아수라천마라는 초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극히 패도적이고 흑도무학의 궁국이라 일컬었던 천마지존공과 천마현 세. 이 두가지 마공과 초식이 합쳐지면서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는 위 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에 아수라독존마공의 위력이 가미되었다 면... "분신이라 하지만 참으로 대단하군. 이 마공을 연성하면서 스스로 천하 무적이라 자부했건만. 혈지존이 쌍영마공을 합일하여 덤벼든다고 해도 단번에 분쇄할 정도의 위력은 된다고 생각했거늘." "분신. 분신 하지 마라. 너야말로 가짜인 분신이 아니가? 진짜 혈존은 오직 나 금혈존만이 진짜이다." 금혈존이 분개한 표정을 짓더니 마혈존에게 달라들며 검기를 날렸다. 절 정고수라면 누구나 날려보낼 수 있는 검기. 괴아하면서도 평범한 이 한 수의 검기는 아무런 파공도 내지않고 음산한 바람을 몰고 마혈존에게 쏘 아갔다. 금혈존의 분개한 표정과 달리 실로 평범한 한수인지라 마혈존의 얼굴에 일시 의혹의 빛이 떠 올랐다. 그는 두 손을 부드럽게 내밀어 검기를 막 았다. 그 순간 밤하늘에 폭죽이 크게 작열하듯 금혈존이 검을 휘둘러 현란하 게 번뜩임과 동시에 수십 갈래의 검기가 폭출되어 마혈존을 향해 미친 듯이 쏘아갔다. 마혈존도 이 기세에는 놀란 듯 얼굴이 굳어졌다. 절대절 명의 위기처럼 보이는 순간 마혈존은 상체를 약간 밑으로 구부리며 위력 적인 강기를 발출하였다. 처음 한줄기 검기를 막았을 때는 지금의 수를 예상치 못했지만 그의 무 공경지로서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 다. 마혈존의 대응에 금혈존은 검기를 계속 쏟아내지 못하고 검을 거두 며 한 발을 들어 밑으로 뻗쳐오는 강기를 가볍게 눌렀다. 순간 금혈존의 몸이 앞으로 급속히 숙여지며 마혈존의 곁으로 바짝 다가 갔다. 실로 절묘한 극상승의 이기차력(以氣借力)의 신법이었다. 마혈존 이 강기를 거두어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이미 금혈존은 그의 몸 가까이 에 이르러 검을 휘둘러 그의 몸에 무수한 검강을 퍼붇고 있었다. 마혈존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 큰 기합소리를 내며 신랄 한 수강을 전개하여 마주쳐갔다. 마혈존은 과연 금혈존이 십혈존 중에 최강자라고 두려워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냉정히 겨뤄보면 분명 금혈존은 마혈존에 비해 한단계 무공이 뒤떨어졌다. 그런 점을 금혈존은 너무나 잘 알기에 오히려 마혈 존이 반격할 틈을 주지않고 검에 경기를 일으켜 온갖 기괴한 천지마검류 의 초식으로 마혈존의 의표를 찔러간 것이다. 금혈존의 검기는 마혈존의 요혈을 노렸고 그의 검강은 마혈점의 허점 을 노렸다. 검기와 강기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부호인 금혈존이 사용하 고 있는 검 자체도 쇠를 두부베듯 하는 신검이었다. 검기가 없다해도 결 코 단련된 손으로도 맛대응하기 위험한 흉기인 것이다. 마혈존은 일방적으로 금혈존에게 밀리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워낙 금혈존의 공세가 험악하여 일시 수세를 공세로 바꿀 수가 없었다. 처음 서로의 공력과 실력을 비교해보고 가볍게 여겨 방심한 것이 화근이 었다. 그 이후 금혈존의 기기묘묘한 공격과 절초에 여러번 당황하며 공 세로 전환할 틈을 얻지 못한 것이다. 마혈존의 무공는 천마지존공을 기본으로 한 수강(手剛)중심의 무공이었 다. 하지만 강기로 애써 손을 보호하지 않으면 금혈존의 검강을 방어하 기 어려울뿐더러 그놈의 검 역시 번쩍이는 예기를 보이고 있어 검기나 검강이 아니더라도 수강없이 맨손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 다. 금혈존은 공세를 취하고 있는 지금의 잇점을 살리기 위해 온갖 절초를 다 발휘하고 있었지만 마혈존은 침착하게 서서 하나하나 모두를 받아내 며 당당히 모든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초조해지는 금 혈존이었다. 같이 와서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뻗은 독혈존이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금혈존이었다. 이제 금혈존의 검놀림이나 마혈존의 수강이 표현하는 초식은 육안으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쾌속함을 보였다. 마혈존은 금혈존 이상으로 초조 해지는 심정을 느끼고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온갖 절기를 마음 속에서 꺼내놓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벼락치는 소리가 울렸다. 거의 동시에 마혈존과 금혈존이 중심 을 잃고 제각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마혈존이 초식대신 내공으로 밀 고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무식하게도 검기와 검강, 검을 모두 내공 섞인 수강으로 일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도 최강의 천마지존공 이 드디어 혼신의 공력을 다해 금혈존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혈존동이라 불린 석실 안은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기류에 휘말려 먼지와 돌조각이 무수히 날리기 시작했다. 금혈존이 연신 몸을 떨었으며 마혈존 도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찌푸렸다. 두명의 혈존이 서로 겨루는 것은 실 로 한 순간의 방심에 생명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서로의 실력차는 백지 한 장 차이였다. 그러나 방심하지 않으면 그 한 장 차이는 영원히 극복 할 수 없는 차이였다. 마혈존은 단지 얼굴이 하얗게 변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금혈존은 앞자락 의 옷이 선혈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미 차이는 명백했다. 공력대결로 들 어선 순간 금혈존은 마혈존에게 밀린 것이다. 같은 아수라독존마공의 힘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천지마검류가 천마지존공에 밀린 것과 같은 결 과였다. 마혈존이 다시 천마지존공의 묵빛 강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다시는 수 세에 몰리기 싫다는 듯이 무리할 정도로 줄줄이 강기를 뿜어대었다. 아 직도 가슴의 통증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금혈존으로서는 난감한 공격 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혈존이었다. 스스로 진짜 혈존 백가량이라 생각 하는 사람이었다. 천하의 혈존이 가짜 마혈존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혈존은 검을 휘둘러 검강을 내뻗어 수강을 하나하나 맞부딪 쳐갔다. 콰르르릉. 콰콰쾅. 다시 폭음이 울렸다. 금혈존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연신 뒤 로 물러섰다. 마혈존은 처음에는 어깨가 뒤로 밀릴 정도로 휘청이더니 갈수록 상체가 안정되었다. 지금은 마치 장난치듯 검강의 반발력에도 불 구하고 아무런 몸의 동요없이 줄줄이 수강을 내질러 버릴 수 있을 정도 가 되었다. "치잇. 마혈존. 네놈 따위에게 당할 줄 알고." 금혈존의 눈에서 염화가 타올랐다. 방금 전에 수세에 몰라 초조해하던 마혈존이 느꼈던 감정이 이번에는 금혈존에게 찾아왔다. 이대로는 패배 와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금혈존은 다시한번 공세의 기회를 얻기위 해 아예 양패구상을 각오하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갈수록 불리하지만 죽 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한 아직 마혈존이 쉽게 금혈존을 제압할 수 있 는 단계는 아니었다. 검강의 파편이 빛조각처럼 뿌려졌다. 이정도 위협이면 마혈존이 잠시 주 춤할 것이 분명했다. 그 틈을 타서 숨을 고르고 쓰라린 내상도 좀 진정 할 시간을 얻을 생각이었다. 마혈존은 유성우같은 검강 파편을 보며 한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다시 묵빛의 강기가 쏟아져내렸다. 이번 강기는 둥글고 거대했으며 수많은 검강 파편 을 모조리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금혈존은 자신의 검강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며 입에서 피비린내를 억 지로 참았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억지로 펼쳤더니 몸의 상태가 안좋 은 모양이었다. 마혈존의 얼굴도 창백했지만 금혈존의 지금 상태와는 비 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혈존의 손이 번쩍 들렸고 다시한번 천마현 세가 천마지존공을 동반하고 펼쳐졌다. 불행히도 이번에는 금혈존도 막 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순간 금혈존은 이를 악물었다. 천하의 금혈존이 여기에서 죽은 것은 말 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당할 수밖에 없다면 홀로 가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금혈존은 검을 들어 마혈존의 가슴에 찔러 들어갔다. "헉." 마혈존이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금혈존의 검을 보았지만 자신의 천 마현세가 먼저였다. 금혈존의 검이 가슴에 닿기 전에 그의 손이 금혈존 의 머리를 산산히 조각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의 머리 지척까지 손이 다가갔을 때 순간적으로 마혈존은 내공 진기가 끊어짐을 느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상을 입을 뻔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입 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뜨거운 통증이 가슴에서부터 피어올라왔다. 마혈존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진기가 끊겨 무용지물이 된 마혈존의 천마현세 대신 아무 렇게나 내지른 금혈존의 검이 마혈존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마 혈존이 분노의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거기에는 엉망진창된 몸 을 일으키며 마혈존을 향해 손을 뻗은 독혈존이 있었다. "크흐흐. 가짜 놈. 네놈도 암습을 했으니 나도 뒤에서 독을 썼다. 피장 파장이니 억울해 하지 말아라." 최후의 순간에 독혈존이 정신을 차렸다. 정말 죽지않고 되살아난 것이 신기할 정도의 커다란 상처였다. 물론 완전히 죽지만 않으면 아수라독존 마공의 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관계로 절대로 살아날 수 있는 상태이기 는 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마혈존이 금혈존의 머리를 박살내려는 광 경을 보았다. 그가 무형독공을 시전했고 마혈존은 독에 중독되었다. "크흐흐흑. 이 마혈존이... 본좌 혈존 백가량이 죽는 다고? 너희들 따 위 가짜에게?" "크크. 징그러운 가짜 마혈존 놈. 빨리 죽어라. 주제에 완벽한 천마지신 을 이루어 무형지독에도 몸이 안 녹아내리고 기껏 진기의 흐름을 방해하 는 정도냐?" "크크. 잘했다. 독혈존. 으으. 죽을 것 같군. 하지만 저놈 마혈존이라 는 가짜 놈을 죽이기에는 독혈존 네놈의 그 정도 솜씨로 충분하다." 금혈존이 애써 숨을 몰아쉬며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악." 마혈존의 억울해하는 비명과 함께 마혈존의 목이 날아갔다. 피분수가 흐 르는 가운데 금혈존도 독혈존도 풀썩 주저 앉았다. "으으. 움직일 힘도 없다." "독혈존. 이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라. 초반에 뻗어버려 얼마나 내 가 고생했는지 알기나 하냐?" "크으윽. 어쨋거나 손을 썻고 결과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내 상처 또한 네놈보다 심하면 심했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둘이 낑낑 거리며 일어서다가 금혈존이 재빨리 주위의 동정을 살피며 말 했다.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천마강시를 부리는 자가 혹시 배교에 있을 지도 모르고. 우리 상처로는 아무리 하수라도 지금은 위험하다. 여기에 남은 천마강시를 회수하는 일이나 배교의 잔당을 잡아들이는 일은 혈지 존에게 맡기자구." "아무래도 그게 낫겠군. 이런 난리를 쳤는데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 을 보아 이곳이 금지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쨋거나 빨리 빠져나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낫겠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동혈을 벗어났다. 석실에는 상 처투성이로 목이 베어진 마혈존 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몸인 천마지존 혁련광의 몸 역시 천마강시의 일종. 그런데도 단 일검에 그 목이 잘라졌 으니 금혈존의 검공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갑자기 석실 안으로 조용하게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석실 안의 폭음을 외부와 차단시킨 남자의 그림자였다. "크크크. 이게 도대체 웬 횡재인지 모르겠군. 근처에 있던 혈지존을 감 시하다가 금혈존과 독혈존을 보게 되다니. 게다가 마혈존의 죽음을 얻 게 될 줄이야." 나타난 자는 바로 광혈존이었다. 귀혈존의 모든 정기를 빨아먹은 바 있 는 광혈존. 그가 죽은 마혈존의 잘린 머리와 몸통에 손을 올려 놓았다. 광혈존은 남의 정혈과 무공, 그리고 모든 기억을 빼앗는 재주를 가진 자 였다. "크크크. 너희 가짜가 모두 모여 내 몸 안에서 진짜 혈존으로 되살아나 는 것이다. 너희들이 모여 완벽한 하나의 혈존이 완성되는 것이다." 마혈존의 머리가 쭈글쭈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급격히 수분이 말 라가는 나무처럼. 마혈존의 몸도 수축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죽만 남 은 것처럼 모든 정혈이 광혈존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아수라독존마공의 상당부분이 복구되었다. 흐흐. 이제 본좌 를 당해낼 자는 십혈존 중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본좌야 말로 선택받 은 진짜 혈존인 것이다. 광혈존이야말로 진짜 혈존 백가량인 것이다." 광적인 목소리가 오랫동안 석실안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광혈존도 금혈 존이나 독혈존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제 목:[연재]혈존무적-요혈존과의 대결 관련자료:없음 [2038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2 08:16 조회:592 낙양성에서 즐거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백이충의 아버지인 서문구랑과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백이충이었다. 백이충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을 모두 대충 이야기했다. 다만 다른 사 람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혈존이 자신이었다는 소리대신 혈존의 영혼에 제압당해 꼭두가시 노릇을 하다가 얼마전 제정신을 차렸으며 호황부의 광한문과 인연이 닿아 호황령주가 되었다는 소리를 했다. 서문구랑은 자신이 기다려온 황제의 사자가 바로 아들임을 알고 몹시 기 뻐했다.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녀석. 아비와 형의 걱정만 시키더니 늠름하게 변했구나. 걱정마라. 식 구들은 모두 무사하다." 서문구랑은 서문 장군부의 식구들은 모두 낙양성으로 빼돌렸다는 기쁜 소식을 백이충에게 전해주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모두 낙양성에 있다 는 것이다. 서문 장군부에 있던 사람들은 하인들과 서문가의 식구로 위 장하고 있던 여자들이라고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서문가의 남자들 은 백이충을 포함해서 모두 북경성 밖으로 떠나있었고 서문가의 여자들 은 외부에 별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변장하게 하기가 쉬웠다는 것이다. "황제폐하의 명이 떨어졌다면 이제 때가 되었다. 역도들을 쓸어버릴 때 가." 서문구랑은 그의 책임하에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했다고 했다. 그 수는 이십만이 넘어 능히 역도를 제압할만 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병력을 옥룡왕 모르게 숨겨둘 수 있었습니까?" "하하. 모르느냐? 요 몇년간 하남에 자주 출몰한다는 도적들의 소문을." 하남의 청만산, 아비산, 우마산, 주가산 등 네 개의 산에 산적들이 자 주 출몰하여 양민을 괴롭히고 마을을 습격한다는 상소가 황실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 산적의 수가 수천에서 만에 이르렀기에 황제는 친히 낙 양성주를 불러 토벌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황군을 내려보냈다. 근 이년 내의 전투로 이미 세 개의 산적 근거지가 토벌되고 주가산의 산 채 하나만 남았는데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는... "모두 폐하께서 명을 내리셔서 한 일이다. 그곳에는 산적들 대신 북로군 벌의 군사 십만이 나뉘어져 각 산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산적은 단지 위장일 뿐이다. 게다가 황제폐하가 낙양에 내려보내신 십만의 황군 역 시 이 아비의 지휘를 받고 있다. 당연히 두 군대는 이년동안 각기 서로 모의 전투 훈련을 하였을 뿐, 있지도 않은 산채가 토벌된 적은 없다." "하오면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버님이 거느리신 이십만의 군사 이옵니까?" "적들이 반항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동원하기는 싫다. 허나 옥룡왕이 이 미 북경을 장악하고 십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전쟁을 피할 방법 이 없을 것 같구나." "그 옥룡왕이라는 자는 실제 황실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 혈천마 궁의 백나안이라는 자가 변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백이충의 말에 서문구랑은 대경실색했다. 그동안 주씨 황실의 반역으로 생각했을 뿐, 설마 무림인이 왕야로 변장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했을 줄 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병사를 동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 옥룡왕을 따르는 신하들도 그가 주씨의 황족이기 때문에 힘에 순순히 굴복한 것이 다. 만약 그의 정체가 밝혀져 단지 강호의 역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 진다면 신하들과 그를 따르는 북경의 장군, 대부분이 그를 거역하게 될 것이다." "동창제독 염무균과 절정마유라는 자를 잡아 놓았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백이충은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긁적였다. "이번에 천하를 떠돌다가 집안에서 혼약을 약속한 소매외에 몇 명의 여 자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진짜 옥룡왕의 딸이 있습니다. 그녀 가 어릴 때 왕부를 떠났다고 하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녀의 입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백이충은 모란서시 백소련에 대해 말했다. 사실 백소련과 갓난 그녀의 동생, 그녀의 어머니 백여옥은 혈지존이 아닌 옥룡왕의 제일왕비 모향혜 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모향혜 는 혈지존이 옥룡왕을 가장하며 죽였으니 천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혈지존이 옥룡왕이 아닌 것은 사실이니 혈지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하 나의 죄를 더 뒤집어 씌운다고 해서 무슨 상관인가? "뭣? 그럼 옥룡왕의 제이 왕비와 옥룡왕 슬하 남매가 사라졌던 것이 모 두 그자의 짓이란 말이냐? 폐하는 그것도 모르고 옥룡왕이 비극을 당한 이후에 사람이 변한 줄 알았는데..." 서문구랑은 크게 기뻐했다. 염무균과 절정마유 만으로는 옥룡왕이 진짜 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좀 약했다. 하지만 어릴 때 총명했던 백 소련, 아니 천향군주 주소련의 다섯 살때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 다. 북경제일미였던 백소옥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실종되었던 옥룡왕 의 딸이 증언한다면 누가 믿지 않을 것인가? "잘 되었다. 서유림의 총수가 바로 천향군주의 외조부 되시는 어른이시 다. 이정례 대인이 너를 돕고 있는데다 서유림마저 힘을 실어준다면 북 경안에서 옥룡왕을 고립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군대가 아니라 소수의 고수들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도 있겠구나." 서문구랑은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일을 축소시킬 수 있겠다. 이 일은 무 림인의 일로 귀착시킬 수 있겠구나. 이 아비의 사문이 무당임을 알고 있 겠지? 네 사조가 되시는 분이 광천도장이시다. 그분을 찾아 백도맹의 힘 을 빌려야 겠구나." "소문에 듣기로 무당과 소림의 여러 어르신들이 승룡곡으로 들어가셨다 는 데요." 백이충은 슬쩍 서문구랑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 서문구랑은 원래 백씨 로 광천도장의 제자였다. 말하자면 백도의 협객이고 장군이 되지 않았다 면 백도맹의 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백도맹을 분탕질 치기 위 해 모용풍을 사로잡아 분신으로 만들었던 것이 백이충이었다. 아니, 혈 존 시절의 백이충이었다. 그뿐인가? 태사조라고 할 수 있는 천무삼성 중 의 현무도선을 마진걸의 몸으로 죽인 것도 백이충이었다. "듣자하니 요즘 백도 무림에 요혈존이니 백혈존이니 하는 것들이 날뛴다 던데... 아십니까?" 은근슬쩍 말을 돌리려는 백이충을 바라보다가 서문구랑의 눈이 번쩍 빛 났다. "그리고보니 너 광한문의 무공을 이어받았다고 했지? 호황령까지 이어받 았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이냐?" "글쎄요? 아까 혈존에게 잠식되었었다고 했죠? 지금 날뛰는 혈존들에게 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거 사실이냐? 아비에게도 정보통이 있다. 지금 금혈존이니 귀혈존이 니 뇌혈존이니 자처하는 자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하는 소리냐?" "말씀드렸잖아요. 해왕군도주와 북해빙궁주 조차 저를 인정했다니까요. 그분들의 딸을 얻은 것도 있고... 하여간 전설상의 광한선인의 후예라 이겁니다." "어릴때부터 허풍은 안떨었으니 믿기는 믿겠다. 그럼 네게 한가지 부탁 좀 하마. 안 그래도 사부님께서 승룡곡의 일을 의아해하며 몰래 조사해 보겠다고 내게 여러번 도움을 요청하셨다. 폐하의 명령 때문에 따르지 못했었는데 사부님의 연락이 끊겼다. 어차피 옥룡왕의 일도 무림의 일 이 되었으니... 네가 한번 가볼수 있겠느냐?"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연히 가야죠." 백이충의 머리에 옥령진인의 글귀가 떠올랐다. (광한신공을 대성하기 위해 얻어야 한다는 인연이 있다고 한 방향이 아 무래도 승룡곡 같단 말이야.) 승룡곡은 백도맹의 가장 비밀스런 최후의 장소였다. 따라서 백도 내에서 도 어느 정도 지위에 있지 않으면 승룡곡의 일을 알지 못한다. 무성 종 리연과 천무삼성은 승룡곡에 대한 일을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왔고 출입 을 통제시켰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는 법이 다. 승룡곡에 논밭이라도 있지 않는한 식량과 의복을 외부에서 들여와 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승룡곡에 물자를 공급하는 일은 백도맹에서 지원해 왔다. 그리고 그 일 을 맡은 자는 금가장이었다. 무림세력이면서도 상계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고 무당 속가제자인 금가장은 그일을 맡기에 여러모로 안성마춤이었 던 것이다. 그렇다. 금가장주는 무당의 속가제자이며 광천도장의 후손이 었고 또한 서문구랑의 친구겸 사형제이기도 했다. 승룡곡을 향해 움직이는 행렬이 있었다. 이십필의 말에 탄 금가장의 무 사들이 오십여 수레에 가득 물자를 호위하며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금가장은 삼개월에 한번씩 이렇게 물자를 승룡곡에 전해왔다. "요새는 정말 복우산에 오르기가 싫어. 왜 이렇게 사람들이 바뀌었는지 모른다니까." "전에는 그래도 같은 백도의 사람들이라고 친하게 말도 걸더니... 이제 는 완전히 죄인처럼 감시하더군." "자네는 그 정도인가? 나는 그들에게 아주 살기마저 느끼고 있다니까. 마치 조금만 그들의 감시를 벗어나면 당장 죽일 것처럼 구니 오금이 저 려 제대로 행동을 못하겠어." "세상이 어떻게 변하려고 그러는지. 나는 여기가 백도의 비밀세력인지, 아니면 마도의 세력인지 요즘 헷갈리고 있다니까." 말을 타고 가는 금가장의 무사들은 연신 불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동 안 금가장의 무사들에게 친철하게 대하던 승룡곡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 었기 때문이다. 불과 삼개월 전의 일이다. 그 때도 평소처럼 승룡곡의 무인들에게 금가장의 무사들은 친절하게 말을 걸려했다. 하지만 그들은 살기 띤 시선으로 마치 그들을 하찮은 부하처럼 부리며 승룡곡 입구에 서 물자만을 건네받아 마치 내쫓듯 떠나보낸 것이었다. 그 태도는 아주 무례하여 금가장 무사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도의 정예라는 이 름은 헛것이 아니었는지 그들의 살기찬 시선에 주눅이 들어 아무 소리 도 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우리가 지들 부하도 아닌데 마치 자기 부하처럼 다루다니. 세상에 이 런 일이 어디 있어?" "우리가 금가장의 무사이지. 승룡곡의 부하인가? 게다가 이 물자도 장주 님이 호의로 제공하는 것이잖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들이 연신 삼개월 전의 일을 기억하며 떠들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앞 으로 사람들이 다가왔다. 금가장의 무사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도복을 입은 자들. 그리고 승포를 입은 승려들. 겉보기에는 틀림없는 불 가와 도가의 무인들이며 또한 백도의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 의 얼굴 색은 음침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시선은 살기에 가득차 있었다. "수고들 많이 하셨소. 날자에 변동없이 제대로 도착했군요." 말투는 부드럽지만 음성은 냉랭하기 이를데 없었다. 오십여명에 이르는 자들은 금가장 무사를 포위하듯 나타났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승룡곡 을 염탐하러 온 첩자들을 대하는 듯 했다. 앞장선 승려의 살기찬 시선 에 불평을 늘어놓던 금가장 무사들의 목이 쑥 들어갔다. "점검하라." 승려의 명령에 승룡곡에서 온 사람들이 수레에 실린 물건들을 일일이 검 사하기 시작했다. 금가장 무사들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평소와 같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물건들은 우리가 인수하겠습니다. 다 음에 또 폐를 끼치지요. 돌아가 주십시오." 승려의 냉랭한 축객령에 금가장 무사들을 인속했던 중년인 한명이 어이 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사.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오일 동안 고생해서 물건을 인계 했는데 휴식도 없이 돌아가란 말입니까?" "죄송하나 지금 승룡곡안에 외부인을 들일 처지가 안됩니다. 그러니 그 냥 돌아가 주십시오."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그래도 삼개월 전에는 이렇듯 물건만 받으 면 볼일 없다는 식으로 냉대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소. 이 근처 이틀 거 리에는 인가도 없다는 것을 알지 않소? 이게 백도의 협객, 아니 불가의 승려가 할 수 있는 행동이오?" "말했소. 돌아가라고. 아니면 강제로 돌아가게 해드리리까?" 승려의 눈에 다시 살기가 가득찼다. 그 눈빛을 보고 분기에 몸을 파르 르 떨던 중년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으으. 백도의 정예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돌아가겠소." 금가장 무사들이 아주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식량이 실린 수레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인영 하나가 반짝 눈을 빛냈다. (눈동자가 붉다. 그리고 성미가 폭급해지고 쉽게 살기를 일으킨다. 나 는... 저 원인을 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은 저런 현상을 일으키는 마공을 알고 있었다. 모용풍의 몸에 들어가 있을 때 연구했던 마공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구결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공이 일으키는 폐해는 알고 있었다. (혈잔마공(血殘魔功)이었던가? 겉으로는 백도의 신공구결과 흡사한 것. 그러나 빠르게 내공이 증진하고 무공이 높아진다. 같은 수련을 해서 같 은 시간이내에 백도의 무공보다 세배 더 빠른 내공의 진전을 얻을 수 있 다. 그러나 그 폐해가 만만치 않다.) 그림자에 숨어있는 인영은 바로 백이충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일으 켰던 죄악의 결과를 보고 있었다. (혈잔마공을 익히면 무공이 강해지는 대신 이성이 사라지고 감정이 격해 진다. 살기가 빠르게 일어나고 난폭해진다. 본능과 욕망이 강하게 일며 점차 전투에 미친 광인으로 변해간다. 가장 무서운 점은... 점차 과거 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사람만을 따르게 되는 것이 다.) 백이충은 승룡곡에 나온 사람들을 보고 한눈에 승룡곡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모용풍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백도의 신공을 전수한 것처럼 꾸며 혈잔마공을 전수한 것이다. 혈잔마공의 무서운 점 은 그 구결이 백도의 신공처럼 현묘하게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승룡곡의 사람들은 점차 과거를 잊고 난폭해지며 혈잔마공을 익힌 모용 풍만을 따르게 되었으리라. (허나 천무삼성을 비롯하여 무성 종리연 같은 사람들이 혈잔마공 따위 의 마공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함에도 승룡곡의 사람들이 저 렇게 대놓고 혈잔마공을 익힌 티를 드러낸 다는 것은... 이미 승룡곡이 완전히 제압되었다는 소리인가?) 승룡곡을 제압했다면 백도의 칠할 이상을 제압한 것과 같다. 나머지 삼 할은 환우령의 세력일 것이다. 백도의 무사들을 마도천하를 이루기 위 해 이용하는 모용풍, 아니 백혈존은 아주 무서운 자였다. 승룡곡에 수레에 실린 물건들이 창고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백이충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 자 창고는 승룡곡 외곽에 있기에 그만큼 중요도도 덜하고 경비도 별로 없는 곳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전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마진걸의 몸을 분신으로 이용해서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은 마치 안개에 쌓인 듯 뿌연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야. 과거에서 분신으로 활동하던 부분의 기억은 마 치 도려내 버린 것같은 상태이니까.) 다행인 것은 황궁 무고이후에 사술대신 도가의 법술을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가지 역시 역천과 순천이라는 다른 길을 가지만 극 은 통한다. 게다가 옥령진인이 서술한 광한신공의 구결은 무공이라면 무 공이지만 법술이라면 또한 법술일 수 있는 구결. 과거 혈존 시절의 백이 충이 무공보다는 사술에 익숙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법술을 이용하는 것 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십보마다 경계가 서 있었다. 백도의 중지여야 할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핏발어린 눈에 살기를 가득 띠고 있었다. 마치 피를 그리워하는 듯. 겉보기로는 백도의 최후 중지인 승룡곡이 아 니라 마두들의 소굴 같았다. (일단 가장 커다란 건물로 들어가자. 그곳이 천무삼성이 거처하던 곳일 터이니... 믿을 수 있는 백도의 수뇌를 만나야 좀 더 정확한 승룡곡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광천사조라도 만나면 좋은데.) 백이충이 용케도 경비들을 뚫고 그림자처럼 건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 실 지금의 그의 종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천년마교의 천마급, 혹은 천무삼성급, 아니면 혈존의 제자나 십혈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백이충은 승룡곡이 백혈존이나 요혈존, 둘 중의 하나에게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운이 좋으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쓰러 트리면 과거의 죄를 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귀혈존을 쓰러트린 경 험이 있기에 백이충은 자신이 있었다. 금상첨화라면 승룡곡에 아직 제정 신을 가지고 남아있을 백도의 인사들을 구하는 것이다. "흑흑흑.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백이충은 천무삼성이나 광천도장의 종적을 찾던 중에 흐느끼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 다. 기억을 더듬는 순간 목소리 주인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백리설이다. 모용풍의 여자. 그녀라면 백혈존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백이충이 흐느끼는 여인의 목소리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많은 백도 여 제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중지에서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가가. 모용가가. 어째서 이렇게 변해버린 건가요? 흑흑. 모용가가." 작은 등불 아래 백리설이 울고 있었다. 두 눈이 퉁퉁 부운 백리설은 아 주 슬퍼 보였다. 그녀는 모용풍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흑흑. 모용가와 우리 백리가를 모두 독으로 제압하시다니. 혜경성승님 을 가두시고 사부이신 맹주를 거역하시다니.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변하 신 건가요? 이 백리설은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요?" 처음 시작은 연풍회였다. 모용풍은 그들에게 기이한 내공구결을 가르쳤 다. 한계에 도달했던 자들도 갑작스럽게 내공이 늘고 무공이 강해졌다. 그러기에 모두들 환호하며 모용풍이 가르쳐준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어 느 순간에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혈광이 일고 난폭해졌다. 과거에도 연풍회의 무사들은 모용풍을 따랐지만 지금은 마치 광신도가 따르듯 그렇게 모용풍을 따르 고 있었다. 세가의 젊은 세력들이 주축이 된 연풍회를 단 일개월만에 이 상하게 변화시킨 모용풍은 그들로 하여금 오대세가를 뒤엎어버리게 만들 었다. "어째서 가문인 오대세가를 그렇듯 탄압하시는 것인지... 어째서 혜경성 승을 인질로 잡으시고 승룡곡을 제압하시는 건지..." 오대세가도 처음에는 가주와 원로를 인질로 잡고 독으로 제압했다. 자신 의 가문인 모용가문과 처가인 백리세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분 노에 차 불복하는 세가의 제자가 많았지만 그런 자는 갈수록 적어졌다. 모용풍이 전하는 무공을 익히면 점차 심성이 변해가고 과거를 잊고 모용 풍에 충성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승룡곡도 지금은 완전히 변해가고 있었다. "진정 모용가가. 당신이 백혈존이십니까? 어이하여 혈존이라는 악마의 별호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흑흑" 백리설이 울고 있을 때 백이충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리낭자. 낭자는 백혈존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군요." 백이충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리설은 깜짝 놀랐다. 그녀도 무공을 익힌 무림의 여협이었다. 그러나 백이충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전혀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백리설은 황급히 눈물을 딱으며 백이충을 경 계의 눈빛으로 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승룡곡에 들어온 거지요?" "경계하지 마시오. 본인은 백이충이라는 사람이오. 옥수비연으로 알려 진 금소매의 약혼자이며 서문대장군부의 이공자요." 백이충이 자신을 소개했지만 백리설의 경계는 풀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백이충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혜연이의 약혼자군요. 하지만 장군부의 이공자는 무공을 익히 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장군부의 공자가 어째서 이곳 승룡곡 에 들어오신 거죠?" "금소매를 알고있다면 내 내력도 알고 있을 것이오. 무당파의 광천도장 이 바로 내게 사조뻘 되시는 어른이오. 처가의 조부가 되시기도 하고. 그분은 승룡곡의 변화를 눈치채고 조사하신다는 내용을 저희 아버지에 게 보냈는데... 소식이 끊겨버렸소.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오." 백이충의 설명에 백리설의 경계가 점차 풀어졌다. 그녀도 요 근래 광천 도장이 잡혀 뇌옥에 갇혔음을 알고 있었다. 모용풍의 짓이었다. 그리고 광천도장이 자신의 제자들과 활발하게 연락을 해왔던 사실이 밝혀졌다. 금가장의 무사들을 경계하여 아예 승룡곡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냉대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렇다면 돌아가세요. 이곳은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차라리 백도맹에 가서 승룡곡의 일을 조사하도록..." "백리낭자. 이미 백도맹은 모용풍, 아니 백혈존의 것입니다. 지금 백도 에서 백혈존을 거역할 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게 승룡곡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모용가가가 백혈존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광천도장이 서문장 군부에 알려준 것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승룡곡은 용담호혈입니다. 어떻게 이곳에 몰래 숨어들어왔는지 몰라도... 모용가가는 정말 무서운 분입니다. 그분은 정당한 대결로 혜 경성승을 제압했고 무성 종리연 맹주도 제압했습니다. 그를 상대하는 것 은 너무 위험합니다." "하하. 미인이 걱정하니 고맙군요. 그러나 아버님의 명령이 있으니 적어 도 사조 어르신이나 혜경성승께서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알기 전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 능력에 대해서는 걱정 마십시오. 그럴 자신이 있기에 이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호황령의 소유주입니다." "호황령? 그게 무엇이지요? 환우령은 알아도 호황령이란 처음 듣는 이름 인데?" (흠. 황실의 전설인 호황부 호황령의 일은 무림에 잘 안 알려졌나? 그 럼 다른 이름을 대야 되겠군.) "호황령은 천외구기가 남긴 세력입니다. 그리고 소생은 천외구기의 공동 전인입니다. 그러니 충분히 능력이 됩니다." 백이충의 말에 백리설의 눈에 결심의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두주먹을 잡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외삼성 어르신과 같은 시대에 명성을 떨쳤던 천외구기의 전인이시라 니... 아마도 제가 모용가가의 악행을 방관한 죄를 씻으라는 하늘의 계 시인지도 모르겠군요." 백리설은 연약한 여인의 얼굴을 집어던지고 굳센 무림 여협의 얼굴을 보 여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승룡곡에서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용가가를 반대 하고 그 이상한 마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뇌옥에 갇혀 있습 니다. 그 숫자는 승룡곡 삼분의 일에 달합니다. 모용가가는 그들을 하나 하나 실혼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성 종리연 맹주와 혜경성 승, 그리고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인질로 잡혀있기에 뇌옥에 갇힌 분들은 반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리설이 앞장섰다. 백이충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나마 모용가가는 저를 믿고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입니 다. 맹주와 성승, 가주들이 갇힌 곳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광천도장 도 그곳에 갇혔습니다. 그분들의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백리설을 따라 간 곳은 기관장치로 가득한 어느 건물의 지하였다. 어째 서 기관매복이 가득찬 곳일수록 지하인지 몰라도 상당히 경계가 심했 다. 백이충이 그들 경비를 따돌리지 않았다면 백이충으로서도 침입하기 가 상당히 곤란한 장소였다. "저 통로의 입구에 두명의 경비가 서 있습니다. 천하제일가의 원로들로 무적장왕 태사조의 조카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용가가에 의해 실혼 인으로 변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이성이 없습니다. 오직 모용가가만을 알 아보며 그 외의 인물이 접근하면 무조건 공격합니다." "그럼 그들을 통과하면 사조와 다른 중요한 분들이 갇힌 곳이 나타나는 겁니까? 그럼 백리낭자는 여기 머물러 주십시오. 그들은 제가 제압하겠 습니다." 백이충은 백리설이 가르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그곳에는 커다란 철문이 있고 그 앞에 두명의 복면인이 있었다. 짧은 복면 밑으로 긴 수 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많이 먹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백 리설의 말대로 눈이 흐릿했다. 백이충이 귀신처럼 다가와 지풍을 날렸다. 일반 지풍이 아니었다. 소리 도 없고 기척도 없고 경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이충은 단지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고 공간을 격하고 지풍은 복면인들의 요혈 바로 앞에 나타났 다. 자연지경을 뛰어넘어 처음 선보이는 광한신공 초입의 위력이었다. 한눈에 보기에 범상치 않아보이는 복면인 두명이 인형처럼 쓰러졌다. 처 음 사용해본 광한신공의 위력에 백이충은 미소를 지었다. 광한신공은 법 술로도, 무공으로도 어느쪽으로도 유용한 만능 신공이었다. 굳이 형식 에 연연하지 않는다. 법술의 요결을 따르자 그림자 속으로 숨는 능력을 보였던 광한신공이 상대를 보고 요혈을 점해 쓰러트리기에 지법이 편하 다고 생각되자 지법으로 발휘된 것이다. 그들이 쓰러지자 백이충이 얼른 철문에 다가갔다. 그의 손이 번뜩이자 철문의 개폐장치가 박살났다.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릉.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엄청난 폭음이 고막을 상하게 할 정도로 크게 일었다. 화염이 솟구치고 바닥이 무너지며 돌가루가 분분히 날렸 다. 철문은 거대한 화약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 것을 폭발시키는 기폭장 치였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백이충은 그야말로 허무하게 화염에 휩쓸 리고 말았다. 백이충은 폭발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런. 백리설에게 당했는가?)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불길. 끝없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지하. 무 너지는 천정. 그리고 화약이 폭발하면서 바로 그의 몸앞에 터지는 파괴 력. 천근 이상가는 화약이 터지는 위력이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도 저히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이충이 위험을 느끼자 스스 로 광한신공이 운기되며 그의 몸이 투명해졌다. 무너지는 돌덩이와 사방 에서 일어나는 화염이 백이충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기 시작했다. 다만 몸을 디딜 버팀이 없는지라 그의 몸은 지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또 하나의 어리석은 놈이 나타났구나." 지하로 떨어지면서 백이충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백혈존이라 자처 하는 모용풍의 목소리였다. 역시 백리설이 안내한 곳은 함정이었다. "흥. 감히 백리설. 네가 나를 배반하다니. 하지마나 본좌 백혈존은 아무 도 믿지 않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네가 배반할 줄 알고 미리 함정을 파 놓고 기다렸는데 역시 예상대로였구나." 가물가물 저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 으며 백이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백리설은 알고서 그를 함정 에 빠트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백이충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자 무섭게 떨어지던 백이충의 몸이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몸을 점검해보니 의외로 작은 상처하나 없었 다. 대폭발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 치고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다. 게다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인데도 낙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바닥이 깊어도 별 부상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자 백리설이 걱정되어 위의 목소리에 좀더 신경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네년은 참으로 거물을 하나 잡아왔구나.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오싹할 정도의 익숙한 기운을 풍기는 놈. 필시 본좌가 반드시 죽였어야 할 가짜 중의 하나일테지. 하하하. 함정 외에 화약까지 사용한 것은 만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이지. 백리설. 네 년의 미모 때문에 본좌를 배반해 도 죽이지 않는 줄이나 알아라. 네 덕에 이제 가짜 놈을 하나 더 해치웠 으니 둘을 처치한 셈이 되는 구나. 천하에 혈존이라 자처하는 놈들은 싸 그리 없애버릴 테다." (어라? 둘을 처치해? 그럼 이 함정을 통해 가짜 혈존이 하나 더 떨어졌 나?) 백혈존은 백이충이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으로 착각하는 듯 했 다. 그리고 백이충은 왜 자신이 이토록 허무하게 당했는지를 알았다. 분 명 함정으로 걸어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징조도 느끼지 못하고 당한 것은 백혈존이 그보다 먼저 그의 혈존의 기운을 알아버렸 기 때문이었다. 폭발은 백혈존이 기다렸다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 틀 림없었다. "흥. 부상하나 없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면 백혈존도 놀라겠지? 이대로 탈출하여 백혈존을 제거하면 백도에 진 빛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 되겠 지. 아버지의 명도 이행하는 것이 되고." 바닥이 가까워 지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좀더 몸을 가볍게 하자 마 치 새털처럼 부드럽게 바닥에 닿았다. 무려 수십장의 깊이에서 떨어졌는 데도 백이충은 태연했다. 광한신공을 그만큼 믿는 것이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이 나눠지면서 그 누구도 그 경지에 접근하지 못한다.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최고로 수련해봤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자 연지경과 비슷하다. 이미 자연지경을 조금이나마 초월한 나의 상대는 되 지 못한다." 문득 백이충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전에 귀혈존 을 만났을 때 느꼈던 기운이었다. 참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기분. 도저 히 주체할 수 없는 살기. 마치 자아를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 혈존의 기 운을 내뿜는 자가 주위에 있을 때 느끼는 기분이었다. "백혈존의 말이 사실이었나? 여기에 또 하나의 가짜 혈존이 있었나?" 백이충이 자신 외에 누가 여기에서 함정에 빠졌는지 궁금할 무렵 빛 하 나 없는 어둠에서 한명이 다가왔다. 그의 기운을 느끼는 순간 백이충은 그가 누군인지 알 수 있었다.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감정은 여전했지 만 추가로 느껴지는 것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요기. 사람의 몸으로는 도저히 갖을 수 없는 요기를 갖고 있는 자가 눈앞에 있었다. "흐음. 요혈존 마진걸인가? 그가 백혈존의 함정에 빠져 이곳에 있는 것 인가? 그렇다면 백도은 완전히 백혈존의 손에 들어간 것인가?" 백이충의 얼굴에 은은한 긴장이 어렸다. 상대는 요혈존이었다. 그는 어 떤 혈존보다 상대하기 더 까다로운 자였다. 그의 무공이 높아서가 아니 었다. 그는 몸의 반이 요괴로 채워져 있는 자였다. 바로 요괴들의 왕이 었다. 다만 백이충에게는 그를 상대할 방법이 있었다. "요혈존. 과거 너는 죽었지. 그것을 요괴들의 기운을 빌어 살려주었는 데 이제 그게 바로 혈존의 일부가 되었구나." "크흐흐. 증오스러운 자. 너는 또 어떤 가짜이냐? 네놈을 찢어 죽이고 본좌가 진짜 혈존 백가량임을 천하에 알리겠다." 백이충의 말에 요혈존이 소리쳤다. 요혈존 역시 백이충이 느끼는 그런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혐오스러운 기분이야 말로 자신과 똑 같은 자가 눈앞에 있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자신이 가짜이 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헛것이라는 것이 증명될까 두려운 기분. 그래 서 반드시 상대를 죽여 없애고 싶은 기분. 바로 혈존의 기운에서 일어나 는 영혼의 동질성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내가 누구냐고? 요혈존. 네 눈은 어둠을 뚫고 사물을 볼 수 있지 않느 냐? 내가 누구인지 봐라. 그리고 과연 누가 진짜인지 말하라." 백이충이 냉랭하게 요혈존에게 소리쳤다. 스스로는 이미 혈존 백가량의 그림자를 벗고 완벽한 백이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혈존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십혈존을 만날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를 느끼는 것이다. "헉. 그럴 리가 없어. 너는... 너는 죽었다. 내 전신은 죽었어." 어둠 속에서 백이충을 쳐다본 요혈존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려버 렸다. 귀혈존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미 죽어 사라졌기에 자신이 분신 의 몸을 통해 환생했다고 생각했거늘 죽었다고 생각한 본신이 멀쩡히 살 아 눈앞에 존재한다면... 처음 느끼는 생각은 이런 것이리라. "네가... 네가 진짜 본체라면 그럼 나는 누구냐? 어째서 나는 혈존 백가 량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지?" 십혈존이 서로를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당혹감이 요혈존의 마음을 휩쓸었다.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만이 남아 자신이 진짜 혈존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백이충의 존재는 그 모든 것을 통째로 부정하는 증거였다. 바로 그들이 혈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 "아니야. 내가 바로 혈존 백가량이다. 너는 허깨비에 불과해. 과거의 허 상이야. 네놈을 소멸시키겠다." 두려움에 떨며 발악하던 요혈존의 눈에 광폭한 살기가 뻗어나왔다. 요혈 존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증거를 부정하고 싶 었다. 그래서 백이충에게 덤벼들었다. "가엾은 것.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숨막힐 듯한 요기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백이충은 보았 다. 요기가 뭉쳐 움직이는 요괴들의 행진을. 거대한 하얀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 백이충을 덮쳐온다. 백이충이 냉소한 다. 그는 그것이 진짜 독수리가 아님을 안다. 요기가 뭉쳐 움직이는 요 괴의 모습에 불과하다. "비천낭자. 감히 덤벼들 생각이냐?" 백이충의 호통 한마디에 흰독수리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요기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호랑이와 늑대가 달려든다. 크기가 집채 만한 놈들이었다. 요기가 아니더라도 그냥 호랑이로 생각하기에는 무리 가 있었다. 물소가 달려든다. 대지를 뒤엎을 정도의 지진을 일으키며 거 대한 물소가 뿔을 치켜들어 위협한다. "청랑왕. 황호대왕. 우두마왕. 눈앞의 내가 누구인지 기억도 안난다는 것이냐? 네놈들이 굴복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나?" 백이충이 또다시 호통쳤다. 거대한 늑대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호랑이 가 두려움에 꽁지를 감추고 거대한 물소가 바닥에 뒹굴었다. 단 한마디 의 위력이었다. 대왕급 요괴들이 저마다 벌벌 떨고 있었다. "원대왕. 지주낭랑. 은사여왕. 너희들이 서려있는 곳에서 나와 내 앞에 굴복하라." 백이충의 호통에 다시 원숭이와 거대한 거미, 그리고 뱀이 모습을 드러 내었다. 그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백이충의 눈앞에 남은 것은 눈이 뽑히고 팔다리가 없는 시체하나였다. "요혈존. 참으로 가엾은 것. 이미 네 영혼은 사라졌고 칠괴의 영혼이 합 쳐 한 사람의 영혼을 대신했다. 혈존의 영혼의 파편이 합혀졌다고 해 도... 요괴들과 맹약을 맺은 내가 그 맹약을 파괴하면 칠괴의 영혼은 갈 라지는 것. 혈존의 영혼 파편 또한 더 이상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이 당연하지 않은가?" 백이충이 한숨을 쉬었다. 요혈존에 들어간 혈존의 영혼 파편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 왜냐하면 요혈존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몸에는 오래전에 흩어져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일곱가지 요기가 뭉쳐 영혼인체 하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혼 인체 하는 것에 달라붙은 백 (魄)은 바로 마진걸의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간인체 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인간도 요괴도 아닌 것에 다시 혈존의 영혼이 남긴 백(魄)이 달라붙었 다. 그리고 달라붙은 백의 영향으로 혈존 행세를 했지만 사실 그 몸에 는 이미 혼이 없었다. 백이충이 그들을 불러내는 순간 요혈존의 영혼인 체 하던 것은 달아붙어있던 백(魄)을 떨치고 일곱 요괴의 제모습을 찾 은 것이다. 백이충은 기가 죽어있는 일곱 요괴를 바라보다가 명을 내렸다. "너희들의 몸을 돌려주겠다. 또한 자유를 주겠다. 너희의 고향으로 돌아 가라. 단 이후에 인간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돌거나 함부로 사람을 해친 다면 반드시 다시 찾아 소멸시켜 주겠다." 백이충이 손짓하자 일곱 요괴는 저마다 머리를 숙이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로서도 더 이상 저 무서운 인간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온 몸에 요기를 내뿜고 있을 때에도 무서운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요괴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신선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칠괴가 사라지자 백이충도 천천히 칠괴가 모습을 감춘 곳을 향해 걸음 을 옮겼다. 지하라지만 빠져나갈 곳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출구가 있다 면 칠괴는 그곳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백이충은 칠괴가 사라진 곳을 통해 이 장소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백이충의 모습이 사라졌 다. 잠시후, "크크크. 이거야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벌써 세 번째 영혼의 파편을 수 거하게 되다니." 익숙한 음성과 함께 광혈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놀랍게도 그는 백이충 의 이목마저 피하고 있었다. 혈존의 기운이야 애초부터 숨기고 있었지 만 백이충이 자연지경을 넘어서 광한신공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도 그 의 이목을 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적어도 백이충의 광한신공 에 비해 많이 뒤지지 않는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크크크. 칠괴의 능력을 놓친 것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본좌가 잃어버린 영혼의 일부. 이제 요혈존의 시체를 이이용 하여 십중 넷의 파편을 얻었다." 광혈존의 손이 죽은 마진걸의 몸에 닿았다. 칠괴가 사라졌으므로 그 몸 에 가득했던 요기와 능력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혈존의 파편이 남기고 간 백은 아직 그 몸에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광혈존 은 그것을 빨아들였다. 흡수했다. "크크크. 요혈존을 흡수하기 위해 잠시 그를 놔두겠다. 설마 그 잠시 사 이에 광한신공의 경지를 높이지는 않겠지." 제 목:[연재]혈존무적-백도지존 관련자료:없음 [20390]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2 08:20 조회:647 <백도지존>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백리설을 따라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이곳은 기 관장치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무저갱이었 는데 백혈존이 이를 이용하여 함정을 꾸민 모양이었다. 칠괴는 사라졌지만 바람을 따라 가니 길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다. 백이 충은 자신이 점차 위로 올라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햇빛을 볼 수가 있었다. 승룡곡 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상으로 올라 온 것이다. "어라? 여기는 어디야?" 백이충이 나온 것은 반쯤 썩어 있는 죽은 거목의 속이었다. 지하의 갈라 진 틈새 입구가 텅빈 고목의 안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교묘 한 자연의 안배였다. 그리고 백이충은 나오자마자 입을 딱 벌일 수 밖 에 없었다. "건곤무적장?"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사방에 철로 된 인형들이 늘어서 있는 것 만은 사실이었다. 가지 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열 두 개의 철인형 들. 그 동작을 연결해보면 백이충에게 익숙한 하나의 장법이 나온다. 바 로 천하제일가의 건곤무적장. 여기가 어디이기에 건곤무적장의 장법을 표현하는 철인형이 있는지 신기 해하며 백이충이 가까이 가자 기기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이충이 흠 짓 놀랐을 때 철인형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위치만 바 꾸는 것이 아니라 손을 휘둘러 백이충에게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거... 무적장왕보다 더하군." 백이충은 뒤통수에 삐질 땀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건곤무적장이었다. 내공이 없는 철인형이기에 장력이나 수강을 내뿜지 못할뿐 그 동작은 완전한 무적장왕의 건곤무적장이었다. 순간적으로 백 이충은 자신이 열두명의 무적장왕에게 포위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날카 로운 장력도 위험도 없었지만 백이충은 열 두 개의 철인형이 펼치는 건 곤무적장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그것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기긱. 마침내 마지막까지 철인형이 움직이자 백이충은 온 몸에 경련을 일으켰 다. 건곤무적장이 이토록 무서운 것은 처음 알았다. 단순한 동작의 연속 으로 백이충 앞에 공격을 보여주었을 뿐이었기에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 의 초식을 완벽히 발휘할 수 있는 열 두명이 내공을 뿜어 똑같이 공격한 다면 백이충도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건곤무적장이되 건곤무적장이 아니다. 이건... 새로운 건곤무적장이 다. 청마산에서 무적장왕이 끝까지 펼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스스로도 완성하지 못한 절학임이 틀림없다." 열두개의 철인형이 동작을 멈추자 그 앞에 하나의 석비가 솟아올랐다. <금지인 삼성곡에 든 자는 필시 백도의 정통을 잇는 후계자이리라. 여기 에 본가의 절학을 뛰어넘는 절학을 남긴다. 노부는 무적장왕이라 하며 천무삼성의 하나이다. 우리는 서로의 무학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고 그것을 기본으로 새로운 절학을 만들기로 했다. 어느날 노부는 영감을 얻어 하나의 절학을 구상해 내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지는 노부도 알수 없다. 노부조차 도저히 익히지 못하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것을 보고싶은 마음에 열두개의 움직이는 철인형을 만들었다. 삼성 곡에 들어오는 자여.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열두개의 철인형을 이용하여 노부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할 것이다. 만약 완성하지 못한다면 후인이 노부가 창안한 이 새로운 장법을 완성해주리를 바란다. 무적장왕이 > "역시 무적장왕이 남긴 것이었나? 십대절학을 뛰어넘는 절학을 연구한다 는 소문이 있더니... 무적장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열배는 뛰어난 사람이었군." 백이충은 한숨을 쉬었다. 무적장왕의 구상은 좋았다. 그러나 열두명이 하나의 동작씩 따로 취한다면 몰라도 저 새로운 건곤무적장은 단 혼자 서 펼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진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무공은 되 지 못했다. 백이충은 단숨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 발상은 너무 뛰어난 것이다. 중단전을 이용하는 무공조차 도달하지 못한 무적장왕이 상단전을 이용하는 무공을 만들어내다니. 허나 이것은 무공이라 할 수 없다. 혼자서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뭔가가 빠져있다. 이 열두 동작을 연결해주는 연환결(連環訣)이..." 백이충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미완성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만일 완성될 수만 있다면 아수라독존마공이나 광한신공에 버금가는 무공 이 될 수 있으리라. 무적장왕은 개념만 잡아놓고 철인형으로 그 뜻만을 표시한 체 더 이상 이 새로운 장법을 연구하지 못하고 청마산에서 목숨 을 잃고만 것이다. 백이충이 아쉬운 미소를 남기며 철인형들이 있는 곳을 떠났다. 미련이 남지만 이 철인형의 무예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한번 완성에 도전해보 고 싶지만 백도 천무삼성의 절기를 훔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무적 장왕은 바로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삼성곡이라 했으니 승룡곡은 아닌가? 아니면 승룡곡근처에 천무삼성이 은거하던 곳인가?" 백이충이 조금 나아가다가 흠짓 놀랐다. 거기에도 백이충을 놀라게할 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마진걸의 분신으로 죽였던 현무도선이었 다. 죽은 현무도선의 목상이 길 한가운 데에 있었다. "내가 혈존에 빠지지 않았다면... 무당파의 조사이니 아버님 사문의 조 사. 따지고보면 나에게도 태사조가 되시는 분이다." 백이충은 자신의 잘못을 절감하며 공손히 목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새삼스럽게 현무도선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현무도선의 목상 앞에 절 을 하자 그의 머리 앞에 툭하고 두루마리 하나가 떨어졌다. <노도는 현무도선이라 한다. 삼성곡에 들었다면 필시 백도의 후예일 것 이고 노도의 목상에 절을 한다면 또한 도가의 제자일 가능성이 많다. 백 도의 후계자를 위해 우리의 심득을 남기기로 했지만 노도는 도가의 제자 가 아니면 이 두루마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친우들과 토론하여 어느날 불현 듯 떠오른 명상을 적다보니 도 가의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는 무공을 만들어 냈기 때 문이다. 백도의 후계자에게 모든 것을 넘기자는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 지만 지금 남기는 구결은 도가의 제자가 아니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자가 도사가 아니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태극일원공 외에 무슨 구결이 따로 있기에 이토록 큰소리를 치는 가 싶어 백이충이 두루마리의 구결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백이충은 자기 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이... 이럴수가. 이것은 옥령진인이 광한신공의 구결을 풀어 설명했던 것과 거의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설마 현무도선도 등선하기 직전의 경지 까지 도달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단계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던 것인 가?" 백이충은 새삼스럽게 천무삼성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적어도 천무삼성 은 혈존에 못지않은 천재였다. "허나 이것 역시 미완성에 불과하다. 옥령진인의 깨달음보다 못한 것이 많은 설명이 부족하군. 일단 그 경지도 광한신공에 비해 떨어지지만 현 무도선이 지금 남긴 구결은 자연지경에 오르지 않은 자는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십대절학을 익혀도 자연지경에 도달하지 못하거늘 누가 이것을 익힐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자연지경에 이르러도 도가의 공 부가 깊거나 나처럼 꿈을 통해 익히는 것이 아니라면... 천하의 그 누 가 이런 오묘한 구결을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도가의 공부를 너무 자세하 게 설명했기에 무공으로 사용하고자 하면 손색이 가는 부분이 많으나 단 순히 도가공부를 깊이 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대단한 보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도를 터윽하는 기분으로 이 구결을 외우 다보면 언젠가 자연지경을 뛰어넘어 이 구결을 터득하는 사람이 있을지 도... "나는 이 구결을 터득할 수 있으나 오히려 옥령진인이 남긴 더 뛰어난 구결이 있다. 이것 역시 나에게 무용지물이구나." 백이충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현무도선의 목상의 발치에 내려놓고 다 시 발걸음을 옮겼다. 무적장왕과 현무도선의 유물을 봤으니 이제 남은 것은 혜경성승의 것이었다. 그러나 혜경성승은 아직 살아있으니 과연 무 엇을 남겨놓기는 한 것인지 궁금했다. 목상을 넘어 나아가니 얼마 후에 거대한 돌부처를 볼 수 있었다. 무려 크기가 오장을 넘는 엄청난 돌부처. 아마도 바위를 쪼개 부처를 조각한 사람은 혜경성승이리라. "으으. 저것은..." 백이충은 부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환한 빛 에 놀라버렸다. 불상의 이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백이충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파사(破邪)의 기운. 바로 모든 악을 물리친다는 부처의 기운이다." 백이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그만 움직임조차 할 수 없고 몸을 떨 수도 없었다. 그의 몸이 굳어갔다. "으으... 나는 백이충이다. 또한 광한선인의 후예이다. 마를 물리치는 부처의 기운에 제압당할 필요는 없다." 백이충은 억지로 두려움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자신은 정당한 의인이 요, 새로운 인간이라 생각했다. 혈존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광 한선인의 유지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조금씩 굳어지 는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빛은 무엇이었을까? 정작 몸을 움직일 수 있게된 이후에 본 바위불상 에는 빛을 낼 만하나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백이충은 자신이 겪은 일이 신기하여 부처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리고 거대한 돌부처에 가려진 한 노승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혜경성승? 으음. 입적하셨구나." 살해당한 것인지 스스로 윤회를 택한 것인지 혜경성승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다만 그의 앞에는 역시 하나의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대 충 열어보니 안에는 또하나의 옥함이 있고 한권의 불경과 하나의 서찰 이 있었다. <삼성곡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 노승은 혜경이라 하며 하나의 무공을 남긴다. 그대는 백도의 후예가 틀림없다. 내가 조각한 바위 부처님의 이 마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박혀져 있고 그 기운은 악한 자는 절대 견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승이 이렇게 한 것은 남긴 무공을 얻는 자 는 악인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허. 대단한 자부심이군. 어떤 무공이기예?" <단 노승의 무공을 얻으려면 먼저 부처에게 삼천배를 하고 같이 남긴 금 강경을 오천번 암송하라. 그리고난 이후에 노승의 무공이 담긴 오감을 열라. 그리하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얻으리 라. 혜경성승> "삼천배? 오천번 불경을 독경(讀經)하라?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 백이충은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가 무한한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무공 이기에 혜경성승이 이토록 큰 소리를 친단 말인가? (옥령진인이 말한 방향에 승룡곡이 있다. 그리고 옥령진인은 이런 말도 남겼지. 도가뿐만 아니라 불가나 속가의 인연 또한 나에게 닿아 있다 고. 무적장왕의 절기는 속가의 것으로 뛰어나지만 미완성의 것이고. 현 무도선의 절기는 대단하지만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 그렇다면 옥령진 인이 말한 인연이란 혜경성승이 남긴 무공을 말하는 것일까?) 백이충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옥함에 가 닿았다. 그러나 옥함을 열지는 못했다. "제길. 백도에 진 빛을 갚기도 전에 남의 무학을 훔쳐도 되는 것인가? 그저 단순히 한번 보고 다시 남긴다고 쳐도... 흐음." 백이충의 얼굴에 갈등이 일었다. 무학을 자신이 보는 것도 그렇지만 삼 천배와 오천번의 독경이라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자기에게 남아있는 것 은 아니었다. 그저 옥함만을 열고 대충이라도 한번 흝어보고 싶은 욕심 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쳇. 하면 될 거 아냐?" 백이충은 혀를 차며 옥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돌부처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천번을 다 했을 때에는 어느덧 하루가 다 간 이후였다. 안하면 모를까 하는 김에 정성을 다해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절을 했다. 그 경외심의 내면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통해 보았던 광명의 위력에 대한 존경심도 포 함되어 있었다. 무공으로 단련되었지만 익숙치 않은 행동을 했기에 허리 가 끊어질 듯 아팠다. "다음은 오천번 읽으면 되지. 이건 뭐야? 금강대장경?" 백이충은 즉시 자리를 잡고 앉아 불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과거 대과에 급제한 학자이다. 책을 읽은 것은 익숙했다. 속독을 할 수도 있 으나 이왕이면 불가에 대해 이해를 하자는 식으로 정독을 했다. "흐흠. 그렇구나. 번뇌를 벗으면 해탈을 얻는다라?" 어느덧 왜 금강대장경을 읽는지도 잊어버렸다. 어떤 때는 무릎을 치기 도 하고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금강대장경은 아주 어려운 불경이었다. 그러나 도와 도는 통한다고 할까? 대과에 급제할 정도로 책 을 많이 읽었고 도가의 공부도 광한신공과 옥령진인을 통해 경지예 다다 른 백이충이다. 한자씩 풀어나가다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단지 음(音)만을 읽고 건너 뛰었으나 백번이 넘어가 고 천번 째 읽기 시작하자 나름대로의 뜻의 정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헛. 불가의 도리라는 것이 도가보다 오히려 깊다고 할 수가 있네. 그런 데 도사는 도를 얻으면 신선이 되는데 중은... 음. 스님도 부처가 되는 건가? 해탈이 곧 윤회를 벗어나 활불이 되는 것인가?" "아니군.아니야. 그런 집착조차 세속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집착이야.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조차 집착이야. 마음의 짐을 벗어 해 탈하면 모든 것을 초월하거늘 부처면 어떻고 거지면 어떤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백이충의 얼굴에 자비심 가득한 미소가 풍겨 나왔 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점차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처음 백 이충이 돌부처를 보고 느꼈던 그 광명의 빛이었다. 하지만 백이충은 스 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천번이 넘어가고 다시 구백번이 넘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마치 한글 자 한글자가 보석이라도 되는 듯 음미하며 불경을 읽고 있었다. 백이충 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염화시중의 미소였다. 사천구백구십구번을 읽었을 때 백이충은 금강대장경을 덮었다. "모든 것이 집착이야. 불가의 깨달음은 충분하다. 내게는 금강대장경이 야말로 진정한 비급이었다. 처음부터 무공에만 집착했으면 어이하여 이 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제 내게 혜경성승의 무공은 필요없 다. 그러하니 또한 오천번을 읽어 혜경성승의 무공을 이어야 하는 의무 를 이를 필요도 없다." 백이충은 상자에 다시 옥함과 서찰과 불경을 집어 넣었다. 그는 공손히 혜경성승의 시체와 바위부처에게 절을 한 이후에 떠나기 시작했다. 이 미 이곳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금강대장경이야말로 옥령진인이 말 한 백이충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혜경성승의 시신을 넘으니 비로소 계곡의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 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승룡곡에서 보았던 혈광을 뿌리는 자들 이 아니었다. 맑은 눈빛을 뿌리는 자였다. 그 중의 몇은 백이충의 눈에 익숙하기도 했다. 청마산에서 혜경성승과 함께 나타났던 제자들이었다. "백도지존을 뵈옵니다." "승룡곡 천무호정 일백위가 백도지존을 뵈옵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백이충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 고 백이충은 당황해했다. "무슨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저는 단지 길을 잃고 저기에 들어갔던 것 뿐으로..." 천무삼성이 남긴 일백의 제자들 중에 한명의 스님이 나와 말을 했다. 소 림 장문인인 불학대사의 사숙뻘 되는 도경대사이다. "아미타불. 삼성곡에서 철인형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부처의 후광 이 솟구쳤으며 지존의 몸에 도기(道氣)가 어려있습니다. 설사 부정하신 다고 해도 지존은 천무삼성께서 안배해놓으신 백도지존입니다."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백이충이 되물었다. "백도지존이 그렇게 간단한 자리입니까? 제가 누구인줄 알고 그런 자리 를 주시려 합니까? 그리고 백도의 모든 문파가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여 러분이 마음대로 백도지존을 논하실 수 있습니까?" "아미타불. 저희는 백도 일백문파의 대표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존 께서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승룡곡의 뇌옥에 마침 백도의 주인들이 모 두 모여 있으니 그들의 승낙을 받아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지존의 신분이 라면..." 도경대사는 미소를 지었다. "천외구기의 진전을 얻었고 서문장군부의 이공자이신 백이충 공자가 아 닙니까?" 도경대사의 말은 그가 백리설에게 밝혔던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백리설 이 그들과 통하고 있단 말인가? "아미타불. 백도는 그렇게 허약하지 않습니다. 일순간에 제압당할 정도 는 아니지요. 혜경성승께서는 해를 당하시어 삼성곡에 피신하시면서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저갱에 빠진 자들 중에 삼성곡으로 나오는 자 가 있을 것이다. 그가 천무삼성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백도지존이 될 것 이라고. 그를 천무삼성 그분들 대하듯 받들면 천하가 구원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맙소사. 이게 그럼 모두 혜경성승의 음모란 말인가? 그 늙은 중도 천기 를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백이충이 어이없어 하는 와중에 도경대사가 허리를 숙였다.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백도는 그동안 놀고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일 백위가 있고 뇌옥에서 승룡곡에서 겪지 못한 무공을 열심히 수련하는 제 자들이 있습니다. 지존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인질로 잡혀있는 원로와 맹 주를 구해낼 것이고 대기하고 있는 오백 탕마승이 항마경(降魔經)을 외 어 미혹에 빠진 제자들을 제압할 것입니다." (승룡곡은 백혈존에게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제압당한 척 했던 것인가?) "백도은 이십년의 평화 끝에 너무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혈천마련에 대한 패배였습니다. 게다가 청마산에 다녀오신 이후 천하의 급격한 변화에 성승께서는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백도가 뼈를 깍아 환골 탈퇘하지 않으면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판단을 하시고는 백도의 고난 을 감수하고자 백혈존이 등장하였을 때 모든 것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하면 처음 본 나를 어떻게 쉽게 믿고 지존으로 받드는 것입니까?" "저희는 백공자에 대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금 등장하는 혈존들처럼 백공자도 한때 혈존의 영혼에 잠식되었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천기노인 께서 백공자가 부활하는 즉시 백공자에 대한 정보를 성승에게 보내셨습 니다. 천기노인이 백공자가 천하를 구할 천황성이라 밝히자 혜경성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천기노인이 읽은 하늘의 뜻이 맞다면 우리들의 진전 역시 백씨 아이 가 얻을 것이다. 너희들은 삼성곡의 입구를 지키고 아무도 들어서게 하 지마라. 진정 인연이 있다면 하늘이 그를 삼성곡으로 인도할 것이다. 너 희들이 입구를 막고 있는 한 무저갱에라도 빠지지 않는 한 삼성곡에 들 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가 삼성곡에 들려 우리의 진전을 얻어 나온 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돕는 자이고 천하를 구원할 자이다. 그 때에는 그 를 백도지존으로 삼고 우리 천무삼성을 대하듯 하라. 하늘이 진정 그런 길을 마련한다면 그 길을 걷는 자야말로 백도의 후계자인 셈이다. - "혈존이 천무삼성 중의 무적장왕과 현무도선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제 내력을 아시면서도 저를 백도지존으로 인정하겠단 말씀입니까?" "죄는 혈존에 있지, 지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혈존의 사술대 법의 그늘에서 벗어나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술대법의 폐해로 지금 여기 저기에서 혈존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때 혈존에게 당하셨던 지 존이기에 하늘이 천하를 구할 천황성으로 지적했는지 모릅니다." "무적장왕의 철인형이 보여준 절기와 현무도선께서 적으신 심득은 확실 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혜경성승의 무공은 제가 잇지를 않았습니다." "아미타불. 그 옥함은 빈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시험. 불가의 뜻은 불경으로 충분한 것. 이미 성승의 심득은 지존에게 전해졌고 그 증 거로 지존의 몸에 부처님의 후광이 맴돌고 있습니다. 도가의 기운과 불 가의 후광을 동시에 지니신 분은 저도 처음 봅니다." 백이충은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음을 느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백도 를 손에 넣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문이 있는 백도이다. 그 리고 자신이 혈존으로 있으면서 많은 죄를 지은 백도이다. 백도지존이 되면 자신에게 권력이 생겨 좋고 또한 죄를 갚을 수도 있어서 좋을 것이 다. 비록 어머니 때문에 군부에 몸을 담았지만 아버지의 뜻 또한 무림 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서문씨 대신에 백가의 성 을 내려주실 리가 없었다. 갇혀있던 뇌옥의 승룡곡 제자들이 일제히 풀려나왔다. 그들은 천무호정 일백위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승룡곡을 포위했다. 만성독약 때문 에 갇혀 인질로 잡혀있다고 알려진 무성 종리연이 뇌옥을 부수고 뛰쳐나 왔다. 그의 뒤를 불학대사, 광천도장 등 무림의 원로들이 따랐다. 혜경 성승이 천하 각지에서 모은 오백 탕마승이 일제히 항마경을 외웠고 마 공 때문에 심성이 변한 백도의 제자들은 일제히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 워했다. "우우. 백혈존의 명을 따르는 마두가 백도인을 가장하여 들어와 백도의 성지인 승룡곡을 더럽혔다. 그들을 찾아내 단죄하라." "백도의 제자들 중에 마공을 익히지도 않고 백혈존을 따르며 백도를 배 반한 자들이 있다. 백도의 배신자들을 처단하라."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게 천라지망을 펼쳐라. 백도를 모욕한 자들은 오 늘 살아돌아가지 못한다." "오늘 백도의 썩은 고름을 뽑아내는 날이다. 오늘 백도의 썩은 살을 도 려내기 위해 그동안 힘들게 참고 견뎌왔다." 승룡곡의 진정한 고수가 나타나 저마다 소리치며 진짜 악인들을 골라내 어 죽이고 제압하였다. 인질 신세였던 백도맹주와 세가의 가주들, 그리 고 원로들이 대단한 활약을 했고 마공에 심성이 흐려진 자들은 항마경 에 맥을 못추었다. 백혈존이 백도맹과 승룡곡을 장악하고 적수인 요혈존을 쓰러트리기까지 는 무척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모든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단 한시 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백도의 준비가 철저했다는 소리이다. "우우우. 감히 본좌를 거역하다니.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백혈존을 거역 하다니." 백혈존 모용풍이 승룡곡의 어느 한 곳에 있다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노여움이 절절하게 들어있었 다. 그리고 그의 등뒤로는 모용풍에게 진심으로 굴복한 일백의 부하들 이 따랐다. "백혈존. 오라." 승룡곡이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에서 백이충이 백혈존에게 천리전음을 보 냈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승룡곡이 정리된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의 의무는 백혈존을 처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으음. 네놈이구나. 그때 무저갱에 빠졌던 가짜 놈이 죽지 않았구나. 모 두가 네탓이로구나."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모용풍이 하늘을 날라 단숨에 수십장을 뛰어넘 어 백이충에게 다가왔다. 백이충이 얼굴을 가렸기에 그는 백이충을 알아 보지 못했다. 백이충을 알아보고 괜히 본체이니, 원본이니 하는 말이 나 올까봐 아예 얼굴을 가려본 것이다. "으하하하. 어떤 가짜 놈인지 모르겠지만 본좌야말로 진짜 백혈존 백가 량이다. 그 증거가 바로 쌍영마공이다." 백혈존의 온 몸이 붉은 빛과 푸른 빛으로 둘러싸였다. 바로 혈존의 독문 무공으로 알려진 혈영마공과 청영마공. 두가지 마공을 한꺼번에 운기할 수 있는 능력은 과거 백이충이 마화타를 통해 준 것이다. 거기에 아수라 독존마공의 일부 능력이 스며들었을테니 자신을 가질만 했다. "보라. 본좌의 쌍영마공을.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혈존으로서의 증거." 주위 십여장이 홍색과 청색으로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청영마기와 혈영 마기가 백혈존의 몸 안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마구 밖으로까 지 뿜어져 나왔다. 그 위세는 가히 만인을 압도하는 힘.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미증유의 힘이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을 복구하지는 못했지만... 으하하하. 그것도 이제 금방 이다. 쌍영마공을 합일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니." 백이충을 혈존의 하나로 생각하고 겁을 주려는 듯, 혹은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려는 듯 백혈존은 자신의 무공을 계속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보다 는 자신이 진짜 혈존임을 같은 영혼의 다른 자에게 증명받고 싶어 한다 고 할까? 청영마공과 혈영마공이 합일되고 있었다. 바로 혈지존이 펼친바 있는 쌍 영합일마공. "이제 그만 죽어라." 