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진짜 짜증나 죽겠네." 벌써 몇시간 째,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시간 컴퓨터 사용으로 더이상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였다. 몸에서는 이러다 정말 죽을수도 있겠구나 싶을정도로 이상사태가 오고 있는 중이다. 침침한 눈, 어지러운 머리, 뻐근한 어깨, 마비 일보 직전인 손가락..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으라는 거냐고." 신경질적으로, 누르던 마우스를 내팽겨친다. 그래, 애초부터 이건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달랑 사진 한 장가지고 무엇을 알아내고, 무엇을 찾겠다는 말인가. 이딴 거지같은 아르바이트는 애초부터 하는게 아니였는데. "그러나 이미 돈은 입금 받아버렸고..." 나는 그 돈을 모두 써버린 상태다. 그러므로 닥치고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며 나는 다시, 찢어진 사진 한 장을 들고는 차근차근 웹 사이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진 속, 교복의 학교를 찾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였다. '사람 찾기 아르바이트?' '응! 야 완전 거저먹기인 아르바이트지. 사진속에 사람들만 찾아서, 간단한 신상정보랑 사진 몇방만 찍으면 되는데' '............' '게다가 얘네 교복 입고 있잖아. 그 교복이 어느 학교인지만 알면, 찾아내는건 식은죽 먹기지.' 염병...!!!!! 거저먹기? 식은죽 먹기? 웃기고 있네. 지금까지 내가 몇십개의 학교 홈페이지를 간지 아냐고 김민지! "아 열받아!!!!!!" 정확히 42번째 학교 홈페이지를 닫으며 피시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는 나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지만, 지금 내겐 그런것 따윈 중요한게 아니였다. 이렇게 찾다간 밤을 새더라도 못찾겠어.... 한참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나는 결국,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나에게 이딴 거지같은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준 김민지를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며. * * * * * "그래! 못찾았어! 지식인에 물어보면 금방일텐데, 또 사진은 인터넷에 올리면 안된다며. 우리나라에 고등학교가 수천개인데. 나보고 그 수천개의 학교 홈페이지를 다 돌아보라고? 그게 말이되?"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이놈의 더위까지 기승을 부린다. 나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벤치에 앉았다. -왜 수천개야. 수원쪽만 찾아보면 된다니까? 그리고 그럴거면 처음부터 돈을 받지 말았어야지 이년아. "수원쪽 고등학교도 몇백개는 될거다. 아 짜증나 진짜. 그 사람 미친거 아니야? 왜 이런 아르바이트를 시킨대?" -나야 모르지... 나도 인터넷에서 봤어. 너 아르바이트 구한데서 기껏 소개시켜줬더니! 왜 나한테 짜증이야." 지금 짜증 안나게 생겼니.. 신경질적으로 주머니 속에서 사진을 꺼내들었다. 모서리가 찢어져 있는 사진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내 나이 또래 남자 2명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 신상정보와 사진은 왜 필요한걸까? 돈 떼어 먹었나? 아니면, 숨겨둔 자식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잘생긴 얼굴들인데.. 역시나, 이 사람들 스토커 인건가? 문득, 나는 내게 이런일을 시킨 사람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어찌됬든 분명,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꺼다. "계약금을 받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나 이미 넌 받았고. "진짜 짜증난다. 그냥 잠수탈까?" -그러나 이미, 그사람은 너의 신상정보를 다 알고. 김민지의 말에 나는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모두 맞는말이였다. 나는, 그에게 계약금도 받았고, 등본도 보냈다. 말 그대로 지금 나는 빼도박도 못하는 상태인것이다. 고로, 나는 어떻게든 사진 속, 사람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 몰라 몰라. 안해 안해. 다른 아르바이트 해서 계약금 돌려주고.. 못한다고 해서 죽일라면 죽이라......." 그렇게 짜증이 솟구쳐 민지에게 투정을 쏟아내는데 순간, 무언가를 보곤 그대로 말을 멈추는 나였다. 믿기지 않는듯, 그대로 굳어 멍청하게 두눈을 꿈뻑이다가,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사진과 맞은편 서있는 아이를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아니였지만, 맞은편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그 아이의 교복은, 사진 속 아이들의 교복과 정확히 일치했다. -뭐? 김민선, 너 제정신이야? 신...봤다. 아니. 교복 봤다!!!!! "야 역시 이렇게 죽으라는 법은 없나봐. 끊어 있다 전화 다시할게."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맞은편에 서있는 아이를 행여나 놓칠새라 뛰기 시작했다. 아이와 가까워 질수록, 드디어 학교를 알아 낼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내 표정은 과도하게 밝아졌고 우리 둘의 거리가 거의 가까워 질때 즈음, 그제서야 그 아이는 나를 발견했다. 이윽고, 자신의 쪽으로 미친듯이 웃으며 달려오는 나를 동그란 눈으로 한참동안 바라보던 아이는. 아이는.. "어? 잠깐만요!!!!!!! 잠깐만요!!!" ..... ......... 도망간다....? "저기요. 아니. 저기요!!!" 이런 미친! 뭐야 저새끼! 자기쪽으로 전력질주 해서 뛰어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에 있던 담배를 바닥에 툭 튕겨 버리곤, 반대편으로 전력질주해서 뛰는 남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도망가는거지? 남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쫒아오는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더욱 속도를 높였고, 그런 남자 덕분에 졸지에 나는, 범인을 쫒는 경찰처럼 미친듯이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찰때까지. 정말 미친듯이. 왜 도망가는지 영문도 모른채.. . . .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그 코미디 스러운 상황은, 남자가 달리기를 멈춤과 동시에 끝났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곤 힘겨운듯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고, -마치 '이 진드기, 그래 니가 이겼다 라는듯한 표정으로- 나 또한 헉헉 거리며 남자의 앞에 주저 앉았다. 미친새끼. 진짜 더럽게 빠르네. 하마터면 놓칠뻔 했어. "왜 따라와요. 미친거 아니에요?" 어느정도 진정이 된건지, 남자는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진심으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쪽이야 말로 왜 도망가요. 미친거 아니야?" "그야.." "그야?" "무서워서 그렇죠. 아까 뛰어오는거 보니까 완전 꽃만 달면 미친년 포스던데." 나의 물음에 남자는 너무나도 순수한 얼굴로, 당연하다는듯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육두문자가 한바가지 튀어 나오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로또와 맞먹는 이 우연을, 지랄같은 성질 때문에 그대로 날려버릴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놀라 셨다면 죄송해요. 다름이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 그랬거든요." "뭔데요?" "그쪽, 학교가 어디냐구요." 그러자, 수상하다는듯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남자.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듯 싶더니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혹시..." "네?" "내 스토커에요? 아까 공원에서부터 계속 쳐다보고, 따라오고." "이런 미...." 친 새끼. 시베리아 쌍화차 개나리 같은. 이걸 콱 그냥! "미...미남 같은 분, 왜그러세요. 그런거 아니라 그 교복이 어디 학교인지 궁금해서 그래요. 정말 순수하게." "그쪽, 순수하게 생긴 얼굴이 아닌데..." 참을인을 새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성질 같아선 당장이라도 정강이를 차고 싶지만, 누누이 말했듯 나는 반드시, 이 교복이 무슨 학교인지 알아야 했다. 그랬기에 나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애써 감추며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어색히 웃었다. "학교만 알려주면 되잖아요. 네? 어려운일 아니잖아요." "학교만 알려주면 갈꺼에요?" "있으라 해도 안있거든요." "어? 지금 나한테 화내는거?"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있어요? 저 화같은거 안내요! 그러니까 빨리 알려주세요. 네?" 김민선, 오늘 제대로 비굴의 끝을 보여주는구나. 이를 꽉 물며 말하자, 나를 놀리는게 재밌는듯 잠시 고민하는척 하는 남자.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녀석의 가슴 부근에 달린 명찰을 찾아내 이름을 외웠다. '강다현' 너는 죽었다. 내 오늘의 수치스러움은 잊지 않고 기필코 복수하겠다. "알았어요. 어려운일도 아닌데 알려줄께요. 백안고등학교에요." 잠시후, 알려주기로 결정을 내렸는지 예쁜 이름과는 달리 사악한 강다현이라는 아이는 선심쓰듯 말했고,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침내 찾아낸 학교이름을 핸드폰에 저장시켰다. 핸드폰 액정 위로 '저장이 완료 되었습니다.' 라는 문구가 뜨자,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였다. 나이스! 드디어 알아냈다. 이제,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사진 몇방만 찍으면 이 어이없는 아르바이트도 끝이다! 그리고, 이 정신병자 싸이코에 대한 비굴도 여기까지다. 환하게 웃으며 탁- 하고 핸드폰 플립을 닫는다. "아 정말 감사해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라고 할줄 알았지?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누나한테 죽을라고 콱! 이거나 먹어라!" 자신의 눈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신명나게 흔들어대는 나를 어이없다는듯 바라보는 강다현. 나는 그런 녀석에게 깜찍하게 혓바닥을 내밀고는, 뒤돌아 섰다. 비록, 녀석이 나를 홧병 나기 일보 직전으로 약올렸지만 그래도 학교 이름을 알아내는 큰 수확을 주었으니까. 정강이를 차는건 참기로 하고.. "이봐요." 하지만, 나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이 뒤돌아서려는 내 옷깃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멍하니, 내 옷깃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또 왜! 또 왜! 너 진짜 나한테 맞아볼래!"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놀란듯 눈을 크게 떠보이다가 내 얼굴에 사진을 턱 하고 내미는 그아이. 순간, 두 아이가 담긴 사진이 눈앞에서 펄럭 펄럭 거린다. 분명히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었는데. 왜 저걸 가지고 있지? "이거 떨어졌잖아요." "어? 언제 떨어졌지? 아무튼 큰일날뻔했다. 고마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녀석이 내민 사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강다현은 나에게 사진을 줄듯 하다가 이내 훽 하고 자신쪽으로 사진을 가져가 버렸다. "뭐하는거야? 줘!" "아까 뭐라고 했죠? 어린놈의 새끼?" 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진을 위로 들더니 그렇게 한참동안 약올리듯 펄럭펄럭 거렸고, 강다현보다 훨씬 키가 작은 나는 낑낑 거리며 사진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제기랄. 순식간에 전세 역전됬다. "줘 빨리. 너 신고한다!" "신고할라면 하던.....어?" 그순간, 장난스럽게 사진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그대로 멈추는 강다현. 이때다 싶어 나는 녀석에 손에 들린 사진을 뺏었다, 그리곤 재빨리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 이번에야 말로 정강이를 한 대 쳐야겠다는 생각에 씩씩거리며 다리를 올리려는데 "해운이 알아요?" 라는 녀석의 말에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해운...이?" "응 해운이." "너. 그 사진 속 사람들 알아...?" "해운이랑 진운이 형인데...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알아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왠지 알 수 있을것 같았다. 지금 강다현을 올려다 보고 있는 내 얼굴이 얼마나 환희에 차있을지는.. 강다현의 말에 나는, 애써 번지는 웃음을 참으며 표정관리를 하려 노력했다. 학교에, 이름까지 알게 되다니 "어? 뭐..그냥 좀...하하하" 이거 완전 땡잡잖아. * * * * * 아까까지만 해도 오늘 하루는, 운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으로 인해, 그 사람들의 학교와 이름을 아는 대 수확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우연을 미치도록 저주하고 있는 중이다. "야. 잠깐만. 잠깐만!" 비명의 가까운 나의 고함소리에도 녀석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진 속 남자가 있다는 연습실 앞에 가까워지자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동요하지 않은채 나를 질질 끌고 갔다. 제기랄. 어쩐지, 일사천리로 잘 풀린다 싶었다. "아니 만날 필요 없다니까?" 결국, 연습실 앞까지 끌려왔다. 나는 연습실 문 앞에서,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나를, 궂이 만나게 해주겠다며 이곳으로 끌고 온 녀석을 씩씩거리며 힘껏 노려봤다. 이새끼는 진짜 싸이코중에 개싸이코가 틀림없어. "너 진짜 왜그러냐 나한테!" "왜요. 바로 근처에 연습실이 있는데, 뭐하러 돌아가요. 보고가야지." "내가 걔를 왜 보고 가!" "좋아하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찢어진 사진 들고 있지. 내가 해운이 소개시켜줄께요. 그러니 무섭게 스토커짓은 하지 마요." 강다현은 다 안다는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그 순간, 정말 진지하게 녀석의 머리를 모두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렇게 오해할수도 있는 상황이다 싶어 화를 누그러 트리곤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거 아니야. 아니니까..." "아니면 뭔데요? 해운이 사진은 왜 가지고 있어요. 해운이랑 진운이형이랑 무슨사인데요?" "그건..."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하는거지? 그렇게 잘돌아가던 잔머리가 오늘은 어째, 영 못돌아 가는것 같다. 이럴땐 딱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미친듯이 도망가는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어떻게 빠져나갈지 주위를 둘러보며 고민했다. "강다현. 너 누가 문밖에서 쫑알쫑알 거리래?" 그러나, 불행히도 그보다 먼저였다. 도망가려 준비도 하기 전에 별안간 굳게 닫혀있었던 연습실 문이 열린건. 순간,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심장소리가 점점 더 빨라짐을 느낀다. 나는 그대로 굳어진채, 믿을 수 없다는듯 사진 속에서만 봐왔던 그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도망가야 한다. 어서 빨리 도망가야 한다. 아까보다 좀 더,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어? 해운아! 그게 아니라." "연습시간도 늦은 주제에. 잘하는 짓이다?" "그게 아니라니까!" 침착해 김민선. 침착하게 뒷걸음질 치다가, 뒤도 안돌아보고 그냥 올라가는거야. 나는, 강다현이 그 남자와 이야기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손을.. "나 니 손님 데려왔어! 짜잔. 이사람 니 사진 들고 있더라!" ...손을 빼려 했는데, 그런 내 손을 놓아주지 않은채 잡아 당겨 나를 정해운이라는 남자 앞에 세우는 강다현이였다. 그런 녀석을 노려보며 나는 생각했다. 기필코 무슨일이 있어도 내손으로, 이놈을 죽여버리겠다고. "............." "............." 그렇게 눈이 빠지도록 강다현을 노려보는데 순간, 사진 속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닿는걸 느낀다. 괜한 민망함과 뻘쭘함에 어색히 웃어 보이자 남자는 그런 나를 아주 오랫동안, 정말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사람 왜. "너...."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거지. "어떻게 여길.." 그는 나의 등장에 무언가..뭐랄까,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나를 바라보던 남자의 검은 눈동자는 이내 차갑게 식어 내옆에 있는 강다현에게로 머물렀다. "뭐야. 해운아 이사람 알아?" 자신에게 정해운의 시선이 닿자, 놀란 얼굴로 묻는 강다현. 정해운이라는 남자는 강다현의 말에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정말 차갑게. "잘들어." "..네?...." "두번 다시 찾아 오지마.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한번만 더 내눈에 띄면"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찰나의 침묵에는 많은것이 담겨 있는듯 보였지만 불행히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 죽여버릴꺼니까." 이내 녀석의 손에 쾅 하고 신경질적으로 문이 닫혔다. 어..그러니까 이게...무슨 상황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나는 한참동안 그렇게 닫힌 문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던것 같다. "저...저새끼........뭐야?" 정신이 들자, 더욱 황당하고, 어이없어 진다. 진짜 별 미친놈을 다보겠네. 정말로 나를 자기 좋아하는 스토커로 생각하는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뭐? 죽여버릴꺼니까? "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이게 진짜 별 그지같은 놈이. 너 나 알아? 초면에 뭐가 어쩌고 어째!?" 결국 치밀어 오는 화를 참지 못한 나는 쾅쾅쾅. 하고 있는 힘껏 연습실 문을 두들렸다. 하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고, 조용한 복도에는 그렇게 한참동안 분노로 가득 찬,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야 문열어! 열으라고! 알바고 뭐고 다 필요없어. 너이새끼 나와! 맞짱떠!!" . . . 2008년 7월, 어느 더운 여름날.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2. "손 괜찮아요?" 정말로 수십번, 아니 수백번은 두드린것 같다. 그렇게 황당하게 문이 닫힌후 나는 주먹 쥔 손이 퉁퉁 부을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며 닫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나는 손이 벌겋게 부어버린채로 그곳에서 쓸쓸히 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깟 손이 문제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수가 없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어쩜 그렇게 무례할수 있는걸까. '두번 다시 찾아 오지마.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한번만 더 내눈에 띄면 내가 너 죽여버릴꺼니까.' 또 다시 떠오르는 기분나쁜 남자의 표정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으으. 진짜 열받아.. "멍들것 같은데..무슨 여자가 그렇게 무식하게 문을 두드려요." 이게 다 이녀석 때문이다. 이녀석만 아니였어도 그곳에 찾아갈일따윈 없었을것이고 그곳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싸이코 녀석을 만나지 않았을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기분을 망치는 일도 없었을텐데..! "야. 너 솔직히 말해." 나는 연습실을 나와, 신경질적으로 강다현을 노려 보았다. "네?" "저새끼 싸이코지. 진짜 정신병자 아냐?" "에이, 해운이 그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너는 이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니?" "그건..." "나는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안되거든? 미친개한테 물렸단셈 치기에는 너무 타격이 크다." 이미 부어오를대로 부어오른 손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나는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털푸덕 난관에 앉았고 곧이어 강다현도 미안한 표정 하며 내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자신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미안해요 누나. 나는 해운이가 저렇게 나올줄은 몰랐죠." 