그의 완손에서 청광이, 오른 손에서 혈광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하나 로 뭉쳐 거대한 힘을 발휘했고 산을 허물어트릴 정도의 엄청난 강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도 백이충은 웃고만 있었다. "가엾은 자. 그러나 한때 내가 죄를 지었던 자." 백이충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혜경성승이 만들었던 바위불상의 것 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태산을 짖눌러버릴 것같은 쌍영합일 마공의 위세도 백이충의 웃음을 흐트러트리지 못했다. "쌍영마공을 합일 시킨 것은 대단하나 때를 잘못 선택했다. 이미 광한신 공의 성취가 반을 넘었으니..." 백이충이 손을 휘둘렀다. 허공에 움직이는 손의 궤도에 따라 거대한 강 기가 한여름의 고드름처럼 녹아버렸다. 마치 거짓말 같은 상황. 혈존 이 천하를 제패했던 쌍영마공이 손짓 한번에 무너지다니. "쌍영마공을 합일했다면 자연지경보다도 위. 황궁무고에 들어가기 전이 었다면 내가 졌을테고, 무저갱에 떨어져 삼성곡을 들리기 전이었다면 승 부를 가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 다." 가장 믿고있던 절대의 마공이 허무하게 스러지는 모습을 보며 백혈존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거... 거짓말. 천무삼성따위 셋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쌍영합일마공 의 일장도 막지 못한다. 그런 허약한 자들의 절기를 얻었다고 해서 본 좌 백혈존을 능가했다고?"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백도의 절기는 위대하다. 천무삼성의 절학 하 나하나는 결코 혈존의 것에 뒤지지 않는다." "으으윽. 이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네가 혈존이면서. 내 가 혈존인데. 바로 우리가 혈존인데 어떻게 혈존의 절기가 천무삼성 따 위에게 뒤진다고 말하는 것이지?" 백혈존이 거의 악을 쓰다싶이 했다. 하지만 백이충은 더 이상 그를 상 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십혈존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자가 백혈 존이 아니었을까 백이충은 생각했다. 만약 쌍영마공을 합일하는 능력을 보여준 백혈존보다 더 강한 혈존이 나타난다면 지금의 백이충으로서도 장담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편이다. 금강대장경을 읽고나서 네게 드리운 영 혼의 파편을 제거할 방법을 찾았으니." 백이충의 손이 현묘하게 흔들린다. 그에 따라 백혈존의 신형도 가랑잎처 럼 마구 흔들린다. 백이충이 손을 뻗자 마치 일부러 다가서듯 백혈존의 신형이 쭈욱 딸려들어왔다. 단지 서로의 수준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인 데도 나타나는 위력의 차이는 하늘고 땅이었다. "으으윽. 본좌는 천하무적 혈존이다. 본좌가 패하다니. 으으. 혈존의 이 름을 스스로 부정하기 전에 본좌를 죽여다오." 백이충에게 제압당하자 백혈존은 얼굴에 생기를 잃어갔다. 좌절. 그것 이 그에게 순간적으로 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백이충의 손 이 백혈존의 얼굴을 덮었다. "광한신공은 선술인 동시에 법술이기도 하는 것. 그대를 모용풍으로 돌 려놓겠다. 그대를 위해 슬퍼하는 백리낭자를 위해서." 청아한 기운이 백이충의 손을 타고 흘러 백혈존에게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백혈존의 몸이 부르르 요동을 치더니 한순 간 축 늘어졌다. 정신도 육체도 완벽하게 백이충에게 패해 쓰러진 것이 다. "모용풍. 그대의 몸에 남아있는 혈존의 백(魄)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 그것을 제거하고 또하나 백혈존으로 그대가 행했던 모든 기억을 지워주 겠다. 내가 혈존으로서 했던 죄악을 용서받았듯이 그대 또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백이충의 눈에는 보였다. 모용풍의 몸에 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것이 혈존 백가량의 잔재이며 지금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전에는 하지 못했던 것. 십혈존에게서 혈존의 백을 제거하 여 원상태로 되돌리는 능력을 백이충은 가지게 된 것이다. 백이충이 모용풍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을 보며 몸을 떠는 자가 있었다. 백이충을 그림자 따라가듯 쫓아다니는 광혈존이었다. "저... 저놈이 감히 본좌의 일부 파편을 제거하다니. 저럴 수가." 광혈존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다는 시선으로 백이충을 바라보 았다. 그를 놓친 것은 아주 잠깐, 하루도 안되는 시간이었으나 그동안 광혈존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능력을 백이충이 갖게 된 것이다. "저 놈이 본좌의 일부인 다른 혈존의 파편을 제거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저자를 뒤따라가 보아야 헛일이 아니가?" 광혈존이 백이충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혈존의 영혼을 흡수하여 완전 한 혈존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파편이 백이충에 의해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게다가 어째서 갑자기 능력이 저렇게 강해진 것이냐? 쌍영합일마공을 어린애 다루듯 하다니. 본좌가 사인분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지만 저 놈 을 당해낼 수가 없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영원히 다른 파편을 모아 아수 라독존마공을 복원한다는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광혈존은 백이충을 따라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귀 혈존을 백이충이 죽이는 것을 보고 귀혈존의 힘과 능력, 그리고 영혼의 파편을 흡수하는 재미를 보았다. 그 이후 그 재미에 들려 혈존의 기운 을 감추고 백이충의 주위를 맴돌다 네사람 분의 파편을 모았으나 백이충 은 훨씬 더 강력해진데다 이제는 영혼의 파편마저 소멸시키고 있으니... "저놈보다 본좌가 더 빨리 다른 혈존을 찾아야 한다. 본좌은 충분히 강 해졌다. 저놈만 아니면 그 누구도 본좌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다른 혈 존들을 제압하여 내 안의 혈존을 완성해야 한다. 적어도 셋 정도만 더 흡수하면 저놈이 광한신공이라는 것을 완성하지 않는한 본좌의 승리는 절대적이다." 광혈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당분간 그의 모습은 백이충 주위에서 찾기 힘들게 될 것이다. 제 목:[연재]혈존무적-신비삼패를 얻다 관련자료:없음 [20397]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3 02:35 조회:639 <신비삼패를 얻다> 광천동장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새로운 백도지존이 그를 향해 절 을 하고 사조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지 마시오. 지존께서 이러면 곤란하오." 연신 두 손을 저어 사양하면서도 광천도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 다. 혜경성승이 천하를 구할 인재라며 천무삼성과 동일시하라고 유언을 내렸던 백도지존이 바로 자신의 제자의 아들인 것이다. "비록 구랑이 지존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지존의 정통성은 천무삼성 어 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오. 백도지존의 자리는 백도인들의 가장 윗자리 요. 함부로 노도을 사조라 부르면 배분이 엉망이 되니 이러면 노도가 곤 란해지오." "아버님께서 사조를 만나면 친할아버지를 대하듯 하라고 명하셨는데... 그러시다면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겠습니다." 백이충이 몸을 일으켰다. 과거 천무삼성이 지내던 건물 삼성각에 백이충 이 지금 백도의 원로들을 만나고 있었다. 천무호정 일백위는 백이충의 곁에서 일백보 이상을 떠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이충의 호위를 자청하여 지금도 삼성각 주위를 경비하 고 있다. 그들의 배분이 지금 백이충의 앞에 있는 원로들의 사숙 뻘이므 로 광천도장이 쩔쩔 맨 것이다. 백이충을 만나고 있는 자들은 바로 무성 종리연을 비롯하여 광천도장, 불학대사 등의 구파의 대표, 모용일현, 남궁비 등의 오대세가의 대표, 그리고 그 외에도 백도를 대표하는 여러 문파의 주인들이었다. 무성 종리연은 나이는 어리지만 따지고보면 천무삼성 공동의 제자인 셈 이니 밖의 천무호정 일백위의 사제라고도 할수 있다. 반면 불학대사나 광천도장은 무성과 함께 천무삼성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있으나 배분상 직계 사손 뻘이고 천무호정 일백위 안에 있는 고수들 중에 소림과 무당 에 적을 둔 직계 사숙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광천도장 같 은 경우는 백이충이 제자의 아들인 사손이면서 동시에 사숙들이 받드는 상전이라는 묘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제게 청이 있습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여기있다는 것은 놀라 운 일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혈존에 맥없이 제압당해 반 강제적으로 승룡곡의 뇌옥에 끌려왔다. 얼마나 모용풍이 백혈존 당시에 철저하게 백 도를 장악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혜경성승의 안배로 자유를 찾 을 수 있음에도 남아있기는 했으나 백이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상황이 반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성 종리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직도 종리연은 백도맹의 맹주이다. 그러나 백이충은 백도맹주까지 부릴 수 있는 백도지존의 위치였다. 백도맹주로서 나이어린 청년을 지존으로 받드는 데에 전혀 거리끼는 바 가 없다. 흑도에서는 지존이라는 신분이 모두를 갖는 권력자의 자리이지 만 백도에서는 맹주라는 자리가 천하의 평화를 위해 발로 뛰는 하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맹주도 그런데 하물며 백도지존의 자리야. 혜경성승 이 남긴 백도지존은 책임과 의무는 크지만 백도의 특성상 권리는 거의 없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처음 혜경성승이 유언을 남겼을 때는 약간 불안이 있기는 했다. 천하를 구할 구성이 삼성곡에서 나온다는 예 언이 진짜인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에는 혈존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 의 능력은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인 백혈존의 능력을 보면 알수 있다. 혜경성승이 당해 삼성곡으로 도망갔고 백도맹주인 자 신 종리연이 십초를 넘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후일을 기약하여 기회를 노리기 위해 당하는대로 참은 면도 있지만 불 과 얼마되지 않은 시간에 백혈존은 백도 문파의 주인들을 인질로 삼고 승룡곡과 백도맹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휘어잡았다. 천무호정 일백위의 힘의 힘이 유일한 반격의 기회였지만 그들이 나섰다고 해도 백혈존을 제 압할 수가 없었다면 결과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결국 지금 혈존들이 날뛰는 세상에서 백도의 힘만으로는 절대 천하를 평 안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뇌옥에 있으면서 백도의 거물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백도가 천하를 안정시킬 유일한 희망 은 혜경성승의 예언이 실행되는 것밖에 없었다. "말하시오. 혜경성승께서 우리들에게 철저히 당부하셨기에...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소. 지존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한 백도지존으로 받들기 로. 우리들은 지존의 그 어떤 명이라도 들을 것이오." 무성 종리연은 백이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앞에서 백혈존을 어린애 다루듯 하고 도가의 기운과 불가의 후광을 동시에 발휘하여 모용 풍에게서 혈존의 영혼을 몰아낸 백이충이었다. 종리연는 백혈존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있었다. 그 때문에 백도의 무 공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백이충은 도가와 불 가의 무공으로 백혈존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무성 종리연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백이충이 삼성곡에서 얻었다 고 짐작되는 무공은 오히려 천무삼성의 경지보다 열배 정도 뛰어난 것이 었다. 반신반의하던 혜경성승의 예언이 너무나도 잘 들어맞은데다가 백이충의 무공을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으니 종리연으로서는 백이충을 절대적으 로 놓칠 수가 없었다. 백이충이 거절한다고 해도 모셔다가 지존으로 삼 을 판이다. "모용형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역시 혈존의 영혼에게 제압당했던 피해 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혈존의 영향을 벗어났으니 더 이상 그는 백혈존 이 아닌 모용풍입니다. 백혈존이 아닌 모용형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 그런. 그가 지은 죄가 너무 큽니다. 그는 백도를 하마터면 돌이 킬 수 없을 지경으로 몰아가려고 했습니다." 삼성각 밖에서 무릅을 끓고 있는 모용풍이 보였다. 그는 백이충이 손을 쓴 이후 완전히 모용풍으로 되돌아왔다. 모용풍의 기억은 과거 그가 죽 었다고 알려진 승룡곡의 사건 이전부터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 결 과 백도는 이미 그때부터 모용풍이 백혈존으로 활동한 것이 아닌가 추측 하고 있었다. 종리연도 자신의 첫째 제자가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 만 모용풍의 죄는 너무 컸다. "모용형이 그런 것이 아니라 혈존의 영혼을 뒤집어 썼던 백혈존이 그런 것입니다. 모용형의 죄를 묻는다면 한때 혈존의 영혼에 영향을 받았던 제 죄도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그런?" 종리연은 난감했다. 천무호정 일백위에게 백이충 또한 한때 혈존으로 행 세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천기노인이 오행진인과 옥령선자로부터 백이충 이 절대 혈존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 혜경성승에게 천황성을 발견 했다고 알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도에 백이충의 내력이 대충 알려진 것 이다. 따지고보면 최초의 혈존은 백이충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종리연 이 보기에 백이충과 모용풍은 그 죄의 크기가 틀렸다. 백이충이 혈존으로 움직였을 당시에는 모든 것을 비밀리에 실행했다. 백 도나 무성 종리연은 백이충이라는 존재를 아예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것 은 천무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종리연이 아는 백이충의 유일한 죄, 백이 충이 혈존으로 활동했던 오직 한가지 행위는 청마산에서 천하 무림의 모 든 수뇌들을 맞이하여 경천동지할 혈투를 벌였던 것이 유일했다. 백도 은 그 일이 백이충이 혈존이 되어 최초이자 최후로 활동했던 일로 알고 있었다. 그때 백이충이었던 혈존은 천무삼성 중의 무적장왕을 죽였다. 그리고 몇 명의 승룡곡 제자를 죽였다. 그러나 그는 흑도의 엄청난 거마들, 혈 천마련의 마황들과 심지어 되살아난 칠대천마들까지도 무수이 죽였다. 그 뿐이랴? 변황동맹의 지존들도 무수히 죽였다. 청마산에서 죽은 사람 들의 피해에 반하면 백도의 피해는 거의 미미하다고도 볼수 있는 상태였 다. 게다가 혈존 그 자신도 결국 청마산에서 죽지 않았던가? 따지고보면 청마산의 일로 백도에서 백이충에게 원한을 가질 자는 천하 제일가 모용세가 밖에 없었다. 무적장왕이 죽었으니... 하지만 그때의 혈존은 청마산에서 죽었고 천기노인이 구해온 것은 혈존의 사술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백이충이었다. 그런데 그 백이충이 모용세가의 소가주 모 용풍을 용서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백도의 입장에서 보면 둘의 처지는 다른다. 혈존의 영혼을 뒤집어쓴 백 혈존 모용풍은 청마산에서 혈존으로 활동했던 백이충에 비할 수가 없는 죄를 지었으니... 일단 모용풍의 죄는 현무도선을 죽인 죄가 있다. 물론 현무도선이야 백 이충이 마진걸의 몸에 들어가 살해했다. 하지만 백도의 그 누가 그 비밀 을 알겠는가? 한때 모용풍을 살리고자 현무도선이 비밀리에 일을 꾸몄다 는 소문도 있었다. 스스로 이승의 생을 마감하면서 현무도선이 모든 내 공과 절기를 모용풍에 넘기고 죽었다는 소문. 그 소문으로 모용풍은 승 룡곡 사건의 오해를 풀고 백도의 영웅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모용풍은 백도에 들어 백혈존이 되어 상상도 못할 일을 태연히 저질렀으니... 이제와서는 당연히 처음에 백도가 예상했던 일, 즉 모용 풍이 승룡곡 사건 때 이미 백혈존으로 활동하며 현무도선까지 죽였다는 가설이 거의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백이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 을 그때의 기억을 모용풍의 머리에서 모조리 지워버렸기에 모용풍도 자 신있게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모용풍은 백혈존으로서 혜경성승을 제압했다. 혜경성승이 피를 토 하며 나뒹굴었고 모용풍은 백도의 우상인 혜경성승을 만성독약으로 제압 하고 뇌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혜경성승을 인질로 승룡곡을 제압했다. 승룡곡 제자에게 광인이 되는 마공을 전수했다. 나중에 천무호정 일백위의 도움으로 혜경성승이 뇌옥에서 탈출하여 삼성 곡으로 도망가지만..., 승룡곡 제자들의 일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 놓 지만..., 천무삼성의 권위를 짓밟고 백도의 성지 승룡곡을 흙발로 더럽 힌 그 죄는 백도의 명예를 완전히 더럽힌 꼴이 되어 쉽게 용서하기 힘 든 것이다. 또한 모용풍은 요혈존이라는 자와 함께 백도를 두조각 내었고 백도맹을 좌지우지했다. 무성 종리연을 사로잡고 그를 기화로 백도맹을 자신의 마 음대로 개조했다. 그 바람에 백도맹은 풍지박산 나버렸고 수많은 협객들 이 백도맹에 실망을 하고 흩어져 버렸다. 백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악 인들을 끌어들여 부하로 삼았다. 그는 백도맹의 손에 넣을 것을 기화로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잡고 오대세가의 가주들을 사로잡았다. 각 문파와 세가에 자신의 부하를 심어놓아 문파의 전통을 일시에 허물어트렸다. 젊 은 청년들에게 마공을 가리켜 수하로 삼았으며 자신의 문파에 반역하게 했다. 그야말로 모용풍 하나로 인하여 백도는 엄청난 구렁텅이로 빠져버 린 것이었다. "아무리 본인은 기억도 못하는 상태로 혈존의 영혼의 지배아래 한 짓이 라 해도... 그 죄가 워낙 크니." "만약 모용형에게 죄를 주려면 나에게도 같이 주십시오. 그가 혈존으로 지은 죄는 한때 혈존으로 움직였던 제 죄이기도 합니다." 백이충으로서는 모용풍을 구하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혈존이었을 시절 의 진짜 여러 가지 일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모용풍이 백혈존이 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백이충이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이 있 어 구할 수만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사실 백혈존으로서의 기억, 그리 고 백이충과 연관된 일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운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 서가 아닌가?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일제히 감격에 찬 눈빛으로 백이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죄가 커도 마우나 고우나 모용가의 기둥이다. 하물며 기억도 못 하는 일을 혈존의 영혼 때문에 저지른 상태임에야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이 태산이다. 모용세가 자체에서 나서지를 못할 뿐 그 마음이야 어디 가 랴? 그런데 백이충이 먼저 나서서 저렇듯 모용풍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 니 무적장왕을 죽인 일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있었다. 따지고보면 혈존으 로 있을 때 무적장왕을 죽인 일을 따진다면 후손인 모용풍이 백혈존으로 서 지은 모든 죄도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천하제일가의 가주 모용일현이 감격해서 부르짖었다. "지존. 혜경성승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본가는 백도지존의 명이 면 불길이라도 들어갈 것이오." 백도지존을 받드는 데에 대해 가장 반대가 심했던 모용세가가 앞장서서 백이충에게 허리를 숙였다. 천하제일가의 지지는 소림사의 지지만큼이 나 무게가 있었다. 백리세가도 백리설을 생각하여 역시 처가된 입장으 로 감격하여 백이충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은근히 오대세가가 백이충 을 받들며 모용풍을 용서하자는 분위기를 풍기자 어느덧 구파쪽의 백도 원로들도 모용풍의 죄를 사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다. "앞으로 지존을 평생 제 마음 속의 주군으로 삼겠습니다. 제 생명은 주 군이 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종리연 맹주가 각 원로들과 상의한 끝에 백혈존은 죄값을 치루어 죽고 모용풍은 제정신을 차린 것에 불과하므로 죄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자 모 용풍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백이충의 앞에 무릅을 끓었다. 이것이 향후 백년간 백도제일인으로 칭송받을 무적일황 모용풍이 마음 속의 주군을 세우는 광경이었다. 백이충은 눈을 감고 승룡곡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종리연과 백이충 은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을 앞에 두고 많은 말을 나누 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종리연은 주로 백도의 약해진 힘에 대해 말했고 백이충은 옥룡왕으로 변 한 혈지존의 반역을 이야기했다. 종리연은 백이충이 호황령주라는 사실 을 알고 많이 놀랐다. 또한 혈지존의 일에 대해 알고는 경악했다. 서문 구랑이 백도맹의 힘으로 옥룡왕부를 제압하기 원한다는 말을 듣고 종리 연은 고민에 빠졌다. 백도맹으로서도 단순히 두고볼 일이 아니었다. 황실의 일로 내전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무림인이 연관된 반역이었다. 차후에 황실이 무림을 탄압할 구실을 주게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반역을 막기위해 무림을 감시 하겠다면 무림인들이 어쩌겠는가? 결국 무림도 나라 속에 속해있는 일원 일 뿐이다. 관이 무림을 통제하는 사태를 막기위해서도 백이충과 서문구랑의 의도대 로 백도맹이 개입을 하여야 했다. 혈지존을 막아 반역이 표면으로 드러 나지 않았을 때 무림의 일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러고도 황제의 무림에 대한 분노가 막아질지 의문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황제의 분노가 무림 으로 쏠리지 않도록 서문구랑이나 백이충에게 부탁해야 했다. "현재 백도는 혼란에 빠져있소. 혼란을 수습하고 세력을 회복하지 않고 는..." 문제는 현재의 백도맹 세력으로는 황실 옥룡왕부를 막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백도의 최고의 전력은 승룡곡의 인원들이 백도 십대절학을 다 수 익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들어보니 옥룡왕부의 무사는 일개 호 위무사들 조차 진법으로 그들 절학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실로 두려운 상대였다. "요혈존이 일으켰던 회백회는 상관없소. 어차피 시간이 가면 다시 백도 로 환원될 세력이니까." 요혈존이 백혈존의 정체를 드러내며 만들었던 회백회. 워낙 점조직이라 종리연이나 혜경성승도 요혈존의 움직임을 알고도 회백회의 전모를 파악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가 될 세력은 아니다. 원래 뿌리부터가 백혈존 에 반발해서 생긴 백도세력인데다 점조직이다. 점조직이란 일종의 피라 미드 조직으로 꼭대기가 쓰러지면 그 밑의 조직이 흐지부지 사라지는 단 점이 있다. 그리고 회백회의 정점인 요혈존이 쓰러졌다. 가만 놔둬도 회 백회는 다시 백도 속의 일부분으로 환원될 것이다. 백이충도 종리연도 회백회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상황이 하나 있었다. 요혈존 마진걸의 모든 기억과 능력, 그리 고 혈존으로 물든 영혼을 광혈존이 빨아먹었다는 사실이다. 회백회에 든 인물에게는 요혈존이 자신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금제를 걸어두었고 회백회와 함께 그 금제에 대한 모든 기억이 광혈존에게 전해 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뿐이랴? 광혈존은 독혈존과 금혈존이 빠져나간 직후 마혈존이 포섭했 던 배교의 무리까지 휘하에 포섭했으니... "현재 백도의 문제는 혼란된 문파를 재정비하고 약화된 세력을 보강하 는 것, 그리고 옥룡왕의 일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변황과 흑도의 위협에 서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점이오." "혼란된 문파의 문제를 정비하는 것은 우리 늙은 이들이 맡을 수가 있 소. 그리고 백도맹을 정비하는 것은 맹주가 하면 되오. 그러나 백도의 세력을 보강하는 문제는 환우비령(　宇秘嶺)의 세력을 백도에 수혈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가 있소. 그러기 위해서인데." 여기까지 회상을 마치고 백이충은 눈을 떴다. 그는 백도맹주를 대신하 여 환우비령(　宇秘嶺)의 주인 환우령주(　宇令主)를 가리는 비무대회 의 공증인 자격으로 왔다. 지금 백이충이 있는 곳이 바로 환우오존이 비 밀리에 세력을 키우기위해 백년 넘게 숨겨왔던 환우비령의 장소였다. 환우령주가 되기위한 자격을 가진 자는 환우오존의 후예여야 한다. 여기 모인 네명이 그러하다. 검각의 각주, 무림칠미의 수좌이며 보리무극검의 계승자 검후 매옥선. 신비삼패의 후계자이며 만상건곤심결의 계승자인 봉황공주 남궁봉. 개방의 젊은 장로로 금강칠채강의 계승자 백결개. 그리고 혈존의 영혼에 몸을 빼앗겨 백혈존으로 행세하다가 제정신을 차 린 모용풍이다. 모용풍은 불사건곤심공과 혼돈패왕도의 계승자이다. 혈존의 영혼과 함 께 아수라혼돈마공의 마력은 사라졌지만 본인도 모르는 분신역할을 할 때 백이충이 남겨준 불사건곤심공과 혼돈패왕도의 능력은 고스란이 남아 있다. 그나마 모용풍이 자격을 잃지 않은 것은 승룡곡에서 화산파 장문 인 주미도인과 하북팽가의 가주 패왕도 팽무악이 모용풍을 인정했기 때 문이다. "후후. 처음 모용풍이 나타났을 때 놀라던 표정은..." 백이충도 환우령주가 되기위해 나타났던 자들, 대부분이 회백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백이충과 함께 나타난 모용풍을 보고 놀라고 경계했다. 모용풍과 친형제처럼 지내던 남궁홍일이나 종리비도 놀랐다. 허나 패왕도 팽무악이 보증하고 백도맹에 무성 종리연이 돌아갔 다는 설명을 하여 오해를 풀었다. 그동안 혈존의 망령을 뒤집어 쓰고 백 혈존이 되었었다는 말에 모두들 놀라고 모용풍이 그 겁난을 벗어난 것 을 기뻐했다. 마지막으로 처음보는 백이충이라는 젊은 청년이 백도지존 이 되었다는 말에 놀랐다. 백도맹주도 명을 받들어야 하는 백도지존. 하지만 모용풍의 말을 믿지 않기에는 그의 주위를 호위하고 있는 천무호정 일백위의 무위가 너무 뛰 어났다. 허연 백발을 날리는 일백위의 상위 몇 명은 그들 환우오존의 후 계자만큼이나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백도 십대절학이라... 강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비무를 보며 백이충은 혀를 찼다. 이미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 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육체의 한계는 바로 하단전을 어 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이다. 하단전은 바로 인간의 육체에 있다. 천지자 연의 기를 인간의 육체에 부여하는 단계인 것이다. 흔히 인간의 몸에 진 기를 모으는 혈도를 가리켜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편법일뿐,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단전이란 기가 모이는 장소이고 인간의 기가 가장 모이기 쉬운 곳은 아 랫배 바로 밑이다. 하지만 그곳만을 단전이라 확정지을 수는 없다. 세맥 에도 진기를 퍼트릴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혈도에 진기를 모을 수도 있 다. 아랫배의 단전 이외의 혈도에 진기를 모으는 것은 어느 곳에 기를 모으든 결국 기를 모으는 가장 밑의 단계, 육체를 이용한 하단전의 단계 였다. 인간의 육체에 기를 가두는 경지는 모두 하단전의 기를 이용하는 단계였다. 지금 봉황공주, 백결개, 매옥선 등은 하단전의 포화상태까지 무공을 연마했다.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극의 단계에 올랐다는 셈 이다. 하지만 이미 모용풍은 중단전을 사용하는 단계에 와있다. 즉 인간의 한 계를 초월한 상태인 것이다. 중단전이란 자연의 기운을 마음으로 다루 는 단계이다. 마음에 기를 끌어모으는 단전을 두는 단계인 것이다. 모용 풍의 자아를 되찾으며 쌍영마공이나 쌍영합일마공 또한 까맣게 잊었지 만 몸이 그 경지를 기억하고 있어 중단전 초입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백이충이 상단전 경지의 아수라독존마공을 몸으로 기억하여 중단전 경지 의 자연지경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중단전을 사용하는 단계는 이른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이나 우주 와 조화되고 일치되는 단계이다. 이른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단계이 고 심검(心劍) 혹은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인 것이다. 이때부터는 진기나 신체의 힘을 빌리지 않고 뜻과 의지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 경지에 오른 자는 아마도 칠대천마 중의 살아남은 천마(天魔)와 만사 지존(萬邪至尊), 혈지존(血至尊), 천축의 법존(法尊), 그리고 혈존을 자 처하는 십혈존 중의 살아남은 자들 정도일 것이다. 천마황이나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 정도면 중단전 초입 상태일까나? 자연지경은 중단전의 최 상위 단계이다. 백혈존도 쌍영마공을 합일하며 비슷한 단계에 올라있었 다. 그리고 백이충은 황궁무고와 삼성곡의 기연을 얻으며 상단전 초입의 단 계에 올라있다. 상단전이란 자신의 마음 안에 우주를 가두는 단계이다. 마음의 단전이 자연을 가두는 경지인 것이다. 이 단계는 자연조차 초월 하여 자연을 뜻대로 움직이는 단계이다. 호풍환우(呼風喚雨)하며 용을 부르고 백호를 타고 다니는 단계. 인간이 말하기를 신선(神仙)이라고도 말하며 마신(魔神)이라고도 부르는 단계이다. 보통 도가의 경우 상단전 초입 단계에 이르면 깨달음이 깊어 육체와 영 혼의 구별이 애매모호(曖昧模糊)해지고 생사가 동일시되기 때문에 육체 를 탈각(脫却)하고 등선(登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가의 경우 선경 에 들고 불가의 경우 살아있는 활불이 되었다가 해탈하여 극락정토에 머 문다. 허나 마공으로 도를 이룬 경우는 선계, 천상, 혹은 극락에서 문 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악선이나 마신이 되어 세상에 머물다가 천하 를 뒤집어 놓는다. 나중에 죄가 쌓이면 천벌을 받고 소멸하게 되는 것 이 일반적이다. 백이충의 경우 너무 욕망에 충실하는 마공의 단계에서 갑자기 도가의 경 지로 전환되어 쉽게 상단전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몸 이 이룬 경지보다 깨달음이 낮았다. 따라서 굳이 육체나 살아가는 생 (生)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등선하려면 지금이라도 선계나 천상에서 문 을 열어주겠지만 아무래도 세상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몇 백년 정도 는 세상에 머물다 가지 않을까 싶다. 백이충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모용풍이 백결개를 물리치고 검후와 맞 서 싸우고 있다. 검후와 봉황공주의 결투는 마치 두 마리 봉황이 어울 려 싸운 것 같았지만 모용풍은 너무도 쉽게 백결개를 물리쳤다. 백결개 는 충격을 받았는지 지금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용풍은 별로 지 친 기색도 없이 검후를 상대하였다. "흐음. 저 나이에... 적어도 일갑자 이내에 심검의 경지에 다다를 인재 를 보게 되다니." 검후의 검은 그녀의 명성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이 이룰수 있는 검의 끝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앞으로 어떤 실마리만 있다 면 바로 심검, 중단전의 초입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설사 아무 런 깨달음이 없다하더라도 일갑자 이내에 중단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 다. 물은 차면 넘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모용풍이 단순히 혼돈패왕도와 불사건곤심공을 완전히 익혔다면 검후를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검후는 보리무상검의 끝을 본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용풍은 어렴풋하나마 이기상인의 경지를 밟아본 처 지이다. 검후의 검을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끝났군." 백이충의 말이 끝난 직후 모용풍의 도가 검후의 목에 닿았다. 상대를 해 치지 않고 제압할 수 있다면 그 상대보다 한단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이 당연했다. 검후는 깨긋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 직후 환우비령(　宇秘嶺) 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환우오존의 후예이며 환우령의 주인을 뵈옵니다." 일천에 달하는 환우비령의 고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천이라는 숫자는 적지만 그 질로 따지자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환우오존이 환우비령의 세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편법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환우오 존의 무학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환우비령의 고수들은 백도 의 오대절학 중 한가지를 적어도 오성 이상 익힌 고수들이었다. 편법으 로 약을 사용하고 침을 맞아가며 무공을 익혔기에 그 이상의 성취는 불 가능했지만 무려 일천명이나 되는 고수가 환우오존의 절학을 익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환우비령은 백도맹 내에서 전투세력이 될 것이다. 위험한 만큼 가장 대 우가 크고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일백년 칩거의 대가가 주 어질 것이다. 백도를 위해 천하를 질타해보자. 환우령의 형제여." 거대한 환호가 일었다. 백도의 제일 전투세력인 환우비령이 어둠에서 밝 은 빛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신비삼패를 구해달라고?" 모용풍에게는 친형제같은 사형제가 있었다. 남궁홍일과 종리비등이다. 그런데 오늘 만난 환우오존의 후예 세명. 모용풍은 그들과 의남매를 맺 었다. 그들 역시 모용풍의 무공과 인품에 흠뻑 빠져 서슴없이 그와 의남 매를 맺었다. 모용풍은 백이충을 자신의 주군으로 소개했다. 황실을 지키는 호황령의 주인이며 백도맹과 승룡곡의 배후인물이라며 신비스럽게 포장했다. 자신 을 단숨에 제압하여 혈존의 망령을 제거해준 것도 백이충이라 소개했 다. 당연히 이들의 눈초리가 초롱초롱해졌다. 그 와중에 봉황공주 남궁 봉이 백이충에게 울며 매달렸다. "흑련에 잡힌 신비삼패를 구해달라고?" 어느새 눈이 맞았는지 봉황공주 남궁봉은 백결개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 다. 그동안 정을 쌓았는지 거지라도 좋은 모양이다. 하기야 개방의 젊 은 장로로 금강칠채강의 후계자이기도 하니 백도의 젊은이치고는 가장 뛰어난 신랑감중 하나일 것이다. 무림칠미의 하나인 검후도 남궁홍일과 바짝 붙어 있었다. 둘다 검을 수 련하기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남궁홍일은 남궁봉의 사촌오라비이기 하거 니와 신비삼패의 천검문의 후예이기도 하다. 그 역시 검후와 함께 눈을 반짝이며 백이충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형이 그러더군요. 백도지존께서 천하에서 아마도 가장 강한 분일 거라고. 철혈존에게서, 흑련에게서 신비삼패를 구해주십시오." 남궁홍일이 고개를 숙였다. 봉황공주 남궁봉도 고개를 숙였다. 짝이 그 러하니 검후와 백결개도 고개를 숙였다. 백이충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 다. 종리연의 당부가 생각난 것이다. "백도와 연계를 지었던 신비삼패가 있소. 환우령의 후계자들 중에 신비 삼패와 연관된 아이들이 있으니... 가능하면 신비삼패마저 백도의 세력 으로 끌어들이면 바랄 것이 없을 것이오." (종리맹주.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미래의 신비삼패의 주인들은 백도의 미래의 주역들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 놔두어도 시간 만 흐르면 신비속에 묻혀있던 신비삼패가 백도에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 겠는데요. 뭐, 지금 은혜를 베풀어 두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겠죠.) "어떻게 하기를 원하나?" "흑련은 지금 무작위로 고수를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한비무 (無限比武)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출신과 내력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겨루어서 강한자가 패한자의 지위를 빼앗는 거지요." 흑련. 그리고 철혈존. 백이충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사실 곤무악은 백이충의 안배로 달아났던 자이다. 그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흑련은 지금 변방무림에서 가장 떠들썩한 이름이다. 그들은 문호를 활 짝 열고 가리지 않고 흑련의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철혈존이 외치는 것 은 단 하나였다. - 무공에 자신이 있는 자는 와라. 그리고 도전하라. 이기면 패자의 지위 와 권좌를 얻게 될 것이다. - 흑련의 정문에는 서열 일천위 까지의 서열이 적혀있다고 했다. 일천위 밑의 제자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흑련의 무사계급에 해당하는 시험을 치면 된다. 그러나 고수라고 불리는 자들은 서열 일천위 이내에서 자신 의 상대를 골라 도전한다. 이기든 지든 흑련의 사람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기면 단 지 무공이 강한 것만으로 흑련의 고위서열과 높은 권좌를 차지할 수 있 다. 이 미칠정도로 매혹적이고 단순한 유혹은 전 무림을 흔들었다. 흑도 의 수많은 마두와 정사지간의 고수들이 모두 흑련으로 뛰어들었다. 자신 의 무공을 믿고 권좌를 위해서, 혹은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기 위해 흑련 에 들었다. 흑련은 빠른 시일 내에 강해지고 있었다. "그럼 철혈존에게도 바로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흑련 서열 십위 이내에 들어야 철혈존에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대신 철혈존은 그 어느 때이든 흑련 서열 십위 이내의 도전을 피하지 않겠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흑련 서열 십위 이내는 철혈존을 제외하고 신비삼 패의 주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첫날 비무로 서열 십위 이내에 들면 바로 다음날 철혈존에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라면 바로 흑련에 도전해볼만도 한데 왜 나에게 부탁하는 거 지?" "저희 부모님인 천검회주나 봉황곡주보다 저희는 강하지 못합니다. 그 런 신비삼패의 주인들이 모두 철혈존에게 패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직접 그분들에게 도전하기도 그렇고. 혹여 모용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 르겠지만... 백혈존과 요혈존을 처리하셨다는 백도지존께서 나신다면 확 실히 철혈존을 제압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나서 신비삼패는 자유스럽게 되고 흑련은 해체된다 이건가?" "흑련의 해체는 귀주나 운남지역의 무림인들에게 보호단체가 사라지는 것이니 자연스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신비삼패가 그들을 흡수한다면 자연스럽게 백도맹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고... 그 통제를 지존께 맡길 것입니다." "자네들의 청을 허락하고는 싶지만 흑련이 있는 장소까지는 너무 멀지 않은가? 알다시피 나는 황실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 호황령주라는 직책 도 맡고있어." "그거라면 걱정마십시오. 신비삼패중에 봉황곡의 이름은 그곳에 사는 수 호영물 봉황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하루에 만리를 나는 봉황은 바로 봉 황공주 남궁소매 곁에 있습니다." 이제는 천년마교나 백도맹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거대세력 으로 성장한 흑련, 그 흑련에 어느날 일단의 무리가 찾아왔다. 무려 일 천명의 고수. 하나같이 두눈에 정광이 번뜩이는 고수들. 그들은 백도가 위난에 빠졌을 때도 나타나지 않던 환우오존의 후예인 환우비령(　宇秘 嶺)의 고수들이라 했다. "철혈존은 들어라. 환우비령의 주인께서 흑련의 주인이 되시고자 한다." 모용풍이 사자후를 실어 소리쳤다. 싸울 것은 백이충이지만 완전한 거짓 은 아니었다. 환우비령의 수좌인 환우령주는 모용풍이지만 그는 이미 백 이충을 주군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이충의 환우비령의 주인이 라는 것도 어떻게보면 진실이었다. 모용풍의 사자후에 흑련의 철문이 우웅 거리는 진동음을 내었다. 활짝 열린 흑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에는 엄청난 거 마효웅들이 즐비했다. 그런자들 조차도 환우비령의 위세를 보고 움찔 몸 을 떨었다. 흑련에서 두 노인이 나와 모용풍을 쏘아보았다. "여기는 흑련이다. 흑련은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허나 무례를 용납하지 도 않는다. 흑련의 절차를 따라 도전한다면 도전을 받아줄 것이고 그렇 지 않다면 흑련과 대결을 해야 할 것이다." 환우비령의 위세에도 겁먹지 않고 큰소리치는 두 노인. 그들은 독문쌍마 였다. 바로 전설적 독성 구양봉의 사제들인 것이다. "하하하. 흑련따위 삼류문파를 짓밟고 환우비령의 힘을 보여줘도 되겠지 만 변방의 늙은이들의 안계를 넓혀주겠다. 흑련의 절차라는 것이 무엇이 냐?" 백이충이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를 쳤다. 한순간 독문쌍마가 두려운 얼굴 을 했다. 백이충이 신비삼패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보여준 것이 다. 마음으로 적을 상해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백이충이 독문쌍마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아자. 철혈존보다 더 강하다. 어쩌면 우리의 상전이 바뀔지도...) (만독문의 명예를 걸고 두 번 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설사 그것 을 쓴다고 해도...) (설마 철혈존에게도 쓰지 않은 멸천지독을 쓸 생각인가? 대사형이 죽기 직전 우리에게 남긴 만독문의 제일지보(第一至寶)를?) (철혈존을 얕보다 패한 것은 어쩔 수 없다쳐도... 무림인의 명예가 걸려 있어 약속을 어기지 못하고 그에게 굴복했다해도... 더 이상 만독문의 이름이 얕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이미 만독문이 굴복했다고 알려진 흑련이 패배할 수도 없다. 우리는 더 이상의 패배를 당할 수 없다.) 독문쌍마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마음속으로 대화했다. 철혈존을 대할 때 도 이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놀랍게도 천하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독문쌍마가 백이충이 나선 순간 자신들은 백이충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것이다. "귀하의 정체를 밝히시오." "본좌는 환우비령의 지존이고 또한 백도와 흑련을 발아래에 둘 사람이 다. 일단 천하지존으로 불러라." 백이충이 오만하게 말하자 독문쌍마가 서로 마주보며 쓴 웃음을 지었 다. 자신있게 나섰지만 지금 그들의 말투는 자꾸만 기어 들어가고 있었 다. 두려움에 백이충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독문쌍마 는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흐음. 참으로 오만한 사람이군. 좋소. 흑련의 련주에게 도전하려면 서 열 십위 이내를 꺽어야 하오." "우리들이 흑련 서열 구위와 십위 독문쌍마요. 우리를 꺽으면 흑련주 철 혈존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질 것이오." "늙은 노인네들이 힘도 좋군. 별로 튼튼해보이지도 않는데 어디 다치기 전에 물러나는 것이 어떤가?" 백이충의 말에 독문쌍마의 얼굴이 치욕으로 붉게 물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문쌍마는 백이충에게 섣불리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덤벼들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흐음. 솔직히 우리들의 무공은 독공이요. 하지만 천하지존의 말대로 노 구를 이끌고 겨루기에는 늙은 것도 사실이요. 만일 천하지존께서 노부들 이 대접하는 독을 마시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겠 소." "하하. 구양봉의 무형지독을 말하는 것인가? 가지고 오라. 어떤 독도 본 좌를 해칠 수 없음을 증명하겠다." 백이충의 호언장담에 독문쌍마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과거 독성 구 양봉의 무형지독은 천하가 다 두려워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내놓으라 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멸천지독은 무형지독보다 백배는 더 지독한 것이다. 이것은 사 형이 과거 혈존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독이다. 신선이나 마신도 죽 일수 있는 독이지.) 독문쌍마가 갑자기 냉소하며 소매 속에서 한봉지의 독을 꺼냈다. 하루에 도 열두번씩 철혈존에게 사용하고 싶은 것을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약속 을 지키기 위해 참고있던 독문쌍마였다. 한 노인이 작은 잔을 꺼내 약지 를 깨물어 피를 채워넣었고 다른 한 노인이 소매에서 꺼낸 독을 그 잔 에 넣었다. "하하. 만독문의 독혈(毒血)에 더 지독한 독을 추가했다라? 기대되는 군." 백이충이 그대로 허공섭물로 독잔을 끌어당겼다. 십장이나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손 안의 독잔을 반항한번 못하고 빼앗기는 독문쌍마였다. 새삼 스럽게 그들은 백이충의 무공에 소름이 돋았다. "지존. 독을 들이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독문쌍마와 겨루어도..." "독을 마시는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명예가 손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버 리십시오. 그리고 무공으로 도전하십시오." 모용풍이 백이충을 만류했다. 그러나 백이충은 아무말 없이 독잔을 마셨 다. 모용풍과 환우비령의 고수들이 놀라 그를 주시하는 가운데 백이충 이 눈을 감고 몸을 점검했다. (어라? 이건 또 무슨 독인가? 천하에 없는 극독, 만가지 독중에서도 독 중지황(毒中之皇)이라 불리며 구양봉의 가장 지독했던 무형지독조차 이 몸에 들어오면 내 기운에 중화되어 사라져야 하거늘. 어이하여 몸 안 에서 사라지지가 않지?) 백이충은 약간 놀랐다. 목으로 넘기는 순간 소멸되었어야 할 독이 몸안 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아직 몸으로 퍼질 힘을 갖 추지 못했고 백이충의 몸을 상하게 할 힘도 갖추지 못했지만 해소되지 도 않았다. (나중에 신경써서 연구해봐야 겠는걸? 몸안으로 퍼지지도 않으니 정 소 멸되지 않으면 나중에 뱉어내야 되겠다.) 백이충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은 여전히 형형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백이충이 아무런 이상이 없자 기겁하고 놀란 것은 오히려 독문 쌍마였다. 그들의 안색은 마치 귀신을 보는 듯 허옇게 질려버렸다. "세상에. 만독문 제일지보 멸천지독이..." "만독문의 일천년 정화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다니..." 독문쌍마는 거의 넋을 잃은 듯 했다. 철혈존에게 패했을 때보다 백배 천 배는 더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마치 백치가 된 듯 머리를 떨구 고 헛소리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귀찮군. 이따위 대접밖에 하지 못하는가? 어이하여 흑련은 대결조차 제 대로 못하는 노인들만 내세우는가? 이름뿐인 시시껄렁 허수아비 역시 삼 류문파였던가?" "흑련에 신비삼패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환우비령이 어떤 세력 이든 신비삼패를 모욕하지는 못한다." 흑련의 대문 안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리며 한 중년인이 나왔다. 남궁 봉의 아버지 천상검제였다. 그의 뒤로 천검문 십이검수가 따랐다. "흐음. 신비속의 천검문이 어떤 존재인가 했더니... 무당파도, 남궁세가 도, 심지어 검각의 인물까지 있지 않은가?" 백이충이 십이검수를 보고 놀란 듯 말했다. 천검문의 비밀은 남궁홍일 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백이충의 주위에 잠복해있는 천무호정 일백위가 십이검수의 내력을 전음으로 말해준 것이다. 그들 중 에는 천무호정 일백위의 사문에 적을 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 천지마검류에 대항하기 위해 천하에 존재하는 스믈 두 개의 검 문(劍門)에서 검객들이 모였다. 천검문은 이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후예 가 교류해가며 검을 연구해왔다. 지금은 십이검수와 나만이 남았지만 천 검문이야말로 천하 검문들의 연합체이다." 청상검제가 가득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독문쌍마를 이겼다. 철혈존에 도전할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흑련을 무시할 자격은 없다. 신비삼패가 몸을 의탁한 이상 그 누구도 흑 련을 모욕해서는 안된다. 방금전의 발언을 취소하라." "취소하지 않는다면?" "독문쌍마의 독이 그대를 해치지 못했다면 지금 그대에게는 아무런 불리 한 점이 없을 터. 취소하지 않는다면 우리, 본좌 천상검제와 천검문의 십이검수가 도전하겠다." "으하하하. 신비삼패.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구. 도전한다면 받아들이 지. 덤벼라." 백이충은 독문쌍마 못지않게 천검문 또한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그들 을 눌러줄 필요를 느꼈다. 독문쌍마와 다름없이 천검문의 검수들에게도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었거늘 무엇을 믿고 덤비든지 궁금했다. 천상검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백이충을 보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 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그것은 백이충이 심어 본능적으로 피어나는 것으 로 스스로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인의 오기로 그 두려움 을 이겨내었다. 그는 단지 백이충의 기세에 자신들이 눌렸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이길 자신이 있어요? 정말 강해보이는데?) 천상검제의 귀로 아내 봉황무후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녀 역시 독문쌍마 가 낭패당하는 광경을 보았으나 섣불리 나서지 않은 것이다. (모르오. 세상에 이런 강자가 있으리라고는. 하지만 천검문의 명예를 걸 고 겨루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소.) (하지마나 철혈존보다 강하다고 느껴지는 자에요. 철혈존에게도 이런 위 압감을 받지 못했어요. 우리 모두가 합공하고도 철혈존에게 이기지 못했 는데 더 강해보이는 이자에게는... 혹시 천하지존이라는 자도 혈존을 자 처하는 자들의 하나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천지마검류를 제압하기 위해 천검문은 백년이 넘게 검학을 연구해왔소. 요즘들어 나는 불가능한 하나의 검법을 생각해 냈고 그 검법을 하나의 진법으로 실현시켰소. 철혈존에게 시험해보지 못 한 그 검진을 저자에게 써먹어보고 싶소.) 천상검제가 봉황무후에게 전음을 날린후 백이충에게 큰 소리를 쳤다. "천검문이 환우비령의 천하지존에게 덤벼들겠소. 우리는 하나의 진법을 펼칠 것이니 환우비령도 맞서 싸울 상대를 뽑으시오." "하하하. 천상검제와 십이검수라. 나 혼자로서도 충분하지. 덤비시오." 그 순간 천검문의 검진이 펼쳐졌다. 천하의 검법이 모두 모인 검의 정화 가 깃든 검진이었다. 제 목:[연재]혈존무적-사라진 철혈존 관련자료:없음 [20398]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3 02:38 조회:561 <사라진 철혈존> 천검문은 천하의 모든 검객들이 저마다 검법의 정화를 가지고 검술의 교 류를 위해 모인 문파였다. 그들의 목적은 천지마검류를 완벽히 꺽는 것 이었다. 따라서 지금 천상검제와 십이검수가 펼치는 검법은 바로 그들 각 검문에 내려오는 검법이었다. 소림사의 달마삼검(達麻三劍) 무당파의 태극혜검(太極慧劍). 검각의 보리무극검(菩提無極劍). 화산의 독고구검(獨孤九劍). 공동의 복마칠검(伏魔七劍. 남궁세가의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 백리세가의 칠채환검(七彩幻劍) 단향검군의 표향검(飄香劍) 그 외의 갖가지 검법. 백도의 십대절학에 들어가는 검법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검법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천하의 유명한 검법은 모두 천검 문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검법을 절정에 달하도록 익힌 검객 들이 하나의 검진을 이루어 백이충을 공격하고 있다. (대단하다. 이 진법은... 천하의 검법들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다.) 백이충은 경악했다. 지금 천상검제와 천검문의 십이검수가 합해서 펼치 는 검진의 위력은 상상불허였다. 각 개인의 능력은 하단전의 경지를 벗 어나지 못했거늘 그들의 검법이 조화되어 펼쳐지는 검진은 중단전의 상 급단계의 위력을 발하고 있었다. 인간은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 개개인 이 다다르지 못한 경지를 서로 힘을 합해 검진으로 심검의 최상승 단계 를 펼치다니. 천상검제와 십이검수의 검에서 제각기 검강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것 은 백색의 검강. 어떤 것은 새파란 검강. 어떤 것은 검은 색의 검강. 어 떤 것은 현묘한 뿌연 회색빛의 검강. 각기 검법에 맞춰 검강이 솟구치 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 검강의 그물을 펼쳐내었다. 그것은 사람이라 면 벗어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무적장왕이 삼성곡에 철인형으로 설치한 것과 같다. 무적장왕은 구상했 으나 완성하지 못하여 철인형으로 표현했지만... 이 진법은 완성되어 공 격하는 것이다. 둘이 똑같이 개개인이 펼치지 못하는 것을 여럿의 힘을 합쳐 이루어냈다.) 무적장왕의 철인형보다 훨씬 험악했다. 열두개의 철인형은 단지 동작을 행했을뿐 내력을 뿜어공격하지 못했지만 천상검제와 십이검수의 검진은 검강을 뿜어대며 백이충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둘다 훌륭 한 하나의 절학이었다. 그것도 심검이나 의기상인의 최고 경지인 중단 전 최상급 단계였다. 그것의 연환을 이루지 못하여 무적장왕은 열 두 개 의 철인형으로 미완성 절학을 표현한 것이고 천검문은 진법으로 실현시 켰다는 치이일 뿐이다. (그 원리는 같다. 허나 진법으로서는 완성이나 하나의 절학으로서는 미 완성이다. 천하 검법의 정수들의 연계. 그것이 진법으로 표현되니 이토 록이나 무섭구나. 삼성곡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이것이 연환의 묘를 갖 춰 하나의 검법이 된다면...) 그 생각을 하니 백이충의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나왔다. 철인형이나 지 금 천검문의 검진이나 그 합쳐진 위력은 심검의 최상승 단계일지라도 그 것이 일인이 펼칠수 있는 하나의 무공이 된다면 상단전의 무공이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검문의 절학을 접하게 되어 영광이오." 검강의 그물이 빽빽하게 뒤덮힌 검진 안에서 백이충의 목소리가 들렸 다. 검진이 펼쳐지고 검강이 뿌려지며 그 놀라운 위력이 나타나자 모두 들 백이충이 죽었으리라 생각했거늘 너무도 멀쩡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천하에 이 검진을 당해낼 자는 손에 꼽을 것이오. 양패구상은 가능할 지 몰라도 검진을 파해할 자는... 아마도 본좌가 유일할 것이오." 검진 안에서 놀랍도록 밝은 빛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불가 자비의 빛이 고 도가 선경의 빛이었다. 아무리 천검문의 검진이 놀라워도 이미 상단 전의 경지에 이른 백이충을 해칠 수는 없었다. 상단전 중단전의 차이는 천지가 번복될 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천검문의 검진이 과거 백혈존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백이충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백이충에게서 뻗어나온 빛은 과거 삼성곡에서 백이충이 바위부처를 보았 을 때 부처님의 사리가 후광으로 내뿜었던 것과 같이 환한 제마의 빛이 다. 또한 광한신공에서 비롯되는 무한한 선인지경의 빛이기도 하다. 그 것은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경계를 둘 수 없는 빛이기도 하다. 아직 깨달 음이 합쳐지지 않아 분리된 빛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금강대장경이든 광 한신공이든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 빛이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천검문의 절학은 본좌를 만족시킬 수 없소. 이제 그만 멈추 시오." 빛이 진할수록 검진의 검강이 소멸되어갔다. 검강이 스러지고 검기가 사 라졌다. 그 사이로 경악에 찬 천상검제와 십이검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얼굴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빛을 띤 경악의 표정이었다. 천 하무적이라 자신했던 절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허물어진 좌절의 빛이기 도 했다. 만독문에 이어 천검문. 그 검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순간인 것 이다. "이미 천검문과 봉황곡은 오래전부터 하나였어요. 내가 돕겠어요." 흑련의 대문에서 열 몇 명의 사람들이 날아왔다. 봉황무후와 봉황곡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원을 펼쳐 허물어져가는 검진의 외곽에 늘어섰고 일제히 손을 뻗어 내력을 줄기줄기 토해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연습해 온 것처럼 봉황무후와 봉황곡 팔대장로들의 진기는 검진의 허점을 보완 하고 그 틈을 파고들어 백이충을 압박했다. 백이충의 안색이 비로소 급 변했다. "속가 제일 신공. 만상건곤심결(萬象乾坤心訣)" 비로소 백이충은 천상검제와 천검문 십이검수의 검진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 깨달았다. 어떻게 각기 그 근원이 틀리고 류가 틀린 열두개의 검법 이 조화를 이뤄 하나의 검진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만상건곤심결. 그것은 하나의 무공이기도 하고 하나의 무공원론이기도 하다. 봉황곡의 조사가 창시한 만상건곤심결은 실재로 만가지 절학을 분석하고 낱낱이 해부한 천하 초식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식의 결합과 분 쇄, 조화와 파해, 괴이신랄한 절초와 왕도를 걷는 기본초식까지 모두 포 함되어 있었다. 천하 모든 문파의 무공을 연구하여 빼놓고 연구하지 않 은 무학이 없다하여 만상(萬象)이라는 이름이 붙은 속가 제일의 무학원 론인 것이다. 실재로 봉황곡에서 만상건곤심결의 완성이 가능했던 것은 봉황곡이 원 래 불사를 연구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불노장생을 연구하며 어떤 때 는 약으로, 어떤 때는 도가의 비법으로 그 꿈을 이룩하려 했던 봉황곡 은 어느날 무공으로 그 뜻을 이룩하려고 했다. 불노장생이라는 인간의 꿈을 연구하는 봉황곡이었기에 수많은 대를 이어가며 천하에 활동하는 모든 문파의 무공원리를 분석하고 기록했으며 그것이 모이고 모여 하나 의 무학원론이 되니 이것이 만상건곤심결이었다. 실제로 봉황곡의 만상건곤심결이라는 것은 만상건곤심결로 만들어지니 봉황신공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무학원론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 이론에 따라 불사의 기공을 연구하여 만들어진 무공이 바로 봉황신공인 것이 다. 허나 세상에서는 만상건곤심결을 갖고 있는 것이 봉황곡이라는 것 을 알고있기에 그 원론에 따라 만들어진 봉황신공을 만상건곤심결이라 지칭한 것이다. 천검문에서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심검 최상승의 단계를 이룩하기 위해 선택했던 것이 바로 봉황곡의 만상건곤심결이었던 것이다. 천하 각문파 의 무공을 원론적으로 설명한 만상건곤심결이었기에 천검문에서 각 문파 의 이질적인 검법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천검문의 지금 검진도 열 두 개의 검법을 만상건곤심결로 펼친 것에 불 과했다. 그 위력이 놀랍게도 자연지경에 버금가는 심검 최상승 단계에 버금가는 경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백이충이 자신의 힘으로 검진을 깨트리려 하자 봉황무후와 팔대장로가 검진의 와곽에 둘러서서 봉황신공을 전개했다. 봉황신공이라하지만 만상 건곤심결로 무림에 알려진 무학을 펼친 것이다. 그것은 같은 무학의 이 치로 만들어진 천검문의 검진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다. 백이충에 의해 붕괴되기 직전의 검진의 불완전한 점을 해소시켜 주고 단 점을 보완해주었다. 실로 깨어지기 직전의 항아리를 외부에서 철로 감 싼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입니다." 문제는 봉황무후와 팔대장로가 힘을 합했어도 결국 만상건곤심결의 이치 에 따라 열두가지 검법에 아홉명의 내력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뿐이었 다. 일시 약점이 보완되고 그 힘이 강해졌으나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두 개의 도도한 강물이 합해졌어도 결국 강물은 강물이란 소 리이다. 중단전의 경지, 심검이나 의기상인의 경지가 아무리 힘을 합쳐 봤자 그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천지조화를 이루는 신선이나 활불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감명깊었습니다. 삼성곡에서 느꼈던 불완전함. 그것의 해결점이 바로 만상건곤심결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 자체로는 인간의 무학에 불과하지 만 인간의 무학을 연결시켜 인간을 초월하게 만드는 것. 연환(連環). 그 것이 여기예 있군요." 한 마리의 개미는 개미에 불과하지만 수천만 마리의 개미떼는 이미 천재 지변이다. 합(合)과 분(分), 그리고 연환(連環)으로 천하 무학을 설명 한 만상건곤심결. 그것은 천하무학의 공통점을 연결시켜주는 무학원리였 다. 백이충의 몸에서 움츠러들어 밀려가던 빛이 다시 환하게 뿜어져 나갔 다. 잠시의 놀라움은 작은 놀라움으로 끝쳤을 뿐. 다시금 검진이 흔들리 고 외곽의 봉황무후와 팔대장로의 몸이 흔들렸다. 그들은 더 이상 백이 충을 위협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이충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백이충의 안색이 급변 했다. "이런. 독이... 독문쌍마가 내놓았던 독이 하필이면..." 독성 구양봉이 죽기 직전 만들었던 최강의 독. 신선이나 부처도 죽인다 고 자신했던 멸천지독. 그것이 백이충의 몸의 기운에 눌려 꼼짝도 못하기는 했으나 소멸되지도 않았다. 백이충이 중단전 최상급의 무학을 제압하고자 상단전의 힘을 이 용하자 멸천지독을 억누르던 힘이 분산되었고 그것이 몸안에 퍼져나가 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수가... 세상에 내 몸을 해칠 독이 있다니." 백이충의 눈이 부릅떠졌다. 온 몸의 힘이 쭈욱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졌 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멸천지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백이충의 온 몸 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퍼져나가면 갈수록 백이충의 안색이 시퍼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깨어지기 시작했던 검강과 봉황곡의 만상건곤심결의 위력도 백이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으으. 지금 내 몸안으로 정신을 집중시켜 독을 억누른다면 외부에서 검 강과 봉황무후의 내력이 내 몸을 갈기갈리 찢어놓을 것이다.) 황궁무고와 삼성곡의 기연을 얻은 이후 지금과 같이 힘든 지경에 빠진 것은 백이충으로서도 처음이었다. 자연지경상태에서는 귀혈존을 죽일 수 있었고 그것을 초월하자 너무도 수월히 백혈존과 요혈존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설마 일개 독에 막혀 곤경에 처할 줄이야. 백이충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입술이 퍼렇게 변색 되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피가 육체와 심장으로 퍼져나갔다. 전신이 마 비되고 저려오기 시작했다. 백이충이 아니었다면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한줌 독수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으으. 만독문, 천검문, 그리고 봉황곡이 합해지니 나도 당해내지 못하 는 건가?" 갈수록 아득해지는 정신과 마비되는 몸, 외부에서 압박해오는 검강의 기 운. 백이충은 절망을 느꼈다. 광혈존은 조금씩 혈존의 기운을 방출했다. 저기 흑련의 정문 앞에서 놀 고있는 백이충에게 들키면 안되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그를 당해낼 자신 이 없었기 때문이다. 긴장한 때문이지 조금씩 광혈존의 이마에 진땀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조 금 후에 광혈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인되었다. 가엾은 가짜 혈존 하나. 먹이 하나가 미끼를 물었다.) 흑련의 안에서 맹렬한 기세로 한명이 뛰쳐나왔다. 그는 증오와 적의로 뒤범벅되어 광혈존이 흘린 기운을 찾아 헤매었다. 철혈존이 광혈존이 흘 린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의 얼굴은 모든 혈존이 그러했듯 혐오와 증오 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되었다. 백이충의 기운을 차단하고 내 기운을 진하게 뿌린 보람이 있 다.) 하지만 좀더 먼 곳으로 유인해야 했다. 백이충이 느낄 수 없는 곳으로. 광혈존은 철혈존이 자신의 기운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혈존의 기운을 뿌 리며 조금씩 흑련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광폭한 눈빛으로 혈존의 기운을 찾던 철혈존도 그것을 느낀 듯 광혈존의 기운 을 따라 미친 듯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디있느냐? 가짜? 여기까지 찾아와 뭐가 두려워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 는 거냐?" 뒤를 쫓아도 그 종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철혈존 곤무악이 분노의 함성 을 외쳤다. 그 소리가 저 멀리 들리까봐 광혈존이 철혈존에게만 들리도 록 전음을 날렸다. "누구보고 가짜라는 거냐? 누가 진짜인지 가리고 싶으면 아무 말없이 따 라와라. 누가 진짜 백가량인지 진위를 가려줄테니." 철혈존의 눈빛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없이 광혈존 의 뒤를 따랐다. 한참 흑련에서 멀어진뒤 광혈존은 되었다 생각하고 모 습을 드러내었다. "네놈은 누구냐? 어이하여 본좌 혈존의 기운을 똑같이 뿜고 있는 것이 냐?" 광혈존을 보고 철혈존이 고함을 질렀다. 눈앞의 광혈존을 도저히 눈앞 에 보고있을 수 없다는 살기가 두 눈에 이글거렸다. "하하. 혈존치고는 덜 떨어진 놈 아닌가? 네 놈도 전생의 기억이 있다 면 우리가 혈존으로서 죽기 직전에 분신으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알텐 데?" 광혈존이 비웃었다. 동시에 철혈존이 파랗게 질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 섰다. "누... 누구냐? 어이하여 이런 막대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 이건... 이 건 흩어진 아수라독존마공에 가까운 기운이다." 철혈존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광혈존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 가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광혈존을 당해낼 수 없다 는 직감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후후. 두려운가? 두렵다면 네놈은 혈존의 자격이 없다. 가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인가? 천하무적인 혈존 백가 량이 아닌가? 두렵고 공포를 느낀다면 혈존 백가량일 수가 없다. 결국 네놈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으으. 본좌야말로 진짜 혈존 백가량이다. 이 철혈존이야말로 혈존이란 말이다. 네놈이 진짜라고 인정할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본좌의 눈에 네놈은 그저 단순한 먹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데?" 광혈존의 몸에서 붉고 푸른 빛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 철혈존이 경악 했다. 광혈존의 몸에 떠오른 기운은 청영마공과 혈영마공이었다. "쌍영마공? 네놈이 어떻게? 그것은 본좌가 죽었을 때 이미 사라진 것으 로 아는데?" "하하. 역시 덜 떨어진 놈. 네놈은 모르는가? 분신 백혈존 모용풍의 몸 에도 쌍영마공을 심었고 마혈존 천마지존 혁련광의 몸에도 쌍영마공을 심었었지. 물론 본좌가 빨아먹은 것은 천마지존이 변했던 가짜의 무공 과 기억이었지만 말이다." "빨아먹어? 네놈은 늙은거지 우문노괴로구나. 네놈 따위가 진짜라고 우 긴단 말이냐?" 철혈존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전 생의 일을 기억하기로 분신 중에 가장 약하고 미완성작이 바로 우문노괴 의 분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위협하다니. 그러나 그의 몸은 연 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혐오와 증오, 살기는 여전한데 갈수록 공포 의 기운이 더 그의 마음을 잠식하는 것이다. "네놈이 천마지존의 기운을 빨아먹었구나. 하지만 겨우 그것 가지고 진 짜라고 우긴단 말인가?" "으하하하. 쌍영마공을 익힌 것 이상으로 본좌 혈존을 증명하는 일이 어 디있단 말이냐? 아니면 쌍영마공도 없이 겨우 다른마공에 아수라독존마 공의 일부 영향을 받아 무적처럼 행세하는 네놈이 혈존이란 밀이냐?" 광혈존이 비웃으며 슬쩍 다른 기운을 흘렸다. 그리고 광혈존의 의도대 로 철혈존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그... 그 사기는? 그 요력은? 설마 혈존의 사술을 이어받았는가? 그럴 리가? 분신중에 사술에 능한 가짜라고는..." "흐흐흐. 천마지존뿐이 아니다. 요혈존 칠괴혼합 마진걸 가짜의 기운도 내 몸안에 있고 귀혈존 유부마영의 기운도 이 몸안에 있다. 쌍영마공. 그리고 요력. 유부마영의 사술. 남의 무공을 흡입하는 본좌의 능력. 완 벽한 혈존에 가깝다고 보지 않나? 혈존의 파편은 모두가 내 몸안에 모 여 하나의 진짜가 되기를 원한다. 네놈도 혈존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그 몸을 나에게 넘겨라. 네 영혼이 내 몸에 모여 좀더 진짜 혈존에 가깝게 될 것이고 아수라독존마공이 복원되리라." 광혈존이 철혈존을 덮쳐갔다. 순간 공포로 얼룩졌던 철혈존의 얼굴에 깊 은 결심이 스쳐지나갔다. "헛소리. 누가 뭐래도 진짜 혈존 백가량은 나 철혈존밖에 없다." 철혈존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패도적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곤무악이었 을 때의 불완전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철괴마공의 거력이었 으며 거기에는 아수라독존마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헛수고. 네놈은 반항할 자격이 없다." 철혈존의 철괴마공에 광혈존이 냉소했다. 그가 쌍영마공을 뿌리는 순간 철괴마공은 눈녹듯이 사라졌으며 철혈존의 지척으로 접근했다. 그 순간 철혈존의 눈에 혈광이 비치며 혈영마기를 내뿜었다. "차앗. 쌍영마공을 익힌 것은 네놈뿜이 아니다." "크흐흐. 네놈에 대한 기억은 본좌에게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네놈에 게 혈영마공을 전수했던 것은 우리 둘다 기억에 있다." 기습적인 철혈존의 공격이었지만 광혈존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 주쳤다. 쌍영마공과 혈영마공의 기운이 맞부딪쳤다. 그 순간 철혈존의 안색이 노랗게 변해갔다. 광폭하게 내뿜은 혈영마기가 흡수되듯 광혈존 의 손바닥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크흐흐. 같은 내공에 동질의 심법. 게다가 영혼의 질도 같지. 모든 것 이 같다면 약한 기운은 강한 기운에 흡수되는 줄을 모르나?" "크으으윽. 네놈. 네놈 따위가 본좌 진짜에게..." "어리석은 놈. 여태까지는 시체의 기운을 빨아먹었지만 네놈이 최초로 살아있는체 본좌에게 빨려먹는 놈이 되는 것이다. 더욱 진하고 강한 기 운을 주거라. 네놈의 영혼파편은 더더욱 생생하게 본좌에게 흡수될 것 같구나." 말라비틀어지는 고목처럼 철혈존의 손목부위부터 삐적 말라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철혈존의 눈에 공포와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포기해라. 네놈도 혈존이라면 협조해라. 모든 영혼이 합쳐 하나로 바뀌 는 것이다. 너도 느꼈을 것이다. 우리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우리 스스 로가 진짜 혈존이라 자부하지 못하고 앞에 각자 분신을 나타내는 하나씩 의 별호를 집어넣은 것을. 하지만 본좌에게 합쳐져라. 그러면 진짜 혈 존 백가량이 부활한다." 손목에서 팔뚝으로, 팔뚝에서 어깨로, 그리고 가슴으로 철혈존의 몸이 급격히 말라갔다. 피와 정혈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처럼. 뼈와 근육의 육 즙이 모두 광혈존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본좌의 일부가 되라. 네 스스로 내어놓아라. 혈존으로서의 자부심을 가 져라. 본좌가 바로 천하의 혈존이다. 천하의 주인이다. 네가 가진 모든 기억과 무공, 그리고 혈존의 파편을 내어놓아라. 조각난 아수라독존마공 의 일부를 내어놓아라." 철혈존의 하체가 비틀어지고 머리부분의 혈관이 드러났다. 모든 것이 광 혈존에게 빨리고 있었다. 철혈존의 모든 것이... "우리의 본체였던 그자가 나타났다. 백이충이... 그자는 아수라독존마공 에 버금가는 무공을 얻었고... 이대로라면 우리 혈존들은 파멸하게 된 다. 혈존 백가량은 영원히 부활하지 못한다. 본좌가 바로 진짜 혈존 백 가량이다. 그러니 내 안에서 하나가 되어라." 광혈존의 마지막 말과 함께 머리끝까지 철혈존의 정혈이 말라비틀어졌 다. 이미 그곳에 철혈존은 없었다. 천년도 더된 것 같은 말라비틀어진 미이라 한구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광혈존이 손을 한번 휘젓자 그대로 먼지로 화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이로서 정확히 넷, 본좌까지 다섯. 혈존의 반이 네게 모였다. 흐흐. 본 조가 광혈존이 아닌 혈존으로 자처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혈존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던 백이충이 문득 생각했다. (인연은 삼성곡에서 끝났던 것일까? 거기서 얻은 것은 불가의 인연밖에 없다. 옥령진인이 남기기를 진정한 광한신공을 깨달으려면 불가와 도가 와 속가의 모든 인연을 얻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속가의 기연 은 무엇일까?) 백이충은 생각했다. 혹시 지금의 위험이 바로 그 인연이 아닐까? 만상건 곤심결은 능히 속가의 최고봉이라 할만했다. (만상건곤심결은 그저 원론일 뿐이다. 무림인이라면 모두 봉황곡이 만들 어낸 무공을 가지고 십대절학의 하나인 만상건곤심결이라 했다. 허나 그 것은 진법으로도 바뀌고 수많은 검학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보황곡의 무 공을 검빈에 보완시키기도 한다.) 백이충은 삼성곡에서 보았던 무적장왕의 철인형을 생각했다. 건곤무적장 을 뛰어넘는 절학. 그러나 하나로 연결시킬 수가 없어 영원히 미완성이 라 생각했던 무공. 그것이 이어진다면 하나의 절기가 될까? 중단전을 뛰 어넘는 절기가 될까? 지금 그를 압박하고 있는 검진의 검강을 생각했다. 열 두 개의 극상검법 이 하나로 모여 검진을 형성했다. 하나하나로 따지자면 하단전 최강의 무학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진법이 되자 중단전 최상의 위력을 나타냈 다. 그것이 한사람이 펼칠수 있는 검법이라면 어떨까? 여럿이 펼치는 것 이 아니라 한사람이 하나의 검법으로 펼칠수 있다면 중단전을 뛰어넘는 절기가 될까? 그의 몸안에 있는 멸천지독을 생각했다. 왜 독을 소멸시키려고 했을까? 독이면 어떻고 영약이면 어떤가? 천지만물이 내 마음에 존재하고 상단 전 안에 만상이 존재하거늘 그 안에 멸천지독이 포함되어 있은들 또 어 떤가? 그것도 상단전안에 갇히 만물의 하나일진데 왜 상단전에 해가된다 고 생각했을까? 왜 내게 해로우니 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멸천지독도 상단전에 가둘수 있을까? 천지만물을 내 뜻안에 가두는 것 처럼 독도 상단전의 무학이 될 수 있을까?) (삼성곡 무적장왕의 철인형은 만상건곤심결로 이어질수 있을까? 그것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상단전의 무학이 될 수 있을까?) (천검문의 검진이나 봉황곡의 합공은 중단전 최상의 경지이다. 그것이 하나로 합쳐지면 어떨까? 그것은 상단전의 무학일까?) 백이충은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속가의 기연? 만상이 곧 만물 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지 아니한가? 육체를 이용하여 인간의 한계까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육체안에 기를 가두는 단전을 사용하는 하단전의 경지. 자연과 동화되어 뜻이 자연과 함께 흘러가고 조화하는 것, 인간을 초월 하여 마음에 단전을 두고 기를 동화하는 중단전의 경지. 마음에 가둔 단전에 천지를 품고 자연을 품고 그 안에 자신의 뜻대로 풍 운조화를 움직이는 것이 단전안에 우주를 가두는 상단전의 경지. (불가와 도가, 속가 모든 인연이 닿아야 광한신공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나? 꼭 그런것일까? 광한선인은 도인에서 신선이 된 분인데 속가의 공 부나 불경을 공부했을까? 옥령진인이 말한 것은 그저 도가의 공부에 집 착해서는 경지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마음에 우주를 담는 것이 상단전이거늘 오히려 마음이 하나에 매여 집착 하면 어찌 상단전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도가의 공부이든 불가의 공 부이든 혹은 속가의 공부이든 말이다. 불가의 금강대장경은 해탈을 말한다. 세속에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 서 초월하는 것. 초월하고 집착하지 않기에 만물을 관조하는 것. 관조하 기에 그 뜻에 만물의 조화가 따라오는 것. 도가의 광한신공은 말한다. 천지자연의 기운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 마음에 천지와 우 주를 가두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신선이 되는 것. 속가의 만상건곤심결을 앞두고 위험에 빠졌다. 거기서 느낀 것은 집착 을 버리는 것. 멸천지독이 독이면 독으로 마음에 담아두는 것. 삼성곡 의 철인형 절학이 있으면 그것도 미완성이라 생각하지 말고 상단전의 마 음에 담아두는 것. 천검문의 절학도 하나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 그저 마음에 담아두면 모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것. 미완성이라 고, 불가능이라고 마음으로 단정짓는 것 자체가 마음이 매여있다는 것, 그저 있는대로 마음에 담아두고 조화를 부리는 것. "그래. 그것이 바로 광한신공이다." 눈부신 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따듯하고 밝은 빛이었다. 백이충의 얼굴 에 성자의 미소가 어렸고 천검문과 봉황곡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러 나 패배한 그들의 얼굴도 밝은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런가? 집착이 없다는 것. 천지와 세상이 내 마음에 있어 덧없고 좁다 는 것. 그러기에 육체를 탈각하고 좀 더 넓은 세계, 각기 자신의 세계 를 가진 존재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인가? 선경으로 가고 극락정토로 가는 것인가?" 백이충이 고개를 저으며 짖굳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나는 싫어. 우리 예쁜 금소매를 놔두고 어디를 가? 우리 예쁜 혈 무오미를 두로 어떻게 가? 싫어. 나는 집착할거야. 오래오래 사랑하고 집착하고 살거야. 살다살다 온갖 정과 재미를 누리다 덧없어지면 그때 갈거야." 흑련에 난리가 났다. 환우비령이라는 신비세력이 나타나고 천하지존이라 는 자가 신비삼패의 지존을 모조리 꺽은 것이다. 그렇다면 흑련의 련주 인 철혈존이 나타나 련주 자리를 놓고 천하지존과 겨루어야 했다. "철혈존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존이 나타남과 거의 동시에 모 습을 감춘 것으로 생각됩니다." "흐음. 철혈존의 성격을 보건대 어디론가 도망갈 자가 아닌데?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니 이상하군요." "허나 도망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실종되었다는 소리인 데... 지금 계속 수소문하고 있지만 철혈존의 모습을 본 자가 없습니 다." 신비삼패의 수좌들이 모두 백혈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철혈존과 달 리 진정으로 감복한 것이다. 그들이 펼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펼치고 도 너무도 허무하게 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또한 환우비령에 그들의 후예가 포함되어 있고 각기 짝을 찾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천하지존을 데려온 것도 그들 신비삼패를 철혈존에게 해방시 키기 위해서 데려왔다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철혈존이 없으면 흑련을 장악하는 일은 헛것 이 되는 건가요?" "흑련의 율법은 바로 철혈존 그가 만든 것입니다. 도전을 하면 받아들이 는 것. 앞으로 지존이 도전의사를 밝힌 이후 열흘동안 그가 모습을 나타 내지 않으면 율법에 따라 흑련은 지존의 것이 됩니다." "그럼 흑련은 내가 지배한다치고. 신비삼패는?"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지존께서는 한 곳에 집착하실 분이 아니라고. 황실을 보호하는 호황령주의 지위에다 백도지존. 거기다 흑련까지. 저희 가 흑련을 맡겠습니다. 어차피 아이들의 상황을 보니 신비삼패도 백도 에 귀속해야 될 것 같습니다. 뒤로 백도와 야합하면서 겉으로는 흑련을 다스려 천년마교를 견제해야 겠지요." "물론 지존의 명령은 철저히 들을 것입니다. 저희 신비삼패는 지존에게 영원히 굴복했으니까요." "흠. 그러면 일단 백도의 일은 대충 수습된 셈인가? 백도맹, 승룡곡, 환 우비령, 게다가 신비삼패가 있는 흑련까지 합하면 옥룡왕을 대항할 충분 한 세력이 된다고 보는데 따라주시겠습니까?" "이미 종리맹주와 연락을 했습니다. 서문장군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더군 요. 천하 사방에서 옥룡왕을 조일 것입니다. 다만..."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현황방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더군요. 또한 변황동맹의 세력이 모습 을 감춘 것에 현황방의 상단이 이용되었다는 흔적이..." "현황방? 금혈존의 일인가요? 그들이 옥룡왕과 관련된 일에 무슨 상관이 죠?" "그 흔적이 북경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 제 목:[연재]혈존무적-마교의 봉문 관련자료:없음 [20399]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4-23 02:47 조회:646 <마교의 봉문> 백이충은 아버지 서문구랑의 말을 상기했다. 따지고보면 지금 천하에서 가장 큰 일은 옥룡왕 혈지존의 일이었다. 반역의 일이기 때문이다. "혈지존이 반역을 성공시키면 그야말로 큰일이지. 하지만 실패해도 큰일 이다." 옥룡왕이 진짜 주씨 일원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다. 따지고보면 주씨 황실의 내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혈지존은 옥룡왕을 가장하고 있는 것일 뿐 진짜 옥룡왕이 아니다. 그는 무림인에 불과하다. 황제가 옥룡왕의 반란을 제압했을 때 그 정체가 밝혀질 것은 명백했다. 고지식하고 충성이 깊은 아버지가 황제에게 거짓을 고할 리가 없다. 생 각해보니 괜히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밝혔다 싶다. 황제의 성품으로 보 아 혈지존의 정체에 놀라 위험하다 싶은 무림에 눈을 돌릴 것이고 다시 는 이런 일이 없도록 무림을 없애거나 통제 하에 두려고 할 것이다. 무 림이나 백도맹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결국 반란이 반란으로 일어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 황제가 자금성에 서 나오지 않고 있는 동안 백도맹이 옥룡왕부를 제압하고 후환을 제거하 면 된다. 그럼 무림의 일로서 끝나고 오히려 황제는 나라의 위기에서 과 감히 일어난 무림인들을 칭송할 것이다." 서문구랑 장군의 복안도 그것이었다. 낙양에서 군사를 일으킬 만반의 준 비를 하고 있었으나 백이충으로부터 옥룡왕이 가짜라는 말을 듣자 그들 을 동원할 생각을 버렸다. 서문장군은 승룡곡에 백이충을 보내 백도맹 의 힘으로 혈지존의 일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다행히 백도의 힘은 옥룡왕 혈지존을 상대할만하다. 백도맹이 정립되었 고 구파와 오대세가가 제자리를 찾고 있다. 혈천마련의 난과 각 혈존의 난립이 오히려 구파일방의 힘을 백도맹 안쪽으로 몰아 뭉쳐주는 역할을 했다. 하나로 뭉친 백도맹의 힘에 승룡곡의 인원이 모두 가세하고 거기 에 환우비령의 힘, 신비삼패의 힘에 흑련의 도움이 더해졌다. 백도의 힘 은 오히려 과거보다 세배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라면 능히 혈 지존의 힘을 앞도할만 하다." 백이충은 혈지존의 세력을 생각했다. 만약 북경에 옥룡왕이 가짜라는 소 문이 퍼지고 그 증인들이 속속 나타난다면 옥룡왕에 충성을 맹세했던 신 료들이 마구 흔들릴 것이다. 명분없이 일어난 반역은 결국 황제를 축출 하고 난 이후에도 천하의 도전을 받게될 것이고 결국에는 패망할 가능성 이 많기 때문이다. 아직 명 제국은 주씨 황실을 받드는 충신들이 즐비하 다. 모란서시가 증언을 하고나면 대부분의 신료와 장군들이 혈지존을 외 면하고 중립으로 돌아서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혈지존이 스스로 양성한 세력과 백도의 힘이 부딪친다는 소리 인데, 혈지존에게 절정고수는 별로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천마강시와 왕부의 위세로 끌어모은 호위무사들. 그리고 그 호위무사들이 펼치는 진 법인데..." 혈지존의 호위무사들이 펼치는 진법은 무섭다. 특히나 승룡곡, 환우비령 의 힘은 백도 십대절학을 익힌 초극고수들에서 비롯되는데 그 힘이 혈지 존의 진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혈지존은 백도맹과 천년마교를 대비 하여 철저한 준비를 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다. 천검문의 진법이 그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서로의 무학이 결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 진법이 갖는 유용성이 다. 각자의 무학으로는 아무리 최고의 무학이라도 혈지존의 진법 안에 서 그물에 걸린 곤충과 같다. 그러나 만상건곤심결로 인해 환우비령의 고수와 승룡곡의 고수가 섞이고 백도맹의 무사와 신비삼패가 섞이며 그 에 더해 흑련이 가세하여 새로운 힘이 되었다. 