강다현은 답답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담배각을 꺼내며 말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누나'라는 말에 놀란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이같은거 말해준적 없는데. 어떻게 내가 자신보다 누나라는걸 확신하듯 말한거지? 교복을 안입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자신보다 많이 늙어보이나? 순간,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한채 입을 꾸욱 다무는 나였다. 그건 지금 이상황에서 '늙어 보여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정말 폭팔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말없이 주먹을 꽉 쥐는 내모습에 강다현은 하얀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연기를 들이 마셨다. "아무튼.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요. 알았죠?" "포기?" "네." 이내 녀석의 입에서 한숨쉬듯 내뱉어진 뿌연 담배연기는 허공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이상 시간 낭비 따윈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가 생각하는 그 '포기'랑 내가 생각하는 그 '포기'가 같은 의미의 포기는 아닐테지만" "............" "돈이고 뭐고 오늘부로 이딴 거지같은 아르바이트 때려칠꺼다." 말을 마치곤,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든다. 사진속에는 같은사람이라는게 믿겨지지 않을정도로 환하게 웃고있는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 사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난 정해운을 웃을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을것이다. 사진속, 환하게 웃고 있는 싸이코의 모습을 보니 더욱 울화통이 터진다. 미친새끼. 왜 나한테 지랄이야? "왜냐면 난, 저딴 싸이코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망설임없이 사진을 구겨트렸다. 저딴 싸이코를 다시 만나느니, 몇달동안 기꺼이 거지로 살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래! 이딴, 골치아픈 아르바이트로 짜증나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이라구! /다음날 '저딴 싸이코를 다시 만나느니, 몇달동안 기꺼이 거지로 살겠다.' 라는 내 다짐은 어디로 간걸까?. 그렇게 호언장담을 한지 정확히 17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어이없게도 녀석이 다닌다는 백안 고등학교 앞을 서성이는 중이다. 행여나, 누가 볼까 싶어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 쓰곤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게 뭐하는짓이냐며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젯밤 달콤한 민지의 말은, 그런 나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다. '포기한다구? 내가 어제, 전화해봤는데 사진 1장에 10만원 쳐준대. 신상정보 하나에 5만원. 너 벌써 이름이랑 학교 알아냈다며. 너무 아깝잖아.' ...그래, 그깟 자존심 하나때문에 다된밥에 재 뿌릴순 없다. 게다가, 하루종일 노가다해도 벌기 어려운 10만원이라는 거금을 셔터 한번으로 버는건데. 그런 달콤한 유혹은 아무리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나라도, 쉽게 외면할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카메라를 잡었다. 그리곤 한쪽 손에는 어제 구겨 트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흠칩난 사진을 들고는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돈 벌러 가볼까나." 그것이 앞으로 내게 일어날 불행의 첫시작인지도 모른채. * * * *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오래된 일이였기에, 나에게는 아직까진 미국의 학교가 더 익숙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마냥- 학교를 둘러보았다. 교실. 복도. 그리고 학생들의 모습... 뭐랄까 한국의 고등학교는 미국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게 얼마나 구경했을까?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의 모습에 나는,시간 가는줄 몰랐던것 같다. 그런 나의 학교 탐방기는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끝이 났다. "저여자 뭐야? 왠 마스크?" "그러게..전학생인가?" "전학생은 아닌것 같은데..교복 안입고 있잖아. 게다가 머리도 갈색이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산했던 복도에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복도를 서성이는 낯선 이방인의 모습은 그들에게 큰 관심사였고, 나는 내게 힐끔힐끔 닿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에 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했다. "아 진짜 정해운, 그런게 아니라니까." ".........." "야 정해운. 진짜 너 나랑 말안할꺼냐. 남자새끼가 드럽게 소심하네! 진짜" 더불어,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강다현의 목소리에 마스크를 올리고, 벽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이새끼가 진짜. 너 나 화나면 무섭다! 응? 야. 정해운!" 애초부터, 쉽게 찾을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던 나였다. 1층부터 5층까지 모든 교실을 둘러보며 차근차근 정해운과 사진 속, 또 다른 남자를 찾을 계획이였는데.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나는 3학년 2반 앞에서 티격티격, 거리는 강다현과 정해운을 힐끔 보며 카메라를 들었다. 수많은 학생들로 복도는 여전히 부산스러웠지만, 그들은 단연 눈에 띄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 숨죽이곤, 카메라 초점을 정해운에게 맞춘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렌즈안에 담긴 정해운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근사했다. 교복이 저렇게나 잘어울리다니. 역시, 남자는 기럭지가 타고나야 하는것인가. "야! 너 지금 이 형님이 말하는데 어딜 보고 있는..." 그순간, 그러니까 내가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르는 동시에 정해운 옆에서 신나게 조잘거리던 강다현의 말이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해야만 했다. 카메라 렌즈속에 담긴 정해운의 시선은 분명 내게로 향해 있었으므로. "어? 누나..." 이어 정해운의 시선을 따라, 강다현 또한 나를 발견하자, 나는 결단 내려야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시치미를 뗄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튈것인가. 나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다리는 너무 짧았고, 느렸다. "너 뭐야."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30초도 안되서 잡혀 버리는거냐 김민선. 응? "어? 하하..." 녀석과 나 사이로 죽고 싶을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의 어색한 -안간힘을 쓴- 웃음에도 그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은채 나를 차갑게 응시하는 정해운. 녀석은, 한동안 나를 그렇게 응시하다가 망설임없이 내손에 들린 카메라를 빼앗았고. 수근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그순간 나는 나의 운명이 비참한 최후로 달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뭐하는거냐고." "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 ".........." "야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학교가 궁금하기도 하고. 절대 너를 보러 온건 아닌야 그러니까 오해같은건 절대로 하지 말아" "너 진짜.." 그순간, 긴 한숨을 내쉬며 한쪽 손을 드는 정해운. 맙소사. 이자식 나를 때릴 작정인가. 진심으로 때릴 생각인가? 나는,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른채 허공으로 올라간 녀석의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안심하며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는 순간 타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가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가지 한다." 멍청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녀석의 손에서 신경질적으로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나의 사랑스러운 카메라님을 내려다 본다. "내...내...카메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성이라는게 있다.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동물과 구분되게 하는 것이며, 감성적 욕망이나 정념을 억제하는것이라 했다. 나는 지금 그런 내 이성의 끈이 끊어졌음을 직감했다. 투둑 하고, "야이 개새끼야!!!!!!!!!!너 진짜 돌았어? 미쳤어? 이게 얼마짜리인줄 알기나해?" "뭐?"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가만 가만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어느새, 녀석과 내 주변으로 학생들이 모여듬을 느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제부터 꾸욱 눌러왔던 감정이 카메라로 인해 폭팔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까지 튀기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는 나와는 달리 정해운은 너무나도 침착했다. 나는 그것이 더 분했다. "니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냐? 어? 혼수상태라도 되? 사진 한장갖고 되게 유세 부린다 너." "..........." "그리고. 내가 어제부터 말하려다가 참았는데. 나 너보다 1살 많아. 나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했거든? 이게 어디서 계속 반말질이야. 너 나 알아? 아냐고 새끼야!" 정해운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말에도 침묵을 지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표정으로.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 나를 그렇게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내 마지막말에 녀석은 아까보다 좀 더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했다. "아니." "뭐?" "몰라." 그순간, 아무런 감정없는 얼굴로 내뱉는 정해운의 말에 나는 이해할수 없는 감정을 경험해야만 했다. "알고싶지도 않고.." 어...그러니까 나 지금..왜 "그러니까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가슴 한구석이 텅 빈것처럼 허무해지고, 저릿저릿 한거지? 분명 머리로는 지금 이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려도 쉬원치 않을놈이니 욕을 한사발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였지만 가슴은 아니였다.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뒤돌아 서는 녀석을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낯선 이방인의 소란 아닌 소란을 들었는지, 달려온 학교 선생님의 모습에도 그렇게 멍하니... "저기. 무슨일로 오셨나요?" . . /교무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교무실 풍경이다. 한쪽에선 수업 준비로 바뻤고, 또 한쪽에서는 사고를 쳤는지 학생이 혼나고 있었다, 맞은편에선 서류를 뒤적였고, 진지한 진학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 사이에서 죄진 사람 마냥 마스크를 벗은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무슨일로 학교에 오셨냐니까요?" "아...그러니까." "그것도 이렇게 수상한 복장을 하고는...." 백안고등학교, 선생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경계하는 눈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내 손에 들린 마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재빨리 마스크를 뒤에 숨기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게 나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욱 더 이상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툭 툭. 툭,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는 속도가 좀 더 빨라진다. "그러니까 말이죠." "네." "사실. 제가, 이 학교 학생을 찾으러 왔거든요. 제 펜팔 친군데요. 아, 제가 미국에서 온지 얼마 안됬거든요." 반은 거짓, 반은 진실인 내말에 선생의 눈초리는 좀 더 날카로워 졌고. 그런 선생의 눈빛에 평소 '임기응변에 강하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는 재빨리 능숙한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미국에 2년정도 있었는데, 그동안 펜팔을 하다가 얼마 전에 연락이 끊겼어요. 한국으로 돌아오면 꼭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도 안되고. 그래서 얼굴이라도 보고싶어서 무작정 찾아 온거에요. 실례가 됬다면 죄송해요. 너무 만나고 싶은 마음에.." ...... 사실은, 사진 한장에 10만원이라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이런 몰골로 찾아왔어요. "아..그래요?" 그제서야 선생의 눈에서 경계심이 풀리는걸 느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들었다. 10분전,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정해운과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해운이랑 진운이 형인데...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알아요?' "네. 이름은..진운..이구요. 정해운 옆에 있는. 이 사람이요." '임기 응변에 강하다'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큰 나였다. 나는 이참에 정해운의 옆에 있던 남자의 신상정보라도 알아내자 라는 생각으로 여자에게 사진을 내밀었고 사진을 받아든 여자는 사진속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나와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진운이요." 응..? 잠깐. 난감한 표정? "네. 그런데 왜..." 그런 난감한 표정을 짓고 계신가요..나는 턱까지 차오른 말을 집어 삼키며 선생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소식..듣지 못하셨나 보네요." "네?" 난감한 여자의 표정은 이내,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영문을 몰라 당황한 나에게 여자는 사진을 쥐어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운이는 일년전에..사고로 죽었어요." * * * * '진운이는 일년전에...사고로 죽었어요.' 도대체 이 아르바이트를 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도대체 왜 그 사람은 어떤 의도로, 죽은 사람의 신상정보와 사진을 구하라고 했던걸까. 혹시, 그사람, 진운이라는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게 아닐까... "셔터 부분이 손상 되었네요.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생긴것 같은데 자세한건 담당자 분이 오셔야 알 수 있을것 같아요. 음...내일 오후쯤 찾으러 오시겠어요?" "..........." "저기..." 온통 의문 투성이다. 나는, 그 의문속에서 혼란스러울수밖에 없었고, 그 혼란은 카메라를 고치러 온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수리점 아저씨가 정신 놓고 있는 나를 흔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후로도 한참동안 그 혼란속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네? 방금 뭐라 하셨죠?" "내일 오후쯤 찾으러 오시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수리점 문을 열고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가 훅 밀려 들어왔다. 나는 길다란 한숨을 내뱉으며 계단에 걸터 앉아 사진을 꺼내들었다. 사진 속에는, 변함없이 정해운과 함께 진운이라는 남자가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쪽 손가락으로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져 본다. "이렇게 행복해보이는데, 죽었다고...." 순간, 웃지 않는 정해운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 졌다. 정해운에게 이사람은 분명, 소중한 사람이였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감정 없는 정해운의 얼굴은 그만큼 힘겨워 보였던것 같다. 그래 나는 분명, 그 얼굴에서 곧 무너질것 같은 절망을 보았던것 같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것을 깨닫자 그제서야 모든걸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상처에 조금이라도 개입할 자신 따윈 없었으니까. [민지야. 정말 미안. 나 이 일 그만둘래. 받은 계약금은 돌려주겠다고 전해줘] 어제와 같은 후회나 아쉬움 따윈 없었다. 이상하게도 가벼워 질 것 같았던 마음은 더욱 무거워 졌지만.. /다음날 "네. 알겠습니다. 이력서 들고, 지금 갈께요." 다른 사람의 이력서를 한번도 본적 없지만, 이만큼 초라하진 않을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텅텅 비어있는 경력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맨땅의 해딩하기가 이런 기분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 계약금. 당장 마련하긴 큰돈이잖아] 하지만, 지금 나는 맨땅에 해딩이라도 해야만 했다. 김민지에게 설득당해 또 다시 그 찝찝한 일에 개입되긴 싫었으니까. 나는, 그녀의 문자를 쿨하게 씹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깟 50만원. 한달만 열심히 일하면 쉽게 구하고도 남을거라는 오만한 착각과 함께. . . "휴...." 그것이 오만한 착각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경력 없는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뽑아 줄 바다같은 마음씨의 사장은 없었고, 나는 면접 보기로 한 곳에서 번번히 퇴짜를 맞으며 쓸쓸히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쯤 되면 슬슬 지치기 마련이다. 벌써 5곳이나 돌아다녔는데. 왜 모두 다음에 연락준다는 말뿐인걸까. "마지막이네.." 어느새 밝았던 하늘은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면접 보기로 한 마지막 가게 앞에 서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5번 퇴짜로 인해 나의 사기는 한숨과 함께 땅으로 꺼져 있는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붙을꺼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고, 약속이라도 지켜야 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술집. 그곳은 왜, 아르바이트를 급구하는지 알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게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턱없이 일손이 부족해 보였고, 그 모습에 꺼져 있었던 희망의 불이 붙으려는 찰라, 나는 카운터에 쌓여있는 이력서에 다시 한번 좌절 할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깐.. "저...아르바이트 구하러 왔는데요." "아..그러세요? 잠시만요. 사장님!!" ".........." "사장님!!!! 아, 지금 일이 좀 바빠서.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시겠어요? 제가 불러 드릴께요." 네...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하고는 뻘쭘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기대는 나. 카운터 옆쪽에 쌓여 있는 이력서를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 이력서, 몰래 다 버려버릴까..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력서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젛는 나였다. "사람이.....급하면 정말 뵈는게 없구나.." 아무리 그래도. 범죄는 안돼 김민선.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주무시나." 마지막 가게라 그런지, 조금은 초조한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안절부절 못한채 연신 손톱을 물어 뜯으며 사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분이 지나도 머리카락 조차 보이질 않는 사장. "에이씨 안돼겠다. 