하나의 진법안에 모두의 힘을 모으면 옥룡왕이 전혀 예상치 못한 조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 이 만상건곤심결의 분(分)합(合)조화(造化)와 분쇄(粉碎)의 이론이다. 설사 옥룡왕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다고 해도 조합에 따라 새로운 힘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의 무공의 조합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합공의 묘가 존재하는 진법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쪽에 만상건곤심결이 있고 그것을 깨달은 백이충 이 있는한 진법으로 천하만무(天下萬武)를 제압하고자 했던 혈지존의 계 획은 실패한 것이다. "천마강시가 문제인데 오히려 환우비령과 승룡곡의 절정고수들이 진법으 로 이들을 묵어놓을 수가 있다. 정 안되면 내가 직접 처리할 수도 있 다. 천마강시의 약점을 아는데다 광한신공을 완성한 상태인 내게는 삼류 고수나 천마강시나 별 차이가 없다." 이대로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바로 옥룡왕을 상대해야 한다. 오히려 옥룡 왕의 진법보다 천마강시가 더 큰 문제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백이충 자 신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 자신 이 가장 후회하는 과거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십혈존에 관한 일이 아니 고는 잘 나서지 않을 마음을 먹고 있다. 천마강시도 백도에서 처리할 방 법만 있다면 굳이 나서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백도가 옥룡왕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를 차 단해야 한다는 것인데." 백도가 모인 힘을 합해 옥룡왕의 공격에 전력을 다한다면 이를 두고보 지 못할 세력이 셋 있다. 하나는 천년마교, 또 하나는 변황동맹, 그리 고 십혈존이 거느린 세력들이다. 만약 백도와 혈지존, 둘이 싸워 한쪽 이 이겨도 만신창이가 될 상태이고 어부지리를 노리는 세력이 있다면 혼 자 큰 이득을 챙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무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황실마 저 욕심을 부린다면 천하는 암흑에 쌓이게 된다. 처음에는 백도의 상대로 옥룡왕의 일만 생각했다. 백도맹이 옥룡왕의 반 역을 막아 혈지존의 반역을 무림인의 일로 축소하여 황제가 무림에 간섭 할 구실을 배제하려 했다. 무림세력 안의 일로 해결하려는 것은 좋다. 백도가 이기면 황제는 무림인이 황실의 어둠을 몰아냈다고 좋아할 것이 다. 가장 최상의 결과이다. 허나 최후에 백도가 이기지 못하고 적이 자 금성을 장악하게되면 무림 안의 일로 축소하려고 했던 계획은 황실 자체 를 위험하게 한다. 그럼 백이충의 아버지 서문구랑이 군사를 일으켜 황 제를 구하려고 했던 애초의 계획만 못한 결과가 나온다. "금혈존이 변황동맹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면... "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문제였다. 이들이 북경으로 향한 속셈을 아직 모른 다. 처음에는 십혈존이니 변황동맹이니 천년마교이니 단순히 무림 안의 일로만 생각했다. 반역은 단지 옥룡왕 혈지존에 관한 일로만 생각한 것 이다. 따라서 백도가 반역을 무림인의 일로 축소하고자 상대할 적도 옥 룡왕 혈지존에 국한하여 생각했다. 그런데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북경으 로 향했단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힘을 합쳤다면 그 힘이 무 림만으로 만족하기에 너무 막강하다. 천하의 재력이 모조리 모인 현황방 이다. 그리고 변황 십만 무인이 모였다. 군자금과 무력이 모였다. 게다 가 이들을 장악한 자는 아마도 금혈존일 것이다. 혈존의 영혼을 가졌다 면 그 욕심으로 보아 황실마저 탐을 낼 수가 있다. 하물며 혈존의 영혼 을 가진 자들은 모두 옥룡왕 혈지존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옥룡왕과 합세 하든, 아니면 그 배후를 치고서 황실을 노리는 것이든 골치아프기는 마 찬가지이다. 최악의 경우 백도맹이 옥룡왕과 같이 선 그을도 상대해야 한다. 그럼 백 도의 힘으로도 약간 위태롭기는 하지만 호황령의 힘이 더해진다면 어떻 게든 될 것 같다. 그러나 나머지 세력은? 다른 이들은 혈지존이나 금혈 존과 같은 반역의 뜻이 없을까? 지금 백이충이 부랴부랴 백도와 옥룡왕 부가 충돌할 때 그 뒤를 칠 다른 세력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그런 우 려에서였다.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북경에 있다는 것은 옥룡왕과 합작했거나 아니면 단독으로 황실을 노린다는 것. 천년마교나 다른 십혈존도 그러지 말라 는 법이 어디 있는가? 대비하지 않았다가 그들에게 당한다면... 천하가 난세에 빠진다. 황실의 주인이 바뀌어 버린다." 현재로서 백도의 저력은 옥룡왕부를 제압할 수 있다. 호황부와 합쳐졌 을 때 북경에 있는 옥룡왕부와 금혈존, 변황동맹의 합한 힘을 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충분히 반역을 제압하고 황제에게 백도의 공을 내 세우며 무림을 변호할 수 있다. 하지만 금혈존과 변황동맹처럼 또다시 북경을 치려는 세력이 계속 나타난다면...? 만에 하나 최후에 백도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느놈이 끝가지 물고늘어 져 마지막에 모두 함께 공멸이라도 하게된다면? 엄한 놈이 살아남아 자 금성을 쓸어버린다면? 황제와 황족들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황실 자체 가 주인 없는 무주공산이 된다. 그 때에 서문구랑이나 서문대원수가 부 랴부랴 나서봤자 늦는다. 호랑이 없는 산에 토끼가 왕노릇을 한다고 천 하 각지에 능력도 없는 중간 세력가들이 난세를 일으켜 대 혼란이 일어 날 것이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옥룡왕과 연계가 되었든, 아니면 각자 다른 꿍꿍이로 북경에 와있든, 북경에 있는 이상 함께 처리 할 수 있다. 몰랐다면 배후를 무방비로 노출했겠지만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알게되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백이충과 백도가 북경에서 옥룡왕을 상대함과 동시에 천하에 산재 한 모든 다른 세력들도 대비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그들에 대 한 방비를 세워두지 않으면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대전 (大戰)이 벌어질 장소가 바로 황도 북경이고 그 대상이 황제가 있는 자 금성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위험이 일어날 사소한 확률 하나 하나도 놓 칠수 없다. 일단 천하의 세력 가운데 북경에 있는 적으로 확실하게 파악된 것은 옥 룡왕 혈지존. 그리고 금혈존의 현황방,변황동맹이다. 그럼 백도가 배후 를 조심해야 할 것은 나머지 십혈존과 천년마교인데... "일단 십혈존이라... 내 실수로 태어난 존재이기는 한데. 내가 이혼통제 대법같은 부작용 많은 대법을 사용하지만 않았어도..." 백이충은 십혈존의 이름에서 몇 개를 지웠다. 일단 자신에게 죽은 귀혈 존, 요혈존, 그리고 혈존의 영혼이 소멸되어 사라진 백혈존.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남은 것은 일곱이다. 백이충은 세 이름에 더해 금혈존의 이름도 지웠다. 일단 정체가 파악되 고 나면 적의 의도가 어떻든 상대할 계획이 세워질 터이니, 뒤통수를 맞 을만한 세력에서 제외된다. "금혈존과 변황동맹 덕에 더 이상 한가하게 천하를 떠돌 수가 없게 되었 다. 백도와의 연계는 아버지에게 맡기고 급하게 북경으로 돌아가 옥룡왕 과 변황동맹을 함께 감시해야 되겠구나. 그것이 호황령주로서 해야할 일 이니..." 십혈존 중에 넷의 행적이 파악되었다. 나머지는 여섯인데... "마혈존은 혈지존 주위를 멤돈다 했으니 역시 북경 근처에 있을 터, 배 후를 공격할 세력에서 제외. 갑자기 모습을 감춘 철혈존은 흑련이라나 세력을 버리고 사라졌으니 홀홀단신이라 역시 부하를 이끌고 황실을 노 리는 세력에서 제외할 수 있고." 백이충은 마혈존이 독혈존과 금혈존의 합공에, 철혈존이 광혈존에게 제 거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세력을 모아 백도와 옥룡왕의 배후를 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십혈존 중에 어부지리를 노 릴만한 세력을 갖출 가능성을 가진 것은 넷. "결국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것은 독혈존 구태립과 광혈존 우문노괴, 경 계할 것은 천뇌교에 있는 뇌혈존, 천년마교에 있는 패혈존 혁우비인가?" 그들 중에 우려할만한 세력은 천년마교와 천뇌교. 그 움직임이 잘 파악 되지 않는 독혈존과 광혈존이 세력을 모아 황실마저 노릴 가능성은 상당 히 적다고 백이충은 판단했다. "어떻게 해서든 천년마교와 천뇌교, 그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 다. 만약 그들이 옥룡왕의 반역에 관심이 없고 무림의 일에만 집중해 있 는 상태라면... 그냥 그 상태로 내버려두어 황도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마저 북경으로 몰려온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치의 앞 도 볼 수 없는 난전이 될 것이고 황제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너무 위험 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서문구랑이 군사를 몰고 북경에 와 전쟁 을 일으키는 것이 더 낫다. "천뇌교와 천년마교라. 그들이 배후를 노리지 않는다고 해도... 현재 고 스란히 세력을 보존하게 된다는 뜻인데..." 우려할 것은 그들이 북경에서 뒤를 노리지 않는다고 해도 백도에 문제 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옥룡왕과의 대전이후 백도맹이 그들을 상대할 전 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확신을 하지 못한다. 하물며 변황동맹과 금혈 존까지 상대하게 되었으니 미래는 더 암담하다. 황실은 안정된다 할지라도 백도의 피해가 크다면 무림은 천뇌교나 천년 마교에 넘겨주어야 할 판이다. 그러면 호황령주로서는 제몫을 해낸 셈 이 되겠지만 백도지존으로서는 의무가 실패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를 천황성이라 믿고 지존으로 따르는 백도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다. "걱정만 해서야 해결될 일이 하나도 없지. 일단 이 두 개의 서찰이 어 느 정도 일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는 수밖에." 백이충은 두 개의 서찰을 썼다. 한통은 천년마교에, 다른 하나는 천뇌교 에 가는 것이다. 백이충 자신은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금혈존과 변황 동맹이 북경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지 파악해야 했다. 그들을 무방비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백도는 모든 세력이 정비되는 대로 북경으로 오라고 했으니... 앞으로 한달 정도인가?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간은?" 봉황곡에 있는 봉황은 만조(萬鳥)의 우두머리이다. 특히나 봉황곡의 전 사들을 태우고 나르는 거대한 신조(神鳥)들은 모두 봉황의 명령을 통해 지시를 받을뿐, 사람의 명령을 듣지 않는 오만한 조류였다. 천년마교에 그런 봉황곡의 한 마리의 신조가 내려앉은 것은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아침이었다. 신조의 다리에 매어있는 서찰은 십만대산 천년마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 다. 서찰의 겉봉에 큼지막하게 다음과 같이 써있었기 때문이다. - 백도맹 위에 군림하고 환우비령을 수하로 거두었고 신비삼패를 수족으 로 삼아 승룡곡을 부리며 감히 백도를 통일했다고 자부하는 백도지존이 흑도의 하늘이자 수천년 마도의 종통을 이어온 천년마교의 위대한 지존 천마에 전한다. - 백도지존이라는 말은 처음들어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백도맹, 환우비 령, 신비삼패, 승룡곡, 이런 이름은 천년마교에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 다. 게다가 흑련에 굴복했다는 봉황곡의 신조가 서찰을 가져왔다는 것 은 그의 말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백도지존의 이름으 로 흑도지존에게 보내는 서찰. 그것은 즉시 천마에게 전해졌다. "그렇단 말이지. 흠." 천마는 서찰을 받아 읽었다. 동시에 만사지존 또한 일심혼원공으로 그 서찰의 내용을 알았다. 이제 천마와 만사지존은 두가지 생각을 할 수 있 는 한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천년마교의 소교주 쌍교잠룡 혁우비가 입 을 열었다. "할아버님. 무슨 내용입니까? 백도지존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백도의 지존이란 소리이겠지. 스스로 천무삼성, 환우오존, 천외구기의 후계자에다 신비삼패의 진전까지 이어 받은 자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만만한 필체가 진짜인 것 같구나." "백도에는 요혈존과 백혈존이라는 자가 있어 재기불능의 상태에 있다고 들었거늘. 그럼 그 백도지존이라는 자는 할아버님들께 무슨 내용의 서찰 을 보낸 것 입니까?" "별 다른 것은 아니다. 정사대전을 일으키지 말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 는 불가침 조약을 맺자는 구나." 천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교주전에 있는 혈 우비와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을 내보냈다. 그들이 나가자 만사지존과 천마는 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백도지존이라는 자가 보내온 서찰은 참 으로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들의 찌푸린 이마는 오랫동안 펴지 지 않고 있었다. 그날 천년마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천년마교의 장로들이 비 밀리에 교주전을 드나들었고 지나치게 많은 고수들이 이동이 교 내에 이 루어졌다. 그것을 보고 입술을 깨무는 자가 있었다. 바로 혁우비였다. "백혈존이나 요혈존 중에 백도를 장악한 자가 사부의 정체를 밝힌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혁우비에게 말하는 자는 바로 철마황이었다. 혁우비의 방 안에 있는 자 는 바로 천마황과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이었다. "늙은이들이 의심하면 우리들이 천년마교를 뒤집으려는 일이 들통날지 모릅니다. 사부.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천마황도 혁우비에게 허리를 숙였다. 금혈존이 제자인 혈지존을 찾아갔 듯이 패혈존은 자신을 배반한 세 제자와 손을 잡았다. 천마황과 혈사 황, 철마황은 혁우비의 눈빛을 보고 그가 사부 혈존임을 인정했고 그가 손을 잡자고 제의하자 기꺼이 손을 잡은 것이다. "사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지금 마교를 뒤엎으십시 오." 천마황은 연신 초조한 눈빛을 보였다. 서찰을 받은 이후 천마의 행동은 확실히 이상했다. 오늘처럼 소교주인 혁우비나 삼대호법 삼마황을 무시 하고 몰래 교내의 인사들을 불러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패혈존은 물끄러미 삼마황을 바라보았다. 과거 혈존 백가량이었을 때 자 신을 배반했던 제자들. 지금은 수족이 된 자들. 그들을 포섭하는 것은 쉬웠다. 천마와 만사지존에게 중압감을 느끼며 마음 속에 불안감을 풍기 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쫓기고 있는자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힘 들다. 패혈존이 각기 그들을 자극하고 빈틈을 보여주자 삼마황은 천년마 교의 소교주 혁우비를 암산하러 함정인줄 모르고 찾아왔다. 하나씩 제압 한 후 자신의 정체 패혈존 임을 밝히며 쌍영마공을 보이자 그들은 맥없 이 굴복했다. 그 때부터 천년마교에는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이 생겨났다. 삼마황은 패 혈존의 수하가 되었다. 삼마황은 패혈존이 자신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감격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혈존에 대한 공포심에 무조건 복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이성은 서서히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패혈존에게 복종한 이후 명철했던 머리와 야심은 점차 돌처럼 굳어가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바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 길이 마지막에는 실혼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 다. "백도는 아마도 요혈존이나 백혈존이 보낸 것이겠지. 늙은이들은 반신반 의하는 상태에서 그나마 조금 우리를 의심하는 것일테고... 어차피 준비 는 모두 끝마쳤다. 이제와서 혈천마련을 다시 천년마교로 바꾸려는 무모 한 늙은이들을 끝장내는 일만 남은 셈이다." 패혈존이 일어섰다. 좀 더 완벽한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천마가 눈치채 었다면 곤란하다. 그동안은 마교의 소교주로서 오히려 삼마황의 권세와 세력을 빼앗는줄 알고 뒤에서 모든 것을 지원하던 천마이고 만사지존이 었다. 그동안 천년마교의 대소사에 단 한가지 일도 빼놓지 않고 혁우비 를 참가시켰던 천마였다. 그런데 오늘 혁우비 없이 교내의 일을 뭔가 움 직이고 있다는 것은 서찰의 내용을 믿지는 않더라도 의심은 하고 있다 는 뜻이다. 패혈존과 삼마황이 교주전에 들었다. 수하를 통해 이미 많은 노마들이 교주전에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패혈존과 삼마황은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교주전에 들어서려하자 교주전 호위대장이 그들을 가로막 았다. "교주가 부르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줄 모르느냐? 천년마교에서 내 발길을 막을 곳은 없다." 패혈존이 나지막히 말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호위대장은 감히 패혈존의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때 안에서 천 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교주를 들여보내라." 천마의 말과 함께 패혈존은 교주전에 들어섰다. 교주전에는 천마와 만사 지존이 있고 마승상이 그들 옆에 있으며 음산귀수, 혈악대제, 백수마 존, 벽력쌍마... 등등 거마들이 즐비했다. 천년마교에 존재하는 중추 세 력의 노고수들은 모두 모여있는 것 같았다. 실재로 교주전에 있는 자들 중에서 일백세가 넘지 않은 자는 혁우비와 삼마황이 유일했다. "어인 일입니까? 교 내의 중대사에 소교주와 삼대호법은 꼭 참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패혈존이 천마와 만사지존에게 빈정거렸다. 천마와 만사지존은 두 눈을 꼬옥 감고 앉아있었는데 천마가 먼저 눈을 떴다. "비아야. 오늘 조사해보니 뜻밖의 사실을 여러개 발견할 수 있었다. 네 가 내게 설명좀 해 주겠느냐?"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현재 천년마교는 젊은 층 외당은 삼대호법이, 늙은 원로층 내당은 우 리 둘이 지배하고 있다. 천년마교의 젊은 고수들을 기른 것은 삼대호법 이고 늙은 이들은 모두 과거 우리 두 할아비가 거느리고 있던 자이니 하 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천마의 눈빛이 뭐라고 정의하라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네가 삼대호법을 장악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젊은 층을 지배하는 것도. 노년층의 고수도 하나씩 포섭하고 있지. 천년마교의 소교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미래의 교주가 되기위해 자신의 직계 세력 을 만드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두 할아비는 네가 어떠 한 일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허나 마승상이 이상한 말을 하더구나." 천마의 눈빛에 마승상이 바로 천마와 만사지존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에서 하나의 서류를 꺼내 읽었다. "천년마교 내에 일종의 만성지독이 퍼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증상이 없 다가 차츰 이성이 마비되고 꼭두가시가 되는 실혼인이 되는 독으로... 본 마교의 반 이상이 중독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두분 교주와 부교 주님의 음식에 만성지독이 계속 들어갔음을 요리사가 자백했고 교주전 의 직속 전투집단 천마대가 모두 소교주에 의해 가짜로 교체되었습니 다. 마지막으로 교주께서 지난 몇 년간 끌어들이신 천년마교 장로원의 장로들이 하나 둘씩 비밀리에 실종되었는데 그 이유가 소교주가 마강시 를 제조하기 위해 납치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천마가 괴로운 어조로 물었다. "네게 하나 물을 것이 있다. 너는 진짜 우리의 손자 혁우비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 이 몸은 진짜 혁우비가 맞습니다." 패혈존이 말하자 천마가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만사지존의 눈도 부릅 떠졌다. 엄청난 안광이 교주전을 물들여 뭇 고수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네 몸은 혁우비라? 그럼 네 영혼은 누구냐?" 콰앙! 천마와 만사지존이 갑자기 나딩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 둘이 그 누구보다 믿는 마승상. 천마가 돌아왔을 때 친부모가 살아돌아온 것 처럼 기뻐하던 마승상이 놀랍게도 둘의 뒤에서 기습을 한 것이다. 더 놀 라운 것은 천마강시의 몸에 혈마전혼대법으로 영혼을 옮겨놓은 천마와 만사지존. 그 둘의 몸이 마승상의 단 일장에 형편없이 나뒹군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이... 이게 어떻게 된..." 무려 십여장이나 날아가 몸을 부르르 떠는 천마와 만사지존. 온통 얼굴 에 경악의 빛을 떠올리며 더듬거렸다. 그들 뿐만 아니라 교주전에 있던 노마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하하. 수고했네. 마승상." 패혈존이 태연하게 웃으며 마승상 옆으로 다가섰다. 마승상은 자기 자신 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패혈존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패 혈존이 눈짓을 하자 마승상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물러나 허리 를 굽혔다. 패혈존은 비웃는 표정으로 나뒹군 천마와 만사지존을 바라보 며 그들이 앉았던 태사의 에 몸을 기대었다. 그는 아직도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천마와 만사지존을 비웃었다. "너무 천마강시의 몸에 욕심을 내었던 것이 탈이다. 차라리 다른 인간 의 불완전한 몸을 택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천마강시를 제조 한 것이 바로 이몸 패혈존 백가량이고 천마강시에 약점을 만들어 놓은 것도 바로 이몸이니까." "너... 너 진짜 혈존 백가량인가? 청마산에서 죽지않고 우리 손자의 몸 에 옮겨붙은 것이냐?" "너... 너 진짜 혈존 백가량인가? 청마산에서 죽지않고 우리 손자의 몸 에 옮겨붙은 것이냐?" 패혈존이 그들을 비웃었다. "후후. 네놈들의 손자는 없다. 오직 패혈존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 금 네놈들 제압된 몸의 상태를 못믿겠다는 표정으로 의심하지 마라. 천 마강시의 몸이라 만성독약이 아무 작용도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본좌가 만들어놓은 약점, 네놈들의 혈도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조 금씩 폐쇄시키는 약이었다. 무슨 서찰인지 모르겠지만 너희 두 늙은이 는 본좌의 정체를 아는 순간이 너무 늦었다. 이미 너희들의 몸 혈도 아 무곳이나 하나 점혈하면 제압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너희 두 늙은이를 제압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마승상이 보고를 올린 상태였단 말이다." 패혈존이 손을 들자 마승상을 비롯하여 삼마황, 그리고 교주전에 있던 일백여 노마중의 반이 대전을 포위했다.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노마 들 중에도 반은 패혈존에게 복종하는 표정으로, 나머지 반은 자신이 왜 지금 몸을 움직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 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는 오십여 노마들, 천마와 만사지존과 함 께 노마들을 자신의 충실한 인형들이 포위하는 모습을 보며 패혈존이 입 을 열었다. "본좌가 바로 패혈존 백가량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들은 마승상의 말은 모두 틀렸다. 본좌의 지시로 축소하여 보고한 것이다. 본좌는 이미 천년 마교 사분지 삼을 장악하였으며 늙은 놈 수뇌들 중에도 반을 장악했지. 거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있는 네놈들과 마승상 같은 놈은 실혼인으 로 만들었지만. 하하. 겉보기에는 별로 분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마들이 바로 반 실혼인이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 나가 실제로는 패혈존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꼭두가시였다. 본인도 알 지 못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꼭두가시. "크하하하. 그래도 본좌는 천년마교가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래서 교주전을 폐쇄하겠다. 너희 두 늙은이는 단순한 천마강시로 돌아갈 테고 내일 본좌는 천년마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할 것이다. 그리고 천년마교는 다시 혈천마궁으로 변할 것이다." 패혈존이 득의의 웃음을 날릴 때 천마와 만사지존의 입에서 우울한 목소 리가 들려나왔다. "그래도 설마 했거늘. 진정 혈존의 화신이로다. 우리들의 핏줄이 아닌 그 음흉한 놈의 환생이로다." "한가닥 기대를 걸었거늘. 우리들의 손자가 야망으로 이 늙은이들을 제 압하려 한 것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천년마교를 장악하고자 욕심에서 벌인 일이었다면 그대로 사라져 주려고 했거늘. 서찰대로 혈존의 환생이 었다니." 천마와 만사지존이 일어섰다. 방금 전에 제대로 몸도 일으키지 못해 버 둥거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움직였다. "허나 교주전을 폐쇄한 일은 잘한 일이다. 패혈존. 너를 죽여도 본교의 치부를 제자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아도 되므로." 천마와 만사지존이 손짓하자 마승상이 다시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 고 혼란스런 표정을 짓던 노마들이 모두 천마쪽으로 돌아섰다. "어... 어떻게?" 패혈존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에 적의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나고 이쪽 편이 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네놈이 혈존이라 하더라도 너무 자만했다. 네놈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훔쳐 우리 두 늙은이를 능가하는지는 몰라도 마공으로는 천마 본인을 따 를 수 없고 사공으로는 만사지존 늙은이를 따를 수 없다." "네놈이 본교의 장로와 내당 수뇌들을 실혼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진 작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네놈이 우리의 손자인줄 알고 그냥 놔두었 을 뿐이다. 그 정도 악심은 역대 마교주 모두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허 나 오늘 백도지존의 서찰을 받고 의심이 생긴 순간 서둘러 실혼인을 해 독했다. 네놈을 따돌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말에 패혈존은 입술을 곱앂었다. 오늘 백도지존의 서 찰을 보고 혹시나 해서 서둘렀는데 바로 그 사이에 천마가 실혼인으로 제압했던 교내 고수들을 해독시킨 것이다. 물론 모두 해소시킨 것은 아 닐 것이다. 시간이 단 하루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둘렀다고 해도 이 교주전 안에 있던 노마들에게만 해독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 금 교주전이 폐쇄된 만큼 천마는 모든 실혼인을 해소시킨 것이나 다름없 었다. 역시 한때 천하를 지배했던 천마답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몸이 멀쩡한 것이냐? 너희 둘의 몸에 집어넣은 독은 본좌가 직접 만든 것이고 너희들은 빼놓지 않고 먹었을 텐데? 그리 고 마승상의 일장도 거짓은 아니었는데?" 패혈존이 다시 묻자 천마와 만사지존이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패혈존을 쏘아보았다. "서찰에는 믿을 수 없는 말이 써있더군. 네 놈이 몸은 우리들의 손자이 지만 영혼은 혈존의 화신인 패혈존이라고. 그리고 천마강시의 몸에 있 던 약점과 그 해소점이 적혀있었다. 설마하면서도 점검해보니 진짜 그 런 약점이 있더군. 그 서찰이 없었으면 꼼짝없이 당할뻔했지." "그래도 그 서찰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시험해 본 것이다. 서찰은 거짓 이며 네놈이 우리 손자로서 단순히 욕심 때문에 마승상을 시켜 암습을 명령했기를 바랐다. 하지만 네몸은 진짜 패혈존이었던 것이다." 패혈존이 탄식했다. "요혈존인가? 백혈존인가? 본좌를 제거하기 위해 감히 이 두 늙은이를 이용했단 말인가? 참으로 혈존 백가량의 화신답지 않은 짓이로구나. 하 기야 그들 입장에서는 삼마황을 다시 수하로 거둔 본좌를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지." 패혈존의 눈에서 혈광이 일었다. 그의 왼쪽에는 혈영마공이 오른 쪽에 는 청영마공이 운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약되어 있는 것이지. 흐흐흐. 본좌는 진정한 혈존이 다. 이곳 천년마교에서 모든 절학을 접하는 순간 다시 한번 잃어버렸던 쌍영마공을 재현해 내었도다. 과거와 달리 동시에 쌍영마공을 운기할 수 가 있지. 크흐흐. 그것도 아수라독존마공의 영향이 남아 과거와는 비교 도 되지않는 위력의 쌍영마공이다." 패혈존의 몸에서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쏟아졌다. 뭉클뭉클 형연할 수 없 는 마기가 쏟아졌다. 천마황과 혈사황, 철마황 등 삼마황은 패혈존에게 복종하는 이십 정도의 노마들을 데리고 저마다 마공을 뿜어대었다. 아 직 교주전에 있는 노마들 중에 삼마황을 당해낼 수 있는 자들은 천마와 만사지존밖에 없었다. "패혈존. 스스로 혈존이라 자처한다면 우리와 승부를 내겠는가? 진다면 스스로 신변을 우리에게 맡기겠는가?" "패혈존. 혈존이라 자처한다면 우리를 이겨라. 우리를 이기면 천년마교 를 스스로 바치겠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몸은 거의 일체화되 듯 조화되었다. 과거 천마황과 혈사황이 다른 칠마황들을 제압할 때 일 심혼원공을 사용할 때의 모습과 같았다. 비록 청마산에서는 일심혼원공 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눈앞의 패혈존은 또한 과거 청마산 의 혈존이 아니었다. 쌍영마공을 발휘하되 아직 합일시키지도 못한 경지 였다. "크흐흐. 아수라천마! 아수라혈사!" 패혈존이 광소를 터트리며 두줄기 붉고 푸른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대었 다. 그 역시 혼자 천마와 만사지존에게 덤벼들었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대결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기가 뒤섞이며 더 커다란 마공으로 변 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천마와 만사지존을 덮쳐갔다. 능히 천마강시의 몸 을 단숨에 파괴시켜 버릴 정도로 엄청난 마공이었다. "일심혼원공. 천마현세." "일심혼원공. 혈사천하." 천마와 만사지존도 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에서 마공 중의 최강이라는 천마지존공과 사공 중의 최강이라는 천사음유공이 뻗어나왔다. 강하고 부드러운 두가지 기운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패혈존의 마공을 마주했다. 콰르르릉. 교주전 전체가 울리는 폭음 속에 패혈존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정신 없이 삼장이나 뒤로 물러섰다. 약간 창백한 안색이기는 허나 내상을 입 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천마와 만사지존은 오히려 끌어당겨지듯 패 혈존 쪽으로 쭈욱 앞으로 날아왔다. 입가에 약간의 핏물을 흘리기는 했 으나 그 눈빛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묵빛의 천마강기가 태산을 허무러트릴듯한 기세로 쏟아졌다. 그 강기를 사이롭고 요사스러운 사기가 교묘히 둘러싸고 있었다. 천마지존공과 천 사음유공의 조화. 마공과 사공이 하나가 되고 조화를 이룬다. 그 위력 은 강한 것을 부드러움이 감싸고 부드러움을 강함이 보완하는 힘이었 다. 패혈존이 허리를 숙였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의 기세가 이럴까? 바로 정면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묵빛의 강기가 폭우처럼 쏟아지고 그 넓은 범위를 사이롭 고 요사스러운 핓빛 사기가 그물처럼 감싼다. 패혈존의 허리가 탄력을 받아 펴지는 순간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바늘 끝 같은 틈을 파고 들어 패 혈존의 몸이 전진했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 다. 아차하는 순간에 패혈존을 시야에서 놓치자 만사지존과 천마는 서로를 등에 지고 경계를 한다. 그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둘의 사이가 벌어지며 바로 그 사이의 비좁은 공간을 패혈존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에 푸른 빛 과 붉은 빛이 어리는 순간 합일되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두가지 색이 동 시에 뻗어나와 만사지존의 뒤통수를 노린다. 천마가 기척을 느끼고 뒤 를 돌아보았을 때는 패혈존의 쌍영마기가 만사지존의 뒤통수를 꿰뚫고 있는 순간이었다. 퍼퍼퍽! 강기가 두부 으깨듯 만사지존의 머리를 박살내는 순간 만사지존의 머리 가 흐물거리며 마치 액체처럼 강기를 통과시킨다. 게다가 몸 전체가 흐 믈거리며 패혈존의 몸을 감싼다. 패혈존은 순간적으로 만사지존의 머리 를 노렸던 오른 손의 자유를 빼앗긴 것을 느꼈다. 오른 손에 청영마기 를 집중시켜 속박한 만사지존의 액체적 몸을 떨쳐내려는 순간 지척에서 천마의 묵빛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패혈존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패혈존의 오른 손을 둘러쌓던 액체가 사방으로 비산되며 패혈존은 자유 를 되찾았다. 그가 허공에 물구나무선 자세로 몸을 돌리자 천마의 묵빛 강기는 그의 머리끝을 스치고 바닥을 강타하여 대 지진과도 같은 흔들림 을 관중들에게 선사했다. 액체같은 만사지존의 몸도 순식간에 다시 뭉 쳐 사람으로 환원되며 패혈존의 몸을 쫓았다. 사사삭. 스스슥. 쉬쉬쉬쉬쉭. 패혈존과 천마, 만사지존은 서로의 몸이 한자의 거리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붙어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서로가 강기를 뿜어 공격하고 방어했 다. 그 와중에 서로의 몸놀림이 워낙 빨리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지 않았 다. 지척에서 뻗어오는 강기가 서로의 몸과 머리를 한치 차이로 아슬아 슬 하게 뻗으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서로 상대의 공격을 눈으로 쫓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전투 경험 으로 부딪치는 동작이 얼마나 계속됬는지 모른다. 무시무시한 강기가 바 람소리를 낼뿐 시원한 폭발음을 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모를 때, 천마 와 만사지존의 눈빛이 부딪쳤다. 갑자기 천마가 움직이던 몸을 바로 세웠다. 동시에 그의 몸을 향하던 패 혈존의 쌍영마기가 강기가 되어 천마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콰쾅. 벼락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왔고 천마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비 틀 두 걸음 물러섰다. 만근의 정련된 한철이라도 두부처럼 너덜거리게 만들 강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단지 두어걸음 물러선 것이다. 겨우 몸을 가눈 천마가 꾸역꾸역 바닥에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패혈존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몸을 떨었다. 천마의 가슴 에 강기를 뿌려대는 순간 알 수 없는 충격이 내부를 뒤흔든 것이다. "천마생사탄강(天魔生死彈剛)?" 패혈존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천마지존공 안에 있는 전설적인 호 신강기를 천마가 익혔으며 그것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 다. 천마생사탄강은 적의 공격만큼 같은 위력을 반탄시키는 호신강기로 내공이 강하면 적을 반탄강기만으로 쳐 죽일 수 있고 내공이 약하면 상 처입는만큼 적도 상처를 줄 수 있는 마공이었다. 다만 적이 자신보다 월 등히 강하면 적의 공격을 반탄시키기 이전에 이쪽이 먼저 으스러져 죽 을 수 있는 아주 모험성 짙은 마공이었다. 천마가 거의 전투 불능의 내상을 입고 죽은 피를 토하며 속을 다스릴 때 만사지존이 패혈존을 덮쳐왔다. 패혈존도 천마 만큼은 아니었지만 거 의 양패구상 격인 천마생사탄강에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할 정도의 내상 을 입었다. 이런 때에 요요롭게 빛나는 붉은색 사기는 죽음이 뻗은 유혹 의 손길 같았다. 패혈존은 이를 악물며 본원진기를 끌어올렸다. (실수다. 그래도 천마가 아닌가? 본좌 혈존과 더불어 고금제일마를 다투 는 자를 가볍게 여기다니.) 생명에 관계되는 본정(本情)을 끌어올리자 몸안으로 힘이 가득찼다. 하 지만 오래 견딜 수는 없다. 패혈존은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일장을 뻗었 다. 가볍게 흔들거리지만 그 속의 기운은 푸른 빛도 아니고 붉은 빛도 아니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마공, 쌍영마기를 합일시켜 뿜어댄 것이 었다. 커다란 모험이었다. 콰콰쾅! 만사지존의 상체가 거의 박살나다시피 했다. 피부가 녹아들고 내장과 뼈 가 드러났다. 그 사이로 붉은 심장이 파괴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만사지존은 싱긋 웃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녹아내리 던 피부와 가루로 변하던 뼈가 뭉쳐 다시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 만 만사지존의 얼굴은 미소와 다르게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죽기 일보직전의 병자의 안색과도 같았다. 패혈존 또한 마찬가지. 내부가 뒤엉키고 기혈이 엉망이 되었다. 만사지 존의 맞대응에 대한 충격 때문이 아니라 아직 쌍영합일마공을 재현해내 지도 못했는데 억지로 둘을 합했기 때문이다. 청영마공과 혈영마공이 서 로 반발하여 만사지존의 몇배나 되는 충격으로 패혈존의 내부를 흔들었 다. 경천동지할 싸움에 모두들 넋을 잃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패혈존이 제 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연신 피를 토하는 천 마나 새하얗게 질려 추운 듯 계속 몸을 떠는 만사지존은 패혈존을 공격 하지 못했다. 그러자 천마황과 혈사황이 몸을 움직였다. 천년마교의 노 마들이 깜짝 놀라 뛰어들 때 천마황이 패혈존의 몸을 껴안고 교주전 천 장을 향해 천마지존공을 뻗었다. 콰앙 하는 충격음과 함께 천정이 내려 앉았다. "오늘은 이만 떠나오. 허나 마도의 종주는 결코 천년마교가 아닌 혈천 마궁임을 기억하시오. 언젠가 마도의 종주자리를 돌려받으러 돌아오겠 소." 천마황과 혈사황이 동시에 같은 음성을 내뱉으며 패혈존을 데리고 떠올 랐다. 그 뒤를 이어 철마황과 이십여 노마가 뒤를 따라 떠올랐다. 천마 황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은 천년마교를 벗어나야 할 때였다. 패혈존이 천년마교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폐쇄된 교주전 안에서는 불리 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천마황은 교주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른 노마 들의 견제로 교주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패혈존의 양패구상 격인 결투를 보고 기회를 노려 교주전을 벗어났지만 이미 패혈존은 정신 을 잃은 상태였다. 패혈존이 천년마교를 포섭한 수단은 거의 실혼인을 만드는 수법이었다. 패혈존은 삼마황이 자신을 배반할까 두려워 자신이 포섭한 모든 수하에 게 자신의 명만 듣는 실혼대법이라는 통제수단을 사용했다. 실혼대법은 평소에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생활하다가 대법을 펼친 사람의 명 령을 받으면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무조건 인형처럼 명을 받드는 실혼인 을 만드는 대법이었다. 분명 천마는 교주전에 있던 노마들만 실혼대법을 해소시켰다고 했다. 외 부에는 자신도 모르게 패혈존에 포섭당한 실혼인 천년마교 제자가 무수 할 것이다. 교주전을 벗어났으니 이제 유리한 것은 패혈존인데 문제는 패혈존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지금 삼마황과 패혈존의 수하들은 자 신이 포섭 당한지도 모르는 상태의 실혼인들을 다스릴 방법이 없다는 것 이다. 패혈존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다. 곧 천년마교의 노마들이 뒤를 쫓아 올 것이다. 천년마교의 실혼인 도움 이 없으면 노마들의 숫자는 저쪽이 네배가 넘으니 이쪽이 너무 불리했 다. 지금은 결국 천년마교를 벗어나야 할 때이다. 지금 패퇴하면 다시 는 천년마교를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천마와 만사지존은 실혼대법을 해 소시킬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 시간을 주면 천년마교 내에서 패혈존이 애 써 펼쳤던 실혼대법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마황이나 혈사 황이 이십년간 키우고 또 천년마교에서 유지하고 있던 세력도 천마와 만 사지존이 천년마교 내의 것으로 녹여버릴 것이다. 결국 패혈존과 천마황 은 실패한 셈이다. "크으윽. 백혈존인지 요혈존인지 백도지존이라는 자의 서찰만 오지 않았 어도..." 천마황이 신음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패혈존과 삼마황, 그리고 이십여 노마는 천년마교 총단을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직 천년마교 전체 를 장악하지 못했기에 천마 측도 달아나는 자들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 지 못했고 교주전에 있던 노마들도 추격하는 기미가 안보였다. 아마도 더 이상 피해를 입기 전에 그들을 놓아줄 모양이었다. 저 멀리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 웅덩이 정도로 피를 토하던 천마가 개미만한 목소리를 내었다. "크으으. 이제 된건가?" "백도지존이라는 자가 신의를 지킨다면... 대신 본 마교는 오늘부터 십 년 정도 봉문을 해야 할 것이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머리 속으로 백도지존이란 자가 보낸 서찰의 끝머리 가 떠올랐다 - 중략 - - 그렇게 혁우비가 패혈존임이 증명되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 다. 제게는 혈존의 영혼을 제거할 능력이 있습니다. 천년마교가 앞으로 십년동안 봉문한다고 약속하시고 패혈존을 천년마교에서 쫓아낸다면 혁 우비의 몸에서 혈존의 영혼을 제거하여 천년마교의 후계자로서 돌려드 릴 것을 약속합니다. 백도지존 올림 - 천마가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실재로 아무리 천마강시의 몸이라해 도 내장이 거의 으스러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젠장.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간신히 이길까 말까인데 살려서 쫓아내야 하다니. 또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아무래도 이 몸이 먼저 죽을 거야. 오 늘은 운이 따랐어." "어쩌는 수 없지 않나? 우리의 핏줄은 그놈 하나뿐인데.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한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봐야지." 만사지존 또한 아주 좋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십년은 요상을 해야 간 신히 몸을 회복할 수 있을까 말까였다. 천마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백도지존이란 놈이 비아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가 있을까?" "패혈존의 상태를 너무 뻔하게 들여다 보았던 점. 우리의 몸이었던 천마 강시의 약점과 보완점을 꿰뚫어 보았다는 점. 그것을 따지면 백도지존이 란 놈도 혈존과 관계되어 있는 놈이야. 그렇다면 진짜 그럴 능력이 있을 지도 모르지.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그가 약속대로 비아를 되돌려주면 우리도 약속대로 계속 십년봉문을 하면 되는 것이고 비아가 되돌아오지 못하고 패혈존으로 죽는다면 우리도 봉문을 깨고 백도와 백도지존이란 놈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면 되니까." < 신녀제전 > 감숙에서 신녀교가 사라지고 천뇌교가 자리를 잡은지 제법 오래되었다. 천뇌교는 어디까지나 신녀교의 후신이라는 개념이 강했다. 비록 신녀의 명으로 스스로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감숙의 성민은 대부분이 신녀교도였 었다. 그 과거를 못잊어 종교세력에서 무림세력으로 탈바꿈한 천뇌교에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신녀교가 감숙의 절대적인 종교집단이었다면 신녀교가 헤체되면서 그 수 뇌 몇몇이 모여 다시 만든 천뇌교는 무림세력이었다. 한때는 백도맹과 동맹을 맺었고 혈천마련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천뇌 교의 교주 귀영신군은 스스로를 뇌혈존이라 불렀다. 그것은 감숙에 불안 한 징조를 가져오는 시초였다. 한달 전, 천뇌교가 전 감숙에 포고문을 붙였다. 그것은 신녀가 다시 감 숙에 강림한다는 포고문이었다. - 신녀가 천하를 어여삐 여기시어 그 은혜를 베풀고 하늘로 올라간지 벌 써 일 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과거 신녀교도들은 신녀의 은혜를 잊 지 못하고 있다. 신녀께서는 천뇌교주의 꿈에 현몽하시어 다시한번 감숙 성에 은총을 내리시겠다고 말하셨다. 신녀제전을 열어 그분의 강림을 맞 이하리니 과거 신녀교의 교도는 모두 신녀제전에 참석하기 바란다. - 감숙성 사람들은 아직도 신녀가 기적을 베풀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었 다. 성화라는 꽃가루를 이용하여 그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 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는지 감숙성 사람들 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신녀께서 천상으로 올라가며 신녀교를 잊으라 하였기에 잊었을 뿐이다. 신녀교의 정통을 이은 천뇌교가 신녀제전을 다시 열고 천상에 올라가셨 던 신녀의 강림을 기원한다고 하자 감숙은 난리가 났다. 감숙의 수십만 성민이 천뇌교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으니... 과연 대 장관이라 할만 했다. 반면 무림인은 천뇌교를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있었다. 과거 천뇌교가 섬 서를 장악했을 때 화산을 치기위해 동원했던 천뇌교도는 일반 백성이었 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고수가 되어 나타나 화산을 멸한 것이다. 그런 데 이번에는 천뇌교가 신녀를 팔아가며 대대적으로 과거의 신녀교도를 모으고 있으니... "뇌혈존 놈. 신경 좀 썼군." 감숙을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보고 놀란 자들 가운데에는 천 뇌교를 향하는 광혈존이 있었다. 그는 흑련에서 철혈존을 처리하고 난 직후 바로 감숙을 향해 떠났다. "천뇌교에서 섬서를 장악했을 때 이만고수를 동원했다고 했으렷다? 갑자 기 그렇게 많은 고수가 생겨났을리는 없고... 놈. 아마도 혈향초를 이용 했을 것이다." 광혈존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그의 외모 부터가 늙은 악취결개의 모습 이 아니고 과거 혈존 백가량의 모습과 흡사하게 변했다. 외모를 바꾸는 것쯤 광혈존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섯의 혈존의 파편이 모이자 서로의 혼백 조각이 동조를 일으켜 혈존의 기억 속에 있던 많은 것이 복구되고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의 복구또한 순조로웠다. 단지 혼백의 열 파편 중에 다 섯 조각이지만 서로의 공명으로 잃었던 부분까지 복구되어 광혈존 스스 로 생각하기를 과거 혈존의 칠할 이상의 모든 기억과 감정, 아수라독존 마공이 자신 안에서 복구되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그는 혈향초에 대 한 기억도 해 낼 수가 있었다. "애초부터 본좌의 전신인 혈존은 혈향초를 만들어내기만 했을뿐 재배에 성공을 못했어. 그런데 천뇌교가 재배에 성공을 했지. 뇌혈존 놈은 혈향 초를 만드는 비법과 천뇌교의 재배하는 비법을 동시에 가진 놈이지. 갑 자기 나타난 이만고수, 마음만 먹으면 동원한다는 수백만의 고수는 혈향 초를 이용한 것이 분명해." 광혈존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는 길 을 따라 같이 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모두 목적지가 같은 한 곳 이었다. 천뇌교의 총단이며 신녀제전이 다시 벌어질 곳. "과연. 감숙의 인원 전부를 끌어모으면 수백만도 되고말고. 이들을 혈향 초를 이용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삼을 셈이군. 흐흐. 뇌혈존. 하지만 네 놈의 계획은 모조리 본좌가 접수해 주겠다. 네놈이 만들 수백만의 고수 는 본좌 광혈존이 잘 이용해 줄 것이다." 광혈존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철혈존을 상대하고나서 자신을 얻 었다. 이제는 남이 죽인 시체를 이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짜들을 처리 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뇌혈존 또한 자신의 상대가 아님 을 굳게 믿었다. "흠. 놈도 혈근으로 인초합일을 이루었으렷다. 놈이 개량한 혈향초 혈근 의 힘이 어떤지 모르겠군. 그러나 본좌 광혈존의 복원되어가는 아수라독 존마공에는 어림도 없으리라." 과거를 기억하면 광혈존은 자주 온 몸이 흥분으로 떨렸다. 청마산에서 혈존은 그 얼마나 무적이었던가? 지금의 자신이 열이 있어도 단 일수에 박살낼 정도로 당시 아수라독존마공을 휘두르던 혈존은 무적이었다. 그 리고 그 아수라독존마공이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두 서넛의 가 짜만 흡수하면 아수라독존마공의 구결은 완성 될 것 같았다. 그때는 구 결이 완성되는 대로 그놈, 진짜의 몸을 가졌던 녀석을 피해 어디론가 숨 어 아수라독존마공을 수련하면 된다. 천마산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순식 간에 아수라독존마공의 진전을 높일 것이 틀림없다. 그 후에는 괴상한 백도신공을 익힌 놈을 쳐없애면 천하에 자신을 상대할 자가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적안미부는 요즘들어 고뇌에 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찾 아온 혈향초에 대한 악몽 때문이었다. 한때 혈향초로 천뇌교의 부활을 꿈 꾼적도 있었다. 혈향초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천뇌교의 술법으로 혈향초를 지배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혈향초의 피해는 너무나 컸다. 금단현상을 끊기 위해서는 갈수 록 많이 필요해지는 혈향초. 사람을 짐승으로, 야수로 만들어버리는 끔 찍한 금단현상, 그리고 맹목적인 충성. 초기 수만명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는 수백명의 희생으로도 충분한 혈향초를 재배할 수 있었지만 지간이 지나자 중독이 심한 수백명이 필요한 양을 만들기 위해 수만명을 희생시 켜야 했다. 그것은 아무리 적안미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끔직한 일이었다. 그녀가 치를 떨며 혈향초에 손을 떼려했을 때는 이미 그녀 자신도 혈향초에 지 배된 상태였다. 그리고 인초합일을 이룬 자신의 제자에 의해 신녀교가 성립되었다. 이미 혈향초에 지배된 적안미부는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 렇게 일년간 신녀교는 수많은 기적을 이루고 선행을 베풀었으며 속으로 수만명의 여자를 지하에 묻었다. 귀영신군이 도착하고 신녀교가 해체되고 백도맹이 난입하고 신녀가 죽었 다. 새로이 인초합일을 이룬 신녀가 태어나 중독을 해소시키고 귀영신군 은 천뇌교를 만들어 백도맹과 동맹을 맺었다. 적안미부로서는 꿈이 아닐 까 싶게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만 풀리고 있었다. 혈천마련의 침입도 막아내어 그 든든한 기틀도 세웠고 천뇌교의 위명도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았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뇌혈존이라니. 후우. 게다가 그 새로운 혈향초를 만들어내실 줄이야." 확실히 새로운 혈향초는 과거의 혈향초에 비해 폐해가 작았다. 중독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전같이 막대한 양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금단 현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사람을 광인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 다. 적안미부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뇌혈존이 혈향초를 개선했다해도 혈향초 는 역시 혈향초였다. 그 피해와 폐단이 적어졌음에도 혈향초는 여전히 사람을 중독에서 풀리지 못하게하는 마약(痲藥)이었고 사람의 마음을 홀 려 영혼을 빼앗는 귀화(鬼花)였으며 사람, 그것도 순결한 여인의 피로서 만 재배가 가능한 피의 꽃이었다. 혈향초는 사람의 이성을 빼앗고 맹목적으로 뇌혈존을 따르게 할 것이 다. 게다가 새로운 혈향초는 사람의 숨은 잠재력을 이끌어내게 한다. 이 끌어내서는 안될 생명의 힘을 단 한번에 폭발시키고 죽게 만드는 힘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일회용이라는 용도아래 뇌혈존은 수천, 수만, 수십 만, 수백만 끝도 없는 고수들을 부하로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돼. 오라버니의 뜻대로 따르면 안돼. 결국 이번 신녀제전에 모일 모 두를 혈향초에 중독시키는 것은 그들 모두의 생명을 빼앗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야."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신녀가 비참하게 죽은 것은 모두 혈근에 희생된 원령들의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뇌혈존은 신녀제전 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혈향초로 중독시키려하고 있었다. 이번 혈향초 는 피해는 적지만 대신 언젠가는 잠력을 폭발시키고 죽게되는 독약이었 다. 아무리 적안미부라도 새로운 혈향초를 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뭣을 할 수가 있지? 동작 하나하나를 감시받고 있는데." 갑자기 뇌혈존이라 자처하는 귀영신군은 심기와 무공, 그리고 사공까지 소름이 끼칠정도로 발전을 하였다. 그는 적안미부에게도 냉정한 시선을 보냈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뇌혈존은 혈향초와 인초합일을 이루어 이미 신녀교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던 천뇌교 교수들의 절대적 인 충성을 받고 있었다. 적안미부도 아무리 마음 속으로 혈향초 재배를 반대하지만 뇌혈존의 명령에 꼼짝도 못하고 그를 따르고 있었다. 뇌혈존 은 적안미부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뇌교 고수 들을 시켜 그녀를 감시할 정도로 철저했다. "오라버니가 인초합일을 이룬 이상... 천뇌교에서 그를 거역할 길은 없 어. 아아. 천하가 피에 잠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따라 야 하다니. 천뇌교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적안미부가 눈물을 흘릴 때 그녀의 방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뇌혈존의 명령에 의해 그 누구의 출입도 철저히 통제된 적안미부의 방 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보고 적안미부는 나지막히 비명을 질렀다. "당신은..." "오랜만이네요. 천뇌교에서 신녀를 찾는다길래 찾아왔어요. 그런데 표정 을 보니 별로 안반가운가 보지요?" 적안미부의 앞에 나타난 여인은 옥수비연 금혜연, 신녀교에 신녀로 알려 진 여자였다. 금혜연이 백이충의 서찰을 가지고 적안미부를 홀로 찾아온 것은 백이충 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백이충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천뇌교는 혈향초의 지배를 받고있어. 소매가 그 중독을 불어주고 는 있지만 완전히 풀어주지 못했지. 따라서 인초합일 상태의 소매는 천 뇌교 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이야." 백이충 스스로도 금혜연의 안전을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지 않다 면 금혜연을 홀로 감숙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금혜연 도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확신하고 있었다. 감숙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금혜연의 얼굴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녀 를 보면 허리를 숙이고 먼저 인사를 하고 존대말을 하였다. 객점에 들리 면 돈을 받지 않고 음식점에 들리면 시키지도 않은 최고급 요리를 가져 왔다. 모두가 과거 신녀교에 들어 한때 성화라고 알려진 혈향초의 영향 을 받은 사람들이다. 금혜연이 그 중독을 풀어주고 있어 폐단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마나 여전히 혈향초의 지배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인초합일의 금혜연에게 무조건적인 봉사와 존경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금혜연은 감숙에 도착하여 단 한푼의 돈도 써보지 못했다. 보이는 사람 마다 금혜연에게 더 해주지를 못해서 난리였다. 포목점에 들리면 고급 비단을 줄줄이 내오며 금혜연에게 안기려 들었고 나그네를 털어먹고 살 아가던 산적도 금혜연을 보고는 주머니를 털어 노자돈에 사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였다. 천뇌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신녀교에서 비롯된 만큼 본능 적으로 금혜연에게 복종하고 명을 들었다. 뇌혈존으로 귀영신군이 자처 한 이후 엄하기로 소문난 천뇌교 총단의 경계망이었다. 그런데 금혜연 이 도착하자 경비를 서던 무사는 상전을 대하듯 허리를 숙였고 그녀가 안내를 부탁하자 친절하게 적안미부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적안미부의 처소는 금지(禁地)인지 수많은 고수가 경비를 서고 있었고 금혜연을 안내한 무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으나 금혜연을 보자 당장 얼굴표정이 바뀌어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절대 금혜연의 명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적안미부는 금혜연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도 혈향초 에 중독된 사람들 치고는 가장 저항력이 많은 것이 적안미부였다. 아마 도 천뇌교의 술법 탓일 것이다. 일단 금혜연을 보고도 복종의 자세보다 는 경계와 놀람의 표정을 지었으니까. "오랜만이네요. 천뇌교에서 신녀를 찾는다길래 찾아왔어요. 그런데 표정 을 보니 별로 안반가운가 보지요?" 금혜연은 백이충이 써준 서찰을 적안미부에게 내밀었다. 적안미부는 놀 란 표정으로 서찰을 받아보았다. "백도지존? 혈존이 백도마저 장악하여 백도지존이 되었나요?" "혈존은 죽었어요. 지금은 귀혈존 같은 혈존의 분신들만 남았죠. 그리 고 백가가는 이제 혈존의 영혼에서 완전히 벗어났답니다. 이제는 백도지 존이에요." 금혜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금혜연이 계속 읽으라는 표정을 지었다. 적안미부는 서찰을 읽어나갔다. "지금 저보고 오라버니를 배반하라고 하는 건가요? 분명 이 서찰에는 그 렇게 적혀있는 것 같군요." "배반이 아니에요. 혈향초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잘 아실거예요. 겨 우 혈근을 없앴는데 또 다시 만들다니. 그건 천의를 어기고 나중에천벌 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에요." 금혜연은 여러번 얼굴색이 변한 적안미부를 설득했다. "어느 것이 진짜 천뇌교를 위한 일인지 생각해보세요. 우리 백가가는 호 황부주이기도 하고 호국대원수의 손자이기도 해요. 만약 천뇌교가 혈향 초로 벌이는 만행을 멈추지 않는다면 백만황군을 보내 천뇌교를 토벌할 거에요. 그리고 천뇌교는 영원히 저주받을 사교로 이름이 남겠지요. 그 것을 원하나요?" "하지만 어떻게 오라버니의 손에서 벗어나란 말이죠? 천뇌교는 철저하 게 오라버니를 숭배하는 집단으로 변한지 오래에요. 혈향초가 악마의 꽃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오라버니를 거역하지 못했어요. 그것을 어떻 게 바꾸겠어요?" "호호.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저와 부교주가 손을 잡으면 불가능하지 않아요." 금혜연은 적안미부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알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금혜연은 바빠졌다. 일단 금혜연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적안 미부와 함께 뇌혈존을 만나러 갔다. 적안미부는 금혜연을 이번 신녀제전 에서 신녀노릇을 할 여인이라고 밝혔다. 적안미부가 어떤 술법을 금혜연 에게 베풀었는지 뇌혈존은 금혜연이 혈향초의 인초합일을 이룬 몸이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가? 과연 비슷하군. 과거 신녀교도들이 모이면 그들의 마음을 지배 하여 충성을 이끌어내는 일은 본좌가 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날 가짜 라는 것이 들키지 않도록 신비한 자세만을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 뇌혈존은 금혜연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혈향초의 지배 때문에 너무 바빠 다른 것은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혈향초의 지배력을 완전히 믿고있었는지 모른다. 그 덕분에 금혜연은 뇌 혈존의 의심없이 천뇌교의 여기저기를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었다. 금혜연은 편하게 천뇌교를 오가고 그 수뇌들을 방문했다. 과거 신녀교 시절부터 있던 고루흑살, 웅산이괴, 일점혈, 운무팔협, 호면수라, 감숙 일객 등의 쟁쟁한 고수들, 황사칠십이풍의 풍주들을 비롯해서 새롭게 뇌 혈존이 포섭했던 무수한 고수들까지. 백도맹이 어지러워지고 천년마교 가 십만대산에 몸을 사리자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흑련과 천뇌교에 몰 린 모양이었다. 다행인 것은 기존 신녀교 시절부터의 고수들이 순순히 금혜연에게 복종 한 것은 물론 새롭게 뇌혈존에 의해 포섭된 고수들도 금혜연에게 복종심 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뇌혈존이 일단 천뇌교에 든 모든 고수를 새 로운 혈향초에 중독되게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인초합일을 이룬 금혜 연에게도 복종하게 된 것이다. 뇌혈존과 금혜연. 혈향초에 중독된 천뇌교의 사람들은 이 두사람에게 복 종한다. 하지만 뇌혈존은 금혜연이 천뇌교에 있음을 알지 못했고 금혜연 은 뇌혈존이 있음을 안다. 금혜연은 교묘하게 뇌혈존의 지시를 조건에 들어맞는 경우 어기도록 지시를 내렸고 뇌혈존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여 천뇌교의 일인독재 명령체계가 조금씩 틀어짐을 눈치채지 못하 고 있었다. 금혜연이 천뇌교의 거의 모든 중요인사들을 만나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 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들 모두를 적안미부의 방에 불러모았다. 바로 신녀제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제 정체를 알고 계시겠지요? 신녀교때 뵌 분도 있고 요근래 뵌 분도 있 습니다. 과거 신녀교를 해체할 때 신녀행세를 하던 금혜연입니다." 금혜연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실로 혈향초의 위력은 놀라워 금혜연 이 무림칠미이자 백도맹의 인물인 금혜연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새 로 가입한 사람들 조차도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명 을 받들 준비만 하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오게된 것은 바로 신녀제전 때문입니다. 지금 천뇌교의 교 주는 잘못하고 있어요." 그동안의 작업으로 은근히 천뇌교도들에게 뇌혈존보다 자신의 명을 따르 도록 여러 가지 명령체계를 복잡하게 바꾸어 놓았기에 뇌혈존을 공격하 는 말을 해도 그 누구도 금혜연을 반박하지 않았다. 만약 적안미부가 뇌 혈존을 비방했다면 당장 천뇌교도들은 당장 그녀를 공격했을 것이다. "과거 신녀교도에 있던 사람들은 혈향초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고 있 는지 알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과거의 신녀를 배반하고 천뇌교를 꾸미 고, 신녀교를 해체한 것도 혈향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지요. 그 일 에 제가 앞장을 섰고 지금의 천뇌교 교주가 선봉을 섰습니다. 그래서 혈 향초의 마수에서 모두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뇌교주는 다시 그 가공할 마약인 혈향초를 다시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까지 써가면서." 명령을 내려도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향초의 마력에 의한 것이 다. 따라서 금혜연은 되도록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여 설득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과거에도 신녀교의 교주의 절대적인 지배력이 있는데도 모두 들 금혜연을 따라 신녀교를 배반한 것은 그들의 이성에 설득하여 그들에 게 이득이 가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천뇌교를 아끼는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잘못된 겁니다. 혈향초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는 어땠지요? 감숙에서 천뇌교를 거역할 문파가 없었습니다. 백도맹과 동맹을 가지고 든든한 기반을 유지 할 수 있었고 혈천마련의 침입도 물리쳤습니다. 그대로 천뇌교를 유지했 다면 감숙에서 제일가는 명문으로, 옛 사도의 종주인 천뇌교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겁니다. 무림인 모두가 부러워하는 문파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겁니다." 금혜연의 말에 누군가 반론을 제시했다. "지금도 천뇌교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 세력입니다. 섬서를 병합하고 화산을 멸문시켰습니다. 과거보다 더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금혜연이 그를 비웃었다. "그래요? 누구의 힘으로 말입니까? 천뇌교 자체의 힘으로 그런 일을 벌 였습니까? 아니면 혈향초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벌였습니까?" "혈향초도 교주의 힘으로 이룬 천뇌교의 힘입니다. 신녀께서 말하시는 천뇌교와 혈향초는 무엇이 다릅니까?" "과거 신녀교가 왜 망했는지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단순히 혈향초의 노 예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사람의 피로 피어나는 혈향초를 계속 가꾸어 나갈 것입니까? 신녀교는 감숙인 모두가 존경하는 선행을 했음에 도 백도맹이 공격하고 내부에서 반역하고 군대가 노려 패망했습니다. 모 두 혈향초라는 마물로 인한 희생이 컸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혈향초를 이용한다면 천뇌교의 앞날도 뻔합니다." 금혜연이 여기까지 말하자 적안미부가 한숨을 쉬며 금혜연의 말을 보충 했다. "신녀께서 알아보신 바에는 황실에서 천뇌교의 일을 눈치채고 있다고 합 니다. 만약 혈향초를 제거하고 마약을 불태우지 않으면 백만의 황군으 로 천뇌교를 공격하고 세세토록 천뇌교를 천하공적의 사교로 지정하겠다 고 했습니다." 적안미부의 말에 모두들 웅성거렸다. 혈향초에 지배당하고 있기는 하지 만 이성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황군의 공격대상이 되고 천하공적으 로 몰리면 살아남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있었다. "천뇌교주는 혈향초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주를 따라 후세에 영원토록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잠시 물러 나 새로운 천뇌교의 명문으로 거듭나는데 한팔을 거들겠습니까?" "신녀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원하십니까?" "과거 적안미부가 은거하여 세력을 키우던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가 부교주 적안미부와 함께 그곳에 은거하셔서 세력을 키우고 혈향초의 일이 잊혀진 다음에 다시 무림에 나오십시오. 그때 천뇌교를 비방할 세 력은 아무데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적안미부를 새로운 천뇌교의 교주 로 추천합니다." "하면 내일의 신녀제전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은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모든 혈향초를 불태우겠습니 다. 내일 천뇌교주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혈향초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아있다면 다시 혈향초로 재기하려 하겠지만 여러분이 없다면 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내일 신녀교가 사라진 뒤를 이어 천뇌교가 잠시 세속에서 은거하겠다고 발표하겠습니 다. 그러면 혈향초를 지배했던 일은 아무도 모르게 덮어질 것이며 교주 가 모습을 감춘 이후 한 십년뒤에 여러분이 다시 감숙에 천뇌교의 이름 으로 등장하시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혈향초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 중독은 어떻게 합니까?" "전에 신녀교를 해체했을 때와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일년에 한번 씩만 만나면 됩니다. 중독은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금혜연의 말에 설득된 표정을 지었다. 하기는 새로이 천뇌교 에 가입된 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끔찍했던 신녀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었 다. 다만 뇌혈존의 인초합일의 지배력에 벗어나지 못하여 그를 따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과거 신녀교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금혜연이 그 중 독을 벗어나게 한다고 하고 같은 지배력으로 그들로 하여금 은거를 설득 하니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신녀교 때에는 귀영신군이 신녀교도를 규합하여 적안미부를 배반하고 금 혜연의 힘을 빌어 신녀교를 해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안미부가 금혜 연의 힘을 빌어 뇌혈존을 배반하는 것이다. 참으로 인과는 돌고도는 것 같았다. 고루흑살이 금혜연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내일 신녀제전에서 우리가 사라지고 신녀만이 남아있어 혈향초를 모두 불태운다면... 교주가 신녀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신녀의 몸에 이상이 있으면 남아있는 혈향초의 기운 때문에 우리는 다시 교주를 찾아 가 그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뇌혈존은 절대 저를 해치지 못합 니다." 금혜연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백이충에게 절대 안전이라는 확 답을 받고 온 것이다. 혈존에게 동화되었던 백이충이든, 혹은 전대의 혈 존이든 금혜연을 해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백이충이라면 당연 히 금혜연을 사랑하고 있으니 해치지 못하는 것이고 혈존이라면 악산산 의 그림자를 금혜연에게서 보고 해치지 못한다. 즉 적어도 혈존이라 자 처하며 백가량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한 절대 악산산의 얼굴을 하고 있 는 금혜연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 백이충의 장담이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뇌혈존이 당황하여 목을 축였던 술잔을 내던졌다. 쨍그렁 거리는 소리 와 함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모두의 시선이 뇌혈존에게 모 아졌다. 지금은 신녀제전이 벌어지고 한참이 지난 이후였다. 신녀제전이 벌어졌던 처음부터 천뇌교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뇌 혈존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를 신경쓸 틈이 없었다. 천뇌교 총단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수십만이었고 심지어 도시 난주 밖까지 사람들이 신 녀를 부르며 몰려들고 있었다. 그 바글거리는 사람을 뚫고 이것저것 따 지고 지시할 틈이 없었다. 이들 모두가 자신의 부하가 된다고 생각하여 뿌듯한 마음만 들었을 뿐이다. 천뇌교도들이 없이도 신녀제전은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과거 신녀교도들 이 저마다 일을 맡겨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뇌혈존은 더더욱 수하들이 사라진 일을 확인하지 못했다. 적안미부에게 거의 모든 일을 맡겨놓았기에 천뇌교 내전에 그들이 모여있으리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신녀를 축복하며 성배를 드는 시간이 되었다. 성배는 한잔의 술 이 대신한다. 자리에 모인 수십만 인파, 모두가 준비된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뇌혈존이 심혈을 기울인 새로운 혈향초 가루가 타져 있 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마신 술잔은 그냥 보통 술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어이하여 성화가 성배에 없단 말인가?" 뇌혈존이 노호를 터트렸다. 모두들 성스러운 신녀의 말씀 도중에 끼어 든 천뇌교주를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혜연이 입을 열었다. "신녀교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돌본 이후 천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러나 아직까지 저를 기다리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속의 일은 세속 안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제가 다시 여러분들을 보게 된 것은 과 거 제가 남긴 말을 상기시켜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저를 잊으십시 오. 성화를 잊으십시오. 언제까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을 위하는 제 바람입니다. 모든 것을 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 그것을 부탁드리러 제가 온 것입니다." 금혜연의 말은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펴져 나갔다. 동시예 뇌혈존의 얼 굴이 노기로 터질 듯 붉어졌다. 신녀를 부정하다니. 성화(혈향초)를 부 정하다니. 그것은 뇌혈존의 모든 계획을 부정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건방진 것. 너는 신녀가 아니다. 누구이길래 신녀행세를 하며 헛소리 를 지껄이는 것이냐?" 뇌혈존이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뇌혈존의 말에 신녀교도들이 깜 짝 놀라 금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금혜연이 면사를 벗었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과거 신녀를 본 적이 있는 신녀교도들이 탄 성과 환호의 소리를 내었다. 뇌혈존이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그 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으으... 산산의 얼굴이다. 너는 과거 신녀교를 해체했던 바로 그녀로구 나." "그렇습니다. 저를 보시고도 제가 신녀가 아니라고 부정하시겠습니까?" 금혜연이 큰소리를 쳤다. 그녀는 뇌혈존이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을 확 신했다. 뇌혈존의 눈이 살기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의 손은 연신 움찔거 리며 살수를 펴고싶은 마음을 대변했다. 그 기세에 금혜연도 찔금거릴 정도였다. "천뇌교주가 감히 신녀를 위협하고 있다." 누군가 큰 소리를 쳤다. 난주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 에게 신녀는 신이다. 감히 천뇌교주가 신녀를 위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뇌교는 신녀를 받들며 감숙에서 세력을 키웠던 단체 가 아니었던가? "으으으. 네가... 네가... 악산산... 네가 나를 방해하다니." 뇌혈존의 눈에 진득한 갈등이 출렁거렸다. 자신의 위대한 계획을 정점에 서 바꿔버린 적. 그러나 그의 기억속에 악산산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소 중한 존재였다. 죽이고 싶은 마음과 그녀를 해쳐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심하게 충돌했다. "너를...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뇌혈존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금혜연에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온 통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금혜연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백이충의 말 만 철썩같이 믿었거늘, 설마 뇌혈존이 살수를 쓰려고 다가올 줄이야. 십혈존은 혈존이면서도 혈존이 아니었다. 그들은 혈존의 파편과 분신의 영혼이 결합된 존재였다. 그래서 스스로 혈존이라 칭하면서도 혈존이라 면 결코 행하지 않을 일을 간혹 저지르곤 했다. 만약 혈존이라면 금혈존 과 독혈존처럼 절대 서로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혈존이라면 금혈존처 럼 이제자 법존을 끌어들이거나 첫째 제자 혈지존과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혈지존이라면 마혈존처럼 배교를 수하로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 이다. 혈존이라면 패혈존처럼 자신을 배반한 삼마황을 수하로 거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혈존이면서도 또다른 존재이기에 혈존이라면 할 수 없는 일도 저지르는 것이다. 뇌혈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혈향초에 미친 혈존이었다. 진짜 혈존이었 다면 어떤 경우든 악산산의 얼굴을 한 금혜연을 해칠 생각을 먹지 못했 을 것이다. 그러나 광분한 뇌혈존은 금혜연을 해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엄마야. 어떡해? 뇌혈존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신조를 타고 도망가려 고 했는데.) 금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쾅 하는 폭음이 울렸다. "감히 산산의 환생을 해치려고 하다니. 네놈은 혈존 중에서 가장 혈존 의 자격이 없는 놈이다." 금혜연의 앞에서 노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식은 땀을 흘리며 금혜연이 고개를 들다가 너무 놀라 딸국질을 했다. 거기에는 또 다른 혈존이 있었 다. 진짜 혈존과 비슷한 혈염 혈발을 갖춘 자. 바로 광혈존이었다. 그 의 시선은 몹시 끈적거렸고 금혜연에게서 떨어질줄 몰랐다. 그 시선을 받자 금혜연은 온 몸에 뱀이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짜 혈존이었다면 금혜연을 애증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나 광혈존은 탐 욕의 눈빛으로 금혜연을 바라보았다. "네... 네놈은 누구냐? 너는 가짜로구나." "으하하하. 네놈의 입에서 감히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가장 혈존같지 않은 놈. 악산산을 부정하는 자체가 바로 네놈이 가장 혈존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감히 그녀에게 손을 쓰다니." 광혈존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발하며 뇌혈존에게 다가갔다. 그 기세에 저 도 모르게 뇌혈존이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은 본능이 불러오는 공포 에 하얗게 질렸다. "너... 너는 광혈존이 아니냐? 절대 절대 이럴 리가 없다. 분신치고 제 일 약한 놈이 네놈이거늘..." 뇌혈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듬거렸다. 그는 자신이 광혈존의 상대 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광혈존의 몸에서는 모든 혈존 이 잊어버렸던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이 조금씩 퍼져나오고 있었다. "하하하. 열 중에서 다섯이 내 안에 있다. 네놈도 스스로 혈존이라 생각 한다면 네 영혼을 내놓아라. 내 안에서 진정한 혈존이 되어라." "으으. 네놈. 가짜 혈존들의 영혼을 빨아먹었구나." 뇌혈존이 놀라 벌벌 떨었다. 자신은 절대 광혈존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 순 비교를 해도 광혈존은 뇌혈존보다 다섯배 강하다. 그런데 아수라독존 마공을 어느 정도 복구한 광혈존은 뇌혈존을 어린애 다루듯 할수 있었 다. (그래. 그렇다. 혈존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다른 놈의 영혼을 흡수하 는 일이다. 천뇌교의 술법을 사용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진작 그런 방법 을 쓸 것을... 약한 놈부터 먹어치울 것을. 괜히 천하를 장악하는 것이 본좌가 진짜 혈존으로 인정받는 일이라 생각하여 무리하다가 오늘의 위 기를 맞는구나.) 뇌혈존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에는 갖가지 사술과 온갖 기기묘묘한 술법이 숨어있었다. 혈향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뇌혈존이 혈존의 부 분중에서 가장 요약하고 잔인한 부분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만가지 술 법과 사술이 단 한가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광혈존 앞에서 뇌혈존은 고 양이 앞의 쥐였다.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광혈존은 기분 좋다는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뇌혈존을 안중에 두 지도 않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금혜연을 시선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그 는 금혜연을 납치할 생각이었다. 악산산의 환생은 당연히 자기 것이어 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며 동시에 백도의 신공을 익힌 백이충을 위협할 인 질도 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금혜연을 신체적으로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으으.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 금혜연이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를 따라 광혈존의 시선이 이동 하자 뇌혈존이 갑자기 몸을 날려 달아났다. 광혈존이 비웃음을 지으며 뇌혈존의 신형을 따라 움직였다. 뇌혈존도 빨랐지만 광혈존이 더 빨랐 다. 뇌혈존이 돌맞은 개구리처럼 파르르 떨었고 그의 머리는 광혈존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네놈이 다섯 번째의 희생물이다. 뇌혈존." 광혈존이 소리를 지르며 그의 정혈을 빨아들이려 했다. 그 순간 뇌혈존 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광혈존의 안색이 변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사술을 이용해 달아났구나." 광혈존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발을 굴렀다. 십혈존의 하나하나의 영혼 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들을 흡수해야 광혈존은 진짜 혈존에 접근하는 것이고 백이충에 대항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를 놓친 것이다. 광혈존은 몸의 기를 퍼트려 뇌혈존이 달아난 곳을 추적했다. 그가 달아 난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뇌혈존을 따라가지 못하고 광혈 존은 머뭇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겁먹은 표정의 금혜연이 있었다. "으으. 결정했다. 산산. 그대를 찾는 것은 다음의 일이요. 어차피 백이 충을 죽이면 그대는 내것이 될 것이니... 지금은 뇌혈존을 쫓는 것이 먼 저요. 그대를 내버려두는 본좌를 용서하시오." 광혈존의 애타는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퍽하고 사라졌다. 그제 야 긴장이 풀려 온 몸이 추욱 늘어지는 금혜연이었다. 그녀의 귀로 신녀 교도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 듯 크게 울려퍼졌다. "와아. 위대하신 신녀를 천뇌교주가 위협하자 하늘의 신장이 내려와 쫓 아보냈다." "신녀를 받들 천뇌교주가 미쳐 신녀에게 반항하자 하늘이 붉은 수염의 신선을 보내 천벌을 내렸다." "천뇌교주는 천하를 뒤흔든다는 거물인데 신녀의 호위신장에게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신녀는 역시 신이시다. 하늘의 천장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오오. 신 녀이시여." 환호속에 금혜연은 쓴 웃음을 지으며 몸을 피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쨋튼 백이충이 지시한 사항은 이해했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린 백이충 을 만나면 단단히 꼬집어 주어야겠다고 결심한 금혜연이었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 7권 분량 끝입니다. 원고 넘기고 일주일 안에 책이 나온다는 군요. 책이 나오면 즉시 공지하고 지울 예정입니다. -------------------------------------------------- 혈존무적6pp.txt 제 목:[연재] 혈존무적-상황을 구하다 관련자료:없음 [20521]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5-15 23:01 조회:711 <상황을 구하다.> 백이충이 북경에 돌아오면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북경의 성문 출입 통 제가 풀린 것이다. 현재 옥룡왕의 입장에서는 자금성을 강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암묵적으 로 소문이 퍼진 것이었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옥룡왕 입장 에서는 조금이라도 천하에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알만한 사 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 옥룡왕의 반란이었지만 그래도 공식화 된 것과 암 중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옥룡왕은 북경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최대한 외부와의 왕 래를 통제해야 했다. 황도 북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하의 태수와 성주들이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정확한 사항을 알 길이 없애 섣불리 움직 일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황도에서 제대로 된 명령이 내려오고 중신 들과 연락도 된다. 다만 황제의 측근의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려 첩자를 보내도 옥룡왕의 수하에 의해 족족 처단 될 뿐이다. 주변 정황만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옥룡왕이 황제가 되려 하 는구나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옥룡왕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 도 아니고 겉으로는 자신이 포섭한 중신들을 내세워 와병중인 황제가 서 신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형식을 띠고 있기에 병권을 가진 자나 관리들 은 짐작만으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옥룡왕이 성문을 활짝 열어버린 것이다. "이건 자신감의 표현인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백이충이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미 지선(地仙)이 된 백이충이 세속의 일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은 굳이 생각하려 하기 때문이 다. 천지를 다스리고 우주를 내 뜻대로 하는 백이충의 능력은 마음만 움 직이면 쉽게 옥룡왕부의 속셈을 알아볼 수 있다. 눈만 감으면 바람이, 자연이, 나무가, 귀신이 그 주변에 맴도는 모든 정보를 백이충에게 보고 한다. 하지만 백이충은 자제했다. 자꾸만 생겨난 권능을 쓰고싶지만 지 금의 자신은 퇴보해야 한다. 애써 잊으려는 경지를 자꾸 떠올리면 안 된 다. "안 돼. 안 돼. 자꾸 쓸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해내면. 내가 지금이라도 선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야해. 경지가 깊어지면 세상만사가 덧없어지고 하찮게 여겨져 결국 하계를 떠나버리고 신선이 되어 버린다 구. 한 이백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떠날 수가 없어." 백이충은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하고자 했으면 진작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지금 백이충의 능력이라면 당장 옥룡왕을 사로잡고 천하의 흉마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쉬운 일이었다. 약간 수고스러울 마음만 먹으면 열흘 이내에 천하를 혼란시킬 모든 문제 점들을 정리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백이충의 상황은 상당히 묘한 상태였다. 모두들 목매어 바라는 경 지에 올라있지만 그의 몸을 얽매는 인연을 더욱 소중히 하고자 그 경지를 버리는 입장이었다. 지금 그는 조금만 방심하면 훌쩍 세속 만사의 인연 을 떨쳐버리고 선계로 떠날 마음이 들 것 같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 는 상태였다. 최대한 이미 깨달은 경지를 잊어버리려 애써야 하고 또한 자신이 나서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내버려두고 참아야 했다. 이는 거지 소굴에서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많은 황금을 발견하게 되어 이미 부자가 되었는데 거지 친구들과의 정이 더욱 소중하고 헤어지기 싫 어 거지 소굴에서 뭉그적거리는 것과 같았다. 춥고 배고플 때마다 자신 의 황금이 생각나고 그것이면 추위도 배고픔도 더러움도 면할 수 있으며 지금의 생활과 비교도 안 되는 호화로운 앞날이 있다는 것을 애써 참으려 고 하는 것과 같았다. 혹은 한번 황금을 쓰기 시작하여 편안함을 맛보면 다시는 친구들이 있는 거지소굴로 돌아올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 는 것과 같았다. 황금을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황금이 있다는 것을 잊어 야 했다. 거지의 경우라면 황금을 친구들과 나눠 쓰면 되겠지만 백이충이 가진 선 경의 깨달음이라는 황금은 남에게 나눠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미 깨 달은 것을 쓰면 쓸수록 인간 세상과의 인연이 하찮게 여겨지고 선계가 가 깝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정과 인연을 버릴 수도 없었다. 혈존의 영혼에서 백이충의 영혼으로 변화한 그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정 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이미 깨달은 것을 잊어버리고자, 참고자 하니 이미 선경에 든 백 이충으로서는 고달프기만 한 신세였다. 두 눈이 멀쩡한 자가 눈을 감고 길을 걸으려하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 모든 불편을 감안한다해도 부 모와 가족과 나누었던 정, 금혜연과 혈무오미와 나누었던 정을 떨쳐버리 고 선계에 들기는 꺼려졌다. 아직까지는 인간으로서의 인연을 좀 더 소 중히 하고 싶었다. "참자. 참아. 나는 단지 인간으로서 지휘를 할 뿐이다. 황실의 문제는 호황부가, 무림의 문제는 백도가 해결할 것이다. 정작 내가 처리해야 할 것은 내 실수로 만들어진 혈존들 밖에 없다. 그들만 처리하고 천하가 안 정되면 모든 것을 잊고 어딘가 조용한 곳에 가서 인간의 인연이 다할 때 까지 평범하게고 즐겁게 살다가 인연이 닿은 모두가 죽고 나면 그때에나 선계에 갈 것이다. 지금 아버지를, 금소매를, 나만 믿고 따라온 여인들 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머리를 휘휘 젓던 백이충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북경을 드나드 는 자들이 하나같이 상인들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줄어든 것은 얼마 전부터 있어온 통제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독 출입이 많아 살펴보니 평소 북경에 드나드는 몇 배의 수레와 물건들이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모두 표국이나 마차, 거대 한 수레에 물품을 싣고 움직이는 자들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일반인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고 상인들과 물품의 움직임만이 많았다. "흐흠. 현황방이 북경으로 왔다더니 상인들이 대거 북경으로 이사오기라 도 했나?" 북경이 철통같은 경계를 펴도 제집처럼 드나들 백이충이다. 성문까지 활 짝 열렸으니 꺼릴 일이 없다. 북경의 출입 통제를 푼 일이나 유독 상인 의 출입이 많았던 일은 백이충의 머리에서 바로 까마득히 잊혀버렸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북경에는 금혈존과 현황방, 변황동맹에 대한 호 황부의 감시가 펼쳐져 있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그에게 보고되리라. 그는 북경에 들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호황부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했 다. 현재 자금성 안을 감시하는 호황부 휘하 호황문과 북경 밖을 감시하 는 호황부 휘하 생사문을 연결하는 곳은 호황부 휘하 광한문이다. 그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생사문의 사람들은 이 정례 대인 및 황 대장군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서 백이충은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낙양에 군대와 함께 대기하고 있어야 할 서문 구랑, 그의 아버지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백도와 연결하시느라 지금 북경에 오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녀석. 잘 해냈구나. 스승님께 연락을 받았다. 덕분에 백도가 혈지존을 몰아내는데 앞장서겠다고 하시더구나. 곧 황도로 오신다더구나." "설마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백도에 맡기려고 군대를 팽개치고 북경에 오신 거예요?" "말버릇하고는. 북경에 온 것은 뜻밖의 사태를 겪어서 해결하기 위해서 이다." 서문 구랑이 다 자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마음에 안쓰럽던 아들이었다. 늘 전장에 나가있어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 했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이렇게 자라 국가의 대사의 한 축을 맡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했다. 물론 서문구랑으로서는 백이충에게 생겨났던 엄청난 일과 그의 현재 경지 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을 알뿐이다. 머 리를 쓰다듬는 손에 백이충도 부자지간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혈 존의 영혼 탓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유난히 그리워하고 접해도 접해도 그 립고 부족하던 가족의 정이 아버지의 손길을 통해 느껴졌다. 그는 진정 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모든 가족들을 사랑했다. "뜻밖의 사태요?" "그래. 자칫하면 무림의 일로 축소시켜 백성들이 고난에 빠지는 전쟁을 막으려던 모든 일이 허사가 되겠구나." 서문구랑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실재로 그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기색 이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고 백이충도 궁금증이 생겼다. "상인들이 등을 돌렸다. 비밀리에 그동안 낙양에서 양성하던 군대의 자 금을 끊었다." 서문구랑은 얼굴을 창 쪽으로 향하더니 중얼거렸다. 군대를 움직이는데 필수조건이 바로 군자금이었다. 서문구랑의 군대는 비밀리에 키우는 병 력이다 보니 나라에서 지원도 되지 않고 있다. 낙양성주가 도움을 준다 지만 이십만의 병력이다 보니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것을 상인들과 연 계하여 서문가의 이름을 담보로 자금을 끌어썼는데 그것이 끊겨진 것이 다. 상인이 북경에 왔다면... 옥룡왕과 연계된다면 일의 규모가 커진다. 군 자금이 충실하면 병력의 모집이 쉬워지고 애써 축소하려던 일이 큰 전쟁 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번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상인들이 북경에 물품과 자금을 풀고 있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대거 북경에 모이고 있다. 군자금과 병력이 모이고 있다 는 소리이지. 상인들의 발빠른 처세는 이해하나... 어이하여 옥룡왕 쪽 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줄을 댄 것인지 모르겠구나."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것이 상인의 정보이고 정세판단이 가장 정확한 것도 상인들이다. 한둘도 아니고 천하의 상권 자체가 옥룡왕에게로 향했다면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님. 아마도 상인들 스스로의 결정이 아닐 겁니다. 제 생각에 현황 방 때문에 강제로 움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이충은 생각나는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백이충은 현황방의 금혈존과 변황동맹의 세력이 북경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단지 무림의 일로 만 생각했거늘 금혈존은 모든 상인과 상단마저 북경으로 소집한 모양이 다. 그 소식을 듣고 서문구랑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북경에 상인들이 자금과 물품을 가지고 몰려든다는 것은 현황방 때문이 라 한다지만... 낙양에서 상인들이 지원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현황방 금혈존이 옥룡왕과 손을 잡았고 옥룡왕이 낙양에 육성중인 군대에 대해 눈치챘다는 소리가 아니냐?" 눈치를 챘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현황방이 어지러운 무림 정세 때문 에 엄청난 수의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는 소문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었 다. 그들이 옥룡왕에 가세한다면... 게다가 상계의 자금이 그들의 배후 를 지원한다면 큰 위협이 되리라. 자금이 끊겨 더 어려운 상황이 되기 전에 북경으로 진군하는 일을 벌여야 했다.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게다가 지금 생각해보니 상인들을 호위하고 왔던 표국의 무사들을 가장했던 자들이 바로 변황동맹의 무사들일 것 같 습니다. 또한 상인을 따르던 하인들도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현황방에서 고용한 용병들일지도 모릅니다." "허! 그럼 큰일이 아닌가?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일을 축소하려 했는 데... 오히려 옥룡왕은 일을 크게 벌일 셈이군. 진정 백성을 돌보지 않 고 전쟁을 일으킬 셈인가? 그럼 네 생각에 백도의 힘만으로 그들 모두를 당해낼 수가 있겠느냐?" "당해낼 수는 있습니다. 백도의 힘은 과거의 백도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피해가 너무 크지요. 무림을 운영하며 평화를 지켜나가려면 힘을 보존해 야 하는데... 일단 현재 변황동맹이나 현황방의 전력이라면 감당할 수 있기는 하나... 쉽게 처리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니니." "상계가 계속 옥룡왕에게 자금을 댄다면? 금혈존의 현황방이 옥룡왕과 연계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더 크지 않느냐?" "지금의 전력 외에 만약 상계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지원하려고 마음먹는 다면... 끝없이 용병을 모집할 수 있으니 밑도 끝도 없이 백도의 힘만으 로 감당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때는 이미 무림의 일로 축소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만약 사실이라면 금혈존을 처치하여 상계의 고리를 끊거나 금혈존과 현황방의 연계를 끊어야 하겠죠." "그것이 가능하냐? 현황방은 천하 상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단체 아니 냐? 게다가 금혈존은 모든 상인들의 복종을 받아냈다는데?" "새로 현황방주가 된 금혈존은 현황방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자입 니다. 상인들의 충성을 받고 있기보다는 힘으로 굴복시켰을 겁니다. 금 혈존이 사라지면 현황방과 상인들도 이번 일에 손을 뗄 것입니다." 갑자기 천하에 옥룡왕의 이름으로 엄청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의 정체는 바로 혈존에 의한 것이었다. 청마산에서 혈존을 죽였다고 소문냈던 옥룡왕이 무림왕으로 혈존을 내세우겠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 다. 앞으로 한달 후에 옥룡왕은 대 혈존탑을 세우겠다고 했다. 그것은 고금 제일인을 뜻하는 것이며 바로 천하무림인의 지존을 뜻하는 것이었다. 옥 룡왕은 혈존이 무림에서 가장 강한 자임을 인정하며 황제를 대신하여 그 를 무림왕으로 봉한다고 선포했다. 옥룡왕이 말하는 혈존은 청마산에서 죽은 진짜 혈존이 아니라 지금 무림 에서 서로 혈존이라 우기는 십혈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날 혈존을 자 처하는 자들은 모두 모여 누가 진짜 혈존인지 가리라고 했다. 그 날 진 짜 혈존으로 밝혀 무림왕으로 선포된 자는 앞으로 천하무림을 다스릴 것 이다. 옥룡왕은 그렇게 선포했다. - 그 날 모든 혈존은 모여라. 그래서 스스로 강함을 밝혀 누가 혈존인지 밝혀라. 또한 혈존이 고금제일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도 나서라. 혈존을 이기고 혈존탑을 허물어트리는 자가 있다면 곧 그가 혈존을 대신 하여 무림왕으로 선포되리라. - 어이하여 진짜 혈존을 죽였다고 알려지는 옥룡왕이 진짜 혈존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돌아갔는지 모르지만 이 소문은 천하를 경동 시켰다. 황도 한 가운데에 대 혈존탑이 세워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천하 무림 인 모두의 수치였다. 그것은 싸워 보기도 전에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혈존이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임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대 혈존 탑이 당당히 천하에 세워지는 꼴을 묵인한다면 그 이후 혈존탑이 존재하 는 상태에서 혈존에 대항한다는 것은 무림인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 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이번 일을 혈존을 기리는 대 혈존탑을 세우는 대회라 하여 혈존 대회라고 불렀다. 백이충에게도 혈존대회의 소식이 들어왔다.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북경 전체에 소문의 방이 붙었고 옥룡왕이 소문을 퍼트리는 통로는 바로 북경을 드나드는 상인들이었다. 북경 한가운데에서 옥룡왕부를 관찰하던 호황부 대원을 통해 소식을 전해들은 백이충은 금혈존과 변황동맹의 법존 이 옥룡왕과 동맹을 맺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옥룡왕과 금혈존이 손을 잡았나? 그럼 변황동맹도? 옥룡왕은 금혈존을 도와 그를 진짜 혈존으로 만들려 하는 건가? 그 대가로 금혈존과 변황동 맹은 혈지존을 돕고?" 백이충은 그 소문을 듣고서야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옥룡왕과 손을 잡았다 는 추측이 사실로 증명되었음을 확신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 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상태이다. 백도의 지금 힘이라면 현재 그들의 전력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옥룡왕 혈지 존을 놓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교활한 혈지존을 단 한번의 기회 로 처리하지 못하면, 바로 내전이었다. 게다가 대놓고 상인들이 고용해 서 북경으로 계속 데려오는 용병들의 유입과 군자금이 문제였다. "일단 상계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용병들이 숨은 곳을 찾으면 금혈 존도 찾을 수 있을 텐데... 금황벌 본가와 흑림 북경 지부. 이 두 곳에 서 용병들을 대거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금혈존과 함께 숨어들었 던 용병들과 변황동맹의 무사는 볼 수 없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것일 까? 게다가 이렇게 끝없이 용병이 몰려오면 실로 무림인의 대결로 압축 시킬 수도 없거늘." 백이충은 옥룡왕이 본격적인 반역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혈존대회는 관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무림인의 일이다. 잘만하면 그 일 을 기화로 옥룡왕과 잔당을 쓸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혈존대회는 전쟁이 아닌 무림인의 일로 축소시켜 해결할 기회일 지도 모른다. 혈지존만 잡으면 내전의 위험은 저절로 사라진다. 일단 혈 지존이 정체를 폭로하고... 백도로 혈존대회를 이용하여 그를 사로잡아 일을 끝내야 한다. 허나 그러려면 반드시 사전에 변황동맹의 고수들과 현황방의 용병무사들을 해결해야 한다." 백이충은 잠깐 갈등을 했다. 어차피 혈존들을 처리하려면 능력을 드러내 야 한다. 그렇다면 한 번만 더 자신의 진짜 힘을 써서 현황방과 변황동 맹의 일을 해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진실로 마음먹는다 면 백만 대군 속에 보호되는 황제의 목을 따오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현황방이나 변황동맹을 와해시키고 혈지존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의 깨달은 경지를 마음껏 사용하기만 한다면... "아니야. 단 한번 한번의 무공 시전이 상단전의 경지를 높게 한다. 그럴 수록 이 세계의 인연에 대한 미련이 엷어지리라.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본신의 능력을 감추고 범인(凡人)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 도인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신선의 길, 불로장생의 경지에 한발 들여 놓고서도 애써 발을 빼내지 못해 고심하고 있는 백이충이었다. 모든 것 을 툴툴 털어 버리고 선계로 떠나기에는 속세의 인연이 너무 아까웠다. 혈존의 영혼에 영향을 받았던 탓인지 백이충의 영혼으로 자아를 확립하고 도 백이충은 사람과 가족의 정에 그만큼이나 굶주려 있었다. 여러모로 고심을 하던 백이충에게 다시 서문구랑이 찾아왔다. 그 역시 전쟁으로 일이 발전되기를 원하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옥룡왕을 혈지존으 로 만들어 무림의 일로 축소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미 혈지존의 정 체를 폭로하기 위해 모란서시 백소련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최악의 경 우를 대비하고는 낙양에 머물고 있는 군사는 동원되지 않을 것이다. 그 런 각오를 하고 서문구랑은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뜻밖의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다." 서문구랑은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백이충은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기 억에서 제거되었을 뿐, 만승패검 오형록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는 여자 였다. 바로 무림칠미의 하나인 부귀옥녀 연가희였다. 현재 상계가 옥룡 왕부 쪽으로 붙어있거늘 서문구랑이 왜 그녀를 데려왔는지 백이충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만보장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부탁을 하러왔다. 우리의 모든 것 을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과연 상인의 정보는 무섭구나." 만보장은 바로 상왕 연일도가 장주로 있는 문파였다. 상왕은 바로 천하 상계의 대부인 상황 조풍의 대제자. 그리고 부귀옥녀 연가희는 바로 상 왕의 누이가 되는 여자로 아름다움과 지혜로 무림에서 아주 유명한 미인 이었다. "소녀가 호황부주를 뵈옵니다." 연가희가 백이충을 향해 절을 하자 백이충은 놀랐다. 아직 옥룡왕조차 호황부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짐작했는데 그와 동맹한 현 황방 소속 연가희가 그를 아는 체 하자 놀란 것이다. "소저는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소?" "물론 백 공자에 대해 잘 알고있습니다. 서문 장군부의 이공자로 과거 혈존의 영혼에 지배당한 꼭두가시로 있었고 지금은 호황부주이자 백도지 존이며 승룡곡과 환우비령을 거두셨고 신비삼패마저 장악하신 분이지요. 백 공자가 단 두통의 서찰로 천년마교를 봉문시키고 천뇌교를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현재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의 천적이지요. 그런 분을 모른 다면 상왕의 누이 자격이 없지요." 연가희의 말에 백이충은 새삼 상인의 정보망에 감탄했다. 아마도 상황 조풍이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깔아놨던 정보망일 것이다. 천하의 세력가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상인들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결정되기 때 문이다. 하기야 흑도이건 백도이건 먹고살고 물건을 써야 살 수 있으니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상인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고 상계를 한 손에 틀어진 상황 조풍에게 정보가 흘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소저가 말한 것을 금혈존도 알고 있소?" "금혈존은 모르고 있습니다. 허나 상황 조 어르신께서 풀려나지 않는다 면 언젠가 금혈존의 귀에도 들어갈 것입니다." 백이충은 그녀의 짧은 말에 많은 것을 알아들었다. "나에게 금혈존에게 잡힌 상황 조풍을 구해달라는 것이오?" "금혈존이 두려운 것은 상계의 여러 어르신을 포로로 잡고 있기 때문입 니다. 무력과 달리 금력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 있는 한 옥룡왕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자금줄을 틀어쥐게 될 것이 고 수많은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상계의 어르신이 풀 려나신다면 백 공자에게 금혈존 개인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하 겠지요." "허. 부탁을 받는 것인지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연가희가 백이충을 향해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저희 오라버니가 직접 왔어야 함을 압니다. 하지만 금혈존의 감시가 두 터워 감히 오지 못하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백 공자에게 부탁드리오니 제발 위난에 빠진 상계를 구원해 주십시오. 만약 조 어르신을 구해주신 다면 백 공자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촉촉한 눈길로 연가희는 백이충을 바라보다가 유혹하듯 살풋 눈을 감았 다. "설사 만보장이나 제 몸을 원하셔도... 백 공자의 명이라면 서슴없이 받 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소녀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연가희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백이충은 아버지의 앞이라 어쩔 줄을 몰랐 다. 서문 구랑이 그녀를 일어나라 하며 대신 허락을 했다. "일어나시오. 충아는 약혼자가 있으니 감히 소저에게 그런 청을 하지 못 하오. 상황 어르신은 이 몸도 존경하는 분이며 또한 서문 가는 만보장에 많은 신세를 진 적이 있소. 또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니 당연히 도 와드려야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이번에 조 어르신이 풀려난다면 저희 상계는 현황방을 해 체하고 다시는 무림의 일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비 를 하여도 절대의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 마음먹으면 상인이 후원한 방파 는 이용물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서문구랑의 단 한마디에 백이충은 다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해야했다. 상 황 조풍을 구하고 오라는 심부름을. 낙양에는 만보장이 있고 북경에는 금황벌이 있다. 만보장은 천하의 상계 를 일으켜 세운 상황의 첫째 제자가 만든 상가(商家)이고 황금벌은 옥룡 왕을 배후에 두고 큰 상단(商團)이다. "금혈존은 상계의 어르신들을 현황방 뇌옥에 가두었다가 이번에 북경으 로 오면서 금황벌에 가두었습니다. 금황벌은 원래 옥룡왕과 사이가 좋았 습니다. 금혈존의 부인과 새로이 금황벌주가 된 현황제갈의 약혼자 옥정 은 의자매입니다. 그래서 금혈존과 옥룡왕부를 연결시킨 것이 혹시 금황 벌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재 상계 십대파벌 중에 서 자의로 금혈존을 따르는 곳은 금황벌과 남북표국의결체, 현황방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인질로 잡혀 계신 어르신들 때문에 따르는 거 지요." "전에 상인들의 호위무사를 가장하여 북경에 들어왔던 현황방의 용병이 나 변황동맹의 무사도 모두 금황벌에 있는 거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요 근래 끌어들인 용병들은 금황벌이 데리고 있 지만... 변황동맹과 금혈존의 지휘를 받는 일급 용병들은 서문 대장군부 에 있습니다." "본가에?" 순간 백이충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가가 적의 소굴로 쓰인다는데. "예. 서문 장군부는 옥룡왕부에 의해 폐쇄되어 지금 비어있습니다. 또한 원래 황궁의 허락아래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커다란 연무장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닙니까? 수십만이 숨기에 조금 좁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광대한 대장원입니다. 게다가 혹시 장군부와 연관된 자가 드나들지 모른다는 명목으로 황도수비군이 엄밀히 지키고 있기에 누구에게도 들키 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입니다." 백이충과 호황부도 그러했다. 설마 황도수비군이 반역자라고 누명을 씌 워 엄밀히 지키고 있는 서문 대장군에 옥룡왕이 몰래 적도들을 숨겨 놓고 있었을 줄이야. 백이충은 당장 노기가 삼천 장이나 솟구쳤다. 마음 같아 서는 본가를 더럽힌 자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싶었으나 일단 상황 조풍 의 일이 먼저였다. "명심하셔야 하실 것은 조 어르신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몸을 숨겨 들키 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혈존은 조금의 이상만 있어도 조 어르신 을 죽이라는 명령을 금황벌에 내렸습니다. 그는 조 어르신이 없어도 힘 과 공포로 상인들을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지금 금혈존과 현황방의 손아귀에서 상인들을 단결시켜 반항하게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분은 조 어르신 밖에 없지요." "그런 위험을 아는 데도 왜 금혈존은 상황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거요?" "금황벌에 명령을 내렸지만... 금황벌에서 과거 조 어르신의 은혜를 못 잊어 감히 살수를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만일 구출 시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라도 챈다면 금황벌도 더 이상 금혈존의 명을 어기지 못 하고 당장 조 어르신을 해칠 것입니다." "눈치채지 못하게 잠입한 다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금황벌에서 상황을 보통 심하게 감시하는 것이 아닌 모양인데 소저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 소? 아무래도 갑자기 사정을 알게된 나보다는 준비를 많이 한 소저가 더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소 만." "조 어르신이 있는 뇌옥으로 식사를 배달하는 하녀 아이 하나가 우리에 게 협조하고 있어요. 금황벌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지만... 오래 전에 우리의 첩자노릇을 했죠. 하지만 조 어르신을 직접 감시하는 몇 명의 노 마를 처리할 실력을 가진 자가 우리에게는 없죠." "안심하시오. 내가 직접 갈 터이니." "크으윽." 순간적으로 일곱 마디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황산칠마라고 불린 노마들 이 일제히 토해낸 비명이었다. 제각기 다른 장소에 특급 살수 못지 않게 숨어있던 황산칠마를 동시에 처리할 고수는 얼마 없다. 그리고 백이충은 그럴만한 고수였다. "다행이 이 정도 녀석들이면 겨우 중단전의 무공 경지만 사용해도 처리 할 수가 있지." 전설적인 심검의 수법을 겨우 라고 말하는 백이충이었다. 백이충은 목숨 이 끊어진 일곱 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루트와 상황의 구 출 방법. 모든 것을 연가희와 만보장이 제공했다. 고수를 구할 수가 없 어 상황을 구하지 못했다는 말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자칫하면 상황의 목숨이 위험하기에 모험을 할 수 없다는 말. 거짓 같 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보장의 재력으로 그만한 고수하나 구하지 못하고 나를 찾아 왔다는 것은 이상하군.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일까? 금혈존을 상계에서 물리치기 위해 내 도움이 필요해서 일부러 상황의 구출을 핑계 로 나를 찾은 것일까?" 백이충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연가희의 예상과 달리 너무도 쉽고 간편하게 일이 처리되고 있었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척척 계획대로 되 어 가는 일. 그렇다면 굳이 만보장이 백이충을 찾아온 목적이 뭘까? 금 혈존이 직접 지키고 있다면 모를까, 황산칠마 정도를 해치울 고수는 돈 만 많이 쓰면 만보장의 재력으로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백이충이 뇌옥의 자물쇠를 부수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뇌옥 안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게. 백도지존." (함정인가?) 너무도 평안한 목소리에 백이충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이건 구원자를 반기는 태도가 아니라 초대한 사람을 기다렸다는 말투가 아닌가? 백이충 은 잠시 생각하고는 자신에게 백도지존이라 부를 만한 남자를 떠올렸다. "진짜 상황입니까?" "너무 경계할 필요가 없네. 노부가 자네가 구하려고 했던 상황 조풍이 맞네. 그리고 자네를 기다린 사람도 맞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평안한 말투네요. 그동안 대접이 좋았던 모양이군 요.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이네. 자네가 누군 지도 모르고 초대할 리가 있겠는가? 충분히 검 토한 이후의 초대일세." "초대? 구출이 아니라 상황께서 이 몸을 초대하신 거라. 아마도 이 몸이 모르는 일을 상황께서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백이충이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촛불 아래 뇌옥은 깨끗한 상태로 치워져 있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수수한 방안의 정경이었다. 상황 조풍은 탁자를 놓고 술을 자작하며 앉아있었다. 그 표정은 정말 고 생의 흔적조차 없었다. 술까지 마시는 것을 보아 백이충을 기다렸다는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서 오게. 초대한 사람에게 술 한잔 없을 수가 있는가?" "보아하니 잡혀온 처지가 아닌 모양이군요. 금혈존과 손이라도 잡고 저 를 함정에 빠트리고자 하신 겁니까?" "아닐세. 아냐. 노부는 금혈존과 손을 잡지 않았네. 호랑이를 잡고자 강 아지와 손을 잡는 바보는 아니네. 다만 노부가 호랑이를 보고자 한 것은 호랑이에게 한가지 약속을 듣고 싶었을 뿐이네." "무슨 약속입니까?" "앞으로 자네가 상계를 보호해 준다고 약속하게. 그럼 노부도 이곳에서 나가겠네." 백이충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대뜸 상계를 자 신보고 보호해달라니.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처럼 너무 당당히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상황께서 이곳에서 나가시는 것이 제게 크게 유리한 것처럼 말씀하십니 다만." "물론. 용병들을 고용한 돈은 우리 상계에서 나왔네. 노부가 나가기만 하면 옥룡왕이 비장의 병력으로 쓰려고 했던 용병들은 적진에 침투시켰던 매복 병력으로, 자네의 부하로 돌변할 걸세. 상계에서 황도수비군에 먹 였던 뇌물명단이면 황도수비군의 장군들을 다시 회유할 수도 있을 터이고 그렇지 못한다해도 금혈존이 끌어들였던 용병의 숫자면 황도수비군을 견 제할 수도 있을 것이네. 또한 천축 법존, 용병들과 같이 있는 변황동맹 을 공격하기에도 편할 걸세." 상황의 말은 현재 꼬인 국면을 단숨에 풀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반 면 현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상황 조풍의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럼 상황께서 나가시지 않으면 여전히 용병들은 옥룡왕부의 비밀 세력 이 되겠군요. 변황동맹과 힘을 합해서 말입니다." 상황이 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 만승패검이 현황방주가 되었을 때는 듬직한 사위였네. 그라면 현 황방을 이용하여 무림이나 관의 압력에서 상계를 보호해줄 수문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가 금혈존을 자처하면서 노부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네." "저에게 부탁하실 바에는 왜 금혈존에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협 조한다면 이렇게 갇히지도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하하. 나를 의심하는 군. 자네는 내가 갇힌 것으로 보이나?" "아닙니까? 그리고 보면 아닌 것도 같군요. 그런데 자유로운 처지인데도 갇혀있는 것처럼 꾸미며 금혈존이 상계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그냥 두고보는 이유는 뭡니까?" "금혈존이 마각을 드러냈을 때, 우리 상계의 원로는 모두 모습을 감출 수 있었네. 현황방을 차지했다고 해도 우리가 잠적하면 현황방은 그저 그런 빈 껍데기 무림의 삼류 문파일 뿐이야. 상인은 여우처럼 교활하다 네. 우리가 숨었다면 금혈존도 쉽게 우리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일부러 잡혔네." "과거 혈천마궁 시절에도 줄기차게 숨어 지내시던 분이니 그 말을 믿죠. 하지만 금황벌, 남북표국의결체, 그 밖의 흑림 등은 이미 금혈존에게 충 성을 맹세한 것을 아십니까? 게다가 옥룡왕에게 붙기까지 했고요." "금황벌이건 흑림이건, 상계에 있는 상인 치고 노부의 말을 거역할 자는 없네. 근본적으로 그들은 상인이고 상인은 상계 이외의 힘에 눌려 재물 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네. 우리의 유대는 결코 폭력으로 깨트릴 수 없는 것이지. 그들이 금혈존에게 충성한 체 한 것은 모두 노부의 지 시에 따라서 한 짓이네. 금혈존이 변황동맹을 끌어들인 것은 의외였지만 금황벌의 충고에 따라 금혈존이 옥룡왕과 동맹을 맺은 것도 모두 노부의 뜻이지." "이유가 뭡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자네에게 상계의 안전을 부탁하기 위해서라고. 그 약속을 해야 여기서 나가겠다고." "쳇. 결국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말이오? 나를 찾기 위해 모험을 했다고? 그리고 내가 노인장과 손잡는 조건이 노인이 여기서 나가는 것 이라고? 노인장 말대로라면 어차피 노인장은 여기서 안전한 거 아니오? 나가든 말든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나가면 자네 편이지만 여기 있는 한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나는 금혈존의 인질이고 금혈존은 상계의 자금을 마음대로 쓸 것이네. 또한 그가 끌어들인 용병과 무수한 상계의 거부도 옥룡왕을 돕겠지."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굳이 나에게 상계의 안전을 지켜달라는 이유. 알아듣게 좀 설명합시다." "애초에 무림인에게 무를 내세워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 네. 현황방이 잘못이었어. 금혈존이 현황방을 장악하자 즉시 깨달았지. 무림의 절대강자가 출현하면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서 무림 방파를 전면 에 내세운다고 해도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네. 우리는 상인답게 최후의 실력자와 거래로 상계의 안전을 확보해 야 했던 거야." "그래서 그 거래의 상대가 저다. 이 말씀입니까?" "금혈존에게 사로잡힌 척 한 것은 모험이었네. 하지만 상계의 안전을 거 론할 만한 능력을 가졌으면서 노부와 거래할 상대가 필요했지. 마도가 아닌, 명분과 명예를 가지고 있어 상계와 약속을 함부로 어기지 못하면 서도 상계를 지켜줄 실질적인 힘이 있는 자를 찾을 필요가 있었네. 백도 와 황실. 이 두 군데에서 거래 대상을 물색했었네." "금황벌이 옥룡왕에 접근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겠군요. 그런데 왜 옥룡 왕과는 거래를 하지 않은 겁니까?" "그래. 옥룡왕의 야심은 진작 알고 있었지. 하지만 옥룡왕은 진짜 옥룡 왕이 아닌 혈지존이었으니 거래 대상이 될 수 없었지. 결국 그를 이용하 여 숨은 백도의 강자를 찾아낼 수밖에. 금황벌주에게 금혈존의 욕심을 자극하여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재력을 이용하여 옥룡왕과 동맹을 맺도 록 유도하라고 했네. 천하가 최대한 어지러워지면 그 혼란을 수습할 숨 어있던 기인이 백도에서 튀어나올 것이고 그 존재야말로 노부가 거래할 대상이라는 계산이었지. 모험이었지만 모두가 두려워하는 한 명의 인물 이 결국 드러났지. 자네가 바로 그 거래할 대상이네." "어째서 금혈존이나 옥룡왕과 거래하지 않았죠? 그는 혈존을 자처하는 인물이고 동맹을 맺은 옥룡왕 혈지존은 거의 반란에 성공한 인물인데? 과거 혈존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상황도 알고있지 않습니까? 오히 려 둘을 묶어 생각하면 상계의 안전을 가장 확실히 보장..." "상인은 진위의 구별이 철저하지. 누구도 예리한 상인의 눈에 가짜를 내 놓을 수 없네. 만승패검이 금혈존을 자처할 때 눈치챘지. 그는 절대 진 짜 혈존이 될 수 없는 존재야. 여지없는 가짜이네. 진짜 혈존의 영혼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혈존의 일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상계의 안 전 전체를 거래할 정도로 큰 인물이 될 수가 없는 존재였지." "금혈존이 큰 인물이 아니라... 그런데 나는 큰 인물이란 말입니까?" "후후. 자네가 과거 혈존의 영혼에 제압 당했었는지, 혹은 아직도 모두 를 속이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지금 자네의 신분은 백도를 평 정한 인물이겠지? 백도지존 말일세. 호황부주라면 분명 황실과도 연관이 있을 터이고. 근래 자금성의 변괴도 자네와 연관이 있겠지? 백도와 황실 에 강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 게다가 이번 난만 무사히 수습할 수 있다 면 그 공은 끝이 없으니 자네는 황제와 별도로 천하지존으로 불리게 될 것이네. 그런 상대와 상계의 안전을 거래하지 않으면 누구와 거래를 하 겠는가? 게다가 노부가 자네의 정대함을 믿고 확신하는 이유는 서문 대 장군부 가족에 대해서는 자네가 진심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네. " "하하. 정말 무서운 것은 혈존이나 옥룡왕이 아닌 바로 상황 노인 이였 군요. 우리 모두가 상황의 손바닥에서 노는 꼴이었으니. 나를 나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려. 그래, 어떤 거래를 원하십니까?" "자네가 천하를 주재할 수 있는 기간동안만이라도 상계의 안전을 보장해 주게."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닙니까?" "노부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솔직히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백도 쪽의 가장 높은 사람인 것이 노부에게도 뜻밖이네. 솔직히 천무삼성 중에서 가장 뛰어나나 혜경성승이 거래의 대상이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자네 가 백도지존이고 자네의 나이가 젊은 이상 자네가 지금 약속을 하면 천하 지존이 된 이후 백년은 넘게 상계의 안전이 보장되겠지? 이 거래를 놓치 면 노부는 바보일 걸세." "그럼 제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겁니까? 또 노인장이 나가지 않으면 현황 방이 어쩌고 용병이 어떻고 하려면 거래를 집어치우십시오. 현재의 백도 전력만으로도 그들 모두를 상대할 준비는 끝난 상태이니까요. 또한 상계 도 그 처벌을 면하지 못하겠지요." "노부가 어찌 자네에게 성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받는 만큼 주는 것이 상계의 거래에서 신용을 지키는 길이지. 이것을 자네에게 주 겠네." "이게 뭡니까? 열쇠 같은데? 황금 열쇠?" "노부의 신표이네. 상계에서 줄 것은 돈밖에 없지. 그 신표를 통해 상계 에 연락하면 황금 천만 관에 해당하는 금액을 세 번 무상으로 제공해 줄 것이네. 적어도 만보장이 존립하는 이상, 십대상벌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 그 증표의 효력은 변함 없을 걸세." "황금 삼천만 관?" "세 번 나라를 뒤엎을 전쟁 군자금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돈이네. 거래 대상은 자네이니 물론 자네 마음대로 써도 좋네. 하지만 그 열쇠가 효력 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자네가 가지고 있을 때뿐이네." "만약 돈을 원하지 않으면?" "돈을 원하지 않으면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지. 그 때는 그 열쇠를 신 물로 사용할 수 있지. 일시불 대신 열 일곱 개의 전장, 스물 두 개의 표 국, 네 개의 해외무역 상단, 천하에 퍼진 수백만 평의 농원, 일곱 개의 주루와 오십 칠 개의 객점, 열 두 척의 무역선을 받을 수 있네. 황금열 쇠는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표시이니까." "관심 없습니다. 상인이 될 소질은 없으니까요. 그것도 원하지 않으면 이건 어디에 쓰나요?" "끄응. 욕심 많은 친구로군. 모든 것을 원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네. 방금 말한 재물과 상회의 재산이면 상계 전체에 대한 막대한 채무자이지. 상인은 빛을 진 채무자를 두려워하네. 노부를 대신하여 채 무자로서 상계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네." "열쇠 하나로 상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만은 괜찮군요. 현황방 과 금혈존. 그리고 변황동맹에 대한 일은?" "변황동맹과 함께 하는 십만의 용병이 자네 명령에 따를 것이네. 금황벌 과 흑림에 있던 용병들도 빠져나갈 것이고... 상인들이 현황방에서 빠져 나가면 금혈존의 세력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되네. 원래 그렇게 되도록 안 배되어 있던 거지. 불쌍한 것은 노부의 양녀뿐이지만... 노부 같은 자의 양녀가 된 것이 이미 큰 희생을 예약한 것이지. 게다가 변황동맹은 같이 있는 현황방의 용병에 대해 전혀 경계를 하지 않고 있네. 동료로 생각하 고 있으니 자네라면 용병을 이용하여 변황동맹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겠 지." "쳇. 생색내지 마십시오. 어차피 상황께서 벌여놓으신 판이니 책임지고 접을 준비도 다 한 것 아닙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 오히려 노부 덕에 자네가 이번 일을 해결하기가 편 해지지 않았나? 자네가 천하지존에 더 한발자국 가까이 가는 길이지. 자 네가 빨리 천하지존이 되는 것이 상계의 안전을 약속 받은 우리도 안전해 지는 길이고." (쳇. 약속만 하고 그대로 무림에서 은퇴해서 평범하게 살 거요. 노인장 의 약속은 노인장 혼자의 꿈이라니까.) "그리고 그 황금 열쇠는 노부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네. 열쇠를 황금 이나 상단과 교환하지 않는다면 만보장이 존재하는 한... 현 십대상인의 후예들이 존재하는 한 그 열쇠를 가진 자는 제 이의 상황이네. 결국 자 네가 천하의 상단을 좌지우지할 천하제일의 부자이네. 물론 자네 대에 한하지만. 흠. 써먹지도 못하고 썩힐 가능성이 많으니 황금 열쇠로 그냥 돈이나 상회를 받고 떨어지는 것이 나을 텐데..." (쳇. 영감탱이. 나는 떠나도 백년 이 백년은 세속에 구르다 떠날 거요.) "알았습니다. 어차피 이곳 황금벌도 상황의 소굴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금혈존이 불쌍하군요. 어서 나가기 나 합시다." "그럼 자네와 나는 약속한 것이네." "그렇다니까. 자, 어서 나갑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상계는 지켜질 겁니 다. 모두가 상황을 기다릴 것입니다." "후후. 약속했네. 약속했어. 이제야 노부의 모험이 성공한 것이네." 상황의 입에서 죽은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상황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 다. 침착하게 거래를 하던 얼굴이 아니라 다 죽어 가는 얼굴이었다. 백 이충이 대경실색하여 상황을 부축하고 맥을 잡았다. 맥이 극히 약했다. "크으윽. 금혈존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네.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자이지. 그는 독혈존을 포섭했고 노부에게 독을 썼네. 그는 금황벌도 믿 지 않네. 아무도 모르게 직접 독을 썼지. 노부가 아무도 모르게 죽으면 내 대역을 내세워 상계를 계속 휘두를 자신이 있었던 거야." 그동안 상황은 백이충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금 혈존에게 걸려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상황. 말하지 마시오. 내가 즉시 데려가겠소. 생사활의가 있으니..." "으으. 하지만 금혈존은 내게 황금 열쇠가 있는 것을 몰랐지. 그것이야 말로 상황을 대표하는 것이거늘.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가 상황일세. 그 열쇠를 증표로 내세우면 더 이상 금혈존은 상계를 좌지우지 할 수가 없 네. 크으윽. 결국 노부의 모험은 성공한 것이네." "말하지 말라니까. 죽을 것처럼 말하지 마시오. 죽은 사람도 살려낸 명 의가 내 주위에 있으니까. 반드시 되살려 놓을 것이오." 백이충의 모습이 뇌옥에서 사라졌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변황이 뜻을 꺽다 관련자료:없음 [20525]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5-16 14:22 조회:603 <변황이 뜻을 꺾다> 서문 대장군부는 북경의 서쪽 외곽 끝에 있다. 대장군부는 이름만 부 (府)일뿐, 실제 그 규모는 가히 성(城)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왜냐하 면 일개 장군부 개인의 저택이 아니라 거대한 군사 훈련을 겸한 군부의 연무장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구만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대장군부의 연무장은 몇 만 군대의 병법, 장군들의 기마와 검술, 부대의 병진 등을 시험하기 위한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어 군대의 주둔을 위한 성처럼 지어 진 곳이 바로 서문 대장군부였다. 영락제 시절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제를 확장시켜 수시로 전쟁을 위한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때가 군사강국으로서의 절정기였다. 황제가 친정을 하기 위해 병사와 훈련도를 점검할 때 수시로 병사들을 북경 근처에 불러 들였다. 지휘통계상 이들 지방 군을 황도수비군이 있는 곳에 머무르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사들을 아무 때나 쉽게 북경 안으로 들일 수 없 어 고심 끝에 병사들을 훈련을 겸해 대규모로 주둔시킬 수 있게 장소로 확장한 곳이 바로 대장군부였다. 삼대에 걸쳐 대원수, 대장군 등, 명장을 줄줄이 배출하고 충절로 이름높 은 서문 가였기에 가능했다. 오죽하면 전대 황제가 금빛 현판을 내려보 내 황제조차 서문 가를 함부로 벌하지 못한다는 유시를 내렸겠는가? 서 문가는 어떤 경우도, 아무리 권세가 강하고 아무리 지휘 통제할 수 있는 병사들을 황도 근처에 많이 두어도 역모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 하 에 서문가를 믿기에 그런 은총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의 서문 대원수가 북로군벌의 총 사령관으로 옮긴 이후 장군부에 머 물던 병력도 모두 북방으로 옮겼다. 장군부 규모도 많이 축소되었다. 현 황제부터 황도 근처에 황도수비대 이외의 병력이 주둔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주인이 없는 서문 대장군부의 연무장은 오직 찬바람 이 돌뿐 병사들이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았다. 본가의 식구들도 연무장과 멀리 떨어진 본 채 깊숙한 곳만 사용했을 뿐이다. 장군부의 텅 빈 연무 장은 간혹 장군부 출신의 무장들이 관례처럼 들려 삼 사천의 병력을 연무 하는 데 사용했을 뿐이다. 서문 장군부에 오천 정도의 병력만 남아있었어도 감히 옥룡왕부에서 함부 로 사람들을 잡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여인과 하인, 수백의 가솔만 있었 기에 북경의 주민들에게 소문내지 않게 조용히 서문 장군부의 식솔들을 압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식솔들이 가짜라고 해도. 뒷골목, 혹 은 하오문에 은밀히 도는 소문만 아니라면 서문 장군부는 평화로운 외관 을 유지하여 평소와 다름없었다. 허나 이미 서문 장군부가 주인없는 빈 집으로 예전의 서문 장군부가 아니라는 것은 북경의 정보통에게는 비밀도 아닐 정도로 퍼져 있었다. "정말 따분해 죽겠군." 묘강의 십이 동주가 저마다 불평을 내뱉었다. 서문 장군부에 스며든지도 벌써 며칠 째. 아무리 장군부가 넓다해도 용병과 변황무사 모두를 합쳐 이십만의 병력을 감추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장군부의 건물에 모두가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병장에 대충 초원에서 사용하는 천막을 치 고 꾸역꾸역 몰려있는 데다 황도 북경 주민들에게 소문내지 않게 조용히 있다보니 좀이 수실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 들어와서 변황의 영광을 재현하는 줄 알았더니... 시원하게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묘강 십이 동주의 뒤를 이어 불평을 하는 이는 새로이 철혈마궁의 궁주가 된 대막일웅이었다. 법존을 따라간 대부분의 변황지존들이 혈존에게 죽 었을 때, 대막일웅 역시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얼떨결에 철혈마궁 궁주 지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때 살아 돌아온 법존에게 아버 지의 죽음에 대해 번번이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혈존도 죽었다는데... 그깟 가짜 금혈존인가가 뭐가 두렵다고." 동영 살막의 막주도 불평을 토론했다. 그 역시 부막주에서 갑자기 막주 가 된 인물이다. 지금 한 방에 모여 불만을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 두 과거 변황동맹에 속해있던 문파의 후예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천축 법존과 천축의 세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천축 세력은 법존에게 절 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지만 기타 세력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중원의 금혈존과 변황동맹이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축 법존이 수상하오." 가장 불만이 많은 것은 홍교의 라마들이었다. 그들의 사부였던 홍교 사 대라마는 천축 법존에 감복하여 그의 종을 자처하였다. 천축 법존은 빠 른 세력 장악을 위해 홍교의 수뇌인 사대라마들의 진심을 굴복시켜 홍교 전체를 수하로 거두었다. 그 일을 위해 법존은 사대라마에게만 많은 공 을 들였는데 사대라마가 죽음으로서 오히려 그 후대를 이은 홍교라마들의 가장 심한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이다. "중원을 굴복시킨다더니... 우리들의 대라마들을 데리고 떠나더니 천축 법존만 돌아왔소. 천룡사주야 그의 수하나 다름없는 천축의 세력이니 두 말 할 필요 없고 달라이 대라마도 법존이라면 쩔쩔매니... 살아 돌아온 자들은 그의 최 측근 밖에 없소. 나는 청마산에서 우리들의 대라마가 모 두 입적하신 일에 대해 심히 의문을 가지고 있소." 천축 법존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서장 홍교 라마의 비분강 개한 말에 동조하여 모두들 함께 서장 황교의 달라이 대라마까지 욕할 생 각은 없는 듯 했다. 살막의 신임 막주가 고개를 저었다. "달라이 대라마가 어떤 분인데 천축 법존과 입을 맞춰 거짓말을 하겠소? 청마산의 일은 사실일 것이오. 과거 혈수라의 행적을 볼 때 그 정도 무 위는 당연하다고 보오. 다만 내가 답답한 것은 혈수라도 죽은 마당에 두 려울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숨어 지내느냔 것이오. 중원 놈들을 죽이고 중원을 정복하러 온 우리가 이리저리 중원 놈들 놀음에 끌려 다니고 있으 니 몹시 답답하오." "막주의 말이 옳소. 혈수라도 죽었거늘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가 중원 놈 들의 왕이나 상인 따위에 비위를 맞춰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한바 탕 난리를 피워 중원에 우리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소." "후우. 우리가 법존을 잘못 본 듯 하오. 우리를 이끌고 중원에 설욕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영웅인줄 알았거늘, 오히려 중원인과 음모나 꾸미는 소인일 줄이야. 치사한 계략이나 음모 따위는 우리와 맞지 않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느니만 못하오." 서장, 동영, 대막, 묘강의 변황고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는데 이 를 오래 전부터 눈치 챈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있는 방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자, 바로 달라이 대라마였다. "너무 변황고수들의 불만이 크다. 하기야 그들은 직접 혈존이나 천마들 을 본 자들이 아니니..." 달라이 대라마는 천축 법존의 고심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혈존의 놀라운 무위를 바로 눈앞에서 본 사람이었고 전설 속의 칠대천 마, 계략을 꾸미기는 했지만 혈존을 죽인 혈지존 등 천외천(天外天)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다. 또한 천축 법존과 더불어 금혈존이 풍기는 혈 존의 위압감에 직접적으로 눌려보았기에 혈존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었 다. 달라이 대라마는 변황고수들이 시기를 잘못 찾아 중원에 들어왔다고 생각 했다. 과거 칠대천마 시절 변황고수들이 힘을 합쳐 중원에 쳐들어 왔다 가 몰살당했을 때보다 몇 배나 강해진 것이 지금의 중원이다. 자칫 잘못 하면 지금의 변황고수들은 중원을 정복하기는커녕 어디서 최후를 맞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당할 확률이 컸다. 지금의 변황세력은 강 자의 위치가 아니라 약자의 위치인 것이다. "천축 법존의 고심도 이해한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건만... 제대로 시 도조차 못하고 수뇌들이 몰살을 당했다. 이 몸도 그때의 악몽 때문에 식 은땀을 흘리거늘 변황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천축 법존의 의무감의 무게 는... 옥룡왕이나 금혈존과 손을 잡을만하다." 달라이 대라마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만약 그가 지금의 사태를 냉정 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불만 세력을 포용하여 천축 법존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지금 그가 선동하면 다시 변황동맹의 세력은 천축을 제외하고 그의 발아래 놓일 것이다. 하지만 중원의 무시무시한 마왕들이나 세력을 잘 알고있는 달라이 대라마는 그 이후의 일을 감당할 간담이 없었다. "그렇다 고해도 저들의 불만을 그냥 놔둘 수도 없다. 제일 좋은 길은 이 대로 변황으로 퇴각하는 것이거늘..." 달라이 대라마는 중원의 저력을 안 이상 변황의 전력을 그대로 보존한 체 퇴각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비록 변황의 수뇌들은 대부분 죽었으나 그 전력은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변황의 피해는 생각보다 미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축 법존은 자꾸만 중원의 일 깊숙 이 파고들고 있다. 아마도 이대로 변황으로 물러서느니 중원에서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달라이 대라마의 생각으로는 너무 위험한 생각 이었다. "법존. 소승 포달랍궁의 궁주 달라이 라마요." 달라이 대라마가 천축 법존의 방에서 그를 불렀다. 속시원하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해 보려는 것이다. 안에서 반갑게 달라이 대라마 를 칭하는 천축 법존의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안 그래도 대라마와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찾으 려 했소." 천축 법존의 입장에서 달라이 대라마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현재 변황의 거물들은 달라이 대라마를 제외하고 사그리 전멸된 상태였다. 천 룡사주는 혈지존의 첩자로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고 새롭게 변황 의 지존들이 된 자들은 천축 법존의 눈에는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 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변황의 거목들 을 중원 정복이라는 명분아래 모조리 제거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혈존이 라는 변수 덕에 너무도 쉽게 달성된 터였다. 청마산에서 벗어난 이후 애초 천축 법존의 목적은 변황으로의 철수였다. 일단 명분이 중원정복이었던 만큼 중원에 들어와 천축을 제외한 여러 세 력들의 힘을 소진시킨 이후 적당한 핑계를 대어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 기만 해도 향후 일 백년 이내에 천축과 변황에서 그의 자리를 위협할 존 재는 없는 셈이었다. 금혈존을 만난 뒤 처음에는 그의 기세에 눌려 협조했다. 한순간 혈존의 위압감을 보고 그에 굴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가는 것을 보 고 있자니 잘만하면 중원을 통째로 삼킬 수도 있겠다는 야망이 법존의 가 슴에 싹트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압니다. 하지만 제 말을 좀 더 들어봐 주십시오." 법존의 부드러운 말에 달라이 대라마의 말문이 막혔다. 변황으로 철수하 자는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천축 법존의 말투와 눈빛에서 그럴 뜻이 없음 을 읽은 것이다. 법존의 눈에서는 야망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무작정 저를 따라 온 변황동맹의 사람들이 불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황의 애초 목적은 중원정복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법존. 법존께서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은 아 나... 중원에 대한 야욕을 아직도 버리시지 못했단 말입니까? 천마와 혈 존, 그 외에 무시무시한 자들이 허다한 것이 중원입니다. 법존도 잘 알 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나 이대로 회군하면 저들의 불만을 어찌 무마하겠습니까? 수하들의 원망을 풀고 중원을 정복할 계획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무슨?" 천축 법존이 내공으로 주위에 소리를 차단하며 조용하게 말했다. 자신과 달리 아직도 변황동맹 대부분의 무사들에게 신뢰를 받고있는 달라이 대라 마의 협조가 그에게는 꼭 필요하다. "그동안 옥룡왕과 금혈존과 의논한 바가 있습니다. 옥룡왕이 혈존 대회 를 열 것이라는 사실은 알 것입니다." "......" "옥룡왕은 청마산 때처럼 혈존 대회가 열리는 당일, 자금성 일대를 차시 혈존대진(借始血尊大陣)을 펼칠 생각입니다. 그 날 혈존의 이름을 단 자 들과 그에 반항하는 자들이 몰고 올 세력을 이용하여 옥룡왕은 괴진(怪 陣)에 보호받고 있는 황제와 측근들을 죽이고 금혈존과 독혈존은 무림 최후의 승자가 될 생각입니다. 자금성은 삼중의 포위망에 쌓일 것입니 다. 혈존대회가 열리는 날 각 혈존과 자금성의 괴세력, 황제들을 처리하 는 일차 포위망은 금혈존과 독혈존, 그리고 혈지존이 천마강시와 맡을 겁니다. 그들이 탈출하는 것에 대비하여 차시혈존대진 안에서 우리 변황 동맹과 현황방, 옥룡왕부의 세력이 이차 포위망을 펼칠 것이며 외부에서 만약 황제를 구원하는 자들이 올 것을 대비하기 위해 용병들과 황도수비 군이 차시혈존대진 밖에서 삼차 포위망을 펼칠 것입니다." "그들의 장단에 우리 변황의 형제들이 놀아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후후. 들어보십시오. 현재 천하 각처에서 혈존을 자처하는 자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제각각 따로 노는 바에야 금혈존, 독혈존, 혈지존과 천마강시의 연합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세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혈지 존은 천마강시를, 저는 변황고수를, 금혈존이 용병들을 동원하면 절정고 수의 숫자이든 단순 머리 숫자이든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 이후의 일은 어이하려 하십니까? 옥룡왕 혈지존이 황제가 되고 금혈 존이나 독혈존 중에 무림왕이 탄생한다해도 우리는 변황형제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처지가 절박하다 하여 어이하여 속수무책으로 이용대상이 되시려 합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최후의 순간 가장 유리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잘만하 면 중원 황제의 자리도, 중원무림도 우리가 지배하게 된단 말입니다." 달라이 대라마의 얼굴이 법존의 말에 크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각 혈존들은 혈지존의 천마강시와 금혈존, 독혈존에게 제거 당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해도 크겠지요. 우리 변황동맹은 빠져나 오려는 각 혈존의 수하고수들을 포위한 상태로 있고 현황방과 옥룡왕부의 고수들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저희 변황동맹과 삼차 포위망의 용병들은 혈지존의 세력이나 금혈존, 독혈존이 개인적으로 입을 피해에 비해 거의 타격이 없을 것입니다." "옥룡왕과 금혈존을 배반하고 그 뒤를 치자는 겁니까?" "차시혈존대진이 펼쳐지면 자금성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혈존대회에서, 옥룡왕의 천마강시만 처리된다면... 독혈존과 금혈존이 상처만 입는다면 차시혈존대진 안에는 한줌도 안 되는 그들의 세력과 우리만이 남게 됩니다. 그때 차시혈존대진 안에서 가장 강자는 나와 변황동맹의 세력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모조리 쓸어버리면 바로 변 황동맹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명의 신민들은 어떻게 하고 말입니까? 혈존 대회에 참석하지 않을 백도 와 천년마교는 어떡하고 말입니까?" "옥룡왕과 금혈존만 사로잡으면 차시혈존대진 안에서 우리가 배신한 일 은 아무도 모르게 됩니다. 용병들은 동맹자의 자격으로 수하로 삼으면 됩니다. 옥룡왕의 세력과 금혈존의 상권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됩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 "옥룡왕의 명령으로 명의 중신들을 인질 삼고 적당한 명의 황족 하나를 허수아비로 내세우면 됩니다. 천하에 황실의 안정을 지킨 공로를 명분으 로 우리가 나서는 거지요. 상계를 굴복시킨다면 중원의 황금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고... 무림도 걱정 없습니다. 혈존 대회를 빌미로 무림의 반 역을 선포하여 황제의 명으로 황군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황군과 무림이 공멸 한다해도 우리는 아무런 손해도 없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이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어째서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혈지존이 옥룡왕으로 행세를 했다면 나도 명의 황족의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나는 혈존에게 배운 바 가 거의 같지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미쳤다. 미쳤어. 법존은 야망에 눈이 멀어 미쳐버린 것이다.) 달라이 대라마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법존은 혈존대회가 벌어지는 날, 차시환혼대진 속에서 자금성을 포위하여 벗어나는 적들을 막으며 전 력을 아끼다가 최후에 남은 자들을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쓸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옥룡왕처럼 명의 황족을 가장하여 황제가 될 셈이 다. 금혈존의 재력과 옥룡왕의 조정세력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그리 고 명 황군을 동원하여 무림을 쓸어버리려는 것이다. (법존은 변황동맹의 세력마저 자신의 야망에 희생시킬 작정이다. 지금은 필요하니 우리 변황동맹을 위하는 척해도... 그의 성격상 모든 것이 성 공한다면 그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우리 변황동맹의 형제들마저 살인멸구 를 할 것이다. 진정 무서운 자다.) "어떠십니까? 모든 것은 변황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변황의 형제들에 게 전해주십시오. 중원을 이 손아귀에 넣으면 무림천하를 균등 분배하여 그들의 지배 아래로 주겠다고. 모든 영광을 같이 하겠다고 말입니다." 천축 법존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달라이 대라마는 하고자 하던 말을 목 속으로 꿀꺽 삼켰다. 이미 야망에 미친 자의 눈빛. 그것은 서장에서 보 았던 지배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 마저 불태워 자멸하고 마는 광인의 눈빛이었다. 여기서 반대를 한다면 법존은 제일먼저 달라이 대라마를 제거할 것이다. "물론 법존의 일에 협조를 해야겠지요. 모든 것이 변황의 영광을 위해서 가 아닙니까?" 달라이 대라마는 침중한 표정으로 끝내 승낙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현 상황에서 그의 말을 거역할 방도가 즉시에 생각나지 않았다. 변황 전체와 변황의 일부인 천축은 그 세력이 거의 비등했다. 전대의 변 황지존들이 죽은 지금 절대강자인 법존이 나선다면 절대적으로 천축이 우 세했다. 달라이 대라마가 반대한다면 반대자를 모조리 죽이고 천축 세력 만으로도 일을 도모할 법존이었다. 하물며 옥룡왕이고 금혈존이고 모조 리 변황동맹을 이용할 생각만 가득한 대마왕들뿐이니 어디에 하소연하 랴? 법존과 동맹을 맺은 용병들까지 주변에 있으니... (기회를 보아 변황형제들의 안전을 도모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 만 어떻게?) 달라이 대라마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떻게 자신이 방안으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그의 뇌리에는 온통 절망만이 가 득할 뿐이었다. "이 눈이 썩었구나. 서장에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변황의 맹 주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변황무림의 맥이 법존 한 사람 때문 에 멸망하겠구나. 이일을 어이할꼬. 어이할꼬. 불존이시여." 달라이 대라마가 넋을 잃고 중얼거릴 때 그의 앞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도 절망에 빠져 있소? 달라이 대라마." 달라이 대라마는 자신의 방안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의 정체 를 안 순간 더더욱 놀랐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게되어 저도 모르 게 털썩 방안에 주저앉고 만 달라이 대라마였다. 놀랍게도 서장의 주인 이 달라이 대라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지울 수 없는 공포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침부터 같이 있던 용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 니다." 천룡사주가 해가 중간에 떠오를 때쯤에 천축 법존을 찾아왔다. 그의 얼 굴은 불안에 차 있었다. "무슨 소리냐? 금혈존이 용병들의 지휘를 본좌에게 맡겼거늘. 본좌가 아 무런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천룡사주의 보고에 천축 법존의 얼굴색도 크게 변하고 말았다. 대장군부 연무장의 동과 서를 나누어 각기 변황동맹의 고수와 용병들을 나누어 주 둔케 했는데 용병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장군부 외부의 이 목을 꺼려하여 용병이든 우리측 형제든 절대 외부 출입을 엄금하라고 했 거늘." "그것이... 어제 저녁 현황방에서 훈련지시가 내려왔다며 일종의 병진 (兵陣)을 밤늦게까지 연습하기에 우리 변황의 형제들은 먼저 거처로 돌 아갔습니다. 그들이 수상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기에." 천룡사주의 말을 들으며 법존은 불길한 예감을 품고 용병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달려갔다. 텅 빈 연무장에는 평소라면 용병들이 병진을 연습하고 있어야 했거늘 지금 텅 비어 있었다. (금혈존이 우리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었나? 그럴 리가? 지금 배반해서 그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이 있지? 다른 변수가 생긴 건가?) 여러모로 생각했지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법존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생긴 이상 장군부를 하루빨리 떠나 변황동맹의 무 사들을 숨기고 옥룡왕부에 가서 금혈존에게 따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 다. 멍하니 법존이 연무장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소문이 돌았는지 변황동맹의 무사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천축의 고수들은 규율을 지키며 절도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변황의 세력들은 노골적 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삽시간에 연무장에 변황고수들이 가 득 들어서며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슈슈슛슉! 그때였다. 갑자기 연무장 밖에서 무수한 화살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 다. 일정한 목표도 없이 연무장 안쪽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화살 비. 그 것은 하늘을 까맣게 덮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수만 발의 화살이 넘 는 것 같았다. "크아아악." 멋모르고 용병들의 실종에 웅성거리며 나섰던 변황동맹의 무사들 사이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림인에게 화살은 별로 위력적이지 못하는 무기였 지만 그것도 저렇게 하늘을 뒤엎을 정도면 이야기가 달랐다. 호신강기로 화살을 퉁기어 낼 수 있는 자는 변황동맹 전체 중에서도 일 푼도 안 되는 천 여명 정도였다. 또한 오만 명 이상 고수라 불리는 자 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검이나 무기로 쳐낼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도 끝없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소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도 순식간에 수백 발 쏟아지는 화살을 일일이 퉁겨 내기에 는 화살 비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제길. 건물로 뛰어들어." 법존이 놀라 소리쳤다. 그 짧은 시간에 변황 십만 고수들 중에 하급제자 들 거의 칠 천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있었다. 단 한차례의 화살 비 가 휩쓴 결과였다. 쓰러진 자들 중 삼분지 일은 즉사했고 나머지는 모두 중상이었다. 화살은 놀랍게도 스치기만 해도 중상 아니면 사망이었다.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법존도 익히 아는 철시였다. 절정고수가 아니면 내공의 힘을 뚫어버리는 철시, 두터운 근육과 뼈는 물론이고 나무 방패 도 그대로 뚫어버리는 무서운 무기였다. 대막의 장인들이 고안하여 만든 철시와 적은 힘으로도 엄청난 거리를 쏘아보내는 조선의 강궁 등, 둘은 금혈존이 귀하게 구입한 것이다. 만일의 경우 무림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서였다. 모순되게도 십만 용병들 중에 내공을 가진 자들만 골라 연무장 에서 철시를 사용하는 궁술을 계속 수련하도록 지시, 궁병 부대를 만든 것은 바로 법존 자신이었다. 그나마 희생이 적었던 것은 변황무인 들이 빠른 신법을 지녔고 피할 건물 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황무림인들은 하나같아 급히 몸을 날려 건물로 뛰어들었다. 내공을 품은 무수히 많은 화살이 이백 장을 건너와 건물의 벽과 문에 파바박 소리를 내며 꽂히기 시작했다. "제길. 용병 따위가." 천축 법존의 두 눈에 노화가 이글거렸다. 장군부는 병사들을 조련하기는 좋아도 농성할 준비는 전혀 안된 곳이었다. 황실에서 자신들을 치지 않 을 거라는 절대적인 자신감 때문일지, 혹은 황실에서 원하면 언제든지 목을 내놓겠다는 충성심 때문인지 연무장 안에서 당당히 밖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기는 편해도 안에서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장원을 둘러싼 담장도 칠 척 길이의 낮은 벽이었고 그 안쪽과 밖의 땅의 높낮이도 같아 안쪽의 방어 벽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도둑들이 만약 장군부의 담을 넘을 간담만 있다면 정말 넘기 딱 좋은 벽이었다. 그나마 그 벽조차 건물이나 연무장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 담장 에 새까맣게 용병들이 올라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명백한 용병들의 배 신이었다. 담장 뒤쪽에서 화살을 받으며 강궁을 겨누고 있는 모습에 이 가 갈렸다. 담과 변황고수가 급급히 피한 건물과의 거리는 이백 여장. 솔직히 일류 고수라도 몇 만의 궁사가 일제히 쏟아내는 철시의 화살 비를 뚫고 담장까 지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무리였다. 삼만 정예 궁병이 일제히 철시를 날 린다면 선두에 선 자들이 한 자리에서 맞이할 화살만도 족히 수백 발은 되리라. 전진은 무리였다. 도달이 가능한 자는 오직 호신강기로 철시조 차 몸으로 퉁겨 보낼 수 있는 절정고수들 뿐. "급히 변황동맹의 수뇌들을 불러오도록 명을 내려..." 천축 법존이 화를 삭힐 때 갑자기 건물에서 뛰어나가는 자들이 있었다. 용병 따위에게 기습을 받은 것을 견디지 못한 성질 급한 변황의 고수인 모양이다. 대막, 묘강, 동영, 서장의 고수들. 천축 법존에게 불만이 많 은 그들이 천축 법존의 명 없이 함부로 뛰어나간 것이다. 한 차례 화살 비가 지나고 조용해지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분노가 이성을 가린 모양 이었다. "바보같이. 괜한 희생을 자처하다니." 천축 법존이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자는 어 리석은 대가를 받으리라. 삼사 만 정도 되는 자가 일제히 뛰쳐나갔다. 가장 선두에 선자들은 가장 성미가 급한 철혈마궁의 고수들로 모두 평소 다혈질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이 나섬과 동시에 하늘을 뒤덮는 화살비가 다시 한번 쏟아져 나왔다. 웬만한 내력으로는 막을 수도 없는 철시들이 일제히 날아왔다. 솔직히 이 백장 거리는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만 먼 거리도 아니었다. 사 만의 고수라면 어느 정도 희생을 통해 담장 끝까지 도달할 수 있지 않을 까 천축 법존은 기대했다. 과연 커다란 비명과 함께 사오 천의 고수가 단번에 쓰러졌는데도 빽빽한 화살 비를 뚫고 나머지 고수들은 전진을 계 속했다. 한 번의 화살비가 끝나고 살아남은 삼만 오천 정도의 고수가 달려들 때 불과 숨 한번 들이쉴 시간을 두고 두 번째 화살비가 쏟아졌다. 그들이 미쳐 십여 장을 전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외 없이 앞 쪽으로 달려갔던 성급한 변황고수 오천 명 정도가 힘도 못쓰고 쓰러졌 다. 법존은 자신이 너무 궁술 훈련을 열심히 시킨 것을 후회했다. 저 정도 연사속력이면 변황고수들이 담장까지 도착하기 전에 세 번 정도 더 화살 을 날릴 수 있을 터이고 이만 이상의 전투불능 부상자가 생겨나리라. "후퇴해라.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돌진하다가는 반 이상의 형제가 목숨 을 잃는다." 갑자기 건물 안에서 달라이 대라마가 뛰쳐나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변 황고수들의 선두에 나서 화살을 막으며 외쳤다. 뛰쳐나간 대막, 서장, 묘강, 동영의 무사들은 달라이 대라마의 청룡후(靑龍吼)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이성을 되찾고 뒤로 피하기 시작했다. 수뇌들의 지휘아래 혼란에서 질서를 회복하며 일제히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용감히 뛰쳐나갔지만 아무런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만 내고 돌아온 변황고수들이었 다. 변황고수들이 뒤로 물러서자 철시의 화살 비도 뜸해졌다. 달라이 대라마 는 호신강기로 철시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영웅적인 자세를 보이며 수많은 화살 비속에 굳건히 서 있었다. 그는 쓰러져 있던 주변 변황고수들을 살펴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달라이 대라마가 보기에 부상 을 입은 자중에는 빨리 손을 쓰면 목숨을 구할 자도 많은 것 같았다. 철 시에 맞고 쓰러진 일만 오천 정도 중에 정말로 죽은 사망자는 일할도 되 지 않았다. 달라이 대라마가 철시를 무시하듯 천천히 걸어 들어오자 건물에 숨은 변 황고수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천축 법존이 나섰다. 달라이 대라마가 호신강기로 철시를 막던 용맹한 모습을 천축 법존도 보여주려 했는데 법존이 나서자 의외로 화살비가 뚝 그치고 말았다. 법존이 쳇 하 고 소리치고는 난관을 벗어날 생각에 골몰했다. (아까 경우를 보건대 한꺼번에 모조리 뛰쳐나간다면... 아마도 반 정도 가 목숨을 잃고 말리라. 그보다는 차라리 소수정예로...) "변황동맹 서열 일천 위는 모두 내 명을 받아 돌진할 준비를 하라. 적은 배신한 용병들이다. 천 명으로도 일망타진할 수 있다." 천축 법존이 이를 갈며 목소리에 진기를 실어 건물 쪽을 향해 소리쳤다. 단 천명일지라도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초고수였다. 제대로 된 무공을 갖 추지 못한 용병 따위 담장까지 도달하기만 하면 단숨에 휘저어 버릴 수 있다. 그때 변황동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몰려나온다면 용병들을 전멸시 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천축 법존의 명령이 장군부를 울리자 마치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장군부 의 담장 쪽에서도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변황동맹의 무리가 어이하여 황도 한복판까지 왔는가? 백도맹의 종리연 이 여기 있다." 수백의 깨끗한 백의를 입은 무리가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용병들이 있 는 담을 너머 담 안쪽으로 용병들 앞에 나타났다. 선두에 선 자는 백도 맹주 종리연이고 그 뒤를 따르는 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정고수들 이었다. "승룡곡 천무호정일천위가 왔도다. 변황의 괴수들은 목을 내밀어라." 나이를 짐작 못할 노인네들 일백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며 정면 담벽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환우비령이 일 백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변황동맹은 중원을 침범 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여기 신비삼패도 있다. 백도에 귀의한 신비삼패가 처음 할 일은 변황동 맹을 처 부수는 일이로다." 용병들 뒤에 제각기 부르짖는 수천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도 맹의 저력. 백도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환우비령과 승룡곡, 신비삼패까 지. 흑도를 제외한 중원 백도의 정예들은 거의 모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 숫자와 무위가 엄청나 천축 법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이된 일인가? 백도맹이 나타나다니? 금혈존에 의해 감쪽같이 위장하 고 북경에 도착했거늘 백도에서 어떻게 눈치챘단 말인가?" 천축 법존이 어이없어 할 때 역시 혼란에 빠진 변황고수들이 저마다 떠들 어대었다. 어제까지 동료라고 생각했던 용병들의 배반, 그것은 혼란으로 이어졌고 철시에 의한 피해와 함께 백도의 출현은 그들을 공포 속으로 몰 아갔다. 희생만 내고 간신히 건물로 돌아왔던 변황동맹 수뇌 급조차 백 도의 절정고수들이 줄지어 나타나자 안색이 변해 떠들었다. "법존의 명에 의해 저들 중원의 용병과 같이 지냈거늘 역시 중원인 들이 배반하였다." "법존이 중원의 왕야와 붙어 다니더니, 혹시 천축 법존이 우리를 판 것 이 아닌가?" "그렇게 백도맹이나 천년마교와 붙지 못하게 하더니 백도맹이 오히려 우 리를 포위하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어이된 일인가?" 삽시간에 변황동맹의 고수들은 불안과 혼돈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제 목:[연재] 혈존무적-좌절된 법존의 야망 관련자료:없음 [20531]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5-17 16:34 조회:521 < 좌절된 천축 법존의 야망 > 건물안에 있던 변황동맹의 고수들은 중원 백도 고수들의 출현에 큰 충격 을 받았다. 저들 용병의 철시도 만만치 않은데 그들 포위망에 백도 고수 들이 가담해 있다니. 게다가 단순히 백도맹이 아니라 중원 전력의 대부 분이 몰려 온 것 같았다. 변황동맹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으며 분분히 천축 법존을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축 법존의 곁에서 오연히 있던 달라이 대라마가 그들의 분란을 막으려 는지 일갈을 터트렸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 지금 적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인가? 하나로 뭉쳐도 힘이 부족한 상태이다." 혼란스러운 때에 달라이 대라마의 일갈은 모두의 정신을 되찾게 만들었 다. 그렇다. 어차피 중원무림과 전투를 벌이러 온 변황동맹의 고수들이 다. 뜻밖의 사태이기는 하지만 감당 못할 일은 아니었다. 배반한 용병은 괘씸하지만 백도는 원래부터 적이었던 것이다. 천축 법존이 달라이 대라 마에게 고마움에 찬 눈길을 보고 있는데 그들 중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한 사태가 그 때 발생했다. 콰콰쾅. 거대한 폭음이 있고 텅 빈 연무장에 폭발이 있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모 두 놀라 연무장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다가 눈길을 돌려 폭발을 일 으킨 원인을 바라보았다. 있으나 마나 이었던 담벽 일부분이 허물어지며 놀라운 화력 병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포. 군대에서 쓰는 대포가 한 둘도 아니고 열문 이나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콰르릉! 미처 침착성을 되찾기 전에 그들이 숨은 누각 하나가 폭발을 일으키며 무 너져버렸다. 또다시 대포하나가 불길을 내뿜은 것이다. 눈앞에서 누각 하나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니 모두들 공포에 질려버렸다. 대포라니. 철시만으로도 힘겹거늘 대포라니. 비록 열 문에 해당하는 대 포지만 저것이 일제히 불을 뿜을 때, 게다가 철시까지 함께 공격을 할 때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두가 짐작했다. 건물도 더 이상 그들을 보호 해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철시와 대포를 뚫고 갈 능력이 되는 변황의 수뇌 급들이 다가간다고 해도 지금 나타난 백도 고수들이 가만 두고볼 리 가 없다. 변황동맹은 자신들이 도망갈 길이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을 절감 했다. 천축 법존마저 질려버려 말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 변황고수들 모두의 귀 를 울리는 엄청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본좌는 호황부주라고 한다. 황제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관리이다. 반 역도 옥룡왕과 결탁한 변황의 무리는 들어라. 감히 변황의 무리가 황도 까지 침입하다니, 너희들은 우리 명과 전쟁을 할 생각이냐?" 대포가 있는 쪽에서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남자 하나가 나타나 소리를 쳤 다. 호황부주라면 황실을 보호하는 전설 같은 관직이다. 