안오면, 내가 찾으러 가면 되지" 그렇게 급한 성질을 참지 못하곤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거짓말처럼 마주쳤다. 그아이와. "정해운...?" 의도치 않은 만남은, 역시나 달갑지 않다. "야. 나 아니다. 진짜 이번엔 너 따라 온거아니야. 너 또 나 스토커로 생각하려 하지. 나 진짜 그런게 아니라..." 그리고, 의도치 않은 상황은...역시나 당황스러울수밖에 없었다. 나는 난감한듯 강하게 저어대던 손을 멈추곤, 그대로 굳어 내쪽으로 쓰러지듯 안겨버린 정해운을 내려다 보았다. 순간, 알싸한 알콜냄새가 코끝에 닿았고, 어깨로 적지않은 녀석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게...무슨... "야. 너..너 왜그래. 취했어?"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은 내 목소리에도 녀석은 아무말이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정해운을 밀어보지만, 녀석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sos를 청해야 겠다는 생각에 술집안에 있을 강다현을 찾으려는데. "김민선..." 술에 잠긴, 그러나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행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너...내이름을 어떻게.." 당황스러움을 넘어, 이젠 혼란스러워 진다. 분명 김민선 이라고 했다. 처음보는 그아이는, 거짓말처럼 내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슬픈 목소리로..아픈..눈으로, "왜 나타났어.." "뭐..?" "....도대체 왜.."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심장을 파고드는 정해운의 젖어있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나는...이제 익숙해졌어. 눈물...참는거." ".........." "그러니까....그 끔찍한 시간으로 다시, 되돌리려 하지마." 녀석의 눈물로 어깨가 젖어들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 아르바이트는, 아무나가 아닌 오직, 김민선. 나를 위한 일이였다는걸. * * * * "빨리 말해." "민선아." "말하라고." 그동안 난 왜 눈치채지 못한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것이 한두개가 아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소개 받고 나서 단 한번도 이 일을 의뢰한 그 사람과 이야기 해본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것을 김민지를 통해서 전달받았다. 계약금도, 계약 조건도, 해야할 일도 모두. "이 일, 시킨 사람 누구야. 그사람 좀 만나야 겠어." 민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내뱉는 내가. 그녀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울만도 했다. 하지만, 당황스럽다고 말해주지 않는건 이해되질 않는다. 무엇이 찔리기에 의뢰한 그 사람의 연락처를 말해주지 않는걸까. "그건..말해줄 수 없어. 그래. 비. 비밀이야 비밀." "웃기지마." "진짜야. 정말로..." 김민지는 말꼬리를 흐리며, 내 시선을 피했고, 내가 어이없다는듯 바라보자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왜? 궁금해 하지 않았잖아." 그래..궁금해 하지 않았지. 이상하다고 느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해운이..." "어..?" "나를..알고 있었어." "뭐? 너를 아는체 해?!!!!!!!" 깜짝이야... 별안간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소리를 꽥 지르는 김민지 때문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진짜, 심장 떨어질뻔 했네. “어. 그리고 이상한 소리도...했어. 그런데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 "기억은 안나는데...아는 사이였던것 같아. 그리고, 이 일 시킨사람은...나한테 그걸 알려주려고 했던것 같고.. 정말 그런게 아니라면 우연치곤 너무, 어이없잖아." "........." "말해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 뭐 알고있지. 이 일, 우연히 나한테 들어온거 아니지? 인터넷에 올라왔다는것도 거짓말이지? 이거 시킨 사람 누구야?" 정말이지 머리가 뻥 하고 터져버릴 지경이다. 머릿속은 온갖 의문과 물음표로 이미 가득찰데로 가득 찼지만, 어느 하나 해결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민지는 내말에 입술을 꾹 깨물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집었다. "야. 너 진짜 대답 안할래!" 그런 민지의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담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누르며 말했다. "기다려. 그사람, 불러줄테니까." . . . 김민지와의 짧은 통화 후, 남자는 민지의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 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민지는, 굳게 입을 다물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이상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채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렷다. '나는...이제 익숙해졌어. 눈물...참는거.' '그러니까....그 끔찍한 시간으로 다시, 되돌리려 하지마.' 나는 왜 정해운을 기억하지 못하는걸까. 정해운의 알수없는 말들은 고장난 라디오 처럼 수십번 재생되어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없었다. 단 한가지 확실하게 알수 있었던건. 그아이의 깊은 상처와 아픔이였다. 보는 사람마저 힘겨울정도로 커다란.. "민선아." ".............." "민선아!" "어? 어...어 왜?" "왔어. 그사람." 정해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정신을 놓고 있을때 즈음. 내 옷깃을 잡으며 눈짓을 하는 민지. 나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분명 조금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게 이런 일을 시킨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혼란스러움이 풀릴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확인한 나는 더욱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 "강다..현?" 3. "강다..현?" 믿기지 않는다는듯 입을 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강다현이...여긴 왜. "누나, 미안해요." 이어 들려오는 강다현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공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역시나, 모든일은 계획된것이었고. 그 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뿐. 왠지 모르게 바보가 된 기분이다. "너야?" "........." "이 일 시킨게 너냐고." "네." "왜?" "누나.." "왜 이런일을 시켰어?" 침착하려 했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떨리는 내 목소리에 강다현은 아무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 말할께요. 그러니까 진정 좀 해요." 이 상황에서 그 누가 진정할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진정 해야만했다. 그 순간만큼은 이성을 찾아야만 했다. 강다현의 말에 나는 침착히 고개를 끄떡이며, 녀석을 바라봤고. 그런 강다현의 동공에는, 알수없는 불안으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담겼다. "우리 처음보는거 아니에요."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이해할수 없는 강다현의 말에 나는 더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뭐?" "누나, 1년전. 나랑 아는 사이였다구요."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마. 1년전에 나는 분명 미국에..." "너, 한국에 있었어. 미국에 있었다고 믿는건 니 기억이 모두 지워졌기 때문이야. 니가 미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이랑 산건...2년이 아니라 1년뿐이야 민선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민지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였다. 아니, 받아들일수 없는 사실이였다. 내가 믿어왔던 시간이, 그녀의 한마디 말로 한순간에 꿈처럼 사라져버리게 생겼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장난치지마...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강다현은 긴 한숨을 내뱉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녀석이 내민 무언가를 내려다 본다. 그순간, 주체할 수 없을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그건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돗을정도로, 감당 할 수 없는 현실이였다. "이거......." 떨리는 손으로 녀석이 내민 사진을 받아드는 나. 찢어진 사진 한켠에는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고 나는 곧,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주머니에 있던 정해운과 진운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사진은 정확히 일치했다. 두개의 사진 조각들이 만나자, 비로소 한개의 사진이 되었다. 하나로 합쳐진 사진 속에는 두명이 아닌, 세명이 함께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누나가 그일을 포기하려고 할때 갑자기 내가 누나 앞에 나타나고.. 이유없이 뛰어서 누나 연습실 근처까지 데려오고.. 분명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진을 주워들고..." 앞으로 수많은 날을 살아가면서 이토록 황당한일을 겪는날이 올까? 강다현의 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생각했다. "맞아요. 그거 우연 아니에요." "도대체 왜..." "우리 둘다 악의는 없었어요. 그냥, 누나가 잃어버린 1년. 찾아주고 싶어서 그랬던거에요." "잃어버린...1년?" "네. 나도 있고, 정해운도 있고, 정진운도 있었던 그 시간." "............." "누나 머릿속에서 거짓말처럼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그 시간이요. 정해운이 저렇게까지 나올줄 몰라서... 우리 계획은 보기좋게 망쳐버렸지만." 강다현은, 잠시 말을 멈추곤 사진 속 행복해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는 눈동자로. 그러나, 나는 그 감정에 동조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답답한 마음 뿐이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찌됬든 이 사실을 몰랐을 그때나, 지금이나 그 기억은 누나가 직접 찾아야만 해요." ".............." "우리가 해줄 수 있는건...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할수 있는건 그저, 누나가 기억을 찾아서." "............"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라는것뿐" "정말...이 모든게 사실이야? 장난 치는거 아니야? 거짓말 하는거..아니야?" 한참의 침묵을 지키던 내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고작 이거였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 일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평소, 선의의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들이 내게 거짓말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이 모든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장난이였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그만큼 나는 갑작스럽게 내게 찾아온 믿을수 없는 이 현실을.. ".........."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날 '그럼 내가 기억상실증이란 말이야?' '응. 정확히 말하면 해리성 기억 상실증으로 보여. 너 다시 한국에 왔을때. 그 1년만 기억하지 못했어. 그래서 다현이랑 이야기 하다가..이런 말도 안돼는 계획 짰던거야.' 한동안 컴퓨터 앞은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였지만, 다음날 나는 한숨도 못잔 얼굴로 다시 피시방을 찾았다. 또 다시, 쾌쾌한 담배냄새로 가득한 이곳에 오다니..한숨을 푹 쉬며, 인터넷 창을 켠다. "해리성..기.억.상.실.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타자속도로 검색창에다가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 내 병명을 치자, 모니터안으론 수많은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타났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검색결과들을 차근차근 둘러보다가 하나의 사이트를 클릭했다. 이내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한 웹페이지가 뜨는 순간, 내 머리는 온통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뒤섞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곳에 온통 정신을 집중하고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관한 글을 천천히 읽어 나간다. "어디 보자...해리성 기억 상실증. 이는 이미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에게 중요한 정보를 갑자기 회생시키지 못하는 장애이다..뭐야. 내가 장애란 말야?" 나는 이렇게 지극히도 멀쩡한데... "단순한 건망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이며 뇌기능장애 때문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사건과 관련되어, 심적 자극을 준 부분을 선택적으로, 혹은 사건 전체를 기억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지속적인 과거 생활을 포함한 전생애나 그 중 일정기간에 대한 기억 상실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는 능력은 남아 있다. 갑작스런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그 원인 중 하나이다. " 그렇다면. 1년전 내가 정신적 혹은 육체적 충격을 받았다는 건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였다. 도대체 1년전에 내게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그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걸까.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의문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인간은 모두 '자기보존'이라는 잠재의식이 있다고 한다. 이 잠재의식은 어떠한 사건이 자신을 지치고 힘들고 무섭게 만들었던 기억만을 지워내는 일종의 '자기보호'이다. 기억이 선택적으로 삭제되는 그것이 두려움, 공포, 실연의 상처 그 어떤것일지라도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드는 일종의 '자기보존' 혹은 '자기보호'이다." 그렇게 한글자도 빠짐없이 글을 읽다가 순간, 스크롤바를 내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곤 웹페이지 맨 마지막에 있는 문장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결심한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나였다. . . .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바램.' /연습실 "잘 생각했어요. 누나" 두번째로 찾은 연습실안. 아니, 저번에 왔을때는 들어오지 못했으니까. 처음이라고 해야 맞는건가. 한껏 높아진 강다현의 밝은 목소리에 아무말없이, 작지만 아늑한 연습실 안을 둘러 본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이게 잘하고 있는건지. '나. 정해운 만날래. 알아야겠어. 우리가 무슨 사이였고. 우리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나는 10분전, 강다현에게 내뱉었던 내말을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곤 쇼파에서 일어섰다. "근사하죠. 키보드, 드럼, 기타. 이래뵈도 구색은 다 갖췄다구요." 강다현의 말처럼 연습실안에는 여러가지의 악기들이 깔끔하게 놓여있었다. 드럼. 기타. 키보드...하나하나 구경하다가 이내, 나는 키보드 앞에 멈춰섰고 손가락으로 키보드 건반을 하나 둘 누르자 맑은 음색이 음악실에 울려 퍼졌다. "밴드 연습실?" "네. 뭐. 지금은 그냥 아지트 정도로 쓰이지만.." "왜?" "지금 남은 멤버들은 나랑 정해운 이렇게 달랑 두명이거든요. 그렇다고 없애긴 싫어서 그냥 그대로 남겨뒀어요. 여기, 우리한테는 추억 많은곳이거든요" 혹시 나한테도 이곳이 추억이였니.. 그러나, 차마 물어보지 못한채 연습실 한가운데에 걸려있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길다란 시계바늘은 어느새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정해운. 6시쯤 온댔지?" "네.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목시계에서 시간을 확인한 강다현은, 초조한 표정으로 곧, 정해운이 열고 들어올 문을 응시했다. 그런 강다현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에 초조해진다. 정해운은 또 다시 자신을 찾아온 나를 어떤 얼굴로 쳐다볼까. 어떤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설까. 그가, 그렇게까지 나를 밀어내는 이유는...도대체 무엇일까. 째깍째깍 거리는 초침 소리가 어쩐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다현아." 그후,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드럼스틱을 돌리며 놀고 있는 강다현을 나즈막히 불렀다. 그러자 녀석에 손에서 돌아가던 드럼스틱이 탁- 하는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누나..." ..뭐.뭐야 이새끼. 저 심하게 감동 먹은것 같은 부담스러운 얼굴은.. "감동이에요. 진짜 눈물 나올것 같아요. 누나가 나를 이렇게 성빼고 다현아. 라고 불러준게 얼마만인지. " 할말을 잃곤 멍하니 강다현을 바라본다..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내뱉은 말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동하다니. 정말, 놀랍도록 특이한 아이다. "우리 설마 많이 친했었니?" "아니요..." 강다현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순간 녀석의 말에 조금 안도했던것 같다. "그래. 그럴것 같았다." "친하진 않았지만 누나가 나 좋아했었어요. 막 따라다녔는데!" "야.." "네?" "내가 기억 안난다고 허위사실 짓껄이면 쥐도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는수가 있다." "미안해요 누나. 사실 뻥이에요." 해맑게 웃으며 다시 드럼스틱을 돌리는 다현이. 그런 녀석을 보며 웃음짓다가 시간이 얼마 안남은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은 여섯시. 이제 슬슬 녀석을 만날 준비를 해야했다. 나는, 강다현에 손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드럼스틱을 빼앗곤, 어리둥절해 하는 녀석을 일으켜세웠다. "너. 나가라" "네? 누나. 너무해요!" "그게 아니라..나가서 숨어있다가 정해운 연습실로 들어오면 그때.." "그때..?" 강다현은 담담한 내 말투에 숨죽이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녀석에게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문 잠궈버려." ...라고, 정해운은 연습실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또 다시 도망칠게 분명했다. 장담하건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잔뜩 내뱉으며, 화를내다가 이내, 쾅 하고 문을 닫으며 이곳을 나가겠지. 하지만, 녀석이 나가지 못하게 문을 잠궈 버린다면 이 작은 공간에는 우리 둘만이 남게 되는거고, 말 한마디 못하고 뻥져있을수밖에 없었던 이전과는 상황이 확실히 달라질것이다. 흐흐흐.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강다현 등을 밀었다. "알았지?" "뭐...알았어요 근데 누나 그거 알아요? " 강다현은 대롱대롱, 연습실 문에 메달려 고개만 쑥 내밀곤 장난스럽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뭐가? 하고 묻자 눈매가 둥그레지도록 웃더니, 충격적인 말을 내뱉고는 뒤돌아 서는 녀석. "지금 진짜..사악해보였어요 웃음이. 완전 악당..." 나는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유리창에 비춰지고 있는 내모습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악당이라니... "저게 뒤질려고!!!!!!!!!!"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드럼 스틱을 주웠다. 그리곤, 문 밖에 서있을 강다현을 향해 다가갈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 틈으로 속삭이는 강다현의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누나. 