백도의 모든 무 리들이 그쪽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아 호황부라는 권위를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백도라면 명예에 목을 걸기에 절대 보통 관리에게 는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럴만한 자격과 지위가 저 복면인 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벽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렸다. 사방 팔방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몇 만인지 몇 십 만인지 구별조차 할 수가 없 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 담 위나 주변에 포진하고 있으니 그들은 아닐 것이다. 호황부주가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와 포위하고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어쩌면 옥룡왕의 심복이라 안심했던 황도수비군이 변심하여 호 황부주에게 달라붙었는지도... "전쟁이라니. 그... 그런?" 변황동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당황한 안색을 띠었다. 그들의 목적은 한족 (漢族)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변황인이 힘을 합쳐 중원에 자신들의 세력 을 과시하고, 힘으로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혹은 포교하여 자신의 교리를 넓히고, 중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중원무림을 눌러 그들의 영 향력을 뺏자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명 제국과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원한다면 변황동맹은 무림인이 아닌 군대가 연합해서 왔을 것이다. 지금 의 명은 대국(大國)이다. 백만 황군을 몰아 서장으로, 묘강으로 쳐들어 온다면 변황 각 지역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철시에 당황하고 배반한 용병들 때문에 경악했으며 백도의 고수들 출현 때문에 질려버렸고 대포와 호황부주의 출현에 절망했다.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철시가 하늘을 가득 메우면 살아 담장까지 도달하여 전투를 벌 일 자는 채 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숫자로 백도의 고수들을 감당 해 낼 수가 있을까? 문제는 그들의 생사만이 아니었다. 이제 호황부주의 질책과 서문 장군부 를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함성을 들으니 자신들의 죽음보다는 고향이 걱 정되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시간 전에 영락제는 남으로 북으로 그 얼마 나 변방을 공략하고 괴롭혔던가? "본 부주는 역도와 결탁한 너희들을 없애고 그 책임을 동영과 서장, 천 축과 대막에 물으려고 했다. 감히 황실을 능멸한 죄로 그 지역을 백만 황군으로 초토화시키고 그 곳에 사는 종족의 씨를 말리고자 했다. 허나 명의 백성인 백도의 무림인들이 이를 말렸다. 너희들의 일은 무림인의 일이니 그들이 맡겠다고. 말하라. 너희들은 무림인의 자격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옥룡왕과 결탁한 반역도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호황부주라는 복면인의 호통에 변황무림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축 법존 에게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이럴 수가! 정보와 다르다. 북경은 옥룡왕에 의해 완벽히 장악되어 있 는 것으로 알고있었거늘. 어이하여 군부에서 보관하는 대포가 움직이고 백도 무림인들이 옥룡왕 모르게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 가 호황부와 저 수십만이 내지르는 것 같은 함성이라니? 자금성의 괴진 을 설치한 것이 역시 호황부였나? 그럼 옥룡왕은 단지 껍질만을 장악하 고 있었던 건가?) 법존이 당황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달라이 대라마 가 나섰다. 그는 철시도, 백도맹의 기인들도 겁이 나지 않는지 당당히 건물 밖으로 나서서 호황부주라 자처하는 복면인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서장 포달랍궁의 달라이 대라마라고 하오. 우리는 결코 중원의 반 역에 대해 도울 뜻이 없었으며 중원에 들어섰던 것도 중원의 유수한 무가 문파와 서로의 무를 비교하려 했던 것이지, 결코 불측한 마음을 먹고 했 던 것은 아니오. 오해를 풀 길이 없으나 그런 행동을 했다면 호황부주에 게 백배 사죄하며 이대로 변황으로 돌아갈 터이니 길을 열어 주시기 바라 오." "흥. 포달랍궁의 궁주. 그대가 그러한 말을 할 입장인가?" "길을 터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준다면 향후 백년간 변황은 중원에 어떠한 다툼도 시비도 피하겠소. 중원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고 돌아 가겠소. 우리가 결백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진심뿐이오. 믿지 못해 우리를 잡아 굴복시키려 한다면 우리 모두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 도 단 한 명 살아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 당당한 포달랍궁 궁주의 모습은 진정 영웅의 모습이었다. 변황의 기개를 살리면서도 한편으로 지금 변황의 고수들을 하나라도 살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현 상황에서 저토록 당당하게 길을 비켜 달라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비록 변황이 앞으 로 백년간 중원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어도... 당장 한 목숨이 위기에 달린 변황인들은 그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았다. "흥. 본 부주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무 림인이라 한들 철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대포와 철시 앞에 어찌 버티 겠는가? 하지만..." 복면인은 옆에선 무성 종리연에게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달라 이 대라마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백도의 무림인들이 너희들이 믿을 만 하다는 구나. 포달랍궁의 궁주는 변황 무림의 지존으로 중원 무림인과 겨루러 왔을 뿐 반역에 가담할 인물 이 아니라는 군. 믿을만한 존재들이라고 믿어보라고 한다. 달라이 대라 마가 약속을 하고 돌아간다면 약속대로 돌아가는 것이 확실하다고 굳이 너희들을 벌할 필요가 없다 한다. 본좌가 너희들을 믿을 수는 없어도 백 도맹주와 구파 장문인의 말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호황부주의 말이 점차 희망적인 측면을 띄어가자 변황무림인들은 살아 돌 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포달랍궁의 궁주. 그대가 변황동맹의 맹주라면 백도맹주의 말도 있으니 그 약속을 믿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변황동맹을 대표하지 못하는 신분이다. 그대의 약속을 증명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호황부주의 이어지는 말에 모두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결국 달라이 대 라마가 자격이 없어 그 말을 믿지 못하겠으니 퇴각로를 열어주지 못한다 는 소리였다. 변황무림인의 갈망하는 표정이 일제히 변황동맹의 맹주인 법존에게 쏟아졌다. 그들도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화포와 철시로 무장한 군대와 용병들, 백도무림인들까지 모여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포위된 상태, 결코 승산이 보이지 않는 궁지에 몰려있다는 것을. 하지만 천축 법존은 쉽게 변황인 들이 원하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옥룡왕, 금혈존과의 약속이 쉽 게 달라이 대라마처럼 모든 것을 단념하겠다는 말을 내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천축 법존이 침묵을 지키자 심지어 천축 고수들마저 절망과 분노의 빛을 띠었다. 마치 법존의 표정은 같이 죽자 하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 껴졌기 때문이다. 그 때 또다시 달라이 대라마가 나섰다. "변황동맹의 맹주는 그 신분과 자격이 있는 자가 강자일 때 차지하는 것. 법존은 이미 그 자격을 잃었소. 본 라마는 더 이상 법존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소. 그리하여 변황동맹의 맹주자리를 걸고 그대에게 도전하 는 바이오. 법존." "달라이 대라마. 그게 무... 무슨?" 달라이 대라마의 뜻밖의 말에 천축 법존이 어리둥절할 때 달라이 대라마 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 라마가 패하면 법존이 변황동맹의 형제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간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요? 그러나 법존이 패하면 변황동맹의 맹주자리를 다시 돌려 받을 것이고 그 지위로 방금 호황부주에게 한 약속을 지킬 것 이오. 호황부주의 말속에는 본 라마가 그러한 자격이 있다면 말한 바대 로 들어주겠다는 뜻이 있었소. 본 라마는 변황동맹의 형제들을 살리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소." 그 순간 변황동맹의 모든 변황무림인들의 환호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한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잊었다. 도전의 의식은 언제든지 전사들 의 마음을 불태우는 흥밋거리이고 거기에 극적인 감동거리를 달라이 대라 마가 입으로 뿜어대었기 때문이다. 법존은 어이가 없는 가운데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달라이 대 라마의 말은 교묘하여 마치 자신은 변황동맹의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희 생하는 성자이며 법존은 부당하게 맹주 자리를 차지하고 모두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가려는 악마라는 식의 뜻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하나를 이상하게 보자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마치 호황부주라는 자와 달라이 대라마는 짜고 말하는 것처럼 상황을 밀고 나가지 않는가? 그리고 보니 용병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라진 것도 이 상했다.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지내던 처지였다. 누군가의 묵 인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용병 나부랭이 따위가 변황동맹 정예 그 누구 도 모르게 빠져나가 장군부 담을 방패로 궁진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달라이 대라마는 꼭두가시 노릇을 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누가 달라 이 대라마를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어제 내가 만났을 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단 하루만에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을 복 종시킬 존재가 있는가?) 의문은 의문이고 머리 속으로 달라이 대라마의 배신에 대한 분노가 솟구 쳤다. 그러나 가슴은 뜨거운 분노로 용솟음쳐도 머리는 차가워질 뿐이 다. 그는 여기에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도전은 현 상황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다. 그가 성큼 나섰다. 도전을 받드는 법존 에 대해 또 다시 환호가 울려 퍼진다. (호황부가 달라이 라마를 사주하여 이런 짓을 꾸민 이유는? 현재의 전력 으로 보아 우리가 극히 불리하지만... 저들도 피해를 감당할 준비가 되 어있지 않군. 몰려든 백도와 용병들을 우리가 아닌 옥룡왕이나 금혈존 등에게 써먹으려 하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몰살시키겠다는 말과 달리 저 들은 우리 변황동맹과의 전투를 원하지 않고 있다.) 법존이 생각을 굴릴 때 달라이 대라마가 호황부주에게 소리쳤다. "호황부주. 우리에게 잠시의 시간을 주시오. 본 라마는 그대가 말한 자 격을 취득하여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약속을 지키겠소." "허락한다. 그대들의 진심이 정녕 그러하다면... 역모와 상관없이 변황 동맹이 말려든 것이라는 백도 무림인의 변호가 합당하다면, 그대 포달랍 궁의 궁주가 자격을 취하는 대로 그 약속을 믿겠다." (놀고있군. 서로 짜놓은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법존은 차가운 눈으로 달라이 대라마를 노려보았다. 그가 무엇을 믿고 이런 일을 벌였든 일단 달라이 대라마를 제압해야 했다. 저들이 변황동 맹과의 일전을 바라고 있지 않다면 좀더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나갈 기 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저들의 사주를 받은 달라이 대라마를 처참하게 제압해 다시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가 없도록 해 야했다. 텅 빈 연무장에 법존과 달라이 대라마가 대치했다. 서로의 안색은 신중 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달라이 대라마는 포달랍궁 비전의 호법신공을 끌어올렸다. 색랍혈불공 (色拉血佛功). 4대 달라이 대라마가 싸리 눈이 내릴 때 갑자기 법을 깨달아 열반하면서 남겼다는 불공. 그것을 무공화시킨 것이 바로 지금의 달라이 대라마였 다. 서장 포달랍궁에서 가장 위력이 뛰어난 호체기공이다. 동시에 그의 손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대수인(大手印). 달라이 대라마는 자연 속에 서있는 초연하게 서있는 한 그루 거목 같았 다. 폭풍이 몰아쳐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수천 년 수령의 거목. 그것은 포달랍궁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풍겨나는 것이리라. "대단하군. 달라이 대라마의 경지가 사부이신 혜경성승과 거의 맞먹지 않은가?" 무성 종리연이 감탄했다. 지난 이십 년 이래로 그는 백도맹주로 천하를 다스려왔지만 그것은 그의 조직 관리능력과 공명정대한 마음 때문이었 다. 그 누구도 무성 종리연이 천무삼성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 다. 그것이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종리연이 천무삼성과 근접한 경 지에 오른 것은 사실이었다. 천무삼성의 능력과 그들이 남긴 미완성의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아는지 확신하는 것도 종리연이었다. 그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물려받은 백이충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백도지존으 로 받든 것이다. 그런 종리연이 천무삼성 중에 은연중 최강으로 알려진 혜경성승과 달라이 대라마를 비슷한 경지라고 평가하고 있으니 달라이 대라마의 무공이 얼마 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숨겨놓았던 최후의 무공인가?" 천축 법존도 긴장을 하며 자신의 최고 신공을 끌어올렸다. 달라이 대라 마가 자신에게 대적하는 것은 뭔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므로 잠시의 방 심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의 몸으로 푸른 기운이 덮쳤다. 천축 최고의 제천불마신공에 청영마공을 합일하여 그 스스로 이룩한 청광 불공(淸光佛功). 쌍영마공에 비견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법존이 생각하는 무공이다. 제석천이 아수라를 제압할 때 사용했다는 신력(神 力)을 목표로 한 청광불공은 천축 최고의 무학. 제석천이 그 웅자를 드러냈을 때 뭇 악마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공포 에 질렸고 수라와 나찰들이 모조리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고 한다. 오직 아수라만이 용기를 내어 제석천과 끝까지 싸웠는데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우주가 뒤집어지는 대 접전이 벌어졌다. 청광불공은 그러한 전설에 걸맞 은 무공이었다. 법존의 얼굴이 장엄하게 빛났고 푸른 광채가 성스러운 빛을 띄웠다. 법 존의 몸이 붕 떠올랐고 그의 발 밑으로 청광이 연화의 형태를 띠며 그의 하체를 받쳐들었다. 자세히 보면 연화불대(蓮花佛臺)의 모습은 청색의 강기가 형상화 된 것이었다. 모든 악인과 사악한 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정당하고 성스러운 광채가 법 존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연화불대에 앉은 법존의 모습은 천 축에서 전설처럼 떠도는 연화불존의 형상같았다. 그 역시 혈존이나 천마 등이 아니었다면 무림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자였음이 분명했 다. "저 정도인가? 생각보다 약하군." 모두들 천축 법존이 보인 광채에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호황부주 백이충만이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려 몸 가까이에 사오 장이 나 뻗어내는 푸른색의 빛은 강기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형상화시킨 법존 의 능력은 진실로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혈존의 기억에 의하면 제자들 중에 오히려 혈지존보다 뛰어났던 최상의 무재(武才)를 가졌던 자가 청영지존이었거늘." 혈지존은 혈영동을 열었고 청영지존은 청영동을 열어 천축법존이 되었 다. 하지만 둘은 달랐다. 지금 혈지존은 혈존의 일인인 금혈존이나 독혈 존과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데 비해 법존은 금혈존 밑에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혈존이나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백이충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영동을 열었다면 지금 법존이 보이는 경지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 상을 뛰어넘지 못했구나." 혈지존과 천축법존의 차이는 무엇일까? 혈영동에 쌍영마공을 익힐 수 있 는 모든 준비가 있었기 때문일까? 천마강시를 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 일까? 하지만 청영동에는 변황에서 약탈한 모든 무공을 넣어놨었다. 그 가치는 혈영동에 비해 못지 않다. "청영지존이 저 정도에 머문 것은 그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버렸 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자. 자신의 그릇을 한정하는 자. 그들은 그 한계 나 그릇이상으로 크지 못한다. 혈지존은 혈영동을 열었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황궁무고를 털었고 대두자들을 이용했다. 그는 쌍영마 공을 터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합일하여 혈존밖에 이루지 못했 던 쌍영합일마공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었다. 쌍영마공과 쌍영합일마공 은 그 차원이 다르다. 쌍영마공 자체가 중단전 초입의 무공이라면 합일 된 마공은 중단전에서 상단전으로 넘어가는 관문과도 같았다. 그 기본을 이루는 상태인 것이다. 혈존상태의 백이충이야 쌍영마공을 합일하면서 동시에 완성된 아수라독존 마공의 구결을 알고있기에 바로 상단전의 경지로 넘어갔지만 혈지존은 아 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깨달음만 있다면 능히 상단 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다. 그것은 혈영동의 안배가 아니라 혈지존 스스로가 그것을 뛰어넘어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 기에 아수라독존마공을 되찾지 못해 중단전 경지에 머무는 십혈존의 일부 를 만나도 눌리지 않고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혈지존은 애초에 천축에서 실전된 변황무학을 찾으러 왔다. 그는 청영동을 열었고 그의 목적을 이루었다. 청영동에 남겨진 무학은 중원의 모든 무학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은 최고의 기연임에는 틀 림없었으나 청영지존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었다. 청영지존이 법존이 되 어 그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법존은 변황 최강의 무학을 터득하고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변황을 통일하고 자신의 세력으로 왕궁을 쌓는 길을 택하고 대신 청영동에서 이룰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포기했 다. "그 결과 그는 청영동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무학경지를 이루었지만 그것뿐이다. 불행히도 청영동의 한계를, 혈존의 안배에서 벗어나지를 못 했구나." 천축 법존의 청광이 어린 강기 덩어리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며 비상했 다. 밝고 찬란하고 경건해 보이는 광채를 띤 강기. 그것은 성스러운 하 늘의 노여움이 지상을 휩쓰는 것 같았다. 휘황찬란한 광채의 강기덩어리 가 형상을 이루며 언뜻 부처의 모습을 이루었다가 사라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 마저 일종의 감동과 경건한 상태로 몰아갔다. "혈존은 혈영동의 천마강시에도 수작을 부려 놓았었지. 쯧쯧 당연히 청 영동의 무학에도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 리 없거늘..." 달라이 대라마는 천축 법존에게서 뻗어 나오는 불광을 보고 잠시 위축되 었다. 달라이 대라마도 활불 소리를 듣는 처지이지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상태이지만 천축 법존 은 무공으로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를 이미 초월한 것 같았다.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자신이 다다르고자 목표로 하는 곳에 이미 올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청광이 휘황찬란할수록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위축되는 것 같았다. 자세 히 보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라이 대라마의 손이 환영을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었다. 멈춘 듯한 달라이 대라마의 손은 눈이 따라가지 못할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빛과 손이 부딪치면서 작은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공기를 진동하고 있었다. 빛은 수없이 많은 강기다발이었고 연이어 달라이 대라마의 몸을 공격했 다. 빛으로 보이는 것은 연이어지는 강기의 해일을 눈으로 쫓아가지 못 한 착시현상일 뿐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강기가 빠르기에 이어진 하나 의 광채처럼 보이는 것이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강기에 달라이 대라마는 연신 대수인을 펼쳐대었다. 다행히 빠름과 변화에 대한 초식은 달라이 대라마의 장기였다. 그를 압 박해오는 푸른색의 강기덩어리를 일일이 하나하나 처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기가 진탕되어 속이 울렁거렸다. 만종 대수인으로도 청광불공의 기운이 어린 강기를 완전히 털어 낼 수 없었다. 숨 한번 쉴 시간에 쏟아지는 수 만개의 강기 파편에 손이 부딪칠 때마다 기이한 기운 이 팔을 타고 올라 달라이 대라마를 괴롭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위험 없이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수세에 몰릴 수는 없다. "타앗. 천수일계수(千手一繼手)"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쑤욱 빛 속으로 빨려들었다. 일순 그의 몸이 강기 다발을 뚫고 천축 법존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 안까지 뛰어든 것이다. 동시에 달라이 대라마의 손이 무수한 환영을 만들어 내었다. 진짜이면서도 가짜인 손. 내공의 극한까지 끌어올려 만들어진 강기가 일 천 개의 손이 되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천축 법존의 강기다발을 뚫고 천 축 법존을 향해 나아갔다. 일천 번의 타격이 연이어지는 포달랍궁 비전 의 절기. 달라이 대라마보다 더욱 빠르고 변화가 많은 초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는 절기였다. "훗. 불존도래(佛尊到來)!" 천축 법존은 살짝 비웃음을 날렸다. 확실히 가공할 무공이기는 하지만 자연과 이미 하나가 된 그에게는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단지 그의 마음 이 달라이 대라마가 쏟아 부은 일천 개의 손을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자 그 즉시 청광불공의 일 단계가 움직였다. 그의 후광처럼 빛나던 푸른빛이 형체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청광이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내며 천축 법존에게 다가오는 천 개의 수강(手剛)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뿐. 푸른 부처가 내뻗는 손이 미치는 달라이 대라마의 일천 수강은 그 즉시 한여름 태양 빛에 녹아 내리는 눈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빠 르고 변화가 심하다고 해도 마음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빠르고 변덕스러 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던 만큼 달라이 대라마의 몸은 빈틈 투성이었다. 천축 법존의 잔인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강기로 만들어 낸 것은 부처의 모습이었지만 법존의 얼굴에 있는 미소는 아수라의 미소였다. 그 미소가 달라이 대라마의 마음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으음. 과연. 천축 법존은 내 상대가 아니로다. 그는 무공으로서 활불의 경지에 와있다. 조금 만 더 마음의 수련을 했다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마음을 닦지 않고 오직 무공만을 닦았구나.) 같은 불자의 입장에서 달라이 대라마는 진정 안타까움을 느꼈다. 불자의 재목으로서 천축 법존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건만 정작 그 자신은 불가의 가르침보다 무공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분 명 자신보다 더 강한 천축 법존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멈칫거렸다. 천수일계수가 실패했을 때 천축 법존 을 유인하기 위해 큰 틈을 보였다. 그곳으로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함 이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형의 힘. 천축 법존에게서 뻗어 나온 마음의 힘이 달라이 대라마의 온 몸을 포박한 것이다. 덕분에 일부러 보 인 틈이 진짜 허점이 되고 말았다. "의기상인(意氣傷人)!" 달라이 대라마가 경악의 외침을 토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천축법존 의 몸 위에 어리는 불존의 형상이 변화를 거듭했다. "영광으로 알고 죽어라. 청광불공 이 단계 기공. 십이청룡폭강(十二靑龍 瀑剛)!" 불존의 형상이 흐릿해지며 다시 뭉쳐 뚜렷한 열 두 개의 용의 머리 형상 으로 변해 달라이 대라마를 공격해 들어왔다. 마치 한 입에 삼켜 버리려 는 듯 끔직한 괴성을 지르는 열두 개의 푸른 용의 머리는 달라이 대라마 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핫!" 보이지 않지만 마치 달라이 대라마 주변의 기운이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불문 청룡후(靑龍吼)로 달라이 대라마 역시 필사의 의지를 끌어올려 법존이 뿜은 무형의 기운에 대항했다. 달라이 대라마가 색랍혈 불공을 십이성 끌어올려 간신히 무형의 압박을 풀고 법존에게서 몸을 떨 어트리려고 했을 때에는 열 두 개의 용의 형상을 한 강기가 그의 몸 바로 지척에 접근해 있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몸이 땅에 눕혀지듯 상체가 뒤 로 휘어지더니 발목을 땅에 고정시키고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 다. "패혈회전륜(覇血回轉輪)!" 무릎을 굽혀 발목까지 땅에 박은 자세로 누운 모습 그대로 달라이 대라마 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달라이 대라마는 원을 그리며 자신의 지척에 다가선 열두 개의 청룡강기에 각기 일백 개의 수강을 쏟아 부었 다. 콰콰콰쾅!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며 주변이 폭약이 터진 듯 황폐하게 변해버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열 두 개의 청룡의 강기가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했고 달라이 대라마의 모습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그가 있던 곳에 한 웅덩이가 될 듯한 붉은 선혈이 점 점으로 뿌려졌을 뿐이 다. "십이청룡폭강(十二靑龍瀑剛)을 막아내?" 피보라는 펼쳐졌지만 시체는 없었다. 청광불공 칠대수법의 하나를 달라 이 대라마가 막아내자 천축 법존은 크게 놀랐다. 게다가 의기상인의 경 지로 마음으로 달라이 대라마를 제압하고자 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 법존보다 낮은 경지에 있는 달라이 대라마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 이다.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달라이 대라마의 무공은 그를 두렵게 했 다. (커다란 내상을 입었다. 제대로 내공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달라이 대라마는 크게 피를 토한 이후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내장이 거 의 박살 난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아내었다. 그 동작이 너무 신속하고 흙먼지가 가려주어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달라이 대라마의 모습 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몸에 외상은 거의 없었지만 내부는 온통 난자 된 상태여서 얼굴은 토해낸 피로 뒤범벅이고 안색은 백납처럼 하얗게 변 해 있었다. (앞으로 방어나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잠력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내공을 휘두를 힘은 오직 세 번 뿐. 하지만 아직 천축 법존의 털끝도 건 드리지 못했다. 겨우 세 번의 기회를 방어만 할 수는 없다. 오직 공격뿐 이다.) 피투성이 몸으로 달라이 대라마가 천축 법존을 향해 덮쳐 들어갔다. 그 것은 무공이 아닌 의지의 기세였으므로 천축 법존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이 조금 위축되었다. 그러나 천축 법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두 손 을 휘젓듯 움직였다. "청광불공 칠 단계 중의 세 번째. 십일면관음타야차(十一面觀音打野 次)!" "열락관음인(悅樂觀音印)!" 천축 법존의 강기가 다시 형상을 이루며 열 한 개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 살 형상을 이루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 보살이 나타내는 열 한 개의 얼 굴 모습을 드리우고 왼쪽 손에 검을 오른 손에 연화가지를 들고 야차를 내리 누르듯 달라이 대라마를 공격했다. 하지만 달라이 대라마의 모습 또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며 두 손을 모아 관음보살 형상의 강 기를 향해 뻗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손에서 연화모습의 강기가 솟구쳤 다. 콰르릉. 콰콰쾅.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기와 기의 싸움이고 강기와 강기의 싸움이었다. 다만 달라이 대라마에게 훨씬 불리한 것은 그의 열락관음인의 무공 수준 은 결코 십일면관음타야차를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화모습의 열 락관음인이 파괴되고 보살형상의 거대한 강기가 검과 가지로 달라이 대라 마를 후려쳤다. "견딜 수 있다. 혈존의 말이 사실이라면." 달라이 대라마는 어제 만났던 자를 생각해내고는 입을 악물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혼자서 천하의 지존들을 초식동물을 쫓는 호랑이처 럼 살육하던 혈존의 모습을. 그는 진짜 혈존이었다. 청마산에 나타났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의 혈존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청마산 때보다 훨 씬 강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달라이 대라마는 변황의 맥을 잇기 위해 서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천축법존은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청영동의 무학에 너무 의존하지 말았 어야 했다. 청영동에서 변황무학의 정수를 접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뛰 어넘거나 혹은 그를 기초로 하여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학을 익혀야 했 다. 청영동은 그의 무공을 비약적으로 높여 주었지만 한가지 약점도 만 들어 주었다. - 천축 법존의 무공이라면 이미 심검, 혹은 의기상인의 경지에 올랐네. 그런데도 금혈존이라는 자에게 너무 쉽게 머리를 숙인 것이 이상하지 않 은가? 그것은 그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이지. - 천축 법존의 무공. 그것은 확실히 마음으로 자연과 동화되고 뜻으로 무 공을 펼치는 중단전의 단계에 와있다. 마음에 자연과 우주를 가두고 부 리는 상단전의 경지는 아니지만 마음과 자연을 조화시키는 경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 결코 금혈존에게 뒤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천축 법존은 금혈존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일시 머리를 숙였다. 왜? 중단전에 이르면 완전무결하게 완성되는 마음의 조화. 그 한 구석에 혈 존이 빈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청영동의 무공에 혈존의 그런 뜻 이 숨어 있었다. 천축 법존은 자신의 무공이 완성된 것만 알았지, 그 무 공 자체가 빈틈이 마련된 불완전 무공인 줄은 몰랐다. 그가 청영동의 무 공에 근본 하여 청광불공을 만들었지만 그 자체가 마음의 허점이 있는 무 공이었다. 중단전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가 마음의 허점이 있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만 천축 법존에게는 바늘 끝 같은 미세한 마음의 금이 있었다. 그 틈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기에 혈존의 하나인 금혈존은 너무도 쉽게 천축 법 존을 기세에서 먼저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내가 천축 법존의 의기상인의 힘을 풀어내 었다. 마음으로 펼쳐내는 강기의 무공 십이청룡폭강과 부딪치고도 견뎌 내었다. 이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 천축 법존의 무공은 보 이는 것만큼, 생각하는 만큼, 완성되지 못했다." 달라이 대라마가 중얼거리고 온 몸의 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방금 전 의 충격으로 뒤로 퉁겨지려는 몸을 고정하고 계속 돌진했다. 세 번에 걸 쳐 쓸 수 있는 힘 중에 두 번 째이다. 속에서 꾸역꾸역 피가 솟구치고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열락관음인을 산산이 부수 고 그의 몸에 다가오는 십일면관음타야차의 잔여 강기의 공격에 그는 색 랍혈불공의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고 그대로 부딪쳤다. "어리석은 자. 감히 천축법존에 대항한 자의 최후를 보여주리라." 천축법존이 무모한 그의 모습에 비웃음을 날렸고 관음보살이 달라이 대라 마의 몸을 산산이 찢어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허공에 피가 분수처럼 뿜 어져 나왔고 달라이 대라마의 모습은 혈인이 되었다. 살점이 너덜거리고 목이 반쯤 잘라지고 한쪽 팔이 달아났으며 뼈가 드러나는 수십 군데의 상 처가 생겨났다. 관음보살은 진정 야차를 끝장내듯 조금의 자비도 없이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청광으로 사라졌다. 천축법존과 지켜보는 모두가 그것으로 달라이 대라마가 끝장이 났다고 생 각했을 때 한 팔을 잃고 온 몸이 난자되어 걸레처럼 변해버린 달라이 대 라마의 모습이 사라진 관음보살의 형상을 뚫고 나타났다. 그는 아수라 같은 모습을 드러내며 천축 법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떻게? 어떻게? 청광불공을 견뎌낼 수가 있지?" 그 모습에 놀라고 질려 천축 법존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달라이 대라마는 내상과 외상이 심해 금방 숨넘어갈 것 같은 처지인데도 달려들었고 천축 법존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에서 기세에 눌려 한 걸음 뒤로 물러 섰다. "그의 말이 맞았다. 너의 무공은 최후의 살상력이 부족하다. 청광불공의 강기는 색랍혈불공으로도 견뎌낼 수 있다." 달라이 대라마가 소리치며 손에서 붉은 강기를 뿜어대었다. 달라이 대라 마의 기세와 그의 말이 순간적으로 천축 법존에게 자신의 무공을 의심스 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붉은 강기를 본 순간 천축 법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연이은 마음의 타격이 그를 허둥지둥 만들었다. "혈영마공? 달라이 대라마가 어떻게?" (혈영마공이 아니지? 단지 그와 비슷하게 보일 뿐.) 육체가 한계에 이르고 내력이 고갈되고 나서야 어젯밤 만났던 그가 달라 이 대라마의 몸에 넣어준 한줄기 진기가 움직였다. 달라이 대라마가 동 원할 수 있는 마지막 힘이고 마지막 기회였다. 겉보기에 혈존의 독문무 공인 혈영마공과 똑같은 형상이었지만 그것은 마공이 아니었다. 달라이 대라마의 몸에 스며든 것은 붉은 색의 이름 모를 불공(佛功)이었다. 청마산에 나타났던 혈존, 어제 달라이 대라마가 만났던 혈존은 스스로 자신을 불도속을 초월한 존재라고 밝혔으며 달라이 대라마는 그것을 믿었 다. 그는 자신이 광한신공이라 밝힌 무공을 달라이 대라마의 몸에 맞춰 불가의 진기로 바꿔 심어주었다. 단 한번 쓸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천 축법존을 제압할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그 형상은 달라이 대라마의 색랍혈불공과 조화되어 붉은 색이 되었고 또한 혈존의 안배에 의하여 혈 영마공과 비슷한 형상을 띠었지만 분명한 불가의 진기였다. (그는 진짜 혈존이었을까? 악마, 아수라보다 더한 혈존, 혈수라가 어찌 부처님의 기운을 가지고 나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마경(魔境)조 차 뛰어넘어 마(魔)이든 불(佛)이든 도(道)이든 상관없는 해탈자란 말 인가?)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 달라이 대라마는 장군부의 정면에서 대 포와 함께 있는 복면인이 전해준 내력을 뿜어대었다. 세맥 속에 숨어있 던 불가의 진기는 대뜸 달라이 대라마의 온 몸을 한바퀴 휘감아 상처를 대충 치료하고는 달라이 대라마의 뜻대로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한 번의 운기가 돌이킬 수 없었을 것 같은 달라이 대라마의 내상을 어느 정 도 진정시켰다. "이제 끝이다. 이번 비무는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었다. 다만 모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내 내력이 바닥났을 때 그대를 굴복시킬 이 불공이 발 휘되도록 안배되었을 뿐." "혈영마공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혈영마공 따위로 승패를 논 하다니. 광오하다." 붉은 기운이 지척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천축 법존은 정신을 차렸다. 저 것이 진짜 혈영마기라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미 그는 마음으로 무공을 펼치는 경지에 이르렀거늘. "청광불공 칠 단계 중의 네 번째. 제석천불연(帝釋天佛緣)!" 천축 법존의 몸에서 다시 서천의 하늘을 다스리는 제석천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위대한 모습과 달리 붉은 기운이 화살이 되어 제석천의 가슴을 뚫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천축 법존의 놀란 얼굴과 함께 그의 가슴으 로 붉은 진기가 작열했다. "커억." 천축 법존이 무방비 상태로 가슴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수 차례의 타격 에 달라이 대라마가 건재한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보잘것없는 붉은 기운 의 단 일격에 천축 법존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 다. 천축 고수들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해버렸고 다른 변황의 수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청영동의 무공은 심검을 이루는 단계. 자연과 조화되는 단계의 무공. 마 음을 다스려 인간을 초월하고 자연과 하나되는 단계. 허나 혈존은 그 모 든 구결에서 단 하나 욕(慾)의 구결을 빼 버렸다. 그로인해 천축 법존의 야망은 인간의 본능에 합일된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의 무공에 미 약한 틈을 만들었다. 백이충이 달라이 대라마에게 심어준 한줄기 불가진 기는 천축 법존의 몸이 아닌 마음의 허점, 욕(慾)의 틈을 공략한 것이 다. 그 때문에 법존은 너무도 쉽게 허물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호황부주 백이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서 변황동맹에 대한 우려도 끝이로군. 천축법존으로서도 잘된 일이 다. 이번에 무공을 잃은 것을 기회로 불가에 전념한다면 진짜 해탈한 부 처 하나가 나올지도... 이번에 잃은 것이 그의 무공이 아니라 미망(迷 妄)임을 깨달아야 할텐데." 달라이 대라마는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백이충을 아직도 혈 존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굴복시키는 데에는 그가 백이충을 혈존으로 착각했음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백이충이 잠깐 넣어준 광한신공의 불가진기. 그 힘의 위력을 깨달은 이상 달라이 대라마는 백 년이 지난다 해도 더 이상 중원을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달라이 대라마가 백이충이 넣어주었던 한줄기 불가진기의 흔적을 기 억하며 매진한다면 어쩌면 그도 자연과의 조화라는 기연을 얻을 지도 모 른다. 어쩌면 열반에 들어 부처가 될지도... "천축 법존은 무공을 잃었으니 앞으로 한동안 천축은 혼란에 빠지겠지. 그가 불가에 매진한다면 이번에는 진심으로 모두를 굴복시키는 활불이 될 테고 과거에 연연한다면 완전한 폐인이 되겠지. 천축이 어떻게 되든 달 라이 대라마가 중원을 대신하여 견제하는 한 천축의 위협을 받을 일은 이 제 없을 것이다." 위태한 모습으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달라이 대라마의 모습을 보며 백이 충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삼 사일 이내에 옥룡왕부에서 눈치채지 못 한 사이에 변황동맹의 고수들은 북경에서 사라질 것이다. 상계도 등을 돌릴 것이고 금혈존이 끌어들였던 용병도 사라졌음을 알게 되리라. 자, 갈수록 불리해지는데 옥룡왕은 어떤 수를 쓸 것인가? 제 목:[연재] 혈존무적-진혈존 부활 관련자료:없음 [20537] 보낸이:김하준 (khj1234 ) 2003-05-18 22:56 조회:148 <진혈존부활 > "혈존의 외모는 완벽합니다." 과거 폐허가 된 옛 옥룡왕부의 지하. 그곳에 미로처럼 얽힌 기관과 지하 시설에 바로 광혈존이 있었다. 광혈존의 외모는 놀랍도록 변해 있었다. 그의 외모는 과거 천무삼성에게 죽기 직전 혈존 백가량의 모습과 단 한치 의 차이도 없었다. 마혈존도 혈존 백가량의 외모를 흉내내더니 광혈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혈존 백가량은 회귀(回歸)해야할 원본(元 本)이고 마음의 본체(本體)였다. 광혈존 앞에서 수술칼을 들고 만족의 미소를 띄우고 그에게 말하는 자는 바로 마화타였다. "혈존 백가량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아는 몸이 바로 저입니다. 제자들의 심장에서 일백 마공을 흡수하여 쌍영마공을 이룰 때 일일이 그의 몸을 진 찰하고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했던 것이 바로 저이니까요. 광혈존 님의 몸은 과거 그의 몸과 한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마화타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듯한 심정으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무 표정한 모습으로 있는 광혈존을 바라보았다. 과거 마혈존의 모습을 바꿔 준 것도 그였다. 마화타가 마혈존에게 잡힌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마혈존이 죽은 후 에는 바로 광혈존과 손을 잡았다. 마화타와 광혈존은 일방적인 지배관계 가 아닌 공존 관계였다. 마화타의 마음 속에는 이왕 혈존이 나뉘어 졌다 면 자신의 작품인 광혈존이 진짜 혈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광혈존이 남의 기운을 흡수하고 무공과 기억력을 빨아먹는 능력 자체가 바로 마화타의 시술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단 하나의 부작용도 없이 혈존의 기운과 영혼파편을 모으려면 광혈존에게는 마화타의 도움이 필요 했고 마화타도 자신의 시술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궁금했다. 광혈존의 외모가 천무삼성에 의해 사라진 혈존 백가량의 몸과 흡사한 모 습으로 바뀐 것은 결국 광혈존과 마화타의 이런 상성관계의 협조 덕이었 다. 마화타는 외모뿐만 아니라 내부까지도 혈존과 광혈존의 육체를 똑같 이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화타. 요 근래 내가 흡수한 혈존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여 속이 고통 스러운 데 이는 어떤가?" "혈존의 영혼이 지닌 기운은 동질의 것입니다. 허나 흡수하신 혈존의 본 체가 되는 것들, 마진걸의 요기(妖氣), 조인후의 사기(邪氣), 전일비와 천마지존의 마기(魔氣), 곤무악의 패기(覇氣), 넷의 기운이 광혈존 님 의 기운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크윽. 어떤 기운이든 무공이든 본좌의 몸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었나?" "물론 흡수될 것입니다. 다만 각 기운이 아수라독존마공에 의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상승마공의 기운으로 변질되었기에 쉽사리 흡수하지 못하 는 것뿐. 광혈존 님이 혈존으로서 각성하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 입니다." 마화타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말했지만 광혈존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런 일이었다. 둘 셋을 흡수했을 때까지는 몰랐으나 넷을 흡수하자 몸도 정신도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자신까지 다섯. 백혈존이 사라 졌으므로 남은 것은 넷이다. "크윽.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해결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다 른 십혈존들을 찾아 흡수하여 혈존으로 각성하는 수밖에 없겠군." 마화타는 십혈존들을 흡수하여 진짜 혈존 백가량이 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했다. 광혈존의 힘이 불안하기에 흡수한 기운들이 완전히 복 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되찾는다면 지금 그의 몸에서 광혈존의 기운과 맞서는 다른 진기들도 맥을 못 추고 하나의 아수라독존마공으로 합류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광혈존께서 겪으시는 고통은 과거 혈존 백가량도 제자들의 심장 을 씹으며 성질이 다른 마공진기를 본신에 합체시킬 때 겪었던 현상입니 다. 제가 드린 혈마환(血魔丸)을 드시면 고통이 덜해지고 각 진기를 통 합하는 데 힘이 되실 겁니다." "크흐흐. 과거의 혈존이 바로 나 자신임을 모르는가? 그렇게 타인 구분 짓듯 하지 마라. 이제 되었으니 마화타는 그만 물러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화타가 석실 밖으로 나가자 광혈존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남의 앞에서 는 보일 수 없는 고통. 마화타에게도 보일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마 화타에게는 육체의 고통만을 호소했지만 마음의 격동이 그를 괴롭히는 것 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흡수한 영혼의 파편들이 광혈존의 정신에 반항하는 고통이었다. 사실 그의 본신은 악취결개 우문노인이었다. 다만 그 기억은 거의 지워 져 있었다. 다른 분신은 혈무영 영주들, 본체의 기억 속에 혈존의 영혼 파편과 기억이 융합한 모습이라면 광혈존은 마화타의 실험물로 거의 백치 가 된 악취결개가 혈존의 영혼파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그런 존재였 다. 따라서 광혈존의 기억에 중요한 것은 혈존 백가량의 모습일 뿐, 악 취결개 우문노인에 대한 기억은 한줌의 가치도 없었다. 아니,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크으윽. 내가 악취결개인가? 혈존 백가량인가? 둘 다 나 자신처럼 여겨 지고 둘 다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니..." 한때는 자신은 혈존 백가량의 일부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혈 존 백가량이 되어야 할 존재라고. 그런데 혈존의 힘이 강해지자 악취결 개로서의 기억과 인생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혈존의 기억과 그 자신이 겪었던 수십 년 생의 가치는 서로 어느 것이 중요한지 판가름하기 힘들 정도였다. "크윽. 악취결개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나는 악취결개로서 혈존의 영향을 이어받은 존재, 그 둘 다 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려 했으나... 으으. 이제 보 니 둘 다 내가 아니지 않는가? 이 기억들..." 광혈존은 마음의 고통이 심한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혈존 백가량의 영혼이다. 그러면 나는 진짜 혈존 백 가량이라 자부할 수 있는가? 지금 생생히 되살아난 악취결개의 인생은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내가 가치를 두지 않는 악취결개의 인생을 진짜 라고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가? 혈존의 기억이 진짜인가? 아니면 악취결개의 인생이 진짜인가? 게다가 지금 되살아나는 기억은... 크으윽." 광혈존의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그는 과거 백이충도 이러한 갈등이 있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혈존의 영혼이 백이충에게 넘어와 살아왔고 백이충으로서 움직였을 때 해당하는 기억의 부분은 모두 백이충이 가지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십혈존이 가지고 있는 기억은 혈존 백가량으로서 활동했던 때의 기억과 무공의 일부, 그리고 각 분신으로서 활동할 때의 기억뿐이었다. "잠잠했던 전일비의 일생, 곤무악의 광폭함, 마진걸과 조인후의 인생마 저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뛰어 노는구나. 그들의 인생 또한 바로 내 것 처럼 떠오르니... 내가 혈존이나 악취결개, 혹은 그들이라 자처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전혀 다른 만들어진 존재인 것일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가 혈존인 것도 같고 악취결개인 것도 같으면서 내가 흡수 한 그들 모두 같기도 하구나. 혹은 그들 모두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종말 혼란스럽다." 그의 머리 속에 각기 다른 자들의 기억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단 하나일 때에는 혈존의 영혼에 눌려 움직이지도 못하던 것들, 그것이 광혈존에게 흡수되고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때는 흡수된 다른 혈존의 기 억과 인격이 광혈존의 정신을 누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각 영혼의 파 편이 기억과 인격으로 되살아나면서 그것은 따로 분리되기도 하고 서로 섞이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크윽. 나는 누구지? 육체조차 마화타에 의해 제멋대로 개조된 것, 영혼 마저 이리저리 긁어모은 혼합품. 인간이라 할 수나 있는 것인가? 이런 내가 혈존이니 악취결개이니 갈등할 자격이나 있었던 것일까?" 광혈존은 길게 탄식하고 말았다. 자아 정체성의 혼란. 이와 같은 것의 현상을 광혈존은 기억하고 있다. 심마라는... "후우. 그만두자. 결국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다. 응? 언젠가 이와 같은 말을 전에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그 순간 광혈존의 뇌리에 벼락같이 한 구절의 익숙한 구결이 떠올랐다. 혈존의 영혼이 다섯 조각이나 모이고도 아물아물하던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 구결. 그것은...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다. 너는 나이고, 너는 또한 나이다. 선은 선이 아니고, 악은 악이 아니다. 선이 곧 악이고 , 악이 또한 선이 다. <중략> 세상이치는 원래 변화하는 혼돈인 것을 굳이 찰나를 구분하 여 정의했음에 불과하다. 만물은 혼돈 속에서 생성되었다.- "혼돈? 그래. 결국 모든 것은 혼돈이다. 어차피 나와 네가 없거늘 혈존 과 악취결개가 무슨 소용이랴? 마혈존이면 어떻고 철혈존이면 어떠랴? 남는 것은 아수라독존마공으로 형성된 혼돈을 다스리는 자만이 있는 것 을. 크흐흐. 혼돈이야말로 내 본체. 떠오른다. 내가 알지 못하던 아수라 독존마공의 구결들이." - 본래 우주는 혼돈의 연속에 불과하다. 억겁의 세월 속에 존재하는 혼 돈 속의 일부 일어나는 현상에 사물의 진리를 정의함으로서 그것을 우주 의 질서라고 인식함과 동시에 진리가 확립되었다. 중략 혼돈과 질서 의 기준은 바로 자신에게 있나니 모든 우주의 질서와 혼돈의 구별이 나의 작은 인식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주보다 큰 혼돈의 시작 은 내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 "크윽. 기억난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최후 혼돈구결이다. 가장 핵심구결 이고 중심을 차지하는 구결이다." 광혈존이 호흡을 내쉬는 사이에 갑자기 그는 온 몸의 고통이 급격히 줄어 들었음을 느꼈다. 자신의 갈등을 혼돈구결 속에 녹여버리고 더 이상 자 아 정체성에 고민하지 않는 순간 그의 몸 안에 존립하던 네 줄기의 반항 진기가 그의 몸 안에 녹아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직 아수라독존 마공이 진실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존재했던 아수라독존마공의 영향을 받은 마공들이 광혈존의 몸에 기가 죽어 녹아들었을 뿐, 아수라 독존마공이 복구된 것이 아닌 탓이었다. "흐흐. 마화타의 말이 맞았다. 단지 반을 차지했음에도 서로의 영혼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거의 모든 기억을 복구해내고 있다. 다섯의 파편에 존재하지 않던 기억마저도... 하나나 둘만 더 흡수해도 혈존으로 각성할 수 있음이 틀림없다. 본좌는 진짜 혈존이다. 백가량이다." 광혈존은 모든 갈등을 멈추고 자신 있는 눈빛을 던졌다. 요기와 패기, 사기가 줄어들자 그 안에 존재하며 날뛰던 기억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광혈존은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고 원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엄청 진보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음 을 알지 못했다. 깊은 혼란, 자아 정체성의 상실. 혼란과 혼돈 속에 모 든 인식과 가치와 사고가 개인의 인식 속에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아수라독존마공이 시작됨을, 모든 것을 부정하고 혼란이 진리이며 그 혼 란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식에서 생겨남을 알게 될 때 아 수라독존마공이 형성됨을 끝내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죽여 폐인(廢人)이 되느냐, 아니면 미쳐 광인(狂人)이 되 느냐,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수라독존마공을 입문(入門) 하느냐의 길이었다. 그 갈래 길에 들어서기 직전에 광혈존은 자아를 다 시 확립하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배교 교주는 들어서라." 광혈존이 말하자 석실의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마혈존에게 새로 부흥의 기회를 얻어 만들어졌던 배교. 그리고 혈존에 의해 멸문을 걸었던 마지막 적씨 일족의 여인이 배교 교주의 신분으로 광혈존의 석실 에 들어섰다. 배교는 마혈존을 흡수한 광혈존에 의해 금혈존과 독혈존이 이곳에 다시 오기 전에 미리 광혈존이 차지한지 오래였다. 광혈존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배교의 본거지를 옮기지 않은 것은 혹시 이 쪽으로 다시 금혈존과 독혈존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들이 오게된 다면 둘 다 사로잡아 자신에게 흡수하고 싶었다. 배교 교주가 들어오자 광혈존이 물었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배교에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때 마혈존을 처리한 이후 다 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배교 교주는 배교를 키워준 마혈존에 대해 별 감정이 없는지 무감정하게 말했다. 그녀와 배교가 마혈존에게 바랬던 것은 배교를 부흥하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혈존의 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마혈존이 죽은 이상 배교가 그런 힘을 갖추고 있을 것 같은 광혈존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는 수 없군. 둘 다 처치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라도 유인하는 수밖 에. 준비했던 흔적을 뿌리고 환상을 일으킬 준비를 해라." 황경도독(皇京都督) 강소유는 옥룡왕의 충신이다. 그는 옥룡왕이 열 살 되기 이전부터 그의 호위무장을 겸했으며 평생 그를 자신의 주군으로 따 랐다. 차라리 가족이 옥룡왕을 배신할지언정 절대 옥룡왕을 배신하지 않 을 자가 바로 강소유였다. 그의 절대적인 충성을 믿기에 옥룡왕도 온갖 애를 써서 황도수비군(皇都守備軍)을 지휘하는 자리를 얻어내어 그에게 맡긴 것이다. 황경도독 강소유. 철혈의 무장이라 불리던 그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 었다. 그의 눈앞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아기씨. 정말 아기씨로군요." 강소유는 눈물을 흘리며 여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끓었다. 친손녀처럼 아꼈던 아이였다. 다섯 살까지 부모보다 자신을 더 잘 따르고 자신의 무 릎 위에 올라 내려오지 않던 꼬마였다.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 다. 비록 성숙하여 북경제일미였던 모친의 얼굴을 많이 따랐지만 그래도 어릴 때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강 할아버지. 흑흑." 우는 여인은 모란서시 백소련이었다. 아니, 강소유에게는 천향군주 주소 련이었다. 과거 옥룡왕의 제이 왕비인 북경제일미 백소옥과 더불어 행방 불명되었던 천향군주 주소련. 주소련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녀의 신분을 확인시켜줄 사람은 강소유가 유일했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강소 유는 가짜를 진짜라고 말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왕야가 가짜란 말입니까? 둘째 왕비 님과 아기씨의 실종으로 왕야가 변 하신 것이 아니라 가짜가 왕야로 변신한 이후 아기씨와 둘째 왕비 님을 해친 것이란 말입니까?" 강소유의 물음에 주소련은 새파란 독기를 품은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았 다. "그 자를 왕야라 부르지 마세요. 그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해친 파렴치 한 도적놈이에요. 저는 모란루를 통해 그의 뒤를 캤고 그의 정체가 혈지 존이라는 무림의 마두임을 알아냈어요. 그는 철천지원수에다 아버지의 이름까지 더럽히고 있어요." "허어.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강소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듯 어쩔 줄을 몰라했다. 눈앞의 천향군주가 진짜임도 분명했지만 옥룡왕이 가짜라는 말도 쉽게 믿기 힘들었다. "믿으셔야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옥룡왕은 살해당하셨습니다. 옥룡왕 부의 일 총관이 동창제독과 삼 총관인 절정마유가 이미 그의 정체를 토론 했습니다. 그는 왕야를 해친 것도 모자라 반역마저 하려한 놈입니다." 주소련의 뒤에 서있는 젊은이는 주소련의 약혼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강소유지만 그의 정체가 서문 장군부의 공자라는 것을 알고 기뻐했고 그가 호황령을 꺼내들자 놀라 부복했다. (그래도 아기씨가 고생을 하더니 하늘이 돌보셨군. 서문 대장군부의 공 자에 호황부주가 아기씨의 약혼자라니.) 아기씨가 훌륭한 짝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주군이 가짜라는 사실이 확실시되자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주소련이 증언하는데다가 백이충이 보여준 여러 증거는 강소유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둘 중의 하나만 없었어도 절대 옥 룡왕이 가짜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속고 있었다니. 내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옥룡왕부로 쳐 들어가서 그 가짜를." "서두르지 마십시오. 강 도독. 그 역적의 머리는 황제폐하에게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놈은 교활한데다 무공이 고강하기 이를 데 없어 철저한 포위망을 만들지 않으면 놓치기가 쉽습니다. 저는 그 때를 혈존대회로 잡고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짜를 고립시켜야 할 것입니다." "호황부주. 명을 내리십시오. 여태 눈이 있어도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 이 몸이 죄를 씻는 의미에서 견마지로를 다하겠소." "그렇게 해주신다면 다행입니다. 일단 청류계의 인사들의 감시를 풀어주십시오.그리고 서유림과 학림파에 이 서찰을 전해 혈지존의 정체를 백 일하에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허어. 이일을 어찌 하는가?" 황사 허청일과 금의위 총영반 허첨이 얼굴을 마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창제독 염무균이 행방불명된 이후 학림파는 이 둘이 이끌고 있었다. 또한 허청일과 허첨은 사촌 형제지간이기도 했다. "천향군주가 진짜인가? 혹시 가짜를 내세워 왕야를 모해하는 것은 아닌 가?" "강소유 도독이 인정했다면 가짜일 리가 없습니다. 강직하기로 만인이 인정할만한 자이니까요. 그리고 왕야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흐흠. 그렇긴 했지. 갑자기 놀랄 정도로 고강해진 무공과 심기. 그리고 야심. 타고난 제황처럼 움직이던 지도력은 옛날의 옥룡왕에게는 볼 수가 없던 기질이었으니까. 하지만 야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렸던 호랑이라 애 써 생각했거늘." "저도 왕야의 무공은 황궁무고에서 비롯된 줄 알았습니다. 허나 그의 무 공은 대부분 마공이었습니다. 얼마 전 혈존을 죽였다고 소문이 났을 때 왕야가 가지고 있다는 천마강시의 소식을 듣고... 솔직히 소제는 그때부 터 왕야가 가짜가 아닐까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한 배를 탄 것을. 이대로 돌이키면 우리 일가 는 구족을 멸하지 않겠는가?" 허청일과 허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사람은 황제의 스승이란 직함 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를 배신하고 옥룡왕에 붙었고 다른 한쪽은 황 실인사를 호위할 금의위의 총수이면서도 동창제독에 휘말려 황제와 황족 을 감시했다. 지금 옥룡왕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서찰이 우리에게만 온 것이 아닌 이상." "후-. 갑자기 천향군주가 나타나다니. 동창제독과 절정마유의 자술서만 으로는 우리 학림파에서 거짓모함이라 우길 수 있지만 만인이 인정하는 옥룡왕의 딸이 가짜라고 우기는 데에야 무조건 모함이라고 우길 수만은 없지 않은가?" 허첨이 자신의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강소유가 보낸 서찰에는 백이충과 주소련이 혈지존의 내막을 적은 편지가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 "우리 학림파의 대부분 중신에게 이 서찰이 도착했을 것이네. 그들이 계 속 우리를 따라 주리라고는 믿을 수 없네. 어물거리다가는 우리 허씨 일 족이 가짜와 연합했다는 누명을 쓰고 희생물이 될 수가 있어. 한시라도 빨리 태도를 확실히 정해야 하네. 게다가 옥룡왕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서유림과 청류계가 들고일어날 것이네." "우리 일족이 무사할 방법이 있을까요?" 황사 허청일은 자신의 품속의 서찰을 더듬었다. 그는 서찰 속에 동봉된 편지에 찍힌 직인을 생각했다. 어떤 영패를 누른 자국. 그것은... "만약 이것을 보낸 자가 전설 속의 호황부주라면... 지금의 자금성의 괴 진을 펼친 사람이라면 방법은 있네." "어떤 것입니까?" "지금 황제 폐하와 자금성 내부가 실종되었는데도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 영되는 것은 우리 학림파의 중신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네. 군 부가 조용한 이유도 우리가 견제하기 때문이고. 섣불리 우리를 건드리지 는 못할 거야. 천향군주의 배후가 호황부주라면 우리도 거래를 할 수가 있네. 즉 옥룡왕이 반역을 하지 않으면 우리도 반역도로 몰리지 않아도 되네." 이미 한 반역을 어떻게 하지 않은 일로 돌린단 말인가? 허청일의 말에 허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허청일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을 축소시키는 거지. 옥룡왕의 일을 반역이 아닌 야사(野史)의 일, 무림의 일로 만드는 거야. 호황부주가 전설처럼 막강한 신선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개인적으로 옥룡왕을 제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거지. 호황부주가 천하를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옥 룡왕을 제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나중에 옥룡왕이 사고로 죽었다는 발표를 천하에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일을 축소시키는 대신 조정 을 순순히 청류계와 서유림에 넘겨준다는 조건을 내밀면 되네." "그런... 권력을 내주자는 소리입니까?" "어차피 황제폐하의 마음에서 우리는 멀어졌네. 그리고 명분에서 밀리고 있어. 힘의 관계는 모르겠지만 명분에서 밀리고 반정이 성공한 예가 없 네. 알아서 죄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래도 멸족을 멸하는 길이야. 일단 공식적인 반역 사실이 없고 군사의 움직임도 없고 옥룡왕 도 사고사(事故死)로 발표되면 황제도 우리를 역모로 함부로 몰아 잡아 들이지는 못 할거야. 대신 우리 허씨 일족은 당분간 조정과 연을 끊어야 겠지." 조정의 각 공신에게 비밀리에 전달된 서신. 거기에는 옥룡왕부의 반역, 그리고 옥룡왕이 가짜라는 것. 이미 황제폐하가 모든 사실을 알고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황제의 명을 받아 서문 장군부에서 무림 백도세력이 혈지존을 잡기 위해 북경에 몰려왔다는 것, 황제의 명을 받들 중신은 천향군주와 한림원주를 찾아 충성을 맹세하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옥룡왕의 정체가 무림인인 혈지존이라는 것, 마도의 괴수였다는 것, 지 금도 무림인을 끌어들여 황조를 뒤업으려는 증거로 혈존대회니 혈존탑이 니 하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황무림인들을 끌여들였다는 것. 모두가 옥룡왕부에는 불리한 사실들이었다. 특히나 중원의 일에 외 세를 끌어들였다는 것에 옥룡왕부에 호의를 느끼던 많은 세력이 중립을 표명했다. 또한 백도무림이 혈지존을 무림 공적으로 선포하고 서문 장군 부의 협조요청을 받아들여 북경에 왔다는 소식도. 이미 청류계의 이정례 대인과 서유림의 한림원주 등이 운무가 가득 깔린 자금성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은 천향군주의 진위를 사실로 확신시켜 주었고 또한 청류계와 서유림의 유신 들에게 명분과 힘을 실어주었다. 비록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옥룡왕부의 힘을 두려워하며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학림파의 중신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듯한 갈등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천향군주가 받아들일까요?" "대국은 아마도 호황부주가 주지하고 있을 거야. 그 배후는 황제폐하가 있을 것이고. 천향군주는 옥룡왕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 니... 호황부주의 뜻에 의해 우리 가문의 생사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 지. 일단 학림파의 뜻을 모아야 하네. 어느 쪽에 붙든 힘을 모아야 협상 을 하기 쉬우니. 우리만큼 불안해하는 중신이 여럿 있을 거야. 그들과 힘을 합해야지." "알았습니다. 중신들을 다시 소집하겠습니다." "그리고 천향군주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군. 호황부주를 움직이기 위해 서는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텐데." 독혈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혈린쌍두사를 본 적이 있다고?" 독혈존은 독문의 진전을 얻었다. 혈무영 십대영주 중에서 무영독와(無影 毒蛙)라는 별호로 독문의 독을 수련했고 나중에 혈존의 영혼파편과 결합 하며 독혈존으로서 자각한 것이다. 혈존의 기억 속에 수많은 마공 구결 이 있었지만 그의 몸 속에 흐르는 기본 무공은 불행히도 독문의 독공이었 다. 그의 독공은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와 결합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다른 혈존들에 비해 그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독공 자체가 마공과 조화 가능한 진신절학(眞身絶學)이라 할 수 없는 탓이기 때문이 다. 그 덕에 귀혈존에게 패해 혈무영에서 쫓겨났고 구걸하듯 금혈존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멸천지독이었 다. 독성 구양봉이 마지막에 만들었다는 멸천지독. 그것은 심검을 이루는 자 라도 녹여버리는 무시무시한 독이었다. 혈지존이나 금혈존도 결코 멸천 지독 앞에서는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독혈존에게는 있었다. 멸 천지독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재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멸천지독의 부 재. 그것이 독혈존이 십혈존 중에 실험물이었던 광혈존과 더불어 최 약 체로 꼽히는 이유라고 그는 생각했다. 혈린쌍두사는 멸천지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독물이었다. 크 기 반장 정도에 온 몸에 붉은 비늘을 두르고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왕 (蛇王). 멸천지독을 이루는 일곱 가지 극독 중의 하나이고 독혈존이 구 하지 못한 마지막 하나였다. "혈린쌍두사인지는 모르지만 과거 옛 왕부의 터에서 머리를 두 개 가진 붉은 뱀을 본 적은 있습니다." 옛 옥룡왕부의 터를 감시하는 무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눈을 보자 면 결코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기야 옥룡왕부 말단 백의무사 가 독혈존이 혈린쌍두사를 필요로 하는지 어찌 알고 친구와 그런 말을 떠 들었겠는가? 게다가 독혈존이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혈린쌍두사를 본 자는 백의무사 들 중에 한 둘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기이한 뱀이 옛 왕부의 터에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호기심에 귀를 기울여 봤더니 그게 설마 혈 린쌍두사였을 줄이야. (마혈존을 죽였던 곳에 혈린쌍두사가 있다. 어쩌면 배교의 잔당은 그것 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모른다.) 혈린쌍두사의 행방을 알자 마음이 타들어 갈 듯 조급했다. 하지만 서둘 러서는 안되었다. 금혈존과 독혈존은 서로 손을 잡았으면서도 서로를 견 제하는 관계였다. 만약 독혈존이 혈린쌍두사를 잡으러 간 것을 금혈존이 알게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려 할 것이다. 독혈존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방으로 들어갔고 폐관수련을 한다고 금혈존 과 옥룡왕 혈지존에게 알렸다. 하지만 그 직후 그의 몸은 옥룡왕부를 빠 져나오고 있었다. "여기다. 이곳으로 전에 배교와 마혈존의 거처를 들어갔었지." 독혈존은 옛 옥룡왕부의 터를 샅샅이 뒤졌지만 혈린쌍두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혈린쌍두사는 가끔 지상으로 올라올 뿐 지하에 사는 습성이 있 으므로 아무래도 배교의 무리가 알고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과거 지 하통로로 스며들었던 곳을 다시 찾았다. "하하. 마혈존이 죽었으니 누가 나를 막을까? 침묵 속에 배교를 혈지존 이 모르는 우리 둘의 비밀 세력으로 삼으려고 놔두자고 합의했거늘... 배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혈린쌍두사를 얻기 위한 것이니 나중에 금혈 존이 알아도 상관없다." 지하통로의 무시무시한 기관장치에 대해서는 한두 번 감탄한 것이 아니므 로 독혈존도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 전진했다. 일단 배교의 교주라는 계 집을 사로잡아 혈린쌍두사에 대해 캐물을 생각이었다. 그 직후 배교를 거둘 것인가 아닌가는 나중 문제였다. "극독이다. 하지만 기관에서 발출한 독은 아니다. 혈린쌍두사의 흔적이 다." 독혈존의 몸이 멈칫했다. 그의 발치에 독이 묻어 신발이 녹아들고 있었 다. 가죽을 녹이는 극독을 접한 독혈존은 마치 미인에게 애무라도 받은 듯 환희의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는 발아래 퍼져 들어오 는 독을 음미했다. "본좌의 몸에 부족한 독. 혈린쌍두사의 독액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 있 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쌍두사가 독액을 뿜어댄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도 기관에 걸렸을 것이다. 독혈존도 긴장해야 지나칠 수 있는 통로 의 기관장치. 지하 통로에 우연히 스며든 혈린쌍두사가 기관을 건드렸고 화가 나서 독액을 뿜어댄 것이 틀림없다고 독혈존은 생각했다. "흔적을 발견했다면... 녀석을 찾는 것은 쉽다." 독혈존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고 곧 통로의 한 쪽에 뱀이 기어간 듯한 미세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한번 발견한 흔적 은 그 다음 흔적의 장소를 가리켰다. 천하에서 몇 위안에 들 정도로 지 독한 독을 가지고 있고 또한 사왕(蛇王)이라고 하나 미물인 이상 독혈존 의 추적을 벗어날 길은 없었다. "흔적이 점차 뚜렷해진다. 혈린쌍두사가 이곳 통로의 기관을 뚫고 지나 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기관을 벗어난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사이로 지독한 독기 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혈린쌍두사는 성질이 급한 독물로 마구 독액을 뿜어대는 습관이 있으니 혈린쌍두사의 흔적이 분명했다. 놈이 얼마 전 이곳을 지났다는 증거이다. 독혈존의 눈이 짙은 녹광으로 번뜩였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전진했 다. 혈린쌍두사의 속도가 놀라우니 발견하기 전에 그놈이 먼저 독혈존을 볼 경우 바로 도망가 버릴 위험이 있다. 혈린쌍두사는 난폭한 만큼이나 겁이 많아 자신 주위에 위험한 존재가 있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성질을 가진 놈이었다. "놈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이 근처를 자주 들렸다는 증거이다. 놈은 이 근처에 있다." 독혈존이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훔쳐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담벽 너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너머에 형용할 수 없 는 독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담 너머에 혈린쌍두사가 있으리라. "혈린쌍두사의 쓸개만 있다면 아수라독존마공을 자극하여 순식간에 독성 (毒聖)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자유자재로 멸천지독을 펼칠 수 있을 것이 고 곧 구양봉이 이루지 못한 만독천하를 이룰 수 있으리라." 바람처럼 커다란 구멍을 넘으며 독혈존이 나타났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혈린쌍두사를 발견하기 위해 번뜩였으나 곧 크게 떠지고 말았다. 독혈존 은 공포와 경악을 담아 소리치고 말았다. "마혈존! 어째서? 우리 손에 죽었는데 어떻게 되살아났지?" 독혈존의 눈앞에 있는 것은 혈존 백가량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광혈존이 었다. 과거 이 지하에서 죽은 마혈존 역시 스스로의 모습을 혈존 백가량 과 똑같이 꾸몄기에 독혈존은 광혈존을 마혈존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죽 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하자 독혈존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눈앞의 마혈존이 설사 살아있는 자라고 해도 독혈존 혼자로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흐흐. 본좌는 마혈존이 아니다. 본좌는 광혈존이다." "광혈존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우문노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 광혈존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자 독혈존도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질문을 던졌다. 다른 십혈존은 서로 만났을 때마다 지독한 증오와 살기로 살수 를 펼쳐내기에 바빴는데 독혈존은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금혈존과 가까 이 있다보니 다른 혈존에 대한 살기와 증오를 억누르는 방법을 터득한 모 양이었다. "흐흐. 우리의 목적은 진짜 혈존 백가량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닌가? 본 좌가 곧 혈존 백가량이니 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흥. 오만하구. 광혈존 따위가. 겨우 마화타의 실험물로 전전하던 주제 에 진짜 혈존을 자처해?" 독혈존이 냉소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이 검게 물들며 짙은 악취를 풍기 는 검은 강기 덩어리 하나가 광혈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그 힘과 기세가 너무 약해 강기를 형성할 줄 아는 절정고수라면 쉽게 막을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이었다. 광혈존이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그 검은 색의 강기를 잡아챘다. 손바 닥이 접촉할 무렵 갑자기 검은 색의 주먹만한 강기덩어리가 폭발하듯 터 져 버렸다. 그리고 독혈존의 득의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핫핫. 그것은 무영지독을 펼쳐내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십혈존 최 강의 마혈존도 한순간 몸이 굳었거늘 광혈존 따위가." 독혈존은 광혈존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두 눈에 살기를 띠며 손을 뿌 렸다. 강기가 하나의 유연한 채찍처럼 변해 광혈존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광혈존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턱. 뱀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독혈존의 독강기가 광혈존의 손에 잡혔 다. 그리고 독혈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이건 광혈존의 기운이 아닌데? 마혈존의 기운이다. 네 놈은 역시 마혈존이었구나." "크크. 네놈과 금혈존에게 죽은 마혈존의 영혼파편과 기운을 빨아들였을 뿐. 자세히 살펴보면 그 외에도 다른 기운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으으. 마화타가 쓸 데 없는 것을 연구하더니 괴물을 만들어 내었구나. 네놈이 우리들을 빨아먹었구나." "그렇다. 혈존의 영혼 파편 다섯이 내게 모였다. 너까지 여섯이지. 내 안에서 하나가 되자꾸나." 광혈존의 압도적인 기세에 독혈존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안 그 래도 무공으로는 십혈존 중에서 광혈존과 더불어 최 약체로 꼽히던 독혈 존이었다. 그가 자신하던 독마저 통하지 않는 이상 혈존의 영혼파편 다 섯과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을 상당량 끌어 모은 광혈존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그는 뱀 앞에 놓인 개구리 마냥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억울하다 생각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는 혈존의 분신이고 파편이다. 내 게 모여 진혈존(眞血尊)이 부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했던 이 유가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으으. 개소리. 너 따위 광혈존이 진혈존이라니.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하고 말고 간에 너는 내게 속할 수밖에 없다." 광혈존의 손이 독혈존의 이마에 와 닿자 독혈존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 올랐다. 워낙 서로의 격차가 커서 반항도 못했지만 이대로 영혼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소멸하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소멸한다면... 광혈존. 네놈도 사라지게 만들겠다.) 독혈존은 자신의 몸 안에 이루던 독의 균형을 스스로 무너트렸다. 독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은 간단했다. 몸 안에 담겨져 있는 아수라독존마공 의 힘으로 몸 안에 존재하는 일백 가지 독 중의 하나를 강력하게 강화하 면 되니까. (일각 안에 내 몸이 녹아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광혈존 놈이 나 를 흡수하겠지. 크흐흐. 일백 가지 독이 무작위로 섞이고 그 중의 하나 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에 영향 받아 변질된 최강의 독. 멸천지독을 능가하는 독이, 해독할 길이 없는 파멸지독이 형성되리라.) 독혈존이 악독한 미소를 지을 때 그의 몸이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독이 내부에서 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를 맞춰 광혈존은 독혈존의 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독혈존의 몸이 녹아 내리는 것을 전혀 이상 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몸으로 들어오는 독력(毒力)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독혈존의 기운이 독인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자신을 해칠 수 없 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윽. 지독하다. 독혈존의 기운이 이토록 강했나? 다른 혈존보다 훨씬 강하지 않은가?" 손이 마비되는 듯한 감을 느끼며 광혈존이 더듬거렸다. 독혈존의 몸이 완전한 물로 변했을 때 광혈존의 몸도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독혈존의 독력을 빨아들인 결과였다. "으으. 뭔가 이상하다. 마화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으으. 어지럽고 토 하고 싶다." 광혈존은 연신 몸을 비틀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일부구결을 해독한 이 후 사라졌던 고통이 다시 그의 몸에서 날뛰고 있었다. 독력이 발작하자 그의 몸 안에 녹아들었던 각기 다른 기운들이 저마다 반기를 들었다. 광혈존의 몸에는 지독한 독이 퍼져있었다. 독혈존은 지독한 자였다. 독 을 품고 구렁이에 먹혀 구렁이 몸 안에서 알을 까는 두꺼비처럼 독혈존은 광혈존에게 영혼과 독공을 빨리면서 그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광혈 존의 몸은 독혈존이 마지막으로 만들어내었던 파멸지독을 견뎌내지 못했 다. 그것은 심검을 이룬 자조차도 죽여버리는 지독한 독이었다. 그리고 광혈존의 경지는 아직 중단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으으으. 나는 죽는다. 독혈존의 독계를 눈치채지 못하고 서두른 탓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구나.) (나? 그런데 내가 누구지? 으으윽. 백가량? 백가량인가? 아니, 광혈존 인데? 어? 독혈존이었나? 마혈존? 요혈존? 내가 누구였지?)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흐트러졌다. 몸도 마 음도 무너져 내려갔다. 광혈존은 절망을 맞이하였다. 마화타를 찾기에는 그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미 그의 손가락부터 녹아 내리고 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그의 몸은 균형을 잃고 죽어버 릴 것이다. 이미 그의 몸 속에는 독기의 난립 덕에 가지각색의 기운이 저마다 날뛰어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패기와 마기와 독기와 요기와 사 기가 저마다 날뛰었다. 또한 그의 마음 안으로 전일비, 마진걸, 곤무악, 조인후 등의 과거와 기억이 난무했다. 더 이상 광혈존의 기억은 그들 모 두의 기억을 광혈존의 영혼아래 통제하지 못했다. "크흐흐. 진혈존이 되고 싶었거늘. 이토록 죽음을 맞이하다니. 노부 광 혈존이 이렇게..." "크으윽. 광혈존이 아니다. 본좌는 철혈존 곤무악.... 곤무악인가? 이 렇게 죽게 되는..." "으으윽. 살고싶다. 이렇게 되려고 흡수된 것이 아니다. 본좌 마혈존 전 일비는 백가량이 되기 전에는 이렇게 죽을 수가..." 광혈존에 흡수된 영혼의 파편이 그의 입을 통해 저마다 소리를 질러 대었 다. 비참했다. 자신이 누구라도 좋았다. 하지만 죽는 것이 억울했다. 진 혈존이 되어야 하거늘 이토록 쉽게 허물어질 줄이야. "크윽. 죽어? 누가 죽은 것인가? 광혈존이 죽는가? 아니면 광혈존의 마 음에 기억과 영혼을 흡수당한 마혈존, 귀혈존, 철혈존, 요혈존, 독혈존 등이 죽는 건가? 아니지? 그들이 살아있기는 했던 건가?" 죽는다? 