정해운 와요!"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춘다. 발걸음 소리는, 아까보다 좀 더 크게 들려왔고, 그와 비례해 빠르게 뛰는 내 심장소리도 점점 커졌다. 나는, 들고 있던 드럼스틱을 뒤로 숨기곤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했는지 드럼스틱을 쥔 손에선 땀이 베어 나왔다. "강다현. 나왔어." 곧이어 나 혼자뿐인 이 공간에, 정해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숨죽여 연습실에 들어온 녀석을 바라봤다. 정해운이 그런 나를 발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녀석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의 연습실 한가운데에 서있는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듯 공허한 웃음을 뱉어냈다. 그리곤, 상대하기도 싫다는듯 망설임없이 뒤돌아 섰다. "정해운. 도망가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니 맘대로 되지 않을거다. ".........." 장난스런 내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채, 문쪽으로 다가가는 녀석. 그러나 그보다 강다현이 더 빨랐다. 찰크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기자 정해운은 신경질적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잠겨버린 문이 열릴리 만무했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두들겨 보지만 열리지 않자 정해운은 쾅- 하고 문을 발로 차버렸다. "문열어." "..........." "헛짓거리 하지말고 문 열라고.."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시리도록 차갑다. 나는 말없이 정해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뒷모습은 왜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힘겨워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순간, 기억을 찾아보기로 한 내 결정이 옳았음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혼자 짊어지기에 정해운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욱씬 거렸다. 이유를 모르는, 아픔이 내심장에 파고 든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이상한 감정.. "정해운." ".........." "내가 1년전 기억을 잃어버렸다며. 그리고 그 기억속에 너도 있었다며." "............" "말해봐." 정해운은, 떨리는 내 목소리에도 뒤돌아 서지 않았다. 내게서 등을 보인채 그렇게 가만히 내말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지금 어떤 얼굴로 서있을지..알지 못했다. "도대체...1년전에 어떤일이 있었던거야?" 처음에는 정말 아무런 관심 없었다. 그저, 무슨일이 있었을까 정도의 호기심이였을뿐. 하지만 지금 너의 모습에. 이제는 진심으로 알고싶어졌다. 니가 감당하고 있는..그 아픔에 관해 "부탁이야. 알려줘." 왜 나를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건지. 왜 내가...이렇게 너의 뒷모습을 보는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건지. 모두 다. "............." "..............." 잠시동안, 우리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해운은 여전히 내게 뒤돌아서지 않았지만. 더이상, 이곳을 나가려 하지도 않았다. 기나긴 침묵이 지루해지려는 찰라, 문고리에 올려 놓은 손을 내려 놓으며,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깨트렸다. "아무일도..." "............" "아무일도 없었어."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덤덤한 목소리로. "아무일도 없었다고? 거짓말 하지마." "그깟 1년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건데." "뭐?" "너랑 나랑 아는사이였던건 맞아.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게 다야." 정해운은 그제서야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눈에는,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의 내가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게 당연했다. 아무일도 없었다니...그게,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의 얼굴이야? 거짓말을 할거면 좀 더 완벽하게 하던가..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럼 왜.." "....."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봤어? 왜 나를 밀어냈어? 왜 나를..." 아니다, 그냥 관두자.. 감정적인 목소리를 내뱉다가, 말을 멈춘다. 대신, 정해운 앞에 멈춰서곤 손을 내밀었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말해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 좋아. 그래도 난 찾고 싶어. 그 기억." "..........." "그깟 1년에 의미 부여 하고 싶다구. 의미 부여 하는건 내 자유니까. 안그래?" 정해운은 내게 두었던 시선을, 자신에게 내민 내 손으로 돌렸다. 허공에 떠있는 내 손이 비참할정도로, 빤히 응시하는 그. 한참 후,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이거 뭐?"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누르며, 나는 정해운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순간, 햇살이 내려 앉은것처럼, 손이 따듯해졌다. 손, 차가울것 같았는데. 무지 따듯하네..아무튼간에. "기억은 안나지만...어찌됬든 우린 다시 만난거잖아." "........" "다시 만나서 반가워 정해운." 환하게 웃어보이자, 정해운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굳더니, 이내 내손을 타악- 하고 뿌리쳤다. 벌레라도 잡은것처럼 정색하곤 말이다. 순식간에 무안해진 나는, 어색히 웃으며 손을 내리곤,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라며 수십번 중얼거렸다. 여기서 화내봤자 좋을건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니 시간, 일주일만 나한테 빌려줘라. 딱 일주일만 나랑 같이 지내보자. 예전에 함께 갔던곳도 다시 가보고..이야기도 해보고. 그러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안그래?" "........" "일주일인데..그정도는 어렵지 않지?" 이런 제안을 정해운이 받아들일꺼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궂이 말을 꺼낸건, 일종의 예고였다. 일주일동안 내가 널 집요하게 따라다닐테니. 그렇게 알아두라는. 그런 예고. 내말에 정해운은 벽에 등을 기댄채 무언갈 생각하는듯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바닥을 응시했다. 설마..고민하는건가?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키며 정해운을 바라본다. "대신, 조건이 있어." 잠시후,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그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였다. '조건'이 붙긴 했지만 분명 정해운은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자신의 눈앞에 한번만 더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 거리던 사람이다. 그런데, 나와 함께 일주일을 보내 주겠다니.. 순간, 잘못들은건가. 싶기도 했다. "무슨...조건?" 잘못들은게 아니라면, 어마어마한 조건이 동반되지 않을까. 지레 겁부터 먹으며 조심스럽게 묻자, 정해운은 바닥으로 두었던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일주일동안..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 니가 믿고 있었던 그 현실로." "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마.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모두 다 잊고 그렇게 살아가." 아..아프다. 정해운과 눈이 마주친 순간, 드는 생각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였다. 아프다. 나를 담고 있는 정해운의 눈동자가 너무, 아프다. "그게 내 조건이야." 조용한 정해운의 목소리는 연습실 안에 울렸고, 동시에 내 심장에도 울렸다. 그순간 나는 조금 두려워 졌다. "그래. 좋아." 한명은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또 한명은, 그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전혀 다른 의도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시작된 우리들의 일주일이라는 시간. 나는, 그 시간속에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잃게 될까... /다음날.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다. 누군가가 옅은 하늘색으로 폐인트 칠을 해놓은것처럼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며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게다가, 서늘한 바람까지 기분좋게 두 뺨을 훑고 지나간다. 이렇게 날씨가 좋다니. "이건 뭐, 데이트라도 해야할것 같은 날씨잖아." 나는, 투덜거리다가 걸음을 멈추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머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옷 매무새는 정돈 되었는지. 내 옷과 구두가 잘 어울리는지. 그러다가, 갑자기 이렇게나 신경쓰는 내가 이해되질 않아, 정신을 놓은 사람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머리가 흐트러지면 어떻고, 옷 매무새가 정돈되지 않았으면 어떤가. 내 옷과 구두가 잘 어울리든, 안어울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정해운을 만나러 가는건데. "오바했다. 김민선." 이게 다 빌어먹을 날씨 때문이다. 더럽게 좋은 이 날씨가 잠시 나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하늘을 올려보다가 이내, 다시 약속장소로 향했다. "..............." 약속장소에는 정해운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거리였지만, 정해운은 그중에서도 단언 눈에 띄었다. 어떻게 티셔츠 한장에, 바지만 입었을뿐인데도 저렇게 근사한걸까? 나는 잠시 동안, 정신을 놓고 벤치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던것 같다. 성격만 착했더라면, 정말 다리에 메달려 애정을 구걸하고 싶을정도로 잘생겼구나 너. "야.. 뭐해 너." 정해운이 날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로도 한동안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놓았던 정신을 잡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뭐 좀 생각하느라.." .....지랄한다. "뭔데?" "그런게 있어. 일찍왔네?" "니가 늦은거지." 정해운은 나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핸드폰 액정을,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약속시간은 2시, 현재시각은 2시 20분. 정해운의 말처럼 놈이 일찍 온게 아니라 내가 늦게 온거였다. 나는, 어색히 웃으며 핸드폰 액정을 탁- 하고 닫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아무튼. 이제 어디갈까?" 정해운은 무책임한 내말에 황당하다는듯 나를 바라봤다. 사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더 솔직해 지자면 정해운과 함께 보내기로 한 일주일이 막막한 상황이다. 자신있게 소리쳤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작정, 많은 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작은것 하나라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있을뿐.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무엇을 할지 '대신' 결정해준 정해운이였다. 고개를 끄떡이며, 그런 녀석을 따라가려는 순간,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급하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잠깐만!" ".........." "나, 들릴데 있어. 금방 갔다올테니까 기달려." . . . "어디 갔다 왔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우리가 함께 들어온 음식점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북적거리는 가게, 구석쪽에 자리잡은 우리의 테이블로 주문한 롤과 초밥이 놓여지자, 정해운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가방에 넣어 둔, 액자를 만지작 거린다. "아무것도 아니야. 배 안고파? 빨리 먹어." 사실, '마음 하나'라는 선물가게에 들려, 액자 하나를 샀다. 가장, 예쁘고 근사한 액자속에 담고 싶었던 지라, 거리가 꽤 걸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찾았다. 그곳은 모두, 수공예 상품들로 이루어져, 어떤 물건이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곳이였다. 내가 왜 이 사진에 그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어찌됬든 찢어지고 구겨져있는 사진 두조각은, 이제서야 한장의 사진이 되어 다시 액자속에 꽂히게 됬다. 만지작 거리던 액자를 이내 가방에 넣고, 이내, 나를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정해운에게 어색히 웃어보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접시에 놓여진 롤과 초밥은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 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맛있겠다. 너 초밥 좋아해?" ....설마, 삐진건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아무말없이 자신의 접시에 초밥을 옮기는 정해운을 바라본다. 처음 볼때부터 느낀건데 정해운은, 정말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진짜 내 친동생이였다면 죽도록 패줄텐데... 입을 삐쭉 내밀곤 초밥을 집으려는데 정해운이 먼저 초밥이 담긴 자신의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 왜?" "먹어." "괜찮아. 내껀 내가 덜어먹으면 되는데." "매운거 못먹잖아." 당연하다는듯 대답하곤, 이내 내 접시를 가져가 자신에 초밥을 담는 정해운.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정해운이 내민 접시를 내려다 보았다. 접시에는 와사비를 조금씩 덜어낸 초밥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보는 정해운의 자상함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려는걸 참으며 초밥을 입에 넣는다. "예전에도 이랬어?" 그러다가, 툭 내뱉듯 물었고 "뭐..가끔." 너 또한, 무심한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나에게...어떤 존재였을까. 함께 있을수록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간다. 나를 증오하고 경멸하는듯한 눈으로 보다가도, 애틋한 눈으로 간절하게 바라보고. 귀찮아 하며 신경쓰지 않는듯 싶다가도 내 작은것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배려해주는. 너는, "그런데 있잖아." "응." "진운이라는...그사람." 이곳에 와서, 한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정해운은 '진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젓가락질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고, 나는 그의 눈에서 알수 없는 힘겨움을 느낄수 있었다. 괜히 물었나 싶어 후회가 들려는 찰라 정해운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듯한 얼굴로 '응.' 하고 대답했다. "사고나서...." "응." "죽었다며." "응." "많이 친한것 같은데..괜찮아?" "아니."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도대체 이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말을 꺼낸걸까? 김민선. 진짜, 너는 이대로 맞아도 할말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상처를 꺼내다니. 계속되는 침묵에 나는 어떻게서든 분위기를 전환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무거운 공기에 숨을 쉴수 없을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거리를 찾으려는데 침묵을 지키던 정해운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어?" "괜찮아?" 그리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 놓는다. 초밥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정해운은 더이상 먹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의미모를 말을 내뱉는 그 였다. "좋겠다." "............." 그순간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 졌다. 이러다가 정말 체할것 같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마음이. . . . "엄청 쏟아지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조금씩 굵어지더니,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무렵에는,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만큼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우산 안가져 왔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굵어진 빗줄기는 도무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맞고 갈까?" 장난스레, 말하자 정해운은 잠시 손바닥을 들어 빗줄기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너무 많이와." "왜? 뭐 많이 오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비 맞는것도 좋은데." "감기 걸리는거 싫어" "그깟 감기가 뭐 대수라고." "한번 감기 걸리면 죽어나는게.." 이제는 어느정도 적응이 됬는지 놀랍지도 않다. 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정해운이. 무심한듯 하지만 자상하게 나를 배려하는 정해운이. "그럼 계속 기다려?" "기다려봐. 생각 좀 해보고." 정해운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무언가를 심각히 고민하는듯 싶었다. 나는 그런 그가 이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고민할일인가. 비를 맞고 가면 가는거고,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리면 기다리는건데.. 엉뚱한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정해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왜 웃어?" "니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지금 너 지구의 종말이라도 고민하니?" "그게 아니라..." 무언갈 말하려다가 빗소리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진동소리에 정해운은 말을 멈추었다. 타이밍 한번, 기가막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검은색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녀석의 검은색 핸드폰을 보고 왠지 모르게, 검은색은 정해운에게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다고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할때쯤, 정해운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참으로 정없는 목소리다. 어쩜 저리 무뚝뚝할수 있을까. "어. 밖." 어. 밖. 이란다. 정해운은 앞 뒤 다 짤라먹고 정말 용건만 말하는 타입인 모양이다. 이런거,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타입인데.. 나는 궁시렁 거리며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 정해운을 올려다 보았다. "뭐?" 통화가 계속될수록, 정해운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정해운의 표정에 통화내용이 궁금해져 괜히 허공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겨 녀석에 옆으로 다가섰고 발꿈치를 들어 통화내용을 들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통화 내용은 빗소리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 너 지금 뭐라고." 아무리 기를 써도 들리지 않자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살짝 들었던 발꿈치 때문에 다리까지 아파오자 엿듣는걸 포기하곤 잠자코 통화가 끊날때까지 기다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참동안 들고 있던 발꿈치를 내리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다현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희미하게. 그러나 정확히 들려왔다. '해리가...다시 돌아왔다구.' "돌겠네..." 핸드폰 플립을 닫으며, 정해운은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질렀다. 도대체 '해리'가 누구길래 저렇게도 심각한 표정을 짓는걸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곤 정해운을 향해 조심스럽게 묻는다. "해리가..누구야?" 그러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너 엿듣는거에도 취미있어?" "엿들을려 한게 아니라. 들렸거든." 사실, 발꿈치까지 들면서 엿들으려 했던건 맞아.. "그냥..." "그냥?" "별거 아냐." "별거 아닌 표정이 아닌데..혹시, 여자친구?" 아무 생각없이 툭, 던진 내말에 무척이나 기분 나쁜듯 인상을 찌푸리는 녀석. 순간 무안해진 나는 입을 다물고는 손톱을 뜯으며 딴짓을 했고, 정해운은 그런 내게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밴드했던애." 사실, 궂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일이였다. 하지만, 정해운은 왠일인지 의문의 여인'해리'에 대해서 내게 짧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주었다. 여자친구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부인한것이다. 그 답게. "아...그래?" "응. 근데 비 안그칠꺼 같은데..." "그러게. 어쩌지?" "기다려봐." "어? 어어..? 야 어디가!" 내가 붙잡기도 전에, 정해운은 망설임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어디론가 달려가는 정해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설마, 설마..나를 그냥 두고 가는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꺼다. 하지만 아닐꺼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이마음은 뭐지? "이제 곧 오겠지." 애써 침착하며, 정해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해운은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가게 앞에 혼자 서있는 나에게 사람들이 시선이 힐끔힐끔 닿자, 나의 짜증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이새끼 진짜. 자기 혼자만 택시타고 가버린거 아냐? 나는 신경질적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건물에서 나왔고, 건물을 나오자마자 안에서는 느끼지 못한 차가운 빗줄기가 머리로 떨어졌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를 피해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비들은 그런 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허무하게 세어 나와 떨어졌다. "에이씨 진짜 짜증나게 쏟아지..." 그러나, 그순간 거짓말처럼 비는 멈추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졌지만. 내가 있는 자리는 더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기다리라니깐." 멍청한 표정으로 우산을 들고 있는 정해운을 올려다 본다. 정해운의 카키색 티셔츠는, 비에 젖어 진하게 변해 있었고,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선 빗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런 정해운의 모습에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우산...사러 간거였어?" "그럼, 도망이라도 갔을까봐?" 정해운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내게 우산을 쥐어주고는,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 급한일 생겨서 가봐야 할꺼 같은데." "............" "혼자 갈수 있겠어?" 지금껏, 정해운에 대해 몇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던것 같다. 무뚝뚝하고 싸가지없고 차가운줄만 알았는데, 정해운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따듯하고 자상한 사람이였다. "너..." "응." "감기 걸리는거 싫다며..." 우산을 받아든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정해운은 차갑게 떨어지는 비와는 너무나도 상반된, 따듯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듯 대답했다. "나말고 너." /다음날 "그래서. 뭐 기억 나는거 있었어?" 어느새, 나의 '기억 찾기'는, 김민지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집에 찾아와 나를 괴롭힐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 전혀." 내 말에 실망한듯한 표정의 민지였지만, 사실이였다. 이상할정도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조그만한 기억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꺼라 기대했는데, 기억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심란해지고만 말았다. "하나도?" "응..하나도." "하긴. 갑자기 돌아올리도 없지." 당연한다는듯 대답하면서도 민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어쩐지 우울하기만 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면서 반대로 기억하고 싶은 일들은 왜 기억나지 않는걸까. 나는 알수없는 답답함에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민지야" "응?"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너는 모른댔잖아." "응. 모르지 나야." "그럼...정해운이랑 나랑, 무슨사이였는지도 몰라?" 정해운의 말처럼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단정짓기엔, 어제 들었던 내 감정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정해운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가도 우울해지고, 행복하다가도 슬퍼진다. 이게 단순히 '아는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일까. 민지는 나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것만은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였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민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머리 위로 아주 큰 바위 하나가 떨어진것만 같은 충격을 경험해야만 했다. "사랑했던 사이야." * * * * * '사랑했던 사이.' 버스 의자의 몸을 기대곤, 믿을 수 없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사랑했던 사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돼.." 그래, 이건 정말 말도 안돼는 소리다. 정해운과 내가 그런 사이였다니.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 정해운이 나를 그렇게 차갑게 밀어 낼 이유는 없었다. 나 또한, 그런 정해운을 거짓말처럼 잊어버릴 이유따윈 없고.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단정짓기엔 김민지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사랑했던.'이라는 말은 분명히 과거다. 그렇다면, 1년전 우리가 헤어졌던걸까? 그리고 나는 영화나 소설속에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정해운과 함께 했던 그 기억을 모조로 잃어버린거고? "김민선 삼류 소설을 써라. 써." 삼천포로 빠지는 나의 소설은 점점 엽기적으로 변해갔고, 나는 어이없는 그 스토리에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바람을 쐴 생각으로 버스 창문을 열었다. 순간,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내 머리를 흔든다. 그 바람에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감으려는 순간 드르륵. 드르륵-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누나, 저 다현이에요. 잠깐 할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우리 연습실 옥상에서 좀 볼 수 있을까요?] 동시에 '다음 정류장은, 백안고등학교 입니다' 이라는, 버스 안내음이 들려왔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타이밍이다. 이렇게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문자가 오다니. 나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곤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아직, 정해운과의 약속시간은 30분정도 남아있었다. "근데 하필이면 왜 옥상? 하여간 별 이야기 아니면 죽여버릴꺼야. 강다현" 버스에서 내려, 핸드폰 액정을 닫고는 걸음을 옮겼다. 내 눈 바로 앞에는, 정해운과 만나기로 한 백안고등학교가 보였지만, 나의 발걸음은 강다현이 있을 연습실로 향했다. 학교에 있어야 할 녀석이 갑자기 연습실 옥상으로 부르는것에 대한 별다른 의심없이 말이다. . . . 혹시나 몰라, 옥상을 올라가기전 연습실을 들렸지만, 역시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대체 왜 시원한 연습실을 나두고, 때양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을 옥상에서 보자는걸까. 정해운이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면, 강다현은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재주가 있는것 같다. 나는 투덜대며, 때양볕이 내리쬐고 있는 밖에 비해서 서늘한 계단을 올라섰다. ".........." 그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박동에 놀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왜이러지..." 그순간, 이유모를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그 두려움에 나는 이제 몇계단만 더 올라서면 옥상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쉽게 뗄수 없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였다. 온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지 말라고.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 강다현!!!" 하지만, 이내 나는 그저 낯선 장소에 대한 누구나 갖는 호기심과 두려움이라고 단정짓고는 강다현의 이름을 부르며 옥상문을 열었다. 그러나 끼익, 하고 쇳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마자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곳에 올라온걸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내가 올라와서는 안되는 곳이였다. ".........." 옥상은, 텅 비어있었다. 그 흔한 화분이나 의자조차 없었고, 나를 보자고 했던 강다현도 없었다. 그리고. "..........으........으.." 김민선도 없었다. 옥상에 들어선 순간,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였다.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나는..내 자신이 모르고 있던 나였다.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이유를 모르는 아픔은, 감당할수 없는 크기로 내 심장에 파고 들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주저 앉았다. "...으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을 나가야 겠다는 생각뿐. 그러나 그조차 쉽지 않았다. 풀려버린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알수없는 두려움에 부르르 떨기만 했다. 무섭다. 이곳에 있는게, 미치도록 무섭다. 그러나, 그 이유를 몰라 더 괴롭다. 어째서, 왜 나는, 이토록 아픈거지? 왜 이렇게 심장이 찢겨져 나가는것처럼 괴로운걸까. 도대체 왜. 왜... -야. 너 뭐야. 어딨어? 만약, 그때 정해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그대로 정신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정해운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씩 진정이 됨을 느낀다. "정..정해운..해운아..해운아."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는 엉망이였다. 그리고 정해운은, 그런 내 목소리에 다급해졌다. -너..울어? "부탁이야. 제발..여기로 와줘." -뭐? "와줘 해운아. 여기로 와줘....정말 죽을것 같아..죽을것 같아.." -너 지금 어디야. 낮게 가라앉은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연습실..옥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려' 라는 정해운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괜찮아..괜찮아 정해운이 온다고 했으니까..라고 내 자신을 위로하며. 그러나, 그 후로도 한참동안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모르겠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왜 우는지, 왜 이렇게 아픈건지. 그저, 직감적으로 이곳이 내게 끔찍한 기억이 담긴 곳이였음을 느낄뿐. ".........." 죽을만큼 힘겹다는게 이런거였을까? 정말 죽고싶다고 느낄만큼 힘겹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큰 공포와 슬픔을 경험한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시간동안에는... "김민선." 그렇게, 두려움과 견딜수 없는 슬픔 속에서 얼마나 갇혀 있었던걸까. 들려오는 정해운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서야, 무릎에 묻고 있었던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정해운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고, 나는 그런 정해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정해운의 일정하게 뛰지 않는 심장소리와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해운은 전화를 끊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 온 모양이였다. "여긴..왜 올라왔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낀다. 나와 똑같이 젖어있음도 느낀다. "무서워...끔찍할만큼 아파. 가슴이. 너무 아파 해운아." ".........." "나 왜 이런거야? 이 옥상에서 무슨일이라도 있었던거야? 도대체 왜.." 정해운은,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좀 더 꽈악 안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괜찮아..." "............." "괜찮아..민선아." 도대체,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걸까. 너의 젖어있는 목소리에, 흔들리는 눈동자에 나는 처음으로 후회가 들었다. 너의 말처럼,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모두 다 잊고 살아가는게 맞지 않았을까. 도망치고 싶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내가 믿고 있었던 그 현실로. * * * * * "그만해. 그만해 정해운!" 소리를 지르다 못해 머리가 아플정도로 악을 질러도 보고, 목이 아플정도로 울어도 보았지만, 정해운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였다. 정해운은 나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채 주먹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원망하며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연습실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 녀석 때문에 이미 엉망이 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 "............" "시발 이유를 알아야 맞아 주던지. 때리던지 할거 아냐 개새끼야!" 정해운은 짜증스런 강다현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뒤엉켜 싸우던 둘은, 참다 못한 강다현이 허공에 있던 정해운의 주먹을 잡고서야 잠시, 멈추었다. 강다현은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피할틈도 없이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 정해운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고, 정해운은 그런 강다현의 모습에 차갑게 실소를 터트렸다.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묻지. 그럼 아는데 묻겠어? 아 짜증나. 입술 터졌잖아!" "니가 옥상으로 오라고 문자 보냈다며." "뭐?" "옥상으로...오라고.." 낮게 가라앉은 정해운의 목소리에,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강다현이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그런 강다현의 모습에 나조차 이해가 가지 않으려는 찰라, 타악- 하고 연습실 문이 열렸다. 우리 셋의 시선은 모두,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만둬. 다현인 아니니까." 그곳에는, 내 또래 아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이해리'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밴드부였다는 여자, 그리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여자. "이것 때문에 그러는거 아냐?" 여자는, 핸드폰을 든채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제서야 비로소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난 강다현의 얼굴에는 밝은빛이 돌았지만, 반면 정해운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거봐. 나 아니랬지! 이해리가 어제 내 핸드폰 하루만 빌려쓰겠다고 가져갔어! 난 무슨 문자 보냈는지도 몰라!" 또각, 또각 연습실을 안으로 여자의 구두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그렇다면, 나에게 문자를 보낸게 너란말이야? 어째서? 납득가지 않는 상황에 입을 열려는 순간, 정해운이 좀 더 빨랐다. "이해리..너." "응?" "뭐하는짓이야." "뭐가? 난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보낸거야." "입 닥쳐." 정해운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이해리라는 여자는, 그런 정해운을 예상했다는듯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채 쇼파에 앉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담배를 바라본다. 그녀는, 불안해 하는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당당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1년전 그 시간을 가지고 있고,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랬어. 우리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기억을 찾고 싶어 한다는데." 그녀는 이내,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처음으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입가에 묘한 웃음을 그리며,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마음." 5. 그 후, 침묵이였다. 이해리라는 여자의 말에, 연습실 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시끄럽게 오고가던 말로 가득찼던 연습실은, 매쾌한 담배연기로 가득찼다. 시야가 뿌얘질정도로, 떠다니는 담배연기가 역겹기까지 한다. 이해리라는 여자의 말에, 잠자코 있던 정해운까지 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고, 두명의 뱉어내는 담배연기는 거의 오염수준으로 공기와 섞여, 내 목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것들은 담배 못피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거야 뭐야. 이렇게 담배를 피워대는데도, 벽지가 누렇게 변하지 않았다는게 미스테리중 미스테리다. 나는 담배연기가 스며든 답답한 공기에 연신 콜록 거리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 누구도 쉽게 꺠지 못하고 있는 침묵을 깨기 위해. "그럼..."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이자, 담배를 뒤적이던 강다현의 손도, 담배재를 털던 이해리의 시선도, 기침을 하는 나를 보고 밖으로 나가려던 정해운의 걸음도, 모두 내게로 멈추었다. "도와줘봐요." 어차피 각오한 일이였다. 나 또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결코 행복한 기억은 아니라는거. 그래서 사실, 조금 무섭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관둘 마음은 없다. 