누가 죽는가? 혈존? 백가량은 이미 죽었는데? 그럼 십혈존? 어 떤 혈존? 마혈존? 그 역시 또다시 죽었거늘 그런데 죽는다고? 죽은 자가 또 죽을 수가 있는 건가? 철혈존, 요혈존, 독혈존도 마찬가지. 그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역시 광혈존인가? 그런데 여기에는 광혈존은 없다. 여섯의 혈존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융합된 혈존들이 있을 뿐 이다. 인격은 분열되었고 다시 모여 하나로 융합되었다. 여기 있는 것은 광혈존도 아니고 마혈존도 아니며 철혈존도 요혈존도 아니다. 서로 소리 를 높여 분리되었다가 융합되고 그러면서 다투다 하나로 합해지는 죽어 가는 영혼이 있을 뿐이다. "크흐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거늘 무엇 이 나를 죽이는가? 존재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죽일 수가 있는가?" 천지가 빙글빙글 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다. 나 자신이 사라졌다. 나 자신으로 정의할 만한 것이 사라졌다. 광혈존이 사라지고 마혈존이 사라지고 독혈존이 사라지고 요혈존이 하라지고 철혈존이 사라지고 귀혈 존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은 혼돈뿐이었다. 모든 것이 가치가 없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죽음이 어디 있고 삶은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광혈존이면 어떻고 마혈존이면 어떻고 요혈존이면 어떤가? 혼돈이면 또한 어떤가?" '혼돈?' 광혈존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혼돈. 지옥 18층 에서 올라온 어둠보다 더욱 짙은 혼돈의 끝. 어둠과 빛이 섞이고 서로를 반대하며 사랑하고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의 뜻이 혼용되는 것. 그것이 바로 혼돈. 세상의 모든 가치와 진리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거짓으로 만드는 것. 더 이상 세상을 존재할 의미가 없게 만드는 것. 이 세상 모두를 헛것처럼, 환상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 그것이 혼돈. '아수라독존마공(阿修羅獨存魔功) 최후의 완성 구결 혼돈진결(混沌眞 訣)!' 빛과 어둠이 터져 나왔다. 뿌연 회색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빛 도 어둠도 아닌 혼돈이었다. 그리고 일어선 것은 백가량도 광혈존도 아 니고 독혈존도 아니었다. 청마산에 나타났던 아수라독존마공의 화신이었 다. 그것은 죽음의 사신 아수라이고 진혈존(眞血尊)이었다. <옥룡왕부> 백이충의 얼굴이 확 변했다. 너무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몸 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듯 아우성치는 느낌을 어찌 모를 수가 있을 까? 절대의 기운. 마신의 기운. 그리고 상단전의 경지에 있는 아수라의 기운. "누가... 누가 아수라독존마공을 재현해 내었다." 백이충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사태가 일어났음을 그의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혈 존의 영혼의 파편이 그에게도 적용되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십혈존으로 영혼의 파편이 나뉘어진 이상... 절대 아수라독 존마공이 복구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누구란 말인가? 누가 진혈존(眞血尊)이 되었단 말인가?" 상단전의 경지에 이른 자는 아주 위험했다. 홀로 천하를 멸망시킬 수 있 는 자. 그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미 반신이 된 자를 인간이 어 찌 막는단 말인가? 천하에서 그 경지를 막을 자는 오직 한 명 백이충 밖 에 없었다. 백이충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옥룡왕을 곤란에 빠트리기 위하여 모 란서시 백소련을 만나기로 했으나 진혈존의 일이 더 급했다. 거리와 공 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다가오는 느낌. 그는 느낌이 이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수라독존마공에 마악 발을 들여놓은 혈존이라면 아직 백이충이 위험 없이 제거할 수 있었다. 주변의 공간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다. 백이충은 자신이 있는 곳이 지 하의 한 석실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본능에 위험을 경고했던 인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가?" 주변 지하 통로 전체가 우르릉 울렸다. 백이충의 일갈에 지진이 일어난 듯 지하 통로가 웅웅거리며 천청에서 흙과 바위가 떨어져 내려왔다. 하 지만 그의 호통에 반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지하 거처에는 아 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하면 그에 지배당하거늘. 여기에서 돌아다 니고 있어야 하거늘. 여기에 없다는 것은 이성을 회복했단 말인가?" 과거 백이충은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했을 때 잠시 이성을 잃었었다. 그 가 이성을 회복하는 것은 그 경지가 이성으로 올라갈 때였고 미처 제 정 신을 찾기도 전에 혈지존에 의해 목숨을 잃었었다. 그러나 새로운 아수 라독존마공의 성취자는 이미 모습을 감춘 이후였다. "제길. 이런 경우라면... 아예 처음부터 과거 혈존의 영혼이 터득했던 아수라독존마공의 경지를 회복한 것이란 말인가? 이미 진혈존(眞血尊)은 그 성취가 이성의 경지를 넘어갔단 말인가? 그래서 나를 알아보고 내 기 운을 느끼고 피한 것인가?" 백이충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지금이라면 별 피해 없이 그를 제거할 수 가 있다. 이미 광한신공의 완성을 앞두고 일부러 미적거리는 그에게 있 어 같은 상단전의 무공이라도 초입에 든 진혈존은 완벽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제길. 아수라독존마공의 장점은 그 성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에 있다. 극성까지 이루는데 일년이 채 걸리지 않을 텐데?" 일년도 너무 많이 잡은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수개월 이내에 백이충의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 혹은 백이충을 피해 다니며 천하를 발칵 뒤집 어 놓을지도 모른다. "젠장. 젠장. 어쩌면 좋지? 그놈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십성 이상 성취한 다면?" 진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십성 이상 성취한다면 백이충도 다시 광한신 공의 미뤄놓은 진전을 피할 수가 없다. 광한신공을 대성한다해도 진혈존 역시 아수라독존마공을 대성한다면 백이충이 이긴다고 자신할 수가 없 다. 그 이후는 오직 깨달음의 경지가 깊은 자만이 이길 뿐이다. 문제는 백이충이 이긴다고 할지라도... "젠장. 젠장. 아수라독존마공은 마신의 길이므로 모든 것이 제 멋대로, 제 마음대로. 마경이든, 선경이든 천계이든 뒤집어 놓을 수 있고 얼마든 지 속세에 머물려면 머물 수 있지. 그의 본질은 혼돈. 하지만 광한신공 의 본질은 자연을 다스리는 것. 광한신공은 완성되면 바로 신선이 되는 길. 곧 세속의 인연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백이충은 울고싶은 심경이었다. 그저 바라고 싶은 것은 진혈존이 아수라 독존마공을 완성하기 전에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몇 개월 안에 해결해야 한다. 이제 다른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가장 최우선의 과제가 바로 진혈존을 찾아내는 문제가 된 것이다. "아무리 마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몸은 하계에 있다. 천하를 다 동원하면 그 종적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혈 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대성하기 전에 그를 찾아낼 것이다." 백이충의 두 눈에 집념의 빛이 넘실거렸다. 천하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그가 인간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옥룡왕 혈지존은 모든 것이 불리해져만 가는 현 상황에 대해 깊은 탄식을 했다. 그의 휘하에 결집해 있던 유학자들이 대거 이탈의 기미를 보인 것 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생각한 학림파도 마 찬가지였다. 은밀히 퍼진 중신들의 중립표명은 비밀리에 퍼져나갔지만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대충적인 상황은 옥룡왕부에 전달되었다. 정기적으로 얼굴을 비 치고 아부를 떨던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어찌 사태가 돌변했음 을 알지 못하랴. 동창이 자금성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금의위 총영반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 했다. 그 모든 사태의 원인을 옥룡왕은 바로 파악 할 수 있었다. 옥룡왕 의 조직은 여전했다. 자신의 부하들마저 감시하는 비선조직을 혈지존은 무림뿐만 아니라 관계에도 거미줄처럼 깔아놨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황 도에 이는 소문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핵심에 가까운 것을 신속하게 파 악 할 수 있었다. 일단 천향군주라는 옥룡왕의 딸이 나타나 옥룡왕이 가 짜라고 떠든다는 정보를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윽. 천향군주라니. 그런 계집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절정마유나 동창제독이 실종되었을 때 자금성을 괴진으로 감싼 세력이 자 신의 신분을 들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짐작은 했다. 무림에 자신의 정 체를 너무 쉽게 드러내었다. 무림인으로서 황실의 일에 간섭할 자는 없 으리라는 얄팍한 자신감에서 였는데 이제는 후회막심이었다. 하지만 혈 지존은 완벽하게 옥룡왕의 행세를 했고 황실 쪽의 세력 중에는 그 누구도 혈지존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리라 자신했었다. 그런데 설마 옥룡왕의 딸이라는 여자가 나타나다니. "그 계집이 본좌를 모함하다니. 그 년이 실종된 것은 십몇년 전의 일이 고 본좌가 옥룡왕을 사로 잡은 것은 십년 전이거늘 언제 그 계집과 계집 의 어미를 해쳤단 말인가?" 혈존이 천무삼성에게 죽고나서 혈지존은 옥룡왕의 주위를 오년이나 맴돌 았다. 완벽하게 그를 가장할 자신이 있고 나서야 십 년 전에 그를 사로 잡고 옥룡왕 행세를 했다. 당연히 천향군주에 대한 일은 알지도 못했다. 알았어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신경 쓰지 않았다. "크윽. 과거 옥룡왕이 그 계집을 총애하여 자신의 측근을 만날 때마다 대동하고 다녔다니. 워낙 기억하는 자들이 많아 그 계집이 가짜라고 우 기기도 힘들지 않은가? 고집덩어리 강소유가 한 말은 누구라도 의심할 수 없다. 그가 보증한 내 딸이 나를 가짜라고 하니 모두들 본좌의 정체 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지금 그의 신분이 발각된다면 더 이상 황좌를 차지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황실의 왕야가 황제 자리를 노리는 것은 반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반역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옥룡왕의 계획은 황제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협박하여 겉으로나마 황제가 순순히 옥룡왕 에게 양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혈지존이라는 무림인이 황좌를 노 린다면 그것은 구족멸문의 반역에 해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 계집의 뒤에는 황제의 명을 받든 자 가 있을 것이고 황실이 증명한다면, 그리고 천향군주를 아는 자들이 증 명한다면 그녀를 가짜라고 할 명분이 없다. 남은 것은 최악의 수뿐. 바 로 천향군주의 입을 막는 것. 지금 상황에서 천향군주가 사라지면 의심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히 옥룡왕이었다. 순수하게 옥룡왕에 충성을 바치던 황족과 중신들도 옥령 왕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천향군주의 출현으로 완전히 마각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천향군주가 사라지면 직접적으로 그를 가짜라 공격하는 증인은 사라지는 셈이므로. "혈광. 명을 받들라." 옥룡왕 혈지존 백나안의 명을 듣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솟아 나왔다. 냉막한 눈빛을 가진 복면인. 그는 옥의(玉衣)를 입고 그림자처 럼 서 있었다. 권력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비밀 호위였다. 혈광은 삼십 년 이내에 가장 뛰어난 살수라고 불리는 살수지왕이었다. 과거 혈존을 암살하려다가 잡혔고 지하뇌옥에 갇힌 것을 혈지존이 구해 호위로 쓰고 있었다. 옥룡왕부의 가장 뛰어난 무사, 옥의무사들 중에 가 장 뛰어난 자였다. 무공으로 치면 옥룡왕부 옥의 무사들 중에 그보다 뛰 어난 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잠입과 살인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심지어 혈지존조차 그의 종적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천마강시 셋에 옥의무사 열을 데려가 천향군주를 납치해와라." 옥룡왕의 말에 혈광의 눈빛에 잠시 이채가 떠올랐다. 옥의무사는 거의 일파의 장로나 장문인 급. 옥룡왕부에도 오십이 채 넘지 못했다. 천마강 시는 무적이지만 이지가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옥의무사야 말로 옥 룡왕부의 실질적이니 수뇌이고 힘이었다. 혈지존의 좌우 양팔이었던 이 총관 장백신선문 문주도, 일 총관 동창제독도 모두 옥의를 입고 있었다. 그런 옥의무사 들 중에 열이나 데려가라 함은 옥룡왕이 이 일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한낱 계집 아이 하나를 데려오는 데 옥의무사 열이라니요?" "그 계집이 이렇게 때를 맞춰 나타났음은 배후가 있다는 소리이다. 아마 도 자금성에 괴진을 펼친 자들일 것이다. 천향군주의 호위에 만전을 기 하고 있을 터이니 가볍게 여기지 마라." "복명." 혈광이 사라지자 옥룡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일이 꼬이고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북경에서 내가 포위될 수도 있 는 일이다. 허나 옥룡왕부에서 기른 무사들과 금혈존, 독혈존, 그리고 변황동맹이 있는 한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북경 황도수비군에서 나오는 마차가 있었다. 조정 삼대파벌의 하나인 서 유림을 향해 움직이는 마차에는 요즘들어 옥룡왕이 가짜라는 소문의 진원 지인 천향군주 주소련이 타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거처는 그녀의 외할 아버지인 한림원주의 저택이었다. 마차를 노려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살수지왕 혈광의 눈이었다. 그는 천 향군주를 납치하기 위해 냉정하게 자신의 전력과 적의 전력을 파악했다. 일단 마차를 호위하는 일백의 기마병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천마강 시 하나만 투입해도 몰살 시킬 수 있는 병력이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마차 주위에 있는 네명의 무사와 마부인가?) 주소련을 호위하는 네 명의 중년인은 바로 일백 마제들 중에 주소련의 호 위를 맡은 자들이었다. 암암리에 그들의 내력을 가늠하다가 빈틈이 없는 자세를 보고 혈광은 놀랐다. 자객으로서 최소한으로 잡아도 저들의 수준 은 옥의무사 이상이었다. (게다가 저 마부. 일파종사 이상이다.) 혈광은 모르지만 주소련의 마차를 모는 자는 바로 북해빙궁주였다. 혈광 은 과거 북해빙궁주와 천외사세로 나란히 명성을 떨치는 천룡사주를 암살 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혈지존의 제자가 천룡사주로 가 장할 수 있었지만 혈광이 가장 힘들어 했던 암살이었다. 그런데 지금 북 해빙궁주를 보며 혈광은 천룡사주를 암살할 때만큼이나 긴장감을 맛보고 있었다. 북해빙궁주를 딸려보냈다는 것은 백이충이 그만큼 주소련의 안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외출로 주소련과 만나지는 못 했지만 이들이 있기에 안심하고 백이충은 진혈존을 쫓았던 것이다. (혈지존의 말 그대로이다. 저런 호위는 백도맹주라도 주위에 두지 못한 다. 하나같이 소림 장문인 이상의 능력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랫 사람의 도리 이다. 하물며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수십 건의 암살임무를 수행해낸 살 수지왕이다. 그가 실패했던 암살은 혈존밖에 없다. 납치 역시 암살과 크 게 다르지 않다.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히히히힝! 갑자기 말이 비명을 질렀다. 마차의 바닥에서 솟아난 것처럼 검은 그림 자가 솟구쳐 사두마차를 끄는 말들의 목을 벤 것이다. 일체의 기척도 없 었기에 북해빙궁주마저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당황해 했다. "감히." 마차가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자 북해빙궁주도 잠시 균형을 잃었다. 그림 자에서 솟구친 검은 인영이 마차를 덮쳐왔다. 북해빙궁주는 노기를 띠며 장력을 내뿜었다. 주위의 온도가 싸늘하게 변하며 마차 주위에 얼음이 맺혔다. 동시에 냉풍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덮쳐갔다. 잠깐 균형을 잃기 는 했지만 마부석에 있는 자는 바로 북해빙궁주였다. "컥." 검은 그림자가 가슴에 그대로 일장을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상 체가 허옇게 얼며 쓰러졌는데 쓰러지기 전에 일격을 받는 동시에 일검을 내뻗었다. 그 일검은 너무나 날카로워 북해빙궁주마저 미처 피하지 못하 고 한쪽 어깨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크으윽. 이런 자가 있다니. 살수지왕이라도 된단 말인가?" 북해빙궁주가 비명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를 막으며 북해빙궁주가 신음을 내지를 때 갑작스런 변괴에 놀란 병사들 이 마차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 세명의 검은 그림자가 기마병들을 향 해 뛰어들었다. 빠르고 순식간의 습격이었다. 게다가 세 그림자는 터무 니없이 강했다. 삽시간에 비명이 난무하고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나왔다. "천마강시? 옥룡왕이 대낮에 손을 쓴단 말인가?" 북해빙궁주가 놀란 얼굴을 했다. 몸에 적중하는 병기들이 수수깡처럼 부 러져 나갔다. 금강불괴가 아니라면 강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옥룡왕 이 지닌 강시라면 천마강시일 터이다. 천마강시라면 북해빙궁주 자신도 일대일로 겨루어 이길 자신이 없는 괴물이었다. 마차를 막고있는 무장한 병사들이 단지 셋뿐인 천마강시들에게 거의 수수 깡처럼 절단나고 찢겨지며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이, 몸으로 막으면 몸이 산산조각났다. 북해빙궁주와 다섯 명의 마제 의 시선이 마주쳤다. 천마강시를 상대로 힘으로 막아서는 안된다. 저 괴 물들을 상대로라면 몸을 피하는 것이 낫다. "주소저. 아무래도 몸을 피하는 것이 낫겠소. 천마강시까지 나타난 것을 보면 옥룡왕이 독한 마음을 먹은 모양이오." 북해빙궁주가 초조하게 마차 안을 향해 말했다. 마차 안은 몇 겹의 안전 장치가 되어 있지만 천마강시를 상대로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백이충 이 있다면 천마강시가 수백이 몰려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북해 빙궁주는 아니었다. 현재 백이충 휘하의 모든 고수들을 따져봐도 천마강 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고수들은 스믈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해 빙궁주는 천마강시 하나라면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셋은 감당할 자 신이 없었다. "쳇. 백가가는 이런 때에 무슨 볼일인지. 옥룡왕이 습격할 것을 예상했 으면서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뾰로통한 얼굴을 한 주소련이 나왔다. 그녀 역시 혈 무 십영주의 하나로 그 무공이 북해 빙궁주에 못지 않았다. 그녀가 나서 자 북해빙궁주가 고개를 끄덕여 다섯 마제에게 신호를 한 이후 몸을 피하 려 했다. 쏴아아악. 쓰러진 기마병의 시체 사이에서 죽은 자 흉내를 내던 열명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싸늘한 검광이 북해빙궁주와 다섯 마제, 주소련 등 여섯명을 감쌌다. 언제 스며들었을까? 주소련은 물론 북해빙궁주조차 눈치채지 못 했다. 혈광이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 살수기예를 전수한 덕이다. 그 날카 로운 검세는 북해빙궁주와 주소련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림없다." 다섯 마제가 즉시 일종의 오행진을 이루며 싸늘한 열줄기 검광과 맞섰 다. 천마강시라면 몰라도 지금 습격해 온 자들의 일검 정도는 아무리 다 급하게 뻗은 힘이라도 막을 자신이 있는 다섯 마제였다. 설사 마제들보 다 강해도 일격에 그들을 물러서게 할 수 없는데 습격해온 열명은 잘해봐 야 마제들과 동격인 고수들이었다. "크아아악." 북해빙궁주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발치에 얼음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던 시체가 벌떡 일어난 것이다. 북해빙궁주의 일장을 얻어맞을 때 그는 심 장을 얻어맞지 않았다. 온 몸이 얼어붙었지만 북해빙궁주의 균형이 흔들 리는 바람에 살짝 몸을 비틀어 심장만은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 몸이 죽기 일보직전의 엄중한 상태였지만 생명만은 보존할 수 있었고 살 수지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혈광은 단 한번의 기회 속에 평상시 이상의 동작을 보여주었다. 그의 몸은 다섯 마제가 형성한 오행진 안에 있었기에 그들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 전혀 사전 기척 없이 뿜어나온 일검은 북해빙궁주의 한 팔 을 날려버리고 얼굴에 긴 검상을 만들었다. "빙궁주." 주소련이 경악하여 소리쳤지만 거의 동시에 그녀의 몸이 뻣뻣해졌다. 무 공은 강했지만 경험이 없는 주소련은 갑작스런 습격을 막지 못하고 검기 에 혈도가 제압당해 버렸다. 그녀의 몸이 굳어 쓰러지는 것을 허연 서리 를 몸에 매달은 검은 복면인 혈광이 붙잡았다. 그는 미처 다섯 마제가 반응하기 전에 주소련을 어깨에 들쳐메고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감히. 우리들 앞에서 사람을 납치하려 하다니." 북해빙궁주가 쓰러지고 주소련이 복면인에게 혈도를 제압 당한 것은 순식 간의 일이었다. 다섯 명의 마제가 일제히 소리치며 복면인을 쫓으려 했 는데 오히려 이번에는 그들을 공격하던 열명의 검수가 방어막을 펼쳤다. 검막이 우산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다섯 마제의 강기공격과 마주쳤다. 콰르르릉. 열 명의 복면인이 일제히 피를 토하고 다섯 마제가 주춤 몸을 뒤로 물리 며 안색이 창백해졌을 때 일백 명의 기병을 몰살시킨 세 명의 천마강시가 그들을 압박해왔다. "빌어먹을." 다섯 마제는 주소련을 어깨에 맨 복면인이 사라지는 것을 두눈 뜨고 지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세명의 천마강시도 당해내기 벅찬 판에 열명의 복면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섯 마제가 자신들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천마강시조차 등한시한 체 주소련을 데려간 복면인을 쫓았다. 하지만 열명의 복면인들이 몸을 던져가며 방해를 했다. 그 바람 에 세 복면인을 죽일 수 있었다. 제압 당하는 즉시 그들은 혀를 깨물었 다. 하지만 천마강시는 다섯 마제를 공격하지도, 다른 복면인들을 도와 주지도 않는 대신 주소련을 납치한 복면인 혈광의 뒤를 따라가며 철저히 보호했고 결국 마제들은 혈광과 주소련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소득은 죽은 세명 적의 시체와 쓰러져있는 북해빙궁주를 보호하는 정도였다. "제기랄. 호황부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다섯 마제의 비통한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주소련을 데려간 복 면인이 완전히 천마강시의 보호아래 사라지자 허탈한 다섯 마제를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다섯 마제의 추적을 방해하 던 일곱의 복면인이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북해빙궁주 때문에 멀리까 지 추적할 수 없어 분을 삼키며 도망자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다섯 마제였다. "이럴 수가." 금혈존은 충격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도 뚜렷이 느낄 수 있었 다.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완전한 존재가 완벽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자신의 기운을 자신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 내고 있는 존재가 있는데. "불가능해. 있을 수가 없어. 어떻게? 어떻게 다시 아수라독존마공이 나 타날 수가 있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어떤 혈존이 그것을 복구해 낸 거지? 누구도 완전한 아수라독존마공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과거에 완전 했던 혈존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도대체 누가?" 현실을 부정하듯 금혈존은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고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진혈존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혈존은 맥 이 탁 풀림은 느끼고 그만 털썩 지면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이제 나는 어쩌지? 진짜 혈존이 탄생되었다면? 나는? 나는 진짜 혈존이 아니었단 말인가? 단지 분신에 불과한 가짜였단 말인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자결하 는 것이 더 쉽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 진짜의 복사품에 불과하다는 것 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쩌 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크으윽. 모든 일이 비틀어지고 있다." 금혈존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변황동맹을 거두고 독혈존과 연계하 고 옥룡왕 혈지존과 손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되는 듯 했다. 혈지존을 방해하는 무리들 쯤이야 자신과 변황동맹, 독혈 존의 힘이면 바로 쓸어버릴 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현황방은 껍질만 남았다. 며칠 전 상계의 모든 거상들에게서 연락이 끊 겼다. 현황방의 고수들을 보내 그들을 불러들였으나 돌아오는 자는 없었 다. 현황방의 주요고수들이 대부분 사라졌고 십대상벌이 금혈존에게 연 락도 없이 등을 돌렸다. 아직 옥룡왕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상황 조풍 의 행방마저 묘연해졌다. 동시에 그의 명에 의해 북경에 몰려왔던 거상 들이 그 모습을 한 순간에 감춰 버렸다. 상계와 현황방은 금혈존의 모든 기반이었다. 그 막대한 자금력으로 용병 들을 부리고 또한 변황동맹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 근본 힘이 사라졌 다. 게다가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행한 일은 쌍으로 온다고 했던가? 그가 장악하고 있던 천축 법존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변황동맹의 모습도 사라졌다. 서문 장군부에 있으라고 당부했었는데. 그곳에서 혈존대회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인까지 했었는데 모두가 사라졌다. 그가 끌어모은 용 병들과 함께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금혈존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 의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있던 부하들, 현황방 에서 그의 명을 받들던 부하도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날자와 비례하여 증 발하고 있었다. 모두가 배반자들 같았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천하의 혈존이. 이 금혈존이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이 그의 몸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벗어날 수 없는 천라지망이 금혈존을 비웃으며 조여오고 있 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자금성에 괴진을 펼친 세력을 의심했다. 혈존 중의 하나가 아 닐까 의심했고 요즘들어 소문이 돌고있는 호황부가 아닐까 의심스러웠 다. 혈존 중의 하나라면 금혈존 아니면 독혈존을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호황부라고 해도 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크윽. 독혈존에게 주의를 주려 했건만. 한 발 늦었던 것일까?" 심상치 않은 느낌에 그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독혈존과 의논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독혈존의 행방을 찾는 와중에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 겪 는 느낌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영혼의 공 명에서 느껴지는 느낌이기에. 진혈존과 자신을 요즘 몰아가고 있는 자가 동일인인지는 알수 없다. 아 니, 이제는 알 필요도 없다. 가장 두렵고 확실한 적의 정체가 확실해 졌 기 때문이다. 금혈존이 당장이라도 해결해야될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무너트리고 마신이 되어버린 진혈존. 그에게 지금 끝없이 공포를 영혼의 공명으로 선물하고 있는 자였다. "크윽. 나는 금혈존이다. 진짜 혈존이다. 내가 가짜라고? 싸구려 분신 복제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금혈존의 눈에서 독기가 퍼지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현실이 냉정하다 해도 금혈존은 지금 살아있었다. 진혈존이 등장했다고 해서 지금 금혈존 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혈존을 자처하며 살아있었고 앞으 로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대로 자아를 부정당할 수는 없다. 이 대로 사라질 수는 없다. 진짜로 진혈존을 앞에 두고도 자아를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은 자신의 자아를 확신했다. "내가 혈존이 아니라면... 내가 혈존 백가량이 아니라면... 나는 금혈 존이다. 금혈존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겠다." 굳게 결심을 한 금혈존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앙다문 이빨 사이에 입술 이 짖이겨져 피가 나는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갈 방도를 생각했다. 일단 진혈존과 마주쳐서는 안된다. 아수라독존마공을 성취한 자와 대결해서 살아남는 것은 화산에 뛰어들고도 살아남고자 하는 것과 같았다. 무조건 그를 피해야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정신이 그의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다. (혈존대회를 취소해야 한다. 혈존탑의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 그날 본좌 가 그곳에 있게되면 진혈존으로 거듭난 자에게 살해되거나 분신취급을 받 게될 뿐이다. 모든 야망이 무너진다. 일단 몸을 숨겨야 한다.) 금혈존은 세상이 무너진 것같은 한숨을 내쉬며 옥룡왕부로 향했다. 진혈 존이 부활했으니 혈지존 또한 가만 놔두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혈 지존은 두 번씩이나 혈존을 죽인 존재가 아니겠는가? 자신은 힘이 부족 하여 혈지존과 손을 잡았지만 아수라독존마공을 성취한 진혈존이 뭐가 아 쉬워 혈지존을 내버려 두겠는가? 살아남으려면 작은 힘이라도 뭉쳐야 했 다. 개미의 발버둥일망정 살아남고자 몸부림쳐야 했다. 금혈존은 혈지존 에게 미래를 위해 잠적하자고 권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크윽. 기어이 그놈이 모조리 잡아먹었구나." 또 한명 절망을 하는 자가 있었다. 바로 천뇌교에서 도망친 뇌혈존이었 다. 그는 지금 느끼는 기운의 정체를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있는 자 였다. 바로 진혈존이 된 광혈존에게 간신히 도망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뇌혈존은 천뇌교에서 쫓겨나 감숙을 벗어난 이후 사천으로 접어들려 했 다. 그곳에서 다시 혈향초를 이용하여 재기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성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서 실패했지, 대비를 했다면 그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뇌혈존이었다. 몸을 숨기고 현재 가지고 있는 혈향초를 퍼트린 이후 수십 년의 세월동안 숨어 세력을 늘리고 다른 혈존의 영혼을 광혈존처럼 잡아먹을 계획을 꾸민 뇌혈존이었다. 지금 가 지고 있는 혈향초만으로도 수만을 중독시키고 남았지만 그것만으로 천하 를 도모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길을 가던 도중 산길에서 털썩 주저앉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때도 넷 이상을 잡아먹었다고 했다. 거기에 또 하나를 잡아먹었구 나. 그리고 각성했어. 광혈존이 진혈존이 되어 버린 거야." 뇌혈존은 광혈존을 상기하고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스스로 혈존이라 자 부했지만 그에 대한 공포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공포였기에 그것을 극복하기도 힘들었다. 하물며 광혈존은 기어이 아수 라독존마공을 복구하여 진혈존이 되고야 말았다. "어이 하는가? 어이 하는가? 그를 만나면 끝장이다. 그놈은 단번에 본좌 를 흡수하고자 달려들 것이다. 과거에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완 전한 혈존이 된 그를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뇌혈존은 통곡했다. 두렵고 서러워서. 자신이 진짜 혈존이 될 수 없음이 안타깝고 서러우며 진혈존이 자신을 제거할 것이 두려워 울었다. 달아날 수도 없다. 이미 마신이 된 자에게 속세는 너무도 좁은 곳이다. 어디로 도망간들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스스로 자결하기 전에야 어떻게 그 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살아날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뇌혈존이 통곡을 멈추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발버둥쳐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자신이 고금제일마 혈존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지려는 뇌혈존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남의 밑으로 굴복 하지 않으려는 자부심. 남에게 당하고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야 말로 진짜 혈존의 영혼이 남긴 정수였다. "혈존은... 나의 전생은 한번 죽었다. 과거에는 혈지존의 계략에 휘말려 죽었고 환생한 뒤에는 아수라독존마공에 입문하고도 혈지존에게 또다시 당해 죽었지. 실날 같은 가능성이지만... 한번 일어난 일이 다시 또 일 어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게다가 내가 도와준다면 처음보다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뇌혈존은 한 사람을 생각해내었다. 옥룡왕 혈지존. 천뇌교에서 쫓겨났을 망정 혈지존과 손을 잡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 뀌었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굴복할 수는 없다. 굴복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자신은 뇌혈존이 아니다. 그런 자는 혈존으로 자처할 수가 없다. 살아날 방법을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단 하나였다. 바로 진혈존을 죽이는 것. 그러려면 실날 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아야했다. 확실한 것은 그 혼자서라면 절대 진혈존 을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혈존은 혈향초와 형벌십자흔의 술법이 결합하여, 아수라독존마공의 영 향이 그것을 강화하여 거의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 같은 혈존이라도 그를 죽일 수 없다. 광혈존처럼 다른 혈 존 여럿을 통합한 자만 아니라면 무적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아수 라독존마공을 이룬 진혈존의 앞에서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다. "혈지존과 합류한다. 내게 있는 혈향초의 제조방법이라면... 그도 나와 손을 잡겠지. 아니, 진혈존의 존재를 알게되면 나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혈존대회를 제안했다 함은 그에게 다른 혈존이 접근해 있 다는 뜻. 십혈존의 다른 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 뇌혈존은 북경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를 위협하는 진혈존이 있다. 하 지만 동시에 진혈존이라는 위협을 제거할 가능성도 있다. 뇌혈존은 그 가능성을 택하기로 했다.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살아남은 혈존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진혈존의 느낌을 받았을 것 이다. 모두 그를 느꼈다면 연합을 고려해봄직도 하다. 우리 혈존들이 힘 을 합하면 조금 더 살아날 가능성이 많으리라." 혈지존에 더해 그는 한 걸음 더 마음을 넓히기로 했다. 혈존. 그 존재는 자신의 자아성을 부정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자신과 똑같은 영혼을 지닌 자들. 그래서 증오스럽고 소멸시키고 싶은 자들이 바로 자신과 같이 혈 존을 자처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틀렸다. 진혈존이 등장했다. 자 신과 똑같기에 증오스러웠지만 그들 모두를 아예 부정하는 진짜 혈존을 앞에 두고 더 이상 증오를 유지시킬 필요가 없다. "손을 잡아야 한다. 하나라도 더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진혈존을 상 대해야 한다.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윽. 이럴 수가?" 패혈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거의 영혼 자체가 백지로 변해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패혈존?" 그를 대동한 삼마황이 물었다.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 천년마교에서 탈출하여 패혈존과 동행하여 몸을 피한 삼마황이었다. 패혈존과 삼마황의 처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단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은 무려 이십 년 넘게 천하제패를 준비해왔던 마두들이다. 천마가 되살아나고 천년마교를 부활시켜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들에 게도 숨겨놓은 세력이 있었다. 애초부터 천마를 배반할 마음을 먹고있던 그들 삼마황이었기에 남몰래 세력을 빼돌렸던 것이다. 패혈존과 삼마황은 북경의 일과 옥룡왕의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혈존대 회도 애써 관심을 피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무림제패에 있었다. 그들 에게 적은 백도맹과 천년마교, 그리고 십혈존이었다. 천년마교를 빠져나온 직후 천년마교의 분타 세력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빼돌렸다. 천마와 만사지존이 두렵지만 삼마황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 다. 게다가 패혈존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천년마교에서는 패 했지만 그것을 미래의 패배로는 인정하지 않을 만큼 패혈존은 강한 존재 였다. 패혈존과 삼마황은 흑룡강성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거기서 혈천마궁을 다시 열 생각이었다. 그들의 수하로 일천 고수가 뒤를 따랐고 계속 마교 분타에서 고수들이 합류했다. 지금 따르는 자들보다 더 강한 고수들도 얼마든지 양성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패혈존에게는 있었다. 여행하는 와중에 북경에서 열린다는 혈존대회의 소문을 듣기는 했다. 한동안 갈등 했지만 패혈존은 혈존대회의 일을 포기했다. 지금 승률없이 함정일지 모 르는 혈존대회에 참가하기 보다는 몸을 사리고 때를 노려 확실한 무림 제 패를 여는 것이 진정한 혈존임을 증명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든 혈존은 내 손에 죽는다. 혈존 백가량은 바로 이몸 패혈존 밖에 없다." 삼마황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던 패혈존이었다. 그런데 그런 패혈존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떠는 것이었다. "부활했다. 그가. 진짜 백가량이 다시 부활했다. 아수라독존마공이 현신 했다." 패혈존이 공포에 질려 입을 열자 삼마황의 얼굴 또한 하얗게 질려버렸 다. 삼마황은 청마산의 결투에 직접 참가해본 당사자였다. 그리고 그들 은 당시 혈존의 무위가 어떠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혈지존 이 함정을 파놓고 그의 약점을 찌르는데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날 살아 청 마산을 빠져나올 자는 혈존이었다.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어떻게? 혈존의 영혼은 십혈존에게 나누어져 쪼개졌다고 하지 않았습니 까?" "모른다. 몰라. 하지만 이 느낌. 이 영혼. 완벽한 진짜 백가량의 영혼이 야. 그리고 완전한 면모를 갖춘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이야. 영혼의 공 명이 전달해준 사실이므로 절대 틀릴 리가 없다." 패혈존은 연신 몸을 떨다가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호흡을 조정했다. 너무도 뚜렷히 느껴지던 존재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스로의 기운 을 진혈존이 감춘 것이다. 그 원인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아수라독존마 공을 터득한 혈존이 나타났음은 확실했다. "흑룡강성으로 떠나는 것은 취소한다. 진혈존이 나타난 이상 세력의 확 장은 의미가 없다." 패혈존의 말에 삼마황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독존마공 의 위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이성도 채 안되는 아수라독 존마공을 가지고도 혈존은 절대무적의 신위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더욱 깊이 익힌 진혈존이 나타난다면 지금 패혈존과 삼마황이 거느린 세력 열 배가 있어도 한 시진 이내에 멸망하리라. "진혈존은 본좌 패혈존과 틀리다. 그는 과거 혈존 백가량보다 더욱 잔인 하고 흉폭하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마신이다. 우리 십혈존 뿐만 아니라 너희들 배반한 제자들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삼마황은 패혈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혈존의 성격을 생 각한다면 배반한 그들 제자를 용납한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솔직 히 패혈존이 그들과 손을 잡은 것 자체가 혈존답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혈존들이 삼마황과 손을 잡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삼마황이 패혈존을 따 르는 것이었다. 패혈존과 달리 삼마황은 부활했다는 진혈존을 상대하지 못할 마신으로 보 지는 않았다. 결국 청마산에서도 죽은 것은 혈존이었다. 다만 그런 절대 의 무위를 가진 존재가 나타났다면 무림제패의 희망이 덧없이 사라질 것 이 두려웠다. 그렇다면 패혈존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진혈존을 찾아 없애 버려야 한다. "생각을 바꾸었다. 이대로는 우리 모두가 진혈존의 사냥감에 불과하다. 힘을 모아야 한다. 청마산 때처럼 진혈존에 대항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래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어쩔 생각입니까?" "첫째는 천년마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천마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이지. 하지만 천마와 만사지존이라 할지라도 아수라독존마 공을 익힌 진혈존의 일장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다. 비참한 최후는 변함 없다. 그저 약간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이겠지." "천년마교에 돌아가는 것은 영원히 천마의 밑으로 굴복하는 것이 됩니 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북경에서 혈지존이 혈존대회를 연다고 들었다. 다른 혈존들이 모두 모 일 것이다. 누가 무슨 방법으로 아수라독존마공을 터득했는지는 몰라도 십혈존의 나머지가 모두 모인다면 간단히 당하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반 항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날 가능성이 실날 만큼이라도 기대해 볼 수는 있다." "다행이군요. 옥룡왕은 혈지존이니 그에게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와 손을 잡고 다른 혈존과도 연합을 하면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힌 자가 누구이든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되면 모두 공평한 신분 으로 서로 동맹을 맺을 수가 있겠지요." (어리석은 녀석들. 아수라독존마공을 이룩한 진혈존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나마 혈존대회에서 다른 혈존들과 연합하는 것이 살아날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할 수 없이 선택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아아. 두렵다. 영혼마저 떨릴 정도로 두렵구나. 도대체 어떻 게 진혈존이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함정에 빠진 백이충> "옥룡왕부에 소련이 납치되었다고?" 진혈존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맥없이 돌아온 백이충에게 전해진 소 식은 아주 불쾌한 것이었다.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한 옥룡왕이 천향군주 주소련을 납치해갔다는 것이다. "이제 옴짝 달싹 못할 처지에 몰아넣었다고 안심했더니... 이것들이 감 히." 안그래도 불쾌한 마음에 더해진 나쁜 소식은 그의 노기를 치솟게 했다. 솔직히 옥룡왕의 일을 잠시 내버려두고 진혈존을 쫓은 것은 옥룡왕이 이 미 끝장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향군주의 출현이후 옥룡왕을 받들 던 중신들은 몸을 사리게 되었고 황도수비군도 옥룡왕을 믿지 못하게 되 었다. 옥룡왕만큼이나 그의 동맹자 금혈존의 세력도 풍비박산 났다. 상계가 등 을 돌렸고 애써 모은 용병은 백이충의 휘하로 몰려들었으며 현황방도 껍 질만 남았다. 또한 변황동맹도 지금쯤 북경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백도를 도와 중원을 침범한 죄를 씻겠다고 달라이 대라 마가 제의했지만 백이충은 변황의 힘을 빌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거절했 다. 결국 남은 것은 옥룡왕 혈지존과 그의 왕부세력 밖에 없었다. 중신과 북 경의 군사들이 중립을 지키는 이상 이제 반역의 위험은 거의 해소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옥룡왕부 단일세력 정도라면 호황부를 동원할 것도 없이 자신 휘하의 혈무영과 일백마제만 동원해도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무림 의 질서를 확립시키기 위해 몰려든 백도 고수들이 그득하지 않은가? 이 제는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소련을 납치하다니. 그렇게 빨리 끝장나 고 싶은가?" 어차피 혈지존은 옥룡왕의 이름으로 혈존대회를 천하에 공표했다. 백이 충은 일부러 혈지존을 압박하지 않고 혈존대회 때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 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혈지존을 놓칠 우려도 있거니와 혈존대회를 이용 하면 단번에 혈지존과 다른 혈존들을 일망타진하고 무림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는 상관없다." 백이충은 광한신공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모든 것을 잊으려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려 했다. 옥룡왕의 일도 자신보다는 휘하 세력을 이용하여 해결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소련이 납치되었다면 사정이 틀리다. 자신이 그토록 세속에 남아 있으려 했던 것이 바로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 던가? "어차피 진혈존이 출현한 이상 광한신공을 완성시켜야 할지 모른다. 진 혈존과 승패를 짐작할 수 없거늘 한 두 번 정도 더 무공을 발휘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직접 옥룡왕부에 쳐들어가 황실의 모든 후환을 씻어버리 겠다." 아수라독존마공은 광한신공과 같은 상단전의 무공이었다. 그 어느 것이 높고 우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각자 뚜렷한 이상을 가지고 자연을 부 리는 단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백이충이 두려운 것은 아수라 독존마공이 가진 성격, 광한신공과 달리 아무런 장애 없이 급격히 마공 의 진전이 빨라져 속성으로 마공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충 수개월을 잡고 있지만 백이충 자신도 광한신공을 접하고 일년도 안 되어 대성을 이루기 직전이다. 아수라독존마공이 그보다 빨리 이루어지 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늘 옥룡왕부를 정리한다. 지금 당장 백도 고수들을 모두 불러모으시 오. 피를 줄이려면 무림의 일로 처리해야 되오. 옥룡왕이 아닌 옥룡왕부 에 숨은 혈지존을 처단하러 가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되겠군." 일백 마제와 북해빙궁주가 놀란 얼굴로 백이충을 바라보았다. 모든 계획 은 혈존대회에 맞춰 세워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말씀입니까?" "혈존대회에 맞춰 혈지존과 함께 무림의 분쟁원인인 십혈존을 한꺼번에 처리하려 했지만... 소련이 위험하니 할 수 없소. 일단 혈지존을 처리하 고 나중에 내가 직접 무림에 나서 남은 혈존들을 처리할 수밖에." "허나 지금은 대낮입니다. 백도맹 고수들이 왕부를 습격하면..." "걱정할 것은 없소. 백도맹 고수들을 부른 것은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서요. 옥룡왕부에 들어갈 것은 나 혼자가 될 것이오. 별 피해없이 혈지 존을 잡을 자신이 있소. 오히려 무림의 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대낮 에 일을 벌이는 것이 소문내기 편할 것이오." "서문 장군이나 폐하께 연락을 주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시간을 끌기에는 소련이 너무 위험하오. 납치한 것으로 보아 뭔가에 이 용하려는 속셈이겠지만 살아있는 것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 수단은 얼마든 지 있으니... 소련은 폐하의 질녀요.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다면 나중에 폐하의 노여움을 감당해야 할 것이오." 황도 안에서 황군이 아닌 한 대규모의 무사들이 움직이는 일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둘 정도, 혹은 십여 명이 검이나 창을 들고 움직 이는 경우는 있어도 무려 수백의 무리가 여럿 떼를 지어 움직이는 일은 드믄 일이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이동이라니. 수비군에 잡혀들어가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다. 황도에 난리가 났다고 광고하는 상황과 똑 같았 다. 상회와 주루, 객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노점상들도 우려의 시선으 로 그들을 바라보며 장사밑천을 주섬주섬 챙겼다. 안 그래도 한동안 심 상치 않은 황도 분위기에 드디어 난리가 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의 시선 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수백의 무사들이 이동하는 것을 한 두 번도 아 니고 짧은 시간에 열 번 이상 보았으니 그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 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동하기 바빠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백성에 피해를 주지 않는 협사들의 무리인지 일반 주위 백성들에게 전혀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에 저렇게 많은 무사들이 숨어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각처에서 솟아난 무사들. 그들은 명을 받고 일제히 움직였고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현 재 북경을 장악하고 있는 옥룡왕부를 향해서. 그들은 넓게 퍼져 옥룡왕 부를 향해 천라지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백주 대낮에 행해진 이러한 포위망은 옥룡왕부에 의해 금방 발각되었다. 옥룡왕부에 즉시 비상 경계령이 펼쳐지고 무사들이 달려나와 옥룡왕부를 보호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출현에 옥룡왕부 무사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옥룡왕부는 본래 권신(權臣)들이 몰려있는 북경 중심가 대로에 있었다. 그러나 마혈존에 의해 파괴된 이후 옛 터는 방치되었다. 왕부의 터이다 보니 섣불리 다른 사람들도 손을 대지 못했고 옥룡왕도 그곳에 다시 왕부 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옥룡왕은 잠시 금의위 총영반의 집에 신세를 졌 었다. 아주 광대한 장원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북경 외 곽의 장원 하나를 매입하여 그곳에 다시 옥룡왕부를 세웠다. 조정 대신 의 집이 아니라 거상(巨商)의 집을 매입했다. 비록 거루전각이 즐비했던 옛 왕부의 호화스러움보다는 못 했으나 부지의 규모는 옛 옥룡왕부가 비 좁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다. 이는 옥룡왕이 옛날처럼 거대한 지하시설을 갖추지 못했기에 자신이 거느 린 무사들을 거주시키기 위해 큰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새 왕부는 가산을 두 개 낀 거대한 장원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옥룡왕부를 포위한 자들과 옥룡왕부를 보호하는 자들. 서로가 긴장하여 대치한 가운데 왕부로 향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젊은 문사차림의 청년. 그리고 그 청년을 옥룡왕부에서 지켜보는 몇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금혈존과 혈지존. 옥룡왕부의 최고 수뇌 두사람이었다. "사... 살아있었나? 어떻게? 영혼이 갈가리 찢겨져 십혈존이 탄생되었 다고 했거늘 어이하여 혈존이 살아났단 말인가?" "이럴수가... 불가능한 일이거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두 사람. 둘에게 백이충의 존재는 악몽과도 같은 것 이었다. 그들에게 혈존은 곧 백이충이기에. "진혈존의 기운이 느껴져서 이상하다고 했거늘... 아수라독존마공이 부 활하여 어떻게 그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나 의아해 했거늘. 바로 저자 로 인해 그런 기운이 생성된 것이오. 혈존이 다시 부활한 것이오. 저 자 가 진혈존인 것이오." 금혈존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진혈존의 기운을 느꼈으되 광혈존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만 영혼이 갈라지듯 아수라독존마공이 갈라졌거늘, 아수라독존마공이 다시 완성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거늘 도대체 어떻게 진혈존이 부활했는지를 궁금했었다. 하지만 백이충이 살아있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청마산에 나타났던 혈존이 죽은 것이 아니라 되살아 난 것이라면 그가 아수라독존마공을 다 시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백이충 을 진혈존으로 착각했다. "어이된 일이오? 혈존이 애초에 죽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대들 십혈존은 어떻게 나타난 것이오?" "모르겠소. 정말 모를 일. 분명 내 전생은 저자에게 깃들었던 혈존이거 늘. 분명 영혼이 쪼개져 내 몸 속으로 들어왔거늘. 어이하여 전생(前生) 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을 보는 듯 넋을 잃은 혈지존과 금혈존. 처음 옥룡왕부를 포위한 무사들을 보고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정체가 백도 고수들이며 또한 자금성에 괴진을 설치한 자가 동원 한 세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하에 혈지존과 금혈존이 두려워할 자는 아무도 없다. 설사 십혈존이라 해도 경계해야할 적일 뿐, 두려워할 대상은 아니었다. 허나 백이충은 틀 렸다. 그들이 아는 백이충은 진실로 혈존 백가량의 환생이고 혈존 자체 였다. 그들의 두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이충은 홀로 옥룡왕부를 향해 유유히 나아갔다. 문득 옥룡왕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가득 비참한 표정을 지었 다. "모든 것이 그가 행한 일이오. 자금성의 괴진도. 천향군주의 일도. 청류 계와 서유림을 연합시키고 본좌를 따르던 중신들과 황도수비군을 중립으 로 만든 모든 사태의 배후에 그가 있었던 것이오. 우리는 그의 손바닥 안에 노는 손오공이었소." "아아. 독혈존의 실종이... 현황방의 붕괴와 상계의 배신이 모두 그의 안배였군. 변황동맹이 아무 흔적없이 사라진 것 또한. 하기야 천하에 저 자, 진혈존을 제외하고 누가 그런 일을 해내겠는가?" 둘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태의 원흉을 백이충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일은 백이충이 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광혈존이 손을 쓴 것도 만만치 않았 다. 백이충이 진혈존이라 생각했기에 그 모든 일을 백이충이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금혈존은 손과 발이 다 잘린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혈지존 역시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백이충이 나섰 다는 것은 이미 그의 모든 하부세력을 망치고 모든 퇴로를 막고, 끝장을 내기 위해서라고 혈지존은 생각했다. 백이충이 홀로 나선 것은 많은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규모 전투 라면 어쩔 수 없이 수많은 희생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백이충이라면 혼자서 그들 모두를 억누를 수 있다. 피를 보지 않고도 기세만으로 옥룡 왕부의 모든 무사들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광한신공을 사용하 기로 결심한 이상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원흉이라 할수 있는 몇 만을 잡아 모든 것을 종결지으려 마음먹었다. "역도들은 들으라. 나는 서문 장군부의 이자 백이충으로 호황부주이다. 또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황도를 어지럽히는 악적이며 천하공적인 혈지존을 잡으러 왔다. 혈지존은 무림의 공적으로 옥룡왕부에 숨어 천하 를 어지럽히고 황실을 능멸했다. 옥룡왕부는 천하공적을 순순히 내어놓 아라. 그를 편드는 자는 역시 천하공적으로 취급하겠다." 혈지존은 호황부주가 백이충임을 알았다. 또한 이미 그가 황제를 손아귀 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혈지존과 금혈존이 백이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갈등하고 있을 때 옥룡왕부의 무사들 중에 누가 백이충을 비웃었 다. "감히 왕야를 모함하다니. 황제폐하께서는 왕야에게 천하의 일을 맡기셨 거늘 누가 감히 폐하의 명을 거짓 칭한단 말이냐? 누가 함부로 왕부를 침입한단 말이냐?" 옥룡왕부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옥의무사들이었다. 장백신선문의 열 두 장로가 백이충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기세를 잡기위해 백이충에게 호 통친 것이다. 옥룡왕부의 무사들이 옥의무사들을 따라 일제히 백이충에 게 비웃음을 날렸다. "왕야를 모함한 자의 피를 보겠다." 옥룡왕부의 담을 넘어 열 두 명의 옥의무사가 백이충을 덥쳤다. 백이충 의 얼굴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얼핏 보아도 그의 눈앞에 있는 자들만도 옥룡왕부의 무사는 일만이 넘었다. 몸을 숨기는 자들을 합하면 수만이 될듯한 자들의 기세를 단숨에 누르려면 광한신공의 기를 퍼트려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옥룡왕부 모든 무사들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했 다. 백이충은 장백신선문의 장로들의 공격을 옥룡왕부의 무사들이 자신 에게 모든 이목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그가 손을 들자 허공에서 콰앙 하는 폭발음이 들였다. 마치 대포의 화탄 이 터진 듯한 굉음. 그리고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크아아악." 허공에서 열 두 명의 사람이 허무하게 박살났다. 산산조각 혈육이 터져 나가며 분시되자 옥룡왕부 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이라기보다 는 마술 같았다. 왕부 무사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과 동시에 분노의 빛 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동일한 분노의 눈빛으로 백이충을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백이충의 힘에 대한 공포와 동료를 잃은 분노가 기묘하게 섞 어져 버렸다. 백이충은 뜻대로 모든 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음을 느꼈다. 적 어도 옥룡왕부에서 지금의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전투의지만은 좋지 않 다고 생각했다. 수만이라는 숫자가 기세가 오르면 아무리 광한신공이라 도 한꺼번에 모두의 마음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다. (전투를 벌이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게된다. 살생은 좋은 것이 아니다. 처음 생각대로 혈지존과 금혈존 만을 잡아 끝내야 된다.) 백이충은 커다란 혈겁을 막기위해 적의 분노가 최대한 오르기 전에 자신 의 정신을 집중시켰다. 수많은 인간의 의지가 감각에 느껴졌다. 옥룡왕 부에 있는 수많은 생명의 분노와 두려움이 뚜렷한 물체처럼 감각에 잡혔 다. 백이충은 그 의지에 자신의 기운을 조금 흘리기로 했다. 그의 몸에 서 광한신공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오 자 백이충에게 시선을 못박고 있던 옥룡왕부의 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누구도 백이충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허억. 이럴 수가?" 심지어 혈지존마저 잠시 정신이 아득함을 느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새파랗게 질린 금혈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둘이 기세에 눌렸다 함은 적어도 옥룡왕부에 있는 자들 중에 백이충의 기세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백이충이 마치 자신의 집을 들어서듯 옥룡왕부 앞의 정문까지 와도 아무 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정문 앞쪽에 있는 옥룡왕부의 무사들 중에 감 히 백이충의 얼굴을 직접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주춤주춤 물 러섰다. 그들은 꾸중을 듣는 아이들이 부모를 대하듯 백이충에게서 알 수 없는 위엄과 복종심을 느껴 감히 대항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호랑이 를 바로 정면에 마주한 어린 아이의 심정이 비슷할까? "문을 열라." 백이충이 말하자 정문을 사수하던 위사들이 허둥지둥 옥룡왕부의 정문을 열었다. 그들 스스로도 왜 백이충의 말에 따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백이충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할 뿐이 다. 백이충이 옥룡왕부 안으로 단신으로 성큼 들어서는데도 그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마치 길이라도 난 듯 백이충이 향하는 방향으로 옥룡왕부 인파들이 두쪽으로 쫙 갈라졌다. 적을 막는 태도가 아니라 상관을 향해 예를 취하는 듯한 자세였다. "미친 것들. 어이하여 적을 공격하지 않고..." 옥룡왕부의 이총관인 장백신선문주가 일갈을 터트렸다. 그는 일문의 문 주로 문파의 영광을 위해 옥룡왕에게 몸을 의탁한 사람이었다. 문파의 십이 장로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자 분통이 터져 이성을 잃었다. 그 분노 가 본능을 이겼고 백이충에 대한 위압감을 이겨냈다. 그의 뒤로 수십 명 의 옥의 무사들이 다른 왕부 무사들 사이에서 몸을 빼어내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옥의무사는 자력으로는 백이충의 기운에 벗어날 수 없지만 남의 힘을 빌어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경지의 무공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그들 은 장백신선문의 문주의 호통에 힘입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일제히 장백신선문주에게 호응하여 기세를 돋구었다. 장백신선문 문주와 옥의 무사들이 호통으로 기세를 돋구자 백이충에게 눌 려있던 옥룡왕부의 무사들 눈에 투지가 조금 돌아왔다. 장백신선문 문주 의 호탕한 기세가 억눌린 마음을 자극한 것이다. 그만큼 전투에 있어 기 세는 중요한 것이었다. 서로 세력이 비등한 군대의 전투에서 장수들이 일기토로 기세를 올리려는 것은 승세를 타면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단 사기를 잃은 군대가 전투의 패배를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백이충 또한 그것을 잘 알고있기에 자신이 퍼트린 기운의 위압감을 이겨 내고 전투의지를 돋구는 장백신선문 문주에 대해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 러나 옥룡왕부의 무사들의 기세가 올라가 광한신공 마음의 금제가 깨트려 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꿇어라." 백이충이 장백신선문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떤 무형의 강기를 뻗은 것 도 아니고 독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무공의 어떤 수단을 썼다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느낄 정도의 고수들은 많았다. 하지만 단지 백이충은 말을 했을 뿐이다. 장백신선문주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황당한 표정이 떠오르며 서서히 무릎을 땅에 대었다. 자신도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 장백신선문주의 그런 행동을 보는 옥룡왕부의 무사들도 모두 황당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드넓게 백이충이 기운을 퍼트린 것과 장백신 선문주에게 집중해서 기운을 쏟아낸 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장백신선문 주는 감당할 수 없었다. 장백신선문주가 무릎을 땅에 대고 팔을 바닥에 놓아 엎드린 자세를 취했 다. 동시에 그의 뒤에 있던 옥의무사들이 일제히 입에 피를 토해 내었 다. 장백신선문주의 기세에 힘입어 투지를 불러일으켰던 만큼 장백시선 문주를 향한 백이충의 기도에 그가 꺽이자 뒤에 있던 옥의무사들도 그 반 동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동안 느꼈던 것 중에 서 가장 거대한 심적 충격이었다. 그들 옥의무사들은 마치 허수아비처럼 바닥에 널부러지며 땅에 몸을 뉘였 다.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변하고 입에서 꾸역꾸역 죽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도 일어서려 했다. 백이 충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백이충의 명을 이행하고자 무릎을 끓 기위해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오너라." 백이충이 다시 말하자 장백신선문주가 무릎 걸음으로 백이충에게 다가서 기 시작했다. 무릎으로 걷는 자세가 아니라 질질 끄는 자세라 삽시간에 무릎의 천이 찢어지고 피가 맺혔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런 것을 신경쓰 지 못하는 표정으로 홀린 듯 백이충의 앞에 다가와 그에게 부복했다. 신 선문주의 뒤에는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려는 옥의무사들 이 힘이 빠진 손발을 놀려 기어오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복종해라." 대 자연을 굴복시키고 천지조화를 움직이는 광한신공의 기운이다. 장백 신선문주는 백이충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무 인이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굴종의 자세이다. 분함과 복종심의 갈등을 참지못하고 장백신선문주는 끝내 눈물을 흘리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장 백신선문주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있던 옥의무사들도 창백한 안색에 계속 피를 토해내며 천명이라도 받은 듯 꿈틀거려 백이충에게 기어오려고 했다. 그것이 태어난 목적으로 여기는 듯, 장백신선문주처럼 그들도 백 이충의 발아래 엎드려 입을 맞추고자 피를 토해내며 기어오고 있었다. "그만. 이제 쉬어라. 그러나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정신을 잃은 장백신선문주가 백이충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몸이 자유를 찾아 땅에 뒹굴었다. 또한 처절한 자세로 기어오던 옥의무사들도 그제야 안심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단 한마디의 말에 수십의 절정고수들이 노예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이다. 백이충이 발아래 있는 장백신선문주를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던 옥룡왕부 무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떨구어 시선 을 피했다. 장백신선문주와 옥의무사들이 그들의 마음에 투지를 일으키 기 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백이충에게 심령 금제를 당해버렸다. 이미 그 들의 마음에는 금제 같은 복종심이 떠올라 도저히 백이충에게 공격의지를 가질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보던 금혈존과 혈지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과연 아수라독존마공. 장백신선문주의 무공은 본좌와 싸워도 일백 초를 견디거늘 말 한마디로 제압하다니." "틀림없소. 그가 진혈존이오. 그리고 우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아 니라면 그의 노예나 분신 인형이 되어야겠지." 둘이 온 몸을 전율하며 공포에 젖어 있을 때 옥룡왕부의 광장에 있던 백 이충의 시선이 둘이 있는 누각 쪽으로 향했다. 무려 이백 여장의 거리가 있고 게다가 누각의 창가에 숨어서 백이충을 살펴보았는데도 원래 그들이 있는 곳을 아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뜻 백이충이 그들을 바라보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둘이 기겁을 하고 몸을 누각 안쪽으로 숨겼다. 금혈존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이하오? 방법이 없소? 아수라독존마공의 마지막 구결의 약점을 대두 자에게 듣지 못했소?" "확실히 대두자는 구결의 완성보다는 그 구결로 아수라독존마공의 약점 을 찾아내려 했소. 허나 그가 찾아낸 유일한 약점조차 아수라독존마공의 입문 단계로 이성이 없다가 발전되어 이성을 되찾을 때요. 그것은 오랜 계획과 안배 속에서 청마산에서 행하였소. 그 외에 약점은 없소." "그럼...." 금혈존의 얼굴에 드믈게 공포와 좌절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아니고 바 로 백이충이기에, 바로 혈존의 전생이기에 자존광대(自尊廣大)한 금혈존 이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다른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십혈존은 전생 혈존 백가량에 관한 일이라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혈지존 의 얼굴은 묘하게 침착했다. "마혈존을 상대로 써먹으려 했던 것, 마혈존과 천마강시를 상대하기 위 해 팠던 함정, 본좌의 야망이 좌절되었을 때 최후에 써먹으려 했던 것을 사용해야겠소." 그들의 몸이 누각에서 황급히 사라졌다. 어딘가로 도망가려는 듯. 동시 에 누각을 향해 백이충이 손을 들었다. 콰르르릉. 백이충의 간단한 손짓 한번에 이백 장을 격하고 누각 한 채가 허물어졌 다. 마치 손바람을 일으키려는 듯한 동작은 너무 간단해 마치 미리 화약 을 누각 밑에 파묻어 놓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누각은 애초부터 부실누각이었던 듯 그대로 그 자리에 부서져 허물어져버렸다. "쳇. 또 지하 통로인가? 혈지존. 너는 전생이 두더쥐냐?" 백이충은 누각을 살펴보며 투덜거렸다. 한번 슬쩍 보는 것만으로 그는 허물어진 누각 밑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있음을 알았다. 이미 누각이 있던 장소에 혈지존과 금혈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산책이라 도 하듯 천천히 허물어진 누각을 향해 걸어갔다. 옥룡왕부의 무사들은 마치 석상처럼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허물어진 누각의 잔재 앞에서 백이충이 비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저 었다. 평소와 달리 백이충은 진혈존의 출현에 평상심을 잃은 상태였으며 또한 혈지존이 주소련을 납치했다는데 분노하여 무공을 펼치는 것을 억누 르려던 자제심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었 다. 누각의 중심이 한 순간 먼지로 화해 스러졌으며 그 속에서 지하를 향한 뻥 뚫인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두운 구멍은 통로라기 보 다는 바닥없이 지옥까지 뚫린 듯한 커다란 동혈이었다. "흥. 혈지존 백나안. 기껏 도망간 곳이 여기냐? 백이충은 마치 무인지경에 드나들 듯 거침없이 누각이 있던 자리의 어두 운 지하 동혈로 몸을 날렸다. 백이충이 지하통로로 짐작되는 동혈 속으 로 사라져도 옥룡왕부의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커다란 심신의 충격을 받은 듯 백치처럼, 혹은 얼음동상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누각이 부서진 자리에 나타난 동혈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미 그 들은 심령상 백이충의 금제를 단단히 받은 상태였다. 그들의 마음이 커다란 타격을 입고 인형처럼 서있을 때 백도의 고수들이 왕부를 덮쳤다. 백도고수들은 큰 소리로 항복을 권하며 한꺼번에 덮쳐 옥룡왕부 무사들의 혈도를 짚었다. 반항할 마음의 기력마저 잃어버렸는 지 옥룡왕부 무사들의 허수아비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그 덕에 옥룡왕부 는 무혈로 신속하게 백도무사들에게 제압당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오. 지존의 기세가 수만의 무사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라 니." "이미 인간이 아니오. 혼자서 옥룡왕부에 들겠다고 했을 때 무슨 짓인가 싶어 놀랐지만 이제보니 과연 그럴만 하다 싶소." "천하에 백도지존을 해할 자가 그 누가 있겠소? 혈지존이라 해도 지존의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이오." 백도와 신비삼패의 수뇌들이 동혈의 앞에 모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직접 눈으로 보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장비가 장판교에 서 단신으로 백만대군을 막았다지만 백이충은 단신으로 수만 무사들을 두 려움에 떨게 했다. "우리가 할 일이 없구려. 거의 다 제압된 자들을 포박하는 정도라니." "지존이 지하동굴로 들어갔으니 곧 혈지존과 금혈존을 잡아오겠지요. 우 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무림과 황실의 암운이 오늘에야 걷히겠구 려." 그르르릉.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옥룡왕부가 거의 장악되었을 때 갑자기 동혈에 서 무엇인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던 소리는 점차 커지기 시작 했고 종리연, 모용풍 등의 고수들 귀에 먼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작을 멈추었고 귀를 기울여 동혈 쪽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 제... 폭... 내가... 막... 피..... - 지하 통로 깊숙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 통로의 사방으로 소리가 울리고 퍼져 번지는 소리라 뚜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벽에 소리가 반사 되어 메아리까져 쳐졌다. 적어도 수천 장의 거리에서 누군가 외친 소리 였다. 그 소리가 지상까지 울려 퍼졌다는 것은 소리를 지른 자의 음공 화후가 얼마나 고강한지 알 수 있었다. 좀 더 귀를 기울이던 종리연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 제길. 함정이다. 수십만 근의 화약이다. 폭팔한다. 내가 최대한 막아 볼테니 그 위에 있는 자들은 어서 피해라. -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이런 뜻이었다. 종리연과 모용풍의 안색이 바뀌었고 거의 비슷한 시각에 종사급 인물들이 그 소리를 판별해 내었다. "피해라. 옥룡왕부가 폭발한다." "혈지존이 옥룡왕부의 밑에 화약을 뭍어놨다. 어서 피해라." 백도고수들이 일제히 제압한 옥룡왕부의 무사들을 옆구리에 끼고 옥룡왕 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들판에서 놀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메뚜기 떼와 같았다. 앞도 없고 뒤도 없었다. 거의 모두가 자신의 신법 을 최대한 동원하여 옥룡왕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그 순간이었다. 백도고수들의 삼분지 이가 벗어나고 미처 삼분지 일이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옥룡왕부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거렸 다. 그리고 불길이 쏟아지며 대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열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에 휩쓸린 자들은 비명도 못지 르고 재가 되었다. 사방이 비명과 신음으로 얼룩졌다. 만 명이상의 사상 자가 생겼다. 인세에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졌다. "제길. 혈지존. 지독한 놈." 수십 만근의 폭발이 일어나는 불길 속에서도 살아 투덜거리는 남자가 있 었다. 물론 그는 바로 백이충이었다. 폭발의 열기. 치솟는 불길. 무너지 는 땅덩어리. 폭발과 불길과 생매장이 겹겹으로 덥치는 와중에도 백이충 은 손톱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용암 속에 들어가 헤엄쳐도 죽지않을 불 사지체를 이룬 자가 바로 백이충이었다. 폭발로 죽을 리가 없었다. 백이충의 얼굴에는 온통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천지자연을 부리는 지선에 가까운 존재가 그까짓 폭팔에...하는 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아 무리 백이충이라도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육체를 가지 고 있는 한 완전한 신선은 아닌 것이다. 또한 육체와 정신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선계에 들기전에 육체가 큰 타격을 입으면 깨달음을 얻은 정신 도 죽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백이충의 깨달음의 경지로 보면 정신이 육체를 한없이 초과한 상태 였다. 그리고 선도를 수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육체란 거추장스런 짐이며 껍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육체를 벗고 선계로 올라 신선이 되고 자 하는 것이 아닌가? 백이충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그 짐을 벗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 찌보면 이번 폭팔도 하늘이 주는 기회, 껍질을 버리도록 하늘이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나 육체를 벗어 던지는 날이 광한신공을 대성 하여 바로 속세의 인연과 작별하는 날이라 생각하면 백이충으로서는 오히 려 악착스레 껍질을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런 껍질이며 짐인 육체를 상처하나 없이 보호하자니 그도 약간의 힘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폭발의 위력이 상상밖으로 컸다. 얼핏 백이충이 목격한 화약통만 도 수십만 근은 될 듯 하니 얼마나 지하에 파묻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 다. 이대로라면 지상의 옥룡왕부뿐만 아니라 그 주변마저 초토화될게 뻔 했다. 아무리 북경 외곽이라지만 그래도 황도였다.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이었다. 백도맹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그의 기운을 퍼트려 폭발의 힘을 막았다. 몸 하나 보호하자면 힘들 일도 없겠지만 폭 발의 위력을 강각막으로 겹겹이 막아내는 데에는 그도 힘이 들 수밖에 없 었다. 벽력탄 만 개가 한꺼번에 터지는 위력을 바로 지척에서 막았지만 다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폭발의 기운이 반 정도 새어나갔는데 그것만으로 주변 지형이 다 무너져 버렸다. "크윽. 힘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백이충은 주변에 숨쉴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내 놓고 드러누워 헐떡 거렸 다. 이래저래 육체도 피곤했지만 지금 광한신공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 다. 아무리 대폭발이었다지만 물론 세속의 폭발을 막기 위해 힘을 썼다 고 백이충의 광한신공과 정신력이 고갈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선이 되지 않기 위해 심력을 모조리 소모했던 것이다. "설마 천시가 또 다시 열리다니... 그건 분명 천시가 열리는 것 같은 느 낌이었어." 심력의 고갈로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정신이 아무리 드넓은 경 지를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인 이상 육체 가 극도로 피곤한데다 정신까지 약해지면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휴식 을 취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백이충이 서서히 일어났다. 몸에 상처는 없었으나 마음이 극히 피곤했다. "쳇, 육체가 덧없다 여겨지자 바로 하늘의 문이 열리다니. 하마터면 능 력을 모두 발휘하느라고 덧없는 육체를 벗어 던질 뻔 했다. 마지막에 육 체에 연연하느라 더 피곤했지만 그래도 속세에 몸을 붙들어 매었으니 얼 마나 다행인가?" 선계에 들 수 있는 천고의 기회를 내던지고 백이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사실 광한신공이 언제 완성될까 전전긍긍해서 애써 누르려고 하는 백이충이지만 육체를 벗어던지고 완전히 선계에 드는 것은 연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용이 여의주를 완성하고도 때를 만나야 비를 타고 승천하는 것처럼 하늘에 오르는 일은 반드시 천시(天時)가 필요했 다. 광한신공의 완성과 등선하는 일은 인간의 힘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하늘이 정한 시기, 천시(天時)와 인간의 노력과 연분(緣 分)이 모두 맞아야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비록 백이충이 지선(地仙)에 가까운 존재라고 해도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 봤자 광한신공을 완성하지 못해 천선(天仙)으로서 선계에 들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백이충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리 겁을 먹고 광 한신공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흑련에서 신비삼패를 눌러 광한신공의 모 든 내용을 해석해 내었을 때 하마터면 광한신공을 완성하여 천선이 될 뻔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각자(깨달은 자)가 심득을 얻었을 때 하늘은 그 문을 열어준다. 보통 그때에 천시와 등선의 연분과 인간의 노력이 모두 절묘하게 맞물린다. 백이충이 자칫 그 순간 스스로 속세의 인연이라는 심마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선계에 가 있을 터였다. 한번 잃어버린 천시는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고도 평생 지선으로 머무는 자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백이충은 그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스스로 광한신공 을 생각하지 않고 버리려고 노력했는데 그것 자체가 속세에 연연하지 않 는 광한신공의 요지에 부합되어 여러 번의 등선 위협(?)을 느꼈다. 천 시는 닿지 않았지만 오히려 버리려고 하기에 더욱 더 광한신공의 완성이 라는 연분이 자주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지금 폭발이라는 위험속에 또 한번 광한신공이 완성될 뻔했다. 그렇다는 것은 등선 할 문이 열리는 천 시(天時)의 위험(?)을 이번에도 백이충이 가까스로 어렵게 넘겼다는 것 이다. 가까스로 다시 육체에 미련을 잡아 광한신공을 완성할 기회를 저버리고 등선할 문을 차버린 것은 좋았다. 그런데 찾아오지 않아도 좋을 그 등선 의 기회가 하필 대폭발 때 일어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완성 일보직전 에서 진기의 역류를 무릅쓰고 백이충은 온 심력을 다해 광한신공의 완성 을 막았다. 