그 기억이 끔찍한 기억이라 한들 어디까지나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이니까. "그럴까?" "김민선!" 전자는 이해리, 후자는 정해운이였다. 그 둘은 전혀 다른 표정으로 내게 동시에 말을 던졌고,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 "말해봐요. 이렇게 만든 장본이라면서요. 내가 어떻게 만들었어요?" 그건, 빈정거리는 말투도 아니였고, 따지려는 생각으로 뱉은 말도 아니였다. 정말로 단지 궁금했을 뿐이였다. 도대체 내게...무슨일이 있었길래, 이러는건지... 나는, 잠시동안 아까 옥상에서 나를 덮쳤던 끔찍할만큼의 커다란 아픔을 떠올리며 말했고. 이해리는 그런 나의 말에, 피식 하고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서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녀가 하는말을 듣지 못했다. 정해운이 재빨리, 내 두귀를 자신의 손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입모양 또한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진짜! "정해운. 뭐하는거야 너!" 들을 수 있었는데...!!! 분명,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런 빌어먹을! "손 떼! 빨리 손 안떼?" 답답한 내 목소리에도, 정해운은 손을 떼지 않았고, 마치 안긴것 같은 그 상태에서 나는 답답함에 발버둥 쳤다. 정말 답답해 죽겠다. 도대체 둘다 뭐라고 짓껄이는거야? 녀석에 품에 꽉 안겨, 마치 웅웅 거리는듯한 느낌으로 번갈아 들려오는 정해운과 이해리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너무 희미하게 들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짜...죽여버려! "눈물 겹네." 잠시후, 내가 안간힘을 다해 정해운의 품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이해리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한거야..눈물겹다니. 뭐가? "뭐가요?" 나는 정해운을 노려보다가, 이내 이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해리는 잠시동안 알수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는게 아닌가. 설마. 이대로 가려는건 아니겠지...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해줘요. 도와준다면서요." "분명, 그럴 생각으로 이곳에 다시 온건 맞아." "그럼 알려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해리는, 말끝을 흐리며 내게 고정시켰던 시선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보류야." "네?" "저 등신새끼 때문에...잠시 보류라구." 뭐랄까. 씁쓸하다고 할까? 그래,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는 망설임없이 뒤돌아섰다. 더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는것처럼 말이다. 다 말해줄것처럼 굴더니. 지금 뭐하는거야.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다시, 붙잡을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옮길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나를 막아선건 정해운이였다. "다 헛소리야." "뭐?" "이해리, 헛소리하는 거라고. 너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되거나 그런일같은건 없었어." "거짓말 치지마. 비켜." "진짜 그런일이 있었다면 나, 너 연습실에 들이지도 않았어." "그럼 옥상은." 정해운은, 갑작스러운 내말에 달싹이던 입을 멈추었다. 거짓말을 할꺼면 좀 제대로 하던가... 그런 눈으로 하는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옥상은 뭔데. 아무일도 없었다면, 저 여자가 왜 나를 옥상으로 올라가게 했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내가 왜 그런 감정을...." "............" "너, 눈에 보이는 거짓말 좀 그만쳐. 기억 잃었다고 내가 바본줄 알아?" 사실, 왜이렇게 화가 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일종의 억울함과 답답함 때문이 아닐까.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기억을 나 혼자만 모른다는 억울함과,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 정말, 아무도 없는곳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다가 성질 다 버리겠네...나는 정해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처음부터 니가 내 기억 찾아 줄 생각 없다는건 알았으니까 이러는거 놀랍진 않아. 그런데." ".........." "알려주지 않을꺼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마." 정해운은 아까보다 훨씬 커진 내 목소리에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를 조금은 냉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무슨일이 있어도 나 기억 찾을꺼야. 찾고싶어." 과연 내가 그 기억을 내가 감당 할수 있을지는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틀후 그 후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찌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정해운과 '일주일'을 약속한 나에게는 20일, 아니 200일과 맞먹는 기나긴 시간이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마치 사랑 싸움을 하는 연인들처럼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왜인지 정해운을 보기가 민망해서였고. 정해운은...사실 모르겠다. 그가 무슨 마음을 먹고 연락을 안했는지는. [정해운..] 결국, 내가 먼저 숙였다. 사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건, 정해운이 아닌 나였다. 정해운과 약속한 시간이 3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응] 답장은 1분도 안되서 도착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나는, 너무나도 빨리 도착한 답장에 잠시 눈을 꿈뻑이며 당황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문자를 적어내렸다. [술 먹을래?] 지난 이틀동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조금 과장을 한다면, 정말 잠도 잘 자지 못하며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던것 같다. 그 결과, 나는 정면돌파로 나갔던 이전과는 달리 반대로 방법을 바꿔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말하지 않는다면, 말하게 하는것이다. 강요하지 않고,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끔. 그래서 나는 최후의 방법으로 '술'을 선택한 것이다. 술이라는건, 사람을 진실되도록 만드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천하의 정해운이라도 오늘만큼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것이다. 왠만한 남자보다 술을 잘 먹는 나였기에, 녀석이 취하기 전까지 절대로 먼저 취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알았어.] "흐흐...." 정해운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사악하게 웃어보였다. 거울 속, 비춰진 내모습은 언젠가 강다현의 말처럼, 악당같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정해운." 오늘,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너에게서 작은 흔적 하나라도 얻어 갈꺼야. 두고보라구. /술집. "도대체가 말이야. 날 왜 고딩 취급하냐고!" "..........." "정작 고딩은 대딩 취급하고. 썩었네 썩었어 이 가게!" 자리에 앉으며 나는 잔뜩 빈정이 상한 얼굴로 투덜댔다. 그도 그럴것이 술집안으로 들어올때, 정작 민증검사를 받아야 할, 정해운은 검사하지 않았으면서, 나는 당연하다는듯 민증검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진과 얼굴이 다른것 같다며 주민 번호를 외워보라는 굴욕까지 주면서. "사진 정말 다르던데.." 어쩐지 정해운은, 그런 내 굴욕 아닌 굴욕을 즐기는듯한 얼굴이다 "포토샵, 심하더라." 녀석은 턱을 괸채 장난스레 말하며 나를 응시했다. 그 순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기뻤다. 사실, 어색하면 어쩔까 고민했었는데 정해운은 나를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평소처럼 대해주었기 때문이였다. "나는 부끄럽지 않아. 현대 기술이 많이 발달했고, 그 특혜를 받는건 당연한거니까." 나는 메뉴판을 정해운 쪽으로 밀어 넣으며,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고 정해운은 내가 내민 메뉴판을 받아드며 피식 하고 웃었다. 잠깐, 웃었다고..? 믿을수 없는 그 광경에 정신이 나간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그러니까 너 지금. "웃었다.." "뭐?" "너 지금 웃었어. 내앞에서 처음으로." 물론, 처음은 아니겠지만. 어찌됬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처음으로 그가 웃었다. 늘,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가, 처음으로. "그런적 없어." 뭐, 바로 정색 하긴 했지만서도 말이다. "에이, 내가 봤는데" "주문 안할꺼야?" 설마...쑥스러워 하는건가. 붉어진 얼굴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화제를 돌릴꺼면 좀 자연스럽게 돌리던지 하지... 나는 그런 정해운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하고 웃다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메뉴판...니가 들고있잖아 멍청아." 잠시후, 정해운이 고심하며 고른 메뉴는 내가 평소 즐겨 먹었던 안주인 '김치찌게'와 '제육볶음' 이였다. 녀석 또한 이 안주를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없이 고른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것임을 알고 시킨건지. 알수 없었지만. 테이블 위로 먺음 직스러운 김치찌게와 제육볶음이 올라오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젓가락을 들고, 제육볶음을 입에 집어 넣고 싶을만큼 배가 고팠지만, 공복에 먹는 술이 더욱 빨리 취한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일단 첫잔은 먹고 시작해야지?" 능숙하게 소주병을 흔들며 눈웃음 짓는다. 그리곤 정해운 앞에 놓인 술잔과 내 술잔에 차례로 소주를 출렁이도록 담았다.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야. 자! 짠!" 잔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절대로 녀석보다 먼저 취할 생각은 없지만, 어느정도의 술기운은 필요 했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소주를 모두 입에 털어 놓았다. 으...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혀끝에 닿는 알싸한 알콜이 평소보다 몇배는 더 쓰게 느껴진다. 타앙- 하고 테이블이 흔들릴정도로 세게 잔을 내려 놓자, 이어 정해운 또한 잔을 내려 놓았다. 나는 말끔하게 비워진 정해운의 술잔을 보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정해운은 술을 잘먹는듯 싶다. 이거 왠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것 같은데? "이제는...좀 괜찮아?" 이번에는 정해운이 두번째 잔을 채웠다. 그순간 나는, 정해운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느꼈다. 나긋나긋하고, 따듯함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 민지는 우리 둘의 관계를 '사랑했던 사이'라고 설명했었다. 잠시동안 나는, 정해운이 저 목소리로 내게, 사랑해 라는 말을 속삭여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싶어 고개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곤 정해운의 말에 서둘러 대답했다. "그때는 미안해. 좀 감정적이였어." ..라고, 나의 말에 정해운은 아니라는듯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비워냈다. 마치 생수를 먹는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괴물이다.. 이러다가, 정말 내가 먼저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재빨리 잔을 비우고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한시라도 빨리 정해운을 취하게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정해운 우리 그냥 먹기는 심심하니까. 게임할래?" "게임?" "응. 게임. 술먹으면서 게임하는게 얼마나 재밌는데. 할래?" "무슨 게임?" "뭐, 게임이야 많지 이를테면 진실게임 같은거..." "............" "우리 진실게임 할래? 아니, 하자" 세번째 잔을 채운다. 그리곤, '그럼 나부터 시작한다' 라고 말하며, 정해운의 동의도 없이 진실게임을 시작하는 나였다 앞으로 나는, 정해운이 대답하지 못할 질문들만 골라서 던질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못차릴만큼 술을 먹인 다음, 녀석이 가장 진실해 질떄즘 다시 물어볼 계획이다. 1년전,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라고,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자. 대답 못하면, 무조건 먹는거야."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콸 쏟아 붓고는 테이블 정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술은 정확히 녀석과 나의 사이로 놓여졌고, 나는 젓가락으로 툭툭- 잔을 내리쳤다. "벌주." "뭐가 이렇게 많아?" "벌주는 원래 타는 사람 마음이야. 지금 내 질문에 대답 못하면 너, 이거 무조건 먹어야해 알았지?" "뭔가..억지같은데..." 정해운은 살짝 말을 흐리며 불안한 눈으로 벌주를 바라보았다. 미친걸까? 아직, 3잔밖에 마시질 않았는데. 순간, 그런 정해운이 귀여워 보인다. 술기운이 오르기도 전에 이러면..안될텐데 말이다. "일단 가벼운거부터." "말해." "우리, 무슨 사이였어? 친구? 아니면 사랑했던 사이?" 말그대로 정말, 가벼운 질문이였지만 그는 내 예상대로 벌주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이대로라면 질문 3-4개 정도만으로 금새 취하게 만들 수 있을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녀석을 보는데, 순간 무언가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벌주를 내려 놓는다. 설마, 대답을 할 생각인가? "아니." 좀 더 강한 질문을 했었어 했나... 정해운은, 이정도의 질문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뉘앙스로 그렇게 말했다. 보기만해도 오바이트가 나올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의 벌주가 담긴 술잔은 출렁거리며 다시 테이블 위로 놓여졌다. 잠시 당황했지만, 뭐 이렇게 대답을 듣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서도 "사랑해선 안되는 사이." 아니, 역시 대답을 듣지 않는편이 나았나. "내 차례지?" ".........." "우리가 사랑했던 사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 있어?" 아니, 애초부터 이 게임같은건 하지 않는편이 나았나.. 아마도, 정해운을 보고 있는 내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운건 당연한 일이였다. 기껏해야 '지난 1년동안 뭐하고 지냈어?' 라든가, '왜 갑자기 기억을 찾고 싶어졌어?' 따위의 질문을 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해운은 나와 똑같이 쉽게 솔직해지기 어려운 부분을 건드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앞에 놓인 벌주를 든다. 어쩔수 없지 않은가, 솔직하게 '응..' 이라고 대답할 순 없었으니 "왜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이였는데?" 그후로부턴 정해운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채 술잔을 들었다. 처음 내가 세웠던 계획대로 말이다. "그래서, 아쉬워? 우리가 그런 사이여서?" 하지만, 그 계획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틀어졌다. 정해운 못지 않게 나 또한, 많은양의 술을 함께 비워냈기 때문이다. "말해봐 1년전에,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정해운이 잔을 비우면, "그러는 너는 기억을 찾게 되면. 감당할 자신있어..?" 기다렸다는듯 내가 잔을 들었다. 안주는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지만, 테이블 위로 빈술병들은 늘어 갔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질문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채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술이 모자르면, 어김없이 술을 시켰고, 그 술들을 비워 나감을 반복했다. 한마디로 그건 정말, 미친짓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때는, 불행히도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야...정해운...이 빌어먹을, 송충이 같은 새끼." ........이미 나는, 몸도 못가눌정도로 술에 취해버렸으니. "응...응.." 그리고 그건 정해운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서 나의 야심찬 계획은 반은 성공, 반은 실패가 된 것이다. 정해운을 취하게 만드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맨정신으로 버티는것에는 실패하였으니..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몸을 가누기 힘들정도가 되버린걸까. 하나..둘..셋....흐릿한 정신을 붙잡으며 테이블 위로 놓여져있는 술병들을 세다가 어지러움에 곧 관둔곤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얼굴을 묻는 나였다. "빌어먹을....어지럽잖아 너 때문에." "나도야.." "얌생이같이 니가 곤란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이게 뭐야 이게. 내 계획은 이게 아니였는데. 이런 시부랄.." "너도, 그런 질문 했어.." 술에 취한 정해운은 굉장히 어려진듯한 느낌이다. 동그랗게 오므리는 입술이 어린애같으면서도 무척이나 귀엽다.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그런 정해운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담배가 피고 싶은듯 담배각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도 강해진다는데 정해운은 피지 않은채 담배각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처음에 나는 정해운이 담배를 피는것 조차 몰랐던것 같다. 내 앞에서는 피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야..정해운." "응.." 나는, 그런 너가 진심으로 짜증난다...정말 신경질 나. "니가 뭔데.."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나서 힘들게 하는거야. "도대체 뭔데...." 그런 눈으로, 그런 얼굴로, 그런 배려로 내 마음을 흔드는거냐고. "죽을라고..새끼가......." "............" "못되게 굴꺼면 계속 못되게 굴던가." 술은 이래서 문제다. 사람을 지나치도록 솔직하게, 그리고 감성적으로 만들어 궂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끄집어 내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인건, 엉켜버린 발음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금 이상태에서 말까지 잘 나왔더라면 나는 '술에 취했다' 라는걸 변명을 삼아 이 아이에게, 내 마음속 있는 말을 보따리 풀어 놓듯 줄줄히 풀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프다고, 니 눈이, 니 얼굴이, 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그래서 두렵다고, 사실은 감당할수 없을것 같다고.. "니 잘못이 아니야." 그순간, 술에 잔뜩 잠긴 정해운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건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였다. 지금껏 자신의 감정을 숨겨왔던 정해운의 진심을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순간. 몸을 일으켜 정해운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새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나는 엄청난 어지러움을 느끼며, 테이블 위로 다시 쓰러졌고, 아마도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을 정해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좀 더 조용히, 들려왔다. "형이 죽은건...니 잘못이 아니야." "..........." "그런데도..나는 니가 미웠어. 죽고싶을만큼 너무 미웠어." 그래도 아직, 조금의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였다. 정해운의 목소리가 아프다는걸 느꼈으니. "용서할수 있을까..하루에도 몇번이고 생각하면서 울었어. 숨도 못쉴만큼 울었어." "............." "민선아, 내가...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지금 정해운이 하는말이 나에게 하는말인지, 자신에게 하는말인지 모르겠다. 이미 술로 인해 판단력은 흐려질때로 흐려졌기 때문이다. 정해운은, 그후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건가. 고개를 들어 정해운의 얼굴을 보고싶었다.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술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나는 자꾸만 흐릿해지는 정신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너의 슬픈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용서할 수........있을까." 이내, 희미하게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눈을 감았던것 같다. 6. "누나, 그래도 이건 좀..." 다음날. 차라리 필름이 끊겨버렸으면 좋았을텐데..술을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정도로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요 이상으로 어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몇시부터 몇시까지 마셨는지, 무슨 게임을 했는지, 그가 내게 무슨말을 했는지...모두 다 "말해 빨리." "제가 마음대로 막 전화번호 알려주기는 좀 그래요. 해리는 무슨일로..." "전화번호 하나가지고, 너 진짜 이럴래?" 강다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을 찾아온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정말 곤란한데...중얼거리며, 머뭇머뭇 거리는 녀석. 아, 진짜 답답하네. "야 강다현!" "누나, 이유를 알아야 전화번호를 주던가, 하죠." 그여자는, 분명 알고 있으니까. 나는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대답대신 강다현을 노려본다. 강다현은 마치, 화창한날 벼락이라도 맞은것 같은 얼굴로 서있었다. 뭐, 이해는 한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로 향하는중 김민선 이라는 날벼락을 맞은셈이니까. "그 여자, 만나봐야 할거 같아서 그래." "왜요?" "이게 진짜! 내가 그런것 하나하나까지 말해줘야되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사실 해운이가, 혹시나도 누나가 이해리 찾으면 이해리에 대한 어떠한것도 말해주지 말라고..." 녀석은 내가, 다시 '이해리'라는 여자를 찾을거라는걸 알고 있었던걸까 "말해줘 다현아." 나는, 강다현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이내,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는, 답답하다 못해 힘겹기까지 하다. 너무 괴롭다. 기억하지 못해서 괴롭고, 기억하고 싶어서 괴롭다. 꾹 누르고 있었던 눈물은, 이내 두뺨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회색 빛의 시멘트 바닥 위로 검은 눈물자국들이 짙게 새겨졌다. "너도, 내 기억 찾아주고 싶댔잖아." "............"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길 바란댔잖아."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내 인생에 '정해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이후로 말이다. "제발...알려줘. 부탁이야." 울음에 뒤엉켜 엉망인 내목소리에도 강다현은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그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볼 뿐이였다. "알겠어요 누나. 알려줄께요." 그러나 잠시후, 떨리는 내 어깨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리며 녀석이 말했다. 조금은, 젖어있는것 같은 소리로 **** 내가 이해리에게 연락을 한건, 그 후로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지 따위의 소심한 고민부터, 과연 내게 말해줄까. 만약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야 하는거지. 라는 고민까지. 영양가 없는 고민을 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이해리는 만나자는 내말에,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고민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정도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나저나 내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까폐 안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각 테이블마다 벽으로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산스럽거나, 시끄럽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 조용한 공간 속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앉았다. "정해운은 아닐테고...강다현이 알려줬나보네." 내가 아무말이 없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 놓는다. 정말이지, 싫다. 저런 얼굴. 내 속을 모두 꽤뚫어 보는듯한 얼굴.. 나는 주먹을 꽉 쥐다가, 시켜 놓은 녹차라떼를 한모금도 먹지 않은채 입을 열었다. 이해리와 한가하게 차를 즐기려고 온건 아니니까. "부탁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그럴것 같아서 나온거야." "네.?" "니가, 부탁 할거라는거 알고 나온거라고." 그녀는 당연하다는듯 대답하며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알려주세요."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애원하듯, 그렇게 말했다. "1년전에 무슨일이 있었던건지..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내가 무슨말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그녀는 나의 말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럴줄 알았다는듯, 아무런 동요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였다. 간절하다는게. 이런걸까? 지금의 나는, 내 자신도 놀랄만큼 간절하다.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다. 다시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기억이 무엇인지 알기를.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일초가 일분같고, 일분이 십분같은. 그런 시간이 아주 잠시동안 흘렀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온건. 니 부탁을 들어주려 온게 아니야." "........" "거절하러 온거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다. 말해줄꺼라 생각했는데. 당신이라면, 나한테 말해줄꺼라고 생각했는데... 믿을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해리는 침착한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이후로 니가 잃어버린 그 기억에 대해서 더이상 궁금해 하지도, 미련 갖지도 말고.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잊고 살아." ".............." "내가 너한테 해줄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이만 일어설께." 궁금해 하지도, 미련 갖지도 말라고? 그렇게 아무일도 없던것처럼 잊고 살라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이제와서,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말 따위가. "그게..안돼." 정말로, 눈물이 나올것 같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터져 나오지 못하게 아랫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안돼. 이제는, 그럴수 없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정말 그러고 싶은데,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해운의 얼굴 때문에... 듣는 사람마저 슬플정도로 젖어있는 그 목소리 때문에...그게 안돼." 그래서 이제는, 내가 믿었던 현실로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수 없다고.. "진심으로..부탁할께요." ".............." "제발..알려주세요." 더이상,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가려던 이해리가 멈춰선 것이다. 그녀는, 아마 나를 바라보고 있을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속에서 멈춰선 나를. 현재의 시간속에서 괴로워 하고 있는 나를. 이윽고 그녀의 짙은 한숨소리. 다시 자리에서 앉는소리. 가방을 뒤적여 담배각을 꺼내는 소리.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온다. 이해리는 후우- 하고 허공에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아무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게 마지막으로 경고 하듯 말했다. "후회 안할 자신 있어?" 아니... "감당할수 있겠어?" ...아니. "네. 말해줘요.." 아마, 이해리의 말을 듣고 난후, 나는 후회할지도 모르고,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젯밤 나는 그 모든걸 감수해야 하더라도 알고싶어졌다. 1년전, 내게 일어났던 그 일을. 아마도, 끔찍하게 괴롭고 힘겨웠던 그 시간들을 말이다. 이해리는 담배 한대를 다 태울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그 끔찍한 시간을 입에 담아야만 하는 이해리에게도. 그리고 그 진실을 들어야만 하는 나에게도.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얼마나 계속됬을까? 새 담배를 입에 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정해운, 정진운, 강다현. 그리고 나" "............"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밴드였어. 각종 대회에서 입상할만큼 실력도 꽤 있었고, 우리 공연을 찾는 팬들도 있었고. 나름대로 부족할것 없는 행복한 밴드 생활이였지." 그렇게, 내가 잃어버렸던 1년이라는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니가 끼어든거야." "..........." "니가 끼어 들어, 그 행복을 짖밟은거야." 허공으로 내뱉은 희뿌연 담배연기가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진 담배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슬픔에 젖어있음을 본다. 혹시, 지금 내 얼굴도 이럴까.. "어느날, 너는 우리 연습실에 찾아왔어. 밴드에 들고 싶다고. 키보드를 맞고 싶다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 그리곤, 침착하게,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채, 그렇게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이해리. 나는 그 순간, 오래된 필름처럼 무언가가, 머릿속을 지나감을 느낀다. '키보드 뽑는다고 해서 왔는데...' '아직, 늦지 않았죠?' 그 장면은 마치 잔상처럼 남아,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고. 알수없는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 니가 사실은 키보드를 맞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진운을 좋아해서 들어온거라는거. 물론, 그런 애들은 많아. 충분히 그런의도로 밴드에 들어올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 "너는, 밴드에 들어와서 정진운이 아닌, 정해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어. 해운이가 너를, 좋아하는걸 알고, 그 감정을 잔인하게 이용한거야. 둘이 하나뿐인 형제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들려온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부인하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도안돼. 내가, 그랬다고? 거짓말..어째서? 내가 왜? 입밖으로는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들이 머릿속에 이리저리 엉킬 무렵, 또 다시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 '다들 축하해줘. 나 해운이랑 사귀게 됬어.' '누구보다 나는, 진운이 니 축하가 제일 듣고 싶은데..축하해줄꺼지?' . . "니 바램대로 그날 이후 정진운은, 흔들렸어. 동생의 여자한테, 사실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여자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어쩔수 없었겠지 자신의 마음을..." "........" "그 모든걸 알게 된 정해운은....어땠을까? 감당할수 있었을까?" 그순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자꾸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내 목을 조르며,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나의 마지막 희망을 비웃었고. 나는 결국 참고 있었던 울음을 토해냈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그래. 내가 너 이용한거 맞아. 정진운이 너무 좋아서, 좋아 미치겠어서 너 이용했어. 근데. 그게 뭐. 그게 뭐.' '.............' '제발 놔줘 해운아. 나 좀 놔줘. 진운이가 나 좋대. 진운이도 나 좋아한대. 나...진운이한테 가게 놔줘.' 이 모든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당시, 정해운은 너무 어렸어. 너무 어려서, 사랑이 전부라고 믿었지. 그래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거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죽을만큼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형을 좋아한다는걸. 자기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것이, 철저한 이용일뿐이었다는걸" "................." "밴드는 해체 됬고, 정해운과 정진운의 사이는 돌이킬수 없을만큼 멀어졌어. 정진운은, 어떻게서든 모든걸 제자리로 돌릴려고 애썼지만, 생각보다 정해운의 상처가 너무 커서. 그럴수 없었고." "............" "진운이는, 괴로워 하며 그렇게 망가졌어. 그 모든것이, 자기 탓인것 같아서.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지. 학교도 나가지 않고 늘 술에만 의지했어.. 그러다가..." 이해리는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나의 울음소리가, 이곳을 메웠다 믿을수 없는 진실 앞에 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능력한 인간이었다. 우는것 말고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녀석, 결국 그 괴로움을 떨치지 못하곤 스스로 자신을 버린거야. 비가 아주 많이 오던날, 연습실 옥상에서...' "으...으흑........." "우울증과 술기운이 만들어낸 순간의 충동이였지. " 1년전 나는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서할수 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그리곤 너무나도 뻔뻔하게 그 기억을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그 아픔속에서, 견딜수 없는 현실속에서 도망쳤던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내가...살기 위해서. "이제 알겠니?" ".........." "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쳤는지..." "..........." "정해운은.....너 때문에 사랑하는 형과, 사랑하는 사람. 둘 다 잃었어. " 내가...살기 위해서... "참 웃기지 않니? 정해운이 너때문에 악몽같은 1년을 보냈을때, 정작 너는 모든걸 거짓말처럼 잊고 웃으며 살아갔다는게.." ".............." "더 웃긴건 뭔지 알아? 그럼에도...그 등신새끼가 끝까지 너를 위하고 있다는거야. 그렇게 상처받고, 그렇게 울었으면서 끝까지.." 앞으로 살아가면서..이렇게 견딜수 없는 아픔을 또 겪는날이 있을까. 이해리의 젖어있는 목소리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모든걸 말하려고 결심한 그날, 정해운이 뭐라고 했는줄 알아?' ".........." '너 만큼은 죄책감속에 갇혀 살지 않길 바란다고 했어.' "............" '정해운이 지난 1년동안 얼마나 지옥같은 삶을 살았는지 넌 몰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어 그녀석.' "..............." '이렇게 된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에 자기가 하나뿐인 형을 잃고, 평생 지울수 없는 상처를 받았는데..' "........." "그 등신같은게 끝까지...' "..........." '너만큼은 이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대.' 이해리의 마지막말에 나는 할수만 있다면 두 귀를 잘라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해서라도 나는 이해리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들을 자신이 없었다. 이기적이게도 모든 진실을 외면한채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믿고 있었던 현실로.. 나는, 그정도밖에 되질 않는 인간이였다.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역겹고 추악한. "너, 누군가 떄문에 숨도 못쉴만큼 울어본적 있어?" "그만.." '정해운은 있어." "그만해..." "보는 사람이 다 무너질만큼. 그렇게 울었어." 제발...그만해.. 제발, 부탁이니까..하지만 나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이해리는 멈추지 않았다. "너 때문에..." 지난 1년동안, 정해운이 감당해야만 했던 죽을만큼 힘겨웠던 그 상처, 슬픔, 아픔들은, 그대로 내게 다시 돌아왔다. 죽고싶다고 느낄만큼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는 그 모든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더이상 내가 도망칠수 있는 현실은 없었다. 이제는 내가 감당해야 할 차례였다. ****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이유들을 동반한채 나약한 인간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게 한다. 연습실 앞,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어둠이 고여있는 그곳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눈앞에 있는 현실을 차마 감당할수 없어서 라는것이 과연, 자신을 버리는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까.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비참한 변명은 아닐까. "..............."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 비참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나 모순된 삶인가. '그러는 너는, 감당할 수 있겠어?' '용서할수...있을까..' 핸드폰 액정에서 찾은 녀석의 이름을 바라보며 그동안 이해가지 않았던 정해운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서야 정해운의 말이 이해가 간다. 정해운은 내게 진심으로 물었던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어.? 이 모든걸 알고, 그 아픔을 견딜수 있겠어? 용서 할수 있을까...내가, 내 모든걸 잃게 만든 장본인인 너를 용서할수....있을까. "............" 그러다가 길게, 통화버튼을 누른다. 녀석의 따듯한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러면 나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것 같아서. -여보세요. 몇번의 기계적인 통화음이 들려오다가, 이내 정해운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다. 나는 그제서야 지금이 시벽 3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해져 있었다. -여보세요. 그리고, 그 고요함속에 너의 목소리마저 고요하게 들려왔다. "............" -김민선? "..........." -너..울어? 너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나의 울음소리에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차마 눈물을 멈추지 못한채 울기만 했다. 정해운, 너는 어떻게 견뎠어? 이 죄책감을, 이 슬픔을, 이 아픔을, 도대체 어떻게 견뎠던거야. 나는 이렇게 죽을것 같은데. 죽고싶어 미치겠는데.. "용서할수 있을까..라고 물었지." -............ "용서하지마. 그게 내 대답이야.." -무슨일이야. 너 왜그래." 아마 너는 죽는것보다 더 괴로운 현실속에서 살아갔겠지. 죽지 못해 살아갔던거겠지. 나는 더이상,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채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 눈물들은 이내 멍처럼, 바닥에 번져갔다. 그런데 해운아 나도 괴로워 하고있어. 나도 지금은, 괴로워 하고 있어. 죽고싶을만큼, 괴로워 하고있어. 너가 그랬던것처럼... 말하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지만, 나는 말할수 없었다. 나보다 더 아팠을 이아이에게만큼은. 말할수, 없었다. "내가 죽인거야" -............ "너희 형, 내가 죽인거나 다름없어. 모든건, 다 나때문이야." -어디야. 너 어디야 지금. "너는 내가 밉지도 않아? 증오스럽지도 않아? 그런일을 저지르고도, 모든걸 잊고 웃으며 살았는데. 그런 내가 역겹지도 않았니." -............ "왜..웃어줬어. 이런 나한테 왜..그랬어.." 그래서 더 견딜수 없잖아. 그래서 더, 살수 없잖아. -민선아.. "이제 됬어. 니 목소리 들었으니까 됬어. 끊을께." -끊지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는 찰라, 다급한 정해운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이제는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목소리에 나는 바보처럼 끊지 못한채 그대로 멈춰섰고, 핸드폰 너머로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문을 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바람소리가 들려오는것 같기도 하다. 정해운은, 아까보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잘들어. 이제 다 상관없는 일이야. 나 다 잊었어. 지난일이 됬다고. 알아?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큰 아픔도 모두 무더지기 마련이야. 아무리 큰 상처도, 아물기 마련이야. 나는 정해운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텅빈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온통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더이상 빛같은건 없다는듯, 그렇게 말이다.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도, 그리워 하지도 않아. 그래서 덜 아파. 예전만큼 아프질 않는다고. ".............."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마. 난 정말 괜찮으니까. 그렇게 괴로워 하지 마. "..........." -민선아. 듣고 있어? "............" -듣고 있냐고..김민선. 응..듣고있어.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듣고 있을뿐이다. 끝까지, 나를 위해. 내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지금,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여기가 어딘줄 알고 온다는걸까. 나는 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결국 피식 하고 웃었다. 그렇게 울면서 웃어버렸다. 여전히 눈에서는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지만 더이상 아까와 같은 두려움은 더이상 없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고마웠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속에서도 아마 늘…, . . . 고요한 새벽, 느릿한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차가운 새벽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바람에 몸을 맡기듯 느릿하게 걷는다. 한걸음..두걸음..세걸음, 걸음을 옮길때마다 눈앞에선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정해운의 모습이 지나갔다. 다시 돌아온 나를 밀어내던 정해운이. 아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정해운이. 아마도 많이 힘들었을 정해운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와사비를 발라주고, 비를 맞으며 우산을 사왔던 정해운이. 잃어버린 기억속에서 괴로워하던 나를 떨리는 몸으로 안아주던 정해운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정해운이 "........." 그리고. 생각했다. 나때문에 너무 깊은 상처를 받았을 정해운을. 죄책감에 갇혀 많이 울었을 정해운을, 견디기 힘든 현실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정해운을, 아마도 나를, 많이 사랑했을 정해운을 ".........." 나는 왜 그런 너에게 지울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걸까. 나는 왜 그런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걸까. 후회는 늘, 뒤늦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만큼 아픈 상처를 동반한다. "............" 느릿하게 움직이던 걸음은 이내, 도로 한복판에 멈춰섰다. 현실로 돌아갈수 없다면, 현실을 도망치자. 그것이 바로 내가 내린 결론이였다. 나는 정말 끝까지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인간이였다. 그러나, 그럴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크기의 죄책감은 단단한 밧줄이 되어 내 목을 졸라왔고, 그 고통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칠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나약하다고 손가락질 한대도 어쩔수 없다. 나는 도저히, 평생을 그 고통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빵.빵빠앙---!! 이내 마치 다른 세상처럼 고요했던 도로위로, 클락션 소리가 기차의 경적소리처럼 길게 늘어진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다. 엄마 아빠.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라서. 미안해..정말, 미안해..그런데 나도, 어쩔수 없어. 새벽바람이 살같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정도로 시리다. 시리도록 차가운 새벽바람에 그렇게 천천히 몸을 맡기려는 순간, 타악, 거짓말처럼 온몸이 따듯해졌다. 참혹한 불구덩이 속으로 끝내 몸을 던지려는 나를, 누군가가 붙잡은 것이다. 그 누군가는 안간힘을 다해 나를 꽉 안았고, 곧이어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충격으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쓰러진 나는, 그 누군가를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입을 틀어 막았다. 정해운이었다. 거짓말 같게도 나를 안아주고 있는 사람은, 정해운이었다. 도로위로 내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가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고, 나는 주체할수 없을만큼 떨리는 몸으로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니가... "왜......." 여기에...있는거야? 왜, 나를 대신해서... "다행이다..." "..........." "늦지 않아서.." 정해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내뱉는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해운이. 정해운이...뛰어들었다. 나를 위해..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도대체...왜......" 너를 버린 나인데. 그렇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나인데.. 도대체..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정도로 오열한다. "민선아..." "으.......으으......" "바보...같은 생각..하지마..니잘못이..아니야." "으...으......." 그순간,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도, 차에서 내린 차주인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도,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도, 모두.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마치, 이공간에 너와 나 둘만 있는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멈추었다. 많은 소리들이 엉켜 들려왔지만, 나에겐 오직 너와 나 뿐이었다. 숨도 쉬지 못할만큼, 운다는게 이런거였을까.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죽을것 같다. 견딜수가 없다. "정해운...." 1년전, 정해운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걸까. 라고 잠시 생각해 본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거짓말 처럼 그와의 추억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심장으로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너의 모습이. 품안에 나를 안고, 놓지 않으려고 꽉 안은 떨리는 너의 두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해운이 얼마나 간절하게 김민선을 사랑했는지. 그동안 그 애틋한 마음으로, 얼마나 힘겨워 했는지. "밉다며....." "........." "내가 밉다며.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미웠다며." 그런데 넌 왜...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뛰어 든거니. 나대신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지금 이순간까지도, 나를 안은 그 두 손을 놓치 않는거니. 도대체..왜 끝까지 너는 나를...위해 사는거니. 나는 너를 잔인하게 버렸는데. "미웠어.." 너를, 잔인하게 잊었는데.. "왜..하필 형이였을까. 너는 왜..나를 사랑하지 않는걸까. 왜...나를 잊어버린걸까. " "............." "죽을만큼....미웠어..정말 죽을만큼 원망했어 그런데 민선아..."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중얼거리듯 말하는 정해운을 바라본다. 나를 대신해, 피투성이가 된..그 아이를. "나는 차마 너를 놓을 수 없었어..." .. ..... 안간힘을 다해...이제서야 참아왔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그아이를, "그러니까...바보 같은...생각 하지마..." "해운...해운아.....해운아..." "민선아......." "............" "많이...아팠지...괴로웠지..." 내 아픔이, 내 상처가, 내 죄책감이 어떻게 너보다 더 클수 있겠니. 그러나, 너는 끝까지 나의 아픔과 상처만 걱정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 한심한 바보였다. 미칠만큼 미련했다. 사랑이라는게 원래 이런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미련하고 바보같은걸까. 자신의 아픔보다 상대의 아픔에 더 아파할만큼...바보같은걸까. 나는 분명 행복했겠지. 그런 너의 미련한 사랑을 받았을테니. 맹목적으로 나만을 위해 살아갔던 너의 사랑을 받았을테니. "으으......으흑.." 정해운은 이번만큼은, 지금만큼은 나를 놓지 않겠다는듯 안간힘을 다해 떨리는 손으로 나를 안았다. 힘겹게. 너무나도 힘겹게, 나도 단 한번은...너를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조금씩 멎어가고 있을 그의 아련한 심장이. "...사실은 거짓말이었어.." 그는, 행여 내가 듣지 못할까봐 두려운 얼굴로 있는 힘을 다해 한자 한자 내뱉었다. 그순간 나를 안은 정해운의 팔에서, 조금씩. 조금씩 힘이 풀려감을 느낀다. 나는 미친사람처럼 오열하며 녀석을 안았다. 놓지 않겠다는듯, 그렇게 아주 꽈악. 안고...울었다. 붉게 물든 녀석의 셔츠가 젖어들때까지..계속.. "이제는 그리워 하지 않는다는 말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해운아...해운아 말하지마..말하지마..제발.." "나...사실은, 죽을만큼 니가 그리웠고. 그 모든걸 용서하고 싶을만큼 너를 사랑해.." 이번에는, 내 어깨에 젖어든다. 서럽게, 정말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해운이. 1년동안 참아왔던 그리움을, 슬픔을, 아픔을, 사랑을...그렇게 토해내는...해운이. 그순간 나는 정말 숨을 쉴수 없을만큼..... 아파왔다. 가여워서. 나를 위해 너무 많은걸 잃어버려야 했던 정해운이 가여워서.. "민선아..." "......으...으으...미안해...미안해." 너를 잊어버려서.. 사랑하지...못해서 내 이기심에 상처밖에 주지 못해서... 미친사람처럼, 같은말만 반복했다. 미안해. 미안해..미안해. 슬프게도 내가 할수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정해운은 따듯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눈..코..입술. 머리카락..어깨..손. 잊지 않겠다는듯 차례대로 눈에 담으며. "민선아...민선아...김민선." "미안해 해운아....미안해..내가 다 잘못했어.." "민선아.." 그순간 마치, 마지막 인것처럼 그렇게..애타게 내이름만 계속 부르던 정해운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든다. 그렇게..아주 천천히. "미안해...하지..마. 나는" ...천천히. "괜찮아. 나는 너를 사랑해서, 비로소 행복할수 있었으니까.." 아주...천천히... "그리고......이건..1년전에 해아하는 말인데..." "............." "너는 아니였겠지만 나는 너를.....정말로.." 잦아 들다가.. "사랑했어. 너무...많이." .... 이내, 멈추었다. 거짓말처럼 그렇게. 멈추었다. 나를 놓지 않겠다는듯 꽉 안고 있던 그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감당할수 없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말도..안돼 "일어..나" 거짓말....거짓말. "해운아...일어나...제발..." 무서워........해운아 나 너무 무서워...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정해운!!!!!!!!!!!!!!!!!!!!!" 영원할껏만 같은, 시간이 깨졌다. 믿을 수없는 현실에 나는,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살수없게..죽어버렸으면..모두 다 나때문이다. 모두 다 내잘못이였고, 모두 다 내탓이였다. 나는 도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너에게 무슨짓을 저지른걸까. 떨리는 손끝으로, 눈을 감은 너의 얼굴을 만진다. 그러자 숨을 쉬지 못할만큼, 눈물이 나온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 맺혀 떨어지지 않는것 같다. '내가 너에게 모든걸 말하려고 결심한 그날, 정해운이 뭐라고 했는줄 알아?' 하느님..도와...주세요.. '너 만큼은 죄책감속에 갇혀 살지 않길 바란다고 했어.' 도와주세요..제발...제발...도와주세요.. '정해운이 지난 1년동안 얼마나 지옥같은 삶을 살았는지 넌 몰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어 그녀석.' 나때문에..너무 많은걸 잃었던 아이에요. 너무 많은걸, 감당해야만 했던 아이에요.. '이렇게 된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에 자기가 하나뿐인 형을 잃고, 평생 지울수 없는 상처를 받았는데..' 도와주세요....하느님.. '그 등신같은게 끝까지...' 제발...이 가여운 아이 좀 살려주세요.... '너만큼은 이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대.' 제발.. "도와...주세요....." . . . 저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려오는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정확하진 않았다. 점점, 눈앞에 있는 모든것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천천히..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것들이 순간, 꿈처럼 흩어지고 침묵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순간까지도, 우리는 서로를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이상하지. 그래서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제서야. 죽을만큼 괴로웠던 고통이 멈추며, 비로소 웃을수 있었다. ".........."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너와 그래도, 마지막은 함께 해줄수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그동안 너의 가슴으로 담았을 아픔과 비참할만큼 가여웠던 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수 있었기에. 아프지 않았다 나는. 조금도…, #Epilogue 그들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죽을만큼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시간은 흘렀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그다음엔 감당할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곤 조금씩 무뎌졌다. 희미해지고 옅어졌다. 끼이익-! 고요한 침묵을 깨며, 연습실 문이 열린다. 그녀는,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짜증스레 털며, 이제는 더이상 오지 못할, 오래되고 낡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서는, 아직까지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기세로 아주 거세게- "왔어?" 연습실 안에는 이미, 다현이 와있었다. 해리는, 자신이 늦은건가 싶어 바로 시계를 확인했다. 역시나, 약속된 시간에 10분전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할정도로 부지런한 놈.. 해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밖에 춥지." "응, 더럽게." 그런 해리에게 다현은, 옅게 웃으며 준비해온 녹차를 건냈고, 해리는 따듯한 녹차가 담긴 컵을 망설임없이 받아들며, 연습실 안을 둘러 보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만큼이나, 따듯했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이제는, 모두 다 소용없어 졌지만.. ".........." ".........." 그리고 둘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각자 조금은 슬픈 얼굴로, 연습실 곳곳에 있는 자신들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을뿐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해리는, 텅 비어버린 연습실을 보며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저곳은 키보드가 있었던 자리. 저곳은 드럼이 있었던 자리. 저곳은.. 그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액자로 시선을 멈춘다. "정말 대단해." 액자안에 담긴 사진속에 그들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비록 찢어지고 구겨져있지만 정말 더럽게 아름다울만큼. "니들, 대단하다고. 알아?"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왔다. 해리는,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럽다는듯 사진을 바라보았고, 다현 또한 그녀의 시선이 멈춰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맞아. 대단하지..'라고, 그순간 그들은, 희미해져 가던 슬픔이 조금씩 선명해짐을 느꼈다. 아마 평생동안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그 슬픔. 해리는, 다현의 말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담배는, 천천히 태울생각이다. 이곳에서 피우게 되는 마지막 담배니까. 이내 그녀의 입에서 한숨쉬듯 뿌연 담배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수 없어. 셋 다 너무 바보같았어. 어째서 그런 선택밖에 할수 없었던걸까." 그래, 이해할수 없다. 그리고 아마, 평생 이해할수 없을것이다. 그런 해리를 보며 다현 또한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마, 그도 아주 천천히 담배를 피우리라. "글쎄..." ".............." "사실 나도 이해 안가지만, 아마도 이해할수 있는날이 오겠지. 사랑이란게. 그런거잖아."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허공위로 뿌연 안개처럼 담배연기만 돌아다닐뿐, 그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담배만 피웠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담배가 타들어 간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것이다. 지독한 추억이 담긴 이 연습실을 떠나야 할때가 조금씩 다가왔다. 먼저, 담배를 끈건 다현이었다. 다현은 애써 웃으며 먼저 와서 챙겨놓은 짐을 들었다. "이제..갈까?" 그제서야 영원히 타들어갈것만 같았던 해리의 담배도 힘없이 꺼졌다. 그러나 재떨이에 떨어진 담배꽁초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야지.."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하는 순간, 보내주어야 하는 순간, 잊어야 하는 순간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일어서지 않았다. 어떻게 떠날수 있을까. 보내줄수 있을까. 잊을수 있을까..희미해져갈수록 오히려 선명해져 가는 존재들. ".........." "..........." 창밖으로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차가운 눈송이들은 바닥으로 천천히 쌓여가고 있었다. 다현과 해리는 그렇게 눈송이가 세상을 모두 하얗게 물들일때까지. 그들의 사랑의 흔적이 곳곳에 묻은 그곳을 떠나지 않은채 아주 오래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결국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비참한 끝을 맞이야만 했던 그들의 사랑을. 그러나, 순간순간 찬란했던, 아름다웠던, 시간마저 지우지 못했던. 아마도 자신들의 남은 인생에서 유일할, 두번 다시 없을. …그 지독한 사랑을 괜찮아. 나는 너를 사랑해서, 비로소 행복할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아주 오래도록..... -The Emd