육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폭발을 막기에도 힘든데 광한신공을 억지로 역류시켰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육체가 무사하고 심력 만 고갈된 것은 하늘이 돌보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이루어지 려는 광한신공을 억지로 막았기에 광한신공의 힘이 약해지고 전신이 극도 로 지쳐버린 것이다. "그보다 이 뒤에서 소련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백이충이 사력을 다해 폭발의 여세를 막은 또 하나의 이유. 그것은 바로 그의 뒤의 통로,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 석실이 있던 곳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그 기운 중에 주소련 의 기운도 있었다. 약간의 힘을 되찾은 백이충이 정면을 주시했고 보이 지 않는 거인이 길을 치우듯 주변 흙이 밀려나며 통로가 생겼다. 백이충이 걸어가면 그의 앞에 저절로 흙과 돌이 밀려나며 땅 속에 길이 생겼다. 그 사이로 허물어진 기관의 잔재인 철조각과 통로와 석실을 구 성했던 돌조각들이 무수히 발견되고 그 사이에 어육이 된 고깃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백이충의 보호를 미처 받지 못하고 폭발에 휩쓸려 죽은 희생자들의 잔재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문이 보였다. "다행이군. 그래도 소련의 기척이 느껴지던 공간만은 제대로 보호한 듯 하니. 석실은 무사한 것 같구나." 백이충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두 사람이 반쯤 허물어진 석실안 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이곳 통로 중에 가장 깊숙이 있었던 중지이다. 혈지존이 가장 비밀스럽게 보관하던 죄수일 것이다. 과연 하나는 그가 찾던 주소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년 남자였다. 백이충은 이 남자의 얼 굴을 알고 있었다. 약간 놀랐다. "설마 혈지존이 여기서 자신이 만든 함정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닐 테 고... 진짜 옥룡왕인가?" 백이충은 혈지존이 진짜 옥룡왕을 살려두었다는 것에 조금 놀라워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남자가 진짜 옥룡왕이라면 혈지존의 반역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옥룡왕이 나선다면 황실의 왕야를 따르던 자들 은 모두 혈지존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무림인 혈지존을 개인적으로 따 르는 세력은 소수일 테니까 그의 대부분의 세력, 모든 관부의 중신과 군 대가 혈지존에게 등을 돌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뜻밖의 일이지만 정말 잘된 일이군. 이로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천하 가 어지러워지거나 내란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어. 하기야 중요 한 인물이었던 만큼 살려두었다면 자신이 있는 곳 가까이에 두었겠지." 혈지존의 입장에서는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애써 키 운 옥룡왕부의 세력은 지금의 폭발로 죽거나 백도맹에 제압당했을 것이고 거기에 진짜 옥룡왕이 출현한다면 말 그대로 홀홀단신이 되어버리는 것이 다. 게다가 백이충도 죽지않고 멀쩡히 살아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혈지존은 천리 밖으로 도망가려 할 것이다. 불쌍하게 혼자된 혈지존. 마 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은 금혈존과 둘이라고 해야하나? 정신을 잃은 주소련과 옥룡왕을 백이충이 살펴보았다. 폭발의 화염과 지 하석실의 함몰은 막았으나 폭팔의 여력에 의한 충격파는 완전히 막지 못 한 모양이다. 하기는 폭발이 너무 그들 가까이서 일어났다. 귀에 피를 흘리고 얼굴도 창백했으며 입에서 검은 피가 홍건히 묻어있었다. 숨만 붙어있는 시체가 바로 지금 둘의 모습이었다. 백이충은 그들을 살펴보고 한 숨을 쉬었다. 둘 다 내장이 제자리를 벗어 나고 기혈이 엉켜버렸다. 이대로 놔두면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죽으리 라.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들을 옮긴다면 흔들리는 충격에 바로 즉사하 리라. 백이충은 몸에 치료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스스로 다치지 않 을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 이둘을 치료할 어떤 수단도 없었다. "하는 수가 없나? 내 본원진력(本元眞力)으로 치료하는 수밖에." 다행히 백이충의 진기는 도가의 청정한 기운이다. 그리고 본원진력은 천 지를 다스리는 광한신공의 근본이다. 이를 이 둘의 치료도구로 사용한다 면 생명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무한한 복이 되리라. 다만 지 금 백이충에게 약간 안좋은 상황은 그의 몸이 많이 지쳐있다는 것. 그리 고 그것을 보충해줄 정신력 또한 거의 고갈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것 역시 곤란한 상황이기는 하나 어렵거나 힘든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지친 상 태로 지내면 되니까. [20548] [연재] 혈존무적-광한신공대아수라독존마공 첨부파일 : 등록자: 김하준(khj1234) 조회수: 292 등록일: 2003-05-21 01:41:31 본문크기: 36268 bytes <광한신공대 아수라독존마공> "죽지 않았다." 금혈존이 고개를 저으며 혈지존에게 말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기운, 어 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영혼으로 느끼는 진혈존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 다. 숨막히는 듯한 불안감도 그대로였다. 백이충을 진혈존으로 알고있는 금혈존은 진혈존의 기운을 느끼고 백이충이 살아있다고 착각했다. 엉뚱 한 오해지만 백이충이 살아있으니 금혈존의 착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그럴 리가? 인간으로서 어찌 수십 만근의 화약이 터졌는데 그 한 가운데서 살아난단 말이오?" "그러니까 아수라독존마공을 이룩한 진혈존이지." 혈지존이 놀란 얼굴을 하자 금혈존이 투덜거렸다. 말을 하는 금혈존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옥룡왕부의 모든 것을 희생시켰는데도 결국 백이충 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소득은 없고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혈지존은 현재 북경에서 떨어진 비밀 거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만일 을 위해 혈지존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로 교활한 여우는 굴이 세 개 가 있다는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금혈존과 혈지존은 지하 비밀통로를 통해 옥룡왕부를 폭파시키고 몸을 피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혈지존이 심복만을 골라 맡겨놓은 곳이었다. 이곳에 그 에게 남아있는 모든 천마강시가 있었다. 그나마 옥룡왕부에서 많이 희생 되고 오십 정도 남았을 뿐이다. 혈지존이 머무는 곳은 북경에서 조금 떨 어진 심산의 조그만 산채였다. 총인원 삼백의 별 볼일 없는 삼류 산적의 산채로 알려진 곳이 설마 혈지존의 최후 비밀 거처일 줄이야. 둘 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혈 지존은 백이충만 없다면 지금이라도 북경에서 옥룡왕 행세를 할 수 있고 금혈존은 백이충만 없으면 다시 상계를 틀어쥘 자신이 있었지만 백이충이 살아있다면 살아서는 북경에 몸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뜨이는 순간이 바로 혈지존이나 금혈존이 끝장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둘 다 암담한 미래에 한동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오. 그 폭발 속에서 인간으로 무사하다면 말이 안되지. 우리가 재기할 기회가 있다면 지금 뿐일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진혈존의 영혼의 기운은 아무 손 상도 입지 않았소. 분명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확실하오." 혈지존이 미련이 남는 듯 희망을 담아 말을 꺼냈다. 이제 와서 모든 것 을 포기하기에는 그 동안 들인 공이 아까웠다. 옥룡왕이 백이충에게 구 해졌음을 모르는 혈지존은 천향군주마저 폭발 속에 소멸했다고 생각했기 에 옥룡왕의 신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백이충이 있는 이상 북경에 멀쩡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반면 금혈존은 혈지존과 달 리 현 사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방법은 하나 뿐이오. 살아남은 십혈존들의 연합. 진혈존은 혈존들에게 위협일 터이니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하오." "허나 어떻게 십혈존을 규합한단 말이오? 그리고 이제 보니 십혈존은 스 스로 혈존이라 자처하지만 진혈존의 술수에 의해 혈존이라 착각하는 분신 에 불과한 것 같소. 꼭두가시가 그자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단 말이오. 그들을 규합한다고 해서 혈존을 당할 수 있겠소?" "뭐라고? 감히 본좌를 모욕한단 말이냐? 비록 진혈존이 나타났다해도 본 좌 역시 혈존이다. 혈존의 영혼이 본좌에 있음은 진실이다." 금혈존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혈지존을 노려보았다. 금혈존을 보자 혈 지존은 금혈존의 무공이 생각났다. 그가 진짜 혈존의 환생중의 하나인 지, 혹은 혈존의 술수에 의해 만들어진 분신이 착각하는 것인지 모르지 만 그의 무공은 진짜였다. 혈지존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공. 혈존의 화신 이라고 자처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일단 하나의 손이라도 필 요한 이상 일부러 금혈존과 등을 돌릴 필요는 없었다. "답답한 김에 실수를 한 듯 하오. 진혈존을 보자 이성을 잃은 모양이 오." "흥. 나도 화를 내어 미안하다. 허나 너도 내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 다. 의심은 버려라. 본좌는 진정 혈존의 화신이니." 혈지존의 사과에 금혈존도 노한 기색을 풀었다. 그 역시 혈지존의 존재 가 아주 필요한 상태였다. 오히려 혈지존보다는 금혈존이 더 다급한 상 황일 것이다. 진혈존이라면 어떠한 상태로든 다른 십혈존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혈존을 규합하는 일은 내게 맏기시오. 혈존대회의 소문이 퍼졌다면 혈존들이 북경 근처로 왔을 터이고, 그들이 기척을 일부러 지우지 않았 다면 그들의 기운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들 모두가 진혈존의 기척을 느꼈을 터이니 서로가 손을 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 리라 생각되오." "그렇게 해주시오. 나도 사람을 풀어 북경의 상태와 진혈존의 정보를 모 아 보겠소." 그날부터 십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혈지존이 조심스럽게 정보를 긁어모 은 바에 의하면 옥룡왕부의 폭발로 죽은 사람이 거의 일만오천 가까이 된 다고 했다. 엄청난 대폭발에 불구하고 사실 피해는 적은 셈이었다. 그 날 모여있던 사만 정도의 고수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고 혈지존은 예상했 기 때문이다. 옥룡왕부는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지금 호황부라고 자처하는 자들 과 백도맹 고수들의 지휘아래 그 폐허를 파해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 이유는 지하에 함몰된 호황부주를 구하기 위함인데 아직도 그가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혈지존은 혹시 백이충이 죽지나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가 졌지만 금혈존이 워낙 완강히 부인하는 통에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영혼끼리 연결되어 있는 금혈존은 지금 진혈존이 확실히 살아있으 며 자신의 기운을 숨기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둘다 얼굴을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리지리 다녀 봤지만 별 성과가 없는 것이다. "다른 혈존들의 행방도 모르고. 진혈존의 행방도 모르니. 혹시 그가 우 리를 이미 발견한 것이 아니오?" "진혈존은 정말 무서운 자이다. 그 기운을 내뿜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종 적을 완전히 숨기고 있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 피할 수도 없다." 금혈존이 고개를 저으며 진혈존의 두려움을 말했다. 금혈존은 진혈존이 자신들의 종적을 이미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자신과 혈지존을 그냥 내버려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운을 숨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미 마신의 경지에 이른 진혈 존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찾지 못할 리가 없으니 기운을 숨기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다른 혈존들을 찾기 위해 자신이 가진 혈존의 기 운을 숨기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금혈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역시 기운을 숨기지 않는 어떤 자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거울 속의 자신처럼 친숙하기 에 오히려 증오스런 기운. 진혈존의 기운은 아니었다. 또 다른 혈존이 금혈존을 찾아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마구 혈존의 영혼을 드러내며 돌아다닌 보람이 있군. 누군가 오고 있 소." 금혈존은 같은 백가량의 영혼을 느끼고 말했지만 잠시 후에는 혈지존도 자신의 비밀 거처로 다가오는 자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산채 를 나서자 저 멀리 수천명이 포위하듯 산채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그들이 백도의 고수가 아니라 마도고수임 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앞장서서 다가오는 자들은 혈지존도 잘 아는 자 들이었다. 바로 혈지존의 사제들. 천마황, 혈사황, 그리고 철마황, 살아 남은 삼마황이었다. 혈지존과 금혈존이 앞으로 나서자 삼마황도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금혈 존은 삼마황을 바라보기보다는 저 뒤에서 마도고수들 속에 숨어있는 자를 지켜보았다. 그에게서 혈존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서 오시오. 여기 혈지존과 금혈존이 있소. 오신 분은 누구요?" 상황을 살펴보고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패혈존이 앞으로 나섰 다. 그는 잠시 복잡한 눈으로 금혈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함정은 아닌 것 같군. 기운을 숨기지 않고 펑펑 퍼트리며 다니기에 의 심했거늘. 본좌는 패혈존이다. 또 다른 나여." 패혈존의 뒤를 이어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이 혈지존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사형. 청마산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 졌습니다." "모두 오랜만이다. 자, 이럴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냐? 우 리는 패혈존과 너희들을 몹시 기다렸다." 금혈존과 혈지존의 입장에서는 이미 다른 혈존과 손을 잡은 일이 있어 패 혈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패혈존도 진혈존 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혈지존과 금혈 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천년마교의 반도들과 패혈존, 그리고 삼마황이 산채로 들어갈 때 그 모 든 것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자신의 기운을 완전히 감추고 있는 자. 바로 뇌혈존이었다. 콰르르릉. 옥룡왕부의 폐허 한곳이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며 무수한 돌덩어리와 흙이 지상으로 솟구쳤다. 폐허를 정리하던 백도고수들이 놀란 눈으로 그곳을 쳐다볼 때 그 안에서 두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백이충이 솟구쳐 올라왔 다. "지존. 무사하셨군요." 백도맹 고수들과 환우비령, 승룡곡, 신비삼패의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 다. 하지만 백이충의 눈을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지상의 맑은 공기를 느끼는 순간 영혼에 강하게 와 닿는 느낌이 백이충의 전 신경을 빼앗아 버렸다. "느껴진다. 자신의 기운을 숨김없이 뿜어대고 있다. 나를 부르고 있다. 진혈존. 그자가 저기에 있다." 백이충이 바라보는 곳은 바로 혈지존이 숨어있는 방향이었다. 그곳에서 진혈존의 기운이 느껴졌다. 영혼에서 느껴지는 짙은 본질감. 지하에 있 을 때는 모르겠더니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자 신의 전생의 일부였다가 전생 자체로서 되살아난 악몽이 저기 저곳에서 백이충을 기다리는 것이다. 백이충의 몸은 아무 이상 없었지만 그의 정신은 몹시 피폐해진 상태였 다. 광한신공이 역류한 직후 죽기 일보직전의 두 사람을 본신의 원정진 기(原情眞氣)를 뽑아내어 살렸으니 백이충이라 해도 피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백이충은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동안 몸 을 숨겼던 진혈존이 이토록이나 확실하게 자신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오늘 그를 잡지 않으면 또 언제 그를 잡는단 말인가? "지존. 어이하여 말씀이 없으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미 옥룡왕은 도망가고 북경은 평화로워졌습니다. 아 니? 데리고 나온 그 분들은 누구십니까?" "종리맹주. 이들은 천향군주와 진짜 옥룡왕이요. 혈지존의 손에서 구했 습니다. 진짜 옥룡왕이 나타난 이상 이제 혈지존은 더 이상 역모를 꾸밀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백이충이 무성 종리연에게 주소련과 진짜 옥룡왕을 건네주었다. 이미 역 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진혈존을 막지 못한다면,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혀 마신이 된 자를 막지 못한다면 천하가 인세지옥이 되리라. "그 기운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제 나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광한신공을 막을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아수라독존마공은 속성의 마공. 청마산에서 혈존일 때의 백이충은 입문 에 들자마자 한 시진 이내에 일성에서 이성의 성취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혈지존에게 당했다. 이미 이성을 성취한 상태의 진혈존에게 벌 써 열흘이나 흘렀으니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백이충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 았다. "우우우우." 백이충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아무 말 없이 사자후를 터트리며 몸 을 뽑아 공중으로 날렸다. 진혈존과의 싸움에서는 아무리 많은 고수들이 몰려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진혈존과 백이충, 둘만의 결전 인 것이다. 경악과 의문의 소리를 발하는 백도고수들을 뒤로하고 백이충은 몸을 날렸 다. 바로 진혈존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저 소리는?" 산 전체를 울리는 장소 소리에 금혈존과 패혈존이 몸을 떨었다. 혈지존 과 삼마황도 눈빛을 빛냈다. "그로군. 진혈존. 어떻게 영혼이 분리되고도 되살아났는지 모르지만 청 마산의 혈존이 다시 되살아 나 우리를 찾는 것이다." 금혈존이 말했고 혈지존은 아직도 옥룡왕부의 대폭발에서 살아난 백이충 을 믿지 못하겠는지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나섰다. 삼마황이 그를 뒤따 랐다. 금혈존도 그들의 뒤를 따르려는 것을 패혈존이 막았다. "잠깐만. 그들을 그냥 놔두자고." "무슨 소리야? 진혈존을 상대하자면 우리가 모두 나서도 승산이 별로 없 거늘. 우리만 뒤로 빠지자고?" "지금 나타난 자는 우리의 전생인 혈존의 원신이기는 해도 진혈존이 아 니다." "그래. 그러니까... 뭐라고?" "진혈존이었다면 지금의 너처럼 반항할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가 우리 십혈존이 탄생하기 전의 영혼의 소유자인 것도 사실이고 진혈존만큼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영혼 의 색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허나 진혈존은 아니다. 진혈 존이었다면 우리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무슨 소리냐? 백이충이야말로 혈존 백가량이 되살아났던 존재이고 우리 가 가지게된 혈존 영혼의 근본이다. 그런데 그가 진혈존이 아니라고? 그 가 진혈존이 아니라면 누가 아수라독존마공을 회복하여 진혈존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금혈존이 놀라 소리치자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지저에서 울리는 듯한 음산한 소리였다. "궁금한가? 진혈존은 바로 나다." 어느새 혈지존과 삼마황이 사라진 방 안에는 두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스며들었을까? 어떻게 저렇듯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그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와 같았고 오히려 금혈존 이 침입자처럼 경악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금혈존이 그 둘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금혈존이 그 둘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저 절로 크게 입을 벌였다. 저 모습은... "진혈존? 백가량?" 나타난 자는 혈발, 혈염, 혈미를 가진 남자. 바로 혈존 백가량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자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금혈존은 심장이 정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완벽한 혈존이었다. 진짜 혈존이었다. 금혈존 은 그의 일부였다. 그의 손발과 같은 일부였다. 그의 신체이고 그의 육 체였다. "크으윽." "복종하라. 너희는 나의 일부. 나는 진혈존이나 너희 또한 혈존. 다른 것은 나는 전체이고 너희는 일부일 뿐이다. 복종하라. 혈존의 일부로 태 어났으니 혈존의 뜻에 복종하라." 어느새 패혈존은 진혈존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복종했다는 뜻. 그렇다면 삼마황 또한 진혈존에게 복종했던 것일까? 진 혈존의 뒤에는 또다른 혈존, 뇌혈존이 역시 그의 그림자도 되는 듯 공손 히 뒤에서 시립하고 있었다. "결정하라. 이대로 소멸하여 내게 흡수되든지, 아니면 내 일부가 되어 손발처럼 움직이든지. 솔직히 이미 완성된 나에게는 더 이상의 다른 혈 존의 영혼은 필요 없다. 허나 내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내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내버려 둘 정도로 자비롭지도 않다." 진혈존은 그 어떤 압력도 금혈존에게 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 다. 금혈존은 스스로 혈존을 자처하는 자. 완벽한 혈존의 앞에서 자신이 그의 일부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였다. 영혼의 무게에 짖눌려 그는 감 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그제야 금혈존은 패혈존이 말한 뜻을 알았 다. 진혈존 앞에서는 반항할 생각조차 못한다는 사실. 그것은 패혈존이 직접 겪었었던 경험담이었던 것이다. "복... 복종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니..." 기어이 금혈존이 진혈존 앞에 무릅을 끓고 말았다. 그러함에도 아무런 저항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처럼 진혈존 에게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금혈존은 진실로 자신이 착각했 음을 느꼈다. 만약 백이충이 진혈존이었다면 옥룡왕부에서 이미 금혈존 은 달아날 생각조차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 굴복의 태도를 취했을 것이 다. 금혈존이 진혈존에게 굴복하자 진혈존은 더 이상 금혈존에게 신경쓰지 않 았다. 금혈존, 패혈존, 뇌혈존은 공손하게 진혈존의 뒤에 시립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혈존은 백이충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기가 약해졌다. 과연 삼마황이 그의 능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측정하 는 도구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하지 못한다면 삼혈존 을 시키는 수밖에. 이길 자신이 있을 때만 그의 앞에 내가 나선다." 진혈존이 백이충의 기운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진혈존. 그는 더 이상 광 혈존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혈존 백가량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생체 였던 백이충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를 없앨 필승의 자신이 없는 한 나서 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오너라. 나의 일부여. 너희들에게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을 나누어주마." 진혈존이 금혈존을 불러 그들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금혈존의 영혼과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맥없이 진혈존에게 빨려들었다. 그 순간 진혈존 의 아수라독존마공이 또 다시 증진되었다. 거의 완성에 가까운 상태로. 그리고 금혈존이 껍질만 남으려는 순간 진혈존의 손에서 다시 아수라독존 마공의 기운이 금혈존에게 흘러들었다. 금혈존은 되살아났다. 오히려 더 욱 강한 힘과 아수라독존마공의 진력(眞力)을 가지고. 진혈존의 뒤에서 두 혈존이 묵묵히 시립하여 진혈존과 금혈존을 바라보았 다. 둘은 비밀리에 이미 진혈존에게 금혈존이 당하는 지금의 일을 경험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힘을 얻었다. 대신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진혈존에게 속박당하고 말았다. 이제 금혈존도 마찬가지 로 진혈존의 노예가 될 것이다. 물론 진혈존이 그들의 영혼을 흡수하고 다시 되돌려 줌으로서 수 개월에 해당하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진보를 순식 간에 이루었음은 당연했다. 혈지존은 백이충의 모습을 보고 눈에 절망의 빛을 띠었지만 결코 포기하 지는 않았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고 산채에서 오십 여명의 인영이 그를 뒤따랐다. 혈지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천마강시였다.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 등도 서로의 눈을 마주치더니 바로 혈지존을 뒤따라 백이충을 덮 쳐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비장한 안색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은 이번 혈존 을 청마산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다. 백이충은 혈지존과 삼마황이 덮쳐오자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진혈 존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해야 할 자 는 진혈존이었다. 그가 최우선이었다. "물러서라. 너희들을 상대할 때가 아니다. 너희를 잡으려고 온 것이 아 니다." 백이충의 호통에 혈지존과 삼마황이 움찔 거렸다. 그러나 오십여구의 천 마강시는 아니었다. 그들은 마음이 없는 강시. 혈지존의 뜻에 따라 그대 로 백이충을 덮쳐왔다. 백이충은 그들이 천마강시임을 알고 손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했다. "마물들.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은 즉시 멸하라." 백이충이 말했다. 말 속에 힘이 있고 기세가 있었다. 앞 쪽에서 백이충 에게 근접했던 천마강시 열 구가 멈칫했다. 그들을 향해 백이충이 주먹 을 내지르는 시늉을 했다. 천마강시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 고 잠시후 허공에서 먼지가 되어 스르르 흩어졌다. 천하의 어떤 마공으 로도 손상시킬 수 없다는 천마강시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 다. 하지만 뒤의 천마강시들은 아니었다. 먼지로 허물어진 천마강시 뒤 를 이어 나머지 천마강시들이 백이충을 덮쳐왔다. 놀란 것은 백이충이었다. 천마강시는 너무도 위험한 마물이었다. 그러기 에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릴 굳은 결심을 했다. 피곤한 가운데 광한신공 의 기운을 끌어올려 발산시켰다. 그런데도 지척에 다다른 열 구의 천마 강시만을 처단한 것이다. 내심 천마강시의 약점을 공략하여 단 일격에 모조리 재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내가 천마강시를 얕보았던가? 그래도 강시의 최고봉이거늘. 그래. 혈지 존이 천마강시의 약점을 보완했구나. 금혈존이 도운 것인가?" 백이충이 허공에서 허리를 튕겼다. 그의 몸이 쭈욱 뒤로 밀렸고 지척에 이르렀던 천마강시들과 거리가 벌어졌다. 어느 순간 백이충은 몸을 멈추 고 손을 쭉 뻗었다가 몸 쪽으로 끌어당기는 동작을 했다. 동시에 열 명 의 천마강시가 허무하게 스러졌음에도 굴하지 않고 공격해 들어오는 사십 의 천마강시가 주루륵 백이충의 손짓에 따라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확실히 모든 천마강시가 백이충의 내력에 반항하지 못했다. "합!" 백이충이 강한 호통을 입으로 뱉어내었다. 백이충이 허공을 움켜쥐는 시 늉을 했고 허공에서 회오리가 생기며 강력한 압력이 천마강시들을 쓸어갔 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오무라져 천마강시들을 으스러트리려는 듯 압력이 밀려들어왔다. "카아아." 호통소리와 동시에 천마강시들이 압력에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 다. 덮쳐오던 기세가 무색하게 천마강시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퍼져 도망가려했다. 끝까지 백이충 방향으로 향하던 열 정도의 천마강시가 멈 칫하더니 역시 스르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삼십의 천 마강시가 압력을 뚫고 도망갔다. 그들은 분노에 찬 것처럼 지척에서 손 을 뻗어 백이충을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역시. 광한신공의 힘이 약해진 것인가? 내가 지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가? 본능적으로 힘을 쓰는 무리한 공격을 내가 피했던가?" 천마강시가 강한 것은 안다. 중단전의 무공으로도 쉽사리 없애기 어려운 것이 바로 천마강시였다. 허나 백이충에게는 수수깡이나 허수아비와 다 름없었다. 그런데 백이충의 예상과 달리 두 번이나 손을 쓰고도 천마강 시들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다. 지켜보는 삼마황은 일격에 십여구씩 천 마강시를 없애는 백이충의 능력에 경악했지만 백이충 역시 내심 자신의 힘이 약해졌음에 놀라고 있었다. (상관없다. 천마강시와 삼마황들을 물리칠 정도의 힘은 충분하다. 하지 만 진혈존을 만나기 전까지 최대한 힘을 아껴둬야 한다. 이번 광한신공 의 일격으로 천마강시들을 전멸시킨다.) 삼십여 갈래의 엄청난 장력이 백이충이 있는 곳을 휩쓰는 가운데 백이충 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천리신보기. 공간을 격하고 그의 모습이 살아남 은 삼십 천마강시의 머리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백이충이 두 다리를 쭉 뻗자 막대한 경력이 그의 발 아래 형성되었다. 주변 공기가 백만 근의 압력이 되어 천마강시를 내리눌렀다. "단 한번. 전력을 다해 단숨에 모두 없애버리겠다." "크어어억." 천마강시가 포효를 내지르며 두 손을 위로 뻗었다. 그들의 손에서도 막 강한 경력이 뻗어나왔다. 간단히 눌려 죽이려던 백이충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그의 두 다리가 재빨리 교대로 움직였다. 허공을 격하고 발을 여러번 후려찼고 압력이 수배로 증폭되어 천마강시들을 내리 눌렀다. "제길. 강시 따위에. 다시 명한다. 멸하라." 백이충의 말투에 살짝 노기가 섞였고 주변의 공기가 부르르 떨렸다. 동 시에 우두득 소리가 나며 삼십의 천마강시의 팔뚝이 한꺼번에 반대편으로 꺽여져 나갔다. 천마강시의 발이 무릅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어갔고 팔이 짖눌려 으스러졌고 천마강시의 몸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멸!" 백이충의 호통이 다시 터져 나왔고 천마강시들의 몸이 팔과 머리부분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백이충의 광한신공이 천마강시들을 부 수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리가 가슴이 재로 변했다. 천마강시 삼십이 한 꺼번에 상체 부분이 재가 되는 스러지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백이충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며 호흡이 거칠어졌고 다시 몸을 튕겨 삼마 황을 덮쳐갔다. 삼마황의 기척을 느끼고 먼저 움직인 것이다. 상체까지 부서졌던 천마강시들이 하체만 남아 말뚝처럼 땅에 반쯤 박힌 자세 그대 로 남아버렸다. 삼마황의 눈빛이 번쩍였다. 앞의 두 번과 달리 삽십의 천마강시가 전멸 하기는 했어도 단숨에 몸 전체를 먼지로 만들지 못햄음을 눈치챈 것이 다. 또한 백이충의 얼굴에 눈에 띠게 피로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심혼원대진을 펼쳐라." 천마황이 앞장서서 삼각형의 진을 이루며 소리쳤다. 일심혼원공으로 서 로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하나의 힘으로 합하는 가공할 무학. 천마 와 만사지존이 고심 끝에 만든 동심합공의 무공이다. 천마황, 혈사황, 철마황이 한꺼번에 일심혼원공을 끌어올렸다. 일심혼원대진이 펼쳐지자 혈지존은 홀로 뒤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세가지 빛깔이 동시에 세사람을 뒤덮었다. 천마지존공. 천사음유공. 철 괴마공. 인세에 보기드믄 세가지 마공이 하나로 합쳐졌다. 삼마황의 일 심혼원공이 깊어진만큼 그들의 합해진 힘 또한 무섭게 증폭했다. "쓸데없는 저항. 순순히 누워라." "어림없다. 일심혼원륜(一心混元輪)!" 세가지 기운이 섞여 수십 배 증폭된 마공이 다시 나뉘어 삼마황에게 흘러 들어갔다. 통합과 분열. 그 기류가 하나의 거대한 륜이 되어 백이충을 공격해 들어갔다. 청마산에서 칠대천마가 백이충을 향해 사용했던 무공 이다. 태산이라도 허물어트릴 공격에 백이충은 눈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금새라도 잠들 듯 피로하기는 했으나 저들의 공격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백이충은 지금 자신의 정신력이 극도로 고갈되었음을 느꼈다. 광한신공 은 정신으로 펼치는 무공. 광한신공의 역류에다가 대 폭발의 위력을 막 고 게다가 옥룡왕과 주소련을 살리기 위해 꼬박 열흘이나 쉬지않고 원정 지기를 쏟아부었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진혈존의 기운을 느 끼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육체로 펼치는 중단전의 무공은 아무 손 상이 없었지만 정신으로 펼치는 광한신공은 계속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진혈존을 만나기 전까지는... 광한신공이 아니어도 삼마황 정도면 육체 의 무공, 중단전의 무공만으로 상대가 가능하리라.) "아수라철갑. 아수라만상. 아수라벽력. 아수라환희. 아수라천지." 백이충은 공중에서 춤을 추듯 잇따라 다섯 가지 절학을 한꺼번에 쏟아내 었다. 절대구식이라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위해 만들어 놓은 최후의 구명 초식중의 일부분. 허나 상단전에 이르면 초식은 더 이상 필요없다. 혈존 이 고심에 고심을 기울여 만든 절대구식은 아수라독존마공이나 광한신공 에 아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절대구식의 전반부가 중단 전의 경지에서는 최강의 초식이라는 것이다. 백이충의 몸에서 성스러운 광채가 그의 몸짓에 따라 퍼져나갔고 동시에 거대한 륜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삼마황은 그것 하나만으로 일심혼원 륜을 그치지 않았다. 통합과 분열이라는 일심혼원대진은 삼마황에게 끊 임없이 거대한 진기를 공급했고 그 힘을 기반으로 삼마황은 수십개의 일 심혼원륜을 백이충에게 쏘아보냈다. "아수라천사. 아수라천마." 백이충의 몸에서 다시 절대구식의 전반부 초식이 쏟아져 나왔고 삼마황의 강기륜을 한꺼번에 쓸어갔다. 거대한 해일을 만난 작은 파도처럼 일심혼 원륜은 순식간에 백이충의 절대구식에 삼켜져 버렸다. (되었다. 자연지경 상에서는 펼쳐지지 않던 마도의 무학이 지금 상태에 서는 자유롭다.) 광한신공 정도 상단전의 무학이 되면 마도와 정도의 형식적 구별이 없 다. 아수라독존마공을 익혔던 몸이 바로 자연지경으로 전환한 것만해도 알 수 있다. 게다가 광한신공은 불도속 모든 류파의 이치를 통합하고 초 월한 경지가 아니었던가? 흑련에서 진정한 광한신공을 얻은 백이충이 마 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절대구식을 펼침에 있어 아무런 장애도 없었 다. 콰르릉. 공기가 파열되며 우레소리가 일어나고 삼마황이 피를 뿜었다. 그들의 안 색이 새하얗게 변하며 온 몸이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그나마 목숨이 단 숨에 끊어지지 않는 것은 광한신공이 아니라 육체의 내공으로 절대구식이 라는 초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이충이 저항할 기력도 없어보이는 삼마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손을 뻗 을 때였다. 삼마황이 있는 곳과 다른 세군데에서 미증유의 힘이 그를 덮 쳐왔다. 백이충마저 놀라게 만드는 거대한 힘. 이것은... "아수라파천황(阿修羅破天荒)!" 천지를 암흑으로 몰아가는 거대한 파괴의 해일이 백이충의 몸을 덮쳐갔 다. 놀랍게도 백이충의 몸을 덮친 것은 절대구식 중에서도 후반부 이식 의 하나인 아수라파천황이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이 없으면 절대 펼쳐낼 수 없는 상단전 마공중의 마공. 아수라파천황은 파멸지기(破滅之氣)를 일으키는 가공할 마도의 초식이었다. "이럴수가? 아직 진혈존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거늘?" 백이충이 크게 놀라며 황급히 광한신공을 끌어올렸다. 더 이상 힘을 아 끼고 할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이 미증유의 파괴력에 무방비로 휘말린다 면 아무리 광한신공을 터득한 백이충이라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것 도 육체를 탈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소멸로 가는 죽음. "광한신공. 광한파천황!" 백이충은 광한신공을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광한신 공에 공격적인 수단, 즉 무공초식이 없음을 원망했다. 사실 마음으로 모 든 것을 제압하기에 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직접 만난 아수라독존마공의 파괴력이란... 고갈된 현재의 광한신공의 힘으로도 감당하기 부족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광한신공으로 최대한 상단전의 힘을 이끌어내는 아수라파천황의 초식을 사용했다. 광 한파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다행히 변조된 초식은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 어졌다. 백이충을 향해 덮쳐오는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광한신공에 밀린 덕분인 지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파괴력의 아수라독존마공은 스스로를 무로 돌 려 허공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광한신공과 부딪쳐 동시에 공멸하고 만 것이다. "아수라멸천황(阿修羅滅天荒)!" 백이충이 미처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그를 포위한 세 인영이 동시에 같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다. 그들을 보고 백이충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진혈존이 아니었다. 십혈존이었다. 바로 금혈존, 패혈존, 뇌혈존 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손에서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백이충은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고 다시 광한신 공을 극성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백이충은 자신이 끌어들인 힘이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힘의 칠성도 채 미치지 못한 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 다. 아수라멸천황(阿修羅滅天荒). 혈존 백가량이 아수라독존마공의 파괴적 힘을 최고조로 나타내기 위해 만 들었던 인세 최고의 마공절초. 신이 아니라면 막을 수 없다. 아수라파천 황이 부딪치는 모든 것을 무로 몰고가는 파괴지력이라면 아수라멸천황은 모든 것을 혼돈으로 섞어버리는 혼돈지기(混沌之氣). 진정한 아수라돌존 마공의 정수였다. 천하를 멸망시킬 진정한 힘이 마침내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다행히 백이충이 지닌 광한신공의 힘도 신력이라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었다. 백이충의 몸에서 여태까지와 다른 성스런 광휘가 뻗어나와 온 산 을 뒤덮었다. 백이충이 흑련에서 광한신공을 깨달은 이래 처음으로 전력 을 다해 펼친 광한신공의 위력이었다. "크윽. 아수라멸천황이라도 나를 상대하기에는 어림없다. 어떠냐? 광한 신공으로 펼치는 광한멸천황!" 소리도 없고 빛도 없다. (無音無光) 형태도 없고 변화도 없다.(無形無變) 죽음이 없으니 삶도 없다. (無死無生) 파멸이 없으니 존재도 없다. (無滅無在)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하늘조차 파멸시키는 아수라독존마공의 최강의 파멸지력 형태의 아수라파천황. 그리고 모든 것을 태초의 혼돈으로 몰고 가는 아수라멸천황. 그 미증유의 아수라독존마공에 부딪친 것은 우주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여 그 힘을 부리는 모든 창생지력(蒼生之力) 광한 신공. 그 둘이 부딪치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지 서로의 힘이 서로 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이는 백이충의 광한신공이 제 위력을 제대로 나 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광한신공이 온전했다면 삼혈존의 미미한 아수라독존마공으로는 아무리 아수라멸천황을 사용했다해도 백이충을 감 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토록 심한 반발력이 서로를 향해 몰아치지 않 았을 것이다. "크어어억." 삼혈존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그들의 몸이 탄력을 잃고 인형처럼 몸이 나가 떨어졌다. 자신이 생성하고 완성한 아수라독존 마공이 아니라 남에게 얻은 힘이기에 그 반탄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커억." 백이충도 피를 토했다. 광한신공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몸에 상처를 입 었다. 광한신공이 되돌아와 입은 상처였다. 게다가 광한신공의 힘이 약 해져 그 상처도 복구되지 않았다. 더 이상 허공에 몸을 띄우지 못하고 백이충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려온 이후에도 이리저리 몸을 휘청거렸 다. 광한신공의 반발력에 입은 상처이기에 심적 타격이 컸다. "이런. 삼혈존 따위에게 타격을 입다니. 크윽. 진혈존이 이것을 노렸단 말인가?" 삼혈존이 갑자기 아수라독존마공을 사용할 리가 없다. 게다가 그들의 몸 에서는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했을 때의 파멸적인 기운, 진혈존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수라독존마공을 사용했고 절대구식의 후반부 초식을 사용했다. 그들이 혈존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을 넣어준 자 는 진혈존일 것이다. 그는 이곳에 있다. 백이충이 숨을 고르며 자신의 상처를 잠시 살펴보았다. 내부가 엉망이었 다. 혈기가 엉키고 단전이 크게 손상되었다. 광한신공이 무사하다면 모 든 것을 바로잡는데 일각도 안 걸릴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단전인 하단 전 상처 못지 않게 자연에 근본을 두는 상단전도 지금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육체의 무학도 마음의 무학도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빠져버린 것이다. "모두 육체에 미련을 두었기 때문이다. 육체가 미련이고 곧 약점이로구 나. 육체가 없었다면 광한신공의 거칠 것이 무엇이었으랴?" 잠깐 동안 백이충은 자신이 세속에 미련을 둔 것을 후회했다. 거침없이 광한신공을 완성했다면 그를 막을 것이 무엇이었으랴? 오늘의 낭패를 당 할 일이 어디에 있었으랴? 백이충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했기에 광한신공 이라는 더 큰 미련을 떨쳐버렸다는 것을 몰랐다. 오히려 지금 광한신공 을 아쉬워하기에 광한신공의 완성이 바로 그의 곁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 서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것은..." 그야말로 끔직한 기운이 백이충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파멸지력? 암흑마기? 혼돈지기?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혼돈의 기운이라 해야할까? 그것은 진혈존이 자각했 을 때 느꼈던 파멸지력과는 또 틀렸다. 또한 이곳에 오기 직전 느꼈던 혼돈지력과도 틀렸다. 훨씬 무섭고 두려운 기운이었다. 백이충이 얼굴을 들었고 그의 시선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잡혔다. "크윽. 모습마저 백가량의 모습인가?" 지옥 유부에서 바로 올라온 듯한 끔직하고 사이로운 기운을 발하고 있는 남자. 오히려 악기(惡氣)가 지나쳐 성스럽고 빛처럼 보이는 남자. 그는 혈발에 혈염과 혈미를 지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이충이 전생으로 생 각했던 혈존 백가량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혈존 백가량이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 완벽히 부활해 버린 것이다. 이미 그 안에는 광혈존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악취결개 우문노괴의 개념도 없었다. 그는 혈존 백가량 이고 또한 아수라독존마공을 지배하는 마신이었다. 백이충과 진혈존은 서로가 서로를 보는 순간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느낌. 그것은 혈존의 영혼의 공통 분모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과는 또 틀렸다. 자신의 분열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악의가 아닌 한없는 친근감과 동질감이었다. 서로 무공 의 극과 극에 이르러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느낌은 그들이 있는 경지가 같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크흐흐. 백이충. 오랫동안 너를 지켜보았다.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사라 져야겠지?" "네가 감히 혈존이라 자처할 수 있는가? 혈존은 어떤 도전이든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은 뭔가?" "네 기운을 소모시킨 일을 말하는 건가? 흐흐. 본좌는 승산없는 일은 늘 피했다. 반드시 필승의 자신이 있을 때만 나섰다. 그래서 본좌는 무적이 었다. 한때 나 자신이었던 네가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두사람은 마치 절친한 친구를 만난 듯 평화롭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러나 백이충은 속으로 맹렬히 광한신공의 기운을 긁어모았으며 진혈존은 비웃듯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진혈존은 백이충에게 살기를 보이기 시작 했다. "본좌는 오랫동안 네 뒤를 따라다녔다. 너는 항상 광한신공의 완성에 한 발을 걸쳐 놓은 듯 보였다. 허나 이제보니 아니로구나. 그 상태로는 내 적수가 될 수 없다." "언제까지 수다나 떨 생각인가?" 백이충이 불쾌한 듯 이야기 했고 진혈존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움직였 다. 진혈존이 움직인다 느끼고 방비할 때 이미 그의 몸으로 무시무시한 파멸지력이 다가와 있었다. 아수라파천황이라는 초식으로 억지로 끌어올 린 파멸지력과는 근본이 틀린 진정한 파멸지력이었다. 백이충은 황급히 끌어올린 광한신공으로 파멸지력을 내리 눌렀다. 그 순간 백이충의 몸 안에서 외부의 파멸지력과 똑같은 기운이 스믈스믈 꿈틀거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광한신공을 공격했다. 백이충은 깜짝 놀랐다. 언제 파멸지력 이 백이충의 몸 안에 들어왔을까? "크하하. 스스로의 몸에 아수라독존마공의 파멸지력이 잠재하고 있음도 몰랐단 말이냐?" 진혈존의 비웃음이 들리고 거센 압력이 백이충의 몸을 짖누르기 시작했 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개미를 만근의 평평한 돌덩어리로 누르는 듯한 절대 저항불가의 힘이었다. 그것은 마신의 힘이었고 파멸의 힘이었다. 그리고 백이충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백이충의 몸에 아수라독존마공의 잔재가 남아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 다. 한때 아수라독존마공을 성취했고 그 흔적이 남아 광한신공의 비급을 보았을 때 단숨에 자연지경에 올랐기 때문이다. 허나 광한신공을 터득하 면서 그 기운이 모두 광한신공에 흡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광한신공에 못지않게 거대한 기운은 주인의 뜻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잠들어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 힘이 진혈존의 안배아래 삼혈 존의 공격에 자극받아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광한신공을 밀어내려 했다. 백이충이 광한신공을 끌어올려 내부의 아수라독존마공을 억누르고 풀어버 렸을 때에는 사방에서 거센 파멸지력과 혼돈지력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 수라파천황이니 아수라멸천황이니 따위의 마공의 힘을 극도로 끌어내는 초식이 필요없었다. 이미 의지 자체가 가장 효율적으로 백이충의 몸을 짓이기 위해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진혈존은 천하를 파멸시킬 것이다. 파멸과 혼돈의 주인이다. 차라리 육체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육체에 대한 너무 깊은 집착도 문제가 되었지만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광 한신공의 완성을 탐하려는 백이충의 욕심도 집착이 되었다. 그것은 끊임 없이 백이충을 괴롭혔고 광한신공의 위력을 약하게 했다. 백이충은 그것 을 몰랐다. 백이충의 뜻이 펼쳐졌고 광한신공이 움직였다. 파멸, 혼돈의 힘과 광한 신공이 서로의 힘을 겨루었다. 너무도 팽팽한 대치. 그러나 백이충의 인 상은 갈수록 찌푸려졌고 진혈존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흘렀다. "백이충. 나의 잔재여. 나의 원본이었던 존재여. 나의 후생(後生)이며 동시에 전생(前生)이었던 존재여. 멸하라." 진혈존이 소리쳤고 파멸지력이 소용돌이치며 몰아쳐갔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기세였다. 그 속에 파멸지력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아주 진하고 탁 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파멸과 함께하던 혼돈의 힘이 진정한 위세를 떨 치며 광한신공을 찢어발기고 백이충에게 덮쳐갔다. 아수라독존마공의 극 성에 이른 진정한 혼돈지기였다. 초식 따위로 억지로 끌어낸 것이 아니 라 마음으로 움직이는 순수한 혼돈지력 바로 그 자체였다. "크아아악." 백이충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오르고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광한신 공이 외부와 내부의 합공에 박살났지만 육체가 재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 았다. 진혈존이 그의 육체를 보존해준 까닭이었다. 아무리 혼돈지기가 영혼마저 소멸시킨다고 해도 창생지력 광한신공에 대해 만의 하나를 걱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이충이 광한신공을 완성하여 신선이 된다면 진혈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누르고 영혼과 육체를 고정시키고 그의 육체를 짖이겼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대로 아수라독존 마공에 의해 움직였다. "죽어라. 소멸하라." 공중에서 몇 번이고 튕겨나가며 백이충의 몸이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파멸지력.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혼돈지기. 그것이 사정없 이 백이충의 몸을 강타하고 또 복구했다. 그리고 또 파멸시켰다. 백이충 은 끊임없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광한신공을 운영했다. 그러나 광한신 공은 이미 혼돈지기에 의해 그 기세를 잃었다. 백이충의 몸이 힘없이 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 그의 몸 이 떨어지는 곳은 절벽 아래였다. 진혈존에게는 이미 공간의 제약이 없 으므로 백이충의 몸이 떨어질 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설사 그 밑에 유사가 있어 땅 속으로 끌려간다 해도 백이충의 몸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깐 시야가 가린 사이에 절벽 밑에 시커먼 입을 벌리는 검은 동혈이 갑자기 나타남을 진혈존은 알지 못했다. 검은 동혈 은 순식간에 백이충의 몸을 삼키고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진혈존 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사라졌어?" 진혈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지지간에 자신의 이목을 피할 것이 아무 것도 없거늘 영혼과 육체의 소멸 직전에 있던 백이충의 몸이 감쪽같이 사 라진 것이다. 황급히 절벽 밑으로 내려가 둘러 보았지만 백이충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신경과 이목을 감쪽 같이 속이고. 진혈존이 자신의 기운을 급히 퍼트려 산 전체를 감쌌지만 백이충의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진혈존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흥. 하지만 이미 그의 광한신공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한 그의 몸에 남아있던 아수라독존마공을 각성시켰으니... 동일한 힘에 극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두 기운 중에 하나를 제거하지 않고는 재기하지 못하리라. 살.아.있.다.면. 말이다." 어느새 진혈존의 뒤로 일곱 명의 사람이 무릅을 끓고 있었다. 천하를 파 멸로 몰고갈 존재들. 혈지존과 삼마황. 그리고 삼혈존이었다. 그들은 노 예가 주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혈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20549] [연재] 혈존무적-마도도 도이다 첨부파일 : 등록자: 김하준(khj1234) 조회수: 314 등록일: 2003-05-21 01:46:55 본문크기: 25149 bytes <마도(魔道)도 도(道)이다.> 천하가 발칵 뒤집혔다. 마신이라고 할수도 있는 고금제일마. 바로 혈존 백가량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거 천하를 공포 속에 몰아넣으며 처 하를 제패했고 바로 얼마전 부활하여 청마산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소 문났던 혈존. 십혈존의 등장과 함께 혈존이 죽으면서 그 화신이 천하를 가득채웠다고 알려졌던 그 혈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혈존의 뒤에는 일곱명의 부하가 따랐다. 혈천마련의 주역이었던 삼마황. 옥룡왕 행세를 했다고 알려진 혈지존. 그리고 천하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십혈존 중에서 살아남은 삼혈존. 그들이 천하를 뒤집어 버렸다. 혈존. 삼혈존과 비교하여 스스로 진짜 혈존이라며 진혈존이라고 자처한 백가량은 수하들을 풀어 북경에 모였던 백도고수들을 풍지박산 내었다. 패혈존 혼자서 마도고수들을 이끌고 백도 전체를 박살내었다. 그 누구도 패혈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승룡곡의 최정예 천무호정일백위가 박살 났고 무성 종리연이 이끄는 백도맹이 박살났다. 신비삼패가 철저하게 깨 지고 환우비령의 고수들이 풍지박산났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일어 난 일이었다. 진혈존은 스스로 황궁에 처들어가 단숨에 황궁을 감싸고 있던 오행미궁대 진을 단숨에 와해시켰다. 황제와 황족을 보호하던 호황부가 전멸했다. 천외구기는 삼혈존과 삼마황에게 모조리 사로잡혔다. 진혈존은 황제를 사로잡았고 북경에 모여있던 뭇 중신들을 사로잡았다. 황실을 지키던 황 도수비군의 수뇌부들이 천인장급 이상이 모두 암살당했다. 혈존무적. 혈존은 그야말로 한번 소문이 돌때마다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학 림파의 중신들이 진혈존이 내린 죽음의 공포 아래 혈지존을 진짜 옥룡왕 이라고 인정했고 옥룡왕은 황제조차 혈존의 밑에 있다고, 혈존이야말로 영세무적이며 고금의 패황이라 공표했다. 황도가 혈존에게 장악당하고 뭇 중신과 황제가 혈존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것이 알려지자 천하가 떠들썩해졌다. 혈지존이 옥룡왕으로 자처하며 황 제자리를 차지한다고 소문났고 혈존은 태상황(太上皇)으로 등극한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충의지사들이 혈존과 혈지존을 성토했고 군부의 장군 들이 움직였으며 검을 쓸줄 아는 무림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군사를 모으던 장군들은 바로 명을 내린 다 음날 목이 잘려져 버렸고 혈존을 성토하던 무림인은 그 사문마저 씨몰살 당했다. 충의지사들은 혈존과 가짜 옥룡왕에 빌붙은 간신과 장수들에게 잡혀가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서로군벌, 북로군벌이 와해되었고 군의 대장군들이 줄줄히 잡혀들어왔다. 심지어 서문 대원수까지. 혈존 대회. 옥룡왕이 주관하고 혈존탑을 세워 혈존이 고금제일인을 입증한다고 했던 대회. 가짜 옥룡왕은 그 대회를 성대하게 열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천 하를 혈존과 옥룡왕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그날을 기해 황도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이곳이 어디인지 그 누구도 알수 없는 곳. 세속(世俗)인지 명계(冥界)인지 선계(仙界)인지 마계(魔界)인지도 확실 치 않은 곳.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암흑으로 쌓여있기에 실재하는지 조차 도 의문스러운 곳. 그러나 따듯한 어둠이 서려있던 곳. 허무의 공간에 한 개의 밝은 빛이 퍼져 나왔다. 태고의 검은 물결이 공 기처럼 감싸고 있는 정적을 깨고 밝혀진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잠깐 주변 을 밝혔다. 그 빛은 외로운지 깜박거리다가 차츰 그 기세를 넓혀갔다. 그러자 따듯한 어둠에 감싸인 곳이 잠깐 드러났다. 빛이 주변을 밝히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마치 무의 공간인 듯 한 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자애스런 인상의 노인이고 또하나는 혈육덩어리 비슷한 형태의 인 간이었다. 피로물든 사람은 옷이 갈가리 찢겨져 있었고 온 몸이 난자당 해 푸르죽죽 죽어있었다. 가슴이 약간 들썩 거려 살아있다는 증거 외에 그가 생명체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 신 기할 정도의 상처인 것이다. 그리고 시체와 비슷한 상태의 인간 옆에 있는 자는 자애스런 노인은 도복 (道服)을 입고있고 손에 불진을 들고있는 노도사였다. 노도사의 손은 피 로 물든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어두운 공간에 피어난 한줄기 빛 은 바로 이 노도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빛에 의하면 이 둘이 있는 곳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거늘 마치 중역이 작용되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은 아무 지장도 없이 허공에 떠 있었다. 차츰 노도사의 몸에서 발출되는 빛이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빛은 노 도사의 몸에서 떠나 혈인의 몸에 머물렀다가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그레한 광택이 떠돌던 노도사의 안색이 차츰 백지장처럼 변하면 서 피로한 얼굴을 드러내었다. 반면 혈인이 되다시피한 사람의 몸에는 한 가닥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인세라고 볼 수가 없는 이상한 공간. 인간같지 않은 탈속한 기운을 풍기는 노도사. 그리고 시체에 가까운 상태였다가 다시 숨을 돌리는 인간.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가 아닌가? 잠시후 노도사는 완전히 지친 얼굴로 쓰러진 사람의 머리예서 손을 떼었 다. 그리고 혈인이었던 남자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끄-응!" 멍하니 눈을 뜬 남자. 그는 바로 백이충이었다. 한동안 그는 현실을 인 식하지 못한 듯 멍하니 있다가 차츰 두눈에 초점을 잡기 시작했다. 육체 로는 오장육부가 으스러지고 전신의 경맥이 파괴되었다. 광한신공이 아 수라독존마공에 침범을 당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내부에서 잠재해 있던 아 수라독존마공의 잔재가 광한신공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엉망진창 상태로 죽은 듯 하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로다. 이미 선계에 한발 디디고 있으면서도 하찮 은 자신의 과거 따위에게 당하다니.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하고 흔들리 니 마력 따위에 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도인이 나지막한 탄식을 터트렸다. 노도인의 탄식을 듣던 백이충이 벌 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놀라고 주변 환경에 놀랐다. 분명 그의 기억으로는 진혈존에게 당해 영혼도 육체도 완전한 소멸을 맞 이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내가 살아있단 말인가? 응? 노도인께서는 누구십니까? 저를 구해주신 분입니까?" "허어. 아이야. 노도(老道)가 기억나지 않느냐? 내 분신이기는 허나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을 텐데?" 노도사의 말에 백이충은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희미하게 익숙한 모습 이기는 허나 뚜렷하게 기억할 수가 없었다. 백이충의 의혹에 찬 시선을 보며 노도사가 빙긋 웃었다. "기억나지 않느냐? 오형산에서 요요태후에게 사로잡혔던 노도의 분신을 네가 구해준 적이 있었지." "아. 자미도인." 백이충이 드디어 노도사를 기억하고 그 이름을 입밖에 내었다. 그렇다. 요요태후에게 사로잡혀 고로움을 당했던 자미도인. 등선한 자미도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족자 속의 도인과 눈앞의 노도인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노도가 바로 모산파의 십이대 제자인 자미도인이다." 백이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형산에서 자미도인을 만난 적은 있지만 그때의 모습은 지금의 자미도인과 전혀 기운이 틀렸다. 그때 오형산의 자미도인이 득도한 인물이라는 평이 아까울 정도로 미약한 기세를 풍겼다 면 눈앞의 자미도인은 탈속하고 고고하여 보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드는 기세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같은 모습이지만 그 분위기가 너무나 틀려 백이충도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등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듣기에 전설 속에서는 이백년전 자미관 을 지으시고 얼마 후에 등선하신 것으로..." "후후. 선계에 발을 들여놓을 뻔하기는 했지. 그러나 한가닥 후회가 남 아 속세에 내 일부를 남겨놓았고 그 바람에 완전히 속세를 떠나지 못했 다." 백이충이 알고있는 자미도인은 별 볼일이 없는 노도사였다. 전설 속에 등선했다는 것도 거짓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실재로 오형산에서는 그의 분신이 요요태후에게 잡혀 수모까지 당했다. 그러나 지금 백이충의 눈앞 에 있는 자미도인은 신선임을 명백히 알 수 있을 정도의 신성한 기운을 뿌리는 존재였다. 백이충의 눈이 의문을 표시하자 지마도인은 웃으며 입 을 열었다. "노도가 지옥에서 새어나오는 독기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미관을 세우고 강제로 틀어막았다. 세속에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지만 늘 한 가닥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돌더구나. 그래서 등선시기에도 미련을 버 리지 못하고 한가닥 기운을 족자에 남겨놓았다. 그래도 미련을 떨칠 수 가 없었다. 이로 인해 노도는 육체를 버리고 등선하고자 했으면서도 완 벽한 선계에 들지 못하고 지금처럼 반선계(半仙界)에 머물러 있구나." "반선계가 무엇입니까?" "반선계란 세속에서 선계로 가는 길의 중간지점 같은 곳이다. 미련을 떨 치지 못하는 자가 억지로 머물 곳을 만든 것이지. 이곳에 오고 나서야 나는 요기혈공을 막은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요기 와 악기는 억눌린 반발력으로 증폭되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자연의 복원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새어나오는 요기와 악기만을 도력으로 정화시켜야 했다. 허나 육체를 버린 원영의 상태로 되돌아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족자에 남겨둔 한가닥 도기가 모든 것 을 막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자미도인은 지금 백이충의 앞에 있지만 그의 육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탈각(脫却)한 존재였고 원영을 이루어 선계에 들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지금 눈앞의 자미도인은 이미 육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세속과는 완전히 절연한 신선이었다. 허나 한 가닥 고뇌 때문에 선계에 들지 못한 신선이었다. "그럼 그 일 때문에 선계에 드시지 못한 것입니까?" "얼마 전에 속세에 남겨둔 도력이 되돌아왔네. 이제야 선계로 완전히 들 어갈 수가 있게 되었지. 허나 천하에 파멸지력이 머물러 있더군. 또한 그 기운은 자네에게서 비롯되어 떨어져 나갔다가 자네를 공격하게 된 다 는 것을 알았네. 이백 년을 기다렸는데 잠시인들 더 못머물러 있으랴. 잠시의 여유를 가지고 자네를 계속 지켜보았네. 그러다가 자네가 당하는 순간 이곳으로 자네를 끌어들였네." "하면 저도 세속에 되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네. 자네는 내 도력으로 이곳까지 온 것일뿐. 아직 선계와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까. 언제든지 돌아갈 수가 있네." "휴. 다행이군요. 진혈존을 막아야 하니 이대로 선계에 들 수는 없습니 다." "선계에 든다고? 자네가?" 자미도인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백이충은 왠 지 기분이 나빴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광한신공을 연성했고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선계의 문이 열렸던 것을 보았습니다." "허어. 물론 선계의 기운을 느꼈겠지. 하지만 자네 스스로 깨달음을 얻 은 것인가?" "예?" 백이충은 자미도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럼 자신이 깨달은 것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곰곰히 생각하게. 광한선인께서 후인 옥령진인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왜 전했는지. 그 이후 등선하신 옥령진인이 자네에게 어떤 예언을 남기셨는 지를 생각해 보게." "......" "자네가 광한신공을 얻은 것. 자네의 앞에 기연이 안배되어 있던 것. 모 두 하늘의 뜻에 따라 자네를 위해 안배되어 있던 것이네. 그것이 왜 마 련되어 있었을까? 굳이 자네를 지목하여 젊은 나이에 선계로 이끌기 위 해 하늘이 그런 기연을 안배해 놓은 것일까?" 그리고보니 혈존의 영혼을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광한신공의 비 급이 떨어져내려왔다. 또 다음 차례라는 듯 호황부주가 접근하고 옥령진 인이 남긴 안배를 얻었다. 그리고 옥령진인의 예언대로 움직여 천무삼성 의 기연도 얻었고 신비삼패와 만나 만상건곤심결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 럼 이것이 모두 하늘이 안배한 수순이었단 말인가? "그럼 제가 그때 깨달음을 얻고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렸어도 선계에 들 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 들었겠지. 하지만 자네는 아직 속세에 있잖아. 광한선인도 옥룡 진인도 그리고 나도 자네가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네. 그럼 자네처럼 세속에 정이 많아 뭉기적 거릴 존재를 고른 선대 신선들의 안목을 믿지 못하겠단 말인가?" (으윽. 무슨 소리야. 그럼 미래를 내다보고 내가 광한신공을 깨달아도 속세에 머물 것을 예견했기에 모든 안배를 남겨놨단 소리야?) "그렇게 떨떠름한 시선을 보낼 필요가 없네. 자네를 지켜보니 천기대로 잔정과 미련이 많아. 그때 이후에도 선계에 들어 갈까봐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것 같던데 한번 놓친 기회를 다시 잡기 쉬울 것 같은가? 광한신공 을 완성해도 한번 기회를 놓친 다음에는 다시 하늘의 문이 열릴 천시를 얻는 것은 어려워. 한마디로 자네는 이루지도 못할 일을 겁낸 멍청한 짓 을 한 거지." "그... 그럼 차후에 광한신공을 완성해도 신선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 까?" "자네는 이미 반선(半仙)이지 않나? 그 차이는 세속의 미련을 털어 버리 고 먼지보다 가벼운 원영(元靈)의 존재가 되어 선계에 드는가 안 드는가 차이 뿐이네. 선계에 드나 안드나 광한신공이 완성된 순간 똑같은 경지 야. 다만 선계에 들면 다시 수련해서 더 높은 경지를 향하는 수련을 해 야겠지. 즉 속세에서는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수련의 기회를 선계에서 다시 맛볼 수 있을 뿐이네." "......" "광한신공이 완성되는 순간 신선이 된다는 것이 맞기는 하네. 그 정도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세속의 미련을 떨쳐버리는 것이 보통이고 거기에 하늘의 시기가 맞아떨어져 선계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네. 하지만 자네 같은 경우 워낙 세속의 미련이 많아 한번 천시를 거부했으니 적어도 일 이백 년 이내에 다시 천시가 열리지는 않을 거야. 하기야 그래서 광한선 인 같은 분이 자네를 골랐겠지만." "저번에 옥룡왕부에서 폭발을 막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등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착각은 자유지. 그때 자네는 스스로 폭발을 막기 위해 억지로 막아놓았 던 광한신공을 터트려 완성하려고 했네.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은 느꼈을 뿐이야. 완성했다면 그때 천시가 열렸을 수도 있 지만 안 열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왜냐하면 노도의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듯 티끌 만한 미련이라도 세속에 남겨놓으면 선계의 문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지." 자미도인도 신선이었다. 그러나 천시가 닿지않아 선계의 문이 열리지 않 았다. 세속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집착. 그것 때문에 완벽한 원영을 이 루어 당장 선계에 들어도 될만한 능력을 갖춘 자미도인에게 선계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다. "자네는 잔정이 많지 않은가? 속세에 대한 미련 혹은 광한신공을 성취하 겠다는 집착.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미련을 가지고 있지. 그 어떤 미련이 나 집착이 하나라도 존재하는 한 선계의 문은 열리지 않네. 그런데 자네 는 아예 선계의 문이 열릴까봐 스스로 그 완성의 경지를 다시 차 버리더 군. 도대체 왜 그동안 스스로 광한신공을 닫아 논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네." 백이충은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 천지자연을 느끼고 이제 선계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워낙 세속에 대한 정이 많아 그것을 거부 했다. 그리고 광한신공을 완성하면 원하지 않아도 신선이 되어 선계로 등선 할까봐 광한신공을 쓰지 않으려 했다. 그 모든 것이 헛 짓이었다. 세속에 대한 정 자체가 바로 선계 등선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럼 광한신공을 아등바등 익히지 않으려 했던 여태까지의 짓은 다 뭐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알지 않는가? 광한신공이나 아수라독존마공이나 다 비슷한 도이지. 마도도 도이네. 그런데 자네에게서 떨어져나간 진혈존은 왜 등 선하지 않을까? 그는 세속에 관심이 많은 자이기 때문이네. 그런 자는 절대 등선을 못하지. 마찬가지로 자네도 세속에 대한 모든 정을 미련 없 이 털어 버릴 때까지는 등선하지 못하네. 아니. 선계의 문이 열리는 천 시가 찾아오지 않지." 백이충이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소생이 어리석었군요. 진혈존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군요. 하지만 이제 제 몸은 이지경이 되었으니..." "자네의 몸이 어떻단 말인가?" "광한신공이 으스러져 버렸습니다. 깨달음이 깨어졌습니다. 게다가 그 흔적을 끌어모아 복구하고자해도 몸에 남아있는 아수라독존마공이 방해하 고 있습니다. 아수라독존마공은 광한신공에 맞먹는 지독한, 제 몸에 또 아리를 튼 독이군요. 선경에 오르는 광한신공을 깨트리는 지독한 마공 이 존재하다니. 마공 따위가 어떻게 그런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에는 정도가 없네. 자네가 배운 것은 진정 광한신공인가?" "예? 그럼 광한신공이 아니고 다른 것이란 말입니까? 제 깨달음은 광한 선인의 심득을 보고 얻은 것인데요?" "그럼 옥령진인이 평생을 깨우쳐 남긴 것도 광한선인의 심득을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천무삼성의 심득도 광한선인의 것이든가? 봉 황곡의 만상건곤심결도 광한선인의 것이든가?" "그... 그거야. 그러나 광한신공에 그 모든 이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 니까?" "하늘은 하나이네. 그러나 그곳으로 오르려고 하는 순간 길은 많지. 자 네는 광한선인이 남긴 심득을 보고 하늘을 오르는 길잡이를 삼았네. 그 러다가 옥령진인의 길도, 천무삼성의 길도, 노도의 만상건곤심결의 길도 보았네. 모두 하늘을 오르는 길이라 같은 것이라 했네. 그러나 그 모든 깨달음이 같은가?" "하지만 결국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국 오르는 길은 하나인데 광한신공이라는 길이면 어떻고 천 무삼성이라는 길이면 어떤가? 만상건곤심결이라는 길은 어떻고 아수라독 존마공이라는 길이라면 어떤가?" 백이충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흑련에서 만상건곤심결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기분, 옥룡왕부의 대폭발에 서 마치 금방이라도 등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와 비슷했다. "아수라독존마공도 광한신공과 같다고요?" "마도도 도이네. 자네 몸에 있는 기운이네. 자네가 깨달은 경지이네. 아 수라독존마공이라 이름지으면 어떻고 광한신공이라 이름지으면 어떤가? 모두 자네 몸에서 일어난 기운인 것을? 굳이 하나인 것을 왜 분류하려 하는가?" 마도(魔道)도 도(道)이다. 도가의 광한신공을 깨닫는데 불가의 이치면 어떻고 속가의 이치면 어떠 랴? 그리고 마도이면 또 어떠랴? 결국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도대체 도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구분짓고 무엇을 구분짓지 않는가? 진리란 마음 속에 있기에 진리인 것을. 남이 진리라 칭한다 하여 진리가 아닌 것을. 내가 나라고 하는데 누가 아니라고 한들 내가 아닐손가?"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다. 백이충의 눈빛이 멍하게 흘러갔다. 지금 백이 충의 눈빛은 마치 초점을 잃은 것 같았다. 두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을 보 고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미도인이 빙긋 미소를 짓더니 그의 곁에서 일어섰다. 자미도인은 고개 를 끄덕이고 그의 곁에서 떠났다. 홀연히 자미도인이 사라진지도 모르고 백이충은 계속 명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이충이 자신을 관조했다. 그의 몸에는 두가지 기운이 있었다. 그가 새 로 만들어 그 자체가 된 광한신공. 광한신공의 기운은 영기를 품어 그의 영혼자체가 되었고 신통력을 품었다. 육체가 스러져도 광한신공이 있으 면 그는 자아를 유지한체 천지간을 자유로히 움직일 수 있다. 그 영기가 하늘로 승천하면 곧 그것이 신선이었다. 또 하나의 기운이 있었다. 그것은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이었다. 과거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생겨난 것이고 혈존 백가량의 영혼을 부정하면 서 사라졌다고 느꼈던 기운이다. 그것이 몸 속에 잠들어 있다가 질투라 도 하듯 광한신공과 대항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백이충은 두 기운을 바라보되 어찌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기운 을 통제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두 기운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두 기운은 의지를 가 진 듯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를 맴돌았고 곧 기쁜 듯이 서로의 몸을 꼬았다. 두 기운이 밀 착되었고 심한 반발력이 있었다. 극한 반발력. 배척하는 기운.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기운이었다. 백이충은 그 반발과 배척을 그대로 지켜보았 다. 둘 다 그였기 때문이다. 아수라독존마공과 광한신공이 배척하며 싸웠다. 아수라독존마공은 마공 의 최고봉답게 독한 기운을 뿜으며 으르렁 거렸고 광한신공은 아수라독존 마공을 정화하겠다는 듯이 밝은 빛을 내뿜었다. 어떤 때는 광한신공이 어떤 때는 아수라독존마공이 유리한 고지를 겸하며 서로 엉키고 물어뜯었 다. 둘은 천적관계의 두 마리 독사와 같았다. 어느순간 서로의 기운이 묘하게 닮아가기 시작했다. 광한신공도 아수라 독존마공 못지않은 독한 기운을 뿜어내었고 아수라독존마공도 광한신공과 같은 밝은 빛을 내뿜었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했고 극성의 기운을 내뿜 었으며 그러다가 서로의 기운을 닮아버렸고 어느 순간 어느것이 아수라독 존마공이고 어느 것이 광한신공인지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내가 아니고 네가 네가 아니다.- 아수라독존마공의 혼돈구결이 꿈틀거리며 광한신공과 자신의 구분을 지워 버리기 시작했다. -천지간의 정의는 이름을 '인식'하면서 의미가 부여된다. 진리는 사물을 인식하는 본인의 '인식'에서부터 생겨난다.- 광한신공이 아수라독존마공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배척하던 두 기운이 묘하게 닮아가기 시작했고 묘하게 같이 움직 이기 시작했다. 둘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더니 마침내 하나처럼 움직였고 그리고 하나가 되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이면 어떻고 광한신공이면 어떠랴?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이루어졌거늘." 백이충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격한 깨달음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그는 깨달음 속에 전율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나이다. 혈존 백가량의 영혼을 뒤집어 쓴 백이충 도 나이고 광한신공에 매달리던 나도 나이다.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을 사랑하고 속세에 미련이 많은 나도 나이다." 아수라독존마공과 광한신공이 합해지자 백이충의 머리 속으로 많은 기억 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 혈존의 영혼이 쪼개 져 다른 곳으로 가면서 사라졌던 기억들. 혈존 백가량의 기억들이 무수 히 머리 속으로 입력되기 시작했다. 혈존 백가량의 삶도, 혈존 백가량의 인격도 하나로 녹아 들어왔다. 혈존 의 영혼을 뒤집어 썼을 때의 백가량도, 그리고 혈존처럼 변해가며 자아 에 대해 고민하던 백이충의 인격도 들어왔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스스 로 새로이 만들어내었던 새로운 백이충의 인격도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수라독존마공을 완성했을 때의 백이충의 인격과 기억도 머리 속 으로 들어왔다. 혈존 백가량이 백이충에게 말했다. 너는 백이충이 아니다. 백이충은 웃 으며 말했다. 너도 나이고 나도 나이다. 너는 나의 과거이고 나는 나의 현재이다. 미래의 나는 또다른 모습 일 수 있다. 혈존 백가량은 웃으며 백이충에게 동화되었다. 자신에 집착하는 백이충이 말했다. 나는 백이충이다. 혈존 따위의 악마 가 아니다. 백이충이 웃으며 말했다. 갈등하는 너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다. 너는 나의 과거이고 나는 나의 현재 모습이다. 미래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도 동화되었다. 수많은 모습이 나타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나타났던 인격의 백이 충도 나타났고 어린 애 시절의 백이충도 나타났다. 천하를 피로 물들이 려던 혈존 백가량도 나타났고 악산산을 순수하게 사랑하던 백가량도 나타 났다. 백가량은 하나가 아니고 백이충도 하나가 아니었다. 둘은 수많은 존재로 나뉘었고 그 모든 존재가 지금의 백이충의 여러 단면이었다. 모 두가 지금의 백이충을 이룬 일부분이었다. "혈존 백가량이면 어떤가? 백이충이면 어떤가? 나는 나인 것을. 아기가 어린아이가 되고 어린아이가 소년으로 청년으로 변하고 청년이 장년이 되 고 노인이 된다.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이 변하고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 가 틀리다. 전생의 내가 있고 현생의 내가 있으며 후생의 내가 있다. 사 람의 인생은 끊임없는 윤회의 흐름 속을 헤엄치고 다닌다. 혈존 백가량 으로 살았고 백이충으로 살았으며 또한 미래의 누구로 살지 모른다. 그 모두가 나이고 또한 모두가 내가 아니다." 백이충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깨달은 자의 미소였다. "나란 정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내가 나일까? 지금 의 내가 나일까? 아니면 미래에 되고 싶은 내가 나일까? 결국 진리는 하 나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모두 나인 것을. 혈존 백가량도 나. 백이충도 나인 것을 어이하여 구분하고 배척하고 지우려 했단 말인가?" 백이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미도인이 간 것을 아나 백이충은 결 코 자미도인을 찾지 않았다. 자미도인은 그에게 앞길을 알려준 것만으로 많은 것을 베풀었다. 어째서 그동안 광한신공의 완성을 거부만 하려고 했던 것일까? 깨달음과 등선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선계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선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속에 대한 미련 탓일 것이다. 광한신공을 완성했다면 아수라독존마공조차 그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혈존에게 그렇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기운에 자신이 당하는 자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실 백이 충의 몸에 있는 것은 광한신공도 아니다. 광한신공도 아수라독존마공도 모두 그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토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위는 무의 공간이고 어둠만이 깔려있지만 이미 각자(覺者)인 백이충에 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며 미소를 짓는 사 람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저 멀리 백이충이 있는 세계와 다른 곳에 있지만 곧 그의 바로 곁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시간을 따지지 않을 과거 속에 존재했던 인물들이지만 곧 지금의 백이충 옆에 있었다. "제자 백이충이 스승 광한선인을 뵈옵니다." 백이충이 무의 공간을 향해 절을 했다. 저 하늘 넘어 선계에 있는 광한 선인이 지금 백이충의 앞에 있었다. 허상이기도 하고 진상이기도 했다. 신선계에 존재하기도 했고 지금 백이충의 앞에 존재하기도 했다. 광한선 인은 미소를 가득 지으며 그의 절을 받았다. "제자 백이충이 스승 옥룡진인을 뵈옵니다." 백이충이 다시 그 옆의 공간을 향해 절을 했다. 그곳에도 자애스런 표정 을 지닌 도인이 있었다. 백이충에게 광한신공의 길을 일러준 옥령진인이 었다. 옥령진인 역시 득도하여 선계에 들어갔지만 자애스런 표정으로 백 이충의 절을 받았다. "후생(後生)에게 길을 열어주신 자미도인에게 감사의 절을 드립니다." 이미 백이충의 곁에 사라져 선계로 들어섰던 자미도인 역시 그의 앞에 있 었다. 선계에 있지만 백이충이 인식하면 자미도인 또한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이 선인이 아무리 멀리 시공간이 떨어져 있어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이유였다. 백이충은 모든 것을 깨닫고서야 자미도인이 바로 봉황곡의 창시자인 것을 알았다. 자미도인이 말한 것이 바로 만상건곤심결의 이치였다. 불노장생을 연구하는 봉황곡. 봉황곡이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 시조인 모산파의 자미도인이 불노불사의 신선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봉황곡은 자미관의 이대관주가 스승의 득도를 보고 감명받아 하산 봉황곡 에 은거하여 개파한 문파였다. 자미도인은 모산파의 제자였지만 동시에 그가 남긴 제자는 봉황곡의 개파조사(開派祖師)였다. 그는 후손을 남겨 자미도인이 남긴 것을 연구하게 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백이충을 위한 안배로 돌아왔다. 자미도인이야말로 만상건곤심결의 창시자였다. "후생에게 길을 열어주신 천무삼성에게 감사의 절을 드립니다." 이미 생을 달리한 천무삼성의 그림자가 백이충의 앞에 있었다. 그들 역 시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득도를 하지 못하고 해탈하지 도 못했지만 나름대로 도를 닦았기에 명계에서 새로운 인연을 얻어 환생 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쉽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백이충은 선계에서 얻을 수련의 기쁨을, 깨달음의 기쁨에 전율할 정도의 쾌감을 얻었다. 지금 백이충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그 누구도 측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이충은 이대로 선계를 향할 수는 없었다. 자미도인의 말대로 자신은 세속에 대한 미련이 너무나 많았다. 모든 세속의 인연에 흥미가 없어질 때쯤이나 되어야 또다시 선계의 문이 열릴 천시가 찾아오리라. 게다가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광한선인이, 옥령진인이, 자미도인 이 남긴 안배였던 모든 것. 천하의 파멸을 막을 사명이 그에게 있었다. "진혈존도 바로 나 자신인 것. 나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었던 것. 그러나 결코 피해서는 안될 것." 백이충은 이대로 돌아가야 함을 알았다. 아마도 이제 세속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면 이백 년 정도가 지나가기 전까지 다시는 이 세계에 발을 들 이지 못하리라. 그리고 이백년 뒤에 선계에 오를 때야 반선계(半仙界)의 통로를 또다시 밟게 되리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얼마나 이곳에서 참수하고 있었는지 몰 랐다. 그러나 때가 되었다. 나가야 했다. 그리고 백이충의 모습이 사라 졌다. [20560] [연재] 혈존무적-황궁의 혈존대회 첨부파일 : 등록자: 김하준(khj1234) 조회수: 322 등록일: 2003-05-23 02:06:09 본문크기: 26550 bytes <황궁의 혈존 대회> 자금성. 황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 그리고 황제가 거처하는 곳이다. 과거 이곳 자금성에 오행미궁대진이 설치되고 황제의 모습이 실종된적도 있었 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다. 지금 자금성의 문은 활짝 열려 져 있다. 자금성을 호위하는 것은 황군(皇軍)이 아니라 혈포를 입은 자들이었다. 무려 오만이나 되는 무사들이 자금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정광이 번뜩였다. 초절정 고수의 눈빛. 게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들은 한때 백도에 굴복했던 상계의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금혈존 의 수하로 들어왔다. 상황을 비롯한 상계의 거물들이 줄줄히 다시 금혈 존의 손아귀에 잡혔는데 그들이 금혈존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뇌혈존이 이들에게 혈향초를 먹여버렸다. 바로 얼마 전에 삼류무 사였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혈향초 덕에 지금 이들은 자금성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에게 철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초절정고수가 되어 자금성을 호 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금성에는 지금 무려 일백일 째 혈존대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금성의 활짝 열린 문으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허락 없이는 혈포 무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 들어간 자는 자금성 안에 존재 하고 있는 혈존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혈존탑 앞 에 버티고 있는 진혈존과 겨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금성안에는 지금 거대한 비무장이 마련되어 있다. 오행미궁대진이 깨 끗하게 치워진 황궁의 중앙광장에 급하게 설치된 비무장이었다. 비무장 이 전면에 보이는 곳에는 황제가 용좌에 앉아있었다. 아직 무사한 안색 이지만 그 얼굴은 눈에 띠게 피로해 보였다. 황제의 좌우로는 수많은 중신들이 늘어서 있었다. 학림파, 서유림, 청유 계의 중신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리고 황대장군, 서문 대원수 등의 모 습도 보였다. 백이충의 아버지인 서문구랑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모두 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비참한 안색으로 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용좌 바로 뒤에는 혈지존이 당당히 서있었다. 어찌보면 황제를 호위하는 것도 같고 어찌보면 황제를 위협하는 것도 같았다. 아직도 혈 지존은 옥룡왕의 신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혈지존이 옥룡왕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입을 열어 말하는 자는 없었다. 혈 지존이 옥룡왕이 아니라고 입밖에 내려던 자는 첫 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모조리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비무대회 사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자들. 하나같이 무림인이었다. 황궁을 장악하고 황제를 장악한 진혈존과 혈지존에 의해 자유롭게 황궁으로 안내된 무림인들이 가득차 있 었다. 무림인도 알고 황제도 알고 중신들도 알고 있었다. 오늘 혈존대회 가 일백일을 끝으로 무사히 끝난다면 진혈존은 고금제일인으로 인정받고 옥룡왕에게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을 것이며 옥룡왕이라 자처하는 혈지존은 황제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을 것임을. 비무대의 좌측에는 백도의 고수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초 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전 패혈존과 삼마황이 이끄는 마도고수들에 의해 철저히 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세력을 보완하고 흩어진 모든 백도가 뭉쳤기에 강해질대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패혈존과 삼마황은 너무나 강했다. 특히 진혈존에게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을 일부 전수받 은 패혈존을 감당할 고수들이 백도에는 없었다. 처참한 패배를 뒤로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몸을 피해 재기를 노렸던 백도 맹이었지만 혈존대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혈존대회가 일백일을 끝마친다면 황실과 무림뿐만 아니라 천하 전체가 진혈존의 손안 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원이 죽을 각오를 하고 비장한 눈빛 을 하며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할 뿐 이었다. 자금성에 온 일천의 백도 고수들은 백도에서도 고르고 고른 고수들만이었 다. 적어도 일파의 장로나 장문인급. 백도맹의 주요인사와 구파일방, 오 대세가가 모두 참석했다. 신비삼패도 참석했고 승룡곡의 고수와 환우비 령의 고수도 참석했다. 오늘 모인 백도 고수들로서도 진혈존의 혈존탑을 무너트리지 못한다면 백도의 재기는 영원히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진혈 존 앞에 나서서 일장을 버텨내는 고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천년마교의 고수들이 몰려 있었다. 천마, 만사지존. 그리 고 마도의 무수한 고수들이 대거 북경까지 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년마교는 멸망했을 테니까. 조용히 세력을 키우려던 천년마교에 뇌혈존이 혈향초에 중독된 삼만 용병 들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무수한 고수가 죽었고 쌍방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뇌혈존은 눈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혈향초로 언제든지 하루아 침에 수만의 고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마와 만사지존은 쓰러지는 천년마교의 고수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천마와 만사지존이 천년마교의 세력을 이끌고 혈존대회에 참석한다는 조 약아래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다. 말이 조약이고 협상이지 천년마교의 일 방적인 굴복이라 할 수 있었다. 천마와 만사지존은 죽일듯한 눈빛으로 비무대회의 중앙에 있는 진혈존을 노려보았지만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있 었다. 도전을 할 수는 있으나 천마와 만사지존이 패한다면 천년마교는 앞으로 진혈존에게 다시는 도전하지 못할 비참한 패배를 당하는 꼴이 되 는 것이다. 또 다른 한쪽에는 금혈존에게 제압당했던 상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있었 다. 그들의 뒤에는 금혈존을 배반했던 현황방의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 은 금혈존에게 다시 잡혔고 오늘 진혈존의 영광을 증명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 강제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현실을 보기 싫다는 듯 두 눈을 꼭 감 고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장님이 되고싶어 하는 태도였다. 천하십대거부가 모두 모였다. 또한 부로서 명성을 떨친 자들도 모두 모 였다. 대상인, 대지주, 대부호가 모두 모여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을 끝으로 그들은 모든 부를 진혈존에게 털릴 것이고 앞으로 천하의 상권은 진혈존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상거래를 하기 위해서 는 진혈존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반항은 있을 수 없었다. 반항 은 바로 상계의 멸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역시 다른 한쪽에는 일그러진 얼굴을 한 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하 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조건아래 금혈존에게 포로로 끌려오다시 피 한 변황동맹의 수뇌들이었다. 살막의 막주, 철혈마궁의 궁주, 그리고 달라이 대라마도 있었다. 금혈존은 귀향하는 그들의 앞을 단신으로 가로 막았고 변황동맹의 수뇌들을 하나같이 삼초를 넘기지 않고 쓰러트렸다. 심지어 법존과의 대결이후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던 달라이 대라마조 차 금혈존에게 오초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은 변방의 황군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위협아래 다시 황도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나마 변황의 제자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향했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포로 비슷한 상태로 머리를 숙이고 있는 변 황동맹의 수뇌들. 그들은 진혈존이 혈존대회를 무사히 끝마치면 그의 발 아래 엎드려 변황이 영원히 진혈존에게 충성할 것이라는 맹세를 해야했 다. 그들은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진혈존이 직접 변황의 씨를 말릴 테니까. 뇌혈존을 배반하고 심산에 숨었던 천뇌교의 고수들도 모조리 끌려와 이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저항할 수 없었다. 뇌혈존은 천년마 교를 치고 남은 용병들을 풀어 천뇌교의 고수들이 숨은 계곡을 포위했고 협박했다. 천뇌교의 남은 고수는 수백에 불과했고 그들을 포위한 자들은 수만이었다. 적안미부는 뇌혈존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뇌혈존은 적안 미부가 없이도 자유스럽게 혈향조를 재배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도 혈존대회가 무사히 끝나는 대로 적안미부는 뇌혈존에게 비참하게 죽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천뇌교의 고수는 내키지 않지만 뇌혈존의 밑에서 진 혈존에게 충성해야 될 것이다. 또다른 한쪽에는 천년마교에 소속되지 않은 마도의 고수들이 몰려있었 다. 그들은 어떤 세력에 소속되지 않았다. 얼마전 흑련에 가입했던 자들 이 대부분이고 신비삼패에 의해 거의 해산된 자들이었다. 그들도 중원의 무인이라는 이름하에 대거 북경에 몰려들었고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소수들만이 자금성에 들어왔다. 또 다른 한쪽에는 일천 혈무영과 일백마제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이충이 진혈존에게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얼굴가득 살기를 내뿜고 진혈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일천 혈무영을 이끄는 혈무오미의 얼굴은 마치 나찰과도 같았다. 낭군을 잃은 그녀들의 얼굴은 오직 복수심밖에 존재하 지 않았다. 일백마제도 혈무오미를 호위하듯 같이 있었다. 호황부의 살아남은 자들도 혈무영과 같이 있었다. 천외구기가 커다란 부 상에도 불구하고 혈무오미와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당장 진혈존에게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는 듯 했다. 호황부가 황 실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금성 밖으로 완전히 쫓겨난 것이다. 게 다가 황제와 황족들의 생명이 모두 진혈존과 그 수하들에게 잡혀 있었 다. 호황부가 치를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혈존대회는 일백일간 계속 되었다. 진혈존은 선포한 그대로 자금성 한가 운데 비무대회 위에 혈존탑을 세웠고 그 앞에 앉았다. 혈존탑이 일백일 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천하에 진혈존을 거역할 존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진혈존은 태상황으로서 황궁과 무림, 심지어 변황까지 정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성격상 천하를 파멸시킬지도 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인세지옥이 펼쳐질지도 몰랐다. 진혈존은 일백일동안 끊임없는 도전을 받았다. 진혈존을 이기고자 덤비 는 것이 아니었다. 혈존탑이 인정받는 것을 도저히 용납못해 무수히 많 은 무림인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진혈존에게 덤볐다. 일파의 종사도 있고 무림에 이름난 협객도 있었다. 한 지역의 패자도 있었고 수십 년전 부터 명성을 떨친 고수도 있었다. 은거한지 오래된 기인도 있었고 수십 년 폐관만 했던 고수들도 있었다. 이십년의 평화는 많은 고수들을 만들어 내었고 또한 혈존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혈존의 부활을 믿는 자도 별로 없었다. 진혈존은 그들 모두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도전자 모두는 일장을 받아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진혈존은 일백일간 단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 비무를 강행했고 비무대회 전체를 피로 물들이며 승승장구했다. 그것은 비무가 아닌 일방 적인 학살이었다. 일백일 내내 수천 명을 상대로 차륜전법에 가까운 상 태로 싸웠음에도 진혈존은 조금의 피로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비 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 질릴 정도였다. 일백일 동안 수천 번에 가까 운 비무로 진혈존은 비무대회 전체를 수천 명의 피로 빈틈없이 붉게 물들 인 것이다. 진혈존의 눈이 비무대회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은 자신에게 도전자 가 없느냐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혈존대회에 참석했던 모두가 그의 시 선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다. 그는 진정 악귀 같은 자였다. 어느 누구 도 일대일로 그와 겨룰 수가 없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백도의 대협들, 혈존이라도 무림지존으로 용납하는 마 도의 마두들. 하나같이 스스로 무적이라 착각하던 고수들. 그들 모두가 진혈존에게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분노만 가지고 하루에 백명 이상 도전 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도전을 진혈존은 받아주었다. 그리고 이 십 년 사이 희석된 혈존이라는 공포를 천하에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성공 했다. 또한 진혈존 역시 가짜일 거라는 인식 또한 완전히 바꿔나 과거의 혈존보다 더 악마같은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피향기가 자욱하자 오십일 정도 될 쯤에는 하루에 도전자가 열 명 안팍으 로 줄어들었다. 그때는 적어도 한 지방의 패주, 스스로도 남들도 무적이 라고 인정하는 자들만이 도전했다. 하지만 그들도 일장을 받아내지 못했 다. 패배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단 한수를 막아내지 못하고 천하에 명성과 협명이 자자한 고수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칠십일 정도 되자 하루에 한 명 정도 도전자가 나왔다. 한파의 장문인, 일파의 종사급, 천하에 야심을 가진 자들이 이름을 떨칠 절세의 기회라 며 찾아왔다. 진혈존이 자신에게 일초를 버티는 자는 살려주겠다는 말에 이름을 떨치고자 찾아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혈존탑의 제물이 되었다. 열흘 전부터는 진혈존을 상대하겠다고 제대로 나서는 자도 없을 정도였 다. 진혈존은 너무도 확실하게 무림인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굴복보다 는 죽음을 자처하는 무림인들이 더 이상 진혈존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돌로 만들어졌던 혈존탑은 피로 물들고 인육에 물들 어 이제는 혈골탑(血骨塔)이 되었다. 드디어 혈존대회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진혈존의 명으로 삼마황 삼혈 존이 수하들과 혈향초에 중독된 부하들을 이끌고 협박과 위협으로 천하의 모든 세력을 혈존대회에 초대했다. 혈존탑의 완성과 동시에 태상황으로 선포되는 것을 축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진혈존의 천하군림을 증명하 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시키기 위해 중원의 모든 세력은 물론이고 고향으 로 돌아가던 변황의 지존들마저 다시 끌어온 것이었다. "이제 도전자가 없는가? 혼자서 못한다면 합공을 해도 좋다." 진혈존이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천하에 누가 자신에게 도전하겠는가 하는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이제 진혈존에 대한 두려움을 천하 모두 가 알았다. 감히 진혈존의 일장을 막아내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있는 자 들은 지금 혈존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자들뿐이었다. 이들이 침묵한다는 것은 천하가 진혈존에게 굴복한다는 완벽한 증명과도 같았다. "크흐흐.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네 놈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겠 다." 천년마교의 진영에서 두 명이 훌훌 떨어져 내렸다. 천마와 만사지존이었 다. 천년마교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든 참아내려 했다. 그동안 가공할 진 혈존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자신들은 진혈존의 적수가 못된다고 느꼈 다. 청마산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천마는 진혈존의 비웃 음 섞인 눈초리를 기어이 참아내지 못했다. "우리들이 혼자서는 네 놈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함을 안다. 하지만 우리 가 만들어 낸 것은 일심혼원공이었다. 그것은 여럿이서 공격해야 진실한 위력을 낸다. 네 놈이 진정 혈존무적을 이룩하려 한다면 우리 둘이서 펼 쳐내는 일심혼원진을 막아내어라." "흐흐. 승낙한다. 헌데 청마산에서 칠대천마와 칠마황이 모두 덤벼도 이 기지 못한 것을 오늘은 이길 수 있다는 건가?" "크윽. 본좌는 천년마교의 교주이다. 네놈을 감당할 수 없다면 차라리 굴복하느니 네놈과 싸워 죽겠다." 천마가 이를 갈며 말했다. 눈앞의 진혈존은 진짜 혈존 백가량이었다. 그 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천년마교의 교주 역시 혈존과는 백년 내내 경쟁 자요 숙적으로 싸워온 천마였다. 그에게 당해 한때 죽었고 혈마전혼대법 으로 되살아나 꼭두가시 역할과 감금생활까지 했던 천마였다. 혈존 못지 않게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겪었다. 참아야 한다고, 혈존의 밑에서라 도 천년마교의 생존을 이어가야 한다고 속으로 외쳤지만 결국 그는 차라 리 영혼마저 소멸하면 소멸되었지 절대 혈존에게 머리를 숙일 수가 없었 다. "일심혼원공. 합" 천마와 만사지존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들의 몸에서 묵빛과 혈광이 쏟아 져나왔고 그들의 몸을 가렸다. 몸이 사라지고 오직 마공과 사공만이 남 았다. 몸을 액체로, 기체로 만드는 만사지존공의 기이한 사공이 천마지 존공과 합일하여 기이한 위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두 개의 새파란 강기만이 보였다. 게다가 그것은 합일되어 한 명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크크. 기사(奇事)가 아닌가? 둘의 몸이 하나로 융합하다니. 가히 일심 혼원공의 위력은 놀랍구나. 두 무공이 섞여 위력의 증폭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두 육체를 하나로 합칠 정도라니. 허나 본좌에게는 어 림도 없는 일. 일초를 받아낸다면 본좌의 패배를 인정하마." "무인은 말로 승부하지 않는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합해 만들어진 강기덩어리 인간의 몸에서 끔찍한 기세 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있는 주변으로 비무대회장의 바닥에 쩡 하니 금 이 가기 시작했다.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천년단목(千年丹木)으로 만 들어진 비무대회의 바닥이 버티지 목하는 것이다. 그 일렁거리는 강기의 덩어리는 아수라파천황이 펼쳐졌을 때의 파멸지기와 흡사했다. 천마와 만사지존의 혼합하여 만들어진 인강형태의 강기가 진혈존을 덮쳐 왔다. 그가 움직이는 뒤를 따라 주위의 시설과 바닥이 단순히 뿜어져나 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먼지로 화해 스러졌다. 단지 보기만 해도 끔 직할 것 같은 강기였다. 마공과 사공이 합해져 진화한 최종의 형태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보고있는 것이다. (천마와 만사지존이라면...) 자금성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일백일 동안 진혈존의 힘 을 보고 그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천하 전 체가 진혈존의 일초지적도 안된다는 현실만은 거부하고 싶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천마와 만사지존이 진혈존의 손에서 단 일초를 버텨주는 것 이었다. 그러기만 한다면 그들도 미래에 희망을 품고 현실을 견딜 수 있 을 것 같았다. 지금 상태로 완벽하게 천하 전체가 진혈존에게 모욕당하 고 짖눌린체 혈존대회가 끝난다면, 천하가 진혈존의 일초지적도 못된다 는 사실만이 증명된체 끝난다면 그들은 다시는 희망을 찾지 못하고 절망 속에 허우적 거릴 것 같았다. 진혈존은 그를 비웃으며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지난 백일동안 그랬던 것 처럼. 그는 모든 도전자에게 손을 단지 한번 들어주었을 뿐이고 그 이후 도전자의 몸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단지 한번 손을 들 었을 뿐이다. 소리도 없고 기세도 없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시무시 한 기세로 돌진하던 천마와 만사지존의 강기인간이 갑자기 몸을 우뚝 세 워 동작을 멈추었을 뿐이다. 그래도 지난 일백일의 다른 도전자들처럼 수만조각의 고기와 선혈로 터져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저히 뿜어대 는 기세가 스러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머리부터 가루가 되어 허공 속으로 산화하고 말았다. 혈존을 제외했던 칠대천마. 천하를 풍미하던 칠대천마의 수뇌이던 천마와 만사지존이 진혈존의 일초 를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안 그래도 가장 먼저 죽여 없애려 했다. 천년마교는 패혈존에게 맡길 것이다." 안그래도 고요하던 자금성 안이 더욱 고요해졌다. 그래도 혹시 하던 기 대는 처참히 짓밟혀졌다. 비무대회장 위에 있는 것은 이미 인간이 아닌 마신인 것이다. 천마와 만사지존이 일초 상대도 안되거늘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모든 무림고수들, 모든 대상인들, 그리고 황제와 중신의 얼굴이 절망으로 얼룩졌다. "백도에서 도전하고자 하오." 백도 쪽에서 일백에 가까운 자들이 한꺼번에 비무대회에 내려섰다. 무성 종리연, 모용풍, 광천도장, 불학대사 등, 백도맹주와 구파일방의 장문 인,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나섰다. 천무삼성의 제자격인 승룡곡의 살아남은 천무호정위, 그리고 환우비령의 최고수뇌들, 검후 매옥선, 봉 황공주, 백결개등도 모두 나섰다. 백도의 최강 고수 서열 일백 팔위 까 지의 고수들이 몰려든 것이다. "일대일로서는 진혈존을 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오. 그러나 백도는 굴복 할 수 없소이다. 혈존탑에 맹세를 할 수 없소이다. 면목은 없으나 이왕 합공을 감당한다 하셨으니... 백도를 굴복시키려면 우리들이 펼치는 백 팔나한진을 감당하시오."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이 야말로 진정한 백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혈천마궁 시 절 혈지존에 의해 소림사의 장로로 구성된 십팔나한진이 파괴된 적은 있 어도 백팔나한진이 파괴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백팔나한진은 전 무후무한 백팔나한진이었다. 일단 그 구성원이 백도 최강의 정예들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소림사 장 문인보다 못한 자가 없었다. 백 팔명의 백도 정예고수들 중에 반 이상이 백도 십대절학의 하나 이상을 익힌 자들이었다. 대성한 자는 드믈지 몰 라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자들은 많았다. 과거라면 혼자만으로 천 하를 종횡해도 무적 소리를 들을 자들만 모인 것이다. 게다가 모용풍이 라면 능히 십혈존의 하나와 겨룰만한 존재였다. 소림사의 장로들 일백팔명이 있어 백팔나한진을 펼친다 해도 지금 구성원 이 펼치는 백팔나한진의 반의 반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지금의 백팔 나한진은 천무삼성의 혜경성승이 갈고닦아 모든 약점을 보완한 완벽한 진 법이었다. 진혈존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들이 펼치는 백팔나한진을 벗 어나지 못하리라. "크흐흐. 마지막 발버둥인가? 승낙한다. 덤벼라." 일백 팔명의 백도 절정고수들이 진을 형성하며 진혈존을 가두었고 진혈존 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백팔나한진이 완성되고 안과 밖에서 원을 그리며 회전을 시작했다. 혜경성승이 만든 백팔나한진은 소 림의 절학이 아닌 십대절학을 사용해도 그 연계성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 무상의 절학이었다. 일백 팔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미증유의 거력이 바로 한 곳, 진혈존을 향해 집중되었다. 백팔나한진에 갇혔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상 대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진혈존은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력이 진혈존을 내리 누를 때 진혈존 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그것은 백도의 전설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콰르르릉! 그 넓은 비무장이, 그것도 강철보다 단단하고 대나무보다 유연하다는 천 년단목으로 만들어진 비무장이 지진을 만난 듯 진동했다. 폭발로 인한 굉음이 비무장에 모인 수많은 고수들의 귀를 멍멍하게 했고 충돌로 생긴 돌품이 사람들의 옷자락을 마구 휘날려 버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일격. 그것도 어떤 수단이지조차 모를 단순한 한수. 그저 손을 잠깐 들 어올리는 단 한동작에 백도의 전설이 깨져버렸다. 안쪽에 위치하던 백도 고수들의 반이 피를 꾸역꾸역 흘려내며 정신을 잃었고 외곽에 위치하던 나머지 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상황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고 정신없이 뒤로 몰라섰다. 백팔나한진은 그 위력을 드러내 보이기도 전에 완전히 와해되었고 반은 중상을 입어 정신을 잃었으며 나머지 반은 내력을 끓어올릴 수 없을 정도 의 깊은 내상을 입었다. 일백팔명의 절정고수가 펼친 백팔나한진으로도 진혈존의 일초를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크크. 혈존후(血尊后)의 부탁대로 너희들의 목숨만은 붙여놓겠다." 진혈존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비무대 중앙에 세워진 혈존탑을 힐긋 보 았다. 혈존탑은 실재로 사람들이 들어가 생활할 수 있는 삼층의 탑이었 다. 그리고 삼층에는 창문 밖으로 한 미인이 파리한 얼굴을 드러낸체 있 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미인. 무림칠미의 하나인 옥수비연 금혜연 이었다. 금혜연은 혈존대회가 끝나 진혈존이 태상황으로 등극하는 순간 혈존후가 되어 진혈존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높은 자의 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혜연에게는 죽기보다 실은 일이었다. 금 혜연이 진혈존의 청혼을 승낙한 이유, 그것은 진혈존이 백도의 고수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한 몸을 걸어 천 하 백도를 살리려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그녀의 낭군인 백이충을 죽인 원수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두팔을 추욱 늘어트린 백도고수들의 얼굴에 비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러나 여기서 진혈존에게 덤벼들어야 아무런 성과도 없다. 그저 자살과도 같은 개죽음일 뿐이다. 금혜연의 희생만 헛되이 할 뿐이다. 분하더라도 참고 미래를 기약해야 했다. 그것이 영원히 오지 않는 희망을 기다리는 미래라도. 백도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와 부상입고 쓰러진 사람들을 데리고 갔 다. 진혈존이 그들을 오만하게 바라보며 변황의 고수들 쪽을 살펴보았 다. 달리이 대라마는 감히 그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어 얼굴을 바닥으로 향했다. 변황동맹의 고수치고 진혈존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혈수라는 아수라보다 더한 악마라는 사 실만이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진혈존의 시선이 백도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비참한 모습을 비웃고 있을 때였다. 신비삼패의 자리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진혈존. 합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 신비삼패 역시 도전해보고 싶소." "크흐흐. 생명이 안전하다고 하니 나서보고 싶은가? 얼마든지. 너희 버 러지같은 것들도 살려줘야 나의 노예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언제 라도 죽일 수 있는 너희 같은 하찮은 놈들을 살려 혈존후를 얻을 수 있다 면 커다란 이득이지." 진혈존은 쳐다보지도 않고 신비삼패를 비웃었다. 신비삼패는 아무런 말 없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의 목적은 진혈존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진혈존이 너무 강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혈존이 결코 신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단 일초만 막아도 마신에 가까운 능력 을 보여준 진혈존을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 다고, 백도에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다고 신비삼패는 굳게 마음먹었다. 천상검제와 십이검수가 나섰다. 봉황무후와 봉황곡의 팔대호법, 팔대장 로가 나섰다. 독문쌍마와 독문의 숨은 힘 사대독로가 나섰다. 그들은 수 치와 오욕을 무릅쓰고 서슴없이 힘을 합했다. 진혈존을 상대로 일대일의 결투를 벌이겠다는 자는 이미 천하에 없었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 용일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만상건곤심결이 있었다. 천검회는 봉황곡과 결합함으로서 천 검회의 갈라진 검류들을 만류귀일(萬流歸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만 상건곤심결로 지금 신비삼패의 모든 힘을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검기 가 하늘을 찌르고 거기에 봉황신공의 힘이 가해졌으며 지독한 독기마저 풍겼다. 삼재(三才)가 합일(合一)되어 일원(一元)의 힘으로 거듭 태어 났다. 흑련에서 백이충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강하고 깊어진 무학이었 다. 그 힘은 능히 상단전의 무학에 버금갔다. 이는 만상건곤심결 자체가 자미도인이 남긴 상단전의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진혈존도 진지한 자세로 신비삼패의 삼재일원검진을 바라보았 다. 강기와 독과 검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진혈존을 긴장시킬 정 도는 아니었다. 다만 기특하다는 듯 진혈존의 고개를 미미하게 위아래로 끄덕이게 했을 뿐이다. "삼패합일(三覇合一), 천위무적(天威無敵)!" 신비삼패가 뭉친 힘이 하나로 뭉쳐 하늘의 위력을 발하니 곧 무적이리 라. 그 외침과 같이 노도같은 힘이 진혈존을 공격해왔다. 수천개의 바늘 끝 같이 예리한 기운. 무엇이든 녹여버릴 것 같은 강력한 독. 그리고 부 딪치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같은 웅후한 강기. 전혀 합쳐질 수 없을 것 같은 다른 성격의 세 가지 힘이 하나가 되어 진혈존을 압박했다. "가소로운 것들. 개미는 아무리 많아도 결국 개미인 것을." 진혈존이 다시 조용히 손을 들었다. 비무대회에 모인 뭇 관중들의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진혈존이 손만 들었다하면 백팔나한진이건 전설상의 천마이건 피박살이 나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크큭. 너무 재미가 없으니 너희에게 가능성을 주지. 내게는 필요없는 초식이건만 걸맞는 초식으로 상대해주지. 아수라파천황!" 그 순간 처음으로 진혈존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파멸지기가 솟아 나왔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진정한 힘인 파멸지력.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이 극성으 로 나타나는 혼돈지력을 일으키기 위한 힘이었다. 아수라파천황이 일으 킨 파멸지기가 신비삼패가 만들어낸 삼재의 힘과 부딪쳤다. 쿠르르릉. 그토록 장엄하고 강하게 보였던 신비삼패 삼재의 힘이 파멸지기에 허무하 게 허물어졌다. 파도에 밀린 모래성처럼 쓰러졌다. 화염앞에 놓인 장작 불처럼, 바다에 던져진 소금처럼 사라져버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 다. 신비삼패의 고수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때 바로 그들의 앞에서 파멸지 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힘은 신비삼패의 내력을 모조리 파괴하고 사 라졌다. 천상검제와 봉황무후는 서있을 힘도 없어 휘청거리다가 주저앉 았다. 신비삼패의 고수들이 저마다 맥없이 쓰러지자 진혈존이 광소를 터트렸 다. "크하하하. 드디어 한 시진만 지나면 일백일의 시간이 끝난다. 그 이후 에 본좌에 반항하는 자들은 구족을 멸하고 관계된 자 모두를 죽여버리겠 다. 아직도 본좌에게 도전할 자가 또 남아있는가?" "진혈존. 우리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들을 죽이거나 네가 죽거나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쓰러진 신비삼패의 뒤로 나타난 자들은 바로 혈무영의 혈무오미와 일백마 제였다. 혈무오미가 일천 혈무영을 이끌고 나서자 그녀들과 관계있는 북 해빙궁주와 남해 해왕군도주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고있는 일백 마제도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다. 일백마제와 혈무오미가 나서자 호황부의 고수들도 나섰다. 천외구기가 나섰고 호황부의 고수들도 나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흐르 고 있었다. 이대로 희망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진혈존에게 반항이라도 하고 죽자는 마음이었다. 신비삼패도, 백도고수도 혈무영과 호황부 고수 들을 따라 우르르 나섰다.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얼굴이었다. "물러가라." 이천에 가까운 자가 진혈존을 향해 다가오자 삼혈존이 노해 소리를 질렀 다. 금혈존, 패혈존, 뇌혈존. 이 셋은 진혈존에게 아수라독존마공의 완 성된 파멸지력과 혼돈지력을 나누어받아 진혈존을 제외하고는 무적이었 다. 그들도 상단전 초입에 있는 고수였다. 혼자서 천하를 상대할 수 있 는 강자들이었다. 이천이라도 이 셋의 기세에 눌려 버렸다. "신성한 대회를 욕되게 할 셈이냐? 감히 혈존탑을 더럽힐 셈이냐? 아무 리 혈존후의 부탁이 있더라도 더 이상 진혈존에게 무례를 범하면 몰살시 켜 버리겠다." 셋이 뿜어대는 압도적인 마기가 이천의 군웅을 내리눌렀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진혈존에게 대항할 자가 천하에 없는 지금 차라리 일방적으로 몰살당할지라도 맞서 싸워 죽 을 결심이었다. 그때였다. 진혈존이 흠칫 몸을 움추린 것은. 그리고 삼혈존의 얼굴이 뻣 뻣하게 굳어진 것은.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모두 물러서시오. 과연 그가 진혈존이라 자처하라 수 있는지 내가 시험 해 봐야겠소."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또한 그리운 목소리가 장내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의 귀에 울려 퍼졌다. 이미 죽었다고 소문났던 백이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0561] [연재] 혈존무적-최후의 결전 첨부파일 : 등록자: 김하준(khj1234) 조회수: 360 등록일: 2003-05-23 02:10:02 본문크기: 25993 bytes <최후의 결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홀연이 모습을 나타낸 자는 바로 백이충이었 다. 그 순간 엄청난 환호가 장내를 휩쓸었다.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줄 기 빛에 대한 환호였다. 절망 속에 피어난 희망에 대한 환호였다. 죽음 을 앞둔 자가 생명의 끈을 발견하고 지르는 환호였다. 그리고 죽었던 낭 군이 돌아온 데에 대한 환호였다. "지존." 백도의 고수들이 일제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릅을 끓었다.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 그리고 백도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출현이었다. 백도맹의 고수들, 승룡곡의 고수들. 그들은 존경 의 눈빛을 빛내며 머리를 조아렸다. "주공." 모용풍을 위시하여 환우비령과 신비삼패의 고수들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허리를 숙였다. 마음으로 감복한 주인이 죽지않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 마치 황제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호황부주." 황제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뭇 중신들의 표정이 어리벙벙해졌고 서문 대원수와 황 대장군, 서문 구랑 장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황제 지척에서 백이충을 향해 환호를 하며 움직였지만 혈지존은 너무 놀라 그들의 반응 을 제대로 제지도 하지 못했다. "공자." 비무장에 있던 혈무오미가 마치 아기 새가 어미의 품을 찾는 것처럼 백이 충에게 달려들었다. 혈무영과 호황부 전체가 흐믓한 미소를 띠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백이충을 환영했다. 그렇게 이곳에 있던 수만의 인물들 이 일제히 백이충 일인의 출현에 환호했다. 백이충은 혈무오미를 한번씩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때까지도 삼혈존과 진혈존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백이충이 살아 되돌아 온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백이충 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때문이었다. "말도 안돼. 어째서 너에게 진혈존의 기운이 흐르는가?" 패혈존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진혈존에게 잔뜩 아수 라독존마공을 당하고 살아난 것도 믿기 힘드는데 놀랍게도 백이충의 몸에 서는 아수라독존마공의 기운이 진하게 풍겨 나왔다. 그리고 삼혈존은 영 혼의 공명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백이충의 몸에도 진혈존과 똑같이 혈존 백가량의 영혼이 완성되어 움직인다는 느낌이 있다는 것을. "하하. 나는 누가 뭐래도 나다. 내가 진혈존의 기운이 흐르건 광한신공 의 기운이 흐르건 내가 나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진혈존이 둘이란 말이냐? 우리의 존재를 포괄하 는 존재가 어떻게 둘이란 말이냐? 인정할 수 없다." 금혈존이 발악적인 소리를 지르며 움직였다. 그의 신형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그의 몸에서는 방금 전 진혈존에게서 뿜어져 나왔던 파멸지력이 쏟아졌다. 자아의 혼란 속에 스스로 진혈존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안정을 되찾았는데 다시 백이충에게서 강하고 완성된 백가량의 영혼의 기운이 느 껴지자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백이충을 공격해버린 것이다. "불쌍한 자. 결국은 너도 나의 피해자. 나의 분신에 불과한 자였지." 파멸지력이 백이충의 몸을 강타했다. 무엇이든 파괴해버리는 엄청난 힘. 금혈존은 이 힘으로 혼자서 변황동맹의 고수 일만을 쳐죽였다. 그리고 달라이 대라마와 다른 변황지존의 합공을 단 오초만에 패배시켜 사로잡았 다. 그런 금혈존의 파멸지력이 백이충의 무방비한 몸에 적중되었는데 자 그마한 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그 엄청난 힘이 그대로 백이충의 몸에 흡 수된 것처럼.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네 영혼을 되찾게 해주겠다. 그것이 소매의 친구인 옥향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백이충이 금혈존을 보며 그렇게 말했고 그 순간 금혈존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의 무릎이 천천히 꿇려졌고 몸을 마구 떨었 다. 육체에서 영혼이 강제로 뽑혀져 나오는 듯한 기분. 두개골을 깨고 생으로 뇌를 마구 휘젓는 듯한 기분이 금혈존에게 느껴졌다. "크아아악." 금혈존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 뒹굴었다. 하나로 융합된 영혼을 절개하여 오염된 부분을 잘라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 무리 신선의 힘을 가진 백이충이라도 그 오염된 영혼과 동질의 백가량의 기억과 인격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금 혈존의 머리에서 지난 일들이 무수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형록으로서의 뚜렷한 자각이 되살아났다. 혼돈. 혼란. 급작스런 기억의 회오리. 금혈존이 아닌 오형록은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금혈존에게서 혈존의 파편을 제거하고 그의 본래 인격을 끄집어 내는 일 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모용풍을 통해 한번 성공한 일이다. 다만 그때 처럼 여유있는 장소가 아니라 금혈존으로서의 기억조차 지워버릴 수가 없 을 뿐이다. "우와아아아." 금혈존이 맥없이 쓰러지자 군웅들이 환호를 질렀다. 그들은 백이충의 손 짓에 따라 희망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백이충의 시선이 다른 패혈존과 뇌혈존을 향했다. 둘이 주춤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찼다. 백이충의 입장에서 혈존의 영혼의 파 편을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본래 인격을 회복시켜 되살리는 것이겠지만 패혈존 뇌혈존의 입장에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인격의 파괴, 즉 현재 혈 존으로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혈존 백가량으로 물들어 그렇게 살 아가고 있던 패혈존 뇌혈존으로서는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정하게 도 백이충은 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너희들도 돌아가야겠다. 천마와 약속을 했지. 천년마교의 후계자를 돌 려주겠다고. 그리고 귀영신군 또한 동생이 기다리고 있다." 주춤주춤 두려움을 모르던 뇌혈존과 패혈존이 식은 땀을 흘리며 뒤로 물 러설 때 백이충의 방자한 행동을 지켜보던 진혈존이 참지 못하고 나섰 다. 진혈존의 뒤에 혈존탑이 있고 그 속에 금혜연이 있기에 백이충은 금 혜연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와 부딪쳐야 했다. 마찬가지로 진혈 존 역시 금혜연을 포기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마신의 경지에 다다른 그가 아직도 인간의 심성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금혜연, 악산산의 후 생때문이었다. 둘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크흐흐. 백이충. 살아났다면 어디론가 숨어 목숨을 연명할 일이지, 감 히 간 크게도 여기에 나타났는가?" 그 역시 백이충에게서 느끼는 동질의 느낌을 느꼈다. 진혈존은 백가량의 영혼의 기운과 아수라독존마공의 힘을 느끼고 긴장하여 그가 행동하는 모 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백이충의 행동이 자신이 광혈존 때 지켜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느끼고 안심했다. (그의 몸 속에 잠재해 있던 아수라독존마공이 아직도 날뛰고 있는 모양 이지. 그럼 그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한번 쳐다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생각하는 것과 성격과 인격을 모두 꽤뚫 어 볼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진혈존도 백이충만은 그 속이 어떤지 알 수 없 었다. 그것은 백이충도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있어 진혈존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도 같았다. "여기에 있을 자는 혈존탑을 허물려 하는 자이거나 혈존을 자처하는 자 이다. 너는 어떤 자이냐?" "후후.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나는 혈존탑이 천하에 불필요하다고 느끼 는 사람이다." 백이충의 대답에 진혈존은 역시 그의 몸에서 느끼는 백가량의 영혼은 자 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백가량의 영혼이 되살아났다면 저렇게 야심 없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혹은 그의 몸 속에 잠복한 아수라독존마공의 힘 때문에 더욱 그 영혼의 힘이 크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백이충 은 이미 백가량의 영혼을 완전히 지워버린 존재, 순수한 백이충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그가 느끼는 바는 정확했다. 지금의 백이충은 백이충이 면서도 백가량을 과거의 자신으로 포용한 백이충인 것이다. 즉 백이충은 지금 자기 자신의 과거와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백 장 이상 멀리 피하시오. 절대 우리 근처로 다가오지 마시오. 그의 파멸지력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 기운에 조금이라도 휩쓸 리면 나도 구할 수 없소. 그리고 내가 패한다면 더 이상 그를 거역하지 마시오. 명심하시오. 나를 제외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소." 주위 사람들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진혈존과 마주보는 백이충이었다. 진 정한 승부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아수라파천황이나 아수라멸천황이 아수라독존마공의 모든 힘을 나타내 었다고는 보지 마라. 진정한 힘은 그것이 아니니." "알고있소. 내 몸 안에 또한 아수라독존마공이 있고 그것이 나의 일부일 지니. 어찌 그 힘을 모른다 하겠소?" "헛소리. 아수라독존마공보다 위대한 마공은 없다. 나조차 그 일부가 되 지 않고 인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수라독존마공일진대 그것이 어찌 누구의 일부가 될 것인가?" 진혈존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이 세계의 것이 아 닌 듯한 이질적인 기운. 형태도 색깔도 없는 것에 사이한 기운이 서려있 어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확연히 보이는 기운이었다. "마선... 이미 그대는 마선이 되었구려." "크하하하. 그렇다. 나는 마선, 아니 마신이다. 신선이 천지를 다스리는 신이라면 나는 천지를 파괴하는 마신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 세상을 버 리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신은 아니지. 이 세계에 머물며 내 마음대로 파괴하고 주무를 마신이다." "역시... 그대 역시 나의 일부분이군. 이 속세에 대해 미련이 많은 곳도 같은 마음이겠지." 백이충은 진혈존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십 장까지 확대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백이충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지랑이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무(無)의 기운을. 공기도 바 람도 먼지도 그 아지랑이 안에서는 소멸했다. 저 기운이야말로 아수라마 공의 정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소멸되리라. 허무와 혼돈의 진정한 원류(原流)이니까. 진혈존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삼 사장 쭉 늘어났다. 그의 뒤에 있던 혈존탑의 끝이 그 기운이 살짝 닿자 접촉한 부분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듯 소멸되었다. 그 광경에 백이충이 놀라 소리쳤다. "진혈존. 앞으로 나서라. 그대로 기운을 확장하면 혈존탑까지 네 기운에 휘말린다. 소매를 다치는 것은 너도 원하지 않는 일이 아니냐?" "어째서 내가 그렇게 해야하지? 산산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네 놈 이 나에게 와라. 허나 자칫하면 산산이 거처하는 혈존탑도 네놈의 공세 에 포함된 다는 것을 명심하라." 진혈존의 기운이 다시 늘어날 기미가 보이자 백이충은 더 이상 참지 못하 고 진혈존에게 마음의 손을 뻗었다. 이미 그들에게 초식이니 육체니 하 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기세가 뻗어 나오 고 기세에 닿는 것은 그 의지에 따라 소멸하거나 파괴된다. 역시 보이지 않지만 성스럽게 느껴지는 기운이 진혈존을 향해 다가갔다. 한 눈에 성스러운 서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서기가 허무와 혼 돈의 기운에 맞부딪쳐갔다. 소리도 형태도 없이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떠한 파열음도 폭팔음도 없었지만 둘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찼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서로를 향해 뻗어나갔고 힘 겨루기를 시작했다. 둘의 마음이 접촉했고 서로를 소멸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 시진, 두 시진, 세 시진. 두 사람이 마주보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작은 동작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로 보고만 있지만 어떤 격전보다 흉험한 일이었다. 서로가 전력을 다 해 기를 뿜어대고 있기에 밀리는 자는 그 기세가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마음의 경지가 단 한끝이라도 차이가 난다면 그를 뒤엎을 가능성 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섯 사진이 지나도록 둘은 서로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 사이 보이지 않 는 두 기운은 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잠시의 방틈도 허용되지 않는 싸 움. 화려한 동작이 없으니 지루할만도 하건만 지켜보는 자들 그 누구하 나 작은 소음을 일으키지 못했다. 실로 천하의 운명이 지금 한판의 격전 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백이충이 패한다면 천하 전체가 덤벼들어도 결코 진혈존을 이길 수가 없 다. 그것은 지난 일백일 동안 진혈존이 증명했다. 또한 그는 뇌혈존이란 수하를 시켜 얼마든지 사람들을 혈향초로 세뇌, 중독시켜 무수한 고수들 을 양성할 수 있다. 진혈존이 존재하는 한 천하는 다시는 그의 손아귀에 서 자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대적할 수 있는 백이충의 승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진혈존의 얼굴에 굵은 땀이 흘러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기운이 서서히 뒤로 밀리고 있음을 느꼈다. 서로가 조금씩 자신의 기운을 감추고 상대 의 힘을 측정하다가 밀릴 때마다 조금씩 꺼내놓았다. 진혈존은 자신의 모든 기운을 다 동원했는데 백이충은 아직까지 여력이 있어 보이는 것 같 았다. 자신에게 당하고 있을 때의 백이충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수라독 존마공의 혼돈지력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무로 돌리는 혼돈지력이지만 백이충의 서기 어린 광한신공의 기만은 어쩌지 못했다. 진혈존의 혼돈지기를 서서히 압박해 가고 있음을 느끼고 백이충이 입을 열었다. "진혈존. 너 역시 피해자이다. 순순히 투항하라. 너의 본래 영혼을 돌려 주마. 네 아수라독존마공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빌어먹을." 백이충이 승리를 장담하고 말을 하자 진혈존이 나지막하게 욕을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혼돈지기를 뒤로 물리며 살짝 몸을 피했다. 세상에 마 음보다 몸의 움직임이 빠른 법은 없다. 전력을 다해 기를 돋구기는커녕 마음을 육체를 움직이는 데 분산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불행 히도 진혈존의 뒤에는 혈존탑이 있었다. 아수라독존마공의 혼돈지기를 따라가던 백이충의 광한지기가 마력에 이끌려 진혈존의 뒤에 있는 혈존탑 을 향해 몰아쳐갔다. "어엇." 백이충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그 자신이 뻗은 기 는 마음에 따라 순식간에 거둘 수 있으나 혈존탑으로 향하는 진혈존의 혼 돈지기만은 아니었다. 백이충은 설마 진혈존이 금혜연을 죽이겠다고 나 설줄은 몰랐다. 스스로 광한신공의 기를 거두어 몸을 움직인 진혈존을 공격한다면 진혈존은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가 거두지 않은 혼 돈지기가 혈존탑을 소멸시킬 것이다. 금혜연이 있는 혈존탑을. 백이충은 황급히 광한지력을 혈존탑에 두르며 방어막을 형성하여 혼돈지기에게서 혈존탑을 보호했다. "크하하.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약해 빠진 놈." 진혈존의 얼굴에서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 이외의 자신을 죽이는 기분. 그것도 자신보다 더 자신과 같은 원본. 자신의 영혼이 갈라졌던 원본. 게다가 그 원본은 자신의 모든 것인 아수라독존마공과 백가량의 영혼을 일부라고 자처했다. 그의 혼돈지기가 동그런 구슬 형태로 뭉쳐지 더니 그대로 백이충을 향해 덮쳐갔다. 백이충은 혈존탑에 머물던 혼돈지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입술 을 깨물었다. 그가 할 수 있으면 진혈존도 할 수 있으니 백이충이 바로 혈존탑의 지척에서 광한신공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진혈존도 혼돈지력 을 혈존탑의 근처에서 순식간에 거둘 수 있었다. 다만 믿지 못하는 것은 진혈존의 금혜연에 대한 진심이었다.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백이충은 진혈존이 혈존탑에 완전히 혼돈지 기를 거두는 것을 확인하고야 진혈존에게 신경을 돌렸다. 그리고 백이충 이 혈존탑을 보호하던 광한지력을 거둘 때 쯔음에는 이미 그의 몸 근처로 수많은 구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파멸지력에 혼돈지기를 쏟아 부운 구 슬. 그 하나 하나가 파괴의 힘이며 혼돈의 힘이고 허무의 힘이었다. 파 멸지력을 천 배 응축한 구슬이 백이충의 몸을 덮쳐왔다. 공간이 사라졌다. 공간이 녹아들었다. 그 안에서 허무하게도 백이충의 몸도 사라졌다. 파멸지력 속에 허무하게 녹아버렸다. 그가 있던 공간과 시간이 혼돈의 힘 앞에 맥없이 녹아버렸다. 비명조차 지를 시간도 없이. 하지만 진혈존은 신음을 내질렀다. "헛! 오히려 내가 속았던가?" 적어도 진혈존 이상이거나 동등하게 강한 자가 바로 백이충이었다. 그가 이토록 쉽게 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그의 혼돈지력에 백이충이 큰 타격을 받는 느낌을 받기는 했으나 그 느낌이 미미했다. 그가 회심의 일 격으로 구사한 혼돈지력의 구슬은 백이충의 일부만을 손상시키고 놓쳐버 린 것이다. 진혈존이 황급히 기를 퍼트려 백이충의 종적을 찾다가 눈을 부릅떴다. 허물어지는 혈존탑. 가루가 되는 혈존탑 속에 백이충이 금혜연을 안고 내려오고 있었다. 타격을 입기는 했는지 안색에 푸른 기가 돌았지만 만 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혈존의 지척에 있어 마음조이던 금혜연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금혜연은 그동안 마음 고생이 깊었는지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는지 백이충의 품에 얼굴을 믿고 기절해 있었 다. 하지만 금혜연은 백이충에게 구출된 것을 기뻐하는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히... 산산을 산산을 내려놓아라." 진혈존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지옥의 악귀가 그러할까? 두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검은 동공이 생겨났으며 입에서 꾸역꾸역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무형무색의 아지랑이 같던 기운이 점차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금혜연은 진혈존에게 있어 악산산이었다. 또한 금혜연과 결혼하고자 하 는 것은 자신이 진짜 백가량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증명절차이기도 했다. 아수라독존마공의 완성으로 혈존 백가량의 기억과 인격과 마음, 모든 것 을 되찾은 진혈존이었지만 그의 마음만은 완벽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자 신이 진짜일까 하는 두려움. 금혜연은 그가 백가량이라는 증거이자 증명 이었다. 그리고 백이충이 금혜연을 안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갑작스런 분노가 그의 이성을 잠식해 버렸다. "진혈존. 침착을 되찾아라. 이성을 잃게되면 네가 마공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공의 노예로 움직이게 된다." "크으윽.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러니 그녀를 내놔라. 내 사랑하는 산 산을 내려놓아라. 당장." "산산이 아니다. 물론 그녀의 과거가, 그녀의 전생이 산산이었으니 악산 산도 그녀라고 할 수 있으니 지금의 그녀는 금혜연일 뿐이다. 과거의 기 억으로 현재의 그녀를 묶어두려 하지 마라." "크으윽. 모른다. 몰라. 산산을 내놔라. 그녀를 잃고 과거의 나는 인간 이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혈존이 되었지. 그녀를 찾았기에 아수라독존마공에서도 인간임을 잃지 않았다. 네놈이... 내 자 아를 위협하는 네놈에게 산산을 줄 수 없다. 그녀를 다오." "줄 수 없다. 너는 역시 나의 과거. 네가 악산산을 놓쳤기에 천하의 흉 마 혈존이 태어났지. 악산산이 죽지 않았다면 천하는 지난 백년 동안 혈 존이라는 참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 또한 소매가 없다면 세 속에 머무를 수 없다. 네가 과거의 악산산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내게는 현재의 소매가 중요하다." 천하를 놓고 싸우던 대 접전은 갑자기 사랑 싸움이 되었다. 하지만 혈존 은 백이충의 과거(혈존의 기억과 인격마저 포용했기에) . 과거의 혈존이 과거의 산산을 사랑하는 환상에 지금의 금혜연을 사랑하는 지금의 백이충 이 질 수는 없었다.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라 금혜연이라는 여인 자체 가 혈존과 백이충의 자아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으윽. 죽어라. 이 놈. 죽어라. 산산을 내려 놓아라." 진혈존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백이충에게 덤벼들었다. 백이충은 금혜연 을 가슴에 안은체 침착하게 광한신공으로 진혈존의 공격을 막았다. 금혜 연을 잃고 갑자기 광분하여 악귀처럼 날뛰었지만 그 힘은 오히려 약해졌 다. 검은 기운은 무시무시한 파멸지기였지만 오히려 진혈존이 침착하게 마음으로 펼치는 혼돈지력보다 못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만큼 그의 아수 라독존마공도 흔들렸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과 검은 묵연은 백이충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 다. 반면 백이충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진혈존의 몸이 크게 떨렸다. 고 통이 서린 진한 신음을 내질렀고 끝내 일다경을 버티지 못하고 땅에 뒹굴 었다. 쓰러진 진혈존의 몸이 손끝 발끝부터 부숴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부서지는 곳으로부터 묵연이, 검은 마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네놈이... 네놈이... 내게서 산산을 뺏어가더니 무공으로도 나를 누르 려고 하는구나." 진혈존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이미 눈동자가 사라지고 온통 흑색 의 눈에 피어오르는 귀화. 동시에 그의 몸이 무수하나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의 틈으로 어둠이, 검은 마기가 새어나왔고 주위를 물들였다. 진혈 존은 자신의 마음을 놓아버렸다. 자신이 아수라독존마공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아수라독존마공에 자신의 마음이 먹히는 것을 택했다. 진혈존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자 아수라독존마공이 진혈존을 먹어갔다. "크흐흐. 모든 것은 네 놈탓. 천하를 파멸시키리라. 아수라독존마공에 내 몸을 맡기리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내가 아수라독존마공이고 아수라독존마공이 곧 나이니. 나는 사라지지만 또한 내가 곧 마기의 근 본이고 혼돈이리라. 나는 없지만 또한 내가 악이고 혼돈이며 소멸이다. 천하 자체를 무로 돌릴 것이다. 북경부터 시작하여 온 천하를 파멸시키 리라." "진혈존. 서... 설마. 감히 마에게 네 영혼을 팔 생각이냐? 순수한 어 둠에게?" 진혈존의 팔 다리가 어둠에 먹혀 들어갔다. 그리고 몸이... 얼굴이 녹아 들어갔다. 남은 것은 두 눈뿐. 진하게 마기가 풍겨나오는 암흑마기 속에 어둠보다 더 검은 진한 암흑의 눈이 마기 속에 빛났다. 백이충의 안색이 변했다. "아수라독존마공이 진혈존을 잡아먹었소. 천하를 파멸시킬 가장 지독한 마기가. 모두들 피하시오.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빠르게. 가장 멀리 피 하시오. 이곳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시오." 백이충이 크게 소리쳤다. 검은 묵연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 람들은 진혈존의 몸이 묵연에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백이충이 승리를 한 줄 알았다. 그리고 백이충의 고함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사태를 알아 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기에 닿는 것은 모조리 가루로 변해 버렸다. 제일먼저 천년단목으로 만든 비무장이 재로 변했고 비무장에 미쳐 치우지 못햇던 도전자의 시체 들이 재로 변했다. 묵연이 급격히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금성 안의 모든 것이 연기에 닿는 족족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십장, 삼십장. 사 십장. 마치 한계를 모르는 연기처럼. 하늘과 땅을 불태우던 태초의 대화 재(大火災)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처럼 삽시간에 주변에 퍼져나갔 다. 그리고 닿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아니 지워버리고 있었다. "크으윽." 비무장 자체가 무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군웅들의 얼굴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변했다. 비무장 자리를 넘어 묵연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묵연이 순식간에 백이충마저 삼켜 버린 것이다. 금혜연을 안 은 체 그 모습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일하게 그들의 희망이라 생각했던 백이충이 맥없이 묵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진혈존이... 부활한 백가량이 어이하여 저런 마기로..." 마혈존, 뇌혈존이 망연히 묵연을 바라보았다. 완벽히 부활했던 진혈존을 진짜 백가량으로 인정했던 그들이었다. 스스로 자신들을 진혈존의 일부 라고 인정했던 그들이었다. 진혈존이 마에 백가량의 영혼을 팔자 그들의 뇌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주인님." 혈존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수많은 마도고수들이 우르르 검은 묵연 근처로 몰려들었다. 진혈존을 쫓아 영화를 누리려다 그의 영혼의 노예가 된 자 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뇌혈존과 패혈존이 그 묵연에 휩싸였다. 진혈 존을 주인으로 삼았던 그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못했다. "크아아악." 진혈존이나 백이충을 제외하고 절대무적으로 군림했던 그들의 몸이 묵연 에 휩싸이자 순식간에 살이 부서지고 뼈가 허물어지더니 재로 화해버렸 다. 그야말로 둘이 무(無)로 돌아가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백이충 처럼 제 모습을 유지한 체 묵연이 퍼지는 속도에 따라 안으로 파묻힌 것 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묵연의 휩쓸림과 동시에 두 절세의 마두는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 가까이 있던 수많은 마도고수들도 재로 화했 다. 수백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은 눈깜짝할 사이였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과 공포에 떨었다. "막아라. 이 따위 마기가 어찌 우리를..." 비무장에 가장 가까이 있던 천년마교의 몇몇 고수들이 일제히 장력을 뿜 었다. 천년마교를 지탱하던 원로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나이가 백을 넘는 노마들. 그들은 눈으로 본 묵연의 공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천마와 만사지존의 복수를 하려 했다. 수십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장력은 가히 산을 허물어 버릴 지경. 그러나 묵연은 그 장력을 타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갔다. 수십의 천년마교 고수들이 그 자리에서 재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이후 묵연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은 단 한가지였다. 천년마교는 물론이고 모든 무림인들, 그 외에 백이충과 진혈존의 대결을 지켜보던 모든 이성을 가진 존재가 몸을 뒤로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저 묵연에 대항하고자 하는 자는 없었다. 서문 대원수와 황대장군이 중신들을 재촉하여 황제를 모시고 피했고 흑백 도의 각 무림 고수들이 저마다 몸을 뒤로하고 묵연에서 도망치려 했다. 변황의 고수도 도망치려 했다. 혈지존도 달아났다. 저 묵연은 무공으로 서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독보다 지독한 것. 세상사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파멸의 기운이었다. 백이충마저 삼켜버리고 그 파멸의 묵연은 끝없이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 다. 혈존탑의 잔해와 비무장, 그리고 그 주변, 그리고 황궁의 누각과 정 원이 묵연에 삼켜져 재로 변하고 있었다. 버티는 것이 없었고 녹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퍼지는 속도가 무림인의 신법에 미치지 못한 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피하라. 피해. 모두 자금성에서 도망가라. 모두 떠나라. 최대한 멀리 떠나." 혈존대회를 지켜보았던 모든 자가 소리치며 달렸다. 자금성에 남아있던 궁녀와 내관들에게 마구 소리치며 달려갔다. 남아있던 자들은 영문도 모 르고 그들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도망가는 자들의 뒤로 검은 묵연이 스 믈스믈 뒤를 쫓아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과 대지와 정원이 묵연 에 휩쓸리는 즉시 재로 변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 자금성에서 달아나려던 사람들이 일제히 다급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 다. 오직 뇌혈존이나 진혈존의 말만을 듣는 자들. 바로 혈향초에 중독된 오만의 혈포무사들이 자금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금성 안 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혈존이 나 뇌혈존의 명없이 자금성 밖으로 나가려는 자에게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무려 오만의 절정고수였다. 혈향초에 중독된 이들은 단 한순간이지만 무 림 일천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나마 초식에 서툴러서 그렇지, 내공으로 따지자면 일백위 안의 고수와 맞먹는 자들. 그들 형향초의 혈포고수들이 철벽처럼 자금성을 포위하고 탈출하려는 군 웅들의 뒤를 막아섰던 것이다. "제기랄. 비키란 말이다. 멍청이 들아. 피하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고." 다급한 군웅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고 장력을 뻗어내며 발악했지만 오 만의 혈포무사는 그리 간단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일시에 자금성 에서 뛰쳐나온 군웅들을 제압할 수도 없었지만 군웅들도 일시에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었다. "제길. 유일하게 저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성녀조차 지존과 함께 마기에 휩싸였으니..." 북해빙궁주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어느 새 자금성은 바로 그들 의 뒤 지척에 몰려오고 있었다. 뒤쳐진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묵 연 속에 재가 되었다. 존재가 지워졌다. 거대한 자금성 전체가 무로 돌 아가고 있었다. 웅장했던 고루노각도, 건물과 대전도 묵연에 휘말려 소 리조차 없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묵연이 마침내 군웅들의 바로 뒤까 지 퍼져나왔다. 군웅들이 절망에 빠져 탄식하고 뭇 신하들에 둘러싸인 황제가 고개를 저 으며 포기할 무렵, 멈칫! 끊임없이 퍼져나가던 묵연이 돌연 확장을 멈추었다. 그렇다. 확실히 끊 임없이 퍼져나가던 묵연은 퍼져나오던 기세를 멈추었다. 여기까지 퍼져 나왔던 것이 검은 마기의 한계였던가? 그것이 아니었다. "비... 빛이다. 마기 안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종리연이 소리쳤다. 그렇다. 검은 묵연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마치 먹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새어나오듯. 그렇게 작은 줄기줄기 빛 이 묵빛의 연기를 뚫고 조금씩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뿜어 져 나오던 빛은 더욱 더 기세를 더해 번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드러나면 먹구름이 사라지듯 묵연이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따라 점차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의 힘이 더할수록 묵연은 기 세를 잃고 스러졌다. 어둠이 엷어지듯 묵연도 움찔움찔하며 흐려지기 시 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어느 순간 마치 지옥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악귀 소리가 천하를 울리듯 퍼 져나왔고 동시에 그를 신호로 한 듯 태양처럼 밝고 거대한 빛이 묵연의 중심에서 터져나왔다. 그 빛은 성스럽고 광휘스러웠으며 엄청나게 밝았 다. 그리고 어둠이 산산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 어둠이 사라지고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는 태양같은 광휘 만이 남았다. 사태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때 빛이 차츰 약 해졌다. 그리고 온 자금성을 비추던 광채의 빛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광 채와 빛이 줄어들고 약해지자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빛의 중심 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토록 끔찍했던 묵연은 단 한줌도 보이지 않았 다. 묵연이 사라지고 나타난 폐허는 너무도 깨끗했다. 방금 전의 그토록 엄 청난 참상이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듯. 거대한 대전도, 화려한 궁궐도, 건물도, 정자도, 누각도, 정원도, 연못도, 나무도, 초목도, 가산도 사 라졌다. 그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 뿐이 아 니었다. 대지가 움푹 파였다. 묵기가 퍼져나갔던 만큼 대지로도 퍼졌는 지 지하 십여장 까지 거대한 자금성 영역 전체가 깨끗하게 깊이 녹아있었 다. 애초부터 땅 높이가 낮은 거대한 무의 영역이 존재해 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안에 빛이 사라지며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여인을 안고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 바로 백이충이었다. [20562] [연재] 혈존무적-그날 이후 첨부파일 : 등록자: 김하준(khj1234) 조회수: 371 등록일: 2003-05-23 02:14:37 본문크기: 9370 bytes 중년이 다 된 서문일충이 이름모를 심산을 오르고 있었다. 서문일충은 현재 나라에서 대장군의 직위에 있었다. "정말 깊숙이도 사는구나. 어머님, 아버님이 보고싶어 하거늘. 무심한 놈이 찾아오지도 않고." 서문일충은 자신의 동생을 생각했다. 역사에는 지워진 그날의 참극. 그 리고 무림에서도 전해지지 않고 쉬쉬하는 그날의 비밀. 영원히 지워버리 기로 한 그날의 사건이후 동생 백이충은 종적을 감췄다. 공식적으로 보면 그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금성은 대대적인 개축공사에 들어갔고 그 비용은 상계에서 부담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날 황제와 옥룡왕이 천하 무림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 것으로 되어 있었 다. 진혈존이라든가 십혈존이라든가, 혹은 혈존탑이나 혈존대회 같은 말 은 모두의 동의하에 침묵 속에 묻혀졌다. 천하를 구한 백이충이었지만 그의 힘은 너무 위험했다. 황제가 뒤를 돌 봐주고 서문 대장군부의 힘이 그를 돌봐준다고 해도 그 자체가 너무 위험 했다. 홀로 천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힘. 그것을 알았는지 백이 충은 모습을 감추었다. 공식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빌어먹을 놈. 그래도 매년 신년에는 찾아오더니 자식들을 본 이후에는 바쁘다고 안 찾아와? 부모님이 얼마나 손주들을 보고싶어하는지 잘 알면 서." 서문일충이 지금은 군부에서 은퇴한 아버지 서문구랑을 생각했다. 둘째 를 따라 부부가 조용한 이곳으로 옮기겠다는 것을 자신이 말리고 있었 다. 아직 군부나 서문가에는 아버지 서문구랑이라는 거물 버팀목이 필요 로 했다. 대신 서문일충은 백이충과 백이충의 아이들을 본가로 꼭 데려 오라는 임무를 떠맡은 것이다. 길을 가던 서문구랑은 문득 자신 외에 또 다른 기척을 느꼈다. 사람이 찾지 않는 심산에 누구일까 쳐다보니 자신을 기다리는 존재들이었다. 그 도 잘 알고있는 존재들이었다. "모용맹주. 오벌주. 여기는 어떻게?" "서문 대장군이시군요. 저는 주공을 뵈러 왔습니다. 매년 이 맘 때쯤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이제 굳어진 습관이라서..." "서문 대장군님. 오늘은 제발 동생분에게 상계에 황금인을 돌려달라고 말좀 전해주십시오. 도대체 얼마나 부려먹으려는지..." 서문일충과 말을 주고 받는 자. 하나는 천하 무림맹주인 모용풍이었다. 그는 백도와 흑도를 통합한 무림맹주이면서 백도의 십대 절학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무림사에 달마나 장삼풍을 능가하는 종 사가 될 것이라며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무림인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대 상황이며 금황벌주 오형록이었다. 조풍의 뒤를 이 어 그는 상계를 잘 조정하며 상황으로서 존경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게 족쇄같은 황금인을 백이충이 가지고 있기에 본의아니게 상계의 대부이 면서 본의아니게 그의 물주노릇을 하는 오형록이었다. 둘다 과거 혈존의 영혼에 제압당해 죄를 지었고 또 백이충에 의해 세뇌가 풀린 존재였다. 그 덕에 겉으로는 툴툴 거리면서도 둘은 매년 신년초에 백이충을 찾을만큼 사이가 좋았다. "하하. 여러분을 만났으니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무림과 상계는 어떠신 지..." "무림이야 별 일이 없지요. 천년마교는 무기한 봉문에 들어갔고... 일백 마제께서 천하 무림에 흩어져 무림을 재건하고 계신지라... 북해빙궁주 와 남해 해왕군도주는 오히려 변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셨다고 합니 다. 혈지존은 죽었는지 전혀 소식도 없는 상태이고." "흐음. 별일은 없습니다. 모두 잘 돌아가지요. 전에 자금성을 복구하는 자금을 대드린 일로 황금인 세 번의 대가 중에 한번은 해결 되었습니다 만. 동생분이 다른 요구를 할 생각도 없고 황금인을 돌려주지도 않으면 서 소생을 돈주머니로 여기시니... 한숨밖에 안나옵니다." 셋이 서로 대화를 해가며 깊은 계곡 하나로 들어갈 때였다. 계곡 자체가 하나의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악심(惡心)을 가지고 있는 자는 통과하지 못하는 진법이었다.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작은 모옥이 보였다. 서 문구랑이 모옥을 보고 기뻐할 때였다. "으와아악." 갑작스런 비명이 터지고 모옥의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중년 남자 하나가 뛰어나왔다. 나이는 좀 들어보였지만 백이충의 모습이 분명했다. 천하에 그 누가 있어 백이충을 비명지르게 한단 말인가? "때리지 말고 말로 하자구. 말로." 억울한 듯 머리를 부여잡고 모옥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백이충. 그리고 모옥안에서 화가 난 옥음이 터져나왔다. "이 인간이 그래도. 도대체 산골짜기로 들어왔으면 사람답게 살게끔 가 장의 책무를 다해야 할 거 아냐? 우리야 원해서 따라 들어왔으니 그렇다 고 해도 아이들은 어떡할 거야? 그래도 매일 내내 낮잠만 자고 돼지처럼 뒹굴 거릴래?" 아무리 많이 봐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녀가 손에 몽둥이 하나를 들 고 씩씩 거리며 나섰다. 이십 년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금혜 연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치켜뜨고 소매를 쓱쓱 걷어 몽둥이를 휘드르다 멍한 표정을 짓고있는 서문일충을 보았다. "앗. 아주버님." 금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급히 몽둥이를 뒤로 가렸다. 그와 동 시에 백이충이 번개같이 서문일충의 뒤에 숨었다. "형. 살려줘. 세상에 현모양처인줄 알았더니 천하의 악처인 것 있지?" 백이충이 서문일충의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금혜연을 바라보자 금혜연이 도끼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서문일충이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모 옥 안에서 다섯 명의 또 다른 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혈무오미. 금 혜연 못지않게 아름다운 다섯 여인. 백이충의 또 다른 부인들이었다. 그런데 혈무오미 또한 모두 화난 눈을 하고 백이충을 노려보는 것이었 다. 서문일충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기... 제수씨. 도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인지..." "휴우. 저인간이... 아주버님. 저희 꼴 좀 보세요. 저희가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는지." 서문일충이 보니 여섯 여인의 옷이 완전히 바느질로 수백번 기운 옷임을 알 수 있었다. 워낙 여인들의 미모가 눈이 부셔 제대로 초라한 옷이 보 이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여인들이 저마다 품에 아이를 하나씩 안고 있는데 아이들의 옷 역시 천상옥동같은 외모와 틀리게 누더기 비슷한 것 이 아닌가? "그... 그 옷이 어떻게 된 겁니까?" "휴. 세상에 지난 해 신년에 장강 홍수 때문에 생긴 난민을 돕는답시고 오벌주에게 받은 황금과 비단을 모조리 가지고 나갔지 뭐예요? 덤벙대다 가 집안에 있던 구리동전 한푼까지 긁어간 것은 물론 우리가 입고있던 옷 을 제외하고 집안에 있던 옷과 천마저 모조리 가져갔으니..." 금혜연이 한숨을 쉬자 혈무오미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맞아요. 벌써 일년동안 단벌 옷으로 버텼어요. 저 이는 실수를 하고도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도 않고." "갓난 아기라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는데 옷감도 없고... 저희들 옷 과 이불을 잘라다 아이들 옷을 만들었어요. 세상에."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어요. 저이가 쌀 한바가 남기지 않고 쓸어가는 바람에." "심산에 은거해도 호강시켜 줄테니 걱정말라고 해놓고 잠만 자고 있어 요. 우리만 부려먹고 자기는 놀고먹고." "정말 저이는 너무해요. 손가락 까닥 안하고 우리만 부려먹으려고 해 요." "게다가 우리가 사냥이라도 해 놓으면 그 가죽을 가지고 가서 냉큼 혼자 술만 마시고 돌아오고." 쏟아지는 여인들의 한탄에 서문일충이 어리벙벙했다. 이게 천하제일의 신비인이 은거해서 사는 꼴이란 말인가? "왜... 왜 마을에 내려오시지 않습니까? 마을에 내려가면 저희들이나 아 무에게 도움을..." 서문일충이 말하다 말고 여인들의 눈초리가 모조리 백이충에게 향함을 알 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백이충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을에 내려가면 안돼. 나랑 같이 마누라들이 선계로 가려면 내가 가르 쳐준 심법을 익히면서 청령한 자연에서 있어야 한단 말이야. 적어도 앞 으로 오십 년 정도는 인간과 접하면 안 돼. 하루이틀이나 며칠이야 괜찮 지만 어차피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 아예 지금부터 독하게 마음먹는 게 낫다구. 나는 마누라들이랑 헤어지는 것이 싫어 인간의 손이 닿은 물건 도 모두 치우고 작년부터 엄하게 금지시킨 건데... 이 여자들은 남편 맘 도 몰라주고.... 커억." 따악. 금혜연이 던진 몽둥이가 정통으로 백이충의 이마와 친밀감을 표시하며 경 쾌한 소리를 내었다. "이 인간아. 그러니 우리는 괜찮다고 쳐도 아이들은 어쩌란 말이야? 그 럼 우리를 마을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면 반선(半仙)이라는 당신이라도 마을에 내려가 아이들 필요한 것을 사오던지. 매일 내일내일 하면서 잠 만자고 시부모님 드리려고 담가놓은 술만 훔쳐 마시고 게으름 피면 아이 들 꼴이 뭐가 돼? 그래도 아버지라면 애들이 사람처럼 입고 생활 하도록 은 해야 할 거 아냐?" "크으윽. 아파. 아이들이야 당신들 젖먹고 자라면 되고. 여기서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발가벗고 좀 다니면 어때서? 왜 들들 볶아?" "아이들이 짐승이야? 벌거벗고 다니게? 금이야 옥이야는 해주지 못할망 정 부모노릇은 해야지. 이 인간아." 백이충의 말에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려는 금혜연. 그러기에 여자는 남 자에게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나? 선계도 좋지만 자식들을 이런 꼴로 키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는 금혜연과 혈무오미였다. "자자. 제수씨들 진정하세요. 저희 부모님이 이충이와 조카들이 보고싶 다며 모두 요번에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제가 가는 길에 살림도구 좀 장 만해 드릴테니. 휴. 이 녀석. 아무래도 좀 이상하게 변한 것 같네요. 제 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주버님이 왜. 저희가 부끄러운 꼴을 보여드린 것 같아요. 글쎄 저이는 자기가 반선이라며 세속의 예의와 관습을 무조건 버리라고 헛소리를 한다니까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릇도 별로 없지만 어제 셋째 가 사냥한 것이 있어 식사대접을 해드릴 수가 있어요." "아. 예." 그날 밤. 서문일충 덕에 바가지 긁히는 것을 면한 백이충이 슬그머니 빠 져나왔다. 고요한 계곡 위에는 둥그런 달이 고고하게 떠 있었다. 몇 번 몸을 날려 계곡의 위로 올라간 백이충은 달빛을 온 몸에 가득 안으며 가 부좌를 트고 앉았다. 신비로운 월광. 고고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튼 백이충. 그의 몸에서 신비 로운 광휘가 천지를 밝히는 듯 했다. 그리고... 백이충은 상체를 굽히고 대성통곡했다. "크흐흐흑. 내가 이러려고 우화등선을 거부한 것이 아닌데... 마누라들 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려고 신선을 거부한 것이 아닌데... 크흑흑. 오늘도 안열리는 구나. 도대체 선계의 문은 언제 열리는 거야?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출판사에 글 넘겼습니다. 쓰고 바로 넘겼습니다. 후. 그리고 드디어 끝났습니다. 음. 역시 책이 나오는 대로 지우겠습니다. 이상하게 혈존무적은 출판사에 글 넘기는 순간에서 책 나오는 시간이 금방이라 공지 어쩌구 여유시간이 넉넉치 않더군요. 그래도 며칠은 여유 있을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